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그게 무슨 헛소리야?'를 드러낸 표정이었건만, 그걸 또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마왕은 한숨과 함께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임무가 취소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대신 어딜 가든 벤을 잘 달고 다니도록 해."
"...."
"겨우 그 정도 일로 네가 죽을 리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후유증으로 약해진 데다 방심한 상태에서 누가 공격해 온다면 조금은 위험할지도."
방심하지 않아도 누가 공격해 오면 위험합니다만. 튼튼한 마족들이라면 모를까, 난 위험하다고.
아, 뒷골 당긴다.
"엇?! 데몬 님! 혈압의 상태가?"
"...별거 아닙니다. 가죠."
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심호흡한 뒤 문으로 향했다.
사실 이건 내 발로 가는 게 아니었다. 나의 유능하고 충직한 부관이 한 곳에 꿋꿋이 서서 어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 눈빛이 어찌나 따갑던지.
"이쪽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준 에드가 군단원들이 대기하고 있을 장소로 앞장선다.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은데, 설마 오래 기다리게 했다고 하극상을 일으키거나 그러진 않겠지…?
아, 괜히 생각했다. 더 가기 싫어졌잖아.
걸음이라도 느릿하게 움직여보려 했으나, 성큼성큼 나아가는 에드의 뒤를 쫓다 보니 어느새 1층 현관 앞에 도착했다.
저 문 뒤에 군단원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거지. 늦었으니 화가 나 있으려나. 가만히 있어도 살벌한 놈들인데, 화가 난 눈빛은 얼마나 살벌할까.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문을 열었다간 정말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 문을 열려는 에드를 급히 불렀다.
"잠깐."
"예?"
"...내가 열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한 에드가 이내 별말 없이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문 앞에 선 뒤, 잠시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데몬 님, 심장의 박동이 이상하게 빠릅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것도 측정 가능합니까?"
"예. 데몬 님의 건강이 달렸는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
벤의 목에 걸린 기묘한 보석을 지그시 노려봤다.
저거 당장이라도 빼앗아서 부숴버리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려나.
그러나 그럴 강단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보석을 깨트릴 정도의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쩌겠나. 힘없는 나는 늘 그랬듯이 체념하고 문에 손을 얹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심장이 뛰는 속도가…."
"...."
"벤, 데몬 님을 너무 약하게 보는 것 아닌가? 데몬 님이 고작 그 정도에 타격을 입으실 리 없잖나."
그래, 쟤 말이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아무리 약하다 해도 그렇지, 고작 그 정도에 위험해질 리가 없지 않나.
역시 에드. 어찌 내 맘을 딱 알고 이렇게 대변해 주는지.
속으로 열심히 응원하는데, 이쯤이면 적당히 수그러들 줄 알았던 벤이 오히려 '어떻게 부관이란 작자가 이리도 무심할 수 있느냐'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웃기는 소리! 자칫하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고! 네놈은 현재 데몬 님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기나 하나?"
"어, 어떤데?"
기세에 밀렸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금이 간 유리와 마찬가지라고! 사실상 후유증이 데몬 님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고 봐야 할 정도로 상당히 안 좋단 말이다!"
"그럴 수가!"
어, 음… 내 몸 상태가 그 정도였어…?
새삼 후유증이라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해 두지만 난 아무런 후유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내 몸 상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데….
역시 이 사실만큼은 죽어도 들키지 말아야겠다. 위험도 위험이지만 너무 쪽팔리잖아.
내심 다짐하는데, 에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다가와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한 것 같습니다."
"원래 이랬는데요…."
"입술도 평소보다 빨간 것 같은데… 혹,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진 않으셨는지요."
"그것도 원래 이랬습니다."
쪽팔린다. 그만해라.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등을 돌렸다. 그리고 둘이 더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뺨을 스치며 반쯤 겹쳐진 세 개의 달이 어서 나오라는 듯 지상을 환히 비춘다.
그리고 그곳에는.
미동도 없이 늘어선 군단원들이─
'...장관이군.'
저들의 눈이 나를 향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지.
문이 열리자 일체의 움직임도 없는 상태에서 눈동자만 굴려 나를 쳐다보는데,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실로 겁먹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등 뒤에서 벤이 '앗, 또 심장 박동이!'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니 들렸던가? 아아, 모르겠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기분이다.
"...."
"...."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저들의 이마에도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 저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은 내 땀과는 다른 의미겠지.
그래, 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땀을 흘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저게 열 받아서 나오는 땀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데….
자칫하면 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살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16. 수하들이 너무 유능해서 미칠 것 같다(4)
'0군단 연무장 침입 사건' 이후 처음 보는 데몬 님이다.
군단원들은 생에 다시없을 정도로 바짝 긴장한 채 데몬 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이후 데몬 님은 다시 연무장을 찾지 않으셨다.
물론 평소 방문 빈도가 극도로 적으신 분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작지 않은 사건이 있었으니 한 번 정도는 더 방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군단원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 이날까지 그분은 0군단을 찾지 않으셨다.
당연히 군단원들은 불안함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리신 걸까?"
"하지만 분명 그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셨는데."
"멍청아, 그걸 보이는 대로 믿냐?"
"설마 그깟 침입자 하나 알아채지 못한 우리의 무능함에 질리신 건…."
"...."
싸하다기보다는 암담함에 가까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가 없다. 그분은 군단을 지휘할 때보다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단검을 휘두를 때 전황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시니까.
그런 이에게 군단원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일 게 뻔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수련했건만.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방해는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건만.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였다.
우리 군단장님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자신들은 여전히 그의 발끝조차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실력이 좀 늘었다고 자만했으니….
조금은 풀어졌던 그날, 데몬 님께서 방문하셨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연무장에 숨어들어 온 침입자를 잡으셨다. 성장했다 믿었던 우리의 실력이 하등 쓸모없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했다.
그러니 질리실 만도 하다.
무능하니까. 혼자가 더 편하고 유리할 테니까.
"...수련이나 하자."
"그래, 며칠 뒤에 나간다는데, 방해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워놓아야지."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데몬 님의 얼굴을 봐야 뭐라도 알 수 있지,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군단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출정하는 날을 기다리며 온갖 추측을 늘어놓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모든 준비가 끝나고 기다리는 지금.
'...왜, 안 나오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데몬 님께서 나오시지 않는다. 부관인 에드 님이 모시러 간 지가 언젠데.
차가운 새벽바람을 타고 불안함이 군단 전체에 스멀스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언제 데몬 님께서 나오실지 모르니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데, 드디어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보다 더 굳은 표정의 데몬 님께서 차분히 걸어 나오는가 싶더니, 우리를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점점 더 차갑게 굳어지는 그분의 얼굴을 보며, 군단원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도 우리가 보기 싫으신 모양이다.'
침묵이 흐른다.
새벽바람은 싸늘하건만,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그건 다들 마찬가지인지 누군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밖에 나가자마자 버려지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해야 데몬 님의 분노를 풀 수 있을지, 빨리 생각해 내라며 나름 필사적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군단원들이었다.
***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다. 남들과는 다른 외모로 태어나 차별받으며 살아온 이가 말주변이 좋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남의 말에 적절한 대답을 해주는 것 자체가 내게는 상당한 심력과 두뇌를 소모하는 일이고, 그만큼 피곤한 일이다.
이를 조금 비틀어 말하면,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것도 힘겨운데, 이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상태에서는 절대 먼저 말을 못 꺼낸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
빨리 저들 중 누군가 먼저 입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침묵은 지금까지 경험해온 것들에 비하면 그리 길지 않았다.
"다들 뭐해! 데몬 님 화나셨잖아!"
"?!"
군단원도, 그렇다고 벤이나 에드도 아닌 전혀 다른 이의 개입.
그것만으로도 놀랄 만한데,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내용은 날 소스라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 나 화 안 났는데?'
애초에 내가 화를 낼 상황이 아니잖아. 이건 명백히 늦은 내 잘못이고….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리리넬?"
네가 왜 여기에 있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살짝 고개를 트니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인영이 시야에 담겼다.
달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 제법 몽환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작달막하고 아담한 체구는 귀여움 그 이상을 담아내진 못했다.
뭔가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한 것 같은데… 나중에 우유라도 좀 사다 주든가 해야지. 안타까워서 못 봐주겠다.
"죄송합니다!"
아, 제발 좀…!
잠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단원들이 단체로 허리를 숙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치듯 흩어졌다.
'너희까지 왜 그래 진짜… 너희가 사과해야 할 일은 딱히 없… 아, 설마 리리넬 때문인가?'
11군단장이자 마왕 다음가는 마력량의 소유자.
귀여운 외모 탓에 자주 깜빡하긴 한다만, 그 위명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한낱 군단원들한테는 하늘 같은 존재일 터.
그런 하늘 같은 존재가 빨리 사과하라는 뉘앙스로 외친다? 이건 잘못한 게 없어도 사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고 원망은 내가 받겠지….'
검게 타들어 가는 내 속을 알 리가 없는 리리넬이 내 사선 방향에 내려섰다.
짐짓 수줍게 가벼운 예를 갖추고는 '나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젠장, 저런 외양이면 화낼 수도 없잖아.
화를 냈다간 어린애한테 화를 내는 파렴치한 어른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럴 용기도 없지만.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뭐부터 해야 하지? 군단원? 리리넬?
그래, 우선 허리 아파 보이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군단원들부터.
"일단 다들 고개 들고…."
설득은 꽤나 힘들었다.
군단원들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나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야 간신히 허리를 편 저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째서 내가 저쪽을 설득해야 하는지 잠시 진지한 고찰에 빠지기도 했지만, 일단 이 불편한 분위기를 타파했으니 만족스럽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겠지.
사과한 이유도 상당히 황당했다.
내가 침입자를 운 좋게 잡았던 그때 그 사건.
자신들의 실력이 모자라 날 귀찮게 했다나 뭐라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건 그렇고, 리리넬?"
"네, 데몬 님!"
"여긴 왜…?"
"아, 아아, 맞다! 그러니까… 아, 이걸 드리고 싶어서요."
어쩐지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보던 리리넬이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진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벤의 목에 걸린 것과 흡사한 목걸이.
순간 벤의 것을 훔치기라도 했나 하는 몹쓸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줄에 꿰인 것이 마력석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은 마력석을 주로 목걸이에 꿰서 사용하니까.
그런데 이걸 내게 왜?
"이게 한 번 정도는 즉사를 면하게 해줄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유는 묻지 말자. 준다는데 받아야지. 어디서 감히 주는 선물에 이유를 따져? 예의 없게.
곧바로 목에 착용하자 리리넬이 해사하게 웃는다.
역시 귀엽다. 이게 어딜 봐서 군단장이라는 건지. 그냥 어린애구만.
나도 모르게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리리넬의 목에 둘려 있던 머플러가 기운차게 움직인다.
'아… 저거 촉수였지.'
인간인 내게서 최대한 거부감을 줄이겠다고 머플러처럼 목에 둘러 위장한 두 개의 촉수.
신나게 꿈틀거리는 그것을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뗐다.
최대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섰으나 돌아선 자리에서 보인 광경은 이러한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너희들 뭐하니…?'
어느새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고 있는 군단원들.
그리고 그 끝에서 검은 기류를 풀풀 흩날리며 투레질을 하는 말 한 마리와, 그 고삐를 쥔 채 대기하고 있는 유능한 부관 에드.
충격적이기 짝이 없는 장면에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입안에서 욕이 맴돈다.
'맞다, 저게 있었지… 제기랄.'
내가 마왕성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거다.
멋있어 보이지만 타라고 하면 절대 타고 싶지 않은 외형의 말.
마계의 말은 인간계의 말과 달라서 생긴 것부터가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저걸 타고 전쟁에 참전하면 누구든 일단 피하고 볼 것 같은 생김새랄까.
심지어 성질도 더 더럽다!
내가 저 위에 타면 분명 죽으리라.
떨어져 죽거나, 밟혀 죽거나, 물어뜯겨 죽거나.
'쌰, 쌰앙….'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아니지.
마왕성에서 온갖 위험을 헤치고 살아온 지 약 1년 하고도 반.
유례없는 최대의 난제가 눈앞에 닥쳤다.
***
"저건 뭐야?"
창밖으로 데온을 지켜보던 마왕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말이라니. 인간계의 말도 아닌 무려 마계의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한 녀석이 그런 걸 탄다고?
"마왕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의아한 듯 물어오는 벨리탄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재차 창밖을 내다봤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부터 마왕성을 나가는 그때까지 배웅해 주고 싶다만, 출정하는 군단이 0군단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명색이 마왕이란 작자가 출정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대놓고 편애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에 출정을 준비하는 다른 군단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몸으로 저런 무식한 것을 타고 가려 하다니.
역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저런다니까.
"벨리탄."
"예."
"통신석 갖고 있지?"
"예, 그렇습니다."
"에드의 통신석도 각인되어 있고?"
"예."
"좋아, 잠시 빌리지."
벨리탄의 통신석을 받아들고 에드의 통신석과 연결했다.
데온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락해 봤자 받지 않을 테니까.
일부러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통신석을 들고 다닐 경우, 꼭 얼마 못 가 박살 났기에 방 안에만 두도록 직접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연락을 해봤자 받지 않겠지.
딱히 불편함은 없다.
평소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녀석인 데다, 지금처럼 밖에 나갈 경우엔 부관인 에드가 꼭 함께했으니까.
유능한 부관답게 에드는 항상 통신석을 지니고 다녔다.
그건 지금도 그렇고.
-예, 제0군단장님의 부관 에드입니다.
"카베르다."
-아, 네, 마왕님. 무슨 일이십니까?
"제정신이냐?"
-...예?
갑작스러운 질책에 당황했는지 한 박자 느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왕은 질책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거침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언제 피를 토할지 모르는 인간을 말에 태우려 들어? 그것도 마계의 말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인간에게 그 먼 거리를 말을 타고 이동하게 하려 하다니, 미쳤지?"
-...죄송합니다.
저렇게 나오니 더 할 말도 없다.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라도 한 듯 팍 식는 기분에 마왕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에드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데온은 마계의 말을 좋아하니까. 인간계에는 저런 말이 없어서인지 종종 말을 타는 이가 있으면 빤히 쳐다보곤 했다.
아직까진 따로 말을 타고 싶다거나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지만, 매사에 무심한 녀석이 빤히 쳐다볼 정도라면 어지간히도 말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부관인 에드가 모를 리가 없으니….
아마 지레짐작으로 데온의 고집을 꺾기 힘드리라 생각하고는 곧바로 말을 준비했을 것이다.
성, 그것도 외성에조차 잘 나가지 않고 내성에만 박혀 있던 인간이 모처럼의 외출을 하는 것이다. 말을 타고 가고 싶어 할 것은 당연할 터.
"...이해는 한다."
-아닙니다. 설득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데온을 설득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고집을 꺾는 행위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설득하려 든다는 것부터가 큰 각오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
평소에 온순한 만큼 한 번 터지면 상당히 위험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인간이라 그런가, 분노를 터트리는 시점도 마족들과 달라서 더 까다롭다.
당연히 설득하는 것보다는 묵묵히 준비하는 쪽이 편했으리라.
"아무튼 그래도 안 돼. 당장 마차를 준비하도록 해."
-예.
"설득은 알아서 하고."
-...예.
어쩐지 대답이 늦은 것 같았으나 마왕은 모른 척 외면했다.
결국 그도 데온의 분노나 미움을 사는 것은 사양이었다.
17. 수하들이 너무 유능해서 미칠 것 같다(5)
일생일대의 위기…인 줄 알았던 말에 관한 문제는 예상외로 쉽게 풀렸다.
에드가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더니 말을 치우고는 마차를 준비한 것이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와 극히 정중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는데… 왜 그렇게 저자세인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나는 좋은데 말이지.
아무튼 거듭된 에드의 사과를 받고 마차를 탄 나는 지금 성을 빠져나와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길이 전혀 닦이지 않은 탓에 마차가 달릴 때마다 엉덩이가 아팠으나… 뭐, 참아야지 어쩌겠나. 그 말을 타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
그리고 참기 싫어도 참을 수밖에 없다. 내 앞에 에드가 있거든.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며 맞은편에 앉은 그는 이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차분히 서류를 넘겨 가며 그 깨알 같은 글씨를 읽고 있었다.
실로 굉장한 능력이었다.
"마물들이 도시를 노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이죠. 본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작은 마을들을 노렸겠지만 이제 남은 것은 도시밖에 없으니 그리로 몰려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마왕성 역시 규모가 소도시 급인데…."
"마왕성에는 마왕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더해서 군단장님들도 계시고요."
"아."
"반면에 도시는 그에 비해 만만한 놈들밖에 없습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강자들이 가득한 마왕성과, 수로 밀어붙이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시. 그 둘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도시를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마물은 이성이 없다. 본능에만 충실하다.
이성이 없는 만큼 본능이 발달되어 있는 놈들이 마왕성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느끼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위험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겠지.
이성이 없는 것뿐이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포를 느끼는 감정이 손실되지 않은 이상 마왕성을 기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도시는 교류를 위해 다른 지역의 이들이 자주 오갑니다. 그러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들을 습격하기만 해도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었겠지요."
"지금은 없으니 성 자체를 노리는 것이겠군요."
"네, 그렇습…."
콰앙!
크아아아아아!!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종잇장 같은 내 몸도 흔들렸다.
박치기라도 할 기세로 제게 달려드는 날 자연스럽게 잡아준 에드가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더니 그대로 자리에 앉혀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안에서…."
-죽여!!
"방비를…."
-마차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해!
"...할 예정입니다."
-이 빌어먹을 마물 새끼들!! 죽어! 죽으라고오오오오!!
...정말이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이곳까지 오는 사이 마물의 습격이 여러 차례 있긴 했다. 오죽하면 처음엔 기겁했던 나도 지금 이렇게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에드의 태연함은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참다못한 나는 슬쩍 창문을 열고 밖을 살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밖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에드, 안 도와줄 겁니까?"
"군단원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괜히 0군단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어… 뭐…."
확실히 그래 보이긴 한다. 군단원들은 착실히 마물들을 죽여나가고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녀석도 딱히 없는 것 같고, 아무리 못해도 다들 적어도 한 마리 정도는 온전히 맡을 수 있는 정도이니….
근데… 벤은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죽어! 죽어어어어어!!"
콰악!
피가 튀었다. 나는 급히 몸을 뒤로 물리며 창문을 닫았다.
나름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건만, 이미 늦은 모양이다. 뺨에 뜨끈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 벤은 제정신이 아니야.
손등으로 그걸 대충 훔치자, 어째서인지 기겁한 에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아주더니 단호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창문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 네. 알겠습니다. 근데 벤이…."
조금 전에 봤던 벤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왕진 가방을 휘둘러 마물의 머리를 박살 내며 그보다 더한 괴성을 지르던 모습.
오죽하면 그의 직업에 혼동이 생길 정도였다.
쟤 주치의 아니었나? 주치의는 어디 가고 웬 광전사가 저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벤은 한 번 손맛을 느끼면 자제를 잘 못 합니다. 저래 보여도 마족이니까요."
그렇지, 마족이지. 잠시 잊고 있었다.
주치의인 데다 전투까지 잘하다니. 이 정도면 쟤 하나만 데리고 다녀도 충분한 거 아닌가?
하지만 한 번 날뛰면 자제를 못 한다고 하니 절대로 단둘이 있고 싶진 않다.
지금까지 치료 등의 목적으로 단둘이 있었던 과거들을 떠올리며, 뒤늦게 밀려오는 충격에 나는 슬며시 배를 매만졌다.
'아, 속 쓰려.'
어째 주변에 유능한 인물들이 늘어날수록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다.
-흐하하하핫! 죽어, 이 자식들아아아아!!
"하아…."
밖에서 들려오는 벤의 광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없이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아, 마물이고 나발이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잠시 휴식!"
"휴식!"
에드의 우렁찬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마차 내부까지 들어왔다. 더해서 복창하는 군단원들의 목소리까지.
나는 한참을 앉아 있어 찌뿌둥한 몸을 쭉 펴며 내심 생각했다.
'저러는 걸 보니 역시 부관이 맞는 모양이네.'
하도 시중을 들려 하고 잔심부름만 하다 보니 시종과 헷갈렸다.
제국의 시점으로 보면 저건 부군단장이 해야 하는 것이지만, 마왕성에서는 군단장들의 부관이 부군단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지금 에드는 본인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 되겠다.
하루 종일 마차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아픈 엉덩이도 좀 쉬게 하고 바람도 쐴 겸 마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고 내리기가 무섭게 보인 것은 검은 기류를 풍기고 있은 검은 말 무리. 한 마리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그것들은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뜯고 있었다.
얼핏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 분위기에 잠시 흠칫했던 나는 조금이지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말은 말인 모양이네. 생긴 거랑 어울리지 않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니… 음?'
...뭔가, 좀 이상한데.
저거… 마물 시체 아니야?
맞다. 정말 마물 시체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지금 평화롭게 옹기종기 모여서 마물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등에 딱딱하고도 차가운 마차의 문이 느껴졌을 때였다.
"데몬 님."
"...."
"데몬 님?"
"...."
제길, 무시무시한 것들! 심지어 많기까지 하다.
군단원들의 수만큼 있으니 많은 것은 당연하다만… 역시 무섭다. 갑자기 저게 미쳐 날뛴다던가 그러진 않겠지?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외형 탓일까,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시선이 그리로 간다.
절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관심이라면 관심이겠지. 경계를 위해 시야에 두는 것 역시 관심의 일종일 테니까.
그렇게 멍하니 말 무리를 바라보는데, 난데없이 코앞에 불쑥 물병이 들이밀어졌다.
"데몬 님, 물 드시겠습니까?"
불쑥 내민 것 치고는 제법 정중한 태도.
내밀었다기보다는 바쳤다고 보는 것이 어울릴 듯한 그 행동의 주인은 다름 아닌 충성스러운 부관 에드였다.
사실 예상하긴 했다.
'내게 이렇게 지극정성인 이들이 얼마나 되겠어.'
상대가 한낱 인간임에도 이렇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니.
"고맙습니다."
물에 대한 감사와, 인간인 내게도 내색 없이 본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한 감사.
두 가지 의미를 담은 인사임을 알 리 없는 에드가 그저 당연한 일이라며 한 번 싱긋 웃어 보인다.
그러고는 조금 전 내가 멍하니 보던 말 무리를 한 번, 내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이내 뭔가 각오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조금 전에 보니까… 말을 보시는 것 같던데…."
"아, 네."
젠장, 기껏 잊고 있었더니만.
그래, 보고 있었지. 혹시라도 저것들이 미쳐 날뛸까 봐.
튼튼한 마족들이라면 모를까, 인간들 중에서도 유독 연약한 내가 저런 것에 부딪쳤다가는 그대로 몸과 영혼이 분리될 것이다. 그러니 경계를 할 수밖에.
그나저나 그걸 눈치채다니, 어지간히도 나를 감시하는 모양이다. 마왕이 명령이라도 내렸나?
'아니 혹시, 사직서 얘기 때문에?'
내가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추측이다.
집요한 마왕의 태도에 치를 떠는데, 조금 망설이던 에드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머뭇거리며 열린 입술 사이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혹, 말이… 타고 싶으신 겁니까?"
"예?"
"역시 미련이 남으셨던…."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래. 내가 저런 끔찍한 걸 타고 싶어 한다고?
황당함에 입만 뻐끔거리다가 뒤늦게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그게 또 그에겐 다르게 비친 모양이다.
"아니, 절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답답하시겠지만 적어도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만이라도 마차를 이용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말은 그 뒤에 원 없이 타셔도 되니, 부디."
"...."
재차 부정하려던 입을 멈췄다.
잠깐만, 그럼 나 평생 탈 일이 없다는 거 아니야?
내 몸 상태는 후유증 따위가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니, 평생 이 이상 나아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알겠습니다."
마족에게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고, 서로 민망해지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자칫 말을 탈 뻔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목이 탄다.
마침 손에 물병도 들려 있겠다, 눈치를 살피며 입에 한 모금 머금는데….
"신입, 이젠 말도 제법 탈 줄 아네?"
"아닙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겸손은 무슨.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럼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지, 아마?"
"그래,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남았지. 우리 군단만의 특수한 전통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특수한 전통이라니. 0군단에 그런 게 있었나?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절차라, 무엇일까.
그전에 0군단에 전통이라는 게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문이다.
0군단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군단. 즉, 만들어진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생 군단이라는 건데… 전통이라고?
물을 삼키는 소리가 저들의 말을 듣는 데 방해가 될까, 입에 머금은 채 저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는 물을 삼키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0군단원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 우리의 군단장이신 데몬 님에 관한 이야기."
"아, 설마…."
"그래, 명색이 0군단인데. 데몬 님께서 용사를 죽였을 때의 그 상황에 대해 확실히 알아두어야 어디 가서 쪽 당하지 않지."
푸흡-!!
"쿠, 쿨럭! 컥, 커헉."
"데몬 님?!"
곧장 고개를 숙인 덕분에 다행히 에드의 얼굴에 물을 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급히 입가를 훔치며 잘못 넘어간 물을 빼기 위해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덕분에 당황한 것은 에드였다.
허둥거리며 새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에 대준 그가 손수건을 살짝 떼 안쪽을 확인하더니 경악이 서린 표정으로 더듬거린다.
"피, 피가…."
응? 또 피가 나왔나?
저 파리한 안색을 보니 또 피가 나온 모양이다.
뭐,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너무 당황한 거 아니….
"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치의, 주치의!!"
"...?"
"벤! 어딨나! 베에에에엔!!"
저기요? 지금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째서 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더 당황하는 건데. 원래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그의 손수건은 깨끗했다.
적어도 붉은 얼룩 같은 것이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난 그냥 사레들린 것뿐이라고.
"무슨 일인가!"
맙소사. 벤까지 와버렸다.
허둥지둥 달려온 저 꼴을 보아하니 괜히 양심이 쿡쿡 쑤신다.
지금이라도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너무도 충실해서 저 멀리 치워버리고 싶은 부관이 나보다 한발 앞서 그의 멱살을 잡고 바락바락 외쳤다.
"데몬 님께서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셨는데, 피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이쯤에서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틀렸어. 이놈들, 상식이 전혀 통하지가 않아.
18. 들춰진 베일(1)
"그래서 말인데, 혹 물병에 독이 들어 있던 게 아닌가?"
"그럴 가능성도 있군! 일단 물병은 따로 챙겨두게. 그 물병을 누가 준비했는지도 알아두고!"
"그러지… 응? 잠깐, 생각하고 보니 그 물병은 내가 직접 준비했는데?"
"에드 네놈… 네놈이 그럴 수가…!"
"아니, 잠깐만. 어째서 사고가 그쪽으로 튀는 건데?!"
아, 생각하고 보니 벤은 아직 전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즉,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
'그런 녀석을 부르다니, 날 죽일 생각이었냐.'
조금 식은 눈으로 에드를 본 것도 잠시, 그래도 날 생각한 것인 데다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으니 그걸 감안해 참작해 주기로 했다.
절대 다음 부관이 12군단장의 부관, 다하르 같은 녀석이 올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 저 둘이 생사를 건 결투라도 벌일 것 같아 나는 황급히 기침을 갈무리하고 둘을 불렀다.
"난 괜찮으니 두 사람 다 그만하고… 켈룩."
"데몬 님!"
"도대체 무슨…! 피가 나온 것도 아니고, 마력석에 반응도 없고… 도대체 뭐지? 마력석이 불량인가? 돌아가자마자 바꾸든가 해야지, 원!"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아, 망할….
하얗게 불태웠다.
뭐를? 내 정신력을.
고작 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리도 많은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할 줄이야.
그럼에도 둘은 끝까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우리의 강인하신 데몬 님께서는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혼자 독을 이겨내시고 거짓말을 하시는구나.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속아주자' 정도의 납득만 했을 뿐.
그쯤에서 멈춰준 것은 정말 고마운데 말이지… 왜 난 환장할 지경일까.
"그때 데몬 님께서 전 7군단장을 깔아뭉개며 그 사이에 떨어지는데…!"
들뜬 듯 잔뜩 과장된 목소리가 들렸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에드가 깔아준 망토 위에 앉아 마차 벽에 기댄 채 멍하니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내 하얀 머리칼을 어지럽힌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바람은 얼른 정신 차리라는 듯 두피를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덕분에 어느 정도 머리가 식으며 '나의 무용담'에 관한 진실이 머릿속 빈자리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래, 저거. 저거 때문에 또 내가 위가 아프다니까. 환장하겠다, 진짜.'
나는 용사를 죽이지 않았다.
자폭하려던 용사를 제지하지도 않았고, 그의 자폭을 몸에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전 7군단장에 관한 이야기도 사실은 조금 많이 왜곡되어 있었다.
이참에 나에 대해 다시 정리해 보겠다.
내 이름은 데온 하르트.
현재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왕성에서 '데몬 아루트'란 이름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마지막 용사'의 '마지막 동료'였다.
'마지막 용사, 라….'
고개를 젖혀 마차 벽에 기댔다.
세 개의 달과 별이 총총히 박힌 검은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우습지도 않지.'
'마지막 용사', '마지막 동료'.
이건 제국에서 칭하는 말이다. 이유는 별거 없다.
제국은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냥 '용사'와 '그의 동료'로 칭하는 것보단 '마지막'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이 좀 더 무게감 있어 보일 테니.
나는 '마지막'이란 수식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용사에게 붙은 것이라면 더더욱.
'영원한 마지막이란 것은 없으니까.'
여기 두 아이를 낳은 집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선 둘째가 막내일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를 더 낳게 되면? 둘째에게 붙어있던 '막내'라는 별칭은 셋째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용사도 그렇다.
세계는 균형을 중시한다. 마왕의 힘은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대하고, 그렇기에 마왕이 살아 있는 한 언제가 될지 몰라도 세계는 또다시 용사를 보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죽은 동료에게 붙어있던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새로운 용사에게로 넘어가겠지.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 용사'의 '마지막 동료'가 아닌,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용사들 중 하나'의 '마지막 동료'가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마지막'이란 단어에 그리 큰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건 그저 있어 보이기 위한 일종의 허세와도 같으니까.
"자폭하려는 용사의 어깨를 딱! 잡더니!"
아, 아직도 이야기 중이었나.
그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건 그냥 용사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귀를 가까이 댔던 것뿐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그래, 용사의 동료로 발탁되어 마왕성으로 향했던 이야기부터.
'...다시 생각해보니 살아 있는 게 용하네.'
그때의 일을 다시 생각하자니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마왕성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험했다. 아니, '상당히'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동료로 발탁되었던 그 많은 이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는데, 어찌 그리 단순하게 '험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결국 저 멀리 마왕성이 시야에 들어올 쯤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용사는 유일한 동료가 되어버린 나를 너무도 신뢰했다.
실상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데.
'그래, 운이 좋았지.'
나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있는 군단원들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진심이십니까?"
절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지금 용사의 눈엔 저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용사'가 괜히 용사일까. 용사는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누구보다 압도적인 재능과 압도적인 신체를 타고난 존재.
현재 그는 내가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저 군세를 선명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틀어 거대한 마왕성을 쳐다봤다.
역시 웅장하다. 바로 저기에 마왕이 살고 있단 말이지.
그럼 저기에 그냥 처박혀서 계속 살고 있을 것이지, 왜….
'왜 마중을 나와서 이 지랄인지.'
거대하고도 웅장한 마왕성.
보통은 저 덩치와 위엄에 시선을 빼앗길 테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까만 것들.
그래, '마족'들이다. 보나 마나 마왕님의 싸움을 구경하겠답시고 따라 나온 군단일 테지.
내 말 이해했나? '따라 나온'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금 마왕성 앞에 마왕이 나와 있다는 뜻이다.
보통 최종 보스는 가장 안쪽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째서 나와 있는 건지.
"애초에 '동료'의 역할은 용사가 마왕 앞까지 도달하도록 길을 터주는 것입니다. 전투는 오롯이 용사의 몫이지요. 그러니까 하르트 님, 당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어요."
"...."
"그래도… 이기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테니, 전투가 끝날 때까지만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재차 어마어마한 군세를 내려다보며 나는 확신했다.
용사는 진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왕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저 병력까지 상대해야 한다고? 아무리 용사라 해도 그건 불가능해.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마왕의 앞까지 길을 터주는 것이 바로 '동료'의 역할. 그러니까 저 병력을 막고 용사가 마왕과 온전한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동료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그걸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은 개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겠지.
기왕 죽을 거, 한 사람이라도 살려놓고 죽는 것이 나을 테니까.
실로 용사다운 발상이다.
"그…."
나오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턱 걸린다. 누군가 목을 옥죄고 있는 듯 숨이 막혔다.
나는 지금 그를 불러 무얼 하려는 걸까. 어차피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 되는 것을.
그를 불러봤자 할 말은 없다. 감히 돌아가자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용사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그런 그가 마왕을 앞에 두고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버린다는 뜻이고.
그렇다고 해서 나도 같이 가겠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살겠다고 아등바등했는데, 그렇게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죽을 게 뻔한 자리로 가겠다는 말이 쉬이 나올 리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나는 살고 싶었다.
"...."
입을 다물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예."
간신히 대답을 뱉었을 땐, 그는 어느새 우리가 숨어 있던 절벽 아래로 내려가 마왕군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담기지 않은 걸음걸이.
패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걸이가, 마왕의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춘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마왕이 주위를 향해 손짓을 한다. 그러자 포진해있던 군단들이 우르르 물러서 거대한 원형을 이루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네.'
솔직히 1 대 1로 싸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명색이 마왕이지 않은가. 비겁한 짓을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자리이니.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못 가 내 생각은 바뀌었다.
'미친, 저게 뭐야.'
그는 양심이 있어서 주위를 물린 것이 아니었다.
이길 자신이 있기에 물린 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라 불리고 있는지,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압도적이다.
상대는 '용사'인데.
마치 성인이 어린아이를 가지고 놀 듯, 마왕은 지루하고도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의 모든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마왕의 승리였다.
용사의 배를 파고들어 등까지 뚫고 나온 그것이 붉은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마왕은 시시하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죽이려는 듯 그의 몸에 꽂힌 검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였다.
"누구냐!"
"!"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대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그것은 명백히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단검부터 빼 들었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한 나는 이내 손에 힘을 풀어버렸다.
'...오우거.'
저건 절대 못 이겨.
심지어 말까지 한다. 그렇다는 건 마왕의 힘에 영향을 받은 '마족'이라는 것일 테고, 그만큼 일반 오우거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
도망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도망치는 데에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80%의 운과 20%의 민첩한 몸놀림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말 다 했지.'
정확하겐 민첩한 몸놀림보다는 '도주 능력'이 더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자존심상 '민첩'이라고 칭하는 게….'
부웅!
"윽, 미친!"
정말이지 겨우 피했다. 다짜고짜 검부터 휘두르다니, 공격 전 대화 시도는 기본 아니었나?
반사적으로 상체를 젖혀 피한 판단력과 그걸 버틴 유연한 허리에 감사하며, 나는 그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맞다, 여긴 절벽이지.'
투둑. 발뒤꿈치를 받치고 있던 바닥이 바스러져 아래로 떨어진다.
유일한 퇴로는 저놈이 막고 있는 길뿐.
녀석이 들고 있는 무식하게 긴 검과, 상체의 터질 듯한 근육, 그리고 지금 상황을 아주 잘 아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내 운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야.'
녀석이 무식하기라도 했다면 어찌어찌 유인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겠지만, 저 녀석의 태도를 봐선 적어도 멍청하진 않은 것 같다.
아마 내가 죽게 된다면 그건 바로 눈앞의 저 녀석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포기하기엔 목숨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애초에 용사의 동료로 발탁된 것부터가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겠다!
같이 죽는 것도 억울하다. 너는 죽어라, 나는 살 테니.
양손에 단검을 쥐고 녀석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기합을 내질러 저 아래의 적들에게 내 존재를 알려주는 그런 멍청한 짓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뜬 채 소리 없이 달려들었다.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뜬 녀석이 이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검을 재차 들어 올린다.
놈이 발을 앞으로 크게 딛고, 한껏 올라간 검이 공간을 가르며 나를 향해 내려올 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나는 머릿속으로 타이밍을 셌다.
'지금!'
19. 들춰진 베일(2)
넘어지듯 바닥을 굴러 녀석의 등 뒤에 자리했다.
보통은 등 뒤에서 찌르거나 베어내겠지만, 오우거의 가죽은 내 미약한 근력으로 뚫기엔 무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힘껏 몸을 내던져 녀석을 밀쳤다.
오우거의 덩치와 힘을 고려해서 진짜 온 힘을 다했다. 오죽하면 내 몸이 반대로 튕겨 나왔을까. 솔직히 어깨가 바스러지는 줄 알았다.
그런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건지, 녀석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바닥을 구르던 몸을 벌떡 일으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그를 확인했다.
코앞은 절벽. 이대로 떨어지면 나의 승리다.
이미 상체가 절벽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저대로면 머리부터 떨어지겠지. 다리부터 떨어진다면 모를까, 저 상태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올라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빌어먹을 오우거 자식이.
기어코 그 상태에서 몸을 돌려 내 발목을 잡았다!
'씨발!'
젠장 맞게도 오우거의 팔 길이를 고려하지 못했다.
몸이 훅 꺼지며 시야가 휙휙 바뀐다.
하늘이 멀어지고 있음이 작아지는 구름을 통해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콰아앙!!
몸 전체에 무거운 충격이 전해졌다.
'우욱.'
속이 진탕이 된 것 같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꾸역꾸역 삼키며 어찌어찌 일어나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푹.
...푹?
아, 나 단검을 쥐고 있었지. 그런데 땅이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을 에워싼 마족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사와 마왕.
...응? 아니 잠깐 이거 뭐야?!
심지어 내 밑에 있던 놈은 좀 전의 그 오우거다. 바닥을 짚으려 했던 내 단검이 찌른 곳은 다름 아닌 목.
'오우거라 해도 체중을 실어서 찌르면 찔러지는구나… 가 아니라!'
나 지금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거지? 게다가 저들 눈앞에서 동료를 죽인 거지? 그런 거지?
갑작스러운 난입 때문인지 사방이 조용하다.
마왕조차도 침묵하는 가운데, 나는 저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생존 본능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용사.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좀 불길하지만 달리 갈 곳은 없다.
사방은 마족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어디로 가나 죽을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마왕에게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미 반쯤 죽어가는 것도 모자라, 자폭할 기세인 용사가 내 유일한 생명줄이라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표정을 굳힌 채 다리를 떨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었다.
용사의 앞까지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미 내가 떨어졌을 때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던 용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고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전혀 안 들리잖아.
'말할 기운도 없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단 무슨 말인지 궁금했기에 나는 친절히 그의 어깨를 잡고 귀를 가까이 대주었다.
그러자 쌕쌕거리는 소리에 섞여, 희미한 목소리가 귓속에 흘러들어왔다.
"당신은… 정말…."
"...?"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뭐야, 끝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용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무리가,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린 것이다.
처음엔 당황했던 나는 얼마 못 가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힘을 양도하고 싶었던 건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자폭까지 포기해 가며.
환희나 고마움보단, 안타까운 마음부터 들었다.
용사의 힘은 의도적인 양도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선택지가 바로 힘의 파편을 대륙 전체에 흩뿌리는 것.
누가 파편의 주인이 될지도 미지수인, 말 그대로 용사의 의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그런 방법밖에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용사의 힘이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착은커녕 조금도 머무르지 못하고 마치 그물을 통과하는 물살처럼 유유히 통과한 그것은, 빛을 잃고 바싹 타버린 재처럼 조각조각 바스러지더니 이내 멀리멀리 사라졌다.
아마 이대로 대륙 전역에 퍼지겠지.
'어째 피뢰침이 된 기분인데.'
용사의 힘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저장해 두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미련하긴.'
용사도 그걸 또렷이 느끼고 있을 텐데,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끝끝내 밀어 넣던 힘이 서서히 약해지며 덩달아 용사의 몸 역시 내게 기대듯 무너진다.
그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눈 마주쳤다.'
나를 달래듯, 그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 순간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사로잡았으나, 밀려 들어오던 힘이 뚝 끊기고 모든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의 몸이 축 늘어지는 순간까지,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용사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죽었어.'
내 유일한 생명줄이.
재차 확인을 해보지만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맥박 역시 조금도 뛰지 않았다.
충격으로 멍해진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떨어졌을 때 내려앉았던 정적. 그 정적이….
"...."
"...."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 무진장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며 슬그머니 일어서자, 나를 보는 이들의 눈동자도 서서히 올라간다.
아, 차라리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저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긴장감에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저 시선들 중 마왕의 것도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 다리가 떨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아니, 손도 떨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니잖아!'
이 상태로는 위험하다.
약육강식에 특화된 마족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그대로 먹힐 거라는 것을, 이곳에 오기 전 열심히 공부했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려는데.
"쿨럭."
주륵.
입 밖으로 피가 울컥 튀어나왔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꾸역꾸역 참고 있던 그것이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
지그시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떨어졌을 때 몸 전체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예상외로 잘 버티기에 조금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필 지금 뱉어낼 줄이야.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이 빌어먹을 몸뚱이를 갈아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축 늘어진 용사의 몸은 어찌나 무겁던지.
'도망쳐야 하는데 이러면 짐만 되잖아. 확 버리고 튀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굳게 닫혀만 있던 마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 이름이?"
이건 무슨 의도일까.
도망치면 찾아내서 죽여버리겠다는, 그러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어쩌면 성을 듣고 가족들을 찾아내 죽이거나 협박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도망쳐 살아남을 확률은 극도로 낮으니 이름이야 말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고.
그보단 가족, 가족들이라….
"...데온 하르트."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이 뺨을 간질인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그것을 쓸어올리고는 붉은 눈동자가 자리한 눈가를 매만지며 설핏 웃었다.
자, 이름을 말해 줬으니 어디 한 번 하고픈 대로 해봐.
그렇게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으나, 돌아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상상조차도 못했던,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 말.
"마왕군이 될 생각은 없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왕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버렸다.
기쁘진 않다. 말이 제의지,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협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꾸만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용사의 시신을 고쳐 안으며 나는 감히 마왕 앞에서 당당히 거절 의사를 피력했다.
"서류 작업은 싫습니다!"
...조금 많이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일단은 거절 의사가 맞다.
의외로 군단장들이 서류 작업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지. 굳이 이곳에 붙잡혀서까지 서류 작업에 시달릴 생각은 없다.
"그럼 하지 마."
"...?"
"흐음, 서류 작업을 하지 않는 고위직이 뭐가 있을까…."
네? 저기요?
"뭐, 없으면 하나 만들면 되지. 0군단장 어때? 마음에 들지?"
아아아니, 잠깐만. 당신 미쳤어?
1군단장이 마왕의 대행자 역할을 맡을 정도인데, 무려 0군단장을 하라고? 아직 내 실력이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반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이 장면을 본 놈들이라면 반대는 꿈도 못 꾸겠지."
그제야 나는 느꼈다.
이건 뭐가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결과적으로 나는 거절할수록 높아져만 가는 대우에 짓눌려 가장 처음 제안했던 0군단장 자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콰아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데온 하르트가 떨어져 내렸을 때, 용사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아마 배에 꽂혀 있는 검만 아니었더라면 벌떡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결과는 이미 정해졌으니까.
용사는 마왕을 죽이지 못했고, 도리어 마왕의 손에 죽을 일만 남았다.
마왕을 죽이지 못한 용사는 존재 가치가 없다.
용사가 받는 모든 대우와 명예는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나오기에 마왕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회수되는 것 역시 당연했다.
쉽게 말해 마왕에게 패배한 지금의 용사는 구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 것을 왜.
왜 굳이 이 죽을 자리에 온 것일까.
데온 하르트. 그에겐 '동료'로서의 의무뿐만 아니라 전투의 결과를 제국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러니 굳이 죽을 게 뻔한 이쪽에 난입하는 것보단, 조용히 자리를 뜨는 쪽이 훨씬 유익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그는 적진 한복판에 난입했고, 지금 이렇게 이쪽으로 당당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 하하.'
가쁜 숨소리에 섞여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동료애라도 생긴 겁니까. 그래서 이렇게 시체라도 수습하러 온 것이고요?
──마왕을 마주해 가면서까지?
배에 꽂힌 검 때문일까, 미묘한 감각이 아랫배부터 부글부글 끓으며 올라가 심장 주위를 맴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기를 한참, 그게 답답했던지 그가 재촉하듯 어깨를 잡고 귀를 가까이 댔다.
거기에 힘입어, 용사는 한 가지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무모할 정도로 착하고 의리 있는 사람.
다음 대의 '용사'가 탄생한다면 그게 당신이 되면 좋을 텐데.
자폭을 위해 끌어올렸던 모든 힘을, 그에게 양도하려는 의도를 담아 쏟아붓기 시작했다.
용사의 힘은 의도적인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용사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죽은 뒤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이 사람이 살길은 이것 하나이기에.
세계가 정한 허용선을 성큼 넘은 용사는 현재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세계를 불렀다.
'세계여, 보고 있습니까.'
보고 있으리라. '용사'는 세계가 직접 선택하여 힘을 부여한 존재이니.
그러니 보고 있을 테고, 알고 있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독단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세계의 뜻을 어긴 대가는 모두 내가 짊어질 테니.
'이 행동에 대한 분노는 오로지 나만을 향하길.'
죄의 무게를 측정하던 세계가 판결을 내렸다.
순간 용사는 끔찍한 고통에 혀끝을 씹었다. 미처 나오지 못한 비명이 목 안 깊은 곳에서 요동쳤다.
근육을 헤집고 뼛속을 날카로운 것으로 찍어대는 듯한 고통. 그 상태에서 힘을 밀어 넣으니 머리마저 깨질 듯 아파온다.
아마 세계의 경고이자 응징일 테지만 무시했다.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피를 집어삼키며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을 무릅쓰고 힘을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제발. 하다못해 파편 한 조각만이라도….'
이런 사람을 마왕에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러니 제발, 그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그러나 그의 간절함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데온을 향해 쏟아졌던 모든 힘들이 빛만 잃은 채 그대로 나와 대륙으로 퍼진다.
마치 구름을 통과하는 새처럼 유유히 그의 몸을 통과한 그것들은 단 한 조각도 빠짐없이 바람을 타고 햇살을 타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역시, 안 되는 겁니까.'
상황을 넓게 보면 손해 보는 것은 없다.
허용선을 넘긴 했지만 어쨌거나 용사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힘의 '양도'를 택했고, '목숨'이라는 대가를 받은 이상 세계는 그의 목적인 '양도'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니 저렇게 사라진 힘은 세계에 귀속되지 않고 여타 '양도'를 택한 용사들의 힘처럼 대륙에 머물며 또 다른 '영웅'을 만들어내겠지.
하지만 그러면 데온 하르트는.
20. 들춰진 베일(3)
'....'
자꾸만 떠오르는 암울한 미래에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 모든 것을 정하고 지켜보는 세계나 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진 몰라도 아마 그건 절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해도 결국은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모습을 그들이 표방했다면, 이리도 냉정하고 가차 없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서히 무너지는 육체를 추스르지 못하고 데온 하르트에게 기댔다.
이젠 고개조차 가누기 힘들어 힘없이 젖히니, 세 개의 둥근 달이 박힌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복잡한 표정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용사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굳이 듣고 싶은 말을 고르라 한다면….
'이름.'
용사라는 칭호가 아닌 내 이름을.
하지만 당신은 모르겠지. 나조차도 잊어버린 내 이름을 당신이 알 도리가 없을 테니.
용사가 된 이상 이전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건 그 존재 가치는 '마왕을 죽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목적에 매몰되어 스스로조차 이름을 되뇌지 못하는….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네요.'
다음 대의 용사는 데온 하르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사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오는 죽음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건 결과가 나왔으니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후련하다. 오히려 죽음이 기껍기까지 했다.
이제는 쉴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내 이름, 그래도 장례식 때는 한 번 정도 언급될 텐데.'
만약.
살아 돌아가 내 장례식을 지켜보게 된다면.
당신은 내 이름을 기억해 줄까.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마왕의 인정을 받아 4개의 주 도시 중 하나인 '첫 번째 도시'를 맡고 있는 관리자는 드물게 덜덜 떨며 성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본래 '관리자'란 인간계로 따지면 '영주'에 비할 수 있는 존재다.
적어도 그 도시에서만큼은 왕이나 다름없는 관리자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며 나와 있는 이유라 하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제0군단장'의 방문.
다른 군단장이라 해도 두 손을 싹싹 빌며 굽실거려야 할 판에, 어떤 성향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거물 중의 거물이 오다니.
굳이 소감이 어떻냐 묻는다면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해 보라.
성향을 모르니 쉽게 아부를 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주제에 기분을 맞춰주지 못하면?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정든 머리와 영영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수하면 죽는다. 실수하면 죽는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등은 진작부터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축축해진 두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관리자는 눈앞에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며 빠른 시간 내에 성향을 파악하는 것.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상대는 마왕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는 0군단장. 자칫 심기를 거슬렸다간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난 오래오래 살아서 이 권력을 누리고 싶다고!'
이내 마차 문이 열리고, 안에서 훤칠한 사내가 훌쩍 뛰어내린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말끔한 인상. 귀족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흉흉한 마력.
저자가 0군단장인가? 아니, 마력이 있다. 0군단장은 분명 '인간'이라 했으니 마력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을 터.
역시나, 저 사내는 0군단장의 오른팔쯤 되는 이였는지 한없이 정중한 몸짓으로 누군가 나오길 기다리듯 마차 문을 잡았다.
그러자 검은 로브의 존재가 마차 계단을 밟고 느릿하게 내려섰다.
'저 사람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 여유로운 몸짓, 태연한 태도, 로브를 쓰고 있음에도 풍기는 위압감까지.
애초에 0군단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로브를 쓰고 있는데, 그가 아니면 과연 누가 0군단장이겠는가.
그의 덩치는 예상외로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술에 잔뜩 취해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상태에서 길 가다 마주쳤더라면 되레 시비를 걸었을 정도로 왜소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정신도 멀쩡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분위기를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강대한 마력을 가진 훤칠한 남자가 누구에게 저리도 극진히 대하고 있는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왕진 가방을 든 남자가 누구를 그리도 챙기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마물과 전투를 한 듯, 몸 여기저기에 피를 묻힌 이들이 누구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 가장 여유로운가.'
꿀꺽.
재차 마른침을 넘기고, 조용히 목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로브의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연이은 마물들의 습격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영영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도착할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
나는 자리에 앉은 채 멍하니 열린 마차 문을 바라봤다.
'내리기 싫다.'
어차피 이미 늦었지만, 여기서 내리면 정말로 꼼짝없이 이 도시를 끔찍한 마물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내 실력이 들통 날 확률도 증가하겠지. 아, 그리 생각하니까 더욱 내리기 싫다.
내리기 전, 에드가 씌워준 로브의 후드를 꾹꾹 잡아당기며 머뭇거리자, 마차 밖에서 문을 잡고 있던 에드가 의아한 듯 나를 부른다.
"데몬 님?"
"...갑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릿느릿 마차 계단을 밟고 내려서자 도시의 관리자인 듯한 투실투실한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원래 저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 저런 표정일 리가. 저건 분명 내가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해.'
기껏 도시를 지켜줄 군단장을 보낸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잔챙이가 와버렸으니 어찌 속 편히 웃을 수 있을까.
아마 지금쯤 '우리 도시는 망했어!'라면서 속으로 좌절하거나, '빌어먹을 마왕 새끼!' 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해맑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다.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데, 그새 감정을 정리한 건지 그가 한 걸음 나서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첫 번째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줄줄이 찬양이었다.
무려 0군단장님께서 방문하시니 두 번은 없을 영광이라느니, 도시 사람들도 모두 안심할 거라느니.
뭔가, 찬양은 찬양인데 대놓고 아부하는 것 같지는 않은 자연스러운 찬양이랄까.
그에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새끼 프로다! 빠른 감정 조절도 그렇고, 이건 아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차마 끊을 용기도 없어 그저 속으로 감탄만 하고 있는데, 슬쩍 나를 살핀 에드가 딱딱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부는 그쯤하고."
"!"
너,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잔챙이가 와서 기분이 별로인 것 같던데, 그 잔챙이가 갑질까지 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보통 이런 경우 앞에서 나댄 부하보다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상관이 욕을 먹는다고.
역시나 놀랐는지 관리자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프로답게 자신의 표정을 헤픈 웃음으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유례없는 0군단장님의 방문에 너무 들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0군단장 데몬 아루트 님의 부관 에드다. 단순한 관광이 목적이었다면 네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목적은 도시를 지키는 것이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너그러운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재차 허리를 깊숙이 숙인 관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에드는 철저히 보고를 받는 상관이 되어 있었다.
펜을 든 그가 마차 안에서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재차 뒤적이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물은 정확히 며칠 간격으로 공격을 해왔지?"
"아… 딱히 규칙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일주일 내에는 다시 공격해 오리라는 것 정도가 될 듯합니다."
"공세는 어느 정도였고, 그 수는 어땠지?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마물들이 왔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나?"
"예, 그렇습니다. 저들도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생존이 걸린 일이라 그런지 주위의 마물이란 마물은 전부 모인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공세 역시 무시무시했고요. 사실상 전투도 전투지만, 그보단 기세 쪽에서 크게 밀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기세라… 그 정도로 필사적이었나 본데… 뭐, 기세가 큰 문제였다면 이젠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니. 긍정적인 말 같아서 좋긴 한데… 그 말을 하면서 날 보는 건 뭐지.
착각이 아닐까 했지만,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는 그의 행동에서 나는 불길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 뭔가 있다!
저, 저기? 잠시만….
"특이사항은?"
무시당했다!
"상대를 마물이라 생각하는 것보단 하나의 수성전이라 생각하고 전투를 벌이는 쪽이 더 맞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데몬 님."
"...네?"
지금까지 날 빼놓고 실컷 대화를 하더니 이럴 때만 나를 부른다. 내게 뭘 바라는 건데?
그래서 어쩌라는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던 에드가 재촉하듯 재차 말을 걸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
어찌하고 말 것도 없다.
굳이 마물을 찾으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할 생각은 없으니 여기 처박혀서 놈들이 올 때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지.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데몬 님?"
"...일주일 내로 쳐들어온다 했으니 기다려야죠. 굳이 놈들 좋으라고 밖까지 마중을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그동안 군단원들은…."
"마물들의 공격이 있을 때까지 자유입니다. 술을 마셔도 좋고, 쇼핑을 해도 좋습니다. 단, 공격이 있을 시 곧바로 대응 가능해야 합니다."
그 말이 그리도 좋았는지, 군단원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진다.
내 선택이 옳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나는 뿌듯함에 모처럼 당당히 가슴을 폈다.
무려 일주일이나 걸릴지도 모른다는데 마냥 대기하고 있으라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물론 내가 상관이니 대기하라 해도 그리했을 테지만, 그만큼 나에 대한 원망 수치도 쭉쭉 올라갔을 테니 썩 좋은 판단은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참에 생색도 좀 내고, 나에 대한 호감도 좀 쌓아두는 편이 이득이리라.
그래야 내가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늘어나지.
'알겠지? 그러니 마물이 쳐들어오면 나부터 지켜야 된다?'
속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한참 전부터 눈치를 살피던 관리자가 이때다 싶었는지 슬쩍 끼어들었다.
"주무실 곳은 저희 측에서 마련했습니다. 가보시겠습니까?"
"오."
말부터 행동까지 상대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데 아주 능숙하다. 역시 프로다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는 군단원들을 돌아봤다.
"그럼 숙소의 위치만 파악하고, 그 뒤는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와아아아아아!!"
"데몬 님 만세!!"
군단원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실컷 놀라고.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니까.
'오랜만에 술이나 마셔야지.'
모처럼의 도시다. 심지어 이곳 첫 번째 도시의 또 다른 이명은 무려 '유흥의 도시'.
술과 도박, 매춘 등 쾌락과 관련된 것들이 바로 이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것!
그중 내 마음에 쏙 든 것은 당연히 술이다.
술을 마실 생각에 신이 난 나는 체면상 겉으로 티 내진 못하고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는 관리자의 뒤를 따랐다.
21. 들춰진 베일(4)
방은 훌륭했다.
마왕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건 애당초 규격 외이니 제외하도록 하고, 나는 속으로 감탄을 뱉으며 성큼성큼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세 개의 달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아직 낮이군.'
그것도 대낮.
물론 마계에는 해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낮과 밤의 구분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저 하늘을 차지한 세 개의 달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세 개의 달이 가로로 길게 늘어서면 낮, 서로 겹쳐져서 하나처럼 보이면 밤.
지금은 일렬로 늘어서 있으니 낮인 것이다.
'낮이면 어때. 낮술은 또 그만의 매력이 있는 법인데.'
답답한 로브를 벗어 던지고 입고 있는 옷을 대충 훑었다. 활동하기에 편리해 보일 뿐인, 아주 평범해 보이는 옷.
이대로 나가도 상관없겠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너무 들뜬 나머지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 됩니다."
"이곳은 '지켜야 하는' 도시입니다. 도시를 엉망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내게는 두 명의 빌어먹을 스토커가 있다는 사실을.
...제기랄!
***
"이게 9군단장인가."
"네, 그렇습니다."
제이카르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봤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최전방.
9군단장과의 연락이 끊긴 것에 수상함을 느낀 마왕이 급파한 지원군으로서 이렇게 왔건만, 상황은 이미 늦은 뒤였다.
9군단장은 죽었다.
'이게 9군단장이라고.'
그래도 한때는 살아 있는 생명이었고 동료였던 이의 시신을 '이것'이라 칭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너덜너덜해서 원 상태를 알아보기조차 힘든 시체.
시체라기보다는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그것은, 급하게 만들어진 티가 나는 조잡한 관 안에 '담겨' 있었다.
"일격, 아니 이격(二擊)째에 목이 나가떨어졌고, 그 뒤는 말발굽에 짓이겨진 건가."
"...."
"네놈들은 상관의 시신도 회수하지 못하고 뭐한 거지?"
"죄송합니다."
9군단장이었던 것을 보는 제이카르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잔인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잔인한 짓을 직접 행한 적도 많았다.
9군단장이라는 큰 전력이 빠져서도 아니다. 물론 그 영향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1군단장님! 적군이!"
"...또, 인가."
예측을 뛰어넘은 적의 강력한 공세.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딱히 준비할 것도 없어 제이카르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단단히 매며 천막을 빠져나갔다.
햇빛 아래에 드러난 그의 꼴은 엉망이었다.
몸 여기저기에 튄 피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겨를도 없이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음에도 간신히 급한 불만 끈 수준일 뿐. 지금 또다시 전투를 치러야 할 정도로 전황은 심상치가 않았다.
이건 전부 한 인간 때문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전장에 등장한 제국의 자랑스러운 패 중 하나.
아마 자신이 아닌 다른 군단장들, 정확히 0군단장을 제외한 다른 군단장들이 이 자리에 왔었더라면 속절없이 밀렸으리라.
빠득.
"...마왕님께 지원 요청을."
감정을 꾹꾹 억누른 듯, 확연히 낮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한다.
괜한 아집으로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으니.
"'진짜 영웅'이 나타났고, 9군단장은 죽었다고."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우리 측의 '조커'가 와서 저들을 쓸어버릴 때까지.
지금쯤 도시에 있을 0군단장 데몬 아루트를 떠올리며, 제이카르는 양 떼들 가운데에서 날뛰는 늑대 같은 이질적인 존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나는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다.
이유는 별거 없다. 전투 하나는 기똥차게 하는 놈들이 한 놈도 아니고 둘씩이나 붙어서 온종일 감시하고 있으니까!
썩을 놈들.
에드와 벤의 집요한 스토킹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는 건조한 시선으로 손에 들린 카드들을 훑으며 흘리듯 말했다.
"전 분명 자유롭게 지내라고 했을 텐데요."
"예, 분명히 들었습니다."
"군단원들이 기뻐하더군요."
"그러니까, 그 '자유'에 댁들도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절대 떨어지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호위를 위해…."
젠장!
나는 신경질적으로 카드를 내려놓고 앞에 쌓인 금화들을 쓸어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녀석이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써줄 아량은 이미 이쪽에 전부 쏟아부은 지 오래였다.
"그럼 에드라도 좀 가지요?"
"호위가…."
"벤 하나면 충분합니다."
제발 좀 꺼졌으면.
숨이 막혀 미치겠다. 난 사생활도 없냐?!
속이 뜨겁다. 이건 필시 열 받은 것이리라. 황급히 옆에 쌓인 금화의 산에 시선을 옮겼다.
'흐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저게 다 내 거란 말이지. 한동안 돈 걱정은 없겠군.
'사실 돈이 그렇게 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옆에 쌓인 금화를 흐뭇하게 눈으로 쓰다듬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이쯤이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지금 도박장에 와 있다.
원래는 마물에 대한 불안함을 술로 날려 보내려 했지만, 이렇게 제지된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얼마 없다 보니 소소한 반항의 뜻으로 난생처음 도박장에 왔는데….
"또 따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나, 왜 이렇게 잘 따?
그냥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이쪽 판만 돌아도 잘 먹고 잘살 것 같은데?
'...진짜 일 때려치워?'
내가 잘 따긴 정말 잘 딴 모양이다. 날 보는 도박장 사람들의 눈빛이 처음과는 달리 미묘하게 바뀌었다.
특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놈의 눈빛이 그랬다.
"내가 진 걸로 치고, 여기서 끝내는 건 어때?"
얼씨구? 말은 바로 해야지.
진 걸로 치는 게 아니라, 그냥 진 거다.
그러나 굳이 그런 걸로 싸울 필요는 없기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도 끝났으니 에드가 뒤에서 슬쩍 건네준 주머니에 금화를 쓸어 담고 있는데, 슬그머니 옆자리로 옮겨온 녀석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밀었다.
"너 진짜 대단한데? 뭔가 술수라도 쓴 거 아니야? 아, 물론 불쾌하게 받아들이진 말고. 그냥 너무 잘해서 감탄한 거야."
"딱히 술수 같은 건 안 썼습니다만… 이건…."
"아, 원래 내가 마시려고 꿍쳐 둔 건데, 져버렸잖아? 입맛도 뚝 떨어졌겠다, 그냥 수고한 형씨가 한잔하라고."
"안 됩니다."
방금 그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스토커 자식들…!
그러고 보니 에드 이 자식 아직도 안 갔네. 왜 여기에 있냐? 내가 가라고 하지 않았어?
쓸어 담은 금화 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며, 나는 고개를 들어 에드를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에 힘을 풀었지만, 아무튼.
"에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안전을 위해…."
"안전이요? 여기 올 때 보니까 벤이 아주 잘 싸우던데요."
거의 광전사 수준이었지.
그래서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만, 이틀이나 이 둘에게 시달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러다간 내가 광전사가 되어버리겠다. 한 놈이라도 빨리 보내버리든가 해야지.
"...그…."
에드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린다.
슬쩍 벤을 보니, 그는 승자의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에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물컵을 집어 들 듯 술잔을 잡았다. 그리고 에드나 벤이 이쪽을 신경 쓰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에드는 쉴 수 있잖습니까. 그동안 많이 고생했을 텐데, 여기서라도 좀 쉬지그래요. 두 번 없을 기회 아닙니까."
"...."
"네?"
"...알겠습니다."
시무룩해진 그가 터덜터덜 등을 돌린다.
훤칠한 사내가 시무룩해진 모습이 짐짓 안쓰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안쓰럽긴 개뿔.'
속만 시원하다.
이성도 아닌 동성이 시무룩해봤자 얼마나 감흥을 주겠는가.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
그리고 멈칫.
액체가 입에 흘러 들어가기 전에 잠시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건지 에드가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졸지에 눈이 마주친 나는 술잔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
"...하, 하하."
실망이라는 듯 식어버린 눈빛.
덩달아 에드를 향했던 벤의 시선마저 이쪽으로 돌아왔다.
내 손에 들린 잔과 내 얼굴을 오가는 따가운 둘의 시선에,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 있던 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냄새만 맡으려고 한 겁니다."
"예, 믿겠습니다."
"...."
"그래도, 혹시나 해서 누차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우린 도시의 안전을 위해 온 겁니다. 술은 최대한 자제해 주십시오."
"예에…."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버려.
대충 그런 의도를 담아 손을 휙휙 내저었다.
내 뜻이 잘 전해진 건지 다시 시무룩해진 에드가 터덜터덜 자리를 뜨고, 잠자코 있던 벤이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그 말을 또 꺼냈다.
"들으셨습니까? 그러니 잔은 멀리 치워버리시죠."
"예에,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삐딱하게 앉아 잔을 손끝으로 밀어내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마치 '웬일이래?'라고 말하는 듯한… 평소의 내 이미지가 어땠길래.
기분이 상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벤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게 술을 권한 녀석을 쳐다봤다.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녀석. 무해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나는 뚱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약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
알코올 냄새에 가려질 줄 알았지?
이래 보여도 약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구별한다.
왜냐고? 지긋지긋하게 경험해 봤거든.
그러니 장담한다. 이 잔에는 마약 성분의 약이 두 종류가 들어가 있다.
아마 수면제나 마비약 정도겠지. 성능에만 집중한 탓에 마약 성분을 갖고 있는 것일 테고.
먹는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후유증투성이의 술이다. 이걸 스스로 마시기 위해 들고 있었다고?
"애초에 졌을 때 써먹으려고 가져왔구만?"
"...."
하얗게 질린 얼굴.
시끌시끌하던 도박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약'은 자칫하면 이 도박장 자체에 발길을 뚝 끊기게 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
침묵이 녀석을 무겁게 압박한다.
수많은 눈동자가 주목하는 가운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놈이 한 선택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약이라니?"
한 마디로 악수(惡手)였다.
증거물이 눈앞에 있는데 부정이라니, 멍청하긴.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벤이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가차 없이 체크메이트를 선고했다.
"그렇다면 직접 먹어보면 되겠군."
"...."
게임은 끝났다. 뭐라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무는 놈을 보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등신.
하긴, 저렇게 멍청하니 동료가 있는 사람에게 그딴 걸 먹이려 했겠지.
뻗은 나를 벤이 업고 가는 틈을 노려 돈주머니를 훔치거나, 들켰을 경우 나라는 짐을 공략해 목적을 이루려 했겠지만, 상대는 마왕성의 주치의다.
아, 주치의라 하니까 실감이 안 나는데, 광전사라 정정하겠다.
마왕성의 광전사. 척 듣기에도 빈틈없어 보이지 않나? 그런 그에게 이런 얄팍한 수를 쓰다니, 이쪽 입장에서는 우습기 그지없다.
의자를 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돈은 아주 제대로 땄고, 약 탄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내가 손해 본 것은 딱히 없다.
더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도 않아서 말없이 주섬주섬 자리를 뜨려는데….
우당탕탕!
그보다 더 빨리, 사건이 터졌다.
22. 들춰진 베일(5)
"네 녀석!!"
처음에는 벤이 사고를 친 줄 알았다.
내 '건강'에 관련해서 만큼은 아주 철저한 데다 광전사 같은 면모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어서 들려온 말은 그런 내 생각에 의혹을 심어주었다.
"마일! 내가 그딴 더러운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랬지!"
음? 벤이 저 녀석의 이름도 알고 있었나?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뭔가 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새 변성기가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벤은 여기에 있잖아?'
여전히 분노에 씩씩대고 있긴 하지만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는 그는 분명 벤이 맞다.
그렇다는 건 저기서 '마일'이란 약쟁이의 멱살을 잡은 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쿠당탕탕!
어우, 안면도 있는 사이 같은데 정말 가차 없다.
'세상에, 집어던지기까지?!'
신나게 잡고 흔들던 멱살을 던지듯 놓은 사내가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고개를 휙 돌려 이쪽을 본다.
마치 악귀같이 일그러진 얼굴에 구석에 처박혀버린 약쟁이를 안쓰럽게 보던 내가 내심 흠칫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녀석은 곧바로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친구가 큰 실례를 저질렀어. 사과하지."
"아뇨, 뭐… 괜찮습니다."
"아니야.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약이라니, 한 번 된통 당해서 두 번 다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지. 미안하다. 뭔가 보상이라도 해야…."
난 정말 괜찮은데.
그냥 빨리 돌아가서 오늘 딴 금화나 세며 쉬고 싶다.
그렇기에 무엇을 권하든 얼른 거절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 술을 좋아한다고 했지? 마침 여기 2층이 주점이거든. 내가 거기서 술이라도 살게."
"!"
"마음껏 마셔도 좋아."
우뚝.
모든 행동이 멈췄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
"마…음껏?"
"그래, 마음껏."
"...."
이건 불가항력이다.
"데몬 님…?"
불길함을 감지한 듯 벤이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핫, 그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야. 에드가 그렇게까지 말하고 갔는데 참아야지.
열심히 따라다니는 벤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저런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되어서는….
"순수한 사과의 뜻이니 부담가질 것 없어. 정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딸 수 있는지 노하우라도 알려주면 좋고."
"노하우 없습니다만."
"아, 초면에 노하우를 캐는 건 너무 심했지?"
아니. 초면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없는데.
"그렇다면 일단 친해지는 것부터 하자고."
묘한 장난기가 담겨 있어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나는 장난스레 휘어지는 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식 선수네.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능숙한 것이 눈에 척 보인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호감이 생겼겠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내게는 안 통한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2층에 와 있었다.
당했다! 어째서?!
알면서도 당하다니, 나란 새끼는 도대체 뭐 하는 새끼냐?
밀려드는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물론 내 머리는 소중하니 실행은 주먹을 꾹 쥐었다 편 것으로 대체했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잘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된다. 술을 안 마신 지 상당히 오래됐으니까.
특히 나 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넘어갈 만도 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도록 술을 좀 마셔둬야 겠….
"데몬 님…."
"윽."
술에 눈이 멀어 방해꾼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간절한 표정의 벤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차라리 왁왁대며 강압적으로 대했다면 최소한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텐데, 저렇게 유순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양심이 쿡쿡 쑤신다.
오히려 더 무섭기도 하고.
때문에 나는 혹여나 그의 기분이 크게 상할까 봐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타협을 시도했다.
"딱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
"취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그래!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거기 형씨도 한잔하지 그래?"
"...됐습니다."
무거운 한숨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심 움찔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벤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히려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얻은 건 없고 호감은 깎였다니. 최악이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필이면 또 그걸 들은 건지, 벤이 움찔 몸을 떨며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
"...."
한숨을 쉬어야 할 쪽은 이쪽인데 왜 당신이 한숨을 쉬냐고 묻는 듯한 눈빛.
어쩐지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딱… 한 잔만입니다."
"네?"
"아쉬우시겠지만, 그 이상은 다음을 기약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허락의 말을 하다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내 귀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서 몇 번의 절차를 걸쳐 그 말이 진실임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간신히 흥분한 기색을 감추고 답했다.
"네."
드디어!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을 확인하려 하자, 마냥 흥미롭다는 듯 나와 벤을 번갈아 보던 녀석이 손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메뉴판에 있는 거 전부 하나씩."
시발, 사랑한다.
이건 너무 낭비가 아니냐 물으니 남으면 친구 놈들 줄 생각이란다.
세상에 이런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술은 금방 나왔다.
나는 벤의 우려 섞인 시선을 무시하고 신나게 병들을 훑었다. 그리고 급격히 우울해졌다.
'이 많은 것들 중에 딱 하나만 맛볼 수 있다니.'
그것도 한 병이 아니라 한 잔이다.
섞어 먹는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 술만의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모처럼의 한 잔을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끝낼 수는 없기에, 나는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이걸 잡았다가 저걸 잡기를 반복했다.
그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음… 고르기 힘들면 내가 추천해 줄까?"
"예?"
"쌉싸름한 맛을 좋아한다면 이거. 뒷맛이 깔끔한 걸 좋아한다면 이거. 달달한 걸 좋아한다면 이거. 목 넘김이 부드러운 걸 좋아한다면 이거. 그리고…."
설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야… 너 이 자식….'
굉장한데?!
이 녀석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길어지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옆에서 벤이 질린 표정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내게 있어 이 선택은 일생일대의 선택과도 같다. 그의 눈치 때문에 대충 선택하기에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가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고심 끝에 간신히 하나를 택하고, 드디어 잔이 내 손에 쥐어졌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가 어쩜 이렇게 영롱하던지.
또 언제 마실 수 있을지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홀짝이는데, 앞에서 같이 잔을 기울이던 녀석이 문득 입을 뗐다.
"좀 시끄럽지?"
"음?"
"거친 녀석들이 많아서, 술만 먹으면 싸움이 붙거든."
"...아."
한쪽에서 서로 주먹질을 해대는 사람들.
하지만 원래 술집에서는 싸움이 일상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곳에는 살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드잡이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누가 이길지 내기할래? 아, 물론 옆에 형씨도 같이."
"전 됐습니다."
"에이, 빼지 말고오."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벤에게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한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건지 알 수 있었다.
반쯤 비워진 잔에 다시 채워지는 술.
어깨동무로 시야를 좁히고, 내게 다시 술을 따라준 것이다.
마족에게는 욕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천사 같은 마족이 다 있을 수가.'
서둘러 잔을 비우자, 다시 술이 채워진다.
또 마시고, 다시 채우고, 마시고, 채우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기억이 끊겼다.
***
웃음은 실없지만, 붉은 눈동자는 또렷하다.
표정은 풀어졌지만, 움직임은 여느 때보다도 빈틈이 없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마구 경종을 울린다. 온몸을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잠시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랬던 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가 무려 술 세 병을 비우고도 반이나 더 마셨을 때였다.
얼어붙은 시간이 깨어지듯,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이블 밑의 두 손이 아직까지도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말리지 못했다.'
처음 취한 것 같았을 때, 말릴 수 있었음에도 술 세 병 반을 해치울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가장 본능이 강렬하게 위험을 고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겉보기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순간인데, 어째서.
그러나 마왕과 함께하며 오랜 시간 전투를 겪어온 벤은 눈보다는 감을 믿는 것이 수명 연장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 담당 환자가 새 술을 따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아하핫…."
안주도 없이 연거푸 술만 마셔댄 탓에 처음 또렷하던 붉은 눈동자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가 테이블에 얼굴을 비비며 헤실헤실 웃는다. 그 탓에 옆에 늘어서 있던 병 중 하나가 툭 쓰러졌다.
'...그새 빈 병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역시나, 병 네 개가 주르륵 늘어서 있다.
쓰러져서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는 것까지 합하면 총 다섯 개.
그새 병을 더 비우다니.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닌가.
빳빳이 서 있던 촉이 조금 누그러졌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지났다는 의미.
그럼에도 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조금 누그러졌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눈앞의 상대를 향해 있는 그의 촉은, 이제 다른 의미로 긴장해야 함을 알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이야아?"
"아닙니다."
"그럼 네가 적이야아아?"
"그자도 아닙니다."
"누가 적이야아?"
"지금 여기엔 없습니다."
"너어, 적이야아아아?"
"아닙니다."
술주정이 시작됐다.
취하지 않을거라면서요….
벤이 조용히 얼굴을 감쌌다. 그 와중에도 데몬의 질문은 계속 반복되고 있어 더욱 참담했다.
괜히 허락했다.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자칫했다간 뭔가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 눈 딱 감고 한 잔만 허락했는데.
'허락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마왕의 조커. 마지막 용사를 죽인 마왕군의 자랑스러운 0군단장 데몬 아루트는.
벌써 20분째 같은 질문과 답을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잔뜩 취해 헤실거리는 저 인간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느냐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 만만해 보이겠지. 실없어 보이겠지. 그럼 어디 한 번 저 질문에 긍정을 해보시든가.
저 '적이야?'라는 질문.
그에 대답을 못 하거나 긍정을 하면, 0군단장은 언제 웃었냐는 듯 돌변해 단검을 들고 마구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런 경우 최소 중상, 심한 경우에는 시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난자당해 죽곤 했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이곳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수습도 힘들다.
'다행히 아직 1단계 수준이긴 한데….'
그의 술주정은 세 개의 단계로 나뉜다.
1단계 질문, 2단계 의심, 3단계는 추궁.
1단계에서 '적이야?'라는 질문에 부정을 하면 그냥 넘어간다.
2단계에서는 그 뒤에 '왜?'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공격이 시작된다.
3단계는 그냥 학살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왜?'라는 질문에 '데몬 님은 마왕군이십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그러니 적이 아닙니다'라는 의견을 내세웠다 치자.
2단계에서는 그냥 넘어가지만, 3단계에서는 '그게 왜? 배신할 수도 있고, 스파이일 수도 있잖아?' 하고 다시금 추궁하는 것이다.
그에 그저 부정하는 것 빼고는 뭐라 답하겠는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버리거나 단순한 부정만을 반복하면 '역시 적이구나' 하고 공격을 가해 오니 당사자로서는 미칠 지경이다.
'3단계만큼은 절대 안 돼.'
그런 생각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새 병에 손을 뻗는 데몬의 손을 제지했다.
탁한 붉은 눈이 도르륵 굴러가 저를 담는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불만.
살기도 분노도 아닌 그저 불만이다. 그럼에도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처럼 잠시 굳어버린 벤은, 마른침을 삼키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23. 들춰진 베일(6)
"그만 드시지요."
"너어어, 적이야아?"
"아닙니다."
"마시면 안 돼?"
"예, 안 됩니다. 충분히 드셨어요."
"한 모금도 안 돼?"
"안 됩니다."
단호하게 테이블 위의 술병들을 모조리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복되는 질문 공세에 덩달아 시달린 사내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눈치를 살핀다.
"어… 이럴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네…."
"그걸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하하…."
그로서는 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자신이 술을 권했기에 생긴 문제 아닌가.
벤 역시 그걸 알기에 그를 노려보았으나, 이미 벌어진 일.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자아내고,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역시 에드를 불러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최선이다. 군단원들도 좀 데려오라 해서 혹시 모를 사고를 치려 할 때 빠르게 막을 수 있도록 해야지.
"통신석이…."
없다.
생각해 보니 안 가지고 나왔다.
주치의인 벤은 마왕성에서 자신의 방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있어봤자 데몬 님의 상태가 악화되어 급하게 뛰쳐나가는 경우뿐. 그런 경우에는 통신석을 챙길 겨를이 없었으니, 벤에게 있어서 통신석의 존재감은 거의 공기와도 같았다.
딱 의식해야 존재를 알 수 있는 정도.
물론 성 밖으로 나올 때 싼 짐들에 포함되어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그건 여전히 챙겨 나왔던 그대로 짐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벤 스스로가 통신석을 잘 챙기지 않는 것도 있지만, 부관인 에드가 데몬 님과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기에 한 실수이기도 했다.
"...통신석 있습니까?"
"으응? 아니?"
"...."
"그, 그래도 여기 주인은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런가."
벤은 어설픈 웃음을 흘리는 사내와 여전히 테이블에 뺨을 비벼대는 데몬을 번갈아 봤다.
인사불성이 된 0군단장을 질질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두고 가기에는 불안하니….
고민과는 별개로,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콰악.
사내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황한 녀석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혀, 형씨? 갑자기 왜 이래?"
"잘 지켜라. 허튼수작 부리면 죽을 줄 알고."
"아 뭐야, 그럴 거면 좋게 말로 해도 되잖… 악!"
"내가 너를 존중한 이유는 이분께서 네놈에게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답조차 못 한다면, 내가 왜 네놈을 존중해야 하지?"
"누, 누가 안 한대?"
답을 들었으니 그걸로 됐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벤을, 사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그냥 틈을 봐서 돈주머니나 슬쩍 하려고 했지.
이것도 '허튼수작'에 포함되지 않으냐고?
약을 탄 것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아닌가.
애초에 마일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자신이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뒷수습은 꼭 내 역할이지.'
누군가 화내기 전에 먼저 대신 화내면 분노가 누그러들기 마련이다.
특히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분노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당혹감이 채우는데, 사내는 이 방법으로 제 친구를 몇 번이고 위기에서 구했다.
아프지 않게 패고 던진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상대는 당황하고, 자신은 그런 상대에게 대신 사과한다는 핑계로 다가가 돈을 훔치고.
어차피 실패한 먹잇감, 위기에서 구해 준 자신이 대신 먹겠다는데 마일로서는 할 말도 없으니 귀찮다는 것만 감안하면 크게 나쁠 것 없는 거래다.
그런데 이번 상대는 뭔가 좀 이상하다.
위화감이 느껴진달까?
원래는 이렇게까지 술을 먹일 계획도 아니었다.
딱 그때, 어깨동무를 하고 2층에 올라올 때 돈을 슬쩍 하려 했으나….
'기분이 싸했지.'
그래서 취할 때까지 술을 먹였다.
돈은 좀 깨졌지만, 그의 허리춤에 있는 돈주머니만 손에 넣는다면 그 정도는 손해도 아니기에 말과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리고 지금.
백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누가 보기에도 완벽한 무방비 상태이건만, 그런데 왜.
'왜 아직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다.
호위를 떼어놓기 위해 일부러 통신석이 없는 척도 했는데, 그래 놓고도 훔치지 못한다면 이 바닥에서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것이다.
당사자는 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고, 재수 없는 호위가 통신석을 빌리러 간 지금이 바로 최적의 순간.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이기에 사내는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은밀하고도 빠르게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터억.
"!"
잡혔다.
사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확실하게 잡혀 있는 손목.
손목을 잡고 있는 하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일어나 헤실헤실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적이야아?"
"...아니."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은 이미 혼란에 빠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이래 보여도 손기술 하나는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는데.
생긴 것도 비리비리해 가지고, 어떻게 알고 잡은 거지? 힘으로라도 빼앗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밖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데엥- 데엥- 데엥-
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물인가?"
"쳐들어올 때가 되긴 했지."
동요는 없었다.
어차피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이들은 따로 있으니까.
다만, 문제는 저기. 통신을 마쳤는지 급하게 달려오는 그의 호위.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사내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젠장, 돈은 물 건너갔군.
"데몬 님, 일어나세요! 마물이랍니다!"
"으응, 적이야?"
"네, 마물은 적입니다."
그리 답하며 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타이밍이 좋았다.
잔뜩 취했음에도 만족할 만한 피를 보지 못하면, 0군단장은 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다음 단계의 주정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때마침 마물의 공격이라니.
"에드와 나머지들이 밖에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내려가시죠."
무려 0군단원들을 '나머지'라 칭한 벤이 서둘러 데몬을 부축했다.
한시라도 빨리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점 안 사람들.
슬그머니 계단을 막아서는 그들의 행동은 누가 보기에도 썩 좋은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어, 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0군단장 데몬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적이야아?"
"보아하니 약도, 소매치기도 실패한 것 같은데. 그럼 이 녀석들은 우리 먹잇감 맞지?"
"...."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문다.
누구도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자,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인 데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적이야?"
"킥, 그럼 긍정으로 알아들을 테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고."
"...."
"적?"
여전히 대답이 없자 웃음이 짙어진다. 덩달아 목소리 역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봤자 술에 취한 녀석이다. 동료라는 이는 고작 하나고.
녀석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물렀다.
"글쎄다, 허리춤의 그 돈을 내놓는다면 그냥 주점 안의 손님이 되어줄 수 있는데."
도박장에서 얼마나 땄는지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보았다.
안타깝지만 도박장 내부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다.
경쟁을 하듯 호구 손님의 주머니를 털기도 하고, 합심해서 돈을 빼앗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금화를 산더미처럼 쓸어간 사람을 그냥 보내줄 리 없었다.
그것도 고작 둘뿐인 아주 손쉬운 먹잇감을.
그런데 공포에 이성이 마비라도 된 것일까.
"푸, 푸흐흐…."
"?"
"흐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핫! 크,크흐흐흐…."
백발의 사내가 미친 듯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어느 순간 뚝- 웃음을 그치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언제 꺼내든 건지, 그의 손안에서는 단검이 빙글 돌고 있었다.
"적이네."
***
저벅. 저벅.
묵직한 발소리에 낡은 나무 계단이 짓눌리는 소리가 겹쳐져서 들린다.
허리춤에 보란 듯이 돈주머니를 찬 백발, 아니 이제는 적발이 되어버린 남자가 느긋하게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저렇게 대놓고 돈주머니가 보임에도, 1층과 2층의 모든 이들은 그를 막아설 수 없었다. 아니,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의 잔혹함을 눈앞에서 본 이들은 공포에 질려서, 그걸 보지 못한 이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데몬의 모습에 광기를 느껴서.
그중 이 모든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한, 무려 술자리까지 함께한 사내는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학살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죽인 이는 고작 한 명이었다.
다만.
'너무 잔인하게 죽여서.'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실없이 웃던 백발의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가 싶었을 때, 그와 거의 동시에 가장 선두에서 킬킬대던 녀석의 어깻죽지에 단검이 파고들었다.
빠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남자가 단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촤악-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얼굴에 잔뜩 튀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팔의 근육을 끊어 반항 못 하는 상태로 만든 뒤, 피를 갈구하듯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얼굴, 배, 팔다리 상관없이 그저 땅에 칼질을 하듯 망설임 없이 웃으며 푹푹 내려찍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잔인하던지.
그가 멈췄을 때는, 새하얗던 백발이 붉게 물든 뒤였다.
그리고 사내는 그가 어째서 멈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너덜너덜해질 수가 없었으니까.'
갈기갈기 찢길 대로 찢겨 원 상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도대체 언제 숨이 끊겼는지 알 수조차 없는 그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덤벼들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계단을 막고 있던 이들도 그걸 느꼈는지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터지는 길을 보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은 죄다 느끼다 죽었으니.
생명체인 이상 죽더라도 최대한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최소한 저런 식으로 죽고 싶은 자는 어느 누구도 없을 터.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남자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든 채 계단을 내려간다. 그의 뒤를 호위로 보이는 이가 따르고 있었으나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식상의 호위일 뿐이니까.
아니, 어쩌면 잠자고 있던 맹수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겨 그의 뒤를 쫓았다.
물론 바짝 따라붙지는 않았다. 딱 그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만, 최대한 거리를 두고 따랐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2층의 상황을 보지 못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1층의 사람들.
물론 몰래 훔쳐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일 게 분명한데, 이 분위기를 보라.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
숨통을 조이는 정적이 건물 전체를 휘감았다.
소름이 돋았다.
저 남자는, 단 한 명을 죽인 것으로 수적 차이를 뒤집고 기세를 자신의 쪽으로 끌고 온 것이다.
본능일까, 의도한 것일까.
하긴, 어느 쪽이든 위험한 존재라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분위기이건만, 그게 마치 폭풍전야 같아 사내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술이 깨버렸어."
"그…러십니까."
벤이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누구라도 그런 일을 목격하거나 직접 벌인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오히려 그만큼의 피를 보고도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하는 것이 대단하리라.
짧아진 말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니까.
0군단장은 술을 마시거나 진심으로 전투에 돌입할 때면 반말을 하곤 했다.
데온이 단검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문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뭔가 발견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빤히 쳐다봤다.
"히익!"
구석에 숨어 있던 마일이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이면 좋으련만, 저 피를 뒤집어쓴 남자는 번들거리는 붉은 눈으로 명백히 저를 보고 있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낌과 동시에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내가 미쳤지. 걸려도 왜 하필 저런 놈한테!'
0군단장의 시선이 그를 향한 것을 벤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감히 데몬 님께 약 탄 술을 권했던 미친놈.
몰랐다면 모를까, 눈에 들어온 이상 용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벤이 짐짓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굳이 저런 놈에게까지 시간을 허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만 하신다면 제가…."
"아니."
"...."
단번에 벤의 말을 끊어버린 데온이 느릿하게 걸음을 돌려 마일에게 다가갔다.
분명 느린 걸음임에도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착한 그는,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얼굴을 마주하고 씩 웃었다.
"약쟁아."
"네, 네!"
"죽기 싫으면…."
"...."
"남은 약 다 내놔."
"...네?"
24. 들춰진 베일(7)
건물 밖에서 제 상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에드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를 멍하니 보다가 다급히 시선을 돌려 건물 안을 확인했다.
얼마나 죽인 건지 확인하려는 의도였으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외의 장면이었다.
'시체가 없어…?'
분명 저 정도 양의 피를 뒤집어썼다면 학살을 벌였다는 것인데.
이질적인 침묵이 가득하긴 하지만, 적어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1층에는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직접 묻는 수밖에 없어 에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아니, 그 전에 몸에 피는 대체…."
"데몬 님 피 아니다."
대답은 벤이 대신했다. 에드는 순간 발끈했다.
지금 자신이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는가.
몸에 묻은 피가 당사자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재차 말을 꺼내려는 순간, 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질린 듯한 표정.
주로 데몬 님의 전투를 직접 본 이들이 많이 보이는 표정이다.
자신 역시 그런 표정을 종종 지었기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
'그래 그거. 눈치 없긴.'
하도 평화에 젖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0군단장의 전투 스타일을.
다른 군단장들의 전투와 확연히 다른 그의 전투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평범한 전투에 빗대어봤으니 답이 나올 턱이 있나.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는지.
아연한 표정의 에드를 무시하고 제 뺨에 잔뜩 튄 피를 손바닥으로 훔친 데온이 혀를 내밀어 그걸 슬쩍 핥는다.
그리고 얼굴에 배어 나오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웃음과 다시 광기를 내비치기 시작하는 붉은 눈동자에, 에드는 기겁하며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어차피 싸우러 가는 거 아니었어?"
"피가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까. 최소한 얼굴은 닦아주십시오."
"흐음."
다행히도 더 이상의 거절은 없었다.
순순히 손수건을 받아 들어 얼굴을 닦는 제 상관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에드가 일이 터지기 전에 속히 전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서둘러 성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엔 규모 자체가 다르다더군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마물에게도 감정이 있느냐'지."
"확실히 있습니다."
"나도 알아."
아니까 여기에 있는 거고.
너무 고지식한 것 아니냐는 웃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분명한 웃음기와 장난기가 담겨 있는 말임에도 에드는 괜히 고지식하단 말을 들은 게 아니라는 듯 굳은 표정을 푸는 대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0군단장의 부관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이러한 모습을 보였을 때, 에드는 극도로 혼란스러워했다.
분명 같은 존재다. 하지만 다르다.
여태까지 보여 온 모습과 정반대의 성격을 보이는 자신의 상관을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고민에 소모한 긴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가 보이는 태도에 맞추면 되는 것이었으니.
성격이 바뀐다고 하여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기억도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으니 그저 과히 변덕스러운 존재를 상대한다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현재의 0군단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빈틈없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았다.
느슨하게 대했다가 자칫 심기라도 거스르면 '그'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됐어. 그래서 내 무기는?"
"여기 있습니다."
그가 몸에 착용할 수 있는 단검과 검집들을 여러 개 내밀었다.
데온은 익숙하다는 듯 그것들을 받아들고 하나씩 착용하기 시작했다.
양 허벅지, 양 허리춤, 그리고 등허리에 단검 두 개를 교차해서 총 여섯 개의 단검을 착용한 그는 마지막으로 에드의 양손에 들린 로브와 망토를 번갈아 보더니 망토를 집어 들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니까 로브까지는 필요 없지."
펄럭.
검은 망토가 크게 휘날린다.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하며 걸음을 옮기던 데온이 잠시 멈춰서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얼빠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건물 안 마족들.
어렴풋이 0군단장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이쪽의 정체를 눈치챈 듯싶다.
'뭐, 딱히 상관없지만.'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저마다 후다닥 몸을 피하는 이들을 지켜보던 그는 이내 픽 웃으며 돌아섰다.
어느새 붉은 눈동자에는 보기만 해도 비릿한 냄새가 배어날 것 같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얼굴 가득 유쾌한 미소를 띤 데온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집어넣으며 말했다.
"가자."
***
감았던 눈을 떴다.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자 보인 것은 그 뒤로 펼쳐진 끝없는 하늘.
잠시 뒤면 살육의 잔치가 벌어질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게 맑은 하늘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연단 위에 서 있었다.
두려움과 긴장, 불안함과 불만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감추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선봉대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지."
말없이 고개를 쳐드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하나는 강력한 힘으로 함정을 돌파하고 적들을 짓밟으며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진짜 선봉대. 다른 하나는 몸으로써 함정을 파악하고 강력한 적들의 공격을 상쇄하는 일명 고기방패.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후자겠지."
이를 악무는 놈들이 시야에 비친다.
반박하고 싶겠지. 아니라고 외치며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겠지. 하지만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
일반 병사에서 갓 지휘관이 된 '나'. 그리고 그 지휘관을 위해 급조된 병사들.
이를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할 만큼 뻔뻔한 놈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침묵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전투에 참여해봤으니 전장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겠지. 잊은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쉴 새 없이 전장에 울려 퍼지는 병장기 소리, 피를 머금어 붉게 물든 질척한 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매개체 삼아 흐르는 '광기'."
"...."
"정신을 집어삼키려는 광기에 저항한 사람도 있을 테고 먹힌 사람도 있을 테지. 그러니 이참에 말해두겠다."
눈빛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눈빛이다.
아마 '광기에 먹히지 말라'는 둥의 식상한 말을 예상하고 있겠지.
우스운 생각이다.
'나'는 이 황당할 정도로 나약한 몸을 가지고 이 미친 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식상할 리가 없잖은가.
"광기에 먹혀라."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귀를 의심하는 듯 놀란 표정의 저들의 향해 끓어오르는 광기를 고스란히 내비치며 말했다.
표정에서, 눈에서 드러난 광기에 몇몇 이들이 흠칫한다. 물러서려던 것을 간신히 멈춘 이도 있었다.
"단, 어설프게 먹혀서는 안 된다. 완전하게 먹혀라. 이성은 적아를 구분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
광기에 먹히지 말라는 말은 제대로 된 검술을 가지고 있는 기사 이상의 이들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다.
변변찮은 검술 하나 익히지 못한 우리가 이성을 유지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고로 맹수는 침착해야 사냥에 성공하는 법이고, 양은 온순한 녀석보다 미쳐 날뛰는 녀석이 더 잡기 힘든 법이다.
우리는 양에 불과했고, 수많은 맹수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방법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나였다.
"온전한 시체를 만들지 마라. 죽었다고 판단되더라도 난도질을 멈추지 말 것이며, 그것의 배를 갈라 내장을 헤집어놓아라. 멈추는 건 이 이상 너덜너덜해질 수 없다고 판단될 때다."
질렸다는 눈빛이군.
고작 말뿐인데 사색이 되다니, 우습지도 않다.
이 어설픈 정신머리로 전장에 섰다간 백이면 백, 전부 죽는다.
원해서 선봉장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서버린 이상 제 밑의 병사들을 죽게 할 생각은 없었다.
책임감 따위가 아니다. '나'는 병력을 전부 잃었다가 그로 인해 올 불이익을 걱정하고 있었다.
병력을 모두 잃어버린 지휘관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배가 없는 '나' 같은 녀석이라면, 분명 목이 날아갈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고작 저런 새끼들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네놈들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잊은 모양인데, 정신 차려!"
그건 억울해서 인정 못 하겠다.
놀라서 커진 눈들이 나를 향한다.
'나'는 그 눈 하나하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적들이 상대 따져가며 검을 휘두를 것 같냐? 강제로 끌려온 거라고 외치면, 그렇구나- 하고 봐줄 것 같아? 여기까지 와서 도덕, 도의 같은 거 따지고 싶은 새끼 있으면 당장 나와. 적들과 한 번 도의에 대해 토론해 보라고 친히 놈들 앞에 던져줄 테니까!"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가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뒹굴고, 나뭇가지가 파르르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소리가 전부 들릴 정도로, 탁 트인 평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약하다. 그리고 이곳은 약한 놈은 도태되는 전장이지.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거냐.
그런 의미의 질책이었다.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 속에서,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싸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전투에서 빠지지도 못하는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론 하나다.
──「심리전」."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거다.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함부로 검을 겨누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공포를 심어주어야 할까.
"이질감.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줘라. 전장에서의 이질감은 어떠한 과정을 걸치든 결국엔 공포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공포는 적의 손발을 둔하게 만들 것이고, 종국엔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겠지. 우리는 그런 녀석의 목을 따는 거다."
그래, 우리는 전장의 하이에나가 된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살기 위해 하는 행동에 비겁이 대수인가.
그럼 이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전쟁터라는 이 한정된 공간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은 역시 몇 개 없다. 사실상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에 불과하지. 일단 전부 말해 주자면─"
하얀 붕대가 손끝까지 꼼꼼히 감긴 팔을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놈들이 가득한 전쟁터에서 혼자서만 먼지 한 톨,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번엔 특별히 지급받은 하얀 망토를 펄럭였다.
"아니면 피투성이, 먼지투성이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돋보일 정도의 피를 뒤집어쓰거나."
당장 검을 피해 바닥을 나뒹굴어야 하는 우리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으니 결국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자신들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침묵하는 병사들을 보며, '나'는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릿한 피 냄새가 배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피를 뒤집어쓴다. 전쟁에 익숙해진 이들조차 경기할 정도의 잔인한 손속을 선보이며.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꼴로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거야. 또한 적에 환장하는 꼴을 보이는 게 좋겠지."
한 마디로 광기에 먹혀버려라, 이거다.
도망치는 놈은 표적이 된다.
하지만 오히려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미친놈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우리는 '진짜 선봉대'가 될 수 없다."
"...."
"하지만 고기 방패도 되고 싶지 않지. 그러니 우린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간다."
진짜 선봉대가 아군의 기세를 끌어올린다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적들의 기세를 끌어내린다."
25. 들춰진 베일(8)
"우리는 적들의 기세를 끌어내린다."
그제야 병사들의 표정이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변했다.
'나'는 잠시 누그러뜨렸던 광기를 다시 드러내며 웃었다.
온전한 시체를 남기지 못할 우리의 적에게 진혼곡을.
싸우다가 바닥을 굴러 흙이 묻었다면 피로 씻어낼 것이며.
적에게 집착하고 피에 미쳐라.
그게 우리가 살 유일한 길이 될 터이니.
"적들에게 공포를."
잔인한 손속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저렇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온전한 시신을 유지하지 못할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하며 느끼는 공포.
이러한 감정들은 망설임을 부를 것이고, 망설임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겠지. 광기에 먹히고 벗어나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
"정 맨정신으로 힘들다면 술과 약에 의지해도 좋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고, 후에 있을 처벌보다는 현재의 생존이 우선이니."
아, 저건 '댁이 그러고도 지휘관입니까?'라는 눈빛이군.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지휘관 따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우리를 이런 사지에 몰아넣은 게 제국이니 '제국에 영광을' 따위의 구호는 외치지 않겠다."
윗대가리들이 직접 지켜보지 않는 한, 앞으로 우리 부대의 구호는 이거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죄책감을 덜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말.
앞으로의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합리화의 끝을 보여주는 추잡하지만 가장 쓸모있는 말.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해."
***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낯설지만 어쩐지 본 적 있는 것 같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곳이 도시이고, 지금 누워있는 곳이 관리자가 내준 방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꿈?'
꿈을 꾸었다.
뭔가 엄청난 내용의 꿈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입가가 축축하다는 것과, 누군가 입가를 손수건으로 계속 닦아주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게 피라는 걸 깨닫기가 무섭게 나는 몸을 크게 들썩이며 속에 고여 있던 핏덩이들을 뱉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우웨에에에엑! 웨에엑! 커헉, 끅."
정말 발작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옆에서 피를 닦아주던 에드가 허둥거리더니 급히 양동이를 받쳐주었다.
그리고는 많이 당황했는지 벤에게 마력석 목걸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불러오겠다며 방을 뛰쳐나갔고,
─역시나 금방 마주친 듯, 얼마 안 있어 벤과 함께 사이좋게 서로의 멱살을 잡고 나란히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다. 아파서 헛것을 본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서로의 멱살을 잡고 들어왔다.
'뭐하냐, 너네.'
황당함에 말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답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