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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박 실장이 퇴사했어?"

"예. 오늘 퇴사식을 하고 완전히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여운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야. 박 실장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우리 형님인데 이거 어쩌나? 설마 출근도 못 한 것 아니야?"

여령 그룹 계열사인 여령 물산의 사장 여운기.

그는 여운구의 동생이자, 동시에 여령 그룹을 두고 후계자 경쟁을 했던 라이벌이었다.

"우리 반푼이 형님 출근은 하셨대?"

그렇게 여령 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왔던 여운기였지만, 결국 후계자 경쟁에서 선택을 받은 건 바로 여운구였다.

당연히 여운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운구의 실적이 아주 좋고 그룹의 순위도 5단계나 끌어올리는 등 탁월한 경영 능력을 선보이긴 하였지만, 여운구에게는 트라우마라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까.

불안증 때문에 매일 밤잠을 설치는 그룹 회장이라니.

그럼에도 그간 여운구가 큰 문제 없이 여령 그룹을 이끌었던 건 그의 단점을 보완해 줄 박 실장이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박 실장이 퇴사를 했으니 어쩌면 다시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예. 출근하셨다고 합니다."

여운기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출근했다고? 박 실장도 없는데?"

"새로 고용한 경호원 7명을 늘 대동하고 다닌답니다."

그러자 여운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질이 안 되니 양으로 승부를 본다, 뭐 이런 건가? 설마 그 7명이 전부 B급은 아닐 것 아니야. 그걸로 박 실장 빈자리가 채워지겠어?"

B급 경호원 하나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회장 경호실에 소속된 B급 각성자가 고작 2명에 불과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즉, 7명이나 되는 B급 각성자 경호원을 일순간에 구하는 건 이 바닥 특성상 불가능하다는 말.

"그런데 그 7명이 모두 투구를 쓰고 다닌다고 합니다."

"투구를 써서 신분을 숨기시겠다? 더 확실하네."

박 실장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으니 어중이떠중이로 주변을 채우고 그들의 실력을 알아볼 수 없도록 신분을 숨기기 위해 투구를 씌운 거라 확신한 여운기.

여운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보아하니 임직원들 눈치 때문에 불안해도 억지로 출근하는 것 같은데······."

박 실장이 없어졌다고 바로 집에 칩거하면 그룹 회장으로서의 신뢰도가 추락할 게 뻔하니 임시로라도 경호원을 보강한 다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출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여운기의 추측.

"살짝 건드려 줄까?"

이때 여운구의 트라우마를 살짝 건드려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여운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위험한 상황을 살짝만 연출해도 여운구는 바로 불안증이 폭발할 거고, 어쩌면 그대로 집에 칩거할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되면 다음 그룹 회장의 자리는 100퍼센트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여운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형한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어. 그러니 그냥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

"후우."

한 남자가 어두운 골목길에 서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살짝 겁만 주는 거야."

그러자 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것 맞죠?"

그들은 여운기의 의뢰를 받은 투견 길드의 길드원들.

그들이 받은 의뢰는 한밤에 여운구의 자택으로 들어가 겁을 주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이 각성자이고 궂은일을 하는 청부 해결사라 불린다지만 분명 어마어마한 부담이 되는 일인 건 사실.

"아무리 그래도 재벌 그룹 회장인데, 일이 잘못 풀리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야? 게다가 이걸 의뢰한 사람이 바로 그 재벌 그룹 집안 사람이라고."

"그렇습니까?"

"이미 내부 정보는 다 받았어. A급인 박 실장은 퇴사했고, B급인 팀장들은 이미 퇴근해서 자택에 없어. 남은 건 새로 들였다는 7명이 전부인데, 그 정도쯤이야 우리 선에서 해결 가능하잖아?"

남자는 B급에, 나머지 6명 길드원은 모두 C급.

자택에 남은 각성자들은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정말 만약에 그놈들이 생각보다 강해도 상관없어. 우리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만 인지시키고 도망치면 그만이라고. 이렇게 쉬운 의뢰가 또 어디 있어? 아무려면 7명이 전부 B급도 아닐 거고 24시간 여운구 회장 옆에 붙어만 있지는 않을 것 아니야. 그럼 잘해 봐야 2~3명에 C급 이하라는 말인데, 그 정도는 쉽잖아?"

"그건 그렇죠."

남자가 담배를 튕겨 내며 말했다.

"자. 들어가자."

그렇게 복면을 쓰고 미리 준비한 루트를 따라 가볍게 여운구 자택의 담장을 뛰어오른 투견 길드원들.

"비상 경보 울렸을 테니 빨리 움직여. 여운구 회장 방은 저기 2층이야! 모두 뛰어."

순식간에 2층 난간으로 도약하여 창문을 깨부순 7명의 길드원들.

"내가 바깥 놈들 확인할 테니까 안은 너희가 정리해."

"예!"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간 부하들.

그때부터 여운구 회장의 방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난다.

"하여튼 거친 놈들이라니까."

그렇게 30초나 흘렀을까.

순식간에 조용해진 여운구의 방 안.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아차린 남자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뭐야. 끝났으면 날 불러야······."

하지만 내부의 상황을 확인한 남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교대로 경호를 할 테니 많아야 2~3명일 거라던 새로운 경호원 7명 전원이 여운구의 방 안에 있고, 그들로 인해 부하들 전원이 제압당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거다.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보가 샜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7명 전원이 이 늦은 시간까지 여운구를 지키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소란으로 인해 일어난 여운구가 외쳤다.

"적이다!"

그러자 남자를 향해 달려드는 두 명의 투구를 쓴 경호원들.

도망쳐야 하나 어째야 하나 당황해하던 남자는 다급히 주먹을 휘두르며 그 둘을 공격했다.

하지만.

퍽!

남자의 주먹을 맞고도 꿈쩍도 안 하며 그대로 제압을 시도하는 거구들.

그 모습을 보고 남자는 바로 깨달았다.

"B, B급!?"

B급인 자신의 주먹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는 각성자는 오직 B급 이상뿐이니까.

그때 장갑을 낀 거구의 손이 뻗어 오자 몸을 피하고 얼굴을 향해 재차 주먹을 휘두른 남자.

그 순간 남자의 주먹에 투구의 일부가 부서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정체가 드러났다.

"히이이익!"

그것은 바로 스켈레톤.

"왜 스켈레톤이 여기서 나와!?"

*

여령 그룹 회장 자택 습격 사건.

그리고 그 결과는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깔끔하다 못해 그야말로 완벽했다.

여운구를 지키던 경호용 스켈레톤들이 B급 각성자를 포함한 침입자 7인을 모두 제압해 버린 거다.

그리고 조사 결과 동생인 여운기의 의뢰를 받아 겁을 주어 트라우마를 증폭시키려 한 거라는 증언이 나오며 여씨 집안이 어수선해졌지만, 어찌 되었든 주어진 임무를 아주 충실히 수행한 경호용 스켈레톤들.

그리고 그 사건의 여파로······.

-한 회장, 경호 스켈레톤 여유가 있습니까?

"F급이랑 E급은 여유가 좀 있는데, C급이랑 B급은 없습니다."

-어허. 벌써요?

돈 많은 부자들로부터 사방팔방에서 연락이 온다.

-B급으로 대여하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만들자면 B급이 아니라 A급도 만들 수 있지만, A급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그렇게 되면 너무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딱 B급 7개로 끝낸 나.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굳이 내가 절제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이 기회에 그냥 제대로 테스트 한번 받아 봐?'

늘 나에게 달리는 의구심은 저게 어떻게 A급이냐 같은 추정들.

애초에 내가 반드시 A급이어야만 하는 이유도 없잖아.

눈치 안 보고 살기로 작정한 상황이니 그냥 아예 높은 등급 받고 마음대로 움직일까?

'높은 등급 받으면 귀찮게 하는 놈들도 확 줄어들 거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회장님, 제가 조만간에 등급 테스트 한번 받을 생각이거든요? S급 이상 받으면 기념으로 B급 추가 생산 할 예정이니 그때 연락드리죠."

너무나 태연하게 S급을 언급한 나.

-오! 정말입니까?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연락해 온 회장조차 너무나 태연하게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미 다들 A급일 리가 없다고 단정 짓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러니 그냥 높은 등급 받아 버린 다음 무데뽀로 돌진한다.

"군산시에도 등록소 있었지? 바로 가서··· 아니다. 그래도 S급 이상인데, 일반 등록소에서 테스트가 되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으로 늘 나를 귀찮게 하던 등록소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회장님?

처음으로 내가 먼저 건 전화에 당황한 목소리로 받아 든 등록소 소장.

"소장님, 제가 테스트 한번 받아 볼 생각이거든요? 군산 등록소에서도 할 수 있나요?"

그러자 소장이 경악하며 말했다.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죠."

-자, 잠시만요. 고위 각성자 테스트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군산 등록소에서 하시겠다고요?

"멀리 가는 건 귀찮아서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테스트 잡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간 잡히면 알려 주세요."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냥 깔끔하게 등급 받고 막가자."

45화

군산시에 있는 각성자 등록소 마당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S급은 나오겠지?"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하게도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오늘 등급 테스트를 받기로 한 한지혁.

한지혁은 현재 공식적으로 F급 각성자이지만 세상 그 누구도 한지혁을 F급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배치된 스켈레톤의 수만 해도 1만을 넘어 2만에 육박한다 알려졌고 이제는 경호원 스켈레톤까지 출시하며 무력을 지닌 소환수 역시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그럼 SS급은?"

"SS는 안되지 않을까?"

현재 한국에 있는 SS급은 고작 5명.

모두들 한지혁이 S급은 무난히 따낼 거라 예상하지만 SS급부터는 정말 차원이 다른 존재이기에 확신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중 능력자니, 전투력 자체는 떨어질 거 같은데."

"그래도 영향력 하나만 놓고 보면 SS급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한국 공장을 국내로 유턴시키는 것은 물론 해외 기업의 투자까지 유치해 상당한 경제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물론 해외 수출에 주력하며 상당한 외화를 벌어오고 있는 게 바로 세론이었으니까.

"SS급을 영향력만 보고 주냐? 그런 식이면 재벌들도 다 SS급이게?"

"아니지. 아니지. 그 영향력의 기반이 능력인 것과 단순히 돈이 많은 건 다르다고. 미국에 물약 관련 능력으로 S급 받은 각성자도 있잖아. 그 각성자 전투 능력은 꽝이라잖아."

즉발성 능력 강화 물약을 만들며 유명해진 미국의 각성자.

비록 전투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그 보조 능력의 유용함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미국에서 S급으로 인정받았다.

꼭 전투 능력이 아니더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며 동시에 충분히 유용하다면 얼마든지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사례.

"하지만 그래도 그건 S등급까지잖아. 전투 능력이 없는 SS급은 아예 사례가 없다고."

그렇게 의견이 갈린 기자들.

하지만 결국 공통된 의견은 하나였다.

그간 한지혁이 보여준 영향력과 능력을 생각하면 S급은 확실한데 SS급은 애매하다는 것.

그렇게 기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한 대표다!!"

등록소 정문에 나타난 한지혁.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다가가려는 순간 한지혁이 외쳤다.

"모두 정지!!"

"어?"

"지금부터 스켈레톤 소환할 거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갑자기 스켈레톤을 소환한다고?"

"소환 계열이니까 소환 능력 보여주려는 건가? 그런데 그게 지금 한 대표에게 의미가 있어?"

그때 한지혁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 뒤로 그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아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 저게 저렇게도 커지는 거였어?"

"게이트보다 더 큰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순간.

아공간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스켈레톤들이 줄을 지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척. 척. 척.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추고 전진하는 스켈레톤들.

기자들은 그 스켈레톤들이 모두 한지혁의 소환수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불안정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것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정도로 스켈레톤의 대열은 크고 웅장했다.

"왜 꼭 도망가야 할 거 같지."

"그러게."

그때 한지혁이 말했다.

"여기까지는 세론 신발 스켈레톤입니다."

"···어?"

"그다음은 SR 전자."

그제야 저 스켈레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기자들.

"여태까지 만들었던 스켈레톤들을 종류별로 내놓고 있어."

기본형인 일꾼 스켈레톤부터 운반형에 더해 건설용, 소방용 등등 그간 한지혁이 만들었던 스켈레톤들의 총출동.

"이다음은 저와 저희 연구진이 공동 연구하여 만든 시제품 스켈레톤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독특한 외관을 지닌 스켈레톤들이 나온다.

팔이 4개인 스켈레톤부터 4족 보행 등등 기괴한 모습의 스켈레톤들.

심지어 키만 7m에 육박하는 대형 스켈레톤도 있었다.

"오오! 미출시 스켈레톤들!"

그러자 어안이벙벙해 하며 이게 뭔가 싶어 하던 기자들도 슬슬 흥미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출시한 경호용 스켈레톤들입니다!"

그렇게 계속 스켈레톤을 소환하며 걸어오던 한지혁이 드디어 기자들 앞에 서며 말했다.

"이렇게 도합 5천. 참고로 이거 전부 예비용입니다."

한마디로 일하는 스켈레톤은 두고 여유 있는 스켈레톤만 소환했다는 말.

"···그럼 이미 2만을 넘었다는 거잖아?"

"근데 왜 하나도 놀랍지 않지? 그동안 너무 적응됐나?"

그때 한지혁이 환하게 웃고는 품에서 종이 다발을 꺼내 기자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이건 소환한 스켈레톤들의 종류와 능력 등 스펙이 적혀있는 카탈로그고요."

카탈로그를 받아든 기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건설형 최대 운반 용량···소방형 특징···"

모든 카탈로그를 기자들에게 돌린 한지혁이 말했다.

"저는 이제 들어가서 테스트할 거거든요. 인터뷰는 테스트 끝나고 나서 해드릴 테니 그동안 스켈레톤들 보고 계세요. 참고로 건설형 같은 무인 조종은 직접 사용해보실 수 있게 조종 장치도 비치했으니 체험해보시고요. 그럼 전 먼저 들어갑니다!"

그렇게 기자들을 뒤로하고 등록소 안으로 들어가 버린 한지혁.

기자들은 카탈로그와 스켈레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무슨 로봇 박람회···아니 스켈레톤 박람회야?"

그때 한 기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기삿거리는 많아서 좋네. 스켈레톤의 상세 스펙이 공개된 건 처음이잖아."

"그건 그렇지. 좋아. 사진 왕창 찍어가자!"

스켈레톤을 대량으로 풀어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현재 상당히 유니크한 존재니까.

소환 계열은 현재 가장 높은 등급이 전 세계를 통틀어 A급일 정도로 희귀한 계열이고 또한 큰 기업의 회장이 S급 각성자로 인정받는 경우는 전 세계를 통틀어 사실상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으니까.

각성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실력을 키우려면 몬스터를 잡으며 소위 노오력을 해야 하는데 큰 기업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위험하게 게이트를 들락날락하겠어.

아무튼 그렇기에 내가 S급으로 인정받으면 큰 기업 회장이자 소환 계열로서 첫 사례이기에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질 게 분명했다.

당연히 이런 홍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래서 아예 작정하고 상세 스펙 카탈로그까지 만들며 기자들에게 전부 공개한 나.

일종의 기업 홍보관이라고나 해야 할까?

"아까 듣자 하니 로봇 박람···아니. 아니. 스켈레톤 박람회라 하던데. 뭐 그것도 좋고."

아무튼 그렇게 등록소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반겨준 건 낯익은 얼굴이었다.

"김한울 길드장님?"

바로 나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김한울 길드장이었다.

이미 빌렸던 돈은 다 갚은 지 오래지만, 갑옷 A/S와 업그레이드 등을 이유로 주기적으로 만나 왔기에 각성자들 중 나와 친분이 있다 말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쩐 일이세요?"

내가 만들어준 갑옷을 입고 있는 김한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기는요. 한 회장님 등급 테스트한다길래 바로 자원해서 왔지."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아. 한 회장님은 처음이라 모르시겠구나. 원래 A급 이상의 고위 각성자는 비슷한 등급의 각성자들 도움을 받아서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워낙 다양한 능력이 있어서 기계만으로는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요."

내가 그런 건 관심이 별로 없어서.

"들어가시죠. 저 말고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게 김한울과 함께 테스트 장소로 이동하자 이번엔 뉴스에서 자주 봐왔던 얼굴들이 등장했다.

바로 각성자 관리청의 청장인 이진영과 SS급 각성자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중 하나인 하얀꽃 길드의 길드장 우도현이었다.

"우도현 길드장님도 왔네요."

그러자 김한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 회장님이 SS급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때 이진영 청장과 우도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이진영 청장입니다."

옆에 있던 우도현이 조용히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김한울이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우 길드장님은 엄청 과묵한 분이라 원래 저러니 이해하세요."

"아. 네."

그때 이진영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한 회장님. 도대체 저희한테 왜 이러는지 묻고 싶었거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켈레톤을 만단위로 만든 것부터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 활용하는 것 등등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저희가 상당히 곤란했었습니다."

이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켈레톤에 대한 세금 문제부터 소환수 관련된 법을 새로 제정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의견도 엇갈리고 정말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렇게 어어? 하는 사이 스켈레톤의 수가 끝을 모르고 불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그룹이 되어버렸고요."

그간 법과 관련하여 스켈레톤은 단 한 번도 제재를 당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제재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해야겠지.

관리청의 행정력이 뒷수습을 논의 할 때쯤 세론은 이미 몇 발자국 앞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세론이 너무 커버려서 함부로 뭔가를 하기도 힘들 정도군요. 하하."

세론과 협력사에 종사하는 직원들부터 세론으로 인한 유턴 기업의 투자 효과 등 세론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세론에 무언가를 시도하는 순간 세론의 영향력에 있는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되니 행정기관 입장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물론 뭐 세론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에 큰 도움이 되고 있죠. 저도 국가 기관의 장으로서 참 감사하고. 참고로 제 개인의 성향을 말하자면 저는 제재로 인해 각성자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라서요. 그냥 저희가 알게 모르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려 한 겁니다."

"하하. 그런가요?"

"아무튼 그건 그거고 오늘 목적은 테스트 아닙니까?"

그때 이진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미리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거긴 한데 이미 저희 내부적으로 한 회장님이 S급일거라 잠정 결론을 내린 상황입니다."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요?"

"그간 보여준 행보만으로도 S급을 받기엔 충분하니까요. 지금까지 소환한 스켈레톤들의 수. 거기에 더해 원래부터 A급 이상의 무력을 지녔다 예상되던 상황에서 이제는 경호용 스켈레톤까지 나오며 사실상 1인 길드나 다름없는 상황 아닙니까.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앞으로 경호용 더 출시할 예정이시죠?"

"음."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뭐. 맞습니다. 앞으로 B급을 최소 수십 개 이상 출시할 예정이라서요. A급도 준비...솔직히 이미 만들어두었고요."

이미 저쪽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은 상황에서 좀 있으면 밝혀질 일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그 정도면 사실상 이미 S급은 확정이라 봐도 되겠군요. 원래는 다중능력자이신만큼 연구원들을 동원해 소환수는 물론이고 그외에 공격 그리고 하늘을 나는 능력에 대한 각종 테스트와 검증 등을 해야하는데··· 그건 청장의 권한으로 생략하고 기본 테스트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제법인데?

이건 이진영이 통 크게 준비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진영 입장에서 이 기회에 각 잡고 내 모든 걸 실험해 보고 싶지 않겠어?

솔직히 나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고.

그런데 이진영은 그와 정반대되는 선택을 한 거다.

내 모든 걸 확실히 밝힐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실험으로 시간을 끌어 나의 불만을 사느니 차라리 절차를 간소화하여 나의 호감을 사는 방향으로.

거기에 개인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각성자에 대한 제재에 반대한다며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건 다시 말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이진영의 제안이나 다름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좋네요."

이렇게 먼저 절차 간소화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줬는데 나도 답례를 해야겠지?

아무려면 관리청 청장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생각해보면 제가 그간 너무 막 나갔네요. 각성자를 관리하는 게 관리청인데 마치 관리가 안 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번호 주시면 앞으로 일을 벌이기 전에 청장님에게 미리 연락은 해드리겠습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며 또한 세론이 관리청에 협조하는 듯한 모양새는 나올 거잖아.

즉 이진영의 면을 살려줄 수 있다는 말.

내 말에 이진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이야.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분인 줄 알았으면 진작 접촉해볼 것을."

세론도 이제 덩치가 커졌으니 정치권 쪽이랑 잘 지내야지.

이진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야기는 이 정도로 된 거 같고 바로 시작할까요? 일단 테스트 기계로 소환수의 근력 같은 기본적인 걸 체크할 겁니다. 그다음은 김한울 길드장님과 간단한 대련이 있을 겁니다. 대충 서로 공격을 두어 번 주고 받아보는 정도로요."

김한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한 회장님과 제대로 한번 겨뤄볼 생각이었는데 김이 새네요."

"하하. 원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때 이진영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나저나 SS급도 도전해보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몰라서 우 길드장님에게 참관 부탁드렸는데."

사실 S급만 되어도 운신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단 말이지.

원래는 기왕 하려 한 거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때.

시종일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우도현이 갑자기 입을 벌리며 말했다.

"하시죠."

갑작스런 우도현의 말에 이진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기껏 우도현 길드장님을 여기까지 모셨는데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것도 좀 그렇긴 하죠. 그럼 김한울 길드장님과 대련이 끝나면 우도현 길드장님과도 간단한 대련을···"

그러자 우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부 생략하고 바로 저와 대련으로 진행하시죠."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어차피 김한울 길드장은 한 회장님 상대가 안 될 테니까. 어쩌면 나조차도 말입니다."

갑작스런 우도현의 폭탄 발언에 모두가 얼어붙는다.

'뭐야. 설마 내 마력을 느꼈나?'

원래 세론에선 상대의 마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강함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강자들은 자신의 마력을 잘 갈무리해두고 다니는 걸 기본 소양으로 생각했지.

하지만 이게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을수록 더욱더.

그래서 어차피 언데드 군단의 변질은 인과율 변화로 인한 사고로 추측되기에 내 적이라 해봐야 언데드 군단 뿐이고 거기에 더해 지구의 각성자들은 마력을 느끼는 사람이 없어 마음 편하게 풀어놓고 다녔던 건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버려 두었던 마력을 안으로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도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입구에 들어오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맞구나.

마력을 느끼는 거.

"오호."

SS급 정도 되면 확실히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구나.

각인된 능력만을 사용하는 일반 각성자와 다르게 마력이라는 이능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우도현.

'그러고 보니 마력을 제법 잘 갈무리 해두었네.'

자신의 마력을 풀풀 내뿜는 김한울과 다르게 조용히 잔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도현.

'내가 그간 각성자를 너무 무시했나 보다.'

그저 이 알 수 없는 세상의 법칙으로 인해 주어진 능력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물 안 개구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던 거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무 막 하고 다녔나 보네요."

우도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사실 지금 매우 놀란 상태입니다. 한 회장님 정도 되는 아우라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니까."

마력 느낀 걸 아우라라고 표현하나 보구나.

아무튼 뭐.

이미 느꼈다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웃기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SS급도 따가지 뭐.

개인적으로 SS급들의 능력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나는 여전히 얼어있는 이진영을 보며 말했다.

"그럼 우 길드장님 말씀처럼 다 그냥 생략하고 바로 대련으로 가시죠."

그렇게 안내받은 대련장.

높은 벽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데다 제법 넓어 대련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내 맞은편에선 창을 꺼내 가볍게 쥔 우도현.

"그나저나 마···아니 아우라는 어떻게 느끼신 겁니까?"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SS급이 되었던 시점이었죠."

세론에서처럼 마력을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수없이 쌓아온 전투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마력의 사용법을 깨우친 사람들.

그게 바로 SS급이었다.

"그렇구나."

"질문하고 싶은 건 많습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힘을 지닐 수 있나, 또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아우라를 통제하나 등등. 하지만 그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가장 빠른 건 손을 맞대어 보는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이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 분 모두 준비되셨으면 손을 들어주세요.

나와 우도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이진영이 말했다.

-그럼 시작!!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우도현의 몸이 순간이동 하듯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도현의 목소리.

"순간 가속. 제 능력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순간 가속.

그리고 그 가속력을 창끝에 실어내면 상당한 파괴력을 끌어낼 수 있겠지.

분명 능력과 잘 어울리는 무기다.

상대가 나만 아니라면.

그나저나 날 상대로 시현까지 해주며 여유를 부린다라···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봐주시는 겁니까?"

"알려드리는 겁니다. 제 능력을. 그래야 공평하니까."

"그런가요."

나는 아공간을 열고 뼈를 무더기로 꺼내며 말했다.

"그럼 저도 보여드리죠. 제 능력을."

46화

아우라를 활용하게 된 이후로 우도현은 더욱더 아우라를 잘 다루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창끝에 아우라를 싣거나 몸에 둘러 강화하는 식으로 점점 더 발전해 나간 우도현.

그런 우도현에게 있어서 한지혁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그 어떤 SS급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한 아우라를 풀풀 뿜어내며 다가오던 한지혁.

심지어 자신이 눈치를 챘다 말하자마자 그 거대한 아우라가 순식간에 사라지듯 정리되는 모습은, 한지혁이 본인의 아우라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렇기에 어쩌면 한지혁과의 대결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본인이 직접 대련을 하겠다 이야기한 우도현.

그리하여 성사된 한지혁과의 대결은 역시나 우도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콰광!

영상으로 본 적 있던 뼈가 날아와 폭발하는 능력.

그 폭발 반경을 벗어난 우도현이 순간 가속 능력으로 속도를 극대화해 한지혁을 향해 창을 내지른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공격.

아우라까지 더해진 이 찌르기는 그야말로 거력이 실려 있어 대형 몬스터조차 순식간에 관통되는 우도현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한지혁의 앞에 뼈들이 뭉쳐 만들어진 뼈 방패가 그의 창을 비스듬히 비껴 내며 막아 낸다.

그렇게 창이 막히자 그 창에 실린 아우라가 뒤로 뿜여지며 대련장 벽을 강타한 그 순간.

콰아아앙!

대련장의 벽이 순식간에 박살 나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 버린다.

"이야. 창에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박살이 나네."

한지혁의 말에 흥이 난 우도현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전력을 실은 다음 아우라를 폭발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그 뼈 방패는 뭘로 만들었기에 제 공격을 그리 쉽게 막은 겁니까."

"이거요? 별것 아니에요. 오만 잡가지 뼈가 다 섞여 있는 거라."

"그런 뼈로 어떻게 제 공격을 막으신 거죠?"

"우 길드장님이랑 똑같은 거지, 뭐. 내 아우라랑 사기를 조합해서··· 아, 설명하기 귀찮네. 대충 뼈는 그냥 강도를 올리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고, 아우라를 아우라로 막아 낸 거라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아우라를 아우라로 막는다.

SS급들이라면 단번에 알아들을 만한 간단명료한 설명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런 느낌.'

SS급 정도 되면 나라를 대표하는 각성자이기에 대련 한 번 제대로 하기도 힘든 게 사실이었다.

모두 자기들만의 길드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의 패배는 곧 그들 길드의 패배로 이어질뿐더러,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인 SS급들은 여차 잘못했다간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이번 대련은 달랐다.

한지혁은 자신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한 아우라를 지닌 강자 아닌가.

그렇기에 마음 놓고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붇는 우도현.

우도현이 창을 다시 쥐며 말했다.

"자.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

우도현은 분명 강했다.

내가 생각해 오던 각성자들에 대한 편견을 깰 정도로.

체계적으로 마력을 배우지 않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인 마력 운용법은 저게 과연 창에서 나오는 파괴력이 맞나 놀라울 정도.

'김한울 길드장은 상대도 안 되겠어.'

대부분의 각성자는 5 대 1의 법칙에 따라 상위 각성자를 상대하는 데 그 아랫급 5명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분명 S급까지는 그게 얼추 맞는 것이 사실.

하지만 SS급부터는 마력을 컨트롤하며 그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에 있는 S급 각성자 10명이 달려들어도 우도현 하나 어찌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세론의 마스터 정도네.'

세론에서도 인류 연합군을 통틀어 100명 수준인 마스터급 강자들과 비견되는 수준.

물론 마력 컨트롤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위력 자체는 절대 그들에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놀람은 딱 여기까지였다.

솔직히 내가 인류 연합군과 마왕군을 통틀어 얼마나 많은 마스터급을 봐 왔고 싸워 왔겠나.

그리고 그중엔 사망하여 내 언데드 군단의 일원이 된 마스터도 적지 않았고.

즉 놀랍긴 한데, 그건 내가 무시하던 각성자들 중에도 마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강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지, 그 실력 자체가 놀랍다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슬슬 지겨운데.'

SS급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장단에 맞춰 줬고, 덕분에 우도현이 제법 신나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우도현은 상성상 나한테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창에 실린 힘이 대단하긴 하나 결국 창의 위력이 실리는 건 뾰족한 창끝이기에 공격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능력도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려 주는 방식이기에 우도현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찌르고 빠지는 기습 공격 타입.

물론 SS급답게 동급 대비 스피드 스타일이라는 거고 어지간한 각성자는 창대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력이 떨어지는 상대와의 대결에서나 그런 거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상대와 대결을 하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아무튼 그런 좁은 공격 범위는 나 같은 물량 전문한테는 쥐약이란 말이지.

'대충 마무리할까?'

보아하니 흥도 오를 만큼 오른 것 같고, 이렇게 대충 마무리해서 SS급이나 받지 뭐.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도현이 거리를 벌리더니 말했다.

"이거, 저만 너무 신이 났나 보군요."

티 났나?

미안.

내가 표정 관리를 잘 못해서.

"소환수도 쓰지 않고 순수하게 붙었는데도 상처 하나 못 입혔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않으신 것 압니다. 아까 느꼈던 아우라는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제가 한 회장님이 진지하게 임할 만큼의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거겠죠."

"에이. 아니라니까요."

우도현이 창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 숨겨 왔던 제 비밀 무기를 하나 공개하겠습니다."

그때 서서히 눈가에 핏줄이 서기 시작한 우도현.

"저는 버서커라고 부르는 능력입니다. 일시적으로 자제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하는 대신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켜 주죠."

그런 능력이 있었어?

그런데 그때.

우도현이 갑자기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빨라!'

순간 가속을 쓸 때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

당황한 나는 위치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곧장 내 주변을 뼈 방패로 둘러 버렸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온 창.

그런데.

부웅!

그간 찌르기 위주로 공격을 하던 우도현이 찌르는 게 아니라 창을 휘둘러 공격을 하는 게 아닌가.

쿠왕!

그렇게 내 뼈 방패를 강타한 우도현의 창대.

"큭!"

그 창에 실린 거력에 그간 문제없이 공격을 막아 오던 뼈 방패에 금이 간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었다.

뼈 방패를 강타하자마자 몸을 돌려 창으로 2연타를 후두려 갈긴 우도현.

그리고 나는 그 힘에 밀려 대련장의 벽으로 날아갔다.

그러곤 벽을 뚫고도 한참을 날아간 나.

나는 날아가며 중얼거렸다.

"아. 씨벌. 쪽팔리게."

신체 능력이 강화된다 이야기는 해 줬지만, 이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거의 일순간 몇 배로 강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놈의 각성자 능력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마법은 기본적으로 물리법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력 강화는 음파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뿐이고, 투명 마법은 빛을 굴절시키는 것이며, 환영 마법은 시신경에 혼란을 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각성자들의 능력은 뭐랄까··· 좀 뜬금없다고 해야 하나?

김한울의 거대화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며, 우도현의 버서커만 봐도 이성 조금 날아간다고 해서 신체 능력이 갑자기 폭증하는 게 말이 돼?

이게 무슨 게임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지금 문제는 내가 매우 쪽팔리다는 거다.

우도현이 자기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며 폭탄 발언을 했는데, 그런 우도현에게 처맞고 뼈 방패에 금이 간 것도 모자라 이렇게 장외로 날아가?

아무리 내가 당황해서 대충 만든 뼈 방패라지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그간 나한테 죽은 마왕군 강자들이 지옥에서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소리를 하겠나.

"플라이."

나는 일단 날아가던 몸을 플라이 마법으로 멈춰 세우며 말했다.

"좀 진지하게 해볼까?"

*

"후욱. 후욱."

버서커를 쓰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흥분이 올라오는 대신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이 폭증한다.

이게 우도현의 비밀 무기인 이유는 평소 우도현의 공격 스타일과 버서커를 쓴 후의 공격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

기습과 스피드를 살린 공격에 적응하던 상대는 갑자기 파워로 밀어붙이는 우도현에게 당황하기 마련이니까.

그때 스피커에서 이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만! 이제 충분합니다! 빨리 사람 보내서 한 회장님 상태 확인해 봐!

방금 전 공격으로 한지혁이 큰 피해를 입었을 거라 생각해 사람을 보내려는 이진영.

하지만 우도현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날아가던 한지혁이 어느 순간 멈춰 서더니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을.

그것도 그간 잘 갈무리해 두던 아우라를 미친 듯이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우도현이 희열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진지하게. 임하는구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던 아우라를 지닌 강자가 드디어 진지하게 임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도현은 날아갈 듯 행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련장 벽 위로 하늘을 날아 모습을 드러낸 한지혁.

-하, 한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이진영의 말에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제 충분한 것 같으니 대련은 여기까지 하겠······.

그러자 이진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지혁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놉! 지금 이렇게 끝나면 쪽팔려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예?!

한지혁이 하늘에서 우도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비밀 무기라 하셨죠."

"맞. 습니다."

"그래도 이성 잘 유지하고 계시네."

"필사적으로. 유지하는 겁니. 다."

"그럼 답례로 저도 진지하게 비밀 무기 하나 보여 드릴게요. 대신 다른 사람에겐 말하기 없기?"

그러곤 아까 하던 대로 아공간에서 뼈를 무더기로 꺼내는 한지혁.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뼈들이 아공간에서 나오는 족족 바스라지며 가루가 되어 간다.

한지혁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왜 뼈를 매개체로 삼는지 아세요? 바로 뼈에는 사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걸 날려서 터트리는 능력을 쓰는 거고. 비유하자면 뼈는 탄이고 그 안의 사기는 화약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한지혁의 손 위로 검은색의 작은 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루기는 편한데 아무래도 화력은 그냥 그렇단 말이죠. 뼈에 담긴 사기의 양은 한계가 있으니까. 물론 아우라를 더해서 강화할 수있 기는 한데, 그것도 한계가 있고요."

그리고 아공간에서 나온 뼈가 바스라지면 바스라질수록 한지혁 손에 올려진 검은색 구체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처럼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할 때 하는 방법이 그냥 사기를 뽑아내서 한데 뭉치는 거예요, 총알을 분해해서 화약을 모으면 화력이 더욱 커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건 뭐다?"

한지혁이 검은 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약만 모아서 뭉친 덩어리다, 이 말씀."

검은색 구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한지혁.

하지만 그런 설명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검은 구체에 담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느낀 우도현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저. 저건······."

일반적인 아우라와는 다른, 불길하고 음습하며 동시에 파괴적인 아우라의 집합체.

"느끼시나 보네. 제법 흉측하죠? 보자··· 이 정도면 됐나?"

그러고는 가벼운 손짓으로 검은 구체를 우도현에게 날려 보낸 한지혁.

그러자 검은 구체가 마치 솜털처럼 두둥실 떠서 천천히 우도현을 향해 날아간다.

분명 다른 사람이 보기엔 작은 검은 구체 하나가 천천히 날아가는 것 뿐이기에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겠지만, 아우라를 다루는 우도현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 검은 구체에 실린 힘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며 이 일대를 모조리 초토화하고도 남을 거라는 걸.

"관전석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쪽은 피해 가도록 조종했으니까."

심지어 저런 흉폭한 아우라 덩어리의 피해 범위까지 조절할 수 있다니.

"그러니 저는 피하는 걸 추천하죠. 대련장만 벗어나면 피할 수 있을걸요? 아니면 항복하든가."

한지혁이 말을 하는 사이 고작 몇미터 앞까지 다가온 검은 구체.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검은 구체는 멀리서 본 것보다 더 흉폭하고 더 강렬했다.

그리고 우도현은 알 수 있었다.

'주. 죽는다!'

이대로 이 자리에 그냥 서 있으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죽을 거라는 걸.

"거의 다 도착했네. 이제 슬슬 결정 내리시죠?"

도주냐 도전이냐.

그렇게 우도현이 망설이는 순간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은 구체.

'으으으!'

본능은 일단 들이받자고 하는데, 남아 있는 이성은 지금이라도 당장 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소라면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을 우도현이지만, 버서커로 증폭된 본능과 검은 구체로 인한 공포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우도현.

결국 이성의 끊을 완전히 놓기 직전, 우도현은 결국 외치고 말았다.

"하. 항복! 항복!"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작은 검은 구체가 날아가자 우두커니 서 있던 우도현이 무조건 항복을 외친 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이진영이 김한울을 보며 말했다.

"뭔가 느끼셨습니까?"

그러자 김한울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작은 구체니까 피해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거였으면 진작 피하고 한 회장님에게 공격을 했을 우 길드장님이십니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겠죠."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이진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회장이 자기보다 강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한지혁이 무언가를 했고 우도현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

그때 하늘에 있던 한지혁이 우도현에게 다가가더니 무어라 무어라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관전석을 향해 외쳤다.

"한 번씩 주고받아서 무승부!"

이진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승부라고?"

누가 봐도 한지혁이 승자임이 확실한데 무승부라니.

하지만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밖에.

이제 한지혁은 명실상부한 한국 최강자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이진영이 부하 직원에게 말했다.

"일단 가서 한 회장님이랑 우 길드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기자회견 준비해. 청와대에도 보고하고."

"예? 뭐라고 보고할까요."

이진영이 한지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긴 뭐야, 대한민국에 6번째 SS급 각성자가 생겼다는 거지."

그러곤 부하 직원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도 어쩌면 SS급 이상일지도 모르는."

47화

한국의 여섯 번째 SS급 각성자의 등장.

SS급 보유 수는 국가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기에 이 사실은 대서특필되며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에도 뉴스가 퍼져 나갔고, 국민들 모두 이제 2명만 더 있으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환호하는 상황.

하지만 그런 국민적 분위기와 다르게 청와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심각했다.

"SS급 이상일지도 모른다라."

대통령의 말에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대결 전에도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말했던 것에 더해 우 길드장이 그 작은 검은 구체 하나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부터가 뭔가 우리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우 길드장이 느꼈다는 말이니까요."

"SS급만 느낀다는··· 아니, 그걸 느껴야 SS급이 될 수 있다는 아우라인가 뭔가 하는 그것 말입니까?"

"그런 걸로 추정됩니다."

"흠."

대통령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분명 강한 각성자의 등장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충분히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한 회장의 포지션은 아주 특이해요. 이미 A급을 출시했다고요?"

"예. A급 경호용이 이미 재벌들에게 대여되고 있습니다."

"그럼 S급이 등장할 가능성도······."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 개인이 SS급 이상의 무력을 지니고 S급 소환수를 양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솔직히 조금 두렵기까지 합니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약 저렇게 경호용으로 국가 주요 인사들에게 배치한 다음 갑자기 돌변하기라도 하면······."

대통령의 말에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막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무슨 말입니까."

"세론, 정확히 말해서 한 회장의 영업 방식은 늘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을 선택해 스켈레톤으로 대체한다. 신발이 그러했고, SR 전자는 물론 건설용 스켈레톤도 그렇고요.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진영이 자료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각성자 경호원의 공급은 늘 부족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호원 자리를 대체해 줄 스켈레톤이 등장한 겁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재벌이고 돈이 많다면··· 거절하시겠습니까?"

한지혁은 이미 큰 회사를 만든 그룹의 회장으로 신원이 확실하며, 그간 상생을 내세우며 기존 제도권에 융화되기 위해 최소한 한국 사람 한정으로는 많은 양보를 해 온 사람이다.

한마디로 그간 쌓아 온 이미지가 좋고 확실하다는 뜻.

그런 사람의 스켈레톤이 지켜 준다는데 이보다 확실한 게 어디있나.

"대통령님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떠올리실 수 있지만, 재벌들에겐 그저 거래일 뿐입니다. 돈을 주고 안전을 사 오는 거래.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간 한 회장의 행보를 보면 그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회장은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도 좀 이해가 안 갑니다. 굳이 편한 길을 두고 사람들 평판에 신경 쓰며 힘든 길을 가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까지야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마하니 그 나이에 노후에 들을 평판을 걱정하는 건 아닐 것 아닙니까."

이진영의 농담에 대통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분위기를 좀 돌려 보고자 해 본 말입니다. 아무튼 그간 한 회장은 누군가가 자신을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조용히 사업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한 회장의 호감을 사서 정부에 협조하도록 유도하는 쪽이 더 맞는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제가 먼저 호의를 베푸니 앞으로 저에게 향후 계획을 언급해 주겠다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단 말이죠······."

잠시 고민하던 대통령이 말했다.

"그나저나 군부에서 스켈레톤을 병사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반대입니다. 그거야말로 한 회장이 가장 불편해하는 일이니까요. 한 회장은 단 한 번도 스켈레톤의 무력을 전면에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즉 본인이 그걸 싫어한다는 소리죠. 그런데 갑자기 아예 전투 병기로 스켈레톤을 쓰는 게 어떻냐 하면··· 거부할 게 분명합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경비 업무를 담당하는 것 정도는 해 줄 것도 같습니다. 그건 전투 임무가 아니니까요."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하다. 전투용만 아니라면 스켈레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대통령이 말했다.

"좋습니다. 청장님이 한 회장이랑 잘 좀 소통해 주세요.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한 회장이야말로 한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해외투자를 유치하는 데 적극적인 세론 그룹.

심지어 노동자 친화적이라 잡음도 없으니 지금까지 세론이 보여 준 행보는 평탄함 그 자체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세론 그룹이 커지며 협력사가 늘어나는 건 대통령 입장에서 환영하면 환영했지 거북해할 일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A급 하나요. 주문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SS급의 탄생을 반기고 내 주변 사람들 역시 연일 축하한다며 말을 걸어왔지만, 애초에 SS급이란 타이틀은 그저 내 운신의 폭을 넓혀 주는 자격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끄고 본격적으로 경호원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 나.

-혹시 S급은 없습니까?

SS급 인증을 받자마자 다들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이거다.

S급 스켈레톤도 가능하냐는 것.

그리고 내 대답은 늘 똑같았다.

"S급은 아직 없네요."

S급 게이트는 가끔 열리기에 아직 사체를 확보하지 못했단 말이지.

-그 말은··· 만들 수는 있다는 겁니까?

"늘 말하지만 저도 모릅니다. 해 보는 거죠. 그래도 뭐, 나름 SS급인데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재벌 회장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A급 하나만 우선 부탁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한 개당 계약금 30억에 월 대여료 10억입니다."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SS급이 되신 걸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세론이 저희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군요.

이것 역시도 SS급이 되며 얻은 효과 중의 하나다.

모두가 먼저 호의적으로 손을 내민다고 해야 하나?

"그거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세론 하면 뭡니까. 상생 아닙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사업하는 놈이지만, 한 회장님처럼 일자리에 민감하신 분은 처음 봤을 정도니까요.

만약 안 그랬으면 이렇게 순순히 사람들이 스켈레톤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잖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튼 만들어지는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네."

그렇게 또다시 성공적으로 거래를 끝마쳤다.

"캬. 돈 잘 벌린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A급 스켈레톤은 모두 20개에, B급은 100여 개에 달했다.

이것들만 해도 이미 순수익으로 한 달에 수백억에 달하는 상황.

하지만 이미 대기업에 가까워져 가는 세론의 순수익에 비하면 솔직히 좀 많이 달린단 말이지.

"그만큼 세론이 많이 컸다는 거겠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역시 스켈레톤의 무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활용하는 쪽이 훨씬 좋고 효율적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호용들은 내 손짓 한 번에 언제든 전투용으로 변경할 수 있는 사실상 내 전투 병력이니까.

이 전투 병력이 용병처럼 돈을 벌어 오는 건데 즐겁지 않을 수가 있나.

"대충 비중을 2 대 1로 잡으면 되겠네."

2는 세론 사업 확장을 위한 스켈레톤 생산에 쓰고 나머지 1은 경호용의 탈을 쓴 전투용에 투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꾼 2개를 만들 때 전투용 하나를 만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전투용, 그중에서도 특히 등급이 올라갈수록 만드는 난이도와 내 마력 소비량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니까.

대충 A급 하나 만들 때 필요한 내 노동력과 마력이면 일꾼 스켈레톤을 거의 천 개는 만들 수 있을걸?

그리고 천 개의 일꾼 스켈레톤이 벌어다 주는 돈은 A급 월 대여료 10억을 아득히 넘고.

역시 돈 하나만 생각하면 일꾼 스켈레톤만 무한정 만드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나저나 슬슬 진짜로 S급도 준비해야겠는데?"

이번 우도현과의 대련은 나한테도 좀 충격적이었다.

마스터급의 강자가 능력을 발현하여 갑자기 순간적으로 확 강해지다니.

이번에야 대련 상황인 데다 내가 작정하고 한 공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우도현이 항복하며 끝났지만, 만약 실전 상황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것 아닌가.

"제대로 된 친위대가 필요해."

최소한 저런 SS급들을 상대로 버텨 줄 수 있는 진짜 친위대가 필요하다.

나는 안전한 위치에서 마법을 퍼부을 때 가장 큰 효율을 낼 수 있으니까.

SS급들이 제법 위험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으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지.

당연하게도 그걸 위한 최소 등급은 S급.

문제는 S급 게이트가 그리 자주 나오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특히 한국은 워낙 국토가 작아서 더욱 출현 빈도가 낮았고.

물론 A급 사체로 S급을 아예 못 만드는 건 아니었다.

사기를 뽑아 한 개체에 몰아주거나 대형화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역시나 효율이다.

언데드의 기본은 살아생전의 강함을 최대한 재건하는 건데, 이걸 다른 몬스터의 사기를 빼 와서 마력을 이용해 어거지로 400퍼센트, 500퍼센트씩 증폭시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그런 일을 할 바에야 A급은 그냥 A급으로 만들고 S급은 S급으로 만드는 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

나는 핸드폰으로 세계 게이트 현황 목록이란 어플을 실행했다.

"보자. 한국은 지금 없고··· 오! 중국은 있네?"

역시 땅은 넓고 봐야 돼.

"어떻게 할까."

방법은 두 개다.

내가 직접 가서 잡아 오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사 오거나.

그렇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답은 하나였다.

"돈 주고 사 오자."

비자 신청 하고 중국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스켈레톤을 한 마리라도 더 만들어서 사업 규모를 키우는 거다.

어차피 이제 돈도 제법 많이 버니 까짓것 돈 주고 사지 뭐.

게다가 결정적으로 자국의 게이트, 그것도 귀한 S급 게이트에 외국인인 나를 쉽게 들여보내 줄 리가 없지 않나.

나는 핸드폰을 들어 SR 전자의 중국 현지 라이선스 매입을 담당하는 안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다른 게 아니라 몬스터 사체가 필요해서요."

-사체요?

"중국에 보니까 S급 게이트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S급 몬스터 사체 좀 사다 주시겠어요? 매입 대상 몬스터 리스트는 보내 줄 테니 잡은 지 얼마 안 되고 사지 멀쩡한 걸로."

일꾼이야 뼈만 사서 대충 만들어도 상관없지만, S급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안 부장이 말했다.

-S급도 만드시려는 겁니까?

SS급이 되고 나름 유명세를 얻다 보니 이제는 대충만 말해도 다들 내 목적을 알아차린다.

"해 보는 거죠."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오케이. 매입하면 비행기 화물로 실어서 보내세요."

당연히 내가 직접 매입한 그 자리에서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게 가장 효율이 좋기는 하지만, 한두 개 만들고 말 것 아니잖아?

그리고 뭐, 하루 이틀 정도 차이야 감수할 만하니 그냥 사다가 한국으로 가져와서 만든다.

"아! 그리고 기왕 매입하는 거, 몬스터 정수도 사 주세요."

S급 정도 되면 그때부터는 몬스터 사체보다 마력 부족이 더 큰 문제다.

S급 몬스터의 살아생전 힘을 재현하려면 그만큼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데, 특히 나는 알고리즘 마력진도 새겨 넣어야 해서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보다 유지에 필요한 마력은 적지만 처음 만들 때 마력은 몇 배나 더 많이 소모된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바로 내 마력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몬스터의 정수.

아마 모르긴 몰라도 S급 몬스터 사체보다 몬스터 정수 사들이는 데 돈이 몇 배는 더 들어갈 거다.

정수가 좀 비싸야 말이지.

-정수는 얼마나 사들일까요.

"돈 아끼지 말고 최대한 많이요."

어차피 정수는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까.

-그럼 매입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안 부장과의 통화를 끊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S급 만들어서 친위대 만들고 경호용으로 몇 개 대여하면··· 짭짤하겠네. 좋아. 그럼 기다려 볼까?"

*

중국에서 S급 몬스터 사체와 정수를 대량으로 구매해 S급 언데드를 만들어 친위대를 복구하려는 내 원대한 계획.

그런데 이 계획이 시작 단계부터 막혀 버렸다.

"안 판다고요?"

-예······.

"왜요? 돈이 부족하답니까?"

내가 몬스터 사체와 정수 매입에 사용하려 빼 둔 돈이 무려 수백억인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당에서 고위 몬스터 사체의 해외 판매를 금지했다고 합니다.

"원래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몬스터 부산물의 해외 거래는 원래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딱히 별다른 제재가 없는 게 보통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막은 건데요?"

-저도 알아보고는 있는데······.

잠깐만.

설마.

"혹시 세론 이름으로 매입하려 한 겁니까?"

-당연히 회삿돈으로 사는 거니까 세론으로 영수증을 끊으려 했습니다.

"설마 이 새끼들 지금 내가 S급 스켈레톤 만들까 봐 안 판다고 하는 것 아니에요?"

안 부장도 듣자마자 내가 S급을 만드려 한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나.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안 부장이 말했다.

-자, 잠시만. 제가 지인 통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시 안 부장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회장님.

"말씀하세요."

-회장님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한국 기업에 대한 판매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이 난 게 회장님이 SS급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결정된 거고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나 견제하려고 안 판다는 거라 이 말입니까?"

-···그것 말고는 판매를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이가 없네?"

물론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이해는 간다.

SS급도 중요하지만 S급 역시도 핵심 전력이니까.

하지만 중국은 인구빨로 S급만 수백에 달하는 나라잖아.

그런 반면 내가 만든 스켈레톤은 각성자들 같은 능력이 없다 보니 등급이 높을수록 동급 각성자 대비 성능이 좀 처진단 말이지.

당장 A급이던 박 실장을 5개의 B급 경호용이 막지 못해 최종 도주 모드가 발동되었고, 그 후 5개가 아니라 7개를 한 팀으로 묶었던 것처럼 동급 각성자를 상대하려면 최소 1.5배 더 많은 수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럼 단순 계산으로 중국의 모든 S급 각성자를 상대하려면 거의 천에 달하는 S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데, 당장 나보고 그렇게 많이 만들라 해도 만들 돈이 없다고!

물론 중국이 이런 사실까지 파악하진 못했겠지만, 아무튼 간에 말이다.

"와. 어이가 없네. 이런 식으로 견제를 해?"

SS급이 되면 방해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태클이 들어온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패스하세요. S급 게이트가 중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나라에서 사죠, 뭐."

그러자 침묵하던 안 부장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할 게 뭐 있어요, 안 부장님이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다른 나라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죠."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중국 이 새끼들 한번 해보자 이거지?"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날 물먹여?

어차피 할 거기는 했지만, 중국에 있는 해외 기업들을 모조리 한국에 유치해 주지.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잠깐만. 지금이야 S급 몬스터 사체 안 파는 정도로 끝났지만, 나중에는 원자재 수출도 중단하는 것 아니야?"

세론의 주력 사업은 원자재를 사다가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거다.

지금까지야 세론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중국에서 별다른 대처가 없었는데, 만약 세론 신발이 중국 신발 시장을 무너트리고 중국에 있는 해외 공장들도 모조리 끌고 온다면?

그때도 과연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

"이 새끼들 무조건 원자재 잠그겠네? 와. 이거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구나?"

세론의 원자재 주력 수입처는 당연하게도 중국이다.

가깝고 싸니까.

그런데 이게 막힌다면?

원자재 수출을 못 한 중국도 손해를 보겠지만, 아예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세론의 피해가 더 클 거다.

"차라리 잘됐네. 이놈들이 먼저 선빵 쳐 준 덕에 정신이 확 들었어."

내가 중국의 세계 공장 타이틀을 노리는 이상 중국과의 관계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일이 없으니까.

"좋아. 이 기회에 아예 탈중국으로 간다."

48화

다행히 유럽에 있는 S급 게이트에서 성공적으로 사체와 정수를 매입한 나.

비행기에 실어 한국에 도착하자 나는 곧바로 S급 데스 나이트 제작에 돌입했다.

금으로 마법진을 새기고 각종 금속으로 취약 부위를 보강하는 등,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데스 나이트.

"후우."

나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역시 S급은 쉽지 않아."

워낙 마력이 많이 소모되고 들어가는 재료가 많아 S급 하나 만드는 데 사체와 정수 그리고 각종 부자재를 더해서 대략 200억이 소모되었다.

물론 다른 각성자들이 들으면 고작 200억으로 S급 하나를 뚝딱 만든 거면 싼 것 아니냐며 어이없어하겠지만, 내가 이것 하나 만들고 말 게 아니잖아.

"본격적으로 정수 사 모으면 정수값 폭등할 것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원래 공급이 달려서 가격이 비쌌는데."

어쩌면 정수값이 지금의 몇 배로 오를지도 모르지.

"여기에 다른 병사들이랑 마스터 급 데스 나이트와 로얄 리치 같은 특수 개체들 그리고 다섯의 결전 병기까지 고려하면······."

까마득하다.

"니미럴. 무조건 돈 많이 번다."

세론 그룹 잘 크고 있잖아.

열심히 벌다 보면 뭐, 까짓것 못 하겠어?

"아무튼 이건 이거고, 지금 급한 건 원자재야."

탈중국을 결심했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어떻게 할까."

가장 쉬운 건 역시 수입처의 다변화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여러 나라에서 수입하면 의존도를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 역시도 결국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꼴이니까.

"지금 타깃이 중국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라고 해서 돌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냉혹한 국제정치 속에서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는 법.

세론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계의 산업을 흡수하면 다른 나라도 세론을 견제하려 들지 모를 일이라는 거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자급자족인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해?"

농토가 부족해서 쌀을 제외하면 농작물 자급자족도 안 되며 자원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원자재에 한해선 저주받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이 대한민국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자. 우선순위를 정하자. 일단 석유는 패스."

에너지 자원이자 플라스틱을 만드는 핵심 중의 핵심인 석유.

하지만 이 석유는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다.

바다에서 기름을 뽑아다 쓰는 시대가 왔는데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은 여전히 손가락만 빠는 처지니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금속이랑 면화지."

각종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금속들과 옷이나 신발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면화.

이 두 가지는 세론에게 있어서 공급이 끊기는 순간 세론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핵심적인 자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개는 필수인데."

당연히 이 두 가지 모두 절대적으로 넓은 땅을 가진 나라에 유리하다는 게 문제다.

넓은 땅을 가져야 광물 자원이 많이 있을 확률이 높고, 경작지가 넓어야 면화, 그러니까 목화를 재배할 것 아닌가.

"넓은 땅··· 넓은 땅이라··· 어?"

세상에서 가장 넓은 땅이자 동시에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곳이 있지 않나.

바로 바다.

"바다에 지하자원이 널려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한번 알아볼까?"

*

지구 면적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

이 바다는 자원의 보고이자 동시에 모두들 침 흘리며 구경만 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바다 자원에 대해 알아본 결과······.

"찾아 둔 곳이 있다고요? 심지어 이미 한국에서 개발 권한까지 획득해 뒀고?"

이미 해양자원 탐사가 상당 수준 이루어졌다는 걸 알아냈다.

그것도 심지어 국제기구가 이미 개발 허가까지 내준 상태로 말이다.

"예. 말씀하신 한국 근해는 수심이 워낙 낮아 채산성 있는 광물이 거의 없지만, 북태평양의 배타적경제수역에 있는 해저열수광상은 이미 여러 나라가 합심하여 서로 구역을 나누어 개발권을 취득해 둔 상태입니다. 이 해저열수광상은 열수분출공과 차가운 해수가 닿아······."

해저 자원을 알아보기 위해 초대한 교수의 설명이 계속되자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교수님, 알아듣기 쉽게. 저 그쪽 지식 거의 전무하거든요? 초등학생한테 이야기해 준다는 생각으로 설명해 주시죠."

그러자 교수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간단하게 말해 녹은 광물이 식으면서 굳은 상태로 해저 바닥에 깔려 있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해저 노천 광산이라고 할까요."

"노천 광산이라는 말은 그냥 내려가서 광물을 줍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그런 노천 광산이 태평양 바다 밑에 있고, 이 노천 광산 일부의 채굴권이 한국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고요."

"오오!"

그거 대박이잖아?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데 왜 채굴을 안 합니까?"

그러자 교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이유는?"

"이걸 가져오는 방법은 현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다 깊숙이 그물 같은 걸 넣어서 바닥을 싹 훑으며 가져오는 건데··· 사실 이게 가장 현실성 있지만 동시에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해저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테니까요."

아아.

그물로 싹쓸이하면 편하고 쉽겠지만 동시에 깊은 바닷속 생명체와 그들의 서식지까지 싹쓸이하게 될 테니까.

이해한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면 환경 단체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 치겠지.

"그래서 나온 게 두 번째 방법입니다. 무인 조종 잠수정 로봇을 내려보내서 선별 작업을 하여 광물들만 골라 오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채산성을 맞추겠습니까."

한마디로 돈이 안 된다?

"그래서 개발한다 개발한다 이야기만 하고 표류한 게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사실상 방치 상태라는 말이죠."

그렇게 교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완벽하네!"

"예?"

"마침 저희 회사에 건설용 스켈레톤 있잖아요!"

무거운 짐을 들기 위해 일꾼 스켈레톤의 강화 버전으로 만든 건설용 스켈레톤.

심지어 머리에 카메라까지 달려 있으니 더 완벽하지 않나.

"건설용 스켈레톤을 해저 채굴용으로 개조해서 내려보낸 다음 막 퍼 담으면 된다는 소리 아닌가요?"

"어?"

교수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거··· 말 되는 것 같은데."

"그쵸?"

이야.

이거다, 이거.

바다 밑에 깔려 있는 노천 광산이라니.

"이거 개발 신청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한국 정부가 가진 채굴권을 이용하기 위해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한 나.

그런데 막상 나를 만나러 온 건 개발권과 관련된 정부 부처의 장이 아닌 게이트 관리청의 청장 이진영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스켈레톤을 이용해 해저 자원을 채굴하신다고요?"

"왜 이 청장님이 오신 겁니까? 이쪽도 관할하세요?"

"당연히 제 관할은 아니지만 보고를 듣고 대통령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그나마 한 회장님이랑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가능합니까?"

"해 보는 거죠. 안 되면 말고."

"지금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십니까?"

"하긴. 자원이 없는 한국 입장에서 빅뉴스기는 하겠네요."

"한국만 빅뉴스겠습니까? 북태평양의 채굴권을 나눠 가진 나라가 한둘이 아닙니다. 만약 스켈레톤으로 진짜 채산성 있게 해저 자원 채굴을 하면 그 나라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오호."

생각해 보니 이거 진짜 성공만 하면 세론에게 중요한 무기가 되겠네.

다른 나라들도 채굴하기 위해 세론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니까.

"아무튼 저도 해 봐야 알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부에 문의한 거고. 그나저나 된다고만 하면 문제될 것 없죠?"

"물론 절차가 있기는 한데,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한번 해 보죠.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만들어 뒀거든요? 들어와요!"

내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온 스켈레톤과 무인 조종 장치를 장착한 직원.

"이게 제가 이번에 개발한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입니다. 여기 스켈레톤들을 바다 밑에 내려보내서 광물들을 퍼다가 배와 연결된 통에 담는 거죠. 그러다 통이 꽉 차면 배에서 끌어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거든요."

"그럼 작업이 모두 끝난 스켈레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요. 그냥 다음 작업자가 교대해서 계속 작업하는 거지. 통만 끌어 올리면 그만이니까 그냥 무한정 바다에 둘 건데요?"

이진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바다 밑에 둔다고요? 그러다 해저에서 생물체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해서 고장이 나면 어떡합니까?"

"수압 생각해서 튼튼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진짜 고장이 난다 해도 무슨 상관 있어요? 어차피 다 뼈니까 그냥 버리면 그만인데. 아. 카메라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그건 광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을 테니 카메라만 건져 올리면 되겠네."

이보다 친환경인 작업 방법이 어디 있나.

이진영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간 수많은 로봇 회사들이 해저 채굴을 위해 연구를 해 왔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해결될 줄이야."

비싼 데다 유지 보수를 위해 수시로 해저와 해수면을 오가야 하는 로봇과 말 그대로 막 쓰다가 고장 나도 버리면 그만인 스켈레톤.

당연하게도 효율 면에서 로봇은 스켈레톤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 참고로 이건 시제품이라 크기가 좀 작거든요? 진짜 가능성이 보이면 이것보다 몇 배는 크게 만들어서 한 번에 왕창왕창 담으려고요."

사람 크기의 스켈레톤으로 어느 세월에 광물을 긁어모아.

기왕 할 거면 크게 만들어서 팍팍 캐 와야지.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자원 개발은 한국의 오랜 숙원이었으니까요."

자원이 없는 나라의 비애.

그간 한국은 해외 광산을 매입하는 등 해외 자원 개발에 힘써 왔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세론의 등장으로 드디어 그 기회의 장이 열린 거다.

"그나저나 설마 정부에 회사 지분 나눠 주고 그래야 하는 건 아니죠? 저 그런 것 되게 싫어하는데."

이진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캐낸 광물을 해외로 빼돌리지만 않는다면 채굴권 대여에 대한 비용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국이 자체적으로 광물 자원을 조달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니까."

"그럴 일 없어요. 애초에 내가 쓸 게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아무튼 좋아.

정부도 지원해 준다 하니 눈치 볼 것 없잖아?

"좋습니다. 한번 해 보자고요."

*

"살다 살다 이런 망망대해를 다 나와 보네."

건설용 스켈레톤 조종사로 일하다 갑자기 새로 생긴 세론 개발의 정직원 제안을 받은 사람들.

정직원이라는 말에 바로 제안을 수락한 그들은 물속의 스켈레톤을 조종하는 훈련을 받은 뒤 정부에서 제공해 준 배를 타고 북태평양 한가운데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 뭐냐. 해저 자원을 캔다고?"

"그렇다고 하던데."

"심해 공포증 있는 사람은 하지도 못하겠네."

"그래서 애초에 없는 사람들만 뽑은 거래잖아. 게다가 어차피 직접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때 정부 쪽 공무원이 외쳤다.

"잠시 후에 도착합니다!"

광케이블이 연결된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이 곧 해저 밑바닥에 도착한다는 공무원의 말에 배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

그들 모두 세론 렌탈에서 건설용 스켈레톤을 수없이 다뤄 본 베테랑들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종 장치를 착용한다.

그렇게 드디어 가면에 달린 액정을 통해 스켈레톤의 시야를 공유한 사람들.

"와. 이게 바다 밑이구나."

"도대체 얼마나 밑까지 내려간 거야? 라이트로 비추는 것 말고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좀 무섭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드디어 완전히 해저면에 착지한 스켈레톤들.

그때 공무원이 말했다.

"스켈레톤 다리에 추를 달아서 떠오를 일은 없지만, 물저항이 있어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이번 채굴은 어디까지나 테스트를 위한 거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

그러자 사람들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 그만합시다, 이미 들을 만큼 들어서 귀에 구멍 날 것 같으니까."

"이미 연습 많이 하고 왔는데 뭘 또."

"회장님이 그러셨잖아. 고장 나도 그냥 버리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그 말에 공무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해저면을 훑기 시작한 사람들.

그때 한 남자가 외쳤다.

"32번, 혹시 이 검은색 돌들 맞습니까?"

그러자 공무원 옆에서 작업자의 영상을 공유하여 보고 있던 연구원이 외쳤다.

"맞습니다! 그 돌이 코발트와 니켈 그리고 알루미늄 등 무려 수십 종의 광물이 뒤섞인······."

"아니, 아니. 그렇게 설명해 주면 우리가 아나? 그냥 이게 맞는지만 좀 말해 줘요."

"마, 맞습니다."

"오케이."

그러자 등에 매달고 있던 삽과 통을 꺼내 마구잡이로 퍼 담기 시작한 스켈레톤.

그렇게 순식간에 통이 가득 차자 조종자가 말했다.

"금방 다 차는데요. 이거 큰 통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 말에 공무원 옆에서 영상을 지켜보던 연구원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테스트라 그런 거고, 나중엔 대형 그물이나 통을 이용할 예정이니 걱정 마시고 일단 올려 보내세요."

"예이."

연구원의 말에 매달고 있던 와이어를 통에 연결한 조종사.

"와이어 연결했습니다. 32번 올리세요."

그 말에 공무원이 기계를 작동했고, 순식간에 배로 끌어당겨지는 통.

"가 봅시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통제실을 나가 와이어가 감기고 있는 곳으로 이동한 연구원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올라온다!"

드디어 깊은 해저 밑에 잠들어 있던 광물이 통에 담겨 모습을 드러낸다.

연구원 하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통에 있는 광물을 집어 들고 확인한 다음 외쳤다.

"성공이야! 성공! 이건 무조건 된다!"

그렇게 정부와 세론 개발이 공동으로 추진한 해저 자원 개발 계획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본격적인 해저 자원 개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49화

스켈레톤을 이용한 해저 자원 채굴을 성공하자 정부는 곧바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자원 강국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떼었다며 언론 플레이를 했고,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진 세론 개발.

그사이 나는 실험 삼아 꺼내 올린 광물들을 제련소에 성분 의뢰 했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철은 없네요. 이건 좀 아쉽다."

철광석이 나와야 전자 제품을 만들 것 아니야.

내 말에 교수가 펄쩍 뛰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런 고품위 광물에 철이라니요!"

"예?"

"이건 위대한 자연이 손수 만들어 준 완벽한 광물 그 자체란 말입니다! 열수분출공에 녹은 광물들이 해수에 의해 식는 과정에서 무거운 광물들 위주로 남게 된······."

"또 또 어려운 소리 하신다. 쉽게, 쉽게."

내 말에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녹은 광물이 찬 바닷물에 식어 무거운 광물들만 표면에 남게 됐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 광물은 자연이 정제해 준 순도 높은 광물이라는 거죠."

"순도가 높다고요?"

"예. 여기 결과지를 보시죠. 1톤의 광물에서 구리가 200kg에 아연 300kg. 이것만 해도 이미 절반인 데다 추가로 금 30g에 은도 1,000g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기타 20여 종의 광물들도 상당량 함유되어 있고요. 이게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교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건 정말 미친 수준의 함유량이라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 정돈가요?"

"다른 걸 다 떠나서 일단 구리 하나만 두고 말씀드리죠. 지구상에 있는 일반적인 구리 광산의 구리 함유량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10퍼센트?"

그러자 교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0.3퍼센트입니다."

"풉!"

0.3퍼센트?!

"구리 광산의 돌 1톤을 캐내면 그 안에 3kg의 구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정제하고 제련해서 만들어지는 게 우리가 흔하게 보는 구리고요. 그런데 이건? 무려 20퍼센트입니다. 심지어 나머지도 대부분 불순물이 아닌 다른 광물이니······. 하. 이건 정말 자연이 내려 준 신의 광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계산기를 꺼내 두들기며 말했다.

"보자. 지금 테스트로 내려 보낸 대형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이 평균 한 시간에 1톤 정도 작업하고 있고··· 24시간이면 24톤."

이번엔 핸드폰을 켜서 각 광물들의 시세를 검색해 본 나.

"구리가 kg당 8,000원이고 아연이 3,000원. 이걸 다 곱하면······."

그렇게 계산을 마친 나는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하루에 1억?!"

대형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 하나가 하루에 1억을 번다고?

그럼 한 달이면 30억이니까 스켈레톤 100개면 한 달에 3천억.

"다 때려치우고 이거나 할까?"

세론 그룹에서 쓸 원자재 정도나 구할 생각이었는데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세론 그룹의 현재 한 달 매출이 7천억에 순이익이 2천억 수준인데, 이건 100개만 투입해도 3천억이라니.

내 말에 교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건 제련 후 기준이라서요. 거기에 각종 부대 비용을 빼면 아마 3분의 2 정도일 겁니다."

교수의 말에도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2,000억은 나온다는 소리잖아요, 겨우 100개로."

"아마 그렇겠죠."

이건 미쳤다.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했는지 내 스스로가 한심해질 정도로.

나는 바로 김덕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지금 당장 중고 배 알아봐 주세요."

지금까지는 실험을 위해서 정부가 제공해 준 배를 이용했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면 세론 개발의 배가 필요하다.

-그건 실험이 모두 끝나면 하시기로 한 것 아니셨습니까?

"실험이고 자시고 무조건 합니다, 무조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

그렇게 본격적으로 가동된 세론 개발의 해저 채굴 시스템은 간단했다.

우선 크레인이 달린 해저 채굴용 선박 하나당 대형 스켈레톤 15개가 배정되고, 그 스켈레톤들이 곡괭이와 삽 같은 기본 채굴 장비를 들고 해저로 내려간다.

그렇게 내려간 스켈레톤들은 주울 수 있는 건 줍고 크기가 커서 곡괭이질이 필요한 건 내리치는 방식으로 광물을 캐내 배에서 내려보낸 대형 통에 담고, 그렇게 대형 통이 가득 차면 배로 끌어 올린다.

이렇게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며 해저 채굴용 선박이 계속해서 광물을 모으는 사이, 한국과 해저 채굴용 선박을 오가는 운반선이 해저 채굴용 선박에서 쓸 보급품을 전달한 다음 쌓인 광물을 실어서 한국으로 가져오는 방식.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개 쩐다!"

캐낸 광물을 이번에 계약한 대형 제련소에 팔아 내가 얻은 금액은 무려 300억.

대형 스켈레톤 15개가 배정된 배 하나가 한 달 만에 벌어들인 금액이었다.

나는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이 좋은 걸 그동안 왜 구경만 했대? 고맙게 말이야."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해저면에 발을 대고 움직이며 곡괭이질까지 하는 대형 스켈레톤과 다르게 잠수정 형태로 물을 떠다니는 로봇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작업 효율로 볼 때 비교가 안 되니까.

아무리 좋게 잡아도 그 효율은 10퍼센트 수준.

그럼 같은 작업 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30억을 번다는 건데, 솔직히 심해 무인 로봇 잠수정과 대형 배를 동원하고 고작 한 달에 30억을 벌어서는 뭘 남기겠나.

당장 나만 해도 지금 운반선 그리고 해저 채굴용 선박의 항해사들과 교대 조종사 등등 해서 고용 인원만 80명으로, 계속 바다 위에서 생활해야 하기에 고액의 연봉을 주다 보니 인건비만 한 달에 10억 가까이 나오는 상황.

거기에 배와 로봇 유지 보수비랑 정부에 지불해야 하는 채굴권 이용료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면 30억 벌어 가지고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다르단 말이지.

그런 걸 다 떼고도 최소 2백억 이상 남으니까.

"축하 드립니다, 한 회장님."

이진영 청장의 축하 인사.

"으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사업이 커지면 수천억도 우습겠군요."

"수천억이 문젠가요. 저 당분간 해저 채굴용 스켈레톤만 만들 겁니다."

물론 계속 이것만으로 수익을 얻는 건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현재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구리의 경우 세계의 총생산량은 대략 한 해에 2천만 톤.

금액으로 따지면 대략 150조 원에 달했다.

문제는 이 원자재라는 게 공급과 수요에 따라 가격 변동폭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내가 세계 생산량의 10퍼센트만 초과 공급 해도 가격은 3분의 2로 떨어질지 모를 만큼 말이다.

즉, 다른 광물들까지 고려하면 수십 조까지는 훌쩍 클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이상까지 성장하는 건 힘들다는 의미였다.

세계 기업 순위 100위 안에 채굴 기업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바로 그 증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이것보다 더 목돈을 벌 만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당분간은 해저 자원에 집중해야지.

나는 이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청장님 도움이 컸습니다. 배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거든요."

김덕배에게 중고 배를 알아보라고 시킨 나.

하지만 이게 의외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중고 매물을 찾기도 힘든 데다, 개조하려면 배의 구조를 변경해야 하는데 한번 사고가 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고로 번지기에 배 구조 변경 허가는 어지간해선 절대 해 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바로 이진영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이진영은 흔쾌히 응했고, 그렇게 이진영의 도움을 받아 정부 보증으로 대출도 90퍼센트까지 받으며 중고 배를 매입해 해저 채굴용 선박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한 세론.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이 자원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될지도 모를 중요한 기로인데,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도와드려야지요."

"그건 확실하게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렴 갯벌에서 바지락 캐는 수준으로 광물을 캐고 있는데 어려울 게 뭐 있어.

그나저나 앞으로가 문제네.

"중고 배 더 없죠?"

지금까지 세론이 매입한 배는 모두 6척.

그중 2척이 운반선이고, 나머지는 해저 채굴용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산 건데 지금 현재 가동되고 있는 것은 1척뿐이고 나머지 3척은 개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4척 다음이 없다는 것.

이진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이렇게 단기간에 원하는 사이즈의 중고 배를 6척이나 산 것도 대단한 겁니다. 배는 그리 쉽게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배는 워낙 고가이고 덩치가 크기에 조선소에 신규 선박을 주문하는 순간부터 이미 향후 운영 계획을 다 잡아 놓을 정도.

그렇기에 중고 배를 매입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이진영에게 도움요청을 했을까.

"아아. 스켈레톤은 많은데 배가 없어서 일을 못 한다니."

"지금이라도 조선소랑 조율해서 지금처럼 급조된 배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해저 채굴용 선박을 만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어봤더니 설계부터 건조까지 아무리 짧게 잡아도 6개월은 걸린다는데요. 그것도 심지어 주문이 밀려 있어 2년 뒤에나 받을 수 있고."

최근 조선업이 다시 활기를 띤 덕분에 주문이 밀린 상황.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혹시 그건 안 됩니까? 해저 채굴장 위에 아예 해상 기지를 만들면 편할 텐데. 그 왜, 석유 시추도 그렇게 하잖아요."

내 말에 이진영이 헛웃음을 하며 말했다.

"개발권을 취득할 때 이미 확정 지어 둔 부분이라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해상 기지는 오히려 배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텐데요."

"아."

"채굴장 수심이 4천 미터인데 그걸 고정형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부유형이라는 건데, 이 부유형도 결국 바지선 같은 배나 플랫폼을 이어서 고정하는 식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럼 그 배랑 플랫폼을 또 구해야겠네요? 그런데 이건 워낙 특수 목적이라 중고 자체가 아예 없을 겁니다."

아아.

이런 노다지를 두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어쩔 수 없죠. 조선소랑 조율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중고 배는 계속 알아봐 주세요, 쓸만한 게 있으면 무조건 매입할 테니까."

*

조선소와 미팅을 하며 일정을 조율한 나.

최대한 빨리 해 달라 사정했지만 조선소 쪽에서도 방법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기에 결국 첫 배를 인도하는 시기는 2년으로 확정되었다.

"아. 답답해. 아아!"

기계조차도 스켈레톤으로 때우며 거침없이 달려온 나에게 2년이란 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단 말이다.

"젠장. 뼈가 물에만 떴어도."

만약 뼈가 물에 뜨는 성질을 지녔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뼈로 해상 기지를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뼈는 물에 넣는 순간 그대로 가라앉아 버린단 말이지.

물론 뭐 공기를 넣은 구조물을 사이사이에 넣는다면 못 띄울 건 없지만, 그렇게 어설픈 해상 구조물을 정부에서 허가해 줄 리가 없지 않나.

"역시 바다는 쉽지 않구나."

그때 김덕배가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회장님."

"예?"

"이번에 입사한 신입 사원들입니다."

세론 본사 신입 사원을 뽑으면 꼭 거치는 과정이 바로 나와의 면담이었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평판 관리 겸 격려 차원에서 입사할 때 한 번만 딱 해 주는 일종의 보여 주기식 쇼.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렇게 문이 열리고, 군기가 바짝 든 상태로 들어오는 10여 명의 신입 사원들.

"반갑습니다. 한지혁입니다."

신입 사원들이 부동자세로 외쳤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렇게 영혼 없이 대답을 해 준 다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던져 준다.

"그럼 이 근처 사시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하하. 역시 회사는 가까운 게 최고죠. 저도 회사 다녀 봐서 압니다."

그렇게 적당히 대화를 하고 넘기려는 순간.

"음?"

맨 끝에 있는 한 신입 사원이 눈에 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신입.

나는 김덕배가 건네준 이력서를 보며 말했다.

"보자. 장철웅 씨네요."

그러자 장철웅이 외쳤다.

"맞습니다!"

"신입으로 들어오신 건가요?"

"비록 나이는 많지만 신입 못지않은 패기로 임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워낙 실업자가 많았던 군산이기에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대단한 거지.

그 동안 쌓아 온 경력을 모두 포기하고 경력이 아닌 신입으로 지원하는 건 보통 각오가 아니니까.

"그간 쌓아 온 경험을 세론에서 잘 발휘하길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배를 만들던 패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

배?

나는 다급히 장철웅의 이력서를 확인해 보았다.

"시대중공업 군산 조선소?"

"예! 6년 전 문 닫은 군산 조선소에서 일했었습니다!"

"요즘 조선업이 다시 활황이라지 않습니까? 아직도 문 닫은 상태인가요?"

"예? 아, 예."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군산 조선소가 재가동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러자 눈치를 보던 장철웅이 말했다.

"시와 협의해서 재가동한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저희 사이에선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쇼라고 여기는 중입니다."

"왜죠?"

"조선업이 조금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성기 수준은 아니라 확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장을 했다가 다시 또 그전 같은 불황이 닥치면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까요. 군산 조선소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거고요."

분명 수주량은 늘었지만 불황을 한번 맞아 본 조선업체들이 테이블 늘리기를 꺼려 한다는 말이네?

"한 가지 질문 더. 군산 조선소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큰 배도 만들 수 있냐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큰 배를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산 조선소에서 만들지 못하는 크기의 배는 세계의 그 어떤 조선소에서도 만들지 못한다 자부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투의 장철웅.

"완벽해!"

그래.

주문 밀려서 대기할 바에야 그냥 내 손으로 만들고 말지.

앞으로 수없이 많은 해저 채굴용 선박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차피 만들 거면 내 손으로 만들어야 싸고 좋을 것 아니야.

모르긴 몰라도 해저 채굴용 선박만 만들어도 몇 년 치 일감은 나올걸?

나는 김덕배에게 말했다.

"김 사장님! 시장님에게 연락해서 미팅 좀 잡아 주세요. 그리고 시대중공업도요!"

50화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내 요청에 모인 윤호창 시장과 시대중공업 대표이사 주영모.

"군산 조선소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윤호창 시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예. 배가 필요해서 직접 만드려고요. 아시죠? 지금 세론 개발에서 해저 광산 채굴 중인 거. 근데 배가 없어서 더 채굴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라서요."

"그거 정말 잘됐군요!"

세계 조선업체 랭킹 1위에 빛나는 시대중공업.

그런 시대중공업은 한국 각지에 여러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었고, 군산 조선소는 그런 시대중공업의 주력 조선소들 중 하나이자 KM 자동차 공장과 더불어 군산시를 지탱하던 양대 산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군산 조선소는 6년 전 조선업의 불황으로 인해 문을 닫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세론이 조선소의 구원투수가 될지도 모른다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때 조용히 있던 주영모가 말했다.

"조선업은 돈이 있다고 해서 금방 뛰어들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분야가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다 그러면서 배우는 것 아니겠어요?

군산 조선소를 인수하고 실직했던 조선업계 사람들을 고용하면 되잖아.

물론 시행착오야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지, 뭐.

"게다가 지금 저희 시대중공업은 군산 조선소의 내년 재가동을 목표로 준비 중인 상황이라 인수 제안은 좀 그렇군요."

"진짜 재가동되는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노후된 장비 보수에만 천억 원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진짜 재가동된다고?

이건 장철웅 이야기랑 좀 다르잖아.

조선업체들이 테이블 늘리길 꺼려 한다면서.

그때 윤호창이 끼어들며 말했다.

"정확히 말해서 완전 재가동은 아니고 40퍼센트지만요."

"40퍼센트?"

그러자 주영모가 윤호창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어찌 됐든 재가동은 재가동이지 않습니까."

장철웅의 말은 반만 맞았다.

테이블 늘리기를 꺼려 하는 건 사실이지만, 손님이 많이 늘어나니 은근슬쩍 몇 개 정도 더 추가하려는 시대중공업.

그때 윤호창이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40퍼센트 재가동도 어디까지나 계획이지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이럴 때 세론이 나서서 딱 인수해 주면 완벽하겠네요!"

군산시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완전히 내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윤호창.

그 모습이 불편했는지 주영모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재가동은 할 겁니다. 그 규모가 아직 미정일 뿐인 거지."

흐음.

혹시 몸값 올려 받으려고 이러는 건가?

"어차피 40퍼센트 재가동한다 해도 결국 60퍼센트는 논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거 내버려 둬 봤자 유지 보수도 안 돼서 계속 노후화만 될 건데, 시대중공업 입장에서도 손해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군산 조선소는 무려 12년 전에 1조 2천억을 투자해 만든 시대중공업의 자산입니다. 이걸 갑자기 이렇게 매각할 수는 없습니다."

12년 전 1조 2천이면 많이 투자하기는 했네.

"좋습니다. 40퍼센트 재가동까지는 인정. 그럼 나머지 60퍼센트라도 파세요."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죠."

지금 조선소 인수 비용이 문제야?

해저 바닥에 깔려 있는 광물들이 내 손을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건져 올려야지!

그까짓 돈? 배만 넉넉하게 만들 수 있다면 순식간에 회수할 수 있다.

인건비랑 유지 보수비 그리고 정부에게 퍼센트로 주는 대여비까지 다 빼도 배 한 척당 한 달에 2백억이 넘게 남는다.

그럼 1년이면 2천4백억이니까 배 10척이면 2조 4천억, 100척이면 24조 원이라고!

이건 못 참지.

"그냥 간단하게 갑시다. 얼마면 파실 겁니까?"

조금 바가지 써도 이번에는 참아 준다.

급한 건 나니까.

그런데 한참을 고민하던 주영모가 말했다.

"···역시 매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지금 조선업이 부활하는 상황에서 군산 조선소를 매각하는 건 미래의 가치를 파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비상용 테이블을 남겨 두시겠다?

이러면 곤란한데.

"한 회장님도 그러지 마시고 그냥 저희한테 의뢰를 하시죠, 잘 만들어 드릴 테니."

"2년 걸린다던데요."

"주문이 좀 밀려 있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전부 재가동하면 되지 않습니까."

"섣불리 전부 재가동했다간 불황에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적당히 주문량을 밀려 놓아야 안심이라 이거지?

"후우. 이거 문제네."

그렇다고 중국에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매각이 힘들다면 임대."

"임대요?"

"60퍼센트 논다면서요. 그걸 세론에서 임대하겠습니다. 놀리는 것보다야 그게 낫잖아요."

"임대라······."

"계약 기간은 일단 2년 잡고 양측 협의하에 조금씩 조금씩 기간을 늘리는 거죠. 그러다 시대중공업에서 테이블 부족하다고 하면 빼 주고."

"테이블?"

"아. 실수, 실수. 나 혼자 생각한다는 게. 아무튼 임대는 괜찮지 않습니까?"

이런 식이라면 서로 윈윈이잖아?

내 말에 주영모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임대라."

"어차피 사람 손 안 타면 기계도 녹스는 법이잖아요. 우리가 유지 보수도 할 테니 얼마나 좋아, 임대료도 받고. 대신 해저 채굴용 선박 설계는 시대중공업에서 좀 해 주세요. 건설 노하우도 좀 공유해 주시고. 물론 이것들도 돈은 지불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이 현실성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경력자를 뽑는다 해도 배처럼 큰 물건을 처음 만들어 보는 세론에서 하자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임대 형식으로 빌려서 시대중공업의 도움을 받는 거다.

그렇게 실력과 노하우를 쌓은 다음 적당한 시점에 세론만의 조선소 하나 만들지, 뭐.

"임원들과 회의를 해 봐야겠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임대료 넉넉하게 드릴 테니까 잘 좀 설득해 주세요."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윤호창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드디어 군산 조선소가 풀가동되는 겁니까? 군산 시민들이 좋아할 겁니다."

"음? 아, 직원들 채용. 물론 채용은 할 겁니다. 근데 기대하시는 만큼은 아닐걸요?"

"예?"

나는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론 하면 뭐죠?"

"···스켈레톤?"

"정답."

"설마 스켈레톤을 인부로 써먹을 생각이십니까?"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24시간 미친 듯이 굴릴 건데요."

다른 업종이야 일자리 문제가 있어 무인 조종 같은 방식으로 도입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세론에서 쓸 배를 만드는 거니 상관없잖아?

"듣자 하니 건설이랑 조선업이랑 비슷한 점이 많더라고요? 조공이 허드렛일하고 사수가 중요한 일 하고. 거기에 노동집약형산업이라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던데요."

그러자 주영모가 발끈하며 말했다.

"노동집약형이라니요! LNG선처럼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배는 아무 조선업체에서나 만들 수 있는 게······."

나는 흥분한 주영모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에헤이. 진정하세요. 제가 말한 건 그런 것 말고 벌크선 같은 걸 말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잘 뜨고 잘 싣기만 하면 되는 배들.

애초에 말이 좋아 해저 채굴용 선박이지, 사실상 그냥 크레인이랑 광케이블 연결 기능이 장착된 상선이나 다름없잖아.

"제가 뭐 LNG선이나 이런 걸 만들겠어요? 그런 것 말고 벌크선 같은 건 노동집약형 맞잖아요."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주영모가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그래서 벌크선 물량을 전부 중국이 수주해 갔죠."

현재 한국 조선업이 부활한 건 LNG선같이 고부가가치에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선박 수주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중국도 이쪽에 진출하여 LNG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하자가 너무 많아 한국 조선업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건 유명한 일화지.

하지만 벌크선 같은 건 말 그대로 배의 기본 기능에만 충실하면 되기에 현재 세계 조선업계는 노동집약형이자 기술 필요성이 덜한 벌크선 물량은 중국이 그리고 LNG선같이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선박은 한국이, 이렇게 양분된 상황.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딱 중국과 같은 포지션의 벌크선들이었다.

"그럼 용접이나 도장 뭐 이런 거야 사람이 해야겠지만, 단순 허드렛일은 스켈레톤 시키면 되겠네요. 듣자 하니 조선소 알바도 많이 구한다던데, 그런 비숙련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켈레톤도 할 수 있거든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파츠들이야 크레인을 쓰겠지만, 그런 것 말고 배관 연결해서 조이는 것 같은, 단순하지만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한 부분은 스켈레톤을 시키면 그만이다.

아무려면 작은 전자 제품 조립하고 신발이랑 옷 재봉하는 스켈레톤이 그것 하나 못 하겠어?

물론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것과 도면을 보고 그에 맞춰 일을 하는 건 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 걸 하라고 만든 게 바로 세론 교육 연구 센터 아닌가.

드디어 그간 열심히 알고리즘 공부를 해 온 덕후들을 활용할 절호의 기회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세요, 한두 달에 배가 한 척씩 뽑혀 나오는 기적을 보여 드릴 테니."

*

정식으로 임대계약을 한 후 노후된 장비 보수 공사까지 마치며 새 단장을 한 군산 조선소.

그 조선소에 그간 실직하여 일자리를 잃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6년 만이네."

"그러게."

그들 모두 군산 조선소에서 일을 하던 전 직원들.

"이제는 시대중공업이 아니라 세론 조선 소속이지만."

그렇게 감회에 젖어 있던 사람들.

그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자. 다들 주목해 주세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저, 저게 뭐야."

그 사람은 바로 세론 그룹의 회장인 한지혁.

그런데 그 뒤로 콘솔을 몸에 걸치고 있는 사람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켈레톤들이 줄지어 따라온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모두 사수입니다. 그리고 여기 뒤에 있는 스켈레톤들이 조공이고요."

"조공이 스켈레톤이라고?"

"사람이 아니라?"

한지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은 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스켈레톤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숙달하시는 겁니다. 백상호 센터장님?"

그러자 콘솔을 장착한 백상호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스켈레톤 조공 활용 방법을 알려 드릴 백상호 센터장입니다."

"참고로 백상호 센터장은 스켈레톤 조종에 있어서 저 다음가는 최고의 기술자입니다. 그러니 백 센터장이 하는 말만 잘 듣고 따라 하시면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그때 백상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이거 알고리즘 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다 살다 배 설계 도면을 보고 공부할 줄은 몰랐죠."

"나도."

백상호가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조종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선······."

*

철판 양쪽에 찍찍이를 붙여 위치를 표시한 용접공이 말했다.

"스켈."

그러자 조공으로 따라붙은 스켈레톤의 눈이 빛난다.

"찍찍이 잡아."

그러자 다가와 철판 양쪽에 붙은 찍찍이에 손을 올리는 스켈레톤.

"조금 더 왼쪽으··· 아니지. 말로 하지 말랬지."

용접공이 철판을 잡으며 말했다.

"스켈, 움직인다."

그러곤 철판을 움직이자 스켈레톤도 찍찍이에 손을 올린 채 움직인다.

그러다 원하는 각도가 나오자 용접공이 말했다.

"스켈, 고정."

그러자 다시 눈을 빛내며 멈춰 선 스켈레톤.

용접공이 철판을 흔들어 보았지만 얼마나 단단히 잡고 있는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좋아, 그렇게 가만히 있어."

그렇게 본격적으로 용접을 시작한 용접공.

"···은근히 편한데."

용접할 철판을 제대로 받치고 있는 게 중요한 용접공 입장에서, 약간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충분히 효율적으로 조공 일을 하는 스켈레톤.

비록 사람처럼 알아서 듣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효율만 놓고 봤을 때 스켈레톤 조공도 결코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그때 철판과 배관을 한가득 실은 스켈레톤들이 한 남자의 뒤를 따라 걸어온다.

그 남자는 바로 백상호.

백상호가 뼈로 만들어진 콘솔을 투닥투닥 조작하자 스켈레톤들이 철판과 배관을 내려놓는다.

그러곤 갑자기 빨간색 실을 꺼내 길게 늘어놓은 다음 테이프로 고정하고는 콘솔을 빠른 속도로 두들기며 말했다.

"빨간색 실 따라서 3호 배관 연결··· 오케이."

그러자 따라온 스켈레톤들의 눈이 번쩍이더니 빨간색 실을 따라서 배관을 놓고는 가져온 멍키스패너로 너트를 조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백상호가 따가운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어우, 더워.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그 모습을 보고 용접을 마친 용접공이 다가와 말했다.

"고생하십니다, 센터장님."

"다들 고생하는 거죠, 뭐."

용접공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계속 이렇게 일을 반복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앞으로 배를 무지막지하게 찍어 낼 거라지 않습니까. 그럼 계속 이렇게 일하셔야 될 텐데요."

"아아. 그건 괜찮습니다. 저는 계속 여기에만 있지는 않을 거라서요."

"···예?"

"지금 빨간 실 묶어서 작업 위치 정해 주는 것도 다 저장 중이라서요. 어차피 당분간 똑같은 설계의 배만 주구장창 찍어 낼 거라 그때는 저장해 둔 것들 불러오기만 하면 돼요.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배나 전자 제품이나 규모만 다르지 똑같은 걸 찍어 내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용접공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작업만 잘 처리하면 나중에는 저장해 둔 행동을 불러오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예요. 여기 위치에 배관 작업 필요하다? 그럼 이번에 저장했던 걸 불러오면 끝."

용접공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다음에는 저 빨간 실 없이 이놈들이 알아서 배관을 연결할 거라는 겁니까?"

"정확히 말해서 알아서는 아니죠, 언제 이 작업을 해야 할지 판단하는 건 사람이니까. 대신 그때는 이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버튼 한번으로 끝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다 하자라도 발생하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백상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발생하겠죠. 이 덩치 큰 물건을 처음 만드는데 하자가 안 나오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요? 신발 하나 만들 때도 초보 프로그래머한테 맡기면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판국인데. 아마 어마어마하게 나올 겁니다, 어쩌면 만들자마자 폐선 해야 될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백상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다 일단 제대로 완성만 해 두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죠. 말 그대로 복붙이 가능해지니까."

배를 복사 붙여 넣기로 찍어 낸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상대는 한지혁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최고의 기술자 아닌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영역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용접공.

"그렇군요. 아. 그나저나 실례가 안 된다면 스켈레톤 프로그래머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죠?"

"저희 아들놈이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백상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희야 좋지요. 제가 교육도 담당하고 있어서. 실력 있으면 한번 테스트하러 오라 하세요. 아. 그리고 연봉의 경우 일반 프로그래머는 초봉 5천 시작입니다."

높긴 하지만 그냥저냥인 연봉에 용접공이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저희 교육 연구 센터 연구진 겸 강사진으로 오게 되면 연봉 앞자리가 달라지죠. 지금 제 연봉이 2억이거든요. 강사진도 전부 1억이 넘고. 아마 앞으로도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컥!"

용접공이 경악하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줍니까?"

"대신 이쪽은 공부 진짜 많이 해야 합니다. 일반 프로그래머들이 그냥 컴퓨터 만지는 수준이라면 저희는 컴퓨터에서 쓸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라서요. 저도 이거 숙달하는 데만 몇 달이나 걸렸습니다. 아무튼 관심 있으면 와 보라고 하세요. 저희는 늘 일손이 부족해서 실력 있는 사람은 언제나 환영이거든요."

용접공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들놈한테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센터 쪽으로 가라 하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용접공이 다시 일하러 돌아가자 백상호가 콘솔을 조작하며 말했다.

"빨리빨리 하자. 그래야 다음번 작업 때는 편한 곳에서 일하지."

그렇게 본격적으로 스켈레톤과 조선공들 그리고 프로그래머들이 어우러져 1호 선박 제작을 시작한 세론 조선.

그리고 이것이 배 복사 신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1화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1호 선박 제작에 돌입하며 나와 교육 센터 강사진은 실시간으로 부족한 부분을 업데이트하면서 스켈레톤의 효율을 높여 갔다.

그중 대표적인 게 색으로 사물을 구분하게 하는 방법.

"너트와 너트를 넣어야 될 위치를 색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배는 전자 제품과 다르게 크기가 워낙 커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파츠들이 들어간다.

당연히 너트 역시도 크기와 길이가 모두 제각각.

그때 한 강사가 아이디어를 낸 게 색으로 그 위치를 표시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5번 규격의 너트와 5번 규격이 들어가야 하는 위치를 같은 색으로 표시하고 다른 규격은 다른 색으로 표시하는 방법.

덕분에 그냥 색에 맞는 락카만 가져다 뿌리면 스켈레톤이 알아서 너트를 조이니 작업 난이도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래서 아예 부품 제작업체에 제작 단계에서 색을 칠해 가지고 납품해 달라 부탁했지.

강사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세론 그룹 다른 계열사에도 전부 적용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디어 마음에 들었으니 상금 천만 원 확정."

그러자 강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다른 강사들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3번째 아니야?"

"저놈 저거 아이디어가 아주 기똥차."

나는 그런 강사들을 보며 말했다.

"부러우면 여러분도 주저하지 말고 아이디어 내세요, 실패한다고 뭐라 안 하니까."

"예, 회장님."

나는 백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하자가 안 나오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하지만 하자가 나오면 전부 해체해서 다시 만드는 과정을 무한 반복 한 덕분에 하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첫 번째 배? 만들자마자 고철로 팔아도 상관없어요. 지금 중요한 건 배를 찍어 낼 수 있게 그럴듯한 알고리즘을 만드는 겁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어요. 딱 문제없이 굴러갈 정도면 됩니다."

적당한 품질에 대량 생산은 세론의 기본 방침이니까.

이것도 다를 것 없다.

내가 무슨 세계 제일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서 천상계급 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싸게 그리고 많이.

어차피 앞으로 해저 채굴을 늘리려면 배가 왕창 필요하다고.

그래서 애초에 시대중공업에 설계도를 의뢰할 때 적당한 사이즈로 부탁했지.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딱 대량 생산에 용이하며 동시에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저 돈 많습니다. 조선소 인수하려고 돈을 빼 뒀는데 임대료만 나간 덕에 돈이 넘쳐 나거든요. 그러니 그까짓 배 하나 통으로 날려도 상관없으니까 알고리즘에만 신경 써 주세요."

나는 백상호와 강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번 프로젝트는 여러분이 센터로 발령받고 처음으로 맡은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고요."

그동안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센터에 들러 이들이 짜 둔 알고리즘을 구현해 주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아 온 강사진.

가끔 말도 안 되는 알고리즘을 짜 와 망가질 걸 알면서도 구현해 주며 이놈들을 언제 키워서 써먹지라고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 과정을 지나 드디어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드디어 수습딱지를 떼고 준네크로맨서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만약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여러분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 공로를 생각해 큰 폭으로 연봉을 올려 드릴 생각입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내 일을 대폭 덜어 주었으니 보상을 해 줘야지.

사실 이들의 연봉?

안 올려 줘도 그만이다.

어차피 이들이 배우고 공부한 알고리즘은 오직 세론에서만 활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들에게 제대로 대우를 해 줘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센터 강사 자리를 원하며 더 노력할 것 아닌가.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은 준네크로맨서를 양산해서 나 대신 일 시키지.

"아마 상상하시는 그 이상으로 올라갈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내 말에 강사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오! 연봉 인상!"

"반드시 완벽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때 한 강사가 말했다.

"평생 세론에 뼈를 묻겠습니다!"

"어? 그럼 죽어서도 스켈레톤이 돼 가지고 일하겠다는 소리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강사들이 환호하며 투닥거리던 그때 한 강사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회장님,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이게 지금 각자 나뉘어서 자기 파트 작업 내용만 저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걸 통합, 운용하는 거죠. 구역을 나눠서, 사람 직원의 작업 공정이 바닥까지면 바닥 배관 작업을 통합해서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아무리 스켈레톤을 동원해도 일정 부분 사람의 손이 필요한 것이 사실.

그러니 사람이 해야 할 작업이 10퍼센트 완료되었으면 그 10퍼센트까지 할 수 있는 작업들을 선정해 통합해서 저장해 두자는 거였다.

"괜찮네요. 좋은 아이디어. 그건 여러분이 머리 써서 잘 통합해 봐요. 다 정리되면 저한테 연락해 주시고. 당연히 성공하면 상금 지급됩니다."

"나이스!"

그렇게 격려의 돈 잔치를 한 후 밖으로 나간 나는 말했다.

"빨리 완성돼라."

일단 발동이 걸리면 그때부터는 무한 제작에 돌입한다.

현재 세론 조선이 시대중공업으로부터 빌린 도크는 6개.

지금이야 알고리즘 작업 때문에 1개 도크만 돌리고 있지만, 이 알고리즘이 얼추 완성되면 그때부터는 6개 모두 24시간 풀로 돌리며 배를 찍어 내는 거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물량이야말로 네크로맨서의 덕목 아니겠어?"

*

도크를 24시간 미친 듯이 굴린 지 대략 3개월 반.

드디어 첫 배가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기존 조선소가 제작 기간으로 6개월을 잡았으니 산술적으로 24시간을 굴리는 세론 조선은 2개월이면 완성돼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알고리즘을 완성하느라 했던 작업도 해체해서 다시 만드는 걸 무한 반복 한 탓에 3개월 반이나 걸린 첫 배.

"이제 내부 인테리어만 남은 상황 입니다."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다가 졸지에 세론 조선이 세워지며 경력직 부장으로 이동한 장철웅.

나는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가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하세요."

"그동안 끝없는 하자 보수를 했지만, 엉망진창입니다. 이미 손쓸 수 없는 곳의 하자도 넘쳐 나고, 무엇보다 이런 식이면 저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하자도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런 건 직접 운용해 보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고요."

"센터에 보고는 했죠?"

"했습니다."

"그럼 됐어요. 그나저나 이거 바다에 뜨긴 뜹니까?"

"그건 문제없습니다. 다만 방금도 말씀드렸듯 숨겨진 하자가 많을 걸로 추측되기에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는··· 죄송합니다. 처음으로 맡겨 주신 프로젝트인데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를 하는 장철웅.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뜨긴 뜬다는 거잖아요. 실력들 좋으시네."

"예? 배가 물에 뜨는 건 당연한 건데요."

"나는 물에 뜨지 못할 것까지 가정하고 진행을 지시한 거라서요. 그 하자라는 거, 설마 배가 막 갑자기 침몰하고 그럴 정도는 아니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 정도의 치명적인 하자도 못 잡아낼 만큼 실력 없는 분들이 아닙니다. 공백기가 길어서 그렇지 모두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던 분들 아닙니까."

"좋다, 좋아. 그럼 바로 6개 도크 풀가동하세요."

"예?!"

장철웅이 경악하며 말했다.

"회, 회장님, 그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왜요."

"배라는 건 워낙 고가이기에 시운전을 하며 하자를 잡아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시운전을 해도 모든 하자를 잡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도크에 들어가 이미 제작을 시작하면 나중에 하자를 발견해도 수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반드시 생깁니다! 그러니 일단 하자를 모두 찾은 다음에······."

"그럼 만들던 건 마저 만들고 그다음엔 더 잘 만들면 되잖아요."

"아, 아니··· 그게 무슨······."

"장 부장님, 지금 오해를 하시는 게, 일반 조선업체는 그렇게 하는 게 맞죠. 배 자체가 상품이니까. 상품에 하자 나면 제조사가 곤란해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이놈들은 상품이 아니란 말이죠."

어차피 팔 게 아니라 내가 쓸 거라고.

그러니 배가 침몰하는 것만 아니면 어느 정도 하자는 그냥 감수하고 써도 그만이라는 거다.

"1번 배는 그래도 좀 불안하니까 일단 근해에서 시운전하면서 하자 잡게 하고, 6개 도크는 기존에 찾아 두었던 하자 보강하면서 만드세요."

"그러다 수정할 수 없는 하자가 또 생기면······."

"그다음 번 배들을 수정하면 되죠. 어차피 앞으로 수십 척을 만들어야 하는데, 앞의 10개 정도에서 하자 발생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요."

원래 실패해 가며 배우는 거잖아?

이렇게 계속 수정하고 또 수정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배가 나오겠지, 뭐.

나도 그렇게 스켈레톤 알고리즘을 만들면서 여기까지 온 거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을 나보다 확신하는 사람이 또 없을걸?

"직원들 왕창 고용해서 24시간 교대 근무 하게 하세요. 야간 수당 쥐여 주고 업계 최고 대우로."

시장한테는 일자리 창출 효과가 별로일 거라 이야기했는데, 막상 24시간 풀로 돌릴 생각을 하니 생각보다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

건설과는 다르게 정직원들은 52시간 근무제로 묶여 있어 무작정 오래 일하게 시킬 수가 없으니 24시간 교대 근무를 시키려면 그만큼 사람을 많이 고용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러다 회사 재정에 무리라도 가게 되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이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나 보구나. 돈 걱정 하지 마요, 나 돈 많으니까."

어차피 일단 배만 뜨면 해저 자원으로 떼돈을 벌 텐데 여기서 아낄 필요가 뭐 있어.

게다가 이미 개조가 완료된 3척의 중고 배가 채굴 작업에 추가되며 거기서 번 돈만으로도 여기 비용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단 말이지.

"자자! 잔소리는 그만하고, 6도크 풀가동합니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열심히 일만 해 줘요!"

*

그렇게 1번 배가 완성되어 시운전에 들어감과 동시에 6개 도크가 풀가동되기 시작한 세론 조선.

당연하게도 1번 배는 시운전과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문제가 속출했다.

너트 풀림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엔진 룸 구조가 잘못되어 진동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등등,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인 1번 배.

하지만 그런 1번 배의 희생 덕에 도크에서 새로 만드는 배들은 그런 하자를 모두 수정하며 만들어져 갔다.

"1번 배에서 하자가 또 나왔대!"

"또? 이번엔 어딘데?"

"선미 쪽이랑 갑판 하부."

다른 조선소 같으면 하자로 인해 위에서 질책이 내려오고 심한 하자의 경우 징계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세론 조선은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갑판 하부는 이미 늦었고, 선미 쪽은 아직 작업 전이니 수정하면 되겠네."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서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작업자들.

"그래도 많이 잡았네. 이 정도면 1번 배보다 두 배는 나아진 것 같은데?"

"두 배가 나아졌어도 솔직히 하품이잖아."

"대신 다음번엔 중품 정도는 나오겠지."

그때 한 용접공이 무전기를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스켈레톤 보내 주세요."

처음엔 스켈레톤과의 협업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던 사람들이지만, 그것도 몇 달을 함께하니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

"A13 구역 작업 모두 끝났습니다."

A13 구역에서 사람 직원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 스켈레톤 작업을 시작하라는 말.

그러자 잠시 후 A13 구역에 나타나 미리 저장된 알고리즘에 따라 일을 하기 시작한 스켈레톤들.

그사이 A13 구역을 마무리한 용접공은 자연스럽게 조공 스켈레톤을 데리고 사람 직원의 작업이 필요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한다.

그야말로 몇 달 만에 이루어진 스켈레톤과 사람의 완벽한 합작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이번엔 두 달 안에 완성되겠는데?"

1번 배에서 했던 실수를 절대 다시 반복하지 않는 스켈레톤들.

덕분에 이번 배들은 정상적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게. 이게 진짜 되는구나."

"근데 이렇게 되면 1년에 세론 조선소에서만 배를 36척씩 만들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네? 와. 36척 미쳤다."

"우리 시대중공업일 때 여기서 1년에 대충 15척 정도씩 만들지 않았었나? 그것도 10개 도크로. 그런데 지금 세론 조선은 6개로 2배가 넘게 뽑는 거네. 아. 게다가 이거 똑같은 설계로 계속 만드는 거니까 숙달되면··· 더 빨라지겠네?"

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이러다 1달에 여섯 개씩 뽑는 것 아니야?"

"에이. 설마."

"그렇지? 설마 한 달에 여섯 개씩 뽑히겠어?"

"하하."

그렇게 잠시 웃음을 터트렸던 직원들이지만 이내 웃음이 잦아든다.

"···직원 계속 늘리고 있다 그랬지?"

"어."

"스켈레톤도 그 작업 뭐시기 저장이 끝나면 지금보다 몇 배로 투입할 거라 했고."

"···어."

그간 스켈레톤 물량을 밀어붙여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해 온 세론.

그 세론의 미친 물량이라면 한 달에 여섯 척도 왠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직원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결국 침묵하던 직원이 말했다.

"생각 그만하고 그냥 일이나 하자."

"그래."

*

정확히 딱 두 달 하고 열흘.

진정한 1기 해저 채굴용 선박 6척이 완성되었다.

"이번 배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자는 많지만 1번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습니다."

"실전에서 쓸 만해요?"

"퀄리티는 여전히 좋지 못합니다."

"못 쓸 정도로?"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장철웅이 말했다.

"···솔직히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닙니다."

"오케이!"

그 정도면 됐지, 뭐!

도저히 써먹지 못할 수준이었던 1번 배와 달리 수준 미달이긴 해도 그럭저럭 사용할 수는 있는 정도의 배를 만들어 낸 세론 조선.

"바로 8번부터 13번까지 제작 들어가세요. 이번엔 평타 정도를 목표로."

이제는 그래도 제법 나를 잘 파악한 장철웅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항해사랑 조종사들 도착해 있죠?"

"그렇습니다."

하자가 많기는 하지만 1번 배와 나머지 배의 작동 구조는 거의 동일했다.

그렇기에 그동안 미리 1번 배에 태워 항해사들에게 조작법을 숙지시켜 두었고, 작업자들 역시 수중 조작 훈련을 마친 상황.

"그럼 기다릴 게 뭐 있어요! 바로 가서 광물 캐야지!"

이제 유일하게 부족한 배가 갖춰졌으니 망설일 필요가 뭐 있나.

해저 자원이 날 기다리는데.

"설마 시운전도 안 하고 그냥 보내시려는 겁니까?"

"해저 채굴장으로 가면서 하면 되죠."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이번엔 제가 따라갑니다! 문제 생기면 제가 전부 해결할게요."

대한민국에 6명뿐인 SS급 각성자가 딱 붙어서 에스코트해 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1기 배들이니 내가 특별히 에스코트해 주지, 뭐.

내 말에 장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좋았어! 항해사들이랑 조종사들한테 바로 배에 오르라고 하세요."

"예."

그렇게 장철웅에게 지시를 내린 나는 곧바로 하늘을 날아 2번 배의 수납 공간에 들어가 미리 만들어 두었던 대형 채굴용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그렇게 2번부터 7번까지 모든 배에 스켈레톤을 소환하고 다시 하늘로 떠오른 나는 배를 향해 뛰어오는 항해사와 조종사들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진짜 시작이다."

해저 자원이란 해저 자원은 모조리 먹어 치워 주지.

52화

"흠흠."

마이크를 테스트한 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세론 그룹은 환경 파괴를 중단하라!"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외친다.

"중단하라! 중단하라!"

"해저 자원 개발로 해저 생태계를 파괴하는 세론 그룹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그렇게 구호를 외친 남자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세론 그룹은 현재 군산 조선소를 임대하여 어마어마한 속도로 배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 배들을 만드는 목적이 뭡니까? 결국 해양 광물을 개발해 돈을 벌기 위함이죠. 그렇게 생산된 배가 고작 세론 조선이 첫 배를 만든 지 반년 만에 벌써 18척을 넘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도크에선 실시간으로 배가 계속해서 건조되고 있고요!"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이 많은 배들이 태평양으로 나가 광물을 채취하면 채취할수록 해양 생태계는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될 게 분명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구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맞습니다!"

"세론 그룹은 각성하라!"

그때 누군가 세론 본사에 들어가려 하자 남자가 막아서며 말했다.

"세론 직원이십니까?"

"예? 아. 예."

"세론 그룹의 환경 파괴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환경 파괴요? 해저 자원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해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생물들이 스켈레톤으로 인해 서식지를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옳은 행위일까요?"

직원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환경 파괴 될까 봐 곡괭이로 광물을 캐고 선별까지 해서 올리고 있는데 그게 무슨 환경 파굅니까?"

"환경 파괴가 아니라고요? 그 어두운 해저에서 라이트를 비추고 스켈레톤들이 무더기로 돌아다니는데 환경 파괴가 안 된단 말입니까?"

"아니, 1번 배 빼면 중고까지 합쳐서 22개니까 스켈레톤 330개밖에 안 되는데 그게 무슨······."

"지금이야 330개지만 계속해서 늘어날 것 아닙니까!"

남자의 말에 직원이 남자를 지나쳐 가며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100척을 만들어도 고작 1,500개인데. 그 넓은 태평양에 풀어놓으면 티도 안 나겠구만."

그러자 남자가 직원의 손목을 낚아채며 말했다.

"수가 적으면 환경 파괴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안일한 태도로 지구 환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직원이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니, 물론 파괴가 아예 안 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런 식이면 플라스틱······."

그러자 남자가 바로 직원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파괴된다고 지금 인정하신 겁니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스켈레톤보다 더 심각한 일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그쪽을 먼저 신경······."

하지만 그런 직원의 말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보십시오! 직원도 환경 파괴임을 인지하고 있지만 세론 그룹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부터 우리 그린프로텍트는 세론 그룹이 환경 파괴를 중단할 때까지 무기한 시위를 이어 가겠습니다!"

그 말에 그린프로텍트 소속 사람들이 외쳤다.

"와!"

그런데 그때.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 노인이 말했다.

"잠깐만. 그럼 세론 그룹보고 배 만드는 걸 중단하라는 말이여?"

노인의 호응에 신이 난 남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배 생산을 중단하······!"

그런데 갑자기 노인이 남자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이 호랑말코 같은 놈의 자슥이, 뭐? 배를 그만 만들라고?! 우리 아들이 얼마나 고생해서 조선소로 복귀했는디, 또 그 지랄 같은 걸 겪게 허라고!?"

"자, 잠시만."

"사람들, 보소! 이놈들이 세론 그룹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 같은디, 가만 내버려 두면 쓰겄소!"

그러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말했다.

"뭐? 세론을 망하게 만들어? 미쳤어? 나 지금 세론 교육 센터에서 교육 중인데?"

"우리 조카들 전부 세론에 취업했는데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러다 한 회장님이 질려서 군산 떠나면 어쩌려고!"

시민들이 달려들어 남자를 비롯한 그린프로텍트 사람들을 끌어내며 말했다.

"저리 꺼져, 이 외지인 놈들아!"

"자, 잠시만요! 우리는 환경 보호를······!"

"세론 그룹에 문제 생기면 우리가 뒤질 판국인데 환경 보호는 개뿔 같은 환경 보호야! 당장 꺼져!"

*

"오오. 깔끔하게 처리하네."

회장실에서 환경 단체 시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민들이 난입하더니 환경 단체 회원들을 모조리 몰아내 버린다.

대충 들어 보니 가족이나 본인이 모두 세론 그룹과 관련된 사람들.

그도 그럴 게, 조선소가 가동되며 새로 뽑은 직원의 수만 무려 2천에 달했으니까.

군산 조선소가 문 닫으며 생긴 실업자가 5천 명이라는데, 교대 근무 때문에 직원을 무더기로 뽑으며 그중 40퍼센트를 세론에서 소화해 낸 상황.

거기에 영업을 중단했던 군산 조선소의 각종 협력사들까지 부활하며 세론 조선으로 인한 고용 창출 효과가 군산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몰빵이 정답이었어."

이제 그 누가 감히 군산에서 세론을 욕하겠나.

그때 회장실 문이 열리며 김덕배가 들어와 말했다.

"회장님, 운반선이 잠시 후 도착한답니다."

처음엔 그저 신발로 생긴 연이었지만 이제는 사실상 내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는 김덕배이기에, 신발뿐만 아니라 사업의 중요 현안은 대부분 김덕배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많이 싣고 왔대요?"

"한계까지 실었다고 합니다."

"크."

해저 채굴용 선박의 수가 중고 배 4개를 포함해 모두 20개로 늘어났다.

덕분에 2척밖에 없던 운반선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해저 채굴 개조용 중고 배를 알아볼 때 크기가 작아서 매입하지 않았던 작은 상선까지 매입해 가며 운반선 규모를 늘린 세론.

그렇게 늘린 운반선들은 한번 한국에 도착할 때마다 세론에 수백억의 돈을 안겨 주는 복덩이들이었다.

"돈이 넘쳐나는구나."

22척의 배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순수익만 무려 4천4백억 원.

지금도 여전히 성장 중인 세론 그룹의 다른 계열사 순이익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조선소에 그렇게 돈을 쏟아붓고도 돈이 남아돌 지경.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

"배는 잘 만들어지고 있죠?"

1번 배는 애초에 실험작이고, 2번과 7번까지의 1기 선박들은 쓸 만하긴 했지만 상당한 하자가 존재했다.

특히 계속해서 운용할수록 예상치 못한 하자들이 지금까지도 하나씩 툭툭 튀어나오는 수준.

하지만 1기의 문제를 보강한 2기는 상태가 상당히 괜찮아졌고, 3기의 경우엔 장철웅이 이 정도면 평균 수준은 된다 인정했을 정도로 나쁘지 않은 퀄리티를 자랑했다.

당연하게도 현재 만들고 있는 4기는 더욱더 하자를 보완해서 만들고 있으니, 이제 세론 조선은 무지성으로 배를 찍어 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

"예. 현재 공정률 20퍼센트로 3기보다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장철웅 부장 예상에 의하면 대략 일주일 정도 시간을 당길 수 있을 거라 합니다. 대략 한 달 반이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아무려면 똑같은 배를 하자 보수만해 가며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안 빨라지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아. 그리고 최근 구리와 아연의 가격 상승폭이 둔화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희 때문인 것 같은데요."

최근 공급 부족 문제로 구리 같은 금속류는 물론 밀이나 대두 같은 농작물까지 대부분의 원자재가 계속해서 연일 최고가를 갱신하며 상승하던 중이었다.

원래 원자재라는 게 생산량을 늘리고 싶다 해서 단기간에 확확 늘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전문가들 대부분 당분간 상승세가 계속될 거라 전망했는데, 유독 구리와 아연만 갑자기 상승폭이 둔화된 상황.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세론 개발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캐 왔나요?"

"교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생산량이라면 지상의 광산에서 광부 2~3만 명이 동원돼야 할 수준이라고요."

먼 옛날 화산이 분출되며 그 용암에 녹아 있던 무겁고 귀한 광물들이 바닷물에 급속도로 식으며 그대로 굳어 퇴적된 해저광물.

그렇기에 해저광물은 일반 광산 대비 순도가 거의 100배에 달했고, 거기에 더해 키만 수 미터에 달하는 대형 채굴용 스켈레톤이 더해지자 말도 안 되는 효율이 나온다.

"구리만 해도 이미 전 세계 생산량의 2.5퍼센트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와. 미쳤네."

고작 스켈레톤 330으로 세계 생산량의 2.5퍼센트라니.

"이러다 가격이 오히려 떨어지겠는데요."

"아마 배를 계속 늘리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을 겁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어차피 너무 많이 올랐으니 조금 떨어지는 정도야 상관없겠죠."

가격이 갑자기 10분의 1 토막 나는 수준만 아니라면 지금 내 입장에선 무조건 생산량을 늘리는 게 이득이니까.

"아. 그리고 제련소 쪽에서 아마 5기나 6기쯤이면 해외 광물 수입을 완전히 중단해도 될 걸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오오!"

한국의 제련소는 그동안 해외 광산에서 채굴된 광물을 수입해 와 순도 99.9퍼센트 수준으로 제련하여 시장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해 왔다.

그런데 그때 등장한 게 세론 개발의 해저광물.

수입해 와야 하기에 물류비가 드는 해외 광물들과 다르게 이미 운반선으로 한국에 도착한 상태에서 파는 데다, 순도도 높아 제련 비용이 절약되는 등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해외 광물을 압도하니 제련소들이 탐을 낼 수밖에.

당연히 제련소들은 세론 개발과 거래하며 해저광물로 해외 광물을 대체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수준을 넘어 5기나 6기쯤 되면 해외 광물 전부를 해저광물로 대체하게 된다는 거다.

즉, 구리와 아연에 한해서 완전한 자급자족이 된다는 말.

"이야. 한국이 원자재 자급자족을 다 하게 되네."

이건 전부 내 덕이잖아?

물론 나도 돈 벌려고 하는 짓이긴 하지만.

"어? 그런데 잠깐만요. 그럼 국내에서 더 이상 해저광물 소화를 못 한다는 소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확장 계획은 없대요?"

"있긴 한데, 계획 수립부터 완공까지 최소 2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해저광물만으로 포화되어 버린 한국 제련소들.

당연하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수출 각이구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 해저광물.

그렇다면 해외 제련소에 팔아야지.

물로 내가 제련소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지만, 기존 제련소가 단순 확장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 것처럼 제련소는 워낙 덩치가 크기에 아무리 나라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해저 자원을 캐서 파는 데 집중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지.

"좋아요. 스켈레톤 더 투입해서 배 빨리 만들라 하세요."

무조건 많이 그리고 빨리.

"알겠습니다."

살다 살다 한국이 자원을 수출하는 날도 오네.

이게 전부 내 덕분이라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격 좀 싸게 줘도 되니까 무조건 많이 캐서 많이 팝시다!"

*

세론 특유의 스켈레톤 물량 공세로 순식간에 배를 찍어 낸 세론 조선.

그렇게 5기에 이르러선 똑같은 설계에 완전히 숙달된 직원들과 스켈레톤의 물량 공세가 시너지 효과를 내며 무려 한달 만에 배를 찍어 내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5기를 넘고 6기, 7기로 가며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세론.

"일본 제련소에서 납품 받겠다고 합니다."

시세보다 5퍼센트 정도 저렴한 가격에 넘겨준다고 하자 한국처럼 자원이 없기는 매한가지인 일본 제련소들 역시 너도나도 환영하며 거래를 튼다.

"굿굿."

어차피 나야 물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다 파는 수준이니 까짓것 5퍼센트 정도는 하나도 안 아깝단 말이지.

물론 그 여파로 최근 구리와 아연의 가격 상승세가 둔화되는 걸 넘어 오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보합세를 유지하기 시작했지만.

아마 몇 기만 더 늘려도 국제가격이 아예 차츰차츰 떨어질 것 같지만, 그거야 뭐 이미 예상한 거잖아?

"아. 그리고 일본 제련소를 통해서 연락을 받았는데, 일본 정부 역시 해저 채굴권을 가진 지역이 있다며 세론 개발과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우리 쪽 채굴하는 것도 배가 없어서 못 하는 판국인데, 다른 나라랑 이걸 나눠야 할 이유가 없지.

물론 무작정 거절하지는 않는다.

"합작회사는 거절. 대신 일본에서 배 구해 주고 세론 개발 일본 법인이 자체적으로 캐서 파는 건 오케이."

한마디로 배랑 개발권을 주면 우리가 전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일본 법인인 만큼 형식적으로 일본 회사기는 하지만, 결국 그 광물을 쥐고 흔드는 건 세론 본사니까.

이 정도라면 해 줄 만하잖아?

당연히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득될 게 거의 없으니 거절하겠지만.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한 그때.

회사 내선 전화로 연락이 온다.

"예."

-회장님, 회장님을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화련광업주식회사라는 중국 회사 사람이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광업주식회사?

광물을 사 가는 제련소가 아니라 광물을 캐는 경쟁업체의 등장이라.

뭔가 느낌이 팍 오는데?

뻔한 내용일 것 같긴 한데, 만나나 보지, 뭐.

나 중국에서 S급 몬스터 사체 매입 거절한 거 아직 안 잊었다고.

"들어오라 하세요."

*

"반갑습니다, 회장님. 김태령 경리라고 합니다."

"경리요?"

"참고로 중국에서 경리는 한국의 이사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그나저나 한국말 잘하시네요."

김태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조선족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세론 개발의 해저 채굴이 워낙 인상 깊어 인사도 드릴 겸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뭐, 잘나가고 있긴 하죠."

"참고로 저희 화령광업은 하북성에서 광산업을 하고 있는 중국의 2위 업체입니다. 주력은 아연으로, 한 해 채굴량만 300만 톤에 이르죠."

"300만?"

그 정도면 거의 전 세계 아연 채굴량의 20퍼센트에 달하는 수준.

이제 겨우 5퍼센트를 간신히 넘긴 세론 개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한 세론 개발이 더욱 대단하지요."

그나저나 의외로 되게 저자세네.

"세론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해저 자원을 채굴하고 있습니다. 그 양이 워낙 엄청나기에 모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시기에 구리와 아연 이 두 개만 상승을 멈추고 오히려 하락하기 일보 직전이 되었고요."

오호.

이제 본론인가.

"당연히 저희 화령광업도 가격 상승을 기대했다가 공급 물량 증가로 상승이 멈춰 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건 저희뿐만 아니라 세계에 있는 모든 아연 채굴 기업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이기도 하고. 즉, 모두가 불행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김태령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세계 아연 연맹에 가입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게 뭔데.

세상에 그런 조합이 있었어?

"물론 비공식 조합이긴 하지만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아연 채굴 기업은 모두 속해 있다 보시면 됩니다."

비공식이라.

"하는 일이 뭔데요."

김태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연 채굴 기업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만드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뭐, 간단하게 말해서 적당히 시장 상황에 따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조율하는 거죠. 그리고 세론 개발 역시 여기에 낄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판단되어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겁니다."

의견을 주고받아 조율한다?

"그건 카르텔 아닙니까?"

세계 아연 연맹이란 거창한 용어의 비공식 모임은 바로 카르텔이었다.

생산량을 조절해 가격을 담합하여 이득을 취하는 모임.

"꼭 나쁘게 보실 일만은 아닙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자원으로 이득을 취하는 게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해저에는 널린 게 자원인데요."

"···물론 세론 개발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무분별한 생산량 증가는 필연적으로 가격 하락을 야기하고, 그로 인해 모두가 공멸하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세론 역시도 해저 채굴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할 것 아닙니까. 아연 가격이 떨어져 그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정말 나 걱정해 주는 것 맞아?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뭐, 들어간다 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각 기업들의 상황에 맞춰 적당한 물량을 나누어 가지는 겁니다."

"아하. 자체 쿼터제를 실시한다?"

"물론 한창 성장 중인 세론이기에 무슨 심정이실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상생을 위해선 서로 양보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저희 아연 연맹에서 세론에 상당한 양보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태령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맹 소속 회사들 모두 자체적으로 최대 7퍼센트씩 생산량을 감축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론에게 그 7퍼센트를 드리지요."

"세계 생산량 기준?"

"당연합니다."

"오호?"

제법 통 크게 준비해 왔는데?

이제 겨우 5퍼센트인데 무려 7퍼센트까지 생산량을 늘리도록 배려해 준다니.

이거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7퍼센트로 만족할 생각이 없는데.

"그 쿼터 기준이면 두어 달 안에 도달할 것 같은데."

"대신 모든 아연 채굴 회사들과 동지가 될 수 있지요."

"동지돼서 가격 담합이나 하자고요?"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관심 없으니 가세요."

김태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는 무슨. 고작 7퍼센트 먹을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요. 그 뭐냐. 화령이 20퍼센트라고요? 그걸 다 주면 고려해 보고."

"···자만심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세론 개발이라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예, 예. 가 보세요."

그러곤 밖으로 나간 김태령.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조용히 있을 리가 없지."

카르텔로 뭉쳐서 잘 해 먹고 있었는데 갑툭튀 한 세론 개발 때문에 가격이 요동치는 상황.

짜증 나겠지.

그래서 회유를 시도해 본 거고.

근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한번 해보자고, 누가 이기는지."

53화

후회할 거라며 엄포를 놓고 갔던 김태령.

하지만 그런 엄포와 다르게 큰 사건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그렇기에 나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배만 계속 늘리며 생산량을 증가해 갔지.

그러던 어느 날.

"관세요?"

김덕배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중국 정부가 자국의 채굴 기업 보호를 이유로 한국의 아연과 구리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화령광업이 세계 아연 채굴 시장의 2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것처럼 중국은 세계 제1의 아연 채굴국이자, 동시에 제련국이었다.

그렇기에 최근 생산량이 늘어나며 중국 제련소 쪽에서도 세론 개발의 아연에 관심을 보이던 중이었는데, 아예 중국 정부가 나서며 한국산 구리와 아연에 관세를 부과해 버린 거다.

"얼마나 부과했습니까?"

"25퍼센트입니다."

"와. 이 새끼들 미쳤구나?"

고작 5퍼센트 할인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25퍼센트 관세가 부과되면 당연히 중국 제련소들 입장에서 세론 개발의 아연과 구리를 매입할 이유가 없어진다.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하는 순간 세금으로 25퍼센트가 더 붙는다는 이야기니까.

"역시 그놈들 뒤에 중국 정부가 있는 게 확실하네요."

중국의 땅은 전부 국가 소유이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회사에 채굴권을 몰아줄 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대충 중국 정부와 커넥션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나오다니.

"한국이랑 중국 FTA 협정 되어 있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마음대로 관세 막 올려도 되는 겁니까?"

서로의 관세를 철폐하자 합의하는 FTA 협정.

"제가 문의를 해 보니 몇 년 전 FTA 협정을 할 당시 광물을 수출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 협정 대상에 아예 포함도 안 해 두었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럴 만하네."

FTA 협정은 그야말로 치열한 밀당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 같은 건 관세를 철폐하고자 하고, 불리할 것 같은 건 관세를 유지하고 싶은 게 기본 이치니까.

그렇기에 서로 하나씩 포기할 건 포기하고 가져올 건 가져오며 수개월에 걸쳐 협상을 진행하는데, 그런 중요한 협상에서 당시 기준으로 수출 가능성이 0퍼센트에 가까운 광물 따위에 협상력을 쏟았을 리가 없지.

"아무튼 그럼 손쓸 방법이 없다는 거네요?"

"당분간 중국 수출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리와 아연을 제련하고 생산하는 나라에 광물을 팔 수 없다는 건 분명 큰 손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왜 세계 각국이 원자재 수급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겠는가.

그건 원자재 하나가 요동침으로 인해서 그로 인해 파생되는 2차, 3차산업까지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번 제대로 치킨 게임 해 줍시다. 마침 그렇지 않아도 너무 비싸다며 아우성인데, 내가 싸게 공급해 주지, 뭐."

그런데 이때 내가 아연을 시세보다 싸게 공급하면 어떻게 될까.

제련소야 어차피 시세에 맞춰 사다가 가공해서 되팔 뿐이니 상관없고, 그렇게 싸게 원자재가 공급되면 제조사들도 원가가 줄어드니, 원자재 가격이 저렴해져서 손해를 보고 죽어 나가는 건 오직 채굴 기업뿐이지.

더군다나 아연과 구리는 둘 모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금속 순위 4위 안에 들 만큼 필수 원자재이기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거다.

"중국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아연 제련소가 중국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원이라곤 하나도 없는 한국조차 상당한 규모의 아연 제련소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제련소는 국가 기반 산업이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크든 작든 대부분 제련소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제련소에 저렴한 아연을 공급하면 그 제련소들의 물건을 납품 받는 회사들은 더 싸게 물건을 만들 수 있고, 이는 당연히 비싼 아연을 쓸 수밖에 없는 중국 기업의 경쟁력 악화로 이어지지.

"구리랑 아연 둘 다 20퍼센트 할인 들어갑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기강 한번 잡아 주지, 뭐.

딱 정확히 중국 관세보다 조금 더 비싸게 책정해서 이도 저도 못 하게 만들어 주지.

물론 이제 겨우 세계 점유율 6~7퍼센트에 불과한 세론 개발의 힘만으로 단단한 카르텔을 무너트리기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미래의 세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리고 기자회견도 준비해 주세요."

"무슨 내용으로 준비할까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론 개발의 향후 계획."

*

"세론 개발은 더욱 활발한 해저광산 개발을 통해 대한민국을 원자재 강국으로 만들며, 또한 세계 시장에 더 많은 광물을 공급하여 최근 급등하고 있는 원자재 가격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내 말에 기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공급량을 얼마나 추가하실 계획이십니까?"

"1년 안에 최소 70척 이상의 채굴용 선박을 만들어 지금보다 생산량을 3배로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지금의 3배?!"

그러자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 세론의 생산량이 3배로 늘면 1년 후에 구리랑 아연 공급량이 20퍼센트 가까이 오른다는 말이잖아."

"그 정도면 가격이 폭락하겠는데?"

전기 자동차가 보급되고 정보화 시대로 흐름이 변화함에 따라 핵심 금속인 구리와 아연의 소비량은 매해 증가하였지만, 공급량은 고작 1년에 2퍼센트 늘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때문에 가격이 계속해서 급등해 오던 구리와 아연.

그런데 이때 갑자기 세론이 등장해 1년 안에 생산량을 3배로 끌어올리면 무려 20퍼센트 가까이 되는 공급 폭탄이 떨어진다는 말.

당연하게도 이런 공급 폭탄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게 되지.

하지만 이건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는 당분간 생산량을 계속해서 늘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향후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던 건 굳이 내 손으로 급격한 가격 하락을 일으켜 손해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지만, 저쪽에서 내가 말 안 듣는다고 손을 썼으니 나도 반격을 해야지.

'주요 아연 채굴 기업들 다 모여 있다며. 세론 개발 6퍼센트에서 손해 보는 것에 비하면 너네 94퍼센트에서 손해 보는 게 훨씬 압도적이잖아?'

게다가 한정된 광산에서 주 종목인 광물만 채굴하는 기업들과 나는 입장이 다르단 말이지.

만약 구리와 아연이 폭락해?

그럼 저번 일본처럼 자기들 해저광물 개발하고 싶어 하는 나라들 중에서 구리와 아연이 아닌 다른 광물을 가지고 있는 나라와 손잡고 그 광물을 또 캐면 그만이다.

광물이 뭐 구리와 아연만 있는 건 아니잖아?

광물의 세계는 그야말로 다양하기에 세론 개발의 해저 채굴선과 스켈레톤은 말 그대로 위치만 바꿔서 가격이 떨어지지 않은 다른 광물을 캐면 그걸로 끝.

한마디로 이 치킨 게임은 애초에 내가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종목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든 돈이 되는 광물로 갈아타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생산량을 3배로 늘린다 했지, 그 대상이 꼭 구리와 아연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알루미늄도 있고 망간도 있고 희토류도 있고, 얼마나 많아.

'어? 잠깐만, 희토류?'

중국이 늘상 하는 짓 중 하나가 세계 점유율 83퍼센트에 달하는 희토류 점유율을 무기로 쓰는 거였다.

당장 일본만 해도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 엄포에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한걸음 물러서지 않았나.

'희토류 한번 알아볼까?'

물론 정제 과정에서 각종 오염 물질이 나온다고 알고 있긴 하지만, 일단 알아는 봐야겠다.

아무튼.

나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그러자 기자들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S급 경호용 스켈레톤 출시는 언제인지······."

"세론 신발이 최근 세계 최대 신발 메이커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세론 개발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들에 대한 질문을 쏟아 내는 기자들.

나는 그들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해 주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오늘 기자회견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할 일이 좀 많아서."

그렇게 단상을 내려가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 공은 내가 굴렸으니 알아서 피해 보라고. 난 이러나저러나 다 상관없으니까."

*

세론 개발이 구리와 아연 납품가를 20퍼센트 낮췄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거기에 향후 생산량을 3배로 늘리겠다는 기자회견이 더해져 크게 흔들린 아연과 구리의 국제 시세.

당연하게도 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채굴 기업들이었다.

"이 미친놈이!"

화령광업의 총경리 왕백치가 화를 내며 말했다.

"뭐? 가격을 20퍼센트 낮추고 생산량을 1년 만에 3배로 늘려? 가격을 올려도 모자랄 판국에 미친 것 아니야?!"

그러자 김태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놈이 아주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런 뉴스를 본인 입으로 떠들다니."

원자재 가격 하락을 부추기는 기자회견을 열고 가격까지 내려 버리다니.

일반적인 원자재 생산 기업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아마 관세를 부과한 것에 대한 대응이 아닐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사업한다는 놈이 무슨 대응을 이딴 식으로 해!"

김태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괜히 건드린 건 아닌가 싶군요."

"아니. 어차피 언젠가는 붙어야 할 놈이었어."

이미 자리를 잡고 생산량을 조절해 가며 이득을 취하던 기존 업체와 아예 새로운 루트로 광물을 공급하는 세론 개발.

이 둘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회유를 했고 회유를 거절하자 강수를 둔 건데, 똑같이 강수로 맞대응한 세론.

"6퍼센트가 많다면 많지만 세계 시장 전체를 흔들 정도는 아니야. 지금이야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기자회견 때문에 흔들렸지만 다시 제자리로 갈 거라고."

하지만 그런 왕백치의 말에도 김태령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 1년 뒤에 생산량을 3배로 늘리면 폭락은 현실화될 겁니다."

"그러니 더욱더 그 전에 굽히게 만들어야지. 젠장. 놈이 SS급만 아니었어도······"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회사들에게 연락 돌려서 우리도 가격 낮춰."

왕백치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경쟁은 공멸뿐이란 걸 보여 줘야지."

*

세론을 따라서 가격을 인하한 아연 채굴 회사들.

물론 세론만큼은 아니고 10퍼센트 수준이긴 하지만, 나름 놈들도 진지하게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하지만 그런다 해서 나한테 피해 올 건 없다고.

"여기 있습니다."

교수가 나에게 건네준 자료를 확인한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히야. 많다, 많아."

구리와 아연 가격이 폭락할 것을 대비해 각 나라들이 해저 채굴권을 보유한 지역의 주요 광물 리스트를 교수에게 요청한 나.

비록 채산성이 떨어져 상업적 채굴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나라들이 해저 밑에 무슨 광물이 있는지 조사 정도는 해 두었기에, 자료를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광물들이 즐비해 있는 리스트.

"알루미늄 많이 쓰니까 나쁘지 않네. 오. 한국 구역에도 망간각이 있네요?"

구리와 아연이 주력인 해저열수광상과 다르게 망간과 코발트가 주력인 망간각.

"망간과 코발트 모두 배터리 제조에 있어 필수인 광물입니다. 가격의 경우에 망간은 구리와 비슷하고, 코발트는 오히려 10배 가량 비싸죠."

"오오!"

"대신 시장 전체 규모 자체는 작습니다. 둘이 합쳐서 대략 구리 시장의 절반 정도? 하지만 전기 차가 보급되며 향후 몇 년 안에 시장 규모가 두 배 이상 커질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네요, 좋아."

그 정도면 오히려 더 쉽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게다가 내가 이 자료를 요구한 건 놈들이 지금 구리와 아연을 타깃으로 잡고 움직이니 언제든 회피할 수 있는 플랜 B를 준비하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무궁무진하네요, 광물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해저 자원을 검은 노다지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다. 물론 뭐··· 제대로 상업화한 건 세론이 처음이지만."

"노다지 인정합니다."

상대는 패를 하나만 들고 있지만 나는 그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광물이 패나 다름없으니까.

"아. 그런데 교수님, 희토류는 어떻습니까?"

"희토류 말입니까?"

"해저에 희토류는 없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렇지.

있을 줄 알았어.

"특히 일본의 수역에 있는 해저 희토류 광상이 상당한 크기를 자랑합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 주도로 무인 잠수정을 이용한 희토류 채굴을 준비하고 있고요."

"일본?"

설마 그때 제안했던 게 이건가?

"그나저나 희토류는 환경오염이 심하다고 하던데, 맞나요?"

"맞습니다. 희토류는 방사성 물질 근처에 분포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는 이 희토류가 아주 조금씩 넓은 범위에 분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워낙 함유량이 적다 보니 대량의 암석을 캐내서 파쇄하고 정제를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죠. 하지만 해저 희토류라면······."

교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오염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 같군요. 해저 광상들은 이미 용암으로 1차 정련을 거친 뒤라 함유량이 아주 높으니까."

대량으로 파쇄해야 극소량을 얻을 수 있는 희토류.

하지만 해저 희토류는 자연이 이미 1차 정련을 해 준 덕분에 함유량이 높아 그만큼 방사성 유출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방사능 유출을 아예 막지는 못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중국은 희토류 정련을 위해 워낙 많은 암석을 파쇄, 정련하기에 아예 개방된 땅에서 하는 반면, 이건 그래도 함유량이 높아 방사능 유출 대비를 해 둔 작은 공간에서도 정련할 수 있으니까요."

"오호."

희토류라.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는 미국조차 쩔쩔매고 그 자존심 강한 일본이 물러설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지 않았나.

이걸 내가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미국과 일본 같은 중국과 적대적인 국가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겠지.

동시에 나를 건드린 중국의 핵심 전략자원을 무너트릴 수 있으니 이건 안 하는 게 멍청한 거다.

하지만 아무리 오염이 적다고는 해도 정련 과정에서 방사능 유출이 되기는 된다는 거잖아?

"이건 한국에서 하면 난리 나겠는데."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일본에 희토류 광상이 있다 하셨죠?"

"다른 곳에도 있기는 있겠지만 일단 가장 가깝고 규모가 큰 건 일본이 맞습니다."

한국에서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게 뻔하지만 일본은 좀 상황이 다르다.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의 희토류 압박에 굴복한 사실은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자존심에 크나큰 스크래치를 남긴 중요한 사건이니까.

그렇기에 그 후로 어떻게든 희토류를 확보하기 위해 발악해 온 일본이지만 그 시도가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었지.

그런 일본이라면 1차 정련 된 해저 희토류의 방사능 정도는 감수하지 않을까?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거 일본 정부랑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해 봐야 되겠는데."

54화

주한 일본 대사의 최근 가장 관심사는 바로 세론 개발이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원의 불모지인 한국이 구리와 아연을 자급자족하게 만들어 주고 심지어 해외 수출까지 하게 해 준, 해저 자원을 최초로 생산성 있게 채굴한 기업이니까.

그렇기에 정부로부터 어떻게든 세론 개발과의 협력을 이끌어 내라는 지시를 받고 계속해서 러브 콜을 보냈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세론 개발.

아니, 정확히는 한지혁 회장.

그런데 그랬던 한지혁이 갑자기 먼저 연락이 와서 먼저 만나자 하는 게 아닌가.

"다과상 준비됐나?"

일본 대사의 말에 대사관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커피와 차는 물론이고 과자와 과일 등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모조리 준비했습니다."

"좋아."

일본과 한국의 사이는 분명 좋지 못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험악한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는 비할 바가 못 되는 수준.

그런데 최근 중국이 한국, 정확히는 세론 개발의 원자재를 콕 집어 관세를 부과했으니, 어찌 보면 이건 기회라 볼 수 있었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이니까.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그때.

"한 회장님 오셨습니다!"

일본 대사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서 이쪽으로 모셔!"

잠시 후 대사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등장한 한지혁 회장.

일본 대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 회장님."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혹시 차 좋아하십니까?"

"아무거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차랑 과자 좀 내와 주세요."

그러자 잘 정돈된 차와 과자를 가지고 테이블에 올려 둔 대사관 직원.

"여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차와 과자입니다. 한 회장님이 오신다기에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차를 한 모금 마셔 본 한지혁이 말했다.

"맛있네요."

"하하. 맛있다니 다행입니다."

"이거, 너무 환대를 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세론 그룹의 회장님을 대접하는 자리인데,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그때 일본 대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중국의 관세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여튼 이기적이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놈들 아닙니까?"

중국과 실시간으로 기 싸움 중인 한지혁이 듣기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는 일본 대사.

당연하게도 그 목적은 해저 자원,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희토류였다.

희토류는 단순히 한 가지 광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여러 종의 희소 광물을 묶어 부르는 표현으로, 이들 대부분 첨단산업에 있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희토류의 한 종류인 네오디뮴의 경우 일반 자석에 비해 10배가 넘는 자력을 지니고 있어 자석이 필요한 모터의 크기를 극단적으로 줄여 주기에 전기 자동차에 있어 필수 불가결 한 소재 중 하나.

그 외의 다른 희토류들도 배터리와 반도체 등등 온갖 첨단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소재이니 그 가치가 더욱 빛이 날 수밖에.

문제는 이 희토류의 전 세계 생산량에서 중국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것이었다.

희토류는 정련 과정에서 환경을 파괴하고 방사능을 유출하기에 일반적인 나라들은 자신들 국토에 희토류가 묻혀 있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데, 중국은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희토류를 생산하며 세계 생산량의 80퍼센트를 넘게 점유하고 있었다.

중국이 그런 환경 파괴를 감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희토류는 돈이 되고 동시에 힘이 되니까.

중국은 희토류 패권이라 부를 만큼 희토류를 무기화하여 전방위로 휘둘렀는데, 일본 역시 그 희토류 패권에 한 대 엊어맞은 당사국 중 하나.

지금도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 압박에 굴복하여 사과를 한 건 일본 국민 모두가 분개해 하는 치욕적인 사건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희토류 자체 생산은 일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시되는 중요 과제였지만, 일본 대사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르는 건 욕심이야. 일단 한 회장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희토류가 아닌 다른 자원도 좋으니 일단 협력을 하면서 천천히 단계를 밟아 가야 해.'

이미 제련소를 통해 합작회사를 제안했으나 배와 채굴 권한만 내놓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통보를 한 세론 개발.

당연히 일본이 원하는 건 자신들이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자원이었기에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기에 일단 살살 구슬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은 일본 대사.

"해저 개발을 통해 인류 모두가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라니. 제가 비록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내가 뭐 지들 해코지한 것도 아닌데 뭐만 하면 태클 걸고, 아주 짜증이 나요."

"그게 중국의 특성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지혁의 불만 토로에 맞장구를 쳐 주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일본 대사는 생각했다.

'좋아. 이렇게 잘 마무리해서 다음번엔 해저 자원 협력을······.'

그런데 그때.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방 먹여 주려고요. 그 뭐냐. 일본 해저에 희토류 있다면서요? 그거 같이 개발해 볼 생각 없으십니까?"

"풉!"

마시던 차를 뿜어낸 일본 대사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토류요?"

"예."

가장 간지러웠던 부분을 갑자기 예고도 없이 긁어 주니 당황한 일본 대사.

"그, 그러니까, 당연히 환영, 아니, 꼭 희토류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한 회장님의 이런 제안이 반갑다고 해야 할까. 그······."

한지혁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제가 합작회사는 싫어하니 채굴은 전적으로 세론 개발이 단독으로 하겠습니다. 배는 일본에서 제공해 주고요."

그전의 제안과 별다를 바 없는 내용.

하지만.

"대신 정련은 일본에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련된 희토류를 저희 세론 개발과 일본이 나눠 가지면 될 것 같은데."

그야말로 일본이 가장 원하고 또 바라 왔던 제안을 먼저 건네는 한지혁.

결국 멍하니 있던 일본 대사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잠시만. 지금 바로 본국에 연락하겠습니다!"

*

내 계획은 간단했다.

희토류는 정련하는 과정에서 방사능이 나오니 이 정련 과정을 일본의 땅에서 스켈레톤을 이용해 진행하고, 그 대가로 일본에게 희토류의 일부를 조금 나누어 주는 것.

그런데 생각보다 일본의 준비 태세가 보통이 아니다.

"무인 잠수정을 통한 해저 희토류의 성분 분석 결과, 지상보다 함유량이 130배가량 높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거기에 방사성 물질의 양도 현저히 적은 걸 확인하였고요."

일본 정부와 연락을 하고 온 일본 대사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저희 일본 정부는 그 샘플링 결과를 토대로 이미 무인도 하나를 선정해 정련 작업을 준비해 두었고, 방사능 처리 방법은 물론 해저 희토류의 정련 방법 역시 모두 연구를 끝마친 상황입니다."

일본이 중국한테 한 방 먹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더니, 희토류에 정말 진심이구나.

말 그대로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일본.

그런 일본이 해저 희토류를 채굴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채굴 방법.

"하지만 해저 3,000m 아래에 있는 희토류를 채굴하는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이건 망간단괴처럼 하나씩 주워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 희토류가 분포된 광맥을 깨부수어서 캐 와야 하는데··· 정말 안 해 본 방법이 없습니다. 채굴기를 설치해서 깨부순 다음 깨부순 광물을 물과 함께 빨아들이는 방법도 써 봤고 무인 잠수정에 파쇄기도 설치해 봤죠. 하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일본 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모두 지속적으로 광물을 채굴하기엔 역부족이었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채굴용 무인 잠수정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때 등장한 게 세론 개발이죠."

일본 대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정부의 조건은 정말 간단합니다. 저희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해저의 희토류 원석을 캐 주시기만 하면 나머지는 전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정련된 희토류를 세론과 나눌 거고요. 아. 원하시면 저희가 개발해 둔 장비도 드릴 수 있습니다. 해저 채굴기가 실패한 이유는 채굴한 후 이동이 불가하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스켈레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요."

채굴 방법 빼고 모든 걸 준비해 둔 일본과 세상에서 해저 자원을 채굴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인 세론의 협업.

그런데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일본 쪽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

말 그대로 땅과 채굴권만 빌리려 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일본의 장비는 물론이고 일본 쪽에서 사실상 정련 과정 전부를 담당하게 될 테니까.

당연히 일본 쪽 파트가 커진다는 건 다시 말해 나눠야 할 몫도 커진다는 말.

"그럼 나누는 비율은 몇 대 몇이 되는 겁니까?"

"6 대 4 어떻습니까."

"세론이 6?"

"일본이 6이지요, 사실상 채굴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과정을 일본이 담당하는 셈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네요. 협상은 결렬입니다."

그러자 일본 대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시만. 비율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세론이 6이어도 마음에 안 드는데, 심지어 일본이 6이라니."

애초에 내가 생각한 비율은 9 대 1이었다고.

하지만 뭐··· 그래.

정련 과정에서 방사능 물질 유출이 되기에 스켈레톤을 쓰려고 한 건데, 이미 지들이 기술 개발 했고 대비책까지 모두 만들어 두었다니 그것까지는 오케이.

정련 알고리즘을 짜야 하는 귀찮음에 더해 방사능 유출이라는 꺼림칙한 상황을 일본이 전부 맡아 준다면 내가 7 대 3까지는 인정해 준다.

세론 개발과 제련소들이 딱 그 정도 비율로 거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뭐?

일본이 6에 세론이 4?

그런 거래는 안 하고 말지.

"원하시는 비율이 있으십니까?"

"8 대 2. 당연히 세론이 8."

7 대 3까진 생각 중이지만 처음부터 패를 깔 수는 없지.

그러자 일본 대사가 경악하며 말했다.

"한 회장님, 괜히 모든 나라들이 희토류 생산을 꺼리고 중국이 희토류를 꽉 잡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희토류 정련은 어렵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어마어마합니다!"

"대신 해저 희토류는 방사능 양도 적고 함량도 높잖아요. 당연히 난이도도 지상 희토류와는 비교조차 안 되게 쉬울 거고."

"그,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일본이 준비해 뒀다는 거, 대단하긴 하지만 대체재가 없는 건 아니란 말이죠."

분명 일본의 준비 태세는 대단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저 자원을 채굴할 수 있는 세론 개발의 유니크 함에 비할 바는 아니란 말이지.

"거 듣자 하니 미국이 중국 견제하려고 호주랑 손잡고 희토류 개발 추진 중이라면서요. 미국에 연락해 볼까?"

미국과 일본은 동맹이기에 만약 미국이 나와 손잡고 해저 희토류를 개발하면 일본 역시 중국산이 아닌 미국산으로 갈아타겠지.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일본이었다면 애초에 자국 영해의 해저 희토류 개발을 왜 준비해 왔겠어.

이미 미국과 호주가 희토류 개발을 추진 중인데.

당연히 일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급자족이다.

그 어떤 타국의 힘을 빌리지 않는 완전한 자급자족.

"한 회장님, 협상이란 게 원래 조금씩 주고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지말고 5 대 5는 어떻습니까?"

"좋아요. 나도 조금은 양보해 드리죠. 7 대 3. 하지만 더 이상 양보는 없습니다. 만약 더 요구하신다면 다른 나라 알아보죠, 뭐. 그런데 그것 아세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론은 늘 선착순 고객을 우대한다는 거요. 이번 협상 틀어지면 일본은 한참 후순위로 밀릴 겁니다. 아시죠? 해저 자원은 무궁무진한데 배랑 스켈레톤이 부족한 거. 다른 나라 걸 개발하기도 바쁜데 언제 일본 차례까지 오겠어요. 안 그래요?"

늦으면 국물도 없다 이 말이야.

"일본 정부에 연락하세요. 이 제안도 거절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요."

*

결국 내 최후의 통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내 7 대 3 제안을 수락했다.

대신 내 몫인 7에서 2의 우선 매입권을 일본 정부에게 준다는 조건을 걸고.

당연히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팔려고 캐는 건데, 일본에서 만든 걸 일본이 바로 사 가면 나야 편하고 좋잖아.

그렇게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자 일본 정부는 광속처럼 움직였다.

미리 무인도에 준비해 두었던 해저 희토류 정련 시설을 가동하고, 해저 채굴용으로 쓸 중고 배도 순식간에 마련해 준 일본 정부.

덕분에 나는 곧바로 스켈레톤과 작업자를 투입해 희토류 채굴을 시작했고, 그렇게 일본의 해저에 잠들어 있던 희토류가 드디어 조금씩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습니다."

스켈레톤이 캐낸 희토류 원석을 일본이 정련해 내서 완성한 첫 희토류들.

나는 작은 광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건 방사능 없죠?"

"후처리가 끝난 거라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요?"

이게 중국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희토류라 이거지?

"이건 가격이 얼마나 된답니까?"

"종류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비싼 건 1kg에 30만 원씩 하기도 한답니다."

"와. 1kg에 30만 원? 그럼 구리보다 수십 배는 비싸단 말이네요."

"예. 대신 확실히 생산량은 적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공급해 준 희토류 원석의 양이 수백 톤에 달하는데, 그걸 정련해서 고작 1톤 건졌답니다."

함량이 130배에 달하는데도 고작 1톤이라니.

그럼 지상의 희토류를 채굴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땅을 헤집어야 한다는 거야?

비쌀 만하네.

"아. 그리고 일본에서 조만간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해저 희토류 채굴 성공을 공식화할 거라 합니다."

그간 비공개로 이루어진 해저 희토류 개발.

이제 성과물이 나왔으니 동네방네 자랑하겠다 이거다.

우리 일본도 드디어 희토류를 생산한다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중국 놈들 일본 발표 보면 식겁하겠네."

희토류는 중국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략 카드 중 하나였다.

물론 미국 역시 이걸 잘 알고 있기에 호주와 손잡고 희토류 생산을 늘리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의 희토류 생산 비중은 83퍼센트로 압도적.

이때 세론이라는 대체재가 등장하면 중국의 기분이 어떨까?

"아마 엿 같겠지."

러시아가 가스 밸브 잠가를 외치는 것처럼 희토류 잠가를 외치던 중국인데, 이제 그 희토류 잠가가 안 먹힌다?

중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꼴이다.

그간 희토류로 중국이 누려 왔던 외교, 경제적 우위가 모두 사라진다는 말이니까.

"캬. 생각만 해도 고소하네."

그러게 왜 날 건드리냐고.

나는 김덕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 사장님, 일본이 발표하기 전에 미리 한국 정부에게 연락 좀 해 줘요, 우리 이제 희토류도 생산한다고. 뉴스로 소식 들으면 좀 서운할 것 아니야. 미리미리 말해 줘야지. 아! 거기에다가 당분간 희토류를 한국에 최우선 공급 한다고도 해 주고요."

한국 역시 중국 희토류 의존율이 90퍼센트에 달하는 나라.

만약 중국이 희토류를 잠그면 반도체부터 각종 첨단산업이 모조리 멈춰 서기에 그간 중국의 눈치를 봐 올 수밖에 없었지.

그런 한국을 세론이 희토류를 자급자족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다.

"그다음 미국, 유럽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가자고요."

중국과 사이가 나쁘지만 희토류 때문에 꾹 참고 있던 나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중국의 희토류 패권에서 독립시켜 준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그들이 세론의 희토류에 점점 의지할수록 중국의 힘은 약해지며 동시에 세론의 위치와 위상은 더욱더 올라가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희토류 하면 중국이 아니라 세론이 떠오르도록 만드는 겁니다."

중국의 희토류 패권?

아니지.

이제는 세론의 희토류 패권이다.

5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