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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

거점은 학교 강당보다 조금 넓은 성곽으로 둘러진 지역이다.

요새라기보다는, 현대의 벙커를 떠 올리게 하는 크기다.

"그겔. 도전자. 적. 아니다."

"겔겔겔. 우리. 도전자. 돕는다."

제3거점의 수비 병력은 스켈레톤들 이었다.

빈약한 무장.

비어있는 안구에 아른거리는 귀기 가 옅다.

3거점을 지키고 있는 숫자는 총 50기.

나는 수비 병력에 대한 기대를 빠 르게 버렸다.

1거점과 2거점에 배치된 수비 병 력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임모탈 워리어를 보내두길 잘했 군.'

이럴 때 펜리르가 있었으면 큰 도 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펜리르는 내 소환수가 아니라 원하 는 대로 불러낼 수 없었다.

걔는 애초에 탑의 부름도 받지 못 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다.

'뭐, 지구에서는 열심히 부려먹어 야지.'

판데모니엄과 엘리시움의 음모.

펜리르가 나설 자리는 앞으로도 충 분히 많았다.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 00:00]

[몬스터 웨이브 - 1단계가 시작됩

니다.]

나는 3거점에 하나뿐인 작살 포탑 위로 올라섰다.

넓어진 시야.

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 흙먼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잘 안 보이네.'

시야가 자욱한 흙먼지에 가려졌다.

나는 혼돈기를 눈에 집중, 안력을 강화하여 홁먼지 안을 살폈다.

잠시 후.

몬스터 웨이브가 가까워지면서, 흙 먼지 사이에 숨어있던 괴물들의 정 체가 드러났다.

88 화

"트롤이군."

난이도는 B급.

평균 3.5m 〜 4m.

신장은 인간보다 두 배 정도지만 어깨가 훨씬 넓고 살집도 많아서 덩 치로 비교하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괴물이다.

'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

전주에 열린 [팔복동 게이트]에서 마주했던 적 이후로 처음이다.

커다란 머리가 흙먼지 사이로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숫자는 20기.

수비 병력보다는 조금 적었다.

나는 거점에 배치된 스켈레톤들을 훑어봤다.

'안 왔으면 몽땅 털렸겠어.'

구멍이 숭숭 뚫려서 뼈가 훤히 드 러나는 낡은 갑주.

이 빠진 칼날을 쥔 팔은 연신 경 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었다.

트롤 20마리가 아니라 하나만 쳐 들어왔어도 몽땅 털렸을 것 같다.

'포탑은 좀 쓸 만할까?'

끼릭, 퉁!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

기다란 작살이 포탑 끄트머리에서 쏘아졌다.

작살은 공기를 가르면서 날아가더 니, 선두에 선 트롤의 몸통에 박혔 다.

"쿠으으. 아프다."

날카로운 촉이 두꺼운 근육과 살점 을 찢으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피가 한 바가지 정도 솟구쳐서 지 면을 적셨다.

위력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수비 병력이라고 준 뼈다귀 놈들보 다는 훨씬 유용했다.

하지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상성이 안 좋아.'

팅 _

몸뚱이에 박혔던 작살이 도로 튕겨 나오고, 휑한 구멍 사이에서 기포가

샘솟았다.

트롤의 종족 특성인 재생능력이 발 동한 것이다.

'포인트를 사용해서 포탑을 증원하 거나, 직접 쓰러트려야겠군.'

나는 포탑 지붕을 박차면서 아래로 도약했다.

반쯤 부서진 성벽을 한 번 경우하 고 재차 도약, 트롤 무리를 향해 정 면으로 돌진했다.

우우웅!

성천조계공이 빚어낸 소우주.

넓은 우주 공간에 자리를 잡은 OO

형태의 별자리가 환하게 빛났다.

'내력이 떨어질 일은 없다.'

넘쳐나는 혼돈기.

더는 소모된 내력을 계산하면서 싸 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크 스타를 제왕의 검으로 변형했다.

파츠츠츠!

검에 깃든 강렬한 기운.

완성된 검기였다.

"쿠우우. 작은 사냥감. 뭉개버린 다."

선두에 있는 트롤은 나무로 된 방 망이를 휘둘렀다.

나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

퍼펑-!

검을 빠르게 내지르자 몽둥이가 파 편 여러 개로 쪼개졌다.

제왕의 검은 기세를 전혀 잃지 않 고, 몽둥이 뒤에 있는 트롤의 목덜 미를 관통했다.

"끄, 끄으...

질긴 생명력.

트롤은 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차라리 생명력이 약했으면 고통이

라도 덜 느꼈을 것을."

나는 혀를 차면서 트롤의 목을 빠 르게 베어 넘겼다.

푸아악!

머리와 목을 분리시키자, 초록색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지옥의 겁화를 사용합니다.]

[마력 50을 소모합니다.]

불로 혈관을 지져버려서 더 나오는 것을 막았다.

막 목을 베어 넘긴 트롤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위로 올라섰다.

"귀찮으니. 빨리 끝내자."

이번에는 칠성검으로 변형.

발검 자세를 취하면서 칠성검을 허 리춤에 가져다 대었다.

"쿠우우. 건방지다."

"사지를 찢어주마."

트롤 무리는 돌진을 멈추고 나를 향해 몰려왔다.

그래.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나도 손쓰기 가 편해지지.

콰콰콰콰!

칠성마검 1초식.

하늘을 떨어트리는 검, 낙일검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전처럼 타오르지 않고 검의 형태로 정련된 기운.

검강!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내력의 양 덕분에, 검법에 담긴 심득을 온전히 펼쳐낼 수 있었다.

10m에 달하는 검강으로 전방을 크 게 베었다.

검의 궤도에 있던 트롤들은 몸통과

하체가 분리되면서 바닥에 나뒹굴었 다.

곧이어 하늘 위로 솟구친 핏방울들 이 아래로 낙하.

일대에 초록색 비가 내렸다.

"역시 몸이 커서 그런가. 한 번으 로는 안 되네."

칠성마검 2초식.

유성검(流星劍)을 이어서 전개했 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별.

검강에 실린 기운이 남은 트롤들의 몸뚱이를 옥죄었다.

[유성검의 기운이 트롤을 압박합니 다.]

[상태 이상 - 마비에 걸렸습니다.]

콰아아앙-!

칼이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 커다 란 폭음이 일어났다.

혼돈기로 이루어진 검강.

내가 기억하고 있던 무공의 힘보다 2배 이상 강력한 힘으로 일대를 초 토화시켰다.

2초식에 휘말린 트롤들은 수십 갈

래로 찢겨나갔다.

칠성마검 1초식과 2초식.

연이어 펼치는 데는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관전했다면 빛이 한 번 번쩍이고 트롤들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 없나?'

길가를 따라 전진하는 몬스터가 있 을지 모른다.

다시 한번 안력을 강화해서 괴물들 의 진격 루트를 확인했다.

개미 새끼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B급 괴물 20마리를 1초 만에 사 냥하다니.'

나는 스스로가 이룬 성취에 놀랐 다.

성천조계공 6성.

그리고 별자리.

진신 내력이 초절정을 넘어서면서 무공의 위력도 원래의 위력을 발휘 했다.

'죽음의 핵을 사용한 건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못해도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내력 을 쌓고 수련을 해야 도달할 수 있

는 경지다.

나는 그 세월을 5개월로 좁혔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무인이 온갖 기연과 영약을 섭취하더라도, 내 성 장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신체 능력은 일류를 조금 넘어섰 고, 내력은 초절정을 넘어 화경을 향해 쌓이고 있다.

'이번 시련. 혼자서도 할 만하겠 어.'

곧장 지도를 켰다.

[거점 간 이동]

[원하는 거점으로 이동할 수 있습 니다.]

[몬스터 웨이브당 1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점 3개와 요새.

이동 가능한 지역이 붉게 반짝였 다.

나는 검지로 중간에 있는 거점을 꾹 눌렀다.

[제2거점으로 이동합니다.]

화아악!

누르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일그 러지면서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어그러진 주변 모습이 원래의 형태 를 되찾자, 서 있는 장소가 어느새 2거점으로 바뀌었다.

『지존께서 명하셨다. 죽어라.』

고저 없는 목소리.

임모탈 워리어는 자신의 몸뚱이와 비견되는 크기의 할버드를 마구 휘 둘렀다.

"쿠으으!"

트롤 무리는 임모탈 워리어 3기를

돌파하지 못했다.

2배 이상 큰 덩치.

공격 범위도 넓고, 속도도 빨랐다.

같은 대형 괴물.

완력과 속도, 그리고 덩치 모두 임 모탈 워리어가 몇 수 위였다.

'승패야 처음부터 정해진 거였지.'

하지만 시간이 꽤 걸렸다.

[생기 갈취]

임모탈 워리어의 주력 스킬이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산 자의 생명 력을 빼앗아서 자신의 힘으로 삼는

강력한 기술.

'트롤은 생명력이 높아서 빼앗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생능력.

그리고 체력.

트롤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다.

머리나 심장 같은 즉사 부위만 파 괴되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나는 괴물.

싸움이 시작된 뒤로 상당한 생명력 을 빼앗았지만, 정작 죽은 트롤은 많지 않았다.

'길게 끌 필요 없잖아?'

탑의 시련.

빠르게 통과해주마.

나는 전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米 米 米

2거점의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

지도를 보고 1거점을 향해 뛰어갔 다.

운류보를 전개하고 30초가량 전력 으로 달리니, 거점의 성곽 근처에 도달했다.

배치한 임모탈 워리어가 적어서 그 런 걸까.

트롤 몇 마리가 우회해서 거점을 향해 거의 다 접근한 상황이었다.

"어딜 노려?"

섬전비도를 빠르게 투척.

성곽을 노리던 트롤들을 빠르게 격 살했다.

남은 트롤 무리도 혼돈기를 전면 개방한 덕에 금방 쓰러트렸다.

[몬스터 웨이브 - 1단계를 통과했 습니다.]

[다음 웨이브는 60분 뒤에 시작됩 니다.]

'후. 까딱하면 거점이 피해를 받을 뻔했잖아.'

몽둥이로 한 번 후려친다고 벽이 부서지지는 않겠지만.

내구도가 깎이는 상황은 피하고 싶 다.

나는 요새로 귀환했다.

"까악. 혼자서 상대해보니 어때? 힘들지?"

"약 올리는 거라면 꽤 효과적이

야."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헛소리를 한마디라도 더 내뱉으면, 바로 놈의 복부에 정권을 꽂아줄 생 각이었다.

"깍. 평화적으로 이야기하자고."

"네 주둥아리부터 평화롭게 움직여 야 할 거다."

"깍. 10% 싸게 해줄 테니 포탑이 라도 설치해두는 게 좋지 않겠나."

까마귀 놈의 말은 얄밉지만 현실적 이었다.

도움도 안 되는 스켈레톤 50구.

그리고 작살 포탑 1채.

세 거점 모두 동일한 수비 병력과 포탑을 보유했다.

'스켈레톤은 시간 끌기. 작살 포탑 하나로는 화력이 부족하다.'

트롤 20마리를 상대하려면 포탑을 몇 개 설치해둬야 할까.

거점 위.

성곽의 방어력을 믿고 딜레이 없이 발사만 한다면, 최소 10개를 배치해 야 한다.

"포탑은 회수할 수 있나?"

"깍. 당연히 안 되지."

"다음 시련에 가져가는 것도 안 되 나?"

"당연하지. 여기서 쓴 포인트는 회 수가 안 된다. 까악!"

일회용이라.

단순히 시련을 통과하려고 많은 pt 를 소모하기는 아까웠다.

'포탑으로 괴물을 모두 쓰러트릴 필요는 없어.'

시간만 끌어도 충분했다.

크로우가 보여준 포탑 중에는 얼음 이나 전기 속성 마탄을 발사하는 구 조물도 있었다.

포탑과 임모탈 워리어로 발을 최대 한 묶는 동안 다른 거점으로 몰려든 괴물들을 빠르게 정리.

그리고 다른 거점의 괴물들도 쓰러 트린다.

'이게 최선이다.'

나는 포인트를 어떻게 쓸지 머릿속 으로 계산을 마쳤다.

크로우한테 포탑 건설을 주문하려 는 찰나.

'아. 그 물건을 확인해봐야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투박 한 돌을 꺼냈다.

오론의 조각.

관리자한테 개인적으로 받은 아이 템이 다.

'보물창고의 열쇠. 사용 방법은 이 미 알고 있다.'

관리자는 아이템의 내역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스스로가 알아내기를 바라는 눈치 였다.

나한테는 물체나 생물의 내력을 살 펴볼 수 있는 [진실의 눈] 스킬이 있다.

덕분에 오론의 조각을 어디서 사용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돌에 혼돈기를 불어넣으면...

볼품없는 돌이 기운에 반응하면서 빨갛게 빛났다.

한껏 붉어진 돌은 동쪽을 향해 레 이저를 발사했다.

"까깍? 그런 건 처음 보는데. 어디 서 난 거냐!"

"알 거 없고. 이 광선이 어딜 향하 고 있는지나 알려줘."

"깍. 웜홀이 있는 곳이다."

"웜홀?"

"네가 막아야 하는 괴물들을 불러

내는 곳이다. 까악."

뭐야.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 는 게 아니었나.

'포탑을 강화할 필요가 없어졌다.'

거점에 포탑을 설치하려는 건 몬스 터 웨이브가 3방향으로 오기 때문이 다.

괴물들이 진격을 개시하는 시작점.

웜홀 자체를 점거해버리면 갈라지 기 전에 일망타진할 수 있다.

"까악.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웜홀을 점거하려는 거 아니냐. 까 악!"

"눈치가 빠르군."

"까악. 너처럼 생각하는 놈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말리는 이유는 뭐지?"

"웜홀을 지키는 괴물들은 웨이브로 소환되는 것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깍!"

역시.

탑의 시련은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 다.

웜홀을 점령하고 광역 마법으로 선

제타격을 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듯 했다.

"괴물의 종류를 알고 싶은데."

"까악. 못 알려준다. 그냥 거점을 지키는 걸 추천한다."

"죽으면 포인트 장사를 못 하니 까?"

"맞다. 깍. 영리한 도전자다."

적어도.

까마귀 녀석이 내가 죽기를 바라지 는 않는 건 진심이었다.

"만약 힘에 부칠 것 같으면 뒤로 물러나도 되잖아."

"까악. 놈들을 한 번 건들면 물러 나도 요새까지 쫓아올 거다."

크로우는 바로 내 말을 부정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나?"

"그래. 너처럼 웜홀을 공략하려다 가 실패하고 후퇴한 도전자들이 있 었다."

"그놈들은 어떻게 되었나."

"요새까지 모두 초토화되었다.

깍!"

웜홀 공략에 실패하면 시련까지도 무위로 돌아간다.

평범한 도전자라면, 위험부담이 큰

도전을 멈추고 거점방어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못 들어주 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

얼마든지 감수해주지.

손에 보물 지도가 있는데, 두렵다 고 나서지 않는 건 바보 같은 행동 이다.

위험을 넘어서야 보상도 있는 법.

오론의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

웜홀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89 화

나는 임모탈 워리어를 모두 2거점 으로 불러들였다.

'전력을 집중시킨다.'

웜홀을 지키는 괴물을 물리치면, 구태여 전력을 분산시켜서 방어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론의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 해 전진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게이트와 흡사하게 생겼지만, 내부 가 검게 물든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 다.

크로우가 말했던 웜홀이다.

"소협.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것 이 좋을 것이외다."

건조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무 대륙의 복식을 입은 사내였다.

피부는 불칸 전사를 연상시키는 붉

은색이었고, 착 가라앉은 까만 눈동 자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사내의 육신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시군."

"소협의 눈썰미가 제법 좋구려."

"근데 넌 강시치고는 혀가 잘 돌아 가고 말이야."

"혹시 무 대륙 출신 무인이시오?"

"나름 연이 있는 것뿐이다."

"그렇구려. 혹, 동향 분인가 하여 물어봤소이다."

나는 너스레를 떠는 무인, 아니 강 시를 천천히 살펴봤다.

강시 (彊屍).

시체에 모종의 대법과 약물, 그리 고 주술을 사용하여 조종하는 무 대 륙 특유의 사령술이다.

'빨갛게 물든 피부라면 혈교의 혈 강시인가.'

무 대륙의 악몽, 혈강시(血彊屍).

사람의 피에 여러 약재를 혼합한 다음, 그 피에 무인의 시체를 담그 고 특수한 대법을 사용해서 제작하 는 강시다.

한 기를 만들 때 최소 수십 명의 목숨을 소모한다.

흉악한 제조 방법만큼 강력해서, 과거 혈교의 핵심 전력으로 사용되 었다고 한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혈교는 내가 무 대륙에 소환되었을 때, 이미 멸문의 길을 걸었다.

혈강시 제작 방법 등 혈교의 비급 이 마교에 남아 있어서 이론만 알고 있었다.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했다.

[혈강시]

근력 : 560 / 민첩 : 350 / 맷집 : 500 / 체력 : 500 / 내력 : 500

* 특성

금강불괴 [S]

죽음의 독 [A]

재생능력 [B]

* 스킬

혈조공 [A]

시산혈해 [A]

시독 분사(r)]

펜리르와 맞먹는 스탯.

민첩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가 500대였다.

'광란에 빠진 펜리르보다 강적이 다.'

혈교에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무인 들을 상대하려고 만든 비장의 무기 다.

높은 신체 능력으로 펼치는 강력한 무공.

특수한 대법으로 완성된 금강불괴 의 단단한 육체.

입가에는 시퍼런 입김이 감돌았다.

한 모금이라도 들이마시면 전투 능 력을 앗아가는 강력한 독이다.

"혈강시가 이지를 지니고 있을 줄 은 몰랐다."

"일종의 계약이오."

"이것도 인연인데 못 본 척해주는 건 안 되겠지?"

"불가능한 이야기라오."

혈강시는 손가락을 쭉 펼쳤다.

기형적으로 기다란 손톱.

그 위로 붉은 기운이 맺혔다.

손을 빠르게 휘두르자, 붉은 기운 이 솟구치면서 지면에 기다란 줄을 만들었다.

"그 선을 넘지 마시구려."

"웜홀을 지키는 게 받은 명령인 가."

"그렇소. 본인은 불필요한 피를 보 고 싶지 않소."

어쭈.

자신감 넘치는 태도 봐라.

나는 팔짱을 꼈다.

"싸우면 네가 이길 것처럼 이야기

하네."

"본인은 혈강시외다. 소협의 성취 가 상당한 것 같지만 본인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소이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으니 넘어오지 마라?"

"그렇소. 귀한 목숨을 이런 곳에서 낭비하지 마시구려."

나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혈강시가 바닥에 그어놓은 선을 밟 았다.

"선. 넘었네?"

그 순간.

중년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 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붉은 아지랑이 에 휘말려서 올올이 하늘 위로 솟구 쳤다.

"그... 그그그."

고장 난 기계처럼 이상한 신음을 내는 혈강시.

퉁! 퉁!

관 5개가 혈강시의 등 뒤에서 솟 아났다.

문을 박차면서 튀어나온 건 회색 피부를 지닌 괴인들이었다.

뻣뻣한 관절

앞을 향해 쭉 뻗은 팔과 굽힐 줄 모르는 다리, 그리고 회색 피부.

철강시였다.

"너희는 철강시랑 좀 놀아줘라."

『존명!』

애들은 애들끼리 놀아야지.

나는 오른손을 까딱였다.

"뭐해. 덤벼."

"키키 키키 키!"

혈강시는 눈이 붉어진 채로 흉성을 터트렸다.

* * *

나는 처음부터 전력을 전개했다.

[성천조계공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혼돈기가 전신을 활보합니다.]

[혼돈기의 영향으로 혼돈력을 제외 한 모든 능력치가 40% 상승합니 다.]

[1 초당 2의 혼돈기가 소모됩니다.]

혼돈기가 밀물과도 같은 기세로 혈 관을 누비면서 전신의 힘을 일깨워 주고.

[성화(聖火)가 전신을 휘감습니다.]

[혼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00% 증가합니다.]

[치유의 축복이 몸에 깃듭니다.]

성스러운 불꽃은 성염 자리로 효과 가 증폭되어, 더 강한 힘을 내게 부 여했다.

*아이템 능력치 보정

[근력 : 132 _ 211.2]

[민첩 : 107 _ 178.7]

*성천조계공&성스러운 불꽃

[근력 : 211.2 - 506.8]

[민첩 : 178.7 _ 428.8]

아이템으로 보정된 능력치.

거기에 성천조계공과 성스러운 불 꽃이 동시에 적용되면서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키키키 키 키!"

혈강시는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크 게 도약했다.

부드러운 움직임.

군데군데 어색하지만, 공세의 예리 함은 일류 무인과 비교해도 부족하 지 않았다.

파츠츠츠!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붉은 기운.

길게 자란 손톱, 그리고 손 전체를 기로 감쌌다.

혈마기.

손가락에 깃든 기운이지만, 검기에

버금가는 예리함을 지녔다.

[다크 스타 - 아틀라스 건틀렛]

거무스름한 철제 장갑이 양손을 휘 감는다.

나는 양손을 마주치면서 합장을 하 고, 동시에 펼쳤다.

대수인.

쌍장에 실린 기운을 해방하자, 환 한 빛과 함께 혈마기 일부가 사라졌 다.

'나한테 정면으로 달려든단 말이

야?'

혼돈기 대 혈마기.

파괴적인 혈마기를 응축시켜서 기 를 형상화했어도, 혼돈기와 정면 대 결을 펼치면 몇 수 아래였다.

아이템 보정과 버프를 중복으로 적 용하면서 능력치도 밀리지 않았다.

가볍게 주고받은 공격.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렸다.

대수인에 깃든 척력의 힘은 혈강시 를 뒤로 튕겨냈다.

'더럽게 단단하다.'

쳇.

나는 혀를 찼다.

대수인을 양손으로 펼쳤지만 손가 락에 흠집을 내는 것에 그쳤다.

"어딜 가시나?"

혼돈기를 아틀라스 건틀렛에 불어 넣었다.

[아틀라스 건틀렛 - 내장 스킬 : 인력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00을 소모합니다.]

평소보다 더 많은 혼돈기를 소모했 다.

아틀라스 건틀렛에 붙어있는 자수 정이 요사스러운 빛을 흩뿌렸다.

"키키 키?"

아틀라스 건틀렛의 인력이 멀리 날 아가던 혈강시의 몸뚱이를 다시금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너진 자세.

이번에는 청룡도로 변형.

[청룡도 - 내장 스킬 : 청룡의 분 노를 사용합니다.]

뇌전의 기운에 혼돈기로 끌어낸 도

기를 휘감으면서 오호단문도를 펼쳤 다.

카가각-

금속과 금속이 충돌했을 때 나는 날카로운 음색.

도를 쥐고 있는 손이 묵직하다.

예리한 칼날이 혈강시의 어깨를 강 타했지만,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조 금 상하는 정도에 그쳤다.

'기를 형상화하는 단계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다.'

혈강시의 특성, 금강불괴.

무 대륙에서는 어떤 무기로도 해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키키 키!"

점잖았던 중년 사내의 얼굴이 악귀 처럼 변했다.

쭉 찢어진 입.

침 대신 독을 품은 입김을 나한테 끼얹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중독 증세를 일으키게 하는 강력한 독이다.

"더럽게 입 냄새를 풍기고 지랄이 야."

[성스러운 불꽃이 타오릅니다.]

삿된 기운을 배제합니다.]

하얀 화염은 혈강시의 독기를 말끔 하게 태워버렸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오호단문도의 초식을 이어갔다.

캉! 카캉!

도기와 뇌전만 가지고는 혈강시의 몸에 제대로 된 상처를 줄 수 없었 다.

"키키키!"

혈마기가 놈의 창백한 손에서 길게 솟구쳤다.

Im를 넘어가는 길이.

혈선 10개가 지면을 스치고 지나 갔다.

바위가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손가락을 휘감은 흉흉한 기운은 완 성된 혈조공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 이었다.

'섬전비도술은 소용없겠다.'

혈강시의 몸뚱이는 단단해도 너무 단단했다.

이미 죽은 몸이라서 급소를 찔러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키키 키키!"

혈강시는 양손을 좌우로 움직이면 서 돌진했다.

바위와 땅거죽이 혈조공의 끝에 걸 리면서 수십 조각으로 잘리고 쪼개 졌다.

"네가 무슨 가위손이나 울버린이 냐?"

지척까지 다가온 혈강시.

다크 스타를 제왕의 검으로 변형.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발검 자세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당장은 칠성마검을 사용할 수 없

다.

하지만.

나한테는 위력적인 무공이 칠성마 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혼돈기를 한계까지 검에 불어넣었 다.

파츠츠츠!

전보다 강렬해진 기운.

유형화된 검기가 스스로 형태를 갖 추면서 칼날 위에 덧씌워졌다.

초절정 무인의 상징.

강기 였다.

'도법은 혈조공의 속도를 따라잡기 에는 느리다.'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

눈으로 좇기 힘든 쾌속의 검이 혈 강시를 향했다.

위기감을 느낀 걸까.

혈강시는 본능적으로 양팔을 들어 올리면서 혈마기를 교차했다.

두터워진 혈마기.

쾌속의 검이 혈마기의 중심을 그대 로 강타했다.

중첩된 붉은 기운이 찢겨 나간다.

온전한 강기는 혈마기를 뚫고 혈강

시의 몸통에 기다란 검상을 남겼다.

사아아악!

붉은 연기가 갈라진 상처 사이로 솟구쳤다.

'또 독이냐.'

입김에 담겨 있던 독보다 한층 더 진했다.

성스러운 화염으로도 단번에 지워 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독성.

나는 혈강시를 더 밀어붙이지 못하 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키키 키키!"

혈강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에 지었던 광소가 사라지고 이 를 부득부득 갈았다.

日 三그■버그

붉은 기포가 검강으로 베인 부위를 메우기 시작했다.

'자기가 무슨 트롤인 줄 아네.'

제련된 강철보다도 단단한 몸뚱이.

강기가 아니면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도 없다.

상처를 입히면 독을 내뿜어서 공격 해온 상대를 중독시켰다.

거기에 재생능력까지.

혈강시가 무 대륙의 악몽으로 불린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키이이이!"

혈강시는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손을 휘감았던 혈마기 열 가닥이 일제히 방출되었다.

정면을 향해 쏟아지는 붉은 선.

강기로 된 검막을 펼쳐서 기운을 해소, 동시에 운류보를 운용해서 미 끄러지듯 바닥을 빠르게 달렸다.

화르륵!

성스러운 화염이 제왕의 검을 휘감 는다.

동시에 검에 내제된 능력, 중압을

발동했다.

빛살처럼 쏘아지는 검격.

속도는 빠르지만, 동시에 묵직한 힘을 담아 혈강시를 베었다.

"키키키키!"

비명인지, 아니면 분노가 섞인 외 침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 를 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뭐야. 천하의 혈강시가 나한테 쫄 은 거냐?"

나는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말을 알아들은 걸까.

아니면 손짓으로 도발하는 걸 알아 챈 걸까.

"키이이이이!"

혈강시는 괴성을 지르면서 진신 내 력을 개방했다.

붉은 아지랑이가 하늘을 향해 거세 게 솟구쳤다.

이전과는 달라진 기운.

우중충한 하늘이 붉은 기운에 가려 져서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건 좀 심상치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하늘에서 붉은 비가 쏟아졌다.

90 화

혈천만우(血天 M 雨).

혈마기를 하늘 위로 일거에 방출.

지면에 내리꽂는 무공이다.

혈강시 특유의 지독한 독이 혼재된 마기.

스치기만 해도 몸을 파괴하고 썩게

만드는 지독한 기운이다.

'파괴력도 위협적이지만, 독까지 더해져서 더 흉악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붉은 비.

전후좌우.

전방을 뒤덮은 죽음의 비에서 벗어 날 수는 없어 보였다.

'과거에 혈교가 왜 무림 공적으로 몰렸는지 알겠어.'

혈강시 1구의 전투력은 초절정 무 인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 다.

오히려 지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무인보다 더 강력했다.

하지만.

혈교는 어째서 혈강시처럼 굉장한 병기를 만들어 놓고도 무 대륙을 일 통하지 못했을까.

'사술은 어디까지나 사술이라는 거 지.'

압도적인 힘.

초절정 이상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 앞에서는 잔꾀도 소용없었다.

내 내력은 아직 화경의 경지에 이 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기보다 훨씬 패도적 이고 파괴력이 강한 혼돈기의 특성 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다.

'나한테 시간을 준 걸 후회할 거 다.'

혈강시가 기운을 하늘 위로 올려보 내는 동안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 다.

상체를 살짝 숙이고 양쪽 다리를 벌렸다.

현재 펼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무공, 칠성마검의 준비 자세였다.

콰콰콰콰-!

칠성마검 1초식, 낙일검.

10m에 달하는 거대한 검강이 일대 를 빠르게 베었다.

검격이 지나간 곳의 풍경이 반으로 잘려 나가면서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풍경 가운데에는.

"키이이이잇!"

혈강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반 오른쪽부터 몸통을 가로질러 왼쪽 어깨까지.

낙일검이 훑고 지나간 곳에는 커다 란 검상이 남았다.

보라색 안개가 혈강시의 몸을 가렸

다.

상처가 깊었는지, 갈라진 틈 사이 에서 솟구치는 독 안개의 양이 평범 하지 않았다.

'몰아붙이기는 어렵다.'

나는 검을 거뒀다.

유성검을 이어서 펼치기에는 거리 가 꽤 있다.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혈마기도 주의해야 했다.

'지금이면 굳이 피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상 세계에 있는 혼돈기를 외부로 발산했다.

시커먼 아지랑이가 전신에서 솟구 치더니, 주위를 감싸는 둥근 구체가 되었다.

[호신마강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700을 소모합니다.]

호신마강.

절정 이상 무인이 되면 내력을 방 출해서 전신을 방어할 수 있다.

'효율은 별로지만 말이야.'

핏빛 비가 흑색 방어막을 마구 두 들겼다.

신체에 전해지는 충격은 미미했다.

운류보를 재차 밟으면서 혈강시와 의 거리를 좁혔다.

"키키 키키!"

붉은 기운 다섯 가닥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혈조공 - 혈천마수]

혈천만우와 달리, 이번에는 기운을 만개하지 않고 응축시킨 형태다.

[혈천만우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혈천만우의 영역 안에서는 혈조공 의 위력이 20% 상승합니다.]

'이런 기능도 있었나.'

핏빛으로 물든 하늘.

공격을 펼치는 용도 외에도 무공의 위력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혈강시는 혈마기 다섯 가닥을 쏘아 내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손가락을 물들이는 혈마기.

전보다 더 거세진 기운이다.

상처가 난 부위에서는 독이 흘러나 왔다.

'독 기운을 억누르면서 공세를 받 아내야 한다.'

나는 열 손가락을 펼치면서 섬전비 도술을 펼쳤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간 섬전비도.

혈강시가 쏘아낸 기운과 충돌하더 니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살문의 무공.

도에 기를 실은 정도로는 혈강시의 패도적인 기운을 모두 상쇄시킬 수 없었다.

'이걸로 됐어.'

다크 스타를 일각수의 뿔창으로 변 형.

창에 기운을 불어넣고, 뿔창에 공

명시켜서 파괴력을 증대시켰다.

혈강시보다 한발 앞서 들이닥치는 세 갈래 기운.

나는 일각수의 뿔창을 빠르게 내질 렀다.

쇄애액!

기세를 잃은 혈마기가 쭉 내지른 창에 튕겨 나서 소멸했다.

"키키키키!"

창을 뻗는 동안 안쪽으로 파고든 혈강시.

열 손가락에 깃든 혈마기를 마구 휘둘렀다.

'강기를 일으킬 시간을 안 주겠 다?'

나는 아직 무기나 신체에서 바로 강기를 이끌어 낼 정도의 성취에 이 르지 못했다.

강기가 아닌, 기를 유형화시키는 정도로는 혈강시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태탱! 태태탱!

창을 휘감은 혼돈기로 혈마기를 해 소하면서 간간이 혈강시의 몸을 타 격했다.

옷깃 조금이 찢기고 생채기가 나는 정도.

그 정도는 혈강시의 자가치유력으 로 금세 회복되었다.

"키키 키!"

혈강시는 몸뚱이의 내구력을 믿고 발을 내디디면서 창에 몸을 들이밀 었다.

간격이 좁혀진다.

악가창법의 거리는 2m 50cm.

혈조공의 범위는 약 lm.

방어를 도외시하고 거리를 좁히는 데만 집중하니, 금세 간격이 줄어들 었다.

혈강시의 입가에 아까 전의 광소가

감돌았다.

"쪼개지 마. 새끼야."

진짜 웃고 싶은 건 나거든.

나는 창을 회수, 아틀라스 건틀렛 으로 변경했다.

인력이 다시 한번 발동되면서 혈강 시를 앞으로 확 당겼다.

혈강시가 살짝 위로 떠오르더니 나 를 향해 날아왔다.

놈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발이 땅 에서 떨어진 상태에서도 공격을 준 비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놈의 자세를 무너트리고 아슬아슬 하게 근접시키는 것.

딱 내가 원하는 짧은 '타이밍'이었 다.

화르르륵!

지옥의 겁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지옥의 겁화를 사용합니다.]

[마력 500을 소모합니다.]

검붉은 화염은 내 손에서 혈강시에 게로 옮겨붙었다.

칠성마검이 낸 기다란 상흔.

겁화는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혈조공 - 혈천수라무]

혈강시는 허공에서 자세를 잡고 혈 마기를 일제 개방했다.

수백 갈래로 쪼개진 혈마기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합장을 하고 양손을 펼쳤다.

유형화된 기가 손바닥 형태를 띠면 서 주위를 뒤덮었다.

대수인이 또 한 번 펼쳐졌다.

콰아아앙-!

혈강시가 대수인의 반탄력을 버티 지 못하고 10m 이상 뒤로 튕겼다.

"키키 키."

튕겨나는 중에도, 혈강시는 웃음기 를 지우지 않았다.

대수인 쌍장으로 튕겨낸 혈마기는 전방뿐.

내 주위를 모두 점하고 있는 걸 장법만으로 튕겨내기는 불가능했다.

[호신마강을 사용합니다.]

곧장 호신마강으로 전신을 둘렀다.

카가각!

혈마기가 사방에서 호신마강을 두 들겼다.

충격이 거듭될수록 막의 두께가 옅 어졌다.

나는 재차 혼돈기를 불어넣어서 호 신마강을 강화했다.

"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혼돈기 소모는 꽤 컸지만, 신체에 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혈마기를 쪼개서 사방을 점하는 공 격.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일점으로 집중된 것보다 힘이 떨어져서 호신 마강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일이 쉽게 풀렸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의 진원지는 혈강시였다.

화르르륵!

검상 위로 붙은 겁화가 기세를 불 려가면서 혈강시의 몸을 좀먹기 시 작했다.

"키, 키키키?"

"흐흐. 재생능력을 믿고 나댔겠다."

검붉은 불길의 화력은 혈강시의 재 생능력을 훨씬 앞섰다.

상처에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

타고난 저항력과 맷집이 강한 탓인 지.

혈강시는 상처 부위에 혈마기를 끌 어올려서 겁화에 저항했다.

겁화의 기세가 한풀 꺾이려는 찰 나.

혼돈기를 마력으로 치환, 겁화를 태우는 연료로 불어넣었다.

"그거. 이제 못 꺼."

내 혼돈기는 13,000.

레인보우 링의 효과로 20%가 늘 면서 16,000에 가까워졌다.

무한 고리 별자리의 효과로 초당 혼돈기 회복량도 엄청나게 늘어났 다.

'저 무식한 녀석을 언제 때려잡 냐?'

강기로 몸을 훼손해도 독안개를 흩 뿌리면서 재생한다.

초절정 무인과 정면으로 싸워도 절 대 밀리지 않는 강력한 적이다.

하지만.

내가 다룰 수 있는 힘은 무공만

있는 게 아니다.

72좌의 권능.

'무공이 안 통하면 권능을 쓰면 된 다.'

혈강시는 근접전을 특기로 하는 이 들, 특히 무 대륙의 무인들에게 상 성에서 앞섰다.

튼튼한 몸과 뛰어난 재생능력.

입김이나 상처를 내면 독이 흘러나 와 중독을 유도했다.

'안쪽까지 단단한 건 아니다.'

대형 괴물은 면적이 크다 보니 상 처 안에 겁화를 불어넣기가 쉬웠다.

혈강시는 인간형.

빠르게 움직이는 적에게 겁화를 명 중시키기는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놈을 파고들게 유도하고, 상처에 권능을 쑤셔 넣었다.

"이제 또 웃어 보시지?"

나는 조금 전에 혈강시가 지었던 광소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米 :k #:

혈강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시체가 어떻게 아파하겠는가.

이미 죽었는데.

그렇기에.

"키키키키키키!"

지옥의 겁화가 몸을 불태우고 있어 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움 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툭-

왼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왼쪽 어깨가 재생과 타기를 반복하 다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린 탓 이다.

"아픔을 못 느낀다고 몸이 멀쩡한 건 아니지."

나는 땅에 떨어진 혈강시의 팔을 지근지근 밟았다.

"키키••••••

"안 그래?"

혈강시는 재차 발을 디뎠다.

나를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 몸이 기울면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 다.

"이제야 끝났군."

검붉은 불꽃이 혈강시의 내부를 대 부분 태워버렸다.

잿더미로 변해서 텅 비어버린 내부 기관.

혈마기가 겁화에 끊임없이 저항했 지만, 이미 절반 이상이 가루가 되 어서 소용없었다.

-경험치 22.5%를 획득했습니다.

와우.

강적이라 그런지 경험치도 많이 올 랐다.

'게이트를 안 들어가고 탑에 오기 를 잘했어.'

1 층과 2층 시련에서는 괴물과 싸 우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길 찾기.

시련을 돌파하기.

포인트와 아이템 보상은 짭짤했지 만, 경험치를 얻을 기회는 적었다.

이번 시련은 달랐다.

'기다리고 있으면 괴물이 계속해서 나오잖아.'

[블랙 포트리스 방어전]은 사냥의 효율이 게이트보다 더 좋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임모탈 워리어는 철강시와 비등하 게 싸웠다.

『지존께서 명하셨다. 죽어라!』

커다란 도끼가 지면을 내려쳤다.

철강시는 특유의 경직된 동작으로 높게 도약, 도끼를 피했다.

- 카악!

날카롭게 가공된 손톱으로 임모탈 워리어의 팔을 후려쳤다.

두꺼운 갑주에 흠집이 났다.

『건방진 시체 녀석!』

저기요.

너도 시체인데요?

임모탈 워리어는 크게 팔을 휘둘렀 다.

철강시가 휘두르는 팔에 맞아서 뒤 로 날아갔다.

_카아아악!

별 타격은 없는 것 같다.

'내구력 하나는 좋은 녀석이니까.'

철강시는 검기상인의 경지에 도달 한 무인, 즉 절정 고수가 아니면 상 대하기가 어렵다.

도검불침.

기를 싣지 않은 공격으로는 상처를 주기가 여간 어렵기 때문이다.

경직되어있지만 나름 빠른 속도.

그리고 튼튼한 방어력.

임모탈 워리어하고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강시는 언데드이니까 생기 갈취도 안 통하지.'

덩치는 훨씬 작은데 내구력도 뛰어 났다.

공격을 맞추기는 어렵고, 맞춰도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

이건 철강시한테도 통용되는 이야 기였다.

카각!

철강시의 손톱이 다시 한번 튕겨 났다.

임모탈 워리어는 마력으로 된 갑주 로 전신을 뒤덮고 있다.

불멸의 결정으로 되살린 언데드.

놈의 안에 박혀있는 결정은 끊임없 이 암흑 마나를 생산했다.

갑주를 쪼개고 안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임모탈 워리어를 쓰러트릴 수 없다.

'이건 뭐... 방패와 방패의 싸움 이잖아.'

가만히 두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철강시를 향해 다가갔다.

91 화

서걱!

흑색 검기가 철강시의 목을 갈랐 다.

"이걸로 얼추 정리가 됐나."

나는 성천조계공의 기감을 극대화 시켰다.

넓게 펼쳐진 혼돈기가 웜홀 주위를 뒤덮었다.

'숨어있는 적은... 없군.'

혈강시 1구와 철강시 5구.

웜홀을 지키는 괴물은 강시 무리가 전부였다.

나는 재차 혼돈기를 오론의 조각에 불어넣었다.

붉은 광선은 웜홀 안쪽을 향했다.

"너희는 여기를 지키고 있어라."

『존명.』

임모탈 워리어를 대기시키고 웜홀 에 발을 내디뎠다.

쩌엉-

강한 반탄력이 몸을 밀어냈다.

[웜홀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공간입니다.]

어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론의 조각을 웜홀과 접촉시키는 순간.

화아악-

조각이 탑의 시스템에 반응하면서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오론의 조각을 확인합니다.]

[3층의 숨겨진 공간, 오론의 보물 창고를 개방합니다.]

웜홀이 좌우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 사이.

황금빛이 새어나온다.

나는 망설임 없이 웜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

감탄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 다.

보물창고 내부는 강렬한 마력을 내 뿜는 아티팩트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은 되어 보였다.

[오론의 보물창고에서는 단 하나의 물건만 집고 나갈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은 시점에서 소유주가 결정됩니다. 신중하게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선택 종료 시간 - 00:04:59]

'깜찍한 짓을 해놨네.'

보물창고에서 아이템을 고르는 건 단순히 운을 시험하는 게 아니다.

아티팩트를 보는 안목.

탑의 시련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도전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과제를 냈다.

'단순히 운빨 망겜식이라면 랜덤박 스를 주지 않았겠어?'

아티팩트가 내뿜는 마력.

마력의 파장과 크기를 읽어 내면 만져보지 않아도 아티팩트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아티팩트 5,000개의 기운을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빨리 읽어 내느 냐.

수천 개에 달하는 아티팩트 중, 좋 은 걸 골라낼 수 있는 요령이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지.'

나는 성천조계공의 기운을 외부로 방출했다.

스스슷!

흑색 아지랑이가 보물창고를 빠르

게 잠식해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빛을 내뿜는 아티팩트.

검, 창, 방패, 각반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것도 유니크... 오, 저건 전설 등급이다.'

마력의 파장과 기운의 세기를 분석 해서 아티팩트 중 강한 기운을 지닌 녀석들을 빠르게 걸러냈다.

1차 분류를 마치고 시간을 힐끗 살펴봤다.

[선택 종료 시간 - 00:01:47]

걸러낸 아이템은 189개.

최소 전설 등급 수준의 마력을 품 고 있는 무구들이다.

이번에는 [진실의 눈]을 사용해서 아티팩트의 내력을 하나하나 확인했 다.

개중에는 악마 군주나 천사장의 애 병을 본떠서 모조품도 있었다.

[지옥멸살검 - 레플리카]

[운명의 창 - 레플리카]

[휘광의 방패 - 레플리카]

[사자의 서 - 레플리카]

진실의 눈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아티팩트 상태창이 눈앞에서 나타 났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를 반복했 다.

시간제한이 30초 정도 남았다.

"후우...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5,000개 중 유니크 등급은 4,811 개.

189개 중 188개는 전설 등급.

나머지 하나는....

'초월 등급 아티팩트다.'

내 시선은 검은색으로 물든 갑주를 향했다.

[원초의 그림자 갑옷]

등급 : 초월 [0] / 종류 : 갑옷

내구도 : 10,000 / 10,000

* 물리 방어 Lv 200

* 마력 방어 Lv 200

* 자가 수복 기능

*충격 일부를 흡수해서 사용자의

마력으로 전환한다.

* [형태 변환] 스킬 사용 가능

* [형상 복구] 스킬 사용 가능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한 가죽 재질 갑옷이다.

'나도 진실의 눈이 아니었다면 모 르고 지나갈 뻔했다.'

[진실의 눈]으로 살펴봤을 때, 갑 주의 진정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었 다.

원초의 그림자 갑옷은 초월 등급답 게 성능도 엄청났다.

엄청난 물리 / 방어력.

그리고 형상 복구 스킬.

'마력을 부여하면 갑옷의 피해 부 위를 바로 복구할 수 있다.'

원초의 그림자 갑옷에는 충격 일부 를 내 마력으로 전환해주는 유용한 옵션이 내장되어 있다.

회복된 마력으로 형상 복구 스킬을 사용하면?

자가 수복 기능이 더해지면 이론상 으로는 절대 파괴되지 않고 나를 지 켜주는 무적의 갑주가 된다.

또한 형태 변환 스킬은 사용자의

크기나 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 나 착용할 수 있는 범용성 높은 옵 션이다.

50m가 넘는 거인도.

2m가 조금 안 되는 나도, 똑같이 착용할 수 있었다.

'볼품없는 모습으로 둔 건 사람들 이 못 고르게 하려는 거였나.'

꽤 심술궂은 장난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원초의 그 림자 갑옷에 손을 뻗었다.

[아티팩트를 선택했습니다.]

[1 분 뒤, 오론의 보물창고에서 자 동으로 나가집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셨기를 바랍니 다.]

암.

올바른 선택을 했고말고.

5,000개 중 유일한 초월 등급 아 티팩트를 손에 넣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었을 거야.'

나는 오랫동안 썼던 [탄로스의 약 속] 갑주를 벗고, 방금 얻은 원초의 그림자 갑옷을 착용했다.

'조금 불편한데?'

나는 마음속으로 갑옷의 형태를 떠 올렸다.

슷 I

• 骨,•

상의를 감싸고 있던 [원초의 그림 자 갑옷]이 흐물흐물해지면서 내 몸 에 딱 달라붙었다.

[원초의 그림자 갑옷 내장 스킬 - 형태 변환을 사용했습니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옷의 형태 로 변했습니다.]

[두께가 얇아져서 패널티가 생깁니

다.]

[물리 방어 : Lv 200 - 18이

[마력 방어 : Lv 200 - 18이

목을 살짝 가리는 검은 면티.

방어력이 약해졌지만, 몸에 걸리적 거리는 부위가 하나도 없었다.

'무공을 펼치기에 딱 좋아.'

무인들은 갑주를 선호하지 않았다.

몸에 묵직한 갑주를 걸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무공의 정교함도 떨 어졌다.

물론 무 대륙의 무인들처럼 치렁치 렁한 옷을 입을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좋아했던 패션을 떠올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몸을 더 움직이기가 수월하 겠어.'

뜻밖의 소득.

내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시간이 지나자 웜홀 밖으로 튕겨 나왔다.

곧장 다음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6분 정도인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시련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米 氷 #:

[몬스터 웨이브 - 2단계가 시작됩 니다.]

우우웅!

웜홀은 공명음을 내더니 공간을 비 틀면서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냈다.

괴물들이 공간의 균열 사이로 모습 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구면이네.'

푸른 파수꾼.

헌터 시험 때 보스 몬스터로 나왔 던 괴물이다.

5개월 전만 해도 저 녀석 하나를 쓰러트리려고 얼마나 도끼질을 했던 가.

'그땐 손에 물집도 잡히고 난리도 아니었지.'

따악!

나는 오른손을 퉁기면서 마력을 해 방했다.

[지옥의 겁화를 사용합니다.]

[마력 2,000을 소모합니다.]

웜홀 앞이 온통 불길로 뒤덮였다.

『공격. 받음.』

『방어 행동에 들어간다.』

『적. 위치. 파악.』

푸른 파수꾼들은 난데없는 공격에 도 당황하지 않았다.

머리통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 위 치를 파악했다.

『적. 발견.』

『반격을 개시....』

쿠궁-

푸른 파수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껏 마력을 품은 지옥의 겁화.

검붉은 불길은 웜홀에서 나오는 푸 른 파수꾼들을 족족 휘어잡고 그대 로 불태워버렸다.

푸른 파수꾼의 특징은 단단한 방어 력이다.

민첩은 떨어지지만 어지간한 공격 은 튕겨낼 수 있고, 비전투 상태가 되면 금세 몸을 수복한다.

하지만.

『이탈. 이탈. 위치를 벗어나야 한 다.』

『후퇴. 불가.」

지옥의 겁화는 웜홀 일대를 모두 집어삼켰다.

느려터진 이동 속도로는 겁화의 범 위에서 벗어나기 전에 모두 녹아내 렸다.

'강해지기는 강해졌구나.'

손끝이 저렸다.

몸은 아직도 과거에 푸른 파수꾼을 해치우려고 고생했던 걸 기억하는 것 같았다.

긴장 한 번 놓을 수 없었던 격전.

지금은 손짓 한 번이면 그때의 괴 물들을 한 줌의 재로 불태워버릴 수 있었다.

녹아내리는 푸른 파수꾼들을 보니, 여태까지의 고생이 보답받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멀었어.'

만족하기는 이르다.

5개월간의 성과는 대단했지만, 앞 으로 가야 할 길은 더욱 멀고도 험 했다.

내가 삼는 기준은 전생의 나 자신.

다중 차원 우주에서 힘의 정점으로 군림했던 투장 데이모스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막연하게 생각 했던 그 목표를 생각보다 빨리 달성 할지도 몰라.'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목표.

만족감과 목표에 대한 투지가 교차 했다.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작동. 불가.』

『위치. 이탈. 불가능.』

웜홀은 계속해서 푸른 파수꾼을 토 해냈다.

앞으로는 검붉은 불길.

뒤로는 계속해서 나오는 푸른 파수 꾼.

전진도, 후퇴도 불가능한 상황.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경험치 0.6%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0.5%를 획득했습니다.

푸른 파수꾼이 겁화에 타버릴 때마 다 경험치가 쏠쏠하게 올랐다.

'이건 오토 사냥 아니냐?'

입가에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웜홀은 푸른 파수꾼 240기를 토해 낸 뒤에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 다.

[몬스터 웨이브 - 2단계를 통과했 습니다.]

[다음 웨이브는 60분 뒤에 시작됩 니다.]

나는 웜홀을 바라봤다.

지옥의 겁화가 주위를 모두 잠식했 는데도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했다.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건가.'

탑의 시스템.

섭리와 법칙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현상.

명색이 72좌의 권능 중 하나인 '지 옥의 겁화'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 다는 건 충격이었다.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이대로 둬도 괜찮겠어.'

웨이브가 시작되면 웜홀에서 괴물 들을 토해낸다.

괴물들은 겁화만 유지하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퇴치할 수 있다.

겁화는 푸른 파수꾼을 모두 불사른 뒤에도 끊임없이 타올랐다.

평범한 불과는 달리, [마력 저항] 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꽃이다.

불길은 오히려 푸른 파수꾼들을 집 어삼킨 뒤로 더욱 거세졌다.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 00:00]

[몬스터 웨이브 - 3단계가 시작됩 니다.]

3번째 웨이브.

이번에는 자이언트 워베어 120마 리가 나왔다.

트롤과 동급인 B급 괴물.

"크어어엉!"

괴성을 지르면서 겁화 사이를 내달 렸지만, 탈출을 시도하는 족족 실패 하고 잿더미로 변했다.

가끔 한두 마리가 온몸이 타버린 채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불길에서 나오는 놈들은 모두 죽 여라."

『존명!』

커다란 할버드가 기진맥진한 괴물

을 맞이해주었다.

자이언트 워베어는 이미 겁화를 헤 치고 나오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임모탈 워 리어의 공격에 쓰러졌다.

"캬. 경험치가 아주 달달하구먼."

4단계는 하이 오크 900마리.

전사와 궁병, 주술사, 그리고 마법 사로 구성된 일개 대대 규모의 군대 였다.

상성이 안 좋았다.

"쿠륵! 여긴 지옥이다!"

"쿠륵, 쿠륵. 이 불길을... 끅."

거점이나 요새를 낀 방어전을 치른 다고 가정했을 때에는 성가신 적이 었다.

하지만 각 객체의 전투력은 푸른 파수꾼보다 밑이다.

하이 오크들은 두 번째 웨이브 때 보다 더 거세진 지옥의 겁화를 버틸 수가 없었다.

"워터 폴!"

"프로스트 아머!"

하이 오크 마법사들은 간간이 마법 을 사용해서 지옥의 불길에 저항하

려는 시도를 했다.

헛수고였다.

"쿠륵! 물도 증발한다."

"내 힘으로는 끌 수 없는 강력한 마법의 불... 끄으윽."

하이 오크 군대도 겁화의 불길 앞 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몬스터 웨이브 - 4단계를 통과했 습니다.]

[다음 웨이브는 60분 뒤에 시작됩 니다.]

3층의 시련.

시련이 아니라 층 전체가 보물창고 였잖아?

92 화

3층을 담당하는 상인, 크로우는 날 개의 털을 다듬었다.

고요한 요새.

간혹 스켈레톤 턱뼈가 들썩이는 소 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깍. 도전자 녀석. 결국 내뺐나?"

3층의 시련은 개별적인 공간에서 진행된다.

도전자가 모두 죽으면 공간의 시간 도 그대로 동결된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아직 도전 자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도전을 포기했나 보군. 깍깍!'

혈강시는 까다로운 적이다.

오러도 막아내는 피부.

그리고 5서클 마법 이하는 자동 무효화.

강력한 물리&마법 저항을 지녀서 몸뚱이에 상처 하나 내기 힘들었다.

'깍, 오러 블레이드나 6서클 이상 은 사용해야 타격을 줄 수 있다.'

상처를 줘도 문제였다.

혈강시의 육신에는 지독한 독무가 응축되어 있다.

단단한 피부를 뚫어내면 독이 해당 부위에서 새어 나왔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반응하는 지독 한 맹독이다.

'혈강시의 회복력은 트롤을 뺨치 지. 까아악!'

단단해서 상처도 입히기 힘든데 피 해를 주면 독을 내뿜어서 공세의 흐

름을 끊어낸다.

기껏 흠집을 내면 혈마기를 소모해 서 회복해 버리니.

크로우는 민철이 혈강시를 절대 이 길 수 없다고 확신했다.

'깍! 혈강시를 보고 내뺐다면 조만 간 이곳으로 올 것이야.'

3층의 시련은 혼자 도전할 만큼 녹록하지 않다.

세 갈래로 몰려드는 몬스터 웨이 브

1층과 2층 시련을 무난하게 돌파 한 도전자라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거점이 3개라는 것이다.

한 손으로 구멍 3개를 막아낼 수 는 없는 법.

포인트를 소모해서 거점을 강화하 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오면 확실히 벗겨 먹어야지. 까아 악!"

크로우는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1시간, 그리고 2시간이 지나도.

민철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 았다.

"까악. 자존심만 센 도전자 녀석. 너무 늦네."

크로우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퍼덕, 퍼덕.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곧장 거점 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

거점 세 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 깍?"

이상했다.

크로우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

다.

거점 세 군데는 모두 멀쩡하게 남 아있었다.

주변에는 전투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떠올 랐다.

'깍. 그럴 리가 없는데.'

크로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곧장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기에, 웜홀 이 있는 곳까지 날갯짓을 하면서 빠

르게 나아갔다.

"까아아악?!!"

크로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쉼 없이 흔들리는 동공.

부리는 위아래로 크게 벌어져서 도 저히 닫힐 줄을 몰랐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많은 도 전자를 마주했던 크로우조차 처음 보는 진풍경이었다.

웜홀 주위를 집어삼킨 검붉은 불 길.

괴물들은 나오는 족족 불에 타서 잿더미로 화했다.

이걸 시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변수가 나타났다. 까악!'

크로우는 관리자에게 고용된 상인 이다.

그의 업무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상품을 도전자들에게 파 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민철과 같은 '변수'를 관리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깍. 이건 관리자님께 보고를 드려 야 해!"

크로우는 허둥지둥거리다가 어딘가

로 날아갔다.

米 >k 米

[몬스터 웨이브 - 10단계가 시작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방어전입니다.]

방어전은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 고 있었다.

지난 9번의 웨이브.

첫 번째 방어전을 제외하면 변수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불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졌잖 아.'

겁화는 웜홀 주위를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괴물의 사체를 자양분 삼아 크기를 더욱 불려 나간 것이다.

괴물 중에는 간혹 화염을 뚫어내는 데 성공한 녀석들도 있었다.

『척살!』

불길을 뚫고 나온 녀석들은 어김없 이 임모탈 워리어의 할버드 맛을 맛 봤다.

'이번에는 좀 다를까?'

가만히 앉아서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도 심심했다.

마지막 방어전.

불길을 뚫고 나올 만큼 강한 적이 기를, 내심 기대했다.

우우웅-!

웜홀은 돌연 크기를 키우더니 여태 까지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커 다란 괴물들을 불러냈다.

15m 크기의 대형 괴수.

S급 몬스터, 자이언트였다.

'실제 거인족에 비해서는 약하다.'

자이언트는 원본인 '거인족'에 비 해 상당히 약화가 된 모습이다.

덩치도 훨씬 작았고, 신체 능력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불칸 종족과 비슷했다.

'그래도 명색이 거인족이니, 마음 을 놓을 수는 없겠어.'

나는 자이언트의 외형을 살펴봤다.

자이언트들은 금속 재질로 된 갑주 로 급소 부위만 가리고 있는 기괴한 패션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나오는 야만 전사를

보는 것 같았다.

"크으으으... 뜨겁구나."

"이곳은 지옥인가?"

"전사들이여. 쓰러지지 마라."

자이언트 무리는 웜홀 너머로 넘어 오자마자 신음을 흘렸다.

검붉은 화염은 여기저기에 들러붙 어서 거인의 몸뚱이를 갉아먹었다.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이곳을 벗어나야 해."

자이언트들은 고통을 버티며 웜홀 주위를 이탈하려 들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존명!』

임모탈 워리어 5기는 겁화 주위에 서서 탈출하려는 자이언트들을 저지 했다.

『지존의 명이다. 그 안에서 죽어 라.」

"건방진 것들."

"덩치도 작은 것들아. 어서 비켜 라!"

임모탈 워리어가 작게 보이는 커다 란 덩치.

하지만 쉽게 돌파하지는 못했다.

이미 지옥의 겁화로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었다.

접촉하는 순간, 임모탈 워리어의 [생기 갈취]가 발동되면서 기력을 추가로 빼앗았다.

"비켜라. 짐이 길을 터겠다!"

돌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강대한 마력의 파동이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른 자이언트보 다 2배 정도 커다란 거인이었다.

하얀 피부와 수염.

입가에는 한기 서린 입김이 끊임없

이 흘러나왔다.

서리 거인.

신화시대에나 존재했던 전설의 괴 물이다.

"이곳은 이제부터 짐의 영역이니 라!"

서리 거인은 웜홀 주위 일대를 자 신의 땅으로 선포했다.

[혹한의 대지]

쩌저저적!

서리 거인이 발을 크게 구르자, 혹 한의 기운이 원을 그리면서 사방으 로 확산되었다.

겁화와 냉기가 부딪쳤다.

타닥타닥-

콩 튀기는 소리가 나고 곳곳에서 대량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거칠 것 없이 타오르던 겁화의 기 세가 처음으로 주춤거렸다.

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 정도로 지워내는 건 불가능하 다.'

지옥의 겁화는 명색이 [죄악] 의 권능이다.

서리 거인이 신화적인 존재라고 할 지라도, 눈앞에 있는 녀석은 탑에서

재현한 '가짜'였다.

힘의 깊이와 신비 면에서 나보다 모두 뒤떨어졌다.

겁화를 몰아낸 건 고작해야 반경 30m 정도.

자이언트의 커다란 덩치를 생각하 면 자기 몸 가눌 수 있는 정도만 불을 꺼트린 셈이다.

"건방진 것. 감히 짐의 행사를 방 해할 참이더냐!"

콰드드득!

얼음으로 된 기다란 참마도가 허공 에 맺혔다.

서리 거인은 참마도를 쥐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임모탈 워리어를 향 해 돌진했다.

쿵- 쿵-

놈이 걸음을 뗄 때마다 지축이 흔 들리고 불길이 좌우로 일렁였다.

땅거죽에 서리는 한기.

서리 거인이 서 있는 땅에 한해서 는 지옥의 겁화도 쉽게 침범하지 못 했다.

『지존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한 다.』

임모탈 워리어는 붙들고 있던 자이

언트를 놔두고 서리 거인을 마주했 다.

초록색 기운이 전신에 아른거린다.

[생기 갈취]로 자이언트의 생명력 을 꽤나 빼앗은 듯 근력과 민첩, 그 리고 갑주의 회복 속도가 꽤 상승되 었다.

참마도와 할버드가 허공에서 맞붙 었다.

까앙!

공세를 한 번 주고받은 것만으로 할버드의 창대가 반으로 잘려 나갔 다.

임모탈 워리어는 미처 충격을 해소

하지 못했는지 뒤로 튕겨 나갔다.

"감히 짐의 앞을 막아서다니."

서리 거인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지면을 박차면서 도약. 들고 있는 참마도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커다란 충격으로 땅이 들썩였다.

쾅! 쾅!

참마도가 여러 번 위아래로 오가면 서 임모탈 워리어의 머리를 두들겼 다.

임모탈 워리어는 무기를 다시 형상 화시키고 생기 갈취를 사용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되다 만 시체여. 건방지구나!"

콰직!

참마도는 여러 번의 공세 끝에 임 모탈 워리어의 머리를 박살 내버렸 다.

[임모탈 워리어 1기가 파괴되었습 니다.]

'어설프긴 해도 신화의 재현이라는 건가.'

임모탈 워리어는 생기 갈취로 한껏

힘을 증강시킨 상태였다.

그런 괴물을 장난감 다루듯 밀어내 버리다니.

서리 거인의 괴력 하나만큼은 인정 해야겠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짐의 힘이니 라!"

"봐줄 사람은 없어 보인다만."

나는 앞으로 나섰다.

서리 거인은 고개를 숙여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물이여. 그게 무슨 말이더냐?"

"주위를 둘러봐라."

소환된 자이언트는 모두 9마리. 이미 절반 이상이 겁화를 버텨내지

못하고 지면에 머리를 처박았다.

"끄윽. 왕이시여."

"뒤를 부탁드립니다."

남은 4마리도 간신히 숨만 붙어있 을 뿐.

언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 다.

"같잖은 자존심을 부리기 전에 부

하들을 살폈어야지."

"작은 미물이 건방지기까지 하구

나. 짐이 오늘 네 목을 쳐서 바닥에

떨어진 왕권을...

"아. 말 더럽게 기네."

나는 서리 거인의 말을 잘랐다.

덩치도 크면서 입으로 싸우려고 하 나.

"주둥이 그만 나불대고 덤벼."

"이... 이! 건방진 미물이!"

서리 거인은 검붉은 불길을 돌파하 고 곧장 나를 향해 돌진했다.

우직한 정면 코스.

옆이나 뒤를 보지 않는 직선적인 공세다.

[서리 거인 - 오르곤]

근력 : 650 / 민첩 : 350 / 체력 : 650 / 맷집 : 700 / 마력 : 500

* 특성

한기의 지배자[A]

거대 괴수[B]

* 스킬

혹한의 대지 [A]

냉기 브레스[A]

냉기 조형 [B]

서리 거인의 스펙은 앞에 상대했던 혈강시보다 조금 높았다.

'그렇다고 서리 거인이 더 강하다 는 건 아니지.'

근력 650이라는 막대한 수치.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힘이다.

혈강시가 힘은 조금 떨어졌어도, 사이즈도 작고 더 민활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깔리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경계해야 할 건 저 엄청난 질량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민첩하게 움직 이면서 서리 거인의 돌진을 흘려보 냈다.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건지.

서리 거인은 조금 전에 내가 서 있던 공간에서 꽤 먼 곳까지 쭉 나

아갔다.

'손해를 본 건 보충해야 하지 않겠 어?'

나는 검지를 들었다.

짙은 마력이 손가락 끝에 응축되었 고, 이내 흑색 결정의 형태로 굳혀 졌다.

[불멸] 권능을 형상화시킨 형태, 불멸의 결정이다.

손가락을 까딱여서 흑색 결정을 던 졌다.

[불멸의 권능이 대상에게 깃듭니

다.]

[불멸의 저주로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낙인이 찍힌 상대를 쓰러트리면 불멸의 전사를 제작할 수 있습니 다.]

서리 거인의 몸에 깃든 저주.

이 녀석이라면.

[전사] 등급 이상의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걸 해 먹었으니, 대신 그 육체 를 받아 가마.'

나는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서리 거인을 바라봤다.

93 화

서리 거인.

10층 아파트의 높이가 27m쯤 되 니, 건물 하나가 내 앞에 서 있는 셈이다.

그 커다란 건물이 나를 짓뭉갤 기 세로 달려온다면?

" 이크."

나는 경신법을 전개해서 옆으로 움 직였다.

위치를 바꾼 직후.

쿵 쿵!

서리 거인이 매서운 기세로 돌진해 서 조금 전 내가 있었던 장소를 짓 밟았다.

"개미 같은 녀석. 감히 짐을 능멸 하려 드는구나!"

"짐은 무슨. 지가 왕인 줄 알아요."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콰콰콰콰-!

혼돈기가 혈관을 질주하고, 뒤이어 하얀 불꽃이 전신을 뒤덮었다.

능력치 140% 상승.

근력은 500대 초반, 민첩은 400대 에 도달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는 부족하네.'

서리 거인의 근력은 650.

불멸의 저주를 적중시켜서 능력치 를 감소시켜도 500 후반을 유지했 다.

저저저적!

놈이 밟고 있는 땅이 서리로 뒤덮 였다.

[한기의 지배자 특성이 발동됩니 다. 혹한의 대지의 범위가 증가합니 다.]

[서리 거인의 능력치가 10% 상승 합니다.]

[냉기 Lv5에 노출되었습니다.]

[근력 / 민첩 / 체력이 10% 하락 합니다』

서리 거인은 특성의 효과로 불멸의 저주로 감소시킨 능력치를 원상복구 시켰다.

반면 내 능력치는 10% 하락했다.

놈은 스킬 하나를 써서 버프와 디 버프를 동시에 해결했다.

서리 거인.

신화시대의 괴물답게 상대하기 까 다로운 적이다.

'어디까지나 일반론이지.'

나는 백염(白炎)에 성력을 추가로 불어넣었다.

[성스러운 불꽃이 거세게 타오릅니 다.]

[사용자의 몸에 깃든 삿된 기운을

배제합니다.]

둔해졌던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 다.

나는 대형 괴수를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동인천역 게이트]에서는 저것보다 더 큰 어보미네이션도 상대하지 않 았던가.

'그때는 성천조계공의 성취도 안 높았다.'

성천조계공 6성.

별자리의 힘을 얻고 더 강해졌다.

'정면 승부다.'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면서 서리 거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개미 새끼답게 촐랑거리면서 뛰는 구나. 하지만 소용없느니라!"

서리 거인은 팔을 크게 휘저었다.

[냉기 조형]

원통형의 얼음 기둥.

수 미터 크기의 뾰족한 기둥들이 공중을 가득 메웠다.

얼음 기둥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낙하를 시작했다.

"보아라! 자연조차 지배하에 두는 짐의 위대함을!"

[아이스 에이지]

서리 거인이 지면을 세게 밟자, 커 다란 얼음이 바닥에 깔린 빙판에서 솟구쳤다.

커다란 얼음벽은 U 형태를 띠며 뒤를 제외한 삼면을 가로막았다.

속도로는 나를 잡을 수 없으니, 얼

음의 무게로 짓눌러버리려는 것 같 다.

근력이 500대라고 해도, 수십 톤에 달하는 얼음을 받아낼 수는 없다.

'나름 머리를 썼군.'

달리던 기세 때문에 뒤로 물러나기 는 어렵다.

놈은 전방과 좌우를 얼음벽으로 막 고 얼음 조형으로 짓눌러버리려는 심산이었다.

'그게 자충수인지도 모르고 말이 야.'

[지옥의 겁화를 사용합니다.]

마력 1천을 부어서 지옥의 겁화를 일으켰다.

손을 크게 휘젓자, 허공에 맺힌 얼 음 기둥들을 향해 날아갔다.

수 미터에 달하는 두꺼운 얼음 기 둥.

한껏 마력을 녹여낸 겁화에 닿자, 수증기와 함께 기화되어버렸다.

나는 경신법 운용을 멈추지 않았 다.

펑! 퍼펑!

혼돈기를 발에 모았다가 아낌없이 터트리면서 추진력을 더했다.

'발판을 만들어주면 고맙지.'

빙벽에 얼굴을 그대로 들이박기 직 전.

품속에 넣어둔 섬전비도를 빠르게 투척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빙산.

섬전비도에 혼돈기를 불어넣어 던 지니, 큰 저항 없이 박혔다.

나는 섬전비도를 회수하지 않고 발 판 삼아서 빠르게 빙벽을 넘었다.

단숨에 서리 거인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대형 괴물을 공략하려면 발을 묶고 차근차근 갉아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서가 좀 바뀌었다.

'그렇게 한 방 먹여달라는데, 가만 히 있으면 도리가 아니잖아?'

서리 거인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존재와 싸우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빈틈을 최대한 노려야지.

나는 빙벽 끝에 서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칠성마검 - 1초식]

기다란 검강이 서리 거인의 어깨를 쭉 갈랐다.

"크오오오오오!"

서리 거인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면 서 뒤로 물러났다.

피부 위로 길게 새겨진 검상.

갈라진 상처 사이로 피가 마구 솟 구쳤다.

덜렁거리는 왼팔은 당분간 힘을 쓰 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칠성마검 다음 초식을 펼치는 대신, 다크 스타를 섬전비도로 변형 했다.

"이대로 놔줄 것 같나?"

다크 스타를 투척.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당겨서 발판 으로 삼았던 섬전비도를 회수했다.

'기세를 탄 이상, 몰아붙일 뿐.'

나는 빙벽을 박차면서 팔에 힘을 주었다.

서리 거인의 몸뚱이에 박힌 다크 스타가 암벽등반용 고정핀처럼 지지 대 역할을 해줬다.

줄을 잡고 놈의 배후를 잡았다.

'등짝이 아주 보기 좋네.'

다크 스타는 2차 해방을 마친 뒤 부터 무기를 둘까지 구현해낼 수 있 다.

비도를 유지하면서 등반을 하듯 서 리 거인의 등짝을 밟았다.

[다크 스타 - 이그누스 티스]

다크 스타를 유니크 등급 도끼, 이 그누스 티스로 변형했다.

붉은 기운이 도끼날을 휘감고 있

다.

지저 깊은 곳에서 불의 정령이 내 뿜는 화염을 받아서 제련했다고 하 는 전설적인 도끼다.

나는 이그누스 티스의 기운을 이끌 어 내면서 태산부법을 펼쳤다.

[이그누스 티스 - 내장 스킬 : 화 염의 숨결]

도끼날이 거세게 타올랐다.

지옥의 겁화와는 다른, 순수한 불 의 정수였다.

쩌억-

도끼는 두꺼운 가죽을 가볍게 뚫어 내고 서리 거인의 몸뚱이에 파고들 었다.

'이 정도면 지지대로 충분하다.'

빙벽을 올라타던 때와는 달랐다.

놈이 몸을 흔들면 비도를 떨쳐낼 수 있다.

하지만 도끼처럼 깊게 날을 박아놓 으면 흔들릴 염려가 적었다.

도낏자루를 밟고 재차 도약.

이그누스 티스는 그대로 두고 아까 놈의 몸뚱이에 박았던 흑색 섬전비

도를 회수했다.

"읏차."

도약 한 번으로 서리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크오오오오...

놈은 고통에 젖은 비명을 내지를 뿌

내가 어깨에 올라탄 지도 모르는 눈치다.

'손맛은 좀 있는데. 시시하군.'

역시.

이 녀석보다는 혈강시가 더 난적이 었다.

타격을 주면 독무를 뿜고 금세 상 처를 재생했다.

순수하게 무공만 사용했다면 현 수 준의 나조차도 꽤 고전했을 상대였 다.

반면 이 덩치만 큰 녀석은... 한 심했다.

'장점을 제대로 살릴 줄 몰라.'

스스로를 왕이라고 드높일 줄만 알 았지, 전투 센스는 꽝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칠성마검의 첫 초 식을 펼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놈의 몸에 새겨진 커다란 검상.

칠성마검을 펼치면 치명상을 먹일 수 있다는 게 이미 증명되었다.

검 끝이 향하는 곳은 서리 거인의 목덜미.

생물의 급소 중 하나였다.

'빨리 끝내주지.'

칼을 뽑으면서 강대한 기운을 해방 했다.

米 米 #:

-경험치 17.5%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m 크기의 초대형 괴수.

서리 거인은 머리와 몸뚱이가 분리 된 채, 지면에 쓰러졌다.

육신의 무게가 얼마나 많이 나갔는 지, 바닥과 닿는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들썩였다.

나는 슬라이딩하둣 서리 거인의 몸 을 타고 지면으로 내려왔다.

'손맛이 있었어.'

서리 거인은 강했지만 힘을 효율적 으로 다룰 줄 몰랐다.

특히.

나처럼 월등히 작은 존재에게 전력 을 다하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했 다.

'그래서 놈이 전력을 개방하기 전 에 쓰러트렸지.'

펜리르와의 사투가 떠올랐다.

덩치가 큰 녀석과 장기전을 벌이면 피곤했다.

나는 상태창을 켰다.

38 레벨.

3층의 시련을 진행하는 동안 레벨 을 3개나 올릴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입술이 절로 씰룩거렸 다.

'보너스 스탯이 15나 되다니.'

[근력 : 132 - 140]

[민첩 : 107 - 114]

나는 레벨 업 보너스로 얻은 능력 치를 모두 투자했다.

『지존의 명을 수행했습니다.』

남은 임모탈 워리어는 3기.

자이언트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하

나가 더 당했다.

'이 정도면 선방했네.'

자이언트.

원본인 거인족에 비해 열화되었다 고는 해도, S급 게이트에서나 출몰 하는 강력한 괴물이다.

지옥의 겁화를 주변에 질러놔서 미 리 타격을 준 덕에 임모탈 워리어의 피해가 적었다.

콰드득!

섬뜩한 소리.

진원지는 서리 거인의 몸뚱이에 꽂 았던 불멸의 결정이었다.

흑색 수정은 크기를 키워가더니 이 윽고 서리 거인의 몸뚱이 전체를 집 어삼켰다.

[불멸의 결정을 맞은 대상이 사망 했습니다.]

[새로운 숙주를 발견했습니다. 죽 음의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불멸 포인트 : 50 - 10이

'갑자기 죽음의 이해도가 올라갔다 고?'

불칸 전사를 임모탈 워리어로 제작

했을 때에는 본 적 없는 메시지였 다.

죽음의 이해도가 올라가면서 불멸 포인트도 2배가 되었다.

'권능을 성장시키는 방법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불멸] 권능.

전 서열 15위, 불사의 파라오 제린 은 수많은 불멸의 군세를 다루었다.

녀석이 다루었던 권능의 비밀.

스테이터스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서 생각보다 쉽게 알아낼 수 있었 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상의 생전 능력과 혼의 업에 맞 춰 임모탈 나이트로 되살립니다.]

[불멸 포인트 : 90/100]

팽창을 거듭하던 수정은 어느 순간 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갈라진 수정 사이.

흑색 기사가 푸른 귀화를 흩뿌리면 서 일어났다.

『지존께 인사 올립니다.』

임모탈 나이트.

전사보다 한 단계 위인 불멸의 군 세가 탄생했다.

덩치는 임모탈과 비슷했다.

30m 크기의 서리 거인을 모태로 제작해서 그런지, 조금 작게 느껴졌 다.

'이 녀석. 보통이 아니잖아.'

피부가 찌릿하다.

임모탈 나이트의 기세는 서리 거인 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진실의 눈으로 임모탈 나이트 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임모탈 나이트]

근력 : 550 / 민첩 : 500 / 체력 : 550 / 맷집 : 550 / 마력 : 450

* 특성

불사의 군세 [A]

검의 달인 [A]

* 스킬

데스 블레이드[A]

아카라스 식 기초 검법 [A]

괴력 [A]

폴리모프 [A]

능력치는 원본인 서리 거인에 미치 지 못했다.

'장군급을 제작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 겠지.'

차라리 다행이다.

기사 등급은 유지에 60포인트를 소모했다.

장군급을 제작했더라면 불멸 포인 트가 모자라서 다뤄내지 못했을 것

이다.

나는 임모탈 나이트의 특성과 스킬 을 훑어봤다.

'기사라서 그런지 검법을 익히고 있잖아.'

임모탈 나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전사와 달리, 검을 전문으로 사용한 다는 것이다.

전사 등급은 상황에 따라 병장기를 빚어낸다.

반면 기사 등급은 검만 다루었다.

'아카라스 식 검법이라.'

검의 악마, 아카라스.

서열 30위의 악마 군주다.

세력을 일구지 않고 오로지 검의 극한을 깨우치기 위해 수련에만 매 진하는 괴짜 악마.

임모탈 나이트가 어떤 연유로 놈의 검법을 익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 다.

'상태창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 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카라스 식 검법.

비록 기초 단계지만, 무 대륙의 절 학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강력

한 검법이다.

그 외에도 시선을 끄는 스킬이 하 나 더 있었다.

"폴리 모프?"

폴리모프는 자신의 형태를 바꾸는 마법이 다.

『예. 지존께서 원하시는 대로 크 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인간 사이즈도 될 수 있다는 건가.

문득 수련 삼매경에 빠진 에인헤야 르 4기사가 떠올랐다.

'너희들한테 경쟁자가 생긴 것 같 다.'

임모탈 나이트.

백색 기사들과 대비되는, 아주 강 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94 화

[시련의 탑 - 3층]

[블랙 포트리스 방어전을 성공적으

로 마쳤습니다.]

*받은 피해

-블랙 포트리스 : 0

-제1거점 : 0

-제2거점 : 0

-제3거점 : 0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거점에 피해를 받지 않고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업적을 기록했습니

다.]

[당신의 이름과 업적이 탑의 역사

에 기록됩니다.]

[보상으로 200,000pt 오} 엘릭서가

주어집니다.]

노란색 포션이 하늘에서 아래로 천 천히 떨어졌다.

나는 병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엘릭세

등급 : 전설[L]

종류 : 잡화

내구도 : 50/50

모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 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약입니다.

복용하는 즉시 생명력과 마력이 최 대치로 회복되고, 갖가지 저주와 상 처, 독을 씻어냅니다.

'정말로 그 엘릭서라고?!'

숨만 쉬고 있으면 누구라도 살려낼 수 있다는 전설의 명약이다.

나도 본 적은 있지, 사용해본 적은 없다.

'엘릭서는 엘리시움 특제니까.'

엘리시움 본성 어딘가에 위치한 영 원의 샘.

성력이 녹아있는 물에 각종 축복을 내리고 여러 영약을 혼합해서 만든 귀중한 포션이다.

엘리시움에서 가장 드높은 천상의

존재.

일곱 천사장들도 긴급사태가 아니 면 쉽게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바로 엘릭서다.

'그걸 여기서 얻게 될 줄이야.'

목숨을 여벌로 가지게 된 셈이다.

레인보우 링의 완전 회복까지 더해 지면, 치명상을 입어도 2번 회복할 수 있다.

'엘릭서는 최대한 아낀다.'

나는 엘릭서를 아공간 주머니 안쪽 에 넣어두었다.

초월 등급 방어구.

그리고 엘릭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모두 손에 넣었다.

천장으로 뻗은 계단.

나는 다음 시련을 향해 발을 내디 뎠다.

米 米 *

계단 너머.

탑의 경계에 발을 딛는 순간, 강렬 한 빛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눈꺼풀을 한 번 껌벅이고 나니 주 위의 풍경이 변해 있었다.

'살풍경한 모습이네.'

회색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커다란 벽.

앞으로 가는 길을 빼면 모두 막혀 있는 일직선 통로였다.

높이 3m, 폭은 5m쯤 되어 보인다.

호롱불이 수 미터 간격으로 벽에 매달려 있어, 통로의 구조를 은은하 게 밝혀주었다.

[시련의 탑 - 4층]

[퀘스트 : 고난의 통로]

함정이 가득한 통로를 지나서 목적 지에 도달해라.

* 목표

통로의 끝까지 가는 것.

'미로 찾기가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이번 시련 동안에는 길을 못 찾아 서 헤맬 일은 없었다.

길은 하나뿐.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은 전진뿐이

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무사히 3층의 시련까지 통과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중성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 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성천조계공의 기감에 걸리는 것은 없었는데?!'

놀랄 새도 없이, 몸을 반대로 돌리 면서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돌연 등 뒤에서 나타난 존재.

목소리의 주인은 턱시도를 입었는 데, 분홍색 복숭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 다.

나는 곧장 [진실의 눈]으로 상대의 정보를 확인했다.

[관리자 란드]

근력 : ??? / 민첩 : ??? / 체 력

[진실의 눈]은 월등히 강한 상대의 경우, 정보를 읽어내지 못했다.

세계석을 흡수하고 여러 기연을 얻

으면서 제법 강해졌지만.

0층의 관리자, 루체 때와 마찬가지 로 이름 외에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멀었나.'

쳇.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관리자한테 남을 놀려먹는 취미가 있는지는 몰랐군."

『후후. 많이 놀라셨다면 죄송합니 다.』

"바쁘신 몸이라고 들었는데. 인사 만 하려고 온 건가?"

『설마요. 먼저 제 소개를 하지

요.』

관리자는 턱시도 끝을 펄럭이더니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복숭아 가면의 오른쪽 눈동자가 붉 게 깜빡였다.

호오.

이놈 보소?

『1층부터 5층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 란드라고 합니다.』

"전민철이다."

『당신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서 알 고 있습니다.』

"귀한 분이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 지 온 건 아닐 테고 말이야."

『0층의 관리자가 주목하는 신입이 라고 해서, 직접 얼굴을 보려고 왔 지요.』

"목적은 그거뿐인가?"

『그렇습니다.』

"이왕 온 김에 이번 시련 주제나 알려주든지."

『그건 불가능합니다. 탑의 규정상, 관리자는 도전자에게 개입해서는 안 되거든요.』

내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모르는 줄 아나 본데?'

놈의 오른쪽 눈동자가 한순간 붉어 졌을 때.

나한테 모종의 마법을 사용했다.

해가 되지는 않아서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관리자야.

방금 한 말, 분명 후회하게 될 거 다.

나는 관리자한테서 시선을 떼고 정 면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통로를 천천히 걸었

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퍼지면서 메아리치듯 여러 번 울렸다.

'어떤 함정이 있을까?'

사람 4명이 나란히 서면 꽉 막힐 것 같은 통로.

간격이 제법 되었다.

미리 함정을 간파하기만 하면 피하 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끼리릭-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 했다.

'왼쪽이 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오는 화살.

기계장치에는 살의가 없다.

마력의 파동을 읽는 것만으로는 함 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소리를 듣고 파악하길 다행이다.'

피할 것인가.

아니면 받아칠 것인가.

첫 함정이니 힘을 빼지 않고 회피 하는 것을 택했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딸깍.

딛고 있던 벽돌이 쑥 들어가더니 일대가 무너져 내렸다.

'옆에도 함정이 있다고?'

주저앉은 발판 아래.

사람 크기만 한 송곳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중력 강화 마법이 적용됩니다.]

[근력과 민첩이 20% 감소합니다.]

몸이 무거워졌다.

중력이 육신을 붙드는 게 '죽음의 해역'을 연상시켰다.

나는 천장을 향해 섬전비도술을 펼 쳤다.

까앙-

비도가 벽에 부딪치는 순간, 강한 반발력과 함께 튕겨 나갔다.

'비도가 안 박히다니.'

천장이 오리하르콘이라도 되는 건 지.

비도에 기를 실었는데도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펜리르나 서리 거인의 몸에 올라탔 던 묘기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충돌 직전.

[호신마강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00을 소모합니다.]

내력을 전신으로 둘러서 막을 형성 했다.

카각!

바닥에 박힌 송곳은 호신마강을 반

정도 뚫어냈다.

'미친. 뭐가 이렇게 예리해.'

혼돈기를 방출해서 만든 강기의 막 이다.

몸 전체를 감싸기 때문에 밀도가 조금 떨어졌지만, 어지간한 방어구 보다도 단단했다.

나는 송곳을 흘겨봤다.

끝에 감도는 예기가 범상치 않다.

'강기를 손상시키는 송곳이라니.'

역시 탑의 시련이라는 건가.

함정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중력 가중 마법진.

기를 실어도 구멍 하나 안 나는 튼튼한 벽.

그리고 호신마강조차 뚫어낼 수 있 는 날카로운 송곳.

나는 혼돈기를 발에 응축시켜서 송 곳 하나를 세게 밟았다.

콰직-

날 선 촉이 혼돈기에 그대로 뭉개 져 버렸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뭉갠 송곳에 발을 딛고 있는 힘껏 도약했다.

중력 마법진을 떨쳐내고 지면 위로 발을 딛는 순간.

끼기긱-

태엽이 움직이는 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아른거렸다.

'엄청 집요하잖아.'

나는 조금 전에 화살이 날아온 방 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공기를 가르면서 날아오는 화살.

극한에 이른 집중력 덕에 발사 타 이밍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곧장 다크 스타를 제왕의 검으로 변형해서 검막을 전개, 날아드는 화

살을 튕겨냈다.

벽 틈 사이.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는 기계장치 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 엄청 귀찮게 하는군."

이번에는 일각수의 뿔창으로 변형.

짜증을 가득 담아서 빠르게 내질렀 다.

뿔창은 틈새 사이로 파고들어서 기 계장치를 박살 냈다.

"후 "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결과는 컸다.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 마 냥, 발판이 무너지면서 아래로 빠졌 다.

나는 혼돈기를 제왕의 검에 불어넣 었다.

칼날에 맺히는 선명한 검강.

옆에 있는 벽을 향해 빠르게 휘둘 렀다.

카앙-

검강과 벽이 충돌하는 순간, 금속 과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가 울려 퍼졌다.

칼자루를 쥔 손이 얼얼했다.

[현 지역은 탑의 시스템 보호를 받 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파괴할 수 없 습니다.]

[시련에서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 여주시기 바랍니다.]

'탑의 시스템이 적용될 줄이야.'

시스템의 규칙은 세상을 이루고 있 는 '법칙'이다.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이치이듯.

4층에서는 '벽'을 부술 수 없는 것 이 하나의 법칙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3층의 시련을 너무 쉽게 통과해서 그랬던 걸까.

통로를 걸으면서 마음을 너무 놓은 것 같다.

느슨해졌던 경계심을 꽉 조였다.

시련의 탑.

도전자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장소 다.

'두 번은 안 당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 통로의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고난의 통로.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참 잘 지은 것 같다.

통로에 깔린 함정은 악랄함의 극치 였다.

머리 위.

아래.

혹은 등 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노 렸다.

'가지가지 하는구먼.'

함정 종류와 속임수도 다양했다.

처음처럼 투사체를 발사해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걸 유도하는 건 애 교였다.

천장이 열리더니 마력 뱀들을 쏟아 내지를 않나.

환상을 보여주고는 발목을 노리기 도 했고, 이미 지나간 통로의 일부

가 갈라지면서 쇠공이 나오기도 했 다.

통로 구조가 변하면서 경사가 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곳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 다.'

성천조계공과 성스러운 불꽃을 동 시에 사용했다.

버프로 한껏 강화된 신체 능력.

나는 긴장을 풀지 않고 오감을 발 휘해서 함정 발동 여부를 파악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위 치를 수시로 바꿨다.

'기계장치와 마법진. 두 개를 혼용 하고 있다.'

성천조계공의 기감을 활성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진을 하는 순간에는 조금도 긴장 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함정으로 가득한 통로를 돌파하는 데 집중했 다.

집중력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로 얼 마쯤 걸었을까.

[극한의 상황으로, 신체의 모든 감

각을 한계 이상 끌어올렸습니다.]

[특성 - 육감을 획득했습니다.]

'육감이라고?'

시련을 진행하던 중, 새로운 특성 을 획득했다.

설마.

시련 내내 이어진 함정은 도전자의 육감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건가.

탑은 도전자에게 시련과 보상을 준 다.

촘촘히 설치된 함정.

도전자의 감각을 자극해서 [육감] 특성을 깨우치게 하려는 세팅 같았 다.

'거참. 빌어먹게 고맙군.'

탑의 보상은 내 마음에 차지 않았 다.

환생이라는 특이 케이스.

나는 전생의 경험과 업을 모두 지 닌 덕에 예지에 가까운 감각을 지녔 다.

특성만 없을 뿐.

육감 특성을 깨우친 사람보다도 더 예민한 감각을 깨우치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용자의 혼에 쌓인 업이 특성에 반응합니다.]

[육감 一 초감각]

내가 속으로 투덜거린 것을 듣기라 도 한 걸까.

스테이터스 시스템은 조금 전에 얻 은 특성에 개입해서 변화를 일으켰 다.

[초감각]

초감각을 일깨워서 체감시간을 극 도로 느리게 합니다.

극한의 위기를 느꼈을 때 자동적으 로 활성화되며, 사용자의 의지에 따 라 능동적으로 초감각 상태를 발동 할 수 있습니다.

육감 대신 생성된 초감각 특성.

'이걸 여기서 얻게 될 줄이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95 화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닥치면 삶의 과정을 짧은 순간에 모두 떠올린다 고 한다.

이른바 주마등 현상이다.

'극한의 공포가 혼에 걸린 제약을 풀어내는 거지.'

뇌에 기록된 정보들을 순식간에 훑 어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

평범한 사람은 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영혼의 격이 높지 않다면, 무한하 게 확장된 사고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초감각은 자의로 주마등과 비슷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적의 움직임 에 반응할 수 있다.'

사고의 확장.

실제로 시간의 흐름을 늦추는 건 아니다.

1초를 수백, 혹은 수천으로 쪼개서 빠르게 생각하고 몸의 움직임을 조 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얻게 될 줄이야.'

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초감각은 악마 군주나 천사장 수준 의 격을 쌓은 존재가 아니면 익힐 수 없다.

전생의 나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언 젠가 손에 넣어야 할 '특성'이었다.

'역시 탑의 시련은 최고다.'

함정 때문에 투덜거렸던 것은 머릿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도전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여러 함 정.

장시간 감각을 극도로 끌어 올린 덕에 초감각의 영역에 도달했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전진했다.

오른발을 지면에 대는 순간, 묘한 파장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초감각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면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주 조 금씩 움직였다.

위기를 감지하자, 초감각이 자동적 으로 발동하면서 사고의 흐름을 가 속시 켰다.

'발을 묶는 함정. 진짜는 위쪽인 가.'

천장에서 여러 구멍이 열렸다.

화살의 비.

느려진 시간 감각 속에서, 천장 위

에 숨겨진 화살을 발견했다.

나는 혼돈기를 발에 집중해서 마법 진 일부를 망가트리는 동시에 지면 을 박찼다.

응축된 혼돈기가 해방되면서 몸을 확 밀어냈다.

휘휘휙!

한발 늦게 쏟아지는 화살 세례.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초감각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연속적으로 닥친 위기.

'아까처럼 멍청하게 당할 줄 아 냐?'

나는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함정의 구조를 파악했다.

체감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 간.

지그재그로 움직여서 함정 공세를 회피했다.

'잘도 사람을 귀찮게 했겠다.'

이제부터는 실력 행사다.

성천조계공에 이어, 성스러운 불꽃 으로 전신을 휘감았다.

더 이상은 함정 따위로 날 막을 수 없었다.

米 米 #:

관리자 란드.

시련의 탑 1층부터 5층, 통칭 [1 레 벨]을 맡은 책임자다.

복숭아 가면을 쓴 존재는 모니터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리자 전용화면.

홀로그램의 개수는 수백, 아니 수 천 개에 달했다.

각각의 화면은 탑을 등반하는 도전 자들을 비추는 중이다.

그 중, 란드가 보고 있는 화면은 특별했다.

[#9484 차원 - 지구 : 전민철]

[4층의 시련을 수행하는 중.]

[천리안을 사용해서 관찰하고 있습 니다.]

천리안.

홀로그램 화면에 비친 민철의 능력 치가 실시간으로 위에 표기되었다.

란드는 민철에게 인사를 하는 순 간, 가면의 기능 중 하나인 천리안 을 사용했다.

'천리안은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은 근 귀찮단 말이죠.'

관리자는 탑의 시스템 일부를 이양 받는다.

수많은 홀로그램 창도 그중 하나 다.

하지만 화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천리안은 '특이점'을 가진 도전자 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탑 시스 템 전용 스킬이다.

사용 조건은 상대방과 마주하는 것.

그 기척은 매우 은밀해서 도전자의 수준으로는 간파할 수 없었다.

"까아악. 관리자님, 크로우입니다."

사람 크기 정도 되는 까마귀가 관 리자의 방에 들어왔다.

란드는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대충 휘저었다.

"깍. 뭐에 집중하고 계시... 앗, 저건 재수 없는 도전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집중 중이니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요?"

한기가 서린 음색이다.

란드의 심기가 꽤 불편해 보였다.

크로우는 부리를 꽉 다문 채로 고 개를 맹렬하게 끄덕였다.

쾅 쾅!

민철을 비추고 있는 화면에서는 연 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통로에 마련된 함정.

무심코 전진했다가는 산산조각 나 서 시체도 찾기 어려울 만큼 흉악한 함정들이 다.

밟으면 밑이 꺼지는 함정.

통로 양쪽이 줄어들어서 도전자를

짓눌러버리는 함정.

독 안개로 주위를 뒤덮고, 리빙 아 머를 앞뒤로 포진시켜서 발을 묶기 도 했다.

'저걸 모두 간파해냈단 말입니까?'

함정 발동 직전.

민철은 함정의 종류와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요리조리 피했다.

란드의 눈동자에는 의혹의 빛이 감 돌았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육감을 깨우친 건 아닐 텐데요.'

탑은 정상을 향해 등반하는 도전자 에게 끊임없이 시련을 제시한다.

4층의 시련도 마찬가지다.

통로에 설치된 수많은 함정들은 도 전자의 감각을 일깨워서 [육감] 특 성을 일깨우게끔 설계되었다.

란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건 육감을 각성했어도 불가능합 니다.'

육감은 만능이 아니다.

특히 살의가 없는 함정은 [육감]으 로도 모두 피해가기 어려웠다.

민철의 움직임은 달랐다.

모든 함정을 읽고, 최적의 행동으 로 피하거나 파훼했다.

란드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것뿐만 이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 방출을 확인합니 다.]

[파괴력 : SS+]

[오러의 방출을 확인합니다.]

[파괴력 : S++]

민철은 이따금씩 무기를 휘둘러서 정면으로 오는 공세를 튕겨냈다.

[천리안]을 활성화시킨 덕에 각 공 격의 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스탯 대부분이 A급에도 못 미쳤을 텐데요.'

S++에서 SS+급까지.

검이나 창, 혹은 도를 휘두를 때마 다 오러가 맺혔다.

간혹 오러 블레이드를 발동하면 공 격의 랭크가 한 단계씩 성큼성큼 뛰 었다.

"시스템. 도전자의 능력치를 확인 해봐야겠습니다."

[관리자 란드의 명령을 인식. 전민

철 도전자의 상태를 화면에 띄우겠 습니다.]

홀로그램 한쪽에 나타난 능력치.

'이건••••••?!'

란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 다.

근력은 S+급, 그리고 민첩은 S급까 지 올랐다.

체력과 맷집은 A+급.

현존하는 어떤 보조 마법이나 성법 도 신체 능력을 2배 이상 늘려주지 는 못했다.

'죽복을 중첩해서 사용하면 반감되

기 마련입니다.'

보조 마법이나 축복은 신체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려준다.

대신 여러 주문을 중복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서로 반발하여 증폭 효과 가 극단적으로 떨어졌다.

한데.

민철의 능력치는 2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단순히 능력만 늘어난 게 아닙니 다.'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뿜어 져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

마나를 다루는 기술도 신묘했다.

란드는 몰랐지만, 무 대륙의 무공 은 기 = 마나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공격 하나하나에 실린 파괴력은 SS급 이상 되는 높은 판정을 받았 다.

'갑자기 힘이 늘어나면 적응하는 것도 힘들죠. 그런데 저자는 아닌 것 같군요.'

란드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 다.

0층의 관리자, 루체가 주목한 인 재.

그녀가 오랫동안 아끼던 '오론의 조각'을 민철한테 줬다는 건 관리자 들 사이에서 이미 파다하게 퍼진 이 야기 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도 전자였지요.'

란드도 처음에는 민철에게 관심을 가졌다.

1 - 5층의 시련을 진행하는 도전 자라면, 모두 모니터링을 할 수 있 다.

하지만.

민철의 능력치는 형편없었다.

'저 정도로는 변수가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란드는 금세 관심을 거뒀다.

하지만.

최근에 전민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크로우."

"까악. 관리자님, 부르셨습니까?"

"저 도전자에 대해 보고를 한 건 당신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깍!"

신경을 쓸 가치조차 없는 나약한 도전자.

전민철은 짧은 기간 급격하게 성장 하면서 탑의 기록을 하나씩 경신했 다.

'이제 와서 변수가 나와서는 곤란 합니다.'

탑은 억겁의 세월 동안 유지되었 다.

하지만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누구 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칠황의 시대.

일곱 강자는 스스로를 탑의 황제

(皇)로 칭하며 세력을 구축했다.

팽팽한 힘겨루기.

칠황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탑 위로 더 올라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유지 하는 중이다.

관리자 몇몇은 고착화된 탑의 상황 에 지쳐서 칠황 중 일부와 끈을 대 기도 했다.

란드도 그중 하나였다.

'0층의 관리자가 주목했던 이유가 있던 겁니까.'

원하지 않은 변수.

민철이 시련을 수행하는 과정에 개

입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관리자는 탑의 시련에 관여하는 게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관여가 가능한 것은 시련의 내용을 비틀거나 큰 변수가 생겼을 때뿐이 다.

란드는 어정쩡하게 있는 크로우를 바라봤다.

"혹시 시련을 행하는 중에 규칙을 위배한 적은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까악!"

"그렇습니까...

아쉽게 되었군요, 라는 뒷말은 속 으로 꾹 삼켰다.

관리자라고 해도, 형평성에 어긋나 는 태도를 보이면 탑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서 천리안 화면 을 직시했다.

민철이 통로를 파죽지세로 돌파하 는 모습이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비 쳤다.

'이 정도면 색채 단계에 도달하는 것도...

등급을 넘어선 경지.

지닌 힘을 '색'으로 구분하는 단계 에 이르러야 탑 내에서 진정한 강자 로 인정받는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요?'

란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철의 현 수준은 높지 않았다.

보조 마법으로 스펙을 끌어올렸지 만, 실제 신체 능력은 대부분 B+나 B 였다.

색채로 구분되는 경지에 이르려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고작해야 지구 출신, 비 랭커가

색채에 도달할 일 따위는 없습니 다.'

란드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 을 부정하고 있을 때.

돌연 민철이 걸음을 멈췄다.

화면 끝.

푸른색으로 빛나는 웜홀이 비쳤다.

"깍. 저기 통로 끝이 보입니다."

"벌써 시련을 통과한 겁니까."

란드의 목소리에는 유독 힘이 들어 가지 않았다.

비 랭커.

지구 출신 도전자들은 4층의 시련 에서 평균 보름 정도를 머물렀다.

통로의 직선거리는 10km.

길지 않은 거리지만, 통로를 빼곡 하게 메우고 있는 함정이 문제였다.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면 상처가 자 동 치유된다.

함정을 몸으로 겪으면서 치유와 회 복을 반복하며 통로를 나아가는 게 보편적인 공략 방법이다.

'그걸 몇 시간도 안 돼서 돌파해버 렸군요.'

상식을 파괴하는 속도.

비 랭커 출신 중에서는 최고 기록 이었다.

4층을 돌파한 도전자 전체를 놓고 보면 상위권에 걸친 수준에 불과했 지만, 놀라운 성과였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도전자는 용 족이나 천사, 악마 등 태생부터 강 력한 고위 영체들이었다.

민철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는 것 자체가 커다란 변수였다.

그때.

- 야.

민철은 돌연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란드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왜, 왜 이쪽을 보고 있는 거죠?'

민철의 눈동자는 천리안 너머, 란 드의 가면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화면 너머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너 부르는 거 맞아. 고개 돌리지 마라.

"뭐, 뭐라고요?!"

란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생각하자 마자 그걸 바로 부정하듯 이야기했 다.

-우리. 할 이야기가 좀 있지 않나?

화면 속에 비친 민철의 얼굴.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96 화

나는 허공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 지만.

내 '눈'에는 다른 광경이 비쳤다.

[관리자 란드가 천리안으로 당신을 관찰 중입니다.]

반투명한 창.

상태창을 활성화시킨 때와는 조금 달랐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건 내 스탯이 아닌, 복숭아 가면을 쓴 관리자였으 니까.

'모를 줄 알았냐?'

관리자 란드.

놈이 수작질을 벌인 건 진즉에 알 고 있었다.

[관리자 란드가 당신에게 천리안을 사용했습니다.]

[탑의 시스템이 당신을 관찰합니 다.]

붉은 눈동자가 번쩍이는 순간.

마력의 파동이 눈치채기 어려울 정 도로 은밀하게 일어났다.

거리가 가까운 덕에 알아챌 수 있 었다.

마력 파동을 읽어내자, 스테이터스 시스템이 곧바로 란드의 수작질을

확인해주었다.

'플레이어 특성을 피해갈 수는 없 다.'

시스템은 내가 이상 현상을 인식하 면 자동으로 분석해주었다.

수상한 마력 파동을 놓치지만 않으 면 암습이나 독 같은 건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이제 초감각까지 깨우쳤으니 기습 은 안 통한다고 봐야지.'

[초감각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메시지.

그와 동시에 사물의 색이 흑백으로 물들었다.

내 '기감'을 위협하는 존재.

혹은 무언가가 나타난 것이다.

'관리자인가.'

아까는 무방비로 등을 내주었지만.

이제는 내게 [초감각]이 있었다.

곧바로 초감각을 해제하고는 기척 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바쁘신 몸께서 시간을 내주셨군."

나는 가벼운 투로 빈정거렸다.

관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숭아 가면 너머.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 다.

"탑의 규정이 어쩌고 하더니, 재밌 는 짓을 하고 있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

"천리안."

관리자의 몸이 한차례 떨렸다.

허세를 부리려면 제대로 연기해야 지.

네 밑천은 이미 다 드러났다고.

"관리자가 도전자와 접촉, 말도 없 이 천리안을 사용했다... 이건 규 정에 어긋나지 않나?"

『이 계층의 책임자는 접니다. 누 구도 제게 규정을 가지고 책망할 수 는 없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입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관리자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플레이에 특성은 생각보다 더 많 은 정보를 보여주거든.

'허세 부리고 있는 거 다 안다.'

내가 여기서 이의를 제기하면, 탑 의 시스템이 개입해서 관리자의 개 입 여부를 판단한다.

관리자의 부정 개입이 인정되면 막 대한 페널티가 부과되고 대량의 포 인트를 지불해야 했다.

어떻게 아냐고?

모두 상태창이 알려줬다.

'천리안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니 별걸 다 알려주네.'

탑 시스템의 규칙.

위반했을 때의 페널티.

이왕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써먹 어야 하지 않겠는가.

관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 태도에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듯했다.

『어떻게... 저층의 도전자가 그 걸 알 수 있는 겁니까?』

"궁금하냐."

『그렇습니다. 설마 0층의 관리자 가 그런 부분까지 알려준 건....』

"헛소리하고 있네."

『그럼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 까!』

"안 알려줌."

내 특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은 1 도 없었다.

중요한 건.

관리자보다 우위에 섰다는 사실이 다.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이고 자시고. 그래서 어떻 게 할 거야?"

『갑자기 무엇을 말입니까.』

"보상으로 나한테 뭐 해줄 수 있냐 고."

『관리자는 도전자의 시련에 개입

해서는 안 .J

"그럼 규정대로 페널티를 받던가."

나는 란드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이 녀석은 5층까지 담당이 잖아?'

탑의 시련과 관련된 보상이나 정보 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기껏해야 5층.

남은 층계 하나를 위해서 보상을 소모하는 건 낭비였다.

나는 천리안의 정보를 확인하는 순 간, 이미 생각해둔 보상이 한 가지 있었다.

'흥정하는 건 이쯤이 적당하겠지.'

기가 드센 관리자.

이 정도로 기를 눌러두면 대화(?) 를 나누기가 한결 편해질 것이다.

"숨겨진 공간에 대한 정보. 아니면 그런 공간을 여는 열쇠면 되겠네."

0층의 관리자.

탈모 사자 가면을 쓴 존재, 루체는 나한테 오론의 조각을 줬다.

3층의 시련에 숨겨진 장소, 오론의 보물창고로 이어지는 지도이자 열쇠 였다.

'그런 보상은 규정 위반이 아니라

는 거잖아.'

나는 팔짱을 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를 노려본 채 몇 분 정도 지 났을까.

『관리자와 척을 지면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J

"기껏 생각한 게 협박이야?"

『후우, 제 관리 구역에서 벗어난 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응. 그럼 신고."

나는 다시 란드의 입을 합죽이로 만들어줬다.

어디서 되도 않는 협박이야.

전생에는 우주를 누비면서 천사장 들과 자웅을 겨루었던 몸이다.

관리자가 대단하다 한들 천사장이 나 차원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규칙에 매여 있다.'

[진실의 눈]을 사용해도 내력을 파 악할 수 없는 강자.

하지만 탑 시스템의 구속을 받고 있어서 도전자에게 함부로 손을 대 지 못했다.

'우회하는 방법 하나쯤은 있겠지.'

눈앞의 관리자와 척을 지면 탑을

오르는 데 방해를 받을지 모른다.

상관없다.

먼저 선을 넘은 건 관리자였다.

'날 건든 대가는 물질로 치러야겠 어.'

칼자루는 나한테 있었다.

오래 고민하던 란드는 결국 어깨를 축 내렸다.

『알겠습니다.』

턱시도 주머니가 열렸다.

주머니 틈 사이, 알 수 없는 문자 가 빼곡하게 적힌 양피지가 튀어나 왔다.

나는 양피지를 바로 낚아챘다.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흐흐. 소소하게 복수하는 건 아니 지?"

『탑의 규칙에 위배되는 행위입니 다.』

하긴.

0층 관리자도 오론의 조각을 어떻 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안 알려줬다.

란드의 날 선 목소리가 한결 풀어 졌다.

'규칙 운운하는 건 자기가 좋을 때

만 꺼내는군.'

양피지의 용도를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 다.

피식.

실소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피안스의 고문세

등급 : 전설 [L]

종류 : 잡화

내구도 : 25/50

"시련의 탑" 9층에는 옛 신을 섬겼던 오래된 신전이 있습니다.

신전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려면 고문서에 기록된 암호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암호 집이라는 말이잖아.'

9층 시련.

갈 길이 멀었기에 일단 정보를 머 릿속에 집어넣었다.

관리자야.

이걸 나한테 넘겨준 걸 나중에 엄

청 후회하게 될 거다.

"약속은 약속이지. 거래는 끝났어."

『당신 같은 도전자에게 한 방 먹 을 줄은 몰랐군요.』

"덜 아픈가 봐?"

『아닙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 다 보면 제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서 말이죠.』

눈치가 둔한 줄 알았는데.

마냥 없지는 않았네.

더 벗겨 먹을 게 있을까 찔러봤지 만 더 이상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 다.

[시련의 탑 - 4층]

[고난의 통로를 무사히 통과했습니

다.]

*소모 시간 : 05:19:32

[보상으로 10,000pt가 주어집니다.]

2층과 3층 보상에 비하면 별 볼

일 없게 느껴졌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초감각을 얻은 게 가장 큰 보상이

다.'

4층의 함정은 도전자의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냈다.

시련을 치르던 도중, [육감]을 넘 어선 [초감각] 특성을 획득했다.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나는 란드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가면을 노려봤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부디 저도 그러기를 빕니다.』

관리자가 내 말에 몸서리를 쳤다.

나는 웜홀 너머, 5층을 향해 나아 갔다.

* * *

공간 이동이 끝나자 바로 눈을 떴 다.

'잠깐. 내가 탑 밖으로 나간다고 했던가.'

시련을 통과하면 다음 층으로 넘어 갈지, 원래의 세계로 복귀할지를 선 택할 수 있다.

혹시 현실로 복귀한다고 말을 했던 건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었다.

'저기에 탑이 있잖아?'

시련의 탑.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자주 봤던 풍경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여긴 지구가 아니다.'

혼란한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대기에 충만한 마나.

마나 밀집도가 지구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내 기억하고 다른 모습이 다.'

지구로 치면 중세의 건축 양식과 흡사한 빌딩들이 주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시련의 탑 - 5층]

[공중정원]

탑은 5층 단위마다 대단위 거주지 역인 공중정원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시련이 진행되지 않으 며, 여러 도전자들이 머무르며 삶을 영유하는 장소다.

휴식을 취하거나 정보를 모으고 다 른 도전자들과 협력하여 다음 층에 도전할 수 있다.

'시련을 바로 진행하는 게 아니었 어?'

탑 5층, 공중정원.

여태 봤던 탑의 시련과는 다른 내 용이었다.

"신입이 왔다고?"

"이번에는 제발 헛발질을 하지 않 았으면 좋겠어."

"소문의 신입을 섭외하는 건 우리

몫이다."

공터 주위.

여러 종으로 구성된 도전자들이 하 나둘 내 옆으로 몰려들었다.

크고 작은 목소리가 섞이면서 주위 가 소란스러워졌다.

얼추 수십 명은 되어 보인다.

도전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검은색 안경을 썼다.

'뭐야. 안경을 쓰는 게 이 동네 유 행인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안경에서 묘한 마력 파장이 뻗어져

나왔다.

관리자 란드의 천리안과 흡사한 느 낌.

급수는 훨씬 떨어졌지만, 천리안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스킬이라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전자 지레스가 당신에게 스카우 터를 사용합니다.]

[도전자 푸르가....]

메시지 여러 개가 동시에 울렸다.

마법의 기운이 육신을 노골적으로

살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 뭐 하자는 거지?'

동의를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정보 를 얻는 건 무례한 짓이다.

판데모니엄이나 엘리시움에서는 탐 색 스킬을 사용하려면 상대방의 동 의를 반드시 얻어야 했다.

아니면 적대 관계에 있거나.

'이걸 확 엎어버려?'

성천조계공을 운용하면 마법의 기 운을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다.

마음에 안 들었다.

잠깐이지만 이 상황을 엎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아니.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갓 5층에 진입했다.

무수한 도전자들.

싸워서 이기는 건 걱정이 안 되지 만, 바로 무력 충돌을 벌이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나는 마법에 반응해서 꿈틀거리는 혼돈기를 진정시켰다.

심상 세계 속 성운들의 기운은 최 대한 은닉해서 힘을 감췄다.

'무 대륙에서는 실력의 3할을 감추

라고 하지.'

내 신체 능력은 높지 않다.

능력치 대부분은 협회 기준으로 보 면 B에 머물렀다.

혼돈력 수치만 S+.

기운을 잘 갈무리하면 탐색 스킬을 사용해도 속여 넘길 수 있었다.

불쾌한 기운이 한바탕 몸을 훑고 지나간 뒤.

"에이. 이번 신입도 꽝이잖아."

"저 능력치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 라온 건지 모르겠군."

"운이 좋았나 보지."

"도대체 화제의 신입은 언제쯤 5층 으로 올라오려나?"

도전자들은 실망한 기색을 띠었다.

그때.

"전민철 헌터 아니십니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인파 사이에 서 튀어나왔다.

나는 그 음성이 향하는 곳을 쳐다 봤다.

검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 그리고 황색 피부.

지구, 그것도 동양인의 외형이다.

30대쯤 되었을까.

말끔한 외모의 사내가 인파를 헤치 면서 다가왔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잖아.'

사내의 외모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정성희.

헌터 인준 시험 때 대련을 벌였던 상대였다.

"당신. 탑에 오르고 있는 줄은 몰 랐군."

"저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협회 요원. 정성희 씨 아니던가."

"절 잊지 않아 주시다니 가문의 영

광이네요."

"영광은 무슨. 과장이 심하네."

투덜거렸지만, 내심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잘 됐군. 5층에 대해 좀 물어봐야 겠어.'

나는 곧장 질문을 꺼냈다.

"방금 녀석들. 마법으로 날 탐색하 던데 관례인 건가?"

"처음 5층에 올라온 도전자의 능력 치를 가늠하고 동료로 포섭하려는 겁니다."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데."

"예. 스카우터라는 물건인데 1만pt 입니다. 탑의 아이템들은 신기한 게 많더군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5층에 막 진입한 상황만 아니었다 면, 스카우터를 쓴 녀석들과 일전을 불사했을지도 모른다.

언짢은 기색을 느꼈는지, 정성희가 바로 뒷말을 붙였다.

"조금 과열되기는 했죠. 탑에 이변 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이변?"

"예. 무시무시한 신입이 출현해서

다들 난리도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신입의 특징이 뭔데?"

"튜토리얼 시련에서 칠황의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합니다."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애써 표 정을 관리했다.

"...그거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

나."

"2층, 심연의 바다에서 단기간에 보석 모두 모았다고 하더군요."

그거... 지금 내 이야기 같은데?

97 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한 게 하 나 떠올랐다.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저쪽에 보면 탑같이 생긴 거 보이 시죠? 저기 가면 랭킹과 업적을 확 인할 수 있습니다."

"5층은 처음이라서 잘 몰라."

"제가 안내라도 해드릴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나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 고 있다.'

0층의 랭킹을 갈아버리고 2층 시 련을 모두 통과한 기라성같은 신예.

최소 수십 명이 공터 주위를 배회 하며 목표를 기다리고 있다.

소란에 휘말리는 건 사양하고 싶 다.

"근처에 괜찮은 찻집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예스

완전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이러면 장소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 았다.

"좋아. 어서 가자."

정성희의 안내를 받아 찻집으로 이 동했다.

[바람의 잎사귀]

커다란 고목.

정령을 이용해서 위로 올라가니, 작은 건물 하나가 굵은 나뭇가지 위 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엘프가 운영하는 찻집이다.

"어서 오세요."

찻집 주인은 초록색 머리카락과 기 다란 귀가 인상적인 엘프였다.

메뉴판에는 엘프의 고향에서만 나 는 여러 나무의 잎사귀를 우려낸 차 가 가득했다.

[에리사 차 - 2pt]

[힘믈 차 - 3pt]

눈에 띄는 건 차에 매겨진 화폐단 위였다.

나는 곧장 정성희에게 질문했다.

"여긴 돈이 없나?"

"탑 안에서는 포인트가 화폐입니 다."

호오.

포인트의 새로운 용도를 배웠다.

이제까지는 공기 팩을 사거나 포탑 을 설치하는 등, 시련을 치르는 동 안 도움이 되는 물건을 구매하는 데

만 쓸 수 있었다.

공중정원에서는 포인트 자체가 화 폐였다.

'이따 포인트의 가치를 알아봐야겠 다.'

내가 가진 포인트는 약 180만.

화폐의 가치를 알아야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주문을 마치고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 너머, [공중정원]의 일부가 내려다보였다.

"신기하게 생긴 건물들이 많죠?"

"그러게. 다른 차원에 온 기분이 야."

불칸 종족의 제단.

엘프의 고목.

엘리시움의 사원.

그 외에도 여러 차원의 건축양식들 로 지어진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 었다.

나는 풍경을 흘겨보면서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청량한 맛이 혀를 감돌면서 정신도 맑아졌다.

엘프 차의 효능이다.

정성희가 돌연 입을 뗐다.

"0층의 시련은 어떻게 통과하신 겁 니까?"

푸흡!

나는 망나니처럼 입에 머금었던 차 를 분사했다.

책상이 요란하게 뿜어낸 차에 흠뻑 젖었다.

"쿨럭. 쿨럭. 무슨 소리를 하는 건 지."

"그렇게 놀라실 일은... 누구나 통과하는 시험인데요."

정성희는 능글맞은 투로 대꾸했다.

이 녀석.

일부러 날 떠본 거였냐.

'보기 좋게 당했군.'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갑자기 던진 질문에는 한 가지 큰 구멍이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는 것.

0층의 시련은 괴물에게 패배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종료된다.

저기서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건, 내가 '무시무시한 신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어.'

5층의 정보 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

두 요소가 겹치면서 정성희의 의도 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허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몸의 긴장을 풀고 허리를 뒤 로 젖혔다.

원목 재질 의자의 투박한 감촉.

등으로 전해지는 딱딱한 느낌에 다 소 놀랐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언제부터 눈치챈 건가."

"0층 랭킹 1위, 전민철이 동명이인 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짐작은요. 반응을 보니 정말로 0 층 기록을 경신하신 게 맞나보네 요."

먹던 차를 내뿜는 과민 반응에 확 신한 듯했다.

쳇.

놀라지만 않았어도 떠보기에 당하 지 않았을 것이다.

보기 좋게 넘어가 버렸다.

'이제 와서 부정하기는 틀렸고.'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하지만.

날 놀린 값은 받아내야지.

"안내 제대로 안 해주면 그땐 가만 히 안 두겠다."

"물론이죠. 그럼 공중정원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정성희는 수정구를 품속에서 꺼냈 다.

수정구의 크기는 야구공 정도였고, 표면이 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들거 렸다.

"이건 뭐지?"

"지도입니다. 거기 버튼을 한번 눌 러 보시죠."

나는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수정구 한쪽에 파인 버튼에 갖다 대었다.

우웅!

구슬이 한 번 떨리더니 은은한 빛 을 내면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도시 내부의 구조물들이 홀로그램 에 표시되어 있다.

붉은 점이 홀로그램 가운데에서 껌 뻑 인다.

"도시가 꽤 넓은 것 같은데."

"예. 공중정원은 상주인구가 10만 이 넘어가는 곳입니다."

10만.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 사람들은 탑을 더 오르지 않는 건가?'

10만이나 되는 사람들은 왜 탑을 더 오르지 않고 5층에 머무르고 있 는 걸까.

2층의 시련에서는 [심해]라고 불리 는 도시가 있었다.

시련을 치러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닷속 작은 세상에 안주 해버린 이들.

"꽤 많은 숫자인데, 모두 탑을 오 르는 걸 포기한 건가?"

"후후. 설명해드릴 게 많군요. 결론 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이번에는 투박하게 생긴 돌을 꺼냈 다.

"귀환석입니다. 탑에서 시련을 받 던 중, 도저히 공략을 못 할 것 같 으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 다."

" 호오."

"가격은 1만 포인트. 굉장히 비싸

지만,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싼 편 이죠."

귀환석이 아니더라도, 탑의 시련을 통과했을 때 5층으로 돌아오는 선택 지도 추가된다고 한다.

"원래 세계로 안 돌아가고 탑에 머 무는 자들도 꽤 있겠어."

"그러니까 상주인구가 10만이나 되는 것이죠."

공중정원에 들어서니, 이전까지 겪 었던 탑의 시련이 모두 튜토리얼처 럼 느껴졌다.

"공중정원은 네 개의 구획으로 나 누어져 있습니다."

도시는 탑을 중심으로 마름모 형태 로 펼쳐졌다.

동쪽은 주택가.

탑에 머무는 도전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서쪽은 대장간.

탑에서 얻은 보상이나 부산물을 가 공하는 지역이다.

남쪽은 상회.

포인트를 가지고 탑 공략 관련 아 이템이나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

북쪽은 커뮤니티.

수많은 커뮤니티가 난립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 커뮤니티라는 건 뭐지?"

"도전자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입니 다."

"지구로 치면 길드 같은 건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탑의 칠황.

도전자 중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일곱 황제가 세운 7대 커뮤니티가 가장 강성한 세력을 보유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커뮤니티들이 난립하는 상황이다.

"아까 시작의 공터 근처에 있던 자

들, 기억하십니까?"

"시작의 공터?"

"민철 헌터가 5층에 막 올라왔던 곳입니다."

아.

그곳을 시작의 공터라고 부르는 모 양이다.s

"5층으로 올라온 도전자는 모두 그 쪽으로 소환되는 건가."

"예. 그래서 시작의 공터라고 부르 더군요."

"그럼 그 녀석들도 모두 커뮤니티 에 소속되어 있나 보군."

"맞습니다. 신입이 오면 커뮤니티 에 섭외하려고 대기 중인 친구들입 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시작의 공터.

헌터 시험이나 헌터 등록 센터에서 상주하던 길드 관계자들이 떠올랐 다.

잠깐.

'이 아저씨가 거기에 있었다는 건...

나는 정성희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럼 당신도 커뮤니티에 들었다는

말이잖아."

"저는 협회 소속 도전자들이 세운 커뮤니티에 들어가 있습니다."

"당신도 나를 섭외할 목적으로 기 다렸던 거 아닌가?"

"아뇨. 협회 출신 동료가 오면 커 뮤니티에 데려오는 게 막내의 역할 이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얄궂은 우연이군."

나는 쓰게 웃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 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땐 랭킹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

었는데.'

레기온을 쓰러트리는 순간.

0층의 시련을 통과하고 랭킹에서 1위를 달성했다.

나는 이후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 어 버렸다.

'조회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도전자들의 관심을 받는 건 귀찮았 다.

다른 도전자들이 탑을 오르던 중에 나를 견제하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싫었다.

"걱정 마십쇼. 저는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비밀을 보장하는 대신 커뮤니티에 들어와라, 그런 제안 같은 건 없나."

"그런 비겁한 짓은 안 합니다."

"그럼 왜 나한테 이렇게 호의를 베 푸는 거지?"

제가 탑에 오를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를 주었으니까요."

얼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정성희 를 바라봤다.

정성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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