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001
자신의 양팔에서 철그렁거리는 쇳소리는 더없이 거슬렸으나, 남성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어두컴컴한 숲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선 앞을 바라보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낮인지 밤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이라는 것은 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기에 오히려 한기가 가득하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 정보였다.
'젠장, 근데 알고 있는 거랑 겪는 거랑은 차이가 너무...! 윽.'
남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왼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왼팔에 떨림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으나 애당초 떨고 있는 건 왼팔만이 아니었다.
"구...."
"...화재...."
어느새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공포 때문에 남성은 진작부터 온몸의 떨림을 통제할 수 없었으니까.
"꺼지라고! 원래 나한테 올 것도 아니면서, 젠장!"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인간처럼 보이는 그것들이 비교적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고.
그럼에도 불행이라 한다면, 악취에 더하여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내장이 드러나 보이는 등 결코 일반적인 인간에게서 발생해서는 안 될 대단한 문젯거리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캬아아아-!"
게다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허벅지만큼 자란 풀숲 더미에서 튀어나오는 기묘한 짐승들도 남성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 발톱이 동물원의 맹수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짐승이라면.
무엇보다 짐승인지 인간인지, 기묘한 말까지 하며 가면까지 쓰고 다니는 생명체라면.
"으어아, 어떻게 하라고!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그저 소리치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도망가는 게 무슨 의미일까.
지도도 없고 길도 모르는 어두운 숲에서 저들을 영원히 따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도망갈 수 있는지,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남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알 수 없는 인간들과, 인간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의 너머에 보이는 것은 빛이었다.
그나마 남성이 조금이라도 도망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빛이자, 이 어두컴컴한 숲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빛.
남성은 그 빛의 주변으로 겨우겨우 보이는 몇 개의 실루엣을 보았다.
그 빛의 중심부로부터 마치 공중으로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하나.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주변에 멀뚱히 서 있는 실루엣이 또 하나.
'이대로는....'
남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자 했으나 그럴 여유조차도 별로 없었다.
두 개의 실루엣의 주변에 또 하나의 실루엣이 보였으니까.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또 하나의 실루엣, 마치 기다란 막대를 들고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움찔거리는 그 실루엣을 보자 남성의 몸은 다시금 뻣뻣하게 굳어갔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설명을 해줬어야, 좀 자세히 이야기를 해줬어야.... 아휴, 아으!"
남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남성을 향해 다가오는 것들 중 그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없었다.
"우...구...."
"캬아아앗, 캬앗!"
비정상적으로 훼손된 상태에서도 움직이는 육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대며 자신에게 쇄도하는 괴생명체.
어두운 숲에서도 더욱 거뭇하게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의 덩어리.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빛과 실루엣들.
꿈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시야에 똑똑히 들어오는 그것들이 있는 이상 남성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젠장... 이거 원래는- 이거 원래 내가 할 일이 아닌데!"
떨리던 왼팔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새카맣게 변한 그의 오른손은 곧 허리춤을 향했다.
익숙하지 않다 못해 낯설기까지 한 감각이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약속 안 지키면 내가 제일 먼저 깽판 칠 거야!"
남성은 소리쳤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 * *
진성에게 있어서는 회사로 출근하는 알림과도 같은 BGM이 들려왔다.
'진짜 브금은 언제 들어도 설렌다니까.'
D&F, 던전앤파이터의 로고를 보며 씨익, 진성은 미소를 지었다.
캐릭터 슬롯을 마지막 한 자리까지 꽉꽉 채워가며 차 있는 자신의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흐흐, 오늘은 또 어디를 돌까. 어디서 파밍을 하는 게 나으려나...."
하물며 그 모든 캐릭터들이 번쩍거리고 있었으니, 그들이 착용한 아이템, 칭호, 오라의 상황이 얼마나 될 것인지,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집약한 '모험가 명성'이 몇인지.
"아, 이 계정은 벌써 주간 던전 다 돌았구나. 다른 계정으로 접속해야겠네."
심지어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계정이 몇 개나 더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모든 캐릭터, 모든 직업으로 종결 콘텐츠에 다다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게 바로 남자, 진성이었다.
그저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한 게임이었다.
그렇게 빠져든 게임이 취미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던전앤파이터 유저와 다른 점이라면, 진성에게 있어 '내 인생은 던전앤파이터와 함께한다'라는 표현까지 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슬슬 너튜브 정산금 들어올 때가 됐는데.... 이번 달은 얼마였더라?'
던전앤파이터 콘텐츠를 활용한 너튜브 수입이 그가 다니던 작은 회사의 월급을 뛰어넘는 시점에서, 진성은 결정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던전앤파이터에 투자해 보기로.
적어도 지금까지 진성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게임의 인기답게 비교적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나오는 조회수는 물론, 간혹 진성의 기행 아닌 기행으로 인하여 조회수가 급증하는 몇몇 동영상 덕분에 수입 구조 면에서 아쉬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근데 역시 지금은... 뭐, 매 시즌 말미마다 이럴 때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만-."
그러나 콘텐츠 직업군의 특성상 언제나 수입이 늘어날 수만은 없는 법.
무엇보다 시즌제를 표방하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특히나 시즌 막바지에 대부분의 콘텐츠가 소비되었을 즈음 다소 침체되는 상태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도 진성의 표정이 그저 어둡지 않은 이유라면 역시나 기존에 '벌어주었던' 영상들이 눈에 띄기 때문일까.
『백진성의 골목공대』-아스라한 : 안개신 무, AtoZ
조회수 89만 회.
『백진성의 골목공대』-기계 혁명 : 바칼 레이드, 나빼고 다 새싹?
조회수 103만 회.
『백진성의 골목공대』-어둑섬 : 해방, 0클 3인 데리고 빡세게 갑니다!
조회수 66만 회.
『던전, 백선생』-아스라한 : 무의 장막, 퍼섭 최초클! 은하계 최초클!
조회수 51만 회.
『해방 천재 백사장』-비질란테 노피격 어둑섬 해방, 올딜러 솔플완!
조회수 47만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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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100만을 넘었던 동영상이 포함된 자신의 주력 콘텐츠 재생목록을 보며 그는 헤실거렸다.
"흐, 진짜 재밌었는데. 교육 공대 뜬 이후로 다른 레이드, 레기온들 공략 영상까지도 조회수 팍 터지는 바람에...."
특정 던전 또는 레이드가 처음 업데이트된 직후, 진성은 오랫동안 즐겨온 던전앤파이터의 게임 이해도와 타고난 게임성을 발휘하여 사실상 최선두의 클리어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알게 된 공략 방법을 업로드 하는 한편, 속칭 '뉴비'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용 공격대를 꾸리고 알려주던 게 그의 패턴이었으며, 그것이 던전앤파이터 내에서 그의 명성을 지탱해 오던 일이었다.
'처음엔 진짜 힘들었는데 말이지.'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이와 공격대를 맺고 레이드를 가는 일이 스트레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한 소위 '야생 공대'만으로도 압박과 부담이 되건만, 해당 레이드를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입장 조건을 겨우 딱 맞춘 풋내기 모험가들에게 모든 패턴 및 공략 방식을 알려주며 클리어 해나가야 하는 '교육 공대'는 '야생 공대'에 비하면 훨씬 더 스트레스가 될 게 뻔한 일!
그러나 진성은 압박을 압박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그는 오히려 콘텐츠로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고, 다소 무모해 보였던 그때의 도전이 지금에 와서는 그의 너튜브 채널 킬링 콘텐츠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진성은 피식거렸다.
'『백진성의 골목공대』 시리즈라... 핫, 내가 진짜 백 씨니까 사실 뭐, 귀여운 패러디 정도로 봐주시겠지.'
유명인을 따라 하는 말투와 사투리로, 가끔은 부드럽게 또 가끔은 자극적으로 공략 방법을 알려주며 진성의 인기는 커져갔고, 너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 또한 늘어가며 유명세를 가져오게 된 일이었으나 그것도 언제까지나 유효한 일은 아니었다.
던전과 레이드의 업데이트는 충분한 준비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다, 같은 던전을 몇 번이고 돌아봐야 조회수는 차츰 감소할 뿐이며 무엇보다 신규 유저들이 계속해서 진입하는 구조가 성립되어야만 했으니까.
진성은 캐릭터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접속했다.
"그래도 기다려봐야지. 내일... 내일 새 시즌만 업데이트되면...."
세리아의 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공지사항 창에 뜬 알림.
마침내 새로운 시즌으로 넘어가는 대규모 패치의 예고를 보며 진성은 떨림을 참을 수 없었다.
'일단 새로운 사도 하나는 무조건이야. 아마 흐름상 누가 나올지도 대~충 예상은 되니까 더 기대되는 데다- 스토리 때문만이 아니지! 크흐, 일단 만렙 확장은 사실상 확정이라고 봐야 하고, 그로 인한 새로운 아이템 파밍에- 당연히 그런 아이템이 나올 만한 새로운 던전에, 레이드에! 거기다 또 새 시즌이라도 버프에, 보상에 온갖 거 다 퍼줄 텐데!'
즐길 거리가 많아진다.
다시 한번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소수의 인원은 이러한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대규모 업데이트를 리셋이라 부르며 혐오하지만, 대부분의 던파 유저들에게 있어선 축제 전날과도 같은 상황!
[님, 님! 마따끄진성 님! 님!]
오늘은 무엇을 할까, 그저 헨돈마이어를 지나가던 진성을 갑작스레 부르는 유저가 있었다.
뒤를 따라오며 님을 연발하는 남자 레인저?
다급한 부름치고는 진성에게 익숙지 않은 닉네임이었기에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님 교육 공대? 하는 분 맞으시죠?]
그리고 이어지는 채팅은 진성의 표정을 곧장 풀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많은 캐릭터를 키우다 보니 캐릭터 닉네임은 대충 짓는 편이건만.
'모험단 이름 그거 잠깐 뜬 걸 알아보고 이거, 이거... 하긴 모험단 이름이 내 이름이니 당연한 건가.'
그러나 평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번갈아 뜨는, 아주 잠깐 노출되는 모험단의 이름 '백진성' 또한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찰나만으로 유저가 눈치챌 정도로 진성 자신의 유명세가 있다는 방증도 되는 법.
진성은 웃으며 채팅을 쳤다.
[아, 네. 너튜브 구독자세요?]
[아뇨,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서.... 그보다-.]
돌아오는 답변은 그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음? 뭐야, 이 사람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진성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낯선 유저의 채팅은 이어졌다.
[저 좀 도와주세요. 사도 프레이-이시스를 잡아야 해요. 정확히는 깨어난 이시스를 제압하고.... 그의 카드를 확인해야 해요.]
너무나 간절한 채팅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상한 채팅이었다.
002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과 다르다는 게 진성이 느낀 위화감의 첫 번째 이유였다.
[이시스 레이드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던전앤파이터 유저들이 던전을 지칭하는 것과는 눈앞의 유저가 지칭하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
분명 이시스 레이드의 공식 명칭은 프레이-이시스 레이드가 맞다.
그러나 채팅으로, 일일이 저 공식 명칭을 전부 사용하여 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깨어난 이시스를 제압해야 한다고? 실제로 죽이는 게 아니긴 하니까 그 표현 자체가 맞기는 하다만....'
진성 자신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제3사도, 이시스-프레이.
낮, 생명을 관장하는 프레이와 밤, 죽음을 관장하는 이시스.
한 몸에 두 가지의 인격을 지닌 사도.
몸 안에서 일어난 그들의 다툼으로 인하여 이시스는 프레이와 나누어졌고, 그 죽음과 어둠의 힘으로 마계를 지배하려는 이시스를 막아야 한다는 던전앤파이터 세계관의 스토리를 담아낸 게 바로 '프레이-이시스 레이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경 설정이자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내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유저들끼리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던전의 이름, 이시스 레이드 정도인 게 일반적이건만.
[이시스 레이드.... 예, 그런 셈이죠.]
레인저 유저는 조심스레 답변했다.
물론 그것으로 진성의 의문이 풀릴 건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가이드로 도셔도 되지 않나요? 1인 전용 레이드가 있는데.]
성격 때문이든, 상황 때문이든 공격대를 구성하여 레이드를 즐기기 힘든 유저를 위한 공식 모드가 있다.
정 이시스를 잡고 싶다면, 그것도 혼자서 하고자 한다면 가이드 레이드를 돌아도 될 터.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건 말하자면 평행 세계의 던전이니까요. 제가 제압해야 하는 이시스가 아닙니다. 완벽하게 그 힘을 드러낸 이시스를 상대하고... 그의 카드를 확인해야 합니다.]
진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발언이자, 진성이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야? 무슨 말줄임표 같은 것까지 일일이 붙여가면서 채팅을 하지?'
진성이 채팅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거리낌 없이 인터넷 용어와 표현들을 섞어가며 채팅을 하지 않던가.
지금까지 진성이 만난 거의 모든 유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채팅을 해왔다.
간혹 공격대를 꾸렸을 때, 음성 채팅을 통해서라면 자못 진지하게 말하는 유저들도 있었지만, 마이크와 헤드셋을 사용하는 유저들조차도 인터넷 채팅하듯 대화하는 이가 거의 대부분이었음을 진성은 알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무슨... 약간 중얼거린다는 느낌? 아니, 채팅에서 그런 느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그리고 카드?'
스멀스멀 피어나는 위화감은 분명했으나 그보다 더욱 강렬하게 진성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카드라면 그냥 경매장에서 사도 되지 않나요? 지금도 하나 올라와 있기는 하네요.]
[하핫, 그럴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5년이나 걸리진 않았겠죠.]
[아....]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5년 만에 복귀한 극한의 컨셉충?"
오랜만에 던전앤파이터에 복귀하며, 그 세계관에 완전히 몰입한 콘셉트의 유저일까?
'거기에 더해서 경매장을 통해서는 아이템을 절대 사지 않겠다, 뭐, 그런 콘셉트까지 더했다는 얘기지?'
그래서 일부러 '교육 공대' 콘텐츠로 너튜브에서 제법 유명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면?
내일의 대규모 패치 전, 오늘 이 유저와 함께 플레이하는 상황을 녹화하여 너튜브 콘텐츠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흐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는데? 녹화해도 되냐고 물어봐서 된다고 하면 거의 백 퍼센트겠지.'
그 또한 자신을 통해 게임 내 유저들에게 알게 모르게 유명세를 떨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닐지.
일단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진성은 황급히 녹화를 준비하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완전 쩔은 아니고 그냥 님 버프 좀 주고 패턴 알려주고 하면 되는 거죠?]
[아뇨, 버프도 필요 없습니다. 사실 어그로만 해도 허용될지 어떨지를 몰라서 말이죠.]
"엥?"
또다시 예상치 못한 그의 답변에 진성의 미간이 찌푸려질 무렵, 그는 다시금 말했다.
[음성... 마이크를 사용해서 패턴 파훼 방법이나 공략 방법만 알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이크 있으세요? 그럼 디코.]
[아뇨, 외부의 것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기왕이면 시스템 음성채팅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
음성 전용 프로그램의 초대 코드 등을 확인하려던 진성이었지만, 역시나 유저의 반응은 남달랐다.
굳이 외부의 프로그램 없이 하자는 그의 제안에 진성은 동의했다.
[네, 뭐 불가능한 건 아닌데요. 근데 님이 일일이 키 눌러서 마이크 쓰시기에는 불편할 텐데.]
어차피 진성 자신에게 아쉬울 점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몬스터와 싸우는 유저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
그 점에 대해 지적하려던 진성이었으나 애당초 유저에게는 그런 고민조차 없었던 것일까.
[...저는 일반채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으음, 내가 말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뭔가 궁금한 것도 있고, 즉각 대응하려면 마이크 쓰는 게 편할 텐데. 아, 마이크가 없으신가?"
개인의 사정이 있을 법하다는 걸 생각하며 진성은 물었다.
돌아오는 반응은 또 한 번의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 뿐이었다.
[오케이. 그럼 혹시 녹화 좀 하면서 진행해도 될까요?]
[음성은... 아쉽지만 마따끄진성 님만-.]
[너튜브 공개용으로.]
[-해 주시는 게, 네, 하지만 녹화한 걸 올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종류의 시도도 이래저래 해보지 않은 게 아니니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채팅 방식.
저렇게 키보드 타이핑을 하고 있다는 걸까?
'하이픈과 온점을 누르고 엔터를 치고 다시 엔터를 쳐서 하이픈에 말을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채팅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위화감에 앞선 것은 일종의 흥분과 기대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미친 컨셉충이 확실해."
콘텐츠용으로 잘 편집하면 나름대로 조회수 좀 나오겠다는 생각과 함께 공략 루트 선정을 위해 물었다.
[일단 4성지 후 이시스로 곧장 달릴까요?]
프레이-이시스 레이드의 솔로 플레이라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루트 중 하나.
그러나 유저는 거절하며 답했다.
[기왕이면 정원까지 다 들르고 싶습니다. 스레니콘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이시스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선 최대한 힘을 확보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역시나 빠른 타이핑보다 놀라운 것은 '스레니콘에게 미안하다'는 극한의 콘셉트!
진성은 오싹하면서도 어쩐지 싱글벙글한 미소를 짓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몇 번 거점으로 돌지는 들어가자마자 말씀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럼 가시죠.]
[네. 이번에도 살아남아 봅시다.]
'...클리어도 아니고, 노 코인도 아니고, 득템도 아니고, '살아남는다'라고?'
충분히 몰입한다면 하지 못할 말도 아니다.
그러나 진성에게 있어서는 세 번째 위화감을 들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 * *
진성은 녹화 버튼을 누르며 자연스레 멘트를 시작했다.
아직까지 음성 채팅 버튼을 누르지 않아 파티를 맺은 유저에게는 들리지 않는 상황, 어떤 의미로는 외부 프로그램을 통해 목소리를 상시 공유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의 콘텐츠! 완~전히 아라드인이 되어버리신 유저분과 함께 프레이-이시스 레이드 1인플을 해보려 합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버퍼 캐릭도 아니고! 말 그대로 순수하게 패턴 파훼 공략! 그리고 상황에 따라 스레니콘 동선 정도만 짜 드릴 예정입니다."
진眞각성의 조건이 되지 않아 2차 각성까지만 마친 남자 거너 직업군의 레인저 직업, 즉, 레이븐.
대상 유저의 주변을 마우스로 돌리며 강조하던 진성은 곧장 [캐릭터 정보]를 눌러 유저의 장비를 확인했다.
"장비- 어.... 와, 장비는 지금 저도 처음 보는 건데요. 세상에, 뭐야, 이게? 아, 물론 레벨이 95라 해도 당장 유효 커스텀을 맞추긴 어려울 수 있다지만... 그래도 하다못해 아칸셋이라도 해야, 크흠, 그렇네요."
비교적 최근까지 유행했던 에픽 아이템 세팅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5년 만에 복귀한 유저라고 암암리에 인식해버린 시점에서, 진성은 그저 과거의 유니크 아이템, 잘하면 신화 아이템 몇 개 정도를 장착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야...? 이런 아이템이 아직도 쓰이고는 있었나?'
그러나 그마저도 부족하여 오히려 던전앤파이터 '고인물'에 가까운 진성조차 놀라게 할 정도의 아이템들을 그는 장착하고 있었다.
"-크, 크흠, 어쨌든 명성은... 6,643이네요. 예~전에 프레이-이시스 레이드 필요 명성치가 거의 이 정도였던 것 같은데. 혹시 아이템은 왜 이렇게 차셨는지 확인 한번 해보겠습니다."
진성은 당황한 목소리를 재빨리 가다듬으며 음성 채팅 버튼을 눌렀다.
["혹시 아이템은 일부러 그렇게 착용하셨나요? 요즘 성장형 아이템이나 뉴비 지원팩도 많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럴 수 없습니다.]
["닉네임이 아까워서 캐릭터를 다시 만들기 싫으신 거면 어차피 특정 모험가 명성 이하 캐릭터는 이벤트 캐릭터 지정도 되거든요. 아마 그렇게만 해도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닉네임을 알고 계십니까?]
유저의 반응에 진성은 히죽거렸다.
자신이 던전앤파이터를 몇 년이나 했는가.
["요즘 유저분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몇 년 전이더라? 강화, 증폭할 때마다 메가폰으로 떠들썩하게, 막 신나게 노래 부르면서 하신 분이랑 닉이 비슷하다는 건 알겠네요. 유명했거든요, 그분."]
비록 지금은 플레이하고 있지 않은 과거의 유저라지만, 게임 내에서 유명했던 인물들이라면 거의 다 꿰고 있다.
진성 자신의 '짬'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으나, 정작 그것을 들은 유저의 반응은 남달랐다.
[그렇군요. 기억하는 분이 계실 줄이야. 몇 년... 5년 정도 되었던가.]
말 그대로 진성의 입조차 다물게 만들 파괴력이라고 해야 할까.
진성은 녹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넋을 놓다 화들짝 놀라 중얼거렸다.
"보, 보셨죠? 우리끼리는 던붕이, 던붕이 하지만! 던파는 이 정도로 몰입해야 재미있는 게임이라는 것을 몸소 알려주실 분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1인 토벌을 하실 수 있을지, 여러분들 기대 한번 해주시고요."
영상용 멘트를 하면서도 진성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어찌되었든 이 유저로 하여금 프레이-이시스 레이드 솔로 플레이를 클리어하게 만들어야 이 영상에도 의의가 있을 테니까.
["정원까지 도신다고 했으니까, 3번 요격 거점 방어하고 8번 정원 거점에서 하강하는 게 1차 목표입니다!]
[예!]
유저는 진성의 지시를 이해했다는 듯 답했다.
그와 동시에 스레니콘의 등으로 몬스터 무리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유저는 곧장 반응했다.
───────────...!!!!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피하기 위해 구석으로 이동하면서도 진성은 유저의 스킬 패턴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딜이 약하니 오히려 스킬 패턴 습관을 빨리 볼 수 있는 건 좋군. 콤보 넣는 구조는 확실히 옛날식이긴 한데... 템이 워낙 그지 같아서 걱정한 것 치고는 의외로 깰 만할지도.'
스킬의 사용 순서 등은 최신 구조와 다를지라도 기본기가 탄탄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마치 진성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는 말했다.
[누군가와 함께 던전을 돈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나 힘이 될 줄 몰랐습니다! 하핫, 뭐, 마따끄진성 님은 그냥 계셔주는 것만이 아니라 상황판 지시까지 봐주시니 실제로 의지가 되기는 하지만 말이죠!]
어떤 의미로는 평범한 칭찬 또는 그저 콘셉트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채팅이 말풍선이 되어 올라오기 직전, 진성이 있는 위치까지 회피하던 유저의 공격이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으니까.
던전앤파이터의 채팅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갑작스레 진성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003
그것은 그저 콘셉트 때문만이 아니었다.
진성은 재빨리 영상용 목소리로 톤을 바꾸며 말했다.
"어라? 여러분들도 보셨나요? 지금 스킬이 아니라 평타-. 뭐지? 저렇게 긴 채팅을 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스템상 모든 공격은 키보드로 이루어진다.
할당된 단축키를 사용한다거나 또는 방향키를 조합한 커맨드 입력을 통해 스킬을 사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패드가 가능하긴 한데 패드 유저는 적어. 아니, 패드가 더 이상하지. 패드로 조종하면서 키보드로 채팅을 입력하는...말이 안 되잖아! 그냥 키마 유저라고 보자면-. 그래, 스킬! 스킬은 선 입력을 기가 막히게 해냈다는 가정하에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치는데-.'
그러나 그는 평타로 공격하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키보드의 X키를 계속해서 연타하는 상황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채팅을 쳤다?
그것도 한두 단어도 아니고 저렇게 긴 문장을?
'X를 다다다다다 누르는 상황에서 엔터를 치고 글을 입력하고 다시 엔터를 치고 X를 다다다다... 가능한가?'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물리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결코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타수가 1분에 1,000타쯤 되면 할 수 있나? 나도 타자 꽤 빠른 편인데도, 쩝.'
자신 없다는 생각이 피어날 무렵에서야 진성은 재빨리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앞으로 레이드 중 몇 번이고 보게 될 장면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당장 요격 거점의 보스를 잡아내는 데 성공한 이상, 진성 자신도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진성은 곧장 음성 채팅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8번 정원에서 하강하면 되고요. 물약...도 준비할 필요가 없겠네요. 피격을 한 대도 안 당하셨으니."]
[후우,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계속...그렇게 살아온 셈이라.]
["네에, 뭐... 크흠, 그러면 어쨌든- 정원은 쌘비구름이냐 오메가 가디언이냐에 따라 차이가 날 텐데, 혹시 상대해 본 적은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분리된 이시스를 잡으러 가기 위한 구조도 귀동냥으로 아는 수준인데.... 민망하군요.]
진성은 할 말이 몇 가지 있었으나 그저 삼켜야만 했다.
'5년 전이면 이시스 레이드 활발할 때 아닌가? 뭐, 템 수준을 보아하니 그때도 못 가봤을 수도 있겠다만.'
어차피 지금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닐 거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
따라서 진성은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름은 오메가 가디언이 더 무서운 느낌인데 실제론 상대하기 더 편하죠. 쌘비구름이 아무래도... 콘셉트부터가 테이베르스 행성에 비를 내리게끔 관장하는 능력자인데다 프레이에게 수호자로 임명된 존재거든요. 그런 면이 레이드에 반영이 되어가지고 아무래도 좀 더 상대하기 힘든 부분이-."]
[잘 아시는군요. 던전앤파이터의 스토리에 대해 다 아시나 보죠?]
그가 화제를 돌려 물어보기 전까지.
진성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금 음성 채팅 버튼을 누르며 답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알죠. 스토리 재밌잖아요? 아, 그렇다고 대사 하나하나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좀 감동적인 에피소드들, 특히 재미있는 사건들은 상세하게도 알고 있긴 해요. <창신세기 > 파트라거나, 아! 아시죠? 비명굴 사건 같은 거. 아니면 또 잭터-."]
[과연... 그렇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는 분이시니. 부럽군요. 저도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유저는 진성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중얼거렸다'라고 해야 할까.
'미쳤어, 중얼거리는 무슨! 던파에 중얼거리기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진성 자신에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다' 따위의 말을 하는 표현 때문일까.
꿀꺽.
진성은 어쩐지 도트로 이루어진 던전앤파이터 속 게임 캐릭터, 화면 너머의 유저가 아쉬움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무슨 멍청한 생각을-. 집중해라. 집중.'
어느덧 다음 몬스터와 조우할 때가 되었기에, 진성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영상용 멘트를 내뱉었다.
"크흠, 이 정도면 진짜.... 여러분, 지금 채팅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네요. 사람이 콘셉트를 잡았으면 이 정도까지는 해줘야 하는 겁니다. 거의 뭐, 진성 아라드인! 모험가 그 자체! 오늘 큰 교훈 하나 얻어갑니다."
무엇보다 진성 자신에게 느껴지는 진지함을 담을 수 없다면, 그저 가벼운 톤으로 처리하겠다는 것 또한 '던전앤파이터 영상 콘텐츠'가 직업이 된 사람답다고 해야 할까.
그가 이렇게까지 콘셉트를 유지하려 한다면 굳이 진성 자신이 더 자극할 필요도 없다는 확고한 결심 또한 섰다.
["어쨌든, 이제 정원으로 돌입-. 아, 부유의 정원! 쌘비구름입니다! 차라리 잘됐어요, 최대한 빨리 녹이고 성지까지 한번 노려보죠."]
[좋습니다.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기를!]
진성으로 하여금 또다시 위화감을 들게 만드는 발언과 함께, 둘은 던전에 들어섰다.
과거 프레이-이시스 레이드에서 '코인 도둑'이라는 별명을 가진 보스 몬스터가 그들의 앞에 있었다.
* * *
패턴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 일러주었다.
해당 패턴이 발현될 때, 그것을 상기시켜주며 그때그때 적절한 방향 또는 이동형 스킬 사용 등의 타이밍을 알려주는 정도가 진성 자신이 해야 할 일.
진성은 기억하고 있던 모든 패턴의 정보 및 즉각 대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최선을 다해 알려주었고, 유저 또한 그런 진성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랐다.
적어도 그러한 면에서 진성과 유저의 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비구름! 말씀드렸죠? 보라색 장판 터질 때만 조심하면 됩니다! 그 외에는 몇 대 맞으면서 딜 하셔도 돼요!"]
다만 진성에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공격을 욱여넣는 것이 말 그대로 피격되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시점뿐이었기 때문.
'하다못해 내가 어그로라도 끌어주면 딜 로스가 좀 덜할까 싶지만서도....'
진성은 입맛을 다시다 음성 채팅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구름 어그로는 제가 좀 끌어드려요? 딜에 집중하시려면 그게 나을-."]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 또한 외부에서의 개입이 된다면 상황이 어찌 될지 알 수 없-. 크읏!]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채팅 치지 마시고 최대한 딜 넣어주세요!"]
[하아, 하아, 채팅은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패턴만 잘 살펴주십시오!]
진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채팅이 빠르다지만 '하아, 하아' 같은 것까지 일일이 치느니 그 시간에 딜을... 쩝, 저런 와중에 스킬 연계나 기본 공격이 들어가고 있기는 하니 또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조금 더 집중해서 공격하면 효율적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앞서기에, 진성의 미간에는 주름이 진 셈이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피격은 진짜 안 당하네. 계속 그렇게 살아왔다는 표현이 거짓말은 아닌가 봐.'
진성 자신이 워낙 세세하게 패턴을 알려주었다지만 그것에 반응할 정도의 컨트롤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유저의 회피력은 말 그대로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응?'
이상한 조짐이 보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보스 몬스터 쌘비구름의 광폭화 패턴 중 하나, 굉천광룡.
흑룡과 백룡 두 마리를 소환하여 유저를 따라다니게 만들며, 만약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맞부딪칠 경우, 전역에 즉사 폭발 판정이 일어나게 되는 무자비한 공격 패턴.
["아까 말씀드린 용 두 마리네요. 그냥 빙글빙글 피하면 되니까 아래로 가세요! 저는 위로 갑니다! 용끼리 부딪치지 않게 찢어놓으면 별일 없어요!"]
줄곧 맵의 구석에 있던 진성은 위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에서 진성은 느꼈다.
[예?! 둘이 같이 하는 겁니까?]
당황.
당황을 넘어선 일종의 패닉.
진성은 어쩐지 자신이 잘못한 기분이 들어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 그렇죠. 그래서 위, 아래로 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와중에도 유저는 빠르게 타이핑으로 진성에게 말했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합니까! 아니, 그러면-. 보스의 무작위 공격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마따끄진성님을 '인식하고 공격'하는 게 될... 이잇-.]
아니, 말하려 했다.
"어?"
진성은 보았다.
갑작스레 유저의 몸에 노란빛의 기둥이 번쩍거리는 모습이었다.
'쌘비구름에 저런 패턴이 있었나? 디버프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
당황한 진성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눈에 보이는 채팅이었다.
[끄, 끄아아아아-!]
정확히는 비명이었다.
흰색의 뇌룡에 닿은 유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방법이 채팅일 뿐.
'이 상황에? 아무리 콘셉트에 빠졌다 한들 지금 저런 채팅을 칠 시간이-.'
미안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황당함에, 진성이 마른침을 삼킬 새도 없었다.
피격 시점에서 일시 경직과 바닥에 깔리는 지속 대미지 판정이 있음은 알고 있었고 그 또한 일러주었건만.
["움직이세요! 윈드밀! 아니면 엑셀레이션 트리거! 바로!"]
유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까.
["딜 안 해도 되니까 움직이시라고요! 그러다 죽습니다? 굳이 코인 낭비 할 필요 없어요!"]
죽어도 되살아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성으로선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 또한 모두 '녹화 중'이거늘, 하물며 '교육 공대'로 유명한 자신에게 교육을 받은 유저가, 고작 프레이-이시스 레이드에서 사망해버리면 이 영상 자체도 쓸 수 없지 않은가!
["님, 님!?"]
진성은 황급히 그를 호출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진성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었다.
[끄으, 크으... 여기까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
마지막까지 채팅을 입력하던 유저는 결국 사망해버리고 말았다.
단말마라기에는 다소 긴 채팅을 입력하며.
"아...."
머릿속에 스치는 온갖 생각에 앞서, 진성은 우선 영상용 멘트를 내뱉으려 했다.
"아, 아쉽습니다. 콘셉트에 집착하신 건 좋은데 너무 채팅에 몰입하신 게 역시 발목을 잡았네요. 결국 사망-. 음?"
그러나 진성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마치 로그아웃해버린 것처럼 파티도 해제한 채, 그가 없어진 것이다.
"나가...셨네요. 갑자기. 콘셉트를 깨느니 그냥 파티를 깨버리는.... 으음. 아쉽습니다."
좋은 영상 콘텐츠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만이 아니었다.
그와 대화하다 진성은 진심으로 그가 프레이-이시스 레이드 솔로 플레이를 해내는 모습 또한 보고 싶었건만.
진정으로 도와보고 싶었건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인터뷰라도 한번 해보죠. 귓속말...은 일단 안 되는 거 보니, 로그아웃하신 건가?"
자신이 결국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삼키며 진성은 말했다.
"자, 우선 귓속말은 안 되니까! 닉네임으로 모험단 이름 확인하고 추후에 다시 한 번 연락드려서! 후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모험단 명칭이.... 어라?"
재빨리 던전을 나와 던전앤파이터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 [캐릭터 검색] 카테고리로 들어간 후 진성은 그의 닉네임을 입력했다.
이 모든 장면 또한 녹화되는 중이었다.
따라서 진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뭐죠?"
검색 결과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다시 게임 창으로 전환하여 조금 전까지 대화했던 닉네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몇 번이나 입력해도 결과는 같았다.
<캐릭터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캐릭터 검색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Lv. 11 이상 캐릭터만 검색할 수 있습니다.
전체 서버, 레벨 11 이상이면 포함되는 공식 홈페이지의 시스템상에서 그는 검색되지 않았다.
이것이 말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점에.
004
늦은 밤이 될 때까지도 진성은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개의 인터넷 창에 더하여 작은 사이즈의 동영상 재생까지, 하루 종일 그가 얼마나 바쁘게 지내왔는지를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진행한 일은 유사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여기다. 여기서 죽자마자 순식간에 로그아웃했지.'
동영상 플레이어를 통해 유저가 죽는 순간을 확인한 후, 다시금 인터넷 창들을 뒤적거려보았으나 그와 동일한 사례가 검색될 리 없었다.
무엇보다 '파티 탈퇴, 로그아웃, 캐릭터 삭제' 따위의 키워드 몇 개를 아무리 조합한다 한들 그러한 경우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진성이 원하는,
남성 레인저와 유사했던 케이스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설 사이트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공홈이라고. 실시간 업데이트라고.'
닉네임으로 검색하면 해당 캐릭터의 정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검색 사이트들은 또 어떠한가.
오픈된 API를 활용하는 해당 사이트들의 메커니즘까지 알아보고 곳곳의 게시판에 질문해보았으나, 그것으로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로그아웃 하자마자 캐릭터 삭제하면 될듯]
[근데 캐삭해도 적용까지 사이트 적용 텀이 있을텐데]
[ㄴㄴ실시간임]
[실시간이 그렇게까지 실시간이라고?]
[그렇게까지 실시간은 또 뭔 소리?]
[아니 근데 캐삭할때 '지금삭제' 입력해야하지않나]
[타자 ㅈㄴ 빨리 치면 가능]
오히려 진성의 질문으로 커뮤니티 유저 간의 갑론을박이 발생하여 제대로 된 정보를 찾는 건 더욱 힘들어지기만 했으니까.
"찜찜해... 영 찜찜해."
의구심은 전혀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진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동영상만 계속해서 보는 것뿐이었다.
혹시나 그가 한 말 중에 어떤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근데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잖아! 그것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나 그의 발언에서 빈틈을 찾아내어 결론을 내리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애당초 진성을 당황시킬 정도의 콘셉트로 플레이하던 유저가 아니었던가.
'그나마 떠올려보자면 과거 유명했던 유저...가 마치 지인인 척? 아니, 자신인 척? 했다는 점 정도인가.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됐지? 예전에 장비 다 지르고 접었다는 소문은 들은 것 같은데 그냥 커뮤니티에 떠도는 말이었지. 정작 실제로는 알 수도 없는 데다-. 그러고 보니 '5년 만에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한 걸 보면 아마 진짜...?'
그가 과거 유명했던 유저 본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의 발언을 복기해보자면 아마도 몇 년 만에 던전앤파이터에 복귀한 유저라고는 인정할 수 있을 터.
'아니, 5년 만에 복귀라기보다는...5년 만에 제대로 된 레이드를 뛴다, 정도로 해석하면 복귀 자체는 그 이전에 했을 수도 있겠다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 검색으로 알아본 결과, 과거 유명했던 그 유저가 던전앤파이터 게임을 돌연 접으며 사라진 게 바로 5년 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일 테니까.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기에는 닉네임도 미묘하게 다른 데다 일단 장비를-.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와도 그런 장비로 레이드는 안 하겠지, 설마.'
닉네임이야 변경권 따위를 썼을 수도 있으며 5년 전 그 시점에 해당 캐릭터를 삭제한 이후 새로이 캐릭터를 만들어 뒀다가 시간이 흘러 이번에 처음 접속했을 가능성 등도 고려해보자면.
진성은 머리를 벅벅 긁어야만 했다.
"아으으으! 머리 아파!"
경우의 수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경우의 수 중 무엇이 진실인지, 결국 알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점.
현재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의 말을 되새겨보는 것밖에 없는 셈이다.
'그 사람이 나한테 원했던 것은 레이드 공략법이야. 쩔은커녕, 버프는커녕 말 그대로 '실시간 지시'만을 원했다. 어그로도 끌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아, 어그로?'
생각을 정리하던 진성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금 영상을 돌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나눴던 모든 대화가 전부 이상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특히나 그의 분위기가 급변한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예?! 둘이 같이 하는 겁니까?]
"...그래, 분명히, 뭐, 나까지 같이 한다고는 얘기 안 했지만. 그래도 용 두 마리가 나오고 위, 아래로 빙빙 돌면서 피하면 된다고는 설명했는데...."
백룡과 흑룡은 각각 별개의 캐릭터를 쫓게 된다.
즉, 용이 두 마리 나오고, 위와 아래로 나뉜다면 당연히 두 명밖에 없는 파티에서 진성 자신에게도 어그로가 끌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으음, 내 설명이 다소 부족했다...오케이, 그럴 수는 있지만!'
유저는 말했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합니까! 아니, 그러면-. 보스의 무작위 공격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마따끄진성 님을 '인식하고 공격'하는 게 될... 이잇-.]
진성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었다.
"보스가 나를 직접적으로 보고 공격한다? 그럼 직접 인식한 다음 공격하지, 뭐, 간접적으로 보고 공격하나? 전체 패턴으로 장판 깔아버리면 그건 간접이고? 와서 근접으로 때리거나 이런 스킬형 공격으로 어그로가 끌리면 직접인가?"
이해도 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은 곧장 이어지지 않았나.
일순간이었으나 유저의 몸을 감싼 노란빛의 기둥.
'맞아. 그리고 여기... 쌘비구름에 이런 노란 빛기둥 같은 디버프는 없어. 분명히 없다. 이 사람 딜이 늦어서 새로운 패턴을 본 게 아니야. 내가 그 옛날 현역으로 레이드를 돌 때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 기둥에 맞으며 유저는 마치 이를 악문 듯 잇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그토록이나 자랑하던 '회피 컨트롤'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백룡에 아슬아슬하게 걸렸고. 그때부터....'
진성은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채팅이다. 폰트가 특별하다거나 시네마틱 영상이 곁들여진 시스템 상의 표현이 아니다.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채팅이다.
'비명을...질렀어. 하핫, 처절하게 느껴진다, 라고 말하는 내가 등신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것 또한 진성에게는 이상한 점이었다.
'움직이지도 않았지. <퍼니셔 > 스킬을 사용할 타이밍을 놓쳤어도... 레벨 95까지 키운 복귀 유저라면-. 일시 경직 상태에서 곧장 <리벤저 > 쓸 정도는 될 텐데. 무적 판정 받아서 빠져나오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고. 설령 <리벤저 >를 안 찍었어도 움직이며 <윈드밀 >을 해도 됐고, <엑셀레이션 트리거>로 바로 거리를 벌릴 수도 있었다.'
맞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움직이던 유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끄으, 크으... 여기까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
생존을 위한 스킬 활용보다 채팅에 집착을 했다?
'그렇게나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그렇게나 피격 판정 없이 다니려고 딜까지 안 넣던 사람이....'
꿀꺽.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잠시 후 기나긴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 영 찝찝하긴 한데, 뭐, 이미 끝난 일이고."
정리가 되지 않는 데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에만 매어있을 여유도, 필요도 없다는 점.
그보다 중요한 건 어차피 따로 있지 않은가.
"내일 패치 공지사항 올라온 거 없나 확인하고 잠이나 자야지."
바로 내일, 던전앤파이터의 세상이 다시 한번 확장될 테니까.
간단한 스트레칭 후에 진성은 던전앤파이터를 실행시켰다.
"응?"
곧 보게 되는 것은 익숙한 홈페이지가 아니었다.
게임 실행 런처도 아니었다.
"뭐야, 이거?"
모니터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뜬금없는 사태였으나 진성은 재빨리 대응했다.
대응하려 했다.
작업 관리자를 열어 이상 프로그램을 종료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모니터 밝기를 낮추는 동시에 모니터와 본체 연결 또는 그래픽 드라이버 문제 등을 확인해야겠다, 라는 생각 자체는 그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떠오른 점이었으나....
"아? 어?"
모니터 밖으로 넘실거리는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화면 밝기'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진성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
"무슨-. 우어아아아-ㄱ!"
순식간이었다.
빛이 진성을 집어삼켰다.
* * *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어딘가로 떨어지는 느낌.
이상 사태를 갑자기 맞이한 뇌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뜬금없는 현실 도피용으로 '내일 점심 뭐 먹지' 따위의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는 경험을 해본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아아아... 아?!"
그러다 불현듯 진성은 자신의 몸이 우뚝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실제로 멈춰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진성 자신의 모습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그저 하얗게만 보이는 장소에서, 땅에 발이 닿았는지 어쨌는지, 물속을 유영하는지 무엇인지, 자신의 신체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기묘한 공간에 놓여있었으니까.
"어, 어어! 어!"
진성은 곧장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현실성이고 뭐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의문은 지금 그에게 사치였다.
우선은 마구잡이로 발광해보는 것.
자신의 오감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인 게 당연한 일.
"합! 흐압!"
숨은 쉬어지는지, 소리는 나오는지.
본능적인 동시에 괴상한 소리를 내보고 나서야 진성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모든 게 전부 같은 공간이다.
그림자가 없어 도저히 어떻게 되었는지 인지할 수 없는 빛밖에 없는 공간.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진성의 사고는 차츰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뭐야? 여보세요! 뭔데? 누구야! 어디야! 어떻게 된 거야!?"
그래봐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짐승처럼 소리 지르던 것을 겨우 인간처럼 소리 지르는 정도였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무슨-.... 음?"
마치 진성의 괴성에 반응이라도 하듯, 그저 새하얗기만 한 공간에서 마침내 또 다른 색이 일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빛이 하얗게 빛나기만 했다면 그것은 달랐다.
전체적으로 황금색의 빛이 일렁거리는, 어떠한 덩어리에 가까운 것인가? 라고 진성이 느꼈을 무렵, 어느새 그것은 형체를 갖추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가 들렸다.
빛의 덩어리가 움직일 때 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였다.
『그것은 빛이요, 어둠이로다.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그 자체로 거룩하고 위대하지만 심연이고 혼돈이라. 그 본질은 내면에 있도다.』
한 구절이 마쳐질 즈음 진성의 눈에 보인 것은 황금의 날개였다.
『우자는 볼 수 없고, 범자는 볼 수만 있고, 현자는 알아보니, 그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내면의 본질을 볼 것이다.』
또 한 구절이 마쳐질 즈음 진성의 눈에 보인 것은 황금의 무기였다.
『그것은 위대한 의지로 회귀할 것이라, 곧 신세가 열리는 길에 내딛는 한 걸음이니 그로써 새로워지고, 그 안에서 영원하리라.』
그리고 또 한 구절이 마쳐질 즈음 드러난 것은 황금의 갑주였다.
진성은 알 수 있었다.
일렁이던 황금빛이 모두 그 얼굴로 모여들어 마침내 잔잔한 빛을 은은하게 퍼뜨리기 시작하기 전부터 진성은 인지하고 있었다.
새하얀 공간을 널찍하게 수놓는, 진성 자신보다 몇 배나 큼직한 금빛의 날개.
도저히 '인간'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체구.
무엇보다 지금 진성 자신의 앞에서 읊은 구절들.
"말도 안 돼."
눈앞에 있는 존재가 무엇이고, 누구인지.
칼로소의 파편 중 하나.
최초의 지혜자이며, 최후의 인도자.
또는 빛의 여인.
"...네메르."
초월자 네메르가 진성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005
네메르는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내 초월자라 구분되는 존재 중 하나다.
진성은 자신보다 몇 배나 큼직한 네메르를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칼로소를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칼로소의 파편이기도 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네메르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저, 저기! 저기요?"
애당초 눈앞에 네메르가 왜 보이는가?
이게 현실이기는 한가?
현실일 리가 없다면 역시 던전앤파이터를 너무 오래 해서?
'오늘 하루 종일 피곤해가지고 헛것...이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미쳐버린 건가? 뭔가 막 꿈, 너무 생생한 꿈을 지금 꾸고 있는 건가? 원래 내가 꿈에서까지 던파 관련 내용이 보일 정도로 미쳐있기는 한데-.'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를 분위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진성의 몸이 우뚝 멈췄다.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한 네메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플레인:아라드와 연결된 플레인의 인간이여.』
눈앞에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전후좌우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기분에 진성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이어진 네메르의 부름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단 중인 칼날에 닿아 그 칼날이 부러지게 만든 인간이여.』
"어, 네? 저요? 제가요?"
그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성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은 발언에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배경 설정에 대해 완전히 꿰고 있지 않더라도 지나칠 수 없는 단어, '연단 중인 칼날'.
"칼날을 부러뜨렸다고요? 연단 중인 칼날-."
『그러나 부러진 칼날은 어차피 연단될 수 없던 것,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리니.』
어떤 의미로 진성에게 다행이라면, 네메르는 진성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일까.
어쩌면 진성 자신의 말을 끊으며 툭 내뱉은 발언이 답변일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진성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이유 모를 안도감과 함께 진성은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이게 꿈인지, 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던파를 좋아하고 나름대로 잘하긴 하지만- 아, 물론 딜찍 캐릭터에 비하면 당연히 약한 건데 그래도 신규 레이드 나오면 거의 항상 최초클에 가까운 데다, 예전에 결장에서도 날아다닌 적이 있긴 하거든요, 근데 그래도-."
물론 그 말을 끝마칠 수는 없었다.
『그대의 능력을 보았다.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를 다루는 솜씨. 캐릭터 모험가로 단련된 솜씨라면 능히 진정한 모험가가, 진정한 칼날이 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대에게는 그저 진정한 칼날이 되기만을 바라지 않으리라.』
네메르는 말했다.
『그대의 능력, 그것은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들이 칼날을 벼리도록 붙잡아내는 힘.』
그것이 진성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역시나 의미는 명쾌히 해석할 수 없었다.
애당초 지금 진성에게 그런 말을 이해하려 애쓸 노력이 될 리가 없었다.
"그... 저기, 근데 집에는 어떻게 갈 수 있죠? 깨워주실래요?"
현실이면 보내주고 꿈이면 깨워달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 내던져지자마자 이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적어도 진성은 지극히 인간다운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플레인:아라드의 칼날들을 부수려는 존재가 있다. 연단 중인 칼날들을, 또한 진정한 모험가가 될 수 있는 자들, 캐릭터 모험가로 하여금 그 연단을 시작한 자들을 방해하려는 존재가 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초월자 네메르'는 '인간'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점이리라.
"...예, 그러시군요."
진성은 의미 없는 맞장구를 쳤다.
네메르의 말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또 다른 생각 때문에, 우선 그녀의 말이 최대한 빨리 끝나게끔 유도하려는 작전 아닌 작전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맞장구만 칠 수도 없었다.
『플레인:아라드에 스며들어 칼날을 부러뜨리려는 존재의 방해를 뿌리쳐야 하리니. 그대는 캐릭터 모험가들이 진정한 모험가로 거듭나는 연습을 마칠 수 있도록, 진정한 모험가 후보가 된 자들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질 칼날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 이것이 연단 중인 칼날을 부러뜨린 자의 책임이로다.』
자신에게 책임을 운운하는 네메르의 말까지 들은 이상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 네? 자, 잠시만요! 아까 무슨-. 제 잘못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고의의 유무와 죄의 유무는 같지 않으니, 잘못이 아니라도 부과되는 책임의 무게는 존재하는 바.』
"아뇨, 아뇨, 그-. 무슨 책임? 죄라니?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부러진 칼날에 대한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네메르는 물었다.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 네메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도달했는지를 되짚어본다면 비교적 간단한 해답은 떠올릴 수 있다.
"그 유저가 죽은 거, 물론 100%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건너뛰어도 이해가 되잖아요? 궁극적으로 제 탓이라고 할 수는 없죠.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도 웃기지만 게임 캐릭터 하나 죽었다고-."
『그는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가 아니다. 그대가 마주한 모험가는 진정한 칼날이 되기 위해 벼려지던 아라드인 중 하나. 또한 과거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를 가장 잘 다루었던 자로서 진정한 모험가가 되기 위해 아라드로 불려온 인간 중 하나.』
"...예?"
진성은 어리둥절했다.
네메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어, 저기, 잠시만요? 제가 잘못 이해했나? 아까 죽은 유저가-그, 그러니까 캐릭터가...."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진성이 잠시 고민하는 찰나, 네메르는 말했다.
『필요한 것은 집요하고 끈질긴 의지.』
"아냐, 아냐, 내 말 좀 들어봐요! 네메르, 님! 님이 나이트를 만드셨잖아요? 설정상? 그, 저기, 나이트를 보내요! 왜 갑자기 나한테 난리-."
『더 이상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가 아닌, 진정한 아라드의 인간으로서.』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내가 가서 뭘 어쩌-."
『시련의 거센 망치가 칼날을 벼릴 때에도, 그대는 그 칼날을 흔들리지 않게 잡고 있어 줄 부집게가 되리니.』
"아니, 뭔 부탁을 하려면 명확하고 또렷하게-."
『부집게로서의 사명을 마쳤을 때,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자리로 돌아갈지로다.』
네메르는 팔을 휘둘렀다.
"아이 시바-."
────────────....
진성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온 세상을 밝히는 것만 같던 모든 빛이 사라졌으니까.
* * *
네메르를 구성하던 황금의 에너지도, 그 에너지와 진성 자신이 존재하던 백색의 공간도 모두 사라졌다.
주변은 기묘한 어둠, 미약하나 짙은 보랏빛, 간간이 점멸하는 노란빛, 말하자면 우주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진성 자신의 손과 발이 제대로 붙어 있음을 실루엣으로나마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이게 뭔-.'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먼 치가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성은 생각했다.
네메르가 한 말을.
'아니, 그보단.... 모험가, 칼날...? 던파 스토리를 개략적으로만 안다고 해도 그 단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적어도 진성이 해왔던 던전앤파이터 게임을 기준으로 한다면, 모험가 그리고 연단된 칼날 모두 '유저'를 뜻하는 단어다.
'시련을 이기며 강해진 유저, 즉, 날카롭게 만들어져가는 칼날로서 유저는 사도들을 싹 다 죽여나가는데~ 그 와중에 무슨 뭐, 음모가 막 섞이고 꼬이고-. 아주 크게 보자면 그런 느낌이잖아?'
게임 속 유저, 모니터 밖의 인간.
그들을 게임에 더욱 몰두하게 만드는 스토리 라인.
'근데 그렇게 내가 해왔던 게-. 아니, 나뿐만이 아니지. 던파에서 해왔던 게... 캐릭터 모험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라고?
진성은 네메르가 말한 것을 되짚어보았다.
'플레인:아라드 그리고 캐릭터 모험가.... 플레인은, 그래, 차원 같은 개념-. 아!? 어?'
그러나 그 생각에만 몰입해 있을 수 없었다.
온몸에 갑작스레 돌기 시작한 뻐근한 감각과 함께 눈앞에 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하고 우중충하고 또한 기묘한 보랏빛이 간혹 보이는 공간 가운데서 일렁이는 환한 빛은 얼마나 통쾌한 것인지.
진성은 움직였다.
허우적거리는 것인지 달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빛을 향해 열심히 움직였다.
빛이 접근하는 것인지 진성 자신이 다가가는 것인지, 마침내 그 빛이 주변의 어둠을 모두 걷어내며 진성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을 때!
진성은 대지에 발을 디뎠다.
"...뭐야, 이건?"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다소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자신의 컴퓨터 앞은 아니었다.
"어디-. 콜록, 콜록. 음?"
매캐한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름과 동시에 느껴지는 열기.
진성 자신이 있는 곳이 숲이라는 것을, 그것도 불타고 있는 숲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실이냐, 아니냐 따위의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다가오는 불길의 뜨거움을 이미 느꼈기 때문이자 연기를 들이마시기 무섭게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의 기침이 나오기 때문이었고.
"어? 어어, 뭐야, 미친!? 내 팔-. 팔이 왜-."
이것이 진성 자신이 완벽하게 겪고 있는 현실임을 깨달았을 때 알아보게 된 또 하나의 정보는 자신의 육체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움직이던 육체와는 사뭇, 아니, 아주 많이 달라진 몸이었다.
특히나 팔을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철그렁거리는 소리.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변해버린 양팔은 어떤가.
묵직하고 어색한 팔의 움직임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 팔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귀검사! 아니, 그냥 귀검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은 귀검사가 되어 있었다.
더 정확히는 던전앤파이터의 외전 직업군 중 하나.
"-다크나이트!"
어찌나 당황하였는지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으나, 지금은 놀라는 것도 사치였다.
"누구냐!?"
"헙."
날카롭고 뾰족한 목소리에 진성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울창한 숲.
타오르는 화염.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
"이 숲에 있는 자가 누구지? 마법진을 파괴한 자인가? 결코 네 뜻대로 되지는 않으리, 이 숲은, 그란플로리스는 내가 지킬 테니까!"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휙, 꺾고 나서야 진성은 볼 수 있었다.
불그스레 타오르는 화염의 가운데, 공중에 살포시 떠 있는 인간인 자 또는 인간이 아닌 자의 모습이었다.
불그스레 타오르는 화염의 가운데에서도 유독 빨갛게 보이는 여성의 외형.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캐릭터를 생성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마주할 수 있는 NPC이자, '던전:불타는 그락카락'의 보스.
'화염의 비노슈...?'
진성은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당황스러워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비노슈와 다른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비노슈 님이셨군요."
비노슈보다 더 먼 곳에서부터 화염을 향해 걸어오는 또 다른 두 개의 인영에서 나온 목소리.
그리고 그중 앞선 자에 대해서라면,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서라면 진성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가!
'...세리아! 세리아 키르민!'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그 어떤 NPC보다도 많이 마주쳤을 존재, 세리아 키르민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006
진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세를 더욱 낮춰야 했다.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마저 드는 것은 도대체 어째서인지.
'뭐야? 뭐야, 이거? 진짜 세리아-. 진짜 세리아야. 그리고 화염의 비노슈... 잠깐만. 그러면 저 뒤에는-.'
세리아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남자 귀검사였다.
남자 귀검사 관련 모든 직업에 이미 아바타를 다 입혀놓은 진성에게 있어선, 오히려 뾰족머리를 자랑하는 남자 귀검사 특유의 기본 외형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남귀검사 도트 다시 찍기 전 모습이 생각나는데. 약간 저런 느낌으로- 아니, 아냐. 자꾸 현실도피 하지 말고! 제대로 생각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정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임을, 지금 당장 자신이 처했고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임을 곧장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법이었다.
패닉에 빠지기 가장 쉬운 순간이었음에도 진성은 또렷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교육 공대 중에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패닉에 빠졌을 때 최악은 최선의 상황을 기대하는 거다. 그래선 안 돼. 최악의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인정하고-. 후퇴 후 재진입할 때가 레이드 성공률이 가장 높았음을 떠올려라.'
어떤 의미로는 패닉에 빠질만한 상황에서의 대처에 충분히 단련이 되었기 때문일까.
진성은 자신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던져졌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 관점에서부터 지금의 상황을 해석한다면, 지금 이 자리는 어디인가.
'캐릭터 만들면 처음 겪는 그 시나리오 퀘스트야. 그란플로리스에 불이 나서 어쩌고저쩌고 처음 겪는 거기...라고? 잠깐, 거기? 거기라면 근데 내가 왜? 여기 있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마자 진성의 두뇌는 급속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점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이 캐릭터를 처음 만들고 자연스레 겪는 시나리오 퀘스트의 일부라면?
홀로 숲속에 뛰어 들어간 세리아를 구해달라는 라이너스의 부탁으로, 유저가 처음 만든 캐릭터, 즉, '모험가'는 그란플로리스에 돌입, 그곳에서 세리아와 만나 화재의 원인 및 또 다른 문제 등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겪는다.
즉, 지금이 그 도중이라고 했을 때?
'시나리오 퀘스트에... 내가 있는 건가? 아니, 그러면 뭐가 어떻게... 나는? 시나리오 퀘스트는 그냥 1인 전용일 텐데.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아, 내가 보이지 않나? 그게, 어....'
시나리오 퀘스트에 진성 자신이 들어와 있다?
생각이 얼기설기 폭풍을 치는 와중에도 진성의 귀는 또렷하게 듣고 있었다.
거리는 제법 멀다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세리아와 비노슈의 대화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비노슈 님이 계속 이렇게 막고 계실 순 없어요.... 케라하 님이 힘들어하고 계세요."
"케라하.... 너희 케라하를-."
"저희가 비노슈 님을 돕게 해주세요. 비노슈 님께서 케라하 님의 곁으로 돌아가실 수 있돌고 힘을 보탤게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확실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비노슈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화르륵, 얌전하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꿔 말하면 지금은... 그래. 이제 인게임 내에서의 '대화'는 끝나고-.'
전투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세리아의 앞으로 순식간에 남자 귀검사가 달려들었다.
그냥 '평타'만 세 번 누르는 기본 콤보 정도로도 대충 비노슈는 상대할 수 있는 법.
특별히 좋은 아이템을 장착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던전앤파이터 '시나리오 퀘스트 던전'의 난이도는 쉬우니까. 그래... 그렇다면 분명 지금, 나는.'
던전앤파이터 게임 속에 있다.
진성 자신이 알고 있는 던전앤파이터의 세계관, 그 배경이 되는 공간.
다만, 그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면 던전앤파이터의 벨트 스크롤 액션 게임이 아니라는 것.
'게임 속... 말하자면-. 게임 속으로 빙의해 버린 나는-.'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아라드 안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지닌 1인칭 시점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진성 자신의 눈앞에서, 바로 그 '평타 세 번 누르는 기본 콤보'조차 화려하고 무섭게 보이는 상황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거지?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진성이 생각하는 사이 화염의 비노슈는 쓰러졌다.
그다음이라 할 것도 없었다.
비노슈는 진성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불을 꺼주고, 세리아와 '모험가', 즉, '유저'는 다음 던전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으니까.
'여기서 내가 튀어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러면...지금 이게-. 적어도 '저 사람' 한테는 게임 속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튀어 나간 내가 보이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거야?'
시나리오 퀘스트 도중 알 수 없는 유저 또는 NPC가 개입했다, 라는 개념?
그런 게 성립할 수 있을까?
진성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무작정 도박수 따위를 두는 게 아니다.
어쨌든 다크나이트의 몸으로 빙의가 되어버린 이상 분명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니, 허튼짓 않고 그 일만을 처리한 후 다시 원래의 세계로, 진성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게 시급하지 않겠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뭔지 모르지만, 이걸 끝내면-.'
뇌를 휘젓는 혼란 속에서 진성이 찾은 것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부집게로서의 사명을 마쳤을 때,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자리로 돌아갈 지로다.』
'다시 컴퓨터 앞일 거야. 응, 분명 그럴 거야.'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렇다면 결국 뭘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한다는 뜻.
진성은 입술을 지그시 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숲의 더욱더 깊은 곳을 향해서, 더욱 어두운 장소를 향해서.
즉, '던전:어둠의 선더랜드'를 향해서.
* * *
진성에게는 두 사람이 그저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아마 저게 진짜 유저라면... 진짜 컴퓨터 앞에서 던파를 하고 있는 게이머라면-.'
던전 선택 지도로 잠시 화면이 변한 후 어둠의 선더랜드를 클릭하여 입장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게임을 통해서라면 거의 일순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변화를, 지금 진성 자신은 이렇게 일일이 뒤쫓고 있는 중인지.
어쨌든 '던전:어둠의 선더랜드'에 돌입했음을, 진성에게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존재들 또한 알려주는 중이었다.
"구울, 이미 죽은 망자들이에요. 그란플로리스에 어째서 이런 일이...."
세리아의 중얼거리는 소리 또한 진성에게는 들렸다.
진성은 그들의 뒷모습을, 정확히는 우측 후방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귀검사가 움직인다. 역시, 이게 게임 그대로라면. 세리아와의 대화를 할 즈음에는 컨트롤이 되지 않았겠지. 이제서야 움직이는 거야.'
남자 귀검사 캐릭터가 좀비, 구울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는 모습을 진성은 차분하게 살폈다.
이런 여유를 갖는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통상적으로 던전앤파이터의 벨트 스크롤 액션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진행된다.
던전의 구성 방식에 따라 방향이 다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좌에서부터 우로 나아가는 셈이다.
'즉... 저들의 우측 후방에 있는 나는-. 적어도 저 유저의 게임 화면에는 보이지 않을 거다. 모니터로 보이는 맵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을 테니-.'
이것이 던전앤파이터 게임 속이라면.
저 남자 귀검사가 정말 '유저가 컨트롤하고 있는 게임 속 캐릭터'라면.
해당 '유저'의 모니터 화면 속에는 진성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터.
"...후우."
진성은 검게 변해버린 자신의 양쪽 팔뚝을 번갈아 가며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상완까지 새까맣게 변해버린 왼팔.
그리고 역시 손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검어진 오른팔.
카잔 증후군을 해소하여 카잔에게서 벗어나는 대신 얻게 된 일종의 흉터이자 흔적.
왼팔 상완과 왼팔 손목 그리고 오른팔의 상완, 손목에 있는 누런색 '귀수 구속구the Demon Shackle'의 차가운 감각까지.
분명한 반응이 느껴지는 신체였다.
꿈일 리가 없다. 이것은 현실일 것이다.
"...근데 내가 알고 있는 다크나이트랑 미묘하게 다른데. 원래 오른팔에는 손목 부분에만 있지 않던가? 이 카잔 증후군 흉터 같은 거무튀튀 피부도 미묘하게 더 늘어난 것 같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체가 되어버린 캐릭터 배경 설정에 집착하는 것 또한 진성다운 면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캐릭터 티어도 말이지. 기왕이면 다른 거, 특히 내가 주캐처럼 쓰는 것에다 빙의를 딱 시켜줬으면 얼마나 좋냐고. 뭐, 다크나이트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아참, 이거 나중에 네오플에 말하면 어떻게 거래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신박하고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주고 전부위 20증폭 확정권 같은 거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으려나? 으힛.'
그러나 반쯤은 농담처럼, 반쯤은 너무나 무거워진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려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진성이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릴 동안에도 남자 귀검사와 세리아는 착실히 나아가는 중이었기에, 진성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둘을 따라잡아야 했다.
'근데 게임 빙의? 라고 해야 하나, 이거... 너무 불편한데. 미니맵 같은 것도 딱 있고, 응? 이 방에서 다음 방으로 가는 길목에는 닫힌 문이 샤라랑~ 하면서 열리는 그런 느낌으로 가이드가 딱 되어야 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남자 귀검사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장소도 진성에게는 그리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다.
울창하고 빽빽한 나무가 그곳에는 조금 적다, 같은 느낌이 전부라고 해야 할까.
'유저였으면 바위나 수풀 약간 있고... 그냥 평평한 잔디밭 느낌에 더 가까운 정도로 보이고 있으려나.'
머릿속에 드는 여러 상상을 확인할 길은 역시나 없다.
그리고 이제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지팡이를 든 구울? 그리고 저건.... 요정들의 마법진?"
세리아와 유저는 마침내 '던전:어둠의 선더랜드'의 최종 보스이자, 사실상 캐릭터 생성 후 첫 번째 시나리오 던전의 마지막을 맞이하려는 중이었으니까.
'남귀검사님, 빨리 죽이라고요. 그리고 세리아가 정화한다고 나서면서~ 끝나면 나도 이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진성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두 손을 모았다.
남자 귀검사의 특별할 것 없는 컨트롤 실력으로도 굴 구위시는 금방 처치할 수 있었다.
물론 스토리 상 곧장 사망하지 않는다.
마법진의 힘을 얻은 굴 구위시는 계속해서 부활을 거듭하며, 그것을 막기 위해....
"제가 저 구울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모험가님을 믿고... 숲의 어둠을 정화해볼게요."
세리아가 나서니까.
'그래요, 세리아 씨! 잘한다! 당신 원래 요정이잖아! 아니, 실제로는 요정보다 더 대단한 이슬-. 하여튼! 빨리 정화하고 끝냅시다!'
세리아는 자신의 마력으로 요정의 마법진과 얽히며 공중으로 부양한다.
그리고 세리아가 그렇게 마법진을 정화하는 사이, '유저'가 할 일은 하나.
마법진을 정화하는 세리아를 보호하는 것.
'굴 구위시를 다시 죽이는 거지. 자, 남귀검사님!'
구체적으로는 굴 구위시를 처치하는 것!
진성은 이제야 모든 일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함께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얼...른?'
따라서 진성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 귀검사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놀랄 만한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라?"
굴 구위시는 남자 귀검사 유저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 요정의 마법진을 향해 쥐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진성은 들었다.
"아윽!"
세리아의 비명이었다.
진성으로서는 더없이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007
"세, 세리아가-. 맞는다고? 피격 판정이 있었어?"
세리아의 HP를 본 적도 없다.
무엇보다 진성 자신이 캐릭터를 키울 때에는 그냥 휙, 쓸어버리며 지나갔기에 굴 구위시가 세리아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습조차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진성의 눈앞에서 세리아는 맞았다.
심지어 신음을 흘리며 아파하고 있다.
"어... 잠깐만. 이거, 그러면 어떻게...."
진성은 멍하니 있는 남자 귀검사와 세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굴 구위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몬스터들은 남자 귀검사를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건데? 왜 안 죽여? 라면 먹나? 하필 지금?'
'근데 유저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남자 귀검사 캐릭터가 사망하면 어떻게 될까.
구체적으로는 진성 자신이 어떻게 될까.
남자 귀검사 캐릭터가 죽는 것, 즉, 유저가 죽는 건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코인으로 부활이 가능할 테니까.
물론 저들의 공격 정도로 유저가 사망하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 터.
라면을 먹는 도중이라도 화면 안에서 자신의 캐릭터가 맞는 모습을 보면 다시 반응할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남았다.
굴 구위시의 공격으로 인해 세리아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세리아가 죽는다... 세리아가...."
던전앤파이터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진성이다.
세리아가 이곳에서 죽기도 할까?
'아니, 그래도, 뭐, 밖에 나가면-. 있겠지. 세리아가 죽는 일은 스토리 상에도 없-.'
없었다.
원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설마..."
머릿속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진성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세리아가 죽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
그저 퀘스트를 다시 시작하는 정도가 아닐 것 같다는 기분.
던전앤파이터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감각이, 결국 진성을 움직였다.
"그륵?"
"구...."
그와 동시에 남자 귀검사 캐릭터를 가격하던 몬스터들 그리고 세리아를 가격하던 굴 구위시의 얼굴이 움직였다.
"하... 하하."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성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만약 지금 유저가 돌아온다면 어떻게 보일까?
또는 자신이 중얼거리며 한 저 말은 어떻게 나타났을지?
진성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그리고 잡념이 머릿속을 지배해선 안 된다.
그랬다가 얻을 수 있는 결과는 하나뿐이니까.
"캬아아아아-!"
허벅지까지 자란 풀숲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괴이하게 생긴 얼굴이 가면이라는 것을, 진성 자신을 향해 휘두른 게 손톱이라는 것을.
"끄앗!"
본능적으로 물러섰으나 루가루 종족의 쿠로가루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진성은 깨달았다.
그저 시각적으로 봤기 때문만이 아니라, 새카맣게 변한 자신의 왼팔에 생긴 기다란 손톱자국과 함께, 그곳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아, 아...파?"
느껴지는 것은 화끈한 고통이었다.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찰과상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캬아아아아-!"
"구... 화재...."
그 고통은 진성을 일깨웠다.
이곳은 던전앤파이터 게임 속이다.
그러나 진성 자신에게는 현실이다.
"아, 아으... 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진성은 결국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사삭, 파사사삭-!
"하아, 하아...."
"구...."
"...화재...."
진성 자신의 요동치는 심장과 다급한 마음과 달리, 긴장하여 경직된 육신은 어두컴컴한 숲을 느릿느릿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와 고통으로 인해 떨리는 몸.
진성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꺼지라고! 원래 나한테 올 것도 아니면서, 젠장!"
"캬아아아-!"
또 한 마리의 쿠로가루가 진성 자신을 향해 도약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해내기도 잠시.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을 치지만 진성은 알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도망갈 수 있는지,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진성 자신이 도망감으로써 '사건'이 터져버린다면?
진성은 보았다.
이 어두컴컴한 숲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빛.
그리고 그 빛의 주변으로 겨우겨우 보이는 몇 개의 실루엣.
굴 구위시는 진성 자신을 쫓고 있지 않다.
세리아를 공격하고 있다.
진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시야에 똑똑히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진성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젠장... 이거 원래는- 이거 원래 내가 할 일이 아닌데!"
상처로 인하여 떨리던 왼팔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새카맣게 변한 그의 오른손은 곧 허리춤을 향했다.
익숙하지 않다 못해 낯설기까지 한 감각이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내가 이래봬도-. 다크나이트 랭킹 8위도 찍어본 사람이라고!"
진성은 검을 뽑았다.
그러곤 검을 쥔 양팔에 온 힘을 모아,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외쳤다.
"<다크 슬래쉬>!"
온 힘을 모아 강하게 그은 베기.
암暗속성의 검보랏빛 기운을 머금은 진성의 검은 다가오던 좀비와 쿠로가루를 동시에 잘라냈다.
* * *
"구웃-?"
"캬르...."
순식간에 잘려 나간 몬스터들을 보며 주변의 다른 몬스터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지능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 또는 그저 본능적인 반응인 듯 보이는 그들이었으나, 정작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놀란 건 진성 본인이었다.
"되... 된다. 됐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본인이 써 본 가장 긴 검이 무엇이 있을까.
두 칸 또는 세 칸을 겨우 끄집어내어 사용했던 커터칼?
케이크를 자르는 플라스틱 나이프도 칼이라 할 수 있다면, 기껏해야 그 정도?
그러나 지금 진성 자신이 사용한 도검은 무엇인가.
도刀. 날이 한쪽에만 섰으나 그 검날의 길이만으로도 80cm는 족히 될 법한 무기!
처음 휘둘러보는 무기를 예상보다 더 잘 다룬 것만으로도 놀랍건만 조금 전 진성 자신이 걸어본 도박수의 결과는 또 어떠했던가.
"캬륵-."
또 하나의 쿠로가루가 진성 자신을 향해 달려들려는 찰나.
진성은 느꼈다.
지금 이 순간, 뒤로 물러서야 하는가?
다른 캐릭터였다면, 다른 직업군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성의 선택은 달랐다.
"<바운스 블로우>!"
스킬을 사용했을 때의 움직임이라면, 모니터 안에서 진성 자신이 보유한 도트 캐릭터의 움직임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는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쿠로가루를 향해, 역시나 낮지만 빠른 도약으로 마주 뛰는 동시에.
휘익──────!
위에서부터 아래로 빠른 내려베기를 시전하는 것!
"-캬아...."
쿠로가루의 오른팔이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진성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게임이었으면 그저 땅에 널브러진 후 사망 판정과 함께 잠시 후 사라졌을 터, 역시 진성 자신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걸까.
그러나 지금 중요한 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흑!"
굴 구위시에게 또다시 가격당한 세리아의 연약한 신음이 진성을 일깨웠다.
집중해야 할 점에 집중해야 한다.
진성은 자신의 도를 꼬나쥐었다.
"제기랄, 스킬 창이라도 보여주면! 아니, 내 아이템이랑 정보는 어디서 보는 건데! 콤보도 자동 설정이라 별 의미도 없겠지만-....!"
그 와중에도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의 진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변해있었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의 칼끝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
"말했지? 나 다크나이트 랭킹 8위까지 찍어 본 사람이라고. 너넨 다 뒤졌어."
그리고 그 칼 끝 너머로, 마법진을 수복하기 위해 공중에 떠오른 세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타오르고 있다는 점.
"<어퍼 >, <브리프 컷>!"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것과 다르다.
진성 자신의 공격이 통함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말 그대로 각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구우우...."
"화재... 막아야...."
"쿨타임도 안 보이고 말이야! 원래 이거 A, A 누르면 나가는 기본 콤보라고, 알아? 뭐, 쿨타임이야 어차피 안 보인다 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 바로 지금!"
무엇보다 진성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활용된다는 것을 확인한 시점에서부터, 진성의 움직임은 조금 전 제대로 도망도 못 치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셈이었다.
"<다크 슬래쉬>, <바운스 블로우>! 참고로 이건 S, S다, 이 자식들아!"
진성은 말 그대로 '던전:어둠의 선더랜드'에서 활개를 치는 중이었다.
달리는 움직임,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게임이었다면 X키를 누름으로써 발동될 법한 '평타 판정'.
몇 마리의 몬스터가 있다지만 진성에게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마법진을 복구해야...."
굴 구위시는 어느새 세리아에게서 떨어져 진성에게 다가왔다.
좀비를 향해 <다크 슬래쉬>를 쓰려는 진성의 뒤를 향해, 그 지팡이를 크게 휘두르는 공격까지.
그러나 진성은 느끼고 있었다.
모니터 속 게임을 바라보는 감각과는 전혀 달랐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
굴 구위시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더하여, 마력에 의해 은은한 푸른빛이 진성 자신의 뒤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휘이이이익-!
"끄으?!"
지팡이가 허공을 베어내자 굴 구위시는 당황한 듯 소리를 내었다.
그 시점에서, 진성의 목소리는 이미 그의 뒤편에서부터 들리는 중이었다.
"이거 몰라?"
굴 구위시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보스 몬스터를 마주하며 진성의 입꼬리는 씨익, 올라가 있었다.
"평타 중 캔슬 백스텝."
한때 랭커였던 자가 어깨를 으쓱하기에는 터무니없는 기초 컨트롤이지만, 키보드로 해낸 게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인 굴 구위시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성의 표정은 이해가 가는 것이리라.
굴 구위시는 반복적인 대사를 내뱉으려 했다.
"마법진 복구-."
"<다크 슬래쉬>!"
그러나 그보다 진성의 스킬이 빨랐다.
암흑의 기운이 서린 진성의 검이 굴 구위시의 어깻죽지부터 복부까지, 길게 베어내었다.
───────────...!!!!
그리고 그 순간, 마법진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끝난 건가?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가?'
진성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마법진 앞에서 쓰러진 굴 구위시의 사체를 살폈다.
자신이 베어낸 상처 부위에서 툭, 튀어나오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
하나는 목걸이. 또 하나는 검보랏빛의 덩어리.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러한 아이템들 옆에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아이템.
'카드? 아?!'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카드를 쥐었다.
어떤 의미로 습관성 루팅과도 같았지만, 목걸이와 검보랏빛 덩어리와 달리, 진성 자신이 주워야겠다는 생각은 어째서 든 것인지.
고민과 결단보다 빠른 건 본능이었다.
'우, 우선 피하자.'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므로 진성은 재빨리 숲속으로 몸을 내던지며 숨었다.
그리고 나서야 진성의 귀에도 무언가가 들려왔다.
"ㅇ뫠ㅓㅏ러ㅙㅑㄹ"
남자 귀검사 캐릭터의 이해할 수 없는, 제대로 음성화조차도 힘든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이어 나온 소리로 인하여 진성도 어렴풋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나온다 됐나? 렉? 렉렉 렉"
서버 접속 지연 상태, 통칭 '렉'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연이은 채팅을 입력하는 중이리라.
진성은 당황스러웠으나 어차피 그에게 말을 걸 수도, 필요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당혹스러운 채 수풀로 숨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서 '렉'이라고 할 만한 사태가 종료된 지금.
"모험가님...!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요정의 마법진 위에 스러졌던 세리아가 일어나 남자 귀검사 캐릭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다만,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렉?'
그 한 단어로 인한 불길함이 진성의 머릿속에 스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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