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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배틀로얄 - 1 > 끝

< 배틀로얄 - 2 >

이건 확실히 대박이다.

성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틀로얄 전장으로 지정된 장소가 그의 쉘터 부근이란다.

다정이 말에 의하면 발을 디딘 곳은 초원이었고 바로 앞에 호수와 산이 보였다고.

전에 ATV를 타고 황제꿀을 따러 간 곳이 분명했다.

"운이 좋구만."

반면 다정에겐 날벼락이었다.

성호의 쉘터를 구경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동굴이니 쉘터니 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구경할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하이힐을 바닥에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좋지. 총을 쓸 수 있으니까."

"총? 이거 진짜 너무하네. 세상 사람들 얘 좀 보세요! 치트키 켜고 게임해요!"

물론 주위엔 아무도 없다.

성호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었다.

"미안한데 내가 나올 때까지 여기 좀 지켜줘. 경쟁자는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거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왜?"

갑자기 불안해지는 건 왜일까.

"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되거든. 배틀로얄은 입구하고 출구가 같지? 어디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뭘 도망을 갔다고."

다정은 차원문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서 너랑 깽판을 벌여야 하는 건데···미궁처럼 말이야."

"미구웅?"

성호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미궁은 규모가 매우 큰 던전을 의미한다.

몬스터도 많고 하여튼 서바이벌 라이프의 최종 컨텐츠 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어렵기도 해서 유저들은 미궁에서 수없이 죽어나갔고, 중기까지의 고인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다정의 멱살을 쥐었다.

"갑자기 생각나는군 그래···너하고 토공이 날뛰는 바람에 맨날 죽었었지···"

"으, 응? 그랬나?"

다정은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체했고 성호는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또라이가 호출할 때마다 그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미궁에 들어갔다.

밖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흉악한 몬스터와 싸우면서 홀로 미궁을 돌파해야 했다.

만난 후에는 그들의 미친 짓에 휘말려서 죽기가 일쑤였다.

토공은 물구나무를 서서 몬스터들을 공격했고 오리궁뎅이는 누군가의 발목을 잡고 몬스터에게 날려버리는 기행을 선보였다.

물론 그 누군가는 김밥조아다.

"자이언트 스윙은 몬스터를 잡고 하란 말이야. 내가 아니라."

"데헷."

"데헷은 무슨."

성호는 멱살을 놓고 아이템을 벗어서 쉘터에 넣었다.

차원 슬롯에 있는 것까지 넣고 나니 다정이 혀를 내둘렀다.

"너 무슨 걸어 다니는 무기창고구나."

"안에서 못 쓰니까 참 아쉬워."

"우와···누가 알면 진짜 아쉬운 줄 알겠어. 진짜 위험한 건 안에 다 있다며?"

"드론으로 적 위치 확인하는 건 어때?"

다정은 할 말을 잃었다.

드론이 있는 건 알았는데 배틀로얄에서 그걸 쓰겠단 말인가.

이건 치트라는 말도 부족한, 아주 비겁한 짓이었다.

물론 성호는 충분히 비겁한 놈이었고 앞으로도 비겁한 짓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 진짜 독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총만 써도 끝나잖아."

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은 이겨놓고 시작해야 좋은 거야."

목숨을 건 게임이니만큼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하여튼 그는 곧 돌아오겠다며 차원문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자기 차원문으로 들어가면 인증이 안 되나?"

다 이겨놓고 결론이 안 나면 허무하니 철저히 하겠다는 거겠지.

다정은 구울 10마리를 차원문 밖에 대기시켜놓고 인근 주택으로 들어갔다.

좀비 두 마리가 쌀을 퍼먹다가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울이 달려들어 좀비들을 박살내고 창밖으로 던졌다.

캬아아―

"흐음···"

다정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봤다.

몇몇 생존자들이 차원문에 접근하려다가 구울에 의해 쫓겨나는 게 보였다.

물론 입구가 하나는 아니므로 다른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국인은 드물겠지···아마···

그녀는 인천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검인이 걔가 아직 있진 않겠지···'

정부 쉘터에서 나온 후로는 정보를 얻지 못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게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검인이라면 잔꾀를 부려 중국인들 사이에서 배틀로얄 이벤트를 치를 것 같았기 때문.

'하여튼 잔꾀 부리는 건 똑같다니까.'

그녀가 봤을 때, 성호와 검인은 동류였다.

전자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 매번 성공하고 후자는 어딘가 어설퍼서 실패를 거듭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뭐 특성이 특성이니만큼 그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검인이 너 오지 마. 죽어."

최후의 한 명이 승리할 때까지 이벤트는 끝나지 않는다.

만약 검인이 성호와 같은 전장에 들어섰다면 그의 죽음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아니겠지.

다정은 그를 지긋지긋해 하긴 했지만 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아직은.

.

.

.

익숙한 초원에 발을 디디니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차단되었다.

근력과 인지가 대폭 낮아진 것이다.

상태창을 호출하니 과연 썰렁했다.

「레벨:- 포인트:-

건강:10 근력:10 민첩:10 재주:10 인지:10

특성:전용 차원문 개방

스킬:-

효과:전장의족쇄」

"아 진짜."

스탯은 10으로 통일되었고 그동안 피똥을 싸면서 모은 스킬이 죄다 날아갔다.

모든 것은 전장의족쇄라는 효과 때문이다.

전장에서만 적용되며 밖으로 나가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실험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 되지.

나는 근처의 나무에 숨어 주위를 살폈다.

"차원문 열어."

이런 젠장.

거의 투명한 색이었던 차원문이 선명한 푸른색으로 나타났다.

남들에게 아주 잘 보이고 추가효과도 날아갔음을 뜻한다.

"차원슬롯이고 차원벽이고 아무것도 못 쓰네."

이런 낭패가 있나.

하지만 다들 같은 상황이므로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내 상황을 알면 그게 공평한 거냐고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니까."

일단은 쉘터로 가자.

나는 차원문을 통해 쉘터로 이동해 드론을 띄웠다.

전장은 열렸지만 이벤트가 시작되기까진 시간이 남아 있다.

대략 2시간 정도···

사람들의 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시작되기 전까지 드론으로 정찰을 끝내고 파밍루트와 생존전략을 결정해야 한다.

"이번에도 여포메타로 가야겠군."

여포메타는 상당히 공격적인 플레이를 의미한다.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나서며 아이템을 강탈하고 죽이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공격이 심하면 잠깐 숨는 정도는 허용되지만 계속 숨어 있으면 쫄보메타로 격하된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 혼자 지어낸 것이다.

"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뭐···"

그 외에도 은신메타, 파밍메타 등이 있지만 솔직히 별 의미는 없다.

킹갓제너럴무기인 총이 있으니까.

"총님이 다 해결해주실 거야."

다들 곤봉과 나이프로 시작해서 롱나이프, 활 등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는데 갑자기 총이 등장한다고 생각해보라.

밸런스 개좆망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근데 그게 내가 되니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나는 토가레프와 실탄을 배낭에 넣었다.

"이게 탄종이 다르단 말이지···"

내가 가진 총은 MP335, 토가레프, K2, 리볼버로 탄종이 전부 달라서 호환이 되질 않았다.

소음기가 달린 MP335는 겨우 10발이다.

"이거하고 석궁을 주력으로 하고 위험할 땐···"

리볼버라도 써야지 어쩌겠나.

K2 소총으로 장거리 사격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티가 난다.

차원 슬롯도 못 쓰는 마당에 들고 다니다간 황금고블린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딨나···"

나는 드론이 송출하는 영상을 보며 마음을 새롭게 잡았다.

아무래도 나를 먼저 공격한 놈을 죽이는 것과 이벤트에서 만난 사람을 죽이는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여기가 배틀로얄 전장인지도 모르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기선 선공뿐이야."

인지 스탯이 대폭 저하되어서 화살을 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니 최선은 먼저 발견하고 먼저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내겐 기반이 잘 갖춰져 있다.

콘크리트 수준으로.

"다 왔군."

드론이 전장 상공에 도착했다.

.

.

.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배틀로얄 이벤트는 두 개다.

첫 번째는 다른 차원에 떨어져서 하는 것.

두 번째는 유저들이 머무는 도시에서 하는 것.

난이도는 두 번째가 월등히 높고, 피할 수도 없다.

대놓고 죽으라는 식이기 때문에 이벤트를 미리 파악하지 않으면 캐릭터가 삭제된다.

다행히 두 번째 배틀로얄은 중반 이후에나 나오기 때문에 지금은 겪을 일이 없다.

나는 신중히 드론을 움직여 밑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뭣도 모르고 들어온 건가, 아니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각각 짝을 지었고 가끔은 혼자 있는 사람도 보였다.

전장이 초원이라서 숨을 곳이 많지 않다.

기껏해야 나무와 바위, 산과 호수 정도.

"호수 주변에서 이벤트가 끝나겠는데."

전장은 처음엔 매우 넓은 면적을 자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진다.

데스매치처럼 몬스터들이 일종의 벽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좀비 벽처럼 촘촘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강력한 몬스터가 있기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은 어렵다.

스펙이 대폭 다운된 상태에서 늑대인간이나 아울베어를 만나면 죽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밖으로 나가길 꺼려했다.

"자식들 움직이는구만."

드론이 보내온 영상에 의하면 내가 있는 숲의 몬스터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전장을 형성하기 위함일 것이다.

"원래 저렇게 많았었나···?"

내가 숲에 자리 잡은 후로 몬스터를 꽤 사냥했지만 지금 몰려나오는 놈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고블린과 코볼트는 물론이고 홉고블린과 오크, 심지어 리자드맨까지 보이는구만.

"저건 늪지대에 사는 놈인데."

북쪽에 늪지대가 있나 본데 독개구리가 거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긴 나중에 가보도록 하고···

나는 사람들의 행색과 위치를 지도에 기입했다.

급한 상황에서는 드론을 볼 수가 없으니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

움직일 때마다 행적을 갱신하고 무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게 좋다.

···여기까진 정석적인 배틀로얄 공략법이다.

"총이 있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마주칠 때마다 빵 쏴버리면 된다.

실탄이 아까우니 가급적 석궁을 쓰는 게 좋겠지만.

설산의 북부지대로 넘어가는데 숲에 누군가가 숨어 있는 게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다른 생존자와 달리 그는 침착했다.

"한국인인 것 같은데···"

드론의 고도를 내리자 아는 사람이었다.

배검인.

그가 나와 같은 전장에 나온 것이다.

"이런 멍청이."

왜 서울로 가지 않았을까.

아니, 잠깐.

일부러 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검인도 분명 배틀로얄이 이 시기라는 걸 알 테니까.

"중국인이 많은 곳에서 이벤트를 할 생각이었나?"

좋은 판단이지만 하필 나와 엮였다는 게 그의 불행한 점이다.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것까진 몰랐던 모양이지?

그는 초원을 지나가던 계곡사슴을 상대로 뭔가를 선보였다.

사슴 한 마리가 빛에 휩싸여 움직이질 못했다.

"저거 예전에 봤는데."

구속 능력이었나? 부산에서 겪은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알기로 저 능력은 장애물이 있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초원이니만큼 장애물이 거의 없어서 검인에겐 다행일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활쏘기 자세를 취했다.

특성은 두 개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나는 그의 위치를 지도에 기입했다.

여기서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대통령 그 아저씨가 거슬려."

다정의 말에 의하면 장원택과 배검인은 협력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동료는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확률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배검인이 하도 욕심이 많아서.

"주승철인가 하는 놈도 그렇고 견제해야 할 놈이 많아."

내가 노리는 건 정부 쉘터의 틈이다.

그 틈을 타 총기와 기타 설비를 확보해야 하는데 검인을 제거하는 건 안 될 말이지.

"넌 트롤이야."

트롤이 있으면 내분이 생기고, 틈이 나타난다.

나는 검인의 목숨을 운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버그를 써서 전장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안 되면 죽이는 수밖에.

약 50%의 확률이다.

"슬슬 가야겠군."

나는 드론을 회수한 후 무기와 물자를 챙기고 딩고와 딩순이를 불렀다.

"딩순이 너는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누가 오면 바로 쫓아내. 알겠지? 물어도 돼."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딩고는 뭐하냐고 묻는 눈이었다.

"얘는 잠시 빌릴게."

컹.

"그대로 돌려준다니까. 하루만 참아."

크르르―

딩순이는 내가 딩고만 데리고 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얘가 벌써부터 신랑을 챙기네.

정작 딩고는 몬스터가 없는 숲을 돌아다닌다는 게 기쁜지 발걸음부터가 가벼웠다.

우리는 순식간에 계곡을 넘어 몬스터들을 돌파했다.

그리고 숲과 초원지대의 경계선에 자리를 잡았다.

딩고가 뒤의 몬스터들을 확인하곤 으르렁거렸다.

"쉿. 지금은 괜찮아."

이제부터 본격적인 배틀로얄의 시작이다.

1시간이 지날 때마다 몬스터가 전장을 좁히는데 그걸 피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제한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보통은 하루에 끝난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조용히 초원을 바라봤다.

전장이 이렇게 형성되어서야 다들 숲에 숨어 있을 것이다.

아이템도 숲에 리젠 될 확률이 높았다.

"초반에는 쓰레기만 나오니까···"

굳이 루팅하러 다닐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아이템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벽 가까이 있으면 잘 모르겠지."

이건 서바이벌 라이프에서도 잘 써먹은 방법이다.

사람들은 벽에 접근하길 꺼려한다.

그래서 벽을 형성한 몬스터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건 잘 모른다.

나는 딩고를 데리고 조심조심 몬스터의 벽에 접근했다.

고블린 등 몬스터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침을 흘리며 서 있었다.

"얘들도 완전 멍청이가 됐네."

스피드런 이벤트에서 사람을 외면하려 애쓰던 몬스터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인지가 떡락하면 이렇게 되나?

어쩌면 마법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다시피 해서 숲을 돌아다녔다.

딩고도 옆에서 같이 살금살금 기는 걸 보면 웃어야 할지.

이윽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둘은 바위에 리젠된 몽둥이와 나이프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이거 왜 나타난 거지? 몬스터도 안 잡았는데?"

"혹시, 이거 자체가 이벤트 아닐까? 빵즈들이 그랬잖아. 게임이 현실에 덧씌워졌다고."

맞긴 한데 니들 입이 좀 험하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석궁을 쏘았다.

볼트가 한 명의 등에 돋아나자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위에 축 늘어졌다.

「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초반 양아치들에게서 루팅한 석궁이지.

롱보우는 좋긴 한데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다.

차원슬롯을 쓸 수 없는 이상 석궁이 최고의 무기였다.

총만 빼고.

나는 석궁 대가리를 땅에 대고 볼트를 장전한 후 놈을 찾았다.

놈은 사라진 상태였다.

"딩고, 찾아."

은색늑대가 자세를 낮추며 숲 안쪽으로 뛰어갔다.

사냥 시작이다.

< 배틀로얄 - 2 > 끝

< 배틀로얄 - 3 >

배틀로얄은 복권추첨이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투자해 복권을 사서 당첨되길 기다린다.

그러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당첨되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일부는 잘 모르고 들어왔다고 항변하겠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아포칼립스에선 모르면 죽는 수밖에.

"나는 살인자야."

어떻게 포장해도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죽일 것이다.

그게 양아치든, 내 생명을 위협하는 살인마건, 친구를 공격하는 생존자건 상관없다.

숫자 37이 시야에 나타났다.

부활권을 얻기 위해 죽여야 하는 숫자다.

다른 사람이 죽일 수도 있고, 몬스터에게 당하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건 변치 않는다.

"둘."

퍽, 하는 소리와 가슴에 볼트가 박힌 사람 하나가 넘어갔다.

그는 나를 발견했고 루팅한 몽둥이로 어떻게 해보려다가 죽었다.

허망할 것이다.

왜 저 놈은 다들 몽둥이를 휘두를 시기에 석궁을 쏘는가.

"슬슬 알아채는 느낌인데···"

누구라도 제한된 상태창과 숫자, 리젠되는 무기를 보면 깨달을 수밖에 없다.

여긴 서로 죽여야 하는 전장이라는 걸.

울고불고 징징대봐야 사냥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하앗!"

그 사냥감이 되기 싫은 여자가 나를 공격해왔다.

돌멩이가 허공으로 떠올라 나를 위협했다.

지금 떠오른 거지만 염동력자 중에선 여자가 많은 것 같다.

그녀는 꾀죄죄한 행색을 한 채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석궁을 쏠 거리를 주지 않고 칼로 찌르겠다는 거겠지.

물론 나는 이미 입을 연 상태였다.

"차원문 열어."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푸른 차원문이 벽 역할을 했다.

"악!"

그녀는 코를 차원문에 와작 부딪치고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붕붕 날아다니던 돌멩이가 툭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차원문을 닫고 석궁을 쐈다.

숫자 35가 34로 변했다.

"···"

루팅할 것도, 확인할 것도 없다.

죽음만을 보고 돌아서는데 딩고가 자세를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뭔가 해서 포복으로 기어가니 사람 둘이 누군가를 둘러싼 게 보였다.

어디서 본 옷차림인데?

아, 인천에서 본 중국인 둘이구나.

남자는 세뇌고 여자가 바람 조종이었던가?

세뇌는 여기서 쓰기 힘들 텐데 아쉽겠군.

남자 쪽이 씹어뱉듯 말했다.

"대화도 안하고 무차별로 공격하는 거냐?"

쟨 또 뭐라는 거야.

포위된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뭐라 지껄이든 서로 죽여야 하는 건 변하지 않거든."

"여기가 뭔데!"

여자가 앙칼지게 외쳤다.

"배틀로얄. 한 명만 살아남는 곳이지."

그의 말에 둘이 움찔했다.

추측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인가?

그나저나 나와 검인 말고 배틀로얄을 아는 사람이 또 있었군.

그는 순식간에 남자에게 접근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블링크.

모든 능력치가 추락했기에 대응도 한없이 느릴 수밖에 없다.

중국인 남자는 윽윽거리다 바닥에 쓰러졌고 여자는 당황해선 바람을 불렀다.

흙과 돌멩이 따위가 마구 솟아오르자 남자는 낭패한 듯 중얼거렸다.

"바람? 뭐 이런···"

나도 처음 보곤 놀랐었지.

남자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왼쪽으로 굴렀다.

중국인 여자가 바람을 끊고 다른 곳에 집중하는 바람에 몸을 완전히 노출시켰다.

여기서 죽일까.

아니, 나로선 전투가 끝난 다음이 좋다.

괜히 나섰다가 양쪽에서 공격을 받으면 곤란해진다.

둘은 능력을 써대며 치열하게 공격을 교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땅이 퍽퍽 솟아올랐고 갑자기 접근한 남자를 피해 여자가 바닥을 굴렀다.

"흑!"

여자가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남자에게도 약점은 있는데 연달아 블링크를 쓰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걸 무시하고 계속 쓰면 저렇게 된다.

"끄흐!"

남자는 머리를 싸매고 데굴데굴 굴렀다.

여자가 그걸 놓치지 않고 두 손을 치켜 올렸다.

후두둑!

바람이 남자의 몸을 하늘로 띄웠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나뭇가지에 팔을 뻗어 대롱대롱 매달렸다.

여자가 능력을 거둔 순간, 남자는 블링크로 그녀의 코앞에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씨발년 존나 질기네."

퍽!

남자의 몽둥이가 여자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리며 허리를 부여잡았다.

남자의 몽둥이가 머리로 향했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토가레프를 꺼내 남자를 쐈다.

퍽!

그는 여자를 때리지 못하고 짚단 무너지듯 풀썩 쓰러졌다.

젠장, 조금 빨리 쐈나.

여자는 남자가 쓰러진 게 이해가 안 되는 듯 했지만 곧 사정을 깨닫곤 몸을 날렸다.

거 판단이 빠른 여자군.

토가레프를 여자에게 겨냥했지만 흙과 수풀이 후두둑 솟았다.

이러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잖아.

나는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딩고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쫓아가."

녀석은 바로 뛰어갔지만 흙먼지가 일어난 주위를 돌아다닐 뿐이었다.

설마 위로 도망쳤나?

내가 하늘을 쳐다봤을 때, 그녀는 이미 나무 위로 사라진 후였다.

"···운도 좋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상관없다.

나는 전투현장을 확인하다가 아이템이 리젠된 것을 발견했다.

재주 스탯을 높이는 가죽장갑이다.

전장에선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아이템의 반입이 불가능해서 이런 걸 쓸 수밖에 없다.

일회용이라 배틀로얄이 끝나면 사라진다.

작은 활도 하나 리젠되었지만 쓸 필요는 없겠지.

"슬슬 원거리 무기가 나오는구만."

우우우―

갑자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본 은색늑대 무린가?

딩고가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선 작업을 분담하는 게 좋겠지.

나는 딩고를 숲 밖으로 보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검인은 숲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사니까 좀 따라줘."

.

.

.

1라운드가 지나고 몬스터의 벽이 전장을 좁혔다.

생존자들은 조금씩 룰을 깨달았다.

몬스터들을 피하고 리젠되는 아이템을 이용해서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걸.

시야에 뜬 숫자가 남은 사람을 나타낸다는 걸 알아챈 사람도 있었다.

눈치가 빠른 이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원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설산과 호수였다.

벽에 갇힌 몬스터들도 있어서 전장은 매우 어지러웠다.

고블린 무리의 독침 세례에 쓰러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를 죽이기도 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검인은 포식자의 입장이었다.

"멈춰."

그를 향해 돌진하던 한 남자가 빛에 휩싸여 덜컥 멈췄다.

이 포박 특성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자그마한 움직임은 멈출 수 없고 중간에 장애물이 있거나 집중이 풀리면 적용되지 않는다.

검인은 그걸 몇 번 써보고서야 깨달았다.

활의 시위를 튕겼지만 화살은 남자의 머리를 맞추지 못하고 지나갔다.

"자라 같은 새끼! 그것도 못 맞추냐!"

"씨발놈이."

중국 욕을 처음 들은 검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자라라니.

자라 하면 용봉탕만 떠오르는데 왜 욕으로 쓰는 걸까?

하여튼 낭패였다.

검인은 포박과 사격술 특성이 상충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나에 집중하면 하나가 풀려버리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검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몬스터 소리에 기겁했다가 흠칫했다.

어느새 포박이 풀려 남자가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체강화.

그만큼 달리기도 빠르다.

검인은 정신을 집중해 간신히 그를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까오리 빵즈! 이거 풀어!"

"풀란다고 푸는 놈은 없어, 짱깨야."

검인은 남자를 시야에 둔 뒤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문득 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처음 배틀로얄 전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국인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배틀로얄이 시작되자마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생존자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뭐하는 놈이야?

설마 중국인들 중 상황을 파악하고 사냥에 나선 놈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한국인이?

만약, 만약에 말이다.

생존자의 숫자를 줄이고 있는 놈의 정체가 다정이나 김밥조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 중첩이 안 되는 두 특성까지 떠올리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씨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래도 저 놈만큼은 죽인다.

검인이 시위에 화살을 걸었을 때, 느닷없이 늑대 무리가 시야 저편에 나타났다.

은색의 갈기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녀석들이었다.

아우우우―

늑대무리의 하울링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런 씨발."

상위 포식자가 나타났으니 하위 포식자는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검인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차피 늑대에게 죽는데 무슨 소용인가?

크왕!

늑대무리가 순식간에 남자를 덮쳤다.

선두의 대장이 남자의 목을 물어뜯었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퍼졌다.

"오, 오지 마!"

검인은 화살을 거두며 달아났다.

아우우―

대장의 지시를 받은 몇몇 늑대가 그를 추적했다.

검인은 하는 수 없이 블링크를 써서 멀어졌다.

숲과 초원의 경계에서 그를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검은 옷에 복면을 쓰고 석궁과 총을 든 상태였다.

그를 본 검인은 경악했다.

총이라고?

어떻게 그걸 갖고 있는 거지?

그때 남자가 총을 그에게 겨냥했다.

길쭉한 소음기가 달린 총이었다.

검인은 포박을 쓸 생각도 못하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본능이 순간적으로 그를 지배한 것이다.

하지만 총구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고 불을 뿜었다.

.

.

.

"뛰어!"

남자의 명령이었다.

검인은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무작정 숲을 뛰었다.

몬스터의 벽보다는 총이 더 무서웠다.

'씨발, 씨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고 남자는 누굴까.

온갖 상념이 머리를 지배했고 그는 돌부리에 걸려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남자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일어나! 뛰어!"

"씨바알!"

"어허. 몬스터들 다 몰려오겠다."

남자는 시종일관 검인을 몰아붙였다.

블링크나 포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쓰면 바로 죽이겠다고 엄포를 놨기 때문.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장애물이 있으면 포박이 작동 안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컹! 컹!

옆에서 개 한 마리가 같이 뛰며 그를 위협했다.

늑대, 사람에 이어 개까지 그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

검인은 울분을 삼키며 뛰었다.

몬스터의 벽이 코앞에 있었다.

"어, 어떻게 해?"

"그냥 뛰라니까!"

탕!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검인의 좌우로 뭔가가 휙휙 날아갔고 정신이 없었다.

한참 뛰다 보니 희한하게도 몬스터의 벽이 사라져 있었다.

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뭐, 뭐지?'

멈춘 그의 뒤통수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뭐해? 안 뛰고."

"어, 어떻게 한 거야? 벽이···"

"지금 그거 신경 쓸 때냐? 한심한 놈이군."

한심한 놈···

다정이 그에게 자주 하던 소리였다.

검인은 울컥했으나 총을 피할 자신은 없어 속으로 분을 삼켰다.

블링크 거리가 짧은 게 원통했다.

"전장을 벗어나려면 멀었어. 계속 뛰어."

남자의 목소리는 검인을 놀라게 했다.

지금 전장에서 벗어나려고 이 지랄을 하는 거란 말인가?

복면을 한 남자는 뒤에서 총을 툭툭 밀며 위협했다.

"여기 있다가 나한테 죽을지 뛸지 선택해라."

"뛰면, 뛰면 살 수 있는 거야?"

"그거야 니가 얼마나 잘 뛰는가에 달렸지, 배검인."

이름까지 알다니 대체 누굴까.

그를 압도하는 능력에 총까지 가진 남자라면 혹시···

검인의 머릿속에 하나의 아이디가 스쳐 지나갔다.

"기, 김밥조아 너야?"

"잡소리 말고 뛰어. 더 지체하면 넌 죽는다."

성호는 거칠게 그를 몰아붙였다.

"윽!"

엉거주춤 뛰는 검인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해야 그가 산다.

몬스터의 벽을 넘고 최후의 몬스터를 죽여야 전장을 벗어난 것으로 판정하기 때문.

시스템 상의 버그이고 확률은 50%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최후의 몬스터를 죽였는데도 검인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구우욱―

어디선가 아울베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검인은 잔뜩 겁을 먹고 멈춰 섰다.

답답해진 성호가 고함을 질렀다.

"계속 뛰라고 했지!"

"아, 아울베어인데···?"

"어떻게든 되니까 빨리 뛰라고!"

탕!

탄두가 아슬아슬하게 검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인은 다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울베어가 나타났다.

구우우욱―

녀석이 날개를 펼치자 검인의 옆에서 뛰던 개가 달려가 컹컹 짖었다.

뒤에서 성호가 크게 소리쳤다.

"저 새끼 구속해!"

"···어?"

"멍청하게 있지 말고 구속하라고! 멈추게 하는 거 있잖아!"

"아, 알았어!"

검인은 집중해서 아울베어를 포박했다.

그러나 힘이 워낙 세어서인지 움찔움찔 풀리려 하고 있었다.

지레 겁을 먹은 검인이 고개를 돌린 순간, 성호는 창을 투척했다.

꾸어엉!

배에 창을 꽂은 아울베어가 고통스럽게 포효했다.

놈의 날갯짓에 주위의 흙먼지가 확 쓸려나가 검인을 덮쳤다.

포박이 완전히 풀렸고 성호는 욕설을 내뱉으며 리볼버를 쏘았다.

탕! 탕!

순식간에 실린더가 회전했고 여섯 발이 아울베어의 전신에 박혔다.

머리를 노렸지만 전부 빗나간 것이다.

놈은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성호에게 달려들었다.

"윽!"

성호는 몸을 날려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검인이 의외로 도망가지 않고 아울베어에게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특성이 발동되었는지 화살이 정확히 아울베어의 눈에 박혔다.

"잘했어! 조금만 더 시선 끌어!"

"아, 알았어!"

배검인은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연신 시위를 튕겼다.

그는 지금 초인적인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울베어가 다가오면 활로 공격하고, 그게 끝나면 포박으로 붙들었다.

덕분에 녀석은 몇 발의 화살을 머리에 꽂곤 괴로워했다.

아무리 생명력이 질겨도 이렇게 타격을 입어서야 버티기가 힘들다.

거기에 옆에서 개까지 짖어대고 있어 정신이 사나웠다.

마침내 성호가 배낭에서 롱소드까지 꺼내자 아울베어는 포기하고 도망가려 했다.

"구속해!"

검인이 포박으로 아울베어를 붙들었고, 성호는 롱소드를 곧추세우고 돌격했다.

마침내 아울베어는 등에 롱소드를 꽂고 절명했다.

놈이 움직임을 멈추자 성호는 곧장 토가레프를 검인에게 들이밀었다.

"구속 쓸 생각하지 마. 손가락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아니까."

"구속이 아니라 포박인데···"

"뭐든지 상관없어. 저쪽으로 걸어."

"···"

검인은 그를 곁눈질하며 숲 안쪽으로 걸어갔다.

정말로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왜 자신을 살려주려 하는 건지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뒤에서 성호가 말했다.

"전장에서 벗어날 확률은 낮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확률이 얼마인데?"

"50퍼센트."

"내, 내가 50퍼센트의 확률로 죽는다고?"

"그게 싫으면 여기 오지 말았어야지."

그의 말이 맞다.

단지 검인은 그가 인천의 배틀로얄 이벤트에 참가했는지 몰랐을 뿐이었다.

성호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대충 알지?"

"···김밥조아···아냐?"

"맞아.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잘 알지. 특성이 세 개인 것도 알고."

"토공하고 다정이가 다 말했구나···"

"내가 알아낸 것도 있어. 하여튼 넌 내 손바닥 위에 있으니까 쓸데없는 짓은 안하는 게 좋을 거야."

"뭘 원해?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니가 지금 죽으면 안 되니까."

검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왜?"

"그건 스스로 생각하고. 오늘 마지막은 괜찮았어."

성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인의 등을 총구로 밀었다.

몇 발짝 떠밀린 그의 몸에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검인은 숲이 아니라 휑한 지방도에 서 있었다.

"···어?"

놀랍게도 그는 배틀로얄 전장에서 벗어났다.

검인은 맥이 탁 풀려서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왜 살려준 거야···"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배틀로얄 - 3 > 끝

< 배틀로얄 - 4 >

검인은 비틀비틀 걸어 촌집에 들어갔다.

왜, 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 김밥조아는 자신을 살려줬을까.

'도대체 이유가 뭐지?'

죽이면 50포인트를 획득하고 배틀로얄의 승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 아니었나?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몬스터의 벽을 뚫은 이유가 뭘까?

"···지금 죽으면 안 된다고 했어···"

앞으로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너 같은 사람이 아직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김밥조아는 자신을 인정해 준 게 아닐까.

"후우···"

검인은 벽에 등을 기대며 몸에 힘을 뺐다.

거칠게 다그치던 그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협력해서 아울베어를 잡았다.

그 강력한 몬스터를 말이다.

―잘했어.

―오늘 마지막은 괜찮았어.

처음 들어본 칭찬의 말이었다.

물론 몇 안 되는 동료들에겐 자주 듣지만 김밥조아 같은 사람에겐 처음이었다.

경매장에서 욕을 들어먹긴 해도 그는 최고 아닌가.

가장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고 성과도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이기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도저히 안 되어서 포기하고 있던 차였다.

자신은 그런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잘했다고, 괜찮았다고 했지···"

검인은 다른 고인물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다정은 대놓고 한심하다 했고 토공 또한 그를 거부했다.

하지만 김밥조아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배틀로얄에서 구해주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권총으로 협박한 건 나를 구해주기 위해서잖아?'

자신을 거칠게 대했지만 버그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혼자만 알던 버그를 써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버그를 노출시키면서까지 나를 구한 건···친구로 여겼던 거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렇게는 못하지.

검인은 혼자 납득하곤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듯 상황을 좋게 해석하니 그가 총을 가진 것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가 강하면 좋은 거 아닌가?

'나도 총을 구할 테니까 상관없어.'

검인은 천천히 일어나 방을 서성였다.

전장에서 튕겨져 나온 덕분에 모든 능력이 정상화되었다.

블링크의 추가효과인 장거리이동을 쓸 수 있으니 쉘터에 복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경매장 죽돌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검인은 경매장에 들어가 배틀로얄에 관련된 코멘트를 훑었다.

오랜만에 열린 이벤트라 그런지 관심도가 엄청났다.

―현업 배틀로얄중이다. 질문받는다.

―지랄하네 미친놈이. 전장에 들어갔으면 지금쯤 존나 빡세게 구를 텐데 경매장 들어올 시간 있냐?

―형은 존나 짱세서 다 쳐바르고 진작 1등 먹었거든.

―어디 구역인데?

―님 스탯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인증가능?

물론 인증은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쫄보라 욕했다.

누군가의 일침이 올라왔다.

―따지고 보면 스탯이 얼마로 떨어지는지 모르는 여기 사람들 전부 쫄보 아님? 들어가보지도 못했단거자너.

―ㅋㅋㅋㅋㅋ

―씨발 딸기공주새끼가 클랜원들 동원해서 입구막았음.

―딸기공주는 뭐하는 짭인데?

―모름? 토공과 함께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양대 공주로 유명했다고 자랑하던데.

―이쁨?

―근돼임.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공주란 놈들은 왜 다 그 모양임?

"흐흐흐."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토공과 근육질 남자인 딸기공주라.

검인은 둘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다가 정색했다.

이게 아니지.

지금부터 김밥조아 찬양을 시작해야 한다.

그가 입력한 코멘트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

―님들 김밥조아는 사실 좋은 사람이었음.

―?

―이새낀 또 뭐지.

―님 도랏?

―난 어쩌면 김밥조아를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음. 그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혼자 라이벌로 생각하고 이기려고 했으니···

―신파극 자제해라.

―이새끼 간첩아님?

김밥조아는 안 좋은 쪽으로 워낙 유명해서 순식간에 악성 코멘트가 우르르 달렸다.

검인은 희열 비슷한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존재감이 없던 그였지만, 김밥조아와 관련된 것을 쓰자 이런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밥조아 찬양을 이어갔다.

사람들의 욕설이 험악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봐야 따까리 아님? 김밥조아 엉덩이나 핥는 좆찐따새끼.

―평생 그 새끼 뒤나 졸졸 따라다녀라.

"씨발놈들이."

검인은 열이 올라 한동안 씩씩거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경매장 놈들의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다.

김밥조아는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였다.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그렇지, 그가 강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만나면 죽여 버릴 거라고 주장하는 놈들도 실제 만나면 오줌이나 안 싸면 다행이다.

왜나면 김밥조아는 총을 갖고 있으니까.

'대체 어떻게 구한 건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와 친구가 되려면 충분히 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감이지만 자신은 그의 곁에 서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총, 총이 필요해.'

장원택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이야 능력자들이 활개를 치는 듯하지만 철사병이 가라앉고 나면 조직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거라고.

그 어떤 능력자라 해도 총 앞에선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검인은 원래 다정을 끌어들여서 정부 쉘터를 지배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도 없이 떠나버렸고 그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부하는 있지만 일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정부 쉘터를 지배하기엔 전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여기선 그 놈과 손을 잡아야 하나···'

주승철.

상당히 수상한 남자라서 검인은 지금껏 그를 멀리했다.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사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그렇고.

자신의 쉘터가 있음에도 정부 쉘터에 머무는 모양새도 좀 그랬다.

'무엇보다 특성을 아는 놈이 없어.'

물론 자신을 포함한 정부 쉘터의 요인들의 특성은 대개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라도 나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장원택의 특성은 텔레파시 비슷한 거라는 소문이라도 있지, 주승철의 특성은 아무도 몰랐다.

검인은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검인씨와는 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제 쉘터로 오시면 융숭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기한을 정하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복귀해서 답하면 되겠지.

검인은 정부 쉘터로 복귀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인천에서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선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푸른 차원문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배틀로얄에 대한 소문이 있었기에 다들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진짜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건 아니었다.

1번에 한해서 출입은 가능하니까.

그러나 진짜 싸우려는 자가 존재했다.

토끼공듀.

그는 팬티와 망토, 토끼 머리띠만 착용한 채로 차원문에 들어갔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그 후 경매장이 대폭발했다.

다른 입구를 통해 전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토공을 발견한 것이다.

황폐화된 마을 가운데의 분수대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더란다.

―님들 봤음? 토공이 분수대 위에서 그랜절하고 있음.

―스탯 떡락했는데 그게 되네···

―안에서 특성 어떻게 됨?

―특성은 유지됨. 추가효과는 안 되고.

―씨발 걔 특성이 부활인데 그걸 쓰게 해주면 배틀로얄 어케 하라는 말임?

―다들 죽는 게 무서워서 배틀로얄 못하는데 특성이 부활이면···

―진짜 좆같네. 뭐가 이리 불공평해?

다들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욕을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토공의 특성은 무한부활로 배틀로얄 이벤트의 카운터였다.

애써 죽이면 뭐하나, 다시 살아나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스탯 개떡락하고 스킬 다 없어지면 해볼만하지 않음? 몇 명이서 다굴치면 토공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무한부활은 아마 안 될 거임. 계속 죽이면 됨.

―토공한테 덤빌 수 있는 사람?

빈말로도 덤빈다는 사람이 없었다.

토공의 전투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

그가 서울에 출현한 뒤 호기심에 화살을 쏜 사람들이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팔다리 중 하나가 부러진 채 그랜절을 해야 했다.

친절하게 자세를 잡아주며 씨익 웃기까지 했다고 하니 악마가 따로 없었다.

이런 소문이 하도 많아서 경매장에서 토공의 위상은 언터쳐블이었다.

덕분에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배틀로얄의 우승자는 토끼공듀 황석현이 되었다.

그는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스크롤을 손에 넣었다.

차원문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무수한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에게 접근하는 멍청한 놈은 한 명도 없었다.

석현은 정부 쉘터로 복귀했고 그나마 친한 윤정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창원에서 어영부영 헤어진 후 서울로 복귀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석현씨 배틀로얄 우승하셨다면서요?"

"네."

"그, 혹시···실례가 안 된다면 보상으로 뭐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석현은 말없이 팬티에서 스크롤을 꺼내 펼쳤다.

그의 손을 주시하고 있던 윤정은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말았다.

"보고 싶다면서요? 보세요."

석현의 재촉에 윤정은 눈을 뜨고 스크롤을 확인했다.

"세상에."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부활 : 1회에 한해 죽은 자를 되살린다. 1,000포인트 소모」

부활이라니···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보상이 다 있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크롤에 손을 뻗었다가 흠칫했다.

특성이 부활인 사람이 부활 스크롤을 가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지?

그녀는 걷기 시작한 석현에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거 어디다 쓰실 건가요? 석현씨한테는 아무 필요 없는 물건이잖아요."

"저한테는 필요 없지만, 친구한테는 필요하거든요."

"친구 누구요?"

석현은 거기까지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로 복도를 짚어 윤정이 따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까지다.

더 접근하면 그의 화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윤정은 꽤 오랜 시간 그와 여행한 적이 있어 그의 분노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녀는 재빨리 장원택의 방으로 향했다.

이범석과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는 윤정이 가져온 정보에 반색했다.

"요즘 사이가 서먹했는데 윤정씨가 한건 해주는군요. 죽은 자를 되살린다고 되어 있었습니까?"

"네."

"다른 사람에게 양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범석의 해석에 장원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보통 스크롤은 찢어야 효과가 있는데 손에 쥐고만 있어도 발동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죽음이란 효과를 무효화하는 거네."

"만약 경매장에 올린다면 엄청난 값이 형성될 겁니다."

하지만 석현이 그걸 경매장에 올리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몇 명의 능력자가 여분의 목숨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두 남자는 지도를 확인하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만한 구역에 전장 하나라···전국적으로 10개 이상의 스크롤이 풀렸겠군."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배틀로얄 이벤트는 하나가 아니라고 하니까요."

"두 번째가 일어나면 박살나는 쉘터가 한 둘이 아닐 게야."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건에 대해서 정보를 모아야겠어. 검인씨가 돌아오면 이야기 좀 하자고 해두게."

"예."

석현도 알겠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선뜻 말을 건네기가 난감했다.

그렇다고 딱히 폭력을 저지르는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을 부탁하면 선선히 들어주곤 했다.

가까이 할 수는 없지만 적은 아닌, 뭐 그런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

장원택은 이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쳐 날뛰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써먹을 구석은 있다는 게 그의 본심이었다.

윤정은 두 남자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

.

.

나는 검인을 보내버리고 배틀로얄에 집중했다.

설산과 호수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이없게도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룰을 눈치 챈 중국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패싸움 끝내주네."

중국에는 계투란 게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란다.

정부가 손을 못 댈 정도로 험악하다는데 그 기상을 이어받았는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이 난무하며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시야에 보이는 숫자도 계속 줄어들었다.

3명.

산기슭에 숨어 있는 사람의 숫자다.

나는 둘의 상태를 대강 파악하고 있다.

끊임없이 지도에 정보를 갱신했기 때문.

위치도 내가 우위였다.

놈들은 나무 뒤에 숨은 반면 나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에 숨었기 때문.

무장수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우위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스탯이 워낙 낮아서···"

화살에 맞으면 한 방에 훅 간다.

나는 망원경으로 양쪽의 나무를 살폈다.

뒤에서 몬스터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놈들이 벽을 좁히면 이제 숨을 곳도 없다.

길어야 5분···그 전에 끝을 내야 한다.

차원문을 앞세워 돌격할까?

내 고민은 아주 간단했지만 다른 둘은 훨씬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뛰쳐나가면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보통 이런 상황에선 급한 놈이 행동하기 마련이다.

"으아아아!"

남자가 우악스런 소리를 지르며 반대쪽 나무에 돌진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총을 쏘기도 전에 화살을 맞아 풀썩 쓰러졌다.

이제 둘만 남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뛰쳐나갔다.

몬스터의 벽이 좁혀지는 찰나 마지막 생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활로 내 가슴을 겨냥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침내 승리했다는 확신이 섰겠지.

"차원문 열어."

하지만 그가 쏜 화살은 차원문에 의해 힘없이 튕겨나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차원문 닫아."

푸른 문이 사라진 순간, 나는 남자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탕!

총성과 함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빛에 휩싸여 전장에서 퇴장 당했다.

강화읍의 거리로 돌아온 것이다.

내 손에는 스크롤이 쥐어져 있었다.

펼쳐보니 과연 1회용 부활 스킬이었다.

"됐어."

아포칼립스에서 여분의 목숨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잘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써야지.

그나저나 다정이는 어딨나···

겁도 없이 근처에 있던 구울이 나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라 이거냐?"

구울 주제에 건방지지만 다정의 부하로 보이니 참기로 하자.

녀석을 따라가니 다정이 건물 2층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묶은 리본은 무슨 의미지?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내게 물었다.

"배틀로얄 어땠어?"

"배검인 만났어."

순간 그녀의 얼굴이 약간이지만 어둡게 변했다.

"그렇구나···검인이 죽었구나···"

"아니. 전장 밖으로 쫓아냈어."

"응? 뭘 어떻게 했다고?"

"내가 전장 밖으로 쫓아냈다고. 50% 확률이었는데 운이 좋았지."

"···그럼 검인이는 아무것도 못 얻고 그냥 쫓겨나기만 한 거야?"

"지금쯤은 내 의도가 뭔지 궁금해 하면서 정부 쉘터로 복귀하지 않을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줘."

"기다려봐. 숨 좀 돌리고."

나는 물을 마신 후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다정은 눈을 감고 듣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걔 칭찬 듣고 완전 착각하겠는데? 아울베어 잡은 건 처음 아냐?"

"내가 다 잡은 거야."

"하여튼 둘이서 잡았잖아. 칭찬까지 해줬으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네. 거기까지 계산한 거야?"

"그냥 애매하게 대했어. 거칠지만 조금만 참아라, 널 살리려면 이 방법뿐이다 뭐 이런 식으로."

"걔 조금 망상끼가 있어서 니 말하고 태도를 엄청 부풀려서 해석하고 있을 걸?"

"그럼 좋고."

검인이 그래준다면 나로선 바라는 바다.

적극적인 행동은 빈틈을 만드니까.

다정은 석현이 배틀로얄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경매장 지금 그거 때문에 난리야. 특성이 부활인 놈이 부활 스크롤을 얻었다고."

이건 좀 이상한데.

배틀로얄 보상이 부활 스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다른 놈이 소문 퍼트렸네. 근데 리본은 뭐야?"

"이거? 이게 뭐냐면···"

다정은 천천히 리본을 풀더니 두 팔을 들어올렸다.

"짜잔! 배틀로얄 우승 보상이야! 바로 나!"

"···거절한다."

나는 차원문을 열고 안에 처박혔다.

다정은 그 앞에 떡하니 버티고선 쾅쾅 두드렸다.

"제세공과금 내세요! 고객님!"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

나는 풍뎅이들와 눈인사를 나눈 다음 딩고를 쓰다듬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길고 추울 것 같았다.

< 배틀로얄 - 4 > 끝

< 얼어붙은 세상 - 1 >

버려진 작은 마을에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폭설로 변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사박사박 밟히던 눈은 어느새 종아리가 빠져드는 눈더미로 바뀌었다.

"눈이다 눈!"

왕, 왕!

딩고와 비슷한 정신상태를 가진 다정은 기어코 녀석과 함께 밖에 뛰쳐나갔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서 눈을 구경한 적이 별로 없나보다.

만약 그녀가 전방에서 군생활을 했다면 절대 안 나갔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휘이이잉―

뼈조차 얼려버릴 듯한 바람이 불었다.

옷을 몇 겹으로 입고 두터운 패딩까지 걸쳤음에도 단추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춥구만···"

냉기저항 목토시를 껴도 뼈가 시린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그리고 좋다고 밖에 뛰쳐나간 다정은.

나는 모닥불을 뒤적이다가 흑탄을 더 넣었다.

실내에서 불을 때는 건 위험하지만 몬스터까지 활동을 멈추는 바람에 안전했다.

이계의 몬스터라고 해도 폭설과 추위 앞에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눈이 얼마나 내리려고 저러는 거야···"

창밖의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도화지 그 자체였다.

제설은 엄두도 못 내고 어딜 가려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눈 속에서 헤엄을 쳐야 할 판이었다.

이동도, 전투도 불가능.

말 그대로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심지어 유류창고의 식물 몬스터도 예외가 아니라서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평화협정이 맺어진 듯했다.

"그리고 우리 다정 씨는 밖에 나가서 저러고 있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렸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정과 딩고가 흠뻑 젖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어땠어?"

"···생각해봤는데 역시 눈은 안 오는 게 좋은 것 같아."

"막 좋다고 뛰쳐나가더니."

파라락!

딩고가 몸을 털자 옆에 있던 다정은 얼음물을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추, 추워···"

"옷 벗고 불 옆에서 몸 좀 녹여."

그녀는 훌러덩 옷을 벗곤 내게 몸을 기댄 채 불을 쬐었다.

타닥타닥.

흑탄에 등유를 적셔서 불을 때니 의외로 검은 연기가 나지 않아 참 좋다.

그나저나 얘도 춥겠네.

나는 차원문을 열어 수건과 이불을 잔뜩 가져왔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딩순이가 나와서 딩고의 털을 핥아주었다.

"신랑 챙기는 거 하나는 기똥차네."

그 말에 다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신부도 챙겨줘야지."

"이불 갖고 왔잖아."

"오오, 내가 신부가 맞긴 한가봐."

"시끄러."

나는 그녀의 젖은 몸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이불을 둘러주었다.

다정은 포근하다며 이불 속에 파묻히곤 얼굴만 내놓았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을까?"

"보통은 패딩이나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겠지. 쉘터는 조금 나을 것 같고."

아주 조금 낫다는 거지 이 추위에 쉘터라고 방한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불을 때기도 어려운 것이, 쉘터는 대개 밀폐된 곳이라 질식하기 쉽다.

"그럼 따뜻하게 지내는 건 우리뿐이네?"

"아마? 근데 차원문 안에 들어가면 더 따듯해. 거긴 봄이거든."

숲은 완연한 봄이 되어 햇볕을 쬐면 잠이 솔솔 올 정도다.

다정은 그 말을 듣곤 부들부들 떨었다.

"서울까지 가면서 렙업시키려고 했는데···"

그녀는 25,30 레벨에 타인을 차원문에 드나들게 하는 추가효과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면 많이 실망할 텐데.

"날씨가 이래서 안 되지. 밥이나 먹자."

나는 쉘터 안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했다.

날이 워낙 추우니 뜨끈한 국물이 있으면 좋겠는데 뭐가 좋을까···

"잔치국수로 하자."

국수의 경우 유통기한이 길어서 아직까지 멀쩡했다.

다시팩은 딱히 유통기한 신경 안 써도 되고, 채소는 텃밭에서 캐고 지단은 화조 알로 만들면 된다.

"김치도 참기름에 양념해서 넣고···"

추운 겨울에 후루룩 들이키기엔 딱이다.

채소를 다듬는데 총알 제조에 여념이 없던 대장 풍뎅이가 풀쩍풀쩍 뛰어 내 옆에 왔다.

"일은 좀 잘 돼가?"

녀석은 머리를 끄덕이는 대신 풍뎅이 그림을 그렸다.

이걸 왜 그리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녀석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쇠창살까지 그렸다.

"아, 풍뎅이들 찾으러 가기로 했었지. 오늘 중으로 출발하자. 밥 먹고 준비 좀 하고."

예스.

녀석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후다닥 뛰어갔다.

폭설 때문에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니 소일거리나 하면서 지내야지.

다정이 조금 징징거리긴 하겠지만 뭐 어쩌겠나.

내가 육수를 끓이고 고명을 준비하는 동안 풍뎅이들은 완성된 총알 3발을 클립에 끼우고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할 거 다 했음!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욕심 같아서는 황제꿀을 마구 퍼주며 일을 시키고 싶지만 풍뎅이들은 로봇이 아니다.

총알 제작에는 상당한 힘과 집중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오래 작업하기가 힘들단다.

축 처져서는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걸 보니 안쓰러웠다.

"푹 자고 오후에 다른 풍뎅이들 찾으러 출발하자."

위치가 상당한 북쪽이라 하루 만에 찾지는 못할 것 같았다.

밤이 되면 현실로 나와서 지내면 되니까.

나는 멧돼지 고기와 식사를 밖으로 가져갔다.

다정이 그릇을 받아들곤 호로록 국물을 마셨다.

"아···몸이 녹아내리는 거 같아···"

"오늘 오후엔 따로 할 일이 있어."

"뭔데?"

새로운 풍뎅이들을 찾으러 간다고 하자 다정이 눈을 반짝였다.

"와 친구들 찾으러 가는 거네. 위험한 숲으로?"

"···위험한 숲? 뭐 북쪽 숲으로 가는 거니까 맞긴 한데···"

설산을 기준으로 북쪽 숲은 쉘터가 있는 곳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왠지 어두침침하고 늪지대도 있으며 몬스터 종류도 다양한 것 같았다.

리자드맨까지 있으니 할 말 다 한 거지.

다정은 손을 팔랑거렸다.

"갔다 와. 나는 딩고나 괴롭히고 있어야지."

딩순이와 함께 사이좋게 뼈를 핥고 있던 딩고가 벌떡 일어났다.

"쟤 너무 괴롭히면 나중에 다 돌려받아. 은색늑대 덩치가 얼마나 커지는지 모르지?"

"커져봐야 딩순이 정도겠지~"

"아니 딩순이는 암컷이고 작은 편이야. 전에 늑대 무리 보니까 수컷은 거의 황소만 하던데."

"헐 대박. 그럼 똥도 많이 싸겠네?"

"전투력도 엄청 높아지겠지."

혼자서 혹멧돼지를 잡을 수 있게 되니까 소형 몬스터는 덤비지도 못한다.

오크 등의 중형 몬스터에겐 밀리겠지만 시선을 끄는 등의 역할은 충분히 해내겠지.

다정은 국수를 먹다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맞어. 이거 토공한테도 줘야지. 우리만 먹긴 좀 그렇잖아."

"걔가 경매장을 잘 안 해서 말이야."

"그래도 시도나 해봐야지. 경매장."

그녀는 코멘트를 남기고 국수 흡입에 몰두했다.

시원하게 먹는 게 참 보기 좋다.

잠시 후 다정이 다시 코멘트를 확인하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야야, 성호야. 토공이 스크롤 사가라는데?"

"무슨 스크롤?"

"그거 있잖아, 부활. 이번에 얻은 거."

"우리한테 주려고 그러나보다."

석현이 얘가 사람을 놀라게 하네.

자기는 부활이 특성이니 필요 없고 우리가 하나씩 갖추게 하려는 모양.

"살까? 다른 놈이 못 사게 1만포 불러버려?"

"사. 어차피 너 포인트 많잖아. 그리고 토공도 포인트 필요해. 죽으면 죽을수록 필요한 포인트가 높아지거든."

그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거래가 이뤄졌는지 부활 스크롤이 빛에 휩싸여 나타났다.

그녀는 부활 스크롤을 들여다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거 아마 팬티에 들어가 있었을 걸?"

"으웩 더러워."

그걸 나한테 던지는 이유는 뭐야.

나는 옷으로 집어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쉘터로 들어가 식사를 준비해 경매품으로 올렸다.

국수가 금방 사라졌고 석현의 코멘트가 올라왔다.

―잘 먹을게.

―그 정도면 양은 괜찮겠어?

거의 3인분을 넣었으니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충분해. 그리고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 감시하는 놈들이 있었거든.

―누구?

―대통령, 따까리, 그리고 종이비행기로 감시하던 놈.

―유현이···는 아닐 테고 그 특성을 가진 사람이 또 있나 보네.

―지금은 감시 못해.

뭐? 설마···

―죽인 건 아니지?

―경고만 했어. 나중에 필요해질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 근데 언제까지 쉘터에 있을 거야?

―필요한 건 총이지? 그걸 얻을 때까지.

―석현아,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 건데 그거 얻으려고 깽판 치고 이러는 건 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때 다정이 끼어들었다.

―아냐! 그냥 니가 세력 구축해서 왕 해버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다 쥐어 패고!

―패다니. 난 그런 야만적인 짓은 안 해.

―그럼 깔끔하게 죽이는 편을 선호하세용?

―팔다리 하나 부러뜨리고 1시간 동안 그랜절 시키는데.

그게 더 고통스럽잖아···

석현은 국수를 먹었는지 맛있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

.

.

"눈이 그치질 않네···"

"그러게."

나와 다정은 이불로 무장한 채로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봤다.

눈이 계속 쌓여 얼음으로 변했다.

그 무게 때문에 위태하게 버티고 있던 건물 몇 채가 와지끈 소리를 냈다.

눈이 더 쌓이면 무너지겠는데.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다정의 구울들 뿐이었다.

20레벨 추가효과로 구울들에게 각종 저항이 주어졌다고.

"정작 주인인 나는 벌벌 떨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대답 대신 목토시와 겨울딸기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나 없는 동안 버티고 있어."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지?"

"풍뎅이들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 밤 되면 여기로 나올 거야."

"숲에서 야영하는 것보단 여기서 나하고 있는 게 나을 걸."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뭐···이런 저런 의미가 있겠지.

나는 딩순이를 데리고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걸치고 풍뎅이 둘을 어깨 위에 올리니 준비 끝이었다.

"설산 북쪽으로 가야 된다고 했으니까···"

여기선 ATV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지.

워낙 험지를 달려서 서스펜션이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시동을 걸고 레버를 누르자 ATV가 힘 있게 봄의 숲을 달렸다.

얼마 후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울창한 나뭇가지와 잎이 햇볕을 완전히 가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풀이나 땅 자체도 왠지 색이 검었다.

"검은 숲이로구만."

나는 ATV를 멈추고 드론을 날렸다.

설산의 배경은 참으로 따스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인데 여기는 정 반대다.

"이런 숲이니까 리자드맨 같은 몬스터가 있는 거지···"

놈들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오크보다 더 위험한 몬스터다.

무리를 짓고, 온갖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기 때문.

삼지창과 그물로 이쪽의 공격을 봉쇄하는 건 리자드맨의 주특기다.

"특히 그물이 아주 위험하지···"

손도 못 쓰고 사로잡히는 수가 있다.

시력은 아주 나쁘고 소리도 못 듣지만 진동을 엄청나게 잘 캐치한다.

공기의 흐름을 감지해서 사냥감의 위치를 알아낼 정도니.

나는 근처의 습지대에서 놈들의 비늘을 발견했다.

역시 리자드맨의 영역이군.

"딩순아, 이거 냄새 맡아."

녀석은 비늘 냄새를 킁킁 맡더니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내 곁에 얌전히 앉았다.

기특한 녀석.

이제 리자드맨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면 녀석이 냄새를 맡고 경계할 것이다.

나는 딩순이의 엉덩이를 쳐주고 풍뎅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바위와 흙더미로 엉망인 곳이었다.

"폭격이라도 맞았나?"

두 풍뎅이가 내 어깨에서 내려와 어딘가로 뽈뽈뽈 기어갔다.

녀석들은 발톱으로 기둥을 가리켰다.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높이였는데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만든 것 같은데···혹시?"

대장 풍뎅이가 흙더미의 구멍을 가리켰다.

몇 개의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풍뎅이인가?

대장 풍뎅이가 준비한 백기를 휘날렸지만 녀석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괜히 경계심만 심어준 것 같은데.

나는 녀석들을 끄집어내는 대신 다정이 파밍한 젤리를 구멍 근처에 놓고 물러났다.

깜빡이는 눈 몇 개가 젤리를 주시했다.

"그거 맛있으니까 먹어봐. 독은 없어."

대장 풍뎅이가 내게서 젤리를 받아들곤 먹는 시늉을 했다.

"야야, 시늉만 하면 안 되지."

내 지적에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곤 젤리를 흡입했다.

눈 몇 개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저건 독이 없어? 하는 의사표시다.

하지만 녀석들은 경계심을 풀지도 않고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쟤들을 움츠러들게 한 게 있을 텐데···"

주위를 돌아다니니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 크진 않네···"

기껏해야 풍뎅이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삽으로 땅을 팠다.

구멍은 꽤 깊숙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삽질을!"

삽으로 땅을 찍으려는데 순간 구멍 속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뎅이?"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후다닥 안으로 숨었다.

왠지 내 풍뎅이와는 생김새가 다른 녀석들인데.

조심조심 근처를 파니 갑자기 큰 집게가 튀어나와 내 손가락을 꽉 물었다.

"아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란 게 컸다.

황급히 손을 빼니 녀석도 집게를 놓고 구멍 속으로 숨었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니들 면상 보고 만다."

나는 태양사과를 씹어 먹고 삽으로 근처의 땅을 모두 파헤쳤다.

옆에서 풍뎅이 두 마리가 깃발을 흔들어 나를 응원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사슴벌레였다.

녀석들은 흙이 우수수 무너지자 커다란 방에 꼼짝 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집게를 까닥거려 나를 위협했다.

"이 녀석들 보게."

또 물리기는 싫어 나무젓가락으로 한 놈을 꺼내니 열심히 버둥거렸다.

그렇게 위험하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풍뎅이들이 구멍에서 나와 발톱으로 사슴벌레를 가리켰다.

저 새끼예요! 하고 외치는 듯했다.

< 얼어붙은 세상 - 1 > 끝

< 얼어붙은 세상 - 2 >

"그러니까 니들이 서로 싸웠다 이거지? 이 나무 수액을 가지고?"

끄덕끄덕.

풍뎅이와 사슴벌레가 모였다.

한 곳에 모인 것은 아니고 따로따로다.

녀석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새로운 풍뎅이들은 내 풍뎅이보다 좀 작았다.

처음 녀석들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할까?

녀석들을 들인 후 덩치가 커진 걸 보면 이 녀석들은 영양이 부족한 것 같다.

사슴벌레는 처음 보니까 평가할 건더기가 없지만,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말에 긍정, 부정을 나타낼 리 없잖아.

"흐음···"

나는 사슴벌레들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이 녀석들 생김새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풍뎅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왠지 건방지다고나 할까.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하여튼 녀석들이 싸우는 이유는 하나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나무수액을 서로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풍뎅이들은 전매특허인 그림을 그려서 자기들이 먼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사슴벌레들은 그림을 그리진 않았지만 어처구니없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 어이없네, 우리가 먼저 왔거든?

뭐 이런 느낌이다.

나는 두 무리에게 물었다.

"먹을 게 하나뿐이야? 다른 곳에 가면 되잖아."

근데 그게 아니란다.

이 숲은 워낙 환경이 척박하고 온갖 몬스터들이 바글거려서 위험하다고.

그나마 안전한 곳이 흙더미와 바위로 엉망이 되어 있는 여기라나.

하긴 나무 몇 그루 외에는 멀쩡한 게 없으니 몬스터가 올 리도 없다.

"우리 같이 갈래?"

나는 새로운 풍뎅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 다섯 마리인 그들은 흠칫 놀라선 물러났다.

그리고 두 풍뎅이의 눈치를 보았다.

녀석들이 연신 그림을 그려서 설명했다.

쉘터가 아주 넓고 풍족하고 어쩌고.

고블린 코볼트는 물론이고 오크를 물리칠 정도로 튼튼하고 어쩌고.

거기까진 풍뎅이들도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는데 꿀단지를 그려놓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황제꿀이 있다고?

작은 풍뎅이들이 대장 풍뎅이에게 달려들어 진짜인지 묻는 듯했다.

머리가 단체로 끄덕끄덕하는군.

다 넘어왔다는 뜻이다.

나는 사슴벌레를 들여다봤다.

"니들은 어쩔래? 뭔가 특기라도 있으면 내 쉘터에 초대해 줄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 녀석들, 확실히 풍뎅이들에 비해선 까칠한 느낌이 난다.

내가 물었음에도 반응은 보이지 않고 풍뎅이들만 노려보는 게 아닌가.

당초 목표는 풍뎅이들이니 녀석들만 데리고 사라지면 그만이다.

나는 풍뎅이들이 결정을 내리길 기다렸다.

하품을 하던 딩순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뭐야, 몬스터냐?"

크르르르···

잠시 후 내게도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건 리자드맨이군.

놈들은 울창한 덤불 뒤에 숨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육체능력은 오크보다 낮지만 도구를 쓸 줄 알아서 늑대인간 이상으로 위험한 몬스터다.

"근데 어쩌나···"

내가 준비 없이 여기 왔을 리 없잖아?

놈들이 도구를 잘 쓴다고 하지만 사실 도구 하면 인간 아닌가.

나는 천천히 일어나 차원슬롯을 열었다.

그물총과 투척기를 집자 사슴벌레들이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뭔지 안다는 뜻인가?

쉬익, 쉿.

녀석들은 은신에 제법 익숙하지만 특유의 숨소리만큼은 숨길 수가 없다.

내 인지가 워낙 높아서 보통이라면 지나칠 소리도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다.

나는 투척기를 들어올렸다.

"일단 한 놈."

강하게 투척하자 아다만틴 창이 빠르게 쏘아져 나가 리자드맨의 가슴을 꿰뚫었다.

쉬쉬쉿!

매복기습에 실패한 리자드맨 세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일어섰다.

전체 풍뎅이들이 깜짝 놀라 후다닥 숨었고 딩순이가 녀석들을 향해 짖었다.

"딩순이 출발."

녀석이 빠르게 리자드맨 쪽으로 돌진했다.

리자드맨들은 은색늑대에게 삼지창을 들이대며 크게 경계했다.

아무래도 딩고와 다르게 실질적인 전투력도 갖고 있으니까.

저 덩치에게 제대로 물리면 답도 없다.

세 놈은 딩순이에게 집중하는 대신 전력을 분산시키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나가 딩순이를 전담 마크했고 나머지 둘이 내게 달려왔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그물을 꺼낸 채.

끝에 달린 막대기를 잡고 집어던져 사냥감을 포획한다.

근데 리자드맨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그물총 사거리가 훨씬 길거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에 담긴 압축질소가 그물을 쏘아냈다.

리자드맨 한 마리가 순식간에 그물에 휘감겨 넘어졌다.

나머지 한 놈은 깜짝 놀라 멈췄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도마뱀."

나는 차원슬롯에서 여러 무기를 끄집어내 던졌다.

리자드맨은 전신에 무기가 박힌 채 절명하고 말았다.

재생능력이 꽤 좋지만 두개골이 박살났는데 멀쩡할 수는 없다.

나는 사체에 다가가 무기를 회수하고 그물에 갇힌 녀석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크르르!

쉬쉿!

놀랍게도 딩순이는 그때까지 한 놈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삼지창이 연신 허공을 갈랐고 딩순이는 재빨리 리자드맨을 물고 튀었다.

제법 강력한 축에 드는 몬스터지만 움직임이 느릿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걸 삼지창과 그물로 보완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안 좋았다.

나는 딩순이가 삼지창을 물고 늘어지는 틈을 타 뛰어들었다.

뻑!

내 주먹에 리자드맨의 대가리가 돌아갔다.

단호한일격과 치명적인일격이 중첩되었기에 보통 타격이 아닐 것이다.

녀석은 주둥이에서 침을 뿜으며 휘청거렸고 나는 사커킥으로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롱소드로 마무리.

리자드맨의 머리가 깔끔하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포인트를 100 획득했습니다」

「스킬 : 수중호흡을 획득했습니다」

"하필 이거냐."

물고기 잡을 땐 좋지만 전투에는 영 도움이 안 되는 스킬이다.

그래도 생활에 도움이 되니까 만족하기로 하자.

뭐 쫓길 때 호수로 들어가 죽은 척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리자드맨의 발목을 자른 후 삼지창과 그물을 회수했다.

그물은 덩굴을 꼬아서 만들었는데 꽤나 촘촘하고 튼튼하게 보였다.

"삼지창 이건 흑단목이지···"

리자드맨의 서식지 근처에 흑단목이 있다는 뜻이다.

흑단목 몽둥이를 쓸 시기는 지났지만 워낙 단단한 나무라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다.

배낭에 다 집어넣고 나니 사슴벌레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풍뎅이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집으로 갈래? 니들이 날 도와주면 나도 그만한 대가를 제공할 거야. 물론 괴롭히거나 때리지도 않고. 어때?"

녀석들은 대장 풍뎅이를 바라보곤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무 수액 따위로 사슴벌레들과 치고 박고 싸우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나는 녀석들을 반찬통에 담아 ATV 적재함에 실었다.

딩순이까지 올라타고 출발하려는 찰나, 사슴벌레들이 몰려왔다.

모두 여섯 마리였다.

"니들은 왜?"

화려한 집게를 가진 한 녀석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녀석의 그림은 보통 풍뎅이와 달리 상당히 정교했다.

나는 시동을 끄고 그림을 감상했다.

"흠···내가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니들이 날 도와줄 수 있다고?"

끄덕끄덕.

녀석들은 거기에 더해 몇 가지를 더 요구했다.

넓고 쾌적한 하우스.

그림을 그릴 염료와 붓.

작물을 재배할 텃밭까지.

"니들 사슴벌레 주제에 요구하는 게 많다?"

내가 빈정대자 녀석들은 잠시 의논하더니 넓고 쾌적한 하우스 그림을 지워버렸다.

하나는 빼준다 이거냐?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정도 해주면 니들은 뭘 해줄 수 있는데?"

대장 사슴벌레가 배낭에 담긴 삼지창을 가리켰다.

뽑아주자 녀석들은 그걸 짧게 잘라 화살대로 가공했다.

오···

흑단목을 가공한다 이거지.

물론 풍뎅이들도 나무를 가공할 수 있긴 하지만 속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무는 전공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텃밭을 요구하는 걸 보면 풍뎅이들보다 잘 할 것 같기도 했다.

반찬통에 들어간 풍뎅이들을 보니 흰 깃발에 X자 표시를 하곤 흔들어댔다.

지금까지 싸운 녀석들과 함께 쉘터에 들어간다니 황당하겠지.

"쉘터는 충분히 넓어서 괜찮아."

나는 대장 사슴벌레를 바라봤다.

"일단 받아주기로 하지. 근데 나는 니들 반만 믿을 거야. 제대로 일 안하거나 쉘터에서 말썽 피우거나 하면 쫓아낼 거라는 의미야. 알겠지?"

녀석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듯 했지만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다른 반찬통을 내밀었지만 녀석들은 그걸 거부하고 ATV를 타고 올라 적재함에 자리를 잡았다.

내 풍뎅이들은 어느새 풍뎅이 무리에 합류해 사슴벌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새 신경전이냐.

"니들 싸우면 숲으로 던져버린다."

협박을 하자 그제야 적재함의 팽팽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나는 쉘터로 ATV를 몰았다.

.

.

.

사슴벌레는 확실히 풍뎅이와 달랐다.

녀석들은 내가 만든 보금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을 새로 만들었다.

동굴에 있던 바짝 마른 질 좋은 나무를 이용해서 말이다.

마치 목수처럼 나무를 가공하고 조립하는 걸 보고 있자니 어이가 가출했다.

"···그거 써도 된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질 좋은 거라서 화살로 만들 예정이었는데 그걸 써버리다니.

대장 사슴벌레가 내게 오더니 종이와 필기구를 요구했다.

뭘 하려나 싶어서 순순히 주니 순식간에 근처의 지도를 그려냈다.

"이야···"

얘들은 확실히 그림을 잘 그리네.

풍뎅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내 솜씨보다 훨씬 정교했다.

녀석은 북쪽 숲 근처에 몇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꽃···열매···버섯···나한테 쓸 만한 거다 이거지?"

끄덕끄덕.

이걸로 나무 쓴 걸 퉁치자는 건가.

나는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풍뎅이들이 스킨십에 거부감이 없는 것과 달리, 이 녀석은 버둥거리며 손에서 내려가려 했다.

"이제 한 식구니까 물자 쓰는 거 뭐 좋아. 근데 허락은 받아야지. 대체가 안 되는 중요한 걸 써버리면 안 되잖아? 그걸 어디서 보충할 거야?"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겨우 그걸 가지고···하는 듯한 자세와 눈빛이었다.

이걸 착각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게 엄연히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녀석을 향해 선언했다.

"그게 싫으면 여기서 같이 살긴 좀 그렇지. 마음이 잘 맞을 필요까진 없지만, 최소한 얼굴 붉히진 말아야 할 거 아니겠어?"

흠···

녀석은 한참 고민하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가는 건 싫으니 일단 수긍한다는 뜻처럼 보였다.

사소한 곳에서 자존심 세우는 녀석들일세.

나는 딩순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정이 딩고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풍뎅이들 발견했어?"

"풍뎅이들은 아니고 사슴벌레들이었어. 성격이 참 특이하더라."

"어떤데? 나한테 보여줘."

"걔네들 내 말도 잘 안 듣던데···"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뭐 하러 받아줘? 콱 엉덩이를 차서 쫓아버리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림을 잘 그리더라. 나무 가공도 잘하고."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계속 있을 거야?"

"글쎄···"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대어 밖을 훑었다.

아까와 달리 눈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다정이 내 팔짱을 꼈다.

"애초에 여기 기름 챙기려고 온 거잖아. 다 챙겼으니 돌아가야지."

가는 수단이 문제였다.

걷다가 다시 폭설이 쏟아지면 나는 몰라도 다정은 진짜 곤란해진다.

목토시에 겨울딸기를 먹어도 뼛속까지 시린 바람과 눈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다정의 말에 의하면 내가 없는 사이 몇 명이 여길 공격했었다고 한다.

"모닥불을 때니까 눈이 녹잖아. 그걸 보고 온 거야. 아주 잃을 게 없다는 듯이 덤벼들던데?"

"죽이진 않았지?"

"몇 대 때려주고 집어던졌지. 근데 또 올 거야."

귀찮아지겠군.

다정을 차원문에 들일 수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인천으로 가자. 썰매를 만들어서 구울이 끌게 하면 돼."

"너 새장가 들려고 그러는 거지."

"무슨 새장가?"

"나 죽이고 여자 들이려는 거 아니냐고."

그녀는 이 날씨에 썰매를 타면 얼어 죽을 거라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안심해도 돼. 썰매에 프레임을 짜서 천을 씌우고 전면은 비닐로 막을 거야. 따뜻해서 잠이 솔솔 올걸?"

"흐음? 그거 만들 수 있어?"

"물론 나는 무리지. 하지만 도와줄 녀석들이 들어왔거든."

나는 동굴에 들어가 사슴벌레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프레임이 있는 2인용 썰매가 필요해. 만들어주면 니들의 요구사항 하나 들어줄게."

녀석들은 다소 묵직한 내 목소리를 캐치하곤 의논에 들어갔다.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첫 요청인 만큼 거절하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녀석들이 거절하면 나도 쉘터를 내어줄 이유가 없다.

잠시 후 대장 사슴벌레가 앞으로 나와 종이에 썰매 그림을 그렸다.

"자리를 좌우로 배치하면 균형 잡기가 힘들어. 앞뒤로 해야지."

이렇게?

"짐칸은 필요 없고 사람 둘만 실으면 돼."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썰매를 설계했다.

마침내 최종설계가 나오자 다른 사슴벌레들이 즉시 제작에 들어갔다.

흠···

확실히 얘네들, 풍뎅이와는 다르다.

썰매 부품 곳곳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새겨졌다.

"풍뎅이들은 장식 없이 만들던데···"

내가 중얼거리자 녀석들은 어찌 그런 놈들과 비교하느냐며 질색했다.

"풍뎅이나 사슴벌레나 내가 보기엔 비슷한데?"

급기야 사슴벌레들이 작업을 멈추고 내게 항의했다.

이 녀석들 나중엔 노조까지 만들지도···

아무튼 한 시가 급했기에 나는 녀석들에게 태양 사과를 내어주며 달랬다.

눈치를 보던 풍뎅이들이 썰매 날을 만들어 주었다.

나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작업에 동참해야지.

정교한 건 못 하지만 조립은 가능하니까.

부품에 손을 대자 사슴벌레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거 참 까탈스런 녀석들일세.

그렇게 두 시간 후 무슨 황제가 쓸 법한 고풍스러운 눈썰매가 만들어졌다.

"타는 게 아니라 끌어야 할 것 같은데···"

하여튼 만들어줬으니 써봐야지.

나는 차원문을 열어 눈썰매를 밀었다.

필로티 주차장 구석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다정이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이걸 만든 거야?"

"나와 사슴벌레, 그리고 풍뎅이까지 합작이야. 이걸 보니까 왠지 끌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아?"

"난 여왕님이니까 앉을 자격이 있어."

네네 그러세요.

나는 두꺼운 비닐을 앞에 씌우고 천을 둘렀다.

그리고 구울들에게 로프를 매다는데 다정이 옆에서 참견을 했다.

"얘네들 썰매 끌면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닐 거야. 최대한 빨리 인천으로 가야 돼."

"가서 버리고 새 구울들 찾자 이거지?"

"이제야 우리가 일심동체가 되는 기분이야."

별로 일심동체가 되고 싶진 않은데···

우리는 앞뒤로 썰매에 앉았다.

다정이 내 품에 바짝 파고들어선 손가락을 튕기자 구울들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되네.

눈썰매는 단단한 얼음바닥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우리는 인천으로 향했다.

< 얼어붙은 세상 - 2 > 끝

< 얼어붙은 세상 - 3 >

한반도의 중북부를 강타한 한파는 생존자들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농담 삼아 폭염보다는 한파가 낫다고 떠들어대던 사람들도 며칠 내내 계속되는 폭설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온도계는 영하 20도를 돌파했고 체감온도는 시베리아를 연상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는 불가능에 가깝다.

영외활동조차 어려워서 피부노출을 최대한 삼가고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정부 쉘터의 한 요원이 고립되었다.

요원의 정체는 인천 북부에 머물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던 오승연이었다.

그녀는 강화도의 유류창고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인형제작 특성으로 조종하는 종이비행기는 거리가 짧았기에 강화도 가까이 가야 했고 그게 곧 재앙이 되었다.

폭설이 내리자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오승연은 국도변의 빈 건물에 숨어 경매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구해주세요···너무 추워요···

―밖에 아무것도 안 보여요···여기 강화대교 동쪽 국도변이에요···편의점 있는 쪽이요···

고립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벌벌 떨며 손발을 비볐다.

당초 가져온 옷은 눈에 젖어서 완전히 얼어버렸고 지금은 얇은 바람막이와 양말 등으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라도 불어오면 폐가 얼어붙을 듯했다.

식량은 그나마 좀 남았지만 손발에 감각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추위에 노출된다면 머지않아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진짜 죽을 것 같았기 때문.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방한대책을 가지지 않은 인간이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장원택 대통령은 그녀를 인천으로 보내며 위기 시 블링크 능력자를 동원해 복귀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폭설 앞에서 그의 발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부 쉘터의 코멘트란은 구조대를 요청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경기 북부가 심했는데, 1m나 되는 엄청난 적설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눈 폭탄을 극복하고 자력으로 쉘터에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 쉘터라고 가만히 있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블링크 능력자를 동원해 외부 요원들을 쉘터로 복귀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폭설에 모든 계획이 망가졌다.

한 블링크 능력자가 햇빛에 반사된 눈을 옥상으로 착각하고 이동했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장원택은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후우···"

절망적이다.

이런 것을 바라고 요원들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구조대를 보내곤 싶었지만 그들마저 고립될 것이 뻔했기에 보낼 수 없었다.

쉘터에 극히 드문 블링크 능력자는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린다며 나가길 꺼려했다.

이범석은 경매장에서 들은 정보를 상황판에 적었다.

"현재 요원 5명이 고립된 상태입니다. 김포, 동두천, 가평 등에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급한 사람은 어딘가?"

"한 명이 구조요청을 한 후 더 이상 코멘트를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에 있던 승연씨입니다. 아마 의식을 잃은 것으로···"

"하필 그녀가···"

장원택은 그녀에게 김밥조아와 다정의 행적을 추적하고 감시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임무가 끝나 인천으로 복귀하면 되는 시점에서 한파와 폭설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코멘트를 보면 강화도에 가까운 김포의 국도변에 있는 모양이었다.

인천지부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녀를 구조할 사람이 없었다.

장원택이 고민에 들어가자 이범석은 착잡하게 상황판을 쳐다봤다.

정부 쉘터에서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문제는 각지에 고립된 생존자들이 구조대를 파견하지 않는 정부를 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장 한 명이 정부가 나를 버렸다며 쉘터의 위치를 경매장에 폭로해 버렸다.

―그 새끼들 총까지 갖고 있음. 철사병 가라앉으면 니들 다 죽은 목숨임.

―ㄹㅇ?

―지하에 총기 수백 정, 총알은 셀 수도 없이 있음. 아마 수류탄이나 중화기도 있을 걸? 지금 나대는 놈들 철사병 가라앉으면 다 처형임ㅋㅋㅋ―이 새끼들 완전히 미쳤네.

―아니 씨발 그럼 철사병이란 게 피할 수 있는 거였음? 그거 왜 말 안했음?

―지하 500미터까지 팔 수 있는 사람?

―하···노답이네.

―더 웃긴 건 뭔지 암? 미리 정보를 입수한 재벌들도 쉘터를 만들어놨다는 거임. 아마 걔들도 총 갖고 있을 걸. 서울 곳곳에 그런 쉘터가 10개가 넘음.

―이 씨발새끼들 지들끼리만 정보 공유하고 앉았네.

―거봐 김밥조아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

―간첩새끼 꺼지라고 좀.

―장원택 이새끼 티비에 나와서 존나 일 잘하는 척 하더니 뒷구녕으로 공작질 해놓은 새끼였구만.

―지금은 그나마 괜찮은데 철사병 가라앉으면 선택을 해야 할 거임. 정부 쉘터에 붙느냐, 아니면 싸우느냐.

―좆같네···

"···"

코멘트창을 확인한 장원택은 신음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사실 비밀이 끝까지 지켜질 것으로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비밀이 밝혀지는 시기를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충분한 세력을 갖추고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밝혀야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게 한파와 폭설로 인해 박살났으니 머리가 어지럽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노크했다.

"장원택씨, 장원택씨!"

둘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범석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들여보내선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장원택을 풀네임으로 부른다는 건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다.

쉘터에 처박혀 있을 사람이 화가 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파견을 가서 고립된 동료 관련된 일일 게 분명했다.

누가 와도 해법을 찾기 어려운 고민거리.

그러나 장원택은 피하지 않았다.

"열어주게."

"그러나···"

"괜찮아. 기자들 대동하고 와서 청와대 앞에서 난리치는 국회의원들이라 생각하면 돼. 사실 그보다는 더 순수하지. 적어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잖나."

"···알겠습니다."

범석이 문을 열자 세 명이 거친 기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있던 장원택을 둘러싼 후 말했다.

"내 친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구조대는 언제 파견할 겁니까."

"구조대를 파견하면, 그들도 죽습니다."

장원택의 말에 세 명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럼 이대로 두고 보자는 말입니까? 외부에 나갔던 요원들, 꼭 복귀시킨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장난합니까? 그들을 버리자고요?"

장원택은 유감입니다, 하고 말한 뒤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김조원씨 아시죠? 블링크 능력자···그 분이 사망했습니다. 남은 블링크 능력자는 한 명인데, 전부 눈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며 안 나가겠다고 그러는군요."

구조대가 사망했다는 말에 셋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셋 중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럼 입구라도 열어주십시오. 우리가 가겠습니다."

"나가면 죽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가 없어요."

그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말을 쏟아냈다.

"죽든 말든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겁니다. 전직 대통령이라 뭐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장원택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거부하기가 힘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셋은 빨리 입구를 열라고 요청하곤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머리에 토끼 귀 장식을 한 또라이를 만나곤 흠칫했다.

"석현씨···? 여긴 무슨 일로···"

장원택과 이범석은 토공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와는 약간의 충돌로 사이가 서먹서먹했다.

완전히 갈라진 건 아니지만 지시를 하기가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토공은 책상에 두 손을 척 올렸다.

"고립된 생존자들 위치 가르쳐 줘. 내가 갈 테니까."

"···석현씨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가면 위험합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가 이거 줬거든. 괜찮아."

그는 겨울딸기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목에는 성호에게서 빌린 냉기저항 옵션이 달린 토시를 매단 상태였다.

지금의 그는 폭설 속에서도 맨몸으로 다닐 정도의 엄청난 저항력을 갖춘 상태였다.

원래도 추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밖을 다닐 정도였으니.

이런 걸 모르는 장원택과 범석은 어리둥절했다.

혹시 김밥조아가 준 걸까?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까. 내가 구해 올 테니까 지도 줘. 입구도 열어주고."

둘은 시선을 마주하곤 결정을 내렸다.

범석이 그에게 지도를 건넸다.

"2번 게이트를 열지요. 다만···"

"구조대는 필요 없으니까 넣어둬. 그리고 창고에 있던 로프 쓸게."

석현은 쿨하게 떠나자 범석이 낮게 투덜거렸다.

"저놈의 반말은 참···"

"분명 혼자 생각한 건 아닐 게야."

장원택은 토공의 뒤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번에 도움을 받으면 적당한 것을 내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유류창고도 그렇고 멀리 있으면서 잘도 탈탈 털어가는군.

"근데 저 친구···길치 아닌가?"

"···"

둘은 말이 없었다.

.

.

.

우리는 강화도를 벗어나 인천으로 향하는 국도를 달렸다.

방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눈썰매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지만 기관과 연료에 문제가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구울들이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던 녀석들도 지속적인 추위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놈은 뛰다가 넘어져선 움직이지 못했다.

강화대교 앞에 도착하니 남은 구울은 겨우 18마리였다.

우리는 구울을 불러 모아 의논했다.

"큰일이네. 얘네들 체력 뺏기는 게 장난이 아니야."

"하긴 눈보라를 헤치고 달렸으니."

구울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대부분 체온 보존에 쓰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울들의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연신 수증기를 내뿜었다.

저러다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면 픽하고 쓰러진다.

나는 다정에게 제의했다.

"제일 팔팔한 몇 놈만 추려. 나머지는 우리 보트 밀게 하고."

"바다에 버리고 가는 거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몸 녹이게 해주는 편이 나아."

다정은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구울들을 바라봤다.

출발하기 전에 결정한 거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던 부하니까.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원문을 열고 보트를 끄집어내 바다에 띄웠다.

보트가 작아서 팔팔한 구울까지 태우고 왕복하려니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바다에 들어가 보트를 밀던 구울들은 하나둘씩 체력을 잃고 떠내려갔다.

그렇게 1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김포의 국도를 달릴 수 있었다.

비닐과 천으로 만든 윈드 실드가 몰아치는 눈보라에 마구 펄럭거렸다.

다정이 손으로 내 다리를 꽉 쥐었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

"김포대! 건물 몇 채는 안 무너졌을 거야!"

"거기 가면 쉴 수 있는 거지?"

"당연하지!"

그녀도 지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익숙하지도 않은 눈썰매에 올라타선 몇 시간을 질주하니 그럴 만도 하지.

하얀 빙판을 보면 나까지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가자!"

로프가 구울들의 몸을 당겼다.

우리는 국도변을 달리는 도중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눈썰매가 빙판의 뭔가를 밟고 뒤집어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정을 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마구 때렸다.

"아이고 허리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눈썰매의 프레임 부분이 박살나 있었다.

썰매를 끌던 구울도 나동그라져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까지군.

나는 엎드려서 멍하니 썰매를 바라보던 다정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저기 주유소에 가서 몸 좀 녹이자."

"아오 진짜! 내가 못 살겠어!"

그녀를 데리고 2층에 올라가니 시체가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이 추위에 바람막이라니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 거지?

시체를 살펴보던 다정이 나를 돌아봤다.

"이 사람 살아 있어!"

"진짜?"

다가가서 보니 안경을 낀 여자였다.

의식이 희미할 뿐 이마와 눈썹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기서 쉬려고 했었는데 잘 됐네."

나는 쌀과 숭어를 꺼내 바닥에 뿌렸다.

구울들이 들어와 허겁지겁 식량을 주워 먹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녀석들은 눈바람을 잠시 피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을 회복한다.

모닥불을 피우니 다정이 그녀를 끌고 근처에 뉘었다.

"이불 좀 줘봐. 이 언니 다 젖었어."

"누가 봐도 니가 언니라고 할 걸."

"어허. 아직 20대야."

눈썰매로 짧은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확인했다.

그녀는 나보다 한살 위인 30세인데 마음만은 20대라고 우겼다.

내가 누나라고 부르자 그녀는 소름이 돋는다며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다.

―토공도 이름 부르면서. 걔 전에도 30대라고 했잖아.

―근데 너도 나보고 오빠 달려라고···읍읍.

이윽고 모닥불이 피어오르자 따스한 온기가 실내를 메웠다.

나는 중요한 점을 다정에게 주지시켰다.

"오래 돌보진 못하는 거 알지? 적당히 정신 차리면 내보낼 거야."

"당연하지. 나도 살기 바쁜데 누구 돌봐줄 여유 없어."

다정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연신 여자의 팔다리를 주물러줬다.

그래도 나보다는 정이 넘치는군.

나는 필요한 것들을 미리 동굴에서 끄집어내 배낭에 넣었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세요···"

다정은 그녀의 얼어붙은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안 죽었으면 일어나요."

"흑!"

그녀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 구조대···구조대에···"

구조대?

그걸 기다린다는 건 어느 정도 큰 세력에 몸을 담았다는 말인데···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종이비행기를 발견했다.

···혹시 우리를 감시하던 따까리 아냐?

그게 아니고서야 여기에 쓰러져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우리를 감시하다가 폭설에 의해 고립된 것이다.

다정에게 귓속말을 하자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죽이자는 말이 나오기 전, 나는 그녀의 귀를 붙잡고 말했다.

"아직은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 좋은 정보를 알고 있을 거야."

"아항···"

이 여자는 종이비행기로 장원택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당연히 아는 것도 많겠지.

나는 다정에게 그녀를 맡기고 경매장을 호출했다.

이만한 인재가 고립될 정도라면 지금쯤 정부 쉘터엔 난리가 났을 것이다.

평소 많은 인원을 곳곳에 파견해서 정보를 얻은 그들이니까.

그런데 정부 쉘터의 홍보 경매품이 없었다.

그걸 왜 내렸지?

다른 경매품을 살피니 정황을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개새끼들 욕 몇개 썼다고 경매품 내려버렸음. 완전 씨발새끼들임.

―원래 걔네들 사람 모아서 뭐 하려고 하지 않았음? 근데 사람들을 버리면 어떻게 함.

―정부 쉘터라고 해도 이런 폭설엔 방법 없죠···

―아무리 그래도 구조대는 보냈어야지.

―내가 구조대로 지정되면 안 갈 것 같은데. 죽을 게 뻔한데 뭐하러 감?

―블링크 능력자는 뭐 씨발 꿔다놓은 보릿자루임?

―너 병신이지? 온통 눈인데 블링크 했다가 바닥 잘못 디디면 바로 추락사야.

―그럼 죽어야지 뭐.

―대통령 할아버지 욕 많이 드시겠네.

흠···일이 이렇게 됐군.

혹시나 해서 석현이 올린 팬티 경매품에 들어가자 그가 냉기저항 아이템이 있냐고 코멘트를 남긴 게 보였다.

이게 언제 남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있어. 겨울딸기도 있는데 줄까? 그것도 효과가 냉기저항이야.

보고 있었는지 응답이 바로 올라왔다.

―역시 성호 너밖에 없어. 그것들 좀 빌려줘. 나중에 갚을게.

―아니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뭐하려고?

―사람들 구해서 영감탱이한테 빚을 지워야지.

아하···

이렇게 도와주면 대통령은 석현에게 뭐라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석현을 신뢰할 것이니 자연히 그의 발언권이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쉘터에 균열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다.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을 방치한 대통령을 과연 신뢰할까?

···이렇게까지 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기회를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폭설을 불러온 것도, 파견 인원들을 방치한 것도 내가 아니니까.

나는 목토시와 겨울딸기를 석현에게 넘겼다.

냉기저항이 사라지니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추웠다.

감시녀는 계속 다정에게 뺨을 맞다가 겨우 깨어났다.

"누, 누구세요?"

우리가 누구냐면···

내가 말하기 전에 다정이 입을 열었다.

"지나가던 부부인데요."

응 아니야.

< 얼어붙은 세상 - 3 > 끝

< 얼어붙은 세상 - 4 >

감시녀는 우리를 감시했다.

다만 얼굴을 확인했는지는 미지수였다.

종이비행기가 그렇게 낮게 날았다면 내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또한 그녀는 현재 제정신이 아니고, 우리도 복장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고글까지 끼고 있으니 정체를 알아차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당장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내려 하다간 자칫 들킬 위험이 있다.

적당히 신분을 위장하고 유도심문을 해야겠군.

나는 다정의 손을 잡아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녀가 오오, 하며 히죽 웃었다.

"우리 오빠 의외로 적극적인 면도 있었네?"

"내가 너보다 한 살 적다는 걸 잊지 마. 하여튼 우리는 정부 요원이야."

"흐음?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야?"

"흉계는 무슨. 그게 편하니까 그러는 거지. 너 현우 알아?"

"어···기억이 날 것 같기도?"

현우는 다정이 김해에 도착하기 전에 떠난 군인이다.

나는 그가 서울에 도착한 뒤에 정보 수집 임무를 맡아 돌아다니는 걸 확인했다.

"정부 쉘터엔 현우나 저 여자처럼 정보를 수집하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아···흠. 그런 거구나. 하긴. 그 할아방탱이 쉘터에 들어앉아선 온갖 정보를 다 알고 있더라고."

현우나 저 여자처럼 정부 쉘터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들이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감시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주위를 돌아봤다.

"···방금 사람이 있었는데···저기요? 누구 없어요?"

"방금 들었지? 아직 제정신 아니야. 정신 차리기 전에 후다닥 해치워야 돼. 다정이 넌 옆에서 추임새만 넣어. 그렇죠, 당연하죠, 뭐 이런 식으로."

"내가 심문하면 5분 안에 팬티 뭐 입었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는데."

그녀가 무슨 방법을 시도할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도록 하자.

나는 다정의 귀를 잡아당기고 속삭였다.

"시끄럽고 우리는 정부 요원이야. 그거만 잊지 마."

"오케이."

작당을 한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정이 살갑게 굴며 다리를 주물러주자 그녀는 당황한 듯했다.

"저, 저기···누구시죠?"

"아, 저희는 정부 쉘터의 정보 수집 요원입니다. 경기 북부 방면에 있었죠."

"방금 부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다정이 혀를 내밀었다.

젠장, 거짓말이 계속 늘면 나중에 안 좋아지는데···

"그건 위장신분입니다. 남녀가 같이 다니려면 그렇게 위장하는 게 필요하죠."

"아···"

다행히 감시녀는 별 의문을 갖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너무 추워서 떨고 있는데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함이?"

"승연이요. 오···승연."

"좋습니다, 승연씨. 우리는 경매장에 올린 승연씨의 구조신호를 보고 왔습니다만, 구조대는 아닙니다."

"···그럼? 구조대는 안 오나요?"

"밖은 지금도 엉망입니다. 구조대가 출발하면, 그들을 구조할 구조대가 또 필요하게 될 겁니다."

"그, 그래요···"

승연은 내심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가 도울 수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다만 확인해야 할 게 좀 있습니다."

"살려는 드릴게."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다정에게 강한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윙크로 화답했다.

이 사람이 진짜.

"어떤···거죠?"

"승연씨가 입수한 정보 말입니다. 쉘터에서 받긴 했는데 혼선이 생겨서 로스트 되었습니다. 대충 이해하시죠? 윗선까지 올라가지 않았단 겁니다."

"그럴 리가···제가 분명히 보고를 했는데요···아니야, 경매장으로 알린 거니까 어쩌면···"

그녀는 참 이용하기 좋게 반신반의했다.

제대로 된 정보수집 요원이라면 이런 틈을 보이진 않겠지만 원래 공학도였을 테니.

나는 경매장을 욕하며 고삐를 죄었다.

"경매장이 워낙 그렇잖습니까. 죄다 익명이니 헛소문이 대단히 많죠. 그래서 대통령께선 우리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하라는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쉘터에서 올린 페이지가 없어졌기도 하고요."

"없어졌다고요?"

"아무래도 허위요청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그래서 쉘터에선 우리를 보내 사태를 파악하려 하고 있죠."

"아···"

승연은 내 거짓말을 믿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처음 듣는 비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천의 폐쇄된 지하철에도 설비를 보관했다 이거지.

"최근 지하철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거든요. 아직은 입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지만 위험해요···그 사람들 약탈자예요···"

"···잘 알았습니다. 그 외에는?"

"그···강화도에서 사람 둘을 감시했었는데요. 유류창고를 싹 털어갔어요. 혼자서."

다정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놈들이군요. 또 다른 건 있습니까?"

승연은 완전히 나를 믿고 자기가 관찰한 걸 줄줄이 털어놓았다.

인천 일대의 섬에서 중국인들이 일제히 상륙했다는 정보가 나왔다.

부천의 타임쉘터의 문이 반쯤 부서졌다는 얘기도 있고.

여러모로 알짜배기 정보를 많이 얻는군.

나는 모두 받아 적은 뒤 그녀를 토닥였다.

"훌륭합니다. 대통령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정보를 전하는 건 우리에게 맡기고 일단은 체력을 회복하세요."

"여기 배낭이요."

다정이 식량과 옷, 신호탄과 기타 생필품을 담은 배낭을 승연에게 건넸다.

모닥불을 쬐어 정신을 차린 그녀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지금 체력이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세요. 나중에 폭설이 잦아들면 구조대가 오긴 할 겁니다."

나는 근처의 가구를 부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승연은 정보를 털린 것도 모르고 거듭 우리에게 고마워했다.

나중에 진상을 알게 되면 화가 나겠지만 목숨 값이라 생각하고 넘기는 게 좋다.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밖에 나서니 다정이 내 팔짱을 끼었다.

"근데 저대로 놔두면 그 할아방탱이가 우리를 경계할 거란 말이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더 경계할 것도 없어. 서로의 선을 침범하지는 않았으니까."

"세상에, 기름부터 설비까지 죄다 탈탈 털 거면서 선을 안 넘었다고?"

다정의 표정은 니가 양심이 있냐? 하고 묻는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 월미도에서 이야기를 나눴잖아? 그 때 속마음을 조금은 확인했어. 내가 대통령의 적이 되지 않는 이상, 안 건드릴 거야."

"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글쎄···"

속마음을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서 결혼식 주례를 서는 걸로 끝인가?

왠지 그 너머에 진짜가 감춰져 있을 것 같았다.

내게 이것저것 내주는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상념을 떨쳐버리듯 계단을 바삐 내려갔고 다정이 뒤를 따랐다.

"어디 가?"

"김포대에 갈 생각이었는데, 바뀌었어. 타임쉘터에 가보자."

"거기 문이 반쯤 뚫렸다고 했지?"

"1년을 못 기다린 놈들이 있었나보지. 우리가 그걸 막아야 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 우리가 그걸 먹어야지."

"이제야 성호답네."

1층의 문에 도착하니 그 심하던 폭설이 약간 주춤한 상태였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우리는 겨울포도를 나눠먹고 김포를 넘어 부천으로 향했다.

너무 추우면 주위의 건물에 들어가 쉬는 식으로 계속 움직였다.

차원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강행군이다.

그나마 안에 들어가 쉴 때는 따뜻한 물을 끓였기에 간신히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중간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몬스터가 보이면 내가 막타를 쳤다.

덕분에 부천공원에 도착할 때쯤에는 24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다.

다정이 내게 다짐을 받았다.

"이제 1레벨 남은 거야. 추가효과 뭐 생기는지 알려줘야 해."

"니가 바라는 게 나오진 않을 거야, 아마."

우리는 근처 건물에 들어가 공원주차장의 입구를 확인했다.

젠장.

눈이 워낙 많이 와서 입구가 봉쇄되어 있었다.

수 미터에 달하는 얼음이 안전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뚫는 건 무리고 봄이 되어야 눈이 녹아 열릴 것 같았다.

우리는 7호선 위의 도로를 따라 부천종합운동장역 입구에 도착했다.

가득 쌓인 눈이 얼음으로 변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입구가 완전히 막히진 않았다.

조심조심 안에 들어가니 의외로 따뜻했다.

"오올···여기서 지내기에 좋겠는데."

"쉿, 목소리 너무 커."

안은 조용했지만 이따금씩 수상한 소리가 났다.

아마 안에 있는 약탈자들이 내는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급히 근처의 화장실에 숨었다.

"에이 씨발 이 추위에 누가 돌아다닌다고 순찰까지 하라는 거야."

"대충 하고 내려가자. 어으 춥다."

그들은 우리를 찾지 않고 멀어져갔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그런데 눈을 부수며 지하1층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보곤 깜짝 놀랐다.

"쟤가 왜 여기 온 거지?"

"토공, 토공."

다정의 목소리에 석현이 고개를 갸웃하다 화장실에서 고개를 내민 우리를 발견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니들 길을 잃었구나?"

길을 잃은 건 너겠지, 이 길치야.

.

.

.

토끼공듀 석현은 미친놈처럼 도심을 가로질렀다.

그의 육체능력은 초인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원소저항에 냉기저항까지 갖추니 눈보라도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는 모두가 움츠러든 세상에서 홀로 토끼 머리띠를 흩날리며 뛰었다.

쿵.

안양의 한 건물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누, 누구···"

"너를 구원할 자."

그렇게 말하는 토공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발이 시리다고 물구나무를 서서 2층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 상태에서 스파이더 워크를 선보이며 남자에게 접근하니 괴물이 따로 없었다.

"으아악!"

기괴한 동작을 본 남자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석현은 왜 놀랐지? 하고 중얼거리며 그를 등에 업고 로프로 묶었다.

출발.

등에 한 사람을 업었음에도 석현의 속도는 거의 줄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에 걸쳐 정부 쉘터와 경기권의 각 도시를 뛰어다녔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음에도 그는 계속 움직였다.

얼마나 빠른지 본 크리퍼와 키퍼도 그를 쫓지 못했다.

요원들이 쉘터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석현씨 대단해요!"

"역시 석현씨밖에 없어!"

하지만 그는 별로 기뻐하지도 않고 다시 쉘터를 나갔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명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성호네가 구출했던 승연이 석현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쉘터에 복귀하자 이틀이 지난 차였다.

석현은 이틀 만에 각 도시에 흩어진 5명의 요원들을 구출한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된다···"

"완전 미쳤네, 미쳤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사람은 길치에겐 불가능하다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기로 했다.

식당에서 조촐한 환영회가 열렸고 장원택이 식판을 가지고 석현의 옆에 앉았다.

"정말 훌륭합니다, 석현씨. 다섯 명 모두를 구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어렵진 않았어요."

그는 대강 대답하곤 밥을 입에 마구 퍼 넣었다.

초인적인 육체능력을 자랑하던 그지만 이틀간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럴 땐 잔뜩 먹고 푹 쉬는 게 제일이다.

장원택은 많이 들라고 한 뒤 젓가락을 들었다.

그의 옆에 검인이 눈치를 보며 앉았고 마지막으로 주승철이 등장했다.

그는 석현의 앞에 식판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말 멋지십니다. 길치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요원들을 구출하시니 말입니다."

장원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갑자기 와서 뭘 나불대는 걸까?

석현은 반찬을 씹다 말고 그를 올려다봤다.

"하고 싶은 말을 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석현씨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 찾을 정도로 길치인데,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도시 여럿을 돌아다녔다···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해."

석현이 거듭 재촉하자 장원택이 그를 말리려 했다.

"그런 말은 여기에서 하지 말고···"

"아뇨, 여기서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요."

승철은 두 팔을 펼치며 과장된 포즈를 취했다.

"석현씨가 여기 괜히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죠. 저는 오랫동안 그걸 궁금하게 여겨왔는데, 오늘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미리 심어둔 부하였다.

승철은 그에게 대답하듯 말했다.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그걸 밝히기 전에 승연씨에게서 들은 정보를 풀어볼까요."

"아직 접촉할 단계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구출된 요원들이 쉘터에 들어왔을 때 장원택이 당부한 사항이었다.

워낙 지쳐 있으니 푹 쉬고 난 다음 면담을 하기로 한 것이다.

주승철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대통령님도 제 말을 들으시면 놀라실 겁니다. 그녀는 정부 요원이라는 두 명에게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모두 밝혔습니다. 그게 과연 누구일까요?"

"자네 설마···"

"부부로 위장하고 다니는 요원이라···그런 건 존재하지 않죠. 마침 우리 석현씨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듯하군요. 이게 우연의 일치입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주승철이 심어 놓은 부하들이 사태를 악화시키려 애썼다.

"뭐야, 그럼 석현씨 뒤에 누가 있다는 소리잖아?"

"뻔하네. 그 김밥조아하고 오리궁뎅이네."

"그 새끼가 우리 쉘터를 아주 좆으로 보고 있다는 거지?"

장원택은 이마를 감쌌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주승철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걸 끄집어낸 걸까?

그때 석현이 일어났고 주승철이 그를 향해 물었다.

"해명이 필요합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았습니까? 김밥조아와 오리궁뎅이 맞아요?"

그는 대답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퍽!

승철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얻어맞아 나동그라졌다.

와장창!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승철의 부하들이 달려와 석현을 막으려 애썼으나 애초에 불가능했다.

"컥!"

"으헉!"

그들은 엄청난 힘에 날아가 테이블을 뒤엎었다.

그리고 석현은 쓰러진 승철에게 다가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안 죽었네?"

그는 입가의 피를 소매로 닦으며 일어섰다.

"···설마 죽일 작정이었습니까? 정신 나갔군. 대통령님! 쉘터에서 폭력은 뭐와 같습니까?"

장원택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으며 신음했다.

정부 쉘터에서 폭력은 철저히 금기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능력을 자랑하는 각성자들이 싸우게 되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쉘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폭력은 살인과 같다고 말이다.

즉 석현은 지금 살인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가 쉘터에 있는 것은 누구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승철이 동의를 구하려 할 때, 석현은 다시 주먹을 날렸다.

무차별 구타였다.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하고 쩔쩔매었다.

석현이 마지막으로 날린 주먹이 턱 멈췄다.

"가소로운 힘 가지고 설치는데, 적당히 해라."

승철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한편 멍하니 싸움을 구경하던 검인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하하···"

사람을 구해 기분이 좋을 석현과 이야기를 나눠 친밀감을 쌓으려던 계획이 날아갔다.

그리고 주승철과 식사를 하며 쉘터 방문 일정을 잡으려던 계획이 증발했다.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 얼어붙은 세상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