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레니는 예상 낙하지점 인근에 서있다.
만약 이대로 비행선이 추락한다면 큰 충격에 휘말릴 것이다.
단순히 폭발에 의한 충격파 정도라면 포션 등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으나, 만에 하나 난간도 없는 하늘성 외부를 향해 튕겨 나간다면.
그다음은 아득히 먼 지상까지 자유낙하다.
"레니 씨!? 움직여, 뛰어!"
진성은 더듬거리면서도 힘을 담아 외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상층부에 있는 유저와 진성 자신의 거리보다 진성 자신과 레니가 조금 더 가깝다는 점일까.
물론 유저에게 목소리가 들려선 안 된다.
그의 '채팅창' 따위에 진성 자신의 채팅이 뜬금없이 입력되어선 안 되니 조심해야만 하는 것.
"레니, 레니!"
진성은 다급하게 레니를 몇 번 더 불렀으나 곧 멈춰야만 했다.
레니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 아아...?"
들었음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리라.
머리로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공포에 질려버린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진성에게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베히모스에서부터 떨어진 점 하나였던 비행선은 하늘성을 향해 가까워지며 삽시간에 확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침음을 흘리며 제자리에 서 있는 레니를 보다 진성은 다시금 떨어지는 비행선을 살폈다.
얼마나 걸릴까. 적어도 분 단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레니는 죽는다.
그리고 진성은, 적어도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다.
레니는 이곳에서 죽지 않음을.
'지금 내가 뛰어 내려가서 레니를-. 아냐. 아냐.'
그러나 길게 잡아야 60초다. 그 안에 레니를 구한다고?
가능할 수도 있다. 진성 자신의 지금 육신이라면.
다크나이트라면 60초 안에 한 층 또는 두 층을 아크로바틱하게 움직이며 내려가 레니를 구해낼 수 있다.
문제는 레니를 죽지 않게끔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저 비행선을... 도르니어를 유저의 눈앞에 떨어지게 만들어야 해!'
쉽게 말하면 진성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파른 기울기로 떨어지는 비행선 '도르니어'를 완만한 각도로 만들어 하늘성 최상층부 인근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 기왕이면 유저인 '모험가' 일행의 인근에 추락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비행선 안에 탑승한 자와 현재 비행선의 예상 낙하지점 인근의 레니, 둘을 모두 구하여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원래의 흐름대로 돌아가게 만들면 된다.
'이런, 젠장!'
다만, 그런 일을 진성이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고속으로 떨어지는 대형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진성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킬이 없어. 마도학자라면 <반중력 기동장치> 같은 걸 써서-.'
다른 직업군이 할 수 있는 일?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다크나이트라면?
공중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멈추게 만든다?
'홀딩이 가능한 스킬도 없는데!'
피격 대상을 일시적으로 멈추게끔 만드는 기술이 있다.
진성은 '레벨'이 부족해 배우지 못한데다
설령 배운다 하더라도 무기로 가격해야만 발동되는 근거리 스킬이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이 모든 것을 진성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결론내렸기에.
"으, 으으, 나와라, 나와라!"
[인벤토리]를 뒤적거리고 있는 중인 셈이었다.
폭염탄 외에 벽력탄 등의 폭탄도 있으므로, 그 폭발력을 활용한다면 비행선의 궤적을 비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최악의 경우, 타이밍 1초, 2초 차이만 어긋나도....'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비행선이 화염에 휘말린다거나 그나마 남은 동력원을 모두 없앤 후 완전히 수직 하락하게끔 만들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레니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비행선 안에 탄 자는 사망하게 될 터.
'...안돼. 그것도 끝장이다. 그러니까, 좀! 제발! 빨리!'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더 이상 제대로 흘러나가지 않을 것이다.
<부집게의 사명>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 * *
안경을 낀 남성은 과자를 씹어 먹으며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창 모드'가 되어있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화면이 보였으나 지금 남성에게는 그런 게 중요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스페이스 바를 눌러야 넘어가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대화창들이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중임에도 특별히 서두르지 않는 것은 그가 보고 있는 또 다른 인터넷 창 때문이었다.
"여그플 룩압 이쁜 거 뭐 없나?"
자신이 키우는 캐릭터가 입을 수 있는 각종 아바타들을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
스크롤을 내리며 이것, 저것 살펴보던 남성은 그제야 게임 퀘스트가 진행 중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아, 맞다. 하늘성 다 깼었구나."
다多캐릭터 권장 게임인 던전앤파이터의 특성상 퀘스트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유저들도 있는 한편, 남성처럼 대충대충 넘기는 자도 있는 건 당연한 일.
'어차피 스토리는 대충 다 아니까. 이제 비행선 떨어지고 다음... 음?'
스페이스 바를 대충 툭, 툭 누르며 NPC들의 대화를 넘기던 남성은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이 흐름 또한 남성이 부캐릭터를 몇 개나 키우며 겪어봤던 상황 중 하나였으나 어쩐지 그의 기억과는 달랐기 때문.
"어? 원래... 원래 저런 이펙트가 있었나?"
무언가 허공에서 터지는 이펙트가 보였다고 해야 할까.
구체적으로는 화염 등은 없었으나 투명한 바람과도 같은 힘, 무언가가 폭발할 때 일어날 법한 후폭풍의 이미지와 매우 유사한 효과가 비행선의 근처에서 연이어 발생한 것처럼 보였다?
'...그냥 휙 날아와서 바닥에 부딪히고 끝~ 이런...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떨어지려던 비행선이 그러한 추가 효과를 동반한 이후에야 날아오는 모습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남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중이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그래픽 오류 같은 거...겠지. 아니다, 원래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럴 일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남성은 스스로 느낀 허탈감에 피식, 웃으며 먹던 과자를 마저 입 안에 털어넣었다.
"부캐릭 많이 키우다 보니 별일을 다 겪네."
와삭, 와삭 소리가 울릴 무렵 그의 모니터에는 여러 NPC들의 대화가 출력되는 중이었다.
[우왓, 뭐야? 뭐가 날아와서 부딪혔는데?]
[이건...이것도 바칼의 마법인가?]
놀란 반과 아간조의 말을 스페이스 바 연타로 넘긴 후 나오는 것은 샤란의 반응이었다.
[마법은 아니에요, 저건-.]
남성은 그 또한 스페이스 바를 툭, 툭 연달아 치며 넘겼다.
따라서 그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비행선?]
마법이 아니라는 추측이 대사로 출력될 때와 비행선이라는 한마디를 내뱉을 때 샤란의 이미지.
연이은 두 개의 발언을 한 샤란의 사진이 사뭇 달랐다는 것을.
은근하게 하늘성의 아랫부분을 관찰하던 샤란의 표정을, 그는 볼 수 없었다.
* * *
폭탄은 안된다.
동시에 비행선의 궤적을 틀어버릴 정도의 힘은 있어야 한다.
그런 물건은 일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가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세계관이 아니었다면.
'찾았- 드아아아아!'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던 진성은 무언가를 후두둑, 꺼내어 바닥에 내려두었다.
언뜻 보면 열대 과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초록색이고, 양손으로 쥐어야 할 정도로 두툼한 데다, 포도처럼 알알이 구성된 형태지만 그 알 하나하나가 귤만 해서, 코코넛보다도 조금 더 큰 수준의 과일
이라고 해야 할까.
'후우, 맞추면 된다. 부딪친 지점에서부터 효과가 발동될 테니-.'
진성은 양손으로 그것들을 쥐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최근에 시작한 유저라면 아마 보고도 무엇인지 모를 아이템일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유저라면, 과거 게임을 즐겼던 유저라면 그 존재를 알뿐더러, 이 아이템의 사용 효과로 인하여 벌어진 에피소드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흐아아압-!'
진성은 마음 속으로만 기합을 외치며 그것들을 마구잡이로 던지기 시작했다.
과일처럼 생긴 것 몇 개를 맞춘다고 비행선의 궤적이 바뀔 리 없다.
그러나 진성이 던진, 지금도 쉼없이 손에 집히는 족족 던져대고 있는 아이템의 정체가 무엇인가.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공식 설명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터지면 아프다기보단 멀리 데굴데굴 굴러가게 만드는 이상한 열매. 파티원에게도 통하니 조심할 것]
즉,
탄착점 혹은 맞은 대상 근방의 아군과 적군을 아무 피해 없이 밀쳐버리는 아이템, 진성이 던지는 건 바로 달빛 주점에서 슈시아로부터 구입한 <하늘나무 열매>였던 것!
'이거 하나에 60골드짜린데!'
다크나이트가 되어버린 진성의 육신은 이미 일반인과 다르다.
손으로, 어깨를 사용해 직접 투척하는 정도라면 떨어지는 비행선의 전방 하단을 맞추겠다는 일념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힘이 있었으니까.
───, ───, ───, ───!
<하늘나무 열매>가 연달아 터지길 몇 번이나 되었을까.
허공을 가른 것도 종종 있었지만, 진성이 던져댄 십 수개의 하늘나무 열매 대부분이 작은 비행선, 도르니어의 목표지점에 몇 번이나 적중했을까.
휘이이잇─────...!!!!
"됐...다."
진성은 보았다.
마침내 제 궤도를 찾고 진성 자신보다 더 상부를 향해 기수를 틀어 올린 비행선 도르니어의 모습을.
그리고 하늘성에 추락하기 직전의 비행선 도르니어에서 무언가가 팔락, 팔락거리며 떨어지고 있음을.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는 셈이었다.
'...카드! 으잇!'
하늘성 방면을 향해 바람에 휘날리고 있던 카드를, 진성은 난간도 없는 외부 계단의 끝자락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낚아챘다.
[도르니어(오염)]
붙잡은 카드에 써인 문구를 확인하는 순간 진성의 머리 위에서부터 폭음이 들렸다.
"우왓, 뭐야? 뭐가 날아와서 부딪혔는데?"
"이건...이것도 바칼의 마법인가?"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반과 아간조의 목소리.
진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이 정도면 된 것일까.
잘 끝났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캐릭터 모험가-. 저 유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출력되고 있을 터.
다만, 진성 자신에게는 모든 게 올바르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
"...아."
진성은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진성보다 아래층의 나선형 계단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자는 물론 레니였다.
토끼 눈을 한 채 벌벌 떨고 있는 레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붉은 머리의 하급 기사와 눈이 마주친 채 진성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레니 또한 진성에게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니.
고요해진 하늘성에 남은 것은 최상층부의 소란뿐이었다.
"마법은 아니에요, 저건... 비행선?"
어쩐지 '아래쪽'을 의심하는 샤란의 목소리가 울린 이후 마침내 진성에게도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긴-. 당신들은... 제발 도와주세요...."
비행선 안에 타고 있던 자가 말하는 도움 요청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진성은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잃으셨군요. 상처가 심하진 않지만 많이 지치신 것 같아요."
세리아는 비행선에 타고 있던 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 진성이었다.
'네... 진짜 너무너무 지쳐서...피곤해 죽겠네요.'
정신없는 와중에 일단 드는 생각은 하나, 안도감.
던전 지역:하늘성이 무사히 끝나고 다음 시나리오로 문제 없이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안도감.
하늘성 외벽에 등을 기대고 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폐에서부터 끌어올려 내뱉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읏."
그 와중에도 눈을 찌푸려야 했던 것은 진성 자신에게 금빛 광휘가 쏟아졌기 때문.
여전히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진성은 그 반응에도 미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걸로도... 레벨은 오르는구나. 일반 유저들과는 다르네.'
그 와중에도 게임 던전앤파이터와 자신의 현실을 비교하며 이런 감상하는 것 또한 진성다운 일이리라.
진성은 [내 정보]를 열어보았다.
레벨은 정확히 23, 모험가 명성은 여전히 17.
얼토당토 않은 마무리라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던전 지역:하늘성의 '오염'은 없으리라.
'그래봐야 당분간이겠지만. 그리고....'
진성 자신의 성장 외에도, 이번 <부집게의 사명>을 다하며 얻은 게 많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보세요! 괜찮- 습니까?"
어느새 진성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니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020
하늘성에서 내려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분은 저를 구해줬습니다, 부단장님. 제대로 설명조차 하기 힘든 방법으로-."
"시끄럽다, 레니. 애당초 네가 단장에게 합류하겠다고 개인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그보다 나는 이 인간에게-."
"피해를 보았다지. '나의 제자'가 무례를 끼친 건 대신 사과하겠네, 하츠 폰 크루거 부단장."
당장 레니가 진성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데다 G.S.D까지 나섰기 때문.
하츠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진성을 노려보는 중이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짜증이 가득 담긴 그의 눈빛은 곧 진성을 떠나 그 옆에서 걸어 나오는 또 다른 사람에게 향해야 했으니까.
"그래, 부단장. G.S.D 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용서해 줘. 겸사겸사 단장 체면 좀 세워달라고."
"단장...너는 누구 편을 드는 거지? 저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때문에 하마터면 하늘성이-. 아니, 우리 아이언 울프 기사단이 통째로-."
"아, 아, 결과적으로는 별일 없었잖아? 우리 부단장의 초동 대처가 완벽했을테니. 안 그래?"
데 로스 제국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단장, 반 발슈테트.
부단장인 하츠에 비한다면 더없이 가볍게만 보이는 반의 언행에 하츠는 열이 받았으나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그곳 또한 수직적인 계급 체계가 존재하는 곳이고, 반이 저런 식으로 나온 이상 하츠는 진성에 대한 트집을 잡는 것도 포기해야만 한다.
"...제길. 알았다. 하지만 너, 앞으로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거다."
진성 또한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저 목례로만 끄덕이며 응했다.
비행선 도르니어에서 도움을 요청한 자를 간이 들것에 실은 채, 하늘성을 내려가는 길은 진성에게 있어 어쩌면 수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무리는 잘 되었으나....
'이상하긴 하네. 레니나 G.S.D가 내 편을 들어준 거야 얼추 이해가 가는데.'
레니는 그녀 스스로 말했듯 진성 자신을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고 있기에 편을 들어주었다고 봐야 한다.
G.S.D는 진성 자신이 말했던 이름에 대해 의미를 두어서, 아니면 샤란이 몰래 부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인간은-.'
진성이 의심하는 부분은 하나였다.
껄렁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4인의 웨펀마스터 중 한 사람.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단장, 반 발슈테트.
'애당초 반은 말이지, 으음....'
반 발슈테트가 누구인가.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최근 시나리오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 해본 사람으로서, 진성은 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리 없는 것이었다.
"아, 진성이라고 했나? 나중에 한번 막사에 들러주겠어?"
"무슨...일 때문이죠?"
"우리 레니를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G.S.D 님의 제자라는 게, 캬아, 신기하지 않아요, 아간조 아저씨?"
레니를 구했기 때문이라거나, G.S.D의 제자라 소개되었기 때문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일 리가 없다.
그 외의 꿍꿍이가 분명히 있음을 진성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 의도를 표출할 수 없었다.
눈을 번뜩이는 반의 곁에서 또 다른 4인의 웨펀마스터 중 한 사람, 대검의 아간조도 있었으니까.
"이야기는 들어보고 싶군. 기회가 된다면 함께 자리해도 되겠나."
"뭐... 일단 상처도 좀 있고 해서-. 회복되면... 예, 나중에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진성은 그저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반뿐만 아니라 <4인의 웨펀마스터>라면 향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있어 많은 교류를 해야 한다는 정보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사를 끝으로, 하늘성에서의 전진 기지 등이 정리되며 본격적인 철수 준비가 진행되었다.
* * *
'자... 이제 하늘성은 당분간 끝이라는 뜻인데.'
진성은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 격투가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저 유저에게 있어서 지금 진성이 겪은, 이러한 대화들은 '스크립트'로 출력조차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저 사람은 이제 벨 마이어 공국의 여왕을 만날 테고... 지금 비행선 도르니어에서 구출해 낸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어쩌고 저쩌고 하겠지.'
해당 유저가 어떠한 흐름으로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다.
문제는 진성 자신이 이제 그 흐름에 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번 오염은 해결했으니까. 굴 구위시 때 남귀검사였고, 이번 하늘성 때 여격투가였으니, 아마 다음 오염 또한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다면 이후의 단서는 어떻게 잡아야 할까.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라가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베히모스와 관련된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는 유저를 또 어디선가 찾아야 할까?
골몰하던 진성과 여타 NPC들은 어느덧 1층에 다다랐다.
세리아와 유저인 여자 격투가 그리고 아간조 등이 보고를 위해 먼저 떠났고.
반과 하츠 등의 아이언 울프 기사단은 그 뒤를 따랐다.
"저기, 구해주신 건...."
철수하는 그들 사이에서 진성에게 특별히 인사를 건네는 건 레니였다.
진성은 건성으로 답하려 했으나 레니가 더 빨랐다.
"아, 감사 인사는 됐-."
"언젠가!"
"예? 예?"
갑작스레 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반응에 진성이 움찔거렸다.
레니는 그런 진성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언젠가...꼭 갚을게요. 그러니, 크흠, 그러니 몸조심하세요."
"어...네."
그것은 진성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발언이었다.
언제나 제국의 기사단 소속으로 틱틱대며,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말투만 봐왔던 레니건만.
'아니, 그보다도-. 왜 얼굴이 빨개져서.... 어라?'
다소곳하게, 심지어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다는 느낌은 진성 자신만이 받은 것일까?
레니는 멍하니 있는 진성의 얼굴을 한 번 더 빤히 바라보곤 그대로 뒤를 돌아 아이언 울프 기사단에 합류했다.
진성에게는 그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에이, 아니겠지? 그러면...안 되는데.'
당황한 진성의 곁에 다가온 것은 두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흑요정이었다.
"자네는...."
G.S.D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뿐이었다.
미처 말을 마치지 않는 노년의 귀검사를 진성은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보다 우선하여 말했다.
"언젠가 말씀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먼저 그리 이야기해주니 고맙군."
언뜻 통하지 않는 대화 같았으나 G.S.D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샤란 또한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이미 진성과 G.S.D의 대화를 모두 이해했다는 뜻이리라.
비록 당사자인 G.S.D는 약어의 해석을 부정했다지만 진성이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나중에 헨돈마이어를 지나게 되거든 찾아오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주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아마 곧 뵙게 될 것 같기는 해요."
"음?"
"흐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성은 G.S.D에게 고개만 꾸벅 숙일 뿐 더 많은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붉은 안대를 교차하여 눈을 가린 귀검사는 그러려니, 하곤 샤란과 인사를 나눈 후 곧 길을 떠났다.
이제 웨스트코스트 항구 근처에 남은 건 두 사람이었다.
"어쩔 거예요? 갈 곳은 있고?"
"안 그래도 이제부터 그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요."
샤란의 말에 진성은 거침없이 답했다.
"무슨?"
하늘성을 내려오기 전부터 정한 게 있다.
앞으로의 거시적인 계획이나 동선까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미시적으로 보자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샤란 님. 마법사 길드니까 그래도 뭐, 숙직실이나...하다못해 탕비실 같은 장소는 있을 거 아녜요? 몸 하나 누일 만한 곳으로다가."
"뭐, 뭐라고요? 우리 길드에서-."
"가시죠. 아참, 통행증이랑...우리가 또 뭐 약속했죠? 포션은 당연히 구비하고 계실 테고."
이제 진성 자신이 정보를 모을 곳은 슈시아의 달빛 주점이 아니라 샤란의 마법사 길드가 될 거라는 점만큼은 확실해진 것이었다.
샤란이 앞장설 필요도 없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모든 미니맵을 외우고 있는 진성에게 있어, 마법사 길드의 대략적인 위치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잔다고? 저기, 잠깐만?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었는-. 진성 씨!?"
거침없이 걸어가는 진성의 뒤를 샤란은 황급히 쫓았다.
* * *
'어디보자, 일단 20렙은 넘었으니 스킬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할 테고.'
진성은 [스킬 창]을 열어 자신이 얻은 스킬 포인트의 배분 등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특유의 콤보 스타일을 통해 최대의 대미지를 뽑아내야 한다는 게 다크나이트 직업군이 고려해야 할 최대 사항이지만....
'무작정 대미지 위주로만 구성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 우선은 회피기, 이동기를 각 콤보별로 섞어 놔야 한다. 쩝, '슈퍼 아머'의 발동도 체크해봐야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개념도 있으니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결국 몬스터를 직접 맞상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당장 하늘성을 나오긴 했다지만 마법사 길드로부터 통행증을 받는다면, 이후 하늘성을 지키는 주체가 제국이든, 공국이든 진성의 출입은 문제없을 터.
'문제는 그게 무섭다는-. 어휴... 일부러 그런 괴물에게 얻어터지러 들어가야 한다는 게 골치 아프다는 거지. 던파 인게임에서 활용하듯 수련의 방 같은 거 없나?'
이러한 [스킬 창]에 대한 정리 및 향후 콤보에 대한 고민은 모두 마법사 길드를 향하며 하는 일이었으니.
"저기? 듣고 있어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진성에게 샤란이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진성이 샤란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있을 리는 없었다.
"네. 제국 측은 아무래도 천계 진입과 관련되어 적극 조사하려 들겠지만, 당장은 벨 마이어 공국 측에서 협조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게 맞겠죠. 아마 샤란 님께는 곧 공국 측에서부터 바칼의 마법진과 관련된 조사를 요청할 테고요. 당연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국에게 비밀로 할 테고. 아마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러니까 돈이 추가로 든다거나 인력의 지원이 필요할 때나 제국에게 슬그머니 협조 요청을 넣겠죠. 공국이라면."
"아...."
샤란은 진성과 나누려던 대화는 G.S.D의 약자를 어떻게 알았냐 라던가, 절망의 탑이 무엇이냐 따위가 아니었다.
바칼의 마법진이 발견되었고 하늘성 위에 천계가 있음이 밝혀졌을 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샤란 님이 말씀하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정도는, 사실 생각해보면 간단히 답이 나오잖아요? 공국과 제국 사이의 알력 다툼이야 뻔한 거고... '천계'라는 단어가 갖는 중요도를 생각해보면."
말하자면 그녀는 향후 정세에 대해 진성에게 물어본 셈이었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진성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라면 당연히 하나뿐이다.
"그게...당신의 생각인가요? 당신이 떠올린 건가요?"
테스트.
진성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시험해보려 했을 터.
진성은 샤란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럼 무슨 남의 생각이겠습니까?"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흐름만큼은 다 외우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발언이었다.
실제로 진성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데다, 주요 NPC들에 대해서라면 세부적인 정보 또한 상당 부분 알고 있으니까.
"과연... 좋아요. 마법사 길드의 이름으로, 진성 씨를 공식 환영토록 하죠."
샤란은 씨익, 미소 지으며 진성보다 앞으로 걸어가 마법사 길드의 문을 열었다.
푸른 돔 형태의 지붕과 화사한 흰색의 벽으로 이루어진, 입구 양옆의 부조가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건물.
진성은 웃으며 그 문을 들어섰다.
"와... 이건...."
게임에서 보았던 마법사 길드는 네메르의 말처럼 '축약'되어 있던 것.
진성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심지어 오가는 '마법사 길드원'들도 많은 건물에 놀라기도 잠시였다.
"공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만, 후훗, 이 정도 지원받는 이상의 일을 해내는 게 우리... 음? 어딜 보는 거예요?"
샤란은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으로써 자랑을 늘어놓으려다 곧 진성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진성의 눈은 어느새 한 곳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레리트라 불리는 네 줄짜리 현악기를 들고 서 있는 여성.
'아이리스 포춘싱어....'
사도 힐더의 꼭두각시.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NPC가 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리스가 말했다.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여요."
021
아이리스 포춘싱어, 적어도 알려진 직업상으로는 '점술가'.
'설마 보인다고? 내가 누구인지-. 그렇게 바로 알 수는 없을 텐데.'
진성의 눈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마주한 NPC들은 세계관 내에서 발휘하는 정도였다.
인간으로서 단련되었던 4인의 웨펀마스터나 G.S.D.
또는 흑요정의 마력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마법사 길드의 샤란.
그들은 모두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배경 설정'을 기반으로 한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아이리스 님...?"
샤란은 조심스레 아이리스를 불렀으나 아이리스는 응답도 없이 진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진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눈을 마주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아이리스 포춘싱어는 분명 일반적인 사람보다 압도적인 마력을 지니고는 있을 거다. 점술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사도 힐더에게 조종당하는 상태니까.'
사도Apostle,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주요 설정 중 하나.
각기 다른 세계에서 마계로 오게 된 이계의 인물들 중 가장 강력한 자들에 대한 총칭.
그 근원은 태초의 의지이자 창조신, 칼로소가 숨겨둔 '어두운 일면의 의지'를 활용하여 만든, 인공신의 힘.
즉, 사도란 창조신의 파편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자신의 사악한 의지가 '인공신'으로 만들어져 힘과 형상을 지닌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마뜩잖았던 칼로소는 직접 그들의 만행을 막고자 했고, 그 자신의 육신과 힘마저 모두 쪼개질 정도의 싸움 끝에 12개체의 인공신을 처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만들어진 행성 '테라'와 생명체는 모두 파괴되며 심지어 하나였던 우주 자체가 여러 우주의 차원으로 나뉘고 말았으니.
결국 12명의 인공신과 인공신을 만들었던 행성 '테라' 안에 잠재된 커다란 힘, 즉, 13개의 힘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 '힘'들은 결국 일종의 환생이라고 해야 할까,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여러 차원, 여러 행성의 강자들에게 깃들었으며 그들이 '마계'로 모여들어 현재의 사도들이 되었다, 라는 게 배경 설정이지.'
13개체이나 제9사도가 교체되어 12자리만이 존재하는, 그 힘을 모두 합한다면 태초의 신이자 위대한 의지와 맞설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 바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사도'인 셈.
그중에서도 특히나 비밀이 많은 자, 여타 사도가 지니지 않은 힘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바로 제2사도.
진성의 눈앞에 있는 아이리스 포춘싱어에게 힘을 부여하고 조종하는 '우는 눈의 힐더'다.
'하지만....'
꿀꺽.
그리고 당연히 진성은 그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법사 길드에 온 것은, 마법사 길드를 임시 거처로 삼으려는 것은 진성 자신의 계산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이리스 님!"
"네, 샤란 님."
샤란은 답변 없는 아이리스를 연거푸 불러 마침내 반응을 이끌어냈다.
마법사 길드장조차도 조심스레 마법사 길드 소속의 점술가에게 질문을 하는 중이었다.
"하늘성에서의 일을...벌써 아시는 건가요?"
그 질문에 아이리스는 자신이 들고 있는 4현의 악기, 마레리트를 퉁기며 답했다.
"슬픈 바람이 불어오고 있군요. 마레리트가 울고 있어요. 이후에도 삶과 죽음이 관련된 일이...일어날 거예요."
그녀의 눈은 여전히 진성을 향하고 있었기에, 지금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뜻인지는 샤란과 진성 모두 파악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건...그렇군요. 아이리스 님이 알게 된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토록 해보고-. 여기는 진성 님이에요. 하늘성에서 G.S.D 님과 함께 바칼의 마법진에 대해 알아보도록 도와주기도 했고...사정상 당분간은 저희 길드 건물 내에 묵을 겁니다."
샤란은 우선 진성을 아이리스에게 소개시켰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갔을 때, 진성 또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성은 말하고 싶었다.
"사도 힐더에게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나요? 혹시 <오염의 원인자>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당연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터.
당장 이런 말을 내던졌다간 <부집게로서의 사명>이 아니라 플레인:아라드의 기반부터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지.
진성은 호흡을 고르다 말했다.
"혹시 제 역할이 무엇인지도 짐작하고 계신가요, 아이리스 님? 아니, 그것도 아니면 제 앞날에 대해서 보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리스와 대화를 해봐야 한다.
그저 겁먹고 있어선 안 된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진성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또는 진성 자신이 아이리스에게 비밀로 활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지.
그 모든 것을 따져보기 위해서라도.
아이리스는 답했다.
"깊은 의문을 가진 분이로군요.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하세요."
조용하게 말하며 그저 목례를 꾸벅, 하며 아이리스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은 마법사 길드의 내부를 걷는 아이리스의 뒷모습을 진성은 끝까지 살폈다.
그러곤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인게임에서 아이리스를 클릭하면 나오는 대사와 비슷해. 의미가 완전히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별 내용은 아닐 거다. 그렇게 보자면 결국 아이리스는-.'
나에 대해 모른다.
진성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부집게의 사명>을 띈 채 이곳 아라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봐야 할 터.
'물론 연기일 가능성은 있어. 그러나... 힐더 자신이라도 내 정체를 곧장 파악하는 게 가능할지 의심스러운데 하물며 아이리스는 역시 안 되는 거지. 힘의 구도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기에 여기까지 온 거니까.'
진성 자신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빙의된 이유는 모두 네메르 때문이다.
사도 힐더보다도 강력한 '초월자'의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면, 결국 힐더 본인도 아니고 그 힘을 일부 부여받아 조종당하는 아이리스가 진성 자신의 모든 정체를 알 수는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좋아. 그럼 내 정체는 들키지 않은 채로.... 아이리스를, <오염의 원인자>에 대해 조사해볼 수 있겠어.'
마법사 길드에 거처를 잡으려는 이유는 샤란을 통한 도움만이 아니었으니까.
진성은 미소를 감추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샤란은 그런 진성과 멀어져가는 아이리스의 뒷모습을 번갈아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성 씨가 이해해줘요.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분이지만 가끔은 저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발언을 하시는 터라-. 아참 그리고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그러다 불쑥, 그녀는 물었다.
어떤 의미로는 사도 힐더와 그녀에게 조종당하는 아이리스 포춘싱어에게 너무나 집중한 대가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아이리스 님께 한 질문의 의미는 뭐죠? 역할을 짐작하냐니? 앞날이 보이냐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었죠? 내가 아이리스 님이 점술가라고 말했던가?"
"...어라?"
아직 샤란이 아이리스에 대해 소개를 시켜주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떠들다니!?
흑요정 마법사 길드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진성을 파고들었다.
진성의 눈동자가 스르륵, 피하려는 그 순간.
"기, 길드장님! 로리안이-. 로리안이 실종됐습니다!"
누군가 샤란을 급히 불렀다.
진성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 * *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달라고 위치 표식을 남기는 마법석 또한 두고 갔으나... 상시 반응도, 호출에 대한 응답도 없습니다."
길드원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작은 마법석을 내밀었다.
몇 시간 정도 연락이 끊겼다 하여 그것을 실종이라 확신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법사 길드 소속이나 되는 인물들이 그러한 문제가 터졌다고 가늠할 정도로 그가 내민 '마법석'의 위력이 대단한 것임을 진성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렸을 돌은, 지금 그저 혼탁하게 변해있을 따름이었으니까.
"반응이 없어진 지는 얼마나 됐죠?"
"샤란 님을 따라 나가고 얼마 안 되어 바로였습니다."
"...알았어요. 하늘성 인근-. 아니, 웨스트코스트 근방을 모두 수색할 테니 인원들을 섭외해줘요."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길드원은 샤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곧장 달려나갔다.
샤란은 잠시 아랫입술을 물다 말고 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쉽지만 진성 씨가 아이리스 님께 물어본 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야겠네요. 들었겠지만 길드 내부의 문제가-."
그 와중에도 진성의 정체에 대해 집착하는 샤란의 말에, 결국 진성은 선택해야 했다.
"로리안 코르나로. 18세, 금발, 샤란 님의 마법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마법 천재."
눈을 끔뻑거리는 샤란에게 진성은 한 발자국 다가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로리안에 대해서라면.... 일단 무사히, 안전하게 있다고 말씀드리죠."
"설마 당신이-!"
"쉿. 샤란 님, 설마 줄곧 함께 있었으면서 제가 납치라도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진성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샤란의 태도를 몇 번이나 보아왔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샤란은 실제로 진성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다 곧장 자신의 추론을 펼치기 시작했으니까.
"어떻게...알았죠? 로리안에 대해서라면-. 그녀의 공주병이야 워낙 유명했다지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아까 아이리스 님한테 질문을 던진 것도 마찬가지고요."
진성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로 원하는 건 하나였다.
"저는 미래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샤란의 완벽한 신뢰.
샤란 자체는 향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으나, 그것은 던전앤파이터를 게임으로 즐기는 유저의 입장에서일 뿐이다.
아라드를 살아가는, 이곳이 말 그대로 현실인 진성 자신에게는 마법사 길드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어둔다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이 될지.
'아까 그건 게임 내에 없는 아이템이었어. 게임 내의 아이템만이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결국....'
조금 전 로리안이 사라졌을 때 확인했다던 마법석 따위의 존재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 말을 믿으라고요? 아무리 아이리스 님이 점술가라지만, 진성 씨는-."
"믿을지, 말지는 샤란 님의 마음입니다만...믿지 않는다고 해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건 더 잘 아시겠죠."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추론해도 답이 나올 수 없는 말도 있는 것이었다.
말하는 진성 또한 조마조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안다, 정도의 발언은 과연 허용되는가.
네메르는 '정체를 들키지 말라'며 강력하게 경고했지만, 그것은 유저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거라면? NPC에게 이러한 방식의 발언이 용납되는가.
두 사람의 눈빛이 소리 없이 마주쳤다.
진성은 진성 나름대로 페널티 등이 없는지 확인했고 샤란은 샤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중.
"로리안이 무사한 건 확실한가요?"
그녀는 물었다.
진성은 자신이 아는 한에서, 페널티를 받지 않을 법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해주었다.
"네. 로리안은 무사할 겁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고, 그녀가 있는 공간이 전부 다 안전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요."
"...그녀가-. 그녀 자신의 힘으로 다소의 위험이 있는 공간에서 안전을 확보했다, 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샤란의 완벽한 해석에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가 로리안이라는 NPC에 대해 아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계에 있지요. 붉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심지어 자신만의 구역까지 확보해서 잘 지내고 있으니.'
지금의 샤란에게는 '마계'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조차 하기 힘들겠으나, 포괄적인
암시의 내용에 틀린 바는 없지 않은가.
"좋아요. 믿기 힘들지만. G.S.D 님과 관련된 일도-. 아이리스 님과 관련된 일도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샤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성은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래서...일단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겠죠?"
"물론."
"알았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올 테니."
샤란은 또 다른 마법사 길드원을 불러 수색 취소 및 진성과의 외출에 대해 알렸다.
마법사 길드를 빠져나오자마자 진성은 샤란에게서 앞장서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웨스트코스트의 중심가에서부터 동남쪽 방면으로 향하는 진성의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듯, 그녀는 물었다.
"항구...쪽으로 가나요?"
"네."
"항구에 중요한 일이? 으음."
거침없는 진성의 답변에 그녀는 무언가를 추측하기 위해 애썼으나 당장 와닿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껏 진지하기만 했던 진성이 발을 멈춘 것은 샤란과 똑같은 피부색을 지닌 자의 앞이었으니까.
"여깁니다."
"음? 여기-. 카곤? 카곤이 왜요?"
목적지, 흑요정 카곤의 앞에 멈춰선 진성에게 샤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요한 일이죠."
진성은 말했다.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제 장비를 맞춰야 하거든요."
다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022
샤란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진성을 바라보기만 할 뿐.
무슨 말을 듣더라도 곧장 합리적인 추론을 내뱉던 마법사 길드장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라? 샤란 님?"
카곤이 그런 샤란을 발견하고 말을 건 시점에서야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다시 입을 연 것은 진성이었다.
"장비요. 마법사 길드의 이름으로 도와주신다고 했잖아요? 하늘성 통행증도 그렇고. 아직 큐브랑 포션은 안 받았지만 일단 저한테 중요한 건-."
"자, 잠깐, 잠깐.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장비? 지금 진성 씨의 무장 상태를-. 심지어 마법사 길드의 돈으로 맞춰달라는 거예요?"
"그게 아쉬운 점이죠. 레벨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여기가 아니라 신다 님한테 가서 구입했을 텐데."
"...아?"
진성은 입맛을 다셨다.
카곤이 파는 장비의 레벨은 25~30 수준.
진성이 조금 전 말한 NPC 신다가 판매하는 장비의 레벨은 45~50 수준이었으니.
현재 레벨이 23이지만 네메르에 의한 <패왕의 계약> 상시 적용 덕분에 요구 레벨이 33 수준의 장비를 착용할 수 있는 진성에게 있어, 레벨을 35까지만이라도 올렸다면 단숨에 신다가 판매하는 장비를 장착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진성이 진심으로 아쉬워함을 오히려 눈치챘기 때문일까.
샤란의 눈썹 끝이 치솟으려는 찰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샤란 님?"
그녀에게 말을 붙인 것은 카곤이었다.
"-아, 카, 카곤. 잘 지냈어요?"
"물론입니다. 여왕님과 샤란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냈지요."
샤란과 같은 흑요정 종족이자 흑요정들의 국가인 펜네스 왕국 출신.
흑요정 왕국 내에서 이미 높은 계급인데다 흑요정 왕국의 여왕에게 총애받는 샤란에게 잘 보이고자 고분고분한 말투를 쓰는 카곤이었으나, 진성을 흘겨보는 눈빛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못생긴 인간과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이 작자가 샤란 님을 곤란하게라도 만든다면-."
"아,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이제는 맞다고 해야 하려나요?"
샤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려다 말고 슬쩍 말을 바꿨다.
카곤의 눈빛을 받는 와중에 샤란의 눈빛마저 바뀔 즈음이 되어서야 진성은 주변을 살피다 말고 멋쩍은 웃음을 내뱉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농담이었고요. 크흠, 샤란 님도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긴... 장비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점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거든요."
"...확실한가요?"
그 와중에도 장비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언급하던 진성은 이제 샤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제가 실제로 여길 온 이유, 중요한 이유라 말씀드린 건-."
카곤을 바라보며 진성은 말했다.
"-마가타 때문입니다. 카곤 님의 마가타가 곧 필요해질 거예요."
흑요정들이 사용하는 비행선, 마가타.
하늘성에 떨어진 비행선 도르니어와 형태는 다소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하늘을 날 수 있는 선박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며, 현재 아라드 대륙에서 민간인을 태우고, 벨 마이어 공국의 영공을 공식적으로 통행할 수 있는 것은 카곤이 유일하다는 걸 진성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샤란과 함께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단순히 그에게서 장비를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가타? 내가 마가타 보수와 운전은 잘하지만 너 같은 인간을 태워줄-."
"태워주셔야 합니다. 저는 저기...저곳에 가야 할 테니까."
진성은 하늘을 가리켰다.
때마침, 무언가가 햇빛을 가리며 진성과 샤란 그리고 카곤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저건...."
하늘을 나는 고래, 떠다니며 움직이는 대륙.
하늘성에서 잠깐 스치듯 지나갔던, 창공을 부유하는 거대한 생명체, 베히모스.
"조만간 저곳에 가게 될 겁니다, 샤란 님. 그때를 위해서 준비 해야해요. 저에게서 '정보'를 받아 가길 원하신다면."
진성 자신의 다음 목적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베히모스라면, 그곳에 무난하게 가기 위한 '밑밥'을 깔아놓기 위해서.
샤란이라면 껌뻑 죽는 카곤에게, 확실히 마가타의 탑승에 대한 권한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곤 님, 그때가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아, 마가타는 바로 날 수 있는 거죠?"
진성은 카곤에게도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카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진성에게 짜증을 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당연하지! 당장이라도 화끈하게 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 녀석을 태우는 건-."
"부탁해도 될까요...카곤?"
진성의 노림수는 완전히 먹혀들었으니까.
G.S.D의 정체에 대한 가설부터 아이리스와의 대화, 로리안의 행방 이후 여기까지.
헨돈마이어의 마법학교장이자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은 진성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셈이었다.
그리고 샤란의 부탁을 카곤이 들어주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진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좋습니다. 그러면 카곤 님? 아이템 목록 좀 볼 수 있을까요?"
"자, 장비까지 정말로 구입하려는 거예요? 진짜?"
"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장비가 필요한 건 사실이라고. 어디 보자, 뭐가 있나~?"
그리고 잠시 후, 진성은 자신의 명성 수치를 확인하였다.
기존 모험가 명성 17.
변경 모험가 명성 65.
아직도 갈 길은 멀다지만 적어도 4배 가까운 성장은 이미 확보한 진성이었다.
* * *
샤란은 말했다.
"혹시 여기 남아 대마법진의 관리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네?"
세리아는 놀라 당황한 눈으로 되물었으나 샤란은 침착했다.
"오염된 대마법진을 정화했던 능력....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세리아 양이 대마법진의 관리를 도와준다면 정말 든든할 거예요. 마법에 관해서도 정식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늘성에서 할 수 있는 대마법진의 관리/보수와 관련된 제안.
거기에 더하여 마법까지 알려준다는 말에 세리아는 당황한 듯 답변했다.
"잠, 잠깐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일련의 흐름을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는 건 진성이었다.
하늘성에서 보았던 세리아와 여자 격투가가 마법사 길드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여격가 유저의 하늘성 파트는 이제 완전히 끝났겠군.... 어이고, 힘들어라.'
샤란이 진성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여유롭게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
유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그는 말했다.
"온다고 했죠? 그리고 제 예상처럼 제안하면 받아들일 거라 했죠? 마법사 길드의 인력 관리 측면에서도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샤란에게 '세리아가 곧 올 테니 그녀를 끌어들여라'라는 조언을 해준 게 바로 진성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샤란은 길드장에게 어울리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이것도 진성 씨가 말한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조언이었나요?"
"그렇다고 해 두죠."
"...그러면? 진성 씨는 이제 뭘 할 건데요?"
그러곤 진성에게 물었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진성도 곧장 답할 수 없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베히모스로... 가야죠."
"언제?"
'어디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는 감을 잡을 수 있었으나 역시 진성에게 있어 '언제'와 '어떻게'에 대한 방법은 당장 알 수가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진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무언가를 허공으로 튕겼다, 붙잡기를 계속했다.
"글쎄요. 때가 되면? 하핫,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 큐브랑 포션 말고 말씀드렸던 '그 포션'도 혹시 제작 가능한지 빨리 알아봐 주세요. 아무래도 급하거든요."
"...하여튼."
마치 동전처럼 보이는 그것을 몇 번이나 튕기며 너스레를 떠는 진성에게, 샤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나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불안한 것은 진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
마법사 길드를 나와 웨스트코스트의 길거리를 누비며 진성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뭐가 오염되었을까.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오염이 드러나게 될까.'
지금까지 처리한 두 건의 오염 제거 작업.
굴 구위시에 대한 오염을 처리할 때만 해도 그저 몬스터만 처치하면 끝인 줄 알았건만.
이상 현상이 막 시작되는 부분을 바로 정리하면 될 줄 알았건만.
'하늘성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지. 레니의 등장으로 인해 꼬인 걸 알아냈다지만 오염된 건 레니가 아니었어.'
정작 오염되었던 건 도르니어였다.
살아있지도 않은 비행선이었다.
'오염된 무언가가 '향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주요 인물을 미리 없애거나-. 유저, 모험가가 그 인물과 마주치지 못하게끔 막는다...?'
그나마 진성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결론을 내려 볼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을 터.
'해당 유저가 겪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내의 '무언가'가 오염되어 있으면...그 오염이 해결되기까지 전체 퀘스트가 전부 다 꼬여있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가?'
첫 번째는 세리아였다.
굴 구위시가 세리아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면 당시의 유저인 남자 귀검사에게 있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는 의미가 사라졌을 터.
두 번째인 레니 또한 마찬가지다.
'레니는... 그 실력 때문은 아니라지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야. 어떤 의지라고 해야 할까. 유저들이 조종하는 '캐릭터 모험가'가 연단된 칼날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중요 인물로 꼽아도 될 정도인 레니가, 그토록 허무하게 '추락하는 비행선에 치어 사망'해버렸다면 역시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은 이어질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후... 갑갑하네."
벌써 두 번을 겪었지만 두 번 모두 케이스가 다르다보니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진성에게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성의 뒤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왔다.
"ㅋㅋ 머가요?"
"왓, 깜짝-...."
진성은 황급히 입을 다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려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의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은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닉네임 '순수찍기'.
창을 어깨에 턱, 걸치고 있는 마창사 직업군의 뱅가드 캐릭터.
진성이 하늘성에 잠입할 때 파티를 맺어 통행증의 문제를 해결할 때 마주쳤던 유저.
"what 깜짝? ㅋㅋ"
순수찍기의 발언에 진성은 잠시 고민했으나 아예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없었다.
그 또한 진성 자신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우선 자신의 '놀란 반응'이 어떻게 인지되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자연스레 인사나 하고 지나가려 했건만....
"오랜만이네요. 순수찍기님."
"ㄹㅇ 요즘 마따끄들은 이상하게 말하네 유행인가 ㅋㅋ 저번에도 그렇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따라서 순수찍기의 발언에는 진성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지금 이 말뜻은-. 마따끄라는 건 다크나이트의, 일종의 별명 같은 건데?'
진성의 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저 사람이 유저라면, 모니터를 통해 진성 자신의 아이디를 봤을 터.
처음 다가와 '뭐가요?'라든가 말장난 같은 말은 진성 자신을 알아보고 장난을 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게 내뱉은 푸념에 말줄임표 따위가 붙어서...그걸 이상하게 여기고 웃겨서 말을 건 거라면....'
거기에 더하여, 조금 전 '순수찍기'가 한 말을 합쳐본다면!
"? 님 저 암?"
순수찍기는 진성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일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진성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날 기억하지 못하면 차라리 다행이야. 문제는 그게 아니다. 지금 이 사람, 순수찍기의 표정은-.'
그러나 다크나이트 유저 수는 귀검사, 격투가, 거너, 마법사 직업군에 비해 많지 않다.
하늘성 앞에서 파티를 맺은 데다 그 이후 한 번의 맵 이동만 있었을 뿐 곧장 파티를 해제하는 '독특한 체험'이라면 기억 속에 남았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진성은 다크나이트의 육신인 자신과 키가 유사한 마창사의 눈을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차츰 변하는 것을 보았다.
낯설고 생소하다는 눈빛에서, 어쩐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그 눈빛!
"아 님 하늘성 파티했던 그 사람임? 그 마따끄?"
순수찍기는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성은 직감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보다, 아마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023
순수찍기는 연속해서 채팅쳤다.
"님?"
"하늘성 파티 맞죠?"
"마즘?"
"대답. 대답."
그것도 진성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진성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마창사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간 그의 '모니터 속 진성 자신의 모습'이 움직였다고 반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
'날 알아보지 못했다가 이제서야 기억이 났을 수 있어. 그러면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엇보다 이러한 의심을 합리적으로 하는 것은 [내 상태] 때문이었다.
'하늘성에 막 오르며 사냥이나 하던 시점에는 명성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게임 시스템에 분명하게 보이는 이름.
진성, 이라는 두 글자는 또렷하게 박혀 있다.
'원래 닉네임, 그러니까 내 이름은 원래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때는 없었다가 지금은 생겼다. 그것도 진성이라고. 이런 일이 발생했을 시점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어.'
진성 자신이 빙의한 이 육신을 G.S.D에게 '진성으로 불러 달라'고 소개했을 때.
그때 [내 상태]에 닉네임이 새겨졌던 게 아닐까?
샤란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이제는 완벽히 이 육신이 '진성'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바로 문제라는 거다. 그렇다면... 결국-.'
꿀꺽.
진성의 합리적인 의심이 도달한 결과.
'그 이전에는?!'
G.S.D에게 자신을 진성이라 소개하기 이전, 즉, 여전히 진성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마창사 유저와 '파티를 맺을 시점'에 진성 자신의 닉네임은 무엇이었을까.
눈앞에 있는 마창사 유저 '순수찍기'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하는 점.
"님님?"
"읏-."
진성은 머릿속에서 갑작스레 울리는 소리에 결국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쭉 모르는 척하려던 진성이 자기도 모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ㅋㅋㅋㅋ 왜 대답 안하셈? 귓속말은 잘 가네"
그것은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스템 중 하나, '귓속말'이었으니까.
진성으로선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귓속말도 되는 건가.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귓속말이 울리는 그 느낌을 도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무엇보다 이 상황을 그냥 넘겨야만 할지.
골전도 이어폰 따위를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두개골을 울리는 말소리가 들려왔을 때, 진성은 선택했다.
"렉렉렉."
그것은 언젠가, 진성 자신이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 * *
"오! 반응했다!"
순수찍기의 기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훑었다.
[아 렉 ㅋㅋ 님 그때 저랑 하늘성 파티 했던 살마 맞죠?]
어찌나 급하던지 오타까지 내며 채팅을 입력했으나 순수찍기는 그보다 더 큰 관심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네. 하이용. 크크.]
"크크? 풉, 진짜 웃기네. 뭐야? 틀인가?"
순수찍기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채팅은 그 미소를 짓는 것보다도 더욱 빨랐다.
[진성님]
[근데 님 닉은 어케 댄거에요? 닉변권 씀?]
게임에 익숙한 유저답게 굳이 한 문장으로 쓰지 않고 나눠 쓰는 습관까지.
[제 닉네임이 왜요?]
진성이 되묻자 순수찍기는 안경을 슬쩍 고쳐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저번에는 닉 없었음 ㅋㅋ 그래서]
[특수문자로 닉 만들었나 햇는데]
[그렇게 못 만든다고 하던데 그래서 다른 방법 쓴줄]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채팅이란.
진성은 답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버그 아니었을까요? 흐흐.]
그것은 게임에 빙의된 자만이 겪는 일종의 안타까움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아하하핫! 흐흐래, 흐흐! 진짜 뭐야, 이 사람?"
자음만 사용하는 인터넷 대화체를 쓰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나 큰지.
그러나 진성이 하는 말은 도저히 그런 식으로 출력될 수가 없었으니.
순수찍기는 손바닥으로 책상까지 치며 웃었다.
[근데 렙이 아직도 낮네요 ㅋㅋ 시나리오 안 밀었음?]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 속에 있는 그 눈을 반짝이며 순수찍기는 다시 물었다.
[제가 사정이-. 천천히 하는 중이거든요.]
[? -. 이런건 왜해요? ㅋㅋ]
[제가요? 크크. 아닌데 안 했는데. 아 오타인 듯요. 백스페이스 누르다가 잘못 눌러진 듯.]
만약 순수찍기가 볼 수만 있었다면, 지금쯤 적잖이 당황한 진성의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그러나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답변하는 진성의 말은 적어도 논리상 틀림이 없었기에, 순수찍기는 그 말을 믿으며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요즘 40대도 이렇게 안 하잖아. 말끝마다 마침표 찍는 것도 그렇고 최소 50대, 아니면 설마 60대? 근데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던파 하기엔 어려울 텐데... 아, 그래서 천천히 하는 중이라고 말했나?'
순수찍기는 모니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고 또 오랫동안 해봤기에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포근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이런 유저분이 있구나. 좋네... 던파는 다른 게임에 비하면 채팅창이 깨끗한 편이지만 그래도 가끔 곱창날 때가 있는데. 그런 거 보다가 이런 분 보면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게임 던전앤파이터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캐릭터를 키워왔던 유저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인간미라고 해야 할까.
[나중에 같이 파티 ㄱ?]
순수찍기는 물었다.
진성의 답변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래요. 레이드 전에라도 파티로 던전 돌 수 있으면 같이 고.]
[같이 고 ㅋㅋ ㅇㅋ 같이 고]
순수찍기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채팅을 쳤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진성은 움직이며 말했다.
[네, 즐던.]
[ㅋㅋㅋㅋ 즐던요]
웨스트코스트 항구 방면으로 걷는 진성을 보며 순수찍기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르신이 저런 채팅하는 게 왜 이리 귀엽지? 닉네임도 딱 본명 쓰시는 것 같아서-. 잠깐, 진성?'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순수찍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던전앤파이터 창을 최소화하며 순식간에 너튜브를 들어가는 흐름까지.
"...맞네. 교육 공대 너튜버랑 이름이-."
순수찍기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곤 답을 내렸다.
'-비슷한 걸 보니 이 사람 보고 시작하신 어르신일 수도 있겠구나.'
게임에 빙의된 사람, 이라는 결론 따위가 날 리는 없는 것.
순수찍기는 다시금 게임 던전앤파이터 창을 열며 기지개를 켰다.
"아으으, 나중에 꼭 파티 해봐야지. 어떻게 플레이하실지 너무 궁금하다. 캐릭도 하필 다크나이트라 더 그렇고."
그러곤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치켜올렸다.
[길드]순수찍기 : 야 우리 길드에 어르신 한 명 추천해도 됨?
[길드]일단아포씀 : 갑자기 어르신? 순수 누나 아는 사람임?
[길드]순수찍기 : 아니 모르는사람인데 ㅋㅋ 뭔가 좋아서
그녀는 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미소 지으며 타이핑했다.
* * *
'일단 잘 넘겼겠지? 으, 순수찍기... 닉네임 기억해두자.'
진성은 웨스트코스트 항구까지 이동한 다음에 재빨리 골목에 숨어들었다.
게임에 빙의되었다고 진성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한다 한들 그것을 믿을 사람도 적을 터, 그럼에도 '들키면 페널티가 있다'라는 경고 하나 때문에 이토록이나 불안하고 초조해야만 하다니.
심호흡을 거듭하며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기도 잠시, 진성의 몸에는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사도를 죽인다는 게 말로는 쉬운데 말이죠."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진성은 건물 벽에 몸을 바싹 기대곤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반의 옆에 서 있는 것은 여자 아처 유저, 전직은 뮤즈.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당연히 유저는 아니었다.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반드시 돌아가서 복수할 거예요!"
목소리 자체는 낯설었으나 상황상 진성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진성 자신이 구한 것과 다름없는 사람, 하늘성으로 떨어지던 비행선 도르니어에 탑승하고 있었던 부상자.
'오필리아가 저렇게 말하는 부분이라면....'
하늘을 부유하는 거대한 고래, 베히모스의 등 위에 있는 고대 유적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활동하는 종교 GBL의 신도, 오필리아.
"마음은 이해하지만, 힘도 없으면서 무리하지 마."
"신도 모두가 저의 가족이었어요. 베히모스의 신전은 제 고향이었고요. 그런데 로터스가... 신도들끼리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게끔-."
그런 그녀가 증오와 공포에 휩싸여 울분을 토하는 부분만으로도 진성은 알 수 있었다.
'로터스다. 정신지배, 정신착란, 정신조종의 사도.'
베히모스에서 비행선 도르니어를 타고 오필리아가 탈출한 이유는 그곳에 사도 중 하나인 '제8사도, 긴 발의 로터스'와 관련된 퀘스트의 도입부가 시작되고 있음을.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극초반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유저는 사도 한 개체를 직접 상대해야만 한다.
'이번 퀘스트에서도 오염의 원인자가 힘을 써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장난 아니겠군.'
그 여파는 보통이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모험가인 유저가 사도 로터스를 처치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설정상 사도 로터스는 아라드에 오기 전, 자신이 거주하던 행성의 '모든 생명체'를 정신 지배했다고 밝혀져 있다. 그 힘이 여기에 그대로 나타나면 끝장이지.'
최악의 상황은 진성만이 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오필리아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던 아간조는 마치 진성의 말을 대변하듯 말해주는 중이었다.
"반, 말하는 뜻은 알겠다만 그만해라. GBL교의 비극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 될 수 있다. 어서 베히모스를 살피고 사도를 막아야 한다. 여왕님께서 마가타를 준비해주신다고 하셨으니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지."
GBL교의 비극이 아라드 전역에 퍼질 수도 있다는 점.
따라서 벨 마이어 공국은 이 사안에 대해 시급히, 즉각 대응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있던 하츠에게 말했다.
"이봐, 부단장님. 내가 대표로 먼저 가볼 테니까 그동안 애들 좀 준비시켜줘. 나만 고생할 순 없으니."
"하여간...."
하츠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여자 아처 유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마가타를 타고 움직이는 게 아닌가?'
던전 지역:그란플로리스와 하늘성은 모두 위치가 고정되어 있으며 육로로 향할 수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유저가 키보드로 조종하는 '캐릭터 모험가'의 움직임에 따라 시나리오가 결정된다고 생각했건만....
'하긴, 마가타를 타는 장면 같은 건 인게임에도 표현된 적이 없어. 그냥 베히모스 던전으로 툭, 들어가면 바로 베히모스의 등 위였다. 그러면 이건-.'
특수한 던전 지역에 대해서는 유저와 NPC간의 괴리가 지금처럼이나 커진다는 뜻?
유저는 그냥 미니맵을 보고 맵 이동을 몇 번 하면 곧장 '던전 지역:베히모스'에 도달하겠으나 실제로 비행선을 타고 가야 하는 NPC들은?
진성은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 이 현실에 존재하는 NPC들과 게임으로 겪는 유저와의 괴리에 대해 고민하려 했다.
빠른 발소리와 함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맞습니다! 단장님만 고생시킬 수는 없죠! 저도 가겠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반과 하츠 그리고 진성마저 경악해야 했다.
"...레니.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인가."
앞선 두 사람은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하급 기사, 레니 블레인스콕의 성질 때문에 한숨을 이어 내쉬었겠으나 진성은 달랐다.
'또 시작이야?! 레니부터?'
이 시점에서 레니는 베히모스에 가지 않는다.
적어도 진성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레니는 등장조차 않아야 정상이다.
즉, 이미 유저가 없어진 자리에서 달려오는 레니나 그녀를 대하는 반응들은....?
"하지만 레니의 말도 일리는 있다. 아간조 님이나 모험가가 함께 한다지만... 단장, 레니도 데려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나."
"안전? 레니가 내 등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그래도 쓸모는 있겠어. 데려가서 한번 고생하고 나면 다시는 저런 소리를 못 할 테니."
하물며 레니를 베히모스에 곧장 데려가겠다는 반의 반응은?!
진성은 확신했다.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여자 아처 유저.
조금 전까지 아간조, 반, 오필리아 등의 대화 스크립트를 보며 퀘스트를 완료한 유저!
'...이게 이번 오염이다.'
그녀의 퀘스트가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진성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몇 번 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다시금 뻔뻔하게 연기를 해야만 할 테니까.
024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인원들이 역시나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일까.
"새, 생명의 은인님!"
"너는 그때 그-."
"아, 아, 부단장.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G.S.D 님의 제자분인데."
제각각의 표정을 지은 기사들이 진성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나마 정상적인 건 역시 아간조밖에 없었다.
"마법사 길드...? 샤란 님이 보낸 건가? G.S.D 님과는 어떻게 된 거지."
"아, 스승님의 명도 있고 또 샤란 님께서 도와달라 말씀하신 것도 있어서 당분간 마법사 길드의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크흠, 지금 '이 사건'과 관련해서도 역시 힘쓸 일이 필요할 것 같으니 저보고 조사를 부탁해주셨고요."
진성은 거침없이 말했다.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과장이 조금 포함되어 있다지만 이것은 거짓말도,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왕님께서 마법사 길드에 이야기를 하신 건가. 으음."
아간조는 이렇게나 빠른 대처에 잠시 의심을 했으나 진성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예. 베히모스에 전이된... 사도 로터스와 관련된 문제를 쉬이 넘길 수는 없으니까요. 가급적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사하는 일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저 혼자 일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 있으니 레니 님과 함께 움직였으면 합니다."
당연히 첫 번째 목표는 레니에 대한 점이었다.
지금 당장 레니가 베히모스에 오르게 된다면, 유저에게 그녀가 보일 확률이 높다는 것.
즉, 그녀를 진성 자신과 함께 움직이게 함으로써 유저의 '모니터 화면'에서만큼은 떼어놔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
"또한 레니 씨와 함께 다닌다면, 제가 샤란 님께 들었던 조사에 필요한 부분만 재빨리 마무리 후 여러분들과 여러 가지를 공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진성 자신이 그들과 무작정 함께하지 않은 채 따로 행동할 수 있는 안배까지 두자는 게 진정한 목표였다.
그 합리적인 제안에 반대할 자는 없었다.
"좋잖아요, 아간조 아저씨. 아저씨랑 나랑 모험가는 길을 뚫는 데에만 신경 쓰면 될 테니까. 조사를 하거나 뭐 귀찮은 것들은 이분에게 맡기면 아무래도 효율적이지 않겠어요?"
반 발슈테트는 긍정적인 발언과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대로 된 실력도 볼 수 있을 테고."
진성을 향해 미묘한 눈빛을 띤 채.
"그렇겠지. G.S.D 님의 제자분이라면 실력은 믿을 수 있는 데다, 샤란 님께 조사에 대한 부탁과 조언을 받았다면 우리가 놓칠 수 있는 단서들도 잘 찾아줄 테니. 고맙군, 부탁하겠네."
그 말을 들은 아간조가 고개를 끄덕인 시점에서 확정은 난 셈이었다.
레니는 진성을 흘끗거리며 자신의 임무에 대해 재차 확인했다.
"제, 제가 진성...님과 함께 후방을 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단장님?"
"그래. 만약 앞선 우리들이 모두 정신지배에 당하면 후방에서 대처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저 '제자님' 외에도 레니 네가-."
"옙! 만에 하나 단장님이 정신지배를 당하신다면 깨어나실 수 있게 곧장 단장님의 옆구리를 찔러드리겠습니다! 무, 물론 이분과...진성 님과 함께요!"
임무에 대해 확인하는 것인지, 자신의 열정을 어필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
"...에휴. 그래, 그래라."
"으음, 곤란하겠군, 반."
반과 아간조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으나 어찌 되었든 진성의 목표는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샤란을 운운하긴 했다만 아간조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도 했으니, 앞으로 진성 자신의 행동반경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뭐야! 왜 이리 늦게 오는 거야? 급한 일이라며?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빨리 좀 오라고!"
카곤은 진성과 반, 아간조 그리고 레니를 보며 투덜거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가타는 순식간에 창공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구름을 뚫고 창공을 누비는 거대한
고래, 아니, 고래라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나 압도적인 생명체.
베히모스가 곧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 * *
'...여기서는 이렇게 되는 건가?'
대부분의 NPC들이 베히모스의 위용에 놀라고 있을 때, 진성은 다른 부분에서 놀라는 중이었다.
하늘성을 가봤기 때문에 비교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늘성에서는 여격가 유저가 있었어. 죽은 눈으로 오르는... 말 그대로 진짜 '인형' 같은 모습으로 세리아와 함께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성의 층계를 일일이 오르는 모든 모습을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연출할 수는 없다.
즉, 그 부분은 네메르가 말했던 '축약' 그리고 현실의 아라드와 게임 간의 괴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베히모스는 비행선인 마가타를 타고 가야하는 던전 지역이라 이런 걸까. 죽은 눈으로 비행선을 타고 있는 모습조차 나오지 않는 데다... NPC들이 모험가 운운을 하면서도 모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아무런 태클도 걸지 않아.'
차이가 있다.
그 부분까지 생각했을 때 진성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뭐, 실제로 게임상에서 비행선을 타지 않고 이동하는, 그냥 던전 지역으로 덜컥 들어가는 파트는 베히모스가 유일하기도 하니까. 당장은 나한테 잘된 일이지.'
이후에도 비행선 또는 해상열차 등의 던전 지역과 맵이 있으나, 그 부분에서는 모두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 표현이 되어있는 것.
그때가 된다면 이러한 이동 과정에도 유저인 모험가의 껍데기 같은 모습이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진성의 추측이었다.
후우우우웅────...!!
베히모스 근처로 다가갈수록 강해지는 건 돌풍만이 아니었다.
카곤은 인상을 찌푸렸다.
"말해두지만 난 바로 베히모스에서 떠날 거야. 하늘성의 마력 때문에 체류하고 있진 못해. 돌아가려면 신호를 보내라고."
주변에 있는 하늘성에 설치된 바칼의 마법진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까지.
카곤의 경고에 아간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 양의 말에 따르면, 사도 로터스는 신전의 중앙에 있다고 하니 우선 외곽에 내려서 상황을 살피는 게 좋을 것 같네."
외곽의 유적지로 비행선이 접근하여 마침내 착지할 수 있는 공간을 차지했을 무렵.
진성은 풉, 하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생겼어! 유저가 생겼어!'
반과 아간조의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어느덧 두 사람의 곁에는 여자 아처 유저의 모습이 생성되었으니까.
어쩐지 미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역시 이런 부분은 결국...이 세계가 게임과 연동되어 있다고밖에 볼 수 없구만.'
분명 게임 던전앤파이터로 즐기는 유저들이 있는 반면, 진성 자신에게는 목숨을 걸고 생존해야 하는 현실의 세계라니.
'하지만 어쩐지, 음, 뭔가....'
진성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공포와 두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모니터와 키보드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가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점이라 해야 할까.
먼저 베히모스에 내린 반과 아간조 그리고 여자 아처 유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베히모스를 본따 눈이 세 개인 가면... GBL교 신도들의 가면이다. 생존자인가?"
"으으, 로터스 님에 거역하는 자.... 죽어라!"
세뇌된 GBL교 신도는 적극 달려들었으나 반은 능숙하게 반격하며 그를 베어버렸다.
"저들을 놔두면 죽는 건 우리니까. 사도에게 조종당하느니 죽는 게 더 편할 거야. 도와준다고 생각하자고."
"반의 말이 맞네. 저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는 이상...이게 최선이겠지."
아간조 또한 그 말에 동의했을 때, 마침내 여자 아처 유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전 지역:베히모스에서, 유저의 뒤를 쫓아야 하는 진성의 임무도 본격적으로 수행해야 할 차례였다.
* * *
돌을 쌓아 만든 고대 유산의 내부는 밖에서 보기보다 더욱 넓었다.
진성은 부서진 유산의 잔해 등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레니 님, 조심하세요. 모험가와 반 님, 아간조 님이 휩쓸고 지나갔다지만 아직 어떤 위험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이미 유저와 반, 아간조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조사를 시작한 상황이다.
유저가 지나간 방면이라면 반드시 '모든 몬스터'를 물리쳐야 다음 방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특별한 위협이 없겠으나, 반과 아간조가 지나간 방향은 또 다르다.
무엇보다 그들을 곧장 뒤쫓는 게 아니라 다소간의 여유를 두고 따라가는 입장 상 이번에는 적을 조우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지. 레니 같은 성격에 갑자기 소리를 질러버린다거나, 유저를 완전히 따라잡아 버리면-.'
그 시점에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더욱 꼬이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미 레니가 이곳으로 온 것만으로도 시나리오가 '오염'되었건만, 그 위험을 더욱 키울 수는 없기에 진성은 경고를 한 것이었다.
"그냥 레니 씨...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까처럼."
다만, 진성의 충고를 듣고 있던 붉은 머리의 하급 기사는 진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으, 아? 네? 레니 씨-. 아까? 제가 언제 그랬었나요?"
"네. 마가타에 탑승하기 전에... 단장님께 제안하실 때요."
레니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오히려 진성은 당황스러웠다.
그런 적이 있었나? 진성 자신이 그런 표현을 썼다는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나?
레니가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진성은 우선 사과부터 하려 했다.
"미안합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죠."
"아뇨! 기분 나빴을 리가 있나요. 생명의 은인님이신데. 오히려 저야말로!"
그러나 레니의 상황은 진성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기사인 자신을 '님'이라 칭하지 않고 '씨'라 칭하여 기분이 나빠 목소리가 내려갔나, 싶었던 예측 따위가 맞을 리는 없었다.
그 반대라고 해야 할까.
"진성 씨라고 불러도 되는지...물어보고 싶은데."
레니는 그 머리 색깔처럼 양 볼을 붉히고 있었으니.
이제 당황스러운 건 진성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기사는 기사였다.
"어, 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원래부터 모험가랑은 친했나요?"
당황한 상대의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는 기술은 확실히 기사 서품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봐야 할 테니까.
진성이 무어라 답할 새도 없었다.
나이? 무슨 나이를 말해야 하는가.
모험가랑 친했냐고? 따위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는 찰나에도 레니는 재잘거리는 중이었다.
"G.S.D 님이라면 우리 단장님뿐만 아니라 부단장님, 저 대검의 아간조 님까지도 존경하는 분이신데 어떻게 제자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어요?"
상대가 빈틈을 보였을 때 그 허점을 파고들어라.
그리고 상대를 당황케 하라. 그렇게 한다면....
"아니, 사실 진짜 묻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라... 만나는 분은 있으신가요?"
치명타를 입힐 수 있으리라.
진성은 그저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어야 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일련의 흐름이라면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레니가-. 어, 근데 이러면... 어....'
꿀꺽.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은 결국 현실이다. 진성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NPC라고만 생각했던 '존재'들에게도 모두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
'인게임에서도 호감도 작 같은 게 있었으니 이해는 간다만-. 그게 아니라 중요한 건-.'
진성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는 자, 레니.
그녀에 대해 진성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게 오히려 문제였다.
레니의 성격이나 배경을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레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다.
진성은 레니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워하던 것도 조금 전까지가 끝이었다는 듯 그녀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느새 진성 자신을 관찰이라도 하려는 적극적인 자세 또한 그녀의 성정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진성은 그 눈을 마주하며 미소만 지을 수는 없었다.
진성이 알고 있는 점 때문인 게 첫 번째 이유였으며.
"반지가 없으신 걸 보니 결혼은 하지 않으신 것 같은-."
"죽어라아아아아-!"
"비키세요!"
"꺅!"
어느새 레니의 측면에 나타난 GBL교의 세뇌된 신도 때문이었다.
진성은 레니를 옆으로 밀치며 그대로 달려나갔다.
허리춤에서부터 뽑은 것은 검 손잡이였다.
그 끝에 부착된 날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 길드의 자금을 사용해 카곤으로부터 장비를 구입했으나, 진성이 구입한 것은 일반적인 검이 아니었으니까.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렸을 무렵 진성이 쥔 손잡이에서부터 뻗어 나온 것은 녹색의 빛이었다.
광검光劍. 진성은 GBL교의 신도에게 광검을 휘둘렀다.
"<다크 슬래쉬>!"
GBL교 신도의 몸을 갈라낸 '빔 세이버'의 날은 웅웅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레니의 눈동자에서도 비슷한 빛이 반짝이는 중이었다.
025
진성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무기의 위력이었다.
스킬 포인트를 조금 더 투자했다곤 하지만 '야이바'와 '빔 세이버'의 차이는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공격력 차이부터 어마어마하지. 야이바는 꼴랑 물리 공격력 96이었는데, 이건 233이라고. 공속 차이도 압도적이고.'
차후에는 마법 크리티컬 등 여타 요소를 고려해야 하겠으나, 당장의 스킬 구성이나 활용도 면에서 광검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조금 전 검증된 실전에서도 진성의 생각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진성이 예상치 못한 점이라면 자신을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라고 해야 할까.
레니는 말했다.
"이번에도 또 저를...."
"아, 저기, 그...위험- 하니까요? 아무래도?"
이 상황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진성은 멋쩍게 웃으며 광검의 빛을 되돌아오도록 수거했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해주는 자가 레니라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으나 그보다 더 곤란한 일 또한 있었다.
'아니, 여성이랑은 무슨...대화를 해야 하는 건데!?'
회사를 다닐 적에는 업무와 연관된 대화라도 해본 적이 있지만, 그 외에 여성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나눠본 적이 없으니.
하물며 진성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호감을 나타내는 이성이 있었던가?
설령 있었다 해도 그 마음을 감추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라 한다면, 저렇게까지 드러내놓고 눈을 반짝이는 이성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우리도! 얼른 가보죠! 여기서 이렇게만 있을 순 없잖아요? 조사도, 어쨌든 해야 하고!"
당황한 진성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레니는 그런 진성을 수줍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진성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는지.
차마 레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진성은 재빨리 몸을 돌려 걸어야만 했다.
"이쪽 방면에서 세뇌된 신도가 나온 거 보면 아간조 님이나 반 님이 가신 것 같으니 우리는 이쪽, 모험가가 간 방향으로 가는 게 낫겠어요."
"네, 그렇게 해요. 진성 씨의 판단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고오맙...습니다."
유저가 지난 자리에는 잔여 몬스터가 없을 거라는 판단에 의한 결정은 결코 틀리지 않겠지만, 어차피 레니에게 그런 건 중요한 문제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진성조차 등 뒤에서 느껴지는 레니의 아우라 때문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진성은 차츰 정글처럼 변해가는 주변 지형을 살피면서도 레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보통의 NPC라면 상관없어. 샤란 님처럼...그냥 단순하게 친해져도 좋은 분들은 괜찮아. 얼마든지 도움도 될 테고. 하지만 레니는....'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하급 기사.
제국의 기사단과의 연결고리로 생각한다면 레니만큼 훌륭한 NPC도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좋지 않아. 이 흐름은 좋지 않다.'
여성에게 인기를 끈다, 따위의 단순한 흥분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기쁨보다 큰 감정은 걱정과 우려.
그리고 진성 자신이 '미래에 느끼게 될 슬픔'에 오히려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성...씨?"
"아, 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서야 진성은 다소 진정된 마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모험가가 이쪽으로 갔다지만 단장님이나 아간조 님은-."
"아마 우리가 베히모스에 내려왔을 때부터 감시하던 세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분들은 미행당하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그 뒤를 잡기 위해 정글 지형으로 들어가셨을 테고... 아마 그곳에서 미행당하는 일당들과 담판을 지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헤에, 진성 씨는 전투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 전략적인 면에서도 뛰어나시군요."
레니는 입이 마르도록 진성을 칭찬했으나 지금의 진성은 조금 전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베히모스의 퀘스트 흐름이야 뻔하지. GBL교의 이단심문관이라 할 수 있는 이사도라를 만날테고. 아직 세뇌되지 않은 이사도라와 함께 백야였던가, 베히모스 등에 있는 유적지 중 가장 높은 곳이자 GBL교의 병기가 숨겨져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하게 될 거다. 그리고 우리도 우선은...그쪽으로 향하는 게 옳을 테고.'
지난날 경험했던 게임 내 시나리오 흐름을 되새기며 진성은 나아갔다.
레니는 진성의 뒤를 쫓으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생명체의 등 위에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네요."
"베히모스라... 이런 고래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등 위에 건물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울창한 정글이 있다니. 진성 씨는 혹시 알고 있었나요?"
실제로 궁금했을지, 그저 진성의 반응을 기대했을지.
어쨌든 레니는 양쪽 중 어느 것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지금의 사태 때문만이 아니라도...레니와는 거리를 두는 게 낫겠지.'
진성이 일부러 그녀와의 친밀도를 올리려 하지 않으려는 데다, 정글 지형이 되어버린 베히모스의 유적지에서는 길을 찾고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얼마나 되었을까.
우거진 수풀들이 다소 정돈되며 곳곳에 여신의 부조가 새겨진 벽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지점 즈음에서.
"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오는 육안六眼의 가면들이 있었다.
"로터스 님께는 다가갈 수 없다...."
"죽여, 죽여라. 죽여."
세뇌된 GBL교의 신도들이 역수로 쥔 칼을 들고 나타난다는 것은 모험가, 즉, 유저가 지난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거기에 더하여 진성은 알고 있었다.
지형이 변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던전에 진입했다는 뜻과도 같을 터.
"크르르르...."
세뇌된 신도들 옆에는 또 다른 몬스터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저게...뭐죠?"
눈이 여섯 개 달린 GBL교의 가면을 쓰곤 있지만 어쩐지 인간 같지 않은 형상의 괴물들이 튀어나온다는 뜻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상체 때문에 양손을 바닥에 댄 채 움직이는, 마치 사족보행 짐승이 되어버린 타락한 신도, 속칭 헌터.
"레니 씨, 뒤로 물러서세요. 이제부터는 보통 놈들이 아닐 겁니다."
진성은 빔 세이버의 손잡이를 조작하여 광검의 검날을 돌출시켰다.
"크르르륵, 크르륵-!"
"죽여라, 로터스 님께 영광을!"
그 순간, 몬스터들 또한 쇄도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수는 여덟, 하물며 인간형과 짐승형이 뒤섞여 달려드는 터에 진성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적정 수준의 이번 퀘스트는 레벨 30 언저리, 아마 30을 넘어야 가능한 수준이다. 난 아직 30까지 찍지 못했으니 피격된다면 데미지가 적잖을거야.'
유저들에게는 어렵다고까지 할 수 없는 시나리오 퀘스트이지만 진성에겐 다르다.
하물며 아직 유저 수준의 레벨조차 되지 않은 채 사도 로터스를 처치하는 퀘스트에 난입한 것과 같으니, 그 위협은 배가 될 터.
'제길, 어떤 스킬 콤보를 쓰더라도 한 대 맞는 건 결국 피할 수 없는건가.'
<다크 크로스>에 이어 <홉 스매쉬>를 섞어 최대한 저들의 뒤를 잡고자 하지만 한 대쯤 얻어맞는 것은 반드시 겪어야 하리라 각오했을 무렵!
"<다크 크로-."< p>
"하압───!"
스킬을 사용하는 진성의 곁에서, 몬스터들보다 큰 기합을 넣으며 달려나간 것은 레니였다.
"-스>? 레니 씨!? 무슨-."
그제야 진성은 깨달았다.
진성 자신에게는 수줍은 마음을 표현하려 하지만, 레니가 누구인가.
챙, 하는 마찰음과 함께 세뇌된 GBL교 신도들 세 명의 내리찍기를 막으며 옆으로 돌아 들어간 레니는 지체없이 그들의 등을 베어내며 외쳤다.
"저도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기사입니다! 진성 씨에게 도움만 받고 있을 순 없죠!"
전문적인 검술 훈련 따위는 받지 못한 GBL교의 신도들 따위는 말 그대로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레니'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
1:3의 상황에서도 레니는 능숙하게 대처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진성은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그래, 당장 거리를 둔다기보다... 우선은 함께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언젠가, 아니, 곧 그럴 때가 된다 하더라도.'
이곳은 이미 베히모스다.
사도 로터스를 마주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진성은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고맙습니다, 조심하세요! <홉 스매쉬>!"
"걱정 마세요! 단장님께는 물론, 하츠 부단장님께 혼나면서 얼마나 많이 단련했는데요!"
다소의 고통을 각오한다면 진성 혼자서도 정리가 가능한 수준의 몬스터들은, 레니까지 가세한 '파티 플레이'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조우하는 몬스터 무리들을 헤치며 나아가길 몇 회쯤 지났을 때.
"진성 씨, 앞에 뭔가 있습니다."
"네... 바닥에 뭔가가 떨어져 있는-... 설마?!"
레니의 조언과 함께 진성은 보았다.
이곳이 던전 지역:베히모스 안에 있는 던전 'GBL 여신전'임이 확신해지는 순간이자....
"아이템이에요. 장비! 아이템!"
진성에게 있어선 또 하나의 시스템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 * *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 미세한 보랏빛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은 분명 '마법으로 봉인된' 물건들, 그것을 해제할 수만 있다면 곧장 사용할 수 있는 <레어급 장비>인 것!
'여긴 유저가 지나간 방이구나?! 그리고 유저가... 아마도 확실해. 유저가 안 먹었어.'
던전 지역:그란플로리스에선 그럴 겨를도 없었다.
던전 지역:하늘성에선 여자 격투가 유저가 남김없이 모든 아이템을 다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성 자신이 쫓아왔던 여자 아처 유저는?!
'뮤즈 직업일 때부터 알아봤지! 조작 난이도가 제법 높아서 처음부터 뮤즈 전직을 고르는 사람은 적으니까, 역시 부캐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돈 많은 유저의 부캐인가? 우하핫! 유저들이 안 먹고 그냥 귀찮아서 지나가 버리면-.'
이런 식으로 바닥에 떨어져 남게 되는 건가?
이러한 방식으로 아이템을 획득하는 게 진성 자신에게도 가능하다는 건가?
'-잠깐, 잠깐. 이거 그러면 경매장을 못 쓴다고 그냥 우울하게 있을 게 아니었어. 모든 아이템을 반드시 NPC에게 구입해야 한다거나, 오직 내 손으로 구해서만 써야 한다는 제약이 없다고 한다면....'
진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몇 가지의 아이디어.
하물며 현재 마법사 길드의 샤란에게 부탁해놓은 것이 예상대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조금 전 떠올린 진성 자신의 계획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크아아아아앗-!
온갖 즐거운 상상에 빠졌던 진성을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든 것은 비명이었다.
"진성 씨."
"네, 들었습니다. 바로 앞이에요. 조심히 가보죠."
바로 근처에서 이토록 섬뜩한 괴성이 들린 이유라면, 어차피 유추할 수 있는 점이었으나 진성은 레니와 함께 조심스레 나아갔다.
그리고 곧 볼 수 있었다.
여자 프리스트 유저와 아간조, 반 그리고 보랏빛 로브를 입고 있는 GBL교의 여인.
보랏빛 로브를 입은 새로운 인물이 '모험가'에게 도움을 주는 '이사도라'라는 것을 진성은 알고 있었기에, 그들 앞에 누워있는 누런색 찢어진 로브의 괴수에 집중해야 했다.
"이사도라, 우리 신도들은...가족 아니었나.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왜-."
"알소르. 그대는 항상 확실한 방법만을 찾아왔죠. 비록 그것이 금단의 지식일지라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길이 있다면, 조금 멍청해 보일지라도 저는 그곳을 걸을 겁니다."
"그 길이 저들인가... 멍청한...."
알소르라 불린 괴수, 한때는 인간이었겠으나 금단의 지식에 손을 대며 '헌터'처럼 신체가 변형되어버린 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이사도라는 그의 곁에서 일어나 유저와 아간조, 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야에서 병기를 확보해 혈옥으로 가 마셀러스 님과 합류한 이후 로터스를 친다는 목표는 변함없습니다. 어서 움직이죠. 시간이 지체된 듯 합니다."
레니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집중했으나 진성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유저는 '백야'라는 지역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거치게 된다.
그곳에서 또 한 번의 사건을 마주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사건이 커지게 되는 것.
그러나 그 이전에도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에, 진성은 평소보다 다소 긴장하는 중이었다.
"그러지."
아간조와 여자 아처, 이사도라와 이사도라가 속한 GBL교의 블러드퍼지 소속 인원들은 곧 이동을 시작했다.
그 장면을 진성은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여기다.'
그가 집중한 대상은 반이었다.
반이 아간조와 유저, 이사도라의 뒤를 쫓아 발을 떼기만 할 뿐이었기에.
'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변함은 없었다.
본래 흐름에서 지금쯤 발견되어야 할 <창신세기 >의 사본에 대해, 반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설마 <창신세기 >까지-. 아니, 아무리 오염이라도 이러면 안 되지 않나?!'
진성은 탄식했다.
어쩌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설정 중 가장 중요한 요소, <창신세기 >.
이와 관련된 상황까지도 '오염'이 침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026
진성은 눈치를 살폈으나 반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성에게 있어 당황스러운 부분이었다.
'오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라고? 반이 아예 반응조차 않는 거라고?'
반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읽는 장면.
당장은 크게 부각되는 부분이 아니다.
유저들 중에서도 그냥 휙, 지나가버리는 스크립트라 정확히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임을 진성은 알고 있다.
그러나 게임 던전앤파이터, 특히 스토리에 관심이 있는 유저라면 반드시 알고 있는 점이자 중요하게 따져보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않은가.
'아무리 진짜 <창신세기 >가 아니고 그 사본에 대한 거라지만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단 말이야? <창신세기 >의 사본을 반에게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뒤틀겠다는 건가, '오염의 원인자' 녀석....'
<창신세기 >.
사실상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요소.
사도 힐더의 옛 고향이자 현재 마계의 옛 모습인 테라 행성에 전해 내려오던 성서라고 알려져 있으며,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창신세기 > 중 제1장 그리고 제4장의 일부를 힐더가 소지하고 있는 상황이 현재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배경이다.
'<창신세기 >와 세트를 이룬다던 <창세기 >, <종세기 > 같은 게
존재한다는 설정은 있지만, 어쨌든 게임 내에서 등장하지도 않는 배경상 요소니... 결국 게임 내, 즉, 이 플레인:아라드에서 모험가와 모험가의 부집게인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되는 건 <창신세기 >다.'
방대한 볼륨의 게임이므로 퀘스트의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창신세기가 얼마나 중요하게 언급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사도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 힐더의 행동 근원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는 온라인 게임이다. '엔딩'이라 할 수 있는 메인 시나리오의 끝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창신세기 >는 유저들에게도 중요하다.
메인 시나리오의 끝, 그곳으로 향하는 편린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스토리에 관심이 많은 뭇 유저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운 이유가 바로 그것.
'지금의 나에게는 더 중요하지. 플레인:아라드가 현실인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운명'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야.'
진성은 반을 살폈다.
당장 이 시점에서는 게임 내에서 <창신세기 >라 인지도 못 하는 작은 흐름의 일부인 장면이지만, 향후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부분을, '오염'으로 인하여 이렇게 넘어가야 하는가.
진성의 고민과 상관없이 반은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여유작작한 태도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유저와 아간조, 이사도라 그리고 이사도라처럼 GBL교 내 블러디 퍼지라는 소집단 소속의 교인들 또한 멀어지는 중이다.
'그냥 가게 두어선 안 된다. 이게 오염이라면 내가-.'
반은 곧 그들을 빠르게 쫓기 시작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일종의 지식 서고와도 같은 이 공간을 벗어나게 될 터.
반 발슈테트는 반드시 여기서 <창신세기 >의 사본을 획득해야 한다.
'캐릭터 모험가'인 유저가, 향후 진정한 모험가이자 연단된 칼날로 성장할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해. 방법이라면 결국...하나뿐이다.'
진성은 주변을 빠르게 훑은 후 레니와 눈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 그리고 역시 붉은 단발머리의 여기사는 흠칫거렸으나 진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레니 씨."
"네, 네, 진성 씨?"
진성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비밀로-? 무, 뭘 하시려고요? 저한ㅌ-."
레니는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설 것처럼 굴면서도 실제로는 물러서지 않은 채 얼굴에 홍조를 띠다.
진성은 레니에게 다가갔다.
"-흐읏."
레니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니의 귀에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사각....
"...응?"
그녀는 눈을 뜬 채 보았다.
진성이 그저 레니 자신의 곁에 흩뿌려진 종이와 필기구를 주워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서고 같은 방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터라 그러한 '재료'는 얼마든지
있긴 했다.
"...진-."
레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진성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녀였으나, 그럴 틈은 없었다.
진성이 레니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종이를 책 틈에 끼워 던졌기 때문.
툭, 하며 울리는 아주 작은 소음이 있었다.
"음?"
그것을,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단장, 4인의 웨펀마스터에 손꼽히는 반 발슈테트가 그 미묘한 소음을 놓칠 리는 없었다.
"잠깐. 무슨...책이 있는데."
반은 바닥에 떨어진, 진성이 내던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진성이 끼워 넣은 페이지들을 스윽,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 * *
"그들은 신이었으되 신이 되지 못한 신이니,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운명을 지니었다. 이에 <창신세기 >는 이들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진성이 조금 전 휘갈겨 쓴 부분이자.
원래의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반이 읊는 부분.
다소 경박한 반의 목소리가 지금은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세상의 끝에 위대한 의지로부터 수많은 신이 태어나니 그들은 하나이자 무한이요....]"
무엇보다 진성 자신이 그것을 전부 떠올려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또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내가 천재는 아니어도 이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고. 어차피 창신세기의 전체가 다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1장의 1, 2, 3절 정도라면, 나도 던파에 인생을 건 놈이었는데 이 정도를 못 외울까!'
어차피 <창신세기 >의 내용이 전부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니다.
내용 일부가 담긴 종이를 반이 챙기고, 향후 이것이 <창신세기 >라 불리는 자료이며,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로써만 사용되어준다면 모든 역할을 다하는 것!
눈앞에 닥친 오염을 일단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진성은 만족감을 표하려 했다.
아니, 표하고 싶었다.
'...뭐야, 저건?'
그러나 쉬이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진성 자신의 기억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괴리 때문이었다.
반이 <창신세기 >의 내용에 대해 주절거리다 그것을 품에 챙길 때,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반 발슈테트의 일러스트는 어떠했던가.
'내 기억으로는 특별히 이상이 있지는 않았어. 반도 그냥 호기심? 사실상 그런 감정으로 사본을 챙긴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저 표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창신세기에 대해 중얼거리는 반의 얼굴은 어떠한지.
그 표정에서 보이는 뉘앙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호기심이나 궁금함이 아니야. 어쩐지 짜증- 아니, 미소? 뭔가 짜증 섞인, 한심하다는 듯 보는 미소?'
무언가 하찮은 존재를 보며 피식, 비웃는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진성은 등줄기에 번개가 치는 것만 같았다.
'왜? 반이- 지금 이 시점에서 반이 <창신세기 >의 사본을 읽으며 그런 감정을 느낄...수가 있나?'
그제야 드는 의문도 있었다.
실제로 진성이 보고 있지 않았던가.
이미 아간조와 유저 그리고 이사도라와 GBL교의 세뇌되지 않은 신도들은 백야로 나아가기 위해 저만치 앞을 걷고 있다.
그 뒤를 쫓던 반은, <창신세기 >의 사본을 손에 넣은 반은....
"뭐야, 이건? 신화를 기록한 건가?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게다가 끝까지 적힌 것 같지도 않고...일단 가져가 볼까."
어째서 굳이, 저렇게나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인지.
마치 다 들으라는 듯, 반 자신이 이런 것을 구했다는 걸 알리려는 듯 목청을 높이는 것인지.
진성은 이 상황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흐름 자체는 이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대로 돌아갔다고 봐도 될 것이다.
반은 진성이 휘갈겨 쓴 사본을 챙기며 재빨리 앞선 일행을 쫓기 시작했고, 그들은 계획대로 백야를 향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반의 저 얼굴은 도대체....'
그러나 반의 표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모니터로 바라보는 게임이 아니기에.
진성 자신이 현실이기에 알 수 있는 표정, 분위기, 행동의 뉘앙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반 발슈테트. 원래도 보통의 인물은 아니야.'
진성은 반에 대해 생각했다.
데 로스 제국 소속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단장.
4인의 웨펀마스터 중 한 사람이자 소검을 주 무기로 다루는 검사.
과거 '비명굴 사건' 당시 사도 중 하나인 시로코를 없애는 공을 세우며 제국으로부터 백작위를 수여받아 현재는 귀족이기도 한 자.
'그뿐만이 아니지. 인게임 던파 시나리오상,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반은... 유저들이 '반발놈'이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의 행적이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잖아.'
그저 선의만으로 '모험가'를 도와주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 중 상당수가 드러났다지만, 아직 모든 걸 알아낸 건 아니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도 그랬지. 하늘성에서 내려올 당시 하츠의 기분까지 상하게 만들어가며 내 편을 들어준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 그런 맥락이고....'
어쩌면 반 발슈테트라는 인물이 지닌 비밀은, 진성 자신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내용을 통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큰 게 아닐지.
그 점에 힘을 실어주는 증거는 또 있었다.
"저렇게...무서운 단장님은 처음 봐요."
"예?"
어떤 의미로는 아이언 울프 기사단에서 반을 가장 존경하고 또 반을 가장 가깝게 대하려는 사람, 레니조차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제가 그 어떤 실수를 했어도.... 하츠 부단장님과 어떤 말다툼을 했어도 저런 표정은-. 아니, 심지어 식당에서 제가 잘못 던진 고기 완자에 맞아 단원들에게 웃음을 샀을 때도 저런 얼굴은 하신 적이 없어요. 저렇게 화를 내는 단장님의 모습은...."
"화? 지금 저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건가요?"
진성의 물음에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어떤 부분에 화가 난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겠으나 레니를 통해 반의 감정 상태를 확정지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면.
"...레니 씨, 우리 내려가죠."
진성은 결정을 내렸다.
지금 저들의 뒤를 더 따라가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드는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도 그녀는 아이언 울프 기사단 소속의 기사로서 그 임무를 다하고자 했다.
"내려가다뇨? 저희는- 물론 단장님의 저 표정이 무섭긴 하지만... 단장님과 모험가 그리고 아간조 님이 선두로 나선 이후 그 뒤를 따라가며 조사하는 게 저희의 임무-."
"네,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도 로터스는 물에 있을 때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즉, 베히모스의 등 위로 전이된 지금은 모든 힘을 쓸 수 없고...따라서 베히모스를 조종하여 미들 오션으로 다가가려는 거죠. 베히모스 정도의 생명체라 아직까지 완벽히 지배당하고 있지 않지만, 더 있었다간 위험해질 겁니다."
따라서 진성은 그 부분 또한 채워줘야만 했다.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는 레니의 표정을 보며 진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그걸 어느새-."
"레니 씨가 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제가 다 알아본 거예요. 이래 봬도 마법사 길드의 의뢰를 받고 온 거잖아요."
당연히 조사를 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배경 설정을 활용했을 뿐.
"그...렇군요. 그러면 내려가는 일은 어떻게 하시려는-."
그리고 진성이 활용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법이 있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꺼낸 것은 반짝거리는 돌이었다.
진성이 마법사 길드에서부터 코인처럼 튕기고 낚아채던 물건.
더 정확히는, 마법사 길드에서 로리안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보았던, 바로 그런 종류의 아이템이었다.
"이걸 사용하면 마법사 길드의 샤란 님께 다이렉트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리고 '비상 상황'임을 깨달은 샤란 님은 카곤 님의 마가타를 곧장 보내주실 거예요. 우린 그걸 타고 내려갑니다."
베히모스로 가게 될 것임을 샤란에게 확인시킨 그 시점부터 진성이 준비했던 또 하나의 아이템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대단해... 역시 진성 씨는- 대단해요!"
레니는 어느새 눈을 반짝거리며 진성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물론 이 모든 계획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진성은 그저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첫 번째 오염은 막았다지만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니야.'
<창신세기 >를 반에게 쥐어줬다.
그러나 그것을 보며 반은 '분노'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뭐야? 샤란 님이 비상사태라길래 와봤더니- 나머지는 다 죽은 거야?"
"입 조심하세요, 흑요정! 단장님과 모험가와 달리 우리는 조사의 성과를 거뒀기에 잠시 내려가는 거니까!"
베히모스의 근처로 마가타를 몰고 온 카곤과 레니가 말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성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027
카곤의 마가타가 착륙하는 지점 근방에는 이미 아이언 울프 기사단이 진을 친 상태였다.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당연히 부단장, 하츠 폰 크루거였다.
"레니, 어떻게 된 거지? 단장은?"
"단장님은-."
"아직 베히모스 위를 수색 중입니다."
레니보다 앞서 대답한 건 진성이었다.
하츠는 불만이 있다는 듯 진성을 노려보았으나 진성이라고 꿀릴 리 없었다.
"...단장은 아직 위에 있다는 건가? 그런데 그냥 와?"
"저는 마법사 길드를 대표하여 베히모스와 사도 로터스에 대한 조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 임무를 달성하였기에 호위로 동행한 레니 씨와 내려온 거고요. 애초에 올라갈 때부터 그러한 조건이었던 건 기억하시리라 믿으니...비켜주시죠. 저는 마법사 길드에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끄응...."
하츠는 물론 모두가 듣는 상황에서 진성은 자신의 역할과 동선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던가.
따로 행동할 가능성도 있음을 미리 말해두었기에 하츠로서도 특별히 할 말은 없는 것.
레니는 하츠와 진성을 번갈아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그러한 시선을 느낀 듯 그는 레니에게 명령했다.
"좋아, 어차피 단장에게 연락이 오거든 다시 모두가 움직여야겠지. 레니!"
"예, 옙!"
"이 자와 함께 다녀라. 아이언 울프 기사단이 모두 움직이게 될 때, 이 자도 다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레니로 하여금 진성을 감시하고 향후 베히모스에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전력이 필요해지면 진성까지 끌고 가겠다는 의도를 하츠는 가감 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예, 꼭~ 같이 갈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진성은 웃으며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베히모스에서 하는 퀘스트는- 사도 로터스와 관련된 퀘스트는 이게 전부가 아니지. 잘됐어. 향후에 또 어떻게 엮어서 베히모스의 등 위로 올라갈지 고민이었는데. 카곤의 마가타를 몰래 타는 것보다 저들 사이에 숨어들어가는 게 훨씬 낫다. 유저의 모니터 화면에서 숨기도 훨씬 편할 테고. 으하핫, 고맙다, 하츠!'
진성 자신이 생각한 방법도 있으나 그보단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일반 기사들 사이에 끼어 움직이면 훨씬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당신, 그런 태도는-."
"레니 씨, 그럼 바로 갈까요?"
하츠는 얄밉다는 표정으로 진성을 흘겨보았으나 진성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아, 네, 그럼...부단장님! 다녀오겠습니다!"
눈치가 다소 없는 레니만이 하츠에게 경례를 올린 후 진성의 뒤를 후다닥, 따를 뿐이었다.
진성은 빠른 발걸음으로 마법사 길드를 향했다.
자신이 준비하려던 한 가지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어 기쁜 마음은 있었으나 역시 무작정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지, 진성 씨! 마법사 길드에 다녀온 이후에 진성 씨는, 아니, 우리는...뭘 할 거죠?"
레니는 물었다.
그것 또한 진성에게는 고민인 부분이었다.
마법사 길드로 가는 이유? 사실 없다.
애당초 베히모스나 사도 로터스에 대한 조사도 마법사 길드의 의뢰를 받았던 게 아니지 않았나.
'마가타를 이용한 대가는 치러야 할 테니 이래저래 이야기는 해줄 거지만... 그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진성은 재빨리 [내 정보] 창을 확인했다.
현재 레벨은 28.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모험가 명성은 변함이 없어도 여자 아처 유저... 돈많은 부캐릭이었던 뮤즈 전직 유저가 남긴 템을 몇 개 먹었지. 마법 봉인 아이템들이라 그것들도 어떻게 다룰지 확인해봐야 한다.'
또한 앞으로의 퀘스트 흐름을 고려하자면, 진성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사항은?
진성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곤 덜컥, 발을 멈추며 뒤를 돌아 레니를 바라보았다.
"일단."
"일단?"
레니의 붉은 눈이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의 건방지고 도도한 표정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진성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말했다.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요?"
"...응? 네?"
"하루 정도 푹~ 쉬자는 뜻이죠."
어쩌면 앞으로를 위해, 진성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예감이 드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농담?"
"아뇨? 농담 아닌데요. 가시죠. 돈은 마법사 길드에서 좀 빌리면 되니까."
"자, 잠깐만요! 진성 씨!"
레니는 황급히 진성의 뒤를 쫓아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샤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 로터스.... 베히모스 위에서-. 미들 오션을 향해 가고 있다고요?"
"네. 로터스는 오직 물속에 있을 때에만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사도입니다. 베히모스의 위에서 건조하게 말라가고 있는 지금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지만, 로터스가 베히모스의 정신을 잠식해가며 그를 미들 오션으로 이끌고 있는 도중이죠. 만약 이대로 베히모스가 미들 오션에 들어간다면, 즉, 베히모스의 등에 있는 로터스 또한 미들 오션에 들어가게 되는...."
진성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지식을 활용해 샤란에게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드는 플레인:아라드의 세계를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지상', 아라드 대륙을 뜻한다.
아라드에서부터 뻗어올라간 하늘성은 '천계'까지 이어지지만, 그곳까지 다다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간층이자 완충계가 바로 아라드를 기준으로 '하늘 위의 바다'라 할 수 있는 '미들 오션'인 것.
즉, 아라드 - 미들 오션 - 천계의 수직 구조가 현시점까지 밝혀진 이곳의 세계 구성인 상황이다.
또한 천계의 실존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아라드의 인물들이라도 아라드의 하늘 위에 바다, 즉, 미들 오션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고래인 베히모스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왔다고 추정하는 게 기본 지식에 가까우니....
"아라드는 끝장- 아니, 그럼 그걸 알면서! 진성 씨는 그걸 알면서도 내려온 거예요? 겁이 나서 도망쳤나요? 내가 준 마법석의 비상 호출 기능은 그렇게 쓰라고 준 게 아닌데, 아이언 울프 기사단을 도와서라도-."
"샤란 님, 제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미리 말씀드렸죠?"
"-...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샤란마저도 진성의 조사로 말미암아 공포를 느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샤란은 레니의 눈치를 보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미래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진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결국 이 선택이 최선이라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그것을 닦달해봐야 소용이 없거늘.
"그러면 이제 뭘 할 거죠? 나는 어떻게 해주면 되죠?"
"마가타의 정비...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유저가 겪게 되는 베히모스에서의 퀘스트 흐름.
시간과 날짜가 완전히 반영되어 있지 않고 '축약된 흐름'이지만, 실제로는 며칠 간의 여유가 있음을 진성은 알고 있다.
하루일지, 이틀일지 모르나 그 기간 중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은?
"-아이리스 님을...관찰해주세요. 아마 아이리스 님이 모험가를 부를 겁니다. 그 직후 바로 베히모스에 다시 올라가게 될 거예요."
"그거면 되는 건가요?"
샤란은 진지한 목소리로 진성에게 확인했다.
진성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마법사 길드의 내부다. 일반 유저들이 NPC 샤란에게 볼 일이 있다면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다행이라면 레니는 건물 안쪽의 응접실에 있으므로 일반 유저들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초반부 퀘스트를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샤란을 찾으러 오는 유저가 드물다는 것일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유저가 없는지 다시 한번 본 후에야 진성은 말했다.
"네. 샤란 님께서는 그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 저번에 말씀드렸던 건 준비가 됐나요?"
"...진짜...이거 만드느라 로톤 님도 그렇고 헨돈마이어, 웨스트코스트 연금술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들뜬 진성을 보며 샤란은 무언가를 툭, 올려놓았다.
투명한 물이 찰랑거리는 작은 병들이 몇 개.
들떴던 진성의 표정이 조금쯤 평온해졌다.
"이건...가요?"
"네, 뭐 잘못된 거라도?"
"아, 아뇨, 아뇨. 훌륭합니다. 기능만 하면 됐죠."
"기능만 하면 된다? 기능이야 당연히 되는 거죠. 내가 테스트도 다 해봤고. 우리 길드원들이 고생고생해서 만든 걸-."
"고맙습니다, 샤란 님. 유용하게 잘 쓸게요. 앞으로도 몇 개나 더 부탁드리게 되겠지만, 헤헤."
진성은 샤란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게 되는 기대감이 다소 사그라들었던 건 물약의 색깔이 진성 자신의 기억과 달랐기 때문이건만.
샤란이 이미 테스트를 해보았고 제대로 작동했다면 더 이상은 실망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내가 지금 쥐고 있는 마법석처럼... 게임 내 아이템과는 조금 다른, 나만이 쓸 수 있는 아이템일 수도 있으니까.'
진성은 샤란이 꺼낸 물약을 챙기고 레니에게 다가가려다 멈춰섰다.
"아참, 샤란 님?"
"네?"
"이거 아이템 확인도 부탁드릴게요.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는데 제가 곧장 해제할 수는 없는 것 같고...."
베히모스에서 획득한, 유저가 습득하지 않고 지나간 장비 아이템의 확인.
'마법으로 봉인된 장비'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마우스 우클릭 한 번으로 풀어낼 수 있는 거라지만, 지금의 진성은 그런 방식으로 택할 수 없다. 샤란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거야 별거 아니죠. 지금 당장이라도-."
겸사겸사 진성이 샤란에게 할 말이 생각난 건 또 있었다.
"그리고 돈도 좀 주실래요? 이것저것 살 게 있어서."
결국 당장 중요한 건 이거였으니까.
라이너스에게서 받았던 여비는 이제 진성 자신의 비상금으로 대략 천여 골드가 남았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않은가!
"돈...."
"원래 활동비가 많이 드는 법이라고요. 베히모스가서 사도 로터스에 대한 정보까지 알아왔는데 이 정도는 뭐, 누가 더 남는 장사인지 잘 아시죠?"
"그, 그렇죠. 네, 드려야지."
샤란은 머뭇거렸으나 강하게 나오는 진성의 말에는 곧장 기세를 죽여야만 했다.
실제로 그가 가져온 정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현시점의 아라드로 보자면 베히모스에서 아직 내려오지도 못한 반, 아간조 그리고 '유저' 정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정보임을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그랑, 진성은 샤란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은 골드 주머니를 가벼운 동작으로 챙겼다.
그러곤 마법사 길드 안쪽 응접실에 앉아있는 레니에게 다가갔다.
"레니 씨! 나가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 정말 휴식을 하자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
"쉴 땐 쉬어줘야 능률이 오르니까요. 아, 레니 씨는 헨돈마이어 가본 적 있어요?"
레니는 불안해했으나 진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 진성 때문일까.
팔八자로 처졌던 레니의 눈썹도 곧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헨돈...공국의 수도 말인가요? 아니요. 단장님과 부단장님은 가보셨지만 저는 아직...."
"흐흐, 그럼 가보죠. 맛있는 간식 만드는 친구도 있고, 술이랑 먹거리 파는 곳도 있고 괜찮거든요. 그리고...지금 필요한 것도 살 수 있고."
진정한 목적은 마지막 발언에 있었으나 그것을 레니가 이해할 리는 없었다.
가벼운 미소로 간식이나 술 따위 운운하는 진성에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을 지어보일 뿐.
"네? 헨돈마이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 정도의 여유는 없죠! 단장님께서 언제 내려오실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돌아다닐 수는-."
말이 되냐는 레니의 말을 끊으며 진성은 무언가를 휙, 꺼내어들었다.
조금 전 샤란에게서 받았던 물약들이었다.
"-이게...뭔데요?"
진성은 레니의 질문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늘성에서 내려온 직후, 진성이 가장 먼저 준비하고자 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퀘스트를, 어디서, 언제 처리할지 모른다.
유저들의 움직임 속도를 쫓기에는 이곳이 현실 그 자체인 진성에게 있어 너무나 큰 페널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한 방법은?!
"'텔레포트 포션'이에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순간이동 포션>과는 좀 색깔이 다르긴 하지만."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아이템 중 하나, <순간이동 포션>을 재현하는 것!
다만, 게임 속 아이템이 노란 약물을 담고 있던 것에 비해 샤란이 만든 게 투명한 물과 같아 다소 당황했으나, 제대로 기능만 해준다면 어차피 아쉬울 건 없었으니.
'아, 그래서 사용 렙제도 없나? 원래는 60렙 이상부터 쓸 수 있을 텐데. 흐흐, 나한텐 개꿀이지.'
진성은 한 손으로 뚜껑을 딴 채 병을 쥔 후 다른 한 손을 레니에게 내밀었다.
"제 손 잡으세요."
"아, 그럼...."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레니는 엉거주춤 결국 진성의 손을 맞잡았다.
진성은 레니의 손에서 나오는 온기를 느꼈기에,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갑니다, 쭉 들이키세요!"
─────────────!
이 손이 온기를 간직하고 있을 날이 얼마나 될지.
진성이 레니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호감이나 애정 때문이 아님을, 지금은 그 어떤 NPC도 알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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