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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아무튼 우리는 고블린 왕국을 멸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동공에 감금되었다.

상태창도 먹통.

요새의 기능도 작동하지 않으며.

콰르르르르릉-!

요새 밖에서는 녹색 벼락이 쉼없이 내리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52. 진화

지하 동공에 감금된 지 10일 차.

여전히 상태창은 먹통이었고, 요새 또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녹색 섬광이 내리치는 외부 상황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섬광의 위력이 조금 약해진 것 같긴 한데....

"쿨럭-. 근데 좀 애매해요. 제가 잘 버티게 된 건지, 저 섬광이 약해진 건지는."

유의미한 변화는 아니었다.

강소현의 맷집이 좋아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아저씨, 진짜 10일이 지난 게 맞을까요?"

10일.

상태창도 없고, 남은 시간 같은 카운터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문물 따위는 으스러졌으니 그것들을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우리는 대략적인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파지직, 파직-!

강소현이 샀던 보호의 룬 덕분이다.

저것이 깨지고 장막이 재생되기까지는 약 24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어두컴컴한 동공에서 시간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로라 아니었으면 우울증 걸렸을지도요...."

로라에게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던 이하린도 어느새 고양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금빛 신성.

로라가 만들어 내는 빛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요새가 먹통이 되었다는 뜻은 발전기도 멈췄다는 의미다.

뭐, 본래도 형광등 같은 건 없었다마는 포탑에서 희미하게 일어나는 빛무리가 있었다.

있다가 없으면 그 체감이 더 큰 법.

"...뭔 얘기라도 할까요?"

로라가 쉬는 동안에는 어둠이 찾아온다.

타이밍 좋게 녹색 섬광도 멈추고, 물론 나가면 귀신같이 몰아치기 시작하지만.

어쨌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번갈아가며 수면을 취하는 우리에게는 대화만이 유일한 유희거리가 되었다.

"영감들이랑 교신도 안 되고."

"아, 그래도 인벤토리는 쓸 수 있네요."

잡담은 아니고 나름 건실한 대화였다.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테스트 하던 중 이하린이 '인벤토리'가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는 별게 없네요...."

어디선가 주워온 고급스럽게 생긴 찻잔 세트.

강소현이 꺼낸 물건이다.

"이준 씨는요?"

나 또한 인벤토리에 제법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아니, 이 상황을 타계할 법한 대단한 것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Å」 - 사용 불가

인벤토리에 지급되었던 마지막 보상.

인벤토리의 사용이 가능하단 것을 듣자마자 바로 이것이 떠올랐으니까.

'인벤토리.'

전처럼 내부 품목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대신 허공에 이상한 선 같은 것이 생겨났다.

"원하는 걸 떠올리고 손을 넣으면 그게 나오는 것 같아요."

라는 말을 참고해서.

「!@∑&$Å」 를 떠올리며 손을 집어넣었다.

"흐음…."

"왜요? 뭐가 잡혀요?"

"아저씨, 뭔데요."

아직 이들은 인벤토리 보상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놀래켜줄 생각으로 안에 잡힌 물체를 집어 당겨 봤는데―

터억.

꺼내지지 않았다.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설명해주자 강소현과 이하린이 정한 방법은 간단했다.

타인의 인벤토리에는 손을 집어넣을 수 없었으니, 그들이 정한 방식은 내 팔을 잡고 함께 당기기다.

"원래 안 되는 건 힘이 모자란 거예요."

라는 강소현의 의견을 참고한 것이다.

"잡아."

"아저씨, 팔 안 빠지게 힘 빡 주세요!"

그러고는 둘이서 내 팔을 붙잡았고 셋이 안간힘을 다해 정체 모를 아이템을 끌어당겼다.

* * *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힘 따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는 법.

"끄응...."

그 뒤로도 며칠이나 이 짓을 반복해봤으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다시금 깨달을 뿐이었다.

"-이이익!!!"

팔이 몇 번 부러지긴 했는데, 강소현이 성내는 모습을 보고서는 화낼 생각도 쏙 들어가 버렸다.

「평범한 강화권 x45」

「하급 포션 x304」

대신 인벤토리에 있던 다른 잡다한 것들을 꺼내놨는데.

『캬아오오-!!』

로라가 금빛 신성을 휘두를 때 말려들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딱히 쓸데는 없어도, 강화권은 좀 아깝네요."

갑자기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꺼내 놓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게 이 안에서 30일 정도가 지났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 식사가 마지막이 될 거예요."

식사를 담당하던 것은 강소현이다.

나는 주방에서 손을 뗀 지 오래고 그렇기에 편의점 비축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안일하다기보다는 동료를 믿었기에 그냥 신경을 껐을 뿐이다.

"괜히 분위기만 안 좋아질까봐 말 안 했었는데, 더 이상 남은 식량이 없네요."

세상이 망하고 약 세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여기저기 물자 지원을 해준 것과 세 명이서 먹은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오래 버틴 것도 사실.

"...그 식물도 안 자라고."

수경 재배 설비에 심어둔 루토 씨앗.

그것은 아직 새싹 수준에서 변화하지 않고 있었다.

요새가 멈추면서 그 씨앗의 성장도 멈춰 버렸다.

이쯤 되니 이 현상에 대략적인 감이 왔다.

아마도.

"시간 동결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요새, 상태창, 인벤토리 등.

지구의 신이란 작자가 준 능력들이 모두 멈춘 것이 맞는 것 같다.

시간 동결인 이유는 시들지도 더 자라지도 않는 루토라는 식물의 상태를 통해 유추한 것이고.

"제법 일리 있는 말이네요."

아무튼 식량이 고갈되었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다음 수순.

"최후의 만찬은 아껴 먹읍시다."

아직 식사 준비를 하지는 않았으니, 대책 마련을 우선시해서 회의에 돌입했다.

"...저걸 먹어야 한다고요?"

대책이고 나발이고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만.

"아, 제가 혹시나 해서 얼려뒀어요."

식량의 비축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고려해서 강소현이 미리 마법으로 냉동 고블린을 비축해뒀다고 한다.

"아저씨, 저도 언니랑 같이했어요. 제가 만든 건 훈제육포예요."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동료 하나는 정말 잘 구했다고 생각한다.

둘 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런 대비를 다 해뒀다니.

나름 감동이긴 한데....

아니, 진짜 감동을 받기는 했는데 말이야.

"그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먹기가 싫네요."

그 대비가 고블린 고기라서 크게 감동받은 티를 내지는 못하겠다.

고블린은 진짜 맛이 너무 끔찍하거든.

탁, 타악-!

『냐아?』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라가 자신의 밥그릇을 앞발로 툭툭 쳤다.

"아, 선택지가 하나 더 있긴 하네요."

고블린 고기와 고양이 사료.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차기 식량이다.

상태창이 먹통이 되어버린 탓에, 기존에 로라가 먹던 '마력이 깃든 키튼 사료'는 제공해줄 수 없다.

대신, 일전에 강소현의 병원에서 파밍해둔 건식 사료를 배급해주고 있었는데―

"까드득. 아저씨, 언니. 그래도 맛은 고블린 고기보다 나은데요?"

곧장 이하린이 시식을 하고서는 우리에게 그 맛을 알려주었다.

그래.

고블린 고기보다야 낫겠지.

아마, 내 추측으로는 똥을 먹어도 고블린 고기보다는 맛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하린은 밖에서 야생의 생활은 한 경력이 있는 만큼, 이런 식생활 면에서는 우리보다 많은 내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떽!"

그래도 로라 밥을 뺏어 먹는 건 안 된다.

여기 얼마나 더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 * *

또다시 30일이 지났다.

아포칼립스가 온 뒤의 인류는 '냉동 보존 고블린 고기'와 '훈제 고블린 고기'가 주 식량이 되었다.

아마 밖도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고.

"미친... 와, 사람 고기 고른 사람들 후회 좀 하겠는데요?"

악마 같은 놈이 주었던 선택지.

사람 고기와 몬스터 고기를 골라라.

사실, 사람 고기에만 너무 좋은 것들이 몰려 있지 않나 싶었다.

일단 식인종들은 고블린 고기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먹으면 마약을 한 것 같은 쾌감과 함께 그 능력을 흡수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진짜배기는 몬스터 고기였다.

이게 페널티가 끔찍한 맛이었기 때문에 확인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것만 30일 넘게 계속 먹다 보니 몸이 달라졌다.

부우우웅-!!

"와! 이준 씨, 이거 보여요?"

강소현의 경우는 모닝스타를 휘두를 때 특이한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붕-!!

휘두르는 과정을 생략하는 느낌.

마치 게임에서 스킬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움직임이 이상하게 변했다.

"큭. 꼴이 좀 웃기긴 합니다만, 대단하긴 하군요."

물론, 꼴이 웃긴 거지 그 위력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그야, 휘두르는 동작을 생략하다시피 하는 기술인데 이걸 앞에서 맞으면, 피하고 자시고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는 이준 씨는요."

나의 경우는 이상한 빔을 뿜을 수 있게 되었다.

지이이잉-

피잉―

요새의 전투력 자체는 매우 강하나, 내 본신의 무력이 아쉽던 차에 만족스러운 능력을 얻은 것이다.

"푸흡."

물론, 삿대질을 하며 빔을 쏘는 내 모습도 조금 웃기긴 했지만.

하필 동작이 이럴게 뭐람.

"아저씨, 나 눈이 자꾸 이상한데...."

제일 가관은 이하린이었다.

일전에 주시자의 눈 몸속에서 눈이 검은색으로 변했었던 이하린.

그때처럼 눈이 변하긴 했는데, 그녀의 경우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나 강소현이 스킬처럼 사용하는 능력을 얻었다면, 이하린은 패시브 능력을 얻은 셈이다.

"크흠, 약간 중이병 같긴 해도 나름 봐줄만하다."

내 감상평이다.

"중이병은요, 무슨. 예쁘기만 하구만. 하린아, 예뻐! 세상이 변했어. 이제는 어떻게 변하든지 자기 모습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강소현의 감상평이자 조언이다.

"하아... 이게 기능은 좋은 것 같은데, 참 외관상 보기가 영 그렇네요."

한쪽 눈에 검은색 흰자위와 흰색 동공을 가지게 된 이하린은 변한 자신의 모습이 새삼 어색한 모양이었다.

생긴게 다르면 좀 어떤가?

능력만 좋음 되는 것을.

"그래서 여기 뭐가 보인다고?"

"이놈은 등뼈가 쓸만할 것 같아요."

아무튼, 이하린이 얻게 된 능력은 투시와 재료를 감별할 수 있는 눈이다.

머릿속에 '마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하린을 놀려주려고 슬쩍 바라봤을 뿐인데―

"마, 말하지 마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내 말을 극구 막았다.

"그래서 꿈에 나온 몬스터는 뭐냐?"

이 이상 놀리기도 뭐해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몬스터 고기를 먹다 보면, 꿈을 꾸게 된다.

내 경우는 '주시자의 눈'보다 수천 배는 큰 하늘을 가득 메운 눈알이 나를 내려다보는 꿈이었다.

강소현의 경우는 까마득하게 큰 거대한 대머리 몬스터가 몽둥이를 휘두르는 꿈을 꾸었고.

"저는 이상한 괴물이 제 눈에 자기 눈알을 끼워주는 꿈을 꿨는데.... 막, 나쁜 존재 같지는 않았어요."

아무튼 꿈은 꿈인데, 현실에 영향을 주는 꿈이었음은 분명하니.

"앞으로 나올 몬스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름 신빙성 있는 추측을 해보았다.

몬스터 고기를 먹다 보면 앞으로 나오게 될 몬스터의 능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꿈의 형태로 찾아오고.

"...그, 뭐 행성만 한 눈알이 나왔다 하지 않았어요?"

"그게, 현실에 나타난다고요?"

진짜 나타나면 그거대로 또 문제긴 하다만.

* * *

세상이 망하고 80일이 경과했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 각성 능력, 몬스터 고기의 효능, 마법과 마력, 상태창, 포인트 상점, 주변 세력을 어찌할 것인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등등.

우리는 끝도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로라가 자는 동안은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녹색 번개가 치는 순간을 제외하면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의 문명을 누리던 인류다.

그런 우리가 얼마나 심심했겠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구장창 대화만을 나눴고, 더 이상 건설적인 대화는 나눌 거리가 없어졌다.

"이준 씨는 MBTI 뭐예요?"

그렇게 시작된 것은 잡담이다.

그냥 수다라 봐도 무방할 정도.

"모릅니다만."

MBTI라는 것이 뭔지는 안다만, 이걸 굳이 테스트해본 적은 없다.

그야....

"의사가 혈액형 성격론 따위를 믿는 겁니까?"

"아니, 의사 아니고 수의사라니까요. 꼭 이럴 때만 의사라 부르더라."

인터넷도 SNS도 안 하는 내가 굳이 그런 것을 찾아할 리가 있나.

약간 한심하게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저씨, MBTI가 그런 미신이랑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치? 이준 씨 좀 이상하지?"

강소현과 이하린이 역으로 나를 바보 취급하기 시작했다.

"아니, MBTI를 믿는 근거가 뭡니까?"

MBTI는 편돌이를 하다 보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단어다.

하루에 한 번 이상씩은 오가는 손님들이 그런 대화를 하고는 했으니까.

"MBTI는 제법 잘 맞아떨어져요. 혈액형은 미신이 맞는데, MBTI는 이준 씨가 직접 고른 선택지를 통해 결과가 나오는 거니까요."

그건 또 몰랐네.

내가 고른 선택지를 통해 나의 성격유형을 알려준다라.

흥미가 동했다.

"그쵸? 재밌어 보이죠? 자, 제가 선택지 불러줄 테니까 한 번 해보실래요?"

아무말도 안했건만, 나를 보며 저렇게 말하는 강소현.

"와, 대박! 언니, 그걸 다 외웠어요?"

무슨 선택지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지루한 이 시간에 할 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은 좋은 징조다.

이런 장소에 혼자 있었다면 진작에 우울증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니까.

정신력, 멘탈 하나는 단단한 내가 그리 생각할 정도니, 저들의 장단에 맞춰 노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자, 1번. '주기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제가 알려준 기준에서 맞는 걸로 말해주시면 돼요."

그렇게 나 이준의 인생 첫 MBTI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매우 동의 - 동의 - 약간 동의 - 중간 - 약간 비동의 - 비동의 - 매우 비동의]

순으로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면, 이하린이 이것을 기록한다.

"이제 반쯤 했어요. '단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거 왠지 동의일 것 같은데."

아무튼.

선택지를 고르는 것 자체는 쉬웠다.

세상이 망하고 내 성격도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웃기는 일인데, 아포칼립스를 살아가면서 내 성격이 어린 시절의 그것과 비슷해지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꿈도 많고 밝은 고등학생의 이준.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긴 한데, 뭐랄까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기도 한데.

본심은 순전히 재밌는 동료들과 함께 다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와...."

그렇게 나의 첫 MBTI 테스트가 끝났다.

"아저씨, 처음 봤을 때 성격이 좀 더럽다 싶었는데. 제 예상 그대로네요."

"떽! 하린이 말만 들으면 나쁜 것 같은데 나쁜 건 아니에요. 인구의 3%밖에 없는 희귀 MBTI라구요!!"

뭔지 알려주지도 않고 저들끼리 신나서 떠드는 중이다.

"그래서 뭡니까?"

"ENTJ요."

"그게 뭔데요?"

MBTI를 들어는 봤어도 제대로 알지는 못했으니, 저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ENTJ가 뭐냐면요···."

강소현은 어지간히도 MBTI의 신봉자인 게 분명하다.

저 설문지부터 시작해서 유형별 특징까지 줄줄이 다 외우고 있었으니까.

"아, 한심하게 보지는 마요. 야간 진료 때 심심하면 보던 게 MBTI라서요."

아무튼 그렇게 강소현이 요약해준 ENTJ의 특징은 제법 나와 잘 맞아떨어졌다.

"I 같은 E신데, 어렸을 때는 완전 E였을 것 같네요."

"아저씨 은근 기분파라 P일 줄 알았는데."

뭔지 모를 알파벳으로 이뤄지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90일째.

변화가 일어났다.

"아저씨, 하늘이 보여요!!!"

자고 있던 나와 강소현을 깨우는 이하린의 외침.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린가?' 싶어서 우리는 요새 마당으로 향했고.

90일 내리 내리치던 녹색 섬광이 멎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도 지하 동공에 있으면서 무슨 하늘이 보이냐 싶었는데.

"...."

진짜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동굴 천장의 뚫린 부분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도 나름 재밌지 않았어요?"

"그러게요. 나름 몬스터 고기 이점도 찾고, 이 세상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누고.... 뭔가 가족같은 느낌이라 좋았는데. 이제 하준이만 오면 되겠어요."

재밌긴 재밌었다만,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은 재미였다.

"아, 그건 그렇죠."

"아저씨 말대로 한 번이라 값진 경험이랄까요?"

저길 어찌 올라갈까 고민을 하던 찰나에 이하린의 눈이 이상한 것을 포착했다.

"어어? 저거 사람 아니에요?"

"이준 씨, 이제 미니맵도 켜지네요. 하린이 말처럼 저거 진짜 사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하늘 위에는 그런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족히 100m 넘게 위에 있다만.

아니, 이거 포탈 속이라 이세계 판정인 거 아니었어?

#53. 신세계

살아 계셨네요오-!!!

네요오-

네요-

요-

저 하늘 높이서부터 들려오는 외침이 동굴 속을 메아리쳐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장진아와 민태준이다.

찾아볼게요오-

게요오-

요오-

10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수직 동굴에서 우리를 구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대신 본래 고블린 왕국으로 들어가는 포탈의 자리부터 수색하겠다는 장진아와 민태준.

바바리안 부족들이 내 집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포탈의 자리를 찾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니, 땅 파면 나오는 곳인데 굳이 왜 포탈을 만들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들긴 한다마는.

"이것도 테라포밍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내 생각에는 포탈이 공략되면서 이곳이 지구에 덧씌워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들 상태창은 열립니까?"

"어?"

"이게 되네요. 천장이 뚫려서 그런가?"

나 역시도 저들처럼 상태창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 90일 만에 본 상태창에는 변한 것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보호 조치 해제로 인해 개인 능력치 표기가 사라졌습니다.」

「이계(異界)의 신성이 개입합니다.」

「집사(執事)의 상태창이 업데이트됩니다.」

「스킬 시스템이 요새 관리로 통합됩니다.」

「설계도가 업데이트됩니다.」

「균형의 천칭이 사라졌습니다.」

「불사자 각인이 상향조정됩니다.」

「이계(異界)의 강대한 신성이 개입했습니다.」

「인벤토리 보상이 개방되었습니다.」

「랭크 순위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상태창을 열자마자 떠오른 메시지다.

아니, 로그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 동굴에 갇힌 동안 변화한 것들이 한번에 로그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으니.

그리고 그것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류의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인류에게 마지막 보루(堡壘)가 주어집니다.」

「광범위한 정보 공유와 소통이 최후의 보루로 지정되었습니다.」

「커뮤니티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거래소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랭크 상위자를 위한 집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몬스터 킬 랭킹 1위 이준(李俊)님께서는 20분 뒤 시작되는 집회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어우, 어질어질하네요."

"그쵸... 뭐가 이렇게 많아?"

저들에게도 많은 메시지들이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와 그 내용은 많이 다를 테지만.

「이계(異界)의 신성이 아기 고양이 로라에게 강력한 축복을 내렸습니다.」

「이계(異界) 신성이 소멸되었습니다.」

까지가 내게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인데....

지구의 신도 아니고 이세계 신이 소멸했다고?

아니, 신성이 소멸했다는 걸 보면 힘을 다 썼다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하겠다.

그래서 생각을 멈춘 채 먼저 보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이준 32세 / 보유 포인트: 105,432,660p」

「클래스: 집사」

「칭호: 최초의 각성자, 신성의 대리자」

「각인: 불사자 각인」

「스킬: [요새 관리], [설계도], [고양이 관리]」

우선 첫 번째 변화.

레벨과 능력치 표기가 사라졌다.

"레벨이랑 능력치는 대체 왜 있던 거죠...."

그러게 말이다.

'집사력'으로 표기되는 나의 것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있었다.

힘의 수치, 스킬의 적응을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유추는 하는데.

끝까지 '능력치' 상태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변화가 불행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태창에 표기는 사라졌어도 나의 힘의 근원이 '집사력'이란 것을 알기에, 나는 여전히 내 몸에 깃든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은 마력인데. 애초에 남에게 배운 마법은 스킬로 표기가 안 되기도 했고요."

"아, 오러도 그래요. 저도 은신 쓰는 게 스킬이 시작이긴 했어도 존재감 조절하는 건 직접 익힌 거라서요."

강소현과 이하린도 나와 비슷한 모양.

이러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힘의 근원을 못 찾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와 달리 상태창에 '능력치' 탭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

지구를 관찰하는 학파나 마탑 같은 것들에게 2차전직을 제안 받지 못한 자들이 도태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선택받지 못했어도 힘의 근원을 찾았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사실상 가망이 없다.

"...아, 다른 사람들한테 배워야겠네요."

그렇다.

세상이 망하고도 사람은 사람에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무력이 전부가 되어버린 인류에게 과연 배움이란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싶다마는.

어쩌면 현대의 사교육 열풍이 각성한 인류에 맞는 방식으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것도 인류가 문명을 재건한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아무튼.

"각자 점검 좀 합시다."

우리끼리의 대화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했으니까, 지금은 90일 만에 만난 상태창에 집중할 차례다.

* * *

"...네? 그게 말이 돼요?"

"진짜긴 하겠지만… 진짜 이해가 안 되는 능력이네요."

내 능력이 바뀔 때마다 듣는 말들이다.

"그래서 해보겠습니까?"

상태창의 점검을 마치고 강소현과 이하린에게 새로이 얻은 능력 중 일부를 소개해주고 테스트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을 뿐인데―

"...그걸 저희보고 테스트하라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아저씨, 그건 나도 못해줘요."

대차게 거절당하는 중이다.

[요새 관리]

[거주민 관리]

[시설 관리]

[편의성 관리]

기존의 스킬들이 '요새 관리'라는 카테고리로 통합되었고, 그 안에는 이런 것들이 추가 되어 있었다.

[편의성 관리]

[요새 수납 - 이동식 요새를 인벤토리에 수납한다.]

그리고 말 같지도 않은 기능이 생겼다.

"아니, 사람이 들어간 상태에서 수납이 되는지 확인을 왜 우리한테 하냐고요!!"

나 자신으로 먼저 테스트해보았으나, 내가 요새와 접촉한 상태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강소현과 이하린에게 이런 요청을 한 것이고.

"...처음 봤을 때와는 나름 많이 변했다고 느꼈는데, 어떤 것은 또 그대로네요. 아니, 어쩜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을까?"

극찬의 말은 덤이다.

뭐, 잘못되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니 내 실수는 맞다만....

나중에 식인종이라도 하나 잡아와서 실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소현과 이하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들 새로 얻은 능력은 없습니까?"

장진아와 민태준이 포탈의 자리에 갔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워낙 다들 변한 게 많아서 자세한 정보 공유는 못 해도,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날 만한 것들을 얘기해 보았다.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로 시작해 유일한 후계자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강소현.

그녀는 '유일한'이라는 말에 어울릴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대부분이 마법서 같은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고, 복잡한 마법들은 나름 공부를 해야지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당장 쓸 수 있는 마법으로 무려 '하늘을 나는 마법'을 배웠다고 한다.

"플라이."

고급 공용 마법이라 척 보고도 쓸 수 있다는데.

"딱히 쓸모는 없네요."

그녀 말대로 이 상황에서 쓸만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10m 위로 나는 것이 한계였으니까.

다음은 이하린.

이하린도 이것저것 많이 받았다는데.

"저는 임무를 받을 수 있대요."

받는다는 말이 어째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른 의미였다.

"임무...?"

"아직 잘은 모르겠네요. '의뢰자를 찾는 중'이라고만 나와서요."

그말인즉슨.

이하린은 암살자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데, '누가 누구를 죽이라 의뢰하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오러 연공법 다음 권을 받은 게 끝이네요."

이하린 역시도 100m 지하 동공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요새 비행 같은 건 없어요?"

"언니 말처럼 왠지 나올 법한데요."

저들이 말한 것처럼 언젠가는 그런 것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마는 지금 당장은 '요새 수납'이 전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인내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과 녹색 섬광이 내리치는 환경에서 90일을 생존해 본 경험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런 환경에 처하면, 같이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대로 계속 갇혀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

요새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며, 수면과 식사의 질이 매우 낮았기에 스트레스 해소할 거리가 필요해서.

뭐, 각종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음식, '고블린 고기'를 먹으면서 90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된 일이다.

고작 대화로 정신을 잡기에는 너무나도 고독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대화 말고도 우리의 정신을 잡아준 존재가 있었다.

『키야오오-!!』

우다다다다닷-!!

고블린의 이상한 주술이 만들어낸 녹색 섬광을 막아주던 로라.

첫 30일간은 워낙에 위력이 강해서, 로라도 제법 무리를 했었다.

나중 가서는 보호의 룬이랑 1일의 텀을 두고 교대를 했지만, 아무튼 로라가 고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로라가 쉴 때는 우리 셋이 집중적으로 케어를 해줬고.

타타타탓-!!

"로라!!!"

그 결과 결국 이하린마저 로라의 마성에 굴복했다.

그간 로라에게 딱히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는데, 고블린 동굴에 있는 동안 로라에게 정을 제법 많이 붙인 모양이다.

저렇게 서로 쫓고 쫓으며 노는 것을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놀이 시간을 마친 로라와 이하린이 나란히 천장의 구멍으로 쏟아지는 햇빛 위에 드러누웠다.

『냐아~!』

"하아~!!"

로라 역시도 90일 만에 보는 햇빛이 반가운 모양이다.

『고로롱~ 고로롤롱』

이 로라의 귀여움이 우리가 제정신을 붙잡을 수 있게 해준 비결이다.

나는 저 광경을 바라보며 강소현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흠, 여유롭게 쉬는 건 좋은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처럼 나도 '슬슬 뭐라도 해야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던 차에 타이밍 좋게 구멍 위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형니이이이임-

니이이임-

이임-

민태준의 말에 따르면 포탈이 있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 대신 저들은 어디서 모아온 재료들로 말도 안 되게 긴 동아줄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촤르르르륵-

100m 길이의 줄이 내려오고 있다.

어디선가 주워온 철근, 쇳조각 따위를 늘리고 엮어 만든 기다란 줄이었다.

요새애애애-

느으으은-

어찌이-

위에서 요새는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 들려왔는데.

저렇게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대답하는 대신 대뜸 동아줄에 매달렸다.

"다들 꽉 잡으시죠."

『냐아-!!』

로라도 지긋지긋한 이곳을 탈출해서 제법 신이 난 모양이다.

'요새 수납'을 사용해 이동식 요새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올려어!!!"

줄에 매달려 지상을 향해 올라가는 우리는 제법 들떠 있었다.

"이준 씨, 밖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시간 비율이 다른 '차원의 틈새'라는 곳에 다녀왔기 때문에 강소현은 저런 의문을 가졌고.

"...아저씨, 밖에도 고블린만 먹고 살까요? 루토가 다시 자라긴 하겠지만...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하준이 오고 나서도 고블린 고기를 먹어야하면 어쩌죠?"

이하린은 식생활에 대한 걱정을 시작했다.

"...."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촤륵-

촤륵-

촤륵-

아니, 생각이 있긴 하다.

초인까지 된 인류가 왜 이렇게 느릿느릿 줄을 당기는지에 대한 의문이다만.

"아, 그러게요."

"초속 10cm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햇살이 내리쬐고 있으니 기분 좋게 이 순간을 만끽했다.

* * *

우리가 줄에 매달려 지상에 도착하기까지는 서너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형님, 어휴... 살아계신 건 알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올라온 우리에게 엄청난 땀을 훔치며 민태준이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지만, 먼저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밖에서는 대체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그래서 물었고.

"90일 정도 지났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형님, 고블린 왕국이 있던 포탈을 정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어찌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보다 덩치도 크고 강직해 보이는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저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처음에는... 형님이 저희에게 안전구역을 맡기고는 그냥 가버리신 줄만 알았습니다."

뭔가 오해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마는.

"사람이 사람을 먹고, 먹은 사람의 힘을 갈취해가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먹지 않더라도 어린아이의 굶주림과 고통을 외면하고, 타인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게 되어버린 세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눈물을 글썽이는 거구의 사내의 진중한 말에 압도되어 버렸기에 변명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아끼는 그런 형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정말... 가슴 깊이 감동했습니다. 존경합니다, 이준 형님."

또각, 또각.

수납한 요새를 꺼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또각, 또각.

저따 대고 뭐라 말을 해야겠는가?

오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쪽이니 상관없겠지.

"푸흡."

"크흐읍."

『냐아앗-!! 냐앗-! 냐!!』

뒤에서 웃음이 터진 이하린과 강소현.

그리고 로라까지.

"...."

어딘가 말을 잃은 듯이 멍해진 바바리안 부족들.

여기서 더 나가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도 말을 하려 했지만.

"동료분들도 강직하기 그지없군요. 90일간의 지옥을 경험하고도 저렇게 밝은 모습이라니...."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민태준의 말에 그 타이밍마저 놓쳐버렸다.

"사실 그간 저희도 나름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물론 형님에 비한다면야 고난도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하필 이어지는 말이 너무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었기에, 이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강소현과 이하린에 로라까지 전부.

"형님이 사라지시고 얼마 안 가 이상한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여자의 등장으로 시작된 민태준의 말.

그의 말을 듣다 보니, 그가 어디서 고블린 왕국 정벌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바리안 부족들은 집터의 앞에 있던 포탈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민태준이 그쪽을 통해 내 상황을 알게 된 줄 알았었는데.

"...그, 무슨 성녀? 신성력으로 로라와 형님을 봤다는데. 그 여자 무리가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그는 자칭 성녀라는 이상한 여자에게 내 상황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장진아 님 얘기랑도 얼추 맞아 떨어져서 믿었죠. 그리고 이렇게 형님이 돌아오심으로써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민태준의 보고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용산구청이 있던 안전구역에 도착했다.

안전구역의 경계 너머로 빽빽하게 파란색 점들이 찍혀 있는 걸로 보아, 저들이 민태준이 말했던 이상한 여자와 그 일행들 같은데.

"형님, 갑자기 왜 멈추시는지...?"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벤토리에 수납해두었던 요새를 꺼내며 그에게 말했다.

쿠구구구궁-!!

"다들 타시죠."

외부인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무릇 강대한 무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54. 이상한 사람들 (1)

쿠우웅-!

다같이 요새를 타고 안전구역 외부에 자리 잡은 이상한 여자를 만나러 갔는데.

이상한 여자 대신에, 이상하다 못해 미쳐버린 사람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것도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신의 재림을 경하드리옵니다-!!!""""

약 이천여 명의 사람들이 내 요새를 향해 절을 하며 외친 말이다.

"태준 씨? 이상한 사람들이라 했지, 미친놈들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강소현이 민태준에게 물었고.

"저,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민태준은 답했다.

지이이익-

지이익-

그리고 요새를 향해 엎드려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닥을 질질 기어서 요새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

말문이 막혀버려서 나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엎드려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일어서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민태준이 말했던, 이상한 여자가 저 사람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저 질문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저, 저요?"

대뜸 이하린이 역으로 물었고.

"...."

이상한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맥락상 나일 가능성이 높다만, 혹시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강소현에게 턱짓을 했다.

"에휴, 이 미친 사람들. 저 말하는 건 아니죠?"

"...."

강소현도 아니었고.

민태준과 장진아 일행은 이미 만나봤으니,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남은 것은 나와 로라.

"저 말하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칼같이 들려온 대답.

"일어서시죠."

신의 재림을 운운한 걸로 보아 주체가 로라가 아닐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질문의 대상은 나였다.

후두두둑-

순백색 로브를 걸친 여자가 일어섰고, 바닥을 질질 끌며 오느라 붙어 있던 돌조각과 흙 따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일한 신의 대리자, 이준 님을 뵙습니다."

그러고는 그녀가 내게 다소 과한 수준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통성명이라기엔 자기소개가 없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이준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본론부터 물었다.

"...."

그리고 이상한 여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타인을 해하며 이득을 취하는 자들은 멸망 전에도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하고서는 타인을 해한다는 수준이 살인과 식인으로 바뀌었죠. 허나, 이준님은 이미 강한 무력을 지니고 계심에도 인류를 위하고자 지하에 준동한 악을 해치워 주셨으니. 이 성녀, 정하나. 가슴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상한 여자의 직업은 자칭 성녀였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뒤에 늘어선 광신도들도 그러하니.

성녀와 퍽이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주신 로라님의 유일한 대리자, 이준님."

그 신앙의 대상이 나와 로라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니, 비주얼과 분위기는 성녀였지마는 말하는 것이 어딘가 사이비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말투였다.

"저희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성녀가 선창하면, 뒤에 엎드려 있는 이교도들이 후창한다.

"2,132명이네요."

그때 귓속말로 이하린이 내게 속삭였다.

"...."

그말인즉슨.

내게 2,132명의 공짜 인력이 생겼다는 말이다.

물론 좋은 점만 말하자면 그런 거고, 세세하게 따져보자면 문제가 좀 많다.

식량도 없는 판에 안전구역의 거주할 사람과 먹을 입이 늘어났다는 것.

허나, 이 문제는 성녀의 이어진 발언을 통해 해결되었다.

"―저희의 안전구역과 모아온 공물을 주신과 그 대리자께 바치겠나이다."

라고 했으니까.

"어질어질하네요."

강소현의 말대로 진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분명 저들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21세기 첨단 문명을 누리던 인류였을 텐데, 어쩌다 저렇게까지 망가졌는지....

랭킹으로 참여하는 집회도 아직 못 가봤고, 변화한 능력과 상태창의 확인도 남은 것들이 많은 상황인데 이제는 사람에 대한 문제까지 추가가 되었다.

단순한 사람도 아니고 미친 광신도로 추청되는 2,132명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뭐라 말은 해야겠으니.

"뭐, 더 없습니까?"

일단 뭘 더 줄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와, 이준 씨 진짜."

"미친. 아저씨, 여기서 그게 할 말이에요?"

바바리안 일행과 민태준은 말이 없었지만,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판단은 정확했다.

"저와 모든 신도들의 몸과 마음을 바치겠나이다."

"저희의 삶과 죽음. 얻은 것과 얻게 될 모든 것을 온전히 그대에게 맡기겠으니―"

조금 많이 지나치긴 했지만....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나 싶었다만.

"저희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일단, 준다니 받기로 했다.

나 이준, 준다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 남자다.

* * *

준다는 것들을 받기는 받는다고 했는데....

극심한 광신도들의 모습에 소름이 끼쳐 우선 안전구역의 내부 상황부터 점검하겠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안전구역 안으로 도망쳐 왔다.

그리고 나는 안전구역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아... 이건 또 뭐냐."

안전구역에 들어선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으니까.

"...이준 씨, 밖이고 안이고 어째 점점 이상해지는데요?"

강소현이 말했고,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장진아를 쳐다봤다.

"아... 그, 안전구역의 주인이 왔다고 알림이 뜨면서 이준 씨 방향으로 빛이 일어났어요."

라는 장진아의 설명 덕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전구역 1의 주인이 도착했습니다.」

저들의 눈에는 이런 메시지와 함께 나를 향해 흘러가는 빛무리가 보인다고 한다.

"저도 이건 처음 알았습니다."

라고 말하며 시선을 내리깐 장진아.

안전구역의 사람들이 광신도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 한숨 돌렸는데,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보인다.

발가락을 보고서 이제 서야 눈치 챘는데, 장진아와 바바리안 부족들은 옷차림이 조금 변해있었다.

"...그, 야성이 진화했다고."

내 시선을 눈치챈 장진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들은 원래의 복장도 표범무늬 가죽 쪼가리를 걸친 것이 다였는데, 이제는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니고 있다.

옷도 더 거친 느낌으로 변한 것 같고.

그래서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는고 저들도 우리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상태창의 간략화, 스탯과 레벨의 삭제.

스킬의 개편 및 추가적인 능력의 발현 등등.

"그래도 맨발로 다니는 건 좀 불편하지 않습니까?"

"맨발로 다녀야 힘이 더 좋아진답니다."

뭐, 맨발로 다니는 것조차 직업 특성이라고 하니,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형님, 우선 이곳 상황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장진아와의 짧은 대화가 끝난 후, 민태준이 대략적인 상황 브리핑을 시작했다.

분명 내가 '치안 관리자' 권한을 주고 이곳을 관리하라 부탁한 것은 장진아였는데, 실질적인 관리는 민태준이 도맡아서 한 모양이었다.

"상납, 크흠, 아, 아니. 세금으로 모아둔 광석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없는 90일 동안 민태준의 주도하에 이세계 광산에서 '마력석'을 잔뜩 모아뒀다고 한다.

"이곳이 마력석을 수집해둔 장소입니다. 24시간 4교대로 철저하게 경계조를 운영하고 있어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산처럼 쌓인 광석을 보니 노동 착취가 이뤄지지 않았나 우려가 든다.

"...제대로 대우는 해준 거지?"

"아, 거기서 일하면 고블린 대신 끼루루라는 이상한 벌레를 먹을 수 있어서... 다들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너도나도 좋아라 이 짓을 했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밖의 식량도 '고블린'이 주식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저들도 새로운 능력을 얻지 않았을까 싶어 물어봤는데.

"다들 이능을 얻긴 했는데, 기껏해야 고블린들이 쓰던 침 뱉기 스킬 정도였습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이상한 함성을 지르는 스킬도 얻었고. 뭐, 그렇습니다."

민태준과 대화를 하며, 알게 된 것들이 제법 많다.

"고블린 고기만을 30일 연속해서 먹으면 이능을 얻게 됩니다."

나의 경우는 테스트할 사람이 고작 셋뿐이었기에 정확한 조건을 알진 못했는데, 이곳 안전구역에는 사람이 천 단위로 있었기 때문에 몬스터 고기로 이능을 얻는 조건이 명확하게 규명된 상태였다.

"60일을 먹어도 추가 변화는 없는 걸로 봐선, 몬스터 종류당 1회 한정으로 추정됩니다. 뭐, 다른 몬스터가 나와봐야 알겠지만요."

그리고 고블린 왕국을 멸했음에도 밖에서는 고블린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고블린 외의 능력을 얻은 사람들이 꿈에서 가장 많이 본 몬스터가 '오크'였다고 하는 걸로 보아 조만간 오크들도 지구에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오크를 먹으면 또 능력을 얻는 구조일 것이고.

"저는 좀 다른 꿈을 꿨습니다."

민태준은 몸에서 이상한 가루를 뿌리는 이능을 얻었고, 꿈에서는 거대한 나방이 나왔다고 한다.

"그, 사실 광산에서 일하면서 끼루루라는 걸 좀 많이 먹었더니.... 아, 끼루루는 몬스터가 아닌지 맛이 제법 좋았습니다. 형님도 구운 끼루루 한 번 드셔 보시죠."

나방을 먹은 후 고블린을 30일 연속으로 먹었다는 민태준.

나름의 권력을 줬더니, 권력자답게 민태준은 약간의 타락을 했다.

고블린이 먹기 싫어 광산 노역을 한 것을 타락이라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내 기준에서 보자면, 민태준이 상당히 믿을만한 사람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무려 약 3개월을 자리를 비웠는데, 이곳을 아무런 문제없이 관리한 것이 아닌가?

망하기 전의 세상을 기준으로 보아도 사업체나 돈 따위를 그 따위로 맡겨두었다면, 진작에 다 털렸을 것이다.

허나, 민태준 그는 신의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와의 첫 만남부터가 강렬했다.

고블린의 역겨운 맛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그것을 참아내던 민태준.

고블린의 맛으로 사내다움을 논하기에는 조금 웃기긴 하겠지만, 그것을 참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사내 중의 사내라는 것은 증명된 것이다.

고블린 고기의 맛은 나조차 버티지 못하는 그런 끔찍한 맛이니까.

게다가 그는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우직함과 정직함까지 증명했다.

"형님은 어찌 이리 관대하시기까지...."

그의 착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지만, 나를 좋게 보는 방향의 오해임을 알기에 그냥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

"이준 형님, 그래서 그 밖에 광신도들은 어찌하실 건지?"

아무튼 안전구역의 내부 상황 파악도 마쳤으니, 이제는 다시 이상한 여자에게 돌아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 차례다.

"...결국 그 미친 사람들 받아들이게요?"

"아저씨, 너무 미친 사람들 같은데 잘 생각해 봐요."

망한 세상에서 안 미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은데, 강소현과 이하린은 저들만큼은 안 미쳤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손해는 없지 않습니까?"

저들이 바치기로 한 것 중에는 무려 '안전구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들을 합병한 이후에 적어도 영토 문제로 속을 썩일 일은 없다는 뜻이다.

저들을 받아들인다면 일전에 나왔던.

「신전을 지어 신앙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라는 메시지로 보아 신전을 지어 신앙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만, '신성의 조각'과 비슷해 보이는 느낌이니 결코 손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이 세계의 전부는 무력이고.

신성이라는 미지의 힘을 다루는 로라와 그 집사인 내게 있어서, 저것이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일테니.

* * *

"유일신 로라님과 대리자 이준 님을 배알하나이다."

""""배알하나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왔음에도 광신도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단 호칭부터 정리합시다."

저런 미친 상태로 멀쩡한 대화를 하기란 어려워 보였기에,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이름으로 부르시고, 신의 대리자나 배알한다같이 부담스러운 말은 쓰지 마시죠."

"...그, 아, 알겠습니다. 이준 님."

""""알겠습니다. 이준니임-!!""""

정리를 했음에도 정리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저 이상한 선창 후창도 멈추고, 대표자 한 분만 나와서 얘기하시죠."

"...네."

울상이 된 표정으로 이상한 여자가 대답했다.

"그래서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성녀고 나발이고, 너도나도 죄다 각성자인 세상이기 때문에 '각성 직업' 때문에 저 꼴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저들이 미쳐버린 사정을 먼저 물었다.

"그저 믿었을 뿐입니다."

성녀 정하나.

이상한 여자라고 소개받았던 만큼, 멀쩡한 화법을 쓰고 있음에도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 한 번의 대화로 확신할 수 있다.

절대 눈앞에 서 있는 여자와 그 뒤에 엎어져 있는 저 광신도들과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함을.

그래서 다른 것을 물었다.

"안전구역 합병이 뭡니까?"

주르륵―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그녀.

"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흐으윽."

90일의 감금 시간보다 이 미친 사람들과의 짧은 만남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감정을 추스르며 말하기 시작한 자칭 성녀 정하나.

일전에 안전구역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고블린 왕국 정벌에 정신이 팔려 모든 메시지를 뜯어보지는 않았었다.

"안전구역의 주인은 다른 구역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자칭 성녀 정하나.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다른 안전구역을 합병하기 위한 방법이 두 가지 존재한다고 한다.

1. 전쟁을 통한 무력 합병

2. 자진 상납

자칭 성녀가 정한 방법은 '2'였다.

그걸 받는 사람은 나이고.

"저희의 공물을 받아주시옵소서."

분명 저리 말하지 말라 했건만.

뭐라 잔소리를 하려 했는데, 곧장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안전구역 7이 안전구역 1에 통합됩니다.」

「안전구역 7의 면적만큼 확장하시겠습니까?」

「Yes / No」

저들이 있던 곳은 노원역 부근이라고 한다.

그리고 No를 고르면, 용산과 노원을 왔다 갔다 하는 비효율적인 동선이 탄생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Yes를 골랐다.

「안전구역 1과 7이 통합됩니다.」

「랭크보드가 갱신됩니다.」

파앗-!

「영토」

1위. 이준(획득 구역 2) - 대한민국

#55. 이상한 사람들 (2)

파앗-!

「영토」

1위. 이준(획득 구역 2) - 대한민국

2위. 미집계

3위. 미집계

안전구역 두 개를 먹었다고 랭크보드에 하나의 탭이 더 추가되었다.

단 한 개의 안전구역만을 소지한 사람은 랭크보드에 집계되지 않는 모양이다.

간만에 랭킹을 확인한김에 몬스터 킬과 플레이어 킬에 대한 것도 보았는데....

「몬스터 킬」

1등: 이준(1,218,876) - 대한민국

2등: 레이먼드 레밍턴(365,884) - 미국

3등: 존 스미스(122,584) - 미국

4등: 풋타엿파쭐라록(98,665) - 태국

.

.

.

23등: 강소현(53,228) - 대한민국

.

.

.

34등: 이하린(49,099) - 대한민국

고블린 왕국에서의 킬이 랭크 보드에서는 집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킬이 강소현과 이하린에게도 조금 나눠져 들어간 것 같고.

「랭크 순위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랭크 상위자를 위한 집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에 나왔던 메시지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랭킹에 대한 보상은 이미 주어졌다.

그 이후에도 뭔가 컨텐츠가 있는지 랭킹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신성의 조각」

무려 신성이 붙은 보상인 만큼 얻는 족족 로라에게 먹이려고 했는데, 이것도 소화가 필요한지 아직은 더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 내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다.

보상은 보상이고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랭크보드의 숫자로 미루어보아, '랭크 상위자를 위한 집회'에서 저 순위로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추측이 든다.

"이준 씨? 상태창 보셔요?"

"아, 네. 이하린, 강소현 씨 두 분도 확인해 보시죠."

랭크 페이지는 이래저래 변화한 것들이 제법 많았다.

'몬스터 킬' 탭의 유일한 대한민국 사람이 나였는데, 어느새 강소현과 이하린까지 여기에 껴 있었고 십만 단위로 치고 올라온 자들도 제법 있었으니까.

「플레이어 킬」

1등: 제인 스미스(2,302) - 미국

2등: 린쒄(2,139) - 중국

3등: 가가와 시게유키(2,054) - 일본

.

.

.

66등: 곽성룡(1,129) - 대한민국

.

.

.

83등: 강두식(736) - 대한민국

내친김에 플레이어 킬도 확인을 해봤는데, 한국인이 둘이나 올라와 있었다.

"아니, 몬스터도 아니고 사람을 수백에서 수천 단위로 죽였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러게요."

나도 다름 수백의 식인종을 죽였건만, 랭킹 끝자락에조차 들지 못했으니까.

뭐 저리 미친 살인귀들이 많은지.

아무튼 랭킹의 확인을 끝내는 동안에도 광신도들은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참에 나는 '안전구역' 탭을 확인했다.

「안전구역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가로세로 1km짜리 정사각형의 공간을 기존의 구역에서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내게 합병된 안전구역 7에도 이세계 테라포밍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성녀에게 물었다.

"광산 같은 건 없었습니까?"

"호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전구역 7에는 '물'이 있었다.

민태준의 말에 따르면 그간 수분 공급은 '고블린'의 피 혹은 끼루루를 짓이겨 만든 액체로 공급해왔다고 하는데.

이런 문제들도 한 번에 해결이 된 것이다.

성녀의 말에 따르면 내부 '이세계 자원' 같은 것들은 구역 병합과 함께 따라오게 된다고 하니까.

주르르륵―

"흐윽…."

우선 안전구역 설계를 어찌할 지 고민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녀 정하나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또 어떤 미친 연유로 눈물을 쏟는지 모르겠다만, 절대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저, 저희의 공물을 받아주시다니...."

제멋대로 이유를 말하며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흐윽...."

"이, 이준 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어."

"오, 로라 신이시여!!"

그것이 시발탄이라도 되었는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신도들도 너도나도 다같이 울어재끼기 시작했고.

"미친...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냐."

나쁜 일은 하나도 없는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었더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하나 떠올렸다.

"갑자기 내려가자고요?"

묘책을 실행하기 위해 다 같이 요새에서 내려가 광신도들과 내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저들이 무해한 것은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강소현을 설득하고 이하린에게도 설명을 해주려 했는데, 이하린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상관은 없다.

"크흠, 정하나 씨."

"...이, 이름을!!!"

"여기 이분은 수의사이자 백색 마탑의 마법사인 강소현이라고 합니다. 강소현 씨, 이분은 스스로를 성녀라 부르는 정하나 씨입니다."

그렇게 내가 시작한 일은 강소현과 자칭 성녀의 만남 주선이었다.

"...네?"

"...네?"

동시에 두 여자가 대답했고, 나는 설명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강소현 씨가 이제 저를 대신해서 성지 건설과 신자들과의 소통 업무를 담당하실 겁니다. 저는 안전구역 설계라든가 개인 정비, 주신 로라의 관리 등등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의 업무는 강소현 씨를 통해 진행하시면 됩니다."

라고 쏘아내듯이 말하고.

「안전구역 1로 이동합니다.」

요새를 수납한 직후 안전구역의 텔포 기능을 사용했다.

로라의 목걸이로 하는 텔레포트와는 다르게, 마법진이 나타나거나 빛무리가 일거나 하는 일 없이 순식간에 용산구청의 잔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로롱~ 고로로롱~ 고로롱』

광신도들과의 만남부터 죽은 듯이 자는 척을 하던 로라.

로라 역시도 그 상황이 제법 부담스러웠는지 상황이 해결되자마자 곧장 골골송을 부르며 기분 좋은 번팅을 시작했다.

로라가 내게 하는 행돌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헤드번팅(Head Bunting)이라는 것인데.

코옹-!

코옹-!

검은색 부드러운 털복숭이 머리통을 내게 들이미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뭐, 쉽게 말해 박치기를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이고.

것도 아주 극상의 친근감을 표현하는 거다. 신뢰감 없이는 이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코옹-!

고양이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이자, '너는 내 집사다'라는 선언하는 행위가 바로 번팅인 것이다.

우측 어깨의 안장에서 내 볼을 향해 머리를 들이박던 로라가 이내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고,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원래도 이 번팅은 사람과 고양이 둘 모두의 엔도르핀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로라는 무려 신성을 지닌, 아니, 이제는 신이 되어버린 고양이었기 때문에.

키이잉-!

로라가 머리를 박을 때마다 기이한 소리를 내는 금빛 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몸에 스며들었고.

"...로라는 정말 대단해."

나는 감탄뿐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코옹-!

로라의 번팅이 주는 추가 효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각성 효과'였다.

커피를 마시고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각성 효과였다.

광신도들을 만나며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함과 동시에 능률과 집중력이 마구마구 올라가기 시작했으니까.

『냐, 냐나냐!! 냐!』

아무튼, 로라가 이 행동을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광신도들이 무섭긴 한데, 신전은 빨리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전해왔다.

뭣도 모르는 아기 고양이지만, 고양이라는 동물답게 신성에 대한 본능이 제법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청난 각성 효과.

소위 말하는 '약 빤 것 같은' 능률이 생겨서 그런지, 머릿속으로 할 일들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었다.

할 일이 정리되었으면, 이제 행동에 옮기는 것만 하면 된다.

* * *

"유일신 로라님의 옥체를 책임지시는 신의(神醫) 강소현 님을 배알합니다."

"...."

광신도들과 함께 버려진 강소현.

강소현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준이 사라지고 순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던 자칭 성녀 정하나는 순식간에 포커페이스로 변해 강소현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했다.

'미친 사람들.'

강소현은 성녀의 모습에서 이준과의 첫만남이 떠올라 버렸다.

세상이 멸망하고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그때, 이준은 자신을 찾아와서는 대뜸 이상한 말을 했었다.

-혹시 진료 보십니까?

그리고 그때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이뤄지고 있었다.

"다친 신도들을 보살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의사지만 신의 수의사라 신의(神醫)로 불리게 된 강소현.

호칭의 정정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녀는 노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신의 사도(使徒)이자 신의 옥체를 보필하는 강소현 님을 배알하나이다.""""

사극에서조차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부담스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들.

그리고....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자신을 두고 인파들 속으로 사라지는 성녀 정하나.

"미친년...."

작게 읊조리는 강소현.

그리고 속으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미친놈.'

그 주체는 자신을 두고 도망가버린 이준이리라.

절뚝, 절뚝.

그래도 강소현은 강소현이다.

세상이 망하고 백색 마탑에 속하면서 포악함과 잔혹성을 배웠다 해도.

그녀는 강소현이기 때문에.

아프고 무해한 약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 사도니임...."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강소현에게 다가왔고.

"어르신, 기절시켜드릴까요?"

강소현은 물었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다.

"기, 기, 기절요?"

허나, 사람들은 이것이 배려라는 것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볼 때는 강소현은 다소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흉악하게 생긴 모닝스타를 꺼내 들고 있고, 힐러라기에는 분위기 자체에서 어딘지 모르게 위험해 보이는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시, 신의 품으로 보내주신다는 말입니까?"

이준과 강소현 그리고 이하린.

이 셋은 대부분을 셋이서만 생활했다.

게다가 동굴 속에서 90일 내리 셋이서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셋은 다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상한 사람 셋이서 이상한 대화를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줬으니, 그 가치관과 대화의 기준 같은 것들이 어긋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강소현은 대답했다.

'신의 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백색 마탑의 힐은 제법 아프니까.'

그녀의 행동은 분명 세심한 배려였다.

모닝스타가 노인을 향해 올라간다.

"...아아, 주신 로라시여. 이 노구를 걸음삼아 부디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해주소서."

노인은 눈을 질끈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토옥-

그리고 모닝스타가 노인의 이마를 살짝 건드렸을 때 노인은 의식을 잃었다.

"…이, 이게 어찌."

다시 일어났을 때 노인의 말라비틀어진 다리가 재생되어 있었다.

"아아, 아직 제가 품으로 갈 때가 아닌가 봅니다."

노인의 주변에는 병자들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병자는커녕 죄다 멀쩡한 사람들뿐이 보이지 않았다.

"나찰(羅刹). 꼭 그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악귀와 같은 무서운 모습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이롭게 해주셨으니."

"하하, 어르신 말이 맞습니다.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을 봤음에도 저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게 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세. 주신 로라와 사도님들에 대한 믿음이 말이야."

"그 말이 맞습니다. 어르신."

로라교.

아직 정식 명칭은 없으나, 아기 고양이 신을 모시는 종교인들에게는 '사도, 나찰(羅刹) 강소현'이라는 이름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곳을 돌아다니던 강소현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쳐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어, 어디 있었다고요?"

"저희는 모두 지하철역에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망하고 강소현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밖에 나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구나.'

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온 자들과 소통하면서 자기는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이라.... 지금에 와서는 저희 모두 그리되어 다행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주신 로라님에 대한 지고한 믿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

2,132명의 광신도들.

그들은 모두가 지하철역에 대피해 있었다.

첫 지진에는 지하철역은 멀쩡했으나, 카운트가 0이 됨과 동시에 지하철역은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고블린이 나타났고, 그들 역시 각성을 했다. 저마다 다양한 직업을 골랐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은 '힐러'였다.

"돌무더기에 깔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를 하니까 몬스터들이 나타나더군요."

그렇게 처음의 믿음은 배신당했다고 한다.

"돌무더기에 깔린 사람들끼리 온갖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래도 인간이기에 서로 협력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겨우 살만해졌다 싶더니 또 폭발과 함께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포칼립스가 찾아올 때부터 보호조치 완화부터 해제되기까지.

세상은 계속해서 부서졌고 지하에 매몰된 인간들은 점점 지옥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다리를 버리고 팔로 기어 움직이는 자, 팔이 잘려 다리로 밥을 먹는 자, 장기가 짓눌려 죽어가는 자들까지. 자살한 사람도 제법 많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암울해졌다.

중년 여성과 대화하던 강소현을 향해 한 여자가 걸어오며 말했다.

"...그때 믿음이 찾아왔습니다."

성녀 정하나였다.

"저는 양팔과 양다리를 잃었고."

그녀는 그리 말하며 로브를 벗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의 팔다리엔 절개선 같은 것이 있었고, 절개선 위로는 작은 고양이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 없어서 기도를 한 것도 있었지만, 하다 보니 보답받는 기분이 들어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지하철역에 매몰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고블린.

그것은 절대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죽기 직전에서야 그 괴물들을 뜯어먹고 연명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살 바엔 죽자고 결심했죠."

성녀도 그렇고 성녀 옆에 있던 노인도 그랬으며,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하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고블린까지 나타났으니,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것은 덧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죽으려던 그때 빵과 물이 내려왔습니다."

죽어가는 몸뚱이.

힐 따위로는 붙지 않는 팔과 다리.

식사를 할 수 있음에도 살아남기에는 요원해보였다.

"그때 하늘에서 포션이 내려왔습니다."

팔과 다리가 재생되지는 않았어도 달랑달랑 붙어 있던 것들이 회복되기는 했다.

"그렇게 한 팔과 한 다리로 살아갔죠."

지하에 매몰된 사람들은 모두 결핍이 있었다.

누군가는 팔이 없었고, 누군가는 다리가 없었으며, 누군가는 사실상 머리랑 몸통만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저희는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하늘에서 금빛 신성이 몰아쳤습니다."

그렇게 정하나는 성녀가 되었다.

"2차 전직,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신의 기적만이 제게 찾아왔을 뿐이죠."

꿈에서 로라와 이준을 봤단다.

사지를 잃고 무력하게 누워 있던 그녀가 꿈을 꿀 때마다 빵과 물이 떨어지고 포션이 내려왔고, 이윽고 사라진 팔과 다리까지 재생되어 갔단다.

"...그리고 돌무더기에서 탈출했을 때 비로소 저는 제 역할을 깨달았습니다."

지하철 돌무더기에 깔린 수천의 사람들.

정하나는 그들을 상대로 포교를 했다고 한다.

"다들 보답받았죠."

기도하다 보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로라와 이준이 나왔으며, 간간이 강소현과 이하린도 등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꿈을 꾸면, 작게는 녹슨 물컵과 돌빵부터 크게는 회복 포션까지 내려져 왔고, 계속해서 믿다 보니 '신도'라는 직업으로 전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저희입니다."

강소현은 깨달았다.

저들이 신앙에 미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들의 신앙은 절대 바뀔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임을.

#56. 이상한 사람들 (3)

용산구청은 지리적으로 제법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좌로는 미군부대가 있던 터에 만들어진 용산공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한강이 있고 좌우에는 지하철역 두 개가 인접해 있었으니까.

지금은 폐허가 되고 역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지마는 그럼에도 터 자체가 좋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쪽으로 옮겨!!"

그리고 무너진 용산구청은 이제부터 '로라교'의 신전 본부로 사용될 예정이다.

뚝- 딱- 딱-

지이이이잉―

신전이 지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다.

어딘가의 중장비가 낼 법한 소음들이 안전구역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그 소리의 근원은 모두 사람이었다.

"이쪽 좀 더 다듬어 주세요!"

지이이잉―

마력으로 만든 칼날이 석조 기둥의 음각을 새기고 있었고.

뚝- 딱- 딱-

"휴우~ 다음!"

차근차근 쌓아지는 각잡힌 거대 벽돌들은 손수 사람이 옮기고 있었다.

아마도 피라미드는 각성한 과거의 인류가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자자, 이제 기반은 다 다져져 갑니다! 다들 조금만 힘냅시다!!"

그리고 이 공사를 주도하는 것은 민태준이다.

-이 친구가 건축 설계사 하던 친군데 제법 안목이 있어 보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친구 중 하나다만, 직접 공사 현장을 이끌어 가는 것은 민태준이었다.

"2팀 지원!"

수천의 안전구역 시민들을 규합하고 분류하더니, 이제는 신전 건축에 있어 공사 인부들을 팀 단위로 나눠 세세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형님, 보고 계셨군요."

일처리가 훌륭, 아니 완벽한 그 덕분에 지하 동굴에서 탈출한 지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제법 멋들어진 신전의 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본직이 뭐라고?"

말을 놓으라던 그의 거듭된 요청으로 이제는 민태준에게 반말을 쓰고 있다.

"아, 조그마한 스타트업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프렌차이즈 카페를 성공시키고 매각 자본으로 시작했었죠."

그의 멸망 전 직업조차도 완벽한 그의 업무능력에 걸맞았다.

세상이 망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어딘가 뉴스에서 봤을 법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고.

아무튼 이곳에 온 목적이 단순한 신전 건설 상황 확인은 아니었다.

바로 저 민태준을 만나로 온 것인데.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사람 관리라는 귀찮은 업무는 나와 맞지 않는다.

어차피 용산구청을 거점이자 기지 느낌으로 만들고 나서 나는 세상을 떠돌 생각이고.

하지만 민태준은 내 제안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책임자를 하기 싫다는 건가?"

세상이 망하고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멀쩡하고 일처리가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민태준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탐내는 것은 이 거대한 안전구역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안전구역의 관리자로 임명하고자 그를 찾아온 것인데.

"...이준 형님이 저를 좋게 봐주신 점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이곳에 메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안전구역의 관리자 따위에 만족할 그릇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신, 형님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안전구역의 관리자 대신, 요새의 식객이 되고 싶다는 민태준의 말.

"...이미 딸린 식구가 좀 많다만."

나, 로라, 강소현, 이하린, 이하준까지 도합 다섯이 내 요새의 식구다.

아직 이하준은 오지 않았지만, 초등학생인 그가 온다면 정신없어질 것을 벌써부터 기정된 사실이기도 하고.

"형님, 제가 또 애들이랑 기가 막히게 놀아줍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거절하기엔 민태준은 너무나도 뛰어난 인재였다.

내게 쥐약인 어린아이 돌보기까지 잘한다고 하지 않는가?

"잠시 고민 좀 해 볼게."

"자,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어도, 저런 식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버리니 왠지 모르게 그가 요새에 합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거, 고도의 암시 같은 것 아닌가?

본래 사람이 그런 법이니까.

생각해본다는 사람에게 '잘 부탁한다'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내 머릿속에는 민태준 그를 요새에 들이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뭐,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또각, 또각.

그래서 지금 찾아가는 것은 강소현과 이하린이다.

기존 동료들에게 민태준의 합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다.

-치지직.

-이준 씨, 더 화나기 전에 빨리 오시죠.

사실 강소현을 보기는 조금 무섭긴 한데, 이 이상 만남을 미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치지직.

-아저씨, 언니 진짜 빡돌았는데요?

혹여나 저들이 민태준의 합류를 거부한다면, 설득까지 해야 한다.

또각, 또각.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강소현과 이하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안전구역 1과 7의 경계면이다.

용산구청의 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안전구역 1과 그 옆에 이어 붙인 안전구역 7의 사이에는 넓은 도로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도로 대신에 호수가 생겼지만.

호수라기에는 이세계 호수라서 그 모습 자체는 조금 달랐다.

질겅-

수면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푸딩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색은 또 연한 핑크색이다.

"-크으."

근데, 맛은 또 기가 막힌다.

물과는 약간 다른 맛이지만, 그래도 맛있는 액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신 로라님의 은총을 받은 호수」

이름이 좀 심각하게 문제였다만.

광신도들이 발견한 안전구역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보이는 것들의 이름이 이상하다.

「유일신 로라님의 대리자이자 제1사도 이준 님의 든든함을 떠올리게 하는 성스러운 거목」

호수 중앙에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의 이름이다.

강소현과 이하린 정도면 작명 센스가 꽤나 좋은 편이라고 느껴진달까.

질겅-

그때 호수의 표면 위로 미끈미끈한 피부를 지닌 물고기가 날아올랐고.

「로라님이 내려주신 일용한 양식」

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길쭉한 뱀장어같이 생긴 물고긴데, 눈코입이고 뭐고 없이 그냥 길쭉하고 미끈한 붉은색이었다.

뱀같이 생겼으나 머리도 뭣도 없었으니, 색도 그렇고 지렁이와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질겅-

젤리 같은 수면 위를 뛰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지렁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세계 호수를 구경하면서 강소현과 이하린을 기다렸는데.

"이준 씨!"

호수 건너편에서 강소현이 나타났다.

타이밍 좋게.

강소현과 호수 중앙의 거대한 나무 그리고 그 너머로 지는 노을이 일직선이 되어 퍽이나 멋진 그림이 되었다.

고즈넉한 노을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거목.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연분홍색의 호수는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고.

찰박, 찰박.

푸른빛 마력을 흩뿌리며 그 호수 위를 사뿐히 걸어오는 강소현도 그러한 풍경과 어우러져 제법 보기 좋았다.

"미쳤어요?"

내뱉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만.

"크흠, 미안합니다."

광신도들 틈에 그녀를 두고 간 것은 나름 미안하게 생각하기에 곧장 사과부터 했는데.

"휴우, 뭐, 그러려니 할게요. 다음엔 봐주는 거 없어요!"

예상외로 그녀가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잘못은 칼같이 인정하고 타인의 사과에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그런 대인배적인 여자가 강소현이다.

어깨에 들쳐멘 모닝스타를 제한다면, 인간으로써 강소현은 상당히 상위에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제가 먼저 말할까요? 아니면 이준 씨가 먼저 말할까요?"

우리가 만난 이유는 사과도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사실 정보 교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다.

내가 없던 동안 안전구역이 어떻게 변했는지와 내가 없는 사이 강소현이 어떻게 광신도들을 휘어잡았는지가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아, 저는 두 분 말 끝나면 말할게요."

어느새 뒤에 다가와 있는 이하린도 마찬가지.

그녀의 경우는 염탐을 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다만, 우리가 없는 동안 우리의 땅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내는 것이기에 딱히 거리길 것은 없다.

"...개선은 어렵겠군요."

시작은 광신도들의 설명이었다.

아포칼립스 초반에 좀비 떼의 습격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좀비들 위로 수없이 많은 빵과 물컵이 드랍됐었는데, 로라가 그것들을 없앤 사건이 있었다.

"진짜 죽기 직전에 음식이 나타났다네요."

그것들은 지하에 매몰되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회복약도 그랬습니까?"

그리고 일전에 로라가 없애버린 회복약 또한 마찬가지였고.

"흐음, 시기를 맞춰 보면 로라가 금빛 신성을 막 흩뿌렸을 때랑 겹치는 것 같습니다만."

신체 절단, 장기 파열 등 중상에 달하는 저들의 부상이 회복된 시기 또한 로라가 신성력을 사용할 때와 어느 정도 겹쳤다.

그말인즉슨.

저들은 근거 있는 광신도라는 말이다.

무턱대고 믿는 광신도들에게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 허나, 제대로 된 기적과 이적을 목도한 광신도들에게 있어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그러했으니, 더 혹독해진 세상 속에서 생긴 신앙은 더욱 견고하고 단단할 것이다.

"개선이라 해봤자, 과한 말투와 행동 교정 정도가 그 한계겠군요."

저들의 개선이 어렵다는 말은 안전구역 1, 기존의 용산구청에 있던 생존자들과 저들을 합병하는 것에 큰 난항을 겪게 될 거라는 말이다.

"뭐, 되는 데까지 해보죠."

* * *

로라교 신전이자 안전구역 1의 청사가 될 곳에 약 4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아니, 이준 님이 여기 주인인 건 알겠는데 저희는 모태신앙 기독교라 개종할 생각이 없다니까요!!"

"허어, 어찌 그릇된 자를 신이라고 믿습니까? 유일신 로라님과 이준 님은 현세에 실존하는 신과 그 대리자이십니다."

"고양이랑 30대 청년을 신으로 믿으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지금 아주머니께서 이곳에 살아 계신 것이 그 증거가 아닙니까? 이준 님이 구원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아주머니께서는 르-페라우니옴의 숙주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시작부터 이 모임은 큰 난항을 겪고 있었다.

"거기 A-1구역, 포교 행위 자제 부탁드립니다!"

"로라님을 믿으시면 구원이 내려올지어니...."

그렇게 열심히 로라교를 포교하는 신도들과 이를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는 안전구역 1의 주민들을 관찰하던 중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잇, 씨이팔, 무슨 털 바퀴를 자꾸 믿으라고 지랄이야?"

고막에 때려 박은 듯이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털...바퀴?"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다만, 로라를 믿으라는 대목에서 반발하며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강소현에게 물었다.

"아, 그... 이게, 고양이를 비하하는 말인데...."

그 뜻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것이었다.

『캬아오오!!』

로라 역시도 그 뜻을 듣고는 격분하기 시작했으니, 로라의 집사로서 이를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각, 또각.

"아까 그 말 다시 해보시죠."

"...아니, 자꾸 그 고양이를 믿으라 그래서 홧김에 욕 좀 했다고 이럴 겁니까?"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40대 아저씨.

"다시 말해보라고."

"...아니, 진짜 이럴 거야? 막말로 여기서 시키는 대로 노동하고 몬스터도 잡고, 어! 그런데 내가 그깟 고양이 흉도 맘대로 못 봐?"

놈이 강하게 나서자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에 힘이라도 얻었는지, 놈이 결국 끝까지 선을 넘어 버렸다.

"털바퀴! 씨이팔! 털바퀴라고 했다! 왜!"

마음 같아선 확 죽여버리고 싶다만.

「김재춘 46세」

꾸욱 눌러 담고는 말없이 추방 버튼으로 손을 올렸다.

파앗-!

"어, 어어? 다, 당신―"

내 앞에서 사라진 46세, 임재춘.

추방 기능을 사용하자, 내가 이곳에 텔레포트를 써서 왔을 때처럼 그는 아무런 전조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또각, 또각.

그리고 나는 신전의 토대로 쌓아둔 거대한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갔다.

"안전구역 내부에서 고양이 비하, 고양이에 대한 욕설, 고양이에 대한 험담을 할 시 즉시 추방."

"안전구역 내부에서 타인과 분쟁이 생겼을 시에는 신전 관리자 '정하나'를 찾아가서 재판을 받을 것."

"안전구역에서 포교 행위는 적당히 할 것."

"이 외의 사항은 오늘 선출될 대리인이 규칙을 정할 예정입니다만, 앞에 말한 세 가지는 절대로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략적인 절대규칙 세 가지를 정했다.

1. 고양이 비하 금지

2. 무력 분쟁 금지

3. 표교 자제

화가 풀린 건 아니다만, 나는 이제 수천을 거느린 대군주가 되어 버렸다.

각성자 수천이 내게 속해있으니 군주라는 단어는 썩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무튼, 내가 엄포를 놓고 나서도 여전히 크나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아니, 종교인들이 여기를 대표하는 건 좀...."

"어딜! 야만족이! 차라리 종교쟁이들이 낫지."

"흐음, 누가 되든 상관없긴 한데. 그냥 막 정해버리는 게 맞는 건가?"

"하긴... 세상이 망했다 해도 우린 사람인데, 너무 독재적인 게 아닌가 싶다."

단상에서 내가 사라지자마자 저런 식의 중얼거리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반년 전까지 민주주의, 투표를 통한 직선제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내가 임명하게 될 대리인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야, 근데 진짜 최소한 공약이랑 투표는 들어봐야 되는 거 아닐까?"

"...니가 가서 건의하든가."

저런 식의 말소리가 사방에서 쉴 틈 없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참, 뭐랄까?

모순적이라고 해야 되나.

용산구청 근처에 있던 자들과 처음부터 용산구청에서 꿀을 빨던 사람들이 유독 심하게 떠드는 것 같았다.

물론, 로라교의 신도들 2,132명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여긴 또 너무 말이 없어서 문제다만.

아니, 아무런 의견이 없다.

저들은 그저 내가 그렇다 하면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고 끝낼 사람들이니.

아무튼.

이대로 내가 누굴 앉혀놔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하나의 묘책을 떠올렸다.

또각, 또각.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안전구역 1과 7은 안전구역 1로 통합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안전구역 1의 관리자는 투표를 통해 선출할 예정이며, 대표자를 선별하는 기준은 '무력'을 기준으로 정하겠습니다."

바로, 무력 민주주의의 탄생이다.

#57. 이상한 사람들 (4)

무력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로 무력의 기준을 충족시킨 후보들을 만들고, 투표를 통해 하나의 대표자를 고르는 방식이다.

왜 무력이 기준이냐?

아포칼립스의 세상에서는 최우선시 되는 것이 몬스터로부터의 생존이다.

즉, 무력이 강해야 산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강한 놈만 뽑자니, 맛이 간 무뢰배가 대표자가 될 수도 있으니.

"자, 이 모닝스타를 방어하거나, 혹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직접 선보여도 좋습니다."

몇 가지 기준을 만들었다.

1. 방어력: 강소현의 묵직한 한 방을 막는다.

2. 공격력: 요새를 둘러싼 '보호의 룬'을 파괴한다.

3. 기타 능력: 단상 위에서 시범을 보여 나와 로라의 인정을 받는다.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안전구역의 대리인 후보를 선발할 예정이다.

"...미친."

이미 선언을 해버렸고, 뒤에서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강소현이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단상 위에는 세 명의 사람이 올라왔다.

"이준 씨,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해볼게요."

바바리안족의 족장이자, 바바리안 대전사 장진아가 첫 번째였다.

부족장으로 살아온 경력이 있으니, 한 구역의 대리 통치자를 맡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준 형님과는 초면이긴 한데, 저 강성태! 자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올라온 사람은 민태준의 친한 동생들 중 하나인 강성태라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도 서 있는 자세도 그렇고 그는 꽤나 야심가인 모양이다.

복장은 직업을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차림이었으며, 손에는 종이쪼가리를 들고 있었다.

"...이 성녀 정하나. 입후보하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녀 정하나였다.

내가 내려가라고 한다면 내려가기야 하겠지마는 종교적 특색이 강한 집단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입후보하게 내버려뒀다.

구시렁거리던 사람들을 보아하니, 차라리 무력이든 종교든 간에 다소 타이트한 조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테스트 결과는 간단했다.

'힘'에 치중한 바바리안답게 장진아는 대검으로 요새의 보호막을 뚫어냈다.

'주시자의 눈'이 쏘던 레이저처럼 부숴버리지는 못했다만, 비교 대상이 괴물인 것은 너무하니 합격을 주었다.

성녀 정하나.

그녀는 예상외로 올라운더였다.

"아아, 로라시여!"

조금 미친 올라운더였다만.

콰지직-!

눈을 감고 기도를 했을 뿐인데, 빛의 칼날 같은 것이 나타나 보호의 룬을 찢어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강소현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치시죠. 사도 나찰(羅刹) 강소현 님."

고추분쇄자에 이어 또다시 이상한 별명이 생긴 강소현.

"-이이익!"

어딘지 모를 감정이 실린 일격이 내리쳐졌고.

콰직-!

"쿨럭- 여, 역시 사도님."

"어...?"

강소현의 모닝스타는 실드를 두부 가르듯이 갈라버리고 정하나의 어깻죽지에 꽂혀 버렸다.

"여, 영광입니다. 사도님의 공격을 받아볼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상황이 성녀 정하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좋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주르륵―

"로라시여."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고 기도하는 정하나.

스스스스―

그리고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로라가 뭘 한 것도 아니건만, '종교' 관련 직종은 저딴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모양이다.

믿음으로 힘을 얻는다니.

직접 보고도 어이가 없다.

아무튼 기도 한 방에 힐과 방어력을 모두 증명한 셈이니 정하나도 후보에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것은 민태준의 친한 동생아라는 강성태.

"저, 저는 힘도 방어력도 없습니다."

허나, 그에게는 다른 것이 있었다.

구우우우우-!

그의 손에서 기이한 소리를 내며 떠오르는 종이 쪼가리들.

종이들이 허공에 평평하게 펴지더니 그 위로 도면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제 능력입니다."

그는 로라교 신전의 설계를 담당했다던 사람이었다. 대체 이 거대한 건축물을 어찌 설계했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비결이 바로 각성에 있었다.

"어, 어떠십니까?"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고작 종이로 3D도면을 만들어 낸 게 다이니 내 기준에서는 한참 미달이다.

"조금 애매합니다. 혹시 직업명이 뭡니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물었고.

"투, 투영사입니다."

투영사(投影士).

어떤 것을 다른 것에 반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투영이라는 단어로 미루어보아, 그의 직업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저 종이 위에 떠오르게 만드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 안전구역이라는 거대한 장소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있어 꽤나 쓸모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단순히 리더의 자격만을 묻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셋 다 제법 괜찮은 인재라는 것만은 사실이니.

내 개인 감상은 개인 감상이고, 일단 투표를 하기로 정했으니 투표 자체는 진행되었다.

"장진아 1,514표, 강성태 407표, 정하나 2,237표."

단순 표대로 대표 하나만 정하기에는 남은 둘이 너무 아까웠기에.

"공동 대표로 장진아와 정하나를 임명하고 강성태는 안전구역 개발부 장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다소 독단적인 인선을 행했다.

이럴거면 투표가 의미 있나 싶겠지만, 어쨌든 민심이 반영이 되긴 한 것이니 큰 불만은 터져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 공동대표라니 너무 감사하죠."

"따르겠나이다."

"자, 장관이요?"

입후보한 셋도 만족스러운 모양이고.

「구역 관리자 1. 장진아」

「구역 관리자 2. 정하나」

「구역 치안 관리자. 윤설, 윤솔」

「구역 신앙 관리자. 정하나」

시스템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이게 다였지만, 장진아와 정하나의 헙조하에 강성태 그가 안전구역 1을 총괄해 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사람을 썼으면 믿어 주라는 것이 우리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뭘 시킬 거면 말이여, 그냥 다 줘. 믿고 권한을 아주 크게 주는 거야. 망하면 어쩌냐고? 옘별, 망할 거면 네 눈깔이 옹이구멍인게지. 사람 못 써서 망한 거는 쓴 놈 탓도 반이여!

맨몸으로 거대 기업을 일군 사람의 말이니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지.

"말 같지도 않은 분쟁이 있으면 즉시 추방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들에게 제법 큰 권한들을 주었다.

분쟁시 즉결 처분권, 마력석의 자유로운 활용, 토지 구획 및 설계 거주민 배치에 대한 자율권한.

"신권국가, 신성 로라 제국의 탄생이군요."

옆에서 조금 미친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