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우살이 - 3 >
사람이 모이면 좀비 레이드가 발생한다.
그러나 강화읍 중심부에서는 좀비 레이드가 발생하지 않았다.
최소 100명은 넘는 중국인들이 모여 있음에도 그렇다.
이는 좀비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데에서 기인한다.
강화읍의 인구는 2만 명 내외였고 대부분이 좀비로 변했다.
이들 좀비들은 식물형 몬스터에게 잡아먹혀 태반이 사라졌다.
최적의 조건을 갖췄음에도 정작 좀비가 없으니 레이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중국인들은 생소한 환경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화읍을 휩쓸며 식료품과 생필품을 파밍하고, 유류가 저장된 창고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식물형 몬스터들이 득실거려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들 주위에 모여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식량은 그럭저럭 구했으나 이 겨울을 따듯하게 나기 위해선 유류가 필요했다.
···여기까지가 나와 다정이 파악한 강화읍의 중국인들에 대한 정보였다.
"근데 육지로 안 가고 왜 여기로 왔을까? 섬이잖아 여기."
다정은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나 보지. 쟤네들 보트 모터도 없다고. 노를 저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들어보니까 그렇네."
어쩌면 오는 중 대부분 죽고 남은 인원이 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정은 내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키가 큰 편이지만 내 어깨가 워낙 위에 있어서 까치발을 해야 했다.
"힘들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겨울 좀 따뜻하게 지내려고 기름 찾는데···그걸 다 뺏어야겠어?"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포칼립스에서 다음은 없어. 오늘 최대한 확보해둬야 내일 살아남는 거야. 일기예보도 모르는데 내일 함박눈이 와서 못 움직이면 방법 있어? 저거 몽땅 다 챙길 테니까 그리 알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역시 너의 쓰레기력은 제일이야. 마음에 들어."
"내가 다 챙기면 저 사람들이 죽을 일도 없어져."
"응? 그건 또 무슨 합리화야."
"합리화가 아니니까 잘 들어봐."
나는 그녀에게 등유로 불을 땔 때의 부작용을 설명했다.
약한 빛도 알아채는 몬스터들이 그걸 감지 못할 리가 없으며, 반드시 전투가 벌어지니 위험하다는 것.
"우리는 그런 위험이 없지. 등유를 아주 잘 쓸 수 있다 그 말이야."
다정의 구울이 주변을 정리할 테니 위험도가 매우 낮아진다.
"그래서 니가 독식하면 저 사람들이 불을 땔 수가 없어져서 안전해진다 그 말이야?"
"빨리 여기서 벗어나게 하는 촉진제도 돼. 강화도 여기 별거 없잖아. 육지로 가야 되는데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등유도 없으니 여길 떠야겠다고 생각할 거야."
다정은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진짜 합리화 쩐다···"
"칭찬 고마워."
그런 어설픈 이유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기름을 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포칼립스에선 힘이 모든 것에 앞선다.
나는 한정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정은 손가락을 튕기더니 내게 물었다.
"혹시 쉘터에 롱코트도 있어? 종아리까지 오는 거."
"있긴 해. 근데 어디 쓰려고?"
"딩고 딩순이로는 시선을 돌리기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도와준다는데 말이 많아. 빨리 내놔. 하이힐도."
예이예이.
내가 코트와 하이힐을 가져다주자 그녀는 옷깃을 덮고 있다가 단숨에 열어 보였다.
꼭 바바리맨 같다?
여자니까 바바리우먼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그건 안하겠지.
하하하.
.
.
.
중국인들은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모든 이정표는 무너졌고 한글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생존본능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맹렬하게 불탔다.
마침 이곳엔 쌀을 보관해둔 창고도 있었고 약간이나마 파밍할 장소도 존재했다.
그들의 고향처럼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한국인들이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누군가 그렇게 주장했으나 이곳에 한국인은 없었다.
공동의 적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협력할 이유가 없다.
또한 최근 발견된 유류창고가 중국인들의 탐욕에 불을 질렀다.
―저것만 확보하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
강화도에 상륙한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곤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유류창고에서 기름을 꺼내기란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식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용감한 생존자가 접근했으나 식물에 먹혔다.
그는 덩굴에 잡혀 대롱에 처넣어진 다음 몇 시간 동안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대롱의 두께가 얇아서 격렬한 몸부림이 드러났고 다들 그 끔직한 광경을 외면했다.
그가 죽고 난 다음 식물형 몬스터, 식귀에 접근하려는 사람은 사라졌다.
하지만 기름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근처 건물에 숨어 기회를 엿보며 다른 생존자들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거리를 배회하던 고블린 무리가 사라졌을 무렵.
늑대의 울음소리가 길게 들렸다.
아우우우―
아우우―
하나도 아니고 다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중국인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여기에 늑대가 있을 리 없으니 늑대인간의 울음소리가 틀림없었다.
거대한 덩치에 놀랍도록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괴물.
어줍지 않은 능력으로 상처를 입혀도 놈은 금방 회복하고 생존자들을 도륙했다.
울음소리는 아주 가까웠고, 공포에 사로잡힌 생존자들은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코볼트나 본 크리퍼 등도 무서웠지만 늑대인간은 더 무서웠다.
그러나 일부 생존자들은 자리를 지켰다.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버티면 기회가 온다고 믿어서였다.
―경쟁자가 없으면 기름을 얻을 수 있어···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고···
―조금만 더 참자···기회를 보는 거야···
그들은 잠을 쫓으며 새벽을 기다렸다.
코볼트까지 뜸해지면 대부분의 몬스터가 사라진다.
식물형 몬스터도 움직임에 제한이 있어 유류창고의 구석까진 공격하지 못한다.
남은 생존자들은 바로 그걸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헛것이 보였다.
어두운 밤 유난히 몸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롱코트를 걸치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었다.
생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자들은 충혈 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걸어가는 자태만으로도 그녀가 미인인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친 건가?
몬스터는 왜 사라진 거지?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생존자들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여자를 취하고 싶은 음충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빨리 내려가서 데리고 가면 괜찮을 거야···괜찮아···
그렇게 생각한 일부 생존자들이 움직였다.
급한 발걸음이 이어졌고 다정은 어두운 골목에 들어가다 코트를 열어젖혔다.
그야말로 여고 앞의 바바리맨과 같은 모습이다.
남자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들끼리 밀치고, 욕설을 내뱉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을 기다린 건 롱코트의 여인이 아니라 기괴한 면상을 가진 구울이었다.
"흐아아악!"
방심한 남자들은 구울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았다.
중간에 다정이 끼어들어 쓰러진 남자들을 자근자근 밟았다.
"내가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도! 왜! 넌!"
남자들은 이 미친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울부짖으며 선처를 호소할 뿐이었다.
"어? 그냥 모르는 척 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그러는 와중에도 다정의 하이힐은 정확히 남자들의 사타구니를 짓밟고 있었다.
"끄억!"
"아 스트레스! 고자도 아니고 적당히 좀 하라고오!"
"살려줘!"
"시끄러! 프리 티벳! 프리 홍콩!"
한편 유류창고 옆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성호는 비명소리에 흠칫했다.
"저렇게까지 밟을 필요가 있나?"
적당히 두들기고 기절시키면 될 것을.
뭐 다정은 변태니까 오랜만에 가학심이 끓어올랐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유류창고에 집중하는 게 좋다.
그늘포도를 먹자 창고 앞을 배회하는 코볼트 여럿과 식물형 몬스터가 보였다.
저들이 침입을 막는 주범이다.
"코볼트는 문제가 아닌데 식물 숫자가 장난이 아니구만."
잘 먹었는지 덩치가 상당히 커서 위협적이었다.
덩굴이 꾸물댈 때마다 코볼트가 한 마리씩 사라졌고 놈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도망가지 못하는 걸 보면 열매가 매력적이긴 한 모양이다.
"저거 맛있긴 하지···"
성호는 장비를 점검했다.
다정과 딩고, 딩순이의 활약으로 주변의 중국인들이 몽땅 사라졌지만 일시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테니 재빨리 챙기고 튀는 게 좋다.
"키퍼가 없어서 다행이야."
그는 풍뎅이들이 만들어 준 대롱을 꺼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비독으로 코볼트들을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훅 훅 불자 코볼트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성호는 재빨리 코볼트를 집어 식물형 몬스터에게 던졌다.
거대한 이파리와 대롱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코볼트들을 삼켰다.
성호는 그 틈을 타 롱나이프를 들고 재빨리 안으로 침투했다.
"차원문 열어."
마음 같아서는 불을 질러버리고 싶지만 그래서야 같이 폭사할 뿐이다.
그는 쉘터에 있던 쌀을 집어던짐과 동시에 기름통을 안으로 넣었다.
유류창고 앞을 배회하던 코볼트들이 쌀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끼기긱!
끼긱!
고블린이라면 겁을 먹고 멀찍이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코볼트는 고블린보다 더 멍청했고 무모했다.
당장 먹을 게 눈앞에 있으니 목숨을 도외시한 채 먹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어느새 본 크리퍼가 나타나 코볼트들에게 달려들었다.
끼아악!
유류창고 앞은 개판 5분전이 되었고 성호는 유유히 기름통을 날랐다.
"생각보다 더 멋지군."
이런 상황까진 의도하지 않았지만 뭐 상관없지.
그는 휘발유를 먼저 넣고 등유, 경유를 나중에 챙겼다.
일부 식물 몬스터가 뒤늦게 그를 포착하고 덩굴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온갖 스킬을 발동시킨 상태였다.
수십 줄기의 덩굴이 롱나이프에 잘려져 바닥에 떨어졌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뭔가 찝찝함을 느낀 일부 중국인들이 되돌아왔다.
그들이 본 것은 유류창고에 들어가 기름통을 챙기고 있는 성호의 모습이었다.
"저 새끼 뭐야?"
"도둑놈이다! 도둑놈이 기름 훔친다!"
밤이 깊었기에 다들 성호가 누구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유류창고에 들어간 이상 모두의 적이라는 것.
창고에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성호는 잠시 대응하다가 슬금슬금 도망갔다.
어차피 남은 것들은 경유라서 크게 아깝지는 않은 모양.
휘이이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구울들이 다정을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의 동시에 딩고와 딩순이도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뛰었다.
일행은 몬스터들을 무시하고 강화읍을 벗어났다.
위험을 무릅쓰고 유류창고 가까이 간 누군가가 울분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다 털렸어! 그 새끼들이 다 가져갔다고!"
중국인들이 분노에 물들었다.
.
.
.
"···거길 다 털었단 말인가?"
"예. 남은 기름통은 파란색 경유랍니다. 휘발유와 등유는 다 턴 거죠."
"허허···중국인들이 거기 진치고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팔다리 한군데쯤 부러뜨려서 위협하면 되겠지요."
"하룻밤 사이에 말인가?"
"그건···"
장원택과 이범석이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인천에 자리 잡은 한 능력자의 도움을 받았다.
인형조종 특성을 가진 그녀는 놀랍게도 종이비행기를 드론처럼 조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쉘터에 들어앉았으면서도 강화도의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실시간은 아니고 하루 이틀 지난 뒤의 상황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강화도의 주유소가 하룻밤 만에 깨끗이 털렸다는 기가 막힌 보고를 받았다.
그 주유소가 어떤 곳이냐 하면, 중국인 100여 명에 식물 몬스터가 가득한 곳이었다.
어지간한 능력자들을 동원해도 그걸 돌파하고 기름을 빼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김밥조아와 다정은 무슨 다람쥐 곳간 털듯 기름을 홀라당 빼갔다.
범석이 창고에 둥그라미를 그렸다.
"이 많은 기름을 빼간 걸로 봐서 아공간의 크기가 상당하다고 봐도 되겠죠. 파밍 던전과 비슷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최초로 각성자들이 나타난 게 6월 말이었나? 그 사람은 그때부터 아공간에 드나들면서 준비를 해온 게야. 혼자서 말일세."
"철사병이 가라앉으면 본격적으로 총을 쓰겠군요."
"아마···안에서 총도 발사할 수 있을 걸세."
늘 침착하던 범석이 깜짝 놀랐다.
"아공간 안에서 몰래 말입니까?"
"그 굵은 볼트도 쏘는데 총을 못 쏘겠나. 다만 내가 궁금한 건 실탄을 어떻게 제조하느냐 하는 것일세. 제조법을 확보했다고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아프리카에서 수제 총과 실탄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그조차도 상당한 설비와 노하우가 필요했다.
도저히 혼자서 할 작업이 아니다.
"저도 실탄을 직접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조법을 요구한 걸 보면 아공간 안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다음엔 그걸 중점적으로 확인해보게."
"예."
그때 문이 열리며 석현이 들어왔다.
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테이블에 주먹을 쿵 꽂았다.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내려앉았다.
언제 봐도 엄청난 힘이군.
장원택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석현씨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는 대답 대신 롱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범석이 황급히 대통령의 앞을 막아섰다.
꽉 막힌 곳에서는 블링크도 무소용이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잠깐 비켜주게."
장원택은 석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흥분했을 거라는 그의 짐작과 달리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친구의 뒤를 캐지 마."
"김밥조아 말입니까? 간단한 행적을 확인하는 것뿐인데···"
"나는 머리 위에 올라가서 뭐든 알고 있다고 잘난체하는 족속들이 싫어."
"하하···이거 뭔가 큰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장원택은 눈짓을 해서 밖의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리곤 석현에게 앉도록 권유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것 참 어린애 같은 청년이로군.
순수하지만 앞을 살피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잘 다뤘다는 소문이 날까···
장원택이 잠깐 고민하고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롱나이프가 그의 목에 닿았다.
빠르다!
범석이 기겁했으나 움직이진 못했다.
"여기서 당신들 죽이면 편해지겠지?"
"다, 당신도 살인자가 되는데···"
그는 삭막하게 웃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자살하면 리셋되고 몇 분 뒤에 되살아나거든. 내가 쉘터 전부를 죽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다.
그리고 실제 그럴 능력도 있다는 게 소름이 끼쳤다.
장원택은 석현이 이렇게까지 미쳤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내 요구는 하나야."
석현이 장원택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지 말고, 찾지 말고, 건드리지도 마. 누군지는 알겠지."
"고작 게임에서 만났을 뿐이잖습니까."
"그게 내겐 전부야. 대답을 듣고 싶은데."
"···"
장원택과 범석은 시선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이 상대인 이상 협상은 좋지 않다.
여기선 들어주는 수밖에···
"···좋습니다. 전부 물리지요."
"좋아."
석현은 그제야 만족하곤 활짝 웃고 돌아갔다.
둘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다정 대신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을 들인 줄 알았는데 미치광이가 들어왔다.
"이거 진짜 큰일이군."
장원택이 한숨을 내쉬었다.
< 겨우살이 - 3 > 끝
< 겨우살이 - 4 >
우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한바탕 난리를 쳐댔기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쉬고 싶었다.
마침 오래된 펜션이 보였고 구울들이 주변을 수색했다.
위험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근처에는 우리뿐인가 봐."
다정이 펜션 옆의 벤치에 앉아 옆자리를 탁탁 쳤다.
내가 옆에 앉으니 다리가 쑥 올라와 허벅지 위에 얹혔다.
"여기서 정오까진 쉴 거니까 그리 알아."
"뭐 그러든가."
"종아리 좀 주물러 줘. 알 배겨서 아파."
"누가 하이힐 신고 뛰어다니래?"
"뭐래.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아니 생존자들 유인한다고 바바리맨 흉내 낼 것까진 없잖아."
그녀는 흠칫하더니 다리로 내 허벅지를 두드렸다.
"봤어?"
"골목 안에 들어가는 것까진."
"안에서 뭐했는지는 모르겠네?"
"모르지."
"사실 중국인들하고 격렬한 쎅쓰를···"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섹스는 어림도 없고 폭력과 욕설이 오갔을 것이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기름 다 챙겼어."
내가 천천히 종아리를 주무르자 다정은 헛기침을 하며 드러누웠다.
근데 그것도 잠깐이었다.
다정은 벌떡 일어나 다리를 오므렸다.
"근데···추워···"
뭐 냉기저항 아이템이 있는 나도 추울 정도니까.
맹렬한 바닷바람이 불어 체감추위는 더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차원문을 열어 롱패딩과 운동화를 건넸다.
"일단 펜션 안에 들어가 있어. 불 피울 테니까."
"응."
그녀는 내 앞에서 바로 코트를 벗더니 패딩을 걸치고 몸을 웅크렸다.
저러고 있으니 애벌레 같네.
"아···배고파. 뭐 맛있는 거 좀 없어?"
"추우니까 뜨끈한 국물이 낫겠지?"
다정이 벌떡 일어났다.
"나 국물 있는 거 좋아해."
"안 좋아하는 게 뭐냐 이 밥순아."
"음···몬스터 고기? 토공이 그거 먹던데 이해가 안 가더라."
나하고 있을 땐 자제했는데 다정하고 다니니 또 버릇이 도진 모양이다.
그녀는 토공이 완전히 미쳤다고 중얼거렸다.
"아니이, 그리폰 같은 건 새 같이 생겼으니까 거부감이 안 들지만 고블린 코볼트 이런 건 딱 봐도 인간형이잖아. 그걸 먹을 생각이 날까?"
"심지어 독도 있지. 석현이는 멀쩡할지 몰라도 우리가 먹으면 배가 많이 아플걸."
"내가 어? 오죽했으면 상점빵을 먹었겠느냐고. 그 맛없는 걸."
"그래도 토공하고 같이 다니니 재미있지 않았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친 짓도 한두 번이지 밤마다 난리를 치는데 감당이 안 돼. 토공 걔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데 난 쉬고 싶다고."
확실히 혼돈 100%짜리와 90%는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다정은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긴 한데 같이 다니기엔 부담이 커. 역시 나한텐 성호 니가 딱이야."
"나하고 다닐 때는 얌전했는데."
석현은 나와 동행하면서 미친 짓을 벌이지 않았다.
다정이 오, 하며 입을 벌렸다.
"배려했네. 어이구, 완전 지극정성이야. 나한테는 대충 대하면서."
"시끄럽고 뭐 먹고 싶어?"
"음···짬뽕 돼?"
"안될 거 없지."
"탕수육도."
"욕심이 많네."
"아참 탕수육은 부먹으로 내주는 거 알지?"
뭐? 탕수육을 부먹으로 내달라고?
그건 못 참겠다.
"탕수육은 찍먹이 근본이야."
내가 엄숙하게 선언하자 그녀는 소파에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나를 덮쳤다.
"이단이다! 전쟁이다!"
얼씨구.
우리는 거실을 데굴데굴 굴렀다.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는 개뿔이.
다정에게서 땀 냄새가 너무 나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나는 달라붙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일단 좀 씻자. 너 너무 냄새난다고."
"그게 여자한테 할 말이냐."
니가 여자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선을 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포칼립스에서 굳이 불편한 옷과 하이힐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여튼 그녀는 자기 겨드랑이 냄새를 맡아보곤 구역질을 했다.
그리곤 바닥에 주저앉아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이 추운 겨울에 연약한 아녀자를 찬물로 씻길 건 아니지?"
구울 여왕 주제에 연약한 아녀자는 무슨.
"물 끓여서 내올 테니까 기다려."
"이예스!"
커다란 원형 목욕통을 밖으로 옮기자 다정이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뭐 이런 것까지 준비했어?"
"준비가 철저하면 그만큼 편해지니까."
물이 다 끓었고 나는 목욕통에 찬물과 같이 부어서 온도를 맞췄다.
다정은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더니 내가 고개를 돌린 사이 목욕통 안으로 쏙 들어갔다.
통은 아주 크지는 않지만 그녀가 쪼그리고 앉을 정도는 되었다.
"아···몸이 녹아내릴 것 같아···"
"온도 괜찮아?"
"응.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아포칼립스에서 목욕이라니 상상도 못 해봤어."
"목욕하고 있어. 밥 준비할 테니까."
"잠깐만 와볼래?"
다정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뭔가 싶어서 가까이 가보니 그녀가 내 목을 잡아당기곤 키스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나는 입술을 빨리다가 겨우 물러났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곤 화를 내었다.
"뭐야. 나하고 키스하기 싫다 이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
"이, 입 냄새가···"
솔직히 말하면 썩은 생선 냄새가 났다.
다정은 합, 하고 입을 다물더니 내게 물을 퍼부었다.
"진짜 여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나는 그녀에게 칫솔과 치약을 건네고 동굴 안에 들어갔다.
짬뽕과 탕수육을 하려면 재료가 적지 않게 들어가겠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친구한테 해주는 거니까.
그리고 그녀의 구울이 파밍해서 넘겨준 식재료도 양이 상당했다.
뭐 그런 식으로 따지고 싶진 않지만.
궁중팬에 재료를 볶는데 풍뎅이들이 묘한 작업을 하는 게 보였다.
스위치를 누르니 못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가 금속조각을 두드렸다.
대장 풍뎅이가 그 흔적을 살펴보더니 발톱을 흔들었다.
···저거 혹시 공이가 뇌관을 때리는 그걸 베낀 건가?
옆의 둘은 내가 준 실탄을 완전히 해체해서 규격을 재고 있었다.
줄자를 너무 능숙하게 쓰는 거 아냐?
"어때, 뭐가 좀 될 것 같아?"
대장 풍뎅이가 나한테 와서는 발톱 3개를 펴보였다.
"3주?"
도리도리.
"설마 3일이면 다 끝난다고?"
끄덕끄덕.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실탄 제작법을 설명해줬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빨리 적용시킬 줄은 몰랐다.
다만 대장 풍뎅이에 의하면 지금 있는 재료로는 총구가 막힐 위험이 크다고 한다.
나한테는 총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다.
"원래 탄피가 구리였나 황동이었나···하여튼 비슷한 게 필요하단 거지?"
끄덕끄덕.
"잠깐 기다려."
철물점을 루팅했을 때 황금처럼 빛나는 부품을 집어던진 기억이 나는데···
동굴 밖에 나가니 딩고와 딩순이는 보이지 않았다.
숲에서 사냥이라도 하나보다.
나는 철물점 창고를 뒤진 끝에 황동으로 보이는 부품을 찾아냈다.
"이거지."
그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한 보람이 있다.
나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문 손잡이와 배관자재를 들여와 풍뎅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예이!
풍뎅이들이 펄쩍 뛰어오르며 발톱을 마주쳤다.
이걸 갖다 주기 전까지 탄피의 재질 문제로 골치가 좀 아팠던 모양.
"진짜 황동 탄피와는 금속배합이 다르겠지만···"
100%를 요구할 순 없다.
총을 쏠 수 있기만 하면 만족이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육수를 붓고 짬뽕을 보글보글 끓였다.
그리고 저장해둔 혹멧돼지 훈제를 잘게 썰어 기름에 튀겼다.
중국집에서 하는 탕수육과는 식감이 조금 다르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준비를 해서 밖으로 나가자 정원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구울을 시켜서 가구를 몽땅 집어넣었나 보다.
나는 정원에 들어가 모닥불을 쬐고 있는 다정에게 그릇을 건넸다.
후루룩.
"으음···맛있어."
다행히도 입맛에 맞나보다.
그녀는 허겁지겁 짬뽕을 들이켰고 탕수육을 덥석덥석 먹어치웠다.
시원하게 먹는 게 참 예쁘긴 하구만.
우리는 식사를 마친 다음 잠시 서로에게 기대어 모닥불 너머의 바다를 구경했다.
다정이 말했다.
"있잖아."
"어."
"여자하고 남자 둘이 여행하잖아, 지금."
"그렇지."
"둘은 친하고 상대에게 호감도 갖고 있어. 인정하지?"
뭐 그럭저럭.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나를 쓰러트린 뒤 올라타선 포효했다.
"아포칼립스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 이러고 있다고! 근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 실화야? 여기가 무슨 동화 속 나라야? 꺄르르 행복하게 살아요 이러게?"
"잠깐만, 잠깐만."
나는 그녀를 진정시킨 뒤 말했다.
"다정이 너 물론 이쁘고 몸매 좋지. 한번쯤 안고 싶은 게 사실이야. 나도 남자라고."
"그러면 뭐가 문제야. 혹시 안 서는 건 아니지?"
그녀는 기어코 손을 밑으로 내려 와락 움켜쥐었다.
"우와. 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네···"
"다정아."
나는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가 몸으로 내 몸을 누르며 말했다.
"빨리 말해. 나 지금 미칠 것 같으니까."
"석현이 때문에 그래."
"토공은 왜? 혹시 3P라도 하고 싶어? 그건 좀 이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이러는 걸 석현이는 모르잖아. 사이가 어색해지는 게 싫은 거야, 나는."
"이미 말했는데?"
"엉?"
이건 또 뭐냐.
나는 다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셔츠를 훌러덩 벗으며 이죽거렸다.
"이미 너 따먹을 거라고 허락 받아놨다고. 그러니까 얌전히 옷 벗어."
"자, 잠깐만."
"무슨 남자가 잠깐만 소리밖에 못해? 내가 도장 찍는다고 한 게 허튼소리일 줄 알았어? 나 한다면 하는 여자야."
그녀가 천천히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나를 쳐다봤다.
마치 먹잇감을 훑어보는 포식자의 시선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홍콩으로 보내줄게."
설마 딜도 갖고 와서 나한테 박겠다는 말은 아니지?
다정의 얼굴이 내려와 내 입술을 덮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몸을 섞었음에도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다정은 여전히 다정이었고 나도 같았다.
둘 다 성인이고 자기 감정 추스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 여행을 준비했다.
다정은 차원문을 열어보라고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머리를 부딪쳤다.
"아야, 이거 왜 안 들어가져?"
"나야 모르지."
"중요한 건 마음이라며. 혹시 너 딴 여자 생각한 거 아니야?"
나는 급히 부정했다.
"절대 아니야."
"그럼 왜 안 들어가지는 거야. 나도 너구리 보고 싶다고."
"너구리가 아니라니까."
안 되겠군.
나는 동굴에 들어가 풍뎅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녀석들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슬슬 소개시켜줄 때가 된 거지.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나와 다정에게 선보였다.
"···풍뎅이치고는 좀 크네?"
다정은 무릎을 꿇고 녀석들의 갑각을 건드렸다가 깜짝 놀랐다.
큰 녀석이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게 아닌가.
"얘네들 뭔가 좀 이상해."
"지능을 가진 풍뎅이들이야. 도움 많이 받고 있어."
"지능이 있다고? 풍뎅이주제에 무슨···"
다정이 어이없어하자 대장 풍뎅이가 발톱으로 마루를 긁어 그림을 그렸다.
풍뎅이들이 검과 방패를 들고 몬스터를 물리치는 그림이었다.
다정은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었다.
"푸, 풍뎅이들이 그림을···"
"지능이 있다니까. 얘네들 나보다 똑똑하고 유능해서 총알도 만들어."
"제조법 달란 게 그래서였구나···정체가 뭐야? 어떻게 만난 거고?"
나는 다정에게 풍뎅이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귀를 기울여 듣던 그녀가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일 잘하는데 고블린 따위한테 잡혀 있었다고?"
할 말이 없는지 풍뎅이 네 마리가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들을 변호했다.
"얘들이 힘은 좀 부족하긴 해. 고블린들이 가둬놓고 재료 던져주면서 윽박지르는데 도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사기잖아."
다정의 눈이 용사 풍뎅이 그림으로 향했다.
대장 풍뎅이는 은근슬쩍 발톱으로 그림을 지웠다.
녀석들이 돌아간 뒤 다정은 내 멱살을 잡았다.
"지금부터 내가 버스 태워 줄 테니까 안전벨트 꽉 매는 거야, 알았지?"
"뭘 하려고?"
"여기서부터 서울까지 가면서 몬스터 때려잡을 거야. 숨만 붙여둘 테니까 니가 막타 치라고."
"그래서 나 레벨 업 시키겠다?"
"한 30레벨까지 올리면 추가효과 두개 생기잖아?"
독한 여자군···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게 더 무섭다.
하지만 여기에서 해야 될 게 있다.
"미안한데 여기서 이벤트 하나 해야 돼."
"무슨 이벤트?"
"배틀로얄."
다정은 그 말을 듣곤 이마를 찡그렸다.
"그거 최후의 하나만 남는 이벤트잖아."
모든 무기가 사라지고 심지어 능력까지 제한된다.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하면 캐릭터가 삭제되기 때문에 유저들이 참가하길 꺼려했다.
이벤트에 캐릭터를 버릴 순 없지 않은가.
그걸 진지하게 판 사람은 나를 포함한 몇 명 정도였다.
죽고 또 죽고 해서 최적의 파밍루트와 생존전략을 수립해 놨다.
그렇게 설명했지만 다정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너 죽으면 끝이라는 거 알아 몰라. 단순히 몬스터하고 싸우는 거하고 다르잖아. 아무리 좋은 능력 가졌어도 다 제한되는데 무슨 소용이야."
"특성은 제한이 안 될 거야, 아마."
원래 게임에선 없었던 것이니까.
"그걸 믿고 들어가겠다고?"
"배틀로얄을 나만큼 잘 아는 놈은 없어. 그리고 여긴 중국인들만 있고."
"아···"
다정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닫고는 나를 바라봤다.
"중국인들이 배틀로얄 잘 모르니까 들어가서 독식하겠다는 거네."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야."
서울에 갔을 때 배틀로얄이 열리면 자칫 아는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곤란하지.
그런데 다정이 눈을 빛냈다.
"서울로 가서 하면 눈에 거슬리는 놈들 다 죽일 수 있겠네."
"어지간한 놈들은 참가 안 할걸. 전장에서 마주쳤는데 아는 사람이면 좀 그렇잖아."
물론 나는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버그를 알고 있다.
하지만 100%는 아니었기에 되도록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치를 생각이었다.
"중국인들도 너 알고 있지 않을까? 기름 훔치는 거 봤을 텐데."
"뭘 훔쳐? 소유권이 이전된 것뿐이야. 정부에게서 나한테로."
"하여튼 걔네는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너 보면 악에 받쳐서 달려들 거라고."
"손해 보는 건 내가 아니야."
내가 참가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배틀로얄 이벤트의 보상이다.
다정을 재운 뒤에 동굴에 들어가서 영상을 확인하니 보상이 캐릭터 부활권이었다.
이걸 잊어버린 이유는 너무 많이 죽어서였다.
토공이나 오리궁뎅이가 미친 짓을 벌이면 나도 휘말려서 캐릭터가 삭제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다 같이 새로 시작하니 부활권은 창고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릴 수밖에.
내 말을 들은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보상이 캐릭터 부활이었어? 그럼 죽은 뒤에도 살아날 수 있는 거야?"
"석현이 능력이 그거잖아? 그게 1회용으로 나올 거야, 아마."
"말도 안 돼."
우리는 그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틀로얄에서 이겨야 한다.
반드시.
< 겨우살이 - 4 > 끝
< 배틀로얄 - 1 >
나와 다정은 여전히 강화도에 머물렀다.
배틀로얄 이벤트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영상으로 확인한 결과 이 시기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대신 세 개의 목표를 잡았다.
첫 번째는 충분한 식량 확보.
그동안 식량을 축내기만 해서인지 비축량이 꽤 줄었다.
물론 동굴의 모든 식량을 합치면 최소 몇 년 동안은 안심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빠져나간 건 채워야 한다는 강박증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다.
쉘터의 물자가 완벽히 갖춰져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두 번째는 쉘터 확장이다.
휘발유가 남아도니 더 이상 확장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쉘터를 확장하지 않는 이상 물자 비축이 어려웠다.
쌀을 좀 버리고 했지만 그 자리를 기름통이 꽉 채웠거든.
지금 동굴에서 나가 공터를 보면 기름통으로 아주 난리가 아니다.
흐뭇하긴 하지만 3m높이까지 쌓아두는 건 좀 그렇지.
마지막으로 만년설이 쌓인 북쪽 산을 탐사해야 했다.
던전에서 입수한 지도와 풍뎅이들이 가르쳐 준 광맥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곳이기 때문.
다정은 내게 들러붙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풍뎅이들에게 잘 보일 거라고 강화읍의 모든 마트를 휩쓸며 젤리를 파밍하지 않나.
숭어가 많다는 내 얘기를 듣곤 앞바다에 나가 잡아왔다.
그 방법이 참 기가 막혔는데.
숭어가 무리지어 있는 곳을 확인하곤 구울이 헤엄쳐 가서 그물을 뿌리는 거란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수십 마리를 들고 와선 이렇게 말했다.
"식량을 확보해야 된다고 했지? 그건 내가 해줄 테니까 손질만 해."
"역시 넌 멋진 여자야."
"그걸 이제 알았어?"
나는 숭어를 동굴로 가지고 들어가 손질해서 진공포장기로 포장했다.
다정은 포장된 숭어를 보더니 신기해했다.
"이렇게 포장하면 오래 먹을 수 있어?"
"땅에 묻어두면 몇 주는 갈 거야. 다 못 먹으면 경매장으로 팔면 돼."
"너 그렇게 포인트를 모으는구나···진짜 알뜰하네."
아껴야 잘 살지.
다정이 다시 파밍을 나간 동안 나는 장비로 쉘터 확장을 시도했다.
엔진톱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미니 포크레인으로 땅을 판 다음 철조망을 옮기는 지루한 작업이 이어졌다.
이걸 다 수작업으로 했다간 앓아누웠을 것이다.
"확실히 기름이 많으니 좋네."
하루 종일 숲에 포크레인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덕분에 내 뻘짓을 구경하러 온 몬스터가 많아졌다.
이 숲에는 왜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 거야?
아무래도 숲이 풍족해서 자리가 비면 주위에서 채우는 것 같았다.
왜 자리가 비냐고?
내가 보는 족족 죽였기 때문이지.
풍뎅이들이 총알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기에 나와 딩고, 딩순이가 방어에 나섰다.
두 녀석은 밖에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고 나는 화살과 발리스타를 쏴댔다.
가끔 빈틈이 보이면 은색늑대 둘이 치고 들어가 몬스터를 찢어놓기도 했다.
"잘했어!"
나는 남은 철조망을 설치해 2X2단으로 만들었다.
여기저기 녹슬어서 그런지 더 흉악하게 보였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접근도 못하고 오크조차 부담스러운 철조망이다.
"녀석들이 꽤 지능적으로 행동한다는 게 문제가 되긴 해···"
한 번은 오크 한 마리가 고블린 사체를 철조망에 대고 넘어오려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오크의 행동이 어설퍼서 철조망에 넘어졌지만 하여튼 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내 쉘터의 방어력은 전적으로 윤형철조망에 기대는 부분이 커서 돌파되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벽을 세워버릴까···"
시멘트와 벽돌을 많이 비축해놔서 쌓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윤형철조망 뒤에 벽을 3m정도로 세우면 딱인데.
문제는 그럴 경우 시야가 크게 제한된다는 점이다.
구멍을 뚫어놔도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대응하기엔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숲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는 게 어려워진다.
전원주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경관을 구경하노라면 뭔가 힐링되는 기분이거든.
"역시 하지 말자."
보통 할까 말까 헷갈릴 때에는 안 하는 게 좋다고들 한다.
내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되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나는 이틀에 걸쳐서 쉘터를 확장했다.
덕분에 200평 남짓하던 공간이 300평 정도로 늘어났다.
"공간이 넓은 건 좋은데 그만큼 공격도 많이 받겠구만."
이제 풍뎅이들이 총알을 만들면 총으로 방어하는 수밖에.
딩고와 딩순이는 쉘터가 넓어져서 좋은지 마구 뛰어다녔다.
좋을 때다.
나는 동굴에 들어가 풍뎅이들의 작업을 확인했다.
"오···"
거의 완성 직전이었다.
대장 풍뎅이가 뇌관과 탄두를 탄피에 조립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조립을 위해 전용 클램프까지 만들었다는 점이다.
잡고 있을 필요 없이 클램프에 물려놓고 끼릭끼릭 조정해서 위치를 잡아 조립하는 식이었다.
"정말 대단한데."
대장 풍뎅이는 심혈을 기울여 총알을 조립했다.
나무 케이스에 탄두를 넣고 작은 망치로 땅땅 두드리니 탄피에 단단히 결합되었다.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 케이스를 확인하자 탄두의 길이보다 더 긴 홈이 보였다.
"탄두 끝이 뭉그러지면 안 되니까 이렇게 한 거구나."
확실히 이 녀석들은 장인임에 틀림없다.
총알의 구조를 파악하자마자 특징을 파악하고 바로 써먹으니.
마침내 완성된 것은 리볼버용 총알이다.
토가레프나 K2는 각각 한 정뿐이지만 리볼버는 두 정이거든.
쓰다가 불량이 나면 버려도 된다.
속은 쓰리겠지만.
대장 풍뎅이가 완성된 총알을 가져왔다.
"니들이 만든 거니까 믿을게."
녀석들은 단체로 머리를 긁적였다.
만들긴 했는데 제대로 나갈지는 확신을 못 하는 것 같다.
뭐 다 그런 거지.
나는 풍뎅이들을 어깨에 얹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회전하면서 쏘는 거지···"
여기선 K2와 토가레프만 썼기에 리볼버는 처음이었다.
다행히도 총알은 약실 안에 쏙 들어갔다.
헐렁하거나 빡빡하지 않고 몸에 맞는 옷을 입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좋아."
나는 나무에 대고 리볼버를 겨냥했다.
어깨의 풍뎅이들이 동시에 머리를 감싸는 게 보였다.
혹시 귀를 막는 건가?
하긴 내 말을 알아들으니 귀도 있겠지.
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굉음과 함께 나무가 퍽 패이며 파편을 날렸다.
성공이다.
실린더를 열고 앞의 축을 미니 뜨거운 탄피가 바닥에 툭 쏟아졌다.
이예이!
풍뎅이들이 내 어깨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와, 니들 진짜 대단하네."
기대를 걸긴 했지만 진짜 총알을 만들 줄은 몰랐다.
아마 내가 모르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진짜 잘했어, 정말 수고했어."
나는 이 멋진 일을 해낸 풍뎅이들에게 먹을 것을 잔뜩 안겨주었다.
녀석들은 잔뜩 고무되어 엉덩이춤을 추었다.
이로서 나는 가장 중요한 총알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풍뎅이들의 수제작인 만큼 공급량은 많진 않지만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간신히 진정한 대장 풍뎅이가 클립 형식으로 공급하겠다고 표시했다.
저런 클립을 이용하면 한 발씩 넣을 필요 없이 단숨에 장전을 끝낼 수 있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물었다.
"하루 생산량은 얼마나 돼?"
대장 풍뎅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발톱 3개를 펴보였다.
3발이란 말이군.
얼핏 생각하면 작지만 내가 뭘 하건 계속 쌓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열흘만 지나도 30발인데."
그때 대장 풍뎅이가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렸다.
뭔가 해서 보니 쇠창살 같은 곳에 갇힌 풍뎅이들을 구출하는 내용이었다.
"혹시 다른 곳에도 풍뎅이가 있어?"
끄덕끄덕.
진작 말하지 왜 지금···
아니다.
내게 신뢰를 준 다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도 이제 한 몫을 하게 되었으니 내가 요청을 받아들일 거라고 여겼겠지.
그냥 요청해도 들어줬을 텐데 내가 신뢰를 표현하는 게 부족했나?
"좋아. 같이 구하러 가보자. 근데 지금은 안 돼. 할 일이 있으니까."
배틀로얄 이벤트가 끝나고 서울로 간 뒤다.
아무래도 다정이 내 레벨 업이 먼저라고 벼르고 있어서 말이지.
풍뎅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듯 우르르 몰려와 감사를 표했다.
엉덩이춤으로.
이제 그만해···
.
.
.
많은 사람이 15레벨을 달성해 경매장에 들어갔다.
경매장의 분위기는 들어오는 사람에 비례해 개판이 되어갔다.
누군가 하루 종일 경매장을 지켜본다면 온갖 개소리와 욕설, 험담으로 점철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익명이고 코멘트를 입력하는 데 비용이 들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궁창에서도 집단지성이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배틀로얄.
그 기가 막힌 이벤트에 대한 소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누군가 언급하고.
어? 나도 그거 해봤는데.
그거 캐삭되는데 미쳤다고 하겠음?
···등등으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한 경매품에 배틀로얄 이벤트에 대한 규칙을 정리했다.
사람들은 그를 저 새끼라 부르며 칭송했다.
―배틀로얄이 열리는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 내라는 것은 분명하다.
―배틀로얄에 참가하기 위해선 차원문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다른 던전과 같이, 출입은 한 번뿐이다. 그리고 이벤트가 시작되면 나오지 못한다.
―들어가면 아이템을 포함한 능력이 제한된다. 아이템이 차원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툭툭 떨어지기 때문에 미리 보관해야 한다.
―배틀로얄의 전장은 하나가 아니고 맵과 아이템 리젠 장소가 정해져 있다.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전장이 좁아지고 몬스터의 위협은 강해진다.
―배틀로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하면 캐릭터가 삭제된다.
다 좋은데 마지막 문구가 문제였다.
현실에서 캐릭터 삭제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
100명이 참가하면 99명이 죽는다는 말이다.
이에 열 받은 사람들이 토해내는 코멘트가 쏟아졌다.
―씨발 미친거 아님? 99명이 죽는 이벤트를 누가 함?
―그래서 서라에서도 하는 놈은 별로 없었음. 기껏 캐릭터 키우고 파밍했는데 캐삭되면 억울하잖아.
―근데 그거 줄기차게 판 놈이 있었음.
―혹시 그 새끼임?
―ㅇㅇ
이 코멘트가 올라오자 코멘트란이 탄식으로 가득 찼다.
―아···
―개노잼.
―이번에도 그 새끼가 1등하겠네.
―아니지 병신들아. 잘 생각하라고. 이번에는 그새끼도 똑같은 조건인데 기회지.
―맞음. 능력 스킬 아이템 다 제한되니까 꿀릴거 없음.
―특성은 어떰? 서라에선 없었는데.
―추가효과는 다 날리지 않을까여? 내가 보기엔 그럼.
―하여튼 이번에 참가하면 김밥조아 볼 수 있다는 말 아님? 걔가 제일 잘 알잖아.
―김밥조아 얼굴 보려고 목숨 건다고? 미쳤구만.
―얼굴은 뭐 복면 아이템으로 가리고 할 텐데.
―근데 아이템이 차원문을 통과 못한다고 하는데 그럼 알몸으로 들어가는 거임?
―ㄴㄴㄴ옷은 입고 들어가짐.
―그래서 참가할 사람?
코멘트가 우후죽순 올라왔지만 진짜 참가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경매장은 개소리의 본진이고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
위험한 만큼 보상은 엄청나겠지만 아무도 1등을 못 해봤기 때문에 뭔지는 몰랐다.
그걸 아는 사람은 딱 셋뿐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접니다. 첫 번째 배틀로얄에서 우승했고요."
"아···그러시구나···"
남녀는 배검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레벨이 높지 않아 세상이 돌아가는 걸 잘 몰랐다.
종말 후에도 특별한 사냥 같은 거 없이 생존 위주로 살아왔기 때문.
그러다 인천에서 배검인을 만나고 약간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잘 풀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략본을 뿌린 사람이고 지금은 정부 쉘터에 있다고.
여자가 검인에게 물었다.
"그, 그럼 저희도 정부 쉘터에 들어갈 수 있나요?"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누가 소개해줘야 들어갈 수 있거든요. 정부 쉘터이다 보니 비밀도 많고···대충 아시죠?"
검인이 목소리를 깔자 남녀는 서로를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살아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살아남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온갖 강력한 몬스터가 출현한다는데 지금처럼 피해다니며 살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 검인을 만났고 그는 정부 쉘터를 소개해준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온갖 VIP들이 머무르고 있는 안전한 장소!
남녀는 거기에 들어가길 원했다.
"그···저희가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요? 검인씨가 소개를 해주시면···"
"소개를 하기 전에 우리 사이에 신뢰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셋은 검인과 함께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검인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에 놀랐지만 실력의 3할이라는 말에 더욱 놀라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의 7할 정도는 숨겨야죠."
성호가 들었으면 비웃었을 말을 그는 거침없이 해댔다.
어차피 특성만 복사하면 그 뒤는 볼 일이 없으니까.
하여튼 남녀는 검인의 실력보다는 지식에 감탄하고 진심으로 같이 생존하길 원했다.
특성 사격술과 포박이 그의 상태창에 나타났다.
그때 그리폰의눈 스킬을 얻었어야 했는데 아쉬웠다.
'됐어.'
검인은 블링크를 이용해 남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순간에 버림을 받은 둘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아닌가?
'어차피 정부 쉘터에 갈 사람들은 아니야.'
도시 간 이동을 하려면 상당한 실력과 운이 필요하다.
둘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추긴 검인에게도 책임은 있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속은 게 잘못이지.
그는 찝찝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인천의 지도를 확인했다.
'중국인들 가까이에서 전장에 들어가야 돼.'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특성에만 조금 익숙해졌을 뿐, 공략본이고 뭐고 하나도 모를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문제라면 다른 한국인들인데···
'토공은 돌아갔고 다정이 문제인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장원택은 그런 중요한 문제를 왜 말해주지 않은 건지 속이 탔다.
혹시 김밥조아를 만났나?
그건 정말 최악인데.
검인은 지도를 와락 구겼다.
둘이 만났다 하더라도 인천에 남아있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서울로 갔을 거야 아마.'
경매장에 목격담이 올라오지 않는 것은 이동 중이라 그런 걸로 여겼다.
김밥조아라면 자기처럼 배틀로얄 이벤트를 미리 대비할 수는 있겠지만···
'아냐, 아닐 거야.'
맞더라도 이 근처는 아니어야 했다.
검인은 주섬주섬 지도를 펼쳤다.
아무래도 영종도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짱개들이 있다는 건 좀 그렇지만···'
쪼렙존에서 활동할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 그였다.
혹시 예쁜 여자가 있으면 데리고 갈 수도 있겠지.
'어차피 대화는 통하니까 상관없어.'
좋아, 결정했다.
검인은 블링크를 이용해 섬 몇 개를 발판삼아 영종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같은 시기.
성호와 다정은 강화읍 외곽에서 차원문을 발견했다.
다정은 어차피 참가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구경만 하기로 했다.
안을 확인한 후 밖에 나와 성호에게 이야기하자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혹시 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지 않았어? 남쪽에 호수 있고?"
"어, 맞는데. 혹시 아는 장소야?
"알지. 내 쉘터 부근이거든."
"···진짜?"
다정은 다시 차원문에 들어가려 하다가 거부당하곤 하이힐로 걷어찼다.
"빨리 열어! 열라고!"
물론 차원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 배틀로얄 - 1 > 끝
< 배틀로얄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