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십 년 전.
갑작스러운 악마의 침공으로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황제는 수도를 대신할 도시를 찾다, 아예 새로 짓기로 결심한다.
그게 이레네다.
도시는 총 3겹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내성, 중성, 외성.
내성에 둘러싸인 곳은 황궁이 자리해 있으며 1구역이라고 부른다.
황제와 그 측근들은 좀처럼 이 1구역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두 번째 성벽은 2구역 3구역을 감싼다. 2구역에는 귀족들. 3구역에는 마탑이나 기타 시설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외벽에 둘러싸인 구역은 외곽이라고 부르는데, 동서남북을 감각 4 5 6 7 구역이라 이름 지었다.
레온이 말한 여관은 5구역에서도 외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
데일은 약도를 들고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이미 달이 높이 떠 있었다. 출발할 때는 아직 해도 지지 않았었는데.
'살짝 늦었군.'
길을 잘못 들어서, 조금. 아주 조금 헤맸을 뿐이다.
데일은 여관의 간판을 살폈다.
맥주잔에 얼굴을 파묻은 당나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이 취한 노새였던가?'
건물 자체가 허름한 거야 그러려니 했다.
근데 어째 여관이 소란스러웠다.
무언가 부러지고, 부서지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잠시 고민했던 데일은 이내 여관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는 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 술 가져와!"
"아악! 이 개새끼가 날 쳤어?"
"와하하하! 부숴!"
술병을 깨는 건 기본에, 탁자와 식기를 이리저리 집어 던지고, 주먹다짐하는 놈들도 있었다.
어찌나 분위기가 소란스러운지, 취객들은 데일이 안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데일은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문가에 쭈그리고 앉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급으로 보이는 여인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하. 내가 못 살아. 진짜 콱 죽어버리든지 해야지."
데일은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흑기사 특유의 서늘한 기운을 느낀 여자도 고개를 들어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데일을 보며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한 빛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시발 진짜 내 인생은 왜 이러니."
취한 노새
* * *
데일은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는 여자에게 말했다.
"입이 험하군."
"뭐요. 내 입 험한 거에 그쪽이 뭐 보태준 거 있어요?"
얼씨구?
쭈그려 앉은 빨간 머리 여자는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데일을 상대로 이렇게 나오기는 쉽지 않다.
여자는 배짱이 두둑한 성격인 듯했다. 아니면 이미 체념했거나.
여자는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데일을 향해 툭 물었다.
"왜 왔어요."
불량한 태도에 맞게 데일도 퉁명스럽게 답했다.
"여관에 방 얻으러 오지 왜 오겠나."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근데 안 되겠네요."
"흑기사라?"
"그것도 그렇고. 당장 이 지랄인데 어떻게 방을 내줘요."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소란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식탁과 의자가 날아다니고,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취객들은 마치 여관을 파괴하는 게 목적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보니 한 패군.'
그냥 취객들이 아니라, 도적 떼나 용병 패거리에 가까운 무리들이었다.
보통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불만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표출하곤 하니.
여자는 지긋지긋한지, 고개를 다시 무릎에 파묻었다.
"걍 죽든가 해야지."
데일이 물었다.
"매일 이러나?"
"부서진 잔해를 치우는 게 아침 일과가 된 지 좀 오래됐죠."
"경비병을 불러."
"설마 내가 안 불러봤겠어요? 내가 그렇게 병신으로 보여요?"
"...."
뾰족하게 내뱉었던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 했네요."
"상관없다."
"경비병들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요. 슬렁슬렁 왔다가 이 새끼들이 찔러주는 돈 받고 시시덕거리며 사라지는 데요. 그럼 저는 보복이나 받고, 돈도 뜯기고. 아니. 근데 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래."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여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니까 딴 데 알아봐요."
"곤란한데. 돈만 주면 누구든 받아준다 해서 찾아왔단 말이다."
"아버지 신조였죠. 그 지랄하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게가 이 꼴이 났지만."
여급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었던 건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데일이 무심하게 물었다.
"결국, 이놈들 때문에 못 받아준다 이건가?"
"예, 뭐. 치워주기라도 하시게요?"
"그러지."
"역시 그건 싫.... 예?"
여자가 파묻었던 고개를 휙 들었다. 데일이 여자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전부 정리해주겠다. 대신. 보름 동안 숙박비는 면제. 받아들이겠나?"
"보, 보름은 너무 많고. 열흘로 합시다. 대신 따뜻한 물을 매일 제공해드릴게요."
데일은 피식 웃었다. 이 와중에도 가격 흥정을 하다니. 어디 가서 굶을 걱정은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봐주지는 않았다.
"보름. 따뜻한 물도 제공하고."
"아니 뭔. 조건이 더 안 좋아졌잖아요. 이런 식의 거래가 어딨어요."
"욕한 값이다. 억울하면 강해지던가."
"하."
여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데일이다."
"...카일라. 시거의 딸 카일라에요. 근데 역시 농담하시는 거죠? 사람 숫자 차이가 있는데...."
카일라는 싸움에 대해서는 무지한 여자였다.
아무리 숫자가 차이가 나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데일은 검지를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물러나 있어라."
"어. 음. 그렇다면야.... 아. 죽이면 안 돼요! 사람 죽이면 경비병들도 가만 안 있는 다고요. 아예 시체까지 숨기면 모를까."
"그건 좀 곤란한데."
워해머에 손을 가져가려던 데일은 멈칫했다.
새로 얻은 무기니 미리 길도 좀 들일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언제나 죽이는 싸움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흑기사의 본능은 깊이 아쉬워했지만, 내면의 인간성은 오히려 잘됐다고 판단했다.
데일이 앞으로 나섰다.
취객들은 여전히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데일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 취객 하나가 뒷걸음질 치다 데일의 흉갑에 부딪혔다.
"아이씨 어떤 새끼.... 엇?"
데일의 모습을 확인한 취객이 얼어버렸다.
지금 현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아마 너무 취해서였을 것이다.
데일은 사내가 술에 깰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어어?"
데일은 한 손으로 취객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렸다.
취객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허우적거렸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데일은 취객을 든 손을 힘껏 앞으로 뻗었다.
"으아아아아악!!"
취객이 날았다.
허공에서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날갯짓한 취객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벽에 쿵! 부딪혔다.
"...."
"...."
소란스럽던 여관 안에 거짓말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둘 중 골라라. 조용히 나가던가, 뼈 몇 대 부러지고 나가던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실내에 있는 이들에게는 오싹할 정도로 선명히 들렸다.
취객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중 하나가 카일라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카일라 이 썅년아. 이교도를 불렀어?"
"너희들 같은 인간 쓰레기보다는 이교도가 낫다 이 새끼야!"
카일라의 거친 화답에 취객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카일라를 향해 걸어갔다.
"근데 이 년이 이쁘다 이쁘다 해주니까...."
데일이 손바닥을 뻗어 사내를 제지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조용히 나가던가, 부러지고 나가던가."
사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취기. 젊음의 혈기. 사내 특유의 자존심. 많은 동료들.
바보 같은 판단을 내리게 도와주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잠깐 주춤했던 사내가 외쳤다.
"이 새끼 족쳐!!"
사내는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그 동료들도 한 박자 늦게 몸을 날렸다.
설령 판금 갑옷을 껴입었다 해도,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제압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데일은 우선 주먹을 뻗었다.
가장 앞서 달려든 사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컥."
흔히 리버 샷이라고 부르는, 간을 타격하는 일격에 사내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데일은 사내가 쓰러지는 걸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죽어어어!"
뱃살이 출렁한 취객이 테이블을 번쩍 들고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빡!
데일은 번개처럼 주먹을 뻗었다. 가벼운 잽이었다.
하지만 취객에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이가 우수수 부러져 나갔다. 취객의 몸이 기우뚱 넘어갔다.
그대로 취객에게서 테이블을 뺏어 든 데일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붙잡아, 앞으로 던졌다.
달려오던 사내 셋이 테이블에 얻어맞고 동시에 날아갔다.
사이좋게 같이 맞았으니, 갈비뼈 하나둘 부러지는 선에서 끝날 것이다.
"이런 시발!"
순식간에 다섯이나 당했다. 사내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개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외쳤다.
"한꺼번에 덮쳐 병신들아!"
그 외침에 사내들은 잠시 주저하다, 이내 데일에게 몸을 던졌다.
그 과정에서 두어 명이 데일의 건틀렛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나머지는 데일을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데일은 습관적으로 손도끼를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아 맞다. 죽이면 안 되지.'
그 머뭇거리는 사이.
더 많은 사내가 달려들어 데일을 붙잡았다. 십수 명이 몰려들어 데일을 깔아뭉갰다.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우두머리가 외쳤다.
"잘했어! 이대로 투구 벗겨! 어디 어떻게 생겼는지나 보자...."
우두머리는 말을 멈췄다.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인간의 산이 순간 들썩였다.
산에 꼭대기를 차지한 뚱뚱한 사내의 얼굴에도 당황한 감정이 어렸다.
아래쪽에서 밀어 올려지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
그럴 리 없는데. 분명 그럴리 없는데. 산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의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데일은 생각했다.
'무겁군.'
데일은 꿇고 앉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들썩임이 강해졌다.
당황한 사내들은 어떻게든 힘을 줘보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점점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매달려 있던 사내들도 점점 올라갔다.
이윽고. 산이 와르르 무너졌다.
"으아악!"
"뭐, 뭔 놈의 힘이!"
데일은 끝까지 매달려 있는 사내를 저 멀리 던져버린 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멍한 얼굴의 우두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나갈 건가?"
"...."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랄 새 없이 출입구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난동을 부리던 취객들이었지만, 도망칠 때만큼은 신속하고 질서정연했다.
여관 안 취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남은 건 데일과 놀란 얼굴의 카일라뿐이었다.
"어. 히, 힘이 좀 세시네요?"
카일라는 설마 데일이 혼자서 모조리 정리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순식간에. 그리고 압도적으로.
싸움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몇 달 내내 괴롭히던 놈들이 이렇게 한방에 정리될 줄은 몰랐는데...."
데일은 몇 안 되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온 사방이 난장판이었다. 오늘 장사는 그른 것 같다.
데일이 물었다.
"혼자 장사하나?"
엉망이 된 실내를 막막한 눈으로 둘러보던 카일라가 대답했다.
"원래는 아버지랑 둘이서 운영했어요."
"저런 놈들 상대로 장사해 먹기 쉽지 않겠군."
그것도 싸움 기술을 배우지 않은 젊은 여자 혼자라면 더더욱.
카일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그럭저럭 잘 돌아갔어요. 은퇴 용병이셨거든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저 혼자서는 힘에 부치더라고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흔한 이야기였다.
"저놈들은? 보니까 한 패거리 같던데."
"아. 지미 패거리에요."
"지미?"
"네. 빈민가 쪽에 자리 잡고 있는 건달 놈들인데, 대가리가 커지더니 요즘은 성안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죠."
"그걸 위한 교두보로 선택된 게 이곳이고?"
카일라가 눈을 크게 떴다.
"엇. 눈치가 되게 빠르시네요. 아니면 이런 쪽에 빠삭하신가?"
"별로."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은 딸. 외진 곳에 자리한 여관.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한 조건 아닌가.
"여관을 헐값에 넘기라고 했나?"
"그 정도면 다행이죠! 아니, 나보고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했다니까요?! 기사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한 미모 하잖아요?"
"?"
카일라는 뻔뻔한. 아니, 자부심이 넘치는 여자였다.
"얼굴 이쁘고 엉덩이도 크니까 자기 신붓감으로 합격이라는데.... 어우 그 시선이 어찌나 소름 끼치던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너와 결혼하면 합법적으로 여관을 소유할 수 있겠군. 나쁘지 않은 방식이다. 후에 뒤탈이 날 우려도 적고."
"...지금은 같이 화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그 자식한테 감탄하고 있는 거죠?"
당연하게도 카일라는 지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이후부터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우르르 몰려와 술 마시고 돈 안 내기. 난동부려서 가구들 박살 내놓기. 다른 손님 겁줘서 쫓아내기.
정신적인 고통도 문제였지만, 여관 운영이 제대로 안 되면서 지갑 사정도 어려워지던 참이었다.
"그나마 경비병들 눈치 때문에 저한테 직접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는데, 가게는 꼼짝없이 넘겨야 할 판이었거든요. 그...."
머뭇거리던 카일라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러고는 맑게 웃었다. 그간 입었을 마음의 상처는 표정에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당찬 여자였다.
카일라는 어질러진 여관을 정리하며 물었다.
"식사 안 하셨죠? 뭐라도 가볍게 해드릴게요."
고민하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데일은 일부러라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라가 감자를 으깨 만든 수프를 내왔다.
쟁반을 내려놓은 카일라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먹어봐요. 절대 맛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데일은 어차피 맛을 못 느끼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데일은 투구의 끈을 풀어 벗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카일라는 오늘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크게 놀랐다.
"엇. 어."
"왜 그러지?"
카일라는 잠시 주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카락을 다듬고, 다소곳이 앉으며 품격 있는 말투로 말했다.
"소녀, 데일 경의 존안을 보니 가슴이 설레어 옵니다."
"이상한 여자군."
카일라는 그런 여자였다.
취한 노새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카일라가 데일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기를 닦고 있던 데일이 문을 열었다.
카일라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녀. 데일 경께 아침 인사 올립니다."
"그 말투, 이상하다. 그리고 소녀라 하기에는 좀 그런 나이 아닌가?"
"...저 이제 스무살이거든요. 꽃다운 처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으시네."
카일라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데일이 물었다.
"왜 찾아온 거냐."
"웬 쪼그마한 노움 꼬맹이 하나가 데일 경을 찾아왔는데요. 되게 귀엽게 생겼던데."
"그래 봬도 너보다 10살은 많을 거다."
"엇. 그래요?"
노움은 종족 특성상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 그 사실을 몰랐던 카일라가 놀라워했다.
데일은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카일라가 밤새 청소를 했는지, 1층은 그럭저럭 깨끗했다.
다만. 부러진 가구들은 어찌하지 못해 한구석에 몰아놓았다.
레온은 얼마 안 남은 의자에 앉아 여관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데일이 레온을 불렀다.
"레온."
"아. 데일 경."
레온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여관을 구하셔서 다행이네요. 근데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나요? 테이블이나 의자들이 죄다 부러져 있는데."
"별일 아니었다."
"그런가요?"
레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이곳에 온 목적을 깨닫고,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누리끼리한 색상의 싸구려 종이였다.
"우선 기본 글자부터 가르쳐드릴게요. 소리 내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부터는 쉬운 책부터 읽어보도록 하죠."
"알겠다."
레온이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자 카일라도 관심을 보였다.
"글자를 배우는 거예요?"
"그래."
"의외네요. 기사들은 가문에서 다 배우지 않나요?"
"내가 평범한 기사였으면 흑기사가 되었겠나?"
"아. 그런가?"
카일라는 납득했다. 그런 카일라에게 레온이 물었다.
"카일라 양은...."
"그냥 카일라라고 불러요."
"카일라는 글자를 읽을 줄 아나요?"
"숫자는 쓸 줄 아는데요. 장부 작성할 때 쓰거든요."
"그럼 괜찮으시면 함께 배우시겠나요?"
"예? 그래도 돼요?"
레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람이 많을수록 배움은 즐거워지는 법이랍니다."
레온의 꿈은 학교를 여는 것.
1대1 과외보다는 이렇게 여럿을 가르치는 학교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레온은 우선 기초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제국 문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어 있는데...."
데일은 집중해서 들었다. 레온이 설명해주는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암기했다.
조금 즐겁기도 했다.
'이렇게 공부해보는 게 얼마 만이지.'
이 세계에 떨어지고는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이다.
데일과 카일라가 집중하자, 레온은 흥이 올라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게다가 데일은 뛰어난 학생이었다.
"왜 여기서는 에 발음이 되는 거지? 아까 말한대로면 으 발음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원래는 으가 맞지만, 몇 가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해서...."
데일은 이해가 빨랐고, 잘 외웠으며, 모르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해가 갈 때까지 질문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도 교사들이 가장 좋아할 종류의 학생.
레온 본인도 데일을 가르치면서 큰 기쁨을 느꼈다.
정말이지, 이런 학생들만 있다면 교사로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찰까.
잠시 쉬는 시간. 레온은 칭찬을 쏟아냈다.
"배우는 게 엄청 빠르네요 데일 경. 제가 처음 배울 때랑은 비교도 안 돼요! 이대로라면 며칠 안 걸리겠는데요?"
"네가 잘 가르쳐서 그런 거다."
빈말은 아니었다. 레온은 생각보다 괜찮은 교사였다.
레온이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헤헤. 그런가요?"
그러다 레온은 울상을 짓는 카일라를 발견했다.
카일라는 데일에 비해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 사실, 카일라는 평범한데 데일이 너무 빨랐을 뿐이지만.
"카일라도 괜찮아요. 데일 경이 빠른 거지, 카일라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위로 안 해줘도 돼요."
한숨을 푹 내쉰 카일라가 데일 쪽을 쳐다보았다.
"데일 경은 왜 그렇게 열심히 배우는데요. 그냥 글 읽을 줄 아는 종자나 하인을 데리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실제로, 잘 나가는 용병 중에서는 그렇게 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느 세월에 흥미도 없는 글자를 읽고 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답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면 손해 볼 일이 많다. 굳이 손해 보며 살 필요는 없지."
레온과 카일라가 시선을 맞췄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배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 뒤로도 셋은 글자 공부에 열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관에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아 집중이 깨지지 않았다.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 레온이 돌아갔다. 데일은 침대에 누워서도 복습을 멈추지 않았다.
잠이 없는 반 언데드에게 밤은 너무나 길다.
이렇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게 생긴 건 참으로 기꺼웠다.
그러다 데일은 어느 순간 복습을 멈췄다.
꿈을 꾸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옛 기억을 선명히 떠올렸다.
조부가 나왔다.
조부가 아직 어린 데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은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단다. 글과 책에 가까워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조부가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조부에게 데일은 말하고 싶었다.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얼마 전에 사람을 또 죽였어요. 그것도 여섯 명이나. 근데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고요.'
데일이 마일즈와 그 일행을 죽인 건 정당했다. 놈들은 죽어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 사람으로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건 두려움이었다.
본인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두려움.
허나 털어놓을 수 없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꿈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는 것뿐이니.
조부는 그저, 언제나처럼 자상하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
데일은 용병 길드로 향했다.
지금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적을 사냥해야 한다.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아침의 용병 길드는 북적거렸다. 실내는 의뢰를 맡기기 위해 온 의뢰자들과 일거리를 찾아온 용병으로 가득했다.
길드는 둘 사이의 중개를 담당했다.
데일이 들어서자 한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데일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교단에 간 그...."
"전선에 있지 않고 왜 용병 일을 하는 거지?"
"이번에 마일즈 팀을 혼자서 죽여버렸다는데. 장비를 팔아서 짭짤하게 벌었나 봐."
"돈만 잘 번다면 상관없지. 가서 파티 제의라도 해보지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교도는 좀."
두려움과 경계. 그리고 호기심.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용병들은 대놓고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별별 사람들이 다 흘러들어오는 업계인지라, 실력만 확실하면 인성이나 신분 같은 건 그러려니 하는 기조 때문이었다.
반대로 용병들은 실력이 떨어져 제 역할을 못 하는 이들을 혐오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데일은 쉽게 접수대로 다가갈 수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접수원이 데일을 맞았다.
여전히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서 오세요 데일 경."
"내가 할만한 의뢰가 있나?"
데일의 물음에 접수원은 사무적으로 답했다.
"특별히 희망하시는 분야가 있나요? 용병들도 전문 분야가 다 다르거든요."
호위, 토벌, 채집, 호송, 전쟁. 그 밖에 다양한 분야들이 있고, 보통 용병들은 그 중 한 두 가지에 집중해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편이 신뢰를 쌓기도 좋고 돈 벌기도 좋았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거나 상관없다."
"그, 그럼 찾아보겠습니다."
접수원은 분주히 서류 더미를 뒤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손이 멈췄다.
데일은 말없이 접수원을 쳐다봤다.
접수원도 입을 꾹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데일이 말했다.
"없나 보군."
"...아직, 데일 경께 의뢰를 맡기는 분이 없으신 것 같아요."
이교도에게 의뢰할 의뢰자는 아직 없었다.
데일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위험하고 더러운 일이라도 상관없는데. 보수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 죄송합니다."
"흠."
데일은 곤란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놈의 흑기사 페널티.
'이래서 게임에서도 흑기사는 안 했던 건데.'
역시 다른 흑기사들처럼 전선을 누비는 게 좋았을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일이 없어 곤란하지는 않았을 거다. 적이 넘쳐나는 곳이니.
하지만 전선은 위험한 곳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에도 언제 변덕 심한 악마가 찾아올지 모른다.
지금 데일의 힘으로는 악마를 상대할 수 없다. 아니. 상대는커녕 도망치기도 힘들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살 수는 없다.
"...."
데일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자, 그 반응을 오해한 접수원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눈에는 희미하게 물기마저 고였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접수원을 구원할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데일 경!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지부장, 가란드가 계단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란드에게 집중되었다. 용병들은 누가 먼저랄 새 없이 가란드에게 다가가 인사하려 했다.
"어. 가란드씨다."
"가란드씨. 좋은 아침입니다!"
가란드는 미소로 화답한 뒤,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데일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위로 올라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가란드의 뒤를 따랐다.
접수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가란드는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밀었다. 가란드가 직접 탄 홍차였다.
"차는 좋아하십니까?"
"먹을 수는 있소."
데일은 찻잔을 받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차를 한입에 삼키는 모습에 잠시 당황했던 가란드가 운을 띄웠다.
"왜 데일 경을 불렀는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나야 고맙지."
탁상 서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낸 가란드가 설명했다.
"최근. 이 근방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상 징후?"
"예. 우선 얼마 전 데일 경께서 의뢰를 처리한 이후, 마일즈에게 피해를 입은 마을에 조사대를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예상대로 마을 주민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란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주위에서 아울베어의 사체 역시 찾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크기가 일반 아울 베어보다 1.5배는 크더군요. 이 정도라면 변종 아울 베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어요."
마일즈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던 건가.
데일이 가란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서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아울베어는 영역 동물입니다. 다른 개체에게 패하기 전에는 자기 영역을 떠나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아울베어보다 1.5배는 큰 녀석이 패배해 이동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그뿐이 아닙니다. 이레네로 연결되는 가도 근처에 원아이 무리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아시죠?"
알다마다.
그 무리를 마주쳐서 박살 낸 게 데일이었는데.
"원아이 무리 역시 아울베어와 마찬가지로 영역 동물입니다."
"하지만 영역을 벗어났군."
"예. 게다가 조사 결과, 아울 베어와 원아이 무리 둘이 서로 가까운 지역에서 생활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니까 가란드의 말은, 그 두 괴물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도망쳤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그 근처에 더 강한 놈이 나타난 것 아니오? 그래서 살기 위해 도망친 거고."
"예.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조사대는?"
"보냈습니다. 동패 용병이 둘이나 포함된 파티였죠."
파티였죠. 그 과거형 표현에서 데일은 파티의 운명을 알아챘다.
가란드가 담담히 말했다.
"파티가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죠. 저희는 지금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모릅니다. 죽었는지, 아니면 사로잡혔는지. 심지어 어떤 괴물한테 당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입니다."
가란드는 고개를 들고, 데일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이미 가란드의 다음 말을 예상하고 있는 데일에게 물었다.
"데일 경께서 도와주시겠습니까?"
미지의 적
* * *
데일이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용병들을 구출? 아니면 거기 있는 적의 배제?"
"그건 전적으로 데일 경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맡긴다고?"
가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길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습니다. 이런 데 어떻게 제대로 된 지시가 가능하겠습니까. 현장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요."
가란드가 이어 말했다.
"만약 용병들이 붙잡혀 있다면 구출에 중점을 두셔도 좋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적의 정체만 파악한 뒤 돌아오셔도 좋고, 가능하면 적을 사살하셔도 됩니다."
데일은 탁상을 툭툭 두드렸다.
'현장 판단에 따르겠다라.'
데일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가란드가 안심시켰다.
"물론, 데일 경이 현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책임을 물을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방식의 의뢰가 흔한 것 같지는 않소만."
"예. 대부분의 용병들은 꺼려하는 편이죠. 다른 무엇보다, 의뢰의 위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요."
적이 누군지. 얼마나 강한지조차 모른다.
이건 마치 눈을 감고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짐승이 나보다 약하면 사는 거고. 강하면 잡아먹히는 거고.
이런 의뢰를 반길 용병은 없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보수를 주는 게 아닌 한.
노련한 가란드는 데일이 의문을 표하기 전에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보수는 의뢰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그리 섭섭한 가격은 아닐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게다가 모두가 꺼릴 의뢰이니만큼 실적도 넉넉히 책정될 거고요."
넉넉한 실적.
즉, 용병 등급을 더 빨리 올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적에 돈이라.'
일반 용병들에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섭섭하지 않은' 금액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아니다.
애초에 의뢰를 가릴 처지도 아니며, 위험한 적은 바라던 바다.
'설마 도망도 못 칠 정도로 강한 놈은 아닐 테고.'
악마가 아니고서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짧게 고민한 데일은 결정을 내렷다.
"하겠소. 바로 준비하면 되겠소?"
"데일 경이라면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따로 섭외해둔 용병들은 없소?"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데일 경께서 사람을 모아야 할 것 같군요."
데일은 멈칫했다.
그에게 사람을 모으라고? 차라리 지금 당장 악마 골통을 부수라고 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냥 혼자 하면 안...."
"안됩니다."
즉답.
가란드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전투에는 변수가 넘쳐납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생깁니다. 그래서 상위 등급 모험가들은 기본적으로 팀으로 활동합니다. 용병왕 같은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데일도 가란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 역시 게임에서 용병 캐릭터를 키운 적이 있었다. 일부러 고독한 늑대 컨셉을 잡고 파티 플레이를 최소화했는데, 그때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다.
'근데 나는 일부러 혼자 하겠다는 게 아닌데.'
괜찮은 인재가 있다면 당연히 함께하는 게 편하다. 하지만 데일은 흑기사가 아닌가.
사람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데일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혹시 나를 시험하는 거요?"
가란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현장에서의 내 판단에 맡긴다거나. 일부러 팀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거나. 나를 평가하려는 느낌이 있어서."
가란드는 차를 한 모금 훌쩍인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일 경은 계속 저를 놀라게 하는군요. 예. 맞습니다. 이번 의뢰는 데일 경을 시험하는 성격이 큽니다. 용병 길드는 주의할 인물이 들어오면 우선 그 사람을 가늠해야 하거든요."
"의뢰를 맡길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맞습니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용병을 투입하는 것. 그게 용병 길드의 일이었다.
"팀을 꾸리도록 유도한 것도 그런 평가의 일환입니다. 저희는 동료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용병에 더 높은 점수를 주거든요."
"그렇군."
가란드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변명을 좀 하자면, 제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지부장이란 직책은 번드르르해도 결국에는 중간관리직이라 말이죠."
"딱히 기분 나쁘지는 않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가란드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라면, 위에서 데일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여기서 제대로 성공하면 귀찮은 일도 줄어들겠군.'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사람을 구해보겠소."
"괜찮겠습니까?"
"뭐.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요. 없으면 나 혼자라도 가야겠지만."
"그러면 갈 때 사용할 짐 마차는 길드에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집무실을 나섰다.
한시가 급한 의뢰다.
어쩌면 실종된 용병들이 살아있을 수도 있었다.
'가능성은 적지만.'
길드에서는 용병들이 이미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실종된 용병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에 데일을 시험해볼 용도로 의뢰를 맡긴 거다.
용병들이 살아있다고 여겼으면, 좀 더 확실한 이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데일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많은 용병이 의뢰를 찾아 북적거리고 있었다.
데일은 실내를 쭉 둘러보며 쓸만한 용병을 찾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시선이었다.
"왜, 왜 저래."
"일단 도망가자."
겁에 질린 용병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쓸만한 놈이 안 보이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데일에게 친한 척을 해왔다.
"데일 경! 오랜만입니다! 저 기억나시죠? 하켄입니다, 하켄. 마일즈 그놈을 죽여서 대박을 친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하하. 저도 데일 경이랑 함께했으면 한몫 잡았을 텐데."
유달리 곱슬거리는 머리를 가진 용병, 하켄이 친한 척 떠벌대었다.
부자연스러울 만치 과장스러운 행동이었는데, 마치 주위에 '봐라. 난 이런 사람이랑도 친분이 있다'라고 과시하는 느낌이었다.
데일은 대답 대신 하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데일이 아무 말 없이 노려보자, 당황한 하켄이 한걸음 물러났다.
"호,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지금 수행하는 의뢰가 있나?"
"예? 아뇨. 어제까지 놀다가 오늘 일감 찾아 나온 건데요."
"따라와."
"예?"
데일은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데일의 등만 쳐다보았다.
앞서가던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안 따라오고 뭐 해."
"예? 그, 데일 경? 이유만이라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데일은 하켄의 말을 무시하며 사무소 밖으로 나갔다.
잠시 갈등하던 하켄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왠지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일단 한 놈 구했고.'
2등급 실드맨. 어떤 조합에 넣어도 1인분은 할만한 인력이었다.
하켄이 입이 좀 가벼워서 그렇지, 노련한 용병이기도 했고.
이미 데일의 머릿속에 자기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걸 모르는 하켄은 불안한 얼굴로 데일을 뒤따랐다.
"데일 경. 이제 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뭐 어디 좋은 가게를 가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데일이 고개만 살짝 돌린 뒤, 무심하게 의뢰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적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과 의뢰 내용도 현장 판단에 맡긴다는 것.
모두 들은 하켄의 얼굴이 하얘졌다.
"아니. 대체 어떤 개 같은 새끼가 튀어나올 줄 알고 그런 의뢰를 받는 겁니까. 예?"
"문제가 생기면 물러나면 된다. 내가 책임지고 도망은 칠 수 있게 해 줄 테니 걱정마라."
"어. 그, 엄청 듬직하긴 한데...."
하켄이 우물쭈물하자 데일이 말했다.
"쉬운 적만 상대하면 성장도 없다. 너도 이제 2등급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음. 그것도 또 맞는 말이라 반박은 못 하겠긴 한데, 그래도 좀...."
앞서가던 데일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하켄을 쳐다보며 말했다.
"싫나?"
"...어. 그게."
데일은 지그시 하켄을 바라보았다.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데일은 침묵의 힘을 알았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하켄이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당연히 해야죠! 이 하켄! 의리 빼면 시체 아니겠습니까?"
"저번에는 고독한 늑대라며."
"아, 아이고. 농담한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십니까."
체념한 하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이 양반이 있으면 괜찮겠지.'
하켄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데일이 보여준 무위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어떤 괴물을 맞닥뜨리더라도 데일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켄은 데일의 옆에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그런데, 설마 우리 두 명은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파티에 사제 한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사제는 이미 구해놓았다."
"아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요?"
"너도 아는 사람이다."
하켄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 * *
"...."
"...."
"...."
빛의 신전 앞에서 에스델과 하켄, 그리고 데일이 기묘한 대치를 하고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에스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약속도 없이 아침 일찍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의뢰를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겁니까?"
"권유 아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빌려준다고 했던 건 너였다."
"아니. 으.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경우라는 게 있잖습니까."
"저도 반대입니다 데일 경."
하켄이 난색을 보였다.
"견습 사제잖아요. 대체 세상 어디서 견습 사제를 사제로 치나요. 전투에서 사람 구실도 못 한다니까요? 저번에 봤잖아요. 원아이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던 거."
"이제 견습 사제 아닙니다!"
에스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사제복의 소매에 새겨져 있는 표식을 보여줬다.
은의 고리가 한 개.
즉. 정식 사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그사이에 사제를 달았다고?"
"흥. 말했잖습니까. 나름 주목받는 유망주라고."
에스델이 턱을 살짝 들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데일도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전투에 도움이 되겠어."
에스델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예? 저는 아직 한다고 말 안 했습니다. 애초에 지금 어떻게 갑니까. 당장 오늘 준비된 일정이랑, 드려야 하는 오후 기도랑, 또...."
말이 길어졌다.
에스델이 계속 거부할 기색을 보이자, 데일은 쐐기를 박았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나."
"윽."
에스델이 굳어버렸다.
신앙인에게 신의 이름을 건 맹세는 무거운 의미를 가진다.
맹세를 깼다가는 신성을 모두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에스델이 조금 애처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아직 막내라서 이렇게 일 빠지면 위에서 눈치 보입니다. 언니들도 안 좋게 보고. 지도 사제님도 혼내시고...."
"알겠다."
에스델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빛의 신의 이름은 내 생각보다 가벼웠던 모양이군."
에스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데일이 고개를 돌리자, 에스델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겠습니다. 하면 되잖습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와라."
에스델은 입으로 '나 어떡해 진짜'라고 중얼거리며, 교단으로 총총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데일이 말했다.
"동료 모으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
옆에서 지켜보던 하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지의 적
* * *
"그래서. 이 세 명으로 갈 겁니까?"
에스델이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하켄도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뭐. 실드맨에 사제, 거기에 기사면 최소한의 구색은 갖춘 셈이지.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으니, 여기에 활잡이 하나만 있으면 딱이겠지만.... 사제 양반, 아는 궁수 있어?"
"아뇨. 그리고 제 이름은 에스델입니다."
하켄은 에스델의 말을 무시하며 데일에게도 물었다.
"데일 경은요."
"아니."
"저도 없습니다. 그러면 새로 구해야 하는 데, 구할 수 있겠습니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들은 데일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도 강하다.
괜찮은 궁수를 구하려면 시간과 돈을 들여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시간은 여유롭지 않다.
"생존자들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둘러야 해."
"저도 데일 경의 말에 동의해요.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구해야죠."
에스델이 데일의 말에 맞장구쳤다.
하지만 하켄은 시큰둥했다. '실종된 용병'이라는 건, 사망자와 크게 다른 바 없는 단어였다.
"그래요 뭐. 그렇다 치고. 그럼 그 밤의 신전에서 사람을 구할 수는 없나요? 내 알기로, 밤의 여신을 따르는 신자들은 굳이 용병 길드에 안 들고 제각각 활동한다는데."
정확히는 길드에 안 들었다기보다는 못 들은 거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 역시 데일이 겪는 어려움을 마주했으니.
이교도를 한 명 더 데려가자는 말에 에스델은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데일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신앙심은 충분히 자극받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데일도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 같지는 않다. 누군지도 모를 녀석을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아."
"하긴 뭐. 다들 머리한 구석이 맛탱이가 간 놈들이니...."
말하다 아차 한 하켄이 재빨리 덧붙였다.
"데일 경을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조심해라."
"옙."
결국, 이 셋만으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숫자가 적은 건 확실히 전력 면에서 불리함이 있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적으면 그만큼 위기 시에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 적어도 서로 발이 엉켜 넘어질 일은 없을 터.
게다가 사람이 적다는 건,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은 곧장 길드로 가 보고를 마쳤다. 가란드는 셋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켄, 데일 경, 그리고 에스델 사님이시군요. 마차와 여정에 필요한 물건은 제가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켄과 에스델도 그 뒤를 따랐다.
준비된 짐 마차에 오른 데일이 하켄에게 말했다.
"네가 마부해."
"예? 꼭 제가 해야 합니까?"
"그러면 내가 할까? 저쪽은 말을 몰 줄 모를 거고."
데일이 에스델을 가리켰다. 에스델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 왜 당연하다는 듯이 제가 말을 못 몰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할 줄 아나?"
"...모르긴 하지만, 단언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하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하켄이 고삐를 쥐자 푸르르, 투레질한 말 두 마리가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마차는 느릿느릿 성문을 빠져나가 가도에 들어섰다.
빈민촌의 사람들이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가오지는 않았다.
도시에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구걸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날이 따뜻했다.
정오의 햇살이 마차 위로 흘러내렸다.
그 따가움에 조금 불쾌함을 느끼며 데일은 헝겊으로 롱소드를 닦았다.
지난번 마일즈와 싸울 때 쓰던 롱소드가 이가 나가서, 새로 장만한 녀석이었다.
'꽤 비싸게 주고 샀으니, 이번에는 쉽게 부러지지 않겠지.'
에스델은 품에서 성경을 꺼내 읽었다. 얼마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종이가 죄다 너덜너덜했다.
에스델은 신경 쓰지 않고, 성경의 글자에만 집중했다.
햇살은 그런 에스델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안 그래도 화사하던 백금발 머리가 더욱 찬란히 빛났다.
성경을 읽는 아름다운 여사제.
제법 봐줄 만한 그림이었다.
신앙심 깊은 무지렁이가 봤다면, 성녀가 나타난 게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 정도로.
다행히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데일은 하염없이 무기를 손질했고, 하켄은 졸린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하켄이 물었다.
"우리 심심한데 얘기나 좀 합시다."
"난 안 심심한데."
"아잇. 그러지 말고. 이것저것 할 얘기 있지 않습니까. 가령, 데일 경이 얼마 전에 마일즈랑 그 졸개들을 처리해서 한 몫 챙긴 이야기라거나."
데일은 검을 닦던 손을 멈췄다.
"아까도 의아했던 건데, 그걸 대체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하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 바닥에는 비밀이 없어요. 누가 한몫 잡았다는 얘기 나오면 다음날 도시 전체에 소문이 퍼진다니까요? 그러다 재수 없으면 강도들이 찾아가기도 하고 뭐 그러는 거죠."
확실히, 마일즈와 그 패거리가 가진 장비를 가져다 파니 짭짤한 수익이 되었다.
그게 이렇게 소문이 퍼질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데일 경은 그런 걱정 없겠네요. 간이 존나 큰 강도가 아니면 누가 굳이 데일 경을 노리겠어요."
데일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델은 읽던 성경을 덮고는 고개를 휙 들었다.
"잠깐. 지금 데일 경이 사람을 죽여 이익을 취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말이 이상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누가 들으면 오해할만하지 않겠는가.
그 오해에 하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용병일 하다 보면 거 사람 좀 죽일 수 있는 거지. 왜 유난이야."
"야."
그렇게 말하면 더 오해하지 않겠는가.
에스델은 충격받은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그 손이 덜덜 떨렸다.
"데일 경. 사고 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데일은 에스델이 시끄럽게 굴 것 같아, 한숨을 푹 내쉬고 설명했다.
가란드의 의뢰를 받을 일부터 마일즈가 마을에서 벌인 학살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에스델이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뭐. 왕왕 벌어지는 일이지."
하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에스델이 시선을 돌렸다.
"왕왕 벌어진다니. 이런 일이 흔합니까?"
"으잉? 뭐, 몇백 년 된 왕국도 박살 나는 시대인데, 마을 하나 없어지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 꼭 용병이 아니라도 도적 떼나 몬스터, 악마 등등. 위험한 새끼들은 많으니까."
에스델이 수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도시에서 가까운 마을에 그런 참사가 벌어졌을 줄은 조금도 몰랐습니다. 제가 태평하게 지낸 동안...."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자책.
하켄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일에까지 책임감을 느끼다니.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데일은 그런 에스델이 조금이지만 부러웠다.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조차 공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는 저 유난스러움.
그건 지금의 데일이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니까.
일행은 다시 입을 닫았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말발굽이 땅을 밟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지루하네."
* * *
일행의 목적지는 이레네에서 북서쪽으로 사흘 정도 거리에 있는 돌산이었다.
'뾰족 바위산'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이름대로 날카로운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아울베어와 이터 무리의 영역이었고, 이전 조사대가 소식이 끊긴 장소.
하켄은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크구만. 내가 알기로 뾰족 바위산은 저 북쪽에 용뼈 산맥에까지 이어지는 거로 알고 있는데, 수색하는 것만 한참 걸리겠어요."
"글쎄."
데일의 생각은 달랐다.
"아울베어와 이터 무리가 겁을 먹었고 도망칠 정도의 놈이니,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막상 그렇게 들으니 덜컥 겁이 들었다.
그 정도로 흉악한 녀석을 지금 상대하러 가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하켄은 불안하게 주위를 쳐다보다 데일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러자 불안이 조금 가라앉았다.
'뭐, 데일 경이 어떻게든 하겠지.'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데일이라면 알아서 잘 할 것 같았다.
하켄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마차를 멈췄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나, 여기서 더 가면 적의 영역이었다.
"자. 식사부터 합시다. 싸우려면 든든히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셋은 따로 역할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각자 알아서 할 일을 찾았다.
데일은 손도끼로 적당히 작은 나무를 베어왔고, 하켄은 근처 개울에서 물을 길어왔으며, 에스델이 솥에다 요리를 준비했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에스델은 데일과 하켄에게 말했다.
"자. 우리 모두 식전 기도를 합시다. 데일 경이랑 하켄도 손을 모으세요."
"?"
"뭐?"
데일과 하켄 모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에스델은 둘의 반응을 무시하고, 양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를 올렸다.
"자비롭고 따스한 빛이시여, 오늘도 저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
"음식은 가란드 그 양반이 준비해줬는데?"
"감사드리며, 빛이 온 세상을 밝히길 바라나이다."
하켄이 끼어들어도 에스델은 꿋꿋이 기도를 읊었다.
하켄은 이게 뭔가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교단에는 기도를 통해 영혼이 밝아진다는 믿음이 있고, 그 대상은 기도를 듣는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즉, 에스델은 하켄과 데일을 위해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근데 데일 경은 종교가 다른 거 아닌가?'
흑기사는 밤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요, 어둠의 구도자였다.
교단의 성기사와는 대척점에 있는 존재.
만약 입장을 바꿔 교단의 성기사 앞에서 어둠의 기도문을 읊었다면, 싸우자는 뜻으로 알아듣고 머리를 부수려 들지 않았을까?
하켄은 미묘한 얼굴을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애송이 사제는 신앙인 특유의 막무가내 태도가 좀 있는 듯하다.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태도 말이다.
하켄은 조심스레 데일의 눈치를 살폈다. 데일이 불쾌하게 여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데일이 투구를 벗었다.
하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드러난 데일의 입꼬리는 살짝이지만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 정도면 미소라고 부를 만했다.
놀란 하켄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엇. 웃을 줄도 아십니까?"
"무슨 의미지?"
"저는 흑기사는 웃지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왜 웃었을까.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답했다.
"그냥. 갑자기 조부가 떠올랐다."
"조부.... 말씀이십니까? 그러고보니 데일 경에 대한 얘기는 들은 적이 없군요."
사실, 궁금했던 적은 많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데일이 답해주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으레 어둠을 받아들인 기사들은 흉흉한 과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 과거를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법이니.
하지만 데일이 딱히 꺼리는 기색이 없자, 하켄이 옳다구나 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느 왕국 출신인지부터 알려주시죠. 레판토? 바이만? 아니면 이미 멸망한 다른 왕국들?"
"왕국이라. 정확히는 말할 수 없다."
"그럼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주세요. 뭐, 바다가 유명한 곳이었다는지, 역사가 길다든지."
데일은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현대의 한국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주의니 과학 기술이니를 설명해도, 터무니없게 들릴 것 같았다.
고민하던 데일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종교에 큰 관심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에 맞춰 설명했다.
"국민의 과반이 신을 믿지 않는 나라였다. 내 조부는 그런 곳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시던 분이셨지."
그 외에는 딱히 한국을 설명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켄은 툭 내뱉었다.
"그것참 저주받을 곳이네요. 완전 지옥 아닙니까?"
아무리 신앙심이 약한 용병이라도 아예 종교가 없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이곳 세계에는 신이 실재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작든 크든 신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 엿듣던 에스델이 끼어들었다.
"들은 적 있어요. 옛 드워프 왕국들 중에 신을 섬기지 않아 저주받은 곳이 있었다고. 그와 비슷한 곳 이려나요?"
"거 참. 대륙이 넓다 보니 별별 왕국들이 다 있군."
이 세계에도 무신론자 국가가 있을 수 있는 건가?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데일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조부께서는 식사 전에 기도 비슷한 걸 외우셨다. 게송이라 부르는 건데.... 그 모습이 에스델과 겹쳐 보여 웃었을 뿐이다."
에스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할아버지가 참 신앙심 깊은 분이셨나보군요!"
"그래."
빛의 신앙이 아니었지만, 그건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에스델이 더 캐물으려 하자 데일이 말했다.
"조부는 신심이 깊었지만 절대 당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던 분이었다. 덕분에 손자는 그 종교를 물려받지 않았지. 나는 그런 조부를 존경한다."
거기까지 말한 데일이 에스델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이해했나 에스델?"
"...."
에스델이 일부러 데일에게 기도를 동참하라 한 이유는 짐작할 만했다.
어둠을 받아들인 이 기사가 빛으로 다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분명 에스델은 선의에서 행동했을 것이다. 데일도 딱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밤의 여신과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계약 관계라 생각할 뿐, 진심으로 어둠을 섬기는 건 아니므로.
하지만 지금 데일은 남이 보기에 밤의 여신을 따르는 신자이고, 에스델도 그 사실을 안다.
에스델이 보여준 태도는 무례한 것이다.
데일이 아닌 다른 흑기사였으면 에스델은 지금쯤 심장에 검이 틀어박혔으리라.
데일의 무기질적인 눈과 마주친 에스델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신경 쓰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하켄과 둘이서 기도를 하도록."
"으익? 저는 왜 끼워 넣습니까?"
하켄이 뒤로 물러나자, 데일이 그 어깨를 붙잡았다. 하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픈데요. 알았어요. 기도할 테니 이건 놔주시면.... 으악!"
데일은 하켄을 힘껏 잡아당겼다. 하켄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수프가 든 그릇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다음 순간. 뾰족한 가시 하나가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 하켄의 머리가 있던 곳이었다.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손님이 온 모양이다."
미지의 적
* * *
데일은 어스름한 숲속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삐죽 돋아난 괴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슴도치 괴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리 세 개로 껑충 뛰어다니는 놈도 있었고, 진물을 뿌리며 다가오는 달팽이 같은 놈도.
십 수개의 눈을 깜빡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같이 생긴 녀석도 있었다.
그 외에도 통일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외형을 가진 괴물이 수십 마리나 있었다.
대륙에서 이런 불규칙한 군세를 지닌 이들은 하나다.
"악마. 악마에게 변형된 괴물들이다."
"예?!"
에스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마의 괴물들이 이레네의 근방에서 발견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켄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악마 새끼들이라.... 원아이랑 아울베어가 왜 도망쳤는지 알 것 같네. 어떡합니까 데일 경. 우리 좆 된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긴."
데일은 하켄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가시를 주웠다.
가시는 겉보기보다 단단하고, 무거웠다. 데일은 그 가시를 들고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쐐액... 퍽!
고슴도치 괴물의 대가리에 정확히 가시가 명중했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줄줄 흘렀다.
데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싸워야지."
그게 신호였다.
온갖 괴물들이 이쪽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데일은 롱소드를 들며 지시를 내렸다.
"에스델. 하켄에게 축복을 걸어."
"데, 데일 경은요?"
"나한테는 축복이 듣질 않아."
고개를 끄덕인 에스델이 빠르게 기도를 읊었다.
은은한 빛이 하켄의 몸을 감쌌다. 몸이 가벼워졌다.
"하켄은 에스델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데일 경은요?"
데일은 대답 대신 땅을 힘껏 박찼다.
커다란 덩치의 흑기사가 하늘로 치솟자, 모든 괴물의 이목이 데일에게 쏠렸다.
데일은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깔끔하게 착지했다.
철퍽!
떨어지는 힘 그대로 괴물 하나를 짓밟은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괴물들의 한 가운데.
날뛰기에 참 좋은 위치였다.
"실컷 싸우겠군."
"캬아아아악!"
표범의 머리에 지네의 몸통이 달린 괴물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데일은 롱소드를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쳤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두개골이 부서졌다. 더러운 액체가 사방에 튀었다.
데일은 곧바로 롱소드를 뽑아 옆을 향해 찔렀다. 뱀처럼 생긴 괴물의 아가리와 뇌가 그대로 꿰뚫렸다.
괴물의 상처에서 흐른 초록색 피가 땅과 닿자, 그르륵 거품이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충격이 등을 덮쳤다.
쿵!
데일은 뒤를 돌았다.
육중한 몸을 지닌 녀석이 꼴에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망치에 얻어맞은 등 쪽 갑옷이 조금 찌그러졌다. 녀석은 케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웃지마."
데일은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놈의 턱이 완전히 부서졌다. 더는 웃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턱이 다 부서져도 괴물의 육체는 곧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데일은 놈의 몸통을 들어, 다른 괴물들을 향해 던져버렸다.
"캬아악!"
옆쪽에서 악어 대가리를 가진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려 데일에게 들이댔다.
데일은 허리를 꺾어 공격을 피한 뒤, 녀석의 주둥이를 힘껏 잡아 돌려버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가 반 바퀴를 빙글 돌았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데일은 팔에 강한 힘을 줬다.
우득!
괴물의 머리가 척추째로 뽑혀 나왔다.
사방에 피가 후두둑 튀었다.
데일의 몸에 묻은 피가 알아서 흡수되었다. 찌그러졌던 갑옷이 곧바로 수복되었다.
잔인하고 끔찍한 광경.
평범한 적이었으면 겁에 질려 주춤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가 만든 괴물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곧바로 다른 괴물들이 달려들려 했다. 그 광경을 보며 데일은 생각했다.
'끝이 없군. 광역기를 빨리 배우든가 해야지.'
두려움이 없는 건 데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피를 흡수한 몸이 이 살육에 크게 기뻐하고 있다.
상대의 숫자가 많은 건 중요치 않다.
생기를 통해 무한한 체력을 얻을 수 있는 흑기사에게 이런 싸움은 그저 즐거운 식사 시간일 뿐이다.
괜히 흑기사가 전장의 악몽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데일은 학살을 계속했다.
새로 얻은 워해머를 크게 휘두르며 괴물들 사이를 헤집어 놓았다.
쇳덩어리에 맞은 괴물들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데일은 워해머를 휘두르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반 언데드의 차가운 포효는 살아있는 것들의 신경을 자극한다.
다른 곳으로 빠지려던 괴물들이 더더욱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켄과 에스델은 둘 다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절반은 사람이라 들었는데, 믿기지가 않는데."
"...하켄은 전선에도 몇 번 가봤다면서요. 원래 흑기사들은 다 저럽니까?"
"흑기사 형씨들이 대부분 잘 싸우는 건 맞지만, 데일 경은 좀 더 흉측한.... 에크!"
하켄은 서둘러 방패를 휘둘렀다. 괴물의 이빨이 방패에 가로막혔다.
데일에게 대부분의 적이 쏠려 있다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하켄이 방패로 괴물을 막는 사이. 에스델이 메이스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에스델 역시 축복으로 강화된 상태이기에, 능히 괴물의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피가 사방에 튀며 에스델의 입에도 들어갔다.
"으엑. 퉤. 퉤."
"하하하! 뭐야, 제법 하잖아! 사제가 아니라 전사가 돼야 했던 거 아닌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싸움이 계속되었고, 수십 마리가 넘어가던 괴물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팍!
데일이 마지막 남은 괴물의 가슴에 롱소드를 박아넣었다. 꺼르륵거리며 피거품을 쏟아낸 괴물의 몸이 허물어졌다.
마침내 전투가 끝났다.
어스름하던 하늘에는 어느새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하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후, 후아. 죽는 줄 알았군."
엉덩이에 철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시체가 깔려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온 사방이 피와 살점이 가득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에스델은 지친 얼굴이지만, 차마 시체 위에는 앉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쭈그려 앉은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악마의 괴물들이 있다는 건, 악마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빨리 도시에 알려 병력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죽은 괴물의 시체에서 생기를 흡수하던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아니다. 악마가 이곳에 왔으면, 이놈들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어."
"예?"
데일은 시체에 건틀릿을 박아넣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원래 이런 괴물의 기억은 흐릿하고 중구난방이라 엿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 능력이 강화되어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격렬하게 싸우는 용병들이다.
'가란드가 보냈던 조사대군.'
용병들은 제법 실력이 있었다.
몰려오는 괴물들에 맞서 똘똘 뭉쳐 싸웠다.
그런데 괴물들 사이에 마법사가 있었다.
갑자기 날아온 보라색 불꽃이 용병들을 덮쳤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당해버린 조사대의 진형이 무너졌다.
그대로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괴물들은 그대로 용병을 씹어먹으려 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괴물들을 말린 뒤, 용병들을 사로잡아 어딘가로 끌고 갔다.
어둡고 깊은 지하 속으로.
데일이 중얼거렸다.
"악마를 따르는 마법사가 있군."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악마가 압도적인 힘으로 대륙의 절반을 정복하자, 신의 권위는 크게 훼손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빛의 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악마를 섬기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그리고 악마는 자기를 따르는 인간들에게 기꺼이 힘을 내어주었다.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이단 심문관들을 불러야 합니다."
"제 생각에도 일단 도시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까지 여기서 죽으면 걷잡을 수 없어요."
하켄과 에스델의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생각해볼 만한 점이 두 가지 있다."
"두 가지요?"
"첫째는 생존자가 있는 것 같다. 앞서서 왔던 용병들을 산채로 끌고 갔으니, 한두 명은 살아있을 수도 있어."
"...."
둘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악마가 부리는 괴물들에게 뜯어먹혔을 줄 알았는데, 설마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에스델은 놀라서 눈만 또르르 굴렸고, 하켄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악마 하수인 놈이 뭔 짓을 벌이는 것 같다."
"뭔 짓을 벌인다 하면...?"
"몰라. 무슨 의식 같은데. 근데 이 의식이 완성되어서 좋을 건 없겠지."
악마와 마법사에게는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그리고 지금 상대하려는 건 악마를 섬기는 마법사였다.
의식이 완성되면 어떤 개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에스델이 말했다.
"우리가 막죠."
"뭐?"
"악마의 하수인을 그냥 놔뒀다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칠지 모릅니다. 피해가 커지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 해요. 게다가 잡힌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사로잡힌 걸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도 외면할 수 없어요."
하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상 모르는 풋내기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악마의 하수인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알아? 그 새끼들은 가진 능력은 다 달라도, 하나 같이 좆 같은 새끼들이라고!"
"위험하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빛을 섬기는 몸으로써,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게다가 우리한테는 데일 경도 있잖습니까."
둘은 동시에 데일을 쳐다보았다. 데일은 무심하게 검을 닦고 있었다.
롱소드는 피와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 이전만큼 날카롭지 못해 보였다.
하켄이 데일에게 물었다.
"데, 데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설마 우리끼리 가자고 할 생각은 아니죠?"
데일은 하켄을 흘끔 쳐다본 뒤, 다시 검을 닦았다. 마치 뭔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당연히 가야지."
"예?"
진짜 악마라면 몰라도 상대는 악마의 하수인이다.
충분히 싸워봄 직하다.
게다가 데일의 기억으로, 게임 속에서 이름에 '악마' 달린 놈들은 사냥했을 때의 보상도 후했다.
악마 하수인의 생기와 영혼.
분명 더 큰 성장을 선사해줄 것이다.
"위험이 없으면 성장도 없어."
"아니. 그래도."
"겁나면 혼자서 돌아가던가."
하켄은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의뢰 중에 혼자서만 도망치라니. 정말로 그렇게 했다가는 앞으로 이 업계에서 일하긴 글렀다.
하켄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 흑기사 형씨라면.'
악마의 하수인이고 뭐고, 저 흑기사보다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수인을 처치하면 그만큼 주워 먹을 것도 많을 터.
분명, 한 몫 든든히 챙길 수 있을 거다.
"겁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 하켄. 절대 동료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그런 인간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
에스델이 중얼거리자 하켄이 찌릿 노려보았다.
반면, 무덤덤하게 검을 닦던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결정을 내렸으면, 주저할 이유는 없다.
하수인
* * *
악마의 하수인 하시나는 세심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제단에 꽂힌 검 하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과 검이 닿을 때마다 손끝이 튕겨나갔다.
따끔한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하시나는 웃었다.
"이제 조금이다. 조금만 더 하면 내 것이 될 것이다."
그 눈동자가 짙은 어둠 속에서 별빛으로 빛났다.
검에 서린 힘을 타락시키기 위해 상당히 오래 고생했지만,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하시나는 빨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서 검을 오염시켜서 그걸 자신의 주인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면 강대하고 자비로운 주인은 더 큰 힘을 그녀에게 내려주리라.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의 수고는 아무렇지 않다.
하시나는 조금도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때, 그녀의 권속 중 하나가 다가왔다.
권속은 고개를 조아리며 어눌하게 말했다.
"침, 침입자. 침입자가, 왔습니다."
하시나는 눈을 찡그리며 권속을 쳐다보았다.
"내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침입자든 뭐든, 네가 알아서 처리해. 또 이런 하찮은 일로 일을 방해하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하, 하지만. 생, 생, 생각보다 강해서...."
"썩 꺼져."
사납게 명령하자 권속은 허겁지겁 물러났다.
다시 어두운 공간에 혼자 남은 하시나는 작업을 재개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쇠를 긁는 듯한 중얼거림이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졌다.
* * *
데일과 하켄, 에스델은 뾰족 바위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켄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데일이 그런 하켄에게 말했다.
"아마 습격은 없을 거다."
"예?"
"아무리 악마의 하수인이라도 끝없이 괴물을 부릴 수는 없어. 방금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절반은 죽였을 거다."
"그건.... 그렇겠죠."
"게다가 우리는 놈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구태여 나와서 싸우는 것보다는, 자기 집에서 싸우려 드는 게 합리적이지."
하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성적으로는 데일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가슴은 당최 진정되지 않았다.
하켄은 후하후하― 호흡하며 요란을 떨어댔다.
반대로 에스델은 침착하다.
그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 일을 빛의 신자가 행해야 할 거룩한 성전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녀는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맞게 가고 있나요?"
"괴물의 기억을 살펴봤다. 가장 날카롭고 높은 봉우리의 중간 지점에 굴이 있었어."
"음? 가장 높고 날카로운 봉우리는 저거 아닌가요? 우리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는데요?"
하켄이 뒤쪽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주위에서 가장 높고 날카로운 봉우리였다.
에스델이 미간을 좁히며 핀잔을 줬다.
"하켄. 데일 경이 설마 그런 것도 헷갈렸겠습니까? 그렇죠 데일.... 경?"
어느새 데일이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하켄과 에스델이 급하게 따라붙었다.
"데일 경?"
"잠시 헷갈렸다."
"아. 예."
셋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해 최대한 체력을 아껴둬야 했다.
산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올빼미 우는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근방 전체가 잠들어버린 느낌이었다.
하켄은 횃불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시발. 조용하니까 더 쫄리네."
에스델도 동의했다.
"이렇게 기분 나쁜 곳은 처음입니다."
데일은 묵묵히 걸었다.
그 덤덤한 모습에 하켄과 에스델의 마음도 진정되었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일행은 우뚝 솟은 봉우리의 하단부에 도착했다.
데일은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다."
"어디.... 아."
큰 바위 두 개가 짓눌려 있었는데, 그사이에 틈이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자그마한 틈.
셋은 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그러니까.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들어갔다가는 딱 좆될 것 같이 생겼는데."
"내가 먼저 가겠다."
"예?"
데일은 흙을 파 틈을 좀 더 넓힌 뒤, 그 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멀뚱히 쳐다보던 에스델과 하켄도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이내 데일의 뒤를 따라 토굴에 몸을 밀어 넣었다.
토굴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 냄새야말로 이들이 맞게 찾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셋은 좁고 구불구불한 토굴을 기어서 이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토굴이 뚝 끊겼다. 흙에 가로막힌 게 아니라,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데일은 하켄에게서 횃불을 건네받아 아래를 향해 던졌다.
툭.
횃불은 머지않아 바닥과 부딪혔다. 다행히 바닥은 깊지 않았다.
데일은 토굴을 벗어나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
'토굴.... 은 아니군.'
잘 짜 맞춘 돌이 바닥과 벽, 천장을 덮고 있었다.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정사각형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하켄이 감탄했다.
"우와. 이런 시설은 언제 또 만들었데. 확실히 악마들이 능력이 좋긴 해."
"하켄. 불순한 발언입니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입을 삐죽이는 하켄에게 데일이 말했다.
"악마가 지은 게 아니다."
"예?"
"지어진 지 꽤 오래됐어."
끔찍한 냄새 사이사이로 아주 오래된 지하 특유의 쿰쿰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악마의 하수인이 이런 정교한 지하 시설을 단기간에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악마라면 몰라도, 그 하수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데일은 게임을 할 적의 지식을 더듬어 이 장소의 정체를 도출해냈다.
"유적이군. 건축 양식이나 분위기를 보면 드워프들이 만든 것 같고."
"어어. 드워프들 유적이라면...."
하켄의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함정이 아주아주 많을 거다."
"아니. 저는 보물이 많을 거라고 얘기하려 했는데요."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복도 저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뭐, 함정이 있더라도 악마 하수인 놈이 다 해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어서 가보죠. 왠지 이 여정이 끝나면, 부자가 되어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의욕이 난 하켄이 방패를 쥐고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일행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하켄의 예상은 맞았다.
함정은 악마의 하수인이 이미 다 해제해놓았다.
그것도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그냥 자기 쫄따구들을 밀어 넣으셨구만."
복도의 곳곳에는 함정에 당한 괴물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계속해서 풍기던 끔찍한 냄새의 원인은 바로 이런 시체들이었다.
셋은 혹여나 함정이 다시 작동할라. 시체들을 피해 조심스레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데일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왜 그러세요."
"온다."
하켄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어둠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켄의 방패 뒤에 숨어 메이스를 들고 있던 에스델은 다가온 적을 보며 경악했다.
"저건...!"
두 다리로 걷는 그건 분명 인간이었다.
관절들이 다소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렸고,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그래도 괴물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데일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아는 얼굴들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앞서서 왔던 조사대 용병들이군.'
그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다가왔다.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중년이었다.
그 입에서 쇠를 긁는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 돌아가라. 목숨을 부, 부, 부지하고 싶다면."
"뭐? 그냥 가라고?"
"가! 가라! 써, 썩 꺼져! 산채로 씹어먹기 전에!"
"꺼져!"
조사대 용병들이 일제히 외쳐댔다. 당황한 에스델이 물었다.
"용병들 맞죠? 대체 저 꼴은 뭐죠?"
"악마의 하수인 놈에게 사로잡힌 뒤, 회유당한 거다. 저놈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야."
붙잡혀서 고문당하는 와중에 힘을 주겠다고 유혹하면, 그 누가 거절할까.
에스델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치유할 수는 없나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들의 눈이 마치 딱딱한 돌덩이처럼 경화되어 있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뜻이다.
하켄이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악마 하수인 놈한테 붙어먹은 그렇다 치고. 왜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보고 꺼지라는 겁니까."
"왜겠나."
데일은 등에 멘 워해머를 꼬나쥐며 말했다.
"무서우니까지."
"예?"
데일이 순간적으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설마 이렇게 갑작스럽게 덤벼들 거라 예상 못 했는지, 가장 앞에 있던 용병이 급하게 방패를 휘둘렀다.
데일은 워해머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우득!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가 부러지며, 용병의 손까지 부러트렸다.
"그어어억!"
데일은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의 입에 건틀릿을 먹여주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것치고는 턱뼈가 쉽게도 부러졌다.
그럴 수밖에.
저들은 이제 갓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참이다.
자기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는 풋내기.
어눌한 말투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다.
게다가 악마에게 직접 힘을 하사받은 것도 아니다. 이들은 하수인의 권속 혹은 노예.
악마의 하수인이 노예들에게 힘을 줘봤자 얼마나 주었겠나.
데일은 계속해서 워해머를 휘둘렀다. 괴물이 된 용병들은 저항다운 저항조차 제대로 못 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그쯤 되니 하켄도 상대가 호구임을 알아보았다.
방패를 힘껏 내질러 용병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그아악!"
속절없이 얻어맞은 용병들은 바닥에 웅크려 비명을 질러댔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살려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협박하거나.
이들은 후자였다.
"그, 그만! 그만해라! 우리를 죽이면, 주인님께서 가, 가만 두지 않을 거다!"
하켄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이 새끼 이거, 그 짧은 사이에 악마 편 다 됐네."
"그분은 강하다. 그분은 무려 19위의 악마, 절멸의 아르구르!"
"악마가 왔다고? 이곳에?"
"...아르구르님께 직접 힘을 받은 강력한 마법사이시다."
아르구르.
데일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그 악마를 섬기는 하수인의 능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그 잘난 마법사는 지금 뭘 하고 있는데."
"그, 건...."
"됐어. 직접 찾아가면 되니."
데일은 워해머를 그대로 내리치려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멈췄다.
눈앞에 멈춰선 워해머를 보며 부들대는 용병을 보며 물었다.
"한 명은 어디 갔지? 원래 다섯 명이었던 거로 알고 있는데."
정신이 나간 건지 용병은 히죽대면서 답했다.
"아, 크큭. 그, 그놈. 그 멍청한 놈은 아직, 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아직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슨 성직자라도 되는 건가?'
철퍽!
원하는 답을 들은 데일은 그대로 용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악마의 힘을 받아 몸이 단단해졌으나, 그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데일은 한 놈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들에게 동정의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저 불우하게 악마의 하수인을 맞닥뜨려, 회유되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한번 악마의 힘을 맛보면 다시는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온갖 끔찍한 짓을 벌이다, 종국에는 모든 인간성을 상실한 악귀가 되어버리는 것.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미래다.
지금 필요한 건 어쭙잖은 동정심이 아닌, 확실한 사살이었다.
에스델은 용병들의 시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일이 끝나고, 제대로 장례를 치러드리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어서 가자."
데일은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 맴돌았다.
'지금까지 고문을 당했으면, 사실상 죽어있겠군.'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봐야 한다.
빠르게 걷다 보니 복도 양옆으로 크고 작은 방 여러 개가 나타났다.
하나 같이 피 냄새가 자욱했다.
데일은 가장 피 냄새가 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온 에스델이 입을 막았다.
"읍! 끄, 끔찍해요."
끔찍하다.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방에는 온갖 고문 기구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튀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웬 드워프가 꽁꽁 묶여 있었다.
아니, 드워프가 맞긴 한 건가?
상처가 너무 많은 데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저 체구가 작고 다부지니 드워프려니 하는 것뿐.
그 몸 위에 손을 갖다 댄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멈췄군. 죽었다."
"아아."
하켄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근데, 악마가 그냥 내버려 둔 게 수상하지 않나요? 혹시 모르니 태우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에스델이 수긍하고, 하켄이 주저 없이 횃불을 가져다 대려던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시, 부레. 나 안 죽었소."
하수인
* * *
"시발 괴물이다!"
깜짝 놀란 하켄이 본능적으로 방패를 내리치려 했다.
데일은 손을 뻗어 방패를 붙잡은 뒤, 드워프에게 물었다.
"분명 심장이 멈췄었는데?"
눈꺼풀을 움직일 힘도 없는지, 눈을 감은 드워프가 힘겹게 말했다.
"살아남으려다 보니 이것저것 잡다한 기술을 배웠소. 심장을 잠시지만 아주 느리게 뛰는 법 같은 것 말이오. 당신들은 누구시오. 내가 드디어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악마 하수인 놈이 또 현혹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오?"
"가란드가 보냈다."
데일의 대답에 드워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군. 너무 형편 좋은 상황이니, 오히려 현혹 마법은 아닌 것 같소."
드워프는 갖은 고문에 시달렸지만, 그 정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목소리에서는 오히려 여유마저 느껴졌다.
데일은 이 드워프에게 흥미가 일었다.
"이름을 말해라."
"발튼. 브릭스의 아들 발튼이오."
"그래 발튼. 몸은 좀 어떤가?"
"음. 솔직히 말해 죽을 맛이오. 호들갑이 아니라, 피를 좀만 더 흘리면 죽을 것 같소."
데일은 에스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뜻을 알아차린 에스델이 성수를 발튼에게 뿌렸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를 읊었다.
하얀 빛무리가 드워프의 몸을 감쌌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거, 위험한 싸움을 앞두고 성수랑 기적을 낭비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하켄이 꿍얼거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이 어느 정도 치유되자, 발튼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발튼이 힘겹게 고개만 데일쪽으로 돌렸다. 그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발튼이 물었다.
"다른 용병들은 어찌 되었는지 아시오?"
"다 죽었다. 네 동료들이었나?"
발튼은 바로 부정했다.
"하! 그럴 리가! 이번에 급조된 파티였소. 순 머저리 뿐이였지. 글쎄, 악마 하수인 놈이 고문을 준비하며 회유하려 하자, 칼이 살가죽에 닿기도 전에 홀랑 넘어가 버리더군. 그 네 놈 다. 덕분에 나는 집중 고문을 당해야 했소. 염병할 것들."
데일은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용케 너는 넘어가지 않았군.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우리 드워프의 정신력을 얕보지 마시오.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소. 게다가 악마에게 넘어갔다가는 죽어서 내 선조들이 골통을 깨려 할 텐데, 어찌 넘어갈 수 있겠소."
드워프 종족의 특징은 자부심과 고집.
발튼의 말에서는 그 두 가지가 모두 느껴졌다.
회유에 당하지 않는 고집, 드워프라는 자부심.
어느새 응급처치가 끝났다.
흉터는 남겠지만,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다.
이제 악마 하수인 놈을 상대하러 가야 한다.
떠나기 전에 데일이 물었다.
"발튼. 악마 하수인이 어떤 마법을 쓰는지 아나?"
"글쎄. 악마 특유의 요사하고 뜨거운 불꽃을 다루는 것 말고는 모르겠소. 우리를 한번 회유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잠깐. 설마 지금 그 자식을 죽이러 가는 것이오?"
"그래야겠지."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오! 세 명이 어떻게 해볼 만한 놈이 아니.... 엇."
놀란 발튼은 힘겹게 두 눈을 떴다. 그제야 자신을 도와준 은인의 정체를 눈에 담았다.
잠깐 굳어있던 발튼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몸이 으스스 떨리더라니. 설마 흑기사가 나를 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소."
"도와서 손해될 건 없으니까."
"그렇긴 한데, 젠장. 역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조사를 떠나다 악마의 하수인을 만나 사로잡히고, 죽은 줄 알았는데 구출대가 오고, 그 구출대를 이끄는 게 흑기사고.
상상치도 못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니,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어쨌건, 내가 말린다고 여기서 도망칠 것 같지는 않군."
"그랬을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한숨을 푹 내쉰 발튼이 말했다.
"이 근처에 내 배낭이 있지 않소?"
하켄이 땅에 널브러진 녹색 배낭 하나를 주워들었다. 배낭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거 같은데요?"
"그거 맞소. 다행히 하수인 놈이 신경도 안 썼군. 앞주머니에 주먹만 한 상자가 있을 거요."
하켄은 시키는 대로 배낭을 뒤졌다. 앞주머니에는 발튼의 말대로 주먹만 한 상자가 있었는데, 그 크기에 비해 상당히 묵직했다.
하켄은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앞쪽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있고, 위쪽에는 버튼이 하나 있었는데, 당최 무슨 용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켄이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야."
"내 걸작품이오. 위쪽의 버튼을 누르면, 구멍에서 비수가 날아가지. 가까이서 쏘면 철판도 뚫을 위력이니, 부디 놈의 머리통에 그걸로 구멍이나 하나 내주시오."
하켄은 데일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데일이 말했다.
"네 말대로의 위력이라면 상당히 비쌀 것 같은데."
"비싸고 자시고. 당신들이 죽으면 나도 꼼짝없이 죽은 목숨 아니오. 잘 써주시오."
당장 가진 물건을 아껴봤자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데일은 발튼의 그런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건 하켄 네가 사용해라."
"아. 그러죠 뭐."
"한발 밖에 못 쓰니 잘 생각하고 사용하시오."
"가자."
데일이 등을 돌리자 하켄도 그 뒤를 따랐다.
에스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꼭 그랬으면 좋겠군. 난 좀 자야겠소."
발튼은 눈을 감았다.
에스델마저 사라지자 방안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그 적막을 버텨내지 못한 발튼이 일부러 소리 내 중얼거렸다.
"젠장. 눈을 뜨면 다 꿈이었을까 봐 두렵군."
* * *
셋은 복도를 걸었다.
한없이 이어지던 복도의 저편에 드디어 끝이 보였다.
굳게 닫힌 쇠문.
저 안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하켄과 에스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막상 싸움이 가까워져 오니, 다잡았던 의지가 흐트러지는 것이다.
데일은 뒤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둘과 달리, 데일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쇠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끼익.
문은 쉽게 밀려났다.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널따란 정사각형 방 한가운데에 있는 정사각형 제단.
그 제단에 꽂힌 시커먼 롱소드 한 자루.
그리고 그 롱소드에 손을 가져다 대며 쉬지 않고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는 여자 마법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법사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분명히 귀찮게 하지 말라 경고했는데, 못 알아들은 모양이.... 끄헉!"
데일은 주저 없이 달려가 롱소드를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마법사의 반응이 늦었다.
롱소드가 마법사의 어깨 깊숙이 박혀 들었다. 하지만 데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밀려나지 않는다?'
온 힘을 실은 검이니, 당연히 마법사의 가녀린 몸이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한데. 마법사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거운 바위가 그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법사 역시 어이없는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세상이 아무리 갈 데까지 갔다지만, 대화도 없이 다짜고짜 검을 찌르는 건 어느 왕국 예절이지?"
"악마의 하수인이 예절도 따지나?"
"...."
듣고 보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잠시 떨떠름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일단 마법사는 데일을 힘껏 밀쳤다.
팔에는 예상보다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데일은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가 이쪽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눈이 보석처럼 경화되어 붉은빛을 띠는 것 외에는 평범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하지만 양 눈에 자리한 루비처럼 빨간 보석이 한번 반짝였다. 그러자 평범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신비롭고 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법사가 물었다.
"일단 물어볼게. 내 권속과 노예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설마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데일의 대답에 마법사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 다 죽였다 이거군. 이상한데. 아무리 그것들이 되다만 머저리들이었어도, 그 숫자는 무시할 수 없었을 텐데."
마법사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뿜었다.
빛은 데일과 일행의 몸을 느릿하게 훑었다. 벌레가 피부를 기어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에 하켄과 에스델이 움츠러들었다.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뒤에 있는 머저리와 빛의 노예를 자청하는 갈보는 하찮은 수준이네. 반면에 너, 어둠을 따르는 반 송장은...."
마법사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세상에. 이런 영혼은 본 적이 없는데. 너.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형태로...."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 특유의 '나만 아는 이야기 지껄이며 으스대기' 화법은 몹시 짜증 났다.
데일이 롱소드를 고쳐 들며 말했다.
"알아듣게 설명해라. 너만 아는 얘기 하지 말고."
"하하!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저놈을 사로잡아 주인님께 바치고, 이 검까지 드리면 난 그분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거야!"
"아니. 설명을 하라니까."
마법사가 이쪽을 보며 씨익 웃었다. 사람을 홀리는 요사한 매력이 있는 미소였다.
"간단히 말해, 너를 죽일 거라는 얘기야."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좀 알아듣겠군."
마법사는 양팔을 활짝 펴며 외쳤다.
"더러운 언데드야! 나는 19위의 악마, 별의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자, 절멸의 아르구르를 섬기는 사도 하시나다! 네 놈을 죽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두어라!"
하시나의 눈빛이 빠르게 명멸했다. 동시에 그녀의 신체가 기묘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피부 위에 비늘이 생겨 마치 바위처럼 딱딱해지고, 다리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꺾여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생긴 촉수 여섯 가닥이 되었다.
촉수에 빼곡히 박힌 빨판이 쉼 없이 뻐끔거렸다.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전에 상대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하시나는 계속해서 변태를 거듭해, 점점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갔다.
하지만 데일은 상대의 변신을 기다려주는 그런 명예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빠르게 달려든 데일이 그대로 그대로 롱소드를 내리쳤다.
하시나는 촉수를 힘껏 휘둘렀다.
까강!
촉수와 칼날이 부딪혔다. 놀랍게도, 버텨내지 못한 쪽은 롱소드였다.
롱소드의 검신에 쩌적 균열이 생겼다.
'또 깨졌네.'
데일은 롱소드를 휙 던진 뒤, 워해머를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기억을 훑었다.
쓸만한 정보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절멸의 아르구르. 하수인의 신체를 뒤틀어 강한 육체를 선사하는 악마. 사용하는 마법은 투박하지만, 더럽게 생명력이 질겼던 것 같은데.'
마법사가 주인으로 선택할 만한 악마는 아니었다.
아르구르는 육체파인데에 반해, 대부분의 마법사는 운동 부족이었으므로.
하시나는 직접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타입인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은 악마에게 붙어 기회를 노린 것인가.
알 수 없다.
데일은 그저 워해머를 휘둘렀다.
팡!
워해머가 놀랄 만큼 빠르게 휘둘러졌다. 망치의 뾰족한 끝이 하시나의 암석 같은 피부를 강타했다.
비늘 두어 개가 후두두 떨어졌다.
"꺄악!"
생김새에 비해 너무나 인간적인 비명을 내지른 하시나가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힘과 무게가 모두 실린 일격이다.
게다가 저 벌름거리는 빨판에 닿는다면, 아무리 데일이라도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빠르게 뒤로 두 발짝 물러난 데일은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엿보았다.
하시나가 외쳤다.
"뭐하나! 처음의 그 기세는 어디 갔지? 언데드 주제에 겁을 먹은 거냐?"
하시나의 촉수가 바닥을 짚었다. 빨판이 지면의 판석에 달라붙었다.
촉수에 힘을 주자 판석은 너무나 쉽게 들렸다. 하시나는 판석을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짜증 나는군.'
판석을 요리조리 피하던 데일은 슬슬 짜증을 느꼈다.
다른 무엇보다, 저 땍땍거리는 마법사의 주둥이부터 막고 싶었다.
데일은 빠르게 날아오던 판석을 덥석 붙잡았다.
묵직한 무게에 양손에 전해졌다. 데일은 판석을 멈추려는 대신, 그 힘을 역이용했다.
날아오는 힘을 이용해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데일의 몸이 한 바퀴 돌았다.
판석은 아직 그 힘을 잃지 않았다. 데일은 그곳에 자기 힘도 실었다.
판석이 더욱 맹렬한 속도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투척을 준비하던 하시나가 서둘러 촉수를 움직여 머리를 방어했다.
콰광!
도저히 돌 부서지는 소리로는 들리지 않는 굉음이 울렸다.
박살 난 판석이 사방에 튀었다.
아무리 악마의 하수인이라도 얼얼한지. 하시나가 잠깐 굳어버렸다.
하지만 이내 자기 실책을 깨닫고는 서둘러 시선을 들었다.
이미 데일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왼손에 들린 손도끼가 하시나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콰득!
단단한 피부 탓에 뇌까지 꿰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록색 피가 튀는 것이, 분명 타격이 있었다.
데일은 하시나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오른팔로 그 목을 휘감았다. 다른 팔로는 하시나의 겨드랑이로부터 손을 집어넣어, 양손을 삼각형으로 교차했다.
단단히 고정 당한 하시나는 당황했다.
생각보다 데일의 힘이 강했다.
게다가 힘을 주는 방향이 절묘하다.
여섯 촉수를 모두 이용해도 곧바로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데일 역시 무기를 휘두를 수 없다.
목을 힘껏 조이고 있다 하나, 악마의 하수인은 고작 숨을 못 쉰다고 죽는 놈들이 아니다.
하시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외쳤다.
"켁! 무, 무슨 개수작이야!"
"너무 나만 보는 것 같아서."
"뭐?"
"하켄!"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하켄이 팔을 힘껏 뻗었다.
하시나는 재빨리 그 손을 살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들려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손에 든 건 자그마한 상자였다.
하시나는 하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반응이 한발 늦었다.
하켄이 상자를 하시나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하시나가 외쳤다.
"뭐야!"
"이 머저리님께서 네년에게 선사할 선물이지."
"뭐?"
하켄은 버튼을 눌렀다.
틱, 티틱. 태엽 돌아가는 소리와 용수철이 팽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 순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하켄이 뒤로 밀려났다.
"어엇."
손에 전해지는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하켄은 서둘러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자기 역할을 다한 상자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하켄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시나를 살폈다.
그리고 환호를 내질렀다.
"됐다!"
그 단단한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머리 건너편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었다.
구멍에서는 끈적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하시나는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너희...."
"그래그래. 똑똑히 기억해. 데일 경과 하켄. 너를 쓰러트린 이름이다!"
데일은 촐싹거리는 하켄에게 그만하고 혹시 모르니 물러나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하시나의 표정에는 이미 여유가 돌아왔다. 그 보석 같은 눈이 한번 깜빡였다.
그러자 머리에 뚫린 구멍이 경악할 정도로 빠르게 살이 차올랐다.
엇, 하는 사이에 완전히 아물어버렸다.
하시나는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준비하게 이게 다라고 하지는 않겠지?"
데일은 생각했다.
'그래. 너무 쉽다 했다.'
마검
* * *
"고작 머리를 꿰뚫은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물론 데일도 그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발튼이 건네준 기계가 얼마만큼의 위력을 발휘할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치명타는 몰라도 유의미한 피해는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아니었다.
하시나의 몸 안에 흐르는 악마의 힘과 별의 주문은 상처를 곧장 재생해냈다.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 게다가 튼튼함에 과도할 정도로 투자한 녀석이고.'
좀 더 어려운 싸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자기 말에 대답해주지 않자, 하시나는 흥이 식은 얼굴로 말했다.
"슬슬 귀찮네."
그녀가 입을 오므렸다. 데일은 무언가 낌새를 느꼈다.
멍하니 서 있던 하켄의 뒷덜미를 잡고 힘껏 뛰었다.
그다음 순간. 하시나의 입에서 보라색 불꽃이 분사되었다.
화아아아!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 불꽃이 물러나는 데일과 하켄을 노렸다.
그 속도가 빠르다.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은한 빛을 뿜는 장막이 불꽃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시나는 자기 이마에 박힌 손도끼를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보호 기적인가. 하찮은 수준이네."
하지만 그 하찮은 기적이 데일과 하켄의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켄은 죽다 살아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거야. 지가 뭐 드래곤이라도 돼?"
"악마의 주문이다. 그보다 에스델. 괜찮나?"
악마의 불꽃은 예상보다 거셌고, 그걸 막아내기 위해 에스델은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린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요."
"기적을 얼마나 쓸 수 있겠나."
"치유 기적이랑 축복 정도는 조금 쓸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은 힘들고요."
"그런가."
하켄과 에스델이 불안하게 데일을 쳐다보았다.
상황은 명백히 좋지 않았다.
계속 싸운다고 이기 수 있을까?
문제는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봤자 저 악마의 하수인이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툭 내뱉었다.
"나 혼자 싸우겠다. 너희는 도망쳐라."
"예에?"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둘에게 데일은 담담히 말했다.
"의뢰 전에 내가 말했지 않나. 적어도 죽지는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지키는 거다."
"그, 그렇지만."
"그리고 너희는 저 하수인을 상대로 싸우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희가 얼쩡거리면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껏 에스델과 하켄의 위치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하시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 자기가 지닌 모든 역량을 끌어내고 싶었다.
에스델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데일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하켄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에스델의 팔을 붙잡고 뒤로 잡아끌었다.
"가자."
"하지만!"
"우리는 방해밖에 안 돼. 너도 알잖아."
"...."
갈등하던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말없이 데일에게 고개만 숙였다.
데일도 무심하게 손만 흔들어주었다.
둘이 사라지자, 흥미롭게 지켜보던 하시나가 물었다.
"동료를 위해 희생한다라. 너. 정말로 언데드가 맞아? 내가 아는 언데드랑 느낌이 많이 다른데."
"방해꾼들을 치웠을 뿐이다."
워해머를 든 데일이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하시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셋이서도 못 이기는 걸 혼자서 이기겠다고? 언데드 주제에 제법 웃기는 걸 잘하네?"
하시나는 좀처럼 긴장하지 않았다. 이미 이기기라도 한 듯한 태도다.
데일은 조금 짜증이 났다.
다른 것보다, 자꾸 언데드라고 부르는 게 신경을 거슬렀다.
그래서 데일은 땅을 박차 워해머를 휘둘렀다.
"어딜!"
하시나의 촉수가 세 방향에서 데일에게 쇄도했다.
데일은 그 궤적을 읽었다. 좀처럼 빈틈이 없다. 그래서 빈틈을 만들기로 했다.
마치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휘두르듯. 허리를 돌려 워해머를 힘껏 휘둘렀다.
퉁!
워해머와 촉수 두 개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촉수에 달라붙은 비늘 두어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을 받은 촉수가 경직되었다. 데일은 그 빈틈을 이용해 워해머를 찔러넣었다.
창처럼 뾰족한 워해머의 머리 부분이 하시나의 가슴에 박혔다.
"꺄악! 이게!"
비명을 내지른 하시나가 곧장 반격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데일이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분노한 하시나가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여섯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이동하는 하시나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데일은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로.
데일은 정사각형 방 안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하시나가 촉수의 빨판을 이용해 벽과 천장에 달라붙으며 데일을 추격했다.
둘 간의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좁아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어김없이 데일의 워해머가 날아들었다.
쇳덩이로 연달아 얻어맞은 하시나가 외쳤다.
"이 개 같은 새끼! 너는 기사잖아! 조금이라도 명예가 있다면 도망치지 말고, 정정당당히 맞서!"
"그런 거 없어."
달려가던 데일은 그대로 벽을 박찬 뒤, 몸을 휙 틀어 하시나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온 힘과 무게를 실은 쇠장화에 얻어맞은 하시나가 치를 떨었다.
반격을 해보려 해도 이미 데일이 다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거듭된 공방에 이제 둘은 서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하시나는 데일이 혼자 남은 게 단순히 희생이 아니란 걸 인정하게 되었다.
'아까랑 움직임이 전혀 다르잖아.'
하켄과 에스델을 신경 쓸 때 와는 다르다.
지금의 데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오로지 승리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오로지 싸움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와 같았다.
반대로 데일은 점점 하시나의 싸움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읽히기 시작했다.
'몸은 좋은데, 센스가 영 별로군. 거리 감각도 약해. 결국에는 마법사라 이건가.'
데일은 워해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시나는 분명 괴물 같은 튼튼함에 재생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게 하시나가 무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때리면, 죽겠지.'
분명 길고 짜증 나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무한한 체력이 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이대로라면, 말이다.
하시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네. 인정할게. 나는 몸 쓰는 일은 영 젬병이라서 말이야."
"마법사가 다 그렇지."
"그것도 인정해. 그러니까, 조금 무식하게 갈게."
말을 마친 하시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시나의 흉측한 몸이 순식간에 불어나며 방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노림수는 간단했다.
방 전체를 몸으로 덮어 데일을 그대로 뭉개버릴 셈이다.
단순하지만 대처가 어려운 공격.
'아직 여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수를 내야 한다.
이미 출구는 막혔다. 어서 저 풍선 같은 몸에 구멍이라도 내야 한다.
데일은 워해머를 휘둘렀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오히려 빨판에 달라붙은 워해머를 놓치고 말았다.
하시나의 촉수가 워해머를 휘감자, 쇳덩어리는 쉽게도 구부러졌다.
'이런.'
롱소드와 워해머는 부러지고, 손도끼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맨몸으로 저 괴물을 상대하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무언가 날카로운 게 필요해.'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찾아냈다.
제단의 정중앙에 꽂힌 새까만 롱소드 하나.
분명, 처음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 하시나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물건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데일은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 데일의 의도를 알아차린 하시나가 비웃었다.
"하하! 그 물건의 어떤 물건인지 알고 손대는 거야?"
"뭔데."
"불신자 드워프 왕국에서 만든, 모든 신성과 이적을 거부하는 보검에 대해서는 너도 들어봤겠지?"
데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불신자 드워프 왕국 얘기는 얼마 전에 들었던 것도 같은데....
이미 승리를 확신한 하시나는 데일에게 좌절감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죽거리며 설명했다.
"신성 거부자는 그 마음속에 조금의 신심도 없는 불신자만이 다룰 수 있는 보검이다! 아니, 마검이라 불러야 할까? 밤의 여신을 섬기는 너 같은 언데드가 다룰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데일은 롱소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제단에 박혀 있는 검을 힘껏 뽑았다.
신성 거부자라 이름 지어진 이 마검은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검다.
먹물을 뿌린듯한 검은색이 아니라, 흑요석을 잘라 만든 것처럼 차갑고 번뜩이는 검은색이었다.
알 수 없는 가죽을 감아놓은 손잡이 윗부분에 넉넉하게 솟아 나온 크로스 가드.
곧게 뻗어 나가다가 끝부분을 뾰족하게 마무리한 검신.
그리고 그 검신 위에 알 수 없는 문자로 새겨진 하얀 글씨.
데일은 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게 마검인지 뭔지는 몰라도 한가지는 알 수 있다.
다시 없을 명검이라는 걸.
데일은 검을 굳게 쥐었다.
롱소드치고는 조금 길고, 무거운 검이었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하시나가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검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다고? 전승이 사실 가짜였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만졌을 때는 분명...."
데일은 새로 얻은 이 검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주위에 적당한 목표가 있었다.
데일은 하시나의 거대한 촉수를 향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하시나의 촉수가 너무나 가볍게 잘려나갔다.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검이었다.
"꺄아아악!"
하시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상처에서 피가 벌컥 쏟아져나왔다.
하시나는 바로 재생하려 했다.
몸속에 흐르는 악마의 힘과 별의 주문을 이용하면, 곧바로 아물 것이다.
하시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깨졌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
하시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신성 거부자의 힘을 끌어냈다고? 그럴 리가. 그건 불신자만이 다룰 수 있는데...."
데일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 절반은 다룰 수 있겠군."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음."
데일은 뭐라 더 설명해주려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대신 데일은 검을 휘둘렀다.
하시나의 촉수가 썩둑 썩둑 잘려나갔다.
재생력을 잃은 하시나는 이제 쓸데없이 커다랗기만 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악! 아악!"
비명을 내지르던 하시나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던 하시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하지만 순순히 죽어주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이렇게 된 거, 너라도 데려가겠다!"
하시나가 모든 여력을 입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공멸을 각오했다.
오므린 입에서 불꽃의 파도가 쏟아져나왔다. 보랏빛 파도였다.
데일은 쇄도해오는 불꽃을 냉정히 바라보았다.
저런 것에 제대로 맞았다가는 갑옷을 포함해 온몸이 녹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멈춰 버린 심장은 뛰지 않는다.
두려움은 일절 없다.
데일은 롱소드를 들었다. 시선은 불꽃 너머에 있을 하시나에 고정했다. 땅을 박찼다. 육중한 몸이 날아올랐다.
불꽃이 가까워졌다. 열기가 갑옷을 덥혔다.
데일은 불꽃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검과 불꽃이 닿았다.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던 불꽃이 한순간.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불꽃이 걷히며 하시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당황.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시종일관 오만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훨씬 보기 좋군.'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하시나가 뭐라 외칠 새도 없이. 들어 올렸던 롱소드를 벼락처럼 내리쳤다.
서걱!
하시나의 머리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고. 통제를 잃은 불꽃이 방안에 휘몰아쳤다.
마검
* * *
마검은 잠시 불꽃을 갈랐을지언정,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방안을 가득 메웠던 불꽃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불꽃에 삼켜진 데일의 갑옷이 군데군데 녹아버렸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데일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흐느적거리는 하시나가 보였다.
놀랍게도, 하시나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반으로 쪼개졌던 머리가 어느새 다시 붙어 있었다.
'질긴 녀석이군.'
하지만 머리 외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눈동자가 흐릿하다. 점점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악마의 힘을 받았어도, 이 정도의 타격을 입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데일이 다가갔다.
하시나가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이, 이럴 줄 알, 았으면 아르구르를 따르는 게 아, 니었는데."
데일이 말을 받았다.
"아르구르가 아니면 뭐. 가니아고스라도 따를려고?"
데일이 게임에서 상대해봤던 악마 중 하나였다.
마법사들의 우상.
기상천외한 주문을 사용하는 게 몹시 짜증 나는 적이었다.
하시나는 웃었다.
"흐. 흐흐. 어디 산속에 처박혀 지냈어? 가니아고스가 뒤, 진지 언젠데."
잠깐 멈칫한 데일이 곧바로 물었다.
"...그놈이 죽었다고? 누가 죽였지?"
하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경 거슬리게 하는 웃음을 계속 흘리며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언데드야 지금 승리를 마음껏 기뻐해라. 주인께서 나의 눈으로 너를 보았으니, 반드시 복수해주실 것이다."
"...방금까지는 아르구르를 선택해서 후회한다며."
"아아. 별이 가까워지고 있어. 이 넓은 우주에 자그마한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바스러지는구나."
하시나는 제정신이 아닌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돌연, 그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내,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무슨 짓을 해버린 거야. 난 그저 힘을 얻어 복수를. 어머니, 아버...!"
써걱!
데일은 하시나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 심장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어마어마한 생기와 잔혼이 흘러들어왔다.
녹아내렸던 갑옷이 빠르게 원상태를 되찾았다.
굳이 하시나의 기억을 엿보지는 않았다. 솔직히, 관심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하시나는 그녀 나름의 이유와 사연으로 인류를 배신하고 악마를 섬겼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다.
하시나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많은 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 이상 데일이 알 필요는 없었다. 데일은 그저 만족할 뿐이었다.
'어쩌면 등급이 오를 수도 있겠는데.'
더 많은 성장. 그리고 튼튼한 검.
데일은 이번 의뢰로 얻은 게 많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유적을 떠나기 전에 데일은 하시나의 머리를 두어 번 더 베었다.
악마의 하수인이니 혹시나 되살아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마무리 작업까지 마친 데일은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마치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옛 드워프들의 유적에는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 * *
유적을 나서자마자 데일은 하켄과 에스델, 그리고 둘의 부축을 받는 발튼과 마주쳤다.
셋은 홀로 나오는 데일을 보며 깜짝 놀랐다.
"데, 데일 경!"
"정말 데일 경 맞아요? 혹시,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거나."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여깄나. 도망치라고 했잖아."
에스델과 하켄은 서로 눈짓을 하며 우물쭈물 얘기했다.
"그게, 역시 그냥 두고 가기는 좀 그래서...."
"저는 왠지 데일 경이 이길 것 같더라고요."
한쪽은 양심 때문이고, 한쪽은 데일이 이길 것 같아서 남았단다.
동료를 버리지 않는 그 마음은 좋게 봐줄 수 있으나....
"만약 내가 패배했다면, 누군가는 길드에 소식을 전했어야 한다. 하지만 너희는 여기 멀뚱히 서 있다가 하수인 놈에게 사로잡혔겠지."
"예...."
"큼."
"특히 하켄. 에스델은 몰라도 용병 생활을 오래 한 너는 그러면 안 됐다."
데일의 말이 옳았다.
이들이 여기에서 기다린다고 데일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겠는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맞았다. 그게 이성적이다.
하켄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데일 경. 도망쳐야 하는 게 맞았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데일이 생각하는 하켄은 노련한 용병이다.
그는 과거 원아이 무리에 쫓길 때도, 늘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용병에게서 그때의 냉정함은 보이지 않는다.
데일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아니면 심정에 변화가 있던가.'
문득, 그가 술집에서 혼자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랜 친우의 죽음이 하켄을 바꾼 것일까?
데일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데일은 이겨서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
비록 하켄과 에스델의 판단력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지만.
적어도 둘이 전투 도중 동료를 버리고 냅다 도망쳐버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된 거다.
어느새 흐릿한 빛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싸우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출발하기에는 에스델과 하켄이 너무 지쳤다.
발튼의 상태 역시 좀 더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둘러앉았다.
하켄은 온기를 쬐며 중얼거렸다.
"의뢰 출발하기 전까지는 악마 하수인과 싸우리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데일 경. 뭐 값나가는 물건들은 없었습니까? 하수인 놈이 보석이나 금화 같은 걸 들고 있지 않았나요?"
"아니. 있었어도 모두 불에 녹았을 거다."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허탕이었나."
"대신 이걸 주웠다."
데일은 하시나를 어떻게 이겼는지 짧게 설명하고는 검은색 롱소드를 보여주었다.
에스델과 하켄, 발튼 모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럼 불신자 드워프 왕국이 진짜로 있었다는 거예요? 허. 난 당연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하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별로 좋은 느낌은 주지 않네요.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에스델은 꺼림칙하게 여겼다.
"...."
마지막으로 발튼은 한참을 말없이 롱소드를 관찰했다.
그러다 눈을 감고는 중얼거렸다.
"신성 거부자."
데일이 물었다.
"하수인도 그 이름으로 부르던데. 유명한가?"
"유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유명한 이야기요.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데일은 어서 더 설명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발튼이 이야기했다.
"먼 과거, 빛의 신께 저주받은 드워프들이 있었소. 왜 저주를 받았으며,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는 전해지지 않소. 그저 끔찍한 저주였다는 것밖에는. 신께서는 아마 이 드워프들이 참회하고, 회개하길 바랐던 것 같소. 하지만 이 불경한 드워프들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거부해버렸지."
"허. 미친놈들이구만."
하켄이 중얼거렸고, 에스델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튼이 이어 설명했다.
"저주로 드워프들은 하나둘 쓰러졌소. 그러다 국왕만이 홀로 남게 되었지. 국왕은 백일 밤낮을 들여 검 하나를 만들었고, 그 검에 온 왕국의 염원을 벼려내었소. 그게...."
"이거군."
"그렇소."
데일은 마검을 들어 올려 유심히 살폈다. 그 안에 깃든 역사를 들으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러다 검신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켰다.
"이건 무슨 글자지?"
"고대 드워프 문자요."
"읽을 수 있나?"
발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겠다."
데일은 다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신에 새겨진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홀로 남은 드워프 국왕은 멀쩡한 정신으로 이 문장을 새겼을까, 아니면 이미 미쳐버린 후였을까.
발튼 역시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마검은 모든 신성을 베어낼 수 있다고 하오. 오직, 불신자만이 다룰 수 있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그건 거짓이었나 보오."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시오."
데일은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이 검이 하수인의 불꽃을 베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문으로 만들어낸 불꽃이었던 것 같다. 신성이 아니라."
"어떻게 주문을 베었을까 물으시는 것이오?"
"그래."
발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드워프 국왕에게는 주문이나 신성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아니겠소."
"그렇군."
"흠. 흠흠. 거기까지 하시죠."
듣다 못한 에스델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나 불경하고, 신성모독적인 대화였던 탓이다.
하켄도 멍하니 있다가 얘기했다.
"음, 대화가 조금 어려운데. 어쨌거나 대단한 보검. 아니, 마검이 있었고, 악마 하수인 년이 그걸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거네요?"
발튼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깔끔한 설명이오. 대체 몇천 년간 파묻혀 있던 유적을 어찌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 뒤로 일행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지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데일을 제외한 모두가 잠에 들었다.
데일은 투구를 벗고, 창백한 얼굴에 모닥불을 쬐며 여러 생각을 했다.
악마 하수인 하시나. 그녀가 보여준 막강한 악마의 힘. 신성 거부자. 불신자 드워프들.
그리고 이미 죽었다고 전해진 악마.
'악마가 그렇게 쉽게 죽는 게 아닌데.'
이곳은 데일이 플레이어하던 게임 속과 배경이 같다. 덕분에 데일의 기억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건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 시대가 조금 다르다. 데일이 활동하는 지금 이 순간은 게임 배경에서 5년이 지난 후다.
데일은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보아왔던 5년전의 과거를, 그러니까 게임의 배경을 떠올렸다.
악마의 군세가 온 대륙을 집어삼키려 하던 처참한 시대.
당장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세기말적 분위기.
플레이어가 구하지 않으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는 그런 암울한 세계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최전선의 상황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단다. 악마에게 속절없이 밀리는 게 아니라,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
하켄처럼 전선에 있던 용병들이 도시로 돌아오는 모습도 보인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증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데일의 기억 속 악마들은 불합리할 정도로 강한 적이다.
게임사가 밸런스를 잘못 설정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을 정도이니, 플레이어도 악마를 상대함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며, 가끔 꼼수도 부려야 했다. 가끔은 직업을 바꿔가며 도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끝끝내 악마의 왕을 토벌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정도로 악마는 강력하다.
그런 괴물들이 스러졌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어디까지나 게임과 같은 배경을 가진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게이머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 세계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악마를 사냥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이런 고민을 계속하다 보면 늘 같은 의문에 다다랐다.
대체 누가, 왜 데일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걸까.
한때는 거의 매일 같이 그 의문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혼자 고민해본들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밤의 여신뿐이다.
그리고 밤의 여신은 대답을 주지 않았다.
정답에 다다를 수 있는 막연한 방향만 제시해주었을 뿐.
"으음. 얼마나 잔 거죠?"
졸음기 가득한 에스델의 목소리가 데일의 상념을 깨웠다.
에스델은 데일을 보고,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뭐 고민 있습니까?"
"왜."
"아니 그냥. 평소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해 보여서 물었습니다. 그냥 제 감이지만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데일 경도 좀 쉬세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투구를 다시 눌러썼다.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그가 가야 할 길은 단순했다.
더 강해지고, 정진한다. 그리하면 여정의 끝에 원하는 걸 거머쥘 수 있을지니.
데일은 자기를 묘하게 바라보는 풋내기 사제를 보며 생각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고.
빈민가
* * *
정오가 되자 일행이 모두 일어났다.
데일은 마차를 끌고 왔다.
하켄은 다시 유적에 내려가 죽은 용병들의 장비를 챙겼다.
마차에 오른 뒤는 다시 평온한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를 지루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죽을 위기에 한번 처하니, 이런 여유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발튼은 고개를 젖힌 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하늘에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눈부신 걸 보듯 쳐다보았다.
"설마 이 풍경을 살아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거 감상적인 드워프 양반이구만."
하켄이 피식 웃자 발튼도 미소지었다.
"그대들에게는 도움을 받았소. 특히 데일 경께는 더욱. 목숨의 빚을 졌으니 반드시 갚도록 하겠소."
발튼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나는 기계 장치를 만지는 기술자이자 여느 드워프들처럼 대장장이이기도 하오. 게다가 석궁을 제법 다룰 줄 아는 용병이기도 하지.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기계 장치라.
데일은 발튼이 건네주었던 상자가 떠올렸다. 버튼을 누르면 비수가 나가는 장치.
그 조그마한 상자에서 쏘아져 나오는 비수는 악마의 두개골도 뚫었다.
그 정도로 솜씨 좋은 드워프이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거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했다.
"생각해둔 게 있는데, 나중에 얘기하겠다."
"기대하고 있겠소."
이때다 싶은 하켄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나는 방패 좀 봐줘요. 한동안 수리를 안 했더니 영 불안하네."
"한번 보겠소. 이런. 상태가 영 좋지 않군."
데일은 일행의 대화 소리와 말발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검을 닦았다.
마검이 햇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다.
* * *
사흘 뒤 정오 무렵에 이레네에 도착했다.
빈민가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아이들이 몰려왔다.
이제는 데일이 식량을 적선해준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데일은 넉넉히 준비해뒀던 식량을 에스델에게 넘겨주었다.
"나눠줘라."
"예? 제가 말입니까?"
"나는 아이들이 무서워한다."
식량이 든 배낭과 데일을 번갈아 쳐다보던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무서운 흑기사보다는 어여쁜 사제가 더 인기가 많았다.
평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에스델은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며 말했다.
"저기 있는 기사님이 나눠주신 거야. 데일 경께 감사하며 먹으렴."
"감사합니다 사제님!"
"아니, 나 말고...."
에스델은 일부러 데일의 이름을 들먹였다. 호의를 베푼 자가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데일은 구태여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으며, 발튼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웬 흑기사가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발튼이 물었다.
"데일 경.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뜬금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밤의 세례를 받은 흑기사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감정들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다 들었소. 그나마 남은 인간성도 뒤틀린 데다, 언데드로서의 충동까지 있다고 들었지. 그래서 위험한 것이고."
"아니. 이 양반은 별 얘기를 다 하네...."
하켄이 슬쩍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데일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고, 발튼도 말을 계속했다.
"나도 흑기사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소. 전장에서였지. 적들이 너무 강했는데, 흑기사가 놈들의 한복판에서 맹수처럼 날뛰었소. 그러다 집중 공격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소. 그때 그 흑기사가 어떻게 했냐면...."
"아군을 죽여 회복했겠지."
말을 받은 건 하켄이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일이 전장에서는 생각보다 흔히 벌어지는 듯했다.
"맞소. 흑기사는 아군을 죽여 회복했고, 적을 죽이다 또 상처를 입으면 근처에 있는 아군을 죽였소. 지휘관들은 그냥 내버려 두었지. 적어도 흑기사가 아군보다 적군을 많이 죽였으니까. 그건 절대 인간이 아니었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소."
데일은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질 거라고 느꼈다.
그래서 무감정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데일 경은 그들과 다른 것 같소. 그것도 상당히 많이. 특히 오늘은 놀라울 정도인데....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데일 경은 정말, 저들을 돕고 싶어 돕는 것이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오?"
데일은 발튼에게 눈길을 주었고, 발튼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데일과 시선을 마주쳤다.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묻고 싶었던 게 이거였나.'
다른 의도라. 애매한 표현이었다.
무얼 의심하는 걸까.
혹시라도 데일의 행동에 사악한 음모라도 숨어 있다 여기는 건가?
'아니. 표정 보면 그건 아닌데. 그냥 진짜로 궁금한거군.'
지식인 특유의 호기심일까.
발튼 나름으로는 큰 모험이었을 거다. 기분 나빠진 데일이 언제 훼까닥해서 검을 휘두를지, 그는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빙빙 돌려서 설명한 것일 거다.
데일은 기꺼이 이 용기 있는 드워프에게 답해주기로 했다.
"나도 모른다."
"...예?"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인지 아닌지.
데일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굳이 답하자면,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군."
"음. 그래도 뭔가, 좀 더 설명을 해주시면...."
귀찮은 듯. 투구를 긁적이던 데일이 말했다.
"내 조부께서 말하길, 원래 이런 일은 특별한 의도 없이 그냥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조부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그냥이라...."
데일의 대답을 곱씹던 발튼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을 들었소. 경의 조부께서는 실로 훌륭하신 분이군."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 빼면 좋은 분이었지."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발튼은 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조용히 눈치만 보던 하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드워프 형씨는 궁금한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적당히 단순하게 사는 게 속 편하고 좋은데."
"하하. 이리 태어난 걸 어찌하겠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에스델이 빈 배낭과 함께 되돌아왔다. 에스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후.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다른 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에스델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도시를 향해 느릿하게 이동했다.
어느새 몰려들었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 아이들은 이쪽을 흘끗거리다, 데일과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까딱 숙였다.
데일은 손을 휘저었다.
아이들이 후다닥 도망쳤다.
어깨를 으쓱한 데일은 마차에 등을 기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찌릿한 적의가 느껴졌다.
적의에 민감한 데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전처럼 허름한 집들이 서 있을 뿐이었다.
데일의 맞은편에 있던 하켄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데일 경?"
"아니. 아무것도. 기분 탓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요?"
마차가 도개교를 넘어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 * *
일행은 우선 용병 길드로 향했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악마 하수인의 출현은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다.
넷은 각각 다른 길드 직원에게 의뢰 내용을 보고했다.
데일의 상대는 가란드였다.
데일은 악마 하수인 하시나를 상대한 얘기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간결하게 설명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가란드는 악마 하수인 얘기가 나오자 크게 놀랐고, 그 하수인을 데일이 처치했다는 대목에서는 경악했다.
"아르구르의 사도 하시나. 제법 유명한 악마 하수인입니다. 그 괴물을 데일 경 혼자서 토벌했다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데일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가란드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지 않네요."
"무엇이 말이오."
"요즘 들어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군인이나 용병들이 이곳 아레네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데일이 말을 받았다.
"하켄 같은 경우 말이오."
"비슷합니다만, 하켄은 냉정히 말해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죠. 하켄보다 훨씬 강력한 실력자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오고 있어요."
"그렇군."
"심지어 이번에 악마의 하수인이 도시 근처에 나타났으니, 후방을 수호한다는 명분까지 생겨버렸군요. 더 많은 수가 몰려들 겁니다."
데일이 물었다.
"실력자가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니오? 용병 길드에 일이 너무 많아 늘 사람이 모자란다고 들었는데."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들이 순순히 용병 일을 해줄지 의문이군요. 게다가 이레네의 세력 구도는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곳에 새로운 힘이 흘러들어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균형이 깨질 것이다.
그리고 균형이 깨진다면 혼란이 발생할 거다.
가란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빈민가가 쪽 움직임이 수상쩍습니다. 성안에 진출하려는 건달들도 있고,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려는 낌새도 있고."
외곽 안에 진출하려는 건달? 분명 데일 역시 얼마 전에 그런 놈들과 마주했었는데....
'취한 노새 여관.'
문득 빨간 머리 여주인과 그녀를 괴롭히던 건달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건달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았을까?
여관이 없어지면 데일은 또 다시 마구간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그 당찬 여자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확인할 필요성은 느껴졌다.
"보고는 끝났으니, 일어나겠소."
"아.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길드를 대표해 말하겠습니다. 악마 하수인을 처치하고, 용병을 구출해준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수나 준비해두시오."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는 가란드에게 데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출구로 걸어갔다.
그 등을 향해 가란드가 말했다.
"한동안 도시가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부디 데일 경도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시면 좋겠군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가란드는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고, 전선에는 여유가 생겼다. 왜인지 전선의 장군들은 이레네로 자기 병사를 야금야금 보내고 있어. 심지어 이번 악마 하수인의 출현으로 명분까지 생겨버렸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로운데.'
팽팽히 머리를 굴리던 가란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평의회를 소집해야겠어."
그는 문밖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 *
데일은 취한 노새 여관으로 향했다. 원래는 밤의 신전부터 들를 생각이었지만, 순서를 조금 바꾸기로 했다.
"어서오세.... 데일 경!"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당찬 눈매의 카일라가 반갑게 맞았다.
여관 안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는데, 테이블 한구석에는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작은 체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데일 경. 이번 의뢰도 무사히 마치셨나요?"
레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준 데일이 카일라에게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별일이요?"
"내가 박살 낸 놈들. 그놈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았냐고."
"음. 얼씬도 안 하던데요? 아. 혹시 걱정해주는 거예요? 맞죠?"
데일은 카일라를 깔끔히 무시했다. 그리고 레온 앞에 앉았다.
"글공부 중이었나?"
"예. 카일라 씨가 의욕이 넘치셔서요."
"어차피 파리만 날리는데, 공부라도 해야죠. 이제 웬만한 건 다 읽을 줄 알아요!"
"카일라 씨가 빨리 배우더라고요."
카일라는 허리에 손을 짚고 우쭐거렸고, 레온은 그런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데일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이번 의뢰 얘기나 해주세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이번에도 장물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용병이 대신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런가요. 아쉽지만, 괜찮아요. 요즘 장물 시장이 성황이라 저도 두둑하게 벌고 있거든요. 이대로면 머지않아 학교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레온이 주먹을 불끈 쥐자, 카일라가 화색을 띠었다.
"와아! 그럼 나도 놀러 가도 돼요?"
"그럼요! 카일라는 제 첫 번째. 아니, 두 번째 학생인 걸요."
레온은 학교를 세울 계획에 대해 재잘거렸다. 어디 건물을 쓸 거라느니, 학생은 어떻게 할 거라느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레온의 눈은 앞으로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빛나고 있었다.
데일에게은 이제 품을 수 없는 감정. 하지만 레온을 보니, 조금이나마 대리 만족할 수 있었다.
한참을 카일라와 떠들던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아내가 기다리겠어요."
"엑. 레온씨 결혼했어요?"
"하하. 아직 경황이 없어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요."
맑게 미소 지은 레온이 책과 종이를 가방에 챙겨 넣고, 총총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카일라가 중얼거렸다.
"쩝. 시간도 늦었는데 저렇게 혼자 보내도 될까요?"
"레온은 애가 아니다."
"그치만, 생긴 건 아무리 봐도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카일라는 레온이 못내 걱정되는지, 출입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학교를 세우려면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게 많았다.
레온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계획서를 꼼꼼히 점검했다.
'의자는 공방에서 싸게 사기로 했고. 교재는 내가 직접 필사해서....'
그러던 레온은 문득,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원래도 으슥한 빈민가의 거리였지만,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적었다.
불길함을 느낀 레온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로브를 눌러쓴 이인조였다. 깜짝 놀란 레온은 뒷걸음질했다.
뒷골목에서 로브 뒤집어쓴 놈들은 백이면 백 강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레온이 물러서자 괴한이 따라왔다. 레온이 다급하게 물었다.
"너, 너희 누구야."
"레온. 최근 장물아비랑 붙어먹어서 짭짤하게 벌었다며? 돈 좀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레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레네에서 누가 돈 좀 만졌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금방 퍼지기 마련이다.
그 소문에 이끌려 강도들이 꼬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많이 벌지는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시선이 끌린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던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일단 도망쳐야....
푹!
"어?"
레온의 가슴에 칼날이 삐죽 솟아났다.
대체 어느 사이에 접근했단 말인가. 레온은 고개를 돌려 적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대로 칼을 뽑았다. 꿰뚫린 심장에서 개울처럼 흐르던 피는, 이제 강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레온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들고 있던 종이도 와르르 쏟아졌다.
"안...돼."
레온은 손을 뻗어 종이를 붙잡으려 했다. 이성이 아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괴한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뭐야. 싱겁잖아."
다른 괴한이 말했다.
"온전한 상태로 데려오라 하셨다."
"알았어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한 괴한은 레온의 몸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빈민가의 어둡고 으슥한 거리에는 피 묻은 종이 몇 장만이 바람에 펄럭였다.
빈민가
* * *
데일은 카일라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다 방으로 올라갔다.
밤이 다 깊어가도록, 데일은 레온이 준 종이에 글자를 쓰는 연습을 했다.
이제 데일은 글을 곧잘 읽을 수 있었다.
아직 어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책을 몇 권 읽으며 연습하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근데 책은 어디서 구하지.'
데일이 기억하기로 도서관은 상위구역인 3구역에 있었다.
아직 데일은 상위 구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어서 동패부터 달아야겠어.'
공부를 마친 데일은 낡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언제나처럼 잠을 잘 수 없는 몸으로 억지로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겼다.
어제 발튼의 질문이 떠올랐다.
―데일 경은 정말, 저들을 돕고 싶어 돕는 것이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오?
데일은 그냥이라고 답했다.
선행은 원래 어떤 의도도 없이 하는 것이라는, 조부의 말을 빌려서 변명했다.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데일은 그냥 자기를 잃는 게 두려웠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의 데일과 지금의 데일은 다르다.
데일의 마음속에는 인간의 마음과 언데드의 본능이 공존한다.
그 둘은 의견이 일치할 때도 있지만, 서로 충돌할 때도 많았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
지금까지는 인간으로서의 부분이 이길 때가 많았다. 하지만 데일은 느꼈다.
인간의 마음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다는 걸.
왜인지는 모른다.
흑기사로서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지. 아니면 이 세계에서 인간의 잔혹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봐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확실한 건 하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훗날. 데일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고 말 것이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자신을 말이다.
데일은 두렵다.
이 모든 여정을 마치고, 자기가 지구로 돌아갔을 때.
이미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려 그곳에 적응하지 못할까 두렵다.
그래서 데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이었을 적의. 지구에서의 생활과 습관을 고수했다.
'지구.'
생각이 지구에서 보냈던 생활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꿈으로 이어졌다.
허허 웃는 조부가 꿈속에 나왔다.
부드러운 주름이 파인 조부의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맺혀 있었다.
오지랖이 너무 넓은 사람.
사찰에서 지원하는 보육원에 매일 같이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던 사람.
그런 조부의 손에 이끌려 데일도 손을 보태야 했다.
음식을 나눠주고, 함께 놀아주고, 가르쳐주고, 손수건으로 코흘리개들의 얼굴을 닦아주곤 했다.
그 당시에도 데일은 딱히 선한 의도로 아이들을 돕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조부가 시키니 했을 뿐.
하지만 몇 년간 이어진 봉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몸뚱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무의식 어딘가에 습관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말이다.
빈민가의 아이들을 돕는 것도 분명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구에서 조부를 따랐던 데일은 이제 인간이었을 적의 자신을 흉내낸다.
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 조부가 데일을 불렀다.
"■■아."
조부는 이제는 불릴 일도 없는 과거의 이름으로 데일을 부르며,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넘쳐나지만, 너만은 사람의 도리를 따라야 한단다."
데일은 중얼거렸다.
"노력해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에게 더 실망하지 않기 위해, 부디 그런 개자식들을 적게 만나길 바랄 뿐이다.
데일은 그렇게 또 하나의 밤을 넘겼다.
* * *
다음날 데일은 새벽같이 여관을 나섰다.
자기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행인들 사이를 빠르게 걸어, 밤의 신전으로 향했다.
밤의 신전은 평소와 비슷했다.
새까만 어둠. 검을 휘두르고 있는 스켈레톤.
하지만 에리얼이 없었다.
'일이 있나?'
사제장이 신전을 비울 정도의 일이면 상당히 큰일일 터.
하지만 데일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엘프와 마주치지 않은 게 기쁠 따름.
데일은 적당히 비어있는 기도실로 들어가 투구를 벗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내렸다.
"왔습니다."
원래였다면 밤의 여신이 곧바로 튀어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었을 것이다.
한데. 오늘은 반응이 없다.
데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신님?"
[...그 불경한 마검은 기도실 밖에 놔두고 오너라.]
데일은 신성 거부자를 떠올리고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기도실에 가져올 만한 물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이 부족했다.
데일은 황급히 신성 거부자를 방 밖에 놓았다.
그제야 밤의 여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데일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하얀 발이 보였다.
[훨씬 낫구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찮다. 하지만 저 마검은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 여신이 아들이 사용할만한 물건은 아니다.]
여신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따를 수는 없다.
이제서야 쉽게 깨지지 않는 검을 얻었는데,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다른 좋은 무기를 구할 때까지는 한동안 사용하겠습니다."
[끄응. 여신이 어서 성검을 내려주든 해야겠구나.]
데일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주면 거절하지는 않겠다는 제스쳐였다.
탐탁지 않아 하던 여신은 데일을 살폈다.
그러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몸 안에 흐르는 강대하고 불길한 혼! 더러운 악마 놈들의 추종자를 살해했구나!]
"예. 악마 아르구르를 따르는 마법사를 죽였습니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역시 내 아들은 여신의 기쁨이니라!]
여신은 방방 뛸 듯 기뻐했다. 악마의 하수인을 처치한 게 어지간히도 기분 좋은 모양이다.
데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정도면 등급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바로 올려주겠다!]
지금껏 모은 영혼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이 데일의 몸 속이 차올랐다.
정확한 말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지만.... 데일은 자기가 한 단계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다.
여신이 그런 데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3등급이 되었구나. 등급이 오름과 함께, '부정한 감각'도 강화되었느니라. 이제 더 멀리 보고, 밝게 들으며, 적의에도 더 민감해질 것이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기사는 3등급부터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는 직업이다.
강화되는 부정한 감각.
그리고 추가로 얻게 되는 기술들은 전투 능력을 큰 폭으로 상승시켜 줄 것이다.
'여기서 혼을 더 모으면 광역 공격 기술을 배울 수 있겠지. 당장 부정한 감각이 강화된 것도 차이가 크고.'
여신이 밝게 말했다.
[참으로 잘해주고 있다. 지금처럼만 하거라.]
밤의 여신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데일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머리에 떨어지는 시선에서 여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신이 물었다.
[이제 제물에 상응하는 축복을 내리겠다. 어떤 축복을 원하느냐.]
데일의 눈앞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데일은 고민했다.
이번 하시나와의 싸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아직 적당한 공격 기술이 없는 데일은 공격력이 부족하다.
지금의 힘으로도 잔챙이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지만, 하시나처럼 튼튼한 적을 만나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때는 역시 마법사가 제격인데.'
마법사를 구해볼까? 하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일단 데일이 제대로 된 마법사를 구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고, 항상 파티에 마법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 부족한 공격력은 근력을 올려서 메꾸는 수밖에.
무식하게 강한 힘을 가지면, 하시나 같은 괴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튼튼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지. 중요한 건 균형이다.'
데일은 근력과 갑옷 강화를 2대1의 비율로 투자했다.
영혼 강화에도 눈길이 갔지만, 적당한 기술을 배우면 그때 투자해도 늦지 않았다.
여신에게 흘러나온 어둠이 데일의 몸과 갑옷에 스며들었다.
근육이 뒤틀리며 더 촘촘해졌고, 갑옷은 이전보다 더 영롱한 어둠을 띠었다.
배분을 마친 데일은 자기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3
직업: 흑기사
근력: 48
내구: 29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강화됨)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악마 하수인 살해자
높은 근력과 내구 능력치.
이 둘만으로도 이미 데일은 같은 등급의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데일이 옳은 방향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만족스레 확인을 마친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궁금한 게 있지만, 물어볼지 말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데일은 여신에게 조심히 물었다.
"제가 처음 이 세상에서 깨어나고, 여신님을 뵈었을 때. 어떤 질문을 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밤의 여신은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너를 이 세상에 불렀는지. 왜 불렀는지를 물어보았었지.]
"예. 여신님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해줄 수 없다고 하셨었지요."
[너에게는 아직 대답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했었다.]
데일이 물었다.
"지금도 자격이 없습니까?"
[그래. 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처럼 계속 나아가거라. 그리하면 언젠가 네 모든 궁금증이 풀릴 것이며, 네가 원하는 걸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일은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또 오거라. 여신은 언제나 네 방문을 기다리고 있노라.]
다시 투구를 눌러쓴 데일은 기도실 밖으로 나갔다.
데일은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자격이 없다라.'
역시 3등급으로는 모자라다는 것일까?
사실. 데일은 여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자신을 불러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분명 막강한 힘과 능력을 갖춘 소수만이 가능한 일일 터.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밤의 여신이었다.
여신 본인은 부정했지만, 데일은 밤의 여신이 자기를 이곳으로 불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언제 봤다고 믿겠는가?
지금은 우호적인 관계이나, 완전히 여신에게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설령 밤의 여신이 순수하게 데일을 위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결국, 내가 직접 답을 찾아야 하나.'
데일은 롱소드를 들어 올려 그 검신에 새겨진 글귀를 손으로 훑었다.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지.'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얻기 위해 데일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강해져야 한다.
지금보다 더욱.
* * *
신전에서 돌아온 데일은 다시 여관에서 글 연습에 몰입했다.
그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용병 길드에 가봤지만 데일이 할만한 의뢰가 여전히 없었다. 가란드도 일로 바쁜지 자리를 비웠다.
'올라간 능력치를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뭐 어쩌겠는가.
데일은 종이에 글씨를 계속 써 내려갔다. 그러다 주먹에 조금 힘을 주고 말았다. 깃털 펜이 반으로 똑! 부러졌다.
"아."
나름 힘을 제어한다고 했는데, 역시 조절이 힘들었다.
레온이 준 펜을 부러트려 먹은 데일은 머쓱하게 투구를 긁적였다.
이제는 진짜 할 게 없어지고 말았다.
"...검이나 닦을까."
데일이 헝겊을 꺼내 습관적으로 마검을 닦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여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요즘 취한 노새 여관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으니까.
여관 안으로 들어온 쪼그만 체구의 여인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데일은 한눈에 그녀가 노움임을 알아보았다.
노움은 실내를 휙휙 둘러보다가 이쪽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탈리. 넌 할 수 있어. 흑기사는 날 잡아먹지 않을 거야. 응."
'뭐야.'
혼자서 갑자기 들어와선, 갑자기 겁먹고, 이제는 자기 암시를 걸고 있다.
데일이 황당하게 쳐다보자, 침을 꿀꺽 삼킨 노움이 이쪽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왔다.
데일 앞에 선 노움은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겁이 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흑기사님."
"말해라."
"혹시나. 호,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그. 사람은 안 잡아먹으시죠?"
자기가 찾아와놓고는 다짜고짜 이게 무슨 말인가.
데일이 답했다.
"노움 고기는 맛이 없는 편이니 걱정하지 마라."
노움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 나름 농담을 섞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잘 안 먹힌 듯하다.
'이게 아닌가.'
머리를 긁적인 데일이 물었다.
"누구길래 날 찾아온 거지?"
"아!"
그제야 목적을 떠올린 노움 여자가 다짜고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세요! 레온이 위험해요!"
빈민가
* * *
레온을 도와달라.
그 갑작스러운 말에 반응한 건 카일라였다.
"레온? 레온이 왜요?"
카일라의 얼굴을 본 노움이 해맑게 웃었다.
"아! 네가 레온이 말한 두 번째 제자구나! 완전 귀엽다 야!"
"에, 에그러새오."
노움이 다짜고짜 자기 볼을 잡아당기자 카일라는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움은 그런 카일라를 마치 어린 동생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묘한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겉모습만 보면 노움은 기껏해야 10대 중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데일은 그런 둘을 무심하게 쳐다보다, 식탁을 쿵쿵 두드렸다.
그제야 노움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레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라. 왜 위험하다는 거지?"
"그게. 그게 말이죠."
노움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레온이 어젯밤부터 안 들어와요...."
"네? 레온이요?"
카일라가 놀라 되묻자,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랑 함께 산 이후로 말도 없이 외박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그래도 요즘, 학교인지 뭔지를 세우느라 바빠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안 돌아오는 건 이상하잖아요. 아무런 말도 없이!"
"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어, 어쩌면 질 나쁜 놈들한테 잡혀있을지도!"
카일라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온씨. 아내분이 있다고 했었죠."
노움은 쑥스러운 듯이 볼을 붉혔다.
"레온이 제 얘기도 했었군요. 아직 결혼식은 안 올렸지만요."
레온에 대한 기억을 되짚던 카일라가 데일에게 물었다.
"음. 근데 레온씨, 지난밤에 아내분이 기다린다고 서둘러 돌아가지 않았었나요?"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정보를 종합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마련한 레온. 아직 혼인을 맺지 않은 애인. 잠적.
이런 경우는 데일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유감이군. 레온은 다른 여자로 갈아탄 것 같다. 흔히 있는 일이지."
힘들 때는 애인에게 빌붙다가, 성공하니 애인을 차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버리는 케이스.
레온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었지만, 사람 속이란 모르는 것이다.
데일의 냉정한 말에 노움이 굳어버렸다.
옆에서 듣던 카일라는 쓰레기를 쳐다보는 눈으로 데일에게 말했다.
"가끔 데일 경은 막말을 하는 것 같아요."
굳어 있던 노움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저랑 레온이 알고 지낸 시간이 20년이에요. 숨겨둔 애인이 있었으면 제가 이미 눈치챘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강한 확신이었다.
이 정도로 한 점 의심 없는 확신이라면 믿어볼 만할 터.
'정말 레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군.'
데일이 물었다.
"그럼 너는 레온이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나?"
고민하던 노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도둑 길드에 납치당한 것 같아요."
"도둑 길드?"
도둑 길드. 납치. 갑작스러운 얘기에 데일이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노움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아실지 모르지만, 빈민가에서는 누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용병이나 강도들이 찾아가서 돈을 빼앗는 일이 많거든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하켄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요즘, 레온이 기사님과 함께 일하며 소소하게 한몫 잡았다는 얘기가 퍼졌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로 많은 돈은 아니었을 텐데."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요즘 빈민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요. 특히 레온은 더 위험하죠."
"더 위험하다고?"
데일이 묻자 노움이 자신 없는 얼굴로 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소문에는 장물아비들과 도적 길드 중 한 곳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레온이 장물아비들과 같이 일하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도적 길드의 표적이 된 것 같아요."
"음."
나름 그럴듯한 추리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굳이 레온을 납치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게....
하지만 데일은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의 인간성과 자제심은 남아 있었다.
확률은 적지만, 그녀의 생각대로 적을 위협하기 위해 납치해두었을 가능성도 있고.
노움은 그런 데일의 손을 덥석 붙잡고는 말했다.
"부탁이에요 기사님! 레온에게 듣기로는 기사님은 엄청 좋은 분이라고 들었어요! 어려운 아이들에게 식량도 나눠주시고...."
"레온이 호들갑을 떤 거다."
"저에겐 믿을 사람은 기사님밖에 없어요! 사례는 꼭 할게요!"
그 어조가 제법 간절하다.
옆에 있던 카일라도 아무 말 없었지만, 내심 데일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데일은 생각했다.
'믿을 사람이라.'
처음에는 다짜고짜 잡아먹니 마니 하더니, 그래도 사람이라 생각해주는 건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주겠다."
어차피 의뢰도 없어, 할 일 없이 시간이나 죽이던 참이다.
노움이 의뢰금을 많이 주지는 못할 것 같지만, 소일거리 정도는 되리라.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노움이 뛸 듯이 기뻐했다. 이미 레온을 찾기라도 한듯한 태도였다.
카일라도 괜히 흐뭇해하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가보세요. 어, 레온씨의 부인 분도...."
"나탈리야. 칼슨의 딸 나탈리."
"나탈리도 여기서 하루 자고 가세요."
"어? 그래도 될까?"
"하하. 지금은 남는 게 방이라서요."
카일라는 자조적으로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여관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은 나탈리가 말했다.
"그러면 하루만 신세 질게."
두 여자는 이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나탈리는 애써 밝게 얘기하며, 레온에 대한 걱정을 눌러두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데일은 계단을 올랐다.
카일라가 물었다.
"오늘은 일찍 올라가시네요? 글 연습은 다 하신 거예요?"
"깃펜이 부러졌다."
"아.... 나중에 레온을 찾으면 하나 더 달라고 하죠."
"그래."
방으로 들어온 데일은 멍하니 누웠다. 공부를 못하니 시간이 남았다.
시간이 남으니 할 게 생각밖에 없었다.
오늘은 레온에 대해 생각했다.
체구는 작지만, 꿈은 컸던 사내.
어떻게 봐도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익살스럽고, 수다스럽고, 때로는 놀랄 만큼 눈치 빠르던 그 노움에 대해 생각했다.
'레온이 사라졌다라....'
문득. 옛날 기억이 났다.
보육원에 있던 아이 하나가 가출해 난리가 났던 적이 있다.
데일은 조부와 함께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는데, 저녁 늦게서야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 울먹이고 있던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 조부와 데일이 얼마나 안도했던지.
돌이켜보면 꽤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데일은 막연히 생각하며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