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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진성은 생각했다.

'렉 현상이었다고? 라면 먹고 어쩌고 한 게 아니라 렉? 그게 말이 되나?'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던전앤파이터에도 물론 렉 현상은 있다.

게임 서버만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컴퓨터와 인터넷 회로의 문제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온라인 게임을 즐겼던 유저라면 반드시 겪어볼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 법한 시점에 렉이 걸렸다가... 문제가 딱 해결되자마자 렉이 풀린다고? 아, 렉이 걸렸기에 문제가 생긴 거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서버 접속 지연 현상이 생겼다면 지금쯤 남자 귀검사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을 유저.

즉,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진짜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정말 렉이었다면.

덜컥 멈춰버린 화면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연결이 되어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굴 구위시를 본인이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알 텐데?'

그런데 시나리오 퀘스트가 진행 중이라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냥 시간이 지나서 자동으로 클리어됐다고 생각할까?

'뭐, 아직 초반부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신규 유저든, 부캐를 키우는 유저든.'

아슬아슬하게 허용할 수 있는 범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저 진성 자신의 바람 때문은 아닐지.

어쨌든 이미 모든 일은 벌어진 다음이었으므로 진성은 그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굴 구위시를 처치했다곤 하나 아직 해당 시나리오 퀘스트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굴 구위시가 사망하며 흘린 검보랏빛의 덩어리에서 검은 힘이 새어나오기도 잠시, 어느새 세리아와 남자 귀검사 주변에는 또 다른 구울들이 생성되고 있지 않은가!

"이건... 구울들이...!"

세리아의 놀란 목소리에도 진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남자 귀검사 유저의 렉이 풀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굵직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낸 자들이 다가올 것을 진성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노슈 님, 샤우타 님!"

진성 자신도 한 번 보았던 화염의 비노슈와 그 이전에 숲의 타우들에게 지시를 내렸을 타우왕 샤우타까지.

구울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힘에 더하여, 구울을 불러낸 검붉은 덩어리를 곧장 태워버리는 비노슈를 보며 진성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아마도 이러면... 끝이다.'

세리아와 비노슈 그리고 샤우타의 이어지는 대화 또한 무난한 흐름이었다.

"요정들의 희생을 악용하던 구울이 있었고, 모험가님이 처치하셨어요."

세리아의 말에 진성은 약간의 섭섭함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실제론 내가 한 겁니다. 그 인간 렉 걸려서 아무것도 못 했다고요.'

이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도 여유가 생겼음을 뜻하는 것.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진성 자신이 다시 나설 일이 없게 되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구울 따위가...."

"방금 비노슈 님이 태운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역병 같은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그건 이 숲에 있던 것이 아니다. 전이 현상이야."

세리아의 물음에 비노슈는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매우 중요한 대화였으나, 어쩐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진성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 그렇지. 그거 디레지에의 파편인지, 떨어져 나온 조각인지. 아마 그런 걸 텐데. 역시 비노슈 누님이라니까.'

이미 스토리를 다 알고 있는 진성 자신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무엇보다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진성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대화를 마치고 비노슈와 샤우타가 먼저 떠난 후 세리아와 모험가, 즉, '유저'까지 발길을 돌리는 모습은 진성에게 약간의 감동마저 선사할 정도였다.

'좋아. 좋았어!'

물론 진성이라고 그저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진성 또한 천천히 세리아와 남자 귀검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이 곧 던전 지역 '그란플로리스'의 밖을 향하는 곳일 테니까.

중간중간 타우를 비롯한 루가루 또는 고블린 등에게 들킬 뻔도 하였으나, 다행히 진성은 별다른 문제 없이 이동할 수 있었고, 마침내 볼 수 있었다.

험한 숲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돈된 도로.

비록 전부 다는 아니라지만 돌로 포장까지 되어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이자, 볕이 잘 드는 곳.

푸쉬이이이익-!

'아라드 간이 해체기!'

그리고 던전 입구 앞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해체기까지 확인한 시점에서, 진성은 깨달은 것이었다.

마침내 던전 지역을 빠져나왔음을.

"나왔어... 나왔다! 됐어! 끝났어!'

기쁨에 겨운 자가 내뱉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고함과 동시에.

────────────...!

"읏? 눈부셔!"

갑작스레 진성에게 빛이 쏟아져 내렸다.

소리는 없었다지만 쾅, 하고 내리찍는 것과 같은 강한 기세로 빛에 휘감기며 진성은 생각했다.

'...이거 설마 레벨 업 이펙트?'

그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진성 자신의 앞에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ㅋㅋ 님 머함?"

팔짱을 낀 건장한 체격의 남자 프리스트 캐릭터가 말했다.

진성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왜 혼자 중얼거리고 있음? ㅋㅋㅋㅋ 뭐가 끝나요? 눈은 왜 부심? ㅋㅋ"

남자 프리스트 유저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순간, 진성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 * *

남자 귀검사 때는 그다지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와 거리가 멀었던데다 당장 얼굴을 살피거나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세리아의 안전, 그것 하나에만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몬스터도 없고, '시나리오 퀘스트 전용 1인 던전' 내부도 아니다.

말 그대로 유저와 유저들이 지나다니며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공개된 장소.

"아? 그 쩜쩜은 머임?"

웃음을 꾹 참으며 진성 자신에게 말하는 남성 프리스트의 얼굴.

어쩐지 어색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상황을, 진성 자신도 겪어본 바 있다.

그럼에도 진성은 물었다.

"님 지금 접속 중인 거죠?"

"? ㅋㅋㅋ 무슨 뜻?"

남자 프리스트는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진성은 보았다.

따라서 다시 물었다.

"던파 접속 중인 거죠?"

"? 진심으로 묻는 거?"

눈앞의 캐릭터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이제 그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의문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진성은 마지막으로 말해보았다.

"네. 지금 제가 뭐 하는지 보이시나요?"

만세를 하면서.

두 팔을 치켜드는 평범한 행위이자 특별히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동작도 아니다.

그러나 못 볼 리 없다.

'보통의 현실'이라면 무엇을 했는지 반드시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다.

남자 프리스트 캐릭터는 말했다.

"그냥 서 있는데 뭘 함?"

진성에게 확신을 주는 한마디를.

"...역시."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이 겪었을 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메르의 말이 사실이었나? 정말... 정말 그런 거였나?'

지금 진성 자신이 던전앤파이터 게임 속에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 남자 프리스트 캐릭터가 그저 던전앤파이터 게임을 즐기는 유저의 것이라면.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프레이-이시스 레이드 할 때... 그 남자 레인저의 포지션이고... 이 남프리스트는-.'

진성이 겪은 것은 바로 눈앞의 사람, 남자 프리스트의 입장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진짜 현실'의 세계에서, 진성은 겪었다.

그렇다면 지금 진성의 입장은.

"ㅋㅋ 이상한 사람이네"

남자 프리스트 캐릭터는 그대로 그란플로리스 던전 지역으로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였다.

저 사람에게는 게임이지만 진성 자신이 조금 전까지 겪은 바에 비추어보자면.

진성은 터덜터덜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어야만 했다.

아직도 쿠로가루에게 할퀴어져 후끈거리는 감각이 남아있는 왼팔을 빤히 보며 온갖 상념에 휩싸였으니까.

'그렇다면 그 남자 레인저는 어쩌면 정말로... 5년 전-. 갑자기 던파에서 사라졌던....'

그 유저였을까.

강화와 증폭을 할 때마다 메가폰으로 서버와 채널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별것 아닌 것으로도 유저들을 흥겹고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고高강화 장비의 유저였을까?

진성은 새삼 네메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가 아니다. 그대가 마주한 모험가는 진정한 칼날이 되기 위해 벼려지던 아라드인 중 하나. 또한 과거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를 가장 잘 다루었던 자로서 진정한 모험가가 되기 위해 아라드로 불려온 인간 중 하나.』

'...빌어먹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드는 감정은 연민이었다.

진성 자신이 루가루 족에게 한 번 긁힌 수준의 아픔이, 만약 게임이었다면 HP가 얼마나 감소하는 수준이었을까.

제대로 맞아본 적도 없는 진성이지만, 그 피해가 미미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그런데 쌘비구름의 뇌룡에 맞았어. 그런 장비로- 그런 허접한 장비로....'

그 수준의 피해에 비한다면 프레이-이시스 레이드의 강력한 보스 몬스터 중 하나의 공격은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할지 상상조차 들지 않을 정도가 아닌가!

'그게 채팅이 아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그 처절하고 괴로워하던 것은-.'

실제로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실제로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떠오른 게 바로 공포이자 두려움이었다.

'5년이라고? 레벨 95까지 키워서 이시스 레이드를 뛰었어? 그게 무슨-. 아니, 잠깐. 나는?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진성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답답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젠자아아앙! 어떻게 되는 거냐고! 끝난 거 아냐?! 뭐야! 왜 아직도 엘븐가드인데!"

진성은 소리를 빽 지르며 제자리에서 발광하듯 움직였다.

유저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면 진성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겠으나, 다행이라면 초보존인 이곳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으며.

'아! 아이템!'

또 하나는 새로이 무언가가 떠오른 진성이 발광을 멈췄다는 점이리라.

진성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손에 턱 잡히는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딱딱하고 각진 아이템, 카드였다.

굴 구위시를 처치했을 때, 그 사체의 곁에 놓여있던 아이템 중 진성이 챙겼던 바로 그것.

'굴 구위시와 관련된 템은 아마 장비? 도적 무기 중에 하나 있던 것 같기는 한데 마법 부여용 카드는... 없지 않나?'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카드'라 함은 몬스터가 가진 기운의 일부를 마력으로 옮겨 담은 것으로, 게임 내에선 유저들의 아이템에 '마법 부여'라는 행위를 통해 스킬 데미지, 스테이터스, 속성 강화나 저항 등의 추가적인 옵션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성 자신의 기억으로는 분명 '굴 구위시 카드'라는 이름의 아이템은 없다.

'아니, 설령 있어도 이상하지. 시나리오 퀘스트용 던전에서 뜬금없이 카드가 나올 리가- 음?'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드랍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진성의 가슴은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성은 카드를 꺼내어 살폈다.

[굴 구위시(오염)]

'...응?'

아이템에 부여할 수 없는 능력치 따위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만, 진성이 그동안 몇백, 몇천 장 이상 살펴왔던 마법 부여용 카드와는 그 구성부터가 다른 문구라니?

'이건 무슨-. 아, 아아!?'

진성은 카드를 오래도록 살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눈앞이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간 느낌이 듦과 동시에 역시나 자신의 몸이 허공에 내던져진 것 같다는 감각이 들었을 때.

진성은 다짜고짜 소리쳤다.

"아?! 으-. 저기, 저기요! 다 했습니다! 예, 다 했어요!"

당황했으면서도 동시에 당황하지 않은 것은 이것을 겪어보았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칼날이 연단될 수 있도록 바로잡는 부집게. 그대는 그 역할을 훌륭히 완수했으리니.』

네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의 입꼬리는 이미 헤벌쭉 올라가는 중이었다.

009

어둠과 어둠만큼 짙은 보랏빛만이 창연한 공간에서 네메르의 황금빛은 더욱 광채를 발하는 중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누군가는 놀라기도 하겠으나 진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쵸? 제가 잘한 거죠? 네! 굴 구위시가 세리아를 때리는 데다-. 캐릭터가, 남귀검사 유저가 움직이지도 않아서 일단 제가 끼어들어 막은 거거든요?! 원래였으면 세리아가 죽으면 안 되니까! 맞죠?"

무엇보다 네메르가 등장하며 진성 자신이 듣고 싶었던 뉘앙스의 발언까지 해주고 있었으니, 지금 비현실적 광경이니, 뭐니 하는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는 셈이다.

『칼날을 부러뜨리려는 존재의 개입으로부터 그대는 칼날이 올바르게 단련될 수 있도록 바로잡은바.』

"그렇지! 그럼 끝? 끝이죠? 이제 보내주-. 읏?!"

흥분한 진성은 호들갑스럽게 말했으나 곧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갑작스레 자신의 주머니에서부터 터져 나온 강렬한 빛이 있었으니까.

빛의 덩어리는 진성의 주머니에서부터 빠져나와 어느새 어두운 공간에 황금의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네메르와 꼭 같은 황금빛을 주변에 뿌리는 것은 진성이 주운 카드였고.

[굴 구위시(오염)]

─────────────....

[굴 구위시(정화)]

'오염에서...정화.'

다시 한번 금빛이 점멸했을 때, 진성은 어느새 허공에 떠 있던 카드의 문구가 바뀐 것을 보았다.

네메르는 말했다.

『하나, 그것은 오염의 원인자가 아니라 그저 오염자로부터의 개입을 억제했을 뿐이리니.』

진성은 네메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야 했다.

그 의미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잠...깐만요. 이대로 끝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설마? 아니죠? 보내줘야죠! 약속했잖아, 시키는 일 다 하면 보내준다고-."

『그대가 한 일은 아주 작은 정화를 마친 것뿐. 오염의 원인자를 찾은 것도, 연단된 칼날이 된 것도 아니로다. 그대는 돌아갈 수 없거니와 그대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것조차 아닐지라.』

"-분명히 말했으면...서. 이 및-."

친년.

이라는 단어를 겨우 삼키는 건 진성의 마지막 이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더없이 흥분한 와중에서도 진성은 오히려 차분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겪은 경험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정이기도 했다.

실제로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의 캐릭터에 빙의되어, 완전한 현실로서 겪어봤기에 가질 수 있는 침착.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라면, 환상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네메르를 자극하는 게 아니야. 그래, 그래선 안 돼.'

눈앞에 있는 자, 초월자 네메르는 절대적인 힘, 진성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직 게임 던전앤파이터 속에서조차 그 능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고 정체조차 모호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그러면... 그 임무? 부여된 임무를 전부 끝내면 돌려보내 주는 건가요?"

진성은 조용히 물었다.

『약속한다. 부정한 존재가 만들어낸 불합당한 시련의 망치가 칼날을 부러뜨리려 할 때. 그 칼날이 올바르게 벼려지도록 단단히 쥔 채 합당한 시련을 맞이하게끔 만들 때. 곧 그대가 <부집게로서의 사명>을 전부 마쳤을 때.』

그제야 진성은 볼 수 있었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장소에 존재할 수 있으리라.』

네메르가 미약한 동작이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 * *

진성은 호흡을 골랐다.

이미 한 번의 빙의를 마쳤기 때문일까.

네메르의 비유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대장장이들이 쓰는 손잡이가 기다란 집게. 모루 위에서 망치로 인해 연단되어야 할 '칼날'을 흔들리지 않게, 똑바로 맞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물건, '부집게'.

"단어나 이미지가 좀 구식이긴 하지만, 오케이. 근데 그게 전부인가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습니까? 기한이나, 조건이나 혹시 또 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저 막연한 질문이 아니었다.

진성 자신은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대와 같은 플레인으로서, 플레인:아라드로 부른 인간이자 연단된 칼날의 후보가 될 모험가. 가장 적절한 대상자를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 나의 임무로다. 캐릭터 모험가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시련으로 연단되는 것이 칼날의 사명. 허나.』

진성 자신이 컴퓨터 앞에서 마지막으로 파티 플레이를 겪었던 대상.

정황상 보자면 실제로 과거의 유명 유저였던 게 분명한 그 사람.

'이제는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을 리가 없다.

네메르의 표현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그는 말 그대로 게임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속 '모험가'이자 '칼날'이었다.

그것도 컴퓨터로 조종하는 캐릭터인 '캐릭터 모험가'가 아니라 실제 세계로 빙의된 '진짜 모험가'이자 '칼날'로 연단되는 도중이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던 와중에-. 아마도 그런 개념에서 이시스를, 정확히는 이시스의 카드를 확인하려던 와중에-.'

지금 네메르가 말한 그대로다.

『그저 플레인:아라드의 캐릭터 모험가를 잘 다루는 것만으로 부족함을 자각했기에, 고통과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캐릭터 모험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바.』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 '캐릭터 모험가'였던,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진성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협업은 가능할지언정 일방적 도움은 불가하다는 것을, 진정한 아라드인으로서 '캐릭터 모험가'에게 완전히 정체가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무엇보다 이곳의 플레인을 담당하는 타임 로드들은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사건을 용납지 않는 점에 대하여, 그대 또한 명심해야 할지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서부터 '빙의된 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규칙 위반의 행위였을 터.

꿀꺽.

그 유저가 진성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던 디버프에 갑자기 휘말렸던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이 빙의된 거라고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었다.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였지. 그렇다면 결국....'

진성 자신과 그의 파티 플레이는 협업이 아니라 도움이 되었기에 사달이 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캐릭터 모험가'였던 진성 자신이 직접적으로 그의 부담, 그의 '시련'을 덜어주었기 때문에.

『하여, 나는 자성했노라. 칼날을 벼리는 또 다른 접근을 해야 함을, 무엇보다 연단 중인 칼날의 심을 부러뜨리려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기에.... 나는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진성의 머릿속에는 온갖 의문과 상상이 떠올랐으나 네메르는 이미 말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일단 진성은 궁금증을 갈무리하며 더욱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 오염이라는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 정화하면 끝인가요?"

『오염과 정화는 물고 물리는 순환의 반복일 뿐.』

"다시 오염될 수도 있다...아, 그렇다면 방해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오염의 원인자'라는 건가요?"

『차원의 틈, 그 왜곡 속에 숨어 개입하는 불분명한 존재. 연단된 칼날이 되지 않으려던 모험가들은 그 존재를 찾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숙명을 다하려 했으나 아직까지 누구도 오염의 원인자를 찾아내지 못한바.... 그대가 만났던 부러진 칼날 또한 아주 작은 정화에만 집착했을지니. 부적확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기를 기원하메.』

네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굴 구위시의 카드 옆에 새로이 무언가가 생성되었다.

'또 다른 카드?'

굴 구위시 카드와 옆에 생성된 또 하나의 카드가 진성 자신의 주머니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진성은 네메르가 생성해 준 아이템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오염의 원인자'라는 걸 찾아내면!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밝혀내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제가 '부집게'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쵸? 시나리오가 원래대로-. 그러니까, '캐릭터 모험가'들이 진짜 모험가가 될 수 있도록 적절한 연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진정한 모험가? 하여튼 그런 인간들이 어쨌든, 뭐, 제대로 해가면서 결국 올바른 흐름이 될 테니까!"

진성은 재빨리 말했다.

『...검증된 바 없으나 타당한 주장이로다.』

네메르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그 답변에 진성은 주먹을 콱 쥐며 다시금 물었다.

"좋았어, 그러면.... 아! 오염된 몬스터-. 그러니까 그... 아라드에서 오염된 자들은 저렇게-.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카드 아이템이 드랍-. 나오는 거고요? 그걸 제가 획득해서 네메르 님께 드리면 정화가 되는 방식이고?"

『그렇다. 그것을 정화하는 것은 나의 힘. 그러나 매 오염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개입할 수는 없으리니. 세계선을 넘나드는 내가 그대를 불러들이고 그대와 이러한 차원의 틈에서 마주하는 것조차 차원의 왜곡과 균열을 커지게 만드는 법칙이기에, 이곳 플레인의 시공간을 관리하는 존재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고 나아가 적대하게 만드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도다.』

"...어? 그럼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건가요? 앞으로는 끝?"

진성은 다급하게 물었다.

이미 네메르를 구축하던 황금빛의 광량이 줄어드는 중이었다.

『불규칙하고 기약 없는 헛된 희망에 의지치 말고, 바라건대 나를 찾으라. 기억의 파편과 이어진 나라면 왜곡과 균열의 공포에서 벗어나 그대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되, 나는 그대의 활약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지켜보겠노라.』

"자, 잠깐만요!"

진성은 산더미처럼 쌓인 질문을 내뱉으려다 멈칫, 생각을 바꾸었다.

어느 정도 조각이 모인 지금, 결국 그 모든 것은 진성 자신이 퍼즐처럼 맞춰봐도 된다.

그렇다면 지금 네메르에게 해야 할 말은 무엇이 있는지.

『말하라.』

진성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다.

분명 진성의 잘못도 있지만 네메르 또한 방법을 새로이 바꾼 셈이라면.

결국 이 '거래'는 진성 자신이 을이 아니다. 어쩌면 동등한 관계도 아니다.

"나는 부집게 아닙니까? 칼날이 될 게 아니니, 시련을 겪으며 직접 연단될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면... 어드밴티지를 줘요. 아바타! 아이템! 성장 캡슐! 아니면 내 원래 계정과 연동시켜주던가."

진성 자신이 갑甲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기에, 그는 두 눈을 불태운 것이리라.

『...차원의 왜곡과 균열이 커질 정도의 힘은 부여할 수 없으되, 한 가지라면 힘을 쓸 수 있을 터. 원하는 바가 있는가.』

네메르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성의 머릿속은 이미 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계정과 연동시켜준다거나, 처음부터 레어 아바타 세트 따위를 줄 거라곤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우선 큰 것을 던진다.

그리고 한발 양보하는 척하며 실리를 취하는 것.

아라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규칙이 현실로써 적용되는 이곳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진성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

"...<패왕의 계약> 항시 적용해주세요."

네메르와 나눈 대화를 당장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딱 한 가지를 고르라 한다면, 모로 봐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게 옳다는 판단하에 진성은 요구했다.

지금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기준점', 유저의 척도를 재는 것은 [모험가 명성]이다.

그리고 모험가 명성을 가장 빠르고 쉽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렙제가 높은 아이템을 착용하는 게 가장 중요해. 그렇다면 <패왕의 계약>이야말로-.'

착용 최소 레벨 제한을 10개 감소시켜주는 효과를 지닌 <패왕의 계약>.

1레벨인 진성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10레벨 이상부터 착용 가능한 장비를 당장 사용할 수 있게 될 터.

'-저렙 구간을 모조리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가깝게는 한 단계씩 높은 수준의 장비가 내 목숨을 구해줄 테고, 그뿐만이 아니지. 네메르가 지금 한 말까지 고려하면, 멀리 보더라도 역시....'

단기적, 장기적 관점 모두 <패왕의 계약>이 가장 큰 효용을 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진성은 긴장하는 중이었다.

네메르가 혹여 들어주지 않을까, 눈치를 보기도 잠시, 네메르는 답했다.

『이루어지리다.』

너무나 간단하게.

그것을 그냥 놓칠 진성이 아니었다.

"그, 그리고! 저기, 피로도! 피로도는 무제한으로! 그쵸? 부집게 역할 해야 하는데 던전 못 들어가거나 그러면 안 되니까-."

『사명을 위한 갸륵한 태도로다. 칼날로서 연단되기에 반드시 필요한 시련이지만 부집게로서 필요한 조건은 아닐지니....』

사라져가던 네메르의 황금 광채가 일순 밝아졌다.

어쩐지 감격한 네메르의 반응 때문이었을까.

『플레인:아라드에서 그대는 또한 생리현상에서의 자유를 얻으

매, 감각은 있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만들어주노라.』

그러나 초월자의 감동은 진성을 당황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네? 어?"

마지막 힘을 다해 빛을 내었다는 듯 황금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초월자 네메르와 일개 인간 사이의 '거래'가 성사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피로도 무한이 그 말이 아닌데? 뭔가 지금 오해가 생겨버린 것 같은데, 저기요!"

정작 그 당사자가 원치 않은 기묘한 이득만이 남은 자리에서.

『그대가 캐릭터 모험가로 겪은 플레인:아라드는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는 바, 실재의 아라드에서, 이곳, 플레인:아라드에서 그대가 그대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기원하리라.』

───────────...!!!!

마침내 황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순간, 툭, 진성은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엘븐가드."

원래의 장소였다.

010

진성은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정보가 뒤섞이고 잊히기 전에 정리부터 해야 한다.

'일단 돌아갈 수 있는 방법부터 보자면-. 결국 세 가지라는 거지.'

진성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급히 흙바닥에 써내려 갔다.

진성 자신 외에 던전앤파이터 세계관에 빙의된 자들에게 부여된 임무.

1. 연단된 칼날이 되는 것

진성은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말이 안 된다. 아직 던전앤파이터 게임 안에서도 스토리가 끝나지 않았어. 대~략적인 흐름은 정해져 있고... 대립 관계를 비롯해서 상당 부분이 밝혀진 데다-. 뭐, 나도 나름대로 스토리에 몰입했던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는 부분도 있다지만....'

연단된 칼날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사도를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임 던전앤파이터 메인 시나리오의 중심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 사도.

창조신의 '악惡한 부분'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들이 지닌 힘과 능력 또한 능히 그러한 수준에 다다른 강대한 존재이자 적이다.

그들 개별 개체 중 하나만 상대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건만 하물며 그 모든 사도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진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어 들었다.

'그래, 아마 그래서... 이 사람도 중간부터 목표를 바꿨을 거야.'

굴 구위시 카드와 함께 딸려 나온 것은 네메르가 진성 자신에게 주었던 일종의 '참고 자료'라고 할 수 있을 터.

딱딱한 종이 질감으로 마치 카드처럼 형상화된 그 안에는 진성 자신과 함께 했던 유저의 지난 행적이 적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오염]에서부터 [정화]한 몬스터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결국 진성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두 번째 방법과 관련된 일이었다.

2. 정체가 불분명한 오염의 원인자를 찾아내는 것

'네메르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 레인저 유저도 기다렸겠지. 하염없이. 온 지 5년이나 됐다는 건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어. 연단된 칼날이 되어서-. 사도를 다 죽일 수 없다는 건 진작 인지한 상태에서 결국 자포자기에 가까운 마음...혹시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지, 아마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네메르의 발언으로 보아 <오염의 원인자>가 개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 것이다. 그로 인해 레인저 유저의 앞에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유저는 네메르에게 <오염의 원인자>를 찾아내기만 해도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을까? 그리고 기뻐했을까?

곧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고통을 참아가며 이겨냈을까?

진성은 네메르가 남겨 준 카드를 보고 있었다.

남성 레인저 유저가 얼마나 많은 던전, 외전 던전에 모험 던전 따위를 돌았는지!

진성은 씁쓸함에 입술을 물었다.

'근데...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거였을 텐데.'

그 정도로 '약한 던전'에 <오염의 원인자>가 숨어있을 리가 없지 않을까.

눈길이 가지 않는 곳에 숨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게 약한 곳에서 결국 힘을 드러내었다면 네메르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직접 나타나 해치워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네메르조차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건 오염시킬 수 있는, 어떤 그런 힘을 적절히 섞어 숨기고 있다는 뜻. 그러기 위한 조건은 결국 하나다.'

사도 또는 사도급.

꿀꺽.

'일단 여기까지는 인정해야 할 거다.'

진성은 새삼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프레이-이시스 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사망했던 유저.

아니, '모험가'.

'5년이야, 5년! 장비가 영 후지긴 했다지만 레벨도 95였다고! 근데 그런 사람도....'

<오염의 원인자>에 대해선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사망한 것인가.

그저 오염된 몬스터, 그 수가 많다지만 레벨이나 수준이 턱없이 낮은 몬스터들만을 죽이다 이곳, 아라드에서 사망해버렸다는 이야기인가!

"빌어먹을... 젠장...."

진성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네메르가 준 목록에 있는 오염된 몬스터의 이름이 몇 개나 중복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기에.

차마 위로 향하지 못하고, 결국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이 중에 <오염의 원인자>가 있기를 바라며 같은 던전을 반복했을 그의 상황이 이제는 머릿속에 실감 나게 그려졌기에.

'그렇다면 내가 취해야 할 방법은... 세 번째다. 어떤 의미로 제일 안전할지도 모르는 방법이기도 한 게 바로-.'

3. 부집게가 되는 것

즉, 진성 자신이 알고 있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흐르도록 조정하는 것.

컴퓨터를 통해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하고 있을, 결국 '캐릭터 모험가'들을 조종하며 향후 '진정한 모험가'이자 '연단할 칼날'의 후보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기 위한 일종의 시험을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 유저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어차피 모든 걸 바로잡을 필요도 없잖아? 연단된 칼날, 모험가들을 위한 시나리오만 붙잡아준다면.... 세세한 것은-.'

네메르가 단서도 주었다.

그녀가 직접 개입할 수 없는 건 이곳의 차원, 결국 이 플레인의 시공간 관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관리자들, 타임 로드들에 대해서라면... 게임 내에서도 몇 번이나 들었다.'

세세한 부분은 타임 로드들이 조율해 줄 것이다, 라는 멘트는 던전앤파이터 게임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진성 자신도 그것에 의지하여 움직일 수 있지 않을지.

'네메르의 의도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일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겠지만-.'

네메르가 누구인가.

진성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에 따르자면, 무작정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어쩌면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현시점에서 진성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지금은, 따라야만 한다면.

"좋아...."

진성은 물끄러미 바닥에 정리된 메모를 살폈다.

그러곤 곧 발로 스윽, 스윽 문질러 모든 글을 지웠다.

가벼운 동작이었다.

"내가 부집게가 되어주겠어."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큼은 묵직했다.

진성의 두 눈이 빛났다.

"부집게? 대장장이라도 꿈꾸는가?"

"우와아앗!?"

그런 진성의 곁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진성은 곧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턱수염이 수북하게 난 중년의 남성.

어떤 의미로는 세리아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마주하여 상호작용을 하는 NPC이자, 지역:엘븐가드의 터줏대감이자 대장장이.

"라, 라이너스...!"

NPC로만 만나보았던 라이너스가 진성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 * *

라이너스는 놀란 눈으로 턱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허헛, 내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 그보다 젊은 모험가에게 이름으로만 불리기에는 내 기분이 조금-."

"아, 라, 라이너스 님. 예, 라이너스 님. 저기, 그, 평소 존경하는 분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신기한 점이라면 그토록이나 오래 플레이했던 던전앤파이터 게임 내에서 들을 수 없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호오, 하긴, 나도 과거에는 제법 알아주는 검사였으니까. 껄껄, 그렇다면 무례를 용서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와 실시간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일까?

라이너스는 호탕하게 웃은 후 진성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부집게라니? 망가진 걸 고치려 해도 도구가 없을 텐데. 장비가 망가져서 그런 거라면 내게 맡기게."

망치를 휙, 공중으로 던져 붙잡으며 그는 턱짓했다.

그가 턱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진성은 보았다.

2단으로 쌓인 가열로와 그 옆에 놓인 큼지막한 모루가 그곳에 있었다.

'진짜 던파 처음 할 때 여기를 얼마나-. 그래, 옛날에는 무기 고치려고 일일이 들른 적도 있었다고! 어둠의 선더랜드 던전 하나 도는데 20분, 30분씩 걸리던 그 시절에 라이너스한테 얼마나 신세를 졌는지!'

옛 생각이 들어 찡한 마음은 자연스레 진성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우와아, 진심...감동이네요."

"허허, 그렇게까지 감동할 정도는 아닌데, 물론 내가 과거엔 검사였다 해도 이미 대장장이로서 진심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진성이 감동한 점과 라이너스가 이해한 바는 조금쯤 어긋나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그냥 길드 아지트 갈 때나 스쳐 지나가는 정도인가? 눈여겨서 본 적도 없었는데.'

모니터 화면으로 볼 때는 더 이상 오브젝트로조차 인지되지 않던 것.

그것을 현실의 크기로, 진성 자신의 눈앞에서, 심지어 가열로의 불길이 내뿜는 열기까지 후끈하게 와닿으며 느꼈을 때 가질 수 있는 실감은 가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점이리라.

"그래서 부집게는-."

"아, 부집게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비를 특별히 고칠 것도- 오오오!?"

진성은 손사래를 치며 라이너스의 말을 끊으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 뒤늦게, 다시금 보게 되었다.

"뭐, 뭐야, 어라? 그러고 보니 팔-."

"허허, 그래서 물어본 거네. 자네의 그 귀수...처럼 생겼으나 귀수와 미묘하게 다른 팔도 그렇고. 꽤 강해 보이는 것이 영락없는 모험가처럼 보여서 말이지."

진성 자신의 육체는 여전히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외전' 캐릭터, 다크나이트라는 것을!

나뭇가지를 쥐고 흙바닥에 생각을 정리할 때에도 심지어 조금 전까지도 몰랐다니!

진성은 라이너스의 대장간 입구 근처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진짜... 또?"

그곳에 걸린 거울을 보며 진성은 경악했다.

'네메르 만났을 때 이 얘기부터 했어야 했나!? 아니, 그때 그 사람은 레인저였잖아!'

생각해놓은 건 많았다.

어떤 직업군이 진성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가장 합당할지.

진성 자신에게는 말 그대로 '현실'인 이 세계, 아라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직업이 제일 나을지.

당연히 그 기반이 되는 것은 해당 직업군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의 구성 때문이었건만!

'게임에서는 괜찮지. 고점만 따지면 웬만한 캐릭터들보다 훨씬 나은 면도 있어. 하지만-.'

말 그대로 '고점'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때에나 좋은 것이다.

즉, 최고 수준의 세팅이 갖춰지기 전의 다크나이트는 사실상 최고 난이도 수준의 운영 패턴을 지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던전앤파이터 배경 설정상 [가장 완벽한 귀검사].

'바로 그 [가장 완벽한 귀검사]를 '웃음벨'로 써버리는 밈이 있을 정도이니....'

저레벨 단계, 아이템이 갖춰지지 않은 단계에서, 그것도 진성 자신에게는 '현실'인 이곳에서 어떻게 운신해야 할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던 진성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음? 근데.... 다른데? 일단 헤어스타일부터가 좀 달라.'

자신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다크나이트와 완전히 같은 외형은 아니라는 것을.

매끈한 헤어스타일의 다크나이트에 비한다면 어쩐지 비죽비죽 뻗쳐 있는 자신의 머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머리야...그래 일단 그렇다 치자고. 근데 그 외에도 제법 다르다.'

다크나이트의 외형적 특징 두 개 중 하나, 즉, 양쪽 팔의 검게 변한 흔적이 진성의 기억보다 더욱 길게 나 있다는 것.

또한 귀수 구속구, 귀박궤가 양팔 동일한 위치에 각각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진성을 신경쓰이게 하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눈이었다.

캐릭터 다크나이트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 소위 '역안?白目'이라 표현할 수 있는 눈.

눈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 있으며, 검은자위는 노란색으로 된 눈이 다크나이트의 가장 도드라진 차별점이 아닌가.

'내 눈은...그냥 일반 눈이군. 흰자위, 검은 동공. 머리도 그렇고 눈, 팔까지 이렇게 다르면 금세 티가 나지 않나?'

그러나 지금 진성은 그렇게까지 깊게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외형이 어찌 되었든 진성 자신의 육신이 완전히 확정되어 버렸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크나이트의 특징을,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탄탄하고 비율 좋은 근육질의 몸매가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아아...."

"젊은 모험가가 벌써부터 한숨을 쉬면 되나?"

"아뇨, 모험가도 엄밀히 따지면 아니긴 한데요... 그쵸, 어차피 뭐, 되돌릴 수도 없는 거 최선을 다해야죠."

진성은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그 와중에도 떠오르는 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시스 레이드 뛰러갔을 때... 내가 이곳에 불려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캐릭터가-.'

다크나이트였다는 것.

설마 최종 접속 캐릭터를 기준으로 이렇게 빙의를 시켜주는 것이었을까.

'쩝, 그럼 '진성븝미쟝'이 마지막 접속이었다면...?'

진성은 어쩐지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너스는 그런 진성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싱거운 친구로군. 그래, 그럼 앞으로 더욱 정진하고. 장비 수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

"아, 저기, 라이너스 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대장간을 향해 몸을 돌린 라이너스를 진성은 황급히 붙잡았다.

"음? 무슨 부탁?"

그러곤 말했다.

이곳에 엘븐가드라면.

그리고 진성 자신이 만약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일반적인 유저들과 비슷한 길을 가야만 한다면.

"통행증...하나만 써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 파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 퀘스트였다면 세리아와 '모험가'에게 라이너스가 통행증을 작성해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경비병을 통과하게 되는 것.

진성은 그냥 게임처럼 생각하고 쉽게 말했다.

그러나 잘 알아야만 했다.

분명 게임 던전앤파이터였다면 퀘스트 문구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겠으나 이곳은 게임이 아니다.

적어도 진성에게는, 현실이다.

"...자네의 눈빛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통행증이라는 건 내 이름으로 신분을 보증한다는 건데."

라이너스의 목소리가 바뀌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011

진성이 잠시 당황한 사이 라이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자는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을, 나, 엘븐가드의 대장장이 '라이너스 스미스'가 확언합니다. 그러니 부디 통행을 허가해주십쇼.... 내가 이러한 내용을, 오늘 처음 만난 자네에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진성 자신이 듣기에도 자연히 고개를 젓게 되는 말이었다.

결국 통행증의 발급이라는 뜻은 현대 사회, 진성 자신이 빙의되기 이전으로 따지자면 가장 가까운 것은....

'처음 만난 사람한테 보증을 서달라고 말한 꼴이구나... 욕먹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네.'

진성은 그제야 생각났다.

실제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나리오에서도 유저의 캐릭터가 통행증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던가.

'그란플로리스에 홀로 뛰어 들어간 세리아를 구해냈으니까. 그리고 세리아와 함께 요정의 마법진을 정화하고.... 사실상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까.'

그 일로 말미암아 라이너스에게 신뢰를 얻었을 테고, 하물며 홀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겠다는 세리아가 걱정되어 유저를 함께 보내기 위해 통행증을 만들어 준 셈이다.

그것을 합당한 이유도 없이, 그냥 덜컥 달라고 했으니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으흠, 이해했을 거라 믿네."

라이너스의 눈초리가 조금 전보다 다소 차가워진 게 기분 탓만이 아니라는 걸 진성은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그에게 있어서는 현실,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하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레인저 유저도 나를 보고 눈빛이 빛난-. 아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야. 라이너스가 이대로 떠나면 안 돼. 어떻게든 벨 마이어 공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수가 있을까.

부탁을 들어준다고 할까? 퀘스트?

진성 자신에게 시킬 일이 없냐고 물어보고 그것을 도와주면 통행증을 발급해줄 수 있냐고 말해볼까?

'가능할 법도 한데 너무-. 인간적으로 너무 속 보이잖아!'

오히려 의심할지도 모른다.

라이너스는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NPC 중 하나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통행증을 대가로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발언은 오히려 그가 진성 자신을 더욱 의심스럽게 바라볼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라이너스는 완전히 등을 돌려 대장간으로 걷기 시작했다.

따라서 진성은 선택했다.

"그럼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잘 가게, 대장장이 일에 관심이 있으면 나에게-."

"크흐흡, 제가... 제 친구가...."

"-으, 으응? 갑자기? 친구?"

혼신의 연기를 하기로.

"귀수에 고통받는 친구가 있습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철그럭.

진성은 자신의 왼팔에 있는 귀수 구속구를 만지작거려 일부러 쇳소리를 내었다.

한껏 찡그린 인상은 감정에 젖어 운다기보다 그냥 못생겨 보이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됐나."

그러나 라이너스는 다시금 진성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성은 오른팔로 눈가를 스윽, 비비며 마치 눈물을 닦는 척했다.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겠다고... 유명한 연금술사 선생님이 계신 곳을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흡, 그분이 누구인지, 그 장소가 어디인지 겨우 알아냈지만 저는 지금 가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지요. 치료는 어차피 불가능하다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약이라도 구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연금술사 선생은 어디의 누구인가."

"벨 마이어 공국에 계시는 로톤 막시머그 선생님입니다."

진성은 말했다.

그리고 라이너스가 숨을 내뱉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라이너스 님! 평소 존경한다고 말씀드린 건 거짓이 아닙니다! 과거 비명굴 사건 때도-. 4인의 웨펀마스터 중 한 분인 아간조 님과 함께 활약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런 라이너스 선생님께 통행증 발급을 부탁드리는 것은 너무나 염치없음을 알고 있지만.... 크흑."

물기 젖은 눈망울로 라이너스를 바라보며 내뱉은 기나긴 부탁.

라이너스는 결국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알겠네. 나 또한...그런 사정이라면 모른 척할 수 없겠군."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진성은 확신했다.

'예상대로야. 먹힌다,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설정이... 먹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 거짓말이 어디에 기반했는지.

진성이 줄줄이 읊은 것은 모두 '게임 던전앤파이터' 세계관 속 NPC 라이너스의 배경 설정이었던 것!

'카잔 증후군으로 인한 귀수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친구를 그 스스로의 손으로 '편하게' 해준 이후 검을 놓고 대장장이가 되었다.... 라이너스의 설정은 사실인가 보군.'

어두운 표정으로 종이를 가져와 통행증을 작성하는 라이너스를 보며 진성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한 거짓말로 인해 굳이 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되새기게 한 것은 아닐지.

'아니... 동시에 놀라운 점이라면....'

그리고 진성 자신이 어느덧 라이너스를 NPC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중은 아닐지.

벌써 적응을 마쳤다는 건 아닐 것이다.

벌써 모든 걸 다 받아들였다는 느낌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음...'

진성은 주먹을 움켜쥐어보았다.

새카맣게 변해버린 자신의 양팔은 여전히 어색하게 보이나 그 감각은 자신이 평소 기억하던 움직임과 완전히 같을 때 느껴지는 미묘한 괴리.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라이너스 님. 다음에 찾아뵐 때는... 어디 좋은 술이라도 꼭 가지고 오겠습니다."

반쯤은 진심으로, 또한 반쯤은 다시금 게임 내 설정의 유효함을 확인할 겸 진성은 말했다.

"음? 껄껄!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구만? 그래, 그날을 기다려보지. 자네 여비 하라고 얼마 넣었고.... 또 이거, 받게나."

"이건-."

라이너스는 잘 빠진 검 한 자루를 진성에게 건넸다.

"-야이바...."

착용 레벨 제한 10, 도(刀), 언커먼 등급 무기 <야이바 >.

현시점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들에겐 줘도 안 쓰는 무기일지 몰라도 진성에겐 다르다.

무엇보다 라이너스에게서 해당 아이템을 구입하려면 드는 골드는 또 얼마인지까지 생각한다면.

진성의 가슴에 뻐근한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라이너스 님...."

"크흠, 뭘 또 그런 눈으로. 여하튼 무사히. 안전하게. 친구를 만나길 바라겠네."

라이너스는 멋쩍어하며 휙휙, 손을 흔들며 말했다.

통행증만 얻으려 했건만 여비에 더하여 <패왕의 계약> 덕에 당장 이득을 볼 수 있는 무기까지.

과거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저레벨 유저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말동무와도 같았던 NPC를 바라보며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벨 마이어 공국.... 그곳의 수도 헨돈마이어로 간다.'

진성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할지 모르겠으나 그다음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을 테니까.

* * *

진성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핫... 새삼 어이가 없구만."

라이너스에게 도움을 받았던 엘븐가드는 벨 마이어 공국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인 헨돈마이어는 벨 마이어 공국의 남부지역에 있다는 설정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는 그저 두 번의, 매우 빠르고 간단한 맵 이동으로 끝내왔던 경험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대가 캐릭터 모험가로 겪은 플레인:아라드는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는 바, 실재의 아라드에서, 이곳, 플레인:아라드에서 그대가 그대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기원하며.』

"간단하게만 표현했다는 뜻이지. 게임에서는. 음, 그래, 사실 그게 맞지. 그게 맞는데..."

설마 실제로는 몇 날 며칠을 가야만 하는 거리일 줄이야!

플레인:아라드의 드넓은 대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줄이야!

진성 자신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기에,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루 만에 도착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피로도 무한-. 그 오해 덕분인가? 뭘 먹으면 맛은 느껴지는데 배가 고프진 않아. 아니, 최악의 경우 배고픈 거야 라이너스가 준 여비도 있으니 어떻게 해결하겠다만-. 급똥이라도 마려웠으면 도대체....'

배변 활동은 어떻게 했어야 할지.

이쯤 되고 보니 네메르가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축복을 내려준 게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내달리면서도 진성은 여전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플레인:아라드? 네메르? 부집게? 다크나이트? 루가루 족에게 공격당해서 아팠어?'

게임에서만 겪던 일을 이렇게 현실로서 겪고 있다?

그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냥 게임 속으로 들어온 개념에서?

새삼 현실의 무거움과 암울함이 느껴질 만한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진성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뭐... 사실 나한테는 잘됐다고도 할 수 있는 건가?"

게임 던전앤파이터로 수입 활동을 했기에 좋아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던전앤파이터라는 세계관을,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진성 자신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게임이었기에 좋아한 것이다.

"후우.... 무슨 부집게니 어쩌고니 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의미로 보자면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자세가, 진성은 이미 다른 사람과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터.

그것은 당장 진성의 태도로도 알 수 있는 점이었다.

'미쳤어....'

빠르게 달리던 진성은 잠시 멈추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플레인:아라드, 게임이 아니라 완전히 현실로서 마주한 아라드의 세계에서 진성에게 은근한 기대감과 짜릿한 흥분을 돋아나게 만드는 이유.

'내가 저런 걸 언제 볼 수 있겠냐고. 한국-. 아니, 세계 어디를 가도 저런 걸 어떻게 볼 수 있겠냐고!'

숲이 울창했던 엘븐가드 때만 해도 별로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 완전히 개활지로 나와 걷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는 것.

"으하핫, 완전 미쳤다니까!"

그것은 하늘 가득히 펼쳐진 대마법진이었다.

비행기가 날아가며 남기는 비행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선명함이라고 해야 할지.

원형으로 생긴 마법진의 지름을, 지상에 있는 진성이 고개를 들어 살피고 있음에도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의 크기라니.

그 크기는 물론, 만든 이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여타의 마법진과 달리 '대'마법진이라 부르는 게 아닌가!

'대마법사 마이어가 만든 마법진.... 진짜 엄청나군. 인게임에서 NPC들이 마이어, 하면 껌뻑 죽는 이유가 있었어.'

진성 자신도 '본 적' 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나리오 퀘스트를 경험하며 대마법사 마이어가 대마법진을 만들어 아라드를 완전히 탈바꿈했음을 보았다.

'대마법사의 차원회랑, 기억의 도서관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야만 했다.

네메르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진성 자신을 언제 또 불러들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고.

그러니 자신을 찾아오라고.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생각해보면...미친 난이도다. 기억의 재현으로나마 존재하는 네메르와 만나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이 바로 그 차원회랑인데.'

레기온 던전:대마법사의 차원회랑.

입장하기 위한 레벨 110 이상.

그리고 모험가 명성 제한 38,095.

남자 레인저 유저가 사망했던 프레이-이시스 레이드보다도 훨씬 수준 높은 곳이다.

그런 곳까지 가야 네메르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니.

'후우... 그래, 일단 마음 편하게 먹고 해보자고. <패왕의 계약>도 무한 적용이잖아. 괜찮아. 할 수 있어.'

엘븐가드를 떠나며 막연하게만 느꼈던 것에 비한다면 지금이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기저에 있는 것은 역시나 수많은 경험에 의거한 자신감이었다.

'캐릭 하나 만렙 찍고 명성 한 4만 5천까지 휙 내달리는 거야 일도 아니었잖아? 5만 5천 넘어서까지는 좀 까다롭다만 그것도 어둑섬 융합들-. 아니, 당장은 그런 것도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차원회랑까지! 3만 8천? 참, 나.'

과장하지 않고서도 백 번 넘게 했던 일이다.

물론 그것을 현실에서 이뤄내기는 분명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차 목적지라도 있다는 것, 수치화된 객관적 목표가 있다는 점이 어디인가.

"목표가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진성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마치 모든 창공에 수평으로 뻗어있는 대마법진만이 진성의 눈길을 끈 것은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는 선線.

대지에서부터 대마법진까지 닿아 있는 수직의 선.

"가보자고."

진성은 호흡을 고르며 다시금 속도를 높여 뛰었다.

그것은 진성 자신이 목표로 해야 할 레벨과 명성치만큼 어쩌면 까마득한, 말 그대로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하늘성'이었다.

또한 헨돈마이어로 향하는 진성의 첫 번째 목적지이기도 했다.

012

진성은 당당한 태도로 통행증을 내밀었다.

벨 마이어 공국의 수도, 그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이 진성을 막을 리는 없었다.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다면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음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예,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살갑게 맞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딱딱한 태도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성은 어쩐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셔야 했다.

'내가 말이야, 원래는요! 어?! 하늘성 막 파괴되어가지고 연합 중앙 막사에서 사실상 총지휘관이자 리더 역할로! 어!? 공국은 언제나 모험가님을 환영합니다, 언제든 들러주십시오! 딱!'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모든 시나리오 퀘스트를 완료했던 진성 자신의 캐릭터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었는지.

그것에 비하자면 지금 자신은 무슨 취급을 받고 있는 중인지.

물론 지금에 와서는 전부 불필요한 잡념임을 알기에, 진성도 특별한 대꾸 없이 벨 마이어 공국의 수도, 헨돈마이어로 들어서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지금에 와서는 특별한 대꾸를 할 여유조차 없는 것 또한 사실일 테니까.

"우와...."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헨돈마이어의 관문이 보이고, 그 관문 너머로 대마법사 마이어를 기리기 위한 새하얀 톤의 통일된 건축물들이 흘끗흘끗 보일 시점에서부터.

심지어 그 관문 너머에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미 한 번 놀랐던 것이건만!

"오늘 저녁에는 뭐 해 먹을까?"

"점심을 먹으러 나와놓고 벌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자, 자, 싱싱한 생선 사십쇼! 오늘 아침에 웨스트코스트 항구에서 갓 들여온 생물입니다!"

도대체 이 떠들썩함은 다 무어라 해야 할까.

고층 건물은 없으나 오히려 단층 또는 저층의 건물들이 일치된 색상을 띄고 나열되어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만족스러운 쾌감.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진짜 무슨 시장이 서는 날인 건가? 아니면 그냥 평소에도 이 정도의 유동 인구가 있는 거야?'

그리고 잘 닦인 도로를 바삐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나이, 직업, 성별 모두 제각각인 인원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진성에게 있어 마치 주말의 명동 거리나 강남 어딘가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눈이 돌아갈 듯 주변을 둘러보던 진성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도전하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거, 아시죠? 결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 찾아와주세요!"

맑고 상쾌한 목소리, 톤파를 양손에 쥔 채 목소리보다 더 눈에 띄는 건강미를 자랑하는 그래플러.

헨돈마이어의 거리를 오갔던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한 번쯤은 말을 걸어보았을 바로 그 NPC를 진성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우와?! 초붕! 초붕이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감탄할 정도였으니.

초붕은 곧장 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핫! 저를 알고 있나요?"

게임에서 마주쳤던 NPC였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법한 질문이었다.

갑작스레 받은 관심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결투대회 챔피언이잖아요! 예,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헨돈마이어에서 초붕에게 얼마나 많은 '대화 신청'을 해보았는가.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와는 별 관계가 없음에도 얼마나 그곳에서 어기적거렸는가.

"헤에, 결투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죠? 제법 튼튼해 보이는데, 어떠세요? 서로의 실력을 뽐내고! 뒤엉켜서 땀 흘리며 끝내 하나가 되어 승리와 우정을 느끼는 결투의 매력! 한 번 느껴보실래요?"

"뒤엉켜서 땀... 다, 다음에... 흐흐, 다음에 꼭! 한번 느껴보겠습니다."

가볍고 빠른 동작으로 말하는 초붕을 보며 진성은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결투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건 그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으음...."

초붕의 곁에 있던 또 한 명의 격투가, 한때 격투가 유저들에게 스킬을 가르쳐주었던 NPC 풍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진성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런 진성의 곁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ㅋㅋ 님 머함? 인방하는 사람인가?"

아바타를 입고 있었지만 남자 거너, 스핏파이어 직업이라는 것쯤은 진성이 곧장 파악할 수 있는 것.

"네?"

"초붕 앞에서 뭐하는데요ㅋㅋ"

"아, 아뇨, 아무것도."

"일부러 채팅 그렇게 친 거임? ㅁㅊㅋㅋㅋ"

웃는 유저를 보며 진성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진성은 그저 장난기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유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게임할 때 상호작용이 가능했던 NPC들 앞에서 하는 행동은 다 드러나게 되는 건가. 그리고.... 역시 유저는 머리 위에 이름이 뜨는구나.'

그것은 관찰을 위한 침묵이었다.

더 이상 초보가 아니라 아바타까지 갖춰 입은 제대로 된 유저를 사실상 처음 보는 진성은 재빨리 정보부터 수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

'평판, 길드, 모험단, 칭호도 뜨지 않는다. 오직 캐릭터의 닉네임만 뜨는 건가.'

진성은 유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나 유저가 그것을 느낄 리는 없었기에, 그는 다시금 제 갈 길을 갔다.

멀어지는 유저의 뒷모습을 보며 진성의 표정은 어느덧 굳고 있었다.

던전앤파이터에 빙의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고 해봐야 결국 닉네임, 캐릭터의 이름을 알아보는 정도가 전부라고?

'그럼 그때 그 남자 레인저, 그 사람은 나를-.'

님, 님 하며 다급하게 쫓아왔던 그 사람은.

도대체 이곳, 플레인:아라드에서 자신에게 페널티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소문을 했으며, 또한 진성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대단하네. 그리고 그 사람도 분명 네메르에게 경고를 들었을 텐데, 은근하게 그 틈을 노리려 했던 점도 그렇고...'

진성 자신에게 버프도 걸어주지 말라, 잡다한 몬스터 처리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저 패턴 파훼 공략만을 원한 건 네메르의 경고를 아슬아슬하게 해석해서 적용하려 했기 때문일 터.

네메르는 말했다.

이 차원에서 시공간을 관리하는 존재들은 빙의된 자와 '캐릭터 모험가' 간의 협업은 인정할지언정 일방적인 도움은 왜곡을 일으키므로 예방코자 한다고.

'그 정도만 하면 '도움을 받는다'가 아니라 '협업 중이다'로 판정이 날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협업과 도움의 차이는 무엇일지.

이미 해당 유저가 겪은 바가 있었기에, 진성은 빠르게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레벨 차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거다. 현재 던파에서 유저 간 수준을 가르는 기준이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아이템의 수준, 결국 아이템을 장착했을 때 오르는 '명성' 차이다.'

진성 자신이 게임을 통해 접속했었던 바로 그 몸, 다크나이트의 모험가 명성은 5만 7천도 훌쩍 넘겼다.

그리고 남자 레인저 유저의 모험가 명성은 6천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그 상황에서 파티를 맺는 것도 가능했고 레이드에 함께 입장하는 것도 가능했으니, 결국 진성 자신에게도 어그로가 튄 시점, '직접적인 개입'이 되는 시점에서 협업이 아니라 도움으로 판단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패왕의 계약>을 던진 게 역시 옳았군. 아이템을 장착할 수 있는 요구 레벨을 10 낮춰주니, 부풀려진 수치나마 명성을 더 빠르게 올릴 수 있을 거다.'

진성 자신이 네메르에게 <패왕의 계약>에 대해 요구한 것도 이러한 추측에 기반한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파티가 일단 된다는 점도 잘 생각해보자면....'

진성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마도 유효하게 성립할 만한 발상이었으나 어쨌든 지금 당장 적용하거나 시험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진성은 작은 동작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다시금 주변을 살펴야 했다.

'자, 일단 어디를 가야 하려나? 바로 하늘성은 못 갈 테고.'

지금은 제국 경비병이 막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NPC에게 하늘성 통행증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누구의, 어떤 시나리오가, 어떻게 어그러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이라면?'

정보를 수집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가.

아직 멀쩡한 하늘성을 돌아다닐 시점의 유저들이 자주 들르는 곳 중 하나, 그리고 일반 상식적으로 봤을 때 정보가 모여드는 장소.

'주점이다.'

진성은 곧장 헨돈마이어의 뒷골목, 달빛 주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진성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아라드의 세계, 이곳의 헨돈마이어의 큰 구조 자체는 게임 속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래, 이쪽 뒷골목을 돌아들어 가면... 저 건물이군.'

진성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달빛 주점의 스윙 도어를 조심히 열고 들어섰다.

아직 늦은 오후도 채 되지 않아서인지 주점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어서오세요."

그렇기에 오히려 진성은 알 수 있었다.

주점 내부의 몇 안 되는 인물들이, 이런 외진 술집에 처음 들어오는 신규 손님을 바라볼 때의 그 싸늘한 눈빛.

일반적인 취객 따위가 그렇게 해도 괜스레 긴장되건만 지금 술잔을 들어올리며 진성을 흘끗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지.

'...카라카스. 실제로 보니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

모험가 길드장, 일명 '한숨의 카라카스'.

진성은 그의 눈빛이 곧장 닿지 않는 자리로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음? 근데 아간조가 없다? 별일이 없다면 보통 여기 있을 법-.'

달빛 주점의 우측 끄트머리에 언제나 있을 법한 NPC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 그는 보이지 않았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아, 주문? 어, 그러면.... 우유 있나요?"

새삼스럽지만 당연한 사실이었다.

유저라면, 게임 캐릭터라면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서 있어도 상관없겠으나 진성 자신에게는 현실이다.

남의 매장에 들어가서 주문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민폐 그 자체인 셈이다.

"...마침 칸나가 만들어 온 우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거면 되나요? 다른 술이나 음식은?"

물론 주점에 들어가 우유 한 잔을 시키는 것도 민폐보다 아주 약간 더 나은 수준이기에, 달빛 주점의 주인장의 표정이 다소 어두운 것이겠지만.

"목만 축이려고요. 헤헤, 감사합니다."

진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곧 주문을 받아 떠나는 주인 NPC를 살폈다.

'슈시아 엘르민.... 요정 맞네. 귀가 생각보다 더 뾰족한데?'

멸종했다고 알려진 그란플로리스의 요정족.

그러나 이곳, 달빛 주점의 주인이자 메인 바텐더로 엄연히 일을 하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감추며 진성은 어느새 슈시아가 가져다 준 우유컵을 쥐었다.

'여기서 NPC들, 아니, 그러니까... 이 세계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대화하기를 기다려봐야 하는 건가. 아니면 하늘성 출입증부터 구해놓고 다른 일을 해야 하나?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획을 짜려는 찰나.

끼이이익...!

달빛 주점의 스윙 도어가 다시금 열렸다.

진성 또한 카라카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문을 바라보았다.

"저기.... 안녕하세요. 달빛 주점의 주인분 맞으신가요? 저는 세리아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어머, 왜 그러세요?"

세리아가 달빛 주점의 주인에게 수줍은 인사를 건네며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여자 격투가, 머리 위에 뜨는 닉네임으로 보아 분명 유저.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는 사람과 닮아서 조금 놀랐을 뿐. 네, 제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죠?"

세리아와 슈시아가 자연스레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진성은 생각했다.

'퀘스트구나. 아마도 하늘성 관련 퀘스트...인 것 같은데. 음?'

슈시아가 처음 세리아를 마주하고 알아보는 장면 등은 어렴풋 기억에 나는 일이었다.

던전 지역:하늘성과 관련된 시나리오 퀘스트 중 하나라는 확신이 들 찰나.

끼이이익...

또 다른 누군가가 스윙 도어를 느리게 열어젖히며 거기에 기대섰다.

진성으로선 하마터면 우유를 뱉을 뻔한 일이었다.

"이봐, 풋내기 모험가들, 바로바로 용건부터 묻고 답을 들으라고! 우리 단장님은 오랫동안 기다리는 걸 싫어하신단 말이야!"

삐딱하게 기댄 자세만큼 베레모를 삐딱하게 얹어 쓴 빨간 머리의 여성.

데 로스 제국,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하급 기사.

'푸웁...레니? 어? 레니?'

레니가 앳된 얼굴을 찡그리며 세리아와 여성 격투가 유저에게 성질을 부리는 중이었다.

013

다른 유명한 NPC들도 많지만,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에게 기억에 특히나 남는 NPC 중 하나를 꼽으라면 꽤 높은 확률로 언급될 만한 인물.

레니는 흘러내릴 것 같은 자신의 베레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국의 반 발슈테트 단장님이 너희 같은 모험가와 협력을 하는 것도 명성에 흠이 가는데! 일 처리가 느려서야 되겠냐고! 거기, 당신도 빨리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카랑카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시선을 끌지만, 진성이 놀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고개를 저을 만한 결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레니가 여기에? 그래, 뭐, 하늘성 퀘스트 중 잠시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여기는 아닐 텐데?'

퀘스트의 모든 대사를 기억하는 게 아니지만 적어도 언제, 어디서 레니와 동행하는지에 대해 파악했다면, 당연히 진성의 눈초리는 가늘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이건... 원래의 시나리오 흐름이 아니야.'

레니가 세리아와 유저를 따라 달빛 주점까지 오는 일 따위는 없다.

결국 이것은 잘못된 흐름이다.

'애당초 지금 여격가 유저한테는 어떻게 보이는 거지? 나는 아마도 달빛 주점에 그냥 서 있는 일반 유저 정도로 보이려나? 하지만 레니는-.'

특수한 상호 작용 등이 없는 한, 진성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가 유저에게 드러나지 않음은 이미 엘븐 가드에서 확인한 바 있다.

만세까지 해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유저를 통해서.

그렇다면 레니는?

'...달빛 주점에 들어오지 않은 판정? 문에 '기대고 서 있어서' 설마 완전 개입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런 느낌? 아예 처음 하는 유저라면 모를까 부캐릭터를 키우는 유저라면 이상한 점을 금세 알아차렸을 텐데.'

어차피 진성 자신이 알 수는 없다.

유저의 모니터 화면이라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어쨌든 문제가 있었다면 유저는 당장 로그아웃한 후 네오플 측 고객센터 등에 찾아라도 갔을 터.

"제게 조금 특수한 마법석이 하나 있어요."

유저는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시나리오의 흐름은 진행되고 있다.

슈시아가 무언가를 꺼내어 세리아에게 건네는 모습 등 시나리오가 그대로 진행되는 중이라면, 유저에게 있어 문제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인정해야 하리라.

'세리아가 들고 있는 건 하늘성에서 얻은 대마법진의 파편. 그걸 정화하기 위해서 슈시아가 저 마법석으로.... 그래, 그렇게 된다면 아마-.'

현재의 퀘스트가 어느 정도의 흐름에 도달해있는 것인지.

파삭-!

마법석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세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앗! 죄송해요, 마법석이...."

"아니에요, 마법석은 다시 구하면 된답니다. 그나저나 봐요, 당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크리스탈이 정화되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군요."

웃으며 세리아를 위로하고 독려하는 슈시아의 대화 또한 진성이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었다.

"다 됐으면 얼른 가자고! 단장님께서 기다리신다!"

다만 그 와중에도 그들을 독촉하는 레니의 대사는 역시나 당황스러울 뿐.

진성은 그들을 흘끗거리며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했다.

'이제 아이리스를 만나던가? 하여튼 대마법진에 이상이 생겼음을 확신하고 하늘성으로 오르며-. 그곳에서 지그하르트를 만나게 될 거다. 하지만 지그하르트는 죽지 않지. 부유성에서부터 계속 마력을 공급받고 있으니.... 아?'

시나리오 퀘스트의 개략적인 흐름을 되새기던 진성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근본적으로 '하늘성' 지역의 스토리 토대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

대마법사 마이어가 만든 대마법진의 원인 모를 오염, 전이 현상과 유사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세리아를 통한 정화.

그 와중 사도 바칼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천계의 실존 여부 등등의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근본적으로 유저가 해야 할 일은 어찌 되었든 하늘성의 최상층부에서 대마법진을 확인하고,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세리아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떠올린 시점에서 진성의 머릿속은 자연스레 그 모든 것을 필터링했다.

그가 집중한 건 오직 두 단어였다.

'오염...그리고 정화.'

진성은 이제 달빛 주점 밖으로 이동하는 세리아와 유저인 여자 격투가, 그리고 레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염의 원인자>가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뒤흔들고자 한다면.

그 흐름을 뒤바꾸어 '캐릭터 모험가'로 숙달되어 그 또한 아라드로 빙의가 될 수 있는 '칼날'이자 '진정한 모험가'가 되기 위한 길을 막으려 한다면.

자신은 막아야 한다.

연단되어야 할 칼날의 부집게로서.

"그럼 당장-."

진성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으니....

"그냥 가시면 곤란한데요, 손님~?"

"네?"

"계산은 하셔야지. 우유 한 잔 마셨다고 공짜가 아니거든요."

"아참, 계산이요, 그, 그렇네. 얼마죠?"

진성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라이너스가 여비로 준 것은 총 3천 골드.

그나마 생리현상에서의 자유가 있기에 지금까지는 지출할 필요가 없었다지만 이제부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쩝, 각 계정마다 억 단위 골드를 쟁여놨었는데. 이거 가지고 벌벌 떨어야 하는... 아니, 잠깐만.'

골드를 세던 진성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슈시아 님, 여기 다른 아이템도 팔죠?"

"그럼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주점이지만... 여기는 뒷골목이니까요."

슈시아의 알듯 말듯 한 답변을 들으며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돈은 고작 3천 골드.

어차피 제대로 된 방어구 하나 살 수 없는 금액이라면?

"흐흐, 판매 물품 목록 좀 볼 수 있을까요?"

진성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구입하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 * *

진성은 달렸다.

레니를 달빛 주점까지 대동한 여자 격투가 유저를 찾기 위함은 아니었다.

누가, 어떻게 오염되었고 무슨 사건이 발생할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모든 일이 '어디서' 일어날지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는 있었으니까.

'어차피 그 유저를 쫓아 다녀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오염 그리고 정화, 단어의 조합만으로 봤을 땐 아주 높은 확률로 하늘성에서 문제가 터지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늘성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

그 일도 어떻게 해내는지 모를 진성이 아니었다.

'경비가 삼엄한 하늘성에 출입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해주는 NPC는 로저 레빈밖에 없어.'

진성 자신이 유저였을 적, 즉, '캐릭터 모험가'를 다루던 때를 떠올리자면 이후의 수순은 당연히 알 수 있기 때문.

다만 진성에게 안타까운 점이라면 NPC 로저 레빈을 만나야 하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만,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리라.

벨 마이어 공국의 수도 헨돈마이어에서 동측에 위치한 무역 거점 도시인 웨스트코스트에 로저 레빈이 있으며, 또한 하늘성으로 오를 수 있는 입구가 있다.

'으, 웨스트코스트도 원래 맵 이동 한 번이면 딱! 끝나는 건데!'

즉, 현실의 아라드인이 되어버린 진성은 웨스트코스트를 가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헨돈마이어의 바로 옆 도시였으므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일까.

무엇보다 진성의 육체가 일반적인 사람과는 격이 다르다.

진성이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복잡한 수도를 벗어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당연하지만 시스템에 의한 편의 기능은 완전히 사용할 수 없구나.'

그러한 이동 시간 또한 진성은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캐릭터를 조종하던 것과 아라드인이 되어버린 현재, 같은 규칙과 같은 상황을 공유하는 듯 보이나 또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중인 것.

'세리아 방으로 이동하는 포탈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짓은 안 된다. 경매장, 세라샵 따위도 안 되고 미니맵도 없군... 어차피 안 될 걸 알았지만 확인하고 나니 좀 아쉽네.'

게임이었다면 ESC를 눌러서 확인할 수 있는 각종 항목들, 도감을 비롯하여 백과사전, 어드벤처, 길드, 아바타 마켓 따위도 당연히 진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뭘 바라냐. 그게 됐으면 애당초 나랑 만났던 남레인저 유저가 그렇게 지냈을 리가 없지.'

게임상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항목들을 쓸 수 없는 건 어쩌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 진성에게 아쉬운 점은 또 있었다.

[내 정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

'명성밖에 못 보나? 크리티컬 수치도 확인하거나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HP나 MP도 그렇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오직 모험가 명성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진성이 보기에는 '이런 명성도 이론상 가능하구나'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낮았으니.

'아이템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닳아빠진 링 흉갑? 훈련용 도? 이거 진짜 말 그대로 캐릭터 딱 만들면 그냥 자동으로 입혀놓은, 레벨 1 때 쓰고 영원히 볼 일 없는 아이템들이잖아? 야이바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기본으로 주어지는 다섯 부위의 방어구와 무기 하나에는 각 명성치 1이 붙어있다.

즉, 원래대로였다면 진성이 장착할 수 있는 모든 아이템의 명성치 합은 6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기' 하나만으로 모험가 명성 12를 상승시켜주는 도, 야이바의 존재는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지.

본격적인 공격력 차이를 체감하기도 전에, 이미 모험가 명성의 차이만으로도 진성에게는 위안이 되는 셈이었다.

'...대마법사의 차원회랑까지는, 으음... 아냐, 너무 멀리만 보지 말자. 일단 눈앞의 것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필요 모험가 명성 38,095를 만족시켜야 진성이 원하는 때에 네메르를 만나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상상이 치솟아 오를 뻔한 상황에서 진성은 고개를 저었다.

낙관적일 필요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긍정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교육 공대'를 데리고 얼마나 많은 레이드를 성공시켜보았던가.

'그래, 그나마 [인벤토리]는... 무슨 삼차원 주머니처럼 꺼낼 수 있는 정도의 편의성이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아이템의 성능 같은 것도 딱 보이고! 만약 이게 아니었으면 나중에 아이템 먹었을 때- 등에 주렁주렁 매달고 겨드랑이에 끼고 다녀야 했으려나?'

분명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즐길 때보다 불편한 점은 있겠으나 현실인 이상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다.

현실이지만 오히려 게임의 편의성 일부를 진성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함에 감사하는 게 더 나은 방향이리라.

"짠내... 다 왔다."

그렇게 나아가길 얼마간이 되어서야 진성은 웨스트코스트에 도착했다.

캐릭터로 움직일 때는 알 수 없었던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와 헨돈마이어와는 확실히 이질적인 감각을 일깨운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런 여유를 즐길 새는 없었다.

진성은 곧장 웨스트코스트의 번화가를 향해 움직였다.

'로저 레빈은 상인 NPC다. 설정상으로도 벨 마이어 공국 웨스트코스트에 거점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개념이니 가장 큰 상업지구를 향해 나아가면-.'

그리고 들었다.

웨스트코스트를 돌아다닐 때 유독 잘 들리는 목소리.

"이봐요, 멋쟁이 양반! 내가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들어보겠어요?"

"조안 페레로!"

"음? 나를 아는-."

진성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곤 곧장 그곳을 향해 달렸다.

물론 그 주인과의 상호작용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쳐 계속 전진을 했을 뿐.

'됐어, 그럼 다 왔다. 조안 페레로 옆에... 보인다, 황금마차!'

100% 기계로 만들어진 말이 이끄는 황금 마차.

NPC 로저 레빈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진성의 입꼬리가 꿈틀댔으나 그것이 씨익,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어라...? 로저 레빈?"

진성 자신보다 훨씬 큰 기계마馬와 황금마차 앞에 로저 레빈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진성은 중얼거렸다.

그런 진성에게 반응한 것은 황금마차 근처에 있던 여성이었다.

"로저 님은 요즘 바쁘세요. 당분간 웨스트코스트에는 오지 않으실 거예요."

"...다프네."

"저를 아세요?"

로저 레빈의 보조이자 조수, 수많은 유저의 엠블렘과 골드를 받아갔던 NPC가 그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진성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아, 아뇨, 아는 건 아니고, 그냥...."

다프네 또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NPC다.

즉, 이 근처에 유저가 있다면 진성 자신의 말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약간의 불안감에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진성이었으나 어차피 그럴 여유는 많지 않았다.

"저기, 다프네 님. 혹시... 하늘성 출입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래 봬도 귀한 물건도 제법 가지고 있는데. 물론 플래티넘 엠블렘은 아닙니다만...."

진성이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여자 격투가 유저는 퀘스트를 진행해 나가고 있을 터, 만에 하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간 결국 부집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죄송하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는 로저 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에요. 제게는 그럴 권한이 없네요."

다프네의 똑 부러지는 거절을 들으며 진성은 생각해야 했다.

앞으로 부집게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로저 레빈에게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었다.

'몰래...하늘성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나.'

웨스트코스트에서는 고개를 다 치켜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창공의 대마법진까지 하늘성이 우뚝 서 있었다.

014

던전 지역:하늘성은 통상적인 던전 지역과 다르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나리오 퀘스트가 진행됨에 따라 그 배경과 상황이 가장 크게 바뀌는 장소 중 하나인데다, 워낙 많은 세력이 얽혀있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

"통행증이 없으면 하늘성에 들어갈 수 없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으나, 제국에서 조사 중이니 돌아가."

하늘성 앞의 바리케이드에서 그것을 올려다보던 진성을 향해 제국의 경비병이 말했다.

진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옙, 알고 있습니다."

분명 벨 마이어 공국에 나타나 있으나 데 로스 제국과도 얽혀있는 문제적 장소가 하늘성이다.

양국이 공동 조사단을 꾸려 하늘성의 실체를 막 파악해나가고 있을 시점이지만 배경 설정상 두 나라의 사이가 좋지는 않으니, 이래저래 여러 NPC들이 까칠할 수밖에 없는 것.

무엇보다 지금 당장 하늘성의 경계가 심한 이유 또한 진성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황녀 중 하나... 이사벨라였나, 이자벨라였나. 황녀가 있을 테니 제국에서 더욱 엄중히 경계를 설 수밖에 없지.'

그것이 바로 진성이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황녀로 인하여 삼엄해진 경계 중, 정당한 통행증도 없이 하늘성에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한번 들어가면.... 저 긴 탑의 어디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세리아와 여격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먹지 않아도 버틸 수 있으니 상관은 없겠으나 그럼에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진성은 주변을 살폈다.

어쨌든 하늘성에 들어간 다음에나 걱정할 일이다.

'박스를 뒤집어 쓰고? 아니면 골드를 하나 휙 던져서 시선을 끈 다음 뛰어 들어가는 건-.'

우선은 들어갈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으나 진성 스스로도 고개를 젓게 만드는 발상들이었다.

'될 리가 없지. 잠입 액션 게임도 아니고.'

결국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밤이 되면 야음을 틈타 빠르게 침투하는 것.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지도 몰라.'

던전 지역:하늘성이 아니라 기타 지역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상황에서는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감시 범위 또는 경계 범위가 드러난 몬스터들의 뒤를 잡아 공격하거나 또는 그 시선을 피해 은, 엄폐하며 움직이는 패턴은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냥 들킨 다음 몬스터 다 패버리면서 진행한 적이 훨씬 많지만.'

여기서는 그랬다가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모른다.

제국의 황녀가 있는 장소에 몰래 침입하다 걸렸을 때 어떤 취급을 당하게 될지.

'부집게가 되기는커녕... 부집게로 온갖 고문이나 당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들키면 가히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사태가 벌어지겠으나 그 외에도 진성에게 다급한 점은 있었다.

시간.

'내가 여기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어느 정도 소요했어. 근데 여격가 유저라면... 시나리오 퀘스트 상으로 그냥 헨돈마이어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한 다음 바로 진입하게 될 텐데.'

일각을 다퉈야 하는 상황에 해가 다 떨어지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진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아?'

제국 경비병이 지키는 바리케이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움직이길 얼마나 되었을까.

진성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잠시 후.

제국 경비병은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까지 눈엣가시처럼 걸렸던 인물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으나....

"...."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제지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리케이드 옆을 지나가는 진성을 노려봐야 했을 뿐.

진성 또한 제국 경비병과 눈을 마주치며 흠칫거렸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생각이 먹혔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막지 않는 제국 경비병을 보며 진성은 가슴을 폈다.

그러곤 말했다.

"통행증이 있는 동료를 기다리느라.... 수고하십쇼."

남자 마창사 레벨 15 유저의 뒤를 따라가며.

그것이 바로 진성의 계획이었다.

'먹히는구나. 역시, 먹히는 거야!'

하늘성으로 진입하려는, 아직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클리어 중인 저레벨 유저, 바꿔 말하면 'NPC 로저 레빈에게 통행증을 받은 유저'와 파티를 맺은 후 하늘성에 입장하는 것!

"ㅇ? 머라고요?"

다만, 그것 또한 위험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컴퓨터 앞에 있는 유저'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한밤중 몰래 잠입한다는 계획에 비한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또 유용한 것인지.

"아 귓속말을 하려다가, 크흠, 실수했네요. 죄송."

"크흠? ㅋㅋ ㅇㅋ"

말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채팅'으로 보일 유저들 앞에서는 진성 자신이 이상한 티만 내지 않으면 괜찮은 게 아닌가.

진성은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제국 경비병들의 삼엄한 경계를 유유히 지나는 중이었다.

'좋았어. 성공이다.'

자신의 전략을 성공시킨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며, 진성은 하늘성의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파티를 해제하곤 말했다.

"고맙습니다, 님."

"ㄱㅊ 이 레벨대에 뜬금 파티하자는 사람 있어서 잼섯음 ㅅㄱ요"

"네, 수고하세요. 즐던."

"즐던ㅋㅋㅋ ㅂㅇ"

진성은 레벨 15의 마창사 유저와 파티를 해제하며 새삼 확신했다.

그에게도 '세리아'는 있을 것이다.

그 또한 하늘성의 대마법진을 보수하기 위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 중일 것이다.

'앞으로 나는 이런 곳에서.... 일을 마치기 전까지 살아나가야 한다는 건가.'

진성 자신과 대화도 통하고 파티도 가능하지만, 진성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그리고 진성 자신이 불과 얼마 전까지 처했던 입장의 유저.

'일단은 집중하자. 그 여자 격투가를 찾아야 해.'

진성은 자신이 알고 있고 또 겪는 '두 개의 현실'에 대한 잡념을 털어버리며 하늘성에 입장했다.

끝없는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탑과 같은 건물의 초입이었다.

그런 진성의 뒷모습을 보며, 레벨 15의 마창사 유저는 말했다.

[채널]순수찍기 : 님들 닉네임 없는 캐릭터도 만들 수 잇던가?

이후 채팅창이 잠시 소란스러워졌음을 진성은 알 수 없었다.

* * *

완전히 성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건 곧장 알 수 있었다.

회랑을 돌돌 말아놓은 것처럼 생긴 건물로, 사실상 외벽이 없어 바깥이 훤히 보이는 데다, 중간중간에는 탑을 구성하는 그러한 기둥마저 파괴된 곳들이 보일 정도였으니.

'...안 무너지는 게 대단하네. 일반 건축물이었으면 사실 진작 주저앉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역시 바칼의 힘? 폭룡왕의 마법 때문인가?'

통상적인 물리 법칙에서 어긋나있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불안하지만 동시에 안전함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으로 진성은 나아가는 중이었다.

일단 그에게 다행이라면 주변에 몬스터도 별로 없는 데다 당연하게도 유저를 비롯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예전에야 레벨 업을 위해 여기서 다들 파티하고 그랬다지만 최근에는 메인 시나리오만 쭉 밀면 만렙까지 가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진성 자신이 걱정해야 할 것은 유저들의 맵에 합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맵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뛰어다니고 있을 NPC들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제국의 아이언 울프 기사단과 로저 레빈에게 통행증을 받은 NPC 모험가들.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혹여 인기척이 있진 않은지, 감각을 곤두세우며 몇 층이나 올랐을까.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는 상자들과 그리고 용의 모양으로 생긴 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탑을 오르는 계단 자체가 외부로 형성되어, 난간도 없는데다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할 것 같은 계단을 올라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렇지. 있어야지."

진성은 알 수 있었다.

던전 지역:하늘성의 던전 중 하나 '던전:용인의 탑'에 들어섰음을.

"키이이이익?!"

기괴한 소리를 내는 것은 다크나이트의 육신인 진성 자신보다도 20cm가량은 더 클 법한 용인龍人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키만 한, 양쪽 어디로도 찌를 수 있는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위협적인 모습까지.

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보는 눈도 없는데다... <패왕의 계약>을 괜히 받은 게 아니거든?!"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적용되는 시스템 중 진성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내 정보]나 [인벤토리]만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진성 역시 사용할 수 있는 요소!

"캬아아아아-!"

달려드는 푸른 용인, 미니우스를 향해 진성은 야이바를 강하게 쥐었다.

그러곤 가로 베기 직후 곧장 이어지는 세로 베기의 연속으로 외쳤다.

"<다크 크로스>!"

─────────────!

[스킬 창]을 활용해 새로이 배운 기술과 함께, 진성은 미니우스의 몸을 열십자로 쪼개어버렸다.

"키엣-."

그것만이 아니었다.

멀찍이서 동료가 당한 것에 잠시 멈칫한 또 하나의 미니우스를 향해, 진성은 도약하며 야이바를 내리찍었다.

"<홉 스매쉬>!"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려 베는 묵직한 동작은 미니우스의 하반신이 시작되는 부위까지 파고들어서야 끝이 났다.

"키이...."

미니우스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진성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이건.... 적응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군.'

아무리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빙의했음을,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함을 안다지만.

생명체가 죽는 모습과 그것을 죽인다는 행위까지 순식간에 적응해버릴 정도는 아닌 것이다.

"후우, 그래도 무기가 무기이니만큼 콤보도 잘 먹히는 걸 알았으니-."

"키이이이...!"

"캬아아아, 캬앗-!"

"-올라가 봅시다."

푸른색의 용인 미니우스와 하얀색의 용인 미르키우스 무리가 쇄도하고 있음에도 진성은 겁먹지 않았다.

공격이 통한다는 것을 안 이상 남은 건 일종의 '테스트'라고밖에 할 수 없을 테니까.

"<어퍼 >, <브리프 컷>-!"

진성은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던전:어둠의 선더랜드'의 급박한 상황을 한 번 헤쳐나왔기 때문일까, 그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그 해답 중 하나라면 역시 진성 스스로 세팅한 콤보 시스템 덕분이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여타 직업과 달리, 다크나이트는 독특한 스킬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콤보다.

통상 하나의 스킬과 하나의 단축키가 대응하는 타 직업에 비한다면 다크나이트는 하나의 단축키, 예컨대 A라는 단축키에 다섯 개의 슬롯이 복수로 형성되는 방식이기 때문.

"-<스핀 어택>, <피어스 스트라이크>-."

즉, A-A-A-A-A를 연달아 누르는 방식으로 미리 설정한 다섯 개의 스킬을 사용 후 S-S-S-S-S, D-D-D-D-D 등의 사용 패턴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게 다크나이트의 장점이자 단점, 말 그대로 양날의 칼이니까. 쿨타임의 계산 방식도 일반적이지 않을뿐더러-.'

앞선 네 번은 일종의 '재료 스킬'이 되며 해당 콤보의 마지막 스킬, 결국 다섯 번째 슬롯에 놓인 스킬이 사실상 '주력기'이자 '폭딜'의 원천이 되어주는 셈.

이것을 모른 채 콤보를 구성한다면 대미지도 별로 넣지 못한 채 몬스터 주변에서 휘적거리는 바보 같은 모습이 연출되며 그것을 '탈춤'이라 부르는 밈까지 따로 있을 정도지만....

'나는 다르지!'

<어퍼 >, <브리프 컷>, <스핀 어택>, <피어스 스트라이크>까지 4번의 연속된 스킬 사용.

다음으로 이어질 콤보 스킬이 가장 강력한 대미지를 줄 것을 알고 있기에, 진성은 나름대로 범위 공격이자 가장 강력한 스킬을 바로 그곳에 배치한 것!

"캬아아아아-!"

"-<다크 익스플로전>!"

진성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전후좌우 360도 전역의 작은 범위에서 어둠의 기운을 폭발시키며, 다가오는 모든 몬스터들을 공중으로 띄워버릴 수 있는 스킬.

이후 곧장 다음으로 세팅한 콤보를 발동하며 모두 정리해버린다는 게 진성의 계획이었고.

"킷?"

"캬?"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움찔거리며 멈춰버린 미니우스와 미르키우스보다 더 당황한 건 당연히 진성이었다.

"왜 스킬이...아!?"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는 아무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있는 반면.

"이거 무큐기구나.'

통칭 '무큐기', 무색 큐브 조각이라는 아이템을 소모하는 기술도 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진성이 보유한 무색 큐브 조각이 없기에 스킬은 발동되지 않는 것이었다.

"키이잇...!"

"카악- 캬아악-!"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몬스터들의 앞에서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음... 큰일 났네."

이제부터 최고 주력 스킬을 봉인 당한 채 전투를 치러야 하기에.

015

게임 던전앤파이터라면 한 계정 내의 모든 캐릭터가 큐브 조각을 공유하므로 신경 쓸 일도 없었다.

무색 큐브 조각만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큐브 조각들을 십만 개 단위로 보유하고 있던 진성에게 있어 그런 것은 애당초 신경 쓸 거리조차 안 되었기 때문.

"캬아아아아-!"

"아니, 근데 왜 늬들이 화가 났냐고! 내가 콤보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기초적인 요소이기에 진성에게는 맹점이 되어버렸으니.

예상조차 하지 못한 부분에서 발목이 잡혀 진성은 잠시 당황했으나,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다크 슬래쉬>!"

파츠츠츳───....

암속성의 기운이 서린 무기를 양손으로 힘껏 휘두르며 진성은 외쳤다.

기존 주력으로 사용하려던 스킬, 게임으로 치자면 A키의 스킬 콤보는 본의 아니게 봉인당했으나, 현재의 진성에게는 A키에 해당하는 콤보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웨이브 >!"

<다크 슬래쉬>에서 힘차게 내려벤 도의 날 방향만 바꾸어 그대로 쳐올리는 형태의 스킬.

하늘성의 바닥에서부터 튀어 오르듯 뿜어져 나간, 일종의 검기와도 같은 기운은 미니우스와 미르키우스 무리를 밀쳐내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몬스터 무리를 가만 보고 있을 진성이 아니었다.

이미 '던전:어둠의 선더랜드'에서도 사용해보았던 도약형 공격 기술로의 연계.

"<바운스 블로우>, <트리플 스탭Stab>-."

그들의 옆을 빠르게 베며 넘어가 후방에 위치한 상태에서 뒤를 돌며 행하는 삼단 찌르기.

그리고 두 번째 콤보의 다섯 번째이자 주력 스킬.

진성은 그대로 검을 회수하며 자신의 등 뒤까지 한껏 젖힌 후 베어 내리며 외쳤다.

"-<그랜드 웨이브>!"

<다크 슬래쉬>처럼 내리치는 기술이지만 그저 검으로만 적을 베어내는 게 아니다.

진짜 공격은 검에서부터 쏘아져 나간 검기다.

하늘성의 바닥까지 긁으며 분출된 초승달 형태의 검기는 미니우스와 미르키우스 무리 모두의 몸을 짓이기기에 충분했다.

"후우...."

진성은 숨을 토해내었다.

용인들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몇 층계를 더 올랐을지.

그저 한 턴의 안전함을 확보했기에 내뱉는 숨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어."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스레 나오는 불만때문이었다.

꽤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음에도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사체들밖에 없다니?

'골드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게 현실이라면 몬스터가 돈을 들고 다닌다는 게 설정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은 있으니까. 근데... 마법으로 봉인된 템이나 성물 같은 건 나올 법하지 않나? 설마 나 혼자 사냥할 때는 아예 드랍이 안 되는 건가?'

진성이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골수 유저라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장착 중인 아이템은 모두 캐릭터를 생성할 때 자동으로 받는 장비 수준이 아닌가.

'곤란한데. 게다가 몬스터의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신경 써야 하는 패턴도 많아지니 최대한 빨리 녹여야 유리하건만.... 설마 몬스터 시체에서 뜯어다 쓰라는 건 아니겠지?'

먼 미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 따위의 걱정도 아니다.

덩치가 크기에 오히려 느렸던 용인들에 비하면 이제는 또 다른 몬스터들, 파닥거리는 날갯짓으로 진성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한 작은 용 형태의 몬스터도 눈에 띄기 시작한 시점.

소위 '잡몹'들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됨을 알기에 진성은 우려하는 것이었다.

새끼 용이라지만 그 크기는 거대한 맹금류에 비견될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예전보단 낫지. 하늘성 뺑뺑이 돌던 그 시절에는 석상에서 불 뿜고, 냉기 뿜고 난리도 아니었으니-."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 어떻게든 긴장을 다스리려는 진성이었으나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끼에에에에엑!"

"끼잇, 끼잇, 끼잇-!"

비대한 몸을 지탱하느라 퍼덕거리는 그들의 날갯짓 소리에 더하여 쉼 없이 울부짖는 소음은 또 어찌나 심한지.

"<다크 크로스>!"

주변으로 퍼지는 새끼 용들을 상대하기 위해 진성은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이어지는 <홉 스매쉬> 콤보로 퍼지는 새끼 용들의 빈틈으로 침투, 다시금 <다크 슬래쉬>를 비롯한 콤보를 좌, 우로 펼치며 몬스터들을 정리하려던 게 진성의 계획이었으나....

쉬이이이잇-!

정신없는 소음에 뒤섞인 파공음을 구분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진성은 깨달아야만 했다.

"끄앗!"

무언가가 자신의 등에 부딪쳤다, 라는 고통을 느끼자마자 진성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무슨-. 자전거 탄 사람한테 부딪친 것처럼, 크으-.'

그러나 고통에 아파하고만 있을 순 없다.

인상을 찌푸리고 자세도 무너졌지만, 진성은 본능적으로 등 뒤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 적을 밀쳐내려 했다.

까아앙...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황당할 정도의 마찰음뿐이었다.

진성은 황급히 뒤를 돌아 살폈다

그 비늘을 까부수고 피부를 파고들었어도 단단한 두개골로 진성의 검을 막아낸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도 아니었다.

푸른색의 새끼용, 루스 세리말리온이었다.

"스턱? 아으, 용대가리가 이렇게 단단-...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하늘성 뺑뺑이 돌 때도 이 패턴이 개짜증 났던 기억이 나는데."

레벨 1 때 쓸 법한 무기는 그 두개골의 단단함으로 받아낼 정도였으니, 비행의 속도가 더해진 그들의 박치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셈.

진성은 <백 스텝>으로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넓게 퍼진 새끼 용의 포지션은 본능적인 포위망 따위가 아니라 그들의 장기인 고속 비행 박치기를 적극 활용하기 위함일 터.

'역시.... 루가루한테 긁혔을 때 알았다고. 이럴 것 같더라고.'

무엇보다 진성이 빙의되기 전, 남자 레인저가 몬스터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떠올렸기에 진성 또한 걱정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다. 생각보다 더 아파.'

자신이 '닳아빠진 링 흉갑'이라는 1레벨 방어구를 장착하고 있다지만 설령 높은 레벨의 방어구를 장착한다 한들 아프지 않을까?

진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겠지.'

이러한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진성 자신은 결국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다크나이트 유저들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점.

콤보를 활용한 '폭딜'을 할 때까지 공격을 맞으며 버티는 일 따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데미지를 넣는 것보다 진성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콤보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맞지 않고 딜을 해야 한다, 다크나이트로?

그렇다면 선택지는 둘뿐.

'-다크나이트의 장점은 아예 사라지는 거라고! 내가 바로 그 탈춤이나 추는 다크나이트가 되는 건데!'

초 근거리에서 강하게 딜을 넣다 맞으면 깨지는 유리 대포가 될 것이냐.

제대로 스킬 적중도 시키지 못한 채 적 주변을 알짱대는 새총이 될 것이냐.

근접이지만 회피기와 이동기가 많아 적의 공격을 빠르게 회피하면서도 무지막지한 데미지를 입히는 직업이 있다.

맞는 고통을 모조리 공격력으로 뒤바꾸는 데다 심지어 제법 긴 시간을 '사실상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스킬을 보유한 직업도 있다.

실제로 대포와 같은 공격력과 사정거리를 지닌 원거리 직업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진성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끼잇?"

"일단 다 뒤져! <다크 슬래쉬>, <웨이브 >, <바운스 블로우>-!"

어쩌면 다크나이트로 빙의되었던 그 시점에서부터 이런 예감을 가졌기에, 회피기와 유틸, 생존기가 많은 타 직업을 본능적으로 원한 게 아니었을지.

진성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던전:용인의 탑'의 몬스터들에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마리의 몬스터를 죽였을까.

진성 자신의 몸에 번쩍거리는 금빛의 광휘가 감싸는 경우도 겪기를 몇 번이나 되었을까.

"멈춰!"

"엇?"

"꼼짝마라, 움직이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죽이며 하늘성을 오르던 진성은 그제야 깨달았다.

데 로스 제국은 하늘성의 입구만 지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중층부에 전진 기지를 설치한 그들을 마주한 진성이 잠시 당황한 사이.

누군가가 하급 기사들을 물리며 다가왔다.

"넌 누구냐. 하늘성에는 어떻게 올라왔지?"

기다란 창을 위협적으로 들고 있는 자를 진성은 곧장 알아보았다.

'...하츠. 하츠 폰 크루거.'

따라서 어쩐지 미묘한 감정을 감춰야만 했다.

'하! 츠! 하! 향! 의 주인공...!'

어쩌면 게임 던전앤파이터 역사상 유일무이한 패치의 대상이 되었던 NPC였으니까.

* * *

설정상 데 로스 제국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부단장이지만 그가 유명한 건 그러한 배경 때문이 아니다.

'패치 전에... 진짜 여러 가지 의미로 유저들한테 인상 깊은 NPC를 꼽으라고 하면 거의 1순위일 정도였는데.'

하츠의 얼굴을 보며 진성은 새삼 옛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인상 깊은 자였으나, 어쨌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겠-."

"아뇨, 적이 아닙니다! 로저 레빈 님께 통행증을 받았거든요. 조사원입니다."

이런 사태까지 예상치 못한 진성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저의 입장에서 시나리오 퀘스트를 할 때에도 로저 레빈에게 통행증을 받은 기타 NPC 등을 만나기도 하므로, 만에 하나 하늘성에서 관련 인물들을 만나면 일단 얼버무리려 했던 것.

하늘성에 입장했다는 것 자체가 하늘성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를 통과했다는 의미이므로, 이 정도의 둘러대기라면 통할 거라는 게 진성의 예상이었다.

대부분의 NPC에게는 통했을 확률이 높다.

"로저 레빈? 제시해라, 확인하겠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NPC 하츠만 아니라면.

과거의 틱틱거리거나 사람 무시하는 성격은 패치로 인하여 사라졌다지만,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까탈스러운 성향만큼은 남아있는 것이다.

"어... 어디다...뒀더라."

진성은 느릿한 동작으로 얼굴을 감추며 몸을 뒤적거리는 척했다.

당연히 있지도 않은 통행증을 찾을 수는 없다.

하츠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모습, 그러한 긴장 상황을 읽었다는 듯 슬금슬금 진성 자신을 포위하려는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하급 기사들까지.

'으, 하츠는 나랑 진짜 안 맞는다니까.'

결국 진성은 선택해야 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것들을 냅다 땅을 향해 집어 던졌다.

먼저 땅에 떨어진 것이 챙그랑, 소리를 내었다.

"-뭣!?"

"무, 무슨-."

유리로 된 병이 깨지며 하늘성의 바닥에 흩뿌려진 것은 검은 액체였다.

그리고 그것이 '오일'이라는 걸 NPC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 진성은 또 하나의 아이템을 이미 투척한 상태였다.

───────────!

폭발음과 함께 갑작스레 타오르는 화염.

"크앗!? 폭발이-."

"부, 불이다! 불!"

"뭐야, 제기랄, 폭탄을-. 이봐! 거기!"

폭탄은 직접적으로 아이언 울프 기사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나 오일과 뒤섞인 화염의 기세는 결코 얕볼 수 없었다.

화르르륵, 타오르며 순식간에 진성과 기사단 사이에 불줄기가 생겨났다.

"잠깐, 거기-. 어디 갔어?! 이런, 젠장! 저 망할 녀석이!"

하츠는 열기에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와중에도 진성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이미 진성이 멀찌감치 도주 중이라는 걸 알고 그저 욕지거리나 내뱉어야 했을 뿐.

층계를 내려가던 진성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흐흐, 요즘은 잡템 취급이라 모르겠지만 예전에 잘 먹혔던 템이라고. 돈은 좀 아깝지만.'

달빛 주점에서 300골드를 주고 샀던 '오일 플라스크'와 510골드를 주고 산 '폭염탄'이 만들어 낸 결과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줬으니까.

"놈을 쫓아! 놈을-."

"부, 부단장님! 불이 번집니다! 오일을 타고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쫓...젠장, 불부터 끈다!"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진성은 확신했다.

아이언 울프 기사단은 하늘성 중층부에 난 화재,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할 테니 자신을 쫓지 못할 것이라고.

물론 진성도 여유롭게 웃기만 할 수는 없었다.

'쩝, 일단 나 혼자 올라가는 길은 막혔다고 봐야 하나. 그럼 이제-. 음?!'

몇 개의 층을 내려와 생각을 정리하던 진성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반대편에서부터 느껴진 인기척, 누군가가 진성 자신이 있는 층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기 때문.

세리아와 여자 격투가.

그들과 함께 하는 NPC, 아간조와 반 발슈테트.

그리고 레니까지.

그들의 모습을 살피며 진성은 생각했다.

'역시 아직도 레니가....'

어디서, 무엇이 변했을지 모르지만 '오염'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진성은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016

마음은 조급하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세리아와 여자 격투가의 옆에 있는 반 발슈테트는 제국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단장이기 때문이다.

'부단장인 하츠가 내 얼굴을 기억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제 와서 반과 함께 올라가 봐야 문제만 커지겠지.'

그렇다면 그 곁에 있는 아간조, 대검의 아간조를 노렸어야 했나.

하지만 진성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항상 달빛 주점에 있던 아간조가 보이지 않은 이유, 결국 이미 그 시점에서 아간조는 쭉 여격가 유저와 함께 다닌다는 설정이 되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남아 있나.

이미 세리아와 '캐릭터 모험가'인 여자 격투가는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걷는 중이었다.

아간조와 반 발슈테트 그리고 레니 또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으니.

그들은 곧 아이언 울프 기사단의 전진 기지를 거치게 될 테고, 그대로 하늘성의 최상층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레니가 하늘성 끝까지 가는 스토리는 없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진성은 던전 지역:하늘성의 스토리를 되뇌었다.

최종 보스인 지그하르트를 처치하려 '모험가'인 유저는 노력하지만, 그는 바칼의 힘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었다.

'아간조, 반과 함께 대항하는 것까진 기억나. 지그하르트가 죽지 않아서 당황하던 느낌은 기억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흐름에 레니는 없다.

퀘스트의 대사를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흐름이라면 꿰고 있는 진성에게 있어 의문은 그것이었다.

'지그하르트에게 마력이 공급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역할...도 레니가 할 리가 없어. 그건 세리아-. 아닌데, 세리아가 아니야. 그걸 하는 건-.'

그러다 깨달았다.

이미 모두가 올라가 자신 외에는 몬스터도 없는 텅 빈 하늘성에, 또 다른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음을.

'마법사 길드의 샤란! 그래, 샤란이 지그하르트의 비밀을 파헤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런 샤란을 하늘성에 무사히 데려다주는 게-.'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진성은 마침내 기억해냈다.

대머리보다도 눈에 띄는 건 X자 형태로 눈을 가리고 있는 붉은 안대.

'...G.S.D.'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조금 오래 즐긴 유저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사실상 던전 지역:하늘성에서 반복되는 사냥으로 레벨을 올리던 그 시절 많은 도움을 받았던 NPC, G.S.D였다.

'샤란이 하늘성 꼭대기까지 가기에는 위험하니까 G.S.D가 호위를 한다...는 느낌이었어. 맞아.'

세리아와 유저인 여자 격투가 그리고 반, 아간조보다 약간 뒤늦게 쫓고 있으나 그들과는 결국 조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하늘성을 오르는 이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샤란과 G.S.D를 이용해서-. 제국 기사단에 들켜도 쫓겨나지 않을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진성은 두 명의 NPC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샤란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G.S.D라면 어떨까.

'그래도 한때 귀검사 직업의 교관 같은 NPC였잖아. 그나마 그 시절에 나눴던 대화 같은 걸 생각한다면 이쪽밖에 없어. 시험해볼 수 있는 건-.'

시험해봐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테니까.

저벅, 진성은 결국 각오를 마치고 앞으로 나섰다.

* * *

"어머나?! 이런 곳에 사람이-."

"...아까부터 인기척은 느끼고 있었으나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무시하려 했네만...생각이 바뀐 겐가."

주춤거리는 샤란과 곧장 검 손잡이부터 쥐는 G.S.D를 보며 진성은 일단 양팔을 번쩍 들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부터 민망하지만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대놓고 드러내는 진성의 태도에, 샤란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하늘성 한복판에서 만났는데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누구죠? 무엇보다 아간조 님을 비롯한 모험가 일행이 조금 전 올라갔을 텐데, 그 모습까지 쭉 지켜보다 지금 나섰다는 뜻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역시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다운 추론을 펼쳤다.

합리적인 그녀의 질문에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진성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으나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뻔했다.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데 혹시...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여기, 하늘성의 최상층부까지 가시죠? 대마법진 조사할 겸. 제가 이래 봬도 어쨌든, 뭐, 용인들도 상대할 수 있고. 지금 같은 때에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저 노골적으로 자신을 끼워달라 제안하는 수밖에.

다만, 대마법진을 조사한다는 목적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대마법진의 조사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헨돈마이어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나 본데. 그러니 더욱 의심되는군요. 순수하게 도우려는 의도가 아닐-."

"순수하게 도우려는 의도입니다! 진짜로!"

"-흐음, 어떻게 할까요, G.S.D 님?"

진성은 말 그대로 정성을 다해 외쳤다.

샤란은 진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G.S.D에게 물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현시점 아라드 대륙 최강의 검사로 손꼽히는 자는 조용히 말했다.

"팔에 깃든 귀鬼의 힘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그것을 완전히 다룰 줄은 모르는 상태로군. 도움을 줄 능력이 있다는 자네의 말은 필시 거짓이 아닐 터."

진성은 자신이 빙의한 육신, 다크나이트의 배경 설정에 대해 G.S.D가 삽시간에 파악했다는 점에서도 놀랐으나 우선 중요한 건 긍정적으로 들리는 그의 말투였다.

"예? 예! 그렇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그러나 우리로선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군. 돌아가게나."

"...네?"

안타까운 점이라면 결과까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일까.

G.S.D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분위기를 살피던 샤란 또한 그의 뒤를 쫓았다.

진성은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중해야 한다? 신뢰가 없다는 뜻?

'믿을 수 없는 건, 그래, 그렇다 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오히려 신중해야 하기에 진성 자신의 합류를 인정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면!?

저들로 하여금 진성 자신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 라는 마음을 먹게끔 만들려면!

"그랜드Grand 소드마스터Swordmaster 던컨Duncan."

진성은 뜬금없이 말했다.

두 NPC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침묵은 잠시였다.

"...설마?"

부연 설명 따위 없어도 샤란은 진성이 내뱉은 말을 이해했다는 듯 놀란 눈을 했다.

적어도 진성이 기억하고 있는 배경 설정은 확실히 통하는 중이었다.

현재 아라드의 그 누구도 G.S.D가 무엇의 약자인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G-. G.S.D 님? 본명이...."

샤란은 말까지 더듬었다.

진성의 말이 사실이라 곧장 확신한 건 아니겠으나, 적어도 G.S.D의 발걸음조차 멈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알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G.S.D는 그저 한쪽 입꼬리만을 올릴 뿐이었다.

"아직도 나를 그런 식으로 지칭하는 자가 남아있었나. 그 옛날 모두 사라진 줄 알았건만...."

"네? 그 말씀은-."

"언젠가 그렇게 불린 적은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네. 물론 내 본명이 던컨도 아니고."

"...그러시군요."

샤란은 그럼 그렇지, 라는 뉘앙스로 답했다.

어쨌든 진성의 입장에서 한 가지는 확실히 해낸 셈이었다.

"저자는 그럼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을까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이나, 나이와 경험 그리고 지식이 꼭 비례하진 않는 법이겠지."

두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

진성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어... 하하, 네, 맞습니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서 한번 말씀드려봤네요."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번 것도 오래 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역시 이건 아닌가 보군. 옛날 아수라 직업군 키울 때 G.S.D를 그런 식으로 불렀던 기억이 나서 던져본 건데-. 하긴, 그 이후에도 밝혀진 바가 없으니 당연히 가명 같은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랜드 소드마스터 던컨이 G.S.D를 풀어낸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는 점이었으니.

진성은 다음 수를 던져야 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던컨은 그냥 관심을 끌려고 해본 말이지만, 저는 진짜로 G.S.D 님이 그런 이름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뜻까지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 수야말로 진성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G.S.D는 무엇의 약자인가.

뭘 줄여서 표현하고자 했던 걸까.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라면 한 번이라도 의문을 가졌을 법한 질문.

'김선달, 감성돔 등등의 놀림거리는 많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 아마 그냥 네오플 측에서 이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나돌고 그랬지만....'

진성은 달랐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좋아했던 그는 간혹 의문을 가졌고 고민해보았고 또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군."

"네, 가시죠, G.S.D 님."

다시금 등을 돌려 떠나려던 G.S.D와 샤란을 보며, 진성은 자신만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가설을 말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가 자신의 본명 또는 G.S.D의 명칭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와중에도 G.S.D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G.S.D가 무엇인지 해석할 수 있는 자.

즉, 굳이 단서 따위를 주지 않아도 그 점에 대해 알 수 있는 자.

'한때 G.S.D가 솔도로스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던 적도 있지. 당연히 지금은 아닌 걸로 밝혀졌고 실제로 스토리 상에서 아무 연관도 없다. 나 또한 G.S.D가 그레이트 솔도로스Great Sol Doros가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어쨌든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야.'

G.S.D는 솔도로스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관련도 없다.

그럼에도 진성의 머릿속에서만큼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었다.

'내 머릿속에서만큼은 G.S.D와 솔도로스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았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방향성.

"절망의 탑의 후손Grand Son from tower of Despair...이라면 어떨까요."

솔도로스가 남아있는 절망의 탑.

시간의 흐름이 외부와는 다른 신비한 공간.

'인게임에서는 이렇게 자유로이 대화할 수 없기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혹시나!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줄곧 생각해봤었다.'

G.S.D가 그곳 출신 또는 그곳 출신의 후예이지 않을까.

따라서 절망의 탑 출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그 외에는 누구도 추측조차 할 수 없는 G.S.D라는 가명을 고집하는 동시에 그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는 건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두근거리는 기대감과 가능성 또한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즐기는 진성만의 방법이었으니.

진성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G.S.D를 바라볼 수 있는 셈이었다.

샤란은 진성을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건 또 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청년이네. 그 상상력만큼은 높이 살 테니 나중에 마법사 길드나 한번 찾아와요. 천~천히 이야기나 한번-...으, 응?"

진성의 말을 의미 없는 농담으로 치부해버리려던 그녀였으나 그녀는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적어도 진성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G.S.D 님...?"

당황할 수밖에 없다.

진성 자신에게도 X자의 붉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G.S.D의 '눈빛'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절망의 탑이 뭐길래-. G.S.D 님?"

샤란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노년의 귀검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성도 마찬가지였다.

샤란만이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두 명의 남성을 번갈아 보기를 몇 분이나 되었을까.

"나는 절망의 탑이 뭔지 모르고 그곳의 후예도 아니네. 하지만... 자네에게 묻고는 싶군."

G.S.D는 진성의 말을 부정했다.

"원하는 게 무언가."

그러곤 물었다.

일련의 흐름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진성은 그런 상황에 놀라거나 당황치 않고 답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뿐입니다. 샤란 님 그리고 G.S.D 님과 함께 하늘성을 오르는 거요. 기왕이면 좀 상황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게 좋을테니-. 아! 제가 G.S.D 님의 제자? 일단 그런 '설정'으로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처음부터 진성의 목적은 하나였으니까.

"...그러지. 자네, 이름은?"

G.S.D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히려 그 부분에서 진성은 잠시 고민했다.

"진성...이라고 불러주시면 되겠네요."

이 다크나이트는 진성 자신이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캐릭터 그 자체는 아닐 터.

슈우우욱-.

진성은 미세한 소음을 들었으나 거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마지막으로 로그인했던 다크나이트 캐릭터의 닉네임, '마따끄진성'으로 NPC들에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다행스러웠으니까.

"진성, 진성.... 알겠네. 가지."

G.S.D는 진성의 이름을 몇 번 읊조리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샤란은 황급히 그를 쫓으며, 그 와중에도 진성을 흘끗거렸다.

셋은 하늘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017

G.S.D 그리고 샤란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진성을 가로막는 건 없었다.

그것은 제국의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하츠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반을 따라간 것인지 자리에 없었으므로, 진성은 약간의 눈치만 보았을 뿐 아무런 제재 없이 하늘성을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역시 G.S.D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유저들 '쩔'해주던 솜씨 어디 안 갔어.'

NPC와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하늘성에 나오는 몬스터들을 말 그대로 휩쓸어버리는 G.S.D의 능력은 또 어떠한지.

진성 자신도 상대할 수는 있겠으나, 압도적인 화력과 범위를 자랑하는 그의 능력에는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저기, 진성...씨?"

"네?"

G.S.D가 몬스터들을 정리할 동안 조금 뒤에서 대기하던 샤란이 진성을 불렀다.

푸른 피부의 흑요정은 미묘한 표정으로 진성에게 말했다.

"으흠, 뭐, 하늘성 오르는 거야, G.S.D 님이 허락도 하셨고 했는데... 나는 아직- 뭐랄까? 진성 씨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하다못해 로저 레빈의 통행증도 없는 사람을 믿기에는 조금-."

"예, 괜찮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진성은 그녀의 '수작'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어차피 뭘 원하는지는 뻔하다.

절망의 탑이 무엇이며, G.S.D와 절망의 탑과의 관계, 혹은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할 터.

당연히 진성은 말해줄 생각도 없었고 애당초 샤란과 특별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기에,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셈이었으니.

"그, 그러니까! 사람 말을, 아니, 흑요정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하늘성 통행증도 우리 마법사 길드의 이름으로 써준다는 말을 하려던 건데. 진성 씨가 그걸 쓴다면~ 겸사겸사 오며 가며 얻은 소식도 나한테 전해주고. 대마법진의 관리를 위해 우리는 공식적으로 하늘성을 오르내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 알죠?"

마법사 길드는 일종의 비행선인 '마가타'를 타고 하늘성에 오르내릴 수도 있음을 진성은 기억해냈다.

그러나 그 자격만 있을 뿐 정작 마가타를 소유, 관리하는 건 마법사 길드가 아니라 다른 흑요정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기에, 굳이 샤란의 이러한 제안에 휘둘릴 리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샤란과 마법사 길드는 향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크게 엮일 일도 없으므로 진성은 그냥 대충 상황만 정리하려 했고.

"그러시군요. 통행증을 주신다면야 받기는 하겠는데... 그 정도로 제가 아는 정보를 공유하자는 제안은 아무래도 좀-."

"물론, 크흠...응분의 대가는 있을 거예요."

진성은 본의 아니게 샤란이라는 대어를 낚은 꼴이 된 것이다.

응분의 대가?

마법사 길드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아.'

진성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기 시작했다.

"큐브."

"네?"

"큐브요. 무색 큐브 조각부터 해서 흑색, 흰색, 적색, 청색 그리고 황금 큐브 조각까지. 일단 큐브를 좀 받았으면 싶은데요. 아, 그리고 포션도 있죠?"

"네, 네? 포션-."

"HP 포션이랑 MP 포션이랑-. 아니다, 자세한 건 '내려가서' 따로 말씀드릴게요. 몬스터 정리도 끝난 것 같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G.S.D 님이 기다리시네요."

진성은 그 사악한 웃는 얼굴로 샤란에게 말했다.

샤란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도대체 지금 무슨 바람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그렇게 하늘성을 오르길 얼마나 되었을까.

'느낌이 바뀌었어. 이제 아마도....'

어쩐지 공기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 무섭게 진성은 다른 방향에서부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세리아와 여자 격투가 유저, 그리고 반과 아간조.

그 시점에서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니는 없다? 하츠도 같이 올라갔다고 했는데 없는 걸 보면-.'

아이언 울프 기사단은 저들과 함께 올라오던 도중 다른 곳을 지키거나 수색하는 중일까?

어쨌든 진성은 G.S.D와 샤란에게 '원래의 계획'에 대해 말하며 움직여야 했다.

"그럼 저는 뒤를 지키고 있을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거면 괜찮겠나."

"네. 목소리가 들리기만 할 정도면 돼요. 샤란 님도 그럼."

다가온 반과 아간조가 G.S.D와 샤란에게 말을 건네고, 샤란이 세리아에게 '대마법진과 다른 마력이 느껴진다' 등등의 대화를 하는 것을 들을 수는 있을 정도의 거리.

'하지만... 저 여자 격투가, 유저의 모니터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지.'

동시에 진성 자신의 정체를 여자 격투가 유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거리.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기준으로 따지자면 한 던전의 '옆 방'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진성 자신의 위치는 유저의 모니터를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을 터, 일단은 그걸로 충분한 셈이었다.

쿠구구구구....

모두가 자리에 모이기 무섭게 하늘성에 강한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번쩍, 하는 순간 그것을 막아내는 반 발슈테트의 모습까지!

'지그하르트. 아직까지 레니가 나오는 모습도 없고.... 문제없다.'

던전 지역:하늘성의 초반부 최종 보스의 등장을 진성은 조심스레 살폈다.

"용의 군주의 하인이자, 빛의 성주이자, 수문장의 이름으로, 물러나라."

지그하르트의 한마디에 제각각 NPC들이 반응했다.

"용의 군주...! 역시 이곳은 바칼과 관계가 있었군요."

"수문장이라, 우리의 추측이 확실해졌군."

"주변의 파동이 심상치 않네, 조심해야겠어."

샤란과 아간조 그리고 G.S.D의 반응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면.

지그하르트를 향해 걷는 세리아의 모습에 진성은 다시금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성주님. 저는 엘븐가드의 세리아라고 해요."

"어...."

"저희는 단지 대마법진과, 대마법진의 오염을 확인하러 왔을 뿐이에요."

당황한 건 반만이 아니었다.

진성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생각을 더듬어봐야 했으니까.

'세리아가 저랬던...가? 너무 초반 에피소드라 나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

여러 캐릭터를 키웠다지만 그 모든 캐릭터를 성장시키며,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스토리에 집중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진성 또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스토리를 좋아한다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관성으로 키워나간 캐릭터들이 많았으므로, 말 그대로 '이렇게까지 초반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을 수밖에!

'흐름을 보면 알겠지. 아마 세리아가 실제로 저랬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 여기에는....'

레니가 없으니까.

적어도 문제의 발단이 레니라는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또한 진성 자신이 기억하기에도 더 이상 하늘성에서 레니와 엮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기에, 진성은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구별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염은...? 이번 오염자는 누구지? 지그하르트?'

그란 플로리스에서 굴 구위시가 오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굴 구위시는 해당 던전 지역의 최종 보스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번 오염자는 던전 지역 하늘성의 최종 보스, 지그하르트일까.

곧장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까지는 진성이 알고 있는 수순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군."

"뭐, 그럼 다른 걸로 소통해 봐야죠. 우리가 잘하는 걸로."

다만, 그 전투의 양상은 진성이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를 뿐이었다.

정신없이 싸우는 그 모습들을 진성은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여자 격투가 유저는 보아하니 그래플러 같은데, 지금 혼자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지그하르트의 주변 몬스터들에게 수플렉스를 작렬시키고 있는 여자 격투가 유저의 움직임을 보며 진성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분명 저것을 '캐릭터'로 인지하고,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며, 키보드로 조종하고 있는 유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저는 진성 자신이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시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간조, 반, G.S.D 심지어 샤란까지 주변에서 물밀듯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건만.'

자신이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즐길 때에도 거의 본 적 없는 대규모 전투에 진성은 새삼 느꼈다.

여기가 자신의 현실임을.

'그래, 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다시 내 몸, 내가 알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진성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집중이다.

이제 '모험가'인 유저는 지그하르트가 불사에 가까운 존재임을 깨달은 상태가 아닌가.

그들이 지그하르트로부터 일시 퇴각하는 모습을 보며 진성도 더욱 뒤로 물러서야 했다.

여전히 유저의 모니터에는 잡히지 않는 장소에서, 진성은 듣고 있었다.

샤란이 지그하르트에게 공급되는 마력의 흐름을 깨달았다는 것.

그곳으로 모두 함께 가보자는 것.

'아, 부유성까지의 흐름이 있구나. 그럼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이블아이가 오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리고 진성 또한 깨달았다.

아직 가능성이 여럿 남았음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직접 움직여야 함을.

물론 부유성을 가기 위해서, 하늘성 외부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괴한 순서로 혼합되어 있는 허공의 길을 다녀야 한다는 점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 * *

휘이이이────...!!!!

"읏-."

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최대한 상체를 낮췄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하늘성의 몇 개 층을 올라왔을까.

까마득하게 보이는 아래를 보자니, 적어도 150층을 아득하게 넘었을 터.

'근데 여기서 외부로 이렇게 나오면! 바람이!'

세계 최고의 빌딩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진성 자신의 몸이 바람에 날아가 지상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오싹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상황이었다.

'두바이의 그 빌딩에서 영화는 어떻게 찍었지?'

한때 하늘성을 이루고 있던 돌조각들마저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묘한 공간, 부유성.

진성은 공포를 없애기 위해 온갖 상상으로 정신을 마취시키며 이동한 끝에 가까스로 모험가 일행을 볼 수 있었다.

부유성 바닥에 그려진 불길한 마법진과 그 마법진을 양 옆에서 지키는 커다란 눈동자까지.

'저 마법진은 지그하르트에게 마력을 공급하는 용도지. 특별히 오염의 여지는 없어보인다. 내가 확인해야 할 건 이곳의 보스 몬스터, 이블아이야.'

과거 유저들을 괴롭혔던 몬스터는 손쉽게 처치되었다.

그 거대한 눈동자 근처에 카드가 떨어지지 않은 점 또한 확인한바, 진성은 다시금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샤란과 세리아가 마력의 흐름을...지금. 끊었다. 저것도 오염된 게 아니라는 뜻이야, 그러면-.'

진성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후다다닥 달렸다.

그들은 다시 지그하르트를 처치하기 위해 내려올 게 아닌가. 그들과 마주쳐봐야 좋을 건 없다.

'으으, 그나마 이 길을 미리 찾아놔서 망정이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벌벌 떨며 오르는 와중에도 진성은 지금의 일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일까.

다시 하늘성의 내부로 돌아올 반 발슈테트나 아간조 등의 실력자가 진성 자신을 볼 수 없는 각도의 길을 찾아놓지 않는다면 결국 들키게 될 게 뻔했으니까.

그들보다 먼저 하늘성으로 돌아온 진성은 다시금 '옆 방'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폈다.

───────────...!!!!

지그하르트의 요란한 기술이 시전되며 마침내 마지막 전투가 치러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진성의 기억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따라서 진성에게는 숨 막히는 답답함이 느껴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남은 마력 때문에 한두 번 더 살아나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끝났어.'

그렇다면 진성 자신은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가.

오염된 건 무엇이고 진성 자신이 바로잡아야 하는 건 무엇인가.

'...이상한데. 레니와 관련된 무슨 문제가 있을 줄 알았더니 레니는 이미 사라져 없고.'

진성이 생각할 수 있는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마력을 차단했음에도 지그하르트가 죽지 않고 계속 버티는 것.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게 진짜 문제고, 내가 직접 나서서 그걸 해결 해야 한다면.... 말도 안 돼. 그랬다간 정체가 곧장 들키게 될 거다. 그때 그 남귀검사처럼 렉이니, 튕겼느니 같은 상황도 아니고.'

지그하르트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여자 격투가 유저 앞에 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글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솔로 퀘스트, 시나리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도중 '정체 모를 유저'가 난입했다고.

그리고 그렇게 진성의 정체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아무리 <부집게 >라지만.... 페널티는 피할 수 없을 거야.'

페널티 정도면 다행이다.

어쩌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진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018

지그하르트가 쓰러졌다.

"더 이상... 위로는...."

무너졌던 그 육신은 또 한 번 재생되었다.

진성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지그하르트를 직접 상대하는 자들은 그럴 리 없었다.

"뭐야, 다시 일어났잖아?"

"방법이 없는 건가? 일단 물러나-."

반과 아간조는 당황하여 물러섰다.

그러나 세리아와 샤란은 달랐다.

"아니에요, 저기! 수복이 완전하지 않아요!"

"내재된 마력의 힘으로 일어난 것일 겁니다. 마력의 추가적인 공급은 확실히 차단되어 있어요."

확실하게 마력을 다스렸던 두 사람이 알고 있기에, 되살아난 지그하르트라도 결국 다시금 처치하게 될 터.

결국 진성에게는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였다.

'설마 이제 와서 오염이 아니었다~ 같은 재미도 없는 말장난 상황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혹시 진성 자신이 잘못 알았던 게 아닐까, 라는 불신이 피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전부 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면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옅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레니가... 만약 레니가 달빛 주점까지 따라간 게 맞는 흐름이었다면? 그게 이상한 점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레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진성 자신이 저 '여자 격투가' 유저의 시나리오가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일반적인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와 다르다고 확신했던 것은 달빛 주점에 모습을 드러낸 레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레니의 참견 등이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번 시나리오 퀘는 이제 거의 마지막인데. 하늘성 오를 때 잠깐 보이고 끝? 그것도 사실 유저의 입장에서는 대화 스크립트 같은 게 없었을 테니 모습도 보이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눈앞에서 죽어가는 지그하르트도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

오염된 카드가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

'아니, 아냐. 확실해. 레니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건 여기가 아니야. 하늘성에서는 이름이나 잠깐 언급되고 모습이나 보이는 게 전부지.'

진성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선택을 믿으려 했으나 그 또한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그하르트가 처치되고 카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불안하겠으나, 나온다면 또 어찌할 것인가.

'...그게 또 문제란 말이지.'

굴 구위시 때와는 다르다.

유저는 그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렉' 현상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으며, 세리아는 기절한 상태였다.

주변에 진성 자신의 행동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리아와 여자 격투가 유저만이 아니다.

G.S.D와 샤란이 진성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뿐만이 아니다.

'...반 그리고 아간조.'

소위 '4인의 웨펀마스터'라 일컬어지는, 현시점 아라드 대륙에서 손꼽히는 실력자가 두 명이나 있지 않은가.

그들의 눈을 피해 지그하르트의 사체 근처에서 카드를 휙, 주워 빠져나온다?

'미친 짓이지. 절대 불가능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전리품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떠나버리면 모를까.'

그럴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그하르트와 하늘성이 바칼과 연관이 있음을 모두가 인지하게 된 시점에서 그 사체로부터 발견된 물건을 가벼이 여길 리 없으니까.

"이렇게- 바칼 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라질 순...."

진성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마침내, 지그하르트가 처치되었다.

진성은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하늘성의 최종 보스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점을.

'...없다. 아무것도 없어.'

이 시점에서 결국 하나는 확실해진 셈이었다.

지그하르트는 오염되지 않았다.

진성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을 무렵.

반과 아간조 그리고 G.S.D와 샤란은 안도의 기쁨을 나누는 중이었다.

"...진짜 해치웠나?"

"더 이상 수복되지 않는군."

"고생들 많았네 그래."

"수고하셨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진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침착함을 되찾은 것은 이후에 이어진 세리아의 발언 덕분이었다.

"드디어 위쪽으로. 대마법진을 확인하러 갈 수 있겠군요! 모두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대마법진에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군요. 이상이 있다 한들, 제가 감히 마이어 님의 마법진의 손이라도 댈 수 있을지...."

샤란의 우려까지 들으며 진성의 눈빛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지그하르트가 죽는다고 끝은 아니지. 하늘성에서 할 마지막 일이 하나 남기는 했어.'

진성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

모험가 일행이 하늘성 외부의 계단을 이용해 오르기 시작하자 진성 또한 급히 뒤쫓았다.

그리고 최상층부에 다다라 그들은 보았다.

"척 느끼기에도 뭔가 심각한 일이...생긴 것 같은데."

"아주 일부지만, 대마법진에 이상이 생겼어요. 이대로 놔뒀다간 손 쓸 수 없이 번질 거예요."

바닥에 그려진, 오염되어 일렁거리는 거대한 마법진을.

"마법사 길드장님, 뭐라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떤 경로인진 모르지만 이미 대마법진에 오염이 침투한 상황...이제 와선 방법이...."

반은 푸념하듯 말했으나 샤란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진성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오염이 이미 침투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오염'이라는 용어가 던파에서 쓰이는 경우는 엄청 제한적이었어.'

어느 때에 주로 '오염'이라는 단어를 썼는지.

진성은 그 시점에서 사고를 확장시켜야 했다.

'처음 얻은 카드가 굴 구위시라서 생명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말 그대로 저 대마법진 자체가 오염되어 있어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면. 그럼 저 정화를 마치면서 카드가 나오게 될 가능성도 있는 건가?'

반드시 생명체만 문제가 있으리란 법이 없다고 한다면?

그와 동시에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근데 어쨌든 그걸 '부집게'로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세리아가 원래대로 정화하면-.'

어떻게 되는지.

진성은 이제 보게 될 것이다.

세리아가 그들 사이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제가...정화해보겠어요."

"이봐, 그런 작은 크리스탈하곤 차원이 다른 문제 같은데."

"슈시아 님이 알려주셨어요. 모험가님과 여러분 모두가 이곳까지 와주셨구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볼게요."

반이 틱틱거리듯 던지는 말에도 세리아는 진중히 답했다.

"세리아 양, 이 정도 오염이라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위험해요."

"괜찮아요. 숲을, 모두를 지키는 일이니까."

샤란의 만류에도 세리아는 멈추지 않고 나섰다.

진성의 몸이 슬슬 움찔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어쨌든 뭔가가 튀어나온다면 지금이다.'

[대마법진(오염)] 따위의 카드가 존재할 가능성까지 고려하자면 진성 자신이 뛰어들어 그러한 카드를 챙길 수 있는 최후가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성은 달리기 경주를 시작하기 전의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세리아는 그란 플로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빛을 내며 대마법진의 정화에 성공했다.

'카드- 카드는?!'

눈부심 속에서도 진성은 안간힘을 다해 카드를 찾으려 애썼지만, 성과는 없었다.

쓰러진 세리아와 세리아를 부축하는 '모험가', 즉, 유저.

그리고 세리아가 어떻게 대마법진을 정화할 수 있는지 놀란 아간조와 샤란 등의 반응이 보일 뿐.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지그하르트에 이어 대마법진의 정화까지.

자신의 예측과는 너무나 다른 흐름에 진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잠깐. 그럼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 위가 천계라는 말 아닌가?"

그 와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반이었다.

천계가 어떤지 알 수 없는데다 우호적일지 모르므로 돌아가는 여러 사람의 제안에도 불구, 반은 내달리기 시작한 것!

"반!"

최상층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최상층'을 향해 뛰어 올라가기 시작한 반의 뒤를 모두가 뒤쫓았다.

그것은 진성도 마찬가지였다.

지그하르트의 시나리오가 망가진 게 아니었다.

대마법진의 오염도 진성이 예상한 '오염'이 아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제 할 일은 없을 텐데.'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유저'와의 거리를 신경 쓰며, 진성은 생각했다.

도대체 이번 시나리오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진성 자신이 '부집게'로서 활동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진성은 웅성웅성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유저를 비롯한 NPC 일행과는 두어 개 층 정도 아래의 지점이었다.

"바칼의 마법진.... 여기까지 와보지 않았다면, 대마법진에 가려 확인하기 힘들었겠어요."

"어떻게 안 되나요? 아까 지그하르트도 멈췄던 것처럼."

"바칼 본인이 다시 나타나거나 그에 준하는 바칼의 힘이 있지 않다면... 마법진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떼를 쓰듯 말하는 반에게 샤란은 단호히 설명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진성도 이 시기의 퀘스트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이 흐름도 내가 아는 그대로잖아. 바칼의 마법진은 그냥 구경만 하고 다시 내려가는 게 전부.... 아!?'

그 순간, 진성은 무언가 깨달았다.

분명히 던전 지역:하늘성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제 유저의 입장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조종하여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하는 일이 없을 뿐이지 아직 시나리오 퀘스트의 진행은 남아있다는 점!

진성의 깨달음과 동시에 G.S.D는 말했다.

"잠깐. 공기의 파동이.... 뭔가 거대한 것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네."

그리고 아래에 있던 진성은 보는 중이었다.

'...베히모스.'

창공을 유유히 나는 거대한 고래.

베히모스의 모습이었다.

* * *

아라드 대륙의 하늘에 있는 바다, 미들 오션을 헤엄치는 생물체.

그러나 지금 진성이 할 일은 갓 등장한 베히모스의 위용에 감탄하는 게 아니었다.

'하늘성에서 하는 퀘스트는 끝이지만 메인 시나리오, 그 스토리의 흐름은 남았어, 그건-.'

공중을 떠다니는 대륙이라 불러도 좋을 베히모스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작은 점이 진성의 눈에 들어왔다.

결코 좋지 않은 상황임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점은 마치 꼬리처럼 연기를 남기며 하늘성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으니까.

그것은 비행선이었다.

'그래, 저거야! 하늘성 시나리오의 진짜 진짜 진짜 마지막!'

하늘성을 향해 추락하는 비행선 하나.

그리고 그 비행선에 탄 사람으로 비롯된 다음 던전 지역이자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이어지는 것!

시나리오 퀘스트대로라면 비행선은 '모험가'인 유저 일행의 근처로 추락하게 된다.

G.S.D가 그 파동을 재빨리 읽어내어 모두 고개를 숙이라고, 조심하라는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 비행선에 탄 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모험가 일행이 구출, 회복하게끔 도우며, 시나리오가 다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게 기본 흐름이다.

다만, 지금 진성의 눈에는 그러한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근데 방향이... 설마.'

하늘성을 향해 연기를 흩뿌리며 추락하는 비행선의 방향만으로 알 수 있었다.

가파르다.

세리아와 유저, NPC들이 있는 꼭대기 층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아래쪽. 지금 내가 있는 층보다 몇 층쯤 아래?'

동력을 일부 잃고 추락 중이라지만 완전히 자유낙하 하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비행선 안에 탄 자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 속도를 줄여가며 그나마 완만한 활강을 통해 비행선이 떨어지는 게 기존 시나리오의 흐름이지 않은가.

'어어!?'

따라서 진성은 다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떨어지는 비행선의 예상 낙하지점은?

'내가 있는 층보다 몇 개 더 아래쪽이면-. 아!?'

진성은 나선형의 외부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를 보았다.

"아? 저게 뭐지?"

올라오던 사람도 그제야 추락하는 비행선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더 정확히는, 레니가 떨어지는 비행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시점에서 진성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레니가 있는 위치. 떨어지는 비행선의 궤적.

두 개가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그 정보가 입력됨과 동시에 진성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이거였구나!"

자신이 '부집게'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마어마한 질량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를 유지하며 레니를 향해 추락하고 있는 것.

'오염된' 비행선 도르니어의 궤적을 바꾸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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