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하늘만큼 큰 영광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운서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몸을 굽혀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녀의 온몸에서 우아한 기품이 배어 나왔다.
얇은 천을 얼굴에 두른 탓에 저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높은 가문 출신의 여인임은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녀 아버지의 조정에서의 위치가 대단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진부의 적녀가 감히 이 선물을 폐하께 바칩니다!”
말을 마친 진운서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힌 후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화합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아직도 그녀의 정체를 미심쩍어하던 조정의 대신들은 그제야 그녀가 태부 진형의 여식임을 깨달았다. 딸이 선물을 바치는 건 분명 아버지의 의중이 실린 행동일 터였다.
진부는 지금 먼저 앞장서서 오늘 연회는 모두 무장을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뒤에서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무장이 황제의 호의를 업고 기세등등한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란 말인가?
“태부의 귀한 여식 외에 어느 가문의 규수가 이렇게 대담할 수 있다더냐? 도대체 무슨 선물인지 짐이 보아야겠구나. 마음에 들면 커다란 상을 내리마. 그렇지 않으면 벌을 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황제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넘쳤고, 눈썹도 한껏 올라가 있었다.
이윽고 대태감이 다가와 진운서의 손에 들린 화합에서 그림을 꺼내 들었다.
진운서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고개를 살짝 든 채 공손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화합을 묶었던 끈을 풀자 돌돌 말려 있던 그림이 족자를 따라 천천히 펼쳐졌고, 그 위에 그려진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근언은 황제의 옆에 서 있었기에, 황제를 제외하면 그 그림을 누구보다 가장 또렷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순간, 그는 그 그림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화폭 위에는 해 질 녘의 전쟁터와 천군만마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공기의 울림까지 생생히 피부에 닿아오는 듯하며,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완벽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싸움이 바로 이러했다. 소근언은 저 높은 단상 위에 서 있는 복숭아색 옷 여인에게 눈길이 가는 걸 참기 힘들어져, 시선을 살짝씩 돌려가며 몇 번이고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잠시 눈길을 준 것일 뿐, 곧 다시 시선을 거두고 더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소근언은 내심 조금 의심스럽기도, 또 놀랍기도 했다. 만약 직접 본 게 아니었더라면 이 그림이 여인의 손끝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으리라.
여인이 새가 지저귀는 꽃밭의 경치를 그리거나 강남의 수향(*水鄉: 물가에 세워진 마을)을 그린다면 일반적인 일이겠지만, 그녀가 생생히 묘사한 건 바로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애가(*哀家: 황태후가 본인을 부르는 말)가 보기엔 상당히 좋은 그림이오. 수려한 강산도가 나올 줄 알았더니 애가의 예상을 빗나갔군. 황상, 아직도 상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이오?”
인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환하게 웃던 태후가 두 손으로 손뼉을 치며 진운서의 그림을 한껏 치켜세웠다.
진운서가 기억하는 태후는 아무리 큰 연회에서라도 자애로운 미소만을 짓고 있었을 뿐, 나서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늘처럼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태후가 먼저 나서서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물론 진운서뿐 아니라 단상 아래에 있던 규수들과 대신들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 태부, 딸을 정말 잘 키웠군! 그림이 짐의 마음에 들 뿐 아니라 태후마마의 극찬까지 받지 않았나!”
이렇게 말한 황제는 그림을 말아 옆에 있던 대태감에게 건네고, 다시 시선을 아래에 있던 사황자 초름경에게 돌렸다.
“전쟁터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니, 분명 군사들에게 바치는 선물인 게지.”
황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의기양양해진 초름경이 곧 몸을 일으키고 공손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부황. 고맙소, 진 대소저.”
사람들은 돌돌 말린 그 그림이 초름경에게로 전해지는 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때조차 소근언은 꼼짝도 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네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짐도 네게 평범한 선물을 줄 수는 없지. 말해보아라. 무엇을 원하느냐?”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이 지나치게 큰 게 아닌가?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셨으니 원하는 걸 말만 하면 모두 이루어질 터였다.
‘진 태부가 대단한 딸을 키워냈구나.’
대신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다.
‘왜 내 자식은 저런 눈치를 갖지 못한 것일까?’
오늘처럼 큰 연회가 열리는 날이야말로 본인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진운서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매우 공손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폐하, 소녀가 무엇을 원하든 승낙해 주실 건가요?”
솜씨 좋게 되물은 한마디에 황제는 더욱 호기심이 일어서 경쾌한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답한 후, 진형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진 태부, 자네 딸이 아주 보통이 아니로군!”
그러자 진형은 얼른 몸을 일으킨 후 고개를 숙였다. 딸이 오늘 저런 행동을 하리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선물을 바친 후 바로 물러날 줄 알았지, 감히 황제께 저렇게 반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이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바람에 버릇이 나빠진 것이니, 폐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진형의 말에 황제가 용의의 팔걸이를 툭툭 치며 웃자, 태후 역시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황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마음에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인들이 앉은 좌석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특별히 친정 식구들을 황궁으로 불러 한두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같이 못난 놈들이라 진부의 저 계집애에게 그 영예를 빼앗길 줄이야!
“짐이 언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 말을 들은 진운서는 몸을 굽혀 다시 예를 올린 뒤, 곁눈질로 소근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도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폐하, 군에는 유능한 사람이 정말 많더군요. 개막 때의 공연은 정말로 기백이 대단했습니다. 비록 소녀는 전쟁터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그 공연을 보고 아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다만, 소녀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인데…….”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일부러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이어나갔다.
“어느 분께서 검무를 가장 멋지게 추시나요?”
이 말의 의미는 앞선 공연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니, 더 대단한 것을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진운서는 상을 받을 때조차 일반적인 답을 내놓지 않았다.
보통의 규수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장신구를 청하기 마련이었다.
연회에 참가한 문신들도 오늘의 연회에선 누구도 흥을 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 씨 가문은 지금 황제의 앞에서 바로 모든 문신을 대표하여 이 사실을 표명하고 있었다.
황제가 진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이 더 큰 은혜를 베풀 수도 있거늘, 다시 잘 생각해 보아라.”
진운서는 진지한 눈빛으로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폐하, 어떤 유능한 군사를 내보내실 건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가 소근언을 바라보았다.
진운서의 요구를 들은 소근언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가 이전에 진부의 문 앞에서 사황자 초름경을 기다리며 알게 된 것은 설사 초름경이라 할지라도 감히 이 진 대소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런 신분이라면 성품도 당연히 거만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소근언은 진 대소저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조금 익숙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유능한 군사라. 소 교위!”
황제의 우렁찬 목소리가 순식간에 소근언을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그는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급히 몸을 굽혔다.
“네!”
“소 교위 자네는 표기영(驃騎營) 제일의 맹장이지. 짐이 자네에게 검무 추기를 명하노니, 검무로 모든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거라!”
황제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소근언은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되었고, 화제 또한 그에게로 옮겨갔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소근언은 즉시 몸을 굽혀 명을 받들고 힘차게 외쳤다.
“신, 명 받들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수다운 기백이 짙게 배어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순간 단상 아래에 앉아 있던 여인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전쟁터에서 구르던 사내라면 당연히 목소리도 아주 거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낮고 우렁찬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소근언이 중앙으로 걸어 나가자, 진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잰걸음으로 옆으로 물러났다.
챙-
칼집에서 뽑아낸 잘 벼려진 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소근언의 동작은 너무나 재빨라서, 언제 검을 뽑아 들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이 뾰족한 검의 날에 반사되었다. 소근언은 귀신처럼 순식간에 검을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렸다가 이내 검으로 바람을 만들어내며, 날렵한 자태와 길쭉하고 늘씬한 몸매를 뽐냈다. 그야말로 대단한 위용이었다.
여인들이 앉은 자리에서 주체할 수 없는 탄성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수많은 궁중 연회에 참석했었지만 검무는 오늘 처음 보는데, 이렇게 멋질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
“저렇게 민첩하니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벨 수 있었겠지. 역시 최고의 맹장이라 부를만해!”
“보아하니 저 소 교위라는 사람은 정말 재주가 있네.”
그중 아까 소근언을 향해 무슨 앞날이 있겠냐며 험담을 했던 규수만은 괜히 하나하나 흠집을 잡아내며 불만에 가득 차 투덜거렸다.
하지만 기회주의자들은 그 규수를 따라 험담할 때는 언제고, 바로 말을 바꿔 모두 소근언이 훌륭하다며 칭찬했다. 그 규수만 진운서 때문에 괜한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이다.
높은 단상 위에 선 진운서는 눈을 떼지 않고 소근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근언이 굉장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예전에 소근언은 칼날이 날카롭기에 빠른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승부는 때로 찰나의 순간에 갈리곤 한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그는 매우 진지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운서에게 생명이란 촌각에 달렸음을 알려주었다.
진운서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빠졌으나, 시선은 여전히 소근언을 향해 있었다. 순간 갑자기 검이 멈추더니, 소근언의 거대한 몸 또한 가만히 멈춰섰다.
“좋구나!”
황제는 연신 칭찬하며 오른손으로 팔걸이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그의 눈빛은 무척 만족한 듯 보였다.
“이 검무를 보니 짐의 마음이 일렁이구나! 잘했다, 짐이 상을 내리마!”
그렇게 말한 황제가 한바탕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진가 규수가 요청한 상이 남달랐으니, 짐이 주는 상도 남달라야 마땅하겠지. 자, 교주(*窖酒: 중국 전통 발효주 중 하나)를 올리거라!”
‘교주’라는 말이 나오자 장내가 술렁거렸고, 대신들은 물론 태후의 안색까지 하얗게 변했다.
교주는 바로 나라를 세운 황제가 직접 장인에게 빚게 한 술로, 지금은 땅속 깊이 묻혀있었다. 이렇게 오래 묵힌 술은 그 수가 한정되어 있기에, 국빈을 맞이할 때나 황제의 생신 연회 같은 아주 중대한 행사에서나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일개 교위 한 사람 때문에 황제가 교주를 꺼내다니?
이는 정말로 하늘만큼 큰 은혜, 하늘만큼 큰 영광이었다.
진운서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보통 큰 은혜가 아니었다. 그녀가 곁눈질로 소근언을 힐끔 보니, 그는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쩌면 소근언은 교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운서는 순간 모든 사람이 그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얇은 천에 가려져 있던 진운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