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데일
* * *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넘쳐나지만, 너만은 사람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고.
'죄송해요 할아버지.'
당신께서 해주신 당부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게임에 빙의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빙의는 어떠한 전조도.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일어났다.
그야말로 달려오는 트럭에 들이받힌 기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게임 배경이 사람이 쉽게도 죽어 나가는 하드코어한 판타지라는 점?
받아들였다.
빙의한 몸뚱이가 기껏 만렙까지 키워 놓은 용병, 마법사, 기사, 사제가 아니라는 점?
받아들였다.
떨어진 위치가 대륙의 변두리였다는 점?
1년을 허비해야 했지만 이것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하필이면 흑기사가 걸려가지고.'
내 직업은 흑기사.
나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앉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삶에 지친 모습이다.
그런 마차 안에서도 유독 사람이 몰린 곳과, 휑한 곳이 있었다.
전자는 웬 어여쁜 사제가 있는 곳이었다.
사제가 맑은 미소를 그리며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빛을 따르세요. 신앙을 잃지 마세요. 믿고 또 믿다 보면 언젠가 신께서 어둠을 사르고, 약속된 광명을 베풀어주실 거랍니다."
험난한 세상에서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사제의 설교를 들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설교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사제는 질문들에 하나하나 성의껏 답해주었다.
그러다 한 초췌해 보이는 여인이 물었다.
"사제님. 제 남편이 작년에 악마들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남편은 천국에 갔겠죠?"
사제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께서는 자애로우십니다. 남편분께서는 악에 맞서 용맹히 싸우셨으니, 분명 천국에 들어섰겠죠."
그때.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참아주겠구만. 신께서 그렇게 자애로우셨다면, 저쪽 남편을 악마로부터 지켜주셨겠지."
목소리의 주인은 마차의 한구석에 앉은 용병이었다.
"무슨 무례한...!"
"당장 사과해!"
다른 승객들이 용병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용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나부랭이들이 덤벼들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었다.
용병은 도리어 눈을 흉흉히 빛내며 말했다.
"이봐. 나는 최전선에 서서 그 끔찍한 악마의 군세랑 여러 번 싸워봤어. 그때 느낀 게 뭔지 알아? 너처럼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년들은 침대 위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거야. 하급 기적은 읊을 줄 아나? 응? 견습 사제 양반?"
"당신...!"
견습 사제는 엄연히 말해 사제가 아니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이렇게 설교할 권한도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용병이 시비를 건 것이다.
용병의 모욕으로 피어오른 분노. 그리고 견습이라는 걸 들킨 부끄러움. 두 감정이 뒤섞여 견습 사제의 얼굴을 붉혔다.
그 반응이 웃긴지 동료와 함께 낄낄거린 용병이 이어 말했다.
"전장에서는 너 같은 것보다는 저기 흑기사 양반이 든든하지. 빛을 등졌으면 뭐 어때? 싸움만 잘하면 됐지. 안 그렇소?"
용병이 대답을 바라듯 한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돌아갔다.
북적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유달리 휑한 곳이 있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조용히 앉아 헝겊으로 롱소드를 닦고 있었다.
온몸을 감싼 판금 갑옷은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그에 대비되게 얼굴은 몹시 창백하다.
눈빛은 시체의 그것처럼 무기질하다. 하얗게 센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잘 깎은 조각상처럼 잘생겼지만, 전체적으로 사람인지 시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사내였다.
사내는 회색 눈동자를 들어 용병을 흘낏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롱소드를 닦았다.
"이런. 무시당했나."
용병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처음 목적인 견습 사제 놀리기에는 성공했다.
견습 사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사과하세요! 저 사악한 이교도보다 제가 못하다니! 참을 수 없습니다!"
"츠믈스읍습느다."
"하하하!"
용병이 견습 사제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자, 동료 용병이 폭소를 터트렸다.
견습 사제의 얼굴이 더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새빨개졌다.
웃음을 거둔 동료 용병이 그런 견습 사제를 달랬다.
"자자. 진정하시고. 퀼이 조금 짓궂은 성격이라 그런 겁니다. 어서 앉으세요. 전장에서 꼿꼿이 서 있으면 화살 얻어맞습니다?"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
그때였다.
후욱!
섬뜩한 파공음이 사제의 말을 끊었다. 다음 순간.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지붕이 날아갔다.
"어어?"
사람들은 황망히 위를 쳐다보았다. 뻥 뚫린 지붕에서 유달리 혀가 긴 외눈박이 괴물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병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시발...."
설상가상으로 마차가 멈췄다. 앞을 보니 마부의 머리를 씹어먹는 외눈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용병은 발작하듯이 외쳤다.
"내가 시간 끌 테니까 당장 나가!!"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서는 싸우고 싶어도 싸우기 힘들다.
멍하니 있던 사람들은 용병의 고함에 혼비백산해 마차 밖으로 달려나갔다.
괴물이 기다란 혀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용병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하! 이 정도는 끄떡없지!"
"저, 저도 도울게요!"
"뭐?"
옆에서 들려오는 견습 사제의 목소리에 용병이 얼굴을 구겼다.
"아직 안 빠져나가고 뭐 했어!"
"간단한 기적은 사용할 수 있어요! 전능하신 빛이자, 하늘이자, 태양이시여 그대의 종복에게 힘을...."
"멍청한 새끼야!"
견습 사제가 양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읊기 시작하자, 그 손이 하얗게 빛났다. 괴물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견습 사제가 귀찮은 짓을 벌일 걸 알아차린 것이다.
괴물은 네 다리를 이용해 벽을 힘껏 박찼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견습 사제에게 달려들었다.
용병은 괴물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거리도 너무 멀다.
괴물은 삽시간에 견습 사제에게 도달했고, 그 커다란 아가리를 쩍 벌렸다.
기도를 읊던 견습 사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조금 후면 저 억센 턱이 그녀의 머리를 뼈째로 씹어먹을 것이다.
견습 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드득!
뼈 같은 게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견습 사제는 눈을 떴다. 그 눈이 휘둥그레졌다.
쇠로 된 주먹이 괴물의 아가리에 꽂혀 있었다.
괴물은 턱을 오므려 팔을 통째로 씹어먹으려 했다. 하지만 팔을 둘러싼 갑옷이 너무 단단하다.
도리어 부러지는 건 괴물의 이빨이었다.
견습 사제는 멍한 얼굴로 주먹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보았던 흑기사가 기계적인 동작으로 괴물을 후려 패고 있었다.
"캬아아악!"
턱뼈가 모두 부서진 괴물이 미친 듯이 저항했다. 하지만 흑기사는 괴물의 아가리를 붙잡은 뒤, 그대로 좌우로 힘껏 잡아당겼다.
촤아악!
괴물의 대가리가 반으로 찢어졌다. 사방에 피와 살점이 튀었다. 견습 사제의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너무나 잔인한 광경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보던 용병은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역시 흑기사 양반들은 화끈해서 좋아!"
그러거나 말거나 흑기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는 흘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에 젖은 견습 사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흑기사가 품을 뒤져 하얀 손수건을 꺼내더니, 견습 사제에게 내밀었다.
"닦아."
"...예?"
견습 사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흑기사는 친히 손수건으로 사제의 얼굴을 벅벅 닦아주었다.
"대, 대체 뭘 하는...!"
견습 사제가 기겁했지만 흑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손길이 꽤 세심하다. 손수건으로 꼼꼼히 얼굴을 문질러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리어 피가 번져 사제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하하하! 뭐하는 거요 흑기사 양반!"
용병이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아닌가?' 싶어 머쓱하게 투구를 긁적인 흑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밖에 더 있을 거다."
"예입!"
용병들이 무기를 쥐어 들고 흑기사를 따랐다. 용병 하나가 흑기사와 발을 맞추며 물었다.
"나는 렌델의 아들인 퀼이라고 하오. 흑기사 형씨는 이름이 뭐요."
용병을 힐끔 살핀 흑기사가 말했다.
"지금은 데일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
"지금은? 아. 흑기사들은 세례를 받고 새 이름을 받던가?"
"뭐. 그런 셈이지."
"어쨌건. 잘 부탁하겠소! 부디 도시까지 살아 돌아가게 해주시오! 기껏 전선에서 구르다 왔는데, 돈도 못 쓰고 죽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어딨겠소!"
쾌활하게 말하는 용병과 무덤덤한 흑기사는 이내 마차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견습 사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전투가 끝났다.
마차 승객의 과반이 죽었다. 견습 사제는 참혹한 광경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귓가에 한 용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발. 원아이 놈들이 여섯이나 나타나다니. 도시 근처 치안이 괜찮다는 것도 이제 옛말인가."
용병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흑기사 형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야. 기가 막히게 싸우던데요?"
"...."
데일은 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퀼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 온몸이 뜯어먹힌 게 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듯하다.
그 퀼의 동료였던 용병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거 씁. 이런 데서 뒈질 놈이 아닌데. 5년간 잘 버티더니 이런 곳에서...."
목숨은 가볍고 죽음은 흔한 세상이다. 데일은 아무 말도 없이 주변을 살폈다.
널브러진 괴물의 시체가 보였다.
데일은 시체의 가슴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찰팍!
피가 튀었다. 건틀릿이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이내 괴물의 생기와 시체에 남은 잔혼이 데일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옆에서 구경하던 용병이 감탄했다.
"오오. 생기를 흡수하는 거군요."
괴물의 시체는 빠르게 쭈그러들었다. 시체는 머지않아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렸다.
데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생기랑 영혼을 많이 모았는데. 신전에 찾아가면 어쩌면 등급이 오를지도.'
데일은 다른 시체로 눈을 돌렸다. 괴물의 습격에 죽어버린 사람들. 그 시선을 눈치챈 견습 사제가 벌떡 일어났다.
"아, 안됩니다!"
"?"
"이분들은 제가 장례를 치러 드릴 겁니다! 그러니, 거, 건드리지 마십시오."
데일이 죽은 사람의 생기를 흡수할까 걱정한 듯하다.
그의 행위는 빛의 신앙 관점으로 봤을 때, 몹시 불경스러운 일이었으니.
보고 있던 용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언제 또 몬스터가 습격해올지 모른다. 지금은 데일이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빌빌 기지는 못할망정....'
혹시라도 데일이 화가 나 자기들을 버려두고 갈까 두려웠던 용병은 먼저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방패를 꼬나쥐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투 중에 도움도 안 된 년이 뻔뻔하게.... 엇."
데일의 팔이 용병을 제지했다.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상관없다."
이 몸뚱이에 빙의하고 데일이 다짐한 게 한가지 있다.
비록, 이런 꼴이 되어 인간성마저 뒤틀려버렸지만, 자기가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잊지 말자고.
본능은 말했다. 어차피 시체 아니냐고. 어서 생기를 빨아들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데일에게 남아 있는 인간성은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지켜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마지막까지 모독하지는 말자고.
데일은 인간성을 따랐다.
그게 데일이 이 세상에서 살아 남아온 방식이다.
데일은 견습 사제가 간단히 장례 의식을 치르는 걸 지켜보았다.
용병은 그런 데일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데일 형씨는 내가 알던 흑기사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뭐, 저도 흑기사는 멀리서 두 세 번 구경해본 게 다지만."
"그럴지도."
짧게 대답한 데일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라."
도시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할 것이다.
흑기사 데일
* * *
흑기사는 언데드와 사람의 경계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다.
이 반 언데드 기사의 마음에는 인간의 마음과 언데드의 본능이 공존한다.
때로는 그 둘이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했다.
그 강력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절대 흑기사를 고르지 않던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이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 데일이 얼마나 좌절했던가.
"...."
데일은 습관적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런 고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흑기사가 되면서 데일의 심장은 박동하기를 멈췄다.
하지만 이런 몸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지치지를 않는다. 잠도 잘 필요가 없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제때 생기만 채워주면 되었다. 마치 자동차에 가솔린을 넣는 것처럼.
데일은 남들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걸었다.
함께 걷는 용병, 갈색 머리가 유난히 곱슬거리는 하켄이 감탄을 흘렸다.
"오우. 남들 짐까지 들고 끄떡없다니. 확실히 반쯤 언데드가 되니 신체가 남다른가 봅니다."
"그래."
"흠. 나도 흑기사가 되기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나. 밤의 여신은 사람 안 가린다는데."
하켄이 농담처럼 내뱉었다. 옆을 힐끔 쳐다본 데일이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추천하지는 않는다. 별로 좋은 몸은 아니야."
"하하하! 저도 농담한 겁니다. 듣기로 흑기사는 감각이 둔하다면서요. 그럼 어? 이거 할 때도 아무 느낌 안 날 거 아닙니까."
하켄은 왼손을 동그랗게 말아쥔 뒤, 검지를 넣다 빼는 시늉을 했다.
"어? 사람이 결국 즐기려고 사는 건데 말입니다. 여자를 안아도 아무 느낌 없으면, 대체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 흠흠"
하켄은 급하게 헛기침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생각해보니 데일에게 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일은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켄이 무슨 말을 하든 무관심해 보였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말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함께하게 됐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골렌의 아들 하켄입니다. 아까 봤던 퀼하고는 불알친구고, 그리고 어.... 아 그래. 철패 용병이고, 2등급 실드맨입니다."
등급. 게임식으로 말하면 레벨.
강한 적과 싸우고, 신전에 가 등급을 올린다.
이 세계는 그가 즐겨하던 게임과 똑같은 법칙이 적용되었다.
'2 등급 실드맨. 무장은 체인 메일에 원형 방패.'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난하게 키웠군."
"예 그렇죠. 열심히 키.... 예?"
"데일. 등급은 1. 흑기사다."
"엥? 그렇게 잘 싸우시는데, 등급이 1이었습니까? 아 하긴. 원래 기사셨으니 이상할 건 없나."
잠깐 당황했던 하켄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등급이 어떻든 데일은 강하다.
인맥을 쌓아둔다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켄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최전선의 상황. 용병 업계가 돌아가는 꼬락서니. 황실에 벌어진 스캔들.
하켄은 용병답게 아는 게 많았다.
데일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솔직히 듣기 귀찮았지만, 가끔 쓸모 있는 정보도 있어 입을 닥치게 하기도 뭐했다.
그때. 뒤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좀 함께 걸으면 안 됩니까?"
하켄은 귀찮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견습 사제가 허리에 양손을 짚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살아남은 마차 승객 10여 명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서 있었다. 하나같이 지친 몰골.
견습 사제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당신들처럼 체력이 좋지 못합니다. 부디 여유를 가져주세요."
하켄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서둘러도 모자랄 판에 여유는 무슨 얼어 죽을 여유야. 주변에 괴물이 돌아다니는데 밖에서 야영하고 싶어?"
"그건 그렇지만.... 아이와 노인들도 있습니다. 휴식이 필요해요."
견습 사제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녀 역시 자기가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쯧. 하고 혀를 찬 하켄이 데일에게 말했다.
"데일 경. 그냥 이참에 버리고 가죠? 짐 덩이들을 굳이 달고 다닐 필요가 있나요?"
견습 사제는 경악했다.
"무슨.... 약자들을 버리라니.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입니까!"
"헤. 돈 안 되면 가족도 버리는 세상에서 무슨."
콧방귀를 뀐 하켄이 데일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내 제안. 경께서도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데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하켄의 의견이 더 공감되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따위. 어떻게 되든 데일이랑 무슨 상관인가.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닐 이유는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버리고 가는 게 옳았다.
이건 언데드로서의 본능.
하지만 내면의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두 의견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
데일은 견습 사제에게 다가갔다. 견습 사제는 떨리는 다리로 반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전에 데일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데일이 물었다.
"이름이 에스델이라 했나?"
"맞습니다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에스델. 제안을 하겠다."
데일의 차갑고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에스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에스델은 억지로 용기를 쥐어 짜내며 물었다.
"뭡니까. 말해보십시오."
"내가 너희들을 계속 데리고 다녀야하는 이유를 만들어라."
"이유라니. 그야...."
사람으로서의 도의를 말하려던 에스델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가.
도의는 물론, 인간이기 마저 포기한 흑기사가 아닌가.
게다가 데일은 이유를 대라고 하지 않고, '만들라고' 했다.
'거래를 하자는 뜻. 자기가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라는 거야.'
에스델은 손가락으로 백금발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그녀가 고민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데일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에스델은 황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 눈앞의 상대가 원할 만한 건 몇 개 없었다.
'돈.... 이겠지. 아마.'
돈은 모두에게 공평한 가치를 지닌다. 설령 그게 반 언데드인 흑기사일지라도 마찬가지.
문제는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다.
에스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췌하고 남루한 모습의 사람들이 에스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견습 사제인 에스델도 마찬가지. 수중에는 최소한의 생활비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에스델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알았다."
데일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 하자 에스델은 서둘러 말했다.
"하, 하지만 제가 책임지고 빚을 갚겠습니다."
하켄이 코웃음을 쳤다.
"뭐 어떻게 갚겠다는 거야."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저는 교단에서 나름 촉망받는 인재입니다. 금방 등급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두 분이 사제의 힘이 필요할 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앙을 걸고 맹세하죠."
"쉽게 말해 몸으로 갚겠다 이거구만."
"모, 몸으로라니."
하켄이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단에서 촉망받는 사제라는 게 거짓말일 수도 있어요. 봤잖아요. 전투 중에 기적 하나 제대로 사용 못 하던 거."
"...."
데일은 고민했다.
확실히. 하켄 말 대로 에스델의 잠재력은 불확실하다.
시간이 지난다고 제대로 된 사제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반푼이 사제라도 나한테는 감지덕지다.'
흑기사 직업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페널티는 빛의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 적의를 사는 것이다.
사제나 성기사의 도움을 받으려면 터무니없는 액수의 바가지를 써야 했다.
문제는 사제가 파티의 필수 인력이라는 점이다. 같은 전력이라도 사제가 있고 없고는 안전성에서 비교 불가다.
이런 점 때문에 흑기사는 게임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직업이었다.
사제 없이 게임을 진행하는 건 굉장히 어려웠으니.
'하지만 이번에 에스델에게 빚을 지워두면?'
에스델 본인은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델을 통해 빛의 교단에 어느 정도 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데일은 결정을 내렸다.
"신앙을 걸고 맹세한다고 했나?"
"...예!"
에스델은 의지 깃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인다. 이제 데일은 낼 수 없는 빛이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후우."
에스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외로 하켄은 데일의 결정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뭐. 설령 저 견습 사제가 별 쓸모가 없어도 진짜 몸으로 갚게 하면 되니....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고. 저는 아주 좋습니다."
하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델은 불쾌한 얼굴로 자기 몸을 가렸다.
데일은 둘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이제 적당히 쉬었겠지. 다시 출발하겠다."
데일의 지시에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하켄이 물었다.
"그래서 데일 경. 이대로면 해가 질 것 같은데, 오늘 밤은 야영할 건가요?"
"아니. 계속 이동하겠다."
"하긴. 제대로 보초 설 인원도 몇 없는데 야영은 힘들겠죠. 무리해서라도 움직여야겠네요."
데일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럿을 이끄는 만큼 행군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에스델은 사람들을 격려하며 행여나 낙오자가 나오지 않게 애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계속 고개를 돌리며 양옆에 펼쳐진 숲에만 시선을 주었다.
하켄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겁니까. 사람 불안하게스리. 아직 해도 다 안 졌잖아요."
데일은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작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일곱이었다."
"예?"
"처음에 우리를 습격한 원아이. 일곱 마리였다고."
"무슨 소립니까. 분명 여섯이었지 않습니까?"
"동료가 죽는 걸 보고 곧바로 도망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어엇."
하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일은 덤덤하게 물었다.
"이터의 생태에 대해서는 좀 아나?"
"예? 아뇨. 저도 잘은...."
게임에서는 기본 상식인데. 이 용병은 전선에서 복귀하는 터라 이런 쪽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데일이 설명했다.
"놈들은 영역에 민감하고 무리 생활을 한다. 무리 생활을 한다는 건 우두머리 개체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놈들은 동료애가 무척 강해. 반드시 복수하러 올 거다."
"엇. 그렇다면."
이터 놈들이 지금도 쫓아오고 있을 거라는 말 아닌가. 그것도 우두머리가 직접.
그냥 이터도 끔찍한 놈들인데, 우두머리는 어떨까.
하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 그래도 아직 거리는 좀 있겠죠?"
"아니. 바로 근처까지 왔다. 느껴진다."
흑기사의 특성 '부정한 감각'.
촉각이나 통각, 미각이 무뎌진 대신 그 외의 감각이 민감해진다.
특히 새로 생겨난 여섯 번째 감각은 살기나 적의, 그리고 피 냄새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데일의 감각이 말했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어. 어어?"
당황한 하켄이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은 평온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의아해하며 하켄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하켄은 왜 데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지 알아챘다.
"...사람들한테 굳이 말할 내용은 아니군요."
"구태여 혼란만 발생할 거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싸워야지."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이겨야지."
덤덤한 말에 하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길 수 있다가 아닌, 이겨야 한다.
확실히. 지금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이미 적이 근처까지 와있다면 이제 와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건 그저 적이 언제 공격해올까 기다리는 것뿐.
둘은 슬쩍 걸음을 늦춰 사람들과 거리를 좁혔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흩어지는 것보다는 뭉쳐서 대항하는 게 낫다.
둘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느낀 걸까? 에스델도 긴장한 얼굴로 목에 걸린 교단의 상징을 붙잡았다.
적막 속에서 점점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땅거미가 졌다.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횃불을 켰다.
횃불의 빛이 어둠을 밀어낸 그 순간이었다.
쐐액!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횃불을 든 사내의 팔을 휘감았다.
"어?"
사내는 안간힘을 쓰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팔을 감은 혀는 그대로 사내를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데일이 더 빨랐다.
번개처럼 휘둘러진 롱소드가 혓바닥을 잘랐다.
촤악!
"키야아아아!"
피가 튀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숲을 울렸다.
당황한 사람들은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흉흉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수십 쌍.
에스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너무 많잖아."
하지만 데일은 무덤덤하다. 어둠 속에서 유독 강한 기세를 흩뿌리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짧게 내뱉었다.
"빨리 덤벼."
다른 개체보다 덩치가 족히 두 배는 큰 외눈 괴물이 어슬렁 걸어 나왔다. 놈은 데일을 보며 침을 뚝뚝 흘렸다.
동료를 죽인 원수의 살점은 분명 맛있으리라.
하지만 데일은 눈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이윽고, 투구의 눈구멍 속에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떴다.
밤은 흑기사의 시간이었다.
흑기사 데일
* * *
흑기사는 반 언데드다.
그리고 모든 언데드가 그러하듯, 태양 빛에 약해지는 효과가 있다.
아니. 약해진다기보다는 제힘을 다 못 낸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달마저 희미한 밤에서야 흑기사는 온전한 제힘을 낼 수 있다.
데일이 앞으로 나섰다. 하켄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보다 더 큰데요."
"해야지."
데일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원아이. 게임에서도 몇 번 상대해봤지. 충분히 할만하다.'
데일은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하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거다.
그 차분함이 하켄에게까지 전염되었다. 긴장이 사그라들었다.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버텨. 에스델이랑 함께."
"자, 자신 없으니 빨리 끝내고 오세요."
끄덕. 고개를 주억거린 데일이 그레이트 원아이의 앞에 섰다.
롱소드의 끝을 적에게 겨냥했다.
투박하지만 날이 잘 서 있는 롱소드였다.
그레이트 원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외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히죽거렸다.
녀석이 흘린 침이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잠시간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땅을 박찼다.
공중에 날아온 그레이트 원아이가 길쭉한 혀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데일은 기계적으로 팔을 내려 롱소드를 휘둘렀다. 롱소드가 그레이트 원아이의 두꺼운 혀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잘라내지는 못했다.
검날이 충분히 날카롭지 못했다.
"키이익!"
혀를 타고 전해지는 통증에 그레이트 원아이는 분노했다.
놈은 그대로 혀를 솜씨 좋게 말아, 롱소드에 강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롱소드의 끝부분이 부러졌다.
데일은 부러진 롱소드를 황망히 내려다보았다.
'아끼던 건데.'
롱소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린 데일은 허리에 메인 홀스터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그대로 그레이트 원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위험한 건 혀.'
원아이는 혀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괴물이다. 놈들의 혀는 낡은 쇠 따위는 거뜬히 구부릴 정도로 억세다.
반대로 다른 신체 부위는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중요한 건 거리를 좁혀 기다란 혀를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데일은 머릿속에 있는 공략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레이트 원아이에게 파고들었고, 섬전처럼 손도끼를 휘둘렀다.
파악!
놈의 어깨에 손도끼가 파고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놈이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머리에 처박혔을 것이다.
"키익!!"
당황한 그레이트 원아이가 네발로 빠르게 뒷걸음질했다. 예상보다 데일이 강하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 했다.
데일은 곧장 따라붙었다. 때아닌 술래잡기가 펼쳐졌다.
조금이지만 그레이트 원아이가 더 빠르다. 하지만 체력으로 흑기사를 이길 수 없다.
이 술래잡기의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사실을 그레이트 원아이도 알았다.
녀석은 전속력으로 발발 기어 다니며 거리를 벌리더니, 돌연. 땅을 박차 공중제비를 돌았다.
등과 얼굴이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적당한 거리와 각도.
혀를 휘두를 충분한 조건이 갖춰졌다.
놈은 아가리를 쩍 벌려, 혀를 마치 창처럼 찔러 들었다.
그 속도가 아까보다 더 빠르다. 위기를 느낀 탓에 그레이트 원아이도 온 힘을 다한 것이다.
촤악!
날아온 혀가 그대로 데일의 오른팔에 휘감겼다. 데일은 손도끼로 혀를 잘라내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오른팔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점점 심해졌다.
드득.
혀에 휘감긴 갑옷의 어깨 부분이 조금씩 찌그러졌다. 신이 난 그레이트 원아이는 더욱 힘을 주었다.
데일도 왼손으로 혀를 붙잡고 힘을 주었지만 자세가 좋지 않다.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레이트 원아이는 집요하게 어깨를 휘감고 비틀었다. 데일의 오른팔이 점점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그러다 마침내. 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갑옷이 부서지며 오른팔이 뽑혀나갔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차가운 피였다. 그레이트 원아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승리했다는 환희가 엿보였다.
하지만 데일은 여전히 담담했다.
오른팔이 뜯겨 나간 덕택에 오히려 몸이 자유로워졌다.
데일은 오른팔을 감싸던 갑옷을 주웠다. 억지로 뜯겨나간 탓에 그 단면이 매우 뾰족하다. 한 걸음 내디뎌 거리를 좁혔다.
데일은 날카로운 쇳덩어리를 기뻐하던 그레이트 원아이의 아가리에 박아 넣었다.
"키, 키익!"
목구멍에 갑옷이 틀어박힌 그레이트 원아이가 바닥에 넘어졌다. 외눈 괴물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올라탄 데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게중심을 잡고 상대를 압박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데일은 아가리에 처박힌 갑옷에 하나 남은 주먹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쾅! 쾅! 쾅!
굉음이 울릴 때마다 갑옷이 더욱 깊숙이 박혀 들었다.
사방에 따뜻한 피가 튀었다.
"키이...."
저항은 길지 못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녀석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이윽고 그레이트 원아이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데일은 툭 내뱉었다.
"귀찮게 하고 있어."
그 모습을 흘끔 지켜보던 하켄과 에스델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뭐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사람이 다 있어."
"저게 흑기사의...."
하켄은 노련한 용병이었지만, 방금의 싸움처럼 우악스러운 싸움은 보기 드물었다.
감각이 무뎌 고통을 못 느끼는 흑기사들만이 저렇게 무식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트 원아이의 숨통을 끊은 데일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은 찌그러졌고, 오른팔은 떨어져 나갔다.
타들어 가는 갈증이 일었다.
파악!
데일은 서둘러 왼손의 건틀릿을 그레이트 원아이의 시체에 박아넣었다.
건틀릿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더니, 이내 생기가 빠르게 흡수되었다.
그러자 떨어져 나간 팔과 어깨의 단면에 붉은색 선이 이어졌다. 선은 수백 갈래로 늘어나더니, 팔을 어깨에 깔끔하게 붙여주었다.
갑옷도 마찬가지다. 흑기사에게 갑옷은 신체의 일부와도 같다.
드득. 소리와 함께 찌그러진 갑옷이 펴지더니 이내 말끔히 원상태를 되찾았다.
'편리한 몸이야.'
생기만 흡수해주면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즉시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컨디션을 되찾은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아이들은 이쪽을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홀로 죽여버린 데일에게 공포를 느꼈다.
데일은 손도끼를 들고 놈들에게로 걸어갔다.
* * *
우두머리를 죽인 순간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셈이다.
원아이들은 몇 번 더 저항하더니, 이내 도망쳐버렸다.
하켄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후, 후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하켄은 질린 눈으로 주위를 보았다.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원아이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만약 데일이 없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쪽의 피해도 있었다.
데일이 그레이트 원아이를 상대하는 동안 3명이 죽었다.
모두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습격해온 상대를 생각하면 이 정도면 작은 피해였다.
에스델은 슬픈 눈으로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던 하켄이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거 수고했습니다. 그레이트 원아이를 혼자 잡으시다니. 확실히 흑기사들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까."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켄이 이어서 물었다.
"이 정도면 제가 데일 경 이름을 들어봤어도 이상하지 않는데.... 어디서 활동하셨습니까?"
"근거지를 둔 적은 없다."
"그래요? 그러면 어디서 오는 길이십니까."
"러셀."
러셀. 러셀. 러셀.
입안에서 여러 번 단어를 굴려보던 하켄이 손뼉을 쳤다.
"아. 북쪽에서 오셨구만. 여기서 그렇게 멀지도 않네요. 여기까지 오는데 한 3주 걸리셨습니까?"
"1년."
"예?"
하켄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뭔. 3주 거리를 1년이나 걸렸다고요?"
"혼자 가도를 따라 걷다가 길을 잃었다."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가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겁니까? 3살짜리 꼬마애도 그러지는...."
데일은 주먹을 쓱 들어 올렸다. 닥치라는 뜻이었다.
하켄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장례가 마무리되었다. 에스델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얼굴은 땀으로 엉망이었다.
"후우. 어째서 이런 일이."
어느새 옆에 다가온 데일이 물었다.
"다 끝났나?"
"예.... 끝났습니다."
에스델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서둘러 헝겊으로 얼굴을 닦았다.
데일이 또 손수건을 꺼내기 전에.
잠깐 멈칫했던 데일이 말했다.
"그럼 바로 출발한다. 괜히 피 냄새 때문에 귀찮은 놈들이 꼬일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자, 지친 얼굴의 사람들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중간한 맹수들이 달려들기에, 그레이트 원아이의 피 냄새는 너무 위협적이었다.
데일은 성큼성큼 걸었다.
밤의 숲길은 어두웠지만, 어둠은 흑기사에게 어떤 방해도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데일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밤도 모두 지나갔다. 어슴푸레하게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숲길도 끝이 났다.
옆에서 걷던 하켄이 미소지었다.
"오우. 드디어 보이네요."
"...."
넓게 펼쳐진 황금빛 평원에 여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원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도시가 우뚝 솟아 있었다. 높다란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벽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제국의 두 번째 수도이자, 인류의 몇 안 남은 대도시. 그리고 게임의 주 무대.
데일은 도시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레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무려 1년이 걸렸다. 도시의 위용을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길만 안 잃었어도 진즉에 오는 건데.'
데일이 우뚝 서 있자 하켄이 다가와 물었다.
"데일 경. 이레네는 처음입니까? 그러면 놀랄 준비 하십쇼. 다른 도시랑은 비교할 수 없게 번성한 곳이니. 뭐. 그것도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지만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다시 움직였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목적지가 보이자 밝은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 * *
성벽에 가까워지니 허름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빈민촌이 나타났다.
모두가 안전한 성벽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꼬질꼬질한 아이들은 구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가, 데일이 뿜는 기세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켄은 귀찮은 듯이 허공에 방패를 휘둘렀다.
"얻어맞기 싫으면 썩 꺼져라 이놈들아. 누구 돈을 뜯어먹으려고."
아무래도 이런 일이 빈번한 모양이다. 데일은 습관적으로 돈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흑기사가 되면서 여러 가지로 잃어버렸지만, 이렇게 전생의 습관이 튀어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데일이 구리 동전 몇 개를 흩뿌리자 아이들의 눈이 땡그래졌다.
하지만 이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허겁지겁 동전을 주웠다.
하켄이 옆에서 경악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신이시여 맙소사! 지금 돈을 뿌린 겁니까? 왜 그런 겁니까 대체!"
데일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냥."
"아니. 그냥 돈을 뿌리는 인간이 어딨습니까! 게다가 거지들한테 적선하는 흑기사라니. 누가 들으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욕먹을 겁니다."
"개는 원래 잡식성이다."
"엇. 그렇습니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뒤로도 하켄은 왜 아이들한테 돈을 뿌리면 안 되는지 열변을 토했다.
보통 저런 아이들은 조직에 속해있으며, 돈을 번다고 해도 죄다 뜯길 뿐이라고.
결과적으로 건달들 배나 불려주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데일은 상관없었다.
애초에 정의로운 마음이나 큰 의미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행동했을 뿐.
둘의 대화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에스델이 엿들었다. 에스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데일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 뒤로 하켄은 혹여나 다른 아이들이 다가올까 방패를 들고 눈을 부라렸다.
돈을 뿌리는 건 데일인데, 마치 자기 돈이 사라지는 듯한 반응이다.
덕분에 성문까지는 별일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는 경비병 둘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입을 쩍 벌리며 늘어지게 하품하는 게 세상 귀찮아 보였다.
하지만 데일을 보자 그 태도가 돌변했다.
경비병은 긴장한 표정으로 창을 쥐더니, 그대로 데일의 목에 겨누었다.
"멈춰라!!"
이 격렬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데일이 말했다.
"...도시에 들어가고 싶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걸 꺼내라!"
"...."
지난 1년간 헤매기만 한 데일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하지만 괜찮다.
데일은 주저 없이 품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게임에서는 이러면 보통 들여보내 주던데.'
처음이니만큼 금액도 넉넉하게 주었다.
하지만 돈을 본 경비병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사악한 새끼가 감히 우리를 돈으로 매수하려 해?"
"?"
"지금 보니 켕기는 게 있구나! 당장 감옥으로 보내겠어! 교단에서 사제님을 불러 심문을 해야겠다!"
"?"
흑기사의 단점 하나.
빛을 따르는 이들의 적의와 혐오를 살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빛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 쪽이 매우 드물다.
평소에는 부패하고 게으르던 경비병이 데일을 보자 갑자기 성실하게 돌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데일은 굳어버렸다.
기껏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도시 안으로 못 들어가게 생겼다.
아니. 들어는 가겠지만....
'감옥에 갇히겠는데.'
그리고 한번 감옥에 갇히면 데일은 다시는 태양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흑기사 데일
* * *
데일이 가만히 있자 경비병들은 창을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 강한 적의가 풍겨 나왔다.
흑기사의 몸은 그런 적의에 민감하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 맞다. 부러졌지.'
오히려 다행일지라도 모른다. 회까닥 돌아버려서 검이라도 휘둘렀다가는 돌이킬 수 없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하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자자. 너무 열 내지 맙시다들. 아니. 아침 댓바람부터 힘 빼서 뭐합니까. 경비병분들도 어서 퇴근하고 집에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밥도 좀 먹고, 잠도 좀 자고, 마누라 엉덩이도 좀 주무르고."
넉살 좋은 태도에 경비병이 미간을 좁혔다.
"넌 또 뭐야."
"저는 하켄이라고 합니다. 철패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습죠. 여기 용병패입니다."
하켄은 용병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얇은 구리 판에는 용병 길드의 문양과 '하켄'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경비병이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위조는 아니겠지?"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용병패를 위조해 길드에 쫓기느니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나을 겁니다."
"큼. 그건 그렇다만. 그래서?"
하켄은 데일을 흘끔 쳐다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경비병분들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끼어들었습니다. 이 데일 경이 겉으로는 흉악하고, 사악하고, 어. 사람 잘 죽일 것처럼 생겼는데, 막상 맨 얼굴은 기생 오라비 같고, 재수 없지만 말입니다."
"...."
데일이 하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켄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 다른 흑기사들과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말도 통하고, 다짜고짜 사람을 찔러 죽이지 않아요."
다른 흑기사들은 그러나 보다.
"저기 뒤에 보십쇼. 저 사람들이 다 우리 데일 경께서 지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흑기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개는 안 물어요.
하켄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조용히 듣던 경비병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아. 드디어 이해하셨군요!"
"너도 저놈과 한패란 거지?"
"?"
"네 놈도 감옥에 집어처넣어야겠다!"
용병 역시 그다지 신뢰 가는 족속들은 아니었다.
고위급 용병이라면 모를까, 철패 용병의 말에는 무게가 없다.
경비병들은 눈을 부라리며 천천히 하켄에게 다가갔다.
흔들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하켄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무, 무슨 소리야! 동료라니! 내 별명이 고독한 늑대라고! 난 언제나 혼자 다닌단 말이다!"
"?"
"아, 아무튼 난 관련 없어."
경비병과 데일까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헛기침한 하켄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경비병들은 다시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밧줄로 데일을 묶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데일은 고민했다.
'어떡하지. 일단 물러나야 하나.'
설마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장은 후퇴하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거야말로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데일이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였다.
뒤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에스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제 특유의 복장과 에스델의 미모를 본 경비병들이 움츠러들었다.
에스델이 차분히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제님들."
"아. 사제님. 저희가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사제님은 그냥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경비병은 공손히 말했다.
따로 신분증을 제시하지도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빛의 신앙을 따르는 사제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었다.
에스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앞으로 나선 건 여기 있는 데일 혀, 형제...."
형제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다, 도저히 아니다 싶었던 에스델이 단어를 바꿨다.
"데일 경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예에?"
경비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의 신앙을 따르는 사제가 흑기사를 두둔하다니? 하켄과 데일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내내 자기들을 언짢게 쳐다보던 에스델이 나서줄 줄은 예상 못 했다.
에스델도 썩 내키지는 않는 듯.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비록 제가 데일 경과 함께한 시간은 적지만, 저 용병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데일 경은 다른 흑기사들과 다릅니다."
에스델은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마차가 습격당한 일. 그 습격에서 데일이 사람들을 구한 일. 데일이 사람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일까지.
물론. 중간에 데일과 에스델이 거래를 했다는 것도 밝혔다. 데일이 마냥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당장 그곳에서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쳐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거다.
조금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아예 약한 사람들을 죽여 그 주머니까지 털었을 거다.
데일의 행동은 경비병들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명예로웠다.
경비병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흑기사가 그런 일을 했다니 영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음."
"사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실이라는 건데...."
둘은 잠시 고민하다가 에스델에게 말했다.
"최근 이교도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놈들이 사고를 많이 쳐서 말이지요. 그래서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교도를 함부로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기사의 신원을 사제님이 보증해주시겠습니까?"
"윽."
신원 보증.
즉, 데일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면 에스델이 책임지겠냐는 뜻이다.
에스델은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에스델입니다. 데일 경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제가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경비병들은 마지못해 수긍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셋은 커다란 성문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침묵을 지키며 눈만 또르르 굴리던 하켄이 에스델에게 말했다.
"와. 설마 우리 견습 사제가 그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보기보다 의리가 있는 타입?"
"벌써 후회가 될 것 같으니 조용히 해주시죠. 그리고 보기보다라니, 무슨 뜻이죠? 제가 의리 없어 보인다는 겁니까?"
에스델이 날카롭게 눈을 치뜨자, 하켄은 앗 뜨거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델은 침묵을 지키는 데일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저 빚이 있으니 갚았을 뿐이니까요."
데일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걸로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럴 때는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나요?"
"너는 고맙다고 했었나?"
그러고 보니 처음 마차에서 습격이 있었을 때. 데일은 에스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에스델은 너무 당황해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 했다. 그만큼 상황이 어지러웠으니까.
그 점을 깨달은 에스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염치와 양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건 고, 고맙.... 아무튼! 도시에서 사고 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의 보증인이니까요. 아시겠습니까?"
"그래. 믿어도 좋다."
"...."
에스델은 미심쩍은 눈으로 데일을 보았다. 세상에 흑기사만큼 믿기 어려운 존재들이 또 있을까.
역시, 보증을 서준다고 한 건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에게 적선하는 모습만 안 봤어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스델은 사제답게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도시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과 지켜야 할 예의 등등.
하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처럼 느껴지자, 하켄이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자자. 긴 얘기는 길에서 하지 말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한잔하면서 하죠? 요정의 노래라고, 제가 잘 아는 술집이 있습니다."
"...도시로 들어오니까 갑자기 태도가 친절하군요. 버리니 마니 하시던 사람이."
"하하! 중요한 건, 내가 끝까지 함께했다는 거 아니겠어?"
데일이 하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맞는 말이다. 고독한 늑대 하켄."
"...하하. 아직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까? 그건 다 제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거라.... 데일 경. 손 좀 치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아픕니다."
둘을 보며 쓴웃음을 짓던 에스델이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교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절대 사고 치지 마세요. 아시겠죠?"
"알겠다."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세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먼저 견습 딱지나 떼라."
"이익! 금방 정식 사제로 승격될 겁니다!"
에스델은 그렇게 씩씩대며 사라졌다.
눈치를 보던 하켄이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저어. 그러면 데일 경은 술 먹을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저도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
데일이 하켄의 팔을 붙잡았다.
"예? 왜 그러십니까."
"길 안내가 필요하다."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이제 사양이다. 하켄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뭐. 길 정도야.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데일이 바로 답했다.
"밤의 신전."
"켁."
* * *
대륙에는 크게 두 가지 신앙이 있다.
빛과 생명을 관장하는 빛의 여신.
어둠과 죽음을 관장하는 밤의 여신.
두 여신은 수천 년을 싸워왔다.
지상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길고 격렬한 전쟁 이어졌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의 결과가 나왔다.
빛은 승리했고, 어둠은 패배했다.
어둠의 추종자들은 음지로 스며들었으며, 빛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쫓았다.
사람들은 빛이 영원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 우주 너머에서 침략자가 찾아왔다.
드넓은 별의 바다를 항해해 온 그들은 자기들을 악마라 칭하며, 이리 선언했다.
"이 별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겠노라."
그들은 뱉은 말을 지켰다.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대륙의 절반이 점령되었다. 악마의 군세는 너무 강했다.
숱한 왕국이 무너졌고, 여러 종족이 멸종당하였다.
그들은 별에 있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빛을 따르든, 어둠을 따르든 공평하게 죽여버렸다.
결국. 빛의 여신은 힘겨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모든 신전에 계시가 내려졌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밤의 여신과 그 추종자들을 아군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곤란한 상황이던 밤의 여신 또한 이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기나긴 전쟁 이후. 처음으로 빛과 어둠은 손을 잡았다.
밤의 신전이 제국 최대의 도시에 당당히 들어서게 된 경위였다.
* * *
밤의 신전은 외벽 근처 유난히 그림자가 짙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했다."
"다음에 봅시다!"
안내를 해준 하켄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데일은 신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지붕 없는 두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는데,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크고 작은 균열이 가득했다.
기둥 너머로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지하는 마치 심연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러니 인기가 없지.'
게임을 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밤의 여신은 취향이 고약한 듯하다.
잠시 서성이던 데일은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정사각형 모양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침이지만 마치 새벽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하지만 실내에 있는 그 누구도 어둠이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그건 데일도 마찬가지.
어둠 속을 살피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신전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는 뼈다귀다.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뼈다귀는 롱소드를 들고 허공을 향해 쉴새 없이 내리쳤다.
데일은 멈칫했다.
스켈레톤이 대놓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밤의 신전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 왜 신전에서 검술 연습이지?'
의아해하는 데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처음 보시는 분이군요."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미려한 몸선이 드러나는 검은 신관복을 입고, 잿빛 머리칼을 길게 드리운 여인이 데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이한 건 검은색 천을 머리에 묶어 두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양옆의 귀가 뾰족하다는 것.
'귀쟁이인가.'
데일은 경계했다. 그는 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형제님. 밤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사제장을 맡고있는 에리얼이라 합니다."
사제장이라니.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다.
"데일이다. 한동안 이곳 이레네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그러시군요. 동지가 늘어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죠.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하세요."
에리얼은 매우 친절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둠을 따르는 이들은 계산에 철저하다.
만약 도움을 원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기도실을 이용하고 싶은데."
"복도 끝 왼쪽 방이 비어 있습니다. 일직선이니 길을 헷갈릴 일은 없을 거예요."
"고맙다."
데일은 에리얼이 말해준 대로 이동했다.
복도 양옆으로 기도실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사방이 웅얼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보자. 끝에서 왼쪽 방이라 했지.'
데일은 기도실 문을 열었다.
"?"
"?"
기도실 안에는 웬 마녀가 양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데일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상황을 이해 못 해 굳어버렸다.
데일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 그렇군. 복도 기준에서 왼쪽.'
기도실 안에서 마녀의 고함이 들렸지만 데일의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쪽 기도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음.'
좁은 기도실 안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단출한 제단 하나만이 툭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은 촛대가. 그 은 촛대 위에는 꺼져버린 양초 세 개가 꽂혀 있었다.
데일은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를 올렸다.
"왔습니다."
그러자 곧장 반응이 나타났다.
양초에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기도실 안을 가득 메웠다.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거라 내 아들아!]
한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몹시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흑기사 데일
* * *
데일은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 고개가 저절로 내려졌다.
방안을 메운 연기는 이내 형상을 만들어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발과 바닥까지 내려온 기다란 검은 머리.
비록, 데일은 고개를 숙인 탓에 발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앞에 선 존재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밤을 따르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란다. 너의 성별은 남성이니, 아들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겠느냐. 아니면, 좀 더 애정을 담아 왕자님이라고 불러주련?]
"...."
끄응. 속으로 신음을 삼키는 데일에게 밤의 여신이 말했다.
[그나저나 1년이 지나서야 찾아오다니. 이 여신이 얼마나 슬펐는지 아느냐?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데일은 투구를 벗어 겨드랑이에 고정했다.
하얗게 센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여신은 감탄을 흘렸다.
[정말이지, 누굴 닮아 이리 잘생겼는지. 못돼먹은 년들이 채갈까 걱정이구나.]
데일은 그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러셀에서 이곳으로 오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산을 헤매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가버렸습니다."
[...내 아들은 지독한 길치구나. 앞으로는 꼭 길잡이와 함께하도록 하거라.]
인정하기 싫지만,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건 이런 잡담이나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모은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데일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손이 데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데일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빨려 나갔다.
[제법 많은 양이구나. 이 정도면 등급 상승도 충분히 가능하겠어. 우선 제물에 상응하는 축복을 내리겠다. 선택하거라.]
데일의 눈앞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이런 부분은 게임이랑 똑같단 말이지.'
여기서 뭘 선택하냐에 따라 추후 성장 방향성이 달라진다.
우선은 근력 상승.
말 그대로 힘이 더 강해진다. 전투 수행 능력에 가장 직접 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다음은 갑옷 강화.
갑옷은 흑기사의 신체와 다름없으며, 흑기사 본인과 함께 성장한다.
갑옷을 강화한다는 건 단순히 단단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게를 늘리거나, 크기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며, 갑옷에 숨겨진 기능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가령, 갑옷 일부를 변형해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든다거나.
마지막으로 영혼 강화는 마력 총량을 늘려준다.
흑기사는 제법 다재다능한 직업이다. 인간으로서 많은 걸 잃은 대신, 밤의 여신에게 뛰어난 육체 능력은 물론에 마법적 재능까지 하사받았다.
성장 방향에 따라 고위 흑마법도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마력은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까. 후반 가면 훨씬 더 중요해지고.'
만렙 캐릭을 여러 개 키워봐서 안다. 후반부에 마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데일은 고민에 빠졌다. 3가지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흑기사를 키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
밤의 여신은 그런 데일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데일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기분 좋아 보였다.
마침내 데일이 결정을 내렸다.
"전부 근력을 올리겠습니다."
[확실하느냐?]
"예."
초반 단계에서는 역시 근력을 올려주는 게 맞았다.
갑옷을 강화해봤자 힘이 부족하면 두들겨 맞기만 할 테고, 마력을 늘리기에는 시기상조다.
'방어력에 전부 투자해서 탱커를 맡는 역할도 있지만....'
그러려면 데일이 등을 믿고 맡길 뛰어난 동료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데일은 흑기사다.
'뛰어난' 동료는커녕, 그냥 동료도 모으기 쉽지 않았다.
결국. 혼자서 다 해먹을 정도의 역량이 필요하다.
데일은 선택했고 여신은 들어주었다. 흐릿한 연기가 데일을 감쌌다.
뿌드득.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며 아우성쳤다. 고통은 없었다. 데일은 그저 담담히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데일은 신체의 변화를 느꼈다.
'더 강해졌어.'
근육의 밀도가 더 높아졌다. 1년간 모아두었던 영혼을 모두 바쳤으니, 그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여신이 흐뭇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듯하구나.]
"예."
[등급도 올려주도록 하마.]
"부탁드립니다."
여신은 데일의 투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차례 퍼지고 모인 연기가 데일의 눈앞을 덮어, 자신의 달라진 정보를 보여주었다.
[데일]
등급: 2
직업: 흑기사
근력: 40
내구: 20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시체에 남아 있는 생기와 잔혼을 흡수한다.
[특성]
반인 반언데드: 통각과 미각, 촉각이 둔해지는 대신 지치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 등의 모든 생리 활동이 불필요해진다.
부정한 감각: 통각과 미각, 촉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적의와 살의, 그리고 피 냄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밤의 여신의 축복: 생기를 흡수해 신체를 수복할 수 있다. 여신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밤에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칭호]
―
데일은 천천히 정보를 읽어내렸다.
근력이 40에 내구가 20. 등급이 2인 것치고는 과할 정도로 많은 수치였다.
'확실히 흑기사가 스탯은 좋아.'
설정에 따르면 흑기사는 원래 명예로웠던 기사들이 타락해서 변질된 존재다.
밤의 여신에게 직접 세례를 받고, 그 영혼과 육체가 어둠의 힘이 서린 갑옷에 고정되어버린 부정한 존재.
중요한 건 이들이 원래 기사였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인간 병기나 다름없다.
그러니 원래 기사였던 흑기사 역시 능력치 자체는 뛰어날 수밖에.
꼼꼼히 정보를 살피는 데일의 귀에 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등급이 2로 상승하고, 근력 능력치가 35를 넘어섰구나. 데스나이트로 전직할 조건을 충족했는데, 어찌할 생각이느냐 데일.]
여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데스나이트로 전직하시겠습니까?"
데스나이트. 흑기사 직업의 갈래 중 하나.
육체 능력에 큰 보정이 붙는 게 특징이다.
'근력이 못해도 지금의 1.5배 정도는 나오겠지.'
하지만 데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직하지 않겠습니다. 데스나이트는 완전히 언데드가 아닙니까."
데일은 비록 이런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조금 강해진다 하나 완전히 언데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 될 말이다.
'데스나이트는 초반에 좋지만, 성장 기대치가 낮기도 하고.'
데일의 선택에 밤의 여신은 기꺼워했다.
[그래. 여신도 네가 못생긴 언데드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용무는 없다. 데일은 꿇었던 무릎을 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인의 형상을 이루었던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데일의 수준으로는 여신의 본모습을 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기도실을 나서려 하자, 여신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잘하고 있다 데일. 지금처럼 계속 정진하거라. 그리하면 여정의 끝에 네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란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던 데일이 멈칫했다.
데일이 원하는 것.
'지구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인간이 되는 것.'
그 두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데일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데일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뒤편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
[이른 시일에 다시 오거라 데일! 이번처럼 1년 만에 오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랬다가는 이 여신은 눈물을 펑펑 흘릴 것이야!]
* * *
데일은 신전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아까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짙은 어둠. 한쪽에서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그리고 야릇한 미소를 짓는 사제장.
사제장이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원하는 걸 얻으신 듯하군요."
끄덕.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로 신전을 나서려던 데일은 문득,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돌렸다.
"질문 하나 할 수 있나?"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요."
"여신님.... 원래 저런 성격인가?"
왜인지 밤의 여신은 첫 만남 때부터 데일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뭐라더라?
'나는 특별하다던가?'
뭐.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다만 그 친근함이 조금 과하다고 해야 할까.
남들에게도 저리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데일의 물음에 사제장 에리얼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여신님께서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한 태도를 보이시니까요."
"아. 그렇군."
"여신님은 죽음을 관장하잖아요? 죽음은 차갑고 조용한 것이에요. 여신님께서 얼음장처럼 차갑다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
아무래도 여신은 데일을 대할 때와 남을 대할 때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신전을 나섰다.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 높이 뜬 해가 사방에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데일은 서둘러 투구를 머리에 쓰고, 면갑을 내렸다.
그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게임의 무대가 되는 이레네에 도착했으니 할 것도 많았다.
당장 롱소드도 새로 사야 했고.
데일은 혹여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올 때 이용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한낮의 이레네는 매우 복작거렸다. 다양한 종족의 행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지난 1년간은 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했다.
악마가 활개 치는 곳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어두운 표정을 하고 다녔으니.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데일이 지나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수군거렸다.
"...흑기사잖아."
"전선도 아니고 왜 도시 한복판에."
"호, 혹시라도 해코지당할 수 있어. 피하자."
빛과 어둠은 화친을 맺었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감정의 골까지 좁혀진 건 아니다.
밤의 여신을 따르는 자들은 여전히 경계와 적의의 대상이었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손이 품을 더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적의에 민감한 흑기사인지라, 본능적으로 무기를 찾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흑기사들이 회까닥 돌아서 사람을 찔러 죽인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하켄이 해준 말이었나?
어쨌든 이런 분위기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흑기사는 데일만큼 자제심이 깊지 않은 듯하니.
데일은 걸음을 서둘렀다.
사람들이 데일을 겁내며 물러나니, 복잡한 길거리도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는 데에 집중하던 데일이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주점 앞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하켄.'
그러고 보니 하켄은 술을 마시러 간다 했었다.
데일은 아는 체나 할까 싶어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하켄은 문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술 먹고 꼴았군.'
손을 뻗어 하켄을 깨우려던 데일이 멈췄다.
하켄의 어깨가 흔들렸다.
"흑. 흐흑. 미안. 미안해."
하켄은 울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퀼. 미안해."
"...."
유쾌하고, 가볍고, 조금은 천박하던 사내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함께하던 친우를 잃은 건 견디기 어려웠을 터.
하지만 하켄은 도시에 오는 내내 그런 내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용병으로서의 프로 의식일 것이다.
아니면 함께 걷는 동료에게 약한 모습은 죽어도 보여주기 싫은 사내 특유의 고집이거나.
"...."
데일은 그런 하켄의 태도에 존중을 표했다.
굳이 말을 걸지 않고, 모르는 척 주점 밖을 나갔다.
오늘. 데일은 주점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새삼 자기가 어떤 세상에 떨어졌는지를 실감하며, 데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데일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건 바로 신분 문제였다.
에스델이 신원을 보증해줬지만, 언제까지 에스델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막말로 에스델이 운 나쁘게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데일은 도시에서 쫓겨나야 했다.
'신분을 얻으려면 단체에 소속되어야 하는데....'
과연 누가 흑기사를 선뜻 자기네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까.
그런 곳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도 딱 한 곳밖에 없다.
늘 일감이 넘쳐나, 반송장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곳.
데일은 용병 길드의 문을 두드렸다.
용병과 흑기사
* * *
악마의 등장 이후. 가장 큰 성세를 누린 곳은 아마 용병 길드일 것이다.
세상에는 무력이 필요한 일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국가의 정예병들은 전선을 유지하기도 급급한 상황.
결국, 자질구레한 일부터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까지 모조리 용병들이 맡게 되었다.
자연히 용병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올라갔다.
예전엔 전장을 전전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비루한 인생들이었다면, 이제는 잘만하면 귀족의 지위까지 얻을 수 있다.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기대 보상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오늘도 다양한 인간군상이 부푼 꿈을 안고 용병 길드 사무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데일도 그중 하나였다.
용병 길드의 사무소는 7구역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옆으로 넓게 퍼진 6층 높이의 석조 건물을 올려다보던 데일은 문을 열었다.
실내는 한산했다.
웬만한 용병들은 일을 나갔을 시간이고, 일이 없는 용병들은 술을 마실 시간이다.
길드 사무소의 1층에는 용병 몇 명만이 한가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데일은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다 뒷걸음질하던 한 용병과 부딪혔다.
"아이 씨발 어떤 새끼야. 처맞고 싶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를 돌아본 용병의 얼굴이 굳었다.
전신을 흑색 갑주로 무장한 데일이 내려다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용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흐, 흑기사가 왜 여기에?"
데일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계속 말해라."
"네?"
"처맞고 싶어 다음에 하려던 말을 계속 말하라고."
용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오른손을 들고는 자기 뺨을 힘껏 때렸다.
짝!
"야, 야이 씨발 멍청한 새끼야! 감히 기사님과 부딪혀? 처맞고 싶어? 처맞아야 정신 차리지. 응?"
짝! 짝! 짝!
용병은 마치 스스로에게 화를 내듯 외친 뒤, 자기 뺨을 연거푸 때렸다.
그 우스운 촌극에 데일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조심해라."
"예, 옙! 조심하겠습니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용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다 해도 여전히 용병은 용병이다.
늘 죽음이 가까이 있는 이들답게 몹시 거칠고, 포악한 구석이 있었다.
누가 위인지는 언제나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쯤 되자 실내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데일에게 쏠렸다.
데일은 어딜 가든 시선을 끄는 외형이었다.
용병들이 수군거렸다.
"흑기사잖아. 처음 봐."
"나는 최전선에서 한 번 본 적 있는데.... 가까이 갈 생각은 안 하는게 좋아."
"길드에는 왜 온 거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데일은 접수대로 향했다.
접수대는 세 개였는데, 접수원 셋 모두 데일을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어느 접수대로 갈까. 데일은 고민했다.
접수원들은 하나같이 제발 자기한테만 오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데일은 그나마 침착해 보이는 쪽으로 향했다.
"어, 어서오세요. 용병 길드 이레네 지부에."
바짝 긴장한 접수원이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데일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접수원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용병 등록을 하고 싶다."
"아. 음. 그렇군요."
다짜고짜 웬 흑기사가 찾아오더니, 갑자기 용병 등록을 하겠단다.
접수원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흑기사는 원래 기사다.
그리고 기사들은 하나 같이 자부심이 넘치고 오만하다.
기사들은 차라리 강도 기사가 되어 여행자들을 털어먹었으면 먹었지, 하찮은 용병 나부랭이가 될 이들이 아니다.
흑기사들은 얘기가 좀 다르지만, 이들 역시 용병에 어울리는 이들은 아니었다.
접수원은 당황했지만 자기 일을 잊지는 않았다.
데일에게 친절한 어조로 물었다.
"신원을 증명해줄 물건이 있나요?"
"없다. 하지만 보증인은 있다."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에스델. 교단의 견습 사제다."
접수원은 눈을 찌푸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교단의 사제가 흑기사의 보증인이 되어준다니?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점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앞의 흑기사가 너무 무서웠다.
'조,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나를 죽여서 내 영혼을 빨아먹을 거야.'
다분히 편견 섞인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접수원은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서,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데일."
"데일 경이셨군요. 우선 용병 등급부터 설명을 드릴게요. 길드에서는 용병 분들의 공적에 따라 목패, 철패, 동패, 은패, 금패 이렇게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어요. 이해 가시나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혹시 데일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게 있을까 싶어 경청했다.
"길드에서 의뢰를 수행해 실적을 쌓으면 등급을 올릴 수 있습니다. 동패 등급부터는 3구역에 들어갈 자격이 생기고, 금패가 되시면 황실에서 준남작 작위가 내려올 거예요."
접수원은 말할수록 긴장이 덜 하는지, 긴 설명을 더듬거리는 일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상위 구역 입장 자격과 준남작 작위.'
이레네는 총 7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3구역부터는 입장에 자격이 필요하다.
동패 용병이 되면 그 자격이 생긴다.
물론, 혜택이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자리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위 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생각하면 빨리 등급을 올려야 하는데.'
앞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데일이 접수원에게 말했다.
"알았다. 목패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등록하겠다."
"저....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
데일이 노려보자 접수원의 말이 다시 빨라졌다.
"저, 저희 길드에는 입단 시험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최소한의 신용을 보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간단한 의뢰를 몇 가지 맡기거든요. 약초 채집이라거나 하수구 청소라거나...."
"짧게 말해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침을 꿀꺽 삼킨 접수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함부로 데일 경께 의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의뢰자분들이 싫어하실 수도 있어서."
"왜지?"
"그야...."
접수원을 말을 잇지 못하고, 데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반응에서 데일은 접수원이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다.
'흑기사니까.'
어이가 없어진 데일이 되물었다.
"흑기사가 캔 약초는 효능이 줄어들기라도 하나? 아니면 내가 하수구를 청소하면 다른 놈들이 청소하는 거랑 다른가?"
"그게. 길드와 의뢰주들간에 신뢰가 깨질 수 있는 문제인지라."
요컨대 반 언데드에게 맡길만한 의뢰주가 없다는 건가.
데일이 만약 확실한 신분이 있었다면. 혹은 무시할 수 없는 실적이 있었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다.
하지만 데일은 이제 도시에 찾아온 참이다.
수상쩍고 낯선 반 이교도에게 의뢰를 맡길 사람은 없다.
'허. 이래서 게임에서 흑기사는 안 한 건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고민하던 데일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지금껏 너무 인간적으로 나갔으니, 흑기사답게 하기로 했다.
데일은 일부러 접수원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시험 없이 목패를 발급해라."
막무가내로 나가기.
접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예?"
"입단 시험을 준비하지 못하는 건 너희의 잘못 아닌가.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지."
"그건...."
꽝!
"꺄악!"
데일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 균열이 쩌적 생겨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안내원이 뒤로 물러났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위협 한 번이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이다.
흑기사 특유의 싸늘한 기세가 주위에 퍼졌다.
접수원은 이제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접수원이 어찌할 줄 몰라했다.
"아, 으."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그냥 목패에 내 이름을 새겨 주면 될 뿐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다."
공포에 질린 접수원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접수원은 떨리는 손으로 목패에 데일의 이름을 새기려 했다.
데일은 속으로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협박 작전. 성공.'
자주 쓰기는 뭣 하지만, 심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써먹기 좋은 작전이다.
그때. 뒤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직원을 겁줘서 은근슬쩍 용병패를 받으려는 건 그만둬 주시지요."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덩치가 크고, 볼에 칼자국이 있는 중년 흑인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데일의 기억에도 있는 얼굴이었다.
"가란드."
은퇴한 금패 용병 가란드. 준남작 작위를 거절한 용병의 전설이자, 용병 길드 이레네 지부의 지부장. 그리고 특별한 비밀을 품고 있는 사내.
게임을 플레이할 적에도 종종 마주치던 인물이다.
데일이 자기를 알아보자 가란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를 아시는군요."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라.... 아. 자네는 가서 일 보게."
"예, 예?"
가란드의 허락에 접수원이 화색을 띠고는 서둘러 접수대에서 물러났다.
대신 가란드가 그 빈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얘기를 들어보니, 용병 등록을 하고 싶다 이 말이죠?"
"그렇소."
"흐음. 저희야 인재는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말이죠."
가란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문제는 앞서 말했던 데일 경의 신뢰 문제입니다. 당장 데일 경에게 의뢰를 맡길 만한 의뢰자를 찾기 힘듭니다."
앞서 나왔던 얘기를 되풀이하자, 데일은 슬슬 짜증이 났다.
'그냥 협박을 해?'
가란드에게는 비밀이 있고, 데일은 그 비밀은 안다. 그 점을 쥐고 이용하면 용병 패 따위야 얼마든지 내줄 터.
하지만....
'아깝다.'
고작 이런 일에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패다. 게다가 첫 만남을 협박으로 시작하다니?
그러면 가란드와의 관계는 앞으로도 쭉 좋지 못할 게 뻔하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데일은 일부러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못 받아주겠다 이거요?"
"흐음."
데일이 흉흉한 기세를 뿌렸지만, 가란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눈으로 데일을 살폈다.
"하켄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이곳까지 보호하면서 왔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하켄이 이미 보고서까지 작성한 것인가?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에 데일은 고개만 끄덕였다.
가란드가 이어 말했다.
"퀼과 하켄. 믿을만한 2인조이지요. 아, 이제는 2인조가 아니지만.... 어쨌건 하켄이 좋게 평가했다면 이유가 있겠죠. 의뢰를 하나 맡기겠습니다."
"내 줄 의뢰가 있소?"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내는 의뢰입니다."
의뢰의 주체가 길드인가?
이런 일은 골치 아플 가능성이 컸다.
가란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뢰자는 길드가 아니라 저이지만요. 수락하시겠습니까? 꽤 위험할 수도 있어요. 아니. 위험할 겁니다."
위험한 의뢰?
오히려 좋다.
데일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받아들이겠소."
* * *
가란드는 곧바로 의뢰 내용을 설명했다.
"이곳에서 이틀 거리의 마을에서 몬스터 토벌 의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아울베어가 이동해와서 마을 근처에 정착했다는군요."
"아울베어는 자기 영역에서 잘 벗어나지 않을텐데?"
가란드가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몬스터의 생태에 대해 잘 아시는 군요! 예, 맞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자기 영역 안에서 생활하는 놈이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의뢰를 받은 길드는 토벌대를 보냈다. '마일즈 팀'이라는 용병 팀이었는데, 동패 하나에 철패 다섯이 포함된 파티였다.
아울 베어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전멸했습니다. 팀을 이끌던 리더를 빼고 전부요. 보고에 따르면 변종 아울베어였다 하더군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이번에 토벌대가 새로 꾸려졌는데, 영 불안해서 말이죠. 데일 경이 함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 베어 퇴치.
데일은 생각했다.
'아울 베어라. 생각보다 버거운 의뢰는 아니야.'
변종이라 하나 다른 용병들도 있다면 크게 위험한 괴물은 아니었다.
"그게 전부요?"
"예. 아, 그리고 죽은 용병들의 용병패를 회수해 주시겠습니까? 유족들에게도 알려주고, 장례를 치러주는 것도 길드의 의무인지라."
"알았소. 가능한 한 모두 챙겨오겠소."
"예. 이번 의뢰만 무사히 끝난다면, 용병 패를 발급해드리겠습니다."
가란드는 분주히 서류를 작성하며 말했다. 접수원에게 시켜도 될 일이지만, 자기가 직접 하는 게 편한 듯했다.
그러다 문득, 가란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용병들도 죽었을 정도니, 근처 마을 사람들도 이미 변을 당했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작은 마을 하나 정도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이다.
가란드가 데일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부디 데일 경께서 그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바랍니다."
"맡겨 두시오."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란드가 막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용병 등록을 하려면 인상착의를 그려야 하는데, 투구 좀 벗어주시죠."
데일은 순순히 투구를 벗었다.
밖으로 드러난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가란드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투구를 벗었다면 접수원이 홀라당 넘어갔겠는데."
용병과 흑기사
* * *
공교롭게도 의뢰 출발일이 바로 다음날이었다.
데일은 길드와 제휴를 맺은 대장간에서 적당한 롱소드를 구매했다. 그러고서는 동이 트기도 전 새벽에 길드 사무소로 향했다.
이미 의뢰 참여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용병 하나가 가란드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가란드씨!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인원을 한 명 더 추가하다니, 그것도 흑기사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가란드는 미안한 표정으로 양손을 들었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네. 하지만 걱정돼서 그런 거야. 요즘 일이 넘치는 걸 알지 않나? 변종 아울베어를 상대하다 소중한 용병들이 더 죽기라도 하면, 길드 운영이 어려울 정도야."
"그래도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문제가 생기면 내 전부 배상하겠네."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창 언성이 격해지던 그때. 데일이 내는 발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가란드가 살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데일 경. 좋은 아침입니다."
데일은 고개만 끄덕였다.
실랑이를 벌이던 용병은 데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막상 눈앞에서 보니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가란드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가? 믿음직스럽지 않나?"
"누가 무력이 부족하댔나. 참...."
용병은 한참을 고민했다. 죽어도 데일을 데려가기 싫은 눈치였다.
그러자 가란드가 표정을 조금 굳혔다.
"이봐 마일즈. 이미 한번 의뢰를 실패했으면서 왜 이리 까탈스럽게 구나. 아니면 데일 경을 데려가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따로 있는 건가?"
가란드의 말에 마일즈라 불린 용병이 찔끔했다.
그는 지금 가란드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가란드의 말대로 마일즈는 지난 아울베어 토벌에 나섰다가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
의뢰에 실패하는 건 흔한 일이다.
실패는 경력에 오점이 될지언정 치명적이지는 않다. 용병들의 평균 의뢰 성공률은 60퍼센트를 간신히 넘길 정도이니.
하지만 동료를 모두 잃고 혼자 돌아왔다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마일즈가 동료를 배신하고 혼자 도망쳤을지 누가 알겠나?
의심이 굳어지면 앞으로 어떤 용병도 마일즈와 함께 하지 않을 거다.
마일즈는 이번에 반드시 만회해야만 했다. 그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단. 제가 토벌대의 리더입니다. 제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데일 경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동의했네."
"그렇다면야."
마일즈는 썩 탐탁지 않아 했으나, 어쨌든 수긍했다.
그는 데일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아만의 아들 마일즈요. 동패에 3등급 워리어. 잠깐이지만 잘부탁하겠소."
"데일이다. 2등급 흑기사다."
덩치가 크고, 쥐새끼처럼 생긴 마일즈는 데일과 마주 잡은 손에 은근슬쩍 힘을 주었다.
3등급 워리어인 그는 다른 무엇보다 힘에는 자신 있었다.
다소 유치한 방법이긴 하나, 용병 사이에 서열 정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
처음에는 마일즈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의아해하던 데일도 곧 그 의도를 깨달았다.
데일 역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마일즈의 표정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마일즈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내 자기도 모르게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악."
"아. 미안하다. 너무 세게 쥔 모양이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데일은 그제야 마일즈의 손을 놓아주었다.
피가 몰려 새빨개진 마일즈의 손이 보였다.
그 얼굴 역시 수치심으로 붉어져 있었다.
마일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흠흠. 제법 악력이 강하시군. 이 정도면 동료로 함께해도 좋을 것 같소."
마치 자기가 데일을 시험했다는 뉘앙스.
하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속으로 마일즈를 비웃었다. 그의 꼴이 매우 추해 보였다.
체면을 구긴 마일즈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마일즈는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데일 경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깜빡 잊은 물건이 있어 준비를 좀 해오겠소."
"알았다."
마일즈가 어딘가로 분주히 사라지고 난 후.
데일은 가란드에게 다가갔다.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래 봬도 실력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여자를 너무 밝혀서 문제지만요."
"다른 인원들은?"
"저기 있습니다. 데일 경까지 총 7명이죠."
동패 둘에 철패 둘. 여사제 하나. 목패 하나. 그리고 데일.
활잡이에 방패병, 사제가 있으니 조합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이다.
여기에 미리 변종 아울베어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까지 철저히 한다면, 도저히 실패할 수가 없는 원정이다.
'어쩌면 내가 나설 일도 없겠군.'
용병들에게 가서 통성명이라도 할까 했지만, 저쪽에서는 딱히 데일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데일은 자리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기다리다 보니 마일즈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배낭이 들려있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그마한 체구의 용병을 대뜸 걷어찼다.
"악!"
"이 새끼가 봤으면 어서 짐 들러 와야지! 뭘 멀뚱히 있어! 정신 안 차릴래?"
"죄, 죄송합니다."
조그만 체구의 용병이 허겁지겁 짐을 받아들었다.
그는 목패 용병이었고, 짐꾼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느닷없는 폭력이었지만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용병 업계에서 폭력은 흔했다.
게다가 목패 등급은 같은 용병이라기보다는 허드렛일꾼에 가까웠다.
동료보다는 하인의 위치.
토벌 참여자들은 짐꾼에게 자기 가방을 모두 맡겼다.
그러지 않은 사람은 딱 둘.
여사제와 데일이었다.
"기사님. 제가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괜찮다. 내 짐은 내가 들겠다."
"그, 그렇습니까."
짐꾼은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자기 체구보다 더 큰 짐을 들고 있었지만, 끄떡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힘이 센데. 인간이 아닌가.'
짐꾼은 갑옷 없이 꼬질꼬질한 투구만 뒤집어쓴 모습이라 종족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마일즈가 외쳤다.
"자! 이틀 거리니만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짐 마차를 빌려놨으니 그곳으로 이동하죠."
마일즈를 선두로 용병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 * *
마부는 마일즈가 맡았다. 고삐를 쥔 그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사제님! 여기 앉으십시오! 헤헤."
"...저는 괜찮습니다."
홍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여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전에도 마일즈가 몇 번이고 치근덕댄 탓이다.
그러자 마일즈가 씩 웃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사제님도 저런 거랑 같이 타고 싶지는 않잖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저런 거'란 데일을 의미했다.
여사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교도의 옆에 앉느니, 마일즈의 치근덕거림을 참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사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일즈의 옆에 앉았다.
나머지 인원들은 마차에 알아서 끼어 앉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걸 알았지만, 데일은 무심하게 새로 산 롱소드를 헝겊으로 닦았다.
마차는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몬스터나 맹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원래 이레네 주위는 치안이 좋은 편이다. 가도는 더더욱 그렇다.
원아이에게 습격당했던 데일이 특이한 케이스다.
그렇게 평화롭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마차는 적당한 위치에서 멈춰섰다.
마일즈는 짐꾼에게 발길질하며 말했다.
"야 이놈아! 빨리 야영 준비해!"
"아, 알겠습니다."
짐꾼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너무 많이 들고 있어서 일까?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가방 중 하나가 열려 그 내용물을 와르르 토해냈다.
"얼씨구. 진짜 가지가지 한다."
"죄, 죄송합니다."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도와주러 나서지 않았다.
그들 일이 아니었으니까.
데일은 허겁지겁 내용물을 주워 담는 짐꾼에게 다가갔다.
짐꾼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익!"
"돕겠다."
"아, 안 그러셔도 됩니다!"
짐꾼은 크게 당황했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마일즈가 오전에 사온 가방이군.'
그 내용물을 살피던 데일은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성수랑 식량이 왜 이렇게 많아.'
두 품목은 여정의 필수품이다.
성수는 다방면으로 활용 가능하며, 치료 효과도 있다.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다만 그 양이 많았다.
고작 나흘 걸릴 여정에 뭐 이리 식량이 많단 말인가.
'마일즈는 걱정이 많은 타입인가.'
드문 유형은 아니다. 유달리 신중해, 과할 정도의 대비를 하는 이들.
여기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마일즈. 물어볼 게 있다."
데일이 갑자기 말을 걸자 마일즈는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아울베어를 상대하는 데 왜 검은 허브가 없지? 갈고리나 밧줄도 보이지 않는다만? 그리고 이건 마비초가 아닌가?"
아울베어는 검은 허브 냄새에 환장한다.
검은 허브로 유인한 뒤, 갈고리로 아울베어의 움직임을 묶는 건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적어도 데일이 알기로는 그렇다.
데일이 추궁하자 마일즈는 얼굴을 굳혔다.
"...의외로 몬스터 지식이 풍부하시군."
이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족히 10년은 구른 노련한 용병처럼 몬스터 상대법에 빠삭하다니.
쯧. 하고 혀를 찬 마일즈가 설명했다.
"이미 아울베어 놈이 어디 서식하는지는 알고 있소. 굳이 검은 허브로 유인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요."
"갈고리는?"
"아울베어 가죽은 비싸게 팔 수 있소. 그런 금덩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지 않겠소? 마비초를 사용해 놈을 제압한 뒤, 깔끔하게 해체할 생각이었소."
데일은 마일즈의 설명을 곱씹었다. 납득이 안되지는 않았다.
'이미 한번 실패했으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만회하려고 하는 건가?'
깔끔한 아울베어 가죽을 얻어낸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앞으로 용병들은 마일즈와 함께 하기를 주저치 않을 터.
결국, 용병이라는 게 돈 벌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데일은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각이었다.
"하지만."
데일이 무어라 더 추궁하려고 하자, 마일즈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 표정에는 언짢은 감정이 숨기지 않고 드러나 있었다.
마일즈가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사사건건 참견을 해오면 곤란하오. 이 토벌대의 리더는 나요. 데일 경은 지금 내 권위를 무시하고 있소."
데일은 마일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저 의문을 표한 것뿐이다."
"의문은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제기했어야지. 이제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와서 추궁해봤자 무얼 하나. 다시 도시로 돌아갈 것도 아닌데.
마일즈는 한껏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안 그러면...."
꺼져라.
분명 마일즈가 뱉지 않은 뒷말은 그런 의미였을 거다.
데일은 마일즈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 줄이야.
데일은 고개를 돌려 주위 반응을 살폈다.
표정을 보니 용병들도 마일즈와 같은 의견인 듯하다.
데일의 의문은 합리적이었지만, 어쨌든 의뢰 도중 리더의 권위는 드높은 법이다.
고민하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조심하시오."
자기 권위를 세우는 데 성공한 마일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일은 생각했다.
'띠껍군.'
내면의 본능이 외쳤다. 그냥 이 재수 없는 사내를 죽여버리라고.
하지만 데일은 따르지 않았다.
그건 데일의 신념과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강한 예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일즈랑은 언젠가 칼을 맞댈 것 같다고.
예감이 아니라 그저 데일의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데일은 다시 헝겊을 꺼내 롱소드를 꼼꼼히 닦았다.
그다음에는 손도끼의 날을 잘 갈아주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의 골통을 부수기 위해서, 무기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용병과 흑기사
* * *
일행은 저녁을 먹은 뒤,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는 잠에 들었다.
데일도 적당한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사실 데일은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다. 반 언데드의 몸은 그런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데일은 억지로 음식을 먹고, 잠을 잤다.
자기가 인간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데일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원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데일은 그저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추억들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추억이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질 때가 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는 기억들.
데일은 이걸 꿈이라고 불렀다.
꿈에 자주 나오는 단골손님은 그를 키워준 조부다.
오늘도 그랬다.
조부가 인간이었을 적의 데일을 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늑대가 있단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 이 두 늑대는 언제나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 두 늑대 중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먹이를 주는...."
"네가 모르는 것 같으니 정답을 알려주마. 그건 바로 먹이를 주는 쪽이란다. 알겠니?"
조부는 데일의 말을 끊고 얼른 설명해버렸다.
꿈속의 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또 어디 신문 같은 데서 좋은 글귀를 보고 데일에게 알려주려고 한 모양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데일은 조부의 말을 경청했다.
흔한 이야기라도 그의 입을 거치면 특별해지므로.
"늘 착한 선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알겠지?"
조부는 어린 데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여기서 뭐라고 더 하셨던 것 같은데....'
그 타이밍에 데일은 꿈에서 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념이 끊겼다.
예민한 청각이 낯선 소리를 포착한 것이다.
'종이 넘기는 소리.'
이런 데에서 들릴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데일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데일은 조금 놀랐다.
'노움?'
노움. 사람과 외모가 비슷하지만, 키는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종족.
원래 사막에서 살던 이들답게 그 귀가 아래로 처져 있고, 속눈썹이 무성하다.
전체적으로 귀엽고 어려보이는 생김새지만 힘은 인간 못지않다고 들었다.
'일행 중에 노움이 있었던가? 아. 짐꾼.'
투구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용병이 사실 노움이었다니.
신기한 기분을 느낀 데일이 모닥불로 다가갔다.
책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노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고개를 들고는 화들짝 놀랐다.
"히익."
노움은 곧장 땅에 머리를 박고 사과를 빌었다.
"제, 제가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나는 잠을 못 자니까."
"예? 그럼 왜 누워 계셨습니까?"
"그냥 기분만 낸 거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노움은 고개를 갸웃했다.
데일은 노움이 들고 있는 두꺼운 책을 보며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아나?"
"예? 아, 네. 기회가 닿아 읽고 쓰는 법을 좀 배웠습니다."
"대단하군."
데일은 솔직하게 칭찬했다.
이 세계에는 글자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당장 데일도 그랬다.
'언어 배우는 데만도 개고생이었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는 참 난감한 일이 많았다.
몬스터로 취급받고 공격받은 적만 몇 번이던가.
그때를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대단한거다."
"어...."
노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갑자기 큼지막한 물방울이 눈가에 맺혔다.
당황한 데일이 물었다.
"...내가 뭔가 실수했나?"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냥. 살면서 누군가가 이렇게 칭찬해준 게 처음이라서요. 다들 노움이 글 알아봤자 어디다 쓰냐고 구박만 했거든요."
"글을 알면 일을 구하기 쉽지 않나?"
"아무래도 저희 노움들은 사람들이 잘 고용을 안 해주거든요."
노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게임에서도 종족마다 평가가 다 달랐지.'
노움이 썩 인기 있는 종족은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데일이 말했다.
"나는 데일이다."
"아. 저는 아일라의 아들 레온입니다. 아시다시피 목패 용병이고, 아직 등급과 직업은 없습니다."
"알겠다. 레온,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너는 마저 책을 읽어라."
"엇. 그, 그래도 됩니까? 너무 민폐가 아닌지...."
"어차피 나는 잠을 안 자니 신경 쓰지 말아라."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레온은 허겁지겁 책을 탐독했다.
그 모습에서 전생의 어린 동생들이 겹쳐 보였다.
데일은 차가운 심장이 살짝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럴 때마다 데일은 조금. 아주 조금은 인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종이는 넘기는 소리. 그리고 모닥불 타닥이는 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 * *
다음날도 여정은 평화로웠다.
마차는 순조롭게 나아갔고, 별다른 위협도 없었다.
이렇게 순조로워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늦은 오후 무렵.
숲길의 한 가운데에서 마차가 멈췄다.
마일즈가 외쳤다.
"자. 이제 아울베어의 서식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소. 여기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단단히 준비해서 갑시다."
여사제가 물었다.
"꼭 이런 숲길에서 멈췄어야 하나요? 이러다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요."
"하하! 사제님이 잘 모르시네. 변종 아울베어의 영역 안에 어슬렁거릴 만한 놈이 어딨소. 그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라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오."
"그렇군요."
여사제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동패 용병인 마일즈가 이런 쪽으로는 가장 해박할 테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마일즈가 솥을 꺼내며 말했다.
"자! 오늘은 특별히 내가 솜씨를 부려보겠소!"
활을 든 용병이 의문을 표했다.
"마일즈씨가 직접 요리를 한다구요?"
"하하. 용병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절로 요리 솜씨도 늘어나는 법이오. 기대해도 좋소. 내 동료들도 내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오."
마일즈의 동료가 저번 의뢰에서 모두 죽었음을 아는 용병이 말을 정정해주었다.
"...좋아했었다는 말이죠?"
"아, 아. 그렇소. 말을 실수했군. 워낙 친했던 사이인지라, 지금도 놈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마일즈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용병들은 숙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마일즈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고자 쾌활하게 외쳤다.
"자! 나는 요리 시작할 테니, 각자들 준비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용병들은 각자 본인의 무기를 점검했다.
그 사이, 마일즈는 수프를 끓였다.
육포와 말린 채소 따위를 넣어 끓인 특별할 것 없는 수프였다.
요리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솥 주위에 둘러앉아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었다.
마일즈가 호들갑 잔뜩 떠니 그 맛이 궁금한 것이다.
마일즈는 용병들의 그릇에 수프를 퍼주었다.
"짐꾼. 그리고 데일 경도 좀 먹으시오."
"가, 감사합니다."
"고맙다."
레온은 혹여나 또 발길질이 날아올까, 황급히 수프를 받았다.
데일은 심드렁하게 그릇을 내밀었다.
마일즈는 데일의 그릇 가득히 수프를 따라주었다. 남들보다 배는 많은 양이었다.
"덩치가 크시니 남들보다 많이 먹어야 하지 않겠소?"
"...고맙다."
용병들이 하나둘 수프를 입에 떠먹기 시작했다.
"응?"
여사제가 머리를 갸웃했다. 분명 나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들갑 떨 정도인가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딱 평범한 정도.
'살짝 향이 독특한 것 같기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인 모양.
하지만 직접 요리해준 성의가 있다. 투정을 부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조용히 수프를 떠먹었다.
데일도 수프를 입에 가져다 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통수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살기.'
수풀 너머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미약한 살기였다. 상대는 어느 정도 살기와 적의를 감출 줄 알았다.
단지, 흑기사의 감각이 너무 예민했을 뿐이다.
'몬스터인가?'
이변을 알리기 위해 데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수프를 먹는 척하며 용병들을 힐끗거리는 마일즈를.
데일은 수프로 시선을 내렸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손가락을 찍어 수프를 입에 가져다 댔다.
데일은 고민 없이 솥을 발로 차 버렸다. 뜨거운 수프가 마일즈의 몸에 쏟아졌다.
"끄아악!"
"모두 수프 뱉어라!"
"예?"
갑작스러운 데일의 행동에 다른 용병들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데일은 검을 뽑아 그대로 마일즈를 베려 했다.
하지만 빠르게 뒤로 물러난 마일즈가 검을 피했다. 그리고 분노한 얼굴로 외쳤다.
"이 자식이.... 모두 공격해!!"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용병들은 순간 자기들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 당황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쐐액!
"컥!"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여사제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마일즈가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시발. 사제는 가격이 더 나가는데."
그제야 용병들은 무언가 벌어졌음을 알아차리고 무기를 뽑았다.
수풀에서는 습격자 다섯이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이 자식들! 죽여버리겠어!"
용병 하나가 검을 뽑아 그대로 습격자에게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몸이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마치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는 느낌.
용병이 검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이미 습격자의 칼날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피 분수가 튀며 용병의 몸이 허물어졌다.
데일은 외쳤다.
"마비다! 수프에 독을 탄 거다! 방어에 집중해라!"
그런 데일에게 습격자 하나가 쇄도했다.
녀석은 워해머를 들어 그대로 데일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데일도 마비 상태라고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데일은 기민하게 스텝을 밟은 뒤, 그대로 손도끼를 뽑아 녀석의 목을 내리찍었다.
우적!
잘 벼려진 도끼날이 살을 가르고 뼈를 끊었다. 뜨거운 피가 얼굴에 튀었다.
데일은 그 상태로 다른 습격자를 노려보았다.
"어엇."
피를 뒤집어쓴 흑기사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심상치 않다.
전장에서 활개 친다는 악마들이 이러할까?
습격자들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데일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땅을 박차 습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습격자들은 무기를 휘둘렀다. 검이 꽤 날카로운 궤적으로 파고들어 왔다.
데일은 그 궤적을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냥 맞아주기로.
캉!
검날이 갑옷을 때렸다. 제법 강한 일격이다. 하지만 갑옷을 꿰뚫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
멍청한 얼굴을 하는 습격자에게 데일이 주먹을 날렸다.
콰득!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아래턱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데일은 주먹을 한 번 더 내리쳐 녀석의 골통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다시 한번 피가 튀며 데일의 갑옷을 적셨다.
원래 같으면 불쾌했어야 하나, 흑기사의 몸은 지금의 살육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데일은 팔을 뻗어 건틀릿을 습격자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기를 흡수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달리 말하면, 무고하지 않은 이들의 생기는 얼마든지 빼앗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습격자의 몸에서 생기와 잔혼이 빠져나와 데일의 몸에 흡수되었다.
데일은 싸늘한 심장을 채우는 충만감을 느꼈다.
사람의 생기를 흡수하는 건 몬스터의 것을 빼앗는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흑기사의 몸은 사람의 생기에 더 기뻐했으며, 들어 있는 잔혼 역시 그 농도가 훨씬 짙었다.
영혼이 짙다 보니 가끔 재밌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그 사람의 기억을 보여주거나.
죽은 습격자의 기억이 데일의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예상대로 마일즈의 동료였군.'
단편적인 기억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성공적이었던 아울베어 토벌.
마을에서 용병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열었던 연회.
시골 처녀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촌장의 딸.
눈이 돌아간 마일즈. 겁간. 발각. 분노한 마을 사람들. 싸움. 학살.
'마일즈의 실수로 마을 사람들과 싸우다 죽여버렸고, 좆 되게 생겼던 거군.'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다시는 용병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은 여기서 끊겼지만 그 이후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마일즈 팀은 용병 일을 접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탕 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길드에 거짓말을 해 다른 용병과 사제를 모았고, 마비초를 준비했다.
문득, 마일즈이 말이 기억났다.
'금덩이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이 시대에 노예는 언제나 수요가 넘쳤다.
몸만 성하다면 얼마든지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한데. 그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변수가 나타났다.
그게 바로 데일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사건의 전말이 대강 파악되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마일즈의 자작극이었던 셈이다.
데일은 검을 들고 주위를 살폈다.
어느덧 아군 중에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데일밖에 남지 않았다.
용병들은 열심히 저항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칼을 맞고 쓰러졌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제가 당한 점과 마비초를 먹은 게 너무 컸다.
데일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상대할 건 넷. 철패 셋에 동패 하나. 동패는 3등급 워리어.... 인가.'
데일은 롱소드를 들고 고개를 마일즈 쪽으로 돌렸다.
뜨거운 수프를 뒤집어 써 피부가 새빨개진 마일즈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하나만 묻지."
"뭐?"
"마을 사람들은 왜 전부 죽였나. 분명 다른 해결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마일즈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뭔 개 같은 질문이야."
"왜 죽였냐고 물었다."
"사람 죽이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해. 나보다 약하고, 이득이 되니까 죽이는 거지."
마일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조금이 죄책감도 없는 모습이다.
데일은 그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그 속에 어떤 괴물을 키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
데일은 롱소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속 늑대에게 먹이를 줄 시간이다.
용병과 흑기사
* * *
데일은 롱소드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마일즈도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녀석이 든 워해머는 새빨간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
침묵.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습격자 중 하나가 조용히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 손이 조금 떨린다.
눈앞의 흑기사를 마주하니 공포가 자꾸만 샘솟았다.
"어?"
그때. 궁수와 데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두려워하는 감정을 읽어낸 건가? 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다.
다음 순간. 데일의 왼팔이 흐릿해졌다.
우적!
어느새 날아온 손도끼가 궁수의 얼굴 한가운데에 틀어박혔다.
"커, 커억...."
피가 강처럼 흘러내리더니 이내 그 몸이 허물어졌다.
마일즈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외쳤다.
"정신 차리고 공격해!"
마일즈가 앞장섰다. 그는 워해머를 힘껏 들어 올려, 그대로 데일을 향해 내리쳤다.
데일은 롱소드를 수평으로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깡!
쇠와 쇠가 부딪히자 불티가 튀었다. 데일은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을 가늠했다.
'워해머를 무기로 쓰는 3등급 워리어. 빠르지는 않지만 일격 하나하나가 강력하다.'
사람보다는 튼튼한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전투 스타일이다.
데일의 단단한 갑옷에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맞아줄 필요는 없겠지.'
무기를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던 데일은 돌연. 손에 힘을 빼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롱소드가 아래로 떨어졌다. 잔뜩 힘을 주던 마일즈의 중심도 앞으로 넘어갔다.
마일즈는 당황했다. 기사가 무기를 버리다니?
하지만 마일즈는 모를 것이다.
데일이 검술보다 오히려 맨몸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데에 익숙하다는 걸.
곧게 뻗은 주먹이 균형을 잃은 마일즈의 얼굴에 쇄도했다.
우득!
건틀릿이 마일즈의 못생긴 매부리코를 완전히 뭉개놓았다.
원래라면 그대로 얼굴 뼈를 뭉개놓았어야 할 일격이다.
하지만 워리어의 신체는 튼튼했다.
불시의 일격을 당했지만 마일즈는 곧장 균형을 잡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마일즈가 입에서 피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가란드 이 시발 새끼. 우리한테 괴물을 붙여놓았잖아."
갑자기 가란드 욕이라고?
데일이 말의 의미를 되물으려던 그때, 마일즈가 외쳤다.
"던져!"
그 순간.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마일즈의 동료들이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 이쪽에 뿌렸다.
은은한 빛이 서린 투명한 액체. 성수였다.
성수가 마일즈의 피부에 닿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제법 비싼 성수인지, 그 속도가 빠르다.
반대로 성수를 뒤집어쓴 데일의 몸에서는 부글부글 거품이 끓었다.
빛과 어둠의 전쟁은 긴 시간 이어졌고, 자연스레 둘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성수 역시 그렇다.
빛의 신성이 담긴 이 액체는 데일같은 존재에게는 치명적이다.
데일은 오랜만에 통증이라는 감각을 느꼈다. 신체가 아닌 정신에 전해지는 통증이다.
그는 조금 짜증 나는 눈으로 마일즈를 노려보았다.
"과하게 성수를 많이 샀다 했더니, 나 때문이었군."
"빨리도 알아차리시는구만."
데일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성수에 닿은 갑옷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마일즈와 동료들도 데일의 꼴을 보고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얼마든지 데일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모양이다.
"귀찮게 구는군."
데일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마일즈가 긴장하며 워해머를 쥐었다. 데일은 잠시 마일즈를 노려보다.... 뒤를 돌아 힘껏 뛰었다.
"도, 도망친다고?"
마일즈가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쫓아야 한다. 여기서 데일을 놓치면 안 된다. 길드 본부에 오늘 일을 보고라도 했다가는 추격대가 올 것이다.
마일즈는 빠르게 데일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데일은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신속하게 달려나가던 데일은 돌연, 방향을 크게 꺾었다.
그가 향한 곳에 있는 건 앞서 죽은 궁수의 시체였다.
데일이 궁수의 가슴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생기가 흡수되었다. 데일의 몸도 빠르게 원상태를 되찾아갔다.
그제야 실책을 깨달은 마일즈가 외쳤다.
"성수 더 던져! 놈이 생기를 못 흡수하게 막아야 해!"
"예, 예!"
동료들은 허겁지겁 유리병의 뚜껑을 따서 던지려 했다.
데일은 궁수의 안면에 박혀 있던 손도끼를 쥐고는 주저 없이 던졌다.
휘익!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 도끼가 습격자의 손에 들린 유리병에 정확히 명중했다.
카창!
"아악! 내 손!"
유리병을 깨부순 손도끼가 그대로 습격자의 손에 틀어박혔다.
옆에 있던 다른 동료는 그 모습에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코앞에 데일이 다가와 있었다.
데일은 양팔을 힘껏 벌렸고, 그대로 박수를 치듯. 습격자의 양쪽 귀를 동시에 후려갈겼다.
짝!
습격자의 눈이 흰자위를 드러냈다.
코에서는 피인지 뇌수인지 모를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더 볼 것도 없다. 죽었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주먹을 한 번 더 휘둘러 손을 부여잡고 끅끅거리던 습격자의 명치를 후려쳤다.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 남은 적은 마일즈 단 하나.
마일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곧바로 동료들을 도우려 했는데, 그 전에 데일이 모두 끝장을 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마일즈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군. 4년을 함께 호흡을 맞췄는데.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다니."
데일은 대답 없이 바닥에 떨어트린 롱소드를 다시 주워들었다.
그런 데일을 보며 마일즈가 말했다.
"괴물 새끼. 타고 났군."
데일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가."
"사람 죽이는 걸 타고 났다고. 움직임을 보면 딱히 전문적인 기술이 엿보이지는 않는데.... 그냥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죽일 수 있을지 다 알고 있는 느낌이야. 타고난 살인마라고 할까."
당최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데일이 짜증을 담아 말했다.
"뭐 어쩌라고."
마일즈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냥. 부러워서. 천직을 찾은 거잖아. 누구는 좆 빠지게 살아도 밑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인생인데."
마일즈는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를 둘러보았다.
동료와 용병들의 시체.
마일즈는 자조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약하면 죽는 거지.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자고."
마일즈는 남은 성수를 자기 몸에 들이부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올라갈 것 같았다.
데일은 걸음을 내디뎠다. 롱소드를 들고 마일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다 속도를 높여 도움닫기를 하더니, 힘껏 뛰어올랐다.
거대한 덩치가 하늘을 날았다.
데일의 몸과 태양이 일치돼 빛이 산란했다.
마일즈는 눈이 부셔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이런 시발...."
데일은 롱소드를 앞으로 뻗었다. 어떤 기술이나 기교도 없이, 그저 떨어지는 힘과 무게를 이용한 공격이다.
하지만 막을 수 없다.
카작!
롱소드가 마일즈가 입은 사슬 갑옷을 깨트렸다.
검 끝이 마일즈의 가슴에 틀어박히려 했다.
마일즈가 양손으로 롱소드의 날을 붙잡았다. 롱소드가 더 파고들지 못하게 온 힘을 다했다.
"끄으으윽!"
롱소드를 잡은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매우 고통스럽겠지만, 마일즈는 힘을 빼지 않았다.
삶에 대한 대단한 집념이었다.
데일은 롱소드에 계속 힘을 실었다.
가슴에 검이 점점 파고들수록, 주위에 피가 튀었다. 더운 피였다.
이렇게 인간 같지 않은 개자식의 피도 이리 따뜻하다니.
자신의 피는 차가운데.
데일은 질투심이 들었다. 언데드 특유의 산자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푹!
마침내 검 끝이 마일즈의 심장을 건드렸다.
마일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날을 붙잡은 양손에도 급격히 힘이 빠졌다.
롱소드가 마일즈의 몸에 완전히 파고들었다.
마일즈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끝났군.'
사람을 죽였지만, 아무런 감정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데일의 본능은 기꺼워하고 있었다.
이 속도도 영혼을 모은다면 3등급도 금방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데일은 생기를 흡수하기에 앞서,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시체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고, 바닥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나?'
마비초가 들어간 수프를 먹었던 게 치명적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몇 명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시체 사이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레온?"
"끄, 끝났나요?"
레온이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데일은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마라. 다 죽였다."
"아, 그, 그렇군요."
"용케 살아남았군."
"운이 좋았어요. 체구가 작아서 시체 사이에서 죽은 척하기 좋았거든요."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재빨리 죽은 척 한 모양이다.
'제법 눈치가 빠른데.'
레온은 주위에 펼쳐진 참상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더니, 이내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데일에게 외쳤다.
"데일 경! 사제님이 아직 살아있어요!"
"뭐?"
데일은 서둘러 레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여사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숨소리가 너무 미약해 데일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레온이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사, 살려야 해요. 남은 성수가...."
데일은 레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예?"
데일은 사제의 가슴을 꿰뚫은 화살촉을 살폈다.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다."
"네에?"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가슴에 화살이 꽂히고 독에까지 중독되었다.
성수나 치유 기적을 사용하려면 그 전에 화살을 뽑고, 해독도 해야 한다.
하지만 약해진 체력으로는 그때까지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애초에 해독할 방법도 없었고.
사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인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질겼다.
말소리가 들리자 사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이마에는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자꾸만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데일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제의 얼굴을 닦았다. 세심한 손길로.
레온이 놀란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여사제도 자기 이마를 닦아주는 게 누구인지 깨닫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사제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억지로 거부를 표하려 했다.
"그만...."
데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너는 곧 죽는다."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
지금껏 여사제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기도 했다.
여사제의 눈에 체념이 어리다가, 갑자기 공포가 차올랐다.
그녀는 데일의 팔을 붙잡았다.
곧 죽을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억센 힘이었다.
여사제가 간절하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제, 혼을 흡수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불경은...."
강력한 흑기사는 시체에 남은 잔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이의 영혼까지 거둘 수 있다.
아직 데일이 그 정도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신앙심 깊은 여사제는 죽음보다 흑기사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게 더 두려울 것이다.
데일은 여사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안심해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원한다면 네 주검은 교단에 데려가 주겠다. 약속하마."
그제야 여사제는 안도하며 표정을 풀었다. 흑기사는 신뢰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존재였지만, 눈앞의 사내는 왜인지 믿음이 갔다.
데일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
"마, 리아. 에요."
"마리아. 유언을 말해라."
잠시 고민한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하, 늘에 계신 여신이시여, 저에게 삶을 내려주소서 깊은 감사를 표하나이...."
"그만."
데일이 마리아의 말을 끊었다.
"네가 믿는 신과의 대화는 죽은 이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마지막 남은 시간은 지상에서 연을 맺었던 이들을 위해 사용해라."
마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 흑기사의 말이 맞았다.
마리아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생명을 쥐어짜 말했다.
"모두에게, 고맙다고. 특히. 페일 형제님에게. 하지만. 마, 마지막, 말은."
"알았다. 마지막 말은 페일에게만 전해주면 된다 이거지? 다른 사람들이 서운해할 테니."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쪽 손을 데일에게 내밀었다. 손을 펴자 안에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가 있었다.
"나한테 준다는 건가?"
"대...가."
마리아가 힘겹게 말했다.
보답이 아니라 대가라는 말하는 부분에서 이 여사제의 고집이 엿보였다.
데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잘 쓰겠다."
마리아가 눈을 감았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반 언데드인 데일은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갔군."
레온은 옆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이 자리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사제와 흑기사. 이런 광경을 다시는 보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일이 눈을 돌렸다.
"슬슬 준비하지."
"예?"
레온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데일은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워야 할 게 많다."
사방에 널브러진 습격자가 입고 있는 장비들.
전부 돈이었다.
용병과 흑기사
* * *
데일은 우선 습격자들의 시체에서 생기를 모두 흡수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입고 있던 장비를 챙겼다.
'장비만 팔아도 짭짤하게 벌 수 있지.'
용병 중에 강도로 돌변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였다.
구태여 위험하게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사람 죽여서 장비를 뺏는 게 더 돈이 되고, 안전하니까.
짐마차에 장비를 모두 실은 레온이 물었다.
"그. 다른 용병분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
데일은 고민했다.
문득, 용병패를 회수해달라는 가란드의 부탁이 기억났다.
그때는 그저 지난 의뢰에서 죽은 용병들의 용병패를 회수해달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어쩌면 마일즈의 용병패를 가져오라는 말이었을 수도 있겠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용병패를 회수하라는 건, 해석하기에 따라 죽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가란드는 데일을 이용해 불순한 용병들을 제거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전부 싣지는 못하겠지. 용병 패와 장비를 챙기고, 시체는 화장해야겠다."
"아, 예."
이 세계에서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면 화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무 땅에다 묻었다가는 언데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일은 아군 용병의 용병 패뿐만 아니라, 마일즈와 그 동료들의 것까지 모두 챙겼다.
어느새 짐 마차가 가득 찼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주검을 얹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마차에 실어야 할 걸 다 싣자, 둘은 바닥에 장작과 시체들을 모아 불을 붙였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레온은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분들에게도 소중한 사람들은 있겠죠? 마리아 사제님처럼 시신을 도시로 옮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데일은 담담하게 말했다.
"죄책감 느끼지 마라. 이 정도만 해도 우리는 도리를 다한 거다. 사제는 약속한 게 있으니까 시신을 옮겨주는 거고."
데일은 손바닥을 펴 은은한 빛을 내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는 몰라도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런 걸 받았으니 데일에게는 마리아의 시신을 옮겨줄 의무가 있다.
밤의 여신을 따르는 이들은 주고받는 것에 철저해야 하는 법이니.
한참을 타오르던 불길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가자."
"예."
레온은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쥐었다. 데일도 그 옆에 앉았다.
데일이 뿜어내는 기운에 말들이 불안해했지만, 레온이 엉덩이를 힘껏 때리자 앞을 향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레온은 아직도 얼떨떨한지 자기 볼을 꼬집었다.
"살아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
"이러면 일단 의뢰는 완수한 거로 쳐주려나요?"
"아마도."
레온은 연신 재잘거렸다. 몇 시간이고 말을 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노움 종족은 호기심이 많고 수다스럽던가?'
짐꾼으로 올 때는 대체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였다.
얘기를 듣다 보니 장물의 처분에 대한 주제도 나왔다.
장물을 어떻게 할 거냐는 레온의 질문에 데일이 답했다.
"용병들 장비는 길드에 넘길 거다. 그러면 길드에서 유족을 찾아 전달하겠지. 우리한테도 일부 보상금이 나오고. 마일즈 쪽 장물은...."
장물. 돈은 되지만 확실히 처분하기가 까다로웠다.
만약 흑기사인 데일이 장물을 팔려고 하면, 불길한 장비라 하여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헐값에 넘기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눈치를 보던 레온이 끼어들었다.
"데일 경. 괜찮으시면 제가 장물을 대신 처분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방법이 있나?"
"예! 제가 장물아비들이랑도 연이 있거든요. 합리적인 가격에 팔 수 있어요. 다만...."
"공짜는 아니라 이거지?"
"헤헤."
레온은 판매되는 장물 가격에서 수수료를 일부 달라고 요구했다.
납득이 되는 수준의 요구였기에 데일은 승낙했다.
데일에게도 나쁠 게 없는 거래였다.
거래가 성사되자 레온은 싱글벙글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매우 기쁜 모양이다.
데일이 물었다.
"그렇게 좋나?"
"네? 아, 하하. 그렇죠. 사실. 제가 꿈이 있거든요."
"꿈?"
"예. 그거 아세요? 옛 제국에서는 평민 노예 할 거 없이 누구나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었대요. 놀랍죠?"
"학교라."
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 살았던 곳과 달리, 확실히 이 세계에서 학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레온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돈을 모은다면 저도 그런 학교를 한번 세워보고 싶어요. 제가 교사가 되고, 빈민가 애들을 모아서 글이랑 이것저것 가르치는 거예요."
"그거 멋지군."
데일의 거짓 없이 순수한 의견에 레온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이런 꿈을 말해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는데, 데일만은 인정해주었다.
레온은 더는 이 반 언데드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좋아지려 했다.
그런 레온에게 데일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글자를 배우려 했는데, 누구한테 부탁해야 할지 곤란하던 참이다. 레온 네가 가르쳐줄 수 있겠나?"
"어엇? 저로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돈은 지불할거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온은 척! 경례하는 시늉을 했다. 데일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이런 세계에 떨어져, 이런 몸이 되었지만 가끔은 즐거운 순간도 있는 법이다.
* * *
데일과 레온은 최소한의 휴식만 취한 채 이레네로 향했다.
마리아의 시신이 비교적 온전할 때 서둘러야 했다.
빠르게 이동한 덕분에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출발한 지 이틀째의 아침, 둘은 평원에 우뚝 솟은 이레네를 볼 수 있었다.
허름한 빈민가가 길을 따라 펼쳐졌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구걸하러 나서려다, 데일의 살벌한 모습을 보고는 주춤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데일을 알아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저번에 데일이 동전을 적선해준 걸 기억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레온은 당황한 얼굴로 데일의 눈치를 살폈다. 얼른 아이들을 물러나게 하려 했다.
"요, 욘석들! 어서 물러서."
"괜찮다."
"예?"
데일은 배낭에서 육포나 치즈 따위의 식량을 꺼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도시를 떠나려던 마일즈는 식량을 과할 정도로 넉넉히 준비했다.
그 식량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식량으로 주면 빼앗기지도 않겠지.'
하켄이 지난번에 해준 조언을 참고했다.
돈이 아닌 식량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은 굶지 않아도 되리라.
데일이 식량을 나눠주자 주춤하던 다른 아이들도 몰려들었다.
데일은 혹여나 못 받는 아이가 없게, 아이들의 숫자를 꼼꼼히 센 뒤 식량을 적절히 분배해 나눠주었다.
레온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데일 경. 되게 잘하시네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동생이 아주 많았거든."
"예?"
어리둥절해 하는 레온을 무시하며, 데일은 배낭을 살폈다.
배낭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몇몇 아이들은 이쪽을 보며 쭈뼛거리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후다닥 사라졌다.
레온은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들이. 받았으면 직접 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지...."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지."
"아, 예. 그렇죠."
마차는 성문을 통과했다.
경비병들이 막아섰지만, 마차에 무얼 싣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얼른 들여보내 주었다.
둘은 도시 외곽지역에서 남쪽에 있는 6구역으로 향했다.
6구역에는 빛의 여신을 숭배하는 교단이 있었다.
교단은 밤의 신전과는 딴판이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 수십 개가 하늘 높이 뻗어 있었고, 뾰족한 삼각형 지붕이 그 위를 덮었다.
볕이 잘 드는 곳이다.
건물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웅장함과 따스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광경이었다.
'성당이랑 비슷한 느낌이네. 밤의 신전도 좀 이렇게 지을 것이지.'
신전을 올려다보던 데일이 레온에게 말했다.
"갔다 오겠다."
"아, 예! 다녀오세요!"
데일은 마리아의 몸을 부드럽게 안았다.
남은 성수를 모두 뿌린 덕분일까? 마리아의 모습은 여전히 죽기 전 그대로였다.
누가 보면 곤히 잠이라도 자고 있나 착각할 정도였다.
데일은 신전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교단의 병사들도 그런 데일을 발견했다.
"어어. 뭐야. 저 자식 왜 여기로 오는 거야."
"감히 그 더러운 발로 성스러운 장소를 밟으려 하다니!"
반응은 격렬했다.
데일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로도 그들은 모욕감을 느꼈다.
창을 꼬나쥔 병사들은 데일에게 모여들었다.
"당장 멈춰! 이 이상 다가가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데일은 어느덧 자기를 둘러싼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짜르르한 적의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데일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허락이라니? 빛의 신전은 황제부터 노예까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건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언데드인 너랑은 상관없어!"
"빛과 어둠은 협약을 맺었다. 더는 적이 아니지. 너희들은 나를 막아설 명분이 없다. 그리고...."
데일의 투구 속에서 흉흉한 안광이 피어올랐다.
"나는 언데드가 아니다. 한 번 더 그렇게 부르면 죽여버리겠다."
"뭣...."
잠시 찔끔한 병사가 더더욱 분노하며 외쳤다.
"들었소 형제들! 여기 이 언데.... 여기 이 자식이 나를 죽이겠다고 했소!"
차마 언데드라고 다시 부르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분명 데일이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데일이 강하게 나오자 병사들의 적의도 더욱 커졌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소란을 듣고 교단 내부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그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아니! 이, 이 봐요! 사고 치지 말라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고 있습니까!"
백금발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견습 사제. 에스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사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스델! 네가 보증했다는 이교도가 저 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적당한 변명을 준비해야 할 거다."
에스델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흑기사를 보증한 것도 눈치를 살 일인데, 그 흑기사가 사고까지 쳐버렸으니 에스델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툭 내뱉었다.
"전부 나에게 시선이 팔려 내가 누구를 안고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군."
흑기사가 교단에 찾아왔다는 충격에 사람들의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데일이 그 점을 지적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품에 안긴 마리아를 발견했다.
"마리아 자매님?"
"어, 어디 다치신 건가?"
"어서 치료를.... 아."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마리아가 죽었다는 것을.
사위가 삽시간에 침묵에 잠겼다.
침묵을 깬 건 데일이었다.
"여기서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전하겠다."
데일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데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데일이 말했다.
"모두 고맙다. 마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
"그게 전부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몇몇은 교단의 상징인 은빛 고리를 들고 기도를 올렸다. 몇몇은 하늘을 향해 탄식을 내뱉었으며, 또 몇몇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던 중, 에스델의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사제가 말했다.
"교단의 가족을 데리고 와준 은인이시다. 길을 내어드려라. 그리고 에스델. 네가 안내를 해드려라."
이견은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우르르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데일은 신전을 향해 당당히 걸었다.
에스델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중에 설명하겠다."
"...일단 본당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페일 이란 사내를 불러라."
"페일 사제님, 말입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전할 말이 있다."
"으음. 알겠습니다."
본당은 교단의 모든 종교적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였다.
기도, 치유 의식, 세례, 그리고 장례까지.
중요한 장소인 만큼 내부도 매우 넓었다.
둥그런 천장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차창이 있었고, 형형색색의 유리를 투과한 빛이 공간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신앙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누구나 감동을 할 장소였다.
에스델은 괜스레 뿌듯한 얼굴을 하며 데일의 반응을 기다렸다.
표정은 '어때? 굉장하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데일은 한 번 실내를 둘러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하고 있나. 어서 가서 페일을 데려오지 않고."
"...알겠습니다. 가면 되잖습니까."
이런 거로 감동을 받기에 데일의 심성은 너무 뒤틀렸다. 애초에 그는 빛의 신자가 아니기도 했고.
에스델이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데일은 품에 안은 마리아를 조심스럽게 본당이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바로 앞에는 교단의 상징물인 커다란 은빛 고리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실로 매달아 놓은 건가?'
은빛 고리는 화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데일은 그 빛에서 신성을 느꼈다. 반 언데드인 그에게는 영 껄끄러운 기운이었다.
더 보고 있기 버거웠던 데일은 등을 돌려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무언가 부드럽고 따뜻한 게 데일의 투구를 어루만졌다.
[고맙구나.]
오후의 햇살처럼 포근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용병과 흑기사
* * *
데일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은색 고리만이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잘못 들었나? 방금 그건 빛의 여신이....'
데일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무리 협약을 맺었다 하나 데일은 밤의 여신의 힘을 받은 몸이다.
빛의 여신이 직접 데일에게 목소리를 속삭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에스델이 돌아왔다. 옆에는 강직한 인상의 사제가 함께였다.
"말씀하신 대로, 페일 사제님을 데려...."
"마리아!"
페일이 다급히 달려나갔다. 그는 마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데일과 에스델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진정이 된 페일이 찾아왔다.
그는 데일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
"페일입니다. 현재는 클레릭의 지위에 있습니다."
'클레릭. 사제 계열에서 최소 3등급은 되어야 하는 직업인데.'
마리아와 연인 관계로 보여, 실력도 비슷할 줄 알았다.
하지만 페일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은 듯하다. 그 눈의 깊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데일은 페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데일이다."
페일은 고개를 끄덕인 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데일 경. 협약 이래 교단에 흑기사가 찾아온 건 데일 경이 처음일 겁니다."
"그렇군."
"한동안 시끌시끌하겠군요."
교단에서 흑기사의 출입을 허가했다.
그간 말뿐인 협력 관계였던 두 종교 사이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멋대로 추측할 것이다.
다만. 데일은 그런 정치적인 부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페일. 마리아의 마지막 말을 전하겠다."
"유언은 이미 말한 것 아니었나요?"
"물러나라 에스델. 네가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다."
"...알겠습니다."
데일이 손을 휘휘 젓자, 에스델이 부루퉁한 얼굴로 물러났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데일이 말했다.
"페일. 마리아는 마지막에 네게 특히 더 고맙다고 했다."
"...."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말아달라 부탁했고."
"그것참. 마리아답네요."
페일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슬픔이 깊지는 않다.
신앙심 깊은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으니.
페일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마리아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미련 없이 안도한 미소를 짓고 있더군요. 분명 데일 경 덕분이겠죠.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어서 감사합니다, 데일 경. 이 은혜는 제가 어떤 식으로든 갚도록 하겠습니다."
데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마리아에게는 받은 게 있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그래도 갚겠습니다. 데일 경은 마리아를 도운 것뿐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모두를 도운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갚겠다는데, 더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 이것도 물어봐야지.'
말이 나온 김에 데일은 마리아가 건네준 반지를 페일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무슨 반지인지 아나?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건...."
페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신념의 반지군요. 고결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사람이 강하게 바라면, 한 번이지만 그 사람의 잠재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물입니다."
"고결한 영혼?"
'흑기사인 나랑은 영 관계없는 단언데.'
결국, 데일이 써먹지 못하는 물건을 받았다는 말이다.
데일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혹시 시장에 팔면 얼마 정도 나오지?"
"네?"
페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던 에스델은 데일을 쓰레기 쳐다보듯 했다.
당황한 페일이 애처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마리아가 데일 경에게 이걸 맡겼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나도 그냥 물어본 거다. 진짜 팔겠다는 건 아니고. 근데 얼마인지만 알려줄...."
"자! 남은 대화는 나중에 기회 되면 하죠!"
에스델이 끼어들어 데일의 말을 끊었다.
"밖에 일행분도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슬슬 가보셔야 하잖아요?"
"아. 그렇지."
레온이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데일은 페일과 인사한 뒤, 에스델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이 데일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걸었다. 부끄러울 것 없이 떳떳하니,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데일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신자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연신 속닥거렸고, 흑기사의 신전 출입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데일의 이름이 도시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오래 기다렸나?"
데일은 불안한 얼굴로 마차 주위를 서성이던 레온에게 말했다.
레온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 데일 경! 다행이네요!"
"뭐가."
"아까 교단의 병사들이 데일 경을 둘러쌌잖아요. 혹시나 큰일이 생길까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나 보네요."
"뭐. 그렇지. 출발하자."
"넵!"
레온은 다시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용병 길드다.
머지않아 길드 사무소에 도착한 둘은 우선 죽은 용병의 장비를 바닥에 내렸다.
밖으로 나온 가란드가 의아해했다.
"이건...."
"이번 의뢰 때 죽은 용병들의 유품이오. 유족들에게 전달해주시오."
"아. 물론이죠."
가란드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용병 길드 규칙상, 의뢰에 함께한 용병의 유품을 챙기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다.
유품이라도 제대로 전달해줘야지, 안 그러면 죽은 용병이 먹여 살리던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는 규칙이기도 했다.
장비를 훔친 뒤, '이건 원래 내 장비요' 주장하면 뭐 어쩌겠는가.
입증해줄 주인이 이미 죽어버렸는데.
한데, 데일은 죽은 용병의 유품을 모두 챙겨와 줬다.
가란드는 흥미로운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내 생각보다 제법....'
가란드는 직원들을 불러 장비를 옮기라 지시했다.
데일은 레온에게 말했다.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어서 장비를 팔아라."
"옙!"
"아. 그 전에."
데일은 마차에서 워해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일즈가 사용하던 물건으로,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데일은 이 워해머가 마음에 들었다.
'검은 휘두르기 좋지만 너무 쉽게 부러져. 둔기 하나쯤은 들고 다니는 게 좋겠지.'
워해머를 챙겨 든 데일은 레온을 보냈다.
레온은 고개를 꾸벅 숙인뒤, 짐마차를 이끌고 도시 밖으로 향했다.
장물아비들은 도시 밖 빈민촌에 있다는 모양이다.
레온을 보낸 데일은 가란드와 함께 길드 사무소의 2층으로 올라갔다.
둘밖에 없는 집무실에서 데일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데일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모두 기록한 가란드가 말했다.
"자. 그럼 사건 보고를 다시 되짚어보겠습니다. 애초에 변종 아울베어에게 용병들이 죽었다는 건 마일즈의 자작극. 사실은 마을 주민들과 싸움이 일어나 그들을 죽였고, 용병 일을 더 하기 힘들다고 판단. 마지막으로 한탕 해 먹으려고 이번 일을 꾸몄다 이거네요?"
데일이 되물었다.
"애초에 당신도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소?"
"예?"
"마일즈가 개수작을 부릴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냐는 말이오. 나를 의뢰에 넣은 것도 그런 마일즈를 죽이기 위해서 아니오? 용병패를 회수하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가란드도 놀랐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곰곰이 되짚어보면 당연히 알법한 일 아닌가 싶소만."
"그 당연한 거를 해내는 사람이 용병 중에도 많았으면 싶군요."
가란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에 있다 보면 가끔 보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용병들 말이죠."
용병들의 민간인 살해.
길드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황실에서 길드를 강력하게 추궁하기 때문이다.
"길드에서는 그런 짓을 벌인 용병을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도망치면 반드시 추적대를 보내죠. 죽음이 확정될 때까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은 다른 무엇보다 길드에 쫓기는 걸 두려워한다.
그만큼 길드의 추적은 집요하고, 지독하기 때문이다.
가란드가 자기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가끔 머리를 쓰는 놈들이 있죠. 바로 마일즈 같은 놈들이요."
"머리를 쓴다라."
"흔적을 조작해 교묘하게 추적을 빠져나가는 거죠. 가령, 마일즈는 변종 아울베어라는 거짓말을 이용해 정보를 교란할 생각이었겠죠. 변종 아울베어에게 마을 사람들과 용병이 모두 당했다. 그러면 추적당할 염려가 없지요."
데일이 말을 받았다.
"마일즈가 구태여 도시로 돌아온 건 마지막으로 한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길드에서 조사대를 보내기 전에 시간을 벌기 위해서고?"
"정확하십니다. 데일 경."
CCTV나 카메라도 없는 세상이다. 작정하고 증거를 조작하면, 얼마든지 진실을 감출 수 있다.
만약 데일이 없었더라면 마일즈는 자기 계획을 성공시켰을 거다.
가란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확신은 없었습니다. 증거가 있었다면 좀 더 확실한 방법으로 놈을 막았을 겁니다. 단지 제 감일 뿐이었죠. 뭔가 이상하다고. 하지만 제가 감이 좋은 편인지라."
"그래서 나를 넣은 것이오?"
"데일 경이 있다면 허튼짓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됐군요."
가란드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일로 길드 소속 용병들이 여럿 죽었다. 교단의 사제도 한 명 죽었다.
뼈아픈 손실이었다.
가란드는 이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어쨌건. 데일 경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주셨습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어요. 다른 용병들도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다면, 저희 용병 길드의 힘은 훨씬 더 강력했을 겁니다."
"그럼 입단 시험은 통과요?"
"통과이고 말고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마일즈는 얇은 쇠판을 데일에게 건네주었다.
데일은 쇠판의 글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그게 자기 이름일 거라고 짐작했다.
"철패?"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데일 경. 그리고 길드에는 경처럼 실력 있는 용병이 절실하죠."
"목패를 건너뛰어도 되겠소?"
"지부장 권한에 그 정도는 허용됩니다."
데일은 용병 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 번의 의뢰 성공으로 얻어가는 게 많았다.
"앞으로 길드를 위해 여러모로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데일 경이 받을 수 있는 의뢰는 많지 않을 겁니다. 아직 의뢰주들의 신뢰가 쌓이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오히려 좋소."
위험은 기회를 내포한다.
더 강한 적을 쓰러트려 의뢰를 완수할수록 데일은 더 강해질 것이고, 더 빠르게 위로 향할 것이다.
가란드가 미소지었다.
"시원해서 좋군요."
"얘기는 끝났소?"
"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갈 곳이 있나 보군요?"
"신전에 가봐야 하오."
툭 내뱉은 데일은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 * *
가란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류를 마저 작성했다.
데일의 신상 등록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죽은 용병의 유족에게 유품을 전달하는 것까지.
뒤처리할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럴 때마다 현역 시절이 그립군.'
접수원이 다가와 그런 가란드의 찻잔에 따뜻한 홍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가란드가 작성하는 보고서를 훔쳐봤다.
과연 그 흑기사가 어떻게 될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보고서를 훔쳐 읽은 접수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입단 시험 후에 바로 철패라니. 그래도 돼요?"
"안 될 거 없지. 위에 올릴 보고서를 엄청나게 써대야 하지만 말이야. 게다가 선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접수원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하고 치면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10년 전 용병왕도 곧바로 철패부터 시작했었죠.... 그럼 그때 이후로 처음이겠네요?"
"그래."
"음.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그래도 이교도인데."
"글쎄. 믿음은 모르겠어.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하지만 이건 내 감이지만...."
가란드는 기대 어린 눈으로 말했다.
"용병왕 만큼의 자질은 있는 것 같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뛰어날 수도."
특별한 근거 없이 오직 감에 근거한 예측.
하지만 가란드는 감이 좋은 편이다.
취한 노새
* * *
데일은 밤의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의 풍경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캄캄한 어둠. 한구석에서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그리고 사제장 에리얼.
에리얼은 데일이 오자 고개를 휙 돌렸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그만큼 다른 감각이 발달한 듯했다.
"어서 오세요 형제님!"
왜인지 잔뜩 들뜬 목소리.
에리얼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교단을 쑥대밭을 내놓고 왔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밤의 여신을 섬기는 몸으로써 깊은 감명을 받았답니다."
"?"
뭘 쑥대밭을 냈다고?
데일이 곧바로 부정했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냥 일이 있어 교단에 들어갔다 나온 것뿐이다."
에리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겸손하시군요. 데일 경의 당당한 모습에 빛의 신자들이 벌벌 떨며 오줌을 지렸다는 건 도시의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여신님의 위엄도 가일층 올라가겠지요. 다른 형제자매들도 매우 고양되어 있습니다."
"...."
다시 부정하려던 데일은 그만두었다. 말한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군.'
으레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고,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다.
몇몇 이들은 데일의 행위를 종교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다고 여길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실상은 그냥 시체 배달이었을 뿐인데.'
상념을 털어낸 데일이 물었다.
"기도실을 쓰고 싶은데."
"끝쪽에서 왼쪽 방입니다."
"고맙다."
데일은 복도 끝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
"?"
기도실에는 마녀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온 데일을 보고 굳어버렸다.
데일은 머쓱하게 투구를 긁적였다.
"아. 잘못 열었다."
데일은 얼른 기도실 문을 닫아버렸다. 안쪽에서는 성난 고함이 들려왔지만 그냥 무시해버렸다.
데일은 비어 있는 기도실로 들어갔다.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양쪽 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를 올렸다.
"왔습니다."
그러자 반응이 나타났다.
은촛대 위에 놓인 양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아름다운 하얀 발과 바닥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구나.]
밤의 여신은 서늘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그리 말했다.
[빛의 냄새가 나. 데일 내 아들. 내 아들에게서 왜 그년의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냐.]
빛의 냄새?
데일의 머릿속에 짐작 가는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교단에서....'
데일은 교단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마리아를 운반해준 일과 본당에서 들렸던 목소리까지.
밤의 여신이 납득했다.
[그랬구나. 빛, 그년이 내 아들에게 침을 바르려 하다니.... 여신은 아들을 믿는다. 아들이 여신을 배신할 리가 없지. 아암.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아 데일은 빠르게 수긍했다.
여신은 그제야 만족한 기색을 띠었다.
데일이 얼른 주제를 바꿨다.
"제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데일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손이 데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데일이 모은 영혼이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여신이 감탄했다.
[짧은 사이에 제법 많이 모았구나. 다만 등급을 올리기에는 많이 부족해.]
"더 분발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으나,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여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물에 상응하는 축복을 내리겠다.]
데일의 눈앞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언제나 고민되는 시간이다. 데일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무난하게 보면 근력을 올리는 게 맞으나....'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근력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균형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몸이 조금 약한 느낌이 들어.'
데일은 전투 스타일상 앞으로 나가 싸우는 일이 많다.
그렇게 싸우다 보면 자연히 적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 때도 생긴다.
만약 적들이 이번처럼 성수를 활용한다면? 혹은 실력 있는 사제가 있어 신성 마법을 사용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위험하겠는데.'
아무리 근력이 높아도,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눈치 보며 싸울 수밖에 없다.
눈치를 본다는 건 제 실력을 온전히 못 낸다는 뜻이다.
데일은 유리 대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결정을 내렸다.
"갑옷을 더 단단하게 강화하겠습니다."
[확실하느냐?]
"예."
곧바로 변화가 일었다.
데일이 입은 칠흑의 갑옷에 어둠이 서렸다. 그 색이 더욱 깊어졌다.
데일은 곧장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2
직업: 흑기사
근력: 40
내구: 25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교단의 본당을 밟은 최초의 흑기사
내구 수치가 올랐다. 이는 데일이 더 튼튼해졌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성장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여신이 말했다.
[이번에 바친 제물로 '생기 흡수'의 효과도 더 강해졌구나.]
"강해졌다면...?"
[더 확실하게 잔혼과 생기를 거둘 수 있겠어.]
데일은 생기 흡수를 통해 시체에 남은 잔혼과 생기를 취한다.
하지만 아직 흑기사로서의 수준이 낮기에 그 일부밖에 거두지 못한다.
비유를 하자면, 고기를 먹는데 살점이 뼈에 덕지덕지 남아 있는 상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기 흡수 기술이 강화되었다. 데일은 이제 더 많은 생기와 잔혼을 얻을 수 있다.
게임식으로 말하면 경험치 획득량이 증가했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아.'
만족스러워하는 데일에게 여신이 추가 설명을 했다.
[흡수되는 잔혼이 늘어났으니, 데일 네가 보게 되는 상대의 기억도 더 선명해질 거란다. 이제 집중만 하면 얼마든지 기억을 읽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능력을 조심해서 사용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데일은 여신의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만족스러워한 여신이 데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데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투구를 눌러썼다.
그는 기도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여신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었다.
데일이 나오자 사제장 에리얼이 반갑게 맞았다.
"기도는 끝나셨나요?"
"그래."
"그러면 혹시 데일 경, 지금 시간이 남으시나요? 밤의 여신님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은데요."
에리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잔뜩 기대감이 서린 미소였다.
그녀는 한 발짝 데일에게 다가왔다. 데일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첫 번째 법칙. 귀쟁이는 경계해라.'
데일이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터득한 교훈이다.
이 교훈이 있었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노라고. 데일은 진심으로 믿었다.
참고로 두 번째 법칙은 '첫 번째 법칙을 어기지 말 것' 이다.
데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간 없다."
"아. 그러면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제가 맞추겠습니다."
"난 항상 바쁘다."
"?"
그렇게 내뱉은 데일은 뒤도 안 돌아보고 신전을 나섰다. 광신도 엘프와는 별로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에리얼은 벙찐 얼굴로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용병 길드는 빠르게 용병들의 유품을 처분해, 유족들에게 돈을 지급했다.
그리고 그 돈의 1할은 데일에게 떨어졌다.
용병 길드의 규칙이었다.
장물 처리를 맡겨달라던 레온도 재빨리 일을 마쳤다.
"괜찮은 값을 받았어요!"
"벌써 다 처리했나?"
"예! 요즘 장비 수요가 많거든요. 빈민가에서도 용병이 돼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사람들도 많고요."
레온은 데일에게 돈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데일은 주머니를 받아들였다.
'제법 묵직한데.'
안을 열어보니 금화도 몇 개 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데일은 그중에서 은화 몇 개를 집어서 레온에게 건네주었다.
레온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어엇! 괘, 괜찮아요! 이미 중간에 수수료는 챙겼어요."
"그거 말고. 나한테 글 가르쳐주기로 한 것. 잊었나?"
"아! 그래도 너무 많이 주시는 게...."
"그렇다면야."
"하지만 데일 경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죠!"
데일이 손을 거두려 하자 레온이 신속하게 은화를 챙겼다.
노움답게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데일이 빤히 쳐다보자, 머쓱하게 웃은 레온이 말했다.
"그럼 데일 경이 시간 되실 때마다 제가 찾아뵐게요."
"나는 언제든 괜찮다. 남아나는 게 시간이니까."
"그런가요? 그럼 바로 내일부터 시작하죠. 지금 데일 경은 어디서 묵고 계시나요?"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답했다.
"마구간."
"...예?"
"어제는 성문 근처 여관에 있는 마구간에서 잤다."
여관 주인들은 데일이 찾아올 때마다 부탁이니 제발 나가달라고.
다른 여관으로 가달라고 싹싹 빌곤 했다.
마구간에서 하루 정도는 머무르게 해줄 테니 해코지는 하지 말아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상황을 설명을 들은 레온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음. 이해 못 할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너무하네요. 데일 경은 괜찮으세요?"
"큰 상관은 없다만."
지금의 데일에게 편하고 불편하고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붕이 있고, 비만 피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가끔 술에 취한 취객이 마구간을 지나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르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으음. 그래도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장소가 있어야죠. 데일 경 소지품을 놓아둘 곳도 필요하고요. 제가 여관 하나 추천해드릴까요?"
"아는 곳이 있나?"
"돈만 주면 누구나 받아주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거친 사람들이 많이 모이긴 한다는데.... 데일 경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성안에 그런 곳이 있나?
고개를 갸웃한 데일은 레온에게 약도를 그려달라 부탁했다.
혹시라도 길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하게 그려라."
"예! 맡겨만 주세요! 5살짜리 아이가 봐도 길을 잃지 않게끔, 상세히 그려드릴게요!"
"부탁한다."
레온은 열심히 깃털 펜을 휘적였다.
데일은 그런 레온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