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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대제의 아들들

20장. 대제의 아들들

천천히 꽃배가 기슭에 닿자, 여인들이 하나둘 배에서 내려갔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손 공공이 앞으로 나와 그들을 이끌었다. 모든 여인의 곁에는 궁녀가 한 명씩 배정되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진운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섬의 꽃들은 서로 아름다움을 경쟁하고 있었다. 멀리 배 위에서 볼 때도 아름다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눈이 호강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들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오직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이는 도저히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광경이었다.

진운서도 천천히 주변을 감상했다. 그때 사방에서 쟁반을 손에 받쳐 든 궁인들이 몰려들었다.

다시 앞을 향하던 진운서가 섬을 미처 다 구경하기 전, 갑자기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황제의 목소리였다.

이내 모두가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연회가 열리는 중정에서는 남녀가 양옆으로 나누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중간의 높은 단상을 사이에 두고 사내들이 앉는 좌석 뒤편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여인들이 앉는 좌석 뒤편에는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면 무대가 펼쳐질 단상과 상석에 앉은 황제가 잘 보일 것 같았다. 역시 규각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 대소저, 여기가 소저의 자리입니다.”

손 공공의 목소리를 들은 진운서가 작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손 공공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사내들이 앉는 자리 쪽에 가닿았다.

진운서는 한눈에 동쪽 아래쪽,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황자 초름경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소근언은 그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쪽을 흘끔거렸다. 그런데 막 시선을 거두려고 할 때, 하필이면 초봉가와 눈이 마주쳤다.

초봉가가 천천히 미소 짓자, 그의 입가에는 따스함이 물씬 풍겼다. 옆에 앉아 있던 초름경도 그 모습을 발견하고 무의식중에 초봉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러자 진운서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높은 단상이 그들의 시선을 차단하자, 초봉가는 금세 웃음기를 거두었다.

“황형(皇兄), 뭔가 발견하셨나요? 어찌 그리 기뻐하세요?”

초름경의 목소리에 다른 황자들도 차례로 초봉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초봉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삼황자 초려북이 끼어들었다.

“마음에 둔 여인 때문이 아니라면, 형님이 언제 이렇게 웃는 걸 본 적이나 있어?”

하지만 초려북이 듣기로 진부의 대소저는 황형에게 마음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진 태부의 성정을 보았을 때, 딸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그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초봉가는 사람들 앞에서 놀림을 당했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곧바로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넷째가 이번에 변방을 지킨 공이 크니, 이 황형이 축하의 인사를 전하마.”

말을 마친 그가 시선을 돌려 상석을 바라보았다.

“넷째의 곁에 있는 소근언이라는 그 교위가 부황의 신임을 받는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다면 황제가 이렇게 큰 연회에서 자신을 호위할 사람으로 그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근언이 상석에 함께 서게 되었으니, 아래에 앉은 황자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이 말이 나오자 황자들 뿐 아니라 여러 가문에서 온 공자들의 시선까지 모두 소근언에게로 쏠렸다.

이때 진운서 역시 자신이 찾기 쉬운 위치에 자리한 소근언을 발견했다.

소근언은 뜻밖에도 황제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석에는 모두 세 자리가 있었는데, 각각 황제와 황후, 그리고 태후의 자리였고, 그 옆에 있는 나머지 한자리가 바로 소근언의 것이었다.

뜻밖에도 이번 연회에서는 다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소근언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이 자리한 곳에서 이렇게 황제가 그에 대한 중시를 표현하다니,

그 모습을 본 진운서는 무척 기뻤다. 황제의 마음이 문신에게 기울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무장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어머, 폐하의 곁에 계신 저 분은 시위 옷을 입고 있지 않은데, 대체 누구죠?”

“그건 모르겠지만 정말 잘생겼네요. 다른 도성의 공자들과 비교해도 훨씬 당당한 기백이 느껴지는 분이네요. 저 정도로 폐하의 눈에 들다니, 대체 어느 집안의 귀공자일까요?”

여인들은 의아해하면서 분분히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의 빛나는 두 눈에는 호기심이 더해졌고, 어느 하나 소근언의 용모와 자태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는 목소리를 듣던 진운서는 자기도 모르게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청차가 담긴 잔을 가만히 들고 앉아 있었지만, 자꾸만 단상 위에 선 소근언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꼿꼿이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무장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저 사람은 도성 사람도 아니고, 귀공자는 더더욱 아니에요.”

그러던 중 어느 가문의 여인인지 모를 부인 하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식간에 여인들의 시선이 그 부인에게로 옮겨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운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고요? 그럼 왜…….”

‘세가 귀공자도 아닌데 어떻게 폐하의 눈에 들어 단상 위에 함께 오를 수 있었지? 말도 안 돼!’

차를 마시던 진운서도 동작을 멈추고 곁눈질로 방금 목소리를 낸 부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좌석은 바로 예부상서 부인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까 황후마마께서 부르셔서 입궁했다가 우연히 저 사람과 마주쳤었답니다. 분명 군의 일품 교위였어요.”

‘교위’라는 단어를 듣자 모두 그제야 진상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떤 규수 하나가 바로 거만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가세가 당당한 가문이라면 어찌 자기 아들을 군영에 들여보냈겠어요? 군사들은 모두 민간의 자제들이고, 혈통이라 할 만한 게 없지요. 단상에 오른 것쯤이야 뭐 별거라고요. 저런 걸로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곤 말할 수 없어요.”

교만한 목소리는 차츰 더욱 높아졌고, 그 규수의 표정에도 업신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규수가 앞장서 이렇게 말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여인들도 덩달아 맞장구를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이 소란스레 오가는 가운데, 곧 연회가 시작되려 했다. 이 중요한 순간, 갑자기 청량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흘려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낭랑하고 힘차며 재기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글쎄요, 그 말은 인정하기 어렵네요. 사황자 전하께서 평민의 자제이고 뿌리 없는 집안의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군영에 보내진 것이던가요?”

그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나오던 의견이 뚝 그치고 장내가 소란해졌다. 황가가 연루된 소란이라면 죄명이 무거워지는데, 그렇게 큰 죄를 감히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그 말에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몇몇은 시선을 돌렸고 몇몇은 고개를 숙이는가 하면, 몇몇은 괜히 찻잔을 꼭 쥐고 긴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앞장서 소근언을 흉보았던 젊은 규수가 이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하고는 당황하여 다급히 변명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일부러 제 말을 곡해하시는 건가요?”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진운서가 몸을 살짝 돌려 담담한 눈빛으로 그 규수를 바라보았다.

규수는 이유 없이 긴장하며 소매 속에 감춘 손을 꼭 쥐었다. 만약 진운서가 굳이 계속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러다 이 일이 밖으로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이런 큰 연회에서 그녀는 좋은 결실을 얻기는커녕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규수의 추론에 따른 것이지, 곡해라니요? 게다가…….”

여기까지 말한 진운서가 다시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 때문에 장내의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더욱 심각하게 고조되었다.

“조정에서 일하며 장래가 있고 없고는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소저의 말 한마디로 결정될 일이랍니까?”

진운서의 목소리는 경쾌했으나, 그녀의 말은 자칫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을 만 한 발언이었다. 아까의 그 교만한 규수는 물론이거니와 제일 먼저 입을 열어 소근언의 신분을 밝힌 부인의 낯빛 역시 새파랗게 변했다. 이내 그 부인이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역시 진가의 소저답게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몇 마디 말로 바로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하셨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높은 단상을 향해 있었다.

“이쪽이 너무 시끄러워 황후마마께서 눈치를 주셨으니, 이제 조용히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시지요.”

부인의 말뜻은 분명했다. 이 화제에 대해 다시는 논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진운서는 가볍게 웃었으나 그 눈매만은 몹시 날카롭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본 아까의 오만하던 규수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나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상석의 용의(*龍椅: 천자의 의자)에 앉아있던 황제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팔 소리가 더욱 커지더니 이윽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몹시 웅장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소리였다.

잠시 후, 단상 위로 군복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대열을 가다듬는 그들의 동작은 무척 빨랐다.

대형이 바뀔 때마다 나팔 소리도 따라 바뀌었다. 병사들은 아무리 어려운 대형으로 바꾸더라도 모든 걸음걸이가 통일되어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거의 몸에 닿을 정도로 발을 높이 들었고, 손을 들어 올렸다 놓을 때도 정확히 동작을 맞추어 움직였다.

진운서는 웃음을 머금은 황제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한 그의 눈동자에서는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이게 바로 대제의 장병이다. 비록 지금은 문신에게 치우쳐져 있기는 해도, 제왕으로서 수하에 능력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건 분명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 순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근언의 온몸에서 위엄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단상 위의 병사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아, 좋구나!”

황제의 용안에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연신 좋다고 외치자, 곧 나팔 소리가 멈추고 모든 병사가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이게 바로 대제의 아들들이다! 오늘 짐의 기분이 몹시 좋으니 모두에게 상을 내리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호탕한 웃음소리는 황제의 흐뭇한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중요한 시점에 감히 흥을 깰 수 없었던 조정의 대신들도 얼른 몸을 일으키고 예를 올렸다.

“훌륭한 아들들을 이렇게 많이 둔 것은 대제의 복입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오늘은 조정의 일은 모두 잊고, 모두 잔을 들어 마음껏 마시게나!”

말을 마친 황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대(大)태감이 얼른 술잔을 가져왔다.

순식간에 모든 조정 대신들과 부녀자들이 술잔을 손에 들었다.

술맛은 아주 달콤했다. 여인들이 마시는 술은 사내들의 것과 달리 향이 짙은 과일주였는데, 많이 마시지만 않으면 취할 리가 없었다.

이윽고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은 진운서가 황제가 기분 좋은 틈을 타 다른 문신들이 미처 훼방 놓을 겨를도 없이 말했다.

“황제 폐하, 호랑이처럼 용맹한 대제의 맹장들을 축하하기 위해 소녀가 성을 다해 올리는 것이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세 넘치게 주위를 울렸다. 연회장이 탁 트여 있었기에 진운서의 목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여인들이 자리한 좌석 쪽으로 향했다. 높은 단상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대체 어느 가문의 규수가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대담한 짓을 벌이는지 저마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의혹이 가득한 가운데, 복숭아색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오로지 총기 가득한 두 눈만이 보였다.

진형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딸이 이렇게 빨리 앞으로 나설 줄 몰랐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오는 딸의 당당한 모습을 보자 곧 근심이 사라졌고, 오히려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