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5

☆ ☆ ☆

네 줄기 오러가 정신없이 부딪쳤다. 그때마다 백왕성 앞의 들판이 사정없이 파헤쳐지며 굉음을 떨쳐 울렸다. 제라드와 바나텔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이들의 전투 역시 그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이내 주위 반경 수십 미터가 쑥대밭이 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러스와 타시드였지만, 둘 다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목숨조차 내던진 두 사람의 거친 공세는 오러 유저로서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데크릴과 마라드는 다른 오러 유저의 눈을 의식해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쓸 뿐, 고유의 비기를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한동안 평수 상태가 유지되었다.

뭐, 그렇다 해도 이미 승패는 갈린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 시간이 지체될 뿐 종국엔 데크릴과 마라드가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 그만큼 러스와 타시드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래서 라스틸 공국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나스단은 더 이상 그들의 전투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백왕성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슬슬 저쪽을 처리할까요?"

기사 출신 오러 유저들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렇지."

"저쪽도 처리하긴 해야...."

나스단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러다 다 도망가겠습니다. 왜 그냥 두고 보는지는 저도 이해합니다만...."

여기 있는 이들치고 오러 유저가 아닌 이는 없다. 그리고 다들 기감을 통해 백왕성의 거주민들이 뒷산으로 대피하는 것도 알아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들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역시, 불필요한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는 부분이 컸다. 다행히 검성은 정신줄 놓고 권황만 상대하고 있으니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개중에는 내심, 얼른 대피하라며 속으로 응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스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전부 놓쳐 버리면 제국의 요구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닐까요? 슬슬 비전투원도 다 빠진 것 같은데...."

확실히 황제의 명령은 백왕과 그의 수족을 모두 베라는 것이었다.

무고한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몸 사리고는 있었지만 대충 기운을 느껴 보니 이제 백왕성에는 기사와 병사 일부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본보기를 남기려면 모두 보내 줄 순 없습니다."

할라인 왕국의 기사, 카메룬 경이 나스단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긴, 저들 정도는 베어야 제국도 체면치레를 할 수 있겠지."

비전투원은 몰라도 검을 쥔 이들은 모두 목숨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이들, 저들을 베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죄책감이 덜하다. 모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봅시다."

"그럽시다."

여덟 명의 오러 유저가 일제히 백왕성을 향해 질주했다. 여덟 줄기 오러의 궤적이 길게 대지 위로 호선을 그렸다.

그들의 움직임을 느낀 러스와 타시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안 돼!"

하지만 그들은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데크릴의 파괴적인 일격과 마라드의 유려하면서도 화려한 연격이 두 사람을 꽁꽁 얽매어 놓고 있었다.

러스와 타시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덟 명의 오러 유저가 막 들판을 반 이상 가로지르며 백왕성 앞까지 도달하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서쪽에서 우렁찬 호통이 터져 나왔다.

"누가 감히 나의 백성들을 핍박하느냐!"

오러 유저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가공할 기세가 서쪽 언덕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도저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운이었다.

"윽?"

호통이 이어지며 언덕 위에서 황금빛 섬광이 뻗어 나왔다.

"연환 기격포!"

뇌성이 울리며 아홉 줄기 금색 빛의 기둥이 허공을 갈랐다. 호선을 그리며 섬광이 백왕성 앞으로 내리꽂히더니 이내 오러 유저들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내리꽂힌 빛의 기둥이 대지를 파헤치며 길게 내달렸다. 대지 위로 아홉 개의 커다란 금이 그어진다.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닌지라 오러 유저들이 저마다 몸을 보호하며 공세를 피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왈그란 경이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이 황금빛 오러는 아까 전부터 지겹도록 보아 온 색상이다.

"설마 권황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여전히 지상과 상공 50미터를 넘나들며 바나텔과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아예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를 만큼 몰입한 상태였다.

"그럼?"

오러 유저들의 시선이 서쪽 언덕으로 향했다.

백왕성 서쪽, 초토화된 숲 사이로 드러난 한 작은 언덕.

그 위에서 거구의 사내가 주먹을 뻗은 자세로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것은 아름다운 두 명의 엘프 여인과 흉악하게 생긴 근육질의 트롤이었다.

그 트롤을 본 순간 카메룬 경이 인상을 썼다. 할라인 왕국 출신인 그는, 저 거대한 어금니를 지닌 트롤에 대해 익히 듣고 있었다.

"상아어금니!"

트롤을 수하로 삼은 인간은 대륙에 단 한 명뿐이다.

카메룬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권왕 레펜하르트!"

제38장 사투私鬪와 사투死鬪

1

교역 도시 자루드의 참상을 본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력을 다해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달렸다.

카를이 준비해 준 명마는 자루드에 그냥 버려두었다. 극강으로 단련된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스피드, 지구력 모두 이름난 명마를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평소에는 체력 보존을 위해 말을 이용하지만 이토록 급할 때는 차라리 두 발로 뛰는 것이 빨랐다.

오러수를 이용하는 이니야와 변신이 가능한 아틸카도 레펜하르트 못지않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시리스를 악몽의 흑마, 블랙 나이트메어로 변신한 아틸카가 등에 태우고 달리니 세 시간 만에 백왕성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러스의 예상과 달리 무려 두 시간 이상을 단축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왕성 인근의 숲 속.

레펜하르트는 계속 땅을 박차며 질주했다. 아무리 그라도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니 슬슬 숨이 가쁘고 피로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숲을 통과해 언덕만 넘으면 안타레스 백왕성이었다.

뒤따르고 있는 이니야에게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레펜하르트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이니야 양?"

그녀가 몰고 있는 은빛 순록은 자신의 오러로 구현한 영수, 구현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본인의 오러를 소모하는 수법이었다. 두 발로 뛰는 것보다야 월등히 체력, 오러 소모가 적지만 그렇다 해도 이리 장시간 구현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니야는 땀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레펜하르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엄살 피울 만큼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어요."

반면 아틸카는 시리스까지 태우고도 비교적 안색이 평온했다.

강한 재생력을 지닌 트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지구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트롤 주술로 장거리 달리기에 특화된 마수, 블랙 나이트메어로 변신했으니 스피드는 비슷할지 몰라도 지구력만큼은 두 사람을 크게 능가한다.

흑마로 변신한 아틸카의 갈기를 붙잡은 채 시리스가 근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은 무사할 까요?"

"그리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소만...."

아틸카가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루드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현재 백왕성을 침략한 이들은 무려 검성을 비롯해 열 한 명이나 되는 오러 유저들이다. 아무리 러스와 타시드가 날고뛰어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싸워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전투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전력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이토록 절대적으로 전력 차가 나면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아틸카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절망을 앞에 두기까진 희망을 가지는 것이 생명 지닌 이를 위한 자연의 가르침. 믿어 봅시다, 그들이 무사하기를."

네 사람은 빠르게 숲을 빠져나왔다. 백왕성이 가까워지니 점차 하늘과 땅을 울리는 강렬한 굉음이 들려왔다.

계속 땅을 박차고 달리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뭐지, 이 엄청난 기운은? 대체 백왕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상식을 초월한 엄청난 오러의 힘이 끝없이 맞붙고 있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백왕성 하늘이 선홍색과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익숙한 느낌의 황금색 오러는....

"...설마?"

드디어 네 사람이 백왕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까지 올랐을 때였다. 이니야와 아틸카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어머나?"

"허억? 뭐요, 저것들은?"

괴물 두 마리가 날뛰고 있었다. 비록 인간의 노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본 저 두 사람은 그냥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괴수 그 자체였다. 사방을 초토화시키는 두 괴물의 전투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모두 석상처럼 굳어 제자리에 섰다.

특히 이니야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 두 괴물 중 한쪽, 황금빛을 뿜어내는 거구의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사내가 레펜하르트 님 말고 또 있었다니!'

이럴 수가!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이는 레펜하르트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정말 세상은 넓어도 너무 넓구나!

그렇다고 이니야의 감정이 저 근육질 노인네로 옮겨 갔다는 소리는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냥 근육이 아니라 '문무 겸비'다. 그녀가 오직 근육만 탐했다면 오크도 취향에 맞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엘프 최강임을 자부하는 이니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역시 인간은 무서워....'

아틸카가 잽싸게 흑마의 변신을 풀고 물었다.

"왕이시여, 황금빛 오러에 저런 육체라면 혹시...."

멍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맞소, 아틸카. 내 사부요...."

☆ ☆ ☆

레펜하르트는 눈을 비빈 뒤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었다.

"진짜 사부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악몽 속 단골로 출몰하던 바로 그 양반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 왜 뒷걸음질 치세요?"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육체에 각인된 공포가 주인의 의지를 거역하고 멋대로 움직인 모양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사부를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비록 수행 과정이 고통스러웠다고는 하지만 다 잘되라고 한 짓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사부님이 여기 계신 거지?'

문득 몸이 흠칫 떨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다.

'서, 설마 새로운 수련법이라도 개발하신 건 아니겠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진정하고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사부의 저 '사랑 가득한 폭력'이 뼛속을 넘어서 영혼까지 각인되었다지만, 그도 전생에서 마왕씩이나 불리던 위대한 대마법사였다. 이 정도도 못 이겨서야 그런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지!

마음을 가라앉히며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제라드의 상대, 선홍색 오러를 뿜어 대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저자가 검성 바나텔인가 보군."

두 사람이 떨어졌다 다시 맞붙을 때마다 구름이 반으로 갈라지고 대지가 흔들린다. 빗나간 기격탄이며 스트레이트 캐논이 세상을 황금색으로 물들일 때마다 경치 자체가 바뀌어 버린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광포하게 날뛸 때마다 언덕이 들판이 되고 들판이 구덩이가 된다.

실시간으로 지도를 바꿔 대는 저 두 사람의 위력은, 아무리 차분하게 바라본다 해도 무덤덤해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허, 사부가 저 정도로 괴물이었나?"

하산 전에 그는 몇 번이나 제라드와 대련을 붙은 적이 있다. 그때도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 안 하는 제라드를 보며 괴물이라 기막혀했었다. 물론 당시 사부가 봐주면서 자신을 상대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와,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사부 표현 그대로 어루만지는 수준이었구나, 그거.'

지금 보이는 바나텔과 제라드의 기량은 전성기의 검성 사이러스와 권왕 테스론조차도 능가하는 듯 보였다. 사이러스와 테스론이 힘을 합쳐도 바나텔이나 제라드, 둘 중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긴, 당시 두 사람은 갓 쉰을 넘겼었고 현재의 제라드와 바나텔은 여든을 넘긴 나이다. 수행 시간만도 3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당연히 경지도 다르겠지.

문득 소름이 끼쳐 레펜하르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맙소사, 전생 때 저 양반들이 있었으면 나도 위험했겠군.'

아무리 저들이 강해도 레펜하르트 역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10서클의 대마법사, 전생의 그가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사이러스나 테스론 대신 저들이 엘린이나 제이드와 함께 덤벼들었다면 확실히 시공 회귀를 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불쌍한 잡탕 용사 알렉스는 어느새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삭제되어 있었다.)

한편, 시리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제라드와 바나텔보다는 파괴된 백왕성 인근을 더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걱정하고 있던 두 사람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 두 사람 다 살아 있어요!"

엘프다운 가공할 시력으로 들판 한쪽에 주저앉은 러스와 타시드를 발견한 것이다. 원래의 트롤 형태로 돌아온 아틸카가 표정을 환하게 밝혔다.

"그렇구려! 비록 부상은 심해 보이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이니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앗! 레펜하르트 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구경만 하고 있던 오러 유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명은 부상당한 러스와 타시드에게 덤벼들고, 나머지는 백왕성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아차!"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 괴물 같은 검성이야 사부가 상대해 준다 해도, 아직 열 명이나 되는 오러 유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재빨리 연환 기격포를 날리며 레펜하르트는 오러 유저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환 기격포가 현란한 파괴의 궤적을 그리며 대지에 커다란 금을 그었다. 그 위세에 달려오던 오러 유저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긴장한 채 자신을 응시하는 그들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호통을 터트렸다.

"누가 감히 나의 백성들을 핍박하느냐!"

전생에도 제국의 황제로 군림했고, 현생에서도 권왕다운 말투를 고심한 레펜하르트다. 두 가지가 융합되니 자연스럽게 저런 식의 호통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레펜하르트도 짐 언브레이커블에 물들대로 물든 탓인지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웅장한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타아앗!"

또 한 줄기의 황금빛 유성이 백왕성 앞 들판으로 날아들었다.

☆ ☆ ☆

빛의 궤적이 대지를 강타했다. 폭음과 함께 빛이 사라지며 구릿빛 청동상 같은 거대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들판 위에 우뚝 선 그의 모습에 오러 유저들이 긴장의 표정을 떠올렸다.

"권왕 레펜하르트...."

뒤이어 아틸카와 이니야도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레펜하르트 곁에 섰다. 무형의 기운을 흩뿌리며 세 사람이 반파된 백왕성 앞을 가로막았다.

착지한 레펜하르트가 강렬한 눈빛으로 오러 유저들을 노려보았다. 그 위압감에 오러 유저들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산악을 연상케 하는 우락부락한 근육에 흔들림 없는 무형의 투기, 과연 전설적인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다운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특히나 저 육체는 참으로 인간미가 없었다. 똑같이 어미 뱃속에서 나온 인간일진대 어떻게 사람 몸이 저리 또박또박 각이 졌단 말인가? 그래도 권황 제라드에 비하면 많이 인간미가 남아 있기는 한데, 그래 봤자 사람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괴물의 제자는 역시 괴물이었다.

게블릭 경이 침을 꿀꺽 삼키며 신음을 흘렸다.

"과연 명성대로의 기세로다."

주먹을 들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여덟 명의 오러 유저들에게 고함을 쳤다.

"이곳은 안타레스 백국의 땅, 그대들은 누구이기에 감히 이 땅을 침범하는가?"

오러가 실린 외침이 귀청 따갑도록 울려 퍼졌다. 오러 유저들의 안색이 굳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달구고 있었다.

"역시 권왕...."

"대단한 기운이군."

더 이상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다. 검성과 함께 바슈탈론 제국에서 온 오러 유저, 리카본 경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나는 바슈탈론의 리카본! 세이어를 모독하고 이단의 길을 걷는 자여! 세이어와 신성 제국의 이름으로 그대를 처단하겠다!"

"역시 바슈탈론 쪽이었나. 하긴 그 동네 예전부터 그랬지."

레펜하르트는 납득했다. 전생 때 암흑제국을 상대로 제일 날뛰던 것도 바슈탈론 제국이었다.

황금빛 오러가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일어났다. 투기가 폭발하며 그를 중심으로 광풍이 불었다.

"좋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이니야도 검을 뽑으며 백은의 오러를 전신으로 휘감았다. 아틸카가 어깨를 들썩이며 주술의 노래를 불렀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도다!"

전투태세를 갖추는 세 사람을 향해 각국의 오러 유저들도 저마다 자기소개를 하며 오러를 일깨웠다.

"그라임의 게블릭이다."

"테이칸의 웨를이라 하오."

"라스틸의 나스단이오."

그들의 소개를 들은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구성원의 출신이 죄다 다른 것이다. 황제 노릇 해 보기도 했던 그이기에 바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제국에서 제 전력 아끼려고 여기저기서 강제로 끌어왔나 보군.'

보아하니 대부분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저 정도의 오러 유저가 움직였다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을 텐데, 레펜하르트나 카를은 저런 정보를 접한 적이 없었다. 바슈탈론 제국에서 상당히 은밀하게 기밀을 유지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야 이런 기습 작전을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

양측의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또 '그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싸우지?'

각국의 오러 유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았다.

싸우긴 싸워야 한다. 하지만 여러 명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의 명예에 누가 된다. 그렇다고 세 명만 나서자니 남은 이들에게 밑천 까발리는 짓이 되어 버린다.

'젠장, 또 이 문제냐?'

리카본은 혀를 찼다. 러스와 타시드를 상대할 때야 검성이 있었으니 몸 좀 사려도 되지만 지금은 꼭 싸워야 할 때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도 몸 사리는 판에 뭐라 타박을 하기도 그렇고....

결국 비교적 머리가 트인 나스단이 또 나섰다.

"이봐요들. 이런 이유로 제국의 명을 거부한다면 왕국에도 폐가 될 터, 이 역시 충성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오. 뭔가 하나는 포기해야 하지 않겠소?"

바실리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크로아틀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합공을 합시다."

합공이란 말에 오러 유저들 대부분이 인상을 쓴다. 그때 나스단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 비기는 숨기고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는 거요. 아무리 기본적인 기술만 써도 이쪽이 수적으로 월등한데, 설마 지진 않을 것 아니오?"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위명이 대륙에 진동한다지만 그들 역시 똑같이 오러를 각성하고 똑같이 초인의 반열에 든 자들이었다. 비록 기본적인 기술만 쓴다 해도 여럿이서 권왕 하나 감당 못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쪽이 제약을 둔다면 합공을 한다는 불명예 역시 상당히 퇴색하는 바, 어떻게든 정당한 대결이었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군...."

"뭐, 그 정도라면...."

오러 유저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의 투지가 확연하게 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별 지랄을 다 해 대네."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까짓 자기들만 알아주는 명예 때문에 저따위 헛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왜 병사들이 기껏 나눠 준 군복에 멋대로 다림줄 그어 놓고 자기들끼리 '봐라! 이거 멋있지?' 하면서 잘난 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민간인이 보기엔 똑같이 허름한 군복일 뿐이구먼.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싸우게 됐군. 말리진 말아야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강하게 두들겼다.

"좋다!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쾅!

주먹이 부딪치며 가공할 파문이 사방으로 뻗었다. 레펜하르트가 시위라도 하듯 연신 양 주먹을 계속 부딪쳤다. 그때마다 빛의 파문이 터지며 굉음을 울렸다.

노골적으로 힘자랑을 해 대는 그 모습에 오러 유저들이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당대의 권왕, 그 위명 높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다.

만약 저자의 목을 베게 된다면 그 명예 또한 대단히 클 터!

'그렇다면!'

'권왕의 목은 내가!'

노골적으로 대부분의 살기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흘러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전히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벗지 못한 이들이다. 엘프인 이니야나 트롤인 아틸카 따위는 관심 밖인 것이다.

저들의 작태에 할라인 왕국의 카메룬 경이 혀를 찼다.

"쯧쯧...."

다른 이들과 달리 카메룬 경은 이종족을 경시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시하긴 경시하는데, 단 한 명만은 경시하지 않았다.

할라인 왕국은 대륙에서도 가장 연금술사 길드가 성행한 왕국, 그곳 출신은 카메룬 경은 젊은 시절부터 저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 왔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먼 친척뻘인 오러 유저 카피르 경이 상아어금니에게 처맞고 반년간 요양 들어갔다는 소릴 들은 적도 있었다.

사실은 아틸카가 아니라 타시드에게 처맞은 것이지만 카피르 경은 굳이 그런 헛소문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니, 웬 듣도 보도 못한 오크보다는 그래도 악명이 자자한 상아어금니에게 패했다는 쪽이 그나마 명예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틸카에게도 많이 맞았으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고.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카메룬 경은 아틸카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블레이드 오러를 뽑은 채 카메룬 경이 아틸카를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저놈들도 보통 놈들이 아닌데 어찌 권왕만 노리는고? 누군가는 저들을 견제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상황 파악을 할 줄 아는 이는 카메룬 경뿐이 아니었다. 바실리의 기사, 왈그란 경 역시 저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 이니야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이니야는 겉보기엔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다. 전신이 잘 단련되어 가녀리기보다는 건강미 넘치는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워낙 날씬하고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다. 게다가 눈처럼 흰 살결과 풍만한 가슴, 엘프 여인에게 익숙한 러스조차 순간 혹했을 정도로 놀라운 미모는 절대 그녀를 전사로 보이지 않게 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오러 유저인 왈그란 경은 이니야의 전신에 갈무리된 가공할 기운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저 기운만으로도 결코 그의 밑이 아니었다.

'굉장한 검사다. 엘프라고 얕잡아 볼 수가 없겠어.'

엘프 검사라면 기껏해야 슬레이어 정도라 생각해왔던 왈그란 경에게 이니야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긴장하며 그는 이니야를 노려보았다.

왈그란의 살기가 이니야를 향해 흘러갔다.

카메룬의 살기가 아틸카를 향해 흘러갔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오러를 각성한 자, 기감만으로도 주위의 기운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말은 없지만 모두 두 사람의 생각을 짐작했다.

머리가 트인 축인 나스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애창, 레드 스피어를 들었다. 오러 유저치고는 특이하게 그는 검 대신 창으로 오러를 각성한 케이스였다. 창끝을 이니야에게 겨누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긴, 명예 욕심 부릴 때가 아니구려."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웨를 경도 아틸카 쪽으로 투기를 돌렸다.

테이칸 왕실에 충성하는 그는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해 전혀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저 간악한 소아 성애 변태 오러 유저, 란타스를 격살한 그에게 살짝 호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저 명령 때문에 이 자리에 오긴 했지만, 왕국의 수치를 제거해 준 레펜하르트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영 찝찝하던 차였다.

"차라리 트롤이나 상대하는 쪽이 속이 편하지."

네 명의 오러 유저가 레펜하르트를, 나머지 오러 유저가 두 명씩 편을 맺고 아틸카와 이니야를 상대하기 위해 기세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양측의 투기가 점점 거세지며 끓어오른 공기가 부딪쳐 웅웅거리며 울렸다.

저만치서 따로 싸우고 있는 두 괴수에 비하면 많이 손색이 있지만, 이들 역시 초인 중의 초인이다. 그런 오러 유저가 십수 명이 모였으니 그 기세가 참으로 굉장했다. 순식간에 사방에 폭풍이 불며 먼지가 자욱하게 날렸다.

어느 순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타앗!"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양측 모두가 몸을 날리며 서로 격돌했다.

2

사부는 말했다.

-자고로 싸움은 선빵이 최선이니라.

사부는 또 말했다.

-여러 놈을 상대할 땐 어떻게 하냐고? 일단 하나 조지고 봐! 생각은 그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제라드의 가르침은 과연 몇 번을 곱씹어도 우러나오는 맛이 있다.

'선수 필승!'

자신을 노리는 네 명의 중장년 오러 유저들, 레펜하르트가 대뜸 그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일단 하나 조지고 생각하자!'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순식간에 그중 한 명의 코앞까지 닥쳤다. 시야 가득 몰려오는 저 근육의 먹구름에 리카본 경이 기겁했다.

"이, 이런!"

그냥도 위압감 넘치는데 코앞에서 보니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리카본이 정신없이 검을 들며 오러 가드를 펼쳤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대뜸 정권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정권의 주위로 다섯 개의 황금빛 파동이 일어 올라 한 점으로 수렴되며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킨다. 찬란한 빛과 함께 섬광이 리카본의 전신을 강타했다.

콰앙!

폭발과 함께 리카본이 피투성이가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검이 부러지고 갑옷이 박살 나 여기저기 흩어진다. 다른 오러 유저들이 기겁해 외쳤다.

"이런!"

"리카본 경!"

주먹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일단 한 놈 조졌고!"

오러 유저들을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두들긴 것은 그저 힘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드러밍하는 고릴라도 아니고, 강적들을 앞에 두고 왜 쓸데없이 힘을 빼겠는가?

비록 이런 육체에 들어와 이런 꼴로 살고는 있지만 그는 분명 마법사였고, 전투 전 냉철히 전략을 짜는 데 익숙했다. 힘자랑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용 술식,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떨어진 바슈탈론 제국의 오러 유저, 리카본은 저 한 방으로 즉사해 버렸다. 아무리 출력을 낮추었다 해도 캘러미티 혼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였다. 그걸 정통으로 맞았으니 살 수 있을 리가 있나?

숨이 끊어진 리카본을 보며 다른 오러 유저들이 신음을 흘렸다. 오러를 각성한 자가 일격에 죽는 경우는 정말 흔하지 않다.

"맙소사... 리카본 경이...."

"단 한 방에...."

사지가 뒤틀린 리카본의 시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바보 같은 놈.'

비록 기습이었다지만, 리카본은 바슈탈론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오러 유저였다. 평소처럼 진지하게 전력을 다했다면 아무리 그래도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의 위력에 일격사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갈고닦은 비기를 썼다면 어떻게든 위력을 흘리거나 회피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리카본은 스스로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쓴다고 제약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하는 와중에도 기본적인 오러 가드만 펼쳤다. 덕분에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모든 위력을 고스란히 맞아 버린 것이다.

'하여튼, 마음가짐이란 게 참 중요하다니까?'

뭐, 레펜하르트도 유서스와 처음 조우했을 때 똑같은 짓을 했으니 남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덕분에 각국의 오러 유저들은 허무하게 전력 하나를 잃게 되었다.

"젠장!"

욕설을 흘리며 남은 세 오러 유저들이 일제히 레펜하르트를 공격했다.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에서 찔러 왔다. 딱히 변화를 가미하지 않은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였지만 동시에 날아드니 회피할 곳이 없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오러의 소용돌이가 블레이드 오러들을 일제히 밀쳤다. 전력을 다해 비기를 써도 뚫기 힘들 판에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만 날렸으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당황한 오러 유저들이 다시 자세를 고치려는 찰나였다.

"헙!"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뱉으며 땅을 박찼다.

세 오러 유저들이 눈을 부릅떴다. 어이없게도 그는 세 오러 유저들에게 돌진한 것이 아니었다. 저만치 떨어진, 이니야를 상대하는 나스단과 왈그란 경이 목표였다.

"동토의 칼날!"

이니야는 검무를 추며 백은의 섬광을 연신 뿌려 대고 있었다. 그녀의 블레이드 오러가 초승달처럼 휜 채 나스단과 왈그란 경의 주위를 점유하며 날아든다.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다 보니 딱히 맞받아칠 방법이 없어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며 공세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기격탄!"

날아든 레펜하르트가 대뜸 기격탄을 쏘아 나스단에게 날렸다. 나스단도 허겁지겁 창날에 깃든 블레이드 오러로 기격탄을 막아 냈지만 그 위력이 너무 높아 주룩 뒤로 밀렸다.

그렇게 상대를 멀리 떨어트려 놓은 뒤, 계속 돌진하며 레펜하르트가 이니야에게 눈짓했다.

'뒤를 부탁하오!'

바로 알아듣고 이니야가 크게 검을 휘두르며 새하얀 안개를 뿌려 댔다.

북해의 숨결!

모든 것을 얼어 붙이는 차가운 빙무가 달려오는 세 오러 유저들을 덮쳤다. 레펜하르트를 노리던 이들의 발이 그 자리에 묶여 버렸다. 오러 방어를 펼치는 것만으로 금세 얼음을 깨고 다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으하하!"

그 잠깐의 틈을 레펜하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이니야를 지나쳐 나스단에게 쇄도한다. 쾌소를 터트리며 두 주먹으로 폭풍처럼 몰아친다. 날카로운 라이트 펀치로 나스단의 블레이드 오러를 두들긴 뒤 곧바로 로우 킥!

퍽!

나스단의 허벅지에서 기괴한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신음을 흘리며 비틀대는 나스단의 턱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어퍼컷을 올려 쳤다. 나스단의 턱이 뽑힐 듯 뒤로 젖혀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커, 커억!"

당하는 나스단을 보며 카메룬 경과 쫓아오던 세 오러 유저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얼른 도와주기 위해 세 오러 유저가 다시 레펜하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백은의 블레이드 오러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백야白夜의 눈보라!"

이니야가 어느새 그들 앞을 가로막고 찬란한 냉기의 검세를 뿌려 대고 있었다.

진짜 눈보라처럼 산산이 흩어진 블레이드 오러가 저마다 칼날이 되어 휘몰아친다. 그 사이로 수십 개의 찌르기가 쇄도한다.

광범위한 공격이면서도 그 사이에 치명적인 연격이 숨어 있다.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으론 도저히 뚫을 방법이 없어 카메룬 경과 세 오러 유저의 발길이 멈췄다.

한편, 허공으로 날려간 나스단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몸을 바로 하고 있었다.

"크으...."

피를 토하면서도 나스단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 역시 이제껏 패배를 모르던 강력한 오러 유저다! 이 정도로 저 '병신' 리카본처럼 쓰러지진 않는다!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나스단이 오러를 이용, 허공을 박찼다. 다시 레펜하르트에게 낙하하며 그가 창을 화려하게 휘둘러 댔다.

"레인지 오브 자벨린!"

창날의 궤적에 따라 나스단 주위에 오러로 구현된 자벨린, 투창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가 손짓하자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이 일제히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갔다. 리카본을 떠올리고 정신이 든 나스단이 고유의 오러 스킬을 아끼지 않고 구사한 것이었다.

쌔애애애액!

강렬한 파괴력을 머금은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이 정교하게 맞물리며 레펜하르트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무기에 정신을 집중해 오크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집중력과 오러를 소모하는 짓이라 그리 효율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나스단의 오러 스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렬한 관통력을 지닌 오러 자벨린을 구현해 허공에 띄운 뒤, 미리 정해진 궤도로 발사하는 류의 기술이었다. 일종의 비도술이나 회검술廻劍術과 비슷하달까?

창을 조종하는데 집중력이나 오러를 쓸 필요가 없으니 모든 힘이 온전히 파괴력에 집중된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저건 단순한 블레이드 오러가 아니라 고도로 운용한 오러 스킬이었다. 한둘 정도면 스파이럴 가드로 튕기겠는데 열 개나 되면 아무래도 힘들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뒤로 뺐다가, 이내 크게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의 장막이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을 뒤덮으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일일이 쳐 낼 섬세함이 없으니 그냥 한 방에 날려 먹자는 심보였다.

날아오던 오러 자벨린들의 기세가 일순 꺾였다. 하지만 이내 돌진력을 되찾고 마치 천을 베는 가위처럼 스트레이트 캐논을 갈라내며 다시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팔뚝을 회전하며 다음 동작을 취했다.

"스파이럴!"

황금의 장막이 휘리릭 휘감기며 열 개의 오러 자벨린을 모조리 휘감았다. 황금의 천이 칼날을 뒤덮으며 이내 모든 영기의 투창이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다.

테스론이 구사했던 스트레이트 캐논의 응용기, 레펜하르트는 그걸 잘 봐 두었다가 그동안 틈틈이 연습해 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르릉!

두 오러 스킬의 충돌 여파로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 주먹을 거둔 채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공격을 막은 것은 좋은데, 그 틈에 나스단이 그의 사정권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쳇!"

간신히 몸을 피한 나스단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젠장!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네."

그래도 리카본 같은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이 어딘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네, 젊은이."

나이 쉰이 다 되어 가는 그를 누가 감히 젊은이라 부르는가? 나스단이 미처 의문을 품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꽝!

방어는 물론 심적 대비조차 하지 않은 때 허용한 일격이라 그 한 방으로 정신이 흐릿해진다. 눈을 감으며 나스단이 애써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

흐릿해지는 시선 속에서 나스단은 보았다. 코끼리처럼 긴 어금니를 지닌 거구의 트롤이 겸연쩍은 얼굴로 단봉을 들고 있는 것을.

☆ ☆ ☆

"상아어금니! 이 사악한 마물이!"

아틸카를 상대하던 왈그란 경과 웨를 경이 치를 떨었다. 둘을 상대하던 아틸카가 갑자기 몸을 빼더니 떨어져 있던 나스단을 기습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바로 아틸카의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틸카가 트롤 주술로 커다란 식물 줄기를 키워 내 그들의 발을 묶어 버린 탓이었다.

"제길!"

블레이드 오러로 간단히 줄기를 끊을 수 있었지만, 그 틈에 이미 아틸카는 나스단을 공격해 버렸다.

혀를 차며 왈그란과 웨를이 다시 아틸카에게 덤비려는 찰나였다.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으로 땅을 찍으며 또다시 그 괴이한 술수를 부렸다.

"마파람에 새싹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

땅이 꿈틀대며 또 두 사람의 다리를 두꺼운 식물 줄기가 휘감아 버렸다. 잽싸게 오러로 줄기를 끊었지만 이미 아틸카는 펄쩍펄쩍 뛰어 이니야와 레펜하르트에게 합류한 후였다.

쓰러진 나스단을 보며 게블릭 경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나스단 경마저 당하다니...."

그래도 한 방에 유명을 달리한 리카본과 달리 나스단은 기절했을 뿐 죽지는 않았다. 딱히 그가 리카본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막 살수殺手를 펼치려는 아틸카를 레펜하르트가 메시지 마법으로 말린 덕분이었다.

바슈탈론 제국이야 어차피 좋은 관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제국의 기사인 리카본에게는 상대의 전력도 줄일 겸 부담 없이 살인기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단은 그저 본의 아니게 제국에 끌려 나온 신세인 것이다.

침략당한 입장에서 열은 뻗치지만, 그렇다고 후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왕의 입장. 잠정적인 적을 늘리지 않으려면 나스단처럼 제국 외의 오러 유저들은 역시 함부로 목숨을 앗을 수가 없다.

뭐, 그렇다 해도 현재 나스단이 전력에서 제외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카메룬 경이 이를 갈았다.

이건 뭐, 몇 번 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리카본과 나스단, 두 명의 오러 유저를 잃었다!

"크으... 자신의 상대도 아닌 이를 기습하다니! 이 무슨 비겁한 짓이냐, 권왕!"

카메룬이 분노하며 외쳤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마주 소리쳤다.

"일대일 대결도 아닌데 내가 누굴 패건 뭔 상관이냐?"

이니야도 한껏 비아냥을 담아 말을 받았다.

"여럿이서 덤벼들면서 잘도 비겁을 그 입에 담는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럿이서 덤비는 주제에 자기 상대만 공격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애당초 명예를 먼저 무시한 것은 저쪽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종자가 논리대로 말이 먹히는 대상이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웠겠지. 당연히 각국의 오러 유저들은 저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들 저 명예도 도리도 모르는 이들의 작태에 분노를 터트렸다.

왈그란 경이 고함을 질렀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대는 무인의 자부심도 없는가! 방심한 상대의 뒤를 노리다니! 권왕씩이나 되는 자가 이런 치졸한 짓을 계속 할 셈인가?"

"응."

참으로 간략한 대꾸가 더욱 화를 돋운다. 왈그란 경의 안색이 수시로 변색되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계속 동료를 잃을 판이었다. 저들은 눈앞의 상대에 연연하지 않고 눈치껏 몸을 빼 서로 힘을 합쳐 하나하나 각개격파할 셈인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수적 우세도 그리 의미가 없다. 오러 유저끼리 손을 합쳐 본 적이 없어,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다.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던 바실리 출신 오러 유저, 크로아틀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 멍청한 짓을 계속할 셈이오?"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했다면 저들도 몸을 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고 있으니 안심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방심한 다른 이의 뒤를 칠 수 있다!

"바보가 아니라면 당신들도 슬슬 힘을 쓰라고!"

크로아틀이 블레이드 오러를 넓게 퍼트렸다. 회색 블레이드 오러가 톱날처럼 변하며 강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유의 오러 스킬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자기도 같은 짓 한 주제에.'

타박하는 크로이틀을 보며 몇몇이 불만을 떠올렸지만 애써 삭였다.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 밑천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 같이 밑천 까발리는 거면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

무기를 고쳐 쥐며 오러 유저들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비슷하게 흐르던 각자의 오러가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처럼 타오르고 안개처럼 흐르고 어둠처럼 은밀히, 산처럼 굳건히.

저마다 고유의 오러 스킬을 숨기지 않으며 진정한 힘을 보인다. 이니야가 긴장하며 중얼거렸다.

"이젠 아까처럼 쉽지는 않겠네요."

레펜하르트가 아쉬워하며 주먹을 매만졌다.

"쩝, 두어 놈 정도는 더 조지고 싶었는데...."

저들이 전력을 다하면 레펜하르트 일행도 감히 상대하다 말고 등을 돌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기습으로 재미 보는 기간은 지난 듯했다.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을 역수로 든 채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두 분 다 조심하시오."

☆ ☆ ☆

그린드 왕국은 할라인 왕국과 바슈탈론 제국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산악 왕국, 험한 산세로 인해 다량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린드 왕국의 기사들은 주로 순수한 검보다는 몬스터와 대항하기 편한 중병기를 쓰는 쪽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린드 왕국의 오러 유저, 르카완 역시 그런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닝 스타를 빙빙 돌리며 레펜하르트에게 접근했다.

보통 모닝스타의 추椎가 성인 장정 주먹만 한 데 비해, 르카완의 모닝스타는 그 철구가 족히 사람 머리통만 한 사이즈였다. 저만한 쇳덩어리가 강렬하게 회전하고 있으니 그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받아라! 권왕!"

르카완이 돌진하며 모닝 스타를 휘둘렀다. 사슬에 달린 쇠공이 블레이드 오러를 뿜으며 레펜하르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철구에 담긴 오러를 '블레이드' 오러라 하기는 좀 어폐가 있겠지만, 원래 대륙에서는 무기를 통해 발현하는 모든 오러를 관용적으로 블레이드 오러라 부른다. 그리고 르카완은 모닝스타의 쇠공 위에 돋아난 뾰족한 송곳을 통해 절삭력이 담긴 오러 또한 구현하고 있었으니, 그리 틀린 명칭인 것만도 아니었다.

쌔애액!

원심력이 실린 모닝 스타가 오러를 한껏 머금고 대기를 가르며 파공음을 낸다. 고유의 오러 스킬을 쓰기 시작한 탓인지 아까와는 파괴력이 전혀 다르다. 감히 방심하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신중히 라이트 펀치를 뻗었다.

"헙!"

강철의 추와, 강철의 주먹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오러 파문이 퍼져 나갔다.

둘의 대결은 레펜하르트의 압승이었다. 그는 충돌 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반면, 르카완은 반발력 때문에 신체 중심선이 흔들려 버렸다.

"윽!"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미들 킥을 날렸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두르는 듯한 위력적인 킥이 르카완의 좌측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르카완이 허겁지겁 왼팔을 들어, 오러 실드를 펼쳤다.

"진철벽眞鐵壁!"

찬란한 빛이 명확한 방패의 형상으로 구현되며 레펜하르트의 정강이와 부딪쳤다. 폭음이 울리며 오러 실드가 미들 킥을 막아 냈다.

'단단하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아까와는 달리 오러 실드가 부서지지 않았다.

모닝 스타를 다루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렇듯, 르카완의 원래 전투 스타일은 커다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모닝 스타를 휘둘러 진격하는 중장보병 타입이었다. 오러 유저가 된 후론 굳이 거추장스러운 방패를 들고 다니지 않았지만 대신 오러 실드를 강화하는 특유의 스킬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 르카완만의 오러 방패, 진철벽은 평범한 오러 실드와는 방어력의 차원이 달랐다. 레펜하르트의 미들 킥을 막아낼 만큼 충분히 견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격은 막았어도 그에 실린 힘까지 모두 흘릴 수는 없었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르카완이 뒤로 길게 밀려났다. 막 그를 쫓으려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인상을 썼다. 승기를 잡은 김에 계속 르카완을 몰아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타앗!"

긴 기합을 터트리며 그라임 왕국의 오러 유저, 게블릭 경이 레펜하르트의 뒤를 노린 것이다. 돌진력을 담아 사선으로 연속 베기를 날리니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십자의 형상을 띠며 레펜하르트의 등으로 날아왔다.

"오러 크로스!"

몸을 돌리며 레펜하르트가 두 팔뚝을 들어 방어했다.

"스파이럴 가드!"

파지지직!

황금빛 전격이 튀며 스파이럴 가드가 게블릭의 오러 크로스를 갈아 버렸다. 게블릭이 인상을 썼다. 훨씬 강화한 오러 스킬을 썼는데도 저 황금빛 회오리를 뚫지 못했다.

"쳇!"

브로드 소드로 연달아 소드 패링을 펼치며 게블릭이 반격에 대비했다. 그때 떨어져 있던 르카완이 모닝 스타를 맹렬히 돌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모닝 스타의 회전에 실리며 거대한 광륜光輪으로 화한다. 르카완이 모닝 스타를 아래로 떨치며 소리쳤다.

"샛별의 고리!"

회전하는 광륜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실소했다. 저 흉악한 무기로 구사하는 기술답지 않게 참 명칭이 운치 있다. 아마도 그냥 모닝 스타로 쓰는 기술이라 저따위 이름을 붙인 듯하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건, 그 위력은 결코 비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광륜과 충돌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윽?'

광륜이 아무런 저항 없이 스파이럴 가드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똑같이 회전을 이용한 오러 스킬, 스파이럴 가드와 샛별의 고리.

르카완은 광륜의 회전수와 방향을 절묘하게 조절해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와 완전히 동조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스파이럴 가드의 기세에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흐름에 휩싸인 채 안으로 파고든다!

르카완의 광륜이 가드를 뚫고 제대로 직격했다.

콰아앙!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수 발자국이나 뒤로 밀렸다. 가슴에 길게 자상이 생겨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의 기술도 있나? 오러 스킬을 제대로 쓰니 장난이 아닌데?'

비록 적이지만 실로 놀라운 기술이었다. 솔직히 감탄할 만했다.

물론, 르카완은 전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지만.

"아니, 정통으로 맞았는데 그걸 맨몸으로 버텨?"

짐 언브레이커블이 흉악하다는 소린 누누이 들어 왔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가 찼다. 이게 안 통하면 대체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베란 말인가?

게블릭 경이 고개를 저으며 르카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이오. 저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하며 게블릭이 브로드 소드를 십자 형태로 베었다. 또다시 오러의 십자가가 허공에 그려졌다.

하지만 게블릭의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미 오러 크로스로는 스파이럴 가드를 뚫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그였다.

오러 십자가 가운데 찌르기를 날리며 게블릭이 소리쳤다.

"크로스 펜타곤!"

날아가는 십자의 블레이드 오러 가운데 날카로운 창이 솟구친다. 창이 달린 오러 십자가가 레펜하르트의 정면을 뒤덮었다.

허공을 가르며 오러 십자의 네 끝이 휘더니 가운데 달린 창날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꽃봉오리가 아무는 듯한 형상과 함께 다섯 개의 블레이드 오러가 한 점에 모여 강력한 관통력으로 화했다.

콰아아악!

한 점에 집중된 관통력이 스파이럴 가드의 회전력마저 뚫으며 쇄도해 온다. 그냥 몸뚱어리만 믿고 있다간 꼬치가 될 판이다. 레펜하르트가 재빨리 몸을 비틀어 타점을 흘렸다.

파지지직!

게블릭의 찌르기가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또 선혈이 튀었다.

'어차피 찰과상일 뿐!'

무시하며 레펜하르트가 길게 팔을 뻗어 손등 치기를 날렸다.

부웅!

공기가 떨리며 커다란 주먹이 반원을 그린다. 손등 치기의 궤적이 돌진하는 게블릭과 정확히 겹쳐졌다. 돌진 도중이라 도중에 멈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잡았다!'

막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띠려는 차였다.

"헙!"

기합을 터트리며 날아오던 게블릭이 돌진을 멈췄다. 레펜하르트의 반격을 감지한 순간, 전신 기혈을 통해 오러를 내뿜어 허공에서 에어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게블릭의 얼굴 앞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공격이 빗나가자 레펜하르트가 욕설을 흘렸다. 간신히 피한 게블릭이 숨을 몰아쉬다 주르륵 코피를 흘렸다.

코피를 닦으며 게블릭이 질려 중얼거렸다.

"맙소사, 맞지도 않았는데 권풍만으로 이 정도인가...."

정통으로 맞았다간 한 방에 황천 갈 뻔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은 평생 단단한 것은 못 씹는 신세 정도는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절로 등 뒤가 시원해졌다. 게블릭이 스스로에게 조소를 흘렸다.

"이런 자를 상대로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쓰겠다고 했다니... 참으로 주제 파악을 못 했구나."

한껏 긴장한 채 게블릭이 다시 몸을 날렸다. 르카완도 오러 실드, 진철벽을 앞세우며 레펜하르트에게 접근했다.

온갖 오러의 빛이 날뛰고, 충돌하고, 퍼져 나가고, 폭발했다.

연신 공격을 퍼붓는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점점 굳어 갔다. 스파이럴 가드로 계속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역시 둘 다 대륙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는 오러 유저다웠다.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하니 점점 힘이 부친다.

'으, 이거 쉽지 않네.'

사실, 표정이 굳기는 사실 게블릭과 르카완 쪽이 더했다.

"두 명이서 덤비는데도 이 정도인가?"

"진짜 괴물이구나! 짐 언브레이커블!"

비록 레펜하르트가 상처를 입었다지만 그것은 살짝 거죽이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전혀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을 잘 흘리고 있다 해서 피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직격타를 피한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스치는 것만으로 필살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레펜하르트의 펀치와 킥이 두 사람에게 쇄도할 때마다 피가 튀고 상처가 부어오른다.

팽팽한 승부 속에서 레펜하르트와 두 오러 유저가 한껏 살기를 퍼트리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마음이 급해진 르카완이 속으로 혀를 찼다.

'크으, 한 명만 더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이미 일대일 대결의 명예 따윈 머릿속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르카완이 힐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저쪽은 고작 엘프나 상대하면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얼른 해치우고 이쪽이나 좀 도와주지!'

☆ ☆ ☆

르카완의 기대와 달리, 다른 쪽도 그리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아아...."

이니야가 머리를 휘날리며 호흡을 내뱉었다. 새하얀 빙무가 사방으로 퍼지며 지면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얼어 붙이는 북해의 숨결, 그 강렬한 한기는 그 자체로도 이미 상당한 위협이다. 일반 병사라면 저것만으로도 꽁꽁 언 동상이 되어 죽어 가리라.

왈그란과 크로아틀이 전신의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렸다.

"흐읍!"

"하아압!"

이글거리는 오러의 불길이 냉기로부터 육체를 보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발이 진창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저 빙무뿐만이 아니었다. 눈 돌아갈 정도로 현란한 궤적을 그리는 저 엘프 검사의 레이피어가 연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다!

"휘날리는 눈꽃!"

수십, 수백 개의 검화를 피우며 이니야는 연신 두 사람을 공격해 댔다. 찌르는가 하면 베기이고, 베는가 하면 찌르기로 변환되는 무수한 변화! 검술이란 측면에서 이니야는 왈그란 경과 크로아틀, 두 오러 유저를 압도하고 있었다.

회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는 크로아틀이 점점 궁지에 몰렸다.

"이, 고작해야 엘프 주제에 어찌 이런 기술을...."

순간 이니야가 참격을 날렸다.

"동토의 칼날!"

초승달 모양의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에서 날아든다. 강렬한 진동이 담긴 그 공격은 도저히 일반적인 오러 가드론 막기가 불가능하다.

크로아틀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검면을 앞으로 내세웠다.

"레이븐 실드!"

칼날을 통해 회색 오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회색 오러의 깃털이 몇 중으로 겹치며, 마치 까마귀가 날개를 접듯 크로아틀의 앞을 겹겹이 감쌌다. 백은의 블레이드 오러가 레이븐 실드를 두들기며 연달아 파문을 떨쳤다.

공격을 막아 낸 크로아틀이 바로 다음 기술의 연계에 들어갔다.

"어비스 암즈!"

크로아틀 주위로 검을 쥔 회색 팔의 형상이 솟아났다.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온 듯한 어둠의 팔이 검을 휘두르며 이니야의 전신을 찔러 갔다.

왈그란 경도 롱 소드로 연속 찌르기를 시도하며 합세했다.

"트윙클 스타!"

변화를 담은 수십 줄기의 찌르기가 허와 실을 교환하며 명멸한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 가득 반짝이며 이니야의 머리 위를 점유했다.

"으으...."

이니야의 안색이 다급해졌다. 저들의 오러 스킬은 일대일이더라도 감히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양쪽으로 쏟아지고 있다!

그녀가 빠르게 레이피어를 허공에 저었다.

휘이이이익!

휘파람 소리 같은 파공음과 함께 검광이 난무하며 백은의 선이 수십 줄기의 궤적을 낳았다. 크로아틀과 왈그란의 공격이 백은의 궤적과 겹치며 멋대로 궤도를 수정당했다.

모든 공격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걸 느끼며 왈그란 경이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어떻게 이걸 전부 감당할 수가!"

강검을 추구하는 크로아틀과 달리 왈그란 경은 변화와 허실을 중시하는 기교파 검사였다. 검술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오러 유저와 비교한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저 보랏빛 머리의 엘프 검사가 구사하는 검술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기술이 조잡해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검술이었다.

'빌어먹을! 저 엘프 계집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란 말인가!'

모든 공격을 걷어낸 이니야가 땀을 줄줄 흘리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헉, 헉...."

그녀의 '흘리기'는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하는 기술이었다. 워낙 공세가 많다 보니 그만큼 체력 소모도 크다. 간신히 방어할 수는 있었지만 그 탓에 상당히 지쳐 버렸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과 오러 스킬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니야는 어쩔 수 없이 엘프, 엘프 특유의 저질 체력은 두고두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전투가 길어지니 점점 팔다리가 무거워진다.

또한, 그녀의 체력을 앗는 것은 그저 왈그란과 크로아틀뿐이 아니었다.

휘이이익!

한창 싸우고 있는 이들의 머리 위로 파공음이 들려온다. 크로아틀이 힐끔 위를 보며 혀를 찼다.

"이런! 또 날아온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저 멀리서 광포하게 날뛰고 있는 제라드와 바나텔, 둘의 전투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니야와 왈그란, 크로아틀이 동시에 뒤로 몸을 던졌다. 선홍의 빛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직격했다.

콰아앙!

폭발을 피한 왈그란이 저쪽 '괴수대결전'을 힐끔거리며 구시렁댔다.

"그냥 싸워도 힘든 판에 저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원 참."

아까부터 종종 바나텔과 제라드의 오러가 이쪽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전투를 멈추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튼 참으로 짜증 나는 전투 환경이었다.

땅은 이니야의 빙무 때문에 진창 같은 느낌이지, 하늘에선 오러 유저도 무시 못 할 무식한 오러 우박이 수시로 떨어지지. 옛 이야기에 절벽이나 외나무다리에서 싸우는 무인의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도 지금 이곳에 비하면 참으로 평온하고 안락한 전장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왈그란 경과 크로아틀은 이니야에 비하면 많이 체력이 남은 편이었다. 점점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며 이니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큰일이네, 어떻게든 단기 결전으로 가야 하는데.'

하지만 저 두 오러 유저는 아무리 이니야라도 일격에 해치울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다.

왈그란과 크로아틀이 다시 이니야를 덮쳐 갔다. 마주 몸을 날리며 이니야도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렸다.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3

레펜하르트 일행과 각국의 여섯 오러 유저는 서로의 전력을 끌어내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오니 아까처럼 싸우던 상대를 바꾸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마다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한 채 계속 공격을 퍼붓고 또 공세를 피했다.

오러 파문이 수십 개씩 터지고 허공 가득 폭음이 울리고 또 울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 갔다.

가혹한 파괴의 현장 속에서 날뛰는 아홉 명의 초인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양손에 시미터를 든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엘프 소녀,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시리스였다.

백왕성의 위험을 본 그때, 레펜하르트는 앞뒤 생각 안 하고 바로 몸부터 날렸다. 이니야와 아틸카도 잽싸게 뒤를 따랐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그들은 단숨에 수백 미터나 되는 거리를 주파해 저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리스로서는 도저히 저런 흉내가 불가능한 것이다. 뒤에 남겨진 채 열심히 두 발을 놀려 쫓아왔지만, 그땐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버린 후였다.

"우우...."

눈앞의 전투를 보며 시리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도착 자체야 아까 전에 했지만, 그녀는 한참이나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무수히 날뛰는 저 오러 파문을 보니 도저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놀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도 뭔가 해야 해!'

각오를 다지며 시리스야 쌍검을 들어 허공에 교차했다.

"가라! 샐러맨더!"

세 마리의 불도마뱀이 춤을 추며 허공에 떠올랐다. 시리스가 바로 샐러맨더를 쏘아 냈다. 목표는 레펜하르트와 싸우는 50대의 중년 검사, 르카완이었다.

화르르륵!

불길의 궤적을 남기며 샐러맨더들이 용맹스레 허공을 가른다. 정령의 기운을 느낀 르카완이 힐끔 곁눈질을 했다.

'뭐야?'

바빠 죽겠는데 어디서 부실한(?) 기운이 끼어드나? 르카완은 대충 오러를 던져 샐러맨더들을 격추시켰다. 르카완은 대충 던진 것이지만 불꽃 정령들에겐 참으로 뼈아픈 일격이었다.

한 방에 샐러맨더들이 폭사하며 정령계로 역소환되었다.

"이, 이런...."

시리스는 당황하며 다시 정령술을 준비했다. 샐러맨더 정도로는 저 가공할 전투에 감히 명함도 못 내미는 것이다.

"나와 줘요! 우다르 묠니르!"

우르릉!

뇌성이 치며 거대한 번개의 정령 거인, 우다르 묠니르가 지상에 현현했다. 소환자의 뜻에 따라 정령 거인이 전격을 뿜어 대며 앞으로 돌진하며 또다시 르카완을 노렸다.

빠지지직!

우다르 묠니르가 대기를 스칠 때마다 방전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아무리 르카완이라도 아까처럼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를 안 했다 뿐이지, 그렇다고 위협이 되었다는 소리도 아니다.

르카완이 레펜하르트의 옆을 공격하며 재빨리 옆으로 뛰었다. 게블릭 경도 눈치껏 합공했다. 덕분에 양측의 자리가 바뀌며 우다르 묠니르의 공격권에 레펜하르트가 들어가 버렸다!

"꺄악!"

시리스가 황급히 놀라 비명을 질렀다. 우다르 묠니르의 우레망치가 레펜하르트의 등짝을 노리고 있었다. 정령들은 어느 정도 자아가 있어 단순한 명령만으로도 적아를 구별할 수 있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공격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당황치 않고 스파이럴 가드를 펼쳤다. 어차피 그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

콰쾅!

폭음과 함께 거대한 번개의 정령이 황금빛 회오리에 휘말려 소멸해 버렸다. 시리스가 아차 싶어 소리쳤다.

"죄송해요! 레펜하르트 님!"

하해와 같이 시리스를 아끼는 레펜하르트가 어찌 이 정도로 화를 낼까? 대범하게 웃으며 도리어 그녀를 달랬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

물론 그렇다고 정말 신경 안 쓸 만큼 그녀가 철면피는 아니다. 주눅이 들어 시리스는 방법을 바꾸었다. 도저히 그녀의 정령술로는 저 섬광처럼 오가는 공방 속에서 적만을 노릴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는 단순한 정령술사 뿐 아니라 4서클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라우 엔크 퀘네피트, 빛이여 내 손에 임하라, 적을 얽매는 밧줄이 되라! 홀드 퍼슨!"

시리스는 테스론이 간단한 마법만으로 이니야와 싸우며 재미 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마법, 홀드 퍼슨을 발동했다.

목표는 아틸카와 싸우는 두 오러 유저, 카메룬과 웨를.

르카완이나 게블릭은 이미 경계를 하고 있으니 먹힐 것 같지 않아서였다.

번쩍!

홀드 퍼슨이 두 사람을 얽맸다. 그리고 채 힘을 쓰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렸다. 시리스의 안면이 구겨졌다.

"윽...."

한창 전투 도중이니 모두 전력을 다해 오러를 끌어내고 있다. 그 강렬한 기세에 어지간한 마법은 통용되지도 않는 것이다.

분명 테스론은 마법만으로 이니야의 움직임을 잠깐이나마 멈추게 했다. 하지만 이는 테스론이 고위 마법사이고 또 고금 제일의 마법 재능을 지닌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리스의 마법으로는 저들의 발목조차 잡을 수가 없다.

"원거리는 안 되겠어."

결국 저 공세 속을 파고들어야 한다 말인가? 솔직히 지금의 시리스로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그녀에겐 레펜하르트로부터 받은 귀중한 선물이 있었다.

시미터를 든 채 시리스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신고 있는 아티팩트, 블링크 부츠를 발동시켰다.

"블링크!"

테스론과 싸울 때는 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미처 사용도 못 하고 당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시리스는 부단히 노력해 이 아티팩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며, 동시에 20미터 떨어진 왈그란의 뒤에서 나타났다.

한창 이니야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왈그란의 넓은 등이 눈앞에 훤히 드러난다. 실프의 기운을 칼날에 실어 시리스가 참격을 날렸다.

'이번만큼은 먹히겠지!'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흥!"

왈그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여기 있는 적들치고 오러 유저 아닌 이가 없다. 아무리 공간을 뛰어넘어 봤자, 다시 나타나는 그 순간 바로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애당초 블링크 부츠를 사용하는 용법이 틀렸다. 부츠의 공간 이동 능력으로 오러 유저를 상대하려거든 등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정권을 피해 원거리로 빠졌어야지.

살짝 몸을 틀며 왈그란이 등 뒤로 오러를 쏘았다.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시리스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가공할 오러의 여파가 시미터에 깃든 실프의 기운을 일거에 박살 내며 쇄도해 왔다. 그녀가 비명을 터트렸다.

"꺄악!"

"시,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눈을 부릅떴다. 손발이 묶여 있어 그 순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때였다.

"쯧!"

혀를 차며 이니야가 검광을 뿌렸다. 백은의 블레이드 오러가 날아와 시리스를 노린 공격을 옆에서 쳐 냈다.

싸우다말고 한 눈을 판 대가는 작지 않았다.

"기회다!"

철벽같던 이니야의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을 크로아틀은 놓치지 않았다. 눈을 빛내며 바로 허점을 파고들었다.

크로아틀의 회색 블레이드 오러가 이니야의 심장을 정확히 노렸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급소를 피했지만 그 순간 강렬한 섬광이 그녀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선혈이 튀며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으윽!"

이니야가 신음을 터트렸다.

간신히 살아난 시리스가 재차 블링크 부츠를 발동하며 사정거리 밖으로 도망쳐 숨을 헐떡였다.

"헉헉...."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정말이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고, 고마워요, 이니야 씨...."

이니야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어깻죽지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팔을 못 쓸 정도로 깊게 베이진 않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력 고갈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다.

신경질적으로 이니야가 시리스를 노려보았다.

'저 병신 같은 년이!'

아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저 실력으로 끼어들겠다고 설치는 거야? 순간 화가 벌컥 났지만 이니야는 애써 속으로 삭였다.

'끙, 참자, 참아. 그래도 돕겠다고 나선 것인데 구박하면 안 되지....'

이니야가 딱히 너그러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일족이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하게 만들 정도로 폭언을 해 대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괜히 스티리아 일족이 이니야의 히스테리에 벌벌 떠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 어린 엘프 소녀는 레펜하르트가 아끼는 아이, 여기서 쌍심지를 켜서 성격 더러운 여자로 찍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레펜하르트 님한테 미움 받으면 곤란하지, 암.'

실란 말에 의하면 인간 남자가 원하는 여인상은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妖婦라 했다. 솔직히 여자 입장에서는 그리 기분 좋은 여인상은 아니라 하겠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를 유혹할 수 있다면 뭔들 못 하리?

지금은 낮이었다.

현모양처, 온화하고 자상한 여인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애써 표정을 풀며 나름 자상하게 말을 건네 주었다.

"위험해요, 시리스 양. 끼지 좀 말아요. 주제 파악은 해야죠?"

...그래도 이니야 딴에는 참 자상한 말이었다.

"그 실력으론 무리예요. 몸을 피하는 게 좋겠네요."

자기 딴엔 친절하게, 이니야는 시리스를 달랬다. 그리고 더더욱 자상함을 발휘해 오러의 바람으로 그녀를 밀어 저만치 전장 바깥으로 몰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은빛의 오러에 밀려 시리스가 맥없이 20여 미터 밖으로 날려 갔다. 저 정도 거리면 딱히 다칠 일은 없겠지?

이니야는 자신의 배려에 감동하며 웃었다.

'아, 이 자상한 나!'

당연히 시리스는 치욕으로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떨고 있었다.

'제, 젠장....'

하지만 한 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녀에겐 이 전투에 낄 자격조차 없으니까.

전장에서 버려진 채, 시리스는 넋 빠진 시선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레펜하르트와 함께했다. 그로부터 전생의 이야기도 들었다. 솔직히 현재의 자신이 아닌, 미래의 누군가를 투영하는 그 시선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미래만큼은 좋았다.

자신이 최강의 엘프, 광기의 발렌시아라 불리며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던 강력한 마검사가 될 수 있다는 그 미래만큼은.

열심히 노력했다.

열심히 정령술을 익히고, 검술을 갈고닦고 마법을 배웠다.

레펜하르트가 말한 미래대로, 그의 곁에 서서 부끄러움이 없는 여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곁에는 다른 여인이 서 있었다.

"조심해요! 레펜하르트 님!"

눈앞의 적을 상대하던 이니야가 힐끔 곁눈질을 하며 소리친다. 레펜하르트의 옆구리로 게블릭이 은밀하게 오러를 찔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알아챈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흘린 뒤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소, 이니야 양!"

레펜하르트와 이니야가 다시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의 오러와 백은의 오러.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색상도 참 잘 어울려 보였다.

오러 뿐만이 아니다. 외모도, 연륜도, 검술도, 전투 능력도... 어느 것 하나 시리스가 더 나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몸매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껏 나은 점이라 봐야 집안 살림이나 잠자리 시중 정도? 하지만 이건 성노의 미덕이지 어깨를 함께하는 여성의 미덕이 아니다.

"스트레이트 캐논!"

"백야의 눈보라!"

두 사람이 다시 오러를 뿜어내며 전투를 시작했다. 미친 듯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도움을 주고, 때로는 도움을 받는다. 오래전부터 함께했던 것처럼 두 사람 다 호흡이 척척 맞는다.

시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과연,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고된 수행을 해야 저럴 수 있는 것이지? 정말 레펜하르트가 말한 미래가 맞기는 한 건가? 저런 여인을 놔두고 자신이 최강의 엘프로, 동족을 이끄는 수장이 될 것이라고?

"하아...."

시리스의 붉은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레펜하르트의 곁에 설 자격이 있는 이는 이니야였다. 자신의 힘만으로 저 경지에 도달한, 존경할 만한 무인인 그녀였다.

자신이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준 것. 아티팩트, 정령술, 마법의 힘. 이 모든 것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저 남자 하나 잘 만나서 강해졌을 뿐, 사실은 아무런 잘난 점이 없는 자신이 아니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리스는 눈물을 삼켰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 ☆

레펜하르트 측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또 다른 전장.

러스와 타시드는 아직도 데크릴과 마라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부상도 심하고 탈진한 두 사람, 러스의 푸른 오러도 타시드의 청록색 오러도 이미 희미할 대로 희미해져 그 위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슬슬 블레이드 오러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랄까?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 모두 정신력만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데크릴이 러스를 향해 감탄을 흘렸다.

"허어, 젊은 친구가 근성이 보통이 아니구먼."

마라드도 타시드를 보며 동감의 빛을 보였다.

"오크 검투사가 제법 쓸 만하단 소린 들었지만, 이건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군."

두 오러 유저 모두 표정에 여유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들을 아직도 데크릴과 마라드가 해치우지 못한 것은 딱히 별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이 살생을 피하려는 성격이라든가, 아니면 오러 유저치고 너무 약해서 반시체인 놈들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서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기본적인 오러 스킬만 쓴다 해도 전력을 다하면 이내 러스와 타시드의 목을 벨 수 있었으리라.

두 사람이 여태 버틴 이유는, 데크릴도 마라드도 계속 저쪽에 신경 쓰느라 내내 한눈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어, 저게 심연의 오러라는 크로아틀 경의 비기로군.'

'과연 왈그란 경의 오러 스킬. 저런 식으로 구현되는 거였나?'

그들과 달리 레펜하르트 일행을 상대하는 여섯 오러 유저들은 이미 전력을 다해 모든 밑천을 꺼내 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철저히 감춰졌던 고유의 오러 스킬들, 오러 유저 입장에서는 참으로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이었다.

남의 오러 스킬을 보았다고 바로 그 기술을 터득한다거나, 더욱 강해질 수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의 비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추후 검을 나누게 되면 한결 유리해진다. 곰곰이 되새겨 보면 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전투 내내 반쯤 정신이 팔려 싸우는 둥 마는 둥 저쪽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 제대로 공격이 될 리가 있나? 그러니 반시체 상태인 러스와 타시드도 간신히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행운도 슬슬 끝이 나는 듯했다.

데크릴과 마라드가 문득 눈빛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눴다.

"으음, 그런데 계속 이러고 있기도 좀 뭣하지 않소, 마라드 경?"

"그것도 그렇지요, 데크릴 경."

사람이다 보니 욕심이 앞서 다른 무인들의 기술을 열심히 훔쳐보긴 했다. 도중에 리카본이 죽고 나스단이 쓰러져도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강제적인 명령에 의해 임시로 모인 무리들, 무슨 동료애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리카본은 짜증 나는 제국의 개가 아닌가?

두 사람 다 제국 놈 죽었다고 기뻐 날뛸 정도로 악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정도로 배알이 없지도 않은 것이다. 뭐, 나스단이 나가떨어졌을 땐 좀 걱정했지만 숨이 붙어 있어 이내 안심했다.

하지만 뽑아 먹을 거 다 뽑아 먹고 나니 슬슬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저쪽은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여기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사람 심리란 게 묘해서, 여러 명 중 소수가 밑천을 털어 내면 자기도 지갑 털기 아까워하지만 다수가 행하면 그에 따라가려는 습성이 있다. 모두가 전력을 다해 고유의 오러 스킬을 개방했는데 자기들만 숨기고 있자니 어째 상당히 치사하고 비열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치사하고 비열한 거 맞지.'

마라드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기사도에 희박한 자유 무인인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오러 유저로서의 긍지가 있다. 계속 이렇게 쪼잔하게 굴고 있을 수야 없다.

"후우...."

마라드는 심호흡을 하며 전신의 오러 기세를 바꿨다. 데크릴도 고개를 끄덕이며 러스를 향해 눈을 빛냈다.

적의 기세가 변하자 러스와 타시드의 안색이 굳었다. 타시드가 뻐드렁니를 드득 갈았다.

"크으, 결국 여기까진가...."

이미 팔을 들어 올릴 힘도 남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피도 너무 흘려 녹색 피부인 타시드가 연두색으로 변색될 지경이었다. 눈앞도 흐릿한 것이 잠깐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바로 혼절해 다시는 못 깨어날 것 같았다.

암담해하며 러스와 타시드가 최후의 오러를 끌어냈다.

"타아앗!"

"으랏차!"

기합 소리만 요란할 뿐, 블레이드 오러의 빛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긁어낼 오러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러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빈털터리군."

☆ ☆ ☆

한편, 레펜하르트나 이니야와 달리 아틸카는 꽤나 여유 있게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 너를 내리쳐 모래와 먼지가 되어...."

기이한 춤을 추며 아틸카가 머리를 흔들었다. 땋은 머리에 매달린 작은 방울들이 딸랑거리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파破의 망치가 되는도다!"

아틸카가 박수를 침과 동시에 그의 어깨 너머로 네 개의 바람이 뭉쳐 망치의 형상을 일궜다. 네 개의 망치가 할라인의 오러 유저, 카메룬 경과 테이칸의 오러 유저, 웨를을 동시에 덮쳐 갔다.

콰콰콰쾅!

폭풍의 망치 주술로 두 사람을 밀어내며 아틸카가 몸을 던졌다.

물구나무를 서며 화려한 발차기를 날린다. 카메룬의 시미터 위로 강렬한 연타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과연 상아어금니! 그 전설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혀를 내두르며 카메룬이 공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아틸카의 사정권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등이 보일 정도로 허리를 크게 뒤튼다. 그리고 강렬한 참격을 뿌렸다.

"반월참!"

카메룬의 시미터가 긴 호선을 그리며 아틸카를 노렸다.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춘 일격이라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반달의 형상을 한 블레이드 오러가 물구나무 선 아틸카의 허리를 베어 갔다.

분명 명중했다고 카메룬이 확신한 순간이었다.

"이는 나의 피요, 살이노라!"

주술을 발동한 아틸카가 물구나무선 채 갈대처럼 낭창대며 몸을 옆으로 뉘었다. 직격은 피했지만, 그래도 반월참이 그의 허리를 반 가까이 시원하게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틸카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피가 솟구치기도 전, 시간을 되돌리는 듯 붉은 선혈이 도로 상처로 돌아가며 삽시간에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기겁하며 카메룬이 입을 벌렸다.

"어떻게 저런?"

아무리 트롤이라지만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이었다. 다시 몸을 바로 하며 아틸카가 히죽 웃었다. 그가 발동한 것은 혈액 구속의 술術, 원래는 심장 뽑기 의식을 할 때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이지만 이렇듯 전투에 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황한 카메룬 대신 웨를 경이 롱 소드를 찔러 갔다.

"질풍 찌르기!"

바람을 가르며 블레이드 오러가 날카로운 송곳 형태로 가공되어 찔러 왔다. 아틸카가 허리를 기묘하게 비틀며 찌르기를 피했다. 그리고 대뜸 웨를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헙!"

박치기를 하려나 싶어 대비하던 웨를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으윽?'

원래 인간은 팔다리를 이용한 것 외의 공격에 익숙하지 않다. 무기는 팔의 연장이고, 팔꿈치나 무릎 역시 사지의 일부다. 여기서 더 공격 방식을 더해 봤자 몸통 박치기나 어깨치기, 박치기 정도가 전부다. 뭐, 대륙 어딘가에는 엉덩이로 사람 패는 기괴한 무술도 있다는데 그건 진짜 흔치 않은 경우다.

하지만 아틸카의 공격은 저 어떤 범주에도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마로 들이받은 게 아니라, 주걱턱을 들어 올리며 그 긴 어금니를 휘둘러 웨를의 목덜미를 노린 것이다!

휘이익!

주술력이 깃든 긴 어금니가 두 자루 칼날이 되어 웨를의 목을 베어 갔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날아온 공격이라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하다. 그 순간 잽싸게 머리를 뒤로 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선혈이 튀며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크으...."

신음을 흘리며 웨를은 잽싸게 오러로 목을 지혈했다. 그 틈에 아틸카가 자세를 바로 하고 두 자루 단봉을 든 채 맹수처럼 몸을 굽혔다.

웨를이 중얼거렸다.

"해괴한 공격이로다...."

카메룬이 경각심을 담아 말했다.

"상대는 몬스터요. 인간을 상대하는 감각은 통하지 않소!"

기세를 가다듬고 또다시 카메룬과 웨를이 좌우에서 아틸카를 덮쳐 갔다. 단봉에 깃든 주술력이 발동되며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와 블레이드 오러와 충돌했다. 연거푸 폭음이 울렸다.

카메룬과 웨를의 이마에 점점 땀방울이 맺혔다. 둘이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데도 저 괴물 트롤은 조금도 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땀도 흘리지 않는 것이, 전혀 지치지도 않은 기색이다!

카메룬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피르 말에 의하면 셋이서 상대할 만했다던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이 자식! 혹시 혼날까 봐 거짓말한 거냐? 카메룬은 카피르 경의 먼 친척으로 형님뻘 정도의 나이였다. 게다가 같은 왕국의 선배 오러 유저이기도 하다. 돌아가면 카피르 놈 경을 치겠다고 다짐하며 카메룬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나, 사실 이것은 카메룬의 오해였다.

예전 아틸카는 레펜하르트와 처음 조우 시, 오러 유저 카피르 경을 비롯해 7서클의 고위 마법사와 강력한 세이어의 신관을 상대로 맞서 싸운 적이 있다. 그때 아틸카는 분명 저 세 사람의 합공을 감당치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두 오러 유저와의 전투에서는 오히려 승기를 붙잡고 있다.

이는 카메룬과 웨를의 합공이 저 세 사람보다 약해서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과 카피르 일행이 싸운다면 카메룬 쪽의 압승일 터다.

상성의 문제였다.

신관의 강력한 신성 주문은 트롤 주술의 발동을 도중에 막을 수 있고, 마법사의 고위 마법은 속성을 변화시켜 다양한 트롤 주술의 억제력이 된다. 반면 주술을 간접적으로 억제할 방법이 없는 오러 유저가 상대라면 모든 트롤 주술을 부담 없이 구사할 수 있다.

트롤 주술을 바탕으로 싸우는 아틸카에겐 오히려 오러 유저'만' 있는 쪽이 상대하기 편한 것이다.

게다가 아틸카의 움직임은 현 대륙의 무술과 전혀 궤를 달리한다. 어차피 멀리서 지원하는 마법사나 신관이야 상대하는 데 별 차이가 없겠지만, 오러 유저 입장은 달랐다. 이제껏 해 오던 전투와는 너무도 다른 싸움 방식에 카메룬도 웨를도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들 역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무인 중의 무인, 밀리는 기색은 있지만 그렇다고 쉽게 승기를 내어 주지는 않는다.

카메룬이 다시금 시미터를 휘두르며 온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반월참!"

반월의 블레이드 오러가 떠올라 아틸카의 정면에 쇄도했다. 아틸카가 단봉을 휘두르며 공격을 피한 뒤 반격하려는 바로 그때였다.

카메룬이 내려치기를 날리며 오러 스킬을 연계했다.

"낙월落月!"

오러 웨이브가 일어나 날아간 반월참과 결합하며 공격 궤도를 바꿨다. 빗나간 반월참이 조각조각 깨지더니 아틸카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놀란 아틸카가 주술의 돌풍을 일으켜 대부분의 공세를 튕겨 냈지만, 그래도 모두 피하진 못해 팔다리 여기저기가 깊숙이 베였다.

웨를도 가만있지 않았다. 낙월의 기세 속으로 파고들며 또다시 질풍 찌르기를 날린다. 아틸카가 단봉을 교차해 막는 순간 웨를의 검세가 변화했다.

"타아앗!"

찔러 가는 블레이드 오러 위로 시뻘건 발톱이 솟구쳐 아틸카의 목을 베려 달려들었다. 찌르기와 베기가 연계되며 수십 개의 검광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질풍의 찌르기에 이은 혈풍의 베기, 그리고 폭풍의 연검!

웨를이 자랑하는 3단 연격이었다.

참격의 폭풍 속에서 아틸카의 쌍수 단봉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오른쪽은 빙빙 돌리고 왼쪽은 손목의 스냅을 이용, 회초리처럼 빠르게 탄력적으로 휘두른다.

"호로로로로로...."

허밍을 흘리며 아틸카는 공세 속으로 몸을 던졌다. 타격 완화의 주술로 몸을 보호하며 두 자루 단봉으로 중요한 공격만 걷어 내고 스치는 부분은 그냥 몸으로 때운다. 반격에 나선 아틸카가 기술을 날린 카메룬의 어깨를 후려갈기며 동시에 반대발로 킥을 날려 웨를의 명치를 걷어찼다.

"컥!"

"으윽!"

어깨를 늘어트리며 카메룬이 뒤로 물러섰다. 웨를도 울컥 피를 토하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두 사람 다 질린 얼굴로 아틸카를 노려보았다.

벌써 몇 번이나 참격과 타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로의 상처가 늘어 갔다.

하지만 지금 고통과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은 카메룬과 웨를뿐이었다. 저 저주받을 괴물 트롤은 강력한 재생력으로 어지간한 상처는 모조리 지워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여전히 움직임이 팔팔하다.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크으... 괴물 놈."

"대체 어떻게 해야 저놈을 해치울 수 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는 기술에 섬세함이 없어 고전하고 있다.

이니야는 지구력과 체력이 떨어져 고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틸카에겐 저런 약점이 없는 것이다. 그는 레펜하르트 같은 강인한 체력에 이니야 같은 섬세한 주술과 체술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트롤다운 재생력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두 사람보다 일격의 파괴력이 떨어져 아직까지 카메룬과 웨를을 쓰러뜨리지 못했을 뿐이다.

두 인간 오러 유저를 보며 아틸카가 눈을 빛냈다.

'둘 다 지쳤군. 슬슬 끝장을 보고 저쪽을 도우러 가야겠어.'

그렇게 필살의 일격을 준비하며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기운은 대체?'

아틸카가 어금니를 길게 휘두르며 고개를 돌렸다. 러스와 타시드가 상대하던 두 오러 유저, 방금까지만 해도 별것 없던 그들의 기세가 갑자기 월등히 강해진 것이다.

폭발하는 듯한 오러가 여기까지 피부로 와 닿는다. 도저히 지금의 러스나 타시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기운이 아니다!

"구해야 한다!"

다급해진 아틸카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나기 시작했다.

4

아틸카는 손톱으로 가슴팍을 길게 그었다. 동시에 야수 같은 포효를 터트렸다.

"크허어어엉!"

그의 전신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뼈가 길어지고 근육이 터질듯 팽창하며 두 눈이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들어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검은 그림자가 카메룬과 웨를의 전신을 뒤덮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신장 2미터 정도였던 아틸카, 그가 순식간에 4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인이 되어 눈앞에 서 있었다.

"뭐, 뭐지?"

웨를의 비명에 카메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젠장! 트롤의 광폭화다!"

생명이 경각에 달한 트롤이 자신의 모든 재생력을 폭주시켜 모든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키는 종족 특기, 광폭화를 아틸카가 시도한 것이다.

광폭화된 트롤은 자신의 안위조차 돌보지 않고 적아조차 구별 못 하며 죽을 때까지 날뛰는 광전사가 된다. 카메룬은 공포를 느꼈다. 지금도 밀리고 있는데 저기서 몇 배나 강해진다면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죽음을 각오하며 카메룬과 웨를이 모든 정신을 아틸카에게 집중할 때였다.

"크아아!"

괴성을 지르며 갑자기 아틸카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카메룬이 순간 황당해했다. 광폭화된 트롤이 눈앞의 적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아틸카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광폭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철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 트롤의 광폭화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 한번 발동하면 죽을 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양날의 검이다.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능력을 얻는 대신 지성도 생명도 태우는 괴물이 된다.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가 없다. 타인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이상, 생명력을 모두 소진해 죽을 때까지 날뛰게 되어 버린다.

인간들은 광폭화된 트롤들을 보며 공포에 떨지만 사실 트롤들에게 있어서도 광폭화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강해지면 무엇하는가? 힘 다 떨어지면 죽는데. 트롤에게 광폭화란 '자살'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틸카는 강력한 주술의 힘으로 광폭화 상태에서도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수많은 구루 중에서도 오직 그만이 터득한 트롤 주술의 비전 중 비전, 명정광폭화明淨狂暴化였다.

"크아아아!"

명정광폭화를 건 채 아틸카는 포효를 터트리며 내달렸다. 목표는 저기 있는 두 인간 오러 유저, 러스와 타시드의 목을 베려는 데크릴과 마라드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웨를이 뒤늦게 몸을 날렸다.

"아차!"

잽싸게 거리를 좁히며 웨를이 블레이드 오러를 뿜었다. 등을 돌린 아틸카의 전신이 허점투성이였다. 안 그래도 덩치도 4미터 가까이 커졌으니 맞추기도 쉽다. 질풍의 찌르기가 아틸카의 등 근육을 후벼 팠다.

푸욱!

선혈이 튀었지만 아틸카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두꺼운 근육이 육체를 보호해 급소까지 블레이드 오러가 닿지를 않았다. 괜히 아틸카가 위험한 광폭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다. 적 앞에서 등을 돌리려면 이 정도 내구력은 필요한 것이다.

카메룬도 얼른 뒤를 따르려 했다. 그때 멀리서 레펜하르트가 그를 견제했다. 아무리 광폭화했다지만 아틸카에게 네 명의 오러 유저를 상대하게 할 순 없었다. 이쪽이 한 명쯤은 더 맡아 줘야 했다.

"연환 기격탄!"

르카완과 게블릭을 상대하면서도 용케 레펜하르트가 수십 개의 오러탄을 날렸다. 기격탄을 일일이 튕겨 낸 뒤 카메룬은 잠시 갈등했다.

어느새 아틸카는 데크릴과 마라드를 가로막고 그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웨를도 이미 합세했다.

'광폭화되어 몇 배나 강해진 상아어금니라지만 오러 유저 셋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

고심한 뒤 카메룬은 레펜하르트에게 칼끝을 돌렸다. 이 상황에선 차라리 빨리 권왕을 처리하고 저쪽을 돕는 것이 더 합리적이란 판단이었다.

레펜하르트의 노림수대로, 몸을 돌리며 카메룬이 그를 향해 블레이드 오러를 날렸다.

☆ ☆ ☆

거대한 괴물이 갑자기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 넓은 등을 보이며 벽력같은 음성을 토해 낸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게!"

러스와 타시드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대체 이 괴물은? 타시드가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 아틸카 공?"

대답은 없었다. 이미 아틸카는 데크릴과 마라드, 그리고 조금 늦게 합류한 웨를과 전투를 시작해 버렸다.

박투가 이어지고 광풍이 불었다. 그제야 상대가 아틸카임을 확인한 러스와 타시드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살았다...."

너무 탈진한 탓일까? 긴장이 풀리는 순간 다리의 힘이 모조리 빠진다. 자리를 피하라 했는데, 피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주저앉은 두 사람의 목덜미를 붙잡고 도로 일으켰다. 상대의 얼굴을 본 러스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아, 시리스 양...."

"일단 피해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리스가 두 사람을 든 채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이니야에게 온갖 구박을 당한 그녀지만 그래도 사람 한둘쯤 나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수십 미터 밖으로 뛰어 전장을 벗어난 시리스가 두 사람을 도로 내려놓았다.

"고맙다, 시리스."

타시드가 감사를 표했다. 시리스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두 사람의 상세를 살폈다.

상처에 힐링 포션을 붓고 물의 정령을 소환해 둘의 혈액을 움직여 자체 치유 능력을 높인다. 신성 주문에 비하면 효과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충분히 응급조치는 되는 것이다.

타시드의 상처를 돌보는 시리스의 안색을 살피며 러스가 의아해했다.

"시, 시리스 양?"

"왜요?"

"아니, 왠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뭔가 안색이 어둡다. 아, 물론 적이 쳐들어오고 동료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으니 당연히 표정이 좋을 리야 없겠지. 하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째 시무룩해 보인달까?

시리스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무 일 아니에요."

이니야에 의해 쫓겨난 뒤, 시리스는 일단 백왕성으로 향했다. 아무리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했다. 주민의 대피라도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 보니 이미 백왕성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스레일은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어서, 그 참사 중에도 빠르게 피난을 끝마쳤던 것이다. 그래서 러스와 타시드에게로 향했다.

힐링 포션을 세 병이나 썼더니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다. 시미터를 쥔 채 시리스가 러스와 타시드 곁에 섰다.

"마저 상처를 돌봐요.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러스와 타시드는 자세를 바로하고 열심히 호흡을 골랐다. 한참이나 정신을 집중하니 그제야 밤톨만 한 오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길 기다리면 된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러스가 눈앞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4미터의 거인이 된 아틸카는 광포하게 날뛰며 세 명의 오러 유저를 압도하는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이니야가 두 명을, 레펜하르트가 세 명을 맡은 채 신위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을 보고 있자니, 저 강함에 새삼 감탄이 나온다.

"...갈 길이 멀구나."

타시드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우리도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러스나 타시드도 일대일이라면 저 타국의 오러 유저들 중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녹초가 된 것은 검성 바나텔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데크릴이나 마라드에게 이리 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멀쩡한 상태라 해도 저렇게 여러 오러 유저들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타시드의 하소연에 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강해지긴 강해졌어. 단지 그 위가 있을 뿐이지."

"더더욱 정진해야겠군. 저 자리에 함께 서기 위해서 말이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타시드가 웃었다. 러스도 미소로 화답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자리에 앉아 계속 전장을 바라보았다. 문득 타시드가 러스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러스."

정신없이 전투를 지켜보던 러스가 타시드를 돌아보았다.

"왜?"

타시드는 실소했다. 이토록 상처 입고 두들겨 맞아 퉁퉁 부은 와중에도, 그의 친우는 신 나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익히 짐작이 갔다.

저쪽의 전장, 무수한 오러 유저들이 무수한 오러 스킬을 난무해 대는 그곳을 가리키며 타시드가 물었다.

"많이 건졌냐?"

"대박이다. 쓸 만한 거 추려서 나중에 너도 가르쳐 줄게."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러스는 히죽 웃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과연 옛 성현의 말씀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 ☆ ☆

러스나 타시드의 감상과 달리, 아틸카는 그리 편한 상태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세 오러 유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아틸카의 전신에 상처도 늘어나고 있었다.

광폭화는 분명 모든 능력을 몇 배로 증가시켜 주지만 그 대가도 분명 있었다. 애초에 전신의 재생력을 폭주시키는 능력이라 광폭화 후에는 더 이상 육체를 재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블레이드 오러가 어깨를 스치며 핏물이 튄다. 고통을 참으며 아틸카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어엉!"

포효와 함께 대기가 응집되어 데크릴을 강타했다. 스치기만 했는데 오러 가드가 깨지고 팔이 퉁퉁 부었다. 데크릴이 혀를 찼다.

"크윽! 뭔 위력이 이리 강하지?"

광폭화 덕분에 공격력이 몇 배로 늘어난 것이다. 아틸카가 손을 뻗을 때마다 연신 주술적인 충격파가 뻗어 나왔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파문이 스칠 때마다 오러 유저들이 피를 토해 댔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숨겨 둔 밑천까지 탈탈 털어 가며 세 오러 유저를 상대하고 있었다.

"인챈트 피스트, 플레임 엔 라이트닝!"

그의 양 주먹이 폭염과 뇌전을 머금고 빛을 발했다.

마법사인 걸 감추고자 여태까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진 것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때였다. 르카완과 게블릭의 합공만으로도 간신히 평수를 이루었다. 거기에 카메룬까지 가세하니 도저히 체술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

이것저것 가릴 형국이 아닌 것이다. 기술 아끼다 개죽음당한 리카본의 시체가 아직도 저기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데, 저 옆에 눕는 바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뇌전권!"

르카완의 광륜에 맞서 레펜하르트가 뇌전권을 뻗었다. 동시에 특유의 술식을 구사하며 마법의 장벽도 쳤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술만으론 섬세함이 부족해 승부를 결하지 못했던 그다. 하지만 정교한 마법이 곁들여지니 이내 승부가 반전되었다.

"타아아앗!"

살기를 담아 레펜하르트는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리 마법까지 쓴다 해도 세 명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제국 출신 말고는 죽이지 않고 제압하겠다.' 같은 헛생각은 뇌리에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이 와중에 저런 오만을 부릴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마법의 장벽에 가로막힌 르카완이 뇌전권에 두들겨 맞아 뒤로 밀려났다. 연이은 화염 폭발에 게블릭이 검게 그을려 신음을 흘렸다.

카메룬이 놀라 외쳤다.

"마, 마법인가?"

아주 대놓고 마법을 구사했으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차려던 차였다.

'아, 결국 들켰구나.'

그런데 어째, 예상했던 것과 반응이 달랐다.

"조심하시오! 권왕이 기이한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소!"

레펜하르트는 아직도 자신의 무문을 얕보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은 몇 대를 걸쳐 내려오는 것, 이 시대의 상식인이라면 권왕이 마법을 쓸 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릴 수가 없다. 당연히 아티팩트라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르카완의 외침에 게블릭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왕이란 작자가 도구를 쓰다니! 언제부터 짐 언브레이커블이 그렇게 타락했는가?"

짐 언브레이커블은 도구 사용을 치졸하다 여겨 무기도 갑옷도 사용하지 않는 무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냥 도구도 아니고 마도구를 쓰다니?

검게 그을린 게블릭 입장에서는 묘한 억울함마저 느껴진다. 그가 저편을 가리키며 외침을 이었다.

"그대의 스승이 엄연히 이곳에 있는데 그런 추태를 보일 셈인가?"

'추태는 얼어 죽을.'

어차피 제라드는 바나텔에게만 온 정신이 팔려 있어 레펜하르트가 뭔 짓 하는지 관심도 없다.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아무런 반문도 하지 않았다. 저들이 저렇게 오해해 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마음껏 마법을 구사해 주었다.

"플레임 볼트! 프로즌 애로우! 윈드 스피어!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이널 디시전!"

온갖 마법이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레펜하르트 본인도 폭풍처럼 날뛰었다.

정신없이 맞서며 문득 르카완이 의아해했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어디에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는 거야?'

현재 레펜하르트는 웃통을 깐 채 바지만 챙겨 입은 조촐한 차림이었다. 목걸이나 반지는 물론, 팔찌나 발찌 등의 장신구도 하나 없다. 저 차림 어디에 아티팩트를 숨겨 둘 장소가 있단 말인가?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상식인.

'...팬티에라도 넣고 있나?'

이것이 르카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이었다.

☆ ☆ ☆

점점 전투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4미터의 거인이 된 아틸카가 연신 두 팔을 휘두르고 주술력을 떨친다. 레펜하르트가 오러와 마법을 연거푸 쏟아 낸다. 주위를 모조리 얼려 버리며 이니야가 계속 허공 가득 검광을 번뜩인다.

저 신위를 상대로 오러 유저들도 강렬하게 맞대응했다. 형형색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하늘과 땅을 수놓으며 파괴의 노래를 불렀다.

왈그란과 이니야가 서로 스쳐 지나가며 한차례 검격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옆을 노리던 크로아틀이 일순 발을 헛디디며 주춤거렸다.

"윽!"

아무리 지쳤다 한들 오러 유저쯤 되는 이가 발이 꼬이는 경우는 사실 없다. 하지만 그는 계속 이니야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을 헤치며 발을 놀리고 있었다. 잠깐 집중력이 흩어진 순간 냉기에 발이 걸린 것이다.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찬스!'

왈그란을 밀쳐 내며 이니야가 뒤로 뛰었다. 레이피어를 수평으로 겨누며 등 뒤로 깊게 당긴다.

"하아아...."

호흡과 함께 그녀의 어깨 너머로 새하얀 투기가 피어올랐다. 투기가 이내 모여들어 거대한 얼음 창의 형상으로 화했다. 검 끝에 백은의 광구가 맺히며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니야의 궁극기, 앱솔루트 스피어였다.

원래 궁극기란 것은 그 위력만큼이나 리스크도 크다. 시전 시 딜레이도 있고 또 실패할 경우 자세가 크게 흐트러져 반격을 대비하기도 힘들다. 사실은 궁극기 없이 통상 기술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물론 처음부터 최강의 일격을 날리고 시작하는 것도 전술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도 대뜸 갈긴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으로 크게 재미를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리 준비하고 있었고 또 상대의 방심을 이용한 덕분이다. 보통은 확실하지도 않은데 필살기부터 날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니야도 아까부터 노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파지지직!

얼음 창 끝에 모인 구체가 내부에서 폭발과 폭축을 연동하며 섬뜩한 기세를 흘리기 시작했다. 왈그란과 크로아틀이 아차 싶어 표정을 구겼다.

이미 기술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견제할 시간이 없다.

이니야가 검을 길게 뻗었다.

"앱솔루트 스피어!"

맥동하는 구체가 일순 빛을 발했다. 수십, 수백의 폭발이 동시에 일어나며 다시 한 점으로 모든 파괴력을 집중했다. 집중된 힘이 한 줄기 백색의 섬광이 되어 대지를 가르며 날아갔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두 오러 유저도 각자 자신이 지닌 최강의 일격으로 섬광에 맞섰다.

"디스트로이어!"

전신의 오러를 응축, 폭발시켜 거대한 창으로 화하는 왈그란의 오러 스킬, 디스트로이어가 섬광을 향해 쏘아졌다.

"다크 노아!"

이중 원반의 형태로 오러의 광륜을 구현, 상부와 하부가 반대로 회전시켜 절삭력과 파괴력을 몇 배로 높이는 크로아틀의 궁극기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기는 이내 앱솔루트 스피어의 궤적에 휩싸이며 아침 이슬처럼 소멸되어 버렸다. 가차 없이 두 개의 오러를 깔아뭉개며 백색 섬광이 순식간에 왈그란을 덮치고 크로아틀까지 관통해 지나갔다.

쿠쿠쿠쿵!

폭음과 함께 왈그란의 전신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피 보라가 시뻘겋게 피어올랐다. 몇십 년 동안이나 바실리 왕국에서 위명을 떨치던 강력한 오러 유저가 단 일격에 즉사해 버렸다!

"맙소사!"

다른 오러 유저들이 기겁해 그쪽을 돌아보았다. 크로아틀은 그나마 좀 나아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전신이 뒤틀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심각한 빈사 상태였다.

레펜하르트도 놀라 눈을 껌뻑였다.

지금 선보인 이니야의 앱솔루트 스피어는 그 위력이 실로 엄청났다. 적어도 관통력만큼은 그의 캘러미티 혼과 비교해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어, 이니야가 저렇게 강했던가?'

레펜하르트에게 있어 전생의 이니야는 그저 보기 드문 엘프 오러 유저이자 강력한 동맹이었을 뿐이다. 오러 유저니 당연히 강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마법사였던 그로서는 그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측량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워낙 성격이 까칠하다 보니 별로 친하지도 않아 자주 얼굴 보지도 못했었고.

그래서 대충 전생 때의 시리스보다 조금 약한 정도라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계속 힘을 키운 시리스가 결국 이니야를 능가하며 엘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오러 유저가 되고 나니 이니야의 힘이 확실히 느껴진다. 저 정도면 족히 오크 대전사 시절의 타시드와도 맞먹을 실력이다!

'아니, 대체 왜 당시에 시리스에게 밀린 거야?'

여기에 레펜하르트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이니야를 처음 만난 것은 북해에서 정령술의 자료를 얻을 때였다. 그 후 다시 조우한 건 이미 10년도 넘게 지난 후,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한창 대륙을 상대로 싸울 때다.

그때의 이니야는 이미 전성기의 그녀가 아니었다.

암흑제국 안타레스의 준동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이종족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던 시기였다. 예전처럼 야생의 엘프를 그저 돈이나 벌려고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씨를 말리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던 시대였다.

당시의 이니야는 수천의 인간을 상대로 오지의 엘프들을 지키며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인간 오러 유저와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녀의 손에 죽어 간 오러 유저는 무려 일곱, 하나같이 대륙을 떨쳐 울리던 강자들이었다.

사투를 마칠 때마다 그녀의 육체는 상처 입고 병들어 갔다. 부상은 두고두고 이니야를 괴롭혔다. 제국에 합류했을 즈음엔 이미 지닌 기량이 전성기의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이니야는 절대 자신의 쇠약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약해지고 병들었을지언정 언제나 당당하고 강인한 모습만을 보였다. 그리고 제국 말기 전쟁 도중 수십 명의 오러 유저와 마법사, 신관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고하게 죽어 갔다.

한 번도 속사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레펜하르트가 저런 내막을 알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뭐, 현재는 속사정은 고사하고 속살을 못 드러내 안달인 여자가 되었지만 당시의 이니야는 분명 레펜하르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쨌거나, 저 일격으로 이니야는 한 방에 두 명의 오러 유저를 쓰러뜨려 버렸다. 그 위력에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던 이들이 잠시 한눈을 팔았다.

아까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은 이니야뿐만이 아니다.

"좋아!"

쾌재를 부르며 레펜하르트가 바로 무릎을 굽혀 주먹을 허리로 가져갔다. 다섯 개의 오러 파문이 팔뚝을 따라 약동하며 떠오른다.

이미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을 통해 저 오러의 고리가 어떤 파괴력을 낳는지 보았다. 집중력이 흩어졌던 오러 유저들이 아차 싶어 대응했다.

"샛별의 고리!"

르카완이 모닝 스타를 휘두르며 광륜을 쏘았고.

"가이아 브레이커!"

게블릭이 전력을 다해 강검의 블레이드 오러를 준비했다.

"반월참, 잔월殘月!"

연달아 카메룬이 반월참을 쏘아 냈다. 십여 개의 반월참이 허공에 머물러 서로 응집된다.

"굉천월광轟天月光!"

응집된 월광의 오러가 광선 형태로 길게 날아갔다.

그러나 레펜하르트가 좀 더 빨랐다. 황금빛 펀치가 하늘을 때리며 뇌성의 비명을 터트렸다.

"캘러미티 혼!"

한 점으로 수렴된 다섯 개의 오러 고리가 재앙의 뿔이 되어 저들을 휩쓸었다. 권마합신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5중첩 캘러미티 혼만으로도 위력은 이미 경천동지!

"으아아악!"

비교적 실력이 낮은 편인 르카완은 채 피하지도 못했다. 정면으로 황금빛 섬광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붉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비껴 맞은 남은 두 사람도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최대한 몸을 보호하며 최강의 기술로 맞서 위력을 상쇄시켰지만 그럼에도 게블릭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고 카메룬의 오른팔이 증발해 버렸다.

"으으, 강하구나, 권왕!"

피를 토하며 소리치더니 게블릭이 그대로 혼절했다.

팔을 지혈하며 카메룬이 휘청거렸다. 정말 엄청난 위력이었다. 최대한 몸을 빼 비껴 맞았는데도 방어한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가다니? 간신히 기절은 면했지만 점점 눈앞이 흐려진다.

"이런...."

이 변고에 아틸카를 상대하던 세 오러 유저가 몸을 빼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갔다. 아틸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명정광폭화를 풀었다. 안 그래도 슬슬 한계인 차였다. 아무리 정신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광폭화는 육체에 심각한 무리를 주는 능력이었다.

원래의 체구로 돌아간 아틸카가 휘청거리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고고, 한 일주일은 꼼짝없이 요양해야겠구먼, 이거."

흙먼지가 걷히며 대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캘러미티 혼이 스치고 간 자리에 길게 운하가 파였다. 그 끝에는 반쯤 붕괴된 언덕이 움푹 꺼진 파괴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으으....'

저 가공할 파괴의 흔적을 보니 절로 사기가 뚝 떨어진다. 데크릴이 고민했다.

'이거, 피해가 너무 크군....'

벌써 셋이 죽고 셋이 혼절했다.

남은 이는 고작 넷, 그것도 카메룬은 한 팔을 잃어 간신히 의식만 놓지 않고 있을 뿐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남은 오러 유저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이대로 계속 싸워야 하나?'

사실, 눈치를 보는 것은 레펜하르트 쪽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와 꽤 힘을 소모한 상태에서 시작한 전투였다. 허세 부리기 위해 늠름하게 서 있긴 했지만, 레펜하르트의 두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가 다리를 후들거릴 정도라면 정말 탈진 직전이란 소리다.

'크으, 체력 바닥났다는 거 들통 나면 안 되는데.'

아틸카도 광폭화의 대가로 지쳐 있었고, 특히 없는 체력 다 쓴 상태에서 앱솔루트 스피어까지 날린 이니야는 반쯤 혼절해 있었다. 그저 특유의 오기로 쓰러지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질 때였다.

문득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한 방향으로 향했다.

"앗?"

"이거...."

저 멀리 떨어진 곳, 아까부터 광폭한 기운이 날뛰던 괴수 대결전 장소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해 중얼거렸다.

"윽! 사부? 대체 뭔 짓을 하시려고?"

5

선홍빛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찢는다.

"죽어라, 제라드!"

황금의 정권이 하늘을 구멍 낸다.

"너나 죽어라, 바나텔!"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격돌 순간 대기가 진동하며 이내 양측의 등 뒤로 충격파가 뻗어 나갔다. 오러의 폭풍이 부챗살 형태로 수십 미터 밖에까지 터졌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되풀이하던 짓이었다. 격돌의 충격으로 인해 두 사람이 다시 뒤로 튕겨 나갔다. 자세를 고쳐 착지하며 제라드가 외쳤다.

"젠장! 아직도 힘이 남았냐, 바나텔?"

반대편에서 재차 검을 들어 겨누며 바나텔도 소리쳤다.

"네놈이야말로 지치지도 않냐? 독한 새끼!"

말은 저렇게 했지만, 두 사람도 결국은 인간이었는지 전신이 어느새 땀범벅이다.

"후우...."

제라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체력은 건재했지만 오러양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헉헉...."

바나텔도 가슴을 헐떡였다. 오러양은 건재했지만 체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검을 든 채 바나텔은 고민했다. 역시 그와 제라드의 실력은 완전히 필적한다. 보아하니 또 사흘 밤낮을 싸우게 생겼다.

사실 이쪽도 바나텔 입장에선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경지에서 이토록 전력을 다할 일은 이미 없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짜증 나는 상대라지만 오직 제라드만이 그의 모든 것을 받아 줄 수 있다. 제라드와의 전투는 극도로 불쾌하면서도 극도로 황홀한, 이중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나텔은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다. 엄연히 바슈탈론 제국의 명에 따라 오러 유저들을 이끌고 왔다.

그는 힐끔 저 멀리 떨어져 싸우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벌써 리카본도 죽었고 몇 놈 더 쓰러졌다. 언제까지고 자신의 유희만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라드와 결판을 내지 않고 이 자리를 뜰 마음은 절대 없다!

바나텔이 검을 들어 세우며 자세를 취했다.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제라드 이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화끈하게 끝을 보자!"

제라드가 히죽 웃었다. 바나텔이 왜 저런 식으로 나오는지는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리 관심을 안 두었다지만, 제자가 나타났다는 것 정도는 제라드도 알고 있었으니까.

'아까부터 제자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저 아이들이 걱정되었겠지.'

하지만 이 대결은 그의 입맛에도 맞는 것이었다.

힘 다 떨어질 때까지 깨작깨작 공방을 주고받느니 서로 최강의 일격을 준비해 화끈하게 맞붙는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호방한 결전이란 말인가!

뒤로 풀쩍 뛰어 몇 십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리며 제라드가 외쳤다.

"그래,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바나텔이 포효를 터트리며 검을 하늘로 쳐들었다.

"오오오오!"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커져 갔다. 끝없이 허공을 찌르고 좌우로 늘어나며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기둥으로 화했다. 어찌나 거대했는지, 그 기둥의 빛만으로도 세상이 온통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직경 수십에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블레이드 오러. 한 인간의 오러양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힘이다. 고금을 통틀어 오직 바나텔만이 보일 수 있는 무위였다.

아무리 앙숙이라지만, 제라드 역시 저 모습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단 말이야.'

만약 바나텔이 다른 오러 유저처럼 응용력까지 갖추었다면, 아마도 그는 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신武神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라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랬으면 애초에 저렇게까지 오러양을 늘리지도 못했겠지.'

저것은 오로지 하나에만 특화된 이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는 신의 경지다. 그의 무문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비로소 이런 육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아압!"

바나텔이 더더욱 외침을 높이며 계속 전신의 오러를 모조리 끌어냈다. 끝없이 방대한 그의 오러가 모조리 한 자루 검의 형상에 스며든다. 거대한 선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기둥이 되었다.

세상을 가호하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

그중 창공의 에어리아스와 대지의 레단티 사이에서 하늘을 떠받쳐 세상을 지탱한다고 믿어지는 거신巨神이 있다. 산악과 의지, 중용의 아틀라스다.

바나텔이 보이는 신위는 그 전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저 오러 스킬에 신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틀라스 교단에서 신성모독이라며 불쾌해했지만, 교세가 그리 세지는 않다 보니 감히 검성씩이나 되는 이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왕년 단 일격에 그라임 왕국 남부의 거성, 아스타드를 붕괴시켜 그 명성을 높인 검성 바나텔의 내려치기.

참성검斬城劍, 아틀라스의 기둥이었다.

"좋구나!"

제라드도 흥분한 얼굴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거악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자세로 오른 주먹을 허리 뒤로 가져간다. 이내 그의 전신에서 찬란한 황금빛 오러 파문이 떠올랐다.

하나, 둘, 셋, 넷....

파동이 순차적으로 연동되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를 꺾고 바위를 부수는 힘이 몇 배로 증폭되며 다리를 붕괴시키고 절벽조차 뚫는 괴력으로 변한다. 종국엔 대 물리 처리가 된 성벽조차 일거에 붕괴시키는, 파성권破城拳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가공할 위력이 되어 황금빛을 발하며 꿈틀거린다.

우우우웅!

일어 오른 오러 파동이 제라드의 오른팔로 차례로 이동하며 약동의 소리를 흘렸다.

'아틀라스의 기둥'을 쥔 바나텔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크큭, 저거랑 맞붙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의 오러 스킬, 아틀라스의 기둥은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한 점에 집중된 것이 아니었다. 일국의 성도 벨 수 있는 검이지만, 단 한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여전히 미약하다.

그래서 바나텔은 각고의 고생 끝에 새로운 기술을 창안했다.

오직 제라드를, 그의 캘러미티 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었다.

"초극압축!"

아틀라스의 기둥이 순간 진동했다. 그리고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공할 파괴의 힘이 검을 쥔 바나텔의 오른손으로 맹렬하게 모여든다. 선홍의 빛이 점점 더 진해지며 밀도를 더한다. 하늘 끝까지 닿았던 빛이 압축, 또 압축되며 길이 10미터까지 줄어든다.

남들처럼 칼날의 형태를 유지한 채 오러를 집중해 위력을 높이는 재주 따윈 없는 바나텔이다. 무식하게 오러를 꾸역꾸역 응축시키기만 하니 예리함이고 뾰족함이고 전부 날아가 버렸다.

이미 더 이상 블레이드 오러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오러 몽둥이란 느낌?

그러나 저 빛 속에 담긴 힘은 이미 예리함 따윈 의미 없는 수준이었다.

오러가 흔들릴 때마다 표면이 대기에 스치며 불꽃이 튄다. 마치 태양의 표면처럼 홍염이 넘실거리며 파공음을 울린다.

10미터까지 줄어든 그 초고도 압축 블레이드 오러를 든 채 바나텔이 관통격의 자세를 취했다.

"자, 붙어 보자! 제라드!"

새로운 기술을 창안할 재주도 센스도 없고 남이 만든 기술조차도 조금만 복잡하면 따라 하는 것이 불가능한 희대의 둔재, 바나텔.

하지만 그는 특유의 우직함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모으고 수행해 결국 짐 언브레이커블의 캘러미티 혼에 대적할 기술을 만들었다.

아틀라스의 기둥을 극도로 압축해 찌르는 관통격.

아포칼립스 스팅거apocalypse stinger였다.

"흐, 제법 짜릿하겠구나!"

기대 어린 눈으로 제라드도 마저 황금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대기가 흔들리며 바람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받아 주마! 바나텔!"

이미 떠오른 네 개의 오러 파동, 그 뒤로 계속 황금빛 파문이 이어지며 위력을 중첩시켰다.

다섯 번째 고리가 공간조차 일그러트리는 가공할 힘을 부여한다. 여섯 번째 파동이 천공을 뚫고 구름마저 사르는 초월적 파괴로 변환된다. 일곱 번째 파동,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르는 대자연의 거력이 한 인간의 주먹에 머문다.

그리고 최후로 떠오른 마지막 여덟 번째 고리....

저것만은 아직 바나텔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8중첩인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 캘러미티 혼.

그 찬란한 빛이 제라드를 뒤덮었다. 바나텔이 기대와 흥분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과연! 예전보다 더욱 강해졌구나, 제라드!"

모든 힘을 검과 권에 실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양측의 어깨 너머로 적색과 금색의 기운이 맥동하며 사방에 파문을 떨쳤다. 응축된 두 힘이 세상을 파멸시킬 듯 요동되며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잠시 후....

"허어업!"

"타아아앗!"

아포칼립스 스팅거와 8중첩 캘러미티 혼이 세상을 가르며 쏘아졌다.

☆ ☆ ☆

적색의 섬광과 황금색 포격.

하나하나가 천지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두 힘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강렬한 빛이 세상을 뒤덮으며 뿜어져 나왔다.

장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굉음이 울리며 두 힘의 충돌로 대기가 진동한다. 공기가 사방으로 밀려나 폭심지가 일순 진공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내 다시 폭발 지점으로 몰려들어 상승기류를 형성, 하늘로 치솟으며 거대한 구름 기둥을 형성한다.

보고 있던 레펜하르트며 오러 유저들이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저, 저게 무슨!"

"뭔 짓을 한 거야, 저 미친 괴수들이?"

뒤얽힌 적색과 금색의 오러가 서로 상쇄되며 고열을 발산,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곧이어 충격파가 파문을 그리며 대지 위를 달렸다.

광풍이 불며 바위가 날아가고 거목이 허공에서 박살 난다. 숲이 통째로 쓰러지고 불탄다. 파괴된 바위며 거목들이 조각나 파편화되어 반파된 안타레스 백왕성까지 날아든다. 성과 외벽 곳곳이 구멍이 뚫리며 금이 가 붕괴되고, 이어진 열 폭풍에 의해 백왕성이 통째로 모래성처럼 쓸려가 버린다.

열 폭풍은 각국의 오러 유저들에게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살아남은 오러 유저들이 치를 떨며 쓰러진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에라이, 저 무식한 양반들!"

"쓰러진 이들을 보호합시다! 서둘러요!"

"알겠소!"

남은 힘을 쥐어짜 오러 가드를 펼쳐 자신과 쓰러진 이를 모두 감쌌다. 죽은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혼절한 이들마저 저 폭발에 말려들게 놔둘 순 없었다. 아무리 동료애가 없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법이다.

"이니야! 아틸카!"

레펜하르트도 허겁지겁 두 사람을 불렀다. 너무 지쳐 오러 가드를 펼 여력조차 없는 이니야를 품에 안은 뒤 레펜하르트가 열 폭풍을 향해 등을 돌렸다. 아틸카가 뒤에서 그녀를 보호하며 주술을 펼쳤다.

"바위 어머니, 천년 눈물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네!"

투명한 보호의 결계가 세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열 폭풍이 그들 모두를 휘감고 불어닥쳤다. 열기의 바람이 오러 가드며 주술의 결계를 두들겨 댔다.

이 열 폭풍은 공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파괴의 여파일 뿐이다. 아무리 지쳤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쯤은 다들 버텨낼 수 있었다.

잠시 후 폭풍이 잠잠해지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끝났나?'

사위가 잠잠해지자 레펜하르트는 제일 먼저 등 뒤부터 돌아보았다. 너무 급해 아까는 신경 쓰지 못했는데....

'시리스는?'

시리스와 러스, 타시드는 무사할까?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이미 열 폭풍에 말끔히 날려간 후다. 막 레펜하르트가 걱정하며 그들을 찾을 때였다.

근처 땅이 움찔거리며 흙더미가 솟아났다. 그리고 이내 흙투성이가 된 이들이 땅 위로 기어 나왔다. 열 폭풍이 밀려오기 직전, 시리스가 대지의 정령술로 구덩이를 파 대피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들 무사하군."

그제야 진정하고 그는 바나텔과 제라드 쪽 상황을 살폈다. 시선을 돌려 폭심지 쪽을 바라보는 순간.

"하하하...."

순수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젠 차마 기가 막히지도 않았다.

아포칼립스 스팅거와 8중첩 캘러미티 혼이 격돌한 바로 그 장소.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크레이터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깊이만 해도 족히 20미터는 되어 보이고, 직경은 거의 200미터가 넘는 듯했다.

지형을 바꿔도 유분수지! 저기다 물만 갖다 부으면 훌륭한 호수인 것이다. 옛날 한 포악한 왕이 뱃놀이 하겠다고 백성들 부려 인공 호수를 만들다 원성을 사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저 두 사람 있었으면 그냥 왕위 보존하고도 남았지 싶다.

눈을 껌뻑이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뭐... 10서클 주문이랑 비교해도 별로 안 떨어지겠는데?'

물론 캘러미티 혼과 아포칼립스 스팅거, 개개의 위력만으론 아무리 그래도 10서클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필적하는 두 기술의 충돌로 파괴력이 몇 배나 증폭되었으니, 그 위력이 실로 엄청났다.

'뉴클리어 버스트만은 못해도 미티어 폴보다는 조금 더 센 거 같다.'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저 정도의 힘에 휘말린 만큼, 당사자들도 결코 무사하진 않았다.

장절하기까지 한 파괴를 낳은 두 노인, 제라드와 바나텔은 저마다 크레이터 벽에 처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라드가 울컥 피를 토하더니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크윽, 또 무승부네. 쓰벌...."

처박힌 바나텔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선혈을 흘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나텔이 힘겹게 이를 악물었다.

"아, 저 새끼, 한 번을 안 지네...."

대륙 최강의 두 무인, 검성과 권황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혼절해 버렸다. 살아남은 타국의 오러 유저 중 한 사람, 마라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크레이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검성이시여!"

레펜하르트도 놀라 땅을 박찼다.

"사부!"

미우나 고우나 사부는 사부다. 물론 제라드는 절대 곱지 않지만, 그렇다고 밉지도 않은 것이다.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주제에 막상 눈앞에서 사부가 쓰러지니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라드가 쓰러진 바나텔을,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부축해 크레이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틸카를 불러 제라드를 맡긴 뒤 레펜하르트는 아직 서 있는 네 오러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던졌다.

"계속할 셈인가?"

마라드는 잠시 갈등했다.

현재 이쪽의 전력은 그와 데크릴, 테이칸 왕국의 웨를 경뿐. 반면 저쪽은 아직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숫자로만 보면 확실히 자신들의 패배다.

하지만 딱히 패했다고 단정 짓기도 애매했다. 그래도 이쪽은 마지막으로 휘두를 힘이 남아 있었다. 반면 권왕 측은 전부 건드리면 쓰러지기 직전이다.

'이대로 사생결단을 내?'

딱히 제국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물러나 버리면 지금 죽은 이들은 개죽음을 당한 꼴이 아닌가? 최소한 저쪽 모가지도 한두 개는 취해야 체면이 선다.

그렇게 갈등이 느껴지는 순간, 팔을 잃은 카메룬이 고개를 저으며 마라드를 만류했다.

"그만합시다."

"카메룬 경?"

중년 기사가 힘없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강하구려, 권왕."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상대의 반응만 지켜보고 있었다. 카메룬 경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뻔뻔한 줄은 알지만 이대로 보내 줄 수 있겠소?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은 자의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어째 눈빛이 정말로 전의가 없어 보였다.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쳐들어온 저놈들을 모조리 붙잡아 죽이고 싶었다. 실제로도 전생 때는 그랬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결코 먼저 자신을 공격한 이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의 이야기일 뿐.

상황상 여기서 원한을 더 깊게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대범한 모습을 보여 주어 마음의 빚을 지우는 게 낫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오. 뒤쫓진 않겠소."

허락이 떨어지자 마라드가 어깨에 혼절한 검성을 짊어진 뒤 리카본의 시체에 손짓을 했다. 영기염동의 힘으로 시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다른 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각자 부상자를 챙겼다. 르카완과 왈그란 경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 버려 시체조차 남지 않았기에, 대신 그들의 무기를 유산 삼아 수습했다.

감사의 예를 갖추며 카메룬이 점잖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적의를 가지고 온 우리에게 보인 그대의 호의, 실로 감사하오. 과연 권왕의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알았소. 비록 사망자가 생겼지만 이는 우리 쪽의 침략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 자업자득이니 원망 따윈 하지 않겠소."

실제로 카메룬은 이대로 할라인 왕국으로 돌아가면, 이후 국왕이 뭐라고 하건 한동안 처박혀 두문불출할 생각이었다. 떠날 준비를 갖춘 카메룬이 문득 말했다.

"권왕이여, 아마도 다른 이들은 다시 그대를 적대하지 않겠지. 하지만 제국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제법 진심이 담긴 호의였기에 레펜하르트도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알고 있소. 우리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거든."

카메룬이 빙그레 웃었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로 그가 인사를 건넸다.

"그럼 무운을."

동료의 시신과 부상자들을 데리고 각국의 오러 유저들은 바로 자리를 떴다. 탈진했다 해도 과연 오러 유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초토화된 들판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상대의 뒤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응?'

이내, 초토화된 들판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레펜하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왜 상대방이 저토록 쉽게 물러섰는지 이해가 갔다.

한 무리의 군세가 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다이어울프를 탄 두 명의 오크와 말을 탄 두 명의 드워프였다.

"레펜 형제! 무사한가?"

"구원자시여!"

오크 투사 칼켄과 스탈라, 그리고 드워프 오러 유저인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이었다. 아스레일이 보낸 전갈을 받고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그들 뒤에는 두 명의 인간도 있었다.

"백왕님!"

"레펜 씨!"

아라난 그라드에서 지원군을 모아 달려온 카를과 실란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자 바로 긴장이 풀렸다.

"진짜 끝났군...."

전신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땅 위고 뭐고 일단 눕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그만큼 피로가 극심했다. 안 그래도 옆을 보니 이미 이니야는 꼴까닥 기절한 상태고 아틸카도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있는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웃으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일단 앉자...."

권황과 검성, 그리고 수십 명의 오러 유저가 서로 맞붙은 이 세기의 대결은 그렇게 소멸된 백왕성의 흔적과 새로운 호수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제39장 아라난 그라드

1

신성 바슈탈론 제국 황도, 엠퍼러란드.

황제의 옥좌에 앉아 레어폴 1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이는 굳은 얼굴로 눈치를 보는 젊은 무관, 보고를 위해 나선 에길네스 백작이었다.

레어폴 1세가 버럭 호통을 쳤다.

"그 무슨 어처구니없는! 어찌 바나텔 공이 패했단 말이냐!"

"그것이...."

황제의 진노에 벌벌 떨며 에길네스 백작이 보고를 이었다. 레어폴 1세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권황 제라드라고?"

"예, 폐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그자가 어째서?"

황제의 독백에 에길네스 백작은 속으로 격하게 동의했다. 이 작전을 제안한 그도 설마 실패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이리저리 재 봐도 전력상 실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아는 검성 바나텔의 힘이라면, 단신으로도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 대부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각국의 오러 유저를 열 명이나 동원했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단 말인가?

전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난입자, 권황 제라드 때문이다! 그자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작전의 제안자로서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왜 그 정신 나간 영감이 하필 이번에만 안 하던 짓을 한 거냐!'

아니, 언제부터 짐 언브레이커블이 제자 챙겼다고? 에길네스 백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물론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감히 황제 앞에서 무엄한 짓 했다가 목 뎅겅 잘리긴 싫었으니까.

하지만, 이 작전의 제안자인 에길네스 백작은 어차피 목 부지하기 힘든 팔자였다.

"후우...."

레어폴 1세가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그가 손짓을 했다.

"데려가라."

대기하고 있던 로열 가드가 앞으로 나와 에길네스 백작의 좌우 팔을 붙잡았다. 백작이 기겁하며 자비를 구걸했다.

"폐, 폐하! 부디 자비를!"

에길네스 백작은 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아우성이 홀 안을 메아리쳤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레어폴 1세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번 사태의 대가는 참혹했다. 제국의 수호신, 검성 바나텔이 중상을 입었다. 열한 명밖에 없는 충성스러운 제국의 오러 능력자 중 한 명, 리카본 경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원성도 자자했다. 애당초 반 강압적으로 협조를 구해 끌어낸 오러 유저들이었다. 저마다 각국의 귀한 보물들, 그들이 죽거나 상처 입었으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각국마다 제국에게 격한 항의를 보냈다.

-아무 일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어차피 위험한 건 검성이 알아서 할 테니 뒤에서 대충 상대하면 된다면서?

-비밀을 지켜야 한다기에 온갖 핑계 만들어 가면서 겨우 보내 줬더니만!

-귀중한 자국의 오러 유저를 보냈더니 반병신으로 만들어 돌려보내!

평소처럼 고풍스러운 말투 떼고 요약한 서신이 아니다. 정말 저 말투 그대로 각국의 왕이며 지도자가 항의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해 감히 하지도 못할 짓, 각국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예였다.

특히 르카완 경을 잃은 그린드 왕국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린드 왕국은 바슈탈론과 할라인 사이에 위치한 작은 소국 연합 중 하나다. 제국의 일개 영지 수준인 가난한 소국, 그린드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가 바로 왕국 유일의 오러 유저 르카완이었다.

소국 연합 사이에서는 한 명의 오러 유저가 국력을 좌우할 정도다. 그나마 르카완 때문에 우리나라도 오러 유저가 있다며 소국 연합 속에서 제법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그 귀중한 왕국의 보물을 데리고 가더니 산산이 박살 나 시체도 못 건지게 한 것이다.

지금도 그린드 왕국의 사신은 '우리나라 오러 유저 물어내라!'면서 황궁 밖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싶지만, 제국의 체면도 있고 지은 죄도 있어서 그냥 놔두는 중이었다.

골치 아프다.

정말 골치 아프다.

"후우우우...."

지상 최강의 제국의 황제, 레어폴 1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흘렸다. 근심 어린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은 그저 침묵만 지켰다.

그때 황제 가까이 서 있던 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젊은 시절엔 꽤나 미남이었을 잘생긴 노신관이었다.

순백의 법복에 화려한 금박 문양을 수놓은 노인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상의 황제에게 세이어의 첫 번째 지팡이가 감히 고하오!"

바슈탈론 제국을 다스리는 또 한 명의 제왕, 교황청 판테온의 주인이자 세이어 교단의 우두머리인 교황 타세라드였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교황을 바라보았다.

"예, 예하?"

교황이 목청을 가다듬고 위엄 있는 음성을 이었다.

"인간의 사정은 신의 뜻을 행함에 있어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 어찌 세이어의 가르침을 앞에 두고 고민한단 말이오? 응당 세이어의 진노를 사기 전에 기필코 저들을 응징해야 할 것이오!"

타세라드의 외침에 신하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광신狂信을 경계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신하들의 태도를 본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교황을 향해 레어폴 1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지상의 신성 대행자여. 그분께서 내려다보고 계신데 부끄러운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강압적인 시선으로 좌우를 둘러보더니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안타레스의 이단자를 벌하겠다! 방법을 강구하라!"

단호한 말투에 신하들이 웅성거렸다. 신하 한 명이 반론을 제시하려 조심스레 앞으로 나설 때였다. 옷자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차게 몸을 돌리며 황제가 말을 끊었다.

"물러가라! 정례를 마치겠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제국의 사정이야 어찌 되건 전혀 뜻을 굽히지 않겠다, 무조건 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신하가 다시 대열로 돌아갔다.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명대로 행하겠나이다!"

홀을 떠나며 문득 황제가 옆에 서 있던 세이어의 교황, 타세라드를 바라보았다.

"지상의 신성 대행자여, 그대와는 따로 할 말이 있소."

타세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따르겠나이다, 지상의 황제여."

☆ ☆ ☆

정견政見의 홀을 떠난 황제와 교황은 어깨를 함께한 채 복도를 걸었다. 격분한 둘의 기세에 시종들이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중앙궁을 벗어나 별궁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궁 서쪽에 위치한 별궁, '순백의 탑'은 감히 그들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시종들을 뒤로한 채 황제와 교황만이 탑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장식이 된 복도에 두 사람만 남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두 층 정도 오르니 강철로 된 민무늬 철문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둥근 테이블 하나만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 손을 얹고 황제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소환."

교황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빛이 두 사람을 휘감으며 복색이 바뀌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바슈탈론 제국의 황제와 세이어의 교황이 아니었다.

인류를 뒤에서 수호하는 위대한 집단의 계승자, 13인의 은의 수호자중 한 명이었다.

은의 수호자, 바슈탈이 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예상 밖이구려, 이런 식으로 일이 틀어질 줄이야."

은의 수호자, 타세랄이 된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그나마 얻은 것이 있다면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백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 정도군."

세 명밖에 없던 오러 유저 중 한 명, 왈그란 경을 잃은 바실리 왕국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제국만큼이나 안타레스 백국에도 크게 향하고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에 쳐들어간 열한 명의 오러 유저, 그들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제국의 리카본과 그린드 왕국의 르카완, 그리고 바실리 왕국의 왈그란만이 죽음을 당했다.

다른 나라들은 보유한 오러 유저를 잃지 않았다. 그라임의 게블릭이나 할라인의 카메룬이 팔다리를 입는 큰 부상을 입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진 않는다.

저 세 나라만이 실질적인 손해를 본 것이다.

물론 그 사투 중에 레펜하르트나 이니야가 출신 골라 가면서 죽인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손해 본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아니, 하고 많은 오러 유저 중에 하필 자기 나라 오러 유저만 골라 죽일 건 또 뭐란 말인가?

특히, 바실리 왕국의 억울함은 더했다.

권황 제라드도, 권왕 레펜하르트―정확히는 그의 육체인 테스론―도 엄연히 바실리 왕국 출신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주요 공신 중 한 명인 실란 필 마르시스도 바실리 출신의 신관이다. 동향 사람 봐주지는 못할망정 가루도 안 남기고 박살 내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쳐들어간 주제에 분노한다는 것이 참으로 뻔뻔한 태도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물건인가?

당연히 바실리의 국왕은 제국뿐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에도 이를 득득 갈고 있었다.

수호자 타세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될 바에야, 권왕이 모든 오러 유저를 싹 다 죽여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럼 차라리 일이 편해졌을 텐데."

그렇다면 손쉽게 대륙의 모든 나라가 안타레스 백국을 적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호자 타세랄의 아쉬움 섞인 말에 수호자 바슈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보내 주었던 것 같소. 세상의 소문대로만 저 권왕이란 자를 바라볼 순 없지.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머리가 좋은 자요."

"그렇겠지. 마법사가 머리 나쁠 리는 없을 테니."

광범위 대륙 감시용 아티팩트, 세이어의 눈을 통해 이 둘은 이미 레펜하르트가 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실은 그동안 은근 주변에 '혹시 마법사가 아닐까?'라며 말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만큼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명은 자자했으니까.

"그 무식한 무문의 이야기가 좀 깊숙이 박혀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이 진실을 알리려면 신탁이라도 떨어지기 전엔 무리겠더군."

수호자 타세랄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새하얀 테이블 한쪽이 빨갛게 점멸했다. 수호자 바슈탈이 타세랄을 불렀다.

"왔군. 수호자 루디움과 수호자 세렐라인이 연결되었소."

이내 주위가 빛으로 물들이며 순백의 공간으로 화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세계와 그 가운데 세워진 비현실적인 새하얀 신전.

공간을 초월해 정보를 전달하는 고대의 아티팩트, 세이어 템플이었다.

사용자의 의식을 투영해 현실과 똑같은 감각을 재현하는 이 유사 공간 덕분에 은의 수호자들은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서로 의사를 나눌 수 있었다.

신전의 중앙 홀에 네 명의 남녀가 나타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 50대의 중년인을 향해 수호자 바슈탈이 버럭 성을 냈다.

"이게 어찌 된 것이오, 수호자 루디움! 분명 권황 제라드는 그대가 처리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

수호자 타세랄도 합세했다.

"아니, 그자가 왜 나타난단 말이오? 덕분에 일이 크게 틀어졌소. 대체 왜 아직도 저자가 살아 있는 거요?"

50대 중년인, 수호자 루디움이 인상을 구겼다.

"아, 그게...."

우물쭈물하던 루디움이 대답했다.

"...보낸 은의 암살자들이 모두 당했소."

바슈탈과 타세랄이 동시에 놀랐다.

"엉? 그자는 오러 유저가 아니오? 아무리 강해 봤자 마법의 힘이 없는데 어찌 죽이지 못한단 말이오?"

"충분한 준비를 갖춰 보낸 것이 아니었소?"

연이은 두 사람의 질문에 루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랬소. 정해진 규정대로 정해진 장비를 들려서,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매뉴얼을 착실히 따랐소."

"그런데 왜?"

인상을 쓰는 바슈탈을 보며 루디움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그런데 안 통하더구려."

바슈탈과 타세랄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 유저를 암살하는 법은 물리적인 방법뿐이 아니다. 은의 현자가 보유한 아티팩트 중에는 강력한 저주를 건다거나 치명적인 독을 형성하고, 또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현자라도 미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정신계 마법을 담은 마도구들도 많았다.

상대가 오러 유저건 대마법사건 신의 화신에 가까운 성직자건 간에, 모든 대상에 전부 통용이 될 만큼 다양한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기에 여태껏 은의 현자가 인류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물리력 때문이라면 오러 유저에게 밀릴 수도 있겠지만 어찌 마법이 있는데 안 통한단 말인가?

루디움이 한 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인들 저런 시도를 안 해 보았겠는가? 물론 다 해 봤다.

하지만 저 권황 제라드는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었다.

강력한 저주는 기합으로 떨쳐 내고 고래도 녹이는 독은 으적으적 씹어 먹고 정신계 마법은 불굴의 근성으로 그냥 버텨 내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벌써 제라드를 노리다 죽어 간 은의 암살자만 두 자릿수였다. 은의 현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기가 막힌 암살 대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설명하자니 참... 자신도 이 상황이 납득이 안 가는데 남을 이해시킬 자신도 없고....

루디움이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냥, 그렇게 되었소. 아무래도 특급 금기 물품 사용을 허락해야 할 것 같소만...."

타세랄이 혀를 찼다.

"여기서 뭘 더 내 달라고? 벌써 몇 개를 잃었는데?"

그러자 루디움도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아니, 안 통하는 물건만 갖다 쓰니 그런 거 아니오? 아예 화끈하게 센 걸로 들이붓자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씩씩거리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슬그머니 눈치만 보고 있던 은발의 작은 소녀, 세렐라인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는 무엇을 했소? 권왕을 암살할 수 있다지 않았소?"

루디움이 버럭 성을 내며 비난의 화살을 슬쩍 그녀에게 돌렸다. 바슈탈과 타세랄도 가세했다.

"그러게 말이오! 외인이었던 현자 레스틴에, 노출 위험까지 각오하며 그의 협력자마저 동원했거늘!"

"심지어는 아다만드릴 슈트마저 내가지 않았소? 그건 금단의 기물 중에서도 특급 중의 특급품이오!"

그 귀한 아다만드릴 슈트 날려 먹고 온 세렐라인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훌쩍거리던 세렐라인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혼나니까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것들 전부 그녀보다 연하年下다. 10대 소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엄연히 여든 살이 넘었다.

"아니, 근데 이것들이 어디다 대고 눈을 부라려? 특히 레어폴, 너! 넌 내가 기저귀 갈아 가며 키웠어!"

50~60대의 노인들이 움찔했다.

세렐라인이 제국의 황제를 노려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지상 최강의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바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수호자 바슈탈에서 레어폴 1세로 돌아가 눈을 껌뻑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흰 수염의 노인이 새파랗게 어린 소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지금은 수호자 회의 아닙니까? 왜 여기서 속세의 일을...."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얼떨결에 언성을 높이긴 했는데 저 세렐라인이라는 소녀는 무려 60년도 전, 그가 아기일 때 자신을 돌봤던 '보모 누나'였다. 감히 호통을 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수호자 타세랄이 헛기침을 흘리며 화제를 바꿨다.

"험험,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서 무엇하겠소?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오."

바슈탈도 얼른 세렐라인의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어쨌건, 이제 공식적으로도 권왕 레펜하르트를 향해 속세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소. 제국이 나설 수 있으니 곧 해결이 될 거라 보오."

루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단 권황 제라드를 노리는 것은 관두고 타깃을 바꿔 보겠소. 권황이 아니더라도 말살해야 할 대상은 적지 않으니까."

타세랄이 달래듯 세렐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는 계속 권왕의 제거 시도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소. 어쨌거나 아직 현자 레스틴은 건재하고, 그의 힘도 여전하니까."

세렐라인도 진정하고 다시 수호자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럴 생각이에요. 대륙에 무수한 오러 유저가 있지만, 은의 기물을 쓸 자격이 있는 오러 유저는 현자 레스틴을 제외하면 현자 브렉티스와 RX 시리즈 뿐. 아직 현자 레스틴에겐 이용 가치가 있어요."

은의 현자가 간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오러 유저나 마법사 자체는 많다. 속세의 권력을 이용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금지된 아티팩트마저 내줄 만큼 은의 현자 내에 깊이 소속되어 있는 오러 유저는 얼마 없는 것이다. 비밀 유지는 은의 현자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니까.

비록 실패했지만 테스론은 여전히 은의 현자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인재였다.

결론이 나자 모인 수호자들이 저마다 유사 공간을 떠나 현실로 돌아갔다. 세렐라인도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녀의 모습이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순백의 빛이 사라지며 다시 주위가 통상 공간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신전 대신 화려한 카펫이 깔린 근사한 응접실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응접실 창문 밖으로 험준한 산세가 보였다. 이곳,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여름 별장이 위치한 퍼틴 고원의 정경이었다. 세렐라인의 옷차림 또한 어느새 순백의 로브에서 귀족가 영양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서자 마침 지나가던 하녀들이 세렐라인을 보더니 조신하게 허리를 굽혔다.

세렐라인이 하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테스론 경은 어디 있지?"

30대의 나이 든 하녀 한 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금역禁域에 가셨습니다, 에렌드 아가씨."

세렐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하녀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세렐라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녀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저분은 왜 저런 젊은 나이에 이런 산속에 계시는 걸까요?"

다른 하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본 저택에서 근무하다 두어 달 전, 별장으로 온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저 '에렌드 아가씨'는 참으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명문 중의 명문가,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나 한창 피어나는 꽃 같은 나이의 소녀다. 그런 미소녀가 황도의 화려한 무도회며 사교계에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이런 깊은 산속에 살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말로는 지병이 있어 몸이 허약하기 때문에 요양 중이라는데, 솔직히 옆에서 모신 하녀들 입장에서는 별로 허약한 것 같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움직이는 것 보면 건강 그 자체인 데다가 가끔 몇 달씩 별장을 비우고 여행도 다닌다. 그때마다 생생하게 돌아오는 소녀가 지병이 있다면 그것도 웃긴 소리다.

하녀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런 산속에서 살면 멋진 남자를 만나지도 못할 텐데 말이지."

"그렇지? 에렌드 아가씨 정도의 미모라면 황도에서도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어쩌면 황태자님을 만날 지도 모르지!"

"황태자께서 올해 마흔이 아니시던가? 그분이 결혼한 지가 언젠데...."

예순이 넘은 레어폴 1세가 여전히 정정하게 제국을 통치하고 있기에, 후계자인 길리우스는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황태자 신세였다.

"그, 그럼 황태손!"

"그건 좀 가능성 있겠다, 얘."

화려한 귀족들의 삶은 하녀들에게 있어 영원한 동경이다. 일단 수다가 시작되니 바로 왁자지껄해진다. 30대의 나이 든 베테랑 하녀, 메를렌이 혀를 차며 어린 하녀들을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군요! 높으신 분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메이드의 덕목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성실히 하면 되는 거예요!"

혼난 하녀들이 입을 다물고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 저택 안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 ☆ ☆

아스티노플 공작가의 여름 별장 뒷산.

그곳에 제법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저택이라 하기엔 너무 투박한, 그저 돌로 올린 건물과 그 주위로 높은 담장이 둘러싸인 이곳은 하녀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공작가의 금역이었다.

담장 안쪽, 포석이 깔린 연무대 위에서 흑발의 아름다운 청년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후우우...."

숨을 잔잔하게 몰아쉬며 청년, 테스론이 눈을 떴다. 체내에서 맴도는 마력을 느끼며 그가 중얼거렸다.

"7서클 대부분을 터득해 버렸군. 역시 마왕의 두뇌인가? 일단 작정하고 덤벼드니 진도가 빠르네."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에 크게 당한 후, 테스론은 자신의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마왕을 노리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직 무술에만 매진하고 마법은 어디까지나 보조로 익히던 마음가짐을 고친 것이다.

그의 육체를 가진 레펜하르트는 결국 권왕다운 힘을 손에 넣고, 전생의 경지까지 융합해 새로운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테스론이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뭐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바뀐 육체의 우월성은 오히려 테스론 쪽이 더 높다.

"그래, 누가 뭐래도 이 육체는 고금 제일 마법사의 것이 아닌가? 그런 무기를 쥐고 있으면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또다시 떠오른다. 캘러미티 혼에 당하던 바로 그 순간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바로 그때 테스론은 마법의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모든 마나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느껴졌다. 그토록 이해가 안 갔던 모든 마학 이론의 글귀들이 영혼에 각인되듯 속속 익혀졌다. 무인의 각성과 비견되는 마법사의 깨달음, 정신 고양情神高揚이었다.

그토록 다룰 수 없던 마왕의 두뇌가 드디어 테스론의 영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의 감각을 바탕으로 테스론은 결국 7서클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마법 수준은 계속 무섭게 늘어, 지금은 은의 현자로부터 받은 7서클 주문 거의 전부를 터득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당장이라도 8서클을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루어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진보였다. 전생 때 레펜하르트가 고작 서른의 나이에 9서클을 입문한 것이 납득이 갔다.

문득 테스론이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육체가 바뀐 것이 다행이었어.'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비롯, 대륙의 모든 강자가 한꺼번에 덤벼서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던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만약 서로의 육체 그대로, 동시에 왕년의 힘을 되찾는다면 테스론은 감히 마왕을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나마 육체가 바뀌어 이 정도 수준 차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겠지....'

고개를 저으며 테스론이 다시 명상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렐라인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오자 테스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떤 처벌이 떨어졌습니까?"

아다만드릴 슈트는 은의 현자 내에서도 손꼽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걸 날려 먹은 테스론의 죄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세렐라인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은, 그대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상대의 강함을 정확히 측정 못 한 수호자들의 잘못도 있으니까요."

테스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제 겨우 마법 쪽으로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길이 보였는데 여기서 은의 현자의 지원이 끊기면 기껏 잡은 희망도 흐려진다.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쉽군, 아다만드릴 슈트가 건재했다면 좀 더 승률이 높았을 텐데...."

아무리 마왕의 두뇌를 제대로 써서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 해도, 역시 오러와 마법을 융합해 쓰는 레펜하르트는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놈의 권마합신!'

솔직히 정신 고양을 이룬 지금도 저건 어떻게 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테스론은 분명 마왕의 두뇌를 소화해 냈지만, 그래 봤자 전생의 마왕과 겨우 같은 시작점에 섰을 뿐인 것이다. 레펜하르트야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상태였을 테니까.

역시 권왕으로 살아온 그 시절의 경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실망한 듯한 테스론의 얼굴을 보며 세렐라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볼게요. 아직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테스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유서스 경은 일단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갔고, 크리스틴 양과 필레나는 옆에서 수련 중입니다."

세렐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황을 마저 점검하기 위해 테스론 곁을 떠났다.

연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

크리스틴은 메사이어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를 쓰고도 레펜하르트 일행은커녕 정체도 모르는 조그만 트롤 소녀에게 당한 그녀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 뒤를 받쳐 주었다 해도 일개 몬스터에게 밀렸으니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별장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현재 메사이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매진 중이었다.

입자마자 아다만드릴 슈트에 적응해 버린 테스론, 애당초 자기가 써 오던 엘드라드를 강화했을 뿐인 유서스, 뛰어난 전투 센스를 타고 태어난 필레나는 아티팩트를 받은 즉시 그 힘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면 크리스틴은 당시 메사이어의 힘을 절반도 제대로 못 꺼냈던 것이다. 똑같이 업그레이드 버서커 아머 받고 제대로 다룰 줄도 몰라 비명횡사한 스테반의 예도 있으니, 사실 운이 좋아서 살았지 제대로 된 오러 유저 만났으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을 것이다.

'실란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사이어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해!'

과연, 크리스틴의 검풍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렬한 신성검의 빛이 대기를 울린다. 확실하게 메사이어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저 정도면 오러 유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바로 밑까진 다다를 것 같았다. 적어도 예전처럼 테스론에게 10초도 못 버티는 수준은 벗어났다.

세렐라인이 내심 감탄을 흘렸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수준이 괜찮네?'

어차피 크리스틴이 가진 성광검 메사이어는 그리 주요 기밀이 아니었다. 막말로 맞아 죽고 적에게 빼앗겨도 은의 현자 입장에선 아플 것도 간지러울 것도 없다. 저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흡족해하며 세렐라인은 자리를 떴다.

공터 반대편의 수풀 사이에서는 필레나가 가부좌를 틀고 테스론처럼 명상에 잠겨 있었다. 세렐라인이 다가오는 걸 보며 필레나가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 어서 오세요. 세렐라인 님."

평민 출신인 필레나는 아직도 그녀를 어려워하며 극존대를 하고 있었다. 존칭받는 입장에서 기분 나쁠 것도 없는지라 세렐라인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손을 저어 인사를 받으며 그녀가 필레나에게 말했다.

"열심이시네요, 필레나 양. 다중복제의 지팡이는 좀 익숙해졌나요?"

"네, 다 세렐라인 님 덕분이에요."

제플린에서 보인 그녀의 마법을 떠올리며 세렐라인이 칭찬을 건넸다.

"필레나 양의 마법 경지가 상당하더군요. 특히 전투만으로 보면 대마법사 수준이라 해도 믿겠던데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평민 출신에 20대 후반인 젊은 여마법사, 필레나. 처음에는 도무지 탐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실력을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레나의 경지는 벌써 7서클, 나이를 보면 천재로 태어나 가문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그 재능으로 대륙에 위명이 자자한 제이드와 동급이다.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천재도 보통 천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아직 7서클 초입일 뿐이지만, 마법을 다루는 그녀의 전투 센스만큼은 7서클 후반인 제이드보다도 더 나은 것 같다.

'과연, 현자 레스틴이 안목이 있긴 있었군. 어쩐지 강하게 그녀를 추천하더라니.'

세렐라인의 칭찬에 필레나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째 표정이 뭔가 감추는 듯한 느낌이어서 세렐라인은 잠시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사실을 잊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감춘 비밀이라 봐야 별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응원을 건넨 뒤 세렐라인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완전히 떠나가자 필레나가 안심하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휴우, 들킨 줄 알았네."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필레나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고대어로 된 문양이 새겨진 검고 네모난 블록, 엘류시온의 목소리였다. 예전, 프리즈랜드에서 은의 현자의 명을 받아 마법사 할 일행을 처단할 때 손에 넣었던 고대의 아티팩트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아끼던 이 기물을 또 발견한 테스론은 은의 현자 몰래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챙겨 두었던 것이다. 수호자 세렐라인에게는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더 강해져야 해."

마력을 집중해 엘류시온의 목소리에 주입하며 그녀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위치 온."

둥근 마력장이 펼쳐지며 필레나의 전신을 감쌌다.

우우웅!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얻은 테스론은 틈나는 대로 그것을 열심히 연구했다. 하지만 지식에 비해 센스가 딸려 도저히 발동 조건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필레나에게 맡겨 보관하게 했다.

가진 두뇌조차 활용 못 하던 테스론과 달리 필레나는 타고난 재능에 어린 레펜하르트의 도움으로 마학자로서의 경지 또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꾸준한 연구 끝에 결국 발동 조건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필레나가 나직하게 언령을 토했다.

"도전. 8단계. 최고급 숙련자용."

유사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이 용암으로 뒤덮인 화산 지대가 필레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발동시킨 필레나는 기뻐하며 바로 테스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정작 이 기물은 테스론에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의 연산력은 이미 아티팩트로 강화시킬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필레나의 소유가 되었다. 이런 기물마저 아낌없이 내준 그를 떠올리며 필레나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더 강해져서 테스론의 힘이 되어야 해!"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로 각오를 다진다.

"다시는 그가 다치는 모습을 보기 싫어!"

붉은 하늘 위로 커다란 고대 문자가 떠올라 빛을 발했다.

Welcome to Magical Beat!

2

안타레스 백국의 새로운 수도, 아라난 그라드.

그 중심에 위치한 백왕궁은 마지막 손질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외벽과 기둥 등은 전부 끝났고 내부 수리만 남은 상태였다.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라 가이라크라는 이름도 붙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거주하던 황궁 가이라크.

모든 종족의 힘이 합쳐져 건축된 그 황궁은 대륙에서 제일 거대하고 위엄 있는 건물이었다. 비록 인간들에겐 대마궁이라 불렸지만 레펜하르트에겐 언제나 그리워하던 장소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 비록 그때와는 규모도 화려함도 비교가 안 되지만, 언젠가 다시 그 위세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동일한 이유로 심연의 전당이라 명명된, 백왕궁 가이라크 서쪽의 거대한 홀.

심연의 전당은 사방이 대리석으로 에워싸고 화려한 벽화와 금은 장식이 치장된 장엄한 공간이었다. 드워프들이 진심을 담아 지은 건물인 만큼, 그 규모며 견고함이 현 대륙 최대의 건축물인 교황청 판테온과도 맞먹을 수준이었다.

벽마다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는 엘븐 실크로 이루어져 있고 도자기며 타일은 트롤의 손이 닿아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닥 역시 오크들이 정성을 다해 무두질한 가죽 카펫으로 촘촘하게 덮여 있다.

세상 어느 왕궁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화려하고 웅장한 심연의 전당.

이 사치스러운 공간 안에 수십 개의 허름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천막 입구를 헤치고 근육질 거구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하암, 잘 잤다."

안타레스의 제왕, 레펜하르트였다. 젊은 시종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세숫물을 갖다 바쳤다. 세수를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종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크으, 백왕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묵으시다니...."

안타레스 백왕성은 제라드와 바나텔의 결투로 인해 완전히 붕괴됐다. 관용구 그대로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날아가 버렸다. 아스레일이며 안타레스 기사단, 백왕성 거주민들은 일찌감치 대피해 피해가 없었지만 살던 곳이 싹 날아갔으니 새로운 거주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현재 레펜하르트와 백왕성 주민들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백왕궁 가이라크에서 묵고 있었다.

천막 위쪽에 펼쳐진 화려한 천장을 가리키며 레펜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누추하긴? 여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런 섭섭한 소릴."

시종이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아니, 절대 누추하지 않습니다. 암요, 화려하기 그지없습죠. 하지만 누추한 것이...."

분명 백왕궁 가이라크는 일국의 왕이 묵기에 부끄럽지 않은 웅장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미완공인 것이다. 창문이며 문, 천장 일부는 여전히 공사 중이다. 그렇다 보니 내부 가재도구도 하나 안 들여놓았다. 어쩔 수 없이 홀 안에 천막 치고 잘 수밖에 없었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번듯한 곳에 가실 수도 있었잖습니까?"

시종의 하소연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 이 정도 인원이 묵게 되면 너무 민폐가 커."

사실 안타레스 백국은 이미 꽤나 성세를 보이고 있어 교역 도시 자루드며 여기저기 도시와 영지에 쓸 만한 저택이 꽤 있었다. 그러니 그쪽에 임시로 묵었어도 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굳이 아라난 그라드를 고집했다.

안타레스 기사와 병사, 백왕성의 거주민을 다 합치면 족히 이백여 명은 된다. 그만한 숫자가 묵으려면 아무래도 고위층 몇몇만 저택 들어가고 나머지는 천막생활 해야 하는데, 집 잃고 고생하는 이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시종에게 수건을 받아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레펜하르트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난 괜찮던데? 솔직히 여기도 별로 불편할 거 없고."

레펜하르트도 이종족 전사들도 그리 사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야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자도 불편함을 못 느끼는 몸이 되어 버렸고, 다른 이종족 전사들도 워낙 오지에서 힘들게 살다 보니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괜히 남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아라난 그라드로 오자는 레펜하르트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카를이며 아스레일 등 인간 수하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은 아라난 그라드마저 백왕성 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군대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아무리 카를이 유능하다 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열 몇 명 정도의 소인원이 정체 감추고 국내로 들어오는 것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안타레스 백국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제플린을 상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각국의 오러 유저들마다 일일이 정보원을 붙여 둘 만큼 광범위한 정보력을 갖추기엔 아직 안타레스 백국의 국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제국이 또 오러 유저만 모아서 비밀리에 저런 식으로 쳐들어오면 대비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일국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전투의 중추이기도 하다. 이들이 아라난 그라드에 있어 줘야 안심하고 도시 건축을 끝마칠 수 있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잠자리의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레펜하르트 일행은 왕궁 안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참으로 화려한지 초라한지 애매한 생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천막, 보기에만 이렇지 사실은 되게 고급품이라고. 오크들이 특별히 마련해 준 건데. 어지간한 석조 건물에서 자느니 여기가 훨씬 나아."

수건을 받아 들며 시종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더군요. 천막 안에서 털가죽 깔고 자는데도 침대보다 더 편안한 것이, 이러다 도로 침대 생활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요.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신데 체통이...."

그렇게 시종이 대답하던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천막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으갸갸갸!"

러스와 타시드의 목소리였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또 시작이네."

시종도 웃으며 대답했다.

"아침 정례 행사입죠."

"난 요새 저 소리 안 들으면 일어난 것 같지가 않다니까?"

그 치열한 사투 이후, 레펜하르트는 물론 다른 이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실란이 바로 신성력을 써 그들을 치유했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남아 있었다.

재생력이 있는 아틸카, 그리고 육체 하나는 대륙 최강인 제라드며 레펜하르트는 하루 만에 자리 털고 일어났다. 단지 탈진했을 뿐 깊은 상처는 없던 이니야도 그럭저럭 사흘 만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는 일주일이 다 되도록 여전히 부상을 달고 있었다.

심연의 전당 안쪽에 설치된 오크리쉬 텐트.

그곳에서 분홍색 성광이 찬란한 빛을 뿌렸다.

칼로 베이는 고통도 눈 깜빡하지 않고 견뎌 내던 굳건한 의지의 소유자, 러스가 비명을 질렀다.

"시, 실란! 그만! 그만! 못 참겠어!"

옆에 누워 있던 타시드도 절규했다.

"아악! 뼛속까지 아프다!"

야멸찬 실란의 대꾸가 뒤를 이었다.

"참아, 이 양반들아! 죽을 만큼 아프다는 거 나도 잘 안다고! 뼛속까지 오러가 박혔으니 당연히 거기도 아프겠지!"

현재 실란의 신성력이라면 어떤 부상이라도 하루 안에 깔끔히 완치시킬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이 일주일째 누워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러스와 타시드의 부상은 단순한 피륙의 상처가 아닌 것이다.

상대한 오러 유저의 잔재 오러가 체내에 남아 있으니, 실란의 치유 주문과 충돌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낳는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혹독한 단련을 이겨 낸 레펜하르트조차도 '사람 살려!'를 외칠 만한 격통이다.

러스나 타시드가 인내심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한 번에 감내할 정도도 아니었다. 단숨에 치료하려다가는 트라우마 생겨 정신적으로 문제 생길 수도 있는 수준이어서 실란도 일주일에 걸쳐 조금씩 치유력을 부여해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으악! 으악! 으아악!"

"오크 살려! 아악! ...앗! 돌아가신 아버지, 어쩐 일로 이곳에?"

고통스럽다 못해 환각까지 보이는 모양이다. 이 처절한 절규에 천막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났다.

"아, 아침이네."

"저 소리 들리는 걸 보니 일어날 때가 됐구먼."

"닭 우는 소리보다 정확하지, 저거."

한때는 러스며 타시드의 비명에 겁을 잔뜩 먹은 시종과 하녀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쯤 듣고 나니 다들 무덤덤해져 버렸다. 다들 그냥 아침이구나 하는 얼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비명이 흐르는 천막 옆에서는 거대한 다이어울프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타시드의 애랑, 흑왕이었다. 처음엔 주인의 절규에 잔뜩 긴장해 으르렁댔지만 요새는 한쪽 귀로 흘리며 어서 아침이나 내놓으라는 듯 바닥을 앞발을 두들길 뿐이었다.

"쯧쯧. 언제까지 저래야 하려나?"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세면을 한 뒤 의관을 갖춰 입었다. 전투 중에는 웃통 까고 사는 그이지만, 평소에는 그래도 왕다운 차림을 하고 살고 있었다.

사실 요즘 들어서는 의관 안 갖추는 경우가 잦았는데 사부 다시 만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아, 저렇게 되면 안 되잖아! 정신 차려야지!'라는 자성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사부님은?"

시녀인 엘프 여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밖에서 칼켄 공과 대련 중이십니다."

☆ ☆ ☆

심연의 전당 밖의 커다란 광장.

그곳에서 거구의 오크와, 더 거구의 인간 노인이 서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허허, 오크 녀석이 제법 칼질을 할 줄 아는구나!"

제라드가 껄껄 웃으며 펀치를 날린다. 육중한 일격이 대검, 마그눔의 검면을 강타한다. 칼켄이 뒤로 10여 미터 넘게 주르륵 밀려났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면서도, 칼켄은 감탄해 마지않는 눈으로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평생 최강자로만 살아온 그였다. 같은 오크 중에는 누구도 그의 상대가 없었다. 유일한 적수가 소꿉친구로 어릴 때부터 티격태격해 온 스탈라였다. 결국 부부가 되었지만 아내는 여전히 그의 훌륭한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스탈라는 어쩔 수 없는 여인이었고, 칼켄보다 근력이며 파워가 떨어진다. 그녀의 오묘한 기술은 존경할 만하지만 역시 칼켄보다는 약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노인은 모든 면에서 그를 압도한다!

일단 덩치부터가 달랐다. 칼켄은 평생 자기보다 큰 사람은 처음 보았다. 예전 황야에서 만났던 오우거랑 비슷해 보인달까?

파워도 스피드도, 압도적이었다. 펀치며 킥이 스칠 때마다 '뱀들의 왕'이라는 엘더 스네이크의 꼬리치기를 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이조차도 제라드에게는 기술이 아니란 점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비기를 쓰지 않고 그냥 손발만 놀리는데도 상대가 안 된다!

"굉장하다! 늙은 인간 투사여! 그대야말로 투신鬪神이다!"

경외 가득한 눈으로 칼켄이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제라드가 허허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네 녀석도 보통이 아니다. 좀 어렸으면 데려다 가르쳤을 텐데, 아쉽게도 너무 나이를 먹었구나."

저 '데려다 가르친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칼켄은 눈만 껌뻑거렸다. 하지만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초월적인 강자를 만나는 것은 투사로서 최고의 영예다. 칼켄이 마그눔을 들고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했다.

"나의 맹우, 마그눔이여!"

대검이 찬란한 오러를 뿜으며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떠오른다. 그 상태로 칼켄이 양손에 수도 형태의 블레이드 오러를 생성시켰다.

"이것이 나의 최고의 공격! 받아 주겠는가? 위대한 투사여!"

제라드가 흐뭇해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너라, 음미해 보자꾸나."

백발을 휘날리며 칼켄이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타아앗!"

양손의 수도가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합일된다. 합일된 블레이드 오러가 마그눔과 결합해 불규칙적인 뇌전을 그려 낸다. 그의 필살기인 벼락 떨구기, 칼켄은 요 몇 년간 고련을 통해 그것을 한층 더 강한 궁극기로 심화시켰다.

"날벼락 떨구기!"

오크답게 기술 이름이 좀 단순하긴 하지만, 어쨌건 이 오러 스킬은 벼락 떨구기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푸른 전격이 제라드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제라드가 가슴을 늠름하게 폈다.

"더블 스파이럴 가드!"

우르르릉!

빛이 터지며 대지가 진동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감탄했다.

'허, 칼켄 저 양반 그동안 더 세졌네.'

처음 만났을 때 레펜하르트는 칼켄과 동수를 이룬 적이 있다. 5중첩 캘러미티 혼을 터득하고 모든 면에서 무인으로서 강해진 지금은 확실히 칼켄을 능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붙으면 승부를 장담 못 하겠는데?'

칼켄 역시 그동안 계속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칼켄의 나이는 이제 마흔다섯, 오크로서는 중년이 지난 나이지만 여전히 청년기의 굴강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성기의 육체에 노숙한 경험, 타 종족 오러 유저와의 만남과 온갖 전투로 이해 그의 기량은 더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뭐, 그래 봤자 사부님에겐 안 통하지만.'

날벼락 떨구기는 분명 강력한 기술이었지만 제라드의 더블 스파이럴 가드에 막혀 정작 육체에 닿지도 못하고 가로막혔다. 하긴, 제라드로 하여금 더블 스파이럴 가드를 쓰게 한 것부터가 저 기술의 위력이 경천동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그냥 스파이럴 가드만으로 막았을 테니까.

잠시 후, 한 대 거하게 맞은 칼켄이 허공에서 세 바퀴 돌며 얼굴부터 착지하는 서글픈 광경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한 방이구먼.'

대련을 옆에서 보고 있던 푸른 곰 부족이며 다른 부족 출신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오오오?"

"칼켄 족장님이 한 방에!"

"과연 투신이시다!"

"역시 백왕님의 스승다운 무위다!"

존경하는 족장이 개같이 날려 갔는데도 구경하는 오크들 중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라드를 향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끝없는 존경과 경외의 시선만을 보일 뿐이었다. 주인 바라보는 충견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날벼락 떨구기마저 안 통하다니? 진정 대단하도다!"

심지어는 맞고 날아간 칼켄조차도 전혀 분노한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오크...."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오크는 강자를 숭상한다.

또한 무조건 큰 걸 미덕으로 치며, 단련된 육체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긴다.

그런데 제라드는 '크고 아름다운 강자'다! 어찌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오크들에게 큰 은인인 레펜하르트의 스승인 만큼, 딱히 제라드에게 패한다 해도 자존심에 상처 입을 것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 오크 전사들 대부분은 제라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스승의 파워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잘 패거라 빠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육체는 강철이시다

아아, 부러워라 스승의 근육

아아, 본받으리 스승의 주먹

등의 괴상망측한 노래까지 불러 대며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무슨 신흥 사이비 종교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제라드도 그런 반응이 싫지 않은지 기분 내킬 때마다 친절하게 한 수씩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대씩 두들겨 팼다는 소리다.)

"하여튼... 사부가 와서 정말 다행이었지."

새삼 당시의 사투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성 바나텔의 힘은 굉장했다. 지금의 그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제라드가 없었다면 기껏 얻은 또 한 번의 생을 그대로 접을 뻔했다.

'용케 도망칠 수 있었다 해도, 러스와 타시드는 잃었을 테고.'

문득 레펜하르트는 품을 뒤져 작은 은빛 엠블렘 하나를 꺼냈다. 제이드를 쓰러뜨렸을 때 발견했던 물건이었다.

"흐음."

옅은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마저 품을 뒤졌다. 이번에는 저 은빛 엠블렘 십수 개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이 수많은 은빛 엠블렘을 보며 그는 사부와 재회했을 당시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