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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변화 (6)

고양이는 야생의 본능이 많이 남은 동물이다.

뛰어난 동체시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들을 사냥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

나의 고양이 '로라'도 마찬가지.

그동안은 건강 상태가 안 좋아 기력이 부족했었는데, 요 며칠간 강소현이 집에 머무르면서 로라의 집중 케어를 해줬고.

『캬오오오!!!』

그 결과, 로라의 야생성이 깨어났다.

보통은 새나 쥐처럼 작은 동물을 사냥하려 한다는데, 로라는 천재묘라 그런지 사냥하고자 하는 대상에도 특별한 면모를 보였다.

쿠웅-!

로라가 사냥하고자 하는 것은 높이 5m의 괴물.

좀비, 고블린, 해골, 갑옷을 입은 시체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거인.

사라진 시체들이 죄다 저기로 가지 않았을까 싶은 외형이다.

기기기긱!

놈이 우리를 바라본다.

사람의 머리통 세 개가 뭉쳐진 저것을 눈알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마는.

기기기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나와 강소현 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눈알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쿠웅-!

콰직!

"미친...."

괴물이 한 걸음 걸었을 뿐인데, 발에 치인 건물 잔해가 날아가 그녀가 일하던 '이태24시 동물병원'의 간판을 부쉈다.

"진짜 미쳤어!! 저 씨···."

직장을 잃고 그 상징마저 잃어버린 강소현이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는다.

허나 그녀의 시선만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로라가 저거를 잡고 싶어 한다고요?"

"쫄리십니까?"

"아니, 무섭고 적개심이 들어서 하악질하는 걸 어떻게 하면 저걸 잡자고 해석을 해요!!"

거대한 괴물은 느렸고 지금에 와서는 가만히 서있기만 하기에 잠시 대화할 시간이 생겼다.

"제가 누굽니까?"

그렇기에 그녀에게 내가 누군지를 알려주기로 했다.

"미··· 미친놈?"

"크흠. 저는 집사입니다. 집사가 자기 고양이 마음도 모를 것 같습니까?"

실제로 로라의 하악질에서 저놈을 꼭 잡으라는 의지가 느껴졌으니.

'각성'이란 걸 고려하면, 내게 고양이의 뜻을 알아듣는 힘이 생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뭐냐, 물컵이랑 빵을 어딘가로 보냈을 때도 느꼈지 않았나.

"그렇다 쳐요. 그럼 저걸 어떻게 잡게요?"

기기기기기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게속해서 눈알을 굴리는 시체 거인.

"다리부터 차근차근 부수다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 저거 다시 움직이는데요...?"

쿠우웅!

사람이었던 것들이 뭉쳐지고 괴물들과 뒤섞인 기괴한 거인이 다리를 들어 올린다.

으드드득.

으드득.

아무렇게나 붙여 놓은 것들이 뭉개지고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하늘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주춤-

"이, 이준 씨!!!"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강소현을 뒤로한 채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또각.

마음속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지이잉―

나는 집사다.

지이이잉―

그리고 내가 로라의 집사로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은 없다.

『캬아오오오!!!』

손에 든 철봉에 빛무리가 일고.

그것에 로라의 응원이 더해지자, 터질 듯한 힘이 모여든다.

휘이이익-!

탑차의 짐칸을 지탱하는 조잡한 철봉.

허나 철봉에서 뿜어져 나간 힘은 조잡하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콰지지지지직―

굉음을 내는 거대한 충격파가 시체 거인을 향해 나아간다.

으드드득!

기기기기기긱-!!

나를 향해 떨어지던 거인의 그림자가 기울어 간다.

쿠우우웅-!!

시체 거인을 지탱하던 다리는 나의 충격파에 맞아 으스러졌고 갈 길을 잃고 허공에 뜬 다리는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기기기기기긱-!

허망하게 기울어가는 시체 거인.

쿠웅!

"...."

"...."

『....』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진 거인에 모습에 나도 강소현도 로라도 할 말을 잃었다.

으드드득-

으드득!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를 흩뿌리며 놈이 바닥을 이적이기 시작했고.

"빠, 빨리 가서 패요!!"

갑자기 용기가 솟아났는지 강소현이 메이스를 움켜쥐고 내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떠오른 단어 두 개가 있다.

'막타충.'

'한입충.'

혹시 내가 쓰러트린 놈의 막타를 치려는 게 아닐까?

혹은 포인트를 나눠먹으려는 속셈이 아닐까?

콰아앙-!

굉음을 내며 바닥을 비적이는 시체 거인.

누가 봐도 나 좀 죽여주소 하는 꼴인데.

"-이이이익!!!"

하지만 강소현은 매너가 있는 여자였다.

한입 충동을 참기 위해서인지 악을 쓰며 나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또각.

그녀의 포인트를 날로 먹었던 전적이 있는 나다.

그렇기에 '한입 사절요.'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고.

또각, 또각.

강소현이 '한입만'에 대한 충동을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니 재빠르게 시체 거인에게 다가가서 철봉을 휘둘렀다.

콰아앙-!

시체 거인이 버둥대며 주변의 지형지물을 부순다.

쿠웅-!!

크고 느린 시체 거인.

게다가 한쪽 다리가 박살나 바닥에 누워 있기까지 하니 놈의 공격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거인의 발버둥을 피하고 몸을 부수는 일이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부우웅-

콰지지지직-!!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 힘을 좀 아꼈는데, 시체 거인이 딱히 뭔가를 더 할 것 같진 않다는 확신이 들었으니, 온 힘을 다해 시체 거인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외형과는 달리 허무하리만큼 나약한 시체 거인.

그래도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아 이놈을 잡으면 무언가 보상이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강소현 씨도 한입 하시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로라의 주치의가 강해져서 살아남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게다가 그녀는 학교 캠프에서 정보 조달까지 해줄 사람이기도 하니 특별히 한입을 허락했다.

한입으로도 보상이 주어질지는 모르겠다만.

후다다닥-!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이스를 들고 뛰어오는 강소현.

퍼억-!

강소현이 시체 거인에 붙은 팔다리 조각 하나를 부술 때, 내 공격은 통째로 관절 한 부위를 부쉈고.

"그, 그만 때리고 양보 좀 해요!!!"

결국 강소현의 본심을 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와 좀비떼의 습격을 통해 그녀도 나름 이 멸망한 세상 속에서 작동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깨달은 모양.

남이 잡아줘도 카운트가 되는 몬스터 웨이브.

남의 포탑으로 적을 죽이면 얻을 수 없는 포인트.

그렇다면 이런 류의 괴물은 어떻게 될까?

1. 막타

2. 기여도

3. 공산주의식 균등 분배

정도가 되겠는데....

그녀의 솔직한 욕심 가득한 말.

그것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한입충, 날먹충, 막타충. 제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강소현 씨에게 한입을 허락했고요."

순수 가한 대미지로 보상을 받는다면 9:1 정도가 될 것이고, 처치에 대한 직접적인 기여도를 따진다면 98:2 정도가 될 테지.

9:1이든 98:2든 간에 그녀가 내 덕에 이미 꿀을 빤 것은 사실.

로라의 치료를 담당하는 주치의인 강소현에게도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 '아포칼립스의 보상'이다.

이 정체불명의 시스템이 언제까지고 우리를 도와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몇 대 치게 허용해준 것만으로도 그녀를 충분히 배려했다고 생각한다.

"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쪼잔해요? 치사해서!"

콰직-!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으로는 계속 시체 거인을 내리치고 있는 그녀.

지이이잉―

수백의 시체가 모여 만들어진 저 시체 거인을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보통의 생명체는 두개골을 부수면 죽는다.

콰자자자자자자작-!!

어깨에 앉은 로라의 숨결을 느끼며 최대한의 힘을 모아 때려 박았더니,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체 거인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푸슈웃-!

푸윳-!

머리가 터져나간 자리에서는 정체불명의 검붉은 액체가 뿜어져 솟구쳐 오르고 있었고―

"우, 우에에엑!!"

그중 일부가 강소현에게 튀어 버렸다.

"웨에엑.... 나, 나는 쓰레기야...."

검은 액체가 묻기가 무섭게 토악질을 하며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

"그저 동물이 좋았을 뿐인데… 돈에 미쳐서 24시 동물병원 같은 데나 가고. 자유 없는 감옥에서 야간 진료로 날려버린 내 20대.... 애초에 거기 취직만 안 했어도 저런 이상한 남자랑 같이 다닐 일도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저 검붉은 액체에 닿으면 심각한 수준의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퓨슛-!

"나, 나는 쓰레기야. 어쩌다 이런 세상에서.... 어, 엄마… 아빠…."

건물 잔해 구석에 틀어박혀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강소현.

푸슈우우우웃―

쉬이이익-!

그런 강소현의 뒤로 검붉은 액체가 한참을 뿜어져 나가더니 이내 그것이 바람 소리로 바뀌며 액체가 멎어들었다.

그리고.

와르르르르르―

거대한 시체 괴물이 무너졌다.

뼈와 살점.

고블린과 좀비.

사람의 형체를 지닌 무언가.

구구구구궁-!

그것들이 빠져나가고 난 자리에는 작고 검은 구슬 하나가 떠 있었다.

구우우웅-!

아마도, 시체 거인의 심장으로 추정되는 자리.

또각, 또각.

무너진 시체 더미를 밟고 구슬을 향해 다가갔고,

파앗-!

「검은 마석」

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체 거인의 첫번째 보상 '검은 마석'.

별 다른 설명도 없고, 시꺼먼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구슬이다.

그래도 '마석'이라는 이름으로 보아하건데 '에너지'를 담은 모종의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나, 나는 쓰레기야...."

정신이 망가진 강소현을 뒤로한 채 나는 다음 보상들을 확인했다.

「이준(Lv.4) 32세 / 보유 포인트: 298,46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4」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별다른 메시지가 나오진 않았어도 몸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이 달려졌기에 확인해본 '상태창'.

시체 거인의 두 번째 보상은 '렙업과 추가 능력치'고 세 번째 보상은 5,000포인트다.

'고작 이게 단가?' 싶을 정도로 역겹게 생긴 외형이었지만, 잡는 것 자체는 손쉽게 잡았기에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기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보상에 정신이 팔린 내게 강소현이 다가와 있었다.

"아, 좀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걸 그냥 낼름 챙기는 게 어디 있어요!"

정신이상에 걸리고도 '보상'을 신경 쓰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강소현 그녀도 아포칼립스에 완전하게 적응한 듯하다.

"기여도로 따지자면 제가 1순위 아닙니까?"

"...허, 진짜 사람이 어쩜 그래? 달라고 안 할 테니까 뭔지나 알려줘요."

그녀가 정신이상자가 된 후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기에, 검은 액체가 뿜어진 것부터 보상을 얻은 과정까지를 설명해줬다.

"…액체에 맞은 기억이 없네요."

그리고 검은 액체의 효과도 알 수 있었다.

1. 액체에 맞은 직후 단기기억 상실증에 걸린다.

2.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극도의 자기비하를 동반한 정신적 자학을 한다.

3. 약 30분간 지속된다.

"몇 방울 안 튀어서 30분인 걸 수도 있어요."

4. 더 많은 액체를 맞으면 지속시간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능력치랑 레벨은 올랐습니까?"

사실 검은 액체의 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과연 그녀도 보상을 받았는가?

"어! 그러게요. 저도 레벨이랑 능력치가 1씩 올라 있는데요?"

"씨발."

"네??"

"아, 강소현 씨는 괜찮습니다만, 앞으로를 생각하니 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문명이 폭삭 무너지고, 괴물들이 즐비하며, 죽어서도 좀비가 되어 농락당하는 인간들.

이 이상으로 망가질 게 있을까 싶었는데....

세상이 앞으로 더 끔찍하게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 대체 뭐가요? 이게 욕할 정도예요?"

"아니, 우리야 지금은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이걸 개나소나 다 안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도나도 한 대라도 치면 렙업이 된다?

당장 나부터 한입충 짓만 하려고 들 것 같은데.

"아… 다들 이득만 취하려 들겠군요. 근처에서 구경만 한다거나···."

이미 학교에서 겪은 몬스터 웨이브로 비슷한 경험이 있던 강소현이다.

"하아···."

그런 그녀이기에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도 더 와닿을 거고.

"이런 놈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사색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다.

"빠, 빨리 잡으러 가죠!"

이걸 너도나도 알아채기 전에 빨리 꿀을 빨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입충 쌉가능요!'라는 게 알려졌다가는… 괴물 주변에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쓰레기들이 가득하게 될 테니까.

인간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니.

* * *

「몬스터 웨이브 3. 36:00」

"와아... 그래도 한 마리 더 잡은 게 어디예요."

내 집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주변을 돌았는데 시체 거인은 단 한 마리밖에 만나지 못했다.

"다른 생존자들은 잡을 생각도 않던데요? 진짜 로라한테 잘 해주세요. 애초에 로라 아니었으면 이준 씨도 도망쳤을 거잖아요."

『달달달달달달-!』

"들리십니까? 제가 얼마나 잘해주고 있는지."

"무슨 트렉터같이 골골송을...."

고양이의 골골송에는 단계가 있다.

고양이마다 편차가 조금 있긴 한테, 우리 로라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그르릉 -〉 고로롱 -〉 골골골골 -〉 달달달달

단계로 진화하는 골골송.

마지막 단계인 '달달달달'에서는 흡사 트렉터가 지나가는 것과 같은 떨림을 동반한다.

골골송, 전문 용어로는 퍼링(Puring).

그르릉, 골골골, 갸르릉 등 주인마다 부르는 명칭에 조금 차이가 있다.

이 골골송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을 꼽자면 아래와 같다.

1. 만족의 표현.

집사의 손맛이 기가 막힌다는 의미.

2. 애정의 표현.

집사가 너무 좋다는 의미.

3. 치유의 표현.

집사를 위로하거나 관절염 등의 물리치료를 해주겠다는 의미.

"아, 퍼링은 그 진동수가 25~150Hz 사이인데, 이게 관절염 물리치료에 쓰는 범위에 포함돼요. 근데 100% 확실한 건 아니니까 참고만 하세요."

로라는 핥아서 '힐'을 할 수 있는 고양이다.

강소현의 설명과 내 경험을 조합해보면, '로라의 골골송은 뼈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역시 내 딸이야."

"이유… 좀 크리피 한 거 아시죠?"

"고양이 키워 보십쇼. 저처럼 됩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고양이가 치명적인 것이지.

"그래서, 고양이 얘기는 그만하시고, 이제 말 좀 해보세요. 대체 학교 근처까지 갔다가 이준 씨 집으로 다시 데려온 이유가 뭐예요?"

아, 그거?

"크흠, 일단 집으로 가시죠."

레벨이 오르면서 새롭게 개방된 설비가 있어서 강소현을 집으로 데려온 거다.

[시체 소각로: 5,000p]

[시체를 처리하는 용도. 추출기와 조합해 자원 확보가 가능하다]

사용에 대한 비용이 안 드는 만큼 제법 비싼 설비.

"뭘 시키려 그래요? 다음 웨이브까지 고작 하루 조금 넘게 남았는데...."

시체를 태우는 건 공짜다만, 옮기는 건 공짜가 아니다.

"아, 제가 새로운 설비를 지을 건데. 이걸 쓰기 위해서 좀 같이 옮겨 주실 게 있습니다."

"와! 막 새로운 포탑 같은 게 추가되는 거예요?"

"보시면 압니다."

흥분한 그녀를 데리고 나는 집앞 골목길에 드러섰다.

#16. 아포칼립스 (1)

콰과과가광-!!!

코너를 돌아 짚앞 골목길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흙더미와 먼지.

"에잇, 씨이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리고 'CK신속택배'라는 쪼끼를 입고 있는 이상한 아저씨 하나.

또각, 또각.

택배기사님이라는 친숙한 이미지 때문에 큰 적개심이 들진 않았다.

편돌이 전에 하던 일이 비슷한 일이기도 했으니.

콰과과과광-!!

내 집 옆옆옆 빌라의 잔해를 치우던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 누구세요?"

뒤늦게 나를 발견한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여기 주민인데, 그쪽은 누구시죠?"

"아, 태, 택배입니다."

아포칼립스에도 택배가 온다는 말인가?

너무도 당황스러운 그의 답변에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아, 아니, 그··· 이 빌라 사셔요?"

"아니요. 저는 저 안쪽 주택에 삽니다만."

"와... 비위가 엄청 강하신가 보네. 저 안쪽은 죄다 시체뿐이던데. 게이트도 하나 있고."

다행히도 그가 내 집앞까지 가보진 않은 듯하다.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전투를 전제로 견적이라도 짜듯이 나와 강소현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택배기사.

스륵-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을 칼집에 집어넣더니 자리를 뜨려고 한다.

철그럭-

나는 그와 반대로 철봉을 앞세우고 그를 멈춰 세웠다.

"그냥 가시면 곤란한데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계셨는지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수상했기 때문인데.

"...."

또각, 또각.

말없이 멈춰 서서 눈알만 굴려대던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아직까지 무기를 뽑지 않는 걸로 보아 호전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

스릉!

"에잇, 씨이팔!"

개뿔.

그 역시도 아포칼립스 패치가 완료된 인간이었다.

"이상한 옷을 입은 놈에 말라깽이 년 하나."

"고양이도 있습니다만."

눈에 조금 문제가 있는지 내 어깨 위의 로라를 못 알아본 택배기사.

"허! 그래, 고양이까지 있네. 둘 중 한 놈은 데려갈 자신 있으니까 들어와 봐!!!"

철그럭-!

봉을 고쳐잡고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마는 무턱대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간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만 죽치지 말고 그냥 보내주지?"

택배기사 역시도 마찬가지.

"하아... 둘이서 30분째 뭐하는 거예요?"

잔뜩 긴장한 채 서로 눈치만보며 시간을 날리던 나와 택배기사.

"멍청하게 그렇게 서 있으면 뭐가 나와요?"

그게 답답했는지 멀찍이서 구경만 하던 강소현이 다가와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파앗-!

그녀가 쓴 방법은 '특수 스킬'을 이용한 회유.

"보이죠? 이게 그 장소에 일어난 것들을 보여주는 능력이에요. 택배 아저씨 어차피 말 안 해도 다 알 수 있어요."

"어,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거냐!"

"그 장소에 있는 사람에 대한 것까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특수 스킬'을 이용한 사기다만.

"2대1로 싸우다 죽으실지. 아니면 그냥 순순히 털어놓고 가시든지 고르시죠."

그녀가 허리춤에 찬 메이스까지 꺼내들고 택배기사를 겁박한다.

그리고 택배기사가 손을 드는 데는 고작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30분간의 대치 상황이 더없이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지만, 택배기사가 내뱉은 충격적인 말에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 내 스킬이... 하아, 어디서 말하지 마라."

한숨을 내쉬며 그가 내뱉은 말.

"근처에 있는 아이템을 찾아주는 스킬인데... 아이템의 대략적인 위치랑 특정할 수 있는 단어만 알려주는 스킬이다."

"이쪽에 아이템이 있다고요?"

"그, 그래. 나는 포기할테니 그냥 보내줘."

"그래요, 가셔도―"

"힌트라도 주고 가시죠."

멍청하게 택배기사를 그냥 보내려는 강소현의 말을 끊고 택배기사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하아... 204호. 이게 끝이야. 진짜다."

"가셔도 좋습니다."

택배기사가 떠나고 적막함이 감돌기 시작한 골목길.

"이준 씨, 커다란 괴물은 잘만 죽이면서 사람만 상대하면 왜 그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그러면 제가 사람을 팍팍 죽였으면 좋겠습니까?"

그녀에게는 이미 사람에 대한 대처법에 답이 내려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닌데.

"아… 니, 다 죽이라는 건 아니고요…."

자신도 살인에 대한 각오가 서있지 않은 주제에 내게 잔소리를 해대는 강소현.

그것이 조금 억울하게 느껴진다.

"강소현 씨야말로 상황 해결은 똑똑하게 해 놓고 그걸 왜 그냥 보내주려 합니까?"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도 그대로 돌려줬다.

"204호로 뭘 알아요? 진짜, 이상한 부분에서 되게 쪼잔한 거 아시죠?"

나는 홀로 살며 나만 챙기는 삶을 살던 사람이다.

그런 내게 쪼잔함을 얘기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그리고 204호라는 정보는 내게 있어서는 매우 쓸만한 정보였기도 하기에 그녀의 말을 반박할 수도 있고.

"204호가 있는 빌라는 제 옆 빌라 하나뿐입니다만."

"...미안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려니 합니다."

으쓱해진 어깨.

또각, 또각.

가벼워진 발걸음.

"-이이이익!!"

잔뜩 성이 난 강소현.

『냐아~!』

집에 돌아와 신이난 로라까지.

아포칼립스가 온 뒤로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 * *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이준은 또라이에 미친놈이다.

화르르르륵-!!

작은 고양이로 시작된 인연.

처음에 본 그는 변태같이 생긴 이상한 코스튬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근 2년간 야간진료 때마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가던 나를 단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던 이준.

그런 그였기에 더 변태같이 느껴졌었고.

안면인식장애가 아니라면 말이 안 될 정도로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지금이야 집사라는 능력과 로라라는 고양이를 알게 돼서 괜찮아졌지만, 지금도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종종 보이는 어딘가 어긋나 보이는 감성만 빼면은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학교에 널린 변태 놈들이랑 멸망한 세상에서 권력을 잡아 보겠다고 설치는 자칭 군인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가장 멀쩡해보이던 남자였으니까.

그가 정부나 군대가 남아 있을 거라는 내 믿음을 깨부쉈을 때는 조금 원망하기도 했었다.

엄마 아빠 생각에 눈물도 났고....

그렇게 우는 나를 두고 갔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했었지.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도 그가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불현듯 찾아온 좀비떼들로부터 지켜주기까지 했으니.

내심 감사한 마음이 쌓여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태 초등학교 생존자 캠프에 들어가 정보원을 하라 했던 이준.

시체 거인을 잡으며 레벨이 오른 그가 '새로운 시설'을 빌미로 나를 다시 집으로 끌어들였고.

화르르르륵―

지금에 와서는 내게 끔직한 일을 강요하고 있다.

"더 빨리 못 옮겨요? 느려 터져서는."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어....'

욕이라도 좀 배워둘걸.

"하아...."

이준의 집앞에 쌓인 수많은 시체를 옮기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썩어 문드러진 좀비.

그 밑에는 썩어 문드러진 고블린.

그 밑의 밑에도 썩어 문드러진 고블린.

반쯤 썩어가는 물컵과 곰팡이 핀 빵들.

"이걸 저 혼자서 언제 다 치워요!!!"

성질이 뻗혀 화는 한 번씩 내고 있는데―

우우우우웅-!!

"그러면 발전소 짓지 말아요? 전기, 가스, 뜨거운 샤워 싫습니까?"

그가 하는 일이 워낙에 중요한 일임을 알아서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얹혀 살게 될 입장이고.

이준, 그가 가진 '집사'라는 능력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집사라고 말하길래 처음에는 고양이 집사인 줄만 알았는데, '집을 관리하는 집사'였다니.

아니, 어쩌면 두 개 다 포함되어 있을 수도?

나는 그냥 힐 몇 개가 끝인데···.

왜 저런 이상한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가져가지고는.

단순 노동 속에서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된다.

"-이이이이익!!!!"

생각들이 맞물려 화가 나게 되면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진다.

"또, 또 저러네. 그쪽 말고 여기부터 치우라니까요!"

이준, 그가 조용히만 해준다면 조금 더 나아질 텐데.

나쁜놈.

* * *

이태원 일대를 샅샅히 뒤져 발견한 시체 거인인 둘.

그놈들을 잡고 레벨 5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까지 고려한다면 나와 같은 케이스가 조금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이태원 쪽에서는 나와 강소현이 레벨과 능력치로는 가장 앞서나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성장한 상태창을 보니, 레벨 5라는 지점부터가 하나의 분기점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준(Lv.5) 32세 / 보유 포인트: 183,46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5」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새롭게 설계도라는 스킬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방어 설비] ― 고정 포탑 2단 업그레이드

└ 자동 포탑 ― 상향된 자동 포탑

설계도에는 이런 식으로 직접 연구를 통해 해금할 수 있게 된 옵션들이 있고, 이미 획득한 스킬 외에 다양한 것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 추출기: 시체 소각로 필요

[주거지 건설] ― 발전소 ― 에너지 설비 ― 냉난방

└ 생활 환경 개선 ― 주방 설비

└ 조잡한 화장실

즉, 레벨업에 따른 추가 설비 외에도 늘려나갈 수 있는 것들이 추가된다는 말인데....

아무리 봐도 잘 설계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아포칼립스 속 집사'라는 게임을 100% 따라간다면, 시작부터 포탑 같은 것을 지금 지을 수도 없었을 테니 크게 불만은 없지만.

뭔가 급조한 듯 만들어진 설계도에서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니.

▷▶▷▶▷▶▷▶ [ 발전소 연구 완료 ]

참고로 설계도 해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없다.

그냥 눌러두면 해당 연구에 필요한 시간이 카운트되고 알아서 연구가 완료되는 것이 설계도다.

심지어 즉시 완료권이 3개나 주어져 있었다.

그래서 추후 가장 효율을 뽑아낼 것으로 판단되는 '발전소'를 먼저 연구했다.

[발전소: 100,000p]

[각종 에너지원을 활용해 전력을 생산한다]

각종 물자를 요구하는 게임과는 달리 포인트만 지급하면 바로 설비를 지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우우우우웅-!!

뭐, 대신 직접 조립을 해야 하지만....

"-이이이이익!!!!"

거참, 조용히 좀 하지.

"또, 또 저러네. 그쪽 말고 여기부터 치우라니까요!"

내가 발전소를 짓는 사이 강소현에게 시체 청소를 부탁했는데, 성질머리가 아주 보통이 아니다.

"아니, 왜 계속 한곳만 치우라 그래요?"

"그냥 하라면 해요."

그녀를 골탕먹이려는 것은 결코 아니고....

굳이 저곳을 뒤져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우우웅-!!

퓨슈우우우욱―

발전소.

이름만 보면 크기가 제법 되지 않을까 싶겠지만,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의 발전소는 아주 작았다.

건물 잔해에서 '돌, 철근, 목재'와 같은 자원을 필요로 하는 '벽이나 바닥 건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발전소.

발전소에 포인트를 지불하자 나타난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품들이었다.

이것들을 직접 조립해야 했는데 그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기에 금세 조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1x1x1(m) 사이즈의 큐브.

파앗!

발전소가 완성되자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24시간 생성 가능 마력: 500]

처음보는 단어다.

'마력'이라니....

'능력치' 하나로 통일된 상태창과는 달리 발전소에서는 듣도 보도 못 한 마력을 생성한다는데.

큐브 형태의 발전소 벽면에 달린 이상한 구멍들과 '전력'을 요구하는 이동식 요새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추가 연구를 더 해야 하는 모양이다.

[에너지 설비 24:00]

남은 즉시 완료 권은 둘.

하나는 발전소에 썼으니 남은 하나는 '자동 포탑'에 사용할 생각이다.

마지막 한 개는 비상용으로 보관하고.

「몬스터 웨이브 3. 23:26」

당장 전기보다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 [ 자동 포탑 연구 완료 ]

순수 포인트 차감으로만 작동하는 고정 포탑으로 추측하건데, 자동 포탑 역시 포인트만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벽이나 바닥 건설처럼 자원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파앗-!

[자동 포탑: 2000p 0/2]

​[750RPM, 초당 12발, 7mm마탄 사용 / 초당 100p 사용]

그렇게 해금된 자동 포탑의 옵션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위이이잉-!

대문 위의 평평한 부분에 건설되기 시작한 자동 포탑 두 대.

철컥!

반투명한 푸른색 큐브들이 뭉쳐져 그 형태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둥근 바닥.

위이이이잉-!

원기둥 형태의 중심 기둥.

철컥!

고정 포탑과 똑같이 생긴 총알을 발사하는 중앙 부분까지.

달라진 점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는 것과 조금 더 기동성이 좋아 보인다는 것.

[자동 포탑: 가동 / 정지]

"자동 포탑 가동."

위이이이잉―

"히이익-!!"

"어어!! 저, 정지!!!!"

쉬이이익-

대문 옆에 지어둔 소각로에 시체를 옮기던 강소현.

자동 포탑의 총구가 그녀의 머리통을 따라가며 회전하려 든 것을 보아하니....

"미, 미쳤어요? 저건 또 뭔데요!!"

아무래도 자동 포탑은 피아식별을 못하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자동 포탑인데... 그냥 움직이는 건 다 쏘는 것 같네요."

"그, 그럼 저 지금 죽을 뻔했다는 거예요?"

"크흠, 제가 곧장 멈추지 않았습니까. 죽을 뻔한 건 아니죠."

퍼억-!

화르르르르르륵―

"하아. 진짜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왜 계속 여기 시체만 치우라고 하는 건지 설명이나 좀! 어? ...이, 이게 뭐지?"

소각로에 시체를 던져 넣고 다시 구덩이로 내려간 강소현의 의문스러운 목소리.

"거기 뭐 있습니까?"

"아, 네. 근데 좀 내려와 보셔야겠는데요?"

아무래도 그녀가 아이템을 찾아낸 것 같다.

#17. 아포칼립스 (2)

미터 단위로 쌓여있던 대문 앞의 시체들부터 반쯤 무너진 골목길에 쌓인 것들까지 족히 수백 구는 되는 시체들이 치워져 있었다.

혼자 이 많은 시체를 치운 강소현이 대견하게 느껴져 뭐라 칭찬이라도 한마디 하려 했지만.

"왜요? 뭐가 또 불만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던진 한마디에 쏙 들어가 버렸다.

"아닙니다."

또각, 또각.

아직도 치울 시체가 산더미다만, 시체를 안 밟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이거 아이템 맞죠?"

우우웅-!

비스듬히 무너진 골목길 아래에 있는 포탈.

그리고 그 비스듬히 무너진 도로 잔해에 하나의 아이템이 있었다.

「죽음이 깃든 가방」

「가방 주인의 원념. 수많은 시체들의 원기가 뭉쳐져 탄생한 아이템」

「소지자를 좀비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어딘가 익숙한 외형의 가방.

분명 첫날 몬스터 웨이브에서 죽었던 옆빌라 아저씨가 애지중지하던 가방이다. 안에는 현금이랑 통장 따위가 있었는데, 딱히 쓸 데가 없어서 대충 저 근방에 버려놨었다.

생긴 건 조금 이상해졌지만....

"설명은 좋아 보이는데, 괜히 만졌다가 저주받는 거 아니에요?"

본래 저 가방은 흔한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서류가방이었다.

허나, 지금은 무슨 악마가 쓰는 가방처럼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가방 표면에는 녹색 진액과 붉은 핏덩이들이 말라붙어 있고, 둥근 손잡이 부근은 척추뼈 같은 걸로 대체되어 있었다.

섣불리 만졌다가는 전염병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 불길한 외형이 된 가방.

"고생하셨으니, 먼저 만져 보시죠."

본래 이런 일은 레이디 퍼스트다.

"에이, 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만져 보는 건 필요 없네요. 어차피 이준 씨 아이템인데, 이준 씨가 집어요. 아까 시체 거인 한 대 치는 걸로도 그렇게 눈치주면서, 괜히 양보할 필요 없어요."

아이템을 앞두고 이뤄진 신사적인 나의 배려.

허나, 그녀의 단호한 대답을 들어버린 이상 '레이디 퍼스트'를 이 이상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각, 또각.

"크흠."

'인벤토리.'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회복 포션을 손에 들고 가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윽-

조심스럽게 가방에 손을 얹자.

「소유자: 이준 / 거래 가능」

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려와는 달리 딱히 안 좋은 효과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짧은 메시지를 통해 알 게 된 정보가 몇 개 있었다.

1. '거래 불가' 아이템이 등장할 가능성.

"흠… 게임식으로 생각하면 착귀 아이템이 뜬다는 말인가?"

"착귀? 그게 뭔데요."

"착용 시 귀속의 줄임말입니다."

"아… 그러면 이 가방도 그런 종륜가요?"

"이건 거래 가능이라고 뜹니다만."

2.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할 가능성.

아마도, 경매장이나 커뮤니티 같은 기능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쓴다는 '튜토리얼' 상점 같은 것에 판매가 가능할 수도 있고.

"튜토리얼 상점에는 판매 기능이 전혀 없는데요?"

강소현에게 가방을 넘겨서 테스트해본 결과 튜토리얼 상점에서의 판매 행위는 불가능했다.

"그러면, 아마도 다른 상점이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이준 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추측해요?"

게임과 유사한 느낌의 '상태창'이나 각종 시스템 때문에 그렇다.

하치만 차마 '게임을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에.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라 대답했다.

"저도 생각은 많이 하는데.... 접근법이 달라서 그런가?"

만일 그녀가 게임을 즐겨했다면, 이런 세상에 조금 더 빨리 적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호전적이고 할 말 다 하는 성격으로 미뤄보아 상당히 많이 앞서 나갔을지도 모르고.

물론, 고양이가 없어서 나만큼 빠른 성장은 불가능하겠다마는.

"이제 학교로 돌아가시죠."

아이템도 먹었고 집의 방어 설비도 증축했으니 볼일은 다 끝났다.

"하아... 결국 다시 가야 하는 군요."

「몬스터 웨이브 3. 12:00」

다음 웨이브까지 12시간을 남긴 시점.

슬슬 출발해야겠다 싶어, 대문 밖을 나서던 순간에 또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튜토리얼 퀘스트: 생존」

계속해서 남아있던 퀘스트 알림이 점멸하기 시작한 건데....

"이준 씨도 이거 보여요?"

그녀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듯하다.

"...."

그리고 나는 미니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

강소현도 마찬가지.

깨끗하게 사라졌던 검은 점들이 어느샌가 다시 돌아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니.

다행인 점은 집앞 골목길에는 검은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불행인 점은 골목길 너머의 2차선도로가 검은 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게다가 검은 점들 중에 특출나게 큰 것들까지 섞여 있었으니.

"진짜 가요?"

강소현 그녀가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하다.

"가방 쓰고 가시죠."

허나 우리에게는 '죽음이 깃든 가방'이라는 사기템이 있다.

"데, 데려다줄 거죠?"

몬스터 웨이브 2에서 나온 고블린 2,000마리.

나만 몬스터 웨이브에 나오는 숫자가 병신같이 마구잡이로 늘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세 번째 웨이브는 최소 2만 마리에서 최대 10만 마리 이상으로 잡는 것이 맞다.

그말인즉슨.

몬스터 웨이브 3가 시작되면 수만 혹은 수십만의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고, 타인에 비해 종료 시점이 매우 늦어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금 강소현을 데려다주는 것이 고난의 시간을 앞둔 내게 있어서는 마지막 외출이 될지도 모른다.

업그레이드된 설비로 보아 죽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고블린 수십만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한참이나 걸릴 테니까.

그러니 가방 성능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그녀를 데려다주고자 한다.

또각, 또각.

"와... 무슨 결계라도 쳐진 것 같네요."

"그러게요."

골목길 앞의 2차선 도로.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빽빽하게 가득 찬 좀비들은 결코 골목길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다.

"아이템 때문일까요?"

아이템 효과라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고.

아마도 생존자들의 영역으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영역에서는 괜찮지만, 파밍을 위해 돌아다니는 자들을 방해하는 요소 같달까?

"흐음, 일리가 있네요. 근데 그거 아시죠?"

"뭐요?"

"우리가 저 사이로 지나가야 한다는 걸요. 혹시 겁먹으신 건 아니죠?"

웃음기를 머금은 강소현의 질문.

길을 뚫어야 할까?

아니면 가방을 믿고 좀비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지 저 좀비떼 사이로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쫄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말을."

또각, 또각.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기에 가방을 믿고 좀비를 헤집고 간다는 선택지를 먼저 골라봤다.

-크라라라라락!!

-크라라락!!

좌우에 빼곡히 도열한 좀비들이 좁은 틈을 비집고 돌아다닌다. 허나 나와 내 어깨에 탄 로라만큼은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저와 로라까지는 공격을 받지 않는군요."

"저, 저도 가볼게요!"

조심스럽게 골목길 너머로 한 발을 디딘 강소현.

"휴우… 가방이 범위로 적용되는 것 같죠?"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게 딱 붙은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유... 가까이에서 보니까 좀비들 진짜 징그럽네요. 눈알이 막 녹아내려요."

이태 초등학교로 향하는 길.

좀비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그런지 그녀의 말 수가 늘었다.

"와, 저거 보여요? 우리가 잡았던 시체 거인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데...."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둥근 공이 있었다. 물론, 대략적인 형태가 공인 거지, 디테일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저것도 잡자고 하는 건 아니시죠?"

온갖 시체가 뒤섞인 구체의 몸체에 기이한 형태의 '거대한 팔'들이 잔뜩 달려 있으니까.

『캬아하아악!!』

로라의 하악질로 보아 저놈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로라의 감은 절대적입니다."

"어련하시겠어요."

또각, 또각.

늘어나는 좀비와 틈틈이 마주치는 기괴한 거대 괴물들을 보며 우리는 점점 긴장감을 느끼게 됐다.

-끼이요오오오오!!!!

비주얼에서 오는 압도감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하늘에 있는 저것들까지 저러는 걸 보면 진짜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태 초등학교로 가기 위한 8차선 도로.

그 정중앙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눈알이 하나 떠 있었는데....

-끼아아아아아악-!!

그 위로 와이번들이 빙빙 원을 그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첫날 하늘을 가득 메우더니 어느샌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던 와이번들.

놈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군부대를 부수던 거인은 사라졌지만, 하늘을 수놓던 와이번은 돌아왔다.

세상이 망한 지 2주 남짓한 시간이 지났고, 여전히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얼마 없었다.

또각, 또각.

'이태 초등학교'.

강소현의 24시 동물병원 간판은 부서져 버렸지만,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생존자 캠프인 '이태 초등학교'의 간판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웨이브 3 끝나면 제가 찾아갈게요!!"

"강소현 씨, 이거 가지고 가시죠."

강소현에게 '죽음이 깃든 가방'을 건네주었다.

"이걸 절 주시면 이준 씨는 어떻게 돌아가시려고요?"

이태 초등학교로 가는 길을 보아하니 절대 강소현 혼자서는 나의 집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8차선 도로를 점거한 눈깔 괴물.

내 감이 말하는데 저것은 매우 위험한 존재다.

그 어느 때보다 불길한 느낌이 들고 있으니까.

"저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로라의 주치의인 강소현에게 가방을 넘겨주는 것이 맞는 판단이다.

"...지, 진짜죠?"

"제 걱정은 마시고 강소현 씨나 잘 살아남아 주십시오."

사실 그녀를 내 집에 두는 것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허나, '몬스터 웨이브'라는 안정적인 적응 기간이 무한정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이 틈에 강소현을 통해 뭐라도 정보를 얻는 게 맞는 판단일 것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물론 내게는 안정적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만.

또각, 또각.

"이준 씨! 힘내요!!! 좀비들 때문에 너무 힘들면 학교로 도망쳐 오세요! 제가 입구 쪽에 있을 테니까!!!"

멀어지는 강소현의 응원을 뒤로한 채 나는 로라와 함께 학교 앞 담장 뒤로 갔다.

거, 쓸데없는 걱정하기는.

"로라, 준비됐지?"

『냐아!!!』

나는 텔포로 돌아가면 그만이거든.

바닥에 기이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이내 나와 로라는 푸른색 빛에 휩싸였다.

파아앗-!!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집 안 방공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로라야, 지정 장소는 마당으로 변경하자."

『냐아?』

산책용 목걸이의 옵션 '신체 접촉 중인 물건과 함께 이동한다.'를 고려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효율충의 끝판왕이 한국인이다.

그중 한국인 게이머가 최고봉으로 쳐지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걸 방 안에 들여놓으면, 아빠가 치우는 게 힘들지 않을까?"

『냐아!』

"다음번엔 마당으로 부탁할게."

집의 방공호는 사실상 이 집의 유일한 '방'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즉, 내가 매일 닦고 치우고 쓸고 하는 장소라는 말이다.

"끄응차-!!"

집 앞의 잔해들 중 쓸만한 것들은 이미 내 집의 담장과 벽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져온 것은 학교의 무너진 담장이다.

멀쩡한 바닥과 담장에 손을 대고 텔포를 했는데, 실제로 가져와진 것은 '무너진 담장'뿐이었다.

아마도 연결된 넓은 도로나 거대한 건축물 같은 것들은 가져올 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이 길쭉한 담장을 챙겨 왔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데....

"끄응차-!!!"

이걸 치울 생각을 하니 마냥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가로 10m 길이로 무너진 담장이 세로로 방공호에 꽂혀 버려서 치우기가 너무 어렵다.

"끄으읍-!!"

그간 사용하면서 익힌 '주거지 건설' 스킬은 재료가 멀쩡할수록 그 효율이 뛰어났다. 때문에 이 담장을 챙겨 왔는데 돌과 돌이 맞물리듯이 방공호에 꽂혀서 그런지 잘 뽑히지가 않는다.

「몬스터 웨이브 3. 03:00」

나는 로라의 집사이기도 하지만, 이 집을 관리하는 집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몬스터 웨이브 시작까지 고작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당장 이 벽을 치워 방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바보 같아 보이지만....

뭐랄까?

약간의 그런 본능이 생긴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끄으으으읍-!!!"

쿠구구구궁-!!!

"비, 비켜, 로라!!!"

내 다리 사이를 스치며 돌아다니는 로라를 피해 마당까지 담장을 운반하는 일은 제법 고되었다.

"끄으읏!"

재료의 보존을 위해 10m 길이의 담장이 부러지지 않게끔 하면서 다리 사이를 오가며 장난치는 로라를 피하기까지 해야 했으니.

쿠웅-!

"휴우...."

「몬스터 웨이브 3. 02:00」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방공호에 떨어진 흙먼지와 돌조각들을 치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스윽- 슥-

잔해 더미에서 파밍해 온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끼이익-

주워둔 옷들 중 걸레로 쓸만한 걸 골라 바닥을 닦는다.

끼익-

바닥에 깔아둔 장판 조각에서 유리 문지르는 소리가 날 때 까지 닦고 나서야 나의 청소가 끝난다.

칙, 치익-

청소 뒤에 하는 담타.

"쓰으읍."

아포칼립스가 와서 좋은 것들도 몇 개 있다.

"후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흡연이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일회용품처럼 쓸 수 있다.

화르르르륵―

바닥 걸레로 썼던 멀쩡한 옷 무더기.

소각로가 생겼기 때문에 바닥에 버리는 대신 옷을 그곳에 집어넣었다.

아포칼립스에서 귀중한 옷을 버리는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애들 내복 같이 작은 옷들을 내가 입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일회용 걸레로라도 쓰는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 3. 01:00」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마지막으로 할 일은 포탈 앞부터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킬존 만들기와 설비 점검이다.

쿠구구구구궁-!!

파밍한 벽을 이용해 두 겹으로 둘러 둔 담장을 한 겹 더 추가하고 높이도 더 올린다.

지붕도 없고 방도 하나뿐인 내 집이지만, 마당 너머의 담장만큼은 높이 3.5m 높이의 세 겹의 벽으로 둘러져 있다.

집이라기에는 조금 삭막해도....

망한 세상에서 뭔 디자인을 챙겨, 그냥 살아야지.

휙-!

휘익-!

강소현이 치워둔 입구의 시체들.

주변에 남은 시체들을 좌우로 집어 던져 시체로 벽을 쌓는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마지막으로 '고정 포탑'과 '자동 포탑' 도합 네 대의 포탑의 작동을 확인하고 나니.

「몬스터 웨이브 3. 00:00」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00,000마리」

10만 고블린 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8. 아포칼립스 (3)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00,000마리」

"옘별...."

내심 각오는 하고 있었다지만, 실제로 10만이라는 카운트를 보는 것은 각오와는 또 다른 얘기다.

"좆됐네."

뿌우우우우우우―

쿠웅-!

쿠웅-!

뿔피리 소리와 함께 포탈에서 나타난 것들은 거대한 방패를 든 고블린 챔피언들.

놈들이 기껏 쌓아놓은 시체 벽을 방패로 밀치고 비스듬히 무너진 도로를 타고 올라오고 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허나 이미 잡아본 놈들이기에 상대법은 쉽다.

투타타타타타타탓-!

투타타타타타타탓-!

자동 포탑 두 대가 놈들의 머리 쪽에 포화를 날리면, 나는 발목을 노려준다.

쿠우웅-

그렇게 선두에 있는 고블린 챔피언을 병신으로 만들어 두면 바닥을 비적이는 고블린 챔피언을 밟고서 갑옷으로 무장한 고블린들이 나타난다.

「보유 포인트: 183,460p」

「보유 포인트: 182,130p」

「보유 포인트: 181,090p」

초당 100p를 쓰는 자동 포탑 두 대.

「보유 포인트: 187,940p」

식히는 시간이 필요한 고정 포탑 두 대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쏘다 보니, 포인트 숫자가 실시간으로 팍팍 변하고 있었다.

뿌우우우우우―

그렇게 한 차례 고블린 무더기를 포화로 쓸어버리고 나면 다시금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시 고블린 챔피언들이 방패를 들고 나타난다.

질걱-

바닥에 깔린 동족의 시체들을 밟으며 진군하는 놈들.

시체 때문에 균형을 잡기 힘들었는지 처음보다는 빈틈이 많이 보였다.

투타타타타타타탓-!

자동 포탑을 잠시 멈추고 고정 포탑으로 시체 위에서 균형을 잃은 고블린 챔피언들에게 포화를 갈겼다.

「보유 포인트: 191,170p」

돌진 원툴인 고블린들.

2,000마리 때와 똑같은 패턴으로 등장하는 고블린 군단은 수만 많지 딱히 달라진 점이 없었다.

「보유 포인트: 212,260p」

포탑 한 대로도 2,000마리를 잡아냈던 나다.

자동 포탑 두 대가 추가되고 더 이상 포탑의 열을 식힐 필요도 없어졌으니 싸움이 쉬워졌다. 쌓일 시체 더미의 해결 방법도 이미 생각해 뒀고.

* * *

잡은 놈들이 만이 넘었다.

앉아서 포탑의 핸들을 당기기만 하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지루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효율을 추구하게 된다.

나오는 고블린들의 수를 가늠하고 자동 포탑의 온오프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포인트 수급에 집중했다.

「보유 포인트: 261,880p」

처음부터 느꼈는데 불합리할 정도로 그 수가 많이 나오긴 해도 '몬스터 웨이브'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클리어가 가능하게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렇게 레벨 디자인이 되었다는 느낌이랄까?

「보유 포인트: 281,110p」

수없이 많은 고블린을 잡다보니 알게 된 것들이 몇 개 있었다.

1. 포탈에서 한 번에 나올 수 있는 고블린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즉, 숫자만 많지 나오는 족족 죽여 버리면 놈들에게 둘러싸일 일은 없다는 말이다.

2. 고블린은 저능아다.

진군의 뿔피리를 불고, 갑옷도 입고, 앞에 방패를 든 탱커까지 보내지만 그게 다다.

일직선 경로로 무지성 진군하는 고블린들은 더 이상 내게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하다못해 궁수만 있었어도 제법 고전을 했을 텐데 말이야.

「보유 포인트: 292,960p」

이쯤 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만....

시체가 너무 많이 쌓였다.

아래를 조준하고 있던 고정 포탑이 위를 바라보는 지경.

쿠우웅-!!

그래서 포탑의 사각지대인 시체 더미 너머에서부터 고블린들이 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가속도가 붙어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대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놈들도 학습을 하는 건지, 시체 더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건 아닌데, 놈들의 전략에 생긴 변화가 신경 쓰이고 있다.

쿠우웅-!

거대한 고블린 챔피언이 시체 더미에서 뛰어내린다.

투타타타타탓-!!

방패도 뭣도 없이 뛰어드는 놈을 벌집으로 만든다.

쿠웅-!

놈이 쓰러질 때 등 뒤에 매달린 고블린들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투타타타타탓-!!

가까운 놈들부터 공격하는 자동 포탑 때문에 의미는 없다만.

어쨌든 놈들이 '높이'라는 것을 이용하기 시작했으니 나 또한 이에 화답해줄 차례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잠시 여유가 생겼으니 이동식 요새의 조종 스틱을 당겨 집의 높이를 조금 올렸다.

혹시라도 놈들이 퍼져서 온다거나 하는 식의 패턴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 그대로 뒀었는데, 10만 대군이 진격하면서 만들어내는 시체 더미들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패턴 변화는 감수해야 할 판이다.

쿠구구구궁-!

딱 시체 더미 너머로 사격 각이 나올 때까지만 요새를 높였다.

「보유 포인트: 329,850p」

높이 쌓여지는 시체.

쿠구구구궁-!

그에 맞춰 더 높아지는 나의 집.

남은 건 지루한 반복의 시간뿐이다.

* * *

이태 초등학교 정문.

강소현은 오는길에 만난 좀비떼로부터 이준이 도망쳐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학교 정문 앞에 일행들을 모아 대기하고 있었다.

"언니... 그 남자한테 바람맞은 거 아니에요?"

"아, 아니야! 그냥 혹시나 해서 내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한 거야."

"그런 것치고는 너무 비장하게 서있는 것 같은데."

오늘 길에 봤던 거대한 눈알 형태의 괴물.

손발이 잔뜩 달린 이상한 구체.

'잘 돌아갔을 것 같긴 해도… 은근 허당끼가 있으니까, 혹시 모르지.'

라는 생각으로 이준을 기다리던 강소현이었다.

「몬스터 웨이브 3. 02:00」

"이제 진짜 가자. 우리도 준비해야지."

이태 초등학교에는 약 2,512명의 생존자들이 모여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1때만 해도 3,423명이나 되던 그들은 두 번째 웨이브와 좀비의 습격으로 인해 그 수가 많이 줄었다.

"아이고, 강 수의사 오셨습니까. 어디 다른 데로 가신다더니. 어째 저희 쪽으로 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이곳에도 질서를 세워야 하지 않나요?"

'주류 그룹'인 정치인과 군인들의 집단 '이태초 생존자' 그룹이 약 1천여 명. 그들을 대표하는 한정식 의원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강소현을 맞이했다.

"됐네요. 쓰레기 청소도 제대로 못하면서 질서는 무슨."

강소현이 매몰차게 한정식의 제안을 거절하고 운동장에 설치된 캠프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저희 뽀삐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비주류 그룹'인 '대학생 연합'과 '가족 단위 집단'이 약 1천여 명. 가족 단위로 모인 '가족 모임'에서는 반려동물은 제법 많이 데리고 왔다.

망한 세상에서 동물까지 챙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한정식 의원의 주류 그룹과 가장 크게 부딪히는 그룹이 바로 '가족 모임'이다.

"몬스터 웨이브가 이제 2시간도 채 안 남아서요."

"하, 진짜 너무 비싸게 구시는 거 아니에요?"

"아주머니, 언니가 좀 바빠서 이해 좀 해주세요~!"

능숙하게 너스레를 떨며 이설이 강소현을 데리고 가족 모임의 영역을 벗어난다.

'미친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몬스터 웨이브까지 약 1시간 반.

그 와중에도 자신의 반려견의 진료를 봐달라고 우겨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던 강소현의 인류애를 더욱 깎아버렸다.

"3천 명이나 있는 사람 중에 수의사가 왜 언니 하나밖에 없는지 모르겠네."

"설아, 비율을 생각해 보면 이게 맞지. 웬만한 직종들 다 하나씩 있다는 게 어디야."

수의사,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이 각각 한 명씩이라도 존재하는 이태 초등학교 캠프.

"근데 진짜 변호사나 국회의원은 좀 필요 없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말을 흐린 강소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저 밖에는 집사라는 이상한 직종도 있단다.'

"소현 언니!!!"

둘은 그들이 있던 소수 그룹의 구역에 도착했다.

300여 명의 소수 그룹은 강소현과 같이 안 좋은 일을 겪은 이들과 이를 우려하는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개중에는 괴물과의 싸움을 회피하는 자들도 일부 섞여있었다.

"히, 힐 좀 써주세요!"

소수 그룹에서 나름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던 전사 클래스의 장진아.

좀비 웨이브에서 동료를 지키다가 팔에 부상을 입은 그녀는 캠프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장진아가 강소현을 보자마자 뛰쳐나가 치료를 부탁했다.

"에휴, 쪼잔한 새끼들. 고추 달린 놈들치고 안 쪼잔한 놈이 없어. 힐!"

강소현의 손에 금색 빛이 맺히고, 이내 작은 빛 덩어리가 부상을 입은 장진아에게 날아간다.

포옥-!

따스한 빛무리가 장진아의 몸을 감싸고.

파스스스―

장진아의 팔에 생긴 커다란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냥, 그쪽에 치료해 달라하지 그랬어. 아팠을 텐데."

"그… 또 무슨 서명을 하라고...."

좀비 웨이브에서 팔에 큰 상처를 입었던 장진아.

"그 새끼들 아직도 그래?

주류 그룹인 '이태초 생존자 그룹'.

그들은 이태초에 있는 대부분의 힐러들을 데리고 있으며, 치료에 대한 비용으로 그룹 가입 서명을 요구하고 있다.

"마, 말만 번지르르 하지 강간범에 음흉한 짓이나 하려는 변태 새끼들도 그냥 방치하고."

"아니, 무슨···… 이 상황이 끝나고 법대로 처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이태초 생존자들 중에는 '능력치' 사용법이 알려지기 전 성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대표자는 그들을 쫓아내거나 처벌하는 대신 '보류'라는 선택을 해버렸다.

주류 그룹은 정치인을 대표로 움직이는 만큼, 모든 행동에 있어 '대의'를 필요로 한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의 대의란, '생존'과 직결된 행동을 뜻하기도 하니.

"아직도 못 싸우겠대?"

강소현이 묻는다.

대체 왜 아직도 전투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저 범죄자들조차 싸울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생존자 캠프에 남아 있는데, 너희는 왜 아직도 싸우지 않는가?

"괴물이랑 못 싸우겠다는데 이해해야지. 솔직히 가족 모임만 봐도 애들은 다 못 싸우는 거잖아. 성인도 무서우면 그럴 수 있지."

윤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강소현의 의문에 대답했다.

"하아...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이랑 있다 왔거든."

이준의 영향 때문일까?

강소현의 생각은 이태초 생존자 캠프에 있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사람들도 결국에는 다 싸워야 해."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언니. 제 동생도 있는데... 그럼, 겁 많고 괴물이랑 싸우는 게 무서운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에는 다 죽겠지.'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강소현이다.

평판이란 게 존재하는 이태초에서 대놓고 그런 발언을 하진 않았지만.

'이준 씨가 차라리 낫지. 처음이야 경황이 없었다지만, 이젠 확실히 말해 줘야 해. 나는 어차피 여기서 나갈 사람이야.'

무언가 결심한 표정이 된 강소현.

그녀가 일행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지금 이 상황이 일종의 보호 조치일 수도 있어.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세상이 변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야."

이준이 말했던 얘기들을 곱씹으며 그녀가 일행들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래도... 우린 사람이잖아요. 싸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버리라니 어떻게 그래요."

"당장 그들을 버리나는 말이 아니야. 싸우게 만들어야지."

하늘에 보이는 와이번.

지상을 가득 메운 좀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포탈과 몬스터들.

그리고 이들과 싸울 수 있게 '각성'한 인류.

"사람? 인간적인 거 좋지. 그런데, 밖에 돌아다녀 보니까 별 희안한 사람들이 다 있더라고. 성격이나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야. '능력'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어."

이상한 집을 지어 거점을 방어하는 능력.

아이템을 찾아내는 능력.

분명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형태의 힘을 얻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몬스터 웨이브는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그리고 이게 끝나고 세상이 더 끔찍하게 변한다면...."

말끝을 흐린 강소현이 그들이 있던 구역 뒤편에 자리한 음침한 자들을 바라본다.

"망한데다가 더 끔찍해진 세상에서 너희가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까? 저놈들 사이에서?"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200여 명의 음침한 무리였다.

이태 초등학교의 마지막 그룹 '쓰레기들'.

망한 세상을 기회삼아 절도에 폭행부터 시작해서 강간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미친놈들이 모인 집단.

"쟤들이 왜 안 쫓겨났을까?"

허나 그런 범죄자들이어도 망한 세상에서는 필요한 게 현실이다.

"여기서 반은 전투를 못해. 그러면 남은 몬스터들은 누가 잡았을까?"

"...."

"나는 이번 웨이브가 끝나면 여기를 떠날 거야. 다들 잘 생각해봐."

* * *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씨이팔."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2,537마리」

10만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숫자로 시작된 고블린들의 습격은 하루가 지났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쓰으읍."

왼손에 담배.

오른손에는 고정 포탑의 핸들.

"후우...."

운전을 하다 보면 한 손으로 밀어서 핸들을 돌리는 게 더 편해지듯이, 포탑의 핸들 또한 비슷했다.

그 덕에 이렇게 담배라도 피우고 있지.

뿌우우우우―

저 개같은 뿔피리 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고로로로로롱』

로라가 없었다면 진작에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시체.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이동식 요새의 다리를 최대한 펼쳐 가장 높은 높이로 올려둔 나의 집.

대문 아래로 비스듬히 깔린 시체들.

-고르르르륵!

그리고 그 시체 무더기를 밟고 오는 고블린들.

단 1초도 자지 못하고 피와 살점이 낭자한 광경을 보다 보니 점점 정신이 마모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준 씨!!!! 자, 잠깐만요!!!! 포탑 정지!!!!!"

응?

드디어 내가 미쳐서 헛것이 들리는구나.

강소현 목소리가 여기서 왜....

"뭐지?"

미니맵에 푸른 점 하나.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6,321마리」

아직 몬스터는 남아 있고.

-고르르르륵!!!

아직 고블린도 계속 오고 있다.

"...."

그런데 어째서 저 고블린 사이에 왜 푸른 점이 하나 껴 있는 것인가?

"이준 씨이!!!!!"

그리고 왜 점점 내 집으로 다가오는가?

"포탑 정지하라고요!!!! 5초만!!!!!!!!"

일단 저 강소현의 목소리는 강소현의 목소리가 맞다.

미니맵의 푸른 점과 그녀의 목소리의 거리감을 비교해 봤을 때, 저 푸른점이 강소현일 가능성도 높고.

위이이이이잉―

타다다닷-!

시체를 밟고 나의 집을 향해 올라오던 고블린 챔피언의 등 뒤에서 강소현이 뛰쳐나왔다.

덜컥-!

급한대로 잠시 포탑을 멈추자 그 틈에 강소현이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휴우... 무서워서 혼났네. 저게 대체 다 몇 마리래요?"

뭘까?

대체 저 많은 고블린 사이로 어떻게 왔을까?

가방의 옵션은 '좀비'로부터의 보호였을 텐데....

설마 몬스터도 포함이 된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녀가 몬스터에게 선공당하지 않는 특이한 스킬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준 씨! 정신 차려요!!! 포탑 키세요!!!"

#19. 튜토리얼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