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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 *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늦은 아침이라 하기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햄을 썰어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제가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습니다. 혹여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직접 검을 들거나 몽둥이를 꺼내들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플란츠가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그러니 칼리안이 한 저 말은 진심일 터였다.

자신이 폭력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놈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해보던 플란츠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냥 무시하고 말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

"같이 가시죠. 헤르츠 경도 볼 겸. 어제 보기로 했었는데 못 봤으니 겸사겸사 같이 얼굴이나 보러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동행은 하겠으나 이번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는 얼굴을 한 플란츠가 이런 대답을 했다. 어차피 아르센에게도 '아우님 모시고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하얀 치즈를 올려 구워낸 납작한 빵을 한 입 삼키는 플란츠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처리했으면 하십니까."

"알아서 해."

관심 없다는 듯, 플란츠는 시선을 내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관심 있으신 것 같은데요."

칼리안이 발칸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플란츠가 처음으로 키워내고 있는 무언가가 아니던가. 비록 온전히 플란츠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대여품' 정도로 여기고 있다지만, 플란츠는 분명히 발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으니 잠깐 흘린 살기에 걱정하는 빛을 보였겠지.

혹시라도 칼리안이 마법사들에게 크게 화를 낼까봐서.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알아."

"제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계십니까."

칼리안이 씩 웃으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안다고 하면, 지금까지는 적당히 이해했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고 있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내 아우님이 내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것도 아닐 텐데."

"네. 아닙니다."

"그럼 왜 갑자기 태도가 바꾸시는지."

"태도가 바뀌다니요."

"확인 안했었잖아. 원래."

칼리안이 책장이 팔락이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서 플란츠가 기분 나빠 하는 것이다.

칼리안이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었는지, 그것도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은 옆에 놓인 붉은 토마토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여전한 얼굴로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말을 이었다.

"형님 그렇게 반만 똑똑하시면 오래 안가 죽습니다."

"······ 매일 짖는 게 일이 됐군."

평소와 같았다면 칼리안은 플란츠의 이런 말도 그냥 웃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저는 가르쳐드릴겁니다. 전부 다."

잔뜩 날 선 붉은 눈이 플란츠를 직시했다.

"그러니, 입으로만 살겠다 하지 말고, 몰래 배려해주지도 말고, 적당히 돕다 뒤로 빠질 생각 말고,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지 말고."

플란츠의 눈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지금처럼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남김없이 전부 다 가르쳐 줄 테니까.

제25장. 있어야 할 곳 (2)

없던 숙취가 생기는 기분이다.

아르센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휘휘 가로저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쳐다봤다.

말이 좋아 군단이지 고작 쉰 명이다.

칼리안이 생각하는 규모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하기에도 모자란 수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르센은 고작 쉰 명뿐인 발칸의 대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물론 누가 됐든 왕궁 밖에서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며 통제할 수는 없음을 안다. 마법사들을 통제한다니. 차라리 앨런을 찾아가서 당신의 제자도 정상인은 아니라는 걸 혹시 아시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살아서 나오는 게 쉬울 것이다.

그러니 통제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르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동안 아르센이 헛짓거리를 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싸워서 지지 말라고 배운 마법인데 싸울 때 써봐야지 언제 써보겠나. 그건 이해한다. 나도 화 나면 마법 쓰니까."

이렇게 대원들을 훑어보던 아르센이 혼잣말인 듯 혼잣말 아닌 소리를 꺼냈다.

"싸우다 보면 가게가 날아갈 수도 있지. 너희가 취해서 이상한 곳에 쏜 게 아니라 가게가 거기 있던 것을 어쩌겠나. 그러니 그것도 이해한다."

나도 몇 번 날려 봤어. 괜찮아.

그럴 때마다 그냥 조금 가난해졌을 뿐이지 별 탈은 없었어.

"마법사답게 싸웠고 안 졌고 안 다쳤으니 됐다. 잘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직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니 쌓인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안다. 신이 나서 술을 마셨고 시비도 붙을 수 있다. 참지 못하면 마법을 꺼낼 수도 있다. 말했지만 그러라고 배운 마법이니까.

"마법사 우습게 보고 덤빈 놈들이 잘못이지."

앞에 서 있는 놈들을 봐라.

딱 봐도 또라이같은 게 누가 봐도 마법사 아닌가. 그런데도 덤볐으면 각오는 했어야지.

마법사가 일반인을 공격하는 게 억울할 거였으면 지들도 마법을 배워놓던가. 그걸 못했으면 입을 조심하며 살든지.

"그런데 문제는······."

전부 이해하고 넘길 것 같던 아르센이 어울리지 않게 뒷말을 흐렸다.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열 셋의 마법사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는 어제 쳤고 치안대에는 새벽에 들어갔는데 나는 그 사실을 전하와 군단장님과 플란츠 부군단장님께서 모두 알게 되신 뒤에 전해들었다. 아, 칼리안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다지."

숨도 쉬지 않고 억양도 없이 줄줄 이어져 나오는 말에 마법사들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치안대에 붙들려가서는 발칸과는 관련이 없다 했군."

이 부분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대원들을 둘러본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아니, 이으려 했다.

"헤르츠 부군단장."

누군가의 어여쁜 목소리가 아르센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애오옹!"

하고, 이런 곳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고양이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칼리안과 함께 빌헬름관으로 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 고민할 거리가 생긴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플란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칼리안만 보냈다.

그 뒤 후원의 산책길을 찾아왔고, 고양이를 만났다.

플란츠를 부르기가 무섭게 다가와 다리에 제 몸을 부비는 것을 보니 아마도 플란츠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차마 미워할 수 없을 녀석을 쑥 안아 든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겁이 없지."

장미 정원에도 불쑥 들어가고, 플란츠의 방에도 불쑥 들어오고. 이렇게 외진 곳까지 겁도 없이 찾아와서는.

"······ 길 잃으면 어쩌려고."

"미야옹!"

꼭 플란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가 소리를 냈다. 플란츠는 결국 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안은 채 벤치에 앉았다. 손바닥을 찾아 제 머리를 가져다 대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플란츠가 잠시 고개를 올렸다.

하늘이 참 파랗기도 하다.

나무마다 비춰진 햇살이 플란츠가 앉은 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칼리안의 말이 또 떠올랐다.

- 평생 제 그림자 노릇이나 하면서 죽은듯이 살 생각도 마시라는 겁니다.

플란츠가 왜 그렇게 구는지 이미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고 있다. 알면서 하는 소리임을 알아서 플란츠도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 미친 놈."

"애옹!"

제 주인 욕 하는 것은 어떻게 알아듣고 고양이가 타박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고양이를 향해 대꾸했다.

"미친 놈 보고 미친 놈이라 하는데. 왜."

"애오옹! 애옹!"

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고양이나 앞에 두고 말싸움을 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아르센을 상대하는 게 덜 우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고양이와 투닥거리는 사이 잠시 바람이 불었다.

- 사아아······.

자작나무 잎은 작았고 잘 흔들렸다.

햇빛 가득한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한가득 지나갔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가 눈을 찌른다. 때문에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대충 치워내던 플란츠의 손이 문득 멈췄다.

히나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린 기분에 오도가도 못하고 서 있던 히나가 얼른 플란츠를 향해 예를 보였다.

고양이랑 말싸움하던 왕자가 그런 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렇게 보고 있었느냐는 말인 것 같아서 히나가 생긋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생긋거림과는 그 본질부터 다른 순수한 웃음이다.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던 히나는 손가락으로 고양이와 플란츠의 발치를 가리켜 보였다. 고양이를 데리러 가까이 가도 괜찮은지를 묻는 것 같아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을 더 걸어온 히나는 플란츠에게서 조금 떨어진 옆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놨다. 슬쩍 쳐다보니 컵에 담긴 하늘색 아이스크림이었다.

히나가 말을 하려면 당연히 손에 든 것이 없어야 했다. 때문에 플란츠는 자신의 옆에 무언가를 내려놓은 시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햇살이 반짝반짝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는데, 또, 도망을 갔어요.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히나가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고양이를 데리고 나왔다는 정도로만 알아들었다.

- 고양이가, 좋은 왕자님을, 따라갔어요. 좋은 왕자님을, 정말 좋아하나봐요.

'고양이가 '어떤' 왕자님을 정말 '무엇' 하나봐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보였다.

두 단어가 퍽 비슷하게 생겼다. 뒤만 달랐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좋은 왕자님.'

플란츠는 최소한 칼리안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때문에 앞에 나온 '좋은'과 뒤에 나온 '좋아하는'의 차이를 오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왕자라니.

평가가 많이 잘못됐다. 너무 많이 잘못됐다.

바람에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뭇잎들은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물결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히나는 플란츠가 지금 꼭 같은 모습의 눈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해줄까 하다가 그냥 미소만 짓고 말았다.

지금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니까. 대신 옆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건넸다.

-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안 먹은 건데.

의자에 내려놓았던 음식을 왕자에게 권하는 시녀는 아마 히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담함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대답했다.

"싫어해. 파래서."

파랗고 둥글둥글한게 꼭 윗층 사는 누구 눈깔 같아서, 라는 말은 뺐다. 히나에게 들려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블루베리가 파란색이라서 싫다는 사람은 처음 본 히나가 소리없이 웃었다.

- 그럼, 무슨 맛, 좋아하세요?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받아서였다.

내가 뭘 좋아했을까.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주는대로 보여져야 하는대로 필요한대로 지냈으니까. 싫어하는 것은 많았어도 좋아하는 것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때문에 단 것은 다 별로라고 대답하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기억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 딸기."

그래서 이렇게 한참 늦은 대답을 했다.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 손 끝을 따라 플란츠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 다음에는, 주방장님께 부탁해서, 딸기 아이스크림, 가져다 드릴게요.

이번에도 모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좋아해주는 고양이와 좋아하는 것 물어보는 시녀 때문에 짜증나던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았다.

기어코 살려두겠다는 동생놈이 뭐든 다 알려주겠다 하지 않나. 그것을 배우려면 머리를 좀 비워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 모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묻기로 했다.

플란츠가 좋아하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 가져왔을 때.

* * *

칼리안은 앨런의 말을 참 잘 듣는다.

칼을 쓰지 말라는 앨런의 말을 잘 듣고 몽둥이를 들었었다. 몽둥이를 꺼내 그레이를 다져놨다.

칼리안은 플란츠의 말도 참 잘 듣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먼저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칼이나 몽둥이를 꺼낼까 걱정한 것은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칼도 안꺼내고 몽둥이도 안 꺼냈다.

다만.

화도 내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은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 뿐인데도 압도한다.

느긋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빌헬름관의 훈련장을 뒤흔드는 느낌이다. 이미 쉰한 명이 있던 곳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그냥 어른도 아니고 그냥 귀족도 아닌 알고 보면 한 명 한 명이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 할 발칸의 마법사들을 완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왕비의 거처가 부서진 것을 안 뒤 '어이쿠' 따위의 말을 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앞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나지막한 구두 소리가 아르센의 옆에서 멈췄다.

멈춘 소리를 따라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제 입으로 불러낸 발칸의 진짜 주인.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부군단장."

오래 전 칼리안이 그레이를 상대할 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풍겨오던 칼리안의 살기를 이미 겪었던 아르센이었다. 그 때에 비한다면 지금의 기세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불린 아르센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 뒤에야 '네' 하는 대답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잠깐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혼을 내겠습니다. 내가 벌을 주겠습니다. 내가 잘 얘기하겠습니다. 내가 경고를 하겠습니다. 이런 거 말고.

내가 다 죽여버리겠습니다.

그게 제일 간단하잖아요.

이렇게 들린다.

아르센은 마음 속으로 번역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나서겠다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왕자님."

아르센의 대답과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열 세 명의 마법사를 하나하나 응시하는 붉은 눈에 그대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들입니까. 발칸과 관련 없다 한 것이."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묻는다.

아르센은 대답하지 않았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떨궜다.

다른 답은 필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사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와 함께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찌할까."

진짜 살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의 것은 그냥 나 좀 보라는 인사치레였던 것처럼. 수천 수만 개의 칼날이 온 몸을 도려내는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마법사들을 향했다.

"생명 붙어 있고 숨 쉬는 내내 내 품에 있을 놈들일 줄 알았지. 나는."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사라졌다.

발칸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얄팍한 책임감.

발칸의 책임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말아야 한다는 뒤늦은 걱정. 그냥 마법사와 발칸의 대원 사이를 말 한 마디로 가르려 한 잔머리.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고 책임져 줄 수 있는 '칼리안'이라는 울타리에서도 벗어나게 됐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왕궁 안에서는 발칸이고 밖에서는 마법사인 새끼들. 나도 필요 없는데."

칼리안의 품 안에서 제 발로 벗어났던 마법사들.

그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제25장. 있어야 할 곳 (3)

하루에 이 말을 대체 몇 번을 하는지.

"미친."

빌헬름 관에 혼자 가라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 알아.

그때 플란츠는 분명 '안다'고 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물었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 가르쳐드릴 겁니다.

그 말을 했을 때부터 이미 칼리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정도 바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칼리안이 어떤 놈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했다.

그 가르침이 이렇게나 사나운 방식일 줄 알았다면 그 태평한 얼굴을 보며 '생각할 게 있으니 오늘은 빌헬름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럼. 쉬십시오.

조금 전, 식사가 끝나고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말한 칼리안이 나간 뒤 플란츠는 후원으로 가 산책을 했다. 고양이와 히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체르밀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지금 당장 누구 하나는 찢어죽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칼리안의 것이었다.

빌헬름 관에 있을 미친 동생놈이 체르밀 궁에서 느껴질 정도의 살기를 줄기줄기 내뻗고 있는 것이다. 플란츠는 그 길로 말에 올라 곧장 빌헬름으로 달렸다.

칼리안이 그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발칸의 앞에 섰을지 누구에게 함께 화가 난 상태였을지 너무 늦게 알았다.

발칸을 아끼는 것이 분명하면서 관심 없어 하는 척,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하는데도 무관심한 척, 직접적인 책임이 두 부군단장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상관 없는 척.

그런 모습을 보인 플란츠에게 함께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신경 안 쓰면 내가 다 잡아버리겠다고.

내 멋대로 화 내고 내 방식대로 다 짓눌러 버리겠다고.

말에서 내려 빌헬름 관으로 들어서는 플란츠의 악다문 이 사이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를 낼 거면······."

화를 낼 거면 그냥 나한테 내라고.

책임감 없게 굴지 말라 그냥 말을 하라고.

그 쪽에 다 쏟아내지 말고!

* * *

집무실에 앉아 커피향을 음미하던 앨런이 순간 팔을 멈췄다.

"······ 우리 왕자님께서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나셨나."

여유롭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날카로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항상 힘을 빼 두려 노력하고 있는 눈초리가 예리한 빛을 냈다. 살기 때문이었다.

아르피아 궁과 빌헬름 관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농도 짙은 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칼리안은 분명 살기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동안 칼리안이 이렇게 범위 없는 살기를 내보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던 앨런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화를 내고 혼을 내는 정도로 끝낼 줄 알았는데,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필요하다면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럴 권한은 충분히 있었으므로 다른 참견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굳이 빌헬름 관이 아니라 아르피아 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앨런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혼을 내고 처벌하는 것의 범위를 넘어섰다. 칼리안의 바로 앞에서 이 기운을 마주치고 있는 이들은 진심어린 생명의 위협을 느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앨런의 어깨가 굳었다.

얼마 전 앨런의 집무실을 찾아왔던 체이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이스가 아르센을 마주쳤던 날이었다.

'설마?'

설마.

칼리안이 지금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체이스조차 자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지 않나. 게다가 오늘은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난 날이다. 그런 상황에서 발칸을 마주했으니.

이것을 떠올린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유로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책을 한 앨런이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앨런이 우려한 것이 맞다면 오늘 빌헬름 관에 딱 쉰한 구의 시체가 생기기 전에 빨리 가 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르메인을 호위하는 렌이 이 엄청난 살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 우선 그 쪽이 함부로 빌헬름 관에 가보지 않도록 말을 해 둘 필요도 있었다.

- 벌컥!

그렇게 급히 문을 연 앨런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앨런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를 본 까닭이다.

전례 없는 칼리안의 살기에 집중하느라 누가 이 곳에 찾아왔는지를 신경쓰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아. 마나실 백작님."

동글동글한 청회색의 눈 브론즈 색의 곱슬머리.

새끼 코끼리 얀이었다.

르메인의 집무실 앞에서 시종장 라울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던 얀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앨런을 향해 간단한 목례 후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면 된다고, 왕자님께서 백작님께 얘기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다른 설명이 없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앨런이나 렌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얀을 먼저 보내 두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저 어마어마한 살기가 결코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아주 잠시동안 생사를 오고 간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그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얀의 모습에 앨런은 여러 감정이 들어간 긴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쉬었다. 칼리안을 걱정할 줄이나 알았지 여전히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를 종종 잊곤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우리 왕자님······."

칼리안은 절대로.

한 가지 일에 하나의 이득만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복도의 창 밖으로 보이는 급히 달려오는 은백색의 말과 그 위에 올라 있는 이를 본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이렇게나 마음 씀씀이가 넓으셔서야."

그렇게 말한 앨런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쿠키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르메인에게서 뺏어온 엘린느의 쿠키였다.

* * *

세상에는 바보가 있고 머저리가 있다.

괜찮은 또라이와 답 없는 또라이가 있다.

그리고 물론 똑똑한 사람과 좋은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르센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물론 저 기준으로 나눌 가치조차 없는 부류, 이를테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같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르센에게 있어 '사람'으로 치부되지 않으니 논외다.

참고로 레이븐은 괜찮은 또라이에 분류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센보다 똑똑하지 못했으므로 '바보와 머저리' 외의 다른 분류를 짓지 않았었지만 근래 똑똑한 사람이라는 부류를 하나 만들었다. 앨런, 그리고 앨런을 상회하는 의외의 지적 생명체 플란츠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 부류에는 딱 한 명이 있다.

칼리안이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스승의 뒤를 이어 '좋은 사람'의 분류에는 항상 칼리안만 있었다. 그렇게 구분해 둔 것에 스스로 의문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왕자님."

그리고 지금 아르센은 굉장히 불안한 눈으로 그 좋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좇으면서도 손 끝에 차가운 마력이 집중되려는 것을 계속하여 참아내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살기가 그만큼 짙었다.

'더 버티기 힘들 텐데.'

마법사들은 물론 다 정신 나간 족속들이지만 그만큼 예민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마법사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검을 들거나 마법을 쓰면 그것이 나을 것이다. 당장 죽을 듯한 것보다는 어디 한 군데 베이고 부러지는 것이 나을 테니까.

"왕자님."

때문에 아르센은 다시 한번 칼리안을 불렀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살기를 집어넣지도 않았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마법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한 아르센이 열 세 명의 마법사들 앞으로 나서기 위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제야 칼리안의 고개가 아르센을 향해 돌아갔다. 그 눈에 담긴 것이 작은 질책임을 안 아르센이 '아차'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칼리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왕궁에서 칼리안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단 세 명.

그들 중 한 명인 2왕자 플란츠가 칼리안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정확히 마법사들과 칼리안의 사이를 가로막은 채였다.

"그만하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려 자신과 마법사들 사이에 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살기는 감추지 않은 채였고 플란츠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의 한기는 플란츠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적어도 절반은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질린 얼굴이었다.

그들을 살핀 플란츠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쳐다봤다. 포기한 듯, 혹은 졌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은 꽤 복잡해서 플란츠조차도 의도를 바로 파악해내기 어려웠다.

즐거움인지, 노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을. 혹은 그 모든 것이 다 섞여 있는 것 같은 얼굴. 그런 얼굴을 한 채 스치듯이 플란츠를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네."

칼날같이 휘몰아치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죽을 때까지 발칸일 새끼들만 데리고 갈 거야. 아닌 새끼 필요 없어."

"네, 왕자님."

마법사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살기가 사라졌음에 주저앉거나 칼리안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놈들은 없었다.

"술 처먹고 사고 칠 거면 내 이름 걸고 쳐."

칼리안의 이름 걸고 칠 만한 사고가 아니라면 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르센이 그러하듯이.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은 기사와 다르다.

그들의 신의는 충의와 다르다. 맹목적이며 헌신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튈 지 모르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강제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칼리안도 익히 아는 것처럼 그들은 돌아있으니까.

그러니 키리에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훈련장 몇 바퀴 뛰는 것만으로는 절대 저놈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없다. 내가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참고 있는지 모두 다 낱낱이 보여줘야 믿는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미쳐있는 마법사들 아닌가.

"내 이름 걸고 치는 사고는 내가 전부 다 막아 줄 테니까. 그러라고 가진 힘이니까."

저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말고. 진짜 힘. 그것을 직접 겪어봐야 믿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돌아서다.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자신들 숨통을 죄이던 놈인 것을 아니까. 이제 정말로 믿을 터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렇게 시선은 플란츠에게 둔 채 마법사들을 향해 말을 맺었다.

"이런 게 진짜 책임감이라는 거다."

어줍잖게 피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한 것처럼 제대로 나서서 보호하라고.

그것이 네 위치에서 네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니까.

······ 플란츠.

제25장. 있어야 할 곳 (4)

뒷통수가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머리 그냥 풀고 올 걸.'

드미레아가 이렇게 잠깐 후회를 했다.

국왕을 만나러 오는 자리였기에 단정한 하얀 셔츠와 바지, 검은 색의 짧은 재킷을 걸쳤다. 거기에 조금 더 깔끔해 보이는 올림머리를 했던 터였다.

덕분에 뒷통수가 빳빳하게 곤두서는 이 느낌이 짧은 머리를 억지로 땋아서 틀어올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것인 듯한 엄청난 살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 후우.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작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으로 보아 지금의 이 기분은 역시 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드미레아는 르메인을 만나고 나가는 길에 칼리안을 찾아가 대련이나 한 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저 정도 살기를 느꼈음에도 저택으로 그냥 돌아갈 드미레아가 아니었다. 그 호승심만큼은 슬레이만을 꼭 닮은 것이다.

그때 르메인의 곁으로 잠시 다가온 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종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하."

칼리안의 살기가 씻은듯이 사라졌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르메인은 발칸이 저지른 사고에 대해서는 이미 알았다. 다만 그 문제에 대해 칼리안과 플란츠가 발칸의 군기를 조금 엄하게 잡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살기를 느끼지 못하니 방금 전까지 드미레아와 렌이 어떤 기분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지난 번 칼리안 왕자의 일에 나서 준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화답했다.

"어느새 긴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비록 드미레아 역시 필요에 의해 응한 소문이라지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소문을 해명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만든' 르메인의 처사, 그리고 도움의 대가에 대해 짚고 넘어간 것이었다.

"그래."

르메인은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드미레아를 잠시 쳐다봤다. 이미 지그프리드가 칼리안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으니 추후 지그프리드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왕실에서 지그프리드를 돕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드미레아는 슬레이만이나 얀과 달랐다.

"당연한 일이지. 내 잊지 않으마."

결국 르메인은 이렇게 향후의 도움을 약속했다.

이미 칼리안에게도 '도움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받아내기로 했지만 그 쪽은 그 쪽이고 이 쪽은 이 쪽이니까. 아무리 르메인의 권력이 약하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국왕이 아닌가. 명분 뿐인 이름이 필요할 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흡족한 약속을 받아 낸 드미레아가 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르메인을 찾아 온 진짜 이유를 품에서 꺼내놓았다.

"공작령에서 전하께 이것을 꼭 전해드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돈이었다.

떼먹고 도망갔던 온천 여행 값을 드미레아 편에 보낸 것이다.

슬레이만의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인다. 그래서 웃었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접점을 한 번 더 만들어 주려는 속셈인 것 같아서였다.

"지그프리드 공이 3왕자를 꽤 좋게 보았나 보군."

당연하겠지만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왕자비로 앉힐 생각은 아닐 것이다. 칼리안을 데릴사위로 삼으려는 생각일테지.

이런 생각을 한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는 빚을 지지 않습니다, 전하. 그 뿐이니 다른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참 잘 포장했으나 결국은 불쾌하다는 소리다.

그냥 빌린 돈 갚으러 온 것이니 혹시라도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관계를 엮으려 들거나 착각하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기도 했다.

그 단순한 슬레이만에게서 어떻게 저런 인재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플란츠와 란델의 아버지인 소 같은 르메인이 짧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