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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앗!

눈부신 빛이 안타레스 백왕성의 외벽을 가로질렀다.

콰콰콰쾅!

성 전체가 흔들리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일이냐!"

홀을 통해 흑발의 20대 청년이 달려왔다. 현재 백왕성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안타레스 기사단의 단장, 아스레일 경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방에서 단장으로서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기사단의 단장쯤 되면 단순히 검술이 뛰어나고 무력이 높은 것만으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기사와 병사들의 훈련 스케줄을 짜고 백왕성 방어 상태를 점검하며 기사단에 딸린 마부나 하인, 시종들을 관리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평소처럼 열심히 이것저것 계산해 가며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뇌성 같은 굉음이 울리며 발밑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아스레일 단장님!"

정신없이 걸음 옮기는 아스레일 옆으로 건장한 중년 기사가 따라붙었다. 안타레스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헌트 경이었다.

"오, 헌트 경!"

헌트 경에게 다가가며 아스레일이 물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백왕성에서는 이런 난리통이 벌어질 때 보통 제일 먼저 의심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었다.

"혹시 러스 경과 타시드 경이 과하게 날뛰시나?"

등 뒤에서 억울해하는 답변이 들려왔다.

"우리 아니오!"

"그러게! 억울하다!"

러스와 타시드였다. 두 사람 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진동을 느끼고 놀라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아스레일의 안색이 굳었다. 두 사람의 짓이 아니라면 이는 대체?

러스가 소음이 울린 쪽을 바라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하오, 이건 오러의 기운입니다."

타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도 처음 접해 보는 투혼이다."

타이밍 좋게, 경비병 하나가 헐떡이며 달려와 소리쳤다.

"적습입니다, 단장님!"

아스레일이 혀를 찼다.

"젠장, 하필 백왕님께서 자리를 비운 이 시기에...."

무장을 갖춘 뒤 아스레일이며 러스, 타시드와 헌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굉음이 울린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성벽 주위에는 안타레스 기사단과 백왕성 경비대가 모여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일부는 무너진 파편에 깔린 병사들을 구하고 일부는 반파된 외벽 위로 올라 밖을 바라보고 있다.

외벽의 상태를 본 순간 러스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이거?"

성벽은 단순히 무너진 정도가 아니었다. 흩어진 성벽의 파편, 그 위의 절단면이 놀랍도록 반질거린다. 오러 유저인 러스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는 블레이드 오러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단 일 검에 이루어진 일이다!

타시드가 기가 차 중얼거렸다.

"...이걸, 한 번에 썰었다고?"

이 절단면의 길이는 거의 수십 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최강의 오크 투사, 푸른 곰의 칼켄이 전력을 다해도 이렇게까지는 못할 것이다.

네 사람은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백왕성 밖, 숲과 이어진 넓은 언덕에 한 무리의 일행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 열 명 정도와 서른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새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풍채 좋은 노인 하나가 뒷짐을 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레일이 의아하며 중얼거렸다.

"누구지, 저들은?"

다 합쳐 봐야 마흔이 조금 넘는 이들, 백왕성을 노리고 온 적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적은 숫자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는 아스레일처럼 느긋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 러스... 저 철 갑옷 입은 친구들 전부 투사인 것 같은데?"

"그렇군, 타시드... 어떻게 저리 많은 오러 유저가 백왕성에...."

두 사람 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한을 느꼈다.

저 기사들은 굳이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지 않았다. 오러를 외부로 발현하지 않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내부에 갈무리된 광포한 힘이 10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어넘어 와 닿고 있었다.

게다가, 저들 앞에 선 저 노인은 대체?

타시드가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저 괴물은 뭐지? 어떻게 인간에게 저런 투혼이 느껴지는 거냐?"

그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등줄기로 냉기가 스쳐 지나간다.

강자, 그것도 어마어마한 강자였다. 이제껏 많은 오러 유저를 접해 본 러스조차도 경악할 정도로.

아스레일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가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그대는 누구요? 안타레스를 적대한 자, 이름을 밝히시오!"

노인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바슈탈론의 바나텔, 세이어의 뜻에 따라 이곳에 왔노라...."

그리 큰 음성이 아닌데도, 그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도 노인의 목소리는 기이하게 백왕성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공포를 느끼며 사색이 되었다. 병사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 이들도 있었다.

"허억!"

"으어어...."

음성에 담긴 힘만으로도 심력이 약한 이를 무릎 꿇리는 절대적인 힘!

러스며 아스레일, 헌트 경 등 정신력이 강한 이들도 공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음성에 담긴 힘의 공포는 이겨 냈으되, 그 의미가 주는 공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창백해진 얼굴로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저, 정녕 검성 바나텔이란 말인가?"

노인이 느긋한 어조로 외침을 이었다.

"안타레스의 백왕에게 고한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 무릎 꿇고 세이어의 이름 앞에 그 죄를 고하라!"

☆ ☆ ☆

바나텔의 뒤에 서 있던, 대부분 40~50대의 중장년인인 열 명의 오러 유저들.

그들 중 갈색 머리에 중후한 인상을 한 기사가 백왕성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할라인 왕국의 이름 높은 오러 능력자, 카메룬 경이었다.

"분위기 보니까... 어째 권왕은 자리 비운 것 같군?"

바실리 왕국의 오러 유저, 왈그란 경이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렇구려. 그리고 오러 유저도 두 명밖에 없어 보이는데?"

오러 유저인 그들은 기감만으로도 대충 백왕성 내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라임 왕국의 게블릭 경이 혀를 찼다.

"안타레스 백국에는 오러 능력자가 열 명 가까이 있다지 않았나? 그래서 이런 짓까지 해 놓고는...."

검성 바나텔과 함께 이 자리에 온 열 명의 오러 유저들이 저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바슈탈론 제국이 아닌, 대륙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던 타국의 오러 유저들이었다.

현실적으로 전쟁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바슈탈론 제국은 권왕 레펜하르트를 벌하기 위해 동등한 방식을 쓰기로 결심했다. 레펜하르트가 제플린을 침략했을 때 했던 짓처럼 강력한 오러 유저들만을 모아서 소수의 초인들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는 현재 파악된 것만 아홉. 그나마 한 명 죽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이쪽도 최소 열 명 이상의 오러 유저는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바슈탈론 제국이라도 왕실에 충성한 오러 능력자의 숫자는 열한 명뿐.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만약 그들을 모두 잃게 된다면 제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래서 바슈탈론 제국은 자국의 오러 유저를 동원하는 대신 대륙 각국에 협박성 전언을 보냈다.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이어에 반기를 드는 이단자를 처벌하고자 하니, 힘을 보태 주길 바란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으면 다른 나라들도 이래저래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오러 유저만으로 벌하자는 제국의 요구까지 반대할 수는 없었다. 군대를 보내라는 게 아니라 개인을 요구하는 것이니 명분이 서질 않는 것이다.

물론 오러 유저의 존재는 각국의 주요 전력이니 이 또한 들어주기 힘든 요구인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은의 현자가 뒤에서 은밀히 영향력을 발휘하니, 결국 각국에서는 왕국에 충성하는 여섯 명의 오러 유저들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테이칸 왕국 출신의 자유 기사, 마라드가 입술을 삐죽였다.

"자루드 시에서도 순 허약한 자들밖에 없었는데... 여기서도 무의미한 학살을 해야 하는 거요?"

세이어 교단 역시 마라드를 비롯한 네 명의 오러 유저를 동원했다. 교단 내의 오러 유저가 아닌, 교단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오러 유저들이었다.

대륙에 현존하는 인간 오러 유저의 숫자는 거의 일흔 가까이 된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각 왕국에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다.

오러를 각성하려면 극한의 무武를 깨달아야 하니, 그 특성상 오러 유저 중에는 속세의 권력이나 지위에 연연치 않는 구도자적인 성격을 지닌 이가 상당히 많았다. 각국의 오러 유저로 활동하는 이는 절반 정도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초국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명성 높은 권황 제라드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분명 바실리 왕국 출신이지만 바실리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은 자유로운 무인이었다. 바실리 왕국에 등록된 오러 유저는 기사단장인 탈리온 경을 비롯해 세 명, 그 숫자에 권황 제라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출신만 따지면 권왕 레펜하르트도 바실리의 오러 유저이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봐 주지 않는 것처럼.

마라드가 불만을 이었다.

"그냥 권왕만 해치우고 끝내면 될 걸, 왜 애꿎은 이들까지 죽여야 하는 거야?"

마라드의 투덜거림에 대륙 남부의 소국, 그린드 왕국 출신의 오러 유저 르카완이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않소? 제국의 요구는 권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라는 것이었으니."

다들 바슈탈론 제국의 억지에 끌려나온 처지라 표정이 편치 않았다. 솔직히 힘을 앞세운 제국의 억지에 환멸도 느끼고 있었다. 자기네 피는 보지 않고 남의 힘으로 뜻을 이루려 하다니, 실로 강대국의 횡포가 아닌가?

하지만 바슈탈론 제국도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 바나텔을 투입해 모범을 보였으니 딱히 비난을 할 명분이 없다.

차탄 공국 출신이지만 공국에 환멸을 느껴 대륙을 떠도는 오러 유저, 데크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깔끔히 마무리하고 대가나 제대로 챙깁시다."

환멸을 느껴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출신이 출신이니만큼 돈독 오른 차탄의 분위기에서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열 명의 오러 유저가 어슬렁어슬렁 백왕성을 향해 걸어가며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뒤에 서 있던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이들은 정규 병력이 아니라 마부며 시종, 하인 등 오러 유저들의 뒷바라지를 시키기 위해 제국에서 제공한 이들이었다. 그래도 각국의 '귀하신 몸'들을 모셨는데 자기 손으로 잡일을 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여튼, 다들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노인, 바나텔이 새하얀 수염 사이로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쯧쯧, 신의 뜻을 행하는 성스러운 일이거늘 어찌 다들 저런 태도를 보이는가?

자루드 시에서도 그랬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들이다.

의욕 없는 오러 유저들의 머리 위로 바나텔이 중후한 음성을 터트렸다.

"무엇들 하고 있나! 설마 저 이단자들의 수괴가 나타날 때까지 여기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셈인가?"

바나텔의 호통에 오러 유저들이 표정을 구겼다. 다들 자기 동네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던 이들이다. 오러를 각성한 이래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반말로 호통을 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으음...."

"크윽, 반말 들어 본 건 20년 만이구먼."

"오러 각성 후엔 아버지한테도 반말 들어 본 적 없는데...."

하지만 바나텔은 그들보다 훨씬 윗줄의 무인이며 또 그들의 스승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또한 바슈탈론 제국 최강의 오러 유저이기도 했다.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어느 것 하나 비교가 되질 않으니 아무리 오러 유저라 한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쩝, 알겠수다."

"가겠습니다, 검성."

"일단 저것들은 정리를 해야겠군요."

오러 유저들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로 무기를 들었다. 저마다 전신의 오러를 무기에 불어넣어 강렬한 파괴의 빛으로 바꾸었다.

부웅! 부웅! 우우웅!

백왕성 앞을 가로막고 열 줄기의 블레이드 오러가 찬란한 빛을 밝혔다.

☆ ☆ ☆

안타레스 백왕성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브, 블레이드 오러다...."

"세상에... 오러 유저가 저렇게 많이...."

안타레스 기사단을 비롯, 백왕성 경비대며 하인들과 시종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성 밖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이들에게 있어 블레이드 오러의 존재는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레펜하르트를 비롯한 온갖 오러 능력자들이 대련 펑펑 해 대며 오러를 선보이곤 했었으니까. 그래서 별로 두렵다거나 하는 감정을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적의 손에 구현되고 나니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졌다.

한 명, 한 명이 수십, 수백 명을 참살할 수 있다는 초인.

무의 극의에 다다른 이들의 증명인 저 파괴의 빛 무리가 무려 열 줄기나 빛나고 있다.

"으음...."

아스레일이 침울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비록 상대에게 군세가 없다고는 해도 열 명의 오러 유저라니? 현재 백왕성에 있는 안타레스 기사단과 경비대 정도는 저들 중 두세 명만 나서도 싹 쓸려 버리리라.

'이쪽은 러스 경과 타시드 경뿐인데....'

도저히 상대가 될 리 없다. 저 정도면 백국의 모든 오러 유저가 총동원되어야 겨우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다.

심지어 저들 뒤에는 그 이름 높은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 바나텔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모두 나서도 감당할 수 없을지도....'

아무리 권왕 레펜하르트라도 수십 년 동안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친 저 노검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감히 들지 않았다.

아스레일은 눈을 감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내 운명도 여기까지인가....'

이제껏 안타레스의 적들이 맛보았던 절대적인 절망, 그것을 이제 자신들이 느끼고 있었다.

한편, 러스와 타시드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타시드?'

'어쩔 수 없지 않나, 러스?'

현 상황에서 백왕성의 전력은 감히 저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붙어 봐야 필패, 반드시 몰살당한다. 근성과 열혈로 때우기엔 오러 유저의 숫자 차이가 너무도 극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만약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남은 백왕성의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저기 서 있는 저 노인, 겉으로는 근엄해 보이지만 등 뒤로 차가운 살기를 연신 뿌리는 바나텔의 태도를 보면 결코 자신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미 아스레일이 수하를 시켜 백국 각지의 마탑에 전갈을 보냈다. 아라난 그라드로 시찰을 나간 레펜하르트 일행과 각 종족의 최강자들이 전력을 다해 달려와 준다면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다.

물론 아무리 빨리 와도 최소 한나절 이상은 걸리겠지만....

"저자들을 상대로 한나절을 버텨야 하는 건가?"

모두 모인다 한들 저들을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만....

"역시 인간은 무서워. 우리는 모든 종족을 모두 모아서 겨우 이 숫자의 투사들을 모았는데, 저들은 그냥 마음만 먹으면 투사 열 명쯤 간단히 보낼 수 있단 말이지?"

러스와 타시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차례대로 뇌까렸다.

"그래도 손 놓고 죽어 줄 수는 없지, 타시드?"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겠지, 러스!"

두 사람이 각오를 굳히며 서로를 향해 웃었다.

러스와 타시드가 각자 롱 소드와 참마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성벽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허업!"

"타앗!"

성벽 위에서 두 사람이 뛰어내리자 전진하던 오러 유저들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러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크게 롱 소드를 휘둘렀다.

우우웅!

창공처럼 맑고 청명한 블레이드 오러가 칼날을 타고 올라 빛났다.

"나는 테네스의 검이자 안타레스의 사이러스!"

타시드도 참마도, 다카르를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섬광이 번득이며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라 도신刀身을 감싸 안았다.

"나는 푸른 곰 부족의 투사, 타시드!"

러스와 타시드가 열 명의 오러 유저를 향해 블레이드 오러를 겨누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터트렸다.

"그대들에게 도전하겠다! 누가 나의 도전을 받겠는가?"

☆ ☆ ☆

압도적인 숫자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용맹스럽게 나선 러스와 타시드.

이들의 용기는 분명 폄훼할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가 만용을 부려 이런 짓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종족들과 달리 인간들은 명예와 기사도를 중시한다. 차탄 공국의 썩어 빠진 기사들이야 아예 작정하고 합공 연습을 하지만, 무릇 제대로 된 기사라면 스스로의 힘과 무예에 자부심이 있다. 그러니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하여 다른 이와 힘을 합치는 일을 치졸하고 비열하다고 여긴다. 이는 기사 출신의 오러 유저도, 아니면 그냥 자유로운 무인 출신의 오러 유저도 예외는 아니다.

즉, 러스와 타시드가 이렇게 정식으로 도전을 한 이상 저들도 홀로 나와 이들을 상대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그들의 노림수였다.

검을 겨눈 채 러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봐야지.'

저들 모두를 동시에 상대한다면 아무리 러스와 타시드가 강하다 한들 금방 당하겠지만, 일대일 대결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지원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단지 문제는, 노림수가 너무 뻔하다 보니 상대인들 짐작을 못 할 리가 없다는 점인데....

"흥! 이단자의 주구에 짐승이나 다름없는 미천한 것이 잘도 명예로운 도전을 입에 담는구나. 시간을 끌 생각인가? 가소롭다!"

아니나 다를까, 바나텔은 두 사람의 내심을 바로 알아챘다. 워낙 노골적으로 드러나니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굳이 그가 이렇게 나온 이유가 있었으니까.

바나텔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비열한 승리는 원치 않는다. 좋다! 도전을 받아 주마!"

일대일 대결은 무인의 명예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시된다. 기사도의 특성상 알면서도 그들의 도전을 받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가 안 보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설마 검성씩이나 되는 인물이 나같이 까마득한 후배랑 대뜸 검을 겨루겠다고 할 리는 없고, 아마 저들 중 누군가와 겨루게 될 거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어!'

과연, 바나텔이 오러 유저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저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러스의 예측이 살짝 빗나갔다.

"음? 그, 그게...."

"일대일이라... 그건 좀...."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내는 열 명의 오러 유저들, 대륙 각지에서 모인 그들이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딱히 이들이 목숨을 아까워하거나 명예를 모르는 무뢰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자와의 결투는 무인의 꿈과도 같은 것, 다른 상황이었다면 다들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다른 오러 유저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러 유저는 서로의 기술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러 유저끼리는 되도록 대련도 잘 하지 않으며 자신의 기술을 드러내는 행위를 극도로 꺼리곤 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무려 열 명, 검성 바나텔까지 합치면 열한 명의 오러 유저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밑천을 저들 앞에서 드러내라고?

차라리 모두 다 같이 싸우는 것이라면 서로 기술이 드러날 테니 억울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여기서 나선다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기술만 파악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러스나 타시드가 기술 숨기고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으로 싸울 만큼 만만해 보이는 적수도 아니고.

"저놈들 아무리 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그냥 일대일이면 모를까,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는 좀...."

다들 대놓고 빠지지는 못하지만, 나서지도 않은 채 연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무나 객기 부려서 나가 주길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면 자신은 상대의 기술을 파악해 약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신 다른 이들을 힐끔거리는 오러 유저들의 작태에 바나텔이 인상을 썼다.

"끄응...."

하지만 저들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저들이 대륙 각지에서 모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제국 내의 오러 유저들이었다면 저렇게까지 소심하게 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저들은 단순한 무인이 아니라 각국 전력의 중추, 자유로운 오러 유저들이라도 각자 인연을 맺거나 책임진 세력이 있는 몸이었다.

함부로 자신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곧 국가 전력의 약화로 이어지고, 이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결코 택할 일이 아니다. 기사도에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개인의 명예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할 수 없군.'

바나텔도 제국을 섬기는 몸, 저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화는 났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겁쟁이라 욕할 만큼 그는 생각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혀를 차며 바나텔이 뒷짐을 진 채 앞으로 나섰다.

"좋다! 이단자의 주구들아! 나, 바슈탈론의 바나텔이 그대들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러스의 안색이 굳었다. 타시드가 당황하며 러스를 바라보았다.

'어? 이게 아니지 않나, 러스?'

'끙, 할 수 없지.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잖아?'

상황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흐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침을 꿀꺽 삼키며 러스는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검성 바나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륙 전역에 위명을 떨치며, 최강의 검사로 칭송받는 이 시대의 절대자.

풍겨 오는 기세만으로도 감각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러스는 꺾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굳건한 의지로 검을 겨누었다.

"테네스의 사이러스가 그대에게 도전하겠소!"

그가 먼저 바나텔을 상대한다면, 그걸 본 타시드는 조금이라도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겠지.

친구를 위해 러스가 먼저 바나텔에게 도전했다. 러스의 내심을 깨달은 타시드가 발끈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다! 푸른 곰의 타시드가 그대에게 도전하겠다!"

서로 먼저 도전하겠다며 다투는 두 사람을 보며 바나텔이 고개를 저었다. 참 아름다운 우정이긴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하룻강아지 둘이서 먼저 범에게 먹히겠다고 날뛰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바나텔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귀찮다! 둘 다 동시에 덤벼라!"

러스와 타시드가 귀를 쫑긋 세웠다. 두 사람이 서로를 힐끔거리며 시선을 교차했다.

둘이 동시에 덤비라고? 이는 기사도의 명예에 크게 누가 되는 일이다. 바나텔은 지금 두 사람을 명예도 모르는 무뢰배라 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이종족들과 어울리며 많이 둥글어진 러스였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뼛속까지 기사로 자라난 몸이었다. 오크의 전통 역시, 한 명을 상대로 합공하는 것은 심각한 불명예다.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홀로 덤벼서는 그저 목숨을 날리는 일일 뿐일세. 러스"

"어쩔 수 없군, 타시드. 불명예스러운 일이나 저들을 지키기 위함이니...."

비록 신념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자신들이 패하면 백왕성의 애꿎은 목숨들까지 모조리 날아간다. 명예를 따질 때가 아니다.

결심한 러스가 오러를 격발시켰다.

"타아앗!"

각오를 굳힌 타시드도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시켰다.

"나의 맹우, 다카르여!"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불길처럼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두 사람이 기합을 터트리며 동시에 몸을 날렸다.

4

날아드는 푸른색과 청록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보며 바나텔은 차분히 검을 뽑았다. 칼날에서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마치 보석처럼 맑고 영롱한, 최상급 루비를 연상케 하는 빛이었다.

바나텔이 팔을 휘둘렀다. 선홍의 오러가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를 받아쳤다.

파아앗!

오러 파문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갔다. 강렬한 반발력이 일어나며 러스와 타시드가 동시에 뒤로 튕겨 난다. 그러나 둘 다 밀쳐지지 않고 바로 몸을 회전시켜 기세를 흘렸다. 이런 직선적인 반격에 맥없이 밀려날 만큼 러스와 타시드는 하수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흘린 기세를 타고 재차 후속타를 날렸다.

"하압!"

러스의 칼날이 바나텔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타시드의 참마도가 파공음을 날리며 허리를 노렸다. 검성의 검이 선홍의 궤적을 남기며 크게 원을 그렸다. 두 사람의 공격이 도중에 가로막히며 다시 오러 파문이 터져 나왔다.

콰앙!

이번엔 바나텔이 공세를 취했다. 원을 그린 움직임을 거두고 자세를 잡은 뒤, 섬광 같은 찌르기를 날린다.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검광이 상대에게 쇄도한다.

러스와 타시드가 저마다 독자적인 스텝을 밟으며 공세를 피했다. 바나텔의 공격은 분명 빠르고 위력적이었지만, 대신 직선적이고 단순했다. 상대의 움직임이나 오러의 흐름을 통해 충분히 궤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어린 것들이 몸놀림이 제법이구나!"

칭찬을 던지며 바나텔이 더더욱 공세를 강화했다. 선홍의 블레이드가 허공 가득 빛의 궤적을 남기며 칼의 춤을 춰 댔다. 러스와 타시드도 스피드를 올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나텔의 검을 차분히 쳐 내거나 혹은 피하며, 자신에게 유일한 거리를 점유한다. 오러 유저 정도의 경지가 되면 공방은 그 자체로 영역 다툼이 되어 버린다. 러스도 타시드도 비처럼 쏟아지는 바나텔의 참격을 피해 연신 오러를 뻗어 냈다.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정신없이 어우러지며 파괴의 비명을 질렀다. 공격이 빗나가거나 가로막힐 때마다 새나간 파괴의 빛이 주변의 대지를 대패처럼 죽죽 밀어 댔다. 흙과 돌조각이 톱밥처럼 허공으로 날리고 땅거죽이 벗겨져 땅 위로 돌돌 말렸다.

세 사람의 오러가 부딪칠 때마다 그 충돌의 여파가 빛의 원이 되어 주위를 사정없이 부수고 있었다. 과연 오러 유저다운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콰콰콰쾅!

귀 따가운 폭음 속에서 백왕성 위쪽의 아스레일 경이며 기사와 병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오!"

처음에는 꼼짝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러스와 타시드가 제법 잘 싸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2 대 1의 대결이라고는 하지만, 저 '검성'과 호각을 이루고 있다니!

"역시 러스 경!"

"과연 타시드 님이시다!"

모두의 얼굴 위로 희망이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으음....'

러스가 살짝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한데....'

쏟아지는 바나텔의 참격을 걷어 내며 타시드도 표정을 구겼다.

그들은 분명 저 '검성' 바나텔과 동등한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바나텔의 검술이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러스와 타시드의 실력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바나텔의 검술이 너무 평범했다는 쪽이 정답이었다.

저 이름 높은 검성, 바나텔의 검술은 전혀 특이한 점이 없었다. 그냥 빠르고 위력적일 뿐이었다. 물론 스피드와 파워는 경지에 오르면 그 자체만으로도 궁극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오러 각성자끼리의 전투라면 검술이나 전술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승부 요인인 것이다.

그런데 바나텔의 검술은 너무 단순했다. 처음에는 혹시 페인트인가 싶어 경계도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일반 기사 수준의 검술과 비교하면 충분히 일류급이었지만, 오러 유저가 보기엔 너무 정직하고 허점투성이였다.

이상하다.

검성의 실력이 고작 이것일 리가 없다.

'그냥 장난치고 있는 것인가?'

그럴 법도 했다. 검성이 보기에 러스나 타시드나 한참 아래의 하수일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또....

"어험!"

헛기침을 하며, 러스와 타시드의 공격을 바나텔이 근엄한 표정으로 걷어 냈다. 선홍의 블레이드 오러가 빛을 발하며 반격해 두 사람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공방 일체가 아니라 일단 방어 자세를 취한 후 공격에 들어선 것이라 충분히 피할 여유가 있었다.

몸을 틀어 피하며 타시드가 안색을 굳혔다.

'장난치는 것치곤 너무 진지해 보이는데?'

바나텔이 여유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한 손만으로 빠르게 검을 휘둘러 러스와 타시드의 합격을 무난히 막아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표정은 차분하여 마치 뒷동네 마실 나가는 할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제대로 검술을 펼쳤다면 진작 두 사람을 쓰러트릴 수 있을 텐데도 바나텔은 정직하고 단순한 공격만 구사하고 있었다.

살기를 풀풀 날리는 걸 보니 일부러 봐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심지어 러스는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검성이라는 이름이 그냥 허명이었나?'

하지만 첫 등장 때 보였던 그 엄청난 기세, 그것은 결코 허세로 꾸밀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어쨌든, 이대로 계속 눈치만 볼 수는 없다. 러스와 타시드가 서로에게 눈짓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방심하고 있는 이때가 기회다!

"허어업!"

기합과 함께 러스가 롱 소드를 휘두르며 복잡한 푸른 궤적을 만들어 냈다. 블레이드 오러가 어지러이 난무하며 화려한 검의 꽃을 피웠다.

폴링 블로섬Falling blossoms(흩어지는 꽃잎)!

이니야 덕분에 영감을 얻어 만든 검술이었다. 허공 가득 푸른 검화劍花가 흐드러지게 창궐했다. 빛의 칼날이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바나텔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아아!"

타시드도 두 팔 근육을 불끈거리며 포효를 터트렸다. 참마도, 다카르가 백열하며 동시에 좌우 연격을 뿜어낸다.

푸른 전갈의 습격!

좌측과 우측 횡 베기를 거의 동시에 날리는 이 연격은 아무리 강인한 오러 유저의 육체라도 그 반동을 감당하기 힘든 호쾌한 동작이었다. 오크 중에서도 최강급 육체를 지닌 타시드 정도만이 가능한 검술이다.

쌔애애액!

파공음과 함께 두 사람의 참격이 바나텔의 사방을 점유한 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나텔이 연달아 자신의 주위에 검의 원을 그렸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의 궤적이 십수 개의 원형 방패가 되어 공격을 모조리 가로막았다.

그 순간 러스가 눈을 빛냈다.

청광의 검화는 두 번 핀다. 흩날리는 오러의 꽃잎은 눈속임일 뿐, 그 속에 숨겨진 진정한 일격이 불을 뿜었다.

풀 블로섬Full bloom(만개하는 꽃잎)!

타시드도 고함을 질렀다. 전갈의 좌우 집게발은 미끼일 뿐, 진정 상대를 제압하는 일격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독의 꼬리다! 좌우로 날린 참마도의 기세를 이용해 타시드가 육중한 내려치기를 시도했다.

"타앗!"

처음으로, 바나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음?"

그는 여전히 둘의 공세를 막기 위해 방어에 들어가 있었다. 그 틈을 절묘하게 파고들며 러스와 타시드가 검과 도를 찔러 넣었다.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정확하게 바나텔의 명치와 어깨를 적중했다!

☆ ☆ ☆

세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겹쳐 정지해 있었다.

좌측에서 검을 뻗어 명치를 찌른 러스, 우측에서 도를 휘둘러 어깨를 노린 타시드.

두 사람의 공격은 분명 정확히 적중했다. 방어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그 절묘한 순간을 노린 것이라 그 순간 바나텔은 어떤 반격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두 사람의 참격을 그대로 허용했다.

하지만, 지금, 러스와 타시드는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이건...."

"어...."

둘은 여전히 검과 도를 뻗고 있었다.

둘의 검과 도 역시 바나텔의 명치와 어깨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닿지는 못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바나텔과 두 사람의 블레이드 오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오러 가드는 아니었다. 그럴 틈을 주지 않은 공격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오러를 끌어 올려 방어한 것이라면, 바나텔의 전신이 희미하게나마 선홍색으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기묘한 감각이 칼날을 타고 손끝에 전해진다. 레펜하르트와 대련할 때처럼 바위나 강철을 두들긴 그 느낌이 아니다. 칼켄이나 이니야의 오러 방어처럼 강렬한 반발력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형체 없는 진흙탕이나 늪에 빠져 버린 듯한 느낌에 가깝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격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듯한 감각이다.

두 사람은 이런 느낌이 언제 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러스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이거, 그냥 패시브 오러?"

오러 유저라면 의식적으로 오러를 발동해 강력한 빛의 검을 벼리거나 불굴의 갑옷, 혹은 방패를 형성시킬 수 있다. 그것이 블레이드 오러이고 오러 가드다.

하지만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리는 동안에는 전신에 희미하게나마 잔여 오러가 남아 있다. 인간의 육체는 전신이 연결되어 있으니 검에 오러를 집중한다 해도 다른 신체 부위에 그 여파가 미치는 것이다. 블레이드 오러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오러 반응, 그것이 패시브 오러passive aura였다.

보통은 자잘한 긁힌 상처 혹은 독침 정도나 막아 줄 수 있는 미약한 힘인데....

'있으나 마나 한 그 패시브 오러로 블레이드 오러를 막았다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제대로 펼친 오러 가드도 아니고, 그냥 패시브 오러로 저런 위력을 보일 수가?

당황한 러스와 타시드를 향해 바나텔이 문득 찬사를 건넸다.

"대단하군, 잘도 그런 움직임을 하는구나."

자신의 몸을 노린 두 개의 칼날을 보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과연 두 놈 다 천재로군. 하긴... 오러 유저들은 대부분 천재지."

갑자기 바나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새하얀 수염 사이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용없을 게다. 난 천재가 아니니까."

바나텔이 발을 들어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쿠웅!

굉음이 울리며 선홍색 오러가 폭풍처럼 치솟아 올랐다. 가공할 오러의 소용돌이가 회오리치며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바나텔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러스와 타시드가 기겁하며 무기를 거두고 뒤로 뛰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일어난 오러의 파도는 1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두 사람의 머리 위까지 뒤덮고 있었다.

타시드가 눈을 부릅떴다.

"컥! 저거 뭐야?"

"말도 안 되는!"

눈앞을 가득 메운 선홍색 오러의 벽을 보며 러스도 경악했다. 그야말로 시야가 전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이토록 거대한 오러라니?

게다가 그는 저 기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기술은 그냥 보기만 하면 익혀 버리는 러스다. 척 보자마자 바로 파악해 버렸다.

'저건 그냥 오러 웨이브잖아!'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쓰는 기본기 중의 기본기, 그것이 블레이드 오러와 오러 가드다. 여기서 저마다 기술을 익히며 갈고 닦아 여러 응용기를 만들어 낸다. 블러드 레인이라던가 기간틱 블레이드, 스파이럴 가드처럼.

오러 웨이브는 그런 기본기 중 하나였다. 용법도 무지 간단했다. 그냥 오러를 실어 땅에 내려찍는 것이 전부다. 보통은 허공에 오러를 날리지 못하는 오러 유저가, 땅이라는 매질을 이용해 비슷하게나마 위력을 내려는 저급한 기술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오러 웨이브가 무슨 해일이라도 된 것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로 밀려오고 있다! 그 위력도 실로 무시무시하다!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박살 낼 엄청난 힘이다!

'말도 안 돼! 오러 웨이브가 저런 위력을 낼 리가 없어!'

경악 속에서 러스와 타시드는 각자 오러 가드를 끌어 올렸다. 저 오러의 해일은 아예 사방 수십 미터를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다. 도저히 피할 곳이 없다. 전력을 다해 두 사람은 모든 오러를 모조리 정면에 집중시켰다.

압도적인 파괴력의 해일이 두 사람을 덮쳤다. 선홍색 빛 무리에 휘감겨 러스와 타시드가 비명을 터트렸다.

"크억!"

"으아아악!"

사방을 뒤덮는 거대한 선홍빛 오러의 해일, 그 여파는 바나텔을 중심으로 거의 반경 100여 미터까지 미치고 있었다. 백왕성의 성벽이 크게 흔들리고 흙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파괴력은 멀리서 결투를 보고 있던 다른 오러 유저들에게까지 미쳤다. 오러 유저들이 저마다 오러 가드를 발동, 뒤로 몸을 날리며 공세에서 벗어났다.

공세를 피해 멀찌감치 착지하며 할라인의 오러 유저, 카메룬 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저 양반은 여전히 괴물이로군."

자유 기사, 마라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라니까...."

사그라지는 먼지 안개 속에서 흙투성이가 된 러스와 타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숨을 헐떡이곤 있었지만 상처는 없었다.

바나텔이 빙그레 웃었다.

"두 놈 다 제법이군. 이걸 버텨 냈느냐?"

러스가 이를 갈았다.

"흥! 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타시드가 말을 받았다.

"이런 단순한 수법에 쓰러지지는 않아!"

레펜하르트의 아발란시 킥은 전신의 오러를 운용해 대지의 틈을 가르면서 가장 효율적인 광역 파괴를 노리는 엄연한 '기술'이다. 하지만 저건 '기술'이 아니다. 용법이고 운용이고 없이 그냥 오러로 땅을 찍은 게 전부다.

단순한 공격인 만큼 파해하기도 쉬웠다. 바나텔의 오러 웨이브에 맞서 오러를 회전, 상승시켜 파괴력을 좌우로 갈라 버린 것이다. 문제는 워낙 오러 웨이브에 실린 파괴력이 막대해 그것만으로 러스와 타시드가 상당량의 오러를 소모해 버렸다는 점이지만.

"헉헉...."

"후우우...."

애써 숨을 고르는 두 사람을 향해 바나텔이 다시 손을 휘둘렀다.

"그럼 이건 어떠냐?"

장난처럼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선홍색 빛의 장막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러스와 타시드가 기가 막혀 눈을 크게 떴다. 저런 엄청난 오러 웨이브를 보이고도 다시 이런 힘을 쓰다니?

"크윽!"

기겁하며 타시드가 참마도를 휘둘러 연달아 팔방 베기를 날렸다.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하며 톱처럼 회전시켜 절삭력을 높인다. 집중된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빛의 장막을 갈기갈기 찢어 대기 시작했다.

"후우우...."

숨을 고르며 러스가 롱 소드를 세로로 들었다. 푸른 오러의 흐름이 전신을 감싼다.

거목은 바람에 꺾이나 갈대는 흔들릴 뿐 쓰러지지 않는 법. 상대의 공세에 정면으로 반발하지 않고 오러를 고무처럼 유연하게 속성 변환해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빛의 장막이 러스의 좌우로 물결처럼 갈라져 흘러갔다.

바나텔이 감탄을 터트렸다.

"허허, 참 재주들도 좋다. 오러를 아주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구나."

호탕한 웃음과 함께 바나텔이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아까는 가로 베기, 이번에는 세로 베기였다.

"그래 봤자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용!"

선홍색 빛의 장막이 허공에서 한 번 접히더니,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타시드가 기겁해 혀를 깨물었다.

"켁? 또야?"

여전히 단순하기 짝이 없는 오러 운용이었다. 그냥 블레이드 오러를 크게 넓혀 휘두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빛에 실린 힘이 너무도 강렬했다. 오러를 최대한 집중시키고 변환해 최고의 효율을 보이는 두 사람보다도 오히려 저 단순한 일격이 더 강하다!

러스가 절규를 터트렸다.

"아니, 뭔 오러가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야?"

숨이 턱까지 차서 도저히 맞받아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뒤로 몸을 날렸다. 최대한 파괴력을 흘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 빛의 장막에 실린 거력은 몸을 날리는 정도로는 도저히 해소되지 않았다.

전신의 오러 방어가 깨지며 두 사람이 다시 비명을 터트렸다.

"으으윽!"

"커어어억!"

빛의 폭포가 대지를 두들기며 끝없이 굉음을 터트렸다. 폭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러스와 타시드가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볼품없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며 러스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 저거...."

피투성이가 된 채 타시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참마도에 기대 애써 몸을 가누며 타시드가 으르렁댔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하나 했더니...."

검성 바나텔, 그가 보인 이 모든 위력의 정체는 간단했다.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모를 수가 없었다. 무슨 오묘한 운용법이나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오러양이 두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막대할 뿐이다!

☆ ☆ ☆

멀리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바실리의 오러 유저, 왈그란 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단순한 기술밖에 못 쓰는 것은 여전하시군. 확실히 천재는 아닌데...."

차탄 출신의 데크릴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틀림없이 괴물이지...."

자유 기사, 마라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오러 운용은 고작 기초에 머무르는 분이 어떻게 오러양은 저렇게 무지막지한 건지...."

오러 유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러스나, 오크인 타시드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오러 유저들은 저 검성 바나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륙 제일의 검사, 모두가 최강임을 인정하는 검성 바나텔.

그는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바나텔은 그리 검사로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명한 무인들처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거나, 남들이 열흘 걸릴 것을 한 순간에 익힌다거나 하는 그런 천재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일류 검사다운 체력과 반사 신경, 민첩성을 지니고는 있었다.

문제는 바나텔의 전투 센스가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전투는 언제나 변수가 있다. 상대는 정해진 동작만을 반복하는 인형이 아니니, 상황에 맞게 기술을 응용해 구사해야 한다. 바나텔은 그런 응용력이 심각하게 없었다. 배운 것을 정직하게 구사할 수는 있었지만 상대가 조금만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허공에 헛칼질을 하기 일쑤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저 조금 쓸 만한 검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바나텔에게도 단 한 가지 뛰어난 부분은 있었다.

그는 우직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밖에 할 줄 모른다. 응용력 따윈 없다. 그저 우직하게 배운 것만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완벽하게 구사한다.

다른 오러 유저들이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상 모든 무문이 기본을 중시하며, 기본이 받쳐 주어야 경지에 들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오러에 각성할 정도 수준의 무인이라면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은 이는 없다. 오러 유저쯤 되면 타고난 재능뿐 아니라, 하루 몇 천 번씩의 단순한 찌르기와 베기로 기본을 탄탄히 닦은 자들이다. 천재 중의 천재인 러스도 내려치기 하나만을 몇 년씩 해 오곤 했다.

하지만 바나텔은 경우가 좀 달랐다.

단순한 내려치기를 천 번씩 행한다면, 누구나 도중에 지치고 집중력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끝까지 검을 휘두르는 마음가짐이 바로 고수와 하수를 가른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사람인 이상, 처음 휘두르는 일격과 천 번째 휘두르는 일격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바나텔은 처음부터 그 '집중력의 흔들림'이 없었다. 천 번의 휘두름을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똑같이 전력을 다해 초심으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우직함의 화신, 어찌 보면 수행의 천재라 할 수도 있겠다.

그 우직함을 바탕으로 바나텔은 결국 오러에 각성해 초인의 반열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러를 각성한다 해서 없는 센스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러의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니 일반 검사들쯤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오러 유저끼리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기껏 오러를 각성했지만 거기까지가 바나텔의 한계였다. 가장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며 오러 웨이브, 오러 가드 등은 특유의 우직함으로 터득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오러 유저들은 오러를 이용해 온갖 다양한 기술을 선보인다. 경험을 쌓은 오러 유저들은 오러를 응용해 원거리로 날린다거나 흐름을 집중, 변화시켜 강대한 일격과 화려한 연격을 보일 수 있다. 개중엔 오러의 속성을 바꾼다거나 형태를 굳혀 마법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곡예를 보이는 진정한 천재들도 있다.

그러나 바나텔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짓이 불가능했다. 타고난 감각에서 그는 너무 둔했다. 일단 어떻게 하는지만 알면 노력해서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아예 감조차 못 잡으니 노력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텔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러 유저가 된 후로도 그는 우직하게 한 가지 길만을 걸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을 우직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기본적인 기량만을 끝없이 올리고 또 올렸다.

그런 지 어언 30년....

결국 바나텔은 대륙 그 어느 오러 유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오러양을 얻게 되었다.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검성의 칭호와 함께.

5

"젠장, 진짜 괴물일세."

빠드득 이를 갈며 러스가 재차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타시드도 참마도, 다카르를 다시 들어 올렸다.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이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근접전은 도저히 답이 없어!'

'하지만 왠지 오러 운용은 단순하다. 그렇다면....'

러스와 타시드가 동시에 뒤로 뛰었다. 수십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린 뒤 두 사람이 허공에 검과 도를 휘저었다.

"세븐 스타즈!"

"늑대 송곳니!"

근거리에서는 도저히 답이 없으니 일단 중장거리에서 오러를 날리며 승기를 잡을 셈이었다. 일곱 개의 푸른 별이 반짝이며 일곱 줄기 유성이 되어 날아갔다. 청록색 오러가 섬뜩한 송곳니 형태로 화해 허공을 꿰뚫었다.

원거리를 격하고 날아오는 저 오러의 빛을 보며 바나텔은 피식거렸다.

'하여튼 재주도 좋아들.'

확실히 그는 저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넘치는 오러양이 있으니 그도 오러를 분리해 허공에 응집시키는 것까진 가능했다. 하지만 분리된 오러를 여전히 의지하에 놓아 운용하며 위력을 극대화시킨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저런 짓이 가능한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지.'

바나텔이 허허롭게 웃으며 검을 뻗었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길게 뻗어 나갔다.

100미터 밖으로 오러를 날릴 수가 없다고?

그럼, 그냥 블레이드 오러를 100미터로 늘리면 되는 문제다!

우우우웅!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죽죽 뻗어 나갔다. 러스의 세븐 스타즈와 타시드의 늑대 송곳니를 가뿐히 부수고도 저 멀리 있는 두 사람에게까지 충분히 닿는다. 기겁해 두 사람이 정신없이 칼날을 피했다.

타시드가 뻐드렁니를 으드득 갈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냐!"

저 멀리 있는 바나텔이 손목을 한번 까닥거릴 때마다 수십 미터 밖에서는 광범위한 파괴가 일어난다. 말이 좋아 100미터지, 저쯤 되면 이미 자연재해다. 바나텔의 초장거리 블레이드 오러가 스치는 곳마다 공기가 갈라져 폭풍이 일고 땅거죽이 벗겨져 휘몰아치며 올랐다. 달인은 검 한 자루로 풍운조화를 일으킨다는데, 바나텔은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도 파괴력이 높다 보니 풍운조화가 '덤으로' 일어나는 식이었다.

러스도 이를 갈았다.

"아, 쓰벌! 검성이면 검성답게 좀 오묘한 기술을 쓰란 말이야!"

그럼 베껴서 어떻게 반격이라도 해 보겠는데... 그냥 절대적인 오러양만으로 밀어붙이니 도무지 답이 없다.

러스도 타시드도 최대한 발을 놀리며 공세를 피했다. 그나마 공격 자체가 단순해서 파괴 범위가 가공함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틈새를 찾을 수 있었다. 둘 다 각 종족의 천재라 불리는 이들, 공격 뿐 아니라 회피하는 몸놀림이나 안목도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안 되겠다! 타시드! 차라리 근접전이 나아!"

"그러세, 러스!"

공세를 피하며 두 사람이 다시 접근을 시도했다. 바나텔의 좌우로 파고들며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뿌린다.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바나텔의 좌신을 노리고, 타시드의 참마도가 허공을 날며 우측 허벅지로 쇄도했다.

그러나 이번엔 바나텔도 쉽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흥!"

바나텔의 전신에서 선홍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오러 가드를 펼친 것이다. 보통은 오러를 집중해 상대의 공격 바로 앞을 가로막는 것인데, 워낙 두 사람의 공세가 화려하다 보니 어디로 공격해 오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전신을 오러 가드로 뒤덮어 버렸다.

여전히 단순하고 비효율적인 수법이지만, 워낙 담긴 오러양이 막대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공격이 가로막혔다. 러스와 타시드는 계속 스텝을 밟아 바나텔 주위를 돌았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저 가공할 일격이 닥쳐 오니, 결코 발을 쉴 수가 없었다.

알짱알짱 주위를 돌아다니는 두 사람을 보며 바나텔이 인상을 썼다.

"어지럽게 도망 다니지 마라! 네놈들이 모기냐?"

버럭 호통을 치며 바나텔이 허공을 쥐는 손짓을 했다. 오러의 힘을 이용해 의지를 부여, 사물을 자신의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영기염동靈氣念動이었다.

역시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쓰는 기본기로, 보통은 멀리 떨어진 무기를 회수할 때나 쓰는 용법인데....

고오오오!

공기가 떨리며, 반투명한 거대한 손아귀가 두 사람을 덮쳤다. 원래 영기염동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하도 안에 담긴 거력이 가공하다 보니 공기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쳐 눈에 보일 지경이 된 것이다. 먼지 가득한 곳에 빛이 비추면 그 흐름이 보이는 것처럼.

"윽!"

"이런! 몸이...."

바나텔의 영기염동력에 의해 움직임이 순간 제어당해 버린다. 러스와 타시드가 허공에 붙잡힌 채 당황했다.

바나텔이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엉!

충격파가 날아가 하늘 위에 두 개의 폭발을 일구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러스와 타시드가 땅으로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둘을 보며 바나텔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잘도 빨빨대며 돌아다니긴 했다만, 그래 봤자다. 이단자들아."

그때였다.

땅에 떨어지던 러스가 갑자기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착지했다. 그리고 횡 베기 자세를 취하더니 차갑게 뇌까리며 검을 휘둘렀다.

"허공검, 호라이즌!"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번뜩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바나텔의 목덜미에서 섬광이 솟아나왔다.

바나텔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가 신음을 흘렸다.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크윽?"

보고 있던 열 명의 오러 유저들도 기겁해 눈을 크게 떴다.

"뭐여, 저거?"

"에엥?"

"뭔 짓을 한 거야, 저놈?"

다들 경악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지금 저 청년은 수십 미터의 거리를 격하고, 바나텔의 그 가공할 오러 가드조차 무시한 채 검성의 육체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바나텔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어라...."

멍한 와중에도 바나텔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의 상처를 감쌌다. 상처를 막았음에도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계속 흘러나온다. 10년 이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신의 피다.

게다가 상처도 결코 얕지 않았다. 정확하게 목의 경동맥을 베었다.

노인의 입에서 기막혀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이건 대체...."

분명 오러 가드를 펼치고 있었다.

분명 육체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러 가드를 부순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고 본체에 상처를 입혀? 오러를 돌려 빈틈을 노린 것도 아니고, 물 샐 틈 없이 전신을 전부 방어하고 있었는데?

"으으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바나텔은 오러를 운용해 상처를 지혈했다. 그가 오러 유저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 한 방으로 저승 갈 뻔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러스가 무릎을 꿇으며 한탄을 흘렸다.

"젠장... 제대로 들어갔는데...."

공간을 뛰어넘는 그의 궁극기, 허공검은 분명 제대로 먹혔다. 솔직히 러스도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정상적이었다면 일격에 바나텔의 목을 떨구었어야 했다.

문제는 그 허공검의 위력이 바나텔의 패시브 오러를 뚫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러 가드도 아니고 고작 패시브 오러에 가로막히다니...."

기가 막혀 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바나텔의 안색이 돌변했다.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놈! 살려 두어서는 안 될 놈이로구나!"

☆ ☆ ☆

피를 본 바나텔이 분노하며 땅을 강하게 내디뎠다. 대지가 출렁이며 또다시 검성 바나텔만의 오러 웨이브, 사방을 뒤덮는 가공할 오러의 해일이 러스와 타시드를 뒤덮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두 사람이 해일에 휩쓸려 날려 갔다.

"으으...."

"제길...."

박살 난 대지 위에, 두 사람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타시드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전신 뼈가 박살 난 듯 전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진다.

두 사람을 향해 바나텔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블레이드 오러를 든 채 그가 긴장한 얼굴로 러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젊은 놈이, 그런 기술을....'

검성이라 불리며 수십 년간 대륙 최강으로 군림해 온 그였지만 방금 그 기술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다.

거리와 공간을 무시하고, 오러 가드조차 통과한 채 본체에만 피해를 주다니? 이건 도저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기술이 아닌가?

지금은 기량이 낮아 위력이 없다 보니 패시브 오러로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경동맥이 잘리는 정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스의 기량이 조금만 더 높아지면, 그의 오러양이 지금의 두 배만 되었다면 목이 떨어지는 건 바나텔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만난 게 다행이군. 조금만 더 뒤에 만났다면 죽는 것은 내가 될 뻔했겠어.'

살의를 굳힌 채 바나텔이 검을 쳐들었다. 바늘 같은 살기가 러스와 타시드의 전신을 강렬하게 찔러 왔다.

타시드가 눈을 감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끝이구먼...."

러스도 죽음을 받아들이며 허하게 웃었다.

'결국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네. 아니, 오히려 이게 잘된 일이려나?'

이 상황이 되고 나니 차라리 지원군이 늦게 온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이 자리에 레펜하르트가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별 차이 없었을 테니까.

'형님이라고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레펜하르트뿐 아니라 칼켄이며 이니야, 아틸카 등 안타레스 백국의 강자와 모두 손을 섞어 본 적이 있는 러스였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누가 와도 저 괴물, 검성 바나텔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그래, 여기서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러스는 눈을 감았다.

바나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를 막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백왕성 남쪽에 위치한 첨탑, 그곳에서 쩌렁쩌렁한 호통이 들려왔다.

"허허! 이게 누구야?"

동시에 가공할 기운이 퍼져 나왔다. 첨탑이 태양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며 우렁찬 외침이 뒤를 이었다.

"기-격-탄!"

황금빛 오러의 탄환이 허공을 가르며 굉음을 울렸다.

고오오오!

러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기격탄이라면 그도 잘 아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이다.

'설마 형님이 벌써?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현재 아라난 그라드에 시찰을 가 있었다. 소식을 듣고 전력으로 달려온다 해도 도착하려면 최소 서너 시간은 더 걸릴 터였다.

순간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 안 돼! 아직 형님은 저 괴물을 못 당해!'

이대로라면 레펜하르트도 자신들과 같은 꼴이 될 뿐이다. 러스가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에엥?"

긴장 가득했던 러스의 눈빛이 순간 멍청하게 바뀌었다.

"...저거, 뭐여?"

타시드도 멍한 얼굴로 읊조렸다.

날아오는 기격탄.

그것은 커도 너무 컸다. '탄'이라기보다는 '제단이라거나 건물'이라고 해야 맞는 사이즈였다.

보통 레펜하르트가 구사하는 기격탄은 사람 몸통만 한 크기, 그런데 저건 아무리 봐도 최소 2층 집 정도는 되어 보인다!

기격탄인지 뭔지 의심스러운 그 무자비한 황금빛 덩어리가 바나텔을 직격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 보통 오러 유저라면 저것만으로도 피 두 사발쯤은 족히 토했으리라.

하지만 바나텔도 괜히 검성이라 불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간단히 저 황금빛 기격탄을 두 갈래로 갈랐다.

콰아아앙!

빗나간 기격탄이 대지에 충돌해 강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바나텔의 등 뒤로 높이 10여 미터의 가공할 폭발 기둥이 치솟았다. 머리칼을 휘날리며 바나텔이 공격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았다.

검성의 입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네놈이 왜 여기 있느냐?"

백왕성의 첨탑 위, 전신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단련된 한 거대한 노인이 서 있었다. 말이 좋아 노인이지 저 가공할 육체에는 단 일 푼의 노쇠도 보이지 않는다. 청동상조차 울고 갈 구릿빛 피부에 딱 벌어진 어깨, 휘날리는 은색 수염만이 그가 노인임을 증명할 뿐이다.

타시드가 맹한 소리를 냈다.

"은인 같은데... 은인보다 훨씬 크다?"

레펜하르트와 비슷해 보였지만 결코 그는 아니었다. 거구인 레펜하르트가 애송이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러스가 눈을 껌뻑였다.

"누구지?"

갑자기 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러스와 타시드뿐 아니라 그 자리의 다른 오러 유저들도 기겁하며 귀를 막았다. 웃음소리만으로도 기혈이 진탕하며 체내 오러가 요동을 친다.

타시드가 벌벌 떨며 외쳤다.

"저 괴물은 또 뭐여? 세상에 뭔 괴물이 이렇게 많은 거야?"

웃음을 터트리며 거구의 노인이 바나텔을 향해 소리쳤다.

"오랜만이구나! 바나텔!"

바나텔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말도 없이 대뜸 이게 무슨 짓이냐?"

노인이 가슴을 실룩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오랜 벗을 만났으니 이 어찌 회포를 나누지 않을쏜가!"

"회포를 나누겠다더니 대포를 쏘냐, 이 미친 새끼!"

100여 미터의 거리를 격하고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둘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이지, 백왕성의 사람들은 연신 쳐 대는 저 인조 천둥에 귀를 막고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 자리의 모든 오러 유저의 시선이 첨탑 위로 쏠렸다.

"저, 저자는...."

"...설마...."

강철을 연상케 하는 불굴의 육체에 치솟은 황금빛 오러, 파괴라는 두 글자를 근육으로 압축해 놓은 듯한 거구의 노인.

대륙의 무인치고 저 유명한 노권사를 모르는 이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명성을 떨치기 전부터 그 위명이 대륙 전역에 진동했던 오러 유저.

검성 바나텔과 함께 대륙 최강의 자리를 양분하는 당대 최고, 최대, 최강의 권사!

누군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권황 제라드!"

<11권에서 계속>

11권

제37장 오랜 악연

1

강철 수조 속에 알몸의 젊은 사내가 둥둥 떠 있었다. 전신이 단단하게 짜인, 놀라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올 때마다 흑단 같은 고운 머리칼이 해초처럼 흔들린다.

이윽고 청년이 눈을 떴다.

'내가 아직... 살아 있나?'

신기하게도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호흡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청년은 눈을 깜박였다.

'...여긴 대체?'

잠시 후, 수조 속의 액체가 아래로 빠지며 공기가 들어왔다. 수조 앞쪽이 천천히 열렸다. 청년이 기침을 터트렸다.

"쿠,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폐 속에서 액체가 흘러나온다. 숨을 헐떡이며 청년은 수조 밖으로 애써 걸음을 옮겼다. 로브 차림의 여인이 소리치며 그에게 달려왔다.

"테스론!"

테스론은 비틀거리며 수조 밖으로 나왔다. 여인이 재빨리 챙겨 온 천으로 그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 천을 받아 걸치며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필레나...."

필레나가 테스론의 전신을 훑어보며 걱정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몸은? 몸은 괜찮아?"

테스론은 멍하니 필레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덮쳐 오던 그 가공할 일격, 6중첩 캘러미티 혼. 산산이 박살 나 버린 아다만드릴 슈트.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던 자신....

"어떻게... 된 거지?"

필레나가 잽싸게 대답했다.

"귀환의 깃털로 탈출할 수 있었어. 그리고 세렐라인 님이 바로 널 여기에 넣어 주셨고."

테스론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날렵해 보이는 근육을 자랑하는 늘씬한 육체, 그곳에는 어떤 흉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아기의 그것처럼 피부 전체가 매끈하고 윤기가 돈다.

테스론은 멍하니 수조를 돌아보았다. 필레나가 설명을 이었다.

"고대의 아티팩트, 리커버리 캡슐recovery capsule이야. 세렐라인 님 말씀이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부상이라도 전부 완치 가능하다고 하셨어."

몸 상태를 점검해 본 테스론은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참혹하게 당했던 육체다. 하지만 지금은 전신에 어떤 통증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아 기운이 없을 뿐이다.

'세상에,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부상이었는데....'

과연 은의 현자다. 이런 엄청난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다니.

무사한 테스론을 보며 필레나가 눈물을 흘렸다. 양손으로 테스론의 얼굴을 매만지며 목이 메어 말을 더듬는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울먹거리는 필레나를 보며 테스론은 부드럽게 웃었다. 필레나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새삼 그녀가 귀엽게 느껴져 테스론은 필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난 괜찮아, 필레나."

"응, 으응...."

필레나가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테스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보다 레펜하르트는? 그는 어떻게 되었지?"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은발의 소녀가 무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이었다.

"권왕은 노예들을 이끌고 제플린을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예요."

"으음...."

테스론이 신음을 흘렸다.

'결국 마왕을 막지 못했는가....'

세렐라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지만 그자의 운명도 얼마 가지는 않을 겁니다. 제플린의 사태 덕분에 이제는 공식적으로 그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공개적으로 그가 죽음을 당한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쉰다.

"후, 되도록 인간들에게 영향력이 적을 때 처리하고 싶었지만, 일이 이토록 커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테스론은 납득했다. 레펜하르트의 이번 행보는 확실히 대륙 전역에 진동할 만한 것이었다. 이미 은의 현자가 은밀히 처리할 수준은 지나 버렸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암살자를 보낼 필요도 없으리라.

문득 테스론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그자를 해치울 만한 강자가 은의 현자에 있었습니까?"

그런 강자가 없어서 세렐라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 아니었던가?

"은의 현자 측이 아닙니다."

세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바슈탈론 제국의, 대륙 최강의 검사가 나섰지요."

"검성 바나텔!"

테스론이 반색을 했다.

'그렇군, 이 시간대면 그도 아직 살아 있겠구나.'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가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한창 악명을 떨치며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이미 사이러스와 테스론은 검성과 권왕이라 불리며 대륙의 최강자 자리를 양분하고 있었다. 테스론이 아직 제자를 찾지 못했기에 권황이라 불리지 않았을 뿐이지, 당시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강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륙 최강자의 자리는 다른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바슈탈론 제국의 수호신, 검성 바나텔.

그리고 테스론을 키운 이후 권황이라 불리게 된 제라드.

여든이 넘는 노구에도 두 사람은 당대 최강을 자랑하며 검과 권 양쪽에서 흔들림 없는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위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둘의 오래된 악연이었다.

검성 바나텔과 권황 제라드는 그들의 명성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견원지간 정도는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매우 따사롭고 우애 넘치는 관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가 검성과 권황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후로, 둘은 몇 번이나 맞붙었고 그때마다 승부를 결하지 못했다.

결국 제라드와 바나텔은 네위그 숲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였고 서로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때가 대륙력 998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후의 일이다.

'그 검성 바나텔이 마왕을 노린단 말이지?'

테스론이 바나텔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해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 제라드가 얼마나 강력한 무인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나텔은 그와 필적하는 강자다.

예전처럼 10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고서야 현재의 레펜하르트로서는 절대 검성 바나텔을 상대로 살아남지 못하리라.

"검성 바나텔이라... 하하."

어째 기쁜 기색이 아니기에 필레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테스론? 잘된 거 아니야?"

"으음, 그렇지...."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느껴진다.

'하긴, 마왕을 막겠다는 일념만으로 여태껏 달려왔으니 당연한 일인가?'

테스론이 허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펜하르트도 이제 끝이군.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지...."

☆ ☆ ☆

같은 시각, 안타레스 백왕성이 내려다보이는 인근 언덕.

열 명의 오러 유저들은 긴장한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이번 일이 위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스스로의 무위에 자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 곁에는 무려 천하의 검성, 바나텔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첨탑 위에 우뚝 선 거구의 노인, 권황 제라드는 바나텔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또 다른 대륙 최강자다!

언덕 쪽을 내려다보던 제라드가 갑자기 가볍게 발을 굴렸다.

"흡!"

신장 2.5미터의 거구가 소리도 없이 백왕성 첨탑을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새도 아니거늘, 한 번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단숨에 첨탑을 날아올라 내성을 넘어 백왕성 외벽까지 나아간다. 거기서 한 번 착지한 뒤 다시 몸을 날리니, 두 번 점프한 것만으로 제라드는 순식간에 쓰러진 러스와 타시드 옆에 도달했다.

경악할 만한 몸놀림이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며 오러로 육체를 회복하고 있던 러스와 타시드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분이 권황 제라드....'

'은인의 스승이라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제라드가 태연하게 물었다.

"레펜하르트 놈은 어디 갔느냐?"

러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형님께서는 지금 성을 비우셔서... 아마도 서너 시간은 지나야 다시 돌아올 겁니다만...."

순간 제라드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엥? 형님? 그놈이 더 어릴 텐데?"

눈앞의 이 청년이 아무리 봐도 20대 후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나마 러스가 동안이라 저리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서른도 넘겼다.)

'제자 놈 나이가... 분명 20대 중반일 텐데?'

하지만 제라드는 곧 납득했다. 실제 나이보다 액면가가 10년쯤 더 먹어 보이는 것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전통이었다. 호방한 성품의 역대 권왕들은 저런 조잡한 오해에 굳이 변명을 달거나 하지 않은 것이다. 제라드가 스무 살에 세상에 나설 때에도 어느 누구도 그를 절대 서른 이하로는 보지 않았었다. 게다가....

'하긴 레펜하르트 그놈, 우리 무문치고도 이상하게 조숙해서 가끔 이 새끼가 10대 소년이 맞나 싶기도 했으니까.'

분명 어릴 때 제자로 거두어 키웠는데도 가끔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세상 살 만큼 산 중늙은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곤 했었다.

제라드가 이번엔 타시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단련된 오러를 내재한 그를 보며 제라드가 신기해했다.

"이건 또 뭐야? 오크인데 오러를 각성했어?"

타시드도 눈을 껌뻑이며 제라드를 향해 중얼거렸다.

"뭐냐, 저 얼굴만 늙은 인간은? 인간인데 어떻게 저렇게 큰 거냐?"

그는 평생 칼켄보다 더 큰 사람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칼켄이 2.3미터에 달하는 거구인데, 저 노인은 인간인 주제에 그 칼켄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솔직히, 인간은 고사하고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멍해 있는 타시드를 보며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이놈의 제자, 별 신기한 걸 다 키우는구먼."

하지만 제라드는 바로 타시드에게서 신경을 끊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끼는 제자의 정신이 오락가락해 스스로 막 이름을 바꿀 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을 지닌 그였다. 이까짓 오크가 오러 쓰는 것 정도로는 그의 대범함을 흔들 수 없었다.

한편, 바나텔은 제라드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제라드의 제자라는 것이야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 권황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전통 때문이었다.

"이놈, 제라드! 네놈이 어째서 여기 있느냐?"

제라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별 소리 다 한다는 듯 대꾸했다.

"사부가 제자 놈 집 들른 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당연히 이상하지! 짐 언브레이커블이 언제 사제 간의 정 따위 느끼는 무문이더냐? 일단 하산시키면 남남 되잖아, 네놈들은!"

역대 권왕들은 하산한 이후 그들의 사부, 권황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다. 사부 쪽도 굳이 제자를 찾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나텔도 바슈탈론 제국도 설마 이곳에 제라드가 나타날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허, 어디서 그런 오해를?"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결코 사제 간의 정이 없지 않다. 제자에 대한 사랑이나 스승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정도는 오히려 짐 언브레이커블이 다른 무문보다 훨씬 더 진할 것이다. 제자 키우는 데 드는 고생이 워낙 막심하니까.

제라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당연히 볼일 있으면 서로 찾아보고 그러지."

단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호쾌한 역대 계승자들은 일반인처럼 평범한 일상의 행사, 즉 생일이나 결혼식, 장례 정도는 굳이 '볼일'로 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제자의 목숨이 위기에 처했다든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든가 하는 일조차도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서는 전혀 큰 '볼일'이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토는 담대, 호쾌, 대범.

쿨한 사나이의 길을 지향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은, 무릇 남자라면 깔끔하게 헤어지면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일단 하산하면 워낙 서로 안 보고 살아서 저런 오해가 퍼져 버렸다. 뭐, 맞고 자란 제자 쪽이 본능적으로 사부를 피해 다니긴 했으니 아주 틀린 오해도 아니었다.

제라드가 눈을 껌뻑이며 되려 바나텔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바나텔? 나이가 몇인데 애송이들한테 힘자랑이나 하고 말이야. 체통 좀 지키자, 응?"

바나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손자뻘인 러스에게 직접 손을 쓰는 것이 부끄럽기는 했다.

"네, 네놈이 체통 따질 때냐? 웃통이나 가려라! 그 나이 먹고도 옷차림이 그게 뭐야?"

현재 제라드는 간편한 바지 차림으로, 상의를 통째로 탈의하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조끼 정도만 입거나 그냥 벗고 지내는데 하물며 지금은 한여름, 그로서는 당연한 의상이었다.

"흐음...."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나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2.5미터의 거구에 알찬 근육을 지닌 그에 비해, 바나텔은 겉보기엔 평범한 노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노인치곤 허리도 곧고 장신에 제법 몸도 탄탄했지만 그래 봤자 일반인 수준일 뿐이다.

시위하듯 양쪽 대흉근을 씰룩거리며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이 나이 먹고도 이런 옷차림이 가능하면 그건 자랑거리지, 뭐가 부끄러운 일이겠나? 혹시 부러운가 보지?"

"끄응...."

바나텔은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부럽긴 부러웠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끄럽다!"

호통을 치며 바나텔이 제라드에게 검을 겨누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바나텔이 말을 이었다.

"힘자랑은 무슨! 세이어의 뜻에 따라 이단자를 벌하러 온 것뿐이다!"

"아, 하긴 제국에서 월급받고 사니 시키는 건 해야겠지. 그러게 젊을 때 좀 부지런히 돈 모으지 그랬나?"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제라드가 조롱을 던졌다. 바나텔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다.

제자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대 후계자들은 젊을 때부터 열심히 재산을 축재한다. 당연히 제라드도 젊을 때부터 던전 탐사며 이런저런 의뢰를 받아 열심히 돈을 모으고 또 불려 왔다. 레펜하르트를 키우느라 절반 이상 탕진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바실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부자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굳이 국가에 아쉬운 소릴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제라드는 자유로운 무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반면, 젊은 시절의 바나텔은 그리 강한 검사가 아니다 보니 먹고 살기도 바빴다. 그래서 딱히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다. 오러 유저가 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나텔의 검술은 그 특성상 딱히 제자를 둘 수가 없다. 그의 오러양이 무지막지한 것은 무슨 절묘한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그렇게 태어난 덕분이니까.

그렇다고 바나텔이 가난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국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검성씩이나 되니 당연히 품위 유지 명목으로 제국에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긴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 봤자 결국은 월급쟁이 신세인 것이다.

몸도 좋은 놈이 돈도 많다. 바나텔이 이를 갈았다.

"아으, 역시 저 새끼는 재수 없어."

제라드도 마주 인상을 썼다.

"헛소리하네. 네놈은 뭐 재수 있는 줄 아냐?"

바나텔의 대해 같은 오러양은 제라드로서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러 유저로서 어찌 저 엄청난 오러의 힘이 부럽지 않을까? 솔직히 질투심이 안 날 수가 없다.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댔다. 그 모습에 러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투가 저리....'

당대에 이름 높은 검성과 권황의 대화라고 보기엔 너무 품위 없는 말투인 것이다. 마치 시장의 무뢰배 같지 않은가?

하지만 나이 지긋하게 먹은 다른 오러 유저들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젊은 것들은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말투도 노숙해지는 줄 아는데, 원래 어린 것들 앞에서 고상 떠는 70대 노인도 같은 동년배 만나면 젊은 시절 말투 도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그것이 몇십 년이나 이어진 악연이라면 더더욱!

'으음... 이놈이 하필 여기에 나타나다니.'

바나텔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이 거구의 노인, 권황 제라드.

저 오랜 악연을 보니 절로 손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황제의 명령을 떠올렸다. 호승심을 애써 억누르며 바나텔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제라드! 이는 바슈탈론 제국의 일이다! 설마 제국과 적대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러스와 타시드를 힐끔거리며 비아냥대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설마 제자의 부하들이니 지켜 주겠다는 낯간지러운 소릴 할 셈인가? 짐 언브레커블은 호쾌한 사나이의 길을 걷는 게 모토 아니었나?"

의외로 제라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 굳이 저것들 지키려고 기격탄 날린 것은 아니지. 그냥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 인사나 한 것뿐이야."

집채만 한 기격탄을 고작 안부 인사 취급하는 제라드의 배포에 다른 오러 유저들이 기막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바나텔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바나텔이 먼저 제라드를 발견했다면 그도 인사 삼아 블레이드 오러 죽죽 뻗어 갈겨 줬을 테니까.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굳이 제국 눈치 보면서 제자 놈 부하 죽는 걸 방관하고 있을 이유도 없지 않나?"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 역시 호쾌한 사나이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라드가 빙그레 웃더니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네와 내가 만났는데 피가 튀지 않으면 너무 섭섭하잖아?"

겨우 참던 인내심의 끈이 툭 끊겼다. 솔직히 바나텔도 황제의 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눈앞의 이 악연부터 처리하고 싶었으니까.

바나텔의 어깨 너머로도 자욱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제라드!"

"아무렴!"

검을 고쳐 쥐며 바나텔이 전신에서 폭풍 같은 오러를 피워 올렸다. 그 기세만으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대지가 진동한다.

"제라드! 이번에야말로 회를 떠 주마!"

제라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마주 외쳤다.

"내가 할 소리다, 바나텔! 이번에야말로 피 떡으로 만들어 주지!"

제라드의 전신으로도 황금빛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빛의 기둥이 허공을 꿰뚫어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바나텔이 검을 든 채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제라드도 주먹을 쥔 채 바나텔을 응시했다.

둘의 거리는 20여 미터 정도, 박투搏鬪를 나누기엔 너무도 먼 거리지만 오러 유저에겐 충분히 사정권 안쪽이다.

선홍색 오러의 불길을 일렁이며 바나텔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고 보니 네놈과 붙는 것도 꽤 오랜만이구나, 제라드."

나직하게 뇌까리며 왼발로 강하게 대지를 내리친다. 찬란한 오러의 장벽이 일어 올라 거대한 파도로 화했다. 굉음과 함께 대지에 주름이 생기며 거대한 오러의 해일이 제라드를 향해 밀려갔다.

눈앞을 뒤덮는 오러의 파도, 그것도 조금 전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아닌 제라드가 있는 방향만을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오러 웨이브였다. 당연히 그에 실린 위력도 아까와는 천양지차!

뒤에 있던 러스와 타시드가 기겁하며 뒤로 점프했다.

"크윽!"

"젠장! 휩쓸리면 끝장이다!"

콰콰콰콰콰!

오러의 파도가 백왕성 앞 대지를 사정없이 파헤치며 제라드를 덮쳐 간다. 그 순간 제라드도 한 발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렇군, 한 10년 만인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제라드가 발을 들었다. 그리고 바나텔처럼 강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황금빛 오러가 간헐천처럼 솟구쳤다. 10여 미터 가까운 오러 기둥이 선홍색 빛의 파도와 맞부딪쳤다.

꽈앙!

대지가 통째로 뒤흔들렸다. 땅거죽이 통째로 휘말려 올라 나선형 흙기둥이 되어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허공에서 부스러져 돌비가 되어 내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타국의 오러 유저들이 혀를 차며 각자 오러 가드를 펼쳤다.

"으윽!"

"저 괴물들!"

바나텔이 이번엔 오른발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10년? 더 된 것 같은데?"

몰아친 오러의 파도 뒤로 선홍색 빛의 소용돌이가 수십 개씩이나 생성되어 돌풍의 영역을 형성했다. 오러의 폭풍이 땅 위에 길게 궤적을 남기며 제라드를 향해 휘몰아쳤다.

제라드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가 중얼거렸다.

"음, 14년 정도겠군."

어린 테스론, 그러니까 지금은 레펜하르트라 불리는 제자를 찾은 것이 당시 바나텔과의 결투 직후였니까.

쿠웅!

육중한 발이 땅을 밟는 순간 원형으로 거대한 오러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퍼진 황금빛 파문이 선홍의 광풍과 충돌해 곳곳에서 폭발했다. 뇌성이 울리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백왕성과 인근 언덕, 숲이 모두 통째로 진동했다. 백왕성의 성벽 곳곳에 금이 가고 벽돌이 부서져 파편을 떨어트렸다. 기사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악!"

"피, 피해라! 성벽이 무너진다!"

쿵! 쿠쿵!

무너진 성벽의 파편이 백왕성 곳곳에 흙먼지를 피웠다. 몸을 낮춘 채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파편을 막고 있던 아스레일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게 정녕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바나텔과 제라드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대기가 뒤틀리고 대지가 요동을 쳤다. 두 줄기 선홍과 황금의 빛이 가공할 파괴력을 사방으로 뿌려 댔다.

"많이 늘었구나! 바나텔!"

한 걸음 내디디면 대지가 갈라지고.

"네놈이야말로! 제라드!"

두 걸음 내디디면 하늘이 찢어진다.

선홍과 황금의 빛이 사방을 뒤덮으며 광폭하게 날뛰었다. 하늘 높이 흙과 풀잎이 휘말려 올라 날리고 구름이 갈라지며 회오리쳤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였다.

정신없이 파괴의 여파를 피하면서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일개 개인이 보일 수 있다니, 정녕 감탄스러웠다.

'정말 굉장하군....'

분명 굉장하기는 한데....

"아니, 어떻게 당대 최강의 무인 둘이서 싸우는데 이렇게 공부가 안 될 수가!"

러스는 기가 차 중얼거렸다. 당대 최강의 검성과 권황의 결투라면 뭔가, 보기만 해도 새로운 경지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은근 기대도 많이 했던 러스였다.

그런데 한 놈은 무식하게 오러양만 늘렸고 한 놈은 무식하게 몸만 단련했으니 정작 배울 것이 없는 것이다. 둘 다 오러 운용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으니까. 제라드가 바나텔이랑 비교되는 바람에 꽤 기교파로 보이긴 하는데, 그래 봤자 진짜 기교파 검사인 러스가 보기엔 여전히 단순한 용법이다.

'정말 대단하고 건질 것 없는 싸움이로군.'

쓴웃음을 지으며 러스는 계속 두 사람의 결투를 바라보았다. 참, 당대의 최강자다우면서도 동시에 전혀 최강자답지 않은 결투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점점 둘의 기세도 커져 갔다.

강렬한 살기가 오러에 실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린다. 인근 언덕이 쩍쩍 갈라지며 대지가 속살을 드러낸다. 숲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진다. 백왕성 곳곳이 붕괴되고 첨탑이 꺾이며 내성 곳곳이 무너져 내린다.

걸음걸음 즈려밟을 때마다 인근의 모든 것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소용돌이치는 오러의 영역 속에서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로를 보며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기본기만 해 댔구나, 바나텔!"

"여전히 무식하게 몸만 키웠구나, 제라드!"

두 사람이 동시에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하하하핫!"

바나텔이 검을 겨누더니 정식으로 자세를 취했다. 그가 익힌 유일한 검술, 제국검의 기수식이었다.

"역시 네놈 정도 되어야 손맛이 온다니까, 제라드."

제라드도 주먹을 뻗은 채 다리를 벌리고 두 무릎을 살짝 굽혔다. 흔들리지 않는 거악巨嶽을 연상케 하는, 육중하면서도 안정적인 자세였다.

"지난 시간에 대한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바나텔?"

검과 권을 서로에게 겨눈 채 두 사람이 눈을 빛냈다.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더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바나텔이 쩌렁쩌렁 호통을 쳤다.

"그럼 장난은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붙어 보자!"

순간 백왕성의 모든 이들이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장난? 장난이라고? 지금 백왕성은 그 장난 때문에 강제 철거 상태가 되었는데!

"...."

아스레일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을 이만큼 절실하게 느껴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제라드가 고함을 치며 화답했다.

"죽여 주마!"

콰아앙!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바나텔과 제라드가 서 있던 자리에 높이 수 미터의 폭발 기둥이 치솟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거리를 좁히며 서로 겹쳤다.

2

바나텔은 바슈탈론 제국 남부의 작은 영지 출신의 평민이었다.

자영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귀족처럼 호강하면서 살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에 여유가 있어 영지 안의 작은 무관에서 검술을 배울 수도 있었다.

그 무관은 제대로 된 검사가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제국군에서 은퇴한 노병 하나가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곳이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검술도 바슈탈론 제국군 공식 검술인 제국 검법뿐이었다.

제국 검법은 모든 제국 병사들에게 익히게 하는 범용적인 검술, 그런 만큼 무슨 오묘한 기술이나 비의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단순한 팔방 베기며 찌르기, 기본적인 스텝 정도만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해서 제국검이 결코 엉망인 검술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범용성이 큰 만큼 제국 검법은 기본기에 매우 충실했다. 누구라도 사지만 멀쩡하면 기본을 닦을 수 있는 체계적인 검술이었다.

실제로 제국의 이름난 기사나 검술 무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을 위한 기본 검술로 제국검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본이 튼튼해야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오랜 무언武言이었으니까.

제국검을 배운 어린 바나텔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우직하게 검을 익혔다. 그리고 놀라운 실력을 보여 무관뿐 아니라 그 일대에서 당해 낼 수 없는 강자가 되었다.

바나텔이 센스가 없느니 어쩌니 해도 그것은 오러를 각성할 정도의 천재들과 비교할 때나 그렇다는 소리다. 저런 시골 영지의 무지렁이들 사이에선 그의 신체 능력만으로도 적수가 없었다.

나름 검에 자신이 생긴 바나텔은 스무 살 때, 집을 떠나 제도로 향했다.

기사가 되려면 타고난 혈통이 받쳐 줘야 하는 법, 저런 시골 영지에서는 아무리 강해 봤자 병사들을 지휘하는 대장 정도가 출세의 한계다. 평민이 검만으로 출세하려면 제도에서 용병으로서 이름을 날릴 수밖에 없다. 이름난 용병은 지방 귀족들이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기사로 등용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제도에 도착한 바나텔은 당시 이름난 용병단이었던 위론 용병단에 적을 두고 검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풋내기 용병이었지만, 시간이 가고 각종 전투를 겪으며 조금씩 '제국검을 쓰는 검사'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용병뿐 아니라 검을 쥔 자치고 제국검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다. 아예 군대에서 가르치는 제식 검술이니 배우기도 대단히 쉬운 것이다. 하지만 제국검은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이지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검술은 아니다.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히지 못한 용병들이 제국검을 쓰는 일은 흔하지만, 그런 이들도 단순히 제국검만을 구사하진 않았다. 보통은 제국검을 바탕으로 용병 생활을 하며 얻은 변칙기를 넣어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쓰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바나텔은 달랐다.

오직 제국검의 단순한 기술 그 자체만으로 바나텔은 이름난 용병이며 기사마저 베어 버리곤 했다. 그의 검은 너무도 빠르고 강렬해, 다들 뻔히 검의 궤도를 보면서도 채 피하거나 막지 못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 특이성 때문에 바나텔은 꽤나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나텔이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만큼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 기본은 탄탄했지만 세상은 그저 기본기만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낼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가끔씩 패배하고, 상처 입고, 죽을 위기도 넘겨야 했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조언했다.

기본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제발 응용을 좀 하라고.

오직 한 가지 기술만을 갈고닦아 천하제일이 된 무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물론 바나텔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찌르기 하나만을 완벽하게 구사해 달인이 된다 해서 진짜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예전처럼 마법이 발달하기 전, 무술가에 대한 정보가 저장될 수 없을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마법사가 흔하고 마탑에서 온갖 마도구를 만들어 내는 시대다. 영상 마법 크리스탈로 녹화가 가능해진 지금은 절대적인 기술 하나만으로 계속 이겨 나갈 수가 없다. 설사 한두 명 정도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기술이 알려지는 순간 끝장이다. 일단 상대가 그 기술에 대해 충분히 대비를 하면 다른 대응법이 없으니 바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 알고 있다.

바나텔도 충분히 납득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저히 응용이 안 되는데 어쩌라고?

바나텔이라고 좋아서 기본기만 죽어라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나름 이런저런 시도는 해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어설프게 따라 할 수야 있지만, 조금이라도 검로를 흐트러트리면 바로 위력도 스피드도 일개 병사 수준으로 줄어 버렸다. 자신보다 훨씬 약한 용병들도 하나 배우면 이래저래 잘도 응용해 대는데, 그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바나텔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좌절하기에는 너무 굳건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연습하다 보면 늘겠지.

수련하다 보면 되겠지.

남들이 하루 연습할 때 열흘 연습하고, 한 달 연습하고, 1년 연습하면 설마 똑같이 눈 코 입 달리고 팔다리 달린 같은 인간인데 안 될 리가 있겠어?

...그런데 안 되었다.

사람에게는 정말 타고난 것이 있는지,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신기할 정도로 센스가 늘지 않았다.

그러나 바나텔은 실망하지 않았다. 분명 센스는 하나도 늘지 않았지만, 대신 초월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자고로 한 우물만 파는 자가 보다 빨리 목을 축이는 법.

여전히 단순한 제국 검술만을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바나텔은 비교적 빠른,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오러를 각성할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경악했다. 위론 용병대의 일개 대장이었던 바나텔이 갑자기 초인 중의 초인이라는 오러 유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깨를 같이하던 동급의 검사가 갑자기 저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바나텔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도 달라졌다. 제국의 온갖 유력 귀족들에게서 그를 초빙하고 싶다며 서신을 보냈다. 타국에서는 백작의 작위를 약속하는 왕도 많았다.

어린 시절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바나텔은 흡족해했다. 역시 그의 믿음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수많은 초빙, 그중에서 바나텔이 선택한 것은 바슈탈론 제국 기사단의 대장 자리였다.

타국에서 제의한 작위와 영지에 비하면 좀 모자란 감이 있겠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바슈탈론 제국인이었고 제국의 검술을 익힌 자였다.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바나텔이 딱히 세속의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릴 적이야 출세하고 싶었지만 정작 오러를 각성하고 나니 무인으로서 더더욱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런 면에서 제국 기사단의 대장 지위는 검을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자리였다.

바슈탈론 제국은 황제에게 충성한 오러 유저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었다. 모든 복잡한 업무는 다른 이들이 대신 해 주었다. 자유로운 무인처럼 기사단 버려두고 대륙을 떠돌며 수행을 나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 풍족한 대우를 받으며 오로지 검술에만 매진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제약이 심하면 심할수록 오러 유저의 경지를 높이기도 힘들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제국 기사단에는 바나텔처럼 평민 출신 오러 유저도 상당수 있어, 마음도 꽤 편했다.

제국 기사단에 적을 둔 후로도 바나텔은 여전히 우직하게 할 수 있는 것만을 수행했다. 남들이 오러 유저치고 참 발전 없다며 혀를 찰 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우직함이 어떤 결과를 주었는지 몸소 체득한 그였다.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대부분 제국 내에서 수행만 하던 그였지만, 가끔씩은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다. 제국의 명 때문이기도 했고, 또 후원을 받는 다른 귀족들의 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수행이 중요하다지만 그렇다고 실전을 멀리 하면 골방의 달인이 될 뿐이다. 그걸 잘 아는 바나텔은 들어오는 협조 요청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마흔을 갓 넘겼던 어느 봄날.

그때 바나텔은 라스틸 공국 변방에서 차탄의 한 상단을 도와 귀족가 하나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러 유저인 바나텔의 힘은 압도적이었으니 귀족가의 기사와 병사 들은 결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그 귀족가는 가문이 휘청거릴 정도의 금액을 들여 당시 공국에 머물고 있던 이름 높은 오러 유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바나텔은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철탑 같은 육체에 사람 같지 않은 거구를 지닌 우락부락한 사내.

이미 20년 가까이 오러 유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권왕 제라드였다.

☆ ☆ ☆

제라드를 향해 돌진하며 바나텔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번쩍!

섬광이 번뜩이며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순식간에 제라드의 가슴에 적중했다.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된 것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한 스피드의 참격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넘치는 오러양을 바탕으로 느긋한 공격만을 했었지만, 제라드를 만났으니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러스와 타시드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빠, 빠르다!'

아까 저 베기를 자신들에게 날렸다면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일거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정말 바나텔이 봐주긴 많이 봐주었던 것이다. 오러 유저인 그들의 동체 시력으로도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쾌검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제라드는 전신에 오러 가드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흥, 이 정도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것도 없지!"

완숙의 극에 달한 참격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 동작 자체는 기본적인 횡 베기와 다름이 없었다. 제라드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제라드는 가슴을 활짝 폈다. 황금빛 불길이 일렁이며 타올라 선홍의 오러와 맞붙었다.

콰쾅!

두 색의 오러가 서로 충돌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둘의 오러 대결은 바나텔의 우세였다. 선홍색 오러가 황금의 빛을 뚫고 제라드의 육체에까지 파고들었다. 폭음이 울리며 제라드의 등 뒤로 거대한 파문이 터졌다. 충격파가 부챗살처럼 뻗어 나가 대지 위에 파괴의 그림을 남겼다.

검을 거두며 바나텔이 감탄을 터트렸다.

"더 단단해졌군, 제라드!"

분명 그의 블레이드 오러는 제라드의 오러 가드를 뚫었다. 하지만 저 인간의 탈을 쓴 쇳덩어리는 오러 가드 없이도 그 육체만으로 가뿐히 나머지 위력을 막아 낸 것이다.

"으하하! 네놈은 전혀 예리해지지 않았구나!"

블레이드 오러에 실린 위력은 물론 강대했지만, 거기 담긴 절삭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의기양양해하며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바나텔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 어차피 난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보통 숙련된 오러 유저들은 오러를 진동시키거나 회전시키는 등으로 관통력이나 절삭력을 높이지만 슬프게도 검성씩이나 되는 주제에 바나텔은 그런 짓 전혀 못 한다. 하지만....

"한 번 찍어서 안 넘어가면 열 번 찍으면 되지!"

검을 쥔 바나텔이 스피드를 올리며 순식간에 검을 여덟 번 베었다. 제국검술의 기본, 팔방 베기였다.

팔방 베기는 다른 오러 유저들처럼 검을 오묘하게 놀려 여덟 번 연속으로 베는 그런 고도의 동작이 아니다. 일단 한 번 베고, 다시 자세 잡고, 또 한 번 베고, 다시 자세 잡고. 이걸 여덟 번 반복하는 진짜 기초 동작이다.

그런데, 팔만 휘두르는 다른 검술가보다도 몸통 전체를 움직이는 바나텔이 오히려 더 빨랐다!

어찌나 동작이 빠른지 몸이 통째로 흐릿해지며 여덟 개의 참격이 원래부터 하나의 기술인 것처럼 동시에 날아온다. 제라드가 기가 차서 혀를 내둘렀다.

'아, 저 새끼, 여전히 병신같이 강하네.'

남들 다 하는 8연격은 못하는 주제에, 아무도 못하는 '일격 여덟 번 동시 구사'는 해내다니? 바나텔은 분명 센스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할 줄 아는 동작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위력적이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비효율의 극에 달하는 연격이다. 단순 무식한 바나텔의 검술을 보며 제라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거참, 저놈 놔두고 왜 세상은 나보고 단순 무식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 와중에도 바나텔의 참격은 제라드의 사방을 철저하게 감싸며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너무 정직한 기술이라 피하려면 피할 수는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찰라의 순간 펼쳐진 참격이지만, 같은 레벨인 권황 제라드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스피드였으니까.

하지만 제라드는 피할 마음이 없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란 없다!

"스파이럴 가드!"

2.5미터에 달하는 거구 위로 황금빛 회오리가 솟구쳤다. 강렬한 오러의 소용돌이가 돌풍이 되어 날아오는 블레이드 오러를 산산이 갈아 버렸다.

콰콰콰콰콰!

귀를 찢는 굉음이 연거푸 울렸다.

바나텔이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리며 제라드를 밀어붙였다. 참격에 깃든 블레이드 오러의 사이즈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종국엔 무슨 강 건너는 다리만 해졌다. 세상이 선홍빛으로 물들며 제라드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스파이럴 가드의 회전을 올리며 제라드도 제자리에서 버텼다.

놀랍게도 비효율의 극치에 달하는 바나텔의 오러가 제라드의 스파이럴 가드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스파이럴 가드가 조금씩 흩어지며 선홍색 오러가 제라드의 사방을 파헤치고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제라드의 거구가 조금씩 뒤로 밀렸다. 그가 인상을 쓰며 발을 들어 크게 올려 찼다.

"타이푼 킥!"

발차기의 궤도를 따라 황금빛 오러가 돌풍이 되어 오르며 남은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를 모조리 걷어 냈다. 제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거기서 오러양이 더 늘었냐? 괴물 같은 놈."

오러를 거두어 다시 몸을 방어하며 바나텔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네놈은 그리 늘지 않았군?"

"원래 오러양이란 게 시간만 흐른다고 펑펑 늘어나는 건 아니거든? 네놈이 괴상한 종자인 것뿐이야!"

호통을 치며 제라드가 몸을 날렸다. 2.5미터의 신장에 200킬로그램 가까운 그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제라드가 길게 옆차기를 뻗었다.

"타앗!"

뻗어 나간 옆차기가 공성추 같은 위력을 실어 바나텔의 옆구리를 노렸다. 말이 옆구리지, 제라드의 발 사이즈를 생각하면 상체 좌반신 전부가 타격점이다. 손바닥을 펼쳐 내뻗으며 바나탈도 기합을 터트렸다.

"허업!"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제라드의 옆차기와 충돌했다. 뇌성이 울리며 대기가 진동했다. 재차 바닥에 착지하며 제라드가 진각을 내디뎌 오른 주먹을 뻗었다. 대포 같은 정권 찌르기가 바나텔의 상체를 향해 쏘아졌다.

쿠웅!

주먹을 지르는 기세만으로 제라드의 등 뒤로 후폭풍이 10여 미터 가까이 일어 올랐다. 바위 같은 정권이 섬광처럼 바나텔을 향해 쇄도했다.

순간 바나텔이 눈을 빛냈다.

"어림없다!"

짧은 외침과 함께 그의 정면으로 무려 아홉 개의 선홍빛 오러 실드가 겹겹이 떠올랐다. 제라드의 주먹이 빛을 발하며 중첩된 오러 실드를 깨부수고 나아갔다.

박살난 오러 실드가 사방으로 튀어 구경하고 있던 러스며 타시드, 다른 오러 유저는 물론 백왕성 인근의 숲과 언덕까지 덮쳤다.

"으에엑!"

"아이고, 검성이시여!"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시종들이 사색이 되어 숲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제라드나 바나텔 입장에서는 그냥 깨진 오러 실드의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졌을 뿐이지만 시종들에겐 유성우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보며 바실리의 오러 유저, 왈그란 경이 몸을 날렸다.

"에잉, 꼴 보기 싫은 제국 놈이라지만 저것들은 죄가 없지."

왈그란 경이 손을 들어 시종들 머리 위에 커다란 오러의 원반을 형성했다. 시종들이 화색이 되어 원반 밑으로 피신했다.

자유 검사, 마라드도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끙! 주위 좀 보고 싸우지, 좀!"

마라드가 자신이 애용하는 곡검曲劍, 팔시온을 길게 뻗었다. 현란한 주황색 블레이드 오러가 창공을 휘감았다. 허공 가득 검광이 휘몰아치며 시종들 머리 위로 떨어지던 오러의 파편들이 일제히 비산해 사라졌다.

"사, 사람 살려!"

"도망쳐!"

정신 차린 시종들이 기겁해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다른 오러 유저들이 애꿎은 목숨 살리기 위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제라드와 바나텔은 둘만의 싸움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쳇! 안 뚫리네."

제라드가 혀를 차며 주먹을 거뒀다. 그의 정권은 바나텔의 아홉 오러 실드, 그중 여덟 개까지는 무난히 파괴했지만 마지막 한 개에서 결국 가로막혀 버렸다.

"예전보다 더 두꺼워졌구먼."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으니까!"

회심의 미소를 띠며 바나텔이 이번엔 검을 뒤로 뽑더니 찌르기를 날렸다. 바나텔의 전신에서 선홍색 빛의 추 형상이 떠오르며 그 끝이 제라드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꿰뚫어 주마!"

그 유명한 검성 바나텔의 관통격貫通擊이었다. 예전 바나텔이 자신의 위력이 궁금해서 땅에다 대뜸 찌르기를 날렸는데, 하도 깊이 파고들어 온천이 솟았다는 엽기적인 전설이 있는 일격이다.

그 위력은 실로 발군!

'역시 대단하군.'

제라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은 흘렸다. 숙적의 존재는 실로 애증의 대상, 피 떡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바나텔이지만 이렇듯 손을 섞고 있으면 흥겹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받아 주마! 으하하하!"

절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제라드가 두 팔을 떨치며 가슴을 활짝 폈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순간 바나텔이 기겁해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저건?"

제라드의 전신을 휘감으며 왼쪽으로 도는 황금빛 오러의 소용돌이, 그 표면에 또 하나의 회오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안쪽의 스파이럴 가드와 달리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강렬한 기세를 사방으로 뿌린다!

"저놈 저거, 저런 기술 없었는데?"

"나도 안 놀았다는 증거지!"

자신만만한 제라드의 대꾸와 함께 바나텔의 찌르기가 두 겹의 스파이럴 가드와 충돌했다. 쇠끼리 긁어 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더블 스파이럴 가드가 바나텔의 블레이드 오러를 끝부터 빠르게 갉아먹었다.

결국 제라드는 바나텔의 찌르기를 무난히 막아 냈다. 바나텔이 인상을 쓰며 다음 공세를 준비하려던 때였다.

이번엔 제라드가 앞으로 나섰다. 오른 주먹에 찬란한 황금의 오러를 머금은 채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흥!"

코웃음을 치며 바나텔이 손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아홉 개의 오러 실드가 차곡차곡 겹치며 제라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제라드가 오른쪽 팔뚝을 몸통에 붙였다. 그리고 전신을 짧게 회전하며 오러 가드 앞에 주먹을 가져갔다.

"제로 임팩트!"

강렬한 권경이 주먹 끝에서 뻗어 나왔다.

레펜하르트처럼 사람을 상대로 충격을 관통시키는 평범한(?) 제로 임팩트가 아니었다. 예전 제라드는 심심풀이 삼아 성벽을 격하고 외성은 놔둔 채 내성만 제로 임팩트로 박살 낸 적이 있었다. 엽기적인 전설이란 측면에서는 제라드도 바나텔 못지않았던 것이다.

아홉의 오러 실드를 모조리 관통하며 전혀 소실되지 않은 충격이 바나텔을 강타했다!

"헙!"

순간, 바나텔은 오러 가드를 또 펼쳐서 제로 임팩트의 위력을 모조리 상쇄시켜 버렸다. 오러 실드를 아홉 개나 펼치고도 오러양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쳇, 역시 만만치 않아. 이번에도 승패를 가리기 힘들겠군."

바나텔도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오랜 숙원을 풀고 싶었는데, 역시 쉽지가 않다.

"역시 내 호적수는 네놈밖에 없군, 제라드."

문득 제라드가 눈가를 찌푸렸다. 주름살을 만들며 그가 바나텔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어이, 어디서 은근슬쩍 맞먹으려고 해? 네놈 분명 나한테 한 번 패했어."

바나텔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버럭 성을 내며 그가 호통을 쳤다.

"야! 그걸 숫자에 넣으면 안 되지!"

3

당대 최강의 권사, 권황 제라드.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제라드는 바실리 왕국에서 꽤나 전통 있는 귀족가 출신이었다. 그의 풀 네임은 제라드 크롬 프로테이스, 뼈대 있는 가문을 상징하는 미들 네임이 엄연히 중간에 붙어 있는 것이다.

프로테이스 가문은 중앙의 유력 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 바실리 동부에서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난 제라드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제라드의 운명이 뒤틀리게 된 것은 열한 살 때.

그의 앞에 나타난 거구의 노인, 당시의 권왕이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 라스탈 덕분이었다.

이미 대륙 최강의 권사로 명성이 높았던 라스탈은 어린 제라드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찾았소! 사부! 드디어 찾았소!

2.4미터의 거대한 근육 노괴가 무릎 꿇고 징징 짜는 모습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어린 마음에도 '나 이 자리에서 죽나 보다.'라고 겁먹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라스탈 입장에선 정말 절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대에 세상에 나와 어언 40년, 온갖 명성을 다 얻었지만 그도 슬슬 늙어 가고 있었다. 뭐, 그의 육체를 본 자라면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후계자 걱정이 되는 나이인 건 사실이었다.

무인으로서의 활동도 모두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찾아 대륙을 떠돈 지 벌써 10년째였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법을 견뎌 낼 만한 인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스승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위대한 가르침의 맥을 끊게 될까 싶어 초조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찾았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벗어난 뼈와 근육을 지닌, 실로 짐승 같은 놈을!

눈물을 훔친 뒤 라스탈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당시 제라드는 귀족가 후예답게 예의 바른 아이였다. 눈치도 빨라, 눈앞의 노인이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신장 2.4미터의 노인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겠지만.)

-프로테이스 가문의 제라드라고 합니다.

예의 바른 아이의 대꾸에 라스탈은 호쾌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대뜸 한 손으로 어린 제라드의 허리를 잡고―팔뚝이 아니다. 허리다. 워낙 사이즈가 무지막지하다 보니 손아귀에 어린아이 하나가 통째로 들어갔던 것이다― 들어 올린 뒤 바로 그의 아비를 찾았다.

-아들을 내놓아라! 그럼 권왕으로 키워 주마!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답게, 라스탈은 대뜸 저렇게 선언했다.

프로테이스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원래 프로테이스 가문은 바실리 서쪽에서 역사가 깊은 무인 가문이다. 당대 최강자가 아들의 재질을 인정해 제자로 맡겠다고 하니 평범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권왕에 대한 소문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그 강력함만큼이나 무식한 수행법 역시 대륙 전역에 잘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초대 권왕은 제자 수십 들였다가 모조리 시체 만들어 도로 뱉었다지 않은가?

물론 라스탈은 그건 다 예전의 일이며, 그때의 노하우를 통해 제대로 안목을 길러 이제는 확실한 인재만 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설득했지만 역시 믿기는 힘든 이야기였다.

제라드의 아비, 프로테이스 남작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아들을 저런 살벌한 무문에 집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의 라스탈은 이미 대륙 최강자로서 일개 귀족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명성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굳이 영향력을 따지지 않더라도 권왕 라스탈은 그냥 그 자신만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귀족가 하나둘쯤은 가볍게 몰락시킬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함부로 제안을 거부할 만큼 만만한 작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유일한 후계자도 아니고, 남작에겐 이미 다른 아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그중 하나를 내줌으로써 당대 최강의 오러 유저와 인연을 맺는다면 그 또한 가문으로서 나쁜 일이 아니었다.

도덕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작을 보며 라스탈은 좀 더 설득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권왕, 주먹으로 대화하는 자였다.

그래서 짐 언브레이커블답게 '설득'했다.

-그대의 아들은 이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호통을 치며 벽에 슥 주먹을 가져가는데, 그 순간 대폭발이 일어나며 저택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라스탈의 설득(?)이 먹혔는지, 프로테이스 가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순순히 어린 제라드를 내주었다. (그래도 라스탈이 양심은 있었는지 착실히 수리비는 보상해 주고 갔다.)

그렇게 열한 살의 어린 제라드는 라스탈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 1년은 무수히 울었다. 부모가 협박을 못 이겨 사부에게 자신을 팔았다고 여겼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2년쯤 되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바빴다.

3년쯤 되니 부모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도망가겠다는 생각만 했다.

5년이 지나자 도망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슬슬 사부가 좋아졌다.

진심은 통한다던가? 아무리 혹독한 수행이라지만 그것에는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부는 극진히 제라드를 사랑했다. 뭐, 사랑의 방식에 좀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랑의 진실성만큼은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8년이 지나고 오러의 힘을 손에 넣었다. 사부의 고마움이 절실히 느껴졌다. 어서 사부가 원하는 경지에 올라 그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제라드의 나이 스물두 살, 드디어 그는 4중첩 캘러미티 혼을 터득하고 당당히 하산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늙은 라스탈은 크게 기뻐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드디어 업을 벗었도다!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구나!

신장 2.3미터의 우람한 젊은이가 된 제라드는 제일 먼저 부모를 찾았다.

굳이 부모가 그립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미 완벽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분위기에 적응한 제라드는 쿨한 사나이의 길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저, 아들 된 도리로 얼굴 정도는 비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가문은 실망스러웠다.

가문이 몰락했거나 타락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귀족가로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었다.

제라드가 실망한 것은 자신의 부모 때문이었다.

자식을 팔아넘기고도 그의 부모는 잘살고 있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아들을 잃고 시름에 젖어 식음을 전폐하다 앓아눕는 부모의 존재는 말 그대로 이야기였을 뿐인 모양이다. 두 분 다 참 팔팔했다. 심지어 아버지 경우엔 정력이 남아도는지 첩도 하나 얻었다.

의외로... 화는 그리 나지 않았다.

그냥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거라는 사부의 말만 뇌리에 맴돌았다.

제라드는 무심하게 가문을 '방문'했다. 잃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오러 유저가 되어 돌아왔으니 당연히 가족들은 그를 크게 환영했다. 드디어 프로테이스 가문도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거라며 좋아하는 가신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더 이상 가족에게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찾아보고 나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은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사흘을 머문 뒤 제라드는 미련 없이 가문을 떠났다. 그리고 세상에 나섰다.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처럼, 제라드 역시 활동을 시작하자 곧 권왕의 칭호를 얻었다. 강력한 육체와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패도적인 오러, 젊은 제라드는 금세 대륙의 강자들 사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던전을 탐사하며 기량을 높이고 각종 귀족가의 의뢰를 받아 재산도 축재해 가며 제라드는 열심히 무인으로서 살아갔다. 2.3미터이던 신장도 더욱 커져 2.5미터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마흔 초반에 다다랐을 무렵.

당시 제라드는 라스틸 공국의 한 귀족가의 의뢰를 받아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만났다.

얼치기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한 검술만을 지닌 주제에, 놀랍게도 오러를 각성한 신진 오러 유저 바나텔을.

☆ ☆ ☆

대륙력 963년. 라스틸 공국의 지방 영지, 리카이드 백작령.

영지 외곽의 한 들판에서 두 무리의 병력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차탄 공국의 테젠 상단이 고용한 용병들과 리카이드 백작가의 병사들이었다.

그 앞에서 두 명의 오러 유저가 서로를 바라보고 시선을 교환한다.

"명성 높은 권왕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바슈탈론의 바나텔이라 하오."

검을 가슴 앞에 세운 채 바나텔은 긴장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눈앞에 선 저 거구의 사내는 바나텔이 일개 용병으로 세상을 떠돌 때에 이미 대륙의 무수한 강자들을 꺾은 이였다. 어찌 긴장치 않을 수 있을까?

진지한 얼굴의 중년인을 향해 제라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라드요."

정중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바나텔을 얕보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명성을 떨친 그에게 바나텔은 그저 애송이일 뿐이었다. 나이는 비슷할지 몰라도 오러 유저로서의 경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바나텔이 몸을 던졌다.

"가겠소!"

"그러시든가?"

콧방귀를 뀌며 제라드가 가슴을 펴도 마주 몸을 던졌다.

전투가 시작됐다. 바나텔의 선홍빛 블레이드 오러가 연신 제라드를 두들겼다. 제라드도 느긋하게 양 팔뚝을 오러로 감싸 공격을 튕겨 내며 주먹을 뻗고 발길질을 해 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공방을 주고받았다. 바나텔을 상대하며 제라드는 속으로 확신했다.

'기본은 튼튼하지만 오러 유저 된 지는 얼마 안 되었나 보군. 오러 운용이 영 어설퍼.'

대충 손을 나눠 보니 자신의 상대가 아님이 확실했다. 슬슬 제라드가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갑자기 바나텔이 길게 괴성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아!"

순간 제라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기세가 상대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앗!"

바나텔의 몸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며 가공할 섬광이 뻗어 왔다. 무시무시한 스피드에 기세 또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자기도 모르게 제라드는 전신의 방어를 극도로 끌어 올렸다.

"스파이럴 가드!"

번쩍!

제라드의 두꺼운 가슴팍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이내 갈라지며 선혈이 흘러나왔다. 바나텔이 날린 참격, 그것이 스파이럴 가드의 강렬한 회전력을 가르고 오러 방어를 뚫고, 심지어 강철 같은 그의 근육마저도 상처 입혔다!

뚝, 뚝, 뚝.

제라드의 가슴팍에서 선혈이 방울져 떨어졌다.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냥 피부를 찢고 근육 일부가 살짝 갈라진 정도였다. 치명상은 고사하고 그리 큰 부상이라 할 수도 없는 옅은 자상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미처 지혈할 생각도 못 한 채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건...."

처음 세상에 나섰을 때는 그래도 이래저래 상처 입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불굴의 육체를 지녔다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경험 많은 오러 유저가 많았고, 아직 그는 완성된 무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 마흔을 넘긴 이후, 캘러미티 혼을 6중첩까지 달성한 후로 제라드는 자신의 피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의 단련된 육체를 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사부 라스탈과 함께 대륙 최강자로 추앙받던 검성 위키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검성의 검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현란했지만, 제라드 입장에서는 회초리나 다름없었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치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라드가 검성 위키아를 이겼다는 것은 아니었다. 검성의 현란한 움직임에 제라드는 그의 옷깃 하나 건드려 보지 못했으니까. 추구하는 길이 너무 다르다 보니 서로 상처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말하면 무승부랄까? 뭐,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봐 주지 않았지만.

한쪽은 화려하게 움직이며 신 나게 후려 패고, 한쪽은 무작정 두들겨 맞으면서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겉보기엔 누가 보아도 제라드의 패배인 것이다. 죽어라 처맞으면서 '난 하나도 안 아프니 그대의 패배다!'라고 외쳐 봐야 구차할 뿐인지라, 제라드도 굳이 그런 인식에 항변을 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최강의 검사 위키아조차도 해할 수 없을 만큼 현재 제라드의 육체와 오러는 완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육체가 베였다?

위력만으로 치면 검성보다도 더 우위가 아닌가?

그것도 남들처럼 멍청하게 자세 다 흐트러트린 채 힘만 집중한 공격이 아니었다. 단순할지언정 확실히 기본에 충실한 일격이었다. 그래서 데스 카운터를 쓸 여유도 없었다.

"후우, 후우...."

전력을 다 쏟은 일격이었는지 바나텔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라드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자식이!"

극도로 분노한 제라드가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단순히 피를 보게 된 분노가 아니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육체가 베였다! 이는 자존심에 금이 간 짐 언브레이커블의 분노다!

"조져 주마!"

일단 전력을 다한 제라드의 기량은 오러 각성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바나텔이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그리 살생을 즐기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상대의 목숨을 앗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다. 단지 대충 패도 어지간해서는 다 죽어 나갈 뿐이지.

비록 분노했다지만 제라드는 굳이 바나텔의 목숨까지 거두진 않았다. 어차피 양쪽 다 청탁을 받아 움직인 일이었다. 딱히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냥 화풀이 삼아 열심히 두들기기만 했다.

기본이 탄탄한 바나텔은 용케도 제라드의 모든 공격을 버텨 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 ☆

"그때 너 분명 패했다, 나한테. 어디서 은근슬쩍 없는 일로 만들려고?"

비아냥거리는 제라드의 말에 바나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삿대질까지 해 대며 항변했다.

"그, 그때는 내가 아직 검성이라 불리기도 전의 이야기잖아! 어쩌다 좋은 사부 만나서 젊은 나이에 오러 유저 된 주제에!"

삿대질하는 손가락 끝으로 오러 줄기가 줄줄이 뻗어 나와 제라드의 전신을 찔러 댔다. 무슨 공격 의도가 있던 게 아니라 흥분하다 보니 체내 오러가 제어가 안 되어 질질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전신을 오러로 감싼 채 제라드가 코웃음을 쳤다.

"흥!"

선홍색의 삿대질 오러가 제라드의 근육에 튕겨 사방팔방 날아가며 솟구치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워낙 오러양이 막대한 바나텔이다 보니 무의식중에 새어 나간 오러라도 거목이며 바위쯤은 박살 낼 위력을 지닌 것이다. 뭐, 제라드 입장에서야 저 정도는 진짜 삿대질과 별 차이 없는 수준이라 그냥 몸으로 버텨 내고 있었지만.

"그럼 네놈이 좋은 사부 만났으면 더 일찍 오러 유저가 되었을 것 같냐?"

제라드의 반문에 바나텔이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끄응...."

까놓고 말해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바나텔의 경지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는 스승이 필요 없는 타입이었으니까.

바나텔이 발끈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이후로는 항상 무승부였잖아!"

제라드가 여전히 놀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지."

권왕 제라드에게 상처를 입힌 바나텔의 명성은 삽시간에 대륙을 진동시켰다. 아무리 때리고 베고 찔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존재는 다른 무인들에겐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왕 제라드와 싸우다 패하는 것은 그냥 다른 강자에게 패하는 것과 이야기가 달랐다. 이쪽은 흠집 하나 못 낸 채 두들겨 맞기만 하다 끝나니 굴욕도 보통 굴욕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나텔이 그동안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혹자는 이런 식으로 평하기도 했다.

-이는 한 인간에겐 작은 일격이지만, 대륙의 오러 유저에겐 위대한 시작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의 평가일 뿐, 바나텔 본인에겐 전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제라드에게 작신작신 전신을 골고루 두들겨 맞은 바나텔은 이를 갈며 더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아무리 상대가 이름 높은 권왕이라지만 그 역시 오러 유저였다. 이토록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니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수행하고 또 수행했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제라드와 조우하게 되었다. 일부러 그를 찾은 것은 아니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연히 서로의 행로가 겹친 것이었다.

제라드와 다시 맞붙은 바나텔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미 오러 유저로서 경험도 많이 쌓았고, 또 오러양도 당시보다 더욱 높아져 있었다. 제라드와 바나텔은 미친 듯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한나절이 넘도록 싸웠다.

승패는 갈리지 않았다.

전투 도중에 그들이 돕던 세력에 다른 일이 생겨 둘 다 몸을 빼야 했던 것이다. 지친 얼굴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이를 갈았다.

-다음엔 절대 살려 두지 않겠다! 제라드!

-운 좋은 줄 알아라, 바나텔! 10분만 더 있었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나텔이 그토록 고련을 하고 또 했지만 제라드라고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여전히 기량은 제라드가 우위에 있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실력 차가 줄어든 셈이니 만족할 법도 하건만, 바나텔은 오히려 이를 갈았다. 그리고 식음마저 전폐하며 더더욱 맹렬히 수행했다.

그 와중에 위키아가 늙어 죽고 검성의 자리가 비었다. 세인들은 권왕 제라드와 동급의 실력을 지닌 바나텔을 자연스럽게 새로운 검성으로 추앙했다.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저런 위업을 보이지는 못할 테니까.

둘의 나이가 쉰을 넘겼을 때였다.

테이칸 왕국 내부의 권력 투쟁 속에서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났다. 이제 바나텔도 더 이상 제라드의 밑이 아니었다. 백 살이 넘은 제라드의 스승, 권황 라스탈도 결국 노쇠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두 사람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대륙 최강의 무인, 검성과 권왕이었다.

하루 밤낮을 싸웠고 결국 무승부가 되었다. 둘 다 피투성이가 되어 동료에게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제라드는 이를 갈았다.

-제 목숨 버려 가며 덤비는 저 미친 새끼!

바나텔도 이를 갈았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꼭!

인연이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면 악연 역시 하늘이 내리는 모양이다. 그 이후로도 제라드와 바나텔은 수시로 마주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승패를 겨루지 못했다.

둘의 실력이 필적해진 것도 있지만, 제라드와 바나텔의 마음가짐 차이도 문제였다.

항상 바나텔은 제라드를 죽일 수 있다면 자기 목이 날아가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덤벼 왔다. 반면 제라드는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었다.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한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라드는 아직 짐 언브레이커블의 맥을 이을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죽게 되면 위대한 가르침이 끊기며 사부에게 받은 그 크나큰 은혜도 갚지 못한다. 아무래도 바나텔처럼 언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바나텔! 내 칭호가 뭐로 바뀌었는지 들었겠지?"

제라드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바나텔이 무시하며 비꼬았다.

"그 권황이라는 웃기는 칭호 말이냐? 왕이 황제가 되었다고 뭐가 더 대단해진 것 같냐?"

제라드가 피식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이든 황제든, 남이 어떻게 부르건 무슨 상관이냐?"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은 후계자를 배출할 때, 권황으로 불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드디어 제자를 찾았다는 거다!"

바나텔과 싸우는 와중에도 제라드는 열심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를 찾아다녔다. 역시 제자를 키워 후계를 마련하기 전에는 마음껏 바나텔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예를 극성까지 닦아야 생겨나는 것이라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제라드 본인이 직접 찾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정작 대륙을 떠돌아 보니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부 라스탈이 왜 자신을 본 순간 눈물을 펑펑 흘렸는지 절실히 이해가 갔다.

그래도 사부는 10년 만에 자신을 찾아냈다는데, 그는 무려 30년을 헤매도 인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중에 할라인 왕국에서 쓸 만 한 여아女兒 하나를 발견하고 조금 기대하긴 했지만, 역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준에는 한참 모자랐다.

그래도 아쉬워서 헤어지기 전에 호흡법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신체 강화 호흡법을 익힌 저 크리스틴이라는 아이가 나중에 커서 결혼이라도 하면 혹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인재를 낳아 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현재로부터 14년 전, 바나텔과 마지막으로 사투를 벌인 바실리 왕국 남부에서의 일이었다.

바나텔과의 전투로 인한 부상을 추스르던 중, 제라드는 한 작은 농가에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후계자를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왜 우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가, 이름이 무엇이냐?

-테스론이라고 하는데요.

아이를 데려오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워낙 가난한 집안이었다. 밥 먹고 애만 싸질렀는지 남아男兒만 아홉이나 되었다. 금화 한 줌을 내밀자 반색을 하며 아이를 내주었다. 혹시 다른 아이도 필요 없냐며 내밀 정도였다.

이후, 제라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산속에 처박혀 후계자를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아이는 쑥쑥 자라 훌륭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가 되어 주었다. 도중에 머리가 조금 이상해져서 제 이름을 레펜하르트라고 우기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건 몸뚱이는 아무 문제 없었다.

그의 제자는 이제 권왕이라 불리며 당당한 무인이 되었다. 그의 오랜 숙원도 풀렸다. 혹시나 제자로 들일 만한 인재가 더 있으려나 싶어 찾아다니긴 했지만 예전처럼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껄껄 웃으며 제라드가 온몸의 근육을 크게 부풀렸다.

"이젠, 아무 걱정 없이 네놈을 상대해 줄 수 있단 소리지!"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나!"

바나텔이 전신의 선홍빛 오러를 더더욱 거세게 태워 올렸다.

"과거 따위 알 바 아니지! 원래 최후에 이기는 놈이 진짜 승자인 법이다, 제라드!"

제라드도 양손에 황금빛 불길을 피워 올렸다. 양 팔뚝을 타고 오르는 오러의 용이 회오리치며 두 주먹에 맴돌아 당장이라도 터질 듯 맥동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동감이다! 바나텔!"

각자 전력을 끌어 올린 채 제라드와 바나텔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두 사람이 몸을 날렸다. 선홍빛과 황금빛이 긴 궤적을 남기며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두 줄기 유성이 허공에서 서로 격돌했다.

4

백왕성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자고로 오러 유저끼리의 전투는 주위에 민폐라는 것이 세상의 상식, 최강의 오러 유저답게 제라드와 바나텔의 결투는 그 민폐 또한 대륙 최강이었다. 쉴 새 없이 땅이 흔들리고 폭풍이 불고 대지가 갈라지고 벼락이 내려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백왕성 안에서 아스레일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지휘했다.

"안타레스 기사단! 비전투원을 보호하며 질서를 유지하라! 제1대대, 성벽의 침목을 보강한다! 2대대는 계속 물을 퍼 날라라! 지붕에 붙은 불을 꺼야 한다!"

보통 기사나 병사 들이었다면, 아무리 아스레일이 명령을 적절하게 내린다 해도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안타레스 백왕성의 기사며 병사들은 질서 정연하게 아스레일의 명에 따라 대응하고 있었다.

사실, 백왕성에 주둔하는 이들은 이 '오러 유저의 민폐'를 꽤나 자주 겪은 상태였다.

백왕성에 항시 머무는 오러 유저만 레펜하르트에 러스, 타시드까지 셋이다. 더구나 이니야도 말만 스티리아 일족의 족장이지 허구한 날 백왕성에서 알짱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드워프며 오크 오러 유저들도 수시로 백왕성을 들락거린다.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대련을 해 댔다. 요새야 틸라가 하도 잔소리를 해서 인근 개간지 쪽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예전에는 다들 성내에서 대놓고 오러 펑펑 뿜어 가며 대련을 붙었다.

모두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는 오러 유저들이다. 처음에는 대련답게 조심조심, 조신하게 시작했지만 일단 흥분해 버리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신 나게 전력을 다하며 백왕성을 쑥밭으로 만들곤 했다.

특히나 러스와 타시드는 아예 대련이 하루 일과인지라, 틈만 나면 싸워 대며 성 곳곳을 부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오죽하면 백왕성이 흔들릴 때 아스레일이 제일 먼저 두 사람부터 의심했겠는가?

이들을 말려야 할 안타레스의 군주, 레펜하르트조차도 성 부서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본인 역시 그 파괴에 일조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자기 돈 주고 지은 건물도 아니다 보니 그리 애착도 없었다.

더구나 현 안타레스 백왕성은 어차피 새로운 수도, 아라난 그라드가 완성되면 철거해야 할 건물이었다.

원래 안타레스 백왕성은 그저 시골 귀족의 성을 편의에 맞게 증축한 건물, 예전 주인인 겔페인 자작이 드워프 노예들 관리하기 쉽게 광산 근처에 집을 지어 놓았을 뿐이다. 드워프들이 지은 성답게 넓고 튼튼하긴 했지만 딱히 전투용 요새는 아니다.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는 유벨 2세로부터 하사받은 크로방스 왕국 내 영토 말고도 글로텐 산맥 전역과 페틀랜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백왕성의 지리적 위치는 저 크로방스 쪽 영토와 글라텐 산맥, 페틀랜드를 연결하는 주요 요충지인지라 반드시 강력한 요새를 세워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카를도 눈살은 좀 찌푸렸지만 열심히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괜히 오러 유저들 기죽이지 않고, 그냥 그럴 때마다 대충 구멍 난 건물에 땜빵이나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나중에는 부술 건물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백왕성에 주둔하는 이들은 오러 유저의 전투에 매우 익숙했다. 얼마나 익숙했는지, 자기들끼리 대피 요령을 숙지해 놓을 정도였다.

병사며 기사들끼리 반장난 반진심으로 오러 민폐(?)가 날아오면 어찌해야 하는지 정해 놓은 규율도 있었다.

오러 유저 간 전투 시 일반인 대피 요령

1. 오러 파문이 날아오면 땅에 엎드린 채 입을 벌릴 것. 배를 땅에 대면 진동으로 인해 내장이 진탕될 수 있고 입을 다물면 폐가 상할 위험이 있음.

2. 뾰족한 첨탑이나 거목 주위로 피신 금지. 낙석이나 파편에 깔릴 수 있음.

3. 벽걸이 가구나 찬장, 장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 되도록 기둥이 많은 건물 옆에 붙어서 대련이 끝나길 기다릴 것.

4. 건물 전체가 위험할 시 빠르게 넓은 공터 쪽으로 피신해 상관의 지휘에 질서 정연하게 따를 것.

등등.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항목을 살짝 바꿔 놓은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건 효과는 분명 있었다.

백국의 오러 유저가 대련한다고 날뛸 때마다 백왕성 내 일반인들은 열심히 몸을 사렸다. 자기편의 대련에 휘말려 어디 하나 부러지면 그건 웃음거리도 못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이 지금 그들을 살려 주고 있었다.

아스레일이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물었다.

"아이와 아녀자들은 모두 피신시켰는가?"

땀범벅이 된 채 병사 중 하나가 대답했다.

"네, 단장님!"

"그럼 이제 시종과 행정관들을...."

말을 하다 말고 아스레일이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흑연 가득한 하늘 위에서 붉은빛 무리가 먼지 사이로 새 나오더니, 이내 굉음이 울리며 연기 사이로 구멍이 뻥 뚫렸다.

아스레일이 고함을 터트렸다.

"또 온다! 다들 대비하라!"

저 천상에서 노니는 두 괴물이 또 뭔가를 흘린(!) 모양이었다. 묵직한 선홍색 오러 덩어리가 백왕성 위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빌어먹을!"

비명을 터트리면서도 다들 당황치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눈치껏 오러의 낙하 위치를 파악하고 기둥 뒤로 숨거나 건물 벽 뒤에 엎드린다. 곧이어 대폭발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평소의 대피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스레일이 고함을 쳤다.

"피해는?"

"부상 두 명, 사망자는 아직 없습니다!"

빠른 병사의 보고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아직 백왕성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걸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인간의 환경 적응력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아스레일이 몸을 일으키고 다시 호통을 터트렸다.

"3대대, 시종들과 함께 행정관들을 모시고 어서 뒷길로 빠져나가라! 어서!"

아녀자들이 미리 탈출한 백왕성 뒷산.

그곳에서는 틸라가 플로라며 다른 인간, 엘프, 드워프 여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거대한 배틀 액스를 어깨에 올린 채 그녀가 열심히 여인들을 독려했다.

"어서 움직여요!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어요!"

여인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연신 걸음을 옮겼다.

"흑, 흐흑...."

"무서워요...."

"러스 님이랑 타시드 님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는데...."

아무리 재난 대피 훈련에 익숙하다 해도 실제로 재앙이 닥쳤는데 대범하게 있을 사람은 없다. 다들 두려워하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틸라가 다시 소리쳤다.

"어서 피해야 해요!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요!"

틸라는 뒤쪽, 백왕성과 그 너머 초토화된 들판을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당대의 검성과 권황, 저 두 사람의 전투는 백왕성 뒷산까지 그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지금도 저 하늘 위에 수십 개의 황금빛 태양이 떠올라 찬란히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연환 기격탄!"

제라드의 기격탄은 과연 레펜하르트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기격탄을 이끌어 내니, 그 크기가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어마어마하다.

사방을 에워싸는 기격탄의 폭풍 앞에 바나텔이 코웃음을 친다.

"흥! 조잡한 기술이구나, 제라드!"

"네가 나한테 조잡하다고 구박할 처지냐, 바나텔?"

욕설이 오가며 바나텔이 거대한 블레이드 오러를 연달아 휘두른다. 날아든 연환 기격탄이 모조리 가로막혀 사방으로 튕겨 난다. 바나텔이야 튕겨 내고 끝이겠지만, 빗나간 기격탄은 또다시 유성이 되어 사방의 대지를 강타한다.

여기저기에서 폭음이 울리며 폭발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그중 하나가 하필 백왕성 뒷산에도 떨어졌다. 폭발과 함께 광풍이 몰아치며 거대한 암석 파편들이 여인들에게까지 날아들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는 여인 앞을 틸라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날아드는 암석 파편을 향해 대지 공명의 힘을 끌어냈다.

"이 정도쯤은!"

비록 카를과 사귀며 반쯤 은퇴하긴 했지만 그녀는 스틸해머 일족 유일의 전사 혈통이었다. 지금도 매일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 암석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쿠웅!

도끼가 암석을 일거에 쪼개며 박살이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틸라가 막 숨을 고르려던 찰나였다.

"또 뭔가가 떨어져요!"

여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휘이이익!

파공음과 함께 황금색 유성이 뒷산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환 기격탄을 튕기며 반격한 바나텔에게 거하게 한 대 맞은 제라드였다.

"그 괴물 노인네다!"

유성이 뒷산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쾅!

분명 사람이 떨어졌는데, 수목이 연달아 꺾이고 산 능선이 파헤쳐지며 길고 긴 파괴의 자취를 남겼다. 심지어 직격한 자리에는 직경 10여 미터의 크레이터도 움푹 파여 있었다.

여인들이 질린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주, 죽었나?"

그 순간, 가운데 파묻혔던 제라드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 자식,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흙도 채 털지 않고 제라드가 다시 땅을 박찼다.

황금빛 궤적을 길게 남기며 허공을 가른다. 단숨에 뒷산을 벗어나 백왕성을 통째로 뛰어넘어 바나텔에게 돌진한다.

"바나테에에에엘!"

틸라를 비롯한 여인들은 멍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저 괴물 노인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현듯 여인 하나가 빠르게 말했다.

"빨리 도망가요."

모두가 찬성했다. 긴장과 공포로 피로하고 지친 몸이었지만, 저 광경을 보니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았다. 다들 한마음이 되어 뛰기 시작했다.

"어서 이 지옥을 벗어나요!"

☆ ☆ ☆

백왕성 반대편의 초토화된 언덕 위.

열 명의 오러 유저들이 제자리에 서서 바나텔과 제라드의 결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왕성의 일반인들이야 저 걸어 다니는 두 재난 때문에 미친 듯이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초인 중의 초인이었다. 직격타도 아니고 여파 정도에 흔들릴 수준은 결코 아닌 것이다. 다들 오러 가드를 펼친 채 여파를 흘려 내며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작자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라임 왕국의 이름 높은 오러 유저, 게블릭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최강을 꿈꾸는 무인이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을 보니 그 자리가 얼마나 멀고 까마득한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자기 동네에선 적수가 없었거늘, 과연 세상은 넓구나 싶었다.

그때 차탄 출신의 오러 유저, 데크릴이 주위를 환기했다.

"그런데 우리, 이대로 계속 보고만 있어도 되는 거요?"

"음? 무슨 의미로 한 소리요?"

마라드의 질문에 데크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좋건 싫건, 다들 명을 받아 온 처지잖소? 검성 저 양반이야 회까닥 돌아서 저런다 쳐도 우리마저 계속 이렇게 구경만 하는 건 좀...."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구려."

다른 오러 유저들도 눈을 껌벅이며 동감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곳에 무력시위나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엄연히 제국의 명에 따라 저 발칙한 이단자들을 벌하러 온 몸이었다.

이렇게 이단자들 놔두고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왈그란 경이 백왕성 앞쪽의 들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데크릴 경의 말이 옳소. 검성은 검성이고 우린 우리지. 검성께선 권황과 그냥 싸우게 내버려 두고 우린 우리 할 일을 합시다."

데크릴이 들판에 널브러진 러스와 타시드를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명을 받은 이상 저들의 목 정도는 들고 가야겠지."

다른 오러 유저들도 하나 둘 다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까야 다들 자기 밑천 드러내기 싫어 몸을 사렸다. 하지만 지금 러스와 타시드는 검성 바나텔에 의해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저 정도면 그냥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만으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오러 유저들의 분위기가 변하자 러스와 타시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타시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윽, 러스!"

"알고 있어, 타시드!"

힘겹게 대꾸하며 러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겹게 참마도 다카르를 고쳐 쥐고 자세를 잡으며 타시드가 헐떡거렸다.

"결국 오는구먼."

제라드의 등장 덕분에 잠시 멈추긴 했지만, 저들이 영원히 구경만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타시드도 하진 않았다. 러스가 아쉬워하며 입술을 훔쳤다.

"쩝, 조금만 더 늦장 부리지."

헛웃음을 흘리며 타시드가 친구를 달랬다.

"그나마 이 정도 회복한 것도 다행이지."

"끙, 이걸 회복했다고 할 수나 있나?"

둘은 제라드와 바나텔이 싸우는 틈을 타 열심히 체력과 오러를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전투에 임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연재해 둘이서 펑펑 오러를 날려 대는데 도저히 회복에만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오러 유저들이 넋 놓고 있어 조금 시간을 버나 했는데....

"어쩌지?"

오러를 뿜어 대며 다시 살기를 뿌리는 저 오러 유저들을 보며 러스가 근심을 토했다. 타시드가 가슴을 치며 외쳤다.

"그래도 저 거인 영감 덕분에 죽을 목숨 하나 건졌잖나? 그거면 됐지!"

"그건 그렇군."

호쾌한 친구의 외침에 러스는 씨익 웃었다.

어차피 죽었을 목숨, 운 좋게 살아난 것에 불과하다. 이제 와서 다시 죽게 된다고 뭐 억울할 게 있으랴?

열 명의 대륙 각국의 초인들, 그들이 저마다 형형색색의 오러를 전신에 머금은 채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신의 격통을 애써 억누르며 러스와 타시드가 다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왈그란 경이 다른 사람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누가 하시겠소?"

이미 빈사 상태인 두 사람이었다. 명령이 있어 어쩔 수는 없지만, 사실 저런 부상자와 검을 섞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사도의 명예에 심각한 흠집이 간다. 하물며 여기서 합공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각국의 기사 작위를 가진 오러 유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부상자를 베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데크릴이 나섰다. 러스를 바라보며 그가 검을 겨누었다.

"제가 하지요. 오러 유저를 상대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자유로운 무인인 그는 비교적 다른 이들보다 명예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유 기사인 마라드가 타시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놈은 내가 맡지. 오크 따위에게 명예 운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

데크릴이 러스 앞에, 마라드가 타시드 앞에 섰다.

데크릴은 인간 오러 유저치고는 특이하게 거대한 양수검, 플랑베르쥬를 애병으로 삼고 있었다. 그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암갈색 블레이드 오러가 찬란히 빛을 뿜었다.

"상황이 정당치는 못하나, 우리는 명예로운 결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단죄를 위해 온 것."

마라드도 팔시온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주황색 오러가 칼날 가득 맺혔다.

"금방 썰어 주마, 오크 놈."

흔들림 없이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는 데크릴과 마라드의 오러, 그걸 보며 러스와 타시드는 히죽 웃었다. 확실히 지치고 상처 입은 그들이 감히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목숨 따위 연연하지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를 억지로 일깨우며 두 사람이 마지막 한 줌의 오러마저 모조리 이끌어 냈다.

"타아아앗!"

러스의 전신이 푸르게 빛났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겨누며 소리쳤다.

"와라! 인간들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