< 134화. 후폭풍(2) >
만약 정말로 플레잉 코치의 정산율을 5프로로 올려준다면 1억 골드 이상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상황이 아주 좋아.'
내가 생각했을 때, 플레이어가 상위 리그로 올라오기 위해선 네 가지가 필요했다.
스텟과 테크닉, 스킬, 그리고 아이템.
'간혹 초기 스텟이 세 자리를 넘는 괴물들은 예외지만.'
거의 99.99%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텟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스킬은 현재 내가 그림자 표식이나 뇌룡의 포효, 뇌신 스킬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는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템은 블라디미르의 가면 하나로 얘기 끝이고.
'팀 투지 플레이어들은 스텟과 테크닉적인 면에선 문제없어.'
저주셋을 이용한 스텟 상승, 그리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는 커리큘럼.
그 두 가지로 팀 투지는 역대급 생존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고급 스킬과 아이템들을 지원해준다면?
주창범이 그랬던 것처럼 1티어 스킬들로 도배하게 된다면 어떨까?
'모용악이나 루치아노, 고건하 같은 플레이어들도 금세 상위 리그로 올라오겠지.'
나야 블랙 허브를 통한 시세차익으로 스킬과 아이템 문제를 해결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쉽지 않을 것이다.
버는 포인트로 족족 스텟을 구입할 테니까.
미션 진행 중에 운 좋게 값비싼 아이템을 얻거나, 스킬북을 획득하지 않는 이상 이 두 가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그 두 가지를 채워줄 생각인 거고.
'승급만 시켜도 본전은 뽑을 수 있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순간 기본급이 껑충 뛴다.
하위 리그에서는 기껏 올라 봤자 천, 이천 포인트씩 오르던 게, 상위 리그에서는 만 포인트 단위로 오르니까.
'당장 내 기본급만 봐도 10만 포인트를 넘지.'
괜히 나 혼자 버는 포인트가, 한때나마 팀 투지 수익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던 게 아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팀에서는 골드만 지원해준다면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제법 된다.
그들이 올라오면 지금까지 받고 있던 포인트가 단숨에 몇 배나 상승할 것이다.
'한 달에 플레잉 코치 정산 비용만 10만 포인트씩 들어올 수도 있어.'
그럼에도 내가 여태껏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이유는, 플레잉 코치의 정산 비율이 고작 3%밖에 안 돼서 투자 대비 리턴이 무척 낮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에게 모두 지원을 해주려면 몇천만 골드 가지고는 택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5프로로 오르면 얘기가 다르지.'
기존의 투자 대비 수익이 66%나 상승하는 셈.
이 정도면 투자금액을 늘리는 게 나한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정확한 가치부터 파악해야겠어.'
그래야 얼마를 투자할 수 있는지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킬북들을 우수수 쏟아부었다.
"······?"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세리안.
"일단 제가 저번 경기에서 정확히 얼마를 얻었는지부터 파악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 하기엔 양이 좀 많아서 그런데,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런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실 때 혹시 팀원들 중에 시너지가 잘 맞을 것 같은 스킬들은 한쪽으로 빼 주세요."
"넹!"
그때부터 우리 둘은 스킬북들을 하나하나 감정하며 종이에 대략적인 가치를 적기 시작했다.
무려 천 권이나 되기 때문에 혼자서 했으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만, 아세리안은 이런 부분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스킬북과 종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절반가량의 스킬북들을 정리했을 때였다.
"어······."
"왜 그러십니까?"
"자, 잠시만요. 이, 이것 좀 봐주셔야겠는데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리안이 말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서둘러 다가가, 그녀가 건네는 스킬북을 살폈다.
[<스킬북:극한심결極寒心訣 >]
[액티브]
[새외무림, 북해빙궁의 독문 무공입니다.]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2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25% 상승시킵니다.]
[마력에 극한의 기운이 흐릅니다.]
[<스킬:극한심결 >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빙신氷身 > 능력을 각성합니다.]
[적의 공격을 방어할 경우, 막는 데미지의 1%를 반사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빙신 >]
[온몸이 단단하게 얼어붙습니다.]
[마력이 깃들지 않은 날붙이의 공격을 무시합니다.]
스킬의 효과를 본 나는 순간 멍해졌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스킬이 플래티넘 등급이라는 것을.
'내가 왜 이 스킬을 못 봤지?'
거의 뇌룡의 포효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효과였다.
이걸 내가 못 보고 그냥 넣었을 리는 없었을 텐데······.
'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천뢰십보를 익힌 직후에 얻은 모양이었다.
그때의 난 새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사용해볼 생각에,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니까.
"이거······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죠?"
고개를 들자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세리안이 보였다.
아마 주창범에게 무척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극한심결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아세리안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벌써 절반이나 했네요. 일단 나머지를 마저 끝내고 얘기하시죠."
"아, 아니에요. 안우진님 부탁인데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아쉬운 듯 한동안 내 손끝을 바라보는 아세리안.
하지만 내가 그녀의 시선을 끝까지 무시하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스킬북 정리.
"와······ 진짜 대박이네요."
종이를 내려다보는 아세리안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스킬북의 개수는 1,021개.
1티어 스킬이 311개였고, 2티어 스킬이 698개였다.
나머지 12개는 3티어 스킬이었는데, 확실히 마교에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서고답게, 3티어 등급의 스킬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략적으로 매긴 스킬북의 총액은.
'11억 7천만 골드.'
기존에 예상했던 6억 5천만 골드보다 80%나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를 보고 있음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아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골드를 손에 쥘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후우."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정신이 없으리라.
11억 골드는 신이라고 해도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나는 종이를 내려두며, 한쪽으로 빼둔 스킬북들을 살폈다.
총 52권의 스킬북이었다.
가치는 9,360만 골드.
대략 내가 번 금액의 8%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투자금을 늘려도 되겠어.'
11억이란 거금이라면, 혹시나 중개 거래소에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나,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스킬북들. 그리고 여기에 2억 골드를 더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2억 골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어보는 아세리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면 내가 투자하는 총금액은 2억 9360만 골드.
제대로 돈지랄을 했다.
'기대되는군.'
이 정도라면 팀 투지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스킬과 아이템은 즉시 전력을 올려주기 때문에, 금방 반응이 올 테니까.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성공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 많았던 상위 리그 최초의 단독 미션! 난이도 조절 실패인가, 아니면 단독 미션의 탈을 쓴 일반 미션인가!
―제대로 잭팟을 터트린 렌! 미션도 완수하고,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까지. 과연 렌이 획득한 저 스킬북들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 것인가.
―각 팜에 바글바글한 무림인들. 하위 리그의 판도가 뒤바뀌나?
└중개 거래소에 매물이 없네 ㅅㅂㅡㅡ 뭔 일 생김?
└이번에 콜로세움으로 무림 쪽 스킬북들이 대거 유입됐음. 그래서 그거 안 풀리나 다들 중개 거래소 기웃기웃대니까 그 반사 작용으로 매물이 싹 쓸려나간듯 ㅋㅋㅋㅋ
└거기다 중개 거래소 평소에 잘 안 들어가는 신들까지 다 들어가서 죽치고 있으니까 ㅋㅋㅋㅋ 매물 풀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음 ㅋㅋ
└이번 단독 미션 개 어이없던데 ㅋㅋㅋㅋ 그냥 상위 넘버링 경기에 렌 혼자 집어넣고 단독 미션이라고 쓴 거랑 뭐가 다름..?
└근데 웃긴 건 그걸 렌이 혼자 깼엌ㅋㅋㅋㅋ 그게 더 어이없었음 ㅋㅋ
└이번 단독 미션 보니까 렌 혼자서 성계 대항전 출전해도 재미있겠더라 ㅋㅋㅋ 싸움도 잘하는데 상황에 따라 쓸 수 있는 유틸 스킬이 ㅈㄴ 많은가 보던데??
└거기다 지금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서 두 개나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준다잖아 ㅋㅋ 이 정도면 꿀잼 예약임ㅋ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 아직도 2달이나 남았어 ㅡㅡ 시간아 빨리 가라 젭라···.ㅠㅠ
└이젠 더 이상 까는 애들 없겠지? 쿠 훌린 vs 렌 가즈아아아아악
아세리안에게 총 3억 골드를 투자하겠다고 밝히고 1주일 후.
[현재 시각 : 23:57:58]
밤늦은 시각임에도 팀 투지의 팜은 대낮처럼 환했다.
모든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데다가, 공터에도 [불빛] 마법이 시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제 일이 아닌데도 되게 떨리네요. 우진이형 때는 안 그랬는데."
"안우진님이야 뭐, 걱정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강한 분이시니까. 근데 슬슬 끝날 때 되지 않았나?"
"어디 보자······ 아직 2분 남았어요. 아으, 왜 이렇게 떨리지?"
"창범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너 때문에 나까지 정신 사납잖아."
"허얼, 무슨 소리예요, 악이 형. 지금까지 형이 제일 말 많았잖아요!"
원래대로라면 모두들 자고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공터에는 팀원들로 바글바글거리고 있었다.
투닥거리는 주창범과 모용악.
허공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하는 아세리안과 피넛엘, 그리고 포르도엘.
두 손을 모은 채 기도 중인 이세연.
그 외에 3기수부터 이번에 새로 들어온 7기수 플레이어들까지.
모두들 한 사람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었다.
'쯧.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기분이겠군.'
주창범과 사인방이 처음으로 단독 PvP 경기에 들어갔을 때 이후로는 이런 초조함을 느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오오! 게이트가 열려요!"
게이트가 열린다는 누군가의 말과 동시에 팜이 엄청나게 시끌벅적해졌다.
5천 명이 넘는 팀원들이 모두들 소리를 지르거나,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얼싸안고 방방 뛰고 있었다.
"휴우."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눈을 떼며 한숨을 내쉬는 아세리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내가 아니었다.
'드디어.'
"오오! 나온다! 나와!"
"와아아아아아아아!"
"폭죽 준비해요, 어서!"
팍! 파바바바박!
순간 무수한 숫자의 폭죽이 터졌다.
"상위 리그로 승급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카이로시아님!"
"우리 팀 두 번째 상위 플레이어!"
오늘은 카이로시아의 승급전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다녀왔습니다."
검은 로브에 검은 완드를 착용한 카이로시아가 은발을 흩날리며 게이트에서 나왔다.
평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그녀 또한 상위 플레이어로 승격한 것에 무척 감격한 모양이었다.
'됐어.'
카이로시아 다음으로는 주창범, 모용악, 지그, 고건하, 루치아노 같은 플레이어들이 순서대로 승급샷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첫 스타트가 무척 좋았다.
이후에 승급전을 펼칠 플레이어들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로시아님은 팜에 들어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당소소가 내게 물었다.
'언제 들어왔더라.'
내가 승급하고 바로 다음 주에 들어왔으니까······.
"음. 대충 10개월 정도 됐네요."
"안우진님은요?"
"전 9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럼 저도 앞으로 9개월 안에 상위 리그로 올라가고 말겠어요."
그런 내 대답에 당소소가 담담하게 다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쉽지 않을 거니까요."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축하해요, 카이로시아님."
"감사합니다, 여신님."
"축하한다. 그대라면 금세 상위 리그로 올라올 줄 알았다."
"감사합니다, 피넛엘님."
어느새 다가와 아세리안, 천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카이로시아가 내 앞에 똑바로 섰다.
"축하드립니다. 결국 올라오셨네요."
나 역시 그녀에게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소소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본 카이로시아가 턱 끝을 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죠."
"······?"
"고생했어, 카이로시아. 그렇게 얘기하셔야죠. 반말권 잊으셨어요?"
"······!"
< 134화. 후폭풍(2) > 끝
< 135화. 후폭풍(3) >
'정말 지긋지긋해.'
르니카엘이 건네준 서류를 보던 라파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도대체 왜 자꾸 포인트가 부족한 거야?'
성계 대항전에 들어가는 포인트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이젠 처음에 계획했던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상황.
그로 인해 요즘 라파엘의 심기가 무척 예민했다.
주변에 존재하는 천사들이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라파엘님."
그때 들려오는 타니엘의 목소리.
"왜."
라파엘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까칠하게 대답했다.
"오딘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또 왜!"
하지만 이어지는 타니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열두 주신이 찾아올 때는 항상 골치 아픈 일들을 들고 왔었으니까.
몇 달 전엔 긴급 미션이라며 렌을 차출해갔고, 당장 며칠 전만 해도 단독 미션이라며 또다시 렌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그날, 라파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
렌이 죽는 순간 그녀가 계획해 온 모든 것들, 천문학적인 포인트가 모조리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성계 대항전이 엎어진다고 해서 상위 리그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영원히 열두 주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겠지.'
그녀의 목표에 영영 도달할 수 없다는 것.
다행히 렌이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열두 주신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건 저도 잘······."
고개를 조아리는 타니엘의 모습에, 라파엘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으로 모셔."
"네."
그러고는 서둘러 의복과 머리칼을 정리했다.
오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오늘은 별일 아니길.'
잠시 후.
"오딘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타니엘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라파엘이 원피스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라파엘, 주신님을 뵈옵니다."
"음, 라파엘. 바빠 보이는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아무리 바빠도 오딘님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한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파엘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딘의 대답은 라파엘이 그토록 바라지 않던 주제였다.
"플레이어 렌이 단독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더군. 그로 인해 주신회主神會에서도 렌을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예."
라파엘이 잡은 치마 춤 너머로 허벅지를 꼬옥 꼬집었다.
'그놈의 렌. 렌. 렌! 도대체 왜 자꾸 렌을 물고 늘어지는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 같았으니까.
렌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
그래서 확실하게 목줄을 채워놨는데, 자신이 채워둔 목줄을 주신들이 자꾸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절대 안 뺏겨.'
라파엘이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오딘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전에 부탁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렌과 한 번 직접 보고 싶다고."
"맞습니다."
"근데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오딘이 안대를 껴,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자 라파엘이 침을 꿀꺽 삼킨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성계 대항전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출전하는 거다 보니까, 이래저래 준비할 게 많은 모양입니다. 성계 대항전이 끝난 뒤에 오딘님을 알현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해 왔습니다."
그러자 오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후. 다행이야.'
아무래도 그녀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참."
그러나 오딘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속이 매슥거렸다.
열두 주신, 특히 오딘과 대화할 때마다 그녀는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듯 하더니 뒤에서 꼬아버렸으니까.
"요즘 재정이 무척 안 좋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내 안 그래도 주신회에서 그와 관련하여 안건을 올렸노라. 아마 곧 있으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앗!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말과 달리, 고개를 숙인 그녀의 표정은 무척 싸늘했다.
'내 목줄을 쥐고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포인트를 무기 삼아 그녀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주신회.
덕분에 상위 리그는 그녀의 왕국이 아닌, 주신회의 왕국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숙인 게 마지막일 테니까.
'2달만 버티면 돼.'
상위 성계 대항전.
그게 그녀의 입지를 올려줄 것이다.
저 위, 열두 자리가 있는 곳까지.
* * *
"그대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지."
눈앞의 존재를 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스킬북의 정리, 팀에 대한 투자, 그리고 카이로시아의 승급전까지.
최근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터라 새로 들어온 신입들을 살피지 못했다.
무려 4천 명이나 새로 들어온 상황.
이전처럼 꼼꼼하게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그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허나."
눈앞의 존재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짧게 쳐낸 은발의 머리칼.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
엉덩이 쪽에서 씰룩거리고 있는 꼬리.
그리고 거대한 육체에 오밀조밀하게 박혀 있는 근육들과, 이빨에 나 있는 송곳니까지.
'당연히 무림에서 들어온 네임드일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알프하임 출신이었을 줄이야.
"내가 들어온 이상 팀의 최강이란 타이틀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수호]
[성향 : 호전]
[근력 : 98(+?)] [민첩 : 101(+?)] [체력 : 89(+?)]
[정신 : 81(+?)] [지력 : 1(+?)] [마력 : 92(+?)]
[각성 능력 : <특급박투술 > <사냥본능 > <육감 > <고급살기 > <최상급마나운용 > <하급치료술 >]
[종족 특전 : 최강의 종족]
이번에 우리 팀에 들어온 네임드는 알프하임에서 온 호인족이었다.
그것도 로열 블러드들만 가지고 태어난다는 은발을 가진.
'호인족은 정말 뛰어난 종족이지.'
육중한 몸,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힘.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민첩한 움직임.
거기다 뛰어난 전투 센스까지.
이전에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만났던 소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개체 수만 많았으면 콜로세움을 씹어먹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쩐지. 모용악이 힘들어하더라니.'
"안우진님, 모용악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들어오시죠."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저······ 이번에 들어온 네임드 말입니다."
"예."
"그······ 죄송하지만 한번 직접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무실로 찾아왔던 모용악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는데, 새로 들어온 네임드를 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갓 들어온 신입에게 졌나 보군.'
직접 본 소호의 스텟은 상위 플레이어 수준.
아직 하위 리그에서 구르고 있는 모용악에겐 버거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최강의 종족인 호인족, 그중에서도 로열 블러드가 상대였으니.
'제대로 한번 서열 정리를 해줘야겠어.'
호랑이는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무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무척 서열에 민감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수호는 호인족의 로열 블러드.
무리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서열에 민감할수록 한번 밟아두면 편하긴 하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나와 수호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특수 대련장 한쪽에서 대기하던 카이로시아가 은발을 쓸어넘기며 다가왔다.
"안우진님."
"예."
"예?"
"······어."
최근 그녀는 별것도 아닌 걸로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반말 듣는 게 그렇게 좋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확실하게 짓밟아 주세요. 아님, 제가 할까요?"
묘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라면 수호를 압도적인 화력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호인족이라고는 하지만, 마법에 직격당하면 죽는 건 똑같을 테니까.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그녀는 마법사.
수호의 입장에선 암습으로 그녀를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상황만 잘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가능성 있기도 하고.
"내가 할게."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상황, 어떤 방식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려줄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천세운과의 싸움을 통해 권각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검만 들고 싸웠다면 연출되지 않았을 상황들이, 권각술이 추가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었다.
말하자면 천세운은 검 뿐만 아니라 주먹과 발차기라는, 네 개의 검으로 날 상대한 거랄까.
'나도 권각술을 특급 경지까지 올려야겠어.'
그렇게 되면 내 공격 방식이 훨씬 다양해질 것이다.
리치가 긴 창을 뚫고 들어와도, 리치가 짧은 주먹과 발차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음을 먹은 나는 벽력섬전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뭘 하는 거지?"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
나는 양발을 어깨너비로 비스듬하게 벌린 채 수호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굳이 창을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요. 덤비시죠."
그러자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발톱에 찢기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보겠다!"
녀석이 낮게 으르렁대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난 칼자국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수호의 스텟으로 봤을 때,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이런 도발도 처음 들어봤겠지.
'제대로 짓밟아 주지.'
나는 천뢰십보.
그리고 뇌신 강림을 활성화 시켰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
그러고는 내게 달려드는 수호의 손톱을 쳐내며, 다른 손으로는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까드득-
쇄골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정강이를 발로 찼다.
"끄윽!"
그러자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여나가는 수호의 무릎.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잘 가라.'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피의 강화 특전이 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근력 스텟은 216 포인트.
그 엄청난 괴력에, 특수 대련장의 흙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먼지를 동반한 엄청난 충격파가 뇌전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그 한 번의 공격 아니, 패대기 질 만으로도 수호는 즉사했다.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 났는지, 복부가 사람이라면 보일 수 없는 형체로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깼습니까."
"······."
"그럼 일어나시죠. 제가 좀 바쁜 몸이라. 한 열 번만 더 죽이고 가겠습니다."
내 말에도 수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온몸을 벌벌 떨 뿐.
사납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순한 양으로 변해 있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군.'
호인족은 뛰어난 본능을 가지고 있는 종족이지만,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카이로시아나 모용악, 고건하처럼 열 번씩이나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더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도리도리.
"전 대답하지 않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다시 묻죠. 더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내, 내가 졌다."
"졌다?"
"져, 졌습니다······."
엉덩이 쪽에서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도 축 늘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서열 정리가 됐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안심할 순 없지.'
"모용악님."
"예, 안우진님."
내 부름에 새로 들어온 준네임드 급들과 함께, 카이로시아 곁에서 싸움을 관전하던 모용악이 달려왔다.
모용악 너머로 준네임드 급 플레이어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아뇨, 바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모용악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또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정신 차릴 때까지 죽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살기를 내뿜자 모용악, 쓰러져있던 수호,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몸을 움찔 떨었다.
시각적 임팩트도 충분했고, 확실하게 경고의 메시지도 남겼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수호님?"
"······예."
"절 쓰러트릴 수 있겠다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물론 그때는 더 과격해진 제 모습을 보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
"그럼 전 이만."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수호를 뒤로하고 특수 대련장을 나섰다.
'오후엔 주창범과 붙어봐야겠군.'
권각술을 수련하려고 했는데, 너무 쉽게 끝난 상황.
마침 곧 있으면 주창범도 승급샷을 받을 테니, 실전 감각을 다듬어줄 겸 녀석을 상대로 권각술을 수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우진이형!"
마침 체력 단련장에서 나오는 주창범.
그래서 그에게 오후의 대련 일정을 잡으려 할 때였다.
"형, 상위 리그에 두 번째 지구 플레이어가 나타났어요."
한달음에 다가온 주창범이 말했다.
"······뭐라고요?"
띠링! 띠링!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집무실로 좀 와주세요! 빨리요!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알림창.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일단, 조금 이따 얘기하죠."
나는 한숨을 내쉰 나는 주창범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집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급해 보이는 아세리안의 메시지.
'아마 성계 대항전 때문이겠지.'
< 135화. 후폭풍(3) > 끝
< 136화. 후폭풍(4) >
집무실로 들어서니, 방긋 웃고 있는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룬이라는 플레이어 때문에 날 부른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날 급하게 호출할 이유가 없을 텐데.
"찾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안우진님. 혹시 소식 들으셨나요?"
"지구에서 두 번째 상위 플레이어가 나왔다는 소식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확 강해져서 곧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하위 게임 메이커가 이렇게 금방 승급시킬 줄은 몰랐네요."
'역시 룬 때문에 부른 게 맞았군.'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세리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변수가 생겼다는 거군요."
"네. 아무래도 유일한 지구 플레이어라는 메리트가 깨졌으니, 이대로라면 안우진님이 없어도 성계 대항전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잖아요."
아세리안이 양손을 깍지 낀채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이론적으로, 열두 성계 모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성계 대항전이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곧 올라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세리안님. 제가 하위 리그 뛸 때 어땠죠?"
"말할 필요도 없죠. 이견이 없는 최강자. 그때 당시 G. O. A. T를 논했을 정도니, 아무리 못 해도 역대 하위 리그 임팩트 중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비슷했다.
'커뮤니티에 내 게시글로 도배되고, 이례적으로 상위 리그에도 내 닉네임이 알려졌을 정도니.'
그때의 난, 하위 리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 플레이어였다.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데 제가 상위 리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어땠습니까. 절 아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였죠. 대부분은 아, 좀 유명한 애가 올라왔구나, 하고 넘기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세리안의 모습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볼 것도 없습니다. 신입생 때의 제 처우를 생각해 보면, 저 대신 룬이라는 플레이어 혼자 지구 성계 대항전에 참가한다? 관객들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지구 플레이어가 등장했음에도 내가 자신만만한 이유가 이거였다.
라파엘은 지금껏 나와 쿠 훌린, 두 사람의 대결을 가지고 계속해서 성계 대항전을 홍보해 왔다.
'지구에선 고작 한 명 밖에 안 나오는데? 라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였겠지.'
그런데 직전에 내가 빠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와 쿠 훌린을 가지고 홍보해왔던 성계 대항전의 이미지가 시작부터 박살 날 것이다.
거기다 지구에서 한 명밖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이슈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고.
"제 생각도 안우진님과 같아요. 룬이라는 플레이어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죠. 안우진님은 하위 리그도 초토화 시키고 올라오신 데다가, 긴급 미션에서 중급 악마를 일대일로 상대하셨고, 심지어 상위 리그 최초로 단독 미션까지 수행하신 분인데요. 그것도 극악의 난이도를."
무척 뿌듯해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오히려 머쓱했다.
바로 면전에 대고 내 칭찬을 들으려니, 뭔가 낯간지러웠달까.
하지만 아세리안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성계 대항전은 아마 그대로 열릴 거예요. 거기에 들어간 포인트가 있으니, 그걸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으려 하진 않을 거거든요."
"관객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말씀이십니까?"
"네. 보통 하이블러드나이트 경기를 준비하는데 어느 정도의 포인트가 필요한지 아시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평균적으로 천만 포인트 정도가 필요해요.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할 기본급이나 보너스를 제외하고, 그냥 경기를 준비하는 데에만요."
"······!"
뭐라고?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천만 포인트?
'도대체 뭐 하는데 그렇게 많은 포인트가 들어가는 거지?'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할 포인트 말고 또 쓸 게 있나?
"안우진님이 경기장에 들어갈 때 열리는 게이트 있죠? 그걸 비프로스트라고 불러요."
"아, 네."
"근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세요? 안우진님은 죽었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세상으로 가시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법도 있고, 신도 있고, 천사도 있는 세계.
그러니까 망자亡者인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엄연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사는 세상은 달라요. 근데 그걸 강제로 잇다 보니,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 거거든요. 아무튼, 일반 경기를 개최하는데도 천만 포인트가 넘게 들어요. 근데 초대형 이벤트인 성계 대항전? 아무리 못해도 10억 포인트 이상이 필요할 거예요. 최소한으로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감도 오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포인트.
그녀의 말대로라면, 관객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성계 대항전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엄청난 포인트를 버릴 수야 없을 테니까.
'곤란하게 됐군.'
내 목적은 성계 대항전이 열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른 성계에서 차원 특전을 얻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후폭풍 또한 라파엘에게 뒤집어씌울 예정이었고.
'라파엘에게 뒤통수를 후려 쳐 주는 건 덤이었지.'
그런데 이대로라면 결국 성계 대항전이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아세리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있어요."
"어떤······?"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눈웃음을 쳤다.
"단순해요. 룬이라는 플레이어도 불참하게 만들면 되죠."
룬을 참가하지 못하게 만든다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다른 팀 소속인 룬을 도대체 어떻게 참가하지 못하게 만들 것인가.
내 말에 아세리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팀 불굴 소속이에요. 불굴의 주인, 중급신 루디악은 커뮤니티에서도 소문 난 안우진님 광팬이구요. 오죽했으면 팀원들 전체를 다 지구인으로 꾸려서, 안우진님 코스프레까지 시키겠어요?"
"······아, 네."
"제가 루디악님과 한번 만나볼게요. 안 그래도 우리 팀 육성법이 궁금하다며 여러 차례 저한테 문의가 왔었거든요. 제가 만나자고 하면 당장에라도 시간을 내줄 거예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진짜 많이 성장했네.'
현재로선 이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아세리안이 제법 든든하게 보일 정도.
"물론 육성법을 공유해주긴 해야 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유니콘의 뿔 사용 방법을 알려주려구요. 팀 불굴 소속 플레이어들 보니까, 마력 스텟이 전체적으로 낮은 것 같더라구요."
"음, 그 정도면 딱 적당하죠."
유니콘의 뿔 사용법은 아직 커뮤니티에 공개되진 않았지만, 알만한 팀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딱히 우리 팀만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 없달까.
그 정도라면 협상테이블에 딱이었다.
"일단 플레이어 룬의 승급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그쪽에 의견을 전달해 놓은 상태예요. 협상이 완료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참. 스킬북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클로에에게 들으니, 30프로 더 비싸게 내놔도 올리는 족족 판매되고 있다더군요."
아세리안에게 투자를 확정지은 이후, 나는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 뜨나 안 뜨나 체크하기 위해 고용한 사용인, 클로에를 통해 중개 거래소에 스킬북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일 저녁 9시에, 딱 4권만.
"제 말이 맞죠? 서두르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포인트를 벌 수 있다니까요."
모두들 무림에서 얻은 스킬북들이 풀리길 기다리는 상황.
굳이 급하게 판매하지 말고, 차라리 매일 같은 시각, 똑같은 물량만 올려보라는 게 아세리안의 조언이었다.
―그렇게 하면 경쟁 심리가 붙잖아요. 어? 좀 비싼데? 근데 이거 누가 사가면 어떡하지? 에잇! 내가 그냥 사야겠다! 그러다 보면 금액이 좀 높아도 일단 손이 나가지 않을까요?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다음부턴 40프로 더 비싸게 올려봐야겠어.'
비싼 금액이 무색할 정도로 올리는 족족 팔려나갔으니까.
그로 인해 게시판엔 나에 대한 원성이 잦아졌을 정도였다.
└아 씨팔! 풀 거면 한 번에 다 풀라고, 찔끔찔끔 풀지 말고ㅡㅡ
└무슨 개한테 밥 주듯이 판매를 하냐? 매일 밤마다 중개 거래소에서 죽치고 있네 하;;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는 역대급이더라 ㅋㅋㅋ 4개 올라왔는데 첫 번째꺼 창궁무애.. 읽고 있는데 4개 다 사라짐 ㅋㅋㅋㅋ 이 새끼들 읽지도 않고 일단 구입부터 누르나봨ㅋㅋㅋㅋㅋ
└어휴 ㅉㅉ 그렇게 죽치고 있으니까 저러는 거지 ㅋㅋㅋㅋ 니들 아니었음 이미 다 풀리고도 남았음 ㅎ
└ㅋㅋㅋㅋㅋ 난 그냥 구경만 하는데도 꿀잼이드라 ㅋㅋ 매일 9시가 되면 커뮤에 찡찡이들 모임 소환됨 ㅋㅋㅋㅋ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북이 무림, 딱 한 곳에서만 흘러나온 거다 보니, 판매자가 나라는 것을 신들이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일단 판매된 5천만 골드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1억 5천만 골드도 만들어지는 대로 가져다드릴게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생긋 웃었다.
"천천히 주셔도 돼요. 어차피 중개 거래소에 매물이 없어서 골드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렇긴 하죠."
"게다가 하위 리그도 요즘 상위 성계 대항전에 이목이 끌려서 관객 수가 저조한 편이더라구요. 그래서 하위 게임 메이커가 최근엔 네임벨류가 낮은 플레이어들에게만 오퍼를 돌리고 있어요. 어차피 수익도 안 나는데, 괜히 이런 경기에서 네임드가 죽기라도 하면 손해니까요."
'그래서였군.'
어쩐지, 요즘 팀원들의 출전 빈도가 굉장히 낮아졌다 싶더라니.
하위 리그에서 팀 투지는 최고 명문 팀으로 꼽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입 플레이어라도, 일단 투지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본급이 빠르게 오른달까.
물론 그만큼 생존율도 높고, 좋은 경기력을 펼쳐주는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컨텐더로 오르는 속도가 다른 팀보다 훨씬 빨랐다.
'상위 리그에서도 명문 팀으로 만들어줘야지.'
다음 목표를 정한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도 고생하세요."
아세리안의 집무실을 나선 나는 특수 대련장으로 향했다.
플레이어 룬이 승급한 문제는 다행히 아세리안이 해결해줄 것 같고.
이제.
고위 리그로 올라갈 준비를 할 때였다.
'승급하기 전에 박투술을 특급까지 올려놔야겠어.'
현재 팀 투지에 나와 대련해 줄 녀석은 차고도 넘쳤다.
아세리안의 말대로라면, 녀석들에게 당분간 오퍼가 없을 테니까.
거기다 마침 새로 들어온 수호가 특급 박투술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과 대련하며 움직임을 연구하다 보면, 특급 박투술로 올라갈 실마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형, 제발 창 좀 들어주세요. 제발요! 창은 한 번에 끝나는데 이건 맞아 죽어야······꽥!"
"안우진님, 저는 일격에 부탁드립니다."
"어어······! 난 왜요! 난 마법사라고요!"
그날부터 나는 한동안 특수 대련장에 살다시피 하며, 오가는 팀원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손맛이 좋은데?'
* * *
"현재 중개 거래소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템들을 쓸어왔습니다."
마계 최하층.
왕은 왕좌에 앉아 손바닥 위에 있는 두 개의 조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초록빛 조각과.
"그리고 중간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작업 중인 타겟이 50프로 이상 타락화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만큼 까만 조각.
'친구여······.'
조각을 보고 있는 왕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녀석이 고위 리그로 올라오는 순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한동안 상념에 젖어 있던 왕이 고개를 들자, 대전大殿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하고 있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여인의 등에는 8쌍의 날개가, 그리고 머리 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다.
"고개를 들라."
"예."
"라미엘, 다음 접선 날짜가 언제지?"
그러자 여인이 잠시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대답했다.
"앞으로 열흘 남았습니다."
"열흘이라······."
왕은 왕좌의 팔걸이 부분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1분 정도 지난 후였다.
"받아라."
팅-
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언가가 여인에게 정확히 날아왔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보니, 초록빛이 흘러나오는 조각이었다.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여인에게 왕이 입을 열었다.
"그 조각을 타니엘에게 전달하라."
"알겠습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할까요?"
여인의 물음에 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대전을 비추고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왕을 비추었다.
자줏빛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반짝거렸다.
"조각 주인의 손에 돌아가야겠지."
< 136화. 후폭풍(4) > 끝
< 137화. 후폭풍(5)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다행히 룬이 소속된 팀 불굴의 주인, 루디악은 내가 불참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룬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양한 성계 출신 플레이어들을 주력으로 밀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팀 불굴은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만으로 이루어진 팀.
그쪽에서도 확률이 낮은 싸움에 내보내봤자, 손해를 자초하는 일밖에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유니콘의 뿔 사용법을 알려주며 부탁한 것도 있겠지만.
'나쁘지 않군.'
덕분에 나는 마음 편하게 박투술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상급신으로 승격했습니다.]
[팜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플레이어 '렌'과 팀 '투지' 간의 수수료율이 30% → 20%로 변경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렌'의 플레잉 코치 정산율이 3% → 5%로 변경되었습니다.]
그사이 아세리안이 상급신으로 승격하며, 팜에 변화가 생겼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특수 대련장이 특수 중력 대련장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
'이거 대박인데.'
"악이 형! 뚫렸어요!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끝내야 돼요!"
"크윽, 차라리 내가 창을 묶어둘 테니까 네가 뚫어보든가!"
"저는 탱커잖아요! 제가 어떻게······헉!"
"둘 다 입으로만, 끅! 나불거, 거리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라!"
현재 나는 주창범, 모용악, 수호와 1대 3으로 대련하고 있었다.
주창범이 앞에서 방패로 내 창을 묶는 사이, 모용악과 수호가 거리를 좁혀 들어오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세 사람이 뭔 짓을 해도 날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제는 스텟이 높아져, 저주셋으로도 저들과 스텟을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나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건.
[플레이어 '렌'의 적용 중력 : 20G]
나를 짓누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중력 때문.
덕분에 움직임은 세 사람과 비슷했고, 근력은 오히려 저들보다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확실히 쉽지 않네.'
덕분에 모용악과 수호가 마음껏 내 품속을 파고들며 검을 찔러 넣고, 손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광경.
'어딜.'
빠악!
"끅!"
녀석들이 품속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불시에 팔꿈치를 휘두르거나 니킥을 꽂아 넣었고.
퍼억!
"어어······!"
상대가 예상하기 힘든 각도로 카프킥을 때려 넣으며 무게 중심을 흔들었다.
'확실히 발차기가 효율이 좋네.'
거의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쥐고 싸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상반신의 움직임에만 체크하기 십상.
하지만 발차기는 하반신이고, 카프킥은 하체를 공격한다.
이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직 견제용으로 쓰고 있는 나와 달리, 천세운은 네 개의 검으로 공격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검의 궤적에서 벗어나도, 또 다른 공격들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을 정도로.
아직 천세운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비슷한 식으로 공격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꽝이었지.'
오히려 거기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창이 힘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순히 박투술을 연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검과 방패를 동시에 다루는 검방술처럼 창술과 박투술을 하나로 합친 새로운 공격법을 터득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이번 대련부터 마무리 지어야겠군.'
이제 슬슬 오늘 일과를 마무리해야 할 시각.
박투술 대신 창술로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창을 고쳐잡았다.
챙! 채챙! 챙! 챙! 챙!
"어어! 모두 조심!"
마음가짐이 달라지자마자, 내 움직임이 180도 달라졌다.
지금껏 내 창을 꽁꽁 묶어두던 주창범이 내 공격에 허우적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틈에 창을 찔러넣어, 주창범의 방패를 쳐낸 나는 곧장 뒤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멀어지는 주창범과의 거리.
'일단 모용악부터.'
그와 동시에, 옆구리에서 달려드는 모용악에게 창을 휘둘렀다.
서걱!
"······!"
그 공격에 모용악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리치가 긴 창의 특성상, 지금까진 주창범의 방패에 막혀 휘두를 궤적이 안 나왔다면, 이제는 거리가 어느 정도 생겨난 상황.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뿜어져 나온 그 공격을 모용악은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한 명 끝냈고.'
뒤이어 모용악의 목에 창을 꽂아 넣은 나는 달려드는 주창범의 방패를 발로 차며, 그 반발력을 이용해 뒤통수에서 날아드는 수호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챙! 채챙!
"······!"
수호가 반사적으로 손톱을 내밀며 내 창을 막아보려 했지만.
'걸렸군.'
푹!
순식간에 창의 궤적을 바꾼 내 공격에 수호의 왼무릎이 꿰뚫렸다.
이걸로 녀석은 기동성을 상실한 셈.
"제, 젠장!"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무조건 방어해야 하게 된 수호는 이어지는 내 창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서걱!
'확실히 내 실력이 엄청 늘긴 했네.'
순식간에 두 명을 피니쉬 시킨 나는 주창범과 마주 섰다.
"후우. 후우."
주창범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
'이젠 대련하자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인데.'
천뢰십보를 얻고 내 창술이 뇌신창으로 진화하면서, 더 이상 팀원들을 상대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한참 스텟이 낮아도 이제는 테크닉만으로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게 되었달까.
당장 주창범만 해도, 예전엔 스텟이 비슷하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사 데미지에, 무기를 맞댈 때마다 스며드는 한기.
거기다 빈틈없는 수비까지.
'근데 이젠 아니지.'
하지만 뇌신창으로 각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철벽이라고 불리던 녀석의 수비도.
캉! 캉! 서걱!
가볍게 뚫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창대에 얻어맞으며 중심을 잃고, 결국 복부에 창이 꿰뚫린 주창범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을 헐떡거렸다.
"하아. 졌어요, 형."
"이제는 안우진님께 상대도 안 되는군요. 더 이상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허탈하다는 표정을 짓는 주창범.
그리고 순수하게 감탄한 모용악.
아직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아, 말을 더듬는 수호까지.
모두들 선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고생 많았습니다."
[현재 시각 : 20:57:42]
이걸로 오늘 대련은 끝.
상태창에 나와 있는 현재 시각을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 시간까지 반납하며 나와 대련을 하고 있던 것이다.
"어서 들어가 쉬시죠."
[플레이어 '렌'에게 적용되던 20G의 중력이 해제됩니다.]
상태창을 눌러 내게 부여되었던 중력을 해제하자, 어깨를 짓누르던 엄청난 무게가 사라졌다.
고개를 숙여보니,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후. 이것도 익숙해져야지.'
중력장은 단순히 모래주머니나, 쇠로 된 팔찌 같은 걸로 온몸을 구속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서 움직이는 기분이었달까.
덕분에 훈련의 효율이 크게 상승하긴 했지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팟! 파바밧! 퍽! 퍽! 팟!
"오늘은 꼭! 이기고 말, 거야!"
"그런 실력으로는 흐읍! 아직 한참 멀었어요."
'저쪽은 무슨 사생결단이라도 내는 것처럼 싸우고 있군.'
고개를 돌려 보니, 이를 악문 채 맨손 대련을 펼치고 있는 카이로시아와 당소소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로시아가 박투술을 훈련하게 된 건 본인의 의지였다.
―저도 같이 훈련할래요!
완드를 착용하고 있는 특성상, 박투술을 익히면 수비에 한결 수월해진다는 게 이유였다.
자기는 머리가 똑똑해서 마법 수련은 오후에 잠깐 해도 된다나 뭐라나.
물론 머리가 좋은 것과 육체적 센스는 아예 다른 영역.
카이로시아는 계속해서 허우적대며 당소소에게 얻어맞기 바쁜 상태였다.
당소소는 내 부탁으로 카이로시아와 대련을 하게 된 거고.
'어차피 카이로시아한테 화력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상태니까.'
차라리 이런 식으로 맨손 격투에 익숙해져서, 수비력이 한층 탄탄해질 수만 있다면 훨씬 효율적인 육성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두 사람이 시너지가 잘 맞네.'
그렇게 카이로시아와 당소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어어! 머리카락을 왜 잡아당겨요!"
당소소의 손에 카이로시아의 은발이 꼬이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깔끔하게 묶어서 위로 틀어 올린 당소소와 다르게, 카이로시아는 긴 머리칼을 풀어 헤친 채 대련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
뭐, 대련을 하다 보면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카이로시아는 마법사라서 이런 일을 처음 겪었겠지만.
"어머, 실수. 앗! 이것도 실수."
그때 당소소가 머리칼과 엉킨 팔을 빼다가 또다시 카이로시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다 보니, 카이로시아가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이건 고의인데?'
"그, 그만! 씨이! 우리 이제 그냥 대련할래요? 박투술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이번엔 제 마법 실력을 보여줄게요."
"미안해요. 피곤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수고하셨어요, 카이로시아님."
"뭐? 야!"
······.
시너지가 잘 맞는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특수 대련장을 나오니, 하늘 가득 은하수가 맺혀 있었다.
어두운 밤, 팜의 각종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진짜 많이 커졌네.'
아세리안이 상급신으로 승격하면서, 기존에 500미터였던 팜의 직경이 1킬로미터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도 5천 명이 넘고, 그에 따라 사용인의 숫자도 급증하면서 숙소나 식당, 체력 단련장, 대련장 등등 다양한 부속 건물들도 새롭게 생겨났다.
이제는 어느덧 소규모 도시처럼 보일 정도.
└무림 탑 100으로 누가 나올 것 같냐. 내 생각에는 남궁천까진 확실하고 그 뒤로 소성이랑 육중헌, 예건정 이 세 명이 비등비등할 거 가튼데.
└예건정이 거기 왜 낌 ㅋㅋㅋㅋ 예건정 빼고 황우명이 들어가면 딱일듯 ㅎ
└???? 예건정이나 황우명이나 거기서 거기지 ㅋㅋㅋㅋㅋㅋ
어느새 성계 대항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
커뮤니티에서는 각 성계에서 뽑힐 탑 100의 명단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거나, 최상위 네임드들 간의 서열을 매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명단을 다 외우고 있는 것도 신기하네.'
아무래도 하위 리그보다 플레이어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관객 숫자는 훨씬 늘어난 만큼 상위 넘버링에서 뛰는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대부분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쿠 훌린 vs 렌만 얘기하는데 주소월 vs 렌 기대하는 사람은 나뿐이냐?
└나도 주소월22222222
└개인적으론 1몽연 2쿠 훌린 3렌 4헥토르 5주소월이 아닐까 싶은디?
└드디어 쿠 훌린 vs 몽연을 보는구나 ㅅㅂ 이번 기회에 확실히 서열 정리 좀 하자.
뿐만 아니라 최상위 네임드들의 순위에 대한 얘기도 끊이지 않았다.
물론 가장 많이 비교당하는 건 나와 쿠 훌린이었다.
상위 리그 최강자 중 한 명인 데다가, 같은 창술사, 그리고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 등등 나와 비슷한 점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쿠 훌린과의 싸움이 이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성계 대항전은 열리지 않을 테니까.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군.'
나는 새롭게 배정받은 숙소 쪽으로 향했다.
숙소도 이제는 어지간한 호텔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크고 고급스러워진 상태였다.
뭐, 어차피 잠만 자러 들어가는 곳이라 나한텐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펄럭― 펄럭―
그때 누군가 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팜에서 날개가 달린 존재는 단 둘 뿐.
"아, 안우진님!"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포르도엘님?"
그 대상은 팜에서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의 육성과 사용인들 관리, 그 외에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는 포르도엘이었다.
'뭐지?'
사실상 포르도엘이 나를 먼저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법 계열을 담당하는 그녀가 나와 부딪힐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군.'
떨리는 눈동자, 당황한 듯 파르르 떨고 있는 손.
거기다 창백해진 안색까지.
이건 뭔가 잘못할 게 있을 때 나오는 신체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정말 죄송해요······. 제,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횡설수설하는 포르도엘.
6쌍의 날개를 가진, 4급 주천사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그녀를 진정시켰다.
"일단 자초지종부터 먼저 설명해 주시죠."
"아, 네······. 그게, 요즘 클로에가 안우진님께 받은 스킬북들을 중개 거래소에 올리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러자 포르도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왠지 가격을 안 보고 사는 것 같다길래······. 호, 혹시나 해서 제가 딱 한 개만 10억 골드에 올렸는데······."
"······?"
"그, 그게 팔렸어요······."
"······!"
뭐라고?
< 137화. 후폭풍(5) > 끝
< 138화. 후폭풍(6) >
4급 주천사 포르도엘.
그녀는 팀 투지에서 마법 계열 육성, 그리고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오늘은 뭐 없나?'
팀에 소속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근접 물리 계열이고, 마법 계열은 카이로시아를 포함해 백 명 정도밖에 없는 상황.
그러다 보니, 피넛엘보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포르도엘은 오늘도 팜을 어슬렁거리며 혹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없나 체크하고 있었다.
'오늘도 많이 힘들어 보이네.'
그렇게 팜을 돌아다니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안우진이 중개 거래소 관련 업무를 맡기기 위해 고용한 사용인, 클로에였다.
"클로에. 바쁘니?"
"앗! 포르도엘님! 아니요, 헤헤. 오늘도 평소랑 똑같죠."
포르도엘의 등장에 클로에가 활짝 웃었다.
좁은 방 안.
그녀의 업무는 매일 같이 중개 거래소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거기서 준신화 등급 이상의 아이템이나 플래티넘 등급 이상의 스킬이, 아니 다 떠나서 비싼 금액에 무언가가 올라온다면 일단 안우진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가 지금까지 안우진을 먼저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멍하니 중개 거래소의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목록을 살피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달까.
'요즘엔 더 힘들겠지.'
특히 최근엔 거래소의 매물이 씨가 말랐기 때문에 벽을 보고 하루 종일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고문받는 거나 마찬가지.
그런 클로에가 안쓰러웠던 포르도엘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같이 중개 거래소 보면서 대화나 할까?"
"앗! 그럼 저야 감사하죠.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괜찮아. 요즘은 스킬북 판매도 하고 있지? 좀 어때?"
포르도엘의 말에 클로에의 눈썹이 팔八자가 되었다.
"사실······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어요."
"왜? 듣기론 너무 잘 팔려서 문제라던데?"
"아, 제 말은 그게 아니구요. 뭐랄까······ 스킬북의 이름이나 가격도 안 보고 사 가는 것 같아요. 올리는 순간 이미 중개 거래소 목록 창에서 사라져 있거든요."
'가격도 안 보고 사 간다고?'
포르도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킬북 구입이 목적이라면 가격은 당연하고, 무슨 스킬이며,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클로에의 말대로라면 그런 것 없이 그냥 일단 닥치는 대로 구입하고 있다는 것.
순간 포르도엘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그래? 그럼 나 한 권만 줘볼래? 이게 오늘 판매할 스킬북이지?"
포르도엘이 클로에의 곁에 있는 네 권의 스킬북 중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딱 보니, 3티어 등급의 스킬이었다.
요즘처럼 스킬북의 씨가 말라, 인플레이션 상황 속에서도 10만 골드에 팔릴까 말까 싶을 정도로 조잡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네, 맞아요. 근데 뭐 하시려구요······?"
포르도엘이 씨익 웃자, 클로에가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포르도엘은 더더욱 기대가 됐다.
"정말 가격도 안 보고 사는지 한 번 보려고."
"어떻게요?"
"음······. 한, 10억 골드 정도로 올려보게. 어때, 너도 기대되지?"
물론 팔려나갈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진짜 가격을 안 본다고 하더라도, 10억 골드나 가지고 있는 신이 존재할 리 없으니까.
그럼에도 10억 골드에 올려보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려는 신들도 황당해하겠지?'
비록 직접 표정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 가격대를 보고 당혹스러워하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음을 먹은 포르도엘은 과감했다.
마침 시간도 저녁 9시가 된 상황.
띠링!
[<스킬북:삼재 검법>]
[판매가 : 1,000,000,000 G]
중개 거래소에 스킬북을 올린 포르도엘이 쿡쿡, 웃었다.
그때였다.
띠링!
"······!"
절대 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알림음.
그게 스킬북 등록과 동시에 울려 퍼졌다.
순간 포르도엘이 밀랍 인형처럼 삐그덕거리며 클로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그 모습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포르도엘은 입을 벌릴 뿐이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스킬북:삼재검법 >이 판매되었습니다.]
절대 보여선 안 되는 글귀가 떠 있었으니까.
'이게 왜······ 팔려······?'
순간 닭살이 돋았다.
아무래도······ 대형 사고를 친 것 같았다.
* * *
포르도엘의 말을 들은 나는 서둘러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젠장. 젠장.'
중개 거래소 물품 등록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금기시 되어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중개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아이템이나 스킬북을 보면 대부분 합리적인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수수료를 받지 않는 거겠지.
그런데 지금, 포르도엘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말하자면 거래소 사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10억 골드라니.'
그것도 수습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금액으로.
'골치가 아프군.'
하물며 이 시간에, 무림에서 흘러나온 스킬북을 판매하는 게 나라는 걸 대다수의 신들이 알고 있는 상황.
10억 골드에 사 간 신도 당연히 내가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이와 관련해서 게시글을 올릴 것이 분명했다.
'상위 리그에서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어.'
서둘러 커뮤니티로 들어간 나는 게시글을 슥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스킬북을 10억 골드에 샀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멍한 상태이거나, 아니면 지금 분노가 가득 담긴 게시글을 쓰고 있거나.
'후.'
"저, 정말 죄송해요······."
포르도엘은 4급 주천사에 어울리지 않는, 개구쟁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세리안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대하는 것만 봐도 애교가 가득 묻어나왔다.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천사.
그렇기에 언젠가 무슨 일이 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쯧.'
이미 벌어진 일이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부터 찾아야지, 잘잘못을 따지고 있어봤자 달라질 게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아, 클로에님께 당분간은 스킬북 판매 멈추라고 전해주세요. 포르도엘님은 커뮤니티를 주의 깊게 살펴 주시고요. 오늘 일과 관련해서 올라온 게 있다면 바로 알려주셔야 합니다."
"네에."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옮기는 포르도엘.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요 며칠 운이 좋더라니.
'일단 게시글이 올라오면 아세리안한테 부탁해서 바로 환불해줘야겠군.'
사실 탐날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무려 10억 골드.
그렇지만, 잘못 삼켰다간 심하게 탈이 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포인트도 아니고, 골드에 목을 맬 만큼 궁하지 않았다.
'제발 잘 지나가야 할 텐데.'
포르도엘이 10억 골드에 스킬북을 판매한 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커뮤니티엔 아무런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변화는 있었다.
'물량이 쌓이는군.'
그날을 기점으로 중개 거래소에 등록되어 있는 아이템과 스킬북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 명이 지금까지 물량을 다 빨아먹고 있던 거였어.'
확실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묘했다.
10억 골드에 스킬북을 판매한 뒤 곧장 물량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매점매석이라고 하기엔 무기, 방어구, 스킬, 소모품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중개 거래소에 있는 모든 것들을 등록되는 족족 구입해 갔다는 것.
[최근 중개 거래소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하여, 금일 20시까지 중개 거래소 시스템 점검이 진행됩니다.]
[이용하시는 모든 분들께 양해 바랍니다.]
중개 거래소를 관리하는 측에서도 그걸 이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콜로세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점검을 하겠다는 공지를 올린 것이다.
'뭔가 있군.'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거래소에 등록된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는 것 하나만으로 매점매석의 의심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내게 문제 삼을 가능성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 일을 커뮤니티에 올리는 순간, 본인이 범인이라는 걸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
결국 10억 골드에 스킬북을 판매한 일 자체가 묻힐 것이다.
'대박인데?'
[보유 골드 : 1,101,473,050 G]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10억 골드가 수중에 생겼다.
말하자면 복권을 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랄까.
'오히려 포르도엘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
그날 이후, 포르도엘은 기죽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아세리안한테까지 불려 가서 한 소리 들은 모양.
'따로 찾아가서 위로해 줘야겠군.'
그녀가 잘못한 일이긴 하지만, 결론적으론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 셈이었다.
마교 본거지에 있던 스킬북을 통째로 털어온 수준으로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으니까.
'이 정도면 스킬북을 판매할 필요가 없겠어.'
내가 골드를 보유하고 있으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혹시나 등장할 준신화 이상의 아이템, 혹은 플래티넘 등급 이상의 스킬을 구입하는 것.
하지만 10억 골드라면 준신화나 플래티넘이 몇 개가 떠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외로 내게 필요한 건 딱 하나였다.
'스텟을 구입할 포인트지.'
이렇게 된 이상 스킬북을 팀원들에게 전부 뿌릴 생각이었다.
1티어 등급의 스킬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더라도, 플레이어의 수준이 크게 상승한다.
당장 마력 상쇄나, 천둥의 숨결, 뇌신을 내가 가지게 되면서 얼마나 많이 성장했던가.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하위 리그에서는 1티어 등급 스킬 한 개만 가지고 있어도 넘버링이 1에서 2는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입들을 제외하곤, 팀원들 대부분이 넘버링 6에서 8 사이에 걸쳐 있어.'
한마디로 1티어 등급 스킬이 추가되면 대부분의 팀원들이 컨텐더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것.
거기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북들은 대부분 무림에서 흘러나왔다.
그곳이 열두 성계에서 가장 강한 네 곳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팀원들의 전력 상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잠시 마음속으로 포르도엘에게 감사를 표한 나는 아세리안에게 향했다.
팀 투지를, 상위 리그에서도 명문으로 불리게 해 줄 날이 머지않았다.
'그때가 되면 포인트가 엄청나게 들어오겠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성계 대항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D-day 7
└하앍. 진짜 오래 기다린 느낌임 ㅠㅠㅠ
└티르너노그 가즈아아아악!
└다들 어느 성계가 우승할 거라고 봄?
└현재 상위 리그 최상위 네임드들만 보면 알프헤임, 무림, 졸본 이 세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음.
└난 무림, 졸본, 지구. 왠지 모르겠는데 렌이 대형 사고 하나 터트려줄 것 같은 느낌 아닌 느낌임.
성계 대항전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커뮤니티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평소보다 수십 배나 많은 양의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반응이 뜨겁네.'
확실히 초대형 이벤트다 보니, 온갖 관심이 쏠려있는 모양이었다.
오죽했으면 하위 게임 메이커가 당분간 하위 리그 경기를 오픈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
그와 반대로 팜은 무척 조용했다.
'다들 여기서 살다시피 하는군.'
특수 대련장엔 수천 명의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렸다.
내가 뿌린 스킬북의 여파였다.
스킬 이해도를 끌어올리는 데에는 대련만 한 게 없었으니까.
'조용하네.'
최근 한 달 동안 팀 투지에서는 아무런 이벤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기에 참가한 플레이어도 없었고, 뭔가 사건 사고가 터지지도 않았다.
그저 모두들 하루하루 단련에만 힘쓸 뿐.
'폭풍전야 같군.'
그 고요함이 마치.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상황 같았다.
물론 그 거대한 태풍은 내가 몰고 오려고 하고 있었고.
그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성계 대항전 '지구'의 참가 멤버로 선정되었습니다.]
[참가 멤버는 각 성계의 상위 100 명까지 입니다.]
[성계 대항전은 총 5개의 경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종 우승 시 '차원 특전'을 획득합니다.]
[성계 대항전의 아레나에서는 사망하더라도 부활합니다.]
[1인당 총 5개의 경기에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 인원 제한은 없습니다.]
[차원 특전은 도박사들이 예상한 비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깃발 쟁탈전
―상위 리그 최강자
―공성전
―악마 사냥
―레이드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Yes / No]
눈앞에 뜬 메시지 창.
나는 망설임 없이.
'언젠가 꼭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었지.'
[Yes / No(선택)]
No를 눌렀다.
< 138화. 후폭풍(6) > 끝
< 139화. 총 출동(1) >
르니카엘은 각 성계 당 상위 100명으로 선정된 플레이어들에게 오퍼를 보내면서도 무척 조마조마했다.
라파엘님이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기 때문이다.
'제발, 무사히 지나가길······.'
1급, 치천사熾天使.
아홉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 중 가장 고귀한 다섯 존재.
그런 탓에 라파엘은 플레이어들을 벌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르니카엘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존재들인걸.'
아무런 상의도 없이 어드밴티지를 줄인 것에 대한 앙심을 품을 가능성이 컸다.
그와 관련해 계속해서 말씀드려봤지만, 라파엘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셨다.
이전의, 철두철미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
그 탓에 르니카엘은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타락화의 전조 증상.'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타락화가 시작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이람.'
르니카엘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이 많다 보니, 자신 또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손바닥으로 뺨을 짝짝 치고,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남은 업무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띠링! 띠링!
[플레이어 '렌' 이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플레이어 '룬' 이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
막 다른 업무를 시작하려던 르니카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기우이길 바랐던.
우려했던 그 일이 터진 것이다.
'빠······ 빨리 어떻게든 해야 해.'
르니카엘은 서둘러 라파엘에게 향했다.
지금, 이 순간은 혼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1년 가까이 준비해온, 막대한 포인트가 들어간 초대형 이벤트가 시작도 전부터 엎어질 위기였으니까.
고작 몇 걸음만 옮기면 되는 짧은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저, 저······ 라파엘님."
"응, 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다가가자, 라파엘이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전의 까칠하던 것과 달리, 무척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성계 대항전이 코앞에 다가왔으므로, 더 이상 변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예전 모습.
그 탓에 보고하기 망설여졌지만, 르니카엘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 뒤 입을 열었다.
"그······ 플레이어 렌과, 플레이어 룬. 두, 두 사람이 성계 대항전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
르니카엘의 말에, 집무실에서 분주히 업무를 보고 있던 수백 명의 천사들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르니카엘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라파엘의 입가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
그 모습에 르니카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미 그쪽과 얘기가 된 내용인 건가?
잠깐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라파엘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
르니카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웃고 계신 게 아니었어.'
분명했다.
라파엘은 지금.
너무 화나서 몸의 통제를 잃은 거라는 걸.
'제, 제발······.'
그때였다.
"······!"
방금 전의 인자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라파엘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하."
그녀의 몸에서 아주 진득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에 주변 천사들이 바르르 떨었다.
"주신, 그 잡것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안 돼!'
르니카엘의 심장이 철렁했다.
"감히 하찮은 것들까지 날 무시해?"
펄럭―! 쨍그랑! 콰당!
9쌍의 날개가 활짝 펴지며 주변의 책상이 뒤엎어지고, 서류가 흩날리고, 유리잔이 깨져나갔다.
라파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지금 모습으로는 지고지순한 다섯 대천사가 아닌, 한 명의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르니카엘은 경험에 의해, 지금 라파엘의 상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타락화······!'
그동안의 예민함에, 극도의 분노까지 느끼게 되면서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르니카엘이 6쌍의 날개를 활짝 편 채 라파엘의 몸을 끌어안았다.
절대로 여기서 나가게 해선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도 안 돼! 라파엘님이!"
"모두들 어서 서둘러! 타락화가 진행되게 하면 절대 안 돼!"
그와 동시에 집무실에 있던 모든 천사들이 날개를 펴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성령!]
[소성!]
[정화!]
[맹약!]
그리고는 라파엘의 타락화를 막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로 신성한 주문을 읊조렸다.
성스러운 빛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끌어안은 라파엘이 숨을 몰아쉬었다.
신성한 주문 덕에 조금은 진정이 된 모습.
무려 백 명이 넘는 천사들의 신성한 주문이 조금이나마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걸론 안 돼.'
하지만 르니카엘은 회의적이었다.
무려 1급 치천사의 타락화를 고작 이 정도로 멈출 수 있다면, 천계에서 타락 천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진행을 조금 늦춘 것 뿐이야.'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해결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제가 주신님들께 다녀올게요! 다른 분들은 타락화를 최대한 늦춰주세요!"
르니카엘의 귓가로 타니엘의 외침이 들렸다.
'좋아. 이대로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타니엘은 신속의 천사라고 불릴 만큼, 이곳에서 가장 빠른 존재.
아마 금세 주신님들을 모셔 올 것이다.
'제발······. 제발 빨리······.'
라파엘을 끌어안은 르니카엘이 팔에 꾸욱 힘을 주었다.
치천사의 타락화를 막을 수 있는 건 주신님들 뿐.
마침 오늘은 주신님들의 회의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그 회의는 라파엘님의 집무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신성한 회당에서 진행된다.
아마 조금 있으면 열두 주신께서 집무실로 도착할 것이다.
"하아, 하아. 이것 놔라. 치천사의 명예를 걸고 오늘 반드시 저 두 놈을 죽여야겠으니."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열두 주신은 오지 않았다.
분명 타니엘이 회당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가장 높은 십이좌十二座의 거룩한 회의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
―비상시엔 누구든 문을 두드리는 것을 허용하노라.
그리고 지금은 비상을 넘어, 초비상 사태가 터진 상황.
'타니엘······! 제발 빨리······.'
르니카엘은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그 기도가 이어질수록, 싸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어느새 라파엘의 몸에서 스멀스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놓아라. 날 왜 막는 것이냐."
작게 으르렁거리는 라파엘.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한 살기가 배어 나왔다.
'이미······ 늦었어······.'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아버지······. 부디 우리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성한 주문을 외우던 천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놈들도 날 무시하는 것이냐아아아아!"
"······!"
눈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아버지······.'
애타게 아버지를 불러 보았지만.
그게 르니카엘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나와 룬, 두 사람의 불참 소식은 빠르게 알려졌다.
출전 거부를 누른 지 불과 10분도 안 돼서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아니 미친 ㅡㅡ 장난하나? 고작 1주일 남겨놓고 불참하는 건 지구 출신 몇 명 없다고 태업하는 거잖아ㅡㅡ ㅆㅂ 콜로세움이 장난이냐? 엉? ㅂㅅ새끼가 인기 좀 얻더니 기고만장해져가지고ㅡㅡ 지금까지 기대하던 관객들 우롱하니까 좋냐? 엉? 넌 평생 따라다니며 악플 단다 ㄱㅅㄲ야
그 짧은 시간 동안 커뮤니티엔 나를 욕하는 게시글들로 가득했다.
'슬슬 뿌려야겠군.'
이럴 줄 알고 미리 입장문을 준비해 놓은 상황.
나는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세요, 안우진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세리안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로 보건데, 아직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슬슬 입장문을 발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벌써 소문이 퍼졌나요?"
아세리안이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들을 급하게 치우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와······. 아니, 이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대요? 출전 거부한 지 5분도 안 되신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생각보다 성계 대항전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큰가 보네요. 뭐, 우리한텐 차라리 잘 됐죠. 바로 올릴게요."
아세리안이 싱긋 웃더니 허공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올렸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물론 입장문을 읽어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랑 아세리안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으니까.
다만 무슨 댓글이 달릴지 궁금했을 뿐.
'미친.'
커뮤니티에 들어간 나는 눈을 치켜떴다.
이제 막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어마어마하게 늘고 있었고.
└와;; 이게 사실이면 애초에 게임 메이커가 성계 대항전을 열 생각이 없던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아무런 상의 없이 공식 오피셜보고 어드밴티지가 축소된 걸 알았으면 ㅅㅂ 나라도 뒤집어엎지 ㅡㅡ
└아.. 이렇게 보니까 렌은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개손해였누 ㄷㄷ
└ㅋㅋㅋㅋㅋ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렌 욕하던 ㅅㄲ들 다 어디 갔냐?
└오히려 게임 메이커가 고춧가루를 뿌렸음. 당장 항의하러 ㄱㄱ
└나도 같이 가자ㅡㅡ 어떻게 게임 운영을 이따위로 함? 항의2 ㄱㄱ
└난 이미 항의하러 왔음. 근데 여기 난리 났는데? 이미 누가 테러하고 갔나 봄 ㅋㅋㅋㅋㅋ 집무실 개박살 나 있음 ㅋㅋㅋㅋ
신들의 여론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타깃이 나에서 라파엘로 확실하게 넘어간 것 같았다.
'이래서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거지.'
입장문을 팩트에 기반해서 적긴 했다.
다만.
내가 손해 보는 부분을 조금 '강조'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무시' 당했다는 부분을 부각시켰달까.
"신들이 확실하게 안우진님 편으로 돌아섰네요. 이 정도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는데요?"
함께 모니터링하던 아세리안이 빈 허공을 응시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잘 풀렸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 입장을 발표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역풍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추세로 보면, 신들이 확실하게 내 편으로 돌아선 것 같았다.
오히려 날 욕하는 신들에게 수십 개의 욕이 달릴 정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특이사항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에. 오늘도 화이팅이에요!"
환하게 미소 짓는 아세리안을 뒤로하고 특수 대련장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걱정할 건 없었다.
여론도 확실하게 돌아선 데다가, 성계 대항전도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
이제야 온전히 내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형, 어떻게 되셨어요?"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특수 대련장으로 들어가자, 팀원들이 다가오며 나를 반겨 주었다.
"예. 잘 처리했습니다. 지금 누구누구 대련 중이십니까?"
"아, 저랑 제이스형은 막 끝났어요. 지그형이랑 고건하형도 슬슬 마무리되실 것 같아요."
"좋네요. 그럼 이어서 저랑 하시죠."
"넹!"
다른 사람들의 대련에 방해되지 않도록 한쪽 구석으로 이동한 나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슬슬 고급 권각술에 대한 감을 잡아가고 있던 상황.
어차피 다음 오퍼가 들어온다 해도 3개월에서 4개월은 걸릴 테니, 그때까지 고급의 경지를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뭐, 뭐야?'
미친 듯이 울려대는 콜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코드 제로. 코드 제로.]
[긴급 상황입니다.]
[초월 리그, 고위 리그, 상위 리그 플레이어 전원은 지금 당장 게이트로 입장하세요!]
[만약 게이트로 입장하지 않을 경우 커다란 불이익이 발생합니다.]
코드 제로?
초월 리그부터 상위 리그까지 전부 다 게이트로 들어가라고?
눈앞에 뜬 알림창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전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한다는 것.
"카이로시아!"
나는 한달음에 다가가,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멍때리고 있는 카이로시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 네? 아앗!"
그리고는 서둘러 특수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내게 팔목이 잡혀, 함께 공터에 생성된 게이트로 달려가던 카이로시아가 물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최악의 상황인 것 같으니까."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다.
또 타락 천사가 등장한 거겠지.
하지만 초월 리그부터 상위 리그까지,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참가한다는 것에서 이번 미션이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이 오질 않았다.
'나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싸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카이로시아의 손목을 잡은 채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화륵! 화르륵!
불꽃이 넘실거리고, 뜨거운 열기가 코끝을 찔렀다.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이전에 왔던 맵.
불의 세계, 무스펠하임.
그곳에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 139화. 총 출동(1) > 끝
< 140화. 총 출동(2) >
'역시 지옥이었어.'
무스펠하임의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잠식해가는 가운데, 나는 가장 먼저 주변부터 살폈다.
높은 성벽.
우뚝 솟아 있는 중앙의 첨탑.
그 중심부에 박혀 영롱한 빛을 뿜어대는 거대한 수정.
'전에 공략했던 루에타 요새와 비슷하네.'
물론 크기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루에타 요새가 직경 1킬로미터 정도였다면, 여기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아무래도 커뮤니티에서 언급됐던 성城급 주둔지인 모양.
'여기가 천계 쪽 영역인가 보군.'
주변에는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존재했고, 하늘 위에는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한 명, 그리고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두 명 있었다.
'천사가 아닌 건가?'
당연히 날개가 달려 있기에 처음엔 천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순백으로 무장한 천사들과 달리, 그들은 형형색색의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고주몽]
[성향 : 중용]
[근력 : 308(+?)] [민첩 : 337(+?)] [체력 : 309(+?)]
[정신 : 199(+?)] [지력 : 108(+?)] [마력 : 319(+?)]
[각성 능력 : <신궁 > <패왕 > <특급살기 > <특급보법 > <특급마나운용 > <특급기마궁술 > <특급박투술 >]
[업적 특전 : 신궁]
입이 쩍하고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능력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악마의 눈이 통해.'
천사들의 스텟은 악마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들에겐 악마의 눈으로 스텟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플레이어들이었어.'
스텟만 봤을 땐 최소 고위 리그 플레이어.
아무래도 고위 리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날개를 달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은데?'
솔직히 좀 탐났다.
피넛엘을 상대하며 날개라는 부위의 이점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그때, 곁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카이로시아가 물었다.
"긴급 미션. 타락 천사가 등장하면 가끔 이렇게 불러."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요?"
경악하는 카이로시아에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대규모로 불려 온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머리 싸매고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곧 미션 창 나올 거야."
어차피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띠링!
[<긴급 미션>을 시작합니다.]
[유형 : 척살(집단 PvP)]
[게임명 : 코드 제로]
[맵 : 삼지옥(특대)]
[관객 수 : 8,311,993 명]
[죽여야 할 타천사 수 : 1 명]
때마침 등장한 미션 창.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죽여야 할 타락 천사가······ 한 명이라고?'
고작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들이 소집되었다는 것.
[메인 미션]
[타락 천사가 마계로 도주 중입니다.]
[마계로 들어가기 전에 타락 천사를 사살하세요.]
[타락 천사 사살은 초월 리그 소속 플레이어들이 맡습니다.]
[미션]
[현재 마계에서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지옥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타락 천사를 마계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초월 리그 소속 플레이어들이 타락 천사를 사살할 때까지 마계에서 넘어오는 악마들을 막으세요.]
[연합 파티 단위로 막아야 할 구역을 배정합니다.]
[플레이어 '렌'이 소속된 연합 파티는 '고주몽 연합' 입니다.]
[연합 파티장 : 플레이어 '고주몽']
[연합 부파티장 : 플레이어 '필릭스']
[연합 부파티장 : 플레이어 '일리아']
[실패 개념이 없는 미션입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악마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그리고 엄청난 길이의 세부 미션창이 떴다.
콜로세움에 들어온 이후, 처음 보는 길이였다.
'쉽지 않겠는데.'
생각보다 훨씬 높은 존재가 타락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난리가 난 거겠지.
띠링!
[플레이어 '카이로시아'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런 대형 미션일수록 사망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시아는 이제 막 상위 리그에 올라온 새내기.
솔직히 내가 봤을 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화력이야 충분하겠지만.'
그렇기에 가장 먼저 그녀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겼다.
표식이 있으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 테니까.
"지금부터 파티를 짜겠다! 왼쪽부터 탱커, 근접 딜러, 궁수, 마법사, 정령사 순으로 선다! 그리고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은 모두 이곳으로!"
그때, 하늘을 돌던 두 쌍의 날개를 가진 플레이어, 고주몽이 중앙의 첨탑 앞에서 외쳤다.
나는 카이로시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마법사들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있어."
"네."
"그리고 여기선 내 닉네임으로 부르고."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로시아를 뒤로하고, 나는 첨탑 쪽으로 향했다.
천 명 가까이 되는 플레이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백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는 백 명 정도라는 것.
"음. 딱 백 명이군. 파티를 구성하기 쉽겠어."
첨탑 위에 앉아있던 고주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걸어 나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벌써 숫자를 다 샌 모양이었다.
나를 포함한 상위 플레이어들이 모두 첨탑 앞에 도착하자, 고주몽이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미션 창에서도 나왔겠지만, 내가 연합 파티장 고주몽이다. 여기 혹시 네임드 있는가?"
"······."
고주몽의 말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곁눈질했다.
나는 상위 넘버링에서 고작 한 경기를 뛰었다.
그것도 단독 미션으로.
그렇기에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초면이었는데, 아무래도 가면 덕분에 내가 렌이란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가면 디자인을 좀 바꾸고 싶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렌입니다."
"오, 그대가?"
내 자기소개에 고주몽이 눈을 치켜떴다.
살짝 입꼬리까지 올라간 게, 나를 반가워하는 느낌이었다.
'날 왜?'
성계 대항전 당시 역대 10명의 네임드 사이에 고주몽이 들어있긴 했지만, 그건 고주몽을 복사한 분신이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라는 것.
'아, 맞다.'
그때,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제가 한 가지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소속된 팀에는 고주몽이라는 고위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졸본 성계 때부터 저와 함께해 온 의형제죠. 근데 주몽이 제게 그러시더군요.
고결한 수정을 먹으러 루에타 요새로 향할 때 온달이 내게 했던 말.
거기서 고주몽이라는 닉네임이 나왔었다.
'아무래도 온달이 고주몽에게 내 얘기를 한 모양이군.'
그제야 나는 고주몽의 호감 어린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 중에 그나마 다행이군.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잘 부탁한다."
"예."
나는 고주몽이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자, 지금부터 상황을 설명하겠다. 모두들 상태창에서 맵을 활성화 시켜주길 바란다."
고주몽의 말에 나는 상태창에서 맵을 열었다.
이전에 봤던, 엄청나게 거대한 지도가 허공에 펼쳐졌다.
"우리가 맡게 된 구역은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입구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특이사항으론, 근처에 록탄 성城이 존재한다는 거지."
지도엔 파란색으로 둥그런 원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우리 연합 파티가 맡게 된 구역을 표시한 것 같았다.
"주변에 자잘한 요새급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마성석이 작은 만큼 커다란 비프로스트를 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악마들은 록탄 성에서 등장할 거고, 우리도 그쪽으로 향해서 악마들을 막아낼 생각이다."
고주몽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성석의 크기에 따라 게이트를 통해 넘어올 수 있는 악마의 숫자가 정해져 있는 모양.
그렇다면 록탄 성 입구를 틀어막는 게 우리 쪽에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무스펠하임의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가장 핵심은 우리의 지지선을 축소시키는 거다.
그리고 지지선을 축소시키기엔 록탄 성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마들을 막는 거겠지.
"우리와 달리 악마들은 중급부터 날개가 달려 있지. 그래서 공중전은 분명 열세일 것이다. 나와 부연합 파티장, 고작 세 사람이 막아내기엔 벅찰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여러분의 임무가 무척 막중하다. 지상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줘야 공중 병력을 막기 수월할 테니까."
고주몽이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다. 여기 있는 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파티장을 맡는다. 지금 뒤쪽엔 각 직업군 별로 나눠져 있으니, 각자 9명의 파티원을 모집한다. 질문 있나?"
위엄이 서린 고주몽의 말에,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고주몽이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어차피 대규모 전투가 될 것 같은데 마법 계열은 마법 계열끼리 묶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마법 병단 개념으로요."
질문한 플레이어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물론 그게 효율은 더 좋겠지. 하지만 여러분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어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공중전은 우리의 '열세'라고. 지상 병력이야 그대들이 앞장서서 막아내면 되겠지만, 공중에서 넘어오는 악마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가장 먼저, 마법사들이 몰려 있는 곳을 기습하면 마법 계열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
"그래서 열 명씩 파티를 짜,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 흩어져 있어야 한다. 물론 중앙의 통제를 받으면 훨씬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원거리에서 화력을 지원해줘야 할 마법 계열들이 모조리 죽고 만다."
내 생각도 같았다.
뛰어난 화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
그들에게 중급 이상의 악마들이 달려든다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찢겨나갈 것이다.
"내 말이 그대의 답이 되었는가?"
"······예."
"좋다. 또 다른 질문 있는 자 있는가? 확신을 가지고 치러져도 부족할 만큼 우리의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니 의문이 있는 자 있다면 지금 나서라.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닌즉."
"······."
"더 이상 의문을 가진 자가 없다면 바로 시작하겠다. 플레이어 렌! 그대부터 순서대로 한 명씩 아홉 명의 파티원을 고른다. 그대들의 등을 지켜줄 파티원들이기에 신중하게 고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1분 이내로 골라주길 바란다."
고주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채 서둘러 이동했다.
1분 이내로 탱커부터 시작해서 정령사까지, 총 9명을 골라야 한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서는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면식이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나부터 살폈다.
'다행이야.'
한번 슥- 훑어보자, 낯익은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이든님. 나와주시겠습니까."
"오랜만입니다, 렌님."
"고창신님. 제 파티원이 되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키아라님."
"안 뽑으셨으면 섭섭할 뻔했네요."
대가의 제단이 있던 죽음의 구도자전, 그리고 서킷 브레이커가 터졌던 혁명전에서 함께 미션을 수행했던 플레이어들이었다.
거기다 카이로시아까지 있으니, 내가 새로 뽑아야 할 플레이어는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아.'
나는 세 명의 플레이어를 모두 탱커로 뽑았다.
그나마 스텟이 준수한 이들로.
키아라와 카이로시아 같은 마법 계열을 지켜줄 플레이어가 필요한 것이기에, 다른 직업군은 애초에 염두도 두지 않았다.
"이만 출발하겠다! 여기서 소모한 시간을 이동 중에 채워 넣을 것이니, 강행군이 될 것이다! 모두들 체력 안배에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펄럭- 펄럭-
고주몽이 날갯짓을 하며 방향을 잡아 앞서나갔다.
그 뒤를 천 명의 플레이어들이 빠른 속도로 쫓고, 맨 뒤쪽에서 두 명의 부연합 파티장이 우리를 따라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임?? 당분간 초월 리그부터 상위 리그까지 모두 중단한다는데?
└다섯 대천사 중에 한 명이 타락했다고 함. 지금 그래서 발할라 발칵 뒤집혔음.
└ㅈㄴ 심각하긴 하네;; 마계의 죄수도 대천사 중에 한 명이 타락해서 저렇게 된 거잖아 ㄷㄷ 죄수 급으로 빌런 등장하면 어떡함?
└에이 ㅡㅡ 차원이 완전 다르지. 죄수는 아버지가 각 잡고 밀어주시던 천사였잖아? 그래서 천사 시절에도 날개를 열두 쌍이나 가지고 있었고. 지금 대천사들이 타락해봤자 죄수 급으로 나오긴 힘듦.
└뭐가 됐든 개꿀 아님?ㅋㅋㅋㅋ 콜로세움 열리고 이 정도 스케일의 대규모 이벤트 열린 건 처음인 거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
└어휴.. 커뮤가 신들 제대로 망쳐놨구나.. 지금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질 모르고 개꿀거리고 있네 ㅡㅡ
록탄 성으로 향하는 길.
나는 카이로시아를 들쳐멘 채 달리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 품에 안겨 있는 카이로시아가 은발을 흩날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그녀는 체력과 민첩 스텟이 낮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장거리 이동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다른 마법사들처럼 마법을 이용해 따라올 순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대규모 전투를 앞둔 상황.
막강한 화력을 지닌 카이로시아의 마력을 아끼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낫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뭐, 내가 그녀 하나 들고 뛴다고 해서 지칠 수준도 아니었고.
"키에에에에에엑!"
"취익! 또 인간들인가!"
우리의 이동에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우리 쪽은 무려 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군세.
[날카로운 바람의 춤!]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사그라드는 눈꽃!]
[예리한 칼날!]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몬스터들은 접근조차 해보지 못한 채, 마법에 터져나갈 뿐이었다.
그때였다.
"저, 저기······!"
"어어!"
주변에서 달려가던 플레이어들이 경악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하늘 위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마치 검은 파도가 몰려오는 느낌.
'젠장. 숫자가 너무 많은데.'
저 검은색을 이루고 있는 건, 악마들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하늘 위에 뜬 먹구름처럼 보일 정도였다.
―모두 전투 준비하라!
하늘 위에서 고주몽이 포효했다.
고작 세 명이서 저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을 상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의 목소리엔 엄청난 투지鬪志가 들어 있었다.
'지상군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야 해.'
나는 카이로시아를 내려 주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여기 계신 분들은 키아라님, 카이로시아님, 로만님 보호에만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예."
우리 파티의 전략은 간단했다.
'한바탕 휘저어줘야겠군.'
다섯 명의 기사들이 네 명의 원거리 딜러들을 보호한다.
그리고 원거리 딜러들은 화력을 쏟아붓는다.
적들에게 뛰어드는 건 한 명 밖에 없었다.
'뇌신 강림.'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 140화. 총 출동(2) > 끝
< 141화. 총 출동(3) >
온몸에서 뇌전을 뿜어대며 전방으로 달려 나가는 안우진.
그가 떠나자 모르는 사람들 속에 홀로 남은 카이로시아의 마음에 불쑥, 불안감이 날아들었다.
'괜찮아. 후우. 침착하자. 할 수 있어.'
카이로시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하위 리그에서 악마에게 죽을 뻔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악마들을 마주한 상황.
카이로시아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해 계속해서 심호흡했다.
―네 마법은 나한테도 위협적일 정도야. 바로 곁에서 봐온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
팜에서 안우진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녀의 마법은 고위 리그를 앞두고 있는 플레이어에게도 위협적일 정도라고.
'할 수 있어.'
카이로시아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우리 구면이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파티원 중 한 명인 엘프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덴에서 위기에 처했던 카이로시아를 안전하게 성 밖까지 호위해주었던 엘프, 키아라였다.
"어······네. 그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키아라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렌님의 같은 팀 동료라면서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많이 긴장되나 봐요?"
"아뇨. 하나도요."
카이로시아가 안색을 삭- 바꾸며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마음을 허락한 사람 말고는.
그러자 키아라가 포근하게 웃었다.
카이로시아는 그녀의 미소가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로시아님이 봤을 때, 렌님은 어때요? 강한 분인가요?"
"어······ 네."
카이로시아가 무의식적으로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저랑 만난 게 아마, 상위 리그에 올라오고 두 번째 경기였나? 그랬을 거예요. 근데 그때도 무척 강했죠."
"······."
"근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강해지셨네요? 카이로시아님도 들으셨죠? 렌님이 상위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걸?"
"네, 들었어요."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만약 우리가 위기에 처하면 저렇게 강한 분이 구해주러 오실 거잖아요. 오히려 우릴 공격하는 악마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걸요? 어때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러자 다른 파티원들도 키아라의 말에 동감한다며 한마디씩 보탰다.
"우리는 렌님이 상위 리그에 올라오고 첫 번째 경기를 치를 때 만났죠. 그때도 렌님이 나서주신 덕분에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파티의 유일한 궁수, 고창신이 말했다.
"맞아요. 그때 그 경기에서 미션을 완수하는 팀에 한해서 부활하는 특전이 없었다면, 저나 고창신님, 이든님, 비욘님 모두 이 자리에 없었을걸요?"
대지 마법을 다룬다는 마법사, 로만이 말했다.
"흥. 이제는 따라갈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졌더군."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대머리 전사, 비욘이 말했다.
모두 안우진과 한 번씩 같이 경기를 치렀던 플레이어들.
그들의 목소리에선 안우진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배어 나왔다.
고작 한 경기밖에 겪어보지 못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잘게 떨리던 손이,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카이로시아는 팜에서의 안우진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고독한 사람이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타나 해결해주었고.
팀원들을 위해서 자신이 벌어들인 소중한 골드와 스킬북들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에, 음주도 즐기지 않고, 언제나 묵묵히 스스로를 단련한다.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다.
눈이 부실 만큼.
'별은 자리를 가리지 않고 빛난다고 그랬지.'
그녀에게 있어 안우진은, 어느새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에덴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했던 그날.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을 때부터.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카이로시아는 걸치고 있는 검은 로브의 후드를 푹 눌러썼다.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었다.
안우진이 지시한 대로 하고 있으면, 이번 미션도 어느새 끝나있을 테니까.
'반드시 따라가고 말 거야.'
그리고는 검은색 완드를 꼬옥 쥐었다.
안우진이 앞서나가는 동안, 그녀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지금까지 번 모든 포인트를 지력에 투자해온 상황.
카이로시아는 근력과 민첩, 그리고 체력을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체력 단련장에서 하루 종일 살다시피 할 정도였다.
안우진은 생존을 가장 우선시했으니까.
[이름 :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닉네임 : 카이로시아)]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71] [민첩 : 77] [체력 : 72]
[정신 : 93] [지력 : 177] [마력 : 172]
[각성 능력 : <천재 > <원소통달 > <대마도사 >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 <고속영창 > <상급치료술 > <마력관통 > <상급박투술 > <상급검술 >]
이번 미션은 그동안 흘린 땀방울을 증명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보여주겠어.'
안우진에게.
어느새 여기까지 왔노라고.
"전투에 돌입합니다!"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날갯짓하며 날아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연합 파티장과 부연합 파티장이 순식간에 검은 파도에 휩싸였다.
―감히 까마귀들 주제에!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 꽈과과광!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연합 파티장, 고주몽이 크게 포효하며 활을 쏘자 오러 블레이드가 깃든 화살이 소나기처럼 흩뿌려졌다.
홀로 검은 까마귀 떼 사이를 휩쓸고 다니는 고주몽의 모습은 신화 속에 나오는 악의 심판자 같은 모습이었다.
"죽어!"
"끄아아아악!"
수십에 가까운 악마들이 화살에 꿰뚫려 지상으로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전장의 열기엔 어느새, 광기가 물들어 있었다.
[피에 잠긴 바람의 꽃잎!]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다른 부연합 파티장들도 날개짓을 하며 악마들 사이를 휩쓸었다.
"······!"
엄청난 충격파가 파도처럼 퍼져나가고, 각종 고위 마법이 공중에서 비산했다.
마치 검은 하늘에 거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느낌.
'저게······ 고위 리그.'
카이로시아의 몸에 닭살이 돋았다.
하늘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밟고 서 있는 땅이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세 명의 고위 플레이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음에도, 쉽지 않아 보였다.
허공에 떠다니는 악마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적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도 지원합시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는 사이 근처에 있던 한 플레이어의 외침에, 지상에 있던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차가운 염화의 칼날!]
[폭렬하는 붉은 꽃잎!]
[날카로운 바람의 춤!]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순식간에 수백 개가 넘는 마법들이 공중으로 난사되고, 마법에 맞은 악마들이 검은 비가 쏟아지듯 추락했다.
하지만 그런 격전 속에서도 안우진 파티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방어 마법을 펼치겠습니다!"
[포근한 대지의 포옹!]
파티의 마법사, 로만이 보호 마법을 시전하고, 탱커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마법사들을 둥그렇게 감싸고, 방어에 집중할 뿐이었다.
―초반에는 방어 위주로 부탁드립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핵심입니다.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차징 공격은 표적이 되면 살아남기 쉽지 않을 거거든요. 적어도 지상군끼리 격돌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딜을 넣어주세요.
떠나기 전 안우진이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온갖 비명과, 피 분수, 그리고 살점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상황.
카이로시아는 로만이 펼친 보호 마법 아래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방패 들어! 어서!"
"끄아아아아악!"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다른 파티랑 힘을 합쳐야 해요! 이봐요! 이쪽으로 붙어요!"
지상의 공격에 화난 악마들이 공중에서 폭격하듯 떨어져 내렸다.
그 무자비한 폭격에, 플레이어들이 들어 올린 방패는 반토막 나고, 방어 마법은 맥없이 찢겨나갔다.
곳곳에서 피가 흩날리며,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그때, 전방에서 빛기둥이 솟구치며 뇌전의 칼날이 주변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어느새 지상군끼리도 격돌하고 있었다.
그걸 본 키아라가 카이로시아, 고창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시작하죠!"
"예. 전 근처로 다가오는 악마들을 견제하겠습니다."
고창신이 활 시위에 화살을 걸며 말했다.
"전 광역 마법을 준비할게요."
카이로시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대규모 전투는 카이로시아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분야였다.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에도 일인 군단으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냈었고.
'보여주겠어.'
그녀는 엄청난 고위 마법을 시전할 생각이었다.
한 번 쓰는 것만으로도 탈진하겠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았다.
안우진이 구하러 와줄 테니까.
[봄볕 아래 돋아난 새싹이 산들바람에 흩어지노라]
마음을 다잡은 카이로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영창을 시작했다.
꽈광! 꽈과과광! 꽝! 꽈과광!
온갖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비명과 고함 소리, 마법이 터지는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접 딜러! 모두 돌격해! 어서!"
그녀가 주문을 영창 하는 사이, 상황은 급박하게 변해갔다.
전방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지상으로 꽂히고.
"렌님이 적 지상군을 반으로 갈랐다!"
"이 틈에 어서 주변을 정리해!"
안우진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며 악마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상전은 누가 봐도 천계의 압승이었다.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샛바람이 꽃밭을 뛰놀며 뒹굴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카이로시아의 영창은 계속됐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방에선 또다시 빛줄기가 터져 나오고, 악마들에 의해 까맣던 지평선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은 지금부터 우릴 엄호하라!
그 모습을 본 고주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지상전에 대한 화력 지원은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모두 조심!"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하늘 위에서 악마들이 쏜 마법이, 지상을 두들겼다.
모래 알갱이와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높게 솟은 싱그러운 하늘 위에 소슬바람이 번져나가며]
그 사이, 나긋나긋하게 영창하던 카이로시아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변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완드를 쥔 카이로시아의 손 쪽으로 주변의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어머!"
그 괴현상에, 악마들에게 공격을 퍼붓던 키아라를 비롯한 파티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얗게 내려앉은 세상 위에서 싸늘한 하늬바람이 칼춤을 흔들어]
작게 읊조리던 카이로시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영창이 공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녹아 있던 마력이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격렬하게 들끓었다.
"······?"
"······?"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까지 공격을 퍼붓다 말고, 카이로시아를 바라볼 정도였다.
[삶과 죽음. 그 사이를 큰센 바람이 휘젓노라]
계속해서 커져가던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죽이겠다며 살기를 담아 내지르는 고함도.
마법이 터지며 발생하는 굉음도.
날붙이와 날붙이가 맞부딪히며 울리는 쇳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질 않았다.
아니, 카이로시아의 영창에 묻히고 있었다.
[오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선 죽음이란 거름이 뿌려져야 하노니]
영창 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공기 중에서 들끓던 마력이, 어느새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탓에 정신없이 싸우던 플레이어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꽂으며 학살하던 악마들마저도 카이로시아의 영창 소리에 전율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온몸을 벌벌 떨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런 미친······! 어서 저년부터 죽여!'
악마들이 카이로시아를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음소거라도 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저, 격렬한 몸짓으로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카이로시아의 목소리가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
십수 명의 악마들이 카이로시아를 죽이고자 지상을 내리꽂았고.
'적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봐! 어서 방패 들어!'
꽝! 꽈과과과광! 꽈과광!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입을 벙긋하며 카이로시아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들어 올리고, 마법을 영창했다.
그리고.
세상 가득 울려 퍼지던 카이로시아의 영창이 뚝- 끊겼다.
[새벽 폭풍에 흩날리는 바람꽃이여, 이 안에서 그 싹을 피우라!]
그와 동시에, 사라졌던 전장의 소리가.
"저 마법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이 개 같은 악마 자식들! 죽어!"
"회복 포션 있는 사람! 누구 회복 포션 없어!"
깨져 나가며 울리는 날붙이 소리가, 살고자 하는 고함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비명이.
광기에 차 있는 외침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
"······!"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 안돼!"
"살려줘어어어어!"
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엄청난 크기의 거대한 회오리가 날아다니던 악마들을 빨아들였다.
끌려 들어간 악마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사방으로 피와 작은 살점들이 흩날렸다.
< 141화. 총 출동(3) > 끝
< 142화. 총 출동(4) >
"모두 조심해! 놈이 렌이다!"
악마 측 지상군에게 돌격한 나는 창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악마들을 학살했다.
서걱!
"제, 젠장!"
적 지상군이 우리보다 두 배나 많았지만, 내 앞을 막을 수 있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방 다 처리할 수 있겠어.'
애초에 적 지상군은 하급 악마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중급 이상의 악마들은 모두 날개를 가지고 있으니까.
'전에 만났던 녀석들보다도 훨씬 떨어지는데?'
심지어 긴급 미션 당시 만났던 하급 악마들보다 전체적으로 스텟이 낮았다.
그때 만났던 하급 악마들이 정예였던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군.'
그런 녀석들이 천뢰십보에, 뇌신 강림이 활성화 되어 있고, 거기다 뇌신창까지 각성한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천뢰십보 덕분에 돌파 효율이 더 좋아졌어.'
단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사방으로 뇌전이 흩뿌려진다.
4중첩이나 된 뇌전은 닿는 모든 것들을 태우고, 예리한 칼날처럼 도륙했다.
[킬 수 현황]
[1위. '주소월' 586킬]
[2위. '아킬레우스' 583킬]
[3위. '몽연' 581킬]
[4위. '고주몽' 577킬]
[5위. '쿠 훌린' 571킬]
[6위. '렌' 570킬]
[7위. '룬' 568킬]
현황판을 힐끔, 살펴보니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닉네임이 올라와 있었다.
'킬 수는 우리 연합 파티만 카운트하는 게 아닌가 보군.'
현재 우리 연합 파티에서 랭킹에 들어있는 사람은 고주몽과 나, 단 둘뿐.
거기다 탑 10안에 고위 플레이어는 고작 세 명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하급 악마들을 상대하는 상위 플레이어들과 달리, 고위 플레이어들은 중급 이상의 악마들을 상대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악마의 숫자가 제법 많은 모양인데?'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 1인당 대략 500명씩 죽인 상황.
플레이어의 킬 수가 저렇다는 건, 악마의 숫자가 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었다.
'분명 아세리안은 천계의 전력이 마계보다 훨씬 높다고 그랬어.'
그래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전력이 더 높으려면 플레이어의 숫자가 악마보다 훨씬 많아야 했으니까.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군.'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해결할 수 없는 의문.
나는 눈앞의 악마들을 죽이는 데 집중했다.
'이번 경기에서 킬 수 랭킹 1위를 찍어야겠어.'
이런 전투에서는 날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체력도 회복되는 데다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근접 물리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광역기를 다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순간 빛기둥이 솟구치며, 십수 명에 달하는 하급 악마들이 몸이 터져나갔다.
뇌신 강림으로 인해, 발동 확률이 1%까지 상승한 데다가, 한 번의 공격으로 여러 명을 공격할 수 있는 창의 특성상 벽력이 자주 터질 수밖에 없었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과광!
벽력으로 인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자, 나는 섬전을 사용해 순간 이동했다.
"무슨······!"
"헉!"
그리고는 내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하는 악마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단숨에 수직 상승하는 킬 수.
하급 악마들은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거의 다 끝났다! 모두 조금만 더!"
"죽어!"
거기다 이곳엔 나만 있는 게 아닌, 무려 수백 명에 이르는 플레이어들이 함께 싸우고 있는 상황.
나한테 진형이 뚫려, 우왕좌왕하는 하급 악마들이 플레이어들의 공격에 빠르게 쓰러져갔다.
[킬 수 현황]
[1위. '주소월' 781킬]
[2위. '룬' 779킬]
[3위. '렌' 777킬]
[4위. '몽연' 770킬]
쿨 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섬전을 쓰며 돌아다니길 한참.
어느새 적 지상군 중에서 땅을 밟고 서 있는 악마가 없었다.
"이겼다!"
"오오!"
적 지상군의 숫자가 우리보다 두 배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후우.'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둬 기뻐하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본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본 게임이군.'
지상전에서의 승리는 연합 파티장인 고주몽이 당연하게 깔고 들어간 전략.
한마디로 진짜는 중급 악마 이상급의 전투인, 공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 잘 해줘야 할 텐데.'
공중전에서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마법으로 중급 악마를 쓸어버리는 동안,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을 지킬 것.
그렇게 카이로시아가 있는 쪽으로 향할 때였다.
'뭐지?'
살며시 들려오는 카이로시아의 영창.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먼 곳에서 여기까지 들린다고?'
하지만 내 놀라움은 그게 시작일 뿐이었다.
"······!"
"······!"
장엄하게 내리깔리는 카이로시아의 목소리.
고오오오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는 공기가 카이로시아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떤 이유로 빨려 들어가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카이로시아의 영창 소리와 동시에 생겨난 현상이었으니까.
'미친······!'
뒷머리가 쭈뼛했다.
무스펠하임의 열기에 녹아 있던 마력이 들끓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현상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플레이어 중에······."
"빨리 복귀······."
카이로시아의 영창 소리는 계속 커져갔다.
아니, 온 세상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로 인해 주변에 존재하던 모든 소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면 주변이 어둡게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카이로시아의 영창 소리가 최고조에 달하는 그 순간.
[새벽 폭풍에 흩날리는 바람꽃이여, 이 안에서 그 싹을 피우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창 소리가 뚝 끊겼다.
챙! 채챙! 챙! 챙! 챙!
콰과과과과과과광!
"빨리 공중을 지원해!"
"화살! 혹시 화살 가지고 있는 분 있소?"
"죽어!"
그러자 음소거되었던 전장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뭐, 뭐야!'
나는 경악했다.
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지상전을 벌인 우리가 있는 곳과, 카이로시아가 있는 본대 사이의 빈 공간.
그곳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오리가 생겨나며 날아다니던 악마들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 안돼!"
"살려줘어어어어!"
소용돌이 속에 끌려들어간 악마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사방으로 피와 작은 살점들이 흩날렸다.
그 한 번의 마법에, 날아다니던 악마의 절반가량이 순식간에 갈려 나갔다.
'미친······!'
심장이 철렁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직경 수백 미터짜리 회오리는 카이로시아의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저 거대한 회오리를 카이로시아가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저런 마법이 적 진영에서 시전 됐더라면······.'
아마 전투고 뭐고 필요 없을 것이다.
저 한 번의 공격에 전력 절반 이상이 날아갔을 테니까.
"시, 신이시여······!"
다른 플레이어들도 멍하니 회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재해災害에 사고가 굳은 것이다.
'이래서였군.'
저 마법을 보니까, 카이로시아가 어째서 근접전을 아예 할 줄 몰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나라도······ 저런 위력을 보면 카이로시아를 전략 병기로만 사용할 테니까.
'이게 진정한 의미의 마법.'
내심 지금까지 마법을 무시해 왔었다.
마법사란 존재는, 종이 쪼가리 몸에 화력만 강한 반쪽 짜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거기다 화력이 강한 마법을 펼치려면 영창이라는 과정까지 거쳐야 한다.
0.1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죽여달라고 목을 빼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그렇기 때문에 콜로세움에서 고위 마법이 터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견제용으로 몇 개 톡톡 날려놓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검을 꺼내 들기 바빴달까.
간혹 파티 대 파티 단위로 싸우는 경우엔 그보다 상위 마법이 발동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콜로세움에서 마법은 보조라는 개념이 강했다.
'내가 지금까지 카이로시아의 진면목을 몰랐군.'
내 마음속에서 카이로시아의 가치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와 미친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지금 뭐임?? 따로 마법진 준비도 안 하고 영창만으로 저런 마법 뿌린 거임?
└ㅅㅂ 도대체 지력이랑 마력 스텟이 몇인 거야? 얼마 전에 상위 리그 올라온 애 아님?
└윗댓 / ㄴㄴ 지력이랑 마력은 마법 데미지 올려줄 뿐이지 고위 마법이랑은 상관없음.
└그럼 고위 마법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됨?
└본인이 공부를 해야지 ㅋ 어떻게 영창하고, 어떻게 마법진 그리고 이런 거 ㅋ 그래서 마법사들이 팜에 있을 때 연구실에서 안 나오잖음
└뭔 소리얔ㅋㅋㅋㅋ 마법사들이 연구실에서 안 나온다고? 살려고 다들 체력 단련실에서 검 휘두르기 바쁘지 않음?
└어.. 맞는듯 ㅋㅋ 연구실에서 안 나온 애들 다 금방 죽긴 했지 ㅎㅎ;
└쟤 어디 팀임? 도대체 어떻게 육성시켜야 저런 마법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닉네임 : 카이로시아 / 소속 팀 : 투지
└또 팀 투지.. 시발.. 거긴 근접 물리 계열 어떻게 육성시키냐고 문의넣어도 답변 하나 없더만..
└내가 봤을 땐 팀 투지에 육성의 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
카이로시아가 발동한 마법에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저 여자를 1순위 타깃으로 처리하라!
공중전을 펼치던 악마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치자, 살아남은 악마들이 모조리 카이로시아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딜!'
[플레이어 '카이로시아'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카이로시아의 뒤로 이동한 나는 쇄도하는 악마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하아, 하아, 앗, 안······렌님!"
"고생 많으셨, 흡!"
나를 발견한 카이로시아와 파티원들이 인사를 건네오자 나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수비부터! 키아라님과 로만님은 보호 마법을!"
"네!"
"알겠습니다."
채애애앵! 채앵!
'후우.'
날아드는 악마들의 공격을 막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팔이 저릿저릿했다.
'쉽지 않은데.'
내 특기는 공격과 돌파.
상대의 힘이 강하다면 부드럽게 상대하고, 상대가 나보다 빠르다면 공간을 잘라먹으며 쓰러트린다.
한마디로 상대 스타일에 카운터를 친다는 뜻.
'일단 막아내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지금처럼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땐 내 특기를 살릴 수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활공해 내려오는 공격을 피했다간, 카이로시아가 죽을 테니까.
게다가 카이로시아의 안색이 창백한 걸로 보아, 단순히 이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다 써서, 마력 탈진이 온 것이다.
결국, 무조건 공격을 막아내는 수밖에.
"키아라님! 마력 회복 물약!"
"네! 제가 먹일게요!"
내가 짧게 소리 치자, 키아라가 카이로시아를 끌어안고 뒤로 빠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 같았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헉!"
그나마 다행이라면 중간중간 벽력이 터져준 덕분에 쇄도해 들어오는 악마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지상군을 완전히 전멸시켜서 이제는 원거리 딜러들이 공중 견제를 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모두 비켜라! 내가 상대할 것이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그때, 하늘 위에서 악마 하나가 파공음을 일으키며 우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머리 위에 거대한 뿔이 돋아 있었는데, 다른 악마들과 달리 6쌍의 회색빛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타락 천사!'
채애앵!
꽈아아아아아아앙!
날아드는 타락 천사의 검을 막자, 내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미친!'
무시무시한 근력에 엄청난 속도까지 곁들여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타락 천사의 각도를 조금 비트는 것 뿐이었다.
"앗, 렌님! 괜찮으세요?"
튕겨 나가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키아라.
바닥을 구르던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일단 타락 천사부터!"
섬전을 써서 다시 카이로시아 곁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이어지는 타락 천사의 공격에 대비했다.
[은은한 물의 장막!]
[포근한 대지의 포옹!]
[오색 빛 바람의 우산!]
[차가운 염화의 방패!]
그와 동시에, 내가 있는 곳으로 여러 겹의 보호막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이스 타이밍.'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보호 마법을 사용해 준 것이다.
물론 고작 이 정도로는 타락 천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 가해지는 충격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것이다.
―흥! 고작 이깟 걸로 날 막을 생각을 하다니!
타락 천사가 또다시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4급 주천사 '카이시엘'의 권능 <신월천사伸月天使의 권능>에 의해 일시적으로 달의 힘이 깃든 아이템의 능력이 봉인됩니다.]
[<로브:달의 메아리>의 능력이 봉인됩니다.]
[상급 악마 '카이시엘'의 스킬 <중천악마重踐惡魔 >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10분간 근력 스텟이 10% 하락합니다.]
그와 동시에 뜨는 알림창.
'뭐?'
그걸 본 나는 흠칫했다.
녀석은 지금, 천사의 권능과 악마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 142화. 총 출동(4) > 끝
< 143화. 총 출동(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