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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화

"아카데미의 학업은 어쩌시고 가문에..."

"내년 봄까지 방학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사전 조사를 하겠다면서 뒤를 따라오더니만, 그런 것도 알아보지 않았더냐?"

율리히의 한심하다는 눈빛에 미하엘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사실 사전 조사 같은 건 한 적도 없다.

번화한 제국의 수도에 가고 싶었고, 적당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

당연히 도착해서는 탱자탱자 놀았다. 율리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그저 비꼬기 위해 하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검가의 자식이란 놈이 검을 이리 험하게 쓰다니."

"제 검을 어떻게 쓰든 제 마음 아닙니까. 참견하지 마시죠."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미하엘을 보며 율리히는 피식 웃었다.

"안 본 사이에 꽤 대범해졌구나. 하긴, 그러니까 형제 암살 같은 걸 시도했겠지."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참고 있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수군거림 때문에 미치겠는데 면전에서 저딴 소리를 하다니!

율리히는 동생의 분노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새로 들어온 동생이 형제가 아니라는 거냐? 아니면 네가 암살 시도를 한 적이 없다는 거냐?"

"양쪽 모두입니다! 애초에 형님은 앞뒤 사정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도 억울하면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나도 사실 궁금하던 차였으니까."

이제 막 성에 도착해서 저택으로 올라가던 차였다. 암살에 관한 건 영지민들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새로 생겼다는 동생은커녕 아버지조차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

당사자인 미하엘의 해명을 먼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작은 그냥 간단한 장난질이었을 뿐입니다!"

누군가한테 해명도 제대로 못 했던 미하엘은 한을 풀어내듯 모든 걸 설명했다. 처음 맥스에게 루크의 잠을 방해하도록 한 일.

놈이 지나치게 깊이 잠들어 뜻대로 되지 않은 일. 그리고 그날만 재수가 없이 들켜서 암살 사건으로 비약된 일.

마지막으로 맥스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일까지.

"그런데 암살 사건을 사주했다니, 억울해서 미칠 노릇입니다!"

"하아."

미하엘의 호소에도 율리히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만 드러낼 뿐이었다. 잠시 후, 율리히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지금 한 말에 빠진 게 하나 있구나."

"뭘 빼먹었단 말입니까?"

"애초에 그딴 장난질을 하지도 않았으면 누명을 쓸 일도 없었다는 것."

"...!"

미하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에 차서 반론을 내뱉기 직전, 그보다 빠르게 율리히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다 네 멍청함에서 비롯된 일 아니냐."

"저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럼 내가 알려주마."

율리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말했다.

"첫째, 가만히 있는 형제를 건드려 적으로 만든 것. 보아하니 꽤 능력이 좋다던데 위협적인 적을 만들었구나."

"반쪽짜리 놈이 머리 꼭대기에 앉아 형님 노릇을 하려 하는 데 가만있으란 말입니까!"

"네가 누군가를 때리면 상대도 주먹을 휘두르는 법이다. 네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느냐?"

미하엘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다. 버팀목이라고는 아버지뿐인 서자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딱 그 수준이었다. 하지만 암살 소동을 거치면서 루크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놈이 원한을 품고 날 몰아붙이려 한다면?'

일방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다. 지금 루크가 작정한다면 미하엘의 평판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추락시킬 수 있을 터.

상상하니 전신에 소름이 쭉 돋는 것 같았다.

"둘째, 부하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것. 대놓고 언제든 잘라버리겠다는 기색을 내비치는데 당연히 널 팔겠지. 간단한 이치 아니냐."

"그, 그래도 지금까지 받은 먹은 게 있는데!"

"일을 시키고 대가로 준 거겠지. 누가 보면 은혜라도 베푼 줄 알겠구나."

정곡을 찌르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필요할 때 말고는 맥스를 찾은 적이 없었다.

맥스 입장에서 미하엘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신분 높은 의뢰인으로 여겼으리라.

"셋째, 일이 잘못된 걸 알았으면 적극적으로 수습을 해야 하는데, 대비책 하나 마련했다고 생각 없이 손 놓고 있었던 것. 현실이 체스처럼 정해진 규칙대로 돌아가는 줄 아느냐?"

"...."

율리히의 일침에 미하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율리히는 미하엘이 시야 너머의 광경을 보고, 동생의 짧은 시야를 우습게 여겼다.

미하엘은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 네게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구나."

"...아버지를 뵈러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마침 소개해드릴 사람들도 있으니."

"소개해드릴 사람?"

"주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하엘이 흠칫하며 등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기이하게 생긴 세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얼굴 반쪽이 짓무른 꼽추였다. 얼핏 보면 흉측하게 생긴 게 전부인 평민이었지만 미하엘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 자, 암살자인가?'

풍기는 분위기,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이 맥스를 떠올리게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인 쪽이 맥스보다 훨씬 소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데 발소리를 듣기 힘들 지경이었으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를 얻었단 말인가?

'이 노인만 그런 게 아니야. 나머지 두 사람도 범상치 않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학자 같은 분위기의 젊은 남성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쪽도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군의 말씀대로 영지를 한 차례 돌아봤습니다."

"그래, 내가 자라난 고향은 어떻던가?"

"더할 나위 없이 좋더군요."

이번에 입을 연 건 뒤에 학자풍의 청년이었다. 그의 엷은 미소에는 억누른 흥분이 느껴졌다.

"치안이 좋고, 군사력은 훌륭하며, 지리적으로도 완벽합니다. 과연 대업을 이루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하하하! 그리 금칠을 해주니 기쁘군!"

"저는 오직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

청년은 살짝 허리만 굽혔으나, 그 작은 움직임에 경의가 느껴졌다. 자신의 주군에게 완벽히 매료되었다는 소리.

적어도 이 청년만큼은 율리히를 배반하지 않으리라. 맥스에게 엿을 먹은 자신과 비교하자 미하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번스타인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

한때 미하엘이 질시하고, 잘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칭호. 그러나 현실은 냉담했다.

율리히는 미하엘보다 훨씬 더 위에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위치에.

"자, 이제 저택으로 가자. 어서 아버지께 너희들을 소개하고 싶으니."

"예!"

미하엘은 수하들과 함께 떠나가는 율리히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한 후계자가 돌아왔으니, 다시 형과 끊임없이 비교될 차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반쪽짜리 서자놈.'

자신을 이곳에 처박은 상대이자, 지금 번스타인 가문의 떠오르는 별. 인재라면 환장을 하는 형이 루크를 가만둘 리가 없다.

확실히 손에 넣거나, 아니면 누구도 쓰지 못하게 부수거나. 십중팔구 둘 중 하나를 강요하리라.

'하지만 그놈은 형님 뜻대로 안 될 겁니다.'

미하엘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율리히가 엿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

아카데미의 방학을 맞은 후계자의 귀향. 백작은 가벼운 연회를 준비하며 기쁘게 율리히를 맞았다.

"어서 와라, 율리히! 아카데미에서 배운 건 많이 있었느냐?"

"견문이 많이 넓어지긴 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호오!"

언제나 성과를 낮춰 말하며 겸손을 떨던 장남이다. 견문이 넓어졌다는 소리를 할 정도면 제법 얻은 게 있다는 소리.

자랑스러운 아들의 성과에 백작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바로 듣고 싶으나, 가족에 대한 소개부터 먼저 해야겠구나. 들어오거라."

백작의 신호에 밖에서 대기하던 루크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율리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루크입니다."

"편지로 이야기는 들었다.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쁘구나."

미하엘과 달리 율리히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새 가족이 생겨서 진심으로 기쁘구나.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보자."

"믿음직한 형님이 생겼으니 저야말로 기쁠 따름입니다."

서로 미소지으며 루크와 율리히가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꿈꿔온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백작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가족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미하엘은 제 형의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본인이 예상했던 대로 율리히가 돌아오자마자 주가가 낮아지고 있는 미하엘이었다. 하지만 사실 루크 입장에선 이 상황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지금 율리히의 태도가 전부 가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새 가족이 생겨서 진심으로 기쁘긴 개뿔. 능력 있으면 부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율리히 번스타인. 기사도를 중시하는 가문의 기조와 달리 난세의 효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녀석.

인재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입하며, 스스로 거두지 못한다면 남이 못 쓰도록 철저히 망가뜨린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외부 이미지만큼은 완벽하게 유지하려 한다.

'뱃속에 구렁이가 득실거리는 놈이지.'

덕분에 회귀 전에는 참 많이도 휘둘렸다. 그때 당한 건 이번 생에서 톡톡히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 생각이었다.

루크의 생각을 모르는 율리히는 순진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듣자 하니 브루노 경이 네 기사가 되었다지?"

"예.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대단한 무력을 가진 기사지. 그 힘이 어디 쓰일지 걱정했는데 좋은 길을 가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참 잘 되었다는 듯 율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지금 생각난 것처럼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 소개해드릴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개할 사람이라?"

"제가 이번에 수도에서 거둔 이들입니다. 지금 두 사람은 잠깐 다른 곳에 가 있는지라 일단 한 사람만 먼저 소개해야겠군요."

율리히의 시선이 뒤로 슬쩍 향하자,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투구로 얼굴이 가려진 기사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레이 윈슬로우입니다."

"...?"

기사의 목소리를 들은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투구 안에서 목소리가 징징 울리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성인 남성이 아니라 변성기가 지나기 전의 소년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 레이 경. 레너드 번스타인일세. 인사는 잘 받았네만 우선 투구부터 벗어주겠나?"

전장이면 모를까, 인사를 나누는 데 투구를 쓰는 건 무례다. 백작이 살짝 나무라자 율리히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버지. 그 부분은 조금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라니? 투구를 벗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이냐?"

"정확히는 아직 벗지 못하는 겁니다. 가벼운 대련 한판 하고 나면 투구를 벗을 수 있습니다."

"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율리히는 백작의 의문에도 한번 빙긋 웃고는 루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크, 가능하면 브루노 경과 친선 대련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느냐?"

"친선 대련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사끼리 만났다면 한번 검을 맞대보고 싶은 법. 브루노 경의 무력을 내가 평소에 말해줬더니 꼭 한 번 싸워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정작 레이라는 기사는 율리히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안 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루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군요. 레이 경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저도 궁금하던 차입니다. 브루노!"

마침 주변에 브루노를 대기시켜 놓았던 터라, 바로 문을 열고 브루노가 들어왔다.

두 기사의 시선이 슬쩍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친선 대련은 드물지 않았다. 휘하 기사의 무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나 서로의 주군끼리 벌이는 신경전의 일환으로 자주 대련이 벌어졌으니까.

"잘 부탁드리겠소, 레이 경."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이상한 목소리에 브루노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고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루크의 뒤에 따라붙던 브루노가 속삭였다.

"주군, 어느 정도까지 할까요?"

"뭐를?"

"레이 경 말입니다. 보아하니 지노처럼 시건방진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아작을 내면 조금 가슴이 아플 것 같아요."

브루노의 속삭임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하니 참 보기 좋다. 브루노의 실력이면 대부분의 기사는 가볍게 이길 수 있으니 근거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전력을 다해서 싸워."

"예? 아예 재기불능으로 만들라고요?"

"그게 아니라 대충하면 네가 진다."

"에이, 농담도 참..."

브루노가 웃으며 손을 휘적거리자, 루크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거인의 혈통이 정령의 후예보다 강하던가?"

"...!"

그제야 속뜻을 알아챈 브루노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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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신비가 깃든 혈맥.'

브루노는 자신의 가문 말고 다른 혈맥을 이은 자와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생전 누누이 말씀하셨다.

-브루노, 고대의 혈통을 잇고 있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네가 세상을 떠돌다 보면 다른 일족과 마주칠 때도 있을 거다.

-다른 일족이요?

-그래. 용의 자손이거나, 정령의 축복을 받았거나, 악마의 피가 흐르는 놈들.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지만 없는 건 아니거든.

평소에 항상 장난기 가득하던 아버지가 그때만큼은 너무도 진지했다. 또렷한 아버지의 눈동자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만약 그런 놈들과 맞붙게 되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 평소 힘만 믿고 방심했다간 골로 갈 테니까.

-아버지는 만나보신 적 있어요?

-반쯤 미친 악마 잡종 새끼를 만났지. 이기기는 했는데 대가가 좀 크더라.

그 말을 하면서 브루노의 아버지는 왼쪽 눈을 만지작거렸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찢겨 빛을 잃은 눈이었다.

조금만 더 상처가 깊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흉터 자국은 컸다.

-명심해라. 약골들 천지라 감을 잃기 쉬운 세상이지만, 그런 놈들 앞에서 방심했다간 훅 가는 수가 있어.

재수 없으면 아비처럼 한쪽 눈으로 안 끝난다며, 껄껄 웃으셨다. 평소의 태도로 돌아온 아버지 앞에서도 브루노는 웃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던 아버지다. 완숙한 기술과 전성기의 육체를 지닌 지금도 아버지와 싸워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를 죽음 문턱까지 끌고 간 건 다른 고대의 혈통이었다.

"...창을 써야 할까요?"

브루노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말했다. 검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바스톤 가문의 진수는 창술에 있다.

승부를 가능하기 힘든 상대라면 모든 수를 써야 할 터. 긴장한 브루노의 모습에 루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됐어. 검만 써도 충분히 승산 있으니까."

"예? 방금 전엔 전력을 다하라면서요."

"얕보지 말고 진지하게 하란 소리지. 누가 친선 경기에서 죽자사자 싸우래?"

루크의 말에 브루노가 머쓱해졌다. 생각해보니 이건 아버지 때처럼 목숨 걸고 싸우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력 좀 보자는 친선 대련. 죽는 사람이 나오면 오히려 그게 문제다.

"아마 네가 저주 풀기 전을 기준으로 친선 대련을 신청한 거겠지. 그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설마 율리히 도련님이 절 지명한 게..."

"당연히 무력 최강의 기사를 화려하게 꺾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덤으로 그런 기사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과 인덕 자랑도 좀 하고."

브루노의 얼굴이 구겨졌다. 새로 들인 기사를 돋보이게 만드는 발판 역할로 쓰려 했다는 거 아닌가.

"반드시 이겨야겠군요."

"그렇다고 아예 묵사발을 내려 하진 말고. 주군과 달리 기사 쪽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서로 짠 거 아니에요?"

"레이 경은 자기가 원해서 율리히를 섬기는 게 아니거든."

율리히의 심복은 총 세 명. 책사가 한 명, 뒷공작 요원이 한 명, 그리고 무력 담당이 한 명.

그중에서 무력 담당인 레이 윈슬로우는 셋 중에서도 예외다.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는 두 사람과 달리,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부하가 된 경우.

명령하면 얌전히 따르기는 하지만 그게 명령을 이해하고 납득해서 따른다는 소리는 아니다.

"사실 이 대련의 의미도 모를걸. 그냥 시키니까 하는 거지."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시는 겁니까?"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루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무렸다. 정보의 출처가 회귀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뒷사정은 생각하지 말고 싸우는 데만 신경 써. 다른 혈통을 가진 자와 싸우는 건 처음이지?"

"뭐, 그렇긴 하죠."

"그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결을 하는 날이 되겠네."

"...."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껏 기사와 벌인 결투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힘을 빼고 해도 가지고 노는 수준이고,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면 얼마 버티지도 못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진짜 '대결'이란 걸 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셈이다.

'좋은데.'

브루노의 눈이 반짝이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껏 숨어있던 호승심에 불이 붙고 있었다.

****

레이와 브루노의 결투는 시작도 하기 전에 가문 내에서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았다.

그중에는 아직 업무 시간인 하인들도 많았지만, 백작이 특별히 참관을 허락했다.

안 그래도 여흥 거리가 적은 세계다. 이런 작은 여흥이 전부 능률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법.

-또 결투야? 미하엘 도련님의 기사가 팔병신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 나서는 건 율리히 도련님이 데려온 기사라던데.

-몇 분이나 버틸지 궁금하구만. 그나저나 친선 경기에 웬 투구?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하인들을 보며 율리히 옆에 선 젊은 청년, 오스카가 눈을 찌푸렸다.

"하인들이 지나치게 방종하군요."

"하하, 우리 가문의 가풍이지. 활기찬 게 보기 좋지 않나?"

"백작 각하께서 지나치게 자비로우신 것 같기도 합니다. 수도의 다른 가문에서 저랬다면 뼈도 못 추렸을 겁니다."

정쟁이 치열한 수도에서는 항상 물밑 싸움이 활발하다. 물어뜯을 거리만 있으면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당연히 하인들의 입단속에도 철저하다. 하인들이 입을 잘못 놀리면 정적에게 약점이 잡히기도 하니까.

"그런 놈들은 나중에 죽여달라고 사정을 하게 됩니다만. 저놈들한테 직접 보여주고 싶군요."

"진정하게. 시건방지게 보이겠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나름대로 장점도 있거든."

"그렇습니까?"

"우선 소문이 빠르게 부풀려진다는 거지."

율리히가 유리잔에 든 과일 음료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소문이란 건 원래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쉽게 부풀려지지. 그중에서 나는 후자를 많이 이용했고."

"이번 대결도 주군께는 후자에 들어가겠군요."

"그렇지. 내 불쌍한 아우에게는 전자겠군."

율리히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있는 이복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완벽한 우애의 미소. 루크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율리히의 미소는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다루기 힘든 놈이야."

"딱히 대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만큼 위장을 잘 하는 거겠지. 자신을 꾸밀 줄 알아. 그런 점에서는 나와 비슷하더군."

루크의 재능에 대한 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수많은 분야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고, 검술에도 엄청난 재능이 있다던가.

하지만 율리히가 보기엔 루크의 진짜 재능은 그런 게 아니었다.

'겨우 몇 개월 만에 아버지를 푹 빠지게 했고, 기사와 하인 전체가 매료되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랑 미하엘은 제대로 손도 못 댔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용인술. 이 세상의 모든 군주가 가장 갈망하는 능력. 그게 루크의 진짜 재능이었다.

율리히 역시 용인술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직접 용인술로 겨루어보면 자신이 우위를 차지할 거라는 자부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재능의 우열 따위가 아니었다.

'군주의 재능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용인술을 가진 자는 인재를 모으고, 인재는 힘을 가지며, 모인 힘은 권좌로 이어진다.

난세의 절대 군주를 꿈꾸는 율리히에겐 새로운 경쟁자가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불쾌했다.

하물며 자신이 영입해야 할 인재를 빨아먹을 가능성이 있는 놈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한풀 꺾어둬야 한단 말이지. 언제까지 기세를 타게 둘 순 없으니."

"도련님을 위해 명성까지 잘 쌓아뒀지 않습니까. 형님이 밟고 올라가도록 머리를 내밀어주는 동생분이 생겼으니 실로 경사입니다."

"쉬잇. 남이 들을까 겁나니 목소리 좀 줄이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율리히의 얼굴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가문 내에서 루크가 지금까지 쌓아둔 명성은 상당하다.

그중에는 브루노의 무력과 관련된 부분도 많다.

자고로 명성을 많이 가진 자가 패배하면, 그 명성 중 상당수를 승자에게 헌납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루크는 참으로 고마운 동생이기도 했다. 자신이 차지할 명성을 그만큼 늘려주지 않았나.

"여신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대결이 되기를. 검을 뽑으시오!"

연무장에 올라선 베르너의 선언과 동시에 두 기사가 자세를 잡았다. 율리히는 느긋하게 곧 쏟아질 환성을 기대하며 유리잔을 기울였다.

"자, 그럼 오랜만에 레이 경의 실력이나 볼까."

"브루노란 작자가 너무 금방 나가떨어지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저래 보여도 실력은 있어. 뭐, 레이 경에게 비할 바는..."

쩌엉

웃으며 이야기하던 율리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지자 입에 머금은 과일 음료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시 후, 경악한 율리히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스카 역시 넋이 빠져있었으니까. 연무장에선 폭풍이 불고 있었다.

****

쩌엉

"...?"

검이 맞부딪친 순간 레이는 놀라서 움찔 몸을 떨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기사는 휘청거리며 나가떨어질 힘은 담았다.

그런데 브루노는 정면에서 레이의 공격을 꿈쩍도 안 하고 받아냈다.

"이야, 제법 하는데? 얘기는 들었지만 좀 놀랐어."

"...제법?"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투구 속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껏 자신과 싸우면서 경악을 내뱉던 기사들이다.

그런데 제법이라니. 브루노를 놀라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레이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

하지만 놀란 건 레이였다. 발에서 지익 소리를 내며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어마어마한 근력이었다.

투구 안에 있는 표정이 짐작 갔는지 브루노가 웃으며 말했다.

"이봐, 레이 경. 힘 좀 쓰라고. 정령의 후예가 왜 이리 비리비리해?"

레이는 눈을 부릅뜨고 브루노를 쳐다봤다. 혈통에 관한 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인데 이 남자가 어떻게?

"주군께서 궁금해하시더군. 정령의 후예와 거인의 혈통 중 누가 더 강한 지 말이야."

"...!"

"내 생각엔 후자 같은데, 댁은 어때?"

잠시 떨리는 눈으로 브루노를 쳐다보던 레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들었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상대가 동류라면 힘을 아껴서 이길 수 없을 터.

레이는 전력을 다하기 위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싸워보면 알겠지요."

"명답이구만!"

쩌저정

웃음을 터트린 브루노가 다시 달려들어서 검을 섞었다. 수십 번의 검격이 부딪치며 요란한 불꽃을 튀겼다.

얼마나 그 속도가 빠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쩌엉, 꽝, 까가강

검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풍압이 뺨과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경하던 기사들 중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진정 인간의 싸움이란 말인가...?"

옆에 있던 기사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신화 속 반신들이 튀어나와 싸움을 벌이는 것 같지 않은가.

이미 대다수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조차 포기했다. 극히 일부의 기사들만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걸 보겠다고 고집스럽게 눈을 굴리고 있을 뿐.

"누, 누가 이기고 있는 거지?"

"모르겠네. 뭐가 보여야 알겠는데..."

"브루노 경이오."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말을 꺼낸 기사는 로더릭이었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너무 집중하느라 코피까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이 사방팔방 굴러가고 있었다.

"보, 보이는 거요?"

"거의 안 보이지만,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게 있소. 자세히 보면 레이 경이 수세에 몰렸고, 브루노 경이 완전히 압도하는 양상이군."

"...."

기사들은 할말을 잃었다. 하나도 안 보이는데 수세니 뭐니 해봐야 어찌 알겠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공방이 느려지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 진짜다! 레이 경이 수세야!"

"브루노 경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어!"

"허, 지금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판인데."

사람들은 로더릭에게 약간의 감탄을 던지고는 다시 전투로 눈을 돌렸다. 드디어 싸움의 양상이 보이기 시작하니 지금부터가 진짜 구경거리였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율리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브루노가 강한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면 내가 지금껏 잘못 본 건가?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계획이 일그러진 율리히와 달리 루크는 편안한 자세로 전투를 관람했다. 표정 관리가 거의 안 되는 율리히의 모습을 보며 루크가 히죽 웃었다.

'자고로 명성을 많이 가진 자가 패배하면, 그 명성 중 상당수를 승자에게 헌납하는 법이지.'

루크 역시 지금껏 가문에서 꽤 많은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가문의 후계자인 율리히만큼은 아니다.

사람 보는 안목과 완벽한 후계자로 유명한 율리히다. 그중 전자에 대한 부분은 뚝 떨어지고 루크에게 더해질 터.

'동생의 발판이 되기 위해 잘 오셨수,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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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까아앙

"큭!"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레이가 뒤로 물러섰다. 브루노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몰아붙였다.

비록 자신이 우위라지만 상대 역시 고대의 혈통.

어디서 역전의 수를 낼지 모르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다행히 전투 경험은 얕은 것 같군.'

순수한 신체 능력만 따지자면 브루노와 비등비등했다. 근력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속도가 빠르고, 순간적인 폭발력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강했다.

그러나 기사에게 중요한 검술의 노련함과 임기응변이 부족했다. 경험이 부족한 견습 기사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슬슬 끝내볼까.'

계산을 마친 브루노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흡!"

쩌엉

"...!"

귀가 아플 정도의 소리가 연무장 전체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이고, 하늘 높이 검이 날아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대로 하늘을 올라갔다 떨어지는 검을 향했다.

땡그랑

"..."

고요한 연무장에 쇳소리가 울리며 검이 떨어졌다. 남은 건 비틀거리며 빈손을 바라보는 레이와 검을 내린 브루노뿐이었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가운데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베르너였다.

"승자는 브루노 경이오."

"좋은 승부였소."

"...좋은 승부였습니다."

선언과 동시에 브루노가 인사하자, 레이 역시 조금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결투가 끝났다는 걸 비로소 인지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났음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 봤던 광경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짝짝짝

"실로 대단하군!"

유일하게 레너드 백작만이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나섰다. 백작은 연무장에 올라와 브루노와 레이를 바라보며 감탄하 얼굴로 소리쳤다.

"난 지금껏 시조 레오닉과 함께 영웅의 시대가 끝을 맺은 줄 알았네. 하지만 내 착각이었군. 전설의 영웅들과 비견될만한 기사가 여기에 둘이나 있었구나!"

"과찬이십니다."

"과, 과찬이십니다."

브루노가 겸손을 떨며 고개를 숙이자, 레이 역시 어설프게 따라 했다. 전투 경험만이 아니라 누구한테 치하를 받아본 적이 없는 태도였다.

"과찬이라니! 솔직히 말해 이것도 부족할 지경이네. 인류의 수호자가 될만한 인물이 둘이나 나왔으니 인류 전체의 복이 아닌가."

설령 섬기는 주군이 다르더라도 인간이라면 몬스터와 싸우는 법. 백작의 말은 위협적인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검으로 두 사람을 높이고 있는 셈이었다.

"하물며 둘 다 내 아들을 섬기니 아비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나? 내 자네들의 대련을 기리고자 연회를 열려고 하니 꼭 참여해 주게나."

"백작 각하의 말씀이니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히죽 웃은 브루노가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이고, 레이는 어색한 태도로 수긍했다. 백작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영웅의 재래에 축복이 있기를!"

"여신이시여, 위대한 기사들을 가호하소서!"

무를 숭상하는 기사들이 먼저 찬사를 보내자, 영웅담에 이끌린 하인들이 이어서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 박수를 치던 루크는 백작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평소 눈치는 없으신 분이 이런 건 잘하신단 말이지.'

방금 전 두 사람의 결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힘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

자칫하면 두 기사는 인두겁을 쓴 괴물, 혹은 사악한 힘을 받은 존재라 여겨지며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근데 딱 분기점에 나서서 좋은 쪽으로 돌려버리셨단 말이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는 괴물이나 영웅, 둘 중 하나다. 백작은 아직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때 후자로 인식을 고정해 버린 거다.

이제 가문 내에서 두 사람을 괴물로 인식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오직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라고만 여기겠지.

"참, 그러고 보니 율리히, 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대련이 끝나면 레이 경이 투구를 벗는다고."

"예.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참이었습니다."

율리히는 빙긋 웃으며 레이를 쳐다봤다. 부들거리며 표정 관리를 못하던 아까 전의 얼굴이 거짓말 같은 전환이었다.

"투구를 벗게, 레이 경."

"네."

레이는 투구에 손을 올리고는 그대로 벗었다. 안쪽에 드러난 얼굴을 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여, 여자!?"

투구 안쪽에 묶여있던 붉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피부는 진주를 연상시킬 만큼 하얗고, 눈동자는 비취와도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 또한 젊었다. 이제 막 만개하기 꽃봉오리라고 해야 할까.

"세상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던 그 기사가 여자였다고!?"

"게다가 저토록 젊을 줄이야. 열아홉에서 스물로 보이는데."

"남자라면 이제 막 견습 기사 딱지를 뗄 때건만."

사람들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백작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앳되어 보이는 목소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여자일 줄이야!

"이거 놀랍군. 여기사는 나도 몇 번 본 적이 없는데."

딱히 여자가 기사가 되면 안 된다는 법칙은 없다. 그러나 신체 능력이 부족한 여자의 몸으로 기사의 길을 걷는 이는 극히 드물다.

하물며 얼굴이 아름답다면 더더욱. 개고생하며 일개 기사가 되느니 큰 가문과 정략혼을 하는 편이 훨씬 편히 살 수 있으니까.

율리히는 백작의 옆에 다가와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여인이란 걸 밝히면 실력보다 성별을 먼저 보지 않겠습니까. 저는 레이 경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음, 과연."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세상에는 고정관념이 먼저 박히면 다른 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까 보여준 실력에도 고정관념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정식 서임은 받았고?"

"열아홉입니다. 서부의 엘리어스 자작 각하께 서임 받았습니다."

"허어, 그 나이 때는 나도 일개 견습 기사였거늘!"

백작이 감탄성을 터트리며 크게 웃었다.

"전설의 발키리가 여기에 있었군! 그대의 검이 발키리 못지않으니, 언젠가 승천하여 여신의 옆에 서지 않겠는가!"

"과, 과찬이십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는 있지만 감동한 티가 역력했다.

'저게 아버지의 숨은 진가란 말이지.'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주변 인식을 그쪽으로 끌어감으로써 사람을 감격하게 하는 것.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기에 대상은 더욱 감격하며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그 모든 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으니까.

'반대로 그런 아버지한테 끝까지 뻗대던 브루노도 대단한 놈이라니까.'

저주에 의한 절망감도 있겠지만, 그만큼 본성이 망종이라 그랬을 것이다.

"자, 이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그만두지! 지금은 영웅의 재림을 즐겨야 할 때니!"

대련이 끝나고 예정에 없던 연회 준비에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율리히는 기쁜 듯이 한껏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푸들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한 방 먹었구나, 동생아.'

가늘게 호선을 그린 율리히의 눈동자는 차갑게 루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브루노와 레이가 연회의 첫 번째 주인공이라면, 주군인 율리히와 루크는 두 번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율리히는 연회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귀환 여정 때문에 몸이 노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실제 이유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이야."

율리히는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래도 본전은 건졌으니 고정하십시오.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다 가문 최강의 기사와 비등하게 싸웠으니 나쁘지 않은..."

"겨우 본전만 챙겨서 뭐가 된다는 건가! 그건 패배자의 사고방식이야!"

주군의 일갈에 오스카는 찔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씩씩거리던 율리히는 이내 한숨을 쉬며 몸을 누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레이 경이 최강으로 올라섰어야 했어. 겨우 열아홉에 최강인 여기사 말이야."

그 경우 사람들의 인상은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껑충 뛰어올랐을 것이다.

유일무이한 영웅이자 전설의 재림으로.

하지만 브루노와 맞겨루다 패하면서 모든 게 꼬였다.

"하나는 둘이 됐고, 둘 중에서 뒤떨어지는 쪽이 되었지. 나이가 어렸느니, 경험이 부족했느니, 잠재력을 생각하면 따위는 전부 변명에 불과해!"

어찌 됐건 최강은 결국 브루노란 소리 아닌가. 그리고 그 최강의 기사를 보유한 건 율리히가 아닌 루크다.

사람들이 최강의 기사를 보유한 군주를 말할 때 율리히와 루크 중 누구를 떠올릴까?

"게다가 이복동생 놈은 더더욱 기가 살았지!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이겨서 기세를 꺾어줘야 했는데 부채질이나 실컷 해줬어!"

쾅, 소리가 나도록 율리히가 책상을 후려쳤다. 마지막에 대단한 기사를 두었다며 자신을 띄워주던 루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칭찬 속에 '대단한 기사네요! 내 기사는 최강이지만!'이라는 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기랄, 속이 터지는군. 이렇게 열이 뻗친 게 얼마 만인지."

"소인이 나설 차례입니까?"

그때, 방구석에서 꼽추 노인이 스산한 목소리를 울렸다. 율리히는 잠깐 멈칫하고는 노인을 바라봤다.

"방법이 있나?"

"암살자에겐 단 하나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지요. 수단은 여러 개지만."

"됐다."

의미심장한 노인의 말을 율리히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 너를 쓰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지. 오히려 지금껏 쌓아온 것들마저 무너뜨릴 뿐이야."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꼽추 노인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율리히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조금 기분은 가라앉았다.

최후의 수단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마음의 여유를 다르게 만들었으니까.

"하여간 골치 아프게 됐어. 어떻게든 놈의 기세를 꺾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선물을 하시는 게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만."

"선물?"

오스카를 쳐다보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신 있는 책략을 내놓을 때 주로 짓던 표정이었다.

"주군께서는 던전에서 얻으신 검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 마검 말인가?"

율리히가 눈을 찌푸렸다. 분명 느껴지는 힘은 보통이 아니건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애물단지 검.

덕분에 상자 속에 처박아 놓고 있을 뿐이지 휘둘러 본 적 한번 없었다.

"이제 곧 성년식이 아닙니까."

"그렇지. 새해가 다 되었으니."

"성년식에는 마땅히 가족에게 축하 선물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마검 정도면 딱 좋겠군요."

"오호라!"

오스카의 말에 율리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검이라 생각했건만 사용할 구석이 여기에 있었다.

"아시다시피 그 마검은 힘을 못 끌어내는 자에겐 그저 철검이지요."

"그렇지."

"하지만 마검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자에겐 오히려 반발합니다."

"덕분에 내 손이 다 타들어갈 뻔 했지 않나."

"그렇습니다. 용의 피가 흐르는 번스타인 가문의 자손에게는 자격이 있었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오스카가 빙그레 웃었다.

"동생분도 비록 서자라지만 용의 피를 잇고 계신 분 아닙니까."

"마검의 힘을 이끌어낼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지."

"그러니 매우 기뻐하시겠지요. 안에 엄청난 힘이 도사리는 검이니."

"하하하! 참으로 좋은 생각이군!"

율리히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왕이면 검을 주기 전에 몇 가지 사전 작업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잘만 하면 승천하는 동생의 기세를 뚝 꺾어버릴 방법이니.

'손해를 보려 하지 않으면 그만큼 반동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동생아. 이번 일이 네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루크를 떠올리는 율리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

그날 밤, 연회에서 돌아온 루크가 찬찬히 날짜를 계산하며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곧 새해인가?"

"며칠 안 남긴 했군요."

"그러게 말이다. 내 성인식도 이제 금방이군."

이 세상에서 성인식은 열여섯 살이 되는 새해에 치른다. 그때 성인식을 치르는 사람에겐 가족에게서 축하 선물을 받았다.

귀족과 평민에 상관없이 모든 이가 치르는 행사였다.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좋은 검 하나가 필요했는데."

"예? 검이라뇨? 누가 검 준다고 얘기라도 했습니까?"

축하 선물은 자기가 직접 말해서 받는 게 아니다. 주는 사람 쪽에서 마음대로 정하는 거다.

그런데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하다니.

"아, 사실 우리 형님이 엄청 좋은 검을 선물해 주실 예정이거든."

"율리히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 다 아는 방법이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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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어슴푸레한 방에서 율리히는 구석에 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거무튀튀하고 먼지가 가득한 상자.

누가 봐도 귀한 물건이 들었다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초라해 보였다.

"설마 이놈을 또 꺼내게 될 줄이야."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은 율리히가 상자의 자물쇠를 열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덮개가 올라가자 숨겨져 있던 물건이 드러났다.

그건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검신은 백은으로 만든 것처럼 새하얗고, 손잡이 부분은 사파이어와 같은 광채로 반짝였다.

'겉모습은 성검이 따로 없건만.'

율리히는 혀를 차며 검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자 검신에서 은은한 빛이 나며 부르르 떨렸다.

-누가 나를 깨우는가...

"나다."

음산한 목소리에 다시 한번 율리히의 눈동자가 찌푸려졌다. 이 검을 만든 작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삐뚤어진 인간이 틀림없었다.

자아를 가진 검이라면 목소리라도 좋게 만들어줘야 할 것 아닌가. 막 무덤에서 일어난 망자 같은 저 목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아, 누군가 했더니... 용의 피를 이은 꼬맹이였군...

크크크.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검이 빛을 발했다.

-날 잡은 손가락은 멀쩡하더냐...? 데인 상처가 꽤 아팠을 터인데...

"보다시피 상처 하나 없지. 마검의 불꽃도 별거 아니더군."

-예나 지금이나 재밌군... 허세부리는 꼬맹이를 구경하는 건...

무심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마검이었다. 일개 검 주제에 자기가 악마라도 되는 양 말을 한다.

검의 본분도 다하지 못하는 주제에 초월자 흉내라도 내는 건가?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이지...? 또 내 주인이 되고자 온 건가...?

"아니. 너한테 어울리는 주인을 소개하러 왔다."

-내게 어울리는 주인이라고...?

마검이 불쾌하다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주인 따위는 없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무척이나 잠재력이 있는 용의 자손이지. 내 동생이기도 하고. 아마 네가 잡자마자 인정하겠지."

-그럴 일은 없다...

"음, 그럼 굴복인가?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며 감격에 떨지도 모르겠군. 건방진 네가 환희하며 누굴 섬기는 모습을 볼 수..."

-닥쳐...!

화르륵

검이 반발하기 무섭게 율리히가 냉큼 손가락을 뗐다. 방금까지 검을 만지던 자리에 푸른 불꽃이 확 치솟았다.

성질을 내는 마검의 태도에 율리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정해라. 그저 내 예상일 뿐이니."

-나는 아무도 섬기지 않아...!

"글쎄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지 궁금하군"

-네 이놈...! 용의 찌꺼기가...!

거기까지 말한 마검의 목소리는 도로 수그러들었다. 마검이 다시 빛을 잃자 율리히가 상자를 닫고 뒤돌아섰다.

"여전히 지독한 성질머리군."

"괜히 마검이 아니겠지요."

대기하던 오스카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넘겨받았다. 율리히는 마검이 담긴 상자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성질을 제법 건드려 놓았으니 누가 깨우든 활활 태우겠지. 동생이 어떤 꼴이 될지 기대되는군."

"지금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마검이 듣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격이 있는 자가 만져주지 않으면 잠만 퍼질러 자는 놈이니."

반대로 자격있는 자가 만지는 순간 바로 일어나 난리를 칠 거다. 율리히는 그 순간이 기다려졌다.

이번에 불꽃이 태우는 건 자신의 손이 아닌, 이복동생의 손일 테니까.

****

몇 주 후, 새해가 밝아왔다. 평소라면 그저 한해가 무사히 지나간 걸 감사하며 덕담이나 나누는 날.

하지만 이번 새해에 번스타인 가문은 꽤 부산스러웠다.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이야, 주군의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제대로 꾸미니 평소보다 몇 배는 낫군요."

브루노와 맥스가 루크를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금실로 자수가 된 예복에 위로 빗어 올린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거울을 확인한 루크는 나머지 두 명을 보며 혀를 찼다.

"너희들도 좀 꾸미고 다녀라. 왜 평소랑 똑같아?"

"기사가 뭔 외모에 신경을 씁니까. 그랬다간 욕이나 먹을 텐데."

"전 지금 외모에 신경 쓰면 지금 맞아 죽습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초적인 성향이 있는 기사 집단에서 외모를 가꾸는 행동은 썩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맥스의 경우는 휘하로 들어온 배경이 배경이다. 이 상황에서 거울이나 보고 다니면 네 죄를 잊었냐고 두들겨 맞겠지.

"쯧. 나만 고생이군."

"말은 그리해도 꽤 기분 좋으신 것 같습니다?"

뻑뻑한 예복을 점검하는 루크를 향해 브루노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루크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야 뭐, 오늘 받을 게 꽤 푸짐하니까."

백작에게서 받는 선물은 딱히 달라질 게 없다. 번스타인 가문의 자식들이 성년식에 받는 선물은 정해져 있으니.

다만 율리히에게서 받는 물건은 제법 기대가 되었다.

"율리히에게서 선물 받을 때 니들이 나서는 거 잊지 마라."

"그런데 진짜 율리히 도련님께서 마검을 줄까요? 그것도 꽤 위험한 물건을."

"주고도 남지. 그런 놈이니까."

회귀 전엔 '너, 내 부하가 돼라'라는 제안에 가운뎃손가락 올렸다고 그 짓거릴 한 놈이다.

하물며 얼굴에 대놓고 똥칠을 한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선물이란 핑계로 당당히 엿을 먹일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

"그러니 합이나 잘 맞춰. 대사 까먹지 말고."

"걱정 마십쇼. 어제 몇 번이고 맥스랑 연습해 봤습니다."

"그런데 저만 대사가 조금 많지 않습니까? 브루노 경은 옆에서 추임새만 넣으면 그만인데."

"남부 기사보단 신비한 동방의 암살자가 설명하는 게 그럴싸하지."

루크의 말에 맥스가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배경만 따로 보면 자신이 더 적절했다.

어쨌건 '동방'이 붙으면 왠지 신비해 보이니까. 만들어낸 가짜 배경이지만 말이다.

그때 바깥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성년식 준비가 되었습니다."

"알았다. 곧 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루크는 마지막으로 예복을 점검하고 밖으로 나섰다. 처음으로 셋이서 장단을 맞춰볼 시간이었다.

****

"두 사람 다 그리 잘 차려입으니 몰라보겠구나."

기사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두 아들을 바라봤다. 루크는 고개를 공손히 숙였고, 미하엘 역시 묵묵히 인사했다.

솔직히 미하엘은 반쪽짜리 서자와 같이 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일어난 '암살 사건'의 반향이 너무 컸다.

여기서 천것이니 뭐니 징징거렸다간 억누른 백작의 분노가 터져 나올 게 분명했다.

'제기랄, 어쩌다가 내 신세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미하엘을 눈치채지 못한 백작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본디 성년식은 부모가 같이 해주는 게 관례이건만, 헬레나는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구나. 아쉬울 따름이다."

"병을 낫기 위해서인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헬레나는 울화병을 다스리기 위해 얼마 전 별장으로 내려갔다. 사실 속내는 루크의 성년식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란 측면에서는 옳은 결정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너희들이 이토록 무탈하게 성년이 되었으니, 아비로서 선물을 줘야겠지."

"...!"

미하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번스타인 가문의 성년식에는 항상 같은 선물을 받는다.

바로 가문에서 보관하는 보물고에서 한 가지 물건을 고르는 선택권.

귀족이라는 걸 고려해도 파격적인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럼 누가 먼저..."

"당연히 루크가 먼저 골라야지. 네가 동생이니까."

미하엘의 질문에 백작은 가차 없이 대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서늘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여기서 또 물고 늘어지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하엘, 대답해라. 루크가 먼저 선택하는 게 맞겠지?"

"...네."

결국, 미하엘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루크를 바라봤다.

"자, 루크. 말해봐라.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느냐?"

요 며칠 동안 보물고 출입 권한을 주어 충분히 고를 시간을 줬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미리 눈도장을 찍어뒀을 터.

무구든 갑주든, 이름 있는 예술품이든. 원하는 건 무엇이든 줄 생각이었다.

"저는 초대 가주께서 쓰셨던 팔목보호대를 원합니다."

"뭐? 그런 잡... 평범한 물건을?"

깜짝 놀란 백작은 무심코 잡동사니라고 하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미하엘도 생각지 못한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예. 다름 아닌 용살자께서 사용하신 물건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만... 아무리 그래도..."

백작이 어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초대 가주의 물건이니 차마 자기 입으로 깎아내릴 순 없었다.

'그건 상징성을 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인데.'

팔목보호대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론 그냥 낡아빠진 붕대일 뿐이다. 눈에 띄는 점이라곤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부식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표면에 지금은 보기 힘든 룬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 정도다.

처음엔 전대 가주들도 마법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기대했었다. 하지만 썩지 않는 것 외엔 별 효과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줄곧 내팽개쳐뒀다.

"정말 그걸로 충분하겠느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초대 가주께서 직접 팔에 감고 다니며 검을 휘두른 물건 아닙니까. 직접 그 혼을 느끼며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허어!"

백작은 루크의 의기에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리도 올곧은 마음가짐이라니! 백작은 하인을 시켜 보물고에서 진홍색 붕대를 가지고 왔다.

갑주가 발달한 오늘날엔 가난뱅이 기사 외에 아무도 쓰지 않는 팔목보호대였다.

"받거라. 네가 말한 물건이다. 시조 레오닉께서 마지막 전장에서도 이걸 두르고 출전하셨지."

"직접 여기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원한다면 그리하거라."

백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크는 예복을 올려 팔목에 붕대를 휘감았다. 룬문자가 겹쳐지며 물결치는 게 겉보기엔 제법 그럴싸했다.

만족스럽게 미소지은 루크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니다. 네가 실질적인 이득이 아니라 시조의 혼을 느끼고자 하니, 그 의기가 나를 더 감탄하게 하는구나."

'아닌데. 이거 실질적인 이득이 엄청나게 있는 건데.'

루크는 속마음을 삼켰다. 회귀 전에도 성년식에 고른 건 이 붕대였다. 물론 그때는 자의가 아니었다.

헬레나와 두 아들이 '가치 있는 거 고르면 죽는다'라는 눈치를 팍팍 줬으니까.

어쩔 수 없이 최대한 가치 없는 걸 고르다 보니 상징성만 남은 붕대를 고르게 됐다.

'근데 생각보다 엄청 좋은 물건이었지.'

마법사가 거의 씨가 마르고, 마법이 걸린 물건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는 세상이다.

그중에서 이 룬문자가 새겨진 붕대엔 상당한 고위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전대 가주들은 뭔 마법이 걸렸는지 몰라서 가치를 알 수 없었던 것뿐이다.

"...가치란 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 저에겐 이 붕대가 초대 시조의 혼을 느낄 수 있는 보물입니다."

"네 말이 옳다!"

당연하지만 말할 생각은 없다. 누구 좋으라고?

"그래, 미하엘은 무엇을 원하느냐?"

"저는..."

순서가 넘어가자 미하엘은 냉큼 명검을 골랐다. 백작은 약간 실망하면서도 흔쾌히 검을 내주었다.

선물의 증정이 끝나자,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율리히가 나섰다.

"아버지, 저도 두 동생에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오, 참으로 기특하구나!"

백작이 생각지 못한 제안에 환히 웃었다. 역시 형제의 우애를 생각하는 첫째 아들이구나!

율리히는 빙긋 웃으며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뒤에 있던 오스카가 나섰다.

"백작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오스카 데일드란입니다."

"그래, 이름은 많이 들었네. 젊은 현자라 불린다지? 그 나이에 대단하군."

수도의 제국 대학에서 열일곱 나이에 월반하여 입학한 천재. 게다가 졸업할 때 모든 과목은 최우수 성적이었다고 한다.

백작의 귀에도 이름이 들려올 정도의 유명인사. 그런 자가 어느새 율리히 곁에 있었다.

당연히 백작의 얼굴도 밝아졌다. 차세대를 짊어질 인재가 후계자를 지탱하는 셈이니.

"부풀려진 소문일 뿐입니다."

"겸손은 됐네. 그나저나 하인이 아니라 자네가 직접 선물을 들고 오다니, 무슨 일이 있나?"

"그만큼 드릴 선물이 중요한 물건이라 그렇습니다."

오스카는 딸칵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었다.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검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이, 이 검은 뭔가?"

"던전에서 잠들어 있던 고대의 검입니다."

"뭣!"

예상치 못한 오스카의 말에 모든 이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던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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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아직 인간에게서 용살자와 대마법사가 탄생하던 시절. 고대의 마법과 신의 축복을 받아 탄생한 물건들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격에 쇳덩이를 무 자르듯 썰어버리는 마검이라던지. 혹은 마시는 것만으로 젊음을 되찾아주는 포션이라던지.

그중에는 아예 불로불사의 영약이나,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 승천하게 만드는 성유물마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모든 이가 침을 질질 흘리며 보물을 탐냈다.

-목숨이 대수냐! 일단 빼돌리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지는데!

영웅은 자연스레 온갖 도둑들에게 시달렸다. 소유주의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탐욕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게 했다.

차라리 들고 다니지 말고 누군가한테 맡기면 편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였다.

-그 약을 짐에게 다오!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 거부한다면 총력을 기울여 네놈을 칠 것이다!

대국의 왕들조차 탐욕에 눈이 돌아가서 달려드는 판국이다. 누구한테 맡기던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믿을 만큼 무욕한 사람은 끊임없이 습격에 시달리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 넘기면 자기가 꿀꺽해 버린다.

참다못한 보물의 소유주들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군대가 들어오지 못할 만큼 좁고 위험한 장소에 숨기자.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온갖 함정과 미로, 방어 시설도 설치하고.

그렇게 탄생한 장소가 던전이었다. 아이디어 자체만 보면 별다를 것도 없었다. 문제는 제작자가 반쯤 인간을 벗어난 작자들이었다는 것.

용의 화염을 검과 마법으로 받아치던 인간들이다. 당연히 던전의 함정도 상궤를 벗어난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더 군대를 밀어 넣어! 어떻게든 보물만 찾으면 된다!

-장난하십니까!? 지금 군단의 반이 던전에서 몰살당했단 말입니다!

-그래 봤자 인간의 함정이다. 나 같은 드래곤이라면... 아아악!

-이런 미친! 고룡이 던전의 함정에 뒤졌다!

던전의 무시무시한 함정은 탐욕에 사로잡힌 도둑과 왕, 심지어는 용마저 쓸어버렸다.

비록 성공하는 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도 일부만 간신히 들고 도망치는 수준에다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물 대부분은 무사했다. 그중에는 소유주가 급사해서 보물을 회수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도 있다.

'가장 가치가 적은 물건마저 국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물고.'

그게 바로 던전이다. 지금은 재현할 수 없는 온갖 신비가 잠든 장소. 발견되면 대륙 전체가 들썩이는 폭풍의 눈.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검이 그 던전에서 나온 물건이란니! 백작이 경악에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진정 이게 던전의 보물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이름을 건다는 건 곧 귀족의 신분을 건다는 것. 오스카의 호언장담에 다들 턱이 빠질 정도로 놀라 검을 연신 바라봤다.

사람들의 반응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오스카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물건은 우연히 얻게 되었습니다. 던전의 기능 중 일부는 세월의 흐름에 노출되어 망가진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들어는 봤네. 아무리 강대한 마법이라도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고대의 마법이라고 영원한 건 아니다. 촉매 없이 순수한 마법만 걸어둔 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점차 약해진다.

이 때문에 던전의 시설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용들도 실패했던 던전 공략이 현대에 가능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지만, 저와 주군은 던전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입구가 아니라 측면이 무너지면서 내부가 드러났었지요."

"그, 그렇다면!"

"아쉽지만 이미 폐허가 된 던전이었습니다."

냉큼 보물 얘기를 꺼내려던 기사의 말을 오스카가 막았다.

"던전 내부에 있던 건 상당수가 마도서였습니다. 하지만 마법이 사라진 탓인지 글자는 해지고, 책의 페이지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부서졌지요."

"아아!"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탄식했다. 그 하나하나가 천금과 같은 가치의 보물들이건만!

실제로 발견한 던전의 보물들이 세월 때문에 못 쓰게 되는 건 드물지 않았다.

다만 그중에서 딱 하나만 멀쩡해도 본전을 챙기기에 대륙이 들썩이는 거다.

'그리고 멀쩡한 것도 몇 개 있기는 했지.'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오스카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 던전의 중앙에 이 검만큼은 빛을 잃지 않고 찬란히 빛났습니다.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그, 그래서?"

"저와 주군은 검을 가지고 던전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지요."

"...율리히, 내가 듣고 있는 게 진실이란 말이냐?"

어지간해서는 사람을 믿는 백작이지만 지금 말은 너무 엄청났다.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두 번째 확인에 율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허, 허허!"

백작이 휘청거렸다. 그렇다면 이건 국보급 검이란 소리다. 번스타인 가문에서도 이에 비견될만한 건 초대 가주의 검 정도밖에 없다.

너무나 엄청난 비밀에 백작이 야속한 눈빛으로 율리히를 바라봤다.

"도대체 왜 말하지 않은 것이냐?"

"죄송합니다. 이 검이 어떤 검인지조차 제대로 몰랐기에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명검이나 보검이라면 모르지만 마검일 가능성도 있던 터라..."

"으음. 분명 그랬다면 애물단지에 불과했겠지."

던전의 보물이라도 사용자에게 파멸을 안겨다 주는 마검이라면 백해무익하다. 쓸데없이 주변의 탐욕만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알아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건 주인을 선택하는 성검입니다."

"성검...!"

마를 물리치고 악을 멸한다는 성검이라니. 공식적으로는 대륙에 다섯 자루밖에 없다는 엄청난 물건 아닌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기 직전, 다시 오스카가 나서서 소란을 잠재웠다.

"하지만 문제는 소유주를 선택한다는 겁니다. 소유주로 선택받지 못하면 그저 평범한 검에 불과합니다."

"무슨 뜻인가?"

"보시지요."

오스카는 어설픈 자세로 검을 들더니, 옆에 놓인 탁자를 향해 휘둘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조각이 튀었다.

"명검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로군. 검날이 무뎌."

아무리 검술에 조예가 없는 오스카라지만, 좋은 검이라면 보통의 나무 정도라면 종이처럼 썰어버려야 하는 법이다.

근데 그냥 일반 검하고 별다를 게 없는 위력 아닌가.

"맞습니다. 당시 던전에서 본을 뜬 글귀를 해석한 결과 검은 선택한 소유주가 아니면 힘을 주지 않습니다."

"허, 그런 종류의 검이 있다고 듣기는 했네만."

"다만 검신은 그 무엇보다 튼튼하고, 몬스터나 사악한 자가 잡으면 손을 불태우는 힘이 있더군요."

"오오!"

진짜 성검 맞냐고 실망하던 사람들이 다시 감탄사를 터트렸다. 스스로 몬스터와 악인을 판별하고 태우는 검이라니!

"율리히, 설마 너는 이 검을 루크에게...?"

"예. 동생의 성년식 선물로 주고자 합니다. 어차피 전 주인으로 선택받지 못했으니까요."

"진심이더냐? 네가 주인이 아니더라도 천금의 값으로 팔 수 있는 검이다."

백작의 말에도 율리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물건에는 올바른 주인이 있는 법입니다. 쓰지도 못하는 보물에 욕심내며 세상을 떠돌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율리히. 네가 진정 자랑스럽구나."

아들의 말에 감동받은 백작은 눈물을 글썽였다. 저런 마음가짐이라니, 후계자 하나는 잘 키웠구나!

"자, 루크. 어서 받거라."

"이런 엄청난 검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형님!"

"됐다. 우린 형제가 아니더냐."

눈물을 글썽거리는 루크를 보며 오스카와 율리히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곧 자신의 손을 태울 검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러는 꼴이라니.

'사악한 자를 태우는 검이라고 말도 해놓았겠다. 이제 뜨거워서 검을 떨어뜨리고 뭐라 변명할지가 볼만하겠구나.'

다른 누구도 태우지 않으면서 루크가 잡으면 달구어지는 검. 가문은 물론 영지 전체에서 소문이 퍼질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며 사악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단정하겠지.

"어서 들어보거라. 이제 네 검이다."

"그럼 기꺼이!"

루크는 냉큼 내밀어지는 검을 받았다. 검신을 양손으로 쥔 순간, 루크의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네놈... 용의 피...! 그놈의 동생이구나...!

마검은 분노에 차서 몸을 떨었다. 이놈이 내 주인이 될 자라고?

-어디 한 번 보자꾸나... 이걸 버틸 수 있는지...!

****

우우웅

"루, 루크 도련님이 잡은 순간 검이...!"

울음소리를 내며 떨리는 검을 보고 기사들이 경악했다. 율리히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며 미소지었다.

'큭, 어지간히도 짜증난 상태였나 보군. 저 정도로 떨릴 줄이야.'

저 떨림은 손잡이에 열을 발생시킬 때 내는 떨림이다. 율리히 역시 처음 검을 잡았을 때 저런 식으로 화상을 입었었다.

검이 떨린다 싶더니 손바닥이 확 뜨거워지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화상이란 다른 상처보다 유난히 아픈 법이지. 놀래서 관중에게 집어던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생각을 이어가던 율리히의 눈이 점차 찢어질 듯 커졌다. 진즉 화상이 일어나고도 남아야 하는데 루크는 검을 멀쩡히 잡고 있었다.

아프기는커녕 뭔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 어째서!"

저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지만, 모두 시선이 루크에게 쏠려 알아채는 자는 없었다.

경악한 건 율리히와 오스카만이 아니었다.

-이노옴...! 왜 놓지를 않는 것이냐...!

마검은 기겁하며 온도를 올렸다. 화상 수준이 아니라 살이 짓무를 온도가 되었는데도 루크는 말짱했다.

표정관리를 한 루크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왜긴, 화염 저항 아이템 장비했으니까 그렇지.'

레오닉의 팔목보호대에 숨겨진 마법. 그게 소유주와 소유주의 장비품들을 화염과 열기에 면역으로 만들어주는 거다.

시조 레오닉이 용의 화염을 아랑곳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진홍색 붕대 덕분이다.

'이거 두르고 불에 뛰어들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기능이지.'

괜히 전대 가주들이 뭔 마법인지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다. 일단 불에 닿아야 하는데 어느 미친놈이 그러겠는가.

루크도 회귀 전엔 우연히 이 기능을 알아차렸다.

'산적 놈들한테 잡혀서 불덩이에 처넣어졌던 게 계기였으니까.'

예전에 의뢰로 어느 도적단 놈들을 도륙한 적이 있다. 그쯤 되면 보통 공포에 질려 도망치겠지만, 도적들은 생각보다 독종이었다.

며칠 후에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고 술집 주인을 협박해 약을 탔으니까. 루크는 속수무책으로 잡혀서 놈들에게 끌려왔다.

-기사 나리의 꼴이 참 볼만 하구만! 불에 타 죽기 전에 할 말 있나?

-야,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냥 칼로 죽이라고!

-싫은데? 동료들 다 죽여버린 네놈한테 그런 죽음을 안겨줄 것 같으냐?

도적들은 고통 속에 죽게 해주겠다며 루크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덩이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루크는 전혀 불에 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묶고 있던 밧줄만 활활 타서 사라졌다.

-시, 시발, 이거 뭐야? 불이 붙었는데 왜 멀쩡해?

-...이 새끼들 다 죽었어.

결과적으로 루크는 살아남았고, 남은 도적 네 명은 루크의 손에 절명했다. 그때 비로소 붕대에 걸린 마법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이왕 받은 거 아깝다며 계속 두르고 다닌 게 신의 한 수였다.

-근데 시발, 생각해보니 이거 두르고 검 받았으면 되는 거였잖아?

성년식 중이라 옆으로 빼둔 게 문제였다며 땅을 치고 후회한 건 그다음이었다.

'어, 속 시원허다!'

기겁한 율리히와 당황하는 마검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오스카는 주군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못 차리며 중얼거렸다.

"도, 도대체 어떻게..."

"아니 저건!"

그때, 넋이 빠진 기사들 사이로 맥스가 냉큼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로는 들어봤지만, 설마 살아생전 이걸 실제로 보다니!"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건가, 맥스!"

단숨에 시선이 맥스에게 집중되자, 브루노가 놀란 얼굴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습니다! 옛 조직에 속해있을 때 동방의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 동방의 고서!"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출처 하나 넣어주고.

"저건 바로 검명! 검이 진정한 주인을 만났을 때 기뻐 우는 현상입니다!"

"그럴 수가! 주군께서 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아니야, 미친놈들아!'

두 사람의 교환에 율리히는 냅다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냥 손잡이에 열을 가하는 행위로 떠는 건데 검명은 무슨!

"세상에, 성검의 선택을 받으시다니!"

"역시 루크 도련님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은 그대로 믿어버렸다. 환호하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마검이 짜증을 냈다.

-저런 헛소리를 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제게 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거, 검의 목소리!"

-그래... 네가 설명해줘라... 내가 떠는 이유는 바로...

"드디어 저를 만났다면서 울고 있군요. 이건 검 나름의 환희인 겁니다...!"

"오오! 역시!"

-...이 새끼가?

만약 마검에게 혈관이 있었다면 지금 핏대가 솟았을 것이다. 분노한 마검은 힘을 끌어내며 말했다.

-이래도 망발을 떨겠느냐...!

화르르륵

"부, 불이다!"

푸른 화염이 검 전체를 휘감자 다들 기겁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루크는 멀쩡했다.

루크가 검을 가만히 잡고 있자, 또 맥스가 튀어나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저 현상마저! 내가 저걸 두 번째로 보게 되다니!"

"저것도 알고 있는 건가, 맥스!"

아까 전처럼 브루노가 한 번 받아주고.

"그렇습니다! 예전 조직의 총수가 소유했던 던전의 무구에서 저런 현상을 봤습니다!"

신빙성 넘치는 증언 하나 끼운 다음에.

"저건 바로 진신개방! 검이 숨은 힘을 끌어내며 주인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는 행위입니다!"

"저 화염이야말로 검의 진짜 힘이란 말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적당히 바람 한 번 넣어준다. 나머지는 말없이 검을 잡은 루크가 눈을 감고 분위기를 잡아주면.

"그렇군! 검이 나서서 도련님과 교감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검과 마음을 나누었다던 영웅이 있었지..."

"이 현상이야말로 주인을 기뻐하는 검의 표현!"

-아니라고... 개새끼들아...!

마검이 쌍욕을 내뱉었지만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그런데 정작 잡고 있는 놈은 목소리를 개무시하면서 시치미만 뗀다.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보자...!

푸화아악

마검은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서 불길을 루크의 몸에 옮겨붙게 했다. 순식간에 전신이 타오르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멀어졌다.

"뜨거워! 여기까지 열기가 느껴진다!"

"이, 이보게!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일부 기사들이 맥스를 쳐다봤다. 솔직히 맥스도 할 말이 없었다. 딱 여기까지만 상정했는데 더 뭐라고 하지?

'브루노 경, 어쩌죠?'

'일단 아무 말이나 그럴싸하게 해봐.'

'그게 먹히겠습니까?'

'분위기가 이 정도면 뭔 개소리를 해도 먹힐걸.'

브루노와 눈짓 교환을 잽싸게 끝낸 맥스가 소리쳤다.

"저, 저건! 오직 고대의 기록에서만 있었다는 현상!"

"저것마저 뭔지 알고 있는 건가 맥스!"

추임새는 똑같이 넣어준 후에.

"그렇습니다! 옛 조직의... 비밀스런 동굴 벽화에! 마법으로 적혀있었습니다!"

어쩐지 조금 조잡해진 출처를 더해주고.

"저게 바로 불의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게 대체 무엇인가!"

"성스러운 화염으로 뭐시기냐! 부정한 기운을 태워서! 아무튼 주인을 정화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주군이 불길 속에서도 멀쩡하시군!"

"바로 그렇습니다!"

적당히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자 그제야 멀쩡한 루크를 보고 납득한 기사들이 환호했다.

"과, 과연! 보게! 도련님께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셨어!"

"내 살면서 이런 기이한 일을 전부 보게 될 줄이야!"

-저... 시발것들이... 진짜...!

속이 터져 뒤집어지는 마검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루크가 조용히 불길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런 루크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작이 소리쳤다.

"루크, 괜찮은 게냐!?"

"괜찮습니다. 그 뭐냐, 사원의 벽화... 아무튼 불이 몸을 정화하는 게 느껴집니다."

-야...! 개새끼야...!

마검의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루크는 잠자코 불길 속에 머물렀다. 모두 그 경이로운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불길 속에서 예복의 끝자락 하나 타지 않고 멀쩡했으니까.

"근데 도련님께서 방금 사원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맥스는 동굴이라 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아,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도련님이 선택을 받았다는 거지!"

"그렇긴 하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율리히와 오스카는 주저앉은 채 루크를 바라봤다. 도대체 왜 저리 멀쩡하단 말인가.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진즉 재가 되었어야 하거늘!

'대체 어떤 마법이냐!'

오스카는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샅샅이 루크를 훑었다. 그때 옆에서 율리히가 중얼거렸다.

"설마 정말로 선택을 받았나?"

"...주군까지 왜 그러십니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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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성년식 이후 하루가 지났다. 마검은 있는 힘을 다해 루크를 거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쓸 수 있는 거라곤 불꽃이 전부인데 화염 면역인 사람에게 먹힐 리가 있나.

시간이 지나자 힘을 다한 마검은 화염을 꺼뜨렸고, 루크는 유유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앞으로 잘 쓰겠습니다.

-....

환하게 웃는 루크를 향해 율리히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줄 수 없었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반쯤 넋이 나간 채 방으로 돌아와 정신을 잃은 게 기억하는 전부다.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너무 심한 충격이었던 탓이겠지. 하지만 잠에서 깬 지금, 율리히의 기분은 어제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형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기껏 일어났더니 처음 들은 소리가 멍청한 친동생의 원망이었으니까.

"던전에서 나온 검을 놈에게 주시다니! 차라리 저를 주셨어야죠!"

어지간히 분한지 소리치는 미하엘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율리히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주고 싶어서 줬나?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말이라도 좀 해보십시오!"

'이 새끼가 남의 속도 모르고...!'

율리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 복장이 뒤집히는 건 미하엘이 아니라 율리히였다.

계획은 엉망이 되었고, 마검은 빼앗긴 데다, 이복동생의 명성은 이제 손도 못 댈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미하엘의 입단속 문제는 둘째치고, 자기 꾀에 넘어갔다는 소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멍청한 놈! 내가 검을 주려고 한 것 같으냐!? 사실 하나도 줄 생각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 꾀에 내가 넘어갔다! 낚시하려고 최고급 미끼를 썼더니, 미끼만 쏙 빼먹고 튀었구나! 덕분에 완전히 망했어! 앞으로 나를 병신 율리히라고 불러다오!

"이런 시발!"

쾅, 쾅, 쾅

생각하다 보니 또 열이 뻗쳤다. 율리히는 저도 모르게 발을 뻗어 책상을 계속 후려쳤다.

만약 이 책상이 이불이었다면 이불을 퍽퍽 차대는 꼴이었을 것이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형의 기세에 미하엘은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혀, 형님?"

"염병할! 그 개 같은 마검! 썩어 문드러져도 시원찮은 쇳덩이가! 크아악!"

생각할수록 분이 뻗친 율리히는 미친 듯이 책상을 두들겼다. 흠칫거리던 미하엘은 뒷걸음질 치다 냉큼 방에서 빠져나갔다.

처음 보는 형의 모습이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괜히 여기서 뻗대다가 형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면 큰일 난다는 것.

'튀, 튀자.'

"으어어어!"

생존 본능에 따라 잽싸게 미하엘이 사라지자, 한참 발광하던 율리히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자 뒤이어 몰려든 건 자괴감이었다.

"그게 어떤 검인데... 그게 어떤 검인데...!"

율리히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기가 쓰지 못하는 검이긴 했다.

하지만 아버지 말대로 써먹을 데는 많았다.

돈을 받고 팔아도 되며, 선물로 환심을 사도 되고, 물욕이 있는 영주와의 거래 도구로 써도 됐다.

어느 쪽이든 억만금의 가치가 있는 검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하필이면 놈의 손에!"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지경이었다.

바깥에 대기하던 오스카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율리히는 까득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갈며 오스카를 노려봤다.

"그래, 이것도 그대의 책략인가? 훌륭하군. 이제 놈이 검을 얻었으니 뭘 해야 하지? 무식한 나는 도통 모르겠는데, 젊은 현자께서 좀 알려주시게."

"...."

오스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책사가 책략을 완전히 망쳤는데 뭔 소릴 하겠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별다른 말을 못하자 답답함에 율리히가 깊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책략이 실패한 건 그렇다 쳐도, 설마 놈이 검의 선택을 받게 될 줄은..."

"주군, 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니? 놈이 그 불꽃 속에서도 멀쩡한 걸 봤잖은가!"

마검이 내는 불길 속에서도 무사하다면 그게 선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율리히의 분노에도 오스카는 의견을 꺾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확신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검의 선택을 받은 것과 불꽃에서 멀쩡한 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설명 좀 해보게!"

"간단합니다. 루크 도련님께서 우릴 속이신 거지요."

오스카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 검이 울리는 걸 보셨잖습니까. 그건 마검이 소유주를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주군께서도 당해보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그렇지만 놈의 심복들이 검명이라고..."

"그건 개소리고요."

무심코 오스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도대체 그 개자식들은 뭔 헛소리로 사람들을 다 홀려놓은 건가.

검명이니 진신개방이니, 인기 없는 음유시인의 헛소리에서 나올 소리 아닌가.

"불꽃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크 도련님이 멀쩡하니 계속해서 강도를 높이며 거부한 것이겠지요. 진정한 소유주로 인정했다면 불꽃조차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놈은 왜 멀쩡했던 건가?"

"고대 마법의 힘이겠지요. 화염을 막아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계셨던 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말이 된다. 마검이 왜 그렇게 화려하게 난리를 부리며 불꽃을 피워올렸는지.

화염이 안 먹히니 갈수록 강도를 올리다 포기했을 터.

"으음, 말이 되는군."

"그렇습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초대 가주의 붕대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아까 전 책략의 실패를 지적당한 탓에 오스카는 의견 제시를 망설였다.

유물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붕대의 경우 예측에 불과했으니. 또 틀리면 주군의 신뢰도가 내려갈 게 뻔했다.

"즉, 놈은 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거로군. 그 고대 마법의 비밀만 파헤치면..."

"처음 계획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겠지요."

"그거 좋군. 나쁘지 않아."

쭉 굳어있던 율리히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맴돌았다. 비록 동생에게 한 방 먹었지만, 나중에라도 만회할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그 유물이 무엇인지부터..."

"율리히 도련님."

한창 논의를 이어가려는 차에, 바깥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너드 백작 직속의 고참 하녀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냐?"

"백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급한 일이니 서둘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율리히가 고개를 갸웃했다. 1년 중 가장 일이 없는 겨울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사건이 생겼기에?

****

그 시각, 루크는 브루노와 맥스를 불러 성년식에서 얻은 검을 살폈다. 브루노는 감탄한 얼굴로 마검의 몸체를 훑어봤다.

"검만 보면 끝내주게 아름답네요."

"만지지 마라, 불붙는다."

"말씀 안 해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루크의 경고에 브루노가 뒤로 물러섰다. 화염을 막아주는 고대 유물도 없는데 불에 타는 건 사양이었다.

어제 루크와 같은 불꽃에 휩싸인다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테니까.

"그나저나 마검은 여전히 주군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한마디도 안 하니까 그렇겠지. 불태우는 건 포기한 모양이지만."

-....

성년식 이후, 마검은 계속 루크에게 욕설을 해댔다. 불꽃을 낼 힘이 없으니 하는 거라곤 욕밖에 없었다.

그에 대처하는 루크의 자세는 간단했다.

'나한텐 불꽃 안 통하는 거 알았지? 슬슬 주인으로 인정할래?'

-닥쳐라...! 누가 네놈을...!

'알겠다.'

검집에 도로 넣어버리고 식사하러 갔다. 여유롭게 티타임까지 즐긴 후 다시 검을 잡았다.

'날 주인으로 인정할래?'

-웃기지 마라...!

'그래.'

다시 검집에 넣었다. 씻고 독서하고 침대에서 잠에 들기 직전에 다시 한번 집어 들고 물어봤다.

'주인으로 인정?'

-싫...!

'오냐.'

다 듣지도 않고 넣어버렸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물어봤다.

'주인 어때?'

-....

그 이후 마검은 입을 다물었다. 검집에서 잠이 드는 것보다, 거부할 때 모욕적인 취급을 받는 게 더 싫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루가 지나서 힘을 회복했음에도 얌전히 있다는 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불을 질러댔다면 루크 입장에서도 곤란했으니.

"그나저나 도대체 누굴 선택할 생각이기에 그리 거부하는 걸까요?"

"선택할 생각이 없는 거겠지."

"지금 시대에는 마음에 드는 주인이 없다는 겁니까?"

"아니. 그냥 안 고르겠다는 거야."

물건이란 누군가에 의해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자아가 있는 유물들은 보통 사용되는 걸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단아는 가끔 나오는 법이다. 일종의 망가진 인공지능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자아가 폭주하는 놈들이 있거든. 자기 신세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 그렇군요. 답답한 물건에 갇혀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쩐지 안타까운 사연이 되어가고 있다만, 사실 그런 쪽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탄생할 때의 정체성은 확고하니까. 문제는 다른 쪽에서 일어난다.

"유물 중에서는 소유주의 머리 위에 올라서길 원하는 놈들이 가끔 나와. 내 힘 덕분에 활약하는데 바치는 경의가 부족하다는 거지."

"...잠시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기를 쓰고 싶으면 굽신거리라는 겁니까?"

"뭐, 그렇지."

"와, 물건도 정신이 있으니까 돌아버리는 놈이 나오네요."

-저놈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마검이 브루노의 말에 불꽃을 피웠다. 하지만 루크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도로 불을 꺼뜨렸다.

힘을 써봤자 먹히지도 않고, 자기만 지칠 뿐이니.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대로는 그냥 무딘 검인데요."

불꽃 같은 힘만 마검이 발휘하는 거라면, 그나마 손에 쥐고 날카로운 명검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런데 마검은 검날마저 자기 마음대로 무디게 한다. 이대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성년식에서 그 난리를 쳐놨으니 누군가한테 팔 수도 없고."

"걱정 마라. 다 쓸 데가 있으니까."

"주인으로 인정받을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어차피 자아가 있는 유물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제작자가 정해둔 경우도 있지만, 지가 마음에 들면 주인이란 경우도 있다.

마검의 경우 후자 쪽이니 절대 인정받을 수 없다.

"하지만 조금 응용하면 다르게 써먹을 수도 있거든."

"...?"

-네놈... 무슨 속셈이냐...?

루크의 의미심장한 말이 불안했는지 마검이 반응했다. 루크가 대답하지 않고 마검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그때, 밖에서 맥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는 백작 직속의 하인 하나가 서 있었다.

"도련님, 각하께서 부르신다는데요."

"아버지께서?"

"네. 무척이나 급한 일이니 서둘러 오시라고 하십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척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슨 일로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성년식 바로 다음 날 일어난 대사건이라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었으니까.

곧바로 준비를 마친 루크가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루크 외에도 율리히와 미하엘이 모여 있었다.

"다 모였구나."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영지에 큰 문제가 생겼다. 가능하면 내가 전부 처리하고 싶으나, 두 장소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라 한 곳은 너희들이 대신 가야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율리히의 얼굴이 굳었다. 영주가 안전한 장소에서 뛰쳐나와 직접 움직여야 한다면 보통일이 아니다.

백작은 율리히의 물음에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지에 악마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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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아, 악마라니...!"

충격적인 소식에 모든 이가 할 말을 잃었다. 악마. 다른 차원의 심연에 거주하는 영적 존재들.

근본이 사악하여 대화가 안 통하고, 타인의 타락과 고통을 즐기기에 극히 위험하다.

다행히 차원을 넘나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어지간해서는 평생 볼 일이 없다.

'하지만 하나라도 나타나면 그 일대는 지옥이 펼쳐지지.'

영적 존재라 퇴치법이 극히 한정된 데다, 강림한 순간부터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주변을 뒤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악마가 둘이나 번스타인 영지에 나타난 거다. 이건 어지간한 군사충돌보다 위험한 사태였다.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추가 피해 예상치는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율리히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추가 피해는 적다는구나. 주변 마을의 유지들이 발 빠르게 대처한 덕이지."

"더 피해가 늘어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이미 일어난 피해만으로도 엄청나다."

백작은 지도를 펴고 자신의 영토에 있는 마을 몇 군데를 가리켰다.

"아르티그, 몰빌, 니르본. 이 세 마을에서 모든 주민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각각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전부 합치면 만만치 않은 숫자지."

"세상에...!"

'살육의 악마군.'

경악하는 두 적자 사이에서 루크가 혀를 찼다. 살인, 유혈, 폭력 같은 행위에서 힘을 얻고 쾌락을 느끼는 악마.

별다른 특수 능력이 없고 생각도 단순무식하지만, 강림한 순간 사람을 죽이고 보는 터라 단기적인 피해는 제일 큰 놈이다.

"다행히 교단에서 파견된 성기사단이 악마를 틀어막고 있다. 놈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고 있지. 나는 가문의 기사들을 이끌고 교단과 합류해서 놈을 끝장내겠다."

영지에서 이런 엄청난 피해가 생긴 거다. 지배자인 영주가 주도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체면이 서질 않는다.

더불어 피해 지역 인근의 주민들을 위무할 필요도 있었다.

"문제는 악마가 한 마리만 나타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쪽은 너희들이 대신 가야겠다."

"어디입니까?"

"발토르."

"거긴 도시 아닙니까!"

율리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일반 마을이 악마에게 습격당하는 것과 도시가 습격당하는 건 천지 차이다.

거주 인구는 물론이고 유동 인구, 1년 세수마저 비교가 안 된다.

만약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다면 가문이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타격이다.

"진정해라. 여긴 그렇게 심하지 않으니까. 악마가 강림하긴 했으나 몽마의 일종이라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몽마라면 환상과 꿈으로 사람의 감정을 빨아먹는 악마 말입니까?"

"그래. 잘 때마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지만, 현실의 몸은 멀쩡하다는구나. 골치 아프게도 그것 때문에 피난을 거부하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다."

거주자들은 재산을, 상인들은 이득을, 장인들은 기반을 이유로 안 떠난다고 한다.

아무리 약해도 악마는 악마.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하는데 손에 쥔 걸 놓기 싫은 거다.

"그러니 너희들은 발토르로 가서 몽마를 퇴치하거라. 공격할 수단이 없다면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피난시키고. 마침 주변에 성녀가 순례 중이었던 터라 우릴 돕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성녀!'

이번만큼은 루크도 관심을 기울였다. 성자 혹은 성녀. 기적과 마법이 드문 이 시대에 극히 드물게 탄생하는 신성의 권화.

브루노나 레이와는 다른 의미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성녀였다.

"시간이 없으니 오늘 내로 채비해서 떠나거라. 소수정예로 일행을 선발하여 말을 달리면 닷새 내에 도착할 거다."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지요."

"참, 미하엘은 이곳에 남아라."

"예? 왜 저만?"

미하엘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악마와 맞서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만 왜 자기만 뺀단 말인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하!"

모호한 말에 미하엘이 반색하며 끄덕였다. 만일의 사태란 율리히가 치명상을 입거나 죽었을 때를 말한다.

즉, 후계가 빌 수도 있으니 너는 여기 남아있으라는 거다.

기꺼운 표정의 미하엘을 보며 율리히와 루크가 말을 삼켰다.

'네가 가면 일만 망쳐놓을까 겁난다는 의미도 있단다.'

'능력 없어서 안 보낸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 약이지.'

'쉿.'

두 아들을 보며 백작이 검지를 입에 대었다. 언제나 아들에게는 상냥한 아버지였다.

****

루크와 율리히는 빠르게 일행을 꾸렸다. 브루노와 레이, 로더릭을 포함하여 대동하는 기사는 총 일곱.

그 외에 하인이나 종자는 전부 제외했다. 신속함과 전투만을 중시한 구성이었다.

다만 루크는 여기에 맥스를 포함시켰다.

"전 기사가 아닌뎁쇼!?""하지만 쓸모가 많지. 전 암살자니까."

"악마한테는 단검이 안 들어가잖습니까!"

"걱정 마. 기사의 장검도 안 들어가."

"그런 뜻이 아닌데요!"

맥스는 제발 빼달라고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 위에 오른 맥스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고만 좀 징징대. 어차피 나 죽으면 너도 사형인 거 몰라?"

"그래도 깔끔히 목을 잘라줄 거 아닙니까. 악마는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이겠죠."

"그건 맞는 말이지."

"자신감 있게 부정해주시면 어디 덧납니까?"

"내가 부하한테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맥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다들 정보가 부족한 탓에 비교적 가볍게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심각한 상황.

아무리 루크라도 여차할 때 맥스를 구해주지 못할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놈이 꼭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회귀 전, 이 몽마 사건은 발토르 시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당시 죽은 사람이 도시의 삼분지 일이나 되었으니까.

하지만 루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 사상자의 숫자를 확 줄일 수 있다. 맥스는 이번 계획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준비는 됐느냐?"

"예. 문제없습니다."

"그럼 얼른 출발하자. 한시가 급하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율리히와 함께 말을 달렸다. 평소의 가식도, 거짓 웃음도 필요 없었다.

지금은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발토르 시에 도착해야 했다.

****

성에서 출발한 일행은 거침없이 말을 달렸다. 최소한의 휴식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밥도 말 안장 위에서 해치웠다.

그 고생 덕분인지 일행은 사흘 만에 발토르 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목표 시간보다 이틀을 더 단축한 셈이었다.

브루노도 처음 세워보는 신기록에 헛웃음을 지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군요."

"글쎄다. 진짜 보람이 있을지 없을지는 안에 들어가 봐야지."

"걱정이 과하신 거 아닙니까? 보고로는 별일 없다면서요."

"조금 과하게 걱정해야지. 상대가 악마니까."

루크의 대답에 주변 인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시간을 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악마였다.

도시 주변에 다가간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문이 제법 멀쩡했다.

"다행히 큰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후, 여신께서 보살피셨군요."

로더릭을 포함한 다섯 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유를 찾았다. 하지만 브루노와 레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오히려 성벽에 깔끔한 모습이 보일수록 더욱 얼굴을 굳혔다.

이윽고 성문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 레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잘못되다니? 무슨 소리요? 성벽도, 문도 멀쩡하지 않소?"

"사람이 없습니다."

"문 앞에 경기병이 멀쩡히 보이는데..."

"거기 말고는 없잖소."

기사의 뒷말을 받은 건 브루노였다. 브루노는 성벽 위를 쭉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성벽 위에 순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심지어 성문에서 저 지평선까지 보이는 사람도 없고. 내가 발토르는 잘 모르지만, 여기 제법 번성한 도시 아니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최소한 오가는 사람 하나는 있어야지."

"...!"

그제야 기사들도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과 문은 멀쩡한데 유동 인구가 없었다.

한적한 지방이나 소도시면 몰라도 발토르다. 몽마에게 고통받으면서도 집값과 이득 때문에 떠나기 싫다던 도시.

그런 도시에 아무도 안 드나들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제기랄, 뭔가 일이 벌어지긴 한 모양이군."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물러서시겠습니까?"

기사들이 일제히 율리히를 쳐다봤다. 백작의 차기 후계자인 율리히야말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 명령권자였으니까.

잠시 망설이던 율리히는 입술을 깨물고 문을 노려봤다.

"진입한다."

"괜찮으신 겁니까?"

"여기까지 와서 꼬리를 말 순 없지. 최소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냥 낌새가 이상하다고 튀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면 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지금껏 쌓아온 율리히의 명성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거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문 앞까지 다가갔다. 가장 먼저 한 기사가 나서서 두 명의 경비병을 향해 물었다.

"어이, 거기 있는 경비병."

"...."

"경비병! 대답해라!"

크게 소리쳤음에도 경비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뭐라 하려던 순간, 경비병의 입이 히죽 올라갔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군.

"...!?"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도저히 인간의 입에서 나올 발성이 아니었다. 경비병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말하며 킬킬거렸다.

-하지만 알아차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들어오다니.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악마!"

기사는 곧장 검을 빼 들고는 경비병을 내리쳤다. 하지만 검이 닿기 무섭게 경비병의 신체가 무너져 내렸다.

땅에 쏟아진 건 인간의 살점이 아니라 바글거리는 구더기 떼였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큽! 이런 역겨운 장난질을...!"

"제기랄! 후퇴해라!"

-이미 늦었다.

율리히의 외침에 사방을 울리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뒤이어 기사들이 왔던 곳에서 시커먼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형태는 검은색 안개와 비슷했지만, 무기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꼴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뭐, 뭐냐 저건!"

"잘은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뒤로 물러서!"

기사들은 잽싸게 뒤로 물러났지만, 그중 한 기사는 미처 몸을 빼지 못했다. 검은 안개는 그대로 기사의 한쪽 팔과 타고 있는 말의 옆구리에 닿았다.

"끄아아아아아악!!"

-끼히이이잉!!

그와 동시에 기사와 말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피부가 산채로 벗겨지는 사람과 같은 비명이었다.

브루노는 잽싸게 말을 달려 오른팔로 냉큼 기사를 낚아챘다.

괴력이 존재하는 브루노이기에 할 수 있는 기예였다.

"이봐, 정신 차려! 무슨 일이 있었나?"

"커헉!? 난 방금 두 눈이 뽑혔는데...?"

"뭔 개소리야? 양쪽 다 멀쩡히 붙어있구만!"

브루노의 말에 기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진짜 눈알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젠장, 환상을 보여주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위험하군."

"저 검은 안개에 닿지 마라! 모두 물러서!"

"하지만 더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그그그긍

그때, 기사의 말에 반응하듯 발토르의 성문이 열렸다. 우연인지 함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열린 길은 성문뿐이었다.

"달려!"

율리히의 말을 신호로 모두가 성문을 향해 들어갔다. 하지만 문안으로 들어간 순간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저 문 하나 넘었을 뿐인데 세상이 통째로 바뀌어버렸기에.

"하, 하늘이!"

"이런 염병할...!"

하늘은 기분 나쁜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땅의 흙은 썩어가는 시체처럼 뭉그적거렸다.

더 재수없는 건 검은 안개가 사방에 있어서 피하려야 피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듯 느릿느릿하게 기운이 다가오자 다들 주춤거리며 등을 맞댔다.

"이건 좀 위험한데...!"

"아이고,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브루노가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맥스는 한탄을 내뱉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루크가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주군!?"

"루크 도련님!"

"뭐 하는 짓이냐!?"

촤앙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루크가 검을 뽑았다. 태양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마검은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설령 검으로 벨 수 없는 사악이라 할지라도, 이 검이 베지 못하는 건 없나니!"

-크크... 헛수고다...

루크의 장렬한 연설에 마검이 비웃었다.

-내가 왜 널 돕지...? 멍청한 것... 넌 여기서 끝이다...

마검은 속이 시원했다. 언제까지 이 개자식한테 속박되어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이리도 빨리 기회가 오다니!

심지어 고통스러운 환상 속에서 죽게 만드는 최적의 악마다. 여기서 느긋하게 놈이 죽어가는 꼴을 감상하리라.

"이 검의 푸른 불길은 설령 그 어떤 악이라 해도 정화하리라!"

-재밌군... 광대짓은 그게 끝이냐...?

킬킬거리는 마검의 비웃음을 무시하며 루크는 검은 연기 속에 마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검이 몸을 떨었다.

-끄아아아아악!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왜 이리 아픈 거야!

"크으읍! 과연 사악한 기운! 검의 힘을 억누르다니!"

루크는 처절하게 소리치며 손을 부들거렸다. 그리고는 슬쩍 몸을 기울여 검에게 속삭였다.

"그야 아프지, 병신아. 이건 감각만 재현할 수 있으면 전부 효과가 있거든."

-뭐어어억!? 아악! 아파파파파!

"성욕 같은 복잡한 욕구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순수하게 고통을 재현하는 안개거든? 뭔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상대를 안 가려."

짐승 수준의 지능이라도 상관없다. 고통이란 건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니까. 당연히 짐승보다 지능이 뛰어난 마검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감각기관은 없지만, 그런 건 다른 존재의 고통에서 가져와 붙이면 그만이다.

"게다가 고통을 통해 힘을 빨아먹는 거라 강한 존재에게 모이는 성질이 있지. 봐, 널 찔러넣으니까 나한텐 안개가 안 오지?"

-꺼어어억! 끄억!

"아프냐? 그럼 불꽃 내던가. 네 불꽃이면 이 안개 태워버릴 수 있는데."

-그걸 먼저 말해에에엑!

루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검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그러자 검은 안개 중 일부가 순식간에 잿더미처럼 흩어졌다.

"오, 오오! 악마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

"역시 성검에게 선택받으신 분...!"

"선택 안 받았다며, 오스카 개새끼야!"

기사들이 일제히 감탄하며 루크의 뒤에서 입을 벌렸다. 뒤에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긴 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루크는 검을 들고 검은 안개를 향해 휘두르며 나아갔다.

"나를 따르라!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겠다!"

-그, 그만둬! 끄아악! 저 검은 것에 날 찔러넣지 마!

"타올라라, 불꽃이여! 네 주인의 부름에 깨어나 악마의 기운을 태우라!"

-이런 미친 새끼가! 아악!

"오오! 루크 도련님의 뒤를 따르자!"

루크는 가열차게 검을 휘두르며 안개를 걷어냈다. 마검은 고통 때문에라도 필사적으로 불꽃을 피워올려야 했다.

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뒤를 따랐다. 성검을 휘두르는 영웅이 앞에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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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루크는 일행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꿈틀거리는 안개가 집어삼킬 듯 다가왔지만, 루크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흡!"

푸화악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안개는 그대로 불타 사라졌다. 그때마다 일행 전체를 위협하던 안개 역시 뒤로 확 물러섰다.

도화선처럼 모든 안개가 연쇄되어 불이 붙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오오!"

"역시 성검!"

일행이 감탄하며 뒤를 따르자, 안개 너머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애송이가 검 하나로 설치는 꼴이 가소롭구나.

아까 전 경비병의 형상을 빌려 말하던 악마였다. 악마는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일행에게 소리쳤다.

-언제까지 그 힘이 유지될 것 같으냐? 10분? 20분?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떨어질지 모르지. 아이야, 일행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무리를 하는 것 아니냐?

"...!"

악마의 말에 일행 전체가 움찔거렸다. 세상에 무한한 힘이란 없는 법. 저 불꽃이 다 떨어지면 일행 전체의 목숨이 위험했다.

"루크.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1시간은 충분히 버팁니다."

율리히의 물음에 루크는 간단히 대답했다. 이전 마검의 화력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거뜬했다.

루크의 대답을 들은 악마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울렸다.

-1시간이라. 짧구나. 1시간 안에 도시를 빠져나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하겠느냐? 유일한 출구는 닫혔는데 말이다.

"안 나갈 건데?"

-...뭐라고?

"안 나간다고. 왜 우리가 도망친다고 생각하지? 너 때려잡으러 온 건데."

악마는 물론이고 일행마저 헛바람을 삼켰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악마를 쓰러뜨리겠다니.

현실을 못 보는 건지, 아니면 간이 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군,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있긴 한데 지금은 일단 안전한 장소부터 찾아야겠다. 사흘 동안 거의 쉬지를 못해서 모두 지쳤을 테니."

-하하하! 안전한 장소라고? 어디 한 번 찾아보아라! 이미 내가 모든 걸 수확한 도시다! 안전한 장소 따위가 있을 것 같으냐?

악마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악마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악마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들 무리하지 말고 잠시 쉬어라. 불꽃은 아직 넉넉하니 임시 안전지대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넌 이 상황에서 왜 그리 침착한 거냐?"

"침착해서 나쁠 거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루크의 말에 율리히는 말문이 턱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나치게 침착하니 기분 나쁠 정도였다.

말을 잃은 율리히를 보며 루크가 피식 웃었다.

"악마 말 좀 진지하게 듣지 마십시오. 저놈이 진실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까?"

"뭐라고?"

"악마는 기본적으로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횟수가 적어요."

악마는 영적 생명체이며 부정적인 감정을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당연히 부정적인 감정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질투를 먹고 사는 놈이라면 무조건 '네 옆집 여자가 너보다 예뻐'라고 말하고, 의심을 먹고 사는 놈이면 항상 '네 마누라가 불륜했다'라고 합니다. 정작 옆집 사람이나 마누라 얼굴도 본 적 없으면서."

"그, 그런 거냐?"

"그런 거죠. 그러니 곧이곧대로 들으면 손해입니다."

-이놈이...!

악마는 이를 갈며 루크를 노려봤다.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일행 전체가 공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악마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안전지대를 찾아봅시다. 성녀가 도착했을 수도 있으니 먼저 그 사람부터 찾아봐야겠네요."

-성녀? 크크크, 성녀라는 건 이년을 말하는 거냐?

그때 루크의 말에서 성녀라는 단어를 잡아낸 악마가 서늘하게 웃었다. 잠시 후,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쑥 튀어나왔다.

몸이 반쯤 찢어진 여성의 시체였다. 옷에는 성녀를 상징하는 교단의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법 신성력이 강한 년이라 애를 먹었지. 하지만 보다시피 이 꼴이다.

"그, 그럴 수가!"

"성녀가 악마한테...!"

일행들 사이에 절망이 퍼져나갔다. 지금껏 침착하던 루크도 성녀의 시체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마, 말도 안 돼! 그건 가짜다!"

-호오, 어째서 가짜라는 거지?

"성녀는 성기사에게 보호를 받고 있을 터! 어떻게 그들을 뚫고 성녀를 죽였단 말이냐!"

-하하하! 그 허수아비들을 말하는 거로군!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애절한 목소리. 그러자 악마가 더욱 크게 웃으며 열 구의 시체를 더 내밀었다.

처참하게 찢기고 내장이 튀어나온 모습에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성기사라는 것들이 너무 약하더군. 죽어가면서 신을 찾는 꼴이라니!

"아, 아니야! 성기사가 겨우 열 명일 리가 없어! 더 많이 있었을 거다!"

-그래. 더 많이 있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들은 겨우 이게 전부였다. 나를 얕본 게 패착이었지.

"그럴 수가...! 성녀를 보호하는 데 겨우 그 정도 숫자만 왔을 리가...!"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볼썽사나울 뿐이니.

루크의 떨리는 목소리에 모든 이가 절망에 물들었다. 루크 역시 아까 전과 같은 용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 전부 죽은 거냐? 정말 그걸로 전부냐고!?"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이게 전부다. 더 내밀 시체가 없는 게 안타깝군.

"아, 그래? 정말 그 정도만 왔나 보네. 하긴, 순례길이니 숫자가 적긴 했겠지."

-...?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루크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안타깝게도 성기사는 열 명이 고작이군. 악마 퇴치를 위해서는 우리가 힘 좀 써야겠다."

"...저, 주군. 그 성기사 전부 저기 죽어있지 않습니까."

"저거 다 가짜야. 솔직히 믿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루크는 쯧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차고는 안개 속 시체를 가리켰다.

"몽마 놈이 뭔 수로 사람을 찢어 죽이냐? 공포나 고통으로 죽게 하면 몰라도."

"그럼 저건 뭡니까?"

"환상으로 만든 거야. 얼굴은 실물을 보고 본떴겠지만. 환상을 만들어서 보여준 걸 보니 진짜는 안전지대에 있는 모양이네."

악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루크는 일행에게 설명을 마치고 다시 악마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크윽! 성녀와 성기사가 다 죽다니! 그렇다면 너에게 저항했던, 우리에게 쓸만한 용병이나 기사도 다 죽었겠군! 좀 보여다오!"

-....

"그리고 너를 상대할만한 기술이 있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죽었다면 내가 더 무서워질 것 같다! 얼굴이랑 신체적 특징이 아주 잘 묘사된 시체를 본다면 무심코 주저앉아 울지도 모르겠군!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꼬맹이가!!

악마의 분노에 호응하여 검은 안개가 사방에서 쇄도했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루크는 냉큼 마검을 휘둘러 안개를 베었다.

너무 화가 난 탓에 연쇄반응을 막는 걸 잊었는지, 안개 전체가 한꺼번에 불타며 주변이 확 밝아졌다.

"요거 안 먹히네."

"악마 성질은 왜 건드리십니까!?"

"새끼가 입만 열면 그짓말이잖아."

"그게 악마라면서요!"

"근데 듣다 보니 짜증 나서 그랬지. 어쨌거나 다 쉬었으면 달려!"

루크의 신호에 다시 일행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아까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아진 상태였다.

악마의 농락을 가볍게 받아친 루크와 다른 이들의 생존 가능성 덕분이었다.

율리히가 루크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도시 중앙지구로 가죠. 안전지대가 있다면 거기에 있을 겁니다."

성벽에 가까운 장소는 그만큼 탈출 가능성도 올라간다. 당연히 악마도 필사적으로 못 가게 막으려 했을 터.

자연스레 독 안에 든 쥐처럼 도시 중앙으로 모일 수밖에 없을 거다.

십중팔구 성녀 일행도 그쪽에 있으리라.

****

루크의 예상은 정확했다. 도시의 중앙으로 갈수록 일그러진 풍경이 원래대로 되돌아왔고, 안개도 점차 옅어져 갔다.

악마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거다. 이윽고 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접근하면 쏘겠다!"

단호한 말투에 루크를 비롯한 모두가 우뚝 멈춰섰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브루노와 레이는 상대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다.

"성기사입니다."

"아까 환상에서 죽어있던 양반들이네요."

"그렇다면 성녀는 무사하단 소리군."

율리히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악마를 상대하는 데 성녀만큼 든든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그대들은 악마의 앞잡이인가, 아니면 단순한 환상인가! 정체를 밝혀라!"

"어느 쪽도 아니오! 난 번스타인 백작가의 후계자 율리히 번스타인!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인 루크 번스타인이오!"

"뭣이!?"

성기사들은 꽤나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일행도 충분히 이해했다. 악마가 반쯤 점거한 도시다.

설마 번스타인 백작의 아들들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성기사 중 한 명이 긴장된 얼굴로 다가왔다.

"잠깐 확인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하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성기사들은 품에서 작은 징표를 꺼내 일행의 몸에 가져댔다. 모든 이에게 한 번씩 같은 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최근 악마에게 워낙 시달린 탓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오. 우리도 당해봤으니."

루크 일행도 겨우 몇 분 사이에 절망에 빠져 악마에게 당할 뻔했다. 루크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이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성녀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루크 일행은 성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이동하는 동안 사방에서 수많은 시선과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누구야? 저런 사람들 있었던가?"

"바깥에서 오늘 도착한 것 같던데."

"미친 소리. 저 악마가 지키는 장소를 무슨 수로 뚫고 와?"

처음엔 작은 수군거림이었지만, 이동할 때마다 시선과 숫자가 늘어났다. 나중에는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엄청나게 많군요."

"예. 사실 도시에 머물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부 말입니까?"

율리히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렇다면 사망자는 거의 없다는 소리 아닌가? 성기사는 자랑스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성녀님께서는 도착하신 즉시 악마의 위험성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 덕에 남아있던 사람들 상당수를 피신시킬 수 있었지요."

보통 성직자도 아니고 교단에서 인정받은 성녀다. 그런 성녀가 '여긴 엄청나게 위험하다'라고 하니 망설이던 사람도 마음을 바꿔먹게 하기 충분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안 나가는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더군요. 성녀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그들을 피난시키고자 하셨고,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지요."

"과연."

성기사들 입장에선 '우리만으로는 감당 못 할 악마니까 지원 부르고 도시 밖으로 나가 있자'고 했겠지.

하지만 성녀는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걱정해서 끝끝내 남았고, 악마가 본격적으로 나설 때 같이 휩쓸린 거다.

"사람들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아마 도시 거주 인구의 반은 될 겁니다."

"엄청나군요."

어쩐지 많다 했다. 아무리 거주지가 밀집된 중앙지구라고는 하나, 동서남북에 살던 사람들이 죄다 모였으니 미어터지고도 남는다.

그나마 이것도 나머지 반이 나간 덕에 모일 수 있었던 거다. 남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 중앙지구만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겠지.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성녀님께서 머무시는 장소입니다."

성기사가 안내한 곳은 작은 저택이었다. 그럭저럭 재산이 있는 평민이 살 법한 좋은 집이지만, 특출나게 좋은 곳도 아니었다.

설명에 의하면 도시를 잠깐 떠난 주민에게 사용 허가를 받은 곳이라 했다. 잠시 후, 일행은 성녀와 만날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리디아라고 합니다. 이리 만나 뵐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군요."

매우 피곤한 얼굴의 성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정도로 보였다.

금발에 새하얀 피부. 아까 환영에서 보긴 했지만, 제대로 다시 보니 미녀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루크는 성녀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회귀 전 그녀의 이름은 매우 유명했으니까.

'검은 성녀 리디아를 여기서 보게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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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성녀를 유심히 바라보는 루크를 지나쳐 율리히가 나섰다.

"반갑습니다, 율리히 번스타인입니다. 무척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율리히는 인사를 나누면서도 걱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성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악마와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걱정을 읽은 성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사흘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악마 때문입니까?"

"예. 제가 잠들면 사람들을 노리더군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성녀가 바깥의 어두운 기운을 바라봤다. 방금 전 루크 일행을 공격했던 검은 안개.

저 멀리서 여기까지 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틈만 생기면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듯 넘실거렸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이곳만은 몽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마 저와 성기사들 때문이겠지요."

누가 잠들면 바로 꿈을 통해 접촉할 수 있는 악마다. 하지만 중앙지구에선 사람들이 잠을 자도 악몽을 꾸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누군가에게 접촉하면 악마의 본체와 연결점이 생긴다. 그때 접촉한 사람에게 신성력을 쓰면 악마 역시 고통스럽다.

재수 없으면 본체까지 들킬 수 있으니, 굳이 꿈에 접촉하지 않는 거다.

"문제는 저희가 잠들었을 때입니다. 그때만큼은 사람들이 악몽에 시달립니다."

꿈에서 접촉하는 정도가 아니다. 성녀와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거주 지역의 절반에 해당하는 범위를 안개가 뒤덮어버린다.

그때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성녀를 깨워대니 자려야 잘 수가 없었다.

"놈의 눈을 속이려고도 해봤습니다만, 몽마라서 그런지 제가 잠들면 바로 알아차립니다. "

"실례지만 사흘 전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이나 주무신 겁니까?"

"글쎄요. 뭐라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말을 하면서도 피곤한지 그녀는 연신 눈을 비볐다. 그 모습에 루크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녀 일행과 합세해서 악마를 퇴치하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꼼짝없이 발이 묶인 상태 아닌가.

'가장 중요한 전력이 땅에 고정된 토템 꼴이군.'

악마를 찾아 없애려면 성녀가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성녀가 이동하면 안개가 거주하는 사람들을 덮친다.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니 움직일 수가 없다. 게다가 잠만 자면 안개가 훨씬 가깝게 접근한다.

도시의 생존자 전체가 악마의 인질이 된 상황.

'그리고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겠지.'

막대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라고 한들 인간인 이상 생리현상을 거부할 순 없다. 이대로 가면 남은 미래는 두 가지뿐이다.

잠을 안 자고 버티다 과로사하거나, 기절해서 쓰러지거나. 그때가 오면 생존자들 사이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다가올 미래를 예견했는지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성기사분들은 안개를 막을 수 없습니까?"

"저희 주변만이라면 가능합니다."

사람들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 악마와의 전투에서는 충분하고도 남지만, 현재 처한 상황이 너무 특수했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 방법이..."

"있습니다."

"뭐!?"

절망 섞인 율리히의 목소리에 루크가 답하자. 단숨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루크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급한 건 성녀님의 휴식과 다른 사람들을 몽마의 손길에서 지키는 것 아닙니까."

"그, 그렇습니다."

"예전에 북부 출신 외할아버지께 정신을 보호하는 비약 제조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악마에게도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비약이 아닌가!

"다만 독성이 있어 자주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도, 독성? 어느 정도입니까?"

"며칠 안에 연속적으로 복용할 때는 3번을 넘기지 않을 것. 그 이후는 최소 석 달 이상 쉬어줘야 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잠을 잘 수 있는 단 하루가 절실한 상황이다. 하물며 세 번이면 차고도 넘친다.

"저, 정말 만들 수 있느냐?"

"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맥스도 데려왔지요."

"예? 저요?"

갑자기 지명받은 맥스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루크는 맥스를 무시한 채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약초만 구할 수 있다면 몇 시간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착수하도록 하지요."

"오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녀 일행은 감동한 얼굴로 루크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게 다 여신의 인도하심이라면서.

한껏 겸양을 떨며 감사를 받은 루크는 맥스를 데리고 바깥에 나왔다.

비약 제조를 위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게 핑계였다. 루크는 맥스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맥스, 바로 이때를 위해서 널 데려왔다."

"역시 절 데려온 이유가 있으셨군요."

"그래. 이 도시와 성녀님을 구하기 위해선 네 힘이 필요하다. 이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대, 대체 그게 뭡니까?"

긴장감에 맥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가 발호하고, 성녀가 쓰러져가는 이 위급한 상황에 자신이 비장의 카드라니?

왠지 모를 고양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 맥스의 양어깨를 꽉 붙잡은 루크가 말했다.

"마약 좀 만들자."

"...예?"

순간 맥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루크는 상큼하게 웃으며 반복했다.

"마약 말이야. 검은 달에서 제조법 배웠지?"

"아니, 대체 누구한테 쓰려고요?"

"성녀."

"...."

맥스는 자신의 귀를 뜯어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

잠시 후, 루크와 맥스는 검은 안개를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찾는 곳은 필요한 약초를 보충할 약재상이었다.

급히 피난을 가느라 약재상의 물건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약초를 꾸러미 가득 챙기는 루크의 뒤에서 맥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쳤어! 아주 제대로 미쳤어! 주군 지금 제정신 맞습니까!?"

"제정신이니까 그만 좀 해라.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냐?"

"성녀에게 마약 먹이는 것부터가 제정신으로 할 발상이 아닌데요!"

"성녀한테만 먹이는 거 아니라니까. 생존자들에게도 먹일 거야."

"그게 더 미친 짓이잖습니까!"

걸리면 사형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너무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맥스 혼자 다 뒤집어쓸 가능성마저 있다.

교단도 번스타인 백작가와 같은 명문가와 정면에서 척을 지기는 싫을 테니까.

"대체 마약을 왜 비약이라고 속인 겁니까!?"

"진짜 비약이니까."

"예?"

이게 뭔 소린가 싶은 얼굴의 맥스에게 루크는 차분히 설명했다.

"몽마가 정신에 손을 못 대는 경우는 두 가지야. 미친놈이나 약물 복용자."

"공통점이 있습니까?"

"있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

다른 점은 전자가 영구적이고, 후자는 일시적이란 것뿐이다.

"이건 나도 들은 소리지만, 정상이 아닌 사람의 정신에 간섭하면 문제가 생겨. 정확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감각을 만질 수가 없지."

말하자면 망가진 피아노 같은 거다. 건반을 누를 때 원하는 소리가 아닌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오는 피아노.

이런 상황에서는 천재 음악가라 해도 연주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이야 많이 사라진 방법이지만, 옛날에는 약 빨고 악마랑 싸우는 경우는 흔했어."

"하지만 마약은 부작용이..."

"심하지. 그래서 딱 세 번이 한계라고 지정한 거야."

그 이상 복용했다간 십중팔구 제대로 중독될 테니까. 하지만 어지간히 진한 게 아니라면 세 번 정도는 문제없다.

게다가 자신이 뭘 복용했는지도 모를 거 아닌가. 찾아도 발견이 안 될 테니 상황 때문에라도 벗어날 수밖에.

"그리고 세 번 다 채울 생각도 없어. 두 번에서 끝내야지. 세 번은 조금 넉넉하게 잡은 거야."

"으음, 그 정도라면... 끄어억!?"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비명에 루크는 냉큼 맥스를 잡아끌었다. 잠깐 안개에 닿았던 맥스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 사이에 겪은 고통이 상당한 것 같았다.

"아, 안개가 닿았습니다. 아까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어요."

"뭐? 아직 불꽃은 멀쩡한데..."

그제야 루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불꽃이 아까보다 확연하게 약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마검 스스로가 불꽃의 화력을 줄이고 있는 거다.

"이 새끼 봐라?"

-흥! 꼴 좋구나...!

지금까진 고통이 무서워서 화력을 펑펑 썼지만, 슬슬 최소한의 자기 보호만 가능한 선을 알아낸 것이다.

이대로 가면 검을 잡은 루크 말고는 아무도 보호할 수 없게 될 터.

"갈수록 반항이 심해지네."

"주, 주군. 그거 정말 계속 가지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걱정 마. 방법이 다 있으니까."

-크크... 그 여유가 얼마나 갈까...?

루크의 호언장담에도 마검은 오히려 비웃었다. 시간은 마검의 편이니까. 살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만약 루크의 방비가 조금이라도 소홀해진다면, 마검은 언제든 루크를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태울 생각이었다.

-기다려지는구나, 네가 곧 절망할 날이 올테니...

"그러냐? 근데 네가 절망할 날은 내일인데?"

-뭐...?

"곧 알게 될 거야."

-무슨 소리냐...! 설명해라...!

루크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약초를 챙겼다. 모든 사람에게 먹힐 분량을 만들기 위해선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

다행히 제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워낙 약초가 많았던 데다, 죄다 잘 말려놓은 터라 금방 분말로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수면제 성분의 약초를 조금 섞으니 이론상 괜찮은 조합이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이 만들어 본 건 처음입니다."

"생각보다 제조가 간단하네."

"상품으로 쓰기엔 조악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약용으로 쓰는 거니 적당히 취하기만 하면 장땡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복용자가 술에 꼴은 수준이면 충분해."

맥스의 말에 따르면 상품이 되려면 여기에 몇 가지 첨가물을 더 넣고, 며칠 걸리는 추가 공정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루크에겐 딱히 알 생각도,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완성된 가루는 즉시 물에 타 비약으로 둔갑했고, 성기사들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약은 다 전달되었습니까?"

"예. 몽마를 막는 비약이라고 하자 금방 동이 나더군요."

"마시면 잠이 올 테니 조금 있다가 복용하라는 소리는요?"

"했습니다. 일부는 말을 안 듣고 즉석에서 마셨습니다만..."

그 정도야 상관없다. 어차피 밤이 가까워진 상태다. 1~2시간 정도의 오차 정도는 별문제가 아니다.

"그나저나 독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독성이 환각작용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신 겁니까?"

"복용한 자들이 그러더군요.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니, 뿅 가는 느낌이라니..."

"걱정 마십시오. 세 번까지라면 괜찮습니다."

루크는 뜨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여기서 자신감이 없어지면 성기사들은 더 불안해할 테니까.

등을 돌린 루크가 맥스한테 슬쩍 눈짓했다.

'야, 부작용 최대한 약하게 만들었다며?'

'평소 약 같은 거 안 한 사람들은 원래 첫발이 세요.'

'괜찮은 거 맞지?'

'걱정마십쇼. 저러다가 금방 잠듭니다.'

짧은 교환을 끝낸 루크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성기사를 돌아봤다.

"성녀님께선 잘 버티셨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푹 쉬라고 말씀드리세요."

"예. 비약은 성녀님께서도 복용하셔야 하는 겁니까?"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루크의 기억에 따르면 이미 이 시점에서 악마는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성녀와 정면대결을 하더라도 크게 밀리지 않을 만큼.

그런데도 굳이 성녀를 피하는 건 계속해서 체력을 소모하게 하기 위해서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성녀도 마셔두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비약을 마신 리디아가 중얼거렸다.

"아, 이 비약 대단하네요. 피곤했던 몸이 풀리는 거 같아요."

"그, 그러십니까?"

"네. 하늘에 나는 듯한... 구름에 오르는 듯한..."

몽롱해진 리디아의 얼굴을 보고 불안해진 성기사가 루크에게 다가갔다.

"괜찮은 거죠?"

"괜찮습니다."

다시 성녀를 바라봤다. 약기운이 돈 리디아가 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헤헤. 기부니 지인짜 죠타아아..."

"정말 괜찮은 거 맞지요!?"

"안심하십시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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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짙은 어둠 속에서 악마가 눈을 번뜩였다. 지금까지 쭉 기다리던 신호를 느낀 탓이었다.

-그 년, 드디어 잠들었나.

악마의 본질은 몽마. 누군가 잠이 들게 되면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지금 느낀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껏 쭉 주시해왔던 자신의 천적. 인간들이 성녀라 부르는 여자가 드디어 잠들었다.

-크크. 역시 필멸자는 별수 없군.

아무리 악마에게 극상성인 힘을 다룬다고 해도 본질은 피와 살을 가진 존재.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사흘이면 꽤 오래 버티긴 했지만, 결국 이게 한계인 거다. 하지만 악마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쉬기엔 이르지.

주변의 검은 안개가 넘실거리며 발토르 시의 중앙지구로 쇄도했다. 다시 한번 인간들에게 고통을 맛보여줄 생각이었다.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면 성녀는 도로 깨겠지.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뜬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그마한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성녀의 고통을 맛보리라.

-자, 인간들아!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거라! 그 모든 게 나의 힘이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악마의 안개가 중앙지구로 쏟아졌다. 이제 곧 참을 수 없는 격통이 온몸을 덮칠 터.

그 아비규환을 맛본다고 생각하니 쾌감에 몸이 떨렸다.

-하하하! 어서 비명을 질러라! 성녀를 깨우...?

드르렁!

신나게 소리치던 악마는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안개에 닿았음에도 인간들이 지나치게 잘 잤다.

고통은커녕 자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냐!?

당황한 악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성녀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주변에 있던 성기사 놈들이?

성수, 결계, 아니면 고대의 의식? 뭔가 자신에게 대처할 방법을 찾아낸 건가? 악마는 이를 갈며 안개에 더더욱 힘을 더했다.

-그렇다면 직접 머릿속을 헤집어주마!

아무리 간접적인 환상통을 막는다 해도 꿈에 직접 간섭하면 막지 못할 터! 악마의 손길이 사람들 정신에 닿았을 때였다.

"으허어, 뿅 간다... 꺼흑!"

-...이 새끼들 약 빨았잖아!

이런 미친 새끼들! 아무리 고통에서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나 약에도 손을 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악마도 고통을 가할 수 없었다. 이를 갈던 악마는 이내 성녀의 꿈으로 향했다.

-성녀도 갈 데까지 갔군. 그렇다면 네년을 조롱해주지!

약까지 썼다면 성녀 입장에서도 쓰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수단이리라. 지금쯤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년을 조롱한다면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겠지. 한껏 비웃음을 띠고 성녀의 꿈에 접촉한 순간이었다.

"주교니임... 저 천사 됐어요... 하늘 날아요... 음냐..."

-성녀란 년이 왜 약을 빨고 있어!?

상식이 박살 난 악마에게서 절규가 튀어나왔다.

****

다음날, 성녀 리디아는 반들반들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무려 사흘만의 숙면이 가져온 효과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비약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정말 위험했어요.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환한 얼굴로 웃던 리디아는 당장이라도 쓰러지려던 어제가 생각났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회귀 전에는 그녀가 걱정한 대로 되었다.

'악마가 죄다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죽여가며 힘을 빨아댔으니까.'

성녀 일행이 발토르 시에 갇혀 있었던 기간은 약 보름. 거의 사나흘 단위로 쭉 깨어있다가 쓰러지길 반복하고, 그때마다 악마는 주민들을 덮쳤다.

그 결과 사상자가 전체 거주 인구의 삼분지 일에 달했다.

현재 피난한 사람이 거주 인구의 반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저 많은 사람 중 삼분지 이 이상이 죽었다는 소리다.

'결과적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거의 운이었지.'

자칫했다면 성녀 일행은 물론, 율리히를 포함한 번스타인 가문의 기사들도 몰살당할 뻔했던 대사건이었다.

앞에 나서길 좋아하던 율리히가 이 일 이후 위험한 현장에 직접 가는 걸 꺼리게 되었을 정도다.

"사람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숙면을 한 덕인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찾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악마를 찾아서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리디아의 걱정에 루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을 비약이라고 속여서 먹이는 것도 한두 번이다.

근본적인 원인인 악마를 찾아내 없애지 않는다면 쭉 제자리걸음이다. 하지만 성녀의 현재 상황이 문제였다.

"제가 여기서 움직이면 다시 안개가 사람을 덮치겠지요."

"저희와 다른 성기사분들만 움직인다면..."

"여러분들을 경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악마에 대항할 방법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설령 마주치더라도 화력이 부족할 겁니다."

상처는 입힐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게 되면 악마는 도로 숨어서 체력을 회복할 것이다.

단숨에 죽이지 않는 한 악마를 마주쳐도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신성력을 보유한 자는 성녀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구에 강력한 축성을 걸어드리는 건데..."

"하실 수 있습니까?"

"가능은 합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막대한 신성력이 필요해요."

안 그래도 악마를 중앙지구에 못 들어오게 막느라 막대한 힘을 쓰는 상황이다. 악마를 쓰러뜨릴 만큼 축성을 하면 반대로 성녀가 약해진다.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축성을 하면 안 하는 것과 별 차이도 없다.

-크크크... 외통수로구나...

허리춤에 걸려있던 마검이 덜걱거리며 루크를 비웃었다. 이제 네까짓 게 어쩔 거냐는 뉘앙스가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던 루크가 눈을 번쩍 떴다.

"희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희망이라 하시면...?"

"이 검을 잘 봐주십시오."

루크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어 두 손으로 잡고 내밀었다. 아름다운 마검의 모습에 리디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름다운 검이군요."

"예. 던전에서 발견된 성검이라고 합니다."

"성검!"

리디아는 깜짝 놀랐다. 악마에게 극상성이라는 검이 바로 성검 아닌가! 지금껏 눈앞에 두고도 모른 채 있었다니!

"하지만 이 성검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라니요?"

"오랜 세월 잠든 탓인지 내부에 막대한 힘이 있음에도, 그 힘을 전혀 꺼내 쓰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럴 수가...!"

실제로는 검이 힘을 안 빌려줄 뿐이지만 말이다. 안타까워하는 리디아에게 루크는 얼굴에서 침중한 빛을 걷어내며 희망차게 소리쳤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론 성유물에 담긴 힘은 성자에게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들었습니다."

"예, 가끔 성유물에 담긴 힘을 얻는 분들이 계시죠. 다만 그러고 나면 성유물의 힘이 약해지거나 아예 사라지지만요."

"그렇다면 성녀님께서도 한 번 시도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성녀님이라면 이 검의 힘을 얻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제가 성검의 힘을요?"

예상치 못한 소리에 리디아가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의 회화를 듣던 마검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한 놈...! 내가 성유물이라더냐...? 나는 그저 마검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도 허가할 성 싶으냐...!

"성녀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마검의 말을 무시하며 루크가 다시 한번 검을 내밀었다. 리디아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하, 하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한들 검의 힘이 약해져요. 이건 루크님의 검이 아닌가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성검입니다. 그런 검이 절 선택했거늘, 어찌 제가 힘을 아까워하며 망설이겠습니까?"

"아!"

감동한 리디아의 눈이 흔들렸다. 성 한 채 값인 명마를 위해서 수많은 영민을 굶어 죽게 만드는 영주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데 평생에 얻기 힘든 검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을 살리려 하다니! 리디아의 마음이 울컥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도해 보겠어요."

"성녀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푸흐흐... 놀고들 있군...

비웃는 마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리디아는 마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리디아에게 루크가 조언을 하나 추가했다.

"힘을 전달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들이쉰다고 생각하세요."

"들이쉰다?"

"예. 성검의 힘을 호흡하며 들이마시는 겁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편이 힘의 전달에 더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특이하네요. 해볼게요."

리디아는 눈을 감고 루크의 조언을 따라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이미지를 떠올렸다.

힘을 들이마신다, 깃든 힘을 들이마신다, 호흡하듯 몸속으로 삼킨다.

-푸하하하...! 더 이상은 못 참겠구나...! 도대체 저게 뭐하는 광대지이이이익!?

웃음을 터트리던 마검은 도중에 비명을 울렸다. 진짜로 힘이 빨려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뭐, 뭐냐...!? 어째서 내 힘이...! 난 건네줄 생각이 없단 말이다...!

"저, 정말 되고 있어요!"

"계속 하십시오! 성검 역시 기쁘게 힘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아, 아냐...! 하지 마라...! 지금 당장 멈추에에에엑!

리디아가 힘을 빨아들일 때마다 마검은 비명을 질렀다. 지금 빨아들이는 건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단순한 검을 마검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 말하자면 혼백이라고 할 수 있는 근원 그 자체였다.

-어, 어째서!

'어째서긴. 그녀가 성수(聖獸)의 힘이 깃든 존재니까 그렇지.'

아득한 고대에는 불멸자가 드물지 않았다. 오죽하면 축복을 받은 영웅들조차 죽일 방법을 몰라 봉인해둔 놈들이 넘쳐났겠는가.

하지만 봉인이란 언젠가 풀리기 마련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여신은 한 가지 계책을 냈다고 한다.

-못 죽이면 먹여서 소화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게 성수다. 성스러운 짐승이란 뜻과 달리, 실제 성수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모든 존재의 영혼과 정수를 삼켜서 소화해버렸으니까. 당연히 성수의 힘은 모든 영적 존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엔 정령들조차 성수를 너무 두려워해서 하늘로 데려가야 했다고 한다.

'회귀 전에 악마를 쓰러뜨린 것도 그 힘 덕이었다지.'

그때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승리를 확신한 악마가 달려들었을 때 그녀가 악마를 삼켰다고 한다.

이 증언에 교단에선 난리가 났다. 악마를 먹어치운다니, 아무리 봐도 성스러움과 백만 광년은 떨어지지 않았는가.

다행히 확인 결과 그녀의 힘은 성수에서 유래된 것이었고, 이단이나 마녀로 몰리는 걸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불길한 이미지 때문에 '검은 성녀'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이단도 아니고 마녀도 아니지만, 순백색의 성녀가 아닌 검은 성녀라고.

'하긴, 당하는 놈이 이 꼴이면 그런 별명이 붙을 만도 하지.'

-사, 살려줘...! 아아아악! 그만 빨아들이란 말이다...!

마검은 그 어느 때보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안개야 그저 고통일 뿐이지만, 성녀는 본인의 영혼 자체를 빨아들이고 있었으니까.

한참 마검의 정수를 빨아들이던 리디아는 이내 기침을 내뱉으며 중단했다.

"콜록! 지금은 이게 한계인 것 같아요."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까?"

"아뇨. 조금 상스러운 비유지만 배가 꽉 찬 느낌? 소화되면 다시 빨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무리에요."

"과연."

소화되면 또 들이마실 수 있다는 거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되는 검이다.

이참에 듬뿍 들이마시고 악마 퇴치에 도움이 되면 딱 좋다. 겸사겸사 성녀와 인연도 생기고.

"성검의 힘을 일부나마 얻으셨는데 어떠십니까?"

"잠시만요. 그러니까 신성력을..."

화아아악

작은 힘을 모으려던 리디아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수준으로 신성력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적어도 세 명의 무구와 갑주에 완벽한 축성을 해줄 수 있었다.

"검의 힘을 세 번 정도 더 흡수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전원의 무구에 축성을 걸어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면 오늘 점심과 저녁, 내일 아침에 축성을 걸어주십시오. 언제까지 악마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으니 하루 후에 결전을 걸지요."

"네!"

리디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간신히 희망이 생긴 것이다.

루크는 번스타인 가문의 일행들에게 작전 전달을 위해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움츠러든 마검이 웅웅거리며 떨렸다.

-서, 설마 계속해서 내 정수를 저년에게 먹일 생각이냐...?

"그런데?"

-그, 그만둬라...! 그렇게 되면 내 힘이 더 약해질 거다...! 저 검은 안개에 휩싸여 죽고 싶은 거냐...?

"어차피 간 보고 있는 새끼가 무슨. 도움 안 되면 도핑하는 데나 써먹어야지."

냉담한 말투에 마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좋다... 내가 양보하지...!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이번 결전에서 내 힘을 마음껏 휘두르거라... 성녀에게 활약을 시키는 것보단 네가 나서는 게 나을 터... 너 역시 그걸 바라지 않느냐...?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거래 아니냐며 마검이 재촉했다. 루크는 잠시 마검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새끼가 어디서 협상질이야? 닥치고 정수나 깔끔하게 씻어둬라. 곧 맛있게 먹힐 몸이니까."

-자, 잠깐...!

마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루크는 소화가 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마검의 비명이 울렸다.

****

루크와 율리히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애초에 백작이 보낸 목적의 반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무하는 거였다.

사람들은 반쯤 희망을 버리고 있다가 영주의 아들들을 보자 눈물을 쏟았다. 자식을 사지로 보내면서까지 자신들을 구하려 하다니!

"도, 도련님. 저희가 살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너흴 살리기 위해 우리가 여기 온 거니까. 너희를 구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여기에 같이 뼈를 묻겠다."

"흐흐흑! 감사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루크의 다독임을 들은 영민들은 눈물을 쏟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머리 꼭대기에 서서 권위만 내세운다고 여겼던 귀족들이다.

그런데 자신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목숨을 걸다니. 감동으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모습에 율리히는 슬쩍 혀를 찼다.

"해본 적도 없으면서 제법 잘 하는구나. 타고 난 모양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시킨 일이시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다만."

루크의 대답에도 율리히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갈수록 루크가 일행의 리더처럼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번 방문에서 명령권자로서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었건만, 오히려 더욱 위치가 애매해지게 되었다.

"이쪽 구역은 너에게 맡기겠다. 나는 반대쪽을 살피마."

"예, 조심하십시오."

"나도 내 몸 정도는 챙길 수 있다. 레이 경도 있고."

약간 삐딱하게 대답하는 율리히를 보며 루크가 으쓱였다. 요즘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건지 갈수록 본심을 드러내는 율리히였다.

율리히가 루크 앞에서 본색을 거리낌 없이 밝힐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도, 도련님께서 직접 여기에...!"

"앉아있어라. 악마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했을 텐데."

루크는 율리히를 보내고도 위무를 계속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을 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백작이 직접 아들들을 보냈다는 사실에 눈물을 쏟으며 기뻐했다. 레너드 백작의 인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아... 옛 생각이 나는군...

"옛 생각?"

갑자기 중얼거리는 마검의 목소리에 루크는 멈칫했다.

-나를 만든 창조자는 내게 말했지... 언젠가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고통받는 자를 구하는 위대한 무구가 되라고 말이다...

"훌륭한 창조주였군."

-그래... 당시에는 전혀 그런 걸 알지 못했지만...

마검의 말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후회와 자책, 그리고 깨달은 자의 목소리였다.

-지금은 알겠다... 내가 구할 사람이 이런 자들이었다는 걸... 내가 창조된 목적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그, 그렇다면...!"

-그래... 루크 번스타인... 나의 소유주여...

마검은 웅웅거리며 푸른 불꽃을 냈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불꽃. 루크를 상처입힐 생각이 없는 힘의 권화였다.

-내 이름은 마검 볼베르크... 나 그대를 내 주인으로 인정하노니... 나와 함께 걷겠는가...?

"...!"

루크는 마검을 잡은 손을 떨었다. 그 전설의 마검, 불의 권화, 화염의 화신인 마검이 지금 자신을 소유주로 인정하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던 루크가 마검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마검, 볼베르크여."

-말하라... 내가 주인으로 섬기고자 하는 자여...

뜨겁지 않은 불꽃을 만지며 루크가 담담히 말했다.

"개소리 말고 들어가 있어라. 새끼가 정수 안 먹히려고 별짓을 다하네."

-아, 아니... 그게 아냐... 내 진심인데...!

"세상에 진심이 다 뒤지면 너도 진심이다, 새꺄."

-자, 잠깐만...! 주인으로 섬긴다니까...!

다시 마검을 허리춤에 찬 루크가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어두칙칙한 검은 하늘은 악마의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 진짜야...! 믿어줘...!

이제 곧 축성이 완료된다. 내일이야말로 모든 걸 걸고 싸우는 날.

-딱 한 번만... 한 번만 믿어봐...!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먹히기 싫어...! 마검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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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결론만 말하자면, 마검 볼베르크는 소멸되지 않았다.

-허억, 허억...! 살아 있어...! 내가 살아 있어...!

이유는 간단했다. 겨우 네 번 만에 모든 걸 흡수하기엔 성녀의 용량이 모자랐던 탓이다.

리디아는 깊게 숨을 내쉬며 루크에게 마검을 돌려줬다.

"이걸로 신성력은 충분히 채웠어요. 이 정도면 모든 분의 무구를 축성하고도 남겠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만전을 기해 나쁠 건 없지요. 더 가져가십시오."

"아니에요. 이미 넘치도록 건네받았습니다. 이 이상 루크님에게 폐를 끼칠 순 없어요."

루크의 권유에도 리디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많은 정수를 흡수했지만, 아직도 마검이란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볼베르크다.

여기서 더 흡수하면 진짜 검의 형태를 한 고철이 되어버릴 터. 리디아는 이 이상 루크에게 받아갈 수 없다며 거부한 것이다.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루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볼베르크를 회수했다. 리디아의 성격상 더 권유한다고 받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이제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슬슬 작전 회의를 시작해야 할 때군요."

"성기사 분들은 제가 불러모을게요. 번스타인 가문에서 나오신 분들은 루크 님께서 모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회의실에서 나간 루크가 슬쩍 볼베르크를 들었다. 볼베르크는 계속 웅웅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느껴진다...! 들린다...! 나는 존재하고 있어...! 그저 존재만 할 뿐인 게 이토록 멋진 일이었던가...?

"완전 신났구만."

-주, 주인이시여...!

루크의 목소리를 들은 볼베르크가 흠칫거렸다. 이전까지의 시건방진 태도는 저 멀리 가져다 버린 지 오래였다.

마검의 말에 루크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주인이 어디에 있는데? 난 도통 모르겠다만?"

-오오, 황송하옵고도 황송하여라... 그 존함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울지니... 이 티끌과도 같은 존재가 감히 당신의 종을 자처하나이다... 위대한 분께서는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주소서...

"고만 좀 해라. 엉덩이 헐겠다."

-그것이 주인의 명이시라면...

루크가 검신을 툭툭 두드리자, 엄청난 손바닥 회전이 뚝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지 연신 움찔거리며 검신을 떨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베르크는 두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첫째는 루크가 볼베르크의 힘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써먹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보물도 간단히 부숴버릴 수 있는 인간이 루크였다. 그리고 이보다 중요한 두 번째 사실.

'이 인간은 나를 없애버릴 방법을 안다!'

볼베르크는 고대의 마검. 지금 시대에는 검을 봉인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하물며 정수를 소멸시키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어째선지 루크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 여자를 통해 흡수하는 방법만 아는 게 아니야, 여러 개 알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정수 흡수에 실패했는데도 저리 여유를 부릴 리가 없다. 볼베르크의 예상대로 루크는 씩 웃으며 검을 흔들었다.

"죽다 살아나니 세상이 즐겁지? 실컷 즐겨둬라. 소멸하기 전에 아쉬움이 없어야 할 거 아니냐."

-주, 주인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나이다...!

"난 섬김받기 싫은데?"

-제발...! 뭐든 바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제 뜻이며, 당신의 명령은 저의 사명이니...!

"그럼 네 정수를 유용한데 써먹으려고 하는데 협조 좀 해줄래?"

볼베르크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울기 직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루크에게 뻗대던 대가가 한꺼번에 돌아오고 있었다.

심지어 협상할 방법도 없다는 게 더욱 암담했다. 악마를 상대할 유일한 무구라면 모를까, 힘을 잔뜩 빨아먹은 성녀가 있다.

그냥 철검에도 축성만 하면 악마에게 통하는데 왜 마검에 매달리겠는가.

"뭐, 한 가지만 해주면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그, 그게 무엇입니까...!?

"종속의 맹세."

-...!

볼베르크는 할 말을 잃었다. 종속의 맹세라는 건 영적 존재가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종속된다는 맹세 그 자체.

맹세하면 그 순간 생사여탈권을 주인에게 양도한다. 주인이 된 자는 손가락만 튕겨도 종속된 자를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지간히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절대 안 하는 맹세다. 머뭇거리는 볼베르크를 보고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건 너무하지? 하긴, 종속의 맹세는 너무 끔찍하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래, 인생은 짧고 굵게 살아야지. 편히 쉬고 있어. 언젠가 네가 소멸하는 그날, 당당히 세상을 바라보며 말하는 거야. 난 자유롭게 살았다고."

-나, 마검 볼베르크는 루크 번스타인을 영혼의 주인으로 섬기나이다...!

[ 마검 볼베르크가 자발적으로 당신에게 종속되었습니다. ]

[ 마검의 힘을 끌어내고 정수를 소멸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종속의 맹세를 통해 마검의 의지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

오랜만에 듣는 메시지에 루크가 씩 웃었다. 이걸로 쓸만한 검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앞으로 잘 써주마."

-부디 주인의 뜻대로...!

볼베르크는 충성스러운 맹세를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나댔다. 적당히 깝칠 걸...'

****

작전 회의를 위해 루크 일행과 성녀 일행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든 사람을 확인한 리디아가 말문을 열었다.

"루크님 덕분에 현재 저희 상태는 만전입니다. 하지만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악마를 잡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차고 넘칠 만큼 신성력을 보충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비약의 독성과 함께 계속해서 신성력이 소모된다. 지금이 악마를 공격할 적기였다.

"우선 여러분께 들려드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예. 우선 좋은 소식은 악마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겁니다."

"...!"

성기사들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가만히 있었지만, 루크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이 넓은 도시에서 악마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저 일직선으로 가서 악마와 싸우면 될 뿐. 엄청난 이점이 아닌가.

"몽마는 다른 악마에 비해서도 특히나 성가신 상대입니다. 자신이 있는 장소를 숨긴 채 마음껏 꿈을 통해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리디아는 탁자 위에 올려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몽마는 자신이 소환된 장소에 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충분히 힘을 키우지 못한다면 본체는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놈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후보지를 몇 개 추려놓았을 뿐입니다만, 적어도 이중에선 확실히 있습니다."

지도 위의 손가락이 서쪽 지구와 북쪽 지구의 다섯 장소를 가리켰다. 다섯 군데 전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설령 허탕을 치더라도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찾을 수 있는 위치.

"확실히 그건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나쁜 소식은...?"

"여전히 제가 여기서 떠날 수 없다는 겁니다."

애초부터 리디아가 못 움직인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비록 피로에서 회복되긴 했지만, 있던 사람들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저 이전보다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뿐. 여전히 생존자들에게 매인 상태라는 건 변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악마를 공격하는 데는 제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호위로 성기사 두 분을 제외하면 모두 공격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만..."

"으음."

율리히가 옅은 신음을 내었다. 악마에게 가장 강력한 건 성녀이건만, 비장의 카드가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다행히 루크님 덕에 성검의 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축성을 건 무구와 갑옷이라면 악마를 상대로 충분히 유효하겠지요."

"저희 역시 악마에 대한 대응책은 충분히 있습니다. 성녀님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해볼 만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불안감을 잠재우듯 한 성기사가 리디아의 말을 받았다. 한참 고민하던 율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차피 시간은 악마의 편이다.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미루다가 당하느니, 도박이라도 걸어보는 수밖에.

"좋습니다. 해보지요."

"그럼 전투조를 편성하도록 하지요."

편성은 빠르게 끝났다.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더 필요한 이상 어지간하면 빠질 수 없었으니까.

빠지는 사람은 성녀인 리디아, 호위인 성기사 둘, 그리고 번스타인 가문의 후계자인 율리히 뿐이었다.

"율리히 님께서는 안 싸우시는 겁니까?"

"가문의 일입니다."

어느 성기사의 말에 율리히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후계자인 내가 죽으면 니가 책임질 거냐는 소리다.

성기사들은 율리히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약간의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악마에게 폐쇄된 도시를 뚫고 왔다기에 기개있는 사내인가 했더만.'

'하긴, 귀족은 정치랑 보신이 우선이지.'

율리히는 성기사들의 시선을 읽었지만 입을 다물고 모른 체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진 한복판에서 악마와 붙는 건 너무 위험하다.

목숨이 보장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쇼맨십을 보여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가문의 기사들은 제가 이끌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루크의 말에 율리히는 소태 씹은 표정을 감추며 수긍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루크 외에 적임자가 없었다.

전투조가 편성되자 리디아는 각각의 무구와 갑주에 축성을 해줬다. 작은 빛무리가 검과 갑주에 빨려들어가는 게 전부인 변화.

하지만 착용한 사람들은 단박에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왠지 검이 손에 착 달라붙는 듯한, 갑주를 안 입은 듯한...'

'놀랍군. 이게 진짜 성녀의 신성력이라는 건가?'

처음으로 신성력을 느껴본 사람들은 신기해했고, 이미 한 번 겪어본 사람은 차원이 다른 힘에 놀라워했다.

모든 축성이 끝나자 성녀가 눈을 감고 사람들을 향해 기도했다.

"부디 여러분께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감사합니다. 성녀님께서도 무탈하시길."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루크 일행은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

"하하, 이거 엄청난데요!"

브루노는 활짝 웃으며 마음껏 안개를 달려나갔다.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안개가 칼과 갑옷에 닿기만 하면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굳이 루크가 불을 피워올릴 필요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브루노를 보고 성기사가 걱정스럽게 충고했다.

"조심하십시오. 일반 안개라면 통하지 않겠지만 악마의 공격이라면 위력을 줄여주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게 어딥니까. 이전에는 손도 못 댈 지경이었는데."

브루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안개를 해치고 공격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차고 넘치는 이득이었다.

루크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며 성기사를 바라봤다.

"지도에 따르면 이 주변인 것 같습니다만."

"예. 하지만 여긴 아닙니다. 허탕이군요."

"그럼 이동하지요."

성물에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한 일행은 즉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도, 그 다음 장소도 허탕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장소에서 일행은 알아차렸다. 여기야말로 당첨이라고.

"이건 딱히 검사 안해봐도 알겠네요."

맥스가 새까만 안개를 보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진득하고 질척질척한 기운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농도와는 비교도 안 지경. 모두 전투를 직감했는지 무기를 꺼내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 사이 루크는 슬쩍 맥스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저번에 말했던 거 만들어놨지? 이리 줘."

"정말 쓰시게요?"

"딱 한 번만 쓸 거니까 괜찮아."

"어휴, 이젠 저도 모르겠습니다."

맥스는 한숨을 쉬며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붉은빛의 찰랑거리는 액체가 든 병이었다.

액체를 확인한 루크는 그 자리에서 유리병을 비우고 슬쩍 옆에 던져버렸다.

"크, 씁쓸하군."

"부작용을 최대한 제거했으니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대신 몸이 나른해질 테니 평소와 다른 감각에 주의하십쇼."

"이래 봬도 수면제 먹고 검 휘두른 적도 있어. 이 정도야..."

"다들 준비하십시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성기사가 급박하게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이 사방에서 꿈틀거렸다.

-이 빌어먹을 놈들,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오다니.

여전히 쇠를 긁는 목소리였지만 이전까지의 여유로움은 없었다. 분노와 짜증, 그리고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축성을 받았구나. 그래서 그리 용감하게 구는 것이냐? 그 이쑤시개만 한 것들로 나를 대적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느냐?

"모두 전투 준비!"

악마의 말을 무시하며 일행 전체가 자세를 잡고, 성기사들은 각종 성유물을 품에서 꺼냈다.

검은 안개를 향해 비추며 성기사가 경구를 중얼거리자,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사악한 존재여, 여신의 권능 앞에 사라져라!"

화아아아악

빛에 의해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권능에 다들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했다.

모든 안개가 씻겨나가자, 꿈틀거리는 거대한 뱀 형상의 무언가가 똬리를 튼 게 보였다. 뱀은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키득거렸다.

-아, 밝구나. 거기서 끝이더냐? 좀 더 보여봐라! 무언가 대단한 게 있으니 그리 자신만만한 것이겠지!

"이놈! 그렇다면...!"

"자, 잠깐! 뒤로 물러서!"

성기사 중 하나가 다른 유물을 꺼내려 할 때, 기사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검은 형상을 한 기사가 기사의 뒤에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꽈아앙

"커억!"

성기사는 검을 들어 막았으나, 엄청난 힘에 뒤로 날아갔다. 팔이 꺾인 걸로 보아 이미 전투 불능이 된 듯했다.

사람들이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검은 갑주를 입은 그림자 셋이 일렁이고 있었다.

-멍청한 것. 내가 아무 대비도 안 했다고 생각했느냐? 그것들은 내가 지닌 힘의 구현이자, 과거 영웅들의 모방이다. 과연 네놈들이 상대할 수 있겠느냐?

"비, 빛이여!"

성기사 중 하나가 다시 성유물을 들어올렸지만, 검은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빛에 불타면서도 기사의 검은 그대로 휘둘러졌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얼마나 많은 힘을 집약시켰다고 생각하느냐? 검을 먼저 휘두르지 않으면 죽을 거다!

"이런...!"

성기사들은 낭패한 얼굴로 검은 기사들을 바라봤다. 어디까지나 악마와 상극인 신성력을 믿고 건 싸움이었다.

그런데 악마는 무식하게도 힘을 단숨에 정화할 수 없을 만큼 쑤셔 넣고, 영웅의 실력을 구현시키는 걸로 약점을 해결했다.

'낭패다! 설마 우리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성기사가 악마의 공략법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악마 역시 성기사들의 공략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성기사를 보며 뱀 형상의 악마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고대의 영웅을 어찌 대적하겠느냐!? 네놈들 중 영웅에 필적한만한 실력을 갖춘 자가...!

"우리얍!"

쿠와아아앙

악마의 말이 이어지던 도중, 브루노가 그림자를 후려쳤다. 축성을 받은 무기에 검은 그림자가 뒤로 날아갔다.

쾅, 소리와 함께 박혀서 꿈틀대는 그림자를 본 악마가 부르르 떨었다.

-...시발, 있잖아! 왜 있는 건데!

"브루노, 레이 경! 각각 그림자 하나씩 맡도록! 남는 놈 하나는 전체가 달려든다!"

"예!"

두 사람이 각각 그림자에게 뛰쳐나가자 성기사 중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 잠깐만요! 무모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영웅의 실력을 가진 그림자에게 맞서다니! 적어도 하나를 집중해서 공격하고 나머지를 막으며 처리하는 방식으로을 써야...!

쩌정, 쾅, 쉬이익

"...이런 세상에."

성기사는 뜨악한 표정으로 브루노와 레이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그림자를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 악마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두 기사의 실력에 고대 영웅과 근접한단 말인가?

"정신 차리십시오!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예, 예!"

화들짝 놀란 성기사들은 일제히 남은 그림자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력에 버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해도 결국 밀도를 높인 것 뿐.

계속해서 쏟아부으면 녹아내리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이 하나 뿐이라면 충분히 없애버릴 수 있다!

"빛이여!"

"여신의 적에게 철퇴를!"

"포위해서 베라!"

사방에서 신성력이 쏟아지고, 기사들의 검이 풍차처럼 날아들었다. 아무리 영웅의 실력을 갖춘 그림자라 해도 본질은 악마의 구현체.

상극인 속성에 공격받으며 떼거리로 몰려드는 기사들까지 막기엔 부족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패색이 짙어지자 악마가 분노하며 루크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봐도 이 상황에서 지휘관은 루크였으니까.

-네놈이 지휘관이렸다!

"아, 안돼! 큭!"

검은 그림자의 검을 막으며 성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설마 자기 보신에 철저하던 악마가 직접 나설 줄이야!

악마는 단숨에 루크를 휘감으며 온갖 악몽을 환상으로 구현시켰다.

-네가 비록 축성을 받았다 한들 이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디 고통 속에서 미쳐보거라! 크하하하하!

"크윽!?"

커다란 웃음 소리와 함께 루크의 눈알이 뜯겨져 나갔다. 이어서 발이 통째로 갈라지고, 손이 찢겨지며 혈관이 튀어나왔다.

이내 심장과 내장이 몸 바깥에 튀어나오고, 갈비뼈가 복부를 갈랐다. 그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미친! 저게 대체 뭐야!"

"환상일 뿐이오! 진정하시오!"

"고통은 환상이 아닐 텐데...!"

맞는 말이었다. 저건 다 악마의 환상.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고통을 보여주는 환상이기도 했다.

당하는 루크는 전부 저 고통을 실제로 느끼고 있을 터!

-자, 고통의 비명을 질러라! 크하하하.... 하아?

"크으읍! 내가 이런 고통에 굴복할 것 같으냐!"

루크는 이를 악물고 악마를 노려봤다. 그 모습에 악마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네, 네놈? 어떻게 이 고통을 버티는 거냐!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모든 게 끝장난다! 나는 여기서 쓰러질 수 없어! 설령 고통이 나를 막는다해도!"

-마, 말도 안돼! 신념으로 막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나의 신념은 그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다!"

화르르륵

루크의 손에서 마검 볼베르크가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맥스가 중얼거렸다.

"여, 역시! 역시 도련님께선...!"

"무슨 일이오!? 저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소?"

"그저 굴하지 않는 신념의 힘입니다... 그렇게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맥스는 주군의 고통을 보며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어제 루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맥스, 결전을 대비해서 꼭 부탁해야 할 게 있다.

-이번엔 또 뭡니까?

-고통을 못 느끼는 약 좀 만들 수 있냐? 사지를 눈앞에서 잘라도 못 느끼는 수준으로.

-만들 수는 있긴 한데... 그거 마약 종류인 거 아시죠?

-딱 한 번만 쓸 거야. 악마의 공격에 대비한 진통제 용도니까 걱정 마.

-어휴, 악마만 아니면 절대 안 만드는데.

그게 바로 방금 전 전달한 붉은색의 약병이었다. 맥스는 알고 있었다. 저 모든 게 단순한 의지의 힘이 아님을.

"볼베르크여, 나의 부름에 응하라!"

-아, 안돼!

불타는 마검이 그대로 악마를 향해 휘둘러졌다. 악마가 기겁하며 물러섰지만 루크가 한발 빨랐다.

볼베르크는 그대로 악마의 본체를 반으로 찢었다.

촤아악

-크아아악! 어떻게 인간이 이 고통을! 그저 의지만으로...!

"나의 의지를 무시하지 마라. 바로 이것이..."

그래, 바로 저것이...

"...내 신념의 힘이다!"

...고오-급 마약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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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

"...."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이 도시 전체를 괴롭혀오던 악마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일부는 얼이 빠진 채 아직도 악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현재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넋을 놓건 말건 주변 풍경은 바뀌고 있었다.

푸스스스

"그, 그림자가...!"

영웅의 힘을 가지고 있던 그림자는 무너져 내렸고, 자욱하게 깔렸던 안개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두컴컴한 세상에 햇살이 비추어졌다. 시꺼먼 어둠이 걷힌 세상은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러분."

노을 아래서 루크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이가 보는 가운데, 붉게 물든 얼굴로 루크가 선언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아!"

한 박자 늦게 튀어나온 전투원들의 함성이 사방을 울렸다.

****

루크 일행이 돌아왔을 때, 도시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얼싸안고 서로의 목숨이 붙어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 탓에 돌아오는 루크 일행의 행색은 먼지투성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는 그야말로 개선장군 그 자체였다.

"영웅들에게 축복이 있으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십쇼!"

사방에서 밀려드는 인파에 루크 일행은 곤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악마한테 점거된 도시를 해방하고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라. 지금의 시대에 누가 이런 영예를 맛보겠는가?

뿌듯함에 잠겨 있던 루크 일행이 인파 속에서 해방된 건 리디아가 나오고 나서였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리디아 역시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일행을 응시했다. 원래 싸우는 자보다 기다리는 자가 더 애가 타는 법.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루크 일행은 누구 하나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고 악마만 쓰러뜨리고서 돌아왔다.

그녀로서는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모두 루크님이 있어 주셨던 덕분입니다."

"그분이 지휘봉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아찔합니다."

"브루노 경과 레이 경의 무위도 엄청났지요."

성기사들은 신나서 이번 토벌의 주역들을 소개했다. 사람들을 약간 뒤로 물리기는 했으나 못 들을 거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성기사들의 말을 주워들었다. 악마와의 만남. 영웅의 힘을 가진 그림자. 그에 대항하는 두 기사.

사람들을 지휘하며 싸우다 뒤에서 악마에게 덮쳐지는 루크.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환상을 뚫고 휘둘러지는 불꽃의 성검!

"...그리하여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아찔하군요."

"세상에."

리디아가 입을 가리며 탄성을 터트렸다. 브루노와 레이의 무력, 루크의 지휘, 그리고 마지막에 환상을 버텨낸 의지력까지.

하나라도 빠졌으면 그 자리에서 몇 번은 전멸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얻어낸 완전 승리.

그야말로 서사시에 어울리는 업적이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다들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만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여러분들은 충분히 일했어요. 오늘만큼은 푹 쉬세요."

리디아는 일행 전체를 숙소 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모든 일행이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지금까지 듣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야, 진짜 엄청난 일이 있었구먼."

"지금 들은 이야기, 고향에 돌아가면 꼭 가족들에게 들려줘야겠는걸."

"그나저나 브루노 경과 레이 경? 난 왜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지?"

누군가는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살아난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고, 누군가는 생생한 무용담을 들려줄 생각에 흥분했다.

셈에 빠른 자들은 영웅의 실력을 지녔다는 두 기사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한 음유시인이 있었다.

중년의 음유시인은 냉큼 품에서 목탄을 꺼내 종이에 글자를 휘갈겼다.

"악마, 성녀, 영웅, 그리고 성검! 시상이 떠오른다, 시상이!"

어느 시대건 영웅의 업적은 노래로 전해지는 법. 지금 여기서 루크 일행의 노래가 탄생하고 있었다.

****

악마가 사라졌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오히려 번스타인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은 지금부터가 더 바빴다.

도시의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사상자는 얼마나 되는지, 복구에는 얼마나 걸리는지를 조사할 때였으니까.

다만 이 조사에서 루크와 브루노, 맥스는 빠졌다. 율리히의 강력한 권고 때문이었다.

"토벌에서 많이 고생한 모양이니 자잘한 일은 내가 처리하마."

"전 딱히 상관없습니다. 몸도 멀쩡하고요."

"악마에게 당했다는 소릴 들었다. 혹시 모르니 몸을 돌봐야지."

"진짜 괜찮은데요."

"쉬라고, 좀!"

참다못한 율리히가 버럭 소리쳤다. 진짜 루크 몸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가 아닌데 자꾸 저러니 짜증이 확 치솟았다.

'제기랄. 이놈의 명성이 너무 올랐어.'

지금껏 가문에서 루크가 벌인 일은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입지가 높아졌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가문 내에서의 입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계승권이 없는 서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악마 강림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버렸지 않은가.

'가문 내에서의 입지는 아무리 높아도 가문 내일 뿐이야. 하지만 이번 사태가 소문을 타고 제국 전체에 퍼진다면...'

그건 그 자체로 본인의 명성이 된다. 번스타인 가문의 서자 루크가 아니라, 영웅의 면모가 있는 귀족 루크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서자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서자 신분은 가문 내에서나 약점이지, 외부에는 그저 귀족일 뿐이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독립 영주가 될 수도 있어.'

황제에게 영지와 새로운 성을 하사받은 가문의 시조. 그렇게 되면 하나의 세력을 가진 군주로 당당히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놈이 곧 이어질 난세의 바람을 타고 쑥쑥 성장한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쨌든 쉬어라! 네 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율리히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눈을 껌뻑이던 루크는 곧 피식 웃었다.

뒤늦게 애쓰는 꼴이 우습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진즉 쌀이 익어서 밥이 된 마당에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자기 딴에는 루크가 돌아다니며 영향력을 넓히려는 걸 차단하려는 셈일 것이다.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안 그래도 영웅으로 여겨지는 루크다. 돌아다니면서 얼굴도장을 찍는다면 열기는 더욱 과열될 터.

율리히 입장에서는 발등에 붙은 불이라도 끄고 싶을 거다.

'문제는 이미 그럴 수준을 넘어섰다는 거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계십니까?"

"있다. 들어와."

허가가 떨어지자 브루노와 맥스가 들어왔다. 여전히 실내복 차림인 둘을 보며 루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도 율리히가 꿈쩍 말라고 했냐?"

"일단 말은 정중하게 했습니다. 말은."

브루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말이야 정중했지만 그게 강요인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럼 바깥 상황은 모르겠네?"

"저는 압니다."

"맥스, 네가? 무슨 수로?"

"아침 일찍 주변을 둘러봤으니까요. 그런데 돌아오는데 율리히 도련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분 얼굴이 악마보다 더 무섭더군요."

그때가 생각나는지 맥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정 관리를 잘 하는 율리히가 그럴 정도면 어지간히 몰린 모양이었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악마 토벌에 대해서 말이 많지요. 영웅의 업적이라고요. 특히 주군, 브루노 경, 레이 경의 이름이 엄청납니다. 불경하지만 성녀님은 곁다리 수준입죠."

"그렇겠지."

이미 예상했던 대로다. 아무리 성녀라 한들 사람들은 뒤의 공로자보다 장대한 전투를 기억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맥스는 여기서 루크도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놀라운 건 하룻밤 사이에 노래도 만들어졌더군요."

"뭐? 노래?"

"예. 시민 중에서 음유시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실력 있는 음유시인이었는지, 노래가 꽤 좋더군요."

맥스는 노래 가사 몇 구절을 흥얼거렸다. 불경죄를 걱정해서인지 직접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다.

다만 성검의 용사 같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특정 인물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브루노 경은 폭풍의 기사, 레이 경은 염발의 기사랍니다."

"크아, 그거 멋지구만!"

자신의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브루노가 무릎을 탁 쳤다. 루크가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 다 썩 좋은 별명이었다.

"레이 경은 불꽃의 머리칼이라. 운치 있는데."

"음률도 듣기 좋아서인지 사방에 노래 가사가 쫙 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제법 유명해지겠던데요."

"좋군."

루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언제까지고 번스타인 가문 내에서 천재 행세만 할 생각은 없다.

명성이란 언제 어느 때고 도움이 되는 법. 유명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그나저나 염발의 기사라.'

브루노도 그렇지만 레이 역시 슬슬 유명해지고 있었다. 하기야 그 무력이면 주머니 속의 송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루크의 눈이 반짝였다.

'잘만 하면 데리고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설령 곁에 여포가 있다 해도, 관우를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는 법.

루크는 인재 욕심으로 눈을 번들거리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도시의 조사와 새로운 행정관의 임명 자체는 일주일 만에 끝났다. 악마가 몽마였던 탓에 재산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 행정관이 착실하게 후임을 키워왔기에 업무의 인계도 어렵지 않게 끝났다. 악마 사태에서의 불행 중 다행이었다.

피해 복구 과정이 끝나자 만약을 대비해 머물던 성녀 일행도 떠나기로 했다.

"번스타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지금도 아찔하군요."

"아닙니다. 사람을 보호하는 건 교단의 당연한 의무인 걸요."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하는 율리히에게 리디아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말투 자체는 정중했지만 상투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율리히가 가문의 대표는 맞았지만, 같이 전선에서 싸운 동료는 아니었으니까.

"번스타인 가문에서는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가 아니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언제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던 리디아가 루크를 향해 다가갔다. 당황하는 율리히를 내버려둔 채, 리디아는 작은 목걸이를 루크에게 내밀었다.

"루크님이 없었다면 저흰 이길 수 없었겠지요. 답례로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그저 제 목걸이일 뿐입니다. 친구의 증표라고 생각해주세요."

율리히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단순한 선물일 리가 없다. 말하자면 '당신은 저와 큰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선언.

성녀와 연줄이 생긴다는 건 가볍게 넘어갈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리디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든 그 목걸이를 가지고 교단에 와 주세요. 아무리 바빠도 꼭 나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찾아가지요."

"예. 언제든 상관없으니 꼭 오세요."

상투적인 아까 전의 대화와 달리 화기애애한 인사가 오고 갔다. 성기사들도 웃음을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히는 불편한 속내를 억누르며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대들에게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성녀님께서도 보중하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건 율리히였지만, 왠지 들러리가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녀 일행이 떠나고 나자, 한숨을 쉰 율리히 역시 일행을 이끌고 가문을 향해 나아갔다.

다들 말고삐를 쥔 손이 가볍건만 율리히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율리히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루크 도련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누구 다치신 분은 없습니까!?"

일행은 며칠에 걸려 다시 번스타인 백작가에 도착했다. 가문 내의 하인과 기사들은 냉큼 달려와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먼저 뛰어온 건 오스카였다.

"주, 주군!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지요!?"

오스카는 걱정으로 가득 찬 외침과 함께 율리히를 빠르게 훑었다. 혹시라도 잘못된 곳이 있을까봐 겁이 난 눈치였다.

율리히의 온몸을 싹 훑은 뒤에야 오스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휴! 주군께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리 무탈하게 돌아오시니 진실로 다행입니다."

"오호라. 그런가?"

"예. 이렇게 다시 뵈니 진심으로... 주군?"

오스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지 율리히의 이마에 핏대가 맺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팰 듯한 살기도 넘실거렸다.

"자, 안 그래도 내가 자네를 무척 보고 싶었다네."

"주, 주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를 뵈기 전에 일단 저쪽 구석에 가도록 하세.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오스카를 질질 끌고간 율리히는 정원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원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퍽, 퍽, 퍽

"새끼야, 마검의 선택 안 받았다며! 안 받았다며!"

"컥, 끄엑!? 주, 주군! 잠시만, 꺽!"

"안 받았다는 놈이 불꽃 부르잖아! 뜻대로 부르잖아! 근데 안 받았다고!?"

"주군, 그게 저도 사람인지라 틀릴 수가, 커흑!?"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현자님!? 내가 속이 터져서 진짜...!"

그날, 책상물림의 현자는 세상의 험난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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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