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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자 (1)

세인테아 동부, 라몬 대산맥.

푸르른 수풀이 우거진 숲길을 한 명의 사람이 걷고 있다.

나무 막대를 어깨에 걸친 채 툭툭 두드리며 어슬렁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녀.

"······."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쪽의 수풀을 돌아봤다.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작은 다람쥐였다.

조심스레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는 다람쥐에게 소녀가 자연스레 쭈그리고서 앉았다.

그녀는 주머니를 뒫적거려 도토리 몇 알을 꺼내들고는 다람쥐에게 내밀었다. 다람쥐는 그것을 냉큼 받아들고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쿠웅.

소녀가 한창 다람쥐를 쓰다듬고 있을 때 갑작스레 땅에 진동이 울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 다람쥐가 먹고 있던 도토리까지 내팽개친 채 도망쳤다.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소리가 가까워지며 나타난 건 거대한 곰이었다. 단순한 짐승이 아닌 몬스터에 가까운 생물.

이미 어디선가 한 차례 사냥을 마쳤는지 곰의 입가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섬뜩하기 그지없는 포식자의 시선에도 소녀는 두려움에 질리기는 커녕 무덤덤했다.

단지 손에 쥐고 있는 나무 막대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점심은 고기 먹을 생각 없었는데."

크헝!

곧 포효와 함께 곰이 소녀를 향해서 거칠게 달려들었다.

소녀가 막대를 치켜들었다. 막대를 감싸고 푸른빛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코앞까지 다가온 곰의 정수리를 향해서 막대를 내리쳤다.

그 일련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지만 벌어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곰의 몸체가 푹 꺼지며 땅바닥에 쿵 쓰러졌다.

소녀는 일격에 즉사한 곰을 빤히 바라보다가 근처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서 주저앉았다.

다시 좀 전의 나른한 얼굴로 돌아온 소녀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음."

***

군주성으로 무사히 귀환하고서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은 아셸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실종돼있을 동안 여간 안위를 걱정했었는지 내 모습을 보자마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을 끼쳤구나. 나는 멀쩡하니 안심해라."

"예, 예······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아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좀처럼 차분함을 되찾지 못하고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아셸이 마지막으로 본 내 모습은 디트로데미얀의 공격에 당해 사라진 광경일 테니 이런 격한 반응도 이해는 됐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자."

성의 복도 한가운데였기에 나는 우선 아셸을 데리고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해주었다.

디트로데미얀의 능력에 당해 세인테아의 변방에 강제 텔레포트된 것,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원마들과 조우한 것까지.

딱히 숨겨야 할 부분은 용사의 존재에 대한 것 말고는 없었다.

사실 용사에 대한 것도 아셸이라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그러셨군요. 그 마족의 공간계 능력에 휩쓸리셔서 그런 일이······."

설명을 모두 들은 아셸이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용케도 띠용이를 데리고 군주성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싶었다.

띠용이는 와이번의 종족 특석상 나와 함께 타는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등에 태우지 않으니까.

아셸이 나름의 인정을 받은 건지, 아니면 영리한 녀석이라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안 건지는 모르겠다.

"내가 사라지고 난 뒤의 상황은 어땠느냐?"

"예, 그러니까······ 숲 이곳저곳을 하루 정도 더 살피다가, 곧바로 군주성으로 귀환했습니다."

"그 대군주 측의 정보원은?"

"그 자와는 따로 갈라져서 이동했습니다. 아마 대군주성으로 복귀했을 겁니다."

아셸이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론 님의 행방을 확인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아니다. 네 판단은 적절했다."

아까 집사장에게 대충 이야기는 전해들었다. 아셸이 대군주에게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는 걸.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으면 그나마 기대볼 수 있는 인물은 대군주뿐이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으니 대군주에게 소식은 이미 닿았을 듯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디트로데미얀과 관련된 건은 숨길 수 없었을 테고, 확실하게 감추면 될 건 용사의 존재뿐이었으니.

만약 내가 용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대군주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만큼은 조금도 예상이 안 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게임에서의 대군주는 용사에게 묘한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데릭이 세인테아를 치지 못 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속을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용사에 대한 걸 들켜서 좋을 건 일절 없을 것이었다.

"······."

나는 아셸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드디어 계승자 찾기였다.

나는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여정을 아셸과 함께 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셸."

"예."

"이전에 내가 고대 유적에서, 내 목표에 대해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아셸이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예,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가 그 본격적인 시작점이다. 네 의지는 그때 들려줬던 대답과 여전히 변함이 없느냐?"

아셸은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었다.

아셸이 당연하다는 듯 굳센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론 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함께하겠습니다."

성검의 계승에 관한 사실은 이 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인 만큼 극비 중의 극비.

사실 굳이 아셸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직접적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 명령에 순순히 따라줄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하고 있는 일을 숨긴 채 이용하듯 힘만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아셸을 절대적인 아군으로서, 소중한 동료이자 부하로서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내 궁극적인 목표를 확실히 밝혀도 되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셸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이동할 곳이 있다. 따라오거라."

***

외출용 로브를 뒤집어쓰고, 군주성에서 나와 아셸과 함께 향한 곳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고급 여관이었다.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이곳으로 찾아오겠다고 용사와 말을 해두었다.

찾을 것도 없이 용사는 여관의 1층 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찾아왔군."

용사가 수프를 뜨던 스푼을 내려놓고 내 뒤쪽에 선 아셸을 힐끗 바라봤다. 아셸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용사를 바라봤다.

나는 여관 홀을 한 차례 슥 둘러보고서 말했다.

"마저 식사부터 하지."

"아니, 괜찮다. 방은 잡아뒀으니 위로 올라가지."

아직 음식이 남았지만 용사는 바로 식사를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기로 용사는 딱히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몸일 것이다. 성검의 힘을 빌린 용사는 반쯤 초월자나 다름없다.

다만, 게임의 대사에서 그녀가 이런 자잘한 일에 권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곧장 위층의 방으로 올라가서 용사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방 주위에 용사의 마력이 퍼지는 게 느껴졌는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차단한 듯했다.

"너도 여기 앉아라, 아셸."

아셸이 자리에 앉지 않고 뒤쪽에 서려고 하길래 옆자리에 앉혔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 전에 우선 아셸부터 소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용사가 먼저 물었다.

"그 자는 누구인가?"

의아함과 경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계승자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인데, 말한 적 없는 낯선 인물을 데려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셸 그론힐트, 내 호위다."

나는 용사에게 말했다.

"앞으로 할 일들은 그녀 또한 함께할 것이다. 큰 도움이 될 인물이다."

"······협력자는 7군주 그대뿐이 아니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만 염려할 건 없다. 내가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이니까. 그리고 계승에 대해서 알 자는 이걸로 이제 끝이다."

용사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 아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그녀에게도 용사의 정체를 밝혔다.

"아셸, 이 자는 세인테아의 용사다."

"······예, 예?"

아셸이 방금 전보다 훨씬 놀란 기색으로 용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짜고짜 이렇게 소개해도 상황 이해가 전혀 되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아셸,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나는 아셸에게 미뤄뒀던 설명을 그제야 해주었다.

성검에 대한 것, 성검의 계승에 대한 것, 그리고 용사와의 협력 관계를 맺은 것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할수록 아셸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했다.

"······."

모든 설명을 듣고 난 뒤, 아셸은 맞은편의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정말 세인테아의 용사입니까?"

어딘가 묘하게 적의가 느껴지는 음성.

나는 이내 그런 아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아셸에게 있어서 세인테아 소속의 인물은, 특히 용사라면 호의적일 수가 없었으니까.

용사 역시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아한 기색으로 아셸을 바라봤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아셸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백월족의 생존자입니다. 세인테아에 의해 멸족당한."

"······!"

그 말에 용사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용사 역시도 황실이 저지른 그 끔찍한 만행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되나 생각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이것도 풀고 가야 할 문제이기는 했다.

"항상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용사, 당신은 세인테아 황실이 저지른 백월족 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아셸은 순간 울컥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아셸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알고서도 황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는 거군요. 맞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당시의 나는 세간과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 있었습니다. 하여 그 참변에 대해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

"아셸 그론힐트 경, 이게 당신에게 있어선 분명 경멸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가 아셸을 향해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사는 단지 그렇게 사과의 말을 전할 뿐이었다.

그건 어떤 말을 더 하기도 죄스럽기에 그 한마디만을 건넨 것처럼 보였다.

아셸이 아무 말도 없자,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든 용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일족을 학살한 배후는 황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당신도 그걸 안다면 어째서."

그걸 알고 있다면 어째서 황제를 가만히 놔두냐는 뜻이었다.

그에 용사가 면목이 없다는 듯한,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나는 황제에게 그가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계승자 (2)

죄를 물을 수 없다.

용사의 말에 아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한 차례 대륙을 구한 영웅, 마왕의 목조차 베어버린 정의의 화신.

그런 존재가 어째서 늙고 노쇠한 황제 하나를 처단할 수 없다고 단언하듯 말하는 것인지.

"······어째서입니까? 만인에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당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축 늘어진 아셸의 목소리 한편에는 날이 서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용사는 자신의 명예 따위를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용사가 황제를 처단한다고 해도 명분만 갖춘다면 용사의 명성에 크게 흠이 갈 일은 없다.

세인테아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그를 행할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것이었다.

단지 이유는 하나.

"현재 상황으로는, 황제를 처단한 뒤 세인테아에 미칠 혼돈을 걷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자코 용사의 대답을 곱씹었다.

용사의 행동 원리는 언제나 일관적이다. 세상의 평화.

하지만 또한 그녀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동화 속의 영웅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제는 영리하고 교활한 자다.

놈은 이런 용사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고, 이미 용사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준비해뒀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황위를 이을 자격이 있는 자식들에게 오히려 더욱 더럽고 잔인한 쟁투를 부추기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폐위나 죽음이 제국에 되도록 큰 혼란과 파장을 미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족의 재침공이 얼마 남지 않은, 모두가 단합되어야 할 시기.

그렇기에 용사는 황제를 심판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할 일과 짊어진 책임이 많은 그녀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세인테아의 국정까지 모조리 뿌리뽑고 다시금 바로잡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당장은 황제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기에 눈엣가시라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용사는 그 복잡한 사정까지 굳이 덧붙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을 변명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셸은 그런 용사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끼어들어서 말했다.

"괜찮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부 하거라."

용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셸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당신을 탓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건 압니다."

"······."

"이것은 제 일족의 일일 뿐이고, 이제 세상에서 잊혀진 약소 종족의 사정 따위 당신의 관심 밖이었다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에게는 내게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습니다. 원망하고 증오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건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는 걸 거다.

내가 용사를 만난 뒤 저 무표정한 얼굴에 가장 동요가 드러난 것을 본 게 바로 지금이었으니까.

아셸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론 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였다.

"귀인께 결례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셸은 정중하지만 더없이 무감정한 투로 용사에게 사과했다.

용사는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런 아셸을 바라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대화였지만 아셸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어 보였기에 이만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다.

"아셸, 말했다시피 이제부터는 용사와 함께 계승자를 찾기 위해 이동할 것이다."

나는 용사에게 말했다.

"계승자의 위치는 세인테아 동부의 라몬 대산맥."

"······!"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곳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라몬 대산맥······."

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물었다.

"지금 바로 이동할 것인가?"

"그래. 질질 끌 이유가 없지."

라몬 대산맥까지는 띠용이를 타고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용사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고쳤다.

"아니, 내일 아침에 이동하기로 하지."

자리를 앞으로 또 한동안 비울 예정이니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정리하고 떠나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용사와 출발한 시간을 정한 뒤 여관에서 나왔다.

용사에 대한 아셸의 감정은······ 반감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행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아셸."

"예."

"용사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려줬으면 한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셸에게 물었다.

아셸은 꽤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좋은 감정은 들지 않습니다."

"그녀가 원망스럽느냐?"

"원망까지는······ 아닙니다. 황제의 처단은 당사자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남을 탓할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심정은 이해됐다.

백월족의 참사는 분명히 용사와 완전히 무관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용사가 막았을 수도 있었을 일.

또한 용사는 황제의 악행을 심판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용사에게도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아셸에게 있어선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이성과 감정은 다르니.

그때 아셸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론 님.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잠깐 심란해졌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

어쨌든 당장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이왕이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긴 하겠지만, 용사와 아셸의 관계가 앞으로의 일에 중요한 건 아니니.

***

성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참모장?"

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참모장 데이폰이 찾아온 것이었다.

성의 입구에 서있던 참모장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7군주님."

참모장이 성에 직접 찾아온 건 저번 6군주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니 그가 바로 방문 의사를 밝혔다.

"마탑주 건과 관련하여 군주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인데, 이렇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하긴, 그거 말고는 없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기에 참모장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나?"

마주 보고 앉아서 묻자 참모장이 집사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내 성격을 아는 참모장이었기에 곧바로 본 용건을 꺼냈다.

"현장에서 군주님께서 구해주신 정보원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그 정보원에게 플라베로스 마탑주가 원마 디트로데미얀과 계약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습니다. 또한 군주님께서 디트로데미얀을 그 현장에서 바로 처단하셨다는 것과, 그 뒤에 한동안 종적을 감추셨다는 것까지도."

나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솔직히 디트로데미얀의 등장에 대군주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섞였는지에 대해선 완전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의도를 읽기 위해 빤히 쳐다보는 게 압박으로 느껴졌는지, 참모장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군주님께 직접 이야기를 전해듣고자 합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나는 고민에 잠겼다.

수도원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로벨지오 수도원에 용사가 출현했다는 정보를 대군주가 지금쯤 알았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알게 될 정보였고, 그렇다면 나와 용사의 연결점을 들켜선 안 됐으니까.

"7군주님께선 대군주님과 약속하신 게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탑주 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대군주님께 정보를······."

내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참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플라베로스 마탑주 암살, 그것이 대군주와 약속한 것. 그러니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 또한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조금 과장되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참모장은 말을 멈추었다.

'좀 짜증나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 때문에 내가 뭔 일을 겪었는가?

디트로데미얀과 싸우고, 세인테아 변방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다른 원마들까지 줄줄이 만나고, 대체 몇 번을 죽을 뻔한 건지 모르겠다. 물론 덕분에 용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아무튼 대군주 때문에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참모장의 말은 내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대답하기 난감하면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지금은 충분히 그럴 명분이 내게도 있었다.

"참모장."

"······."

"디트로데미얀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우연인가?"

나는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참모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해······ 이십니다. 디트로데미얀의 등장은 대군주님의 뜻과 조금의 관계도."

"그렇군. 하필 플라베로스의 마탑주가 원마의 계약자였고, 내가 마탑주를 처리하려던 그 순간에 놈이 등장한 게 전부 짖궂은 우연이란 말이지."

"······."

"대군주에게 전하도록. 이번 일에 대해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해명이 필요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참모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대군주님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참모장도 더 묻지 못 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게 나가면 어떻게든 대충 얼버무려서 넘길 수 있겠지. 어쨌든 약속대로 마탑주는 처리한 게 맞으니까.

***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특별히 생긴 문제는 없었다.

리프 남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물어보니 리프는 북부 도시로 단원들 몇몇과 함께 임무를 나갔고, 리곤도 그를 따라갔다고 했다.

리프 남매는 어느새 성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서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하루 동안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아셸과 함께 띠용이를 데리고서 성을 나섰다.

집사장에게는 다시 한동안 자리를 비우겠다 말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도록 잘 관리할 것이었다.

용사는 도시 밖에 위치한 숲에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가 띠용이에게 흥미가 깃든 눈길을 주었다.

"7군주 그대의 와이번인가?"

"그래."

"블랙 와이번은 교감이 쉽지 않을 텐데, 좋은 동반자가 있었군."

용사가 슬며시 띠용이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나 이외 인물의 손길을 격하게 싫어하는 녀석이었지만, 묘하게도 용사에게는 특별히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그르렁거리며 내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에게도 원래 와이번이 있었던가?'

기억하기로 용사의 와이번은 아마 마족과의 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용사를 보조해서 곁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원마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가.

"같이 와이번을 탈 텐가?"

내 물음에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옆에서 비행하겠다."

어차피 도시들을 경유해서 목적지까지 이동할 건 아니었기에 눈에 띌 문제는 없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이걸로 준비는 다 끝났다.

크오오!

띠용이가 우렁찬 포효와 함께 먼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뒤를 용사가 날아서 따라붙었다.

가자, 성검의 계승자를 찾아서 라몬 산맥으로.

계승자 (3)

"이쪽입니다."

카숄의 국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안내원을 뒤따라 성의 입구를 통과했다.

소문으로만 무성히 들어온 8군주성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괴이하고 기괴했다.

성 곳곳에 쌓인 거대한 흑탑들.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건 석재나 목재 따위가 아니다.

키이이.

살덩이, 갑각, 그것들이 난잡하게 뭉친 가운데 삐져나와 꿈틀거리는 다리와 더듬이들.

탑을 구성하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닌 무수히 많은 벌레 떼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인간보다도 훨씬 큰 괴충들이.

8군주 흑해 여제, 그녀가 거느리고 지배하는 벌레 군단. 이곳 8군주성은 그 본진이자 둥지와 다름없다.

성 곳곳에서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몬스터들의 사체를 옮기고 있었다. 벌레들이 먹을 식량이었다.

하인들이 탑에다가 사체를 던지면 그것은 순식간에 탑 안으로 빨려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흉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에 카숄 국왕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그는 성 한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다른 탑들처럼 벌레들이 떼거지로 뭉쳐있는 게 아닌, 하나의 개체였다.

성의 건물들보다도 거대한 그 괴충은 하인들이 가져온 식량을 몇 갈래로 갈라진 입으로 게걸스레 씹어삼키고 있다.

다만 놈이 먹고 있는 식량은 몬스터 사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들.

앞서서 걸어가던 안내원도 그 광경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했다.

"편식이 심한 녀석이라 인간 말고는 잘 먹으려고 들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보기 불편하셔도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놀림이 섞인 듯한 말투에도 카숄 국왕은 침묵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8군주의 수하라도 일국의 국왕을 대할 태도가 전혀 아니었으나, 이곳은 카숄도 세인테아도 아닌 칼데릭.

아쉬운 것이 있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쪽은 그였다. 안내원의 태도가 어떻든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성 내부는 그나마 바깥에 비하면 평범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한 대문 앞에서 멈춰선 안내원이 손을 내밀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십시오."

카숄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안내원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부디 위대하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언행에 신중을 기하시길.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당신의 신변을 책임져줄 수 없습니다."

"······."

안내원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손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은 차갑고 어두운, 그리고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자줏빛으로 빛나는 발광석 하나가 천장에 박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카숄 국왕은 곧 흠칫 놀라서 굳었다.

마치 고치처럼 천장에 얽혀있는 거대한 실타래, 그 실타래 안쪽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숄 국왕, 날 만나고 싶다고 했나요."

나른하고도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심장을 옥죄듯 울려퍼졌다.

카숄 국왕은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슬쩍 내리깔고 말았다.

칼데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국이라도 그 역시 일국의 국왕, 아무리 상대가 군주라도 시선도 못 마주할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공간의 분위기가, 그리고 벌레보다도 하찮은 존재를 보는 듯한 흑해 여제의 눈빛이 그를 그러도록 압박했다.

······이것이 진짜 군주의 위압감인가?

카숄 국왕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중립국 회담에서 봐온 대군주, 그리고 저번 회담에서 본 새로운 7군주는 굉장히 점잖은 태도를 내보였던 거라는 걸.

"이렇게 8군주를 뵙게 되어······."

"빈말은 집어치우고 용건을 말해요. 뭐, 듣지 않아도 뻔하긴 하다만."

카숄 국왕은 온몸에 올라온 소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어스힐을 압도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주십시오."

흑해 여제의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뱉었다.

"세인테아는 이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더라죠. 당신들을 돕지 않았으니 칼데릭에 도움을 받을 명분이 있다는 건가요?"

"······."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더 큰 문제가 하나 더 있잖아요?"

한순간에 웃음기를 싹 지운 흑해 여제가 보란 듯이 정색하며 말했다.

"우리 7군주가 이미 어스힐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지금 나더러 7군주와 대립해서 어스힐을 침공하는 걸 도우라는 뜻인가요?"

어둠 속에서 흑해 여제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음 순간 카숄 국왕이 품에서 꺼내든 것은 혼탁한 붉은빛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진주였다.

그것을 본 흑해 여제의 눈이 슬며시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입가에 괴기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어디서 얻었죠?"

"먼 선조께서 마경에서 발견하신 걸로 기록된 카숄 왕가의 보물입니다."

카숄 국왕이 진주를 내밀었다.

"만약 군주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이것을 이 자리에서 바로 드리겠습니다."

"흐응······."

흑해 여제가 콧소리를 내뱉으며 진주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기에 뭔가 했는데, 설마 그걸 거래의 대가로 가지고 올 줄은 몰랐네요."

"······."

"근데 국왕, 이런 생각은 안 했나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물건만 날름 삼켜버리면 어쩌려고? 아니면······."

그녀가 눈웃음을 띤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카숄 국왕을 가리켰다.

"굳이 약속할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당신을 치워버리거나. 설마 그러지는 못 할 거라고 믿고 내 둥지에 찾아온 건 아니죠?"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이 농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카숄 국왕은 알았다.

칼데릭의 군주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 이곳에서 일국의 국왕이라는 직위 따위는 그를 조금도 보호해주지 못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하나뿐이 아닙니다."

"······?"

"지금 가지고 온 것 말고 2개를 더 보유하고 있습니다."

흑해 여제는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나머지 2개는 약속을 지킨 뒤에 주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으니 내가 굳이 당신과 거래할 이유가 있을까요? 카숄의 왕성에 직접 찾아가서 물건을 앗아오면 되는데?"

그 말에는 카숄의 국왕도 인상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입을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흑해 여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렇게까지 막 나갔다간 감수해야 할 것이 많을 거다, 하나는 챙겨도 나머지 둘은 뜻대로 얻을 수 없을 거다,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죠?"

"······."

"나도 알아요. 그냥 농으로 해본 소리니까 그리 정색하지 말라고요. 안 그래도 보기 추한 얼굴이 더 역겨워지잖아요."

흑해 여제는 좌우로 더듬이를 까닥거리며 잠시 말이 없었다.

카숄 국왕은 그 숨 막히는 침묵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내 흑해 여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좋아요. 더 할 말이 없으면 그건 놔두고 나가봐요. 내가 다시 그쪽에 수하를 보낼 테니."

카숄 국왕은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불안 또한 치밀었다.

만일 세인테아의 황제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시 어스힐을 삼킬 기회가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감사드립니다. 그럼······."

카숄의 국왕이 방 밖으로 나가고, 흑해 여제는 바닥에 놓인 진주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뿜어져나온 가느다란 실타래가 진주를 낚아채서 손으로 가져왔다.

"재밌네, 재밌어."

진주를 살펴보며 연신 웃음을 흘리던 흑해 여제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금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숄 국왕을 데리고 온 안내원이었다.

"지금 7군주는 다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목적지는?"

"언제나 그랬듯 따로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성을 비울 듯합니다."

흑해 여제가 더듬이를 까닥였다.

자세한 건 몰라도 최근에 7군주가 대군주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저번 6군주 때의 일로 대군주와 약속한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한데, 뭐 그거야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과연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걸."

마침 타이밍이 적절하기는 했다.

7군주, 그 오만한 인간이 자리를 비운 틈에 카숄을 지원해서 어스힐을 밟아버린다면?

대군주 또한 이 일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안다. 그러니 걸릴 만한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7군주는 이미 6군주 때의 일로 한 번의 선을 넘었다. 그래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대군주와도 맹세했었고.

이미 일이 벌어진 뒤에는 아무리 격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들 수 없을 것이다.

놈이 또 한 번 같은 군주를 죽인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대가를 치뤄야 할 테니까.

***

산골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맥없이 하늘이나 수풀을 둘러보며 산책하거나, 아니면 짐승이나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서거나.

라온 산맥은 수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대산맥이다.

카앤은 오늘도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산맥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몬스터를 찾아서 집에서 멀리 나섰다.

버릇처럼 나무 막대로 어깨를 두드리며 산길은 걷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흐음······."

거대한 늑대 발자국. 그리고 이족보행인 것으로 보아 웨어울프의 흔적이다.

새로운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발자국의 길이가 몇 뼘은 될 정도로 거대했다. 이 정도로 거대한 놈은 처음이었다.

웨어울프는 웬만큼 난 모험가들도 상대하는 걸 피할 정도로 사납고 흉포한 몬스터.

하지만 카앤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발자국의 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한참의 추적 뒤, 카앤은 수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있는 웨어울프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웨어울프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웨어울프의 주변 바닥에 쓰러져있는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

로브를 걸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의 남성.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맥의 깊은 곳이다.

카앤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웨어울프에게로 신경을 옮겼다.

웨어울프 역시 쓰러진 사람에게서 카앤에게로 관심을 옮기고 그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크허엉!

성난 포효와 함께 돌진해오는 웨어울프를 향해서, 그녀는 침착하게 막대 대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에 푸른빛의 기운이 감돌며 웨어울프와 그녀가 서로 교차했다.

동시에 웨어울프의 가슴팍이 쩍 갈라지며 선혈이 튀어올랐다.

"좀 얕았나?"

상처에도 아랑곳않고 다시 몸을 돌려 돌진하는 웨어울프를 보며, 카앤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계속 몸을 움직였다.

웨어울프의 발톱은 나무조차 찢어발길 정도로 강력했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카앤은 유연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웨어울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모두 피하며 검격을 이었다.

촤아악!

몇 번 더 검격에 몸을 베인 웨어울프는 결국 힘이 다해 땅바닥에 몸을 뉘였다.

카앤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

상태를 살피니 숨은 붙어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외상은 없으나 안색이 완전히 새파랬는데, 아무리 봐도 웨어울프에게 당해서 쓰러진 건 아닌 듯 보였다.

카앤은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중년을 번쩍 들고서 어깨에 짊어졌다.

쓰러진 사람을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 일단은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아버지가 치료해주든가 하겠지."

계승자 (4)

사람이라고는 전혀 살 것 같지 않은 숲속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오두막.

조잡한 나무 울타리를 지나쳐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카앤은 탁자에 놓여있는 주전자를 집어들고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선 그대로 성큼성큼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엔 한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남자는 방으로 들어온 카앤의 모습을 보고서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낯선 이를 보고서.

"그게 누구냐?"

당혹스러움이 여실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카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

"동쪽으로 나갔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어. 근데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카앤이 쓰러진 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고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뭘 보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외부인의 상태를 슥 훑어본 그가 곧바로 진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마력 탈진인 것 같구나."

"아, 그러면 괜히 데려왔나?"

단순한 마력 탈진이라면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회복될 일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마력을 굉장히 무리하게 끌어올린 모양이군. 상태가 심각해서 그대로 뒀으면 목숨을 잃었을 거다."

그가 소매를 걷고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창고에 가서 만드린 뿌리하고 페퍼리아 잎 좀 가져오너라. 물도 한 컵 끓여오고."

카앤은 군말 없이 바깥으로 나가서 남자가 시킨 것들을 가져왔다.

남자는 자리에서 바로 간단한 치료약을 조합하기 시작했고, 카앤은 익숙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물었다.

"이 사람 어디서 온 사람일까? 아버지."

라몬 산맥은 사람이 사는 도시나 마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맥이었다.

길목으로서 통행하는 이는 당연히 없었고, 때문에 카앤에게 있어 산맥 외부의 인간이란 낯설디 낯선 존재였다.

남자 또한 그녀가 이 외부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글쎄다."

남자는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치료에 집중했다.

카앤도 더 묻지 않고서 팔짱을 낀 채 벽면에 등을 기대었다.

심각한 마력 탈진으로 쓰러진 외부인. 정체가 무엇인지야 정신을 차리면 본인에게 직접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

제국의 아카데미, 엘폰의 정교수 로디븐.

그가 장기간 휴가까지 내며 이런 제국 변경의 외진 산맥까지 오게 된 경위는 단순히 연구의 재료 수집을 위함이었다.

그의 전공 중 하나인 테이밍 마법은 많은 몬스터들의 표본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몬 산맥은 완벽한 장소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대자연은 미지의 생물들이 넘치는 보고였으니.

"정말 혼자서 가셔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수행인 몇 명은 데려가시는 편이······."

"됐네. 뭐 거창한 일이라고 번거롭게 사람을 붙여서 가나."

로디븐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오른 이 산맥에서 설마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산맥 깊은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단 같은 구조물에는 눈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들의 사체가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전신을 피로 흠뻑 적신 채 우두커니 서있던 괴인.

대륙 최대의 아카데미 엘폰, 그곳의 정교수라는 직위를 지닌 로디븐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런 그도 평생에 이렇게나 불길한 기운을 풀풀 뿜어내는 마력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인간? 마법사인가? 이런 외진 곳까지 죽을 자리를 다 찾아오고, 참으로 불운한 녀석이구나."

로디븐은 본능적으로 그가 마족이거나, 적어도 마족과 관련된 계약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존재가 이런 장소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다짜고짜 시작된 괴인의 습격에서 로디븐이 할 수 있는 건 필사적인 도주뿐이었다.

격의 차이는 명백했으나,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던 건 언젠가 아카데미의 교장에게 선물로 받았던 마도구 덕분이었다.

간발의 차로 마도구에 각인된 무작위 텔레포트 마법으로 겨우 괴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으음."

정신을 차린 로디븐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었다.

'여기는······?'

로디븐은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괴인에게 습격을 당했고, 겨우 도주한 다음 마력을 다 탈진해서 정신을 잃었었는데······ 이곳은 어디지?

로디븐은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쓰러지기 전에 완전히 탈진됐었던 마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경계가 섞인 눈으로 방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 방문이 열렸다.

"깨어나셨군."

로디븐은 방으로 들어온 낯선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더듬더듬 물었다.

"누구······ 시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가?

로디븐의 물음에 남자가 간단히 대꾸했다.

"이 오두막의 주인이오."

······오두막? 산맥 한가운데에?

이 험한 산맥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로디븐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딸아이가 숲에 쓰러진 당신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소. 그래서 간단히 치료를 마친 참이오."

"아······ 고맙소."

로디븐은 일단 감사부터 건넸다.

남자가 물었다.

"몸 상태는 어떠시오?"

"아, 덕분에 괜찮은 것 같소. 한데······."

로디븐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의문들 중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를 정리했다.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분명히 심각한 수준의 마력 탈진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리 말끔하게 상태를 안정시킨 건지.

반면에 남자는 로디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방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차라도 좀 가져다드리겠소. 쉬고 계시오."

방 바깥으로 나간 남자가 이내 찻잔을 들고서 도로 돌아왔다.

로디븐은 남자가 건네준 차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 모금 마시는 척만 하고서 탁자에 내려놨다.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툭 말을 내던졌다.

"이상한 건 넣지 않았소. 그럴 이유도 없고. 안심하고 마셔도 되건만."

"······."

로디븐은 무안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무방비한 상황이라 조심한 것뿐이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애초에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줬을 리도 없었으니까.

"미안하오. 아직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그렇소. 한데 당신은······ 이 산맥에서 생활하는 분이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디븐은 남자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을 줄 알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서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회복되었다면 내킬 때 떠나시오. 더 안정이 필요하면 며칠 정도는 머무를 수 있게 해주겠소."

단지 그렇게 말하고는 더 나눌 말이 없다는 듯 다시 밖으로 나가버릴 뿐이었다.

로디븐은 묘한 사내라고 생각하며 닫힌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옆의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는 집 주위를 넓게 두른 목책과 앞마당이 보였다.

그리고 앞마당에서는 한 소녀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저 소녀가 딸인가?'

로디븐은 일단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남자는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집 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두막의 앞마당으로 나온 그는 소녀가 올라가있는 나무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어느새 눈을 뜨고서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네요."

훌쩍 나무 밑으로 뛰어내린 카앤이 로디븐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물었다.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이죠? 어디서 온 사람이에요? 여기에는 왜 들어왔어요?"

자신에게 아무것도 궁금한 게 없는 것 같은 남자와 정반대로 그녀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아 보였다.

질문 세례에 로디븐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에게 있어 이 나이대의 소녀는 아카데미의 학생 말고는 평소 상대할 일이 없었고, 그들은 대체로 아주 공손했기에 카앤의 천진난만한 태도가 새삼 낯선 탓이었다.

"너는, 아버지와 단둘이 이 산맥에서 살고 있는 거니?"

"제가 먼저 질문했잖아요. 먼저 대답하세요."

로디븐은 당혹스러움을 숨기며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로디븐이라고 한다. 마법사지. 엘폰 아카데미 소속의 교수이기도 하고."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폰? 아카데미?"

***

용사와 동행하여 라몬 산맥까지의 향하는 길은 굉장히 고요했다.

고요했다고 해야 할까, 공기가 삭막했다고 해야 할까.

아셸을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닐 때도 딱히 대화를 많이 나누던 편은 아니었지만, 용사가 일행에 추가되니 더 오가는 말이 없게 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용사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전혀 하지 않는 편이었고, 아셸도 용사를 의식해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말이 없었으니까.

날이 완전히 저물고 식사와 야영을 위해서 땅에 내려섰다.

아셸이 습관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듯 살펴보고는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온다는 건 띠용이의 사냥에 함께 나선다는 의미였다.

우리가 먹을 식량이야 챙겨온 게 있지만 띠용이의 몫은 따로 사냥이 필요했다. 덩치가 덩치였으니까.

와이번의 본능 탓인지, 저번에 한 번 띠용이가 몬스터를 너무 불필요하게 많이 학살한 전적이 있었다.

워낙에 영리한 녀석이라 말은 잘 듣지만, 그때부터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셸이 따라붙어서 제어하도록 하고 있었다.

펄럭!

띠용이가 날개를 편 채 하늘로 날아오르고, 아셸이 그 뒤를 쫓아서 달리며 멀어졌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한참이나 모닥불이 타오르는 걸 멍하니 응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용사가 그런 내 모습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걸 물어도 되겠나?"

"······?"

용사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출발한 뒤 지금이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목적은 대륙의 평화라고 했다. 그것은 나의 목적과 합치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를 돕는 것이라 했지."

"그래."

"그러면 칼데릭의 군주가 된 것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인 것인가?"

아······ 그 얘기인가?

한마디로 군주가 된 이유가 궁금하다는 말이었다.

그녀도 내가 최근에 군좌에 오른 새로운 군주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까.

'그건 나도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야.'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렸던 것뿐이지.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침묵으로 넘겼다.

"이 또한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건가."

하지만 용사는 더 캐묻지 않고 순순히 넘어갔다. 침묵만으로 대답이 됐다는 듯.

아무래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지만 오해하든 말든 별 상관은 없었다.

"궁금한 걸 하나 더 물어도 되겠나?"

"일일이 그렇게 묻고서 질문할 필요는 없다.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줄 테니."

"그대의 호위, 아셸 경에 대한 이야기다."

용사의 목소리가 조금 무겁게 가라앉았다.

"7군주 그대와 아셸 경의 유대는 보통처럼 보이지 않더군. 그대가 경을 수하로 거두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음······."

아셸의 정체를 알게 되서인지, 용사는 확실히 그녀에 대해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이겠지만.

이건 알려주지 못 할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군주성에서 아셸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 백월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찌어찌 곁에 데리고 다니게 된 것.

이야기를 들은 용사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질문했다.

"그대 또한 나를 경멸하는가?"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의미를 못 이해하지는 않았다.

나는 말없이 용사와 눈을 마주쳤다.

용사를 경멸하냐고? 그럴 리가 없다.

게임에서 그녀가 흘렸던 독백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스쳤다.

그녀가 마음에 품은, 평화를 위한 맹목적인 신념을 그녀 본인을 제외하면 가장 잘 아는 인간은 아마 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셸은 그럴 수 없어도 적어도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도 결국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니 그런 거겠지만.'

나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고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신이 아닌 이상에야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지.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나?"

"······."

"내가 당신에게 지니고 있는 감정에 적어도 경멸은 조금도 없다."

용사의 표정이 어쩐지 지쳐 보인 탓이었을까.

나는 조금 쓸데없는 뒷말까지 덧붙이고 말았다.

"그리고 당장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용사, 당신뿐이다."

그 말은 조금 의외였는지 용사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잠시 뒤 인기척이 느껴지고 아셸과 띠용이가 돌아왔다.

아셸은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서서 마저 호위를 서기 시작했다.

사실 용사까지 있는 이상에야 뭐라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일은 없다.

그렇기에 아셸이 보초를 설 필요는 없었지만 말려도 고집을 부릴 게 뻔했기에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호위로서 책무를 다하려는 그녀를 존중하려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셸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그녀의 분위기가 띠용이와 함께 나서기 전보다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가?

의아함을 느끼다가 다시금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

"천천히 먹어라."

아셸은 게걸스레 사냥한 몬스터를 뜯어먹는 띠용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녀석은 듣는 둥 마는 둥 식사 속도에 전혀 변함은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본 아셸이 슬며시 띠용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흠······."

그리곤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발 부근에 손을 올리고는 슬슬 쓰다듬기 시작했다.

평소에 7군주 앞에서는 보일 수 없는, 그리고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었지만 보는 눈이 없는 지금은 괜찮았다.

와이번의 발가락 사이사이의 비늘에 조금 물렁한, 촉감이 좋은 부위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그녀였다.

아셸은 잠시 멍하니 비늘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용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아셸에게 있어 용사에 대한 감정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분노는 아니다. 원망이나 경멸 따위도 아니었다.

단순히 일족의 일과 관련된 껄끄러움의 감정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뭘까?

7군주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지만, 그저 당신의 뜻에 따를 뿐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셸은 좀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여전히 혼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이만 가자."

식사를 마친 띠용이를 데리고 아셸은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잡았던 곳에 도착할 즈음 7군주와 용사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당장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용사, 당신뿐이다."

아셸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 상태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순간 마음 한편이 답답할 정도로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해보면 용사에게 껄끄러운 무언가를 느낀 건, 그녀의 정체가 용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가 아니었다.

7군주가 여관에서 용사와 처음으로 만나게 했을 때부터.

그가 남들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부터.

"······."

7군주에게 있어 용사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세상의 영웅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찬란하고 위대한 여인이었다. 적어도 자신 따위는 감히 비교도 될 수 없는.

아셸은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마음에 솟아오르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애써 외면하며.

계승자 (5)

"아카데미가 뭔데요?"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렸을 적부터 산맥에서 살아온 그녀는 산맥 바깥의 물정에 어둡다 못해 거의 무지했다.

로디븐은 조금 당황하며 생각했다.

'이 산맥에서만 살아온 아이인가?'

엘폰은 대륙 최대의 아카데미, 어디 촌구석의 시골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모르는 이를 찾아보기가 더 힘들 정도다.

로디븐은 그녀가 세상의 물정에 완전히 어두운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아카데미라는 건 말이다."

"뭔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마법사라는 거죠? 어떤 마법을 쓸 줄 알아요?"

로디븐은 조금 정신이 산만해지는 걸 느꼈다. 마법에 대해서는 또 알고 있나?

'······아! 그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로디븐은 뒤늦게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내몰았던 괴인의 존재를 떠올렸다.

텔레포트로 간신히 따돌리긴 했지만 어쩌면 추적을 당할 수도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아주 미세한 마력의 잔재도 감지할 수 있었으니.

또 이 장소가 텔레포트한 지점에서 얼마나 거리가 떨어진 곳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력으로 추적을 당하는 게 아니더라도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시 놈과 마주치게 될 위험이 있었다.

로디븐은 다급해져서 말했다.

"네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느냐? 해야 될 말이······."

"마법은 저도 좀 쓸 줄 알거든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 마법은 본 적이 없다 보니까 궁금해서요."

"아니,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로디븐은 카앤의 말을 끊고 용건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흠칫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불꽃을 피워낸 카앤이 그것을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저는 화염 마법을 좀 할 줄 알아요. 사실 아직 배운 게 거의 원소 마법밖에 없기는 한데."

"······."

로디븐은 놀란 눈으로 허공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을 바라봤다.

원소계 마법에 속하는 화염 마법, 마법사라면 초심자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초급 마법 중 하나.

하지만 로디븐이 놀란 이유는 카앤의 마법 전개에 있었다.

'별 집중하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냈다.'

마법이란 마력의 성질을 변환시키는 것.

그 과정에 마법사의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술식 계산이 이뤄지며,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간단한 마법이라도 방금처럼 숨을 쉬듯 아무렇지 않게 펼쳐내는 건 경지에 달한 마법사들에게나 가능한 일.

방금 카앤이 행한 단순한 행위는, 마법사인 로디븐의 눈에는 세살배기 어린아이가 저글링을 한 것과 다르지 않게 보였다.

'그런데······ 방금 원소 마법밖에 할 줄 모른다고 한 건가?'

로디븐은 눈앞의 소녀에게 급격히 호기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마법은 아버지에게 배웠느냐?"

"그렇죠."

"배운 지가 얼마나 됐지?"

"이제 반 년 조금 안됐는데요. 그건 왜요?"

······마법을 배운 지 반 년도 안된 입문자라고?

로디븐은 카앤이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모습은 거짓이라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애초에 거짓이라고 해도, 그녀가 방금 보여준 마법 전개는 고작 열몇의 어린 마법사가 보일 수 있는 숙련도가 결코 아니었다.

'천재.'

그런 상식을 아무렇지 않게 비트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 있다.

로디븐은 등골에 미약한 소름이 이는 것을 느끼며 카앤을 빤히 바라봤다.

그오오오!

육중한 기척이 가까워짐과 함께 포효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풀을 헤치고서 오두막의 마당에 거대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뿔이 4개 달린 사슴이었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로디븐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카앤에게 말했다.

"물러서거······."

아니, 말하려고 했다.

돌연 도약과 함께 섬전처럼 쏘아나간 카앤이 맨주먹으로 거대 사슴의 턱을 후려쳤다. 무언가 터지는 폭발음이 났다.

고개가 덜컥 꺾인 사슴은 그대로 땅바닥에 허물어졌다. 일격에 절명한 것이었다.

"종종 몬스터들이 집까지 들이닥치기도 해요. 이런 놈들은 대부분 고기도 질겨서 맛없는데."

바닥에 착지한 카앤이 주먹을 털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막 마법을 펼치려던 로디븐은 뻘쭘하게 뻗은 손을 거두며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이 아이, 체술의 수준이······?'

마법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나?

아니, 방금의 광경을 보면 마법이 보조고 체술의 수준이 훨씬 더 높아 보였다. 저만한 몬스터를 가볍게 처치하다니.

"음, 나와계셨군."

뒤이어 사라졌던 남자가 마당에 나타났다.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풀뿌리 같은 것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로디븐은 그의 기척을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는 사실에 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두 부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약초 캐고 온 거야?"

남자가 쓰러진 사슴을 힐끗 바라봤다.

"또 몬스터가 들어왔나?"

"응."

"다른 몬스터가 꼬이기 전에 얼른 치우거라. 또 오두막 근처에 대충 버리지 말고 제대로 묻고."

카앤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슴의 뿔을 붙잡았다.

거대한 사슴의 사체를 질질 끌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자가 로디븐에게 시선을 옮겼다.

"바로 떠나실 생각인가?"

"아, 아니. 아니오."

카앤의 재능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다시 중요한 문제를 떠올린 로디븐이었다.

"급하게 해야 할 얘기가 있소.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것과 관련된 것이오."

"······."

남자는 로디븐의 사정에 그닥 관심이 없는 기색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왜 이런 험지에서 홀로 쓰러져 계셨소?"

로디븐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혹시 마족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오?"

"그야 모를 리가."

"······다소 갑작스러운 이야기겠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오."

남자가 잠자코 듣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우선 늦었지만 소개를 먼저 하겠소. 나는 엘폰 아카데미의 정교수인 로디븐 페르슈마라고 하오."

"흠······ 엘폰."

정체를 들은 남자의 반응은 묘했다. 적어도 카앤처럼 아카데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기색은 아니었다.

로디븐은 그 반응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가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이 산맥에 온 목적은 마법 연구를 위해서 다양한 몬스터의 표본이 필요했기 때문이오."

"그러셨군."

"한데 이 산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을 보았소. 그리고 느껴졌던 마력으로 보아 놈은 분명히 마족이거나 그 계약자요."

이번에도 남자의 반응은 묘하기 그지없었다.

마족은 한때 세상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존재들. 보통은 그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그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조금 꿈틀거린 게 전부였다.

"그렇군. 마족이라."

로디븐은 그런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조금 더 언성을 높였다.

"놈은 보통 마족이 아니었소.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나는 제법 뛰어난 마법사요. 황실이나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과 견주어도 실력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

"놈은 그런 나를 가지고 놀듯이 농락했소. 천운이 닿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아니, 그야 당연하지 않소? 이곳은 이제 안전하지 않으니 한시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요. 당신도, 당신의 딸도."

로디븐은 그에게 아무런 상황 설명도 해주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괴인이 이쪽을 추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들이 놈과 맞닥뜨려 위험에 처하기라도 하면 그건 전적으로 벌집을 건드린 자신의 탓이었다.

"당신 부녀의 터전에 이런 위험을 가져온 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마족이 나를 찾기 위해 근방을 모조리 들쑤시고 있을 수도 있소.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소."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로디븐의 말을 끊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오. 다른 볼일이 없다면 당신은 떠나시오."

로디븐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방금 제대로 설명을 듣기는 한 건가?

만약의 참사를 피하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를 보면 알아서 한다는 말은 그럴 거라는 의미 같지가 않았다.

로디븐은 남자의 정체를 그럴듯하게 짐작해봤다.

변방의 외진 산맥에서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딸은 체술도 마법도 보통 또래의 성취를 훌쩍 뛰어넘은 듯 보인다.

은퇴한 기사나 마법사가 산골에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사는 건 아주 드문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의 선배들 중에도 그런 이가 있었으니.

물론 그런 것치고 남자의 외모가 젊어 보이기는 했지만 경지에 달한 마력은 육체의 노화를 늦추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기척을 놓쳤던 것도 그렇고,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그의 수준을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로디븐은 남자가 적어도 자신보다 높은 격에 있는 강자라고 생각했다.

'그 마족과 마주한다고 해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말려야 할 일이었다.

로디븐이 괴인에게서 느낀 격의 차이는 거대했다.

이 남자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놈과 맞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주시오. 내가 놈에게서 느낀 마력은 정말로······ 이보시오. 듣고 있소?"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시선을 오두막의 입구 쪽으로 돌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로디븐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놈이라는 게 아무래도 벌써 온 것 같은데."

"······뭣?"

잠시 뒤, 로디븐은 등골이 쭈뼛거리며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 불길하기 그지없는 마력의 기운. 놈이었다.

"이, 이런······."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남자를 뒤따라 로디븐도 움직였다.

바깥으로 나간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오두막 사방을 둘러싼 채 서서히 다가오는 무언가의 무리였다.

연기처럼 넘실거리는 검붉고 거대한 그것들은 보통의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기이함과 사이함을 지니고 있었다.

"······."

남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무리, 그것들의 한가운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놈이 있었다. 로디븐이 말한 괴인이었다.

***

여정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거대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봤다.

'도착했다.'

이곳이 라몬 산맥.

현시점에서 성검의 계승자가 살고 있을 곳.

"이곳인가?"

"그래."

옆에서 비행하는 용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산맥 전체를 뒤져서라도 계승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셸."

"······예, 론 님."

뒤에 타고 있는 아셸이 내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얘가 왜 이러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정신이 조금 산만해진 느낌이었다.

용사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째 용사와 대화를 나눴던 다음날부터 특히 이러는 느낌인데······.

'뭐가 또 있나.'

아셸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당장은 계승자에 집중해야지.

"내려갈 것이다. 잠시 휴식한 다음 추적을 시작하자."

"예."

나는 산맥 아래를 향해서 비행 고도를 낮추었다.

계승자 (7)

[······내 어렸을 때? 뜬금없이 뭐 그런 걸 물어봐?]

[산속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어. 세인테아 동쪽에 산맥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검술이나 마법도 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른 건 대답해주겠는데, 아버지에 대해선 더 묻지 마.]

게임 스토리 진행 중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화의 일부였다.

유저, 그리고 동료들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게 된 계승자가 들려준 자신의 과거 이야기.

시간상으로 따지면 계승자는 분명 이 라몬 산맥에 있다. 거짓말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다만 문제는 계승자가 이곳에 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띠용이를 탔다고 해도, 이 넓은 산맥 전체를 샅샅이 뒤지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막막한 일이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좀 쉬운 정도.

산맥에 도착하고 약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용사와 반대편으로 향한 나는 끝없이 펼쳐진 수풀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쉬자."

띠용이의 목을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녀석이 대답하듯 그르렁거렸다.

녀석뿐만 아니라 나 역시 감각을 아까부터 최대로 끌어올린 채였기에 정신이 피곤했다.

"······!"

감각에 미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감지된 건 그 순간이었다.

하나는 마족의 마력을 연상케 하는 불길한 마력,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마력.

앞서 몇 번이나 만나본 마족이었기에 불길한 마력 쪽의 주인이 마족이라는 걸 확신했다.

'또 마족이라고?'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곳에서까지 마족의 마력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기에.

설마, 하는 불길한 가정이 머릿속에 스쳤다.

계승자가 위치한 이 산맥에 마족이 있다면 그건 우연인가? 설마 계승자를 노리고 찾아오기라도 한 건 아닌가?

지금 시점에 계승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마족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계승자의 존재는 용사가 성검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알게 된 사실. 나와 용사 외에는 누구도 알아서 안 되는 비밀.

아무리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영향들을 미쳤다고 해도 그건······.

"론 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아셸도 기운을 느낀 듯 나를 불렀다.

"속도를 최대로 높여라, 띠용아. 지금 가고 있는 쪽으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노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될 것이다.

***

'와이번······?'

로디븐은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물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가 와이번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온갖 몬스터에 대해 박식한 그조차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크기의 블랙 와이번.

와이번은 대륙의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서식하지 않는 희귀하기 그지없는 생물이다.

설마 이곳 라몬 산맥에서도 서식하는 와이번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등 위에 누군가가 타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카앤 역시 당황하며 와이번을 바라봤다. 그녀에게 있어 와이번은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그리고 날개가 달린 몬스터였다.

후우우웅!

돌풍과 함께 와이번이 지상으로 착지했다.

이어 와이번의 등에서 내린 건 두 명의 남녀였다.

괴인은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마법사에게서 그들에게로 신경을 옮겼다. 두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리를 두고 마주한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가공할 기운.

이번에 마족을 사냥하여 한 차원 더 높은 격으로 성장한 괴인은 알 수 있었다. 여인이 은연 중에 뿜어내고 있는 마력의 격을.

방어막을 펼친 마법사에게는 격의 차이에 모호함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단번에 직감했다.

'내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이 보좌하듯 곁에 서있는 남자.

그에게서는 마치 벌레라도 보듯 일말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이질적이었다.

더군다나 저만한 강자를 수하로 둔 이가 당연히 보통 존재일 리가 없다. 지극히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잠깐, 블랙 와이번?'

괴인은 머릿속에 번뜩 스쳐간 정보에 순간 오싹함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는 본래 평범한 인간이었고, 지금도 세인테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세간의 소문에 밝다. 근래 대륙을 떠들석하게 하고 있는 한 존재에 대해서도 당연히 흘려들은 것들이 있었다.

흑발의 인간 남성, 백월족 호위기사 여인, 블랙 와이번······.

'칼데릭의 7군주.'

같은 군주인 6군주 폭왕을 살해하고, 중립국 회담에서도 세인테아 황실 측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새로운 칼데릭의 군주.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외관적 특징은 소문으로 들은 것들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섣부른 짐작이 아니었다. 대륙에서도 길들인 인물이 몇 없다는 블랙 와이번까지 있는 걸 보니 분명 확실했다.

'7군주가 대체 왜 이곳에?'

칼데릭의 군주, 그에게 힘을 준 마족초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자.

그들은 마족의 정점인 원마들과 비교해야 이치에 맞는 괴물들이다.

괴인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숨을 죽인 채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 7군주는 이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방어막 너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괴인은 7군주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서 도주하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마족은 아니고, 계약자인가?"

7군주의 입이 열렸다.

괴인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타인의 손에 쥐어진 감각, 이 불쾌감은 오랜만이었다.

괴인은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하며 7군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7군주가 수하인 여인에게 곧장 명령했다.

"목숨은 붙여서 제압해라, 아셸."

***

기운이 느껴지는 근원지에 도착하자 펼쳐진 풍경은 선뜻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많은 괴물들을 부리고 있는 마족, 그리고 그에 대치하여 방어하고 있는 듯한 세 인물.

"······!"

나는 그중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의 색도, 눈의 색도, 어렸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계승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외관.

'계승자!'

분명히 계승자가 맞다.

나는 온몸에 찌릿 전율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아셸에게 명령했다.

"목숨은 붙여서 제압해라, 아셸."

괴인 쪽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아 마족은 아니고 계약자인 듯했다.

때마침 계승자를 습격하고 있는 상황이 공교로웠기에 설마 정말로 마족들이 계승자의 정체에 대해서 안 건가 싶었으나······.

'모르겠네.'

[Lv. 73]

그렇다기엔 너무 피라미였다.

일단 마족들이 계승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정말로 알았다면 이런 피라미를 보낼 게 아니라 최소한 원마급이 직접 움직이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용사는 그들에게 있어 마왕의 부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인데 말이다.

놈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일단 제압해서 용사에게 심문이라도 시키면 될 것이었다.

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검을 뽑아든 아셸이 괴인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콰과과과광!

그녀가 휘두른 일검에 괴인의 주위에 있던 괴물들이 먼저 우수수 쓸려나갔다.

괴인이 기겁하며 요란하게 마력을 일으켰으나 덧없는 발악이었다. 90레벨이 넘는 아셸과 놈 사이의 격 차이는 아득했다.

순식간에 괴인의 뒤를 점한 아셸이 놈의 뒷머리를 붙잡고서 그대로 지면에 내리찍었다.

"끄으윽······!"

"얌전히 있어라. 저항하면 머리를 터뜨리겠다."

아셸의 경고에 괴인은 체념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다시 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그들은 펼치고 있던 방어막을 거두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사람들이 다 쓸어버렸는데, 아버지······?"

카앤이 얼떨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등장해서는 수많은 괴물 무리와 괴인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해버린 여인.

슬슬 마력에 한계가 왔던 남자는 방어막을 거두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

한편 로디븐은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남자 쪽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박자 늦게야 짐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칼데릭의 7군주?'

외모도 그렇고, 블랙 와이번도 그렇고, 전부 소문으로 들어온 것과 일치하는 인물.

산 넘어 산이었다. 마족의 계약자에 이어서, 칼데릭의 7군주는 또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저 마법 연구를 위해 찾아온 산맥에서, 로디븐은 자신이 무언가 어마무시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괴인을 제압한 7군주가 이쪽을 향해서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멈춰선 그가 세 사람을 슥 훑어봤다.

로디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칼데릭의 7군주······ 이십니까?"

로디븐은 말하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이곳에 어째서 모습을 드러낸 건지 이유도 모르는 상황에, 너무 섣불른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칼데릭의 군주?"

로디븐의 말에, 괴인의 공세에도 태연하기만 했던 남자의 얼굴에도 자그마한 놀라움이 일었다.

카앤은 알아듣지 못 했기에 멀뚱히 세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녀는 칼데릭과 군주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무런 대답도 없던 7군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대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문, 그러나 예상 외로 온화한 태도에 로디븐은 저도 모르게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곧 다시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대답을 고민했다.

상대는 적국이나 다름없는 진영의 군주, 엘폰의 교수라는 신분을 솔직하게 밝혀도 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목적이 무엇이지? 괴인 쪽인가? 아니,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어째서인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로디븐의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때 카앤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저는 카앤이에요."

그에 7군주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녀가 말을 건 순간, 로디븐은 왜인지 7군주가 조금 놀란 것 같다는 기색을 느꼈다.

"이쪽은 제 아버지고, 이쪽은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이에요. 무슨 아카데미니 교수니 했던 것 같은데 저도 잘은 몰라요."

갑자기 자신의 정체까지 다 까발려버리는 카앤의 언사에 로디븐은 당황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기 저 엄청 강한 사람도 그렇고, 분위기를 보니까 좀 대단하신 분인가요? 칼데릭의 군주?"

"······."

7군주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로디븐은 속으로 아우성을 지르며 7군주의 분위기를 살폈다.

좀 대단하신 분? 아무리 세상사에 무지하다고 한들 칼데릭에 대해서도 몰랐단 말인가?

감히 어느 누가 칼데릭의 군주의 바로 앞에서 이딴 망발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이, 이 아이는 산속에서만 살아 세상에 무지해 그런 것이니······."

혹여 7군주의 언짢음을 사기라도 했다면 아무도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지 못 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로디븐이 대신 설명하려던 때였다.

쿠우우우!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또 다시 하늘 저편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계승자 (8)

슈우우우!

황금빛의 기운이 마치 혜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가공할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왔나.'

분명 나랑은 산맥의 정반대쪽으로 향했을 텐데 어떻게 벌써 알고 왔을까.

어쨌든 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다. 찾을 수고를 덜었으니까.

이내 순식간에 이곳까지 도달한 용사가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설마 광채의 정체가 사람이 날아오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세 사람은 경악한 기색이었다. 방금까지 재잘거리던 계승자도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용사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

용사 또한 그들과 아셸에게 제압당한 마족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설명을 바라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계승자를 슬쩍 쳐다보고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녀인 것 같다.'

성검의 계승자.

용사의 남은 삶의 마지막 목적이자, 희망.

"······!"

계승자를 바라보는 용사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복잡한 순간일 것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계승자를 드디어 찾은 것이었으니까.

용사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말리지 않으면 당장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검을 소환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녀를 불렀다.

"이봐."

용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 이성을 찾은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용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맞나? 따로 확인이 필요한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게임에서 용사와 계승자의 만남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계승자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은 용사는 성검을 소환하여 계승자에게 쥐어주었고, 오직 용사에게만 반응해야 할 성검의 기운이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계승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과정은 용사가 저 소녀에게 성검을 쥐어주고, 그녀가 바로 계승자임을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

용사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직접 성검을 꺼내서 확인해야 한다."

"그런가. 그럼 그건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군."

용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다짜고짜 성검을 꺼내서 계승자에게 쥐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계승자 외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 둘.

계승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단둘이 산맥에서 살았다고 했었다.

그러니 둘 중 한 명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는데, 어느 쪽인지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계승자가 왼쪽에 서있던 남자의 곁에 가까이 붙으며 속삭여 말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또 늘어났는데, 아버지."

나는 계승자의 아버지가 아닌, 내 정체를 먼저 입에 담은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이쪽은 뭐? 아카데미 교수?

계승자가 방금 남자를 산맥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한 말이다.

아카데미라면 세인테아의 엘폰을 말하는 건가? 그런 작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될 듯 싶었다. 모일 사람이 전부 모였으니.

"적의는 없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이게 첫 만남이니 계승자와 그녀와 관련된 인물에게는 나쁘지 않은 첫인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계승자는 내게 있어 용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계의 최종 보스인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 그녀와는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야만 했다.

내 정체는 먼저 밝힐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들켰다.

그렇기에 경계를 거두게 하려면 우선 이곳에 온 그럴듯한 목적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마침 좋은 연막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저 마족의 계약자 때문이다. 그대들과는 관련이 없으니 안심하도록."

"······예, 예. 그렇습니까."

가장 긴장한 채 있던 교수라는 남자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내 정체까지는 알아챘지만 용사까지는 알아보지 못 한 듯했다.

당연했다. 나야 소문이 난 게 많으니 알아볼 요소가 충분했지만, 용사는 현재 성검의 능력으로 폴리모프까지 한 상태였으니까.

그때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용사, 그리고 아셸을 둘러보고 있던 계승자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큰 도움을 받았소.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소."

의외로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감사 인사였다.

"들어오시겠소? 바로 떠날 것 같지는 않은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리리다."

남자가 등 뒤에 있는 오두막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떠날 것 같지 않다니······ 무슨 소리지?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 뭘 눈치채기라도 했나?

계승자의 아버지는 게임에서도 거의 나온 정보가 없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무언가를 느끼며 용사를 바라봤다.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야기도 듣고 싶으니."

***

차를 대접받으며 나눈 대화는 별 것 없었다.

우선 계승자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카앤이 맞았다. 그것으로 그녀가 계승자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교수 쪽의 이름은 로디븐, 그는 정말로 엘폰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라고 했다.

연구에 필요한 몬스터 표본을 얻기 위해 이곳 라몬 산맥에 왔다가 우연히 이들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한마디로 계승자와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니 마족의 계약자는 아무래도 계승자와 별다른 관련이 없는 듯했다.

놈과 처음 마주친 건 교수 쪽이고, 그 때문에 계승자 부녀까지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교전 중이었던 거로군.'

계승자의 아버지 쪽의 이름은 벤이라고 했다.

되도록이면 그의 정보도 알고 싶었기에 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 은근히 화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나는 그저 평범한 나무꾼일 뿐이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 같던데."

"젊었을 적에는 떠돌이 마법사였지. 군주께서 듣기엔 별 재미없는 이야기일 것이오."

대놓고 그가 자신과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캐묻는 것은 실패했다.

다만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레벨도 그렇고, 그는 계승자처럼 세간의 지식에 어두운 것도 아닌 듯한데 내게 조금도 긴장한 기색 따위가 없었으니까.

보통 군주쯤 되는 거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교수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일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용사와 오두막의 앞마당에 나란히 서서 따로 말을 나눴다.

"이건 사소한 거다만."

"······?"

"그 벤이라는 남자의 이름, 진짜 본명이 아닐 것이다."

용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사에게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으로 판단한 사실일 것이었다.

"우리를 경계해서 그런 건가."

"그보다는 다른 쪽일 것이다."

"······음?"

"진실과 거짓에는 흑백처럼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게 아니다. 그 남자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름에는 절대성이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버리고 오랜 세월을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면,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지."

나는 용사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 벤이라는 남자가 살아온 삶에서 여러 이름을 사용해왔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중 벤이 현재의 이름이고.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용사의 말마따나 사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고.

"그보다 이제 확인을 해봐야겠지."

"그래. 근데 그 전에 저것부터 처리하는 게 어떻겠나?"

나는 오두막과 떨어진 곳에서 아직까지 아셸에게 제압당한 채 있는 계약자를 바라봤다.

"계승자와는 전혀 무관한 놈인 것 같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일이니 확실히 확인을 하지."

용사와 함께 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용사가 차가운 눈길로 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해라."

항거할 수 없는 기운에 놈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어대다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놈의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놈은 특별할 것 없는 마족의 계약자였고, 이 산맥에 다다른 건 우연일 뿐이었다.

용사가 놈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역시 놈은 계승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7군주······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할 테니······."

나는 애원하듯 말하는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원하는 건 모두 들었으니 더 볼일은 없었다. 마족과 놈들의 계약자는 살려둘 이유가 하등 없는 해악이었다.

투욱.

즉살을 사용하자 놈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용사가 조금 놀란 듯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방금 그건 마력이 아니군. 신비인가?"

나는 용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뒤쪽을 돌아봤다.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두막에서 나온 계승자, 카앤이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 죽인 건가요?"

바로 근처로 다가온 그녀가 쓰러진 계약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오해를 샀을까 싶어서 물었다.

"그래. 불쌍한가?"

"아뇨. 그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을 뻔했는데 그럴 리가요."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릴게요. 어, 그러니까······ 군주님 덕분에 저도 아버지도 무사하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

악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나 하다가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로디븐 아저씨한테 방금 좀 들었어요. 그러니까, 칼데릭의 군주라는 게 북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왕들 중 한 명이라고. 엄청 대단한 분이라고요."

"······그래."

옆의 아셸이 어딘가 안절부절한 기색으로 끼어들려고 했다.

어쩐지 이 상황이 웃기게 느껴져셔, 나는 피식 웃으며 아셸에게 손을 저었다.

계승자는 어릴 적부터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세간의 지식에 어두울 거란 건 알았다. 이 정도일 줄 몰랐을 뿐이지.

또한 내가 게임에서 알고 있는 계승자보다 지금의 그녀는 훨씬 성격이 활달해 보였다.

"그럼 이 엄청 강한 사람들은 군주님의 부하인가요?"

"부하기도 하고, 동료기도 하지."

카앤이 타겟을 바꿔 용사와 아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녀들도 조금 얼떨떨한 기색으로 악수를 받아주었다.

'이제 슬슬······.'

나는 저멀리 떨어진 오두막을 바라봤다. 아직 오두막 안쪽에 있는 로디븐과 벤은 밖으로 나올 기색이 없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다.

나와 눈짓을 주고받은 용사가 계승자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럼 카앤,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이요?"

"그래. 간단한 일이야. 내 검을 한번 쥐어보기만 하면 된다."

카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뭐. 그게 뭐 대수라구요. 근데 검이 어디에 있는데요?"

사아아아.

용사가 허공에 손을 뻗자 황금빛이 모이며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검에 카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자, 쥐어보렴."

용사가 허공에 둥둥 뜬 성검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카앤은 물끄러미 성검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을 검자루로 가져갔다. 그리고······.

번쩍!

그녀의 손이 닿은 순간, 성검에서 찬란한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계승자 (9)

성검에서 뿜어져나온 빛이 시야를 온통 밝게 뒤덮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광채였다.

깜짝 놀란 계승자가 손에 쥔 성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광채도 서서히 사라지며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뭐예요, 방금? 나한테 뭘 시킨 거예요?"

계승자가 용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용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석상처럼 굳기라도 한 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용사를 대신해서 당혹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는 계승자를 진정시켰다.

"네게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그 검의 특별한 능력일 뿐이니."

"······능력이요?"

"그래. 사용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판별하는 능력이 있는 검이다. 명검들 중에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있다."

대충 둘러대자 계승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검을 사용하기에 어울리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음······ 그래."

계승자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용사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는 없던 경계심도 약간 묻어나오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다짜고짜 건네준 검을 자신이 쥐자마자 눈이 멀 정도의 빛이 뿜어져나왔으니.

성격은 아직은 순진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기만 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제 어쩔 거지?'

어쨌든 그녀가 성검의 계승자라는 건 이로써 용사도 확인했다.

나는 용사를 힐끗 바라보며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성검의 계승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이 다음부터의 일은 용사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용사는 어쩔 것인가.

계승자에게 사정을 숨김 없이 설명하고 협력을 구할 건가? 아니면 일단은 더 지켜볼까.

나는 용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용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가능하다면 그녀도 당장이라도 계승자를 설득하여 성검을 계승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계승자의 현재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 전에 절대적인 문제가 있었다.

왜냐면, 성검의 계승에는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하는 '조건'들이 존재했으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용사는 계승자에게 한마디 사과를 건네고서, 성검을 도로 회수한 뒤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는 아셸에게 계승자를 상대해주고 있으라고 속삭여 말한 뒤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그녀는 계승자가 맞나?"

땅바닥에 성검을 꽂아두고서, 생각에 잠긴 듯 나무 앞에 서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용사는 올려다보고 있는 잎가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7군주, 그대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덕분에 정말로 이렇게 계승자를 찾게 되었으니."

"말과는 다르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그제야 용사가 내게로 시선을 옮겨 눈을 마누치고서 물었다.

"그대는, 성검의 계승에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나?"

계승자에 대한 정보도 내가 전부 제공한 마당이다. 이거라고 굳이 눈치를 볼 건 없었다.

"네 가지 시련."

"······."

내 말에 용사는 도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알고 있었군."

성검을 계승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그것은 계승자가 겪어야 할 4가지의 시련이었다.

그것은 검술이나 마법 등 무력적인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닌, 내면의 번뇌에 관한 것이었다.

[소중한 이를 상실하는 슬픔을.]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는 절망을.]

[인간의 이기심에서 추악함을.]

[옳다 여겨온 정의에서 회의를 느껴야 할 것이다.]

나는 게임에서 성검이 용사에게 내렸던 계시를 떠올렸다.

계승자가 성검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련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

새삼 생각하지만, 정말 더럽게 막막한 문제였다.

신비를 찾느니, 허세를 부려서 주변을 속이느니, 지금까지 헤쳐온 난관들과는 결이 다른 까다로움이었다.

라사의 메인 스토리, 그것은 요약하면 계승자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험 이야기다.

유저와 계승자가 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로그나르 왕국의 마커 시, 모험가 길드 건물.

퀘스트를 수행하던 유저는 마침 이해관계가 일치하던 계승자와 함께 하나의 의뢰를 맡게 된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연은 하나둘씩 여러 동료들을 만나며 장대한 모험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계승자는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계승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게 된다.

계승자에게 성검을 계승시키는 것.

그것을 이루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그러한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의 내 행동으로 이미 게임상의 메인 스토리는 꼬일 대로 꼬여버렸으니까.

본래라면 계승자와의 모험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이미 몇몇 해결했고, 지금만 해도 없었어야 할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약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하려면 지금의 시점에 계승자를 찾아온 것부터가 단단히 어긋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내게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임에 빙의하고, 살아남기 위해 별 수 없이 7군주가 되고, 신비들을 모은 것부터가 이 세계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그 나비효과로 인해 계승자가 유저와 처음 만났던 시점과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러면 영영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게임의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하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다시 그녀의 동료들까지 찾아내 모험을 떠나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유저와 계승자, 그리고 그 뒤에 만난 동료들과의 유대.

그것은 수많은 우연과, 계기와, 사건들로 쌓이고 얽힌 복잡하고 끈끈한 관계다.

또한 계승자의 마음은 내가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도, 조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게임의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그대로 따라가도 변수가 넘쳐날 판에, 신이라도 되지 않은 이상 지금 상황에서 메인 스토리를 그대로 재현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더해서 다른 동료들을 찾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들 또한 지금 시점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으니.

그렇기에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만족시킬 새로운 계기들을 만들어야 한다.

'······대체 어떻게?'

지금 용사가 나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니, 배신이니, 인간의 이기심이니, 정의니······.

현재의 용사는 아버지와 산속에서만 자라온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수로 그런 고통들을 겪고, 극복하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쭉 생각해왔지만 명확한 방도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인위적으로 무대를 마련하고 계승자를 그 위에 올려놓기라도 해야 할까? 마치 연극처럼?

과연 그런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었지만,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 이전에 인간으로서 못 할 짓이기도 했다.

문득 영화가 하나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세트장에 갇힌 주인공이 그 세트장이 진짜 세상인 것처럼 살고, 모두가 주인공을 속이는······.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다시 용사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용사는 입을 열었다.

"계승의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계승자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지금껏 내게는 막막한 문제였으니까."

"······."

"그렇기에 알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은 떠오르는 방법이 없군."

용사 또한 내가 생각한 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는 수겠지. 조금의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승자를 찾아낸 지금, 어쩌면 성검에서 새로운 계시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다."

용사는 그렇게 말하며 성검의 자루를 슬며시 쥐었다.

그녀의 기대대로 성검에서 계시가 더 내려올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용사나 나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동안은 계속 여기서 머물며 계승자와 가능한 한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좋을 것이었다.

***

"이상한 사람들이야."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카앤은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맞은편에는 로디븐이 앉아서 아직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로디븐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갔어요?"

"좀 전에 위층으로 올라갔단다."

현관문을 슬쩍 바라본 로디븐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런데, 혹시 밖에서 그들과 더 이야기를 나눈 거냐?"

"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별 거 없어요. 그냥 악수 나누면서 인사 좀 했는데요."

7군주와 악수를 나눴다는 말에 로디븐은 허, 탄식을 내뱉었다. 무언가 형용하기 힘든 괴리감을 느끼며.

그의 상식에서의 군주들의 이미지와 실제로 본 7군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적어도 함께 차를 나누거나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로디븐은 좀 전의 대화를 상기하며 7군주의 저의를 짐작했다.

그는 단순히 마족의 계약자를 쫓아 이곳에 왔다고 했지만 로디븐은 물론 순순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로디븐은 7군주의 온화한 태도가 자신보다는 이들 부녀에게 향해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7군주의 진정한 목적은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한들 로디븐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다시 고민에 잠기려고 할 때였다.

"아저씨, 산맥 바깥에 대한 이야기 좀 더 해줄 수 있어요?"

"······음?"

"칼데릭이니 뭐니 무슨 큰 세력들이 있다면서요. 그거에 대해서 자세히요."

그녀의 요구에 로디븐은 맥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칼데릭과 세인테아를 포함한 대륙의 4대 세력, 그들의 수뇌, 마족들에 대해서 로디븐은 차례로 설명해주었다.

카앤은 흥미가 가득한 기색이 되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7군주라는 자는 최근에 군주의 자리에 새롭게 오른 자다. 같은 군주인 6군주 폭왕을 살해한 것으로도 유명하지."

"왜 죽인 건데요?"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매우 좋지 않은 생각 같구나."

호기심에 찬 카앤의 눈빛에 로디븐은 이건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카앤, 너는 바깥세상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 자를 편하게 대하지만 말이다, 칼데릭의 군주는 정말로 위험한 자들이다. 일신의 힘으로도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들이지."

"엄청나게 강하다는 거네요."

카앤이 헤에, 감탄사를 흘렸다.

물론 나라라는 개념조차 흐릿한 그녀에게 크게 와닿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던데요. 갑자기 검이나 쥐게 시켜본 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검?"

카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아저씨는 무슨 아카더미의 교수라고 했잖아요?"

"아카더미가 아니라 아카데미다."

"네, 아카데미. 그건 뭐 하는 곳인데요? 교수는 또 뭘 하는 거고요?"

로디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대답했다.

"아카데미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란다. 검술이든, 마법이든, 지식이든 말이다. 그리고 교수는 가르치는 입장의 사람이지."

카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가 가르치는 사람이면 배우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데요?"

"학생이라고 한다. 네 또래의 아이들 몇천 명이 여러 교수들에게 배우고, 서로 배움을 공유하기도 하지."

그 말에 그녀의 눈에 자그마한 흥미가 깃들었다.

계승자 (10)

계승자가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과제였지만, 그보다도 가장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계승자를 데려가야 할까.'

일단 계승자를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계승자만 설득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한 건 계승자의 아버지인 벤의 존재였다.

'게임에서도 계승자는 분명히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걸 굉장히 꺼려했지.'

그건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현재에서 몇 년 뒤 시점까지, 그 사이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뭐라도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닌 이상에야 그녀가 산맥 바깥으로 나갈 이유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할 이유도, 미래에는 성격이 지금보다 더 어두워 보였던 이유도 딱히 없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정말로 맞다면 그 변고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나와 용사의 개입으로 막은 마족 계약자의 습격.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근거들로 생각해보면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한 추측이었다.

그 부분은 미뤄두고, 어쨌든 계승자에게 있어 아버지는 하나뿐인 가족이다.

계승자가 그런 아버지를 두고 홀로 산맥 바깥으로 쉽사리 나가려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계승자를 강제로 납치라도 할 게 아닌 이상에야 단지 그녀뿐 아니라, 그 역시도 설득이 필요한 대상이었다.

'용사도 지금쯤 골머리를 싸매고 있겠지.'

나는 뒤쪽에 서있는 아셸에게 물었다.

"아셸."

"예."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성검의 계승에 대해서."

성검과 계승자에 대한 정보는 아셸과도 진작 모두 공유한 상태였기에, 그녀 역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셸이 조금 머쓱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거다."

나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셸이라고 뭔가 아이디어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풀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팔로 머리를 베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시야 한편에 아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묘하게 그늘이 진 것처럼 느껴지는 표정.

"······."

언제부터였지? 아셸이 저렇게 이상한 기색을 보이던 게.

용사와 동행을 시작한 지 중간쯤부터였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용사의 존재가 불편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느낌이 들 뿐.

이참에 그녀에 대한 문제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셸."

"예."

"네 상태가 얼마 전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빙빙 돌려 말하면 흐지부지 넘어갈 것 같았기에 대놓고 물었다.

자그맣게 헛숨을 들이킨 아셸이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역시 뭔가가 있기는 있군.

"아닙니다, 론 님. 저는······."

"네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나는 너를 믿으니, 그렇게 여겨도 문제는 없는 거겠지."

아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만 알아둬라. 너는 내 앞에서 언제나 냉정할 필요도, 흔들리지 않을 필요도 없다.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터놓지 않으면 별 수 없지. 굳이 무리해서 억지로 캐묻고 싶지는 않으니.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아셸이 꾹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한심한 이유라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을 뿐입니다."

"······?"

한심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무슨. 네 한심한 모습이야 지금껏 많이 봤는데."

"예?"

"스튜 끓이는데 소금 넣는 걸 까먹거나, 몰래 띠용이를 쓰다듬으며 입꼬릴 씰룩이거나, 아니면······."

"······예, 예?"

아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농담이다."

너무 축 처진 기색이길래 한번 농담해본 건데 반응이 격했다.

내가 이런 농담을 한 게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지 그녀는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채였다.

"어떤 이유라도 네게 실망할 일은 결코 없으니 말해봐라."

진정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온 아셸이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앞으로의 여정에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회의감이 들었는지까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용사, 그렇지 않아도 일족의 일로 불편한 존재인 그녀가 협력자로서 함께하고 있었으니.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용사와의 대화, 내가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당신뿐이라고 그녀에게 위로차 말을 건넸을 때.

아셸은 아무래도 그 대화를 듣고 회의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거라면 이 녀석은 정말로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마법사의 던전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나?"

"······?"

"나는 네게 내가 바라는 바와 목적에 대해서 말했고, 너는 기꺼이 그를 돕겠다고 했었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아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은,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던 내 진실된 속내였다."

"······."

"알겠나? 아셸. 네가 처음이었다는 거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런 한심한 생각은 이제 관둬라."

무력과는 관계가 없다.

이 외로운 세계에서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셸일 것이다.

아셸은 한참을 굳은 듯 멍하니 서있다가, 곧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심각한 건가 했더니 별 것도 아니었구만. 하여간.

나는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용사가 계승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용사, 에인델은 마당 한편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카앤을 바라봤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어느새 다시 마당으로 나와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

검이 차례로 그리는 검로도, 몸의 균형도, 근육의 움직임도.

무엇 하나 모난 것 없이 완벽하다.

그녀는 현재 그녀의 수준에서 펼칠 수 있는 완벽한 검을 펼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이 피나는 노력의 결실인지, 아니면 하늘이 내린 타고난 재능인지.

'천재.'

카앤은 성검의 계승자다. 그러니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후자였다. 오히려 평범했다면 놀랐을 것이다.

"되게 유심히 보시네요."

카앤이 검을 휘두르던 걸 멈추고 에인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마당에 있던 건 에인델이고 그녀의 앞에서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건 카앤이었지만, 에인델은 사과를 건넸다.

"실례라면 미안하구나."

"딱히 실례는 아니고요."

목검을 어깨에 걸친 카앤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에인델이라고 했죠. 당신도 검사 맞죠? 보기에 내 검술은 어땠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진짜요? 빈말 아니죠?"

"진심이다. 내가 빈말을 할 이유는 없다."

흐응, 콧김을 내뿜은 카앤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인델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런데요, 결국 그 이상한 검은 왜 나한테 쥐어보라고 했던 거예요? 그 검이 나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 확인해서 뭐 하게요?"

에인델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검의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서다."

"새로운 주인······? 왜요?"

"나는 이제 그 검을 쥘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 무덤에 같이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명검이니."

그 말에 카앤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리셨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병이라면 제 아버지가 이것저것 잘 고치시는데, 한번 말씀드려볼까요?"

"안타깝지만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병이 아니라서 말이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아니, 그래도."

카앤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에인델에게서 알 수 없는 단호함을 느끼고, 관두었다.

"······그래서 저는 그 검의 주인으로 적합했나요? 뭔가 요란하게 빛이 나기는 했는데."

에인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구나."

"유감이네요."

카앤은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가능하면 들어드릴게요."

에인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네게 궁금한 걸 몇 가지 묻고 싶은데."

"그쯤이야 얼마든지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왜 아버지와 이런 깊은 산속에서 단둘이 살고 있는 거니?"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목덜미를 긁적이던 카앤이 이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이유랄 건 없는데요. 제 기억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부터 전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었으니까요."

"······."

"그나마 산맥 바깥에서 있었던 유일한 기억이라면, 다 죽어가던 저를 아버지가 구해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는 것밖에 없어요. 그조차도 희미해서 잘 기억은 안 나고요. 아버지한테 물어도 항상 대답을 피하고."

에인델이 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 친부가 아니었다는 건가?

"산맥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니?"

에인델은 카앤이 떨떠름해한다는 걸 알고 질문을 바꿨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소녀를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다음에 성검의 계승도 어떻게든 시도해볼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억지로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만에 하나 상황이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치닫더라도 말이다.

현실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뼈져리게 겪고, 또한 이해하고 있는 에인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승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성검의 주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 책임을 결코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용사인 이유였다.

"음······ 그것도 글쎄요. 그래도 바깥세상에 대한 흥미는 있어요."

카앤이 조금 들뜬 기색으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으로 보거나 아버지한테 이야기로만 들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도시라는 장소, 온갖 마법사들이 모여서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는 세인테아의 마탑, 온 대륙을 떠돌며 고대의 유적을 찾는 모험단들."

"그래. 바깥에는 그런 것들이 있지."

"그리고 당신들이 왔다는 칼데릭도 참 재밌는 곳인 것 같아요. 지배자인 군주들도 종족이 전부 다르다면서요?"

에인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래도 바깥세상에 대한 흥미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예 관심도 없었다면 설득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테니.

"가장 흥미로운 건 로디븐이 이야기해준 아카데미라는 곳이에요."

"아카데미······?"

"네, 아카데미요. 아케데미랬나? 아무튼 저랑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서 온갖 것들을 배우는 장소래요. 검술도 배우고, 마법도 배우고, 그리고 모여서 연구도 하고."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카앤을 에인델이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잘 들어보니,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전부 장소 그 자체보다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계승자 (11)

어느새 해가 저물고 산맥에 밤이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데, 한동안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머물러도 되겠나?"

계승자 문제를 일단락 짓기 전까진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딱히 없었지만 만들면 그만이었다. 놈에게 힘을 준 마족의 흔적을 더 찾아보기 위해서라는 걸로.

벤은 딱히 따지고 들 생각은 없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좋을대로 하시오. 한데 오두막에 세 분이 전부 머물 방은 없소만······."

"오두막 바깥에서 머무를 것이니 상관없다."

노숙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질리도록 했으니 별 문제도 없었다.

우리는 오두막의 마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용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계승자를 어떻게 데리고 갈지는 생각했나?"

타오르는 모닥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알고 있다."

"일단 전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나? 달리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어차피 언젠간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계승자가 아무런 사실도 모른 채 성검을 계승할 수는 없었으니.

"정말 방법이 없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건 한 번 말하면 되돌릴 수 없다. 일단 다른 방법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군."

용사의 말도 맞았다. 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거의 없다시피 한 그녀에게, 다짜고짜 성검이니 계승자니 이야기를 꺼내봐야 뭔 반응이 돌아올지 감도 안 잡혔고.

"그럼 그건 미뤄두고, 계승의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지는 계획이 있나?"

"아니······ 없다. 그건 설득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지."

나는 슬쩍 용사의 눈치를 보고 물었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구성하여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어떻게 생각하지?"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런 짓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용사가 단호하게 잘라 대답했다.

곧바로 답이 돌아온 걸 보니 역시 그녀도 그에 대해서 생각은 해본 모양이었다.

인위적으로 상황을 구성하여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그건 즉 그런 것이다.

계승자에게 억지로 동료를 만들어주고, 그들과 유대를 쌓게 하고, 희생시키고, 균열을 일으키고, 마음과 감정을 짓밟고, 절망을 안겨주고······.

그야말로 계승자의 삶을 멋대로 주무르고 망가뜨리는 거나 다름없다.

계승자에게는 많은 경험과 모험이 필요했지만, 우리가 그것을 억지로 채워줄 수는 없었다.

"마족의 침공이, 마왕의 부활이 코앞까지 다가오더라도 말이냐?"

"그래."

최악의 미래를 입에 담아 내뱉어도, 용사의 올곧은 눈빛에는 흔들림 한 점 없었다.

"그때가 온다면 계승 따윈 아무래도 좋다. 내가 직접 모든 걸 끝내러 올테로어로 향할 테니."

"······."

올테로어, 마족들의 땅.

봉인된 마왕과 그를 지키는 원마들, 그 밖의 수많은 고위 마족과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복마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현재의 용사를 붙잡고 있는 건 '계승'이라는 희망이다.

그 희망마저 사그라든다면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는 분명 방금의 말대로, 마족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끝장을 보려 하겠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결국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으니.

잠시 침묵이 내려앉고, 용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화를 나눠 보니 계승자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그런가?"

아까 용사가 계승자와 대화를 나누던 건 나도 멀리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별 내용은 없었던 것 같다. 산맥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 계승자가 신나게 떠들지 않았었나.

"그 아이는 바깥세상에 대해서 흥미가 있는 모양이더군. 특히 친구를 원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겠지. 어렸을 적부터 이 산속에서만 지낸 모양이니."

용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 있기는 한데······."

"뭐지?"

"······그 아이가 계승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감정과 깨달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산맥에서 나가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유대를 구축해야겠지."

"그렇지."

"그에 그나마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아카데미가 어떨지 생각해봤다."

······아카데미?

다소 뜬금없는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승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아카데미에 유달리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 로디븐이라는 자에게 들은 이야기겠지."

"그래. 어쨌든 계승자도 스스로 원하는 것이라면 그녀를 설득하기도 더 쉬울 테니까."

"아니, 잠깐······."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계승자를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그곳에서 성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해봤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계승자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있다. 친구들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확실히 아카데미야 학교나 다름없는 장소니 용사의 말이 틀리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승 조건을 충족하길 기대하기엔 좀 많이 무리이지 않나?

"그러면 그대가 생각한 다른 방안이 있나? 7군주."

"······."

물론 없지.

나는 짧은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용사의 의견도 나름의 일리가 있기는 했다.

계승으로 향하는 길을 단계적으로 생각해보면, 최우선 과제는 계승자가 동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동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집단에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도 맞고.

그럼 그 집단이 어디냐가 문제인데······ 확실히 달리 떠오르는 선택지는 없었다.

'진짜 아카데미가 그나마 최선인가?'

정말 계승자가 원한다면, 그녀를 산맥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에도 좋은 구실이기도 하고.

나는 왠지 어이가 없어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곳에서 성검의 계승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거라고는 기대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있었다.

고작 아카데미 같은 장소에서 성검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큰 이벤트가 발생하기는 할까?

그리고 그 이전에 계승자가 그곳에서 그만큼 깊은 유대를 쌓은 친구를 만들 수는 있을까.

근데 그 불확실성은 아카데미가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이긴 했다.

용사도 그걸 알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말대로 아카데미를 구실로 계승자를 설득해보는 건 어떤가?"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일단 계승자를 산맥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뒷일은 시간을 두고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하고······."

용사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승자뿐 아니라 그녀의 부친 역시 설득해야지. 그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그래, 그쪽도 문제지.

그는 지금까지 바깥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한 이 산속에서 홀로 계승자를 키워왔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마 그 이유부터 알아야 하리라. 그런 자가 딸을 순순히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날이 밝고, 나는 용사와 함께 곧장 계승자를 찾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요?"

마당을 쓸고 있던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입학이 뭔데요?"

"네가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는 거다. 그곳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여러가지 것들을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란다."

용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갑자기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건데요?"

"계속 이런 산속에서만 지내기엔 네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네 재능은 몹시 뛰어나.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들을 배우면 네가 품은 능력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용사는 계승자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밋밋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글쎄요, 관심은 있는데······ 그래도 집을 떠나기는 좀."

기대 이하의 반응에 나는 왠지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너는 계속 이 산맥에서만 지내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닌데, 잘 모르겠네요."

계승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건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

"그래도 지금 당장 마음이 크게 내키진 않는 것 같아요. 아버지도 있고. 그러니까 거절할게요."

그렇게 설득에 실패한 뒤 도로 돌아왔다.

나와 용사는 말없이 나란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부터 설득해야 하나?'

한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산맥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데에는 아버지의 존재도 비중이 있는 듯했다.

원래라면 계승자를 먼저 설득한 뒤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순서를 바꾸는 편이 좋을까?

"일단 그녀의 부친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보는 게 어떤가."

용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그때였다.

손목에 차둔 팔찌에서 반짝이는 빛에 나는 고개를 내렸다.

"······?"

이 팔찌는 이번에 산맥으로 떠나기 전에 집사에게 명령해서 챙겨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모르니 그동안 군주성에 시급한 일이 생긴다면 신호를 받기 위해서.

'뭐지?'

이렇게 신호가 온 건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딱히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대군주와 관련된 일인가? 아니면 마족들과 관련된 일?

'하필 이런 때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시점에 계승자를 두고 군주성으로 돌아가기는 내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설마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신호를 보냈을 리는 없으니,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왜 그러지?"

나는 용사를 바라봤다.

계승자의 신변에 대해선 그녀가 있으니 걱정할 건 없긴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믿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진 않겠지. 그러려면 진작에 그럴 수 있었으니까.

"잠시 군주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엔록으로? 급한 일이 생겼나?"

"그래."

내 말에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계승자는 염려할 것 없으니 다녀와라. 내가 그대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뢰라.

용사가 직접 저렇게 말하니 확실히 그녀도 나를 어느 정도 동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아셸은 군주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띠용이 위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자."

***

최대한 빠르게 군주성으로 돌아왔다.

군주성의 분위기는 평소와 별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습격을 당했다거나,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이 찾아왔다거나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성에 내려서자 집사장이 곧바로 나와서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군주님."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인지 용건부터 묻자 집사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대군주도, 마족과도 관련된 게 아닌 의외의 말이었다.

"어스힐 왕국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

"보름 전에 카숄이 어스힐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8군주께서 카숄에 전력을 지원하셨습니다."

······뭐라고?

가드팔크 공성전 (1)

어스힐 북서부 국경, 로왈프 평원의 가드팔크 요새.

카숄과의 핵심 분쟁 지역인 만큼 수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철벽의 요새.

"······."

성벽 위의 군사들이 창백하게 질린 기색으로 요새 너머 평야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참담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왕국에서도 가장 용맹하다는 가드팔크의 전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어떤 처절하고 끔찍한 전투에서도 단 한 번도 투지를 꺾은 적이 없었던 요새의 사령관, 마스토 또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절망감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평야를 모조리 뒤덮은 검은 군세.

재앙과도 다름없는 그 대군세를 마주하고서도 사기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대체 어째서 흑해 여제가······.'

마스토 사령관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회담에서 7군주가 어스힐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칼데릭의 군주인 흑해 여제가 카숄에 병력을 지원했단 말인가.

비록 같은 세력이라도 군주들이 서로 협력하기만 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8군주가 대놓고 7군주와 척을 진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혹여 7군주의 마음이 변심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8군주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카숄을 지원한 것도 말이 된다. 아니, 그 편이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무엇이 됐든 재앙이다.

전자든 후자든, 어느 쪽이든 8군주가 직접 자신의 군세를 동원했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의지는 명백했다.

왕국의 모든 힘이 집결되어도 역부족일 판에 이 요새의 병력으로 저 군세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이 가드팔크 요새는 바람 앞의 촛불보다도 위태로운 처지였다.

아직까지는 평야에 진만 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저 군세가 진격해오는 날에 요새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터.

"······사령관 각하!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부사관이 전해온 소식에 마스토 사령관은 평야에서 시선을 떼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 군세가 아직까지 침공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어스힐과의 마지막 협상을 위해서였다.

요새에 입성하는 어스힐의 국왕, 롱포드의 곁에는 기사와 마법사 몇몇이 전부였다.

최대한 서두르기 위해 수도에서부터 오고 있는 군대보다 먼저 요새에 도착한 것이었다.

"상황은 어떤가?"

롱포드의 물음에 마스토가 참담한 목소리로 자세한 상황을 모두 보고했다.

"두 차례 적진에서 사신이 왔었습니다. 요구 사항은 하나, 로왈프 평원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북서부의 국경선을 카바온까지 후퇴시킨다면 침공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

롱포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카숄의 요구가 그만큼이나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왈프에 대한 완전한 권리 포기, 거기에 더해서 카바온까지의 국경선 후퇴. 저번 회담에서 주장했던 것보다도 훨씬 정도가 심했다.

만약 요구를 전부 수용한다면, 이번 침공을 넘기더라도 어스힐은 더 이상 카숄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각하! 비상입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적진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롱포드와 마스토는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거의 요새의 높이와 맞먹는 거대한 괴물 거미가 홀로 요새를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광경을.

"8군주의 전력입니다. 한데 왜······?"

"거미 위에 누군가가 타고 있습니다."

빠르게 거미가 다가오는 성벽으로 병력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적이 공격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내 요새 앞까지 다가온 거미가 성벽과 조금의 간격을 두고 전진을 멈추었다.

거미 위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었는데, 그 역시 8군주 측의 인물이었다.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으나 온몸은 흑빛을 내는 벌레의 골격으로 덮여있었고, 이마에는 몇 가닥의 더듬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힐의 국왕. 요새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셨군요."

그 말에 마스토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8군주는 요새의 움직임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국왕이 요새에 도착했단 걸 알고 바로 움직인 것이리라.

그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위대하신 군주님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사절로서 왔습니다."

"전언이라니······?"

"만약 카숄의 요구에 대해 추가 협상을 원하면, 군주님께서는 직접 당신과의 대면을 허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응하시겠다면 지금 바로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롱포드의 눈이 커졌다.

옆에 있던 마스토도 한 박자 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서 경악했다.

"잠깐, 그 말은······ 설마 지금 8군주께서 직접 이곳에 와있다는 뜻이오?"

씩 미소를 지어 보인 사절이 어쩔 거냐는 듯 롱포드를 바라봤다.

롱포드는 미간을 좁힌 채 고민에 잠겨있다가, 이내 대답했다.

"알겠소. 지금 바로 8군주와 대면하고 싶소."

"폐하!"

그에 마스토와 다른 측근들이 바로 반대하기 위해 나섰으나, 롱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지 않느냐? 8군주가 다른 속셈이 있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가 없다."

8군주가 직접 이곳에 와있는 거라면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없다. 전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국왕인 자신을 인질로 잡는다? 그녀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리고 모든 전력을 학살하는 것도 가능할 터인데.

그럼에도 이렇게 사절을 보내왔다는 건 정말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기회라고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동행하겠습니다, 폐하."

측근들이 나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롱포드가 사절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롱포드와 몇몇 측근들이 사절이 타고 온 괴물 거미 위에 올랐다.

쿠웅, 쿵.

거미가 8군주의 군세가 있는 곳까지 다다르자 벌레들이 갈라져서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군세를 가로질러 거미가 멈춰선 곳은 군세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던, 수많은 벌레들이 뭉쳐있는 거대한 벌레들의 탑이었다.

"이쪽으로."

거미에서 내린 롱포드는 사절을 따라서 그 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의 내부에는 거미줄과 피막 같은 것이 벌레들과 함께 어지럽게 얽혀서 벽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간간이 불빛을 내는 야광 벌레들도 존재했는데, 그들이 어두운 공간을 그나마 밝히는 등불이었다.

끼이이······.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그것들을 보며 롱포드는 역겨움을 삼키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벌레들이 내뱉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정신력을 갉아먹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다다른 곳에는 그 존재가 있었다.

"군주시여, 말씀하신 대로 어스힐 국왕을 데려왔습니다."

어두운 허공에 대고 고개를 꾸벅 사절이 구석으로 이동해서 섰다.

허공에 달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고치 위에 누워있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롱포드와 측근들은 긴장한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어서 와요, 롱포드의 왕."

그녀가 입을 열자 아까부터 내부에서 울리던 벌레들의 울음이 일시에 멎었다.

끈적하고 역겨웠던 공기에는 오싹함이 더해져 목을 죄이는 것만 같았다.

칼데릭의 8군주, 흑해 여제.

그녀가 롱포드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

흑해 여제가 카숄을 지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집사장에게 어스힐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자세히 보고받았다.

"로왈프 평원에 위치한 요새에서 닷새 째 대치 중이라고······."

"예. 아무래도 어스힐의 국왕이 도착하면 최후 통첩을 고할 모양입니다."

로왈프 평원이라면 저번 회담에서도 그렇고, 카숄이 끈질기게 탐내온 어스힐의 영토다.

카숄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 기어코 어스힐을 침공했단 말인가?

'그런데 왜 8군주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8군주의 개입이었다.

8군주가 뜬금없이 왜 카숄에 힘을 실어주고 나섰단 말인가?

그녀가 뭐라도 카숄과 관련된 게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전혀 없었다.

"왜 8군주가 카숄을 지지하지?"

내 물음에 집사장이 답했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카숄 측에서 먼저 나서서 8군주님을 설득한 것 같습니다."

설득? 어떻게?

8군주가 제 이익을 위해 카숄을 부추기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카숄이 8군주에게 무슨 대가를 치르기로 했길래 그녀가 전쟁에 개입했는가.

'내가 중립국에서 어스힐을 지지하기로 한 건 당연히 알 텐데······.'

물론 그녀가 내 뜻에 따라줄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어떠한 말도 없이 일을 벌였다는 건 대놓고 척을 지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8군주와 내가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건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지금도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중이라 했지."

"예. 당장은 그렇습니다만 어스힐의 국왕이 도착하고 나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8군주도 직접 움직였나?"

"죄송합니다. 그 또한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집사장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카숄 측의 정확한 목적은? 로왈프의 권리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스힐이 순순히 로왈프를 포기할 것 같은가?"

"······어스힐 국왕의 성정으로는 아마 그럴 것이라 사료됩니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8군주의 군세를 상대로 맞서기라도 하겠나?

그건 애초에 전쟁이 아니다. 어른과 갓난아기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지.'

나는 고민에 잠겼다.

8군주가 어째서 카숄을 지원한 것인지는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어스힐이 순순히 로왈프를 포기하고 일단 카숄의 침공이 거기서 무마된다면?

카숄도 원하는 걸 얻으면 더 이상 무력 시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한 명분으로 어스힐을 친다는 건 그들에게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면 내가 지금 당장 서둘러서 나설 필요는 없다. 당장 8군주와 충돌할 일 없이 나중에 확실히 정리를 마치고 따져도 되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용사까지 잠적을 깨고 나온 상황. 용사가 개입한다면 내가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직접 카숄에 책임을 묻고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단지 찜찜한 건 8군주의 의도였다.

그녀가 카숄을 지지한 의도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의도.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이딴 짓을 벌였는지.'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침공이 시작된 것도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스힐이 순순히 로왈프를 넘기고 항복한다고 해도 정말 거기서 침공이 끝날까?

어차피 후에 내게 소식이 들어가고 나까지 개입한다면 별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라는 걸 카숄도 알 텐데?

'느낌이 안 좋아.'

왜인지 태평하게 상황을 지켜보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8군주는 내가 갑자기 소식을 듣고 전장에 직접 개입하는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설령 내가 직접 로왈프로 향하더라도 자신이 있다는 건가.

8군주가 로왈프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와 맞서는 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다.

"지금 당장 로왈프로 향한다."

나는 아셸과 함께 곧바로 다시 띠용이 위에 올라탔다.

가드팔크 공성전 (2)

"내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겠죠? 어스힐 국왕. 그를 위해 마련한 자리니 마음껏 물어보세요."

분위기와 정반대로, 흑해 여제의 목소리는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천진했다.

롱포드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그녀에게 물었다.

"8군주께서 카숄을 지원하는 이유를 알고 싶소."

그에게 있어 가장 궁금한 이유이자 현재 모든 상황의 핵심이었다.

흑해 여제가 웃음을 흘리다가 대답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요. 세상의 모든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은 2가지뿐이랍니다? 상대가 밉거나, 아니면 그 다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거나."

"······"

"내가 어스힐 왕국에 개인적이 유감이 있을 이유는 없으니 뭐겠나요? 이 전쟁이 내게 손해보다는 이익이 되니까 참전한 거예요."

"이익이라는 건······."

"카숄의 국왕이 내게 원하는 걸 바쳤거든요. 병력 지원은 그에 대한 대가죠. 혹시 당신도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나요? 그것이 카숄의 준 것보다 가치가 있는 거라면야 얼마든지 카숄의 군대를 쓸어드릴 수도 있는데 말이죠."

롱포드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원하는 걸 주면 당장이라도 손바닥 뒤집듯 편을 바꿔줄 수 있다. 그녀의 말이 이 상황을, 두 왕국의 전쟁을 하찮은 장난처럼 여기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애당초 별 의미도 없는 조롱이었다.

롱포드는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카숄이 대체 그녀에게 무엇을 준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왕국을 통째로 갖다 바치기라도 하겠다고 약속한 게 아닌 이상 대체 왜 칼데릭의 군주가...

"카숄이 군주께 무엇을 주었소?"

그것까지는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흑해 여제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롱포드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애초부터 항복을 생각하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항전한다면 이건 전쟁이 아니라 대학살이 될 뿐이었으니.

남은 건 최대한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최소한의 손실로 전쟁을 끝내는 것.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이미 카숄이 조건을 말하지 않았나요? 로왈프 평원의 권리가 카숄의 것임을 인정하고, 카바온 지역까지 국경을 후퇴시키라고."

"군주께서 본인을 따로 이곳에 부른 저의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저 조건을 수락하면 될 뿐이면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리가 없다. 정말로 의문을 해소해주기 위함이 전부일 리가 없었다.

빤히 롱포드를 바라보던 흑해 여제가 입꼬리를 찢어올리며 웃었다.

"눈치가 없지는 않네요? 그런데 인간 주제에 내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언사는 불쾌해요.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

"후후, 농담이에요. 아무튼 정답이에요. 따로 당신에게 제안할 게 있답니다."

고치의 줄이 쭉 늘어지더니 그녀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바닥에 내려선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군주가 직접 다가오자 롱포드와 신하들은 완전히 위압되었다.

롱포드의 바로 앞에서 멈춰선 흑해 여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말했다.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해요, 어스힐 국왕."

"······!"

"요새가 무너지고, 군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고, 피가 온 대지를 붉게 적실 때까지 미련하게 싸우라는 거예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순간 롱포드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귓가에서 입을 뗀 흑해 여제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멈춰주도록 할게요."

"그게······ 무슨······."

"요새는 멸망하고, 로왈프 평원은 카숄의 차지가 되겠지만, 거기서 전부 끝이라는 거예요. 전쟁이 끝난 뒤에 카숄이 더 어스힐을 탐내지 못하도록 내가 직접 저지해주도록 하죠.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하는 약속이에요."

항복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싸운다면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주겠다니.

"군주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당연하게도 롱포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흑해 여제가 어째서 이런 괴상하고 끔찍한 제안을 하는 것인지.

"내가 방금 전에 말했죠? 다툼의 원인에 대해서."

"······우리가 순순히 항복하는 것보다 항전하는 게 더 이익이 된다는 말이오?"

"후훗, 그건 아니에요. 말했다시피 나는 원하는 이익을 얻었어요."

"그럼 어째서."

"사실은 이유가 하나 더 있어서 그렇답니다."

흑해 여제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이익도 이익이지만, 나한테 거슬리는 상대가 있거든요. 아주 오만하고 건방진 인간 한 명이. 그래서 한번 반응을 확인해보고 싶어졌어. 내가 이런 일을 벌이면 어떻게 나올지."

롱포드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내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전쟁과 관련이 있으며, 인간이며, 그녀와 어울리는 격을 지닌 존재.

'7군주.'

7군주는 저번 회담에서 어스힐을 두둔하고 카숄의 전쟁 선포를 막아주었다.

즉 그녀의 말을 해석하자면, 7군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기에 어스힐을 건드려서 그를 도발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고작 그따위 이유였다.

그딴 시답잖은 이유로 이곳을 산지옥으로 만들라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7군주는 말이죠, 여러모로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그의 행보를 알아보면 묘한 구석이 있어요. 6군주를 죽인 뒷사정도 그렇고, 생각보다 냉혈한 성격은 아닌 걸까? 설마 이만한 격에 오른 존재가 연민 같은 쓸데없는 걸 마음에 품고 있는 걸까. 과연 내가 당신들을 싹 몰살했을 때 반응이 어떨까?"

롱포드는 억누르기 힘든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언제나 그랬듯, 절대자들에게 있어 이런 작은 왕국은 그저 내키는 대로 가지고 놀다 부숴버릴 수 있는 체스말에 불과했다.

"내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시오?"

"아, 개전 전에 당신은 요새에서 떠나도 상관없답니다? 딱히 당신 목숨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오, 8군주. 내가 신하들을 남겨두고 내 한 목숨 챙기려 도망칠 일은 없소."

"그런가요? 아무튼 강요를 할 생각은 아니랍니다."

도로 몸을 돌린 흑해 여제가 다시 고치 위로 올라가 누워선, 더듬이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다만, 제안을 거절한다면 왕국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지겠죠. 로왈프를 점령한 카숄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군세를 일으킬 테니까요. 이번처럼 다시 내게 병력 지원을 요청할지도 모르고요?"

강요할 생각이 없다면서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그 협박을 내뱉은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데릭의 군주였기에, 제안을 거절한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루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할 것도 없소. 거절하겠소."

"흐응, 즉답인가요."

한순간 흑해 여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가, 다시 웃는 상으로 돌아왔다.

"굳이 여기서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시간을 줄 테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시길."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오."

"생각하라면 해, 버러지가. 내가 그러라고 하잖아?"

돌변한 말투와 함께 흑해 여제에게서 뿜어져나온 살기에, 롱포드는 의식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기운을 거둔 흑해 여제가 대화는 이걸로 끝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 내가 여기까지 걸음했는데 시시하게 끝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루의 시간을 줄게요. 가서 잘 숙고해봐요."

***

귀환한 롱포드는 성벽 위를 걸으며 요새 내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왕국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한 곳인 가드팔크 요새는 그 역사가 반백 년이 훨씬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곳의 용맹한 전사들은 외부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어 변경을 수호했다.

단지 창칼을 들고 싸우는 이들만이 있는 건 아니다.

이곳은 적을 막는 요새이지만 동시에 도시이기도 했다. 다른 도시들과의 차이는 단지 그뿐이었다. 성벽 안쪽, 요새의 내곽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터전이 있었다.

"······."

롱포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갑작스러운 침공이었기에 그들을 대피시킬 시간과 여력도 없었다.

8군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건 단지 군사들뿐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모두 희생시키는 것.

이 요새에 살아있는 생명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는 터무니없는 선택지였지만, 8군주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데릭의 군주였다. 제안을 무시한다면 과연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기억은 문득 먼 과거로 거슬러간다.

카숄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시작됐던 전쟁, 그리고 맹렬한 마지막 전화 속 카고쉬 성 전투.

선대 국왕은 보름간 처절하게 버티며 병력 지원만을 기다렸던 그들을 포기하고 적군의 본대를 급습했다.

그것은 카숄의 허를 찌르는 치명적인 한 수였고, 결국 카숄은 큰 타격만 입은 채 회군하고 전쟁은 끝난다.

······롱포드는 전쟁을 훌륭히 지휘하고 왕국을 지킨 선대에게, 아버지에게 끝내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꼭 그들을 포기해야만 했느냐고.

만약 카고쉬 성에 지원을 보냈다면, 전쟁이 더 길어지러라도 그곳에 있는 수천의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 종전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바침으로써 이뤄낸 결과였다.

군주는 연민과 냉정을 함께 갖추고 그것을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는 존재.

항상 그런 가르침을 내린 당신이, 마지막 선택에서 정말 그들을 불쌍히 여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느냐고.

현재로 돌아와 롱포드 또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못난 군주인가.

절대자의 한마디가 두려워 수만의 생명을 희생시킬 군주인가, 아니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왕국에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군주인가.

이 전쟁을 지금 끝내지 못한다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인가?

비로소 선대를 이해하게 된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의 시간이 더 흐르고, 롱포드는 마스토 사령관을 불러 명령했다.

"적진에 항복 사절을 보내라.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조건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

"또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지원군에도 전령을 보내라. 지금쯤이면 거의 다 도착했겠군. 요새에 입성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시 회군하여 수도로 돌아가라고."

마스토는 그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항복은 당연한 결단이었다. 8군주까지 직접 전장에 자리해있는 상황에 항전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의아한 것은, 그의 뒤를 쫓아 수도에서부터 내려온 지원군을 요새에 들이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명령이었다.

어차피 항복할 거라면 굳이 그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런 고생을 시킬 이유가 없었으니까.

"폐하, 회군 명령을 어떤 저의로 내리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롱포드가 뒷말을 이었다.

"그저 만약을 대비할 뿐이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마스토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하면 폐하께서는."

"나는 모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이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만 가서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그렇게 적진으로는 항복 사절이, 그 반대편의 광활한 평야로는 전령이 각각 말을 타고 달려갔다.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었다.

뿌우우우우.

요새 전체에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몇 번 끊기며 울려퍼졌다.

혼란 속에 사령관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간 롱포드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다.

"저, 적군이······."

흑해 여제의 벌레 군세를 앞세워 요새로 천천히 진격해오고 있는 카숄의 군대.

롱포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카숄이 이 요새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카숄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언제 은둔을 깰지 모르는 용사의 존재, 그리고 회담에서 7군주가 했던 선언.

게다가 세인테아는 이번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8군주를 끌어들인 것 자체로 카숄은 상당한 부담을 껴안아야 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저 항복을 받아내어 무혈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접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이 후에 감당해야 할 대가가 여러모로 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선택은 이것이었다.

이건 카숄의 의지일까, 아니면 카숄은 그저 흑해 여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일까.

"확성 마법을 펼쳐라."

다시 눈을 뜬 롱포드가 근처에 서있는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이윽고 검을 뽑아든 그가 전투를 준비하는 군사들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쳤다.

"전 군사는 들어라! 어스힐의 국왕, 롱포드 바몬이 그대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전언이다!"

"칼데릭의 8군주가 원하는 것은 이 요새의 절멸이다! 현재 8군주는 적진에 그녀의 군세와 함께 직접 자리해있으며, 항복의 의사를 전했음에도 그것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후문을 개방하고, 적군이 도달하기 전까지 사람들을 최대한 요새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라! 군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목숨이 아까운 자는 그들을 호위하며 함께 빠져나가라! 그것은 명예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이건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새를 버리고 도망치라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군주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남아있을 자는 남아라! 대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울 자들은 바로 전투를 준비하라!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죽음이 아니다! 짐 또한 끝까지 요새에 남아 싸울 것이다!"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잠시 뒤 군사들에게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수성진을 펼쳐라!"

"폐하와 함께 끝까지 맞서싸워라! 우리는 가드팔크의 전사들이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겁먹고 도망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을 통솔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주거지로 이동할 뿐.

마스토 사령관을 비롯한 측근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롱포드를 바라봤다.

그들의 군주는 이미 이 자리를 자신의 무덤으로 정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디 재고해달라고? 이제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처절히 싸울 군사들을 놔두고 도망치라고?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저들도 국왕인 롱포드만큼은 놓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쿠구구구.

땅의 울림이 점점 커짐에 따라 거대한 군세가 요새를 집어삼킬 듯 가까워졌다.

이윽고 요새를 코앞에 두고 진격이 멈추었다.

그 가운데서 카숄의 국왕이 호위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나왔다.

"롱포드 국왕! 기회를 줬음에도 결국 끝까지 결사항전하기를 택한 것인가!"

롱포드 또한 그를 노려보며 성벽 위에 서서 대답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구나. 이미 항복 의사는 전했을 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이미 늦었다. 가드팔크 요새는 너의 그 아집 때문에 멸망하게 될 것이다."

롱포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겠으나, 칼데릭의 군주를 끼어들인 그 선택이 카숄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카숄 국왕은 코웃음을 치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파도가 요새를 향해서 밀려들었다.

***

카숄의 침공 소식을 들었을 당시, 테이르는 수도의 왕성이 아닌 다른 도시에 있었다.

단순한 침공이 아니라 8군주까지 개입한 불가항력의 침공.

소식을 듣고서 테이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이전에 7군주가 남겼던 말이었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닥치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당장 적군이 왕국의 앞마당까지 들이닥친 마당이었다.

도움을 청하고 자시고 7군주령에 전령을 보내서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다 끝나있을 테고, 어차피 7군주도 진작 소식을 들었을 테니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곧장 수도로 이동한 테이르는 아버지가 이미 가드팔크 요새로 떠났고, 그 뒤를 따라서 1왕자 루커스까지 지원군을 이끌고 떠났다는 걸 알았다.

테이르 또한 그들의 뒤를 쫓아서 요새로 향했다.

그 하나가 요새로 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의미가 있기에 하는 일은 아니었다.

수도를 떠나서 닷새 째 되는 날, 요새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 테이르는 수도의 지원군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테이르? 네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어째서 군을 통솔하고 계십니까?"

"물론 폐하의 명령이다. 가드팔크 요새의 상황을 제대로 듣지 못했더냐?"

"그게 아니라, 정말 아버지께서 형님께 그런 명을 내리셨냔 말입니다. 아버지가 이미 요새로 향하셨는데 하필 형님을 시켜 지원군을 이끌고 오게 하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루커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형님의 독단이군요. 아무리 아버지가 걱정되셔도 그렇지."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렇겠지요. 제가 형님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니."

두 형제가 잠시 눈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왕자 전하, 전령입니다!"

말을 타고 달려온 한 병사가 그들에게 다다라서 롱포드의 전령을 전했다.

전령을 읽은 루커스는 자그마한 침음을 흘렸다.

"즉시 회군하여 수도로 돌아가라니······ 이 무슨."

의도를 알 수 없는 전령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가드팔크 요새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고작 반나절의 시간 정도.

대체 지금 요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왕자 전하, 이건······."

고민에 잠긴 루커스를 향해서 테이르가 말했다.

"형님은 지금이라도 수도로 돌아가십시오. 요새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이 전령을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혹여 형님까지 잘못되시면 왕실은 어떡하란 말입니까?"

"라그마스가 있고, 세리가 있고, 그리고 듀라크 숙부도 왕성에 와계시다. 지금은 왕실을 걱정할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해야지. 너는 그럼에도 내게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냐?"

"왜 또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십니까."

"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내 눈으로 직접 요새의 상황을 봐야겠다."

결국 결정한 듯 보이는 루커스를 보며, 테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옆에 바싹 붙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너까지 요새에 갈 필요는 없다. 수도로 돌아가거라."

"싫습니다. 형님께서도 제 행동에 간섭하실 수는 없습니다."

루커스는 한숨을 내쉬며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두고 간다고 해도 어차피 계속 쫓아올 게 뻔했으니까.

그가 주위의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가드팔크 요새로 계속해서 전진한다!"

***

매캐한 연기. 시뻘건 혈무. 찢어지는 폭음. 처절한 함성, 고함, 비명들.

"막아라! 적들이 북문에 공격을 집중하려 한다!"

"방어 결계를 펼쳐! 내벽까지 뚫리면 전부 끝이다!"

그 혼돈과 광란의 판에서 모두가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벌레들을 병사들이 창으로 찔러 막았고, 기사들은 성벽 이곳저곳을 누비며 강한 개체들을 맡아서 상대했다. 마법사들은 후방에서 전열을 갖추고 방어 마법과 공격 마법을 번갈아 펼쳤다.

벌레들이 성벽을 기어올라가는 사이 카숄 군은 성문을 뚫으려 했고, 수성 무기들이 그들을 쉴 새 없이 폭격했다.

그러나,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수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벌레와 인간들이 뒤섞여 사방에서 밀려오는 군세에 전열이 망가지고 수세에 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촤아악!

한 병사의 머리를 씹어먹고 있던 벌레를 베어낸 롱포드는 눈가에 튄 체액을 닦아냈다.

독 성분이 있던 건지 얼굴 근육이 굳는 것 같더니, 한쪽 눈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는 곧장 치유 마법을 사용하고서 피로에 찌든 숨을 뱉어냈다.

주위를 둘러봤다. 거대한 사마귀 괴물을 둘러싸고 상대하던 기사들이 우수수 반토막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을 펼치다 멀리서 날아든 창이 목에 박혀 쓰러지는 마법사가 보였고, 폭격에 무너진 성벽과 함께 아래로 추락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수비를 뚫고 요새 안쪽으로 침입한 몇몇 벌레들에게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성벽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던 민간인들이었다. 아이를 지키려고 온몸으로 벌레를 막다가 찢겨 죽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거짓된 평화에 찌들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광경이었다.

저멀리 보이는 흑해 여제의 군세는 여전히 온 대지를 뒤덮을 듯 광대했다.

롱포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대로 공격을 시작했다면 요새는 그와 동시에 멸망했을 거라는 걸.

최대한 발악해보라는 뜻인지, 지금은 극히 일부의 전력만 보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황이 최악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이대로면 요새가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삐걱거리는 몸을 다시금 움직이려던 롱포드의 귓가에 함성 소리가 울렸다.

"······수도의 지원군이다!"

서쪽 성벽으로 적들을 돌파하고 요새로 입성하고 있는 수도 지원군.

롱포드는 그 광경을 보며 탄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분명히 요새에 발을 들이지 말고 회군하라 했을 터인데.

"성문을 개방하시오! 우리가 방호하겠소!"

지원군의 등장에 군사들의 사기도 순간적으로 올랐다.

적들을 찢어발기며 이내 요새로 완전히 들어온 그들이 본격적으로 수성에 참전했다.

"폐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북쪽 성벽입니다!"

"길을 뚫어라! 어서 가서 폐하를 지켜라!"

루커스와 테이르는 북쪽 성벽으로 전진했다. 징그럽게도 몰려드는 벌레들을 베어넘기며 나아갔다.

거대한 벌레 몇 마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엄호하던 기사들이 나뉘어져 놈들을 상대했다.

"······윽!"

그때 벌레가 휘두른 촉수가 루커스의 몸을 휘감았다.

곧바로 뛰어든 테이르가 검을 휘둘러서 촉수를 베어냈다.

떨어져서 바닥을 구른 루커스가 퍼뜩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피하······!"

콰아아앙!

어디선가 날아든 거대한 마법 폭격이 그들이 있는 자리를 강타했다.

충격파에 그대로 튕겨나간 테이르의 몸이 성벽 바깥 쪽으로 붕 떴다.

터억!

추락하는 그를 루커스가 간신히 붙잡았다.

성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걸쳐있는 그들을 향해서 벌레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막으려던 주위 군사들이 또다시 날아든 폭격에 벌레들과 함께 폭사했다.

"끄으으······."

머리에 이명이 울렸다. 고막이 터진 것인지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루커스는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은 뒤, 테이르를 끌어올렸다.

두 형제는 잠시 주저앉아 호흡을 고르며 전장을 둘러봤다.

부서진 잔해들과 시체들이 한가득 쌓인 가운데, 벌레와 인간들이 뒤섞여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야말로 산지옥이었다. 말로만 듣던 마경을 직접 본다면 바로 이것과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지원군의 합류에도 상황은 아주 조금 숨통이 트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검자루를 꽉 쥔 루커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네게 사과할 시간이 없겠구나."

테이르가 루커스를 돌아봤다.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이제 와서 다 무슨 의미고, 네게 무슨 염치로 믿음을 바라겠냐만은······ 미안하다, 테이르. 나와 동생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말에 테이르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려 하지 않았던 과거 이야기.

루커스와 그의 동생들, 그리고 테이르는 배가 다른 형제다.

하지만 핏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사이가 좋았던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고, 누구보다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루커스의 친모인 1왕비가 테이르를 독살하려 시도한 그날 전까지는.

테이르는 천재였다.

검술이면 검술, 마법이면 마법, 그리고 학문이면 학문, 무엇 하나 뒤떨어지는 재능이 없었다.

본래라면 장남인 루커스가 왕위를 잇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테이르의 재능은 1왕비에게 있어 그러한 관례도 누르고 테이르가 후계가 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남달리 많았던 1왕비였다.

일찍이 친모를 여윈 테이르에게 그녀는 자신을 어머니로 여기라 하며 친절히 대했으면서도, 그 뒤에서는 그를 암살할 궁리를 했다.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쓰러진 테이르는 운 좋게 곧바로 하인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1왕비의 철저했던 독살시도 또한 결국 꼬리가 잡혀 걸렸다.

격노한 롱포드 국왕에 의해 그녀를 폐위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형제들의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뒤, 테이르는 아무런 말도 없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왕성을 떠났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하여 단 한 번도 너를 형제가 아니라 생각한 적이 없다. 세리는 물론이고, 라그마스 또한 네게 항상 퉁명스레 대했지만 속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압니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루커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 너는 무슨 심정으로 왕성을 떠났느냐? 한 번이라도 네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구나. 나와 동생들을 의심했느냐. 아니면 원망했느냐."

침묵하던 테이르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나는 아무도 의심한 적도, 원망한 적도 없습니다."

"······."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형님과 동생들이 그분을 폐위되게 만든 날 원망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뭐가 됐든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사라지면 시간이 전부 해결해줄 테니까."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랬지요. 이제 와서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너무 늦게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테이르가 만신창이인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커스도 바닥을 검으로 딛고 일어섰다.

"······동생들에게도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수도로 돌아가라고 진작 말했을 텐데. 예전부터 네 고집은 한 번을 못 꺾는구나."

"하하, 형님만 하겠습니까."

어둡게 그늘이 진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지은 테이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궁전 뒤뜰의 정원에 다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루커스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그저 말뿐인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잘 알았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지옥에서 살아나가게 될 일은 없다는 걸.

다시 성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벌레들이 두 형제를 향해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번쩍!

눈부신 순백의 광채가 갑작스레 창공을 뒤덮었다.

그 거대한 광채는 이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요새 외곽을 향해 우수수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광!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요새를 뒤흔들었다.

성벽으로 끝없이 밀려오던 벌레들은 그 일격에 절반 이상이 폭사했다.

"······!"

벌레들을 베어넘기고 테이르와 루커스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요새 바로 위를 천천히 비행하고 있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흑색의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의 등 위에 타고 있는 이들을 발견한 테이르는 멍하니 서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7군주."

가장 암담한 순간, 기적이 정말로 찾아왔다.

가드팔크 공성전 (3)

"······마침 딱 맞춰 왔네요, 7군주."

고치 위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흑해 여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그녀의 눈에 전장에 도착한 7군주의 모습이 비추었다.

***

나는 반파된 요새를 차가운 눈길로 내려다봤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그 설마가 맞았다.

어스힐의 국왕이 항복하지 않고 싸우길 택한 걸까?

내가 알기로 그는 그렇게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흑해 여제의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은 경우는 하나였다. 항복을 했음에도 상대가 항복을 받지 않은 것.

내가 군주성에서부터 여기까지 곧바로 온 이유가 그런 전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늦고 말았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스힐은 필사적으로 항전한 듯 보였지만 흑해 여제의 힘을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요새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라도 온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셸."

"예."

검을 뽑아든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아셸이 즉시 대답했다.

아셸이 방금 전에 날린 일격에 요새로 밀려오던 벌레들은 절반은 죽었다.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내려서 남은 벌레들을 쓸어버릴 기세였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런 학살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참상일 테니까.

"가서 요새를 지켜라."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곧장 띠용이의 등에서 요새를 향해 뛰어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검기의 폭풍이 다시 한 번 요새의 외곽을 휩쓸며 벌레들을 몰살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멀리 보이는 흑해 여제의 군세를 향해서.

보아하니 요새를 공격하는 데는 전력의 극히 일부만 동원한 모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요새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을 거대한 개체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

나는 그녀의 군세를 살펴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군대 곳곳에 솟아있는 거대한 벌레들의 탑.

저것은 '모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 모탑이 바로 흑해 여제가 다스리는 거대한 군세의 핵심이었다.

모탑의 뿌리에는 생식핵과 융합된 여왕체가 있는데, 생식핵의 마력을 통해 에너지만 계속해서 보급된다면 여왕체는 끝없이 벌레들을 증식시킬 수 있다. 그것이 게임상에서의 설정이었다.

'31개.'

현재 보이는 모탑의 개수는 31개였다.

많아봐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왕체의 개수는 40개가 넘지 않을 테니, 저 정도면 그녀가 가진 전력을 거의 총동원한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그녀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했다.

고작 어스힐의 요새 하나를 치는 데에 저만한 수의 여왕체를 전장에 끌고 왔다고?

과시를 넘어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애초에 여왕체 자체를 끌고 올 이유가 없다.

'내가 오는 걸 대비했군.'

그녀는 내가 이곳에 시간 맞춰 도착하는 경우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지 않았거나 더 늦었다면 그대로 어스힐을 쓰어버렸겠지.

나는 흑해 여제의 의도가 둘 중에 무엇인지 헷갈렸다.

이건 내가 오더라도 끝까지 요새를 치겠다는 의도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목표가 날 끌어들이는 거였나.

전자라면 그녀가 나와의 충돌까지 감수하며 어스힐을 치려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전쟁에 대체 그녀가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후자의 경우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날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면, 그래서 지금부터 뭘 어쩌겠단 거지?

그녀가 나한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건 저번 긴급 소집에서부터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전력을 총동원하여 싸움을 걸 이유라고 한다면······ 정말 맞나?

어차피 그녀는 날 죽일 수 없다.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전투도 대군주의 허락 없이는 금지지만, 전투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나를 죽일 생각이면 그녀도 뒷감당이 불가능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때였다.

흑해 여제의 모탑들에서 거대한 마력이 유동하는 게 느껴졌다.

우우우우웅······.

나는 인상을 굳힌 채 모든 모탑들에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거대한 덩어리를 바라봤다.

그것들은 날벌레 떼였다.

요새를 공격하던 벌레들의 수백 배는 되어 보이는 어마무시한 물량.

끝없이 쏟아져나오며 한곳에 뭉쳐 곧 하늘 저편을 시커멓게 뒤덮은 그것들은, 그야말로 '재앙'이라는 문자가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갖춘 것과 같았다.

거대한 날벌레 군단이 서서히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더니, 전장에 흑해 여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어디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요, 7군주. 요새의 사람들을 지켜야죠?

즐겁다는 듯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

······나는 그제야 8군주의 의도가 어느 쪽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미친년은 정말로 나를 도발하기 위해서 이 짓을 벌인 모양이었다.

"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하늘에서 밀려오는 시커먼 파도를 바라봤다.

막지 않는다면 요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쓸려나갈 것이다.

가능하면 흑해 여제와 부딪히기는 싫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충돌을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할 생각이었다.

이미 6군주를 죽인 내가 계속해서 다른 군주들과 충돌하면 대군주의 눈치가 보이니까.

하지만 놈이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쩔 수 없다기보다도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다.

"한번 해보자고."

나는 좀 더 아래로 내려간 채 곧바로 혈술을 활성화했다.

정면에서 몰려오는 흑해 여제의 군단은 그야말로 압도적.

이전에 마경 할루멘타에서 상대했던 몬스터 떼와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그때처럼 고작 핏방울을 흩뿌려서 뒤덮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대응해서야 10분의 1도 못 죽이고 놈들이 요새에 도달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쪽에도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진 능력들을 어떻게, 어떤 상황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해왔다.

그중에 가장 신경을 쓴 건 당연히도 즉사 능력과 혈술의 시너지.

아직까지 실전에 활용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규격 외 규모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 역시 마련해뒀다.

피를 뭉쳐 터뜨려서 핏방울을 흩뿌리는 것보다 훨씬 적은 피로, 훨씬 광범위한 범위를 타격할 방법을.

내 몸에서 뿜여저나온 핏물이 안개처럼 일렁거렸다.

액체 상태가 아닌, 기체와 다름없는 상태로의 성질 변형.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그동안 무던히도 혈술을 훈련하며 피의 컨트롤 능력을 높였다.

시뻘건 혈무는 이내 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저 군세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

나는 초재생 능력을 오로지 내 혈액의 재생에만 집중시켜 계속해서 혈무를 퍼뜨렸다.

이 또한 능력을 연구하고 훈련하며 얻은 성과 중 하나였다. 초재생은 신체의 특정 부분에만 재생력을 집중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화아아아악.

이내 수백 미터 반경은 가볍게 넘을 정도의 거대한 피안개가 완성되었다.

나는 지옥을 향해 스스로 날아들어오는 벌레 군단을 잠자코 응시했다.

***

"이건······."

마스토 사령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장 이곳저곳을 빛살처럼 누비며 홀로 벌레들을 몰살하고 있는 여인.

그녀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백의 벌레들이 쓸려나갔고, 함락 직전이었던 요새의 전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롱포드도 숨을 고르며 하늘에 떠있는 와이번을 멍하니 바라봤다.

"······칼데릭의 7군주다. 7군주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셨다."

그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기회가 왔을 때 어서 적들을 몰아붙여서 절멸시켜야 했으니까. 물론 이미 7군주 측의 초인이 대부분을 쓸어버린 마당이긴 했다.

"폐, 폐하! 저기······!"

그때 저멀리 흑해 여제의 군세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벌레로 이루어진 탑들에서 무시무시한 수의 날벌레 괴물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하늘 저편을 모조리 뒤덮은 그것들이 요새를 향해서 점차 가까워졌다.

지금까지의 공격은 장난조차도 아니었다는 듯한 압도적인 군세.

잠시 희망에 빠져있던 군사들은 다시금 절망에 질린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셸도 잠시 전투를 멈추고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시 뒤, 와이번 위에 타고 있는 7군주에게서 자욱한 혈무가 퍼져나왔다.

그것은 이내 몰려오는 흑해 여제의 군세에 못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져서 요새 주위를 뒤덮었다.

"······뭘 하려는 걸까요?"

벌레들의 시야로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흑해 여제는 눈매를 좁혔다. 피안개?

7군주가 피를 다룬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자세한 능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살해한 6군주의 능력인 광혈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마 독이나 정신 지배인가?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짐작했다.

"고작 그런 것들이라면 실망인데 말이죠."

흑해 여제의 벌레들은 기본적으로 독충이었다.

마경에서도 가장 독하고 끔찍했던 그녀의 마력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독은 통하지 않았다.

정신 지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레들은 그녀의 일부나 다름없으며,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지배에 완벽하게 묶여있다.

이 지배권을 빼앗는 건 7군주가 어떤 술수를 부린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자, 어디 발악해봐요. 당신이 뭔 짓을 하든, 내 아가들이 요새를 멸망시키는 게 훨씬 빠를 테니."

흑해 여제는 조소를 지으며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벌레 군단이 7군주의 피안개 영역으로 완전히 진입한 순간이었다.

"······!"

흑해 여제는 경악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순간에 모든 벌레들의 생명 신호가 끊겼다.

피안개 속의 벌레들이 지상을 향해 우수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