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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백작은 사흘 전에 미리 귀환해 있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백작이 향한 장소의 악마도 잘 처리된 모양이었다.

다소의 사상자는 나왔지만, 악마가 상대라는 걸 생각하면 천운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그리고 그 성과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인 게 루크 일행이었다.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구나!"

백작은 감격스럽게 외치며 두 아들을 껴안았다. 조건만 보면 백작보다 몇 배는 더 나빴다.

이미 반쯤 점거된 도시, 인질이나 다름없는 생존자들, 그리고 지독하게 까다로운 정신적 공격.

그런데 루크 일행은 그 모든 걸 이겨 내고 사상자 한 명 내지 않았다.

"음유 시인이 너희들의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시인의 노래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아버지께서도 곧 나오실 겁니다. 훌륭하게 악마를 토벌하셨지 않습니까."

"말이라도 고맙구나!"

루크의 말에 껄껄 웃으며 백작이 다시 한번 포옹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덕담인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노래로 만들어질 만큼 백작의 승리는 극적이지 않았으니까.

"미하엘도 수고했다. 나 없을 때 훌륭히 영지를 돌보았더구나."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담담히 미하엘이 답했으나 속은 내심 쓰렸다. 백작이 무사한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두 형제가 무사한 건 영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제기랄, 둘 다 멀쩡하군. 하나라도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형인 율리히가 죽었다면 가문의 후계자는 미하엘이 되었을 거다. 루크가 죽었다면 눈에 박힌 가시 같은 놈이 사라졌겠지.

그런데 둘 다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왔다. 미하엘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걸로 우리는 귀족의 의무를 다했다. 모두의 무사와 승리를 축하하며 연회를 벌여야겠구나."

적군과 싸우든, 아니면 악마와 싸우든 정말 처절한 패배가 아니라면 으레 연회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승리했다는 걸 알리는 홍보이자,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잊기 위한 요식 행위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지쳤겠지. 둘 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라. 연회는 사흘 후에나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 그리고 율리히는 잠깐 따라오거라."

"예."

루크가 뒤로 물러나고, 율리히는 아버지를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 들어온 백작은 부드럽게 율리히의 어깨를 감쌌다.

"율리히, 정말 잘했다."

"예?"

"후계자라는 위치를 명심하고 만용을 부리지 않은 것 말이다. 이 아비는 그게 무엇보다 장하다. 피가 끓을 나이 아니냐."

"...."

율리히는 그제야 백작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아챘다. 불편한 기색과 노래에 끼지 못한 걸 짐작하고 위로하기 위해 부른 것이다.

너는 후계자니까 그런 짓 안 해도 충분하다고. 몸이 무사한 게 제일이라고 말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리는 법이다. 이 아비는 네가 그 사실을 잊지 않아 기쁘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버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 당연한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세상에 널려 있지 않느냐."

아버지의 말에 율리히가 씁쓸히 웃었다. 확실히 세상엔 자기 혈기를 못 이기고 나서다 죽은 귀족 자제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율리히의 당시 판단은 합격점을 받고도 남았다.

"너야말로 내 뒤를 이을 진정한 후계자다.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오래 붙잡아 둬서 미안하구나. 푹 쉬어라."

"예."

율리히는 방에서 담담한 얼굴로 나왔다. 그리고 나온 즉시 율리히가 웃음을 싹 지우며 눈을 번뜩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복동생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부르셨습니까, 주군."

오스카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푸르딩딩하게 멍이 든 눈을 달걀로 비볐다. 그 모습에 율리히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미안하군. 내가 고생을 많이 해서 날이 서 있었던 모양이야."

"아닙니다, 주군. 이해합니다."

발토르 시에서 벌어진 일은 들었다. 악마의 공격, 위태로운 성녀, 루크의 대활약 등등.

사람이라면 충분히 정신적으로 지칠 만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오스카마저 헛다리를 짚었다.

순간적으로 정신 줄을 놓을 만했다.

'후, 그날 붕대 이야기는 안 해서 다행이군.'

안도하는 오스카를 깨닫지 못한 채, 율리히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날 불러서 위로해 주시더군.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는 나라고 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 맞아. 루크가 아무리 입지를 높이고 명성을 알린다 한들 후계자는 될 수 없지."

적자가 두 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서자에게 계승권이 돌아갈 이유는 없다. 아무리 루크가 명성을 높이더라도 율리히의 입지는 확고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곧 찾아올 난세에 놈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거지."

결론만 말하자면, 현재 제국의 상황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부에선 야만인들이 준동하고, 남부에선 대가문들의 갈등이 극심하다.

서부에선 몬스터 활동이 지나치게 활발해져 쓸 만한 무력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뽑아 쓴다. 레이가 여자면서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나마 건재한 건 동부지만, 이번 악마 사태가 여러 영지에서 벌어지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현 상황에서도 황제는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하고, 황태자는 옛 절대적 황권을 다시 찾겠다고 난리지. 정작 다른 영주들을 지원해 줄 생각은 없으면서."

"그래서 모두 불만이 한계까지 차올랐지요. 다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위태위태한 균형이 유지되는 이유는 단 하나. 평화에 의한 관성과 내전의 두려움 때문이다.

다들 들고일어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무서운 거다. 말하자면 먼저 나설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직 그런 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누군가 황실에 불만을 표하는 순간, 모든 영주가 들썩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지. 그리고 그 시기는 이제 10년도 남지 않았어."

현 황제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리고 지금 황태자는 힘 있는 영주들을 찍어 누를 생각이다.

다시 말하자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 순간이 난세의 개막이었다.

"그런데 이복동생이 너무 컸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

"동생분이 군주가 되실까 걱정되십니까?"

"군주가 안 되면 누군가의 칼이 되겠지. 어느 쪽이든 끔찍한 일이군."

본인의 재능도 출중한데, 휘하에 브루노라는 영웅급 기사가 붙어 있다. 거기에 이번 사건으로 큰 명성까지 얻었다.

데릴사위로 들여 가문의 검으로 쓰고자 하는 이가 넘쳐 날 것이다.

"자네도 느끼겠지만 명성이 아직 완전히 퍼지지 않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는 놈을 건드릴 수 없어."

솔직히 지금조차 위험하다. 교단의 성녀와 연줄이 생겼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위장하여 무마할 수 있는 범위 내다.

눈을 감고 고민하던 오스카의 입이 열렸다.

"이미 죽이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그리고 브루노 경의 무력은 너무도 아깝지요.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나도 느끼고 있네.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고지. 어지간하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한숨을 깊게 쉰 율리히가 슬쩍 구석에 있는 어둠을 바라봤다.

"거트, 있나?"

"부르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지금껏 두 사람과 달리 어둠 속에서 율리히를 보좌해 온 꼽추 노인이었다.

"약을 만들어다오."

"약이라 하시면?"

"투명한 비약 말이다. 재료는 있겠지?"

"넘치도록 충분합지요."

꼽추 노인, 거트는 서늘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막 약을 만들기 위해 거트가 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덜컥.

"주군."

"레이 경? 무슨 일인가."

어지간해서는 먼저 율리히를 찾지 않는 레이가 들어왔다. 투구 안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목소리엔 약간의 조급함이 어려 있었다.

"제 본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병세와 관련된 건가?"

"예, 상태가 악화되셨다고...."

레이는 말끝을 흐렸다. 본론을 말하기에는 조금 염치가 없었으니까. 율리히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거트? 비약을 만들기 전에 먼저 수면병의 약부터 만들도록. 약재로 쓰는 자호박은 내가 내어 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레이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방을 나가고 나자 오스카가 조금 찜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 계속 저렇게 쓰실 겁니까?"

"뭘 말인가?"

"레이 경 말입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자호박 아닙니까. 언제까지 그 보석을 사서 내어 주실 생각입니까."

"어쩌겠나? 그게 특효약이라는데."

수면병. 자세한 원인은 불명이지만, 한 번 발병하면 점차 수면 시간이 늘어나다 시체처럼 잠만 자게 되는 병이다.

주기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깨어나지 못하다가, 영양 부족 등으로 육체가 쇠약해져 조용히 죽게 된다.

연명하는 약은 있지만, 문제는 들어가는 재료다. 그 비싼 자호박을 일정 분량 갈아 넣어서 먹여야 하니까.

"다행히 던전에서 얻은 자금은 아직 넉넉하지. 자호박 수십 개 정도야 문제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소모되는 돈도 돈이지만, 어차피 레이 경은 계속 써야 할 사람 아닙니까. 저러느니 차라리...."

"안 돼."

율리히는 오스카의 말을 냉담하게 끊었다.

"그건 안 돼. 자네도 가치를 알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레이 경의 충성을...."

"시끄럽네. 아무리 레이 경이라도 엘릭서를 쓸 수는 없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일세."

단호한 목소리에 오스카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저렇게 엘릭서를 아끼는 건 이미 반쯤 레이 경을 손에 넣었다고 여겨서겠지. 하지만 그게 진짜 충성이라 할 수 있을까?

커다란 희생 없는 어정쩡한 자비. 당연히 바치는 충성 역시 어정쩡하거늘.

'언젠가 큰일이 되지 않으면 좋으련만.'

연속된 실패에 발언권이 약해진 오스카는 뒷말을 삼켰다. 자신의 불안감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 * *

거트는 율리히의 곁에서 암살과 뒷공작의 실행 등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걸 공식적으로 알릴 수는 없는 법.

표면상 거트의 직위는 약제사였다. 당연히 가문 사람들에게도 율리히가 데려온 약제사로 알려져 있다.

-약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어지간한 고위 사제보다 박식하지요.

-꼭 필요한 인재 중 하나지. 신분 때문에 경시하는 사람이 많은데 네가 가치를 알아봤구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거트는 백작의 덕담과 함께 약제사로 가문에 들어왔다. 현 상황은 거트에게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어떤 약재라도 조합에 따라선 독이 되는 법. 그런데 약제사라는 직위 덕에 코앞에서 독을 만들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이토록 유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킬킬 웃으며 거트는 약초 몇 개를 덜어 냈다. 율리히가 말한 비약의 제조는 거의 완성 단계였다.

거트가 끓고 있는 약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약제사 어르신, 계십니까?"

"누군가?"

"저 맥스입니다. 기억하시지요?"

"…들어오게."

잠시 망설이던 거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약제사가 찾아오는 이를 거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쯧, 그다지 마주치고 싶은 상대가 아니건만.'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상대방 역시 암살자 출신이라 들었다. 남들이야 거트의 움직임을 눈앞에서 봐도 뭐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동업자 출신이라면 뭔가 알아내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그게 불편했다.

"무슨 일인가?"

"루크 도련님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약재 몇 가지를 달라고 하시던데요."

"줘 보게."

적어 놓은 종이를 받은 거트가 내용을 훑어보고는, 적힌 약재를 적당히 덜어서 내어 줬다.

한시라도 빨리 맥스를 내쫓고 싶었기에 은근히 서두르는 티가 났다.

"자, 여기 있네. 달리 일없으면 나가 보게나. 지금 바쁜 참이네."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은 뭡니까? 재료를 보아하니 어지간해선 안 쓰는 것들인데...."

"왜 남의 약에 참견인가? 자네가 약제사인가?"

"어이쿠, 아닙니다. 그냥 신경이 쓰여서 그랬습니다."

후다닥 나가는 맥스를 보며 거트가 혀를 찼다. 무슨 약인지는 봐도 모르겠지만 괜히 재수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거트는 다시 비약의 제조에 착수했다. 방에서 나온 맥스는 약재를 들고 가다 중얼거렸다.

"저 미친 노인네, 진짜로 저 약을 만드네. 검은 달 간부 출신이었나?"

맥스가 혀를 내두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주군에게 전달할 말이 많았다.

* * *

"투명한 비약?"

루크와 함께 있던 브루노는 맥스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이름이라기보다는 별칭으로 들렸다.

"예. 만들 때는 걸쭉한데, 다 만들고 나면 물처럼 투명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이름 한번 성의 없구만."

"하지만 이름과 달리 진짜 무서운 약입니다. 한 번 복용하면 죽을 때까지 일정 주기로 해독제를 계속 복용해야 하니까요."

한 번이라도 해독제 복용이 늦으면 그대로 내장이 녹아내린다. 당연히 한 번이라도 복용한 사람은 해독제를 가진 사람의 노예가 된다.

더 골치 아픈 건 이 비약에 완전한 해독제가 없다는 점이다.

"말단일 때 복용한 사람은 간부급이 돼서도 계속 복용해야 합니다. 제조법은 극히 일부 간부만 알고 있고요. 평생 조직에 메일 수밖에 없죠."

"그거 끔찍한데. 넌 제조법 알고 있냐?"

"모릅니다. 재료 수급은 자주 하러 갔지만, 비율이나 추출법 등은 안 배웠거든요."

하지만 어떤 재료를 쓰는지는 알고 있기에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루크는 맥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히가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군.'

반쯤 예상하긴 했다. 루크의 재능은 둘째 치더라도, 브루노의 실력은 놓치기에 너무 아까웠을 테니까.

한꺼번에 모든 걸 손에 넣고자 한다면 그 비약이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지금 해독제 제조법은 없는 거 맞지?"

"적어도 저는 모릅니다. 아마 최초 제조자도 완전히 해독할 생각은 안 하고 만든 거 아닐까요."

"그럼 전설의 엘릭서라도 되지 않는 한 꼼짝없이 죽는 셈이로군."

"어, 그렇겠죠?"

복용한 것만으로 모든 병을 고치고 잘린 사지와 내장을 복구한다는 엘릭서다. 그런 전설의 영약이라면 낫게 하고도 남을 거다.

"그나저나 엘릭서 가진 사람이 있긴 있습니까? 동화에서나 나오는 약인데요."

"있지. 율리히."

"…예?"

멍청히 눈을 껌뻑이는 맥스를 놔둔 채 루크는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오히려 잘됐다.

'레이를 데려오는 김에 엘릭서도 가지고 와야겠군.'

42화

회귀 전부터 율리히는 꽤 자금이 많은 편이었다. 번스타인 가문이 원래 윤택하긴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예상 이상의 자금을 뿌리곤 했다.

루크도 그랬지만, 당시 주변인들도 자금의 출처를 꽤 궁금해했다. 출처가 세간에 밝혀진 건 율리히가 죽고 난 다음이었다.

'전부 던전에서 나온 거라고 했지.'

던전 '공략'은 절대 아니다. 국보급 보물이 넘쳐 나는 던전을 공략했다면 어지간한 왕국 규모의 재력을 얻게 되었을 테니.

어디까지나 다 쓰러져 가는 던전의 폐허를 발견한 거다. 비록 보물은 대부분 못 쓰게 되었지만, 금화만큼은 꽤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전에 마검에 대해 오스카의 말도 반은 진실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중 제대로 건진 진짜 보물은 딱 두 개.'

하나는 지금 루크가 쏠쏠히 잘 써먹고 있는 마검 볼베르크. 또 하나는 일정 분량의 엘릭서다.

애물단지인 마검과 달리 엘릭서는 정말 여러 용도로 잘 써먹었던 모양이다. 본인의 비상약, 뒷거래 재료, 희망 고문용 미끼 등등.

'이번에도 그렇게 하도록 둘 생각은 없지만.'

나중에 가주가 되면 사사건건 앞길을 방해할 놈이다. 이참에 미래의 성장력도 꺾고, 귀중한 보물도 꿀꺽해 주는 게 제일이겠지.

생각을 마친 루크는 맥스와 브루노를 바라봤다.

"독을 타기에 제일 좋은 시기는 역시 연회겠지?"

"연회 말고는 기회를 잡기 어렵겠죠."

"권유를 거부하기에 가장 힘들 때기도 하고요."

연회에서 남이 권하는 술을 거부한다는 건 반쯤 모욕처럼 여겨진다. 특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결투까지 신청할 정도로.

그러다 보니 권유받는 사람도 어지간하면 주는 대로 마시는 게 예의다.

"좋아, 계획은 정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연회 날에 소 한 마리 잡아야겠다."

"…예?"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두 사람을 보며 루크가 씩 웃었다.

* * *

사흘 후, 연회 날의 당일. 레이는 조심스럽게 감싼 약의 봉투를 누군가에게 건네줬다.

상대는 율리히의 심복 중 하나.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약을 전달하며 본가를 드나든 인물이었다.

"움직일 때 조심하게. 잘못해서 깨지면 큰일 나니까."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 심장만큼이나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물에 가까이 가지 말고 매번 확인해 보도록. 무언가 이상이 있으면...."

"그 즉시 돌아와 새 약을 받아 가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재차 안심시키려는 소리에 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극성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저게 잘못되는 순간 어머니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레이 입장에선 극성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떠나는 전령을 한참 바라보던 레이가 등을 돌렸을 때였다.

"레이 경, 연회인데 여기 있으셨습니까."

"오스카 님."

레이는 어느새 흔들리는 표정을 다잡고 오스카를 바라봤다. 오스카는 슬쩍 전령이 사라진 장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무사히 도착할 겁니다. 지금까지 쭉 그래 왔지 않습니까."

"…그럴 거라 믿고 싶습니다."

"제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종신 계약 말씀입니까."

오스카는 말없이 수긍했다. 번스타인 가문 사람들은 레이가 종신 계약을 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어디까지나 기간 계약의 관계이며 계약을 계속해서 연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오스카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수면병을 치료해 줄 사람이 나타날까 기다리는 거겠지.'

여차하면 자신의 무력을 팔아서라도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서. 물론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치병을 치료할 방법이 그리 형편 좋게 튀어나오는 건 아니니까.

"주군께서는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분에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말로요."

그 비싼 자호박을 아낌없이 써 주는 율리히다. 고맙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레이는 마지막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만약 종신 계약을 맺었는데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종신 계약을 바친 순간 이 무력은 주군의 것이 되는데.

"방도를 찾으시면 분명 주군께서 손을 써 주실 겁니다."

"예, 그분께서도 항상 그러셨지요. 치료할 방법을 알게 되면 반드시 어머니를 낫게 해 주시겠다고."

"경이 온전한 충성을 바친다 한들 그 말씀을 바꾸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확고한 거부에 오스카가 한숨을 쉬었다. 나이만큼 세상 경험도 거의 없는 레이지만, 그게 곱게 자랐다는 소리는 아니다.

사람이 원하는 걸 얻었을 때 얼마나 바뀌는지 잘 알고 있을 터. 아무리 고마워도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레이 경도 연회를 즐기시죠."

"네."

짧게 대답한 레이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말은 저리했지만, 성격상 그저 자리나 지키고 있을 게 뻔했다.

잠시 레이를 바라보던 오스카가 아쉬움을 떨쳐 냈다.

'오늘만 날은 아니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으니.'

언제고 또 시도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어차피 앞으로 한참은 율리히 진영에 남아 있을 레이니까.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오스카는 연회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 루크는 자신의 방에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건 핏기가 쏙 빠진 창백한 얼굴.

눈만 감으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루크의 얼굴을 꼼꼼히 점검한 맥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완벽합니다. 약발이 제대로 들었네요."

"좋은데. 이것도 검은 달의 비전이냐?"

"아뇨, 어쩌다 얻어 배운 겁니다. 죽은 척할 때 쓰기 좋다고 하더라고요."

"부작용은 따로 없고?"

"그야 자주 복용하면 안 좋죠. 가끔 복용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맥스는 말하면서 여성용 화장용품을 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분을 덧바르고, 몇 가지 칠을 더하자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진짜 핏기가 돌아온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기만 해도 창백한 얼굴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내가 말한 건 준비됐어?"

"예, 안 들키게 가져오느라 혼났습니다."

옆에서 브루노가 양동이 가득 출렁거리는 액체를 담아 왔다.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소의 생피였다.

사발에 생피를 담은 루크가 눈을 찌푸렸다.

"비린내는 어쩔 수 없군."

"그래도 가장 신선한 편입니다."

"알고 있어. 연회에 쓰기 위해서 지금 막 잡은 거니까 신선하긴 하겠지."

한숨을 깊게 내쉰 루크가 이윽고 소의 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한 사발, 두 사발, 세 사발.

연속해서 계속 피를 들이켤 때마다 루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솔직히 말해 당장이라도 뱉고 싶었다.

"제기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하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부족해. 많이 마실수록 나중에 효과가 확실하거든. 끄읍!"

루크는 다시 사발로 소의 생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기어코 양동이의 피를 반 넘게 들이켜고 나서야 사발이 멈췄다.

"크아! 이제 준비 완료다."

"입에서 피비린내 엄청납니다, 주군."

"안 그래도 양치할 생각이었어."

그래도 약간 냄새가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정도야 속일 수 있겠지. 딱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연회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알았다. 곧 가마."

살짝 나온 물배를 누르며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조금 안 좋긴 했지만 버틸 만했다.

어차피 곧 비울 생각이니 오래 버티지 않아도 되겠지.

* * *

연회는 성대했으나 복잡하지 않았다. 승리를 기념하고 슬픔을 떨치기 위한 연회인지라 격식 따윈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리했다! 악마를 물리치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니 기사들이여, 기뻐하며 이 연회를 즐기게! 이건 승전의 연회이니!"

와아아아!

백작의 아주 짧은 연설에 기사들은 환호했다. 죽은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미증유의 재해에 매우 잘 대처한 것도 사실.

지금은 이 승리를 마음껏 즐길 시간이었다. 한창 연회에서 먹고 마시는 기사들을 보며 백작이 두 아들을 돌아봤다.

"둘 다 피곤은 풀렸느냐?"

"예, 충분히 쉬었습니다."

"다행이구나. 원래대로라면 너희들의 활약을 조금 더 알리고 싶었다만."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온 우리보다는 사상자가 나온 기사들이 더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루크의 말에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율리히 역시 웃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더욱더 루크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역시 위험한 녀석이야.'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충성을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여기서 더 크기 전에 싹을 꺾어 두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터.

결심을 확고히 한 율리히는 슬쩍 옆의 심복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심복은 쟁반에 두 개의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율리히는 잔 하나를 루크에게 내밀며 말했다.

"루크,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술을 마셔 봐야지. 자고로 인생의 첫 잔은 원래 아버지나 형제에게서 받는 법이다."

루크는 어정쩡하게 율리히의 잔을 받았다. 잔에서는 고급스러운 포도주의 향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남부의 코르모 지방에서 만들어진 포도주다. 향도 맛도 최고급이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허, 코르모 산 포도주는 파는 개수도 한정되어 있지 않으냐? 설마 아비보다 동생에게 먼저 줄 줄이야."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원래 첫 잔은 특별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농담 어린 핀잔에 율리히가 눈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루크는 잔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도 말은 들어 봤습니다. 정말 귀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수도에서 그쪽 지방 친구를 알게 되었거든. 마침 이번에 보내 줬더구나."

"그리 귀한 선물을… 감사합니다, 형님."

"형이 동생에게 주는 첫 잔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율리히가 잔을 들었다. 그에 호응하듯 루크 역시 잔을 들었다.

"이번에 성인이 된 동생을 위하여."

"그리고 귀한 술을 선물해 주신 형님을 위하여."

서로 가벼운 건배사를 나누며 잔을 들이켰다.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율리히의 시선은 루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잔을 비운 루크는 깊게 숨을 토해 내며 웃었다.

"처음 술을 마셔 봤는데 정말 향기롭습니다. 원래 이런 건가요?"

"그럴 리가! 귀한 술이라 그럴 뿐이다. 하하하!"

싹 비운 잔을 보며 율리히는 진심으로 웃었다. 한번 마시면 바로 몸에 흡수된다는 비약이다.

이미 손가락을 넣고 토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이걸로 루크는 완전히 비약에 종속된 셈이었다.

'후, 앓던 이가 빠진 것 같군. 이제야 좀 편하게 잘 수 있겠어.'

남은 건 적당한 때가 오면 루크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옭아매는 일뿐이다. 율리히가 다시 잔을 들어 비약이 없는 술을 따랐다.

"자, 한잔 더 해라. 이왕 마셔 본 것 마음껏 마셔 봐야지."

"예, 그래야 하는데… 갑자기 속이...?"

그때, 갑자기 루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부들거리다 털썩 무릎을 꿇은 루크는, 그대로 바닥에 무언가를 토해 냈다.

"우웨에에엑!"

"무, 무슨 일이냐!"

"루크!"

"주구우운!"

루크의 입에서 피가 마구 쏟아지자 사방에서 난리가 터져 나왔다. 백작이 루크에게 다가가기 직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맥스와 브루노가 달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주군! 주군! 크흐흑, 정신을 차려 보십시오!"

남들이 안 보이도록 일단 브루노가 큰 덩치로 가림막을 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맥스가 냉큼 손을 넣어서 얼굴을 박박 닦는다.

교묘한 손놀림을 통해 얼굴을 두드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

"비키거라! 루크를 보겠다!"

"가, 각하! 주군께서...!"

"루크!? 이 아이의 얼굴이 어찌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얼굴이다. 그런데 이렇게 창백해지다니! 마치 살아 있는 시체와 같지 않은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군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시더니...!"

"제발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소란스럽게 외치며 맥스는 슬쩍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깨끗하게 닦여 나간 화장품이 범벅된 손수건은 그렇게 사라졌다.

루크는 쓰러진 채 피거품을 내뿜으며 백작을 바라봤다.

"끄륵...! 아버지...!"

"루, 루크!"

목구멍에서 계속 핏물이 새어 나오자 백작이 기겁하며 루크의 손을 잡았다. 백작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인 순간, 루크가 브루노를 향해 눈짓했다.

'배 눌러! 세게!'

'옙!'

1초의 교환이 끝나자마자 브루노가 루크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그러자 잔뜩 담아 뒀던 물배의 내용물이 위로 쑥 이동했다.

"크허억!"

"...!"

또 피가 분수처럼 위로 팍 뿜어져 나오자 백작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마치 맹독이라도 먹은 사람 같지 않은가! 걱정하는 백작 옆에서 냉큼 맥스가 굴러다니던 잔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곧 깜짝 놀란 얼굴로 맥스가 소리쳤다.

"율리히 도련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것도...!"

"왜 잔에서 검은 달의 비전인 '투명한 비약'의 냄새가 나는 겁니까!"

"...!?"

율리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놈이 도대체 어떻게 투명한 비약을 알고 있는 거지?

그 약은 무색, 무취, 무미일 터인데! 깜짝 놀라는 율리히를 보며 맥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냄새가 없는 비약이지만, 아무튼 냄새로 알 수가 있다구요!'

원래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니들이 암살자 해 봤어?

43화

"투명한 비약이라니, 그게 대체 뭔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작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맥스는 침중한 얼굴로 술잔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과거 저와 같은 동업자, 그러니까 암살자에게서 들은 겁니다. 그 유명한 검은 달 출신이었죠."

"검은 달!"

주변에서 경악성을 울렸다. 검은 달이라면 귀족조차 살해한 악명 높은 암살자 집단 아닌가!

"그렇습니다. 투명한 비약은 바로 그 검은 달에서 쓰던 독약입니다. 완성하면 무색투명한 액체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죠."

"대체 무슨 효과이길래 애가 이 지경이 된 건가!?"

"효과는 간단합니다. 한번 복용하면 일정 시간 내에 항상 해독제를 복용해야 하고, 복용 시간을 놓치면 독이 발작해서 피를 토하며 죽습니다."

한마디로 복용자를 조직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비약이다. 그 끔찍함에 듣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그야말로 악마와 같은 발상이 아닌가. 잠시 말을 멈추고 분위기를 잡은 맥스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원래 이 약은 복용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약입니다. 복용한 즉시 효과가 나타나진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크흑! 다 제 탓입니다!"

추궁하는 백작의 말에 맥스가 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제가 어제 도련님께 가벼운 강장약을 만들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된 겁니다."

"뭐? 아니, 강장약이 독약과 뭔 상관인가?"

"약재 중에 몇 가지는 같이 복용하면 안 됩니다. 뱃속에서 섞이며 다른 약효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들어 드린 약에는 투명한 비약과 충돌하는 성분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맥스는 털썩 주저앉으며 두 눈에 손을 올렸다. 차마 말하기 힘들다는 듯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중에 효과를 발휘할 독이 약재가 충돌하면서 일찍 발휘된 것이겠지요.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크흐흑!"

"...!"

율리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재수 없게 걸린 셈이 아닌가?

반쯤 혼절한 루크를 안은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해독제는? 해독제만 있으면 살릴 수 있는가? 제조법을 알려 주게!"

"제조법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젠 늦었습니다."

"그럴 수가...!"

"만약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전설의 엘.릭.서뿐입니다."

맥스가 악센트를 주며 띄엄띄엄 엘릭서를 강조했다. 그와 동시에 율리히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 모습을 슬쩍 곁눈질한 브루노가 맥스에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엘.릭.서는 전설의 영약이잖나! 그딴 게 어디 있다고!"

"하지만 도련님을 고치는 방법은 엘.릭.서뿐입니다! 엘.릭.서가 없다면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다!"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지금 시대에 엘.릭.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 따윈 아무도 없는데!"

움찔, 움찔, 움찔.

엘릭서가 언급될 때마다 연신 율리히는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잠시 후, 각오를 마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줄 순 없다!'

전설의 영약 엘릭서. 평민이 황제에게 바치기만 해도 당장 귀족 신분에 자작 위까지 얹어 줄 수 있는 보물이다.

그 가치만으로 무궁무진한 용도가 존재한다. 설령 이대로 자신의 명성이 똥통에 처박히더라도 엘릭서만은 지켜야 했다.

"각하! 각하께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루크를 안은 백작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랑스러운 아들을 잃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백작에게 브루노가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만약 이게 누군가의 음모라면! 각하께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음모, 음모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작은,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코 내가 직접 처벌하겠네."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처벌은 처벌일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처벌을 내리겠네. 전설의 드래곤이든, 야만의 땅에 군림하는 왕이든, 심지어 내 혈육이라도!"

마지막 말을 유난히 크게 소리치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 분노에 연회장 전체의 기온이 쭉 내려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에서 속뜻을 짐작한 율리히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죽이실 생각이다.'

후계자에서 끌어내려지는 정도가 아니다. 백작이 굳이 처벌이라고 말을 돌린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소중히 여겼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는 끔찍한 소리를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시발, 시발, 시발!'

속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율리히가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만 지금 알 수 있는 건, 엘릭서를 아끼는 순간 난세고 나발이고 다 끝장난다는 거였다.

"오스카."

"…예."

오스카는 말을 꺼내자마자 알아들었다. 엘릭서의 보관 장소를 알고 있는 건 단 두 사람뿐이니까.

* * *

오스카는 금방 돌아와 품에서 약병을 꺼내 건네줬다. 약병을 받은 율리히가 백작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

"해독제입니다."

"...!"

백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저 말은 루크를 살릴 방법이 있다는 소리. 하지만 동시에 율리히의 범행을 인정하는 소리기도 했다.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받아든 백작에게 맥스가 손을 내밀었다.

"제게 주십시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먹일 때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부탁하겠네."

맥스가 약병을 받아들이고, 브루노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오스카 옆에는 레이가 서 있었다.

"레이 경, 이번 일은...."

"주군을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고맙소."

잠시 변명을 생각하던 오스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암만 생각해도 변명거리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수면병과 자호박이라는 목줄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거마저 없었으면 바로 떠났을 테니.

"아, 아니! 이 약은! 이 약은 설마!"

그때 약병을 유심히 바라보던 브루노가 소리쳤다.

"틀림없어! 이 빛깔! 이 광채!"

"브루노 경, 무슨 일입니까!"

"이전 아버지의 고서에서 묘사된 바를 본 적이 있네! 이건 바로 엘.릭.서!"

"뭐라구요!? 이게 그 엘.릭.서란 말입니까!"

"뭣!?"

다른 의미로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엘릭서라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전설의 영약이 아닌가!

그런데 그 엘릭서가 지금 여기에서 튀어나왔다고?

"그래, 맞아! 이 정도 분량이면 그 불치병인 수면병을 두 번은 치료하고도 남겠군!"

"...!"

오스카가 뜨악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가! 수면병이라면 그 악명 높은 불치병 아닙니까! 그런데 겨우 그 정도의 양으로 낫다니요!"

"아니! 내가 들은 효험에 의하면 충분히 치료하고도 남아! 잘만 하면 세 번까지도 치료할 수 있을지 몰라!"

"세상에! 수면병을 세 번이나 치료할 만한 양이라니! 이 정도의 엘릭서가 대체 어디서!"

'미친놈들아, 닥치고 먹여! 그냥 먹여! 얼른 좀 먹이라고!'

자기들 주군 뒤져 가고 있는데 저런 대화는 왜 나누는 거야!? 오만 가지 쌍욕을 삼키면서 오스카가 곁눈질로 슬쩍 옆을 바라봤다.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레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쓰러질 듯한 몇십 초 후, 레이 쪽에서 입을 열었다.

"당신, 알고 있었나?"

"레, 레이 경."

"거짓말하면 이 자리에서 죽인다."

오스카는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잠시 오스카를 노려보던 레이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진짜 죽일 것 같았으니까. 루크는 슬쩍 눈을 떠서 분위기를 확인한 후 속삭였다.

'들었지?'

'들었습니다.'

'좋아,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자고.'

두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며 맥스는 유리병을 까서 루크에게 먹였다. 루크는 엘릭서를 들이켜는 대신 슬쩍 입에 머금었다.

기침으로 뱉지 않게 보관하는 게 중요했다. 엘릭서가 안 들어가자 당연히 얼굴이 창백해지는 약효도 풀리지 않았다.

루크를 껴안은 맥스는 심각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이, 이런! 약효가!"

"어떤가? 그 엘릭서 아닌가? 루크는 나았나?"

"죄송합니다, 각하. 양이 부족합니다!"

"양이라니!? 자네가 말한 것처럼 엘릭서라면 낫고도 남아야 하지 않나!"

"독이 너무 지독합니다! 수면병을 딱 두 번 치료할 분량만 더 있다면 완전히 해독할 수 있을 텐데...!"

맥스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홱 돌려 율리히를 바라봤다.

"더 있느냐?"

"...."

"미리 말해 두마. 네가 약을 얼마나 썼느냐는 상관없다. 이 아이의 생사만이 중요할 뿐이다."

즉, 엘릭서를 썼건 말건 루크가 죽으면 죄를 묻겠다는 소리다. 율리히는 썩어 들어가는 표정으로 오스카를 바라봤다.

오스카는 어정쩡하게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가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수면병 두 번은 더 고칠 양, 어서 가져오셔야지."

'시이발....'

오스카는 눈총 속에서 엘릭서를 병에 더 담아 왔다. 맥스는 냉큼 병을 받고는 루크에게 다가갔다.

"주군, 제발 눈을 떠 주십시오. 흐흐흑!"

유리병을 입에 가져가는 척하면서 소매 안에 쏙 넣는다. 그리고선 방금 전에 처음 엘릭서를 비워 버린 유리병으로 체인지.

비어 있는 유리병을 흘려 넣는 시늉과 동시에 지금껏 입에 담아 왔던 엘릭서를 꿀꺽 삼킨다.

곧장 효과가 나타날 테니 삼키자마자 살짝 신음을 흘려주면 완벽하다.

"으윽...!"

"루, 루크! 정신이 드느냐!?"

"아버지...?"

루크의 게슴츠레 떠졌다. 엘릭서의 효과가 나타나며 순식간에 혈색이 회복되고, 온몸에 생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안심한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흐흑!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버지,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부자의 포옹에 주변이 눈시울을 붉혔다. 루크는 아버지를 안은 채 뒤의 두 사람을 쳐다봤다.

세 사람의 엄지가 서로를 향해 슬쩍 올라갔다.

* * *

모처럼 벌인 승전 기념 연회는 아수라장으로 끝났다. 기사들은 그날의 일에 대해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인들 역시 고든에 의해 철저히 입단속을 당했다.

-연회에 대해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라.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철저히 진원지를 조사한 후 목을 잘라 버리겠다.

-예, 예!

-저택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나는 검을 들고 다니겠다. 호신용이지만 혹시 그날 일을 말하는 놈이 있다면 다른 데 쓸지도 모르겠군.

-...!

집사장 고든의 무시무시한 엄포에 누구 하나 입을 열 생각을 못 했다. 덕분에 한동안 저택은 침묵이 감돌았다.

혹여라도 말실수를 했다가 목이 잘릴까 겁났으니까. 그런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루크는 브루노가 가져온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어, 달다. 아주 꿀맛이구만."

"그렇습니까? 제 생각에는 당도가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럼 기분 탓이겠지. 요즘 뭘 먹어도 달달하게 느껴지네."

회귀 전에는 정면 대결이든 뒷공작이든 한 번도 못 이겨 본 율리히다. 그런데 이번 일로 반쯤 관짝에 놈을 처넣었다.

예전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10년 묵은 체증이 단숨에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뭣보다 세력을 확 깎아 버린 게 가장 큰 성과지.'

율리히는 신임과 인망을 잃었고, 오스카 역시 같은 꼴이다. 뒷공작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거트는 처형당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무력이던 레이는 율리히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후계자 자리는 유지됐지만, 가주가 되기 전까지는 숨죽이고 살아야 할 거다.

'골칫거리 하나가 줄어든 셈이군.'

단순히 루크를 괴롭히는 적자여서가 아니다. 회귀 전에 놈은 동부 영주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상대로 군림했다.

조금 과장 보태서 동부의 반을 지배한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하지만 저 꼴이 된 이상 전과 같은 위세는 불가능하리라.

"그나저나 아버지는 요즘 어떠셔?"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건강엔 크게 이상이 없지만, 회한이 깊으신 것 같네요."

"그렇겠지. 그토록 믿어 왔던 후계자의 민낯을 봤으니."

탄탄한 육체와 정신력 덕분에 앓아눕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이번 사건은 백작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터.

회복되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그동안 루크는 편하게 병자 대접을 받으며 쉬고 있으면 그만이다.

'뭐, 엘릭서 덕분에 몸이 너무 건강한 게 탈이지만 말이지.'

확실히 엘릭서의 효과는 굉장했다. 이미 마셨던 비약을 정화하고 맥스의 약효마저 통째로 없애 버렸다.

그러고도 자잘한 피로까지 회복되어 며칠 동안 펄펄 날아다닐 정도였다. 손가락이 잘렸을 때 마시고 붙이면 도로 붙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 맥스가 바깥에서 들어왔다.

"주군, 레이 경이 뵙자고 하는데요."

"들어오라고 해."

안 그래도 슬슬 올 거라 생각했다. 잠시 후, 투구를 벗은 레이가 들어왔다.

평소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경우였다. 레이는 자신을 여자보다는 기사로 보길 원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미모를 사용할 정도로 급하다는 거겠지.'

"루크 도련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네, 레이 경. 무슨 일로 왔지?"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레이가 손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 하는데,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용건을 말하려면 그 전에 한 가지 사실을 밝혀야 한다. 문제는 그런 행위가 루크를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자칫해서 거래가 틀어진다면....'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한참 동안 레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루크는 피식 웃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대답하기 힘들면 나중에 하게. 대신 모처럼 왔으니 선물이나 주도록 하지."

"선물...?"

"자, 여기."

루크는 레이의 손에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유리병에는 푸른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설마, 하는 표정의 레이를 바라보며 루크가 가볍게 말했다.

"엘릭서일세."

"...!"

유리병을 바라보는 레이의 두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44화

처음엔 농담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유리병에 담긴 엘릭서는 진짜였다.

진한 파란색에 은은한 광채, 게다가 담긴 유리병까지. 전부 어제 봤던 그대로였다.

"어째서...?"

경악에 이어 찾아온 건 쏟아지는 의문이었다. 왜 이걸 나에게. 어떻게 내가 이걸 원하는 줄 알고.

그리고 왜 지금 아무 대가도 없이. 모든 의미가 함축된 의문에 루크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왜 자네가 그걸 원했느냐는 물음이라면 간단하지. 지금 저택의 상황을 보게."

"...?"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아. 율리히도 마찬가지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난리가 벌어졌는데 누가 당사자들에게 찾아오려 하겠나."

가문의 후계자가 사랑받는 서자에게 독을 먹였다. 심지어 그것도 단순한 독이 아니라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악명 높은 독약.

단순한 내부 문제가 아니다. 바깥에 알려졌다가는 가문 전체의 위신이 떨어질 만한 치부. 당연히 모든 이가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이 상황에서 해당 사건의 당사자들과 접촉을 한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만나는 순간 뭔 오해를 받고 휘말려 들지 모르지. 그래서 모두 몸을 사리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날 찾아왔지."

그렇다면 현재 상황이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절박하거나, 아니면 충분히 감수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근데 나에게 받아 갈 게 뭐가 있을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이 검이나 브루노의 무력이 전부야. 그런데 자네는 둘 다 탐낼 사람이 아니잖나."

"...."

"그렇다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걸 원해서 온 거겠지. 안 그렇나?"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다. 사실을 말하자면 맥스가 유리병을 소매 안으로 빼돌리는 걸 그때 봤기 때문이다.

숙련된 손놀림이었기에 어지간한 사람은 눈앞에서 봐도 몰랐을 동작. 그러나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레이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크를 찾아왔다. 제발 엘릭서를 나눠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는데.'

부탁하려면 먼저 루크가 엘릭서를 빼돌렸다는 걸 입에 담아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루크를 향한 모욕이 될 수 있는 상황.

선선히 인정하더라도 줄 가능성이 희박한 엘릭서였기에 언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루크가 그냥 선물이라며 내준 것이다.

"저, 저는."

"말할 필요 없네."

막 입을 열려던 레이를 루크가 막았다.

"사실 나랑 형님은 그리 화기애애한 관계가 아니야. 지금이 아니라 꽤 이전부터. 자네도 알고 있었지?"

"…예."

레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적인 문제로 더러운 일에서는 곧잘 제외되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검 사건 같은 경우. 사람을 불태우는 마검을 성검이라 속여 루크에게 주는 것만 봐도 앞뒤 사정은 대강 파악하는 법이다.

"형님은 곧잘 수작을 부렸지만, 나도 똑같이 되돌려주곤 했네. 내가 엘릭서를 빼돌린 건 필요해서가 아니야. 형님을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지. 그러니 가져가게."

"어째서, 대가를 받지 않으시는 겁니까?"

"절박해 보였지. 필요해 보였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안 떠오르는데."

맞다. 어머니를 치료하는 데 필요해서 부탁하러 왔다. 하지만 그건 대답이 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엘릭서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한 개 늘어나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영약.

그저 황제에게 뇌물로 바치기만 해도 백작 위와 영지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아직도 납득이 가질 않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지. 이 보물이 '만약을 위해'라는 핑계로 창고에서 썩어 가는 것보다는 당장 절박한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는 데 쓰이길 원했네. 하물며 그로 인해 어느 명예로운 기사가 구원받는다면 더더욱."

"...!"

레이의 눈앞이 흐려졌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북받쳤다. 그녀를 기사로 서임해 준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기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하며, 사람들을 불안케 하지 말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그 말씀을 따라 기사가 된 이후, 한 번도 약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어깨를 억누르며 레이가 입을 열었다.

"검을 휘둘러 베고 죽이는 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천한 이가 고합니다."

레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긴 머리칼이 바닥에 닿을 만치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

큰 죄를 저지른 기사가 용서를 빌거나, 계약 관계를 넘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때나 취하는 자세였다.

"처음으로 따르고 싶은 분을 만났기에 그분의 손에서 쓰이다 죽고 싶습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충성의 맹세. 수사학을 배우지 않은 레이의 맹세는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무런 꾸밈도, 허식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순수한 진심뿐이었다.

"평생 곁을 지키고자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루크는 조용히 레이를 바라봤다.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받아 보는 기사의 맹세였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일어서도록."

"받아주신다면 일어서겠습니다."

"먼저 사람부터 살리고 와."

"...!"

레이는 고개를 쳐들고 루크를 바라봤다. 뺨에 눈물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크가 웃었다.

"내 곁에 서기 전에 마지막 근심을 털고 와라. 그게 첫 명령이다."

* * *

레이는 바로 말을 타고 번스타인 가문의 성에서 떠났다.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율리히와 종신 계약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날 이후 사방에 알려진 상황이었으니까.

주군으로 섬기던 이의 민낯을 보고 크게 실망한 기사. 그게 번스타인 가문에서 레이를 보는 시각이었다.

'다행이군. 율리히 때문에 도매금으로 욕을 먹었으면 골치 아팠는데.'

평소의 모범적인 행실 덕분에 같이 엮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를 쓸 루크 입장에선 잘된 일이었다.

나중에 '배신의 기사' 같은 멸칭이라도 붙으면 주군으로서도 곤란했으니까. 저 멀리 레이를 바라보던 브루노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귀한 엘릭서가 날아갔군요."

"아까워?"

"애초부터 제 것이 아니니 아까울 것도 없습니다. 주군이야말로 아깝지 않으십니까?"

"전혀 아깝지 않지."

레이 같은 기사의 충성을 받을 수 있다면 엘릭서 정도야 별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엘릭서를 아낀 율리히가 우스웠다.

방금 전의 맹세는 범용한 기사가 했더라도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 그런데 엘릭서 하나 아끼자고 저런 기회를 걷어차다니.

'하여간 효율밖에 모르는 놈이란 말이지.'

효율도 따져야 할 때와 무시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거늘. 혀를 찬 루크가 맥스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율리히는 요즘 어때? 여전히 처박혀 있나?"

"상황이 심각합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어요."

"어느 정도길래?"

"이건 추측이지만, 여차하면 후계자가 교체되겠던데요."

"뭐? 진짜로?"

예상치 못한 소리에 루크는 흠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유능함에서는 미하엘과 비교가 안 되는 율리히다.

그런데 그 사건 하나로 과연 레너드 백작이 후계자 교체까지 고려할까?

"일반적인 독약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다름 아닌 투명한 비약 아닙니까. 그 덕에 지금까지 있던 인망 싹 날려 먹었지요."

"그건 예상했지."

곱게 죽이는 약이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약을 썼다.

이건 불명예 이전에 마녀나 악마가 할 법한 소행에 가까웠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귀족 가문이면 또 모릅니다만, 여긴 번스타인 가문 아닙니까. 가문 내에는 백작 각하의 영향을 받은 기사들이 넘쳐 나고요."

"…그걸 깜빡했네."

루크가 이마를 탁 쳤다. 브루노 수준으로 자아가 강하거나 귓구멍을 아예 막아 버린 게 아닌 한, 모든 기사는 주군의 영향을 받는다.

번스타인 가문도 마찬가지다. 기사도와 명예를 중시하는 레너드 백작으로 인해 크든 작든 명예에 신경 쓰는 풍조가 생겼다.

당연히 율리히의 소행에 기사들의 반감이 몇 배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미하엘 도련님은 표리가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게 낫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너무 없어서 문제지."

사실 그건 단점일 뿐이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니 장점처럼 느끼는 사람이 나온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러면 골치 아픈데."

"예? 잘된 거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미하엘은 아니야."

루크가 율리히를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해 보면 미하엘보다 율리히가 가주를 맡는 게 더 나았다.

동부는 다른 지방에 비해 유독 평화롭다. 덕분에 많은 영주가 힘을 비축할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해서 자존심도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난세가 되면 십중팔구 지들끼리 치고받겠지.'

그렇게 되면 번스타인 가문에도 영향이 온다. 최악의 경우 가주가 된 미하엘이 회귀 전처럼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었다.

멍청한 황태자는 여파도 고려하지 않고 가문 전체를 함께 엮어 버릴 터. 제대로 힘을 키우기 전에 반역자 낙인이 찍히는 건 사양이었다.

최소한 그 전에는 율리히가 가주 자리에 올라 동부의 고삐를 잡아 줘야 했다.

"쩝, 좀 더 고생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군. 동아줄을 내밀어 줘야겠어."

"예? 아니, 그 고생 하면서 떨궜는데 대가도 없이 살려 주자고요?"

"누가 대가가 없다고 했어?"

투덜거리는 브루노를 보며 루크가 씩 웃었다.

"내가 필요하긴 해도 공짜로 일해 주는 건 사양이다. 대가로 남은 거 죄다 벗겨 먹어야지."

* * *

"미치겠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자신의 방에서 율리히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몰락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하엘에게 자리를 위협당하다니!

'차라리 상대가 루크라면 자괴감이라도 안 들었을 텐데.'

몇 번 겪다 보니 확실히 알았다. 이복동생은 율리히 자신보다 확실하게 한 수 위였다.

가지고 있는 것 대부분을 잃고 얻은 깨달음이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잘난 상대에게 당했다는 위안은 있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아니지, 미하엘은!'

친동생이라지만 다혈질에 난폭하고 생각도 없는 바보가 미하엘이다. 그런 미하엘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긴다?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게 나을 정도의 수치였다. 그때, 바깥에서 하인이 조심스레 소리쳤다.

"도, 도련님. 맥스가 도련님을 뵙고 싶다는데요."

"뭐? 맥스가?"

"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맥스라면 루크의 심복 아닌가. 그 병신 같은 미하엘이 헛짓거리하다 루크에게 넘겨 준 녀석.

그런데 그놈이 자신에게 왔다? 루크의 전령이란 소리였다.

"어서 들여보내!"

허락이 떨어지자 맥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퍽이나 여유로운 표정을 보니 율리히의 속이 문드러졌다.

"그날 이후 며칠 만에 뵙습니다, 율리히 도련님."

"시끄럽다. 설마 나를 조롱하기 위해 온 것이냐?"

"어이쿠, 제가 어찌 감히. 전 그저 제 주인의 제안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뿐입니다요."

"제안? 무슨 제안?"

"율리히 도련님의 명예를 돌려드릴 수 있는 제안입죠."

율리히의 눈이 흔들렸다. 그놈의 명예가 똥통에 처박혀서 이 꼬라지다. 그런데 그 명예를 다 뺏어 간 장본인이 도로 돌려주겠다고?

"말해 봐."

"그 전에 율리히 도련님께서 한 가지 약조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줄 알았다. 대가가 필요하겠지. 뭐냐? 말해 봐라."

이 지경에 몰렸으니 어지간한 건 다 내줄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던 율리히는 다음 말에 눈이 뒤집혔다.

"그날 연회장에서 쓰신 것만큼의 엘릭서를 더 내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뭐!?"

하마터면 율리히는 맥스의 뺨을 후려갈길 뻔했다. 그날 쓴 엘릭서가 가지고 있는 분량의 거의 절반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내어 달라고? 그러면 진짜 한 번 쓸 분량밖에 안 남는다.

'제기랄, 남은 양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내지르는군.'

율리히는 시침을 뚝 떼며 팔짱을 꼈다.

"엘릭서는 그날 놈의 입으로 다 들어갔다! 그런데 어디서 조달하란 말이냐?"

"그러시군요. 그럼 전 이만."

"자, 잠깐. 대화를 더 나눠 봐야지 왜 바로 가려는 거냐?"

"루크 도련님께선 엘릭서 없으면 그냥 오라고 하셨거든요. 엘릭서 말고는 받을 거 없다면서요."

"없다니까!"

"그러니 가야죠. 참, 요즘 미하엘 도련님께서 얌전해지셨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시더군요. 역시 사람은 자기한테 기회가 오면 바로 알아보나 봅니다."

"...!"

율리히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빈말이 아니라 엘릭서가 아니면 진짜 거래할 생각이 없다는 게 보였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율리히 쪽이었다.

"주마."

"예?"

"주겠다고! 그러니 얼른 놈의 제안이나 말해 봐라!"

진즉 그럴 것이지. 맥스는 웃으면서 루크의 편지를 꺼냈다. 냉큼 낚아챈 율리히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봤다.

처음엔 잔뜩 짜증이 나 있던 율리히였지만, 편지를 다 읽을 때쯤엔 멍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지, 진짜로 이 짓을 해야 한다고?"

"네."

"지금 나랑 장난하나?"

"효과는 직빵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거짓 한 점 없는 순수한 말에 율리히가 머리를 짚었다. 확실히 효과는 있겠지. 잃은 명예도 상당수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몰려 오는 회의감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이런 짓까지 해 가며 구차하게 살아야 하나?'

그래도 지금까지는 최소한의 체면은 지키고 살았는데. 왠지 명예를 되찾는 대신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편지는 불태우시고, 생각 있으시면 엘릭서 들고 약속 장소로 나오십쇼."

"…알았다."

율리히의 대답을 들은 맥스가 방에서 나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율리히는 편지를 촛불에 태웠다.

활활 타들어 가는 편지가 어째 자신의 신세 같았다. 지금을 넘기지 못하면 그대로 잿더미가 될 수 있는.

'그래, 존엄이 대수냐. 간신히 내려온 동아줄이거늘.'

지금 중요한 건 체면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율리히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눕혔다. 편지에 쓰인 준비물이 떠올랐다.

"…주방에서 고추냉이를 가져와야겠군."

눈물이 필요했다. 아주 많은 눈물이.

45화

그날 저녁, 율리히는 저택의 정원으로 향했다. 품에는 부엌에서 슬쩍한 고추냉이와 엘릭서가 들려 있었다.

정원에는 율리히보다 먼저 세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브루노와 맥스, 그리고 루크.

루크는 율리히를 보자마자 당장 본론을 꺼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준비물은 챙기셨습니까?"

"네가 말한 고추냉이라면 가져왔다."

"아니, 그건 됐고요. 중요한 건 엘릭서죠."

루크의 당당한 말에 율리히가 이를 갈며 품에서 엘릭서를 꺼냈다. 딱 이전에 썼던 양을 전부 합친 수준이었다.

"이거면 됐냐?"

"아주 좋습니다."

루크는 냉큼 엘릭서를 낚아채서 맥스에게 넘겨줬다. 맥스는 조심스레 엘릭서를 천에 말아서 품에 넣었다.

저 귀한 게 단숨에 손에 들어오니 셋 다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좋은 건 알겠다만 거래를 잊지 마라. 내 명예를 돌려준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지금 위험하신 상황 아닙니까."

"남의 일처럼 말하는구나. 원인을 따지자면 너 때문일 텐데."

"예? 형님이 혼자 칼 휘두르다가 자기 복부 찌른 거에 가깝지 않나요?"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율리히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가식을 벗어던진 건 둘 다 처음임에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과 동류라는 걸. 이미지 관리가 철저할 뿐 속은 여우나 다름없다는 걸 말이다.

"됐다. 말해 봤자 뭘 하겠느냐. 이미 다 지나간 일을."

"역시 형님이십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시니 가주의 풍모가 있군요."

"작작 좀 놀려라. 그나저나 진짜로 할 생각이냐?"

"뭘 말입니까?"

"편지의 그거 말이다! 나보고 그딴 짓을 하라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

각오는 했다. 명예만 회복된다면 충분히 할 생각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루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방법 있었으면 형님이 진즉 생각했겠죠."

"...."

"싫으면 어쩔 수 없지요. 엘릭서는 안 돌려드릴 거지만...."

"누가 안 한다고 했냐!? 한다! 한다고!"

마지막 출구가 봉쇄된 율리히가 외쳤다. 루크는 씩 웃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율리히에게 넘겼다.

율리히는 의아하게 종이를 바라봤다.

"이게 뭐냐?"

"이제부터 형님이 할 대사입니다. 적당한 각색은 상관없지만 큰 줄기는 어긋나면 안 됩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쭉 훑어보던 율리히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이건 예상보다 더 미쳐 돌아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 방법 외에는 기사회생할 수단이 없는데.

"자, 여기 향로 드릴 테니 옆에 두십쇼. 저쪽에서 안 보이도록 잘 가리셔야 합니다. 크게 움직이지 말고요."

"네가 말한 고추냉이는? 언제 사용하면 되는 거냐?"

"일단 엄지손가락에 바르고 있다가 제가 신호하면 타이밍 맞춰서 삼키면 됩니다. 다른 데 묻혀서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조심하고요."

"네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잘됐군요. 그럼 이제 제가 건네드린 대사를 외워 주시죠. 시간이 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요."

루크의 독촉에 율리히는 한숨을 쉬며 대사를 훑어봤다. 내용이 딱히 길지도 않았기에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섯 번 정도 읽어 본 후, 율리히는 다 외운 종이를 루크에게 건넸다.

"다 외웠으니 시작하자. 한시라도 빨리 끝내 버리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십시오. 브루노와 맥스도 위치로."

"옙."

맥스가 냉큼 어딘가로 뛰어가고 브루노는 정원의 입구를 막았다. 그러자 막 입구로 들어오려던 정원 담당 하인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 나리. 저희들은 정원을 관리해야 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리도록. 두 도련님께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시는 중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조금 있다 들어가라."

하인들은 갈팡질팡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완전히 막는다면 윗사람에게 고하겠지만, 잠깐 기다리라고 하는 데 별수 있나.

브루노로서도 이들을 오래 막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소문이 퍼지려면 일단 목격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남은 건 맥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뿐. 브루노는 슬쩍 율리히와 루크를 곁눈질하며 자리를 지켰다.

* * *

"후우우."

레너드 백작은 깊은 한숨을 쉬며 포도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성품이지만, 이런 날은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하엘은 그렇다 치자. 원래부터 성품이 망나니니까. 그런데 지금껏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겨 왔던 율리히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내 업보인가."

마누라를 내버려 두고 외도를 저지른 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큰 형벌이지 않은가.'

자식들끼리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서 목숨을 담보로 잡고 부리려 하다니.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는 소행이었다.

계속 술을 따르는 백작을 보며 고든이 걱정스레 말했다.

"각하, 벌써 세 병째입니다. 몸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드시지요."

"취기가 돌면 그만 마실 생각이었네. 그런데 도통 취하질 않는군. 지금까진 조금만 마셔도 잘도 취했는데."

"각하...."

씁쓸한 백작의 목소리에 고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으니까.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모욕에 가까우리라. 백작의 술잔이 조용히 채워지고 있던 도중이었다.

"배, 백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에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 떨고 있는 건가.

"정원에서 율리히 도련님과 루크 도련님이 만나고 계시다고 합니다!"

"뭐라고!?"

너무 놀란 탓에 백작은 술잔을 놓쳐 깨뜨렸다. 술에 독을 넣어서 준 게 바로 얼마 전이거늘 또 만나다니!?

올라오려던 취기마저 싸그리 날아갔다. 백작은 다급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켜라!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백작의 박력에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서둘러 백작이 떠나고 나자, 나무에서 창문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맥스가 냉큼 내려왔다.

그리고 잽싸게 정원 근처로 달려가 까마귀 소리를 흉내 냈다. 까마귀 소리는 숲에 울려 퍼지며 브루노의 귀로 들어갔다.

"저, 나리. 언제쯤 정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려 보래도. 금방 끝날 것...."

까악, 까악.

"…같았는데 예상보다 이야기가 오래 걸리시는군. 이제 들어가 봐라."

"예? 아, 예."

입구를 막던 브루노는 까마귀 소리에 냉큼 길을 열어 줬다. 하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우르르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루크와 율리히 근처로 다가가진 않았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괜히 가까이 갔다가는 엮일 수 있으니까.

그런 하인들을 보며 율리히가 눈을 찌푸렸다.

"언제쯤 시작하면 되는 거냐?"

"이제 다 됐습니다. 그때까진 잡담이라도 나누죠."

"잡담이라고 해도 할 이야기가 없어서야...."

"아니면 그냥 혼자 중얼거리셔도 됩니다. 우리 둘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뉘앙스만 주면 되니까."

"차라리 그게 편하겠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뭐라 말하기 시작했지만, 사실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나 헛소리였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는 대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런데 정원 입구 근처가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부엉, 부엉.

"...!"

슬쩍 입구 쪽을 바라보려던 율리히는 이어서 들려온 부엉이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는 맥스의 신호.

레너드 백작이 입구에서 브루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루크는 웃으며 율리히를 바라봤다.

"자, 때가 된 것 같으니 시작하죠. 대사 기억합니까?"

"다 기억하니까 말 안 해 줘도 된다."

투덜거리면서 율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진짜로 이런 짓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율리히는 크게 소리쳤다.

* * *

"어째서 막는 건가! 지금 저 둘을 붙여 놨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각하! 부디 진정하셔야 합니다!"

브루노는 한창 정원에 진입하려는 백작을 막고 있었다. 자신을 막는 브루노의 모습에 백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율리히와 루크를 함께 둔 채로 떨어져 있는 걸까? 마땅히 주군의 곁을 지켜야 할 기사면서!

"비키게! 아니면 강제로 뚫고 가겠네!"

"각하께서 나서시면 저주를 풀 수가 없습니다!"

"뭐? 저주?"

뜬금없는 소리에 백작이 멈칫했다. 이 상황에 갑자기 저주라니?

"각하,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율리히 도련님 아닙니까. 그런 분이 어째서 술잔에 독을 타 이복동생이신 주군에게 준 걸까요?"

"그야...."

댈 이유는 너무 많았다. 질투였을 수도 있고, 브루노가 탐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숨은 성격이 드러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까지의 행보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도 너무 많았다.

"주군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율리히 도련님은 던전의 저주를 받은 게 틀림없다고."

"더, 던전의 저주라니?"

"고대의 던전에는 침입자의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저주가 드물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각하. 율리히 도련님이 이전에 보여 줬던 행동이 정상적이었습니까?"

아니다. 자랑스러운 후계자였던 율리히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이복동생의 술잔에 독을 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난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만약 던전의 저주였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사실 아들을 믿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뿐이지만, 그런 걸 구분할 정도로 지금 백작은 냉철하지 못했다.

브루노는 씁쓸하고도 애잔한 얼굴로 무겁게 말했다.

"지금 주군께서는 율리히 도련님이 저주로 미쳐 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검이라면 그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루, 루크가...!"

"전 주군을 믿습니다. 그러니 방해하면 안 됩니다. 가까이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만, 끼어들면 모든 게 파탄 날 겁니다."

속에서 끄집어내려던 저주가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며 브루노가 신신당부를 했다. 백작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을 미치게 만드는 저주가 사라진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알겠네. 내 조심하지. 다만 두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듣고 싶으니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게."

"그러겠습니다. 대신 들키지 않게 조심해 주십시오."

그렇게 백작이 막 정원 안쪽으로 들어간 무렵이었다. 율리히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그렇다! 이 저주가 나를 좀먹고 있다! 그날 이후, 끊임없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온다!"

율리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럴 수밖에 없다는 듯한 애절함이 담긴 음성.

누가 봐도 자괴감에 미쳐 가는 소년의 비명이었다. 진짜로 그랬으니까.

'시이발, 쪽팔려 뒤지겠네!'

얼굴을 감싸 쥐며 율리히는 계속해서 대사를 말했다.

"나, 나는 내가 두렵다! 앞으로 대체 무슨 일을 더 할지 나조차 알 수 없어! 그때 던전에 욕심을 내서 들어가는 게 아니었건만...!"

"형님! 진정하십시오!"

"진정!? 진정이라고? 나는, 나느으은!"

루크가 뒤에서 꼭 껴안자 율리히는 발작하며 소리쳤다. 진짜로 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랑 뒤에서 꼭 껴안고 있으려니 돌아 버리겠다 진짜!

"끄으윽! 물러서라! 저리 꺼져! 나는, 나는 율리히다! 내가 율리히 번스타인이다!"

"유, 율리히...!"

저주에 괴로워하는 율리히를 보고 백작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브루노의 말이 진짜였구나.

그렇다면 루크에게 독을 먹인 것도 전부 저주로 인한 것!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가, 가라! 날 찾지 마라, 루크! 지금도 저주가 널 죽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만둬라! 나는 더 이상 나를 억누를 수 없어!"

이 짓거리 하기 지랄맞아서 진짜 억누르기 힘들다 새끼야. 빨리 끝내자. 은근한 율리히의 독촉에 루크가 검을 빼 들었다.

"성검 볼베르크여! 저주를 정화하라!"

검을 아래로 휘두르며 루크가 말을 걸었다.

'야, 불꽃. 티 안나게, 빠르게, 칼끝에만!'

-예, 주인이시여...!

화륵.

빠르게 불꽃이 검 끝에서 확 피어났다. 너무 순간적이라 빛이 잠깐 뿜어지는 거로 착각할 만한 수준이었다.

불꽃은 그대로 율리 뒤의 향로에 있는 약초, 블랙 허브를 태웠다. 검은 연기가 뭉실뭉실 올라오기 시작하자 루크가 다시 중얼거렸다.

'이젠 빛 좀 뿜어 봐. 가능하면 세게!'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화아아아악.

눈부신 빛이 성검 끝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피어오른 연기가 율리히 뒤쪽에서 풀풀 올라왔다.

누가 보면 율리히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착각할 광경.

"크으으윽! 저, 저주가, 저주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향로를 가린 율리히가 가슴을 감싸 쥐었다. 백작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성검에서 뿜어지는 눈부신 빛. 그리고 빛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율리히. 몸 위로 나풀거리는 검은 연기.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브루노가 중얼거렸다.

"율리히 도련님의 사악한 마음이, 빛에 정화되어 가고 있다...!"

'그, 그런 건가!'

브루노의 말에 백작은 깨달음을 얻고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율리히는 성검에 의해 그 악독한 저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힘내거라, 율리히! 저주에 지지 마라. 너는 내 후계자 아니더냐!'

백작은 입술을 깨물며 저주와 싸우는 자신의 자식을 응원했다. 아비로서 지금 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진심 어린 응원뿐이었기에.

그런 백작을 보며 브루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그럴싸한 추임새 더 없나? 뭔가 추가로 곁들여야 그림이 될 것 같은데....'

46화

백작과 하인들이 모든 일을 목격한 뒤에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남은 건 율리히의 연기와 폭풍 같은 눈물뿐이었으니까.

-크윽,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내가 동생을 죽이려 하다니!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루, 루크! 크흐흑! 날 용서하거라! 꺼흐흐흑!

-제가 어찌 형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숨겨 둔 고추냉이를 한껏 들이킨 율리히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려 대며 루크를 껴안았다.

그리고 루크의 감동적인 포옹으로 인해 연기는 마무리. 그리고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저택 내에서는 소문이 쫙 퍼졌다.

-율리히 도련님이 한 짓은 사실 저주에 의한 것이다!

-루크 도련님이 율리히 도련님의 저주를 풀어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람이 제법 많았다. 특히 미하엘은 형님이 별 수작을 다 부린다고 코웃음까지 쳤다.

하지만 피해자인 루크가 직접 사실이라고 언급하고, 율리히 스스로 백작에게 죄까지 청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던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저주에 휘둘렸습니다. 그 결과 동생을 죽이려 했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가문을 떠나고자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원래부터 쇼맨십에는 재능이 철철 넘치던 율리히다. 한번 기회가 오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혀를 놀리며 사람들에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백작은 당연히 거부하며 율리히의 손을 맞잡았다. 한때의 실수로 저지른 일에 어찌 책임을 묻겠냐며 말이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자책을 그만두고 쉬거라. 너는 어디까지나 내 후계자다.

-아, 아버지! 크흐흑!

백작의 선언과 함께 투명한 비약 사건은 종결되었다. 율리히의 명예 역시 '저주로 인해'라는 핑계로 상당수 회복할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후계자가 될 뻔했다가, 하루 만에 후보에서 내려온 미하엘만 속으로 화를 삭일 뿐이었다.

그리고 독약 사건이 종결된 후 두 달이 지났다.

* * *

서서히 눈이 녹기 시작하는 시기에 백작은 루크와 미하엘을 집무실로 불렀다. 용건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열여섯 나이의 봄이라면 모든 귀족 자제에게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두 사람 다 잘 왔다."

미하엘과 루크를 보며 백작이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율리히가 벌인 짓은 기억나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두 사람을 훑어본 백작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희의 표정을 보니 내가 왜 부른 건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구나."

"진로 문제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 너희도 이제 성인이지 않으냐."

열여섯. 이 세계에서 성인으로 인정하는 나이. 평민과 귀족 가릴 것 없이 이 시기에 진로를 결정한다.

평민이라면 가업을 잇거나 일자리를 구하고, 운이 좋다면 누군가의 도제로 들어가기도 한다.

귀족 자제는 평민보다 훨씬 선택지가 많긴 하지만, 기본적인 진로는 세 가지다.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적성을 찾아보거나, 집안에 남아서 가문을 이을 준비를 하거나, 출세를 위해 기사로 활동하거나.'

백작은 두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아비는 너희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 한다. 다른 의견이 있느냐?"

"없습니다. 저 역시 아카데미로 가고 싶습니다."

미하엘은 즉답했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어디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 그렇겠지.'

사실 형편만 되면 누구나 수도의 아카데미로 간다. 가장 번화한 수도의 문물도 접하고, 다른 귀족 자제들과 연줄도 쌓을 수 있다.

겸사겸사 아카데미에서 숨은 재능이라도 찾으면 대박이다. 이 정도면 안 갈 이유가 없는 셈이다.

'형편이 안 되는 귀족도 많지만 말이야.'

아카데미의 학비를 지급할 여유가 없는 시골 영주들은 집구석에 박혀 있고, 기사 계급은 당장 월급 줄 주군부터 찾는다.

그러니 어찌 보면 아카데미란 상류 귀족들이 사교 연습장인 셈이다.

"루크, 너는 어찌할 테냐?"

미하엘의 대답을 들은 백작이 루크에게 물었다. 말은 그리 해도 아카데미 외에 다른 선택지를 고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잠시 생각하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전 수행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뭣...!"

백작이 깜짝 놀라 루크를 쳐다봤다. 미하엘 역시 적잖게 놀란 모양새였다. 루크의 선택지는 그만큼 괴상했으니까.

수행 기사. 견습 기사나 평기사 같은 정식 계급이 아니라 심신의 수행을 위해 떠도는 기사를 말한다.

수행 기사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검 한 자루와 말 하나, 그리고 세 명 이하의 가신들을 이끌고 최소 1년간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며 기사도를 행하는 거다.

'추상적이지만 봉사 활동 좀 하라는 거지.'

마을 사람들의 골칫거리인 몬스터를 때려잡거나, 못된 마름을 혼내 주거나, 억울한 이의 결투 재판에 대신 나서거나.

그 지역 영주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까진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대한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

"정말 수행 기사의 길을 갈 생각이냐?"

"예, 이미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느냐? 수행 기사 활동은 네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집 떠나서 고생하는 삶이 쉬울 리가 있나. 수행원 숫자부터가 세 명 이하로 제한되는데.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터라 잠자리도 계속 바꿔야 하고, 목욕 같은 호사는 제대로 누리기도 힘들다.

"나 역시 젊은 시절 수행 기사로 활동했지만, 결코 쉽게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중도에 포기하느니 안 하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끝내 해내셨지 않습니까. 저 역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을 갈고닦으려 합니다."

"네 의기는 가상하다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또 다른 사정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지금 수행 기사로 살아 보지 않으면 언제 기회가 오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확고한 루크의 의지에도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전통이 중요하다지만 수행 기사는 너무 오래된 전통이다.

사실상 백작이 마지막 수행 기사 세대였으니까. 지금의 젊은 귀족들 중 일부는 수행 기사보고 곰팡내 나는 전통이라 할 지경이니까.

"이것 하나만 말해 주마. 지금 시대에 수행 기사의 명예를 남들은 잘 알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습게 보는 이들까지 있지. 그런데도 하겠느냐?"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으음."

루크의 대답에 백작은 결국 반대를 꺾었다. 수행 기사 활동 자체만 보면 더없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반대했던 것은 그 과정에서의 고난과 옛날보다 확연하게 떨어진 위상 때문이다.

"알겠다. 네가 그리도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가 수행 기사인 한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다. 1년의 기한을 마치기 전까지는 모든 걸 너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루크가 부탁하고 싶은 소리였다. 가문의 도움을 받는 수행 기사라니. 명예는커녕 손가락질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좋다. 그럼 가장 먼저 어디로 갈 생각이냐?"

수행 기사는 자신의 가문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야 하는 법. 자기 집 안마당에서 노는 걸 수행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미리 생각해 뒀던 루크는 바로 대답했다.

"서부입니다."

* * *

돌아온 루크에게 사정을 설명받은 브루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행 기사? 아직도 그 곰팡내 나는 전통을 합니까?"

"내가 한다는데 눈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니,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아무 이득도 없으니."

그동안 자기 주군 성격은 확실하게 파악한 브루노다. 지금까지 루크가 적극적으로 나설 때는 무언가 이득이 있을 때였다.

그런데 수행 기사는 얻을 게 없다. 기껏해야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라며 나이든 귀족들의 호감이나 평민들의 환호가 고작.

약간의 명예도 있겠지만 고생을 생각하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게다가 한번 하면 1년은 포기할 수도 없잖습니까. 포기하면 오히려 욕이나 먹을 텐데."

"나도 안다. 다 계획이 있으니까 하는 짓이지."

"거참,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이신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브루노를 뒤로한 채 루크가 생각에 잠겼다.

'슬슬 그 일들이 벌어질 때란 말이지.'

회귀 전, 이 당시에는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서부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다섯 가문이 멸문한 사건.

그리고 또 하나는 북부에서 야만족의 왕이 탄생한 사건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사건이 루크에게는 최악의 악재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서부와 북부가 황제한테 제대로 반항을 못 했으니까.'

두 지역은 각각의 사건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얼마나 여파가 컸는지 황제의 '번스타인 혈족 몰살' 발언에도 제동을 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황제는 반발을 흐지부지 넘기고 마음껏 제멋대로 굴었다. 만약 두 지역이 멀쩡했다면 황제의 미친 발언을 그냥 넘기지 않았으리라.

'이번 생에도 그 미친놈이 마음껏 날뛰게 둘 수는 없지.'

서부와 북부로 가서 사건에 끼어들어 결과를 뒤트는 것. 그게 현재 루크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 기사는 아주 적절한 명분이었다. 기사도를 위해선 어딜 가든 이상할 거 없는 신분이니까.

덤으로 사건에 끼어들 핑계로도 써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수행 기사가 사람 도우러 왔다는데 뭐라고 할 건가?

"참, 그나저나 레이한테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늦는군."

"뭐, 서부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걸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거리와 별개로 소식만큼은 빨리 전할 수 있잖아."

전화 같은 건 없는 세계라 전서구 통신이 일반적이지만, 그래도 장거리 통신이 가능한 유물 정도는 대도시에 존재한다.

간단한 절차를 밟으면 멀리서 소식이나마 전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그런데도 지금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휘말린 건 아니겠지.'

루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보낸 시기가 조금 안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레이 역시 서부 출신이니까.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회귀 전엔 번스타인 가문에 쭉 머물러서 잊고 있었다.

"이왕 서부로 가는 길이니 윈슬로우 가문에 들러야겠군."

"그러다가 서로 엇갈리는 거 아닙니까?"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돼. 엇갈리는 거야 별일도 아니고."

기우로 끝난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만약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다면 지금의 방문이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브루노는 마침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노잣돈은 어쩌실 겁니까? 백작 각하 성격에 두둑이 얹어 주시진 않을 거 같은데."

최소로 잡아도 1년에 걸친 여행이다. 여비는 꼭 필요하겠지만 레너드 백작이라면 딱 필요한 만큼만 주리라.

기사는 기사다워야 한다는 백작의 신념을 볼 때, 금화를 잔뜩 줘서 편한 여행을 하라고 하진 않을 테니.

"설마 1년 가까이 노숙하거나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는 걸 계속해야 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돈 나올 구멍이 있으니 거기서 조달해 가야지."

"돈 나올 구멍? 아!"

잠시 갸웃거리던 브루노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딱 한 군데, 돈 나올 구멍이 있었다.

* * *

"그놈이 왜 나한테 돈을 찾는 거냐!?"

율리히는 전령으로 온 맥스를 보며 소리쳤다. 갑자기 두 달 가까이 조용하던 놈이 갑자기 전령을 보내기에 이상하다 했다.

그런데 대뜸 하는 소리가 뭐? 돈 좀 달라고?

"거래 다 끝났다! 더 줄 것도 없고, 더 받을 것도 없단 말이다! 근데 뭔 놈의 돈이냐? 대신 내놓을 거라도 있다더냐!?"

"아뇨, 그냥 돈만 받아 오라 하셨습니다."

"이 미친놈이 진짜...!"

율리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젠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호구로 여기는 건가?

아무리 물밑 싸움에서 패배했다지만 이런 취급이라니! 맥스를 향해 율리히가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꺼져라. 그리고 놈에게 전해라. 앞으로 이따위 우습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말이다!"

"음, 알겠습니다. 율리히 도련님께서 아직 저주가 안 풀리신 모양이네요."

"뭐, 뭐?"

"저주요. 루크 도련님께서는 저주가 다 풀리셨다고 했는데 아주 미약한 기운이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 언제든 발작할 수 있겠어요."

"...!"

그제야 율리히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챘다. 거부하면 수행 기사로 떠나기 전에 저 한마디를 슬쩍 흘리고 간다는 소리다.

얼핏 보기에는 별거 아니지만, 아버지와 가문 내부 사람들의 인식을 통째로 뒤바꿀 수도 있는 한마디였다.

만약 저택 내에서 수상한 정황이 또 발견되면 어떻게 될까.

'저주가 완전히 풀렸다고 하면 날 의심하진 않겠지. 하지만 저 한마디를 남기고 간다면....'

율리히가 정말 수작질을 부렸든, 아니면 다른 작자가 저지른 수상한 정황이 포착되었든 일단 율리히부터 의심할 것이다.

또 율리히 도련님의 저주가 발작한 게 아닐까? 라면서. 율리히 입장에선 더럽게 골치 아픈 불씨를 남기는 거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율리히가 이를 갈았다. 겨우 다 끝내 놓은 줄 알았더니 이런 약점이 잡혔을 줄이야.

그 모습을 보던 맥스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탁 쳤다.

"참!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 전하라고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냐?"

"괜히 배짱부리면 언제든 미칠 수 있는 자식 되는 거니 처신 잘하시라고."

"...."

그날, 맥스는 돌아가면서 작은 보석 궤짝 하나를 들고 갔다. 부피는 작지만 보석 하나 처분할 때마다 금화 주머니가 가득 차는 물건들이었다.

혼자 남은 율리히는 왠지 짠맛이 나는 차를 홀짝이며 눈을 비볐다.

47화

루크는 자금 조달을 마치기 무섭게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지나치게 빠른 준비에 백작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너무 급한 것 아니냐? 적어도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진 후에 떠나거라."

"저에겐 충분할 정도로 따뜻한 기후입니다. 수행을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봄이 오겠지요."

회귀 전만 따져 봐도 열다섯 해를 평민 사냥꾼으로 살아 온 루크다. 겨울의 혹독함은 진즉에 몇 번이고 겪어 봤다.

귀족의 신분으로 방한 도구 다 챙겨 가는 여행쯤이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하물며 넓은 가도에 중간중간 여관도 즐비하잖은가.

"여행길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으음, 그렇긴 하다만."

백작은 걱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자신도 해 본 수행 기사 활동이다.

루크의 말이 진짜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늦장 부릴 시간이 없다.'

루크는 연신 백작을 안심시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절절한 충성의 맹세를 바쳤던 레이다.

고치려던 누군가에게 엘릭서를 성공적으로 먹였다면 연락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진즉에 일을 해결했을 시간인데도 연락이 끊겼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지.'

이전부터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거의 확신 중이었다. 마침 시기도 공교롭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빨리 서부로 가서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루크는 며칠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말에 올랐다.

루크의 뒤에는 당연하게도 가신인 브루노와 맥스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버지, 아직 날이 찹니다. 얼른 들어가시지요."

"됐다. 겨우 이 정도 날씨에 배웅도 못 해 주겠느냐."

레너드 백작은 성문 바깥까지 루크를 배웅했다. 그 진풍경에 영지민들은 신기한 듯이 몰려나와 떠나가는 루크 일행을 구경했다.

백작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여비로 쓰거라."

"감사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미안하구나. 네가 수행 기사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것을 줬으련만."

수행 기사 활동은 편안함을 좇는 여행이 아니다. 오히려 불편함과 고난을 이겨 내고 사람을 돕는 여정에 가까웠다.

많은 돈으로 편안히 간다면 그 의미 역시 퇴색되리라. 적어도 백작은 그리 생각했다.

"이 정도만 해도 저에겐 충분합니다."

루크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너무 잘 이해해서 진즉 뒷돈도 마련해 둔 상태니까.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조심하거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1년 후에는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루크는 말머리를 돌려 떠나갔다. 브루노와 맥스가 뒤따르는 모습을 보며 백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힘든 여행이 되겠지. 하지만 너라면 이겨 낼 수 있을 거다.'

단순히 사람을 돕는 일만이 아니다. 먹고, 자고, 이동하는 일 자체가 고생스러울 거다. 아무리 사냥꾼으로 살아 본 루크라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집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것과 1년 가까이 정처 없이 떠도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힘내거라, 아들아.'

여비도 얼마 없이 떠나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며 백작은 뒤돌아섰다.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에 대견스러움을 느끼면서.

브루노는 슬쩍 성문 앞에서 백작의 모습이 사라진 걸 보고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번스타인 가문의 영지부터 벗어나야지."

이 일대가 전부 번스타인 가문의 영토니 벗어나려면 꼬박 닷새는 걸릴 거다. 그때까지는 고생 좀 하리라.

백작이 루크를 조사하지 않아도 일행을 지켜보는 놈이 있을 테니까.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다른 영지에 도착해야 한다.

"닷새 정도는 노숙하면서 육포나 씹어야겠다."

"그 후에는요?"

"뭘 물어? 고급 여관에 가서 묵은 때 빼고 향신료 듬뿍 친 요리를 먹어야지."

편하게 갈 수 있으면 편하게 간다. 회귀 전부터 가지고 있던 루크의 좌우명이었다.

* * *

수행 기사에 어울리는 생활은 처음 닷새뿐이었다. 그 이후는 편하게 고급 여관과 대도시를 따라 이동했다.

당연히 이동하는 체력 소모를 제외하면 고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이 소시지 맛있는데, 비법 알려 달라면 거절하겠지?"

"해산물 수프도 죽여줍니다. 저것 좀 더 시키죠."

"요리는 맛있는데 술은 별로군요."

세 사람은 여관의 2층 방에서 옮겨져 오는 요리를 즐겼다. 백작가의 식사도 훌륭했지만, 외지에는 외지의 맛이 있는 법이니까.

접시를 모두 비운 브루노는 이빨 사이에 낀 고기 조각을 빼며 말했다.

"그나저나 주군, 저희야 편하지만 계속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수행 기사라기엔 그 뭐시냐, 너무 편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꼬리 밟히면 욕만 먹는 거 아니냐는 소리다. 루크는 손을 휘휘 저으며 고기를 씹어 삼켰다.

"어차피 동부와 중부에선 도와줄 사람도 없어. 동부는 안정되어 있고, 중부는 황궁이 꽉 잡고 있는데 뭘."

사건이라고 하면 영주 본인이 사고 치는 것 정도인데, 그건 애초에 수행 기사가 나설 일이 아니다.

영주가 자기 영지에서 깽판 친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서부와 북부는 아니지. 거긴 지금도 난리니까. 이 호사도 서부에 들어서는 순간 끝이야."

북부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도 있지만, 서부의 경우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어수선한 상태다.

레이와 대면하기 이전에 다른 골칫거리와 마주할 각오조차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이 짓도 이제 끝물이니까."

"뭐, 그러시다면야...."

브루노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하게 몸을 눕혔다. 지금껏 주군이 한 말 중에서 틀린 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 말도 사실이리라.

* * *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이건 심한데요."

"또 나왔냐?"

"예, 숫자는 적지만."

얼굴을 찌푸린 브루노가 숲속의 어둠을 바라봤다. 노란 눈동자 몇 쌍이 루크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와르그. 하이에나와 닮은 몬스터로, 약해 보이는 사냥감이 있으면 떼로 달려들어 물어 죽이는 놈이었다.

"쫓아낼 수 있겠냐?"

"다섯 마리니까 위협만 해 주면 되겠네요."

브루노는 천천히 철창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와르그 떼를 노려본 뒤, 있는 힘껏 창을 나무에 휘둘렀다.

콰아앙.

-끼엑...!

아름드리나무가 충격에 뒤흔들리자 주시하던 와르그 무리는 기겁하며 흩어졌다. 감히 사냥할 대상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기척이 사라지고 나자 맥스가 투덜거렸다.

"서부에서 몬스터 피해가 극심하단 소리는 들어 봤지만, 이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군요. 정비된 길에서 다섯 번이나 마주치다니."

몬스터나 짐승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에 극도로 예민하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영역 역시 어지간하면 안 들어간다.

기웃거렸다간 자신 역시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런데 엄연한 인간의 영역인 길에서 마주친 몬스터가 다섯 무리다.

"평소에도 이렇게나 습격이 잦은 겁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상 사태지."

동부는 물론 서부, 북부, 남부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는 루크다. 서부의 몬스터 출현 빈도는 진즉 알고 있다.

몬스터 출현이 잦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 몬스터의 출현 빈도는 평소보다 지나치게 높았다.

'뭔 일이 있긴 있군.'

다섯 가문의 멸문에 관련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서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주군, 어쩌실 겁니까?"

"뭘?"

"노숙 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실 생각입니까?"

루크는 혀를 찼다. 서부에 들어온 이후 일행은 도시나 마을에 들르지 않고 노숙을 이어 가고 있었다.

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골치 아픈 부탁을 피하기 위해서다. 수행 기사라는 신분 때문에 부탁받으면 거절할 수도 없으니.

'게다가 이렇게 몬스터가 마구 튀어나오는 상황인데 부탁이 없을 리가.'

십중팔구 처리하기 곤란한 맹수나 몬스터 퇴치 등을 부탁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만큼 윈슬로우 가문에 찾아가는 건 늦어지겠지.

문제는 계속 노숙을 하다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딱 이틀만 더 버텨 보자. 이틀이 지나도 윈슬로우 가문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때 마을을 찾아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맥스가 한숨을 쉬며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미 자기엔 늦었으니 불에 몸이나 녹이면서 휴식할 생각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거기 누구 있소? 괜찮다면 잠깐 불에 몸을 녹이고 싶소만."

어투 자체는 털털했지만, 억양에는 귀족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루크는 슬쩍 브루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야?"

"기사입니다. 일행은 없고, 혼자군요."

신원을 확인한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자리가 있으니 이리로 오시오."

"고맙소!"

들뜬 목소리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모닥불에 가까워지자 빛이 다가오는 이의 그림자를 벗겨 냈다.

나타난 건 이제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기사는 냉큼 자리에 앉아 몸을 녹였다.

"으흐,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소."

"노숙 준비를 안 해 온 거요?"

"모닥불 피울 도구는 있었지. 몬스터들의 습격에 엎어지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창 몸을 녹이던 기사는 루크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다.

"꽤 젊군? 그 나이에 견습 기사인 거요?"

"수행 기사요. 얼마 전 동부에서 이쪽으로 왔지."

"허어, 요즘 세상에 수행 기사라니. 뒤에 있는 분들은?"

"한 명은 내 하인이고, 다른 이는 내 가신이지."

"아하."

기사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신기하게 세 사람을 쳐다봤다. 수행 기사라는 게 신기하기도 한 것 같고, 대화에 굶주리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럼 서부는 처음이시군."

"그렇소."

"일이 부족하진 않을 거요. 여긴 항상 사람이 필요하거든."

말을 하던 기사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루크를 바라봤다.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기사인 베릭 윈슬로우요."

"…윈슬로우?"

옆에서 브루노가 멍청히 되물었다. 기사 베릭은 브루노의 반응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서부에선 힘깨나 쓰는 집안이지. 그렇다고 너무 주눅 들지는 마시오. 나는 방계니까. 겨우 말단 기사직 하나 차지하고 있는 처지요."

보아하니 브루노의 반응을 가문의 명성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루크는 눈짓으로 브루노와 맥스를 조용히 시킨 뒤 입을 열었다.

"루크 번스타인이오."

"번스타인? 붉은 용의 번스타인?"

"맞소."

"...."

루크가 수긍하자 베릭이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전의 미소는 싹 사라졌다. 굳어진 베릭의 얼굴이 모닥불의 빛에 비추어졌다.

베릭의 반응에도 루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윈슬로우 가문이라니 마침 잘됐군. 레이 윈슬로우라는 기사를 아시오?"

"…그 이름을 어찌 아시오?"

"어찌 알기는, 내 기사니까 알지."

내 기사, 라는 발언이 나오자 베릭이 몸을 움찔 떨었다.

"내 기사라는 게 무슨 소리요?"

"종신 계약을 하며 충성 맹세를 바친 기사라는 뜻이요."

"허, 허허. 그럼 진짜로...."

루크의 말에 베릭은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다시 한번 묻지. 레이 윈슬로우라는 기사를 아시오?"

"죽었소."

"거짓말도 못 하면서 하려고 하지 마시오."

즉답에 루크가 코웃음을 쳤다.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빤히 보였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베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가 주실 수는 없겠소?"

"대답하기 싫으면 마시오. 어차피 윈슬로우 가문으로 가던 중이었으니."

"후우우!"

루크의 말에 베릭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베릭은 순식간에 무언가를 던졌다.

촤라락.

"뭐, 뭐야!?"

"...!?"

갑자기 거미줄처럼 다가오는 무언가에 루크 일행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반신이 묶인 상황이었다.

베릭은 씁쓰레하게 일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옛 유물을 흉내 낸 마도구요. 귀쟁이 놈들이 만든 물건이지. 상대를 잡아서 포획하는 용도라더군."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맞았다! 그런데 그대는 접대의 관습을 어기겠다는 건가!"

접대의 관습. 주인이 손님을 예우로 맞이하면, 손님 역시 주인에게 의리를 다해야 한다는 전통.

평민은 몰라도 귀족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전통이다. 항의하는 루크를 향해 베릭이 단호히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소. 그대들이 레이를 데려가게 둘 수는 없거든."

"어쩔 생각이지?"

"가문으로 데려가든가, 아니면 다른 도시에 잠깐 옮겨 놓겠소. 일이 끝나면 풀어 주리다."

"그 '일'이라는 게 대체 뭐냐?"

"나중에 알게 될 거요."

이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어 보였다. 베릭이 세 사람을 기절시키기 위해 검집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미안하오."

"브루노, 부수고 빠져나와."

"예!"

루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브루노가 힘을 쓰며 몸을 포박한 마도구를 부수려 했다. 베릭은 브루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헛수고요. 그 마도구의 강도는 사슬과 비슷하지. 맨몸으로 사슬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이...."

콰드드드득.

"…있네?"

박살이 난 마도구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자, 베릭이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구속구를 망가뜨린 브루노가 어깨를 풀며 말했다.

"주군, 어찌할까요?"

"일단 죽지 않을 만큼만 패."

"자, 잠깐...!?"

뒤로 물러서려던 베릭을 향해 브루노의 주먹이 날아왔다. 한동안 서부의 길목에서 쉼 없이 비명이 울려 퍼졌다.

48화

"꺼으윽...!"

약 20분 후. 떡이 된 베릭은 바닥을 기면서 신음을 흘렸다. 몸에는 루크와 맥스가 풀어 낸 마도구가 채워진 상태였다.

루크는 혀를 차면서 베릭을 깔아 봤다.

"우리 대화 좀 나누지."

"끄윽,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대화요?"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시지. 접대의 관습을 어긴 주제에."

정곡을 찌르자 베릭이 움찔했다. 접대의 관습은 그저 말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주인이든 손님이든 이를 고의로 어기면 다른 한쪽이 상대방을 죽여 버려도 무방하다.

심지어 이 경우 어지간한 대귀족의 친인척조차 항의를 못 한다. 누가 봐도 자업자득이니까.

"알았으면 고개를 들어서 이쪽을 봐."

"보고 있소."

"이쪽 보라니까 어딜 보고 있어? 내 머리 위에 새라도 있나?"

"눈이 부어서 보이는 게 거의 없소. 끅!"

"...."

고통에 움츠러드는 베릭을 보고 루크가 입맛을 다셨다. 브루노가 악감정이 있긴 했는지 제대로 패긴 했다.

슬쩍 옆을 쳐다보자 개운한 얼굴로 브루노가 손을 털고 있었다.

"크흠, 어쨌든 질문 몇 개 해야겠어. 레이랑 무슨 관계지?"

"사촌이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 숙부님이지."

"사촌?"

루크는 베릭의 머리카락을 훑었다. 붉기는커녕 가장 흔한 색인 갈색이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소만, 우리 가문에는 붉은 머리칼이 오히려 드무오. 선조님은 붉은 머리라고 하셨지만, 세대가 지나며 피가 옅어진 거겠지."

"뭐, 그렇다 치자고. 그럼 왜 우릴 잡으려 했지?"

"당신들이 레이와 만나는 걸 막기 위해서였소."

"그건 보면 알아. 내가 묻고 있는 건 왜 막으려 했느냐지."

베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둡게 물든 얼굴은 남들한테 치부를 밝히려는 사람과 같았다.

"서부에 대해서 알마나 알고 있소?"

"몬스터가 더럽게 많은 땅."

"틀린 말은 아니군."

루크의 말에 베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요약이 너무 심해. 직접 살아 보면 그 정도가 아니오. 야생과 문명이 반쯤 섞인 전장이 바로 이 서부지."

서부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무조건 아이를 많이 낳아라, 어차피 성인이 되는 건 많아 봐야 둘 뿐이다.

그만큼 서부는 몬스터의 습격이 잦은 땅이다. 사람들은 항상 싸움을 대비하고, 소모되는 기사와 병사의 숫자도 엄청나다.

당연히 서부의 가문들은 언제나 무력이 절실하다. 레이 같은 강력한 기사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3년 만에 그 아이가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모두들 기뻐했소. 원래부터 강한 아이였던 데다, 최근 몬스터들의 출현 빈도가 훨씬 높아졌으니까. 가문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여겼지."

하지만 윈슬로우 가문의 기대는 곧바로 배신당했다. 가문으로 돌아온 레이는 주변 사람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냉담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에겐 충성을 바친 주군이 있습니다.

가문 어른들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 무력을 가지고도 가문을 위해 쓰지는 않고 새 주군을 따라가겠다니?

가주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필사적으로 레이를 억류했다. 그리고는 베릭을 불러 명령했다.

레이의 주군이라는 놈이 어떤 작자인지 좀 알아보라고.

"…그래서 동부로 가는 중이었다?"

"아니, 그리 멀리 갈 생각은 없었소. 중부까지 가서 정보 수집 의뢰라도 낼 생각이었지. 설마 가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어지간히도 재수가 없었다며 베릭이 고개를 숙였다. 루크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댁 말은 이런 거군. 레이의 주군인 내가 가문에 가서 만나면 이 이상 억류할 수 없으니, 아예 못 만나게 막으려 했다고."

"그렇소. 어쨌거나 시간이 흐르면 고향에 대한 애향심도 다시 생겨날 테고, 죽어 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

"까고 있네."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베릭의 몸이 움찔 떨렸다. 루크는 더없이 스산하게 베릭을 노려보며 말했다.

"앞뒤 잘라먹지 말고 전부 이야기해. 어떻게 된 일이야?"

"무, 무슨 소리요?"

"생략된 게 너무 많잖아. 레이가 가문을 떠난 이유부터, 네놈들이 막지 않고 보내 준 것까지."

강한 기사를 그토록 원한다는 서부다. 진짜로 레이의 힘이 필요했다면 떠나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서부에서 힘 좀 쓴다는 가문이라면 열여섯 살짜리의 가출 따윈 어렵지 않게 붙잡았을 터.

근데 이제 와서 레이의 힘이 절실하다고?

"솔직히 말해. 뭘 숨기고 있냐?"

"...."

베릭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말할 기색이 없자 루크가 검을 빼 들었다.

"그래, 말할 수 없다면 됐다. 잘 가도록."

"자, 잠깐! 정말 날 죽일 생각이오!?"

"나는 적당히 빼고 더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말한 다음 '거짓말은 안 했소'라는 새끼들이 제일 싫거든.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쪽이 훨씬 낫지."

루크의 말에 베릭이 몸을 떨었다. 더없이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루크의 검이 막 휘둘러지려는 순간.

"금방 돌아올 줄 알았소!"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베릭의 입이 열렸다. 루크가 목을 자르려던 손을 멈췄다.

"계속 말해 봐."

"우린 금방 돌아올 줄 알았소.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의 어머니는 가문에 있으니까."

"그 아이의 어머니라니? 레이의 어머니라면 댁한테는 숙모 아닌가?"

"아니오."

깊게 한숨을 내쉬며 베릭이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서녀요."

* * *

레이는 손을 뻗어 어머니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르고 움푹 들어간 볼. 하지만 레이에겐 이 얼마 안 되는 살점이 너무 기뻤다.

이전에 어머니의 모습은 살아 있는 해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하렴, 내 뺨이 다 닳겠구나."

"어머니."

웃는 어머니의 말에 레이가 눈물을 흘렸다. 저리 표정을 지어 움직이는 어머니를 본 게 얼마 만일까.

열세 살 이후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거의 전부였는데.

"이 어미는 다 나았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앞으로는 계속 깨어 있을 거야."

"저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기는. 내가 매번 잘 때마다 깜짝 놀라 흔들어 보는 주제에."

어머니의 핀잔에 레이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도 이게 꿈이 아닌가 의심하곤 하니까.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으면 불안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엘릭서라니. 살아생전 그 귀한 것을 내가 입에 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 주군께서 주셨어요."

"자비로우신 분이구나. 직접 만나서 절이라도 드리고 싶건만."

어머니의 말에 레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 주군을 만나야 할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고 레이 자신이었다.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고, 충성 맹세만 바치고 허둥지둥 빠져나왔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발이 묶여 나갈 수가 없다.

"아가씨."

그때, 밖에서 중년의 하녀가 들어왔다. 하녀는 잔뜩 긴장한 몸가짐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어미는 여기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네."

인사와 함께 레이는 밖으로 나왔다.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은 바로 차갑게 식었다.

"어머니는 잘 보살피고 있나?"

"제 신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길 바란다. 어머니께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날이 네가 죽는 날이니까."

중년 하녀는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레이라면 당장 하녀의 목을 꺾어 죽여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서녀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녀는 옛날을 후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레이는 하녀의 옆을 지나쳐 복도를 지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레이를 보고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가 집무실에 도착하자 하인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자작 각하. 아가씨께서...."

덜컥.

"...!"

하인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전달이 끝나기도 전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레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닫고 집무실에 있는 남자를 봤다. 희끗한 머리에 턱수염과 이어진 구레나룻을 가진 귀족.

현재 윈슬로우 자작가의 가주인 케이든 윈슬로우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의가 없구나. 하인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진 못하겠더냐?"

"용건을 말씀해 주시지요."

"아직도 날 원망하느냐?"

케이든 자작의 말에 레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혀를 차며 케이든 자작이 등을 돌렸다.

"사제가 말하기를 네 어미의 상태가 부쩍 좋아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예."

"최대한 몸에 좋은 음식으로 먹이고 있다. 석 달 정도면 뛸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겠지."

"다 주군이 주신 엘릭서 덕분입니다."

"…지금까지 네 어미를 보살핀 우리 덕이기도 하지!"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며 케이든 자작이 레이를 노려봤다.

"넌 서부의 자식이다! 이 고통받는 땅을 놔두고 어디로 갈 생각이냐!?"

"제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곁으로."

"네 주군은 아직 없다! 있다면 이 가문에 있겠지!"

케이든 자작과 레이의 시선이 부딪쳤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자작의 눈빛에 레이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진정하십시오, 두 분 다."

"리온."

케이든이 말을 건 아들을 쳐다봤다. 리온 윈슬로우, 가문의 후계자이자 적자, 그리고 레이의 이복동생이었다.

리온은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을 말렸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누님께선 가문에 남으실 건데."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럴 리가요. 아직 부인의 몸도 멀쩡하지 않은데 어딜 가십니까? 어서 회복시켜 드려야지요. 윈슬로우 가문의 재력을 써서 말입니다."

레이의 입에서 으득 소리가 났다. 옛날부터 싫었던 이복동생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뱀 같아졌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르지 않으면 무심코 베어 버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 누님께선 어서 가서 쉬시지요. 부인과 할 말이 많이 남았지 않습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리온의 말에 레이는 바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리온은 곧 아버지 케이든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천지가 뒤집혀도 누님이 먼저 마음을 열 일이 없다는 건 알지 않습니까."

"그래도 최소한 짐을 느낄 줄 알았다. 제 어미를 힘껏 보살펴 주지 않았느냐."

"일어나고 나서는 그랬지요. 누님이 그런 눈치도 없겠습니까."

"크흠."

자식의 핀잔에 케이든 자작이 시선을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수면병에 잠들어 있는 동안은 시체나 마찬가지.

죽지 않았나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몸이 썩지 않도록 시간마다 뒤집혀 준 게 전부였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은 여기에 정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니면 누가 부인을 돌보겠습니까?"

"하지만 맹세를 했다지 않느냐. 그것도 번스타인 가문의 자식에게."

"여긴 서부입니다, 동부가 아니라."

아무리 번스타인 가문의 위명이 높다 한들 동부의 이야기다. 아득히 먼 서부에서 그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는 없다.

기사단이나 군대로 대원정을 한다면 본인들이 먼저 쓰러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차분히 지켜보세요. 어차피 누님도 곧 현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후우, 알겠다."

케이든 자작이 수긍하자, 리온은 시선을 돌려 방금 레이가 나간 문을 서늘하게 쳐다봤다.

'그 힘은 가문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누님. 당신이 멋대로 정한 주군이 아니라요.'

리온의 두 눈에는 탐욕이 번들거렸다. 그건 가족이 아니라 막강한 병기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 * *

"그러니까 수면병 걸린 어머니가 있었고, 그 때문에 언젠가는 가문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렇소."

루크의 말에 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지. 그 아이는 3년 동안 가문을 찾지 않았소. 심지어 1년 전부터는 수면병의 연명약까지 가문으로 보내 왔고."

가문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금껏 자기 손아귀에 쥔 것처럼 여겼는데, 막상 보니 독립을 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은 '치료약'이 아니라 '연명약'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연명약이 끊기면 필시 가문을 의지할 테니까.

그때가 레이를 다시 손에 넣을 기회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방문했더니 그 아이는 제 어미를 치료했소. 나중에야 그게 전설의 엘릭서였다는 걸 알았지."

"그럼 끝난 거 아닌가? 어머니는 치료했다며? 더 잡아 둘 빌미도 없을 텐데."

"레이의 어미가 수면병에 걸린 게 벌써 5년 전이오. 병은 나았지만 톡 치면 부러질 만큼 쇠약해졌는데 어디로 가겠소?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지."

"그게 윈슬로우 가문이었군."

"맞소. 가문에게 남은 마지막 동아줄이었고."

거기까지 말한 베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머진 아까 말한 대로였다.

어머니의 건강을 빌미로 레이를 억류했고, 동시에 충성을 바친 주군이 누구인지 알아 오도록 한 거다.

"하."

루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율리히나 이놈들이나 다 똑같았다.

상대가 절망적인 상황을 이용해 제 손아귀에서 굴리다가, 상황이 급변하자 기겁하며 외양간을 고치려 든다.

브루노도 어이가 없었는지 옆에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병신 같구만. 차라리 처음부터 잘해 주든가."

"...."

베릭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번만큼은 본인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잠시 베릭을 내려다보던 루크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운이 좋았군. 여기서 이놈한테 사전 정보를 들을 수 있었으니."

"어쩌실 겁니까? 이대로 윈슬로우 가문에 방문하시렵니까?"

"아니, 가기 전에 잠깐 수행 기사 활동 좀 해야지."

"예?"

브루노와 맥스가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레이를 찾기 전까지는 최대한 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왕 갈 거면 윈슬로우 가문에서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 * *

그로부터 보름 후, 케이든 자작은 집무실에서 노성을 터트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수행 기사라니!"

지금은 이미 곰팡내 나는 구닥다리 관습. 하지만 서부인들에게는 누구보다 절실한 존재이기도 한 게 수행 기사였다.

큰 대가도 받지 않고 몬스터를 쫓아 주니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만이라면 자작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수행 기사는 영지 안정에 도움이 되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이 칭호는 뭐냐! 염발경의 주군이라니!?"

귀족들에게는 일부 칭호가 수식어처럼 붙기 마련이다. 남들이 지어 주는 것도 있고, 자기가 겉멋만 따져서 직접 붙일 때도 있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수행 기사는 매번 자신을 일컬으며 이리 소리쳤다.

-내가 바로 용의 핏줄이자 염발경 레이 윈슬로우의 주군, 루크 번스타인이다!

"이런 미친놈이...!"

49화

케이든 자작은 이를 갈았다. 이건 완전히 상정 외였다.

'안 그래도 레이의 이름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거늘!'

보통 서자는 가문에서 쥐 죽은 듯 살기 마련. 당연히 영지민들은 대부분 레이의 이름을 모른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레이를 언급하며 자기가 주군이라 하는 작자가 나온 것이다.

처음으로 인식된 이름이 '누군가의 기사'인 셈이다.

'제기랄, 이러면 나중에 골치 아파지는데.'

이젠 레이가 마음을 바꿔 가문을 섬기기로 하더라도 문제다. 왜 충성 맹세를 뒤집었냐고 누군가 물어볼 테니까.

종신 계약을 어기는 건 기사로서 엄청난 불명예. 당연히 레이의 본가인 윈슬로우 가문도 소문에 휘말린다.

"조용히 끝내기를 바랐는데 도대체 왜...!"

"아버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케이든 자작에게 리온이 다가왔다. 리온의 얼굴 역시 썩 좋지 않았다.

"어서 오거라. 너도 소문을 들었느냐?"

"예, 웬 수행 기사가 누님의 주군을 자처하고 있다더군요."

"어떻게 보느냐? 진짜로 그놈이 레이의 주군일 거라 생각하느냐?"

"거짓은 아닐 겁니다. 번스타인을 자칭했으니."

제국 전체에 이름값이 높은 번스타인 가문이다. 사칭하는 순간 가문에서 달려와 찢어 죽일 게 뻔하다.

그런데도 저리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답답함에 케이든 자작이 책상을 쳤다.

"도대체 동부에서 콕 처박혀 있어야 할 놈이 여긴 왜 왔단 말이냐!?"

"진정하십시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희망적인 관측은 수행 기사 활동을 하러 온 김에 겸사겸사 가신의 이름을 파는 중이라는 것.

레이가 이 지역 출신이니 가신을 통해 이름값을 높여 보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일단 지금은 정보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정보라고는 해도 베릭을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걸릴 텐데."

"자작 각하!"

그때, 바깥에서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다급한 모습에 케이든 자작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경망스럽게."

"베릭 경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아니, 그놈이 왜 벌써 돌아온단 말이냐?"

"자,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레이 아가씨에 대한 급히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일단 오라고 해라. 무슨 일인지나 들어 봐야겠으니."

케이든 백작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베릭을 불렀다. 중부까지도 못 갈 시간인데 어디서 정보를 물어온 건가?

* * *

잠시 후, 베릭을 만난 케이든 자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얼굴이 그 지경이 된 게야?"

"사정이 있었습니다, 숙부님."

베릭은 창피한 듯 얼굴을 슬쩍 돌렸다. 안 그래도 눈두덩이부터 입술까지 잘 구워진 빵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으니까.

"그 사정을 포함해 설명해 봐라. 정보는 어찌 된 게냐? 레이에 대해 말할 게 있다는 건 또 뭐고?"

"그게 사실은...."

케이든 자작의 재촉에 베릭은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서부의 어느 길목에서 루크 일행을 만난 일.

사정을 듣고 제압하려고 했던 일.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해서 내부 사정을 설명하고 며칠 만에 간신히 풀려난 일 등등.

모든 설명을 들은 케이든 자작이 노성을 토했다.

"가문의 일을 다 알려 줬다고!? 네놈은 머리가 있는 게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목을 당장 치려고 했기에...."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베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작 역시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속이 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정하십시오, 아버지. 그래도 놈에 대한 정보는 얻었잖습니까."

리온은 계속해서 책임을 추궁하려는 자작을 막아섰다.

"확실한 건 이제 놈이 우연으로 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누님을 찾기 위해 왔고, 지금 하는 짓은 모두 저희 가문에게 하는 선언입니다."

자신의 기사를 넘보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곧 되찾아 가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걸로 놈의 대처 방법도 정해졌으니까요."

"대처 방법이라니?"

"굳이 우연인지 오해인지 고민할 것 없이 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잖습니까."

리온의 눈이 번뜩였다. 진짜 주군이 왔다고 해서 레이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물며 몬스터에게 시달리는 서부도 아니고, 평화롭게 잘 사는 동부의 핏줄이라면 더더욱.

"그럼 넌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다고 보느냐?"

"우선 가장 먼저 저 나불거리는 입부터 막아야겠지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칭호지만, 더 퍼지게 놔두는 것보단 낫다.

"놈을 가문으로 초대하지요, 공식적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