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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마탑에는 어떻게 갈 거냐? 워프 게이트?]

<그건 제 월급으로 안 돼요.>

마탑과 저택의 거리를 생각하면, 깨지는 비용은 상당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계산하면, 한 달 동안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기차를 타야죠.>

[...기차? 뭐냐? 그건? 먹는 건가?]

현재 레오의 지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상식 외의 발언이었다.

생각해보면 현자는 300년보다도 더 전에 은거했을 테니, 현대 문물을 알 리가 없었다.

<보면서 설명해드릴게요. 그러니까...>

"레오!!"

갑자기 누군가가 레오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저런 가까운 호칭을 쓰는 사람은 가문 내에서도 드물었다.

"아리아 아가씨?"

드물다기 보단, 아리아가 유일하다 말해도 무방했다.

"오늘...! 휴가를 쓴다며...?!"

방금 전 다녀온 곳은 집사장실, 알프레드가 업무를 보고 있는 집무실이었다.

알프레드를 보고 온 이유는 휴가 사용에 대한 통보 때문이었다.

"아, 네. 아가씨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당연히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도 말하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우선 집사장에게 말하는 것이 휴가를 허락받는 것이 효율성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왜...?! 왜...! 휴가를...! 3주씩이나 써?!"

다만 2년 동안 깊게 묵혀놨던 휴가들을 몰아서 쓴다는 점에서 아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기왕 외출하는 김에 들를 때가 많아서요. 이 시기에는 할 일이 제법 있거든요."

레오가 워프 게이트를 택한 대신 기차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금전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목적지가 한 곳이라면 워프 게이트가 몇 배는 편안했지만, 들러야할 곳이 여러 곳이라면 기차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그래도...! 이러는 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그런가요? 하지만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갑자기 빠질 수는 없는걸요."

마탑의 허가증 정도야 미룰 수 있었다. 어차피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1~2주 정도는 여유를 둬도 되겠지.

하지만

"성묘하러 가야 해서 그다지 여유는 둘 수 없는데요. 일주일 안에 고향까지 내려가야 하거든요."

"...성묘? 도론으로 간다고?"

자주 말하지는 않았는데, 용케 그런 촌구석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천재.

"부모님 성묘하러 가야거든요. 저번 해에도 갔잖아요."

"저번 해에...?"

하긴 아리아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저번 해에는 워프 게이트 써서 바로 갔다왔죠. 그 때문에 지갑이 완전 비긴 했지만요."

저번 해에는 워프 게이트 덕에 하루는 넘게 걸릴 성묘는 2시간 정도로 단축할 수 있었다.

[아, 저번에 고향 내려갔을 때?]

현자는 어쩔 수 없이라도 따라가게 되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라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지.

"그럼 이번에도 워프 게이트로...!"

"그건 안 돼요. 돈도 없고..."

레오의 표정이 조금 우울하게 변했다.

"마을 촌장님이 편찮으세요. 며칠 전에 전보를 받았거든요."

"...아..."

[아까부터 너무 가불기 아니냐?]

부모님의 성묘, 지인의 병환.

이걸 말리는 건, 어지간한 독기로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말리는 것 자체가 인간 말종이었고.

"...그...그럼... 잘 갔..."

레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리아는 떨어지는 눈물을 간신히 오러로 붙잡는 실정이며 심정이었다.

2년이나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레오나르도가 3주씩이나 사라진다는 건, 아리아스필에게 있어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아! 차라리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갔다... 같이?"

그 제안에 참지 못하고 떨어지려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무래도 기차로 가는 거다보니 혼자 가는 건 재미가 없거든요. 마을 사람들한테도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순간, 아리아의 머릿속에는 기차를 타는 상상마저 끝나있었다.

***

기차역은 워프 게이트 이상으로 사람이 붐벼있었다. 본디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중산층 및 저소득층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교통수단인 만큼 그에 비례한 인파들이 밀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오, 이게 기차야?]

기차는 마치 거대하고도 긴 원통을 잘라 몇 번이고 연결한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만 놓고 봤을 땐, 동양의 용이라는 생물과도 유사했다.

[...흠...]

기차를 처음 본 고대인은 의외로 초연한 표정으로 그 웅장한 몸체를 바라보았다.

<왜요?>

[이건 내가 예전에 고안했던 거랑 비슷한데?]

<...진짜에요?>

보통이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일갈할 테지만, 저번에 들은 업적이 하도 인상적이었기에 약간의 믿음이 샘솟았다.

[당시에는 역을 설치할 장비도, 전국에 레일을 깔 비용도 없는지라 안 된다고 퇴짜 맞았거든. 참 시대가 좋아지기는 했어.]

<근데 그럼 현자님 발명품 도용한 거 아니에요?>

[야, 300년도 더 된 일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하는 건 너무 쪼잔...]

<이거 만든 마법사, 특허하고 사업으로 3000억 골드는 넘게 벌었데요. 지금은 25살의 연하인 미인을 아내로...>

[죽여버려도 되냐?]

마탑에서 허가증 받기 전까진 자제해주세요.

"레오! 이쪽인 거 같아!"

아리아는 승강장에서 손을 흔들어대었다. 귀족가의 영애님께는 이런 경험할 일이 많지 않으니 흥미가 돋을 수밖에 없을 거다.

"우선 매표소에서 표부터 사야해요! 따라오세요!"

레오가 큰소리로 외치자, 아리아는 민망하게 얼굴을 붉히며 매표소로 뛰어왔다.

"...미...미안."

"괜찮아요. 그럼 두 장 살게요."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매표소 직원에게 표주문을 했다. 직원은 묵직한 레오의 주머니를 보자, 흔쾌히 일등석 칸 두 장을 내밀어주었다.

"잘 가지고 계세요. 중간에 직원들이 표를 끊을 테니까요."

"...그...그정도는 알고 있었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의심을 불렀지만, 레오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때때로 주인의 부족한 점을 가려주는 것이 기사의 충심이 아니던가.

"그럼 타죠. 곧 있으면 기차도 출발할 테니까요."

역무원들은 기차의 입구 앞에서 승객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레오 일행도 입구에 들어서 열차에 올라탔다.

[마차랑은 다른 느낌이네. 훨씬 넓고 쾌적하구만.]

현자의 말대로 열차 내는 마차와는 격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편안했다. 그건 물론 지출이 큰 일등석 칸을 구매한 까닭도 컸다.

아무래도 비싼 만큼 좌석을 제값을 할테니까 말이다.

[그럼 잠깐 갔다올게.]

<네? 어디로요?>

[그냥 기차 내부나 구경하게. 구조를 파악해야 이게 표절이 모방인지 구분할 거 아니야.]

설마 아까 말한 거에 아직도 뒤끝이 남은 걸까, 그런 걸 물을 새도 없이 현자님은 멀찍이 날아갔다.

<근데 이거하면 마나 소비가 커진단 말이에요.>

멀찍이 떨어진 현자와도 태연히 통신하며 레오는 투덜거렸다.

[좀 참아라. 이것도 다 익숙해지라고 하는 거야.]

몸의 마나 코어와 서클이 2개로 늘어났을 때 즈음 알아낸 것인데, 마나 코어와 서클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현자와 떨어질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게 된다.

지금은 대략 원래 거리에서 2배로 늘어났지.

'뭐 괜찮겠지. 조금은 졸리기도 하고... 잠깐 조용히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최근에 쉬지 못하고 일한 탓일까, 레오나르도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갔다. 평소에는 수면 시간에도 현자의 존재 때문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일등석의 쾌적함 덕분일까, 아니면 휴가라는 기간이 긴장을 풀어준 탓일까.

레오나르도는 어느샌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레오, 중간에 간식차가 온다던데, 뭐라도..."

아리아는 기차에 흥미를 느끼며 이것저것을 구경하려던 순간,

무언가가 아리아의 어깨에 얹어지게 되었다.

무거웠지만, 따뜻한

간지럽지만, 부드러운

"...음...? 어...!?"

레오의 머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기대져 있었다.

'...깨워...야하나..?!'

그렇게 아리아가 레오의 볼을 잡으려던 순간,

'...잠깐...'

굳이 깨워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레오, 자신의 전속 기사는 그리 편안한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

매일 근력 수련과 무기 수련, 그리고 마나 수련을 빼먹지 않고 이행하며.

동시에 마법 공부 또한 쉬지 않고 익혀왔다.

지금 아예 3서클 마법의 허가증을 받으러 마탑으로 향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자신의 소중한 기사를 깨우는 것이 맞는 일까?

절대, 결코 아니다!

아리아가 아니더라도 모두 고개를 저을 만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선의'로서, 친구로서의 '배려'로서

아리아스필은 자신의 어깨를 기꺼이 희생하도록 결심했다.

단언컨대, 사심 따위는 없었다.

이대로 레오의 향기를 맡는 것이나, 조금만 더 중심을 잃어서 아예 레오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포상은 결단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아리아는 사색에 빠지는 것에 집중했다.

아주 행복한 사색이 소년의 향기와 함께 이어졌다.

<+--|-|--+>

EP.32 3주간의 휴가-3

기차가 출발에 비해 격하게 덜컹대기 시작했다.

그 진동은 열차가 깊은 시골로 향하고 있다고, 스스로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으...음...?"

그 까탈스러운 기관차의 토로에, 레오의 고개가 떨리며 동시에 눈꺼풀도 떨렸다.

이내 더 크게 진동하자 미동만 하던 눈꺼풀이 활짝 열렸다.

"일어났어? 레오?"

"...예...예?"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있던 레오는 조금 당황한 듯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머리를 기대고 자버렸네요."

"아,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레오도 많이 피곤할테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대고 자도 돼!!"

고마운 말씀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명색의 기사인데 아가씨에게 폐를 끼쳐서 쓰겠나.

"지금 어느 역이죠? 아직 멀었나요?"

"지금은 다빈스 역이라고 했으니까, 아직 도론까지는..."

"예? 다빈스요?"

역사의 이름을 듣자 레오는 급히 되물었다. 급한 반응에 아리아는 당황했는지 의문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어. 다빈스역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문제..."

확인이 끝나자 레오는 속히 가방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얼른 내려야 해요!"

"어...? 왜..."

"도론으로 가려면 다빈스역에서 내려야해요. 도론으로 직행하는 열차는 아예 없어요!"

도론은 시골 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깡촌이었다. 어설프게 지은 집과 건물이라도 없었더라면 숲속 안이라 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현자님!! 얼른 오세요!!>

[어? 왜? 지금이 중요한 장면 보고 있다고.]

열차 안에서 중요한 장면이고 아니고 할 게 있는가. 새삼 현자가 어떤 인물인지 되새길 수 있었다.

<됐고, 얼른 오세요. 내려야 한다고요.>

[아직 도론역이라는 곳은 안 나왔는데?]

아까도 말했던 설명을 2초 이내로 해결하자, 현자도 따라 내릴 수 있었다.

중간에 열차가 출발한 뻔한 걸, 간신히 역무원에게 붙잡고 부탁해 곤란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함이 스멀거렸다.

"겨우... 내렸네요..."

플랫폼으로 간신히 내리게 되자, 레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칫 늦기라도 했다면 3km 이상이나 되는 선로를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러게 좀 잘 체크하지 그랬어.]

<...그건 죄송하네요.>

이것만큼은 아리아는 물론, 현자조차 탓할 수 없었다. 도론까지 바로 도착하는 기차역이 없다는 걸, 아는 건 레오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열차에 뭐 볼게 있다고 그렇게 늦게 왔어요?>

설마 진짜 특허랑 저작권 가지고 소송을 걸만한 것을 찾는 것일까.

[막장 소설 좀 보고 왔어. 다른 일등석에 봤는데, 내가 삼각이나 사각 관계는 봤어도 300년 넘도록 오각 관계는 처음 봐서...]

<...그냥 안 들을래요.>

아무리 현자의 돌을 버틸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도, 치정극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레오였다.

"그럼... 어디로 가야해?"

들뜬 기세로 눈을 반짝이는 아리아는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런 외진 시골은 아리아에겐 처음 보는 풍경일테니, 나름대로 흥미가 깊을 것이다.

"마차는 못 타고, 직접 걸어가야 해요."

레오는 그렇게 설명하며 검지 손가락 끝으로 푸른 초목과 연결된 산을 가리켰다.

"마차는 못 타?"

앞장선 레오를 따라 걷는 아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시골이긴 해도 다빈스 역에는 수십대 이상의 마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 질문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물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길이 험하다 보니 마차는 가기가 힘들죠. 마부들도 보수를 곱절로 받아도 안 가려고 해요."

포장되지도 않은 울퉁불퉁한 흙길에, 듬성듬성하게 나있는 돌부리와 나무뿌리, 그리고 덤으로 구덩이와 진흙탕 투성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보수보다 마차 바퀴 수리값이 더 나올 것이다.

"그럼 출발하죠."

레오는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마을로 향했다. 1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이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

[근데 말이다, 너 따지고 보면 촌장이 아파서 가는 거잖아.]

<그렇죠.>

[그런데 왜 그렇게 낄낄거리냐? 촌장님 고려장하고 싶었냐?]

이 양반은 말해도 항상 이따위로 말한다 말이지.

실실거린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낄낄거린다는 표현은 처음 들어봤다.

<제가 무슨 현자님입니까?>

[그럼 뭔데?]

<촌장님은 어차피 건강하세요. 전생에도 이렇게 안 돌아가셨어요.>

[...뭐?]

촌장님은 레오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정정히 살아계셨다. 물론 잔병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편지 중 5할은 감기 정도의 가벼운 병 정도였다.

[그럼 왜 가는데?]

<그거야 성묘도 해야하고, 오랜만에 고향 사람도 뵙고 싶으니까요.>

전생에는 거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리아와 만난 뒤로는 성묘를 가는 횟수조차 줄였지.

[은근 패륜아였구만.]

<패륜이든, 불효막심이든 간에 욕하세요. 사실이긴 하니까.>

레오는 아리아에게 승리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가린다고 해봐야 흑마법이나 마인이 되는 수단 정도였을까.

부모님의 성묘도 줄이고, 고향 간에 연락은 거의 끊어버렸다. 전생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들렀을 때는 고향 사람들은 내가 죽은 걸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회귀한 지금은 그런 후회를 없애기 위해 반성하는 거지.

[...거기서 인정해버리면 내가 쓰레기가 되잖아.]

<어라? 아니었어요?>

[그래, 내가 만악의 근원이지. 아주 그냥.]

<이제라도 알면 됐어요. 앞으로 착하게 사세요. 아, 이미 죽었구나.>

현자는 극한의 언어 공격에 충격을 받은 듯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근데 어디까지 가야 해? 레오?"

아리아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언덕을 오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아마 피곤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고,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다보니 지루해서 물어본 까닭이 클 것이다.

"이 정도면 마을도 나올 거에요. 그러니..."

바스락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유사했지만, 확연히 다른 성질의 음색.

그 소리에 레오가 검을 들었다. 팔찌였던 검은 돌이 검으로 변환되었다.

"레오...!?"

카앙!

날아오는 단도가 레오의 검 앞에 튕겨졌다.

"습격...!?"

아리아가 경악하기도 전에, 수풀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마치 숲속의 맹수와 같은 몸체, 검은 털로 뒤덮인 사냥꾼이 튀어올라 돌진했다.

타앙!!

날과 발톱이 맞부딪쳤다.

아까 날아온 단도가 아닌, 짐승과 맹수의 전유물이라 불린 발톱이 검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사람...이...늑대...?"

사냥꾼은 늑대의 형상을 한 인간.

"이게 누구신가...! 마을을 버리고 상경한 개자식이잖아!"

웨어울프였다.

"그 면상으로 용케 개자식이라고 말하나 보네?!"

그 웨어울프의 압살을 받아내며 레오는 소리를 질렀다.

흰 발톱과 검은 칼날이 서로 떨리며 밀리고 미는 것이 반복되었다. 아마 더 힘을 준다면 둘 중 하나는 다칠 거다.

파앙!!

"레오한테서 손 떼...!"

그 순간 아리아가 돌진해 각력을 자랑했다. 그 발차기에 검은 야수 사냥꾼을 날려버려 바위에 꽂히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괜찮아? 레...!"

"딘 형!!"

아리아가 다행스러운 눈치로 바라볼 때, 레오는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료이자 형을 바라보았다.

"형...?"

[죽은 거 아냐?!]

레오는 급히 딘에게로 뛰어갔다.

웨어울프 딘 하운즈.

그는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동시에 레오의 친한 형이었다.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생각도 없이 발차기를 날려서...!"

"괜찮아... 아가씨... 턱뼈가 조금 나간 것 같지만...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딘이 말하는 거로 봐선, 조금이 아닌 것 같았지만 레오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웨어울프의 생명력이라면 금방 뼈가 붙고 아물 것이다.

"반응으로 봐선... 아가씨, 수인은 처음 보지?"

아리아는 방금부터 고개를 숙인 채, 눈으로 딘의 몸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유난히 특징적인 외모를 지녔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 정도면 양호한 반응이거든. 애초에 싸움을 건 것도 나니까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것도 없어."

"그래요, 따지고 보면 형하고 제가 멋대로 싸워서 그렇죠."

딱!

"악! 왜 때려?!"

딘은 부러진 턱뼈를 붙잡으며 레오의 머리를 내리쳤다.

"넌 좀 반성해! 네가 미리 설명했으면 내 얼굴이 이 꼴이 났겠어?"

"상관없잖아. 어차피 멀리서 봤을 땐 차이 없어."

퍽!

주먹이 다시 떨어졌다. 같은데로 연타로 맞으니 충격이 뇌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걸 지금 말이라고!"

딘하고 레오는 항상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서로 주먹다짐이든 칼날다짐이든 간에 몇 합은 겨루고 들어간다.

일종의 신고식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솔직히 아리아가 피해자고, 너희 둘이 가해자야. 그러니까 정도껏 했어야지.]

머리가 띵한지라 반박할 여유도 없었다. 머리를 몇 번 어루만진 끝에 레오는 다시 언어 능력을 되찾았다.

"어쨌든 도론에 잘 왔어. 이름이... 그게..."

아리아는 예의를 지키며 조신한 방식의 인사를 보였다. 아름다운 아리아의 미모가 예법을 중심으로 더욱 밝게 빛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라고 합니다."

"아, 그랬지. 잘 부탁해. 아리아스필...라인...?"

악수를 하려던 딘은 손이 땀으로 흥건해지는 걸 체감했다.

"...라인하르트?"

두꺼운 모피가 축축해져 늘어질 정도로, 극심한 수분이었다.

"...그 용사 가문...?"

"...아, 예."

"그니까 마왕을 죽인 용사 가문?"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대 용사셨던 루벤 라인하르트님이 마왕을 퇴치하셨죠."

"...아..."

딘은 잠시 손을 거두고 아리아에게서 떨어졌다.

"잘못했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

그러고는 90도 자세로 허리를 꺾어 사과했다.

대략 90도로 90번 정도 고속으로 말이다. 아마 아리아가 도중에 말리지 않았더라면, 180도로 180번 사과하는 진기명기를 구경할 수 있었을 거다.

조금 아쉽구만.

***

"근데 왜 말 안 한 거야!? 편지에는 분명 기사 가문의 영애라고 했잖아!!"

"기사 가문은 맞지."

"용사 가문이 그냥 기사랑 같냐?!"

분명 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는, 단순히 기사 가문이라고 했을 뿐, 라인하르트는 고사하고 용사 가문이라고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럼 이따위로 안 하고, 현수막도 걸고 막 잔치도 벌였을...!"

"용사 가문보다 화려하게 벌일 자신은 있고?"

"...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마음이 중요한 거지! 마음이!"

맞는 말이긴 했지만, 아까 보였던 90도 90회 사과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피식거리게 되었다.

"전... 괜찮아요. 원래부터 그런 건 부담스럽다고 생각해서요."

"...레오랑은 다르게 상냥하네. 하긴 그러니까 레오랑 사귀겠지."

"앞말은 빼지? 나도 착하니까 사귀... 잠깐...?"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사귄다? 아리아와 자신이?

아, 친구로서 사귀게 되었다는 뜻이겠...

"너희 연인 사이 아니었어? 편지에 그렇게 보내서 마을 사람들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확인사살이었다.

여태까지 편지에는 연인이라는 단어는커녕, 그와 관련되거나 유사한 언어가 한 줌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게...무슨...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기가 차다 못해 역류하는 바람에 고함을 치고 말았다.

"아니, 니가 그렇게 보냈으면서 뭔 소리야?!"

"내가 언제!"

딘은 나이프를 넣는 주머니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몇 구절씩 읽기 시작했다.

"'목숨을 맡겨도 좋을 상대다.'"

호적수로서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기사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있기에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라며!! 니가 편지에!!"

...그건 맞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오해가 소지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런 뜻은 전혀 없었단 말이야!

"아리아 아가씨!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뭐라도 해명을...!"

"...흐..."

"아리아...?"

아리아의 표정은 이상했다.

"...히힛...흐으...흐..."

아니.

그냥 다 이상했다.

<+--|-|--+>

EP.33 3주간의 휴가-4

"하...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1. 레오는 편지로 여태까지의 일과 가문에서 일하게 된 후의 일을 설명했다.]

[2. 근데 아리아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오해가 소지가 있는 구절이 좀 있었다.]

[3. 그래서 레오와 아리아는 도론 마을에서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라는 거지?"

"그지. 지금 마을 사람들 다 그렇게 알고 있어."

생각해보면 1년 전에도 하는 말이 조금씩 이상하긴 했다. 당시 딘하고 촌장이 말하면서 묘하게 히죽거렸던 건 그 탓일 것이다.

[너... 눈치가 너무 밑바닥 아니야? 보통은 1년 전에 찾아갔을 때 눈치채잖아.]

<...저만 잘못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때는 그것 말고도 할 얘기가 많았다고요.>

아리아와의 오해도 제법 큰 화젯거리였지만, 그 이상으로 몇 년은 넘게 마을을 떠났다가 환향한 것은 대략 10년은 길게 우려 먹어도 부족하지 않은 안줏거리였다.

그리고 고작 2시간 정도에만 마을에 있었으니 회포를 풀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고.

"아가씨께서도 뭐라고 말씀해보세요. 아가씨도 곤란하시잖아요."

아리아스필은 항상 무표정으로 기본으로 생활해왔다. 회귀 뒤에는 제법 웃는 상이 되었지만, 딱히 기쁜 일이 없으면 그녀의 입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헤? 뭐...라고? 흐..."

그런데 지금은 너무 웃고 있었다. 말에 중간마다 입바람 소리가 울릴 정도로 말이다.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는 표현은 아마 지금 아리아를 위해 있는 어법일 것이다.

워낙 아름답기는 했지만, 전생의 괴리감 때문에 몸에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저렇게 웃는데요...?>

[...몰라. 네가 농담암살술이라도 썼나 보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으휴...]

왜 당황스러운 건 자신인데 현자가 답답하게 한숨을 내쉬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건지, 자신이 미친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걸 가서 확실히 정정해야겠네요."

더 늦기 전에 사실을 알려야했다.

"근데 진짜 사귀는 게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보다 내가 무슨 수로 영애님하고 사귀는데?"

레오의 신분은 평민.

그것도 부농층도 아닌, 일개의 용병에서 간신히 기사가 된 몸이다.

그런 자신이 아리아스필이라는 용사 가문의 영애와 연인이라니, 아마 가주님이고 마르켄이고 간에 온 세상 사람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우리도 네가 모시는 아가씨가 용사 가문인 줄은 몰랐다고."

딘마저 그렇게 납득하자, 헤실거리던 아리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세상의 많은 것을 봐왔던 현자조차 저렇게 희비가 교차하는 게 확실히 육안에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정작 두 눈치 없는 놈팡이 형제는 눈치 못 챘지만 말이다.

"근데 어떡하냐... 촌장님은 그 말을 들으면 다시 앓아눕는 거 아니야?"

"...다시 앓아눕는다고? 그냥 감기 정도 아니었어?"

딘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털이 부숭부숭한 볼을 긁었다.

"그러니까... 편지를 쓴 날은 그랬는데, 다음날에 가뭄 때문에 무리하게 님부스한테 기우제 부탁하다가... 이니스한테 미움 사서 벼락 맞았어."

"으휴... 주책맞은 할망구, 감기 걸릴 때는 좀 쉬라니까. 그래서 지금은?"

"골골대다가 네가 온다고 하니까 벌떡 일어났어. 그래도 빌빌대는 건, 여전하지만."

"촌장님답네."

아리아는 놀란 나머지, 연거푸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고 했는데, 태연히 넘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딘과도 처음 만났는데, 님부스니 이니스라는 처음 듣는 인물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부...

'...전부 여자 이름이잖아...'

'님부스'나 '이니스'와 같은 이름을 남자가 쓸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도론과 같은 촌에서 그런 열린 문화를 가지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저기 님부스하고 이니스는 어떤 '여성'분이셔?"

일부러 여성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물었다. 아니라면 웃으면서 남자라고 정정하며 설명해줄 것이다.

"여자? 레오, 걔들을 여자라고 봐야할까?"

"글쎄... 걔들이 생긴 건 예뻐도, 하는 짓은 오크 뺨을 후려갈기는 수준이여서... 근데 걔들한테 그런 게 의미가 있어? 형?"

"내 말이."

별거 없는 험담, 뒷담화에 가까웠다.

대화의 의미는 결국 얼굴값을 전혀 못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쿠웅

그 순간 무언가 내리 앉는 굉음이 울렸다.

눈치가 없는 레오나, 딘, 심지어 현자조차 그 폭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직 아리아만이 그 폭발음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게 정신의 폭음인 것은 그녀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글쎄... 걔들이 생긴 건 예뻐도...'

'...걔들이 생긴 건 예뻐도...'

'...생긴 건 예뻐도...'

'예뻐도'라는 말이 굉음과 함께 메아리쳤다. 눈엔 생기가 빠지고, 어째서인지 손은 검 손잡이에 다가가고 있었다.

"도착했네."

살기가 점차 흉흉하게 흘러나올 무렵, 마을의 인영이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여기도."

언제 와도 익숙한 풀내음과 욕지거리가 진동하는 장소.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이었다.

"얘들아!! 레오 왔다!! 퍼뜩 나와!!"

구수한 사투리를 외치자, 집가에 있는 사람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흡사 전쟁통에 뛰쳐나오는 피난민 같기까지 했다.

"레오나르도!!"

아니, 정정해야겠다.

저런 기세로 달려오는 피난민은 너무나 과소한 평가였다. 하늘을 찌르고 남을 기운은 마치 정예 의병단을 불방케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

우락부락한 얼굴을 한 채, 남성은 도끼칼을 들었다. 핏기가 뭍은 칼날은 피가 흘러내리자 제법 섬뜩했다.

"사정이 있었어요. 제프 아저씨."

그러나 제프가 저러는 흥분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레오가 아니었다. 저 정도면 생각보다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밥 다 식었다고! 어!? 뜨거울 때 먹어야지!!"

애초에 저런 이유로 화내는데 무서워할 일은 없었다.

"여보, 애가 힘들게 왔는데 좀 살갑게 대해줘요."

도축업자 겸 요리사인 제프의 아내, 수자는 그런 난폭한 남편을 다독이며 화사한 인상을 보였다.

"잘 왔어. 레오. 1년 만이지?"

"네, 자주 왔어야 했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늦게 오게 되네요."

"우리 사이에 뭘~ 그보다 준비한 물건은?"

"물론 준비해놨죠. 사모님."

레오는 마치 암거래를 하는 검은 시장의 큰손처럼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라? 왜 없지?"

하지만 이내 그 암상인의 표정은 얼빠지게 변해갔다.

"레오?"

"...초콜릿 세트를 기차에 두고 내렸나...?"

분명 휴가를 내고 집을 쌀 때는 챙겨두었다. 하지만 기차에서 급하게 내릴 때, 준비해두었던 초콜릿 세트를 두고 내린 것 같았다.

"여보~ 다시 들어도 돼."

스릉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에 제프는 핏기어린 도축 칼을 들어올렸다. 그 긴박한 순간, 레오의 손에 무언가가 집혔다.

"찾았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뒀네요!"

고급스럽게 포장된 검은색 상자가 가방에서 당당히 드러났다. 그러자 자연히 칼날도 내려갔다.

"근데 뭐라고 하셨나요? 아주 상처받을 말을..."

"아니~ 우리 레오~! 아줌마 생각도 해주고! 아주 기특해!!"

수자는 명령을 철회한 채, 살갑게 맞이했다. 행여나 레오가 명령에 관해 캐물을까 걱정돼, 양볼을 잡는 것은 퍽 활기를 갖다주었다.

"촌장님은요?"

"촌장님은 지금 회관에 계셔. 아무래도 아프시기도 하고... 조금 솔직하지 못한 분이시잖니."

"그냥 무뚝뚝하신 거죠."

그렇게 서로 1년 동안 밀린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인사를 끝낸 몇몇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아리따운 소녀에게로 향했다.

"저 애는..."

"소개할게요. 제가 모시는 영애님이신...."

"레오 여친이구나!!"

소개할 때 정정한다는, 레오의 원대한 첫 계획은 첫단추부터 어그러졌다.

여친이라는 말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아리아와 레오를 한 시선으로 모아놓았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그러네! 레오 여친이야!!"

"편지에 쓴 거랑 똑같은데!?"

"경사네!! 제프! 얼른 닭 한 마리 더 잡아!!"

레오의 말은 마치 소귀에 경을 읽듯 하등 의미가 없었다. 꼭 주책맞은 친척처럼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 멋대로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그게 아니라..!!

"이럴 게 아니지! 얼른 촌장님께 데려가지!!"

"그래!! 그러자고!!"

정정이고 뭐고 마을 사람들은 이미 막무가내로 레오와 아리아를 붙잡은 채, 마을 회관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저들의 머릿속에는 레오와 아리아가 연인이라는 공식에 진리로서 박혀 입력돼있었다.

"그러니까...! 사람 얘기 좀...!"

뭐라 지적할 기회도 없었다.

이미 커플로 확정된 기사와 아가씨는 마을 회관에 밀어 넣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촌장과 얘기하라는 의미에서 마을 회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배려에 레오는 복장이 터지고 있었다.

[너무 막무가내인데?]

고향 사람들을 보고 늘상 지적하는 현자가 선녀처럼 보였다. 아마 바퀴벌레를 보고, 쥐를 보니 조금 귀여워 보이는 거와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레오냐...?"

조금 어두운 회관의 안, 한 노파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새치가 덥수룩한 머리를 자랑하며 촌장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많이 쉬셨네요. 아누스 촌장님."

아누스는 기침을 연거푸 뱉으며 오랜만에 돌아온 레오를 노려보았다.

"묻는 말엔 대답 안 하고 딴소리하는 거로 봐선 레오가 맞구나."

"기껏 걱정해줬더니 욕부터 박는 거로 봐선 건강하신 것 같네요."

훈훈한 악담이 오가며 촌장과 레오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마 300년은 넘게 묵은 현자과의 언쟁에서 밀리지 않는 건, 촌장의 덕이 컸다.

"이 늙은이가 벼락에 맞았는데 잘도 건강하겠구나."

"어디 이니스가 그런 게 한두 번입니까? 그러니까 아플 땐 쉬셔야죠."

이니스라는 이름에 다시 아리아의 눈이 흉흉해졌다. 그 기운은 눈치챈 아누스 촌장은 손가락으로 아리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저 여자애가 너 같은 멍청이를 연인으로 삼은 안타까운 아가씨냐?"

"그니까 아까부터 말하는데...! 그게..."

"레오는 멍청이가 아니에요."

이번에는 아리아가 레오의 말을 잘랐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리아는 단호한 어투로 촌장으로 노려다 보았다. 연장자에게, 그것도 마을 촌장에게는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을의 노파는 슬며시 눈을 기울이며 아리아스필에 맞서 노려봤다.

"허... 용사 가문의 온실 속 화초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아리아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성도 말하지 않았는데, 바로 용사 가문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매일 마법하고 검술을 단련해요. 가문 기사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지금은 마탑으로 중급 마법 허가서를..."

"결국 할 줄 아는 게 싸우는 거밖에 모르는 거겠지. 마법도 운 좋게 기회가 생겨 얻어걸린 거일 뿐이야."

그 말에 현자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때릴 수만 있다면 고개째로 뺨을 쳐날렸을 것이다.

"그리고 저한테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용병이 얻은 지식 따윈 믿을 게 못 돼. 해봤자 자신의 경험에 매몰될 테지."

아리아의 눈빛에 점차 독기가 서렸다. 어떻게든 저 노파의 말을 논파하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아마 너보다도 많이 알 게다."

그 말에는 반론하지 못했다.

레오의 곁에 있는 시간의 총량은 촌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니 묻겠다. 너한테 있어 레오나르도는 어떤 존재지?"

"...그...건..."

아리아스필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전속 기사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존재였고,

친구라고 하기엔 공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연인이라고 하기엔 자신에게도, 레오의 마음에도 확신이 없었다.

"거봐라.어차피 연인이라고 해도, 철없는 꼬마 아가씨가 추억거리 따위라도 필요한 거겠지. 정말 결혼이라도 할..."

하지만 저 모욕에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결혼할 거예요!!"

정적이 흐를 틈도 없었다.

"스무 살 되면 바로 결혼할 거고!! 아이는 아들딸 둘로 낳을 거예요!! 이름까지 정해뒀다고요!!"

기차에서의 망상은 이미 신혼 생활로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

EP.34 3주간의 휴가-5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누가 들어도 기가 뒤집힐만한 헛소리.

헛웃음을 내다가 호흡곤란이 올만한 거짓부렁이었다.

하지만 저 당돌한 박력 앞에서는 목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결혼...? 진심...인가?"

아누스 촌장도 저런 대답은 예상 못 했는지, 말을 잠시 떨었다.

"...그...게..."

말을 떠는 건 촌장만이 아니었다. 큰소리를 친 아리아도 말을 떨며, 얼굴이 달궈지는 양철처럼 새빨갛게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아니, 더 묻는 건 의미가 없겠지. 입만 산 놈들은 이 나이 먹도록 지겹게 봤으니까."

아누스는 굽은 등을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기는 했지만, 그 거침없는 기립은 위압을 주기엔 충분했다.

"따라 나와라. 제대로 된 '대화'는 이런데서 하는 게 아니지."

아누스의 발걸음이 앞서자,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이가 털릴 대로 털린 레오도 무의식의 힘을 빌려 밖으로 나갔다.

***

향한 곳은 녹림이 우거진 숲속의 중심부였다. 마을에서 떨어지자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이라 할만한 인공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숲의 빈터에 선 아누스는 뒤따라온 아리아 일행을 보며 말했다.

"여기가 좋겠군."

"...뭘 할 생각입니까?"

불려온 아리아보다 옆에 있는 레오가 경계가 서려 있었다. 팔찌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은 그 날선 기세를 어림으로나마 짐작시켜주고 있었다.

"여자끼리의 대화니, 놈팡이는 끼어들지 마."

그렇게 쏘아붙이며 아누스는 자신의 지팡이를 직각으로 들어 아리아를 가리켰다.

"너, 이리로 와 서라."

"...네?"

"젊은 년이 귀가 먹었나? 늙은이가 두 번이나 말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단호한 독설에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누스의 앞에 섰다. 자신의 앞에 아리아가 서자 아누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난 말로 주절거리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대화'를 하겠다고 주장하니 이질적인 모순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가장 직관적인 수단으로 '대화'하는 걸 즐기지."

그 순간, 아누스의 지팡이 중심으로 바닥에서 바위들이 원형으로 솟아나왔다. 순식간에 원형의 진이 완성되었다.

"마법...?!"

레오나르도와 유사한 형태의 마법, 그 광경을 보자 아리아는 바로 검을 발도했다.

"할멈! 뭐하는 짓이야!?"

레오도 검을 든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심히 격앙된 목소리로 그는 검을 겨누었다.

"남자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낙뢰가 내리쳤다. 레오나르도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전기의 결계가 쳐졌다. 방음 효과까지 있는 건지 레오는 전격 너머 큰소리로 외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또 마법...!"

아리아가 놀란 건, 단순히 마법을 써서가 아니었다. 레오와 동일한 효과를 내면서도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기에 더욱 경계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할 수 있겠군."

"...이게 대화인가요?"

원형으로 둘러진 바위와 번개의 벽, 조용한 담화를 원하다는 핑계로는 납득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네가 나를 상대로 날붙이를 든다면, 대화는 아니겠지. 다 늙은 노파를 상대로 꽤나 날이 서있군?"

"...마법을 쓰셨잖아요."

아누스는 그런 기색이 맹랑하기라도 했는지, 비웃듯 헛웃음을 내었다.

"그래, 확실히 그건 맞는 지적이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누스는 다른 나무 막대기를 들어 아리아에게 집어던졌다. 아리아는 한손에 검을 쥔채로 그 막대를 잡아들었다.

"...이건 왜..."

"검 대신 그 막대로 싸운다면, 한 대라도 맞추는 순간 내가 한 말은 취소하고 사과하도록 하지. 결혼을 하든, 애를 낳든 상관하지 않으마."

그 말에 아리아의 얼굴은 가을밭의 과일처럼 진하게 익어갔다. 새삼 자신이 뱉은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부끄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대신 레오 그 멍청이가 여기로 들어올 때까지 한 대도 못 맞춘다면, 연인이고 뭐고는 다 접어라. 가망도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아누스는 지팡이를 촉매 삼아 마나를 전개했다. 얼굴을 붉히던 아리아도 대답으로 검을 던지고 나무 막대를 양손으로 쥐었다.

'마법의 대응은 레오 덕분에 어떻게 할지 알고 있어. 하지만...'

아누스의 마법은 레오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단순히 위력이나 속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물 마법?!'

결정적인 마법의 본질은 확실히 달랐다. 마법진 없이도 수분의 칼날이 날아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고작 나무 막대기로 반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아리아는 좌우로 구르며 액체의 검격을 피했다.

"구르는 재주는 있군."

지금은 조롱에 아랑곳할 시간은 없었다. 단전에 힘을 주며 이내 체내의 마나 코어를 활성화시켰다.

"호, 천재라는 게 과장은 아니었군. 그 나이에 3성이라니.

세 개의 별들이 빠르게 발광하며 그녀의 몸에 마나를 순환하기 시작했다. 2년간의 세월과 노력을 통해 아리아는 이미 코어를 3성까지 끌어왔다.

"하지만 소질에 비해 다듬어지진 않았어."

이번에는 벼락이 난무했다. 전격을 머금은 섬광이 소나기처럼 아리아에게 떨어졌다.

'...레오랑은 확실히 달라.'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사용되는 마법들의 위화감을.

"어떻게... 마법진도 없이...!"

지금까지 아누스는 영창도, 수인도 없이 하물며 마법진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말이다.

"예쁘장한 눈이 장식은 아니었군. 하지만 그걸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

콰지지직!!

폭음과 함께 번개의 장벽에 실금이 갔다.

"아무래도 대답해줄 시간도 없겠군."

연속적으로 폭음이 울려퍼졌다. 갈라진 결계의 균열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 폭음 사이마다 아누스는 연격으로 마법을 날렸다.

'...냉정히 생각해야돼.'

그 혼돈의 격전지에서 아리아는 침착히 공격을 회피하며 생각했다.

분명 레오는 마법을 쓸 때 항상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건 자신의 오빠인 리오스도 마찬가지였으니, 대부분의 마법에는 마법진이 필요할 것이다.

보조 기술인 영창이나 수인은 생략 가능해도, 뼈대인 마법진은 빼낼 수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생각할만한 건 하나밖에 없어.'

아리아스필은 마나 코어의 마력을 눈에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시력의 격상으로 시야의 피로가 증가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나무 막대로는 오러를 최대로 집중시켜 공격하는 전략도 불가능했으니.

그녀는 반격 대신, 탐색과 공략에 집중했다.

[...요리조리 잘 피하는데~? 히히~]

[이쯤에서 봐주지 그래? 예쁜 애를 괴롭히는 건 가슴이 아프단 말이지.]

마나로 강화된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던 두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형상과 장소가 기묘했고,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하기엔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존재.

[저 애, 우리가 보이는 것 같아~!]

[진짜로? 이거 이직하기 좋은 기회인데.]

"조금은 조용히 해라."

아누스의 말에도 마나의 말괄량이들은 아리아를 바라보며 꺄르륵거리기 바빴다.

"...저건..."

"봐버렸으면 하는 수 없지."

아누스는 마나를 완전히 전개하며 주변에 있는 정령들을 실체화시켰다. 옆에 있는 두 정령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소정령들마저 전부 시야에 드러났다.

"...이건..."

"정령, 정확히는 도론에 정착한 정령들이지."

정령, 마법에 문외한인 아리아도 들어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마나에서 태어난 생명이자 지성, 마나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요정, 그게 정령이었다.

"난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다. 마나만 놓고 보면 너는커녕 지금 결계를 부수는 꼬맹이보다도 못하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누스에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용되는 마법의 위력에 비해, 아누스의 마력은 조촐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철부지 아가씨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아. 그것도 내 고향의 숲이라면 더욱."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의 아귀는 맞게 된다. 아누스가 마법진을 그리지 않은 것도, 강력한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 것 또한 설명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숲에서...'

아누스는 정령사로서도 중위권에 위치할 뿐, 정점이나 상위권에 위치한다고 할 순 없었다.

다만, 싸우는 곳이 자신이 태어나고 몇십 년 동안 함께 지내왔던 고향이라면.

그 지역의 정령들은 미운 정과 고운 정이 깊이 쌓인 아누스를 전력으로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디 정령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내 설명을 천천히 듣는 거로 봐선, 어지간히 포기하고 싶은가 보군."

콰아아아앙!

맹렬한 파괴음, 그 소리를 방아쇠로 벼락의 방어막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아리아 아가씨!!"

"그래, 애써 날뛰는 것보다야 그렇게 좋아하는 연인한테 보호만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어지는 도발, 생각 외로 아리아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건 이 전투로 아니라는 걸로 증명하면 그만이었다.

"이니스, 님부스 이제 끝내지."

[나참, 좀 봐주지. 박정하다니까.]

[그냥솔직하지 못한 거라니까. 저번에도 기우제 때...]

그러면서 사람 형상을 한 두 정령은 키득거렸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아누스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때론 노인의 감은 위기나 공포를 색적하는데 유리하고 유용했다.

노파의 경험은 말하고 있었다.

"...님부스...이니스..."

지금 저 소녀는 어떤 존재보다도 위험하다고.

-저기 님부스하고 이니스는 어떤 여성분이셔?

-글쎄... 걔들이 생긴 건 예뻐도...

저 두 정령이 레오나르도에게 감히예쁘다 칭찬받은 녀석들이었다.

겨우 운이 좋게도 자신보다 레오를 먼저 만나,

분명 자신보다 그런 칭찬을 먼저 들었을 방자한 것들.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뜨겁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뭐야... 저 애 갑자기 기백이 살기로...?!]

[아누스!! 빨리 막...!]

우지끈

아리아는 한 손의 악력만으로 나무 막대기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동시에

쐐액!

그 막대기 절반을 아누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

반응했을 때는 이미 안면에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급히 방어했지만, 차게 분노한 아리아에겐 그런 여유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연속으로 들리는 화살 소리.

화살 대신에 베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마치 호우처럼 쏟아졌다.

"방어막!!"

[전격 결계를 쓴 마나가 충전이 안 됐어!!]

"젠장...!"

저런 공격을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거다. 고작 해봐야 아픈 정도일 테지.

문제는...

'저 중에 남은 막대가 섞여있을 텐데...!'

내기에서 승리하는 조건은 막대기를 맞추는 것, 저 소나기와 같은 가지들에 있는 막대가 스치기라도 한다면...

"...레오가 못된 것만 가르쳤군. 하지만...!"

주변에 있는 정령을 전부 동원해 전방위를 일일이 방어한다면, 숨겨진 막대를 막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주변에 바위, 풍압, 전격, 물보라가 일며 막대를 튕겨내었다. 결계에 비하면 연약한 방어였지만 나뭇가지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잠깐... 그 여자앤...]

투척물에만 집중한 나머지, 아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다른 정령들도 방어 때문에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어디에...?]

그 순간 모두는 상공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

아리아는 공중으로 뛰어들어 아누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급히 방어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저 일격은 단순히 잔재주로 던진 견제 공격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방어들이 전부 뚫리고 전장을 가로지른 역전의 투희가 공격을 날렸고.

공격은 이미 적중했다.

충직한 그녀의 기사는 그 아름다운 장관을 막바지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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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3주간의 휴가-6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피곤해서 일어날 수 없는데, 힘든 것은 체감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로 덕분에 취하는 휴식이 편안하고, 심지어는 행복마저 느낄 정도였다.

레오나르도가 느껴졌다.

기이한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그 설명이 적절하다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누워있는 장소에도, 몸을 덮어감싸고 있는 것도, 온도와 공기마저도 레오나르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음..."

그 행복감에 못 이겨 아리아스필은 조금씩 감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고, 잠에서 깨자 느낀 건 익숙한 내음이었다.

모순적인 조화에 아리아는 침대에서 조심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다. 낡은 책상, 허름한 벽과 벽지, 빛바랜 커튼까지.

모두 오래됐다고 생각했지만, 역설적으로 가문의 저택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낡았음에도 먼지나 때 하나 없는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남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천천히 아담한 집안을 살필 무렵, 옆쪽을 보자 이 편안함을 만든 상냥한 기사가 보였다.

"...레오...?"

의자에 기대 졸고 있는 레오나르도였다. 옷차림은 흙투성이에 해져있었고, 옷깃이나 소매는 난폭하게 찢어지고 넝마가 되어있었다.

그런 가여운 옷차림으로 가린 몸은 더 지독했다. 손바닥부터 손가락까지 전부 굳은살째 까지고 찢어져 있었으며, 딱지가 겨우 굳은 손에는 붕대가 어설프게 감겨있을 뿐이었다.

"...나 때문에..."

미안한 감정에 레오를 깨우려던 순간, 옆 서랍 쪽 위엔 빵 한 덩이와 우유 한 컵이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쟁반 옆에는 작은 쪽지가 적혀있었다.

[촌장님 일은 죄송합니다. 워낙 융통성 없는 사람이어서요. 깨시고 허기가 지시면 빵과 우유를 드셔주세요. 가문에서 먹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영양 보충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아리아는 아무 말없이 레오에게 떨어졌다. 이미 결계를 뚫은 것만으로 충분히 피로했을 테니, 조금이라도 자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아리아는 빵과 우유를 들어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레오 말대로 그리 맛있는 맛은 아니었다. 빵은 퍼석하고 우유는 고소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 맛이 좋았다.

맛있는 거와는 별개로 이 음식은 좋았다.

영양 보충을 끝내자 아리아는 레오를 조심히 들었다. 무겁고 탄탄한 몸이었지만, 자신의 기사가 해준 일에 비하면 이런 배려는 대수롭지 않았다.

레오를 조심히 침대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끼이익

문의 낡은 경첩 소리가 울리며 한 노파가 걸어들어왔다.

"레오나르도, 애 상태는 어떻..."

아누스의 눈은 침대로 고정되었다. 침대보다는 한 남자를 껴안은 채 들어올린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게 중요했다.

"..."

"...아...그게..."

"나중에 말하도록 하지. 하는 건 말리지 않겠다만 피임은 잊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아누스는 문을 닫아 나가려고 했다. 의외로 아리아는 당황하지 않은 채 레오를 침대를 눕혀놓고,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괜찮아요. 지금 얘기해도 돼요."

"...의외로 당황하지 않는군. 그런 단어가 익숙한가?"

"...무슨 단어요?"

아리아는 의아한 듯 아누스에게 되물었다. 그 반응에 아누스는 아리아의 상식이 어느 정도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런 계획을 짠 건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누스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레오를 보며 다시 아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염치는 없다만, 밖으로 나가서 얘기해도 되겠나?"

아리아도 졸고 있는 레오를 힐끔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도론의 밤은 아침과 달리 고요했다. 안개처럼 내리앉은 어둠이 주변의 소리를 전부 삼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숲을 걸은 것은 노년과 유년의 길에 선 두 여성이었다.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있을 때, 아누스는 짚고 있는 지팡이를 그대로 바닥에 지그시 눌렀다.

"...몸은 어떻지?"

그녀의 질문은 딱딱했지만 단호하지는 않았다. 무뚝뚝함에 가려진 상냥함은 친분이 없는 아리아조차 눈치챌 수 있었다.

"...네, 괜찮아요. 덕분에..."

"나 때문에 쓰러진 거지. 레오 덕분에 괜찮아진 걸 게다."

아리아는 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화가 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누스가 한 말을 전부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밉나?"

그 앙금을 눈치챈 걸까, 노인은 두서없이 아리아의 마음에 흙발로 다가갔다.

"...네?"

"밉다면 미워하고, 안 밉다면 지금이라도 미워했으면 좋겠군. 이런 늙은이는 빨리 죽는 게 젊은이들한테 편하거든."

자조적인 발언에 아리아는 무슨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갑자기 동조하거나 감싸줄 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그런 건..."

"...그리고 미안하다. 사실 사과가 먼저겠지."

그런 망설임을 주는 것조차 사죄하는 것처럼, 아누스는 아리아에게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반응에 아리아는 더더욱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

"난 약속했지. 내가 진다면 한 말들은 취소하고 사과하기로."

아누스는 고개를 들며 아리아의 눈을 마주보았다.

"미안하다. 너의 마음을 가벼이 여기고, 레오와의 관계를 업신여겼다. 늦게나마 사죄하마."

아누스는 고개와 허리를 다시 숙였다.

평소 거친 말만을 일삼은 까닭일까, 저 사죄는 다른 이와의 사과는 무게가 달랐다.

"아...아니에요...! 저도 갑작스레 그런 얘기를 했으니...! 보호자인 아누스 씨께서 화날 실만도 하죠...!"

그런 사죄의 깊은 무게가 느껴지자, 아리아는 급히 아누스의 사죄를 받아내려고 했다. 사실 실질적으로 레오를 기른 것은 그녀였기에 아리아는 더욱 그녀의 체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라... 확실히 맞는 말이지. 난 레오나르도의 부모도 아니니, 생각해보면 너희의 관계에 간섭할 자격도 없어."

이어지는 자조적인 발언에 아리아는 눈을 떨었다. 애초에 결혼은커녕, 연인도 아닌 그녀였기에 아리아는 양심이 죄악감으로 찔리는 걸 체감했다.

"...저... 그게... 사실은..."

"여기로 널 부른 건, 어릴 적의 레오나르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그 말에 진실을 고백하려던 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 목석은 물어도 대답 하나 안 할 테니, 이럴 땐 노파심 많은 노인네가 주책을 부려야겠지."

레오나르도의 과거.

그 내용은 설사 죄책감에 짓눌린다고 할지라도, 꼭 들어야만 하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호기심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 숲의 공기가, 아누스의 진심이 아리아에게 속일 각오와 들을 다짐을 불어넣었다.

"레오의 애미에 대한 얘기는 들었나?"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레오가 10살 즈음 돌아가셨다고..."

"...돌아갔다라, 분명 레오가 그렇게 말한 거겠지."

아누스는 쓰게 웃었다. 웃지도 않으면 이야기의 쓴맛은 더 농후하게 입가에 남을 것이다.

"레오가 마을 떠난 이유를 알고 있나?"

아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지어내지 않는 이상, 대답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는 스스로에 대한 얘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선 더욱 철저히 숨기고 감추었다.

"모르겠지. 레오는 그런 애니까."

아누스는 숲의 으슥한 곳으로 걸어갔다. 어둡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어둠에 대한 공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람은 밝은 퇴악볕보단 얕게 깔린 그늘에 안심을 얻는 법이었다.

"레오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으러 마을을 떠났다. 10살 무렵에 사라진 어머니를 찾으러 말이야."

"하지만... 분명 레오는..."

자신의 어머니가 3개월 동안 안 돌아왔기에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내 아리아는 아누스의 말의 진의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건 단지 '그렇게 말했다'일 뿐인 것을.

"레오나르도가 이 마을에 온 건, 1살도 되기 전 무렵이었지."

아누스는 그날이 어젯밤처럼 생생했다. 기묘하게도 몸이 낡아질수록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건 젊은 적보다 쉬워졌다.

폭우가 내리는 날, 물의 정령조차 매서운 비에 두려워 자리를 피한 밤.

그 폭우를 뚫고 걸어온 바보가 있었다.

누군가의 어미가 되기엔 충분해도, 좋은 어머니가 되기엔 조금 모자라 보이는 여성이었다.

남편도 없이, 아기를 가슴팍에 멘 채 이런 폭우를 홀몸으로 뚫은 게 그 판단의 날인이었다.

"그게 레오의 어미, 렌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마을에 찾아온 렌은 난데없이 살 집을 요구했다.

"...예? 여기가 고향 아니었어요?"

"레오에겐 고향이겠지만, 렌은 아니야."

렌은 어쩌다 마을에 몇 번 머무른 이방인일 뿐, 마을의 출신은 아니었다.

"어쨌든 몇 번 마을을 지켜준 적도 있고 하니, 난 근처에 빈 집을 내어주었다. 창고로 쓰긴 아까우니 차라리 잘됐다고도 생각했지."

불평을 하면서도 아누스는 살 곳과 가벼운 음식과 돈을 내주었다.

그러면서도 아기는 어떻게 된 거이냐 물었지만, 마치 렌은 침묵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는 자기 애비를 몰라. 우리도 레오 아비는 모른다."

그때, 레오가 했던 자기소개가 기억났다.

'그러니까 난 그냥 레오나르도다. 없는 애비 만들어줄 거 아니면 토 달지 말고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레오 본인이 가볍게 얘기했으니까.

하지만 그 무게가 가볍게 보일 때까지 걸린 시간은 가볍지 않으리라, 그녀는 추측했다.

"레오는 특이한 아이였어."

"...좋은 쪽으로요?"

"좋은 쪽도, 나쁜 쪽도 아니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안타까웠지."

레오나르도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욕망에 광기가 있듯. 무욕에도 광기가 존재했다.

마치 산타의 캐롤에 나오는 착한 아이와 똑같았다.

"울지도 않았고, 짜증을 내지도 않았어. 하물며 장난도 치지 않았지."

현재의 레오나르도와는 동일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우는 건 그렇다 쳐도 짜증이나 장난이 없는 건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걱정했지. 단순히 먹이고 재우는 건 편했지만, 그건 애를 키우는 게 아니라 가축을 먹여 재우는 거랑 다를 게 없으니까."

극단적 비유였지만, 아누스에겐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 소년은 죽지 않은 것일 뿐, 살아있다는 표현은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 심히 걱정하지 않았어. 제 어미한테는 제법 사람 같았으니까."

렌과 같이 있을 때 레오는 같이 웃기도 하고, 귀여운 짜증을 부리도 하며, 때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웃을 장난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레오 어머니는..."

"그래, 10살 무렵으로는 아예 사라졌지."

그 후였다.

레오가 무욕을 넘어 무심을 깨달은 건.

"그나마 웃기라도 하던 녀석은 그것마저 잃어버렸지."

소년은 희망을 잃었기에 모든 것에 무심해졌다.

그 뒤로 대략 한달이 더 지나서였을까, 레오나르도는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을 안은 지루해서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어. 제 엄마를 찾으러 간 거겠지."

모두 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렌이 좋은 어머니가 되진 못해도, 어머니의 자격을 포기할 만큼의 썩은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레오를 말리기 위해 딘이 막아섰다. 열살배기 애가 저런 상태로 나가면 어떨지는 뻔했으니까."

"...그래서 이기고 나갔군요."

"아니, 처음에는 졌다."

아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에도 마나 없이 자신을 압도한 레오였다. 그런 레오가 아무리 어리다 할지라도 패배하는 건 납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엔 딘을 이겼지. 고작 애 한 명이 늑대인간을 쓰러뜨린 거야."

단순히 힘이나 기술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아와의 상상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썼다.

"처음엔 동물의 피를 이곳저곳에 뿌려 냄새를 교란했다. 그렇게 견제 공격만 하다가 마지막엔 미리 깊이 칼집을 낸 나무들을 부러뜨려 딘을 잡았지. 정정당당하고는 거리가 멀었어."

그럼에도 아무도 레오를 붙잡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붙잡으면 애가 정말 선을 넘을 것 같았다. 아이로서든, 사람으로서든."

그렇게 레오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 여행을 내막은 몰랐지만, 고작 3년만에 몸에 여실히 남은 흉터는 그 여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는 건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가출한 애가 대뜸 편지를 보냈더군."

그때 아리아는 떠올렸다. 딘이 보여준 레오의 편지를.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왜 그런 인형 같은 아이가 기사 가문에 들어간 건지, 아가씨를 모시는 것에 그렇게 보람을 느끼는 건지도 말이야."

그렇게 마을 사람이 머리를 맞댄 결론은 간단했다.

"레오도 사랑을 알았다고 생각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은 그렇게 변할 수 없다고 말이야."

아리아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확실히 그런 의미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1년 전에 왔을 때 즈음에는 난 확신했다."

아마 레오와 친분이 있다면 알만한 사실이었다.

"그 앤, 사랑에 있어선 목석이나 다름없더군. 사랑이 뭔지도 몰라."

그 말에 아리아가 다시 침울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당황스럽게 바뀌었다.

"...왜 그러지? 설마 내가 진짜로 너희들이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나?"

갑자기 태풍과 해일 몰아치듯 수치가 밀려왔다.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흑역사는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멋대로 속은 것 같지만, 난 그렇게 낭만주의자가 아닌지라... 속기가 더 어렵더군."

"...죄...죄송합..."

"사과는 괜찮다. 오히려 애를 목석 같이 키운 내가 사과해야겠지."

아누스는 주름진 입꼬리를 피식 웃어보였다. 조소나 조롱이 아닌, 안도와 안심의 미소였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그런 레오를 부탁해도 되겠나?"

"...네...네?"

아누스의 눈이 맑고, 시선은 반듯했다. 아마 저런 눈은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에서만 흘러나올 것이다.

"너희가 사귀지도, 결혼할 걸 정하지 않은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너에게 내 손주를 맡기고 싶더구나."

아누스는 아리아를 머리를 쓸어넘겼다. 주름진 손임에도 부드러운 온기가 머리에 지그시 스며들었다.

"...하지만 전 레오보다..."

"레오를 지킬 필요는 없다. 아가씨가 기사를 지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으니."

잠시 뜸이 들여지더니 아누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너 스스로를 지켰으면 한다. 부디 레오보다 먼저 죽지 말아라."

그제서야 아리아는 아누스의 시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저는..."

"연애를 건너뛰고 결혼할 정도의 의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만... 내가 너무 성급히 생각했나?"

그 말에 아리아의 표정은 완전히 익어버렸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누스는 그런 소녀의 심성에 만족했다.

"다행이군. 그럼 먼저 가보지. 잘 시간을 빌려줘서 고맙네."

아리아는 한참을 대답을 못한 채, 붉게 물든 얼굴을 식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

"...다녀왔..."

돌아온 아리아는 말을 멈추고 침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심했던 탓일까, 레오나르도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많이... 힘들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아리아는 레오가 누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레오는 침대에서 평온한 표정을 지은 고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표정한 레오라...'

사실 지금도 촌장님의 말씀은 여러의미에서 믿기지 않았다.

항상 다채로웠던 레오였기에, 아리아에게는 더더욱 상상이 어려운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근데 난 어디서...'

잠시 둘러보던 아리아는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집... 잘 데가 하나밖에 없어.'

보통은 소파라도 하나 더 있기 마련인데, 이 허름한 집에 침구는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 남은 건 춥고 딱딱한 마룻바닥 뿐이었으니까.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아리아는 조심히 레오가 덮은 이불을 잡아올렸다.

이건 절대 그런 게 아니었다.

불가항력 아닌가, 누가 봐도 불가항력이었다.

레오나르도도 추울 테고, 자신도 마룻바닥에 자는 건 힘들었으니.

서로한테도 이득인, 그래! 상호이익이었다.

이불 속에 같이 들어가도 떨어져 있으면 그만이다.

아무 문제도 아니다.

촌장님도 자신에게 부탁한다고 하셨으니 찔릴 필요도 없었다.

"...하..."

하지만 한숨과 함께 아리아는 결국 반쯤 넣은 몸을 침대에서 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차라리 마룻바닥에서 자는 것이 스스로의 양심에...

털썩...

그 순간 레오의 팔이 반 정도 들어온 아리아의 허리를 감쌌다. 의도한 것이 아닌, 정말 우연한 잠꼬대였다.

"...레...레오...나..."

아리아는 극한의 정신적 갈등에 놓였다. 이성과 본능이 극단적으로 갈등하며 아리아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잘못했어요..."

그 순간, 레오가 작게 말했다.

"...레오...?"

"잘못했어요... 가지 마요... 제가... 더... 잘할테니까..."

그 순간, 이성과 본능은 하나로 일치했다.

침대에 누워 아리아는 레오를 감싸 몸에 품었다.

흑심이든, 상호이득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소년에게 '괜찮다'는 걸주고 싶었다.

<+--|-|--+>

EP.36 열차에서-1

기묘한 꿈을 꿨다.

엄마가 돌아온 꿈, 회귀한 뒤로는 거의 꿔본 적이 없었던 그립게 쓰라린 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따뜻하게 몸을 안아주었다.

무척이나 기뻤는데, 영문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근데 엄마의 몸이 묘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딱딱하고, 어째 마룻바닥 같은 냄새가...

"...으으..."

그렇게 길몽인지 악몽인지 모를 꿈에 시달리자, 레오는 자연히 눈을 뜨게 되었다.

일어난 자리는 차디찬 침대 옆에 마룻바닥, 아무래도 간호하던 도중에 잠든 것 같았다.

"...나도 많이 물렁해졌구만."

[말랑한 몸을 계속 부비부비하니까 그렇겠지.]

아침 알람 대용으로 현자의 상쾌한 지랄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는 짜증을 냈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나진 않았다.

아마도 숙면 덕분에 피로가 풀려서 그런 것일 거다.

<...혹시 제 꿈을 봤어요?>

[뭔 꿈을 꾸든 좋은 꿈이었겠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안 좋은 꿈을 꾸면 넌 아주 그냥...]

뭔가 묘하게 대화의 방향이 맞물리지 않았지만, 의미는 대강 맞았기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엄마를 봤거든요. 아마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자서 그런가봐요.>

[...하... 그래. 좋은 꿈이었겠네.]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체념한 듯 순응하는 목소리, 그런 기행이 이젠 너무 익숙했는지 레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아리아 아가씨는..."

아리아스필은 침대보와 이불을 완전히 뒤틀어놓은 채, 이 집과 어울리는 시골 처녀처럼 자유분방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저 잠꼬대에 말려들었다면 레오도 어딘가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어지간히 피곤하셨나보네."

배 부근이나 가슴 부위 쪽도 옷도 조금 벗겨져 있었다. 어지간히 난폭히 자지 않는 이상 저렇게 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면 감기 걸려요."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시선을 뗀 체, 그녀에게 이불을 제대로 고쳐 덮어주었다.

[무슨 신혼집 남편 같구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대답하지 마. 각막하고 고막에까지 염증이 생길 지경이야.]

저 양반은 아침부터 신경질이었다. 그것보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고, 왜 생각이 다 그런 쪽으로밖에 안 돌아가는지 의문이었다.

"...아직 여유는 있네."

시계를 보니 서너 시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 여유 있게 기차에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레오나르도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 걸려있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 주방용 앞치마에는 실력 발휘를 할 의지가 완연히 드러났다.

***

아리아의 눈꺼풀이 떨렸다. 여러 소리가 복합적으로 울리자 잠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불이 켜지는 소리, 기름이 튀고 계란이 익는 소리, 물이 끓은 소리.

그 이외에도 부드러운 콧노래가 그 소리를 엮어 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잠기운이 덜 가신 목소리에도 자신의 충직한 기사는 빠르게 반응했다.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일어난 그녀 앞엔 사랑이 있었다.

순수한 애정의 근원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향긋한 조찬의 향을 풍기는 사랑스러운 남자.

"...어... 침 흐르는데 괜찮으세요...?"

지금 입가에 침이 흐르는 건 허기가 져서일 거다.

절대 '앞치마를 두른 레오'의 모습에 욕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치마를 두른 레오'는 귀엽고, 애교스러우며, 사랑스러웠다. 그것마저 부정하는 건 불가능한 진리였다.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 우선 식사라도 하시죠."

레오의 둔감함에 안심하며 아리아는 욕망의 침을 슬며시 닦았다.

"드셔보세요. 간단한 것밖에는 없지만, 영양보충에는 좋아요."

아리아는 이번에는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식탁 위에 펼쳐진 식사들은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전문식 같았으니까.

"...다... 다 직접 만든 거야?"

"네, 아무래도 아침이니 도움을 받긴 그렇잖아요."

아리아는 지금까지 어떤 진미도 먹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재력과 지위로는 세계 각국의 요리사들을 부르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금 깨달았다.

그건 우물 안의 개구리의 천려(淺慮)라는 걸.

"...안 드셔도 되겠어요? 다 식겠어요."

저 사랑스러운 존재가 담은 정성만큼은 어떤 요리사도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잘 먹을게...!"

아리아는 입 안에 음식을 넣으며 생각했다. 이건 음식이 아닌, 사랑이라고.

'...그리고 이건 조금...'

아침에 자신을 깨워주고,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를 함께하니...

'신혼 부부 같아...!'

갓 결혼한 신혼의 부부, 같은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맛은 어떤가요?"

"맛있어! 매일매일 같이 먹었으면 좋을 정도로...!!"

그때 아리아는 당황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제 멋대로 '결혼 망상'을 되새기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조금은 우쭐하게 되는데요?"

레오나르도의 유쾌한 반응에 아리아는 걱정을 줄였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은 여전했다.

"...그게... 어제..."

간신히 음식을 목으로 넘기며, 그녀는 사과를 입에 담았다.

"멋대로 그런 얘기를 해서 미안해... 너한테는 곤란한 얘기일텐데..."

"아뇨. 전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응? 히끕...!"

너무 예상 밖의 대답이었기에 아리아는 높은 딸꾹질 소리를 내었다.

설마 레오나르도도 자신과 같은 계획을 조금은 품은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이 머리를 스쳤다.

"제가 촌장님 앞에서 체면 세워주시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고마워요."

이때 아리아는 몰랐지만, 현자는 온갖 쌍욕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건, 아마 순수한 그녀에겐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었으리라.

"...아...어... 그래..."

하지만 레오의 반응은 틀림없는 저주였으리라. 그녀에게도, 레오 자신에게도 말이다.

***

"벌써 가는 거야?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좀 더 있다 가지?"

딘은 송곳니로 미소를 지으며 슬쩍 제안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원래 나온 목적은 마탑의 허가서니까. 오래 있긴 힘들 것 같아. 변수가 많은지라."

"그럼 잘 갔다와. 그런 허가서는 바로 따오라고."

레오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아누스 촌장이 걸어왔다.

"갈 거냐?"

"예, 오래 못 있어 죄송합니다."

"오래 있어 봐야 밥이나 축내기만 하지. 얼른 가기나 해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누스는 아리아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분명 너도 마탑에 간다고 했지?"

"네? 예, 저는 마법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만..."

내민 손에는 작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봉투만 조금 좋았다면 편지라고 말해도 손색없었다.

"이걸 피시스 나트라라는 사람에게 건내라. 나한테 받은 것도 있으니 분명 잘해줄 게다."

"...아, 감사합니다."

아리아는 그 배려와 어젯밤의 일을 연속적으로 떠올리며 감사를 표현했다.

"그럼 썩 나가. 번개맞은 무릎 시큰거리니까."

"예예, 분부대로 합죠."

독설에도 나름 미운 정이 든 탓일까, 레오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목례를 했다. 아리아도 최대한 정중히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레오를 따라 걸었다.

"레오나르도!"

그 순간 아누스는 기차의 화통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그 아가씨를 울리면 다시는 마을에 찾아오지 마라! 그런 시원치 않은 녀석은 키운 기억이 없다!!"

레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은 채, 대답했다.

"네! 누가 키운 손자인데요! 할머니!"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가버렸다.

[얼굴 빨개진 거봐. 어지간히 기쁜가봐?]

"입 다물어라."

[하긴 그러니까 일부러 번개를 맞은 거겠지. 원래 계획은 그걸 동정표로 할머니라고 듣는 거였잖아.]

저 대화를 듣지 못한 건, 다행이면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

다시 돌아온 기차역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파도가 몰아쳤다. 일등석 티켓을 사지 않았더라면 분명 저 인간 해일에 휩쓸려 오랫동안 표류했을 것이다.

"401호... 여기네요."

레오 일행이 탑승할 객실은 401호, 문 너머에는 두 사람분의 이어진 의자가 서로 마주한 채 설치되어있었다.

[근데 너흰 아예 객실을 대여한 거야? 저번에는 아예 너희 둘만 객실에 있었잖아.]

저번 상황에서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비싸요. 원래는 모르는 승객도 같이 타는 편이죠. 저번에는 그냥 그 자리가 안 팔렸거나, 승객이 안 온 거죠.>

현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의 옆 창가에 떠다녔다. 레오와 아리아는 서로의 옆자리에 앉은 채 기차의 출발을 기다렸다.

"여긴가?"

기다리는 동안, 다른 승객도 401호에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화사한 미소를 지닌, 또래의 소녀처럼 보였다. 자신의 체구보다 살짝 작은 큰 캐리어를 든 게 제법 인상적이었다.

레오 일행도 그녀에게 목례하며 그녀가 자리가 앉을 수 있도록 다리를 오므렸다.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키로 어떻게든 캐리어를 객실 선반에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애처롭게도 그녀의 체구는 선반의 높이에 비해 낮기 그지없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보다 못한 레오가 그녀의 짐을 올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행동에 소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레오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이내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천만에요. 숙녀분."

숙녀라는 호칭에 소녀의 미소는 더욱 발그스레해졌고, 아리아는 조금 붉그레해졌다.

같은 현상처럼 보였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 교차하고 마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분은 어디로 여행가시나요?"

"여행이라 할 건 없지만, 마탑으로 갈 겁니다."

그 말에 소녀는 약간 과장을 보태며 그 대답에 호응했다.

"연인 분들끼리는 마탑이 여행지로 인기가 많더라고요! 주변에 마도구나 마법 음식점이 많아서 인기가 좋아요!"

연인이라는 말에 아리아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가 싶었다. 그렇게 오해해주면 아리아의 감정은 응어리질 것도 없었다.

"하하, 연인은 아닙니다. 친한 친구죠."

하지만 그 풀리는 표정을 레오는 굳이 다시 꼬여놓았다. 아리아의 표정은 붉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시군요. 친구끼리의 여행도 좋죠."

소녀는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며 웃었다. 저 웃음에 아리아는 자연히 주먹을 쥐게 되었다. 아마 비웃음이라는 확정만 된다면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꽂아넣을 것이다.

"숙녀분은 무슨 일로 기차에 타셨는지요?"

레오도 거슬리긴 매한가지였다. 저런 꼬맹이가 어딜 봐서 숙녀라는 것인가, 정신으로 보나 몸으로 보나 자신이 더 숙녀에 가까운데.

"아, 저는 친구들이 불러서 탔어요. 오랜만에 만나자고 해서요."

"그런가요? 친구들을 위해 그렇게 해주시다니 정말 상냥하시군."

저런 게 뭐가 상냥한단 말인가.

고작 해봐야 유흥이나 즐기는 걸 텐데, 방탕하거나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호호, 고마워요."

그 웃음을 보던 도중, 레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다가갔다.

"레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가까이 옮겼다.

"저기 갑자기 왜..."

레오는 그녀 머리에 묻은 작은 꽃잎을 떼어내었다.

"머리에 묻어 있었습니다. 이거 죄송하군요."

"아...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좋은 꽃잎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제는 참는 것에 부아를 느꼈다.

저 불여우 같은 여자에겐 분노가, 믿었던 기사에게는 배신이 여실히 가슴을 찔러왔다.

주먹을 쥔 손은 점차 단단해졌다. 오러를 넣지만 않았을 뿐, 치기만 한다면 분명 이빨 한 두 개 정도는 나갈 것이다.

"숙녀분, 실례가 안 된다면 볼을 내밀어줄 수 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만 확인할 게 있어서요."

"아, 또 뭔가 묻었나요?"

소녀는 별 의심없이 볼을 내밀었다.

이제는 분노와 배신이 인계점에 도달했다. 아리아의 주먹은...

우드득

일순 주먹은 뻗어졌다. 소리로 봐선 코 또는 광대뼈의 골절, 심하면 턱과 이빨도 골절됐을 것이다.

"아뇨."

하지만 주먹을 날린 건 아리아가 아니었다.

"그래야 때리기가 편하거든요."

레오의 주먹은 확실히 숙녀의 안면에 격돌했다.

아니, 숙녀라는 표현이 이제는 적절치 않게 되었다.

그녀의 피부는 점토처럼 녹아내리며,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작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젠장, 그래도 아니길 바랬는데."

열차 강도를 바라보며 레오나르도는 낮게 읊조렸다.

<+--|-|--+>

EP.37 열차에서-2

그대로 나가떨어진 소녀를 보며 아리아는 충격에 금치 못해 입을 벌렸다. 차마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히 일어나니 비명을 지를 새도, 긴장도 하지 못했다.

"레...! 레오!!"

"네. 아가씨."

구타한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레오나르도는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왜 갑자기 때린 거야?! 속은 시원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경악스러운 나머지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표출했지만, 레오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손가락으로 쓰러진 사람을 가르켰다.

"잘 보세요. 아무리 세게 때려도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역변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 말에 아리아는 조심히 레오의 어깨 너머로 쓰러진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연히 경악한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남자...?"

소녀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수염이 더럽게 난 중년의 남성이 안면이 반 정도 으스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하기엔, 그 남성이 입은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불쾌하게도 단서를 남겨주고 있었다.

"폴리모프, 일종의 변신 마법이에요."

다른 존재나 생물로 변신하는 마법, 최소 4서클은 돼야 쓸 수 있는 중급 마법으로 마나가 남아있는 이상 변한 외모는 계속 유지된다.

[...얘가 그정도라고?]

현자는 한심하게 널부러진 여장 남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현명한 현자더라도 바로 납득하기는 힘들 것이다.

"당연히 4서클은 아닐 거예요. 그러면 바로 변신 풀고 마법으로 반격했겠죠."

하지만 폴리모프라는 마법에는 다양한 응용법이 있었다. 개중에는 하위 등급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는 응용술이 있지.

"아마 중급이나 상급 마법사가 폴리모프를 먼저 걸어준 겁니다. 그리고 유지 시간은 자기 마나로 보충한 거고요."

그렇게 하면 굳이 4서클의 마나와 폴리모프의 술식을 몰라도 변신할 수 있고, 다수 사람들 또한 장시간 동안 외모를 바꿀 수도 있었다.

"...어떻게... 안 거야?"

"굳이 따지면 한두가지는 아니죠."

처음 의심을 한 건, 캐리어를 들어올려줬을 때였다.

"무겁더군요. 저런 체구의 사람이 들기엔 힘들 정도로요."

단순히 캐리어는 밀어 옮기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인간은 캐리어를 '들어올려' 선반에 캐리어를 올려놓으려고 했다. 키가 낮아서 실패했을 뿐, 들어올릴 힘은 충분했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

"당연히 더 있죠."

그 다음에 의심을 활성화한 건, 그 캐리어를 든 손이었다.

"소녀의 손이 아니더군요."

"흉터는 없었는데..."

"아뇨. 팔과 손의 크기가 안 맞았어요."

팔과 손의 비율이 어설펐다. 흉터를 지우는데 급급해 폴리모프의 마법을 두껍게 덮으면 손이 부어오른 것처럼 커지게 된다.

집중하지 않으면 모르지만, 인체에 대한 지식이 박식하다면 그 위화감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확신하긴 힘들죠. 신체적 특성일 수도 있고, 일종의 병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레오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증거를 찾으려고 했다.

"아까 머리에 잎을 뗐을 때 있죠?"

"어? 어어..."

잊을 리가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화가 치미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때 얼굴을 오러를 두른 손톱으로 살짝 그었습니다. 크고 깊지도 않지만, 피와 통증은 생길 정도로요."

그리고 그다음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완전히 그었는데도 피는커녕 아프다는 말도 않더군요. 눈썹 정도는 찌푸릴 만도 한데."

이 또한 폴리모프의 맹점이었다. 얼굴을 마법적 점토로 뒤덮은 것이니, 변신 부위에는 감각과 통증이 무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때렸습니다. 원래 폴리모프는 강한 충격을 받아도 풀리거든요."

덕분에 결과의 흑백은 확실히 갈렸다.

단시간에 화려하고도 섬세한 추리를 말하자, 다들 경탄으로 경악을 내보였다.

[너 예전에 흥신소 했냐?]

<용병일 중엔 추리가 필요한 일도 있으니까요. 현상금 사냥꾼하고 같이 다니다가 배웠습니다.>

[어쩐지 고자 같은 놈이 이상하게 여자를 잘 꼬신다 했어.]

<예? 이게 어떻게 꼬시는 겁니까?>

현자는 말이 없었다. 레오는 단순히 뻔뻔한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저런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걸 진짜로 모르는 것도 능력이야... 능력...'>

어찌되었든 지금은 이런 추리를 선보였으니, 남은 건 범인의 의도와 내막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레오는 기절한 남자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그래도 지금은 차장이나 승무원에게 말하는 게 먼저..."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 선택지는 위험 요인이 있어요."

레오나르도는 드레스의 차림에 숨겨진 암기와 소지품을 빼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차장이나 승무원 중에도 패거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직원 중에...?"

가방에 든 것은 직접 봐야 알겠지만, 무게나 정황을 봐서는 테러용 폭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현자님은 그걸 확인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유령은 몸은 이런 일에 제일 적합하고 편리했다. 어디든 통과가 가능하니까.

현자는 바로 가방에서 머리를 박으며 가방 속을 확인했다. 조금 소름끼치지만 저 방식이 제일 확실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그 중에 회중시계와 같은 작은 은장식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 주변을 비추는 거울이 드러났다.

"여깄군."

생긴 형태가 거울일 뿐, 이건 통신용 마도구였다. 그것도 마탑 기념품 상점에서 파는 장난감 따위가 아닌, 군인들이나 사용하는 전문 통신기였다.

[...미친 놈들...]

가방에서 얼굴을 빼낸 현자는 욕설을 연거푸 입에 담았다.

<왜 그러는데요?>

[...이 새끼들, 이 열차를 의식진으로 삼을 생각이야. ]

"...의식진...?!"

[처음 보지만 알겠어. 유독가스형 폭탄이야. 열차를 아예 독가스로 채울 생각이라고. 이 새끼들.]

급히 레오는 남자의 옷을 벗겨 등을 보였다.

"씨발... 왜... 하필..."

아리아가 있는 걸 감안해도, 욕설이 나왔다.

등에 있는 아홉 개의 머리가 달려있는 뱀의 문신.

그건 흑마법사 조직 하나인, [히드라]의 상징이었으니까.

"...흑마법사라고...?"

"예. 이 문신, 전에도 본 적이 있어요."

물론 전생의 일이었지만, 출처를 일일이 설명해줄 순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우리에게 유리한 점을 이용해야죠."

레오는 통신 마도구를 만지며, 목을 가다듬었다. 오러가 성대 주위에 둘러지며 점차 목소리를 본래의 성질에서 변화시켰다.

***

그 상황, 다른 객실들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다만 이리도 조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미 괴한들의 흑마법이 이런 테러 작업에 특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어때? 다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은 공포에 질린 승객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그들은 정신 공격계의 마법에 실성한 나머지 반항할 의지도 없어졌다.

"괜찮은 것 같아. 일등석만 점령하면 의식을 시작해도 되겠어."

두꺼운 로브를 입은 다른 남성의 설명에, 정장의 남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모안, 그 변태 자식은 뭐하는 거야? 빨리 좀 할 것이지."

"돈으로 들어온 변태놈이 그렇지 뭐."

그러던 와중, 통신기가 진동하며 수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뭐야?"

"모안인 것 같은데?"

"하... 빨리도 연락하네."

퉁명스러운 반응으로 정장의 남성은 연락을 받았다.

"어, 나다. 무슨 일이지?"

[...빨리... 지원을 불러... 쿨럭...!]

음질은 떨렸지만, 모안의 목소리는 확실했다. 저런 걸걸하게 간드러진 목소리는 흉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슨 일인데?"

[일등석 내에 기사와 마법사가 있어...! 지금 계속 대치 중인데 지원이 필요해. 최소 3성에 2서클이야...!]

"...하 씨발... 넌 지금 어딨는데?"

[지금 복도에서 대치 중이야...! 부상도 조금 입었어. 최대한 지원이 많이 필요해. 지금 다른 곳은 상황이 어때...?]

"너 빼고 다 점령했어. 제물들은 전부 준비됐다고."

[그럼 일등석으로 와줘... 어차피 의식은 한곳에서 모여서 시작하는 게 낫잖아...!]

"알았으니까 좀 닥쳐. 폭탄만 설치하고 바로 간다고."

그러고 통신은 일방적으로 끊겼다.

"다른 애들도 다 불러야겠어."

"뭐? 우리만 가도 되지 않아?"

"3성 기사에 2서클 마법사는 까다로운 조합이야. 기관실을 지키는 사람만 빼고, 다 불러야겠어. 여차하면 원격으로 폭탄 터트리고 방독면 쓰면 그만이잖아."

저들로선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지였다.

현재 정신 계열 흑마법에 걸린 승객 중엔 폭탄을 해체할 만 인재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 독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형이었다.

'설사 폭탄을 떼도 바로 자폭시키면 그만이야. 독을 중화시키는 법은 모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브를 입은 남자는 열차에 잠입한 모든 흑마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

연락을 들은 조직 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모여 일등석 너머의 칸 앞에 섰다.

열차의 레일과 화통 소리 때문에 정확히 칸 너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방심할 수는 없었다.

"모두 준비해라."

대장으로 보이는 흑마법사는 문손잡이는 붙잡으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한 손가락씩 내려가고, 이내 손이 완전히 오므려지자 대장이 발로 문을 차며 돌입했다.

"...?"

하지만 객실 복도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한 사람은 쓰러진 자신들의 동료였고, 다른 한 명은 푸른 눈과 흰 생머리를 지닌 소녀였다.

다른 일등칸 전용실들은 명령이라도 받은 듯 일제히 문을 굳게 잠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뭐야? 설마 저 애한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리아는 돌진했다. 좁은 통로의 이점은 혼자인 아리아스필만이 누릴 수 있었다.

파앙!!

검집째 들어있는 칼에 맞은 선두의 흑마법사는 그대로 제압되었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이더라도 이런 밀폐된 장소에선 광역이나 범위 공격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야!! 모두 방독면 쓰고 독 뿌려!!"

하지만 저들에게도 당연히 믿는 구석은 있었다.

마법사들은 단체로 방독면을 쓴 채,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독극물을 살포했다.

자신들이 가진 방독면이 없는 이상, 저 가스를 마시면 심하면 즉사, 적어도 기절할 것이다.

"끄아악...!"

"해치워...으악?!"

독가스가 연막이 된 탓일까, 흑마법사들은 오히려 독안개 속에 숨은 아리아를 찾지 못하고 차례로 당해갔다.

"...어...떻게...?"

마지막으로 남은 흑마법사는 조금 걷힌 독구름 속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에는 이미 방독면이 둘러 있었다. 그게 자신의 동료에게 뺏은 것이란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불완전하더라도 지금 의식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승객을 대부분 몰살시키고 작게나마 의식진을 펼친다면 지금보단 확실히 강해질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

억지로 마나와 마기를 짜내며 그는 손에 보랏빛 마법진을 펼쳤다.

"둘 것 같아...!"

아리아는 급히 달려가 그 손모가지째로 검으로 부러뜨렸다.

"지금이다!! 폭발시켜!!"

하지만 독안개 때문에 아리아도 뒤에 쓰러진 남자가 발동한 마법을 눈치채진 못했다

"이겼다!! 고귀한 악이여!! 바친 제물로 우리에게 힘을...!!"

광신적인 외침과 함께 그는 양손으로 마기를 끌어모았다.

"...어...?"

하지만 기이했다. 폭탄의 폭음도, 폭파에 휘말린승객들의 비명도, 죽음의고통에 몸부림치는 원혼들도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행이다. 레오가 훨씬 빨랐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남은 적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남은 독가스들은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전부 빠져나갔다. 레오가 몰래 앞칸으로 접근하기 위해 뚫은 통로였다.

그 사이, 레오는 다른 칸에서 마지막 폭탄을 만지며 말했다. 해체된 폭탄은 그대로 작동을 정지했다.

[근데 어떻게 이걸 해체할 줄 아냐?]

<이때는 신형 폭탄이긴 한데, 제 시대에는 10년도 더 된 구형이에요. 맨손으로도 잘했는데, 이젠 마법까지 있으니 해체하는 건 더 쉽죠.>

새삼스럽지만 회귀자의 지식은 만만히 봐선 안 될 것이었다.

<+--|-|--+>

EP.38 열차에서-3

남은 유독 폭탄을 모아두며, 레오는 더러워진 손을 털었다.

[이제 다 끝난 거냐?]

<아뇨. 기관실이 남았어요.>

기관실에 있는 건, 대략 한 명에서 두 명.

능력 자체는 쳐봐야, 아까의 잔당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문제는 기관실이라는 점에 있었다.

[하긴 기관실 자체를 폭파시키면 거기서 끝이지.]

<게다가 기관사를 인질로 잡는 것도 생각하면 더 까다로워요.>

[그럼 아리아랑 합류할 거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아스필과 합류하면 그 사이에 기관실 일행이 눈치챌 수도 있었고, 오히려 인원이 많으면 불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쉽게 가야죠.>

레오는 뒤로 잠시 물러서더니 기관실이 있는 차량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기습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기습을 위해 레오는 돌진과 동시에 문을 부서뜨렸다.

"끄악!!"

기습이 효과적이었는지, 문을 막고 있는 흑마법사의 잔당 중 한 명이 충격에 나가떨어졌다.

[정면돌파 아니냐?]

<그게 그거죠.>

둘 다 갑작스럽게 쳐들어가는 거니 같은 맥락이었다.

"넌...! 넌 뭐냐...!!"

레오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잔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오러를 두르고 있었기에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한 공격이었다.

"끄아악!!"

두 명이 제압되자 레오는 급히 기관사가 있는 자리로 뛰어갔다. 기관사만 당해도 기차의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몰살당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 살았어요."

다행히 정신 자체는 멀쩡한 것 같았다. 정신이 멀쩡했기에 이런 사태에서도 탈선 없이 운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어떡합니까...?"

"근처 묶을만한 물건은 없습니까? 기절은 시켰어도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겠죠."

쓰러진 두 초짜 흑마법사들을 보며 레오는 말했다. 하지만 조금은 기묘했다.

지금까지 수준을 보면 아직 이들을 통솔하는 대장인 것 같은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대장은 기관실에 있을 것이라고도 판단했는데...'

그 순간, 기관사는 기관실의 서랍을 열며 말했다.

"아, 그거라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방향을 바라보자 독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까의 폭탄들보다도 진한 농도의 독극물, 그 안개가 레오에게로 직격했다.

"...너...설마...."

"아까웠어. 그러니까 기관사까지 잘 확인했어야지."

기관사는 폴리모프한 얼굴을 돌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이 테러를 일으킨 주동자이자 대장이었으니, 방해꾼의 죽음에는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인정. 이건 예상 못 했네."

하지만 레오는 안 죽었다.

인정하는 의미에서 레오는 이번엔 확실히 기관사였던 흑마법사를 주먹으로 으스려뜨렸다.

"크악...?!"

갑작스레 부러진 코뼈를 만지며, 그는 멀쩡한 레오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레오의 입가에는 방독면이 씌여져 있었다. 자신들의 것을 뺏은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투박하게 만들어진 생김새였다.

[검은 돌을 방독면으로 쓰냐?]

<급하니까요. 진짜 유용하네요.>

다용도 암석에 호평하며 레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런 장난감으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다음 마법은...!"

"그러니까 그 전에 끝내야지."

[블리자드]

쥔 주먹에선 이미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한랭의 눈보라가 기관실에 살얼음을 만들며 온도를 떨어뜨렸다.

"그딴 1서클 마법으론 손가락도 못 얼려!!"

그렇게 자신만만한 외침을 내며 그는 독가스를 다시 내뿜었다.

"...어?"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 독가스는 전부 기운 없는 고꾸라졌다. 지금 살포한 독구름 뿐만 아니라, 이미 떠다니고 있는 독들마저 아래로 가라앉아 달라붙고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찬 공기는 무거워서 가라앉아. 그리고 이 독은 액체 입자로도 돼 있으니까 얼면 효과도 없어져."

굳이 회귀자가 아니더라도, 상식과 관찰만 있다면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 화염 마법으로...!"

"두겠냐?"

나아가는 주먹은 나불거리는 주둥아리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덤으로 광대뼈과 두개골이 약간 뭉그러지긴 했지만, 그건 레오에게 알 바 아니었다.

"끝났네요. 이제 아리아 아가씨만 부르면 되겠어요."

아리아스필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5서클 마법사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런 장소에서 아리아를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했고, 만약 있다면 레오가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근데 레오나르도.]

<예? 왜요?>

현자는 약간 의아한 톤으로 기관실을 바라보았다.

[근데 너 기차 운전할 줄도 알지?]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오는 당황했는지, 얼굴이 풀렸다.

[결국 운전할 기관사가 없어진 거잖아. 그럼 기차는 누가 운전하냐?]

몰래 침입한 흑마법사라고 해도, 이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 건 그 범죄자였다.

"...아..."

[야... 너 설마...]

레오나르도는 용병으로서의 삶과 전생의 무사 수행을 통해 전투술 뿐만 아닌, 다양한 경험을 쌓아올렸다.

현자의 혹독한 마법 수련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던 것도, 그 경험의 산물 중 일부였다.

"...괜찮아요. 아마도."

하지만 기차를 운전할 일은 전생에서도, 현생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게다가 기승나 승마라면 몰라도, 기차 운전은 배울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마부 없이 마차타는 거랑 뭐가 달라?!]

"선로 위에만 달리는 거니까 괜찮다고요. 선로에 이상만 없으면 괜찮아요."

과속을 해서 탈선만 하지 않는다면, 기차는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것이다.

[야... 잠깐만...!]

현자는 기관차 벽을 관통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씨발!! 빨리 멈춰!!]

<왜요?!>

[선로에 나무가 쓰러졌어!!]

<미친!!>

레오는 급히 브레이크를 향해 뛰어갔다. 아무리 초심자일지라도 브레이크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부딪친다!!]

"으아아아아아아!! 안 돼에에에에!!!"

레오는 브레이크도 잡지 않았다. 오히려 급정지는 기차를 전복시킬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비명만이 나왔다.

"레오나르도!?"

급히 달려온 아리아는 기관실에서 비명을 지르는 레오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안 다쳤어!?"

"...그...그게 지금... 선로에..."

그런데 무언가 기묘했다. 기차의 속력을 생각하면 이미 부딪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그런데도 기차는 여전히 순탄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혹시 창문 밖을 봐주실 수 있나요?"

"어? 창문 밖?"

아리아스필은 그 부탁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 밖을 내다보았다.

"...왜? 아무것도 없는데?"

"선로도요?"

"어? 어어. 아직 역도 안 보이는데?"

레오나르도의 시선은 자연히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에게 향했다.

[큽... 으아아아아~ 안 돼에에에에~]

마탑에 가면 저 인격을 기만하는 악령을 없애는 방법부터 연구해야겠다고 레오는 다짐, 아니 맹세했다.

***

다행히 쪽팔린 거만 빼면, 이야기의 결말은 잘 풀린 편이었다.

이후엔 철도 경비원들 및 마도기사단들까지 와서 기차를 정차시키고, 승객들의 흑마법을 풀며, 흑마법사들을 체포했으니까.

다만 아까의 비명이 쪽팔릴 뿐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이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 벌어질 뻔했어요."

전문 경비단과 마도 기사단 대표는 레오와 아리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살해하지 않고 제압한 덕분에, 이 사건과 조직의 배후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본래라면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기에 살상하는 전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계책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은 채,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수사를 진행해야할 기사단과 경비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었다.

"근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가만히 있던 아리아스필은 저들의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낀 탓일까, 참지 않고 질문을 내었다.

"네, 말씀하시죠."

"왜 흑마법사들은 이런 짓을 한 건가요? 사실 제대로는 이해가 안 가서..."

흑마법의 체계를 모르는 그녀로선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모르는데도 이해하면 좀 섬뜩할지도 모른다.

"그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유력한 것은 흑마법의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흑마법..."

흑마법

같은 마법이라 불리고는 있기에 다들 흑마법과 일반 마법은 유사할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흑마법과 마법은 사실상 다른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윤리적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놓고 봐도 말이다.

"흑마법은 일반 마법과 달리 지식보단 마기와 감정을 중심으로 기술을 전개합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게 쉽게 말하자면..."

"마법은 수학적이지만, 흑마법은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어디까지나 긍정적으로 표현했을 때의 예이지만요."

마법은 일일이 계산하고 산출하는 것이지만, 흑마법은 계산보단 해석을 중심적으로 사용한다.

그것 외에도 차이점이 다양히 있지만, 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선 이 차이점이 제일 중요한 요점이었다.

"문제는 흑마법은 자신의 감정으로 충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이었죠. 그래선 마법보다야 효율이 떨어져요."

그렇기에 흑마법은 대안을 강구했다. 그리고 이 개같은 짓거리가 그 방법 중 하나였고.

"기차에서 다량의 사람을 학살하면 그만큼 생명력과 원한, 분노, 절망과 같은 양질의 감정을 가져갈 수 있어요. 시체는 이후에 부산물로서 팔기도 쉽고요."

그리고 나머지는 간단하다. 그 악의를 마나와 가공시켜 마기를 만들어 흡수하거나, 악마와 또다시 계약하는.

흔히 보이는 악순환 중 하나였다.

"좋은 감정을 쓰는 건..."

"작은 분노가 큰 행복보다 오래 갑니다. 그런 비합리성이 흑마법의 추상적 요소와 힘을 극대화시켰죠."

그렇기에 흑마법사들은 지탄 받으며 돌팔매를 맞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을 위해서 어떤 제물이고, 악행이고를 가리지 않으니까.

"...제법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어린 나이에는 알기 힘든 지식일텐데..."

조금 뜨끔하긴 했으나, 레오는 태연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마법을 익히다보면 풍문이라도 듣게 되죠."

"...그렇군요.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눈을 모자로 살짝 가렸다. 마법사에겐 저런 풍문을 아이가 듣는다는 것이 썩 기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체포도 끝났고, 설명도 하셨으니 가셔도 좋습니다. 시간을 너무 끌어서 죄송하군요."

"감사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인사하며 아리아스필과 함께 역을 빠져나갔다. 안 그래도 수사와 체포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차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차였다.

"근데 마탑에는 어떻게 가?"

"가는 방법이야 많지만... 시간이 애매하니 우선 쉴 장소부터 찾아보죠."

지금은 점심 시각에 휴가 기간이니, 마탑 주변이 한창 붐빌 시각이었다. 거기에 그런 소동과 광경을 봤으니 잠시 휴식을 취할 장소를 찾을 필요도 있엇고.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아리아스필 일행 앞에 한 남자가 걸어왔다.

수려한 금발에 싱그러운 녹안, 거기에 고급 모자와 정장까지 입으니 그 미적인 인상에 호감을 더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신지."

레오는 살짝 경계하는 눈치로 남자에게 물었다.

"이거 소개가 늦었군요."

남자는 신사적으로 모자를 벗으며 소개에 인사를 곁들였다. 격조있는 태도에선 품격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전 제프리 페드니안이라고 합니다. 청탑의 4서클 마법사로 레오나르도 님을 안내하기 위해 왔죠."

"그러시군요."

이내 그 제프리의 눈은 아리아스필에게도 향했다.

"안녕하신가요? 꼬마 숙녀님. 리오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슬며시 아리아의 손을 잡아 입술을 대려고 했다.

"아, 죄송합니다."

레오는 그런 아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자연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길가에 큰 벌레가 있더군요. 밟으시면 신발이 더러워질 것 같아 실례했습니다."

제프리는 실눈과 입술의 꼬리를 올리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레오의 표정은 약간 굳어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죄송하지만, 그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큰 소동을 겪기도 했으니 조금 휴식을 취한 뒤 가기로 하겠습니다."

"아, 그러시다면 제가..."

"그것도 괜찮습니다. 리오스 님께 추천받은 장소는 직접 가보고 싶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아리아의 손을 잡은 채 시내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자주 보이지 않는 기이한 행동에 아리아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가 왜 저러지?'

평소에는 시비나 무례를 겪지 않는 이상, 귀족 자제보다 예의있는 레오나르도였다.

저 남자는 무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짐작가는 것이라고 해봐야...

"...레오나르도."

"네? 말씀할 게 있으신가요?"

"혹시 저 남자가 나를 만지는 게 싫어?"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가 반응을 보였던 것, 제프리가 손등 키스를 하려던 직전이었다.

그렇다는 건,

"네,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저 남자랑 같이 있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말에 확신이 생겼다.

이건 분명...!

'질투하는구나...!! 다른 남자한테!!'

리오스가 추천해준 책에서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남자는 한 번 점찍은 여자가 있다면,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만지는 것조차 불쾌한다고 말이다.

"...으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항상 어른스러웠던 레오나르도에게도 저런 귀여운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괜찮으세요?"

"어? 응응! 난 다 이해해!!"

"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는 급히 뒤를 돌아보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너도 남자이긴 하네. 질투도 다하고.]

<저 새끼가 흑마법사니까요.>

[...뭐?]

<정확히는 나중에요. 이삼년 지나고 흑마법사가 되는 의식을 펼쳐요. 그래서 제가 죽이고요.>

전에 현자는 마탑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혀를 끌끌거린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도 그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데, 그 까닭은 간단했다.

<지금 마탑엔 장래유망한 흑마법사들이 드글거립니다. 제가 온 이유엔 그 자식들 소탕도 있어요.>

그 악행을 일일이 봐오고 처리해온 레오였기 때문이었다.

[...하... 미친... 근데 어떻게 잡게? 개같아도 아직은 아니라며.]

<지금 저지르고 있는 범죄로요.>

레오나르도는 표정을 찌푸리며 불쾌한 예시를 대었다.

<그 새끼는 같은 경우엔 원조교제와 성상납을 통한 시험지 답안 유출이 있겠군요.>

[...시바, 이번엔 네가 잘했다.]

현자와 레오가 드물게 의견이 일치했다.

<+--|-|--+>

EP.39 마탑-1

마탑

마법사들이 모인 연합이자, 마법을 연구하는 학회, 또는 불법적인 마법과 마법 개발을 감독하는 관리국으로.

현재는 각 분야마다 청탑, 적탑, 백탑, 흑탑으로 나뉘어있다.

이는 분야에 따라 효율적으로 분업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각각의 마탑이 탈선치 않도록 견제하고 협력하는 권력의 분할이었다...

<...라는 게 표면적으로 말하는 형태죠.>

그런데 사실 속알맹이는 차라리 비어있는 게 나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마법 연구는 대부분 특허 쟁탈전으로 바뀌었고, 이젠 몇몇 마법사는 마법을 감독하는 수준이 아니라 독점하려고 있어요.>

현자가 살던 시대에도 당연히 순수한 의도로만 마법을 연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대 때에는 사업과 권력의 수단보다는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더 높게 두었다.

그것만큼은 현자 본인이 자부할 수 있었다.

[하... 그리고? 흑마법에 손댄 마법사 말종들은 누구냐?]

그런 자부심이 짓밟히는 것에 착잡함을 느끼며 현자는 물었다. 그 한숨에 레오는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진 현실을 직시시킬 물건을 꺼냈다.

[...왠 노트?]

<원래라면 직접 펼치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체가 없는 유령인지라 너무 어려운 요구인 것 같았다.

<목차만 넘겨드릴게요.>

[...근데 무슨 노트가 소설책만 해?]

현자의 말대로 레오가 든 노트는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 마탑의 교과서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목차는 10페이지나 되었는데, 이건 마치 작은 사전을 연상케 만들었다.

[1순위, 2순위, 3순위... 사람에 무슨 등급을 매겼냐? 게다가 한둘도 아니고.]

<저라고 좋아서 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정보 정리는 체계적인 편이 낫잖아요.>

대략적으로는 죽인 사람의 수를 중점적으로 계산했다. 그 외에도 위험도나 성격, 행적 등을 사람마다 일일이 기록해뒀으니 노트는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일 먼저 죽여야할 놈은 누군데?]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당장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죽이는 것은 자신도 의심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처리 방식은 이걸로 해야죠.>

[이번엔 뭐냐?]

페이지를 넘겨 뒷부분으로 향하자, 「즉결 처분 가능 대상」이라는 페이지가 나왔다.

<아까 그 페도 새끼처럼 지금 당장 마탑에서 뒷공작을 벌이고 있는 놈들도 있어요. 개중엔 흑마법에 이미 접근한 말종도 있고요.>

[...오호라...]

현자가 흡족하게 썩은 미소를 내보였다. 하긴 개짓거리를 한 후배를 갈구고 팰 기회가 있다면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도착했어! 저기지?"

아리아가 크게 손짓하며 레오를 불렀다. 저렇게 들뜰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는데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네, 맞네요."

아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높은 탑이 네 채 세워져 있었다. 사실 탑보다는 색색별의 기둥 같기도 했는데, 그 탑들을 이어서 사각형 형태의 건물도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시절 땐 저런 네모난 건 없었는데?]

<마탑에서 인원이 너무 늘어난 나머지, 수용 인원을 늘리기 위해 건물 추가로 축조했대요.>

[오, 그건 조금 괜찮은데? 얘들도 융통성이라는 게 생겼구만.>

그 방안이 괜찮다는 것에는 레오나르도도 동의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법과 마탑에 대한 사람들의 거리감도 준 편이었으니까.

"들어가죠."

레오나르도의 말에 아리아도 고갤 끄덕이며, 마탑으로 향했다.

"리오스...?"

그때, 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한 여성은 아리아 일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표족한 귀가 그녀의 종족을 은유적으로 알리는 것 같았다.

"네?"

"아... 아니네. 죄송합니다. 착각했어요."

그녀는 연신 하품을 하며, 다크서클이 진한 눈을 연거푸 비볐다. 척 봐도 며칠은 넘게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제 오빠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오빠...? 리오스 동생이에요...?"

기운빠진 목소리로 꾀죄죄한 여자는 물었다. 살짝 치면 바로 기절할 것 같았다.

"네...? 그런데요...?"

"제프리 씨가 배웅을 가셨는데... 못 만나셨나요...?"

레오나르도는 자초지종을 가볍게 설명했다.

열차에서의 소동과 제프리가 해주는 안내의 거절까지 말이다.

"...그렇군요... 많이 힘드시겠어요오..."

사실 힘들어 보이는 건 그녀 쪽이었다.

[...쟤 왜 저래? 무슨 리치야?]

<말이 너무 심하네요. 저렇게 봐도 하프 엘프입니다.>

저 뾰족한 귀가 그 사실을 현자에게도 이해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납득되지 않는 점도 여전히 있었다.

[그럼 왜 저렇게 죽을상이야?]

<대학원생입니다.>

[다른 의미로 인간을 포기했구만.]

<인정합니다.>

"소개가 늦었네요오... 전 아메리 에스프라고 해요. 흑색 마탑 대학원생에... 하프 엘프에 4서클 마법사죠오오..."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아리아스필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하하하... 괜찮답니다. 잠을 못 자서 그래요오..."

그녀는 힘겹게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다섯 손가락을 폈다.

"아... 다섯 시간이나..."

"5일 동안 철야해서... 커피 마시면 나아질 거에요..."

그녀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고 안쓰러운 공기가 주변에 감돌았다.

[하루만 더 지나면 리치 되겠네.]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레오나르도였다.

"...혹시 저희를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행여나 길가다가 졸도할까 걱정된 레오나르도는 나름대로 배려를 넣은 채 부탁했다.

"예에...? 괜찮을까요...?"

평소 아리아스필이라면 조금 질투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어지간히 안쓰러운지라 그녀도 차마 거절하지 않았다.

"예... 그럼 최선을 다해서... 안내를 하겠습니다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구부정한 허리를 기지개로 피며 레오나르도 일행을 안내하러 갔다.

"그러면...바로... 마탑주실로 안내할까요오...?"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원래라면 조금은 안내해달라고 할 생각도 있었지만, 저 안쓰러운 대학원생에게 그런 노동마저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바로 안내하겠습니다아..."

그녀는 낡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어?"

그 순간 바로 일행들은 어느 건물 앞으로 전이되었다. 마법진도 없이 순식간에 이동하자 아리아스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순간이동 마법입니다아... 최대한 빠르게 왔어요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마법진 없이..."

정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고속으로 마법진을 형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법진은... 바닥에 있습니다아.... 그리고..."

아메리는 자신의 펼친 허름한 종이를 내보였다.

"이 지도에는.... 그 마법진과 좌표가 연결되어 있어요오... 언제 어디서는 바로 순간이동이 가능하죠오..."

[이건 대단한데? 내 시대에도 이런 마도구를 만드는 놈은 드물었다고.]

현자가 호평한 만큼 레오도 제법 경악했다. 레오도 마법에 발을 담근 만큼, 저 지도의 유용성과 가치에는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정말 대단한데요?"

"에헤헤... 저도 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사실은 교수님들이 새벽에 자주 부르셨는데... 교통비도 없고... 마차도 없을 때가 많아서요... 그래서... 만들었어요... 헤헤..."

왜 분명 본인은 웃고 있는데, 다들 안쓰러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까.

짚이는 구석이 너무 크고 많은지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오스 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오... 순간이동은... 리오스님이 잘하시거든요..."

분명 의도는 좋았을테지만, 결과가 저런 지라 선뜻 칭찬이나 호응이 나오지 않았다.

광산용 폭파 마법을 개발했다가 테러로 악용된 사례를 본 현자가 옆에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럼 흑탑주님을 부르겠습니다아..."

아메리는 빌빌거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어...?"

노크에도 대답이 없자, 아메리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문 근처로 바라보았다.

"아... 지금은... 안 계시네요오... 아마도 점심을 드시는 것 같아요오..."

"그러면 괜찮습니다. 잠시 뒤에 오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안내를..."

그건 허락하기 몹시 힘들었다.

윤리와 양심적인 문제로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안내는 괜찮으니... 적당히 쉴 곳을 알려주시겠어요? 도서관이라던가...?"

"아아... 알겠습니다아..."

그녀는 다시 노력과 고통의 산물인 순간이동 지도를 꺼냈다.

눈을 한번 깜빡하자, 바로 도서관 입구로 이동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책이라도 추천해드릴까요오...? 제가 최선을 다해서..."

"아뇨. 괜찮아요. 덕분에 편하게 돌아다녔네요."

그녀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시선이 맛이라도 간 것처럼 양눈의 시선이 정반대를 보고 있는 것이 보기 불안했을 뿐이었다.

"그럼 사러가려던 커피를..."

"그냥 주무세요."

"...예에...?"

"저희를 안내해준다고 핑계를 대면 될 겁니다. 숙소나 집에 가서 주무시면 되겠죠."

"아아..."

그녀는 사시가 됐었던 눈이 또렷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잘 수..."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있는 시계가 빛났다.

"어? 그건 뭐에요?"

"잠시만요오..."

그녀는 시계를 얼굴에 가까이 댄 채 대화를 시작했다. 몇 번을 '예'와 '네'로 대답한 끝에 그녀는 침울하게 '알겠습니다아...'라고 답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아... 교수님께 갔다올게요오..."

수면이라는 염원했던 꿈이 깨부서지자, 다들 속으로나마 애도를 표했다.

[...쟨 솔직히 흑마법사 돼도 이해한다.]

<그래도 전생에는 계속 백마법사로 일해요. 대학원은 다행히 졸업하니까요.>

[...인간 승리다. 진짜 인간 승리야.]

인간에 대한 찬가를 논하자면, 아마 레오나르도는 바로 저 여인의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단순한 농이 아닌, 경외를 담은 진심이었다.

"...근데.. 이건..."

아리아스필은 떨어진 허름한 지갑을 들었다. 넝마가 된 상태로 봐선 주인이 누군지 추측을 넘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떨어뜨린 것 같네요. 제가 돌려드릴게요."

"아, 근데 어디 갔는지 알아?"

"사용한 마법식이면 보면, 대강 위치는 알겠더라고요. 근처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그동안 간단한 책이라도 읽어주세요."

아리아스필은 별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고, 독서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갔다올게요."

"응, 빨리 와야 돼."

레오는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근데 무슨 책을 읽지?"

아리아는 마탑이 아니더라도, 마법에는 상식과 지식이 얕은 사람이었다. 그런 아리아에게 마탑의 책들은 전부 어려운 암호문이나 다름없었다.

"고등 마법 융합을 위한 원소 기호"

[안정적인 마법진 구성을 위한 마방진]

"전부 어려운 것들뿐이네..."

그렇게 책장을 흝던 사이, 아리아의 눈에 그나마 익숙한 용어가 있는 책이 들어왔다.

「인체와 생명의 신비」

"이건 조금 쉬워보이는데..."

인체와 생명이라면 분명 검술이나 체술에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론적인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아리아는 책을 폈다.

그리고 아리아스필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지식을 레오가 오기 전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

EP.40 마탑-2

아리아가 '인체와 성'이라는 목차를 보는 사이, 레오나르도는 마탑의 강의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데 너무 강의실이 많은데? 찾을 수 있겠어?]

<저쪽에 있네요.>

레오가 손가락으로 작은 점을 가리켰다. 너무 멀찍이 떨어져있지라 현자는 간신히 시력을 집중해야 그나마 보일락말락했다.

[...너 유목민족이었니?]

<이미 제 고향 보셨잖아요.>

[아닌데 저게 보여?]

<노력하면 다 보입니다.>

옛 분들이 좋아하는 근성론을 들먹이며, 레오는 강의실 입구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한 대학원생에게로 걸어갔다.

"...어딨지...? 분명 여기에..."

"아메리 씨, 이걸 떨어뜨리셨어요."

주머니를 뒤집으며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레오는 주운 지갑을 내밀었다.

"아...! 여깄었군요오...! 감사합니다아...!"

그녀는 거의 울먹이는 기색으로 지갑을 받으며,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오... 거기에... 식비로 산 식권들이 다 들어있어서... 없었으면... 이번 달에도 숙주나물만 먹을 뻔했어요오..."

'이번 달에도'라는 단어에서 저번달에는 그 고생을 겪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타까운 나머지, 레오나르도는 동정의 의사조차 표하지 못했다.

"...아, 혹시이... 레오나르도 군도... 강의를 들어보시겠어요오...?"

"예? 그래도 되나요?"

"예에...! 가끔 견학을 오시는 분들도... 강의를 듣고 하거든요오..."

레오나르도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마탑의 교육 수준도 알 수 있을테니, 오히려 환영해야 마땅했지.

"그럼 사양 안 하겠습니다."

[어디 후배놈들이 잘하는지 볼까?]

강의실의 문을 열자, 넓은 강당과 같은 형태로 학생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그 중심에는 교탁에 선 교수가 있었다.

뚱뚱한 체격에 기름기 있는 콧수염과 머릿결은 안타깝게도 썩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아, 레오나르도 군. 이 강의는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오..."

"예? 왜요?"

그녀의 조언에 레오나르도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는 설명에 복잡함을 느낀 것일까 드물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럼 딱 10분만 들어보세요.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오..."

그런 기묘한 당부에 의문을 풀기 위해 레오와 현자는 묵묵히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대략 7분이 지나자 레오와 현자는 또다시 의견이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딴 게 강의냐?]

"이런 게 강의야?"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물론 현자와 비교하면 못할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나 한심한 강의였다.

[이정도면 강의가 아니라 그냥 주입식 세뇌잖아.]

지금까지 나온 강의는 단순히 고위 마법진의 암기, 그리고 그에 대한 사용법과 의의 정도밖에 없었다.

단순히 단시간에 가르친 마법진이 많은 것 이외에는 하등 가치가 없는 주입식 강의였다.

현자가 아니라, 리오스조차도 이런 무가치한 강의를 하지는 않았다.

웃기는 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빠르고 더 정확히 마법진의 형태와 정의를 말하는가를 평가할 뿐, 그에 대한 의의나 응용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스피드 퀴즈를 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하... 왜 안 들어야하는지 알겠네요. 얼른..."

"...저기... 레오나르도 군...?"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며 아메리는 당황스러운 눈치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이내 레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메리 뿐만 아니라, 학생이 레오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가르치고 있는 교수도 말이다.

[...아마도 교수가 제일 먼저 본 것 같은데? 그래서 다같이 널 바라본 거고.]

한숨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아메리의 조언을 빨리 듣지 않은 것이 회귀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스러웠다.

"거기, 누구지? 내려와라."

거만하고도 강압적인 어조, 차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레오는 아무 말 없이 교탁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걸아가는 동안, 몸을 흝는 학생들의 시선은 레오의 발걸음을 무겁게만 만들었다.

"...아까 내 강의에 평가를 내렸던데, 다시 말할 수 있겠나?"

"그게 그건..."

갑자기 그는 육중한 손으로 교탁을 내려쳤다.

"그게 아닐텐데? 똑같이 말해보라고."

이젠 남아있는 교양마저 없어졌다. 의심할 것도 없는 문책을 위한 명령이었다.

"...'이게 강의냐'와 '왜 안 들어야하는지 알겠네요.'리고 말했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야, 그냥 사과해?! 넌 자존심도 없냐?]

현자의 말을 듣고 싶긴 했지만, 지금은 머리를 숙이고 참아야했다. 행여나 중급 마법 허가서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게 더 큰 손해였다.

"아니.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내 기꺼이 기회를 주도록 하지."

어설프게 내는 위선적 자비, 솔직히 사람만 없었더라면 면상에 토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강의가 불만스러우니 자네가 직접 강의해보게. 정식 대학을 졸업한 교수보다 자네가 더 나은 강의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누가 봐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마탑의 학생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겠다는 의사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 난 앉아있도록 하지. 기대하도록 하겠네."

몇몇 학생들은 조소를, 다른 학생들은 교수의 유치한 처벌에 한숨을 소폭 내쉬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네요.>

[잘됐네. 교실을 완전히 뒤집어놓으라고.]

현자의 제자는 전혀 불안한 기색이 없었다. 같이 있는 현자도 마찬가지였다.

타닥타닥

레오나르도는 아무 말 없이 칠판에 마법진을 세 종류 정도 적었다.

"이 마법들은 모두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1서클의 기초마법이니까요."

그 말대로 전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배운 마법들이었다.

[파이어볼]

[라이트닝]

[매직 미사일]

"그런 기초적인 걸 가르치려고 합니까? 초등생 아카데미는 아닐 텐데요?"

교수는 레오나르도의 서클을 대강 파악한 것일까, 조롱을 던져대었다.

"...그럼 이 기초적인 것에 대해 하나 묻도록 하죠."

레오나르도는 그런 조롱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건지, 건조한 목소리로 주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이 마법들은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요?"

"그건 간단..."

"참고로 서클과 원소에 대한 질문은 아닙니다. 그보다 원초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니 부디 잘 고민하시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레오의 강의를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그것 이외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 같으니,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마법진에 차례로 점선을 그렸다. 파이어볼은 수직으로 점선을, 라이트닝은 가로로 점선을, 매직 미사일은 옆쪽에 180도로 반전된 형태의 마법진을 그려내었다.

"이 마법진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칭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차이는 그 대칭이 상하, 좌우, 점 대칭의 형태로 나뉜다는 것에 있죠."

그 말에 다들 조금씩 호응을 시작했다. 뚱보 교수가 눈치를 줬기에 다시 사그라들었지만, 몇몇 학생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법진들은 단순한 예시일뿐, 사실 모든 마법진에는 대칭이 있습니다. 단지 고위 마법으로 갈수록 복잡해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죠."

다시 질문은 이어졌다.

"그럼 어째서 우린 대칭을 마법진에 넣을까요?"

그 질문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암담한 교육 현장에 슬픔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근간은 대칭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눈치이자 레오는 간단한 예시를 들기 위해 테이블에 놓은 구슬을 들어 회전시켰다.

"이 구슬은 아무리 돌려도 같은 모양을 유지하죠. 변화해도 같게 측정되는 것, 이게 대칭성의 간단한 예시입니다."

이제 몇몇 학생들은 슬며시 필기구를 꺼내들었다. 오랜 시간 교육의 현장에 있었던 학습의 프로들의 감각이 이 강의를 조금이라도 문자로 남기려는 본능을 자극했다.

"마법진이 대칭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주를 이루는 소재인, 불, 물, 바람... 그런 원소를 마나로 끄집어내기 위해선 대칭이 가장 효율적인 형태라고 말할 수 있죠."

우주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마법진도 대칭이다.

상식과 마법의 기초만 있다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강의였다.

그 순간, 한 학생이 조심히 손을 들었다.

"네, 질문해주시죠."

"...그럼... 대칭의 종류에 차이점을 두는 이유는 뭔가요?"

눈치를 보며 그녀는 쭈뼛거렸다. 이유는 교수의 따가운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그것 또한 간단합니다. 인간이 마법을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것을 조율하기 위해섭니다."

대칭의 형태를 조절하는 건, 일종의 가공 작업이었다. 불에도 요리에 쓰는 불꽃과 철을 녹이는데 사용하는 불이 다르듯, 마법에도 가공 수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법진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런 것 또한 가능하죠."

레오는 손 위로 마법진을 형상화시켰다. 파이어볼의 형태였지만, 상하 대칭이 아닌 점을 기준으로 180도 대칭의 형태였다.

마법이 발현되며 화살과 같은 불꽃이 발사되었다.

"...이건..."

"이는 파이어볼과 매직 미사일의 융합 형태로, 마법을 조합하는 기초적 방식입니다. 이해와 응용, 이를 통해 무수히 많은 마법을 개발할 수 있죠."

레오는 칠판에 그려진 마법진들에 손을 대며 말했다.

"물론 이 마법진들은 기초이자 정석입니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죠."

그리고 그 마법진을 지우개로 지워나갔다.

"하지만 마법 사용자가 아닌, 마법사로 살아가기 위해선 그 이상의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석을 기억하되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학자와 마법사의 본질이니까요."

교수는 할 말을 잃고, 학생들은 급히 필기하기 바빴다.

퍽 만족스러운 풍경에 레오는 짧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걸 끝으로 레오는 말을 멈췄다.

강의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짝...짝짝짝짝!!

약했던 손뼉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이어졌다.

모든 학생들은 이견없이 레오나르도의 강의에 환호했다.

<근데 이제 어쩐다...>

[왜? 이 정도면 잘한 거야. 나보단 모자르지만, 저 인면수심 돼지보다야 몇배는 낫다고.]

<그건 그런데... 저 돼지가 교수인 이상, 제 중급 마법 허가서에 이견을 제기할 수도 있어요.>

해그만 퍼그넌 교수

즉결 처분 대상도, 흑마법사도 아니지만 레오나르도는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좋은 감정은 없었다.

아까도 보았듯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교수인 주제에, 거만하고 오만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하... 설마 쪼잔하게 이의를 제기하겠어?]

<그거 왠지 복선 같으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말죠.>

복선에 바로 응하기라도 한 건지, 해그만 교수는 레오나르도에게 달려왔다.

"자네...! 학번하고 이름이 뭐지!?"

목소리만으로 칭찬할 의도가 아닌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게... 전... 레오나르도라고 합니다. 학생은 아닌지라, 학번은 없습니다."

그 말에 학생들은 다들 의문스러운 기색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설마 자네... 마법 허가서를 따러온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육중한 교수의 얼굴에 썩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복선이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흐...그럼..."

짝, 짝, 짝

짧고도 균일한 박자의 박수, 마치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박자에 손을 맞춘 것 같았다.

"훌륭한 강의였네. 레오나르도 군."

걸어온 것은 검은 옷차림을 한 남성이었다. 레오와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한 남성, 그에 비해 몹시 창백한지라 닮았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쟤...설마...]

그 설마였다.

"마...마탑주님...!!"

흑색 마탑의 마탑주, 베르난 베르데인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걸 받을 자격은 충분하군."

흑색 마탑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중급 마법 허가서"

〔대상: 레오나르도〕

옆에는 마탑주 허가의 증거인 특수 인장이 찍혀있었다.

"...이렇게 바로... 주시는 건가요?"

"그럼 미룰 이유는 어딨지? 난 불필요한 절차는 생략하네. 시간 낭비거든."

[얘는 그래도 말이 통하네. 다 꼴통은 아니구만.]

레오나르도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가 내민 허가서를 받으며 레오는 감사히 허가서를 받들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흑탑의 대학원에서..."

"그건 싫어요."

[아니네. 쟨 악마야.]

이 생각도 서로가 동의했다.

<+--|-|--+>

EP.41 마탑-3

"...휴... 간신히 거절했네요..."

흑탑주는 계속해서 대학원생을 빙자한 노예 계약을 권유했다. 사람도 많은지라 거절하는데도 한두시간 걸린 게 아니었다.

[잘한 거야. 쟤 봐라.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현자의 말대로, 앞에 있는 대학원의 노예는 네크로맨서와 계약한 언데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차라리 언데드는 통각이라도 없으니 그나마 덜 안타깝기라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오... 아직 어리시니이... 대학원은 천천히 생각하셔도 돼요오..."

저 정도면 성녀나 다름없었다.

자신이나 현자 같았으면 같이 죽자는 의미에서 물귀신마냥 같이 하자고 꼬셨을 것이다.

"...근데 아메리 씨는 왜 대학원생을 했나요?"

슬며시, 그리고 자연스레 궁금했던 의문을 물어보았다.

왜 저렇게까지 하면서 대학원생을 하는지, 같은 인격체이자 생명체로서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 재밌어서요. 헤헤... 지금도 재밌어요... 그리고 나중에 학위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오..."

분명 칭찬할 정도로 바람직한 이유인데, 왜 더 안타깝게 보일까.

그 의문은 모두 알지만 풀지는 못할 난제였다.

"대학원은 졸업하는데 오래 걸린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오...! 하프 엘프도 장수하거든요...!"

이유가 납득은 되는데, 너무 처량했다.

[...저건 마법의 미래가 밝다고 봐야할까?]

<...그렇다고 생각하죠. 흑마법사로 타락하지 않은 게 어디에요.>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모두에게 좋았다. 저렇게 괜찮다고 하는데 옆에서 걱정하는 게 더 민폐였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오...! 이제 과제 준비해야돼서어..."

"...네, 가보세요."

[쟤 안 죽는 건 맞지?]

<예, 딱하게도요.>

현자나, 레오나 눈으로 저 학위의 노예에게 애도를 표했다.

언젠간 편한 곳으로 가길.

[그러고 보니 아리아는?]

<...아, 늦었겠다.>

지갑만 갖다준다는 게 그만 강의도 벌이고, 중급 마법 허가서도 받아버렸다.

적어도 3시간은 넘게 지나갔을 것이다.

[...애 완전 화났겠는데?]

<...그렇겠죠? 아무래도...>

[가면 싹싹 빌어. 답은 그거밖에 없다.]

현자답게 현명한 답안을 내주었다. 고향과 같은 마탑에 온지라 지혜가 상승한 것 같았다.

"...아리아 아가씨...?"

도서관에 들어가, 아리아가 있는 자리를 향해 조용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 반응에 따라 분노의 정도를 간을 재는 것이었다.

"..."

아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책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었지. 귓가나 볼이 붉은 걸로 봐선 확실했다.

[...빡친 것 같지?]

<...예... 몹시...>

레오는 조심히 아리아에게로 향해 말을 걸었다. 죽을 각오는 반 정도는 되어있었다.

"...아리아 아가..."

"난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갑작스러운 외침.

도서관에 있는 모두가 아리아를 놀란 채 바라보았다.

"...어... 왜 그래요...?"

레오나르도조차 그 외침에 당황한 건지, 살짝 주춤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어...!? 그...그게 말이야...!"

그녀는 레오와 책을 힐끔거리더니 급히 책을 덮어 뒤짚었다.

"그게... 책에 너무 집중해서 놀랐어... 하하..."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책에 집중하셨어요? 무슨 책이었는데요?"

"그...그게..."

그녀는 책은 한 손으로 최대한 가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주머니에 넣었던 쪽지가 생각났다.

"아아...! 그러고 보니 아누스 씨께서 쪽지를 전해달라는 사람이 있었지?!"

"예? 그랬긴 했는데..."

"얼른 가자! 얼른!!"

아리아스필은 안 어울리게 흥분하며 레오나르도를 붙잡고 뛰쳐나갔다. 평소의 분위기만 생각해도 명백히 의심스러웠다.

<...왜 저럴까요? 평소답지 않게.>

[그러게. 야설이라도 몰래 읽었나?]

<...그걸 추측이라고 합니까? 마탑 도서관에 야설이 어딨어요?>

현자의 추측은 몹시 근접했지만, 레오나르도의 지적 또한 타당했다. 현자도 확신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건 그런데, 표정이 꼭 니가 자다가 팬티에 싼 거랑...]

<그냥 좀 닥쳐요. 물어본 내가 나쁜 놈이지.>

현자가 혀를 차긴 했지만, 저 관음증 늙은이의 말을 굳이 귀담을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적당히 잘 장소를 안내해달라고 부탁하죠."

"...잘 장소...?!"

갑자기 경악하며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의 바지춤을 바라보았다. 그런 기묘한 시선에 레오는 조금 당황해하며 말을 이었다.

"...마탑에는 여분의 기숙사도 있을테니까요. 거기로 안내해달라는 말이었는데... 혹시 싫으신가요?"

"아...아... 아니야... 미안."

도대체 무슨 의미로 오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사과했으니 추궁하지는 않기로 했다.

[쟤 진짜 야설 본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마탑이 썩었어도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겠죠.>

[근데 왜 바지 사타구니 쪽을 보는데? 아무리 봐도 거기 보는 거 아니야?]

참으로 발상이 한심한지라 레오는 눈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레오나르도도 그 방향으로 시선이 향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아마도.

***

마탑의 방은 각각 개인실로, 아리아는 여성 기숙사 방향, 레오나르도는 남성 기숙사 방향으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아리아는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마탑의 규정인지라 군말없이 그 지시에 따랐다.

[근데 이제 어쩔 거냐?]

침대 누운 레오를 보며 현자는 물었다. 레오나르도는 피곤한 몸의 기지개를 피며 대답했다.

<우선은 휴가 기간 동안은 마탑에 있으려고요. 3서클 마법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핑계를 대면 충분하겠죠.>

마탑의 자료와 연구는 리오스가 가르치는 것보다 훌륭한 건 사실이었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3주 동안 그 놈들 다 잡게?]

<그건 힘들죠. 지금은 즉결 처분 대상에만 집중하려고요.>

어디까지나 잡지만 않는 것일 뿐이었다. 확인 절차 정도로 간결하게 감시할 용의는 있었다.

잡을 혐의만 없을 뿐, 그들이 한 악행은 레오의 뇌리에 똑똑히 남아있었으니까.

[괜찮겠냐? 책 조금 보니까 대규모 몰살을 한 놈도 있던데.]

사실 현자의 말대로 안전을 생각하면 그런 녀석들은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회를 가질 자격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무슨 자격으로 심판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 같아서요.>

레오는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무책임하구만.]

<무책임은 심하죠. 소(少)책임한 겁니다.>

[알았다. 소책임한 소인배야.]

뛰어난 언어유희력에 탄복하며, 레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시작하다니, 뭘 어떻게 하게?]

<증거를 잡아야죠.>

레오나르도는 검은 돌이 변한 팔찌를 어루만지며 기숙사 밖을 나가 복도를 걸었다.

[근데 그렇게 쉽게 되겠어? 마탑은 내 시대 때에도 삼엄했다고. 현대에는 발전하면 했지 퇴보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현자의 지적은 의외로 맞는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개방적인 척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을 까보면 더러운 면을 어떻게든 은폐하는 조직이니까.

개인적인 비리나 악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니가 은신을 잘해도 마법 경비 시스템을 다 뚫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모르는 게 더 있냐?]

<아니요. 현자님 말대로에요.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경비를 뚫을 순 없죠.>

마탑에 기본적으로 설치된 감시용 수정 구슬과 경보용 정령, 그리고 비리를 저지른 철두철미한 쓰레기들은 특수한 잠금장치나 비밀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레오나르도가 날고 기어도 그걸 전부 뚫고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어떻게 하게? 속여서 들여 보내달라고 할 거냐?]

<그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죠.>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옆에 있는 현명한 유령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어떤 인간들도, 정령들도, 마물들도, 심지어 마법사나 정령사조차 저 유령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유령이기에 어떤 물체에도 통과, 투시하는 것도 가능했고, 마법적 식견도 뛰어나 관련된 물체를 식별하는데도 능했다.

그렇다는 건.

<현자님이 들어가시면 되잖아요.>

현자가 들어가면 절대로 들키지 않는 완전 범죄가 된다.

[...그러네?]

<...그걸 이제야 아셨어요?>

[야, 그게 오히려 고마운 거지. 이거 악용하려면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다? 어?]

어째 말뜻과 방향이 묘하게 이상했지만, 우선 조력자였으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근데 들어가서 보는 건 그렇다치고... 증거는 어떻게 꺼낼 건데? 그건 나라도 불가능하다고.]

<그건 증거를 찾은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증거의 유무였다.

어디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정보가 확실한지도 판단하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선 그 새끼부터 족치러 가죠.>

레오나르도의 노트에 적혀있는 1순위는,

[제프리 페드니안]

아리아스필에게 찝쩍였던 아동성애자 개새끼였다.

***

[...야... 이제 좀 쉬자...]

<한 곳만 더 들르고요.>

[그 말만 4시간째 10번이나 했잖아!!]

현자의 말대로 레오나르도 새벽 동안 6시간이나 쉬지 않고 각종 방과 장소를 돌아다녔다.

단순히 돌아다닌 것이면 현자도 역정내지 않겠지만, 지정된 방에서 모든 벽면과 지면,그리고 천장을 통과해 살피는 건 생각보다 지치는 일이었다.

<어차피 안 주무시고, 안 다치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야... 넌 못 봐서 그래. 아까는 바닥의 쥐가, 천장에는 곱등이들이, 벽에 바퀴벌레가 생명의 탄생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더라? 그걸 봤어? 네가 봤냐고?!]

<한 늙은이의 오밀조밀한 장기를 직접 보긴 했죠.>

2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레오에겐 영원히 잊히지 않을 트라우마였다.

[그거는 봉사지. 봉사.]

<...>

[알았어. 무리수였어.]

이번엔 인정이 빨라서 다행이었다.

<이번 놈은 진짜 악질입니다. 자기 학생들의 아이디어는 전부 다 도용한 뒤에, 그 학생들은 마탑에서 내쫒은...>

[여어 출발해라. 그런 새끼는 다 죽여버려야돼. 스물다섯 살 연하의 미인을 아내로 둔 놈은 더 그렇고.]

좀 많이 추하긴 했지만, 결과적 목적과 의도는 같았기에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시작했다.

"저기..."

누군가가 레오나르도를 조심히 불렀다. 그 부름에 레오는 조금 경직됐지만, 자연스러움을 위해 최대한 부드러이 대답했다.

"네? 누구... 으아 시발!!"

분명 면전에 욕을 한 건 무례였다. 누가 봐도 무례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이유는 있었다.

[...낮에 본 대학원 노예잖아. 나도 언데드인 줄 알고 쫄았어...]

눈앞의 사람은 퀭한 표정에 눈그늘로 점철된 시선으로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램프로 얼굴만을 비추고 있으니 섬뜩함이 더 가중되었다.

"...아하하...죄송합니다아... 갑자기 부르시니... 당황하셨겠어요오... 죄송해요오..."

"아...아닙니다. 저도 놀라서요...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퍼석한 머리를 긁으며 너털웃음을 내었다. 솔직히 안심되긴 했지만, 이젠 다른 의미로 걱정되었다.

"...근데 왜 부르신 건지...?"

사실 어째서 자신을 부른 건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최대한 조심히 행동하기는 했는데...

"...아, 그게 레오나르도 군이 뭘 찾는지 알 것 같아서요오... 저랑 같은 걸 찾고 있는 것 같은 것 같아서어..."

이건 예상 외의 이유였다.

설마 회귀자인 자신 외에도 마탑의 비리를 눈치챈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메리처럼 유약하다고 판단된 인물이...

"마탑에 있는현자의 유산들을 찾고 있는 거죠? 그렇죠?!"

아메리는 처음으로 곧은 시선으로 눈을 반짝였다. 이러니 정말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레오나르도는 슬며시 눈을 돌려 유산의 장본인인 현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있었나...? 늙으니까 영 기억력이...]

새삼 현자의 존재를 숨긴 것이 현명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것마저 알리면 저 인간 찬가의 마법사는 바로 흑마법사로 타락할 것이다.

<+--|-|--+>

EP.42 마탑-4

"현자의 유산이요?"

"네! 전설의 대마법사인 현자가 마탑에 남긴 유산이요!!"

저 사람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원래 이런 얘기에만 웃는 것일까, 아니면 예전엔 자주 웃었는데 대학원생의 낙인이 찍혔기에 웃음이 사라진 걸까.

답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그거 가짜 아니죠?>

이럴 때는 본인에게 묻는 게 빨랐다. 믿음직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묻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나도 몇백전이여서 생각이 잘 안 난다고.]

이젠 믿음직 못한 게 아니라, 의심스럽게 무책임했다.

"맞죠? 맞죠!?"

...저 대학원생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기에.

"...네, 맞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새하얀 거짓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럼 따라오세요! 서로의 단서를 조합해보죠!"

그녀는 흥분하며 레오나르도를 끌고 뛰어갔다. 아무래도 편히 범죄자를 척살하는 건 그른 것 같았다.

***

따라간 곳은 허름하고 좁은 방이었다.

강의실이라고 하기엔 부실한 점이 많았고, 기숙사실이라고 보기엔 사람이 살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여기는..."

"저희 현자 연구부실이에요!!"

"현자 연구부...요?"

"네! 현자님의 현자님을 의한! 현자님을 위한 동아리에요!!"

레오나르도는 옆에 있는 그 연구 대상을 바라보았다. 동아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쭐해야 하는 것이 퍽 보기 불편했다.

까놓고 말해 현자가 연구 대상인 건 맞았지만 말이다.

[저런 애를 내 후계자로 삼았어야 하는데, 진짜 아깝다.]

<그럼 지금이라도 적출해서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고.]

말을 말자.

옆에 저렇게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하찮은 말싸움을 하는 것도 꼴사나웠다.

"근데... 정확히 현자...님에 대해 뭘 연구하는 거죠?"

사실 지금 레오가 제일 궁금한 건, 왜 저런 인간이 현자라 불리는 것이었지만... 저 대학원생의 롤모델을 그렇게 모독하고 싶진 않았다.

때로는 환상을 꿈꾸는 게 아름다운 법일 때도 있었다.

"전부요! 현자님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자님의 남긴 마법을 연구하기도 해요!"

[아 아깝다~ 쟤가 동굴에 왔어야 했는데~]

레오나르도는 순간적으로 심장을 뽑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목숨이 붙어있을 자신이 없었기에 포기했다.

"부원은 저랑... 리오스 뿐이지만, 신입부원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현자를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도 환영이고요!"

...어쩌면 레오도 현자를 연구하고 싶긴 했으니, 환영받을 자격이 있긴 있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저랑 마찬가지로 현자의 유산을 찾는 사람일 줄은 몰랐거든요!"

아까부터 그 유산도 신경쓰였다. 어딨는 것보단 본인도 모르는 유산이 왜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현자의 유산은... 정확히 뭔가요?"

"흠... 본질에 대해 묻는 건가요? 확실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도 추리에 도움을 줄지도 몰라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오해해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현자의 유산은 마탑주를 포함한 모든 마탑의 마법사들이 찾고 싶어하는 재보에요."

---------------

먼 옛날, 마탑이 마법사의 집단으로서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한 현인이 나타났다.

당시 마법의 수준은 검술은커녕, 마나의 조작법이라 간신히 말할 수 있는 수준일 뿐이었다.

그 자리에 나타난 현자는 각종 마법의 기본, 서클 마법과 마법식들의 기초를 알려주며 마법의 위상과 마탑의 체계를 다지는 모든 초석을 다져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어느날 현자는 마탑을 떠나겠다 말했다.

마탑주를 포함한 모든 마법사들은 그를 붙잡기 위해 애원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현자는 마법사를 위해 이 말과 함께 자신의 유산을 남겼다.

[마탑에 내 지식의 일부를 숨겨두었다. 자격을 가진 자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현자는 마탑을 떠났다.

몇백년이나 마법사들은 그 재보를 찾기 위해 마탑을 이잡듯 뒤졌지만, 결국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

<...진짜에요?>

레오나르도는 정말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차라리 한 명이라도 그걸 찾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그게 아니면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 하나 더 넓혀진다.

<그냥 마탑 나가고 싶다고 사기 친 거 아니죠?>

현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해볼만한 사안이었다.

[아... 그거 말하는 거였어? 괜찮아. 그거 진짜 있어.]

안도의 한숨이 돌풍처럼 튀어나왔다. 만약 아니라는 걸 들으면, 레오는 저 안타까운 대학원생에게 고통스러운 거짓을 고해야만 했을 거다.

['자꾸 성가시게 해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라는 마음으로 준 건데 그렇게 거창하게 해석해줄 주는 몰랐네.]

뒷말은 못 들은 거다. 뒷말 같은 건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게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의무였다.

"...리오스 이외에는 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전 믿고 있어요. 현자의 유산은 있을 거라고. 그래서 마탑에 온 것도 있거든요!!"

저 희망 넘치는 표정에 현자도 조금은 죄악감을 느낀 걸까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그냥 대충 만든 쓰레기를 놓고 유산이니 뭐니 한 건 아니죠?>

[...아니야. 아마도...]

저 뒷말도 못 들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정확히 뭐였는데요? 수준으로 치자면 어느 정도였길래요?>

설마 애들 장난감 정도를 넣어놓거나, 편지 같은 걸로 대충 써갈겨놓은 거면... 그것대로 큰 문제일 것이다.

[그게 네가 쓰고 있는 '검은 돌' 있잖아? 그정도인데... 괜찮으려나...?]

<음... 그거면 괜찮은데요?>

자신없는 기색과는 별개로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칠 정도의 재보였다.

실제로 검은돌은 2년 동안 계속 쓰고 있지만, 이 한번 나가지 않았고, 형태 변화도 자유로웠기에 날도 무뎌지지 않았다.

<근데 정확히 뭐가 있었는데요?>

[...뭐 간단한 마도구들이나 지팡이 정도였지.]

현자는 태연히 자신이 개발한 마도구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 마도구들의 설명에 레오나르도는 입을 쩍 벌린 채, 간신히 새어나오는 비명만 막을 수 있었다.

[...왜? 별거 아니잖아.]

<...뭐가 별거 아니에요?! 그것들만 있으면 지금 문제 대부분 해결 가능하잖아요!>

아부나 과장이 아닌 객관적 사실이었다.

자신이나 저 안타까운 대학원생 모두 행복해질 보물들 뿐이었다. 이런 물건을 개발하고 까먹는 저 기가 막힌 두뇌에 경악하다 못해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그렇긴 하지.]

<됐고, 얼른 반지부터 찾죠! 그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근데 얘들도 진짜 멍청하다. 어떻게 몇백 년 넘도록 그거 하나 못 찾고 못 풀었을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마탑과 마탑의 대마법사들이 한꺼번에 능욕당한 느낌이었지만, 부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의리도 없었고.

"...흠... 혹시 단서가 있나요? 조금만 보고 싶은데..."

"물론이에요! 현자를 찾는 동료는 서로 도와야죠!!"

이미 찾긴 했지만... 이건 안 알리는 것이 현자를 찾는 동료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었다.

"여기요!! 제가 정리해둔 노트에요!"

가져온 나무상자에는 해진 노트가 10권이나 적혀있었다.

[...뭔가 엄청 미안해지는데.]

<이미 늦었어요.>

그 잘못을 지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레오는 급히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말하면 바로 찾잖아. 뭘 어렵게 생각해.]

<생각해보세요. 만약 마탑에 오늘 찾아온 제가 갑자기 그걸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갑자기 시기와 질투의 눈빛으로 자기를 보는 건 둘째치고, 저 대학원생이 어떤 기분일지는 조금이나마 고려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렇겠네.]

<그러니까 여기선 이렇게 해야겠죠.>

레오나르도는 노트를 천천히 30분 정도 조용히 다시 현자에게 말을 걸었다.

<현자님, 반지는 어딨어요?>

[...그게 그건 가봐야 알아. 구조만 기억하고 있어서, 리모델링했으면 나도 찝어서 말할 수가 없다고.]

<그 정도면 충분해요.>

래오나르도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대사를 읊었다.

"알 것 같습니다."

"...어? 정말요?"

"확실친 않지만... 추측할 만 곳은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진짜에요?! 얼른 가보죠!!"

"예, 추측인 만큼 빨리 찾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노트를 덮고 한손으로 든 채, 동아리실 밖으로 나갔다.

***

[왼쪽, 그리고 복도 끝까지 가면 방이 나와. 거기에 있어.]

"내용을 추측하면 여기서 꺾어져서 나온답니다. 그 방엔 현자는 적탑주와 몰래 체스를 뒀다더군요.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기일 가능성이 있어요."

대충 노트에 적혀있는 낭설과 상상으로 짜깁기 한 거지만, 보물을 찾는 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오... 근데... 저긴..."

아메리는 당황스러운 황당함을 드러내며 복도 끝방을 가리켰다. 그 방에는 생각지도 못한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화장실인데요?"

게다가 여자 화장실이었다.

<...현자님... 하... 그런 취향인 건 알고 있었지만, 꼭 이런 식으로 욕구를 풀 필요는...>

[아니니까 싸물어. 내가 말했잖아. 여기 리모델링했다고. 나도 화장실로 바뀔 줄은 몰랐어.]

그 주장이 사실이길 바라며 레오나르도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죠."

"...괜찮을까?"

"딱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캥길 것도 없죠. 그냥 사람이 없는지만 봐주시고, 사람 오면 그땐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돼요."

게다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이 야심한 새벽에 사람이 와서 화장실이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오..."

생각처럼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밖에 있던 레오나르도도 걸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근데...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리고 전 이미 여길 둘러봤어요."

그녀 말대로 여자 화장실은 말그래도 화장실로서의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 재건축된 것을 고려하면 추측이 가능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흠... 이상한데?]

<뭐가요?>

[여긴 원래 넓은 창고였거든? 근데 지금 훨씬 좁아.]

<...설마... 현자님, 이번에도 해줄 수 있어요?>

[나보고 여자 화장실을 뒤지라고? 내가 넌 줄 아냐?]

...

...

.......

[알았어. 입 다문 채로 꼽주지 말라고.]

침묵의 눈치가 효과적이었는지, 현자는 화장실의 벽을 향해 몸을 집어넣었다.

[...으...지네에 돈벌레... 아...! 찾았다! 있어!! 앞쪽 벽이야!]

현자의 외침에 레오나르도는 그 방향을 향해 칠흑색 검을 꺼내들었다.

"레오나르도 군...?! 갑자기 왜...?!"

"조심하세요. 최대한 부드럽고 조용히 할 거지만 닿으면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벽을 사각으로 잘라내었다. 시멘트가 쪼개는지는 소리와 함께 벽이 사각형으로 잘려 밀려나갔다.

"...어...? 어어...?!"

화장실 너머에는 빈공간이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물건을 숨길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여깄었네요."

[여길 왜 메워뒀대. 찾기 더 힘들게.]

그건 레오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벌인 인물은이미 죽은 사람일테니 따지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유산은 어디에..."

아메리가 어두운 비밀 공간을 더듬는 사이, 레오나드로는 현자의 지시에 따라 벽면을 잡았다.

[거기야. 거길 눌러.]

식상하긴 했지만, 벽돌을 누르자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상자가 튀어나왔다.

"어어?!"

"어라?! 어떻게 나온 거지?"

[너무 발연기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옆에 숨긴 장본인이 있으니 연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현자의 유산...!"

그리고 유일한 관객의 관심사는 유산인 상자 뿐이었다.

"...근데 어떻게 열 수 있을까요?"

[문제를 풀면 돼. 이제 문제가 뜰 거야.]

<문제요? 어려운 거에요?>

[...그게... 애매하지.]

불안한 대답과 함께, 일행은 상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용케 내 유산을 찾아냈군.]

상자에서 푸른빛이 나오며 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송출되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의 기대에 맞게 진중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와 어투를 들으면 마법사를 꿈꾸는 많은 어린이들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현...현자님!!"

아메리는 경악스레 상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현자의 유산을 찾아낸 건 칭찬해주겠다. 대단하군.]

"...저...드디어... 제가 최초로...! 마법사로 살길 잘했어요...!"

그 확답에 아메리는 다른 의미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구건조증인 눈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찾아낸 거로는 아직 이걸 허락해줄 수는 없다.]

"...예? 그럼...?"

뭔가 일방형 통화라고 하기도 그렇고, 쌍방형 통화라고 하기도 묘한 상황이었다.

그럴 땐 다물고 있는 게 정답이었다.

[내 친히 세 가지 문제를 낼테니, 그걸 맞추면 가져가도 좋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풀도록.]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 문제를 낸 장본인이 있는데, 무슨 문제든 두렵겠는가.

<...근데 뭔 문제를 낸 겁니까?>

[그게...]

그 순간, 푸른빛이 뜨며 글씨가 송출되었다.

[1. 현자가 좋아하는 음료 취향을 맞추세요.]

<...고작?>

이런 문제를 맞추지 못해 몇백년이고 마법사들은 찾아 헤맨 건가?

아니, 어렵긴 어려울 수도야 있겠지만, 문제의 수준이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했다.

<...일단 따지는 건 안할테니, 답이나 알려주세요.>

[아메리카노. 난 그것만 먹었어.]

정말 마법사들의 수준이 의심되었지만, 일단 답을 맞히는 것이 중요했다.

[정답을 외친 뒤 답을 외치시오]

"정답! 아메리카노!"

[틀렸습니다.]

"...어?"

파지지직!!

그리고 분출되는 전기, 온몸에 전격이 휘감는다.

"아악!!"

"레오나르도 군!"

[틀릴 시에 벌칙과 함께 그 정답자는 그 문제의 기회가 박탈됩니다.]

왜 아무도 못 풀었는지 감이 왔다. 결국 찍거나 때려맞추는 건 불가능하는 뜻이었으니까.

<...장난쳐요!?>

[어... 이게 왜 아니야? 나 아메리카노만 먹어! 진짜로!!]

진심이 담긴 외침, 그렇게 되면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문제를 만든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설마..."

잠시 고민을 하던, 아메리는 다시 대답했다.

"정답... 물 많이 탄 연한 아메리카노?"

확신이 없는 대답, 레오나르도도, 현자도 의심하는 눈치였다.

[정답이다!]

"씨발...! 장난해...!?"

이딴 걸 맞추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현자를 떠나보낸 장본인들은 물론이고, 몇백년 전 인간이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걸 알아내는 것도 미친 짓이었는데, 그게 샷을 추가한 건지, 연한 건지를 어떻게 아나?!

[...아 그랬지...?]

게다가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걸 맞추는 새끼가 어딨어요?!>

[저기.]

현자는 손으로 저 하프 엘프 대학원생을 가리켰다. 이 양반은 양심이라는 게 존재할까?

"...어떻게... 맞춘 겁니까...?"

레오는 저 기적과도 같은 답안에 두려움마저 느끼며 조심히 물었다.

"...그게... 예전에 책에서 현자가 쓴 물약을 못 먹어서 물 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저걸 맞추는 것도 기적이었다. 이정도면 팬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 추종자였다.

그러건 말건 퀴즈는 계속 진행되었다.

[2. 현자가 가진 알레르기를 말하시오.]

이건 생각보다 쉬웠다. 알레르기는 신체적 질병이니 잊기가 더 힘들 것이다.

[아, 이건 알아! 사과 알레르기!!]

"정답!! 사과 알레르기!!"

파지지지직!!

두 번째 문제의 실패를 전격을 통해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끄아...이번에는 왜..."

[...야야야!! 이건 진짜라고!! 나 구라 안 쳤어!]

"정답...? 홍옥 사과 알레르기?"

[정답이다!]

이젠 따질 기력도 없었다. 전격을 맞아서도 있겠지만... 분노하는 것조차 정신적으로 질릴대로 질렸다.

[마지막 문제다. 신중히 생각하고 풀도록.]

"신중이고 씨발이고!! 생각해서 풀 수 있는 문제를 내라고!!"

옆에 있는 현자든, 상자 속 현자든, 두 현자 모두 무시한 채 할 일을 시작했다.

[이 마도구는 누구를 위해 만들었지?]

이번엔 현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이 대학원생이 저 기상천외한 문제를 어떻게든 답할 것이다.

"...음...으... 모르겠어요..."

"...예?"

"그게... 여기 있는 마도구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현자랑 관련있는 마법사가 한둘도 아니여서..."

그녀에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사실 앞에 있는 두 문제를 맞힌 것이 더 기적이었다.

[...야, 이번엔 안 틀릴 테니까... 똑같이 말해줘.]

<스펠링 하나라도 틀리면 바로 심장 뽑고 인공 심장 집어넣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부탁한다.]

...하... 저렇게 부탁하면 거절하는 게 더 힘들지 않은가.

"정답."

현자의 문제에 현자의 정답을 말한다.

[켈리 데이비스 로빈]

"켈리 데이비스 로빈."

[정답이다.]

그 말을 끝으로 상자가 열렸다.

상자 속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이건... 평복과 평유의 반지에요."

현자가 처음 말한 마도구.

"이걸 차면 수면욕, 식욕, 성욕을 통제할 수 있고, 체내의 독성도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켈리 데이비스 로빈은..."

그녀는 급히 그 이름의 주인을 찾으려 노트를 폈다. 하지만 레오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켈리는... 내 친구였어. 지병 때문에 마약성 약물을 계속 복용했는데,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통증 때문에 살 수가 없었지. 그래서 이걸 만들었는데...]

"켈리 데이비스 로빈은 약물 중독으로 현자님이 마탑에 있는 사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이걸..."

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레오나르도도 그를 그저 조금 바라봤을 뿐, 더 이상의 위로도, 비난도 건네지 않았다.

아물었음에도 쓰린 흉터는, 쓰다듬는다고 낫지 않는다는 걸 그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그럼 이제 나갈까요?"

반지를 고이 주머니에 싼 채, 아메리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죠...! 얼른 마탑주님들께 이 발견을 보고...!"

보고를 위해 여자 화장실에서 나온 순간,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레오...? 거긴..."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이자 기사.

용사 라인하르트 가문의 영애.

"아리아 아가씨...?"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는 여자 화장실에서 나가는 레오나르도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여자와 함께 나가는 장면 그대로.

싸늘했다.

왜 아리아의 손은 검으로 향하고 있을까.

목적은 그녀의 죽은 눈에서 찾을 수 있었다.

<+--|-|--+>

EP.43 마탑-5

지금까지 레오나르도는 어떤 싸움도 겪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인간 도살자라 불린 광전사도 자신을 죽이지 못했으며, 저주와 죽음의 군주라 불린 사령왕도 레오의 손에 쓰러졌다, 현대에 부활한 고대의 악마조차 레오를 끝내 잡아먹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레오나르도조차.

"레오..."

지금 상황이 가장 공포스러웠다 확신할 수 있었다.

"설명해."

"...예? 뭘...?"

퍽석

복도의 대리석 바닥에 검이 박혀들어갔다. 물렁한 점토를 뚫는 것처럼 빠르고 깔끔히도, 바닥은 실금도 갈라지지 않은채 검자국만이 남았다.

검을 뽑으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죽음이 몸에 엄습하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죽으면 유령 생활 잘 알려줄게.]

죽음이 전제인 게 이상하지만, 부정할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리아스필 양...? 우선 진정하고오...!"

"닥쳐."

"예...에...?"

아리아스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아까의 살인 미소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거야?"

"예...? 그니까 뭘...?"

"한 거냐고!! 대답해...!!"

주어를 생략하고 말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공포로 사고가 정지돼서 추측이나 추리를 할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뭘 말씀하는..."

"입 다물어...!! 듣기 싫으니까아...!!"

더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뭐 때문에 저리 울분을 터뜨리는 건지.

해명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도.

그 사이에 아리아는 분노와 악을 써가며 울화를 폭발시켰다.

"...난...! 난 말이야...!! 레오나르도랑 처음으로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냐고오...!! 왜 날 배신한 거야아...!!"

이제는 우리가 이해할 영역이 아니었다. 거의 우는 목소리로 흐느끼듯이 아리아는 울부짖고 있었다. 얼굴에도 점차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쟤 진짜 왜 저래요...?!>

[나도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

두 남자가 혼돈에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 한 대학원생이 아리아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요. 어른인 제가 성급히 결정했네요. 아리아스필 양의 마음도 고려했어야했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레오나르도한테 그런 짓을...!!"

그렇게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그녀는 아리아의 몸을 안았다.

"정말 미안해요. 같은 인물을 경애하는 사람으로서 아리아스필의 마음을 알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으...아아..."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혼돈과 광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레오나르도는 생각없이 바로 이 장면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젠 같이 해요."

"...예...?"

아리아의 눈물이 그쳤다. 울분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메리의 말은 아리아에게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게 무슨...!"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데... 분명 다같이 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예요! 더 의미도 있을 거고!"

분명 아메리의 말뜻은 현자의 유산이 중심에 있었다.

아메리의 눈엔 아리아스필도 레오와 마찬가지로 현자의 유산을 찾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렇기에 본인만 쏙 빼놓고 현자의 유산을 찾은 것에 질투를 느끼고 분노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인의 입장에서도 그런다면, 저럴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진정한 문제는...

'...세 명이서...?! 설마... 다같이...?! 그런 난폭한... 걸...!!'

아리아스필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는 점에 있었다. 아리아의 머릿속에는 욕정과 배덕의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그런 파렴치한 짓을...!! 제가 원할 것...!!"

"...파렴치하다고요...? 아! 리오스를 빼먹어서 그렇군요! 리오스랑 넷이서 다같이 해요! 그럼 좋겠네요!!"

아리아스필의 표정은 아예 불덩이가 되어있었다. 착각이 펼치는 쾌락과 배도의 유열은 어린 소녀에게는 치명적으로 자극적인 유혹이었다.

잠시 진정과 설명, 그리고 해명의 시간이 필요했다.

***

"...으으으..."

아리아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를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있었다.

사과를 받기도 기묘한 상황인지라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그 이야기까지 꺼내면 아리아스필은 수치심에 졸도할지도 모른다.

"...정말... 죄....송..."

이를 악물고 아리아는 수치 그 자체인 사죄를 입에 담으려고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사실 의심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죠!!"

급히 아메리는 사과를 받아줬다. 하긴 그녀 입장에선 친구 동생이 저러는 것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처음 아리아스필에게 현자의 유산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녀는 몇 번이고 반복해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며, 늦은 시간까지 모든 게 의심할 이유는 충분히 되었으니까.

다행히 화장실 벽을 자른 것을 보여주고, 보관함인 상자와 유산인 반지를 내밀자 아리아스필도 그제야 믿을 수 있었다.

<...근데 뭐라고 오해한 걸까요?>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 나 같은 현자한테 묻지 마.]

개소리인데도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는 의문에 단념했다. 현자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근데 그 반지는 어떻게 할 건가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리아는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보며 물었다.

"예에... 아무래도 마탑주들님께 보고가 먼저겠죠. 마탑 역사에 처음으로 발견한 현자의 유산인 만큼..."

"그건 당장 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을 자른 건, 함께 반지를 찾은 레오나르도였다.

"예에...? 왜요오...?"

"우선 그게 진짜인지를 물을테고, 진품 여부를 가린다고 가져갈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요."

"...그럼 안되는 건가요오...?"

레오나르도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지못해 측은한 눈치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걸 그냥 돌려주겠습니까? 바꿔치기나 안 해도 다행이지."

마탑주들이 모두 악독한 건 아니지만, 현자의 유산은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다.

흑심이 생겨도 이상할 건 없지.

특히 저런 유약한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을 땐, 그에 대한 탐욕이 더욱더 가중될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오...?"

"만약에 그거 주는 대신에 박사 학위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줘야죠!!!"

저 대답은 어리석거나 멍청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몇 년을 노예로 살아왔기에 반사적으로 자유를 갈망했을 뿐이었다.

"봤죠?"

"...으...응."

드물게 보는 애처로운 풍경에 아리아는 할 말을 거의 잃어버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천재에겐 저런 빈곤한 사상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네...역시... 그렇죠오?"

"그럼 차라리 한 번이라도 반지를 끼어보고 결정하죠. 그렇게라도 하면 마도구로서 진짜인지 아닌지는 감별 가능하니까요."

그 제안에 두 일행은 고민에 잠겼다. 그 사이 반지를 만든 장본인은 레오에게 귓속말로 말을 걸었다.

[근데 괜찮겠어? 저거 한 번 끼우면...]

<괜찮아요. 그러라고 말한 거니까요.>

[...하긴 사실 쟤가 쓰는 게 제일 맞는 거긴 하지.]

현자의 승낙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일까, 망설이던 아메리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어어?!"

가장 먼저 놀란 건, 아리아였다.

"...왜...! 왜요...!?"

"눈 봐요! 충혈된 부분이...!!"

그 말에 아메리는 시계의 검은 면으로 얼굴을 반사시켜 확인해보았다.

다크서클은 여전히 진했지만, 건조하게 갈라져 충혈된 눈은 점차 희고 맑게 수분이 차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졸리지가 않아요. 머리도 무척이나 맑고...!"

"아무래도 진짜인가보네요. 다행이에요."

[다 알면서... 사기 하나는 기가 막혀. 진짜.]

욕인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칭찬으로 생각하자.

"...그럼 이제 반지를..."

이 행복감을 즐길 여유도 없었는지, 성실한 노예는 대학원을 위해 반지를 빼려고 했다.

"...어? 이게 왜...?"

아메리는 당황스러운 듯, 약지를 핀 채 반대손으로 반지를 감싸 빼려고 했지만,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그게... 이 반지가... 아리아스필 양, 한번만 좀 잡아주세요."

"예? 예예."

아메리의 부탁에 아리아는 가볍게 반지를 붙잡았다. 아메리는 그녀의 악력을 믿으며 몸을 쨉싸게 뒤로 뺐다.

"으아아아...!! 아파요!! 아악!!"

"아... 죄송해요."

아메리의 비명에 아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사과했다.

[아리아 쟤, 아까 웃지 않았어?]

<예? 그랬어요? 착각한 거 아니에요?>

여기에 웃을 일이 어딨다고, 아마도 어두운 지라 착각했거나, 현자의 노안이 더 심해진 것일 거다.

"이제... 어떡하죠...? 이게 안 빠지면..."

"괜찮아요. 어차피 찾았다는 시점에서 주인의 자격은 아메리 씨나 저에게 있는데, 문제를 푼 양을 비교하면 지분은 아메리 씨가 많으니까요."

처음부터 이건 아메리에게 줄 계획이었다.

반지의 효과인 치유력이라면 그녀의 몸에 있는 각종 골병들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꽁으로 줘도 돼?]

<아까울 것도 없죠. 애당초에 저 사람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했고...>

레오나르도는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열심히 산 사람에게도 보상이 돌아가야죠.>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는가. 전생에도 나름 상위권 마법사였는데, 이 마도구 때문에 대성할지.

<다 투자에요. 이걸로 다른 유산 얻는데 조력을 구하기 쉬울 거고요.>

[내가 있잖아.]

<아, 그러시군요. 하긴 연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시는 홍옥 사과 알레르기를 지닌 현자님의 도움도 몹시 절실하죠. 너무 절실하네요, 예.>

[조리돌림도 이 정도면 국보가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야.]

별말씀을. 과찬인 평가였다.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저 결혼도 안 했는데... 이걸... 어떡하죠?"

아메리가 반지를 끼운 손가락은 약지, 바보가 아닌 이상 약지에 끼운 반지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대로 시집도 못 가면 어떡해요...?"

<...>

소책임한 소인배는 슬며시 자신의 배후령을 바라보았다.

[...]

무책임한 무뢰배는 고개를 저으며 절망적인 확답을 내렸다.

소인배와 무뢰배는 책임감 없이 애도를 표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

다음날, 여러 가지 소동과 사건이 있었지만, 상황은 제법 조용히 지나간 편이었다.

우선 레오나르도의 조언대로 이번 일은 당장 밝히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분명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많을 테고, 심하면 반지를 뺏기 위해 손가락만 잘라가거나 암살하는 것도 서슴치 않을 테니까.

화장실의 벽은 아메리의 마법으로 메우고 복구한 채, 일행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날 밤, 그들은 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근데 말종 마법사들은 안 잡아도 돼?]

<이것만 있으면 바로 잡을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이 시험은 생각보다 까다로울 텐데...]

<뭐요. 이번에는 현자의 첫 키스 날짜라도 맞춰야 하나.>

했을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자 기준이라면 간접 키스도 포함할 테니...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알맞았다.

[닥쳐 새끼야.]

<그러게 누가 그딴 식으로 문제 내래요?>

[난 솔직히 그거 일주일만에 해결할 줄 알았다고! 다 나랑 친한 녀석들이었으니까!]

솔직히 정말 친한 사람이라면 바로 풀 수야 있겠지만, 어지간히 천재거나 미친 놈이 아닌 이상, 그런 식으로 답을 맞추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만약 풀었어도 푼 친구는 더 이상 친구일지도 의문이었고.

"아! 레오!"

"오셨어요? 레오나르도 군."

도서관 앞에는 두 사람이 이미 와있었다.

"늦은 밤에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현자의 유산을 찾기 위해서라면 일주일, 아니 지금은 한달도 안 자도 괜찮아요!"

저 말이 단순히 동조의 의미가 아닌,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현자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근데 정말 마탑 도서관에 유산이 있을까? 다녀가는 사람들도 한두 사람이 아닐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화장실은 시도때도 없이 다녀가는 곳이니까요. 등잔 밑이 어두운 걸 노린 거겠죠."

두 사람은 감탄사와 함께 납득했다.

[...그래, 당연히 그거 때문이지. 하하.]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저 양반은 굳이 사족을 붙여 의심을 만들어낸다. 너무 한심한 나머지 지적은 안 했다.

"...근데 전에도 와봤지만... 여긴 정말 넓네요. 책이 몇 권이나 있는 걸까...?"

"대략 800만권... 지하의 고서고까지 포함하면 30만권은 더 있어요."

그 숫자에 아리아의 입은 떡하고 벌어졌다.

사실 마탑은

학술적 자료도 후대에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고, 마탑에 있는 학생들과 교수들도 이런 방대한 자료를 이점으로 삼아서 마탑에

협력했으니, 마탑에겐 이 책 모두를 관리해도 아깝지 않을 가치가 있었다.

"근데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할까요?"

"...그게 사실 도서관에선 현자님이 아예 힌트 같은 말씀을 남기셨어요."

[도서관에도 내 지혜가 녹아있지. 아마 이곳의 남은 지혜는 우리가 잠든다 할지라도 영원히 남아있을 거야.]

"...라고요. 그래서 다들 도서관에서 각종방식을 시도했대요."

누군가는 책을 베고 자보기도 하고, 찢어보기도 하며, 아예 불태워버리기까지도 했다.

"근데 그러다가 그런 짓한 교수고, 학생이고 전부 다 내쫒겼어요. 자료 및 재물 손괴죄로..."

책을 베고 잔 것은 그나마 훈계나 반성문으로 넘어갔지만, 누가봐도 찢거나 불태운 건 변호할 여지가 없었다.

[당연하지. 개념을 어디에 팔아먹은 거야.]

<현자님이 할 말이에요? 그보다 찾는 법이 아까 말한 것에도 섞여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책을 뽑기 시작했다.

"...그 책들이 단서에요?"

"아뇨. 사실 딱히 아무 책이나 상관없어요. 최대한 크고 두꺼운 걸로 많이 뽑아오세요."

"...예? 정말요?"

레오나르도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각종 책들을 뽑았다. 그 행동에 다들 조금 의심하는가 보더니, 속는 셈치고 각자 책을 뽑았다.

"이정도면 될까요?"

책들이 책상에서 여러 개로 이룬 탑을 보며 아메리는 되물었다.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이제 어떡하면 돼?"

"이제 잘 자리를 만들면 돼요."

"잘 자리...?!"

왜 저 말에 저렇게 화들짝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충격적인 방법이었나?

"...그건 시도해봤지만 안 됐어요. 책을 베고 자는 건 이미..."

"베고 자는 수준이 아니라, 침대... 책으로 아예 관짝을 만들어야해요."

"...예?"

레오는 저 반응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본인도 처음 들었을 때,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그니까 잠든다는 게 두 가지 뜻인 거야. 진짜 잠드는 거랑, 죽는 거. 그런 의미로 숨긴 거지.]

-<...신기하고 느낌 있긴 한데, 그걸 몇 백년 동안 아무도 안 했다는 게... 좀...>

확실히 신박한 방법이긴 하지만, 괴짜가 많은 마탑에서 그런 방법을 시도하지 않은 건 조금 미심쩍었다.

[사실 이건 방법을 알아도 단번에 통과를 못하면 의미가 없어.]

<왜요?>

[말 그대로야. 내가 들어가는 방법은 말해줄 수 있지만, 통과할 방법은 알려줘도 시험에 들어가면 하등 의미가 없어진다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헛소리를 많이 하시는 분이니 이해하도록 했다.

[근데 한 명만 성공해도, 물건은 얻을 수 있으니까 딱히 걱정 안해도 돼.]

현자님 말씀대로였다.

이번 것도, 저번의 문제 시험처럼 다수일수록 유리한 게 중점이었다.

아무래도 다같이 협력해 성공하라는 의미였겠지만...

'특허 가지고도 물어뜯는 마법사들한텐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렵지.'

그런 생각을 홀로 곱씹으며 레오나르도는 책의 선을 각지게 다듬어 관의 형태를 완성시켰다.

"대충은 됐네요."

"저도요. 설마 이런 의미로 잠든다는 건 줄은 몰랐네요."

"...그럼 누우면 될까요?"

레오나르도는 완성된 책의 관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만 성공해도 이기는 게임이니까, 다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도 꼭 성공해야죠!"

"나도 열심히 해볼게!"

각자 성공의 의지를 표명하며 관 속에 누웠다. 레오나르도도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일행은 눈을 감았다.

***

...

...

......

"...일어나..."

"...으...?"

누군가가 레오나르도의 몸을 붙잡아 흔들고 있었다.

"...일어나봐. 레오..."

그 흔들림에 못 이긴 것일까, 레오나르도는 눈을 조심히 떴다.

"...여긴..."

자신의 집이었다. 깜빡 잠에 든 것일까, 입가에는 조금 따뜻한 침이 묻어있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잠든 것 같네요."

"괜찮아. 우리 사이인데 뭘~"

아리아스필은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집에 있는 앞치마는 언제 찾아낸 것인지, 자기 껏마냥 편하게 입고 있었다.

솔직히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남색 앞치마는 어느새 자라있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 굴곡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색기에 레오는 잠기운을 핑계로 잠시 하반신을 이불로 덮었다. 혈기가 조금 잠잠해지자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레오? 안색이 안 좋은데?"

사실 아침인 것과 앞치마를 입은 그녀가 앞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걸 당당히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말하는 게 미친 거지.

"괜찮아요. 아리아 아가씨야말로 어제 괜찮았어요?"

"응? 어제 뭐가?"

몸을 활처럼 휘며 기지개를 킨 아리아는 역으로 물어보았다. 조금씩 느껴지는 혈기에 레오는 약간 민망하듯 웃으며 질문을 정리했다.

"촌장님하고 한판 붙었잖아요. 어떻게 그 옹고집 할머니를 이겼어요?"

"...아... 그거...? 그게 말이지..."

아리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레오나르도는 멀찍이 있는 시계의 초점을 바라보았다.

째각거리는 소리가 아홉 번 정도 반복되자 아리아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레오나르도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진다.

"야."

동시에 단칼에 그 말을 잘랐다.

"...레오...? 갑자기 왜..."

"입 닥쳐. 열받으니까."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어투,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리아에게만큼은 절대로 쓰지 않을 어조였다.

"...왜 그러는데...!? 내가 뭘 잘못...?"

"빡치니까 내 앞에서 아리아스필인 척 하지 마. 몽마냐? 아니면 흑마법사? 그것도 아니면 환각제 주입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데?!"

레오나르도는 테이블을 내리쳐 가구를 주먹으로 부서뜨렸다.

"그럼 내가 물은 걸 대답해봐. 촌장님을 어떻게 이겼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빼놓지 않고 대답해봐."

"그건..."

"바로 대답 못 하겠지? 안 그래? 어쩔 수 없을 거야."

환각이나 꿈은 대상의 지식과 무의식을 결합해 현실과 유사한 가짜를 만든다. 굳이 사실적이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현실적이지도 않더라도, 기억과 의식을 흐리게 만들면 인간은 이곳이 현실일지, 꿈일지에 대한 의문조차 떠올리지 않으니까.

"근데 이게 약점이 하나 있거든."

하지만 자신이 인지하고 있되 세부 정보를 모르는 기억은 상상의 결이 다르다.

"그걸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기 위해선 최소 10초에서 15초가 필요하거든. 없는 걸 다시 상상해서 창조해야 하니까. 이제 이해했어?"

"무슨 말이야?! 아직 9초밖에 안 지났어!!"

아리아답지 않은 역정, 하지만 레오의 확신은 다른 의표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아, 그래? 근데 어떻게 9초라는 걸 알았냐?"

"어...? 그건...?"

"아까는 시계를 본 것도 아니고... 8초,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10초일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9초인 걸 정확히 알았냐고."

아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뻔하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니까.' 아니야?"

이곳에서 그 시간이 9초라는 걸 정확히 아는 건 레오나르도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