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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나는 잿더미가 흩뿌리듯 땅으로 떨어지는 벌레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됐다.'

즉살은 어떻게든 상대에게 닿기만 하면 발동 조건이 충족하는 능력.

즉, 피 한 방울이든, 한 방울의 1000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양이든 어떻게든 닿기만 하면 되는 것.

그렇기에 이런 것도 가능하다.

별 경계도 없이 벌레들을 피안개 속으로 들인 순간, 내 승리는 확정된 것이었다.

"내려가자, 띠용아."

나는 요새의 상황을 확인하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공격은 막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흑해 여제는 선을 넘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제대로 치루게 해줘야지.

"론 님."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아셸이 내 몸을 빠르게 훑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눈에는 벌레 군단과 완전히 정면에서 충돌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난 괜찮다."

피를 좀 과하게 많이 쓰긴 했지만 초재생 덕분에 괜찮았다. 아직 여력도 남아있었다.

나는 요새를 돌아보며 아셸에게 명령했다.

"너는 계속 요새를 지키고 있어라."

"예? 그럼 론 님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아셸과 띠용이를 남겨두고, 지평선 너머에 보이는 흑해 여제의 군세를 향해 다가갔다.

공간 도약을 연속해서 쓰며 다가가자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흑해 여제는 어디에 있을까. 뭐, 아마 가장 큰 모탑 안에 있겠지.

초감각으로 그곳에 감각을 집중하니 거대한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녀를 상대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어느새 군세에 지척까지 다다른 나는 서서히 혈술을 활성화했다.

스으으으.

내 몸에서 다시금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피안개가 서서히 벌레들을 뒤덮었다.

사람만 한 크기의 작은 놈들도, 성채만큼 거대한 벌레들도 피에 닿자마자 픽픽 죽어서 쓰러졌다.

이것들은 목표가 아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모탑을 향해서 다가가며 계속 피안개를 흩뿌렸다. 주위의 벌레들은 접근하지도 못하고 계속 죽어나갔다.

- ······멈춰요!

다시금 흑해 여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유쾌하게만 들렸던 아까와 정반대로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흑해 여제에게 있어 여왕체는 그녀의 거대한 군세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이다.

그런데 왜 고작 수십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냐고 한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간단했다.

그만큼 여왕체를 만드는 일이 힘드니까.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는 여왕체를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쩌저적······.

모탑에 자욱히 퍼져나간 피안개가 닿자, 거대한 마력 반응이 사라지며 썩은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졌다.

하나를 처리한 나는 곧장 다음 목표를 향해서 방향을 틀었다.

주위의 벌레들이 아까보다 더 많이, 격렬하게 몰려들었다.

어떤 놈들은 멀리서 거미줄 같은 거나 마력포를 쏘아댔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가까이 온 놈들은 피안개에 죽었고, 원거리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나는 부동 장막으로 막거나 피할 공격은 공간 도약으로 피하며 계속 이동했다.

흑해 여제의 군세 한복판을 누비며 여왕체를 6개째 죽였을 때였다.

"7군주우우우우!"

저멀리 보이던 거대한 모탑에서 흑해 여제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날아들었다.

나는 부동 장막을 펼쳐 그녀의 공격을 막은 뒤, 다시 멀리로 공간도약했다.

그녀가 곧장 쫓아왔지만 나는 무시하며 계속해서 할 일을 했다.

그녀의 공격을 막고 피하며 여왕체를 하나씩 죽여나갔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따지고 보면 군주들 중 나와 가장 상성이 나쁜 건 바로 흑해 여제였다.

그녀가 자랑하는 물량 공세는 즉살에 무용지물.

그렇다고 간단한 보호막조차 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망자왕처럼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마력을 먹고 자란 벌레들은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내구성이 높겠지만, 내 즉살 능력은 닿는 것 자체를 방지하지 않는 이상 방어력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다.

또한 군세를 제외하면 흑해 여제의 개인의 능력은 군주들 중에 최하위다.

그녀가 군주인 이유는 이 거대한 벌레 군세를 한몸과 다름없이 지배하고 있기에 그런 것.

개인의 능력으로만 따지면, 그녀는 군주들 중 레벨이 가장 낮았던 폭왕보다도 육체 능력이 낮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사들처럼 전문적으로 육체를 다루는 법을 익힌 것도 아닐 터다.

지금 그녀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있음에도 나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멈춰, 7군주! 멈추라고! 멈춰!"

어느날, 그저 우연히 지성과 분에 넘치는 힘을 가지게 된 마경의 괴물.

그것이 바로 흑해 여제의 본질이다.

그녀가 자랑하는 능력들은 아무것도 내게 통하지 않는다.

흑해 여제는 악에 받쳐서 소리치며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절반에 가까운 여왕체가 죽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갑자기 방향을 바꾼 그녀가 요새가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멈추지 않으면 요새의 인간들을 학살하겠어!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렇게 나오는 건 나도 좀 곤란한데?

어쩔 수 없었기에 관심을 옮겨주려는데, 그때 요새로 달려드는 그녀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아셸.'

흑해 여제를 막아선 건 아셸이었다.

고유 특질까지 사용해서 전신을 새하얗게 물들인 그녀가 전력으로 흑해 여제와 맞섰다.

"건방진 년이, 감히!"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번의 공방이 오고간 가운데, 흑해 여제의 주먹을 검으로 막은 아셸이 튕겨나갔다.

아무리 흑해 여제의 육체 능력이 약하더라도 아직 90레벨인 아셸이 맞설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

하지만 아셸은 금방 일어서서 다시 흑해 여제의 앞을 막아섰다.

비록 상대는 안 되더라도 잠깐 시간을 끄는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나는 비웃음 섞인 투로 흑해 여제에게 말했다.

"잠시 그러고 있어라. 금방 나머지도 다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내가 그렇게 말하며 순간이동하자 흑해 여제도 다시 다급히 날 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내 나머지 여왕체들까지 전부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몰살시켰다.

"아, 아아······."

벌레들의 사체들이 수북히 쌓인 한가운데서, 흑해 여제는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절망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고작 저깟 인간들 때문에······ 네, 네가······."

"8군주."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감히 나와 맞서려고 하지 마."

"······."

"다시 한 번 이딴 짓을 벌이면 그때는 대군주고 뭐고 상관없다. 바로 폭왕의 곁으로 보내주마."

흑해 여제는 그저 몸을 한 번 움찔 떨고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그녀도 힘의 차이는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두고서 요새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론 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수고했다."

요새로 걸어가는 길에 한쪽에 몰려있는 패잔병들이 보였다. 카숄 군이었다.

일부러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길을 열었다.

그 한가운데에 카숄의 국왕이 보였다.

그의 앞에서 멈춰서자 그는 허망함과 절망이 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7군주."

나는 그를 무시하고서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카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어스힐에 결정을 맡길 생각이었다.

이윽고 요새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부서진 성문 앞에 나와서 몰려있었다.

다 죽어가는 처참한 꼴의 어스힐의 군사들. 그중에 피를 뒤집어쓰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어스힐의 국왕, 그리고 테이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고 선언했다.

"전쟁은 끝이다."

······와아아아아!

정적이 흐른 뒤, 그들에게서 찢어지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결단

나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요새 안쪽에서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부상자들을 옮기는 한편, 바깥에서는 어스힐 국왕이 군사들을 데리고 투항한 카숄 군을 제압하고 있었다.

흑해 여제는 어느새인가 돌아간 듯 보였고, 대지에는 무수한 벌레 사체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띠용이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벌레 사체들을 뒤적거렸는데, 먹을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러다가 말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된 뒤, 나는 어스힐 국왕과 성벽 위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카숄의 왕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카숄이 먼저 일으킨 전쟁이라고 한들 일국의 군주니, 신중할 만도 했다.

처형을 결정하든 포로로 잡아 카숄에게 배상을 받아내든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8군주는 두 국가의 일에 더 간섭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뜻대로 하도록."

"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군주님."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셸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 뒷정리가 끝날 때까지 너는 이곳에 남아있어라, 아셸."

"알겠습니다."

그에 어스힐 국왕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 건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왕성으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내 전사를 요새에 남겨두겠다."

요새의 전력이 처참히 깎인 마당에 상황을 파악 못 한 카숄 군이 뒤늦게 더 몰려오기라도 하면 괜한 트러블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런 경우를 염려하고는 있었는지 롱포드의 옆에 서있던 1왕자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나는 테이르와도 한 번 눈을 마주치고서, 몸을 돌렸다.

아셸이 물었다.

"지금 바로 떠나십니까?"

"그래. 산맥으로 돌아가야겠다."

나까지 정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계승자를 놔두고 급하게 온 마당이었으니까. 용사가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띠용이에 등 위에 올라타자 어스힐 국왕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7군주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군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선의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훗날 기회가 닿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테이르와 1왕자도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테이르를 불렀다.

"테이르."

"예? 예."

"그보다 내 말을 무시했구나. 분명 어려움이 닥치면 내게 도움을 구하라고 했을 텐데."

"예에? 아, 아닙니다! 그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는데,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농담으로 건넨 말에 테이르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제 계속 왕성에서 지내는 것이냐?"

"······예, 앞으로는 그럴 생각입니다."

"잘됐구나."

나는 어스힐 국왕과 1왕자를 차례로 바라보고서, 띠용이의 목을 툭 두드렸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지.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줄 테니 군주성으로 찾아와도 좋고."

녀석이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셸과 세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나는 용사와 계승자가 있는 산맥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며 생각했다.

'대군주가 어떻게 나오려나.'

하지만 그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건 명백히 흑해 여제가 먼저 내게 걸어온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저번 회담에서 분명 내 뜻이 어떤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개무시하고 어스힐을 친 거니까.

애당초 대군주도 두 국가의 전쟁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흑해 여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카숄을 지원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흑해 여제를 저지한 것도 내 자유다.

그것에 대해 대군주가 책임을 묻는다면 애초에 흑해 여제가 이번 전쟁에 개입한 것부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쪽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인 군단인 흑해 여제가 거의 모든 여왕체를 잃은 건, 칼데릭에 있어 꽤 큰 전력 손실이기도 했으니.

대군주가 과한 대응이었다고 질책하려 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비장의 카드는 있었다. 바로 용사.

이번에 카숄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용사의 부재가 컸다.

어차피 용사도 곧 공식으로 다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가 성동에 있는 동안 황실에서 벌인 짓들도 있을 테고,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을 테니.

만약 대군주가 내게 책임을 물으면 그녀를 조금 팔아먹으면 됐다.

먼저 용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흑해 여제의 미친 짓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된다.

용사가 멀쩡히 있는데 한 국가를 쓸어버렸다면 그건 칼데릭에 큰 독이 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내가 숨겨야 할 건 용사와 나의 관계지, 그녀에 대해서 말도 못 꺼낼 이유는 없었다.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다른 고민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대군주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래서 계승자는 대체 어떻게 해야 될까?

'지금쯤 용사가 설득······ 하지는 못했겠지.'

나는 가능성 적은 기대는 접었다.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진전되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카앤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였음에도 검날에 부딪힌 바위가 굉음과 함께 반쯤 쪼개졌다.

"이렇게요?"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옆쪽에 서있는 여인에게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금방 감각을 익히는구나."

용사, 에인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앤을 바라봤다.

현재 에인델은 카앤에게 자신의 마력 운용법의 근간을 조금이나마 가르치고 있었다.

방금 것은 단순한 동작일 뿐이지만 체내에서는 난해한 기운의 흐름을 동반한 일검이었다.

이미 기초가 튼튼히 잡혀있는 데다가 재능까지 뛰어난 그녀는 뭘 가르치든 금방금방 성장할 것 같았다.

성검의 계승자기에 이만큼 자질이 뛰어난 것인가, 아니면 자질이 뛰어나기에 계승자로 선택받은 것인가.

에인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디븐은 진작 떠났고, 7군주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엔록으로 돌아갔다.

현재 이곳에 있는 건 그녀와 카앤 부녀뿐이었다.

에인델은 그동안 설득을 위해서 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딸아이가 정말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나는 간섭할 생각이 없소. 녀석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오.'

분명히 갈등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 쪽의 문제가 해결됐어도 여전히 카앤 본인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해서 은근히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카앤은 애매모호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애당초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닌 에인델이었기에 이런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원마들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후우."

한창 검을 반복해서 휘두르던 카앤이 지쳤는지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재밌는 건가 싶어 에인델이 물었다.

"왜 그러니?"

"아뇨, 그냥. 바깥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러는 게 즐거워서요."

"······."

"슬슬 점심 때인데 또 같이 사냥하러 가요, 델.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분홍색 토끼가 나오거든요? 찾기 좀 힘들긴 한데 그 녀석이 맛 하나는 기가 막혀서······."

에인델은 말이 나온 김에 다시 산맥 바깥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다가, 관두었다.

카앤은 순수한 소녀였다.

처음 만난 낯선 이들에게 경계 대신 호의와 호기심을 품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에인델이 카앤을 산맥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이유는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더라도 결국 핑계에 불과한 이유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대신해 마족을 막아낼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평생을 산속에서 산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기 위해서다.

문득 에인델은 회의감을 느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성검의 계승,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뜻은 아니었다.

성검에게 초월적인 힘을 받았지만 그녀는 항상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했다.

애초에 성검은 힘만 주었을 뿐, 방향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마족들과 싸운 것도, 마왕을 봉인시킨 것도 전부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확실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시킨 적이 없던 성검이 처음으로 내비춘 뜻이었으니까. 계승자를 찾아라.

물론 에인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대로 자신이 죽고, 성검의 힘이 세상에서 사라진 채 마왕이 부활하면 미래는 암담했다.

그녀는 마왕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성검의 신력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도 그 악의 화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요?"

우두커니 서있는 에인델을 카앤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에인델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7군주가 돌아오기 전까지 카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

요즘 카앤은 하루하루가 꽤나 즐거웠다.

반복되기만 하던 일상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들은 그녀에게 활기를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떠났고 지금은 한 사람만 남았지만, 카앤은 그녀와 어울리는 게 제법 즐거웠다. 바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검술을 배우거나, 아니면 같이 사냥을 나가거나 하며.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벤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코를 킁킁대더니 물었다.

"바깥에서 고기를 구웠냐?"

"어. 델하고 같이 먹었어."

"그런데 아비한테는 한 점 가져오지도 않고, 쯧쯔."

"먹고 싶으면 아버지가 나왔으면 되잖아? 셋이 먹기에는 좀 부족하긴 했지만."

벤의 반대편에 털썩 앉은 카앤이 컵에 차를 따라서 마셨다.

잠시 말없이 차만 마시는데, 벤이 그런 그녀에게 일상적인 투로 물었다.

"딸아, 산맥 밖으로 나가고 싶냐?"

"······?"

뜬금없는 물음에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까지 또 뭔 소리야?"

"그 델이라는 여인이 내게 묻더구나. 네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음······ 그래서 뭐라 했는데?"

"나야 아무렴 상관없지. 중요한 건 네 의지 아니겠느냐."

카앤이 그를 게슴츠레 보다가 물었다.

"진짜 상관없는 거 맞아?"

"그래. 그럼 넌 언제까지고 산맥에서만 박혀 살 생각이었느냐? 나갈 때가 되면 나가야지."

카앤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바깥세상에 대한 걸 물을 때마다 이야기를 은근히 피했던 게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언제까지 산맥에서 살 생각이었냐 말하고 있으니.

"뭐, 어쨌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아카데미에 가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도 좋고, 아니면 세상을 떠돌며 모험을 해도 좋고. 너한테 가르친 것들이 있으니 어디든 가서 재주가 부족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무모하게 행동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

카앤은 컵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물었다.

"있잖아, 아버지."

"왜."

"평소에는 깊게 생각 안 했는데, 바깥에 대해 말하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어."

"뭐냐?"

"난 왜 어릴 적의 기억이 없지? 나랑 아버지는 어쩌다 여기서 살게 된 거야?"

그에 벤은 잠시 침묵하다가, 먼산을 바라보며 짧게 대꾸했다.

"원래 사람은 다 어릴 때 기억이 없다."

"뭔 아기 때를 묻는 게 아니잖아. 한 대여섯 살쯤 기억도 완전히 없다고."

"글쎄다. 그럼 언제 한 번 머리를 크게 다쳤나."

"말이 돼? 그런 식으로 말 돌리지 말고."

"딸아, 쓸데없는 걸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거라. 네 어릴 때야 별 거 없었다고 말했었잖냐? 네 어미가 살아있을 때는 평범하게 도시에서 지냈었고, 그러다 이 산맥으로 이사를 온 거라고."

"사람 하나 없고 몬스터들만 득실거리는 이 산에?"

"······공기는 맑고 좋지 않냐? 내 개인적인 취향도 조금은 있었다."

카앤은 황당해져서 더 묻기를 그만두었다.

벤이 능청스럽게 화제를 되돌렸다.

"아무튼,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다."

"딱히 아버지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건 아닌데."

"쯧, 고얀 녀석이. 빨리 다 마시고 일어나기나 해라. 혼자 마저 사색이나 떨게."

카앤은 콧방귀를 뀌고서 남은 차를 쭉 마셔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침대에 누운 카앤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깥세상······.'

산맥 바깥으로 나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

분명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평생을 살아온 장소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불안, 두려움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 이상으로 델이 해준 이야기들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만나본 바깥세상의 사람이었다. 또한 델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 수 있었다.

이 거슬림 때문에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잠에 들지 않고 한참 뜬눈만 깜박이던 카앤은, 침대에서 일어나 오두막 바깥으로 나섰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그녀는 하늘에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고서 마당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저멀리 불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에인델의 모습이 보였다.

에인델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니?"

"좀 앉아도 될까요?"

"얼마든지. 차라도 타줄까?"

"네."

카앤이 맞은편에 앉자 에인델은 컵을 꺼내서 찻잎과 물을 넣었다.

불에 올려서 데울 필요도 없었다. 컵 안의 찻물은 그녀의 손에서 그대로 부글부글 끓더니 김을 풍겼다.

카앤은 받아든 차를 홀짝이다가 입을 열었다.

"델은 내가 산맥 바깥으로 나가서, 그 아카데미란 곳에 입학하기를 바라는 거죠?"

에인델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안 물어봤는데, 왜요?"

"그건······ 네 재능이 아깝기 때문이야."

에인델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자질은 세간에서는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단다. 그걸 산속에서만 썩히는 걸 보고 있다면 누구든 아까워하겠지."

"흐응······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그래."

"델한테는 왠지 그 이상으로 심각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내가 더 강해지면 델의 검을 나한테 물려주려는 건 아니에요?"

"응?"

그녀는 순간 흠칫 놀랐다가, 이내 카앤의 말을 이해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성검을 쥐어보게 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그런 핑계를 댔었지. 이 검은 주인을 가리는 명검이니 뭐니.

의도치 않게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말을 한 카앤이었다.

"뭐, 근데 뭐든 좋아요. 내 재능이 어떻고 그것도 별로 관심 없고요. 그냥······."

카앤이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게 맞는 것 같아요, 델."

***

며칠에 걸쳐 산맥으로 돌아오자, 저멀리 계승자와 용사의 모습이 보였다.

"내려가자, 띠용아."

나는 두 사람의 앞에 내려서서 띠용이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계승자는 검을 휘두르고 용사는 그 옆에 서있었는데, 아무래도 검술을 지도하고 있던 듯했다.

검을 내린 계승자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다시 돌아오셨네요? 떠난 줄 알았는데."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궁색해서 손을 한 번 들어 인사했다.

용사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은 잘 해결하고 돌아왔나."

"그래."

"무슨 일이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계승자가 보는 앞에서 설명하기는 뭔가 그래서 힐끗 쳐다봤는데,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아버지가 식사 준비하고 계실 텐데 제가 가서 4인분으로 차리라고 할게요. 저 먼저 오두막으로 돌아갈 테니까 두 사람은 천천히 와요. 밥부터 먹고 마저 가르쳐주세요, 델."

그렇게 말하고는 오두막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용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델?"

"아, 그녀에게 내 이름을 그렇게 밝혔다."

본명 대신 가명을 알려줬다는 말이었다. 원래 이름이 에인델이니 델인가.

계승자와 꽤 친해진 건가 싶어 진전이 있었나 물어보려다가, 일단 그녀의 질문에 먼저 답해주었다.

"카숄이 어스힐의 영토를 침공해서 그것을 막고 왔다."

"······뭐라고?"

깜짝 놀란 용사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중립국 회담에서의 일부터, 흑해 여제의 개입까지.

설명을 모두 들은 그녀는 침음만을 흘렸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에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전쟁을 막아줘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7군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용사가 조금 새삼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같은 군주와 부딪힌 건 그대도 큰 부담을 감수한 것이 아닌가."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계승자에 대해서 말인데, 뭐라도 진전은 있었나?"

나는 계승자에 대한 걸로 화제를 돌렸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물은 건데, 용사는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카앤이 마음을 정했다. 산맥 바깥으로 나가기로."

"······뭐? 설득에 성공했다고?"

"설득에 성공했다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군.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뿐이니까."

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계승자의 설득에 성공했다면 일단 첫 번째 큰 난관은 넘은 셈이었다.

"그녀의 부친 쪽은 어떻지?"

"부정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의 뜻대로 하게 두겠다고 하더군."

"음······."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럼 정말로 저번에 꺼냈던 이야기대로 할 생각인가?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겠다는."

"이미 그녀에게는 말을 그렇게 해두기는 했다만······."

용사가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겠지. 그대가 떠나있을 동안 생각을 계속 해봤지만, 달리 떠오르는 건 없더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맞나 싶어서였다.

"다만, 만약 아카데미에 입학시킨다면 근처에서 그녀를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그렇겠지. 입학만 시킨 다음에 손을 놓고 방치할 수는 없으니."

"그에 대해서도 생각한 게 있다."

"뭐지?"

"나도 그녀와 함께 학생으로 입학하거나, 아니면 가르치는 교직원 측으로 아카데미의 관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별 문제 없이 바로 근처에서 지켜볼 수 있겠지."

"뭐? 그게 가능한······ 아."

나는 말을 하다가 깨달았다.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이라면 방금 말대로 하는 것에 별 어려움은 없을 테니까.

'······어? 잠깐만.'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용사에게 물었다.

"혹시 그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 타인에게도 가능한가?"

"가능하다. 왜 그러지?"

용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잘 생각해보니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서 용사에게 말했다.

"계승자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거라면, 당신이 아닌 내가 보호자 역으로 함께 입학하는 건 어떻겠나?"

성검의 계승. 그를 위한 네 가지 조건.

소중한 이의 죽음. 배신. 인간의 추악함. 정의에 대한 회의감.

용사는 그 조건의 충족을 위해 계승자를 모질게 몰아붙일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그것을 결코 허용치도 않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

한마디로 용사에게 계승 문제를 맡긴다면······ 솔직히 진전이 있을 거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어떻게든 성검의 계승을 성공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오로지 목적의 달성만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짓은 나도 못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인위적인 상황을 구성할 마음은 있었다.

'가령, 계승자와 최대한 친해진 다음에 일부러 내 죽음을 가장하거나.'

그 정도는 성검의 계승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니, 그 정도도 하지 못할 거라면 계승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게 맞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아카데미도 여러모로 적합한 무대라는 판단이 들었다.

만약 내가 계승자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용사의 시야와 간섭을 차단하면서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가질 수 있다.

계승자에게 친구로서 접근하기도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나 대신 그대가? 어째서······."

의문을 비치는 용사에게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으니까. 마의 씨앗들도 찾아야 하고, 원마들도 견제해야 하고, 그리고 잠적하고 있던 동안 발생한 문제들도 해결해야 하고, 많은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안 그런가?"

"······."

"아무리 계승 문제가 중요하다고 한들 그것들 전부를 손을 놔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희미한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무책임하게 그대에게 모든 일을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주인 그대 또한 할 일이 많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나는 남는 게 시간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어도 군주령은 알아서 돌아가고, 대군주의 명령이 아닌 이상에야 딱히 맡고 처리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하고 보니 뭔가 굉장히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일단 전부 사실이었다.

용사는 뭔가 애매모호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 계승자에 대한 건 내게 맡기는 게 어떤가. 어차피 당신과 나 둘 중 하나가 맡아야만 할 일이다. 성검의 계승에 대한 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에 용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심중을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비록 협력 관계이긴 해도 우리 사이에는 아직 충분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지."

"그런 것이 아니다. 7군주 그대를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아니, 당신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맹세하겠다."

나는 용사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서 말했다.

"나는 언제나 계승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행동할 것이다. 또한 성검의 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그를 위해 계승자의 의지와 인격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짓밟는 짓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용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대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 그러니 일단은······ 알겠다."

"내 제안에 따르겠나?"

"그래. 입학이 확실히 정해지면 그대의 뜻에 따르기로 하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도록 하지."

좋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었다.

"그런데 입학을 시킨다면 어떤 식으로 시킬 생각이지? 방법이 있나?"

나는 그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엘폰 아카데미에 대한 건 거의 비중이 없었기에 설정을 자세히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입학 시험 같은 걸 치뤄야 되나?

용사가 대답했다.

"아카데미 측에 지인이 있다. 그쪽에 부탁하면 아마 입학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 고위 인사인가?"

"아카데미의 교장이다."

교장?

그건 또 의외였기에 무슨 연줄인가 싶었다.

용사가 내 의아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였다. 지금은 은퇴하고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지."

준비 (1)

나는 산맥에서 곧바로 다시 떠나기로 했다.

계획이 세워진 마당에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군주성으로 돌아가서 아카데미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고, 이것저것 필요한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용사는 일단 계속 이곳에서 머무르다가 적당한 때에 계승자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라 했다.

그때가 되면 곧바로 소식을 전해받기로 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난감하다 싶어 물었다.

"성검에 대한 내용을 위험하게 전서구로 주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접선 장소를 정해두면 어떤가?"

이 판타지 세계는 쓸데없이 현실적이게도 즉발적인 장거리 통신 수단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없었다.

마법의 장거리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각각의 마전석에 같은 성질의 마력이 녹아있어야 했다. 대군주성 지하에 있는 참모장 전용 텔레포트 마법진처럼.

하지만 마전석은 더럽게 희귀했고, 얼마나 먼 거리에서든 통신이 가능하려면 터무니없는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애당초 그런 초장거리 마법은 그쪽 자질을 타고난 마법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성검의 능력에도 장거리 통신 수단은 없었다.

용사가 계승자를 데리고 있는 채로 군주성에 찾아오기도 번거로울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내 쪽에서 찾아가는 게 수월하겠지.

"아, 그건 방법이 있다."

그런데 용사는 갑자기 아공간 같은 것에서 무언가를 쑥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둘둘 말린 낡은 두루마리 종이였다. 펼쳐셔 보자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백지였다.

"이게 뭐지?"

"통신 기능이 있는 고대 마도구다."

용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똑같이 생긴 걸 하나 더 꺼내서 손에 들고 펼쳤다.

"이 종이에 마력을 조작해서 글씨를 쓰면, 보시다시피······."

용사가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고 종이에 글씨를 쓰자, 내게 건네준 종이에도 똑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얼마나 먼 거리에 있든 다른 종이에도 문자가 새겨진다. 이걸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지."

"호오······."

나는 신기해서 종이를 살펴봤다. 진짜로 별 마도구가 다 있군.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다."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뒤, 용사와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띠용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녀와는 머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

군주성으로 돌아와서 나는 엘폰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를 알아봤다.

일반적인 입학 방식이나, 수업 방식이나, 교칙이나, 주요 인사들의 신상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용사가 말했던 교장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마족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마법사였는데, 또한 용사의 친우로도 유명한 자였다.

마지막 마왕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은퇴한 뒤 지금은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이 세계의 웬만한 주조연들은 다 파악하고 있다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런 걸 보면 역시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또 알아보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하나 알았는데, 바로 칼데릭에도 입학 추천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각 군주에게 매년 추천서가 주어지는데 인재를 추천해서 엘폰 아카데미로 보내는 게 가능했다.

이런 시답잖은 권한이 왜 있는 건가 생각하니, 일단 두 국가는 표면상 동맹 관계니 그에 대한 보여주기식 제도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권한을 잘 써먹는 군주가 있다고 한다.

다른 군주들과 달리 2군주 뇌후의 가문은 일정한 주기로 아카데미에 가문원을 보내 세인테아 쪽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힘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문득 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리곤.'

바로 리곤에 대해서였다.

리곤은 계승자에 못지 않은 천재고, 나이도 대충 그 또래다.

그렇다면 계승자와 친해져서 동료가 된다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최대한 많은 변수였다.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의.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많은 경험과, 많은 교류가 필요했다.

그건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일단 계승자에게 사람을 붙여주면 좋은 것이고.

딱히 리곤이 계승에 기여가 되지 않더라도 그냥 계승자와 동료가 되는 것 자체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리곤도 아카데미에 입학을 시킬까?'

마침 나한테도 입학 권한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중요한 건 리곤의 의지였다.

나는 의견을 묻기 위해 곧바로 리곤 남매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현재 리프 경께서는 엔록 변경의 마즈락 협곡에 출진을 나가계십니다."

"······출진? 왜?"

"철혈 기사단에 갓 입단한 기사들은 훈련 과정으로 엔록의 험지들에 출진을 나가게 되서······."

그런가. 열심히 하고 있나 보네.

"명하시면 당장 군주성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전하겠습니다."

"됐다. 그럴 필요는 없다."

성에 없는 리프는 놔두고, 일단 리곤만 부르기로 했다.

[Lv. 29]

"부르셨습니까, 군주님?"

부름을 받고 온 리곤이 반가운 기색으로 내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29레벨?'

저번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1레벨인가 아니었나?

그새 또 폭풍 성장을 해서 30레벨을 코앞에 둔 리곤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

"군주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간단한 근황 이야기를 듣고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곤, 혹시 세인테아의 엘폰 아카데미를 알고 있느냐?"

리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리곤 남매는 애초에 출신이 칼데릭이니 세인테아에 대해선 잘 모를 만도 했다.

나는 아카데미란 기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리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있군요.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장소라. 신기하네요."

"혹시 관심이 가느냐?"

"네? 네. 조금은요."

"그래. 그럼 혹시 아카데미에 입학해볼 생각은 없느냐?"

"······네?"

리곤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말했다시피 엘폰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이다. 아셸에게 계속 검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거기서 네가 더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구나."

"하지만 저는 누나, 아니, 누님처럼 성의 기사가······."

"나는 네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 너와 네 누이에게 기사가 돼라고 했던 건 그저 길을 하나 제시해준 것일 뿐이지."

나는 팔짱을 끼고서 말을 이었다.

"네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그중에 얼마든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누이를 따라서 기사가 되어도 좋고, 방금 말한대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다른 길을 생각해봐도 좋다."

"······."

"누이와 상관없이, 기사가 되려 하는 건 온전히 네 의지가 맞느냐? 아니라면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리곤도 기사가 되는 것에 진심이지는 않았던 듯했다.

내가 먼저 꺼냈던 말이고, 리프도 기사가 됐으니 별 생각 없이 자신도 당연히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겠지.

며칠이 흐른 뒤, 리곤은 다시 나를 찾아와서 대답을 들려주었다.

"잘 생각해봤는데, 말씀하신 대로 그 아카데미라는 곳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냐?"

"네. 군주님께서 절 생각해주셔서 좋은 기회를 주시는 거니까요. 제 또래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다함께 배우는 장소라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요."

잘됐다 생각하는데, 리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약 누님이 반대하면 그냥 성에 남고 싶습니다. 누님 마음을 언짢게 하면서까지 먼 곳으로 떠나는 건 제게도 너무 불편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에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중요한 동생 일이니 당연히 그녀에게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근데 멀리 나가있다고 하니······.'

언제 용사에게 연락이 올지 모르니 빨리 결정하고 준비를 마쳐둬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성으로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부르자니 그것도 괜히 번거롭고 오래 걸리고.

'내가 가면 그만이지.'

변경이라고 해봐야 엔록 안이면 띠용이를 타고 하루도 안 걸릴 것이다.

그냥 내가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리곤, 네 누이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함께 가겠느냐?"

그에 리곤이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호, 혹시 와이번을 타고 가나요?"

"그래."

"가겠습니다! 무조건 데려가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이전부터 와이번을 타고 싶어했었나.

띠용이는 익숙한 아셸 외에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게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크게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그렇게 들뜬 리곤을 태우고서 곧장 리프가 있다는 마즈락 협곡으로 떠났다.

***

마즈락 협곡의 런켈시드 기지.

이곳에 주둔 중인 기사들은 매일같이 협곡을 수색하고 조사하는 것이 일이었다.

마즈락 협곡에는 많은 종의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고, 그중에는 웨이브를 일으키는 종도 있었다. 그것들에 대한 동향 조사를 꼬박꼬박 해두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협곡 아래로 재앙이 몰아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 오늘도 힘내보실까."

한 사내가 흥얼거리며 몸에 걸친 장비들을 점검했다.

"넌 항상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알 수가 없네."

그의 옆에 서있던 여인이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사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요즘은 좀 편하지 않냐? 신입들 들어와서 우리도 할 일 줄고. 이것저것 가르치는 맛도 있고."

"가르치는 맛은 무슨. 어리버리한 놈들 때문에 언제 한 번 사고나 안 터지면 다행이지."

"걔들이 경험이 좀 부족할 뿐이지 우리보다 실력이 없진 않아, 마멜라스. 본성에서 온 인재들이신데. 저번 조사에서도 큰일날 뻔한 거 리프 덕분에 사고 막았던 거 못 들었어? 케드 그 녀석도 목숨 건지고."

리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여인, 마멜라스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내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7군주님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말이야. 진짜일까."

런켈시드의 기사들 사이에는 근래 하나의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바로 본성에서 온 기사인 리프가 뒷배경에 7군주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헛소문으로 여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군주가 일개 기사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그녀가 7군주의 정말 총애를 받는 인물이라면 이런 변경으로 출진을 왔을 리가 없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딴 헛소문을 믿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마멜라스를 보며 사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녀가 리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누가 봐도 그저 열등감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은 몇 달 뒤면 훈련을 끝내고 다시 본성으로 귀환해 탄탄한 엘리트 코스를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철혈 기사단의 단원과 친분이라도 쌓아두면 나쁠 게 전혀 없는데, 쓸데없이 저런 감정 소모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 리프 경."

와이번도 제 말하면 튀어나온다고, 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에게 사내가 손을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리프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준비는 다 마쳤나?"

"예."

"그래. 그럼 슬슬 나가지. 오늘도 열심히 일해보자고."

사내가 리프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서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마멜라스도 그녀를 흘겨보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퍽.

어깨를 부딪힌 리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멀어져가는 마멜라스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실 리프에 대한 건 군주성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곳에서는 출처도 불분명한 헛소문 정도로 그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리프가 이곳으로 오기 전 직접 인사 책임자에게 자신에 대해 함구를 부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7군주의 이름에 비호를 받으며 훈련을 편하게 하기라도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자신과 동생에게 새 삶을 준 그분을 조금이라도 실망시키는 일은 싫다고 그녀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 정도 시비야 악티폴의 노예 검투사 시절에 비하면 시비라고도 할 수 없었다.

리프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

"하암······."

경계를 서던 병사가 지루함에 쩍 하품을 했다.

런켈시드 기지는 지리적 특성상 몬스터들이 기지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기에 처음에 근무를 시작하게 됐을 때는 불안감에 덜덜 떨며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져서 마음만 먹으면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빠져있지 말고 제대로 서. 슬슬 기사님들 돌아올 때잖아."

"하품 좀 한 것 가지고 깐깐하게 굴지 마. 니가 내 마누라냐?"

동료의 말에 병사가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

저멀리 하늘 저편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작은 점에, 병사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야, 저게 뭐냐?"

"뭐가?"

"저기 하늘에 저거 안 보이······ 어, 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병사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렸다.

거대한 와이번 한 마리가 기지를 향해서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비, 비상! 비상!"

병사들이 혼비백산해서 비상 신호를 울렸다.

이내 기지 안쪽에서 나온 몰려나온 기사들도 와이번을 발견하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뭐야?"

왜 와이번이 여기에 있어?

런켈시드의 총지휘관 역시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지척까지 다가온 와이번을 바라봤다.

그러다 와이번의 등 위에 누군가 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아, 탄성을 내뱉었다.

"정지! 공격하지 마라! 모두 무기를 거둬라!"

한편에서 요격 준비까지 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취소했다.

이내 하늘에서 내려온 와이번이 기지 한편에 천천히 착지했다.

이어 와이번의 등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며 총지휘관은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정말로 7군주다.

소문으로만 듣던 새로운 7군주가 이곳 런켈시드 기지에 직접 걸음한 것이었다.

총지휘관은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의 곁으로 다급히 달려가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런켈시드 기지에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7군주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사와 병사들도 그제야 기겁해서 고개를 숙였다.

남자, 7군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런켈시드의 총지휘관인 사크란입니다!"

"지휘관이었군. 변경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네. 별 건 아니고 누굴 좀 만나러 온 것뿐이니 긴장 풀도록."

그 말에 총지휘관은 안도감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한마디 말뿐이라도 어느 누가 평생에 군주에게 노고를 직접 치하받을 기회가 있겠는가?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의문이었다.

군주께서 누굴 만나기 위해 이런 변방까지 친히 행차하셨다고? 대체 누구를······ 아.

"리프가 지금 기지에 있나?"

총지휘관의 깨달음과 동시에 7군주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기지의 총책임자인 그는 아주 조금은 사정을 알고 있었다.

본성 측의 인물로부터, 그것도 철혈 기사단의 단장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전언이 있었으니까.

이번에 런켈시드로 출진을 오는 신입들 중, 리프라는 기사를 특히 신경 쓰고 살피도록 하라고. 티가 나지 않도록.

그 이유에 대해서 총지휘관은 그저 그녀가 7군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라는 말만 전달자에게 들었을 뿐이었다.

'······정말 사실이었구나.'

총지휘관은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뒤에 선 기사를 쳐다봤다.

눈짓을 받은 기사가 말했다.

"리, 리프 경은 지금 마즈락 협곡에 수색을 나간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타이밍이 안 좋았군."

총지휘관이 다급히 말했다.

"지금 즉시 복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군주님."

"됐다. 그냥 내가 직접 가지. 마즈락 협곡이라는 게 저쪽인가?"

그러고 7군주는 데리고 있던 소년과 함께 와이번에 도로 올라탔다.

펄럭!

육중한 날갯짓과 함께 와이번이 협곡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총지휘관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주위에 명령했다.

당장 기지 정리를 시작해라. 지금 기지에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도 전부 나서라고 해라. 7군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최대한 눈에 거슬리는 것 없도록 깔끔하게 청소해야 할 것이다."

"예!"

"그리고 경계병들도 외벽에 더 촘촘히 배치시켜라. 죽기 싫으면 정신들 바짝 차리고 있으라고 해."

그야말로 폭풍처럼 왔다 간 7군주의 방문에 기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

"가르가리의 흔적이군."

지면에 흩뿌린 푸른 체액을 살펴보던 부단장이 중얼거렸다.

현재 기사들은 협곡의 초입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별로 굳지 않은 걸 보니 가까운 곳에 있겠군요."

"그래. 서둘러 찾아서 처리하지."

"쯥, 오늘은 좀 수색이 길어지겠습니다."

가르가리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두꺼비 형태의 몬스터였다.

놈은 서식지로 정한 곳 일대에 계속해서 독무를 퍼뜨리는 습성이 있었기에, 흔적을 발견했을 때 빨리빨리 처리해두지 않으면 모르는 새에 민가까지 내려와 끔찍한 참사를 낼 수도 있었다.

기사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곧장 수색에 나섰다.

리프는 마멜라스와 같은 조가 되어 숲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후방을 잘 살펴봐라. 사소한 흔적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보고해."

"예."

마멜라스는 바로 즉답하는 리프를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침묵 속에 꽤 한참을 이동했을 때였다.

"······!"

마멜라스는 수풀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두꺼비를 발견하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가르가리였다.

가르가리 또한 둘을 발견하고 눈을 뒤룩거리며 낮게 깔린 울음소리를 냈다.

'찾았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놈을 응시하다가, 뒤쪽의 리프를 힐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넌 여기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

"혼자서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문제 있나?"

리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혼자서는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 위험? 네가 어설프게 껴들어봐야 방해만 된다. 주위나 엄호하고 있어."

순 억지인 말에 리프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둘씩 페어를 짜서 수색에 나선 게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멜라스는 검을 뽑아들고서 홀로 가르가리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는 리프에게는 아주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거나 활약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마멜라스가 가르가리를 향해서 돌진했다.

입을 쩍 벌린 가르가리가 혓바닥을 쭉 늘려서 공격했다.

마멜라스는 몸을 틀어 피하며 측면으로 접근했다. 그녀의 검이 가르가리의 옆구리를 갈랐다.

독무를 퍼뜨리기 시작하면 성가시기에 최대한 빨리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전력을 다했다.

몰아치는 검격에 가르가리는 사방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발악을 했다.

마멜라스가 속으로 조소를 지으며 마무리 일격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리프가 소리쳤다.

"경!"

순간 마멜라스도 아차 했다.

쏘아진 뒤 되돌아오는 가르가리의 혀가 방심한 그녀의 다리를 기습적으로 휘감았다.

"꺄악······!"

마멜라스는 꼴사납게 공중에 붕 떴다가 도로 땅에 처박혔다.

쓰러진 그녀를 향해서 혀가 다시금 아래로 내리쳐졌다.

촤아악!

순식간에 달려온 리프가 혀를 베어버린 뒤, 가르가리의 머리를 베어 숨까지 확실하게 끊어놓았다.

검에 묻은 체액을 털어낸 리프가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끙끙거리던 마멜리아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수치심과 쪽팔림이 가득한 표정으로 리프를 노려봤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리프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락대는 그녀를 쳐다봤다.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알아서 처리했어! 명령 불복종이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경께선 제 선배시지만 규율상 제게 정식으로 명령할 권한은 없습니다."

순간 화를 못 이긴 마멜라스는 검까지 바닥애 패대기치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짜악!

리프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난데없이 뺨을 후려맞은 리프는 아무 말도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마멜라스를 바라봤다.

그에 움찔한 마멜라스가 이를 까득 갈며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이 건방진 년이 진짜······!"

슈우우우우!

갑자기 귓가에 들려온 거대한 파공음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동작을 멈췄다.

소리의 근원지는 하늘이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날개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이쪽을 향해서 쏜살같이 낙하해오고 있었다.

'······와이번?!'

나즈락 협곡에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서식하지만, 그렇다고 와이번이 살지는 않았다.

말로만 들어봤지 생전 처음 본 아룡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마멜라스는 한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

리프도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마멜라스가 다급히 수풀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리프가 그 팔을 붙잡았다.

"뭐, 뭐야? 미쳤어?! 이거 놔!"

"7군주님이십니다."

마멜라스는 순간 그녀가 뭔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멈칫했다. 7군주?

그러는 사이 와이번은 어느새 지면까지 내려와 착지하고 있었다.

그제야 와이번의 등 위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완전히 얼이 빠진 채 등에서 내려온 남자를 바라봤다. 흑발의 인간이었다.

"군주님."

고개를 숙여 인사한 리프가 7군주의 옆에 서있는 리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리곤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리프."

"예. 한데 어쩌신 일로 이곳까지······."

7군주가 가르가리의 사체와, 얼어붙어있는 마멜라스를 힐끗 바라봤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마멜라스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7, 7군주님을 뵙습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리프의 뒷배경에는 정말로 7군주가 있었던 것이다.

마멜라느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바로 방금 전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렸기에.

어쩐지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7군주가 그제야 리프의 뺨이 붉은 것을 발견하고, 리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리프가 마멜라스를 한 번 내려다봤다.

마멜라스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벌벌 떨며 속으로 기도했다.

'사, 살려줘. 제발······.'

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군주님."

그에 마멜라스는 온몸에 탈력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리프의 동료 기사를 내려다봤다.

정도 이상으로 격한 반응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프가 그냥 넘기려는 것 같으니 굳이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리프에게 말했다.

"리곤과 관련한 일로 네게 물을 것이 있어서 말이다. 바람도 쐴 겸 직접 온 것이다."

"아······."

"일단 기지로 돌아가지. 와이번에 타거라."

다시 리곤과 함께 와이번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사람을 더 태우려고 해서 그런지 띠용이가 콧김을 내뿜으며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지만, 목을 쓰다듬어서 달랬다.

그런데 리프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와이번에 처음 타는 게 낯설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군주님. 송구스럽지만 급한 용무가 아니시라면 저는 따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

"수색 임무는 이제 끝났습니다. 뒷정리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기지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함께 돌아가면 될 걸 왜 굳이?

'아.'

그러다 당연한 사실 하나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현재 그녀는 이 협곡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 난데없이 나타나서 그녀를 쏙 빼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물론 내가 군주인데 그러든 말든 뭐가 문제겠냐만, 이런 행동이 다른 기사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리프의 마음가짐이 어떨지는 나도 안다.

내가 했던 말대로 군주성의 기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겠지.

지금의 내 행동은 그런 그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나도 조금 물들었나.'

비록 아주 사소한 일일 뿐이었지만, 나는 새삼 스스로에게 놀랐다.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그런 걸까. 내가 언제부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 하나에 신경을 못 썼지?

그 사소함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폭왕이나 흑해 여제 같은 미친놈은 안 된다고 해도 말이다.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해도, 이 남매의 목숨을 구한 게 나라고 해도.

그것들이 내가 주위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방패는 되지 않았다.

애당초 별 것도 아니었던 놈이 우연히 얻게 된 군주위.

이깟 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허상일 뿐이다.

앞으로는 마음에 조금은 경계심을 가지는 편이 좋겠다.

"리프."

"······예."

내가 이름을 부르자 리프가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혹여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괜히 가엽게 느껴져 나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군주님."

"그럼 기지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에 리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이런 말을 내게 들을 거라곤 예상 못한 얼굴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리곤도 가능하면 남아서 리프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게 보여도 이런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그렇게 리프를 남겨두고서 띠용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리프까지 안 태워도 되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녀석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셸은 나 없이도 잘 따르는 녀석이 웃기지도 않는다. 괜히 부끄러워서 싫어하는 척하는 거냐?"

캬아악!

그 말에 녀석이 드물게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성질을 부렸다.

하여튼 말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네.

"농담이다, 농담."

***

기지로 돌아간 뒤, 몇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리프과 기사들과 함께 복귀했다.

나는 환복을 하고 온 리프와 리곤을 데리고서 조용한 방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일단 오랜만에 만나는 두 남매가 회포를 풀 시간을 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세인테아의 아카데미에 입학을 말입니까?"

이야기를 모두 들은 리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물론 예상한 반응이었다.

동생을 난데없이 먼 타지로, 그것도 칼데릭을 넘어 세인테아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묻고 있는 건데.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 군주들에게는 매년 엘폰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가 한 장씩 주어진다. 실제로 2군주 뇌후도 잘 써먹고 있는 권한이지."

리프는 더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워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리프."

"예, 군주님."

"혼란스러워 할 것 없다. 편하게 네 생각을 들려주면 된다."

나는 리곤을 힐끗 쳐다보고서 말했다.

"리곤은 네가 반대한다면 아카데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네가 반대한다면 나 또한 이를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제야 리프는 좀 침착해진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솔직히 그녀가 반대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대로면, 그녀는 언제 또 동생의 광혈병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내 곁에서 떨어뜨려놓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고 했었으니.

지금은 그 강박이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다만, 뭐가 됐든 리프에게 있어 리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단순히 멀기만 한 곳도 아니고, 칼데릭과 사실상 적대 관계인 세인테아로 보내고 싶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리프가 이윽고 입을 열고 물었다. 내가 아닌 리곤에게.

"리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리곤이 말했다.

"군주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나는 누나가 반대하면 안 간다고."

"그게 아니라 네 마음을 묻는 거야. 나나 군주님은 상관하지 말고 온전한 네 마음을. 정말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니까 그러네."

"어째서?"

리곤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특별하거나 거창한 이유는 없어.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계속 성에서만 하루하루 성에서 검만 휘두르며 지내는 지금보다는······ 뭐라도 더 많은 걸 겪어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리프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에 시간이 필요하다면 좀 더 고민해보라고 말하려는 때였다.

"저도 제 동생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의외로 시원스러운 결정에 나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로 괜찮겠나?"

"예. 물론 걱정은 되지만, 리곤이 원하는 거니까요. 반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생이 원하니까. 간단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짧은 순간 수많은 고뇌가 스쳤을 것이었다.

그녀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리프의 대답에 리곤의 표정도 환해졌다.

사실 리곤에게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알 턱이 없지만, 리곤은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붙어있게 될 테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리곤의 엘폰 아카데미 입학도 결정되었다.

준비 (2)

리프와의 이야기를 마치고 군주성으로 귀환했다.

나는 계속 아카데미 입학에 대해 준비하는 한편, 때가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뭐가 있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군주령이야 언제나 그랬듯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가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았다.

한 번 정리해두고 가야 할 건 군주령과 관련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일이었다.

바로 암영 프레온에 대한 것.

'그 여자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

군주성에 첩자로 잠입했다가 나에게 걸리고, 지금쯤 어딘가에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여자.

내가 그녀에게 시킨 건 미래에 세인테아의 수도를 테러할, 빙의의 신비를 가진 괴한에 대한 것이었다.

'벌써 뭘 알아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내가 그나마 알고 있던 티끌만 한 단서로 그녀가 무언가를 알아냈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없었다. 밑져야 본전으로 시킨 일이었으니.

암영에게 정보 수집을 시킬 때 길어도 1년 안에는 보고를 하러 돌아오라고 했었다.

가능하면 더 짧은 주기로 해두고 싶었지만 먼 거리를 왔다갔다 하라는 것도 활동에 방해가 될 테니까.

그러니 시간을 최대한 끌면 끌었지 굳이 일찍 돌아오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아직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았다고 봐야 했다.

만약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외부 활동은 어렵다.

그러니 암영이 현재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도 그 전에 확인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나는 이전에 암영에게서 빼앗았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낙인을 찍은 대상의 방향을 알려주는 고대의 마도구.

나는 이 반지의 낙인을 암영에게 찍어 협박해서 정보 수집을 하도록 시켰었다.

지금도 반지에서는 희미한 빛이 뿜어져나오며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나 멀리 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무리 멀다고 해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었다. 띠용이가 있으니까.

생각이 떠오른 김에 처리하기 위해 바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번 외출은 간만에 동행자 없이 나 혼자였다.

***

반지가 가리키는 빛을 따라서 이동한 지도 열흘이 넘게 지났다.

예상했던 대로 암영은 칼데릭을 넘어서 세인테아 쪽 방향에 있었는데, 그 거리가 상당했다.

'여기는······.'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풀을 내려다봤다.

이 숲은 세인테아 영역 바깥에 위치한 거대한 숲이었다. 이름은 딱히 없다.

의아한 이유는, 이 숲만 넘으면 이제 지도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바다가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사를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야 나도 알 턱이 없지만······ 이런 외지까지 나와서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도통 짐작하기 힘들었다.

'설마 제대로 조사 안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반지가 있는 이상 내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와중에 약간의 찜찜함도 차올랐다.

이 이름 없는 숲의 심부에 살고 있을 누군가를 알기 때문이었다.

'마녀 큐렐.'

당연하지만 라사의 강자들은 전부 대륙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이유로 그 이름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 강자들 역시 많았다.

마녀 큐렐은 그중에서도 상당한 네임드로, 일단 세인테아의 오성 못지 않은 정도의 강자였다.

수십 년 동안 이 숲에 박혀서 마법 연구만 하고 있다는 설정이었으니 당연히 지금도 있을 것이었다.

게임상에서도 나온 게 없기에 그녀에 대한 자세한 배경은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아는 건, 그녀가 과거에는 세간에서 마녀라 불렸을 정도로 괴팍한 마법사라는 것뿐.

이런 숲에 틀어박혀서 홀로 마법 연구를 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광활한 숲에서 설마 마주칠 리는 없겠지만······.'

찜찜한 건 하필 암영이 이 숲이 있는 방향에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마녀를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온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스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이씨."

나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멀리서부터 서서히 거대한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지의 빛은 마력이 있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좀 전부터 아주 조금씩, 천천히 아래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암영이 이곳에 있다는 명백한 의미다.

그리고 사람 하나 살 리 없는 이 숲에서 마력이 느껴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저쪽이 마녀의 영역인가?'

마력이 넓은 범위에 걸쳐서 퍼져있는 걸 보니 아마 결계가 아닐까 싶었다.

암영은 분명히 저 결계 안에 있을 것이다. 놈은 정말 마녀를 만나려고 이곳에 온 건가?

"내려가자."

일단 지상으로 내려왔다.

띠용이 등에서 내린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마력이 느껴지는 숲 저편을 바라봤다.

이걸 들어가봐야 돼, 말아야 돼?

마녀 큐렐은 악인인지는 잘 몰라도 괴인임은 확실한 인물이었다.

다짜고짜 영역에 들어가면 두 팔 벌리고 환영이라도 해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어째 사서 고생을 하는 느낌이었지만, 여기까지 와놓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띠용이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녀 큐렐은 세인테아의 대마법사들과 동급의 강자였다. 아마 92레벨인가 그랬을 것이다.

나 혼자야 위험해도 어떻게든 한 몸 지킬 자신이 있었지만, 녀석은 괜히 짐만 될 수 있었다.

홀로 숲 안쪽으로 나아가자 서서히 마력의 기운이 짙어졌다.

정체 모를 마력 결계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뒤, 주위에는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 감돌았다.

결계 탓인지 어쩐지 한층 흐려진 것 같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서 계속 벌걸음을 옮겼다.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잠시 뒤였다.

- 너는 누구냐?

마치 노이즈가 끼인 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

마녀 큐렐이다.

걸음을 멈춘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지? 이 결계를 펼친 마법사인가?"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해서 경계를 살 필요가 없었기에 태연한 어투로 물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다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질문에 답해라. 누구냐? 무슨 용건으로 이 숲에 들어왔지?

"이 결계 속에 아마도 한 여인이 있거나, 혹은 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 ······.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용건은 그것뿐이다. 혹시 내가 말한 자가 어딨는지 알고 있나?"

그러자 갑자기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 프레온 그년과는 무슨 관계냐?

프레온은 암영의 이름이었다.

역시 마녀는 암영과 아는 관게였나? 부르는 호칭을 보니 어째 사이가 좋은 건 아닌 듯한데.

- 이곳에 있는 게 맞군. 그녀와 무슨 관계지?

- 질문은 내가 한다, 침입자.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자꾸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답해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말했다.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다. 말했다시피 내가 원하는 건 프레온뿐이야. 그녀는 내 포로다. 그러니 그녀가 네게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내게 넘겨주고, 아니라면 이유부터 설명해줬으면 하는군."

그러자 갑자기 주위의 마력이 유동하더니 내게 몰아쳤다. 물리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카볼리사의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기에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다. 내게 정신계 마법은 통하지 않아."

그러자 다시 한 번 마력이 요동치며 이번엔 공격 마법이 날아들었다.

나는 부동 장막을 펼쳐서 사방에서 몰아치는 마력의 칼날을 막아냈다.

콰과과과광!

이제 보니 이 결계는 완전히 마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아무리 봐도 마녀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먼 곳에 떨어져있는 듯한데, 결계를 구성하고 있는 마력의 흐름은 직접 이 자리에서 조작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이런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애초에 마법에는 문외한인 나였기에 쓸데없는 의문이었다.

뭐, 오랜 시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만큼 마련해둔 장치야 이것저것 많겠지.

'그래도 위험할 건 없지만.'

뇌후의 전력도 막아낼 수 있는 부동 장막에 이런 공격은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뒤에야 마녀의 공격이 멈추었다.

나는 장막을 거두고서 말했다.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격을 전부 막아내자 마녀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반응이 없다가, 이번에는 또 뭘 하려는 건지 내 주위를 감싸고 마력이 모여들었다.

안에 가두려는 듯 장막 형태로 구성되는 마력을 보고 나는 곧바로 공간 도약으로 빠져나갔다.

"적당히 관둬라. 네 역량으로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

- ······그래. 보아하니 그런 것 같구나. 마법인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정체가 뭐냐?

"그냥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끄는 게 좋지 않겠나? 프레온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된다. 너도 내가 계속 이곳에 있는 건 껄끄러울 텐데."

마녀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 껄끄러워? 웃기는군. 너도 이 결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계속 길이나 헤매다가 기어나가도록 해라.

빈정이 상한 건지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마녀였다.

마녀를 무시하고 반지의 빛을 따라서 나아가도 그만이었지만, 말하는 걸 보니 그것도 방해할 것 같았다.

마녀는 이것저것 괴상한 마법들을 많이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직접적으로 통하는 건 없다고 해도 길을 헤매게 하거나, 프레온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도 있었다.

'성가시게 구네.'

나는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서 마녀의 마력의 기척을 샅샅이 훑었다.

일부러 감각을 혼란시키려는 듯 어지럽게 퍼져있는 마력 파장.

그 가운데 한쪽으로 멀리까지 희미하게 이어져있는 마력 실타래가 느껴졌다.

나는 그 방향이 마녀가 있는 곳이라 확신하고, 그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내가 네 위치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쪽에 있나?"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 봐도 딱 걸려서 당황한 게 분명했다.

나는 침묵하는 마녀에게 조금 유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마법사. 말했다시피 우리가 싸울 이유는 없다. 네 영역에 다짜고짜 들어온 건 사과하겠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이 결계 안에 있는데 바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나도 정말로 마녀와 한판 붙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적당히 숙여주었다.

마법사 놈들은 나랑 상성이 영 좋지가 않았다. 이대로 찾아간다고 해도 방어 마법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곤란한 건 이쪽이었다.

물론 마녀가 그 사실을 알 턱은 없었기에, 위치를 특정당한 이상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 ······네가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기에 알려주는 것이다.

이내 허공에 마력이 화살표 형태로 뭉쳐지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마녀의 말은 체면을 챙기려고 하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았기에 나는 속으로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고맙군."

- 그런데 아까 말한 포로라는 건 무슨 의미지?

"별 거 아니다. 쥐새끼처럼 나에 대한 정보를 캐려다가 걸렸을 뿐이지."

나는 마녀에게 물었다.

"너도 프레온과 무슨 관계인지 알려줄 수 있겠나? 궁금한데."

마녀가 혀를 차고 대답했다.

-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예전에 놈에게 자그마한 빚을 진 적이 있었는데, 이미 갚은 빚을 빌미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상한 요구를 하더군.

"요구?"

- 몸에 새겨진 마력 각인을 지워달라고 말이다. 이제 보니 그게 너 때문이었구나. 빌어먹을 년이 내 거처에 뭔 괴물을 끌어들여온 건지.

마녀가 투덜거렸다.

그제야 나는 암영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역시 내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나.

마녀는 이런저런 마법에 해박할 테니 어쩌면 반지의 각인을 지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 방금 가리킨 방향에 가둬놓고 있었으니 꺼내가라. 다시는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목소리는 울려퍼지지 않았다.

나도 딱히 마녀에게 더 물어볼 건 없었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암영이 있는 방향으로 한참을 이동하자 한 동굴이 나타났다.

마녀가 암영을 가둬놓았다는 장소가 아무래도 동굴 안인 듯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있었다.

동굴 입구에는 마력으로 장막이 처져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마녀가 해제했는지 저절로 사라졌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 동굴 한편에 찌그러져 누워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헉!"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 뜬 암영이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래 동굴에 갇혀있었던 건지 꼬질꼬질한 꼴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한심스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암영."

암영이 조심스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헤헤 웃더니, 간신 같은 어투로 말했다.

"절 구해주러 오셨군요, 7군주님? 감사합니다. 마법사 놈은 죽이셨습니까?"

그 뻔뻔스러움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설마 상황을 모를까 기대하기라도 하나.

"마법사야 무사하지. 네가 반지의 각인을 지우려고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도 다 들었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영이 넙죽 엎드려서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7군주님."

나는 혀를 차고서 물었다.

"조사는 지금까지 얼마나 진행했지?"

"······."

"설마 하나도 한 게 없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앞으로는 개수작 안 부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정보를 수집하겠습니다."

애초에 기대한 게 적었기에 뒷골이 땡길 정도는 아니었으나, 한숨이 나왔다.

"암영."

"예, 군주님. 하명하십시오."

"저기 저거 보이나?"

나는 동굴 천장 한쪽에 처진 거미줄을 가리켰다.

거미줄에는 날벌레 한 마리가 꼼짝없이 걸려있었다.

"예, 보입니다."

"저게 지금의 너다. 그깟 각인 하나 지운다고 정말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

"두 번 기회는 없다. 똑바로 시킨 일이나 해라. 내가 누구인지, 네 처지가 어떤지 망각하지 말고."

나는 동굴 바깥 쪽으로 턱짓을 했다.

"나가라. 다시 오늘로부터 정확히 1년 뒤에 군주성으로 찾아와서 성과를 보고해라."

벌떡 몸을 일으킨 암영이 고개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각인이 지워지면 암영을 쫓을 방법 따윈 없다. 방금 건 그냥 허세 섞인 협박이었다.

그래도 내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이번엔 확실한 경고가 됐겠지.

'그보다 역시 영 믿을 만한 놈은 아니야.'

저 여자를 믿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테러에 대한 건 따로 대처할 방안을 계속 생각해봐야겠다.

나도 이내 동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주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준비 (3)

엘폰 아카데미의 신학기는 약 2달 정도 뒤였다.

그때가 바로 계승자와 나, 그리고 리곤이 아카데미에 신입생으로 입학할 때였다.

내가 가진 군주 권한의 추천서는 사용하려면 일반적인 입학 신청 기간보다 더 빠르게 세인테아로 보내야 했기에, 리곤에 대한 건 이미 집사장에게 서류를 작성하고 추천서를 보내도록 시켰다.

내 쪽은 용사가 맡아서 계승자와 함께 묶어 추천을 넣겠다고 했으니, 귀찮게 처리할 일은 없었다.

그동안 아셸도 성으로 돌아왔고, 그녀에게도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용사와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용사는 현재 계승자를 데리고 세인테아 동부를 돌아다니며 도시들을 구경시켜주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알아볼 것들도 대충 알아보고, 정리할 것들도 대충 다 정리한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물론 남는 시간 동안 띵가띵가 놀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마력을 다루는 법을 좀 익혀야겠지.'

알아본 바로 엘폰 아카데미의 학부는 크게 검술학부와 마법학부로 나뉘어있다.

정치라든지 역사라든지 다른 학문적인 과목들도 당연히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들은 검술과 마법 둘 중 하나의 학부에 속하고, 적성에 따라서 다른 과목들도 추가로 선택하는 식이었다.

단 한 명의 초인이 일국과도 맞먹을 수 있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없는 이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힘이다.

귀족들의 가문을 구성하는 근간 역시 그런 힘이었다.

물론 정치도 잘하고 머리도 잘 굴려야겠지만, 기본적으로 힘이 없으면 다른 능력들이 얼마나 뛰어나든 전부 부질없을 것이었다.

아마 엘폰 아카데미의 교육 구조는 그러한 힘의 법칙의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닐까 싶었다.

학문이고 뭐고, 일단 마력을 쌓고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게 그들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할 테니.

이게 내가 지금부터 마력을 익혀야 하는 이유였다.

마력 한 톨 다룰 수 없는 놈이 아카데미에 입학해봐야 대체 뭘 하겠는가? 퇴학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엘폰 아카데미의 교칙을 알아보니, 성적이 크게 떨어지면 정말 입학하고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쫓겨나는 게 가능했다.

정말 그런 참사가 발생하면 쪽팔려서 용사의 얼굴을 볼 면목도 없었다.

그렇기에 입학 전에 어떻게든 최소한의 능력은 키워야만 했다.

"······마력 연공법 말씀이십니까?"

아셸이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마력을 전혀 다룰 줄 모른다."

"예."

"그러니 네가 직접 가르쳐줬으면 한다, 아셸.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익혀두긴 해야 할 것 같더군."

나는 내게 마력에 대해 가르쳐줄 스승으로 아셸을 선택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녀가 가장 적임자인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배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가면을 쓰지 않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은 아셸밖에 없었다.

"완전히 일반인을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기초부터 가르쳐주도록."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아셸과 함께 연무장으로 이동한 나는 그녀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마력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 마력을 쌓는 일의 첫 단계는 이 잠재 마력, 마력의 씨앗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나는 아셸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몸속에 잠들어있는 자신의 마력을 느끼라는 말이었다.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르네.'

마력 연공의 자세한 설정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었기에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무협마냥 대충 무슨 호흡법 같은 걸로 쌓는 줄 알았는데, 몸속에 이미 마력의 씨앗이 있다고?

내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아셸이 말을 이었다.

"잠재 마력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지 아직 실체가 있는 게 아닌 개화되지 않은 마력의 가능성입니다. 마력을 느끼려 해도 아마 평소 느끼시던 마력처럼 느껴지시진 않을 겁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초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잠재 마력이라는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단순히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마력의 개화법은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입니다만, 저의 경우는 그저 몸을 움직이며 익혔습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마력을 개화합니다. 육체적인 자극을 주며 몸에 계속 감각을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마력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마법사의 방식은 다른가?"

"마법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명상을 통해 마력을 개화하는 경우도 많긴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적성일 뿐이고, 마력의 개화 자체는 무인과 마법사를 따로 구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법의 길을 걷는 이라도 육체적인 자극을 통해 마력을 개화할 수 있고, 무인이라도 명상을 통해 마력을 개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과정은 어떻든 성공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내 경우는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생각하는데, 아셸이 말했다.

"론 님께는 제가 그랬듯이 검술 훈련을 병행하여 마력의 개화를 유도해볼 생각입니다만, 어떠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어차피 아셸에게는 검술도 배울 생각이었기에 좋은 방법이다 싶었다.

거기다 초재생 덕에 웬만큼 육체를 혹사시켜도 지치지 않는 나였기에 명상보다 더 이점도 있어 보였다.

"혹시 검은 다루실 줄 아십니까?"

"아니, 무기 자체를 전혀 다뤄본 적이 없다."

나는 연무장 한편에 놓인 훈련용 목검을 집어들었다.

설마 내가 검을 배우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는데.

아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날 바라보다가, 자신도 목검을 집어들었다.

"그럼 일단 검술 대련을 한 번 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련?"

"예. 효율을 위해선 저도 론 님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

"검술에는 문외한이라고 했는데······ 뭐, 좋다."

나는 아셸과 마주 서서 어색하게 목검을 치켜들었다.

아셸이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기에 나는 왠지 머쓱해서 말했다.

"내 육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으로 형편없다. 대련이 되기는 하겠나?"

"아, 물론 마력이 없는 대련입니다. 저도 마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발을 뗀 아셸이 검을 휘둘러왔다.

나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숙여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내 동작은 내가 느끼기에도 대체로 어색하고 엉성했지만, 꽤 그럴듯한 대련이 이어졌다.

초감각이 있었기에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아셸의 공격을 막고 피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검을 멈추고 대련을 끝낸 아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로 완전히 초심자셨군요."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감각과 인지 능력은 저보다 훨씬 수준이 높으시니 검술도 배우면 금방 성장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나는 아셸에게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세 교정이 주였다. 가로 세로 베기, 사선 베기 같은 기초적인 것들로 시작해서 응용적인 동작들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자세를 교정받았다.

이왕 배울 거 제대로 배우고 싶었기에 귀찮더라도 철저히 아셸의 말에 따라서 훈련에 임했다.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사흘쯤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검을 휘두르다 불현듯 몸속에 꿈틀대기 시작한 미약한 기운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마력이 개화된 것 같군."

"그러십니까?"

아셸이 내 가슴팍에 손을 얹고 자신의 마력을 흘려넣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축하드립니다. 적어도 열흘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력을 개화한 다음은 본격적으로 그것을 제어하는 법을 배울 차례였다.

여기서부터가 무인과 마법사로 갈리는 지점이었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시키는 법을 배울 수도 있었고, 마력의 성질을 변환시켜 마법을 펼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었다.

"마력은 육체의 근육과 비슷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특별한 기술 없이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계속해서 단련되고 늘어납니다."

지금 내 몸속에 자리잡은 마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이것을 빨리 늘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집사장에게 시켜 최상품의 마력 영약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성의 창고에 이미 여럿 있었다.

군주가 된 뒤로 군주성의 재산을 이제야 좀 유의미하게 사용해보는 것 같았다.

"제가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드릴 테니. 론 님께서는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에 집중해주십시오."

나는 연무장 한가운데에 정좌를 하고서 아셸의 도움을 받아 영약의 기운을 성공적으로 흡수했다.

영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가 한계라서 무한히 마력을 늘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지만, 이제 막 마력의 길에 들어선 입문자치고는 이로써 상당한 마력을 쌓게 되었다.

마력 개화 뒤, 대략 한 달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셸에게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아셸은 내 마력 친화력과 마력을 제어하는 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가이탄 호에서 만났던 모험가도 내가 마력 친화력이 뛰어나다 하긴 했었지.

쿠웅!

나는 검을 거두고서 바닥에 쓰러진 나무를 바라봤다.

고작 한 달 만에 검에 마력을 두르고 조금 작은 나무 정도는 벨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만에 이만큼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아셸의 가르침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약과 신비들 덕분이기도 했다.

초감각으로 극대화된 감각은 마력을 제어하는 데에 굉장히 큰 역할을 했으며, 초재생은 쉽게 지치지 않고 계속 훈련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초재생에 초감각에 바탕 능력치부터가 사기고, 영약의 도움까지 받으니 성장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역시 게임은 스펙빨이지.'

물론 이 정도야 이 세계의 초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내 몸으로 직접 하니 또 기분이 색다르긴 했다.

즉사 능력과 신비들을 빼면 지금 내 레벨은 몇 정도 될까?

괜히 궁금했지만 내 레벨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셸, 지금 내 수준은 어느 정도 되지? 리곤과 비교하면."

옆에 서서 지켜보던 아셸에게 묻자 그녀가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리곤보다 서너 단계 정도 아래이신 것 같습니다."

서너 단계 아래라.

현재 리곤은 또 성장해서 30레벨을 넘겼다. 그러면 넉넉잡고 20레벨 초반쯤으로 생각하면 되나?

그 정도면 아카데미의 신입생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수준일 것이었다.

'오히려 좀 뛰어난 편 아니려나. 신입생이면 고작 15살 애들인데.'

한번 리곤과 대련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그건 관뒀다.

아셸도 아니고 리곤과 대련해서 지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체면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셸에게 계속 검을 배우는 한편, 나는 마법에 대해서도 파고들어보기로 했다.

이제 마력을 다룰 줄 알게 되었는데 한 번쯤 마법도 펼쳐보고 싶은 건 당연했다.

아셸도 마법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녀에게 배울 수는 없었다.

성에 뛰어난 마법사들이야 넘쳐났지만, 일단은 가볍게 마법서로 독학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마법에는 그닥 재능이 없었다는 걸.

"······."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쓴 채 읽었던 설명을 또 읽고 읽었다.

마법의 발현은 크게 체외로의 마력 방출, 성질 변환의 두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마력 제어에 이제 능숙한 내게 마력을 방출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성질 변환이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마력의 성질 변환이란 간단히 요약하면 해당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이 술식이라는 게 단순히 무슨 수학식 같은 거였으면 이렇게까지 헤매지도 않았다.

마법서에는 어이없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술식을 그냥 '인지'하고 느끼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술식을 푸는 것도 아니라 느끼라고? 무슨 이런 개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결국 성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까지 불러와서 조언을 구했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단지 성과가 있었다면 술식을 느끼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그나마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이란 일종의 공감각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특정한 숫자나 문자에서 색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마력에서 특정한 패턴을 느끼고, 술식으로 풀어낼 수 있으면 그게 마법이었다.

이는 마력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오롯한 마법적인 자질이라서, 굉장히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패턴을 느끼라고 해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럼 느껴지실 때까지 집중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이 단계에서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군주님."

내 표정이 굳자 마법사가 조금 창백해진 기색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는 군주성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하는 말이니 의심할 건 없었다.

별 수 없이 그 패턴이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 나는 검술 훈련 외의 시간은 전부 그에 투자했다.

하지만 사흘이 넘는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진짜 어렵네, 마법은.'

검술도 어렵지 않게 익히고 있으니 마법도 별 거 없으리라 생각한 건 내 오만이었다.

마법은 몸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정말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분야였다.

사실 마법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지만, 오기가 생긴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열흘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패턴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 단계는 거기서 파생되는 기본적인 마법들을 익히는 단계였다.

마력을 다루는 실력은 이미 충분한 수준이었기에 나는 오로지 술식에만 집중해 마법에 파고들었다.

화륵!

나는 손바닥 위의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기초 마법들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봐야 화염을 포함한 몇몇 원소 마법과 방어막 마법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마법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었다.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아무 생각 없이 자그마한 광구를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조작하고 있던 나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마도구에 서서히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 보름 후 아카데미의 신입생 입학일이다. 별 문제는 없는가?

드디어 용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나도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고 글씨를 써서 답장했다.

- 그래. 지금 어디에 있지?

- 라피드 시다. 곧장 찾아올 수 있나?

- 물론이다. 도시 바깥에서 장소를 정해서 만나도록 하지.

나는 종이를 도로 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때가 되었다.

엘폰 아카데미

"너는 조금도 늙지를 않았구나, 에인델."

엘폰 아카데미의 교장, 나인베르크는 몇 년 만에 보게 된 벗의 얼굴을 바라보며 반갑게 웃었다.

용사, 에인델 역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너는 얼굴에 주름이 많이 늘었다, 나인베르크."

"누구 놀리나? 한번 성검에게 물어봐다오. 회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이 팔자 주름만 어떻게 좀 없애줄 수는 없냐고."

두 사람은 자리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잠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나인베르크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성동에서는 언제 나왔나?"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세상에 나와있을 생각인가?"

"그렇지."

"몸은 어떻지?"

"좋지 않아. 아마 10년도 버티기 힘들 거야."

태연한 대꾸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올곧기 그지없는 벗은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짖궂은 농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성검의 신력으로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인가?"

에인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베르크는 뭐라고 더 묻지 않았다. 잠시 교장실에 침묵이 흘렀다.

"올테로어로 향하기 전에 작별이라도 고하러 온 거라면 관둬라. 설령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너의 그런 마지막을 바라지 않아."

"너도 말투가 제법 순해지긴 했구나. 그래도 교장을 하니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이봐, 에인델."

에인델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언젠간 그래야 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나도 내 목숨을 허망하게 내던질 생각은 없다. 시간이 남은 한 끝까지 발악할 것이지."

나인베르크가 한숨을 내쉬며 쇼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럼 왜 이곳에 찾아왔나? 설마 정말로 얼굴만 보려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음, 그게 말이지."

이어진 에인델의 말에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추천 입학?"

"그래. 아카데미에 두 아이를 입학시키고 싶은데, 내 존재는 숨기고 네 권한으로 어떻게 해줄 수 있나?"

"물론 가능이야 하지. 그런데 왜? 몹시 당황스러운 요구를 하는군.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자식이라도 생겼었나? 어느 놈팽이지?"

"실없는 농은 말고. 어쨌든 가능하다는 거군."

나인베르크가 재촉하듯 말했다.

"됐으니 제대로 된 설명을 해봐라. 네 존재를 숨기라는 걸 보니 설마하니 후계를 양성할 마음이 든 것도 아닐 테고, 대체 뭐냐?"

에인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인베르크, 이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네게 이유는 설명해줄 수 없어."

"······어째서?"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나인베르크는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성검과 관련된 건가.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해해줘서 고맙다."

"내가 해줘야 될 일은 그것뿐인가?"

"그래. 그저 입학만 시켜주면 된다. 다른 건 특별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

나인베르크는 에인델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만큼 절대적인 신뢰였다. 바란다면 목숨조차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줄 수 있는.

찻잔을 전부 비운 에인델이 물었다.

"그보다 나인베르크, 아직 보인 건 아무것도 없나?"

나인베르크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 그날 이후로 아무것도. 암운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곧 뭔가 보일지도 모르지."

***

리곤은 성의 기사들을 호위로 대동시켜 진작 먼저 세인테아로 보냈다. 마차로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띠용이를 타고 가도 되긴 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괜히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저기 있군.'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출발한 나는 라피드 시 인근의 숲에 내려섰다.

숲 한가운데에 한 여인이 로브를 걸친 채 서있었다. 용사였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계승자는?"

내 물음에 용사가 대답했다.

"카앤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새학기 시작 전에 기숙사에 먼저 들어가야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들여보냈군.

입학일 전, 그러니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신입생들은 미리 아카데미 내에 위치한 기숙사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했다. 교내 분위기에 적응하고, 학생으로서 필요한 물품들도 제공받기 위해.

아마 지금쯤 리곤도 아카데미 내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 지체할 건 없지. 나도 바로 들어가겠다. 달리 숙지해야 할 사항은 있나?"

"특별히 없다. 전부 이야기했던 대로다. 아, 하나 사소하지만 바뀐 게 있긴 한데······."

"뭐지?"

"그대와 카앤은 검술학부가 아니라 마법학부의 학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게 전부다."

용사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전에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는 분명 검술학부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카앤이 마음을 바꿔서 말이다. 이왕이면 익숙하지 않은 마법을 배우고 싶다더군."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 반응에 용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뭐, 괜찮겠지.

내 마법 실력이 좀 처참하긴 해도 퇴학 당할 정도만 아니면 되니까.

검술 학부가 아니라 마법 학부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러면 리곤과는 학부부터 완전히 갈라지게 생겼네.'

리곤의 존재에 대해서는 특별히 용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계승자와 리곤이 쉽게 친해지려면 리곤에 대해서도 용사에게 말해두는 게 맞았다.

그러면 용사가 아카데미의 교장에게 부탁해서 셋을 같은 반으로 묶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최대한 조심하기 위해서.

용사는 교장을 신뢰하는 동료라고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용사가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진 않았겠지만, 괜히 칼데릭의 군주가 추천한 인물과 용사의 추천한 이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제3의 인물이 괜히 인지하고 싶게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용사를 배신하고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제로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 안일함 때문에 용사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산에서 만난 그 교수까지는 별 수 없지만.'

그런데 이러면 반은 고사하고 학부가 나뉘었으니 리곤과는 좀 멀리 떨어지게 된 셈이었다.

살짝 꼬인 느낌이 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같은 학년 학생인데 어떻게든 만나서 친해지게 할 방법은 있겠지.

"어쨌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제······."

내가 끝말을 흐리자 용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허공에 손을 뻗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모여들며 성검이 나타났다.

"원하는 외모가 있다면 되도록 맞춰보겠다."

"딱히 없다. 머리칼과 눈동자 색은 바꾸고, 나머지는 무난하게 하지."

이제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으로 내 외형을 바꿀 차례였다.

내가 지금 이 얼굴 그대로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참고로 성검의 폴리모프 능력은 쓸데없이 너무 뛰어나서 성별의 전환조차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용사가 아예 여자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전에 내게 진지하게 물었을 땐 기겁했었다.

물론 용사의 입장에서야 최대한 계승자의 안전을 신경 써야 하기에 제안한 것일 터였다.

내가 계승자와 동성이라면 기숙사까지 한 방을 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항시 옆에 붙어서 지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별까지 바꾸는 건 좀.'

그랬다간 제왕의 혼으로도 버티지 못할 자괴감이 몰려올 것 같았기에 거절했다.

아무리 계승자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런 건 내가 못 버텼다.

화아악.

성검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나오더니 내 전신을 뒤덮었다.

온몸에 차오르는 이질감에 불쑥 메스꺼움이 차올랐지만 찰나였다.

이내 빛이 사라지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내 손을 내려다봤다.

"······끝난 건가?"

용사가 성검의 힘으로 내 앞의 허공에 거울을 만들어주었다.

갈색 머리칼에 벽안을 가진, 평범하디 평범한 소년의 얼굴.

나는 얼굴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며 완전히 뒤바뀐 외모를 확인했다.

크게 신기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일인 데다가, 나는 애당초 기존의 얼굴에도 아직까지 그닥 적응이 안 된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체격 역시 아직 미성숙한 소년 정도의 나이에 맞게 조금 작아졌다.

용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어떤가?"

"괜찮은 것 같다. 음."

아, 목소리까지 어려졌군.

나는 조금 헐렁해진 로브를 다시 올려입었다.

갑자기 변한 몸에 이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야 금방 적응될 것이었다.

"혹시라도 폴리모프가 풀리거나 들킬 일은 없겠지?"

"없다. 대마법사가 오더라도 꿰뚫어보거나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용사가 저렇게 확언한다면 걱정할 일은 없겠지.

나는 띠용이에게 다가갔다.

"성으로 돌아가라, 띠용아. 왔던 길 그대로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이제 한동안은 못 만날 거다."

띠용이는 아쉬운 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손에 머리를 부벼대다가, 이내 날갯짓을 하며 떠올랐다.

하늘 저편으로 순식간에 멀어지는 녀석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보겠다."

용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엘폰 아카데미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 신분 증명에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럼 믿고 맡기겠다, 7군주."

그렇게 용사도 떠나고, 홀로 숲에 남은 나는 잠시 가만히 서있다가 몸을 돌렸다.

라피드 시, 엘폰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으로.

***

"우와."

엘폰의 정문을 통과한 카앤은 아카데미의 내부 전경을 구경하며 탄성을 뱉었다.

산맥에서 나와 델을 따라다니며 여러 도시들을 구경했지만, 이렇게나 크고 높은 건물들은 처음 봤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안내인이 멈춰선 그녀를 재촉했다.

"이쪽입니다, 카앤 학생."

"아, 네."

카앤은 어서 기숙사로 가서 자신이 머물 방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바로 입실할 수는 없었다.

아까부터 뭘 이리 묻고 확인할 게 많은지 또 관계자들과 한참을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델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기에 카앤은 얌전히 말에 따랐다.

그렇게 입학 절차를 전부 마친 다음에야 기숙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카앤의 방은 220호로 복도 끝쪽에 위치해있었다.

그녀는 받은 룸키를 꺼내들고 어설프게 문고리에 밀어넣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고 깔끔한 방 내부가 펼쳐졌다.

가구들은 책상과 침상 등 기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카앤은 잠시 방을 둘러보다가 방 한편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층 침상의 위층 침대로 올라가서 냅다 드러누웠다.

'2명이 한 방을 같이 쓴다고 했었지.'

방을 같이 쓰게 될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녀는 선잠에 들었다.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난 건 잠시 뒤였다.

몸을 일으킨 카앤은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 현관에 어색하게 서있었다.

"저기······."

카앤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안녕?"

"어? 어. 안녕."

"나 여기 방인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깜빡 잠들었어. 너도 이 방이지?"

소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스카라고 해. 에스카 마리올즈. 너는?"

"난 카앤."

"카앤이구나. 성은?"

"성? 그런 건 딱히 없는데. 그냥 카앤이야."

소녀, 에스카가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카앤. 룸메이트가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해."

훌쩍 침대에서 뛰어내린 카앤이 그녀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나도 반가워! 잘 지내보자!"

***

라피드 시 안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정문에서 경비들과 함께 서있던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서 이동했다.

전에 신비를 찾을 때도 한 번 온 적이 있던 장소였지만, 제대로 다시 보니 넓기는 엄청 넓었다.

본관 같은 건물의 카운터에서 신분 증명과 물품 지급 등 필요한 절차들을 마쳤다.

지급받은 물건은 교복이나 학생 수첩 등, 앞으로 필요한 용품들이었다.

그렇게 정식 입학 절차를 전부 마친 다음 곧장 기숙사로 이동했다.

기숙사는 남자와 여자 기숙사로 나뉘어있었는데, 두 건물은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계승자는 220호 방에 배정받을 거라고 했었지.'

나는 잠시 기숙사 건물 앞에 멈춰섰다.

초감각을 끌어올린 채 계승자가 있을 곳을 헤아려봤다. 2층의 방이니까······.

'······찾았다.'

2층에서 왼쪽 끝 방.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는데, 들어보니 한쪽은 계승자인 카앤이 맞았다.

벌써 룸메이트와 친해진 건가 생각하며 나는 남자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 건물이고, 위치는 파악했으니 방에서도 그녀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205호.'

내가 배정받은 방은 205호였다.

방문 앞에 선 나는 방 안에서 기척을 느꼈다. 내 룸메이트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모양이었다.

철컥.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룸메이트의 얼굴을 확인하고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듯했던 리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뭐지?

이런 우연이 있다고?

방 배정은 학부가 아니라 학년별로만 나뉘는 거라고 했으니, 검술학부인 리곤이 나와 같은 방으로 배정받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했지만······.

"안녕."

리곤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녀석이 내 정체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나도 황당함을 숨기고 인사했다.

"안녕."

"너도 이 방에 배정받은 거지? 둘이서 한 방을 쓰는 거라고 하더라."

"어, 알고 있어."

"나는 리곤이야. 너는?"

나는 새로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랜. 앞으로 잘 지내보자."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리곤과도 가까운 관계가 돼야 했는데, 운 좋게 같은 방이 됐으니 금방 친해질 수 있으리라.

***

개학일, 그러니까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날짜는 내가 기숙사에 들어온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정도 뒤였다.

그동안 나는 아카데미 내에서 무난하게 시간을 보냈다.

리곤과는 빠르게 친해졌다. 군주성에서도 굉장히 스스럼없는 성격이었던 리곤이었기에 친해지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계승자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신경 써서 살폈다.

길을 오가며 종종 마주치기는 했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개학하면 같은 반이 될 테고, 특별한 접점도 없는 지금 애써 무리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산맥에서 봤던 계승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다고 해서 경계를 사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공용 도서관에도 한 차례 방문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이전에 몰래 잠입했을 때는 아직 신비가 생성되지 않은 건지 허탕만 쳤었던 그 책장을.

'없네.'

하지만 여전히 신비는 없었다.

언제 생성될지 모르는 거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틈틈이 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개학일 바로 하루 앞까지 다가왔다.

개학일 전날에는 신입생 입학식이 있었기에 강당 같은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이곳에서 개인의 길과 적성을 찾아 성장할 수 있도록······."

우글우글 모인 학생들 가운데 섞여 앉아, 나는 강단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바라봤다.

아카데미의 교장. 용사의 동료이자, 우리가 순조롭게 입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인물.

그는 짧은 환영사를 마치고서 금방 한쪽으로 물러섰다.

교장을 포함해 몇몇 인사들이 연설을 마친 다음으로는, 신입생 대표의 선서였다.

판타지 세계의 학교라고 해도 지구 학교의 입학식과 별다를 건 없었다.

"레아 헤리윈, 바이온 렉시오. 두 신입생 대표는 강단 위로 올라오십시오."

강단 위로 두 학생이 올라와서 나란히 섰다.

다른 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남학생과, 눈에 띄는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학생.

나는 그중 한 명의 레벨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Lv. 36]

남학생도 높은 편이었지만, 여학생 쪽의 레벨은 무려 30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리곤보다도 1레벨이 높은 레벨.

이 자리에 있는 신입생들 대부분이 20레벨도 안되는 걸 생각하면 압도적이다 못해 그냥 수준이 달랐다.

'헤리윈이라면 분명······.'

두 사람은 동시에 선서문을 또박또박 읽은 다음 도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 다음으로는 1학년을 맡은 교수들 소개를 간략히 하고 입학식은 곧 마쳐졌다.

하루가 지나고 개학일이 되었다.

수업은 오전 8시부터 시작이었기에 나와 리곤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기 바빴다.

"수업 잘 들어. 이따가 점심 때 보자!"

"그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뒤 리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리곤과 나는 학부가 달랐기에 아예 수업을 받는 건물부터가 달랐다.

'이스릴 반.'

마법학부의 1학년은 총 3개의 반이 존재했는데, 그중에 내 반은 '이스릴'이라는 이름의 반이었다.

반에 도착한 나는 활짝 열려있는 앞문으로 들어갔다.

반 내부는 지구의 대학교 강의실처럼 넓었는데, 구조도 대충 비슷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잠시 몰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적당히 빈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음.'

이제부터 정말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받아야 한다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 생소해지는 와중, 학생들은 계속해서 반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내 기억에 있는 인물도 있었다.

'쟤는······.'

어제 입학식의 신입생 대표였던 여학생.

그녀가 반에 들어서자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녀는 창가 쪽에 위치한 뒷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쟤도 같은 반이 됐나.

잠시 뒤에 소곤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쟤가 걔지? 헤리윈 가의 천재."

"마탑의 정식 마법사랑도 겨뤄서 이긴 적이 있다더라."

"와, 혼자 다른 세계에 사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헤리윈 후작가는 세인테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마법 명가였다. 어제 입학식에서 이름을 들었을 때도 떠올렸었다.

'레아 헤리윈.'

게임상에서는 간접적으로도 등장한 적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억상으로는.

물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천재라고 한들 아직은 애송이일 뿐이고, 고작 몇 년 만에 스토리에서 빠질 수가 없을 정도로 거물로 성장했을 리도 없으니까. 아니면 뭐 참변에 죽었을 수도 있고.

"여기야? 엄청 넓네."

책상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잡념을 이어가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계승자가 떠들석하게 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의 여학생은······ 룸메이트군.

몰린 주위의 시선에 그녀가 눈치를 보며 계승자에게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활기차네.'

벌써 가까운 친구가 한 명 생긴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계승자가 갑자기 이쪽을 쳐다봤기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에스카, 저기 가운데 자리에 앉자."

"어? 저쪽에 빈자리 많은데······."

"나는 가운데가 좋아."

계승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내 앞자리로 다가왔다.

묘한 자리 선정이다 싶어 바라보는데, 나와 다시 눈이 마주친 그녀가 난데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안녕."

물론 계승자와 나는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이다.

두 사람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계승자의 친구가 그녀에게 소곤거리며 묻는 게 들렸다.

"아는 사이야?"

"아니? 모르는 사이인데."

하여간 붙임성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다.

앞으로 이 녀석이 어떻게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키게 해야 할까······.

슬슬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고 더 이상 들어오는 학생이 없을 즈음, 교수가 들어왔다.

앞에서 아까부터 쉬지 않고 떠들고 있던 계승자도 그제야 조금 얌전해졌다.

"저 사람이 교수인가봐, 에스카."

"카앤, 이제 조금만 조용······."

교수는 어딘가 차가운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교실이 완전히 정숙해진 가운데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강단 한가운데의 교탁으로 다가가서 선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1년간 이 반의 담임을 맡을 로켈이라고 한다. 전공은 역장계 마법, 담당 과목은 마법 구성과 대인 전투다."

그 이상 짧을 수 없는 소개를 마친 로켈 교수가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말했다.

"1교시가 내 수업이니 조례는 생략이다. 바로 수업을 시작하겠다."

수업과 적응 (1)

리곤의 삶은 평화로움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위치해있던 삶이었다.

고향은 멸망하고, 자신은 끔찍한 불치병에 걸리고, 누이는 그런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노예 검투사가 되어 몇 년을 생사의 경계 속에서 살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리곤은 새삼 묘한 감정을 느끼며 아카데미의 복도를 걸었다.

검술학부에는 총 5개의 반이 존재했으며, 그중 리곤이 배정받은 반은 '헨릿'이라는 이름의 반이었다.

'여긴가?'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 리곤은 반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몰렸다.

리곤은 인사를 해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기에 그냥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이 하나둘씩 반으로 들어왔다.

그중에 한 남학생이 리곤의 근처로 다가와서 앉아 인사를 건네왔다.

"여, 안녕."

모르는 이였기에 리곤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너 205호 기숙사지? 나 바로 옆방 206호야. 몇 번 지나가면서 봤는데 얼굴 기억 안 나?"

남학생이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에 리곤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어쩐지 조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래, 잘 지내보자."

"제이스 마홉, 내 이름이야. 마홉 가의 삼남인데 우리 가문 들어본 적 있어? 좀 변경에 있긴 해도 남부에서는 꽤 유명한데."

알 턱이 없었기에 리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쩝, 역시 모르는구만. 네 이름도 가르쳐줘."

"난 리곤이야."

"리곤이구나. 성은?"

"성은 없는데."

그 말에 남학생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쳐다봤다.

"아······ 너 귀족이 아니었구나?"

"응."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리곤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난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그럴 생각 전혀 없거든. 오히려 대단하네. 가문도 없으면 순수하게 네 능력만으로 인정받아서 입학했다는 거잖아?"

"음, 그런가?"

"그런 거지. 여기서는 입만 살아서 배경 따지는 게 머저리 같은 짓이라더라. 실력으로 증명해야지."

리곤은 좋은 녀석이구나 생각하며 함께 웃었다.

"그보다 넌 어디 출신이야? 궁금한데 혹시 누구한테 추천받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아, 나는 칼데릭에서 왔어. 세인테아 사람이 아니라······."

리곤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으나, 웃음기 가득했던 남학생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칼데릭?"

순간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그들 또한 남학생과 비슷한 표정으로 리곤을 쳐다봤다.

"그, 그렇구나. 하하."

리곤의 어깨에서 슬며시 손을 뗀 남학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리곤은 왜 그러나 싶어 말을 걸려다가, 그가 겁을 먹은 거란 사실을 깨닫고서 관두었다.

"······방금 들었어? 칼데릭이래."

"진짜 거기서도 사람이 오는구나······."

조금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 주위 학생들이 소곤거렸다.

리곤은 잘 몰랐지만, 세인테아의 사람들에게 있어 칼데릭의 이미지란 이러했다.

대륙의 유일한 드래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거칠고 무자비한 강자존의 땅.

온실 속에서 자라온 어린 귀족들에게 있어선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건가?

뒤늦게 어떤 분위기인지 감을 잡은 리곤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듯했다.

***

1교시 수업은 마법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한 수업이었다. 마력의 방출과 술식의 전개에 대한.

간단히 말해서 모든 마법을 펼치는 데 있어 적용되는 과정을 자세히 탐구하는 것이었다.

"즉, 술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정해진 형태가 없다. 개개인이 다르게 느끼는 심상을 말로 설명해서 가르치는 건 고블린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조금 덜 머저리 같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그런데도 이런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이 수업에 유의미한 배움이 있다고 생각하나?"

로켈 교수가 대답해보라는 듯 앞자리에 앉은 한 남학생을 바라봤다.

"어, 그게 그러니까······."

남학생은 당황해서 더듬거리기만 할 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턱을 긁적였다. 물론 나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교수의 시선이 다른 학생에게로 향했다.

"모든 술식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이론을 배우려고······."

"그건 이 다음에 있을 이론 마법 수업에서 열심히 배우도록. 다음."

계속해서 다른 학생들의 대답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게도 교수의 시선이 닿았기에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가 당당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는 별 반응 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이었다. 레아 헤리윈.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고 대답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그제야 교수의 표정에 미약한 변화가 생기는 게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이미 제 술식의 형태가 어떤지를 완전히 인지하고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러니 적어도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업이 맞습니다. 술식과 관련해서는."

교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 말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대답해보겠나?"

그녀가 주위를 한 번 힐끗 둘러보고는 말했다.

"앞서 말씀하셨다시피 술식은 본질적으로 무형합니다. 때문에 아직 자신의 술식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미숙한 마법사들은 술식의 형을 다르게, 더 적합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수업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저와는 다른 이유로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겠죠."

물 흐르듯 매끄러운 대답.

교수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정답이 맞는 듯했다.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씹어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나?'

내가 군주성에서 마법을 배울 때도 가르치는 역할을 했던 마법사는 내게 다양한 술식의 형을 최대한 말로 설명하며 알려주려고 애썼었다.

그건 방금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내가 술식을 다르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지를 기대했기에 그랬던 것이리라.

교수가 턱을 긁적이며 다시 레아 헤르윈에게 물었다.

"자네가 술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게 어느 시점이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인지했습니다."

"타고났군. 다들 방금의 설명은 잘 들었나?"

그가 교탁을 툭툭 두드리고서 말을 이었다.

"술식은 무형하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계기야 아무래도 좋다. 이 수업은 그 계기라는 걸 너희들에게 최대한 많이 제시해주기 위해 마련된, 1학년에만 존재하는 기초 수업이다."

"······."

"들었다시피 아주 간단한 이유지. 들으면 누구나 그렇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데 질문에 대답한 건 단 한 명뿐이다. 그것도 애당초 이 수업이 필요하지도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알 필요가 없는 학생이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학생들이 침묵했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했겠지. 문자나 그림으로 그럴듯하게 표현된 술식들을 많이 접하고, 외웠을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은 품지 않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딱히 의문을 품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었으니까.

"물론 그런 식으로도 실력은 발전한다.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뛰어난 마법사도 될 수 있겠지. 그러나 마법의 본질은 탐구하는 것이다. 사소한 의문과 궁금증 하나까지도 샅샅이 전부. 너희가 책으로 봐온 술식들도 수많은 마법사들의 그러한 탐구의 산물이다. 남들이 편하다고 알려준 길만 걷다간 그저 그뿐인 마법사가 될 것이다. 뛰어날지언정 결코 위대하지는 못한."

대부분 학생들의 묘한 표정을 짓자 교수는 조금 김이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위대하느니 어쩌니, 평생을 마법에 전념하며 살 것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맞다. 적당히 할 녀석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학업에 전념하고, 적당히 퇴학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해서 적당히 졸업해라. 나도 그런 어중간한 놈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으니. 그렇지 않은 녀석들에게는 내 말이 사소하게나마 조언이 되었기를 바란다."

교수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첫 수업은 이 정도로 마치겠다. 남은 시간은 휴식해라. 종례는 따로 없으니 수업이 전부 끝나면 그대로 해산하면 된다. 설마 아직까지 교칙도 다 숙지 못하진 않았겠지."

교수가 반 밖으로 걸어나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일 있는 대인 전투는 이 수업처럼 말로만 떠드는 수업이 아니니 단단히 준비들 하고 오도록."

그가 나가고 나서도 교실은 한동안 침묵에 잠겨있다가, 곧 긴장이 풀어진 분위기가 되었다.

교수 성격이 깐깐하다느니, 앞으로 힘들 것 같다느니, 몇몇 학생들이 작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앞자리의 계승자를 바라봤다.

"말하는 게 왠지 좀 재수없는데?"

"카, 카앤. 교수님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친구인 여학생이 당황하며 계승자를 말렸다.

그래도 수업이란 것 자체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계승자의 입가엔 재밌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갑자기 따분하다고 다 때려치고 나가기라도 하면 그것도 곤란하니 잘된 일이었다.

***

다음 수업은 이론 마법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는 로켈 교수보다는 비교적 젊은 여성이었다.

"이론 마법 과목을 맡은 마린드 필리스티아 교수라고 합니다. 전공은 해독계 마법입니다. 혹시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 학생은 얼마든지 질문하도록 하세요."

질문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없다면 바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죠."

이론 마법이란 말 그대로 마법의 이론에 관련한 것이었다.

무한한 형태를 가진 술식에서 그나마의 공통성들을 찾고, 그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학문. 수많은 마법사들이 아주 오랜 시대에 걸쳐 정리하고 발전시킨 인고와 지혜의 총집합.

성에서 마법을 배울 때 날 가르쳤던 마법사는 이렇게 비유했었다.

'술식이 육체라면, 이론은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육체 자체를 단련하는 거라면, 거기에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무기를 잡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어울리는 무기는 각자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검이 가장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메이스가 가장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채찍이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이론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규칙성을 술식에 응용하여 무기의 숙련도를 높이는 게 이론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 라고 했었다.

대마법사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는 것 역시 대체로 이론에서부터 출발되는 거라던가.

'근데 더럽게 어렵지.'

마법 이론은 술식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분야의 자질이긴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내게 있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이 이론이라는 거야말로 정말 수학 공부와 다름이 없었으니까.

내가 고등학교 때도 일찍이 포기하고 손을 놨던 과목이 바로 수학이었다.

마린드 교수가 학생들을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4명으로 나누면 적당하겠네요. 자, 지금 바로 넷씩 가까운 사람끼리 붙어앉도록 하세요. 제 수업은 조별 형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조별 수업? 그런 식으로도 하는 건가.

나는 이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붙어있는 사람끼리 조를 이루는 거라면 나는 계승자와 한 조였으니까.

"음, 아니다. 그냥 출석 명단 순으로 나눠야겠네요. 다들 다시 앉으세요."

그런데 학생들이 우왕좌왕거리는 걸 본 교수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아, 그냥 그대로 하지.

"아리아 맨카스트, 앤디 그리밋, 오실리아 트로앙······."

그렇게 내가 속하게 된 조에는 아쉽게도 계승자는 없었다.

대신 한 명 보통이 아닌 녀석이 있었는데, 레아 헤리윈이 나와 같은 조가 되었다.

"첫 수업의 주제는 화염 마법입니다. 지금부터 자료를 나눠드릴 테니, 제가 칠판에 적는 문제를 자료에 제시된 이론을 적용해서 풀어보도록 하세요. 우선 조원들끼리 문제를 논의하고 푼 다음 제가 해답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할 겁니다. 시간은 30분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눠받은 자료와 칠판의 문제를 훑어보고서 벌써부터 머리가 난잡해지는 걸 느꼈다.

원소 마법에서 가장 기초에 속하는 화염 마법.

물론 나도 지금은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이론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마법 이론이란 건 마법의 기본적인 형식을 다양하게 응용시키는 학문이기도 했으니까.

"저기······ 어떻게 할까?"

조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까지 포함해서 조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레아 헤리윈에게.

자료를 읽고 있던 그녀가 우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분담해서 풀어야지."

"응, 그렇지. 근데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논의부터 해야 될 것 같은데······."

"할 필요 없어. 해석 다 끝났으니까."

그 말에 그녀는 무언가를 종이에 슥슥 적고는 보여주었다.

"이런 식으로 풀면 되는 문제야. 계산할 부분은 내가 분담해줄 테니 각자 계산하도록 해. 이견 있어?"

조원들이 입이 떡 벌어져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도 속으로 놀랐다. 자료 받고 몇 분도 안 지났는데 그새 혼자 문제를 해결했다고?

'진짜 천재구나.'

레아는 이내 종이 4장에 계산식을 나눠적어서 척 봐도 가장 어려워 보이는 식은 자신이 가져가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해석이 끝났으니 각자 계산만 해서 합치면 문제 풀이는 끝이었다.

"······."

나는 종이에 펜을 끄적거리며 내 몫을 열심히 계산했다.

하지만 썩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런 단순 계산조차도 입문자인 내게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부호 해석이 헷갈려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고, 기댓값이 안 나와서 했던 계산을 몇 번이나 다시 하고······.

그렇게 버벅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다른 조원들은 전부 다 계산을 끝내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좀 민망한데?'

순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집중된 시선 속에 나는 묵묵히 계산을 계속했다.

"5분 남았습니다. 슬슬 정리하세요."

교수의 말에 레아가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아직도 안 끝났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데 5분 안에는 못 끝낼 것 같네."

그녀가 내 종이를 들여다봤다.

종이에 적힌 처참한 풀이 흔적들을 슥 훑어보고는, 경멸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입학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네."

그녀는 고맙게도 내 종이를 낚아채가서 자신이 마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버리더니 나머지 종이들까지 모아서 한 데에 장문의 해설을 써내려갔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좋네.'

이런 녀석과 같은 조가 됐으니, 앞으로도 이론 수업은 적당히 얹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이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하루의 수업은 점심 시간인 정오를 기준으로 오전에 두 수업, 그리고 오후에 한두 수업이 존재했다.

생각보다 빡세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이 90분이었기에 그렇게 널널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음.'

나는 친구와 함께 반에서 나가는 계승자를 바라보며 아는 척을 할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어째 열대여섯 살짜리 애랑 친구 먹는 게 흑해 여제랑 싸울 때보다 까다로운 것 같은 기분일까.

이건 내가 필요 이상으로 신중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승자와 친분을 쌓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시작부터 망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으니까.

일단 점심은 넘기기로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한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식당으로 이동한 나는 리곤과 만났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학비에 전부 포함되는 것이었기에 사비는 따로 들지 않는다.

"수업은 어땠어? 마법이면 이것저것 배울 게 많을 것 같은데."

"글쎄. 그냥저냥 들을 만한 것 같네."

그러고 보니 리곤 얘는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도 배웠던가.

줄을 선 채 잡담을 떨다가 식사를 받고서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는데······.

'어.'

문득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계승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마침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리곤에게 물었다.

"리곤, 저기 가서 앉을래?"

"어? 아는 사람이야?"

"나랑 같은 반 애들인데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계승자와 연결고리를 만드는 건 나보다도 리곤이 더 문제였는데, 마침 좋은 기회였다.

리곤은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자 계승자의 친구가 먼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고기를 써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계승자도 이내 우릴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 혹시 나 누군지 기억해?"

계승자의 친구는 알아보는 눈치였다.

"아까 수업 때 뒷자리에 앉은······?"

"맞아. 혹시 합석해도 될까? 앉을 자리 찾는데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말이야."

그녀가 눈을 깜빡이다가 계승자를 돌아봤다.

계승자가 입에 한가득 담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같이 앉고 싶다는 거야? 상관없어."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한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랜이라고 해. 그리고 이쪽은 리곤. 마법학부는 아니고 검술학부인데, 내 룸메이트야."

"으응, 반가워. 난 에스카 마리올즈야. 우리 둘도 룸메이트라서 금방 친해졌어."

계승자의 친구, 에스카가 서먹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난 카앤이야. 그런데 너희들도 이름에 성이 없네?"

계승자가 껴들어서 왜인지 반가운 기색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우리 둘 다 평민이니까."

"평민, 그거 귀족이 아니라는 뜻이지?"

나는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상하게 내가 말 거는 애들마다 말이야, 내 이름을 알려주면 꼭 성이 뭐냐고 물어보고, 성이 없다 하면 왠지 그냥 무시해버리거든. 에스카만 빼고."

"······."

"혹시 너희도 그래? 왜 그런 건지 알아?"

천진한 질문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에스카는 몰랐던 이야기인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계승자는 아직 세간의 상식이 부족하다. 당연히 계층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것이었다.

막 수프를 뜨던 리곤이 그걸 왜 모르나 싶은 기색으로 말해주었다.

"보통 평민이라면 무시하는 귀족들이 많아서 그래."

"그래? 왜?"

"그야 신분이 낮으니까?"

계승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신분이 낮다고 무시한다고? 어째서?"

"어째서냐니······ 그냥 귀족은 원래 그래. 자기보다 가진 게 없으니까 무시하는 거지. 에스카라고 했나? 네 친구처럼 평민이라고 무시하지 않는 귀족은 드물걸. 굳이 귀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잖아?"

아무렇지 않게 냉소적인 이야기를 하는 리곤을 보며 나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얘는 계승자처럼 산속에서만 산 것도 아니고 리프와 함께 겪은 일들이 많을 테니.

계승자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자기 에스카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스카, 너 진짜 좋은 녀석이었구나? 귀족인데도 나랑 어울려주고."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하하······."

에스카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겠어. 나도 명색만 귀족일 뿐인데."

"응? 그건 무슨 소리야?"

"그냥 너희들이랑 다를 것 하나 없다는 소리야. 우리 가문은 변방의 작은 가문이거든.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귀족이 아니야."

약소 귀족이라는 거군.

당연히 귀족이라고 해서 잘 사는 귀족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에스카 넌 좋은 녀석이야."

"그래, 그래."

에스카는 계승자에게 이미 익숙한지 막무가내식 말에도 적당히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아, 그런데 나도 내 출신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안 말하면 왠지 속이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때 리곤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난 세인테아가 아니라 칼데릭 출신이야. 칼데릭에서 7군주님께 추천을 받고 엘폰에 입학하게 됐어."

내게는 이미 꺼낸 적이 있는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그걸 왜 말하나 싶었다.

계승자는 별 반응 없었다.

그래서 뭐? 라는 얼굴로 리곤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어? 7군주라면······ 아."

무언가 생각난 듯 말하려던 계승자가 아차 싶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했다.

전에 나와 만났던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용사에게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 꺼내지 않고 잘 멈췄다.

"카, 칼데릭?"

리곤의 말에 에스카는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격한 반응에 계승자가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고, 리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애들한텐 칼데릭 출신의 사람이 썩 달갑지는 않은가봐. 반에서도 어쩌다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들 날 피하더라고."

"그래? 왜 그러지?"

아, 그런 거였나.

상황을 이해한 나는 이야기에 껴들었다.

"세인테아 사람들에겐 칼데릭의 인식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래.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곤은 좋은 녀석이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오해 같은 거 안 하는데? 애초에 왜 인식이 나쁘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난 칼데릭 출신이라고 피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전혀 아무렇지 않은 계승자의 반응에 리곤도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렇지, 에스카?"

"어? 어······ 미안. 그냥 조금 놀라서."

에스카가 리곤의 눈치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보통의 반응이기는 할 터였다.

"그런데 리곤, 7군주와는 무슨 사이야? 칼데릭의 군주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던데, 그럼 너도 대단한 가문 사람인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분께 우연히 목숨을 구원받아서······."

계승자도 나와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리곤의 이야기에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내 앞에서 나에 대한 걸 주제로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공통 분모가 생긴 건가?'

뭐가 됐든, 두 사람이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게 될 것 같았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수업과 적응 (2)

다음날 2교시 수업은 대인 전투 수업이었다.

어제 들었던 대로 수업을 맡은 담당 교수는 담임인 로켈 교수였다.

학생들은 교실이 아니라 넓은 훈련장 같은 장소로 이동해서 둥그렇게 둘러섰다.

"대인 전투 수업은 이름 그대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전투를 훈련하는 수업이다."

교수가 한가운데에 서서 수업에 대해 설명했다.

"너희들은 우선 같은 마법사를 상대로 싸우는 마법전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마법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여지없이 어제의 수업처럼 질문이 던져졌다.

그러나 이번엔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로켈 교수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 따윈 없다. 상대보다 우월한 마력량, 우월한 마법 전개 속도, 익힌 마법의 다양성과 조합의 효율성, 상대의 마법을 읽고 파훼하는 통찰력, 환경 활용, 심리전, 전부 다 빠짐없이 중요하지. 압도적인 기량 차이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몇 가지 요소 따위로 절대적인 우위를 판가름할 수 없는 변수 덩어리가 바로 마법전이다."

그가 난데없이 두 학생을 집어서 가리켰다.

"말했다시피 이 수업은 말로만 떠드는 수업이 아니다. 거기 두 사람, 이름이 뭐지?"

지목을 받은 학생들이 대답했다.

"세바스 마디르입니다."

"한트 아센입니다."

"세바스 마디르, 한트 아센. 가운데로 나와서 마주 서라."

그들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나와 훈련장 한가운데에 마주 섰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교수가 상대해주며 가르치는 게 아니라 첫 수업부터 학생들끼리 싸우게 하는 건가?

"규칙이나 제한은 따로 없다. 대련이지만 실전이라 생각하고, 지금부터 서로 최선을 다해 겨루도록."

로켈 교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 팔짱을 끼고 섰다.

갑자기 싸우라는 말에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교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승리 기준은 내 판단 하에 대련을 중단시킬 때까지다. 대련의 내용과 결과는 모두 성적에 포함된다."

성적에 포함된다는 말에 그제야 두 학생은 진지해진 기색이었다.

"셋을 세면 시작이다. 하나, 둘······."

전투가 시작하고 선공으로 세바스가 먼저 화염구를 피어올렸다.

상대도 거의 동시에 방어 마법을 전개했는데, 방어막에 충돌한 화염구가 확 터지며 불길을 퍼뜨렸다.

진짜 실전과 다름없이 시작된 전투에 몇몇 학생들은 익숙하지 않은지 긴장한 기색이었다.

콰앙! 쾅!

연달아 굉음이 울리며 마력이 충돌했다.

전투의 양상은 한동안 세바스가 계속 공격 마법을 펼치며 몰아붙이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트에게 갑자기 흐름을 뺏겨 역으로 몰아붙여지기 시작했다.

세바스가 상대의 충격파 마법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제야 교수가 나섰다.

"그만. 대련 종료다."

한트는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숨을 내뱉었고, 세바스는 분한 기색으로 살짝 인상을 구겼다.

로켈 교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세바스 마디르, 대련은 자네의 패배다. 패배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제 마력량과 출력이 상대보다 조금 더 부족했습니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동등했다면 제가 먼저 승기를 잡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상대가 자신보다 마력의 총량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자진해서 전투를 화력전으로 끌고 갔다는 게 되는군. 방어막에 대고 공격만 쏟아부으며 말이지."

"······."

"물론 반대로 자네의 마력 총량이 더 월등했다면 먼저 주도권을 잡아 승리할 확률이 높았겠지만, 결과는 마력을 먼저 전부 소진해버린 것이 패인이 되었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도 그런 도박을 할 수 있겠나?"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세바스는 아차 싶은 기색이었다.

"다시 물어보겠다. 패배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마력의 총량도 부족했지만, 시작부터 상대의 기량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의 역량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전투를 끌어갈 것이지?"

"최대한 마력 소모를 아끼면서 상대를 탐색하는 걸 최우선으로 할 것 같습니다."

로켈 교수가 피식 웃었다.

"그래, 탐색. 기본 중의 기본이지. 말하면서도 스스로 이 당연한 걸 왜 잊고 있었나 생각할 것이다. 말과 글로는 배웠지만, 그런 쉬운 것 하나도 실전에서 상기하고 적용하는 건 이토록 차이가 큰 일이다."

그가 한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트, 자네는 대련에서 승리했지만 스스로에게 지적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처음에 방심해서 너무 쉽게 상대에게 주도권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지 않았다면 승기를 더 쉽게 잡을 수 있었겠지. 마력 총량 외에는 얼추 수준이 비슷했으니."

로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외에도 부족한 것들은 산더미지만 첫날이니 이 정도로 마치지. 당장은 방금 말한 요소들이 중점이었다. 충분한 공부가 되었길 바란다. 이만 들어가도록."

짧고 명확한 피드백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수업인 거군.

두 사람은 희비가 엇갈려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로켈 교수는 곧바로 다음 대련자들을 찾는 듯 학생들을 훑다가 시선을 멈추었다. 바로 내게서.

그리고 그 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사람은 다름이 아닌 레아였다.

"거기 두 사람, 이름이 뭐지?"

······하필 또 쟤인가?

어제 이론 수업부터 참 우연찮게 잘 엮인다 싶었다.

"랜입니다."

레아도 내가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레아 헤리윈입니다."

"가운데로 나오도록. 지금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모든 학생들이 한 번씩 대련을 할 것이다."

나와 레아는 훈련장 한가운데로 나와서 마주 보고 섰다.

몇몇 학생들이 내게 불쌍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여서리라.

물론 내가 마법만으로 대련에서 이길 방도는 없었다.

그녀의 레벨은 36, 반면 내 마법 실력은 레벨 수치로 따지면 아마 20도 안되지 않을까 싶었다.

'몇 초 만에 끝나는 거 아니야?'

딱히 제한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마법전 수업인데 몸을 강화해서 싸우는 것도 그렇겠지. 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련이 시작하고 나는 곧바로 공격에 대비해 방어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레아는 어째서인지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기회를 줄 테니 얼마든지 공격해보라는 태도였다.

'뭐, 그렇다면야.'

나는 피식 웃으며 공격 마법을 펼쳤다.

어차피 내 공격이 그녀의 방어를 뚫을 일은 없을 테니, 마음 놓고 전력으로.

쩌엉!

좁은 범위에 집중시켜 날린 충격파 마법이 방어막에 막혀 소멸했다.

의외의 위력이라 생각했는지 레아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이어서 화염구들을 만들어 그녀의 주위로 퍼뜨렸다.

그녀는 방어막을 전신을 덮는 구형이 아니라 면 형태로 만들어서 방어하고 있었는데, 저러면 마력 소모는 적지만 까딱 상대의 공격을 놓치면 골로 갈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한마디로 저건 굳이 마력으로 찍어누르지 않아도 조작 능력만으로 내 마법을 모두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화염구를 어지럽게 빙빙 회전시키다가 온갖 각도에서 엇박으로 쏘아냈다.

그에 레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면 형태의 방어막 몇 개를 더 형성하더니, 몰아치는 화염구들을 모조리 막아냈다.

생각한 것보다도 너무 간단히 막혀버렸다.

그나마의 내 강점인 마력 제어 능력도 나보다 훨씬 위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분야가 없었다.

이제 더 떠오르는 공격 패턴도 없었기에, 나는 그냥 던지고 보는 심정으로 섬광 마법을 펼쳤다.

번쩍!

강렬한 빛이 터지며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에 나는 다시 화염구를 만들어서 쏘아냈다. 그러나 역시 헛수고였다.

저 정도 수준의 실력자가 고작 시야가 제한됐다고 공격에 대처를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시야가 다시 돌아오고,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방어막을 거두고서 입을 열었다.

"더 보여줄 거 없지?"

그리고선 손을 뻗더니 충격파 마법을 펼쳤다.

나는 곧바로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방어막은 충격파와 충돌하자마자 산산히 박살났다.

나는 휘청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딱 방어막만 깔끔하게 파괴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대련 종료다."

명백히 가름난 승부였기에 로켈 교수가 나섰다.

그래도 할 건 다 해보고 졌기에 별 아쉬움도 없었다.

"랜, 패배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모든 면에서 역량 차이가 너무 났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그런 상대와의 전투를 어떻게 이끌어갈 생각이지?"

나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이끌긴 뭘 이끌어? 모든 면에서 다 압도적이었다니까. 그냥 묻는 건가.

"그냥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뿐인가?"

"운에 맡겨서 도박수도 던져보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도주도 시도해보겠지요. 애초에 그런 적과 싸워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요."

나름 진지한 대답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켈 교수도 실소를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력 제어 능력으로 승부를 걸은 건 네게 최선이었지만, 그 이전에 역량 차가 너무 컸다. 마력량과 제어 능력은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전부 수준 미달이더군. 앞으로는 마력적인 부분보다도 술식의 진전에 집중해야 할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식에 약한 나는 아직까지 익힌 마법도 적고, 마법을 펼치는 속도도 상당히 느린 편이었다.

마지막 일격도 상대가 대놓고 막으라고 여유를 줬기에 방어할 시간이 있던 거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방어막을 펼칠 새도 없었겠지.

"레아 헤리윈, 자네는······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한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교수의 물음에 그녀가 감흥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최선을 다했으면 시작하자마자 끝났을 테니까요. 그런 건 대련으로서 의미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대를 배려했다는 건가?"

"수업의 의미를 흐리고 싶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그건 내가 듣기에 조금 뼈가 있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학생끼리 대련을 시켜봤자 자신에게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뜻처럼.

그리고 정말 그런 의미로 한 말이라고 해도 오만함이라 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녀의 레벨은 신입생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

로켈 교수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만 자리로 돌아가도록."

몇몇 학생들 차례가 지난 다음에는 에스카의 차례였다.

긴장한 기색의 그녀에게 계승자가 웃으며 등을 툭 두드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후우······."

대련이 시작하고, 의외로 에스카 쪽이 먼저 공격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충격파 마법이 날아갔지만 기민하게 대응을 준비하고 있던 상대의 방어 마법에 쉽게 막혔다.

[Lv. 11]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대련의 결과를 쉽게 짐작했다.

왜냐면 에스카의 레벨이 상대보다 낮았으니까. 그녀의 레벨은 반에서도 거의 최하위 수준이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에스카의 전력을 대충 파악했는지 상대가 곧장 반격에 나섰다.

에스카는 그 거친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다가 금세 한계가 왔다.

퍼엉!

에스카의 방어막이 상대의 공격에 산산히 박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방어막이 그녀의 주위로 생기며 충격을 막아냈다.

위험한 일이 생기기 전에 방어막을 둘러준 것은 로켈 교수였다. 손을 거둔 교수가 입을 열었다.

"대련 종료다."

그가 에스카를 바라보며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에스카 마리올즈, 자네의 패배다. 패배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에스카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마법 실력이 전체적으로 상대보다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맞다. 가감없이 말해서 신입생인 걸 감안하고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자네는 전투라는 영역보다도 순수한 마법이라는 영역에서의 능력부터 일단 더 키울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정말로 가감없는 독설에 에스카의 낯에 그늘이 드리웠다.

두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계승자가 풀이 죽은 그녀에게 뭐라 말을 걸려다가 마는 게 보였다.

시선을 돌린 계승자가 째려본 것은 로켈 교수였다. 친구가 심한 말을 들어서 화난 건가.

계승자의 순서는 거의 마지막 차례가 돼서야 다가왔다.

그래봐야 대부분 학생들이 입문자 수준이었기에 몇 번 공방을 주고받으면 마력을 다 소진해서, 대련 한판 한판은 금방 끝났다.

나는 마주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마법 수준은 아직 초심자라 했던가.'

용사에게 듣기로, 계승자는 검술뿐 아니라 마법에도 굉장히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 했었다.

다만 검술과 달리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나처럼 기초 마법들이나 몇 가지 쓸 줄 안는 게 전부라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대련의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마법은 아직 초심자 수준이라 해도, 마력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Lv. 32]

리곤이나 레아보다는 낮지만 그녀의 레벨 역시 30대.

마력 자체의 수준은 마찬가지로 신입생 레벨이 아니었다.

대련이 시작하자마자 계승자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말했다.

"화염 마법으로 공격할 거야. 제대로 막아."

"······응?"

그러더니 곧바로 보란 듯이 화염을 피워올렸다.

상대가 황급히 방어 마법을 펼친 뒤에야 불덩이를 쏘아냈다.

퍼엉!

굉음과 함께 상대방의 방어막이 반쯤 박살난 것이 보였다.

계승자가 그걸 보고는 다시 한 번 화염을 피워냈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더 크게.

"한 번 더 간다."

그에 상대는 기겁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교수가 입을 열었다.

"대련 종료다."

교수를 돌아본 계승자가 코웃음을 치며 불꽃을 꺼뜨리고는, 그에게 적대적인 투로 물었다.

"전 어땠습니까? 교수님."

로켈 교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력의 수준도 뛰어났고, 마법의 전개 속도도 뛰어났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벌였군. 실전에서도 그렇게 상대에게 공격을 예고하고서 공격할 건가?"

"아뇨. 근데 이건 대련이잖아요."

"대련이라도 실전처럼 임하라고 말했을 터다."

잠깐 말문이 막힌 계승자가 생각났다는 듯 대꾸했다.

"제가 최선을 다했으면 상대가 처음 공격도 못 막고 바로 끝났을 것 같은데요? 그건 이 수업의 의미를 흐리는 게 아니에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살짝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까 레아가 교수에게 했던 말을 어설프게 빌려 말하고 있는 계승자였다.

그냥 별 이유도 없이 교수가 마음에 안 들어서 꼬장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반응이 궁금해서 레아가 있는 쪽을 돌아보니 그녀가 곱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계승자의 반항적인 태도에도 로켈 교수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네 무례함이 친구의 면을 살려주진 않을 것이다. 이만 자리로 들어가도록."

결국 한마디를 들은 계승자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교수의 말에서 자신이 그닥 좋지 않은 짓을 했다는 건 알았는지 상대였던 학생에게 말했다.

"미안해. 장난치려거나 널 무시할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었어."

"어? 응······."

남은 학생들의 대련까지 모두 끝나고 나니, 타이밍 좋게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첫날의 수업들보다도 훨씬 빡센 수업에 진이 빠져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로켈 교수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이제 고작 첫 수업이다. 다들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는 편이 좋을 거다."

***

한편 비슷한 시각, 리곤의 헨릿 반 역시 대인 전투 수업을 위해 훈련장에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니까, 다들 쟤가 뭐 그리 무섭다는 거야?"

홀로 멀뚱히 서있던 리곤의 귓가에 근처에서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다.

"칼데릭이라는 이름에만 쫄아서 말이야. 여리여리하게 생긴 게 별로 셀 것 같지도 않구만."

"야, 야. 들리겠다······."

"들리면 어때? 들으라고 해."

"넌 진짜 겁도 없냐? 칼데릭 출신 학생들은 군주한테 직접 추천을 받고 오는 거란 말이 있단 말이야."

"그런 건 다 헛소문이야. 말이 되는 소리냐? 이름에 성도 없는 녀석인데 어디 적당한 출신이겠지."

리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남학생이 움찔 놀랐다가 이내 보란 듯 비웃음을 짓고서 시선을 홱 돌렸다.

리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네.'

이미 반에서는 하루 만에 단단히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러면 졸업할 때까지도 친구는 세 사람 말고 아무도 없게 되는 게 아닐까.

"재잘재잘 시끄러워."

그때 갑자기 끼어든 묵직한 목소리에 계속해서 떠들던 두 남학생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 바로 옆에 서있던 거구의 남학생이었다.

리곤은 그의 얼굴을 학기 시작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입학식의 신입생 대표였던 남학생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름이 바이온 렉시오였던가.

그는 명문 무가 출신의 유망주로, 학기 시작 전부터 검술학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다들 조용."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담당 교수가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연무복 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대인 전투 수업 담당 교수인 가온 세실레아다."

"······."

"뭐, 내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좋고. 다들 멀뚱히 있지 말고 저기 있는 훈련용 가검부터 집어라."

학생들이 검을 모두 챙기자 가온 교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검술 대련을 할 거다. 가장 먼저 지원할 두 녀석은 가운데로 나와라."

"······."

"갑자기 싸우라니 당황스럽나? 대인 전투는 본래 이런 수업이다. 물론 모든 대련의 승패는 성적에 포함된다. 가장 먼저 나서는 녀석들에겐 가산점을 줄 생각인데, 계속 눈치만 보고 있을 거냐?"

그에 재빨리 한 학생이 나섰고, 곧바로 또 다른 학생이 나섰다.

리곤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제의 책상머리 수업들보다는 이렇게 직접 몸을 쓰는 수업이 리곤에게 있어서도 더 취향이었기에.

"자, 대련 시작이다. 목숨이 걸린 전투라고 생각하고 양방 모두 최선을 다해라."

수업의 방식은 학생들이 대련을 진행하면 교수가 끝나고 피드백을 해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가온 교수의 피드백은 기본적으로 독설이었다.

"왜 반격할 기회를 알면서도 놓치지? 겁쟁이 놈이 가검으로도 상대를 베는 게 무섭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의 중심이 엉망이다. 네놈 다리는 무슨 지푸라기냐?"

"기합은 왜 시도때도 없이 내지르는 거지? 그딴 버릇은 고쳐라. 쓸데없이 호흡만 낭비하고 있다."

대련은 마친 학생들은 설령 승자라도 독설을 못 피하고 시무룩한 기색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리곤은 교수의 말과 자신의 감상을 비교해보며 대련을 관전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핵심은 일치했다.

"다음은······."

수업 중간쯤 차례, 교수의 시선이 리곤에게 닿았다.

그녀가 묘한 눈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네가 그 칼데릭에서 왔다는 녀석이지? 실력 좀 보자. 나와라."

리곤은 주목된 시선 속에 훈련장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리고 너, 나와라."

"예? 예."

다음으로 지목을 받은 학생이 이어서 걸어나왔다.

그는 아까 전에 리곤의 험담을 했던 남학생이었다.

두 사람이 가검을 쥔 채 마주 보고 섰다.

남학생은 입가에 웃음을 건 채 당당한 기세로 검을 치켜들었다.

리곤도 검을 늘어뜨린 채 서있다가,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검을 치켜들었다.

"대련 시작."

교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남학생이 기세 좋게 리곤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리곤과 붙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놈을 쓰러뜨리면 반에서 자신의 위세는 급부상할 테니까.

'바닥에 꼴사납게 자빠뜨려주마!'

두 사람의 간격이 검을 부딪힐 범위 안으로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카앙!

남학생은 순간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손에서 놓친 검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검을 거둔 리곤은 머리를 긁적이며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학생을 바라봤다.

'너무 셌나?'

나름 힘조절을 한 건데, 그냥 막고 목에 검을 겨눌 걸 그랬나.

뭐가 됐든 대련은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합이었다.

검사가 전투 도중 자신의 검을 놓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도 없었다.

"끝이다. 이거 싱겁군."

학생들도 모두 놀란 가운데, 가온 교수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린 남학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교, 교수님. 방금은 제가 너무 방심해서······."

"방심? 내가 분명 목숨을 건 전투라 생각하고 임하라 했을 텐데. 너는 지금 등신처럼 실력 발휘도 다 못하고 일 합에 목이 날아갔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녀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너무 짧게 끝나서 말할 것도 없으니 들어가기나 해라, 형편없는 놈아. 너는 마음가짐부터가 문제다."

가온 교수가 리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이름이 뭐지?"

"리곤입니다."

"그래, 리곤. 넌 훌륭했다. 그 한 동작에서도 기본은 모두 빠짐없이 충실하더군. 들어가라."

처음으로 독설 대신에 나온 칭찬.

리곤은 그냥 그런 기분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갔고, 남학생도 참담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으로는······ 너, 나와라."

가온 교수가 다음으로 지목한 학생은 바이온 렉시오였다.

바이온이 훈련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그는 검 중에서도 대검에 가까운 검을 골라서 들고 있었다.

이어서 그의 상대로 뽑힌 남학생은 한껏 긴장한 기색으로 마주 섰다.

콰앙!

대련이 시작하자마자 덩치에 맞지 않는 속도로 돌진한 바이온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 학생은 다급히 검을 들어 방어했으나, 굉음과 함께 공중에 붕 뜨더니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리곤과 마찬가지로 단 한 합에 끝나버린 대련.

바이온의 엄청난 괴력에 학생들이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

검을 거둔 바이온이 시선을 돌려 리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리곤도 멀뚱히 눈을 마주쳤다. 갑자기 왜 자신을 쳐다보는 건가 생각하며.

***

복도를 걷던 로켈 교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인을 보고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가온 교수가 그에게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로켈 교수님 아니십니까. 수업 끝내고 돌아가시는 길이군요?"

"그렇네."

"저도 방금 막 마치고 돌아가는 참이었습니다, 수업은 좀 어떠셨습니까?"

로켈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야, 저는 깜짝 놀랐지 뭡니까. 혹시 검술학부에 칼데릭 출신의 학생이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네."

"리곤이라고, 제가 방금 수업한 반의 학생이었습니다. 대단하더군요. 이미 정식 기사와 비교해도 손색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군."

로켈 교수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보다도 더 기준이 엄격한 가온 교수가 저렇게 칭찬할 정도면, 정말 인재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딱히 검술학부 학생에 대해 궁금증이 일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교수님 반에도 천재로 유명한 아이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레아 헤리윈이었던가."

"남의 학생에겐 관심 끄게."

"하하, 그냥 후에 있을 교류 수업이 벌써 기대되서 그렇습니다. 까칠하시긴."

가온 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보다 학기 시험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함께 점심 식사는 어떠십니까?"

"미안하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얘기는 나중에 나누지."

"에이, 그러지 마시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가온 교수를 떨쳐낸 뒤, 로켈 교수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전 대인 전투 수업에서 인상에 남은 학생들에 대해서.

레아 헤리윈. 헤리윈 가의 유명한 천재.

오늘 수업에서 본 모습은 과연 그 소문대로였다.

짧은 대련 속에서도 로켈 교수는 그녀의 현 수준과 터무니없는 천재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고작 열다섯의 나이에 그 정도 성장세라면, 늦어도 서른이 넘기 전에 엘폰의 교수들도 뛰어넘을 실력자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교장의 직접 추천으로 입학한 것으로 짐작되는 두 학생.

카앤, 그리고 랜.

본래 학생들의 배경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로켈 교수였다.

하지만 그 둘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용사의 동료, 현 교장 나인베르크는 취임 뒤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권한으로 학생을 추천 입학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가진 만큼 확실히 특이한 점은 있었다.

잘 단련된 육체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둘 모두 마법사보다는 무인 쪽에 가깝게 느껴졌다는 부분이.

다만 다른 점은 카앤이라는 아이는 마법에도 자질이 있었고, 랜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로켈의 눈으로 보기에는 카앤 역시 천재였다. 부족한 점들은 있었지만 앞으로 잘 배운다면 장래에는 레아에 못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될 것이었다.

다만 랜이라는 아이는 왜 검술학부를 놔두고 마법학부에 입학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켈 교수는 싱거운 잡념을 이어가다가 이내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나 분명한 건, 이번 1학년은 작년보다 흥미로운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수업과 적응 (3)

엘폰에 입학하고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계승자, 카앤과 부쩍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식사도 리곤과 에스카를 포함해 항상 넷이 함께 했고, 의도적으로 계속 마주치며 가능한 어울리려고 했기에 친해지는 건 계승자의 성격상 시간문제였다.

처음에 리곤을 조금 불편해했던 에스카도 리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금세 편견을 지운 것처럼 보였다.

"······."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버릇적으로 카앤이 있는 방의 기척부터 확인했다.

아직 자고 있는지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 울려퍼졌다.

시간을 확인한 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씻을 준비를 했다.

엘폰은 일주일을 주기로 6일은 수업일과 하루의 휴일이 존재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휴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난 항상 카앤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써야 했으니까.

설마 아카데미 안에서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기기야 하겠냐만은,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내 기척에 리곤도 곧 깨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랜, 오늘 휴일인데 뭐 할 거야?"

"글쎄."

물론 그건 카앤이 뭘 할지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난 이미 그녀가 오늘 뭘 할지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에스카와 나눈 이야기를 전부 귀담아들었으니까.

'밖으로 외출을 할 거라고 했지.'

휴일에 학생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놀아도 되고, 자율적으로 학습을 해도 됐다.

그리고 아카데미 밖으로 외출하는 것 역시도 가능했다.

카앤은 아무래도 오늘 에스카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도시를 둘러볼 모양이었다.

내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조금은 기대감도 있었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카앤이 성검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하는 거였고, 밖으로 나가면 뭐라도 사건이 생길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식사할 시간이 되고, 나와 리곤은 기숙사를 나섰다.

식당에서 카앤하고 에스카와 만나서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래서 에스카하고 훈련장에서 마법 연습 좀 하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너희들은 어때?"

입안에 음식을 한가득 넣고 들뜬 기색으로 말하는 카앤이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리곤이 먼저 동조했다.

"나도 안 그래도 한번 나가볼 참이었어. 바로 아카데미로 들어와서 도시 구경도 제대로 못 했었거든."

"그래? 잘 됐네. 오늘 같이 실컷 구경하면 되겠네."

"오전 10시부터가 외출 허가라고 했었나. 너도 갈 거지, 랜?"

"물론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식사를 마치고서 예정대로 우리는 훈련장에서 함께 훈련을 했다.

리곤은 검술 훈련을 했고,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마법 연습을 했다.

나는 땀까지 흘리며 마법 전개에 집중하는 에스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머릿속의 술식을 마력에 녹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아, 말로 설명하기 어럽네."

카앤은 그 옆에 서서 자신의 요령을 설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물론 술식이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었기에 별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에스카는 나보다도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딱 마법을 펼칠 수는 있는 정도, 마법사로서는 간신히 턱걸이 수준.

오늘 카앤이 에스카와 함께 훈련을 하려고 한 이유는 아마 저번의 대인 전투 수업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성장보다도 에스카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지만 로켈 교수의 말이 좀 심하긴 했어도 틀린 부분은 없어 보였다.

"흐아······."

금세 마력을 전부 소진한 에스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어렵네. 난 마법에 별로 재능이 없나봐."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더 연습하면 분명 잘하게 될 거야."

한편, 한쪽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던 리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좀 쉬었다가 이제 슬슬 갈까?"

"그러자."

리곤이 카앤을 슬쩍 바라보고는 갑자기 물었다.

"근데 카앤, 혹시 너도 랜처럼 마법 말고 체술도 익혔어?"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야 몸부터가 단련된 몸인 게 보이니까. 손에 굳은살도 그렇고."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문득 두 사람이 검으로 대련을 펼치면 누가 이길까 호기심이 들었다.

레벨은 리곤이 좀 더 높긴 했지만, 30레벨대에서 몇 레벨 차이는 싸워보기도 전에 승패를 확정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차이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갑자기 둘더러 싸워보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사소한 궁금증으로 그쳤다.

휴일의 외출 허용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우리는 외출 명부를 작성했다. 담당자에게 시간 내에 돌아와서 체크하지 않으면 벌점이라는 주의를 들은 뒤, 곧장 아카데미 밖으로 나섰다.

우리뿐 아니라 아침부터 외출을 하는 학생들은 많았기에, 거리에 그 모습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 8시간뿐인 귀한 외출 시간이니까.

"가려고 생각한 곳은 있어?"

"아니? 그냥 발길 가는 대로 구경하는 거지, 뭐."

라피드 시는 대도시라서 하염없이 대로만 따라서 걸어도 꽤나 볼거리가 많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열린 연극을 구경하다가 자연스레 장터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노점에 진열된 먹거리들을 보며 카앤이 눈을 반짝였다.

"저거 되게 맛있어 보인다. 저게 뭔지 알아, 에스카?"

"음, 감자를 얇게 잘라서 기름에 튀긴 음식 같은데······?"

카앤과 에스카는 그 감자튀김 비스무레한 걸 샀고, 리곤은 어디선가 양념이 가득 발린 닭꼬치 같은 걸 사왔다.

나는 적당히 캐러맬 같은 게 한가득 담긴 병을 사서 애들에게도 나눠주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를 사서 서로 나눠먹으며 수선한 거리를 걸었다.

"······?"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저멀리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과일이 진열된 노점 앞에 서서 과일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

순간 내가 잘못 봤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뭐야, 저거?'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용사한테 따로 들은 말은 없었는데?

거리가 더 가까워지고, 마찬가지로 남자를 발견한 카앤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 그래?"

"아니······ 응? 잠깐만."

남자도 곧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앤을 본 그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딸아!"

카앤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서있다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아버지 맞지?"

"그래도 애비인데 얼마나 안 봤다고 얼굴도 못 알아보냐?"

"아니, 뭔데? 아버지가 왜 여기 있는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리곤과 에스카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 벤이 태연하게 물었다.

"아무튼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버지가 왜 여기 있냐니까?"

"뭐긴 뭐냐, 산에서 내려온 거지. 여기 도시에 자리 잡기로 했다."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꼭 너한테 말을 해야 되냐?"

카앤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탄식만 몇 차례 내뱉다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거면 나랑 같이 내려오지 왜······."

나도 이게 지금 뭔 상황인가 싶었다.

용사에게 듣기로 카앤의 아버지까지 함께 도시로 왔다고 들은 적은 없었으니까.

말하는 걸 들어보니, 두 사람에게 언질도 없이 혼자 따로 산에서 내려온 건가?

그가 나와 리곤, 에스카를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

"벌써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나 보구나. 다들 반갑소. 카앤의 아비인 벤이오."

벤이 인사를 건네자, 에스카가 먼저 허둥지둥 인사를 받았다.

"아, 저는 에스카라고 해요. 카앤과 같은 기숙사를 쓰는 친구입니다."

"리곤입니다. 저도 친한 친구에요."

"랜입니다."

카앤이 머리를 긁적이며 의아한 투로 벤에게 물었다.

"웬 경어?"

"아카데미 학생이니 다들 귀족분들 아니냐? 예의를 지켜야지."

"아니, 귀족은 에스카 하나뿐인데. 그보다 나도 편하게 말하는데 아버지가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맞습니다. 편히 말씀해주세요."

벤이 다시 한 번 우리를 둘러보고는 껄껄 웃었다.

"그럼 그럴까? 알겠다."

나는 그의 분위기가 저번에 봤을 때와 사뭇 다르다고 느꼈다.

산맥에서 봤을 때는 좀 더 무뚝뚝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 집은 어디에 있어?"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다. 올 테냐?"

"응. 너희들도 괜찮지?"

카앤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뜬금없게도 집들이를 하게 생겼다.

***

벤의 집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저택이었다.

특별히 크지는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차고 넘치도록 넓은 집이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 아버지? 집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 거 아닌가?"

"다 너는 모르는 재산이 있다. 짐승이나 몬스터 가죽 같은 것도 좀 챙겨와서 팔았고."

넓은 공간에 가구라고는 테이블과 의자 정도가 전부라서 내부는 휑했다.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차를 대접받았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고 이내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주제는 주로 카앤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산에서 살 때는 이 녀석이······."

리곤과 에스카가 카앤에 대해 아는 건 그녀가 어릴 적부터 깊은 산속에서 살았고, 우연히 연이 닿게 된 엘폰의 관계자에게 입학을 권유받고 추천 입학을 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벤은 산에서 생활할 때의 카앤이 어땠는지를 말해줬고 두 사람은 그걸 흥미롭게 들었다.

"푸핫, 그게 진짜야? 카앤?"

"아이씨······ 쓸데없는 이야기 좀 하지 마, 아버지."

낱낱이 들춰지는 흑역사에 카앤이 드물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벤의 입을 막으려고 들었다.

그야말로 사이가 좋은 부녀지간의 모습이다.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질 정도로.

"······."

순간 불쑥 하고 올라온 영문 모를 감정에,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봤다.

뭐지? 기분탓인가?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기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가 훌쩍 넘었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기로 했다.

벤이 마당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주는 가운데, 카앤이 그에게 툭 물었다.

"그래서 진짜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사는 거야?"

"그래. 나도 평생 산에서만 박혀 살 생각은 아니었다."

카앤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와 달리 내심 기쁜 기색이었다.

아마 산에서 떠날 때 그를 혼자 두고 떠나는 걸 신경 썼던 게 아닌가 싶었다.

"뭐, 그럼 외출할 때마다 찾아와서 밥이나 같이 먹으면 되겠네."

"외출은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거냐?"

"아니, 일주일에 한 번."

"그건 잘됐구나. 너무 자주 찾아오면 나도 피곤하다. 적당히 와라."

카앤이 콧방귀를 뀌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간다."

"오냐. 가라."

나도 세 사람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 녀석을 잘 부탁하마."

나는 고개를 돌려 벤을 바라봤다. 그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철도 없고 아직 부족한 게 많겠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올곧은 아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죠."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기며 세 사람이 떠들었다.

"아버지가 되게 재밌는 분이시네. 부럽다."

"부럽긴 뭐가? 하여튼 우리 아버지지만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거리가 떨어졌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마당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카앤이 의아한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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