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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별천지 이세계 (5)

"아이고~ 이준 씨, 오셨습니까."

구청 앞 공터에 요새가 도착하자, 너스레를 떨며 구청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듣던 것보다는 작군요."

그리고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수백은 되어 보이는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내 요새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하느라 그랬다기에는 분위기가 무거웠으니, 저들은 전부 세뇌당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아, 요새를 보고 다들 놀랐나 봅니다. 뭐 해! 무기 안 집어넣고!!"

스릉-

철그럭-

채앵-

사방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요새를 둘러싼 인파는 완전한 비무장이 되었다.

그리고....

『냐아!』

방금 구청장이 내게 무언가를 했다.

내가 감지할 수는 없었으나, 로라가 감지해준 덕분에 저놈의 술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허허, 로라가 참 건강합니다."

웃으며 로라의 칭잔을 하는 구청장.

"감사합니다. 어떻게 제 요새 좀 구경하시겠습니까? 안에 기가 막힌 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도 놈과 같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세뇌의 정확한 효과는 모르겠으나, 일단 당했을 때의 경험대로 그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였는데.

"...흐음."

구청장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르릉』

로라는 그런 구청장에게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지만.

처억-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손을 맞잡아줬다.

뭔가가 내게 들어오려다 막히는 것이 느껴진다.

강소현의 정화 마법과 로라의 신성 덕분에 구청장의 술수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뭣 같은 기분을 눌러 담는다.

"가시죠, 청장님."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청장을 보챘고.

"크흠, 기우였나 보군요."

청장은 대놓고 수상한 발언을 하면서 나를 따라 요새 위로 올라섰다.

내가 좆으로 보인다 이거지?

두고 보자고.

또각, 또각.

구청장과 그의 측근 경찰서장을 비롯한 6명이 나의 요새로 들어섰다.

"하하, 이준 씨가 대단하다 하신 게 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요새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구청장.

"문을 닫아야 돼서."

드르르륵―

쿠웅-!

이동식 요새의 대문이 닫혔다.

그리고....

퍼억-!

"끄아아아아악-!!!"

강소현의 모닝스타가 나와 청장 뒤편에 있던 경찰서장을 내리쳤다.

허리부터 다리까지가 으깨진 경찰서장.

서걱-

서걱-

투욱, 툭.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어진 칼질 두 번에 목이 떨어져 죽은 이름 모를 경찰관 둘.

"이, 이게 대체-!"

눈앞에서 구청장이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를 위해 준비한 대단한 것은 압도적인 폭력이다.

"제가 좆으로 보이십니까?"

그리고 나는 참아 왔던 말을 놈에게 내뱉었다.

퍼억-!

말을 마친 직후 인벤토리에서 철봉을 꺼내들고 놈의 다리를 후려쳤고.

으드드득-!

구청장이 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 그는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어, 어찌… 대체, 왜!!"

간만에 철봉을 휘두르니 진창에 박혔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또각, 또각.

바닥에 쓰러져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구청장.

퍼억-!

"끄아아아악-!!!"

대답 대신 팔을 부서줬다.

"이, 이, 이이 이준 씨, 마, 말로 합시다!!!"

다짜고짜 세뇌를 박고서는 대화를 요청한다라.

퍼억-!

"끄으으윽...."

내 대답은 몽둥이질이다.

질퍽.

"이준 씨, 제가 할까요?"

"아저씨, 나도 뭐 도와줄까요?"

그새 구청장을 따라온 나머지 인원들을 다 해치웠는지, 강소현과 이하린이 내 뒤로 다가와서는 동시에 물었다.

"이놈은 죽이면 안 됩니다. 심문이 필요해서."

아포칼립스.

세상은 멸망했고, 우리는 수많은 괴물을 죽였다.

괴물만큼은 아니어도 사람도 제법 죽였고.

이하린, 그녀는 처음부터 밖에서 지내던 사람이다.

어린 동생을 지키며 괴물과 싸웠고 막판에는 식인종들에게 쫓겨 다니며 살육전을 벌였다.

강소현은 직접 살인을 하진 않았다만, 초반부터 고자를 양성한 경력이 있다.

게다가 백색 마탑에서 고문이라는 이름의 수행을 받고 왔으니, 어떤 면에서 보면 강소현 그녀가 가장 스페셜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뭐, 내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식인종들 때문에 수백 단위로 사람을 죽여 댔으니.

어쨌든,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녹록치 않아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것도, 그중 우리 셋은 상당히 상위권에 속하지 않을까 싶고.

이제부터 내가 구청장에게 하려는 것은 상당히 큰 고통을 동반한 심문인데.

"그건 고문 아닐까요?"

뭐, 굳이 가장 맞는 표현을 고르자면 고문이 맞긴 한데....

이것에 있어서 일말의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구청장이 쓰레기 같은 놈인 것도 한 몫 하겠지마는 나 이준이 그만큼 이 세상에 적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효율적으로 고통을 주는 법을 좀 아는데···."

아무튼, 백색마탑에서 나름 전문적인 경험을 쌓고 온 강소현이 시범을 보이겠다고 나섰다.

"읍-! 으브브븝-! 으븝-!!!"

"쓰읍-!"

팔다리가 으깨지고, 몸통과 머리만이 남은 구청장.

그가 뭉뚱해진 팔다리를 휘저으며 괴성을 질러댔고, 강소현은 '쓰읍.' 단 한마디로 그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우선 백색마탑의 비전 회복 마법으로 몸 상태부터 돌려놓을게요."

으득, 으드드득.

강소현의 양손에 흰색 빛이 맺히고 그것이 구청장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득.

강소현이 구청장에게 회복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까드드득, 끼기긱-!

아니, 저게 회복이 맞긴 한가?

때리는 족족 비명을 질러대던 구청장.

그가 짧은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충혈된 눈으로 버둥거리고 있었으니까.

고통에 극에 달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놈을 보면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튀어나올 듯 커진 눈.

실핏줄이 터져 새빨개진 눈알.

마치 마약이라도 빤 것처럼 확장된 동공.

투욱-

그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기절한 것이다.

그리고-

"-어웨이크!"

강소현이 기절한 구청장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공용마법 '어웨이크'.

전장, 장기간의 전투 혹은 집중이 필요할 때 강제적으로 의식을 일깨우는 마법이다.

내가 저것을 아는 이유는 강소현에게 배워서이기도 하지만, 마탑 노인네들이 그녀에게 가장 많이 쓴 마법이기도 해서다.

앞으로 구청장은 어떤 고통을 겪든지 다시금 일어나게 될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나왔다.

몸은 회복되긴 했으니까, 비명이 나온 것이다.

"다시 부수죠."

그리고 회복된 구청장을 보며 내가 제안했다.

"아, 아저씨? 심문은요?"

심문?

각성한 직업도 모르고, 저놈의 레벨도 모르며, 구청장이 진짜 구청장인지조차 모른다.

이중에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놈이 '각성한 인류'에 속해 있다는 것과 '식인종'이 되었다는 것뿐.

"부술게요…?"

이하린의 말에 멈춰 있던 강소현이 나를 보며 묻는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콰직-!

"끄으으읍, 끄으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둘러지는 모닝스타.

"으, 언니 진짜 무섭네. 아저씨 저렇게 화풀이만 하고 죽일 건 아니죠?"

놈의 입을 열게 하려면 질문 따위로는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입이 무거운 놈일 수도 있고.

그러니.

스스로 뭔가를 술술 불 때까지는 저 짓을 반복할 생각이다.

* * *

"아저씨, 재갈은 풀려 줘야 말을 하죠."

10여 분간 반복된 작업에서, 이하린 덕분에 우리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은 재갈이 풀려야 말을 한다는 것.

"크흠, 이제부터 풀면 되지."

"아, 그렇네요."

피칠갑이된 강소현의 메이스.

부우웅-!

모닝스타가 바람을 가르고 구청장의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모닝스타의 끝에 달린 가시가 정확히 구청장의 재갈만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그 덕에 그의 입은 자유로워졌다.

"...주, 죽여!!!"

그리고 자유로운 발언을 허가받은 구청장이 대뜸 죽여 달라고 소리쳤다.

보아하니 아직 대화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퍼억-!

모닝스타가 휘둘러진다.

으드드드득-!

기절한 놈을 계속해서 마법으로 깨우고 부서진 전신의 뼈와 살을 재조합해 원상복구 시킨다.

퍼억-!

그리고 다시 모닝스타가 휘둘러진다.

"언니, 커피 드실래요?"

"어, 부탁할게!"

약 30분의 반복.

구경하기 지루했는지 이하린은 커피를 타러 갔고.

퍼억-!

강소현의 모닝스타는 계속 내리쳐졌다.

물론, 그사이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장진아와 연락하며 계획을 구체화하고, 아이들의 구조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 * *

1시간.

구청장이 굴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지, 진짜야!!!"

"일단, 몇 번 더 부셔보시죠."

강소현이 사실 확인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고, 이하린은 비밀 임무를 받고 구청으로 향했다.

퍼억-!

"흐음, 이준 씨 거짓말은 안 하는 것 같은데요? 검증 마법도 잘 통하고. 실제 심문한 결과도 똑같고요."

무언가 마법을 써서 검증을 마친 강소현이 내게 말했다. 그럴 거면 뭣 하러 팔다리는 부쉈나 싶었는데,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당장은 구청장이 내뱉은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정보1. 용산구청의 어르신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놈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구청장일행에게 '어린아이'를 요구했고 보호를 명분으로 안전구역의 아이들은 모두 용산구청 6층 이상에 모여 있다.

정보2. 사람들을 강제 노역시키는 곳에는 무슨 광산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광석들은 이곳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남는 것들은 '어르신'들이 가져간다고 했다.

어르신과의 게약상 광산 내부의 일은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정보3. 세뇌당한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인원이 전부다. 즉, 요새를 둘러싼 300여 명 정도가 한계치라는 것인데.

행동을 제약하는 수준의 세뇌가 300명인 거지, 실상 구청장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인원은 500 명 정도나 된다고 한다.

정보3. 구청장의 직업은 '세뇌술사'다.

강소현, 이하린처럼 무슨 연합이나 협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고 독립 클래스로 전직했다고 한다.

나와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되는데....

내 경우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이 각성의 근원이었으니, 저놈은 원래부터 '가스라이팅, 세뇌' 등에 관심이 많았던 놈일 가능성이 크다.

"풀어."

들은 것은 다 들었으니, 이제 무고한 피해자들을 해방해줄 시간이다.

주어도 없이 '풀어'라는 단 한마디의 말 뿐이었지만.

"허어어어어업-!!!!"

찰떡같이 알아들은 구청장이 뭉개진 두 손을 뒤흔들며 마력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이 틈에 놈이 수를 쓸 수도 있겠지마는 그런 걱정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워낙 철저하게 놈이 굴복시켜서도 있고.

"뭐, 뭐지?"

"저, 저건 또 뭐야. 분명 우리는 청장님께 좋은 말을 듣고 있었는데."

"빨리 광산에 가야 해!!"

세뇌가 풀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도 하니.

그를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큰일이네 오늘 할당 양을 다 못 채웠는데."

"김 씨, 같이 가!!!"

세뇌가 풀렸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만.

눈앞에 포탑과 미사일 포대가 달린 요새가 있는데도 광산 노역부터 신경 쓰다니.

뭐, 저들은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당장 광산으로 가준다니 내 입장에서는 방해물이 사라지는 격이라 나쁜 것도 아니니까.

"사, 살려줘-!!!"

"죽이시게요?"

들을 것도 다 듣고 세뇌도 다 풀었으니.

퍼억-!

털썩-

고개를 끄덕이며 철봉을 휘둘렀다.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와, 이준 씨도 진짜 뒤가 없네요. 그냥 죽여버리시는 걸 보면...."

뒤가 없긴 한데.

죽을만한 놈이니 죽인 거다.

세뇌, 강제노역, 어린 아이를 뭔지 모를 놈들한테 보내기까지 했으니.

소생 마법이 있다면, 되살려서 한 백 번쯤 더 죽여도 되지 않을까 싶다.

* * *

구청장을 죽이고 1시간.

요새에 청장이 온 지는 2시간.

슬슬 찾아나서는 사람이 생길쯤이라 불안감이 들던 찰나.

구우우우우웅-!!!

요새의 앞마당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백색.

순백의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야, 하린이 수완이 좋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이하린은 임무를 마쳤다.

구우우우우웅-!

마법진이 빛나면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니, 어린아이들이 나타났다.

구우웅-!

뒤이어 우리 옆에 작은 마법진이 빛나며 이하린이 나타났다.

"아, 아저씨, 나 잘했죠?"

강소현과 함께 가볍게 말하고 있었는데, 뒤이어 나타난 이하린의 몰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투욱-!

"언니 나 좀 고쳐줘요."

떨어진 팔, 피칠갑된 몸.

나와 강소현에게 한마디씩 내뱉고는 이하린은 기절해 버렸다.

까드득-

강소현이 붙잡은 메이스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녀는 화가 났을 것이다.

나처럼.

또각, 또각.

화가 난다고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이하린은 강소현이 봐주고 있으나, 100여 명의 어린아이들은 그대로 마당에 널브러져 있으니까.

딱히 어린아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망한 세계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멀쩡한 어른으로서의 도리는 다 할 생각이다.

툭, 투둑- 툭.

아이들 모두 의식은 없었다.

그래도 간헐적인 떨림을 보이고, 일부는 숨을 크게 쉬고 있으니 살아는 있는 것이다.

비록, 미라처럼 비쩍 말라 있다고는 해도....

"로라, 되겠어?"

『냐아…』

『냐, 냐냐냐냐!!』

검은색 솜방방이를 휘두르며 열심히 내게 설명하는 로라.

안타깝지만 저 상태를 로라의 신성으로 고칠 수는 없다고 한다.

내게 설명하는 로라의 모습은 아주 귀여웠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귀엽지가 않았다.

뭐, 로라의 의지를 쉽게 요약하자면.

부상이 아닌 생명력을 빨린 거라서 치료가 어렵다는 말이다.

생명력을 회복하려면 잘 먹고, 행복함을 느끼면서 잘 살아야 하는 방법뿐이 없다는데....

이 망한 세상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또각, 또각.

"하린이는 좀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한곳에 잘 모아둔 뒤, 강소현에게 다가가 이하린의 상태를 물었고.

"아저씨!"

내 뒤에서 은신을 풀며 이하린이 나타났다.

그세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누구한테 그렇게 당한 거지?"

회복된 이하린에게 대략적인 '어르신'이란 놈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휴유, 애들이 너무 말라서.... 금방 했어요."

그사이에 강소현이 아이들을 요새 건물 안쪽으로 안전하게 옮겨 두었다.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구할 사람도 다 구했고.

볼 것도 알아낼 것도 다 알았다.

「불법 점유 중인 세력을 몰아내고 적법한 안전지대의 주인임을 증명하세요.」

「영역을 선포하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

"영역 선포."

삐이이이이이이이―

#46. 별천지 이세계 (6)

삐이이이이이이이―

이명.

귀를 간지럽히는 기이한 소리가 울린다.

"미, 미친. 아저씨, 뭘 한 거예요?"

구청과 그 앞의 피난민들의 거주지.

그 아래로 붉은색 빛이 차오른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이내 안전지대 거대하고 붉은색의 장막이 쳐졌다.

영역 선포의 효과다.

「안전구역의 온당한 주인 이준(李俊) 님께서 영역 선포를 사용하였습니다.」

「현재 점유 세력이 있으므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30」

그리고 나타난 메시지.

"미친. 아저씨, 이런 능력도 있었어요?"

위업 보상의 숨겨진 조건은 안전지대에 진입하는 것이다.

위업보상이라는 대단한 이름에 비해, 그 효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만....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승리해서 쟁취하라는 것이니까.

"아... 대신 땅을 얻었을 때 효과가 다르지 않을까요?"

강소현의 말대로, 안전지대의 주인이 된다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다진 고기가 되어버린 구청장의 실토에 따르면, 그는 '임시 관리자'라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즉, 안전지대에는 아직 주인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다.

그리고 구청장이 죽었음에도 점유 세력이 남아 있는 걸 보아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전쟁이라니... 너무 뜬금없긴 한데, 뭐 피할 순 없겠죠?"

흐음.

미니맵에 붉은색 점이 생긴 걸로 보아,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만.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20」

"이준 씨, 무슨 세력을 결정하라는 메시지가 나왔는데요?"

"아저씨랑, 르-페르우니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데...."

르-페르우니옴.

어르신으로 불리는 자들의 이름이다.

본명에 한자까지 박아버리는 시스템 실명제에도 좋은 면이 있긴 한데....

"그게 뭡니까?"

르-페르우니옴으로 대체 뭘 알겠는가?

"저도 모르죠."

강소현도 모르고.

"제가 한 번 골라 볼까요?"

이하린도 모른다.

조금 미친 소리를 곁들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문어 인간이라면서, 그걸 골라보겠다고?"

이하린의 팔을 잘랐던 것은 인간의 탈을 쓴 문어라고 한다.

"아, 당연히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 미친놈들... 빨판으로 막… 어우."

문어 다리 같은 게 나와서 문어인 거지, 실상은 매우 추악했다고 하니.

아무튼 진영을 다 고르자, 강소현과 이하린이 있는 내 요새에 두 개의 초록색 점이 생겼다.

붉은색 점 = 적

초록색 점 = 같은 편

파란색 점 = 중립 혹은 간잽이

이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무리는 말고 확실히 각이 나오면 움직여."

"알겠어요. 아저씨가 무슨 아빠야 뭐야! 알아서 잘합니다!"

사전에 계획한 것들을 확인하고 간단한 잡담을 나누고 나니.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05」

어느새 전쟁 시작까지는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위이이이잉―

자동포탑을 포함해 모든 무기들의 정비를 마쳤고.

미사일 포대의 화면에 손을 얹었다.

"아, 저는 여기서 쏘면 되겠네요."

요새 축소화를 사용하면 고정 포탑의 조종대가 요새 내부의 조종실로 이동하기 때문에 강소현 또한 조종실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좀 비켜 봐요."

나는 투박한 1인용 콘크리트 의자에 강소현과 함께 앉아 있다.

아니, 낑겨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려나?

거참 불편하게.

"아저씨, 나는 먼저 가 있을게요."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01」

이하린이 떠나고 남은 시간은 1분이 되었다.

시작은 화려하게 구청을 무너트리면서 시작할 생각이다.

미니맵을 보아하니, 대부분의 파란색 점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진 광산 쪽에 모여 있다.

그리고, 바바리안들이 자리한 임시 선별 구역에는 초록색 점이 가득했고.

마지막으로 구청안은 숫제 붉은색 천지였다.

아니, 그냥 거대한 붉은점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폭격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걱정은 덜은 것 같다.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00」

남은 시간이 0이 됨과 동시에―

『키야오오-!!!!』

로라가 포효하며 금빛 물결을 요새 전체에 씌웠다.

띠딕-!

그리고 나는 있는 힘껏 화면에 미사일 탄착지를 지정했다.

* * *

"어르신, 구청장이 죽은 것 같습니다."

"쯧, 하필 그런 머저리가 여기를 먹어가지고는...."

반만 남은 용산구청의 10층.

그곳에 20여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다.

"피."

노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여깄습니다."

깡마른 남자 하나가 유리컵에 피를 가득 채워서 가지고 왔다.

컵에 들은 피는 자신의 피다.

허나, 그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은 위대한 르-페르우니옴의 심복이 될 사람이니까.

"흐음, 그대는 저것이 뭔지 아는가?"

피를 가지고 온 자에게 다른 노인이 질문한다.

"저, 저것은...."

얇은 다리 8개가 지탱하고 있는 이상한 요새.

여기저기 삐쭉삐쭉 총포와 미사일들이 튀어나와 있으며, 전방에 달린 카메라와 시체 소각로 때문에 약간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하우르의 움직이는 성입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아는 것 중 가장 유사한 것을 골라 대답했다.

백치가 되기 직전의 사내.

아는 것에 한해 대답을 잘 하고 있지만, 요새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저것은 어떤 무기냐고 물어보았다면 답을 얻었을 것을.

"...흐음. 움직이는 성이라."

르-페르우니옴.

그들은 아직 지구를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의 문명을 모른다.

"이 거대한 건물은 고작 행정건물이고 저리 작은 것은 성이라고 부르다니, 거참 기괴한 세상이구려."

그들이 살던 곳에서는 총알이나 미사일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전쟁 시작까지 남은 시간. 00:15」

"이게 뭐라고?"

노인이 물었고.

"시스템, 상태창, 설명창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피를 바친 남자가 대답했다.

"이걸 어찌 우리에게까지 적용했을꼬... 그것도 죽어버린 신이."

"껄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쪽에는 약해 빠진 놈들뿐이 없는데."

"신이란 작자들의 기적이 언제는 말이 된 적이 있었나?"

"흐음, 그런데 저놈들은 저런 조그만 성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하하, 본국에 있던 성(城)에 비교하니 그리 보이는 거지요. 우리야 좋은 일 아닙니까? 그래도 이걸 이기면 저희가 이 땅을 먹게 되는 것이니."

수많은 노인들이 피가든 잔을 들 채 승리를 전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퉅투르그-!""""

째앵-!

잔이 부딪히고, 그들의 입에는 미리 마시는 축배의 음료가 흘러 들어간다.

잔이 입으로 다가가자.

츄루르르르릅.

기괴한 소리를 내며 얼굴에 달린 모든 구멍에서 새까만 문어 다리 같은 것들이 튀어 나왔다.

쭈우우웁-!

튀어나온 다리들 중 하나가 잔에 들어가고, 잔에 가득 차 있던 피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크으, 이쪽 세계 놈들 피는 맛이 참 특이하단 말이야."

"좀 전에 어린 것들 구하겠다고 왔던 계집애 맛이 참 좋았는데, 한 입 하는 사이 스크롤로 도망가 버릴 줄은 몰랐네."

"껄껄, 살아 있으니 곧 보게 되겠지요. 저 조악한 성에 숨어 있을 테니까요."

노인의 말투.

노인의 외모.

허나, 그 본질은 다르다.

차원을 좀먹는 기생충, 르-페르우니옴.

그것이 저들을 부르는 말이니.

"이 세계는 얼마나 갈 것 같소?"

나약한 인간에게 나오는 맑은 피.

성체들의 생기 자체가 적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대체할 어린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생명체의 생기라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으니.

"흐음, 그 계집 수준이라 가정한다면 1년이고, 마탑 같은 것들이 있다면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네."

"동포들이 더 넘어오기에는 아직 제약이 많구려. 농장을 만들기도 어렵고."

멸망한 지구.

그곳은 기생충들에게 있어 콜로니를 세울 최적의 조건이었을 지니고 있다.

「전쟁까지 남은 시간. 00:05」

시간은 계속해서 줄고 있지만, 그들의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크으, 이 인간이란 놈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드워프, 엘프랑은 또 다른 맛이 있어."

한 세계의 종을 멸망시킨 것이 르-페리우니옴 일족이다.

「전쟁까지 남은 시간. 00:01」

그들은 숙주를 이용해 세계에 침투하고, 힘을 빼앗아 연명하는 기생충.

이미 기생충의 둥지가 생겼다.

그리고 힘도 제법 모아놨으니, 멸망한 세상에서 그들은 무력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전쟁까지 남은 시간. 00:00」

그리고 남은 시간이 0이 되었을 때.

"빨리 쓸어버리고 생기나 좀 빨아 먹자고."

그들은 여느 때처럼 세계를 집어 삼키려 들었다.

지구의 인간은 나약하다.

드워프처럼 강력한 무구도 없으며, 엘프와 같이 정령을 친구삼아 이능을 부리지도 않는다.

다른 세계의 인간들과는 달리 그 육체마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린아이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조악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촤르르르륵-!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촉수가 튀어 나왔다.

저것은 전투 직전에 보이는 행동으로 저 문어발을 보고 살아간 자들은 극히 드물다.

아직 흡수한 생기가 적어 본신의 힘을 되찾지는 못했어도 그들에게 있어 갓 마나 다루는 법을 배은 인류를 수탈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슬슬 준비 하―"

피슈우우우우웅-!!!

그런 그들에게 폭력이 찾아왔다.

콰아아아아앙-!!!!

카운트가 0이됩과 동시에 찾아온 12발의 미사일.

본래 지구를 좀먹기로 한 기생충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준의 요새에서 날아온 것들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콰르르르르르―

폭격.

10층짜리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끄으으... 다들 괜찮소?"

무너진 잔해 속에서 촉수를 비집고 일어나는 르-페르우니옴들.

촤라락-!

숙주의 팔다리가 뭉개지자 그들은 얼굴을 가르고 밖으로 나왔다.

커봤자 190cm인 인간.

그 허물을 벗고 나타난 것은 기괴한 문어 다리가 잔뜩 달린 괴물이었다.

"따닥, 따악- 뿌르르르르-!, 구강구조가 간단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다른 숙주를 구할 때까지 수어로 말할 뻔했―"

푸욱-!

푹, 서걱-

-띠딕.

"와, 이게 되네? 아저씨, 잡았어요."

이하린.

그녀가 은신한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직 다른 기생충들이 허물을 버리기도 전에 재빠르게 한 놈을 잡아챘고, 그 모든 다리를 잘라 버렸다.

찌지직-!

그러고는 아직 살아서 버둥거리는 기생충의 머리통을 들고 스크롤을 찢었다.

피슈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들려온 짧은 소리.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남아 있던 구청의 잔해는 가루가 되었다.

* * *

이하린이 납치해 온 이상한 생명체.

문어, 오징어, 낙지 등과 비슷한 다리가 잔뜩 달려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촉수가 가득한 구체 형태의 머리통이 있다.

"흐음, 연체동물에 속하고 분류는 두족강이 아닐까 싶은데...."

의사.

아니, 수의사긴 해도 요새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강소현이 놈의 생김새를 보고 한 말이다.

흠....

문어도 연체동물에 속하는 거니, 수의사의 전문 분야라고 봐야 되려나?

촤르르르륵-!

퍼억-!

"뗵! 어딜 움직여. 지금 길이 재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

그리고 강소현은 제법 신난 표정으로 문어 대가리의 여러 가지 것들은 조사하고 있었다.

또각, 또각.

"이놈 말도 한답니다."

번뜩-

"말을요?"

안 그래도 반짝이고 있던 강소현의 눈이 더 빛나기 시작했고.

부르르르-

처음으로 문어 괴물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구우웅-!

요새 안에 마법진이 떠오르고.

"와, 아저씨!! 대박, 이번 건 더 커요!!!"

이하린이 또 한 마리의 문어를 잡아왔다.

무너진 건물이 무슨 갯벌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잔해를 헤집더니....

촤륵-!

"나머지는 다 죽은 건가?"

"그런 것 같은데요...."

12발의 미사일 포대.

처음은 건물을 무너트렸다.

그 다음은 건물 잔해에 있던 붉은 점을 노렸다.

계속해서 살아남은 것들이 있어 단 두 개가 남을 때까지 무지성으로 미사일을 쏟아 부었다.

한 발에 5만 포인트.

미사일 12발을 쏘면 한 번에 60만 포인트가 든다.

그리고 그것을 수십 번은 반복해서 쐈으니, 1,000만 단위로 있던 내 포인트가 바닥을 보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이준(Lv.10) 32세 / 보유 포인트: 95,432,660p」

「클래스: 집사 / 집사력: 10」

「칭호: 최초의 각성자」

「각인: 불사자 각인(Lv.1)」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웬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포인트를 얻어 버렸다.

뭔가 설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마는....

뭐, 없으면 없는 대로 잡아온 두 마리를 가지고 실험을 해 보면 될 일이고.

『냐아!』

"그래?"

로라에 말에 따르면, 저놈들은 동물이 아니라 벌레라고 한다.

기생충.

그것이 저 문어 대가리의 정체였다.

또각, 또각.

"아, 이준 씨, 슬슬―"

"네?"

"저게, 벌레라고요?"

"그럴 리가요... 아, 로라가 그랬어요?"

"아니, 어찌 이런, 이게 기생충이라고요?"

"아이 씨."

새로운 동물의 발견.

학계도 뭣도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강소현은 이 사실을 굉장히 기뻐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뒤로는 그 기쁨만큼이 분노가 되어 버렸고.

"-이이이이익!!!!"

결국 그녀는 잔뜩 성이 났다.

"내가 벌레를 만지다니...."

또각, 또각.

기생충 조사를 담당하던 강소현과 대화를 끝낸 후 나는 요새의 조종실로 이동했다.

미니맵에 붉은 점은 사라졌으며, 멀찍이, 광산 주변에 있던 붉은 점들도 지금은 대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 바바리안이 조직한 반란군에 제대로 제 일을 처리해준 덕분이겠지.

초록색 점.

즉, 나 이준의 편이 될 것을 선택한 자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마중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쿠우웅-!

쿠우웅-!

요새를 움직여 구청 잔해를 짓밟고 이동했다.

"아, 이준 씨!"

장진아와 그녀의 부족민들 셋.

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수백의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서, 성?"

"와... 저거 총이야?"

"나 그 눈알이랑 저거랑 싸우는 거 봤잖아."

저마다 내 요새를 본 감탄을 내뱉으면서.

"이제 밖은 정리는 다 끝난 것 같은데요?"

요새 앞에 다가온 장진아가 말했고.

"지금 모인 사람들을 동원해서 파란색 점들까지 싹 다 모아와 주시죠."

나는 다음 지령을 내렸다.

아직, 식인종 색출 작업을 하지 않았거든.

죽어버린 붉은 점들을 제하면, 대략 2,000명의 인원이 이 구청에 남아 있다.

100% 확신하건대 저들 중 일부는 식인종을 고르지 않았을까 싶다.

#47. 별천지 이세계 (7)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몬스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다.

외견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으며 마법으로 이것을 구분하기도 매우 어렵다.

"아무리 백탑 마법이 위대하다 해도, 2천 명은 좀...."

엄밀히 말하자면, 검증 마법으로 가능하긴 하다만 이것을 진행할 인력이 모자라다.

대신, 우리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치지이이이익-

불판에 고기가 구워지고 있다.

"아저씨, 진짜 이걸로 확인이 가능하다고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만든 식인종 구분법은 바로 고블린 고기 먹이기다.

일단, 우리 셋은 전부 카드 선택에서 '몬스터 고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간 먹었던 사람들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고블린 고기의 맛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우엑... 진짜 고통만큼이나 끔찍한 것 같네요."

강소현의 감상이다.

"우웩, 와, 진짜 맛이 씹...."

이건 이하린의 감상이고.

"이준 씨도 먹어 보셔야죠?"

"크흠. 크흐읍… 끄읍."

체면 때문에 토악질을 하진 않았다만, 그 맛을 표현하지면 가히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워도, 소금으로 간을 쳐도, 뭘 찍어 먹어도 끔찍한 맛이 변하지는 않네요."

우리가 시식한 고블린 고기는 총 3종류.

구은 고기, 기름에 튀긴 고기, 각종 간을 곁들인 고기인데.

하나같이 끔찍한 맛을 선사해줬다.

"이거면 절대 표정 연기로는 못 속일 걸요?"

라는 걸 보니 식인종 구별법으로도 제법 쓸만할 것 같고.

그놈들은 고블린 고기를 먹어도 일반 고기처럼 느낀다니까.

* * *

"1번!!"

요새의 포탑 앞에 일렬로 선 사람들이 모여 있다.

치이이익-!

"우에에엑-!!! 이게 무슨 고깁니까?"

1번 참가자가 토악질을 하며 발끈했다.

위이이이잉―

것도 포탑의 총구가 머리를 조준하고 있음에도.

"통과!"

호흡, 맥박, 동공의 움직임을 확인한 강소현이 합격 싸인을 내주었다.

나는 조종실 스크린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 포탑을 이용해 질서 정련하게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다.

조금 비인간적인 방법일 수도 있지만, 각성한 인류를 상대로 이 정도쯤은 해줘야지 우리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2번!"

"우에에엑-! 미친. 씨이발. 뭘 먹인 겁니까?"

"통과!"

"57번!"

"...."

털썩-

"통과."

당연한 소리지만 기절도 통과다.

진짜 기절해도 말이 될 정도로 고블린 고기는 역겨웠으니까.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선별 속도도 빨라졌고 어느새 번호는 500번대에 접어들었다.

이쯤이면, 식인종이 없는 게 아닐까 싶었던 차에―

"소, 소고깁니까? 이 귀한 걸...."

식인종을 발견했다.

사람 고기를 처먹는 놈들에게는 고블린 살점이 소고기 맛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맛이 어때요?"

"꼬, 꽃등심 맛입니다."

것도 제법 맛있는 부위로.

"이쪽으로 오시죠."

강소현 옆에 서있던 장진아가 정돈된 자세로 그를 두 번째 고정 포탑 앞으로 데려갔다.

투탓-!

짧은 총성.

털썩-

그리고 주검이 되어버린 식인종.

당연한 말이지만 처형 자체는 내가 도맡아 하고 있다.

다들 강해졌다고 해도 사실상 처형에 준하는 살인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포탑, 총이라는 비교적 죄책감을 덜 주는 수단이 있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512번."

"... 무, 무슨 일이죠?"

치지지직-!

"아, 요새 정비하는 소리입니다."

강소현이 시치미를 떼며 512번에게 구운 고블린 고기를 먹였다.

그리고.

"끄아앗-! 맛이 정말. 이상합니다."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를 선보이는 512번.

식인종들도 뇌가 있어서 그런지, 지금의 이 줄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럼 이걸 드셔보시죠."

"흐음, 이건 괜찮은데요?"

둘 다 고블린 고기다.

"허업-!!"

답이 나오자마자 곧장 강소현이 입을 틀어막고 그를 파티션 너머로 끌고 갔다.

투타탓-!

"저게 뭐 하는 소리래?"

"요새 정비하는 소리라는데, 사실 김씨 말로는 식인종을 색출하는 것 같다네."

"식인종?"

당연히 줄을 서 있는 자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각성까지 했으니 요새 근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들도 제법 있을 것이고.

허나, 대열을 이탈하거나 난장을 부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 자동 포탑들이 대열을 조준하고 있는데다가, 구청을 무너트리는 포격을 목격했기 때문도 있지만.

"에휴, 개 같은 구청장. 우리가 그딴 놈한테 속아서...."

시간이 지나면서 세뇌가 풀려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 저희 딸이 진짜 저곳에 있는 것 맞죠?"

"따님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상태가 좀 안 좋긴 하지만...."

물론, 아이들을 구해준 것도 한몫 했다.

800번.

1000번.

1500번.

2000번.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2313번."

"우읍.... 후우."

"이준 씨, 이 사람 애매한데요?"

각기 다른 것으로 위장한 세 종류의 고블린 고기를 먹고서도 판단하기 애매한 사람이 나타나버렸다.

"아니, 무슨 마법도 안 통해요."

검증 마법까지 소용없다니.

또각, 또각.

지금까지 나타난 식인종은 117명.

마지막 한 명이기도 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직접 그의 모습을 보러 갔다.

드르르륵―

대문이 열리자 요새의 입구에 쳐진 칸막이가 눈에 들어온다.

"으읍... 후우."

그리고 칸막이 너머로 나타난 것은 거대한 남자다.

일단 키가 나보다 크다.

그리고 근육이 그냥, 무슨 바윗덩어리처럼 크고 단단해 보였다.

나도 한 몸 하는데, 내 몸은 따위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근육이었다.

불끈, 불끈.

"우읍!"

그가 고블린 고기를 먹을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하,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하려는 겁니까?"

"와… 진짜 어렵네요."

"뭐가요?"

흠, 척 보고 알아챘다.

지금 강소현이 어려워하는 것은 저 남자가 고블린 고기를 먹고 보인 반응을 구분하는 것이다.

저 '우읍'이 역함을 참고 멀쩡한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역겨운 척을 하는 것인지가.

또각, 또각.

"진짜 아무리 해도 마법이 안 통해요."

"뭐하자는 겁니까?"

강소현이 빛을 머금은 손으로 거구의 사내를 툭툭 건들고 있고, 그 남자가 강소현을 멀뚱멀뚱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확인해보죠."

"그쪽이 여기 대장입니까?"

내가 다가가자 거대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악- 박.

한 손으로는 짧은 스포츠 머리를 문지르면서.

"그렇습니다만."

앞에서 보니 키가 진짜 크다.

2m20cm는 되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솔직히 말해 주시죠. 제가 먹은 게 대체 뭡니까?"

블라인드 채용, 블라인드 면접 등등 현대 문물 중에는 참고할만한 것들이 제법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고블린 시식회도 고기의 정체를 숨긴 채 진행했다.

"고블린 고기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고기의 정체를 알려 줬다.

"하아, 어쩐지 맛이 이상하더라니...."

"아니… 이걸 왜 먹였습니까?"

"아, 식인종 색출 작업이면 납득할 만합니다."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이자 그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여전히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쪽은 어느 쪽이신지?"

"당연히 몬스터 고기를 골랐습니다."

약간 성난 표정으로 그가 내 질문에 답했다.

화가 난 모습을 보자니, 사람이라기엔 오우거가 떠오르는 분위기였다만.

"이준입니다. 나이는 서른둘이고요."

뭐, 일단 식인종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좀 더 확실하게 하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민태준입니다. 서른하나입니다."

통성명을 진행하고 잡담을 좀 나눠 보니 그는 제법 호쾌한 사람이었다.

"아, 약해 보이기 싫어서 참았죠."

"기분요? 아니요, 뭐 그런 사정이 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블린 고기를 먹고 보인 애매한 반응은 '약해 보이기 싫어서' 역함을 참은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선별작업을 이해까지 해준다 했으니.

"아, 경리단길이 제 거주지였죠. 거기 진짜 마경입니다. 미친놈들이 막 길에...."

용산구청으로 오기 전까지는 식인종들과 싸우며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도 식인종들이랑 싸움이 붙은 적이 있어서. 형님 뜻 백 번 이해합니다."

자기 집을 빼앗길 순 없다며, 놈들과 단독으로 전투를 벌였으며.

"제가 숨겨주던 애들 데리고 일로 온 겁니다."

어린아이들 여섯 명을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아, 제가 확인했어요."

이하린과 강소현을 통해 실제 아이들의 증언까지 확보했으니, 그는 식인종이 아니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통과."

* * *

식인종 착출 작업을 마친 후 우리는 구청 폐허를 확인했다.

"와...."

6층 이상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잔해들의 표면에는 새까만 석유빛깔의 덩쿨들이 가들 뒤덮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지원자 모집합니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요새를 높이고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형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쪽 분들은 여기서 알게 된 지인들입니다."

라며 민태준이 장정 열댓 명을 데리고 왔다.

나와 주시자의 눈이 전투를 벌이던 사이 먼저 구청으로 향했다던 민태준.

고작 이틀 먼저 왔을 뿐인데 지인을 열댓 명이나 만든 것을 보면, 그가 제법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르르르륵―

장정 열댓 명이 건물 잔해에 붙은 검은색 덩쿨을 뜯어 요새의 소각로로 옮기고 있다.

"휴유, 시체들을 어쩌죠?"

「추출중... 22%」

그리고 뭔지 모를 덩쿨 때문에 추출기 %가 차오르고 있었다.

"덩쿨, 그다음에 문어 시체 같은 것들 위주로 먼저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나중에."

각성자 십여 명에게 10층 건물의 잔해를 헤집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치지직

-이준 씨, 여기 싸움 났는데. 좀 와보셔야할 것 같네요.

추출기 선별작업의 우선순위를 정해주고 우리는 분쟁이 벌어졌다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안쪽은 또르지오 아파트 주민들이 쓰겠다니까요!!!"

아이와 노인을 중심에 두고 안전구역의 자리를 재배정해줬는데, 구청에서 생활하던 아파트 주민들은 이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또각, 또각.

"...아, 오셨어요?"

할머니와 아이를 핍박하던 아주머니가 당황한 채 나를 바라본다.

"꼬우면 나가시죠."

그리고 나는 저런 불순분자들까지 이곳에 머무르게 둘 생각이 없다.

살아남아 요새에 감금된 두 마리의 기생충 때문에 아직 전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 땅의 주인임을 알고 있을 터.

"나가."

나는 말로 타이를 생각 따위는 없다.

애초에 이곳의 규칙을 빡빡하게 만들 생각도 없고.

허나, 저런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자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은 없다.

"어, 어떻게!!!"

"내가 누군 줄 알아! 세상만 돌아오면, 너 따위는!"

축객령에 반발하는 아줌마와 아저씨.

누구긴 누구야 기생충들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 놈들이지.

파란색 점으로 보이긴 해도 저들에게 딱히 호감이 가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구청 건물에 살던 거주민들 중 반수는 맨정신으로 청장과 기생충 괴물에게 협력했다고 하니까.

"장진아 씨, 저들 다 쫓아내시죠."

「이준(李俊) 524 vs 르-페르우니옴 2 / 중립: 1,527」

아직 생포한 두 마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역의 주인이 되지는 못했다.

나는 구청장이 했던 것처럼 시스템을 이용한 추방은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추방 자체는 쉬웠다.

포탑으로 위협할 것도 없이, 바바리안 부족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가는 선에서 끝났으니까.

"...야, 야만족들."

뭐라 구시렁거리긴 해도, 저들이 전쟁에서 제법 활약을 하긴 한 모양이다.

장진아가 모은 반란군 500여 명을 필두로 제법 따르는 자들도 많아 보이니까.

아무튼, 뭐시기 아파트 주민들은 다 같이 사이좋게 안전구역 밖으로 쫓겨났다.

대충 봐도 같은 아파트 주민들끼리 동조했던 게 보여서, 그냥 이참에 다 같이 쫓아냈다.

남은 두 놈을 죽이면 나는 이 안전구역의 주인이 된다.

허나, 나는 성자가 될 생각도 없고 민주적인 지도자가 될 생각도 없다.

멸망한 세상에서는 강한 무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리더가 될 수 있으니까.

물론, 나는 여기 처박혀 살 생각이 없다만.

* * *

상황정리.

이렇게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식인종 색출 및 사살.

불순분자 추방.

안전구역의 자리 배치.

마지막이 가장 고민이었는데,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천막에 판잣집 짓고 사는 삶인데, 자리 따위는 제비뽑기로 바꿔주면 그만.

아무튼 이런 귀찮은 일들을 다 처리한 뒤 우리는 다 같이 강제노역이 이뤄지던 장소에 도착했다.

"아저씨, 이 천막도 다 떼버리지 왜 그냥 두셨대요?"

그야.

이 안에 뭐가 있는 지 아직 모르니까.

노역하던 사람들 말로는 저기서 나오고 나서 기억이 싹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혹시 모르니까 공격부터 해볼까요?"

흠.

점점 미쳐가는 게 느껴진다.

멸망이란 것은 제법 끔찍한 일이다.

지적이고 할 말 잘하던 로라의 주치의가 어느새 무지성 전투광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뭐, 지금에 세상에서는 그게 더 좋은 건가?

"입구만 좀 무너트리죠."

콰아아앙-!!!

고정 포탑의 소형 미사일.

하다못해 미사일 포대에서 나가는 유도 미사일도 있건만.

쿠르르르르―

지하로 향하는 동굴 위로 세워진 광산 입구.

그것을 무너트린 것은 강소현의 모닝스타였다.

"와... 미친, 저게 뭐래요?"

그러게 말이다.

입구가 무너짐과 동시에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났고―

끼루우우욱-!!!

끼로로록-

끼로로로록-

그 안에는 진짜 이세계가 들어 있었다.

#48. 테라포밍(Terraforming) (1)

끼로로록-

끼로로로록

테라포밍(Terraforming).

지구화(地球化) 혹은 행성 개조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인데....

저 단어는 본래 '지구' 입장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허나,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역으로 이세계에서 지구를 테라포밍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다.

지구는 멸망한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로부터 테라포밍당하고 있었다.

"지구가 테라포밍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생각을 그들에게 전했는데, 타이밍 좋게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세계(世界)의 변화를 목도하였습니다.」

"아저씨, 언니 이거 보여요?"

"세계의 변화라니.... 이준 씨 말처럼 지구가 진짜 테라포밍당하는 것 같은데요?"

분명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온 사람들이 있었건만, 어째서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만 나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거 광산이죠?"

"언니, 숲 같은데요?"

허나, 우리 앞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 탓에 그런 의문 따위는 머릿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숲 같은 광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숲이라기엔 위치가 지하 동굴이었으며, 동굴이라기에는 녹색이 무성한 그런 곳.

그리고 벽면에는 빽빽하게 푸른빛 빛을 뿜는 결정들이 붙어 있었다.

"나무?"

동굴 벽에는 결정이 그리고 안쪽에는 이상한 붉은 점이 가득한 나무들이.

끼루루루룩-!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상한 생명체까지.

툭-!

동굴 안으로 조금 들어가서 벽을 두드리자 푸른빛의 반투명한 결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게 아마 그 광물 같군요."

세뇌로 광산 노역을 하던 사람들이 캐던 광물의 실체를 보았지만.

"뭐에 쓰는 걸까?"

"글쎄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모른다."

우리 모두 저 광물의 사용처는 알지 못했다.

"대신 알려줄 놈들은 있습니다만."

우리 요새에 감금되어 있는 문어 기생충 두 마리는 그 해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저씨, 그놈들 제가 잡아온 거 알죠?"

납치가 취미가 되어버린 이하린과.

"심문은 제게 맡겨 주세요."

고문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겨버린 강소현.

저들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은 다 고양이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고로로롱~ 고로롱』

나는 24시간 정신안정제 로라와 붙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

끼로로로록-

끼로로로록-

번뜩!

물론 이렇게 귀찮아질 때도 있다만.

『키야오오-!!!』

로라의 놀이 스위치가 켜져 버렸다.

이 경우에는 사람과의 놀이가 그 대상이 아니니 '사냥 스위치'라 부르는 게 더 맞겠지.

타다다다닷-!!

어깨에서 뛰쳐 내려가 이상한 것을 쫓아 동굴 아래로 내려가는 로라.

끼루루우우욱-!!

로라가 쫓는 것은 나비라기에는 나방만큼 통통하게 생겼으며 나방이라기에는 새처럼 크고 새라기에는 복실복실한 털이 가득한 징그럽게 생긴 벌레다.

"쓰읍-! 로라!!!"

이미 멀찍이 떨어져 버린 로라를 육성으로나마 저지해보려 했지만―

『키야오!』

타앗-!

이미 늦어 버렸다.

저 뭔지 모를 생명체는 이미 로라에게 낚아 채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바바바바바박-!!!

그리고 로라는 그것을 입으로 문 채 앞발로 고정시켰고, 옆으로 누워서 고정된 이세계 생물에게 뒷발차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

벌레.

저것의 외형을 묘사하자면, 나비와 나방 사이 어딘가에 있는 붉은색의 30cm 남짓한 크기의 벌레다.

30cm라는 뜻은 로라보다 조금 크다는 말이고.

그 말은 로라는 자기보다 큰 벌레를 사냥할 정도로 강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파바바바바박-!

『캬오-!!』

그리고 고양이의 뒷발 팡팡은 진짜 '사냥감의 기절'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간 '귀여워 보이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실제 사냥 모습을 보니 그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다.

콰득-

"로라!!! 아, 안돼!!!"

젠장.

저걸 먹어 버릴 줄이야.

심지어 기절시킨 사냥감을 뜯어 먹기까지 했으니.

저것을 사냥꾼 아니면 뭐라 표현해야겠는가?

콰득.

『찹-찹-찹-찹-』

"...."

사료도 아니건만.

이상한 벌레를 뜯어 먹는 내 귀여운 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얼어 버렸다.

아니, 당황했다고 해야 되려나?

나 이준이 이렇게까지 당황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마는 로라의 집사로서 이 일을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

"강소현 씨."

"...아, 네?"

강소현도 저 모습을 보고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로라는 예방접종도 못 했고, 구충약 같은 것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강소현한테 수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때가 왔다는 의미다.

"아, 네. 맞다. 나 수의사였지."

그리고 강소현은 잊고 있던 자신의 직업을 떠올렸다.

우다다다다-!

『키야오!』

신나게 사냥을 마치고 내게 달려오는 로라.

그리고 로라의 입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벌레가 물려 있었다.

『냐아~!!』

위풍당당.

자신만만한 자세로 내게 다가와 벌레를 내 발치에 내러놓았다.

"...와 로라가 이준 씨를 정말 사랑하나 보네요."

내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광경이지만, 전문가의 의견은 달랐다.

"고양이가 사냥감을 물어다 주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 중―"

고양이는 집사를 엄청 큰 고양이 정도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양이 머릿속에서 집사라는 존재는 친구, 우호적인 동료 혹은 엄마나 형제 정도로 구분이 된다.

"개랑은 완전 다르죠. 고양이는 사람한테 하는 것과 같은 고양이한테 하는 행동이 똑같아요."

고양이에게 개처럼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없는 이유라고 한다.

"아무튼 이준 씨한테 사냥감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아마도 이준 씨를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똑똑한 로라가 내게 저것을 먹으라고 줬을 리는 없고, 반죽음 상태의 것을 가져와서 내게 사냥을 가르치려 들 리도 없다.

그러니 저것은 온전히 내게 자신의 성장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러니.

"잘했어!"

로라를 쓰다듬으며 잔뜩 칭찬해주었다.

『냐아~!』

저리 귀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로라에게 어찌 벌레를 잡아오지 말라 혼내겠는가?

『고로로롱~ 고로롱』

신나게 사냥 놀이, 아니, 진짜 사냥을 마치고 내 어깨에 올라타 골골송을 부르며 잠이든 로라.

고개를 돌리니 둥글게 만 몸이 보인다.

그리고 작고 귀여운 검은색 털복숭이 얼굴이 내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강소현 씨, 구충제 만들 줄 아십니까?"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살면 되는 법.

벌레를 먹은 것에 대한 대비책은 사람들끼리 논의하면 될 일이다.

"...몰라요."

"강소현 씨 회복 스킬이 있으니, 상관은 없겠군요."

마법으로 하는 회복은 로라에게도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저 벌레들 좀 박멸합시다."

로라가 깨어나기 전에 이 동굴을 청소하기로 했다.

* * *

"이준 씨, 이거 아이템이라는데요?"

그렇게 벌레들을 박멸하던 중, 강소현이 이상한 것을 들고 왔다.

"...나방 날개가 아이템이다 이 말입니까?"

나방, 좋게 봐도 나비의 날개다.

"다른 건 아닌데, 이것만 아이템처럼 메시지가 뜨네요. 한번 집어 보세요."

「요정의 잔재」

「먼 옛날 숲을 수호하던 요정종의 잔재.」

강소현에게 나방 날개를 건네받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상한 가루가 잔뜩 떨어지는 저 날개의 정체가 요정의 잔재란다.

"...어디다 쓰는 걸까요?"

세상이 망하고, 우리는 다양한 의문을 서로에게 물어 왔다.

그리고―

"모릅니다만."

"언니, 나도 모르겠어요."

대부분의 의문들은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요정의 날개라는 걸 보면, 로라 구충약 걱정은 덜어도 되지 않을까요?"

'잔재'라는 것이 신경 쓰이긴 한다만, 강소현 말대로 걱정이 조금 줄어든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야 따지고 보면 요정을 먹은 거니까.

요정은 더럽고 위험한 이미지는 아니기에 마음을 조금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퍼억-!

계속해서 생겨나는 궁금증들을 묻어두고 남은 벌레들도 박멸했고, 동굴 중앙의 나무숲 사이로 은신을 쓴 이하린을 보냈다.

"이 광석부터 캐보죠."

이하린을 기다리는 사이 나랑 강소현은 벽에 붙은 광물들을 캐보았다.

콰직-!!

"-끄읍! 이준 씨, 이거 무거운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닝스타를 내리친 강소현이 광석을 들어 올리며 말했고.

"무거워 봤자- 흡, 제법 무겁군요."

나 역시도 보기와 달리 무거운 광석을 보고 놀라 버렸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무려 톤 단위의 건물 잔해를 손쉽게 옮기게 된 아포칼립스의 진화한 인류다.

"끄으읍-!"

그런 진화한 신체를 가지고도 이 무게감이라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마력이 느껴지네요."

라는 강소현의 발언으로 보아 이 돌은 '마력이 담긴' 돌멩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마력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마력이란 것 때문에 무거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력석. 그런 이름일 것만 같군요."

어딘가의 판타지 게임에서 봤던 마법적인 광석의 이름이 떠올라서 말했을 뿐인데―

「마력석(魔力石)이 세계에 기록되었습니다.」

세계가 이것을 받아들였다.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내가 지은 건 아니다만.

"뭐, 검증도 못하는 데 그게 상관있나요? 어디 저작권 같은 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나방 이름은 강소현 씨가 지어 보시죠."

아무튼, 시스템이 이름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 우리가 제정신으로 이세계 풍경을 본 첫 번째 인류임은 분명한 사실이니.

뭐, 안전구역의 주인이 정해진 뒤여서 그런걸수도 있고.

"흐음, 끼루루는 어떨까요? 울음 소리가 비슷해서 지어봤는데."

그리고 강소현은 작명에 정말 재능이 없었다.

"끼루루가 뭡니까...."

물론, 바꿀 수는 없었다만.

「개체명 끼루루가 세계에 기록되었습니다.」

스으윽-

"아저씨, 나무 이름은 제가 지을게요."

어느샌가 숲속 정찰을 마치고 온 이하린이 등 뒤에서 나타났고 그녀 역시도 이름을 하나 지었다.

「붉은 얼룩무늬 반점 동굴 나무가 세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하린 역시도 작명에는 센스가 없었다.

"왜요?"

"이름이 너무 길다. 서식지와 외형의 특징을 따서 잘 짓긴 했다만, 저렇게 길면 부를 때 너무 힘들지 않겠어?"

"...아, 그렇네요. 다음에는 아저씨 조언 생각해서 지어볼 게요."

"그래서 저 안은 어떻지?"

동굴 중앙에 펼쳐진 이세계 숲.

그곳에 다녀온 이하린의 감상은 단순했다.

"별거 없던데요."

붉은 반점이 가득하고 이파리가 사람 머리통만한 나무들로 이뤄진 숲.

그 안에는 별다른 게 없었고, 그냥 끝까지 나무만 있었다고 한다.

"아, 근데 이상한 비석이 하나 있어요."

그러면 별게 없는 게 아닌 건데....

또각, 또각.

이하린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숲의 중앙.

그곳에는 15cm 남짓한 작은 크기의 비석이 있었고 비석에는 알아먹지 못할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흐음, 요정력 132684년―"

그리고 강소현이 곧장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만.

13만 2684년.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요정이란 놈들은 무려 13만 년 넘게 문명을 유지해왔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니.

"와, 진짜 재미없네요."

비석의 내용은 재미는 없었지만, 유익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1. 요정의 문명은 13만 년을 유지하고도 숲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2. 숲은 요정의 힘이자 근원이다.

3. 그리고 요정은 기생충 문어에 의해서 멸망했으며, 그 전조로 지구와 비슷한 재앙이 일어났다.

4. 안타깝께도 요정들은 각성도 못했고, 무력이 약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멸망해버렸다고 한다.

5. 대신 요정족의 왕이 멸망 직전에 자신들을 벌레로 만들어서 가능성을 남겨놨다는데.

끼루루루룩-!!

분명 다 죽였건만, 어느새 나무에서 나타난 나방 끼루루.

"이게... 가능성이라고?"

끼루루루룩-

끼루루루룩-

끝없이 나타나는 벌레들을 보고 의문이 든다.

나타나는 수만 보면 화장실의 나방파리들이 떠오르는데....

저게 어딜 봐서 요정인지.

게다가 수도 배로 늘어난 느낌이다.

"더 잡을까요?"

"저것이 요정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냥 내버려 둡시다. 괜히 더 건들였다가 계속 배로 늘어나면 골치 아파집니다."

"쯔읍...."

아쉬운 듯 메이스를 집어넣는 강소현을 뒤로한 채 일행들 데리고 동굴 밖으로 향했다.

"아저씨, 뭐 하려고요?"

"심문."

「보호조치 해제까지 61:23」

당초 3일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는데, 이곳의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했기 때문에 시간을 초과해버렸다.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쓰고 2일 전에는 고블린 왕국이 들어 있는 포탈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젧밟긃맍핽-!!! 꾸르그드, 뿌르르르르―"

요새로 돌아가서 문어 기생충의 심문을 시작했다.

퍼억-!

로라의 금빛 장막에 갇혀 있던 문어 괴물이 강소현의 모닝스타에 다져지고 있다.

"와... 진짜 역겹다."

이하린의 감상이다.

"그렇군."

이건 내 감상이고.

문어와 비슷하게 생긴 기생충이 부서지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역했다.

『키야오-!!』

냄새도 그렇고.

고블린 시체 썩는 냄새에도 그냥 지내던 로라가 신성으로 방벽을 쳤을 정도니까.

퍼억-!

"휴우, 힐."

그리고 다져진 놈을 회복시키는 강소현.

"끼르르르가럆뺪, 뿌르르르르."

허나, 회복되기는커녕 놈은 고통스러운지 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뿌르르르르- 그르부르그- 아, 아."

"제, 제발 그만!!!"

"뭘 묻기라도 해!!! 제, 제발 백마법은 그만-!!"

놈이 주둥이가 이상하게 변하더니 사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세계에서 온 말하는 벌레답게 놈의 비명 속에서도 제법 실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백색 마탑'의 마법은 놈들에게 쥐약이다.

씨익.

강소현이 미소를 짓는다.

마치 벌레를 괴롭히는 어린아이마냥 순진한 미소다.

누구보다 맑고 밝은 미소였지만, 그녀의 앞에는 검은색의 꾸덕한 피를 쏟아내는 문어 같은 기생충이 놓여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망가지려 그러는지....

"힐-"

"뿌르르르륽긁쁇쁍-!!!!"

또각, 또각.

"강소현 씨, 그만. 그러다 죽겠습니다."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있지만, 아무것도 듣지 않고 죽이기에는 아까웠다.

"부르르르륵- 브르르, 부륵. 하, 아, 자, 바, 사, 사, 살려주십시오."

"이 돌이 뭐지?"

대답은 빨랐고, 그 내용도 제법 흥미로웠다.

마력석이란.

지구의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등의 것들과 같이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돌이다.

지구의 것들에 비해 그 성능은 월등하게 높았다.

우선, 환경오염이 없는 에너지원이라는 점이 놀라운 부분이었다.

뭐, 이미 망해버린 세상에서 환경오염이 중요하겠냐 싶겠지마는 앞으로 문명이 재건되고 나서를 떠올린다면, 매우 훌륭한 자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만....

"보, 본국에 있는 동포들을 불러오려고."

그리고 기생충의 목적도 들을 수 있었다.

르-뭐시기라는 저 기생충들은 본국이 있는 행성에 숨어있다가 먹잇감이 될 만할 세계를 발견하면, 막대한 마력을 지불해 차원을 넘어온다.

"지구가… 뭐?"

"이, 이, 이대로 가면 소멸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소멸할 예정이라고 한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아, 앞으로 200년 정도면 이 행성은 부서지게 됩니다."

#49. 테라포밍(Terraforming) (2)

"...200년?"

"에이, 원래였어도 200년이면 멸망하고도 남았지."

"그러게요. 뭐 저딴 걸 정보라고 내뱉지?"

그리고 이것은 그 말을 들은 우리의 감상이다.

지구.

우리의 마더 네이쳐이자 삶의 터전인 지구가 멸망 전에 어땠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감상이 저런 것도 당연한 것이다.

저 하늘을 수놓은 와이번보다 많은 양의 미세먼지.

핵폐기물부터 온갖 쓰레기들이 버려지고 있는 바다.

하루하루 높아지는 온도와 늘어가는 벌레들.

자본주의적인 문제까지 곁들이자면 끝도 없겠지만, 대충 환경만 따져도 지구는 망할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뭐, 멸망 직전의 여름, 탑차 안에 있던 계란이 익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지구는 50년은 고사하고 30년 만에도 멸망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다른 건 더 없어?"

200년 뒤 멸망이라는 같잖은 정보에 화가 난 강소현이 모닝스타를 꺼내 들고 다가갔고.

"뿌르르르르륵- 그륵쁅."

조건 반사라도 되는 양, 놈은 얻어맞기 전부터 비명을 내질렀다.

이세계의 존재답게 박살나는 족족 몸을 금방 회복했지만, 고통만큼은 그대로 전해지는 모양이다.

"부르르르- 쀼르륵, 가, 아, 나, 자, 다, 다른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놈이 내뱉은 것은 르-페르우니옴에 대한 정보.

즉, 문어 기생충이 자신의 동족을 팔시 시작한 것이다.

쿠궁-! 쿵-!

죽은 듯이 이 상황을 보고만 있던 다른 한 마리의 기생충.

쿠웅-!

로라의 금빛 장막에 감금되어 있던 다른 한 놈이 그때부터 미친듯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말인즉슨.

지금 나오는 정보가 매우 고급 정보라는 뜻이다.

쿠구궁-!

동족을 팔아먹는 녀석의 입이라도 막아보고 싶은지 거세게 발버둥을 쳤지만.

『키야오오-!!』

로라의 함성 한 번으로 정리되었다.

남은 한 놈을 조용하게 만든 후에는 심문을 하던 기생충의 말에 집중했다.

르-페르우니옴.

놈들은 열악한 세계를 향해 차원문을 열고 침공하는 벌레들이다.

생명체의 생기를 흡수해서 본국으로 돌아가 공급하는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으며, 침공한 행성에서 기생할만한 신체를 얻지 못하면 서서히 소멸한다고 한다.

"그럼 이대로 내버려두면 죽는 건가?"

"뿌르르. 그, 그렇다."

왠지 모르게 내 감이 저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소현 씨."

퍼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강소현의 모닝스타가 놈을 내리치기 시작했고.

퍼억-!

반복된 고통 끝에 놈이 진실을 토해냈다.

시작부터 검증 마법을 써도 되건만, 꼭 강소현은 반죽음 상태를 만든 뒤에 검증 마법을 쓴다.

"이게 더 효과가 좋더라구요."

라고 하니, 뭐라 할 말은 없다만.

"뿌르르륵, 긁쁅... 주, 죽이면 끝납니다. 그러니 제발 저 만큼은 살려주십시오."

"내가 네놈의 생존은 보장하지."

거짓말을 못하는 강소현 대신 내가 놈의 생존을 보장해줬다.

당연히 지킬 생각은 없지만.

놈의 입장에서는 믿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해서 고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기생할 육체를 얻지 못하면 가진 생명력을 소진한 뒤에 본국으로 소환된다는 기생충 르-페리오니움.

저 정도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닌가?

놈들이 재수없게 나 같은 놈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곳에 있는 인간 대다수는 문어 기생충의 숙주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흡수한 생명체를 제법 잘 흉내 낼 수 있다는 르-뭐시기. 기억까지는 보지 못해도 대략적인 말투나 행동 정도는 따라할 수 있다고 한다.

"도, 동족들은 세상 곳곳에―"

기생충들은 이미 지구 곳곳에 침투해 있다.

"마력석... 저희 세계에서는 쁅큘숡이라 부르는데."

마력석의 사용법까지 듣고 난 뒤 마지막 질문을 했다.

"...뭐 더 할 말 있나?"

테라포밍이 된 안전구역의 일부분.

그리고 지구에 침투한 이상한 기생충들.

고블린 왕국이 들어 있는 괴상한 포탈까지.

심지어 나는 주시자의 눈을 잡고 누군가의 주시 대상이 되기까지 했으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죽일까요?"

그런 내 고민을 깨는 강소현의 질문.

"뭐 더 물을 게 없다면야."

나름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망설임이 있던 강소현인데, 그 대상이 문어 형태의 기생충이 되어 버리니 손속이 잔혹하기 그지없다.

퍼억-!!

"아, 아무래도 벌레라니까 혐오감이 들어서요."

라는 말과 함께 곤죽이 되어버린 문어 기생충.

이해는 한다.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주시자의 눈에 문어 기생충까지, 이세계의 생명체들은 죄다 혐오스러움 그 자체니까.

또각, 또각.

"쀼루률규류뷸-!!!"

로라의 금빛 장막에 갇힌 남아 있는 한 놈.

"펴, 편하게 죽여준다고 약속해라...."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놈의 주둥이에서 나온 말은 살려달라도 아닌, 편하게 죽여달라였다.

"여, 여자 인간. 맹세해라!!"

"대신 뭐든 다 불어."

두 번째 기생충에게 새로운 정보를 얻었고, 우리는 약속대로 놈을 편하게 보내줬다.

조금 이상한 얘기긴 했다만.

퍼억-!

* * *

「남아있는 적대 세력이 없습니다.」

「개체명 이준(李俊)이 안전지대 구역 1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생충이 죽고나서 떠오른 메시지다.

「안전구역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습니다. 필요 자원: 마력석 2kg」

「구역 관리자를 지정해 해당 지역의 발전 및 관리를 위임할 수 있습니다.」

「거주민을 자유롭게 추방할 수 있습니다.」

「치안 관리자를 지정해...」

「신전을 지어 신앙을 ...」

「...」

그리고 연달아서 수도 없이 많은 설명창들이 나왔는데, 요약하자면, 나 이준이 이 안전구역의 절대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텔레포트라...."

"미쳤네요. 2kg이면 콩알만큼 만 떼어도 될 것 같은데. 사실상 무한 텔레포트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저런 고등마법을 막 쓰는 이준 씨는 뭔지 참...."

"아저씨, 여기를 자원 기지로 사용하라 뭐 이런 말인 것 같은데요?"

강소현과 이하린의 말대로다.

안전구역의 마력석 광산과 텔포 한 번에 2kg밖에 안 드는 저렴한 비용.

뭐, 아직 마력석의 가치를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 작은 돌멩이 하나가 제법 묵직한 것을 고려해보면 2kg은 실제로 콩알만 한 크기일 것이다.

거기다가 신전을 통한 신앙 수급까지 가능하니.

르-뭐시기의 말이 아니었다면, 뜬금없이 뭔 신전이냐 싶었겠지만, 놈이 죽기 전에 내뱉었던 말을 고려해보면 '신전'의 요소는 필수불가결하다고 볼 수 있다.

-뿌르르르, 시, 신성. 그 작은 신에게 깃든 힘은 믿음이 커질수록 강해진다.

-신의 힘이란 것은 등가 교환이 기본.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이 바쳐진다.

-뭐? 그럴 리가 없다!!!

-받기만 하는 신앙이란 게 대체 어찌 가능하단 말이냐.

로라의 힘은 '신성의 조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과 관련된 힘이었다.

등가교환이라는 기생충의 말과는 달리 나는 받기만 했다만.

『냐아-!』

"그래, 네가 최고다."

어깨 위에서 칭찬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로라.

벌레의 말처럼 등가교환이 기본인 힘이었다면, 바쳐진 것은 아마도 로라에게 깃든 힘이 아닐까 싶다.

-이, 행성 또한 그리 멸망했으니.

-아무것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구의 신도 지구를 개박살 내는 것을 조건으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냐냐냐-냐냐!!!』

로라는 그딴 건 필요 없다고 한다.

고양이란 무릇 그런 존재니까.

또각, 또각.

그래도 로라가 더 강해지면 좋은 일이니 조만간 신전을 지을 방안을 마련하긴 할 것이다.

아무튼 이곳의 절대자가 되었으니, 남은 한 가지 일을 처리할 때가 왔다.

"...네?"

"지금 저보고 여기를 관리하라는 말이에요?"

"아니, 저희 부족은 그렇게까지...."

"하아, 그렇게 말하시면 할게요."

치안 관리자로 바바리안 족을 지정한 뒤 이곳의 발전을 맡겨 두었다.

구역 관리자를 지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신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텔포 기능까지 있으니 간간이 내가 오가면서 관리하면 될 것이다.

"아... 노, 노역이요?"

-이준 씨, 이거 캐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저씨, 기껏 광산을 얻었는데 제대로 써야죠.

-세금! 세금으로 받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이하린과 강소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서 안전구역의 세금으로 광산의 광물을 받기로 했다.

안전구역 1의 주인이라는 키워드는 2도 있고 3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말인즉슨.

안전구역을 건 쟁탈전이 열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애초에 여기를 먹은 것도 '전쟁'이 그 수단이었으니.

"사냥조는 광산 노동에서 제외하고, 전투가 싫은 사람은 광산 노역을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장진아를 포함한 바바리안 부족만으로는 세금 시스템을 굴리기가 벅찰 수도 있으니, 식인종 선별 작업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민태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아직 신뢰가 쌓이진 않았기에 별다른 직함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제법 협력적인 자세를 취해줬다.

"형님 부탁이라면, 뭐. 제가 여기서 친해진 동생들이 제법 있는데, 다 같이 힘써서 질서유지 좀 해보겠습니다."

몇 시간뿐이 안 지났건만, 구청을 치우기 위해 동원했던 민태준의 지인들은 어느새 '친해진 동생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려 부탁을 흔쾌히 들어줄 수 있는 형님이 되어 버렸고.

뭐 저런 친화력이 다 있는지.

"자자, 이분이 여기 주인이신 이준 형님이시다."

뭐랄까....

약해 보이기 싫어서 고블린 고기의 역함을 참은 것도 그렇고.

"어허, 농땡이 피우면 안 되지."

"민석아!!! 여기 손 좀 보태봐."

멀끔하게 치워지고 있는 구청 건물의 잔해를 보면, 일처리와 사람관리 능력도 매우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거기, 너 왜 혼자 있어?"

"일로 와서 같이 일도 하고 얘기도 나누면 좋잖아?"

구석에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챙겨두는 세심함까지 겸비했으니.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제법 뛰어난 알파메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형님 제가 잘 조율해서 장진아 치안 관리자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런 S급 인력이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 것을 보면,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구청 빨리 치우고 세금 문제 도와드려야 한다!! 다들 조금만 힘내자고!"

라며 곧장 일을 하러 가버려서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뭐, 때 되면 자기가 말하겠지.

* * *

"형님, 이게 다입니다."

이세계 광산을 확인하기 위해 요새를 이동시켰기 때문에, 민태준이 추출기에 집어넣을 르-뭐시기의 잔해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두었다고 한다.

어찌 일처리가 이리 깔끔한지.

「추출중... 100%」

민태준이 모아 둔 검은 덩굴들과 르-뭐시기의 사체, 그리고 요새에서 주검이 되어버린 두 마리의 것까지 모두 소각로에 집어넣자 곧장 추출기의 %가 100으로 차올랐다.

푸슈우우우욱-!

형형색색의 증기를 내뿜는 추출기의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생명의 조각」

「사자(死者)소생을 가능케 한다. 온전한 신체부위 1개 이상 필요.」

생기를 빨아먹는 기생충에게서 추출된 것이라 그럴까?

무려 죽은 자를 부활시켜준다는 말 같지도 않는 아이템이 나왔다.

"...이걸 산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라는 강소현의 질문.

당연히 답은 모른다.

르-뭐시기가 더 나와서 몇 개씩 더 얻는다면 몰라도 당장 부활 아이템을 헛된 테스트로 사용할 수는 없다.

고블린 왕국을 처리할 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나왔다면 더 좋았겠다마는....

"아니, 아저씨. 요새가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바래요?"

그건 그래도.

무력이란 것은 언제나 더 강할수록 좋은 법이다.

「보호조치 해제까지 51:00」

보호조치 해제까지는 약 이틀 하고도 3시간 남았고, 본래 고블린 왕국 처리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하루를 더 써버렸다.

"며칠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안전구역에 치안 관리자 장진아 일행과 새롭게 만난 알파메일 민태준에게 작별인사를 고한 뒤 요새를 타고 우리는 내 집 터로 향했다.

쿠우웅-!

10분 남짓한 가까운 거리.

그새 누가 소문이라도 냈는지 미니맵에 안전구역으로 향하는 파란 점들이 잔뜩 있었고―

"이, 이쪽에 안전지대가 있대요!"

"저건 뭐야? 몬스터?"

"미니맵에 파란 점으로 나오는데... 저런 능력도 있구나."

"그래도 섣불리 움직이지 마."

요새가 가시범위 내를 지날 때마다 다들 멈춰서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 쫓아냈던 또뭐시기 아파트 주민들이 악의적으로 소문을 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쿠우웅-!

어차피 신규 인원은 못 들어오게 설정해놔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가까운 거리를 고작 눈알 괴물 하나 때문에 마음대로 못 다녔다니."

"식인종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흠, 내 생각에는 세력을 정비하고 다시 기회를 노리지 않을까 싶다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금세 대로를 지나 집 앞의 2차선 도로로 들어섰고.

우우웅-!

집 앞, 아니 집터가 있던 골목길에는 여전히 기괴한 소리를 토해내는 포탈이 열려 있었다.

두둥- 둥 -두둥-!!

그 앞에 이상한 것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만.

두둥-! 둥 두둥!

친히 마중까지 나와있는 고블린 군단.

그리고 그놈들을 보고 드는 생각.

'저놈들은 대체 뭘 주려나?'

다짜고짜 이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나도 어딘가 망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50. 왕국 (1)

집앞 골목길.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고블린들.

고블린은 고블린이라 그런지, 요새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저들끼리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두둥- 둥! 두둥-!

그들이 하는 일은 바로 집 앞의 고블린 시체 청소.

북소리를 노동요삼아 부패해가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열심히 포탈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마도 내부 동굴로 보내 뭔가를 하려는 거겠지.

"와, 골목길이 생각보다 넓네요."

라는 이하린의 감상.

시체가 대부분 치워져 있었기에 본래 있던 무너진 골목길이 드러나 있었다.

띡-

시체 청소부라 해도 수가 수백이다.

그리고 그 정체는 고블린이고.

놈들이 뭉쳤을 때 고정포탑 핸들에 달린 미사일 발사 스위치를 눌렀고―

피슈우우웅-

퍼어엉-!!!

포탈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은 모두 폭사해 버렸다.

쿠우웅-!

쿠우웅-!

전과는 요새의 무력 자체가 달라졌음이 확연하게 실감나는 순간이랄까?

고작 2천 마리 잡는데도 고전해서 근접전까지 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지금의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느꼈다.

우우우웅-!

본래 2m 정도의 높이를 지니고 있던 포탈인데, 며칠 만에 봤다고 그 크기가 배 이상은 커져 있었다.

요새는 요새다.

축소화를 했어도 기본적인 사이즈 자체가 제법 컸기 때문에 어떻게 포탈로 욱여넣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키만 3m 이상은 되어 보이는 고블린 킹과 퀸.

그들이 오가기 위해 이 포탈이 넓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밀고 가겠습니다."

피슈우우우우웅-!!

「보유 포인트: 115,432,660p」

마지막 남은 두 마리의 르-뮈시기를 잡고 보유 포인트는 1억을 넘겼다.

썩어 넘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금액.

그렇기 때문에 일단 포탈 속으로 포격부터 박고 시작했다.

포탈 속으로 들어간 미사일에서 폭파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지만.

「보유 포인트: 116,455,340p」

늘어나는 포인트 덕분에 저 안이 개박살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 언제까지 쏘게요?"

쏘는 족족 늘어나는 포인트.

본래 이 포탈을 '버닝 포인트존'이라 칭했던 만큼 벌어들이는 양이 제법 쏠쏠했다.

그래도 두당 천만 포인트씩 주는 르-뭐시기만큼은 아니었지만.

「보유 포인트: 118,974,620p」

아무튼 그렇게 포인트 변화가 없어질 때까지 포격을 가하고 나서야 우리는 포탈을 향해 움직였다.

주시자의 눈을 잡고 식인종과의 전투에서 배운 미군의 전쟁법.

본래 싸움은 폭격으로 근방을 초토화한 뒤에 하는 것이다.

"어어! 아저씨 저거 포탈 입구가 넓어진 것 같은데요?"

요새가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작았던 포탈 입구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내부에 폭격을 가한 덕분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포탈이 넓어진 이유 따위는 어찌 됐건 상관은 없다.

우리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으니까.

"드디어 들어가는군요."

메이스를 들고 잔뜩 설렌 표정을 짓는 강소현.

"먼저 보고 올게요!"

라며 투명해진 채 포탈 속으로 뛰어든 이하린.

쿠우웅-!

그리고 요새를 운전해 포탈 속으로 들어갈 나까지.

우리는 제법 강하니까.

* * *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안전이 확인된 후 기이한 울림을 토해내는 포탈을 비집고 들어가자 나타난 곳은 전과 똑같이 동굴의 입구였다.

허나, 그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고블린의 살덩이들은 온데간데없었고, 벽다운 벽이 드러났으니까.

폭격 때문에 동굴의 입구 쪽은 거대한 지하공동같이 변해 있었다.

"이준 씨, 저쪽은 좁은데요?"

그리고 미쳐 폭격이 닿지 못한 곳에는 여전히 좁고 고블린 살덩이로 가득한 통로가 있었다.

요새가 지나가기에는 터무니없이 좁지만, 길이 좁으면 넓히면 그만이다.

피슈우우우웅-!!

콰아아앙-!!

"이제 넓어졌습니다."

축소화한 요새의 높이는 약 7m.

벽면을 메운 고블린들의 살덩이들이 폭격으로 사라지자, 크고 넓은 본래의 동굴 통로가 드러났다.

"...이, 이게 되네요."

직접 요새를 조종하는 나도 매번 놀라운데, 남들이 볼 때는 그 정도가 더 큰 모양이다.

"여기는 벽도 좁은데요."

콰아아아앙-!!!

"이제 넓어졌습니다."

고블린의 살점이 가득한 벽을 폭격으로 밀어버린다.

그렇게 드러난 동굴이 좁다면 그것도 폭격으로 밀어버린다.

요새에 추가된 유도 미사일 포대 덕분에 앞길을 막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주저없이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데에는 이하린의 섬세함 덕분도 있었다.

은신을 썼으나, 미니맵에서는 파란색 점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거리길 것이 없으니 우리의 전진은 거침없었다.

콰아아아앙-!!!

길이 막히든, 고블린의 살덩어리들이 부풀어 오르든,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콰아아아앙-!!

그냥 밀어버리고 가면 되니까.

-치지직.

-아저씨, 잠깐만 쏘지 마요.

그렇게 길을 넓히며 가던 도중 이하린이 통신기로 연락을 해왔다.

"휴우, 혹시 몰라서 미니맵에는 보이게 해뒀는데, 진짜 무식하게 밀고 오시네요. 무슨 불도저인 줄."

"나중에 그런 것도 생길 거다."

진짜 생길지는 모르겠다만, '아포칼립스 속 집사'의 플레이 경험으로 미뤄보면 아마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길을 뚫으며 복귀한 이하린의 정찰 보고를 들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이곳의 상황이 제법 변해 있다고 한다.

"무슨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던데요."

"막, 정란차나 공성탑 같은 게 있고."

"전에는 없었는데, 고블린 킹이랑 퀸도 대열에 있었어요."

"뭔 이상한 걸 타고 있긴 했는데."

우리가 쳐들어올 것을 알고 대비한 것은 아닐테고.

「보호조치 해제까지 48:00」

2일 남은 보호 조치가 끝나면 지구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아닐까 싶다.

저들의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겠지만.

"입구가 좁은데요? 아니, 출구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도착한 동굴의 반대편 출구.

성인 남자 둘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입구가 보인다.

"하린아, 부수고 가면 그만이야."

그리고 이하린의 의문에는 강소현이 대신 답을 해주었다.

"다들 마음의 준비 하시죠."

동굴의 출구는 고블린 왕국과 제법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고 출구와 왕성 사이에는 천막으로 지어진 주둔지가 수도 없이 많이 있고.

아마도 동굴 출구를 부수자마자 곧장 어그로가 끌리지 않을까 싶었으니.

"휴우, 아저씨 대충 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건 알죠?"

"하린아, 이거보다 약했을 때도 고블린은 10만 단위로 잡던 작자야. 뭔들 못하겠어."

둘 다 마음의 준비도 된 것 같으니, 곧장 동굴 출구를 부숴버렸다.

피슈우우우웅―

콰아아아앙-!!!

예상했던 대로 벽을 부수자마자 수많은 고블린들이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르륵?

-고륵?

-고르르륵, 그륵-!!!

오랜만에 바라본 고블린 왕국.

그곳은 여전히 말도 안 되게 넓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世界)라고 불러도 될 법할 정도로.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세계를 부술 것이다.

* * *

악의의 집합체.

인간의 비명을 수집하는 소악마.

고대 주술을 통해 생과 사를 가르는 악귀.

그것이 우리 고블린이다.

-우리의 터전을 침범한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고블린 킹과 퀸은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고블린의 지능은 낮다.

하지만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언제 어디서든 번식이 가능하기에 항상 고블린은 입이 많았다.

살기 위해 뭐든 먹었고, 그렇게 살다보니 세계를 좀먹는 몬스터가 되었다.

모든 세계(世界)에서 그들을 거부했다.

그저 살기 위해 습격하고 빼앗았을 뿐인데, 그들은 토벌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고블린은 수가 많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수많은 고블린들 중 살아남은 개체들은 강해진다.

그것이 고블린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화한 고블린들이 모여 왕국을 세웠을 때 그들의 위험도는 S급을 뛰어 넘는다.

두둥-! 둥- 두둥-!!

진격의 북소리가 울린다.

-궁수 장저언-!!!

그리고 고블린 궁수들이 이준의 요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활시위가 당겨지기도 전에 고블린들을 향해 압도적인 폭력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앙-!!!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저, 저것은 대체 뭐야!!

왕이 소리쳤다.

-내, 내 아이들!!!

왕비가 절규했다.

첫 포격은 궁수들과 함께 있던 왕과 왕비의 직계 혈족인 고블린 워리어들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황폐한 땅만이 남아있을 뿐.

피슈우우우웅-!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또다시 정체 모를 물체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콰아아아아아앙-!!

이번에는 왕의 친위대다.

붉은 갑주로 무장한 수만의 고블린 정예병이 폭사했다.

-전하! 후, 후퇴하셔야 합니다.

왕에게는 의문이 생겼다.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들은 제물을 모아, 그걸 바쳤다.

고블린들이 활개치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보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족히 수천 년은 넘는 기간 동안.

왕이 수도 없이 바뀌었으며, 때로는 왕이 없었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고블린들은 마치 피에 새겨진 본능이라도 되는 양 제물을 바쳐왔다.

정체 모를 녹색 마법진을 날 때부터 그릴 줄 알았다.

그렇게 그들의 염원이 이어져와 멸망이 진행 중인 하나의 세계(世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은 드디어 이뤄졌다.

허나 제약이 있었다.

신이란 작자가 뿌려놓은 힘 때문에 이 좁은 감옥에서 나가진 못했고, 또다시 주술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보호조치 해제까지 46:37」

그짓도 이 시간이 끝나면 필요 없어지건만.

콰아아아앙-!!

수천년을 이어온 고블린들의 염원은 고작 이틀을 남기고 산산이 부서졌다.

-내, 내 자식들이!!!

킹과 퀸.

수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그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수많은 아이들.

고블린 왕국은 거대하고 움직이는 괴물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왕과 왕비의 눈에서 녹색 피눈물이 흐르고, 그들은 하나의 결심을 했다.

* * *

"캬, 아저씨 미쳤고."

이하린은 매우 신났다.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네요."

강소현도 매우 신났다.

『냐아-!!!』

"크흠, 제 요새가 좀 대단하긴 합니다."

그리고 나와 로라도 마찬가지다.

퍼어어어엉-!!!

그야, 저 광경을 보면 속이 뻥 뚫린단 말이지.

고블린을 벌레로 치자면 바퀴벌레 혹은 나방파리와 같이 번식이 매우 뛰어난 해충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사람을 습격하고 사람을 납치해간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말인즉슨.

고블린들은 백해무익한 쓰레기라는 말이다.

콰아아앙-!!

그래서 그런지 한 발 한 발에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죽어나가는 고블린들 볼수록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핵 앤 슬래시 게임을 하는 기분이랄까?

"킹이랑 퀸은 어쩌죠?"

왕성에 있는 고블린 킹과 퀸.

본래 싸움은 머리부터 죽이고 시작하는 게 맞으나, 왕성에 있는 곳에 푸른색 점이 제법 보였기 때문에 그 주변부터 초토화시키고 있다.

푸른색 점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사람 목숨 따위는 한없이 가벼워진 세상이 되었더라도 구할 수 있는 무해한 사람은 구해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그니까요. 식인종이라면 몰라도...."

"아저씨 말대로 일반인들은 구해 주는 게 맞죠."

아니, 우리 모두의 생각이다.

"아저씨 비정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 착한 구석이 있단 말이에요."

내가 비정했다면 이하린과 이하준 남매는 진작에 식인종들 배 속에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만.

뭐, 굳이 잡담을 더 할 필요도 없어 초토화된 거대한 고블린 왕국의 잔해로 요새를 이동했다.

지하 동공에 자리잡은 거대 왕국.

중앙의 왕성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고블린들의 야영지, 정란차 공성탑 등의 설비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사실상 중앙의 왕성을 제외한 모든것이 폐허가 되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니.

쿠우웅-!

요새가 만들어낸 참상을 감상하며 이동했고, 우리는 지금 고블린 왕국의 왕성 앞에 도착했다.

왕성이라기에는 조잡했고.

성이 아니라기에는 성 같은 외형의 것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흙을 굳혀 쌓은 것 같은 외견이되 형식 자체는 성의 모습을 띄고 있었으니.

-고르르르륵-!!!!

-고르르륵-!!!

그리고 성 위에서 왕과 왕비가 뭐라 소리치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이 짧은 틈에 이하린이 요새 내부로 들어가는 데까진 성공했으니, 이제부터 할 일은 간단하다.

납치된 인간을 구조하기 위해 어그로를 끄는 것.

-고르르르르륵-!!!

계속해서 뭐라 외치는 고블린의 왕과 왕비.

나름 남에 집에 온 것이니 환영 인사로 노크를 해주었다.

피슈우웅-!!

콰아아아앙-!

고정 포탑에 달린 소형 미사일로 왕성의 외벽을 조금 부서주자.

-꼬오오오오르르!!!!!!

고블린들의 왕이 요새를 향해 극찬의 찬사를 읊기 시작했다.

-치지직.

-아저씨, 이 정도면 안 무너질 듯요.

내부에 잠입한 이하린이 그렇게 말했으니, 거리길 것 없이 외벽을 향해 소형 미사일을 퍼부웠다.

콰아아아앙-!!

콰르르르르르르―

외벽이 까지고 드러난 성의 본체.

고블린들답게 미학적 취향도 아주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왕성의 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해골이다.

장식들은 갈비뼈, 척추뼈, 이름 모를 뼈들이고.

즉, 저것들이 죄다 이곳에 끌려온 인간의 부산물이라는 말이다.

"옘별."

대충 봐도 수백의 인간이 이곳에서 죽어났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열이 받는다.

인류애 같은 건 아니고.

망한 세상에서 생긴 동족에 대한 연민이라 보면 될 것이다.

식인종들은 예외로 치고.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벌거벗겨진 성에서 벌벌 떨고 있을 고블린 킹과 퀸을 바라봤는데.

푸우욱-!

놈들이 갑작스럽게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킹인지 퀸인지.

고블린 킹과 퀸으로 불렀지만 사실상 둘은 외견으로 구분이 어려웠으니....

뭐 호칭 따윈 각설하고, 어쨌든 두 놈 중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거대한 대검으로 찌른 것이 놈들이 벌인 이상한 짓인데.

그 결과는 우리에게 있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촤르르륵-!

칼에 찔린 고블린 킹의 아래에 생겨난 녹색 마법진에서 거대한 녹색 손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고오오오오르-!!

칼에 찔린 놈이 칼을 끌어안은 채 더 깊은 곳으로 칼날을 쑤셔 넣었고―

촤악-!!!

그 순간 거대한 녹색손이 마법진 위로 올라와 고블린 킹을 붙잡고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다.

인신공양.

만화에서 봤을 법한 그런 장면이 생각나는데, 이 경우에는 인신이 아니라 고신이라 해야되나?

아무튼 제물이 바쳐졌으니, 그 대가도 나타나야 하는 법.

띡-

띠딕-

그리고 그 대가는 내 요새였다.

포탑, 조종 스틱, 유도 미사일 포대를 포함해 모든 기능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 섰고.

-고오르르르르-!!!

살아남은 고블린 퀸이 '니넨 이제 뒤졌어'라는 듯한 느낌으로 소리치며 왕성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걸 보는 내 심정은 뭐랄까.

타앗-!

"히힛."

저 고블린 킹인지 퀸인지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진달까?

『캬아오오-!!』

요새는 로라의 금빛 포효 한 번에 정지 상태가 풀려 버렸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강소현이 요새에서 뛰어 내려가 고블린 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차라리 요새에 당한다면 존엄만은 챙길 수 있었을 것을....

#51. 왕국 (2)

고블린 왕국에는 대체 몇 마리의 고블린이 있을까?

그들이 왕국은 동굴을 통해 나왔다기에는 말도 안 되게 큰 공간에 있었으며, 퇴로가 없는 거대한 동공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눈으로 봐서 정확하지는 않다마는 이 지하 동공의 크키는 소도시에 버금가는 방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블린들이 수도 많고 매우 밀도 있게 뭉쳐 지내는 놈들임을 감안하면, 못해도 수백만은 넘지 않았을까 싶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만.

그리고 그놈들의 왕인지 왕빈지 하는 것마저도 무의미할 정도로 약했다.

것도 요새의 지원 없이 강소현이 단독으로 상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실드."

티잉-!

사람보다 거대한 대검은 실드에 맥없이 막히고.

부우웅- 콰직!

2m는 족히 넘는 크기의 방패는 강소현의 모닝스타에 힘없이 으스러졌다.

-고오오오오!!!

그 안의 팔까지 박살이 나버렸으니.

푸직-

강소현의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냐아~!!』

박살나는 고블린 왕국과 고블린들의 왕을 보며 기뻐하는 로라.

그 귀여움이 아니었다면, 일방적인 싸움에 벌써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푸직-

강소현의 모닝스타와 흩뿌려지는 고블린의 살점.

쿠우웅-!

그리고 고블린들의 왕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치지직.

-아저씨, 사람들 구하긴 했는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요.

타이밍 좋게 이하린이 납치된 사람들까지 구했다고 한다.

"이준 씨, 말도 안 통하는 것 같은데 그냥 죽일게요?"

라는 강소현의 물음.

말도 안 통하는 놈들과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것도 시도 때도 없이 내 집에 쳐들어오던 침략자 놈들에게.

그렇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퍼억!

강소현의 모닝스타가 고블린 왕국의 마지막 생명을 앗아갔다.

"하아, 간만에 몸 좀 풀었네요."

땀을 훔치며 요새를 향해 걸어오는 강소현.

부우웅-!

그녀가 모닝스타를 허공에 휘두르고.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닝스타에 붙어 있던 녹색 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과연 이 세상에 무력으로 우리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꼭 사람이 아니어도 말이다.

사기급으로 강력한 나의 요새.

로라의 신성이 주는 여러가지 효과들.

강소현의 묵직한 근접전과 이하린의 은밀함과 오러를 담은 칼날까지.

'주시자의 눈' 따위가 백 단위로 온다 해도 이제는 이길 자신이 있다.

와이번도 마찬가지.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이하린이 연락을 취해왔다.

-치지직.

-아저씨, 언니.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여기 사람이 좀 많아요. 옮기는 것 좀 도와줘요.

얘는 건물 안에 있었으면서, 대체 어떻게 우리가 쉬는 걸 알았는지....

"몇 명 정도일 줄 알았는데, 납치된 사람들이 제법 있나 본데요?"

쉴 만큼 쉬었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강소현과 함께 이하린이 있는 고블린 왕성으로 향했다.

또각, 또각.

왕성 내부는 사람의 해골로 이뤄진 정문과는 달리 별다른 게 없었다.

그냥 토벽 수준이었으니까.

"아저씨~! 언니~!"

일자로 된 복도 끝에서 이하린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이했다.

"사람이 많아야 얼마나...."

"많죠?"

그러게 말이다.

족히 50명은 넘는 사람이 왕성 복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거 저 혼자 지하감옥에서 옮긴 거예요."

덤으로 감옥을 지키던 이상하게 생긴 고블린 백여 마리까지 해치웠다고 한다.

"끽 해야 열 명은 되려나 했는데."

왕성 복도에 늘어진 사람들.

다들 야위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일단 옮기고 생각하죠."

* * *

요새 밖의 공터.

본래는 왕성의 일부였으나 폭격으로 인해 공터가 되어버린 장소에 53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눕혀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고민에 빠져 있었고.

"왜 안 깨어날까요?"

힐.

로라의 신성 세례.

강소현의 충격 요법.

이하린의 살기를 통한 압박.

CPR 등의 현대 의학까지 포함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사람들은 미동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아저씨, 이거 문신이라도 되는지 전혀 안 지워지는데요?"

그리고 잡혀있던 사람들은 벌거벗겨진 채로 있었고, 가슴부위에 녹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뿔달린 고블린이 그려진 문양.

아마, 고블린들이 쓰던 인신 공양과 비슷한 종류의 주술로 추측되긴 하는데.

『냐, 냐냐- 냐냐냐냐-!!』

로라조차도 저것을 해제하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

"흐음, 영감들도 모르겠다네요."

상태창을 통해 백색 마탑과 소통한 강소현도 마찬가지.

"아, 암살자 협회는 그런 소통은 못해서...."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든 이하린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우리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선택지가 악인과의 전투도 아니고 하물며 괴물과의 싸움도 아니었으니.

고블린에게 포로로 잡혔던 인간들에 처우.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만, 저들의 몸에는 고블린들이 새겨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한 낙인이 그려져 있다.

"저들을 살려두는 것은 위험을 초례할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내키지 않군요."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단 차라, 내가 먼저 운을 뗐고.

"맞아요... 아이들도 있는데."

"애들은 죄가 없잖아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강소현과 이하린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50여 명의 의식불명자들.

"의학적인 소견으로는... 아니, 저 수의산데 진짜 자꾸 이럴 거예요?"

"어차피 기본적인 지식은 있으실텐데, 그래서 어떻습니까?"

강소현이 저들을 자세히 관찰해본 바로.

"...숨도 쉬고 신체 반응도 있는데, 의식만 없는 상태예요. 동공 반응은 또 없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저도 왜 저런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저들이 아직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요새 안에 들이는 것까지는 못해도 평평한 땅 위에 저들을 일렬로 눕혀놨다.

아직 고블린 왕국의 공략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혹시 모를 위험 요소인 생존자들을 외부에 배치한 것이다.

"보상이 없네요. 포인트도 하나도 안 올랐어요."

"흠, 포인트가 안 주어지는 건 좀 이상하군요. 아무래도 저 성을 부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몬스터 웨이브.

시체 거인.

주시자의 눈.

안전구역의 전투.

하물며 살인까지.

변한 세상에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했을 시에는 보상이 지급되어 왔다.

적게는 포인트부터 많게는 아이템과 레벨의 증가까지.

오십만, 아니, 백만은 훌쩍 넘는 고블린들의 왕국을 섬멸하고 얻게 될 것 또한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콰아아아아앙-!!!

콰르르르르―

남아있던 왕성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

「이상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보호조치 해제까지 10:00」

「진득한 악의가 개입합니다.」

"...아."

"아저씨 좆된 것 같죠?"

"하루도 넘게 남았었는데 갑자기 10시간이 된다고?"

물론, 이러한 행위들에 보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 최근 너무 좋은 보상만 받아서 그런지 이렇게 될 것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냐아....』

게다가 포탈 속 고블린 왕국의 섬멸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게 로라였으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괜찮아."

축 늘어진 귀.

안절부절못하며 흔들리는 꼬리.

45도 아래로 얼굴을 내려 깐 귀여운 검은 고양이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풀이 죽은 로라를 진정시켜 주었다.

"우쭈쭈-"

『냐, 냐냐-! 냐냐냐냐-!』

그리고 그새 기운을 차린 로라가, 앞발을 흔들며 연신 뭐라 말하는데.

"왜요. 로라가 뭐래요?"

"당장 요새에 박혀 숨어 있으랍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촤아아악-!!!

요세 옆 공터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 아래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블린 킹의 시체 아래에서도 마법진이 생겼고, 동시에 모든 마법진에서 거대한 녹색 손이 나타나서는 사람과 고블린의 시체를 끌고 들어갔다.

"미친."

"이게 뭔-"

저 끔찍한 광경을 보며 감상을 내뱉는 이하린과 강소현.

"꺄아아-!"

"아, 아, 아아저씨?"

둘의 팔을 끌고 요새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쿠우웅-

요새의 대문이 닫히고.

『캬아오오-!!!』

로라가 요새에 금빛 장막을 두텁게 씌우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콰르르르르릉―

세상이 녹색 섬광으로 가득 찼다.

틱- 티딕-

그리고 요새의 조종스틱이 작동하지 않는다.

칙, 치익-

"쓰으읍."

간만에 담배가 땡기는 순간이 왔달까....

"후우-"

불가항력.

아무것도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쿠구구구구궁-!!

요새를 둘러싼 금빛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보호의 룬으로 쉴 새 없이 벼락이 내려친다.

예전 같았다면 강소현이고 이하린이고 비명을 질러댔겠지마는 우리는 침착하다.

"아저씨, 포탑도 안 돼요?"

이하린은 차분하게 요새의 상태를 물어봤고.

"제가 한번 보고 올게요. 블링크."

콰아앙-!

밖의 상태를 보러 가겠다던 강소현은.

"쿨럭- 쿨럭. 밖에 나가자마자 몸이 으깨질 뻔했네요."

피를 한 줌 토하며 1초 만에 돌아왔다.

『캬아오오-!!』

로라는 녹색 섬광을 향해 하악질을 하며 계속해서 요새를 지켜주는 금빛 장막을 보충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발견한 것이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뿐이지.

"다들 상태창 보셨습니까?"

세상이 망하고 인류의 등불이 되어준 것은 각성과 상태창이다.

"미친, 아저씨 상태창이 안 열리는데요?"

"어, 나도 그렇네."

그리고 지금은 그 상태창마저도 먹통이 되었고.

[고양이 관리]

[소원: p%34xp을 %%$^@@로 구현한다.]

오직 이 메시지 하나만이 출력되고 있긴 하다만, 당장 이것을 사용해서 이 상황을 타계하기도 어렵다.

부상자 몇 명을 요새로 옮기는 기적을 보여줬던 것이 '소원'인데.

이 지하 동공에서 우리를 탈출시킨다거나, 저 녹색 섬광을 없앨 정도의 기적은 일으킬 수 없다.

로라의 집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이 느껴진다.

"일단 현재 상황부터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고블린 왕국을 멸망시켰다.

2. 그 과정에서 지하 감옥에 있던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3. 고블린을 잡고 포인트가 오르지 않았기에 보상을 노리고 왕성을 부쉈다.

4. 왕성이 부서지자 녹색 손이 고블린 왕의 시체와 생존자들을 끌고 들어갔다.

5. 그리고 녹색 섬광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까지가 현 상황인데....

"타계책이 안 나오는데요?"

그렇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어찌해야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녹색 섬광의 위력 자체는 조금 줄어들었기에 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냐, 냐나냐냐냐-! 냐!』

둥글둥글한 앞발을 열심히 흔들며 설명하는 로라.

"...본능이다?"

로라가 이곳을 처리하자고 주장하는 근거는 본능이었다.

야생의 고양이의 본능은 아닐 것이니 로라가 쓰는 '신의 힘'과 관련된 본능일 것이다.

『냐아....』

"괜찮아. 주눅들 필요 없다."

본능이건 뭐건 이 왕국을 내버려 두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로라의 잘못은 없다.

설령 로라가 잘못을 했다 해도 로라의 잘못은 없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집사란 무릇 그런 존재이니까.

"식사...하실래요?"

상태창도 시스템 메시지도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 10시간이 넘게 지났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곳에 오고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까.

"아저씨, 하준이가 오면 어쩌죠? 이렇게 위험할 때 오면 안 되는데...."

식사를 마치고 이하린이 동생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염탐꾼 놈들이라 위험할 때 돌려보내진 않을 거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마탑이니 학파니 협회니 하는 놈들은 실시간으로 우리와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구경하는 변태들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뭐, 자기들이 고른 사람을 사지로 모는 미친놈들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