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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신성길드가 성공적으로 플러스 단계 마물 소예를 사냥한 가운데······.

사냥 소식이 언론과 TV를 뒤덮고 있을 무렵, 본사로 향한 백군서는 이영문을 만나고 있었다.

고된 사냥의 여파를 완전히 씻어버린 백군서보다 이영문의 안색이 더 안 좋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다, 군서야."

"형님이 걱정해주셔서입니다."

"네 활약이 컸다고 들었다."

백군서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함만 느낀 자리였습니다. 특히 저와 최준호의 차이를 실감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

아마 이영문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백군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예를 사냥하는 자리가 없었다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 어쩌면 최준호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보던 건 세희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준호는 최소 십대초인급 실력자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백군서는 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세희가 이례적으로 공을 들이긴 했지. 최준호를 잘 잡았어."

"하지만 최준호는 위험합니다. 그룹이 흔들린다면 사업적인 실패도, 마물 사냥 실패도 아닌 최준호일 것입니다. 당장 세찬이 건만 해도······."

"그만."

이영문이 손을 들어 백군서의 말을 제지했다.

이미 둘은 이세찬이 누구에 의해 백치가 된 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건 여기까지 하자."

"죄송합니다."

"네 말대로 최준호가 위험한 건 맞다. 하지만 우리 그룹에 큰 이익을 안겨다준 것도 사실이지. 사업가로서 녀석을 멀리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었으면 다른 곳이 이익을 봤을 거다. 군서야."

"예."

"세희가 녀석과 잘 되도록 도와다오."

"제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보다 해줄 수 있는 건 많다."

"그런 말씀은 좋지 않습니다, 형님."

백군서가 놀라 말했지만 이영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바람과 현실은 다른 법이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최준호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녀석이긴 합니다."

"정부에서는 세희와 이어지는 걸 방해할 거다. 우리가 파악한 만큼 그쪽도 최준호에 대해 파악했을 테니. 한집안이 되면 대한민국이 신성그룹에 먹힌다고 생각할지도. 딱히 틀린 말도 아니야. 그게 우리에게 이상적인 그림이기도 하고. 그러니 네가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믿어도 되겠나?"

"저는 형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어."

이영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

소예와 한별의 동시 사냥으로 이번에 대한민국은 사냥 능력을 제대로 증명했다.

하나는 플러스 단계고 다른 하나는 유해 8단계였지만 동시에 둘을 상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란다.

아직 유해 8단계 마물조차도 상대하는 걸 버거워하는 국가가 많았으니까.

"파워 랭킹 6위로 올랐어."

대통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천명국도 상당히 표정이 밝았다. 각성자 파워 랭킹은 국력을 상징하는 지표 중 하나여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전한지 어필할 수 있단다.

실제로 국토 면적대비 가장 안전한 국가로 대한민국은 5위 안에 진입했다.

빌런과 마물이 득실거려도 살기 좋은 국가였군. 다른 국가는 얼마나 지옥이란 건지.

"그나저나 오늘이긴 한데. 굳이 나가야겠나?"

오늘은 독일에서 프란츠가 입국하는 날이다.

대놓고 날 혼내러 오겠다고 했으니 지나칠 수 없지.

대통령과 천명국은 제발 지나가달라는 얼굴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굳이 외면할 이유가 있나?

그래서 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겠다는 의중을 밝힌 상태였다.

"예."

"불필요한 충돌이 벌어질 수 있어. 차라리 청와대에서 짧게 인사하는 게 나아."

그래봤자 그 영감 성격상 바로 질러버릴 텐데?

아무래도 대통령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했다.

"어차피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청와대보다 공항이 낫지 않겠습니까?"

"······."

내 배려를 이제야 이해한 듯하다.

물론 나는 무조건 싸울 생각은 없다.

"좋은 분위기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 믿어야지. 잘할 거라 난 믿어. 안 그런가, 천 실장?"

"예에······."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면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데.

어차피 나도 안 믿는 사람에게 억지로 믿음을 권하진 않으니까.

"그럼 가보겠습니다."

공항으로 향하는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혈종이 된 후에 만났지만 프란츠와 만남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내 기프트 중 하나인 기뢰는 가장 애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 손에 죽었을 때 프란츠는 이미 여든이 넘은 노인이었다. 유럽에서 존경받으며 조용히 삶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음에도 정의를 위해 한국으로 왔다.

이때부터 꼰대 기질이 충만했을까?

혈종일 때 날 보자마자 젊은 놈이 악에 굴복했냐며 정신 차리라고 호통부터 쳤던 양반인데.

"강하겠지?"

훨씬 젊은 지금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

60대 중반에 접어든 프란츠 귄터는 겉모습만 보면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선 굵은 얼굴에 탄탄한 근육이 자리한 몸은 잘 단련된 실력자임이 드러났다.

그는 길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옆에서 잔소리하는 제자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좋게 나가셔야 해요."

"그럼 좋게 나가지, 내가 판을 엎어놓겠느냐?"

"하시는 행동이 안 좋으니 문제죠."

"어허."

프란츠의 제자, 로라 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전에 최준호를 상대해봤기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언을 했지만 스승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쩌다 자신이 이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건지, 처지를 생각하면 서글퍼졌다.

"리그에 대항하려면 힘을 합쳐야 하니 온 거다. 정신머리를 제대로 박아놔야지, 내가 따끔하게 훈계할 테니 넌 옆에서 지켜보기나 해."

"그걸로 정신 차린 사람이 있기나 해요?"

"있다. 30년 전 요하네스 뮐러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 얘기는 백 번도 넘게 들었고요. 그리고 예전에 사망한 분 얘기해봤자 확인도 안 되거든요."

"크흠, 아무튼 계속 얘기하면 듣게 돼."

"하아!"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프란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미리 단단히 훈계하지 않으면 리그에 현혹될 수 있어. 가장 좋은 건 결혼을 시켜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건데······."

그러면서 로라를 보자,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자꾸 이상한 소리하면 가만 안둘 거예요. 그리고 생각도 없어요. 나이 차이가 얼만데!"

"사랑에 나이 차이는 상관 없다."

"제자 손맛 볼래요?"

앙칼진 로라의 말에 프란츠가 꿍얼거렸다.

"···나 때는 스승을 하늘처럼 생각했는데."

"저 가르치면서 스승놈이라고 들은 게 수백 번이거든요?"

"아무튼 나만 믿어라. 정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라도 제정신이 박히게 해줄 테니."

"최준호는 진짜 강하다고요."

"나보다?"

"쉽지 않을 걸요."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프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젊은 것이 강해봤자다. 넌 네 스승을 무시하는 거냐?"

"무시는 안하죠."

"에잉, 요즘 것들은 존경을 몰라. 가자."

혀를 차며 앞장 섰다. 뒤따르는 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괴팍한 스승과 반쯤 미친 최준호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미래 예지 기프트가 생긴 건 아닐 테고.

근데 왜 미래가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91화

나는 프란츠 영감을 맞이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물의 창궐 이후, 그 역할이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항이자 국제노선의 허브였다.

독일에서 오는 프란츠 일행도 몇 차례 경유를 거친 뒤 오는 것이다.

굳이 먼 길을 오는 걸 보면 영감의 체력은 걱정할 게 없군. 혈종일 때 날 잡으려고 와서 기력이 딸려서 며칠 휴식을 취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본래 나는 혼자 오려고 했지만 천명국이 극구 만류하며 사람을 붙였다.

"실장님이 감시하라 했습니까."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 걱정 많이 하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고."

우리 천 실장이 날 각별하게 생각하긴 하지.

나는 따라온 각성자안보실 직원에게 안심하라고 말한 뒤 조용히 프란츠를 기다렸다.

내가 아무리 가차 없이 손을 쓴다고 해도 과거의 인연을 만나는 자리에서 손을 쓸 생각은 없다.

물론 영감은 날 만난 적이 없을 테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줬던 사람이라 기량이 완전히 하락하기 전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내가 혈종일 때 상대적 기준으로 가장 강한 적이었으니까.

당시 프란츠는 기량이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내게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해줬다.

그랜드 마이스터라는 위명이 어울리게 기뢰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몇 번이고 위기에 처했었다.

기뢰가 한번 파고들면 질기게 내부를 휘저어 대고, 영감의 체술도 신묘하기 그지없어 미쳐 버릴 것 같았지.

그만큼 대결 후 얻은 깨달음도 만만치 않았다.

좋다는 기프트를 모조리 취해서 미쳐 버렸던 내게 있어 기프트가 많은 것이 좋은 게 아니란 걸 깨닫게 해 줬으니까.

"따지고 보면 영감 지분이 조금 있는 건가."

기프트 허용량이 넘어가서 미쳐 버렸던 거라 생각하는 내게 기프트를 줄이는 계기를 준 게 대결 직후였으니까.

그나저나 영감이 어떤 상태려나.

당시에도 엄청 꼬장꼬장했는데 기력이 남아 있는 지금은 훨씬 심할 것 같다.

"도착했습니다."

직원의 말에 난 상념에서 벗어났다.

두근두근.

이상하게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번 생에선 미쳐 있던 날 보고 다짜고짜 호통 쳤던 양반이 제정신인 날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가 되었다.

잠시 후, 아직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프란츠와 일전에 본 적 있는 로라 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프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힘이 느껴진다. 꽤 세다. 저번 생에서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심지가 굳건했다.

어지간히 깐깐하겠군.

나를 본 프란츠가 로라와 대화를 나누더니, 만류하는 로라를 뿌리치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딱딱하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했다.

"네가 최준호냐?"

"반갑습니다, 그랜드 마이스터 프란츠 귄터."

"그래도 예의는 아는 녀석이었군. 듣던 소문이랑 다른데?"

"첫 만남이라 예의를 차려 봤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안 차리겠다는 얘기냐?"

"보고 판단하죠."

"후배라면 자고로 선배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하거늘······."

미간을 모으며 날 보는 프란츠.

난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 정정하니 꼰대력이 장난 아니군.

"헤드 브레이커라 불린다고? 대체 얼마나 많은 놈의 머리를 깨고 다닌 거냐."

"깰 놈들만 깨고 다녔습니다. 문제라도?"

"아니, 잘했다고. 죽을 놈은 죽을 짓을 하더군. 빨리 다 쳐 죽이는 게 세상에 더 이롭다."

"의외네요. 다들 지적 하던데."

"지적할 건 네놈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그렇다. 아직 어린데 대체 얼마나 죽여서 손에 살기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거냐."

귀신같은 영감 같으니라고.

"손을 쓸 때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머리도 부수려고?"

저번 생에서는 그랬다만, 지금은 굳이 그럴 생각이 없어서.

난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프란츠도 더 캐묻지 않았다.

"나와 같은 기프트를 갖고 있다고 들었다."

"확인해 보겠습니까?"

"그래야지. 써 봐라."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난 곧바로 프란츠에게 손을 뻗었다. 뒤에 있던 로라가 놀란 목소리를 냈지만 정작 당사자는 가만히 있었다.

내 손에 서린 기뢰가 프란츠의 어깨를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파지직! 하는 스파크와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기뢰가 빨려 들어갔다.

일반인이라면 뼈가 모조리 부서져 가루가 되었을 위력이지만 프란츠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걸 감당해 냈다.

나 또한 프란츠를 죽일 생각으로 쏟아 낸 게 아니었다. 이 정도로 죽을 양반도 아니었고. 애초에 이 기프트를 가졌다면 내성도 갖고 있겠지.

그 증거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을 닮아 아주 고약하구나."

눈을 감고 있던 프란츠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만 있어. 이런 광기와 살기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미치지 않은 게 용하군. 아니, 이미 미쳐 있나."

"미치긴 누가 미쳤단 말입니까."

"너 말이야, 너. 지금 유럽에서 한국에 미친개가 날뛰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해."

"누가 그럽니까."

이 양반, 선 넘는다.

그나저나 미친개 발언은 누가 했는지 물어봐야겠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로라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는데, 프란츠가 말하고 있어서 캐물을 수 없었다.

"나 때는 말이야, 꿈과 희망이 있었어. 내 손으로 마물을 박멸하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숭고한 이상. 그걸 위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리기도 했지. 포스가 역류한 녀석도 있었어. 당연히 수습 못 하고 죽었고. 우리 때는 기프트 개방을 위해 맨몸으로 마물을 상대해 보는 용기도 있었는데 요즘 것들은, 쯧쯧!"

프란츠가 날 보고 혀를 찼다.

"수틀리면 상대를 죽일 생각부터 한단 말이야. 각성자 하나 키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줄 아냐? 재능이 좀 있다고 하면 다짜고짜 돈부터 외쳐 대거나 뛰쳐나가 빌런이나 되고. 대체 세계가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전 빌런 잡는 정부 소속 초인입니다."

"그 살기가 빌런한테만 가는 게 아니니까 문제다. 내 제자 손목은 왜 분질렀는데?"

"덤빌 땐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건 맞는 말인데. 누가 보면 죽을 짓을 한 줄 알겠다."

코웃음 치는 프란츠.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라.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돌린다.

딱 걸렸다. 아무래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거 같은데 미친개 리스트 좀 물어봐야겠다.

"그래서 그게 끝입니까?"

"끝일 리가. 기프트에 살기 냄새가 너무 짙게 배었다. 내 조언을 듣기 전에 내 기프트부터 체감해라. 너희는 기뢰라 부른다지? 나는 이걸 블리츠(Blitz)라 부른다."

그리 말한 프란츠가 손을 뻗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들자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반사적인 겁니다."

"에잉, 요즘 것들은 믿음이 없어."

프란츠의 손에 서린 기뢰가 날 파고들었다. 으음,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짜릿함과 동시에 퍼져 나가는 저릿함.

점점 번져 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하고 내 안에서 흩어졌다.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날 보는 프란츠에게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같은 기프트인데 당연히 똑같지, 다를 리가 있겠냐. 나도 맛봤으니 너도 맛보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 꼰대 영감이.

죽일까?

인내심이라는 거 생각보다 빠르게 바닥난다.

"이걸 어떻게 발전시키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지. 네놈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면 난 다른 방법이다."

프란츠가 손을 뻗자 소멸되어야 할 기뢰가 형태를 유지하여 내 앞까지 도달했다.

"어떠냐? 가르쳐 줄 수도 있다."

마치 강아지 앞에서 뼈다귀를 흔드는 표정이었다.

나도 손을 뻗어주었다.

"그 정도는 저도 가능합니다."

"어?"

프란츠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원거리로 투사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단지 위력이 효율적이지 않을 뿐이다.

고작 이 정도로 유세를 떨려고 한 건가.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프란츠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재미없는 녀석. 꼭 이겨 먹어야 했냐? 너 잘났다, 네 똥 굵다."

저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건지.

제임스 리드도 그렇고 프란츠 영감도 그렇고 조사가 시급했다.

"그래서 계속 여기 있을 겁니까?"

"가야지. 할 것들이 제법 많으니까. 네가 앞장서라."

"그러죠."

우리는 차를 타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로라에게 미친개 명단에 대해 물어보니 못 알아듣는 척 독일어만 했다. 말하는 거 몰라도 듣는 건 가능해 보이는데.

프란츠와 얘기를 나누는 것은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혈종으로 완전히 선을 넘던 시기였으니까.

어쩌면 정다현과 갖는 감상이 비슷할지도 모른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노년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빌런인 날 죽이기 위해 먼 타국까지 찾아왔으니까. 정의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신념을 난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오! 이 차도 제법 괜찮군. 하지만 역시 독일 차가 최고란 말이지. 독일 맥주는 없나?"

···다만 독뽕이 상당한 듯 싶었지만.

어딜 가나 사람은 비슷한 법이다.

* * *

청와대에 도착하고 열린 만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대통령과 프란츠는 국제정세부터 시작하여 외교 전략, 길드 운영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둘은 서로의 식견을 추켜세워 주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대통령은 유럽의 맹주로 우뚝 선 독일을 칭찬했고, 프란츠는 대한민국의 저력을 칭찬했다.

당장 나눈 대화만 듣고 있어도 국뽕 썸네일이 쏟아질 정도다.

"확실히 특이한 형태입니다."

"길드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지요."

독일의 길드는 특이하게도 정부와 시민이 합쳐서 51%의 지분을 유지하게 했는데, 이는 길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인재가 외국으로 유출되었지만 정부 혹은 길드 입김이 너무 강한 국가의 폐해를 겪고 다시 돌아오는 각성자들이 많았다.

세계는 마물과 전쟁 중이다. 여기에 같은 인간인 빌런의 존재까지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자신이 자라온 터전, 안정감, 국가의 통제 능력 등 다른 요소가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고 있단다.

"돈이 모든 가치가 아닙니다. 살아가는 터전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상 깊은 말씀입니다."

프란츠와 대통령과 대화 중에 유독 '라떼는'이나 '요즘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면서 왜 날 힐끔거리는 건지.

나더러 들으라는 건 아니겠지. 따지고 보면 나도 요즘 것들 보면서 혀를 차는 쪽에 속하는데.

"한국에 계신 동안 편히 모시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지."

"그럼 최준호에게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난 봤다.

대통령과 천명국의 표정이 급속도로 흐려지는 것을.

설마 날 못 믿는 건가.

"대통령님."

"음? 왜 그러나."

"혹시 제가 못 미더운 겁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대통령이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물어왔다.

"그럴 리가. 최준호 초인, 부탁해도 되겠나?"

믿는다면서 왜 내가 거절하길 간절히 바라는 눈인 건지.

나랑 다니면 사고가 나는 줄 알겠다.

아닌 걸 보여 주지.

"제가 책임지고 서울 구경 시켜 드리겠습니다."

"부탁하겠네. 으, 으음!"

대통령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 * *

나와 프란츠는 둘이 이동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로라도 슬쩍 사라져 있었는데,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혼자 움직이는 걸 선호한단다.

미친개를 누가 얘기했는지 끝까지 말 안 하더라.

누가 보면 뒤끝 발휘하려고 그런 줄 알겠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아무튼 나와 프란츠 둘이서 서울 투어를 떠났다.

한국에 머무는 건 고작 사흘.

그동안 서울의 각종 궁궐을 둘러보고 다양한 음식도 먹었다. 족발을 먹어 놓고 새로운 슈바인 학센이라고 하면서 엄청나게 먹더라. 족발집에서 독일 맥주는 왜 찾는 건지. 그걸 또 기어이 공수해 온 족발집 사장도 대단했다.

다음 날 일정에서는 아카데미에 들려서 고명학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해서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그러다 붉은 뱀 김영환 얘기가 나오자 혀를 찼다.

"그런 놈은 죽어도 싸."

어째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누군가 죽인 걸 프란츠가 가장 공감해 주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온 김에 프란츠는 대한민국의 미래라 할 수 있는 학생들을 위한 특강도 해 주었다.

지금은 물러났다고 하나 십대초인에 속한 고강한 초인의 등장에 학생들의 눈이 바로 초롱초롱해졌다.

날 보면 사색이 되던 것들이 차별이 심하군.

역시 간판이라는 게 중요하긴 했다.

서울 구경 마지막 날, 나와 프란츠는 고급 한식당에서 한상차림을 먹은 뒤, 산책 겸 밖으로 나왔다.

"좋군, 도시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건 국가의 자존심이 건재하다는 의미지. 나 때도 이런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독일 함부르크의 작은 마을에 태어난 프란츠는 마물의 습격으로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고 한다.

마물의 습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꼈고, 강해져야겠다는 동기부여를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기뢰도 번개에 맞아 그걸 적응하면서 얻어냈다고 하는데, 현지에서는 제우스(Zeus)라 부르기도 한단다.

참 어울리지 않는 이명이다. 제우스라 하기에는 여자를 한 번도 사귀지 못한 걸로 아는데.

"나도 한국에 대해 알고 있다. 인재의 힘으로 선진국 반열에 든 강국이지. 마물의 등장으로 넓은 국토도, 풍부한 자원도 중요도가 내려간 시점에 인재가 풍부한 한국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별생각 없습니다."

"요즘 애들은 생각이 깊질 못해."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꼬장꼬장하기는. 다시 고개를 돌린 프란츠가 말했다.

"내가 지켜 온 세상이지만 요즘 많은 생각이 든다. 욕망은 점점 더 강해지고, 세계를 수호한다는 대의는 시들어가고 있지. 전부 머릿속에 계산기부터 굴려. 나를 비롯한 초인들의 강대한 힘을 어떻게 이용할지 머리만 굴리는 정치가, 기업가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이러려고 평생 동안 세상을 수호한 게 아닌데."

"후회하는 겁니까."

"후회하지. 내가 희생하는 만큼 세상은 바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욕망을 너무 얕봤어. 내가 희생하는 만큼 그걸 받아먹고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더구나."

"······."

대통령하고 나눈 대화하고 많이 다른 느낌인데.

프란츠의 생각이 원래 이랬던 건가.

"결국 우리의 고충을 알아주는 건 같은 각성자뿐이지. 그걸 모르는 사람은 우리가 위험하다며 법으로 옭아매려 하고 손가락질을 하고. 목숨을 걸고 사냥을 해도 버는 돈이 많다며 세금을 떼어 가고. 희생한 우리에게 돌아온 건 모진 대우들뿐이지."

"······."

"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세상이 썩어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네 힘이면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있을 텐데."

"뒤집어서 뭐합니까. 귀찮기만 한데."

날 향한 프란츠의 눈이 가늘었다.

어째 꽤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거 같은데.

애초에 한국에 온 것도 제자 손목 부러뜨린 나를 보러 온 거 아니었나.

그런데 마지막 날까지 내게 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게 목적이 아니었단 거다. 그럼 사흘 내내 날 살펴보던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건데.

방금 얘기한 걸 조합해 보면 이런 건가.

"그래서 영감님은 리그 사상에 동의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노망이 일찍 왔네."

기계도 작동 안 할 때 몇 대 후려치면 정상이 되던데.

노망 난 것도 머리 몇 대 후려치면 정상이 되려나.

92화

프란츠가 대한민국을 방문한 표면인 이유는 제자의 복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제자가 어디서 얻어맞고 오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로라는 이미 인정받는 초인이다. 밖에서 얻어맞았으면 제 실력으로 극복해야지.

오히려 패배하고도 죽지 않았으면 하늘이 도운 것이다.

초인이 된 후 자기 잘났다고 콧대가 높아지던 차에 좋은 경험을 쌓았다 싶었다.

프란츠가 눈앞의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최준호.'

혜성처럼 떠오른 신예 초인.

놈을 보기 위해 멀리 바다 건너왔다. 그를 향한 프란츠의 눈에 짙은 의심이 깔려 있었다.

헤드 브레이커라는 섬뜩한 이명.

여기에 수가 틀리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가는 손속.

항거불가능한 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잔인함까지.

프란츠는 그에게서 정의로운 초인보다 빌런에 한없이 가까운 심성을 엿봤다.

그의 힘을 탐내어 국가 공인 초인으로 대우하지만 심성이 올바르지 못한 초인은 또 다른 리그의 삼악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프란츠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세계 초능력자의 날 행사에서 최준호가 슈반트네르와 로라, 트라오레를 상대하는 동영상을 보면서다.

모두 유럽 연합에 속한 초인이기에 프란츠는 셋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세 초인이 합공을 하고도 최준호에게 밀렸다.

'이 녀석은 너무나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세계를 불사를 거악이 될 수 있다.

프란츠는 리그를 만든 삼악을 만났던 옛 기억을 떠올렸다. 녀석들은 젊은 시절에도 범상치 않은 실력자였다.

뒤틀린 사고를 가졌어도 마물로부터 세계를 수호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심이 리그라는 괴물을 낳았다.

프란츠는 아직도 후회한다.

자신이 위화감을 느꼈을 때 손을 쓰거나 생각을 바꿔 놓았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 손을 썼다면 리그는 등장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리그의 삼악은 자신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올라갔다.

그래서 최준호가 크게 엇나가기 전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갈등을 이용하여 세를 불린 리그에 최준호가 합류하게 되면?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면··· 내가 막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준호 정도 되는 초인이 리그에 가담하면 –1이 아닌 –100,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가뜩이나 마물을 상대하느라 버거워하는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덤벼라."

프란츠가 결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로부터 30분 뒤.

"아이고! 나 죽네! 젊은 놈이 사람 친다!"

프란츠는 쓰러져 곡소리를 냈다.

* * *

최준호를 시험해 본 결과는 혹독했다.

왼쪽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 전체와 손목까지 모조리 부러진 상태였고, 오른쪽 팔은 정반대로 꺾여 부러져 있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양다리조차 집요하게 파고드는 기뢰로 인해 위태위태했다.

완전 망가져 버린 자신과 다르게 최준호는 멀쩡했다. 옷만 찢어지고 자잘한 상처가 전부였다.

"젊은 놈이 노인을 이렇게 두들겨 패는 게 어디 있냐!"

하지만 말을 하는 프란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일부지만 최준호의 편린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광기와 살의였다. 스스로를 세계를 위한다는 리그와 뒤섞일 수 없는 순수가 최준호에게 존재했다.

이게 초인이 된지 1년도 되지 않은 자의 힘이라고?

지독함도 이런 지독함을 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사람을 어떻게 하면 말살할 수 있는지 프로그램화 된 살인기계를 연상케 했다.

프란츠는 독일의 초인으로서 최전선에서 무수히 많은 마물을 상대하고, 리그가 태동할 때부터 리그의 빌런들을 상대해 왔다.

그중에는 헬 마스터도 있고, 프란츠는 그를 상대하고도 무사한 몇 안 되는 초인이다.

그런 리그의 삼악도 이런 독한 수를 쓰지 않는다. 최준호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위험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왜 시험을 하는 겁니까."

가까이 다가온 최준호는 혀를 차더니 회복제를 뿌려 준다. 부러진 뼈가 제자리를 되찾고 가루가 형태를 갖춰 나간다.

전신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마치 준비했던 걸 꺼내 놓는 걸로 보아 처음부터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지울 수 없었다.

평온한 표정에서 조금 전 엿본 광기와 살의가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네놈, 눈치채고 있었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프란츠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그럼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리그 소속 아닌 거 다 압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살아 있는 겁니다."

아니면 목을 부러뜨렸을 거란다.

"······."

그럼 자신은 무엇을 위해 연기했던 거란 말인가.

결연했던 각오는? 이 부상은? 대체 왜?

최준호의 정체를 놓고 혼란스러워하던 걸 던져 버린 프란츠가 소리쳤다.

"그걸 아는 녀석이 날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영감님이 강해서 부상 입히지 않고 이길 수 없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아!"

"시험해 보려던 대가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네놈을 시험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다 내 잘못이야."

아이러니하게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리그 소속이었다면 자신을 살려 둘 리 없었을 테니까.

늙은 몸이 엉망이 되면서 얻어 낸 한 줄기 희망이었다.

"반성이라는 걸 하긴 하는군요."

"됐고, 회복제나 하나 더 뿌려!"

"이거 비싼 겁니다."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을 거 같아?"

"청구할 겁니다."

"쪼잔한 놈! 나 때는 동료가 빚을 지면 신용대출을 해서라도 빌려줬어!"

"그건 선 넘은 거고요."

처음부터 이 자식 손에 놀아났던 거였구나.

허탈하기도 하면서 부상당한 부위가 욱신거려 왔다.

치이익!

이 회복제, 효과가 좋긴 한데 아프긴 또 더럽게 아팠다.

* * *

프란츠 영감이 날 시험하고 있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울려 준 건 아직 꺾이지 않았을 실력이 궁금해서다.

스스로 물러났지만 전성기에 십대초인이라 불린 실력을 겪어 보고 싶었다.

결과를 얘기하자면, 꽤 인상 깊었다.

특히 노련함이나 기뢰의 응용은 나도 몇 가지 참고할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 늙은 날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니 만족했냐?"

"멀쩡한 거 다 압니다."

대결 결과가 싱겁게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경험과 노하우로 부딪치는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더 강하고 더 빠르게 부딪치면 된다.

그 결과 엉망이 되었지만 신성그룹 특제 회복제의 위력은 굉장하다. 속에 골병이 들었어도 겉모습은 멀쩡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날 째려보던 프란츠가 맥이 풀린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뭘 말이냐."

"제 실력 말입니다."

"···리그로 간다는 소리 하기만 해 봐라. 내가 아는 녀석 다 불러서 네놈 레이드 뛸 거다."

누가 보면 내가 혈종 때처럼 미쳐 있는 줄 알겠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날 못 잡는다.

프란츠도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닌 듯했다.

"리그로 갈까 그렇게 걱정된 겁니까."

"그럼 걱정 안 되겠냐? 요즘 것들은 말이야, 툭하면 수틀린다고 다 뒤집어 버리고 도망쳐서 빌런이 되더라."

"전 안 그럽니다."

"네놈이 얼마나 많이 뒤집어 놓았는지 생각도 안 하는 거냐?"

대체 뭘 뒤집었다고 하는 건지 금시초문이다.

내 표정을 본 프란츠가 한숨을 내쉰다. 뭔가 열 받는군.

그러니까 내가 사고뭉치라는 거잖아?

"하긴, 그게 둔감하니 최악은 벌어지지 않은 거겠지."

"리그에 갈 생각 없습니다."

"안다, 누가 귀 먹은 줄 알아?"

안 믿어놓고. 참 뻔뻔한 영감이다.

"그만큼 리그의 사상이 위험하다는 거다. 방금 전 내가 말했던 것들, 끌리지 않더냐?"

"안 끌리던데요."

"진짜?"

"개소리에 휘둘리는 건 그만큼 멍청하다는 의미입니다."

리그가 말하는 건 달콤하지만 결국 그것뿐이다. 혁명을 시도하는 세력이 지껄이는 말은 언제나 그렇듯 달콤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 대안으로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각성자가 대우받는 세상을 만든다? 그럼 비각성자는 어쩌고?

내가 각성자라고 해서 가족 모두가 각성자인 건 아니다.

리그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철저하게 배제한 채 마치 실력 있는 사람들이 이끄는 올바른 세계를 만들 것처럼 지껄인다. 그럼 실력 없는 사람은 죽어도 되고? 처음에는 공감하더라도 도태되어야 하는 게 내 가족이라면 웃으며 받아들일까?

내부의 모순은 내부에서 해결하면 된다. 나처럼.

"···허허. 그래,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 생각을 들은 프란츠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믿음이 좀 갑니까?"

"미리 말 좀 해 주면 안 됐었냐?"

"그럼 순순히 믿을 겁니까?"

"믿을 수도 있지 않을까?"

프란츠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영감님 스스로 답을 알고 있네요."

"한마디도 안 져 주는구나. 독한 놈."

누구더러 독하다는 건지.

끝까지 꼰대 기조를 유지하는 거 보면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싶었다.

"넌 리그에 대해 별 걱정이 없어 보이는구나."

"그런 녀석들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있지, 세계가 멸망한다면 녀석들 때문일 테니까."

"세계는 쉽게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혈종이 되어 미쳐 날뛸 때도 망하지 않았다.

다만 심각하게 망가졌을 뿐.

프란츠가 고개를 젓는다. 뭐가 또 있나?

"각성자들이 등장하던 초창기, 예언 기프트를 가진 선지자가 있었다. 그를 아느냐?"

"모릅니다."

들어본 적도, 관심도 없었다.

예언이라는 게 애초에 가능한 거였나? 그냥 지껄여 놓고 한두 개 맞아떨어지는 걸 자화자찬하는 걸로 보이는데.

그럼 나도 예언이 가능하다.

나는 앞으로 미치지 않을 것이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며, 사고도 치지 않을 것이다.

예언, 참 쉽군.

부정적인 내 대답과 달리 프란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쉽게도 선지자는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계가 마물이 아닌 인간에 의해 멸망할 수 있음을 우려했고 자신이 살아가던 터전에 여러 예언을 남겼다."

프란츠는 선지자가 예언한 대격변이 일치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모든 예언을 확보한 게 아니다. 우리가 발견했을 때, 선지자의 예언은 상당 부분 유실되어 있었지."

선지자는 나미비아의 문명이 닿지 않던 작은 해안가 마을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글자도 몰라 돌에 그림으로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예언은 이러했다. '스스로 빛이라 생각하는 어둠이 세상의 모든 축복을 집어삼킬 것이다.'라고. 우리는 이 어둠이 리그라 생각하고 축복은 기프트라 생각하고 있다."

"······."

"리그는 블랙하운드와 헬 마스터라는 절대강자가 존재하지만 중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르고스다. 녀석은 늙지 않고 세계를 시야 안에 두며, 교활하게 책략을 꾸미지."

아르고스가 교활하다고 하는 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누구더러 빌런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건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폭언이다.

"예언을 해석해 보면 축복을 집어삼킨다는 건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여러 개의 기프트를 의미한다. 아르고스가 듀얼 기프트를 넘어서 그 이상의 보유자라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건 뭡니까?"

"기프트를 삼킨다는 건, 기프트를 가져간다는 것. 리그에 포섭되는 각성자들을 의미한다."

"그럴듯하네요."

내가 볼 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았지만.

"결국 아르고스가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빌런이란 뜻이다."

"아르고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진짜인지 알 수 없지."

그 정도로 교활하다는 건가.

"결국 리그를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래."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 전력이 그렇게 강한 줄 모르겠던데.

현재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초인의 숫자는 마흔 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

단일 세력으로 이만큼 많은 초인을 보유한 곳이 없으나, 리그 또한 점조직으로 흩어져 있기에 한군데에 전력을 투사할 수 없다.

쓸데없이 많이 모인다 싶으면 다 죽여 버리면 되고.

"당장 내 말을 납득하지 않아도 된다. 흘려듣지만 마라."

"그러죠."

세계의 멸망이라, 예언이란 건 참 거창하다 싶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이면 족족 죽이다 보면 언젠가 사라져 있겠지.

우리는 식당에 말해 새 옷을 구해 갈아입고 프란츠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세상은 여러 사람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 그걸 명심하도록."

그 말을 남긴 뒤 안으로 들어갔다.

끝까지 내게 리그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거 같지만, 글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리그에 가장 자유로운 것이다 보니 내가 체감하지 못한 걸지도.

"그나저나."

아까부터 프란츠가 말했던 예언 내용이 머릿속에 걸렸다.

모든 축복을 집어삼킨다?

이거 왠지 내 혈중섭식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데.

설마, 아니겠지.

* * *

프란츠에게 이번 대한민국 방문은 성과가 있었다.

최준호라는 괴물의 실력을 겪어 본 것도, 녀석의 성격이 리그와 상극이라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아마 리그에서 나섰어도 놈의 성격 때문에 모조리 머리가 부숴졌을 것이다.

손속이 지나칠 정도로 잔인한 것 빼고는.

"예우가 없어, 예우가."

외상은 다 나았지만 여전히 뼈마디가 시려 왔다.

그만큼 최준호와 대결에서 입은 부상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로라가 걱정을 드러냈다.

"괜찮으신 거 맞죠?"

"끙, 안 괜찮아도 괜찮은 척 해야지."

"···그러니까 최준호는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녀석이 최준호랑 다니기 싫다고 내빼?"

"죄송해요."

프란츠가 눈을 치뜨자 로라가 바로 사과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공감이 가긴 했다.

제 놈만 정상인 줄 아는 미친놈 같으니라고.

그래도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던 방한이었다.

음식도 맛있었고, 철저한 경계태세 체제에서 도시가 굴러가는 것도 보았으니까.

"넌 잘 구경했냐?"

"네, 볼 건 다 봤죠."

"스승이 얻어맞고 있을 때 재미는 다 봤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

"에잉, 나 때는 제자가 스승을 하늘처럼 모시고 다녔는데."

"같은 말 반복이거든요?"

투닥거리며 공항에 도착했을 무렵, 프란츠와 로라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프란츠 공! 한국 방문은 즐거우셨습니까?"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셨는지?"

"전한철 대통령과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준호가 옆에 있어 접근하지 못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프란츠는 미소 지은 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줬다.

"매우 아름다웠고, 역동적이며, 실력자가 많은 국가입니다. 각성자 강대국으로서 세계의 리더가 될 역량을 엿보았습니다."

차분한 한국어가 나오자 기자들이 모두 놀라워하면서 질문을 쏟아냈다.

외국에서 온 거인이 대한민국을 칭찬해 주는 건 시기를 막론하고 먹히는 코드였다.

분위기가 얼어붙은 건 질문이 한국에 조언할 부분, 한국이 주의해야 할 부분으로 틀어지다가 최준호에 대한 부정적인 질문이 나올 때였다.

"최근 최준호 초인의 등장으로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최준호의 손속이 빌런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인이 아이돌마냥 가볍게 처신하는 건 국가적 망신이라 생각하시지 않는지······."

"빌런보다 더 잔인한 헌터가 등장한 사회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모두 꼭지를 따기 좋은 이야기거리였다.

"······."

한국어 리스닝이 가능한 로라의 표정이 굳었고, 부드럽게 답변하던 프란츠의 표정도 굳으며 조용히 턱을 매만졌다.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질문을 퍼붓던 기자들도 어느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프란츠가 발산하는 기세에 압도된 것이다.

"나라를 위한 이들이 아닌 평화에 기생하는 부류였나?"

"······!"

싸늘한 눈길에 기자들이 대답을 못하고 얼어붙었다.

십대초인에서 물러났다고 하나 유럽의 거목이자 최강으로 꼽히는 초인이었다.

일반인에 불과한 기자들은 기선이 제압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각성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평화다. 그 평화에 젖어 그들의 희생을 망각하고 가진 허물을 들춰 가십거리로 소모되게 만들어 갈등을 유발하지."

프란츠의 일갈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이 모든 광경이 생방송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가 누린 평화는 공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걸 명심해라!"

이러니까 각성자들이 진저리를 치며 리그로 가 버리지.

몇몇은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작 이 정도도 마주할 용기도 갖지 못한 주제에.

경멸 어린 눈으로 기자들을 훑어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쓰레기들! Ficken!"

93화

"속이 뻥 뚫리는군. 역시 프란츠 공이야. 시원하게 일침을 날렸어."

"······."

환하게 웃는 대통령과 달리 천명국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공항에서 이루어진 프란츠의 인터뷰는 생방송으로 낱낱이 반영되었다.

아무 의미 없이 방영된 게 아니었다.

프레임을 잡기 위한 인터뷰였고, 그 도구로 선택된 게 프란츠였다.

결과는 기자들이 원하던 대답과 정반대로 나왔지만.

아마 기자들은 프란츠에게서 초인이라면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대답을 원했을 거고, 그 부분을 따서 여론몰이를 하려 했을 테지.

하지만 프란츠의 말로 모든 게 뒤집혔다.

"평화는 결코 공짜로 굴러온 게 아니지. 지금 입법하려는 세력은 이걸 망각하고 있고."

물론 각성자들이 존경을 받는 독일과 부와 명예를 갖는 대한민국의 각성자 시스템은 다소 다르다.

대한민국은 각성자가 되는 것이 신분역전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고, 부와 명예를 얻은 각성자가 사고를 치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각성자가 이뤄 놓은 평화를 부정하는 면이 강했다.

그래야 각성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각성자보다 비각성자 숫자가 더 많아서 할 수 있는 여론몰이였다.

불안감 속에서 공존이 이루어졌으나, 그 균형이 깨진 것이 리그의 득세였다.

비각성자들이 각성자들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생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각성자 표를 얻기 위해 이 공포심을 자극하는 세력이 있었다.

"지금 보다 명예를 세워 줘야 해. 그래야 각성자에게 양보를 요구할 수 있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테지."

프란츠의 인터뷰 장면에서 시선을 뗀 대통령이 천명국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심각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어. 그거 말고 최준호를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없습니다."

"그래, 없지. 최준호의 실력은 우리가 생각한 걸 아득히 뛰어넘었으니까."

각성자는 결국 정부가 제어할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서로 상호견제가 가능하고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갈라놓아야 통제가 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하면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아야 한다. 제어가 불가능한 절대적인 힘은 환희를 가져다주지만 폭주하게 되면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 입장에서 최준호란 존재가 그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이뤄 내는 성과들은 그 생각을 희미해지게 만들었다.

결정타는 프란츠와 충돌한 정보를 접했을 때였다.

"프란츠 공이 십대 초인에서 물러났지만 그 역량은 밀린다고 보기 힘들지."

"체력 이슈가 발생할 수 있지만 포스량이나 기프트 운용 노하우는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 프란츠 공을 제압한 게 최준호고."

"···예."

두 사람이 한식당 산책로에서 충돌하고, 상대적으로 최준호가 멀쩡했던 점, 남은 기간 동안 프란츠가 불편함을 보였던 걸 볼 때 결과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준호는 멀쩡하게 잘 돌아다녔으니까.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게 더 힘들다는 걸 감안할 때, 최준호가 명백히 한 수 위라는 말이 된다.

"플러스 단계 마물을 홀로 잡는 걸로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지. 최준호는 리그의 삼악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일 거야. 처음부터 우리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던 셈이지."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리 편인 게 더 중요해. 국가 소속 초인인 게 중요하고. 애써 부인하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자고.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자기 손에 놓인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좋겠어."

얼마 전, 국회에서 올라온 각성자, 비각성자 평등적용법이다.

법안 자체는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법 적용이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걸 다루고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현재 각성자의 자율적인 무력행사를 크게 침범하고 있다.

이것이 각성자의 범죄율을 획기적으로 낮출 거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각성자의 목에 목줄을 거는 행동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잘 안다.

최준호의 존재 덕분이다.

그러니 여야 가리지 않고 합의를 했겠지.

천명국이 우려를 드러냈다.

"반발이 심할 겁니다."

"내가 거절하겠다는데 어쩌겠나. 아직 지지율이 60%가 넘어.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가 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면 딴소리 못 할 걸?"

"······."

"아니면 다른 좋은 의견이 있나?"

천명국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법률은 제 주전공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하자고. 이거, 기자들이 보고 최준호한테 달려갈 수도 있겠는데."

그리 말한 대통령이 천명국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 부분은 우리 천 실장이 좀 더 고생해 주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근데 제일 황당한 건."

대통령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법이 제정된다고 최준호를 옭아맬 수 있다고 본 건가? 안 지키면? 잡아넣을 수는 있고?"

그럴 리가.

오히려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을 찾아갈지도 몰랐다.

같은 생각을 하던 대통령과 천명국이 시선을 마주치고 실소를 흘렸다.

"최준호에게 익숙해진다는 거, 무섭군."

* * *

프란츠가 돌아갔지만 여운은 강하게 남겼다. 특히 돌아갈 때 날 겨냥한 인터뷰에 일갈을 터뜨린 게 화제가 되었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자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확실히 기자들이 날 안 좋아하긴 하나 보다. 오창문의 사지를 부러뜨려서 그런가. 그것도 손속에 사정을 둔 건데.

그나마 모두가 내 적은 아니었는지 고예진을 필두로 옹호 기사가 올라왔다.

<타국 초인에게 자국 초인을 욕해 달라고 한 기자들, 국격 추락 어디까지?>

<자국 언론에 보호받지 못하는 초인, 이대로 두고 보면 초인의 '대거' 이탈 현실화 될 수 있어······.>

<이런 와중에 평등적용법 제정? ···갈등 우려 돼.>

<최준호 초인 등장 이후 높아진 국격 총 정리!>

<프란츠 공도 적극 동조할 수밖에 없는 최준호 초인의 무수한 업적들!>

···이렇게 보니 나도 나라를 위해 꽤 많은 일을 했다.

근데 평등적용법은 또 뭐야? 뭐, 법 만드시는 분들이 이상한 짓 하는 거 하루이틀 아니니 그러려니 싶었다.

그나저나 기사를 보니 나도 꽤 훌륭한 초인이잖아? 이런 나를 리그에 갈 걸 우려했던 프란츠 영감도 걱정이 참 많다 싶었다.

그나저나 프란츠 영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남는다.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예언.

그리고 리그의 분탕질.

심각한 일이랍시고 내게 얘기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공감이 가진 않았다.

"높은 분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자기 밥그릇이 걸린 만큼 빠릿하게 움직일 거라 기대하는 중이다.

물론 경고를 마냥 흘려듣진 않는다. 행여나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게 나였으니까.

빌런이 아닌 믿음직한 아들로서, 든든한 오빠로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내가 혈종에게 먹혔던 시절, 간절히 바라던 순간들이다.

막상 꿈을 이루니 별거 없었지만.

그래도 미치지 않은 게 어딘가 싶었다.

집에 돌아오니 날 본 윤희가 대놓고 궁시렁거렸다.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입맛 떨어지게."

"그게 오빠한테 할 말이냐?"

"그럼 애인한테 하겠냐?"

"애인은 있으면서 하는 소리이길 바란다."

"걍 죽어."

"말 참 예쁘게 한다."

"그럼 다현 언니처럼 조곤조곤 할 줄 알았어? 꿈 깨셔. 자기만 재미 봐 놓고."

얘가 이렇게 토라진 이유는 프란츠를 만날 때 소개를 안 시켜 줘서 그렇다.

윤희의 롤모델이 로라였는데, 닮고 싶은 초인이라고 한다. 재능도 재능이고 젊은 나이에 초인이 되어 멋지다나.

그런 로라 팔목을 부러뜨린 게 난데 용케 아무 말도 없다 싶었다.

"다음에 소개 시켜 줄게."

"약속 지켜."

"오냐. 요즘 사냥은 어떠냐, 할 만해?"

"순조로운데? 내 발전 속도 엄청 빠르다고 칭찬 엄청 듣는 중. 하긴, 죽어라 훈련하는데 실력이 늘지 않으면 맥이 풀릴 거 같긴 해. 누구씨가 굴려 줘서 말이지."

날 원수 보듯 바라보는군.

오히려 감사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아직까지 불굴이 개방되지 않는 걸 보면 여력이 남아 있는 거 같은데.

"더 훈련할 거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기만 해 봐라. 다 뒤집어 버린다."

···귀신같은 것.

어쩌면 불굴이 아니라 감지 같은 기프트를 개방한 거 아닐까?

"내 얘기는 됐고, 이번에 다현 언니랑 합방한다며?"

"어, 훈련하는 걸 컨텐츠로 해 보려고."

"갑자기 훈련 컨텐츠?"

"요즘 헌터들이 날로 먹는다는 여론이 있다고 해서.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대중에게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 외에 최근 국회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평등적용법과 관련된 내용인가 싶었다.

진세정은 이 법의 반대 입장으로, 각성자들을 옥죄어서 잘된 곳이 없는 걸 예로 들었다.

근데 너무 풀어 두면 각성자나 빌런이나 비슷한 거 아닌가.

내 눈에 띄면 가리지 않고 뭉개 버리면 그만이긴 한데.

"그거 좋네. 안 그래도 사람들이 각성자가 하늘에서 뚝딱 내려오는 줄 알던데."

윤희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 장난 아니라니까? 누가 보면 선택받고 힘이 주어진 건 줄 알아. 가끔 댓글 보면 속 터져서 죽겠어. 진짜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생겼는지 면상 한 번 뜯어보고 싶더라."

"얼굴 가죽 뜯다가 죽을 수 있다."

"안 죽거든?"

죽던데?

그렇게 죽여 봤다고 할 수도 없고.

네 말 맞다고 해 주니 으스댄다.

이런 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건가.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지 못하니 답답하군.

"아무튼 좋은 컨텐츠야. 고레벨 각성자도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알리면 각성자에 대한 인식도 조금 달라지겠지."

그러면서 보고 싶은 거만 보는 현 세태가 문제라고 열변을 토하는데, 그 모습에서 프란츠의 꼰대력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합방 의도를 알아차린 윤희가 입맛을 다셨다.

"부럽다. 나도 오빠 방송 한번 나가 보고 싶었는데."

"너도 한번 초대할까."

"어! 나도 출연하고 싶어."

진세정에게 한번 말해 봐야겠군. 컨텐츠 제작은 진세정을 비롯해 이제 어엿한 팀이 된 최준호팀에서 회의를 거쳐 내 수락하에 제작된다.

회의에서 자꾸 내 세계관에 디테일을 더하는데, 솔직히 진세정이 내 전생을 엿봤다는 것에 백 원을 걸 정도였다.

"난 다른 컨텐츠 할래!"

"하고 싶은 거 있어?"

"나 먹방 좋아! 겜방도 좋고! 술먹방도 좋겠다!"

다 몸이 편한 거다.

내 생각이랑 많이 다른데?

내가 짜본 컨텐츠는 이러했다.

<신성 길드 초짜 헌터가 다짜고짜 나 홀로 유해 6단계 마물을 만나게 된다면?>

<신성 길드 초짜 헌터는 절벽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신성 길드 초짜 헌터가 아무것도 없이 무인도에서 얼마나 버틸까?>

···등등의 컨텐츠를 생각했었는데.

뭐, 컨텐츠 방향이 당일 사정에 따라 바뀌기도 하는 법이니까.

일단 해 준다고 하자. 낚는 게 중요하니까.

"알았어. 다 해 보자."

"예쓰!"

···라고 해 놓고 훈련 컨텐츠로 짜 봐야지. 몰래 카메라라고 하면 납득하지 않을까.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건데.

납득할까?

납득하겠지.

물론 납득할 확률 0.01%고 절망할 확률은 99.99%겠지만.

절망할 윤희의 표정을 생각하니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최근 각성자 개인 방송 중에서 가장 핫한 것이 최준호의 <초인의 일상>이라는 밋밋한 이름의 채널이었다.

평범한 일상 영상이 주를 이룸에도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단기간에 구독자 500만을 돌파하고, 영상마다 조회수가 1,000만 이상이라는 수치를 기록했다.

영상이 가진 여파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초기에 의도했던 최준호의 이미지 메이킹 외에도 공익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오늘 방송도 그 연장선상에 속했다.

"오늘 방송 의도는 '고레벨 각성자가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가.' 예요."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공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프란츠가 남긴 이 말은 유럽에서 각성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각성자에 대해 안 좋은 인식도 존재하기에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하는가를 놓고 준비한 컨텐츠였다.

"어느 정도로 하면 됩니까?"

"평소에 훈련 강도가 약한가요?"

"그리 강하진 않습니다."

"그래요, 곤란한데. 정다현 팀장님은 어떠세요?"

진세정은 내가 아닌 정다현을 보며 물었다.

회색 트레이닝복에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정다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변에서 꽤 강하다고 하는 편인데, 저는 버틸 만해요."

"그럼 평소대로 해 주시다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좀 더 강하게 해 주실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날 보며 물어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네. 근데 좀 과격할 수 있어서. 눈살 찌푸려질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리얼리티가 중요하니까요."

"그럼 평소대로 하자."

"네."

내 말에 정다현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그림인지 모르는 진세정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 * *

김태현은 올해 30살 된 백수다.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일거리가 없으면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새벽에 늦게 잠들어서 점심을 지나 오후에 기상한 그는 라이브에 최준호 방송이 예고된 걸 확인했다.

"오늘 정다현이 나온다고 했지."

김태현은 최준호 채널에서 유명한 최준호 억까였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웬만한 배우보다 잘생긴 얼굴, 레벨 8 초인이라는 타이틀은 하나하나가 열등감을 폭발 시키는 요소였다.

김태현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최준호를 보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도 각성자 재능이 있었다면, 기프트가 주어졌다면 일용직을 전전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관점에서 최준호는 운이란 운은 다 끌어다 쓴 녀석이었다.

자신도 녀석처럼 행운이 따랐다면 열심히 살았을 텐데.

미리 시켜놓은 치킨이 도착했을 때,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었다. 타이밍이 딱 좋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일일 게스트 정다현입니다.

"···예쁘다."

순간 악플을 달려던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미모였다.

방송 화면에 나온 정다현은 기초 메이크업만 했음에도 미모가 빛이 났다. 트레이닝복만 입었음에도 쭉 빠진 몸매는 탄력이 넘쳐 보였고, 레벨 7에 도달한 아우라가 발산되었다.

부럽다. 나란히 선 모습이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최준호에 대한 적의가 더욱 커져 갔다.

-오늘은 평소 각성자가 어떻게 훈련하는지를 컨텐츠로 해 보려고 합니다. 정다현 팀장은 평소 쉬는 날 어떤 훈련을 하죠?

-저는 평소에 임무가 없는 날은 전부 훈련에 매진합니다. 무기가 손에 익어야 해서 손에 떼어 놓지 않으려고 하고, 무기가 없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무술과 총기 훈련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재능을 타고 나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는데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다고? 믿을 수 없다. 김태현은 노력이라는 키워드마저 빼앗아 가려는 둘에게 적의감을 느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악플이 쏟아졌다. 매니저가 빠르게 차단에 나섰지만 채팅창을 보는 둘이 보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응을 보일 때까지 쑤셔 주겠다고 생각할 때, 최준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개별 훈련이 아닐 땐 주로 지도 대련을 합니다.

채팅창에서 시선을 뗀 둘은 구석에 걸린 목검 빼어 들더니 들고 마주했다.

어차피 보여 주기 식이겠지. 몇 번 소꿉장난 하다가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라고 말할 게 뻔했다.

각성자들은 땀 흘리며 노력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족속들이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김태현이 그리 생각할 때, 둘의 목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쩌엉!

두 사람의 대련은 김태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최준호의 목검은 공기를 갈라 버릴 것처럼 매섭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에 대응하는 정다현의 목검은 날렵하면서 다채로웠다. 눈을 현혹시키는 검격으로 방어를 해냈지만 강맹한 최준호의 검격은 어렵지 않게 방어를 뚫어 냈다.

쾅!

-흐읍!

목검이 어깨에 작렬하자 정다현은 호흡을 들이키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 균형을 잡았다. 그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최준호의 목검이 집요하게 찔러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로 끈질긴 검격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정다현이 다시 한번 공격을 허용했다.

퍽!

최준호는 봐주는 게 없었다. 정다현의 방어가 무력화 될 때마다 어김없이 목검이 작렬했고, 듣는 것만으로 섬뜩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정다현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아, 안 돼!"

지켜보던 김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다가 흠칫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다현을 응원하고 있던 것이다.

각성자를 혐오하는 자신이 이렇게 몰입했다고?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애처로울 정도로 끈질기게 버티는 정다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다.

무엇을 위해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걸까.

천재로 불리지 않았었나. 20대 초반의 정다현은 레벨 7에 올라 부와 명예, 실력을 모두 갖춘 천재다. 근데 왜 저렇게 필사적인 걸까.

"······."

어느 순간 김태현은 악플을 쓸 의욕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에 둘의 대련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하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정다현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최준호의 목검은 비열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정다현을 농락하며 전신 곳곳을 두드렸다. 목검이 빗겨 맞아 찢겨 나간 어깨 부위는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읍!

20여 분 동안 이어진 대련의 끝은 정다현이 복부에 목검을 찔리면서 끝이 났다.

-여기까지.

최준호가 목검을 거두자 뒷구르기로 몸을 일으킨 정다현이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감사합니다.

-원래 쓰러져도 공격을 하지만 제한된 시간이 끝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최준호의 말에 그를 향한 원성이 쏟아졌다. 김태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방송이라고 해도 오바해서 정다현을 때리다니!

댓글창은 최준호를 향한 원성과 최준호 실더들이 가세하면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거 살살한 겁니다.

보통 이 정도면 과하게 했다고 할 법도 하지 않나?

최준호는 끝까지 자신이 살살했다고 말했다.

94화

시켜 놓은 치킨이 식어 버렸다. 하지만 김태현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땀을 훔치는 정다현의 모습이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열심히 하는 여자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김태현이 생각하는 정다현은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였다. 아름다운 미모, 천재적인 재능,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기프트까지.

신성길드 소속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국가수호국으로 옮긴 후에도 최연소 기록을 갈아 치우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만족하고 안주해도 되는 거 아닐까?

"설마, 인터뷰 때 얘기한 게 사실인가······."

시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히던 정다현.

당시에 가식이라 비웃고 넘어갔지만 진지하게 대련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영상에서 본 정다현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으니.

오히려 자기를 내세운 성격이 아닌 듯했다. 대련이 시작한 뒤 정다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카메라로 향한 적이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네."

정다현은 진짜배기였다.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했던 게 완전히 사라진 걸 느꼈다.

자신이 게으르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게으른 게 아니다.

모두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한 정다현마저도 확고한 목표를 갖고 정진하고 있었다.

"최준호도 마찬가지겠지."

노력이 없다면 초인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

세상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결국 자신만 멈춰 선 채 다른 사람은 묵묵히 걸어 나갔다.

악플 달 의욕도 사라져서 채팅을 멈추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혹독한 대련으로 스타일이 엉망이 되었지만 정다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차라리 최준호가 아니라 정다현이 방송하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움을 느낄 무렵이었다.

"이놈은 뭐야?"

눈에 거슬리는 댓글이 눈을 잡아끌었다.

바사칸-크크, 꽤 성장했군.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남아있어.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의미겠지. 좀 더 본능에 의지해서 움직임을 빨리할 필요가 있다. 최준호가 손속에 사정을 둔 게 아쉬운 부분이군. 평소대로 좀 더 굴렸어야 했는데.

"이 새끼가!"

저렇게 열심히 하는 정다현을 비난하다니!

바사칸은 김태현도 아는 네임드 유저였다.

평소 함께 최준호에 대한 악플을 달아서 동지라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이렇게 엇갈리다니.

눈에 불을 켠 김태현이 채팅 쳤다.

빨래빨아-네가 뭐라고 판단하냐? 딱 봐도 방구석 찐따같은데 평가질하지 말고 현생을 살아라.

바사칸-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평소에는 내 말에 동조하더니, 어린놈이 버르장머리가 없군.

빨래빨아-그런 아저씨는 버릇 있고요? 그냥 감사하다고 남기면 됩니다.

바사칸-난 지금 정다현이 더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은 뒤에 빠져 있어라.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정다현에게 조언을 해 주려면 최소 레벨 7이거나 초인이어야 할 텐데 그런 고레벨 실력자가 한가하게 채팅이나 치고 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아주 그냥 개나소나 초인이지."

빨래빨아-뉘예뉘예, 누구나 방구석에선 초인입죠.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바사칸-내가 초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내 정체가 드러난 건가. 정체는 철저하게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날 추적한 거냐? 넌 누구냐?

"아주 가관이네, 가관."

보다보니 어이가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컨셉에 먹혀 버린 게 아닐까.

측은함은 곧 조롱으로 바뀌었다.

빨래빨아-어르신, 제발 방구석에 나와 세상과 마주하세요. 초인은 무슨 ㅋㅋ 얼른 나가야 일 안 짤리죠. 아, 설마 일자리도 없어서 이렇게 한가하게 노는 건가?

바사칸-어린놈의 버르장머리가.

빨래빨아-버릇없으면 어쩌려고? 함 만나서 혼내주시게? 근데 만나면 한 주먹거리도 안될걸? 아조씨, 내가 바쁜 걸 다행으로 여겨요. 딱 봐도 만나면 한 주먹거린데 ㅋㅋ 함 뜰까요?

바사칸-······.

"별것도 아닌 게 까불기는."

방구석 초인을 제압한 김태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에는 이렇듯 수많은 방구석 초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락없는 패배자였다.

"······."

그게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서 잠깐 절망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탁월한 자기 합리화가 없다면 이런 생활도 못 하니까.

잠시 후 방송이 끝나자 김태현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다현의 자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팬 카페까지 가입하고 나서야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얻고자 했던 정다현에 대한 정보가 아주 많았다.

"국가수호국 빌런전담팀장. 엄청난 엘리트네. 하긴, 그러니 저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 거겠지."

이날, 최준호와 정다현의 대련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각성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는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각성자들을 무분별하게 옥죄려는 평등적용법에 대한 비판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방송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은 진세정의 얼굴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에서 오늘 방송이 성공임을 깨달았다.

대체 어느 부분이 먹힌 걸까. 평소보다 대련 강도도 낮았는데. 좀 더 굴려야 제대로 효율이 나올 텐데 적당히 한 게 아쉬웠다.

그런 것치고 대련이 이어지는 내내 진세정의 표정에 경악이 가득했지만. 내가 볼 때 이 정도 대련은 보여 주기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 사이 진세정은 정다현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대련하시는 거예요?"

"평소보다 약했어요. 보통 팔다리가 부러지거든요."

"세상에나! 정말 그렇게 하는 거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러니 상처를 입는 거고요. 대련할 때마다 제가 얼마나 모자란지 깨닫곤 해요."

"이걸 모자라다고 하면··· 어휴! 진짜 각성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아줘야 할 텐데."

진세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긴, 정다현은 나도 인정하는 근성녀니까.

그게 없었다면 오늘의 성취를 이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오늘 방송, 괜찮았던 걸까요?"

이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네! 완전 대성공이에요! 아니, 최준호 초인님의 방송 역사상 최대 성공이에요! 모두 정다현 팀장님 덕분이에요!"

"······."

내 공은 없는 건가? 진세정이 내 눈을 피한다. 내가 아니라 정다현 덕분이라니, 뭔가 섭섭하군.

잘됐다니 다행이다만.

다만 걱정이 되는 것도 하나 있다.

요즘 인터넷 방송에서 조작은 심각한 화두에 오르고 있던데.

나와 정다현의 대결은 평소와 다르니 이것도 조작이 아닐까?

좀 더 리얼리티가 넘쳐야 할 텐데. 나중에 진세정에게 물어봐야겠다.

"뒤풀이해요, 뒤풀이!"

진세정의 말에 모든 팀원들이 고개를 든다. 근데 내가 아닌 정다현을 보는 거지? 근처에 맛있는 된장찌개 집을 알고 있는데.

설마 정다현더러 정하라는 건가.

그런다고 달라지려나.

이런 진세정의 속내를 모르는 정다현이 미소 지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아싸!"

정다현의 말에 진세정이 환호했다.

그리고 30분 뒤.

"······."

능이된장전골 전문집에 도착한 진세정은 침묵했다.

그래도 된장찌개에서 된장전골로 업그레이드 됐다.

그에 반해 정다현은 방송 때도 보여 주지 않은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나 입에서 된장 냄새 날 거 같아."

한탄하는 진세정을 보며 난 감탄했다.

그거 참 부러운 능력이군.

말만 그랬을 뿐, 맛있게 먹더라.

"오늘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여러 곳에서 압박이 들어왔어요."

한참 먹던 중, 진세정이 그리 말해 왔다. 이번에 제정되려고 하는 평등적용법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번에 정다현과 대련하는 컨텐츠를 놓고 태클이 들어왔단다.

이게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가 있나?

보니까 다른 곳에서도 하던 건데?

이미 다큐멘터리로 각성자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보여 주는 내용은 많고 많았다.

예전에는 상당한 반향이 일어나기도 했고.

"파급력이 다르거든요."

진세정은 내 채널이 갖는 파급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현직 초인이면서 가장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외국 시청자도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한다.

여기에서 고레벨 각성자가 평소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법률 제정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웃긴 인간들이네. 나한테 직접 말도 못할 거면서."

"곧 초인님에게도 몰려갈 거예요. 기자들이 직접 초인님의 생각을 들으려 하겠죠."

내 생각을 알고 싶다는 건가.

이 법안이 각성자의 목을 옭아매려 하는 법이란 걸 알고 있다.

프란츠 영감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을 법이다. 아, 실제로 기자들의 태도를 보고 난리치긴 했었지.

난 솔직히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법 하나가 세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리가 없어서. 다만 이게 날 노린 거라면 굳이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법을 통과시켜서 각성자들에게 목줄을 걸고 싶다면 본인들도 그만한 것을 내놓아야지.

세상의 이치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내가 하나를 내놓으면 다른 사람도 하나를 내놓고. 가끔 사기를 쳐서 내가 100개를 내놓기도 하고 상대가 100개를 내놓기도 하지만.

내가 협상한 이상 공정한 거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니면 목을 내놓으면 되고.

어차피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말이 있으니 별걱정은 없다.

"좋지 않은 법이에요."

묵묵히 먹던 정다현이 말을 보탰다.

각성자의 행동을 크게 위축시켜서 빌런이 활개 치게 만들 수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위축시키게 만들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번 컨텐츠가 그 법안 제정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까?"

"네, 찬성 측이 그동안 각성자들이 무도하다고 한 걸 정면으로 반박하게 되니까요."

고레벨인 정다현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걸 보면 감동 코드가 있긴 하지.

나로는 안 되냐는 말에 진세정이 냉큼 대답했다.

"네, 초인님이 고전하는 모습은 전혀 안 그려지던데요. 그러려면 최소 초인을 데려와야 하는데 현실성이 없기도 하고요."

버서커가 있긴 한데, 녀석도 날 고전하게 만들 수는 없지.

순간 녀석을 방송에 내보낼까 생각이 들었지만 포기했다.

붉은 뱀 김영환을 죽이면서 빌런 이미지는 벗어던질 수 없게 되었다.

"아! 근데 초인님의 생각도 모르고 나댄 감이 있네요."

진세정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정다현이 날 보며 물었다.

"오빠는 어떤 생각이세요?"

"나?"

별생각 없는데.

"원하는 게 있다면 그만한 노력을 보여 줘야겠지."

* * *

아니나 다를까, 고예진은 평등적용법을 놓고 내게 인터뷰를 청해 왔다.

길게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생방송에서 이뤄진 인터뷰로 간단하게 내 생각을 밝혔다.

"법이 더 많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걸로 옳은 것처럼 들리지만 현장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초인님은 반대하시는?"

"좀 더 다듬으면 현장에 맞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예진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하긴, 이 법은 각성자들이라면 치를 떠니 나도 반대할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처음 초안을 낸 14명의 국회의원분들이 직접 마물 사냥과 빌런 체포 현장에 동행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래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지지를 보내죠."

방구석에서는 나도 <사람을 안 죽이고 사로잡는 방법 99가지>같은 책을 쓸 수 있다.

현실에서 그게 안 돼서 문제지.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고예진은 표정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저, 그 현장이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요?"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 보라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깨닫는 바가 많지 않겠습니까?"

설마 현장 체험도 해 보지 않고 날림으로 법안을 만들었을까.

죽으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고.

근데 내가 볼 때 반 정도 죽어야 정신을 차릴 거 같은데.

고예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는 언제든 일어납니다."

95화

95화

"그럼 그렇게 진행하지."

대통령의 지시에 정무수석이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천명국과 둘만 남은 대통령은 히죽이며 웃었다.

"상황이 아주 재밌게 흘러가는군. 안 그런가?"

"······."

"이런 건 직접 봐야하는데 말이지. 내가 국회에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울 때가 없어. 아마 지금쯤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을 텐데 말이지."

"취미 한 번 고약하십니다."

"안 그럼 어쩌겠나. 제 복을 발로 차는 자들인데.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평등적용법은 너무 많이 갔어."

대통령은 혀를 찼다. 천명국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세계적인 흐름은 점차 각성자를 향한 규제를 풀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각성자의 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마물의 위협이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국가가 못살게 굴면 타국으로 갈 수 있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 연합체에서 타국의 초인을 빼돌리는 행위를 금지시켰지만 여전히 뒤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정도로 초인 모시기가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빌런 조직과 손을 잡아서라도 마물의 숫자를 줄이려는 국가도 있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평등적용법은 명백한 시대역행 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법이 지금 논란이 되는 것처럼 충분한 현장 경험을 청취하고 만들어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최준호와 힘 싸움이 얼마나 무모한 건지 모르는 게지. 지창용이가 제어를 할 줄 알았는데 당대표가 되고 나서 머리가 많이 굵어졌어. 그나마 제일 눈치 잘 보는 녀석이라 도와줬더니."

"하지만 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알아, 그러니 정무수석을 보내는 성의까지 보이지 않았나? 그래봤자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던 지금은 지켜볼 때야.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 판가름이 나야 그 다음에 중재를 할 수 있겠지. 다만."

대통령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준호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야. 가불기에 걸린 녀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한 일이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보니 최준호 정치력도 상당한 거 같은데, 상대하기 까다롭겠어."

"아······."

측은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이유를 잠깐이나마 이해하지 못했던 천명국은 그를 상대해야 하는 게 자신임을 깨닫고 탄식했다.

젠장, 배가 아파오는 기분이다.

*

최준호의 발언으로 여당 측은 발칵 뒤집혔다.

법안을 발의한 건 여당 주도로 이루어진 만큼 선전포고로 들렸던 것이다.

정무수석이 중재를 해왔지만 당연하게도 결렬되었다.

오히려 최준호를 감싸고도는 청와대의 행동에 여당 의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이건 우리를 농락하는 것입니다!"

"최준호! 그 녀석이 감히 국회의원을!"

"당장 밀어 붙어야 합니다! 청와대를 압박합시다!"

"대표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

당대표 지창용은 눈을 감고 국회의원들이 소리치는 걸 들었다.

한심한 것들의 아우성이다.

'대통령님이 혀를 차고 계시겠어. 이 건으로 눈밖에 날 수 없지.'

대통령이 당대표였던 시절부터 계파의 일원으로 보좌해온 지창용은 돌아가는 흐름이 어떤지 눈치 챘다.

최준호를 억제해보겠다고 제멋대로 설친 게 패착이었다. 청와대에서 최준호를 감싸고 돌 때 지레짐작했어야 했는데 느슨한 관계라 생각하면서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

문제는 최종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점이다.

'도시락 사태'에서 최효직의 사위가 반병신이 되었고, 공천도 배제하라는 명령에 불만을 가졌다. 최효직은 비리의 주체라고 하나 당대표인 자신이나 서울시장인 한정문은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이미 칼을 뽑아든 이상 무라도 썰어야 한다. 하지만 잘못될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한다.

지창용은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의원들을 지켜보다 말했다.

"김용준 의원, 하상우 의원, 김슬혜 의원. 초인들의 목에 줄을 걸어야 한다고 한 건 의원님들입니다. 최준호 초인의 의견도 합당하니 현장에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

평등적용법은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발의했다. 최준호의 행태가 괘씸하다며 국회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콕 짚어 지목당한 세 국회의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대표님! 지금 우리를 버리려는 겁니까?"

"현장에 가면 우릴 죽이려 들 겁니다! 최준호가 어떤 자인지 잊으신 겁니까!"

"대표님, 그건 최준호한테 굴복하는 거예요!"

곧 죽어도 가겠다는 말은 안하는군.

지창용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용감하게 간다고 해도 그 후에 벌어질 일이었다.

과연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왜 자신은 아무도 살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 자체가 최준호가 지닌 무서움이었다.

여태 대한민국에 여러 초인이 등장했지만 이런 초인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너서클에 들어오길 바랐으며, 카르텔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여기에 가장 충실했던 것이 붉은 뱀 김영환이었다.

욕심이 지나쳐서 나중에는 부담이 될 정도였지만 말은 잘 통했다.

하지만 최준호는 아니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고, 명예욕도 없다. 수가 틀리면 상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손부터 쓴다. 그럼에도 끝없이 희생자가 발생하는 건 '나는 아니겠지.'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다.

이미 최준호는 기득권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준호를 제어해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방법이 뭡니까?"

"최준호를 피해 실전경험을 쌓는 겁니다!"

"아니, 왜 우리가 최준호 제안을 따라야 하는 겁니까? 숫자로 밀어붙입시다."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사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것입니까? 대통령님을 설득할 자신은 있고?"

"그건 대표님에게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주 개판이군.

최준호가 던진 한 수에 이렇게 갈라져서 싸우는데 이길 턱이 있나.

다툼이 점점 더 격렬해질 때였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젊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대표님."

"유중호 의원."

재선 의원 유중호였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최준호 초인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그를?"

"예. 최준호 초인이 과격하게 나왔지만 분명 협의할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만나보고 설득하겠습니다."

"유중호 의원의 수완은 알지만 최준호는 아무래도 좀······."

오죽하면 청와대조차 설득하는 걸 포기했겠는가. 더군다나 최준호는 국회의원을 만나주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게 옳았다. 아무 취급도 받지 못해서 열받아하는 의원이 많은 형국이고.

그러면서도 달변가인 유중호가 나서면 상황이 반전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가 생기긴 했다.

지창용은 마음을 바꿔먹었다. 유중호가 성공하면 그의 입지를 내세워 다른 의원들을 견제할 수 있겠지.

"믿어보지요."

"만족하실 결과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유중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내 인터뷰가 화제가 된 만큼 정다현과 대련도 적잖이 화제가 되었다.

특히 정다현의 미모를 칭찬하는 여론이 어마어마했는데, 원래 남자보다 여자가 인터넷 방송에서 더 선호 받는다고 진세정이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다.

이렇게 쉽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세희에게도 얘기를 해봐야 하나?

그것과 별개로 윤희를 낚는 건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기대해도 되지?"

"어, 기대해."

훌륭한 희생양을 얻은 나는 이세희와 만남 자리에서도 인터넷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기 PR에 적극적인 이세희는 의외로 방송 출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저뿐만 아니라 그룹의 이미지도 생각해야 돼서요. 좀 더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군."

"지킬 게 많은 입장이니까요. 수성이라는 게 보수적일 수밖에 없죠."

어깨에 얹힌 짐이 많은 이세희도 어지간히 피곤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저는 지금처럼 하드코어 한 게 좋아서요. 방송에 나오기 적합하지 않죠."

"하긴."

가끔 나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굴려달라고 외치는 게 이세희였다.

납득을 하면서도 아쉬움을 느끼는 게 나도 방송에 꽤 재미를 붙였다 싶었다. 하긴, 당장 윤희를 낚아서 몰래카메라 컨텐츠를 생각하는 걸 보면 그럴지도.

"다현이는 강도가 좀 약하던데 매번 저렇게 하는 건 아니죠?"

"당연히 더 강하게 하지."

"역시."

고개를 끄덕인 이세희는 평등적용법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더러 프레임을 잘 잡았다며 칭찬을 하는데, 솔직히 거기까지 계산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생각은 원론적인 부분이었으니까. 법안을 발의할 거라면 현장 경험 정도는 쌓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두 명 정도는 죽어줘야 진짜 위험한 현장에 갔구나 생각하게 될 테고.

"하지만 적이 늘어나는 형국은 좋지 못해요."

예전이라면 다 죽이면 그만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도 발전이란 걸 하는 사람이다.

적은 많이 죽일수록, 아군은 많이 살려둘수록 좋다는 걸 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가장 좋은 건 준호 씨를 따르는 국회의원을 늘리는 거죠. 그들이 준호 씨 의견을 국회에 반영하거든요."

"반영까지 해야 하나?"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서요. 본질은 준호 씨에게 손해가 되는 법안을 발의하지 않는 거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이세희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었다. 꼭 참여는 하지 않더라도 내게 필요하다는 건 알겠다.

정치인이라, 대통령을 가까이 해봐서 아는데 내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쓸모 있는 도구란 건 알겠다.

"어째 이용당하는 느낌인데."

"이용까지는 아니고, 힘을 합치자는 거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세희는 꿩 먹고 알 먹고 전략을 구사하겠단다.

내게도 손해가 되는 게 아니니 수락했다.

다만, 이세희와 관계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그리고 괜찮겠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세찬."

"······."

"여러 소문이 돌고 있는 걸 알고 있어. 부담스럽다면 당분간 거리를 둬도 돼."

이세희가 이세찬을 바보로 만든 게 내 소행이냐고 물어보면 난 솔직하게 대답할 의향이 있었다.

내 앞에서 선을 넘은 것도 있지만 녀석이 사라져야 이세희 앞길이 탄탄대로라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이세희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

"오빠는 분명 애증이 있어요. 성인이 되고 제가 성과를 내면서 저를 향한 증오가 짙어졌고요.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고리를 단호하게 끊을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상황에 감사해요."

이세희가 내 눈을 응시했다.

"저는 준호 씨가 어떻게 행동했더라도 상관없어요. 앞만 보고 현재를 살아가겠어요."

"멋지네."

"멋지긴요. 현실 도피가 살짝 섞인 건데. 그리고 미쳤어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멀리하라니요. 절대 못 내줘. 내 거야."

졸지에 누구 소유가 되어보는군.

"나도 모르게 속내가 나왔네."

멋쩍게 웃던 이세희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제 빅뱅 시리즈도 안착이 됐는데, 다른 좋은 사업거리 없을까요?"

"글쎄."

빅뱅 시리즈도 엄연히 말해 사업성 있는지도 모르던 걸 이세희가 소생시켜준 건데.

애초에 나한테 사업적 감각도 없고.

하지만 이세희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날 집요하게 쫓았다.

"분명 있을 거예요. 준호 씨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니까!"

"알았어, 생각해볼게."

···이거 왠지, 없어도 생각해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인터뷰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들은 물론, TV에 나오는 평론가들도 하나둘씩 발을 걸치고 있었다.

날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국회에서 급발진을 했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밑에서 청와대와 국회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천명국에 귀띔해줬다.

권력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가 같은 편임에도 신경전을 벌이는 건 결국 주도권 다툼이었다.

"이러니 다 죽이는 게 편하다니까."

여러 말이 나오고 있지만 물론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법을 제정할 거면 현장 체험은 필수지. 그래서 조건을 내건 것이다. 직접 현장 흐름을 체험해보고 같은 생각이면 나도 지지하기로. 다른 의도가 아니라 숭고한 마음이 있다면 나서겠지.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면 역시, 순수한 의도는 아닌 듯했다.

공을 넘겨버린 만큼 신경을 끄려 할 때였다.

여당 소속 국회의원이 날 찾아왔다.

원래 만남은 거절하는데 이름이 익숙하고, 직감이 묘하게 만나보라고 의도해서 수락했다.

이 이름, 어디서 봤더라?

"최준호 초인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유중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유중호는 여당 내 소장파 의원으로, 35세에 당선되어 재선을 한 젊은 피다. 40대 초반이 젊은 피라고 하는 걸 보면 국회가 고인물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는군.

초인은 나이가 들수록 쇠락하지만 국회의원은 선수가 누적되어 요괴가 되고 있다.

"이번에 평등적용법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행여나 여당에 안 좋은 생각을 가지실까 걱정돼서."

"여당이 주도한 거 아닙니까?"

"모두 같은 생각은 아닙니다. 저만해도 생각이 다릅니다."

고작 그걸 어필하려고 온 건가.

그럼 원하는 대답을 해주면 되겠지.

"여당에 유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일부 옛 기억에 갇혀있는 분들은 각성자를 제어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군요."

"예, 각성자를 지원하는 것이 국가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국가 경영도 각성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고요."

유중호는 그 스스로도 큰 재능은 없지만 레벨 5에 오른 각성자라고 밝혔다. 근데 내가 가늠해볼 때 레벨 5가 아니라 레벨 6인 거 같은데?

나와 같은 각성자라는 걸 강조하더니 교묘하게 평등적용법을 발의한 의원들을 비난하면서 각성자를 띄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념이 아예 다른 수준인데 왜 같은 당에 있지?

내가 의문을 갖건 말건 유중호는 열성적으로 자기 생각을 밝혔다.

"각성자는 억압받고 있습니다. 현재 사회 분위기로 인해 자기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기억났다.

왜 얼굴이 익숙한가 했더니 아는 얼굴이었다.

난 지금보다 10살 정도 더 나이 든 유중호의 얼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유중호, 그는 미래의 대선후보였으며.

리그의 첩자였다.

이걸로 대한민국이 뒤집혔었지.

먹이가 그물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유중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는지······."

"반가워서요."

96화

96화

'됐다.'

유중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부 활동이 제법 잦아진 최준호지만 국회의원이 그를 보려면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들었다.

행사에 마주쳐도 상종하지 않기 일쑤였고, 만남을 청해도 무시당하는 게 다반사였다.

깽판은 치지만 누구보다 거리를 멀리 두는 것이 최준호였다.

그래서 더욱 몸이 달았던 것도 있다. 한 번, 한 번만 만남을 갖는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녀석의 사회성은 떨어진다. 그 부분을 적극 공략한다.'

유중호가 최준호를 만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 전 리그에 투신했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중이어서다.

최준호가 리그에 올 수밖에 없도록 유중호는 계략을 세웠다.

첫 번째 계략이 평등적용법이었다. 하는 행동 족족 범죄가 된다면 정상적으로 사회에 붙어있을 수 없게 될 터.

국회를 미워하고 정부에 실망한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국민을 원망하며 이 나라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된다면 여러 국가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나서겠지만 위정자가 자신을 도구로 생각하는 걸 알게 된 이상 갈 곳은 리그밖에 없어진다.

교묘한 가스라이팅으로 선택지를 제한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중호는 야당의 가교 역할을 하며 평등적용법 발의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언론 대응에 나서면서 무산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놓고 협박이라니.

최준호의 말에 발끈하긴 했어도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결코 현장에 가지 않을 것이다.

의원들이 적극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자연히 동력은 상실될 테고.

'만만치 않아.'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상 외로 최준호의 정치력은 상당했다. 저 실력을 온전히 리그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은 더 빨리 올 것이다.

유중호는 초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다.

젊은 시절 뛰어난 각성자였던 그는 자기보다 레벨 낮은 자가 상사인 것을, 총괄하는 사람이 비각성자라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왜 나보다 못한 녀석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걸까.

자신보다 사냥한 마물 숫자도 적고, 위험도도 낮았다.

저들이 뭘 증명했기에?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게 당연한 세계라면 세계가 잘못된 게 아닐까.

세상이 무수히 많은 '불의'로 지정한 일도 사실 들여다보면 각성자와 마물이 등장하기 전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기형적으로 뒤틀린 세계는 모순이 쌓여나가고 있었다.

'버러지들이.'

비각성자는 아직도 자신들이 각성자와 동급이라 생각한다.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초인을 비롯한 각성자가 피를 흘려 지금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고, 비각성자는 뒤에서 사소한 사고들을 놓고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자격도 없는 주제에.

그들은 초인이 만든 세계에 감사하며 자신의 노동력만 제공하면 되는 일이다.

불만이면 각성자가 된다. 하지만 될 수 없을 것이다.

왜 각성자가 선택받았는지, 그들 중 소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을 기프트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실력에 따라 철저하게 대우받는 세계.

이것이 진정 옳은 방향이 아닐까.

'내가 정의다.'

처음 최준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믿지 못했다.

리그의 삼악조차 경계하는 초인이라니.

유중호에게 있어 리그의 삼악은 절대선이자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였다.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은 초인이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어야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고스에게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그는 이 썩어빠진 세상을 정화할 초인이자 구세주였다.

첫 번째 계략이 무위로 돌아간 이상 두 번째를 실행에 옮길 때였다.

'내 세치 혀로 최준호가 리그에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친분을 쌓고 공감해주는 척 하면서 조금씩 리그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은 대권을 거머쥐어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최준호는 리그 소속이 된다.

훗날 세상을 바꿀 행보가 자신의 손에 이뤄진다는 사실에 등골이 짜릿해졌다.

눈앞의 최준호에게서 서늘한 살기가 자신에게 향하기 전까지.

"신기하단 말이지."

"뭐, 뭐가 말입니까?"

유중호는 자신이 압도된 걸 느꼈다.

이것이 초인의 기세인가?

아니, 다르다.

최준호는 자신을 향해 살기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오늘 처음 봤는데?

대체, 왜?

"리그 출신들은 하나같이 입을 잘 털더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설마 제가 리그 출신이라는 겁니까?"

"맞잖아."

"헛소리! 이 말이 거짓일 경우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가슴이 철렁했지만 유중호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말리면 뒤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괜찮다. 증거는 없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리그 출신이라는 걸 드러낸 적 없다.

떠보는 것이다.

"감당 돼."

"증거, 증거가 있습니까?"

"언제부터 내가 증거 갖고 손을 썼나."

최준호라면 진짜 저지르고도 남을 놈이었다.

왜 의원들이 평등적용법을 갖고 난리 쳤는지 알 것 같았다.

미친개였다. 절대 상종해서는 안 되는 미친개.

유중호가 눈을 굴렸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럼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 마지막 수를 내밀었다.

"난 국회의원입니다. 국회의원은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이 있습니다.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손을 대면 사고가 커질 겁니다."

"알게 뭔데."

퍽!

머리에 번져가는 통증과 함께 유중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유중호는 개인적으로 인상이 깊었던 사람이다.

리그 첩자가 정체를 감추고 대선후보까지 되었던 게 놀란 기억이 난다.

물론 이거만으로 기억하는 건 아니고, 당시 리그 첩자인 게 밝혀지면서 나라가 발칵 뒤집혀 날 포위하던 포위망이 느슨했졌던 적이 있다.

꽤 골치 아프던 차에 난 유유히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러니 내 입장에서 유중호를 기억할 수밖에. 근데 어떻게 해서 정체가 밝혀졌는지는 나도 기억에 없다. 굳이 과정을 알 필요도 없고. 리그 첩자인 것만 알면 된다.

어차피 내 손에 잡혔으니까. 같은 리그 패거리일 수 있어서 수행원도 모조리 잡았다.

조용히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털어볼 생각이었는데 내게 잡힌 지 3시간만에 TV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유중호 의원이 실종!>

<유중호 의원, 일정 소화 도중 수행원들과 행방불명!>

<오리무중! 유중호 의원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유중호 의원, 실력과 감각을 지닌 여당의 젊은 피!>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여당의 소장파 의원이자, 말끔한 이미지와 유려한 언변, 폭 넓은 교류로 차차기 유력 대선후보라 불렸던 그가 사라진 것이다.

국회의원 하나 사라진다고 이렇게 뒤집힐 일인가?

난 굳이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행적이 드러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중호가 나와 만남을 갖는다는 사실이 전해졌던 것이다.

당장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가세해서 유중호 행방에 대해 질문해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각성자안보실장 천명국에게 연락하시라.

이걸로 잠깐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참고로 난 천명국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잠깐 고생해서 시간을 벌어주겠지.

그 사이 나는 유중호를 데리고 내게 도움을 줄 지원군을 찾아갔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혈종일 땐 도움받을 곳이 없어서 다 죽이는 거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희대의 살인마라 했지만 방법이 없어서 그랬던 거다.

아무튼 내가 방문하자, 소식을 접했는지 키다리 아저씨가 길길이 날뛰었다.

"이 미친놈아! 왜 여기로 폭탄을 가져와!"

"조언을 구할 사람을 생각해보니 청장님밖에 없더라고요."

"왜 나냐? 천 실장도 있고, 이세희 팀장도 있잖냐! 왜 나한테 가져오냐고!"

정주호는 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내가 유중호를 제압하고 데려온 건 정주호가 이끄는 국가전선방위청이었다.

어차피 도움 줄 거면서 튕기기는.

"이미 저질렀으니 도와주시죠."

"아씨, 내가 이래서 청장을 안하려던 건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건지. 이게 다 천명국 그 자식 때문이야. 날 추천해서 이렇게 같이 고통 받으려고. 똥쟁이 자식, 피똥으로 변기나 가득 채워라······."

탈모를 걱정하면서 정작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를 거칠게 헤집는다. 다행히 손은 안 본다. 방금 한 뭉큼 쥐어졌던데.

정주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일단 저질렀으니 수습해보자. 저 양반, 진짜 리그 첩자는 맞냐?"

"맞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제 감이요."

"···일단 근거가 없다는 건 알겠다. 근데 얘가 불지 않으면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 알지?"

"브레인워싱을 사용해도 될지 궁금해서요."

"그게 되겠냐! 현역 국회의원이라고! 가뜩이나 너한테 이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런가요."

"그래, 임마! 아오, 진짜!"

안 되면 안 된다고 하지 어지간히 히스테리다.

근데 안될 건 뭐지. 어차피 입으로 사실을 불면 해결되는 건데.

난 미래에서 확실한 사실을 보고 왔기에 잘 안다.

뭐, 아직 리그에 가입 안했을 수도 있는데 말하는 거 보면 리그에 호감이 있는 거 같으니 삭초제근의 묘를 살릴 수도 있을 거 같고.

미래를 보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건데 이해받지 못하는 거 같아 고독하다.

그냥 죽이고 조용히 묻어버릴 걸 그랬나.

혼자 발광하다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정주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여기로 온 건 잘한 거야. 주변에서 예상하지 못한 곳이니까."

하지만 청와대에서 벌써 알았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아마 알 거다.

내가 천명국 핑계를 대면서 왔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천명국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최준호 초인님."

"오셨습니까, 실장님."

천명국이 하얗게 질린 채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 먼저 들렸다 오지. 그 사이에도 그의 스마트폰은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데, 천명국은 아예 전원을 끄는 선택을 했다.

"유중호 의원 구금, 사실입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내가 발로 널브러진 녀석을 툭툭 차자, 천명국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왜?"

"리그 첩자거든요. 아, 아직 본인이 실토한 건 아니에요."

"······."

내 말에 천명국의 안색이 더 하얘졌다. 이러다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여태까지 제가 여태까지 주장했던 것 중 거짓이던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다소 과하게 손을 쓰는 면은 있지만 아무에게나 손을 쓴 적은 없다.

정주호도, 천명국도, 내 주변 사람들도 이건 다 동의할 것이다.

"유중호 관련 인물 중 리그 첩자가 더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제가 앞장 서죠."

내가 저질렀으니 해결도 앞장 서야겠지.

브레인워싱이 직빵인데, 일단 대통령에게 물어봐야겠다.

*유중호와 관련된 자들 중 리그 첩자는 존재했다.

의원실에서 정체를 드러낸 보좌관을 모조리 죽었고, 순순히 항복한 사람들도 잡혀갔다.

최준호가 그 앞에 섰다. 가로막던 이들은 팔다리가 부러졌고, 심한 이는 중상을 입었다.

번개처럼 들이친 최준호 뒤로 각성자안보실의 각성자들이 유중호 의원실의 물건을 모조리 압수했다.

"······!"

뒤늦게 달려온 지창용이 나아가려고 했지만 최준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자식은 진짜 미친놈이다. 여당대표인 자신의 신분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고 있었다.

평등적용법을 발의한 의원들이 옳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의 목에 줄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국회에 들어와서도 손을 쓴 미친놈이다.

여기에 격하게 반발하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을 것 같았다.

"뒷일을 부탁합니다."

"예."

볼일을 마친 것처럼 최준호가 자리를 벗어나자, 간신히 압박에서 벗어난 지창용이 천명국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천 실장. 이게 무슨 짓인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이러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대표님도 용의선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무슨 말······."

"유중호 의원이 리그 첩자라는 의혹이 있습니다."

"······!"

분노를 터뜨리던 지창용은 머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현역 국회의원이 리그 첩자다? 이것이 가져다줄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하얗게 질린 그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의, 의혹만으로 일을 저지른 건가?"

"그 의혹을 제시한 게 최준호 초인님입니다. 여태까지 최준호 초인님이 무언가를 놓고 지목했을 때, 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증거도 없이 일을 저질렀단다.

평소라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여당의 소장파이자, 차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의원이 리그 첩자였다?

자칫하면 당 전체가 날아갈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의원을 잘 다독여주시길. 조사가 끝나면 대통령님께서 직접 메시지를 보내실 겁니다."

"···오래 기다릴 수 없다고 전해주시게."

"예."

그 길로 천명국이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지창용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유중호 건은 대통령이 개입하면서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내가 브레인워싱을 사용할 일은 없었는데, 대통령은 직접 유능한 정신계 각성자들을 섭외하여 유중호가 리그 첩자라는 걸 밝혀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중호 의원, 리그 첩자로 밝혀져······.>

<靑 "여당 소속 유중호 재선 의원, 리그 첩자.">

<지창용 당대표 "국민 여러분에게 송구······.">

현역 국회의원이 리그 첩자였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뉴스가 온통 유중호가 리그 첩자라는 사실로 뒤덮였다.

"나라를 구해줬네. 정말 고마워."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 유중호를 잡은 건 우연에 가까웠다. 만약 이름에 친숙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유중호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잡지 못했을 것이다. 대선후보가 된 후에 잡으려고 했으면 잡음이 훨씬 심했을 테고.

"그래도 고마운 일이지. 이런 분을 알아서 잘 모셔야하지 않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말만이라니. 평등적용법 거부권 행사한 것도 난데."

"예, 감사합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대통령이 헛기침을 했다.

"이번 건은 우리 당의 실수이니 만큼 확실하게 단도리를 하지. 평등적용법도 거둬질 거고, 당 소속 의원들도 더 귀찮게 굴지 못할 거야."

"제가 귀찮은 일을 떠넘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혀. 한번쯤 칼질이 필요한 시점이었지."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정치적인 논리였다. 끝이 존재하는 권력이다 보니 당이 청와대 생각과 조금씩 어긋났던 것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을 거란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뒷말이 나오지 않게 잘 처리하지."

대통령과 대화를 마치고 청와대를 벗어나려고 할 무렵이었다.

기자들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내 차를 에워쌌다. 현역 국회의원이 리그 첩자라는 소문이 밝혀지면서 내게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이러다 사람 치겠군.

난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유중호 의원이 리그 첩자가 맞습니까?"

"어떻게 밝혀내신 겁니까?"

"과정에 강압적인 건 없었습니까?"

이렇게 무질서하게 질문이 쏟아질 때 하나씩 받아주면 다 해줘야 한다. 내 할 말만 하는 게 좋다.

"유중호가 리그 첩자인 걸 확신한 건 절 설득하는 척하면서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을 심으려 했습니다. 절 리그에 데려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

내 말에 기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평등적용법에 대해 유중호는 찬성 의사를 밝혔습니다. 각성자와 비각성자가 차별없이 법 적용하는 건 좋지만 각성자의 목에 줄을 채워서 이 나라를 리그에 헌납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그 말을 남긴 뒤 나는 차를 타고 청와대를 벗어나 신성길드 옆 빌딩인 최준호팀 사무실로 향했다.

다들 간 줄 알았는데 진세정이 남아 있었다. 야근 중이란다.

"기자들도, 국회의원들도 찍소리 못할 거예요. 캬! 정말 초인님은 대단하신 거 같아요."

"운이 좋았습니다."

"실력인 거 다 알아요."

날 과대평가하는 거 같았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일 뿐인데.

더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으니 그러려니 해야겠다.

"특히 마지막 말씀이 정말 좋았어요. 이제 국회에서 초인님을 노린 법안은 만들기 힘들 거예요. 각성자를 옥죄는 법안은 곧 리그 첩자가 아니냐는 공세에 시달리기 딱 좋아졌거든요. 그런 위험은 감수하려들지 않겠죠."

"그건 좋은 소식입니다."

"네, 좋죠. 시대에 역행하지 않으니까요. 앗! 잠시만요! 초인님 기사가 떴어요."

내게 양해를 구한 진세정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으흐흐흐!"

그러면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제3자가 봐도 굉장히 수상해보였다.

"뭐하는 겁니까?"

"아! 왜 야근하는지 모르셨구나. 지금 유중호 정체를 밝힌 게 초인님이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있거든요. 거기에 악플 달고 있어요."

"악플?"

누구 악플을? 유중호를? 걔를 욕해서 뭐하지?

하지만 진세정에게서 나온 악플 대상은 유중호가 아니었다.

"네, 초인님 기사에 초인님 욕하는 악플을 달고 있거든요."

나? 나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듣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내게 고개를 돌린 진세정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초인님의 팬이 결집하려면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하거든요. 억까가 몇 명 있긴 한데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제가 악질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럼 팬들이 초인님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거든요. 와! 이거 보세요! 반대수랑 리코멘이 어마어마하게 달리고 있어요. 전부 욕이에요! 초인님 팬이 이렇게 많아요!"

"······."

과거로 돌아와 처음이었다.

내 앞에서 내 욕하는 사람에게 손을 쓰지 못한 건.

97화

97화

유중호의 리그 첩자 사실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남겼다.

우선 여당 지도부는 책임을 통감, 총사퇴를 했다. 당에 리그 첩자가 있었다는 것은 당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만들 대형 사건이었다.

이를 시기적절하게 진화한 것은 대통령의 담화였다.

리그 첩자가 침투하도록 관리하지 못한 것에 사과하면서 통렬한 반성과 함께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엄숙히 다짐했다.

대통령은 과거 여당 당대표.

이걸로 큰 타격을 받아야 했지만 놀랍게도 충격은 크지 않았다.

유중호가 리그 첩자인 걸 밝혀낸 것이 청와대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랑 여당을 분리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세희는 이 원인을 청와대와 여당의 잡음 때문이라고 했다.

정권을 거머쥔 청와대와 연장을 해야하는 여당 입장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이해관계를 놓고 몇 차례 충돌이 벌어지면서 청와대와 여당을 분리해서 보는 시선이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리그 첩자를 적발해내서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청와대가 준호 씨를 영입한 건 최고의 한 수였어요."

여기에 청와대와 미묘하게 대립하던 지도부가 총사퇴를 하면서 청와대 입김이 들어간 지도부 선출에 들어갔단다.

청와대 중심 여당 개편 찬성이 65%에 달했고, 여당 지지층에서는 81%가 찬성을 했다.

대통령의 뜻대로 진행될 테니 더 이상 국회가 뭐라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을 테니 나야 좋았다.

"더 귀찮게 굴지 않을 테니 나야 좋네."

"준호 씨가 만들어준 성과죠."

"야당이 남아 있으니까."

"거기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보통 이런 호재를 물고 늘어져 정부 지지율을 떨어뜨려야 할 야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소장파 의원으로 명성을 날리던 유중호는 야당 측 의원과도 활발하게 교류를 나눴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 형국이라 야당도 소극적인 논평을 남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세희가 현재 형국에 대해 내게 설명해줬다.

"이 모든 것이 최준호의 계략이라는 말이 있죠."

"딱히 의도한 건 아냐.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거지."

"우연, 절묘, 준호 씨가 이렇게 말하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 알아요?"

"그럼 어쩔 수 없고."

내가 굳이 억지로 믿으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우연이었다, 우연.

공교롭게 유중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도 우연이고, 브레인워싱을 쓰지 않고 대통령 선에서 해결된 것도 우연이고, 진세정이 기사마다 악플을 달아 불을 지펴 화력을 끌어올린 것도 전부 우연이다.

그러다 보니 유야무야 된 게 하나 있다.

"좀 아쉽네."

"뭐가요?"

"국회의원들이 현장에 나가서 각성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느껴줬으면 했거든."

"······."

이세희가 할 말을 잃고 날 멍하니 바라봤다.

"그거 진심이었어요?"

"당연히 진심이지."

"···아마 의원들은 자기 목숨을 노린 계략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다들 자기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이지. 근데 사냥 간다고 다 죽는 건 아니잖아. 몇몇 소수의 경우만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럼 최전방에서 각성자들이 고생하는 것도 알아줄 것이지. 하여간에 자기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다.

그냥 대통령에게 말해서 강제로 불러낼까?

그런다고 말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네."

포기하는 수밖에.

그와 별개로 이세희 말대로 이번 건이 크긴 컸다.

여당 지도부가 총사퇴하면서 청와대 입김이 더 강해졌고, 이로 인한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예정이라니 최종 승자는 청와대와 나라는 말이 나왔다.

근데 내 얘기는 여기에서 왜 나오는 거지?

난 그냥 편해지는 게 전부인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화를 마친 뒤, 이세희는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식사를 권유했다. 난 정중히 거절했다.

"점심이라도 먹고 가시지."

"지금부터 더 재밌는 일이 있거든."

"뭔데요?"

"몰래카메라."

그 대상은 윤희였다.

*"아씨,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나와 윤희는 사무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윤희와 합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내 쪽은 몰래카메라였고, 윤희 쪽은 술먹방으로 알고 있는 게 차이였지만.

"다현 언니가 초대박 냈잖아. 내가 나왔는데 반응 별로면 좀 그런데."

"넌 신선한 맛이 있으니 더 잘 나오지 않을까?"

"진짜? 날 이렇게 높게 평가할 줄 몰랐네."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몰래카메라가 밝혀지고 표정에서 드러날 테니까.

나도 기대 중이다.

이런 내 속내를 모르는 윤희의 표정이 환해진다.

음, 죄책감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보통 속이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나?

근데 오히려 이번 일로 통쾌한 걸 보면 그동안 쌓아둔 게 많은가보다.

"아참, 그리고 오빠 기사마다 찾아다니면서 악플다니는 녀석 있는 거 알아?"

"그래?"

왠지 누군지 알 거 같다.

"어, 얼마나 악질이던지 오빠 팬들이 아주 치를 떨더라. 캡쳐해서 보내는데 아직도 못잡았데."

그야 본인일 테니까.

난 직접 작성하는 것도 봤다.

"아무튼 간도 크단 말이지."

"그러게. 걸리면 머리가 부서질지도 모르는데."

"뭐, 뭐?"

윤희가 기겁한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황급히 시선을 외면한다.

왜 피하냐?

직감과 윤희의 성향, 방금 보인 반응으로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도 악플 달고 있냐?"

"아, 아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짓을 하고 다닐 리가 없잖아."

"진짜?"

"당연하지! 뭐야, 지금 사람 못 믿는 거야?"

어, 전혀 안 믿기는데.

내 직감은 녀석이 한 짓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희가 내 시선 회피에 나서면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했다.

"올라가자."

"어, 근데 진짜 나 아냐."

"그래그래."

넌 악플을 달았고, 난 몰래카메라를 했으니까.

이걸로 퉁 치면 되겠다.

우리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윤희는 휑한 풍경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왜 아무것도 없지? 오빠, 음식은? 나 배고픈데."

난 윤희에게 공복을 유지하라 했다.

술먹방인 줄 안 윤희는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공복 유지를 주문한 건 간단했다.

대련하다 토하면 안 되니까.

"이번 컨텐츠는."

"응?"

"몰래카메라야."

"뭐?"

그리고 나와 대련할 거란 말에 윤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진세정은 채팅창의 폭발적인 반응에 환희를 느끼면서 동시에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저거 괜찮은 걸까.

오늘 컨텐츠는 찐남매 케미를 앞세운 최준호의 지도 대련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 착오가 있었다.

컨텐츠 속 컨텐츠로 최준호가 최윤희에게 몰래카메라를 시전했다. 최윤희는 오늘 방송이 술먹방인 줄 알고 왔단다.

그 뒤로 시작된 지옥 훈련. 최준호의 인정사정없는 지도 아래 최윤희는 엉망진창이 되어 서 있는 시간보다 바닥을 구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세상에나, 빈속이라니 토하지 않을 거라 다행이라니.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경악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템을 쥐어짜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저주를 퍼붓는 최윤희와 찐으로 기뻐하는 최준호의 표정은 리얼함 그 자체. 채팅창 반응도 폭발적인 호응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대련이 끝났다.

기력이 고갈된 최윤희는 엉망이 되어 널브러졌다. 저 모습을 보고 대련이 조작이니 봐줬느니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진세정이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는 최준호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초, 초인님. 이거 괜찮은 걸까요?"

"영상이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심하지 않나 싶어서······."

"평소대로 한 건데."

최준호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바닥에 대(大)자로 누운 최윤희가 숨을 몰아쉬면서 "최준호, 죽인다, 죽일 거야. 죽여버리겠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을 저주였다.

정작 저주받는 당사자는 태연한 표정이다.

"나중에 용돈 쥐어주면 됩니다."

"네? 그걸로 된다고요?"

"남매 사이의 평화는 용돈으로 유지되는 법입니다."

"웬만한 금액으로는 안될 거 같은데,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최준호에게 귀를 기울인 진세정은 금액을 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굴려주시면 안 돼요?"

오죽하면 이 말이 반사적으로 나올 정도였다.

대련 내내 저주를 퍼붓던 최윤희도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오자 군말없이 정리 운동을 하고 복귀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하나뿐인 오빠가 저 모양인데, 내가 맞춰야죠. 그리고 나 잘못되라고 하는 게 아닌 것도 알고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참 대단한 남매 사이다 싶었다.

최준호 위명에 가려졌을 뿐, 최윤희도 신성길드 소속으로 촉망받는 헌터였다. 레벨에 비해 실력이나 성과도 뛰어나고, 평판도 훌륭했다.

오빠의 존재감에 가려진 게 애석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최윤희가 진정으로 뛰어난 인재임이 발휘된 건 뒤풀이 메뉴를 된장전골로 정하려던 최준호를 제지하고 한우전문점으로 데려가면서다.

처음 이루어진 한우 회식에 팀원들 모두 환호했다.

모두 배 터지게 한우로 기름칠을 할 무렵, 최윤희가 진세정에게 다가갔다.

"오늘 제가 거하게 낚인 거 아시죠?"

"네. 저는 관여 안했어요."

"알아요, 딱 봐도 저 웬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었어.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 저 한 번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제가 속았으니 이번에는 제가 속일 차례죠. 부탁드릴게요."

채널 주인은 최준호인데 최준호를 대상으로 몰래 카메라를 하려고 하다니.

···굉장히 좋은 발상이다.

갑자기 온갖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진세정은 슬쩍 엄살을 부렸다.

"···저 잘릴 수도 있는데요?"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절 믿어요. 알았죠?"

"네."

그렇게 음흉한 계획을 세우며 웃었으나.

이쪽을 보던 최준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팀장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마 망했다고 밝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진세정은 최준호의 집요한 추궁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윤희가 말하면 그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셨죠?"

"···네."

지못미 최윤희.

진세정은 속으로 수백만 번 사과했다.

*여당 개편의 키를 쥔 대통령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쳐보였다.

하긴, 정치인이라는 종족은 권력을 쥐지 못하면 늙어버리는 법이니. 왕성하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지금이 대통령에게 전성기일지도 모른다.

"모두 최준호 초인 덕분이지."

"저는 거들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이쪽이 고맙고."

난 대통령이 목적이 있어서 부른 걸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용건을 꺼내들길 기다렸다.

서로 선수끼리 속내를 감추고 그럴 이유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은 헛기침을 하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실은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불렀네. 일본 측에서 온 의뢰지."

"말씀해주십시오."

"현재 일본은 리그와 전쟁 중이지. 꽤 팽팽하게 이어지다가 이번에 한방 먹이는데 성공했다더군."

"잘했네요."

"그런데 리그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어. 두 명의 초인이 지원올 예정인데, 그중 하나가 12궁의 일원이라더군."

리그 12궁.

리그의 설립자인 삼악을 제외한 열두 명의 초인을 칭하는 말로, 초인 중에서 최상위로 평가받는 일원을 의미한다.

강대국이 보유한 초인 중 가장 강한 초인 정도의 무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두 명의 초인이 합류한다는 건 전면전에서 일본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저번에 도움 요청은 거절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12궁이 나선 이상 상황이 달라졌네. 실제로 일본도 위기 상황이라기보다 힘을 합쳐 리그에 타격을 줄 생각이지."

문제는 마물을 경계해야 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모든 전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님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맞네. 국익을 생각할 때 도와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약속받은 게 많나봅니다."

"당연히 최준호 초인과 공유할 생각이네."

일본의 도움 요청이라.

아직도 아르고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더러 빌런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지.

저번 생 내내 지독하게 후회하며 혈종에게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던 나다.

그 노력이 고작 저놈의 몇마디로 부정당하는 게 기분 더러웠다.

누구더러 빌린이라고.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버르장머리를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

"돕겠습니다."

어차피 오래 체류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할 때 잠깐 다녀오는 거니까.

"고맙네."

대통령도 활짝 웃었다.

*갈색머리의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농염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 방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의자에 앉은 아르고스에게 향했다.

언제 봐도 조각처럼 잘생긴 모습이다.

슬쩍 장난기가 든 그녀는 아르고스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아르고스. 잘 지냈어요? 오늘도 잘 생겼네요."

"포옹 풀어, 콘스탄티나."

"편하게 티나라 불러도 된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스킨십은 당연하죠."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니까."

"깐깐하기는."

가볍게 혀를 찬 콘스탄티나는 손을 풀고 아르고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미적 감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구 배치였다.

속으로 혀를 찬 그녀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킬 일이 있다고요?"

"일본에 가줬으면 해."

콘스탄티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거길 차지할 생각인가요?"

"아니, 함정을 팔 거야. 네 힘이 필요해."

"누굴 죽이고 싶나 보네요."

"그래, 네 저주가 필요해."

위치 닥터(Witch Doctor) 콘스탄티나.

리그 12궁의 일원이자 초인.

직접 전투력은 약하지만 조건이 갖춰졌을 때 발동하는 저주는 삼악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초인이다.

모든 초인이 꺼려하는 초인이 바로 그녀다.

아르고스가 이렇게 부탁하는 경우가 없었기에 콘스탄티나는 적잖이 놀랐다.

"우리 달링이 죽이고 싶은 상대가 누군데요? 말만 해요. 죽여줄게."

"헤드 브레이커, 최준호."

콘스탄티나의 고개가 다시 한번 기울여졌다.

"그 사람은 아르고스가 반드시 데려와야겠다고 하던 사람 아닌가요?"

"한때 그랬지."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려요."

"생각이 바뀌었어."

"왜요?"

"빌런이라서."

"네?"

콘스탄티나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빌런이면 더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닌가?

리그는 빌런이 국가에, 개인에게 갖는 악감정을 이용해서 세를 불려왔는데.

"저기, 세계가 우리를 빌런의 정점이라 칭하거든요? 리그를 만든 당신이나 투신한 나도 빌런이고요. 그런데 최준호가 빌런이라서 제거해야 한다니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빌런이니까."

빌런 조직이 빌런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였다.

하지만 아르고스는 단호했다.

"최준호는 언젠가 빌런이 될 수밖에 없어. 빌런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걸 갖췄으니까. 그를 품으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했지만?"

"그가 들어오면 오히려 리그는 파멸할 거야. 그 전에 죽여야 돼."

98화

"······."

밖으로 나온 콘스탄티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아르고스를 봐 왔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해 왔다. 그래서 최근 등장한 헤드 브레이커 이슈에 대해 잘 몰랐다. 동아시아에 등장한 신예 정도?

"내가 유럽에 신경 쓴 동안 이렇게 바뀔 수 있나?"

그곳에서 얻은 이명 위치 닥터.

저주를 활용한 전혀 새로운 전투 방법은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녀의 손에 루마니아는 초토화 되었으니까.

콘스탄티나는 아직도 기프트 각성할 때를 생각한다.

자신의 기프트를 욕심낸 정부, 그리고 길드들. 만약 그들이 자기 능력을 탐내어 가족을 해코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심심찮게 떠오른다.

불타오르던 집안. 타 죽어가던 부모님. 겁에 질린 언니와 남동생.

그 광경을 보며 낄낄 웃던 정부 관계자들.

위치 닥터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날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빌런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지."

핑계 없는 무덤 없는 것처럼 리그에 들어온 빌런들 모두 각자 사정이 있다.

자신처럼 과거사에 얽혀 어쩔 수 없이 빌런이 된 사람도 있고, 태생 자체가 쓰레기인 사람도 있고.

눈에 띄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눈앞에서 쓰레기 짓을 하면 가차 없이 손을 썼다.

리그 소속 12궁의 일원이지만 악(惡)에 누구보다 단호한 것이 콘스탄티나 그녀였다.

세상의 모든 악과 어둠을 집어삼키는 검정을 표방하지만 그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헤드 브레이커에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얼마나 악하기에 아르고스조차 거절하는 걸까.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다섯도 되지 않을 텐데.

아니, 애초에 아르고스는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 표현이 과하지 않다.

호기심이 점점 커져갈 때, 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블랙하운드를 보고 콘스탄티나가 손을 들었다.

"하인즈!"

"콘스탄티나."

"마침 잘 왔어.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네?"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콘스탄티나가 놀랐다.

자신이 알던 미친개 하인즈가 맞나 싶었다.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못해 세계가 좁다 하며 누비고 다니는 게 그였다.

본거지에서 가장 얼굴을 보기 힘든 인물이 저리 말하니 의외일 수밖에.

"내가 아는 블랙하운드가 맞으려나? 하는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상황에 따라 바뀌는 법이다."

"신기하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이란 바뀌는 걸까.

전 세계의 공적이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블랙하운드가 화제를 돌렸다.

"알을 만났나?"

"응. 이번에 임무를 부여받았어."

"무슨 임무?"

"헤드 브레이커를 제거해 달라네?"

"···헤드 브레이커."

무섭게 굳는 블랙하운드의 표정에 콘스탄티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하인즈는 헤드 브레이커랑 부딪쳐 본 적 있지 않아?"

"네게 맡긴 걸 보면 알이 확실하게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나보군. 헤드 브레이커는 강하다."

"그 정도야?"

"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다."

"그건 좀 놀라운데?"

콘스탄티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정중하지만 실력에 대한 평가가 가차 없는 것이 블랙하운드였다. 그는 누구도 자기 위에 놓아두는 법이 없으며, 아르고스만을 동지이자 리더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블랙하운드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여태까지 그 평가를 들은 건 헬 마스터를 포함해서 다섯도 넘지 않았다.

헤드 브레이커는 이제 갓 초인이 된 걸로 아는데.

아르고스에 이어 블랙하운드까지.

둘의 평가가 동일하다면 헤드 브레이커는 진짜 위험한 초인이라는 말이 된다.

"단단히 준비해야겠네."

"너도 조심해라."

"알잖아? 내 영역에 들어오면 누구든 자신 있는 거."

"나도 죽을 뻔했으니 안다. 하지만 헤드 브레이커는 아니다."

"어떤 점이?"

끝을 헤아리기 힘든 저력이야 말로 헤드 브레이커가 갖는 무서운 점이다.

블랙하운드가 진지하게 조언하는 것만으로도 그 위험성이 체감되었다.

"아쉽진 않아? 내 손에 헤드 브레이커가 죽는 건데."

"누구더라도 제거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헤드 브레이커는 죽을 거야. 가장 혐오하는 모습에 자신이 삼켜지는 걸 보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확언이었다.

"······."

블랙하운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