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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천인(贱人)



13화 천인(贱人)

자신을 향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남궁묵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정 씨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스스로 눈물이 날 정도로 내리친 후, 몹시 흐느끼며 이야기했다.

“저도 큰아가씨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출신이 저급하다곤 해도, 청백(淸白)한 집안 출신입니다. 사당에 제사도 모셨고, 나리께서도 저를 정실로 부위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앞으로 제가 어찌 살아갈 면목이 있겠습니까?”

“언니, 제 어머니께서 무슨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르셨기에 돌아오자마자 저희 어머니를 그리 못살게 구시는 것입니까?”

남궁주도 소리 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때마침 돌아온 남궁회는 여식의 이름문제로 안 그래도 매우 격노한 상태였던 데다, 돌연 정씨 모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더욱 화가 나 남궁묵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남궁주가 곧바로 남궁회의 품에 쏙 안겨 눈물을 터뜨렸다.

“아버지, 저와 어머니를 단양에 남게 해주십시오. 저희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또다시 남궁회가 분통을 터뜨리자, 정 씨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흑흑……. 소첩의 출신이 저급하여 큰아가씨의 눈에는 그저 천첩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나리, 소첩은 더는 살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다 정 씨가 돌연 일어나 옆에 있는 기둥에 제 몸을 들이받았다.

“부인, 안 됩니다!”

깜짝 놀란 남궁휘가 민첩한 동작으로 정 씨의 행동을 저지했다. 정 씨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동생 남궁묵의 명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남궁묵이 살짝 남궁휘의 팔을 잡아왔다.

“둘째 오라버니. 저분들이 지금 왜 울고 계신가요?”

곧 남궁휘가 믿을 수 없이 감격한 빛으로 몹시도 기뻐했다.

“묵아, 네가 드디어 나를…….”

퍽!

이내 기어이 정 씨가 옆에 있는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쳤다. 피가 흐르는 것까진 아니었으나, 정 씨는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내 정 씨가 고통에 일그러진 눈으로 황당함에 굳어버린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없어 그간 참 잘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세월이 참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궁묵의 의연한 대처에 자신의 과장된 행동까지 폭로되자, 당장이라도 남궁묵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만 싶었다.

분기에 젖어드는 정 씨와 반대로, 남궁묵은 차분히 입술을 뗐다.

“아버지께선 제가 사죄하기를 바라십니까?”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남궁회가 간신히 노여움을 다스리며 이야기했다.

“정 씨는 남궁가의 부인이다. 어머니라고 부르기 싫거든 부인이라고는 칭해야 하는 것 아니더냐? 그 엉망진창인 호칭을 당장 거두지 못할까!”

남궁묵은 아버지를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완부인이라는 호칭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누가 그렇게 칭하라 가르치더냐!”

“작년 스승님과 함께 성 밖 이씨 나리 댁 이부인의 병을 진찰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 댁의 애첩이 그렇게 불리더군요. 듣기론 이 부인께서 회임하셨을 때 기방에서 데려온 여인이라고 합니다. 이씨 나리 댁의 하인들이 뒤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이 부인께서 병환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시면, 이씨 나리께서는 그 애첩을 정실로 받아들이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버지, 기방이 어디입니까? 이 완부인도 기방에서 데려오신 것입니까?”

* * *

남궁묵의 말에, 결국 정 씨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졸도했다. 남궁주가 다급히 그녀를 부축한 뒤 서럽게 울부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한순간의 인연이라도 깊은 정을 쌓을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아무리 폐하의 고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두 분께선 엄연한 부부가 아니십니까? 아버지께선 정녕 계속 언니가 어머니를 모욕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입니까!”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남궁묵은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눈빛은 울고 있는 남궁주보다도 더욱 서글퍼 보였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오랜 기다림 끝에 안겨준 충격 탓에 처연히 세상을 떠나간 어머니와 그의 여식 남궁경이 남긴 기억이 선하게 남아 있었다.

곧 남궁서가 난처한 기색으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묵아, 앞으로는 그런 말을 듣지 마라. 부인……, 그래. 부인은 기방에서 데려온 분이 아니다.”

“그럼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이 부인이 울며 하소연할 때 저도 들었습니다. 집에 정식으로 초대된 이는 부인이고, 달려온 자는 첩이 된다고요. 집안의 안주인은 엄연히 정실부인 한 분뿐입니다. 안주인의 초대도 받지 않은 분이 스스로 첩실이 되러 찾아왔다면 그 불청객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까? 친정도, 출신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분들을 대체 뭐라고 칭해야 기강과 법도가 바로 서는 것입니까?”

정 씨를 부축하고 있던 남궁주는 순간 팔오금이 굽는 것이 느껴졌다. 과장된 연극을 보이던 정 씨가 이번엔 정말로 기절한 것이었다. 곧 격노한 남궁회가 소리쳤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네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그러는 것인지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당장 가서 규율을 제대로 배워오도록 하거라. 또다시 소란을 피웠다가는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이곳에서 했던 말을 한마디라도 밖으로 내보냈다가는, 그날부로 너희 목숨은 없는 줄 알거라!”

남궁회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인들에게 서늘한 경고를 남겼다. 하인들은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으론 남궁묵을 향해 진심 어린 감탄을 하고 있었다.

“부인을 방으로 보내어 쉬게 하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느냐!”

곧 남궁회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남궁주는 이런 갈무리가 몹시 불만이었지만, 그냥 울분 가득한 빛으로 남궁묵을 노려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남궁주가 정 씨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자, 대청은 순식간에 거대한 정적에 잠겨들었다.

이내 남궁묵은 복잡한 표정의 오라버니들을 바라보았고, 남궁서가 먼저 운을 뗐다.

“아우야, 묵아를 데리고 가서 쉬게 하여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러자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묵에게 이야기했다.

“묵아, 이만 가자. 내가 사람을 시켜 네가 머물 곳을 다 정리해 놓았다.”

남궁묵은 눈을 빛내는 남궁휘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쉰 뒤, 원하는 답을 주었다.

“둘째 오라버니께 수고를 끼쳐드렸습니다.”

남궁휘가 금세 환해진 얼굴로 몹시 반갑게 이야기했다.

“어서 가보자. 가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다시 바꿔주겠다.”

어느새 홀로 대청에 남은 남궁서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묵은 아직 자신을 큰오라버니라 칭하지 않고 있었다.

* * *

쨍그랑!

안뜰 정 씨의 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침상맡에 머리를 기댄 정 씨가 남궁주가 가져온 차를 바닥에 내던진 것이었다.

“어머니.”

“주아야……. 이 어미의 명이 참으로 고통스럽구나.”

넋을 놓고 있던 정 씨가 놀란 눈망울을 한 남궁주를 어루만지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남궁주는 서둘러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어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저희 편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남궁경, 아니. 남궁묵이 저리 의기양양한 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정 씨는 냉소를 지었다.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고? 네 아버지를 믿느냐?”

남궁주가 의아한 빛으로 되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아버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하……. 주아 넌 아직 모른다. 네 아버지가 정말로 우리를 위해 주셨다면, 방금 남궁경이 그런 소리를 할 때 그 아이를 그대로 두었겠느냐? 네 아버지는 줄곧 너를 아끼시기는 하지만, 오늘 네가 그 말을 했더라면 분명 호된 벌을 내리셨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께선 지금 제 아버지가 저보다 남궁경을 더욱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남궁주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남궁묵을 사랑했다면, 그리 오랜 시간 그녀를 단양에 홀로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남궁묵을 이제껏 홀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식을 묻거나 들으려 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정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궁주에게 짧은 한숨을 내쉬다가, 그냥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내가 그 계집아이를 얕본 것이다. 다음번에는 절대로 오늘처럼 부주의하지 않을 것이야!”

조금 전 들은 남궁묵의 날카로운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정 씨를 보며, 곧 남궁주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머니, 무엇이 걱정이세요? 언니 혼자서 무엇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월군왕부에 시집가기만 하면, 반드시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릴 것입니다. 어떤 수를 내어서라도 어머니께 꼭 부인 고명을 드릴게요.”

정 씨가 곧 남궁주를 포옥 품에 안았다.

“그래도 주아가 가장 효성스럽구나, 배은망덕한 두 아이와는 다르게…….”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사람은…….”

남궁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남궁주는 그리 총명하진 않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생판 바보는 아니었다. 제 어머니에겐 아들이 없기에, 이 초국공부의 후계자는 오직 장자 남궁서 하나뿐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의지해야 할 사람도 남궁서와 그의 아우 남궁휘밖에 없었다. 이대로 남궁묵에게 그들을 빼앗겨 버린다면, 손해는 오직 자신만 입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아요. 오라버니들께선 몇 년이나 언니를 만나지 않으셨으니, 당연히 그리움도 죄책감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의 10년이 넘는 우애가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 부디 성내지 마세요.”

그에 마음을 조금 진정한 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 네 말이 맞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공든 탑을 이대로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남궁묵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보자꾸나!”

“어머니께서 그러시다면 되었어요. 어머니, 그럼 저……. 황장손을 뵈러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정녕 황장손을 보러 갈 수 없나요?”

“그게……. 너는 지금 도대체…….”

때아닌 남궁주의 부탁에, 정 씨는 순식간에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찾아갔다가 타인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남궁주의 명성은 심각하게 추락할 것이 빤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주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눈은 오직 황장손을 향한 걱정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 저는 황장손이 너무나 걱정되어요. 게다가 황장손을 만나고 오면 저도 그와의 사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정 씨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연왕은 이미 남궁묵에게 마음이 기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위군맥의 앞날이 위태롭기 짝이 없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보단 월군왕과의 혼인이 더욱 큰 이득이라는 건 부러 말할 가치도 없었다. 여식 남궁주가 월군왕비가 된다면 황자비가 되는 것이니, 그때가 되면 남궁묵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정 씨가 이야기했다.

“그래, 이 어미가 널 도와주마. 허나 이번 일은 절대로 네 아버지가 모르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곧 남궁주가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