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광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높다란 건물의 지붕 위.
지붕 위의 한 공간이 마치 커튼이 걷히듯 양옆으로 밀려났다.
왜곡된 공간 속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특징 없는 노인. 특이한 건 그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수정구다.
수정구 속에는 푸른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결투가 끝난 광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노인은 눈동자가 광장을 볼 수 있도록, 앙상한 팔을 들어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중얼거렸다.
"실패했군. 바이만의 왕족이 마탑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이 도시의 파멸이 한 단계 더 가까워졌을 텐데."
하지만 그 눈빛에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어딘가 기꺼워하는 기색까지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다음 수를 준비하면 될 뿐이야. 내게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준 건, 다름 아닌 당신이니까."
그 눈동자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 좁쌀처럼 작아진 데일을 담았다.
그때. 수정구를 든 노인의 이마에 땀이 주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수정구가 무거워서 흘리는 땀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흥. 벌써 시간이 되었나."
다시 공간이 커튼처럼 걷히며 노인의 모습을 가렸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변화
* * *
도시를 뜨겁게 달궜던 결투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빠르게 식었다.
제법 재밌는 화제였지만, 그에 대해 계속 씹어대기에 외곽구역과 빈민가의 삶은 너무 바쁘고 고달프다.
수색으로 사로잡은 위험 분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정식이 아닌 약식 재판이었다.
절반 정도는 혐의가 입증되어 사형에 처했고, 나머지 절반은 무죄방면 되었다.
사람들은 이 결과에 놀라워했다.
당연히 감옥에 잡혀들어간 사람들 전부 목이 잘릴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억울한 사람이 몇 생기더라도, 도시의 안위를 위해 당연히 희생을 강요하던 게 그간의 기조다.
어쩌면 경비대장 카달이 이번 사건으로 무언가 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게 사람들의 추측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수색 작전은 일단 성공으로 평가되는 분위기였다.
이후. 도시에 가해진 위협 행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를 피하기 위해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폭풍 전의 고요일까.
어쨌거나 도시는 오랜만의 평화에 젖어 들었다.
반면 데일은.... 그 나름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데서 지낸단 말이에요?"
엘레나가 카일라의 여관을 둘러보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혹 지붕이 무너질까 걱정이에요."
"안 무너지거든요!"
카일라가 볼멘소리로 외치자 흠칫한 엘레나가 프라우에게 말했다.
"술집 여급이 이야기에 끼어들다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여급이 아니라 이곳 주인이랍니다 공주님."
"네에?"
엘레나가 화들짝 놀라자, 카일라가 도끼눈을 떴다.
그런 엘레나에게 데일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서. 왜 찾아온 거지?"
"흠흠. 은혜를 갚을 겸 좋은 제안을 하러 왔어요."
"제안?"
엘레나는 양 허리에 손을 짚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겁에 질려 있던 얼마 전까지와는 다르게, 왕족 특유의 기품이 동작에서 배어 나왔다.
엘레나는 데일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데일 경. 경께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하사하겠어요."
"...."
마치 대단한 자리를 주는 듯한 태도에 데일은 어이가 없었다.
옆에 있던 프라우가 호들갑을 떨었네.
"청사자 기사단은 바이만 왕국에서도 으뜸가는 기사단일세! 한때 카를 폐하가 그 단장을 맡으셨었지. 이게 무슨 말인지 아나? 자네는 이제 바이만 왕국의 가장 뛰어난 기사일세!"
엄청나게 부럽다는 듯. 프라우는 그 맑은 눈을 반짝였다.
데일이 물었다.
"일단 묻겠는데, 기사단에는 나 말고 누가 있지?"
"나 역시 청사자 기사단원일세! 참고로 내가 부단장이네!"
"너 외에는 없나?"
"지금은 그렇네!"
프라우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단 두 명밖에 없는데 기사단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데일의 답은 정해졌다.
"거절하겠다."
"!"
"!!!"
엘레나와 프라우 둘 다 눈을 부릅떴다.
특히 프라우 쪽은 반응이 너무 격해, 눈알이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엘레나가 당황해서 물었다.
"이런, 이런 명예로운 직위를 왜?"
"명예 말고는 없으니까."
그 명예가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데일은 손을 휘휘 저었다.
"볼 일 다 봤으면 돌아가라. 괜히 마법사 안 마주치게 조심하고."
데일이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엘레나는 데일을 한차례 노려보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프라우 경."
"예."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겠어요."
갑작스러운 결정에 프라우가 물었다.
"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긴 너무 허름하고 더럽지 않습니까."
"왕국에서 탈출할 때는 지붕조차 없는 곳에서도 야영해야 했다. 이 정도쯤이야."
"허름하고 더러워서 미안하게 됐네요."
카일라가 멀리서 툴툴거렸지만 엘레나와 프라우는 무시했다.
"그리고, 기사단장이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하지 않겠어요?"
"기사단장 안 한다니까."
하지만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지금 엘레나가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데일의 옆일 것이다.
데일이 딱히 엘레나가 지내는 저택으로 갈 생각이 없다면, 엘레나가 이곳으로 옮기는 게 맞았다.
엘레나 옆에 이 시끄러운 엘프까지 따라오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라. 그럼 장기 숙박 손님이 또 늘었네요?"
그제야 카일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빙그레 걸렸다.
어찌나 기분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망할 위기였던 여관에 손님이 속속 들어차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왜인지 손님들이 하나 같이 데일과 연관된 사람 같지만....
그때. 불콰하게 취한 하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데일 경! 응? 이 꼬맹이랑 귀쟁이는 누굽니까?"
아무래도 술에 취해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프라우가 고민도 없이 검을 뽑으려 하자, 데일이 그 손을 막았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 친하게 지내라."
"...데일 경이 그리 말하니, 한 번만 봐주겠네."
엘레나도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을 했지만, 데일이 그렇다 하니 수긍했다.
"저도 가볍게 벼락을 날리는 수준에서 참아보겠어요."
"그러지 마라."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취한 하켄이 데일에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데일 경 덕분에 한몫 두둑히 벌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비싼 술을 먹었는데.... 아니.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지.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엄청 중요한 말이었는데. 뭐였더라?"
"원한다면 생각나게 만들어줄 수 있다."
물리적으로.
"아! 기억났습니다! 가란드가 데일 경을 만나면 길드로 찾아와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데일이 하켄을 지나치자, 잔뜩 취한 하켄이 비척거렸다.
프라우가 그런 하켄을 붙잡으며 말했다.
"다녀오게. 이 곱슬머리 친구는 내가 잘 맡아주겠네."
"으잉. 뭐라는 거야 이 귀쟁이가."
프라우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데일은 뭐라 하려다 그만두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하켄은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죽이지는 마."
"하하! 나를 뭘로 보는건가!"
데일은 고개를 끄덕여준 뒤, 여관을 나섰다.
곧바로 무언가를 두들겨 패는 듯한 소리와 하켄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울렸다.
데일은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하던 하티가 그런 데일의 뒤를 느릿하게 따랐다.
* * *
다시 들른 용병 길드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굵직한 일이 마무리되고, 주머니가 묵직해진 용병들이 휴식기를 가진 것이다.
수색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부지런한 용병 몇 명만이 의뢰를 찾아 서성였다.
그런 와중에 데일이 들어오자 시선이 한순간 집중되었다.
"엇."
"어...."
데일을 못 알아본 사람은 없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결투 이후. 데일은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데일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접수대의 직원에게 걸어갔다.
그때. 용병 중 하나가 데일의 앞을 막았다.
"?"
시비인가? 참으로 간 큰 용병이다. 데일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꺼지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용병이 정중하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데일 경."
"음. 그래."
생각보다 예의 바른 태도에 데일은 당황했다. 예의라니. 용병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결투 잘 봤습니다. 솔직히, 대단했습니다. 황실 기사단의 기사를 꺾으시다니요."
정확히는 입단 예정인 기사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한 명의 전사로서 감탄했습니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인 듯. 용병은 얼른 뒷걸음질해 길을 터주었다.
데일은 자신을 쳐다보는 용병의 눈에 서린 호의를 발견했다.
고개를 돌렸다. 다른 용병들도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거친 삶을 살아가는 용병들은 강자를 존경하고 동경한다. 이번에 데일이 보여준 모습이 어지간히도 인상적인 모양이다.
'아니.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까.
적의는 둘째치고, 데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희석되었다 해야 하나.
갸우뚱한 데일은 용병들을 지나쳐 접수대에 섰다. 직원도 전보다 좀 더 진심이 묻어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예! 무슨 일이신가요!"
"가란드가 찾는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올라가시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계단을 올라 가란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데일이 문을 열자 서류 더미. 아니, 서류의 산이 보였다.
서류 속에 파묻힌 가란드는 며칠간 철야 한 듯, 눈가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흑인도 다크서클이 진해질 수 있군.'
다소 불손한 생각을 하는 데일에게, 가란드가 손짓했다.
"앉으세요. 어디 보자...."
가란드는 서류 더미를 힘껏 밀어 버렸다. 서류가 우수수 무너져 내리자 데일이 앉을 자리도 생겨났다.
가란드가 머쓱하게 말했다.
"수색 작전 이후 뒤처리할 게 많아서 말이죠."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이럴 때마다 현역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대단한 영웅들과도 손을 맞췄던 그 시절이.... 아.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시간이 없다는 건 이 주위에 널린 서류의 산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짬을 내준 것도 가란드로서는 큰 호의를 베푼 것이리라.
"나한테 할 말이 무엇이오?"
"길드 상부 회의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데일 경을 동패로 승급해도 될 것 같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동패를?"
"유례없을 정도로 빠른 승급 속도지만.... 사실. 그간의 실적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봤자 동패인걸요. 진즉에 승급했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가란드의 말을 곰곰이 듣던 데일이 물었다.
"조금 갑작스럽군. 이번 일은 길드와는 관련이 없지 않소."
암흑가의 주민들을 지킨 건 에리얼의 부탁이었다. 크리스틴과의 결투도 길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승급이 결정되었단 말인가?
"왜냐하면, 상부에서 데일 경에 대한 평가를 바꿨기 때문이죠. 믿을 수 없는 반 언데드에서, 그럭저럭 믿을만한 반 언데드로요."
"왜 그렇소."
"왜긴요! 데일 경이 자제심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솔직히 참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크리스틴과의 결투 도중. 데일은 빈사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데일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그 점을 길드의 상부에서는 높게 산 것이다.
아니. 길드의 상부뿐만이 아니다.
아까 보았던 용병들에게서 두려움과 적의가 사라졌던 게 떠올랐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일을 다시 보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반가운 소식이다.
동패를 달면, 이제 상위 구역에도 출입할 자격이 생긴다. 데일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데일이 물었다.
"언제쯤 승급할 수 있겠소."
"음. 길드 규정상, 실적이 모두 찼으면 상위 등급에 걸맞은 어려운 의뢰를 한 번 더 수행해야 승급할 수 있습니다."
데일의 투구를 긁적였다.
"그런 규정은 처음 들어보오."
"하하. 그럴 겁니다. 이게, 3년 전에 용병왕께서 용병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직접 만드신 규정이라...."
용병왕. 그 거슬리는 이름이 또 들린다.
데일이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가란드가 선수를 쳤다.
"어쨌건. 데일 경께서는 의뢰를 하나 맡아주시면 됩니다. 동패 용병이 받을 만한 의뢰를요."
"음. 그런 거라면. 추천해줄 의뢰가 있소?"
"마침 데일 경을 찾는 분이 있습니다만.... 아마 조만간 본인이 직접 찾아갈 겁니다. 들어보시고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바쁜지라."
그렇게 말한 가란드는 다시 서류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마 더 말을 걸기도 미안할 만큼, 일이 보였던지라 데일은 조용히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대체 누가, 언제, 찾아온단 말인가?
정보가 부족한 탓에 데일은 꼼짝없이 여관에 틀어박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관에서는 할 일이 없다.
데일은 습관적으로 헝겊을 꺼내 무기를 닦았다.
그 바로 옆에 앉아서 프라우 역시 검과 손도끼를 꺼내 헝겊으로 닦고 있었다.
지나가던 카일라가 중얼거렸다.
"둘이 행동하는 게 어쩜 똑같네요."
데일은 멈칫했다. 세심하게 검을 닦는 프라우를 훑어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무기를 닦는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 떠올라 버렸다.
그런 데일의 시선에 프라우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다르게 해석한 듯, 자랑스럽게 검과 도끼를 들어 올렸다.
"하하! 경이 보기에도 훌륭한 무기지 않나! 내 자랑이라네! 이 검의 이름은 비토. 손도끼의 이름은 다렌이라고 하네. 멋지지 않나?"
프라우가 묻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재잘거렸다.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굉장히 엘프스러운 작명이군. 이상한 이름이다."
"내 부모님의 성함을 따왔네."
"어쩐지."
"...보통은 이럴 때 사과를 하지 않나?"
데일은 무심하게 다시 고개를 내렸다. 무기나 마저 닦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다시 들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오는군.'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꽤 많은 수가 몰려온다.
맥주가 맛없는 카일라의 여관에 단체 손님이 올 턱이 없으니, 분명 데일이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이내 여관 문이 열렸다.
데일은 그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의문스러워했다.
"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왔다.
상행
* * *
여관 안으로 들어온 건 녹색 머리가 아름답게 웨이브 진 여인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실내의 불빛을 반사해 번들거렸고, 셔츠 위에 걸친 얇은 숄은 육감적인 몸매를 한껏 드러내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기 매력을 알고, 그 매력을 활용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물론, 데일이 놀라워한 건 그런 여인의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데일은 이 여인을 본 곳은 재판장 안이었다. 그때 여인은 다른 재판관들의 옆에 서 있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
여인은 평의회의 일원이었다.
여인이 여관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이어 그녀의 부하로 보이는 장정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프라우는 조용히 앉아 책을 읽던 엘레나를 보호하듯이 섰고, 꾸벅 졸던 하켄이 얼른 데일에게 다가왔다.
"거, 거물이 왔는데요. 평의원이라니."
"누군지 아나?"
"알다마다요. 외곽구역 상인 길드의 수장, 레베카. 가진 거 없이 태어나 젊은 나이에 상회 하나를 세운 살아있는 전설. 도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그런 시선을 즐기듯. 여유롭게 걸어온 그녀는 곧장 데일에게 찾아오지 않고, 적당히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카일라에게 말했다.
"가게에 왔으면 일단 물건을 사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어? 음식과 맥주를 내와줘."
카일라가 물었다.
"음식은 뭐로 드릴까요?"
그런 카일라의 질문에 레베카가 미소 지었다. 마치 귀여운 후배를 보는 듯한 미소라 해야 할까.
물론, 카일라에게는 그 미소가 조금 재수 없게 느껴졌다.
"손님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물건을 내오는 것. 그게 상인의 기본이야.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크게 될 수 없어."
"...맥주랑 소시지, 양파 수프면 됐죠?"
레베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수긍으로 받아들인 카일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적.
여관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레베카는 데일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의 힘을 알았다. 분위기를 휘어잡는 방법을 알았다.
데일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먼저 입을 열면 지는 대결을 하는 듯. 실내는 고요한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카일라다.
카일라는 접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레베카와 그 부하들 앞에 요리를 놓았다.
레베카는 소세지를 포크로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진한 육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음. 가게 미관에 비해서 음식 맛은 괜찮네. 맥주는...."
맥주를 한잔 홀짝인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직원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더 훈수가 이어질 것 같아 결국 데일이 말을 꺼냈다.
"훈수나 두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
그제야 레베카는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데일 경. 후배들을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훈수를 두게 되네요."
"오지랖이 넓으시군."
"글쎄요. 남의 결투에 덥석 나서시는 분께 그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레베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데일은 식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썩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재보려는 태도나, 남을 아래로 보는 듯한 시선이나, 핵심을 꺼내기 전까지 빙빙 돌아가는 방식이나.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핵심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소."
"아하. 그런 방식을 선호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전에 우리 일단 서로 인사부터 할까요? 세상 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가 있는 법이잖아요?"
레베카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가, 다시 반대로 꼬으며 말했다.
"레베카예요. 고아라서 댈만한 부모님 이름은 없지만, 지금은 제 이름을 딴 상회를 운영하고 있죠.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를 이끌기도 하고요."
굳이 고아라는 점을 강조하는 건, 그런 자리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기 때문이겠지.
데일도 짧게 답했다.
"데일이오."
"좋아요 데일. 왠지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안 그럴 것 같은데.
데일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대신 대화가 옆으로 새기 전에 먼저 핵심에 다가갔다.
"가란드에게 얘기 들었소. 나한테 할 의뢰가 있다고?"
"맞아요. 동패 승급을 앞두고 있다 했죠? 딱 그에 어울리는 일이죠."
그렇게 말한 레베카는 옆에 앉은 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일은 뭐 중요한 물건이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베카의 손에 쥐어진 건 궐련이었다. 부하들이 그 끝을 자른 뒤, 마도구를 이용해 불을 붙여주었다.
하나같이 값비싼 물건들이다.
그녀는 궐련을 입에 머금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행동 하나하나에 과시가 배어 있다. 상인에게는 재력을 과시하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니.
데일은 그런 레베카에게 성큼 걸어갔다. 레베카가 미소 지었다.
"아. 경도 피워보고 싶은가요? 제법 괜찮은 물건이에요. 귀족이나 마법사들이 많이 피는 물건이죠. 원한다면 하나 선물로...."
데일은 레베카가 문 궐련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잡아당겨, 옆으로 휙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궐련이 부하 중 하나의 맥주잔 쏙에 풍덩 들어갔다.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소. 그리고, 애가 있소."
데일은 뒤쪽에 앉아 있던 엘레나를 가리켰다. 애 앞에서 실내 흡연이라니. 용납할 수 없다.
데일의 행동에 레베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실내에 다른 모두는 경악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부하가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일어섰다.
"이놈!"
"뽑을 건가?"
데일 역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당장이라도 서로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그만."
레베카는 당황한 감정을 가라앉히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좋아요. 데일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그럼 이제 일 얘기로 들어갈까요?"
"그래주면 고맙겠군."
듣던 중 반가운 얘기다. 데일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레베카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장이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 아시나요?"
"글쎄. 모르겠군."
"여러 일을 하지만, 가장 신경 써서 하는 건 전선에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에요. 중요한 업무죠."
그냥 중요한 업무가 아니다.
전쟁은 보급이 절반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리 강인한 병사라도 굶으면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니.
"정확히 말하면, 보급을 보조하는 역할이지만요. 대부분의 일은 황제 폐하와 상위 구역의 귀족들이 처리하니까요. 저는 그 사이에서 기름칠을 하는 역할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다 해도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남쪽의 4군단에 보급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거기에...."
"나를 호위로 고용하고 싶다는 거요?"
"예. 중간거점인 카엘름 성까지만 함께하면 됩니다."
레베카는 지도를 꺼내 카엘름까지의 거리를 보여주었다. 느긋하게 가면 2주 정도 걸릴 거리였다.
"선금으로 금화 4개에, 하루에 은화 6개씩. 일이 끝나면 금화 6개를 추가로 지급해드릴 거예요. 전투가 있다면 성과급은 따로 드리고, 전투로 얻은 노획물은 당연히 본인이 챙겨도 됩니다."
"흐음."
데일은 레베카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한다.
일을 무사히 끝나기만 하면 금화가 열 개라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금화 한 개만 해도 쉬이 볼 수 없는 거금이라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옆에서 듣던 하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하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냥 선금만 먹고 튀어도 남는 장사 같은데...."
고민하던 데일이 물었다.
"고작 철패 용병을 고용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크리스틴 경과 결투를 봤다면, 누가 데일 경을 고작 철패 용병이라 생각하겠어요. 그런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데, 금화 몇 개가 아깝겠어요?"
레베카가 미소를 입에 걸고 말하자,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조건의 의뢰다.
돈도 돈이지만 레베카와 이런 식으로 끈이 생기면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될 일은 없으니까.
가란드가 굳이 귀띔해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확실히 결투 한번 치르니, 좋은 의뢰가 알아서 굴러들어오는군.'
데일이 가만히 있자, 레베카는 속으로 무얼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확정한 듯한 말투다.
이제 데일이 입을 열고 승낙만 하면 계약 체결이다.
하지만 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침묵. 하지만 시선은 레베카에게 고정했다.
"...."
왜 데일이 대답하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하던 레베카는 이내 데일이 지금 무얼 하는지 깨달았다.
'똑같이 되돌려주는구나.'
침묵의 힘.
레베카가 가게에 와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잠시 표정을 굳힌 레베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뭐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라도 있어요? 혹시나 협상을 원하시는 거라면, 이미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을 드린 거라고 말씀드릴게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조건은 지금도 충분하오. 아니, 오히려 과할 정도지. 그래서 의심이 가는군."
"의심.... 말인가요?"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않소?"
언뜻 보면 데일의 호감을 사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큰돈을 줘, 데일과 연을 맺어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너무 대놓고 드러낸다고 해야 하나.
그 모든 걸 고려하더라도 액수가 크다.
그리고 데일이 아는 상인이라는 인종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형편없는 상인이든, 대상인이든 그 사실에 예외는 없다.
하물며 눈앞의 여인은 성공 신화를 이뤄낸 몸.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허."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 눈에 이채가 서렸다.
꾸며낸 표정이 아닌, 진심으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런 큰 규모의 보급을 맡아 왔다면, 상시 고용하는 무력이 있을 것 같소. 보급 때마다 용병들에게 의뢰하는 건 변수도 많고, 번거로운 일이니까."
"맞아요. 상회 소속 사병들이 있어요. 웬만한 동패 용병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전사들이죠. 그래서요?"
데일이 이어 말했다.
"이미 무력이 모두 갖춰져 있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덤일 것이오. 그 덤에게 주기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오."
"말했잖아요. 데일 경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쪽은 친구를 돈 주고 사시오?"
흑기사의 무기질적인 눈과 상인 특유의 재는 듯한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그러길 잠시. 레베카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가란드가 또 호들갑을 떠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맞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사실 데일 경은 일종의 보험이에요."
"보험?"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름 성 근방에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교단의 이단 심문관들이 이미 그곳으로 향했지만, 저는 자그마한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외곽구역의 상인 길드장들은 모가지가 날아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말이다.
그만큼 전선에 대한 보급은 막중한 임무였다.
"데일 경은 이전에 사도 하시나와 싸워 이겼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혹 놈들과 마주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보험이군."
"시험해보려는 느낌도 있었죠. 데일 경이 활약해주신다면, 다음에는 정말로 거금을 들여 상회로 끌어들일 생각이었거든요."
어깨를 으쓱한 레베카가 말했다.
"전부 말했어요. 그래서요. 이제 어쩔 거에요?"
"어쩌겠소."
데일이 말했다.
"덤으로 딸려가는 게 아닌, 악마 숭배자를 상대할 호위로서 다시 협상해야 하지 않겠소."
* * *
긴 협상 끝에 레베카는 여관을 나섰다.
그녀는 데일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흡사 흙 속에서 반짝이는 돌을 찾아낸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레베카의 오른팔 같은 부하가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좋으십니까? 돈만 더 뜯기게 생겼는데."
레베카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고말고.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났는데, 기쁘지 않겠어? 가란드는 저런 사람을 어디서 찾았대."
슬쩍 눈치를 살핀 부하가 말했다.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레베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아는 기사들은 대부분 꼴통이었어. 사람 잘 죽이는 꼴통. 내가 말이라도 걸려 치면 어딜 천한 년이 말을 붙이냐고 깐깐하게 굴지. 심지어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거렁뱅이들도 그런다니까?"
"으음."
"하지만 방금 말하는 거 봤잖아. 생각도 깊고, 신중하고, 예리하고. 이교도면 뭐 어때?"
칭찬 세례에 부하의 얼굴이 더더욱 부루퉁해졌다.
"...정작 그 상대는 상회주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무례하게 입에 문 궐련도 빼버리지 않았습니까."
"애 때문에 그랬다잖아. 그보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부하는 즉시 답했다.
"뭐, 예. 준비는 완벽하게 해뒀습니다. 솔직히, 악마 숭배자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보고를 듣던 레베카가 미간을 좁혔다.
"완벽하다고 말하지 마."
"...예?"
레베카는 밤하늘에 불길하게 떠오른 그믐달을 보며 말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꼭 문제가 터지더라고."
상행
* * *
상행이 출발하는 건 사흘 뒤다.
레베카는 목적지로 향하는 구체적인 경로를 데일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서다.
이 세상에 도적들은 흔하다.
계획이 새나가면 괜히 파리가 꼬일 수도 있다.
'이런 대규모 행렬을 누가 습격할까 싶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냥하기 위험한 만큼 성공했을 때의 보상 역시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데일이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그는 늘 그렇듯. 무기의 날을 잘 갈아놓고, 헝겊으로 깨끗이 닦았다.
그런 데일을 엘레나가 걱정스레 쳐다봤다.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악마 숭배자를 마주칠 수도 있다잖아요. 제가 봤던 악마 숭배자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이들이었어요."
엘레나는 바이만 왕국을 떠올렸다.
그 강대하던 바이만 왕국이 함락당한 건 단순히 밀려오는 악마의 군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악마 숭배자.
내부에서 혼란을 획책하던 인류의 배신자들야말로 왕국을 멸망시킨 원흉이다.
그들의 힘은 악마보다는 뒤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악마 숭배자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도 한때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사람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사람들을 무너트릴 수 있을지를 잘 알았다.
데일은 엘레나의 걱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상관없다."
오히려 사람이랑 싸우는 것보다 악마의 똘마니들이랑 싸우는 게 더 낫다.
생기가 넘쳐나며, 뒤틀리고 강한 영혼을 지닌 그들은 좋은 경험치 수급원이었다.
당장 사도 하시나를 죽이고 얼마나 성장했던가.
"오히려 먼저 덤벼줬으면 좋겠군."
"!"
그런 데일의 대답에 엘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데일 경은 정말로 두려움을 모르시는군요."
어깨를 으쓱인 데일은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그때. 여관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데일 경! 결투를 한다는 말을 듣고 왔소!"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한동안 잊고 있던 드워프였다.
발튼이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얼굴이 사뭇 심각하다.
"발튼. 오랜만이군."
"얘기는 들었소. 강력한 기사와 결투를 벌이신다고."
"?"
"결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이 발튼. 밤을 새워가며 부탁한 물건을 만들어왔소."
이 무슨 뒷북이라는 말인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데일은 차갑게 말했다.
"이미 결투는 끝났다."
"...예? 언제 말입니까?"
"일주일 전에."
발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누, 누가 이겼소."
"내가 이겼으니 이렇게 살아있는 것 아니겠나."
접시를 닦던 카일라가 핀잔을 줬다.
"어디 골방에라도 틀어박혀 있었어요? 온 도시가 그 얘기로 시끌시끌했는데."
발튼은 망연자실해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맙소사. 내가.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늦었다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발튼은 그제야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죄, 죄송하오 데일 경. 너무 집중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
아무래도 발튼은 작업 때문에 한참 동안 작업실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결투에 대해 듣게 되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없다 해야 할지.
"그래서. 그게 이번에 만든 물건인가?"
데일은 발튼이 쥔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홀스터다. 옆에 큼직한 가죽 파우치가 달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좌절해 있던 발튼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음! 그렇소! 데일 경의 부탁을 받고 긴 고민 끝에 만들어낸 내 회심의 역작이오."
데일이 호기심을 느꼈다.
"무슨 효과가 있지?"
"그전에 어떻게 이 물건을 만들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겠소."
"그냥 핵심만 설명하면 안 되나?"
"처음 데일 경께 과제를 받았을 때는, 막막한 기분이었소."
발튼은 데일을 무시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데일 경은 원거리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단이 없어 고민이라 했지 않소."
"그래. 투척에는 한계가 있으니."
데일은 일단 발튼의 분위기에 맞춰주기로 했다.
물론, 별거 없는 물건이었으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다.
발튼이 말했다.
"처음 생각했던 건 단순했소. 투척 무기를 수백 개씩 걸어놓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달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소."
무기가 떨어질 게 걱정이라면, 아예 왕창 가지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음."
"그렇소. 그리하면 여러모로 거추장스럽겠지.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갔소. 이 물건에서 영감을 얻었소."
발튼은 등에 멘 가방에서 부메랑을 꺼냈다.
"무기를 투척한 뒤, 투척한 무기가 되돌아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지 않겠소? 투척한 뒤 스스로 되돌아오는 무기!"
"그건 나쁘지 않군."
데일은 수긍했다.
부메랑처럼 던졌다가 되돌아오는 무기라. 그렇다면 투척 무기가 고갈 날 일은 없을 거다.
정말이지. 발튼이 기대 이상으로 해주었다.
"훌륭하군. 그래서. 그 무기는 어딨지?"
발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당연히 없소. 스스로 돌아오는 무기라니. 그건 룬 마법사들의 영역 아니겠소?"
"?"
"내가 생각한 건 무기에 줄을 매달아 다시 잡아당기는 것이었소. 그러다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했지."
발튼은 눈을 빛냈다. 마치 그 기발한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봐달라는 느낌이었다.
데일은 그리해주었다.
"그게 뭔가."
"발상을 달리하는 것이오. 상대와의 거리가 멀면 거리를 좁힌다. 하지만 꼭 데일 경이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지 않겠소?"
발튼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홀스터에 걸린 파우치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빼자 나온 건 끝이 뾰족하게 구부러진 커다란 갈고리였다. 갈고리는 밧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갈고리를 이런 식으로 빼내서... 던지는 것이오!"
발튼은 밧줄을 빼내 갈고리를 힘껏 던졌다.
슈욱!
빠르게 뻗어 나간 갈고리가 가게의 반대편에 있는 식탁에 단단히 파고들었다.
"자! 그다음에 밧줄을 단단히 잡고, 이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발튼이 가죽 파우치에 나 있는 버튼을 누르자, 팅! 하는 기계 작동음이 들렸다.
그다음 순간. 펼쳐졌던 밧줄이 다시 돌돌 말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발튼도 밧줄을 쥔 손을 힘껏 뒤로 뺐다.
그러자 식탁이 바닥을 긁으며 이쪽으로 끌려왔다.
발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하! 거리가 멀면 상대를 끌어온다! 이것이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아니겠소?"
"가게에서 뭐하는 짓이에요! 자꾸 이렇게 굴면 발튼 씨는 출입 금지 할 거예요!"
"윽."
카일라가 화를 내자 움찔한 발튼은 서둘러 식탁을 되돌렸다.
식탁에는 갈고리 자극이 남았지만, 발튼은 모른 체했다.
그사이.
데일은 갈고리를 손에 쥐어보았다. 로프와 딸려 나왔던 갈고리는 버튼을 누르자 빠르게 수축했다.
'나쁘지 않은데.'
수축하는 힘이 그렇게까지는 강하지 않다. 무거운 목표물은 데일이 직접 잡아당기는 힘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힘이야 차고 넘치지 않던가?
무엇보다 멀리 있는 대상에게 다가가는 게 아닌, 직접 끌고 온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곧장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데일은 갈고리를 쥐고 던지려다가, 카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데일 경까지 그러지는 않을 거죠?"
"...물론이다."
데일과 발튼은 여관의 뒷마당으로 나갔다. 여름 햇살을 받으며 꾸벅 졸고 있던 하티의 귀가 쫑긋 섰다.
왔냐? 라고 말하는 듯이 크릉 울은 뒤, 그대로 고개를 휙 돌려 누워버렸다.
발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음. 독특한 친구군요."
"신경 쓰지 마라."
데일은 갈고리를 손에 쥐었다.
마침 하켄이 연습용으로 세워 놓은 허수아비가 있었다.
데일은 밧줄을 잡아당긴 뒤, 공중에서 붕붕 돌렸다.
발튼이 말했다.
"사실. 이 물건을 만들 때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데일 경이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였습니다. 아무래도 투척 무기와는 결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단순히 던지기만 하면 되는 무기랑은 달랐다.
밧줄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줄의 움직임까지 모두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데일은 이런 몸이 되고, 스스로 확신하는 게 한 가지 있다.
'나는 웬만한 무기술에는 전부 재능이 있어.'
단순한 자화자찬이 아닌, 제법 냉정한 시각으로 평가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데일은 무기술에 재능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싸움에 재능이 있었다.
그게 이 차가운 몸에 잠들어 있던 재능 탓인지. 아니면 원래 데일이 자기도 모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건, 데일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라면 대부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지금껏 그가 살아 남아온 비결 중 하나다.
이번에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쐐액!
데일은 밧줄을 힘껏 던졌다. 갈고리가 탄력적으로 날아갔다.
퉁! 갈고리가 뒤쪽에 있는 담벼락을 때렸다.
실패.
하지만 상심할 필요 없다.
이 무기의 가장 큰 장점은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공격이 실패해도 괜찮다.
데일은 갈고리를 되돌린 뒤, 곧장 다시 던졌다.
그렇게 시도하길 두어 번. 마침내 갈고리가 허수아비를 때렸다.
발튼이 감탄했다.
"오오! 몇 번 만에 곧바로 감을 잡다니! 대단하시오. 솔직히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어디까지나 목표물에 맞추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물론 갈고리가 날카로우니 그 자체로 상처를 입힐 수 있긴 하다.
'독이라도 바르면 더 좋겠지.'
맹독도 좋고, 마비 성분이 있는 약초를 발라도 좋다.
하지만 일단 갈고리의 용도는 목표에 박아 넣은 뒤, 그대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단순히 맞추기만 해서는 절반의 성공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데일은 계속해서 연습했다.
갈고리를 던지고, 회수한 뒤, 다시 던지기를 반복했다.
체력이 무한하다는 건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데일은 집중력을 유지한 채, 긴 시간 동안 연습을 반복했다.
자연히 성장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 정도를 수련했을 때.
마침내 데일이 던진 갈고리가 노린 위치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데일은 곧바로 밧줄을 당겼고, 허수아비가 그대로 밧줄과 함께 딸려왔다.
하티 옆에서 주저앉아 있던 발튼이 손뼉을 쳤다.
"오오! 성공이오! 벌써 이렇게 완벽하게 다루다니!"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계속 연습해서 어느 때라도 사용할 수 있어야 쓸모가 있겠지. 그러려면 더 연습해야 하는데...."
데일은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며,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움직이는 표적이 있으면 연습할 때 더 좋을 텐데."
"움직이는 표적 말입니까?"
"실전에서는 상대도 움직일 것 아닌가."
"그건 그렇죠. 하지만 움직이는 표적이라.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만들기 힘들 것 같은데...."
발튼이 곤란해하던 그때.
이 무슨 우연인가.
여관 문을 열고 프라우가 뛰어나왔나.
"아! 데일 경! 여기 있었군! 허수아비를 붙잡고 무얼 하고 있는가?"
데일은 그런 프라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찾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출발 당일. 데일은 아침 일찍 집합 장소로 향했다.
마차와 상회 직원들은 이미 전부 모여 있었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 하지만 데일이 아는 이들도 있었다.
여관에서부터 함께 온 하켄이 그랬고, 용병 길드에서 오며 가며 마주친 적이 있는 용병들도 몇 보였다.
다른 한쪽에는 에스델을 비롯해 교단의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에스델은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일도 적당히 손을 휘저어 주었다.
'이곳저곳에서 인력을 끌어왔군.'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마지막 점검을 마친 레베카가 이쪽으로 왔다. 옆에는 인상 더러워 보이는 기사와 함께였다.
레베카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와요 데일 경. 홀스터를 바꿨나요? 못 보던 가방이 보이네요?"
"새로 구했소."
데일은 홀스터에 걸린 파우치를 툭툭 두드렸다.
밧줄과 갈고리가 들어 있어 제법 묵직했다.
레베카는 별로 관심은 없는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는 옆의 기사를 가리켰다.
"서로 인사 나누세요. 상회의 안전 총책임자인 가브리엘 경이에요. 자. 가브리엘 경."
레베카는 어서 인사하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데일을 흘끗 쳐다본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책임자는 나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내가 지시를 내리면 즉각 따르도록. 그 이상 할 말은 없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가브리엘이 고용주의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닌 듯했다.
"쯧."
그 말만을 남긴 가브리엘은 기분 나쁜 걸 봤다는 듯. 바닥에 누런 침을 뱉고는 멀어져 갔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나는지 하티가 가브리엘의 등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데일은 그런 하티의 털을 쓸어주며 말했다.
"지금은 참아라."
데일은 여러 사람을 봐왔다.
그리고 저런 종류의 인간은 제 명에 못 산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 가혹한 세계에서 재수 없는 놈들은 오래 살아남기 힘든 법이다.
상행
* * *
"자! 출발하세요!"
레베카의 외침에 상단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물을 가득 실은 짐 마차만 수십 대였다.
맨 앞 마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맨 뒷줄의 마차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요란한 이동에 도시 사람들도 나와서 구경했다.
몇몇은 손수건을 흔들며 여정의 안녕을 기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호의적인 시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데일은 몇몇 탐욕스러운 시선들이 이쪽을 향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마차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한 뒤, 서둘러 인파 사이로 녹아들었다.
'정보를 팔려는 건가.'
도시의 정보상에 대규모 마차 이동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 정보는 도시 밖의 도적들에게도 흘러 들어갈 터.
'여길 습격할 정도로 배짱 있는 도적이 있을까 싶지만.'
데일은 고개를 돌려 이쪽의 전력을 꼼꼼히 살폈다.
큰 규모의 상행답게 병력이 출중하다.
우선 상회 직원만 80명에 달한다. 그중 과반은 저 가브리엘이라는 기사에게 훈련받은 사병이다.
심지어 사병 중 열 명은 말을 타고 있었다.
일반 상인들도 최소한의 싸움은 가능하다고 한다.
단순히 물건만 잘 팔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니까.
그 외에 고용된 용병의 숫자는 총 40이 조금 넘는다. 대부분 철패에서 동패 등급이었지만, 풋내기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발목을 잡을만한 이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교단에서 보낸 사제가 에스델을 포함해 8명.
'8명이라.'
전투원 10명에 사제가 하나씩 붙을 수 있다.
사제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치유가 부족해 사람이 죽을 일은 적을 것이다.
사제는 언제나 수요가 많고, 비싼 인력이란 걸 생각하면, 레베카는 제법 좋은 고용주라 할 수 있다.
'나쁘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조합이 괜찮다.
상회의 사병들 절반은 활이나 쇠뇌를 메고 있고, 방패를 짊어진 이들도 많았다.
거기에 사제들까지 풍부하니.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를 바 없을 구성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마법사가 없군.'
마법사가 있고 없고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 얼간이 같던 마법사 한스도 혼자서 강력한 화력을 뿜어대지 않았던가.
여차할 때 전쟁 마법사의 화력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마법사는 사제보다 비싼 인력이다. 고용을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비싼 돈을 줘야 한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믿을만한 마법사는 매우 드물다.
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제아들은 그야말로 변수 덩어리들이다.
그들의 마법은 너무 강력해, 적보다 아군을 더 많이 죽일 때도 많았다.
레베카가 굳이 전력에서 마법사를 배제한 이유는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데일은 문득 엘레나를 떠올렸다. 전기를 머금으며 하늘을 날던 수룡을 생각하면....
'아쉽군.'
하지만 좋은 마법사가 곧 좋은 전쟁 마법사라는 건 아니다.
엘레나에 대해서는 차차 두고 봐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엘레나는 아직 어렸다.
그런 상념을 뚫고 하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우. 앞으로 이 주일간 걸어 다녀야 할 거 생각하니, 벌써 무릎이 쑤시네요."
늘어지게 하품한 하켄은 투덜거렸다. 그의 눈에는 마차를 모는 직원들의 모습이 비쳤다.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여정에 상행에 참여한 대부분은 걸어가야만 했다.
마차에 앉거나 말 타는 걸 허용받은 건 소수의 인원들.
상회주인 레베카나 말을 타고 주위를 정찰하는 가브리엘과 기병들. 그리고 사제들뿐이다.
사실. 레베카는 데일에게도 마차 동승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데일은 거절했다.
저 피곤한 여자랑 둘이 마차 안에서 몇 주간 같이 있는 건 사양이었다.
툴툴거리는 하켄에게 핀잔이 날아왔다.
"하켄은 너무 엄살이 심합니다. 벌써부터 투덜거리면 어떡하나요."
"으음?"
하켄은 옆에서 나란히 걷는 에스델을 흘끗 쳐다본 뒤, 말을 꺼냈다.
"근데 사제 양반은 왜 우리랑 같이 걷는 거야."
"...그러면 안 되나요?"
에스델이 섭섭한 얼굴을 하자 하켄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 다른 사제들은 마차에 타고 있잖아. 편하게 가지, 굳이 왜 힘들게 걸어가냐 이거지."
데일도 동의했다.
"그래. 네 친구들도 나랑 같이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마차에 탄 다른 사제들은 이따금 이쪽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굳이 혼자서 걷는 걸 고집한 에스델 때문에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이교도인 데일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한 것인지.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비중이 더 클 것이다.
에스델은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당당히 말했다.
"다른 분들이 모두 힘들게 걸어가는데, 제가 뭐라고 앉아 가겠어요. 그리고 누구랑 함께 걷든, 그건 제 자유니까요."
"음."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건 분명 좋은 장점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도 훌륭하다.
단지, 때로는 그런 올곧음이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가령. 에스델이 걷기로 결심하면, 앉아서 가는 다른 사제들의 입장은 어찌 되겠는가.
그런 부분에서 에스델은 처세가 부족했다.
'역시 피곤한 타입이야.'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교단에서 주목하는 유망주라니, 알아서 잘하려니 싶었다.
"그보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마리아 자매님이 드린 반지를 부숴 먹은 거에 대한 해명을 저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데일은 쫑알거리는 에스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주위 펼쳐진 풍경을 구경했다.
넓게 펼쳐진 평원에 바람이 불자, 키 낮은 풀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평화롭다.
이 평화가 달갑냐 묻는다면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서 싸움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고, 더 많은 성장을 이뤄내고 싶다.
크리스틴과의 싸움 이후 데일은 많은 걸 느꼈다.
그 싸움에서 데일은 분명 죽을 뻔했다. 패배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 데일은 두려움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니다.
사람이 아닌 언데드로서 죽는 게 두려웠다.
데일은 생과 사가 갈리는 그 순간에, 몸 안을 가득 채웠던 거친 충동을 기억한다.
거기서 버티지 못했다면 데일은 폭주했을 수도 있다. 구경하던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먹었겠지.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싶지 않다. 위기를 겪는 건 사양이다.
그러기 위해서 데일이 할 수 있는 건 하나.
'강해져야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주위는 너무나도 평화롭다.
데일은 어느새 싸움을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몸뚱이에 너무 적응해버린 모양이다.
* * *
상행을 출발하고.
첫 닷새간은 별일 없이 평화롭게 지나갔다.
가끔 들판의 맹수가 다가와 기웃거리다, 줄지어 이동하는 이쪽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달아날 뿐.
몬스터나 도적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 규모에 무장도 출중한 집단을 습격한다는 건, 아무리 흉포한 몬스터라도 많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건 엿새째 저녁이었다.
"정지. 오늘은 여기서 밤을 지낼 거예요."
레베카의 명령에 상회의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야영을 준비했다.
근처 냇가에서 물을 길어왔고, 마른 풀과 나뭇가지로 불을 피웠다.
오래 합을 맞춰온 만큼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켄도 용병들에게 외쳤다.
"우리도 질 수 없지! 당장 준비하자고!"
대체 뭘 질 수 없다는 걸까.
어쨌건, 상회 직원들이 능숙하게 야영 준비를 하는 걸 보고 경쟁의식을 느낀 것 같다.
야영과 노숙은 용병들의 단짝이니.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매우 빨랐다.
데일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켄이라는 좋은 하인이 있는데 왜 굳이 몸을 쓰겠는가.
야영 준비는 하인의 일이다.
그렇게 들판에 모닥불이 하나둘 완성이 되고. 커다란 솥에 여러 재료를 때려 넣은 수프가 하나둘 완성되어 갔다.
솔직히 수프의 겉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냄새 하나는 좋았다.
그리고 그런 냄새를 쫓아온 건지. 아니면 모닥불의 빛을 따라온 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즉시 검을 뽑으며 외쳤다.
"일어나라!"
갓 만든 수프를 입에 넣으려던 사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에는 불만과 짜증이 가득하였다.
행복한 식사 시간이 방해받으면, 누구라도 화가 나기 마련이다.
"준비해!"
활과 쇠뇌를 든 사병들이 사격을 준비했다. 그러자 다가오던 무리가 우뚝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이내 그중에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꾀죄죄한 몰골의 중년 사내였다.
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었다.
가브리엘이 레베카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이 말을 몰아 앞으로 향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저쪽에서 겁에 질린 듯한 화답이 돌아왔다.
"저, 저희는 파이도 마을 피난민입니다."
"피난민?"
가브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뒤쪽에서 듣고 있던 레베카가 앞으로 나섰다.
"파이도 마을이면 제법 큰 마을이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사내는 침중한 어조로 답했다.
"그게.... 도적 떼에게 당했습니다."
레베카는 미간을 좁혔다.
"도적? 파이도 마을이 고작 도적 떼에게 당할만한 마을은 아닌 거로 기억하는데."
마을이 크면 당연히 방비도 삼엄해지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하켄의 고향인 늪지 마을만 해도 나무로 지은 목책에 조잡하지만 망루도 있었다.
만약 마을에 야트막한 성벽이라도 있다? 그렇다면 수비는 몇 배로 유리해진다.
하지만 마을을 습격했다던 도적들. 평범한 녀석들이 아닌 모양이다.
"아주. 아주아주 사나운 놈들이었습니다. 마치 이야기 속 엘프처럼요."
"잠깐. 엘프들이 습격했다고?"
레베카가 민감하게 반응하자 피난민이 황급히 부인했다.
"아, 아뇨. 그만큼 사납다는 겁니다. 잔인하고, 숫자도 많았어요! 어림짐작해도 삼백 명은 넘는 듯한...."
"그랬단 말이지."
수백 명의 도적 떼.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말이 안 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피난민이 이어 말했다.
"저희 마을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놈들에게 완전히 유린당했습니다. 저희는 혼란 와중에 가까스로 탈출했죠...."
피난민은 뒤쪽의 무리를 가리켰다. 30명 정도로 보이는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남루한 복장이었다.
피난민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시겠습니까? 근처 도시로 갈 때까지만 함께 걷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이 도망쳐 나와서, 저희는 이대로 가면 모두 굶어 죽거나 도적들한테 추격당해 죽을 겁니다!"
"으음."
레베카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피난민 30명. 감당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상행인 만큼, 레베카는 변수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우리도 도와줄 여력이 없어."
"그, 그런."
한순간 좌절한 피난민은 다시 고개를 들고는 간절히 부탁했다.
"그렇다면 오늘 밤만이라도 같이 묵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면 됩니다. 다들 도망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레베카도 차마 이것마저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래. 저녁밥이랑 오늘 밤 잠자리 정도는 내주도록 할게."
"저,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겠죠 가브리엘 경?"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별문제 없을 것 같소. 어서 동료들을 모아와라. 상회주께서 친절을 베푸셨으니, 고마워하고."
"아, 알겠습니다."
피난민이 서둘러 돌아가려던 찰나. 덤덤한 목소리가 그를 잡아 세웠다.
"잠깐."
"?"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데일이 차분히 걸어 나왔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누가 너보고 앞으로 나서도 된다고 허락...."
"잠깐만요. 일단 지켜보죠."
레베카가 말리자 가브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천천히 걸어가 피난민 앞에 섰다.
커다란 덩치의 흑기사가 다가오자 피난민은 움찔했다.
"왜, 왜 그러시는지...."
"너. 피 냄새가 나는군."
몸에 배어 있는 은은한 혈향. 아무리 깔끔히 씻는다 해도, 살인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그 특유의 미약한 피 냄새를 풍긴다.
이 냄새는 잘 감추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
하지만 피에 민감한 흑기사. 그리고 짐승의 코만큼은 속일 수 없다.
데일의 옆에 따라온 하티가 피난민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울었다.
겁에 질린 피난민이 잡아뗐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전 모르겠... 억."
더 들을 것도 없다.
데일은 그대로 사내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허공에 들어 올린 뒤, 짤짤 흔들었다.
퉁. 투퉁.
한번 흔들어 줄 때마다 돈주머니나 무기 따위가 후두둑 떨어졌다.
흔드는 재미가 있는 사내였다.
데일은 더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사내를 마구 흔들었다.
잡다한 물건이 바닥에 쌓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피 묻은 단검도 있었다.
굳은 지 얼마 안 된 피였다.
"...."
데일과 사내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내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데일은 사내의 이마를 붙잡고, 강제로 자신에게 향하게 돌렸다.
그리고 멀찍이서 지켜보는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친구들도 이곳으로 데려와라. 당장."
상행
* * *
멱살이 붙잡힌 사내는 고민하는 척을 하다, 이내 목청껏 외쳤다.
"시발 들켰다!"
데일은 곧바로 사내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목소리가 퍼졌다.
뭉쳐 있던 무리가 이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잠깐. 도적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거였다고? 그렇다면...."
레베카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곧바로 이해했다.
레베카가 시선을 보내자 데일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녹아들어 동료들을 부르려던 것 아니었겠소. 뭐, 음식에 독이라도 탈 생각이었겠지."
교묘한 수법이다.
우선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요구한 뒤, 곧바로 하룻밤 잠자리만 내어달라는 들어주기 쉬운 부탁을 한다.
그러면 사람 심리가 무심코 들어주고 말게 된다.
하물며 꼴이 꾀죄죄한 피난민이라면야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냉정히 내치기 어렵다.
숫자도 얼마 안 되니 무심코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고.
도적들이 그 모든 걸 계산한 걸까?
그렇다면 놈들의 우두머리는 제법 영리할 터였다.
레베카와 가브리엘은 하마터면 놈들의 수법에 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얼굴을 찌푸렸다.
가브리엘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이 하찮은 것들이.... 쏴라!"
멍하니 있던 사병들이 일제히 화살과 볼트를 날렸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운 나쁜 도적들 두어 명을 꿰뚫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애꿎은 땅만 두드렸다. 거리가 아슬하게 멀었던 탓이다.
가브리엘이 외쳤다.
"이대로 놈들이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기병은 나를 따르라!"
"예!"
그는 말 고삐를 쥐고 이내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의 뒤를 기마병 아홉이 뒤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데일이 말했다.
"저 기사를 뒤로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예? 무슨 말이신가요?"
레베카의 질문에 데일은 답했다.
"도적들이 수작을 부리려고 이곳에 찾아왔다면, 도와줄 병력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 아니겠소?"
"그건.... 그렇군요."
"어쩌면 이것 역시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소. 우리 쪽 기병들을 유인해내기 위해 말이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레베카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상대는 그래 봤자 도적이에요. 군인도 아닌데, 그런 전략을 구사할까요?"
그래. 도적이라는 게 문제다.
대부분의 도적은 기껏해야 건장한 농민들에게 무기를 쥐여준 수준에 불과하다.
얕잡아봐도 이상하지 않을 상대다.
가브리엘이 추격을 개시한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설령 도적들의 함정이라도, 그는 능히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기사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데일은 방심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에 도적들이 몬스터들보다 흔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숫자가 많다면, 개중에는 돌연변이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데일은 바로 돌아가 하켄과 에스델에게 말했다.
"싸움 준비해라. 하켄, 너는 에스델과 다른 사제들을 지켜. 최우선 보호 대상은 사제라는 걸 잊지 마라. 하티, 너도 하켄을 도와라."
하티가 알았다는 듯, 낮게 울었다. 하켄은 당황하며 물었다.
"예? 싸움이라니요?"
"어쩌면 제법 영리한 놈들일 수도 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하켄은 가브리엘을 보며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보면 딱히.... 응? 어디 가셨지?"
하켄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데일은 그곳에 없었다.
그쯤.
저 멀리 말을 몰아나간 가브리엘이 도망치는 도적들의 뒤를 잡았다.
가브리엘이 창을 찌를 때마다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렇게 신나게 날뛰며 전훈을 올리던 기병들은 문득. 자신들이 본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깨달았다.
'으음. 일단 돌아가야겠어.'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말을 멈춰야 했다. 가브리엘과 기병들이 말의 속도를 늦추는 그 순간이었다.
들판에 난 작은 언덕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 수풀에서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던 도적들 수십 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놈들의 손에는 쇠뇌가 들려 있었다. 조잡한 게 아닌,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뭣? 매, 매복?"
가브리엘과 기병들은 크게 당황했다. 생각보다 숫자도 많고, 무기도 제대로 되어 있다.
간부로 보이는 도적이 외쳤다.
"말을 쏴라!"
투퉁!
볼트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영리한 도적들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이 아닌, 기병들이 탄 말을 노렸다.
볼트에 얻어맞은 말들이 구슬픈 울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숙련된 기병들도 낙마는 피할 수 없다. 바닥에 떨어진 기병들은 곧바로 충격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독한 수련의 결과였다.
하지만 낙마했다는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도적 떼의 간부가 외쳤다.
"떨어졌다! 지금 족쳐!"
"우와아아!"
도적들이 이내 벌떼 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어림짐작해도 백에 가깝다.
"이놈들이 감히!"
가브리엘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 야수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숫자 앞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포위당한 기병들이 전부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쯧.'
가브리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실책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포위를 뚫어내야 한다. 기껏 키운 기병이 여럿 죽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가브리엘이 각오를 굳히고, 앞장서서 포위를 뚫어내려던 그때. 전장 한편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사아아악!
도적들이 뭉쳐 있던 곳이 어둠에 휩싸였다.
해가 완전히 져서 밤이 되었나?
아니다. 땅거미가 질지언정, 주위에는 여전히 노을이 흩뿌리는 빛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저 어둠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당황한 건 도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이건 대체...."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만 이리저리 돌렸다. 이런 상황에도 도망치지 않는 건, 그만큼 이 도적들이 규율이 잡혀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둠은 빠르게 걷혔다.
그리고 어둠이 걷힌 자리에. 데일이 서 있었다.
"...?"
도적은 어느새 자기 옆에 서 있는 흑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데일도 그런 도적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든 뒤, 그대로 가볍게 내리쳤다.
퉁!
도적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마치 잠에 드는 듯, 느릿한 움직임이다. 도적이 눈을 감았다.
이제 그 잠에서 깰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제야 다른 도적들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무, 무슨."
"고, 공격해!"
도적들이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데일을 향해 무기를 내리쳤다.
칼, 철퇴, 도끼, 망치. 다채로운 무기들이 날아들었다.
데일은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깡! 까깡!
날붙이가 데일의 갑옷을 두드렸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의 공격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데일은 공격을 무시하며, 양손으로 굳게 쥔 검을 그대로 크게 휘둘렀다.
부웅!
검이 반원을 그렸다.
그나마 무장이 괜찮은 놈들은 뒤로 튕겨 나갔고, 그러지 못한 도적은 그대로 몸이 반 토막이 났다.
사방에 피와 내장이 흩날렸다.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도적들은 주춤했다.
"어어...."
"시. 시발. 완전 괴물이잖아."
이쪽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데, 저 괴물은 거침없이 아군을 죽여댄다.
그 무력감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일깨웠다.
공포.
도적들이 하나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규율이 엄격하다 하나, 그래 봤자 도적은 도적이었다.
데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점점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슬슬 한계군.'
데일은 공포에 민감하다.
사람이 어느 정도 공포에 이를 때 무너지는지를 잘 알았다.
지금 적들의 사기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건. 아마도 데일보다 두려운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놈들을 완전히 무너트리려면....'
데일의 시야에 고함을 내지르는 사내들이 눈에 띄었다.
"이 새끼들아! 도망치는 녀석은 목을 베겠다!"
"저 개자식의 목을 따오는 놈한테는 금화를 주겠다!"
"싸워! 우리가 유리하다고!"
도적 떼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아마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다.
도적들이 가까스로 버티는 원인이 바로 저놈들일 것이다.
데일은 품에서 도끼를 꺼내, 일말의 주저 없이 던졌다.
쐐액!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간 손도끼는 그대로 간부의 이마 한가운데에 틀어박혔다.
불시의 기습이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유리. 우리가 유리...."
도적 간부는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이내 풀썩 쓰러졌다.
다른 곳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다른 간부들은 동료의 죽음에 경악했다.
'분명 거리가 멀었는데?'
'괴물인가?'
그리고 그 순간. 레베카가 이끌고 온 사병과 용병들이 도적들을 덮쳤다.
"가서 아군을 구출해!"
"와아아아!"
파도처럼 덮쳐드는 사병들. 결국, 도적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져, 졌어!"
"도망쳐!"
"이런 멍청한 새끼들! 당장 싸워! 도망치는 게 더 위험하다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하는 건 후퇴할 때라던가?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등을 보인 도적들은 더는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사냥해야 할 사냥감일 뿐.
데일은 가장 앞장서 달리며 도적을 베어 나갔다. 그 살벌한 모습에 살아남은 간부 둘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 글렀군."
"어쩔 수 없지. 후퇴하자."
둘은 말을 몰아 도주를 시작했다.
부하 도적들이 이따금 그런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저도 태워주십쇼!"
"꺼져."
간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도적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말을 몰아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가브리엘이 외쳤다.
"저놈들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말은 아까의 함정에 당해 전부 잃었다. 사람의 다리로 말의 속도를 따라잡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때. 데일이 두 간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도적들이 쿵쿵 달리는 데일의 몸에 치여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간부들도 순간 당황했다. 저런 괴물이 쫓아오다니. 등골이 절로 섬찟해지는 광경이다.
하지만 간부들은 이내 자신들이 더 빠르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 하하. 괜히 쫄았네."
"멍청한 새끼. 맨몸으로 따라잡을 생각.... 컥!"
간부의 몸이 뒤로 쭉 당겨졌다.
말에서 떨어져, 공중에 붕 뜬 간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을 손으로 부여잡을 뿐이다.
간부는 이내, 자기 몸에 파고든 날카로운 쇳덩이를 확인했다.
'가, 갈고리?'
갈고리를 빼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밧줄을 잡아당긴 데일이 간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간부는 본능적으로 칼을 뽑으려 하다 그만두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다행인 일이다.
정보를 캐낼 놈 한 명 정도는 필요하다. 이미 다른 간부는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으니.
데일은 밧줄과 갈고리를 파우치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새로운 무기의 첫 실전.
'나쁘지 않군.'
어느새 싸움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도적이 저항을 포기했다.
아군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이겼다!"
"이, 이겼다!"
아군의 피해는 사망자가 넷에 부상자가 스물. 그마저도 사제가 치유하기 전에 재수 없게 당한, 운 나쁜 경우뿐이었다.
그에 반해 못해도 50이 넘는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의심할 나위 없는 승리.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닌, 대승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게 데일이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데일 경! 데일 경!"
"역시 대단하십니다!"
요즘 부쩍 호의적이 된 용병들이 데일의 이름을 연호했고, 상회의 사병들은 감탄의 시선을.
가브리엘은 그런 데일을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자기 실수를 아는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런 환호가 데일에게 어떤 희열이나 기쁨을 전해주지는 않았다.
사람 잘 죽였다고 환호받는 건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데일은 쓸데없는 것들에 반응하는 대신, 사로잡은 간부를 붙잡고 말했다.
"이제 전부 말해라."
"구, 구체적으로 무얼 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스스로 생각해야지."
데일은 간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순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다."
눈치 빠른 간부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았다.
탈영병
* * *
데일은 사로잡은 도적 간부를 임시로 세운 천막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데일과 레베카, 그리고 가브리엘이 들어왔다.
간부는 세 사람의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몸을 떨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데일은 이 사내가 제법 배포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군.'
정적을 깨고, 처음 운을 뗀 건 레베카였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간부는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말했다.
"피셔. 제 이름은 피셔입니다."
"그래 피셔. 도적단에서는 나름 지위가 높은 것 같은데, 원래는 무슨 일을 했지? 날 때부터 도적은 아니었을 거 아니야."
"그건...."
피셔가 뜸을 들이자 가브리엘이 눈을 부라렸다. 그는 자기를 엿 먹인 이 도적들에게 조금이라도 복수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읽어낸 피셔가 황급히 말했다.
"군인! 군인이었습니다!"
"호오. 군인이라."
얼추 짐작은 했었다.
이들이 보여준 전술이나 규율 잡힌 모습은 평범한 도적 떼가 흉내 낼 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레베카가 물었다.
"탈영병인가?"
"그, 그렇습니다. 원래는 4군단 소속 십인대장이었습니다. 저희 대장은 백인대장이었고요."
레베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그러면 백인대가 통째로 탈영해서 도적 떼가 되었다고?"
"그런 셈이죠."
탈영병이 도적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백인대 전체가 도망치다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레베카가 물었다.
"대체 왜 도망친 거지?"
"그거야...."
"아니. 도망치는 이유는 알겠어. 근데 왜 하필 지금이야? 도망칠 거면 이전에 했어야지. 영웅들이 악마를 여럿 죽인 덕에, 지금은 비교적 평화롭잖아?"
악마와의 동부전선은 최근, 큰 전투 없이 지루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루하다는 건 다르게 보면 평화롭고 여유롭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전선을 지키던 군인들이 도시로 찾아와 수작을 부릴 정도로 말이다.
레베카가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왜 진짜 위험하고, 목숨이 오가던 때 탈영하지 않고, 지금처럼 평화로운 때에 도망친단 말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 피셔는 고민 없이 답했다.
"그야. 지금이 감시가 느슨하니까요?"
"아."
"그때는 탈영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백 명 중 하나 될까 말까 했어요."
진짜 위험할 때는 탈영 자체가 불가능하단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그래. 일단 이 얘기는 넘어가자. 그러면. 지금 너희 도적 떼에는 100명 가까이 되는 탈영병이 모여 있다는 거지?"
"아, 넵. 그렇습니다. 대부분 경험이 풍부한 친구들이죠. 거기에 이곳저곳 몰려다니면서 새로 신입을 받아들이거나, 사로잡은 사람들도 있고요. 모두 합치면 300정도 될 겁니다. 아니, 방금 많이 죽어서 그 정도는 안 되려나?"
데일이 말했다.
"오늘 네가 이끌고 온 건 새로 받은 놈들이었군."
이번 전투에서 맞싸웠던 놈들은 제법 규율이 잡혀 있었지만, 그것뿐이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전선에서 오래 구른 탈영병이었다면 좀 더 고전했으리라.
데일의 물음에 피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신입들 실전 경험 좀 쌓게 하려고 데려온 거였죠. 원래는 적당히 소득을 거두면 바로 도망칠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기병들이 너무 생각 없이 달려들다 보니, 욕심이 나서 그만...."
열심히 말하던 피셔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생각 없이 달려든 기병이, 지금 자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레베카가 그런 가브리엘을 말린 뒤, 물었다.
"도적들 본대는 지금 어디 있지?"
"파이도 마을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법 큰 마을이더군요. 낮지만 돌로 만든 성벽도 있고."
"파이도 마을.... 그러고 보니 피난민으로 위장한 도적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하하.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여유가 좀 생겼는지, 피셔는 슬쩍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살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지을법한 스산한 미소였다.
그 순간. 데일은 곧바로 피셔의 뺨을 후려쳤다.
짝!
"억!"
피셔의 몸이 휙 날아갔다. 누런 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데일은 피셔의 머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웃지 마."
"죄, 죄송합니다."
피셔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황급히 말했다. 표정에 드러났던 여유가 곧바로 싸라졌다.
거인도 기절시키는 따귀다. 건방진 도적에게 예의를 주입하기에는 충분했다.
데일은 피셔를 들어 올려 억지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마지막으로 질문할 게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한층 더 공손해진 피셔가 고개를 조아렸다. 데일은 물었다.
"왜 한두 명도 아니고, 백인대 전체가 도망친 거지?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는 법인데, 백인대 전체가 탈영을 결심했단다.
그렇다면 그만한 계기가 있지 않을까?
"계기 말입니까? 하. 하하."
피셔가 웃음을 터트렸다.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웃지 말라고 한 게 바로 조금 전인데 바로 웃다니.
하지만 피셔가 지은 웃음은 어딘가 이상했다. 메말랐다 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큰 공포에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 짓게 되는 그런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맥없이 웃음을 흘리던 피셔는 얼굴을 달리하며 물었다.
"기사님께서는 악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상위 서열의 악마를요."
데일이 대답하기도 전에 피셔가 이어 말했다.
"저흰 봤습니다. 보고 말았지요."
피셔의 눈빛이 멍해졌다. 그 눈동자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담고 있었다.
"그건. 그건 대적할 수 없어요. 영웅들이 악마를 사냥해줄 거라고요? 전부 개소리에요. 저항은 의미 없어요. 늦든 빠르든,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악마가. 악마가 우릴 모두 죽일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도망쳐야지요.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서는요."
그 뒤로 피셔는 비슷한 말만 되풀이했다. 질문을 던져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데일의 질문이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낸 듯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라.... 더 묻고 싶어도 대답해줄 상태가 아닌 것 같네요."
레베카는 피셔를 사병들에게 넘겼다.
* * *
피셔의 심문이 끝나고. 레베카는 데일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했다.
데일은 단칼에 거절하려 했지만....
"밥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어요.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가브리엘이 반발했다.
"일정에 대한 부분을 왜 이 자와 이야기한다는 것이오! 지금은 용병으로서 여정에 참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지 않소!"
원래 상행의 세부 계획은 상회주인 레베카와 안전 책임자인 가브리엘 둘이서 상의하곤 했다.
여기에 저 아니꼬운 이교도 기사가 참여하다니. 가브리엘의 심기가 크게 뒤틀렸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런 가브리엘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피난민으로 위장한 도적들을 간파해낸 게 누구였죠?"
"...저 기사였소. 하지만 그건!"
"적의 함정에 빠져 말을 모두 잃고 궁지에 몰린 경을 도와 적을 물리친 건 또 누구였죠?"
"...."
아무리 가브리엘이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데일 경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수도 있어요. 정말 재수가 없었다면 이레네로 돌아가야 했을 수도 있고요. 그러면 제 모가지가 날아갔겠네요?"
레베카가 엄지를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가브리엘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마침 잘됐다는 듯, 더욱 가브리엘을 쏘아붙였다.
"사업이란 건 결국. 인재를 어디에 배치하냐가 전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저는 가브리엘 경이 잘해줄 거라 생각하기에 거금을 주고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거라고요. 근데. 오늘은 조금 후회가 되네요."
"...실수는 인정하오. 하지만 그간은 잘 해오지 않았소. 실수한 건 오늘이 처음이오."
가브리엘의 궁색한 변명에 레베카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면 효과가 떨어지는 법이다.
"맞아요. 지금껏 훌륭히 해주셨죠. 하지만 앞으로 더 좋은 모습을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한 레베카는 가만히 앉아 있던 데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기하는 게 늦었는데, 데일 경은 너무 잘해주셨어요. 앞장서서 동료들을 구해주신 점이나, 도끼를 던져 간부를 죽인 것. 도망치는 피셔를 사로잡은 것. 심지어 도적들이 함정을 팔 것도 예상했었잖아요? 저는 바보같이 그 생각을 무시했었고요."
"얻어걸렸을 뿐이오."
"운도 실력이죠. 상행이 끝나면 성과급은 넉넉히 지급할게요."
데일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잔뜩 가브리엘에게 면박을 준 뒤, 데일을 칭찬하면 가브리엘의 분노가 어디로 가겠는가.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역시나 방심할 수 없는 여자다.
하지만 돈을 넉넉히 준다니, 데일은 고개만 끄덕였다.
레베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건 저는 데일 경에게 전략적 안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안목으로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어쩌면 이번 일, 조금 심상치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거든요."
마을 하나를 박살 내버린 수백 명 규모의 도적 떼.
심지어 그 도적 떼는 탈영병 출신이라 규율도 잡혀 있고, 전략을 구사할 줄도 안다.
만약 그놈들과 제대로 싸우게 된다면, 영 귀찮은 일이 될 터였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한번 크게 패배했소. 감히 우리랑 다시 맞붙으려 하지 않을 것이오."
레베카는 그런 가브리엘에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경.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면 안 됩니다. 사건이 일어난 원인도 생각해야죠."
가브리엘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레베카가 말을 이었다.
"백인대 전체가 전선에서 탈영하다니. 이상하잖아요? 아무리 감시가 느슨해졌어도, 추격조를 꾸리거나 했어야죠."
데일이 물었다.
"전선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탈영한 게 아닐 수도 있죠."
"...?"
레베카가 말했다.
"옛날에는 말이죠. 바다 근처 영주들이 해적들이랑 손을 잡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 안 그러겠어요? 배 하나 털면 짭짤하게 한몫 챙길 수 있는데."
데일은 레베카가 말하려는 바를 곧장 알아차렸다.
"전선 지휘관이 일부러 군대를 보내, 이 주위를 털어먹고 있다 이거요?"
군대가 그 정도로 타락했단 말인가?
하지만 최근 도시에서 벌어지는 수상쩍은 일들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죠. 제가 만나 보았던 장군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렇군."
"마음에 걸리는 건 또 있어요. 저런 도적 떼가 활개 칠 때까지, 카엘름의 영주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도 의문이에요."
치안 유지는 영주의 의무다.
꼭 의무가 아니라도, 큰 마을이 박살이 나면 당연히 거둬들이는 세금이 줄어들 텐데, 그걸 가만히 놔둘 영주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다른 일 탓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소."
"아마도요. 어쨌거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확실해요. 우리도 다소 계획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는데....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마침 그때 음식이 나왔다. 돼지고기를 갈아 반죽한 후, 기름에 튀겨낸 요리가 눈에 띄었다.
'상행 중에 먹기에는 사치스러운 음식인데.'
어쨌건, 데일은 언제나 그렇듯, 음식을 먹기로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투구를 벗어야 했다. 데일은 투구를 벗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얗게 센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시선을 옮기던 레베카는 데일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
레베카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시선에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흠, 흠흠. 평소에도 투구를 좀 벗고 다니는 게 어때요? 답답하잖아요."
민망하게 헛기침한 레베카가 말했다.
"나는 쓰는 편이 더 편하오."
"그런가요...."
아쉬운 듯이 말끝을 흐린 레베카가 가브리엘이 막 먹으려던 요리 접시를 옮겨 데일 앞에 가져다 놓았다.
"많이 먹어요. 경."
"...."
"고맙소."
가브리엘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데일은 무덤덤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이후로 셋은 음식을 먹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목적지가 카엘름 성인 건 변치 않지만, 원래는 중간에 파이도 마을을 지나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이도 마을에는 지금, 도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마을에서 쉬지는 못하겠네요. 우회해서 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레베카는 지도에 올려진 말을 옮겼다. 함께 지도를 보던 데일이 말했다.
"이대로면 놈들이 작정하면 마주칠 수밖에 없소. 더 우회하는 게 어떻겠소."
"저도 그편이 확실하지만...."
레베카는 지도를 가리켰다.
"그러면 너무 돌아가게 돼요. 일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죠."
여기서 일정이 더 지체되는 건 레베카에게 큰 부담이었다.
결국에는 강행돌파를 해야 한다.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적들이 아무리 탈영병 출신이라도, 이미 한번 큰 패배를 겪었다.
사기가 떨어져 있을 거다.
"게다가 병력의 질은 누가 뭐라 해도 이쪽이 뛰어나요. 도적들도 생각이 있으면 다시 덤비지는 않겠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레베카의 말은 상식적이었고, 논리적으로 타당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상식적으로만 돌아가지 않지.'
앞서서 피셔와 나눈 대화에서 데일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도적들에게는 무언가 꺼림칙한 게 있다는 걸.
그게 무엇일지는, 머지 않아 직접 확인하게 될 것 같다고. 데일은 생각했다.
* * *
파이도 마을은 한때 대도시 간의 중간 거점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경제 사정이 여유롭고, 기후도 나쁘지 않았던 터라 주민들은 잘 웃었다.
예로부터 파이도 마을의 여인들은 미소가 이쁜 미인들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미소는 이제 없다.
침묵에 잠긴 마을에는 피비린내만이 맴돌 뿐이다.
그 파이도 마을의 광장에 사로잡힌 주민들이 줄에 묶여 있었다.
도적 떼의 수장인 '라팽'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묶여 있는 주민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에 흰 가면을 쓴 곱사등이에게 말했다.
"어떤가?"
곱사등이는 가면 속 눈을 형형히 빛내며, 주민들을 훑어보았다.
이내 가면에서는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확실히 괜찮군요. 상태가 나쁘지 않습니다. 흐흐. 역시, 라팽 백인대장은 저희를 실망 시키지 않는군요."
곱사등이는 쇠를 긁는 듯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이단 심문관들한테 쫓겨 짜증이 나던 차에, 이만한 수확이라니. 동지들이 분명 기뻐할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다. 약속한 물건은?"
"물론, 준비해두었습니다."
곱사등이는 몸에 걸치고 있던 남루한 거적때기를 한차례 펄럭였다.
그러자 바닥 아래에 원통형 물체가 데구르르 굴러 라팽의 발밑에 와닿았다.
라팽은 홀린 듯이 물건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곱사등이는 웃었다.
"흐흐. 한때 전선을 지키던 명예로운 전사가 악마의 힘이 담긴 무기에 홀리다니. 제법 즐거운 광경이군요."
하지만 라팽은 홀린 듯이 물건을 바라볼 뿐이다.
어깨를 으쓱인 곱사등이는 주민들을 향해 걸어갔다.
주민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럴수록 곱사등이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는 중얼거렸다.
"젊은 청년과 처자의 목숨이 합쳐서 413개.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젊은 청년의 손을 붙잡았다.
"히, 히익!"
청년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청년의 신체가 손끝부터 시작해 천천히 먼지가 되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청년뿐만이 아니었다. 곱사등이가 부린 마법은 전염성이 있었다.
줄에 묶인 젊은 남녀가 이내 하나둘 먼지가 되어 산채로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듯,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노인과 아직 어린아이들은 그 광경에 경악하며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곱사등이는 그 비명이 그저 즐겁기만 하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주민이었던 먼지를 가죽 자루에 주워 담았다.
작업을 모두 마친 곱사등이가 라팽에게 말했다.
"라팽. 제물은 잘 받았습니다. 이런 거래라면 환영이니, 언제든지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닥쳐. 너랑 마주칠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니까."
"하하. 처음에는 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지만 한 번 맛을 보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겁니다."
라팽은 대답 없이 악마의 무기만을 쳐다보았다. 이미 단단히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곱사등이가 문득,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근데, 이 근방에서 라팽이 그 무기를 사용할만한 적수는 있습니까? 겨우 마을을 점령하는 데에 쓰기에는 아까운 물건인데 말입니다."
그제야 곱사등이를 흘끗 쳐다본 라팽이 다시 무기에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마침 시험해볼 곳이 있으니."
탈영병
* * *
으레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기 마련이고, 원하지 않은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닷새간의 이동 끝에, 데일이 마주한 것은 저 멀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도적 떼다.
도적들이 앞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기어코 이쪽에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레베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주 당당하시군. 누가 보면 정규군인 줄 알겠어."
하다못해 야음을 틈타 기습하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평원에서 대기하고 있다니.
심지어 도적 주제에 은 방패가 그려진 멋들어진 깃발까지 펄럭이고 있었다.
저들은 자기들이 도적이라는 정체성이 약한 걸까?
데일은 상대의 전력을 빠르게 가늠했다.
"매복은 없고, 이백 명이 훌쩍 넘는군. 그중에서 한눈에 봐도 잘 무장한 건 100명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소. 나머지 150명은 갓 받아들인 신입으로 보이고, 조금이지만 기병도 있소."
"...이 거리에서 그게 다 보인다고요?"
레베카가 놀란 얼굴을 하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모든 감각을 잃은 대신, 데일의 시각과 청각만큼은 평범한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데일은 저 멀리 평원에 대기하고 있는 도적 떼의 무장 상태와 병력의 질을 모두 파악했다.
'작정하고 싸우려고 나왔군.'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꼼꼼히 살피던 데일은 적의 전열에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걸 발견했다.
주로 노인이나 아이였다. 데일은 저들을 어디다 쓰려는지 알아챘다.
'사로잡은 마을 주민들인가? 화살받이로 쓰려나 보군.'
젊은 여자나 남자는 그 나름의 쓸모가 있다.
하지만 노인과 아이는 그렇지 못하는데.... 저들은 기어코 써먹을 방법을 찾아내고 만 모양이다.
레베카도 사로잡힌 주민들을 발견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군인들은 지극히 효율적이고, 악독하게 싸워야 했죠. 저 탈영들은 자기들이 배운 걸 충실히 써먹을 생각인가 봐요."
레베카는 가브리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가브리엘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마차를 일렬로 늘어서 전진하는 건 불리하다. 가브리엘은 마차를 5열 종대로 바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전투 시에는 마차가 엄폐물의 역할도 해줄 것이다.
이제 싸움이 벌어질 것은 명백하다. 용병과 사병들 모두 웅성거렸다.
"저게 다 도적이라고?"
"뭔 숫자가...."
"저런 놈들이랑 싸울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
특히 하켄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니 저거. 진형 짠 거 보니까.... 설마 군인 아닙니까?"
"탈영병이라는데."
"!!"
하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고는, 걸음 속도를 늦췄다.
에스델이 반개한 눈으로 그런 하켄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의뢰 중간에 도망치면 하켄은 용병 길드에서 제명이 될 겁니다."
"어, 어허. 도망이라니. 큰일 날 소리를. 난 그냥, 혹시나 뒤쪽에 있을 매복을 정찰하려는 것뿐이야."
"아. 예."
그렇게 적과 아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이제는 화살이 닿을 거리에까지 이르렀다.
"멈추도록!"
가브리엘의 지시에 아군이 일제히 멈췄다.
양측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도적 떼에서 신입에 속하는 이들은 곧 있을 전투의 흥분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탈영병들은 차분히 서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때. 도적 떼의 진형이 반으로 갈라져 양옆으로 물러났다.
중앙에 생겨난 길을 통해서 유난히 눈이 붉게 충혈된 드워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는 평범한 인간 남성과 비슷하거나 살짝 작았는데, 드워프 기준으로는 엄청난 장신이었다.
드워프는 이쪽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나는 은 방패 도적단의 대장, 라팽이다! 지금 우리가 왜 이곳에 서 있는지, 너희들은 그 이유를 잘 알거라 생각한다!"
"하. 도적단에 붙이기에는 안 어울리는 이름인데."
레베카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브리엘에게 손짓했다.
그 의사를 읽어낸 가브리엘은 조용히 전투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팽은 계속 외쳤다.
"너희들은 내 부하들을 죽였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라팽을 무시하며 가브리엘이 지시를 내렸다.
"사격 준비."
활과 볼트를 든 사병들이 사격을 준비했다.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친 라팽이 고함을 질렀다.
"달려 이 새끼들아!"
그러자 도적들이 사로잡은 주민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외쳤다.
"달려!"
"살고 싶으면 달려라!"
도적들은 머뭇거리는 포로를 무자비하게 칼로 찔렀다.
겁에 질린 노인과 아이들이 아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을 허우적댔다.
"고, 공격하지 마세요!"
"우리는 도적이 아닙니다!"
사병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가브리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말했다.
"더럽게 구는군. 어쩔 수 없다. 그냥 쏴라."
"예.... 예? 하지만."
"저놈들이 포로일지, 변장한 도적일지 어떻게 알아! 당장 쏴!"
사병들은 눈을 질끈 감고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쐐액!
"억!"
"커억!"
후두둑 쏟아지는 화살들에 포로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제야 도적들은 방패수들을 앞세워 이쪽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그들의 얼굴에서 포로들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자기가 화살을 맞지 않은 것에 기뻐할 뿐.
놈들은 노인과 아이의 시체를 스스럼없이 짓밟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데일은 보았다.
가브리엘이 사격을 명한 것부터 도적들이 시체를 밟고 전진하는 것까지.
무기질적인 눈에 그 모든 광경을 담았다.
그리고 검을 쥐며 생각했다.
'전부 합쳐서 250명이라.... 어쩌면 이번 상행이 끝나면 등급이 오를 수도 있겠군.'
그 순간, 데일의 마음속에서 도적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데일이 검을 들고 전투를 준비하자, 그 옆에 서 있던 하켄이 중얼거렸다.
"라팽. 라팽. 라팽.... 설마 거인 라팽?"
데일이 되물었다.
"아는 놈인가?"
"이름 정도는 들어봤습니다. 저는 2군단에 있었고, 저놈은 4군단 소속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장에서 10년 넘게 살아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얘기군."
"예."
강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놈을 처치하면 만족스러운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데일이 전장을 가늠하는 사이, 양측의 병사들이 드디어 중앙에서 격돌했다.
"전부 죽여!"
"밀리지 마라! 진형을 유지해라!"
"버텨!"
방패를 든 방패수들이 우악스럽게 버텼고, 그 뒤에서 창병들이 연신 창을 찔러댔다.
숫자는 상대가 우세하다.
하지만 이쪽에는 도적들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
교단의 사제들이다.
"빛이여. 당신의 어린 양에게 악에 맞설 힘을...."
"상처 입은 자들에게 자비를...."
사제들의 축복에는 신체 능력을 올려주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용기를 불어넣는 힘도 있다.
강력한 힘을 얻은 아군들은 용기백배해 적들을 밀어냈다.
설령 상대의 무기에 상처를 입더라도, 곧장 사제들이 치유해버렸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에스델의 활약이다.
에스델은 혼자서 동시에 여러 명에게 축복을 걸거나, 깊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해버렸다.
이전과 비교하면 놀랄 만큼 성장한 것이다.
"대, 대단한데."
"성녀를 대신할 교단의 유망주라니...."
아름다운 여사제의 활약 덕에 아군의 사기가 더욱 올랐다.
전열이 거세게 적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적의 전열은 탈영병 출신인 고참들이 맡고 있었는데, 그들은 생각보다 강한 기세에 당황하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는 가브리엘의 실수 탓에 사제들이 제대로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도적들은 아군에 이 정도로 사제가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노련한 전사들이다.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어보았다.
결국, 전쟁이란 끝까지 버티는 쪽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도적 떼의 고참병들은 이를 악물고 전열을 사수했다.
그렇게 중앙이 맞붙는 사이.
도적들 쪽에서도 움직임을 보였다.
우측에 빼놓은 10여 명의 기병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은 능숙하게 말을 몰며 아군의 측면과 후방을 호시탐탐 노렸다.
아군 사수들이 활과 볼트를 날렸지만, 그럴 때마다 기병들은 조롱하듯이 거리를 벌렸다.
기병들은 능숙하게 아군의 전력을 깎아나갔다.
레베카가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때 기병만 있었다면...!"
기병을 상대하기 좋은 건 같은 기병이다.
레베카의 말에 가브리엘은 움찔했다. 그 기병을 말아먹은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때 데일이 나섰다.
"내가 가겠소."
"네? 경이 대체 뭘...."
데일은 대답 대신, 기병이 활개 치는 아군의 좌측을 향해 성큼성큼 뛰어갔다.
언제든 뒤를 찌를 수 있는 기병은 미리 제거해 놓는 게 편하다.
자칫하면 아군의 진형이 무너지고. 그 틈을 돌파해 사제들을 직접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기병들이 아군을 농락하며 헤집어놓고 있었다.
데일은 옆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 용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빌리겠다."
"예? 이, 이건 제건데요?"
"잠시만 빌리겠다고."
데일이 짜증을 섞어 말하자, 용병은 황급히 데일의 손에 창을 들려주었다.
창을 쥐고 그 무게를 잠시 가늠한 데일은, 이내 오른팔은 뒤로. 왼팔은 적을 향해 쭉 뻗었다.
잠깐의 조준. 그리고 투척.
쐐애액!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창은 그대로 기병의 가슴에 적중했다.
"컥!"
사슬 갑옷 탓에 꿰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기병이 그대로 낙마했다.
활개 치던 기병들은 일제히 데일을 쳐다봤다.
"저놈이...."
"조심해."
데일은 그들이 곧바로 도망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낙마한 동료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데일을 주위로 넓은 간격을 두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신참들은 몰라도, 탈영병들끼리는 의리가 끈끈하군.'
실제로 그들은 같은 백인대였던 지라 호흡이 잘 맞았다.
데일은 어지럽게 빙빙 도는 기병들을 보며 손도끼를 꺼냈다.
손안에서 요령 좋게 도끼를 굴린 데일은 다음 순간.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병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어딜!"
대비하고 있던 기병은 당장 버클러를 내밀어 도끼를 쳐내려 했다.
'기습이 아니라면 이 정도쯤은 막아낼 수 있다!'
깡!
버클러와 도끼가 맞부딪혔다. 자신만만하던 기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끼에 실린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
"큭!"
그대로 균형을 잃은 기병이 말 아래로 낙마했다.
다른 기병은 그 모습에 당황했지만, 동료가 벌어준 틈을 헛되이 하지는 않았다.
기병 둘이 양방향에서 데일을 향해 쇄도했다.
앞서서 달려드는 기병은 다릿심만으로 몸을 고정한 뒤,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검에는 말이 달리는 힘과 무게가 그대로 실렸다.
그는 팔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데일의 눈을 어지럽혔다.
데일은 그 궤적을 차분히 읽어냈다. 검격에서 얼마 전 맞붙었던 강적이 떠올랐다.
'크리스틴.'
검술의 원류가 같은 걸까? 동작에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크리스틴에 비한다면....
'형편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공격할지 눈에 빤히 보인다.
크리스틴이라면 분명 저렇게 공격하지는 않았을 거다.
데일은 상대의 공격이 향해 올 방향을 예측하고, 미리 검을 내뻗었다.
다음 순간. 상대는 정확히 예상대로 행동했다.
"!"
당황하는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데일은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려, 드러난 상대의 목을 올려 베었다.
기병은 본능적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피 분수가 튀었다.
기병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데일은 곧바로 기병의 몸을 낚아채,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달려들던 또 다른 기병이 커다란 양날 도끼를 수직으로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데일은 죽은 기병의 몸을 앞으로 뻗었다.
양날 도끼가 기병의 몸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대로 꿰뚫지는 못했다.
사슬 갑옷을 껴 입은 기병은 좋은 방패였다.
"이 자식이!"
동료를 방패로 쓰는 데일을 보며 기병이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첫 공격이 실패한 순간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데일은 그대로 유물 장갑을 기병의 허리에 대, 충격파를 발산했다.
팡! 하는 충돌음과 함께 기병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움직임을 멈췄다.
깔끔한 승리.
데일은 죽은 두 기병의 생기를 곧바로 흡수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실력이 늘었나?'
단순히 신체가 빨라지고 단단해지고 그런 느낌이 아니다.
싸우는 기교.
정확하게는 검을 다루는 기교가 늘었다.
크리스틴과의 싸움이 깨달음을 준 것일까? 그런 것 치고는 성장 폭이 큰데....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실전을 통해 실력이 향상되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그저 만족스러울 뿐.
기병들도 그제야 이 흑기사가 예상보다 버거운 적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능숙하게 갈고리를 집어 던졌다.
"엇!"
갈고리가 가장 후미에 있던 기병의 사슬 갑옷에 걸렸다.
데일은 밧줄을 잡아당겨 그대로 기병을 바닥에 메쳤다.
주저 없이 기병의 목을 벤 데일은 바로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주인을 잃고 머뭇거리는 말이었다.
데일은 고민도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히히힝!
흑기사의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에 말이 화들짝 놀라 앞발을 들었다. 어떻게든 데일을 떨어트리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균형을 잡으며, 말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진정하고. 달려라."
그런다고 말이 진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리기는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말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다른 기병들과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기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자기들 말을 뺏어 타다니!
데일은 대답 대신 갈고리를 다시 던졌다.
기겁한 기병이 창을 세워 갈고리를 튕겨내려 했다.
'이미 연습했던 거다.'
이전, 프라우을 상대로 갈고리 투척을 수련할 때. 프라우는 자꾸만 무기로 갈고리를 쳐내려 하곤 했다.
때문에 데일도 그에 대비책도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데일은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살짝 잡아당겼다. 궤도가 틀어진 갈고리와 밧줄이 창을 휘감았다.
"이익!"
기병은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턱도 없었다.
날뛰는 프라우에 비하면 너무나 약했다.
기병은 곧바로 끌어당겨 지는 데일의 힘에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여섯이 당했다.
동료 절반을 잃고 나서야 기병들은 데일이 맞설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조드가 당했어!"
"사, 산개해!"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데일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을 하나씩 추격해 죽일 생각이었다.
데일이 말을 몰았다.
그리고 아군 병사들은.... 데일이 혼자서 기병을 전멸시키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