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
* * *
그 뒤로도 기사단장은 군세의 지휘관급 되는 개체만 골라서 죽여댔다.
데일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강한 하수인의 생기를 흡수했다.
너무나 빠르고 간단한 성장!
'이게 자동사냥이라는 건가?'
지휘관을 잃은 악마의 군세는 가뜩이나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더 우왕좌왕했다.
아군은 그런 하수인들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수인들이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사단장이 외쳤다.
"놈들을 쫓아라! 놓치면 안 된다!"
이 잔당들이 흩어져서 다른 마을을 습격하거나, 산이나 숲에 숨어들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기사단은 말을 몰아 도망치는 하수인들의 목을 베었다.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동자에 불타올랐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 동안 이어진 싸움이 막을 내렸다.
기사단장은 말에서 내려 혀를 찼다.
"쯧. 몇 놈 놓치고 말았군. 주위 영주에게 말해 둬야겠군."
지휘관들이 기사단장에게 모여들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대승입니다!"
"적군 5,000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경미하고요! 이보다 더 완벽한 승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빅토르 백작도 기사단장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전부 기사단장이 덕이오."
"전부 내 덕은 아닐세."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이제 기사단장이 자기를 칭찬할 차례였다.
의례적으로라도 '하하. 빅토르 백작이 훌륭히 군을 지휘해준 덕이네'라고 말하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내 부하 놈들이 고생 좀 했지. 놈들이 벤 적이 못해도 1,000이 넘을 테니까. 아. 그리고, 데일 경. 자네도 수고했네! 아주 인상적이었어!"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데일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제법 사내처럼 싸우더군. 마음에 들어."
"난 별로 한 게 없소만."
"하하하! 이 친구 겸손도 참!"
"아니. 나는 진심인데...."
데일이 한 거라고는 기사단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기사단장이 강적을 베면 콩고물을 주워 먹은 것뿐이다.
'이렇게 전투가 편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수월했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어떨지 진심으로 고민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데일이 겸손을 떤다 생각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홀로 날뛰며 자네가 모든 이목을 끌지 않았나. 덕분에 아군도 더 편했을 걸세.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확실히 괜찮긴 했습니다."
황실 기사들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은 데일의 활약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이다.
언데드 특유의 산 자의 신경을 거스르는 소름 끼치는 기운은 적의 주목을 끄는 법이다.
데일이 우악스럽게 날뛴 덕분에 기사들이 견뎌야 하는 부담도 덜했다.
'단장께서 저 녀석을 우대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게다가 여타 다른 흑기사와 달리 아군을 공격하거나 폭주해서 날뛰는 일도 없지 않던가?
기사들은 데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흑기사는 특별하다고.
기사단장이 데일만 칭찬하자 분위기가 조금 미묘해졌다.
슬쩍 눈치를 살핀 데일이 말했다.
"지휘관들도 모두 훌륭히 병사들을 이끌었소. 아군의 피해가 적은 건 다 그 덕분이오."
"음? 아. 그건 맞지. 자네들도 고생 많았네. 논공은 일단 성에 들어가서 하도록 하겠네."
"예!"
지휘관들은 자신을 언급해준 데일에게 감사를 표하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일도 고개를 끄덕여준 뒤,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이제 가봐도 되겠소?"
"그래.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자네에게는 지금이 중요할 텐데 말이야."
양해를 구한 데일은 전장으로 향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은 온통 시체투성이였다.
피로 새빨갛게 물든 벌판에 병사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뒤처리를 해야 하긴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눈치였다.
데일은 그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군의 주검만 모아 따로 뒤로 빼내라."
"예?"
"어서."
악마의 군세를 맞서서 용감히 싸운 이들이다. 그 죽음에 예우를 지켜야 한다.
당황하던 병사들은 이내 아군의 주검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 더미를 뒤지는 건 고역이었지만, 그때 활약한 게 바로 하티다.
하티는 뛰어난 후각으로 아군의 주검이 있는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그렇게 머지않아 아군의 주검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벌판에 남은 건 하수인들의 시체뿐이다.
데일은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검은 안개를 전개했다.
사아아아!
안개가 지면을 얇게 덮으며 퍼져나갔다.
이제 데일은 안개를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선배 흑기사인 케인에게 배운 요령이다.
평소보다 얇게 퍼져나간 안개는 더 넓은 범위를 덮었다.
이윽고, 안개에 덮인 시체에서 생기가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데일은 생기를 가득 머금은 안개를 거두었다.
어마어마한 생기와 잔혼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하수인들의 기억도 머리에 파고들었다.
"!"
악마의 하수인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불안정했다.
그들이 가진 혼란스러운 기억과 끔찍한 광경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정신이 오염되는 기분.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느낄 리 없는 두통이 이는 기분이다.
"...."
데일이 한동안 가만히 서 있자, 누군가 그런 데일의 팔을 잡았다.
"경.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데일이 고개를 내렸다. 에스델이었다.
맑은 눈동자에는 데일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옆에 있던 하켄이 그런 에스델에게 핀잔을 주었다.
"편찮기는 무슨. 이 중에서 튼튼함만으로 따지면 한 손에 꼽겠구만... 진짜 아픈 건 아니죠?"
둔한 하켄의 눈에도 데일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걸까?
둘이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데일은 손을 저었다.
"별거 아니다."
"진짜 별거 아닌 거 맞죠?"
"그래."
딱히 신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생기를 흡수하는 건 이 정도로만 해야겠군.'
저번 가니아고스 때에도 느낀 거지만, 이 이상 흡수해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머릿속 또 다른 본능은 어서 먹어치워서 강해지라고 외쳐대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이 흡수하면 감당할 수 없는 걸까? 시간이 필요해.'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데일이 흡수를 그만두자 기사단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더 흡수 안 하나?"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소."
"뭐, 배가 부르고 그런 건가? 하하하!"
"...."
"좀 웃어주게."
뒤처리를 마친 부대는 그날 벌판에서 하루 숙영했다.
완벽한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기사단장은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베풀었다.
기사들은 기사들끼리.
지휘관들은 지휘관들끼리 모여 서로의 무용을 칭찬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빅토르 백작도 여러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때 제가 위험에 처했는데, 나탈 남작께서 부대를 이끌고 도와주셔서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모두 빅토르 백작 덕분이죠."
"하하. 그건 그렇죠."
"...."
"백작님? 듣고 계십니까?"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던 백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음? 아아. 듣고 있었네."
그렇게 말한 백작은 꾸며낸 미소를 지어낸 뒤, 은 고리를 손에 꾹 쥐었다.
그가 연회 동안 다시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 * *
이미 별동대를 완벽하게 분쇄한 이상, 더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적들도 이곳에 강력한 전력이 있다는 걸 파악했을 터. 부대는 행군 속도를 올렸다.
벌판을 지나, 카엘름 성을 경유해, 이리스 성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그런 와중에도 전선에서 급보가 시시각각 날아왔다.
"놈들이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현재 성벽을 막아내고 있지만, 아군의 피해 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르구르가 직접 등장해 외벽을 무너트렸습니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막아내 아르구르에게 타격을 입히고 저지해냈습니다! 외벽을 가까스로 수복했지만, 이쪽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전령들이 다급히 달려와 기사단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기사단장은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 전해주게."
이미 부대의 행군 속도는 한계였다. 여기서 더 속도를 내봤자 낙오자만 무더기로 생길 것이다.
기사단장의 말에 전령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기사단장은 지그시 눈을 감은 뒤,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상황이 급하다고 마음까지 급해서는 안 된다네. 전선의 상황이 어렵다는 건 병사들에게 말하지 말게. 괜스레 겁을 먹어봤자 좋을 게 없으니."
"예!"
그렇게 부대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리고 이레네를 떠난 지 20일째. 마침내 이리스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판이군."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리스 성으로 악마의 군세가 새까맣게 들이치고 있었다.
성벽 주위에 깊게 파놓은 해자에는 이미 시체들로 가득 차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성벽은 군데군데 무너졌고, 성문도 수 차례 부서졌다 보강되었는지 너덜너덜했다.
"아무래도 기마 돌격으로는 재미를 보기 힘들겠군. 마법사들. 부탁하네. 가장 강한 걸로 갈겨주게."
언덕 지형인데다가, 지난 싸움의 흔적으로 구덩이나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이런 지형에서는 기마 돌격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사단장의 명을 받은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웠다.
마스터 급은 아니어도 하나같이 뛰어난 전쟁 마법사들이다.
이들이 길고 복잡한 주문을 입으로 외자, 마력이 휘몰아쳤다.
데일은 생각했다.
'정말 큰 놈으로 준비하나 보군.'
다음 순간.
마법이 완성되었다.
화아아아!
불꽃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하수인들을 휩쓸었다.
하수인들이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재가 되었다.
적들이 바글바글하던 전장에 순식간에 공백지대가 생겼다.
'역시 마법사가 좋아.'
불꽃놀이로 이쪽의 등장을 화려하게 알렸다.
이제 이목이 쏠릴 것이다.
지금 움직여야 한다.
"돌격!"
기사단장이 가장 앞서서 검을 휘둘렀다. 그 뒤에 잽싸게 따라붙은 데일도 마검을 들었다.
기사단장 뒤가 가장 안전하기도 하고, 주워 먹을 것도 많기에 나온 약삭빠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 모습을 다르게 해석했다.
'늘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군. 실로 기사답도다.'
설마 이 흑기사가 콩고물이나 주워먹으려고 따라붙는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나온 오해다.
마법으로 한차례 얻어맞은 적을 기사들이 헤집어 놓자, 완전히 길이 뚫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다.
머지않아 다시 적이 몰려들 것이다.
지금 당장 통과해야 했다.
마침 이쪽을 알아차린 성 내의 아군이 성문을 열고 있었다.
"어서 성으로 움직여라! 빨리!"
아군 부대는 허겁지겁 성문을 향해 이동했다.
성안의 아군은 이쪽이 더 수월하게 움직이게끔 화살과 마법 세례를 퍼부었다.
가장 앞서서 돌격한 기사단장은 아군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뒤에 남아 지킬 요량이었다.
그 옆에 데일이 섰다.
"먼저 들어가게. 뒤는 내가 지킬 테니."
"함께하겠소."
"암! 기사라면 그래야지!"
"?"
기사단장이 왜 이렇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지는 의아했지만, 데일은 끝까지 기사단장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편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아군이 성안으로 들어가고. 성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둘은 적을 베었고, 성벽에서 내려오는 밧줄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벽에 오르자, 병사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아! 지원군이다!"
"황실 기사단이야! 우린 살았어!"
그런 뜨거운 반응이 익숙한 듯. 기사단장은 무덤덤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평범한 병사의 복장을 한 노인이 기사단장에게 말을 걸었다.
"4군단에 온 걸 환영합니다."
"음?"
기사단장은 상대를 살피고 표정을 찌푸렸다.
앞에 있는 서 있는 건 장대한 체격의 노인이었는데, 오른팔이 없었고, 상의에는 붕대를 칭칭 감아놓았다.
피를 어찌나 흘렸는지 붕대가 시뻘겋다. 그에 대비되게 얼굴은 너무 창백해서 시체라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기사단장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맙소사. 이런 중상자가 직접 전선에 서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단 말인가! 아니면 4군단의 장군은 이런 부상자를 싸우게 시킬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란 말인가. 자네는 우선 가서 휴식을 취하게."
노인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걱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4군단장은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말이죠."
그러자 주위 병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은 의아해하며 주위를 쳐다봤다. 병사들이 왜 웃는지 이해가 안 됐다.
노인은 그런 기사단장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다시 한번 4군단에 온 걸 환영합니다 기사단장 미하일 경. 이곳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군단장, 베른바르트라고 합니다. 베르나르의 아들, 베른바르트."
군단장의 소개에 기사단장이 눈을 부릅떴다.
4군단
* * *
군단장이 외벽에 서서 직접 진두지휘하다니? 까딱 잘못해서 마법이나 눈먼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어쩌려고 이러는가.
심지어 군단장이 입은 갑옷은 일반 병사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기사단장이 못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다급히 존대하며 말했다.
"아, 아니. 군단장. 대체 왜 이곳에서... 그것보다 그 갑옷은 무엇이오. 더 제대로 된 갑옷을 입지 않고서 왜."
"하하하! 눈에 띄는 갑옷을 입으면 그쪽에 아주 마법을 퍼부어대더군요. 이렇게 병사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게 차라리 안전합니다. 이 안쪽에 따로 챙겨 입기도 했고 말입니다."
베른바르트는 갑옷을 살짝 젖혀, 안에 입은 천 갑옷과 셔츠를 보여주었다.
평범한 천 갑옷은 아니었다.
아마 특별히 제작한 물건일 것이다.
베르바르트가 속에 입은 갑옷을 보이자, 주위 병사들이 야유했다.
"우우우! 너무 합니다 군단장님!"
"자기만 안전하려고!"
"시끄러워 이 녀석들아! 꼬우면 너희들이 군단장 해!"
"그건 싫습니다!"
"하하하하!"
한낱 병사들이 감히 장군이 얘기하는 데에 끼어들다니?
기사단장도, 데일도 선뜻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베른바르트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애들이 조금 버릇없더라도 이해해주시죠. 워낙 오래 함께 지내다보니까 다들 격의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처음 온 지휘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죠."
"음. 흠흠. 군단의 분위기는 군단장의 재량이오. 내가 왈가왈부할 부분이 아니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성 밖을 살피던 병사가 외쳤다.
"적군이 물러갑니다!"
"우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벌떼처럼 모여들던 적군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쪽에 지원군이 들어간 걸 저쪽에서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후. 한시름 놓았군.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시기에 제때 와주셨습니다."
"오히려 너무 늦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갓 징집한 병사들의 행군 속도를 생각하면 아무리 빨라도 닷새 정도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명성이 자자한 분답습니다."
"흠. 흠흠. 그 부분은 나의 공이 아니오. 오히려 이쪽 덕을 보았지."
기사단장은 데일을 가리켰다.
그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데일에게 베른하르트가 시선을 주었다.
그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오호. 이쪽은?"
"데일이오."
"흑기사 데일! 맞나? 하하하! 직접 보니 더 반갑군!"
"나를 아시오?"
"당연한 말을! 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에서도 큰 인기일세! 특히 밤의 신도들은 자네를 열렬히 따르더군. 개중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소설책까지 들고 와서 나보고 읽어달라고 하는 놈도 있었어! 자기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말이야! 하하하!"
악마를 토벌한 적이 있으니 이름 정도는 알려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소설책이라면....
'그 엉터리 소설을 말하는 건가.'
데일은 베른바르트가 오해할까봐 말했다.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지만, 그 소설책은 엉터리요. 대부분은 거짓이오."
베른바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재밌으면 그만인 것을! 자네도 그냥 소설 내용이 진짜인 걸로 하게."
"...."
"병사들에게 희망이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사람 좋게 말한 베른바르트는 기사단장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만 내려가서 얘기를 좀 나눕시다."
"알겠소."
"너희들은 적당히 뒤처리해! 부관은 피해 상황 종합하고!"
"예입!"
베른바르트와 기사단장, 데일은 성벽을 내려갔다.
빼곡히 몰려 있던 병사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제야 이 성의 현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처참하군.'
몸이 성한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시체가 이곳저곳 굴러다닌다.
병사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시체를 옮겼다. 그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일상이라는 뜻이었다.
'이게 현실이다.'
이레네의 그 평화로운 분위기. 상위구역에서의 화려한 풍경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런 분위기였다.
데일이 게임을 할 적에 느꼈던 게임 속 분위기는 늘 이랬다.
세상이 당장 내일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암울함.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
비로소 데일이 있어야 할 곳에 온 기분이었다.
"후우. 나이를 먹으니 걷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기사단장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베른바르트는 절뚝거리며 말했다.
기사단장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이 시리더군."
"참. 세월이란... 가끔 젊고 강인할 때 끝을 맞이한 전우들이 부럽습니다."
"그들에게는 배부른 소리겠지만 말이오."
"하하. 그건 그렇죠."
잡다한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길 잠시.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가자, 베른바르트는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요새를 떠날 때 병력을 크게 잃었습니다. 4천의 병력만을 겨우 이끌고 가까스로 이곳에 도착했죠. 최근의 공세 동안 1,500명이 넘는 병사가 전사했습니다. 특히 마법사와 기사들의 피해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아르구르 그 교활한 자식은 이쪽의 주력만을 계속 깎아먹더군요."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와 마법사를 잃은 건 뼈아픈 점이다.
하지만 베른바르트를 탓할 수는 없다.
내부 반란이 벌어지고 군단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병력을 이끌고 이곳까지 도달한 것만으로 대단한 역량이었다.
베른바르트가 수십 년간 전선을 수비 해온 건 절대 운이나 요행이 따라서가 아니었다.
"적의 숫자는 어림짐작해도 2만이 넘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죠. 다행히 아르구르외에 다른 악마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기사단장이 말을 받았다.
"상황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지만, 내 예상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소. 우두머리인 아르구르만 어떻게 처리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하하. 기사단장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저는 안심이...."
"다만."
기사단장이 말을 끊었다.
여태껏 호의적이었던 표정을 지우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군단장께서 계속 뭔가를 숨기는 것 같소."
"...."
"군단 내에 배신자가 절반이나 나왔다고 들었소. 그들이 누구인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군단장 같은 유능한 사람이 반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기사단장과 베른바르트의 시선이 얽혔다.
평생을 전쟁에 바쳐온 두 노장은 서로를 담담히 응시했다.
베른바르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찌나 깊이 한숨을 쉬는지,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입김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베른바르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얘기했다.
"반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의 이름은 알베른입니다. 최고 참모이자, 군단장 대리. 그리고...."
베른바르트는 한 호흡 주저하다가 말했다.
"내 손자 되는 놈입니다."
* * *
이리스 성은 전선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요새였다.
식량과 전쟁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고, 방어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4군단은 진작 전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 넓은 성에는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성의 일을 돕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이 있었고, 주점이나 도박장 등등 군인들이 욕구를 해소할 환락가가 있었으며, 종교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신전은 필수였다.
데일은 그중에서 밤의 신전으로 향했다.
이번에 기사단장을 따라다니며 주워 먹은 게 많다.
제물을 바치면 5등급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인가.'
데일은 하티와 함께 밤의 신전 앞에 섰다.
이레네의 신전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더 깔끔한 인상이었다.
'왜지? 이레네의 신전이 본당 같은 개념이 아니었나.'
의아해하던 데일은 하티와 함께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이레네에서 봐 왔던 것과 똑같이 어둡기만 한 실내.
하지만 늘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사제장 대신, 제법 많은 신도들이 정겹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나?'
데일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쇠장화가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신도들의 이목이 순간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음?"
"저분은 설마...."
"데일 경? 설마 데일 경이십니까?"
우르르 몰려든 신도들이 설마 하는 감정을 담아 물었다.
'또 귀찮아지겠군.'
데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 잘못 봤다. 나는 데일이 아니다."
"세상에! 진짜 데일 경이잖아!"
"거대한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흑기사가 데일 경 말고 또 있을까!"
"그럼 이쪽이 하티인가?"
"...."
결국 또 귀찮은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고, 몇몇은 하티에게도 손길을 뻗쳤다. 하티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울었지만, 이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제야 데일은 이들이 이레네에서 봐 왔던 신도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강자들이다.'
걸음걸이나 품에 찬 무기, 단련된 근육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들은 평범한 신도들이 아니었다.
전투 직종.
데일처럼 여신에게 힘을 하사받아 싸움에 나서는 전사들이었다.
'확실히 전선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
데일만은 못해도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들이다.
이 정도의 전사들이 흔하게 돌아다니다니. 이곳이 전선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하지만 데일은 이들이 껄끄러웠다. 일반 신도들도 껄끄럽지만, 이들에 대한 감정은 더욱 안 좋았다.
밤의 여신이 내려주는 힘은 분명 강력하지만, 강한 만큼 부작용도 있다.
자칫 힘을 잘못 제어하다가는 마음이 뒤틀려버리는 것이다.
데일의 머릿속에는 이레네의 빈민가에 찾아왔던 사령술사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사령술사는 꿈 많던 노움 부부, 레온과 나탈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고, 심지어 그 시체마저 병사로 되살렸다.
데일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낸 사건이다.
데일은 여전히 나탈리가 건네준 깃털펜을 들고 다니며, 가끔 꺼내 보곤 했다.
'레온. 그리고 나탈리.'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데일의 기분이 날카로워지려던 그때. 신도들을 헤치고 누군가 달려왔다.
"허억! 허억! 드,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대를 쓰고, 잿빛 사제복을 걸친 사내였다. 사내는 데일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여신님의 기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레짐입니다! 이곳 4군단의 밤의 사제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갑다."
"이리스에 있는 동안은 제가 모든 편의를 책임지겠습니다!!!"
말이 빠르고 목소리가 크다. 말소리가 투구 안을 쩌렁쩌렁 울려 조금 짜증이 났다.
데일이 보기에 아레짐이 에리얼보다 나은 점은 그 귀가 뭉특하다는 것 빼고는 없었다.
데일은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어서 기도실에나 가고 싶었다.
"그럼 난 이만...."
"아! 이렇게 저희를 위해 신전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딱히."
"이런 영광스러운 날에는 축하 연회를 열어야죠! 창고에 잠들어 있는 귀한 술을 내놓겠습니다!!"
"와아! 그거 좋네!"
"나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신도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하자, 온 신전이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밤의 여신은 죽음을 상징하지 않던가. 그리고 죽음은 서늘하고 고요하며 고독한 법이다.
이런 소란은 전혀 밤의 신전에 어울리지 않았다... 라고 데일은 생각했다.
'이레네의 신전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군.'
투구 안이 시끄럽게 울렸다. 참다못한 데일은 투구를 벗었다.
밖으로 드러난 얼굴에 신도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
"헙."
잔뜩 놀란 눈치. 특히 여신도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투구 속에 우악스러운 괴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걸까?
데일은 아레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부탁이 있다."
"무, 무엇입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데일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좀 꺼져."
4군단
* * *
데일은 신도들을 간신히 떼어놓고서야 기도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제단. 은 촛대. 그리고 꺼져버린 양초 세 개가.
이레네의 기도실과 차이점이 없었다.
"왔습니다."
[어서 오거라 내 아들.]
촛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여신의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여신의 하얀 발이 보였다.
그런데. 형상이 어딘가 흐릿하다.
여신의 목소리도 어딘가 먼 곳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데일의 의문을 짐작한 여신이 말했다.
[이곳은 악마들의 영역과 너무 가깝구나. 그 역겨운 놈들의 악취가 내 힘을 크게 제한하고 있어.]
"...이레네로 돌아가서 다시 찾아뵙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다. 조금 힘에 부친 것뿐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하려무나.]
데일은 모아온 제물을 바쳤다.
여신은 이만한 상대를 데일이 혼자서 상대한 줄 알고, 크게 놀랐다.
[세상에! 그 잠깐 사이에 이 정도 양을 모아 올 줄이야! 내 아들의 실력이 이렇게 빨리 늘다니, 여신은 기쁠 따름이다!]
"저. 사실 절반은 제가 죽였다기보다는... 기사단장이 죽인 걸 조금 주워 먹었습니다."
[기사단장? 황실 기사단장?]
"예."
[주워 먹었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돈 후.
여신이 애써 밝게 말했다.
[남이 먹다 버린 시체를 뜯어먹는 청소부 역시 자연의 순환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란다. 내 아들이 그런 역할을 맡다니 이 여신은 매우 기뻐....]
"애써 좋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기사단장이라. 대단한 자와 함께하게 되었구나.]
여신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오래전부터 국가의 지도자들은 교단의 사제들이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껄끄러워했단다. 신의 힘을 내려받는 게 아닌, 직접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단련하는 법을 개발하고, 검술을 수련했단다. 그렇게 나온 게 바로 기사라는 작자들이지.]
그리고 그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노력 끝에 나온 게 바로 기사단장 미하일이다.
[기사단장의 힘은 이름을 날렸던 영웅들 개개인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단다. 기사단장 같은 자가 몇 명만 더 있었어도, 어쩌면 악마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와 함께하면 배울 점이 많을 테니, 이 기회를 잘 살리도록 하거라.]
데일을 깊이 생각해주는 조언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이 정도면 승급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충분하단다. 마침내 5등급에 이르렀구나!]
여신의 손바닥을 펼쳐 데일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간 모은 잔혼이 빠져나가고, 그 대신 강력한 힘이 파고들어 왔다.
심장에 어둠의 신성이 가득 들어찬다.
심장은 분명 멈춘 그대로지만, 그 안에서는 강력한 힘이 맥동했다.
동시에 데일의 모습에도 변화가 생겼다.
데일의 투구에 양옆으로 곡선형의 뿔 같은 장식이 튀어나왔다.
뿔의 표면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좀 더 인간에게서 벗어난 모습에 데일은 표정을 찡그렸다.
여신이 설명했다.
[그 뿔처럼 생긴 장식품은 앞으로 네가 마력을 다룰 때 도움을 줄 것이란다. 마음에 안 들어도, 참아주거라.]
"알겠습니다."
더 강해진다는데, 그깟 외향이 무슨 소용일까. 데일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자. 이제 드디어 5등급에 이르렀구나. 설마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줄은 여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장하구나.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 열심히 해주어서.]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노력한 것이니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그간 데일 너는 여러 기술을 다루어 보았겠지. 하지만 다양한 기술을 다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단다. 이제 한 가지를 정해, 깊게 파고들어야 할 시간이다.]
마침내 5등급에 달했다,
생기 흡수. 검은 안개. 영혼 지배. 해골마 소환.
그간 데일은 소위 말하는 '공용 기술'들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한 가지 계열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눈앞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냉기"
"영혼"
"어둠"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각각의 계열은 서로 특징이 명확한 만큼, 장단점도 극명하게 갈린다.
우선 냉기 계열.
그간 데일의 주위에 서는 사람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곤 했는데, 그 힘을 더욱 극대화하는 계열이다.
냉기 계열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그 공격성에 있을 거다.
다수의 상대로도 강력하며, 1대1의 싸움에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
검을 맞댈 때마다 피부에 서리가 내리고, 뼈가 얼어붙는데 맨정신을 유지할 상대가 얼마나 될까?
'성장 방향에 따라 완전히 방어적으로 갈 수도 있어.'
얼음 방패나 냉기 갑옷과 같은 방어 위주 기술을 배우면, 단단함만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능을 보이기도 한다.
게임식으로 말하면, 최상의 탱커인 것이다.
데일은 선배 흑기사인 케인에 대해 떠올렸다.
케인은 냉기 계열을 택한 흑기사였다. 냉기를 흩뿌리며 전장을 누비던 그 모습은 아군의 악몽과도 같았다.
'우선 냉기는 보류.'
다음은 영혼 계열이다.
영혼 계열 흑기사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다재다능.'
언데드를 부리거나 저주를 걸고, 영혼을 다루는 등 다채로운 기술을 사용에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기사보다는 흑마법사 쪽에 더 가까워진다고 해야 할까.
'마검사 같은 느낌이지.'
다만, 영혼 계열은 상대적으로 근접 전투에서 약점을 보인다.
여전히 데일의 힘은 그대로이니 강력함 힘을 발휘하지만 다른 계열에 비교해서는 손색이 있다.
'근접전투에서 약해지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아.'
근접전투에서 약해진다면 다른 기사나 전사를 호위로 두어야 한다. 즉, 필연적으로 남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건 데일이 원하는 게 아니다.
데일은 혼자서라도 적을 분쇄할 수 있는 힘을 원한다.
데일은 영혼 계열을 선택지에서 제거했다.
마지막 남은 건 어둠 계열.
'어둠 계열이라....'
어둠.
밤의 힘을 다루고, 주위에 공포와 두려움을 흩뿌리는 식으로 싸우는 흑기사.
그림자는 곧 흑기사의 검이자 방패가 될지니.
'이쪽도 나쁘지 않지.'
어둠은 냉기와 영혼 계열의 사이쯤의 위치해 있는 계열이다.
근접 전투에서 여전히 강하지만, 나름대로 범용성도 있다.
특히 공포를 흩뿌리는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제값을 해준다. 여유를 잃은 적만큼 손쉬운 상대는 없으니 말이다.
데일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냉기와 어둠.
욕심 같아서는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어리광은 허락되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던 데일은 두 선택지의 장단점을 간단히 요약했다.
'당장 강해지는 데에는 냉기가 좋아. 어둠은 당장은 냉기보다 떨어지지만, 고점이 높지.'
당장의 강함이냐, 미래의 강함이냐.
이렇게 정리하니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데일은 긴 시간을 기다려준 여신에게 말했다.
"어둠을 선택하겠습니다."
[어둠을 택하면 암흑기사로 전직하게 될 거란다.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어. 네 선택에 확신하느냐?]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예."
[알았다. 네게 힘을 내리도록 하마!]
화악!
여신의 모습이 다시 연기의 형상으로 흩어진 뒤, 데일에게로 몰려들었다.
새로운 힘이 깃들었다.
투구에 난 뿔 장식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눈에서 빛나는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주춤하게 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빛이 번뜩였다.
'변했다.'
데일은 변화를 느꼈다. 심장에 흐르던 밤의 신성도 무언가 변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더 깊어졌다 해야 할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그림자였다.
이곳은 빛 한점 들지 않은 어두운 공간이다. 하지만 데일의 아래에는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꾸물거리고 있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
그런 게 데일의 발아래에 넓게 퍼져 있었다.
[암흑기사로 전직하면서 여러 기술이 강화되었단다. '생기 흡수'는 '생기 강탈'로. '검은 안개'는 '새벽 안개'로. '부정한 감각'은 '어둠의 감각'으로. 그 부분을 확인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데일은 나머지 제물을 능력치에 골고루 투자한 뒤,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5
직업: 암흑기사
근력: 90
내구: 66
마력: 50
체력: ―
정신력: 4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강탈
새벽의 안개
영혼 지배
해골마 소환
[특성]
반인 반언데드
어둠의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북부의 영웅
마침내 흑기사 계열의 상위에 속하는 '암흑기사'에 이르렀다.
자주 사용하던 기술들의 강화.
그리고 꾸준한 상승을 보이는 능력치.
강해졌다.
데일은 이제 명실상부 강자다.
아마 황실 기사단원을 상대로 싸워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1대1로 싸웠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데일은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다.
저 성벽 밖에 빼곡히 모여든 악마의 하수인과 추종자들.
그리고.
'아르구르.'
당장 이 힘을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용건을 마친 데일은 언제나처럼 매정하게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 차가운 모습에 여신이 조금 섭섭해하며 말했다.
[데일. 네가 나의 신도들. 특히 내 힘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안단다. 아마 일전에 만났던 사령술사 탓이겠지.]
"...."
[하지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 사령술사도 처음부터 악했던 건 아니다. 밖에 있는 아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지.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단다.]
"사정이 있으면 그런 짓을 벌여도 된다는 의미입니까?"
데일의 어조는 본인도 놀랄 정도로 차갑고 뾰족하다.
여신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란다. 그저. 모두가 너처럼 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너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란다. 너무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데일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뒤. 미련 없이 기도실을 나섰다.
여신의 형상은 그런 데일이 안타까운 듯, 한참을 서성이다 이내 하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 * *
기도실 밖으로 나오니, 놀랍게도 아까 보았던 신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숫자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린 하티를 마구 만져대며 자기들끼리 쑥덕이고 있었다.
"어쩌지? 우리가 뭔가 데일 경의 기분을 나쁘게 했나봐."
"사죄하자."
"사과만으로 되겠어? 사죄 연회를 여는 게 어때?"
"그거 괜찮네! 마침 나한테 아껴둔 술이 있는데!"
"나도 아껴둔 술이 있어!"
"저도 있습니다."
"...누군가 보급창고에서 술을 자꾸 훔쳐 간다고 들었는데, 그게 여러분이었나요?"
그때. 데일이 걸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난 건 하티였다.
늘 도도하던 이 늑대는 이제껏 지은 것보다 가장 반가운 표정으로 신도들을 뿌리치며, 빠르게 걸어왔다. 어지간히도 시달린 모양이다.
뒤이어 다른 신도들도 다가왔다.
그중에서 사제장인 아레짐이 고개를 연거푸 숙이며 말했다.
"무언가 경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저 아레짐! 신도들의 대표로서 이 목숨을 끊어 그 사죄를...!"
"...제발 목소리 좀 낮춰주면 좋겠군. 그것만 아니면 별로 불편하지는 않다."
"경께서 원하신다면!!!"
"...."
한숨을 머금은 데일은 그런 신도들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 데일의 등에 대고 아레짐이 말했다.
"가시는 겁니까? 연회는요?"
"사양하겠다."
"그렇군요...."
아레짐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고, 다른 신도들도 슬픈 눈으로 고개를 내렸다.
데일이 죄인이 된 듯한 기분.
그런 분위기를 무시하며, 데일은 꿋꿋하게 나가려고 했지만....
아레짐은 포기를 모르는 사내였다.
"내, 내일 중요한 집회가 있습니다. 혹시 와주실 수 있나요? 부탁입니다! 이번 집회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집회를 내가 왜... 이긴다고?"
집회와 이긴다. 잘 어우러지지 않는 두 단어였다.
데일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누구를 이겨야 하는데."
"누구긴요."
아레짐은 사납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빛의 신도 그 개자식들이지요."
4군단
* * *
황당해진 데일이 물었다.
"혹시 집회라는 게 패싸움을 의미하는 거였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은 패싸움 같은 거 안 합니다."
'예전에는 했구나.'
아레짐은 상황을 설명했다.
의외로 전선에서는 빛의 교도든 밤의 신도든 차별 없이 바라본다고 했다.
위험한 전장에서 같이 부대끼는 동료이기도 했고, 당장 강력한 힘이 되어주는 밤의 신도들을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두 종교의 세가 비등한 만큼 양측에서도 포교에 필사적으로 열을 올려야 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서 개종시키는 것.
"그게 바로 매주 열리는 집회입니다! 상대보다 더 즐겁고, 더 놀랍고, 더 유익한 집회로 신도들을 포섭하는 것! 아주아주 중요한 행사인 겁니다!"
아레짐은 눈동자에 불꽃을 불태우며 말했다.
"이번 집회에서, 저놈들은 아주 특별한 손님을 초청했다고 합니다."
"손님?"
"예. 교단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라는 듯합니다. 만약 놈들의 집회가 우리보다 훨씬 알차다면... 우리 신도들을 모두 빼앗기고 말 겁니다!!!"
'겨우 집회 한 번에 빼앗길 신도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아레짐과 다른 신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간절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부디, 데일 경께서 참석해주십시오! 그러면 분명 저희가 이번 집회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요!"
"부탁입니다!!"
"제발요!"
이 곤란한 종교쟁이들은 데일이 허락할 때까지 안 비켜줄 기세였다.
데일은 썩 꺼지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여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를 좋아하는 이들이니, 너무 밀어내지 말아달라라....'
여신이 직접 부탁한 일이다. 아주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데일 개인적으도 이 '집회'가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호기심이 조금 일기도 했다.
결국.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어디로 가면 되나."
"우와아아아!"
"경께서 허락하셨다! 우리가 이겼다!"
"빛의 신도들을 쳐부수자!!"
환호성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승낙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데일은 곧바로 후회했다.
* * *
데일은 기운이 쏙 빠지는 기분으로 막사로 돌아왔다.
일반 병사와 다르게 데일에게는 제법 괜찮은 방이 내어졌는데, 하켄이 무구를 닦고 있었다.
"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그래. 웬일로 무기를 손질하고 있군. 바로 술 마시러 나갔을 줄 알았는데."
"하하. 여기는 전선이지 않습니까. 미리 손질 안 해뒀다가 전투라도 벌어지면, 큰 곤욕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켄은 전선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 용병이다.
비록 운 좋게 안전한 데서 복무했다고 해도, 전선은 전선이다.
데일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전선 병사들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더군. 다들 가족같이 지내는 것 같고. 원래 전선은 다 이런가?"
"음. 그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복무했던 곳은 영 살 곳이 못 되었죠."
하켄은 그때가 생각나는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로 칼부림은 일수에, 도둑질은 예사였고, 하여간 개판이었어요. 밤에 제대로 자려면 불침번을 따로 서야 했다니까요? 그때 퀼이랑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했는데... 예."
죽은 친우에 대해 떠올랐는지 퀼의 얼굴이 흐려졌다.
데일이 물었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서 그 가족들한테 말했나? 퀼이 죽었다고."
"...아직요.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런가."
사실, 이미 그 가족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켄만 모를 뿐. 데일은 그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당사자들끼리 언젠가 해결할 문제라 생각했지만....
"마음을 빨리 먹는 게 좋을 거다."
"예?"
"어쩌면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 4군단을 향한 침공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악마가 어째선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평화에 금이 간 것이다.
과연 제국이 버텨낼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예에... 그렇죠.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하아."
하켄이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데일은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에스델은 어디 있나?"
"교단 사제들에게 끌려가던데요. 뭐 중요한 행사가 있나봐요."
"중요한 행사?"
하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뭔 종교 행사라는데요. 하여튼 다들 신앙심이 깊어요. 저는 가끔 가서 헌금이나 내는데."
에스델은 에스델 나름대로 바쁜 모양.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하켄은 이내 곯아떨어졌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데일은 창문을 열었다. 고요하다.
밤의 이리스 성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수만 명의 주민과 병사들이 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드르렁!
하켄이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어주었다.
원래 같으면 거슬렸어야 하지만, 지금은 왠지 기껍게 들렸다.
홀로 적막 속에서 밤을 보내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
데일은 언제나처럼 생각에 잠겨 들었다.
오늘은 생각할 거리가 아주 많았다.
4군단. 베른바르트. 5등급. 밤의 신도. 그리고....
배낭을 열어 깃털 펜을 꺼냈다.
발랄하던 노움이 전해준 마음의 증거. 우물쭈물하다 지키지 못했던 데일의 후회.
'레온. 그리고 나탈리.'
데일은 혹여나 깃털 펜이 부러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이 자그마한 물건을 보고 있노라면 밝게 미소 짓던 노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들을 죽이고 시체로 부리던 사령술사에 대한 분노도 같이 피어오른다.
그때. 데일은 그 쓰레기들을 충분히 응징했다. 직접 이 손으로 목숨을 거둠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하지만 그걸로도 데일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의 감정은 여전히 영혼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무덤덤해진 마음속에서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데일은 적당한 단어를 생각해냈다.
'실망.'
사령술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때. 데일은 사람에게 조금 실망했던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게 별거 아닌 라면, 데일이 지키려는 인간성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데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마음속에 새겨진 조부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넘쳐나지만, 너만은 사람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데일은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 그 가능성을.
그저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이 믿음을 유지한 채, 조부의 말을 따를 수 있기를.
* * *
땡! 땡! 땡!
4군단의 아침은 요란한 종소리로 시작한다.
막사에서 일어난 병사들은 배식소로 가 아침을 해결했다.
일이 있든, 할 일이 없든. 다들 부지런히 움직였다.
병영에 마련된 막사에서는 고참병들이 이레네에서 온 신병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검 똑바로 내질러!"
"절대 방패 내리지 마! 내리면 옆에 동료들도 같이 뒤진다! 방패 내리는 새끼는 내가 직접 두들겨 패 줄 테니 그리 알아!"
"엄살 부리지 마! 실전에서는 이것보다 몇 배는 힘들다!"
상당히 혹독한 훈련이었다.
굶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순진하게 입대한 병사들은 욕설과 살벌한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금방 알게 되겠지.'
이렇게 혹독하게 훈련하는 게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을 올려줄 거라는 것을.
과연 저 중 몇이나 살아남아 고참병이 될까.
데일은 계속 걸음을 옮겼고, 하티가 그런 데일의 다리를 툭 쳤다.
"아. 방향을 잘못 들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표정으로 말한 하티가 도도하게 앞서나갔다. 자기 뒤나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데일은 하티를 따라가면서 성을 둘러보았다.
전투가 없는 날에는 숙련병들도 다소 한가해 보였다.
나른하게 햇빛을 쬐는 이들도 있었고, 성안에서 텃밭을 가꾸는 병사도 있었다.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
'하긴. 이러니까 한가하게 종교 집회에 참석하겠지.'
데일은 아레짐이 꼭 찾아와 달라며. 안 오면 울어버릴 거라고 말했던 장소로 향했다.
하얀 판석이 깔린 넓은 공터였다.
평소에는 출정식 같은 걸 할 때 쓰이는 장소일까?
그런 공터에 두 집단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일부러 흰색 옷을 입었고(대부분은 때가 타서 누리끼리했다), 다른 한쪽은 어두운색 계열을 맞춰 입었다.
'어디가 어느 진형인지 보기 편해서 좋군.'
양 종교의 신도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미워서 노려본다기보다는, 위협적인 경쟁자를 보며 긴장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런 둘을 일반 병사들이 자리에 앉아 구경하며 도란도란 얘기했다.
"오늘 집회는 뭔가 특별하다는데?"
"뭐가? 맛있는 거라도 나온대?"
"몰라? 엄청 대단한 사람을 불렀나봐."
"난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온 건데?"
데일이 다가오자 밤의 신도들이 곧장 알아챘다. 아레짐이 훌쩍 다가와 검은색 가운을 건넸다.
"잘 오셨습니다! 잠시만 이걸 쓰고 계셔주십시오! 정체를 숨겼다가 드러내는 게 더 극적이니까요!"
"...."
여기까지 온 이상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데일은 가운을 뒤집어썼다.
덩치에 비해 가운이 조금 작아서 다리 부분이 훤히 보이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 데일을 옆에 두고 아레짐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 한다."
이 집회를 어지간히도 진심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저쪽에서도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한 모양이다.
생각하는 게 이쪽이랑 똑같은지 저들도 흰 가운을 씌웠다.
그리고 이윽고 집회가 시작되었다.
처음 데일이 집회에 들었을 때 생각한 건, 따분한 설교였다.
사제가 나와서 성경을 읽고, 뜻은 좋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그런 분위기.
하지만 실제 집회는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여기 라딘 신도께서는 이번에 다크 레인저로 전직하셨습니다. 이제 한 번에 화살을 3발씩 쏠 수 있는 신기를 부릴 수 있죠!"
준비하고 있던 궁수가 곧바로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불그스름한 빛에 둘러싸인 화살 3대가 동시에 쏘아졌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환호했다.
"오오오!"
"멋진데?"
그러면 빛의 교단 측에서도 지지 않고 외쳤다.
"여기 우푼타 신도께서는 이번에 3등급 실드맨이 되셨습니다. 날아오는 화살 따위는 거뜬히 막아낼 수 있어요. 결국, 전장에서 중요한 건 생존 아니겠어요?"
타워 실드를 든 방패수가 우뚝 섰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다른 신도가 쇠뇌를 발사했고, 빠르게 날아간 볼트는 거대한 방패에 맥없이 튕겨나갔다.
"확실히. 무난하게 괜찮지."
"오래 살려면 방패를 다루긴 해야 해."
데일은 이 집회의 성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건 뭐랄까, 포교라기보다는....
'홈쇼핑?'
서로 교의 장점을 설명하며 병사들에게 열렬히 어필하는 게 무슨 물건을 파는 쇼호스트처럼 보였다.
'이래도 되나? 아니. 이게 오히려 맞는 건가?'
하루하루가 힘든 전선의 병사들에게 따분한 교리 따위를 설명하면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당장 도움이 되는 부분을 설명하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쉬울 터.
병사들도 사제들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확실히 생존률을 생각하면...."
"교단 쪽을 택하면 성수를 싸게 살 수 있다는데."
"하지만 밤의 신전으로 가면 기본적인 무구를 지원해준다네. 매주 맛있는 스튜도 주고."
어느 한쪽을 선뜻 선택하지 않는 분위기.
양측의 사제는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이다.'
'지금 분위기를 가져와야 해.'
아레짐이 먼저 외쳤다.
"고민하시는 분들께! 우리 교가 자랑하는 영웅을 선보이겠습니다! 이 분을 본다면, 지금까지 갈등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겁니다! 자! 앞으로 서 주세요!"
지지 않고 교단 측 사제도 외쳤다.
"신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죠!"
아레짐이 데일의 가운을 벗겼다.
맞은편에 있던 사제도 똑같이 행동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고.
병사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데일도 상대편으로 시선을 보냈다. 상대측은 어떤 인물을 준비해온 걸까.
"...."
"...."
잠깐의 침묵 후에 데일이 물었다.
"...네가 왜 거기 있는 거냐."
"...제가 할 말입니다."
에스델과 데일은 서로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4군단
* * *
아레짐이 데일을 소개했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유명한 데일 경입니다! 다들 들어보셨죠?"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그 데일 경?"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진짜 있는 사람이었어?"
"저, 저 바닥에 그림자 봐봐. 실제로 보니 더 살벌하네."
아레짐이 계속 외쳤다.
"밤의 여신께서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한 명의 강대한 기사를 보내셨으니, 그게 바로 데일 경입니다! 데일 경은 악마를 베었고, 언데드 군세를 물리쳤으며, 수많은 괴물과 도적떼를 소탕하셨습니다! 데일 경!"
아레짐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한 말씀 해주시죠. 흑기사가 되어서 좋은 점이 뭐가 있습니까?"
"음."
딱히 장점이랄 게 있을까?
이런 몸이 되어 얻는 이점이라 봐야....
"...사람을 더 잘 죽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강대한 힘을 하사받은 데일 경에게 적수란 없지요. 여러분도 교에 들어오시면 데일 경처럼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얻지 못할 수도 있고요.'라고. 아레짐은 뒷말을 일부러 작게 말했다.
명백한 과장 광고.
하지만 병사들은 혹하는 눈치였다.
"저런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갑옷 멋있다."
소문의 그 흑기사를 직접 마주하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교단 쪽 사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병사들의 주의를 돌리고자, 얼른 외쳤다.
"이쪽을 보십시오! 여기 이분은 에스델 님이십니다! 무려 성녀의 대체자로 불리시는 인물이지요! 아니, 성녀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뇨. 저는 아직 성녀님에 비해서는...."
"지금 교단에 들어오면 성녀께서 직접 세례를 내리실 겁니다!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병사들은 혹하는 기색을 보였다.
네 명의 영웅이 전선의 병사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성녀라는 얘기를 들으니 이목이 쏠릴 수밖에.
게다가 에스델의 미모도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병사들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손톱을 잘글잘근 씹고 있는 아레짐에게 데일이 물었다.
"비등한 것 같은데? 이럴 때는 보통 어떻게 하지?"
"보통 실력 행사로 끝내죠. 더 강한 쪽이 더 우대받는 건 전장의 법도니까요."
"?"
마침 상대측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신도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더니, 넓은 원형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상대측에서 외쳤다.
"전사라면 혀로 겨루지 않는 법! 너희를 꺾어 우리의 신앙심이 더 두텁다는 걸 증명하리라!"
아레짐도 외쳤다.
"바라던 바다!"
"와아아아!"
드디어 기대하던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환호했다.
'이건 뭔.'
데일이 멀뚱히 서 있자, 아레짐이 빠르게 설명했다.
"한 명씩 나와서 상대방과 겨루는 겁니다. 한쪽이 다 쓰러질 때까지 계속 싸우는 거죠. 더 나올 쪽이 없으면 패배고요. 단, 무기는 사용하면 안 되고요."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포교해도 되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로의 신앙을 겨루는 데 이것만 한 게 어딨다고요. 설마 토론이나 설전 같은 걸 벌일 거라 생각하셨나요?"
보통 그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그런 데일의 의문과는 별개로 대결은 척척 진행되었다.
"양측의 전사는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데일 경을 내보내겠다!"
아레짐이 데일의 등을 밀며 외쳤다. 그리고는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꼭 이겨야 합니다! 현재 전적은 121승 12무 121패라고요. 여기서 이겨야 우위에 설 수 있어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나?"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어차피 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살려낼 수 있어요! 아! 실수를 가장하면서 그냥 죽여버리셔도 되긴 합니다."
데일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셈 치고 중앙으로 나아갔다.
마검은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이건 결투보다는 대련이나 스포츠 경기에 더 가까운 모양이니.
데일의 등장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반명. 상대방 측은 잔뜩 긴장했다.
"젠장. 첫 번째부터 흑기사를."
"우리는 성기사 없나?"
"...이번에 다 전사하셔서."
"그렇다면...."
모두의 시선이 에스델에게 집중되었다. 에스델이 미간을 좁혔다.
"왜 저를 쳐다보시는 거죠? 설마 저보고 싸우라는 건 아니죠?"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저는 성기사가 아니라고요!"
신도들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전선에서는 일반 사제들도 뛰어난 전사인 경우가 많았다. 남들에게 보호받기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하지?"
"강력한 축복을 집중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사제들이 신도에게 축복을 부여했다. 얼떨결에 에스델도 참여해야만 했다.
각종 축복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신도가 데일의 앞에 섰다.
제법 덩치가 큰 전사였다.
전사는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위명은 많이 들었소. 하지만 순순히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내가 신의 뜻을 따라 당신을 꺾어 보이겠소."
"맘대로 해라."
그 순간. 손을 번쩍 들었던 사제가 아래로 손을 내리그었다.
경기 시합을 알리는 신호.
동시에 전사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
데일은 달려오는 전사의 허리를 요령 좋게 잡았다.
그리고는 한 바퀴를 빙글 돌려, 힘껏 던져버렸다.
"우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며 저 멀리 날아간 전사는 콰직! 하는 충돌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미동이 없다. 순간 죽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
'실수로 너무 세게 던졌다.'
신도들이 우르르 몰려가 전사를 살폈다. 한 신도가 외쳤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오른 어깨랑 왼쪽 종아리가 박살 났습니다!"
"심장이 뛰나?"
"예!"
"그럼 상관없다! 다음!"
곧바로 다음 전사가 나섰고, 이번에도 데일이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렇게 다섯이 넘는 전사가 하늘을 날았다가 추락하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구경하던 병사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
"대단하다!"
"전사들이 쪽도 못 쓰다니. 소문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역시 밤의 여신을 따르는 게 더 좋으려나?"
"데일 경! 데일 경!"
그들은 데일의 용력을 칭송했고, 미소 지으며 경기를 즐겼다.
아레짐도 몹시 기뻐했다.
"이겼습니다! 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요! 이 기세로 모조리 때려눕히죠?"
"아니. 나는 여기까지 하겠다."
"엥? 아니. 더하시지 왜...."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니 오히려 마음이 켕겼다.
애들 노는 곳에 어른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기분이랄까.
데일이 빠지자 다시 양측의 신도가 격돌했다. 마치 씨름처럼 서로를 붙잡고 넘어뜨리려 바둥거렸는데, 이번에는 꽤 비등비등해서 제법 봐줄 만했다.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응원했고, 승자에게는 환호를. 패자에게는 위로를 보냈다.
게다가 경기가 계속 진행되자, 병사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나도 한번 해볼래!"
"나도!"
팔을 걷어붙인 병사들은 경기에 참석해 자신의 무용을 과시했다.
어느새부터 밤의 교도니 빛의 신도니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이 시간을 보낸다.
그제야 데일은 왜 이 집회에 사람이 이리도 많이 몰리는지.
그리고 군단장이 자칫 위험한 사태로 번질 수 있는 이런 요란한 집회를 허용하는지 이해했다.
'화합인가.'
함께 땀을 흘리며 힘을 겨루다보면 실력도 늘 것이고, 어느샌가 동료의식도 싹 틀 것이다.
데일은 지금껏 이렇게 두 종교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빛과 밤은 화해했다 하나 긴 시간 이어온 감정의 골은 깊었고, 데일은 항상 편견과 적의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낌새는 없다.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길지언정, 서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광경이 이레네도 아닌 전선에서 펼쳐진다니. 조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궁금하기도 하군.'
이런 분위기에서 군단의 절반이나 반란을 일으키다니?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 그들이 곧 악마의 아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끈끈하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의문 속에서 계속된 대결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결과는 밤의 신도 측의 압승.
데일이 초장에 워낙 많은 전사들을 쓰러트려서 교단 측에서는 어찌할 재간이 없었다.
생각보다 격한 경기 탓에 부상자가 많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사제 인력이 많아서 금방 치유할 수 있었다.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이제 먹고 마실 시간이었다.
어디선가 음식과 술을 구해온 신도들이 병사들과 연회를 즐겼다.
술잔이 연거푸 돌고. 불콰하게 취한 사람들은 밤의 여신을 따르든 빛을 따르든 상관없이 어울렸다.
데일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에스델도 다가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니. 저는 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유쾌한 것 같아요."
"결국에는 사람 사는 곳이니까."
에스델이 짓궂게 말했다.
"조금 봐주시지 그러셨어요. 데일 경이 너무 무자비하게 싸우시니까, 저희 신도들이 엄청 실망했다고요."
"적당히 봐주면 오히려 싸우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말이지...."
그러는 와중에도 병사들과 신도들은 웃고 떠들었다.
그들은 술잔을 들며 소리 높여 외쳤다.
"빛의 여신 만세!"
"만세!"
"밤의 여신도 만세!"
"만세!"
"베른바르트 군단장님 만세!"
"만세!"
그때. 전선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병사 하나가 흥에 취해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이여 영원하라!"
"...."
"...."
갑자기 내려앉는 싸늘한 정적.
방금까지의 유쾌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냉랭한 눈으로 눈치 없는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당황한 병사는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 몰라 더듬거렸다.
"어. 어어."
사근사근해 보이는 신도 하나가 그런 병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하 이 친구. 4군단에는 처음인가보지?"
"어. 어어. 그렇지?"
"그러면 함부로 황제 폐하 만세라니 그딴 소리는 하지 마. 오래 살고 싶으면 말이야."
그렇게 말한 신도는 하늘을 향해 술잔을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황제에게 죽음을!"
"죽음을!"
"악마에게도 죽음을!"
"죽음을!"
"우리의 싸움에 의미가 있기를!"
싸해졌던 분위기는 신도의 재치에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하지만 데일과 에스델은 이 전선의 병사들이 마냥 유쾌하지 않다는 걸.
그 마음속에 날카로운 검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사람들.'
황제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 이름을 굳이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 * *
겉으로 먹음직스러운 과일도 그 속이 썩어있는 경우가 있다.
4군단이 그러했다.
병사들의 황제에 대한 원망은 대단했다.
데일은 아레짐에게 그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아레짐이 질문을 던졌다.
"경께서는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별생각 없는데. 다만 뭐랄까... 꾀가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당장 귀족들의 힘을 줄이면서 북부에서 활개 치던 케인을 처리하고, 자기가 부릴 수 있는 군사를 늘리기 위해 친위대라는 조직을 만들어낸 황제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황궁에 틀어박혀 계획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겁이 많다는 인상이 있군. 자기 보신적이라 해야 할까."
"정확하십니다. 황제는 겁이 많은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죠. 만약 자기 위치만 지킬 수 있다면, 군단이고 백성이고 전부 버릴 수 있을 걸요?"
그 정도까지나?
데일은 아레짐이 과장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믿지 못하는 눈치시군요. 경. 사실 이 전쟁이 아군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는 걸 아시나요?"
"이길 수 있었다고?"
아레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영웅들이 활약하며 두 자릿수의 악마를 토벌하던 그때. 아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고, 전쟁의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만약 그 기세를 몰아 전선 저 너머로 진격했다면, 어쩌면 이 전쟁을 우리의 승리로 끝낼 수도 있었겠죠."
아군의 승리?
곰곰이 생각해본 데일은 그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군세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상위 악마들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재해와 같다.
데일이 게임을 할 적에도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혼자서는 말이지.'
데일은 늘 생각했다.
육성을 완료한 캐릭터 넷 정도만 함께 싸우면, 상위 악마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그리고 영웅들의 정체가 데일이 생각하는 이들이 맞다면....
'상위 악마라도 이길 수 있어.'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아레짐이 물었다.
"승리가 눈에 보이던 그때. 황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어떻게 했지?"
"모든 보급을 끊었습니다. 식량. 생필품. 전쟁 물자. 전부 다."
군단의 보급은 대부분 이레네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급이 끊긴다면....
"진격 같은 건 불가능하죠. 배고픈 병사는 싸울 수 없으니까요. 아니. 진격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당장 병사들이 굶주려서 서로 칼부림을 하고, 아사하고, 심지어 배고픔을 못 이겨 사람의 살점을 뜯어먹고...."
아레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데일이 물었다.
"대체 황제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
아레짐이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두려우니까! 황제는 군단장들이 두려운 겁니다. 군단장들은 수십 년간 전선을 지휘해왔고, 수만이 넘는 병사들은 사실상 군단장의 병사나 다름없어요. 그런 상황에 전쟁이 끝나면."
"자기한테 칼끝을 겨눌 거라 생각했군."
터무니없는 망상이냐 묻는다면, 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강력한 군벌들이 전쟁이 끝난다고 순순히 군대를 해산할까?
이후에 있을 황제나 귀족들의 견제를 생각해서라도 군대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다 마음을 먹으면 이레네로 진격할 수도 있는 거고.'
황제에게는 오히려 전쟁이 끝나는 게 더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급을 끊어 병사들을 굶어죽인 것이고.
"경께서는 저희를 배신한 절반의 병력이 악마에게 홀려 넘어갔다고 생각하셨겠죠?"
"아니었나?"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이게 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진심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이제야 상황이 어느 정도 눈에 보였다. 왜 그렇게 많은 배신자가 나왔는지도.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있었다.
"아무리 분노했다 해도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닌가? 악마와 손을 잡는다면, 결국 최후에는 본인도 괴물이 되어 버릴 텐데. 군단의 절반이 그걸 결심했다고?"
악마의 추종자가 되면 그 결말은 뻔하다. 자아를 잃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병사들이 그걸 원하지는 않았을 터.
"그게 사실...."
아레짐은 데일의 물음에 갈등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데일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이럴 때는 닦달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게 제일이었다.
긴 고민 끝에 아레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이끄는 게...."
아레짐은 선뜻 말하기 힘들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대마법사님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4군단
* * *
대마법사라니.
"내가 아는 그 대마법사가 맞나?"
"사라진 영웅들을 생각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데일이 다시 물었다.
"그 대마법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있다고?"
"어디까지나 소문이 그렇다는 겁니다만... 생각보다 많은 병사들이 넘어갔어요. 아주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닐 겁니다."
많은 악마를 베어낸 영웅들은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신과도 같다.
만약 그런 영웅이 이끈다면, 기꺼이 따를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영웅들이 악마들이랑 손을 잡았단 말이 되지 않나?"
"믿기 어렵지만, 그럴 수도요. 영웅들의 거취는 워낙 소문만 무성한 일이라 확언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영웅들끼리 서로 싸우고 갈라졌다는 말도 있고, 악마들에게 투항했다는 말도. 심지어 그 악마들을 제압해서 수족으로 부린다는 말도 있어요."
어느 게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영웅들은 황제와 마찰을 빚다, 결국 직접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아무것도 명확한 게 없다.
하지만.
'만약 반란군을 주도하는 게 대마법사라는 놈이 맞다면.'
머지않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대마법사라는 자를.
나머지는 만나서 직접 쓰러트린 뒤, 목에 칼을 대고 질문하면 될 뿐이다.
너는 대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데일은 마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을 뽑을 날이 머지않았다.
* * *
사흘간은 놀랄 만큼 평화로웠다.
평원에서 물러난 아르구르의 군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병사들은 실로 오랜만에 휴식과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성에 있는 모두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우니 오히려 껄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마치 폭풍 전 고요의 느낌이랄까.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건 확실한데, 너무나 조용하니 가슴이 불안해졌다.
그런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군단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연일 쉬지 않고 회의했다.
"외벽의 보강 작업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솔직히. 아슬아슬했는데 살았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계속해서 병력을 들이칠 줄 알았는데. 혹시 성을 포기하고 지나치려는 거 아닐까요?"
"놈들이 여기를 지나치면 우리는 곧바로 병사를 보내 앞뒤로 공격하면 될 뿐이야."
지휘관들도 왜 악마의 군세가 진격을 멈췄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불안하더라도 기회는 기회. 이번 여유를 살려 최대한 여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렇게 종일 이어진 회의가 끝나고. 베른바르트는 목을 뚜둑 풀었다.
"후우. 정말이지. 나이 먹고 이러는 것도 못 할 짓입니다. 예전에는 나흘 밤낮을 새가며 싸워도 지치지 않았는데...."
기사단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소."
"오래 살아봤자 좋을 거 없다는 말이 공감이 갑니다. 진즉에 묫자리에 들었어야 할 노인네가 질기게 살아남아 못 볼 꼴만 보고 있으니."
"몸은 좀 괜찮으시오?"
베른바르트는 가슴에 칭칭 감은 붕대를 두드렸다.
"상처는 대충 아물었습니다. 무리만 안 하면 다시 터질 일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오. 군단장 같은 훌륭한 지휘관이 굳건히 버텨주어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길 테니 말이오."
"하하하. 미하일 경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두 노인들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데일은 그런 둘의 뒤에서 조용히 뒤따랐다.
그때. 모퉁이에서 빅토르 백작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사단장의 눈동자에 탐탁지 않은 감정이 떠올랐다. 베른바르트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 빅토르 백작이 보여준 추태 탓이었다.
'병사들이 버릇없다고 처벌하려 했다고 했던가?'
군단장을 상대로도 격의 없이 지내는 병사들이 백작이라고 예의를 지켰을까.
전형적인 귀족인 빅토르는 그 무례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상급자에게 저리 건방지게 굴어? 내 본보기를 보여주마. 저놈을 군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라!"
그렇게 외친 빅토르는 병사에게 태형 10대를 내렸다고 한다.
소문으로는 아예 처형할 생각까지 했는데, 부관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고.
당연히 빅토르 백작의 그런 처사는 큰 문제가 되었다.
일단 전선의 병사들은 가뜩이나 이레네의 귀족과 황제를 싫어한다.
그런 와중에 자기 동료가 별것도 아닌 일로 채찍을 맞았다?
병사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뻔했다. 폭동이 벌어질 뻔하자, 기사단장은 곧바로 빅토르 백작을 찾아가 꾸짖었다.
"병사들이 격의 없이 상급자를 대하는 건 군단장이 부대의 사기를 위해서 장려한 부분이네! 그대가 무어 그리 잘났다고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건가! 가뜩이나 고생하는 병사에게 겨우 이런 일로 채찍을 휘두르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나!!"
그날부로 빅토르는 근신을 명받고,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회의에 끼워주지 않는다는 건 이후 수행될 작전에서도 배제되며, 공을 세울 기회마저 빼앗겨버리는 것이다.
전공을 세우기 위해 이 멀리까지 온 빅토르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처사.
당연히 그는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렇게 매일 같이 회의가 끝나고 기사단장을 찾아오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좋은 저녁이오 군단장. 그리고 기사단장."
백작은 조금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군단장과 기사단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백작. 내가 한동안 막사 내에 근신해있으라 명하지 않았나? 자네가 돌아다니는 걸 보면 병사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네."
"저도 기사단장과 같은 의견입니다. 답답하더라도 되도록 움직이지 않아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으음. 그, 그건 알지만 워낙 좋은 계획이 떠올라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소. 이건 너무 획기적이라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도 있는 작전이오."
그렇게까지 말했지만 여전히 두 노인의 태도는 심드렁했다.
지난 며칠간 빅토르 백작이 내놓은 획기적인 작전이라는 건, 너무 도저히 써먹을 게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계획을 설명하던 빅토르 백작의 말을 기사단장이 중간에 끊었다.
"여기서 백인대 둘을 미끼로 내보낸 뒤...."
"그만. 의견은 고맙네. 하지만 더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막사로 돌아가 편히 쉬게나."
"...."
기사단장은 데일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어서 가세나. 할 일이 많으니."
그리고 이게 빅토르의 역린을 건드렸다.
꾹 분노를 참고 있던 빅토르 백작이 폭발했다. 그는 손에 은 고리를 굳게 쥐고는 외쳤다.
"감히 나보다 그따위 사악한 이교도를 더 우대한단 말이오!"
"음?"
"내가 저 언데드 놈보다 못한 게 뭐요! 아! 이제 알겠군! 기사단장 당신도 사실 이교도였군!"
언데드라는 말에 데일은 저도 모르게 검을 손을 가져다댔다.
기사단장이 없었으면 당장 뽑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네 백작. 그리고 지금이 뭐 백 년 전인 줄 아나? 두 여신께서 화해하셨는데, 이교도고 뭐고가 뭔 상관인가."
"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어떻게 황제 폐하의 검이라는 자가 그런 망발을!"
"자네. 아무래도 너무 흥분한 모양이야. 그만 들어가서 쉬게나."
인상을 찌푸린 기사단장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등에 대고 백작이 외쳤다.
"이래도 될 것 같소? 내 웬만해서는 이런 말까지 안 하려 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 보시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백작은 나름대로 권세 있는 귀족이다. 다른 귀족들과 연이 있었고, 가문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가만 안 있으면."
"뭐?"
"가만 안 있으면 뭐 어쩔 텐가. 검이라도 뽑을 건가? 그렇다면 환영하네. 결투라면 언제든지 받아주지."
기사단장이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자 백작은 주춤했다. 그 모습이 너무 추해,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마침 잘됐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계속 말해보지. 자네가 여기 데일 경보다 못한 게 뭐냐고? 자네가 행군 때 낙오자들을 직접 업고 걷기를 했나? 전장에서 나와 함께 선두에서 적을 분쇄하길 했나? 끝까지 뒤에 남아 아군이 성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기를 했나? 응! 단 하나라도 했냔 말이다!"
어지간히 열이 올랐는지, 기사단장은 반말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백작! 나는 무능한 자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능하면서 뻔뻔한 이들은 몹시 싫어하지! 너와 네 가문이 어떤 식으로 전공을 조작하고, 어떤 식으로 돈을 먹여 네 그 작위를 만들었는지 폐하께서 정녕 모를 거라 생각했나?"
"나는. 나는...."
"정신 차려라 백작! 전장터에 필요한 건 무능한 신도가 아닌, 유능한 이교도다! 여기 있는 데일 경의 반이라도 따라오도록!"
지금껏 참아왔던 말을 아낌없이 토해낸 기사단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가세나. 소리를 내질렀더니 배가 몹시 출출하군."
군단장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꽤 권세 있는 귀족이라 들었는데요."
"괜찮소. 폐하께 한소리 좀 듣고 말지. 뭐하나 데일 경? 빨리 오게나."
두 노인은 멍하니 서 있는 백작을 지나쳤다.
데일도 그 옆을 천천히 지나갔는데, 백작은 증오 어린 눈길로 데일을 노려보았다.
"너. 너! 용서 못 한다 이교도야. 내 반드시 너를...."
기사단장에게 야단맞고, 애꿎은 데일에게 그 적의를 돌리다니? 기사단장은 뭔가 복수해보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라 그런 것일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게 나온다라.
'한결같아서 좋군.'
하지만 데일은 다른 기사나 귀족처럼 백작에게 빌빌 기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아악! 이, 이거 놔!"
"다음에 한 번 더 언데드라 불러봐라.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다."
데일의 눈이 빛을 뿜어냈다.
정신 지배.
정신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빅토르는 완전히 몸이 굳어버렸다. 깊은 공포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데일은 그런 백작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앞서서 기다리는 두 노인에게로 걸음을 향했다.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백작은 그제야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천하의 빅토르가. 이런 굴욕을."
으득 이를 간 빅토르가 일어나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성 내에는 병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중에는 밤의 신도로 보이는 자들도 더러 보였다.
'저렇게 당당히!'
대놓고 밤의 신도임을 드러내면서 활보하다니.
이레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가서 주제를 알라며. 알아서 찌그러져 있으라며 저 이교도들을 다그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여기서 더 사고를 쳤다가는, 그때는 정말 기사단장이 가만있지 않으리라.
설상가상.
병사들의 시선도 따갑다.
"저놈은 뭔데 저기 서 있는 거야."
"들었어? 자기한테 건방지게 대했다고 채찍질한."
"아. 그 새끼? 지가 귀족이니까 뭐라도 된 줄 알았나?"
"에이 기분만 잡쳤네. 카악 퉤."
이리스 성은 좁다. 소문은 금방 퍼져나간다.
이미 빅토르가 벌인 일은 4군단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쏟아지는 적의에 빅토르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 하찮은 것들이! 신이시여. 이 빅토르가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부디 목소리를 들려주십시오!'
빅토르는 은 고리를 굳게 쥐고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기도가 응답받는 일은 없었다.
상관없다. 백작은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도할 생각이었다.
강한 믿음이 언젠가 보답받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 기도는 머지않아 어느 한 불청객에 의해 방해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신사분."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였다. 밖으로 드러난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다.
한눈에 봐도 수상쩍다.
하지만 왜일까.
그 목소리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깊은 힘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 목소리를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힘이....
백작이 당황해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신사분께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백작이 홀린 듯이 물었다.
"부당한 대우?"
"예. 당신은 매우 유능하신 분입니다. 고귀한 핏줄에 흠잡을 데 없는 경력. 모두가 떠받들고 예우를 갖춰야 하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주위에 있는 멍청이들은 그걸 못 알아보고, 오히려 당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니. 이것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너... 차, 참으로 맞는 말이구나!"
어떻게 이렇게 자기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해줄 수가!
그런 열렬한 반응에 사내는 씨익 웃었다.
"어디. 시간이 되신다면 저랑 얘기나 좀 하시렵니까?"
"물론이다!"
"그럼 따라오시죠. 변변치 않지만, 차라도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백작은 마치 사탕을 약속받은 아이처럼 순진하게 사내의 뒤를 따랐다.
어느 샌가부터 백작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사라졌다. 그저 사내를 따라 흐느적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런 백작을 인도하는 사내의 로브 속에서는 두 눈동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뿜었다.
아르구르
* * *
"놈들이 온다!!!"
거짓말 같던 평화는 그 외침으로 너무나 간단히 깨져버렸다.
갓 해가 져 온 세상에 그림자가 드리운 저녁. 저 멀리 평원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군세가 그 특유의 눈동자를 아름답게 빛내며 몰려왔다.
별의 군대.
땡땡땡땡!
요란한 종소리가 성 내에 울려퍼졌다.
회의실에 있던 군단장이 말했다.
"그래. 드디어 오는군. 모두 자기 자리로!"
"예!"
지휘관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데일도 빠르게 움직였다.
데일이 맡은 건 동쪽 성벽이었다.
지난 전투로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곳이었고, 이번에도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곳이었다.
데일은 일부러 이곳에서 싸우겠다고 지원했다.
"허. 더럽게 많기도 하네요. 저놈들은 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자기들끼리 애라도 낳나."
하켄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런 대군을 앞에 두고도 딱히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간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늘어. 어지간한 일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 다른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고참병들은 여유로워 보였지만, 경험이 적은 병사들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데일의 옆에 서 있던 병사도 그러했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앳된 청년이었는데, 창을 쥔 손을 위태로울 정도로 떨어댔다.
데일이 물었다.
"실전은 이번이 처음인가?"
설마 데일이 직접 말을 걸어줄 줄은 몰랐는지, 병사는 황송해하며 말했다.
"예? 예. 밥 잘 준다는 얘기만 듣고 덜컥 입대했는데. 솔직히 좀 후회되네요 하하. 그래도 밥은 맛있었지만."
"그런가."
"그. 경이랑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저도 밤의 여신님을 믿거든요. 엄청 영광이에요. 돌아가면 가족들한테 자랑해야겠어요."
이 신참 병사는 밤의 신도인 모양. 그는 간절한 눈으로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아 돌아갈 수 있겠죠?"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답했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예."
반드시 살아갈 수 있다고. 빈말로라도 그렇게 말해주길 원했지만, 야속한 데일은 그리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병사는 창을 불끈 쥐고 전방을 응시했다.
적의 진군이 빠르다.
거리가 시시각각 좁혀져 왔다.
수만의 적군이 이쪽을 향해 내달리니,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꿀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사들은 준비하시오!"
전선에서 오래 구른 지휘관이 외쳤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문이 완성된 순간.
지휘관이 외쳤다.
"발사!"
화아아!
낙뢰와 불꽃이 전장을 휩쓸었다.
강력한 마법은 대지에 깊은 상처를 냈고, 한 번에 수십의 적군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바다에 물 한 바가지를 부은 꼴이다.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
지휘관이 다시 외쳤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중단하고, 바로 위치를 옮기시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기진맥진해진 마법사들을 업고 빠르게 달려갔다.
이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들의 입장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게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상대편의 반격이 마법사들이 있던 곳으로 날아왔다.
콰앙!
불이 붙은 거대한 바윗덩이가 성벽을 강타했다.
바위는 성벽과 부딪히며 여러 파편으로 나뉘었고, 파편은 곧 병사들을 덮쳤다.
"크아악!"
"방패 내리지 마!"
"사, 사제님을 불러줘...."
바위 파편은 서너 개가 데일에게도 날아왔다. 데일은 주먹을 내뻗어 그대로 파편들을 후려쳤다.
파편이 부스러기가 되어 공중에 흩뿌려졌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신병이 감탄을 흘렸다.
"와. 와아...."
데일은 전장을 응시했다. 바위가 날아온 곳을 찾아헤맸다.
적군이 바글거리는 전장이지만, 데일은 등급이 오르면서 '부정한 감각'이 '어둠의 감각'으로 진화했다.
향상된 시각은 금방 바위를 쏘아낸 원흉을 찾아냈다.
"투석기인가?"
상당히 커다란 투석기였는데, 대체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중간중간 눈알이나 사람의 얼굴 형상이 돋아나 있었다.
그 투석기에 바위를 얹고, 마법사로 보이는 놈들이 바위에 불을 붙였다.
가끔은 바위가 아니라 자기 아군을 붙잡아다가 날리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 투석 공격이 아군에 상당히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점이다.
'저런 걸 계속 놔두다가는 성벽이 걸레짝이 되겠는데.'
병사들의 피해도 피해지만, 성벽이 입는 타격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저런 거에 얻어맞으면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데일이 직접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켄. 뭐 던질만한 거 없나?"
"던질 거요? 돌멩이 같은 거?"
"기왕이면 큰 거."
"아까 날아온 바위 중에 부서지지 않은 게 하나 있던데 뭘 하려고... 설마?"
데일은 하켄이 가리킨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말대로 용케 부서지지 않은 바위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데일은 바위를 양손으로 붙잡고, 힘을 주었다.
드득.
바닥에 박혀 있던 바위가 둥 떠올랐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데일이 외쳤다.
"다들 물러나라!"
주위에서 멍하니 있던 병사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데일은 바위를 단단히 붙잡은 뒤, 몸을 빙글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충분히 힘이 실렸다고 판단이 든 순간.
바위를 손에서 놓았다.
바위가 하늘을 날았다.
병사들의 고개가 바위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그들이 본건....
콰앙!
바위가 투석기에 그대로 직격했다.
"아니. 투석기를 투석으로 요격했다고?"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데일은 전장을 다시 살폈다.
제대로 얻어맞은 투석기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다시 고쳐서 쓰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투석기가 많았다.
'어림잡아도 스무 개는 넘어 보이는데.'
게다가 꽤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어 이곳에서는 요격하기 힘들었다. 앞서서 투석기를 부순 건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때.
한차례 함성과 함께 저 멀리서 황실 기사단원들이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눈에 보였다.
마법사 같은 적의 주요 전력을 헤집어 놓으려는 걸까?
방어만 고집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기사단장이 참으로 적절한 때에 지시를 내려주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데일도 성벽에서 힘껏 도약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하켄이 붙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날아오른 데일은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쿵! 높이 날아오른 만큼 땅에 부딪혔을 때의 충격이 거셌다.
데일의 착지점에 있던 적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악마의 하수인들은 이내 데일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데일은 겁을 먹지 않고 달려드는 이 괴물들이 오히려 기껍다.
새로운 힘을 시험해볼 기회다.
마력이 빠져나간다.
데일 아래서 꿀렁이던 그림자가 돌연, 사방으로 뻗어나가 주위를 뒤덮었다.
검은 안개의 상위 기술.
새벽 안개.
"캬악?"
"크르륵."
하수인들은 주위를 뒤덮는 어둠에 당황했다. 당장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공포가 등을 타고 흐른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산채로 생기가 빨려 나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멈출 수가 없다. 끝끝내 마지막 남은 생기마저 강탈해갔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자, 남은 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생기가 모두 빨려버린 시체뿐.
데일이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에 매우 만족했다.
'나쁘지 않군.'
드디어 기술들이 강력한 화력을 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력은 왕창 잡아먹었지만.
데일은 거침없이 적군 사이를 헤집었다.
흑기사가 왜 전장의 공포인지를 직접 선보였다.
그렇게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에 투석기가 있었다.
마침 하수인과 마법사가 모여서 다음 바위를 쏘아 보내려고 준비하던 참이다.
그들과 데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크륵?"
이놈은 대체 누구고 왜 여기 있는 거지?
하는 표정이 하수인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데일은 그런 하수인을 무시하고 투석기를 부여잡은 뒤, 힘을 주었다.
우지끈!
별다른 어려움 없이 투석기가 박살이 났다.
망연자실한 하수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데일은 놈을 흘끗 쳐다본 뒤, 마법사로 보이는 하수인만 죽이고는 곧장 떠났다.
일일이 죽이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데일은 전장을 누비며 투석기와 마법사만 노려 제거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사들이 다시 성벽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이목이 이쪽에 전부 쏠리면 골치 아프다.
데일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그대로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병사들은 휘둥그레진 얼굴로 데일을 쳐다봤다.
하켄이 대표로 물었다.
"어. 음.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뭐하고 오신겁니까?"
"투석기를 네 대 부숴놨다. 더 부쉈어야 하는데."
"...아니. 그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닌가요?"
하켄의 말에 병사와 지휘관도 일제히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 투석기의 약 2할을 부쉈는데, 대단하지 않을 리가.
마법사들의 느낄 위협도 줄어들고, 성벽이 입을 피해도 훨씬 덜할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거로는 부족해.'
여전히 적은 너무 많다.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은 너무나 적다.
이렇게 투석기나 적의 마법사를 제거하는 게 데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혼자서 전장의 판도를 바꾼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아니.'
있었다. 개인 혼자서 전장을 주무를 수 있는 존재를.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모습을 감췄다.
저 하늘 너머에서 거체를 지닌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뭉툭한 부리가 툭 튀어나온 머리. 이마에 돋아난 두 쌍의 뿔.
힘껏 펄럭이는 네 겹의 날개.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있는 꼬리까지.
19위의 악마이자 별의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자.
절멸의 아르구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노, 놈이 왔다!"
"으. 으으."
정신력이 약한 병사들은 주저앉았다. 아르구르는 그런 인간들을 비웃듯, 하늘을 우아하게 유영했다.
'저 거대한 몸뚱아리가 대체 어떻게 하늘에 뜨는지 모르겠군.'
황제가 부유 마법에 환장하는 이유가 저것 때문일까?
아르구르의 등장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성벽 아래서 달려들던 하수인들은 지금까지는 봐주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미친 듯한 기세로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막아! 절대 올라오게 둬서는 안 돼!"
"창 찔러...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날아온 괴조가 병사를 하나 낚아채 그대로 날아오른 뒤, 지상을 향해 떨어트렸다.
아르구르의 공중 부대가 참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발리스타를 하늘을 향해 쏘아댔다. 큼직한 쇠 화살이 하늘을 꿰뚫었다.
이어지는 접전.
아르구르는 직접 참전하지 않고, 그저 멀리서 하늘을 여유롭게 비행했다.
마치 이쪽을 비웃는듯한 태도다.
그런 상황에서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다. 죽고 죽이는 소모전.
성벽과 방어시설을 끼고 싸우는 데다, 평균적인 병력의 질도 더 높은 아군은 힘겨워도 제법 잘 방어해냈다.
적의 숫자가 훨씬 많았지만, 이쪽은 경험 많은 정예병들인 것이다.
게다가 아군의 기사단장이나 마법사 같은 고급 전력도 아르구르를 견제하기 위해 여력을 아끼고 있지만, 아르구르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왜지? 저놈은 영악하지만 겁쟁이는 아니야. 오히려 호전적이지. 이런 식으로 싸울 기회를 마다할 리는 없어. 일부러 저렇게 다 보이게 날아다닐 놈이... 시선을 끈다?'
데일은 곧장 첨탑 중 하나에 올라서 더 넓은 시야를 전장을 살폈다.
적들이 빼곡히 들어찬 평원. 달조차 희미해 어둠에 잠겼지만, 데일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데일은 북쪽 방향에서 또 다른 군대가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악마의 군세? 아니다.
데일은 시력에 집중해 그들을 상세히 확인했다.
아군과 비슷한 복장. 비슷한 무기.
'반란군.'
4군단에서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의도로 오는 건 아닐 것이다. 이곳 이리스 성을 완전히 함락시킬 작정이다.
'저놈들을 이끄는 게 군단장의 손자라고 했나?'
손자가 조부를 기어코 죽이러 오다니. 참아줄 수 없다.
게다가 저들은 대마법사와도 무언가 관계가 있을 터.
하지만 우선 이 사실을 윗선에 보고하는 게 우선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 저들의 접근은 아직 데일 외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군단장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데일은 첨탑을 뛰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들렸다.
"남쪽 성문이 열렸다!"
앞으로 한참은 더 버텨줘야 할 성문이 뚫렸다.
'아니. 뚫린 게 아니라 열렸다고?'
데일은 곧바로 첨탑을 뛰어내려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아르구르
* * *
데일은 남문으로 달렸다.
병사들의 시체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분이 있었나?'
이미 군단의 절반이 반란군으로 돌아선 상태다.
성 내부에 배신자가 있거나, 적의 첩자가 있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베른바르트 군단장도 그걸 예측해 성문 주위를 삼엄한 경계를 펼친 것이고.
'그리고 남문은 우리 쪽 지휘관들이 지키는 곳인데?'
이레네에서 온 귀족 지휘관과 병사들이 주축이 되어 남문을 수비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닳고 닳은 정예병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실력 있는 자들인 것이다.
서둘러 달려간 데일은 활짝 열린 성문을 보았다.
그 성문으로 적군의 군세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병사들은 무력하게 휩쓸려 나가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어디... 저깄군.'
성문을 여는 쇠사슬을 감아 놓는 도르래.
그곳에서 지휘관급 인물들과 추악한 괴물 하나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의 형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악마의 추종자가 성에 숨어든 것일까?
데일은 지휘관들을 돕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미 몇몇 지휘관이 큰 부상을 입어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등에서 느껴지는 섬찟한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가, 그게 데일이라는 걸 깨닫고 화색을 띄웠다.
"데일 경!"
"무슨 일이오! 도르래를 제대로 지키고 있었어야지!"
"며, 면목 없습니다."
성문과 그 성문을 여는 도르래는 가장 삼엄히 지켜야 할 것 중 하나다.
거기에 악마의 추종자가 다가가게 하다니.
'잠깐.'
저 추종자. 어쩐지 낯이 익다.
특히 손에 쥔 은 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빅토르 백작?"
"...예."
"백작이 추종자였다고?"
"저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백작의 아르구르의 추종자였다니.
아무리 악마의 추종자가 인간 사회에 녹아드는 데 능하다고 해도, 백작에게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백작은 그냥... 한심하고 오만한 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다 연기였다?'
어쨌거나 할 일은 하나다.
데일은 마검을 쥐고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문어처럼 징그러운 촉수가 돋아나고, 얼굴은 도마뱀처럼 비늘에 둘러싸인 백작이 데일을 보았다.
그 못생긴 얼굴이 데일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제 발로 왔구나! 이교도 놈아! 이 빅토르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누가 누구보고 이교도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악마의 똘마니 주제에."
데일은 어처구니없어하며 응수했다.
이 괴물은 아직도 자기가 빛의 신자라고 믿는 걸까?
"닥쳐라!!"
일갈을 터트린 백작이 4개의 촉수를 움직여 빠르게 접근해왔다.
아르구르의 힘을 받은 추종자들은 으레 육탄 공격과 근접 전투에 능하다.
'그리고 재생력이 뛰어나지.'
예전에 싸워 봤던 하시나도 그러지 않았던가.
데일은 검을 들어 올렸다.
백작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 궤적을 읽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악마의 힘을 받아 조금 빠르고 튼튼해졌을 뿐, 백작의 움직임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데일은 검을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크게 특별할 것 없는 내려베기.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써억!
백작의 몸이 사선으로 잘려나갔다. 반 토막이 난 징그러운 몸은 서로 옮겨붙으려 했다.
악마의 신성이 가진 치유력.
하지만 붙지 않는다.
"...어째서?"
그제야 백작은 데일의 손에 들린 검을 눈에 담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불길한 기운을 품어내는 마검을.
백작은 촉수를 움직여 은고리를 굳게 쥐었다. 그 눈동자가 마구 떨린다. 본인의 최후를 직감한 것일까?
"시, 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종에게 목소리를 내려주소서. 마지막만이라도...!"
"설마 아직도 네가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악마에게 어지간히도 홀렸군."
"닥쳐라! 이 찢어 죽일 놈! 사악한 이교도 놈! 너의 사후에는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장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을지어다!"
"그래?"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네가 먼저 가서 뎁혀놓고 있어라."
우적.
마검이 백작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백작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데일은 마검을 회수했다.
설마 일격에 죽일 줄이야.
내려베기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펼쳐져, 데일 본인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백만 번이나 휘두른 보람이 좀 있는 건가?'
데일은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당장 병력부터 수습하시오. 저 성문부터 틀어막아야 하오."
"하, 하지만. 다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도 적군이 성문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성벽이 갑자기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아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고, 당황해서 갈피를 못 잡는 이들도 많았다.
정예병이라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쯧.'
속으로 혀를 찬 데일은 우선 성문으로 달려 나갔다.
마검을 횡으로 휘둘러 한 번에 적을 베어냈다.
데일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적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이 파도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그 흐름을 막아낼 수는 있다.
데일이 성문을 홀로 막아내자 괴수들도 잠시나마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 기회를 살려, 데일이 외쳤다.
"모두 정신차려!! 죽고 싶지 않으면 일어서서 무기를 쥐어라!!!"
데일의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동시에, 마력을 끌어써 영혼 지배를 사용했다.
영혼 지배는 대상의 정신에 간섭하는 기술.
상대를 공포에 빠트릴 수도 있지만 그 활용을 조금만 비틀면....
'공포에 빠진 이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다.'
데일의 외침에 혼란에 빠져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제정신을 차린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광경은 홀로 적군을 막아내는 데일이다.
지금은 데일이 바로 이 이리스 성의 성문이자 벽이었다.
"...신이시여."
병사들에게 광경은 전율을 안겨주었다. 원래 밤의 여신을 따르던 신도들에게는 종교적인 감동을 주었다.
여신의 기사가 우리를 위해 성을 막아내고 있다!
"모두 가서 데일 경을 도와라!"
"우와아아!"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나 데일을 향해 달려왔다.
방패를 세우고, 창을 쥐어 대열을 이루었다.
속절없이 밀리던 상황이 어느샌가 다시 비등해졌다.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이끈 데일을 보며 감탄하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아졌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보가 무너진 둑처럼 적군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게다가 적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전력들이 속속 도착했다.
"처, 청동 거인이다!"
몸집이 성벽만 한 금속 골렘이 쿵쿵 걸어왔다.
원래라면 가까이 오기 전에 요격해야 하지만, 혼란을 틈타 기어코 성벽에 다가섰다.
거인은 무거운 몸뚱아리 그대로 성벽에 엎어졌다.
쿠구구궁.
성벽이 일부 무너지고. 적들은 엎어진 청동거인을 밟고 성벽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쯧. 안 되겠군.'
남쪽 성벽은 이미 방어 능력을 잃었다. 그렇게 판단한 데일이 지휘관들에게 외쳤다.
"후퇴해야 하오!"
"하, 하지만."
"여기 있으면 전부 개죽음이오! 후퇴해서 내성에서 막든, 다른 병력이랑 합류하든 해야 되오!"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데일의 의견이 옳다는 걸 알았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데일은 마지막 마력을 전부 쥐어 짜내, 성문 앞으로 새벽 안개를 전개했다.
이 안개가 퍼져 있는 한 적군도 선뜻 들어오지 못할 터.
그 틈을 이용해 아군은 일사불란하게 후퇴했다.
'마력이 동이 나버렸군.'
고질적인 문제인 마력 부족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깝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마력을 아낌없이 썼기에 병사들을 살릴 수 있었다.
함께 달리던 지휘관 중 하나가 물었다.
"저희는 일단 내성으로 갔다가, 다시 재정비할 생각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나는."
후우우우우!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르구르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거리는 멀다.
하지만 그 거대한 4겹의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히 들렸다.
아르구르는 여전히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이리스 성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가 잡아 놓은 먹이를 가지고 장난치듯.
놈은 한결같이 여유로운 태도였다.
데일은 악마의 표정을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저 부리에 서린 게 비웃음이란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
오히려 저런 식으로 여유를 부리니 더 열이 받는다.
"나는 우선 군단장이 있는 곳으로 가겠소."
"아. 알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무사하십쇼 경! 저희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살아서 보길 바라겠소."
그렇게 말한 데일은 등을 돌려 멋들어지게 사라지려 했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지휘관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길을 모르겠소."
"예?"
"군단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다고."
* * *
혼란은 전방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의 성벽에 당도한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성벽도 연이은 마법과 투석 세례에는 견뎌낼 수 없었다.
한 곳 두 곳 무너지기 시작하고.
더 많은 적군이 짓쳐들어온다.
이제 아군의 우위는 없다.
동등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
병사들은 악마를 따르는 괴물들과 맞서야 했고, 때로는 옛 동료들과도 칼을 맞댔다.
그렇게 상황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던 그때.
데일은 어느 한 병사의 길 안내를 받아 가까스로 군단장 베른바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단장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적어도 자기 피는 아닌 것 같았다.
양손에 도끼를 쥔 베른바르트가 데일을 반갑게 맞았다.
"오! 데일 경! 무슨 일인가!"
"남쪽 성문이 뚫리고, 반란군이 온다는 얘기를 하려 했는데... 이미 늦은 것 같소."
베른바르트가 사납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손자놈이 기어코 내 목을 따러 왔군 그래. 정말이지. 드디어 나도 눈을 감은 날이 온 모양이야. 그래도 전장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으니, 전사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그렇지 않냐 얘들아!"
"예 그렇습니다!"
"군단장님과 끝까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병사들의 호응에 껄껄 웃은 군단장이 말했다.
"뭐. 그냥 죽어줄 수는 없지. 자! 일단 내성으로 퇴각하자!"
"예!"
격렬히 항전하던 병사들은 내성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내성은 바깥의 성벽보다 더 두껍고 높다. 분명 더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군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을 먼저 보내고, 데일과 베른바르트는 가장 후미에서 따라갔다.
성에는 이미 적군들이 들이찼다.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차 하면 사각에서 악마의 하수인이나 추종자들이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으랏차!"
베른바르트가 도끼를 내리찍어 단박에 괴수 하나를 두 동강 냈다.
병사들이 환호하며 외쳤다.
"군단장님도 어서 오십시오!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까불지 마! 이 자리는 너희 같은 놈팽이들한테 양보 못 해!"
병사들은 머뭇거리다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베른바르트는 옆에 있던 데일에게도 말했다.
"자네도 어서 가게."
데일도 빠르게 움직이려다 돌연. 걸음을 우뚝 멈췄다.
"...."
"왜 그러나?"
데일은 베른바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에 칭칭 감은 붕대. 단단한 근육. 피가 새빨갛게 묻은 도끼.
어느 것 하나 용맹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언제까지라도 군단을 지켜낼 노장.
전선의 수호자.
하지만 왜일까.
데일은 이 군단장에게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혹시. 죽고 싶은 것이오?"
"...뭐?"
"목숨에 미련이 없는 것 같아서."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전사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걸 수 있야 하지 않나."
촤악!
데일은 다가오던 하수인을 하나 벤 뒤 다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한가하게 대화나 할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묻고 싶었던 게 있소. 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어서 말이오."
"뭔데 그렇게 말하나. 물어보게."
"4군단의 탈영병들이 카엘름 성 근처를 약탈하던 일이 있었소. 놀랍게도 백인대 전체가 탈영했었지."
예전. 데일이 상단을 호위할 때, 자기를 탈영병이라 주장하는 4군단 소속 백인대와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들은 악마와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
'백인대 전체가 탈영하다니. 그냥 우연은 아니야.'
데일은 당연히 윗선의 지시를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베른바르트를 어느 정도 의심하기도 했고. 하지만 며칠간 대화를 하며 느낀 거지만, 베른바르트는 그런 짓을 벌일만한 자가 아니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백인대가 탈영한 일이 있었지. 보고는 들었네."
"군단장이 그런 일을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소. 아마 손자가 일을 꾸몄겠지?"
"나는."
"몰랐단 얘기는 하지 마시오. 군단장은 그렇게 무능한 사람이 아니오. 그렇게 눈치가 없었다면 진즉에 4군단은 무너져 내렸겠지. 아마... 손자가 반란을 꾸미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니오?"
베른바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그 눈에 강한 적의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 자네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날카롭다는 애기는 못 들었는데."
"인정하는 것이오?"
"뭐. 여기까지 와서 부인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지. 맞네. 알면서 방조했네."
"왜 그런 것이오."
베른바르트는 도끼를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나?"
"의미?"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네. 제국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고, 내 병사들을 지키는 걸 긍지이자 내 삶의 의미로 생각해왔지."
베른바르트는 다시 고개를 내려 데일과 눈을 마주쳤다.
"내 비록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이 노력이 언젠가 보답받을 거라 생각했네. 설령 내가 죽더라도. 내 손자가. 손자가 이루지 못하면 손자의 손자가 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을 거라 생각했네. 그걸 위해서라면 이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바쳐도 상관없었어."
"...."
"하지만 아니었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야. 황제는 평화를 바라지 않아."
처음으로 기회가 보였던 때가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기회를. 하지만 그 기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다름 아닌 평생을 믿고 충성했던 황제에게!
"그 기분을 아나? 내 모든 인생이. 이곳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내 전우와 병사들. 그리고 아들. 내 가족 같은 놈들의 죽음이 사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으면 편했을 거야. 내 전우들처럼."
데일이 물었다.
"직접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그러셨소."
"하하하! 생각했었지! 내 손자놈도 연거푸 권해왔고!"
"그럼."
"어찌 그러겠나. 내가. 나마저 부정해버리면, 내가 살아온 의미는. 내 전우들의 목숨값은 정말로 무가치한 게 되어버리지 않나. 의미 없다고 해도, 이 4군단을 내 손으로 무너트릴 수는 없네."
군단장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호탕한 군단장은 그곳에 없었다.
긴 시간을 4군단을 수호해 온 살아있는 전설도 없다.
늙고 병들고 지친 베른바르트만이 이곳에 있을 뿐이다.
"손자를 놔둔 건... 그 녀석만큼은 나처럼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았다네. 그래서 놈이 반란을 준비할 때, 뒤에서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했지."
"그러니까. 군단이 무너지지 않길 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무너지길 바란다는 거요?"
"하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복잡하지 않나? 어째 나이만 먹을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는군. 진즉 죽었어야 하는데."
군단장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적이다.
데일은 그런 군단장을 내려다보다, 그를 직접 일으켜주었다.
"일어나시오."
"그래. 갈 때 가더라도 끝까지 싸우다 죽어야지."
"아니. 군단장은 오늘 죽지 않을 것이오. 병사들이 군단장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죽지 않을 거라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의 삶은 헛되지 않았소. 이 전쟁은 반드시 끝날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오."
"뭐?"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한 발언에 군단장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살면서 감히 자기가 전쟁을 끝내겠노라고. 이리도 당당히 말한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표정 변화도 없고, 목소리의 높낮이도 적은 이 흑기사가 말하니 허세 부리는 걸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말. 진심인가?"
"그렇소."
"하지만 대체 어떻게?"
"글쎄. 악마를 다 죽이면 되지 않겠소? 그러려면 우선."
데일은 하늘을 가리켰다.
거대한 몸집의 악마가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쪽을 비웃듯이.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던 참이다.
데일은 선언했다.
"저놈부터 떨어트리겠소."
아르구르
* * *
데일은 기사단장을 찾았다.
기사단장은 여전히 휘하 기사단과 함께 성벽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아르구르가 다가올 때를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단신으로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기사단장 혼자뿐이니까.
기사단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아르구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휘하 기사들이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단장.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다른 병력들은 이미 성벽에서 물러나, 내성으로 갔습니다. 저희도 가야 합니다."
"쯧. 이대로 물러나야만 하나."
그때. 기사단장을 찾은 데일이 성벽을 올랐다.
기사단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자네 왔나?"
"후퇴할 생각이오?"
"그래야지. 준비한 게 수포로 돌아가서 아쉽지만, 어쩔 수 있나?"
그간. 아군은 아르구르를 상대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그 준비를 하는 데에 데일이 지닌 지식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우선 아르구르를 떨어트리는 것부터 시작이야.'
강력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지 않다면, 붕붕 날아다니는 저 악마를 쓰러트릴 수 없다.
하여. 우선 지상으로 떨어트리는 게 아르구르를 상대하는 핵심이다.
그에 대비해 아군은 성벽 곳곳에 특수 제작한 발리스타를 설치했다.
발리스타에 장전된 대형 화살에는 밧줄을 연결해, 일단 아르구르를 꿰뚫으면 줄을 잡아당겨 땅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구르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다가오지 않고, 그저 성 주위를 빙빙 돌 뿐이었다.
이쪽의 생각 같은 건 뻔하다는 듯이.
"내성에는 발리스타가 몇 대 없는 걸로 기억하오. 지금 있는 마법사들만으로는 저 아르구르를 떨어트릴 수 없고. 만약 이쪽에서 저놈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저 악마 놈도 적극적으로 싸울 것이오. 놈은 교활하니까."
내성으로 후퇴하면 잠깐이나마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간 벌기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기사단장도 끝까지 이곳 성벽에서 버티려 했던 거고.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일단 놈을 떨어트려야겠소."
"하지만 어떻게? 이 거리에서 발리스타는 닿지 않네. 닿아도 저 단단한 피부를 못 뚫을 것이고."
"흠."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발리스타는 안 되고. 비행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전부 황궁에 있고.'
그러다 데일의 눈에 뜨인 게 있다. 성벽에 파고든 바위.
미처 부수지 못한 투석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아군도 투석기가 있소?"
"그야 있네만. 혹시 투석기로 아르구르를 맞출 생각이라면 포기하게. 숙련된 병사라도 날아다니는 걸 맞추려면 운이 필요하다네."
"괜찮소. 일단 투석기로 안내해주시오. 투석기를 사용할 줄 아는 병사도."
잠자코 있던 기사단장의 제자가 벌컥 화를 냈다.
"이 건방진 놈! 제대로 설명해라!"
"그만. 일단 따라보자꾸나."
"스승님!"
"달리 뾰족한 수도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제자와 기사들은 영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기사단장만큼은 데일에게 신뢰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의 말마따나 다른 뾰족한 수도 없기도 했고.
이대로 후퇴하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해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기사단은 투석기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멀쩡한 투석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디선가 숙련병도 구해온 기사단장이 물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나? 투석할 바위라도 구해오면 되나?"
데일은 대답 대신, 투석기 위에 올라탔다.
무릎을 쭈그려 앉고, 팔로 무릎을 둘러 몸을 둥글게 말았다.
사람들은 순간 말을 잃었다.
"뭐 하나 자네?"
"보면 모르시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제발 아니라고 해주게."
"아마 맞을 거요."
데일의 의도가 명확해지자 사람들이 극렬하게 반응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네!"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 아닌가. 안 죽나?"
왠지 이 흑기사는 저 멀리 날아올랐다가 떨어져도 살아남을지도... 하지만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데일이 물었다.
"그러면. 이대로 성에 틀어박혀서 패배를 기다릴 생각이오?"
"...."
"나는 그런 거 싫소. 할 수 있는 건 다 할 생각이오."
데일은 투석기를 다룰 병사를 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궤도상 조만간 아르구르가 이 근처를 지날 거다. 그때가 기회야."
"하, 하지만 저는 사람을 쏘아보낸 적이 없는걸요."
"사람이 아니라 쇳덩어리라 생각해라.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러다 실패하면요? 어, 어떻게 되는 거죠?"
데일은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그럼 다 죽는 거지.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니 더 긴장되는데요."
"자. 이제 온다. 준비해."
데일은 자세를 잡았다.
병사는 아찔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래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기사님들. 도와주십시오."
커다란 투석기다.
데일이 올라가 있는 지레를 내리려면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주저하던 기사들은 이내 하나둘 힘을 보탰다. 줄을 잡아당겨, 데일이 타고 있는 지레를 아래로 내렸다.
반대편에 있는 무게추가 붕 떠올랐다.
이로써 준비는 끝.
이제 정확한 타이밍에 던지는 일만이 남았다.
"...."
침묵.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검을 쥐고 숱한 전장을 헤쳐온 기사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기묘한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녀석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
하지만 악마는 결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법이 없다.
아르구르는 얄미울 만치 여유를 부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밤하늘에 뜬 달만을 쳐다볼 때.
후웅!
거대한 날개가 공기를 밀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온다.'
아르구르가 다가오고 있다.
모두 준비했다. 이윽고 달이 가려지고, 거대한 악마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병사를 쳐다봤다.
병사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르구르와의 그 거리와 녀석의 궤적을 읽어냈다.
기사 하나가 조급하게 물었다.
"언제쯤 쏘아보낼 생각이냐."
"아직입니다."
"지금 쏘아야 하지 않나?"
"아직입니다!"
"이러다가 놈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다!"
하지만 병사는 고집스럽게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아르구르의 그림자가 성벽을 훑고, 녀석의 거체가 달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순간.
병사가 외쳤다.
"지금입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손을 놓았다.
팅!
올라가 있던 무게추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데일이 올라타 있던 지레는 반대로 힘껏 솟아올랐다.
데일의 몸이 마치 포탄처럼 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지구를 벗어나는 우주 비행사가 이런 기분일까.
엄청난 가속에 데일조차도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데일은 그저 몸을 웅크려 원형을 유지했다.
혹시라도 궤적이 틀어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릴까.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조마조마하게 그 광경을 쳐다봤다.
빠르게 날아간 데일이 점점 아르구르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그 궤적을 읽어낸 기사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대로라면!"
"성공했어! 정말로 성공했다고!"
설마 진짜 될 줄이야!
기사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으니, 아르구르가 육체파의 악마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아르구르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날개를 펄럭여 급하게 선회했다.
회피기동.
데일과 아르구르의 사이가 다시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이런!"
기사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눈을 질끈 감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로 떠오른 데일은 여전히 침착했다.
몸을 밀어주던 추진력을 잃고, 다시금 낙하하기 직전의 그 정지 순간.
데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이도 올라왔군.'
어찌나 높이 올랐는지, 세상 모든 게 너무나 작게 보였다.
성벽도. 병영도. 개미떼처럼 조그맣게 돌아다니는 아군과 적들도.
저 한복판에 있었을 때는 그리도 치열했건만.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너무나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여. 어딘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데일은 고개를 돌려 아르구르를 보았다.
인류의 비극이 가까이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던 아르구르도 이쪽을 보았다.
녀석은 이쪽을 알아보았다.
"아! 그 영혼의 형태는... 그래! 너구나! 근데... 이런 식으로 맞닥뜨릴 줄은 몰랐는데."
데일의 몸이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악마조차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어떻게 해야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그때. 데일이 벼락처럼 갈고리를 던졌다.
휘이익!
로프가 풀려나며 빠르게 날아간 갈고리가 아르구르의 다리를 칭칭 감은 뒤, 고정되었다.
"...!"
경악하는 아르구르. 데일과 악마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데일은 밧줄을 힘껏 잡아당겨 아르구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르구르는 날개를 펄럭여,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비행을 시작했다.
덩달아 밧줄을 붙잡은 데일도 그 움직임에 딸라나갔다.
아르구르가 공중에서 연거푸 급선회하고, 두어 번 몸을 빙글 뒤집었다.
살벌한 곡예비행.
그 움직임에 맞춰 데일도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하지만 데일은 끝끝내 밧줄을 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밧줄을 잡아끌어 거리를 좁혀갔다.
'밧줄이 안 끊어지는 게 다행이군. 발튼이 잘해주었어.'
그리고 멀미를 하지 않는 지금의 몸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데일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착실히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구르의 다리를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노옴! 감히!"
아르구르는 전략을 바꿨다.
위태로운 곡예 비행을 멈추고. 네 겹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개가 푸르스름한 빛에 둘러싸이고.
다음 순간. 수천의 깃털이 뽑혀나와 데일을 향해 집중되었다.
콰득! 콰드득!
깃털이 직격할 때마다 무시할 수 없는 충격이 전해졌다. 갑옷에 크고 작은 흠집이 생긴다.
날카로우면서도 강력한 일격.
하지만 이 정도쯤은 버텨낸다.
아르구르의 다리를 꽉 붙잡은 채, 마검을 아르구르의 몸통으로 찔렀다. 워낙 피부가 질긴데다가 매달린 터라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여러 번 찔러야 겨우 상처가 났다.
후두둑.
피가 투구 위로 흘러내렸다. 데일이 곧바로 피를 흡수했다.
갑옷의 흠집이 곧바로 회복되었다.
"이 벌레 같은 놈! 당장 떨어져라!"
도저히 데일이 떨어져 나가질 않자, 아르구르의 발광이 더 심해진다.
그러는 사이에 데일은 놈의 다리를 기어올라, 기어의 몸통에까지 올라서는 데에 성공했다.
단단한 피부위로 데일이 마검을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찍었다.
'피부가 단단하다고? 그러면.'
같은 지점을 계속 찌르면 될 뿐!
마검이 절묘하게 같은 지점을 찌를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튀었다.
아무리 질긴 피부라도 같은 곳을 계속 타격하면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르구르가 분노했다.
"제법 먹음직한 영혼이라고 좋게 봐주었더니...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보자!"
이미 아까 보이던 비웃는 듯한 태도와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열이 오른 아르구르는 바닥을 향해 머리를 내렸다.
몸을 수직으로 세웠고. 이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아르구르를 일단 바닥으로 떨어트린다는 당초의 목적은 성공이라 볼 수 있지만....
데일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져오는 지상을 보며 생각했다.
'나부터 죽겠는데?'
* * *
지상에서는 공중에서의 사투를 보고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내 살면서 이런 싸움은 처음 봐."
"대체 저기서 안 떨어지고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는 거야."
"허...."
기사단장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놈이로세. 아일라. 너도 좀 보고 배워라. 나보다 강한 놈을 상대로 이기려면, 저런 지독함이 필요한 법이다."
"...."
제자인 아일라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공중에서 홀로 악마와 사투를 벌이는 데일의 모습은 기사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멋있다.'
같은 전사로서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아르구르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낙하 위치는 성 밖의 평원.
기사단장이 외쳤다.
"자! 저 녀석이 목숨을 걸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황실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
기사단장과 황실 기사단원들이 앞다투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공중에서 펼쳐지고 있던 사투를 보던 베른바르트도 크게 외쳤다.
"아군이 저리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데 겁쟁이처럼 숨어 있을 수는 없지! 우리도 악마를 죽이는 데에 동참한다! 어차피 못 죽이면 우리는 다 죽어!"
"4군단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와아아!"
내성의 문이 열리며 잔존 병력이 쏟아져나왔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매서운 돌진에 적군은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우수수 스러졌다.
모든 병력이 평원으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적군과 아군. 병사와 하수인. 마법사와 기사를 가리지 않고 한곳으로 모여든다.
바야흐로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을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르구르
* * *
이렇게 빠른 속도로 떨어져 본 건 처음이다.
어마어마한 가속에 머리가 붕 뜨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너무 빠르게 떨어진다. 나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녀석도 타격이 있을 것 같은데.'
아르구르가 자기가 입을 피해를 무릅쓰고, 데일을 떼어내려하는 걸까?
'아냐.'
이 영악한 악마가 그렇게 대책 없이 굴 것 같지는 않다.
데일의 머릿속에, 아르구르가 펼쳤던 위태로운 곡예 비행을 떠올렸다.
거체에는 어울리지 않던 뛰어난 움직임.
'떨어지기 직전에 몸을 돌려, 그 회전력으로 나만 떨어트릴 생각이다.'
놈의 노림수를 읽었으니 데일이 할 건 하나다.
데일은 낙하하는 와중에도, 아르구르의 몸통을 천천히 기어올라, 기어이 그 날갯죽지까지 당도하는 데에 성공했다.
더 빠른 추락을 위해 네 겹의 날개는 다소곳이 모여있었다.
데일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기회를 엿보았다.
필요한 건 침착함과 정확함.
실수하면 데일은 지상에 부딪혀 그대로 뭉개질 터이고. 아르구르는 다시 유유히 하늘로 비행해 아군을 유린할 것이다.
데일은 지극히 차가운 마음으로 타이밍을 가늠했다.
지상과의 거리를 보지 않았다.
데일이 본 건 아르구르의 몸통이다. 그 근육의 움직임.
악마도 결국은 감정이 있는 존재다. 일을 벌이기 전에 반드시 티가 날 것이다.
그렇게 지상과의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진 그때.
아르구르의 근육이 꿈틀였다.
'지금이다!'
데일은 곧바로 날갯죽지로 다가가, 날개 하나를 부여잡았다. 온 힘을 다 쏟아 굳게 쥐었다.
펄럭!
아르구르의 몸통이 회전하는 동시에 거대한 날개가 활짝 펴졌다.
하지만 본디 4겹이 펼쳐졌을 날개는, 3겹만이 완전히 펼쳐지고. 하나는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다.
데일이 괴력을 이용해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
당황하는 아르구르.
차라리 네 겹의 날개가 다 펼쳐지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겹만 펼쳐지지 않은 건 치명적이다.
불균형.
위태롭게 곡예를 부리던 아르구르는 순간 자신의 움직임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평소였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균형이야 다시 다잡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이곳은 지상 바로 근처다. 그리고 아르구르는 데일을 떨어트리기 위해 무리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그 몇 가지 불운이 겹쳐... 아르구르가 성대히 땅과 부딪혔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면이 진동했다.
아르구르는 바닥을 연거푸 굴렀다. 데일도 굴렀다.
진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 하찮은... 벌레 놈이."
아르구르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시할 수 없는 충격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장 큰 손해는 바닥을 구를 동안 날개 하나가 완전히 꺾어버렸다는 것.
이제 더는 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손해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데일이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내 직접 네 영혼을 삼켜서, 영원히 고통받도록 할 테니!"
만신창이가 된 데일은 그런 아르구르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아르구르와 바닥을 뒹굴면서 그 거체에 너무 많이 깔렸다.
갑옷은 성한 곳보다 찌그러진 곳이 더 많고, 온몸의 뼈는 조각나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일 때가 없었다.
고개를 든 아르구르는 데일을 집어삼키기 위해 데일에게 쿵쿵 기어서 다가왔다.
그 얼굴에 비웃는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하하! 어떠냐? 팔다리가 뭉개져서 버러지처럼 버둥거리는 기분이? 이제 이해가 좀 돼나? 아무리 너희 버러지들이 발버둥 쳐봤자, 결국에는 전부 다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아르구르가 발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인정하마. 제법 귀찮았어. 특별히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마."
아르구르치고는 참으로 자비로운 처사였다. 데일은 그런 아르구르를 올려다보며 툭 던졌다.
"뒤."
아르구르가 물었다.
"뭐?"
"뒤 보라고 멍청아."
써억!
돌연. 아르구르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실선은 붉은빛을 띄더니, 이윽고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아르구르의 목이 뚝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무슨!"
잘린 목이 그리 외쳤다.
어느새 아르구르의 위에 발을 올린 기사단장이 외쳤다.
"하하! 데일 경! 살아있나?"
"살아있소."
"정말이지. 잘 해주었어! 이 악마를 홀로 떨어트릴 줄이야! 그나저나 몸꼴이 영 아니군. 이거 받게! 이럴 줄 알고 미리 챙겨왔네!"
기사단장은 죽은 하수인들의 시체 3구를 던져주었다.
데일에게는 참으로 기꺼운 배려였다.
데일은 시체를 받아 곧장 생기를 흡수했다.
'부족해.'
워낙 피해가 크다. 이 정도로는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
하지만 혼자서 움직일 정도로는 호전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전장.
흡수할 시체는 넘쳐났다.
데일은 다시 일어나 주위 시체를 흡수하며 몸을 회복했다.
하지만 회복력이 좋은 건 데일만이 아니다.
아르구르 역시 잘린 목이 금방 붙어버렸다.
"이런. 목을 베어도 이렇게 단시간에 회복하나?"
"네 이놈!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하하하! 악마가 할 소린가 그게!"
이윽고 아르구르와 기사단장이 서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격전이었다.
기사단장이 한번 검을 그을 때마다 아르구르의 피부에 깊은 상처가 연거푸 생겨났다.
아무리 단단한 피부라도 저 괴물 같은 검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르구르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강한 육체와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은 아르구르의 강력한 두 무기다.
'회복을 더디게 하려면, 불로 지지거나 냉기로 얼리거나. 이 마검으로 쑤시거나. 아니면....'
그때.
데일의 허리춤에 무언가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시체를 흡수하다 묻은 피인가?
'아니. 피가 아니야.'
짙푸른 색깔의 끈적한 액체.
이건 피 같은 게 아니다. 데일은 주머니를 뒤졌고, 유리병 하나가 산산이 조각났음을 깨달았다.
'쯧 깨져버리다니.'
아니. 그 난리통에 형체라도 유지한 게 대단한 것일까?
어쨌건 이 유리병이 담고 있던 건 꽤나 지독한 물질이었다.
'가니아고스의 맹독.'
중독된 이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주는 맹독.
딱히 쓸 일이 없어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거다.'
무려 악마의 피다. 같은 악마를 상대로도 분명 효과를 보일 터.
데일은 곧장 마검을 몸으로 당겨, 갑옷을 타고 흐르는 맹독을 긁어냈다.
안 그래도 불길한 마검은 악마의 맹독까지 머금어, 한층 더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데일은 이 살벌한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때쯤.
적군 역시 주인의 위기를 깨닫고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캬아악!"
"주인님을 지켜라!"
악마의 하수인들이 몸을 던져서라도 기사단장을 제지하려 했다.
사자처럼 생긴 하수인이 아가리를 벌리며 뛰어들었다. 하지만 하수인은 갑자기 난입한 다른 이에 의해 튕겨나갔다.
"그렇게는 못 두지!"
베른바르트가 양손의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외쳤다.
"모두! 기사단이 악마를 상대할 시간을 벌어라!"
"예!"
그 뒤에 있던 병사들도 앞으로 달려나와 하수인들과 맞붙었다.
서로가 목숨을 내던지듯. 격렬하게 싸웠다.
모두가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이번 전투를 판가름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죽거나 죽이거나.
데일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마검을 쥐고 땅을 힘껏 박찼다.
아르구르와 기사단장은 마치 신화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향해 모든 기량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신화에 데일이 끼어들 시간이다.
데일은 아르구르가 기사단장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틈을 타, 뒤로 접근했다.
그리고 놈의 몸을 힘껏 찔렀다.
따끔한 감각에 아르구르가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회복한 데일이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심지어 몰래 다가와 자기를 찌르다니.
분노가 눈동자에 불타올랐다.
"오냐! 그렇게 죽고 싶다면 너부터... 컥."
아르구르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악마는 곧장 자기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깨달았다.
"이건 설마?"
"네 동료의 독이다. 해독제도 없는 고약한 놈이지."
"노오옴!"
분노한 아르구르가 데일에게 날개를 휘드르려 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의 검격에 움직임을 급히 멈추었다.
"나를 잊으면 좀 섭섭허이."
"버러지들이!"
"기사단! 모두 이 괴물을 토막내라!"
"예!"
기사단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륙 최강의 기사들이자, 집단 전투의 달인들이다.
아르구르는 거대한 몸으로 미친 뜻이 날뛰었다. 날개로 타격하고. 온 몸으로 짓뭉개며, 꼬리로 후려쳤다.
운 없는 기사들은 일격에 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에도 기사단은 용맹히 돌격했다. 멈춰서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게 동료의 희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아르구르는 수세에 몰렸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검격이 날아들었다. 피부가 순식간에 베이고, 난도질당했다.
아니. 사실 아르구르에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의 회복력은 악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이따위 상처 따위. 그저 따끔할 뿐이다.
문제는 독이다.
'가니아고스! 이 지독한 놈!'
가니아고스의 맹독에는 딱히 신체에 해를 끼치거나, 신경을 교란하거나 하는 효과는 없었다.
그저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뿐!
상대를 되도록 오래 살려두어 고통을 가하려는 가니아고스의 고약한 심성이 그대로 담긴 맹독이, 이제는 아르구르를 괴롭게 했다.
아무리 몸을 회복해봤자 소용이 없다.
독은 여전히 몸속에 맴돌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독기를 내보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특히 저 기사단장이라는 자는 아르구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집요하리만치 날개만 베어댔다.
결국. 아르구르는 숨겨왔던 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상처 입은 날개를 펄럭여 낮게 날아오른 아르구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안 그래도 거대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데일은 놈이 뭘 하려는지 알았다.
"모두 물러나시오!"
아르구르가 이윽고 참았던 숨을 거세게 내뱉었다.
화아아악!
악마의 숨결은 보라색 불길이 되어 온 천지를 뒤덮었다.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그대로 집어삼키는 사악한 불꽃.
너무나 뜨거워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황실 기사단원들조차 뒤로 물러날 정도.
'뒤로 물린 다음, 날개를 회복해 다시 날아오를 생각이다!'
날아오른 놈은 도망칠 거다. 도망쳐서 여력을 회복한 뒤, 다시 복수를 준비할 터.
도망치게 둬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놓치지 않는다.'
데일은 내뿜어져 오는 불꽃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불이 갑옷을 핥으며 그대로 녹여버렸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더는 못 버티겠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망토를 활짝 펼쳤다.
데일은 망토에 담긴 힘을 끌어냈다.
'마법 반사.'
그러자 망토에 새겨져 있던 푸른 사자 문양에서 빛이 피어올랐다.
사자 한 마리가 망토를 뚫고 나와 지상에 단단히 섰다.
빛으로 이루어진 사자는 우렁찬 포효를 내뿜었다.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망토에 닿은 불꽃이 그대로 아르구르에게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아르구르는 경악했다. 불꽃이 되돌아오다니?
데일은 살아있는 방패가 되어 불꽃을 뚫고 아르구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돌연. 데일이 망토를 아르구르를 향해 집어 던졌다.
힘껏 펼쳐진 망토가 아르구르의 시야를 가렸다. 아르구르는 숨결을 더 세게 내뱉어 망토를 치워버리려 했다.
아르구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망토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망토가 가리고 있던 그 뒤편에서... 기사단장이 튀어 올랐다.
'뭣이!'
데일의 망토 뒤에 숨어서 몰래 접근하고 있었던 건가? 저 긍지 높은 기사가 마치 쥐새끼처럼 행동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한 수.
방심을 파고드는 한 자루의 검.
기사단장은 언제나 그렇듯. 너무나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아르구르의 머리가 썩둑 잘려나가며,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 회전하는 방향에 맞춰 불꽃 역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이 잘리고, 온몸은 만신창이에 맹독이 극심한 고통을 선사하지만, 회복하면 될 뿐이다.
지금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다. 넘겨서. 다시 힘을 되찾아, 복수하면 된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쳐죽이고, 그 가족들을 산채로 씹어먹고, 이웃들을 뼛조각 하나 안 남게 불태워 버리리라!
이 위기만 넘긴다면...!
"데일!"
기사단장이 외쳤다.
데일은 땅을 박차고 힘껏 뛰어올랐다.
마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어디서 어떻게 베어야 할까.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위에서. 아래로.'
다른 특별한 기교는 필요 없다.
검을 들었다가, 내리친다.
숱하게 연습해온 그 동작을 그저 되풀이할 뿐이다.
후욱!
마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아르구르의 경악한 얼굴 정 가운데에 실선이 생겨났다. 이윽고 머리는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잘린 머리에 마검을 박아 넣었다.
아르구르는 더는 회복하지 못했다.
봄이 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