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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

시작은 간단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올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해 주면 그만이었다.

-수행 기사 나리! 제발 좀 도와주십쇼!

-좋다! 용의 핏줄이자 염발경 레이 윈슬로우의 주군인 내가 도와주마!

-네? 그, 그러니까 용의 핏줄이자....

-레이 윈슬로우의 주군! 중요한 부분이니까 까먹지 말고!

호칭에 집착하는 기사는 어디에나 있는 법. 주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곧잘 따라 했다.

나중에는 호칭에 신경 쓴다는 걸 알아낸 이들이 자연스레 소리쳤다.

-용의 핏줄이자 염발경, 레이 윈슬로우의 주군이신 루크 나리! 도와주세요!

-음, 좋다! 잘 외우는군!

-헤헤, 어찌 제가 기사님의 칭호를 틀리겠습니까?

-저도 부탁드립니다! 용의 핏줄이자 염발경...!

나중에 사람들은 아예 호칭을 달달 외워 온 다음 부탁을 건넸다. 그때마다 루크는 성실히 응했다.

사실 요청이라고 해 봐야 서부에서 기사에게 부탁할 건 몬스터 퇴치밖에 없었다.

루크는 부탁받은 즉시 달려가 마을 주민들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줬다.

-안심하라! 용의 핏줄이자 염발경의 주군인 내가 놈을 쓰러뜨렸으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

마을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늘어난 몬스터들이다.

영주한테 부탁은 했지만 한참 뒤에나 처리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하여 골칫거리를 처리해 주는 수행 기사라니.

루크의 명성은 일파만파 퍼졌고, 당연히 뒤의 칭호도 유명해졌다.

"소문의 전파 속도가 엄청 빠르네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처리했으니까 당연하지."

"그거 거의 다 제가 처리한 거잖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브루노가 투덜거렸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는 보통 브루노가 일격에 몬스터를 처리해 버렸다.

하루에 수십 건의 부탁을 처리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브루노의 등을 두드렸다.

"그야 네가 하는 게 더 빠르니까. 지금은 명성이 필요한 때거든. 수고 좀 해 달라고."

"아니, 그래도 이건 사기죠. 수행 기사는 도련님인데."

"사기지. 근데 뭐 문제 있나?"

"…없네요."

솔직한 말에 브루노는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니 루크와 정직함이란 단어만큼 안 어울리는 게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고생했다."

"슬슬 때가 된 겁니까?"

"그래, 이 정도로 명성이 퍼졌으니 윈슬로우 가문에서 찾겠지."

이미 퍼진 소문을 주워 담지는 못하겠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더 퍼지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다.

뭣보다 루크는 레이의 주군. 좋든 싫든 레이를 손에 넣기 위해 한번 만나려 하리라.

'억지로 레이를 굽히는 것보다 날 이용하는 게 더 쉬울 거라 생각할 테니.'

물론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을 거지만.

덜거덕.

"왔군."

잠시 후, 마차에서 몇 명의 기사가 내렸다. 기사들은 곧장 루크가 식사하는 탁자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루크 번스타인 경이 되십니까?"

"그렇소만, 누구시오?"

"케이든 자작 각하께서 경을 초대하시고자 합니다. 부디 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의 말에 루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꺼이."

* * *

루크 일행은 곧바로 마차에 타 케이든 자작을 만났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기다리는 시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약간 희끗한 머리에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자작이 루크를 향해 말했다.

"반갑네. 현 윈슬로우 가문의 가주인 케이든 윈슬로우일세."

"번스타인 가문의 삼남, 루크 번스타인입니다. 이리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올리자 케이든 자작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봐도 힘만 믿고 날뛰는 무뢰배의 예의범절이 아니었다.

'쉬운 상대가 아니군.'

베릭이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조금 난폭한 성격을 기대했건만. 케이든 자작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난감함을 숨겼다.

"당연히 초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의 활약은 이미 들었네. 내 영지에서 수많은 도움을 줬다는데 어찌 그대를 못 본 척하겠나."

"감사합니다, 각하. 저도 꼭 각하를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허어, 나를?"

"예, 제게 충성을 바친 레이 경의 부친이라고 들었으니까요."

케이든 자작과 옆에 있던 리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젠 대놓고 직구를 내던지겠다 이건가?

하지만 이런 상황 역시 상정 내였다. 얼른 평정을 되찾은 케이든 자작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나 역시 들었다네. 이리도 훌륭한 이를 주군으로 맞이하였으니 참으로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야."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제가 그녀의 충성에 부족한 주군이지요."

"허허, 젊은 친구가 겸손함이 과하군. 자네가 부족하다면 누가 자격이 있겠는가?"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덕담이 오가고 있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번뜩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대화. 본격적인 대화는 나중에 두 사람만이 남았을 때 이어지리라.

"참, 내가 소개하는 걸 깜빡했군. 내 후계자라네."

"처음 뵙겠습니다. 리온 윈슬로우라고 합니다. 올해 열여섯이 되지요."

옆에서 지금껏 가만히 있던 리온이 인사했다. 짧은 인사 후, 리온은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루크를 바라봤다.

"이야기는 누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수행 기사 활동이라니, 감히 저는 흉내 낼 수가 없군요."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이유야 어찌 됐건 훌륭하십니다. 전 기사로 나설 만한 검술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까요."

리온은 은근슬쩍 루크를 띄워 주는 척하면서 말에 뼈를 담았다.

-그 나이에 수행 기사? 그럴 실력이 되긴 하냐?

'이 새끼 봐라?'

당연히 그 도발을 못 알아들을 루크가 아니었다. 리온은 그런 루크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부탁이니 루크 경과 대련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경께 배울 게 많을 것 같으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한마디로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자신과 한판 붙자는 소리. 새파란 놈의 비아냥에 루크는 살짝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손님 입장에서 제가 어찌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같이 대련하며 검술을 견식하는 것도 기사의 기쁨이니 말입니다."

'됐다!'

루크의 대답은 들은 리온이 속으로 반색했다. 이미 베릭에게서 루크와 브루노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은 상태였다.

검술에 아예 무지하진 않은 것 같지만, 대부분의 일은 가신인 브루노에게 맡기는 자. 그렇다면 뻔하지 않은가.

본인의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소리다. 진짜 자신 있는 검사는 실력을 시험하고 싶어서 언제나 안달이 나 있으니까.

'아무리 번스타인이라도 과거의 영광일 뿐이지. 실전 경험은 어디까지 있을까?'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서부다. 때때로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면에 서야 하는 영주에게 검술은 필수 중의 필수.

그건 후계자인 리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또래 중엔 적수가 없으리라 스스로도 자신하고 있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리온은 바로 루크를 연무장에 안내했다.

"이곳이 가문의 연무장입니다."

"정비가 잘되어 있군요. 감탄스럽습니다."

"언제나 몬스터에 시달리는 서부니까요. 연무장에서의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의 피 한 방울이니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짧은 잡담을 끝내며 루크와 리온이 목검을 들고, 심판을 맡은 케이든 자작이 연무장 아래쪽에 섰다.

대련이 시작되기 전, 윈슬로우 가문의 두 부자는 서로 슬쩍 시선을 나누었다.

'과하게 하면 안 된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서로 귀족의 자제. 이번 대결은 베릭을 뭉개 놓은 것에 대한 작은 보복이자, 앞으로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기세 싸움이다.

과하게 해서 가문의 문제로까지 발전시키는 건 역효과였다. 고개를 끄덕인 케이든 자작이 입을 열었다.

"여신께 부끄럽지 않은 대련이 되기를. 시작하게."

타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온이 달려들었다. 아까 전의 겸양과 달리 바람처럼 빠른 속도였다.

'흥, 미안하지만 이쪽은 실전이라면 질리도록 겪은 몸이다.'

열여섯 살 이전부터 자작의 몬스터 토벌을 줄기차게 따라다닌 리온이다. 그 사이로 직접 검을 휘둘러 보고 피도 뒤집어썼다.

하물며 지금까지 곱게 가문에서 자란 도련님 따위야!

'우선은 첫 격으로 가볍게 이마를...!'

따악.

"켁!?"

갑자기 이마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리온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루크의 목검이 리온을 후려친 것이다.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파악을 못 하는 리온을 보며 루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10년 넘게 전장에서 굴렀다, 애송아.'

50화

리온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내, 내가 지금 맞은 건가?'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확신이 서질 않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건 루크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이번엔 제가 빨랐군요."

"...!"

여유로운 목소리에 리온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검이 움직이는 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우연이야! 우연이 틀림없어!'

불안감을 억누르며 리온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너무 서두른 탓에 상대의 공격이 사각에서 날아온 게 확실했다.

이번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차분히 공격할 생각이었다.

'일단 붙어서 목검을 쳐 낸 후에 파고들면...!'

따악.

"끅!?"

목검끼리 맞부딪친 순간, 또 한번 리온의 이마에 불꽃이 튀었다. 루크의 목검은 똑같은 장소를 정확히 가격하고 있었다.

뒤로 휘청이며 물러선 리온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체 무슨...!?'

이번에도 공격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당황하는 리온을 보며 루크가 히죽 웃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를 악문 리온은 다시 루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잔재주 없이 정면에서 돌파할 생각이었다.

가장 빠르고 강한 속도로 내려친다면, 상대도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을 터.

'어디 이러고도 똑같이 할 수 있나 보자!'

자신만만한 리온의 목검이 휘둘러진 순간, 루크의 목검도 움직였다. 두 개의 목검이 부딪친 순간이었다.

따악.

'…미친! 내 목검을 옆으로 쳐 냈어!?'

리온은 속으로 경악성을 내뱉었다. 검끼리 부딪쳐서 멈추는 거면 모를까, 다른 방향으로 쳐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힘 조절을 잘못하면 다 쳐 내지 못하고 베이거나, 자칫하면 쳐 낸 쪽이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하지만 루크의 궤적은 완벽했다.

자신은 거의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균형은 잃게 만드는 일격. 휘청이는 리온에게 또다시 목검이 날아들었다.

빠악.

"끄헉!?"

세 번째로 같은 장소에 목검을 맞은 리온이 휘청거렸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루크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어디서 전쟁 한번 안 겪은 애송이가 날 이겨 먹으려고.'

루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범재' 특성의 효과는 간단하다. 모든 기술의 등급이 '숙련자'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죽기 살기로 노력해 봤자 평범한 재능의 한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건 검을 다루는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루크는 10년 넘게 '숙련자'의 한계치에서 머물며 전장을 굴렀다. 달리 말하자면 평범한 기사 수준에선 최강이란 소리.

설령 천재라도 경험 부족이면 이길 수 있는데, 하물며 수재 수준의 꼬맹이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졌습니다."

리온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검사로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두 사람이 연무장에서 내려오자 케이든 자작이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대련이었네."

"감사합니다."

말과는 달리 자작의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기를 꺾기 위해 신청한 대련이건만, 반대로 이쪽의 체면이 깎여 버렸다.

하지만 귀족이란 때론 원수 앞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하는 법. 자작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찬사를 건넸다.

"역시 번스타인 가문일세. 과연 용살자 레오닉의 검술답군."

"조상의 영광이 어찌 제 영광이겠습니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네. 내 오늘 개안을 하는군."

한참 루크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던 자작은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걸 깜빡했군. 그대를 위해 좋은 술을 준비했는데 참여하지 못하겠어. 대신 내 아들과 함께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가능하면 자작님과도 같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만."

"정말 미안하군.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자리여서 말이네."

자작과 루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술자리를 준비했다는 건 서로 내밀하게 대화 좀 해 보자는 소리.

그리고 그 대화를 아들이 대신한다는 건 '이건 가문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는 눈 가리고 아웅이다.

'귀족답군.'

표리가 없고 직설적인 아버지를 오래 봐서 그런지, 오랜만에 보는 귀족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원래 귀족이란 삶 자체가 정치인 법이니까.

"리온, 네가 나 대신 루크 경을 대접해주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겠습니다."

리온은 활짝 웃으며 아버지의 말에 수긍했다. 그 모습에 루크가 혀를 내둘렀다.

'아직 이마 벌건 주제에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재주지.'

검술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적인 감각은 아버지에 뒤떨어지지 않는 아들이었다.

* * *

루크는 리온과 함께 응접실에 안내되었다. 응접실에는 고급스러운 포도주와 함께 가벼운 안줏거리가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대결이 끝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남부의 레르겐 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입니다. 향이 참 좋지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잔이 채워졌다. 그 말대로 향도 맛도 썩 괜찮았다. 서로 가볍게 잔을 비운 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루크 경의 활약은 많이 들었습니다."

"수행 기사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돌아다니시며 본 서부는 어땠습니까?"

"몬스터가 정말 많더군요."

베릭에게 한 것과 똑같은 대답. 창의성은 없었지만, 솔직히 다른 감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가도 몬스터, 몬스터, 몬스터. 이 지랄맞은 환경에서 시달리다 보면 누구나 서부라고 하자마자 몬스터를 떠올릴 거다.

"맞습니다. 서부는 참 고난이 많은 땅이지요. 그만큼 언제나 강력한 기사에게 목말라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이 같은 기사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리온은 루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최근엔 더욱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누님 같은 분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 항상 생각합니다."

"안타깝군요. 언젠가 그런 기사가 한 사람 더 나오기를 바랍니다."

명백한 거절에도 리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얼른 다시 미소를 띠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글쎄요. 이미 있는 분께서 맡아 주시면 더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예, 하지만 충성을 바친 상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럼 그 충성을 바친 분께서 명령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기사의 본가를 스스로 도우라고요."

"글쎄요."

내가 왜? 라는 표정으로 루크가 리온을 쳐다봤다. 리온이 손뼉을 치자 바깥에서 하인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어떤 건 무기였고, 어떤 건 지금껏 본 적도 없는 도구였다. 다만 그 모든 도구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띄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 물끄러미 물건을 바라보는 루크를 향해 리온이 말했다.

"마도구입니다."

"...!"

마도구. 마법의 힘이 걸린 물건으로 그 위력은 유물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도 인간에겐 매우 유용했다.

베릭이 쓴 마도구만 봐도 그렇다. 상처 없이 사람을 포박하는 용도로 그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마법이 거의 사라진 지금 시대에는 귀쟁이들이나 만드는 물건인데.'

유물만큼은 아니더라도 구하기 어려운 만큼 그 가치는 상당했다. 리온은 마도구를 루크 앞에 내밀며 말했다.

"전부 루크 경께 드리지요."

"…레이와 교환하기엔 너무 값싼 대가군요."

얄팍한 수작에 루크가 혀를 찼으나, 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선물일 뿐입니다. 전 아무 대가도 원치 않습니다."

"...?"

"굳이 따지자면 이 마도구를 가지고 번스타인 가문과 교역하고 싶군요. 강인한 기사들이 많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루크는 흠칫 몸을 떨었다. 교역에 쓸 수 있을 만큼 마도구가 많다고? 이건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그렇다면 설마 마도구를 양산할 수 있다는 소린가?

"엘프들에게서 비법이라도 알아내셨습니까?"

"글쎄요."

루크의 말에 리온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알려 줄 수 없다는 소리.

"한 가지 확실한 건 곧 우리가 교역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마도구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 그 첫 파트너로 번스타인 가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루크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급조한 계획이다. 마도구가 생산되면 굳이 동부까지 와서 번스타인 가문과 교역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사방에서 나랑 계약 맺자고 달려들 텐데. 그러니까 이건 루크를 향해 내미는 제스쳐인 셈이다.

'이 거래를 들고 가문으로 가라. 그럼 가문 내의 입지가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그것과 레이를 교환하자… 이거군.'

확실히 나쁜 거래는 아니다. 아무리 괴물 같은 무력을 지닌 기사라고 해도 결국은 개인.

막대한 수입으로 이룰 수 있는 영지의 발전과 가문 내 입지 상승을 고려하면 거스름이 남는 수준이다.

"어떻습니까?"

입꼬리를 올린 리온이 루크를 향해 물었다. 이걸 과연 거부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루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싫은데요."

"...."

리온이 얼굴이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거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 그러나 루크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가 왜 가문의 입지를 높이냐? 나 혼자 유명해져야지.'

이미 가문의 입지는 높을 만큼 높은 루크다. 이 이상 높아져도 크게 다를 거 없다.

이 공적으로 후계자가 될 만한 적자면 모를까, 서자 입장에선 더 노력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이유가 하나.

'이 새끼들, 회귀 전에 멸문한 이유가 귀쟁이들 때문이었단 말이지.'

서부에 충격을 준 다섯 가문 멸문 사건. 그 주범은 바로 엘프였다. 지금껏 서로 경멸하며 어지간하면 접촉하지 않던 종족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때만큼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을 건너 기어코 다섯 가문의 씨를 말려 버렸다.

마지막까지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거래로 확실해졌다.

'귀쟁이 놈들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구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최악의 경우에는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엘프한테 같이 찍히겠지.

루크 입장에선 미치지 않고서야 저 귀한 기사와 교환할 이유가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예, 매우 진심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서로 할 이야기를 다 한 것 같군요. 슬슬 제 기사를 보고 싶습니다만."

리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마 이 거래를 거부할 줄이야. 그렇다고 이대로 레이를 내줄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누님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으니 하루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루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녀에게 숙소로 안내받았다. 그 뒷모습을 리온은 날카롭게 노려봤다.

정공법이 안 먹힌다면 비겁하게라도 쫓아내는 수밖에.

* * *

리온은 말과 달리 레이와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되는 날에도 대답은 같았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군요."

언제나 똑같은 말의 반복. 이유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어떤 이유든 전부 핑계라는 게 빤히 보였다.

루크는 혀를 차며 브루노와 맥스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냐?"

"아무리 봐도 시간 끌기네요."

"역시 그렇지?"

맥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방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명확한 거절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나한테는 의미가 꽤 크지."

"예?"

"난 수행 기사잖아."

"...!"

그제야 상황 파악한 맥스가 흠칫했다. 수행 기사는 대륙을 떠돌며 사람을 돕는 게 의무다.

아무 의무도 없이 한 장소에서 느긋이 지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초대라고 해도 기껏해야 일주일이 한계겠지.

그 이상 머문다면 세간의 눈초리가 따가워지리라.

"졸렬하네요."

"효과는 직빵이지만."

루크 일행은 어디까지나 초대받은 입장. 접대의 관습에 따라서 주인에게 막 나갈 수가 없다.

막무가내로 레이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실례이자 불명예니까. 반대로 계속 머물 수도 없다.

이대로 계속 눌러앉으면 의무를 내팽개친 수행 기사가 되기에.

'새끼들, 머리 좀 굴렸는데?'

루크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단순하지만 루크 일행에겐 더없이 효과적인 계책이다.

'근데 이런 건 회귀 전에도 많이 겪어 봤거든.'

파훼법이 없는 계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게 있다면 단순한 정보 부족일 뿐.

루크는 슬쩍 브루노를 바라봤다.

"대접은 어때? 잘해 주나?"

"대접 자체는 엄청 잘해 줍니다.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만 말하면 바로 내오니까요."

"술도?"

"예, 좋은 것만 골라 주던데요."

"그렇단 말이지."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저리 극진히 대접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게 놈들의 계책을 무너뜨릴 틈이었다.

"상대가 졸렬하게 나오면, 우리도 졸렬하게 받아쳐 줘야지."

"이번엔 또 무슨 꾀를 내신 겁니까?"

"그러니까...."

루크는 브루노의 귓가에 계획을 속삭였다. 모든 계획을 들은 브루노가 눈을 껌뻑였다.

"잘도 그런 걸 생각하십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저도 이놈들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습니다."

브루노는 씩 미소를 지었다. 비록 욕을 좀 먹을지 몰라도, 이런 수작을 부리는 놈들에겐 한 방 먹여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어이, 바깥에 누구 있나!"

밤이 되자마자 브루노는 크게 소리쳤다. 레이와 만나는 것 이외에 바라는 건 뭐든 해 달라는 명령을 받은 하인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예, 나리. 무슨 일이십니까?"

"포도주 있나? 가능하면 독한 걸로."

"독한 포도주요? 아르세 지방의 포도주라면 있습니다만...."

"그럼 그것 좀 가져와라. 오늘은 독한 술이 마시고 싶군."

"알겠습니다."

하인은 냉큼 포도주를 가져다줬다. 자기 전에 포도주를 가끔 찾던 브루노인지라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은 이전과 달랐다. 포도주를 한 병 다 비운 브루노는 추가로 더 독한 술을 요구했다.

"한 병 더!"

"예, 기다려 주십시오."

"한 병만 더."

"예? 자, 잠시만...."

"한 병 더!"

"네에!?"

작정하고 취하기로 했는지 브루노는 계속해서 포도주를 들이켰다. 전부 마신 건 아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을 때쯤, 브루노는 은근슬쩍 포도주를 따서 창문 아래로 콸콸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독한 포도주를 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흠, 이 정도면 되겠지.'

한참 포도주를 시킨 브루노는 비워진 병들을 바라봤다. 어지간히 술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도 만취하기 딱 좋은 양이었다.

거울을 보고 약간 벌게진 얼굴을 확인한 브루노가 방문 밖으로 나오며 비틀거렸다.

"꺼으윽! 취한다!"

"브, 브루노 경!?"

좌우로 휘청거리는 브루노를 보고 하인이 기겁했다. 저 정도로 만취하다니. 술버릇이 나쁜 기사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브루노는 휘청거리기만 할 뿐 하인을 보고 성질을 부리진 않았다.

"끄윽! 내가 화장실을 가려 하는데에! 화장실이 어디지이!?"

"저, 저쪽입니다."

"그렇구마안!"

열심히 좌우로 휘청거리며 브루노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진짜 화장실에 갈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평소에 저쪽으로 못 가게 했겠다.'

유난히 루크 일행의 침입을 막았던 저택 중앙을 향해 브루노가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하인들은 기겁하며 막으려 했지만 브루노는 막무가내였다.

"여,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무어야아!? 내가 화장실을 못 간다는 게야아아!?"

"아니, 화장실은 여기가 아니라...!"

"시끄럽뜨아아아아!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아아아!"

브루노는 하인을 홱홱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하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났다.

술 취한 기사를 막다가 잘못하면 두들겨 맞을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때였다.

"브루노 경! 이쪽은 접근 금지요!"

"기사 된 자가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이요!"

기사 두 사람이 나서서 분노한 얼굴로 브루노를 막았다. 기사를 확인한 브루노가 눈을 빛냈다.

'여기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소리렸다.'

그렇다면 레이가 머무는 곳과 상당히 가깝다는 소리. 브루노는 비척거리며 잔뜩 만취한 것처럼 주절거렸다.

"으윽! 지금 뭐어언 소리인지 모르것네에에!"

"이 작자가! 술 취했으면 어서 들어가 잠이나 주무시오!"

"자아아암? 그게에… 으어어! 미끄러진다아아!"

"자, 잠깐! 거긴 창문...!"

기사들이 막으려 했지만 브루노가 더 빨랐다. 브루노는 미끄러지는 척 창문을 향해 있는 힘껏 어깨로 들이받았다.

쨍그랑.

"꺄악!?"

"무슨 일이냐!"

유리 부서지는 소리에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다. 2층이었기에 브루노의 몸은 빠르게 땅으로 떨어졌다.

기사들은 기겁했으나 브루노는 완벽한 회전을 선보이며 착지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으니까.

"끄으으윽! 취한다아아! 내가 노래 한 곡조 뽑아야겠구우운!"

"브루노 경! 지금 무슨...!"

"나느으으은! 브루노오오오! 내 주구느으으은! 루크 번스타인이라네에에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 전체를 울렸다. 저 멀리 자던 사람도 기겁해서 튀어나올 목청이었다.

전장을 내달리며 넋 나간 병사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던 브루노의 목청이다. 지평선 너머에도 들릴 목청으로 소리를 질러 대니 못 듣는 자가 없었다.

"레이이이! 윈슬로우우우우! 어디에 있나아아아! 엘릭서어어! 가져가아안! 레이이이 겨어어엉! 주군이이이인! 루크 번스타이이이인! 여기에 있는데에에에!"

"저, 저 미친놈이!"

"막아! 저 시끄러운 입을 막아!"

기사들은 떼거리로 달려들어 브루노의 입을 막으려 들었으나, 힘이 한참 부족했다.

브루노는 기사들을 밀어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레이이이이이! 레이이이이! 어디에 있나아아아! 우리가 왔는데에에에! 번스타이이이인! 주군이이이이!"

"이런 제기랄! 좀 닥치란 말이다!"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브루노에게 들러붙었다. 그런 기사들을 보며 루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무례한 짓을 저질러도 비교적 쉽게 용서받는 방법이 뭔지 알아?'

'그런 쉬운 방법이 있었습니까?'

'있지. 죄송합니다, 너무 취했었습니다, 딱 두 마디면 돼.'

평소라면 이런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접대의 관습에서 주인에게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구는 순간 명예를 잃으니까.

그러나 그게 술에 취한 우발적 사고라면? 만취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서 싹싹 빌면?

'귀족 체면 때문에라도 절대 용서 못 해! 라고 할 수가 없는 거지.'

무심코 킬킬 웃음이 나왔다. 참 잘도 이런 생각을 해 내는 주군이었다. 졸렬한 계책에 맞서는 졸렬한 파훼법.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은 브루노가 소리를 질렀다.

"루크으으으으! 번스타이이이인! 나느으으은! 브루노오오오오! 레이 겨어어어으으으읍!"

"입 막았어! 막았다고!"

"좋아, 이대로 묶어!"

"빌어먹을! 술버릇 한번 고약하군!"

사방에서 기사들이 달려들어 브루노를 밧줄로 묶었다. 몬스터에게 시달려서 그런지 꽤나 발 빠른 대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 아가씨! 여기에 오시면 안 됩니다! 자작 각하께서도 말씀하셨...!

-닥쳐라! 브루노 경! 저 여기 있습니다!

기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브루노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51화

한 번 들킨 이상 어떤 만류도 먹히지 않았다. 레이는 브루노와 합류하여 그대로 루크의 방까지 향했다.

루크를 만나자마자 레이는 상기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이 윈슬로우가 주군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엘릭서는 잘 썼나?"

"예, 명하신 대로."

고개를 든 레이의 얼굴에는 지금껏 머물던 그림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루크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준 보람이 있군."

"가능하면 어머니도 주군을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만...."

"아직 몸이 약하다고 했지. 무리할 필요 없다."

어차피 레이를 만난 이상은 넘쳐 나는 게 시간이다. 거동도 힘든 몸뚱이로 만나는 것보단 차라리 회복되고 만나는 편이 보기도 좋겠지.

"주군께선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얘기하자면 조금 길다."

루크는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수행 기사가 되어 브루노와 맥스를 달고 서부까지 온 일과 베릭을 만난 일.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윈슬로우 가문에 초대된 일.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로 레이를 만나지 못하게 한 일까지.

"며칠 더 지나면 꼼짝없이 자리를 뜰 판이었지. 그래서 적당한 꾀를 내서 너를 불러낸 거다."

앞뒤 사정을 들은 레이는 눈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가족인 레이에게도 루크 일행에 대한 정보는 숨긴 모양이었다.

하기야 레이가 들었다면 지금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쫓아왔을 테니까. 레이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가족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됐다. 가족이 저지른 짓과 네가 한 일은 별개지. 상황을 보니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 것 같고."

충성을 바친 주군에게 가려는 자식과 그걸 만류하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써먹으려는 가문.

암만 봐도 화기애애한 관계는 아니었다. 레이 역시 침묵으로 루크의 말을 긍정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생각이오?"

술을 깨기 위해 옆에서 찬물을 홀짝이던 브루노가 물었다.

"보아하니 어머니께서 반쯤 인질로 잡힌 것 같은데, 이대로는 우릴 따라올 수도 없지 않소."

"아니요, 따라가겠습니다."

"뭐? 괜찮은 거요?"

단호한 대답에 브루노가 두 눈을 껌뻑였다. 레이는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르나 바보는 아닙니다. 지금 어머니를 박대하면 제가 가문에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을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엘릭서까지 찾아서 간신히 살린 어머니다. 그런데 그런 레이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한다?

설령 몸에 큰 위해가 없더라도 레이는 가문에 등을 돌릴 것이고, 만에 하나 죽기라도 한다면 아예 가문을 향해 검을 겨누리라.

"제가 지금껏 가문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돕지 않은 제게 원한을 품어 저와 적대하는 걸 감수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일기당천의 기사라고 해도 결국 한 사람. 자작가 전체와 대적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가문에 머물렀다. 아예 본 척도 안 하면 눈이 돌아가서 손해를 감수하고 어머니를 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문제없습니다."

"어째서요?"

"그야 레이의 주군인 내 신분을 알게 됐잖냐."

"…아!"

그제야 브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제국에서도 명망 높은 번스타인 가문의 자제.

그런 루크의 기사를 욕보이는 건 루크를 욕보이는 것이고, 나아가 번스타인 가문 전체를 욕보이는 것이다.

자작이 미친 게 아니라면 번스타인 가문에 싸움을 걸 수는 없을 터.

'레이의 증언만이라면 반신반의했겠지만, 본인이 직접 온 이상 이제 의심할 수도 없지.'

그렇기에 레이가 떠나도 자작은 울며 겨자 먹기로 레이의 어머니를 보살펴 줘야 한다.

번스타인 가문과 철천지원수가 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잘됐네요. 이대로 떠나면 되겠습니다."

"아니, 그건 안 돼."

"예? 어째서?"

"여기 상황이 너무 이상하거든."

회귀 전, 엘프에 의한 서부 다섯 가문의 멸문. 베릭이 가지고 있었던 엘프의 마도구. 그리고 리온이 가져온 수많은 물량까지.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레이를 데리고 가는 건 쉽지만, 그랬다간 이전처럼 다섯 가문이 통째로 사라지겠지.'

루크 입장에선 가능하면 막고 싶은 사태였다. 그 망할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서부는 비교적 멀쩡하게 있어 줘야 했다.

'내일 자작이 부를 테니 정보나 얻어 볼까.'

어차피 최우선 목표는 이루었다. 이제 칼자루를 잡은 건 이쪽이니, 급할 건 전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자작은 바로 루크를 찾았다. 자작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루크를 노려봤다.

설마 그따위 수작으로 레이와 만날 줄이야. 덕분에 기껏 세워 둔 계획이 전부 무너졌다.

'아니, 아직 끝이 아니야.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실수는 실수. 놈에게 이걸 빌미로 레이를 얻어 내야 한다!'

억지다. 실수에 비해서 지나치게 과한 대가. 그러나 귀족이란 명분만 선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당당히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억지라도 안 부리면 뒤가 없었다. 이대로 레이를 보내면 모든 게 끝나니까.

"루크 경! 어제...!"

"죄송합니다, 각하! 설마 제 가신이 술에 취해 그런 난동을 부리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작이 뭐라 하기 전에 냉큼 루크가 입을 열었다. 말이 막혔기에 자작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다행히 죄를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나머진 계획대로 밀어붙일 뿐이었다.

"그렇네! 그러니까...!"

"이게 모두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대접해 준 각하께 이리도 죄스러울 수가!"

"알겠다니까! 그러니 대가로...!"

"그러니 지금 당장 여길 떠나겠습니다! 제 가신들과 함께!"

소리치려던 자작의 입이 딱 다물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브루노, 맥스, 그리고 레이까지! 모든 가신이 모였으니 어찌 더 머물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모두를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리게!"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는 루크를 자작이 급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루크는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려 버둥거렸다.

"아닙니다! 가신이 어제 그리 실수를 했으니 각하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대가는 다른 것으로 치르면 되잖나!"

"떠나는 것 외에 무슨 대가를 치르겠습니까? 지금 당장 떠나겠습니다! 레이를 데리고 지금 당장!"

"...!"

폭포수처럼 쏘아 대는 루크의 말에 자작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수작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 새끼, 내가 용서해 주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떠나겠다고 할 셈이다!'

다른 대가를 요구하는 순간 사죄를 명목으로 레이를 데리고 뜨겠다. 용서해 주면 아무 대가도 안 치르고 흐지부지 넘어가겠다.

복장이 뒤집히는 수작질이었지만, 막을 방법이 없는 게 문제였다. 뭣보다 말할 틈을 안 주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럼 전 이만 떠나겠습니다! 지금 당장!"

"자, 잠깐! 용서하겠네!"

"예!? 잘 안 들렸습니다만!?"

"용서하겠네! 손님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 더 머물게나!"

자작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루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루크는 감격했다는 듯 냉큼 고개를 숙였다.

"자작 각하께서는 자비로우시군요! 제 가신의 실수를 용서하시다니!"

"아닐세. 술에 취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심지어 아무런 대가도 안 받으시고 그런 자비를 베푸시다니! 저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억지 미소를 짓는 자작의 뺨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 새끼, 지금 나 속 터져 죽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렇게 한바탕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지나간 뒤였다. 자작은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았고, 루크는 아까 전의 난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분해졌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브루노가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됐고. 용서했다니까."

"뭐든 말씀하십시오."

능구렁이처럼 재차 다짐시키는 루크를 보고 자작이 한숨을 쉬었다. 어린놈이 보통내기가 아니다.

후계자인 리온이 상대했다가는 계속 휘둘릴 터. 자작 본인이 이참에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자네가 날 도와주길 원하네. 수행 기사의 목적에 걸맞게."

"수행 기사는 개인이나 특정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인간과 다른 종족의 싸움이라면 어떤가? 충분히 세상을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루크가 흠칫했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엘프입니까?"

"그래, 그 귀쟁이 놈들이지. 지긋지긋한 놈들."

자작은 목이 타는지 옆에 놓인 냉수를 들이켰다. 한잔을 통째로 들이켠 후에야 자작이 도로 입을 열었다.

"후우, 이제 간 보기는 때려치우고 솔직히 말하겠네. 요즘 서부와 귀쟁이들 사이가 안 좋아. 정말 안 좋지."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두 종족은 숲을 경계로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서로 침략을 하지도, 받지도 못할 텐데요."

"그래,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이 있지. 하지만 어째선지 최근 놈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어."

이유는 자작도 모른다. 놈들이 영역을 넓히기로 한 건지, 아니면 넘어와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확실한 건 자꾸 놈들이 넘어오는 통에 충돌이 잦아졌다는 거다.

"단순히 해만 끼친다면 모르지만, 서로 충돌하면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있네. 마도구지."

"그럼 어제 보여 주신 그 마도구가...."

"전부 노획품일세. 우리가 뺏은 건 아니지만."

"무슨 뜻입니까?"

"헤르닝 백작가를 아나?"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백작가가 아니라 번스타인 가문처럼 변경백으로 임명받은 가문.

서부에서는 번스타인 가문 못지않은 위상의 명문 귀족. 하지만 동시에 회귀 전 첫 번째로 멸문한 가문이기도 했다.

"서부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가문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네. 몬스터에 의해 고립되기 쉽기에 서로 돕자는 거지. 다만 그런 연결에도 중심은 있고, 서로 알력도 생겨나기 마련이지."

"헤르닝 백작가가 그 중심입니까?"

"맞네. 그리고 주변에는 나를 비롯해 다른 세 가문이 있지. 솔직히 말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관계일 뿐이야. 서로 사이가 썩 좋진 않아."

어디까지나 몬스터라는 재해에 맞서기 위해 체결된 동맹이다. 몬스터만 없었다면 지금 당장 등을 돌려도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몬스터를 앞에 두고 그랬다가는 서로 사이좋게 망할 수 있다. 그 으르렁거리는 사이를 그나마 중재할 수 있는 게 헤르닝 백작가였다.

"그런데 최근 헤르닝 백작가에서 도움을 요청하더군. 귀쟁이와 한창 싸우는 중이니 원군을 보내 달라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보상이 아주 후했어."

"마도구입니까?"

"그래, 놈들에게서 노획한 걸 한가득 보내 왔지. 전투에 기여한 만큼 마도구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말일세."

윈슬로우 가문에서 보자면 침이 절로 넘어가는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전투력을 올리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상황.

그런데 그 비싼 마도구를 이 정도로 넘겨 주고, 기여하는 바에 따라서 더 줄 수도 있다고?

자작은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다. 문제는 며칠이 지난 후였다.

"몬스터가 늘어났네. 너무 늘어났어. 기사단은커녕 병사조차 제대로 보내기 힘들 지경이야. 이 상황에서 마도구 욕심을 부리다가는 영지가 무너지겠지."

"계약을 파기하실 순 없습니까?"

"이미 받아들였는데 무슨 수로? 다른 가문이라면 모를까 헤르닝 백작가 체면에 먹칠을 할 수는 없네. 보복이 몇 배로 돌아올 테니."

그렇다고 대충 오합지졸을 보낼 수도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모욕이고, 뭣보다 사이가 나쁜 다른 가문이 윈슬로우 가문을 무시할 게 뻔하니까.

자작이 원하는 건 소수 정예의 강한 기사였다. 헤르닝 백작가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고, 가문의 힘을 자랑하며, 다른 가문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는 기사.

"그리고 그런 기사가 내 성에 있지."

"레이를 말하는 거라면 안 됩니다."

"포기했으니 안심하게. 약으로 자호박 하나 안 쓴 주제에 욕심이 과했지. 제 어미를 봐서라도 남지 않을까 싶었건만...."

루크의 단호한 대답에 자작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몇 분 사이에 주름살이 한 줄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더라도 잠깐은 괜찮지 않겠나. 그 아이가 섬기는 주군과 함께라면 말이지."

잠시 말을 끊은 자작은 루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와 함께 윈슬로우 가문을 대신해서 원군으로 나서 주게. 대가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52화

"무엇이든, 말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말이지."

사실상 자작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 구두 약속이니 증거 따윈 없다. 하지만 말을 뒤집는 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하는 법.

적어도 루크 앞에서 가주가 직접 한 소리를 엎을 수는 없으리라.

"명예를 원한다면 서부 곳곳에 자네의 이름을 퍼뜨려 주지. 돈을 원한다면 가능한 한 융통해 보겠네. 다른 걸 원하나? 최대한 들어줄 테니 말해 보게."

루크는 자작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말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리지요."

"뭔가?"

"혹여 이번 여정에서 다른 가문과 다툼이 발생하게 되면, 제가 무슨 결정을 내리더라도 한 번 지지해 주십시오."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런 부탁을 한다는 건 주변의 반감을 사는 결정을 한 번은 하겠다는 것.

어떻게 보자면 귀족에겐 가장 무서운 부탁이었다. 지지자 역시 그 반감을 나누어 가져야 했으니까.

"무슨 짓을 할 셈인가?"

"아직 모릅니다. 모든 건 가 봐야 알겠지요."

루크의 알쏭달쏭한 말에 자작이 잠시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상황이 상황이라 결정을 물릴 수도 없었다.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겠네."

"가문의 이름에 맹세코 말입니까?"

"그래, 윈슬로우의 이름에 맹세코."

자작의 대답에 루크가 미소를 지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루크 일행은 윈슬로우 가문의 원군에 참여했다. 원군에는 후계자인 리온과 브루노에게 얻어맞은 베릭도 섞여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루크 경과 동행하거라. 그의 가신들 역시 큰 도움이 될 거다.

-예....

사전에 언질은 미리 받았지만 리온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레이는 빼앗겼고, 가문의 중대사에 도움을 받게 생겼다. 그 대가로 조건 없는 지지마저 약속했다.

리온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결과였다.

'참패다.'

같은 동년배 상대로 이렇게 농락당한 건 처음이었다. 쓰디쓴 패배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세상이 제 것처럼 느껴졌던 열여섯 소년에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루크 일행도 그런 리온의 상태를 이해하고 약간 떨어져 이동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으면 곤란하지.'

지금이야 패배감을 곱씹고 있다지만 곧 정신을 차릴 터. 그때는 냉정히 가문의 이득을 파악하고 행동하리라.

그 전에 건드렸다가 열등감을 폭발하면 곤란하기에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죽어 나가는 건 베릭이었다.

"이봐, 베릭 경."

"또 왜 부르시오?"

"얼굴이 왜 그리 죽상이야?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어."

"사람 얼굴을 떡으로 만들어 놓고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려."

"댁이 먼저 덤볐잖아."

"...."

루크의 말에 베릭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루크 일행과 조금도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접대의 관습을 어기고 치부를 드러낸 데다, 반격당해서 손도 발도 못 쓰고 땅에 누웠으니까.

'그런데 나 대신 나서 줄 리온이 저런 상태니....'

한숨을 내쉬면서도 베릭은 루크 일행에게 붙었다. 이렇게 된 이상 좋든 싫든 자기가 이들을 담당해야 했으니까.

"아무튼, 왜 불렀소? 궁금한 거라도 있소?"

"몇 가지 있지. 헤르닝 백작가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상황에 따라 다르오. 아무 일이 없으면 일주일 만에 도착하지."

"아무 일이 없으면?"

"몬스터가 자주 튀어나오는 길이라서 지체될 때가 자주 있소. 빈도에 따라서는 보름 이상 걸리기도 하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숲길 사이로 뒤틀린 들개처럼 생긴 몬스터가 뛰쳐나왔다.

와르그. 이전 루크 일행의 숙면을 방해한 놈들이었다.

-그르르

"부르지도 않았는데 바로 튀어나오는군."

사방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를 본 베릭이 눈을 찡그렸다. 루크 일행을 제외하면 기사 열 명에 병사 서른의 전력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튀어나왔다는 건 인간 사냥에 제법 자신 있다는 소리. 아마 주변 상인이나 여행자 무리를 자주 잡아먹었으리라.

"도움이 필요한가?"

"그래 주면 고맙...."

"아니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베릭이 루크의 제안을 수긍하기 직전, 한 기사가 먼저 말을 막았다. 베릭이 흠칫해서 기사를 향해 뭐라 하려고 했으나, 기사는 이미 뛰쳐나간 상태였다.

"병사들, 전진! 일자 대형으로 뒤를 따르라!"

"와아아!"

-크르륵!?

기사의 호기로운 외침에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을 예상치 못했는지 와르그 무리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기사들은 그대로 틈을 파고 들어가 검을 휘두르며 놈들을 도륙했다. 혹여라도 놓친 놈이 있으면 그대로 병사들이 달려들어 마무리했다.

-케에엥!

"쫓지 마라! 대열을 이탈하지 마!"

서른이 넘는 와르그 무리가 와해되자, 기사들은 병사들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제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무심코 쫓으려던 병사들은 그대로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지휘였다.

'괜찮은데.'

보통 기사는 개인의 무력에 치중하느라 지휘 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기사들은 둘 다 출중한 편이었다.

적어도 무력으로는 번스타인 가문이 우위겠지만,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이들이 우위일 것이다.

"좋아! 다시 행군 대형으로 복구!"

"예!"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평소 훈련의 성과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리가 정리되자 기사들은 다시 루크 일행 곁으로 다가왔다.

"보다시피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손님께서 힘을 쓰실 필요는 없지요."

얼핏 듣기에는 정중한 말이었지만, 묘하게 날이 선 어투였다. 기사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브루노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놈들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래?"

"이해하시오. 자존심 때문이오."

"자존심?"

"하루 너머 실전을 겪는 서부의 기사들이오. 모두 자기들이 최정예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지. 그런데 당신들이 조력자로 오지 않았소."

그것도 그냥 조력자가 아니다. 저 얼마 안 되는 병력의 초라한 숫자를 메워 주고도 남을 강력한 조력자로 여겼다.

기사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다. 매일 같이 실전을 겪는 자기들보다 평화로운 동부 놈들을 더 높게 치다니!

"나야 그대들 실력을 알지만, 저들은 아직 모르잖소. 그러니 불만을 품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아니, 레이 경이 여기 있잖소. 그 정도면 납득을 하고도 남아야지."

"전 저들을 모릅니다."

브루노의 의문에 레이가 기사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전 4년 전에 가문을 떠나왔습니다. 저들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어, 그러니까 모두 신참이란 소리요? 레이 경이 가문 떠나올 때 새로 들어온?"

"맞소."

베릭이 다시 말을 받았다.

"다들 레이가 떠날 때쯤에 들어온 기사들이지. 당연히 레이의 실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솔직히 가문의 후광으로 끼었다고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럼 착각 좀 바로잡아 주지."

"기사들은 한 번 정하면 제 눈으로 보기까지 의견 안 바꾸는 거 알잖소."

이번엔 브루노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했다. 특히 자신보다 강자의 경우엔 더더욱.

자신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귀를 막는 거다. 해결 방법은 본인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대들이 이해 좀 해 주시오."

"뭐, 그 정도야."

"끄응."

브루노는 아직 불만이 있는 모양새였지만, 루크는 가볍게 수긍했다. 결국 두 사람의 실력을 몰라서 일어나는 문제다.

어차피 실력은 금방 드러날 터. 다른 기사들이 자존심을 꺾고 납득할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 * *

윈슬로우 가문의 기사들과 루크 일행 사이에 작은 벽이 세워지긴 했지만, 달리 큰 문제는 없었다.

간간이 무리 지은 몬스터가 공격해 오긴 했으나 그때마다 기사들은 피해 없이 물리쳤다.

때로는 봤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루크 일행이 볼 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저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나?"

"젊은 친구들이라 호승심이 안 죽어서...."

그때마다 베릭은 쩔쩔매며 변명을 해야 했다. 베릭 역시 브루노와 레이 앞에서 저런 으스대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으니.

그렇게 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나아가던 리온은 정찰병의 소식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몬스터가 죽어 있다고?"

"예, 그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자, 병사의 보고대로 수많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상처를 보아하니 기사와 병사들에 의해 죽은 모양이었다.

"제기랄, 누군가 앞서가는 모양이군."

베릭이 눈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루크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먼저 몬스터를 정리해 주면 좋은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 하지만 앞에 있는 누군가랑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리 아니오."

이 시기에 이런 길을 가고 있다면 앞서가는 상대는 뻔하다. 헤르닝 백작가의 원군 요청에 응하는 가문 중 하나.

그리고 헤르닝 백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네 가문은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흔적을 보니 우리보다 병력도 많은 것 같은데… 골치 아프군."

"알력 싸움이 걱정되면 조금 느리게 가는 게 어때?"

"그게 더 문제요. 다른 가문보다 명백히 늦게 가면 백작가의 심기를 거스를 테니."

즉,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지금은 서서히 해가 지고 있는 저녁.

괜찮은 노숙 자리를 찾다 보면 십중팔구 목적지가 겹칠 것이다.

"다들 대형을 유지해라! 누군가 앞에 있는 모양이다!"

리온이 소리치자 병사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 기사 역시 아까 전보다 훨씬 진중하게 자세가 변했다.

경쟁 관계에 있는 가문이라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으니. 그렇게 철저히 자세를 다잡고 몇 시간 나아갔을 때였다.

저 멀리 노숙 준비를 하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펄럭이는 깃발의 문양을 확인한 리온이 이를 악물었다.

"빈델른 가문이다. 모두 놈들과 만날 준비를 해라."

리온의 목소리에 모든 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루크는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레이를 바라봤다.

"왜 이러지? 분위기가 무겁군."

"사이가 나빠서 그렇습니다."

"원래 안 좋다며?"

"그렇긴 하나 빈델른 가문과는 거의 원수 사이입니다."

"이유가 있나?"

"윈슬로우 가문이 몬스터의 습격에 방파제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빈델른 가문은 윈슬로우 가문의 뒤에 있는 형국. 몬스터의 습격은 대부분 윈슬로우 가문 쪽에서 먼저 당한다.

가끔 빈델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놈들이 있기는 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윈슬로우 가문으로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빈델른 가문에서는 도움을 줄 때 무척 인색하게 굽니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 정도가 아니라면 작은 원조조차 거부하지요."

"과연."

확실히 그렇다면 원수 사이가 될 만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의 전력은 루크 일행을 제외하면 기사 열 명에 병사 서른 명.

그에 비해 상대는 척 봐도 200명이 넘어가는 규모였다. 원수 가문과 만나는데 기세로도 눌리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수밖에.

윈슬로우 가문의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갔을 때였다.

"하하하! 이게 누구야! 우리의 이웃사촌께서 오셨군!"

호방하게 생긴 청년이 나와서 리온을 보고 웃어 젖혔다. 그 얼굴을 본 리온이 입술을 짓씹었다.

53화

"발터 빈델른...!"

빈델른 자작가의 후계자이자 리온보다 2살 연상인 남자. 동시에 리온이 가장 증오하는 남자였다.

발터는 환하게 웃으며 일행을 쭉 둘러보았다.

"요즘 몬스터가 늘어서 걱정을 많이 했네. 우리의 든든한 이웃인 윈슬로우 가문이 혹여 큰 곤란을 겪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근데 다 기우였군."

"무슨 헛소리냐?"

리온이 도끼눈을 뜨고 발터를 노려봤다. 서두가 길 때는 꼭 사람의 속을 긁는 소리를 내뱉는 놈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발터의 입가에는 진한 비웃음이 맺혔다.

"기사 열에 병사 서른! 정말 엄청난 규모 아닌가! 윈슬로우에 이만큼이나 힘이 남아 있다면 우리 가문은 앞으로도 평안하겠어. 하하하!"

"...!"

대놓고 하는 비아냥에 루크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이를 갈았다. 이백 명이 넘게 데리고 온 놈이 저따위 기만질이라니.

"그렇겠지. 우리의 핏값으로 평안 무사한 가문이니 말이야. 저리 많이 데려온 걸 보니 지금 같은 시기에도 살 만한가 보군."

리온도 지지 않고 비아냥을 던졌으나, 발터는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그대들의 핏값으로 우린 평안하다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흘려 주게나. 뭐, 우리가 주는 건 없겠지만!"

"하하하하!"

도를 넘은 비아냥에 리온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루크도 무심코 감탄했다.

저 정도로 말하면 나중에 자다가 칼침 맞는 거 아닌가? 루크는 슬쩍 레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소에도 저런 식인가?"

"예."

"용케도 전쟁까지 안 갔군."

"그 반대입니다. 전쟁을 벌일 수가 없으니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겁니다."

차라리 폭발한 상대 쪽에서 쳐들어올 수 있다면 말을 조심할 것이다. 하지만 서부에서 그랬다가는 사이좋게 망한다.

전쟁의 후폭풍으로 몬스터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끝장이니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부 귀족들은 모욕의 수위가 높은 편이다.

아무리 도발해 봤자 병사 하나 동원하지 못하니 정도가 없는 거다.

"상대와 격차가 까마득하면 그래도 말조심을 하겠지만 두 가문은 동급입니다. 빈델른 가문에서는 무서워할 게 없지요."

"…하여간 여기도 정상은 아니라니까."

루크가 슬쩍 혀를 찼을 때였다. 한창 윈슬로우 가문을 비웃던 발터의 시선이 루크 일행에게 향했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시오? 보아하니 윈슬로우 가문 사람은 아닌 모양이오만."

언제 혀를 찼냐는 듯 루크가 냉큼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재 수행 기사로 윈슬로우 가문을 조력하고 있는 루크 번스타인이라고 합니다."

"번스타인? 설마 동부의 그 번스타인?"

"예, 그리고 이쪽은 제 가신인 브루노 바스톤과 레이 윈슬로우입니다."

맥스는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일개 종복으로 온 맥스야 소개하는 편이 오히려 이상한 거니까.

살짝 눈을 찌푸리던 발터가 레이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거였나."

"또 무슨 헛소리를 할 셈이냐?"

"아니, 별거 아니다. 윈슬로우 가문에서 인맥을 이용해 얼마 안 되는 위신이라도 세워 보려고 한 걸 알았을 뿐이지."

"너...!"

"하지만 그 인맥도 쓸 게 못 되는구나. 기껏 얻은 조력자가 겨우 기사 셋과 종복 하나? 그래서야 어디 위신이나 서겠느냐?"

입꼬리를 올린 발터가 루크 일행을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방계인 분이 입지를 올리겠다고 오신 모양인데, 괜히 힘 빼지 말고 사람 돕기나 하는 게 어떻겠소? 저런 다 쓰러져 가는 가문을 도와줘 봤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루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특히 레이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감히 주군을...!"

그깟 가문 따윈 모욕당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에 대한 모욕은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막 검을 뽑으려던 레이를 루크가 막아섰다.

"그만."

"하지만...!"

"됐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가만 냅 둬."

레이를 진정시킨 뒤, 루크는 발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법 의기양양한 게 어지간히 이쪽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루크가 발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충고는 매우 감사드립니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말이오. 도저히 말을 안 할 수가 없겠더이다."

"그런데 그 오지랖은 잠시 넣어 두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겨우 기사 셋이 위신을 올리다 못해 이백 명을 감당하고도 남으면 그 망신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미소를 지은 루크의 말에 이번엔 발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뒤에 있던 이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저놈이 미쳤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여간 동부 놈들 으스대는 꼴이란.'

'여기서도 지들 이름값이 통하는 줄 아는군.'

병사들이야 자기들끼리 속삭일 뿐이었지만, 기사들은 대놓고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세도 정도껏 부려야 할 거 아닌가. 발터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대단한 담력이요. 역시 용과 싸운 시조를 둔 가문답군."

"과찬이십니다. 겨우 이백 명과 싸워 이기는 게 어찌 용과 비교할 일이겠습니까."

"하! 그 입담이 부디 끝까지 가길 바라오."

이 이상 대화해도 무의미하다 여겼는지 발터는 등을 돌려 일행에게서 멀어졌다. 윈슬로우 가문의 기사들은 멍하니 루크를 쳐다봤다.

저게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분명 개소리인데 너무 당당하니 보는 쪽도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왜들 그렇게 쳐다보나? 부끄럽게."

루크는 그들의 시선에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 * *

그렇게나 으르렁거린 두 가문이었지만 노숙하는 장소는 바뀌지 않았다. 이미 해가 거의 넘어간 시간.

이 위험한 땅에서 서로 꼴 보기 싫다고 이동하는 것도, 굳이 머물기 좋은 자리를 떠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서부에선 정보가 꽤 늦는 모양입니다."

한창 모닥불을 피우던 맥스가 중얼거렸다.

"전 적어도 도련님의 이름 한 번은 들어 봤을 줄 알았습니다."

"딱히 내 이름을 몰라도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이전에 해결하신 일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다름 아닌 악마 퇴치 아닙니까. 대륙 전체에 소문 쫙 퍼지기에 충분한 이야기죠."

게다가 음유 시인에 의해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이쯤 되면 헛소문으로 치부하더라도 이름 정도는 한번 듣기 마련.

그러나 윈슬로우 가문과 빈델른 가문의 반응을 보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최근 몬스터가 지랄맞게 많이 나온다잖냐.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소문이란 건 결국 사람을 통해서 도는 법이니 사람이 안 오면 별수 없어."

"거참, 시기가 참 안 맞네요. 덕분에 다들 도련님이랑 브루노 경 이름값을 몰라서 이 꼴이니."

맥스는 투덜거리며 숲을 쓱 둘러보았다. 하도 많은 인원이 모인 탓인지 더 이상 다가오는 몬스터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조금 떨어져 있긴 하나, 근처에 머무는 전원의 숫자를 합치면 이백하고도 사십이 넘어간다.

아무리 멍청한 몬스터라도 이런 대규모 인원을 습격하는 경우는 없다.

"아무래도 한동안 대접받기는 그른 모양입니다. 이래서야 활약할 기회도 없을 테니 원."

"…아니, 우리가 활약할 기회가 온 모양이다."

맥스의 말을 받은 브루노가 숲 한구석을 응시했다. 레이 역시 나뭇가지를 꺾던 걸 멈추고 브루노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바라본 숲속에서 수많은 눈이 번뜩였다.

-키키키키.

웃는 것 같기도, 신음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빈델른 가문 쪽이었다.

"놀이다! 전투 준비!"

말 끝나기 무섭게 숲속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놀. 하이에나의 머리를 하고 인간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몬스터.

인간을 죽여 도구를 뺏어서 쓸 줄 아는 지능이 있는 데다,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본능 때문에 매우 위험한 놈들이었다.

큰 마을도 놀 무리에게 습격당해 폐허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

"제기랄, 저놈들이 미쳤나!?"

"이 숫자를 보고도 달려들다니 이게 뭔… 어?"

짜증을 내며 일어서던 병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숲에서 슬금슬금 튀어나오는 놀 무리의 숫자는 엄청났다.

어림잡아도 약 삼백 이상. 그 비정상적인 숫자에 모든 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비상! 당장 일어나 대형을 갖춰!"

"어서 방진을 짜라! 늦으면 다 죽는다!"

"무기 잡아! 방패 쥐어! 창 겨누라고!"

-키키키키.

다들 다급하게 움직였다. 우왕좌왕하는 꼴이 재밌었는지 놀들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발터는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이! 너희들! 이리 와서 좌익을 맡아라!"

"뭐!? 우리가 왜 네놈 말을...!"

"희생 줄이려면 우리 말대로 해, 멍청한 놈아! 서부의 방식도 모르느냐!"

"제기랄!"

리온은 인상을 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아무리 서로 적대한다고 해도 이럴 때는 힘을 합쳐야 했다.

윈슬로우 가문의 기사들이 냉큼 달려오자 발터가 급히 작전을 설명했다.

"우리가 전방과 우익을 맡겠다! 좌익은 가장 희생이 적은 부분이니 실수로라도 뚫리면 다 네놈 책임인 걸 명심해라!"

"시끄럽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니 작작하고 어서...!"

다투면서도 대형을 짜려던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른 병사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숲에서 놀들이 쉼 없이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키키키!

-키히히히!

"신이시여...!"

기사와 병사들은 절망한 눈동자로 놀들의 무리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나온 놈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대략 오백.

설령 싸워 이긴다 해도 여기 있는 사람 중 9할은 죽어 나갈 전력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도대체 이런 놈들이 어디서...?"

누군가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아무리 요즘 놈들의 출현이 잦아졌다지만 이건 지나쳤다.

"다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냐! 전투 준비!"

발터가 이를 갈며 절망한 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여기서 넋 놓고 있으면 몰살이다.

어떻게든 싸워서 활로를 뚫어야 했다. 베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루크에게 소리쳤다.

"루, 루크 경! 우리와 함께 좌익을 맡아 주시오!"

"굳이 그럴 필요 있겠소?"

"뭣!? 지금 무슨 소리요!"

"우리에겐 레이랑 브루노가 있잖소. 너무 겁을 먹는군."

"지금 장난하오!?"

루크의 말에 베릭이 현재 상황도 잊고 벌컥 화를 냈다.

"그야 두 사람이 기사 열 명분의 전력이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이게 그걸로 뒤집힐 전력 차이요!?"

"열 명분이라."

루크가 피식 웃었다. 레이를 그렇게 손에 넣으려고 한 주제에 정작 두 사람의 힘도 제대로 모르는 건가.

어찌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이들이 본 건 어디까지나 제압하는 데 필요한 힘만 쓴 두 사람이다.

전력을 발휘하여 적을 죽이려는 브루노와 레이 따윈 본 적도 없겠지. 루크가 조용히 말했다.

"레이, 브루노."

"예, 주군."

"가서 쓸어 버려."

"명을 받듭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그걸 본 베릭과 리온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누, 누님!?"

"지금 이게 무슨!"

두 사람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고, 뒤이어 발터가 분통을 터트렸다. 한 사람의 힘도 아쉬운 판에 지금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저 작자들이 미쳤나!? 당장 돌아오지 못해!"

기사라는 작자들이 혼란에 빠져 이성이라도 잃었단 말인가. 기겁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 두 명의 기사와 놀 무리가 서로 맞닥뜨렸다.

-키키키키!

-키하악!

놀들은 멍청한 사냥감을 비웃듯 웃으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놀들의 조잡한 무기가 두 기사에게 휘둘러진 순간.

푸화아아악.

"...!?"

수십 마리 놀들의 조각난 육편이 하늘로 치솟았다.

54화

그건 인간의 모습을 한 자연재해였다. 비유하자면 폭풍과 화염. 두 형체가 전장을 휩쓸 때마다 수십 마리 놀들이 사라졌다.

뒤에 남은 건 핏물과 조각난 살덩이들뿐. 누구 하나 그 속도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사들조차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앞에 나아간다 싶으면, 조각난 놀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고 하늘을 날았다.

-키, 키헤에엑! 키학!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중앙에 있던 놀이 크게 울부짖었다. 다른 놀과는 다른 털 색깔과 복식,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키히이익! 키이익!

-키힉! 키힉!

우두머리의 울부짖음에 놀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중앙에 있던 놀들은 일제히 뒤로 빠지고, 뒤에 있던 놈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몇몇 기사가 놀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쇠, 쇠뇌? 놀들이 쇠뇌 부대를 운용한다고?"

"이런 미친! 어느 머저리가 저걸 빼앗긴 거냐!"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장전한 뒤에 다루기가 쉽고, 인간을 상대로 더없이 효과적인 무기.

그렇기에 쇠뇌는 보통 일반인의 소지를 금지한다. 만에 하나 몬스터에게 빼앗겼다간 보통 일이 아니니까.

'약해 빠진 고블린이 손에 들어도 기사를 죽이는 게 쇠뇌인데...!'

그런 쇠뇌가 한두 개도 아니고 스무 개다. 한 사람당 열 개만 조준해도 피할 길이 없는 상황.

"위험...!"

-키히이이익!

피피피핑.

우두머리 놀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쇠뇌가 쏘아졌다. 스무 개의 볼트가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누군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슴도치가 될 기사 두 사람을 걱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기사는 예상을 깨부쉈다.

쩌어어엉.

수십 개의 쇳덩이가 충돌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스무 개의 볼트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대부분이 무슨 일인지 몰라 눈만 껌뻑일 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걸 다 쳐 냈다고...?"

동시에 날아드는 볼트가 자그마치 스물이다. 한 사람당 열 개씩만 쳐 낸다고 쳐도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볼트를 쳐 냈다. 심지어 놀란 기색은커녕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창과 검을 털어 낸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왼쪽에 열 놈 처리하지."

"그럼 전 오른쪽에 열 놈을."

짧은 의견 교환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달렸다. 우두머리 놀은 기겁하며 울부짖었다.

-키히이익!

'막아!'라는 소리가 어쩐지 인간의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일제히 놀들이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섰다.

헛수고였다.

"방해된다."

푸화악.

종잇조각을 찢는 것처럼 브루노와 레이는 놀 무리를 돌파했다. 일직선의 혈흔을 남기며 순식간에 두 사람이 쇠뇌 부대에 육박했다.

-키히.!

서걱.

재장전을 위해 낑낑거리던 놀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빛줄기가 번뜩였다. 열 번의 섬광과 함께 쇠뇌를 다루는 놀은 모조리 목이 떨어졌다.

귀찮은 쇠뇌를 처리한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우두머리를 향했다.

-키, 키히이이이이!

좌우에서 노려진 우두머리는 울부짖으며 뒤로 뛰었다.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저건 의미가 담긴 언어가 아니다.

'비명.'

오백의 놀을 지휘하던 우두머리가, 그저 살고 싶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역관절로 이루어진 놀의 다리는 과연 빨랐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하지만 두 기사는 '인간'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초인.

"새끼가, 어딜 도망가?"

"...."

단 한 번. 땅거죽이 뒤집힐 힘으로 바닥을 박찬 브루노와 레이가 쇄도했다. 우두머리가 뒤를 돌아본 순간, 검과 창이 번뜩였다.

-키...!

촤아악.

비명도 다 끝내지 못한 채 우두머리가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목은 레이의 검이, 허리는 브루노의 창이 찢어발긴 것이다.

우두머리의 몸뚱이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자, 브루노가 창을 한번 털어 내고 소리쳤다.

"청소 끝!"

다락방 청소라도 끝낸 것 같은 가벼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가벼운 목소리에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몬스터도 인간도, 전부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침묵이었다.

놀들마저 바로 앞에 있는 적을 보고도 옴짝달싹 못 했다. 몇십 초가 지난 후, 놀들을 돌아보던 브루노가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 안 도망가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건지, 놀들은 잠깐 움찔거렸을 뿐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레이의 시선이 루크에게 향했다.

'주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선을 읽은 루크는 자신의 목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그었다.

'죽여.'

브루노와 레이는 서로를 잠깐 쳐다보고는, 내렸던 검과 창을 도로 올렸다. 그제야 놀들은 정신을 차리고 괴성을 질렀다.

-키에에에에에!

-키에! 키히에에에!

겁에 질린 놀들이 일제히 무기를 바닥에 버려 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아예 입고 있는 방어구까지 집어 던졌다.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레이와 브루노가 놀의 무리를 훑기는 했으나, 죽은 놈은 백여 마리 정도였다.

아직도 사백이 넘는 숫자가 있음에도 그 모두가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키히이이익...!

볼썽사나운 비명과 함께 마지막 한 마리가 숲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백여 마리의 놀 시체와 놈들이 버려 두고 간 물건뿐.

레이와 브루노는 사라진 놀들을 확인하고는 루크에게 되돌아갔다.

"거, 좀 비켜주쇼. 빽빽해서 들어갈 수가 없구만."

브루노의 말에 흠칫거리며 기사와 병사들이 길을 내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개선 장군의 귀환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루크의 곁에 복귀하자, 루크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입이 루크에게 집중되었다.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은 침묵에 루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차리다 만 저녁이나 먹읍시다."

* * *

전투 이후, 주변에서 루크 일행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윈슬로우 가문의 태세 변환은 볼 만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안 든다'라는 분위기가 팍팍 느껴졌다면, 지금은 경외가 가득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자꾸 이쪽을 쳐다보는 기사들을 보며 브루노가 한숨을 쉬었다.

"부담되어서 죽겠습니다."

"이전엔 대접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저건 심하잖습니까. 말만 하면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 줄 거 같은 눈빛인데. 하여간 중간이 없어요."

농담이 아니라 눈빛이 전부 초롱초롱한 게, 혹시라도 말이라도 걸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고 루크가 고개를 까닥였다.

"마침 잘됐다. 이참에 뭣 좀 물어보고 와라."

"예? 제가요?"

"다들 네 말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냐. 말만 하면 술술 불어 줄 거 같은데."

"레이 경은...."

"싫습니다."

브루노가 슬쩍 돌아봤으나 레이는 단박에 거절했다. 아무리 시선이 바뀌었다 해도 싫어하는 본가의 기사들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엮이는 건 질색이었다.

"역시 네가 적임이네."

"어휴, 뭘 물어보고 오면 됩니까?"

설명을 들은 브루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윈슬로우 진영으로 향했다. 브루노가 다가가자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브루노 경!"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불편하게 해 드린 거라도?"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과도한 예의에 브루노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놈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바뀔 기미가 안 보였다.

"커흠, 일단 두 가문의 병력 차이가 너무 나는데 어떻게 된 거요? 이쪽은 쉰도 안 되는데 저쪽은 이백 아니오."

"예!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윈슬로우 가문의 수년간 재산 피해와 병력 피해가...!"

"그건 기밀이야, 이 미친놈아!"

저 멀리서 베릭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기사들을 쫓아 보냈다. 아쉬워하는 기사들의 등을 떠민 베릭은 식은땀을 닦았다.

"브루노 경, 이러시면 곤란하오."

"난 아무것도 안 했소! 저들이 갑자기 난리인 거지!"

"끄응, 그렇긴 하나 나 외에 다른 이에게 물어보는 건 자제해 주시오."

"그나저나 저 치들은 왜 저리 난리요? 솔직히 부담스러워 미치겠는데."

한숨을 쉰 베릭이 기사들을 곁눈질하며 설명했다.

"방금 전 빈델른 가문과 싸운 거 보셨잖소."

"그렇소만."

"사실 저런 대접이 한두 번이 아니오. 윈슬로우 가문은 워낙 몬스터 출현지가 곳곳에 있어서 이런 원군 요청엔 별 힘을 못 쓰거든."

"그런데 우리가 활약한 덕에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게 되었다?"

"저쪽을 보면 알 거요."

브루노가 베릭이 가리킨 장소로 시선을 옮겼다. 빈델른 가문의 병력이 위치한 장소였다.

기사고 병사고 전부 비실거리는 게 유독 힘이 빠진 모양새였다.

"날개에 화살 맞은 참새 꼴이구만."

"평소엔 우리가 저 꼴이었소. 그런데 이제 입장이 역전된 거지. 기사들이 보기엔 브루노 경과 레이가 여신의 사도처럼 보일 거요."

한마디로 전설적인 실력에 대한 경외감, 그런 대단한 자가 우리 편이라는 흥분, 오랜 세월 억눌린 울분의 해소까지 다 섞인 거다.

기사들에겐 두 사람이 우상처럼 보이리라.

"후,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그리고 아까 전 질문 말인데...."

"그것도 아까 말한 대로요. 윈슬로우 가문이 특출나게 약한 거고, 보통 최소 백 명은 보내오. 그래서 무시를 많이 받은 거고."

"그럼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방금 전 놀 무리는 뭐요? 원래 저런 습격이 자주 있는 거요?"

베릭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오. 나도 살면서 저런 경우는 난생처음 봤소. 아마 숙부님… 자작 각하께서도 겪어 본 적 없을 거요."

"서부에서도 처음 벌어진 일이라는 거요?"

"그렇소. 솔직히 말해 뭔가 이상하오. 너무 이상해."

베릭은 브루노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무언가를 속삭였다. 한참 동안 속삭임이 이어진 뒤, 브루노가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다.

스튜를 막 떠서 접시에 담던 루크가 브루노를 돌아봤다.

"어때?"

"주군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몬스터가 급격히 늘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헤르닝 백작가가 마도구를 보내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놀 같은 대규모 무리가 출현한 것도 지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살면서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는데요."

베릭은 거기서 몇 마디를 더했다. 헤르닝 백작가가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지만, 너무 수상쩍다고 말이다. 루크는 조용히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몬스터들이 저리 대규모로 튀어나오는 이유는 하나지. 터전을 잃은 거야.'

자연재해가 일어난 게 아니면 누군가한테 쫓겨났다는 소리다. 그 누군가는 대부분 강력한 포식자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포식자는 보통 영역을 차지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몬스터가 계속 누군가한테 쫓기듯 튀어나오고 있다.

'포식자가 아니야. 엘프들이 숲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거다.'

광범위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이동하는 행위. 이건 집단을 이룬 지성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럼 엘프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을까.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확실한 건 엘프가 인간의 영역 근처까지 다가와 주변을 헤집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때 마침 헤르닝 백작가의 마도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거 슬슬 윤곽이 보이는데.'

이쯤 되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대충 상상이 갔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엔 아주 작은 조각이 부족했다.

헤르닝 백작가.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은 그곳에 있었다.

55화

놀 무리를 만난 지 이틀 후, 루크 일행은 헤르닝 백작가에 도착했다. 백작 성을 바라본 루크가 입을 벌렸다.

"방어가 거의 편집증 걸린 사람 수준인데."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가문의 영주성이라면 기본적으로 방위 능력도 높다. 하지만 헤르닝 백작가는 그 이상이었다.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해자는 엄청나게 깊었다. 성벽 위에는 화살을 장작처럼 쌓아 두었고, 당장 끓일 준비가 된 기름통이 가득했다.

'아무리 몬스터 침입이 잦다지만 심하군.'

순수하게 몬스터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면 저 해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중 성벽에 끓는 기름이라니?

마치 누군가와의 공성전을 대비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일행이 성벽 가까이 다가가자 리온이 앞장서서 소리쳤다.

"윈슬로우 가문과 빈델른 가문이 원군 요청에 응하여 찾아왔다! 문을 열어라!"

잠시 후,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도개교가 내려왔다. 루크 일행과 윈슬로우 가문이 앞장서고, 빈델른 가문이 뒤를 따랐다.

루크는 도개교를 건너가며 성벽 위를 둘러보았다.

"확인조차 하지 않는 건가?"

"딱히 확인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루크의 혼잣말에 답한 건 리온이었다.

"헤르닝 백작가와 다른 네 가문은 힘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다 같이 연합해서 공격해도 승산이 5할 미만일 정도로."

"위협이 안 된다는 소리군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 인원수라면 들어가서 공격하더라도 금세 섬멸당할 겁니다."

그러니 방문 목적만 확인하면 거리낌 없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미친 게 아니라면 문 열어 줬다고 돌변해서 공격할 리가 없으니까.

가문들끼리 곧잘 원군 요청을 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에 매번 복잡한 절차를 거쳐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확인하는 쪽에서는 귀찮고, 확인받는 쪽에서는 짜증 나는 일이니.

"그래서 평소엔 깃발에 있는 가문의 문양만 확인하고 열어 주는 편입니다. 겸사겸사 서로의 신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행위기도 하고요."

"과연."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리온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리온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담담한 얼굴로 루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의 가식적인 웃음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갑자기 제가 다가온 게 이상하십니까?"

루크의 기색을 눈치챈 리온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크는 선선히 인정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이전 누님이 싸우는 걸 보고 느낀 게 있을 뿐입니다."

"느낀 거라시면?"

"제 그릇으로는 누님을 담아낼 수 없었다는 걸 말입니다."

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진즉 알고 있다고 여겼다. 트롤과 싸워 손쉽게 이기는 힘.

그리고 일기토에서 어렵지 않게 모든 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힘. 리온이 생각한 레이의 힘은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예상을 아득히 웃돌았다.

'누님이 마음만 먹었다면 가문 전체가 쑥밭이 되었겠지.'

그건 인간의 모습을 한 재해였다. 감히 리온이, 아니 윈슬로우 가문이 담아 둘 수 없는 무언가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레이를 얻겠다고 낑낑거린 리온 스스로가 우습기만 했다.

"그런 누님과 브루노 경을 루크 님께서는 담아내셨지요. 제가 보기엔 그러고도 남는 자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루크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라 하기 애매한 반응이었지만, 리온은 알 수 있었다.

저 웃음이야말로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이라는 걸.

'무서운 사람이다.'

이제 막 열여섯 나이인데 레이와 브루노를 손에 넣었다. 어지간한 가문 하나를 풍비박산 내고도 남을 힘이다.

그런데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더욱 많은 것을 쥐려 한다. 이 사람이 완성되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삐를 쥔 손에 땀이 맺혔다.

"윈슬로우 가문은 언제나 루크 경을 지지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거래로 인한 단 한 번이 아니다. 무슨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겠다는 맹세. 어찌 보면 과한 수준의 호의에 루크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 반드시 지키시길 바랍니다."

* * *

성안에는 헤르닝 백작가 외에도 다른 두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다른 두 가문도 막 도착한 듯 보였다.

일행을 이끌고 떨어지려는 루크에게 다시금 리온이 다가왔다.

"루크 경, 저와 같이 가시죠."

"예? 어딜 말입니까."

"백작 각하를 뵈러 말입니다. 루크 경은 독립적인 지휘관이 아닙니까."

그야 구색만 보면 그렇다. 윈슬로우 가문을 도와주러 참전하긴 했지만, 루크가 윈슬로우 가문의 휘하인 건 아니니까.

분류하자면 '윈슬로우 가문을 도우러 온 외부 세력 루크'가 되는 셈이다. 휘하에 딱 세 명밖에 없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제가 가도 지휘관으로 인정이나 받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 부분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온은 루크의 귀에 속삭였다.

"누님과 브루노 경을 보면 백작 각하가 어차피 루크 경을 따로 부르실 겁니다. 그 전에 저희 가문과의 친분을 과시해 주십시오."

"아하."

단박에 사정이 이해가 갔다. 백작 입장에서는 굳이 윈슬로우 가문을 통하기보단 루크와 직접 마주하고 싶을 터.

그렇게 되면 좋든 싫든 따로 떼어 놓으려고 할 테니, 그 전에 서로 친하다는 것 좀 잔뜩 어필해 달라는 소리다.

"그 정도야 물론 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루크는 리온의 뒤를 따라 백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규모는 번스타인 백작가와 비슷했다.

응접실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이미 도착한 세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한 사람은 같이 도착한 발터 빈델른.

나머지 두 사람은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흠칫하는 발터와 달리 두 사람은 루크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만."

"리온, 이번엔 네놈이 대표가 아닌 거냐?"

말하는 어투가 곱지 않았다. 딱 봐도 서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놈들은 예의도 모르나? 처음 보는 분에게 그따위 태도라니."

"웃기는군. 왜 우리가 윈슬로우 가문 사람에게 예의를 차리지?"

"미안하지만 이분은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다."

"뭐?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어리둥절한 두 청년을 향해 리온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수행 기사이자 번스타인 가문의 아들이신 루크 번스타인 경이다. 다들 예를 갖추도록."

"처음 뵙겠습니다. 윈슬로우 가문의 조력자로 온 루크 번스타인입니다."

리온의 소개에 루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눈을 껌뻑거리던 두 사람이 눈을 찌푸렸다.

"번스타인? 용의 피를 이었다고 떠드는 검가 말이냐?"

"쯧, 서부의 일에 동부 사람을 부르다니. 한심한 놈!"

번스타인 가문의 위명에도 두 사람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루크의 소개를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더욱 날뛰었다.

그리고는 곧 루크를 노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뭐, 인사는 해야겠지. 스테판 안스바흐요."

"데미안 오르후스. 여긴 서부임을 명심하시오, 번스타인."

그 반응에 루크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들, 멀리 있다고 막 지르는군.'

자신감의 원천은 뻔했다. 하도 멀리 있으니 모욕을 하건 말건 못 오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윈슬로우 가문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덤이겠지. 루크의 눈이 옆에서 가만히 있는 발터를 향했다.

"서부의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발터 님께서도 제가 여기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 생각하십니까?"

루크의 말에 발터가 움찔했다. 아니, 모욕을 한 건 저쪽인데 왜 조용히 있는 나를?

그런 발터를 더욱 미치게 하는 건 옆에 있는 두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서부의 일은 서부가 알아서 해야 하는 법! 외부 조력자인 그대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어디 있소?"

"그럼! 이봐, 발터.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자네도 서부의 아들이지 않나?"

'닥쳐! 제발 좀 닥치라고!'

지들 딴에는 한마음이 돼서 윈슬로우를 깎아내리자는 속셈이겠지. 평소라면 발터도 신나서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루크를 모욕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휘하에 괴물딱지를 둘이나 두고 있는 작자가 아닌가!

"이봐, 발터! 말을 해 봐!"

"벌꿀주라도 마시다 입이 붙었나?"

'이런 시발...!'

가만히 냅 두면 중립이라도 취할 텐데 자꾸 저러니 어쩔 수 없었다. 발터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커흠, 저분은 수행 기사라고 했잖나. 저 악랄한 귀쟁이 놈들과 싸우기 위해 서부까지 왔으니 진정 기사의 귀감이지. 굳이 모욕할 필요가 있나?"

"...!?"

데미안과 스테판이 발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하게도 발터의 시선으로는 이 두 사람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덜컹.

또 뭣도 모르고 입을 열기 직전,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지금껏 투닥거리던 네 명의 귀족 자제들이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

루크는 같이 인사를 하며 백작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이 사람이 당대 헤르닝 백작가의 가주.'

발데마르 헤르닝. 회귀 전에는 하도 일찍 죽어서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던 인물이다.

다만 이렇게 마주하니 바로 알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전형적인 무골 타입이군.'

햇볕에 노출되어 거뭇하게 탄 피부와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근육질. 그리고 손바닥에 보이는 굳은살과 날카로운 눈매.

루크가 보기에 눈앞의 남자는 선봉에 나서서 검을 휘두르는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잘 와 주었네, 젊은이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원군 요청에 응해 주니 참으로 기쁘군."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가 어찌 각하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발데마르 백작이 굵직한 목소리로 공치사를 하자, 냉큼 다른 가문 자제들이 달려들어 추임새를 넣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백작은 슬쩍 리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만 조금 안타깝군. 요즘 윈슬로우 가문의 사정이 안 좋은 모양이야. 내가 평소에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했거늘."

"죄, 죄송합니다, 각하."

"아닐세. 그저 걱정되어 한 소릴세."

윈슬로우 가문의 적은 병력을 꼬집는 말에 리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다른 가문 자제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에 보기 싫은 놈이 구박받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으니. 잠시 리온을 응시하던 백작의 시선이 루크에게 향했다.

"그런데 자네는 누구인가? 처음 보는 친구로군."

"수행 기사인 루크 번스타인이라고 합니다, 각하. 윈슬로우 가문의 조력자로 왔습니다."

"루크 번스타인? 루크 번스타인이라...."

백작의 냉철한 눈동자라 루크를 훑었다. 마치 처음 보는 상품을 품평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그 모습에 옆에서 데미안이 나섰다.

"각하! 서부의 일은 서부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법! 그런데 어찌 동부인이 조력자라며 끼어들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들으면 내정 간섭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리온은 기가 막혔지만, 스테판은 한술 더 떴다.

"맞습니다, 각하! 이미 온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윈슬로우 가문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리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들이 꼬투리 한 번 잡았다고 이따위로 나오다니!

두 사람은 이어서 발터에게 시선을 보냈다. 너도 거들라는 재촉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발터가 애써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보게. 루크 번스타인,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한창 생각에 잠겼던 백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루크를 쳐다봤다.

"자네, 설마 발토르의 악마 살해자인가?"

56화

백작의 말에 모든 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발토르의 악마 살해자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루크는 담담히 백작의 말을 수긍했다.

"발토르에서 미진하게나마 성녀님을 도운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허! 그럼 정말로...!"

경탄한 백작이 루크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아까 전이 상품을 품평하는 눈빛이었다면, 이번엔 이미 검증된 보물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각하, 죄송하오나 저희들에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발토르의 악마 살해자라니, 들은 적 없는 호칭입니다만."

다른 세 가문의 자제는 물론 리온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 역시 루크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듣지 못했으니까.

백작은 다른 가문의 자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 아직 듣지 못한 건가? 동부의 번스타인 영지에 악마가 두 마리나 나타났고, 둘 다 퇴치되었다는 이야기를."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네. 덕분에 한동안 제국이 떠들썩했지. 분명 한 놈은 번스타인의 가주가 직접 목을 베었고, 나머지 한 놈은 그의 아들이 소멸시켰다고 들었는데...."

다시금 백작이 시선이 루크에게로 향하자, 루크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온전히 저의 힘만으로 이루어 낸 일은 아닙니다. 성녀님의 조력과 훌륭한 가신들이 있었던 덕이지요."

"훌륭한 가신이라. 그래, 내 음유 시인의 노래로 듣기는 했지. 폭풍경과 염발경으로 불리는 영웅이 휘하에 있다고 들었네만."

"제게는 과분한 기사들입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대답에 백작의 입가가 푸들거렸다. 제 딴에는 기쁜 기색을 억누르려 하는 것 같았으나,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윈슬로우 가문의 조력자로 왔다고 들었네만...."

"염발경으로 불리는 제 기사가 윈슬로우 가문 출신입니다."

"허, 그랬던가?"

백작의 시선이 리온에게로 훅 돌아갔다. 움찔거리는 리온을 향해 냉큼 백작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처럼 훌륭한 기사가 윈슬로우 가문이었다니, 진즉 알려 줬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게...."

"하기야, 무슨 상관이겠나. 이제라도 알았으면 된 일이지."

"가, 감사합니다."

리온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백작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기뻐했다. 리온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어리벙벙한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백작이 호기롭게 외쳤다.

"먼 동부에서 이곳까지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내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마련하고자 하네만."

백작의 말에 루크를 제외한 모든 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군을 요청했으니 반쯤은 전시 상황이라는 소리.

그런데 이 상황에서 연회를 연단다. 어지간히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와중 루크만이 웃는 얼굴 답했다.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각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