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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26

118화 운수 나쁜 날(2)

118. 운수 나쁜 날(2)

결국 던전은 45억에 낙찰됐다.

일반적인 B등급 던전보다 거의 3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강현은 정말 피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40억에 응급실로 실려 갔던 한재문은 5억이 더 썼다는 말을 듣고 다시 실신했다.

"재문이도 참. 내가 알아서 충당해 준다니까."

"놀랄 만도 했습니다. 45억이면 길드의 여유 자금을 전부 쏟아부어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애초에 내 돈 들여서 만든 길드! 엉? 내 피와 땀이 들어간 길드인데, 이 정도도 맘대로 못해?!"

"형.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왜 혼자 흥분해서 그래요?"

"크흠..."

강현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내가 잔뜩 벌어서 우리 길드원들 떵떵거리게 해준다니까 그러네."

"알겠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요."

윤나래가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건방진 놈들... 그래도 내가 길드장인데..."

강현이 구시렁대며 앞으로 걸었다.

"그나저나, 강현 님. 무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중충한 분위기입니다."

신성아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새삼 우울함이 느껴졌다.

잔뜩 낀 먹구름.

사방에 무덤이 깔려 있었다.

사전 조사대의 말에 따르면, 필드형에 언데드가 나오는 던전이라고 했다.

"이건 뭐,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았어도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챘겠는데?"

서늘한 분위기에 약간 소름이 돋은 강현이 팔을 쓰다듬었다.

"해골 뼈다귀 하루 이틀 부수는 것도 아니고. 가보자고."

강현이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푸슉-하는 소음과 함께 땅을 뚫고 나온 새하얀 손이 강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끄아아아! 씨발!"

그리고 등장하는 언데드들.

사이클롭스의 무덤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온갖 종류의 언데드가 땅을 뚫고 올라왔다.

"놀랐잖아. 새꺄!"

강현은 놈의 두개골이 흙을 뚫고 나오자마자 전력으로 걷어찼다.

-파아악!

그 발길질에 새하얀 두개골이 수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며 허공에 흩날렸다.

"이거 항의해야겠어. 정보를 줄 거면 자세히 알려 줬어야지. 내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면 어쩔 뻔했어?"

"아, 예..."

"방금 놀란 모습은 영상에서 삭제해라."

강현이 위튜브용 영상을 촬영 중이던 윤나래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삭제하라고."

"알겠다니까요!"

윤나래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꼴사나운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형. 다 놀았으면 좀 도와줘요!"

신성아와 함께 언데드를 부수던 안유성이 외쳤다.

"평소에는 자기 밥그릇 건들지 말라던 놈이 웬일이냐?"

"얘들은 손맛이 덜해서 금방 질려요. 개성도 없고."

"아, 그러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하는 소음과 함께 다른 놈들보다 유독 거대한 언데드 오크의 머리통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이 던전 은근히 노다지 아냐?"

오크가 들고 있던 글레이브(glaive)를 집어 들며 말했다.

"수습팀한테 자잘한 장비라도 놓치지 않게 신경 쓰라고 전해둬."

"알겠습니다."

던전 공략팀 뒤에는 항상 수습팀이 따라붙는다.

마정석과 아이템 등,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가치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는 사체의 가격이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강현은 수익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값비싼 무기를 든 놈들이 잔뜩 나와주니 신이 났다.

"명절에 친척 어른들이 부모님 모르게 용돈을 찔러준 기분이야."

어느 집이 그렇듯 부모님이 발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대충 정리됐지?"

"예."

어느새 주변의 땅은 부서진 뼈로 인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이라도 내린 것 같네...'

강현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

"지금 몇 시야?"

"밤 9시 13분입니다."

강현의 물음에 신성아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음, 우리가 아침 먹자마자 던전에 들어왔지?"

"예."

"그럼 슬슬 쉬어야겠네."

때마침 던전에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온종일 우중충한 날씨라서 나는 진작 밤이 된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실제 던전의 밤은 훨씬 어두웠다.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기온이 떨어졌다.

"강현 님. 코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부숴야지."

던전의 노말 코어(일반 핵)에 도착한 일행은 주변을 정리하고 핵을 부쉈다.

"공략 포상금이 없는 게 아쉽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B등급 던전의 코어를 부수면 억 단위의 돈이 떨어졌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제는 배데스 길드가 소유한 던전이었기에 관리 차원에서 코어를 부숴야 했다.

메인 코어를 부수면 던전이 사라지지만, 노말 코어를 부수면 던전의 개방 시간이 초기화된다.

이 던전을 계속 유지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우선 노말 코어는 보이는 족족 부수는 것이 맞았다.

"형. 오늘 저녁은 뭐에요?"

코어를 부수고, 주변의 정리가 끝나자 안유성이 다가왔다.

"차돌박이 된장찌개."

"어휴. 또 소고기네."

"된장찌개가 뒤에 있으니까 이건 된장찌개야. 그리고 소고기가 어때서!?"

던전 보존식.

시작은 맛없는 햄버거였지만, 지금은 한식부터 양식까지 다양한 식사가 가능하도록 발전한 상태였다.

여전히 그 살인적인 가격이 문제였으나, 강현은 거의 원가에 들여올 수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거 맛있네."

"예. 먹을 만한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맛 또한 발전해서 전처럼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자자."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강현은 침낭을 깔고 드러누웠다.

먹고 남은 쓰레기는 어차피 던전이 클리어되면 사라지기에 한쪽에 던져둔 채였다.

이것을 이용해서 요즘은 방사능과 같은 각종 오염 물질, 생활 쓰레기 같은 것들을 던전에서 처리하는 곳도 많아진 상태였다.

"알람 맞춰둬. 다섯 시간만 자고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모두가 눈을 감았다.

밤 10시.

잠을 자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었으나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딱히 잠들지 않아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일반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은 그저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안유성.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꼭 깨워야 한다."

"저도 잘건데요."

"너는 일 터지면 항상 먼저 깨잖아."

안유성은 육감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감지했다.

"쳇."

일행은 던전 공략의 필수라 여겨지는 불침번조차 두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

휴식과 전투의 반복.

일행은 한동안 위의 두 개만을 반복하며 이동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지칠 법도 했지만, 누구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흐아아압!"

베일의 장검을 든 강현이 온 신경을 집중해 적들의 공격을 흘려냈다.

"이딴 놈들 주먹 한 방이면 부수는데, 이 개고생을 해야 해!?"

-멍청한 놈. 그런 태도로 전투에 임하니 실력이 늘지 않는 거다. 훗날 진정한 강자를 만났을 때 한 번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다면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알겠다고! 알겠어! 그놈의 잔소리는 엄마보다 더하네."

강현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예상보다 던전이 쉬웠기 때문이다.

같은 B등급 던전이라도 난이도는 모두 천차만별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몬스터의 상성, 던전 내부의 환경 등. 기타 여러 가지에 따라 개인이 체감하는 난이도는 더욱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형. 이 던전 너무 시시한데요?"

"그래서 뭐?"

"그냥 얼른 보스 잡고 나가자고요."

그런 것들을 고려해도 이 던전은 너무 쉬웠다.

"징징대지 마. 계속 찾고 있는데 마력이 안 느껴져."

물론, 이것은 강현과 그 패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다.

국내에 고작 4명으로 B등급 던전 공략을 공략한 길드는 배데스와 단군. 둘 뿐이었다.

아직도 최상위권 길드가 아니면 B등급 던전 공략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이상하다. 메인 코어에 가까워지는 느낌은 드는데 말이야. 왜 보스가 안 느껴지지? 설마 보스가 없는 던전인가?"

"생각이란 걸 좀 해요. 보스가 든 망치 뺏으러 여기 왔잖아요. 그새 까먹었어요?"

"아, 그랬지."

윤나래의 핀잔에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명색에 B등급 던전인데 이렇게 쉬우면 그만큼 보스가 강하겠죠. 상식 아니에요? 길드장은 도대체 아는 게 뭐야? 맨날 무식하게 망치만 휘둘러 댈 줄만 알지. 까고 보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강현의 인상이 점차 험악해졌다.

신나서 떠들던 윤나래는 강현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말을 바꿨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같은 바보는 머리 박고 죽어야죠. 에잇! 하하."

윤나래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자신의 머리에 휘둘렀다.

"조금 더 나갔으면 위험했다."

"길드장님 최고!"

그사이 사회생활에 많이 적응한 윤나래였다.

"야. 저기 보이는 언덕만 넘어가면 메인 코어인 것 같다."

"메인 코어에 이 정도로 접근했는데 보스가 없다니... 확실히 이상합니다. 보스에게 메인 코어를 지키는 것은 본능 같은 것일 텐데요."

"뭐, 가보면 알겠지."

신성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느낌이 이상하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

뾰족한 수가 없었던 강현과 일행은 그저 걸었다.

마침내 언덕의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쯤. 안유성이 입을 열었다.

"형."

"왜."

"이 언덕 이상하지 않아요?"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안유성을 바라봤다.

"뭔 소리야?"

"약간 흔들리는 것 같은데."

안유성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해 있었다.

"너 이 새끼... 설마..."

순간 다른 일행들도 이상을 알아차렸다.

"강현님. 땅이 움직입니다!"

"어어? 뭐야!?"

언덕이 일어서고 있었다.

동시에 일행의 시야가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미친놈아! 빨리 말했어야지!"

"재밌잖아요. 하하하!"

윤나래는 하늘을 날았고, 신성아와 안유성은 고양이처럼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이런 시벌!"

오직 강현은 착지 도중 진흙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던전 내부의 흙에 마력을 차단하는 성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 그나저나 이거 사이클롭스 맞아?"

"엄청나게 큰 게 재미있겠네요. 때릴 곳이 많겠어요."

완전히 일어선 사이클롭스는 15m가 넘어 보였다.

일행은 사이클롭스를 사냥한 적이 제법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놈은 뼈밖에 없음에도 지금껏 사냥한 모든 개체의 크기를 압도했다.

-투툭, 툭, 후드득

놈의 뼈에 붙어있던 흙들이 떨어지며 사방으로 튀겼다.

"이 덩치를 어떻게 때려잡지."

최근 강현에게 대형 몬스터란 그저 때릴 곳이 많은 샌드백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놈은 달랐다.

전신에 뼈밖에 없어서 약점이랄 것이 보이지 않았고 그 뼈마저도 상당히 단단해 보였다.

"일단 패면서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강현이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빼든 순간,

-철퍽

거대한 진흙 덩어리가 강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푸흡, 푸하하! 형. 탈모 온다더니 가발 새로 맞췄어요?"

안유성이 삿대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 모양이 꼭 화장실의 '그것'처럼 생겨서 안유성은 더욱 웃겼다.

"하아, 오늘 일진 더럽네..."

진흙을 치워낸 강현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딱 기다려!"

모든 버프를 활성화한 강현이 마력을 가득 담아 전력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마치 다이너마이트라도 터진 듯한 굉음.

엄청난 충격에 마력과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원망하진 마라."

이 정도면 최소 전치 8주 수준으로 뼈에 금이 갔을 것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먼지가 걷히기 전까진.

"뭐야? 왜 이렇게 단단해?"

먼지가 걷히고 보이는 놈의 뼈는 아주 깨끗했다.

상처하나 없는 모습.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 강현이 당황하던 순간,

"강현님! 조심하십시오!"

신성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오늘 일진 진짜 더럽네..."

동시에 보이는 거대한 해머.

-퍼어억!

트럭만 한 해머가 그대로 강현을 후려쳤다.

119화 운수 나쁜 날(3)

119. 운수 나쁜 날(3)

거대한 해머에 얻어맞은 강현이 하늘을 날았다.

"와아, 멀리도 날아가네."

"괜찮겠습니까?"

신성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형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마?"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안유성 씨. 저는 보스 몬스터를 말한 거였습니다만."

"예? 하하..."

당황한 안유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신성아라면 당연히 강현을 걱정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스라면, 형이 없으니까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요?"

"놈의 뼈가 비정상적으로 단단합니다. 강현 님의 공격으로 상처조차 내지 못했는데, 저희가 공격할 수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성아의 지적은 정확했다.

언뜻 보기에 방금 강현의 공격은 무식한 휘두르기 같았지만, 아니다.

그 안에는 지금껏 해왔던 전투에 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압도적인 괴력과 더불어 파괴에 중점을 둔 치명적인 마력 컨트롤.

방금 강현이 휘두른 공격을 맞고 버틴 몬스터는 지금껏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것이 보스 몬스터 혹은 대형 몬스터라 할지라도 신체가 파괴되기 일쑤였으며, 즉사하지 않더라도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런데 놈의 뼈에는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문제긴 해요. 멍청한 악덕 길드장이라 해도 파워 하나는 진짜였으니까..."

어느새 옆으로 내려온 윤나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공격에 맞지 않게 주의하면서 탐색전으로 갈게요. 저런 공격에 맞으면 형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는 아마 그대로 즉사일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뼈가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방금 공격에 상처하나 없을 수는 없거든요.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번 찾아봐야죠."

자연스럽게 안유성이 지휘를 하고, 일행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쿠웅, 쿵!

"이거 잡을 수 있기는 한 거야?!"

보스 몬스터 '변종 언데드 사이클롭스'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저 거대한 체구와 압도적인 근력.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단단함을 무기로 일행을 압박했다.

"이렇게 보니 꼭 강현 형이 거대해진 것 같네요. 하하."

겉으로 태연하게 웃음을 흘렸지만, 안유성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약점을 찾을 수가 없어.'

전투가 제법 흘렀음에도 놈에게 별다른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놈의 뼈를 내려치는 안유성의 메이스는 약간 찌그러져 있었고, 타격할 때의 반동으로 인해 안유성의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위기야.'

심지어 놈은 뼈로 이뤄진 언데드라 지치지도 않는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재미있네."

안유성은 점점 달아올랐다.

피가 튀는 전투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깨부수는 희열 또한 그에 못지않다.

적이 강할수록 희열은 더욱 커진다.

"안유성 씨. 일단 후퇴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때였다.

옆으로 다가온 신성아가 후퇴를 제안했다.

"후퇴요?"

"예. 이대로 싸우다가 체력과 마력이 떨어지면 도망치는 것조차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물러났다가 다시 도전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어차피 보스는 코어 근방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으음..."

안유성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꺄아악! 이것들은 뭐야!?"

하늘에서 윤나래의 비명이 들려왔다.

[언데드 와이번]

그곳에는 뼈로 된 익룡처럼 생긴 몬스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지?"

"와이번이라. 보스만으로도 벅찬데 성가신 게 늘었습니다."

윤나래는 한동안 언데드 와이번과 공중전을 벌이다가 결국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이익, 공격이 먹히질 않아!"

"아무래도 보스와 마찬가지로 마력 실드가 처져 있는 것 같습니다."

"마력 실드... 마력 방패..."

순간 안유성의 머리가 번뜩였다.

윤나래에게 다가간 안유성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물었다.

"혹시 저놈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봤어요?"

"그, 그냥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던데..."

"그때 뭘 하고 있었는데요?"

"공격이 안 먹히니까 마정석이라도 찾아볼 요령으로 머리 근처를 날고 있었지..."

잘생긴 안유성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당황한 윤나래가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왜 그래...?"

"크큭. 이제 알겠어요."

그때였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뭘 알겠는데?"

그곳에는 어느새 도착한 강현이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서 있었다,

**

-푸아악!

하늘을 날아온 강현이 진흙에 처박혔다.

"아으으... 장난 아니네."

공격을 받아낸 왼쪽 팔뼈 전체가 박살이 났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이 삐걱거리는 것이 제법 충격이 큰듯했다.

"무슨 힘이 이렇게 무식하게 세?"

강현의 뼈가 부러질 정도니 그 위력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당한 건 오랜만이네."

어느 순간부터 강현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어지간한 칼질에는 피부에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력을 이용한 공격은 위협적이었지만, 그것은 갑옷을 입어도 마찬가지.

결국, 강현은 조금이라도 민첩하게 움직이기 위해 갑옷을 벗은 상태였다.

"현명한 선택이었어."

아마 지금 공격을 갑옷을 입은 채로 받았으면 충격은 조금 덜했겠지만, 갑옷은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만, 갑옷은 그걸로 끝이니까."

완전히 박살나면 수리도 안 된다.

"일단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하자."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강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웨인의 비기'를 사용하면 강현은 육체가 파괴되고 찢겨나가는 고통을 받는다.

그런 고통스러운 스킬을 강현을 마력이 허용하는 한 항상 유지했다.

즉, 뼈가 부러지는 고통쯤은 이제 강현에게 별다른 감상을 주지 못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날아온 거야?"

주위를 둘러본 강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1km는 넘게 날아온 것 같았다.

"하아, 어차피 몸도 회복해야 하니까 좋게좋게 생각하자... 중요한 건 어떻게 놈을 부수냐는 건데."

날아가기 직전 상황을 떠올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식적으로 뼈가 그렇게까지 단단해질 수 있나? 이상하단 말이지."

강현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마력 실드다. 뼈 전체에 얇고 단단한 마력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베일이 강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력 실드? 설마 그 종잇장 같은 마력 방패 말하는 거냐?"

-그래. 지금쯤이면 네 동료도 눈치챘겠지.

"그게 그렇게 단단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 커다란 덩치를 전부 뒤덮는다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드래곤이나 가질 법한 방대한 마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뭔데?"

-나는 기사다. 그리고 언데드에 대한 마법들은 부정(不正)한 것으로 여겨 배우길 꺼리지.

"그럼 결국 모른다는 거잖아!"

-끝까지 들어라! 나는 생전에 많은 네크로멘서를 처리했다. 그러며 얻은 지식이 있지.

베일의 말에 날뛰던 강현이 금세 얌전해졌다.

"그 방법이 뭔데?"

-언데드를 생성할 때 특수한 마법 처리를 하고, 그에 협응하는 마력 패턴으로 실드를 전개하면 효율을 엄청나게 끌어올릴 수 있다. 뛰어난 네크로멘서는 마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단단한 실드를 뼈 전체에 두를 수 있지.

"결국, 단단한 실드가 쳐져 있다는 거 아니야? 계속 같은 말만 빙빙 돌리고 있는 것 같은데."

강현이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멍청한 놈. 아무리 효율이 뛰어나도 그만한 크기에 그런 강도로 실드를 걸려면 네크로멘서가 근처에서 상주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근처에서 조종하는 술자가 있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군. 아무리 뛰어난 네크로멘서라도 그런 수준의 마력 소모를 견딜 수는 없을 텐데... 만약 가능했다면 혼자서 한 국가를 위협할 만한 거물이다.

"그러면 진짜 강한 거물인가 보지."

-쯧쯧. 상식적으로 그런 거물이라면 굳이 저런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방식을 쓰지 않는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흑마법으로 너희를 단숨에 죽였겠지.

베일의 말에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마력 하나만 비정상적으로강하다는 건데... 마치 반다렌코처럼 말이지?"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의 수장 반다렌코. 그는 특출나게 강한 마력으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었다.

강현은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뭐야. 벌써 다 왔나? 몸도 회복됐고, 타이밍 좋네."

어느새 강현은 육체는 모두 회복된 상태였다.

저 멀리 있는 일행을 발견한 강현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크큭. 이제 알겠어요."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유성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불만이냐?"

"불만까지는 아니고요."

안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하던 이야기 해봐. 뭘 알겠는데?"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설명을 이어갔다.

"근처에 실드를 거는 마법사가 있어요. 보스의 마정석을 찾으려고 하니 방해하는 거로 봐서 확실해요."

안유성의 설명을 들은 강현이 씨익 웃었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어. 인마."

"알고 있었다고요?"

"당연하지 인마. 그걸 누가 몰라?"

강현의 말에 일행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어허, 진짜라니까 그러네."

강현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베일이 알려준 것이라는 말은 뺀 채였다.

"믿을 수 없어..."

강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일행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네크로멘서가 근처에 있다는 결론이 난거지."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윤나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강현의 머리통을 붙잡은 윤나래가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아까 보스한테 맞았을 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요."

"뒤질래?"

인상을 찌푸린 강현이 윤나래를 집어던졌다.

"그나저나 너희는 왜 여기 있어?"

일행은 보스와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작전상 후퇴를 한 거죠. 형처럼 무식하게 부딪혀서 될 상대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뭐 인마!?"

"아, 방금 한 말은 취소. 이제 형도 엄청나게 똑똑해졌구나."

낄낄대던 안유성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 네크로멘서는 어디 있어요?"

"그건 나도 모르지."

"마력 같은 거 안 느껴져요?"

"계속 찾고 있는데 안 되네. 보스 마력도 마력인데, 메인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너무 강해."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찾아왔잖아요."

"그것도 그러네?"

안유성의 말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마력 감지가 날로 발전해서 그런가... 메인 코어의 근처에 있어도 제법 민감하게 마력을 느낄 수 있기는 해."

"그러면 답은 나온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여기 있겠죠."

강현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듣게 설명해봐."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땅이요."

**

오랜만에 강현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깃들었다.

"바로 끝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놈의 위치는 확실하다.

마력이 감지되지 않는 위치이면서 비정상적으로 강한 마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

"메인 코어 아래지."

메인 코어 근처로 다가오자 일행을 발견한 보스가 달려왔다.

"전부 시선 끌어!"

강현의 말에 일행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각자 공격을 하며 보스의 시선을 끌었다.

그 틈에 강현은 곧장 메인 코어로 달려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삽자루 하나 챙기는 건데!"

괜한 짜증을 내며 강현이 서둘러 땅을 파헤쳤다.

'미약하지만 마력이 느껴진다.'

역시나 메인 코어 아래가 정답이었다.

땅을 파 내려갈수록 더욱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쿵, 쿵, 쿵!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오는 보스 몬스터 또한 강현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강현 님. 조심하십시오!"

신성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을 파냈다.

마침내 보스가 메인 코어에 도착하고 거대한 망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

"늦었어. 새꺄."

강현이 흙 속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푸욱

다시 빠져나온 강현의 손에는 로브를 입은 언데드가 들려 있었다.

"거기서 재미 좀 봤냐?"

-이런! 어떻게 알았…!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이 손에 힘을 주었다.

-파가각

그 힘에 단숨에 두개골이 박살나며,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120화 운수 나쁜 날(4)

120. 운수 나쁜 날(4)

파가각- 하는 소음과 함께 네크로멘서가 축 늘어졌다.

배후에 있던 흑막 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쿠우웅!

네크로멘서를 죽였으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싸이클롭스는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2차전이 시작됐다.

강현은 빌게인의 장검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붉은 장검에 푸른 마력 불꽃이 타오르며 우웅-하는 소리가 울렸다.

"한 번에 간다!"

강현은 싸이클롭스의 발치로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발목을 이루는 뼈 중에 가장 위쪽에 있는 거골.

체중을 발로 전달하는 그곳을 공략해 단숨에 싸이클롭스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뭐야?!"

하지만 결과는 강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원래라면 두부를 자르듯 부드럽게 뼈를 갈랐어야 할 검이 손가락 한 마디를 파고드는 데 그쳤다.

"실드 부서진 거 아니었어?"

-원래 싸이클롭스의 뼈는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저만한 덩치를 지탱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네크로멘서가 특수한 처리를 한 것 같다.

"그 특수한 처리를 한 놈은 방금 두개골이 박살 났는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전투에 집중해라.

"언제는 다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말을 하면서도 강현은 쉴 새 없이 발을 놀렸다.

보스가 휘두르는 거대한 망치가 지면을 때릴 때마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저거 위에서 아래로 찍히면 답이 없겠어."

옆으로 맞았음에도 전신이 부서질 뻔했다.

수직으로 내려치는 공격에 당한다면 아무리 강현이라 해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까딱하면 죽는다. 정신 바짝 차려!"

"알고 있어요!"

강현의 외침에 윤나래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단단한 거 아니에요? 공격이 전혀 안 먹히는데."

"맞습니다. 네크로멘서를 처리했는데도 저희의 공격력으로 피해를 주기는 힘듭니다."

사실 변종 언데드 싸이클롭스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거대한 몸체.

극도의 단단함.

이러한 기본적인 특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까다로웠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피해를 주기 위해 공격 하나하나에 온 힘을 실어야 한다.

많은 집중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강현 님. 이제라도 마정석을 찾아서 부수는 게 좋겠습니다."

"마정석은 볼 것도 없이 머리에 있을 것 같긴 한데, 저놈이 그것만은 기를 쓰고 막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으음..."

"일단 움직여!"

아주 짧은 작전 회의를 마치고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보스에게서 굉음이 울렸다.

-그어어어어어어어

언데드는 발성 기관이 없기에 의지 자체를 머릿속에 전달하는 마법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일정 수준의 지능을 넘어서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보스가 처음으로 소리를 낸 것이다.

"뭔 일이야?"

고개를 돌리자 보스의 발치에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아아아압!"

-탕탕탕탕.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유성이었다.

"저건 또 뭐하는 거야?"

말을 하던 강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놈..."

안유성은 보스에게 못질을 하고 있었다.

안유성이 인벤토리에 상시 보관하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

안유성은 그중 몸체가 두텁고 단단한 단검을 골라내 마치 못처럼 보스에게 박아 넣고 있었다.

"저게 되네..."

보스의 공격을 피하면서 움직이는 거대한 뼈에 단검을 가져다 대고 메이스로 쳐서 박아 넣는다.

말로 하기는 쉬웠지만, 실제로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거기에 그 뼈가 어지간한 철판보다 단단하고, 못을 내려치는 망치가 둥글고 울퉁불퉁한 형태의 메이스라면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저 재능충은 완성형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전투 전반에 걸친 센스.

신체를 제어하는 감각.

시작부터 모든 것이 압도적이었던 안유성이었다.

그 이상의 발전은 힘들 것이라 여겼지만 강현의 착각이었다.

강현이 지금껏 강해져 왔던 것처럼, 안유성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됐다!"

마침내 완성된 단검 꼬지.

보스의 한쪽 발에 거의 백 개에 달하는 단검이 빼곡하게 박혔다.

"형. 와서 한 대만 때려 줘요!"

강현은 단번에 안유성이 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챘다.

씨익 미소를 지은 강현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간다! 윤나래 버프 걸어!"

평소 강현은 추가적인 버프를 받지 않는다.

'웨인의 비기' 하나만 사용해도 신체에 강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이 필요한 시점.

"좋았어!"

넘쳐흐르는 힘과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현재 강현의 기본 근력은 38.

사실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능력자가 모든 아이템을 착용하고 버프를 받은 상태에 가깝다.

거기에 A등급에 이른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사용하면 83에 가깝게 상승한다.

추가되는 칭호와 아이템의 효과 9, 마지막으로 윤나래의 버프 효과 7.

총합 99에 달하는 엄청난 근력이 강현에게 힘을 주고, 동시에 강현의 몸을 파괴했다.

-부우웅!

우르그의 거대 망치가 마치 야구 배트처럼 가벼웠다.

자신의 체중의 10배가 넘어가는 것을 휘두르는 것은 강한 근력과 별개로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했지만, 강현에게는 이제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

"비켜어!"

보스의 발치에 도달한 강현이 발을 땅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휘둘러지는 거대한 망치!

-콰앙! 파가가가각!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보스의 발 한쪽이 산산이 조각났다.

조각난 뼈들이 허공에 흩뿌려지며 눈발이 휘날리는 듯한 화려한 장면이 연출됐다.

-쿠우웅!

한순간에 한쪽 발이 박살 난 보스가 그대로 엎어졌다.

"전부 조져!"

**

강현과 패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쓰러진 보스의 뒤통수로 뛰었다.

각자 무기를 꼬나쥐고는 광산의 광부처럼 온 힘을 다해 뒤통수를 내려쳤다.

"크하하하! 이거 끝내주는데!"

강현은 아예 보스의 텅 빈 눈구멍 안으로 들어가서 망치를 휘둘러 댔다.

언데드의 두개골 안으로 들어간 최초의 인간으로 기록될 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실 보통 인간은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사기(死氣)로 인해 숨 쉬는 것은 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강현에게는 조금 불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앙, 콰앙, 쾅!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싸이클롭스의 거대한 두개골에서 광란의 파티가 벌어졌다.

"이익! 죽어, 죽어, 죽어!"

윤나래는 그동안 길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처럼 '죽어'를 연발했다.

신성아는 조용히 철제 화살에 마력을 실어 날리고 있었고,

"하하하하하!"

안유성은 미친 듯이 웃으며 메이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어어어어어!

언데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놈도 자신의 머리통에서 파티가 계속되면 끝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왜이래!?"

파티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후의 발악을 시작됐다.

"어? 어어!"

싸이클롭스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자신의 이마를 바닥에 힘껏 내려찍었다.

-쿵, 쿵, 쿵!

놈의 두개골 안에 있던 강현이 비트에 맞춰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야아아아! 어떻게, 좀 해봐!"

말을 하던 도중 혀를 씹어 피가 흘러나왔다.

일행은 잠시 뒤로 물러나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대로 그냥 두면 알아서 죽지 않으려나."

"냅둬요. 알아서 나오겠지."

그러는 사이에도 강현의 디스크 팡팡에 탑승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튕겨나가고 있었다.

"씨발! 너, 너, 너희, 들! 뭐해!?"

고객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윤나래가 손뼉을 쳤다.

"길드장님! 큰 거 한방 갈게요! 괜찮죠!?"

"빨리해!"

강현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바퀴벌레를 농구공 안에 집어넣고 경기를 했을 때, 농구공 안에 든 바퀴벌레가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억! 윽! 컥! 칵! 왘!"

보스의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절로 터지는 탄성.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밖에 거대한 마력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잠깐만...'

무언가 잘못됐다.

이건 단순히 '큰 거 한방'이라고 표현할 만한 수준을 벗어난 마력이었다.

"야야! 이런 미친!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하라면서요! 기다려요. 거의 끝났으니까!"

"안, 안 돼! 멈춰!"

강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윤나래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미안해요. 길드를 위해서예요. 길드장님은 어차피 안 죽잖아요?"

말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 나가면, 넌! 뒤졌어!"

안쪽에서 발악하는 강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더욱 즐거운 느낌이다.

한껏 미소를 지은 윤나래가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을 날렸다.

"메테오."

아직 F등급의 숙련도 제로인 마법이었지만, 위력 하나는 발군이었다.

단숨에 윤나래의 모든 마력이 빨려 나가고, 높은 하늘에서 집채만 한 돌덩이가 생성됐다.

"괜찮겠지?"

"제 육감이 이번에는 좀 위험할 거라 말하긴 하는데, 어차피 형은 다시 살아나니까 괜찮겠죠."

안유성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응원에 힘입어 윤나래가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

-쿠우우우웅.

정확히 보스의 몸 중앙에 바위가 꽂히고, 묵직한 폭음이 울렸다.

수많은 공격으로 이미 약해져 있던 보스는 그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온몸의 뼈들이 산산이 조각나며 보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이고..."

순간 현기증을 견디지 못한 윤나래가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습니까?"

"네. 한번 쓰고 나면 며칠 마법을 못쓰기는 하는데... 그래도 비싼 돈 들여서 산 보람이 있네요."

전 재산을 털어서 겨우 구한 마법의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물론, 보스를 잡았다는 것보다 강현에게 처음으로 한 방 먹였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었다.

**

"맛이 어때!? 아, 이게 아니지. 괜찮아요?"

모두가 진심으로 걱정했던 덕분일까? 강현은 살아남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보였지만 어쨌든 목숨은 부지한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바퀴벌레보다 더하네. 그걸 살아요?"

"너, 너... 일어나면 진짜 뒤졌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강현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에이, 길드장님. 화내지 마세요. 혈압 높아져서 위험해요. 봐요! 지금 피가 더 많이 나오잖아요."

"주, 죽인...다."

"푸흡, 꺄하하하하!"

윤나래는 정말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크윽! 흐아아!"

순간 강현의 눈이 번뜩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꺄아아! 좀비다!"

"거기 안 서?!"

옆에서 둘의 콩트를 지켜보던 안유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진짜 좀비 아니에요?"

"뭐가 인마."

"조만간 머리가 부서져도 돌아다닐 것 같은데."

"실험해보고 싶다는 표정 짓지 마라. 죽이고 싶으니까."

"쳇."

"그리고 좀비는 머리가 박살 나면 죽거든?"

잠시 안유성을 노려보던 강현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내 팔자가 이렇지 뭐."

자신이 모은 사람들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됐고, 아이템이나 보자. 나온 거 있어?"

"이것저것 나오긴 했는데 딱히 쓸만한 건 없습니다."

"그래...?"

"대신 가장 중요한 보스가 들고 있던 해머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강현이 반색했다.

"역시! 얼른 보자."

이름 : 필시언의 해머.

등급 : A-

내구도 : 9953/10000

설명 : 시라스 왕국의 다섯 영웅 중 하나인 필시언이 사용하던 해머.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마법의 금속 오르하리콘을 이용해 시라스 왕국 최고의 대장장와 대마법사 함께 제작했다. 필시언이 동료의 배신으로 죽음에 처한 후 왕국에서 해머를 회수하려 했으나, 옮기는 것이 불가능해 흙을 덮어 숨겨 두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능력 : 크기 변형, 무게 조절

*크기 변형 – 사용자가 원하는 크기로 변경이 가능하다. 단, 크기가 커질수록 무게 또한 무거워지니 주의가 필요하다.

*무게 조절 – 마력을 이용해 무게를 최대 50%까지 감소 혹은 증가시킬 수 있다.

설명을 본 강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됐다. 이거면 됐어."

이 아이템 하나로 그동안 있었던 모든 고생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진짜 운수 더럽게 나쁜 날이라 생각했는데, 크흡..."

얼마나 서러웠던지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

"형. 뭐예요? 같이 좀 봐요."

어느새 모여든 일행이 너도나도 고개를 내밀었다.

"맞아맞아. 다 같이 고생했는데 구경은 시켜 줘야지."

"안 닥치냐."

강현의 독설에 윤나래가 서둘러 안유성 뒤로 숨었다.

"와아, 이건 진짜 좋은데요? 어지간해서 아이템 욕심은 안 내는데 이건 탐날 정도예요."

"그렇지?"

"형. 이거 그냥 저한테 팔아요. 제가 살게요."

"싫어 인마."

"한 50억 정도면 되겠어요?"

"안 판다고!"

"하긴 50억은 너무 짜죠? 100억?"

"어, 음..."

순간 강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다 같이 사냥한 거고 저도 나름 부길드마스터인데 100억까지 준다고 하면 완전히 남는 장사 아니에요?"

"아씨. 안 판다고! 홀리지 마. 새꺄!"

"쳇."

돈은 벌면 되지만 이런 아이템은 언제 다시 얻을지 모른다.

강현은 필사적으로 유혹을 참아냈다.

"대신 이번에 돌아가면서 너희 아이템 파밍이나 하자. 그동안은 구닥다리로 어떻게 버텼는데 이제는 안 되겠어."

"그럼 저부터 시작해요!"

"너는 안돼."

윤나래의 요청은 단칼에 거절됐다.

"형. 그럼 저부터."

"너도 안돼."

"왜요?"

"너는 B등급 무기 있잖아."

안유성은 이미 B등급 무기가 있기에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자 윤나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저는 B등급 무기 없는데요?"

윤나래를 본 강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래도 안 돼."

"왜 안되는데요!?"

"내가 싫으니까."

"그럼 처음부터 '너희'라고 하지나 말든가 하여튼! 밥맛이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윤나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재빠르게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강현은 피식 웃었다.

"농담이고, 정말 제대로 아이템을 맞출 필요는 있겠어. 요즘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그렇게 알고. 일단 오늘은 돌아가서 쉬자. 몇 번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피곤해 죽겠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

121화 변해가는 것들

121. 변해가는 것들.

싸이클롭스의 무덤 공략 이후, 오랜만에 신태길이 강현을 찾아왔다.

"던전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 그냥 뭐, 괜찮았어요."

잠시 던전에서의 일들이 생각난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직접 이렇게 다 찾아오고."

신태길은 항상 업무에 치여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직접 찾아오는 일이 없는 그가 찾아오자 강현은 호기심이 들었다.

"일단 이거 받으시죠."

신태길이 주머니에서 처음 보는 기계 장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예요? 신형 스마트폰인가?"

"비슷합니다. 정부와 기업 합작으로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제품의 프로토타입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합작?"

"예. 요즘 마정석을 동력으로 한 전자제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도 그런 겁니다."

"와. 괜찮네요. 마정석으로 나오는 건 따로 충전도 필요 없잖아요."

최근 시장에는 마정석을 이용한 전자제품 열풍이 불고 있었다.

마력이 굉장히 효율적인 에너지였던 덕에 제품은 한번만 충전하면 1년 이상 사용이 가능했다.

거기에 능력자들은 마력을 불어넣어 본인이 충전이 가능했다.

때문에 기존에 팔리던 제품들보다 훨씬 고가임에도 꾸준히 시장을 넓혀가고 있었다.

"마정석 스마트폰이라고 해서 기존과 크게 다른 것은 없습니다. 강현 씨 같은 경우에는 마력으로 충전이 가능하고, 던전 안에서 사용이 가능하다는 게 좀 다르겠네요."

"던전 안에서 사용이라... 그래도 전화는 안되죠?"

"예."

아직 던전 내에서 통화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네요.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예요?"

"잠시. 이것도 받으시죠."

신태길은 강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기계를 꺼내 들었다.

"이건 또 뭐야. 보청기?"

"마찬가지로 정부와 기업 합작으로 만든 제품의 프로토타입입니다. 기존에 있던 통역 마법을 기반으로 제작돼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해 줍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라... 혹시 몬스터랑 대화도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와! 뭐야?! 언제 이런 걸 만들고 있었어요. 귀띔이라도 해주지."

몬스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존에도 가능했다.

바로 통역에 관련된 마법이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이것들은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

천문학적인 가격에 한정적인 물량.

굳이 고생해서 몬스터와 대화를 나눠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

애초에 몬스터 중에 대화를 나눌 정도로 지능이 있는 개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통역 마법에 유일한 쓸모는 외국어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스킬북을 살 돈이면 통역사를 수십 명은 고용할 수 있었기에 부자들이나 사용하는 사치품의 일종처럼 여겨졌다.

"이 기계를 양쪽 사용자 모두가 착용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니지만, 강현 씨에게 먼저 보여드리는 겁니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쓸데가 있었는데 잘됐네요."

강현은 자신의 검술 선생님 케르고를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래서 이것들을 저한테 주는 이유가 뭐예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주는 것이니 고맙게 받겠지만, 강현은 신태길이 갑자기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딱히 대가성은 아닙니다."

"그럼요?"

"강현 씨에게 알려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앞으로 필요하실 것 같기도 하고요."

"알려줄 거?"

"예. 정말 중요한 겁니다."

갑자기 신태길이 무게를 잡기 시작했다.

"강현 씨. 요즘 들어서 전자제품에 고장이 잦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고장이라니... 확실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전화 도중에 끊기는 일도 있었고. 아, 컴퓨터도 가끔 다운되고 그랬어요."

"강현 씨는 마력 수치가 높으니 그런 증상들이 더 자주 나타났을 겁니다."

"그게 이유가 있어요?"

"예. 현재 그런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그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언급되지 않을 뿐이지요."

그제야 강현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다.

"던전이랑 관련된 거죠?"

"맞습니다. B등급 던전이 나타난 지도 벌써 9개월 정도 흘렀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른 시일 내에 A등급 던전이 출몰할 거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거랑 전자 기기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사실 A등급 던전이 등장한다는 것은 모두가 예상하는 일이었다.

이제와서 그리 놀랄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느끼실진 모르겠지만 B등급 이후로 던전이 아닌 현실에서도 잔류 마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던전이 아닌 현실. 지구에 마력이 존재하게 됐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자제품이 맛이 갔구나."

"아직 A등급이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지구의 마력 밀도가 점점 높아지는 중입니다. 이 추세 대로라면 A등급이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전자제품이 무력화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허어..."

전자공학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

이는 과거 산업혁명 이전의 인간으로 치면 불을 빼앗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지금 인류의 모든 것은 전력을 구동력으로 하는 장비를 이용하고 있는 상태.

만약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 뻔했다.

"그거 확실한 정보예요?"

"미국에서 비밀리에 온 정보입니다. 정확한 출처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정보를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거."

"아, 그게..."

순간 강현의 질문에 신태길이 당황했다.

"뭐, 밝히고 싶지 않은 거라면 됐어요. 딱히 나한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대단하신 미국발 정보가 지금까지 기똥차게 들어맞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다. 이거잖아요."

"맞습니다."

"대비는 잘하고 있는 거죠?"

"정부는 그동안 모아 온 마정석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기존 시스템을 개편하는 중입니다. 제시간에 맞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거면 됐네요."

"강현 씨. 아시겠지만 이건 절대…."

"절대 비밀이다?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아무리 강현이라 해도 이런 정보가 새어나가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벌써 가게요?"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신태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일이 바빠서."

"잠깐만 기다려 봐요. 말할 게 있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갑자기 무게를 잡는 강현을 보고 신태길이 당황했다.

"이번에 내가 B등급 던전 하나 클리어 했잖아요. 싸이클롭스의 무덤."

"예. 알고 있습니다."

"그거 경매에서 좀 비싸게 산 것도 알죠?"

당연히 알고 있었다.

강현이 45억이라는 거금을 부어서 던전을 샀다고 전국이 난리었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강현 씨. 혹시…."

"그 돈. 신태길 씨가 좀 메꿔줘요."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

"그걸 왜 제가 메꿉니까?!"

"정확히는 정부에서 메꿔달라는 거죠. 안돼요?"

"안됩니다. 지난번에 C등급 던전 기사훈련소도 거의 공짜로 넘기지 않았습니까?"

"거 참. 팍팍하게 구시네. 딱 30억만 메꿔달라니까요."

"정부가 무슨 자선사업 단체입니까!? 아니, 자선사업 단체도 그걸 메꿔주지는 않을 겁니다."

"전에 신태길 씨 입으로 그랬잖아요. 우리는 한배를 탔다면서요? 아니에요?!"

"그, 그건..."

한배를 탔다는 말에 신태길이 당황했다.

강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태길 씨! 남천동 살지요!? 내가 신태길 씨랑 밥도 묵고! 싸우나도 가고! 마 다했는…."

"그만하시죠..."

열정이 가득 찬 강현의 연기에 신태길이 두 손을 들었다.

"제발! 그 이상한 성대모사 좀 그만하면 안 됩니까?"

"그럼 30억 페이백 해줄 거죠?"

강현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또 무슨 핑계로 예산을 가져와야 할지... 신태길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기분이었다.

**

"잘 지냈어요?"

강현은 오랜만에 부모님이 계신 집을 찾아왔다.

부모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지도 어느새 반년.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지만, 앞으로 어떤 혼란이 찾아올지 알 수 없기에 찾아온 것이다.

"이게 누구야! 우주대스타 강현 오라버니 아니야!?"

"징그러우니까 꺼져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동생 강아현이었다.

최근 이사한 강현의 가족은 서울의 고급 아파트에서, 정부 요원들의 호위까지 받으며 살고 있었다.

강아현 또한 다니던 중소기업을 나오고, 강현이 보내주는 돈으로 백수 생활을 한 지 3개월 정도가 흘렀다.

"엄마가 그렇게 오라고 해도 얼굴 한번 안 비추더니 웬일이래? 용돈 주러 왔어?"

"아, 너 보러 온 거 아니라고! 비켜!"

"미친놈이! 여자를 패? 뒤질래!?"

강현이 현관문을 지나치며 자신을 밀어내자, 강아현이 더욱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허, 옛날의 내가 아니다. 잘못 덤비면 큰코다치니 좋게 말할 때 꺼져라."

"그게 좋게 말한 거냐? 어?"

그때였다.

안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현아. 누구랑 그렇게 시끄럽게... 강현이니!?"

"하하... 오랜만이죠?"

"이놈의 새끼! 엄마가 그렇게 얼굴 좀 보자고 해도 안 오더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미안해요. 바빴어요..."

몇 달 전, 뇌사 상태에 빠졌던 강현의 어머니가 깨어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뻐했으나, 이내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거동조차 힘들 정도로 그녀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 강현이니!?

하지만 강현이 살아있는 것을 보자 어머니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어머니는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정말 잘 왔다."

처음에는 짐짓 화가 난듯한 표정을 하던 어머니는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강현을 끌어안았다.

"이럴 게 아니지. 얼른 들어와라. 밥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어요."

"안 그래도 우리도 이제 저녁 먹으려던 차였는데 잘됐네. 여보! 이리 좀 나와봐요!"

"뭐야. 강현이냐."

안방에서 나온 아버지가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아빠도 잘 있었어요?"

"잘 있었다마다."

이내 서로를 보며 씨익 웃는 부자.

강현과 아버지가 가볍게 포옹했다.

"사내놈이 징그럽게 껴안기는."

"좋으면서 그러시네. 그나저나 팔은 어때요? 쓸만해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강현이 물었다.

"오래 사용하면 피곤하긴 하다만, 일상생활에서는 문제없다."

오크 사건 당시, 외팔이가 된 강현의 아버지는 의수(義手)를 사용하고 있었다.

정서빈의 연구소에서 회심의 역작.

마정석을 기반으로 움직이며, 능력자가 착용 시 아이템과 같은 효과를 준다.

"무리하지 말고 조금씩 사용 시간을 늘려요."

그러나 강현의 아버지는 비능력자.

착용은 가능했지만, 능력자들처럼 강한 힘을 낼 수는 없었다.

그마저도 오래 사용하면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와 자주 쉬어야 했다.

"내가 너처럼 능력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괜히 이런 고생을 시키는구나."

아버지의 발언에 순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현의 표정 또한 굉장히 어두워졌다.

"에이, 아빠답지 않게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능력자가 아니면 어때서."

강아현이 나서서 분위기를 밝게 했지만, 어두워진 강현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너도 인상 안 펴!? 답지 않게 우울한 척이야."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는 거 아니지?"

"아씨. 아니라고!"

사실 강현의 표정이 어두운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거지 같은 기억이 떠올랐어.'

몇 달 전. 강현은 최민준과 설전을 벌이며 싸운 적이 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뜯어말린 탓에 상황이 정리되기는 했으나, 강현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 개새끼. 그때 끝을 봤어야 하는 건데...'

**

반다렌코와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 무너지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날은 신태길의 주선으로 모두가 오해를 풀고 화합을 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범죄자 새끼한테 오해는 무슨."

강현은 시종일관 삐딱했고, 그것은 나머지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임에서 다툼이 벌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몰라? 뭘 모르는데?"

강현이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오직 시련만이 인간을 강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인간만이 앞으로 펼쳐질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최민준의 대답에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냐?"

"안일하군."

"뭐?"

"강함에서 오는 오만함인가? 그딴 안일한 생각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이 새끼가...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는 수가 있어. 주둥이 잘 놀려라."

강현이 사납게 말했지만, 최민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변해가는 세계에서 너 혼자는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너는 강하니까. 하지만 너의 가족은? 동료들은? 네가 언제까지고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최민준의 말에 강현의 얼굴이 굳었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강현도 그에 대한 고민을 몇 번이고 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에 결국 외면했던 문제였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어차피 나중에 죽을 거니까, 그냥 지금 죽여 버리자 이거야?"

"시련을 겪고 성장하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러면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성장하지 못해. 비각성자에게 몬스터는 시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앙이야."

강현의 말에 최민준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도태되어 죽을 이들이다."

"하, 계속 지껄여 봐. 끝까지 듣고 조져야 속이 편할 것 같으니까."

강현이 코웃음을 쳤지만, 최민준은 여전히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마력이 새로운 자원이 되는 세계에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인간의 자리는 없다."

"..."

"너도 느끼고 있지 않나? 우리가 있는 이곳도 점차 마력이 생겨나고 있다. 던전 밖의 세상도 마력에 변화하고 적응해 가는 것이지."

"그래서 그 새로운 세계에 도태되는 인간의 자리는 없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강현의 말에 만족한 듯 최민준이 미소를 지었다.

"개소리 잘 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금세 표정이 굳었다.

"솔직히 내가 생명존중이랑 거리가 먼 인간이기는 한데. 네가 선민사상에 찌들어 있는 안유성 보다 더한 미친 새끼라는 건 잘 알겠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라."

"논리는 지랄이야!"

**

"현아. 현아! 뭐하니?"

어머니가 계속해서 멍하니 있는 강현을 흔들었다.

'됐다. 지금 생각해서 뭐하겠냐.'

강현은 최민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뒤로 밀어내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 배고파요. 얼른 밥 먹어요."

"그래그래. 알겠다."

강현은 그날에 사건을 최대한 잊으려 했지만, 이렇게 한 번씩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던 상처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올 때면, 최민준의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도태되어 죽을 이들이다.

"개소리야. 내가 그렇게 안 만들어."

순간 강현이 내뱉은 혼잣말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현아. 무슨 일 있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하하하!"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뭐예요?"

강현이 다시 밝은 분위기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뭐긴 뭐야. 너 좋아하는 소고기지."

"평소에는 고기 잘 안 드시잖아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샀어요?"

"엄마가 오늘 꿈자리가 좋았거든. 어쩐지 네 생각이 나서 아까 장 볼 때 사뒀어."

어머니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맥주도 있죠?"

122화 인기스타 케르고(1)

122. 인기스타 케르고(1)

배데스 길드의 훈련장.

예고도 없이 떨어진 전체 소집 명령에 모든 길드원이 모였다.

"갑자기 무슨 전체 소집이야?"

"하아, 길드장님은 왜 안 하던 짓을 하시는 거야. 귀찮게."

"그래도 개꿀 아니냐? 오늘 하루 던전 공략 쉬잖아."

"뭐가 꿀이야. 빨리 던전 돌아야지. 얼른 존나 세져서 길드장 자리 먹어야 하는데."

"미친놈. 중증이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200명이 넘어가는 군중이 웅성대자 제법 소란스러웠다.

"어. 왔다."

"야야. 조용히 해."

그때였다.

훈련장의 문이 열리며 두 개의 인영이 들어섰다.

모두든 길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닫았다.

"잘들 지냈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강현이 안부 인사를 건넸다.

"예에."

"오늘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서까지 너희들을 귀찮게 해서 아주 미안하다."

강현이 말을 하며 조금 전 툴툴대던 길드원을 정확하게 노려봤다.

이글거리는 눈길을 마주한 길드원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걸 들었다고...?'

앞으로 강현이 오는 날이면 입조심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 이유가 있어서 부른 거니 너무 짜증 내지 마. 짧게 할 거니까."

"예."

길드원들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강현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초창기부터 배데스는 전투와 훈련 상황 외에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길드에 정식으로 비밀 검술 교관님을 들여왔다."

'정식'으로 '비밀' 교관을 들인다는 이상한 말에 몇몇 길드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휴, 한두 번도 아니고.'

강현이 괴상한 행동을 하거나 멍청한 말을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모두 그러려니 했다.

단지, 이제 한국에서 최정상급에 자리한 배데스 길드를 가르치는 교관이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해할 뿐이었다.

"뒤에 후드 눌러쓴 저 사람인가?"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지금 길드 안에도 수준급의 검사들은 많은데..."

"우리를 가르칠 사람이 있긴 한가?"

"외국인일 수도 있어."

"단군의 한세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강현이 손뼉을 쳐서 이목을 모았다.

"자자, 다들 닥치고.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 길드에 검술 지도를 담당할 교관 케르고다. 케르고 이쪽으로 나와서 모자 벗어."

강현의 말에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후드를 벗었다.

"어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동시에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고블린인데...?"

**

길드 전체 소집 하루 전날.

강현은 홀로 C등급 던전 '기사 훈련소'를 찾았다.

"이게 될까?"

-나한테 묻지 마라.

"너도 던전에 있다가 나왔잖아. 안 될 것도 없어 보이는데."

검 속에 들어있는 베일과 대화를 나누며 강현이 던전에 들어섰다.

마치 던전이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보하는 강현.

"케에에..."

그러나 어떤 고블린도 감히 강현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오랜 기간의 구타로 던전의 고블린들이 강현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칭호를 얻은 것은 덤이었다.

고블린의 악몽 :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처음 고블린에게 당한 괴롭힘을 잊지 않고 이자까지 더해서 갚는 치졸한 '당신에게만' 주어지는 칭호.

효과 : 칭호 보유자는 고블린에게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상당히 우스운 내용에 그다지 쓸모없는 효과의 칭호.

솔직히 화가 났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제는 강현도 그러려니 하고 있는 상태였다.

"케르고! 어디 있어!?"

강현의 말에 던전 안쪽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정체는 바로 케르고.

던전의 흔한 잡몹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보스의 자리까지 올라선 아주 독특한 고블린이었다.

달려오는 케르고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케에엑, 켁, 캉켠. 케륵!"

해석하자면, '오크 같은 강현. 또 왔네.' 였다.

"그래그래. 나도 반갑다."

"케에엑! 케륵, 케엑!"

"그래. 알겠으니까 진정해."

케르고가 정신없이 무언가를 주절거렸다.

강현은 그런 케르고를 진정시키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야. 이것 좀 써봐."

"케륵?"

강현이 내민 것은 귀에 착용이 가능한 소형 통역기.

얼마 전에 신태길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이렇게 귀에 넣어서 끼우면 돼."

강현이 직접 하나를 들어 자신의 귀에 착용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케르고는 마찬가지로 통역기를 자신의 귀에 끼웠다.

"저 멍청한 놈.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시키면 해야 한다."

케르고는 통역기를 착용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거 불편하다. 돼지! 오크 같은 강현. 항상 귀찮게 한다."

"내가 오크 같아?"

"그렇다. 강현은 오크다. 아주 멍청한 오크. 켈켈켈... 켈켈...?"

낄낄거리던 케르고가 순간 멈칫했다.

"강현? 말했다..?"

케르고가 눈을 부릅뜨고 강현을 바라봤다.

"어어. 말했지. 너도 말하던데? 내가 멍청하고 뭐? 돼지 오크? 그건 무슨 말이야?"

"강현. 케르고 실수다."

케르고가 다급히 손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주절거렸다.

"나는 강현 친구. 우리는 친구. 케르고는 친구 욕하지 않는다."

"친구? 지랄하고 있네.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고 이때까지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 이거지?"

"강현. 오해다. 때리지 마라."

"때리지는 않고, 죽여줄게."

그 후로 한동안 강현의 구타가 이어졌다.

"강현. 오해다. 케에엑!"

처음에는 변명했다.

"강현. 돼지 오크. 케엑! 아프다. 때리지 마라. 멍청한 오크야!"

그 다음에는 발악했다.

"강현. 케르고. 잘못했다. 용서해라. 열심히 살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제 강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케르고였다.

그러나 강현은 케르고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까지 주먹질을 이어갔다.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고블린 몇 마리도 어느새 겁에 질려 모두 떠난 상태였다.

"야. 정신 차려."

결국, 케르고는 완전히 실신해서 바닥에 대(大자)로 뻗었다.

강현은 스킬을 사용해 케르고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케에에엑..."

강현이 사용한 스킬은 손가락 끝에서 물총처럼 물을 쏘아내는 마법이었다.

경매에서 심심풀이로 산 스킬.

사실 이 마법의 제작자는 아이들 놀이용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강현은 주로 자신에게 구타당해 실신한 상대를 깨울 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하지 그랬냐."

강현이 마찬가지로 경매에서 구한 F등급 회복 스킬을 케르고에게 걸어 주었다.

케르고가 피떡이 된 상태에서 아주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너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 나밖에 없다?"

"미친놈..."

순간 통역이 된다는 것을 잊은 케르고가 본심을 내뱉었다.

"아직 덜 맞았구나?"

"케르고 미친놈. 강현은 좋은 인간. 좋은 인간을 욕한 케르고는 미친놈."

"그래그래."

강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케르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괜찮다. 케르고 멀쩡하다."

잠시 후.

케르고는 금세 부상을 떨치고 일어났다.

강현에게 수시로 구타를 당해서인지, 회복력 하나만큼은 정말 발군인 케르고였다.

강현은 그런 케를고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케르고 너 나 따라서 밖에 나가볼래?"

"모르겠다. 밖이 어딘가."

"뭐긴 뭐야. 던전 밖이지."

"던전...?"

케르고는 던전 밖이라는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치밀어오는 두통에 얼굴을 비명을 내질렀다.

"던전 밖... 모르겠다... 케엑! 머리가 아프다. 케르고 아프다!"

케르고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정신 차려! 인마!"

강현은 케르고의 멱살을 쥐고는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하는 소리와 함께 케르고의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갔다.

"케에엑!"

"괜찮냐? 아직 아파?"

"괜찮다. 케르고 멀쩡하다. 때리지 마라."

케르고를 바닥에 내려놓고 강현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금제 같은 게 걸려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본다. 나도 던전에 있을 때는 머리가 멍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는 두통 같은 게 없었잖아?"

-언데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저 고블린과 나는 전혀 다른 경우지 않은가. 멍청한 놈.

베일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입만 열면 멍청한 놈이래. 확 그냥 용광로에 처넣어 버릴까 보다."

-...

강현의 말에 베일이 침묵했다.

"됐고, 이놈 어떡할 지나 생각해봐. 밖에 데리고 나가고 싶은데."

-조심해야 한다. 강력한 금제라면 저 고블린이 죽거나 혹은 백치가 될 수도 있다.

"그건 안 되지... 내가 몇 달 동안 얘를 돌봤는데."

상식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구타를 가하는 것을 보고 '돌봤다'라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강현의 미화된 기억 속에서 자신과 케르고는 서로 우정을 다지고 땀 흘리며 성장한, 소년 만화의 라이벌이었다.

"데리고 나가면 이것저것 좋을거야. 훈련할 때 굳이 왔다갔다 안 해도 되잖아. 다른 길드원들도 좀 배우라 하고."

-이 던전은 어떡할 건가?

"케르고만 빼내면 여기 기사 훈련소는 다른 길드에 팔아야지."

고심하던 강현은 어떻게든 케르고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야. 케르고. 정신 차려."

"케엑... 케르고 괜찮다."

"나랑 같이 던전 밖에 나갈래?"

"던전 밖.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케르고가 다시 고통에 몸부림치려 하자 강현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케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케르고 괜찮다. 괜찮다! 멀쩡하다!"

"그래? 그러면 나랑 밖에 나갈래?"

"밖이 뭔가... 모르겠다. 아프다..."

"그럼 맞아야지."

"알 거 같다. 나가자 강현. 케르고 지긋지긋하다. 던전 싫다."

몇 번의 학습으로 강현은 케르고를 던전 밖에 꺼내올 수 있었다.

**

다시 현재.

길드원들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강현이 피식 웃었다.

"앞으로 우리 길드에서 검술을 가르칠 케르고다. 전부 오해하지 않게 잘 봐둬."

"저, 길드장님?"

한 길드원이 손을 들었다.

"왜?"

"저건 고블린인데요."

"나도 눈 달렸어. 잘 보인다."

"고블린이 어떻게 검술을 가르칩니까!?"

"왜 안돼? 편견을 버려. 나도 얘한테 배웠어."

강현의 말에 길드원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쓰읍! 어렵게 데려왔으니까 전부 깍듯이 대해."

"아무리 길드장님이라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맞아. 고블린한테 뭘 배워?"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거기 너."

순간 강현이 한 길드원을 집어냈다.

"방금 머리 어떻게 어쩌고 한 놈."

"예?"

"너 평소에 검 쓰잖아. 맞지?"

"예..."

강현의 말에 길드원이 내심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내기 하나 하자."

"갑자기 무슨 내기를..."

"스킬 다 빼고 순수하게 검만 써서 얘랑 한판 붙어."

강현의 말에 길드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보고 저기 있는 고블린이랑 싸우란 말입니까?"

"그래. 네가 이기면 너한테 내 사비로 1,000만 원 주고 내가 '나는 또라이다' 세 번 삼창한다."

강현의 말에 길드원의 표정에 사악한 웃음이 들어섰다.

"1,000만 원에 또라이다 세 번 삼창. 무르기 없기입니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대신 네가 지면 '나는 잣밥이다' 라는 문구 써서 일주일간 이마에 붙이고 다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할 거야 말 거야?"

"공돈이 생긴다는데 당연히 해야죠. 추가로 길드장님 삼창하는 거 위튜브에 박제해도 됩니까?"

"박제하든 말든. 그러면 승낙하는 거로 안다."

갑자기 벌어진 내기에 길드원들이 흥분한 듯 눈을 빛냈다.

"케르고."

"왜 부르냐."

"저기 쟤 보이지? 손 좀 봐 줘."

"손을 본다?"

"혼내주라고. 죽이지는 말고."

"싫다. 케르고 왜 싸우냐. 여기 인간들 많다. 무섭다."

"죽을래? 할래?"

"하겠다."

태세전환 하나만큼은 수준급인 케르고였다.

"너. 지면 죽는다."

뒤따르는 강현의 말에 케르고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묵사발을 내놓겠다."

123화 인기스타 케르고(2)

123. 인기스타 케르고(2)

김성식은 원래 '퇴사자들'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중소 길드에 소속돼 있었다.

직장을 다니던 평범한 이들이 모여서 안정적으로 사냥하고, 적당히 돈을 버는 그런 길드.

다른 길드원은 차츰차츰 쌓여가는 돈을 보며 만족했지만, 김성식은 달랐다.

'이렇게 싸워서 언제 레벨업하고 언제 강해지는 건데?'

김성식은 늘 불만이었다.

더 빨리, 더 강해지고 싶었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사냥하며 하루하루 벌어가다가는 결국 도태되리라 생각했다.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다.'

그러던 차에 보게 된 배데스 길드의 모집 공고.

'이거다!'

김성식은 자신이 있었다.

길드 지원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독기와 끈기. 그리고 깡!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레벨, 능력과 관계없이 합격시켜 준다고 한다.

김성식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길드를 나와서 지원했고, 당당히 합격했다.

배데스의 공식 1기 멤버가 된 것이다.

길드장 강현과 간부 몇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길드에 발을 들인 사람.

그게 바로 김성식이었다.

"나보고 저런 고블린 하나를 못 잡을 거라고?"

그동안 고블린이라면 지겹도록 베어 왔다.

길드장이 데려온 고블린은 분명 뭔가 특별하겠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김성식의 레벨 66.

검을 사용하는 길드원 중에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능력자다.

C등급 던전을 졸업하고 현재 최고 난이도인 B등급 던전을 공략 중인 김성식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자, 규칙 설명한다. 마력, 스킬 사용 금지. 죽이기 금지. 신체 절단도 되도록 자제해주고, 상대가 항복하거나 실신하면 끝이다. 오케이?"

"케륵!" (알겠다)

"알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케르고와 김성식이 대답했다.

"야야. 내기 걸어 누가 이길까?"

"당연히 김성식이지. 쟤 1기 멤버잖아. 다른 건 몰라도 검 쓰는 것만 보면 간부진 제외하고 한 손가락에 꼽힐걸?"

"나는 고블린에 걸란다. 길드장님이 데려왔으면 뭔가 있겠지."

"김성식 한 표. 쟤 독한 거 모르냐. 곧 죽어도 항복은 안 할 놈이야."

길드원들은 서로 내기를 걸며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내기 결과는 김성식에게 걸린 판돈이 80%으로 압도적인 수준.

그 모습을 본 강현은 얼른 달려가 케르고에 돈을 걸고 돌아왔다.

"참고로 시간제한은 없으니 먼저 지쳐 나가떨어져도 끝이야."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김성식의 자신만만한 발언!

"그래. 내가 봐도 그럴 것 같아."

강현은 피식 웃으며 받아쳐 주었다.

"그럼, 시작!"

강현의 신호를 시작으로 김성식이 힘껏 땅을 박찼다.

'죽이지는 않으마. 대신...'

김성식의 특기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연계 검술.

정신없이 몰아치는 자신의 검을 스킬 없이 견딘다는 것은, 길드장 수준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바로 끝장낸다!"

김성식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케르고가 황급히 방어하며 차츰 뒤로 물러섰다.

"오, 역시 속도 하나는 빨라."

"쟤는 저런 속도로 쉬지도 않고 휘두르더라. 체력 수치가 몇인 건지."

"아... 역시 고블린한테 거는 게 아니었는데."

케르고는 시작하자마자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보고 길드원 대다수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 주제에 제법 버티는데!?"

김성식은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혹시라도 죽을까 봐 살살했는데 말이야.'

자신의 공격을 곧잘 받아내는 것을 보니 전력을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흐아아아아!"

김성식의 검이 날카로운 검로를 따라 움직이며 더욱 빨라졌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나는 금속음이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케르고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야. 케르고 장난 그만하고 끝내."

그때 들려오는 강현의 목소리.

"케륵!" (알겠다)

김성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장난치지 말고 끝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고블린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김성식이 고민은 금세 해결되었다.

-채앵!

"와아! 방금 뭐야!?"

수비만 하던 케르고가 돌연 자세를 바꾸며 휘두른 일검.

그 한방에 김성식의 팔이 만세라도 하듯 활짝 열렸다.

주위의 길드원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고, 김성식은 그 순간에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뭐야!? 젠장,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어. 일단 피한다.'

팔이 젖혀지는 순간 그 힘을 이용해 땅바닥을 굴렀다.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야.'

덕분에 케르고의 검이 옆구리를 살짝 베는 것에 그쳤다.

"케헥, 케륵. 켈켈..."

(멍청한 놈이다. 웃기다. 켈켈.)

바닥을 구르는 김성식을 보며 케르고가 낄낄거렸다.

"후우, 그래. 제법 하는 놈이라 이거지?"

바닥을 구르고 일어난 김성식은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전의를 더욱 불태웠다.

원래 배데스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한다.

바닥을 구르는 것 따위.

이기기 위해서라면 백번도 더 구를 수 있었다.

"흐아아아!"

김성식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동시에 온 정신을 집중해 놈의 빈틈을 찾아냈다.

보이는 곳은 총 여덟 군데.

'전부 동시에 공략한다.'

압도적인 속도로 밀어붙인다.

김성식의 머릿속에서 이것이 대련이란 사실은 어느새 사라졌다.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한 검이 휘둘러졌다.

"케륵, 케륵." (인간. 멍청하다)

그에 맞서서 케르고 또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모두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이거 뭐야...?"

"무슨 고블린이 저래!?"

"완전히 어른이 어린애 데리고 노는 수준이네."

검을 휘두르는 김성식의 자세가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케르고가 단순히 검을 막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김성식의 검을 교묘하게 흘려냈다.

그 결과 힘이 분산된 김성식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으으으! 이게 뭐야!?"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을 휘적거리는 자세가 된 김성식.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케륵, 켈켈." (웃기다. 켈켈)

심지어 케르고는 이 모든 일을 제자리에 서서 한쪽 팔로 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김성식이 스킬을 사용했다.

갑자기 김성식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동시에 그의 검에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위험한 거 아냐?"

"야! 그만해!"

한 길드원이 김성식을 말리기 위해 나서려 했으나, 강현이 막아섰다.

"길드장님?"

"그냥 보기나 해."

강현의 얼굴에는 아주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죽어!"

김성식이 휘두르는 검은 마치 한 줄기의 벼락같았다.

"케륵."

케르고는 비웃음을 머금고는 검을 마주 휘둘렀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케르고의 검.

그것의 정체는 오랜 시간 단련한 날카로운 마력이었다.

-채애앵!

마침내 둘의 검의 맞부딪히고,

"끝났네."

김성식의 검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말도 안 돼..."

매끈하게 절단된 검.

그 절단면을 바라보던 김성식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

"케르고. 수고했다.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케르고는 좋다. 고기."

"그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역시 고기가 최고지. 내가 소고기 사줄게."

케르고와 잡담 이후, 강현은 김성식에게 다가갔다.

"내기는 내기니까 괜찮지?"

"..."

강현의 물음에도 김성식은 멍하니 검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보자... 야. 누가 펜이랑 종이 좀 가져와 봐! 테이프도."

"여기 있습니다."

"좋아. 크게 적어야 잘 보일 테니까... 됐다."

새하얀 종이에 두꺼운 펜으로 써진 '잣밥'.

잣으로 지은 밥이라는 매우 건전한 뜻이다.

"성식이는 앞으로 일주일간 잣밥이다. 떨어지지 않게 주의해."

김성식의 이마에 종이를 붙인 강현이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위튜브에 올리면 대박이겠다. 너희들도 내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꼭 검이 아니라도 되니까. 알겠지?"

강현이 큰 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런 수치플은 절대 못 해...'

모두가 강현의 눈길을 피하기 급급했다.

"뭐, 없으면 말고."

"저기 길드장님."

그때 한 길드원이 손을 들었다.

"저 고블린은 정체가 뭡니까?"

"우리 길드의 검술 교관이지."

"아니... 고블린이 저렇게 강한 게 이해가 안 돼서... 어디 B등급 던전 보스라도 되는 겁니까?"

길드원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C등급 던전 잡몹인데?"

"예...?"

강현의 대답을 들은 길드원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방금 당한 김성식만 해도 어지간한 C등급 던전의 몬스터는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실력자였으니까.

케르고는 살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서 정말 필사적으로 강현과 싸워왔다.

원래도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신체적으로 압도적인 강현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욱 기술을 연마해야만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강현은 이 과정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 몰라! 말하자면 길고, 그냥 앞으로 잘 모셔. 대화가 안 되니 교육은 무조건 대련으로 진행한다. 예약제로 할 거니까 하고 싶은 사람은 재문이한테 말해."

"예에..."

한재문의 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다음 날.

강현은 케르고와 함께 아이템 연구소로 향했다.

정서빈과 이야기를 하고 겸사겸사 케르고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이게 자동차라는 거야."

"강현. 자동차. 후지다. 못생겼다."

그사이 강현에게 못된 말을 많이 배운 케르고였다.

"이 새끼가! 내 번틀리 3호를 무시하네. 이래 봬도 잘 굴러가 인마!"

"강현 말. 어렵다. 후지다."

"자꾸 헛소리하면 앞으로 소고기 안 사준다."

"강현은 멋쟁이다. 자동차 멋지다."

케르고가 빠르게 인간 사회에 적응하고 있을 때였다.

-쿵.

신호 대기 중이던 강현의 자동차를 누군가가 들이박았다.

"시벌! 어떤 새끼야!?"

"시벌. 시벌. 나쁜 놈이다."

안전벨트는 개나 줘버리라 외치던 강현은 자연스럽게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 똥차는 에어백도 안 터지네!"

"케르고 아프다."

안타깝게도 불과 1분 만에 번틀리 3호는 잘 굴러가는 차에서 똥차가 됐다.

"인마!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렇게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밖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강현의 혈압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후우, 참자... 민간인이면 조금 혼내주고 능력자면 그냥 반 죽이자."

어쨌든 혼내준다는 말이었다.

강현이 번틀리 3호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내가 누군지 알아? 태신 길드 길드장 동생이야. 넌 이제 죽었어. 얼른 안 기어 나오냐!? 어!?"

강현을 들이박은 염치없는 남자는 이제 번틀리 3호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쾅! 쾅!

"얼른 기어 나와 새끼야!"

남자가 발길질을 가할 때마다 차량이 좌우로 흔들렸다.

참다 못한 강현이 차에서 내렸다.

"누구 동생이라고?"

"어...?"

강현을 본 남자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강현...님 이세요?

"네. 강현님이신데 그쪽은 누구실까."

강현의 말에 남자가 이리저리 눈깔을 굴렸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대낮부터 술을 마셔서."

"딱 보니까 능력자 같은데. 아까 뭐 태신 길드? 길드장이랬나?"

"아닙니다! 저 그냥 민간인이고, 능력자랑 아무 관계없습니다!"

강현의 악명은 이미 유명하다.

굳이 강현이 아니더라도 능력자들 사이에서 '배데스 길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가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나같이 독종에 어떻게든 복수를 해왔으니까.

"아까 다 들었는데 어디서 지랄이야?"

강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콰앙!

갑자기 뒤쪽에 있던 번틀리에서 굉음이 울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번틀리 문을 박살 내고 밖으로 나온 케르고가 보였다.

"강현. 케르고 문 열었다."

케르고가 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부수고 나온 것이었다.

"저건 고블린...? 맞나?"

케르고를 본 남자가 자신의 술이 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고블린은 160cm 중후반 정도로 크게 단련된 몸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눈앞의 고블린은 적어도 180cm는 넘어 보였고 온몸에 터질듯한 근육과 칼자국이 나 있었다.

적어도 레벨 10의 남자가 상대할 수준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야이 새끼야! 그걸 그렇게 부수면 어떻게 해!?"

"강현. 때리지 마라. 미안하다! 케르고 아프다!"

화가 난 강현이 케르고에게 달려간 사이 남자가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빨리... 빨리 받아!"

오늘따라 신호음이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됐다!"

마침내 연결된 전화.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

"형 도와줘. 조졌어! 빨리 와야 해!"

-무슨 일이야?

상대방은 태신의 길드장 이백서, 남자의 친형이었다.

"내가 사고를 냈는데, 그게 강현 차였거든? 그런데 거기서 괴물 고블린이 튀어나오고. 죽을 수도 있어! 시발 빨리 오라고!"

-무슨 개소리야. 너 또 술 처먹었냐? 강현은 뭐고 고블린은 뭔데?

"시발! 빨리 오기나 해!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남자가 전화하는 사이 케르고를 정리한 강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아... 시벌. 오늘 일진 사납네."

강현은 전신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마에 돋은 힘줄로 봤을 때 상당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형. 제발 빨리 와줘..."

124화 인기스타 케르고(3)

124. 인기스타 케르고(3)

태신 길드의 길드장 이백서.

그는 사고로 부모를 일찍 여읜 탓에 빨리 철이 들었다.

유일한 가족인 동생 이남수와 함께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항상 눈칫밥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성공해서 떳떳하게 살 거야.'

이백서는 끈질길 노력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늘도 그런 이백서를 돕는 듯 가진 재능도 나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백서는 꽤나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흔히 짱이라고 불리는 것도 계속 해왔다.

대학에 가서는 잘생긴 얼굴로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던전 사태 이후에는 대담하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길드를 세웠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태신 길드는 마침내 제법 이름을 알리는 대형 길드로 발돋움했다.

완벽한 인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 후회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동생은 내가 지켜야 해.

이백서의 유일한 가족인 동생 이남수. 그는 이백서와 상당히 달랐다.

부모님의 죽음.

친척 집에 얹혀산다는 것.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어린 이남수를 삐뚤어지게 했다.

철이 들어야 할 시점에도 이남수는 여전했다.

어디를 가든 최고였던 자신의 형, 이백서 덕분에 대접받는 삶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백서는 그런 동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항상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뭐야? 웬일로 전화를 했데?"

그럼에도 동생에게 전화가 왔을 때, 이백서는 솔직히 반가웠다.

"논다고 바빠서 연락도 안 받더니."

얼마 전 이백서는 동생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2억 원가량의 스포츠카를 선물했다.

동생 이남수는 차를 선물 받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락을 끊었다.

확인해 보니, 매일 여자를 만나고 술에 절어 살고 있다고 했었다.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

전화를 받은 이백서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물었다.

-형 도와줘. 조졌어! 빨리 와야 해!"

"무슨 일이야?"

다급한 동생의 목소리.

불안감이 엄습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평소에도 자주 사고를 치는 동생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많이 심각한 것 같았다.

"무슨 개소리야. 너 또 술 처먹었냐? 강현은 뭐고 고블린은 뭔데?"

이때 까지만 해도 이백서는 강현이 그 배데스의 강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아... 알겠으니까 기다려. 지금 당장 갈게."

-빨리 와! 으아아! 미친놈이 사람 때리려 한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이백서의 마음 또한 다급해졌다.

"길드장님 어디 가십니까?"

"급한 일이 생겨서. 찾지 마!"

사무실을 뛰쳐나온 이백서는 곧바로 차량에 올라섰다.

**

"저기인가?"

동생이 있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차량들이 멈춰서 있고, 많은 인파가 모여있던 탓이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아씨. 누가 밀쳐? 헉!"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힘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이백서의 얼굴을 보고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백서와 태신 길드는 인근에서 제법 유명한 길드였기 때문이다.

"야! 이남수. 또 무슨 사고를..."

말을 하던 이백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의 동생 이남수가 누군가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맞고 있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여섯 살 터울로 손 한번 대지 않고 자식처럼 키워왔던 동생이다.

비록 지금은 조금 삐뚤어졌지만, 분명 언젠가 어릴 적 모습처럼 바르게 될 것이라 믿어왔다.

"내 동생한테 손을 대!?"

그런 동생이 맞는 모습을 본 이백서는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드디어 왔나?

그때였다.

동생을 때리던 남자가 뒤로 돌아섰다.

그 남자는 이백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강현...?"

"당신이 여기 있는 쓰레기 형이야?"

강현이 굉장히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

'국내 최정상급에 있는 배데스와 싸울 수는 없어.'

이백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사람 보고 쓰레기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백서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아, 초면부터 너무했나. 미안해요. 동생 교육을 굉장히 이쁘게 해 놨던데. 혹시 인생은 실전이란 건 안 가르쳐 줬어요?"

"왜 제 동생에게 손을 댄 겁니까?"

"여기 이 귀여운 놈이 내 소중한 번틀리를 들이박은 것도 모자라서 쌍욕을 하면서 달려들더라고. 내가 차에 좀 예민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사람을 때립니까!?"

고작 가벼운 접촉사고를 일으켰다고 사람을 때리다니.

이백서는 소문처럼 강현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외제차 보니까 돈도 많아 보이더라고. 이런 놈은 벌금 받고 웃으면서 풀려날 놈이라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쪽이 무슨 태신 길드의 길드장이라 했나?"

"하아, 맞습니다. 태신 길드의 길드장 이백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비실비실한 놈이 설치고 다녔구만. 태신이면 이쪽 동네에서 제법 유명했죠? 그런 길드면 더 처신을 조심해야지. 내가 민간인이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강현의 건방진 말이 계속되자, 이백서는 점차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강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강현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쪽이 처신을 조심하란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쉽게 말하면, '사고 치는 건 네가 더하지 않냐?' 라는 뜻이었다.

"뭐요?"

이백서의 말을 들은 강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실을 말한 겁니다. 동생이 실수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대신 그쪽도 제 동생을 때린 것에 대해서 사과해 주시죠."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이것도 이백서의 입장에서는 정말 참고 참아서 이야기한 것이었다.

"100억."

순간, 강현의 입에서 뜬금없이 백억이란 말이 나왔다.

"100억은 배상해 줘야겠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 동생이 내 차를 들이받았잖아. 합의금 100억이라고."

"당신 차는 2,000만 원을 넘기기 힘들어 보이는데, 100억 이 무슨 말입니까?!"

강현의 자동차를 확인한 이백서가 소리를 질렀다.

"아, 자동차 박살 난 값은 안 줘도 돼요."

"그러면…."

"저기 뒤쪽에 쓰러져 있는 고블린 보여요?"

강현의 시선을 따라가자 정말 무언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고블린... 인가?'

피떡이 된 상태에 체구가 워낙 커서 고블린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 한참 걸렸다.

"저 고블린 몸값이 좀 비싸거든요. 1억은 줘야겠어요."

"후우...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나머지 99억은 뭡니까?"

분명 강현은 100억이라 했다.

저 괴상한 고블린이 1억이라 해도 아직 99억이 남은 것이다.

"그거야 당연히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지. 내가 마음이 좀 여려서 많이 놀랐거든요. 지금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네."

"지금 장난합니까!?"

결국, 이백서가 폭발했다.

아무리 태신이라 해도 100억이나 되는 돈은 융통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할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억지에 100억을 쓸 수는 없다.

"장난같이 보여?"

갑자기 강현의 기세가 돌변했다.

계속해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던 전과 달리, 굉장히 차갑고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당신이 오는 사이에 조사를 좀 했거든. 알고 보니 이놈. 아주 유명한 쓰레기더라고?"

이백서가 오는 사이, 강현은 태신 길드와 이남수에 대해 알아본 상태였다.

"마약부터 성범죄까지. 살인 빼고 저지를 수 있는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질렀더만. 당신 알고 있었어?"

"예...?"

이백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동생이 조금 엇나가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딴 식으로 감싸고 도니 이 개새끼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거 아냐? 내가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이 사태에는 당신도 책임이 있는 거야."

이백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남수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기는. 지랄하네."

그 순간, 기절해 있던 이남수가 눈을 떴다.

"혀, 형..."

"남수야! 괜찮냐!?"

이백서는 서둘러 이남수를 살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기는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후우, 다행이다. 남수야. 일단 정신 차리고…."

이백서는 동생을 추스르려 했지만, 이남수가 강하게 밀쳐냈다.

이백서가 당황하며 동생을 바라봤다.

"너 왜 그러는 …."

그 순간 이백서가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동생 이남수의 눈은 강한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형. 저 새끼 당장 죽여버려. 개좆같은 새끼..."

"뭐..?"

"형은 할 수 있잖아... 내가 좀만 더 쎘으면 내가 죽였는데... 시팔."

이남수의 말은 농담 같지가 않았다.

이백서는 이런 눈을 가진 자를 수없이 만나왔고, 싸워왔기에 확신했다.

자신의 동생, 이남수는 진심으로 강현을 죽일 생각이다.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강현이 혀를 찼다.

"쯧쯧. 이 새끼 눈까리 희번덕거리는 거 봐라. 아무튼, 나는 이런 놈한테 사과 못 하니까 받고 싶으면 100억 내놔. 꼬우면 뜨던가."

"..."

"아, 참고로 사과는 안 할 거야. 이런 쓰레기한테 고개 숙이는 짓은 못하지."

"주, 죽어! 오크 같은 새끼야!"

"뭐? 이게 뒤지려고 환장했나!"

화가 난 강현이 이남수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이백서가 움직였다.

-짜악

이백서가 이남수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인 것이다.

"형..?"

손찌검은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짜악, 짜악!

"커헉, 형! 때리지 마! 왜 이래!?"

한동안 이어진 구타는 이남수가 이빨을 토해내며 실신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커, 커헉..."

이남수가 피를 토해내며 기절한 모습을 본 이백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백서가 굳은 얼굴로 강현에게 다가가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뭐야?"

"정말 죄송합니다. 이 일에 대한 것은 제가 어떤 식으로든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흐음..."

"전부 제 잘못입니다."

이백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길드의 일이 바쁘다.

동생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동안 동생을 방치해 왔다.

그 행동들이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동생 놈은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조치하겠습니다."

진심 어린 이백서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마음에 드네."

"예...?"

뜬금없는 말에 이백서가 당황했다.

"방금 한 말 전부 지킬 자신 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겠습니다."

"정말로?"

"예... 지금까지 제가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강현 씨 덕분에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그거면 됐어요."

"그게 무슨..."

"100억은 농담이라고요. 내가 뭐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강현의 말에 이백서가 손사래를 치며 일어났다.

"아닙니다. 반드시 이 일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100억은 무리겠지만, 강현 씨에게도 적절한 배상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소고기나 한번 사줘요."

"그런 거로 어떻게..."

이백서가 안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어느새 강현은 멀어져 있었다.

"야야. 일어나."

"케르륵..."

강현은 바닥에 쓰러진 고블린을 대충 뒷좌석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박살 난 문짝을 대충 손으로 구겨서 마찬가지로 뒷좌석에 쑤셔 넣었다.

"그럼 갑니다. 맥주 마시고 싶으면 연락해요."

운전석에 올라탄 강현이 손을 흔들었다.

"저기, 잠시..."

당황한 이백서가 강현을 붙잡으려 했지만, 강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저게 움직이기는 하는구나..."

뒤 범퍼가 찌그러지고, 문이 떨어져 나간 자동차가 달려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한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백서는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하하하!"

그동안 강현에 대한 소문이 다소 과장됐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이백서는 깨달았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강현이 소문보다 더한 또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주 조금 멋지다는 것까지.

**

강현과 이백서의 사건 이후, 인터넷은 다시 한번 뜨거워졌다.

-강현식 참교육 시즌 2 절찬리 상영 중.

과거 정대한과 아이들 사건에 이어 또다시 벌어진 참교육 사건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당시 그 장소에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관련 영상과 사진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제가 저 동네 사는데, 저놈 진짜 유명한 쓰레기 새끼임. 속이 다 후련하네. 어후...

-강현이 좀 미친놈 같긴 해도 인성은 ㄱㅊ은 듯

-지금까지 강현의 행보를 돌이켜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현 팬들 또 신났네. ㅉㅉ 싸움질이나 하는 놈이 뭐 대단하다고, 저거 전부다 불법 아님?

-여기서 열폭하는 네 쓰레기 인생이 레전드^^

여론이 마냥 강현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대다수의 사람은 강현의 행동을 지지했다.

-제 친구가 태신 길드 소속인데, 저 사건 끝나고 이백서가 길드에서 제일 중요한 아이템 건네줬다고 함.

-중요한 아이템이 뭔가요?

-그건 기밀이라서 모른다네요...

-뇌피셜 ㅅㄱ

-또또 아는척 못해서 안달난 사람 나왔네

-아니, 진짜인데...

수많은 소문, 찌라시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퍼지고 다시 사라졌다.

거기에 더해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케르고였다.

-강현 반려동물(?) 근황.

실시간 1위에 등극한 게시물.

클릭해 보면, 막 번틀리를 부수고 나온 케르고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반려동물 ㅁㅊ ㅋㅋㅋㅋㅋ

-잘못 건들면 조진다... 근데 저거 고블린은 맞는 거예요?

-ㄴㄴ 무슨 고블린이 저렇게 크고 험악하게 생김?

-저거 밖에 저렇게 데리고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려고

-강현이 알아서 하겠지 ㅋㅋㅋ

-분명 대가리는 고블린인데 아래쪽은 오크보다 흉악하다...

-내가 보기엔 강현 닮아서 그런 듯, 원래 주인이랑 애완동물은 닮는다 하잖아여 ㅋㅋㅋㅋ

-ㅇㅈ 자세히 보면 강현 닮은 것 같기도 함 ㅋㅋㅋㅋㅋㅋ

-위에 큰일 날 사람들이네... 밤길 조심하시길.

거기에 더해 케르고와 김성식의 대련 영상까지 위튜브를 타면서 케르고의 명성은 해외까지 퍼질 정도였다.

"크큭. 반응 좋네. 이거 보이냐? 이거 다 네 이야기야."

강현은 그 모든 것을 사무실에 앉아서 낄낄거리며 지켜봤다.

"케르고, 모른다. 인간 글자 어렵다."

강현이 내민 스마트 폰을 보며 케르고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놈."

"때리지 마라. 강현 자꾸 때린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인마. 나중에 말 잘 들으면 안 때릴게."

"진짜인가?"

강현의 말에 케르고가 반색했다.

"아니. 때릴 건데."

"..."

"꼬우면 덤벼. 너 대장 시켜줄게."

"강현. 오크 같은 놈..."

"뭐? 이 새꺄!?"

125화 밀려오는 어둠(1)

125. 밀려오는 어둠(1)

며칠 후. 강현은 다시 정서빈이 있는 아이템 연구소를 찾았다.

"좀 늦었네요. 지난번에 온다고 하시더니."

"그날은 일이 좀 있어서."

"아, 혹시 인터넷에 나왔던?"

정서빈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뒤에 있는 분이 설마 그 고블린인가요?"

"맞아요. 케르고. 후드 벗어."

케르고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신기하네요. 원래 몬스터 위에는 이름이 뜨는데 이 고블린은 그런 것도 안 보여요."

"어? 맞네요?"

정서빈의 말에 놀란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던전에 있을 때, 케르고의 위에는 고블린 기사라는 이름이 떠다녔다.

나중에는 그것이 고블린 기사단장으로 바뀌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던전 밖에 데리고 나올 때였나? 아무튼, 언제부턴가 안보이더라고요."

"오호...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이렇게 데리고 다닐 정도면 대화가 가능한 것 같은데."

"이거요."

강현이 착용하고 있던 통역 장치를 정서빈에게 건넸다.

"이걸 착용하면 몬스터와도 대화가 된다는 거군요. 어디서 구했어요?"

"신태길 씨가 줬어요. 정서빈 씨는 이런 거 못 만들어요?"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긴 한데, 이건 완성도가 높아 보이네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만든 거지?"

"사실 정서빈 씨가 별로 능력 없는 거 아니에요?"

강현의 말에 정서빈이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대놓고 해요? 이건 아마 마법에 굉장히 능통한 누군가가 개입한 게 분명해요. 정부는 물론이고, 다른 기업에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마법에 능통한 사람이라..."

"이전부터 그런 말이 돌기는 했어요. 정부에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라 치부했는데, 이걸 보니 아주 헛소문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드네요."

강현은 이것에 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신태길이 말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 데이언스. 아십니까?

-데이언스? 그게 뭔데요?

-그... 예전에 강현 씨와 싸웠던 해골 마법사입니다. 몬스터들을 조종하던. 그때 최동우 씨가 나타나서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아아, 기억나네요. 그 자식 작살을 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요? 혹시 그놈 붙잡았어요?

-그게... 사실 그 리치가 최민준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현재는 저희의 연구를 다방면으로 돕고 있습니다. 강현 씨에게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때는 이미 최민준과의 관계도 정리가 끝났던 시점이라 강현도 더는 말을 말하지 않고 넘어갔었다.

"무슨 일 있어요?"

기억에 잠겨 있던 강현을 정서빈이 깨웠다.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뭐, 정부에서 그런 걸 숨길 수도 있겠네요."

"뭐예요. 혹시 아는 거 있으면 말 좀 해줘요. 우린 사업 파트너인데."

"그런 거 없습니다."

"쳇."

강현이 단칼에 거절하자 정서빈도 금세 포기했다.

"됐고, 사업 이야기나 하죠. 요즘 어때요?"

"당연히 최고죠. 연구는 순조롭고, 생산도 안정됐고, 요즘 들어 수요가 늘어나다 보니 금전적으로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마정석 값이 급등해서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어허, 마정석은 길드에서 싸게 대주잖아요."

강현의 말에 정서빈이 피식 웃었다.

"맞아요. 강현 씨 덕분에 싸게 마정석을 구해서 다른 곳보다 여유가 있기는 해요.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비싸져서 힘든 것도 사실이에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현재 마정석 가격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으니까.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기반 시설이 마정석으로 작동하게끔 대체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정부에서 너무 급하게 추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유가 있겠죠."

"거기에 대해선 신태길 씨한테 들은 게 좀 있어요. 조만간 전자 기기가 다 먹통이 될 수도 있더라고요."

"역시 그랬군요."

강현의 말에 정서빈이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는 눈치네요?"

"저 이쪽 분야에서는 나름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어요. 그 정도 예측이야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죠."

"세계적인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딴지 걸지 말아요!"

정서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외치자 강현이 낄낄거리며 물러났다.

"알겠어요. 왜 화를 내고 그러나."

"휴우... 됐어요. 말을 말아야지. 그나저나 용건은 그게 끝이에요? 따로 볼일이 있다면서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다른 건 아니고. 지난번에 건네준 마력 흡수 장치. 연구 진척이 어떻게 됐나 해서요."

마력 흡수 장치.

사람에게서 마력을 뽑아내는 장비로,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에서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최연화와 인질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펼칠 때, 한세연과 최민준이 그것을 챙겨 왔다.

그들은 신태길에게 장치를 건넴과 동시에 강현에게도 하나 주었는데, 강현은 그것을 곧장 정서빈에게 연구용으로 넘긴 것이다.

"지난번에는 딱히 성과가 없다면서요."

"이게 고유 능력과 합쳐서 만들어진 장비고 마법적인 것들이 많이 들어가서 현대 기술로 분석하기 무리가 있긴 해요."

"흐음..."

"그래도 이번에는 꽤 성과가 있긴 했어요. 정부 쪽에서 도움을 줬거든요."

정부. 정부. 뭐만 하면 그놈의 정부가 끼어 있었다.

강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부가 아주 만능이네요."

"휴우...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어요. 진짜 거기에 다른 차원의 마법사라도 들어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강현은 내심 뜬금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과가 어떤데요?"

"마정석에서 마력을 뽑아내고, 다른 생물에게 주입까지 완료했지만... 결과가 딱히 좋지 않아요.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적응하더라도 마력 컨트롤이 완전히 불가능한 수준이라."

"아직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네요."

"네. 그래도 조만간 뭐가 나올 것 같기는 하니까 기다려요."

강현도 사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볼일은 다 끝난 건가요?"

정서빈의 물음에 강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뭔가 할 게 있었는데...'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번뜩였다.

"아! 까먹을 뻔했네. 여기 이거 수리 좀 부탁해요."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하나둘 나오던 아이템들은 어느새 작은 산이 될 정도로 쌓였다.

"이게 뭐죠...?"

"수리해서 팔 것들이요. 많이도 모았네."

"여기는 대장간이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요!?"

정서빈이 짜증을 냈지만, 강현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여기가 국내에서 수리 제일 잘하잖아요. 그리고 이거 고쳐서 팔면 꽤 짭짤한데. 안 할 거예요?"

"으으..."

아이템을 수리, 분해하는 과정에서 얻는 되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이득이 다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즉, 무조건 승낙하는 게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판매 수익은 비율대로 나눠주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강현이 낄낄대며 연구소를 떠났다.

남아 있는 정서빈과 연구원들은 허망한 얼굴로 아이템 산을 바라봤다.

"이걸 언제 다 고쳐서 팔아..."

**

배데스 길드 사무실.

"크하! 시원하다. 역시 여름에는 차가운 맥주지."

사계절 내내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강현의 말이었다.

사무실에는 오늘도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강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길드장님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직원들도 이제는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다들 자기 일에 열중하기 바빴다.

"좋아좋아. 젊어서 뭐하겠어? 일해야지!"

꼰대마인드로 무장한 강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좋네."

새로운 맥주 캔을 꺼내며 창밖을 바라보던 강현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이것도 넘겨야 했는데."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이었다.

"정서빈 소장한테 준다는 게 깜빡했네."

이것의 정체는 바로 태신 길드의 이백서에게 받은 아이템이었다.

-이게 뭐예요?

-강현 씨에게 보답할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져온 아이템입니다. 돈이나 장비 같은 건 저보다 훨씬 많고, 좋으실 테니 다른 걸 드리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호... 무슨 아이템인데요?

-B등급 보스를 잡고 나온 아이템인데 순간적으로 주위의 마력을 묶어버리는 장치입니다. 무투파인 강현 씨라면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주위의 마력을 묶는 아이템.

이것을 사용하면 아마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았다.

강현은 다시 한번 아이템의 설명을 확인했다.

이름 : 마력 고착화 스크롤

등급 : B

내구도 : 5/5

설명 : 마법사를 사냥할 때 주로 사용되는 스크롤. 스크롤을 찢는 즉시 발동된다. 단, 강력한 마력 컨트롤이 가능한 마법사는 마력 고착화를 무시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능력 : 5분간 반경 100m의 모든 마력이 고정된다.

"잘만 쓰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한번 써보면 정확하게 어떤 능력인지 알 것 같았지만, 단 하나뿐인 스크롤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언젠간 기회가 오면 쓰겠지."

강현이 스크롤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을 때였다.

"형. 뭐하고 있었어요?"

어느새 다가온 안유성이 말을 걸어왔다.

"일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요?"

"직원들 감시하는 일."

"와아.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형 인성도 어지간하네요."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시비야?"

갑작스러운 시비에 강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형. 요즘 맨날 혼자 다니거나 아니면 그 고블린이랑만 다니잖아요."

"그게 왜?"

"심심해서 죽일 것 같으니까 사건 하나 같이 해결해요."

"보통은 '죽을 것 같으니까'가 맞지 않나?"

"실수예요."

사소한 실수는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강현의 물음에 안유성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스마트폰을 받아 들자, 짤막한 뉴스 기사가 보였다.

"이게 뭔데?"

"던전 브레이크 기사요."

"또, 또! 던전 브레이크냐?"

이제 던전 브레이크라면 지긋지긋했던 강현이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건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지. 왜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건데."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흥미를 잃은 듯 보이자 안유성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사건이랑 다르다니까요?"

"뭐가 다른데."

"중소형 길드들이 무리하게 던전을 샀다가 공략을 못 하는 거죠."

"전혀 다르지 않은데?"

던전이 경매 형태로 바뀌고, 초창기에 간혹 터지던 사건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능력 밖의 자본을 가진 길드가 무리하게 던전을 사고, 관리하지 못해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보통은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에 정부에 구제 요청을 하지만, 간혹 그 시기를 놓쳐 사건이 터지곤 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 길드는 다시는 던전 경매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그것도 다 옛말이지 요즘도 그런 길드가 있나?"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창기에나 일어나던 일. 시스템이 정립된 지금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었다.

"딱 보니까 별일도 아니구만. 어디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잘 대처해서 막았다잖아. 이런 일에 우리가 나설 게 뭐가 있어."

"들어봐요. 최근에 이런 사건이 유난히 한 지역에서만 많이 일어난다니까요?"

"그래서?"

"냄새가 나요. 제 육감이 이걸 해결하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고요."

안유성의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네.'

확실히 한동안 길드원들과 함께하는 것에 소홀하기는 했다.

여러 잡다한 일이 많아서 바쁜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던전 공략으로는 레벨이 거의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강현은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투가 아니면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투 감각이 잃지 않을 정도로만 던전을 공략하며,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리라 예상되는 A등급 던전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강현 님! 해야 합니다!"

그때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성아가 벌떡 일어났다.

"왜? 너도 심심해?"

"예. 심심합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렇게 무게 잡고 이야기할 건가..."

강현이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성아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지금까지 안유성 씨가 끼어들어서 사건이 크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안유성 씨는 본인이 재밌으리라 생각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니까요."

"네가 방금 한 말이 '아주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랑 동의어인 건 알아?"

"이번에도 멋지게 일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배데스 길드니까요! 사람들이 열광할 겁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체념한 강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희랑 무슨 말을 하겠냐..."

강현 패거리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126화 밀려오는 어둠(2)

126. 밀려오는 어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