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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뒤늦게 찾아온 혈육 간의 정



14화 뒤늦게 찾아온 혈육 간의 정

남궁서는 아버지가 있는 서재로 왔다. 남궁회는 마침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곧 인기척에 고개를 든 남궁회가 남궁서를 향해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묵아는 몇 년 동안 혼자서 생활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데다가, 아무도 그 아이에게 규율이나 예의를 가르쳐 주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까지 와서 다시 남궁묵을 감싸는 남궁서를 보며, 남궁회가 곧 뭉클하게 웃었다.

“네가 그 아이를 많이 아끼는구나. 서아, 아무리 그래도 난 그 아이의 아비다. 호랑이가 아무리 흉악해도 어디 제 새끼를 잡아먹더냐. 넌 내가 그 아이를 어찌할까 두려운 것이냐? 내가 그 아이를 어찌할 것 같으냐?”

“감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 한이 서려 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일은 더는 논하지 않으마. 다만 앞으로 언행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거라. 지체 높은 귀족 아가씨가 입이 그렇게 험악해서 되겠느냐?”

“예,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 그 아이에게 이 혼사를 대신하게 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아와 황장손의 사이가 이미 그렇다 하니, 어찌하겠느냐. 규율에는 어긋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아이를 억지로 혼인시켰다가 큰 소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남궁가는 명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태자 전하와 황장손의 노여움까지 사게 될 것이다.”

남궁서는 그냥 침묵으로만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그 역시 아버지가 남궁묵에게 부디 이 일을 잘 설명해 주길 바란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대신 이 뜻을 전한다 해서 남궁묵이 이를 잘 들어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간 그들은 친오라버니와 친아버지로서 남궁묵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등한시하고 내버려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남궁묵이 과연 남궁가에 얼마만큼의 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일러주어라. 정강군왕 세자는 비록……. 하지만 정강군왕부의 맏며느리가 되고, 곁에 장평 공주님과 연왕 전하만 계신다면 그 누구도 감히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가 출가할 때 아비는 혼수를 두텁게 준비해 아이의 체면도 제대로 세워줄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묵아를 잘 설득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네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 볼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어머니를 먼저 만나 뵙고 난 후, 묵아를 보러 가겠습니다.”

“네가 알아들었으니 되었다. 네 어머니도……, 그동안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희 둘을 친자식 못지않게 길러주었다. 너는 초국공부의 적장자이니, 이 아비를 위해 남궁가에 다시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알아들었느냐?”

“예, 아버지.”

“가보아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남궁서가 떠난 후, 남궁회는 돌연 탄식에 젖어들었다. 큰 소란이 일어나, 남궁묵이 멋대로 이름을 바꾼 걸 추궁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떠올린 까닭이었다. 곧 남궁회가 종이 위에 커다랗게 ‘묵’ 자를 쓰곤 멍하게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 * *

성내 남궁가의 별원은 금릉 황성의 초국공부만큼 크진 않았지만, 서봉촌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집에 비하면 아주 큰 편이었다. 황제가 먼저 성내에 행궁을 지은 후, 황성의 권력가들 사이에 행궁 주위 별원을 짓는 게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비록 1년에 한 달 정도 머물까 하는 별원임에도, 황제가 하니 모두 따라 하는 추세였다.

운 좋게도 황제와 고향이 같았던 남궁회는 남들에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별원을 위치나 규모 면에서 더욱 특출 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남궁묵을 위해 준비한 별원도 상당히 근사했다. 남궁묵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는 남궁 형제는 물론, 남궁회의 면전에서 연극을 벌이고 있는 정 씨 모두 이런 것에 있어 남궁묵을 소홀히 대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정 씨는 남궁묵의 성정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악의가 없음을 알게 된 후론 더욱 인색하지 않게 대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궁회가 사는 본원 외에 가장 좋은 정원을 남궁묵에게 내주었다.

“묵아, 이 죽원(竹院)이 어떠하냐? 하인들에게 미리 손을 봐두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 아직 아무도 머문 적이 없어.”

그때, 매우 신나 하는 남궁휘의 목소리에 남궁묵이 문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궁묵 역시 이 별원이 6년 전에 지어졌고, 남궁 일가가 여태 한 번도 온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로써 새삼 남궁회가 참 황제에겐 못 미치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적어도 매년 자손들을 이 단양으로 보내 제를 지내건만, 남궁회는 단 한 번도 단양에 자손을 내려 보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좋습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곧 남궁묵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실제로 이 정원은 아주 근사했고, 구조나 풍격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취향에 매우 부합했다.

하지만 남궁휘는 매우 울적한 얼굴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둘째 오라버니와 꼭 이렇게 격식을 차려야겠느냐?”

남궁묵이 고요한 눈으로 남궁휘를 올려다보다가, 그냥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 역시 남궁휘의 노력을 모르지 않았다. 남궁서에 비하면 그는 더욱 순수하고 열렬하게 동생을 향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정말 잘 대해주고픈 동생 남궁경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까.

남궁묵은 남궁경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가 생전에 지닌 감정까지 생생하게 이어받은 건 아니었다. 다만 죽기 직전의 그 비통함과 가슴에 맺힌 원한은 실로 너무도 큰 부분이어서, 차마 잊히지 않고 아직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것뿐이었다.

남궁경이 정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원망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남궁묵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쓸쓸한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고작 11살이던 소녀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연이어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남궁묵은 남궁휘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남궁휘도 겨우 열세네 살이 된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남궁경의 기억으로써도 그를 이해했고, 실제로 남궁묵은 그와 함께 자란 적도 없기에 당연히 특별한 감정도 없었다.

“좋다, 묵아야. 일단은 푹 쉬도록 해라. 내일 나와 함께 성내 구경을 가보자꾸나.”

곧 서둘러 어두운 그늘을 가린 남궁휘가 명랑한 웃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남궁묵이 의아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오라버니께선 완부인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남궁휘가 다정한 미소로 남궁묵을 품속에 포옥 안고 말했다.

“그건 오라비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남궁묵은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만 쉬러 가보겠습니다.”

“기다려 보아라.”

그때, 남궁휘가 잠시 남궁묵을 불러 세운 뒤,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곧 한 중년 남성이 시녀 몇 명과 함께 들어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둘째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큰아가씨께서도 안녕하신지요?”

“이 사람들은 모두 네 시중을 들어줄 사람들이다. 너도 직접 한번 보거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주마. 괜찮다고 느껴지면 금릉에 데려가도 좋다. 이들은 모두 별원의 시녀들이다.”

남궁묵은 친절한 웃음으로 소개하는 남궁휘의 뜻을 곧바로 파악했다. 본래 별원에서 지내던 시녀라면 정 씨의 사람일 확률이 크게 낮아진 것이었다. 금릉으로 함께 간다 해도, 초국공부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궁묵도 이 문제에 관해 큰 우려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고로 배신은 믿음 뒤에야 오는 것이었다. 믿음을 주었던 이가 자신을 배신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남궁묵 스스로가 더 똑똑히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도 네 곁에서 보살펴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네가 집으로 돌아와 주었다. 그러니 국공의 아가씨도 지금처럼 소박하게만은 살 수가 없어. 여기 있는 동안 사람들과 교류도 해야 한다. 묵아, 네가 한번 잘 살펴보고 고민해 보아라.”

남궁휘는 남궁묵이 거절할 것을 걱정해 인내심을 품고 차근차근 권유했지만, 사실 그는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다. 남궁묵이 비록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짜 남궁경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시대의 규율과 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남궁묵은 본래 그리 좋은 사람도 아니어서, 이렇게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고 인권이 천대되는 이 시대에 대해 그리 큰 문제의식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남궁묵은 본래 암살자였다. 생명을 잡초 따위로 여기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생명을 그리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다. 여태 시녀와 함께 생활하지 않은 건 정말로 딱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초야를 떠나 남궁가로 돌아왔기에, 이 시대가 원하는 귀족의 신분에 맞게 장단을 맞춰나가야 했다.

“고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나 몇 명 남겨주십시오.”

이어진 남궁묵의 대답에, 남궁휘가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규율대로 하면 네 정원에는 반드시 우등 시녀 4명, 이등 시녀 6명과 어린 여자아이 12명, 그리고 이곳을 관리할 연식이 있는 하인 2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두 사람, 일단은 이 우등 시녀와 함께 생활하도록 해라. 나머지는 왕 총관(总管), 그대가 고르도록 해라. 부디 잘 생각하고 골라야 한다. 이 관사(李 管事)의 교훈을 절대 잊어선 아니 된다.”

남궁휘가 지시를 내린 왕 총관은 평소 매우 냉정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이 관사는 본래 남궁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단양의 모든 남궁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보직에 있었다. 그럼에도 여태 남궁묵을 등한시해 와서, 결국 남궁회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고 초국공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초국공부에서 쫓겨나면 최소한 이 저주(*滁州: 지명)에선 다른 누군가가 다시 데려가 주는 경우도 없었기에, 이 관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결말을 맞은 셈이었다.

“예, 둘째 도련님. 너희들, 어서 둘째 도련님과 큰아가씨께 감사드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둘째 도련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소인들, 큰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남궁휘에게 선택받은 시녀들은 몹시 기뻐했다. 그들은 줄곧 남궁가의 별원을 지켜오며 상대적으로 수월한 일을 맡았지만, 또 그만큼 특별한 전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1년 내내 주인을 만나보지도 못했으니 하사품 같은 것을 받은 경험도 없었다.

그런 그녀들이 단숨에 남궁가 큰아가씨 곁을 지키는 우등 시녀로 발탁된 것이었다. 거기다 남궁묵을 잘 모시면 금릉으로까지 데려가 주겠다고 하니, 선택된 네 시녀들은 단숨에 모두의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남궁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먼저 들어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응, 묵아. 어서 가보아라. 나머지는 오라비가 알아서 정리하마.”

남궁묵이 걸음을 옮겼지만, 갓 부임한 네 시녀들은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묵은 따로 그들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심지어 눈길조차 건네질 않았다. 그래서 너무도 남궁묵의 냉담한 반응에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들을 혹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인지, 온갖 걱정이 밀려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남궁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어서 따라가지 않고 무엇 하느냐!”

다소 어벙해 보이는 시녀들의 모습에, 남궁휘 역시 몹시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남궁묵을 제대로 잘 보필해 줄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었지만, 곧 떠오른 정 씨의 시녀들에 대한 기억에 곧바로 밀려든 생각을 털어냈다. 감히 동생을 무시하는 시녀보단 차라리 어눌한 시녀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았다. 잘 가르쳐 보다가 안 되겠으면, 또다시 더 능력이 좋은 시녀들을 발탁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