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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유일한 바람

21화. 유일한 바람

“온평 이 개만도 못한 놈! 누구의 사주를 받고 주인인 나를 음해하는 것이냐!”

온여귀는 그제야 길길이 날뛰며 입을 열었다.

온평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며 허둥지둥 말했다.

“노야, 소인은 억울합니다. 제가 어찌 사주받고 노야를 음해하겠습니까?”

온부의 내부 사정을 좀 아는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저 온평은 분명 온 시랑을 이십 년 넘게 모시던 측근이라고. 온부의 대집사 자리에까지 오른 자란 말이지!”

“그 정도로 신임을 받던 자라면 돈 몇 푼에 주인을 쉽게 배신할 리가 있나?”

“그렇다면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곧은 사람인가 보네.”

누군가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말했다.

“다들 내 말 들어 보시오. 세상일 중엔 참 모를 일이 많지 않소? 온 시랑같이 인정머리 없는 파렴치한 밑에서 저 올곧은 사람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소?”

그의 말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박한’ 온여생도 뭔가 깨달은 듯 크게 말했다.

“열째 아우야, 이 형이 널 돕고 싶지 않은 건 아니나 사람이 거짓되게 살 수는 없지 않으냐? 하물며 우리 봉이는 이제 곧 회시를 보게 되니 아비 된 내가 그 아이의 앞날에 흠이 될 수 없네.”

“그게 무슨…….”

온여귀는 온여생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뭔가 말하려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냉정하게 그 모습을 살피던 온유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인과응보라더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화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건가?

하지만 온여귀는 한창인 장년의 나이였기 때문인지 전생의 노부인처럼 절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에게 있어 죽는 것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온여귀는 최소한 당장은 자신이 반격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그때 문득 어디선가 스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뽑는 소리였다.

소리가 난 쪽을 본 구경꾼들이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임 씨 손에서 장검 한 자루가 차가운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임 씨는 검을 들고 온여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뒤편에서는 시동 장순이 눈이 휘둥그레져 속삭였다.

“저건 세자의 장검 아닙니까?”

그냥 구경하러 온 건데 어쩌다 자기 주인의 패검이 온부 부인 손에 들어간 거지?

당금의 명문가 공자들은 다들 패검을 차고 다니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무공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패검은 옥 노리개나 마찬가지로 그저 장식용이었다.

정왕세자의 저 장검은 칼집이 특히 화려했다.

하지만 아무리 장식품이라고 해도 칼은 칼인지라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있었다.

임 씨는 그것이 누구의 검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슴에 쌓인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집을 만큼 거대한 분노를 풀고 싶을 뿐이었다. 이 검으로 온여귀의 심장을 꿰뚫어 그의 피가 뜨거운지 아니면 뱀의 것처럼 차가운지 보고 싶었다.

“어머니!”

그때, 가녀린 그림자가 뛰어나와 임 씨가 검을 들고 있는 쪽 팔을 껴안았다.

앞을 막아선 딸을 바라보는 임 씨는 비통함과 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유아야, 비키거라!”

오늘 저 온여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지 않으면 이 사무친 원한을 풀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 저쪽을 보세요.”

온유가 한쪽을 가리켰다.

임 씨는 멍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부인의 하얗게 센 머리가 보였고, 큰딸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둘째 딸의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어머니, 어리석은 짓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함께 있잖아요.”

전생에도, 그리고 이번 생에도 온유에게 중요한 건 부귀영화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행복한 삶도 꿈꾸지 않았다. 유일하게 바라는 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임 씨는 멍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 같기도 했고 아주 긴 시간 같기도 했다. 그녀는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온유는 어머니 손에서 검을 빼앗았고 임 씨는 순순히 응했다.

노부인의 기운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완청아, 이 어미가 말하지 않았더냐! 사람을 베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먼저 봐야 한다고 말이다! 저 잡놈에게 네 손을 더럽힐 가치가 있느냐?”

임 씨는 온여귀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말했다.

“쓰—레—기!”

말을 마치자마자 임 씨의 몸이 휘청했다. 세 글자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것 같았다.

온선이 잰걸음으로 달려와 임 씨를 부축했다.

“선아, 네 어미를 데리고 장군부로 돌아가 있으렴. 유아는 이 할미를 따라 입궁하자꾸나.”

노부인은 지팡이를 굳게 쥔 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온여귀를 힐끗 보고 돌아섰다.

“이 늙은이가 태후마마를 뵙고 사위 자랑 좀 해야겠구나.”

노부인은 힘찬 걸음으로 황궁으로 향했다.

온유도 서둘러 외할머니를 따라가다가 몇 걸음 못 가 갑자기 손에 든 장검이 생각이 난 듯 빙그르르 돌아섰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장순이 손을 크게 휘저었다.

“저희 세자의 검입니다!”

장순은 크게 소리치며 달려와 검을 받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손 하나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온유가 다가왔다.

“죄송해요. 저희 어머니가 오늘 좀 너무 흥분하셨어요.”

기삭이 검을 받으며 가볍게 웃었다.

“인지상정입니다. 소저께선 어서 가 보세요.”

소년의 순수하고 환한 웃음을 보며 장순은 어리둥절했다. 방금 내 뒷덜미를 잡았던 게 세자는 아니시겠지?

병약한 세자께 자신을 꼼짝 못 하게 할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온유는 기삭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치마를 잡고 잰걸음으로 노부인을 쫓아갔다.

구경꾼들은 볼거리가 없어지자 뿔뿔이 흩어졌다.

기삭은 장순을 데리고 정왕부로 돌아가면서 얼굴을 실룩거렸다.

장순은 그런 세자가 기분이 좋은 걸 보고 담아 뒀던 궁금증을 풀었다.

“세자, 아까는 왜 갑자기 저에게 큰 소리로 그 말을 하라고 시키신 겁니까?”

장순은 정말 의아했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세자께선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가 그 떠들썩한 광경과 마주쳤다.

하지만 구경하려면 그냥 구경이나 하실 것이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갑자기 그에게 세자가 한 말을 크게 따라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건 바로 “천하에 저런 몹쓸 짓을 할 사내가 몇이나 있다고 싸잡아서 욕하는 겁니까!”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온 집사가 온 시랑의 심복이었다는 것도 세자께서 시켜서 한 말이었지.

사실 그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큰 소리로 말하라고 해서 장순은 좀 졸아 붙었었다. 까딱 잘못해서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간 세자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처럼 성실하게 상전을 위하는 시동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는가?

“네가 보기에는 네가 소리쳤을 때 사람들 반응이 어떤 것 같았느냐?”

경쾌한 발걸음으로 걷던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더 떠들썩해졌지요. 다들 온 시랑더러 돼먹지 않은 놈이라고 쑥덕거리던걸요.”

“그걸로 된 거야.”

소년은 허리춤의 패검을 만지며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몇 마디 말로 더 떠들썩해졌으면 구경꾼 입장에 나쁠 것 없잖느냐?”

“그건 그렇네요.”

장순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인은 혹시나 세자께서 온가의 이소저 때문에 그러셨나 했습니다.”

말을 마친 장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응?

눈썹이 꿈틀한 소년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온 이소저를 도우면 안 되느냐?”

장순이 고민 없이 대뜸 대답했다.

“안 되고 말고요. 온 이소저가 세자를 훔쳐봤다는 소문이 파다했잖아요. 그런데 세자께서 지금 그분을 도와주려 했고, 그걸 온 소저가 알게 된다면……. 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지 않습니까? 온 소저는 이때다, 하고 세자의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고 할걸요?”

우리 세자님과 별다른 친분도 없으면서 담장을 넘어 훔쳐보다가 세자님 위로 떨어진 거잖아! 우리 세자님이 심성이 고운 걸 알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세자를 가까이서 모시는 충복으로서 세자의 순결함은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장순의 말에 소년은 흥미를 느꼈다.

그는 허리춤의 칼집을 꼭 쥐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럼요!”

장순은 주변을 훑어본 다음 소곤소곤 말했다.

“소인이 냉정하게 봤을 때, 온 소저는 겁이 없는 분 같더라고요. 다음에는 세자께서 목욕하는 걸 훔쳐보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

소년은 어이없는 얼굴을 하면서도 무슨 상황을 상상했는지 어느새 귀가 빨개졌다.

장순이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더 커졌다.

우리 세자께선 이렇게 순진하시니……. 내가 꼭 지켜 드려야 해!

“쓸데없는 소리!”

어느새 표정을 가다듬은 기삭이 말했다.

세자가 엄숙하게 말하자 장순은 고개를 끄떡였다.

“소인 조심하겠습니다.”

기삭은 장순을 놔두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곧게 자란 나무처럼 훤칠한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장순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닌데…….

그런데 혹시 정말 그 온 이소저 때문에 나에게 큰 소리로 떠들라고 시키신 거 아냐?

장순은 그 생각에 스스로 몸서리를 치며 극구 부인했다.

아닐 거야. 절대 아닐 거야!

한편, 온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온여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놀랍게도 장군부 노부인이 향한 곳과 같은 쪽이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온 시랑이 장군부 노부인을 쫓아가는 거야?”

“쫓아가기 힘들걸? 아까 보니 노부인 걸음걸이가 웬만한 젊은이의 것보다 빠르던데.”

“하긴, 시간도 꽤 지났고.”

구경꾼들의 말은 합리적인 추론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주관적인 바람에 가까웠다.

장군부 노부인은 태후를 뵙고 이 일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그럼 일이 더 흥미진진해질 것인데 만약 온 시랑이 그걸 막기라도 한다면 구경꾼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현재로서는 다들 온여귀가 악당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권선징악의 결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우리는 어쩌죠?”

상청이 상 씨의 옷소매를 붙들고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온여귀는 길을 서두르느라 상 씨 가족 세 사람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세 사람은 난처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상 씨는 ‘온부(溫府)’라고 쓰인 현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상 씨의 결정에 깜짝 놀란 상휘와 상청이 이구동성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하나는 십구 년, 하나는 십육 년 동안 학수고대하던 날이었다.

이렇게 말하자면 조금은 과장일지 몰라도, 최소한 두 사람이 철이 든 다음부터는 늘 온부에 들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랬기 때문에 상 씨의 말은 두 남매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하지만 상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그곳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사실 당당하게 온부의 대문 안으로 들어설 날을 두 남매보다 더 고대하던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감정적으로 대처할 때가 아니었다.

온부의 하인들 중 적어도 절반은 임 씨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아 그런 부모를 만났으니 부러워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