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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화

나는 라피드를 마주했다.

5m 간격.

두 걸음만 걸어도 서로의 공격 범 위에 들어오는 거리다.

『정말로 주군께 검을 겨누어도 되 겠습니까? j

"왜. 쫄았냐?"

『이건 기사로써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그럼 그 잘난 주군의 명령이다. 전력으로 덤벼."

『...명을 받듭니다.』

라피드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도약 했다.

한껏 날아올라서 고도를 높인 직 후, 지면을 향해 급강하.

칼을 치켜세우면서 급격하게 거리 를 좁혔다.

'궤도가 훤히 보이는군.'

정직한 돌진.

강하하는 속도와 방향 전환 각도를 감안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나는 피하지 않고 검을 치켜세우면 서 정면으로 받아쳤다.

챙!

흑색 검기와 성광기가 허공에서 격 돌했다.

『으음'?!』

라피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급강하를 하면서 공격의 위력을 한 껏 끌어 올렸지만 우위를 점하지 못 했다.

"이게 끝인가?"

『공격을 더 받아내는 건 어려우실 겁니다.』

라피드는 검을 휘둘렀다.

엘리시움의 천사들이 익히는 기본 검법, 광휘의 검법.

직선적이고 우직해서 허초나 변칙 적인 초식이 없는, 정석적인 검법이 다.

'다시 말해 공격이 뻔히 보인다는 거지.'

나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

챙! 채챙!

제왕의 검으로 펼치는 검무.

창궁무애검법은 번번이 광휘의 검 법의 초식 사이에 있는 허점을 파고 들었다.

광휘의 검법의 흐름이 뚝뚝 끊어진 다.

제왕의 검이 놈의 검법 사이에 이 물질처럼 끼어들면서 라피드의 동작 을 절묘하게 끊어냈다.

『어, 어째서. 내가 더 빠르고 강 한데! j

라피드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 다.

"재미없는 녀석. 너무 정직하게 검 을 휘두르잖아."

나는 제왕의 검을 길게 내미는 척 살짝 겨누었다.

뒷걸음을 치면서 칼을 추켜세우는 라피드.

이렇게 허초에 훅훅 넘어가다니.

놈이 주춤하는 사이에 강력한 위력 을 지닌 초식을 펼쳤다.

콰콰콰!

한껏 증폭된 흑색 검기.

[제왕의 검]에 담긴 중압의 기운까 지 담아서 라피드의 검을 찍어 눌렀

다.

『크읍!』

검에 실린 힘을 다 해소하지 못하 고 무릎을 꿇는 라피드.

자세가 무너진 놈의 목덜미에 칼끝 을 겨누었다.

"이제 알겠나? 지닌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의미를 말이다."

라피드의 표정은 나라를 잃은 것 마냥 허망했다.

입을 몇 번 뻥긋거릴 뿐, 아무 대 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에인헤야르를 훑어봤다.

놈들은 라피드의 패배가 충격적인 듯,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 다.

"아주 닭 날개 놈들이랑 판박이 야."

실망스럽다.

고정된 이름과 자아.

상태창에 보면 '성장형' 권능이라 고 했으니, 다루다 보면 강해질 것 이다.

하지만.

천사들처럼 재미없고 자존심만 센 녀석들은 필요 없다.

그때.

『주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를 숙였던 라피드가 몸을 일으 켰다.

성급히 일어났는지, 놈을 겨누고 있던 칼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면서 상처를 남겼다.

"왜. 아직도 승복을 못 하겠어?"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몇 번을 다시 싸워도 결과는 바뀌 지 않을 것이다.

한껏 비웃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라피드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조금 전에 사용하신 검법을 배우 고 싶습니다.』

응?

얘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 가.

나는 이마를 찌푸린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뗐다.

"이유를 들어보지."

『저는 주군을 지키는 검입니다. 한데 조금 전에 실력이 모자라는 것 을 체감했습니다.』

"그래서 검을 배우고 싶다?"

「예. 불충한 몸이지만, 감히 청을 올립니다.』

『저희도 같이 청을 올립니다!』

엉거주춤 서 있던 에인헤야르들도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허.

내 입에서 감탄과 한숨이 섞인 헛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가지는 정정해야겠다.

'닭 날개 놈들보다는 생각이 좀 트 여 있잖아.'

천사들은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

는다.

스스로의 정의와 가치관.

신념을 굽히고 고치는 것에 익숙하 지 않았다.

에인헤야르는 천사와 여러 부분이 흡사했지만, 최소한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주, 주군!』

『다시 한번 간절히 청합니다. 부 디...!J

"게이트에서는 사냥에 집중해야지. 검을 봐주는 건 "

지금은 경험치를 얻어야 할 때.

이 녀석들한테 검법을 알려주는 건 나중 일이다.

* * *

나는 에인헤야르를 펜리르 옆에 배 치 했다.

"펭구야. 네 후임이다."

-멍? 후임이 뭐야?

"너 부하. 너희는 앞으로 펭구 명 령을 따른다."

r저희가 섬기는 것은 오직 주군뿐 입니다.』

『주군께서 검의 주인이십니다.』

『한낱 미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니요.』

미물이라고?

"펭구야. 서열 정리 좀 해라."

-귀찮은데. 주인님이 시키면 해야 지.

펜리르는 변신을 풀었다.

10m 크기의 커다란 야수.

에인헤야르는 펜리르의 전신에서 솟구치는 강대한 기운을 마주하는 순간, 파르르 떨었다.

『선배님께 충성!』

『주군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1초 만에 서열 정리가 끝났다.

에인헤야르 4기는 펜리르를 선배로 모셨다.

'에인헤야르가 어설프게 나섰다가 는 손만 꼬이지.'

나는 후방의 안전을 더 튼튼하게 두고 전진했다.

"끼요오오옷!"

곳곳에서 들리는 배틀 로어.

불칸 전사 다섯 마리가 몰려들었 다.

'아, 그러고 보•니...

쳇.

나는 혀를 찼다.

30레벨 때 선택한 권능.

빛의 군세의 원류인 [불멸] 권능 을 사용해보지 않았다.

콰직!

오른손에 암흑 마나를 집중, 불멸 의 권능을 일으켰다.

흑색 수정이 손가라 끝에 맺혔다.

불멸의 결정. 제린의 권능이 형상 화된 모습이다.

'이걸 대상한테 붙여두면...

손가락을 튕겨서 불멸의 결정을 날 려 보냈다.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간 흑색 수 정.

"컥!"

수정은 정면으로 돌진하던 불칸 전 사의 이마에 푹 박혔다.

피격 부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검은 문자.

불멸의 권능이 발동했다.

[불멸의 권능이 대상에게 깃듭니 다.]

[불멸의 저주로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낙인이 찍힌 상대를 쓰러트리면 불멸의 전사를 제작할 수 있습니 다.]

불칸 전사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 다.

"이단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죽어보면 알걸?"

"죽는 건 네놈이다!"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고.

큰마음 먹고 권능의 비밀을 알려준

건데.

"사람 마음에 상처를 입힌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다크 스타를 청룡도로 변형.

파지지직!

오호단문도의 흑색 도기와 청룡도 의 뇌전을 융합하고 횡으로 베었다.

불멸의 결정을 이마에 박아둔 불칸

전사가 반으로 잘렸다.

상체가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바닥 에 나뒹굴었다.

[불멸의 결정을 맞은 대상이 사망 했습니다.]

[대상의 생전 능력과 혼의 업에 맞 춰 불멸자로 되살립니다.]

[불멸 포인트 : 10/50]

불칸 전사의 시체를 매개 삼아, 불 멸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콰드득!

손톱 크기의 수정이 크기를 마구

불려 나갔다.

불멸의 결정은 섬뜩한 소리를 동반 하며 불칸 궁사의 시체를 집어삼키 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10m 크 기까지 자라났다.

마구 부풀어 오르던 수정.

어느 순간 표면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나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쿠오오오오!』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성.

흑색 갑주를 입은 커다란 괴물.

푸른 귀화가 커다란 헬름 사이로 넘실거렸다.

인페르노 사이트.

상급 언데드에게 나타나는 원령의 불꽃이다.

임모탈 워리어.

전 서열 15위, 불사의 파라오 제린 이 다루었던 강력한 언데드가 탄생 했다.

『지존을 배알합니다.』

놈은 앞서 에인헤야르와 마찬가지 로 무릎을 꿇었다.

얘들은 인사만 하면 저러고 있네.

무릎 닳겠다, 닳겠어.

"저 녀석들을 처치해라."

『존명. 서먼 웨폰!』

스스슷!

검은 기류가 무기의 형태를 띠었 다.

임모탈 워리어의 신체 길이와 비슷 한 크기의 할버드.

놈은 양손으로 할버드의 중단을 짚 더니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콰콰콰콰!

흑색 충격파가 지면을 휩쓸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가 양손 도끼를 휘둘렀던 때보다도 더 거친 기세였 다.

"피, 피해!"

"정면으로 받아내면 죽는다!"

용맹스러운 불칸 전사도 임모탈 워 리어와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정면 승부를 고집한다면.

그건 용맹이 아니라 만용이겠지.

불칸 전사 무리는 임모탈 워리어 한 기의 공세에 발이 묶였다.

나는 [불멸] 권능으로 만들어낸 언데드의 활약을 지켜봤다.

'A급 게이트의 시체로도 전사를 만들어내는 게 고작이군.'

[불멸] 의 권능은 대상의 능력에

따라 4단계로 제작된다.

전사 - 기사 - 장군 - 왕.

임모탈 워리어는 [불멸] 의 권능 으로 살려낸 언데드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 병종이다.

'하위 병종이라고는 해도...

임모탈 워리어

근력 : 300 / 민첩 : 200 / 체력 : 300 / 맷집 : 300 / 마력 : 200

* 특성

불사의 군세 [A]

* 보유 스킬 생기 갈취 [A] 괴력 [A] 무기의 달인 [B]

강하다.

A급 게이트의 보스인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도 높은 능력치였다.

'S급 헌터의 순수 능력치가 이쯤

되지 않을까?'

막연히 짐작해봤다.

나는 S급 헌터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직접 만나서 [진실의 눈]을 사용해 봤다면 좋은 비교 대상이 되었을 것 이다.

전생 때 권능의 원소유자인 제린을 떠올렸다.

'제린 녀석. 상대하기가 꽤 번거로 웠지.'

불사의 파라오 제린.

놈은 손짓 하나로 무수한 언데드

군단을 다루었다.

'권능으로 만든 언데드들은 꽤 강 했다.'

하급 병종인 전사급 2마리면 갓 성체가 된 악마를 압도할 수 있었 다.

그보다 상위 병종인 기사나 장군, 왕급은 훨씬 더 강력했다.

고위 악마, 혹은 귀족과 정면으로 겨루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불멸 포인트라. 무한히 만들 수는 없는 것 같군.'

임모탈 워리어 한 구에 10포인트.

상위 병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포인트와 급에 맞는 육체가 필 요했다.

과거 권능의 원주인인 제린은 불멸 의 전사를 수천 구나 다루었다.

'빛의 군세와 마찬가지로 성장형 권능이라는 건가.'

더 많은 언데드 군세를 다루기 위 해서는 숙련도를 쌓아야 했다.

제린과 벌였던 전투를 떠올리는 동 안, 임모탈 워리어와 불칸 전사의 싸움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크어억!"

"컥!"

불칸 전사 둘이 할버드의 충격파에 휘말렸다.

흑색 기류에 닿은 부위가 찢겨나가 고, 마른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은 둘은 임모탈 워리어의 옆을 향해 병장기를 찔렀다.

파츠츠츠!

오러가 깃든 창과 대검은 두꺼운 갑주를 뚫고 피부에 생채기를 냈다.

"공격이 먹힌다!"

"괴물 녀석. 이대로 베어주마!"

불칸 전사 둘은 추가 공격을 시도 하려 했다.

끼기직-!

임모탈 워리어의 육체에 파고든 검 과 창.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낼 뿐, 힘을 주어서 뒤로 당겨도 원주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생기 갈취]

흑색 기운이 꿈틀거린다.

생물의 에너지를 강탈하는 기류가 먹잇감을 찾은 것이다.

"히, 힘이...

"이 녀석이 원인이다. 어서 벗어나 야 해."

창을 사용했던 불칸 전사는 뒤로 물러나서 생명력 강탈을 피했다.

완전히 근접했던 불칸 전사는 기진 맥진한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우 그것뿐인가.』

임모탈 워리어는 할버드를 재차 휘 둘렀다.

서걱!

불칸 전사 둘은 충격파에 휩쓸려서 비명도 못 지르고 전사했다.

곧이어 방금 피해를 받은 곳이 초

록색으로 물들었다.

불칸 전사한테서 갈취한 생명력으 로 파손 부위를 복구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불멸의 권능이 훨씬 나은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흘겨봤다.

에인헤야르 피네스와 눈을 마주치 는 순간.

놈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시선을 홱 돌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아챈 듯했다.

'검법을 수련시켜보면 알겠지.'

만약.

에인헤야르의 학습능력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

빛의 군세를 사용해서 저 4기를 다시 불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연.

너희는 불멸의 군세보다도 더 가치 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77 화

사냥 후 뒤처리를 담당하는 지원 팀.

지원팀 소속 장인들은 탄성을 내질 렀다.

"김 씨. 이런 거 본 적 있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구먼."

일행의 시선은 민철이 불러낸 소환 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광휘를 내뿜는 에인헤야르.

흑색 기류와 갑주로 전신을 감싼 임모탈 워리어.

흑과 백.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민철의 명령을 따랐다.

"저 기사들을 봐. 천사를 닮지 않 았어?"

"나는 기사들보다도 저 거인이 신 경 쓰여. 저 흉흉한 기운, 보기만 해도 무섭지 않냐."

장인들은 모두 마나를 느낄 줄 아 는 각성자다.

에인헤야르와 임모탈 워리어가 내 뿜는 강렬한 기세에 몸서리를 쳤다.

초식동물이 포식자를 마주쳤을 때 오금을 저리듯.

본능적으로 민철의 소환수가 강하 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장인 한 명이 정영현에게 물었다.

"정 팀장님은 저런 거 본 적 있 수?"

"처음 본다."

정영현은 짧게 대꾸했다.

무덤덤해 보이는 태도.

평소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경험이 많으시니깐 당황하지도 않 는구먼."

"역시 정 팀장님이야."

지원팀 장인들은 영현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감탄했다.

정영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멍청한 것들아. 그런 게 아니 라고!'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켰 다.

대담한 것이 아니다.

잘게 떨리는 손끝.

민철의 소환수가 뿜어내는 박력에 움츠러든 것이다.

정영현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감정.

놀라움을 넘어 경악으로 물든 눈빛 이었다.

'저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그는 20년 넘게 헌터 업계에서 장 인으로 일을 했다.

성간 연합에 소속되기 전에는 국내 일류 공격대에 속해서 여러 게이트 공략에 참여했다.

독립 후에는 따로 팀을 차려서 성 간 연합과 계약을 맺고 이종족 용병 들을 지원했다.

개중에는 A급 헌터들도 다수 있었 다.

하지만.

소환 계열에 특화된 헌터도 저렇게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괴물을 다루 지는 못했다.

정영현은 임모탈 워리어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등급을 가늠했다.

'A급? 아니. 그 이상이야.'

수십 년 동안 다져진 감.

여러 헌터와 괴물들의 싸움을 지켜 봤다.

A급 이상, S급 미만.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A++정도의 무력.

다년간의 경험은 임모탈 워리어의 수준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런 괴물들을 다섯이나 부리다 니.'

정영현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임모탈 워리어의 뒤.

망막 너머로 민철의 모습이 비쳤 다.

r그 =

w=r.

영현은 민철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겨우 3개월 전이었지.'

암사동 게이트.

갓 각성하고 헌터 라이선스를 딴 애송이가 D급 게이트를 단독으로 공략했다.

대담함과 과감성.

수라장을 여럿 넘으면서 완성된 실 전 무예로 게이트의 괴물들을 압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될 헌터라고 생각

은 했지만...

예상을 상회하는 속도.

민철의 성장세는 영현의 상식을 아 득히 넘어섰다.

모든 헌터는 [잠재능력]을 가진다.

평균 3년에서 4년.

한 헌터가 각성 후에 잠재능력 개 화에 걸리는 기간이다.

아무리 뛰어난 성장 잠재력을 지닌 헌터라도, 지닌 재능을 꽃피우기까 지는 꽤 오랜 시간 실전과 훈련을 겪어야 했다.

'유명 길드의 유망주도 단기간에

이만큼 강해지지는 못했다.'

이 성장세가 멈추지 않는다면.

국내 제일.

아니,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 는 건 아닐까.

자신은 지금 세계 제일의 헌터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걸지도 모른다.

두근, 두근.

심장이 떨렸다.

임모탈 워리어가 뿜어내는 박력을 접하면서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철이 어디까지 성장

할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정영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민철의 등 뒤를 쭉 바라봤다.

米 氷

[규암면 게이트] 공략은 오래 걸리 지 않았다.

게이트 끄트머리에 있는 부락.

불칸 족장과 전사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임모탈 워리어 5기로 전사들 의 발을 묶고 단독으로 족장에게 돌

진했다.

"꾜... 전사의 혼이...

"혼은 무슨.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위에서 아래를 향해 쏟아지는 검은 뇌전.

혼돈기와 뇌력이 뒤섞여서 만들어 진 강대한 에너지는 족장의 몸을 반 으로 갈라버렸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수련장으로 돌 아가는 길.

나는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

속은 복잡했다.

새롭게 얻은 불멸의 권능의 장 • 단점.

[규암면 게이트]에서 벌인 전투를 복기하면서 권능의 활용 방안을 정 리 했다.

'사령계 권능치고는 편리하다.'

네 크로맨시.

시체에 기운을 불어넣어서 술자의 병력으로 활용하는 강력한 마법이 다.

반대로 말하면 일으켜 세울 매개체 인 '시체'가 없을 때 극단적으로 약 해졌다.

사령 계열을 특기로 삼는 악마들은 제작한 언데드를 따로 보관하거나 주위에 두어서 전력의 공백을 극복 했다.

'불멸의 권능은 그 번거로움을 상 당 부분 해결해준다.'

임모탈 워리어 5기는 차원 너머, 권능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에 보관했 다.

[불멸] 권능으로 생성한 차원의 틈새.

오직 불멸의 군세만 보관할 수 있 는 전용 공간이다.

미리 만들어둔 녀석들은 필요할 때

마다 아공간에서 꺼내 쓸 수 있다.

물론.

제작해둔 게 없으면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거야 소모될 때마다 다시 만들 어두면 되는 일.'

큰 문제는 아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움직이는 게 굼떠서 나랑 상성이 맞지 않는다.'

임모탈 워리어.

[불멸] 권능으로 제작할 수 있는 하급 병사.

덩치가 큰 만큼 공격 범위가 넓고 내구력도 뛰어났지만, 대신 기동력 이 많이 떨어졌다.

불칸 전사처럼 인간형 적을 상대할 때는 떨어지는 기동성이 발목을 붙 잡았다.

'내가 나섰으면 진즉에 끝났을 전 투였는데.'

[생기 갈취]는 강력한 스킬이다.

근접이 특기인 적이라면,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근접하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을 헌납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를 바로 무력화시키지 는 못했다.

시간을 어느 정도 들여야 대상의 생명력을 충분히 빨아들여서 전투력 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덩치가 큰 탓에 노릴 곳도 많았고.

압도적인 스펙으로 전투 내내 불칸 전사들을 압도했지만 결정적인 한방 이 부족했다.

'대형 괴물과 싸울 때 꺼내야겠어.'

임모탈 워리어의 커다란 덩치는 난 전 상태에서는 오히려 독이었다.

아쉬운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권능의 숙련도를 쌓는 조건을 알 수가 없다.'

부릴 수 있는 임모탈 워리어는 총 5구.

불멸의 권능은 지옥의 겁화처럼 사 용자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더 많은 숫자를 다루려면 권능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불사의 파라오 제린은 불멸의 군세 를 수천 구나 다루었다.

'아직은 감이 안 오는군.'

불멸의 권능을 여러 번 사용해보기 도 하고 제작한 임모탈 워리어로 불 칸 전사를 쓰러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숙련도는 전혀 오르지 않았 다.

권능의 원주인은 사망한 지 오래.

내 힘으로 [불멸] 권능의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어떻게 하면 권능의 숙련도를 올 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정을 세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서울로 돌 아왔다.

수련장 앞에 정차한 차량.

"다 왔어요."

낭랑한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는 상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엘리가 다음 일정 을 브리핑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준비하시면 돼 요."

"어디로 가는데?"

"수원에 열린 게이트를 할당받았어 요. 이걸로 확인해주세요."

"부여보다는 가깝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을 확인한 뒤, 곧장 수련장 안 으로 들어왔다.

자취방에 있는 짐은 모두 수련장으

로 옮겼다.

사업 파트너인 하린이 수련장 옆에 거주 구간을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나는 곧장 빛의 군세 권능을 사용 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에인헤야르 네 기사의 목소리가 쩌 렁쩌렁하게 울렸다.

"검을 알려달라고 했지?"

『예!』

나는 에인헤야르 4기를 하나하나 훑어봤다.

의욕에 가득 찬 모습.

아까 기가 죽었던 것과는 정반대였 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지."

나는 다크 스타를 에인헤야르가 쥐 고 있는 검과 동일한 형태로 바꿨 다.

검을 추켜세웠다.

칼날 끝이 에인헤야르를 향했다.

"이번에 너희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더 볼 일은 없을 거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쓸모가 없다면 혼돈기만 낭비하는 꼴이지.'

불멸의 권능과 빛의 군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제린은 그 강력한 언데드 군대를 수천이나 굴렸으니까.'

권능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만 알아내면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했 다.

반면 빛의 군세로 불러낸 에인헤야 르는 성장 가능성이 미지수였다.

만약.

이번에 가능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면....

에인헤야르 무리는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듯 얼굴에 긴장을 드 티웠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나는 다크 스타로 복제한 에인헤야 르의 검을 쭉 •훑어봤다.

칼의 폭이 얇지만 길이는 꽤 길었 다.

휙휙-

검을 몇 번 휘둘러보면서 무게감을 손에 익혔다.

'이런 형태의 검이라면... 그 무공

이 어울리겠어.'

매화검법.

무 대륙의 구대 문파 중 하나, 화 산파를 상징하는 무공이다.

전생의 나는 계약에 따라 마교의 세력 확장을 돕던 중, 화산파의 영 역을 공격하고 그 비급을 손에 넣었 다.

매화검법은 칼끝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켜서 꽃의 모양을 만든다고 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가 계열의 무공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허초와 변칙 공격이 많 았다.

'내 성향하고는 잘 안 맞아서 익혀 두기만 했지.'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

검마의 칠성마검.

모두 패도적인 무공이라는 공통점 이 있다.

전생의 나는 이 무공들 외에도 패 도적인 성향의 무공을 즐겨 사용했 다.

'이 녀석들한테는 그 무공들보다 매화검법이 더 잘 어울릴 거다.'

높은 기동성을 보유한 에인헤야르.

하늘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천변만

화(千變M化)한 칼끝의 변화로 상대 를 농락한다.

이론은 완벽했다.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말 이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상승 무공에 깃든 묘리는 복잡하면 서도 심오했다.

나는 다크 스타를 앞으로 찔렀다.

매화검법의 첫 초식, 매화노방(梅 花路傍) 이다.

"이제 시작이다. 집중해서 보는 게 좋을 거야."

에인헤야르 4기의 눈빛이 내 검을 향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매화검법을 전개 했다.

총 24초식.

검 끝이 쉬지 않고 현란하게 움직 였다.

천변만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면서 상대를 농락하는 검술이 펼쳐졌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매화 향은 나지 않았지만.

동작만으로도 검법에 담겨 있는 상

승 무공의 모리를 담아내기에는 충 분했다.

마지막 초식인 매화만리향(梅花M 里香)을 펼치고는 검을 거뒀다.

"좀 알겠냐?"

나는 큰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검법을 익힌다는 건, 단순히 형 (形)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보폭.

골반과 어깨의 움직임.

근육 하나하나를 모두 통제하면서 완벽한 자세로 검을 휘둘러야 한다.

'한 번 봤다고 검법을 익히면 그건

천재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후기지수라 도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런데.

『주군. 다시 한번만 보여주시면 검법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도 못 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78 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에인헤야 르.

목소리의 주인공은 첫 번째 기사, 피네스였다.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한 번 보여준 걸로 이해가 갔다

니. 그건 불가능해.'

매화검법.

현생의 내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창 궁무애검법, 그리고 오호단문도에 버금가는 상승 무공이다.

동작 하나하나에는 무공의 묘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어떤 천재라도 한 번 본 무공을 요체까지 깨닫는 건 불가능했다.

"너희도 다 이해가 가냐?"

『예! 주군!』

남은 세 기사도 입을 모아 대답했 다.

에인헤야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 봤다.

올곧은 금색 눈빛.

동공에 흔들림이 없다.

'이 녀석들. 진심인 것 같은데.'

나는 마음속의 의구심을 꾹 눌렀 다.

오냐.

원하는 대로 한 번 더 보여주마.

팔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휘익! 휙!

총 24초식으로 된 매화검법.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면서 내력도 운용했다.

검 끝에서 피어나는 매화향.

화산파의 상징, 매화검법을 온전히 펼쳤을 때만 나는 그윽한 냄새다.

혼돈기를 운용하면서 검을 휘두르 니, 검격의 변화가 허공에 맺히면서 검은색 꽃을 피워냈다.

'내력을 운용했을 때 매화향이 난 다고 해서 매화검법이지.'

검법을 전개하는 중에 힘이 덜 들 어가거나 자세가 무너지는 등, 잘못

된 습관이 들어가면 향도 사라진다.

24초식을 펼치면서 매화향을 한 번도 꺼트리지 않는 것.

매화검법을 제대로 펼치고 있다는 표식이다.

총 24초식을 펼치는 동안, 검에 감 도는 매화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좀 알 것 같나?"

「예! 주군!』

망설임 없이 나오는 대답.

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꾹 눌렀다.

'시켜봐서 못하면 끝인 거지.'

처음에 대답했던 에인헤야르, 피네 스를 지목했다.

"한번 해봐라."

『Yes. My Lordlj

피네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 다.

' 어'?!'

코끝을 간질이는 좋은 향기.

분명 매화향이었다.

초식을 이어가자, 허공에 하얀색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광기로 빚어낸 매화였다.

'미친. 실화냐?'

매화검법을 두 번 보여준 게 전부.

에인헤야르 피네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익혔다.

"그만!"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주, 주군. 마음에 안 드십니까? 시정할 부분이 있다면....』

아니야.

너무 잘해서 문제인 거야.

나는 고개를 한 번 저은 뒤, 피네 스의 검에 코를 가까이 대었다.

매화향이 검에 아른거린다.

녀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화 검법을 펼쳐냈다.

[에인헤야르 피네스가 매화검법을 습득했습니다.]

[에인헤야르....]

연속적으로 들리는 알람.

피네스에 이어, 나머지 셋도 모두 검법을 습득했다.

이 녀석들.

정말로 검의 천재였다는 건가?!

내 머릿속에서 빛의 군세에 대한 평가가 빠르게 수정되었다.

'몇 번 본 가지고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높은 기동성을 가진 에인헤야르.

이 녀석들한테 무공을 가르친다면?

나는 무 대륙의 수많은 무공 지식 을 알고 있다.

에인헤야르와 합이 잘 맞는 무공을 알려주었을 때 얼마나 큰 시너지를 발휘할지.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되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

나는 침을 삼키면서 마구 뛰는 가 슴을 가라앉혔다.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에인헤야르가 보여준 의외의 천재 성 (?).

단순히 운이 좋아서 맞아떨어진 우 연일지도 모른다.

'다른 무공도 바로 익힐 수 있나, 실험해보자.'

나는 기대감이 섞인 눈빛으로 에인 헤야르들을 바라봤다.

* * *

[암향표 (暗香!風)]

매화검법과 마찬가지로 화산파를 상징하는 무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이라는 말처 럼, 은밀하게 움직이는 경신법이다.

'매화검법과 암향표는 합이 잘 맞 는다.'

나는 암향표를 두 번 보여주고 에 인헤야르에게 시켜봤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에인헤야르는 물이 스펀지를 흡수 하듯, 내가 펼친 무공을 빠르게 습 득했다.

『주군! 땅에서 움직이는 속도가 엄청 빨라졌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 니다.』

에인헤야르는 은밀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수련장을 누볐다.

날개를 펼치지 않았는데도 움직임 이 재빨랐다.

경신법을 밟을 때마다 살짝 흐려지 는 몸뚱이.

암향보의 효능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게 아니었다.'

-동기화.

나와 에인헤야르는 영혼으로 연결 되어 있다.

무공을 펼치면 내 혼에 잠재되어 있는 경험과 깨달음이 활성화된다.

에인헤야르는 그 깨달음을 전달받 아서 무공의 묘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무공을 보고 배운 게 아니라 내 경험을 그대로 습득한 것이다.

'이 정도면 불멸 권능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무공을 익히면서 성장하는 에인헤 야르.

반면 불멸의 권능은 정해진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에인헤야르에게 여러 무공을 익히 게 하고, 수련을 거듭하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그 한계를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 다.

"집합."

짧은 한마디를 내뱉자, 에인헤야르 4기가 내 앞에 모였다.

"솔직히 말하지. 아까는 크게 실망 했었다."

내가 힐난을 내뱉자, 에인헤야르들 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참 속마음을 알기 쉬운 녀석들이 다.

"하지만, 지금은 너희의 가치를 스 스로 증명해냈다."

꺾였던 에인헤야르의 고개가 다시 위를 향했다.

눈가에 불꽃이 아른거린다.

칭찬 한 번 해줬다고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

"피네스."

나는 처음으로, 에인헤야르를 이름 으로 불렀다.

『예. 주군!』

"매화검법을 펼쳐봐라."

『Yes. My Lord!』

피네스는 아까 익힌 매화검법 24 초식을 빠르게 펼쳤다.

성광기가 빚어낸 하얀 꽃.

향긋한 매화향이 코를 간질였다.

"카스파. 암향표를 사용하면서 수 련장을 돌아라."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파팟!

에인헤야르 카스파의 신형이 흐려 졌다.

은밀하면서도 빠른 걸음.

화산파의 절기, 암향표였다.

카스파는 잔상을 남기면서 원을 그 리듯 수련장 내부를 빠르게 내달렸 다.

"그만."

나지막하면서도 작은 목소리.

두 에인헤야르는 내 음성에 반응해 서 바로 무공 사용을 멈췄다.

"나는 너희에게 여러 무공을 알려 줄 것이다."

『주군께서 우리에게 하사해주시는 강력한 힘.』

『무공. 이게 무공이라는 것이군 요.』

『저희가 알고 있는 광휘의 검법보 다 훨씬 강력합니다.』

『주군께서 직접 저희에게 깨우침 을 주시다니!』

에인헤야르 4기는 각각 다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반응은 달라도 품고 있는

마음은 동일했다.

경외감.

무공의 위력에 전율했고, 그걸 배 울 생각에 들떠있었다.

내가 무공을 처음 배웠을 때를 떠 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너희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 다."

따악!

엄지와 중지가 부딪치면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우우웅-

푸른빛을 내면서 작동을 시작한 대

마력 집속진.

주위의 마나를 끌어모으면서 수련 장 내부의 마나 밀집도를 빠르게 높 였다.

"매화검법과 암향표를 3성까지 수 련해라."

갓 생성된 스킬은 모두 1성.

현생의 나와 마찬가지로 '깨달음' 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했다.

반복적인 단련과 수련을 거쳐야만 성취를 올리고 깨달음을 몸에 적용 시킬 수 있다.

'실전에 써먹으려면 최소 3성 정도 는 되어야지.'

이 수준으로는 싸움에서 방해만 된 다.

당분간 에인헤야르를 싸움에 투입 하지 않고 무공 수련에 집중시킬 것 이다.

매화검법과 암향표.

그 외에도 여러 무공을 익히고 하 늘을 누비면서 적을 농락하는 에인 헤야르.

그 모습이 사뭇 기대가 되었다.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강해져라. 그러면 너희를 내 검으 로 삼아주마."

『Yes. My Lord!j

에인헤야르는 의욕이 넘치는 목소 리로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성천조계공 운용을 멈추고 눈 을 떴다.

밤새 내내 혼돈기를 운용하면서 세 계석의 기운을 녹여냈다.

그 덕분에 상당한 혼돈기를 쌓고, 성천조계공의 성취도 올릴 수 있었

다.

간밤에 쉬지 않고 심법을 수련했지 만, 피곤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심법이 몸의 피로를 씻어준 덕분 이다.'

우드득-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굳은 몸을 풀었다.

그때.

이질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휙! 휙!

연신 검을 내지르거나 휘두르고 있 는 에인헤야르.

"너네. 밤새 그러고 있었던 거냐?"

『주군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기 위 해....』

"길게 말하지 말고. 예, 아니요로 답해."

『예!』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해서 에인헤 야르의 스킬 상태를 확인했다.

[매화검법 - 1성]

[0% _ 7%]

정말이었다.

'밤새 쉬지 않고 수련을 했잖아.'

상승 무공은 성취도를 올리기가 매 우 어렵다.

무공에 깃든 묘리.

하나하나가 고수의 심득을 그대로 녹여내서 만든 동작이다.

그걸 몸에 익히려면 엄청난 노력과 이해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대마력 집속진의 도움이 있었다고 는 해도 대단하군.'

수련장을 가득 메운 진한 마나.

에인헤야르가 매화검법의 초식을

펼칠 때마다 반응을 일으켰다.

풍부한 마나가 신체를 자극하면서 성취 향상에 도움을 준 것이다.

수련에 몰입하지 않았다면 대마력 집속진의 효과도 소용없었겠지만.

늘어난 무공 성취도가 에인헤야르 의 열정을 증명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들이잖아.'

에인헤야르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번 상향조정되었다.

처음에는 천사를 닮은 성격에 거부 감이 들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무공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니 없던 호감도 생겨났다.

에인헤야르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 켜보다 보니 금세 약속 시간이 다가 왔다.

수련장 앞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성간 연합 소속 차량이 나를 기다렸 다.

"민철 헌터. 오늘도 안 늦으셨네요. 펭구도 안녕?"

-헥헥. 예쁜 누님이다.

펜리르는 엘리의 품 안으로 쏙 들 어갔다.

프로펠러처럼 빙빙 도는 꼬리.

저 방정맞은 것을 어떻게 하면 좋 을까.

"오늘은 인천이라고 했지?"

"맞아요. 참, 지부장님이 전해달라 고 한 게 있어요."

엘리는 사각으로 된 케이스 가방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호호, 안 알려주셔서 저도 몰라 요."

가방 양쪽에 있는 잠금장치를 위로 젖히니,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

렸다.

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가지런히 진열된 비도 10개.

경매 전에 주문했던 섬전비도였다.

[섬전비도]

등급 : 희귀[R] / 종류 : 단도

내구도 : 500/500

* 근력 증가 Lv 15

* 민첩 증가 Lv 25

* 관통 효과 Lv 20

희귀 등급.

다크 스타로 구현할 수 있는 유니 크 등급보다 한 단계 낮았다.

'섬전비도 자체는 특별한 기능이 없으니까.'

나는 비도 하나를 살짝 쥐었다.

전체적인 디자인.

칼날의 예리함, 그리고 무게중심까 지.

모두 주문했던 대로였다.

칼끝에 난 구멍은 아라크네의 실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끝은 골무처럼

손가락에 끼울 수 있는 형태였다.

나는 골무를 손가락에 걸고, 비도 를 품 안에 넣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면 원하는 타이밍 에 비도를 던지거나 회수할 수 있 다.

"완벽해. 퍼펙트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크 스타와 섬전비도 10개.

이 정도 장비라면 어떤 적이 와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에인헤야르도 수련에 열중인데,

나도 질 수는 없다.'

밤새 수련에 매진한 녀석들을 떠올 리니 더욱 의욕이 솟구쳤다.

79 화

인천으로 가는 도중.

엘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는 중, 그녀의 안색이 굳 었다.

"민철 헌터."

"무슨 일인데 그런 표정을 지어?"

"협회에서 게이트 공동공략 제의가 들어왔어요."

"공동공략이면, 전주 때처럼 여러 팀이 공략하는 건가."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계획에 없는 일.

불쾌감보다도 궁금증이 치솟았다.

"협회에서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있어?"

"협회에서 게이트의 파장을 재확인 했는데 내부 면적이 처음 책정한 것 보다 2배 이상 크다고 해요."

"면적이 2배여도 상관은 없는데."

"협회 규정상 게이트 규모가 중급 이상이면 최소 2개 길드가 공력에 참여하게끔 되어있어요."

"귀찮게 되었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늘어날수록 변수가 생긴다.

특히 게이트 안에서는 계산하지 못 한 요소 하나가 큰 위험으로 번질 수도 있다.

엘리는 난색을 띠며 고개를 숙였 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됐어. 네 잘못도 아니잖아."

"그 대신 A급 게이트 하나를 더 할당받았어요."

"역시 일 하나는 잘한다니깐."

하나를 주면 하나, 아니 두 개는 받아와야 하는 법.

엘리는 손해 보는 짓을 절대로 하 지 않았다.

"게이트 책정이 잘못되었다고 하니 기껏 준비한 브리핑 자료는 쓸모가 없게 되었네요."

"직접 들어가 보면 알겠지."

나는 느긋하게 말하고는 좌석에 몸 을 기댔다.

게이트가 열린 곳은 동인천역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협회 요원들이 이미 주위 통제를 마쳤는지, 공원 안쪽에는 민간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를 향해 접근하자, 요원 한 명이 앞에 섰다.

"성간 연합 분들이십니까?"

" 예."

"게이트 책정에 오차가 생겨서 죄 송합니다."

날 보자마자 사과하는 현장 요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 데요."

뒤따르던 엘리가 곧장 질문을 던졌 다.

"공동공략에 참여하는 길드가 어디 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금산 길드로 알고 있습니다."

금산.

화랑과 신성에 이어 국내 3대 길 드로 불리는 곳이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엘리가 질문하기 무섭게 차량 여러 대가 공원 주차장 안으로 속속 들어

왔다.

차량 앞에는 모두 금산 길드의 마 크를 부착했다.

"벌써 왔네요."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잘됐 네."

첫 입장 때는 두 길드가 같이 진 입해야 한다.

금산 길드에서 발 빠르게 움직여준 덕에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는 금산 길드에서 파견한 공격대 의 규모를 살■펴봤다.

'엄청 많네.'

캠핑카.

장비를 적재한 무장 차량.

장인들을 태운 대형 버스 등, 차량 숫자는 열대를 넘어섰다.

공격대 인원만 수십 명.

게이트 바깥에서 공략을 지원하는 힐러진과 보조 인원을 포함하면 백 명을 넘는 인원이었다.

'3대 길드가 게이트 공략을 하는 방법인가.'

저렇게 많은 인원이 게이트 하나 공략하려고 움직이다니.

비효율적이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때.

벗겨진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 사내 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금산 길드 2공격대 대장, 오정우 요."

"성간 연합 소속. 전민철입니다."

"당신이 요새 소문이 자자한 신입 이구먼?"

언뜻 호탕해 보이는 목소리.

하지만 그 안쪽에는 미세한 적의가 섞여 있었다.

"소문이 자자한 신입인지는 모르겠

지만, 맞는 것 같군요."

나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오정우는 내 주위를 좌우로 둘러봤 다.

"그쪽 공격대는 언제 다 도착하는

거요?"

"다 왔습니다만."

"여기에는 댁 혼자밖에 없잖수." 오정우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음색.

말끝에 살짝 묻어났던 적의가 서서

히 표출되기 시작했다.

"30명 같은 1명이죠."

"성간 연합이라고 해서 기대했는

데. 괜히 발목만 붙잡지 않았으면

좋겠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가는 오정

"엘리야. 저건 시비 거는 거 맞

지?"

"저도 그렇게 느껴요."

"저 대머리랑 성간 연합 사이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뇨. 처음 보는 얼굴인걸요. 개인

적인 이유가 아닐까요?"

"난 저런 대머리 아저씨 몰라."

풋-

엘리는 작게 웃었다.

농담하는 줄 알고 있나 본데.

진심이다.

'누가 발목을 붙잡게 될지는 조금 이따 확인해보자고.'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를 모 르겠다면.

그 이유를 만들어주는 게 마땅한 도리지.

입가 한쪽이 위로 올라갔다.

나는 불길한 미소를 띠면서 대머리 아저씨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米 #: 米

[동인천역 게이트]의 내부.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딛는 순간, 환한 빛과 함께 주위의 풍경도 바뀌 었다.

'여긴••••••

검게 물든 대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죽 음의 땅이다.

코끝에 아른거리는 시체 냄새.

무수한 '죽음'의 향이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뒤져서 땅에서 느껴지는 짙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 아챘다.

'죽음의 땅.'

온갖 생명체의 시체가 쌓여서 만들 어진 지역.

산 자를 배척하는 망자의 영역이 다.

그때.

게이트 표면이 쉴 새 없이 출렁거 렸다.

금산 길드 소속 헌터들이 [동인천 역 게이트] 안으로 입장했다.

총원 30명.

제2공격대 헌터들은 하나 같이 희 귀 등급 아이템으로 무장을 갖추었 다.

탱커, 근접 딜러, 원거리 공격수, 그리고 힐러진.

과거 전주에서 경쟁을 벌였던 화랑 길드 공격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 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신예가 아니라는 점인가.'

나는 [진실의 눈]으로 몇몇 헌터들 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협회 기준 B급.

하나 같이 잠재능력을 80% 이상 개화한 베테랑 헌터들이다.

"흥. 뭐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금산 길드 공격대 선두.

오정우가 투덜투덜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더 안 가는 게 좋을걸요?"

나는 짧게 충고했다.

오정우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떠올 랐다.

"애송이 녀석. 벌써 겁을 먹은 건 가. 얘들아, 금산 길드의 저력을 보 여주자!"

오정우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 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대머리는 날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공격대장의 뒤를 따라 전진하는 금 산 길드 공격대.

공격대 무리는 죽음의 땅에 진입했 다.

그때.

쿠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딛고 있는 지면 이 마구 요동을 쳤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 진동은 위협 적이지 않다!"

오정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대 헌터들은 당황하는 기색 없 이 쥐고 있는 무기를 지지대 삼아 진동에 버텼다.

요동치던 땅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쯔쯧.

나는 혀를 찼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왜 이곳이 죽음의 땅인지.

조금 전에 올라온 진동은 죽음의 땅의 공포를 열어젖히는 서막에 불 과했다.

콰직!

갈라진 지면 틈 사이.

앙상하게 마른 뼈가 마구 솟구쳤 다.

수백 개나 되는 팔들은 죽음의 땅 에 발을 디딘 공격대의 바짓가랑이 를 붙잡았다.

"대장님! 발아래에서 적이 나타났

습니다!"

"언데드입니다!"

"모두 당황하지 마라. 내가 신호를 주면 뒤로 물러나서 진형을 바로잡 는다."

오정우는 발을 세게 굴렀다.

[대진각]

충격파가 대지를 한바탕 휩쓸었다.

헌터들을 붙잡았던 뼈 팔들이 커다 란 힘에 휩쓸려서 수수깡 부러지듯 박살 났다.

"역시 대장님이야."

"어서 재정비를 하자."

게이트 쪽으로 후퇴하려는 공격대.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구어어 어...

"그겔겔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스켈레톤.

썩어 문드러진 좀비.

전후좌우.

언데드 군세가 사방에서 일어나면 서 금산 길드 공격대를 포위해버렸 다.

'저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봤

다.

죽음의 땅.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지역을 제대 로 정화하지 않으면 이런 형태가 된 다.

검게 죽어버린 땅은 흙이 아니라 시체들을 쌓아서 만든 대지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가면 사지로 뛰어드는 꼴이지.'

게이트 진입 전, 탐색에 조예가 있 는 헌터를 시켜서 조사했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저 대머리 녀석이 나한테 무슨 억 하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의식하고 서둘러서 진입을 한 탓에 공격대 전체가 위험에 빠져버 렸다.

언데드의 숫자는 금세 수천으로 늘 어났다.

"민철 헌터. 저거 안 도와줘도 되 는 건가?"

지원 팀장 정영현의 목소리가 떨렸 다.

"내버려 둬도 돼요. 고생 좀 해야 지."

"다른 길드라고 해도 그렇지, 저러 다가는 경을 칠 것 같네."

"저 언데드들. 모두 하급이에요. 제 대로 대처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걸 요."

나는 스켈레톤을 가리켰다.

D급 게이트에서나 출몰할 법한 약 해빠진 녀석들.

명색이 3대 길드의 공격대이니 쉽 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저런 잡졸들이 아니지.'

이곳은 평범한 게이트와 다른 지역 이다.

죽음의 땅.

이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

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나는 성천조계공을 활성화했다.

감각을 날카롭게 해서 죽음의 기운 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찾 았다.

정면을 기준으로 45도 각도.

흑색 기운이 나풀거리는 곳을 발견 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임모탈 워리어 5 구를 불러냈다.

"너희. 여기서 일행을 지켜라."

『존명.』

"펭구야. 너한테 맡긴다."

-멍! 나만 믿어라.

지면 전체가 언데드 소굴인 죽음의 땅.

지원팀을 대동하고 들어가기에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여긴 혼자 다니는 게 편해.'

성천조계공에 이어 성스러운 불꽃 도 몸에 휘감았다.

모든 능력치 90% 증가!

막대한 힘이 샘솟았다.

나는 땅을 박차면서 운류보를 운용 했다.

언데드 군세에게 포위당한 금산 길

드 공격대를 지나, 그 안쪽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그어어어!"

"신선한 살. 나한테 줘라."

하급 언데드로 된 군세가 앞을 가 로막았다.

나는 놈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대 신, 발바닥에 혼돈기를 집중시켰다 가 일제히 터트렸다.

퍼엉!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몸.

부유감이 전신을 휘감는 것도 잠시 뿐, 금세 아래로 떨어졌다.

'어차피 잡졸. 경험치도 거의 안 주는 놈들이다.'

나는 오른발로 좀비의 머리를 밟으 면서 운류보를 재차 운용했다.

머리나 어깨.

언데드의 몸뚱이를 징검다리 삼아 서 군세 사이를 헤치고 목적지를 향 해 나아갔다.

"그겔? 산 자의 냄새가 났는데."

"머리 위다."

"그어어어...

언데드 군세가 머리 위로 팔을 휘 저으면서 날 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놈들이 나를 인식해서 팔을 뻗었을 때면 이미 지나간 뒤였다.

'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 비다.'

죽음의 땅.

게이트 전체가 괴물로 이루어진 공 간이다.

하급 언데드는 사람으로 치면 비듬 이나 때 같은 물질.

아무리 털어내도 본체인 사람에게 는 해를 끼치지 못한다.

'죽음의 땅을 유지하는 상급 언데

드를 쳐야 한다.'

나는 죽음의 기운이 강한 곳을 향 해 쉬지 않고 달려갔다.

3분 정도 전진했을 때.

쐐애액!

무언가가 먼 곳에서 날아들었다.

나는 육안으로 물체를 확인하기 전 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등을 스치고 지나간 물체가 지 면에 박힌 순간.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언데드 수십 마리가 폭발했다.

뼛조각과 썩은 살점이 비가 내리 듯, 내 뒤로 쏟아졌다.

-산 자여. 내 공격을 피하다니, 몸 놀림이 제법이구나.

확성기에 대고 말한 것처럼 크게 울리는 음성.

정면을 바라봤다.

목 위가 비어있는 언데드 기사.

상급 언데드, 듀라한이 유령마 위 에 올라탄 채로 날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금방 찾았네."

나는 듀라한을 보면서 의미심장하 게 웃었다.

80 화

목 없는 기사, 듀라한.

자신의 머리통을 허리춤 옆에 끼고 있는 언데드가 검은색 유령마를 타 고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검은 아지랑이가 흉흉하게 피어오 른다.

'상급 언데드. 이 녀석이 결계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죽음의 땅은 망자들의 원혼이 응집 되어서 만든 일종의 결계다.

이곳에서 생성되는 언데드는 파괴 되지 않는다.

머리나 핵을 부숴도 재생.

망자의 [죽음] 자체를 거부하는 영 역이다.

나는 뒤를 힐끗거렸다.

저 멀리.

금산 길드 제2공격대가 몰려드는 하급 언데드들을 마구 베어나갔다.

'저건 헛짓거리라는 거지.'

치려면 결계의 축이 되는 언데드를 파괴해야 한다.

바로.

저 듀라한처럼 말이다.

'저 녀석들도 고생 좀 했겠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부표처럼.

금산 길드 공격대는 언데드 군세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 다.

내 말을 잘 들었으면 떡이라도 얻 어먹었을 텐데.

-뒤에 있는 동료들이 걱정되나 보

군?

"동료는 무슨."

-걱정하지 마라. 이제 곧 너도, 저 들도 우리의 동료가 될 것이다.

듀라한은 왼손을 뒤로 뻗었다.

통에 들어 있는 쟈벨린을 쥐더니 팔을 한껏 젖히고는 앞으로 뻗으면 서 투척했다.

나는 섬전비도를 가볍게 쓰다듬었 다.

화르륵!

백염(白炎)을 휘감은 섬전비도.

[섬전비도술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5가 소모됩니다.]

곧장 쟈벨린의 궤도를 향해 빠르게 던졌다.

손바닥 크기 되는 비도가 2m 길이 의 쟈벨린과 충돌했다.

태행-!

충돌 순간, 강한 반발력이 일어났 다.

날아온 방향으로 도로 튕겨나 버리 는 쟈벨린.

나는 오른손 중지를 살짝 당겼다.

10m 이상 늘어났던 아라크네의 실 이 손가락 힘에 자극을 받아 빠르게 수축했다.

섬전비도는 빨려오듯 소매 안으로 들어왔다.

-으으. 이게 끝이 아니다. 일어나 라, 나의 군세여!

끼이이잇!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귀곡성이 주 위를 뒤덮었다.

검붉은 로브 수십 개가 허공 위로 떠올랐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

대신 흰 가면이 둥둥 떠다녔다.

검붉은 로브와 하얀색 가면. 중급 언데드, 다크 후드였다.

'마법에 특화된 언데드였나.'

지면에서 30m.

근접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저 산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하얀색 가면의 입이 아래로 분리되 더니, 덜그럭덜그럭 움직였다.

마법 영창.

각양각색의 마탄이 허공에 실체화 되었다.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언데드로 살 려낼 수가 없잖아?"

-네놈이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재미없는 녀석.

언데드가 되었다고 농담을 받는 세 포도 죽어버린 건가.

나는 성스러운 불꽃을 섬전비도 10개에 불어넣었다.

양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파바박!

공중을 향해 날아드는 섬전비도.

손가락 숫자에 맞춰서 비도를 모두

다루어내는 것.

섬전비도술의 진정한 사용 방법이 다.

비도 10개는 날아드는 마탄 공세 를 와해시켰다.

'아직 힘이 남아있다고.'

칼에 깃든 혼돈기.

그 위에 덧씌운 성스러운 불꽃은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았다.

손가락을 까딱이니, 비도 10개의 궤도가 살짝 틀어졌다.

칼끝은 공중을 부유하던 다크 후드 를 향했다.

-키이이이! 역겨운 기운이다!

-저기서 벗어나야 해.

비도 10개는 다크 후드의 본체를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투척 한 번으로 다크 후드 무리 절반을 소멸시켰다.

섬전비도에 실린 힘이 모두 소진되 자, 양손을 꽉 말아 쥐었다.

휘리릭.

비도가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왔 다.

-이, 이노오오옴!

듀라한이 유령마의 고삐를 마구 흔

들었다.

유령마가 발을 요란하게 퉁기면서 돌진했다.

말발굽에 밟힌 언데드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기고 산산조 각이 나버렸다.

엄청난 기세였다.

정면을 가득 채운 듀라한의 신형.

"그렇게 와주면 고맙지."

다크 스타를 청룡도로 변형.

[성화(聖火)의 권능]

[청룡도 - 청룡의 분노]

[오호단문도의 도기(刀氣)]

세 힘을 한데 엮어서 빠르게 휘둘 렀다.

콰르르릉!

하늘에서 땅으로.

회백색 기운이 한데 얽혀진 태도가 유령마와 듀라한을 동시에 베어냈 다.

-어? 왜 내 몸이 동강 났지?

듀라한은 '베였다', 라는 사실도 인 지하지 못한 듯했다.

이어지는 2초식.

청룡도를 빠르게 거두고 초식을 이

어갔다.

태도의 칼날이 수평선을 그었다.

서걱!

몸뚱이의 옆구리에 끼고 있던 듀라

한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경험치 2.5%를 획득했습니다.

네 등분으로 잘린 듀라한.

조각조각 난 채로 지면에 널브러졌

다.

그 순간,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커 다란 소리를 내면서 마구 요동쳤다.

"그어어어...

-그겔, 힘이, 사라진....

대지를 뒤덮었던 언데드의 물결.

끊임없이 솟구쳤던 스켈레톤과 좀 비는 돌연 머리를 땅에 처박거나 바 닥에 나뒹굴었다.

-경험치 0.01%가 올랐습니다.

-경험치 0.02%가....

- 경험치

귓가에 아른거리는 무수한 메시지!

죽음의 땅을 구성하던 축 하나를

파괴하는 순간.

축의 영향권 안에 있던 모든 언데

드를 처치한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한 번에 20%에 가까운 경험치가

올랐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영역에 묻혀있는 언데드들의 수를

합산하면 수만은 되었다.

D급 언데드 수만을 쓰러트린 경험

치.

기쁨에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 로 참아냈다.

'결계를 지탱하는 축은 더 있다.'

듀라한을 쓰러트리면서 걷어낸 지 역은 일부.

게이트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게 다 경험치라는 거네.'

할짝.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봐! 당신이 이 언데드들을 모두 해치운 거요?"

반들반들한 민머리가 인상적인 사 내.

오정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무, 무슨 수로 그 많은 언데드를 쓰러트린 겁니까."

오정우는 상당히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면서 극존칭을 썼다.

뭐,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축을 담당하는 언데드를 쓰러트려 야 해."

방법을 안다고 해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지나칠 수 있는 돌파력.

상급 언데드를 빠르게 쓰러트릴 수 있는 순간 화력.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죽음의 땅의 축을 파괴할 수 있다.

"그걸 알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듀 라한을 처치한 겁니까?"

"위험하기는 무슨."

나는 콧방귀를 꼈다.

고작해야 D급 언데드.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한들,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위험해 보이면 물러나 있든지."

넘실거리는 죽음의 기운.

금산 길드 공격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온통 경험치로 보였다.

'금산 길드가 선수 치기 전에 모든 축을 공략한다.'

파팟!

나는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 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금산 길드 제2공격대장, 오정우.

그는 평소 민철에게 안 좋은 감정 을 품고 있었다.

3개월 전, 헌터 시험.

홀로 흑의 삼연성을 박살 낸 사건 때문이었다.

'겁 없는 신입이 스승님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금진섭.

금산 길드의 마스터이자, 국내에서 5명뿐인 S급 헌터이다.

오정우는 흑의 삼연성과 마찬가지

로 금진섭에게 가르침을 사사 받았 다.

스승의 존재는 태양과도 같다.

그 태양 빛에 그림자를 드리운 헌 터, 전민철을 생각하면 화가 잔뜩 났다.

'언젠가 녀석을 만나면 금산 길드 의 무서움을 알려주겠다.'

술자리 등 사적인 자리에서 공공연 히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일까.

우연하게도 게이트 공동공략에서 민철과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정우의 눈빛이 혼란으로 번들거 렸다.

-위험해 보이면 물러나 있든지.

민철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

그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귓가에 맴 돌았다.

거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금 산 길드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 다.

그의 눈동자는 민철의 등에 고정되 었다.

'내 실수로 공격대를 위험에 빠트

렸다.'

제2공격대는 오정우의 지시대로 죽 음의 땅에 무턱대고 진입을 했다가 포위를 당했었다.

언데드의 등급은 높지 않았다.

압도적인 숫자가 문제였다.

하나를 해치우면 두 놈이 몰려들었 다.

한 손이 열 손을 막아낼 수 없다 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언데드 군세 앞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민철 헌터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었어.'

부끄럽다.

자신의 안전보다도 헌터들의 목숨 을 귀히 여기는 고귀한 마음가짐.

민철의 고결한(?) 마음을 모른 채 혼내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스 스로가 민망해졌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무리하게 나 섰잖아.'

죽음의 땅은 넓었다.

축 하나를 파괴했지만, 조금만 시 선을 돌려도 언데드가 바글바글했 다.

"그어어어어!"

"산 자. 산자다!"

언데드 군세는 무리 중에 가장 돌 출된 민철에게 어그로가 끌렸다.

제2공격대는 민철이 나서준 덕분에 재정비를 마칠 수 있었다.

"부상을 모두 치료했습니다!"

"저주나 독에 걸린 사람은 없나?"

"예. 전투에 지장이 없을 만큼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정우의 눈동자가 맑아졌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우리 길드는 이제부터 민철 헌터 를 지원한다."

죽음의 땅의 축을 노리는 민철.

그가 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게 끔, 언데드 군세의 시선을 분산시켜 줄 미끼가 필요했다.

제2공격대 헌터들은 오정우의 말을 이해했다.

"아까처럼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헌터들의 눈빛에 감도는 전의.

느닷없이 포위당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얘들아. 민철 헌터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자!"

"예!"

금산 길드 제2공격대는 전열을 가 다듬고 언데드 군세의 측면을 공격 했다.

쾅! 쾅!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응?'

금산 길드 공격대가 언데드 군세와 접전을 개시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설마.

'내 먹잇감을 가로채려는 건 아니 겠지?'

전열을 제대로 갖춘 제2공격대는 전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았다.

빠르게 회전하는 톱니처럼, 하급 언데드 무리는 충돌하는 족족 산산 조각이 났다.

언데드 군세 일부가 제2공격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운신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구경할 때가 아니잖아.'

아까 포위당했을 때 조금 더 고생 하게 둘걸!

너무나도 쌩쌩한 헌터들의 모습을 보니 잘못 판단한 듯했다.

'경험치는 양보 못 해!'

나는 운류보를 전력으로 운용하면 서 빠르게 내달렸다.

두 번째 축.

상급 언데드, 소울 이터가 입을 쩍 벌렸다.

-흐흐흐. 산 자여. 겁도 없이 이곳 으로 왔구나.

"시끄럽고. 죽어라."

다크 스타를 제왕의 검으로 변형, 성스러운 불꽃을 두르고 창궁무애검 법을 펼쳤다.

빛살같이 쏘아지는 찌르기.

소울 이터의 중심부.

실체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부위, 붉은 핵을 일격에 쪼개버렸다.

-끼아아!

소울 이터는 한 줄기 비명을 내지 르면서 소멸했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축을 담 당하는 상급 언데드도 빠르게 제거 했다.

-경험치 0.01%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0.02%를....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네 번째 축을 파괴하는 순간.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하고 레벨도 한 개 올릴 수 있었다.

'이제 하나 남았다.'

금산 길드의 방해(?)를 이기고 낸 성과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

축을 파괴하면서 수축되었던 죽음 의 땅에 변화가 생겼다.

81 화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땅이 원래의 색을 되찾 아간다.

썰물이 빠지듯 죽음의 땅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아직 끝이 아니다.'

파괴되지 않은 축 하나.

죽음의 땅의 잔여 기운이 최후의 축을 향해 집중되었다.

한데 모인 흑색 기운은 이족보행을 하는 생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 다.

40m 크기의 거인.

처음에는 거인의 형태였지만, 죽음 의 기운이 넘실대면서 팔과 다리를 여러 개 만들어냈다.

허리가 살짝 굽은 대형 괴물.

팔과 다리를 10개씩 가지고 있는 데, 육체를 구성하는 것은 수많은

시체들이 었다.

"저, 저게 뭐야."

"무슨 크기가 저렇게 커?!"

"으으....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금산 길드 헌터들은 몸서리를 치면 서 뒤로 물러났다.

어보미네이션.

죽음의 땅의 기운이 뭉쳐서 만들어 진 괴물의 이름이다.

곧장 진실의 눈을 사용했다.

[어보미네 이션]

근력 : 657 / 민첩 : 233 / 체력

: 755 / 맷집 : 666

* 특성

죽음 군집 [B]

세계의 가히B]

* 스킬

부패의 손길[B]

죽음의 숨결 [B]

죽음의 메아리(r)]

약 40m 크기의 초대형 괴수.

유독 낮은 민첩을 제외하면 펜리르 보다도 더 스탯이 높았다.

"으으 "

나는 혀를 내둘렀다.

높은 스탯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놈의 흉측한 외모 때문에 역겨워서 였다.

'어보미네이션은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

옛 전장에서 죽어버린 모든 사체를

엮어서 만들어진 괴물.

그 흉측한 외모만큼이나 강대한 힘 을 지녔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쓰러트렸을 때 얻을 보상을 생각하면서 전의를 불태웠 다.

'생긴 것은 저래도 완전 혜자니까.'

수십만 언데드를 뭉쳐서 만든 거대 한 괴수.

걸어 다니는 경험치 덩어리다.

또한 어보미네이션을 유지하는 [죽

음의 핵]은 엄청난 암흑 마나를 품 고 있어서 희귀 아티팩트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

"민철 헌터."

오정우가 나를 불렀다.

한껏 풀어진 목소리.

착각이라도 한 걸까. 조금 전 음색 에는 적대감 대신 경외감이 느껴졌 다.

나는 아까 일도 있고 해서 말을 편하게 놨다.

"무슨 일인데?"

"지원 요청을 부르겠습니다. 저건

우리 선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빠져."

[다크 스타 - 제왕의 검]

기다란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저건 내 먹이다. 손대지 마라."

나는 칼끝을 어보미네이션에게 겨 누었다.

『Umoooo!』

죽음의 메아리.

산 자의 마음을 공포로 물들이고

혼에 충격을 입히는 귀곡성이다.

어보미네이션에게 엮인 시체 수십 만 구가 동시에 입을 벌리면서 괴성 을 질렀다.

"끄으으...!"

오정우는 한 줄기 신음을 흘렸다.

뒤에 있던 헌터들은 상태가 더 좋 지 않았다.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벌벌 떨거나 어보미네이션을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금산 길드 제2공격대는 죽음의 메 아리를 듣고 전의를 상실했다.

'어설프게 도전하는 것보다는 저게 낫군.'

[성스러운 불꽃이 삿된 기운을 몰 아냅니다.]

[마비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원혼의....]

죽음의 메아리 따위.

미카엘의 권능, 성스러운 불꽃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정면으로 돌진했다.

『산 자. 너도. 우리와. 함께.J

『아프다. 아파.』

『따뜻한 피. 살. 원한다.』

어보미네이션은 오른쪽에 달린 팔 5개를 크게 휘둘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하늘을 가득 메운 어보미네이션의 팔

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기에 틈이 있다.'

혼돈기를 발바닥에 밀집, 일거에 방출했다.

콰아앙-!

어보미네이션의 팔 여러 개가 한발 늦게 지면으로 떨어졌다.

'놈, 아니 놈들의 공격은 역시 정 교함이 부족하다.'

하나이면서 군체.

어보미네이션은 여러 원령과 언데 드의 사체를 엮어서 만든 누더기 괴 물이다.

최소 수십.

자아를 가진 원혼들이 어보미네이 션을 움직인다.

오합지졸 여럿이 한 몸뚱이를 조종

하는 꼴이니, 지닌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너도 우리와 함께하자.

-동료다. 동료.

-죽음으로 속죄해라.

큰 원혼들이 아닌, 어보미네이션에 게 깃든 잡령들이 입을 벌렸다.

팔과 팔 틈새.

썩어 문드러진 팔 수십 개가 좁은 공간에 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어보미네이션의 몸뚱이에서 뛰쳐나 온 팔이다.

아까 금산 길드 공격대가 죽음의

땅에 발을 디뎠을 때를 보는 듯했 다.

[창궁무애검법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56을 소모합니다.]

나는 제왕의 검을 크게 휘두르면서 검막을 형성했다.

흑색 검기로 만든 견고한 막.

언데드들의 팔이 썩둑썩둑 잘려 나 갔다.

'여기서 끝내면 안 되지.'

[성화(聖火)의 권능]

[제왕의 검 - 중압]

[창궁무애검법]

두께만 수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팔

제왕의 검이 바로 앞에 있는 어보 미네이션의 팔을 베었다.

'미카엘의 권능은 부정한 기운과 상극이다.'

성스러운 불꽃이 팔뚝을 휘감고 있 던 삿된 기운을 소멸시키고, 뒤이어

중압의 힘이 깃든 흑색 검기가 시체 로 엮어서 만든 팔을 분쇄했다.

썩은 열매가 툭 떨어지듯.

왼쪽 팔 하나가 지면에 나뒹굴었 다.

[지옥의 겁화를 사용합니다.]

[마력 150을 소모합니다.]

검붉은 불꽃을 잘려 나간 팔 부위 에 붙였다.

'재생을 못 하게 봉쇄해주마.'

겁화는 시체를 집어삼키면서 금세 규모를 불려 나갔다.

지옥의 불꽃이 잘린 단면 전체를 장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 다.

나는 다시 한번 [진실의 눈]을 사 용했다.

[근력 : 657 _ 631]

[민첩 : 233 _ 206]

어보미네이션의 능력치가 눈에 띄 게 감소했다.

'전생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놈은 하나이면서 군집체.

수많은 원혼과 시체의 기운이 뭉쳐 져서 탄생한 괴물이다.

몸뚱이 일부를 잘라내면 그만큼 죽 음의 기운도 손실을 보고, 전투력도 떨어졌다.

물론.

어보미네이션의 몸뚱이를 그만큼 갉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설령 팔 하나를 잘라내더라도 다시 근접하는 순간 트롤처럼 재생능력을 발휘해서 전투능력을 회복했다.

'성스러운 불꽃과 지옥의 겁화가 있으면 그 재생능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미카엘의 권능.

온갖 부정한 기운과 삿된 것을 몰 아내는 성스러운 불꽃.

언데드에게는 그야말로 상극이다.

성스러운 불꽃으로 절단해버리고 이음새를 겁화로 태워버리면, 어보 미네이션의 잘난 재생능력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라내다 보면 저 엄청난 스탯도 바닥을 드러낼 거다.'

40미터는 너무 크잖아.

눈높이에 맞게 좀 잘라줘야지.

『Umooob

『산 자. 죽인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

온갖 원령의 비명이 귀를 어지럽혔 다.

"이거나 드셔."

나는 오른손 중지를 펴는 걸로 대 답을 대신했다.

米 氷 米

어보미네이션은 온몸이 무기였다.

뼈 수천 개 난사.

시체 독 안개 뿌리기.

팔을 수십 개로 늘려서 지면 강타.

그 외에도 몸뚱이를 활용할 수 있 는 방법이라면 뭐든 동원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정면만 피하면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600대에 달하는 근력.

그 근력은 [두꺼운 팔을 전력으로 휘두를 때]를 전제로 한 능력치였

다.

팔에서 솟아나는 뼈 한 가닥에 600대의 근력이 실릴 리 없다.

전력을 다한 공격은 피하고 자잘한 건 쳐내면서 연신 놈의 몸뚱이에 상 처를 새겨 넣었다.

성스러운 불꽃이 만든 커다란 틈 새.

그 안에 지옥의 겁화를 불어 넣어 서 팔과 다리를 끊어내고 몸통 안을 태웠다.

'펜리르와 싸웠던 경험을 이렇게 써먹을 줄 몰랐군.'

쉼 없이 이어진 접전.

40m 크기의 괴물을 작게 잘라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인보우 링의 회복 능력까지 사용 했다.

'혼돈기는 이제 바닥이다.'

심상 세계에 깃든 별들은 기운을 거진 소모해서 빛을 잃어갔다.

팔과 다리도 후들거렸다.

후욱.

나는 달아오른 폐부에 공기를 넣어 주고, 정면을 바라봤다.

어보미네이션은 재차 죽음의 메아

리를 발산했다.

전처럼 소리가 요란하지 않았다.

작아진 몸뚱이.

아파트 크기만큼 육중했던 덩치는 어느새 10m까지 줄어들었다.

'저거 잘라내느라 더럽게 힘들었 지.'

나는 손등을 들어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어보미네이션 사냥은 전투라기보다 고된 노동처럼 느껴졌다.

40m 높이 건물을 칼로 일일이 쳐 낸다고 생각해봐라.

혼돈기가 바닥을 드러내니, 피로감 이 급격하게 몸을 잠식해갔다.

"아이고, 힘들다. 나머지는 너희가 좀 처리해라."

『존명!」

후방에서 대기하던 임모탈 워리어 두 기를 앞으로 불렀다.

'이쯤이면 이 녀석들을 써도 되겠 지.'

어보미네이션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집합체이다.

언데드 중에는 최상급 괴물.

권능으로 제작한 임모탈 워리어라

고 해도, 어보미네이션과 근접전을 벌이면 역으로 흡수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기운이 줄어든 지금은 달랐 다.

『지존께서 명하셨다. 죽어라.』

『Umoooooo!』

임모탈 워리어 2기는 암흑 마나로 생성한 도끼를 들고 어보미네이션의 몸뚱이를 마구 찍었다.

-경험치 42.2%를 획득했습니다.

폭발적으로 오르는 경험치.

여러 시체를 엮어서 만든 거대 괴 수

어보미네이션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육편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소멸되었 다.

'지원팀이 할 일이 없네.'

언데드가 주로 출몰하는 게이트는 헌터들에게 인기가 없다.

시체 상태인 언데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극히 제한 적이며, 쓰고 있는 장비도 낡거나 저주받은 게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어보미네이션한테 흡수되 었다가 갈기갈기 찢겨 졌으니.

'건진 건 이거밖에 없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 구슬.

[죽음의 핵]이다.

나는 검은 구슬을 줍자마자 아공간 에 집어넣었다.

죽음의 핵은 강대한 기운으로 시체 를 조종, 끊임없이 언데드를 생성해 낸다.

'여기서 오래 둬서 좋을 건 없다.'

죽음의 핵을 회수하고 지원팀이 있 는 곳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옆에는 금산 길드 제2공격대가 꿔 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설프게 서 있었다.

"뭐야. 당신들, 아직 안 갔어?"

첫인상부터 안 좋았다.

특히 두피가 반들반들한 아저씨는 시비조로 말을 걸어서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설마 이제 와서 권리를 운운하고 그러진 않겠지.'

금산 길드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곱 지 않았다.

그때, 오정우가 앞으로 나섰다.

"민철 헌터. 할 말이 있어서 기다 렸습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처음 봤을 때와는 목소리 톤이 완 전히 바뀌었다.

공손하면서도 예의 바른 음성.

저 벗겨진 머리만 아니면 다른 사 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뭔데. 들어나 봅시다."

"처음에 시비조로 말한 걸 사과드 립니다. 내가 당신을 오해했습니다."

오정우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거야.

'진짜 사과하는 거야?'

금산 길드와 나는 언데드 몬스터를 누가 빨리 해치우나 경쟁(?)하던 사 이였다.

아이템의 소유권을 두고 이야기하 기 전에 밑밥을 까는 건 아닐까.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오정우는 본인의 할 말을 계속 이 어갔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저희 공격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얘네... 왜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거야?

82 화

[동인천역 게이트] 공략을 마치고 수련장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죽음의 핵을 어떻게 사용하지?'

전장에 감도는 죽음의 기운이 고농 도로 밀집된 구슬.

죽음의 에너지는 암흑 마나의 한 갈래였다.

'전생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취했겠 지.'

암흑 마나의 정수.

능력 있는 악마라면 죽음의 핵을 흡수해서 단번에 마력을 껑충 늘릴 수 있다.

스탯으로 치면 약 80포인트.

16레벨을 올려야 얻을 수 있는 능 력치가 검은 구슬 안에 잠재되어 있 다.

'근데 그건 악마잖아.'

현생의 나는 인간이다.

죽음의 핵에 내제된 힘을 흡수하려 고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나한테는 성력과 암흑 마나를 동시 에 다루는 희대의 심법, 성천조계공 이 있었다.

'그치만 바로 흡수하기는 꺼림칙하 단 말이야.'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

두 성운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죽음의 핵에 깃든 암흑 마나를 소 화해내면 대칭도 무너질 것이다.

전생에는 암흑 성운만 활성화되었

기에 거리낄 것이 없지만.

현생은 두 가지 힘을 동시에 다루 기 때문에 섣부르게 흡수할 수가 없 었다.

'세계석의 기운도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잖아.'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세계석.

창조의 근원이 깃들어 있다는 강력 한 광물.

탑 튜토리얼 보상으로 받은 세계석 을 성천조계공으로 흡수, 심상 세계 에 태양으로 구현해냈다.

정정하자.

구현보다는 보관이라는 말이 더 어 울렸다.

세계석의 힘도 모두 흡수하지 못했 는데, 거기에 죽음의 핵을 더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죽음의 핵을 흡수하기는 꺼려졌다.

'이걸 다룰 수 있는 장인도 흔치 않고.'

죽음의 핵은 성간 연합의 마이스터 도 다루어낼 수 없다.

암흑 마나에 익숙한 존재.

악마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죽음

의 핵을 벼려내어 아티팩트로 만들 수 있다.

'막상 얻었는데 쓸 곳이 마땅찮다.'

人,•

나는 혀를 찼다.

"...그런고로 내일은 공략 일정이 없어요."

"응?"

"그 반응은 뭐에요. 혹시 브리핑 안 들은 건 아니죠?"

두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차 안.

엘리는 브리핑용 태블릿을 내려놓 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안 들으셨 나요."

"공략 일정이 없다는 말부터."

"하나도 안 들으셨다는 거네요."

"미안."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죽음의 핵 처리 여부를 고민하다가 엘리의 이야기를 모두 놓쳐버렸다.

"지원팀 휴식과 길드 간에 입찰 경 쟁이 심해져서 내일은 게이트 섭외 를 안 하기로 했어요."

"갑자기 입찰 경쟁이 심해진 거 야?"

"최근 로스트 랜드 공략이 끝났거 든요."

로스트 랜드.

직역하면 잃어버린 땅이다.

1차 대격변.

게이트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났고, 시간이 지나자 일제히 게이트 브레 이크를 일으켰다.

'브레이크 상태로 오래 방치하면 지구와 게이트의 벽이 흐릿해진다.'

게이트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융합.

현세에 존재하는 게이트, 괴물들을 생성해내는 땅이 되고 만다.

인류는 1차 대격변 직후 대응 시 기를 놓쳐서 전 세계 면적 중 40% 가량을 소실했다.

1차 대격변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로스트 랜드 중 복구한 것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여전히 전 세계에서 30% 정도는 괴물의 땅으로 전락해 있었다.

"국내 쪽이면 강원도 북부랑 예전 휴전선 쪽이지?"

네. 대형 길드의 주력 다수가 돌

아왔으니,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졌 네요."

헌터 협회에서는 주기적으로 길드 에서 로스트 랜드 토벌 인원을 지원 받았다.

대형 길드 소속 공격대들이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게이트 섭외에도 영향을 끼쳤다.

'요즘 귀찮은 일이 많아졌네.'

공동공략에 이어 게이트 낙찰 경쟁 이라니.

마음 편히 레벨을 올리는 데 집중 할 수가 없었다.

"걱정하실 건 없어요. 확정적으로

A급 게이트를 수주할 수 있는 권한 도 있으니까요."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 나."

"그런고로 다음 공략 일정은 이틀 뒤니까 잊지 말아 주세요."

"오냐. 꼭 기억하마."

엘리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米 #: #: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온 전화.

하린 린스우드였다.

-민철 님. 오늘은 찾아가지 못할 것 같은 것이에요.

"무슨 일 있나?"

-진법을 처음으로 건물에 적용해 본 것이에요.

"알려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걸 적용하다니."

하린이 전한 소식은 꽤 고무적이었 다.

진법을 건축물에 적용하려면 마나 의 흐름과 기둥의 배치 등 하나하나

를 신경 써야 한다.

하린은 벌써 배운 진법 일부를 건 축물에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은 실험단계인 것이에요. 결 과가 나오면 바로 말씀드리는 것이 에요.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다."

-기대해도 좋은 것이에요.

통화를 끊고 난 직후.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일까지 일정이 다 비어버렸네?'

게이트 공략.

진법 교육.

그리고 수련.

경매가 끝난 뒤, 한 번도 흐트러지 지 않은 일정이었다.

갑자기 일정이 뭉텅 빠져나가니 기 분이 묘했다.

'수련이나 해야겠어.'

뒤통수를 긁으면서 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군! 오늘도 무탈하게 귀환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축하할 게 따로 있지. 검법이나 수련해."

나를 반기면서 수련을 잠시 멈추는 에인헤야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손을 휘 휘 저으면서 짧게 잔소리를 했다.

『Yes. My Lord!j

에인헤야르 4기는 충직하게 대꾸하 면서 검을 휘둘렀다.

하여간 고지식한 건 닭 날개 녀석 들을 그대로 빼닮았어요.

내 수련을 시작하기 전, 에인헤야 르가 펼치는 매화검법을 한번 살펴 봤다.

초식을 연습하는 중에 이상한 습관

은 생기지 않았는지.

힘의 배분은 적절한지.

'큰 문제는 없다.'

혼에 새겨진 투쟁의 업.

에인헤야르는 내 전생의 지식 일부 를 이어받고 그걸 체화하는 중이었 다.

원래는 검법 수련을 할 때 스승이 참관해야 하지만.

기억의 전승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번거로운 과정을 모두 넘겼다.

덕분에 수련 과정을 봐주지 않아도 무공 성취가 쭉쭉 늘어났다.

우웅!

10배 높은 고밀도의 마나.

에인헤야르가 검법을 휘두를 때마 다 성력에 반응해서 몸을 자극시키 고 무공의 성취도를 더욱 빠르게 향 상시 켰다.

그 순간.

'자극이라고?'

수련을 지켜보던 중, 죽음의 핵을 활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매끈거리는 검은 구슬.

[동인천역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어보미네이션을 쓰러트리고 얻은 죽 음의 핵이다.

사아아아!

죽음의 핵 주위로 검은 기류가 내 려 앉았다.

농밀한 죽음의 기운.

평범한 사람이라면 맡기만 해도 중 상에 이를 만큼 강력한 파동이다.

죽음의 핵과 맞닿은 피부가 따끔거 렸다.

성천조계공을 운용하지 않으면 내 육신에도 피해를 줄 만큼 강한 에너 지였다.

'이 기운을 세계석을 자극하는 용 도로 쓰는 거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죽음의 핵이 내뿜는 강력한 파동.

가공하지 않은 채로 심상 세계로 흘려보내 세계석을 자극, 기운을 활 성화시키는 건 어떨까?

만약 내가 세운 가정이 맞는다면, 세계석의 힘을 대량으로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실패하면?

죽음의 핵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게

된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능성은 충분해.'

이틀 동안은 일정이 하나도 없다.

실험해볼 시간은 충분했다.

『주군! 사악한 기운이 느껴집니 다!』

『사특한 마나를 품은 요물입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죽음의 핵을 경계하는 에인헤야르.

지금은 분위기를 깨는 헛소리를 해 도 귀엽게 보였다.

"에인헤야르야."

『주군. 부르셨나이까!』

"너희 덕분이다. 잘했다."

처음으로 에인헤야르한테 칭찬을 했다.

본인들은 정작 칭찬을 받는 원인도 모르고 있지만.

『주군께 칭찬을 받았다.』

『본인, 카스파는 오늘을 잊지 않 을 것입니다.』

『주군!』

에인헤야르 4기는 신나서 요란하게 떠들었다.

나는 검지를 곧게 펴서 입술에 가 져다 대었다.

"잠깐. 조용히 좀 있어 봐."

형 집중 좀 하자.

나는 세계석의 기운을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게끔 머릿속으로 시뮬 레이션을 굴렸다.

* * *

나는 가부좌를 틀고 수련장 바닥에 앉았다.

발 위에는 죽음의 핵을 올려두었

다.

드라이아이스처럼, 농밀한 죽음의 기운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 시켰다.

'시작하자.'

철컥.

심상 세계의 통로를 여는 소리.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정신에 자리를 잡은 소우 주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환하게 빛나는 빛의 성운.

검게 타오르는 암흑 성운.

대칭을 이루는 두 성운 사이에 자 리를 잡은 세계석 태양.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 마냥 아름다 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까지는 평소랑 똑같다.'

기존의 수련 방식은 혼돈기를 빚어 내서 세계석의 기운을 추출하는 것 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죽음의 핵].

나는 죽음의 핵이 내뿜고 있는 강

력한 기운을 체내 안으로 불러들였 다.

'으 '

혈관을 불로 지지면 이런 느낌이 들까.

죽음의 기운은 산 자를 거부하는 독이다.

그 기운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니, 몸이 발작을 일으켰다.

'심상 세계로 끌고 들어갈 때까지 만 참아야 해.'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버텨냈 다.

죽음의 기운은 하단전과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까지 역류했다.

심상 세계에 쏟아진 검은 기운.

[죽음의 핵]이 내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였다.

화아아아악!

세계석의 기운이 형상화된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혼돈기로 부드럽게 긁어냈을 때와 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힘 이었다.

항성 내부가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 으키면서 강렬한 힘을 발산했다.

그 힘은 심상 세계 속 소우주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래. 이거였어!'

병균이 들어오면 백혈구가 몰려들 듯.

세계석은 외부의 기운에 자극을 받 자 더 많은 힘을 풀어내면서 소우주 를 보호했다.

양쪽 성운의 기운이 빠르게 불어났 다.

[성천조계공의 성취도가 1% 상승 했습니다.]

[혼돈력이 0.5 늘어났습니다.]

[성천조계공의 성취도가...』

끊이지 않고 몰려드는 죽음의 기 우

세계석은 [죽음의 핵]에게 맞서기 위해 쉬지 않고 에너지를 뿜어댔다.

'소우주의 완성도가 올라가고 있 다.'

심상 세계를 관조하고 있기에, 소 우주에 찾아온 변화를 모두 알 수 있었다.

툭, 데구르르.

마침내.

모든 기운을 소진한 죽음의 핵은 껍데기만 남긴 채 바닥에 나뒹굴었 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야 해.'

나는 상단전을 열고 혼돈기를 전신 세맥에 흘려보냈다.

혼돈기가 죽음의 기운에 손상된 몸 을 어루만진다.

'다시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군.'

만신창이가 된 몸.

몸뚱이를 죽음의 기운의 통로로 사 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죽음의 핵에 담긴 에너지가 더 많았더라면, 신체에도 심대한 타 격을 입혔을 것이다.

'운이 좋았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탕된 몸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뒤.

나는 상태창을 활성화해서 성천조 계공의 성취도를 확인했다.

83 화

[성천조계공의 경지가 6성에 도달 했습니다.]

[성천조계공의 영향을 받아서 신체 가 강화됩니다.]

[근력이 12 증가합니다.]

[민첩이 12 증가합니다.]

[맷집이 10 증가합니다.]

[체력이 10 증가합니다.]

[혼돈력이 40 증가합니다.]

[세계석의 기운을 녹여내서 혼돈력

80이 추가로 증가합니다.]

*5성 특전

혼돈기 추가 50%

*6성 특전

소우주에 별자리를 새길 수 있습니 다.

나는 바닥을 훑었다.

텅 비어버린 죽음의 핵.

안에 있는 모든 기운은 세계석을 자극하는 촉매로 소모되었다.

정제 과정을 거쳐서 흡수했으면 스 탯으로 80포인트 정도 되는 막대한 암흑 마나.

판데모니엄의 악마라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탐을 낼 만큼 엄청난 가치 를 지닌 물건이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한 번 소모된 기운은 다시 채워지 지 않는다.'

죽음의 핵은 커다란 그릇.

그 그릇에 담긴 '암흑 마나'는 사 라졌다.

판데모니엄의 장인에게 맡기면 최 소 [레전드] 등급을 만들 수 있는 재료.

적절한 가공 과정을 거치면 악마의 힘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보물이다.

그걸 일회용으로 사용해버렸다.

'제 역할을 충분히 했군.'

입가에 감도는 미소.

아까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력 스탯 80포인트?

성천조계공의 성취를 6성까지 끌어

올린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저

렴했다.

[성천조계공 : 4성 一 6성]

세계석을 처음 받아들였던 때와 마 찬가지로 성취가 순식간에 2단계나 훌쩍 상승했다.

나는 눈을 감고 심상 세계를 관조 했다.

소우주에 흘러넘치는 힘.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 주위로 흐 르는 에너지가 한층 강력해졌다.

[혼돈력 : 320 _ 420]

[혼돈기 : 5,270 _ 9,240]

혼돈력이 단번에 100포인트 상승.

5성 특전으로 보유 혼돈기가 50% 추가되었다.

늘어난 혼돈기는 거의 2배에 육박 했다.

'뭐, 이건 부가적인 거지.'

내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천조계공 6성.

심법의 진가가 발휘되는 건 바로 6성부터 였다.

[별자리]

별자리는 별과 별 사이의 흐름을 이어서 만들 수 있습니다.

별의 흐름 사이에 새길 수 있는 것은 사용자의 업적입니다.

심상 세계의 소우주는 사용자의 혼 에 새겨진 업적을 판단하여 별자리 를 만듭니다.

성천조계공은 심상 세계에 소우주 를 빚어내는 심법이다.

듣기에는 거창해 보이지만, 5성까 지는 그저 효율이 꽤 뛰어난 여러 심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순수 성능만 놓고 보면 성천조계공 과 어깨를 견줄 만한 심법도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천마신공처럼 말이야.'

천마신공 (天魔神功).

마교의 창시자이자, 무 대륙의 역 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절대적인

강자.

천마의 독문 무공이자, 심법이다.

'심법의 성능만 놓고 보면 천마신 공이 위일 거다.'

역대 마교 교주의 위에 오른 무인 에게만 허락되는 절세의 무공.

천마신공은 숨만 쉬어도 자연지기 에 있는 암흑 마나를 빨아들이면서 절로 그 기운을 더해간다.

심법의 기초를 닦아두면 자연지기 를 흡수해서 스스로 내력을 불려 나 가는 신공이다.

무 대륙에는 천마신공과 어깨를 견 줄 수 있는 절세신공이 더 있다.

북명신공.

혈천수라공.

선천공.

어느 것을 우위라고 손꼽기 어려울 만큼 모두 절세의 신공들이다.

'그것들보다 성천조계공이 위인 이 유는 한 가지다.'

성천조계공 6성.

소우주에 있는 수많은 행성들 사이 를 이어서 [별자리]를 새기는 것.

진정한 성천조계공의 시작은 바로 6성부터 였다.

나는 높이 올라가서 심상 세계 속

소우주를 관조했다.

발아래 있는 우주.

수많은 별들이 세계석으로 만들어 진 태양을 사이에 두고 빙글빙글 돌 았다.

'전생의 우주는 이렇게 여러 빛을 품고 있지 않았지.'

암흑 성운으로 가득했던 우주.

강력했지만.

그만큼 차가운 우주였다.

투장 데이모스 때 익혔던 성천조계 공은 반쪽짜리.

지금은 암흑 성운만 있는 게 아니

었다.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빛의 성운.

강대한 두 기운은 판데모니엄과 엘 리시움이 대립을 이루는 것처럼, 서 로를 마주하고 회전하면서 대칭을 이루었다.

'그때보다 새길 수 있는 별자리가 더 다양할 것이다.'

나는 우주 일부에 손을 대었다.

[현재 소우주에 새길 수 있는 별자

리는 총 3개입니다』

[사용자의 혼에 쌓인 업적을 검색

합니다.]

[검색 결과 별자리로 새길 수 있는 업은 다섯 가지입니다』

-죄악 자리.

-죽음 자리.

-빛의 군주 자리.

-성염 자리.

-혼돈구체 자리.

'못 보던 것들이 많아졌다.'

죄악, 그리고 죽음.

전생에도 봤던 별자리다.

죄악 자리는 말 그대로 [죄악] 의 권능을 얻으면서 창조할 수 있게 된 별자리 였고.

죽음 자리는 수많은 죽음을 극복해 낸 뒤에 생긴 것이다.

'죽음의 핵의 기운을 정면으로 마 주한 영향인가.'

죄악과 죽음.

별자리의 등급은 죄악이 훨씬 위였 다.

명색이 72좌의 악마에게만 주어지 는 권능이니, 업에 맞춰 생성된 별 자리의 기운도 훨씬 강력했다.

하지만.

성염과 빛의 군주.

그리고 혼돈구체라는 별자리는 처 음 들어본다.

'내용을 알고 싶은데?'

[성염 자리]

성스러운 화염의 수호신. 미카엘의 가호를 받은 별자리이다.

* 혼돈력 30 증가.

*성화의 권능 사용 시 성력 소모 50% 감소.

*성화의 권능의 효력이 2배로 증 가.

[빛의 군주 자리]

빛의 군세를 이끄는 위대한 군주를 기리는 별자리다.

*성력(혼돈력) 15 증가.

*에인헤야르의 성장률 100% 증가.

* 에인헤야르 숫자 2기 증가.

[혼돈구체 자리]

근원의 힘을 다루는 존재에게 허락

된 영광된 별자리이다.

*혼돈력 50 증가.

* 혼돈의 권능을 다룰 수 있다.

* 혼돈기 소모량 30% 감소.

*혼돈기 회복 능력 100% 증가.

'응. 빛의 군주는 아니야.'

셋 중에 걸러야 할 것 하나를 바 로 솎아냈다.

에인헤야르의 성장률 증가는 장래 를 위해 투자할 만했지만.

성염 자리와 혼돈구체 자리에 붙은

옵션이 너무 뛰어나서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우선 내 힘이 먼저다.'

수하들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건 내 성격과 맞지 않다.

성염 자리는 성스러운 불꽃의 권능 의 효능을 확 끌어올려 주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나머지 하나.

혼돈구체의 설명에 눈이 갔다.

'둘 다 물음표로 표시되어서 쓸 수 가 없었지.'

성화 / 겁화의 권능.

빛의 군세 / 불멸의 권능.

정작 두 힘을 융합시켜서 만들어낸 '혼돈기'를 활용한 권능은 [???] 표 시가 된 채로 묶여 있었다.

'결정했다.'

현재 새길 수 있는 별자리는 3개.

-죄악 자리.

-성염 자리.

-혼돈구체 자리.

내가 고른 별자리였다.

'이제 일을 시작해볼까.'

별자리는 그저 마음만 먹는다고 해

서 새겨지는 게 아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 사이의 배치를 보고 선을 이어 별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이제부터 해야 하는 일도 비슷하 다.

대신, 별과 별 사이에 혼돈기로 선 을 그어야 한다.

도예가가 진흙을 빚어내서 모양을 내고 화덕에 넣어서 바짝 굳히듯.

나는 혼돈기를 운용해서 별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업을 새겨 넣어야 한다.

'일정이 비어서 다행인 건가.'

오후부터 내일 밤까지.

별자리를 소우주에 새길 시간은 넘 쳤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쉬고, 곧장 혼돈기를 끌어 올렸다.

* 米 *

먼저 새길 별자리는 죄악 자리였 다.

'오래된 성의 모양이었지.'

권능을 하사받는 공간.

죄악의 전당을 빼다 박은 형태의 별자리다.

나는 혼돈기를 손가락에 응축시켜 서 유독 큰 암흑 성운 하나를 찍었 다.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지 못하면 별자리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

별과 별.

혼돈기로 빈 우주 공간을 쭉 그으 면서 다른 별을 접붙였다.

죄악 자리는 이미 전생에 수도 없 이 봤던 별자리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금방 별

자리를 소우주에 안착시킬 수 있었 다.

[죄악 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죄악 자리]

판데모니엄 심층부에 있는 요새, 죄악의 전당을 본떠 만든 별자리이 다.

* 혼돈력 30 증가.

*죄악의 권능 사용 시 소모 마력 30% 감소.

암흑 성운 10개를 이어서 만든 죄 악 자리.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고성(古城) 이 소우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화아아악!

강렬한 힘의 폭풍이 소우주에 몰아 닥쳤다.

별자리가 생성되면서 신체에 그 효 과가 곧장 적용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다만.'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전생 때 수도 없이 봤던 별자리를

다시 그려내는 건 쉬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별자리를 새겨야 한다.

'각 별의 기운, 그리고 별자리의 형태를 모두 감안해야 해.'

별자리를 구성하는 성운의 기운이 모자라거나.

혹은 별자리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 는 이름일 경우에는 별자리가 생성 되지 않는다.

'기운도 무한한 건 아니다.'

별자리를 잇는 도료는 혼돈기다.

모든 기운을 소모하면 별자리를 새

기는 작업을 더 이어갈 수 없다.

나는 빛의 성운들을 쭉 훑어봤다.

'성염 자리는 죄악 자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별자리에 붙은 부가 능력치.

스테이터스 시스템 덕분에 새겨보 지 않은 별자리의 등급도 보다 정확 하게 알 수 있었다.

성운들의 숫자와 에너지 총합은 죄 악 자리와 비슷하게.

그러면서도 불꽃의 형태를 형상화 시킬 수 있는 별들을 빠르게 훑어봤 다.

'좋아. 이거면 가능하겠어.'

나는 혼돈기를 아라크네의 실처럼 쭉 늘렸다.

길게 늘어난 혼돈기.

빛의 성운 하나를 시작점으로 잡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죄악 권능과 마찬가지로 빛의 성운 열 개를 이었더니, 곧장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성염 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스러운 불꽃.

불의 별자리가 빛의 성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단번에 성공한 덕분인지, 혼돈기는 넘쳐났다.

별자리를 새기면서 혼돈력이 60 추가되었고, 덕분에 혼돈기도 1만을 넘어섰다.

'이제 무공을 펼칠 때 내력을 걱정 할 필요는 없겠어.'

절세 무공인 칠성마검 전 초식을 3번 연속 전개해도 떨어지지 않는 내력이다.

별자리 두 개를 새겼음에도, 심상 세계 속 소우주는 여전히 엄청난 혼 돈기를 내뿜었다.

'근데 혼돈구체는 뭐 하는 별자리 야?'

성염 자리는 빛의 성운.

죄악 자리는 암흑 성운에 기반을 두는 별자리다.

혼돈구체는 다르다.

태생부터가 빛과 어둠, 양쪽을 내 포하고 있는 별자리였다.

'별자리 모양은 대충 생각나는데.'

구체라고 했으니.

단순히 원 형태로 그려내면 되지 않을까.

나는 혼돈기를 다시 한번 쭉 늘여 서 암흑 성운을 크게 감싸는 형태로 이어붙였다.

이번에는 20개.

'스탯을 50포인트나 주니, 전의 권 능보다 더 많이 들어가겠지.'

이왕이면 큼지막하게.

아끼지 않고 별들을 이었다.

마침내 원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혼돈구체 권능이....]

기다리던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84 화

[혼돈구체 별자리의 형태를 잡아내 는 데 실패했습니다.]

쩌어엉!

손가락이 강한 반탄력에 튕겨 났 다.

짧게 흘러나오는 비명.

커다란 파문이 심상 세계 속 소우 주에 휘몰아쳤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무수한 별들.

광활한 우주를 본떠서 만들었으나, 본질은 내 정신이다.

심상 세계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면 서 자리 잡았던 소우주도 흐트러진 것이다.

'젠장. 실패라고?'

골이 울리는 충격.

술을 진탕 마신 것처럼 어지러웠

다.

나는 곧장 성천조계공의 구절을 떠 올리면서 심법을 운용했다.

불안정했던 소우주가 금세 출렁거 림을 멈추고 안정을 되찾아간다.

'두 성운을 섞어야 하는 건가?'

다시 한번 손가락 끝에 혼돈기를 집중.

이번에는 빛의 성운 중 몇 개를 골라서 반원을 그리며 이었다.

'나머지 반은 저쪽으로.'

혼돈기를 쭉 늘려서 암흑 성운이 있는 곳을 향해 이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혼돈기를 일정 거리 이상 벌리자, 내 통제를 벗어났다.

[혼돈구체 별자리의 형태를 잡아내 는 데 실패했습니다.]

성천조계공의 구결을 외우면서 흔 들리는 정신세계를 다시금 안정화시 켰다.

원을 그려서 별자리를 새겨도 안 돼.

양쪽 성운의 힘을 끌어다가 써도 형태를 잡아낼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오기가 생겼다.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

두 가지 힘을 빚어내서 혼돈기를 다루게 된 것이 별자리를 만들 수 있는 '업'의 조건이었다.

'성염 자리는 한 번에 새겼는데.'

별자리의 원형.

즉 해당 업적과 관련된 형태로 별 과 별 사이를 이으면 대부분 성공했 다.

이번은 조금 달랐다.

구체.

혼돈의 힘을 다룬 것이 업적으로 인정되면서 생긴 새로운 별자리다.

'원 형태. 그리고 양쪽 성운의 힘 을 다루는 조건일 거다.'

재차 혼돈기를 응축시켰다.

이번에는 양손이다.

'하나가 안 된다면 둘이다.'

황도 12궁을 보면 쌍둥이자리도 있지 않던가.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에 각각 동 그라미를 하나씩 그렸다.

[혼돈구체 별자리의 형태를....]

이번에도 실패다.

아오, 씨!

'어쩌라는 거야?,

감도 못 잡겠다.

별자리는 모두 내 '업'에 기반을 둔다.

모두 내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 그래서 형태를 고정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혼돈구체처럼 감도 못 잡은 경우는 처음이다.

'일단 다른 별자리를 새길까?'

성천조계공의 성취가 더욱 깊어지 면 소우주에 여러 별자리를 새겨 넣 을 수 있다.

죽음 자리는 이미 새겨본 적 있는 별자리.

빛의 군주 자리도 머릿속에 곧장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 봬도 전직 마왕이다.

이런 데서 뜻을 꺾을쏘냐?

'혼돈과 원. 두 성운을 포함하면서 원을 그려내야 해.'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

두 군집은 꽤 먼 간격을 두고 서 로를 대칭하며 우주를 돌았다.

직접 연결하는 건 거리가 멀어서 실패.

양쪽에 원을 그리는 건 별자리로 인정되지 않아서 실패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별자리를 이 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

다.

심상 세계를 관조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데?'

남은 혼돈기는 1천을 조금 넘었다.

6성을 달성하면서 엄청나게 불어난 혼돈기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으로 한 번.'

레인보우 링의 회복 스킬은 재사용 시간이 돌아오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다.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가면, 별자리

각인은 소모된 혼돈기를 채울 때까 지 강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면 흥이 식지.'

마지막 시도.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우주를 관조 했다.

혼돈구체라고 불리는 별자리의 근 원을 찾아내기 위해.

그러던 중, 내 시선이 한쪽을 향했 다.

'잠깐. 저걸 별자리에 포함한 적은 없었지?'

다른 성운보다 유독 커다란 항성.

우주의 중심에 자리를 잡은 세계석 태양이다.

'세계석 태양을 중간지점으로 두고 원을 연결해보는 건 어떨까?'

태양의 위치는 두 성운의 중심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혼돈기를 길게 늘어뜨리면 어떻게든 연결할 수 있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문제는 저 태양이 내 별로 인식이 될지 모르겠다.'

세계석이 형상화된 태양.

나는 그 힘을 일부만 흡수했다.

죽음의 핵을 사용해서 기운을 자극 했지만, 여전히 태양 안에 깃든 에 너지는 방대했다.

'몰라. 남은 건 어차피 이 수밖에 없어.'

나는 세계석 태양을 별자리의 시작 점으로 선택했다.

혼돈기로 된 길이 암흑 성운 10개 를 연결시켰다.

이대로 세계석 태양에서 마침표를 찍으면, 암흑 성운만 낀 원이 완성 된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혼돈기를 다시 한번 쭉 늘렸 다.

쿠구구궁!

소우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크 게 출렁거렸다.

바닥까지 떨어진 혼돈기.

사람으로 치면 허기짐을 느낀 것이 다.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아라.'

나는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가다듬 고 세계석 태양을 교차하면서 별자 리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빛의 성운 10개를 연결

해서 원을 그렸다.

빛의 성운 10개.

암흑 성운 10개.

그리고 세계석 태양.

총 21개 연결시켜서 만든 초대형

별자리 였다.

태양을 중심으로 각 성운에 원 2 개가 각인되었다.

별자리를 각인시키고 나니 00의 형 태를 띠었다.

'오. 꽤 그럴싸하잖아?'

우웅!

OO 형태의 별자리가 은은한 파장을 흩뿌리며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별자리를 쭉 주시했다.

[혼돈구체 별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별자리의 형태와 상반된 성운의 기운이 맞물리면서 사용자의 업적에 개입합니다.]

[혼돈구체 一 무한 고리]

[무한 고리 별자리가 성천조계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화아아악!

별자리를 구성하는 성운.

세계석 태양을 뺀 별 20개가 저마 다의 기운을 강하게 발산했다.

성력과 암흑 마나가 무한 고리를 타고 순환한다.

심법을 수련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 였다.

[무한 고리 별자리]

혼돈구체를 중심으로 정반대의 성 질을 지닌 성운을 연결해서 만든 별

자리다.

* 혼돈력 100 증가

*상시 성천조계공 운용 가능

*혼돈기 회복 속도 200% 추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시스템 음성.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별자리가 변화했다고?'

전생 때는 온 우주를 통틀어서 최 강자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업을 쌓았다.

성천조계공에 각인시킨 별자리만

수십 개.

하지만.

각인 도중 별자리가 변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원이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거였나.'

세계석 태양.

[혼돈구체]는 우주의 중심에 자리 를 잡은 커다란 항성을 가리키는 것 이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결과적으로는 그 착각 덕에 더 강 한 별자리가 탄생해버렸군.'

좋아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쓴웃음을 지으면서 무한 고리 별자 리를 바라봤다.

米 氷 #:

나는 눈을 떴다.

소우주에 각인된 별자리.

무한 고리와 죄악, 그리고 성염 자 리가 기운을 내뿜었다.

'힘이 넘친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증기가 끓어오르듯, 한껏 오른 열기가 입가 를 타고 올라왔다.

성천조계공 6성.

세계석의 기운.

그리고 별자리.

단기간에 불어난 혼돈기가 소우주 를 가득 채웠다.

'상태창.'

이름 : 전민철

레벨 : 35(10.1%)

종족 : 인간

능력치

근력 : 132EB+]

민첩 : 107EB+]

맷집 : 91 [B]

체력 : 93[B]

혼돈력 : 600 [S+]

혼돈기 - [13,200]

신체 능력은 탑에서 나왔을 때보다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먼저는 플레이어의 권능.

레벨을 올려서 얻은 55포인트를 모두 근력과 민첩에 투자했다.

다음으로 성천조계공.

4성에서 단번에 6성까지 상승하면 서 신체 능력 전반을 강화시켜주었 다.

가장 큰 변화는 혼돈력이었다.

성천조계공의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40포인트가 상승했다.

세계석의 기운을 흡수해서 늘어난 80포인트, 거기에 별자리 3개를 각 인시키면서 생긴 160포인트까지.

총 280포인트가 늘어났다.

'5성 특전으로 50% 증폭 효과가 추가됐지.'

성천조계공의 혼돈기 증폭률은

120%.

다룰 수 있는 혼돈기가 5천 대에 서 1만3천 대, 폭발적으로 증가했 다.

'이 정도면 절정 무인의 수준을 넘 어섰어.'

초절정의 경지.

무 대륙에서 한 지역의 패자로 군 림할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이다.

'초절정과 화경의 사이, 정도일까.'

거침없이 늘어난 혼돈기.

전생의 내 '깨달음'이 있어서인지 내력도 빠르게 불어났다.

나는 다크 스타를 제왕의 검으로 변형했다.

길게 뻗은 칼날.

혼돈기를 천천히 불어넣었다.

파츠츠츠-

검면을 뒤덮은 흑색 기운.

혼돈기로 빚어낸 검기다.

'여기서 더...!'

더 강한 기운을 칼날에 밀어 넣었 다.

흑색 검기가 칼날 표면 위로 물결 을 치면서 점점 형태를 굳혀간다.

콰콰콰콰!

강렬한 기운이 제왕의 검 너머로 솟구쳤다.

2m까지 솟구친 기운은 제왕의 검 과 동일한 칼날 형태로 굳어졌다.

검강(劍푸).

무학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심후한 내력.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초절정 고수의 증표 다.

『저 막강한 기운을 봐.』

『주군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 같 다.』

『주군! 수련에서 성과를 얻으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에인헤야르 4기가 수련을 멈추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경하는 무슨. 수련이나 집중해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입술 한쪽이 떨렸다.

새끼들.

알아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조만간 다른 무공도 알려줄까.'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별자리를 각인시킨 뒤, 시간을 확 인했다.

늦은 오후.

'생각보다 얼마 안 지났네?'

별자리 각인에 꽤 오래 집중했다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

펜리르가 내 곁으로 달려와서 꼬리 를 휘휘 저었다.

-멍! 주인님. 배고프다. 어서 밥 줘라.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주인님이 밥 챙겨준 지는 하루가 지났다.

" 하루라고?"

정말이었다.

날짜가 하루 바뀌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별자리를 새겼구나.'

꼬박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너무 집중했던 모양이다.

게이트 공략이나 진법 교육 일정이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펑크를 낼 상 황이었다.

'전화위복이었군.'

나는 쓰게 웃었다.

-멍! 주인님 찾는 전화가 엄청 많 았어.

펜리르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부재중 전화 20통]

뭐지?

나는 부재중이 찍힌 번호를 확인했 다.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

장용수.

한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신흥 강 자, 데모닉 길드를 이끌고 있는 길 드장이다.

한국 이름으로는 그렇고.

본명은 베르데, 판데모니엄에서 파 견된 악마였다.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녀석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

았던 건 다크 엘프 사태 때다.

조사를 맡겨두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꼬리를 잡은 건가.'

부재중 기록을 보니 궁금증이 치솟 았다.

나는 곧장 전화 버튼을 눌렀다.

뚜- 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오는 신호 음.

"민철 님! 이제야 연락을 주셨군 요!"

느끼한 목소리.

장용수, 아니 베르데의 음성이 확 실했다.

"다크 엘프의 꼬리라도 잡은 건 가?"

"아, 그건 아닙니다. 그 녀석들은 엘프 대사관에서 철저히 조사를 벌 이는 통이라 저도 잘...

"다른 이유였군. 어디, 이야기나 들 어보자."

"두 번째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지령.

베르데를 파견했던 판데모니엄의 악마가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85 화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지면에 내려앉고, 길가 곳곳에서 전등이 빛을 발했다.

짧은 해.

밤이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새 겨울인가.'

전생을 각성한 지 5개월 정도가 지났다.

하루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계 절이 지나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 다.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 근처 카페를 향해 걸었다.

딸랑-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카페 안쪽에는 베르데가 미리 자리를 잡 아둔 채, 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민철 님.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

다."

"일찍 왔다?"

약속 10분 전.

나도 제법 일찍 나왔는데.

베르데는 그보다 더 부지런히 나왔 다.

"후후. 군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맞다.

이 녀석, 심각한 중2병이었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 하면서 제발 포즈 좀 잡지 마라.

베르데의 오그라드는 말이 더 길어 질까 두려워서 바로 말을 잘랐다.

"오냐. 커피 좀 시키고 오마."

"군주... 아니, 민철 님의 취향은 이미 파악해두었습니다. 아이스 아 메리카노 맞으시지요?"

"어, 어."

떨떠름한 투로 대꾸했다.

이 녀석.

내 커피 취향도 기억하고 있었나.

"역시. 민철 님에게 어울리는 취향 입니다."

"웬 취향?"

"언제나 타오르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음료를 내리시는, 그야 말로 불에 어울리는 성정 아니겠습 니까."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조금 전 헛소리를 들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빠악!

사심을 가득 담아 베르데의 뒤통수 를 후려쳤다.

"커 헉!"

"아주 그냥 이프리트가 여기 있다 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실은 녀석의 중2병 멘트가 오글거 려서 때린 거지만.

솔직히 말할 수 없어서 대충 말을 둘러댔다.

"크, 크윽. 죄송합니다. 제가 민철 님의 대계를 망칠 뻔했습니다."

아니.

큰 계획 같은 거 없다고요.

제발.

내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처럼 이야 기해주라.

"그 지령이라는 게 뭐지?"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꾹꾹 참아

내면서 본론을 던졌다.

"흑사회가 한국에 정착할 수 있게 힘을 보태라는 명입니다."

"흑사회?"

"모르시는군요. 블랙 네트워크에서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규모 범죄 조직입니다."

...블랙 네트워크는 뭐고. 흑사회 는 또 뭐야.

하나 같이 처음 들어보는 명칭이 다.

"둘 다 모르겠으니까 설명 좀 해 봐."

"흠흠. 먼저 블랙 네트워크는 마피 아나 마약 카르텔 같은 범죄 단체들 이 연합해서 만든 국제단체입니다."

"범죄자들이 국제단체라고? 웃기지 도 않는군."

"뭐, 그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 죠. 민철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규모가 꽤 큰 편입니다."

블랙 네트워크.

세계 각지에 있는 거대 범죄조직들 이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만든 범 세계적인 조직이다.

온갖 장물과 불법적인 물건을 취급 하는 블랙마켓.

돈만 주면 어떤 의뢰라도 수행하는 해결사, 검은 암살단.

그 외에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법적인 일에 개입했다.

"흑사회는 중국에 있는 대규모 범 죄조직입니다."

"그 녀석들이 한국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힘을 보태 달라?"

"예. 역시 민철 님의 혜안은 엄청 나시군요."

아뇨.

네가 설명해준 걸 그대로 읊은 것 뿐인데요.

일일이 반박하는 것도 귀찮아서 대 꾸하기를 포기했다.

"한국에도 블랙 네트워크가 있을 거잖아."

"블랙 네트워크에 낄 만큼 대규모 범죄조직은 없습니다."

"오.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살기 좋 은 곳이었구나."

"치안도 좋은 편이고 판데모니엄과 엘리시움, 두 세력 모두 관심을 가 지고 있는 나라니까요."

"일단 표면적인 목적은 블랙 네트 워크 한국 지부에 협력하는 건 가...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속하 의 능력이 미진하여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블랙 네트워크의 세력 확장.

고작 그걸 위해 '검은 세례'라는 것을 내려주고 악마들을 투입했을 리 없다.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인가.'

판데모니엄의 다음 계획.

다크 엘프 무리의 배후와 같은 존 재일까.

아니면 다른 녀석, 이를테면 아스

모데우스의 짓일까.

"다크 엘프와 블랙 네트워크의 관 계는?"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다크 엘프들이 지구에 밀 입국했다면, 블랙 네트워크의 도움 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관이 없어도 상관없어."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크 엘프와 관련이 있든 없든.

현생의 나에게 있어, 판데모니엄은 방해물이 었다.

"이프리트 님. 지시를 내려주십시 오."

"여태까지 그랬듯, 지금은 지령에 충실해라."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 다.

"이프리트 님께서 품고 계시는 원 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는지요."

"지금 잡아봐야 꼬리치기. 몸통이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흑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판데모 니엄과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냈다.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몸통을 드러냈을 때 일망타진한 다.'

나는 느긋하게 열매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 * *

[동인천역 게이트]를 공략하고 1주 가 지났다.

엘리가 저번에 넌지시 언급했던 대 로, 게이트 수급에 난항을 겪기 시 작했다.

대형 길드들의 적극적인 게이트 섭 외.

특히 A급 게이트는 경쟁이 심해서 수주받기가 어려웠다.

공략이 없는 날.

나는 오래간만에 성간 연합 용산지 부를 방문했다.

"웬일로 오셨어요?"

"할 일이 없어서."

무한 고리 별자리 덕분에 숨만 쉬 어도 성천조계공의 숙련도가 꾸준히 올라갔다.

에인헤야르는 가만히 둬도 알아서

수련을 잘했다.

엘리는 무턱대고 찾아온 나를 5층 에 있는 카페로 안내했다.

"넌 안 바쁘냐?"

"바쁘죠. 근데 민철 헌터님을 지원 하는 게 최우선 업무거든요."

"아무리 봐도 업무로 보이지는 않 는다만."

"이럴 때 안 쉬면 언제 쉬겠어요?"

엘리는 눈웃음을 치고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커피를 마셨다.

잔을 드는 손짓이 굉장히 우아했 다.

"지부장은?"

"최근 바쁘셔서 자리를 비우는 일 이 많으세요."

"부탁할 게 있었는데."

"말씀하시면 전해드릴게요."

"전에 망토 이야기했었잖아. 각인 을 해야 하거든."

요르문간드 망토.

탑 2층에서 요르문간드한테 선물 받은 아이템이다.

'빨리 각인을 해야 착용할 수 있는 데.'

요르문간드가 직접 자신의 가죽을

잘라내서 마법적인 가공을 거친 망 토.

주인이 각인을 해야 완성되게끔 마 법적인 장치를 해둔 탓에, 진실의 눈으로 살펴봐도 아이템의 성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최소 유니크 등급 이상은 되지 않 을까.

마음속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지부장님이 알아보는 중인데 쉽지 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

"그만한 실력을 지닌 장인을 구하 기도 어렵고, 지구에 모셔오기는 더

힘드니까요."

지구는 차원의 억제력이 꽤 강력한 세계다.

다른 세계에서 물건이나 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넘어오려면 오랜 시간 과 마력을 소모해야 한다.

특히 고위 영격을 지닌 존재들은 억제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서 상당 부분 제약이 걸렸다.

쳇.

나는 혀를 찼다.

"네 말대로 쉽지는 않겠군."

"지부장님이 노력하고 계시니, 그

래도 금방 구해질 거예요."

"그나저나 요즘 왜 이렇게 게이트 섭외가 어려운 거야?"

"호호, 성간 연합은 꽤 미움받으니 까요."

"왜?"

"외국에서 재화를 빼가는 거랑 비 슷한 느낌인 거죠."

엘리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웃을 기분이 안 나는데.

매일 진행했던 공략은 이틀에 한 번꼴로 줄어들었다.

B급 2번에 A급 1번.

평균적인 수치다.

들어가는 게이트가 모두 A급이면 모르겠지만, B급 게이트를 공략해서 는 성에 안 찼다.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려면 레벨을 올리는 게 가장 빠른데.'

이제는 몸을 단련해도 신체 능력의 향상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성천조계공을 운용하면서 혼돈기로 육신을 개변했지만, 한계는 명확했 다.

'현생의 몸은 재능이 없다.'

전민철이라는 사람의 잠재능력은

정해져 있다.

평범한 인간.

재능이 뛰어난 무인과 비교하면 민 망할 정도였고, 투마의 강건한 육체 는 언급하는 것조차 실례였다.

'그릇을 넓히면 되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전민철]이라는 형태의 그릇.

더 많은 물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개선을 거쳐야 한다.

무 대륙에서는 그 과정을 '환골탈 태'라고 불렀다.

더 강한 내력을 받아들이고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몸뚱이로 변화하는 것.

당장은 시도할 수 없다.

'최소 절정 수준으로 몸뚱이의 수 준을 올려야 한다.'

내력은 초절정에서 화경 사이.

신체 능력은 일류를 조금 넘어선 정도.

무 대륙의 기준으로 진단한 내 수 준이다.

신체와 내력의 언밸런스.

최소 절정, 지구 기준으로는 모든 능력치를 A급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환골탈태를 시도할 수 있다.

'근데 게이트 섭외가 안 된단 말이 야.'

막힘 없이 도로를 질주하다가 교통 체증에 걸린 느낌이다.

"엘리야. 게이트 섭외가 언제쯤이 면 잘 잡힐 것 같아?"

"지금은 여러 길드가 경쟁적으로 게이트를 수주하고 있어서요. 확답 은 못 드리겠어요."

엘리는 미안한 안색을 띠면서도 단 호하게 말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확실한 성 격이다.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다시 탑을 올라야겠어.'

시련의 탑.

탑이 부여하는 시험을 극복하고 보 상을 얻는 것.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는 알 수 없 지만, 지금처럼 간간이 쉬어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천족의 의식이 시작되려면 한 달 정도 남았나.'

경매 때 마주쳤던 천사.

타니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

다.

'여유를 두고 돌아오는 게 좋겠다.' 마침내 다시 탑을 등반하기로 결심

을 내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분간 게이트 섭외는 취소해줘."

"탑에 오르시게요?"

눈치 빠른 엘리.

금세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 질

문을 날렸다.

내가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을 싫

어할 수가 없어요.

"그런 셈이지."

"헤에. 한 가지 잊으신 게 있는 것 같은데."

엘리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

뭐지?

내가 잊어버린 게 있던가.

"게이트 공략하기로 하고 빼놓은 게 있나."

"땡.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봐요."

"경매 대금 지불을 마무리하지 않 았다든지."

"방향이 다르다고 했잖아요."

말이 이어질수록 굳어지는 엘리의 표정.

머리를 굴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 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모르겠다."

"와. 진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잊어버리신 건가요?"

엘리는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음성 가운데 섞인 노기와 황당함.

엘리한테서 도통 보기 어려운 모습 이었다.

'내가 실수한 게 있나?'

화가 났다.

분명 화가 났는데, 그 원인이 나인 것 같다.

"어. 뭔지 모르겠어."

" 식사."

"식사 ?"

"탑에 들어가기 전에, 저한테 밥 사준다고 했잖아요!"

-나오면 밥이나 한번 먹자.

-밥... 이요?

-어. 공적인 거 말고 사적으로.

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이 가득한 엘리에게 남 겼던 인사.

그녀는 그때의 말을 지금까지 기억 하고 있었다.

'내가 죽일 놈 맞네.'

먼저 약속해놓고 다시 탑에 들어갈 때까지 완전히 잊고 살았다.

이마에 뿔이라도 난 듯, 화가 잔뜩 난 엘리.

꿀꺽.

나는 노기가 감도는 엘리의 눈동자 를 마주하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 다.

86 화

"저녁에 시간 돼?"

"흥. 제가 한가한 줄 아나요? 바빠 요."

엘리는 토라진 기색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까였다.

말문이 콱 막혀서 합죽이가 된 것 처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군.'

쓴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먼저 식사 약속을 잡아놓고 오랫동 안 잊어버렸다.

사무적인 관계라고는 해도, 명확한 실례였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 켰다.

오늘따라 혀에 감도는 커피 향이 유난히도 쓰게 느껴졌다.

서로의 음료가 다 떨어질 때쯤.

엘리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할 말 없어요?"

"••••••미안."

"괜찮아요.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 는 것도 아니고."

아니요.

지금 네 표정은 전혀 괜찮은 것처 럼 보이지 않는데요.

'내 실수이니, 감정의 응어리는 풀 어야지.'

후우.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엘리와 나는 비즈니스 관계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이에 감정이 안 섞일 수는 없다.

유능한 파트너와 사이가 소원해지 는 건 사양이다.

"그럼 언제 시간 돼? 기다릴게."

오늘은 백수 신세.

게이트 공략도 없고 오후에 하린을 만나서 진법만 알려주면 된다.

"일이 많아서 엄청 늦어요. 기다려 줄 거예요?"

지금 차를 마시는 분이 하실 이야 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끝나는 대로 연락 줘. 어차피 집 이랑 가깝잖아."

엘리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좋아요. 대신 정말로 오래 기다려 야 할지도 몰라요."

"잠들기 전에만 연락 주면 돼."

"호호, 일부러 일찍 잠드는 건 아 니죠?"

설마.

농담으로라도 일찍 잔다고 했다가 는, 저 차를 뒤집어쓸 것 같은 느낌 이 들었다.

하아.

이래서 주둥아리를 잘못 놀리면 화 가 찾아온다고 하나 보다.

늦은 밤.

나는 엘리와 한국대 대학로를 거닐 었다.

'겨울인데 사람 참 많네.'

추운 겨울에도 스피커와 기타 하나 를 들고 버스킹을 하는 아마추어 음 악가.

기말고사를 마치고 젊음을 불태우 러 나온 청춘.

숨을 쉴 때마다 허옇게 솟아나는 입김이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대학가의 밤은 낮보다도 더 뜨거웠 다.

"근데 왜 여길 오자고 한 거야?"

"대학교는 청춘의 요람! 늘 가보고 싶었었어요."

청춘의 요람이라.

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대 를 다녔다.

덕분에 대학로는 손에 훤히 잡힐

듯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추억... 같은 건 잘 모르겠 고, 술을 마시고 피자를 부친 기억 은 많았다.

'떠올려서 좋을 건 없군.'

고개를 좌우로 털면서 상념을 지워 냈다.

힐끔힐끔.

주위의 이목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 다.

정확히는, 수많은 시선이 내 옆에 있는 엘리를 향했다.

'눈에 띄는 외모이기는 하지.'

큰 눈망울과 또렷한 이목구비, 화 장을 거의 안 했는데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흰 목선이 단발머리 아래로 살짝 드러났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 그리고 면바 지.

특이한 패션이지만, 그 패션을 소 화할 만큼 몸매도 뛰어났다.

부러움과 질시.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이 나와 엘 리를 향했다.

'아서라. 아무 사이도 아니다.'

엘리와 나는 그저 비즈니스 관계.

사내들의 끈적끈적한 눈빛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엘리를 바라봤다.

"와보니까 어때?"

"좋네요. 이게 지구인의 청춘이라 는 거잖아요."

"뭐, 그런 셈이지."

"저희 종족은 좀 심심하거든요."

견족.

수인족들의 연합체, [비스트 랜드] 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종족이 다.

견족은 매사에 진중해서 사회 자체

가 굉장히 경직적이다.

좋게 말하면 보수적인 거고.

나쁘게 보면 경직된 사회였다.

"저녁으로 생각한 건 있어?"

"곱창이요."

의외의 선택이다.

파스타나 스테이크처럼 있어 보이 는 메뉴를 고를 줄 알았다.

'하긴. 얘는 견족이잖아.'

엘리의 아름다운 외형에 잠깐 선입 견을 가져 버렸다.

이종족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

면 안 된다.

"다른 음식 생각나는 건 없고?"

"지구에 파견되고 가장 맛있게 먹 은 메뉴가 곱창이거든요."

"좋아. 오늘은 내가 대접한다고 했 으니 특별히 맛있는 곳으로 안내할 게."

한국대에서 곱창으로 유명한 곳이 라면, 내가 한 곳을 알고 있다.

엘리를 데리고 대학로 후미진 곳에 있는 곱창집으로 왔다.

[바른소곱창]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허름한 건 물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점포. 처음 온 사람이라면 쉽게 발 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운 모습이었 다.

"여기인가요?"

"어. 생긴 건 이래도...

킁킁-.

엘리의 코가 찡긋거렸다.

"냄새 엄청 좋아요! 당장 가요."

엘리는 내 말을 끊더니, 팔을 홱 잡고 매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

다.

와.

박력 있어.

나는 엘리의 기세에 말려서 끌어당 기는 힘에 저항조차 못 했다.

드르륵-

낡은 미닫이문을 젖히자 내부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 여럿과 불판.

누런 벽지에는 학생들이 남기고 간 낙서가 가득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매장 안쪽은 빈 테이블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 자리 하나 비었어요."

엘리는 누가 앉기라도 할까 총총걸 음으로 비어있는 좌석에 앉았다.

"사장님. 여기 모둠 구이 한판 세 트 주세요."

나는 익숙한 메뉴를 시켰다.

잠시 후, 곱창과 대창 등 여러 부 위가 불판에 올려졌다.

치이익!

고소한 향을 내면서 구워지기 시작 하는 곱창.

엘리의 눈동자가 불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긴 사장님이 구워주니까. 좀만 기다렸다가 먹으면 돼."

"향이 너무 좋네요. 어서 먹고 싶 어요."

내 말은 전혀 듣지 않는군.

엘리의 온 신경은 눈앞에 있는 곱 창을 향했다.

'이런 모습도 있구나.'

늘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건 익 숙했지만.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말을 흘려듣 는 허당 같은 모습은 처음 봤다.

"이제 드시면 돼요."

직원이 말을 해주기 무섭게, 젓가 락이 불판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엘리는 노릇노릇하게 익혀진 곱창 을 빠르게 집고, 입에 쏙 넣었다.

"우움. 마이쪄요."

"...씹으면서 말하지는 말고."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은 아 이가 저럴까.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얼굴이다.

늘 도도하고 감정 평소하고는 달랐 다.

나도 곱창 한 점을 집어 먹었다.

입을 가득 채우는 고소한 맛.

무의식적으로 예전 습관대로 소주 를 시킬 뻔했다.

곱창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불판을 오가는 엘리의 젓가락.

일류 무인을 연상시키는 속도였다.

'이러다가는 내가 먹을 게 없어지 겠어.'

위기감이 들 만한 빠르기였다.

이에 질세라.

젓가락을 들고 곱창을 빠르게 집었 다.

나와 엘리는 대화 한번 나누지 않 고 곱창을 먹는 데 집중했다.

"후아. 여기 정말 맛있네요."

엘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곱창이 거의 남지 않은 시점에서 꺼낸 첫마디였다.

'어.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씩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계셨어 요?"

"새삼스럽기는. 난 각성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잖아."

"학생이라고는 해도. 민철 헌터 는... 그, VIP잖아요."

아.

맞다.

'나를 고위 영체의 분신으로 생각 하고 있었지.'

나는 마르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다크 스타를 찾으려고 성간 연합의

[차원 창고]를 이용했다.

코드 R.

투장 데이모스 시절에 얻어놓은 VIP 코드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정작 코드의 주인은 죽고 환생해 서 이렇게 있잖아.'

입맛이 썼다.

엘리와 마르탄에게는 현생의 내 모 습이 '유흥'을 즐기는 정도로 비치 는 건 아닐까.

'반년 전에는 학교를 다니기 바빴 다고.'

용사박물관 특별전시관에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내 삶은 남들과 큰 차 이가 없었다.

평범한 학생.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지도 않았고, 그저 고집이 좀 있고 친구들과 어울 리기 좋아했다.

신검 칼리트와 마주하는 순간.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데이모스든, 전민철이든. 둘 다 나 다.'

두 존재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한쪽을 유흥으로 취급해버리 면.

그건 나를 부정하는 꼴이다.

'나한테는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삶을 영 유하던 때와는 다르다.

판데모니엄과 엘리시움.

다중차원 우주의 두 거대 세력은 지금도 지구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공작을 벌이고 있다.

안락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변수라도 차단할 수 있는 힘 이 필요했다.

적어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말이다.

"엘리. VIP라고 해도, 난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있어."

"그, 그런가요?"

갑자기 진지한 투로 이야기를 꺼내 자, 엘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감돌았 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좀 더 확실 하게 말해야겠다.

"너와 마르탄과의 관계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능력 있는 파트너들이 나를 도와 줘서 고맙다고 생각해."

내 활동을 '유흥'이라고 생각하지 않게끔.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서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어색해진 분위기.

"호, 호호. 곱창 이러다가 다 타겠 네요. 얼른 드세요."

엘리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더니 얼마 남지 않은 곱창을 향해 젓가락 을 날렸다.

米 米 米

나는 탑을 들어갈 준비를 했다.

아공간 주머니에 보급품을 쟁여두

고 아이템들을 정비했다.

'다크 스타를 빼면 모두 내구도가 있는 아이템들이니.'

탄로스의 갑주 세트.

섬전비도 10개.

특히 탄로스의 약속과 믿음은 꽤 많이 손상되어서, 파손 부위를 반드 시 수리해야 했다.

원제작자인 마르탄은 잦은 업무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걱정 마십쇼. 수리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요."

성간 연합에는 마이스터 급보다 조

금 낮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장인 여럿이 있었다.

장인은 능숙하게 비도의 칼날을 다 듬거나 실을 점검하는 등 빠르게 수 리를 마쳤다.

시련의 탑.

다시 한번, 하늘 위를 향해 끝없이 솟아오른 커다란 건축물 앞에 섰다.

엘리가 배웅하러 탑 근처까지 따라 왔다.

"이번에는 언제쯤 돌아오실 건가 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탑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

흑사회.

그리고 천족의 의식.

판데모니엄과 엘리시움이 각각 꿍 꿍이를 가지고 움직이는 중이다.

'적당히 올라간 다음 지구로 돌아 와야겠어.'

나는 탑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민철 헌터."

엘리가 나를 불렀다.

"응?"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주 셔서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번에 곱창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 기에 대한 답인 듯했다.

"새삼스럽기는. 유능한 파트너잖 아."

나는 씩 웃고는 커다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87 화

시야가 검게 물든다.

처음 탑에 입장했을 때와 동일했 다.

'탑 3층으로 이동하는 건가?'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이 보일 때까 지 기다렸다.

잠시 후.

어둠이 걷히면서 바뀐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진 하늘.

지면은 마른 갈색인데, 잡초도 몇 없어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 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검은 돌로 세운 커다란 벽.

높은 벽은 반경 수백 미터를 감싸 고 있다.

그 위에는 뼈만 마른 스켈레톤들이 좌우를 살피면서 경계를 섰다.

'여긴... 요새인가?'

덜그럭-

스켈레톤 하나가 나와 눈을 마주쳤 다.

망자 특유의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 았다.

등 뒤에는 지름이 4m 정도 되는 커다란 구슬이 있는데, 죽음의 핵처 럼 강대한 기운을 축적해놓았다.

[시련의 탑 3층]

[퀘스트 : 블랙 포트리스 방어전]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요새를 지켜내라.

* 목표

블랙 포트리스의 핵 수호.

* 거점

-블랙 포트리스

내구력 : 2,000/2,000

-제1 거점

내구력 : 1,000/1,000

-제2 거점

내구력 : 670/1,000

-제3 거점

내구력 : 355/1,000

'저 구슬이 요새의 핵인 것 같군.'

양팔을 쫙 펼쳐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구체.

눈에도 확 들어와서 적의 침입을 허용할 경우에는 방어하기가 여간 어려워 보였다.

핵 옆에는 컨테이너를 닮은 간이형 건물이 있었다.

끼이익!

2m 정도 되는 커다란 까마귀가 문 을 열고 나왔다.

"까악. 새로운 도전자인가?"

"누구냐."

"까악. 그렇게 보면 섭섭하다고. 내 이름은 크로우, 보다시피 상인이다."

글쎄.

어딜 봐도 상인으로 보이지는 않았 다.

크로우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관리자인 줄 알았군."

"깍깍. 관리자님은 그렇게 쉽게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관리자가 아니라면 볼 일 없다."

"까아악! 급한 도전자. 내 말을 안 들으면 후회할걸?"

크로우는 날개를 활짝 펴서 앞을 가로막았다.

귀찮은데.

2층에서 마주쳤던 어인이 떠올라서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았다.

"너도 포인트가 목적이잖아. 할 이 야기 없다."

포인트.

탑에서 제시하는 시련이나 서브 퀘 스트를 달성하면 얻을 수 있는 일종 의 화폐다.

[l,657,750pt]

여태까지 시련을 치르면서 쌓은 포 인트다.

튜토리얼에서 100만.

2층 시련을 모두 통과하면서 50만 포인트를 얻었다.

기하급수적으로 포인트를 습득했지 만, 정작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2층에서 좀 쓴 게 전부였나.'

물 한 병.

그리고 산소 팩 조금.

2층 곳곳에 있는 중간거점에서 생 존과 활동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게 다였다.

'가치를 모르고 있으면 사기당하기 쉽잖아.'

나는 아직 포인트의 용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깍깍. 이번 시련은 포인트를 안 쓰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을 거다."

"그러든지 말든지."

크로우의 날개를 홱 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까아악! 성질도 급한 양반. 한 번 만 내 말을 들으면 생각이 확 바뀔 거야."

"너도 정보료 같은 걸로 포인트를 요구하나?"

"그런 짓은 안 한다. 크로우는 정 직한 상인이다."

"좋아. 들어나 보지."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상황이 못마땅한 듯, 언짢은 기색 이 가득한 크로우.

놈은 잠깐 망설이더니 부리를 열었

다.

"지도를 펼쳐봐라."

나는 순순히 퀘스트 창의 부가 기 능을 활성화시켰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

3층의 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응?"

"뭐가 다른지 알겠나. 깍!"

"여긴 안 가본 지역도 모두 보이 네."

1층과 2층은 지도 기능을 사용해 도 가본 곳을 빼면 모두 가려져 있 다.

상대방한테서 지도를 뺏거나.

특정 아이템으로 길을 찾아야 했 다.

'그러고 보니 심해의 나침반은 안 없어졌네?'

아공간 주머니에 그대로 남아있는 심해의 나침반.

안에 있는 진주는 시련을 수행하니 몇 번이고 기운을 흡수하면서 크기 를 키워갔다.

2층의 시련을 모두 통과하면 진주 에도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깍. 지도 다 본 거냐. 봤으면 말 을 해라."

한참 동안 멍하니 있자, 크로우가 타박했다.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상념을 지우고 바로 대답했 다.

"다 봤다. 요새로 향하는 길이 3개 가 있군."

"까악. 확인한 게 맞구나. 그 길들 이 바로 괴물들의 진격 방향이다."

/- 1 거점 一

[요새] -- 2거점 一 웜홀

\- 3거점 一

3층의 구조를 표시하면 이런 형태 였다.

"웜홀은 뭐지?"

"괴물들이 소환되는 지역이다. 깍."

"소환된 병력이 3개 길을 공략하는 구조인가."

"까악. 이번 도전자는 이해가 빨라 서 좋다."

요새 방어전.

길목에 세워진 거점들은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격퇴하는 용도인 모양이 다.

"거점은 일정 시간마다 언데드를 생산하는데, 방어에 도움을 준다. 깍!"

"그게 전부인가?"

"아니. 웨이브에 딱 한 번, 파괴되 지 않은 거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크로우는 날개를 펼쳤다.

반투명한 창 3개가 눈앞에 나타났 다.

거점 3개를 비추는 화면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는 멀쩡한데, 나머지 둘의 상 태가 안 좋네."

제1거점은 성벽도 튼튼하고 수비병 의 숫자도 꽤 많았다.

2거점과 3거점은 상태가 안 좋았 다.

성벽 곳곳에 구멍이나 균열이 나 있고, 스켈레톤 병사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이래서 내구도가 낮았구나.'

특히 3거점은 손만 대도 무너질

것 같은 외형이다.

크로우는 내가 인상을 쓴 걸 보고 '까악'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서 포인트가 필요한 거다."

"포인트?"

"까깍. 10pt당 거점이나 요새의 내 구력을 1씩 고칠 수 있다."

엉망진창이 된 3거점을 수리하려면 6,450pt.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다.

"먼저 3거점에 몰려온 괴물들을 퇴 치하고 나머지 거점을 도우러 가도 되잖아."

"깍깍. 거점 사이의 거리는 수 킬 로미터. 네가 아무리 빨라도 거점 모두를 도는 건 어려울걸?"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거점을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은 웨 이브당 1번.

거점 한 곳은 두 발로 뛰어가야 한다.

'마지막 거점은 도움 없이 자력으 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거겠 지.'

거점의 수비 병력만으로 몬스터 웨 이브를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니.

도전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탑의 시 련이다.

몬스터들의 공세가 거점의 방어 능 력보다 강력하게 책정되었을 가능성 이 높았다.

'근데 이상한 게 하나 있다.'

나는 조금 전에 느낀 위화감을 곧 장 질문했다.

"이봐. 상인."

"깍?"

"다른 도전자들은 없는 건가?"

"까아, 깍. 없다. 지금은 너 혼자뿐

이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깍, 눈치채버렸군. 이 시련은 최대 5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건 가?"

"그렇다. 반나절 전에 다른 팀이 시련을 시작해서 너만 있는 것이다. 까악!"

이 녀석.

나한테서 포인트를 벗겨 먹으려고 파티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걸 고의 로 안 알려줬다.

역시 탑의 상인이라는 작자들은 하 나 같이 믿을 게 못 된다.

"다른 팀원을 만나는 방법이 있을 거잖아. 말해봐."

"3층으로 올라온 도전자는 자동적 으로 이곳에 오게 된다."

심해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과 파 티를 맺는 구조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곤란하다.'

언제 올라올지 모르는 도전자를 기 다리면서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

"됐어. 혼자서라도 먼저 도전하지."

크로우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 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것도 잠시, 곧바로 장사꾼 특유의 미소를 짓고는 내 어깨를 잡 았다.

"깍, 까악! 혼자 공략하는 건 어려 울 거다."

"도와주려고?"

"난 전투 같은 건 모른다. 대신 도 움을 줄 상품은 알고 있다, 까악!"

크로우는 상품 목록이 기재된 바인 더를 들이밀었다.

*작살 포탑 - l,000pt

* 화염구 포탑 - 2,000pt

*스켈레톤 강화 - 2,500pt

나는 바인더에 개제된 상품들을 살 펴봤다.

'포탑으로 방어를 세우거나, 아니 면 수비 병력의 양과 질을 늘릴 수 있군.'

상품 종류는 다양했다.

1분 정도 바인더의 내용을 싹 훑 어보고 크로우에게 돌려주었다.

"까악. 뭘 구매할 건가?"

"구매는 안 한다."

"깍. 이번 도전자는 오만하다. 혼자 서 모두 막을 수는 없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지."

그 순간.

[3층의 시련 - 블랙 포트리스 방 어전을 시작합니다.]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 05:00]

5분 뒤.

괴물들이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몰려올 것이다.

'아. 맞다. 그게 있었는데.'

시간을 보는 순간.

튜토리얼 0층에서 관리자한테 개인 적으로 받았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오론의 조각.

시련의 탑 3층에 숨겨진 보물창고 를 여는 열쇠였다.

'일단 첫 웨이브를 넘기는 게 먼저 다.'

나는 불멸 권능을 사용했다.

주아아악!

손을 휙 뻗자, 허공 위에 커다란 균열이 나타났다.

저번에 제작해둔 임모탈 워리어 5 기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지존을 배알합니다.』

"시간 없으니 예는 집어치우고. 둘 은 윗길로, 셋은 중앙으로 향해라."

1거점과 2거점.

내구도가 높은 거점에는 임모탈 워 리어 무리를 배치했다.

'가장 약한 곳은 내가 지켜야지.'

3거점.

나는 반쯤 무너져 버린 거점을 향

해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