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본격적으로 수색이 시작되는 당일.
광장에는 이번 일에 참여하는 용병, 경비대, 마법사. 그리고 그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북적였다.
형식적인 작전 책임자인 조피스 가주와 경비대장 카달이 연이어 연설했다.
"...하여, 우리는 빈민가에 숨어 있는 배신자들을 색출해내, 도시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이레네여, 영원하라!"
카달의 힘 있는 외침에 군중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응답했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신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배신자들을 싸그리 목매달아라!"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번 작전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도시에 흉흉한 사건들이 계속 터지니, 불안해하던 참이다.
시민들은 정의로운 경비대와 용병들이 위험인물들을 모조리 색출해내길.
그렇게 해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길 간절히 바랐다.
카달은 그 반응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카달에게 흰 로브를 입은 굉장히 '마법사스러운' 복장의 중년이 말했다.
"슬슬 시작했으면 좋겠소. 시간 낭비는 질색이라."
"음. 알겠다."
마법사의 재촉에 카달은 인상을 구겼지만, 이내 출진 명령을 내렸다.
외곽 경비대를 선두로 용병들이 줄지어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저 멀리 전쟁이라도 떠나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실상은 빈민가를 털러 가는 거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민들은 용병들의 앞에 꽃을 뿌려주었다.
카달이 어느 한 지점에서 말했다.
"여기서 나눠진다."
계획은 4개 조가 각각 다른 방향의 성문으로 나가 빈민가를 수색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미리 배정했던 대로 인원이 나뉘어, 도시의 다른 성문을 향해 흩어졌다.
카달이 맡은 1조는 동문으로 나갔다. 저항이 가장 격렬할 거라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카달은 곧바로 자경단원들을 맞닥뜨렸다.
"이건 뭔....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골목길을 막고 선 자경단원들을 제법 훌륭하게 무장했다.
마차나 급조한 목책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지붕에는 이따금 대형 쇠뇌가 보이기도 했다.
'반발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달은 얼굴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골치가 아팠지만 일단 대화는 해봐야 한다.
'이들 역시 폐하의 신민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해결해야 해.'
한 발짝 앞서나간 카달이 외쳤다.
"나는 외곽 구역 경비대장 카달이다! 도시의 안전을 위해 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으니, 당장 길을 비켜라!"
성난 대답이 돌아왔다.
"지랄마! 니들이 뭔데 우리 사는 곳을 들쑤시는데!"
"그래 임마! 되도 않는 누명 씌워서 다 감옥에 쳐넣거나 강제 노역 시킬 생각이잖아!"
자경단원들의 날선 대꾸에 끙, 신음을 삼킨 카달이 다시 외쳤다.
"오해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시와 제국을 위협하는 위험 분자들을 수색하기 위한 작전이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일은 내 명예와 선조와 수염에 걸고, 절대 없을 것이다!"
명예와 선조와 수염까지.
목숨보다 중요한 것 세 가지를 모두 걸어버렸다.
고지식한 드워프인 카달이 자기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카달의 진심은 전해지지 못했다.
"좆까 이 쥐방울만 한 땅딸보 새끼야!"
카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드워프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만 정확히 짚어서 하는 게, 한두 번 욕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달은 참아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다.
정말로 도시를 지키기 위해 하는 작전임을. 카달의 진심을 저들에게 전해줄 방법이 있을 거다.
카달이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그때.
함께 따라온 마법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왜 이곳에 멈춰 선 것이오."
"저놈들이 막고 있어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 겨우 그것 때문이었소?"
"겨우?"
마법사는 대답 대신 입으로 무언갈 웅얼거리길 시작했다. 그런 마법사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카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카달이 급하게 마법사를 멈추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주문이 완성되었다.
허공에서 생겨난 불덩어리.
그 불덩어리가 자경단원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화아아아아!
땅에 떨어진 불덩이는 이내 화염 기둥이 되어 그 일대를 태워버렸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덮치며 자경단원들을 덮쳤다.
"끄아아악!"
"어억!"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화상을 입은 자경단원들이 허우적거렸다.
기껏 쌓은 목책과 장애물들도 활활 불타올랐다.
고기와 나무 타는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그 끔찍한 광경에 멍하니 굳어 있는 카달을 보며 마법사가 차분히 말했다.
"말했지 않소. 시간 낭비는 질색이라고."
마법사
* * *
마법사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살상 마법을 주류로 연구하는 전쟁 마법사.
그 외의 마법을 연구하는 일반 마법사들.
이 시대에 살아가는 마법사 중 구 할은 전쟁 마법사다.
그리고 이 전쟁 마법사가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바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는 법이다.
마법은 하나같이 위험하고 강력하다. 광역 마법에 적뿐만 아니라 아군마저 죽어 나가는 경우는 전장에서 너무 빈번하다.
아군을 죽였다고 질질 짜는 마법사는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악마에게 대적하기 위해.
전쟁 마법사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들이 되어야 했다.
"이게 대체...."
멍하니 있던 카달이 마법사에게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마법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짓이라니요. 계획의 걸림돌을 치운 것뿐입니다. 그걸 위해 제가 온 거잖아요?"
카달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저들이 걸림돌인 건 맞으나, 분명 대화의 여지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이 마법사가 싸그리 불태워버렸다.
"저들은 황제 폐하의 신민이다! 그런 신민들을 다짜고짜 불태워버리다니!"
"무슨 소리십니까? 이레네의 도시법에 따르면 도시의 주민은 성벽 안에 거주지가 있는 주민까지만 인정됩니다. 빈민가의 주민들은 그저 이 장소를 멋대로 점거하고 있는 범법자 무리에 불과하죠."
마법사는 법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했다. 빈민가는 공식적으로 도시의 주민이 아니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기에 마법을 날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곳은 제국의 영역이다! 그리고 제국 안에 있는 모든 건 황제 폐하의 소유물! 도시의 법이 어쩌고 할 그게 아니야!"
"음. 그것참. 수구적인.... 아니. 보수적인 생각이군요. 뭐, 어쨌건. 이렇게 한가하게 잡담을 나눌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마법사가 앞을 향해 턱짓했다.
마법에 타격을 입은 자경단원들이 이쪽을 향해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제 대화의 여지는 없다. 남은 건 투쟁뿐.
그리고 저들은 절대로 자기 터전이 남에게 짓밟히는 걸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카달이 지시를 내렸다.
"모두 저들을 제압하라! 하지만 되도록 살릴 수 있는 자들은 살려라.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위험분자들의 색출이다! 그걸 잊지 마라!"
"예!"
우렁차게 대답한 경비대와 용병들이 자경단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달은 생각했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고.
* * *
암흑가는 암흑가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다. 주민들은 공터에 한데 모여 불안에 떨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시작됐군.'
데일은 골목을 막아놓은 수레 주위에 들려오는 소음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되나?'
아무리 소강상태에 빠져 있다 하나, 여전히 악마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그런 와중에 단결은커녕 이런 무익한 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데일이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일을 벌인 마탑도. 동조한 평의원들도.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악마가 그리 우습게 느껴지나.'
데일이 기억하는 악마들은 그야말로 세계의 파괴자요, 살아있는 재해였다.
그들의 강함은 비상식적이다.
갖은 애를 써도 사냥할 수 있는 건 중위 서열까지가 고작.
상위 서열 악마는 여러 직업으로 도전해봤지만,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적어도 한 직업에서 끝을 본 강자 넷이 힘을 합쳐야 상대해봄 직하다는 게 데일의 계산이다.
그렇기에 악마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공포 덕분에 인류는 단결할 수 있었다.
적이 너무 강하니 내부 싸움을 벌일 틈이 없는 것이다.
가끔 악마를 숭배하는 변절자들이 나와도, 사람들은 힘을 합쳤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진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런 무익한 싸움까지 벌이고 있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거다. 악마가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다는 거고.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공포에 익숙해진 것일까?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특히 이번 일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이런 사건을 의도했다 느낌이 든다 해야 할까.
'이해관계....'
각 조직은 저마다의 욕망이 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 마탑이나, 도시의 안정을 되찾고 싶은 경비대. 중간에서 콩고물을 받아먹고 싶은 평의원들.
모두 자기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때, 이런 거대한 풍파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고.
데일이 꺼림칙하게 여기는 건 이 부분이다. 상황이 너무 절묘하다 해야 할까.
이해관계가 이리 딱 맞아떨어지니 도리어 의심스럽다.
'마치 누군가 조율한 것 같은 느낌인데.'
그리고 그런 배후가 있다면, 외부인의 소행이라기보다는 도시 내부에 배신자가....
그렇게 데일이 추측을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조용하던 암흑가에도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쇠장화가 바닥을 밟는 소리. 허리에 매단 검이 흔들려 절그럭거리는 소음. 왁자지껄한 잡담.
용병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용병들이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머지않아 용병들의 잡담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거긴가? 이교도들 모여 있는 곳."
"어쩐지 냄새도 이상하고 어둡더라."
"그냥 다 잡아들이자. 어차피 제대로 된 놈들도 아닐 텐데."
웅성거리며 골목에 들어선 용병들은 이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길목을 막아선 수레. 그 수레 위에 데일이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용병들은 누가 먼저랄 새 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압적인 풍채. 내려다보는 구도. 머리 위를 덮은 건물의 그림자.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고요함.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나운 늑대.
겁먹었다. 평범한 이라면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은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곤란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게 그.... 어, 어떡하지."
"돌아갈까?"
"싸워보지도 않고?"
"난 싸우기 싫은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용병 중에서 상대적으로 경험 많은 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데일에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데일 경이시죠? 명성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직접 보니 영광이군요."
용병은 양손을 비비며,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그제야 데일도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너는?"
"저는 제온이라고 합니다. 팽의 아들 제온. 길드 소속 용병으로, 지금은 동패이죠. 아! 하켄이랑도 몇 번 술잔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켄은 요즘 잘 지냅니까?"
뜬금없이 하켄 얘기를 꺼낸다.
아마 데일과 하켄이 함께 일한 적이 많다는 걸 알고 일부러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사교적인 용병이군.'
사교성은 용병에게도 훌륭한 미덕이다.
그런 면에서 제온은 능숙했다.
하켄의 안부를 물으면서 은근슬쩍 데일에게 친근함을 주려 하고 있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제온의 얼굴이 환해졌다.
데일이 마음을 어느 정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리적 거리가 좁혀진 기분에 제온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데일 경.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는 이 일대를 수색하러 왔습니다. 그러니 그.... 좀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주민들의 신원은 내가 모두 파악해두었다. 수상한 놈들은 전부 쫓아냈고. 굳이 너희들이 뒤져보지 않아도 된다."
단호한 대답에 제온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시 한번 손을 비비며 말했다.
"물론, 데일 경이 확인하셨겠지요. 하지만 이게 저희도 돈을 받고 일하는 거다 보니.... 직접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내 눈을 의심하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요! 저희는 데일 경을 믿습니다. 그냥 확실히 하자는 거죠. 그리고, 정말 확실하다면 조사해도 상관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온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기 논리가 퍽 그럴듯하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다만, 데일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잡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성과급이 있을 텐데.'
이런 의뢰의 특성상, 수상한 사람들을 많이 잡아들일수록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라는 건 매우 애매한 표현이다.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른다.
그래서 데일은 답했다.
"좋다."
제온이 환히 웃었다.
"역시 데일 경. 진정으로 명예로우신...."
"허나 조건이 있다."
"예?"
"너 혼자서만 들어와라."
"그게 무슨 말이신지...."
"어차피 조사하는 데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제온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입가에 지은 억지 미소가 꿈틀거렸다.
"하하. 그래도 혼자서는 조금 그렇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고."
"걱정 마라.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지켜주지."
"아니 데일 경은 그...."
"왜 그러지?"
데일은 머뭇거리는 제온에게 쐐기를 박았다.
"나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거짓말이었나?"
제온의 얼굴이 굳었다. 할 말이 궁해지자 그는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번 일에는 경비대부터 길드, 마탑까지 껴있습니다.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릴 생각입니까?"
"그들은 그들 일을 하고. 난 내 일을 하는 것뿐이다."
"후회하실 겁니다."
결국, 참지 못한 제온이 협박 비스무리한 말을 꺼냈다. 데일은 그 대답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내가 후회하게 만들어봐라. 다른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닌, 네 손으로 직접."
데일이 검을 겨누며 용병들의 안색이 썩어들어갔다. 저 몸짓의 의도는 선명하다.
빨리 덤비거나, 아니라면 썩 꺼지라는 뜻이다.
용병들은 고민했다.
이곳에 모인 용병들은 10명 남짓. 동패보다 높은 등급은 없다.
각자 경험도 있고, 나름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는 용병들이다.
그렇다면 데일과 전투를 벌여볼 만할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서 도적 길드 하나를 박살 내버린 괴물에게 덤벼드는 건, 도저히 할 짓이 못 되었다.
모두의 간절한 시선이 제온에게 모여들었다. 제온도 그 분위기를 읽었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굴욕적이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다.
"후우. 오늘은 이대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두고 보십시오. 다음에 올 때는 우리만 오지는 않을 겁니다."
끝까지 엄포를 놓는 건, 제온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사내로서. 용병으로서의 자존심.
그렇게 말한 제온은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런 제온을 데일이 불러세웠다.
"멈춰."
"?"
용병들이 일제히 자리에 멈췄다. 데일이 말했다.
"다음에 올 때 더 많이 데려올 거라면, 지금 미리 제거하는 게 깔끔하겠지."
두고 보자는 놈들을 굳이 보내줄 이유가 어딨을까?
검을 든 데일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겁에 질린 용병들이 제온을 노려보았다. 제온은 억울했다.
'아니. 당연히 그냥 보내주는 흐름 아니었나?'
데일이 다가가자 용병들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데일은 아예 뛰기 시작했다. 용병들도 뛰었지만 금방 따라잡혔다.
데일이 곧바로 검을 휘두를 기세이자 제온이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냥 자존심 한번 부려봤습니다! 다신 안 오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명예.... 아니. 부모님을 걸어도 좋습니다!"
"저, 저도입니다. 어머니께 맹세코!"
"저도...."
용병들이 앞다투어 부모를 걸기 시작했다. 데일은 이 패륜아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짧게 말했다.
"앞으로는 말조심해라."
어차피 겁만 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용병들이 이 주위를 들쑤시는 일은 크게 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용병들은 고개를 굽신거리다, 이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왜 뒤로 물러나. 용병 새끼들 또 게으름 부리고 있었네."
그렇게 말한 건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청년이었다.
오만한 말투. 똑 부러진 억양. 그리고 손에 든 지팡이까지.
청년의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마법사다.
마법사
* * *
마법사 청년은 갈색 눈에 탁한 금발 머리를 가졌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다.
로브와 지팡이가 아니었다면, 농부의 아들쯤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눈에 담긴 오만함.
자기가 남들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는 우월감은 전형적인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청년의 옆에는 입을 두건으로 가린 전사들이 넷 서 있었다. 하나 같이 실력이 있어 보였다.
마탑에 소속된 노예 병사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마법사의 등장에 용병들은 당황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법사는 자기 말이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너희들은 입이 없어? 벙어리야? 왜 물러나고 있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아니면 한 놈 정도 불태우면 고분고분해지려나?"
그제야 제온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이렇게 갑자기 귀한 분을 마주치게 되어 모두 당황했습니다. 그, 마법사님은 저희에게는 귀족님들과 다를 바 없어서...."
과연 제온은 사교적이었다.
그는 은근슬쩍 마법사를 추켜세워 화를 풀려고 했다.
마법사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귀족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흐음. 그래. 귀족이나 우리나 비슷하긴 하지.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는 쓸모없는 귀족보다는 우리가.... 그런 거라면 용서하겠어."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왜 물러나고 있었지? 이곳 조사를 벌써 끝낸 거야?"
"그게...."
제온은 대답하기 어려운 듯. 뒤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데일이 석상처럼 조용히 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의 고개도 제온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저건 또 뭐야. 흑기사? 여기가 전장도 아니고 무슨...."
마탑의 마법사들은 상위 구역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다.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제온이 얼른 설명했다.
"그. 데일 경이라고, 요즘 한창 잘나가는 용병이십니다."
"흑기사가 용병이라고? 아니, 그보다 용병이면 저기를 왜 막고 있는데."
"용병이긴 한데 아무래도 이번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리고 저기가 밤의 신도들이 모여 있는 곳 아니겠습니까. 신도들을 지키려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킨다고? 누굴 바보로 알아? 흑기사한테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하나밖에 없어. 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라는 거. 저 시체들한테는 뭘 지키고 어쩌고 할 정도의 이성이 없다고."
전쟁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지휘관으로서의 전략 전술이나, 전장에서의 교리 따위를 배운다.
그중에는 각 병과를 다루는 방법도 있는데, 흑기사를 의미 있게 써먹는 방법은 하나라고 가르친다.
가서 싸우게 시키는 것.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런 것까지 배우지는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마법사는 화를 냈다.
"그냥 일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데일 경에 대해서는 길거리 붙잡고 아무한테나 물어보셔도 됩니다!"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말하면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렇단 말이지."
마법사는 눈을 게슴츠레 떠서 데일을 쳐다보았다. 데일도 그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겼다.
마법사는 제온에게 고갯짓했다.
"가서 당장 비키라고 전해."
"...예? 제가요?"
"그럼 내가 할까?"
제온은 검게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명을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데일에게 다가갔다.
"저.... 데일 경."
"안 돌아오겠다고 부모까지 걸더니, 바로 깨버렸군."
"으음."
제온은 신음을 삼켰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제온은 조심스럽게 마법사의 말을 전했다.
"그. 마법사님이 비켜달라고 하시는데요."
"가서 전해. 싫다고."
"그.... 직접 말하시면 안 될까요?"
데일은 그런 제온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깨갱한 제온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입으로 '중간에 껴서 무슨 지랄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올 때보다 더 느린 속도로 돌아갔다.
마법사가 제온을 노려보았다. 제온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싫다는데요?"
마법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전해. 안 비키면 험한 꼴 당할 거라고. 마지막 경고야."
"저. 그냥 직접 전하시면...."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제온은 눈물을 머금고 걸음을 옮겼다.
'개 같은 새끼들.'
제온은 데일에게 되돌아가, 반쯤 해탈한 심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랍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데일은 검을 뽑아 들었다.
기겁한 제온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하지만 데일의 목표는 제온이 아니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고 이곳을 겨누고 있었다.
"역시 언데드라 그런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구나. 감히 내 명을 거역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푸른 보석이 달린 지팡이에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던 용병들은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팡이가 데일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중간에 자기들이 서 있다는 걸.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지팡이의 끝에 전류가 몇 번 튀더니, 이내 새하얀 번개를 방출했다.
꽈릉!
"이런 씹!"
"피해!"
용병들은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반응이 느린 용병 몇은 번개에 직격당했다.
"아가가가각!"
순식간에 검게 타버린 용병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럼에도 번개는 멈추지 않았다.
데일을 향해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다.
데일은 옆을 향해 힘껏 굴렀다.
거센 전류가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그대로 수레에 직격했다.
콰직!
번개에 직격당한 수레가 산산이 조각났다. 불이 붙은 파편이 이리저리 날았다.
'번개 방출 주문인가.'
터무니없는 화력에 용병들은 눈만 커다랗게 떴다. 차마 자기들을 향해 마법을 사용한 걸 따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마법사가 보여준 주문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마법사는 그런 시선들이 마음에 드는지, 으스대며 말했다.
"이야, 그걸 피하다니. 운이 좋았네? 근데 다음에도 운이 따라줄까?"
마법사는 곧바로 주문 구결을 외웠다. 지팡이에 다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대로 두면 안 된다. 데일은 땅을 박찼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주문이 완성되는 게 한참은 더 빠르다.
지팡이가 데일을 겨냥했다.
데일은 황급히 오른손에 힘을 응축해, 검은 안개를 주위에 퍼트렸다.
사아아아!
골목에 검은 안개가 들어찼다. 데일의 모습도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어딜!"
마법사는 안개를 향해 지팡이를 겨냥했다. 그리고 주문을 시전.
꽈릉!
새하얀 번개가 다시 한번 공간을 갈랐다.
검은 안개와 마주친 번개는 그대로 안개를 불살라버렸다. 순식간에 안개가 걷혔다.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조준을 빗나가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바짝 엎드려 있던 데일은 땅을 박차 속도를 높였다.
마법사는 조금 당황했다.
"어어? 마, 막아!"
그의 외침에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노예 병사 넷이 일제히 앞으로 달렸다.
무기는 방패와 철퇴.
갑옷은 걸치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움직임이 날랬다.
쇠 방패 네 개가 동시에 데일을 향해 들이밀어 졌다.
데일은 달리는 힘 그대로 방패를 향해 발을 뻗었다. 쇠장화와 방패가 부딪혔다.
그리고.... 꽝!
번개가 뿜어져 나올 때와 비슷한 소음이 울리며 호위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호위는 당황한 표정으로 균형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전해지는 충격이 너무 컸다.
하체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데일은 쓰러진 호위를 그대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옆에서 동료를 지키기 위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쯧. 귀찮게.'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는 철퇴가 셋. 가슴과 견갑을 노리는 철퇴는 무시했다. 갑옷의 단단함을 믿었다.
데일은 관절을 노리는 철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붙잡았다.
"어?"
과묵하던 노예 병사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철퇴가 붙잡힌 호위는 어떻게든 무기를 데일의 손아귀에서 빼내려 했다.
틀린 선택이다. 그는 곧장 철퇴를 포기하고 방패를 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싸움에서 틀린 선택은 언제나 죽음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데일을 상대로는 그렇다.
오른손의 검을 힘껏 든 데일은 그대로 검의 손잡이로 호위의 투구를 힘껏 내리찍었다.
깡!
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투구의 일부가 움푹 들어갔다. 호위는 흰자위를 까뒤집었다.
코에서는 핏물인지 뇌수인지 모를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대로 즉사.
하지만 다른 호위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잠깐의 틈을 살려 어떻게든 데일을 공격하려 했다.
그때, 마법사가 외쳤다.
"붙잡아!"
그 명령에 데일 앞에 있던 노예 병사는 방패까지 내던지며 데일을 사로잡으려 했다.
데일은 그대로 검을 내리쳐 머리를 쪼개려 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노예 병사가 철퇴를 내밀어 어깨를 베는 데에 그쳤다.
노예 병사는 데일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절대 놓치 않았다. 마치 그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양.
꽈릉!
다시 한번 번개가 발사되었다.
데일은 소음과 즉시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호위들이 데일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광적일 충성심이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개가 호위와 데일을 한꺼번에 덮쳤다.
치지직!
전격이 갑옷을 타고 흐르다, 이내 그 속에 든 몸뚱이를 태우기 시작했다.
늘 차갑게 유지되는 데일의 몸이 오랜만에 온기를 되찾았다. 온기라기에는 너무 뜨거웠지만.
마법사가 소리쳤다.
"하하! 언데드야 맛이 어때? 따끔하지?"
당연히 통증은 없다.
하지만 피해가 적지는 않았다. 데일은 몸 군데군데를 점검했다.
'팔은 괜찮고. 다리는 잘 안 움직이는군.'
몸에 남은 전류가 움직임을 방해한다.
데일은 번개에 맞고 널브러진 노예 병사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바싹 타버려서 그런지, 흡수할 수 있는 생기도 적었다.
하지만 적어도 느릿하게 뛸 정도로까지 회복할 수는 있었다.
데일은 검을 들고 마법사를 향해 천천히 달렸다. 그 굼뜬 움직임에 마법사는 비웃었다.
"흐흐! 멍청한 언데드 새끼. 지금이라도 도망쳤어야지. 오냐. 원하는 대로 재로 만들어주마."
마법사는 마지막 마법을 준비했다. 이전보다 주문을 외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언가 큰 걸 준비한다는 뜻이다.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둘 간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그렇게 데일이 스무 걸음 앞까지 다가갔을 때.
주문이 완성되었다.
"이걸로 끝이다!"
파즈즈즈.
지팡이 끝에 전류가 지직거리다, 이내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번개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얽히더니, 네 발 달린 야수의 형상을 이루었다. 야수는 데일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데일이 굴러서 피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주문이다.
데일도 마주 달렸다.
애초에 피할 생각은 없다는 듯.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멍청한 놈이군. 번개를 검으로 가를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번개를 검으로 벤다니. 머리가 문제가 있지 않은 한 그런 바보 같은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데일이 들고 있는 저 흑색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걸.
검을 높이 든 데일은 번개 야수가 달려드는 걸 침착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야수의 형상을 이루었기에, 속도는 이전보다 느렸다.
야수는 푸르고 흰 전류를 이리저리 튀기며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아가리가 데일을 집어삼키려는 직전. 데일은 검을 내리쳤다.
파아아악!
"어?"
번개가, 잘렸다.
마법사는 얼빠진 표정을 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반으로 잘린 번개는 이내 다시 합쳐져 야수의 형상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데일이 마법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데일이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마법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양을 등지고 선 흑기사의 거체가 마법사의 얼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 아아."
마법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공포에 잠식된 머리가 말을 안 들었다.
데일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뒤, 아래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으아아악!"
마법사의 가랑이 사이 빈 공간에 검이 박혔다. 데일은 고개를 낮추고, 마법사와 눈을 맞췄다.
"나는 언데드가 아니다. 알겠나?"
마법사는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 얼굴을 쳐다보던 데일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바닥에 지린내 나는 웅덩이가 생겨났다. 마법사의 바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마법사
* * *
"사, 살려주세요.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마법사는 지금 본인이 얼마나 한심한 꼴인지도 모른 체,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데일이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봐라."
데일은 고민하고 있었다. 죽일까 말까.
처음부터 확실히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무기를 투척하거나 하는 식으로 싸웠을 것이다.
'죽이면 골치가 아프다.'
애송이 마법사를 죽이는 거야 쉬운 일이다. 문제는 저 마법사 뒷배에 있는 마탑이다.
노예 병사를 죽이는 건 마탑의 '재산'을 훼손한 것으로, 다소 넘어갈 여지는 있다.
마탑은 지금 외곽구역까지 내려와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 굳이 애송이 마법사의 일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선제공격을 한 건 마법사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법사를 죽이게 되면 마탑은 체면 때문이라도 데일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그게 아무리 수준 낮은 애송이 마법사라도.
'좀 더 깔끔히 해결해야겠어.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였다면 얼마든지 복수의 대상이 되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바라는 바다. 마법사들과의 끝없는 싸움은 가파른 성장을 보장해줄 테니.
하지만 지금 데일은 암흑가를 지키는 몸. 아무리 데일이라도 주민들을 지키며 마법사들과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애꿎은 주민들에게 불똥이 튀는 건 막아야 한다. 적어도 이번 수색이 끝나기까지는 말이다.
그게 에리얼과의 약속이었고, 그게 데일의 책임감이다.
그런 속내를 모르는 마법사는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가, 가진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 무, 뭔가 원하시는 게 있나요?"
원하는 것.
그러고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데일은 마법사와 시선을 맞췄다.
투구의 눈구멍 속에 있는 데일의 무기질적인 눈을 마주한 마법사가 바짝 얼어붙었다.
"히, 히익."
"이제부터 질문을 할 테니, 성실하게 답해라."
마법사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우선 이름부터 말해라."
"한스. 한스입니다. 부모님 이름은 모릅니다."
한스.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흔한 이름이었다.
데일은 이어 물었다.
"마탑에서 빈민가를 수색하는 이유를 말해."
"도, 도시에 위협이 되는 위험 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데일은 땅에 박아 넣은 검에 손을 올렸다.
"나는 거짓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또르르 눈알을 굴려 주위 눈치를 살핀 한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차, 찾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저도 말단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라고 들었습니다."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대체 마탑의 마법사들이 왜 망국의 왕족을 찾는단 말인가.
그런 의문에 한스가 대답했다.
"그게, 그냥 평범한 왕국이 아닙니다. 바이만 왕국이라고, 검과 마법을 숭상하는 국가인데.... 아십니까?"
데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바이만. 안다. 알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그야, 데일의 게임으로 이 세상을 접할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근근이 버텨오던 바이만 왕국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니까.
그리고 그 최후에 데일도 함께 했었다.
설마 그 이름을 다시 들을 줄이야.
데일이 갑자기 말이 없자, 한스는 다시 눈치를 살피며 끙끙 앓았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아, 예. 그. 바이만 왕국에는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마법이 있어서...."
"그래서. 그 후계자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고, 그 마법을 얻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다?"
"그, 겸사겸사 위험분자도 찾으면 여러모로 좋으니까...."
말을 하던 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궁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더 한심한 이윤데.'
속으로 한숨을 흘린 데일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더더욱 여기를 들쑤실 필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네가 왕족이라면 여기 숨어 살겠나?"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 바이만 왕국 역시 빛의 여신을 따르는 곳이었다.
그런 왕국의 후계자가 밤의 신도들 사이에 섞여 살 일은 없지 않겠는가.
"마, 맞습니다. 생각해보니 경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한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진짜 동의하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들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가.'
애송이에 그렇다고 뒷배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놈이다. 더 물어볼 봤자 들을 것도 없어 보였다.
데일은 바닥에 박아 넣었던 검을 다시 뽑았다. 한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 여기서 너를 보내주면 다시 되돌아올 건가?"
"아, 아닙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절대 경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데일은 한스와 다시 눈을 맞췄다.
"너는 이곳에서 성공적으로 수색을 마친 거다. 왕족은 없었고, 노예 병사는 네가 실수로 날린 마법에 죽은 거야. 그렇게 보고해야 할 거다. 알겠나?"
"다, 당연히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지요.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데일은 뒤쪽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용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들은 부모를 걸고는 곧바로 돌아오던데? 명예보다 좀 더 중요한 걸 걸어야 하지 않겠나?"
한스가 표정을 굳혔다.
"설마."
"주문에 걸고 맹세해라."
"!"
주문에 건 맹세.
마법사들에게 약속을 받아내기 가장 확실한 방법.
한스는 경악했다.
대체 데일이 그걸 어떻게 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 마법사들만 아는 걸 어떻게."
"하기 싫은가?"
갈등하던 한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는 법이다.
"그, 그럼 제 주문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한스는 이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탑에 오늘 일을 필사적으로 숨길 거다.
적어도 암흑가의 주민들이 보복하러 온 마법사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스가 눈치를 살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그래."
데일의 허가가 떨어지자 한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등에 대고 말했다.
"잠깐."
"예에?"
"그거. 내려놓고 가라."
데일은 한스의 지팡이를 가리켰다. 한스가 지팡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거 상당히 비싼 건데요."
"그러니까 놓고 가라고. 싫나?"
데일이 검에 손을 가져다 대자, 한스는 부들거리면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 이만...."
"잠깐."
데일은 한스가 걸친 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로브도 좀 비싸 보이는데."
"...벗겠습니다."
한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한스는 반쯤 나체가 되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마법사가 사라지자 숨죽이고 있던 용병들도 그 뒤를 뒤따랐다.
그들은 데일을 경악한 눈으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슨 번개를 얻어맞고도 버텨.'
'그 지독한 마법사들을 벗겨 먹다니. 미친놈이야.'
'앞으로도 건드리지 말자.'
용병들마저 사라졌다.
골목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데일은 전투가 남긴 흔적을 눈에 담았다.
'위력 하나는 굉장하군.'
기껏 쌓아놓은 수레와 모래주머니가 마법 한방에 박살이 났다. 허름한 집들 이곳저곳이 무너졌고, 타버린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고작 마법사 하나가 만들어낸 참상이다.
심지어 한스는 마탑에서 별로 지위가 높지도 않아 보였고, 어딜 어떻게 봐도 애송이였다.
그렇다면 한스보다 윗선의 마법사들은 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까.
'역시, 마법사가 최고긴 한데.'
데일도 한때 마법사 캐릭터를 키워봐서 안다.
조합에 마법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마법사 하나만 추가되면, 적어도 화력이 부족할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데일은 처음 이 몸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마법사를 영입하는 건 반쯤 포기했다.
굳이 먹지도 못할 음식을 넘보며 군침을 흘리는 건 미련한 짓이다.
데일은 박살 난 수레 위에 걸터앉았다.
그때까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주민들이 다가왔다. 촌장이 데일의 안부를 물었다.
"그.... 끝난 겁니까?"
"용병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마법사도 마찬가지고."
그제야 촌장은 안심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촌장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번개에 맞으셨는데."
"음."
썩 괜찮지 않았다. 데일이 물었다.
"돼지나 소가 있다면 잡아주겠소?"
"돼지랑 소는 없고. 닭은 좀 있습니다."
"그러면 그거라도. 돈은 나중에 주겠소."
"아닙니다. 이미 과할 정도로 많이 받았는데, 이 정도는 대접하게 해주십시오."
그리 말한 촌장은 얼른 주민들에게 손짓했다.
주민들은 서둘러 닭을 잡아 대령했고, 데일은 생기를 흡수해 신체를 회복했다.
이제 데일의 몸은 워낙 맷집이 튼튼해 웬만한 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아내도 끄떡없다.
반대로 말하면, 체급이 커졌기 때문에 신체를 회복하려면 흡수해야 하는 생기도 많아졌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닭을 많이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
강력한 적들에게 홀로 맞서 이겨내는 그들의 기사에게, 이 정도는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영광이었다.
그렇게 주민들이 기쁨을 느끼거나 말거나.
데일은 수레 위에 조용히 앉아 헝겊으로 검을 닦았다.
어서 이 폭풍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 *
수색 작전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은 용병들과 경비대는 빈민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놀랍게도, 수색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도둑이나 범죄자의 근거지를 소탕했고, 불온한 일을 계획하던 위험분자도 다수 사로잡았다.
물론,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저항은 거셌고, 많은 피가 흘렀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빈민가의 서쪽 구역.
골목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는 그곳은 섣불리 말을 들일 수 없는 미로였다.
괜히 검은 뱀 형제단같은 조직이 자리 잡은 게 아니다.
오고 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수색 작전은 질질 끌리고 있었다.
날씨는 푹푹 찌고, 저항은 거세며, 사람들의 불쾌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무언가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질 듯한 조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암흑가는 평화로웠다. 마법사를 쫓아낸 날 이후, 예상대로 더 귀찮게 하는 이들은 없었다.
데일은 묵묵히 수레에 앉아 검을 닦았다.
이곳으로 쳐들어오지만 않는다면, 그 외의 다른 건 관심 없었다.
머릿속에는 일전의 일로 자꾸 후회가 들었다.
'그냥 한스 그 녀석을 필요할 때마다 써먹을 걸 그랬나. 마력의 맹세까지 했으니, 가끔 부르는 건 괜찮았을 것 같은데.'
데일은 주위에 여전히 남은 마법의 흔적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마법사를 부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예 가능성이 없었다면 생각도 안 했겠지만, 얼마 전 일이 생각나 자꾸 미련이 생겼다.
데일은 그런 상념을 지워내듯. 습관적으로 헝겊으로 검을 닦았다.
하도 닦다 보니 이미 헝겊은 넝마가 되었다.
조만간 새 헝겊을 사야 할 성싶었다.
그때. 옆에서 얌전히 앉아 더위를 달래던 하티가 데일을 꼬리로 툭 쳤다.
데일도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다섯. 제법 나쁘지 않게 무장했어.'
용병일까? 그렇다면 마침 잘 됐다. 검을 깨끗이 닦아놨으니 시험해보기 제격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다가오는 이는 아는 얼굴이었다.
토모 상회의 주인, 아이렉이 부하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렉은 잔뜩 지친 얼굴이었다.
이번 수색 동안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은 모양이다.
아이렉은 평소보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네 데일 경. 다행히 이쪽은 평화로워 보이는군. 데일 경 덕분인가?"
아이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를 흘긋 살핀 데일이 물었다.
"많이 어려운 모양이오."
"어렵지. 설마 주문쟁이들을 불러 올 줄 누가 알았겠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암살자라도 모아둘 걸 그랬어. 날고 기는 마법사들도 뒤에서 칼이 날아오면 끝이거든."
아이렉은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데일이 툭 물었다.
"항복한다는 선택지는 없소? 딱히 뭘 숨겨두고 있지 않다면, 적당히 뒷돈을 먹이면 당신은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데일은 아이렉과 대화를 떠올렸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득에 몹시 민감하다는 건 알았다.
패색이 짙어진 지금. 저항을 이어나가는 건 무익한 일이다.
그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러한 질문에 아이렉이 빙그레 웃었다.
"데일 경은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야."
잠시 멈칫한 데일이 물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소?"
쓴웃음을 지은 아이렉이 딴소리를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소문이 들리더군. 지금 마탑에서 찾으려는 이가 멸망한 왕국의 후계자라고."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음속에 무언가가 턱 걸리는 기분을 느꼈다.
'음?'
불현듯 이전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 아이렉과 나누었던 대화의 한 자락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빈민가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네. 노예부터 몰락한 왕국의 왕족까지 가지각색이지.
데일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가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정답으로 보이는 걸 찾아내고 말았다.
데일이 물었다.
"아이렉. 그러고 보니 그대는 제국 귀족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오."
아이렉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안에는 데일에 대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자그마한 정보로 순식간에 정보에 이르는 예리함. 아무나 가지지 못한 능력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데일에게, 아이렉은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바이만 왕국이라 하네. 검과 마법을 숭상하던, 자랑스러운 조국이지."
한 호흡 뒤.
데일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왕국의 후계자를 당신이 보호하고 있었군."
바이만
* * *
아이렉은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보호.... 라기보다는 조금의 도움을 주고 있네."
"그래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려던 것이었군. 마법사들에게 한번 잡혀가면 멀쩡히 돌아오기는 힘드니 말이오."
아이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 있던 부하들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왜 찾아온 것이오."
대충 어떤 부탁을 할지는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렉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아이렉이 데일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힘을 좀 보태주지 않겠나? 사례라면 얼마든지 하겠네. 이대로면 내 상회 전체가 날아갈 판이야."
"후계자를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니오? 순수한 호의로 보호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으로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아이렉은 귀족보다는 상인에 더 가까운 유형이다. 의리나 명예보다는 금화 한 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부류.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손을 떼는 게 아이렉에게 더 어울렸다.
아이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네. 순수한 호의는 아니었지. 언젠가 바이만 왕국이 다시 일어선다면 공주는 왕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투자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 생각했네. 하지만 악마와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왕국의 재건은 요원하네.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일궈온 사업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아이렉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우리 가문은 700년 넘게 왕국을 섬겼지. 그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네. 나도 아직 멀었다는 거지."
데일은 아이렉의 얼굴에서 한가지 감정을 읽어냈다.
미련.
눈앞의 귀족은 망해버린 조국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영리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도, 떨쳐낼 수 없었다.
망국의 귀족은 죽을 때까지 이 미련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왕국이 재건되어 그 안에 살아가는 삶을 꿈 꾸겠지.
그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은 알았다.
하지만.
"힘들 것 같소."
데일은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공터에 주민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저들을 보호해주기로 이미 의뢰를 받았소. 나는 계속 이 자리를 지킬 생각이오."
"...."
예상한 대답이었던 듯. 아이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네. 역시 안되는군. 미안하네, 이런 부탁을 해서. 괜히 신경만 쓰이게 했군."
"나는 괜찮소."
거절당한 아이렉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연이 있는 이들에게는 전부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몇 명이나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저 뒤쪽에서 사내 한 명이 뛰어왔다. 사내는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듯, 헉헉 숨을 골랐다.
아이렉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자리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그, 급하게 보고 할 게 있습니다!"
"뭐?"
잠시 숨을 고른 사내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큰소리로 외쳤다.
"공주님이 잡혀갔습니다!"
* * *
용병과 경비대는 빈민가의 골목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짜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레네의 여름은 덥다.
서풍을 타고 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는 도시를 찜통으로 만들어버린다.
일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버리니 용병들은 죽을 맛이었다.
심지어 여기 있는 대부분은 사슬 갑옷이며 천 갑옷 따위를 겹겹이 껴 입어서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갑옷을 벗을 수도 없다.
마탑의 개입으로 빈민가 주민들의 사기는 많이 꺾였지만, 여전히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기습을 맞고 골로 가버릴 수 있었다.
그런 탓에 사람들의 불쾌함은 극에 달했다. 누군가 툭 건들기만 해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카달은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하군.'
병사들이 폭발하면 그 분노를 어디다 풀까. 분명 빈민가 주민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피해를 최소로하라는 명령도 어기고,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다.
카달은 지금은 일단 물러나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숨을 고르고,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문제는 태평하게 뒤에 서 있는 마법사들이다.
저들은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약 경과가 시원찮으면, 빈민가를 전부 불태우기라도 할 작정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지.'
카달은 한숨을 삼켰다. 이곳은 제국의 영역.
그리고 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건 이 땅의 적법한 군주이자 통치자인 황제의 것이다.
불법으로 이 자리를 점거한 빈민가 주민들 역시 황제의 소유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재산과 신민을 지키는 게 경비대장의 사명.
제멋대로 날뛰는 마법사들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어김없이 마법사 하나가 걸어와 재촉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겁니까."
카달은 떫은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게. 모두 지쳐있어.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야."
"대체 그 얘기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요. 계속 이런 식이면 저희는 카달 경비대장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달은 이를 악물었다. 등에 멘 거대한 도끼가 징징 우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이 건방진 마법사들을 토막 내주고 싶지만, 원하는 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게 삶의 비애다.
"후우. 알겠소."
결국, 재촉을 못 이긴 카달은 돌입을 명하려 했다. 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일단 부딪혀야 조금이라도 진척이 생길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어?"
"뭐, 뭐야."
용병과 경비대원들 모두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걸어 나오는 이들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한쪽은 엘프 검사였다.
우드 엘프 특유의 녹색 머리칼과 뾰족한 귀, 중성적인 외모가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검사치고는 좀 호리호리했지만, 얕잡아 볼 수는 없다.
겉보기에는 얇아 보이는 저 근육이 인간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엘프의 옆에서 걷는 건 아직 앳된 소녀였다.
이제 기껏해야 열넷 정도 되었을까? 어깨까지 내려오는 바다색 눈동자와 같은 색깔의 머리. 선명한 이목구비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귀엽다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어 앳된 느낌이지만, 아무도 소녀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소녀의 눈빛. 걸음걸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다른 존재다.'
멍하니 쳐다보는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같은 인간이지만, 더 높은 격의 인간이라고.
몇몇 용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카달과 마법사들도 입을 열지 못 했다.
오직 엘프 검사만이 소녀에게 간절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이대로면 엘레나님이 위험하단 말입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무고한 피가 흐르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내가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어요."
"아잇. 그깟 하찮은 목숨이 몇이 죽든 엘레나님께 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엘프 검사가 설득하려 해도 소녀는 요지부동.
엘레나라 이름 불린 소녀는 기품있게 걸어가 마탑의 마법사 앞에 섰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도리어 당황한 건 마법사들 쪽이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짓만 주고받는 마법사들을 향해, 엘레나가 말했다.
"당신들이 이 주위를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가 나 때문임을 알아요. 비겁하게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나에게 직접 말하세요."
"...."
슬쩍 시선을 교환한 마법사 중 하나가 물었다.
"바이만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엘레나 바이만이 맞나?"
"제 이름이 맞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얘기를...."
마법사는 주저 없이 말했다.
"엘레나 바이만. 너를 불순분자들과 내통한 혐의 및 반란 모의 혐의로 체포한다."
"뭐? 자, 잠깐. 일단 내 말을 들어 보고...."
"뭐하고 있는가! 어서 잡아들여!"
마법사의 명령에 병사와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 * *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렉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순진한 공주님이 결국 사고를 치셨군."
"무슨 일이오."
"공주님도 마탑에서 본인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그래서인지 자기가 직접 대화를 나눠보겠다더군. 하! 대화라니!"
무고한 피가 흐르는 걸 원치 않는 마음은 갸륵하나,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그간은 내가 막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빠져나간 모양이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긴.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체포당했지. 무려 반란 모의 혐의까지 걸렸네! 망국의 공주가 다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준비했다. 그럴듯하지 않나?"
마탑의 계획은 안 봐도 뻔하다.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워 가둬둔 뒤, 마법 지식을 털어놓으면 봐주겠노라 당근을 흔들 것이다.
반란 모의는 중죄.
당장 목이 잘릴 판에 누군들 넘어가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공주가 사로잡혔다면, 마탑은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더 이곳에서 꾸물거릴 이유는 없으니, 철수했을 거다.
마탑이 빠지면 전력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용병과 경비대만으로는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우니, 수색도 사실상 마무리된 것과 다름없다.
데일은 또 한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홀로 적에 맞서 주민들을 지켜냈으니 말이다.
이제 주민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데일은 다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데일은 얼른 돌아가려는 아이렉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공주.'
바이만 왕국의 최후.
게임에서 아주 주요한 분기점이었던 그 순간에, 그는 게임의 주인공으로서 함께 있었다.
아이렉이 말하는 그 공주와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공주와 생존자들을 왕국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그때 탈출시켰던 인원이 여태껏 살아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깊게 관여되어 있단다.
이 일을 데일이 마주한 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의 인도일까.
마음이 변했다.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이 최종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데일은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직접 두 눈으로 담고 싶어졌다.
"나도 가겠소."
"도와주는 건가?!"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기대는 하지 마시오."
조금의 가능성만 열어둔,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 하지만 지금의 아이렉에게는 그 작은 가능성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어서 가게나!"
일행은 우선 공주가 있는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놀랍게도. 공주는 여전히 잡혀가지 않은 상태였다.
용병과 경비병이 큰 원을 그리며 포위하고, 그 가운데에 공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공주의 옆에는 한 손 검과 손도끼를 든 엘프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세상에."
노신사는 감탄을 터트렸다.
부상을 입고 끙끙대는 용병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저 엘프 혼자서 이만한 숫자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놀라지 않았다.
종족 전체가 강인한 전사인 엘프에게, 어중이떠중이들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
데일이 엘프를 경계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엘프의 저항이 거세자, 용병이 소리쳤다.
"야 이 귀쟁이 새끼야! 빨리 항복.... 억!"
퍽!
어느새 날아온 손도끼가 용병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감히 귀쟁이 같은 멸칭으로 부른 대가였다.
엘프가 고함을 질렀다.
"이분은 바이만의 왕족이시다! 감히 왕족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가려 하다니! 세상 어느 곳에도 왕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법은 없다!"
엘프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용병과 경비대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이미 만신창이였지만, 저 검사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기백이 있었다.
용병들은 도움을 청하듯,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법사들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공격 마법이라도 날렸다가는, 옆에 있는 공주까지 죽을 수 있다.
'공주는 그 쓸모가 다하기 전까지는 죽어서는 안 된다.'
검사 혼자서 수십의 적을 밀어내는 광경.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이렉이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 하나는 뛰어난 친구일세."
그렇게 말하고는 데일을 은근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떤가. 저기에 데일 경의 힘이 합쳐지면 제법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표정하던 데일의 얼굴은 더욱 무기질적으로 변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엘프는 좀....'
바이만
* * *
아이렉은 곧장 경비대장 카달에게 향했다. 카달은 아이렉을 알아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범죄자가 이렇게 대놓고 다가오다니, 뭐 잡아가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범죄자라니. 나는 지극히 합법적인 사업만 벌이는 사람이오."
카달은 코웃음을 쳤다.
"하. 빈민가 주민들이 어디서 무기를 얻었을지 빤히 보이는데, 뻔뻔하게도 거짓말하는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버럭 소리친 아이렉이 포위당한 공주를 가리켰다.
"일국의 공주를 입증되지도 않은 혐의로 체포할 수는 없소!"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카달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역시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아이렉은 당당하게 말했다.
"재판을 신청하는 바요."
"뭐?"
"도시법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재판받을 권리가 있소. 나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겠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마법사들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되도 않는 수작질이군. 도시법에 따르면 빈민가의 주민들은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재판받을 권리 따위는 없어."
아이렉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공주님께는 권리가 있소. 도시에 집이 있으니 말이오."
"뭐?"
"5구역에 공주님의 자택이 있소. 공주님은 평소에 그곳에 생활하시다, 잠시 도시 밖으로 놀러 왔을 뿐이오."
아이렉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품을 뒤져 자택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를 꺼냈다. 소유권자에는 엘레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가? 그렇다고 하나 집문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독한 놈이군.'
마법사들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아이렉이 이어서 말했다.
"따라서 공주님께는 정당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있으며,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구속을 거부할 권리 또한 있소."
마탑의 마법사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마라."
"글쎄. 그쪽이 먼저 자초한 일 아니겠소?"
고개를 홱 돌린 마법사가 카달에게 말했다.
"재판은.... 인정하겠습니다. 법이 그렇다면 따라야 하지요. 하지만 평범한 범죄가 아닌 반란 모의 혐의입니다. 이대로 풀어줄 생각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카달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고심에 빠졌다.
그러다 한참 후,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그럼 공주의 신변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평의원 한 명이 보호 및 감시하는 거로 결정하겠다. 보자.... 가란드 정도면 괜찮겠나?"
마법사와 아이렉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가란드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일 없이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일을 맡긴다면 그가 제격이다.
카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재판이라니. 하여튼 귀찮은 일들만 골라서 일어나는군."
그렇게 내뱉은 카달이 외쳤다.
"모두 예를 갖춰 공주를 용병 길드까지 안내하라! 저 엘프 검사는.... 정당한 저항을 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예!"
체포가 아닌 안내. 대우가 확연히 달라졌다.
용병들이 뒤로 물러나고, 경비대원들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다가갔다.
그제야 엘프 검사도 무기를 거두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엘프 검사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엘프가 기절하거나 말거나, 아이렉은 엘레나에게 다가가 꾸짖었다.
"공주님. 제가 나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안해요. 대화가 가능할 줄 알았어요."
"이야기는 다 들으셨겠지만, 일단 경비대를 따라가십시오."
"알겠어요...."
데일은 멀찍이 떨어져서 시무룩해하는 엘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게임에서 보았을 때랑은 많이 달라졌다. 조금 더 의젓해졌다 해야 할까.
'많이 컸군.'
이럴 때마다 데일은 묘한 감상을 느끼곤 했다.
가란드나 엘레나처럼 게임 속에서 보았던 인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그런 인물들을 직접 마주하는 건 여러모로 기묘한 감각을 선사해주었다.
현실과 게임.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흐려진다 해야 할까?
이미 게임 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더 놀랄 일이 어딨겠느냐마는.
신기해하는 시선을 느낀 걸까?
엘레나도 고개를 들어 데일을 보았다.
소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
아이렉과 데일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누굴 보고 아버지라는 것인가.
데일은 대꾸조차 안 했고, 아이렉은 엘레나를 달랬다.
"자.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어서 가십시오. 저도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으응.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데일을 흘끗거린 엘레나가 경비대와 함께 떠나갔다.
아이렉이 서둘러 데일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더 귀찮아질 모양이네. 그래도 급한 불은 껐어."
"수고했소."
"나는 바로 가봐야겠네. 준비할 것이 많으니. 그래서 떠나기 전에 작은 부탁이 있는데."
"무엇이오."
"저 친구 좀 잠시 맡아주겠나?"
아이렉이 가리킨 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엘프가 쓰러져 있었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뼈도 몇 대 부러진 게 지금까지 안 죽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나보고 저 엘프를 챙기라는 말이오?"
데일은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투구를 눌러쓴 탓에 아이렉에게 잘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아니면 지금 아이렉이 너무 정신없어서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거나.
"워낙 제멋대로인 놈이네. 엘프가 다 그렇지 않나? 솔직히 나도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놈인데.... 정신을 차리면 허튼짓 좀 하지 않게 자네가 좀 붙잡아두게. 사례는 두둑이 하겠네!"
"아니...."
아이렉은 데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데일은 땅에 쓰러진 엘프를 흘끗 쳐다봤다. 내심 이대로 숨이 끊어졌으면 하고 바랐지만, 엘프의 목숨은 질겼다.
엘프는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자기가 아직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데일은 엘프의 한쪽 발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돌부리에 연거푸 머리를 부딪쳤지만, 상관없을 거다.
엘프의 생명은 잡초만큼 질기니.
그렇게 여관까지 이동한 데일은 대충 바닥에 엘프를 내려놓았다.
놀란 카일라가 물었다.
"어? 누구예요? 세상에,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적당히 사제 한 명 불러 치유해라. 금액은 토모 상회에 청구하면 된다."
"으음."
카일라는 사제를 불러왔고, 사제는 간단히 치유 기적을 읊은 뒤 붕대를 칭칭 감아주었다.
사제의 말에 따르면 팔뼈도 부러지고, 군데군데 상처가 깊어 한동안 요양해야 한단다.
데일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엘프를 적당히 빈방에 던져둔 데일은 침대에 누웠다.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던 하루다.
수색. 아이렉. 바이만 왕국. 그리고 엘레나. 그가 게임 속에서 마주하던 인물들.
데일은 홀로 침대에 누워 상념에 빠져들었다.
오늘 머릿속에 특히 맴도는 건 게임 속 기억들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바이만 왕국 방어전.'
바이만 왕국 방어에 참여한 건 그가 기사 캐릭터를 육성하고 있을 때였다.
데일은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억이 선명해지며,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내 전혀 다른 풍경이 생생하게 변했다.
데일은 이걸 꿈이라 불렀다.
'여긴.'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쯤 무너져내린 성벽 위였다. 곳곳에 피 웅덩이가 고여 있고, 못 치운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기억에 있는 장소다.
'바이만 왕국의 수도.'
데일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 평원이 새까맣다.
악마의 군세가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괴물들은 하나 같이 두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새까만 평원에 수많은 안광이 반짝이는 광경은, 마치 은하수를 연상케 했다.
몇몇 감성적인 이들이 악마의 군세를 '별의 군대'라 부르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음울한 얼굴로 조용히 신을 향해 기도했다.
제국에서의 지원은 제때 오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저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
오늘. 긴 역사를 자랑하는 바이만 왕국은 멸망할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데일은 멍하니 성벽 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에게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다가왔다.
푸른 머리와 눈. 범상치 않은 갑옷. 형형한 눈빛.
바이만의 마지막 왕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잘해주었네 아렌. 덕분에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왕국은 진즉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야."
아렌. 그래. 분명 데일은 그런 이름을 캐릭터에게 붙여주었다.
데일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그런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네. 여전히 성안에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백성들이 많다네. 그중에는 내 딸 아이도 있지."
데일은 눈을 감았다. 왕이 무엇을 부탁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내 병사들은 왕국과 함께 최후를 함께 할 걸세. 하지만 외부인인 자네는 그럴 의무가 없네. 부디 자네는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해주게."
기억 그대로라면 이제 선택지가 떠오를 것이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 카를 바이만과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는 불굴의 전사이자 명예로운 기사이므로,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악마와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 선택지가 떠올랐다.
[생존자들을 이끌고 도망치세요. 당신이 돕지 않으면 생존자들은 악마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추가 임무: 공주의 목숨을 살려, 바이만의 의지가 끊기지 않게 해주세요. 엘레나 바이만은 천재적인 마법 소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존은 훗날,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파도가 될 것입니다.]
데일이 선택한 건 후자였다.
물론, 카를 바이만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상황은 없다. 그는 명예롭고 올곧으며, 하위 서열 악마와 홀로 맞붙을 수 있는 위대한 기사다.
비록 누군가 창작해낸 게임 속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데일은 이 사내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전장에는 무려 중위급 서열 악마가 둘이나 있다. 이길 확률은 한없이 낮으며, 생존은 꿈만 같은 일이다.
전자를 고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선택을 내리자,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말을 뱉었다.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믿을 수 있네. 자네는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기사이니."
카를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말했다.
"부디 내 딸을 지켜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기점을 지나쳤습니다. 훗날 당신은 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맞닥뜨릴 겁니다. 반드시.]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를 무시하며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짐 보따리를 짊어진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어린 공주도 있었다.
호위기사의 손을 잡고 덜덜 떨고 있는 공주에게 데일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데일은 꿈에서 벗어났다. 신기한 기분이다.
사람이었던 시절의 기억들을 선명하게 경험하는 건 몇 번이고 해 봤다.
하지만 모니터 너머로 보았던 게임 속 광경을 마치 직접 체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데일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힘인 걸까?
그나저나....
'훗날 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반드시 맞닥뜨린 다라.'
결국,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카를 바이만은 끝까지 악마의 군세에 맞선다.
그는 생존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했다.
카를은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딸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다고. 그러니 힘을 달라고.
그에 밤의 여신이 응답하시니, 역사상 가장 강력한 흑기사가 탄생했다.
한때 카를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흑기사는 홀로 악마 둘을 상대해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 군세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악마의 하수인들은 도망치는 생존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고, 결국 근처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남은 건 겨우 절반 남짓.
그 이후로 게임의 주인공은 긴박한 전선의 상황을 돕기 위해 바로 떠나야 했다.
공주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반밖에 지키지 못한 셈이다.
그때 데일이 다른 선택을 내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카를을 살릴 수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때 다른 선택을 내렸으면, 엘레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엘레나 바이만의 생존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거라 했던가.... 애매한 표현이군.'
엘레나라는 파도가 적을 덮칠지, 아군을 덮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 파도는 벽에 가로막히려 하고 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 엘레나의 운명이 결정된다.
데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이어가며 밤을 지새웠다. 그가 상념에서 벗어난 건 해가 갓 떠오른 새벽이었다.
아래층이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취객이 난동이라도 부리는 걸까?
데일은 무기를 챙겨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보았다.
붕대를 칭칭 감고 무기를 든 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엘프를.
"여기가 어디지! 나를 왜 납치한 건가! 공주님은? 오호라, 실력으로 나를 이기지 못하니, 비겁한 수를 쓰는구나! 그래, 어쩐지 뒤통수가 욱신거리는 게, 필시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군!"
카일라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하는 얼굴로 엘프를 바라보다,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 검사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데일을 보자, 그 얼굴이 오랜 친우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환해졌다.
"아! 혹시.... 그대가 데일 경이군. 그렇지?"
이 엘프가 자신을 알다니?
데일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맞다."
"뛰어난 전사여! 그대와 검을 한번 겨뤄보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그 날이 오늘일 줄이야!"
잔뜩 신이 난 엘프는 금방이라도 데일에게 검을 휘두를 셈이었다.
대꾸하기도 짜증이 났다. 데일은 밖을 향해 말했다.
"하티."
그러자 영리한 늑대가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데일은 엘프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물어."
바이만
* * *
엘프는 호전적인 종족이다.
엘프 사회는 소수의 사제 계급을 제외하면 구성원 모두가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며, 전투의 달인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한 자루의 검이라 생각하는데, 삶이란 그 검을 끝없이 두드려 날카롭게 벼려내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 두드리는 방식이란 실로 단순하다. 끝없이 싸우며 강자와 맞붙는 것.
엘프들이 아군과 적을 막론하고 실력자에게 싸움을 거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엘프라는 종족 자체를 꺼리는 이유였다.
"악! 아악! 이 녀석! 그만!"
데일의 명령에 하티가 충실히 달려들자, 당황한 엘프 검사가 허우적거렸다.
반격을 하고 싶은데, 부상 탓에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엘프 검사가 데일에게 외쳤다.
"데, 데일 경! 늑대를 좀 멈춰주지 않겠나? 강한 전사라면 몰라도, 짐승한테 죽고 싶지는 않다네!"
"조용히 있겠다고 약속한다면."
"약속하네! 약속할 테니 멈춰주게!"
데일은 하티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영리한 하티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한시름 놓은 엘프 검사가 눈을 반짝였다.
"예로부터 짐승은 강한 전사를 따른다고 했는데.... 이런 거대한 늑대의 인정을 받다니. 데일 경의 역량은 상상 이상이군."
"앉기나 해라."
"알겠네."
엘프 검사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얼른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멀찍이서 지켜보던 카일라가 물었다.
"그.... 이제 괜찮은 거 맞죠?"
"그래."
"식사라도 내올까요?"
엘프를 흘끔 쳐다본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는 오직 데일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당최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다.
"데일 경. 소원이 하나 있네."
"별로 안 궁금하다."
"데일 경이랑 한 번만 검을 섞어보고 싶네. 이 부상이 나으면, 한 번만 결투를 해주지 않겠나?"
"아니."
"역시!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네! 전사라면 응당 그래야지!"
이 엘프. 사람 말을 듣질 않는다.
한숨을 삼킨 데일은 본론을 꺼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나?"
"음?"
어리둥절해하는 엘프에게 데일이 대강 상황을 설명했다.
공주가 재판을 받게 될 거라는 것. 지금은 용병 길드에서 보호 및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 기절해 있는 엘프를 돌봐달라고 아이렉이 데일에게 부탁했다는 것.
엘프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 일이 그렇게 되었군. 아이렉 그자는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일을 해주었어."
"당분간 얌전히 있어라. 어차피 재판에서 네가 도울 일도 없을 테니."
"어떻게 그러겠나. 나는 바이만의 기사일세. 끝까지 공주님을 지킬 의무가 있어."
기사라고?
데일은 엘프의 얼굴을 살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프라우. 청사자 기사단의 프라우라고 하네."
"음."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분명 바이만 왕국에서 탈출할 때, 엘레나를 호위하던 기사 중에서 프라우라는 애송이 엘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요. 일부러 넉넉히 담았어요."
생각하는 사이 카일라가 음식을 내왔다. 양고기와 감자를 넣은 수프였다.
"음! 무슨 일이든 일단 배부터 든든히 채워야지. 고맙네 여관의 여급이여!"
"여급이 아니라 주인이거든요?"
음식이 나오자마자 프라우는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제법 큰 그릇에 담은 수프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프라우는 다 먹고도 부족한지,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데일의 그릇을 쳐다보았다.
"...."
비 맞은 개처럼 애처로운 눈빛이다.
데일은 그릇을 내밀었다.
"먹어라."
"!!"
화색을 띤 프라우가 외쳤다.
"고맙네! 역시 그대는 훌륭한 전사일세!"
음식을 주는 것과 훌륭한 전사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프라우는 음식을 쉬지 않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구놔주나. 경은 호시 하이에프인가?"
"다 씹고 말해라."
음식을 꿀꺽 삼킨 프라우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경은 혹시 하이엘프인가?"
데일이 정색하며 말했다.
"나를 모욕할 생각인가?"
"음, 내 말 어디에서 모욕을...? 아니. 별건 아니고. 그대의 딱딱 끊어지는 듯한 억양이나 말투가 하이엘프들이랑 비슷해서 말이네. 그러고 보니 데일이라는 이름도 하이엘프 식 아닌가?"
데일은 대답 대신 투구를 벗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한 프라우가 당황했다.
"어? 아니었군. 당연히 억양 때문에 하이엘프인 줄 알았네."
"그야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웠으니까."
"어렸을 때 하이엘프랑 같이 지냈나?"
정확히는 어렸을 때가 아닌,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데일에게는 달갑지 않은 기억일 뿐이다.
데일이 대답하지 않자 프라우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는 이야기 주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아무튼. 일단 공주님을 만나볼 생각이네.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마음대로 해라."
"같이 가겠나? 사실, 공주님이 그대에게 호기심이 좀 있다네. 소문을 들었거든."
"소문?"
프라우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빈자들에게 기꺼이 식량을 나눠주는 흑기사. 실로 명예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도시 안에 살 때는 다소 소문이 와전되었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빈민가에서 며칠 살다 보니 소문이 전부 사실이란 걸 깨달았네. 그대가 흑기사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고."
데일이 물었다.
"그건 설마 바이만의 국왕이 마지막에 흑기사가 되어버린 것 때문에 그런가?"
데일의 말에 프라우가 화색을 띠었다.
"아. 알고 있었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앙마저도 포기하다니. 참으로 숭고한 선택이었지. 몇몇 머저리들은 타락했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폐하를 존경한다네. 실로 존경할 만한 전사였어."
그리운 눈으로 과거를 회상하던 프라우가 현실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나는 그대와 만나기 위해 용병 길드로 종종 찾아갔다네. 주위가 시끌시끌하니, 그대처럼 명예로운 기사가 호위를 맡아주었으면 싶었지. 한데, 운이 나빴던 건지 계속해서 엇갈리더군."
그야 데일은 최근 접수대로 향한 적이 없으니, 마주치기 쉽지 않았을 거다.
프라우는 긴 이야기를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가겠나?"
곰곰이 이야기를 곱씹던 데일은 문득,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데일은 고개르 끄덕였다.
"그래. 얼굴이라도 한번 보지."
* * *
엘레나는 길드 사무소의 꼭대기 층에 구금되어 있었다.
사무소에 도착하니, 가란드와 아이렉이 대화하고 있었다.
둘은 데일을 보더니 반갑게 맞았다.
"아. 왔습니까?"
"...프라우 경도 왔군.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럴 수는 없지. 공주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네."
프라우와 아이렉은 서로를 찌릿 노려보았다.
사이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당연한가?'
실리를 추구하는 아이렉과 호전적인 프라우.
사이가 좋은 게 더 이상한 조합이었다.
데일은 가란드에게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곧바로 재판이 열릴 겁니다. 왕족이니 약식 재판도 아니고, 정식으로 열어야겠죠. 평의원들이 모두 모일 겁니다."
외곽구역의 재판권은 평의원들에게 있다.
평소에는 재판을 열지 않고 약식으로 판결해버리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평의원 일곱이 모두 참여하는 정식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이번 일은 상위 구역 귀족들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합니다. 그야, 그 바이만 왕국의 마지막 왕족 아닙니까.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아이렉이 말을 받았다.
"보는 눈이 많고, 관심이 클수록 좋네. 마탑에서 수작을 부릴 여지가 줄어들 테니."
평소였다면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마탑을 상대로 재판에서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평의원들도 마탑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아무리 마탑이 있다 해도 평의원들도 주위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타당한 증거 없이는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을 거네. 우리는 어디까지나 누명을 쓴 거니, 당연히 그런 증거는 없을 거고. 변호만 제대로 준비하면 돼."
아이렉이 희망차게 말했다.
설령 상대가 마탑이라도 이길 자신이 있어 보였다.
프라우가 끼어들었다.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거다. 만약 공주님께 위험이 생긴다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경이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니, 경은 제발 좀 얌전히나 있게나. 괜히 일을 망치지 말고."
흥! 하고 콧숨을 내쉰 프라우가 말했다.
"공주님은?"
"꼭대기 층에 계시다. 세바스가 시중들고 있을 거네."
세바스는 아이렉을 보좌하는 노신사의 이름이었다.
프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바스라면 믿을 수 있지. 일단 올라가 보겠네. 경도 함께 가게나."
프라우가 엘프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데일도 그 뒤를 따르려 했는데, 가란드가 잠시 불러세웠다.
"경. 저들을 돕기로 하신 겁니까?"
가란드는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데일은 부인했다.
"별로. 애초에 내가 재판을 돕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 같소만. 나는 법에 무지한 사람이오."
"음. 그러시군요."
"왜 그러시오."
가란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일은 끼어봤자 골치만 아플 겁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구경하는 게 제일 현명하지요."
"마탑 때문에 그렇소?"
"꼭 마탑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일은 백이면 백. 아주 더럽게 흘러가거든요."
구태여 더러운 판에 다가가지 말고, 멀리서 구경하는 게 현명하다는 조언.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계단을 올랐다.
공주가 구금된 방 앞에는 경비병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프라우와 세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 같이 들어가게나."
프라우가 권유하자 세바스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음. 프라우 경이라면 몰라도 저쪽은.... 공주님의 안위를 생각하면 좀...."
"칼도 잡지 않는 자가 감히 전사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건가!"
프라우가 길길이 날뛰자, 세바스가 흙 씹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포기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진작 그랬어야지."
허가를 받은 프라우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 프라우 경. 그리고...."
시선이 데일에게 머물렀다.
소녀는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만나서 반가워요. 경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어요."
억지로 만들어낸 듯한 근엄한 목소리였다.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음. 어제 내가 보인 추태는.... 부디 잊어주세요."
상관없는 사람에게 아버지라 불렀으니, 부끄러울 만도 할 터.
"딱히. 신경 안 쓴다."
자연스러운 반말에 엘레나가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엘레나가 안도했다. 데일이 그런 엘레나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
"궁금한 거요?"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데일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법을 다룰 줄 알기에 마탑에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엘레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얘기네요. 혹시 제 마법을 보고 싶다는 말인가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가 지닌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카를이 아닌, 엘레나를 택했던 과거의 선택이 옳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곤란해하던 엘레나는 이내 양손을 펼쳐 보였다.
다음 순간. 공간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엘레나는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마력은 이내 물의 형태를 취했고, 물은 용의 형상을 취했다.
수룡.
물로 이루어진 용은 좁은 방안을 유유히 비행했다.
데일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용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수룡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새하얀 섬광이 주위를 한차례로 뒤덮었다.
빛이 가시고. 다시 확인한 수룡의 몸에는 전류가 흐르며 빛나고 있었다.
두 가지 마법의 조합.
일전에 보았던 한스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고등 기술에 데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런 묘기를 부리는 엘레나는 전혀 힘들지 않고, 그저 즐겁기만 한 듯.
그 나이에 걸맞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마법에 관한 엘레나의 재능은....
'위험할 정도로 뛰어나다.'
흑기사 데일
* * *
마법이라는 힘은 신비롭기 그지없지만, 그 나름의 규칙은 존재하다.
우선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주문 구결을 입으로 읊조려야 한다.
영창이라 불리는 이 작업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는지는,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 중 하나다.
하지만 눈앞의 어린 마법사는 그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이게 말이 되나?'
더 놀라운 건 엘레나가 부린 마법의 종류다.
보통 마법사는 하나의 계열만을 다룬다.
번개면 번개. 불이면 불.
죽을 때까지 한 우물만 파도 그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게 바로 마법이라는 학문의 심오함이다.
데일도 마법사 캐릭터를 키워봤기에 잘 안다.
마법 하나를 배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미 어린 나이에 두 가지 계열의 마법을 수준급으로 다뤘다.
단순히 뛰어난 재능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선을 넘었다.
핏줄에 내려오는 힘일까?
지금껏 데일이 마주친 존재 중, 이런 게 가능한 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악마.
'괜히 마탑에서 잡아가려고 안달인 게 아니었군.'
악마에 비견될 재능이라니.
엉덩이 무거운 마탑에서 직접 빈민가를 뒤엎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마법은 오래 유지되지 못 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던 수룡은 어느 순간 형체를 잃더니, 바닥에 떨어져 물웅덩이가 되었다.
아직 어린 엘레나는 마법적 재능에 비해 마력이 부족한 듯했다.
엘레나는 조금 기대하는 표정으로 데일에게 물었다.
"어, 어떤가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하는 물'에 '전격 부여' 주문을 응용한 건가? 훌륭한 솜씨다."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마법인지 바로 알아보다니.... 마법에 조예가 있으신가요?"
"조금은."
"놀랍네요. 기사들은 마법에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당장 프라우 경은 마법을 보여줘도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눈에 띄니 마법을 자제하라는 말만 하고요."
지금도 프라우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엘프는 강자를 동경하지만, 그 강함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능력에 관한 것뿐이다.
그들에게 마법은 비겁한 편법에 불과하다.
프라우가 단호히 말했다.
"공주님. 지금도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괜히 시선을 끌 테니 마법은 자제해주십시오."
엘레나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평소의 프라우는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 모양이었다.
데일은 엘레나가 마법을 부리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주위의 시선 탓에 자기 재능을 제대로 갈고닦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엘레나를 보며, 데일의 안에서 일전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마법사.'
탐이 난다.
한스 같은 얼간이 마법사보다도 훨씬 탐이 났다.
이대로 엘레나가 마법을 갈고 닦아 본인의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다면.
그렇다면 악마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데일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
엘레나는 아직 어리다.
전쟁 마법사로서 훈련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뛰어난 마법사가 모두 뛰어난 전쟁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다.
훗날이면 몰라도, 지금 당장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기면, 빚을 지어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겠군.'
간단한 대화를 마친 데일과 프라우는 방을 나섰다.
프라우는 방 앞을 지키고 선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내가 지킬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나게."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게...."
"저희도 가란드 님께 명령받은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내가 지키겠다고 하지 않나. 칼 맞고 싶지 않다면,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게."
말을 참 이쁘게 하는 엘프를 보며 두 용병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침 그때 아이렉이 계단을 올라왔다.
그는 계단을 오르며 대화를 들었는지, 프라우에게 핀잔을 주었다.
"지금 공주님은 가란드가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네. 용병들이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리고 경의 몸 꼬라지를 보게. 그 몸으로 무얼 할 수 있겠나. 검이나 제대로 들 수 있겠나?"
프라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몸 곳곳에 붕대를 칭칭 감은 데다, 팔이 부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시무룩해진 프라우는 더 떼쓰지 않았다.
"알았네...."
데일은 아이렉에게 물었다.
"재판 준비는 잘 되고 있소?"
"순조롭네. 최대한 이곳저곳에 소문을 내서 재판에 대한 주목도를 올리고 있네. 벌써 재판의 결과로 내기를 거는 자들도 있을 정도지."
아이렉은 적극적으로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 바로 마탑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평소였다면 그냥 마탑의 힘으로 평의원들을 압박해, 유죄 판결을 받아냈을 거다.
야만적인 구석이 있는 이 세계의 법체계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엘레나의 고귀한 신분. 게다가 이번 사건은 화제성이 너무 크다.
여러 사람이 주목하는 상황에서는 대놓고 그리할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증거도 없이 왕족에게 유죄를 선고하면, 평의원들의 평판이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판결을 내려야 했다.
이쪽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
그래서인지 아이렉은 제법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사실상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어. 지켜봐 주게. 그 주문쟁이 놈들의 콧대를 눌러줄 테니."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날까?
데일은 자신만만한 아이렉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행운을 비오."
* * *
일을 마친 데일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 안은 고요했다.
카일라는 일이 있는지 어딘가로 사라졌고, 하켄은 진작에 곯아떨어졌다.
1층의 넓은 홀에는 데일 혼자 앉았다. 익숙한 고독함이 찾아왔다.
데일은 멍하니 화로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엘레나.'
엘레나의 재능은 분명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마법은 너무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게임에서나 볼 일을 직접 마주친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이미 이런 세상에, 이런 몸뚱이로 떨어진 순간부터 이 무슨 새삼스러운 생각이냐는 느낌도 들지만....
그리고 그 신선한 충격은 데일의 안쪽에 가라앉아 있던 한 가지 주제를 되살아나게 했다.
이 세상은 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
처음 데일이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본인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이 몸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새하얀 눈을 만졌을 때의 싸늘함도. 저 멀리에 떠 있는 태양이 전해주는 포근함도. 통증도. 간지럼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기분.
그저 보고, 들을 수만 있는 육체.
그런 육체를 가진다는 건 마치 게임하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사람은 모니터 너머로 캐릭터가 움직이는 걸 보고,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캐릭터가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 않나.
게다가 이 세계의 배경은 게임과 똑같다. 구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데일이 처음 이 세상에서 맞서야 했던 건 지독한 비현실감이었다.
모든 건 허상에 불과하며 자기는 질 나쁜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
한때는 스스로의 생을 끊으려고 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하면 이 꿈에서 깨어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직후에 있던 하이엘프들과의 유쾌하지 못한 만남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에 대한 현실감을 선사해주었지만....
기껏 다잡은 불안정한 현실감이 오늘 엘레나의 마법을 보면서 또다시 흔들린다.
"...."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는지 확인하려고, 으레 자기 뺨을 때리던가?
데일은 멍하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건틀릿. 데일은 그 건틀릿을 화로 안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
화로의 불이 건틀릿을 핥았다.
여전히 고통은 없다.
이럴수록 비현실감만 커진다는 걸, 데일은 알았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데일 경. 혹시 손이 시리십니까? 이거 장갑이라도 하나 선물해드려야겠군요."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가란드가 여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그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화로에 들어간 건틀렛을 가리켰다.
그제야 데일은 화로에서 손을 뺐다.
'문 여는 걸 알아채지도 못하다니.'
어지간히도 집중했던 것 같다.
데일은 가란드에게 물었다.
"직접 찾아오다니. 꽤 중요한 일인가 보오."
"내일 있을 재판에 대한 얘기입니다."
잠시 멈칫한 데일이 말했다.
"말해보시오."
"사실, 아이렉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일 재판은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습니다."
데일은 그게 무슨 소리냐 물었다.
가란드는 한참을 설명했다.
그 모든 설명을 다 들은 데일은 조용히 화로를 바라보았다.
가란드도 데일이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데일이 툭 물었다.
"가란드.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하지 않았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글쎄요. 뭐라 해야 할까...."
잠시 말을 고른 가란드가 입을 열었다.
"제 윗사람들이 데일 경을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중간관리직이니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
"데일 경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경의 자유입니다.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시길."
그 말을 남긴 가란드는 여관을 나서려 했다.
데일은 그런 가란드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 윗사람이 누구요."
가란드는 흘끗 뒤를 본 뒤,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사라졌다.
* * *
망국의 공주를 심판하는 재판이 열렸다.
그 화제성 탓에 재판장에는 방청객이 가득 찼다.
데일도 그중 하나로서 조용히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일곱 평의원이 모두 들어서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엘레나, 변호를 맡은 아이렉이 각자의 자리에 섰다.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지루한 공방이 오갔다.
마법사들은 빈민가에 있었던 네크로맨서나, 악어 떼를 푼 미치광이 여인.
그 밖에 도시에 행해진 위협행위를 열거했으며, 거기에 엘레나가 엮여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렉은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며, 앞선 사건들과 엘레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변호했다.
이 비슷한 공방이 몇 차례나 오고갔다.
흐름 자체는 순조로웠다.
마법사들은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계속해서 엘레나에게 갖다 대려 했지만, 아이렉이 훌륭히 방어해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이 컸다.
방청객들이 소곤거렸다.
"이대로라면 공주 쪽이 이기겠는데."
"아무리 마탑이라도, 이번 재판을 억지로 이겼다가는 뒷말이 나올 거야."
사람들은 엘레나가 이길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미 이 재판의 결과를 아는 데일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방청객 중에 유독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잘생긴 사내가 있었다.
사내도 시선을 느낀 걸까?
뒤를 돌아본 사내와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
순간,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단지 눈빛만 보아도 많은 걸 알 수 있는 법.
데일은 사내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저놈인가.'
그 역시 무언갈 느낀 것인지. 데일을 향해 씨익 웃은 사내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데일도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여러 차례의 공방 이후. 평의원들이 긴 시간을 상의하며 판결을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
결과가 나올 시간이다.
첫 번째 순서는 대장장이 길드장이었다.
"음. 뭐, 그럴듯한 증거도 없는데 무죄로 해야 하지 않나?"
방청객이 한차례 웅성거렸다.
예상대로의 결과에 '그럼 그렇지' 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다음 순서는 조피스 가주였다.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얼마 전 도시를 습격한 여인이 사용하던 유물 지팡이가 조금 의심스럽지 않나 싶은데요. 마법으로 유명한 바이만 왕국과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피스 가주는 궁색한 이유를 들며 조심스레 유죄를 선언했다.
그럴 수밖에.
남작위이자, 상위 구역의 귀족들과도 연이 있는 그는 카달과 더불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평의원이다.
타국의 왕족.
그것도 빈민가에서 자기만의 세력을 꾸리는(정확히는 아이렉의 세력이지만) 이는 좋게 보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평의원들의 판결이 내려졌다.
무죄. 유죄. 무죄. 유죄.
판결이 나올 때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렸다.
아이렉의 표정도 썩어들어갔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이렉은 이를 뿌득 갈았다.
'젠장. 마탑 이 새끼들이 기어코...!'
그리고 마지막 순서가 왔다.
마지막은 가란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번 재판의 향방이 결정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란드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가란드는 그 시선을 음미하듯, 말을 끌며 뜸을 들였다.
"저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너무 어려운 문제군요. 기권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이제까지보다 더 큰 소란이 일었다.
"뭐?"
"뭐라고?"
"잠깐.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죄 셋. 무죄 셋. 기권하나.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어제, 가란드가 귀띔해준 그대로의 전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마탑의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군요. 유감입니다."
전혀 유감인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몇 번인가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지혜롭게 대처하셨지요."
아이렉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한발 빨랐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이 판단하지 못 하는 일은 신께 판단을 맡길 뿐. 저희는 결투 재판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경! 나오시오!"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잘생긴 금발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온몸을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는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뿌려댔다.
그 얼굴을 본 방청객인지 바람잡이인지 모를 이가 중얼거렸다.
"크, 크리스틴 경이다!"
"크리스틴?"
"황실 기사단의 입단을 앞둔 기사라고!"
황실 기사단. 황제를 따르는 가장 강력한 기사들의 집단.
그곳에 입단이 예정되어있다는 건, 저 사내가 그만큼 괴물 같은 작자라는 걸 의미한다.
이 갑작스러운 흐름에 방청객들이 흥분했다.
결투. 그것도 이름 있는 기사의 결투다.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류의 그런 사건.
아이렉은 당황했다. 마탑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처,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이번 재판에서 그들이 마탑을 상대로 맞설 수 있었던 건, 바로 재판의 화제성 덕분이었다.
많은 이가 지켜보니 마탑도 허투루 행동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마탑은 화제를 화제로 덮는 수를 사용했다.
결투가 선언된 순간, 재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결투로 쏠릴 것이기 때문.
명예로운 결투를 통해 판가름을 낸다면, 마탑이 치사하고 더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도 많이 희석될 것이다.
'좋지 않군.'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서 결투를 거부했다가는 그건 그것대로 시민들의 빈축을 살 것이다.
왕족이라는 자가 명예로운 결투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 터.
그러면 끝장이다. 다시 재판을 벌여도 패배할 것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가 준비한 건 무려 황실 기사단을 앞둔 기사다. 저런 괴물을 상대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내가 나가겠다!"
"겨, 경. 진정하세요."
프라우가 아이렉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혀 버둥거렸다. 부상을 심하게 입은 그는 지금 크리스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니. 만전의 상태라 해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죽음이다.'
여기서 누가 나서든,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마법사들의 함정은 치명적이었다.
그 안에 고스란히 걸려든 순간, 승산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렉에게 조피스 가주가 물었다.
"피고 측은 결투 재판을 받아들일 건가요? 만약 결투를 받아들인다면 대전사를 내세워도 좋습니다. 그럴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이렉은 입을 다물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마치 축제라도 벌어지는 듯한 분위기. 데일은 그런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심하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겁에 질린 엘레나의 모습이다.
표정은 억지로 다잡고 있지만,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금 저 자리에 있는 건 고귀한 왕족도 아니고, 마법의 천재도 아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일 뿐.
그 반대편에 선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침내 성공했다는 듯, 환희하고 있다.
마치 원하는 장난감을 얻게 된 소년처럼 순수한 미소다.
방청객들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에 단순히 즐거워한다.
결투로 인한 엘레나의 처우 같은 건 전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평의원들은 마탑의 압력에 굴복한 지금의 상황이 민망해, 괜스레 헛기침만 했다.
조부의 말이 옳았다. 세상에는 개자식들이 너무 많다.
'눈 뜨고 못 봐주겠군.'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덩치의 흑기사는 어디서나 눈에 띈다. 순식간에 시선이 데일에게 몰렸다.
재판장 내에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
데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일전의 상념을 다시 떠올렸다.
데일을 괴롭히는 지독한 비현실감. 현실과 게임. 꿈과 가짜. 불안정한 자아. 흐릿한 경계.
모든 게 불안정하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았다 뜨면, 이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데일은 찾아냈다.
그 혼돈 속에서도 확고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찾아냈다.
'나.'
데일은 사람이다. 사람이고 싶다.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모든 게 불분명해도, 그 의지만큼은 선명하다.
그렇기에 데일은 스스로가 사람임을 계속해 증명해나갈 생각이다.
이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멋대로 보내는 시선과 기대는 데일에게 중요치 않다.
적의를 보이는 시민들이나 우상으로 숭배하는 밤의 신도들. 도와주길 원하는 아이렉이나 가만히 있길 바라는 가란드.
모두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할 뿐이다.
데일의 행동에 그런 것들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밤의 신도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진 지금.
데일의 결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데일은 다시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데일은 가죽 주머니를 뒤져, 깃털 펜을 하나 꺼냈다.
그 싸구려 깃털 펜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래. 어쩌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을 수도 있겠군.'
그러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이미 한번 마주했다.
꿈 많던 노움 부부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정적을 끊어내며,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차갑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재판장을 울렸다.
"내가 나가겠다."
"뭐...."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마법사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데일에게 외쳤다.
"네가 뭔데!"
데일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흑기사."
결투
* * *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
"저 흑기사는 분명...."
"세상에."
기사와 기사 간의 결투.
모든 이들이 가슴을 설레할 만한 승부가 성사되었다.
마법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크리스틴을 쳐다봤다.
"크리스틴 경."
"하하하. 좋군. 그렇게 나오셔야지."
크리스틴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젊은 기사들은 으레 명성과 업적에 굶주리기 마련이다.
크리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확정되다시피 했지만, 아직 크리스틴에게는 만족할만한 업적이 없었다.
한때는 다른 기사들이 흔히 그렇듯.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토너먼트에 참여할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너무 뻔해.'
흔하고 뻔한 업적은 사람들에게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크리스틴은 그의 이름을 오래도록 밝혀줄 그런 불멸의 명성을 원했다.
그리고 최고의 기회가 왔다.
이교도 기사와의 결투!
승리했을 때 얼마만큼의 찬사를 들을까. 음유시인들은 그에 대한 일화를 노래하겠지. 귀족가의 영애들도 분명 크리스틴을 생각하며 밤잠을 설칠 것이다.
크리스틴은 이미 이겼을 때의 달콤함을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크리스틴은 자기 실력을 믿었다. 피를 토하며 갈고닦아온 재능을 믿었다.
이제 그의 노력이 보답받을 때였다.
'바이만의 공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반드시 이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업적이 될 중요한 결투에는 그에 걸맞은 무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 좀 더 많은 사람이 봐야 한다.'
크리스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다물고 있는 조피스 가주에게 말했다.
"결투 재판이 성립되었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서로 준비가 안 된 것 같소. 그러니 이틀 후, 7구역의 광장에서 결투하는 게 어떻소? 시간은.... 그래. 적당히 해가 내려온 시간대면 공평할 것 같군. 어떻소?"
크리스틴의 제안에 가주는 데일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동의하나?"
"상관없소."
데일이 동의하자, 가주는 엄숙히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번 재판의 판결은 결투의 결과에 따르는 것으로 하겠다. 장소는 7구역 광장. 시각은 이틀 후, 교단의 종이 다섯 번 울리면 결투를 진행할 것이다."
선언과 함께 재판이 막을 내렸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리며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저들은 오늘 있을 희대의 사건을 소문내고 다닐 것이다.
아마 오늘 밤, 술집에서는 오로지 데일과 크리스틴의 결투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 터.
다음으로는 평의원들이 나갔다.
그들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당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이도 있었고,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의원들을 둘로 나뉘어 데일과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데일에게 다가온 건 가란드와 에리얼, 그리고 대장장이 길드장이었다.
나이 지긋하고 꼬장꼬장한 인상의 드워프가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드워프치고도 키가 작았다.
"흐음. 네가 그 소문의 흑기사라 이거지...."
흥미롭게 쳐다보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요즘 젊은 놈들답지 않게, 제법 남자다운 놈이잖아. 그래. 사내가 검을 뽑을 때는 뽑아줘야지."
드워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르크의 아들, 바우만이다. 지금은 대장장이 길드를 이끌고 있지."
"데일이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무기 한두 개는 뚝딱 만들어줄 테니."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악수를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바우만이 얼굴을 찌푸렸다.
"허리 굽히지 마."
그러고는 자기가 까치발을 들어, 손을 마주 잡았다. 아무래도 바우만에게 민감한 부분인 듯하다.
바우만이 떠나간 다음에는 가란드가 다가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나한테 귀띔해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아니오?"
"음. 사실 그렇긴 하죠."
멋쩍게 웃은 가란드가 표정을 굳혔다.
"크리스틴 경은 강합니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예정되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혹시 아십니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도 황실 기사단을 몇 번 만나본 적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인간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군으로서 함께하면 그것보다 든든할 수가 없지만, 적으로 상대하면 악몽 같은 존재였다.
이제 데일은 그 악몽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아직 크리스틴은 정식으로 황실 기사단원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상대는 지금껏 싸워온 그 누구보다 강할 테니.
가란드가 떠나가자 마지막으로 에리얼이 다가왔다.
언제나 데일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지금은 굳어있었다.
안대 탓에 그 눈빛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 눈동자에도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으리라.
"...지금 제가 말린다고 해도, 그만두지는 않을 거죠?"
"그래."
"따라오세요."
그 말을 남긴 에리얼이 혼자 걸어나갔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듯이.
여기서 가만히 서 있으면, 늘 미소를 꾸며내는 저 사제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데일은 순순히 뒤를 따랐다.
앞서가던 에리얼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했다.
"데일 경은 죽을 거예요."
"...딱히 죽을 생각은 없는데."
"데일 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크리스틴은 위험한 작자예요. 명문 기사 가문 출신인 그는 어떻게 해서든 데일 경을 자기 업적을 위한 제물로 만들 거예요. 일부러 광장에서 결투를 벌이려는 의도도 뻔하죠. 더 많은 사람이 결투를 보게 만들려는 거예요."
에리얼은 어딘가 화가 난 듯 보였다. 크리스틴에게? 아니면 데일에게?
에리얼이 이어 말했다.
"간단히 죽이지도 않을 거예요. 최대한 가지고 놀 듯, 천천히 요리하며 자기 실력을 과시하겠죠. 사람들 앞에서 데일 경을 망신줄 거예요. 그러고는 자기가 사악한 이교도 기사를 죽였노라, 당당히 선언하겠죠."
에리얼과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에리얼은 안대를 했지만, 왠지 눈이 마주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데일 경은 신도들의 우상이에요. 우상이 형편없이 당하는 건, 사제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어요."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신도들을 보호해달라 요청했을 때, 제가 말씀드렸죠. 하급 유물을 하나 드리겠다고. 지금 드리겠습니다. 유물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올라가겠죠."
반가운 얘기다.
안 그래도 에리얼에게 직접 찾아가 약속했던 유물을 내놓으라 말할 참이었다.
당연하지만 데일은 크리스틴에게 죽어줄 생각이 없었고,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말을 마친 에리얼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목적지는 밤의 신전이다.
계단을 내려간 에리얼은 여느 때와 같이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을 지나쳐, 기도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요."
"?"
"어서요."
데일은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고, 에리얼도 뒤이어 들어왔다
넓지 않은 기도실은 두 사람이 들어서기에는 조금 좁았다.
에리얼은 양손을 그러모아 조용히 기도를 읊었다. 그리고 다시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요상한 일이 일어났다.
"여긴...."
"밤의 신성으로 만들어낸 특별한 공간입니다. 지금은 유물 창고로 쓰고 있죠."
원래라면 기도실로 통하는 복도가 보여야 한다. 하지만 펼쳐진 풍경은 복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공간. 그 공간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물건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데일이 물었다.
"이것들은 다 유물인가?"
"예. 긴 세월 간 신도들이 모아놓은 유물들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되는 건가?"
"아뇨.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에리얼이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일 경이 유물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유물이 데일 경을 선택하는 겁니다. 시험 삼아 아무 유물에나 손을 뻗어보세요."
데일은 그리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접시처럼 생긴 유물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유물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데일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에리얼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셨죠?"
데일은 조금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만약 나를 선택하는 유물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안타깝지만 유물을 얻지 못하는 거겠죠?"
"...."
잠시 떨떠름한 얼굴로 에리얼을 쳐다본 데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단 어떤 유물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 설명을 좀 해줄 수 있겠나?"
"원하시다면야."
데일과 에리얼은 창고 안을 거닐었다.
처음에는 물속을 거니는 듯한 감각에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에리얼은 데일이 가리키는 유물마다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저 방패는 뭐지?"
"아가라드론의 방패네요. 웬만한 공격은 전부 막아낼 수 있는 방패죠. 주기적으로 고기를 먹이지 않으면 주인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요."
"저 팔찌는?"
"가르타스의 타락이라는 물건이에요. 착용하면 엄청난 힘을 주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완전히 미쳐버리게 돼요.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것도 사소한 단점 중 하나죠."
아무래도 밤의 신전에 잠들어 있는 유물들이다 보니, 하나같이 흉악한 물건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던 중.
데일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짝이 없는 장갑이다. 색깔은 회색. 마치 그물이 얽힌 것처럼, 각 손가락을 이루는 부분에 하얀선이 그어져 있다.
데일이 물었다.
"저건 어떤 물건이지?"
"아. 죽음의 손아귀라는 이름의 유물입니다. 효과는 간단하죠. 저 손바닥 부분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방출할 수 있어요. 다만, 그에 대한 대가로 생기를 바쳐야 하지만요."
생기를 바쳐서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을 낼 수 있는 유물.
분명, 이번 상대는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에는 사람.
머릿쪽에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다면....
'해볼 만하다.'
데일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고민했을 거다.
유물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로 생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일은 생기가 부족하면 다시 흡수하면 된다.
부작용이 데일에게만큼은 미미하다는 것.
"이걸로 하겠다."
결정을 내린 데일은 장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장갑이 쑥, 뒤로 밀려났다.
에리얼이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데일 경이 유물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유물이 데일 경을 선택하는 거라고."
"...."
데일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장갑은 이번에도 옆으로 쑥 이동했다. 손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벗어나는 게, 마치 놀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데일은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 고심에 빠졌다. 감히 물건 따위가 자신을 가지고 놀다니.
참을 수 없다.
에리얼에게 물었다.
"혹시 유물이 저렇게 뒤로 물러나는 건, 이 공간의 힘인가?"
"예. 이곳에는 밤의 신성이 진하게 퍼져 있거든요. 그 신성이 유물의 의지를 일깨워.... 아무튼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이 공간이 특별해서라고만 알면 됩니다."
"그래. 신성이 없으면 유물도 도망치지 못한다는 거군."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는 에리얼은 굳어버렸다.
데일이 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자, 잠깐. 그 마검을 이곳에 들고 들어왔다고요?"
"들고 오지 말라는 말은 못 들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데일은 에리얼의 말을 끊듯.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벼락처럼 휘둘렀다. 신성 거부자가 밤의 신성을 베었다.
화아아악!
그저 어둡고, 잔잔하던 공간에 긴 상처가 생겼다.
이윽고. 마치 밑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물이 빨려들 듯. 온 공간에 펼쳐진 신성이 그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에리얼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쳤어요?!"
늘 차분한 그녀가 실로 오랜만에 뱉었을 욕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성이 빨려들면서. 유물들도 파도에 휩쓸린 물고기 떼처럼 이쪽을 향해 쇄도해 왔다.
데일은 그 모습을 차분히 살피다, 그 안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흐름이 멈췄다.
"정말! 일을 벌일 거면 제발 말을 먼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황급히 공간에 난 상처를 신성으로 덧댄 에리얼이 툴툴거렸다.
"왜 대답이 없...."
데일에게 고개를 돌린 에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데일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주먹에는 낯익은 장갑이 하나 붙들려 있었다.
데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선택받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다."
에리얼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결투
* * *
데일은 '죽음의 손아귀'를 왼손에 착용했다.
다행히 유물 장갑은 신축성이 뛰어나, 건틀렛 위에 덧씌워도 별문제가 없었다.
데일은 왼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움직임에는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데일이 물었다.
"시험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사용하면 되지?"
"원하는 대상에게 손을 접촉한 뒤, 머릿속으로 발동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될 거예요. 아니면 무언가 터트리는 상상을 하거나."
데일은 품을 뒤져 단검을 하나 꺼냈다. 검날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쇠로 만들어 적당히 단단한 녀석이었다.
데일은 왼손으로 단검을 쥐고,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터져.'
쿵!
강력한 충격파가 손바닥에서 뿜어졌다. 주먹을 쥐고 있었기에 충격은 고스란히 단검과 주먹으로 전해졌다.
단검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문제는 찌그러진 게 단검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데일 경. 주먹이 찌그러졌는데요?"
"아무래도 주먹을 쥐고 사용하면 안 되나 보군."
"당연한 것도 직접 몸으로 체험해야 직성이 풀리시나 보군요."
충격파는 손바닥에서 나가기 때문에 주먹을 쥐면 그 충격이 손에 전해진다.
'무언가 단단한 물건을 깨트릴 필요가 있으면, 주먹을 쥐면 되겠군.'
데일은 오른손으로 찌그러진 왼손을 억지로 폈다. 이미 그 형체를 잃은 단검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어쨌거나 위력이 과할 정도로 훌륭하다는 건 알았다.
'다만, 생기를 제법 잡아먹는군.'
모든 건 등가교환이다.
강력한 마법에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듯, 이 유물을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생기가 요구되었다.
데일은 생기 부족으로 인한 미약한 갈증을 느끼며, 에리얼에게 말했다.
"어쨌든. 잘 쓰도록 하겠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당한 거래에 대한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했을 물건이니.
에리얼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그 유물이 데일 경을 승리로 이끌길 바랄게요."
용건을 마친 둘은 다시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도실 문을 닫은 뒤, 다시 문을 여니 바깥은 이전과 같은 복도였다.
에리얼이 복도로 나가며 물었다.
"기도를 드리고 가실 거죠?"
"그래."
기왕 온 거, 기도를 안 할 이유는 없다.
바깥으로 나간 에리얼은 기도실의 문을 닫아주었다.
허리에 찬 검을 바깥에 놓은 데일은 투구를 벗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왔습니다."
은 촛대에 놓인 양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연기는 이내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하얀 발과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오거라 데일. 내 아들. 기다렸단다.]
밤의 여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여신 역시 데일이 지금 어떤 싸움을 앞두고 있는지 알았다.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있구나.]
"예."
[두렵지 않느냐? 아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크리스틴이 데일보다 몇 수 위라는 건 명확하다.
그 사실은 데일도 알고, 여신도 안다.
하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몸은 아닌지라."
[데일.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어떻겠느냐.]
"이제 와서 도망치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제가 욕먹는 게 아니라, 교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겠죠. 이교도들은 역시 겁쟁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겁니다."
데일의 설명에 밤의 여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관없다. 여신은 그 어느 것보다 아들의 목숨이 중요하다. 겁쟁이라고 조롱당한다 한들, 아들의 목숨만 하겠느냐. 그러니....]
더 설득하려던 여신은 입을 다물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서 데일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이미 결심을 굳혔구나.]
"예."
이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싸움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
그렇기에 데일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믿어줄 수밖에. 제물을 바치겠느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간 모은 잔혼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보르단과 마법사가 부리던 노예병 등에게서 얻은 잔혼이었다.
언제나처럼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평소였다면 길게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전부 근력에 투자하겠습니다."
자신보다 명백히 강력한 상대에게 내구도 따위는 무의미하다.
아무리 튼튼해봤자, 조금 더 천천히 패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데일이 선택하자, 여신이 힘을 내려주었다.
몸속을 파고든 힘은 이내 데일의 근육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데일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3
직업: 흑기사
근력: 62
내구: 34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검은 안개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악마 하수인 살해자
등급에 비해 월등히 높은 능력치. 이곳에 적힌 숫자야말로 지금 데일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꼼꼼히 눈에 담은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신의 형상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데일은 기도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빈 기도실에 여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드시 이기거라. 반드시.]
* * *
바쁘게 돌아다니는 데일과 달리, 크리스틴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승리했을 때의 동작을 연습했다.
"이겼노라! 흠. 이건 아니야. 사악한 이교도야, 흙으로 돌아가라! 음. 너무 거창한데."
그런 크리스틴을 보며 마탑의 마법사는 표정을 찡그렸다.
"경. 조사해보니 상대는 제법 강하다고 해야 할지, 특별하다 해야할지. 어쨌거나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입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셔도 되는지...."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강하다 해봤자 흑기사는 언데드요. 반쯤 본능에 의지하는 놈들의 싸움 방식은 제법 호쾌한 편이나, 반대로 너무 단순하지. 내 몸에 검이 닿을 일은 없을 것이오. 그것보다 함께 고민해주시오. 어떤 식으로 연출해야 결투를 더 극적이게 보일 수 있겠소?"
마법사가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연출이라니.... 그건 연극에나 쓰는 단어 아닙니까?"
"정확히 봤소. 나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이오. 내가 일격으로 놈의 목을 베어버리면 재미없지 않겠소?"
참다못한 마법사가 외쳤다.
"맙소사! 경,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결투입니다! 마탑에서 경께 거금을 드린 건, 장난이나 치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내뱉은 마법사는 아차 싶었다.
크리스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장난? 주문쟁이가 좋게 봐줬더니 주제를 넘는구나."
"...."
크리스틴에게서 살기가 진득하게 퍼져 나왔다. 마법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사는 마법사의 천적이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가까이서 날아오는 칼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옛이야기 속에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친 기사의 일화가 많은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마법사가 겁에 질려 부들거렸다. 그제야 크리스틴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내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소.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니 내게 부탁한 것 아니오?"
"그, 그렇죠."
"어디까지나 조금, 여흥을 돋을 뿐이오. 그대들은 갈채를 보낼 준비나 하시오. 나에게 걸맞은 힘찬 갈채를 말이오. 아. 마법으로 폭죽 같은 걸 위로 쏴주는 것도 괜찮겠군."
"...고민해보겠습니다."
"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중얼거렸다.
"자. 이제 그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까.... 아! 그러고 보니 이 언데드 놈이 어쭙잖게 인간 흉내를 낸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리스틴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공주의 판결을 가르는 두 기사 간의 결투.
이 사건은 단순히 외곽 구역을 넘어 상위 구역, 그리고 성벽 밖 빈민가에까지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가 이길지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다.
마탑이 죄 없는 공주에게 누명을 씌웠다거나 하는 얘기는 이제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전부 마탑의 의도대로였다.
크리스틴의 가문에서도 이번 결투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교도 기사와의 결투. 아마도 모든 젊을 기사들이 원할만한 명성이 아닌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결투에 대한 소문이 어찌나 화제가 되었는지, 심지어 공사다망한 황제까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시끌벅적함 속에서 마침내 결투 당일이 되었다.
7구역의 광장.
결투 장소로 선택된 이곳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그 숫자가 못해도 1만 명 이상이었다.
곳곳에는 특수를 맞아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이 음식을 팔았고, 결투의 승패에 따라 도박을 하는 이도 있었다.
배당은 20배.
즉, 크리스틴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황실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무거웠다.
하켄은 그런 숫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결심을 내린 뒤,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데일 경이 이긴다에 전부."
"오오. 용기 있는 분이시군요."
"흥. 난 데일 경을 믿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한 하켄이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히 물었다.
"호, 혹시 무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전 재산을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하하하. 안 됩니다."
하켄은 축 늘어졌다가, 이내 고개를 바짝 세우고. 데일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데일은 조용히 앉아 검을 닦고 있었고, 카일라와 에스델, 하티가 주위에 있었다.
하나같이 걱정 어린 표정.
오직 데일만이 덤덤했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하켄은 데일에게 다가가 말했다.
"데일 경! 꼭 이기셔야 합니다! 저 하켄, 한평생 데일 경을 돕기로 한 몸. 데일 경만 믿고 있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으음. 알겠습니다."
데일의 차분한 태도에 하켄마저 진정했다. 이 기사에게는 주위 분위기를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잠시 뒤. 아이렉과 프라우, 그리고 엘레나가 다가왔다.
아이렉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네. 우리 때문에.
"딱히 당신들 때문이 아니오. 내 의지로, 증명하기로 결정했을 뿐이오."
"증명?"
되물으려던 아이렉의 말은 프라우에게 가로막혔다.
"최고의 싸움을 보여주게나! 저 재수 없는 기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게!"
데일은 프라우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머뭇거리던 엘레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엘레나의 얼굴은 복잡했다.
두려움. 긴장. 그리고 죄책감.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쩌면 자기 탓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엘레나는 일방적인 피해자인데도 말이다.
데일은 그런 엘레나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카를이랑 약속도 했었지.'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저 겁먹은 채 손을 떨고 있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엘레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침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크리스틴이 광장으로 들어섰다.
"와아아아!"
"크리스틴! 크리스틴!"
"힘내세요!"
반응이 뜨겁다. 잘생긴 기사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데일도 광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저게 그...."
"으음."
데일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졌다 하나, 그는 여전히 흑기사였다.
사악하고 두려운 이교도 기사.
사람들은 꺼림칙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악역은 누구인지가 명확히 갈렸다.
사람들은 크리스틴의 승리를 바랐다.
물론. 데일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해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남들이 데일에게 무엇을 바라든. 무얼 기대하든.
데일은 할 일을 할 뿐이다.
마침내 두 기사가 광장의 중앙에서 마주 섰다.
크리스틴이 히죽 웃었다. 그 찰랑이는 금발을 한 손으로 넘기며, 거드름을 피웠다.
"너에게는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내 명성을 퍼트릴 기회를 줘서 말이야. 내 살아생전 언데드 덕을 다 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싸움 전 트래쉬 토크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싸움은 주둥이로 하는 게 아님을, 데일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어갈 수 없는 말에 데일이 대꾸했다.
"나는 언데드가 아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래. 네가 인간 흉내를 낸다는 말은 들었다. 참 가증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 흉내를 낼 수 있을지, 오늘 한번 확인해보자고."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데일은 생각했다.
저놈의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다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마침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잘 닦아놓았다.
곧, 데일의 생각대로 될 것이다.
결투
* * *
공증인을 맡은 조피스 가주가 선언했다.
"본 결투는 양 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며, 결투자는 명예를 지킬 것이고, 이 결투의 승패에 따라 패자는 모든 걸 승복해야 할 것이며, 이 이후 어떤 보복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결투는 결투로 끝내라 이 말이다.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이 결투의 증인이니, 둘은 끝까지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긴 선언 뒤에 조피스 가주가 물러났다.
크리스틴은 씩 웃었다. 유난히 하얀 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가 말했다.
"그라일 가문의 크리스틴."
데일이 짧게 답했다.
"데일."
크리스틴은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눈구멍이 가로로 긴 일자를 그리는 투구였다.
그는 양손으로 은백색의 롱소드를 들었다. 시퍼런 예기를 풀풀 날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데일과 크리스틴은 각각 결투장의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정식으로 만들어진 결투장이 아닌, 간단한 목책으로 관중들과 선을 그은 조잡한 결투장이었다.
공간이야 넉넉하다지만....
'굳이 이런 곳을 택한 이유를 모르겠군.'
데일은 롱소드를 아랫배 쪽으로 당긴 뒤, 검 끝으로 상대의 머리를 겨누었다.
처음에는 일단 거리를 벌리며, 상대를 가늠해보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데일을 보며 히죽 웃더니, 목을 뚜둑 풀었다.
"그러면. 일단 가볍게 실력이나 볼까?"
그 순간.
크리스틴이 땅을 박찼다.
데일이 크리스틴을 다시 두 눈에 담았을 때. 그는 이미 데일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
부지불식간이었다.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 무시무시한 기동.
데일은 반사적으로 검을 곧추세웠다. 가로로 휘둘러진 롱소드가 데일의 검과 십자로 맞물렸다.
카가가가각!
강대한 힘이 검을 타고 전해진다.
데일은 검의 각도를 기울여 어떻게든 힘을 흘려 넘기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더 노련하다.
힘껏 밀어치려는 듯이 굴던 크리스틴이 돌연. 검을 뒤로 힘껏 뺐다.
'이런.'
데일이 균형이 앞으로 무너진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틴은 검을 위로 들었다. 검을 든 팔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것이다.
크리스틴은 그대로 내리쳤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 벼락같은 일격이다.
'위험하다.'
데일은 급소를 피하기 위해 몸을 힘껏 뒤틀었다.
검이 그대로 데일의 왼팔을 가격했다.
단단한 갑옷과 검의 충돌.
검이란 무기는 본디 갑옷을 부수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이번에는 달랐다.
찌그러지는 쪽은 오히려 갑옷 쪽이었다.
우득!
갑옷이 부서지며 안쪽의 육체가 드러났다.
크리스틴은 절묘하게 검의 각도를 꺾어 팔에 깊은 자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완전히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뒤로 힘껏 물러났다.
그대로 팔을 내주고 접근하려는 데일의 수를 간파한 것이다.
거리를 벌린 크리스틴이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언데드야. 너희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데일은 차가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팔을 어루만졌다.
역시, 예상대로 강력한 적이었다.
'특히 마력으로 인한 신체 강화가 골치 아프군.'
안 그래도 강한 신체가 한 번 더 강화되어, 예상을 초월한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갑옷을 찢어발겨도 이 하나 나가지 않는 검.
절묘한 검술까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재수 없는 기사는, 그 오만함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데일이 잠시 가만히 서 크리스틴의 움직임을 복기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이죽거렸다.
"어라. 혹시 벌써 겁먹은 거야? 그럼 곤란한데. 기껏 보러 와준 관객들을 즐겁게 해줘야지! 아니면. 조금 봐줄까?"
저 경박한 말들은 데일을 도발하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성공했다.
늘 덤덤한 데일도,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데일이 다시 검을 앞으로 세우자, 크리스틴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크리스틴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그 추진력은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데일도 동시에 앞으로 돌진했다.
중앙에서 둘이 맞부딪혔다.
일전과는 달리, 검과 검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캉! 카캉!
은백색과 흑색이 충돌할 때마다 허공에 불티가 튀었다.
빠르고 어지러운 공방전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딱 그들이 기대하던 화려한 싸움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흘렸다.
"와아. 대, 대단한데."
"막상막하 아니야?"
하지만 나름 실력을 갖춘 이들은 냉정하게 말했다.
"흑기사가 밀리는군."
"응."
데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데일은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노림수는 시도하는 족족 성공하며, 데일의 반격은 철저히 가로막힌다.
농락당하는 기분.
그만큼 상대가 지닌 기교와 기술은 압도적이었다.
데일이 가진 검술은 실전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으로 벼려내었다면, 크리스틴은 정반대다.
경험은 부족하다.
하지만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천재에게 개량되고, 발전해온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살인기술은 감히 데일이 넘볼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의 검술은 예술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갑옷 이곳저곳에 상처가 늘어난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 빈틈을 찔러 들었다. 데일은 점점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일방적인 싸움.
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었다.
'왜 치명타를 안 날리지?'
크리스틴의 기량이라면 치명상을 만들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러지 않았다.
데일이 숨기고 있을 한 수를 경계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기엔 크리스틴의 태도에는 너무나 여유가 넘친다.
비유하자면.... 마치 투우사 같다.
차근차근 소에게 상처를 입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투우사.
크리스틴은 지금, 데일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에리얼이 예견했던 그대로.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어지간히도 얕보인 모양이다.
'흐름을 바꿔야 한다.'
이대로 가면 천천히 패배로 걸어나갈 뿐이다.
좀 더 상대의 밑천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데일이 지닌 수를 써야만 한다.
데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껏 펼쳤다.
샤아아아아!
검은 안개가 퍼져나가 데일과 크리스틴을 감쌌다.
크리스틴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오호. 검은 안개.... 맞나? 하지만 아직 그 수준이 별로 대단치 않은 것 같은데?"
어둠 속에 녹아든 데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홀스터에서 손도끼를 꺼내 그대로 투척했다.
캉!
"앝은 수를!"
크리스틴은 간단히 검을 휘둘러 도끼를 쳐냈다.
그의 민감한 감각은, 설령 시야가 제한되었어도 제 역할을 수행했다.
크리스틴은 청각에 집중했다. 안개를 가르고 쇄도해오는 날붙이의 소리가 들린다.
'도끼는 속임수. 잠깐의 틈을 이용해 검을 찌른다? 너무 뻔하군.'
크리스틴은 여유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검이 뻗어올 거라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얼굴이 이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
검이 뻗어온 건 맞다.
하지만 그 검을 잡고 있어야 할 데일이 없다.
'아차. 이것도 속임수인가.'
설마 기사가 검을 버릴 줄이야.
크리스틴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이미 데일이 양팔을 뻗어오고 있었다.
이미 보르단에게도 써먹었던 수.
하지만 크리스틴은 보르단 따위보다 아득히 높은 격의 실력자였다.
순간적으로 크리스틴의 온몸이 푸르게 빛났다. 마력으로 신체 전체를 강화한 것이다.
크리스틴이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데일에게 검을 내질렀다. 가슴을 노리는 궤적.
데일은 그냥 무시했다.
무시하고 왼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크리스틴의 검이 데일의 흉갑을 부수고.
데일의 왼손에 덧쓴 유물 장갑에서 충격파가 나온 건 동시였다.
콰직!
둔탁한 소리. 안개가 걷혔다.
관중들은 비로소 공방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데일의 흉갑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다.
다만. 워낙 단단한 부위인지라 그 속까지 드러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틴의 오른팔 부분의 갑옷 역시 조금이나마 찌그러져 있다.
마지막에 가슴을 가격당한 탓에, 손을 제대로 쥐지 못했다. 만족할만한 피해를 주지는 못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크리스틴이 원했던 완벽하고 여유로운 승리에는 흠집이 갔다.
그게. 크리스틴을 열받게 했다.
크리스틴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 봐주니까 기어오르는군."
크리스틴의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피어오른 마력은 근육에 단단히 스며들었다.
신체를 강화하고 남은 마력은 눈을 통해 안광이 되어 흩어졌는데, 아이러니하지만 그 모습이 흑기사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음 순간.
크리스틴이 바닥을 박찼다.
땅이 패이는 동시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크리스틴의 모습을 눈에 담았을 때는 이미 검이 데일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이미 반쯤 찌그러진 부위였다.
드득!
갑옷이 뚫리고, 선혈이 튀었다.
데일은 황급히 검을 주워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가르고. 이미 크리스틴의 몸은 데일의 등 뒤에 있었다.
'어느새?'
촤악! 다시 한번 피가 튀었다.
데일은 곧바로 허리를 돌리며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크리스틴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쳤다.
사선에서 치고 들어오는 검격에 옆구리가 찌그러졌다.
"언데드야, 당혹스러운가? 그러게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데일은 소리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마치 조롱하듯, 데일의 어깨 위에 머리를 붙이며 속삭였다.
"후회해도 늦었다. 이제부터 네 민낯을 드러내겠다."
쐐액!
다리가 깊게 베였다. 데일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뜩이나 피가 부족한데, 유물 장갑 탓에 생기까지 소모했다.
갈증. 갈증이 인다.
'생기가 필요해. 생기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가장 좋은 방안은 저 재수 없는 기사를 죽여 생기를 취하는 것이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데일을 멀뚱히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면 딱 적당하군. 인간 흉내는 그만둘 때다."
그러고는 데일의 몸을 쇠장화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월등히 벗어났다.
그대로 날아간 데일의 몸이 결투장을 나누는 목책과 부딪혔다.
쿵!
목책은 가볍게도 부서졌다. 그리고 데일은 한참을 더 굴러, 관중들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어, 어?"
"...엇."
그제야 데일은 크리스틴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데일은 주위에 있는 관중들을 올려다보았다. 하나같이 벙찌고, 겁먹은 표정들이다.
그 두려움이 도리어 데일을 자극했다. 생을 탐하는, 언데드의 본능이 자꾸만 깨어나려 했다.
먹어.
내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이전, 어딘가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흑기사는 아군을 죽여 회복했고, 적을 죽이다 또 상처를 입으면 근처에 있는 아군을 죽였소.
기억났다. 발튼과 나눈 대화다.
흑기사들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사며,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유.
흑기사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다. 그건 데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점점 갈증이 심해진다. 본능이 이성을 억누르기 시작한다.
지금 데일의 상태는 위험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기를 취해야 한다.
점점 인간 데일이 아닌, 언데드 데일에 가까워져 간다.
'안 돼.'
이 본능에 따라서는 안 된다.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다고 잘난 듯이 말해 놓고. 이렇게 굴복해버리면 안 된다.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던 찰나.
한 줄기 또렷한 음성이 데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데일 경."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관중들은 전부 데일에게서 달아났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에스델이 있었고, 하켄이 있었다.
둘은 데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에스델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있는 건,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
억울하게 죽은 여사제에게서 받은 반지였다.
이게 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까. 검에 베이는 과정에서 주머니가 찢어진 걸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에스델이 말하길, 이 반지에는 옛 영웅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고결한 영혼을 가진 이에게 단 한 번, 강한 힘을 내려준다 했다.
데일은 반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바랐다. 지금 이 순간. 힘을 달라고.
반지에서 빛이 몇차례 반짝였다.
깜빡. 깜빡. 뚝.
빛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
"...."
"...."
침묵. 잠시 눈치를 살피던 하켄이 중얼거렸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당황한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바, 반지가 데일 경이 맘에 들지 않나 봐요."
"...."
떨떠름하게 반지를 쳐다보던 데일은 생각했다.
'이놈의 유물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깐깐하게 나오는군.'
하지만 선택하는 쪽은 언제나 데일이다.
데일은 유물 장갑을 낀 손으로 반지를 쥐었다. 그리고 남은 생기를 한계까지 사용해, 그대로 충격파를 터트렸다.
콰앙!
주먹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이다. 오래된 반지 따위는 쉽게도 찌그러졌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영웅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데일은 곧바로 그 영혼을 부여잡았다. 있는 힘껏 흡수했다.
영혼이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이것 놓으라는 듯, 격렬히 저항했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영혼을 취해 그 힘을 흡수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을 빨아들였다고 생각한 순간. 영혼의 저항이 끊겼다.
데일은 몸 안에서 맥동하는 강력하고 순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일은 확신했다.
잠시지만. 아주 잠시지만.
자신이 더 높은 격의 존재가 되었음을.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결투
* * *
내면에서 거센 힘이 사납게 용솟음친다. 본디 데일의 힘이 아니다. 남에게서 억지로 뺏어온 힘.
그렇기에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결투장으로 돌아갔다.
"음?"
크리스틴의 미간을 좁혔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분명, 크리스틴이 계획했던 건 데일을 한계로 몰아넣어, 그가 관중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큰 혼란이 생겼을 때.
크리스틴이 적절히 끼어들어 사악한 이교도 기사를 베어내고, 시민들을 구출하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사람 몇이 죽거나 다치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다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인데.
한데.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데일은 관중을 공격하지 않았다. 분명 신체는 한계에 몰려있을 터.
그 본능에 따라 생기를 탐해야 옳다.
'자제했다고?'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조차 굶주리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데. 하물며 언데드는 어떨까.
하지만 데일은 참아내었다.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특별하다 해야 할지. 어쨌거나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입니다.
크리스틴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래. 확실히 특별하긴 하군.'
데일이 이쪽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왔다. 사위는 쥐가 죽은 듯 고요했다.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흑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크리스틴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지금 저 앞에 다가오는 적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거리가 가까워진다.
크리스틴은 데일의 투구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과 마주쳤다.
'윽.'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충격에 빠졌다.
'내가 겁먹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자랑스러운 그라일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나, 천재라 불릴 정도의 재능을 타고났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시기한 두 형제는 사사건건 크리스틴을 견제했다.
밤중에 암살자가 찾아온 일이 수차례며, 음식에 독이 들어있던 적도 많다.
노골적인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어머니를 어렸을 때 여의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크리스틴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재능밖에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고, 뼈를 끊어내는 심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결국, 이 순간까지 다다랐다.
그렇기에 크리스틴은 겁먹지 않는다. 않아야만 한다.
크리스틴은 억지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데일에게 말했다.
"무언가 사특한 수를 쓴 모양이군. 하지만 서로의 기량 차이가 명백하다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데일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검술로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데일은 검을 손에서 놓았다.
"음?"
갑작스러운 행동에 크리스틴이 표정을 굳혔다. 데일은 그 투구 속에서 빛나는 눈을 응시했다.
저 위에서 깔보는 듯한 눈빛. 일단 그것부터 고쳐 주어야겠다.
데일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쿵!
강한 힘에 바닥이 내려앉는다. 다음 순간. 데일의 몸이 흐릿해진다.
크리스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빠르다! 아니. 단순히 빠른 걸 넘어서....
"이런!"
서둘러 정신을 차린 크리스틴이 검을 끌어당겼다. 이미 데일의 주먹이 가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콰앙!
주먹에서 났다기에는 너무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틴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무슨 힘이!'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는데도 도저히 버틸 수 없다.
크리스틴은 서둘러 균형을 잡으려 했다. 검술을 통해 배운 그대로.
하지만 데일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대로 따라붙어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마치 길거리 무뢰배들의 그것처럼 되는 대로 휘두르는 주먹.
규칙성도 없고, 무의 미학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힘과 속도가 뒷받침되자, 무뢰배의 주먹은 그 어떤 검격보다 더 파괴적인 공격으로 변모했다.
"크윽!"
연타를 얻어맞으며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었다.
그 눈에 이제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다. 비로소 데일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와, 데일을 적으로서 증오하고 있었다.
데일이 중얼거렸다.
"좀 낫군."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었다.
"한낱 언데드 주제에...!"
마력이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눈가의 안광이 짙어진다.
데일의 속도를 따라오기 위해, 마력을 한계까지 사용해 신체를 강화한다.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겠지만, 일단은 이겨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둘은 이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어지럽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눈으로 읽어낼 수 없는 속도의 영역에서 공방을 시작했다.
주먹이 크리스틴의 머리를 가격한다. 검이 데일의 옆구리를 부순다. 주먹이 가슴을 후려친다. 검이 어깨를 베어낸다. 주먹과 검. 검과 주먹.
마지막 순간. 크리스틴의 검이 데일의 갑옷을 찢고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됐다!'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데일이 갑자기 강해졌다 하나, 아직 기량에서는 자기가 한 수 위다.
이 싸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모를 것이다. 이겼다는 생각이 들 때야말로 가장 위험하다는 걸.
데일은 그걸 잘 알았다. 활용할 줄도 알았다.
"!"
사아아아!
투구의 눈구멍. 갑옷의 이음매. 그리고 검격에 찢어진 상처.
데일의 갑옷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어둠이 피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안개?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끈적하고 짙은 어둠이다.
크리스틴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당장 벗어나야....'
하지만 어떻게? 둘 간의 거리는 좁고, 무기는 상대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있지 않나.
갈등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도망갈 기회를 놓쳤다.
다음 순간. 어둠이 주위를 모두 덮었다.
크리스틴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눈을 떴는지 뜨지 않았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모든 소음과 시야가 차단된 압도적인 적막감.
끔찍한 공간이었다.
―크리스틴.
―넌 죽어야만 한다.
"이, 이게 무슨."
어느 순간부터 귓가에 저주의 말을 뱉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공기는 너무나 차가워 갑옷 위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발버둥 치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발을 딛고 선 단단한 땅이 어느새 늪이 되어 그를 집어삼켰다.
몸이 점점 늪 아래로 가라앉았다.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늪이었다.
크리스틴은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차갑고 어두운 늪은 그를 빠르게 삼킬 뿐이다.
크리스틴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이 적막을 깨고자, 일부러 소리 내 외쳤다.
"환각! 그래, 환각이다! 실제로 바닥이 늪이 될 리가 없잖아! 이 사악한 이교도 놈아! 이딴 수작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렇게 외친 순간. 그에 화답하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얼굴을 드러냈다.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습이 이상하다. 하나같이 뒤틀려 있다.
누구는 몸이 반 토막이 나 있고, 누구는 머리가 없다.
"뭐, 뭐야 너희들은. 썩 꺼져 괴물 새끼들아!"
크리스틴은 알지 못했다.
이 괴물들 역시 한때는 이름이 있었음을. 하시나, 하킴, 마일즈, 아바프, 검은 뱀 형제단, 마탑의 노예병, 용병 등등. 각자를 부르는 칭호가 있었음을.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게 빨려, 껍데기만 남은 괴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알지 못한다.
그 역시 저들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이라는 걸.
괴물들은 이내 크리스틴에게 몰려들어 아가리를 벌렸다. 그대로 크리스틴을 산 채로 뜯어먹으며 그 생명을 취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크리스틴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쳤다.
"아니야! 이 통증 역시 가짜다! 정신력으로 버티면 돼! 꺾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크리스틴이 미친 듯이 외쳐댔다. 괴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틴을 물어뜯었다.
귓가에는 계속해 저주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어서 너도 죽으라고. 저항을 그만두라는 말이 지나갔다.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것만. 이것만 넘긴다면....
그때. 정겨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포기하렴. 포기해서 편해지렴."
"어...머니?"
너무나 그립고. 간절히 듣고 싶던 목소리.
환청이다. 꾸며낸 목소리다. 크리스틴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
위태롭게 크리스틴을 지탱하던 마음속 끈이 뚝 끊어졌다.
늪이 완전히 크리스틴을 집어삼켰다.
괴물들과 크리스틴은 가라앉았다. 저 깊은 곳. 죽음을 향해.
마지막 순간. 크리스틴은 멍하니 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게 흑기사의 힘. 이건....'
위험하다. 저 흑기사는 속에 위험한 괴물을 키우고 있다.
속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을 바깥에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기회가 없다.
죽음이 그를 완전히 삼켰다.
"...."
데일은 무심히 아래를 쳐다봤다. 어느새 어둠이 걷혔다. 바닥에는 크리스틴이 누워 있었다. 늪도 없고, 괴물도 없다.
핼쑥해진 시체가 있을 뿐이다.
마력이 신체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 생기를 잔뜩 뜯어먹혔는데도, 비교적 시체 상태가 온전하다.
그 눈동자 역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한 사람처럼, 부릅떠진 두 눈은 공허하다.
철퍽!
데일은 크리스틴의 목 부분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그대로 움켜쥔 뒤, 생기를 흡수했다.
상대는 강한 적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어마어마한 생기와 잔혼이 흘러들어왔다.
만신창이였던 데일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찌그러지고 찢어졌던 갑옷이 수복되고, 신체 역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갈증이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뿌옇게 흐리던 충동들도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태어난 기분.
생기를 모두 흡수한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광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일은 멍하니 있는 조피스 가주에게 말했다.
"승패가 났소. 어서 결투 종료를 선언하시오."
"아."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조피스 가주가 급하게 외쳤다.
"스, 승자는 데일 경! 그리하여, 처음 선언한 대로, 엘레나 바이만에게는 무죄가 선고된다!"
데일의 승리. 하지만 광장을 떠나갈 듯한 갈채는 없다.
그야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무조건 이길 거라 생각한 크리스틴이 패배하고, 져야 했을 악역이 이겼으니.
좋아하는 건 도박으로 몇십 배의 이익을 낸 이들밖에 없었다.
하켄도 그중 하나였다.
"크하하하! 믿고 있었습니다 데일 경! 황실 기사단이니 뭐니 해도, 별거 아니.... 별거 아니진 않았지만, 데일 경한테는 안 되죠!"
에스델은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바, 반지를 부수다니. 그건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안에 깃든 영웅의 영혼은...."
"지금은 없다."
"지금은 없다라니...."
프라우와 아이렉도 다가와 호들갑을 떨어댔다.
"맙소사. 세상에. 내가 지금껏 보았던 것 중 가장 멋있는 승부였네!"
"하하! 잘했네! 아주 잘해주었어! 오늘은 성대히 축하해야겠군!"
마지막으로 엘레나가 데일의 갑옷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마, 워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어요."
데일은 엘레나를 흘끗 내려다본 뒤, 툭 내뱉었다.
"꼭 갚아라."
"네? 네, 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결투의 승자는 어떤 승리 소감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떠나갔다.
마치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떠나가는 데일을 사람들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망토와 가면으로 신분을 가린 2인조도 있었다.
그중, 직급이 낮아 보이는 여성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승.... 아니. 단장님."
단장이라 불린 사내는 미소 지었다.
"흐음. 제법 훌륭하군."
"예?"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가 아는 이 단장이라는 사내는 당최 누구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저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고.
"간만에 좋은 걸 봤어. 흑기사 데일이라. 기억해둘 가치가 있겠군."
"그 정도인가요? 분명 봐줄 만한 싸움을 보여주긴 했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다."
단장은 관중석 이곳저곳에 시선을 주었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결투다.
상위 구역에서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온 건 이 둘만이 아니었다.
제법 권세를 자랑하는 고위 귀족도. 도시의 유력자도. 기사 가문의 일원들도 곳곳에 신분을 감추고 구경하고 있었다.
단장은 먼 거리지만 그들의 눈에 담긴 놀라움을 읽어냈다. 데일을 향해 보이는 흥미와 탐욕 역시 읽어냈다.
옆에 있던 여성이 물었다.
"마탑에서 가만있을까요? 공들인 일을 훼방 놓았는데."
단장은 피식 웃었다.
"그놈들도 체면이라는 게 있다. 결투가 끝나자마자 복수를 하면 면이 안 살아. 그리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을 거다."
"예?"
"결투 때 보지 않았나? 저 흑기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 역시 따라주고 있다. 그야말로 변수 덩어리지. 내가 주문쟁이라면 저걸 굳이 건드느니, 그냥 모른척할 것 같군."
여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
여인이 그런 단장을 붙잡았다.
"아. 그 단장님. 크리스틴 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정식으로 단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입단이 예정되어 있던 사내가 아닙니까."
"흐음."
턱을 손으로 쓰다듬던 단장이 물었다.
"크리스틴이라. 그런 놈이 있던가?"
"...."
그 눈을 마주친 여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 나의 기사단에 패배자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단장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 자꾸만 뒤로 고개를 돌려 데일을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맘에 걸린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라 해야 할까.
'투구를 뒤집어썼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지. 언제 만난 적이 있나?'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찝찝하다. 왠지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또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후자로 생각이 기울었다.
"자. 어서 돌아가자. 또 동쪽에서 말썽이라는구나."
"예. 단장님."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리는 너무나 바빴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뒤로 돌려, 뒤쪽을 둘러보던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