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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18

110. 함정의 함정(2)

던전 사태 이후로, 세계 어디든 날마다 끔찍한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그 때문에 이제는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반정부주의 러시아 테러집단에 의한 이번 사태는….

-이번 사건의 중심인 배데스 길드의 길드장. 강현은 현재까지 잠적 중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반다렌코. 그는 누구인가?

-실제 목격자 정보를 단독으로 입수한 저희….

외국의 테러 단체가 대한민국을 습격한 것도 모자라서, 국민을 납치했다.

이것은 던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아, 강현 씨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을 노려봤다.

"모릅니다..."

"분명 살아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신성아 씨."

"예. 강현 님은 분명 살아계십니다."

"사건이 터진 던전은 이미 클리어 됐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만약 강현 씨가 살아 있다면, 도대체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 이대로 가면 강현 씨는 대한민국의 공적이 될 겁니다!"

흥분한 신태길이 손을 뻗어 TV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굳은 얼굴의 반다렌코가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은 대한민국과 싸울 생각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강현이다. 그는 싸움 도중 사람들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다. 우리는 그를 찾기 위해 불가피하게 인질을 붙잡았다. 하지만, 강현만 보내준다면 모든 인질을 안전하게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약속한다.

반다렌코는 직접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사에 영상을 뿌렸다.

반다렌코는 강현이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들의 동료. 강신 길드와 김준용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능력자 교육 학교에 입학한 동료 또한 이유 없이 구타를 가했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복수로 자신들은 강현을 공격했으나 강현은 비겁하게 다른 사람들을 방패 삼아 도망쳤다.

때문에, 자신은 불가피하게 인질들을 붙잡았다.

그런 내용의 비디오가 전국적으로 방영된 것은 물론이고, 위튜브와 온갖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도배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들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했다.

-강현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개쓰레기네.

-걔는 원래부터 인성 쓰레기로 유명했음.

-배데스 길드는 뭐 아무런 입장 발표 없나? 이거 가만히 처박혀 있는 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강현 당장 러시아로 보내라. 인질들이 무슨 죄냐.

-그냥 배데스 길드 전체를 보내야 될 듯.

사람들을 조종하는 데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싸해 보이는 구실과, 약간의 물꼬를 터주는 것.

그것만으로 강현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신성아 씨. 저게 안 보입니까?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끝이란 말입니다!"

신태길은 항상 차분함을 유지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신성아는 그런 신태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녀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정말 모르니까...'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강현이 부활한다는 것.

사실,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강현이 자신이라도 살려 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성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강현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다.

'만약 정말 강현 님이 거기서 죽은 거라면...'

혹여나 정말 그것이 강현의 마지막이었다면 그때는...

'복수뿐이야.'

반다렌코와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을 쓸어 버린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그것이 두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강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신태길 씨. 일단 강현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가이니까요."

대화를 듣고 있던 한세연이 신태길을 제지했다.

"예...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신태길이 말을 이었다.

"한세연 씨가 말씀하신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 이곳에 계신 분들께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신태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알려줄 거요?"

"정확히는 소개해드린다는 것이 맞겠군요. 여기 계신 배데스 길드의 간부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계신 분입니다."

신태길의 말에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후우, 그러면 들어오시죠."

어째서인지 잔뜩 긴장한 신태길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개새끼야!!!"

-콰아아앙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뭐야?!"

"이 목소리는..."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강현 님!"

그곳에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강현이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잡혀있는 것은,

"최민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범에 등극한 남자. 최민준이었다.

**

오랜만에 죽음을 경험한 강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지독한 무력감이었다.

"하아..."

부활의 페널티로 레벨이 하락하고,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절반으로 감소한 상황.

전신에 무기력함이 덮쳐왔지만, 그보다 더욱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졌어."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것.

반다렌코.

자유 능력자 연합.

신성아.

능력자 교육 학교의 학생들.

최연화까지.

온갖 상념들이 강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부활 능력은 들켰을까?"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숨기려 했으나 이제는 힘들 것 같았다.

"뭐, 걸렸으면 어쩔 수 없지."

이제 강현은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릴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부활의 정체가 탄로 난다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신성아가 무사한지가 걱정이네. 최연화도 그렇고..."

신성아는 잘 해냈을 거라 믿는다. 그녀라면 분명 적들의 포위를 뚫고 임무를 완수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놈들에게 잡혀간 사람들.

놈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들을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살아 있다면 최대한 빨리 구해야 했다.

"그러려면 몸부터 회복해야 해."

부활 페널티로 모든 능력이 절반으로 감소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놈들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모르는 상황.

강현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정신 차리자!"

강현이 자신의 뺨을 짝-소리가 나도록 두들겼다.

"우선은 점검부터 해야 해."

강현이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었다.

"레벨은 하나 하락했고... 스텟은 오히려 오른 건가?"

죽기 전 강현의 레벨은 70이었다. 현재 레벨은 69. 부활의 페널티가 레벨 하락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쓰읍... 저거 올리는데 2주는 걸렸는데."

능력자 교육 학교로 바쁠 때였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이 걸려 레벨을 올린 것만은 분명했다.

그 노력이 허사가 됐다고 생각하니 강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좋게 생각하자. 일단 스텟은 올랐으니까."

레벨은 하락했지만, 전체 스텟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번 전투로 근력과 체력이 1 상승했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득인 것이다.

"그리고 스킬은... 거의 변동이 없네."

스킬과 능력은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제자리였다.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냐?"

강현은 유일하게 상승한 능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강혁식 사투(A)

능력 : 목숨을 건 전투에서 적을 해치우고,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설명 : 처절한 싸움의 대가 강현. 그의 막싸움은 이제 절대적인 경지에 오르기 직전이다.

베일과의 전투 후 새롭게 얻은 능력이 중급 체술과 합쳐지면서 생겨난 능력.

처음에는 분명 C등급이었는데 벌써 A등급에 도달했다.

이 유례없는 성장 속도에 강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오르면 좋은 거지. 뭐."

대략적인 점검을 끝마친 강현이 마지막으로 정리할 것을 꺼내 들었다.

이름 : 빌게인의 영혼 장검

등급 : B+

내구도 : 800/800

설명 : 빌게인의 장검을 죽음의 기사 베일의 마정석을 이용해 훌륭하게 가공했다. 기존의 능력을 보존하는 상승시키는 동시에 죽음의 기사 베일의 영혼이 성공적으로 검에 안착했다.

능력 : 광전사, 내구도 강화, 자가수복

검의 내구도는 그사이 회복된 것인지 완벽했다.

문제는 검에 깃든 베일의 영혼.

앞으로 있을 전투를 위해서는 베일과의 담판을 확실하게 지을 필요가 있었다.

"야."

-...

"듣고 있는 거 안다. 대답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존나 태평한 소리 하네."

얼굴을 일그러뜨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가 안 도와줘서 상황이 이렇게 된다는 말은 안 할게. 처음부터 제대로 싸웠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 같으니까."

어쩌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틴 끝에 광전사를 사용했기에, 더 나은 결과가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전투 초반, 놈들의 세력이 건재할 때 광전사를 사용했으면 그 정도로 놈들을 몰아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확실하게 해라. 네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곤란하니까."

강현의 말에 베일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입 꾹 처닫고 있으면 뭐 어쩌라고?"

-너를 돕는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무슨 조건?"

-던전에서 벗어나서부터 점차 나의 정신과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인마."

-언데드의 영혼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

베일의 말에 강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시벌.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그게 가능하니까 네가 지금 검에 들어가 있는 거겠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제안하고자 한다. 앞으로 언젠가, 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면 나에게 새로운 육체를 줘라.

"뭐...?"

-나는 얼마나 오랜 세월 인지도 모를 만큼 미궁을 지켜왔다. 내가 지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을 만큼.

베일의 말에 강현은 그가 공주를 지키는 호위 기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실 생에 대한 미련은 없다. 하지만 궁금해졌다. 새로운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내가 살던 세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의 발로 직접 걸으며,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허, 참..."

-네가 이것만 약속한다면 나도 앞으로 널 돕는다고 약속하지.

"용광로에 안 처박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게 딜(Deal)을 거네."

강현은 황당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는 빌게인의 장검이 필요했다.

-대신 나도 너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기로 하지.

"뭐 어떻게 도울 건데?"

-네 검술.

"검술이 왜."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한 수준이더군. 네 신체는 강인한 전사의 그것이었지만, 검술은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강현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내가 앞으로 너에게 검술을 알려 주겠다. 너에게 재능은 없어 보이지만, 마력을 다루는 능력은 제법 괜찮더군. 검술의 수준을 기본으로 끌어올리고,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에 대한 완성도를 올린다. 그렇게 하면 너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거다.

강현은 잠시 그 의미를 곱씹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베일의 지적은 정확했다.

어쩌면 강현은 아주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계약 성립이다."

-약속은 분명히 지키겠지.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새꺄."

-나는 명예로운 기사다. 우선은 그 천박한 언행부터….

"명예는 지랄하네. 그런 놈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 자존심 하나 지킨다고 구경만 해?"

-그건….

"됐고! 앞으로 서로 맡은 역할만 잘하자고. 해서 네가 육체를 찾으면 그걸로 끝. 오케이?"

-하아... 알겠다.

마침내 강현에게 제대로 된 검술 스승이 생긴 날이었다.

**

"아, 또 박살 났네."

강현이 수십 조각으로 나뉜 스마트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스마트폰은 특수 제작된 케이스가 끼워져 있었지만, 결국 격한 전투를 견디지 못한 것 같았다.

"새로 하나 사야겠네."

던전 사태 초창기부터 전투 중에 스마트폰이 부서지는 일은 흔했다.

그 때문에 던전에 들어갈 때는 가지고 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날은 교육을 위해 편안한 마음으로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단 길드 사무실로 가자."

사실 스마트폰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게 최우선이었다.

밖으로 나온 강현은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예. 어서오십…."

여느 때처럼 인사를 하던 택시 운전기사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가, 강현..?"

"예. 맞습니다. 급해서 그런데 빨리 가주세요."

"..."

이제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유명해진 강현이었기에, 그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 택시기사는 뭔가 이상했다.

"저기요. 출발 안 해요?"

"예예... 갑니다."

굉장히 당황한 모습.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온 대한민국이 강현을 찾기 위해 눈이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지금 막 죽음에서 돌아온 강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강현은 택시기사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도착했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강현이 요금을 내고는 곧장 건물로 들어섰다.

"다들 모여있나 보네."

가볍게 마력을 운용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회의장인가."

평소 사람의 왕래가 없는 장소.

아마 지금 벌어진 사건 때문에 다들 모여서 회의 중인 것 같았다.

"음?"

회의장으로 향하는 복도, 평소 사람이 왕래하지 않는 장소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뒷모습이었음에도 제법 익숙한 실루엣.

"거기 누구야?"

강현의 말에 서 있던 남자가 뒤로 돌아섰다.

"너는..."

돌아선 남자. 최민준과 눈을 마주친 강현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오랜만이군. 강현."

"이 개새끼야!!!"

111화 정면돌파(3)

111. 함정의 함정(3)

"오랜만이군. 강현."

최민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강현은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전력으로 복도를 질주한 강현이 시원하게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앙

주먹은 최민준에게 닿기 직전 붉은 마력 장막에 막혔다.

이것은 이미 예상한 상황.

강현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어 최민준의 멱살을 쥐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강현이 최민준을 뒤집어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

땅이 울리며 콰앙-하는 소리가 울렸다.

"멍청하게 덤벼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

그러나 최민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 새끼가!"

"그런데 어째서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해졌어."

최민준에게서 날아든 마력이 강현의 전신을 조이려는 찰나,

"강현 님!"

회의실에서 뛰쳐나온 신성아가 둘을 붙잡았다.

**

회의장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강현이 신태길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하아, 알겠습니다."

신태길은 한 번에 밀어닥친 상황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의 중심은 자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은 모든 이야기가 끝나면 받도록 하죠."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는 제법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강현의 친구 김태수.

그는 단군 길드에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태수 씨에게는 병든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김태수는 아버지의 치료약을 수소문하던 도중, 최민준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최민준 씨는 김태수 씨가 단군 길드 소속인 것을 알고, 한세연 씨에게 접촉한 겁니다."

그 후에 세계 던전 정상회담 사태가 터지고, 한세연이 최민준을 구해서 구출했다.

그리고 한세연은 자신이 최민준을 구했고, 보호하고 있음을 신태길에게 알렸다.

즉, 김태수 – 최민준 – 한세연 – 신태길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처음 한세연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화가 났습니다."

최민준을 보호하고 있다는 한세연의 말.

신태길은 고민했다.

어쨌거나 상대는 테러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었다.

-하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지만 대한민국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비록 손에 든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 해도, 그것마저도 이용해서 위기를 헤쳐나가야 했다.

"저는 최민준 씨가 충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신태길은 한승훈 대통령에게 최민준을 기용할 것을 건의했다.

고심하던 한승훈도 승낙하고, 마침내 현재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습니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편하게 물으시죠."

"하아..."

강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신태길 팀장이 저 범죄자 새끼랑 마음이 잘 맞았는지, 왜 나한테 숨겼는지, 한세연 씨는 도대체 왜 끼어든 거고, 대통령이란 작자는 도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으면 저런 국제 테러범을…!"

"강현 씨. 일단 진정하시죠."

"시발!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건 완전히 나만 병신 취급받은 것 같은데?!"

"그건 아닙니다. 강현 씨에게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태길은 정말 진심으로 미안했던지라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강현 씨가 가지고 계신 의문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민준 씨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제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여러분들 앞에 불러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저놈이 필요한 이유가 뭔데요?"

"최민준 씨가 놈들의 수장. 반다렌코와 접촉했었기 때문입니다."

"반다렌코면 그 코쟁이?"

"예. 이것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면 우선 놈들에 관해 설명해야겠군요."

신태길은 그동안 놈들에 관해 알아낸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라는 조직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에는 이번 사건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외국에서는 이미 유명한 범죄 조직이었고, 특히나 놈들이 주로 활동하는 러시아의 경우 상당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철저히 점조직 형태이고, 그 본거지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있는 상태입니다. 체첸 반군과 연결돼 있다. 이슬람 무장 단체의 후원을 받는다. 소문만 무성한 상태죠."

"그런데, 저기 있는 최민준은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범죄자 새끼들끼리는 맞는 게 있어서 그런가 보네. 그럼 정보만 얻고 그냥 죽이죠."

강현의 말을 들은 당사자, 최민준이 피식 웃었다.

"본인이 앞에서 듣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능력이군."

"그럼 내가 범죄자 새끼 눈치를 볼까? 응?"

"강현 씨. 제발..."

신태길의 만류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저 새끼는 일 끝내고 죽이는 거로 하죠."

"대충 설명이 끝났으면, 이제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했으면 하네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세연이 나서서 중재했다.

강현은 한세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도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한세연의 말대로 지금은 과거보다 미래를 생각할 때였다.

"후우, 아까 했던 이야기 좀 다시 해봐요. 지금 내가 무슨 상태라고요?"

"매국노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시면 됩니다."

"시벌, 어이가 없네."

말 그대로다.

강현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해 싸운 것밖에 없다.

그런 그가 지금은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가 되어 있었다.

'뭐... 결과적으로 졌으니까. 나쁜 놈이긴 하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과정보다는 결과가 최고인 세상이다.

자신이 한 유일한 잘못은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렇게 안 될 거다.'

생각을 정리한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아요?"

강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강현 씨.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왜 하루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강현 씨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왔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좀 늦었죠. 그런데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그건..."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씨익 웃었다.

"내가 그날 죽었거든요."

**

강현의 입에서 나온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

강현이 죽었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모두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건가?'

'죽을 정도로 다쳐서 움직이지 못했나?'

'놈들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탈출한 건가?'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공평하게 혼란스러웠다.

한세연, 신태길, 최민준, 안유성까지 가리지 않고 강현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아니, 강현 씨... 죽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결국, 신태길이 나서서 강현에게 물었다.

"문자 그대로예요. 그저께 싸우다가 죽었어요."

"강현 씨.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습니까?!"

"부활했으니까."

강현의 말에 다시 한번 모두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죽고, 오늘 부활했어요. 나는 몇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나거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지금 이해가…."

"이해고 자시고! 나는 죽어도 되살아난다고요. 이거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이해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믿기 힘들었을 뿐이다.

"하! 하하... 재미있는 놈이군."

최민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평소 과묵한 그지만, 이 황당한 일에는 헛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내가 약해서 숨겨왔어요. 여기저기 좋지 않은 일에 이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뭐, 알려지면 어때요?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이어지는 강현의 말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 표정들이 아주 재미있네. 와! 내가 이거 숨기느라 지금까지 입이 어찌나 근질거리던지.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나오죠. 왜 안 나와요? 신태길 씨도 뒤통수 한번 맞아보니 어때요? 아주 얼떨떨하죠? 크하하!"

"허, 참..."

딱히 뒤통수를 맞았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정신이 혼미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갑자기 내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유성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이 그렇게 생각 없이 싸우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나 했더니, 계속 죽었던 거네요? 크큭."

안유성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생각 없이 싸운다니. 내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데."

"하하하! 역시 형은 재미있어요."

"이게... 진짜라니까!?"

강현이 장난스럽게 짜증을 냈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본론?"

"아까 하던 이야기 있잖아요. 무슨 레코인가 레고인가 하는 놈."

"반다렌코입니다."

"아무튼,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선전 포고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이 난 강현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대로 돌려주죠."

**

-뭐임? 지금 라이브 영상 켠 거?

-이 시국에 라이브로 가다니. 제정신 아니네 ㅋㅋㅋㅋㅋ

-어디 있음? 왜 아무것도 안 보여.

-역적 몰아내라. 강현 쓰레기 같은 놈. 이제 필요 없다.

-적어도 해명은 들어봐야지. 무뇌들 많네.

-야아아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방송을 시작한 지 몇 초 만에 채팅창은 눈으로 좇아가지 못할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시청자가 3만 명을 넘어가고, 그 숫자는 지금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거?

-슬슬 나와라. 뭔 배짱으로 이렇게 기다리게 함??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듯.

마침내 시청자가 5만 명을 넘어가고, 충분히 기다렸다고 판단한 강현이 화면에 나타났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강현입니다."

동시에 채팅창이 터져나갈 정도로 글이 올라왔다.

-와 진짜 나왔네 ㅋㅋㅋㅋ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났어요?

-이 시국에 그대로 얼굴 들이미는 깡 하나는 인정해야 될 듯

-도망자 등장하셨네요.

-형. 인질들 어떡할 거야? 내 아는 친구 형도 잡혀갔어.

강현은 빠른 동체 시력으로 올라오는 글들을 훑었다.

"우선. 제가 늦은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면, 그날 전투로 부상이 심했습니다. 놈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기는 힘들었거든요."

강현의 설명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는데 부상은 무슨.

-어쨌든 교육생들 두고 런했다는 거네요?

-야. 전부 냉정하게 좀 생각해라. 어차피 거기 있어봤자 다 죽을 거면, 강현이라도 도망쳐야지.

-쉴드충 쳐내

이미 예상했던 반응.

강현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저는 그 반다렌코라는 놈한테 졌고, 도망쳤습니다. 예. 그건 맞아요. 그래서 이제 그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강현이 말을 하자마자 책임을 어떻게 질 거냐,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그 코쟁이가 이야기했죠? 저 혼자서 오라고."

강현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노려봤다.

"지금 어떻게 할지 전해줄 테니까 잘 들어. 반다렌코. 너도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말을 하는 강현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일 아침. 대한민국 기준 9시. 네가 말한 던전으로 혼자서 간다. 대가리 깨질 준비하고 있어."

112화 극한의 던전 탈출(1)

112. 극한의 던전 탈출(1)

-대가리 깨질 준비하고 있어.

화면 속에서 강현이 사악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놈이 뭐라고 하는 거지?"

반다렌코가 옆에 있는 통역사에게 물었다.

"그게... 약속 장소로 내일 아침 9시에 혼자서 오겠다고 합니다."

"으음..."

반다렌코가 침음성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솔직히 반신반의하며 실행했던 일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손해 볼 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현이 살아 있던 죽었던, 이 일로 자신에게는 명분과 보험이 생긴다.

덤으로 한국 내에서 강현의 지위를 무너뜨리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만약 강현이 숨어버리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고, 혹여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인질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오겠다고 할 줄이야.'

사실일까? 반다레코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강현은 한번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혼자 오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자만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다른 계획이 있는 건가...'

분명 강현은 강했다.

그와 1대1로 싸우라면 높은 확률로 자신이 질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연합의 수장.

연합의 힘을 동원한다면 강현 하나를 처리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결국은 의도대로 흘러갔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 없군."

강현이 저렇게 정면 돌파를 한다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합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하의 물음에 반다렌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정대로 진행한다."

반다렌코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강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마쳤으니까.

내일. 강현은 죽는다.

**

엄청난 인파.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기자와 카메라들이 모였다.

이곳은 별 볼 일 없는 F등급 던전의 입구였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강현 씨!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혼자서 놈들과 싸울 방법은 있습니까?"

"인질의 무사 생환을 위한 조치가 아닌, 무책임한 발언과 행동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해주시죠!"

강현이 놈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강현은 무심한 얼굴로 기자들 사이를 지나쳐갔다.

"강현 씨! 마지막 각오 한마디라도 말씀해 주시죠!"

누군가의 말에 강현이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 모습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며 강현이 씨익 웃었다.

"놈은 대가를 치를 겁니다."

그 말만을 남긴 채 강현은 그대로 던전으로 사라졌다.

**

몸이 떠오르는 익숙한 감각이 느껴지고, 강현은 던전에 들어왔다.

"안에도 숨어있네."

던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능력자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미 던전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이 미약한 것이 아마 능력자 활동을 하지는 않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기자일 확률이 높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대단들 하네."

생각해보면 전쟁터에도 종군 기자들이 존재한다.

그만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뛰어난 것이리라.

강현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강현 씨."

그때였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강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목소리의 정체는 이전에 반다렌코 옆에 서 있던 통역사였다.

"저를 따라오시죠."

"인질은?"

"저를 따라오시면 인질은 자연스럽게 풀려날 겁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고?"

"그게... 어차피 강현 씨에게는 선택지가 없을 거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통역사의 말에 강현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맞아! 맞는 말이네."

강현의 과장된 반응에 통역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명령받은 대로 강현을 안내하는 것뿐이었다.

"이곳입니다."

마침내 도착한 장소.

그곳에는 예의 푸른 포탈이 있었다.

"그래. 이 정도 준비도 없이 불러내지는 않았겠지."

솔직히 놈들이 약속 장소를 한국으로 잡은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강현은 당연히 이전에 사용했던 포탈을 사용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거 회수는 어떻게 하지?"

포탈을 열기 위해서 놈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장치.

뜬금없이 강현이 그것에 관해 묻자 통역사가 당황했다.

'지금 상황에 그게 궁금한가..?'

통역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했다.

"아마 우리가 들어가고 나면 폐기될 겁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얼른 들어가죠."

강현은 내심 탐나던 물건이라 입맛을 다셨지만, 수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화아아악!

빛이 번짐과 동시에 몸이 떠오르고, 눈을 뜬 강현의 앞에 폐허가 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오호."

사방에서 숨어있는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현은 곧장 전신에 마력을 활성화해서 거칠게 뿜어댔다.

"제대로 시작해 볼까!"

그때였다.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강현의 머리를 후려쳤다.

동시에 들려오는 총성.

-타앙!

강현은 총알에 맞은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피부를 파고들지 못하고 멈춰 선, 납작해진 탄두가 잡혔다.

"시벌, 살다 살다 총을 다 맞네."

아마 마력을 활성화하지 않아도 총기에 당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강현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타다다다다당!

총성은 한 번에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 총성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엄청난 양의 총알이 쏟아졌다.

그들은 강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빗발치는 총알 사이에는 전차를 잡기 위한 로켓탄들도 섞여 있었다.

-콰과과과광!

폐허 사이로 정신없이 달리는 강현.

날아오는 흙먼지에 강현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작작 좀 해라. 새끼들아!"

**

쏟아지는 총탄을 뚫으며 강현이 거침없이 달렸다.

거대한 방패로 몸을 가린 상태였지만, 빗속에서 우산을 쓴다고 몸이 젖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방패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을 통과한 총알이 강현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따끔하네."

낯선 장소에서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벌이는 전투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궁지에 몰리자 더욱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찾았다."

순간 강현이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으헉?!"

구식 소총을 든 놈의 당황한 얼굴이 가까워진다.

강현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방패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결과는 즉사.

퍼어억-하는 소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단숨에 깨져나갔다.

그로테스크한 사체 앞에서 강현이 포효했다.

"언제까지 이딴 장난질이나 할 거야!?"

이렇게 쓰러뜨린 적이 벌써 몇 명 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체력이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력도 아끼지 않고 쓴 탓에 많이 고갈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지.'

체력과 마력은 상관없다.

강현은 어차피 오늘 여기 죽을 각오로 왔다.

하지만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

강현의 목표는 동귀어진.

최소한 반다렌코는 완벽하게 죽여야 목표가 달성이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됐다.

"오, 드디어 등장하셨나?"

순간 강현에게 쏟아지던 총탄과 마법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수많은 능력자들을 거느린 반다렌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반다렌코의 말하자 통역사가 전달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반다렌코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됐으니까 얼른 덤벼."

강현의 직설적인 말에 통역사가 당황했다.

"놈이 뭐라고 했지?"

"그게.. 대화는 필요 없고 싸우자고 합니다."

"으음..."

확실하다.

지금 강현은 무언가 이상하다.

인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전투를 벌이고, 뒤가 없는 사람처럼 싸우려고만 한다.

'포기한 건가?'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기엔 그 눈이 너무 빛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냐...'

반다렌코는 고민하던 사이, 그에게 무언가가 날아왔다.

"연합장님!"

그것의 정체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 잔해였다.

주위에서 걱정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반다렌코는 태연하게 쉴드를 전개해 잔해를 막아냈다.

"그래. 어차피 네가 죽고 나면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겠지."

"그만 씨불이고 덤벼. 새꺄!"

빌게인의 장검을 뽑아 든 강현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그날처럼 당할 거라면 오산이다!"

그와 마주한 반다렌코가 마력을 폭사시켰다.

마력에 둔감한 사람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엄청난 마력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놈의 패턴 분석도 끝난 상태.'

사실 분석이랄 것도 없었다.

강현의 힘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

'압도적인 힘에는 더 압도적인 강함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야.'

온갖 수단을 동원한 반다렌코의 마력 수치는 80이 넘어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스킬의 종류만 해도 백여 가지.

그중에는 마력을 괴물처럼 잡아먹는 스킬들 또한 존재한다.

'평소에는 비효율적이라 잘 사용하지 않지만... 지금은 다르지.'

비효율의 극치로 덤벼드는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

"이게 뭐야?"

반다렌코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력에 강현이 당황했다.

"생각보다 더한 괴물 새끼였네. 이거."

지난번 전투로 제법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마력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단기전으로 처리한다."

판단을 마친 강현이 앞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끄아아아!?"

땅이 뒤집혔다.

문자 그대로 땅이 뒤집혔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백 제곱미터의 땅이 솟아오르고 해일처럼 강현을 덮쳐왔다.

그 규모는 자연재해라는 말로도 부족해 보였다.

"이건 무슨 개사기 스킬이야!?"

강현은 곧장 빌게인의 장검에 내장된 광전사를 활성화했다.

제한시간이 5분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잴 상황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광전사를 쓰기도 전에 생매장당해 죽을 지경이다.

"흐라아압!"

강현이 한 손에는 빌게인의 장검, 다른 한 손에는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들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쏟아지는 흙더미, 바위, 건물 잔해들이 강현의 앞에서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그렇게 놈의 마법이 끝나려는 찰나.

"이번엔 또 뭐야?"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극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현에게 쏟아지던 흙더미들이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얼어붙었다.

"씨벌, 가지가지 하네!"

-카드득, 차앙!

강현의 신체가 얼어붙는 동시에, 강현의 근육 움직임에 의해 깨어지는 것이 반복됐다.

'이만한 마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이건 도저히 개인이 낼 만한 힘이 아니었다.

아무리 반다렌코의 마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아?"

강현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마침내 흙더미들이 모두 가라앉아 반다렌코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지랄... 무슨 흡성 대법이냐."

반다렌코 뒤에 서 있는 능력자들.

하나하나가 강현에 근접하는 마력을 가진 그들이 반다렌코에게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크아아아!"

그것을 견디는 반다렌코도 여유로워 보이진 않았지만, 강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벌써 3분이 지났어.'

놈들이 마력을 모으는 방식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한눈에 봐도 반다렌코에게 강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작 2분을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2분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끝이야.'

2분이 지나면 자신은 극심한 탈진 상태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제발, 빨리 좀 해라!'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강현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의 중심 핵(Main Core)이 제거되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강현과 반다렌코 사이에 떠오르는 푸른 포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반다렌코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하아, 드디어 됐네."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씨익 웃었다.

"야. 코쟁이. 혹시 던전 탈출이라고 들어봤냐."

무너지는 던전.

탈출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들어와 봐. 새꺄."

오늘 강현의 역할은 탈출을 막는 보스 몬스터였다.

113화 극한의 던전 탈출(2)

113. 극한의 던전 탈출(2)

[던전의 중심 핵(Main Core)이 제거되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뜬금없이 떠오른 메시지.

그와 함께 강현과 자신의 중간에 푸른 포탈이 생성됐다.

'이게 무슨 일이지?'

반데렌코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던전 탈출이라고 들어봤냐."

강현이 웃고 있었던 탓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상황은 놈이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네놈이 감히..."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관없다.

강현은 이미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든 상태.

지난번 전투를 떠올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놈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당황하지 않고 지금처럼 차분히 압박한다면 문제없다.

상황은 여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지옥으로의 초대."

반다렌코는 바로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

"크헉!? 왜..!?"

순간 반다렌코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갑자기 엄청난 마력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마력이 역류한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당황하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전부 정신 차려!"

"하지만 연합장님. 얼른 나가지 않으면 던전이...!"

그럴 만도 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공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냉철해져야 한다.

"어차피 던전 입구는 놈이 막고 있다.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집중해!"

말을 한 반다렌코가 강현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스킬은 제대로 발동한 것 같았다.

엄청난 불길이 쏟아지며 강현의 주변을 모조리 녹이고 있었다.

그 화력이 어찌나 강한지 지면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강현은 금세 흔적조차 남지 않고 녹아서 사라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뭐야!?"

반다렌코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강현이 불길 속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이 공격으로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지형 뒤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놈은 몸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밖으로 나와 불길을 맞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반다렌코를 제외한 나머지에는 관심 없다. 전부 꺼져!"

그때 강현의 입에서 러시아어가 터져 나왔다.

어수룩한 발음이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문제없었다.

부하들의 동요가 더욱 거세졌다.

"크허억!"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마력에 반다렌코가 서둘러 마법을 끝냈다.

갑작스럽게 마법이 취소되자 부하들이 역류하는 마력에 피를 토해냈다.

"이런 쓸모없는 놈들! 전부 죽고 싶은 거냐!?"

"이대로면 어차피 죽습니다!"

누군가의 반발이 불씨가 되고, 금세 모두에게 옮겨 붙었다.

"살려줘! 나는 아직 죽기 싫어!"

"저놈을 보라고. 지금 저놈을 이길 수는 없어..."

"놈은 대장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했어. 지금이 기회야! 도망야 해!"

"으아아아!"

죽음의 공포.

그것을 건드리는 데는 큰 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한 명이 견디지 못하고 달리기 시작하자 막혀있던 물줄기가 뚫리듯 모두의 가슴에서 공포가 쏟아졌다.

연합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포탈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크큭..."

강현은 그런 도망자들 사이를 웃으며 지나치고 있었다.

"네놈..!"

전신에 화상을 입어 징그럽게 피부가 녹아내리는 강현.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길이 몸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강현의 입에 걸린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다.

부하들이 동요하는 데는 저 악마와 같은 모습도 한몫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말했지? 다시 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반다렌코는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으나, 최대한 냉정을 유지했다.

'놈은 지쳤다.'

강한 기세와는 달리 강현의 걸음은 처음 같지 않았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모습.

아마 놈이 사용한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고 부작용이 나타난 게 분명했다.

강현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반다렌코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놈은 좀비와 같다. 이곳에서 계속 싸운다면 둘 다 죽을 거야.'

어차피 강현은 죽기 직전이다.

이곳에서 탈출하지 못해도 죽고, 설사 나온다고 해도 던전 밖에서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니 얼른 강현을 밀치고 자신도 밖으로 나가야 했다.

"다 죽어 가는 놈이 허세를 부리는군. 휘몰아치는 바람!"

반다렌코가 마법을 사용하자 칼날 같은 바람이 강현을 향해 쏘아졌다.

강현의 주위를 돌며 할퀴는 바람.

그것은 강현의 피와 불길을 머금으며 더욱 거세져만 갔다.

'마법을 피할 힘도 남아 있지 않군.'

순간 반다렌코는 강현을 이 자리에서 죽일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 목숨이 우선이야.'

저런 놈에게 자신 같은 위대한 인간의 발목을 잡혀서는 곤란했다.

반다렌코가 서둘러 강현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어디가 이 새끼야!"

벼락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오고,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이!"

그곳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강현이 있었다.

"이거 놔라!"

놈은 한쪽 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고, 다른 손은 바닥에 쑤셔 넣어 고정한 채였다.

반다렌코가 미친 듯이 강현의 얼굴에 발길질을 가했다.

-퍼억! 퍽!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멀리서부터 붕괴하던 공간은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저 붕괴는 몇 초 내로 이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런 미친놈! 죽음의 칼날!"

반다렌코가 자신이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절삭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했다.

아까 전의 마력 역류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마법은 성공했다.

죽음의 위기가 반다렌코에게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서걱.

강현의 팔목이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반다렌코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끄아악?!"

발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발목을 깨물고 있는 강현이 보였다.

그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궁!

붕괴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안 돼, 안 돼!"

그러나 탈출하기 위한 포탈도 코앞이다.

자신은 아직 살 수 있다.

절대로 이따위로 죽을 수는 없다.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다!"

반다렌코는 칼을 꺼내 미친 듯이 내려쳤다.

하지만 강현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는 것에 그쳤다.

애초에 반다렌코는 마력 외에 다른 신체 능력은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능력자이다.

그런 반다렌코가 당황한 상황에서 급하게 내려친 칼로 강현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죽음의 칼날..! 쿠허억!"

마력을 쥐어짜 마법을 쓰려던 순간, 결국 마력이 다시 역류했다.

'젠장, 젠장! 젠장!'

마력이 역류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지만, 지금의 반다렌코는 그것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크큭, 큭..."

강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안 돼! 제발, 부탁이다. 놔라!"

지면의 붕괴지점은 정말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반다렌코는 결심했다.

강현을 떼어낼 수 없다면, 자신의 다리를 자라야 한다.

"끄아아아아악!"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반다렌코의 다리가 너덜너덜하게 잘렸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됐다!"

그러나 반다렌코는 웃었다.

이제 포탈을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된다.

다리 한쪽이 없지만, 그도 강한 능력자.

두 팔로 뛰더라도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어..?"

그때였다.

무언가가 자신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 팔로 자신을 붙잡고, 이빨로 튀어나온 철골 구조물을 깨물어 버티고 있는 강현이 보였다.

그 눈은 여전히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미친놈..."

던전이 붕괴했다.

**

정영식은 은신의 스페셜리스트다.

최민준과 초창기부터 함께하던 심복이기도 했다.

정영식은 본인의 장기를 살리는 임무를 자주 맡았는데, 주된 일과는 최민준의 명령에 따라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던 도중 강현에게 D등급 던전 '하피의 절벽'에서 붙잡히고, 신태길에게 인계된 정영식.

본래라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할 그가 러시아에 있었다.

"던전이 완전히 소멸했다."

강현이 계획한 이번 작전에서, 정영식은 가장 핵심을 맡고 있었다.

바로 던전을 강제로 클리어할 것.

강현은 놈들이 자신을 끌어들일 때, 분명 낮은 등급의 던전을 활용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것이 강현을 압박하는데 변수를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태길 씨. 예전에 잡은 최민준 부하. 은신하던 놈 기억해요?

-예.

-그놈 지금 뭐 해요?

-사실... 현재는 풀려나서 레벨을 올리는 중입니다. 정영식의 능력은 유용하니까요. 그래도 제 통제하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놈. 이번에 한 번 써먹죠.

강현은 처음부터 정영식이 은신한 상태로 바짝 자신을 쫓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가면 최대한 빠르게 던전의 메인 코어를 부순다.

도박성이 짙은 작전이긴 했지만, 성공만 하면 반다렌코를 확실히 붙잡을 자신이 있었다.

-실패한다 해도, 죽는 건 정영식이랑 나. 둘 뿐이잖아요. 그사이에 한세연 씨가 비어있는 놈들 본진으로 들어가고.

-강현 씨는 부활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결과적으로는 정영식만 죽는 거니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에요.

계획의 골자가 잡히고, 강현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놈들에게는 무조건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을 거야.

-그러면 제가 은신을 한다고 해도 들킬 겁니다. 마력을 감추는 스킬이 있긴 하지만, 높은 등급의 감지를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그러니까! 나는 시작부터 마력을 엄청나게 낭비하면서 뿜어낼 거야. 놈들이 너를 탐지하지 못하도록. 그사이에 너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서 핵을 날려버려.

-으음...

-시간이 생명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실패하는 거야.

처음에는 승낙하지 않으려 했다.

강현의 예상과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약간의 실수만 있으면 그대로 사망이었으니까.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조건이 너무 달콤했다.

-정영식 씨에 대한 감시를 풀어드림과 동시에 범죄 이력을 삭제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시죠. 능력 내에서 모든 조건을 맞춰드리겠습니다.

결국, 정영식은 신태길의 유혹에 넘어갔고 멋지게 성공했다.

"후우, 보고해야겠지."

저 멀리, 소멸한 던전 앞에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성이는 러시아 놈들이 보였다.

위성 전화기를 빼든 정영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임무는?

"성공입니다. 반다렌코와 강현. 모두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수고했다. 조금만 버티도록, 3일 내로 운송 수단을 보내지.

"예."

최민준과의 통화를 끝낸 정영식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단 배부터 채울까."

은신을 하기 위해서 챙겨 온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겨울의 러시아 벌판에서 버티려면 아무리 능력자라도 맨몸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으음, 생긴 건 괜찮네."

이번 임무를 시작하면서 지급받은 햄버거.

신기하게도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아이템이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배가 고팠던 정영식은 곧장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우에엑! 이거 무슨 맛이 이래!?"

햄버거는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

한세연과 최민준.

그리고 한국 최고의 정예 길드인 단군 길드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들이 모였다.

"1차 목표는 인질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한세연의 말에 모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들을 확보하기만 하면 이송 문제는 러시아 정부에서 해결해줄 거예요. 그 후에 놈들의 장비를 수거합니다."

최민준은 반다렌코의 근거지를 알고 있다.

반다렌코는 설마 최민준이 강현 편에 붙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강현과 반다렌코가 결전을 치르는 날.

"강현 씨가 그곳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어요.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되니까요."

한세연이 말을 하던 그때, 어디선가 전화가 울렸다.

"임무는?"

위성 전화를 받은 최민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됐나요?"

"성공했다는군. 반다렌코와 강현. 둘 다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최민준의 말에 한세연이 미소를 지었다.

"일이 더 쉬워졌네요.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죠?"

"도착 3분 전입니다!"

헬기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들 장비 사용법은 잘 숙지했을 거라 믿어요. 그럼 먼저…."

한세연이 말을 하던 순간,

"내가 먼저 가지."

최민준이 아무런 장비도 없이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지상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상공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으음, 그때와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건가."

부드럽게 지상에 착지한 최민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러시아의 베슬란.

체첸 사태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땅이었다.

114화 재회(1)

114. 재회(1)

날씨는 맑았고, 생각보다 따스했다.

흔히 러시아가 한국보다 훨씬 추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러시아는 워낙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기에 위치에 따라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따스한 지역도 있었다.

그리고 한세연과 최민준이 찾아온 베슬란도 그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여기인가요?"

지상으로 내려온 한세연이 먼저 내려와 있던 최민준을 보며 말했다.

"근처인 것 같군."

전화를 든 최민준이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최민준과 안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다."

"예. 최민준 님도 안녕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우선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오늘을 끝으로 오정수. 너도 러시아에서 임무를 끝내고 한국으로 복귀한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오정수.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에서 간부를 맡고 있고, 한국에서 잡아 온 능력자들을 관리하던 남자였다.

그는 사실 반다렌코의 정체를 알자마자 최민준이 심어놓은 스파이로, 지금까지 약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 채로 활동해 오고 있었다.

"이곳이 출입구입니다."

오정수를 따라 걸은 지 약 10분.

오정수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멈춰 섰다.

잠시 바닥을 더듬거리던 오정수가 무언가를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후드득-하며 흙이 떨어지고,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연합 본부로 가는 출입구 중 하나입니다. 일반 연합원들은 알지 못하고, 간부들만 알고 있는 곳이죠."

"안의 상황은 어떻지?"

"본부 소속의 전투원들은 대부분 강현과 싸우기 위해 나갔고, 남은 것은 시설과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한 인력들뿐입니다. 인원은 약 200명. 이들 중 실질적으로 신경 써야 할 고위 능력자들이 50명. 마지막으로 이들을 모두 지휘하는 간부가 하나 있습니다."

"지휘하는 간부라고?"

"예. 반다렌코 연합장 바로 아래 직책을 가진 여자입니다. 전투 능력이 연합 내에서 한 손가락에 들어가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알겠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최민준이 한세연을 바라봤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들은 한세연과 단군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내부는 생각보다 깊은 지하였다.

어둡고, 습한 악당 소굴의 표본 같은 장소.

곳곳에 흔적들을 보면 상당히 오래된 시설 같았다.

한세연이 그것에 대해 질문하자, 오정수는 전쟁 때 쓰던 방공호를 개조한 시설이라고 설명했다.

"뭐야?"

시설을 둘러보던 도중 누군가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단군 길드원이 쏘아낸 마력 빔이 남자의 머리를 단번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본부에 외지인을 들이면, 안 되는... 크헉!"

"크아악!"

몇 번의 소란 이후.

마침내 침입이 들통난 것인지 내부에 위이이잉-하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기에 당황한 사람은 없었다.

"인질들은 어디 있나요?"

한세연이 오정수를 붙잡고 물었다.

"아직 5분은 더 걸어가야 합니다."

"서두르죠. 내가 선두로 나갈 테니 방향만 알려줘요."

"예."

한세연이 검을 뽑아 들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C-8 섹터! 지원을, 크악!"

"놈들이 인질을 향해 움직인다. 모두 준비해!"

"버텨라. 지원이 곧 도착한다."

"안 돼. 막을 수가 없어!"

다른 이들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

한세연이 달려간 길에는 오직 머리 없는 시체만이 남아서 피를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괴물은 괴물이야...'

최민준은 한세연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군. 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피한다는 수준을 넘어섰어.'

최민준의 생각처럼 한세연의 움직임은 무언가가 달랐다.

단순히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 -라고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뭐지?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가? 아니야. 단순히 그 정도로 나올 수 있는 몸놀림이 아니야...'

최민준은 한세연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함께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최민준은 이 기회에 한세연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으나, 그 강함을 비밀을 파헤치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여기입니다."

한세연과 일행은 금세 목적지인 포로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적이 포로들을 앞세운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하! 오정수. 네놈이었나?"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여성이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

경멸하는 눈빛으로 오정수를 바라보는 여성은, 한세연처럼 한 손으로 사용하기 좋은 장검을 든 채였다.

"보스에게 동양의 원숭이들은 내쳐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결국 이 꼴이 났군."

"산드라. 반다렌코와 침대에서 헐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년인 줄 알았더니, 그런 눈치가 있었어?"

오정수의 말에 산드라라 불린 여성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었다.

"이익...! 죽여버리겠어!"

반다렌코와 산드라의 관계는 연합 내에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어떻게 오정수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보다는, 수치심. 분노가 먼저 그녀를 지배했다.

잔뜩 흥분한 산드라가 폭발적인 속도로 뛰쳐나왔다.

"말하는 솜씨가 제법이네요."

"러시아어를 알고 계셨습니까?"

"간단한 회화 정도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싸우면 저는 3초 안에 찢겨나갑니다."

오정수의 말에 피식 웃은 한세연이 산드라를 향해 달려 나갔다.

"너는 또 뭐야!?"

산드라가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의 궤적을 따라 엄청난 양의 마력이 폭사되며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아주 짧은 순간.

한세연은 뒤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저 공격을 막아야 하나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은 여기 없다.'

공격의 위력이 심상치 않아 보였으나, 저들은 단군 길드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들의 실력에 대한 무례였다.

-후우웅!

한세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마력을 피했다.

"날뛰는 모습이 잔뜩 흥분한 원숭이를 닮았네요."

한세연이 러시아어로 말했다.

"으으! 동양의 연놈들이, 감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산드라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전부 죽어!"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산드라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듯 전력으로 마력을 쏟아부었다.

"꺄하하하하하! 잘게 썰어주마!"

산드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뿜어지는 마력이 지하 벙커를 할퀴었다.

그 충격에 땅이 흔들린다고 느낄 정도로 강한 위력이었다.

"그러게 진작 내 앞에서 기었어야지. 이런 멍청한…."

그때였다.

마력을 쏟아내던 산드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켜 떠졌다.

"저게 뭐야!?"

한세연이 검을 휘둘러 모든 공격을 비틀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뒤쪽으로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끔, 교묘하게 공격이 벽을 향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위력은 강한데, 정말 중요한 검술 실력은 어린애 수준이네."

한세연의 말에 산드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감히 나한테 그런 소리를 지껄여? 좋아. 제대로 상대해 주겠어."

산드라는 자신이 있었다.

눈앞의 동양인 여성이 제법 검술 실력이 뛰어나단 것은 인정하겠으나, 저 정도는 그녀도 충분히 가능한 묘기였다.

그녀가 반다렌코에게 선택받고, 이런 엄청난 마력을 부여받은 것은 그만큼 그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 강함의 근간에는 어릴 적부터 다져 온 탄탄한 검술 실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눈을 빛낸 산드라가 조심스럽게 한세연에게 다가갔다.

"죽어."

순간 산드라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한세연이 취하고 있는 자세.

근육의 준비 상태.

동공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모두 계산한 후, 공격 이후에 반격까지 몇 수 앞을 내다본 최상의 검로.

산드라는 자신이 검을 뻗고 3초 안으로 한세연이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채채채채채챙!

눈 깜짝할 순간 엄청나게 많은 검격이 오고 갔다.

그리고 멈춰 선 둘.

한 발짝 물러난 한세연의 뺨에 얇은 실선이 생겨나고, 핏방울이 맺혔다.

손으로 피를 닦은 한세연이 씨익 웃었다.

"제법이네요."

동시에 산드라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마, 말도 안..."

산드라의 목에 붉은 선이 생기고, 동시에 그녀의 신체가 허물어졌다.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쓰러진 산드라의 두 눈에는 경악만이 남아 있었다.

**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처럼, 최연화는 빠르게 현재의 생활에 적응해 갔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소연 씨. 오늘 크게 다친 것 같던데... 괜찮겠죠?"

"놈들이 우리 목숨은 살려주니까. 기다려 봐야죠."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최연화는 최대한 그들 틈에 섞여,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화 씨는 오늘도 대단하던데요?"

"네?"

그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몬스터 엄청 많이 잡으셨잖아요. 다른 분들보다 레벨이 높아서 그런가?"

"아니에요. 비슷하게 잡았는데, 앞에 있다 보니 유독 튀었나 봐요."

"에이, 그런 수준이 아니던데?"

최연화는 생각 없이 지껄이는 남자의 입을 당장 틀어막고 싶었으나 겨우 참아냈다.

"연화 씨. 지금 레벨이 몇이에요? 저번에 3레벨이라고 하셨나?"

"네. 지금은 4레벨이에요."

"와, 3일 만에 레벨업 하셨네요."

"다른 분들도 다 한걸요. 뭐..."

놈들은 포로들을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던전에 집어넣고, 지켜본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몬스터와 싸우지 않으려 했지만, 몇 번의 구타와 폭행 이후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능력자들보다는 낮은 레벨의 몬스터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여기! 치료사. 이쪽이야!

대신 놈들은 사람들이 죽는 것만은 절대적으로 막았다.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즉사만 아니라면 살려내는 뛰어난 치유사들.

그들이 항상 함께하며 사람들의 상처를 돌봐주었다.

그렇게 3일 동안 싸우고, 휴식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자 사람들의 레벨은 빠르게 증가했다.

고작 3일 만에 2레벨이 증가한 사람이 있을 정도니, 효과 하나만은 입증한 셈이다.

-레벨 업으로 생긴 포인트는 모조리 마력에 투자한다. 어차피 검사하면 들통나니 숨길 생각은 하지 말도록.

놈들이 으름장을 놨지만, 최연화는 속지 않았다.

'레벨 업 자체를 숨기면 돼.'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이용해 능력을 강화하고, 탈출을 준비해야 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연화 씨도. 내일 봐요."

또다시 칙칙한 방으로 들어온 최연화가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최연화

▫칭호 : 불굴의 의지

▫레벨 : 10

▫상세 능력치 :

·근력 13 (+1)

·순발력 20 (+1)

·체력 14 (+1)

·마력 13 (+1)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검의 가호

▫능력 : 중급 검술(D), 하급 체술(E), 집중(F)

▫스킬 : 가속(B), 검귀의 강림(B)

그 짧은 시간 사이 레벨이 무려 3이나 오르고, 새로운 능력 또한 획득했다.

강현이 알면 눈이 뒤집힐 만한 성장 속도였지만, 최연화는 만족하지 않았다.

'더! 더욱 강해져야 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내일은 더욱 스스로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응?"

그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부 밖으로 나와!"

"빨리빨리 움직여!"

어째서인지 잔뜩 흥분한 놈들이 사람들을 복도로 내몰았다.

'뭐지?'

이곳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정해진 규칙 생활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최연화가 전신을 긴장시켰다.

"조금만 있으면 놈들이 들이닥칠 거다. 보통 놈들이 아니야! 모두 방심하지 마!"

간간이 들리는 러시아어와, 분위기로 최연화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구조대가 온 거야!'

최연화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강현 오빠가 구해주러 온 건가?'

마지막 순간.

강현이 위기에 처한 것 같았지만, 최연화는 강현을 믿었다.

강현이라면 보란 듯이 살아남아서, 사람들을 구해주러 올 것이라고.

"크아악!"

마침내 구조대가 도착하고, 그들의 면면을 살핀 최연화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없네... 역시 강현 오빠는 그날...'

구조대에는 익히 알고 있는 한세연과 단군 길드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강현 오빠라도 거기서 살아남는 건 무리였던 거야...'

순간 눈물이 차올랐지만, 참아냈다.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자.'

잠시 후.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성과 한세연의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최연화는 조금 전 실망이 무색하게 전투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워...'

한세연의 움직임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같은 검을 드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 차이.

특히나 마지막 접전에서는 집중하던 최연화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기술과 속도가 오고 갔다.

그것을 끝으로 놈들의 대장은 죽었다.

"산드라 님!!!"

패닉에 빠진 놈들이 괴성을 내질렀지만, 최연화의 귀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멋져..."

오직 한세연이 마지막에 보여준 그 움직임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놈들 다가오지 마라! 그 이상 접근하면 인질들의 목숨은 없어!"

"이봐. 포기하라고. 산드라도 저렇게 허무하게 죽었잖아. 목숨은 소중한 거야."

"닥쳐! 배신자! 내 말이 우스워?!"

연합원과 구조대 사이에 러시아어로 대화가 오고 갔다.

정신을 차린 최연화는 대화에 집중했지만, 워낙 빠르고 부정확한 발음이라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다.

"더 접근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순간 공포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한 남자가 한 인질을 붙잡았다.

"으아아! 이거 놔!"

"우리가 인질을 못 죽일 것 같아? 착각이다!"

남자는 누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검을 들어 인질을 내리쳤다.

"안 돼!"

돌발 상황에 모두가 경악하며 달려왔다.

하지만 인질이 죽는 것을 막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순간,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연화가 스킬을 발동했다.

"검귀의 강림."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뽑혀 나오는 검.

최연화는 단숨에 흥분한 남자의 팔목을 잘라냈다.

"크아아아악!"

최연화는 고통에 울부짖는 남자가 진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곧이어 몰아치는 그녀의 검격.

순식간에 온몸이 난도질당한 남자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에 쏟아졌다.

"이런 미친!"

"보리스, 보리스가 죽었어!"

주변의 적들이 경악하는 그 순간에도 최연화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적의 당황을 이용한 훌륭한 공격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스킬로 인해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크아아악!"

"인질 주제에 감히!"

이내 제정신을 차린 연합원들이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쓸어 버려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한세연과 단군 길드원.

그들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115화 재회(2)

115. 재회(2)

"우리가 인질을 못 죽일 것 같아? 착각이다!"

흥분한 적이 인질을 죽이는 것.

이미 예상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책 또한 세워 뒀다.

남자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자 최민준이 은밀하게 마력을 쏘아냈다.

불시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남자가 검을 휘두르려 하자 최민준이 마력을 조종하고, 동시에 한세연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 놈들이 잠깐만 멈칫하게 만들면 돼요. 그럼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알겠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최민준과 한세연은 세워둔 작전.

다만, 문제가 있다면 예상보다 적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늦을 수도...!'

그때 한세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최연화가 단숨에 적을 토막 낸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세연의 눈이 빛났다.

'상당한 재능이야.'

최연화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최강우 회장의 외동딸.

강현을 선망해서 능력자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저 정도의 실력자일 줄은 몰랐다.

'분명 이제 막 교육 학교에 들어갔을 텐데.'

한세연은 이번 일이 끝나면 최연화를 단군에 영입하기로 결심했다.

반드시 검증된 최강자들만 영입하는 기존의 방침을 어길 만큼 최연화의 재능이 탐났기 때문이다.

최연화가 적을 공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한세연이 도착하고,

"쓸어 버려요."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적이 정리됐다.

"살았어. 살았다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단군 길드야."

풀려난 인질들이 연신 단군 길드를 환호했다.

한세연은 사람들의 인사치레를 뒤로하고 위성 전화를 들었다.

"인질 확보는 완료됐어요."

-알겠습니다. 인근에서 스페츠나츠(FSB)가 대기 중입니다. 바로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최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잔당들이 남았을 거예요. 무리해서 진입하지 말고, 외부에서 기다리라고 말해줘요. 우리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한세연이 단군 길드의 간부 김이현을 불렀다.

"김이현 씨."

"예. 길드장님."

"안내인과 함께 인질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줘요. 저는 둘러볼 곳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단군의 부길드장 김이현은 오정수의 안내에 따라, 인질들과 길드원들을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곳에 남은 사람은 이제 한세연과 최민준. 두 사람뿐.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둘이 시설 안쪽으로 들어갔다.

**

다른 사람들 없이 둘만 남게 되자 그들은 더욱 거침없이 움직였다.

최민준이 적의 움직임을 제압하면, 한세연이 단숨에 목을 베어낸다.

최적의 효율로 움직이며 그들은 빠르게 기지 내부로 들어갔다.

"여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그 마력을 추출하는 기계라는 거죠?"

"그렇다. 이전보다 더 성능이 향상된 것 같군."

100대가 넘는 기계가 넓은 공동에 줄지어져 있었다.

기계마다 한 사람씩 매달려 있었는데, 온몸에 무언가를 꽂은 채 마력을 추출당하고 있었다.

"시간을 내서 온 보람이 있네요."

이것이 한세연과 최민준이 이번 일에 개입한 '진짜' 목적이었다.

강현을 이용해서 놈들의 세력을 분산, 약화하고 가장 안전하게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것.

어떤 이는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한세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신뢰. 명예. 정의. 모두가 힘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들이야.'

특히나 이렇게 힘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단군은, 아니. 자신은 인류를 구한다는 위대한 사명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남들의 시선 따위로 인해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일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아이템 판정이 되는군요? 다행이네요. 만약 안 된다면 가져가기 조금 곤란했을 텐데."

"일단 필요한 것부터 챙기지. 시간이 얼마 없다."

한세연과 최민준이 주위에 있는 장비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담았다.

다만, 마력 추출 장치는 제법 크고 무거웠기 때문인지 그리 많은 수를 담을 수는 없었다.

"인벤토리에 한계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아쉽네요. 전부 가져갈 수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이미 필요 이상으로 챙겼다. 이제 나가도록 하지."

"그러죠."

원래는 이곳에 남은 장비들을 파괴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세연은 인류가 공존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자신이 독식해서 정점에 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남겨둔 장비를 러시아에서 가져가고, 연구한다면 분명 또 다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뭐야? 왜 여기 있는 거야?"

눈을 뜬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

이제 다시는 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곳에 돌아온 것이다.

"분명 반다렌코를 붙잡고, 던전이 붕괴됐는데... 그러면 집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부활 장소는 집이었다.

그렇다면 던전이 무너지는 순간 죽었을 테니 집에서 눈을 떠야 정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떠올린 강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미친놈...

반다렌코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던전이 완전히 붕괴되던 그때.

[이스터에그가 발동합니다]

"맞아! 분명 그랬어."

그때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귀는 어느 정도 들렸다.

정확히는 불에 녹아버린 고막이 복구된 상태였다.

"그럼 여기는…."

그 순간 강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님. 오랜만이네요]

"하하..."

관리자. 신. 혹은 절대자.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무언가가 다시 강현을 이곳으로 불러냈다.

"그러게요. 존나 오랜만이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셨어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던전은 코어가 부서지면,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과 함께 소멸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계획한 거니까."

[아니요. 강현 님은 잘 모르는 것 같네요. 만약 제가 이 사건을 알지 못했다면 강현 님은 그대로 소멸했을 거예요. 그건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죠]

"그 말은 부활이 안 된다는 겁니까?"

[네. 붕괴하는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말 그대로 소멸. 끝이에요. 다만, 이번에는 강현 님이 운이 좋게도 제가 뿌려놓은 장난감을 가지고 계셔서 알 수 있었죠]

그제야 강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

그곳에서 화룡 길드의 박호연과 내기를 통해 얻어낸 이스터에그.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차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계속해서 저한테 이상한 스킬이나 호칭, 능력 같은 걸 주시는 걸 보니. 신경 써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주 고마워요. 정말로!"

[말에 뼈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강현은 괜히 상태창을 켜서 '잔인한 가정 파괴범' 호칭과 '강현식 사투' 스킬을 확인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강현 님을 자주 본 것은 맞아요. 강현 님을 보고 있으면 정말 즐겁거든요]

"역시나..."

[그렇다고 해서 항상 강현 님만 보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보기보다 바쁘거든요. 특히나 이번에는 꽤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정말 알지 못했어요. 이스터에그가 소멸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더라면, 제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강현 님은 그대로 소멸했을 거예요. 당연히 부활은 꿈도 못 꾸죠]

부활을 할 수 없다니.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다른 할 말은 없으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원래 이스터에그의 기능이 이거거든요]

"이거?"

[저와의 면담이요]

"쓰레기였네."

[너무해]

강현은 아직도 관리자가 튜토리얼 5단계에서 자신에게 한 짓을 잊지 않았다.

"궁금한 거라..."

그래도 이왕 얻은 기회.

강현은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왜 하필 저입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부활 스킬.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재능도 없는 저 같은 놈한테 줬냐는 말입니다."

[그건 그냥 랜덤이에요]

"예?"

예상치 못한 답변에 강현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강현 님을 지켜보는 이유는 재미있어서지, 다른 이유는 없어요. 설마 처음부터 본인이 세상을 구할 운명을 가진 대단한 무언가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건 아니죠?]

"그, 그게..."

[혹시... 평소에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 안 들으세요?]

순간 강현은 닥치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래도 상대는 신이었다.

"그러면 다른 질문. 이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뭡니까?"

[궁극적인 목적이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저는 관리자.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에요]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도대체 왜, 어디와, 무슨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 건데요?"

[그건...]

"하켄 차원이라는 건 뭡니까?"

튜토리얼이 시작된 날.

하켄 차원의 일방적인 연결이 감지됐고, 지구의 방호 시스템이 작동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연결을 임시로 거부함과 동시에 5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그동안은 그저 그 시간을 기다리며 강해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물어봐야죠."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시네요. 항상 막무가내인 줄로만 알았는데.]

"칭찬해도 나오는 거 없으니 질문에 답이나 해주시죠."

강현의 시큰둥한 말에 관리자가 웃음을 흘렸다.

[먼저 하켄 차원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하켄 차원은 지구와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그리고 예상하셨겠지만, 던전의 기반이 된 세계죠]

"던전이 하켄 차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겁니까?"

[네. 정확히는 과거의 하켄 차원이지만]

"과거의 차원..."

[그리고 균형이란 건 하켄 차원과 지구와의 균형이에요. 정확히는 두 세계의 마력 균형을 맞추는 것이죠]

"왜 두 세계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건데요?"

[두 세계가 완전히 연결될 때를 대비해서죠]

계속되는 말에 점차 강현의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핵심은 빼놓고 겉 가지만 빙빙 돌려가면서 이야기하고 있어.'

결국, 강현이 가장 핵심을 물었다.

"그 연결이란 거. 누가 한 거고, 왜 일어나는 겁니까? 혹시 당신이 주도한…."

[그건 아니에요]

관리자가 강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두 세계를 연결한 것은 제가 아닌 다른 이에요]

"그게 누군데요?"

[그건...]

"그건?"

[비밀입니다!]

"하아... 시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방금 욕하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분명 들었는데]

"아니라고요."

[저 나름 대단한 존재인데요]

"어쩌라고요!"

강현의 짜증에 관리자가 즐거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강현 님. 자꾸 머리 넘기지 마세요]

"그런 것도 알고 있습니까?"

[강현 님이 매일매일 하는 건데 모를 리가 없죠]

"아무튼, 그건 또 왜요?"

[요즘 탈모 오시지 않았나요?]

확실하다.

저 관리자. 아니, 저놈은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제가 좀 도와드려요?]

"필요 없으니까. 꺼져요!"

[네. 그럼 안녕히]

"자, 잠깐! 이렇게 갑자기…."

[다음 만남을 기대할게요]

순간 강현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기다려라 씨이벌... 언젠가 한 방 먹이고...'

이내 강현의 의식이 끊어졌다.

116화 재회(3)

116. 재회(3)

강현이 죽고 난 이후, 고작 며칠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연합에 스파이였던 오정수는 그동안 모아 온 자료를 모두 정부 제공했다.

그리고 정부는 그 기회를 노치지 않았다.

뉴스에 내보내고, 위튜브를 활용하고, 관련 다큐까지 제작을 지원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자료를 활용했다.

그러한 노력들 덕분에 강현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풀리게 되었다.

-나는 역시 강현 믿었다니까

-ㄹㅇ 인간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때다 싶어서 마녀사냥하는 거 역겹더라 진절머리남

-강현이 죽어도 부활하거나, 순간이동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뭔지 아시는분?

-그게 말이나 됨?ㅋㅋㅋㅋ

-현장에 있던 사람이 절대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뭔가 있긴 한 듯

그 대신 새로운 오해가 생기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대한아! 아이고 내 새끼. 어쩌다가 이렇게!"

"정만득 의원님."

"뭐야? 너희는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같이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정대한과 패거리는 마력을 모두 잃고 폐인이 됐다.

또한 그들의 가족이 벌여온 온갖 불법, 비리도 밝혀져 모두가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됐다.

얼마나 공정한 심판이 내려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연화의 아버지. 최강우가 움직였기에 이전처럼 손쉽게 법망을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 것이 분명했다.

"피해자분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이 돈으로 그분들을 위로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강우는 거기에 더해 피해자들, 그리고 유족들에게 대대적으로 위로금을 지급했다.

딸이 그곳에 잡혀 있는 동안 자신도 같은 괴로움을 겪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진심 어린 말과 함께 지급된 돈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왜 이렇게 오라 가라 해요. 피곤해 죽겠구만."

그 모든 일이 정리되고, 마침내 오늘.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 사건과 관련된 이들이 다시 모였다.

"강현 씨. 오셨습니까."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불렀어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논공행상이라고요."

"논공행상은 무슨. 국가에서 저한테 줄게 남아 있긴 해요?"

"크흠... 감사의 인사라도."

"필요 없어요."

그때 회의장 문이 열리며 최연화가 들어왔다.

"꺄악! 강현 오빠! 살아 계시다는 말은 들었는데,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것 까진 없…."

"그동안 피해자 분들 만나고, 정리한다고 너무 바빴거든요! 이제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최연화는 원래의 밝은 모습을 제법 되찾은 상태였다.

아직도 가끔 어두운 얼굴을 하거나, 지나치게 냉랭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어어. 그래그래."

"제가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강현 오빠가 돌아가신 줄 알고 정말 하루 종일 울었는데 이렇게 돌아와서 정말 다행…."

최연화가 한창 조잘거리던 그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등장한 이들을 본 강현이 사납게 웃었다.

"아주 단짝이 다 되셨네."

들어온 이들은 오늘의 마지막 손님. 한세연과 최민준이었다.

썩은 미소를 지은 강현이 한껏 그들을 비꼬았다.

"둘이서 짝짜꿍이 잘 맞나 봐?"

"딱히. 합리적이기에 필요가 맞았을 뿐이다. 사실 네놈처럼 단순 무식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맞을 수밖에 없지."

"이 새끼가. 말 다 했냐?"

"그렇다면?"

최민준이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더 주둥이를 찢고 싶게 만드네.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해 줘?"

"두 분. 일단 진정하시죠."

신태길의 만류에 강현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어휴. 말을 말아야지. 빨리빨리 끝냅시다. 그리고 너는 밤길 조심해라. 길가다가 뒤통수 터지면 나인 줄 알어."

"강현 씨. 제발..."

"아아, 알겠어요."

강현은 농담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것은 이번 사건을 완전히 마무리 짓기 위해서입니다."

"사건 마무리? 그러면 최연화는 왜 온 거예요?"

"최연화 씨는 피해자분들의 대표십니다. 피해 보상에 대한 부분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계십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도 마무리 지어야 했기에 불렀습니다."

신태길의 대답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이번에 놈들의 기지를 급습하며 얻게 된 기계장치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군요. 꺼내 주시겠습니까?"

한세연이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장치를 하나 꺼냈다.

"이건 뭐예요?"

"인간에게서 마력을 뽑아내는 장치입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호..."

"현재 정부에서는 인간이 아닌 몬스터, 혹은 다른 것에서 마력을 뽑아내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게 된다면 그 다음은 그 마력 포션을 만드는 것이겠죠."

"궁금한 게 있는데. 포션을 이용해서 마력을 회복할 수는 있겠지만, 마력 통 자체를 넓힐 수는 없지 않아요?"

"예. 마력 포션을 복용하더라도, 마력 최대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겁니다."

"그럼 놈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한 마력을 가지게 된 거예요?"

"그건 반다렌코의 고유 능력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마력이 가득 찬 상태에서, 강제로 마력을 주입해 억지로 그릇의 크기를 늘리는 거죠. 그것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지만, 하루 이틀 안에 성과가 나오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흐음... 알겠어요. 그래서 이 기계장치를 보여주는 이유가 뭐에요?"

"강현 씨와 최연화 씨에게 하나씩 드리기 위해서죠."

"예?"

예상치 못한 선물에 강현이 당황했다.

"강현 씨는 정서빈 씨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고생하셨으니, 응당 가져가야 할 대가지요. 최연화 씨의 같은 경우에는, 그녀의 아버지. 최강우 씨와 이미 거래를 끝마친 상태입니다."

"어쩐지. 위로금이 과하다 했네."

최강우가 회장으로 있는 삼오 그룹에서 쏟아져 나온 위로금.

강현은 전 국민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거래가 이뤄져 있었다.

"이 사회, 정치, 경제에서 이유 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저기... 그래도 아버지는 진심으로 그분들을 걱정하고 계셔요."

조심스럽게 손을 든 최연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했다.

"아아, 오해하지 마. 뭐라 하는 건 아냐. 남들을 도우면서 자기 이득을 챙기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간 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깊게 본 사람들이다.

자신의 내면과, 대외적인 이미지. 그리고 실리까지 챙긴 최강우 회장의 행동을 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군 길드와 저 범죄자가 왜 여기 끼어들었나 했더니. 다 목적이 있었네요. 크큭."

강현의 말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 주는 거라니. 잘 받을게요."

"방금 말했지 않습니까.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그래도 최민준 씨 측에서 제공한 자료 덕분에 강현 씨에게 좋지 않던 여론을 빠르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안 잡아먹으니까 그렇게 필사적으로 쉴드 안쳐도 돼요."

"크흠."

정곡을 찔린 신태길이 괜히 헛기침했다.

"흐아! 오랜만에 머리 썼더니 피곤하네."

회의는 그 이후로도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난 듯하자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끝이죠?"

"예.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려던 찰나.

갑자기 한세연이 최연화를 붙잡았다.

"최연화 씨. 잠시만."

"네..?"

"혹시 단군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어요?"

한세연의 말에 모두가 멈춰 섰다.

"단군 길드라니..."

대한민국 최고의 정예 길드로 유명한 단군.

길드원 하나하나 모두 이름 있는 능력자들로 이뤄진 단군은 세계적으로도 위상이 높았다.

소수 정예 길드인 만큼, 단군은 가입 조건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수시로 바뀌는 가입 조건.

그리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한세연의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길드에 들어가고 나서도, 뒤쳐지게 되면 곧장 길드 내 2군으로 보냈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네. 최연화 씨는 가능성이 있어요. 단군에 온다면 제가 전적으로 맡아서 키워 줄게요."

그런 단군에 이제 막 능력자가 된 새내기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꽤나 큰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길드 내에서도 반발이 있을 것이고, 최강우 회장이 로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한세연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최연화를 영입하려 했다.

'분명 최강우 회장이라는 뒷배가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만약 최연화가 능력이 없다면, 최강우 회장이 직접 부탁했더라도 그녀를 단군 길드에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세연이 최연화를 탐내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꽤나 파격적인 조건이라 생각하는데."

한세연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인재를 얻었어.'

최연화는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최고의 조건을 거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세연의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최연화를 키울 것인가에 대해 모든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할게요."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 네?"

"거절할게요. 저는 이미 가고 싶은 길드가 있어서요."

최연화의 거절에 한세연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푸흐흡, 크하하하!

한세연이 저런 멍청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처음 본 강현이 박장대소를 했다.

"풉, 크흐흠!"

신태길 또한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한세연이 노려보자 곧장 헛기침을 하고는 정색했다.

"이유... 이유가 뭔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가고 싶은 길드가 있어요."

"설마 배데스 길드?"

"네."

최연화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야야. 우리 그렇게 아무나 받아들이는 쉬운 곳 아니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들어와야지."

"강현 오빠. 그래도 같이 있던 정이 있는데, 안 될까요~?"

"노노, 안 되지. 안 돼. 우리는 어디처럼 절차도 무시하고 막 사람을 들이는 쉬운 곳이 아니라고."

"에이... 그러면 면접 보고 들어갈게요."

"그래그래. 그래야지. 하하하!"

강현은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이놈의 인기란... 피곤하네. 한세연 씨. 자고로 길드장이라면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이 따르는 법인데 그렇게 줏대 없이 아무렇게나…."

강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콰아앙!

한세연이 엄청난 괴력으로 문을 닫으며 회의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크하하하! 아우!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

"휴우... 꼭 그러셔야 했습니까?"

"뭘요?"

"아닙니다..."

강현과 신태길의 촌극을 지켜보며 최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는 배데스에 들어가지만, 언젠가는 뛰어넘고 말 거야.'

한세연이 싸우는 모습을 본 그날.

최연화는 결심했다.

언젠가는 그녀를 뛰어넘고 말겠다고.

'물론, 그 뒤에도 강현 오빠 옆에 있을 거지만.'

강현과의 미래를 생각하며 최연화가 실실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음흉한 웃음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

117화 운수 나쁜 날(1)

117. 운수 나쁜 날(1)

"하압!"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라고 몇 번을 말했건만! 또 그렇게 무식하게 휘둘러 되는군.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닥쳐!"

두 자루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빈틈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격.

강현은 재빨리 검을 쳐올렸다.

-멍청한 놈! 몇 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방금 적의 힘이 너와 엇비슷한 수준만 됐어도 네 자세는 완전히 무너졌을 거다. 그 뒤에는 죽음뿐이지.

"그러면 어쩌라고!"

-가르쳐 준 대로 하란 말이다!

"시벌. 말은 쉽지."

C등급 던전 '기사 훈련소'.

강현과는 제법 인연이 있는 던전이었다.

기사 훈련소는 원래 정부에서 지정한 '교육용 보호 던전'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인기가 없어 관리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강현은 신태길을 통해서 싼값에 던전을 구매했다.

-길드장님. 아무리 싸다고 해도, 이런 던전에 돈을 투자하기는 좀...

도중에 한재문의 반발이 있었으나, 강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허! 다 우리 길드원들 훈련을 위해서 그런 거라니까!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구매했지만,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기사 훈련소는 강현의 개인 훈련장이 돼버린 상태였다.

"케에엑!"

강현의 검술 선생님. 케르고가 휘두르는 검이 강현을 몰아붙였다.

"이 새끼가 어딜 기어올라!"

-힘으로 제압하지 마라. 그런 태도로는 늙어 죽을 때까지 검술 실력을 늘릴 수 없을 거다.

"나도 알고 있어!"

사방에서 몰아쳐 오는 검을 강현이 부드럽게 받아냈다.

-그래! 그거야!

"쫑알쫑알. 정신 사나워 죽겠네."

계속해서 머리를 울리는 음성에 강현이 짜증을 냈다.

-검은 무작정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하단! 빈틈을 노려라!

그러거나 말거나, 베일은 계속해서 주절댔다.

-방금은 좋았다. 하지만 얕았군.

강현이 휘두른 검이 케르고의 허벅지를 베어냈다.

하지만 케르고가 재빨리 반응했기에 피부를 스치는 것에 그쳤다.

그 순간.

[능력 '베일의 검술'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됐다!"

메시지와 함께 들리는 음성.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드디어 올랐다! 으아아!"

이것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은 강현이 검을 내려놓았다.

"고생했다. 이제 쉬어도 돼."

그러나 이미 피를 봐서 흥분한 케르고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해."

"케에엑!"

"그만하라고 했잖아! 새꺄!"

-퍼억!

강현이 힘껏 내지른 발길질에 얻어맞은 케르고가 수십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께르르..."

케르고는 억울했다.

매일매일 얻어맞는 것도 고역인데, 저 인간의 태도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캉켠... 옼. 케엑..."

해석하자면, 강현. 오크 같은 새끼란 뜻이었다.

참고로 '오크 같은 놈'은 고블린 사이에서 가장 심한 욕설 중 하나였다.

그 말을 끝으로 케르고는 기절했다.

"뭐라는 거야?"

거품을 물고 있는 케르고를 보고 피식 웃은 강현이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4개

▫레벨 : 85

▫상세 능력치 :

·근력 38 (+4)(+5)

·순발력 37 (+3)

·체력 39 (+3)(+13)

·마력 40 (+3)(+10)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강현식 사투(A), 베일의 검술(B), 마력감지(B), 마력운용(B), 독 내성(D), 열기내성(C), 냉기내성(D)…

▫스킬 : 분노의 사자후(A), 상급 육체 재생(A), 거인의 힘(A), 마력폭발(A), 엔트리아의 외피(A), 웨인의 비기(A), 일도양단(B), 가속(C)…

강현이 지난 몇 달간 이뤄낸 엄청난 성장.

대부분의 스킬은 A등급에 도달했고, 능력 또한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A등급 위는 없는 건가?"

'강현식 사투', '상급 육체 재생', '거인의 힘'과 같은 경우 꽤 오래전에 A등급에 도달했었다.

강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등급에 도달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어떠한 진전도 없는 상태였다.

"뭐, 언젠가는 오르겠지."

강현에게는 밑바닥 시절부터 다져온 경험과 인내심이 있었다.

잠깐 성장이 정체된다고 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몇 시지?"

강현이 던전에서도 작동이 가능한 마정석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얼른 나가야겠다."

**

8월 초. 뜨거운 뙤약볕을 만끽하며 강현이 거리를 거닐었다.

"야야. 강현이다."

"와아, 근육 좀 봐."

"사진 찍어 달라 할까?"

능력자가 된 이후. 강현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자신의 멋진 근육을 자연스럽게, 마음껏 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요즘 근육이 잘 안 커지는 느낌이네."

키 179cm. 몸무게 102kg.

원래라면 엄청난 거구의 근육 돼지로 보여야 할 신체 스펙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강현의 모습은 그보다 조금 슬림했다.

약 90kg을 넘긴 이후로 더는 근육의 부피가 커지지 않은 탓이다.

대신 무게만은 이상하게 꾸준하게 증가했는데, 마력에 의해 신체가 변화되며 생기는 현상 같았다.

"오셨습니까."

"어어, 기다렸어?"

"아닙니다. 경매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찰나였습니다."

"좋았어."

길드 사무실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신성아가 강현을 반겼다.

그녀의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라이브 방송으로 온라인 경매가 진행 중이었다.

-제 17회 대한민국 던전 경매.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몇 달간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이 던전 경매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원시로 회귀했던 인류가 다시 지성을 갖추게 됐다 했었나?'

경매와 소유 시스템이 생기기 이전에는 모든 길드가 무력으로 던전을 점거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도가 확립되고, 공식적으로 경매에서 낙찰을 받아야 던전의 소유권이 인정됐다.

물론, 이 제도를 시행하는 데는 많은 반발이 뒤따랐다.

-던전 공략 포상금을 없앤 것도 모자라서, 던전을 돈을 주고 사라고? 제정신이야!

-돈에 미친 정부는 각성하라!

원래 지급되던 공략 포상금도 없애고 기존에 없던 경매금까지 지불해야 했으니, 길드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배데스 길드, 불사 길드, 검은 기사단. 정부 시스템에 적극 찬성.

-단군 길드의 한세연. 이번 변화는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올 것.

그러나 최상위권에 위치한 길드들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거기에 대해 마정석 값이 급등하자 길드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경매에 얼마를 쓰던, 던전을 가져가기만 하면 그 이상의 수익을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본격적으로 던전 산업이 자리를 잡은 상태.

그 결과 던전 부산물과 마정석의 가격이 말 그대로 폭등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멈출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마정석의 가격 폭등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정부는 진짜 어마어마하게 벌었겠다.

-그러게. 지금 가격의 10분의 1일 때부터 쓸어 담았잖아.

-10분의 1이 뭐냐? 초창기에는 그것보다 훨씬 싸게 긁어모았었어.

-어디 예언자라도 있는 거 아냐?

과거 마정석의 사용처가 불분명했을 때부터 정부는 세금으로 마정석을 사들였다.

덕분에 지금은 그것의 몇 배에 달하는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그동안 던전 공략 포상금으로 뿌린 세금을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던전. 오늘 나오는 게 확실한 거지?"

"예. 신태길 팀장에게 미리 정보를 들었으니 확실할 겁니다."

"좋았어."

경매의 초반부.

F등급 던전부터 시작되기에 아직 강현이 원하는 던전이 올라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다음은 B등급 던전. 코볼트 성채입니다.

마침내, 현존하는 가장 높은 등급인 B등급 던전의 경매가 시작됐다.

-코볼트 성채는 중세 성을 배경으로 한 미로형 던전으로, 다수의 코볼트가 등장함과 동시에…

진행자가 한동안 던전 설명을 이어가고, 마침내 경매가 진행됐다.

-시작 금액은 1억입니다. 성신 길드 1억! 불사 길드 5억! 아, 바로 금액이 뛰네요.

경매는 일반인들도 모두 지켜볼 수 있지만, 입찰은 불가능하다.

각 길드에 입찰이 가능한 아이디가 하나씩 지급되는데, 상위 등급의 던전일수록 입찰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13억. 13억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단군 길드! 단군 길드 20억!

진행자의 말과 동시에 채팅창에서는 난리가 났다.

-와, 갑자기 20억이라니... 역시 단군 클라스 ㄷㄷ

-뭔데 돈을 저렇게 쓰는 거지? B등급 던전이면 보통 15억 내외 아닌가?

-이번에 사전 조사 참가한 사람 중 한명이 보물 창고를 본 것 같다는 말을 흘렸는데, 그거 때문인 듯합니다.

-그거 그냥 찌라시라던데

-생각을 해봐라. 단군이 눈독 들일 정도면 그냥 찌라시가 아니겠지...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을 보며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흐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저 던전 내가 가져갔어야 했나 싶어서."

"저건 우리가 점찍은 던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만약에 진짜 저기서 보물창고가 나온다면 너무 배가 아프잖아. 안 그래도 잘 나가는 한세연한테 보물창고라니! 만약 거기에 대박 아이템이 잔뜩 들어 있으면, 100억 우습게 벌 텐데. 아깝지 않아?!"

신성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얼마 전부터 강현은 한세연과 묘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길드 랭킹.

1위 단군. 2위 배데스.

능력자 랭킹.

1위 한세연. 2위 강현.

물론, 저 랭킹이란 것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가장 높은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이트에서 내건 순위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자!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던전! 싸이클롭스의 무덤입니다!

드디어 강현이 기다리던 던전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사전 조사대에 따르면 던전 타입은 … 입니다. 끝으로 던전 보스는 변종 언데드 사이클롭스로 확인됐는데, 거대한 해머를 주무기로 이용한다고 하는군요.

사회자가 한동안 던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고,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마침내 경매가 시작됐다.

"강현 님. 얼마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15억."

"알겠습니다."

-배데스 길드! 15억! 오늘도 시작부터 화끈합니다!

강현은 경매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15억을 입력했다.

역시나 채팅창에서는 불이 났다.

-오늘 강현이 직접 하나보다 ㅋㅋㅋㅋㅋㅋㅋ

-ㅇㅈ. 듣자하니 강현이 앉은 날에는 일단 10억 단위로 때리고 시작한다 함.

-노빠구 상남자 강현. 인정합니다.

이미 몇 번의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강현에 대한 소문이 멀리 퍼진 상태였다.

강현이 경매에 참여하는 것을 위튜브 라이브로 진행한 적도 있었기에,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5억. 더 없습니까? 아아! 단군 길드! 단군 길드 20억. 20억 나왔습니다.

순간,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뭐!? 20억!?"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자 콰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사무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강현인 것을 확인하고는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엌ㅋㅋ 단군 바로 20억. 오늘 경매 개꿀잼이닼ㅋㅋ

-어디까지 올라갈까ㅋㅋㅋㅋ

-오늘 한세연이랑 강현 불붙었다.

-ㄴㄴ 아직 모름. 바로 포기할 수도 있음.

댓글창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잔뜩 흥분한 사회자가 소리를 질렀다.

-배데스 길드 22억! 아, 무섭습니다! 잠시만요. 단군 길드! 곧바로 25억을 입찰합니다! 오늘 역대 최고 경매가를 갱신할까요!?

"이런 씨벌!!!"

"강현 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조금씩 가격 올리면서 시간을 끌어봐."

"알겠습니다."

강현은 다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 속 목소리는 감미로우면서도 듣는 이를 서늘하게 했다.

"한세연 씨. 뭐하자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저 던전. 나한테 필요한 거 알고 일부러 깽판 놓는 거잖아요!"

강현이 싸이클롭스의 무덤을 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보스가 들고 있는 무기 때문.

강현이 사용하는 '우르그의 거대 망치'는 D등급의 해머로, 획득한 지 무려 1년이 넘어가는 고물이었다.

그동안 강현은 새로운 무기를 찾았지만 원하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던전 정보.

강현은 반드시 저 던전에서 새로운 무기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한세연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지저분하게 나온다 이거죠?"

-강현 씨. 자고로 길드장이라면 어느 정도 무게를 가져야 사람이 따르는 법이죠. 그렇게 막말을 내뱉으시면 안 됩니다.

한세연의 말에 강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거 설마?'

한세연이 내뱉은 말은 몇 달 전에 강현이 한세연에게 했던 말이었다.

최연화가 단군 길드를 거부하고 배데스 길드에 온다고 한 그날.

강현은 정말 신이 나서는 한세연을 놀렸었다.

"와아! 그 일을 가지고 아직도 삐져 있다고? 무슨 이런 좀생이가 다 있어?!"

-반말하지 마시죠. 대단한 배데스 길드장님. 이만 전화 끊을게요.

"자, 잠깐!"

한세연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우..."

강현이 치밀어 오르는 화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 배데스. 길드의 여유 자금이 부족해진 걸까요? 계속해서 낮은 단가로 금액을 올리고 있습니다. 단군 길드! 다시 금액을 올려서 29억!

사회자의 말과 동시에 댓글창에서는 강현을 소인배라고 놀리는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강현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0억! 질러버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사무실 한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사무장님."

"한재문 사무장님이 쓰러지셨어."

노심초사 경매를 지켜보던 한재문이 혈압으로 인해 쓰러진 것이다.

'아아, 길드 자금이...'

그러거나 말거나 강현은 완고했다.

"후우, 한세연. 두고 보자!"

118화 운수 나쁜 날(2)

118. 운수 나쁜 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