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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용왕님의 알람이 되었습니다 (2)

 

 

이곳은 프론테라 백작령.

마젠타노 왕국 최동단에 위치한 지방.

원래는 자그마하고 보잘것없는 시골 촌구석이었지만 최근 왕국에서 가장 핫한 개발 구역으로 거듭난 영지였다.

오늘도 시커먼 미세먼지 쑴펑쑴펑 날리는 석탄 광산.

방구석에 깔린 카펫마저 따끈따끈 보들보들 익어가는 온돌.

어느새 알뜰살뜰한 곡창지대로 거듭나고 있는 마레즈 개간지와 계단식 농경지.

거기에 고산지대 청정수가 24시간 콸콸 쏟아지는 상수도와 인심 넉넉한 아파트 단지.

심지어 주민들의 모든 생활 오물이 위생적으로 처리되는 대하수로 시설까지.

왕국에서 이렇게 최첨단을 달리는 영지는 없었다.

게다가 왕실의 지원마저 빵빵했다.

매달 풍부한 물자가 재건 지원의 명목으로 내려왔다.

내 돈은 1원도 들이지 않는데 매달 햇반과 밑반찬이 수십 톤씩 택배로 날아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웃한 라코나 자작령에서 받는, 아니, 뜯어내는 수도세.

나마란 영지에서 받는 사면안정시설 관리비.

하나같이 영양가 만점인 자금원이었다.

'거기에다가, 후우. 이번 달에도 엘프 마을에서 엘렌시아 수액이 들어왔구나. 고작 석탄 서른 자루를 주고 그렇게 귀한 걸 한 병이나 받아낼 수 있다니. 그건 들어오는 대로 창고에 비축하라고 로이드가 그랬지, 아마?'

아마도 큰아들이 그렇게 당부했던 것 같다.

아르코스 프론테라 백작은 그렇게 기억을 되새기며 열심히 움직였다.

 

팍, 파삭! 팍!

 

백작의 부지런한 손짓에 모종삽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저택 꽃밭에서 무단 거주를 시도하던 잡초들이 사라졌다.

그만큼 백작의 마음도 푸근해졌다.

"후우."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풍족한 영지.

앞으로도 아쉬울 것이 없을 든든한 미래.

거기에 두 아들도 너무나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영지의 주인으로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보다 더 흐뭇하고 푸근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소, 여보?"

"네?"

그의 물음에 백작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서 열심히 놀리던 모종삽을 멈추곤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그냥. 기분이 푸근하고 훈훈하여 행복해서 말이오. 마침 날씨도 좋고. 그래서 말인데, 이따 오후에는 말을 타는 건 어떻겠소?"

"설마 경주라도 하자는 말씀은 아니겠죠?"

"아무렴 설마. 같이 탑시다. 앞뒤로 나란히. 꼭 붙어서."

"어머, 이 사람이 참."

"허허허, 민망하오?"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그런 좋은 얘기를 왜 이제야 꺼내나 싶어서요."

"허허허!"

부부의 얼굴에 똑같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꽃밭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이 흙투성이가 되었건만, 손에 묻는 그 흙의 감촉마저도 즐겁고 행복했다.

햇볕마저 더욱 따사롭게 느껴졌다.

그렇듯 포근한 햇볕 아래.

주위를 살포시 살핀 부부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한데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꽃밭 옆의 허공에 순간이동 마법진이 열렸다.

 

파츠츳! 샤아아아아아-!

 

"...으엇?"

"어맛!"

마침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던 백작부부가 깜짝 놀라 멀어졌다.

그 와중에도 손을 꼭 붙잡고서 순간이동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이내 마법진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사람 셋과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아."

순간이동 마법진이 사라진 직후.

로이드는 땅에 내려서며 살짝 비틀거렸다.

'으으, 멀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룡굴 중심부에 있었던 그였다.

한데 용왕 베르키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니 모든 것이 급격히 변했더랬다.

사방을 휘감는 마력의 물결과 함께 몸이 허공에 보옹 떠올랐다.

주위에 온갖 별빛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정말로 잠깐.

땅에 내려서고 보니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웅장한 마룡굴 내부가 아닌, 햇볕 따뜻하고 익숙한 저택 꽃밭이 보였다.

꽃밭을 다듬다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있는 반가운 얼굴들도 보였다.

"로, 로이드?"

반가운 두 얼굴.

백작부부가 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덕분에 로이드도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룡굴에서 여기 프론테라 저택까지 한 큐에 온 거네.'

과연 용왕의 마법답다.

그는 백작부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어, 그, 그렇긴 하다만. 저분과 저 사자는?"

백작의 얼떨떨한 손길이 용왕 베르키스, 그리고 만티코어를 가리켰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귀한 손님이십니다. 일단 자초지종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드릴게요. 우선 이분들을 모실 일이 훨씬 급하고 중요할 듯해서.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직감했다.

지금은 설명 같은 걸 하느라 미적거릴 때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곁에 선 용왕 베르키스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당장 자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어!'

벌써부터 반쯤 감긴 눈.

그 사이로 언뜻 비치는 동태 같은 눈빛.

어깨는 축 늘어졌다.

허리는 구부정했다.

두 손과 무릎도 흐느적댔다.

만약 여기 흙바닥에 이불을 깔아 준다면?

일언반구 항의도 없이 그대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24시간 풀취침을 감행할 모습이었다.

'안 돼. 그래도 모처럼 용왕을 여기까지 모신 건데. 제대로 된 곳에서 재워야 해. 그래야 나중에 생색도 잔뜩 낼 수 있을 거야.'

행여나 당장 용왕이 여기 드러누워 버리는 게 아닐까.

로이드는 내심 다급해졌다.

백작부부에게 서둘러 얼버무리고는 베르키스의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저기, 용왕님?"

"...어."

"순간이동 마법 감사합니다. 그럼 절 따라오시죠."

"꼭 따라가야 되냐...."

"아, 으잇, 익, 여기서 잠드시면 안 됩니다!"

"졸려어어...."

"조금만 힘내세요!"

로이드는 잽싸게 베르키스를 부축했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애쓰며 옮기듯.

한껏 비장한 표정과 몸짓으로 용왕 베르키스를 둘러업다시피 했다.

저택 별채 손님용 숙소 침대로 베르키스를 던져 넣었다.

"그럼 아침 모닝콜 시간 때 깨워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꿀나잇 하십시오!"

"드르렁."

그렇게 또 하나의 위기(?)를 넘겼다.

비로소 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여전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던 백작부부에게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하면, 아까 그 손님이 세상 모든 드래곤의 왕이... 신 것이더냐?"

"예,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런 분을 우리 영지에서 모시게 되었다고? 앞으로 1년 가까이나?"

"예, 어쩌다 보니."

"뭔가 저분의 특별한 요구나 조건은 없었더냐?"

"음, 있긴 합니다."

"어떤?"

"하루에 한 번, 아침마다 잠을 깨워 드리면 됩니다."

"잠을?"

"예. 아내분, 그러니까 용왕비님한테 아침마다 연락을 하셔야 된다고 하셔서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애초에 그것 때문에 제가 저분을 모셔오게 된 거라서."

"...허허허."

프론테라 백작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참으려 해도 흐뭇한 웃음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내 아들이 어쩌다가 이런....'

거물이 되었단 말인가.

백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국왕에게 수시로 불려 가서 일을 맡는 것은 어느덧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드래곤의 왕을 직접 모셔오기까지 했다.

국가의 왕에 이어 드래곤의 왕과도 인맥을 다지게 된 셈이었다.

'어쩌면 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이의 아비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로이드가 인간의 왕, 드래곤의 왕뿐만이 아니라 지옥의 왕과도 인연을 다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로이드는 그 사실을 굳이 알려 주진 않았다.

'무려 지옥인 거니까. 그냥 말 그대로 저승인 거잖아? 거길 다녀왔다는 이야길 해 봤자 잔뜩 걱정만 하시겠지.'

게다가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지옥에 가서는 진짜 로이드를 만났으니까.

망령이 되어 떠돌던 녀석의 환생을 도왔으니까.

그 이야기만 쏙 빼놓기가 조금 그랬다.

양심의 소리가 머리채를 움켜쥐는 기분이었다.

진짜 로이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꼭 전하리라.

언젠가 그 이야기를 꺼낼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말하리라.

설령 그 솔직함 때문에 어떤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행여나 백작부부의 원망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밝히리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선 처리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였다.

백작부부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알리면서도 로이드는 지옥행에 대한 이야기는 숨겼다.

그러다 보니 화제가 자연히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한데 저... 사자는 뽀동 경처럼 새로 소환한 친구이더냐?"

프론테라 백작의 호기심이 만티코어를 향했다.

마침 만티코어는 꽃밭의 꽃냄새를 킁킁대며 맡고 있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아, 그건 아닙니다. 저분은 만티코어라고, 용왕 베르키스 님을 모시는 신하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함께 여기로 오게 된 것이고요."

"흐음, 그렇구나."

끄덕끄덕, 그게 백작부부가 만티코어에게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심지어 저택의 경비병이나 하인 하녀들, 영지민들의 반응도 백작부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 못 보던 거대 사자가 있네?"

"완전 크고 뚱뚱하잖아?"

"뽀동 경과 덩치가 비슷할 정도인데?"

"엄마! 나 저거 뱃살 만져 보고 싶어!"

즉, 이곳 지방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만티코어의 엄청난 덩치와 위용에도 전혀 쫄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프론테라 영지의 주민들.

그들은 이미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와 비벙이를 겪은 이들이었다.

게다가 몬스터 도미노 사태를 겪으며 온갖 마수들도 원 없이(?) 체험했다.

말 그대로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들인 셈이었다.

덕분에 이곳 주민들의 눈에는 전설적인 마수인 만티코어도 그저 '좀 크고 뚱뚱하고 배에 탈모가 와서 뱃살 핑크핑크한 사자, 혹은 뚱냥이' 정도로만 보였다.

물론 만티코어 또한 그런 사람들의 환대를 기꺼이 즐겼다.

"아빠! 나 저거 타 보고 싶어!"

"코로롱!"

"타도 된대!"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

만티코어는 순식간에 프론테라 영지 어린이들의 뚠뚠하고 푹신한 놀이기구, 혹은 곤충채집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로이드도 나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영지로 돌아왔더니 일거리가 제법 쌓여 있었던 까닭이었다.

'겨우내 얼었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한 상수도 배관도 그렇고. 마레즈 개간지 배수 시설이랑 계단식 농경지 옹벽도 점검해야 하고. 온돌 보수 의뢰도 제법 쌓였고. 석탄 광산 안전점검에다가, 대하수로 배수로 정비에다가. 와, 미친다, 미쳐.'

너무 오래 영지를 떠나 있었던 까닭이었다.

프론테라 백작이 나름 신경을 썼지만.

바이에른 경과 공병대, 거북목과 골병대가 신경 써서 관리해 왔지만.

그럼에도 로이드가 직접 모든 것을 살피고 점검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앞으로는 이렇게 영지를 오래 비울 일이 잘 없을 거니까.'

누군가의 일감을 맡아서 영지를 떠나는 건 이제 안녕이다.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영지를 지켜내기 위해.

노후를 책임질 자금 마련을 위해.

타지에 나가서 구르며 돈을 벌어오는 짓도 이젠 끝이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모든 위기를 다 넘겼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여생을 꿀만 빨며 살아가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보수와 점검에 이렇게 애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주구장창 영지에 붙어살면서 꾸준히, 조금씩 신경만 써 주고 관리하면 되리라.

소중한 꿀단지를 지키고 가꾸기만 하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피로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 힘껏 보수와 점검에 매달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매일 아침 용왕 베르키스를 깨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용왕의 알람이 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저기, 용왕님?"

"...."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드르렁."

"저기, 용왕비 님께 연락하셔야지요?"

"으음... 나중에...."

"나중에요? 그럼 조금 뒤에 다시 깨워 드릴까요?"

"어...."

"얼마쯤 뒤에 깨워 드리면 될까요?"

"내일...."

"...."

아니, 이 용왕이 뭐래는 거야.

예상보다 훨씬 잠투정이 심한 용왕이었다.

결국, 로이드는 비장의 무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용왕님. 이게 다 용왕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흠흠!'

로이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름 청량한 음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자장자장 우리 용왕↗ 자장자장 우리 용왕↗ 꼬꼬닭아 울지 마라! 우리 용왕 잠을 깰라↘아↗!"

그것은 멸망의 자장가였다.

혹은 지옥의 모닝콜이었다.

듣는 이의 고막을 영원히 잠재우고.

굿모닝 헬게이트를 알뜰살뜰 오픈시키며.

듣는 이의 달팽이관에 전설의 명약 알보-7을 담뿍 발라주는 듯한 노래였다.

덕분에(?) 용왕 베르키스의 잠도 싹 달아났다.

"...너님, 한 주먹에 배 터지고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니?"

"크흠! 흠! 죄송합니다."

"아니면 한 많은 세상의 한 줌 다이옥신으로 승천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

"으음,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우선 용왕비님께 연락부터 하셔야 한다고, 제가 그 사명을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쯧. 그래서 일부러 끔찍한 노랠 불러제낀 거야?"

"아뇨."

"그럼?"

"최대한 열심히 잘 부른 건데요."

"그게?"

"예."

"...미안."

"크흡."

어쨌건, 그렇게 로이드는 매일 아침 아슬아슬하게나마 용왕의 알람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확신했다.

'이젠 나, 정말 다 해낸 거야.'

진짜로 다 해냈다.

번잡하지 않은 시골에서 유복하게 여생을 살아가기.

평생 힘들거나 복잡한 일 없이 꿀만 빠는 건물주, 혹은 백수로 살아가기.

그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도 열심히 굴렀더랬다.

수없이 위기를 넘나들었더랬다.

때로는 좌절할 뻔하고.

그럼에도 또 일어서고.

포기하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더랬다.

그리고 이제는 목표로 삼았던 모든 일을 이루었다.

영지는 더없이 안전해졌다.

자금도 너무나 탄탄해졌다.

앞으로 걱정할 거리가 없었다.

진짜 로이드에 대한 진실도 조만간 백작부부에게 알릴 것이다.

그 마음의 빚을 청산하는 사소한 일만 제외한다면 어떠한 풍파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자신의 침실에서 심호흡을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밤의 침실.

그 고요함 속에서 마음을 다졌다.

'이게 마지막 확인인 거야.'

모든 것을 이루어낸 삶.

앞으로 걱정이 없는 삶.

과연 자신이 정말로 그러한 삶을 살다가 평온한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행여나 자신 앞에 예기치 못한 변고나 굴곡이 찾아오진 않을 것인가.

그것을 확인하고자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제법 오래 묵혀둔 스킬을 꺼냈다.

 

달칵.

 

[스킬명 : 엔딩 스포일러]

[스킬 특성 : 절대 권능]

[필요 CP : 80 (3회차)]

[일정량의 CP를 소모하여 현재 스토리의 대단원에 펼쳐질 엔딩씬 일부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습니다.]

 

눈에 익은 스킬 안내가 펼쳐졌다.

로이드는 심호흡을 했다.

'확인해보자.'

스킬창 아래쪽의 '실행'을 선택했다.

 

[스킬 : 엔딩 스포일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소모 CP : 80 (3회차)]

[현재 보유 중인 CP : 1,192]

 

[YES / NO]

 

'물론 예스지.'

 

딩동.

 

[스킬 : 엔딩 스포일러가 발동됩니다.]

[80 CP가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CP : 1,112]

 

스킬 발동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다.

 

츠즈즈즈...!

 

주위의 시간이 급속도로 느려졌다. 마침내 정지했다.

봄바람에 살랑이던 창가 커튼도.

어디선가 날려 오던 꽃잎도.

모두 시간 속에 박제되듯 멈추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로이드의 앞 공간이 일렁였다.

둥글고 새파란 통로가 열렸다.

'가보자.'

로이드는 통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온통 섬광으로 물들었다.

 

파아앗...!

 

마치 눈을 감았다가 뜨듯.

로이드는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광경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곧, 뜻밖의 풍경에 경악했다.

'...뭐야, 이건?'

251화. 세 번째 엔딩 스포일러 (1)

 

 

'뭐야, 이건?'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휘둥그레 뜨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당연했다.

엔딩 스포일러를 보고 있는 거니까.

미래, 엔딩 시점인 자신의 몸에 의식만 들어와 있는 상태니까.

즉,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미래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1인칭이되 철저한 관찰자인 시점.

그러한 입장에서 자신의 미래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낡은 노트가 있었다.

한데 노트 표지가 이색적이었다.

표지에는 '로이드 프론테라의 기록'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즉, 그건 일기장이었다.

'내가 일기를 쓴다고?'

내심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일기를 쓰는 습관 따위는 없는 자신이었다.

그나마 예외라면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로 쓰던 일기, 혹은 군대에서 억지로 쓰던 병영일기밖에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일기 따윈 쓰지 않는데.'

어쩌다가 미래의 자신에게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긴 걸까.

그 습관이 얼마나 잘 들었으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일기를 쓰고 있는 걸까.

'그래도 나쁘진 않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처음엔 좀 뜻밖이라서 뜨악했다.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보냈던 인생이 얼마나 한가하고 꿀 같았으면 내가 일기를 다 썼겠냐.'

심심했던 거다.

지루했던 거다.

그만큼 평온하고 평탄한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기 따위를 쓰는 습관을 자신이 장착할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절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안심하던 마음에 희미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건 미래의 자신이 기침을 하면서부터였다.

"...쿨룩! 쿨럭!"

 

피핏!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몇 방울 검붉은 피가 일기장에 튀었다.

미래의 자신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온통 헤지고 땟국물 가득한 소매로 일기에 묻은 피를 닦았다.

'어? 잠깐.'

로이드는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소매가 왜 저래?'

그의 시선이 일기장의 피를 닦는 소매를 향했다.

낡은 셔츠였다.

원래는 밝은 색이었을 소매였다.

그런데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빨아 입은 걸까.

온통 시커멓고 누런 때가 가득했다.

게다가 온통 해져 있었다.

단추는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뭐야. 평온한 삶을 살았는데 옷이 왜 저래.'

뭔가 이상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렇지 않을 거라 믿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을 불안감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그의 눈길이 다급해졌다.

'잠깐. 그럼 내 손은?'

문득, 그는 지난 두 번의 엔딩 스포일러를 떠올렸다.

엔딩 스포일러를 쓸 때마다 미래 자신의 시각을 빌려서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미래 자신의 나이를 확인할 그나마 간편한 방법은 손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손, 손은?'

그의 시선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손등을 향했다.

그리고 덜컥 멎었다.

'주름이... 없어.'

매끈했다.

조금 거칠었지만 주름이 없었다.

노인이라면 지니고 있을 법한 검버섯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늙어서 죽는 게 아니라는 건데. 대체 뭐야, 이 상황은.'

일단 계속 지켜보자.

확인부터 해보자.

로이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 사이, 간신히 기침을 가라앉힌 미래의 자신이 펜을 집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일기장을 펼쳤다.

덕분에 로이드는 일기장의 기록을 훔쳐볼 수 있었다.

 

사라락.

 

[자발적으로 쓰는 일기는 처음이다. 슬프다. 백작님이 사고를 당하셨다. 그저 평소처럼 승마를 즐기셨던 것뿐인데. 항상 즐겨 다니시던 길이었는데. 하필 그곳에서 말이 족제비에 놀라 펄쩍 뛸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서슬에 백작님의 목이 나뭇가지에 부딪힐 줄 누가 알았을까. 의사의 말로는 일단 지켜보자고는 하지만 이건... 모르겠다. 그저 슬프다.]

 

사락.

 

[백작님이 하루 만에 깨어나셨다. 목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하셨다. 그런데도 애써 웃으며 모두를 안심시키려 하셨다. 자신은 괜찮다고. 감각이 없으니 오히려 아프지도 않다고. 누워서 지내니 불편할 것도 없다고. 그렇게 사람 좋게 웃으셨다. 그게 백작님의 유언이 되었다. 지금 밖에서는 백작부인이 숨죽여 울고 계신다. 사실은 나도 울고 싶다. 일단 백작부인을 달래드리러 나가봐야겠다.]

 

'....'

이게 무슨.

로이드는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일기장을 훔쳐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기장 페이지가 차례차례 넘어갔다.

 

[백작부인이 말을 잃으셨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웃지도 않으신다. 꽃밭을 가꾸지도 않으신다. 방치된 꽃들이 말라죽을까 내가 대신 모종삽을 들기 시작했다. 올해 프리지아는 예쁘게 피었으면. 그래서 백작부인의 슬픔이 가라앉으면 좋겠다.]

 

사락.

 

[프리지아 꽃이 예쁘게 피었다. 그런데 백작부인은 그걸 볼 수가 없게 되셨다. 아침에 하녀 에밀리의 비명이 들려왔을 때에야 나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한때 모두가 즐겁게 웃던 그 식당이 부인의 마지막 장소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그랬다. 백작부인은 먼저 떠나간 백작님이 그리우셨던 걸까. 왕도에 있을 줄리앙을 불러야겠다. 따사롭던 저택이, 이젠 너무 넓고 허전하게 느껴진다.]

 

사라락.

 

[줄리앙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 녀석이 와야 부인의 장례를 치러드릴 수 있을 텐데. 아마도 백작님 때처럼 답장을 보내기보단 황급히 달려오고 있는 거겠지. 꼬밍이를 보냈으니 금방 올 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사락.

 

[답장이 왔다. 줄리앙이 아닌, 세라자드 양이 쓴 비보다. 자신이 그때 집을 비우는 게 아니었노라고. 줄리앙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노라고. 그 사이에 강도가 들 줄은 몰랐다고. 아니, 자신이 조금만 일찍 집에 돌아갔더라면 늦기 전에 줄리앙을 발견하고 옮길 수 있었을 거라고. 자책과 비통함으로 가득한 비보가 떨리는 글씨에 담겨 날아왔다. 멍하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집에 혼자 있던 줄리앙이 강도의 칼에 찔렸다니. 거짓말 같다.아니, 이건 거짓말이면 좋겠다.]

 

사라락.

 

[지난 한 달을 어떻게 보낸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도 멍하다. 그래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펜을 든다. 그간 백작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왕도에 왔다. 줄리앙의 장례도 치렀다. 슬프고 비통한 일도 연달아 일어나면 무감각해지는 걸까. 모르겠다. 이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작부부와 줄리앙의 연이은 죽음. 철혈의 기사에서의 상황들과 묘하게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불길하다. 불안하다.]

 

'미친. 뭐야, 이거.'

로이드는 내심 이를 갈았다.

그의 눈길이 더욱 바빠졌다.

천천히 넘어가는 일기장 페이지.

그 속의 기록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불길한 느낌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왕성에서 연락이 왔다. 국왕을 알현했다. 한데 이상했다. 국왕의 왼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주위를 물린 후에 넌지시 여쭈었다. 설마 왼팔에 이상이 있으신 것이냐고. 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긍정의 제스처였다. 그걸 보는 순간 떠올랐다. 철혈의 기사. 그 속에서 벌어졌던 국왕 시해 미수 사건. 그때 잘린 국왕의 팔은 왼쪽이었다.]

 

사라락.

 

[오랜만에 영지로 돌아왔다. 왕도에 있는 동안 세라자드 양을 무던히도 달래야 했다. 어쩌면, 만약 내 불길한 예측이 맞는다면, 분명 세라자드 양에게도 뭔가 일이 생길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길. 제발 내 예감이 틀린 것이길.]

 

사락.

 

[가슴이 내려앉는다. 샤일로와 미트로프. 우리 가문에 빚을 지웠던 사채꾼들. 그 두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목을 찔렸단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작부부와 줄리앙, 그리고 두 사채꾼들. 모두 철혈의 기사 초반에 죽음을 맞았던 이들이 아닌가.]

 

사라락.

 

[몇 달간 긴장하며 지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가 없다. 하지만 마음이 황폐하다. 불안하다. 요즘 자꾸 술 생각이 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락.

 

[남부에 전쟁이 터졌다. 큰 전쟁은 아니고 국지전이라고. 뭐,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세라자드 양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이곳으로 와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사라락.

 

[세라자드 양의 답장이 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아니, 불안하다.]

 

사락.

 

[세라자드 양의 소식이 왔다. 전사 통지서다. 그걸 받아보고서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남부와의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녀가 자원했단다. 줄리앙을 잃은 울분을 풀기 위함이었던 걸까. 돌격대의 선두에서 무리한 돌격을 감행했단다. 적진 깊은 곳에 고립되어 분전했다고 한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젠...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서 열심히 살며 덩달아 운명이 바뀐 이들. 그래서 죽음을 모면한 사람들. 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있다.]

 

'미친.'

로이드는 치를 떨었다.

일기장은 계속해서 넘어갔다.

그동안 미래의 자신이 받아본 비보도 계속 살펴볼 수 있었다.

술탄은 행사 중의 사고로 추락사했다.

오크 아로쉬는 사냥 중에 큰 부상을 입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나마란 영지를 통치하던 나마란 영애도 사고를 당했다.

경사가 큰 도시 진입로에서 미끄러지는 마차에 깔려 즉사했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데 저게 다 진짜로 일어난 일이라니.

믿기지 않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섬뜩했다.

저 사건들의 공통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철혈의 기사에서 죽거나 큰 사고를 당했던 인물들이야.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오는 바람에 운명이 바뀌어 살아남게 된 사람들이기도 해.'

한데 그 사람들이 모조리, 전부 다, 원작과 비슷한 형태의 사고와 죽음을 겪은 것이었다.

'그럼 나는?'

문득, 철혈의 기사에서 로이드 프론테라가 맞았던 최후가 떠올랐다.

잦은 폭음 때문에 중병을 얻었다.

주점 골방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설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온 일기장.

그 여백의 페이지를 바라보며 로이드는 긴장했다.

그 사이, 마침내 미래의 자신이 펜을 움직였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길로.

처량하게 일그러진 글씨체로.

마지막 여백의 페이지를 힘겹게 채워나갔다.

 

[이젠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술, 손대지 말아야 했나. 아니, 아무도 못 지켜줬잖아. 너무 괴로웠는걸. 그냥 이젠... 쉬고 싶다. 꿀 빠는 것도 이젠 모르겠다. 두 개의 목숨? 그건 진짜이긴 하던데. 그래 봤자 며칠 전에 썼는데도 결국 이 꼴인걸. 그냥 힘들다. 피곤하고 지친다. 운명, 그거, 결국은 거스를 수 없는 거였나 싶고. 이게 다 뭔지. 나는 진짜....]

 

그 순간이었다.

"...쿨럭! 커억! 커흑! 커어억!"

힘겹게 펜을 놀리던 자신의 몸이 격하게 경련했다.

영혼마저 뱉어낼 듯 괴롭게 기침했다.

그러다 뭔가를 왈칵 토해냈다.

 

철퍽!

 

'...!'

피였다.

검붉은 피가 한 사발이나 뿜어져 나왔다.

쓰고 있던 일기장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콰당!

 

의자째로 넘어졌다.

비로소 방 안쪽 풍경이 보였다.

익숙한 곳이었다.

영지의 주점 2층.

낡은 골방.

"로이드 님!"

뒤늦게 뛰어들어오는 누군가.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도 보이는 선명한 은발.

"하비... 엘."

이쪽을 황급히 살피는 손길.

그게 마지막이었다.

 

...화아악!

 

눈앞이, 세상이 어두워졌다.

순간적으로 전신이 허공에 붕 뜨는 느낌.

그리고 로이드는 눈을 떴다.

"...."

 

사르륵.

 

허공에 멈추어 있던 커튼이 밤바람에 살랑였다.

그 기척에 로이드는 전신을 흠칫 떨었다.

창가를 돌아보고서야 깨달았다.

'돌아왔구나.'

엔딩 스포일러가 끝났다.

어느새 자신은 저택 침실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날뛰는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방금 내가 본 거, 뭐였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엔딩 스포일러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몬스터 도미노 현상으로 일어난 메뚜기 떼의 습격도.

몰려든 피난민 사이에 생겨난 콜레라 사태도.

모두 엔딩 스포일러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거, 분명 우연한 사고들이 아니었어.'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한편으로는 조금 전 미래의 일기장을 통해 훔쳐보았던 일련의 사건들을 머릿속에 차근차근 정리했다.

'백작님이 승마 중에 사고로 크게 다친 날. 얼핏 본 거지만 대략 3년쯤 후였지.'

그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그저 불행한 사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미래의 일기장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연일 수가 없지. 우연치고는 너무 지독하잖아. 철혈의 기사에서 죽었어야 했을, 그런데 나 때문에 죽지 않은 사람들만 딱 골라서 죽어간 거니까.'

심지어 죽음의 형태 또한 묘하게도 원작의 것과 닮아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원인 모를 팔의 마비를 겪은 국왕 알리시아의 경우도 그랬다.

'원작에서는 잘린 팔이, 여기선 잘리지 않은 대신에 마비를 겪게 됐어.'

그러면 팔이 달려만 있을 뿐이지, 잘린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특히나 소드마스터인 국왕에겐 더더욱 그럴 터다.

게다가 자신은?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울증에 술을 찾게 됐고. 병이 도지고. 결국엔 폐인 꼴로 주점 골방에서....'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며 죽었다.

결국엔 원작 속 로이드 프론테라의 것과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와나. 무슨 이런 미친.'

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운명의 장난인 걸까.

아니면 운명을 끝끝내 거스를 수는 없다는 걸까.

그렇다면 이거, 어쩌면 진짜로 답이 없는 문제인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운명의 장난이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건.

일단은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레 포기하기엔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바야흐로 이제야 모든 꿀단지를 알차게 차곡차곡 쌓아 둔 터였다.

남은 인생 내내 꿀단지를 꼭 끌어안고서 행복하게 뒹굴뒹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저따위 사건들을 겪게 된다니.

그건 싫었다.

만약 그런 엔딩이 이 시나리오의 끝인 거라면?

이따위 이야기를 쓰는 작자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분명 저 개막장 사태, 원인이 있을 거야. 운명이건 뭐건 간에. 바꾸거나 막아낼 방법이 있을 거야.'

그는 고민했다.

가장 간단하게는?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는 백작의 승마 중 사고를 막는 방법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거, 아무리 봐도 단순히 불행한 사고가 아닌 거 같아. 그러니까 그걸론 안 돼. 그 사고를 막는다고 해도 또 다른 형태로 백작이 사고를 당할 거야. 그러면 결국엔 비슷한 불행들이 연달아 일어나게 된다는 소리지.'

만약 저 사고들이 운명을 거스른 대가로 일어난 것이라면?

그래서 운명이 원래의 이야기로 이곳의 사건들을 끌어가려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당장 일어날 사고만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짜로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래서 안일하게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진짜로 대책 없는 상황을 맞이해 버리면? 그럼 끝이야. 그냥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어. 일단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해.'

로이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로이드는 벌떡 일어났다.

한밤의 저택 복도로 나섰다.

동시에 그는 조금씩 직감했다.

지금까지가 가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바꾼 운명에 맞서야 할 여정이 펼쳐질 듯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해야지, 뭐.'

어차피 피할 수 없다.

교수님이 무자비하게 내준 살인적 분량의 과제처럼.

그 과제를 하면서도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과거의 나날들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래서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면.

'일단 잠부터 줄이자.'

그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의 자신이 취했던 가장 단순하고도 정석적인 대응법을 선택했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란다면?

그 와중에 알바도 뛰어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란다면?

답은 하나다.

잠을 줄이면 된다.

날밤을 새우면 없는 시간이 만들어진다.

그날부터였다.

마치 과거 필사적으로 살았던 나날들처럼.

로이드는 저택 서재에서 날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투덜거리는 건 잊지 않긴 했다.

'어오! 여기 인터넷만 있었어도!'

자신이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미래의 엿 같은 최후.

그걸 바꿀 실마리를 얻어내기 위한 자료 검색 노가다가 이어졌다.

252화. 세 번째 엔딩 스포일러 (2)

 

 

인터넷.

전 지구를 아우르는 거대한 통신망.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기처럼 누리는 문명의 이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당연한 듯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켜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업무를 위해서.

또 누군가는 공부를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킬링타임용 오락거리를 위해서.

나름의 방법으로 어푸어푸 헤엄치는 광활한 정보의 태평양인 그곳.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실시간으로 거북목 꿈나무로 거듭나게 되는 공간.

그곳이 인터넷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지구 문명의 이기를 매우 그리워하는 한 남자가 이곳, 프론테라 저택 서재에 있었다.

"...그어어어어."

로이드는 책상 위에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철푸덕 턱을 괴었다.

그리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새 책을 펼쳤다.

이게 몇 권째의 책일까.

모르겠다.

일단 백 권은 넘은 게 확실한 듯한데.

'미치겠네, 이거.'

로이드는 고개를 푸럴러러 흔들어 쏟아지는 졸음을 털어냈다.

그리고 옆에 쌓아둔 산더미 같은 책을 돌아보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벌써 사흘째 날밤 새웠는데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네.'

어림잡아 앞으로 살펴볼 책이 50권은 되는 듯했다.

대부분이 운명에 관한 철학서, 혹은 마법에 관련된 저서였다.

개중에는 점성술이나 천문학, 정령, 신화, 각 지방의 민담에 관련된 책도 있었다.

즉, 로이드는 엔딩 스포일러로 본 미래의 단서가 될 법한 책을 모조리, 싸그리 다 골라내서 읽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이거, 대강 설렁설렁 살펴볼 수도 없고.'

사실이었다.

솔직한 마음이야 페이지를 술술술 넘기며 대강 훑어보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의 서책들은 현대 대한민국의 것들과 달랐다.

깔끔한 타이포 디자인, 문단과 페이지 구성의 배치, 그 밖의 배려 등등.

현대의 서적들은 그런 가독성을 갖추지 못하면 판매 경쟁에서 곧바로 밀리곤 했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자기계발서, 정보지 등도 모두 그러했다.

그렇기에 하나같이 읽기 편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데 여기 서재의 책들은?

가독성 그딴 거 없었다.

정교한 인쇄술도 없었다.

그저 필사한 사람의 날려 쓴 글씨체가 난무할 뿐이었다.

때로는 돋보기가 필요할 정도로 깨알 같은 글씨만 가득한 책도 있었다.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

게다가 하나같이 내용도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설렁설렁 넘기면서 읽다간 중요한 단서를 놓치기 딱 좋아 보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반강제적으로 이곳의 서적들을 정독에 가깝게 읽어야 했다.

실로 지치는 일이었다.

'인터넷. 인터넷이 필요해.'

대한민국에서 누리던 문명의 이기가 절로 그리워졌다.

만약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뒤바꾼 이곳 사람들의 운명.

그 운명이 힘을 발휘한 듯 연이어 터진 사고.

그런 현상을 검색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네이버 지식in' 같은 게시판에 물어볼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쪽이 지금 이렇게 사흘 내내 책에 파묻혀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겠지. 더 많은 정보나 단서를 얻었을 거야.'

 

탁.

 

로이드는 책을 덮었다.

고개를 드니 머리가 띵해졌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좀 아닌 거 같다.'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모두의 불행.

그 기이한 현상의 단서를 책에서 찾는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지구의 인터넷 검색을 떠올려 보니 그런 확신이 더욱 굳어갔다.

'단순히 노가다로 해결할 일이 아니야. 그랬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각이 보여.'

사흘 동안의 서적 자료 조사 노가다를 직접 해 보니 절로 그런 결론이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 책이 너무 많은 데다 어떤 책에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하나하나 노가다로 뒤적거려야 해. 그런데 그걸 일일이 다 읽으려니 검색 속도가 너무 느려.'

사흘 내내 서재에 처박혀 있었다.

아침에 용왕을 깨우는 시간만 제외하곤 거의 그랬다.

혹시나 해서 책을 대상으로 측량 스킬도 써 보았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측량 스킬로는 책 페이지의 종이 재질이나 두께, 면적만 스캔할 수 있었다.

그 위에 쓰인 글씨는 측량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사흘 내내 눈이 빠지도록 매달렸지만 고작 100권 남짓한 서적의 내용을 조사한 게 다였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이 짓을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까.'

매일을 이렇게 보낸다고 해도?

단순한 계산상으로 천 권을 조사하는 데에 30일.

만 권을 조사하는 데에는 무려 300일이 걸릴 것이다.

'그 정도면 왕도의 왕실 중앙 도서관에서 이쪽으로 관련된 자료를 다 뒤적인 거라고 봐야겠지.'

한데 과연.

300일의 시간을 들여서.

왕도의 왕실 중앙 도서관을 모조리 조사한들.

'그 속에서 내가 찾는 자료나 단서가 나올까?'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자료가 나오지 않으면?

천금 같은 300일의 시간을 날리게 되는 셈이다.

'게다가 만약에 정말로 다행스럽게 자료나 단서를 찾는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자료나 단서는 발견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닐 터다.

그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해야 한다.

분석으로 내린 결론이 과연 올바른가를 교차 검증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그 결론을 바탕으로 대응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문제야. 시간이 모자라.'

로이드는 엔딩 스포일러로 본 일기장을 떠올렸다.

그곳에 남겨진 불행의 기록들.

그중의 첫 번째 사건인 프론테라 백작의 낙마 사고는 고작 3년 뒤에 일어날 것이다.

'자료 찾고, 분석하고, 결론 내리고. 그러다 보면 3년 정도는 훌쩍 지나갈 거야. 그래선 안 돼. 대응법을 찾아낼 즘에 이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할 테니까. 너무 늦어.'

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나 계산해보니 답이 더욱 명확해졌다.

서적을 통한 자료 조사는 진심으로 노답이다.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할 것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이런 노가다성 자료 조사 말고. 아, 인터넷이 있으면 진짜 좋을 건데. 지식in처럼 질문 올리면 태양신들이 답해주고. 얼마나 좋아. 여기도 그런 태양신처럼 질문에 답 척척 주는 존재가 있... 었네?'

 

멈칫.

 

한숨을 푹 내쉬려던 로이드는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있었다.

심지어 매우 가까이 있었다!

'용왕!'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런 멍청한. 그걸 못 떠올리고 있었다니. 용왕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러고 보면 용왕 외에도 자신의 '지식in' 역할을 해줄 존재가 또 있기도 했다.

'만약 용왕이 만족스러운 단서를 알려주지 못한다면... 지옥왕한테라도 물어봐야지.'

다행히 지옥으로 갈 방법은 알고 있다.

북극 지방에 열어둔 헬게이트.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지옥으로 건너간 뒤에 곧장 지옥성으로 날아가면 될 것이다.

'물론 지옥왕에게 답을 들으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제시해야겠지만.'

어쩌면 어지간한 대가로는 답을 못 들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 우선은 용왕 베르키스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쪽에게 질문하는 건 공짜일 테니까.

'마침 조금 있으면 동틀 시간이기도 하고.'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잠깐 눈을 붙였다.

읽던 책을 베개 삼아 쉬었다.

곧 날이 밝았다.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별채의 손님용 숙소로 향했다.

용왕 베르키스를 평소처럼 깨웠다.

"저기, 용왕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흐음냐...."

"안 일어나시면 노래 부를 겁니다."

"어, 일어났다."

"감축드립니다. 칼기상에 성공하셨군요."

"...흐아암."

베르키스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꺼풀을 가까스로 반쯤 떴다.

자다 깬 얼굴로 허공에 마법 술식을 그렸다.

아내에게 통신 마법을 날려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전날과 똑같았다.

 

파츳!

 

"...하."

오늘도 역시나 수신을 거부당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삐침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꾸준히 통신을 시도하면 언젠가는 풀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키스는 다시 누웠다.

'어쨌건 오늘 숙제는 끝!'

그 생각에 신이 났다.

콩당콩당 설레는 마음으로 담요를 덮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너님, 왜 안 가냐?"

평소와 달리 로이드 프론테라, 저 인간 녀석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보통은 이쪽이 이렇게 잘 준비를 하면 내일 다시 오겠다며 살금살금 방을 나가곤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긴커녕 묘한 눈길로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너님, 뭐냐. 어째서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건데."

"저기, 제가 용왕님께 질문 한 가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

"잔다. 드르렁!"

"...."

말을 마치자마자 0.1 나노세컨드 만에 잠들어 버리는 용왕 베르키스.

로이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리 깨우려 해도 소용없었다.

대범하게 어깨를 콕콕 찔러보아도.

옆에서 미친놈처럼 춤을 추어도.

심지어 노래를 불러제껴도.

용왕 베르키스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당연하지. 여기서 답을 못 얻으면 또 지옥까지 가야 하니까.'

아무래도 지옥에 가는 건 찜찜했다.

특히 지옥왕이 공짜를 모르는 성격이기에 더욱 그랬다.

괜히 단서 하나를 얻자고 엄청난 대가를 값으로 지불해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가능하다면 용왕에게 도움을 받는 게 좋아.'

그날부터였다.

매일 아침, 로이드와 베르키스의 기 싸움이 벌어졌다.

"용왕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응, 내일 보자. 드르렁!"

"...."

상큼하게(?) 잠들어 버리는 용왕.

하지만 로이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 찾아올 때마다.

그래서 용왕을 깨울 때마다.

그는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댔다.

"용왕님! 모종의 이유로 바뀌어 버린 원래의 운명이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몰라. 내일 보자. 드르렁!"

"...."

여전히 질문이 씹혔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새 아침이 밝았다.

"용왕님! 제가 다른 차원에서 온 놈인데, 어쩌다 보니 이곳 세상의 운명을 바꿔 버렸습니다!"

"응, 그랬어?"

"예!"

"알았어. 내일 보자. 드르렁!"

"...."

 

또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용왕님! 원작 소설에서는 죽었는데 저 때문에 살아난 이곳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갈 불운한 사태가 생길 듯합니다!"

"그래, 너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드르렁!"

"...."

 

역시나 새 아침이 밝았다.

"용왕님! 지금까지 제가 드렸던 질문을 다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아니, 몰라. 내일 보자. 드르렁!"

"...."

 

지치지도 않고 행성이 한 바퀴 자전했다.

"용왕님! 이제 답 좀 주시죠!"

"싫어. 잘 거야. 내일 보자. 드르렁!"

"...."

 

대자연의 섭리가 또 아침을 불러왔다.

"용왕님! 오늘도 답 안 주시면 내일은 뽀뽀로 깨워드리겠습니다!"

"너님, 드디어 미쳤구나?"

"네, 미쳤습니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발 제 질문에 답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돼. 답해줄 생각 없어. 돌아가."

"하지만 이미 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로이드는 베르키스의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렁그렁한 눈매로 간절히 용왕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베르키스가 질겁했다.

'이거, 죽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 이거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살기를 거두었다.

대신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이는 건 안 돼. 이 녀석한테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까. 날 아침마다 깨워주는 대신에 이곳 영지에 머물러 주기로 했으니까. 그것도 일종의 약속이니까.'

하니 그 약속을 깰 수는 없다.

자신의 입으로 꺼낸 약속을 깬다면?

자칫 용언의 힘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죽일 수도 없고. 그냥 확 마법으로 입을 막아 버려? 아니야. 그럼 아침에 날 제대로 깨우질 못할 텐데. 쯧. 귀찮아.'

베르키스는 심각한 귀찮음을 느꼈다.

벌써 며칠째 괴상한 질문을 던져대는 로이드.

이렇게 성가실 수가 없었다.

한데 계속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이놈,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구장창 성가시게 굴 기세였다.

'그냥 아무 대답이나 대충 던져줘야겠다.'

그러면 저 녀석도 만족하고 질문 세례 퍼붓는 거, 그만두겠지.

차라리 그게 나을 듯했다.

결론을 내린 베르키스가 물었다.

"쯧. 그러니까 너님,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예, 맞습니다."

"이곳 세상이 너님네 차원에서는 소설 속이었다고?"

"예, 정말입니다."

"알겠어. 딱히 강조 안 해도 돼. 어차피 너님이 살던 차원도 다른 차원의 어느 창고에 보관된 하드디스크 한 쪼가리에 불과하니까."

"...예?"

"뭘 놀라고 그래. 차원끼리의 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어쨌건 지금까지 너님이 했던 질문을 종합하자면, 너님이 다른 차원에서 왔고, 이곳 차원의 원래 운명을 비틀어 버렸다고 했지. 맞나?"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 비틀린 운명에 의해 죽지 않게 된 사람들이 앞으로 줄줄이 죽어나가게 될 거다. 그 사태를 막고 싶다. 맞지?"

"예, 바로 그겁니다."

"그럼 간단하네."

베르키스가 피식 웃었다.

"혹시 너님, 운명의 복원 현상이라고 들어봤어?"

천하의 용왕마저 두 손 들게 만든 로이드의 집요함.

그 집요함이 마침내 인터넷 지식in 검색에 필적하는 성과를 끌어내고 있었다.

253화. 운명의 복원력 (1)

 

 

운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너무나 탄탄한 활시위처럼.

아무리 당겨서 변형시켜도.

늘어뜨리고 모양을 바꾸려 애를 써도.

시위를 잡은 손을 놓기만 하면 순식간에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게 바로 운명의 복원 현상이야. 그만큼 운명이라는 놈은 고집이 엄청나거든. 그래서 항상 막강한 복원력을 발휘하지."

"그런 겁니까."

"응."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모종의 이유로, 아주 가끔씩 너님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개입 때문에 운명의 방향이 통째로 바뀌는 경우가 있어. 운명의 복원력은 그럴 때 강력한 힘을 행사하지."

"바뀐 운명을 원래의 것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거군요."

"맞아. 원래 너님이 읽은 소설 속에서는 이곳의 백작, 아니, 남작부부가 빚에 쪼들리다가 목을 매고 죽었다고 그랬나?"

"...예."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부모님이 겪었던.

원치 않았지만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던.

그 비통했던 상황과 너무나 닮은 남작부부의 죽음.

로이드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베르키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걸 기껏 살려놨더니 결국엔 낙마해서 목이 부러지고. 부인은 그 슬픔에 빠져 자살하고. 그게 운명의 복원 현상인 거야. 그건 쉽게 못 막아. 아니,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해."

"백작님이 겪을 낙마 사고를 막아도 말입니까?"

"응. 낙마 사고를 막아봤자 다음 날 목욕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통에 목이 부러진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걸."

"...."

"그런 식인 거야. 운명의 복원력은. 어떻게 기를 쓰고 막아도 끝끝내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거."

"그럼 어떻게 해야 그걸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몰라."

"예?"

"못 들었어? 모른다고."

"헐."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냐. 내가 신이야?"

"하지만...."

"너님, 답도 모르면서 운명의 복원력이니 뭐니 하는 얘긴 왜 꺼냈냐고 따지고 싶은 거지?"

"예."

"쯧, 부정하지도 않네."

"솔직한 심정이니까요."

"뭐, 그래도 아주 답이 없는 건 아니고."

"형님, 전부터 진심으로 존경해 왔습니다."

"...."

"진짭니다."

"어휴. 뭐 어쨌건,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줄 답은 모르지만, 그 답을 찾을 실마리 정도는 있을지도 몰라. 혹시 너님, 인어 왕국에 전해지는 진실의 보옥이라고 들어봤어?"

"못 들어봤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진실의 보옥이라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베르키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건 나도 아주 예전에 알고 지냈던 인어한테서 들은 거야. 인어 왕국엔 진실의 보옥이라는 물건이 있다더라."

"설마, 진실을 밝혀주는 뭐 그런 겁니까?"

"어. 비슷해. 딱 하나의 질문에 한해서 말이지."

"하나의 질문이요?"

"그래. 하나."

베르키스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어떤 질문에도 진실이 담긴 답을 알려준다고 하더라고. 대신에 조건이 있어. 방금 말한 것처럼 딱 한 가지 질문,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답만 알려준다고 하던데."

"그럼...."

로이드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을 파파팍.

"제 주위에 일어나는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방법을 알려주세요, 라는 질문 정도면 충분히 구체적인 걸까요?"

"아마도? 그건 인어 왕국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겠지."

"예, 그럼 인어 왕국은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로이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됐다.

실마리를 찾았다.

정말로 막막해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해서 콕콕 찔러본 용왕에게서 영양가 높은 실마리를 얻어냈다!

'인어 왕국 진실의 보옥. 그걸 찾으러 인어 왕국에 가면 된다는 거지?'

희망이 엿보였다.

생각보다 손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장밋빛 청사진도 그려졌다.

한데 그 청사진은 베르키스의 무성의한 대답 한 방에 와자작, 구겨지고 말았다.

"몰라."

"예?"

"모른다고. 인어 왕국 어디 달렸는지."

"아니, 아까는 알고 지낸 인어가 있었다고 말씀하셨...."

"걔 늙어 죽었는데."

"...."

"호우호라였나. 걔가 인어 왕국 전전대 여왕이었거든. 근데 늙어서 죽었어."

"저기, 그래도 그분 돌아가시기 전까진 교류를 하셨을 거 아닙니까?"

"했지. 주로 내가 부려먹었지만."

"...."

"나중에 왕위 얻더니 왕국 주소부터 싹 옮기고 안 알려주더라?"

"...."

용왕이시여.

당신은 대체 어떤 대인관계를 꾸려오신 겁니까, 이 잠탱아.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싶었다.

하지만 더 매달릴 수가 없었다.

모른다는데 어쩌겠는가.

'이쯤에서 물러나자.'

여기서 더 매달리는 건?

선을 넘게 되는 행위가 되리라.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용왕의 눈가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그래. 알아낼 건 충분히 알아냈어. 괜히 더 매달리면서 귀찮게 하고 선 넘으면 손해야.'

사람이란 적당히 얻었을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타이밍임을 로이드는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 서비스 정신 가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예. 어쨌건 덕분에 잘 알았습니다. 용왕님, 아니, 형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님?"

"어이쿠, 저도 모르게 또 본심을...."

"본심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그럼 너님 이제 인어 왕국 찾으러 가겠네?"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내 모닝콜은?"

"수하한테 잘 일러두겠습니다."

"정말로? 너님 말고도 날 빠릿하게 깨워줄 인재가 있는 거야?"

"예. 말을 못해서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 있긴 합니다."

로이드가 빙글 웃었다.

그런 그의 뇌리에는 골병대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뭐, 거북목이랑 사각턱이랑 오십견. 걔네가 아침마다 여기 찾아와서 탭댄스에 훌라춤 추면 깨기 싫어도 자동으로 눈이 번쩍 뜨일걸.'

뼈마디 소리가 온통 삐그덕삐그덕, 달각달각.

그렇게 숨 가쁜, 아니, 뼈 가쁜 댄스 타임을 겪고 나면 제아무리 용왕이라도 깨지 않을 수 없을 터다.

덕분에 로이드는 베르키스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아침마다 확실하게 깨워드릴 수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시죠."

"뭐, 그렇다면야."

벌러덩 드러눕는 베르키스.

그런 용왕의 입가에도 어느새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아. 드디어 털어냈다. 귀찮은 녀석 같으니라고.'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이 떠올랐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놈.

아니, 다른 차원에서 온 김수호라는 녀석.

자신이 처한 문제를 도와달라고 어찌나 귀찮게 매달리던지.

그 서슬에 매일 아침 아내에게 모닝콜 숙제를 하고도 몇 분씩이나 뒤척여야 했다. 곧바로 잠들지 못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였다.

그가 인어 왕국 진실의 보옥을 로이드에게 알려준 것은.

'뭐, 운 좋으면 찾을 수 있겠지. 적어도 그때까진 귀찮게 매달리진 않을 거고.'

문득, 수백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인어 호우호라가 그랬던가.

자신들 인어 왕국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고.

'그게 진실의 보옥에 관한 이야기였지. 그런데 너무 오래전인 신화시대에 딱 한 번 등장한 물건이라서 그게 진짜로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저 전설이나 전승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한다고.'

그렇게 지나가듯.

마치 실없는 농담처럼.

잠깐 언급했던 것이 진실의 보옥이었다.

즉, 진실의 보옥이라는 보물은 인어 왕국에서도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이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아마도 단군 신화에서 마늘과 쑥 먹고 사람이 된 웅녀 전설쯤 되지 않을까.

'그러니 그 보옥, 진짜로 찾으려면 엄청 애먹을 거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제법 오래 걸리겠지.'

베르키스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보옥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그 기간만큼 저놈이 귀찮게 매달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자신의 아내를 향한 모닝콜 숙제 기간도 끝나지 않을까.

'그럼 그대로 마룡굴로 돌아가는 거지. 저놈 다시 볼 일도 없고. 저놈 징징거림에 시달릴 일도 없고. 완벽해.'

생각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담요 속의 발가락이 행복하게 꼼지락거려질 정도였다.

그렇듯 속내를 감춘 베르키스.

나름 실마리를 찾았음에 만족한 로이드.

용왕과 인간의 살가운 미소가 허공에서 얽혔다.

'어휴, 귀찮은 녀석.'

'아휴, 잠탱이 녀석.'

그렇게 미소 속의 딜교환(?)을 마친 로이드가 물러났다.

용왕의 코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서재로 돌아왔다.

인어 왕국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건 며칠 전에 여기서 봤어.'

서재로 돌아온 로이드는 신화와 전설이 담긴 책자를 집어들었다.

며칠 전, 서재에서 날밤을 지새울 때 조사했던 서적 중의 하나였다.

'그때 인어 왕국 언급이 이쯤에 있었는데. 인어... 인어 왕국... 좋아. 여기 있다.'

다행히 그 대목을 금방 찾아냈다.

 

[인어들은 가장 깊고 험한 바다까지 잠수할 수 있으며, 그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그 누구도 쉽사리 찾아갈 수 없을 곳에 왕국을 숨겨 두곤 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그들의 왕국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 실마리는 오직 가장 험악한 바다를 항해하는 가장 노련한 몇몇의 선원들만이 경험담을 통하여 쥐고 있을 뿐이리라....]

 

'흐음.'

로이드는 턱을 괴었다.

'가장 험악한 바다라.'

머릿속 정보를 쇽쇽 끄집어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 나왔던 수많은 장소들.

그중에서도 바다에 관련된 언급이나 설정들.

그것들을 이리저리 맞추어 보고, 조립해 보고, 비교해 보았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북해 쪽에 있겠구만.'

로이드는 확신했다.

일단 남쪽 바다는 아니다.

로라시아 대륙 남쪽에 제법 큰 바다가 있기는 한데, 그곳의 극지방은 지구의 남극처럼 커다란 대륙이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북쪽은?

'로라시아 대륙에서 제일 험악하다는 북극해가 펼쳐져 있지.'

가장 모질고 거친 바다.

10미터가 넘는 파도가 수시로 몰아친다고 했다.

그 무시무시한 해류 속에 빙산이 떠다닌다고 했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겐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해역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험한 바다를 일부러 항해하는 변태 같은 선원들이 몇몇 있다고 했어.'

바로 황제고래를 사냥하는 포경선 선원들이었다.

한 마리만 잡아도 선원의 평생 자랑거리가 된다는 황제고래.

그 일확천금을 노리는 바다의 사냥꾼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북극해 황제고래 포경선의 모항은 다행히 내겐 친숙한 곳이지.'

친숙하다 못해 우호적인 곳.

기가티탄을 잡는 쾌거를 이루었던 바로 그곳.

크레모 항구였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크레모 항으로 떠나기 위한 여정을 서둘렀다.

준비는 간단했다.

꼬밍이를 타며 날아갈 동안에 먹을 사흘 치의 식량.

그리고 노숙을 위한 텐트와 침낭 등의 장비를 챙기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그 외에 백작부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긴 했다.

"그러니까, 크레모 항에 다녀오겠다고?"

"예."

 

딸그락.

 

모처럼 백작부부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그 자리에서 로이드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물론 솔직하게 모든 걸 밝힌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구상 중인 새로운 사업이 있노라고.

그래서 현지 조사 차원에서 크레모 항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만 대강 둘러대었다.

프론테라 백작이 조금은 염려스러운 듯 물어왔다.

"그런데 괜찮겠니?"

"예?"

"앞서 왕도에 다녀오고선 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당분간은 집에서 푹 쉬겠노라 하지 않았더냐?"

"예, 그랬었지요."

"그래서 이 아비는 걱정이로구나."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이 아비가 너의 부지런함은 잘 알고 있다만, 모처럼 쉬겠다던 녀석이 갑자기 새로운 사업이라니. 혹시 아비에게 말 못 할 일이라도 생긴 것이더냐?"

"아, 그건 아닙니다."

"그래?"

"예."

로이드는 짐짓 웃으며 쿡,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백작부부의 걱정.

그 염려하는 마음을 덜어주질 못했다는 게 느껴졌다.

'하긴. 나라도 그냥 새 사업을 하겠다는 말은 안 믿겠지. 분명 뭔가 밝히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 급하게 움직이는 티가 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가롭게 보내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이제 백작이 낙마 사고를 당하기까진 3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 안에 용왕이 말한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방법을 찾고 실행해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걱정되시겠지만, 조금만 믿어 주세요.'

이쪽의 둘러대는 말을 믿어 주는 척하는 백작부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이쪽을 염려하는 기색인 백작부부.

그런 백작부부를 로이드는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꼭 지켜 드리고 싶은 분들이었다.

그저 이곳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워서?

혹은 자신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 무사히 남아 주어야 할 사람들이라서?

아니었다.

예전엔 그런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지옥에서 망나니 로이드를 환생시킨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제겐 알려드려야 할 진실이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솔직하게 진실을 알려드리리라.

그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리라.

설령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지금껏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 준 저분들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거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해 드리기 위해 자신도 최선을 다 하자고 생각했다.

'그런 불행, 두 번은 겪기 싫으니까.'

문득, 대한민국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너무 아파서 잊을 수가 없는 그런 기억.

그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뵈어야 했던, 보내드려야 했던 날의 기억이었다.

'여기서도 그런 일, 겪기 싫어.'

대한민국에서는, 그 당시에는.

순진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별다른 갖춘 것도 없어서.

지켜드리지 못한 당신들이셨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할 수 있어.'

지킬 수 있다.

지키고 싶다.

두 번 다시는 그날의 설움과 후회 같은 건 곱씹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열심히 할게요."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백작부부를 향한 로이드의 미소 속에 굳은 다짐이 배어났다.

254화. 운명의 복원력 (2)

 

 

쏴아아아, 철썩!

 

봄날의 햇볕 아래 부서지는 파도.

파도를 가르며 입항하는 화물선.

화물선에 오르내리는 선원들.

오랜만에 찾아온 크레모 항구는 여전히 떠들썩한 모습이었다.

예전에 왔던 때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남모를 감정을 느꼈다.

"후우."

이토록 활기찬 항구의 모습.

자신이 기가티탄을 물리친 덕분이다.

그 커다란 괴수가 사라짐으로써 마침내 항구의 잠재적 위협이 사라졌다.

덕분에 발길이 끊겼던 각국의 상선들이 다시금 이 항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토록 활기찬 항구가 되었다.

그걸 생각하며 로이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보람이 느껴져서?

아니었다.

'...아! 그때 사례금을 더 받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떠올리는 어리석은 후회.

이제야 되새기는 미련과 회한!

몇 년 전, 기가티탄을 없앴던 당시를 떠올리자니 후회의 감정이 깊고 진한 에스프레소 사골육수처럼 쑴펑쑴펑 솟구쳤다.

'기가티탄 잡아 주면 이 항구가 더욱 발전할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멍청했어. 내가 너무 안일했어. 그때 눈 딱 감고 사례금 훨씬 많이 불렀어야 했어. 그게 아니라도 항구 이용 관세에 약간의 지분이라도 달라고 떼를 썼어야 했어.'

만일 그랬다면?

정말로 얼굴에 티타늄 철판 딱 깔고 그렇게 했다면?

일찌감치 돈방석에 앉았을 것 같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항구 교역량.

그 관세의 1퍼센트만 받아먹었어도?

국왕한테 지원금 보내 달라고 떼를 쓸 일도 없었을 것 같았다.

나마란에 가서 돈 벌려고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듯했다.

'훨씬 편하게 탱자탱자 놀 수 있었던 건데. 쓰읍!'

로이드는 장마철 반지하 원룸 벽지마냥 습기가 차오르는 눈시울을 원통하게 닦아냈다.

화사한 햇볕 아래 활기찬 크레모 항구의 모습.

그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자니 절로 아랫배가 살살 아파졌다.

자연 그의 걸음도 빨라졌다.

"...쳇. 빨리 가서 볼일이나 보자."

"크레모 백작을 접견하시려는 겁니까."

"어, 당연하지."

뒤를 따르는 하비엘의 물음.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어딜 가든 그곳의 실세에게 가장 먼저 인사할 것. 기본이잖아?"

"권력자들 곁에 붙은 아첨꾼 같은 처세로군요."

"어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이라고 해 주면 안 돼?"

"전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와. 좋겠다. 부러워라."

"예, 인정합니다. 이게 모두 주군의 배려 덕분이지요. 편하게 검술만 닦으며 자랄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당신은?

다른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하비엘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심 떠올렸다.

프론테라 영지를 출발하기 직전의 며칠.

그동안 그는 매일 아침 듣고야 말았더랬다.

들을 생각이 딱히 없었음에도 들려왔더랬다.

'용왕 베르키스. 매일 아침마다 그를 깨운 후에 로이드 님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

바뀐 운명이 다시 되돌아올 수 있냐느니.

이곳이 사실은 소설 속에 존재하는 세계라느니.

그래서 자신이 살려낸 백작부부와 줄리앙 등이 잇달아 사고를 겪고 죽게 될 거라느니.

처음엔 그저 꾸며낸 소리인 줄 알았다.

뭔가 또 이유가 있어서, 용왕을 성가시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이상한 소리들을 하는 줄 알았다.

한데 매일 듣다 보니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헛소리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앞뒤가 잘 맞았어.'

게다가 저 로이드는 진짜 로이드 프론테라가 아니다.

정말로 다른 세상에서 온 김수호라는 자가 본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헛소리라 여겼던 말들이 또 다르게 들렸다.

특히, 주군인 프론테라 백작과 부인에게 변고가 생길 거라는 말이 제일 심각하게 느껴졌다.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곳 세상이 다른 차원에서는 소설 속 이야기라는 것도.

그 이야기 속에서 프론테라 남작 가문이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것도.

저 가짜 로이드가 그 비극을 막아냈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한데 그 불행이 돌아오게 될 거라고 했지. 그걸 막아야 한다고... 방법을 알려달라고 용왕에게 매달렸어.'

앞서 걸어가는 로이드.

그의 뒷모습을 향한 하비엘의 눈길이 깊어졌다.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던 건지도.'

진짜 로이드 프론테라가 있음을 알았음에도.

저 사람이 가짜였다는 진실을 알았음에도.

지켜보자는 선택을 했던 자신이었다.

때문에 번뇌하기도 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저 가짜 로이드를 지켜보고, 지켜주자고 했던 결정과 다짐.

그게 틀리지 않았던 듯했다.

'그래서입니다. 크레모로 오겠다는 당신을 군말 없이 따라나선 것도. 당신을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있는 것 또한.'

저 가짜를 지키리라.

저 가짜의 뜻을 받들리라.

그리하여 프론테라 가문의 비극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위험도 모두 감수하고 짊어지리라.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이틀 전 프론테라 영지를 출발하던 때부터 품은 생각처럼.

함께 꼬밍이를 타고 날아오는 내내 되새겼던 각오처럼.

은발의 기사는 굳게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크레모 백작의 저택에 도착하게 되었다.

"후아. 여기도 오랜만이네."

로이드는 감회가 새로운 기분으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 여기 처음 찾아왔던 때에는 가문의 빚도 다 갚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물론 지금도 사정이 만만치는 않지만.'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빚더미에 깔린 것보다 더 큰 위기다.

이대로 3년만 지나면 프론테라 백작을 시작으로 가족들과 주위의 모두가 차례차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판국이다.

그러니 반드시, 여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로이드는 각오를 다지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경비에게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혔다.

다행히 그 뒤의 기다림은 거의 없었다.

방문 소식을 들은 크레모 백작이 만사를 제치고 마중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오, 자네 이게 얼마 만인가. 우리 크레모의 영웅. 크레모나 지방의 자랑. 우리 로이드 프론테라 군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아하하."

"음? 어째서 그렇게 웃나?"

"아닙니다. 오랜만에 뵙는 백작님 신수가 더욱 훤해지신 듯해서 말이죠."

"이게 다 자네 덕이지. 기가티탄 그놈 그거, 사라지니까 항구에 상선이 싹 몰려들고 말이야. 제대로 숨통이 트였지 뭔가, 핫하하!"

 

팡팡!

 

크레모 백작의 솥뚜껑, 혹은 불곰 앞발 같은 손이 이쪽의 등을 팡팡 두드려 왔다.

'대접이 전이랑 딴판이네.'

로이드는 내심 쓴웃음을 머금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때엔 온갖 잔머리를 다 굴려야 했는데.

그래서 겨우 공사를 따낼 수 있었는데.

한데 이젠 달라졌다.

기가티탄을 잡은 공적.

그때의 업적 하나로 지금까지 크레모에서 영웅으로 불리게 된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건부터.'

로이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저 대접이나 받으려고, 어깨나 으쓱이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그는 다탁을 사이에 두고 백작과 마주앉자마자 자신의 방문 목적을 이야기했다.

"저, 오늘은 제가 백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뭔가."

"혹시 이곳 항구에서 가장 노련한 포경선 선원을 알아봐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포경선? 혹시 북극해 황제고래 포경선을 말하는 건가?"

"예. 바로 그겁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의 항해 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선원.

그런 선원들만이 인어 왕국에 대한 실마리를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로이드는 그렇게 기대했고, 백작은 그 기대에 선뜻 부응해주었다.

"그런 선원들이라면 몇몇 알고 있지. 마침 지금 입항해서 항구에 머무르고 있는 자도 있을 테고. 혹시 그들에게 용건이 있는 건가?"

"예.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보고 싶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좋아. 내 자리를 마련해주도록 하지. 그런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백작.

그런 백작이 이쪽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우리 크레모의 영웅. 크레모나 지방의 자랑. 우리 로이드 프론테라 군은 이제 몇 살이 되었더라?"

"...예? 제 나이 말입니까?"

"가정을 이룰 때가 훨씬 지났을 듯한데. 자네, 급하지 않나?"

"안 급합니다."

"진짜로?"

"예. 진짜로."

"전혀?"

"예. 전혀."

"쯧. 여지를 주질 않는구만."

"죄송합니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여전히 이쪽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크레모 백작.

아마 왕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비슷한 상태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이들의 구혼에 응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냥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고 싶거든요.'

얼굴도 모르고 애정도 없는 사람과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짝이 되는 건 싫었다.

그렇기에 귀족가 영애들보단 평범한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어쨌건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금은.'

나름의 탈압박에 성공한 로이드는 곧바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다음날 곧바로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테랑 선원과의 소개팅(?)이 곧바로 성사되었다.

"내 소개함세. 이쪽은 펠리페. 내가 아는 가장 노련한 뱃사람이자 북극해에서 가장 빠른 황제고래 포경선인 펠리코니아 호를 23년째 책임지고 있는 베테랑 선장이기도 하지."

"반갑소. 펠리페외다."

크레모 백작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펠리페 선장이 손을 내밀어 왔다.

"반갑습니다.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악수를 하며 맞잡는 손이 두껍게 느껴졌다.

굳은살 가득하고 거친 손이었다.

그 다부진 악수 한 번으로 펠리페가 얼마나 많은 풍랑을 극복한 선장인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베테랑을 데려오셨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느라 늘상 찡그렸을 눈매.

그 눈매에 자연스럽게 잡힌 잔주름들마저 지극히 노련해 보이는 사내였다.

로이드는 한층 신뢰감을 느끼며 용건을 꺼냈다.

"우선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 펠리페 선장님 같은 분이 필요했거든요."

"내게 말이오? 무엇이 궁금한 건지."

"혹시 선장님께서는 인어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인어?"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선장님께 질문하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아는 정도만큼은 압니다. 인어들은 바다 최강의 존재죠. 엄청난 근력과 수영 실력으로 세상의 모든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그들의 군단은 기가티탄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걸 말입니다."

"흐음. 그만하면 진짜로 알 만큼은 아는 건데. 대체 그들에 대해 뭐가 더 궁금하단 거요?"

"인어 왕국의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인어 왕국?"

"예."

"그건 왜 알고 싶은 거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니까, 인어 왕국에 찾아갈 용건이 있으시다?"

"예. 그곳이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모르오. 대신 그곳을 찾아낼 방법은 대강 알고 있지."

펠리페 선장이 눈가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대꾸했다.

로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알려줄 수 있으십니까?"

"뭐, 어려울 것도 없소."

펠리페 선장이 말했다.

"북극해로 가면 되오. 가장 차가운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곳. 거대한 빙산이 끝도 없이 떠다니며 범선을 위협하는 해역. 그곳 깊은 바닷속에 그들의 왕국이 있으니까."

"오옷."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드디어 알아냈다.

저런 베테랑이 하는 말이라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본드래곤 용용이를 부르고 잠수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서 북극해 속으로 다이빙을....

그때였다.

마치 찬물을 촥 뿌리는 듯한 펠리페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거긴 위치만 안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외다. 그냥 안다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거긴."

"혹시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그런 겁니까?"

그냥 깊은 바다가 아니라 완전 깊은 심해라면?

그러면 문제가 조금 어려워질 것이다.

튼튼한 용용이는 몰라도 자신은 심해의 수압을 못 버틸 테니까.

아스라한 심법이나 마나하트를 동원해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음, 그럼 거금을 들여서라도 마법적인 준비를 갖춰야 하는 건가.'

로이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펠리페 선장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깊은 곳이라....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외다. 이건 허락의 문제요."

"허락이라니요?"

"그렇게 들었소. 내가 아직 햇병아리이던 시절에 고참 선원들에게 말이오. 그들이 알려주더군. 행여나 바다에서 인어와 마주친다면, 그 해역을 통과하기 위해 무조건 허락을 구해라. 바다는 곧 그들의 집이니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그건 인어들의 왕국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고 말이오."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이런 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오. 하지만 나는 확신을 담아서 말할 수 있소. 인어들의 왕국의 찾아가려면 그들의 허락과 인정이 필요할 거라고 말이오."

"음, 실례지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근거가 있는 겁니까?"

"물론이오. 내가 가봤거든."

"설마, 인어 왕국에 말입니까?"

"그렇소. 딱 한 번. 아주 잠깐이었소. 스무 살이 되기도 전이었으니까, 아마 31년쯤 됐을 거요. 그날도 난 뱃전에 잔뜩 달라붙은 얼음을 깨서 떼어내고 있었지. 그러다 그만 미끄러졌소. 바다에 빠졌고, 금방 극심한 한기를 느꼈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소리를 질렀지. 그런데 바람과 눈보라가 너무 심하게 몰아치더란 말이오. 덕분에 내가 타던 포경선 갑판에선 아무도 내 목소릴 듣지 못했지. 결국엔? 내가 바다에 빠진 줄도 모르고 배가 떠나가 버렸소. 그렇게 얼어 죽는 건가 싶었지. 두려웠고 절망적이었소. 그런데 그때였소. 처음 보는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났던 건 말이오."

"인어였군요."

"맞소. 우람하더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군. 침입자인지 아닌지를 헷갈려하는 것 같았소. 무서웠지. 내가 침입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어야겠다고 절실히 생각했소. 그래서 행동했지. 덕분에 성공했고, 그 인어에게 허락을 받아 잠시나마 인어 왕국에 함께 내려갈 수 있었소.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무사히 뭍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고 말이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니 내가 여태 살아서 여기 있는 것 아니겠소?"

"과연."

로이드는 감탄했다.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베테랑이라더니 과연,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됐어.'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용왕 베르키스가 말한 진실의 보옥.

인어들 사이에 전해온다는 전설급 아티펙트.

그 보옥의 도움을 받으면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 엿 같은 현상을 막을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인어 왕국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으려 한 건데.

'대박이야.'

실제로 인어 왕국에 다녀온 산증인을 한 큐에 찾아냈다.

이건 실마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어 왕국행 관광 가이드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럼...."

로이드는 설레는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선장님께선 바다에 빠져서 인어와 마주쳤을 때, 그 인어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셨던 겁니까?"

"인어의 인정을 받은 비결 말이오?"

"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알아낸다.

인어 왕국에 갈 수 있다!

그렇듯 희망의 불꽃이 로이드의 가슴속 찬란히 피어나는 순간.

펠리페 선장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었소."

...x발, 뭐라구요?

255화. 노래에 진심을 담아서 (1)

 

 

'...저기 x발, 뭐라구요?'

로이드는 원래 욕을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험악한 일 더러운 일을 겪어도 혼자 투덜거렸으면 투덜거렸지, 육두문자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냥, 그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은 예외였다.

펠리페 선장이 너무나 진지하고 훈훈하게 대답을 꺼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울컥 욕을 할 뻔했다.

하마터면 선장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짤 흔들어댈 뻔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래? 노래라고? 아름다운 노래애?'

아마도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특성이 있다면 그건 아름다운 노래가 아닐까.

로이드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볼 줄 알았다.

당연히 자신의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노래 같은 분야가 특히 그랬다.

그는 자신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어제 입학한 공대생이 강의실에서 뚝딱 반도체를 만드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뭐? 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야 할 테니까.

그러려면 용왕의 조언대로 인어 왕국에 있다는 보옥을 찾아야 하니까.

"저기, 그런데 꼭 노래여야 하는 겁니까?"

"음?"

고개를 갸웃거리는 펠리페 선장.

로이드는 그런 선장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마치 물에 떠내려가다가 지푸라기를 움켜쥐듯.

혹은 급하게 잡힌 소개팅을 앞두고 신발장 속 키높이 깔창을 탐색하듯.

나름의 희망을 걸고서 물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꼭 노래일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적이 아니라는 거, 침입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증명만 하면 되는 거니까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춤이라든가. 혹은 휘파람이라든가."

"흠, 모르겠소. 다른 방법은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당시의 난 물에 빠져 있던 터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고 말이오. 게다가 춤이나 휘파람이라니. 굳이 왜 그런 방법을 써야 하는 거요? 이미 날 통해서 검증된, 노래라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

그 확실한 방법.

저는 확실하게 못 쓸 것 같아서 이러는 거란 말입니다.

로이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그가 물었다.

"저, 그럼, 아무나 노래를 하면 되는 겁니까?"

"아무나라니? 무슨 뜻이오, 그 말씀은?"

"그러니까, 음, 저 말고 이 친구가 노래를 하는 것도 유효한 건지를 묻는 겁니다."

로이드가 손을 뻗었다.

옆에 있던 하비엘을 가리켰다.

선장의 눈길이 하비엘을 쓱 쳐다보았다가 다시 이쪽으로 스륵 돌아왔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고 보오."

"어째서요?"

"내가 직접 들었거든. 날 구해줬던 인어에게."

"그 인어가 뭐라고 했길래 말입니까?"

"자신들은 절박한 이가 직접 노래하는 소리에만 응답한다고 했지. 그러니 아마도 용건이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이가 대신 불러주는 노래는 인어들을 설득할 수 없을 거외다."

"그럼, 무조건 제가 직접 노래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보오."

"...."

"왜 그러오? 무슨 문제라도 있소?"

"...."

예. 문제야 아주 많죠.

로이드는 선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한 자의 미소였다.

선장의 물음에 대한 답은 하비엘이 대신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로이드 님은 노래를 잘 못하십니다."

"노래를 못한다고?"

"예."

"얼마나 못하길래?"

"혹시 교역도시 나마란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으신지요."

"아, 들어본 적 있소. 헬나이트가 난동을 부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예. 그 헬나이트가 듣고 괴로워 몸부림을 쳤습니다."

"몸부림을? 어째서?"

"...."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크흠, 흠! 지옥에서 불려 온 헬나이트가 괴로워할 정도로 노래를 못하는 거였소?"

"대략 못으로 철판 긁는 소리가 훨씬 아름다울 겁니다. 혹은 선장님 창자 속에 살고 있을 기생충의 노래 솜씨가 더 좋을 거라고 보셔도 무방할 듯하고 말입니다."

"후, 그랬구려."

...그만해, 미친 자들아.

여기 당사자가 옆에서 듣고 있잖아.

'후아.'

로이드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눈꼬리에 살포시 맺히려는 눈물방울을 털어냈다.

그때였다.

선장이 이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세상 인자하고 호쾌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소. 그까짓 노래, 조금 못해도 상관없소."

"예?"

"생각해보니 내가 말한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내가 말한 아름다운 노래라는 건 겉으로 느껴지는 기교나 목소리의 청아함 같은 게 아니었소."

"그럼 뭘 말씀하신 겁니까?"

"진심과 정성이오."

선장이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사실 북극해에 빠졌던 당시의 나도 노래를 잘한 게 아니었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생각해 보시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였소. 돌아와 달라고, 내가 여기 빠졌다고, 멀어지는 배를 향해 외치다가 목까지 쉬어 버린 상태였지. 그랬던 내 노래가 어땠을 거 같소?"

"음,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었겠군요."

"맞소. 최악이었지."

선장이 피식 웃었다.

"제정신으로는 들어주기도 어려울 끔찍한 노래였소. 음정도 제멋대로에, 목소리는 쉰 데다 호흡마저 형편없이 덜덜 떨려대서 말이오. 사실 나도 눈앞의 인어가 그 노래를 좋게 봐줄 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지. 그저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부른 노래였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그 인어가 당시 선장님의 노래를 좋게 들어준 거였습니까?"

"그랬소."

선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군. 그때 느꼈소. 귀 기울여 들어주고 있구나. 적이 아니라고, 침입한 게 아니라고, 그걸 알아달라고, 그렇게 호소하는 내 진심을 조금씩 느껴주고 있구나, 라고 말이오."

"진심과 정성이 통한 거였군요."

"바로 그거외다."

이쪽의 어깨를 짚은 선장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노래를 듣기 좋게 못 한다고 해서 주눅들 것 없소. 그런 건 겉으로 느껴지는 기교에 불과한 거요. 이번 일에 중요한 건 노래에 담긴 진심과 정성일 테니 말이오."

"그럼, 제 노래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경험자로서 말해주자면, 그렇소."

"고맙습니다."

비로소 로이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경험자인 선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맞아. 내가 성급하게 생각했던 거야. 인어잖아.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 노래를 듣는 관점이 사람과 충분히 다를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지레 걱정하지 말자. 내 진심을 보여주면 될 테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의 노래에 대해 그런 감정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용기를 얻은 로이드는 선장을 향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기, 그럼 선장님?"

"음, 또 궁금한 게 있소?"

"예. 혹시 당분간 항해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 배의 항해 일정 말이오?"

"예. 말이 나온 김에 북해에 가서 인어들과 접촉해 볼까 합니다만, 가능하다면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선장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말입니다."

로이드는 솔직하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어차피 인어 왕국을 찾아야 할 터였다.

그래서 북극해에 가야 할 터였다.

하니 기왕 가는 거, 가장 노련한 선장의 배를 타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뭐, 가장 편하게 가자면 꼬밍이를 타도 될 거고, 아니면 본드래곤인 용용이를 타고 날아가도 되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꼬밍이는 뱁새였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장거리 비행에 적합하지 않았다.

날아가다가 지치고 페이스가 떨어진다 싶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착륙해서 잠깐이나마 쉬게 해 줘야 했다.

한데 북극해로 날아갈 때는?

그게 불가능할 터였다.

'너무 추워. 게다가 망망대해야. 육지가 없어. 곳곳에 빙산이 있다지만, 거기 착륙해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순 없을 거야.'

그렇다고 본드래곤인 용용이를 타고 날아가기에도 좀 그랬다.

'꼬밍이처럼 지치진 않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크고 위협적이야. 그 존재만으로도 인어들이 큰 위협을 느끼게 될걸.'

분위기가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나가리가 될 것이다.

정성과 진심으로 인어들을 회유해야 할 텐데.

시작부터 침입자로 찍히게 될 것이다.

로이드는 그런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삯은 두둑하게 드리겠습니다. 배 한 번 띄워 주시면 안 될까요?"

"흐음, 그 말씀은 전세를 내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북극해까지 다녀오는 여정이라. 쯧. 지금이 황제고래를 잡지 않는 비수기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요?"

"그래서 더 간곡히 요청하는 겁니다."

"흠, 쉬고 있을 선원들도 다시 불러들여야 할 거고, 유빙이 평소보다 더 많을 거라서 훨씬 위험할 테니 수당도 최소 두 배는 주셔야 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돈은 많습니다."

"정말이오?"

"예, 우선 이건 계약 착수금으로."

 

털그럭, 삐걱!

 

로이드는 미리 준비한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테이블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렸다.

선장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

"주머니 안쪽, 살펴보셔도 괜찮습니다."

"...크흠흠!"

선장이 주머니 속을 슬쩍 살폈다.

로이드가 일찌감치 마룡굴에서 챙겨온 금화와 보석들이 샤라방 빛나며 선장의 눈길을 맞이했다.

온갖 풍파로 깊어진 선장의 눈가 주름이 꿈틀거렸다.

"계약 착수금이 이만큼인 거면 전체 금액은...."

"거기 담긴 것의 다섯 배를 드리지요."

"오늘 출항하면 되는 거요?"

"감사합니다."

역시나 돈의 힘은 위대했다.

더 복잡한 이야기는 필요도 없었다.

빛의 속도로 출항 준비가 이루어졌다.

선장은 휴가를 즐기던 선원들을 하루 만에 다 불러 모았다.

처음엔 투덜거리던 선원들도 선장이 제시하는 엄청난 수당에 앞다투어 배에 올랐다.

식량과 식수 등의 물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엔 크레모 백작의 도움이 컸다.

여전히 로이드를 사위로 원하는 크레모 백작이었다.

이참에 신세를 입히자는 생각인지 적극적으로 펠리코니아 호의 항해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그날 저녁.

해가 지기도 전에 펠리코니아 호가 크레모에서 출항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였다.

북쪽으로의 끝없는 항해가 이어졌다.

마침 날씨는 청명했고, 바람은 잔잔했다.

파도는 잠잠했으며, 해류 또한 안정적이었다.

'다행이네. 뱃멀미 하면 어쩌나 했는데.'

로이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어릴 때 한강에서 유람선 딱 한 번 타본 게 그의 제대로 된 항해 경험의 전부였다.

그래서 내심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범선을 며칠씩 오래 타보는 건 처음인 거였으니까. 온종일 웩웩거리며 먹은 거 다 게워내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출항 후 20일째가 되는 날.

펠리페 선장이 로이드에게 말했다.

"드디어 원하던 장소에 도착하셨소."

"여기가 말입니까?"

"그렇소. 북극해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겨우 해역 초입에 다다른 것이지만."

로이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관리된 갑판.

그 뱃전 너머로 보이는 풍경.

숨을 내쉴 때마다 뭉게뭉게 퍼지는 입김 사이.

시리도록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문드문 떠다니는 새하얀 유빙도 곳곳에 보였다.

가끔 티브이의 다큐멘터리에서 보곤 하던 극지방 바다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선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여기서 노래를 하면 될 듯하오."

"노래를요? 여기서?"

"그렇소. 느끼고 있을진 모르겠는데, 이미 우리 근처에 인어들이 와 있소. 어제부터 우리 배를 따라오며 숫자를 늘려가는 중이지."

선장이 힐끔, 바다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는 묻지 마시오. 그저 바닷새들의 움직임이나 정어리 떼를 관찰하면 짐작할 수 있는 거니까. 어쨌건 이미 인어들이 충분한 숫자로 모여서 우리 배를 감싸다시피 하고 있소. 그러니 이제는 슬슬 저들에게 우리가 침입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야 할 듯하오."

"그러지 않는다면 공격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정확하오."

선장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워낙 배타적인 이들이라서 말이오. 수십 년 전에 날 받아들인 것도 그때 잠시뿐이었고. 그러니 이제는 용건이 있는 자가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할 거요. 안 그러면 말 그대로 침입자로 간주되어 공격받거나 해역에서 쫓겨날 테니까."

"후우, 알겠습니다."

선장을 말을 듣는 동안 하비엘을 힐끔 돌아보았다.

녀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선장의 말이 맞다고.

정말로 배 근처에 인어들이 몰려와 있다고.

그랜드 마스터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을 번득이며 녀석이 알려주고 있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됐다.

"흠흠, 흠!"

로이드는 긴장감을 가라앉히며 헛기침을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서 걸음을 옮겼다.

펠리코니아 호의 뱃머리 끝 부분.

그곳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돛대.

보우스프릿 위에 올라섰다.

바닷속에 있을 인어들에게 가장 잘 보일 장소였다.

그들에게 이쪽이 부를 노래의 정성과 진심을 가장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을 듯한 장소이기도 했다.

'후우.'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들여다보았다.

'모두를 살리고 싶어. 백작님과 백작부인도. 줄리앙도. 세라자드 양도. 국왕 누님이 한쪽 팔을 못 쓰게 되는 것도 싫어. 그러자면... 여기서 내 진심이 전해져야 해.'

검푸른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을 인어들.

그 무수한 청중들에게 자신의 진심이 닿기를.

그리하여 저들의 오해와 적대가 풀어지기를.

한편으로 작은 소망을 감히 품어 보았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가득 담아.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로이드는 천천히 노래했다.

모자란 기교 대신에 마음을 담았다.

불안한 음정 대신에 진심을 채웠다.

자신의 마음과 진심이 저들의 경계심을 녹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원하며, 그 마음을 담아 정성껏 노래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인어 군단의 펠리코니아 호에 대한 무차별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256화. 노래에 진심을 담아서 (2)

 

 

촤학!

 

살얼음 가득한 파도가 몰아쳤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대형 포경선, 펠리코니아 호의 옆구리를 때렸다.

수많은 역경과 거친 풍랑을 이겨낸 범선이 기우뚱거렸다.

선미루 위쪽까지 튀어 오르는 얼음물 세례.

졸지에 온몸이 흠뻑 젖은 선장 펠리페가 타륜을 돌리며 외쳤다.

"좌현! 전타!"

"전타!"

선장의 명령이 순식간에 전달되었다.

갑판장의 입을 통해 갑판 아래 노실로 전해졌다.

노잡이 선원들의 등판 근육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노련한 선장의 부드러운 타륜 회전.

거대한 선체가 좌현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 기울어지는 정도와 맞추어 노실의 구령이 달라졌다.

"좌현측! 노 박고 4회 1타! 우현측! 전속 1회 1타!"

"후! 하!"

노잡이 선원들의 호흡이 같은 박자로 맞추어졌다.

반면 노를 젓는 박자는 달라졌다.

좌현측 노잡이들은 4회 호흡에 한 번 노를 당겼다.

우현측 노잡이들은 1회 호흡에 한 번 노를 당겼다.

양쪽 노의 달라진 움직임이 선체의 움직임을 더욱 극적으로 도왔다.

 

촤하아아악!

 

선체 앞머리가 물살을 휘젓는 뱀장어처럼 좌측으로 확 쏠렸다.

거대한 선체가 순식간에 파도를 가르며 좌측으로 급기동을 선보였다.

그렇게 펠리코니아 호가 왼쪽으로 급격히 움직인 직후.

바닷속에서 근육질 덩어리들이 돌고래처럼 연달아 솟구쳤다.

하지만 그들은 돌고래가 아니었다.

 

촤학! 촥! 파학!

 

"크아앗!"

"놓쳤어!"

바닷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근육질 육체.

그 아래로는 화려하게 빛을 반사하는 비늘과 지느러미의 하반신.

인어들이었다.

물 위로 치솟은 잠깐의 순간.

몇몇 인어들이 치를 떨며 펠리코니아 호를 쳐다보았다.

회심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안타까움 담긴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자매들이여! 침입자를 놓치지 말도록!"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

"단숨에 용골을 부러뜨려!"

무려 오백에 달하는 인어들이 펠리코니아 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력으로 지느러미를 휘저었다.

그 엄청난 근력으로 급상승했다.

펠리코니아 호의 배 밑바닥에 몸통박치기를 시도했다.

 

콰앙! 쿵! 터쿵!

 

펠리코니아 호가 급격하고도 유연한 기동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수많은 인어들의 파상공세를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공격을 당할 때마다 선체가 충격으로 들썩거렸다.

배 밑바닥이 불길한 굉음을 토해냈다.

선장 펠리페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로이드의 표정은 더욱 다급해졌다.

"아니, 선장님!"

인어 군단의 총공격이 시작된 직후.

로이드는 살벌하게 급변한 분위기에 기겁했다.

하마터면 보우스프릿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질 뻔했다.

"노래! 하면 된다면서요! 진심과 정성을 담으면 된다며!"

급격한 기동과 인어들의 몸통박치기로 온통 요동치는 갑판.

그 위를 거의 기다시피 하며 선장에게 돌아온 그가 빽 외치며 따졌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진심으로 억울했다.

'될 거랬잖아! 진심과 정성으로 노래하면 된다며!'

그래서 했다.

정말로 온 마음을 다 담았다.

나름 진지하게, 따뜻하고 간절하게, 정성을 다했다.

백작부부와 줄리앙, 그 외의 모두를 살리고 싶다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그러니 조금만 도와달라고.

적이 아니라고.

침입한 것도 아니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손을 내미는 심정으로 노래했다.

"그런데 왜! 이딴 상황이 펼쳐진 거냐고요!"

로이드는 억울한 진심을 담아서 따졌다.

한데 펠리페 선장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아니! 내가 노래를 하랬지 무슨!"

그가 바쁘게 타륜을 돌리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빽 외쳤다.

"세상에! 이딴 상황이 왜 펼쳐진 건지 모르겠소? 내가 노래를 하라고 했잖소! 진심과 정성을 담아서!"

"그랬죠! 그래서 제가 노래를 했지 않습니까!"

"...그게 노래였다고?"

선장이 진심이냐는 듯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어왔다.

그 눈빛이 진짜로 진지하고 심각해서 로이드는 하마터면 왈칵 눈물샘을 전면개방할 뻔했다.

선장의 팩트 폭력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듣기만 해도 귓구멍에서 피가 나올 것 같은 괴상한 소음을 만들지 말고 그냥 평범한 노래를 했어야지! 노래를! 왜 괜히 그런 이상한 시도를 해가지고! 쯧!"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다시 제대로 노래를 해보는 건 어떻겠소?"

"...."

"아니! 이 사람이! 왜 자꾸 대답도 없이 울고만 있는 거요!"

"...."

선장님이라면 안 울게 생겼습니까.

졸지에 온몸의 뼈가 실시간으로 분질러지는 듯이 말로 두드려 맞고 있는데.

로이드는 힘껏 눈시울을 훔쳤다.

그리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쯧! 노래 안 하렵니다! 다른 방법을 써야겠으니 이대로 탈출이나 하죠!"

일단은 그게 최선일 듯했다.

선장이 제시했던 노래를 통한 접근.

그렇게 인어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은 꽝인 듯했다.

아니, 오히려 인어들의 적대감을 최대치로 올려놓아 버린 지금은 일단 도망부터 치는 게 최선일 듯했다.

'그 후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정말로, 진짜로 방법이 없으면 용용이를 불러와서 인어 왕국 침공이라도 해 버려야지.'

만약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결국엔 인어들과 친해질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압도적인 힘을 통한 해결도 염두에 두어야 할 듯했다.

'하지만 그건 최후의 방책이고. 일단 지금은 안전하게 튀는 게 우선이겠지.'

로이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투쾅! 콰앙! 쿵!

 

배 밑바닥에서 쉴 틈 없이 굉음이 올라왔다.

인어들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으려고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포경선이 충격으로 들썩거렸다.

'이거, 좀 쌔한데.'

로이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보아하니 진짜로 안 좋은 상황이다.

심지어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거 같다.

'아무리 대형 포경선이라도 이렇게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애초에 이 범선은 황제고래 사냥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선박이었다.

수백 톤이나 되는 황제고래 시체를 끌고서 고래 무리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돛 외에도 제법 많은 노를 갖추었다.

덕분에 큰 덩치에 비해 순간적으로나마 폭발적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반 선박보다 압도적으로 튼튼한 내구력을 지녔다.

작살에 맞아 몸부림치고 저항하는 황제고래.

그 엄청난 덩치의 난동과 반격에 버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좋지 않아.'

무려 인어였다.

자타공인 바닷속 생태계의 최강자.

황제고래마저도 몸을 사리는 수중의 폭군.

그런 존재가 인어 군단이 아닌가.

'엄청난 힘을 지녔다지. 근력만으로는 오크 최상위급 전사들과도 맞먹는다고 했나? 그런 놈들이 수백이나 달려들고 있으니... 이대로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다가는 결국엔 배 밑바닥이 부서질 거야.'

물론 배 밑바닥이 부서져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터다.

애초에 황제고래의 반격에 버티도록 설계된 배였다.

몇 군데쯤 구멍이 나고 침수가 되어도 배 전체가 침몰하지는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운 나쁘게 용골이 부러지면?'

선박의 척추와 같은 구조물인 용골.

그게 부러지면 그냥 끝이다.

침수 차단용 격벽 구조고 뭐고 간에 그냥 침몰 당첨일 터다.

한데 문제는, 저들 인어들에게 용골을 부러뜨릴 힘이 충분하다는 거였다.

'지금은 그럭저럭 엄청난 기동을 선보이면서 가까스로 용골 직격은 피하고 있긴 한데, 이런 운이 언제까지고 따라줄 거란 보장이 없어.'

로이드는 상황을 냉정하게 살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쪽에선 반격할 방법도 좀처럼 없고.'

반격할 수는 있다.

방울이로 수중에 화산폭발을 쏜다거나.

하망이로 바닷물을 흡입한 후에 한꺼번에 뱉어서 회오리를 만든다거나.

하다못해 자신이나 하비엘이 수중으로 발파를 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해.'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칫 이쪽이 아니라 저쪽, 인어들이 위험해질 터였다.

'저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해. 그런데 행여나 잘못 반격했다가 다치는 인어가 생겨나면? 그럼 끝이야. 그냥 나가리야.'

그때부터는 정말로 저들과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설득이고 부탁이고 모조리 편의점 바닥에 떨어뜨려 쏟아 버린 컵라면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

결국, 로이드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선장에게 외쳤다.

"선장님! 지금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습니까?"

"버티다니, 어떤 의미로 말이오?"

"침몰하지 않고 버티는 거 말입니다!"

"운이 좋으면 온종일 가능하오!"

"운이 나쁘면요?"

"1초!"

"...."

한마디로 진짜 운에 달렸단 소리구나.

로이드는 멘탈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저들과 협상을 시도해보겠습니다!"

"협상? 이 상황에서 말이오?"

"예, 통할 거라는 기대는 안 하지만요!"

"시간이라도 끌어보겠단 거요?"

"제 말을 듣는 동안에는 저들의 공격이 그나마 좀 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협상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시겠죠?"

"알겠소. 회피 기동보다 해역 탈출부터."

일단 이 해역을 탈출하는 게 가장 중요할 터였다.

그러면 곳곳에 떠 있는 빙산, 유빙이 줄어들 테니까.

그만큼 배가 충돌이나 좌초를 겁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도망칠 확률을 높일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노련한 펠리페 선장은 이쪽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해보자.'

그는 입술 주위와 혓바닥 근육을 풀며 선미루를 내려갔다.

선미 꽁무니 뱃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얼음물 파도.

그 아래를 향해 마나를 실어 외쳤다.

"저기! 인어 누님들! 실은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아!"

로이드의 외침이 철썩이는 파도 사이로 쇽쇽 스며들었다.

배 밑바닥에 몸통박치기를 위해 급상승하던 인어 몇몇의 귓가로도 숑숑 스몄다.

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제가 괴상하고 끔찍한 노래를 불러서 누님들 심기를 상하게 했다는 건 잘 알겠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제가 뭘 하면 누님들이 화를 풀어주실까요!"

 

까요...! 까요...! 까요오...!

 

그의 외침이 더욱 우렁차게, 멀리, 깊이까지 퍼졌다.

비로소 모든 인어들의 공격이 잠시나마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수면 위를 향했다.

모두가 뱃전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로이드를 주목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저놈이야!"

"맞아! 저 인간이 아까 노래했어!"

"그건 노래가 아냐! 음파를 이용한 저주였어!"

"언니, 전 아직도 고막에서 피가 나요!"

해역 모든 인어들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저 인간을 잡아야 한다.

확 족쳐 버려야 한다.

다시는 더러운 노래와 소음으로 바다를 더럽히지 못하게 아예 입을 꿰매 버려야 한다.

그렇듯 정의구현(?)을 향한 타오르는 분노와 의지로 인어군단이 다시금 정신무장을 다졌다.

그리고 더욱 거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촤악-!

 

"...으엇!"

갑자기 확 솟구치며 주먹을 날려오는 어느 인어의 습격!

그 서슬에 로이드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주먹이 너무나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 주먹 뒤에 달린 엄청난 전완근과 어깨 근육이 보였다.

이쪽을 향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인어의 눈빛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건 영락없는 전사의 눈빛이었다.

'날 죽이려 하고 있어!'

그런데 대처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속도와 기세.

그렇게 치고 올라오는 주먹.

반면 뒤로 피하려 넘어지고 있는 자신의 동작은?

그렇게 굼뜨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확신했다.

'맞는다.'

저걸 맞으면 어떻게 될까.

최소 턱뼈가 골절되지 않을까.

'운 나쁘면 평생 죽만 먹어야 할지도.'

그건 싫었다.

한데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마나하트 속 마나를 뽑아내며.

그나마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를 증폭하며.

턱이 부서지지 않도록 일말의 방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다였다.

'으으, 제발!'

아프지 않기를.

그는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그때였다.

 

터커엉!

 

턱 바로 아래에서 강렬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제야 보였다.

'하비엘?'

어느샌가 바로 옆에 다가온 하비엘.

녀석이 손을 뻗고 있었다.

올려쳐 오던 인어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흡!"

자신의 주먹이 막힌 인어가 눈을 부릅떴다.

즉시 온몸을 뒤틀었다.

도주를 위해서?

아니었다.

 

후아앙!

 

통나무보다 두꺼운 근육질 꼬리가 이쪽을 향해 휘둘러져 왔다.

저기 스치기만 해도 최소 전신 골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엄청난 위세였다.

그러나 하비엘에겐 아닌 듯했다.

"위험합니다. 물러서시죠."

녀석이 나머지 손을 뻗어왔다.

이쪽을 확 뒤로 밀쳤다.

그리고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깨와 인어의 꼬리가 충돌했다.

그리고 인어가 튕겨 나갔다.

 

투퍽!

 

"커헙?"

근육질 인어가 헛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십수 미터나 날려갔다. 파도 속으로 추락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곧바로 수면 아래로 헤엄쳐 사라졌다.

그제야 하비엘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괜찮습니까."

"...어, 응."

로이드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중에 아래턱을 쓰다듬고 있자니, 뒤늦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방금은 진짜로 큰일이 날 뻔했다.

하비엘 녀석이 아니었다면 크게 당했을 수도 있다.

'젠장.'

로이드는 치를 떨었다.

협상을 시도하면서 시간을 끌어보려 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배, 진짜로 침몰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이나 하비엘은 꼬밍이 등을 타고 탈출할 수 있겠지만, 펠리페 선장이나 나머지 선원들은 많은 수가 희생될 것이다.

'그건 싫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 짧은 사이에도 상황이 시시각각 나빠졌다.

 

콰아앙! 삐거덕, 콰쾅! 찌컥!

 

서서히,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선체를 두드리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조금씩 거슬리는 잡소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선체가 충격으로 비틀리는 것 같습니다."

하비엘도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면 큰일이 날 듯했다.

'정말로 배가 가라앉으면 로이드 님부터 구해야겠지.'

어떤 일이 있어도 로이드 님은 지켜야 한다.

설령 저 사람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이미 가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 이상.

저 사람은 진짜보다 중요한 가짜다.

그러니 반드시 지키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불합리를 겪더라도.

반드시 보호하고 지켜내리라.

그렇게 은발의 기사는 각오를 다졌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쓰읍. 상황이 이러니까 어쩔 수가 없네. 하비엘? 우리 낚시 좀 해야겠다."

"예? 낚시라니요?"

로이드의 말에 하비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상황에서 난데없는 낚시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게다가 미끼도 없는데 낚시를 어떻게?

이윽고 은발의 기사는 목도해야 했다.

밧줄을 알차게 들어 올리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의 입꼬리에 뻔뻔하게 떠올라 있는 미소.

그리고 이쪽을 향해 태연하게 내뱉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너, 미끼 좀 하자.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니까 얼음물에 빠져도 죽진 않겠지?"

257화. 인어 왕국의 속사정 (1)

 

 

"너, 그랜드 마스터니까 얼음물에 빠져도 죽진 않겠지?"

"...."

"그렇겠지?"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이드 님.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정색한 눈길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은발 기사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난데없이 낚시를 하자고 하시더니, 설마 저를 미끼로 쓰시려는 겁니까?"

"응. 정답."

"...."

"음, 한 번에 맞춰서 기뻐?"

"...."

기쁜 건 아니고, 좀 당신을 밟고 싶어졌습니다. 아주 잠깐.

하지만 하비엘은 그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다.

어느새 표정을 굳힌 로이드가 재빠르게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야, 내가 이렇게 설렁설렁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거, 진짜 장난 아닌 상황인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야."

어느새 진지해진 눈길로 로이드가 말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 배, 계속 이런 식으로 공격만 받다간 더 못 버틸 거다. 그렇다고 저 집요한 인어들을 제대로 뿌리칠 것 같지도 않고."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그래서 네가 물에 좀 뛰어들어야겠어."

"미끼가 되라는 말씀이시면, 정확히 어떤 방식을 생각하신 겁니까."

"완전 무서운 미끼."

로이드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어지간하면 반격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래서야. 딱 한 번. 한 방이면 돼. 저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뒤로 크게 물러나도록 하는 한 방. 너라면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저들을 물러나게 하고, 그 틈에 도망칠 시간을 벌겠다는 겁니까?"

"응. 어때?"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로이드의 의도를 금방 깨달았다.

단 한 번의 강력하고 위협적인 반격.

그걸 통해 인어군단을 잠깐이나마 물러나게 만든다.

그렇게 파상공세의 맥을 끊고 도주할 시간을 번다.

"좋아. 만약 그 와중에 너도 다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하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저 가짜 로이드는 이래서 좋다.

종종 미친놈처럼 굴기는 하는데.

그래도 항상 이쪽 걱정을 해주기는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하비엘은 즉시 움직였다.

"밧줄, 저쪽 마스트에 묶어주십시오."

"어."

그는 로이드에게서 받은 밧줄을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동안 로이드가 밧줄 반대편을 마스트에 묶어주었다.

그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바다에 뛰어들겠습니다. 수중에서 제가 반격을 하면 즉시 밧줄을 끌어올려 주시면 됩니다."

"반격을 했다는 건 무슨 방법으로 알릴 거지? 따로 신호를 보낼 거야?"

"아뇨. 신호가 없어도 바로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어떻게?"

되물었다.

하비엘이 피식 웃었다.

"바다가 뒤집어질 테니까요."

그 말을 마친 하비엘은 뱃전에 올라섰다.

로이드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삽시간에 온몸을 휘감는 극한의 차가움.

피부와 그 아래 근육, 혈관마저 모조리 얼려 버리는 듯한 감각.

하지만 그럼에도 하비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스라한 심법을 한계까지 발동했다.

전신 세포에 깃든 마나하트를 공명시켰다.

포효를 품고서.

서늘한 눈빛으로.

해역 전체를 쓸어보았다.

펠리코니아 호를 향해 달려드는 수백의 인어 군단.

그들 하나하나의 동선과 예측 경로를 모조리 계산했다.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수백 미터는 뒤로 휩쓸어 버릴 일격을 준비했다.

'기회는 한 번.'

시리도록 푸른 물속에서 하비엘의 눈이 더욱 푸르게 빛났다.

강대한 힘을 집중하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한데 그런 이쪽의 기세를 감지한 것일까.

야생에 가까운 감각으로 위험을 느낀 것일까.

모든 인어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었다.

펠리코니아 호를 향하던 돌격을 중단했다.

사납게 내지르던 포효를 되삼켰다.

모두가 하비엘을 주목했다.

똑같이 부릅뜬 눈길로.

경악에 잠긴 표정으로.

하비엘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하비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이쪽의 의도를 깨달은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다고도 생각했다.

이미 모든 인어의 위치와 동선을 파악한 후다.

이제 검만 뽑으면 저들 모두를 수백 미터는 휩쓸어 날려 버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확신하며 하비엘이 검을 뽑으려는 순간.

이쪽을 노려보던 인어들이 한 손을 들었다.

검지로 하비엘의 얼굴을 스르륵 가리켰다.

그리고 약간은 발그레해진 멍한 얼굴로.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너, 합격."

 

...철썩.

 

순간 바다가 잠잠해졌다.

어떤 인어도 거칠게 헤엄치지 않았다.

주위를 떠다니던 유빙도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위쪽 수면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파도소리뿐.

그렇게 순간적으로 고요해진 바닷속에서 하비엘이 움찔했다.

뽑으려던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서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

합격이라니.

난데없이 무슨 소리일까.

저 인어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혹시 이쪽의 의도를 예상하고 반격을 차단하려는 걸까.

혹은 시간을 끌면서 이쪽의 허를 찌르려는 걸까.

'경계를 풀어선 안 돼.'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그때였다.

이쪽과 펠리코니아 호를 둘러싼 채 공세를 중단한 인어들.

그들 중의 한 인어가 천천히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렇게 5미터쯤 앞까지 다가왔을까.

인어가 물어왔다.

"아름다운 인간, 당신의 이름은 뭐죠?"

"...."

하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인어가 아니었기에 물속에서 말을 하는 재주는 부릴 수 없었으니까.

이내 말을 걸어온 인어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내 정신 좀. 인간들은 우리처럼 물속에서 복화술을 쓸 줄 모르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럼 잠시 수면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괜찮아요. 당신, 합격이라고. 공격하지 않겠어요."

인어가 펼친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인어들을 돌아보며 엄격하게 명했다.

"다들 물러서 있어."

그 한마디에 인어 군단이 수십 미터나 물러나며 포위망을 풀었다.

그걸 보니 조금은 믿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하비엘은 말없이 수면으로 올라갔다.

"...후우."

출렁이는 파도 사이에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잠시 후 인어도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비로소 하비엘은 인어 군단의 대표로 나선 인어의 면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반가워요. 나는 인어 왕국 수중경비대 3조장이랍니다."

"프론테라 백작가를 섬기는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입니다."

"하비엘 아스라한?"

"예."

"어머. 이름도 예쁘셔라."

"...."

하비엘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눈앞의 인어도 그렇고 다른 인어들도 그렇고.

조금 전부터 다들 이쪽을 향해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있다.

하비엘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제 얼굴이 합격이라는 겁니까."

"오, 어떻게 알았어요?"

"익숙합니다. 이런 상황은."

하비엘은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살아오며 어딜 가든 얼굴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수많은 여성분들의 따스한 호의를 받아왔지요. 그렇기에 이런 상황, 제게 낯선 것이 아닙니다. 한데-"

수중경비대 3조장을 보는 하비엘의 눈빛이 살짝 서늘해졌다.

"아무리 제 외모가 근사하다 해도, 당신들은 영토의 경계를 수호하는 이들일 텐데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인어 왕국에 접근하려면 당신들의 허락과 인정을 받아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음, 맞아요."

"인정을 받기 위해선 진심과 정성이 담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것도 대강은 맞아요."

"하지만 전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상관없어요."

"상관... 없다니요? 설마?"

"꼭 노래만이 상대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건 아니겠죠."

"...."

"이미 당신의 얼굴을 보며 감동 받았고 허락했고 인정했는데 노래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인어 경비조장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말했다.

하비엘은 어쩐지 그 기세(?)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럼, 정말로 당신들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겁니까? 제 외모로?"

"당연하죠. 우리 자매들도 모두 인정하는 거, 봤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시간? 무슨 시간요?"

"저 위에 있을 제 일행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습니다."

하비엘의 눈길이 펠리코니아 호 갑판 쪽을 슬쩍 가리켰다.

인어 경비조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하비엘은 곧바로 수면을 박찼다.

펠리코니아 호 갑판으로 올라갔다.

마침 그곳에 이쪽의 상황을 보기 위해 뱃전에 모여든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로이드가 있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반격도 안 했는데 저들이 공격을 멈춘 거냐?"

제일 먼저 달려온 로이드가 물어왔다.

하비엘은 바닷물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저들의 인정을 받아낸 것 같습니다."

"인정? 허락을 받았다고?"

"예."

"어떻게?"

"제 얼굴이 합격이라더군요."

"...."

"사실 생각해보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긴 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로이드 님이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바다에 뛰어들 것을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이 배가 공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거고 말입니다."

"...."

"하지만 이렇게나마 저들의 허락을 받아냈으니 다행입니다."

"그래. 참 다행이다. 네가 잘생겨서. 그렇지? 하하하하하."

"예. 로이드 님의 희망 없는 노래가 불러온 폭력적 파국을 제 잘생김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정말로 다행이다. 아, 좋아라. 아하하하하."

"로이드 님."

"응. 왜."

"그만 우시지요."

"닥쳐. 바닷바람 소금기 때문에 안구건조증 터진 거거든."

"그래도 일단 아래쪽의 인어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로이드는 거친 소매로 눈시울 훔치며 뱃전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헐. 근육 대박.'

출렁이는 얼음물 파도 사이.

상체를 불쑥 내밀고 있는 인어 형님, 아니, 누님이 계셨다.

우람했다.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 크레모 항구에서 인어 조각상이 세워질 때도 생각했던 건데.

역시나 평생, 매일, 24시간 익스트림 레벨의 수영으로 단련된 인어들의 근육은 문자 그대로 흉기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오크 아로쉬랑 나란히 헬스장 데려가면 장난 아닐 듯.'

자신이 직접 겪어본 최강의 근육러들인 오크와 능히 비견될 미친 피지컬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근육 감상이 중요한 때가 아니다.

로이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 흐흠! 안녕하십니까? 저는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합니다."

"...."

"방금, 제 호위기사인 아스라한 경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쪽 분들께서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아스라한 경의 미모를 칭찬하고 인정하기로 결정하셨다지요?"

"...그랬다만?"

"우선 그 너그럽고 현명하신 결정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로이드가 영업용 미소를 환하게 장착했다.

그 효과인 걸까.

인어 경비조장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감사? 감사는 우리가 해야겠지. 생각지도 못하게 저런 미모를 감상하게 됐잖나. 아무래도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날인가 봐."

"어이쿠, 그렇게 말씀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저희에게도 오늘이 행운의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행운? 그쪽에게도 행운이라니?"

"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너그럽고 현명한 안목을 지닌 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너그럽고 현명한 안목이라. 그냥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말했을 뿐이다만."

"아하하. 그렇습니까? 진솔하기까지 하시군요."

"진솔한 건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그쪽은 우리에게 무슨 용건인 거지?"

이쪽을 올려다보는 경비조장의 눈길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의아해서 말이야. 우린 하비엘 아스라한의 아름다운 외양을 통해 감동을 받았고, 그의 왕국 방문을 허락했을 뿐이야. 한데 어째서 조금 전부터 그쪽이 나서서 자꾸만 살갑게 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쪽, 우리에게 따로 용건이 있는 건가?"

"아, 당연히 있습니다."

"어떤 용건?"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저 하비엘 아스라한의 호위를 받는 사람이라서요. 같은 일행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아스라한 경의 왕국 방문을 허락하셨으니 당연히 저도 함께...."

"안 돼."

"...예?"

"안 된다고."

단호박을 단숨에 자르듯 단호하게 말하는 인어 경비조장.

그녀가 한층 깐깐해진 눈길로 물었다.

"우리가 감동한 건 하비엘 아스라한의 아름다운 용모인 건데, 어째서 그 용모와 상관도 없는 그쪽의 왕국 방문을 허락해야 하는 거지?"

"아, 그건...."

로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놔.'

내심 난감해졌다.

솔직히 이런 냉대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비로소 로이드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얼굴로 사람 차별이라니.'

아무래도 저들이 왕국 방문을 허락한 것은 하비엘 한 사람만인 듯했다.

이유는 달리 없어 보였다.

'잘생겨서겠지. 진짜로 그게 이유의 전부겠지. 그래. 안 잘 생겨서 미안하다. 이렇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크흡.'

서러웠다.

부러웠다.

세상의 존잘러들을 향한 원망의 눈물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옆에 있던 하비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모깃소리로 속닥이며 재촉했다.

"야."

"예."

"뭐라고 좀 거들어 봐."

"어떻게 거들면 되겠습니까."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나도 쟤네 왕국 방문할 수 있게 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 나서서 뱃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로이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녀석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녀석이 제발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거창한 말을 해주길.

인어들이 녀석의 말에 끔뻑 넘어가게 되길.

그래서 자신도 인어들의 왕국 방문을 허락받을 수 있길.

'제발!'

그렇게 기도하는 사이.

마침내 하비엘의 입이 열렸다.

"경비조장님? 실은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어머나. 부탁이라니, 어떤 부탁이죠?"

이쪽과 대화하던 때와는 달리 하비엘에게 대답할 때는 180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바뀌는 근육질 인어. 심지어 눈빛마저 초롱초롱하게 바뀌는 근육 빵빵 인어.

그 반응의 온도차에 로이드는 콧김을 풍 뿜었다.

그러는 사이 하비엘과 경비조장의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 로이드 님의 왕국 방문을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아스라한 님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너무나 간단하게.

정말로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부탁을 왜 이제 하느냐는 듯.

경비조장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58화. 인어 왕국의 속사정 (2)

 

 

"네, 아스라한 님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너무나 간단하게.

실로 당연하다는 듯.

인어 경비조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하던 로이드가 뒷골을 딱 짚을 정도로 심플한 반응이었다.

'...그게 다냐!'

정말로 다였다.

하비엘의 부탁도.

인어 경비조장의 허락도.

정말로 그게 끝이었다.

부탁에 복잡한 미사여구를 붙이지도 않았다.

어찌어찌한 이유 때문에 부탁하는 거라는 말도.

이쪽에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다는 간곡한 부연도.

그러니 부탁을 들어주면 뭘 해드리겠다는 복잡한 사례 약속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심지어 인어 경비조장의 반응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심플했다.

우리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그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그쪽이 우리에게 그러저러한 값을 치르길 바란다는 등등의.

그런 최소한의 협상 과정조차도 없었다.

'젠장. 아무리 노력해봤자 잘생긴 놈 못 쫓아가....'

로이드는 쑴펑쑴펑 피어나는 자괴감 속에 한탄했다.

평소 자신의 방식이었다면?

수많은 계산과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힘겨운 머리싸움 끝에 인어들의 왕국 방문 허락을 받아냈을 것이다.

한데 하비엘이 나서니?

그런 과정이 필요도 없었다.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부탁합니다. 네, 아스라한 님의 부탁이니 들어드릴게요. 꺄르륵. 이러고 끝인 거잖아.'

어쩐지 억울해졌다.

영혼의 뿌리 끝까지 착잡해졌다.

하비엘을 따라 바닷물에 뛰어들 때도.

인어 경비조장에게서 인어왕국 방문자용 조개 목걸이를 받을 때도.

그 목걸이를 통해 수중호흡 및 대화 마법과 수압보호, 잠수병 방지, 체온 보호 마법을 부여받을 때도.

덕분에 무리 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안내받을 때도.

로이드는 짜디짠 바닷물 속으로 더욱 짭짤한 눈물을 송골송골 흘려내야 했다.

'그래도 어쨌건 원했던 건 얻어냈어.'

과정이 예상보다 좀 험난하긴 했지만.

하비엘의 모공 구석까지 철저한 존잘력을 새삼 피부로 실감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애초에 원했던 목표를 정확하게 달성했다.

'마침내 인어 왕국, 입장이다.'

로이드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하비엘과 나란히 잠수를 하고 있는 자신.

그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싸고서 함께 헤엄치는 수십의 근육질 인어 무리.

그리고 멀어지는 위쪽, 수면에서부터 커튼처럼 쏟아지는 북해의 햇볕까지.

꿈결처럼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하. 이래서 고래로 환생하고 싶다고 했던 건가.'

문득, 망나니 프론테라의 망령이 떠올랐다.

녀석이 그랬던가.

기왕 하는 환생이라면 고래로 태어나고 싶다고.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보고 싶다고.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수심이 거침없이 깊어졌다.

주위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햇볕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방이 캄캄해졌다.

그때 마침 곁의 하비엘이 손을 움직였다.

 

츠스스스...!

 

녀석의 손끝에서 피어난 오러가 랜턴처럼 주위를 밝혔다.

덕분에 심연의 어두컴컴함 속에서도 한 줄기 촛불처럼 녀석과 나란히 잠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깊은 곳까지 잠수했을까.

수심 2천 미터?

혹은 3천 미터?

어쩌면 그보다 깊을지도 모르는 곳.

그곳에 인어 왕국이 있었다.

'문어?'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문어였다.

그냥 거대한 정도가 아니었다.

몸통 크기만 수 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사방으로 펼친 다리들은 얼마나 크고 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거대한 생명체들, 기가티탄이나 비벙이, 본드래곤마저도 저 문어 옆에 둔다면 그저 참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데 그 문어가 포도송이 같은 뭔가를 품고 있었다.

'저거... 설마 알집인가?'

처음엔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문어 알집인 줄 알았다.

한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도시야.'

문어 알집 속이 전부 비워져 있었다.

아니, 수많은 건물로 채워져 있었다.

'알 하나하나가 거주구역인 건가.'

그러니까 인어들의 왕국은 거대한 문어가 품은, 수십 미터짜리 알 수천 개가 모인 포도송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쪽의 감탄을 눈치챈 걸까.

인어 경비조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저 문어 안 물어. 우리 왕국의 귀염둥이니까."

"...."

저게 대체 어딜 봐서 귀염둥이인 겁니까.

로이드는 반박(?)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모두는 문어의 몸통 곁을 지나쳤다.

어지간한 축구장 크기 눈알의 감시를 통과했다.

도시의 입구 역할을 하는 알집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였다.

경비조장의 안내를 받으며 수십 칸의 알집을 통과하고 거쳤다.

그 끝에야 비로소 중앙의 가장 큰 알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이 우리 여왕께서 머무는 곳이야. 왕국을 방문하는 외부인은 무조건 여왕께 인사를 드리며 용건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고. 그리고 아스라한 경?"

"예."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요."

"예,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럼."

이쪽을 대할 때는 시종일관 딱딱하던 경비조장이 하비엘에겐 더없이 살갑게 인사하며 떠나갔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콧김을 풍 뿜어냈다.

'쳇.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이런 취급이 더러워서라도 여기 인어 왕국, 빨리 용건만 마치고 떠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인어 여왕의 알현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엄청난 근육질의 인어 여왕.

그 앞에 예를 표했다.

"오늘 이렇게 방문을 허락해주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가 인어 여왕께 인사를 올립니다. 아울러, 제가 인어 왕국에 전해진다는 진실의 보옥의 행방을 찾아 이곳까지 왔음을 여왕께 고하여드리는 바입니다."

재빨리 자신의 용건부터 밝혔다.

그리고 여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돌아올 여왕의 반응에 대비했다.

'용왕의 말대로라면 진실의 보옥, 여기서도 엄청난 보물일 거야. 쉽게 내어주거나 사용을 허락하진 않겠지. 뭔가 거창한 조건을 걸지 않을까. 왕국에 도움을 줘야 한다거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하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분명 협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가 중요해. 인어 여왕이 뭘 원하는지, 뭘 아쉬워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해.'

그게 협상의 시작이다.

상대의 니즈 간파.

아쉬운 구석을 찌르는 것.

그렇게 이쪽이 원하는 걸 최대한 적은 대가로 얻어내는 것.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보자고.

로이드는 내심 각오를 다지며 여왕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데 다음 순간.

인어 여왕이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뭐? 진실의 보옥? 요즘 세상에도 그런 걸 믿는 순진한 사람이 있나?"

"...예?"

생각지도 못한 웃음소리.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인어 여왕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느꼈다.

여왕이 만면에 머금고 있는 웃음.

그 웃음의 분위기가 너무나 묘했다.

'뭐지, 저 반응은.'

순간적으로 쌔한 느낌이 왔다.

예상과 너무나 다른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저건....

'딱 그런 거 같잖아. 어떤 외국 기자가 인천 공항에 도착했어. 그런데 한국 방문 목적을 이렇게 밝히는 거지. oh! 단군 시대에 마늘이랑 쑥 먹고 사람 됐다는 웅녀! 그분과 인터뷰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라고 말이야. 지금 인어 여왕 눈빛이 그래. 그렇게 말하는 외국 기자를 쳐다보는 한국인 같은 눈빛이야.'

처음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럴까 싶었다.

한데 진짜였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정말로 그런 눈빛이 맞았다.

'설마... 진실의 보옥이라는 거, 진짜 완전 전설의 물건인 건 아니겠지?'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전설적인 물건, 혹은 보물.

어느 세상에건.

어떤 나라나 지역이건.

전설적으로 불리는 물건이 꼭 하나씩은 있다.

단군신화의 세 가지 신물인 천부삼인(天符三印).

춘추전국시대의 쌍검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불교 부동명왕의 용왕검 구리가라(俱梨迦羅).

아서왕 이야기의 엑스칼리버(Excalibur).

기독교의 용살검 아스칼론(Ascalon).

북유럽 신화 오딘의 창 궁니르(Gungnir).

인도 신화의 핵무기급 화살 브라흐마스트라(Brahmastra).

대한민국의 봉지를 열어도 내용물이 안 보인다는 질소 과자까지.

보통 그런 전설적 물건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상상 속 이야기 속에만 존재해서 실체가 없다거나.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너무 너무 너어어무 오래전에 존재했다거나.

...라는 등등의 이유로 현재에는 찾을 길이 없는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로이드는 쌔한 느낌을 머금으며 물었다.

"으음, 위대한 인어들의 여왕께 제가 감히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묻도록."

"방금 여왕께서 제게 하신 말씀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도 진실의 보옥을 믿는 순진한 사람이 있느냐는 그 말씀, 그거 설마... 진실의 보옥이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뭐 그런 물건이라는 뜻인 겁니까?"

"왜 아닐까."

이쪽은 떨리는 심정으로 물었는데.

인어 여왕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쉽게 대답해주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혹은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듯.

그런 눈빛으로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물은 바가 맞다. 그쪽이 찾고 싶노라 말한 진실의 보옥이라는 것 말이지. 그게 없었던 물건이라고는 못 하겠어. 하지만 그걸 찾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시대를 한참 잘못 골라서 태어난 거 아니냐고 되묻고 싶어질 듯하군."

"그 말씀은...."

"진실의 보옥, 그건 우리 인어들 사이에서도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물건이야."

"커헉."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헛물을 들이켰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이 맞는 듯했다.

'이런 망할! 진실의 보옥이라는 거, 현재에 존재하는 게 아니었던 거야?'

인어 여왕을 알현하며 자신 있게 용건을 밝힐 때까지는 좋았는데.

한데 그 뒤부터 여왕이 보인 반응을 보자니.

진실의 보옥이라는 거, 아무래도 너무 옛날 물건인 듯했다.

"으음, 그럼 여왕님께 한 가지만 여쭙자면, 진실의 보옥이라는 거 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긴 했던 물건입니까?"

"음,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로이드가 물었다.

여왕이 근육질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실존하긴 했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적어도 신화시대에는."

"신화시대...."

"안타깝지? 그러게 보옥을 찾고 싶었으면 조금만 일찍 태어나지. 안 그런가?"

"...."

로이드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옛날도 아니었다.

무려 신화시대였다.

그러니까 철혈의 기사에서 몇 번 언급됐던 이곳 세계의 연대를 통해 그 시기를 추정하자면....

'최소 만 년 이상 전인 거네.'

기절하고 싶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우기도 전일 터였다.

한데 그런 물건을, 이곳 인어들도 신화시대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보물을, 심지어 이런 바다 밑바닥에서 어느 세월에 찾아낼 수 있을까.

'내가 무슨 고고학자도 아니고.'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인어 여왕의 애석함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건 그런 허황된 용건을 진지하게 품고서 이곳까지 찾아온 그쪽이 안타까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데 그쪽은 진실의 보옥에 대한 이야길 어디서 들었지? 그 이야기는 우리 인어들 외의 종족은 거의 알지도 못할 텐데."

"아, 그건...."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진실의 보옥을 알려준 존재.

그 존재를 향한 원망의 불길을 새삼 이글이글 피워내며 그가 답했다.

"용왕 베르키스 님입니다."

"용왕? 하. 그분이라면 진실의 보옥 이야기 정도는 충분히 알 만하지. 보옥이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진실 또한. 그러고 보니 그쪽, 아무래도 그분께 농락을 당한 듯한데. 맞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로이드는 쓰라린 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정말이다.

제대로 용왕에게 낚였다.

'용왕 그 양반 그거, 내가 귀찮게 구니까 떨궈내려고 꼼수 쓴 거였구만.'

비로소 그는 용왕이 부린 꼼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귀찮으니까.

매일 질문을 해대니까.

그걸 떨궈내려고 아무 답이나 성의 없게 내준 것이었다.

한데 그 진위를 알아챌 방법이 없던 자신은 그만 그 성의 없던 답을 진짜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와 버린 거였다.

'후아. 이젠 어떡하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서 용왕의 멱살부터 붙잡고 서라운드 자진모리장단으로 짤짤짤 흔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여기까지 오면서 들인 수고가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진실의 보옥, 전설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아예 허구라고는 하지 않았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련 때문에?

그게 아니더라도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확인만 해보고 떠나자 싶었다.

"그럼 위대한 인어 일족의 여왕께 제가 한 가지 간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간청?"

"예. 잠시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제가 이 위대한 왕국에 머무르며 진실의 보옥을 탐색해볼 수 있을는지요."

"흐음."

"부탁드립니다."

로이드의 눈길이 간절해졌다.

여왕의 눈빛에 성가심이 떠올랐다.

이내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다. 그 정도쯤 허락한다고 해서 우리 왕국에 손해가 생길 일은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차피 찾아낼 가능성도 없겠지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보옥을 찾는다면 그 결과 또한 우리 왕국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지. 그쪽의 보옥 탐색에 따로 지원은 해주지 않을 거야. 실은 우리 왕국에도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서 자잘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거든."

"예? 골치 아픈 문제라니요?"

로이드가 되물었다.

인어 여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일이 있어. 간단하게만 밝히자면 최근 북극해 상공에 갑작스럽게 열린 지옥의 통로 헬게이트 때문이지."

"...."

 

뜨끔.

 

로이드의 뒷덜미가 콱 굳었다.

"혹시 그쪽은 갑자기 헬게이트가 열린 이유를 알고 있나? 인간 세상에서 그런 현상과 관련된 소문이나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거나."

"모릅니다. 없습니다."

"그래?"

"옙."

콕콕 찔리는 양심의 소리.

그걸 억누르며 로이드는 빛의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뽀송뽀송 뻔뻔한 티타늄 철판을 3중 엠보싱처럼 깔고서 여왕을 향해 말했다.

259화. 인어 왕국의 속사정 (3)

 

 

"난데없이 바다 위에 헬게이트가 열리다니, 그거 정말로 근심이 많으시겠습니다."

로이드의 뻔뻔한 목소리가 인어 여왕의 공간을 숑숑 물들였다.

여왕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근심이라. 당연하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바다가 바로 여기, 북극해였는데 말이다."

"그 일이라니요?"

"본드래곤의 침공."

"헙."

로이드는 순간 호흡하던 바닷물을 뿜어낼 뻔했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아 당황스러운 심정을 숨겼다.

인어 여왕의 한숨 섞인 말이 이어졌다.

"불과 얼마 전이었지. 평온하기 그지없던 이 해역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던 것은. 그것은 침공이었다. 전례 없는 존재, 본드래곤의 침공 말이다."

"본드래곤이라니...."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북극해에 방문한 본드래곤.

게다가 최근의 일이라니.

분명 용용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옥에서 탈출용 헬게이트를 열었던 게 딱 여왕이 말하는 시기랑 비슷하니까. 그때 헬게이트가 북극해 상공으로 연결됐고. 마침 북극해에 있던 용용이가 그 헬게이트로 지옥에 건너와 용암 거인 퇴치에 힘을 보탰었잖아. 딱이네. 딱 들어맞네.'

로이드는 은근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양심이 실시간으로 콕콕 찔렸다.

게다가 위기감도 쑴펑쑴펑 느껴졌다.

만약 본드래곤 용용이를 여기로 보낸 게 자신이었다는 걸 인어 여왕에게 들킨다면?

'빼박 원샷 참수형 당첨인 거지.'

최소한 여기서 몸 성히 나갈 순 없을 듯했다.

하비엘의 보호를 받아도 마찬가지.

이런 심해에서는 아무리 하비엘이라도 마법의 도움 없이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여왕과 인어 근위대의 피지컬 터지는 근육질 몸매를 보자니 더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렇듯 이쪽이 마른침을 꼴깍꼴깍 넘기는 사이에도 여왕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자세히 말하기는 그렇지만 본드래곤이 우리 해역을 침공했지. 기가티탄도, 황제고래도, 모두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을 정도였어."

"그래서 설마, 인어 군단이 출동했던 겁니까?"

"당연히."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걸까.

인어 여왕의 눈길이 서늘해졌다.

"파상공세를 퍼부었지. 혈전이었어. 그렇게 며칠을 싸우던 도중이었나. 북극해 상공에 헬게이트가 열리더군."

"...."

"아무리 본드래곤이라도 우리 군단의 공세는 버거웠던 모양이야. 그놈, 헬게이트가 열린 걸 보자마자 꽁지 빠진 정어리처럼 허겁지겁 도망을 치더라고."

"...."

사실은 그거, 용용이가 제 냄새 맡아서 반갑게 꼬리 치며 날아간 거였는데.

로이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여왕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건, 그 사건 이후로 북극해 상공에 열린 헬게이트가 사라지질 않고 있어. 그래서 골치가 아파. 지옥의 뜨거운 공기가 계속 흘러나와서 말이지."

"...그건 확실히 문제겠군요."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들어보니 여왕의 골치가 아플 만했다.

'헬게이트에서 뜨거운 공기가 흘러나오는 거면, 흐음, 확실히 이쪽 인근의 기온이 제법 상승했겠어. 그러고 보니 북극해 해역에 진입했는데도 지옥에서 받은 찬사가 발동하질 않았지.'

문득, 지옥에서 받은 찬사,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 떠올랐다.

'찬사 발동 조건은 연평균 기온 섭씨 0℃ 이하의 모든 지역에 입장할 때...였지.'

한데 북극해역에 오면서도 찬사가 발동하지 않았다.

즉, 지금 북극해의 연평균 기온이 영하가 아닌 상태라는 뜻이었다.

'쓰읍. 이거, 뜻밖의 극지방 온난화 사태인 건가.'

난감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어 버렸다.

한데 그걸 바로잡거나 멈출 방법이 없었다.

'저 헬게이트, 지옥왕이 계속 열어두길 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닫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북극해 상공에 열려 있을 것이다.

온난화 사태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해 보였다.

'쯧.'

일부러 여기에 헬게이트를 연결한 것은 아니긴 한데.

이쪽 동네의 북극곰이나 인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였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단속했다.

'걸리면 죽는다.'

본드래곤 용용이의 난동도.

온난화의 주범인 헬게이트도.

모두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건들이었다.

한데 여왕에게 그 사실을 들켜선 좋을 일이 하나도 없을 듯했다.

'일단 살고 보자. 일단은 살아야 나중에 여유가 좀 생겼을 때 저 문제도 도와주든 고쳐주든 할 거 아냐.'

혹시나 만약 그 사이에 인어들이 셀프로 헬게이트 문제를 해결하면 더 좋은 거고.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뻔뻔한 철판을 안면에 차곡차곡 깔았다.

손바닥을 쇽샥쇽샥 비비며 인어 여왕의 푸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후우, 정말 그렇군요. 실로 근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렇지. 특히 빙산이 너무 빠르게 녹고 있어서 말이야. 여러 생물들의 항의와 호소를 일일이 들어주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통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은 몰랐어. 차라리 12시간 무호흡 상태로 황제고래 스무 마리와 줄다리기를 하는 게 훨씬 편할 정도야."

"그, 그렇습니까."

"으음, 진심으로. 만일 이번 일의 흉수를 찾아낸다면 지금까지 쌓인 내 울분을 모조리 이 주먹에 실어서 명치에 꽂아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

"왜 그런 표정이지? 어쩐지 낯빛이 창백해 보이는데. 혹시 아직도 수중호흡이 익숙해지지 않은 건가?"

"아닙니다. 그냥 잠깐...."

"잠깐?"

"뜬금없지만, 집에 두고 온 꿀단지들이 떠올라서요."

최소한 죽기 전에 꿀은 좀 빨아봐야 할 텐데.

로이드는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인어 여왕은 조마조마한 이쪽의 심정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꿀이라. 그 육지의 산물이 달콤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맛을 보고 싶군. 어쨌거나 이제는 그만 물러나도록. 아까 말한 대로 그쪽의 왕국 내 활동을 허락하는 바이니."

"감사합니다!"

재빨리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더욱 재빨리 여왕의 면전에서 물러났다.

괜히 더 미적거리다간 꼬리가 밟힐 것 같았다.

그렇게 여왕의 거처에서 물러나자 비로소 참았던 숨이 쏟아져 나왔다.

"...후아."

살았구나 싶었다.

한데 그러는 와중에도 뾰족뾰족하게 찌르는 듯한 눈길이 옆얼굴에서 느껴졌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혹시 뭐, 나 양심 살아 있나 싶어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 아니지?"

"왜 아니겠습니까."

하비엘이 일침을 놓듯 대꾸했다.

"헬게이트가 열린 일도, 본드래곤 용용 경이 북극해에서 날뛴 일도 모두 로이드 님과 연관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 못 하실 텐데요."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어쩌냐. 일단 살고 봐야지. 아까 저 여왕 근육 못 봤냐."

"봤습니다."

"근데도 넌 그런 말이 나와? 넌 내가 저 근육 빵빵 품에 프리허그 당해서 와지직 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

"예."

"헐, 부정하지도 않아."

"솔직한 심정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압사당하는 꼴을 감상하셔야 속이 후련하시겠다?"

"양심과 정직함을 버리고 살아남은들 그건 비겁자의 삶이 될 뿐일 테니까요."

"응, 고마워. 비겁자로 오래오래 만수무강할래."

"...."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하비엘이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말입니다. 로이드 님."

"어."

"진실의 보옥이라는 거, 이런 곳까지 와서 꼭 찾으셔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음, 아마도?"

로이드는 짐짓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그래. 슬슬 이 녀석이 의문을 표할 때가 되긴 했지.'

로이드는 나란히 걷는 하비엘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아마도 녀석은 모르고 있을 터다.

프론테라 백작가의 앞날에 불운한 사건들이 생겨날 것임을.

백작부부와 줄리앙, 세라자드가 차례로 죽게 될 것임을.

가문이 철저히 몰락하게 될 것임을.

그렇게, 이 세상이 소설 철혈의 기사 속 역사와 유사하게 돌아가게 될 것임 또한.

'그게 운명의 복원력이라는 거지. 젠장.'

생각하자니 내심 치가 떨렸다.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이야기의 암울한 초반 전개를 바꾸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지금껏 쏟아부은 피, 땀, 노가다의 엑기스가 얼마나 진했는데.

'결국엔 그게 다 소용없어진다는 거잖아. 그 망할 놈의 운명의 복원력인지 뭔지 때문에.'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억울함에 치만 떨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젠장맞을 사태를 방지하려면 움직여야 했다.

막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자면 어떤 물음에건 답을 주는 진실의 보옥을 찾는 일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이 녀석한테 그걸 다 알려줄 수는 없겠지.'

원래의 역사.

뒤바뀐 이야기.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운명.

그걸 설명하려면 자신의 정체 또한 밝혀야 할 것이다.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도.

그저 다른 세상의 가짜라는 것도.

진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마저.

모두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럴 순 없잖아.'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니 지금은 거짓말을 해야 할 때다.

그리고 마침, 자신에겐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둔 거짓말이 있다.

"음, 진실의 보옥이라는 건 말이지."

로이드는 입술에 침을 촵촵 발랐다.

태연한 목소리로 준비된 멘트를 착착 꺼냈다.

"보험이야."

"보험... 말입니까?"

"어."

확신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즘 용왕 베르키스를 매일 아침 깨워주고 있었잖냐. 그러다가 용왕한테 우연히 들었거든."

"인어 왕국에 진실의 보옥이 있다는 이야기를 말입니까?"

"어. 그거, 엄청 강력한 보물이래."

"어떤 강력함을 지니고 있는 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도 답을 알려준다더라."

"답을, 말입니까?"

"어. 그러니까 살다 보면 굉장히 곤란한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는 거잖아? 막말로 몬스터 도미노 사건 때 기억나지? 메뚜기 떼 엄청 날아왔던 거."

"기억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거잖아?"

"그럼 로이드 님의 말씀은, 살면서 영지에 재난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미리 보옥을 찾아두시겠다는 겁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더욱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

로이드의 거짓말이 이어졌다.

"인생은 길잖아. 어떤 재난을 만날지 모르는 거잖아. 그런데 보옥 같은 보물을 미리 찾아서 확보해놓으면? 한 번 정도는 그런 재난을 적절하고 안전하게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얘기지. 어때. 보험치고는 제법 괜찮지 않냐."

"과연. 그렇군요."

"그렇지?"

"예."

"그런데 네가 어쩐 일로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냐?"

로이드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하비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설령 엉망진창인 사람이라도 아주 가끔은 바른 소리를 하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

"그래서입니다. 엉망인 사람이 가끔 하는 바른말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저와 같은 사람들이 보일 수 있을 아름다운 배려가 아닐까요."

"헐."

"실로 오랜만에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로이드 님."

"와 이제 너란 놈, 칭찬으로도 사람을 패는구나?"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전 로이드 님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쯧. 말대꾸라도 못하면 밉진 않을 텐데."

"감사합니다. 이렇게 미워해 주셔서."

"그럼 앞으로도 쭉 그래 줄까요?"

"그것 또한 미리 감사드립니다."

"감사도 선불이야?"

"가능하다면 한꺼번에 지불하고 싶습니다."

"분할 지급이 싫으시단 거지?"

"예. 그래야 앞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와. 차라리 네가 도련님 해라. 내가 호위기사 할게, 그냥."

"그렇게 하도록, 프론테라 경."

"...야."

"죄송합니다."

"그래도 웃네?"

"즐거웠으니까요."

"그래, 즐거웠다니 뭔 말이 더 필요하겠냐."

로이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다행이다.'

이쪽이 그럴듯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비엘이 믿어줬다.

솔직히 재난에 대비하는 보험으로 진실의 보옥을 찾아두는 거라는 말, 조금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었는데.

'일단은 그 핑계가 먹혔어.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겠네.'

그렇게 로이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하비엘은 깊어진 눈길로 로이드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다행이야.'

이쪽이 그럴듯하게 꾸민 반응을 로이드 님이 믿어줬다.

솔직히 이쪽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 끝까지 감출 수 있을까 싶어서 걱정이었는데.

'일단은 로이드 님, 아니, 저 가짜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 내 반응이 꾸민 것이라는 사실도, 저 설득력 떨어지는 핑계를 믿어주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직은 모르고 있는 거겠지.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겠어.'

그러니 한결 마음 놓고 저 가짜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

저 가짜가 하려는 일을 도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하비엘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인어 여왕의 궁을 완전히 벗어났다.

몇 줄기의 통로를 거치며 거대한 포도송이, 혹은 알집 같은 형태의 도시로 진입했다.

'후아. 명란젓 먹고 싶다.'

개당 수십 미터 크기의 알 수천, 수만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듯한 도시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입맛을 츄릅 다셨다.

이 도시의 모습을 보자니 오랜만에 고향의 맛이 그리워졌다.

특히 자신이 좋아했던 명란젓 생각이 많이 났다.

'후우. 명란젓 그거 적당히 잘라서 들기름 뿌리고 깨 뿌려서 고슬고슬 달래간장 비빔밥 위에 올리고 돌김에 싸먹으면... 하아. 미치겠네.'

절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향수병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보옥 탐색부터.'

로이드는 각오를 다졌다.

결의 담긴 눈빛으로 인어 왕국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근육질 인어들이 무수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저들 중에 누군가는 보옥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그런 희망을 품어 보았다.

그래도 이 왕국의 전설적 보물이니까.

비록 너무 옛 시대의 보물이라곤 해도 어쨌건 귀했던 신물이니까.

저 인어들도 보옥에 대해 조금씩은 아는 것들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돌아다니며 물어보는 거야. 최대한 많은 인어들에게서 대답을 듣고, 그걸 종합하는 거지. 그러면 가능성이 보일 거야. 최소한 보옥을 추적할 수 있을 윤곽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

그것이 로이드의 의도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도 있었다.

간단한 일이라고, 별달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감을 장착하고서 인어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잠시 후.

로이드는 인어들에게 '도를 아십니까'와 동급의 취급을 당하기 시작했다.

260화. 보옥을 아십니까 (1)

 

 

"저기, 혹시 진실의 보옥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이곳은 깊고 깊은 북극해 아래의 인어 왕국.

수십만 덩어리의 알집으로 이루어진 기묘하고도 거대한 도시.

그중에서도 중심가라 불리는 840,928번째 알집.

통칭 '빨간 알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인어들은 기묘한 이방인과 맞닥뜨려야 했다.

"진실의 보옥이라뇨?"

질문을 들은 인어가 대흉근을 불끈거렸다.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질문한 이방인을 쳐다보았다.

이방인, 로이드가 어색한 제자리 헤엄을 유지하며 배시시 웃었다.

"아,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제가 인간 세상에서 흥미로운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이곳 인어 왕국에 진실의 보옥이라는 멋진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흠, 그거 언제 적 소문이죠?"

"예?"

"그거 완전 옛날 얘기 아닌가...."

인어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로이드를 쓰윽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와의 거리도 다섯 지느러미 정도 벌렸다.

"전 그거 어릴 때만 잠깐 들어본 거라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앗, 저기...!"

그렇게 붙잡아볼 틈도 없이 인어가 쌩.

로이드에게서 훌쩍 떠나 버렸다.

어쩐지 아까보다 다소 바빠진 듯한 지느러미짓이었다.

"후아."

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뭔가 반응이 쌔한데.'

기대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진실의 보옥이라면 인어 왕국의 진귀한 보물이니까.

무려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보물이니까.

이곳의 인어라면 대부분 친근하게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 아무 인어나 붙잡고 물어봐도 대략의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물론 대부분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겠지. 그래도 그걸 모두 들으며 이야기를 종합하면 뭔가 단서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막상 보니까 이건....'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도시의 거의 모든 인어들이 이쪽의 물음에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

심지어는....

"저기, 진실의 보옥을 아십니까?"

"아, 몰라요. 몰라."

"정말로 모르십니까?"

"아, 붙잡지 마요. 헤엄치러 가야 된다니까요? 나 오늘 헤엄 덜 쳐서 근손실 오면 책임질 거예요?"

"...."

라는 식의 노골적인 무시도 수시로 당해야 했다.

즉, 이건 그냥 아예....

'도를 아십니까 취급이잖아.'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질문을 받은 인어들의 반응이 딱 그랬다.

갈 길 바쁜데 붙잡혀서 쓸데없는 질문을 들은 사람들 같았다.

대놓고 귀찮고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아니, 그 정도만 해도 양반일 때도 있었다.

"어이쿠, 어르신 인어님?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음? 육지의 인간이 왜 여기에?"

"아, 다름이 아니라 제가 여기서 진실의 보옥이라는 보물을 찾아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현명해 보이는 어르신을 뵙게 되어서 말입니다. 혹시 제 몇 가지 질문에 답해주실 시간이 있으신지...."

"없어."

"...."

"안 그래도 뼈마디 쑤셔서 미치겠구만, 질문은 무슨 생선 뼈다귀 같은."

"저기,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야 이 젊은 인간아, 너 사기꾼이지?"

"예?"

"요즘 세상에 무슨 진실의 보옥이야? 지금이 가을도 없고 겨울도 없던 1만 년 전쯤 시대면 몰라. 무슨 우리 증조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틀니보다도 오래된 소리를 하고 있어? 아직 새파랗게 젊은 인간이."

"...."

"그러니까 말이다, 젊은 인간아. 본심이 뭐야. 무슨 야바위를 치려고 진실의 보옥이니 뭐니를 묻고 다니는 거야?"

"그, 으음...."

"냉큼 대답 안 해? 어디 이 할미한테 맞아볼래?"

 

불끈!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할머니 인어.

등은 살짝 굽었는데 전완근은 여전히 굉장하셨다.

아니, 그냥 굉장한 정도가 아니라 500원짜리 동전 다섯 개쯤은 아침 운동으로 웃으면서 뽀쟉 구부릴 수 있으실 듯했다.

로이드는 난감해졌다.

'후아. 이거,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울고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거리를 지나가던 인어들 대부분이 이쪽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행여나 인어 어르신께 뭐라고 버릇없이 굴기만 하면 당장 몰려들어서 불끈불끈하고 매운 근육맛(?)을 보여줄 분위기였다.

"크흡,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결국, 로이드는 연신 굽신거리며 줄행랑을 치고야 말았다.

그렇게 알집 구석 골목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절로 억울한 심정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와나. 미치겠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짜로 이건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 붙잡고 단군신화에 나온 웅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냐고 묻고 다니는 기분이네.'

아닌 게 아니라 인어들의 반응이 딱 그랬다.

인어 왕국 진실의 보옥.

그 보물이 정말로 너무나 오래된 물건이라는 실감이 확 들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자신을 농락한 용왕 베르키스.

그에게 돌아가 다시 매달려볼까.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지옥에 갈까.

뭔가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지옥왕에게 운명의 복원 현상 방지법을 물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짐 싸서 돌아가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최소한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매달려보고, 그래도 답이 없으면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여전한 인어들의 냉대와 무시.

그런 반응 속에서도 로이드는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굴었다.

얼굴 가득 철판을 깔고서 질문을 하고 다녔다.

"저기, 거기 지나가시는 인어님? 혹시 진실의 보옥이라고,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

"거기 이두박근 멋있는 총각? 진실의 보옥에 관심 없어요?"

"...."

"아, 당신은 오늘 제가 본 인어 중에서 제일 멋있는 지느러미를 지닌 분이십니다. 그런데 혹시 진실의 보옥이라고 알고 계실까요?"

"...."

단 한 사람의 인어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도를 아십니까를 대하는 대한민국 행인들처럼.

저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쳐다보듯이.

대부분이 대꾸조차 없이 로이드를 쌩하니 지나쳤다.

하지만 로이드는 지치지 않았다.

실망하거나 시무룩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무시와 냉대에는 익숙한 그였다.

대한민국 사회의 밑바닥에서 온갖 후줄근한 모습으로 뒹굴 때 이미 냉대와 무시는 실컷 당해본 터였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또 당한다고 한들 별달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뻔뻔하게 철판을 깔았다.

'에라이. 어차피 도를 아십니까 취급당하는 거, 제대로 컨셉이나 잡아보자.'

될 대로 되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예 어그로나 끌어보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였다.

정말로 그는 컨셉(?)을 잡아 버렸다.

"저기, 선생님? 아이고, 인상이 차암 좋아 보이십니다? 이거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실의 보옥한테서 좋은 기운은 왕창 많이 받으신 거 같은데 말이죠?"

"...."

"거기 총각? 혹시 어깨가 무겁다거나 목이 결리지 않아요? 어이쿠, 내가 보니까 이거 아주, 조상님이 뒤에 업혀서 울고 계시는데? 진실의 보옥을 꼭 찾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

"으음, 제가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하시는 일마다 마지막이 잘 안 풀리곤 하지 않으신지요? 그거... 진실의 보옥의 기운을 받으면 싹 풀린다고 제가 알고 있는데 말이죠. 사실은 이거, 아무한테나 알려드리는 거 아닙니다?"

"...."

...라는 식이었다.

물론 인어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러나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좋아. 인어들이 몰려들고 있어!'

로이드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쪽의 이상한 컨셉질이 소문이 난 걸까.

혹은 괴상한 인간 하나가 미치광이 짓을 한다는 소식이 퍼진 걸까.

정말로 주위에 인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쪽을 보며 연신 수군거렸다.

어떤 인어는 피식피식 이쪽을 비웃었다.

저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크게 웃기도 했다.

마치 신기한, 혹은 덜떨어지는 구경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좋아. 아까보다 훨씬 좋아.'

오히려 조금씩 희망이 엿보였다.

여전히 자신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는 인어가 없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인어들의 관심을 끌게는 되었다.

덕분에 제법 많은 수의 인어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건 확률의 문제인 거지.'

한두 사람을 찾아가며 붙잡고 질문을 하는 것보다.

수십, 수백 명을 모이게 하는 것.

그게 대답을 들을 확률을 높일 길일 것이다.

'물론 부끄러움은 하비엘, 네 몫인 거고.'

아닌 게 아니라 곁의 하비엘은 아까부터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아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쪽이 부끄러운 걸까.

일행이 아니라고 나름 어필하고 싶은 걸까.

차마 확 멀어지진 못하고 소심하게 다섯 발짝쯤 애매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로이드는 히죽 웃었다.

'일단 판은 깔렸어.'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진실의 보옥에 대해 질문하는 목소리를 일부러 확 키웠다.

이곳에 모인 인어들이 자신의 질문을 다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혹시 관심 있는 인어가 있으면 제발 걸리라는 심정으로.

더욱 뻔뻔하게 철판을 깔았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저기, 당신은 진실의 보옥이 뭔지 정말로 궁금한 거요?"

마침내, 처음으로, 이쪽을 향해, 먼저 질문을 하는 인어가 등장했다!

"예?"

로이드는 깜짝 놀라서 그 인어를 쳐다보았다.

물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젊은 남자 인어였다.

한데 그 외모가 조금 특이했다.

'인어치고는 근육이 좀 소박하네?'

보기만 해도 근육빵빵 부담스럽게 우락부락한 이곳 인어들과 몸매가 좀 달랐다.

인간으로 치자면 매끈한 육상선수 정도?

딱 그 정도로 슬림(?)했다.

한데 그런 특이한 몸매의 인어가 이쪽으로 선뜻 다가와서 진지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들었소. 당신이 인어들을 붙잡고 꺼내는 질문들을 말이오."

"제 질문을 들었다고요?"

"그렇소."

슬림 인어 총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결 진지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래서 당신과 진실의 보옥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소이다만, 혹시 자리를 옮길 수 있겠소? 아무래도 여긴 듣는 귀가 많다 보니."

"저야 좋죠."

로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기다렸던 바다.

그는 하비엘과 함께 슬림 인어 총각을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헤엄쳤을까.

인적 뜸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슬림 인어 총각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반갑소. 내 이름은 로토루아라고 하오."

"로토루아?"

"그렇소. 신화시대의 가장 유명했던 인어의 이름을 따서 어머니가 지어주셨소이다. 그 시대의 가장 값진 유적인 진실의 보옥을 꼭 찾아내라는 염원을 담아서 말이오."

인어, 로토루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로이드가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신화시대의 유적을 당신이 찾고 있다고요? 진실의 보옥을?"

"그렇소."

로토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 가문은 대대로 진실의 보옥을 발굴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소. 무려 수천 년째 비원을 품고서 말이외다. 하지만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소. 그러던 중 아까, 인어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는 육지 사람의 소식을 들었고 말이오."

"제 얘기였군요."

"그래서 바삐 헤엄쳐 온 것이외다."

시종일관 진지하던 로토루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났다.

새삼 아까 느꼈던 놀라움과 반가움이 되새겨진 까닭이었다.

'설마 진실의 보옥을 믿는 육지 사람을 만날 줄이야.'

실로 반가웠다.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실의 보옥은 이곳 인어들에게도 거의 잊혀진 존재니까. 하지만 우리 인어들이 잃어버린 가장 안타까운 유산이니까.'

그걸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온 자신이었다.

실제로 보옥 발굴에 평생을 매달린 자신이기도 했다.

한데 이곳 인어들의 호응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웃음만 당하고 살아왔다.

인어는 그런 유적 따위에 매달리지 않는 법이라고.

그런 지루한 유적 탐사를 할 시간에 헤엄이나 더 쳐서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그게 진정한 인어가 갖추어야 할 소양일 거라고.

핀잔 섞인 잔소리와 오지랖만 듣고 살아야 했다.

한데 오늘, 이렇듯 마음이 통하는 존재를 만나 버렸다.

이곳의 인어들조차 무시하는 진실의 보옥.

그걸 애타게 찾는, 자신과 비슷한 이를 만났다.

심지어 그게 인어도 아닌 육지의 인간이었다!

로토루아는 감격스러움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로이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외다. 초면에 조금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하고 싶은데 말이오."

"요청이라니요?"

"당신, 나와 함께 보옥 발굴에 매진해보시지 않겠소?"

진심으로 요청했다.

인어가 아니라도 좋았다.

종족이 달라도 상관없었다.

보옥에 대해 함께 탐구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와 더불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뻤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흐음. 글쎄요?"

로이드가 고개를 까딱, 한쪽으로 기울였다.

의구심 섞인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심지어 의심 섞인 삐딱한 말까지 꺼냈다!

"제가 그쪽 분의 말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뭐요?"

로토루아는 당황했다.

무려 보옥을 찾는다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의 요청에 흔쾌히 응할 줄 알았는데.

한데 저렇듯 삐딱하고 석연치 않은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로이드의 의심 섞인 말이 연달아 날아왔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시죠. 다른 인어들은 다들 보옥 이야기만 들어도 귀찮다고 무시하기 바쁜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서 보옥에 대해 침을 튀기는 인어가 있다면 말입니다. 과연 그걸 진심으로 보고 그저 덥석 반갑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 그게 무슨...."

"혹여나 그쪽 분이 나쁜 마음을 먹은 사기꾼 인어라면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보옥에 대한 걸 이리저리 묻고 다니느라 절실하던 제 심정을 이용해먹기 딱 좋은 상황 아니겠습니까?"

"이, 이보시오. 난 다른 이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그런 인어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싶으시면 증명해보시죠."

"...."

"대대로 보옥 탐사를 했던 가문이라면서요."

"그랬소. 한데 그걸 어째서...."

"그러니까 증명을 해보시란 말입니다. 당신이 사기꾼 인어가 아니라는 거."

"그걸 어떻게...."

"어떻게긴요. 쉽지요. 보옥에 대해 알고 있는 거, 다 말씀해보시죠. 저도 보옥에 대해 나름 알고 있는 정보가 있으니까. 당신이 말하는 정보가 올바른 건지 대조해보면 그쪽이 사기를 치려는 건지, 진짜로 보옥을 찾으려는 인어인 건지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 정말 그 정도로 날 못 믿겠다는 거요?"

"쯧. 증명할 자신 없으면 갈 길 가시든가."

로이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돌아섰다.

그 모습에 로토루아는 욱하면서도 초조함을 느꼈다.

'안 돼!'

모처럼, 거의 평생 처음 만난 존재였다.

저토록 보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이는 정녕코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다.

놓치기 싫었다.

로토루아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돌아서는 로이드의 어깨를 잡았다.

"그럼 귀 활짝 열고 잘 들으시오. 인어 왕국에 신화시대에서부터 전해진 진실의 보옥이라는 건 말이오...."

그때부터였다.

로토루아는 빡침과 초조함의 바이브를 싣고서 보옥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술술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는 꿈에도 몰랐다.

도발에 넘어간 그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성심껏 설명하는 내내, 뒤돌아서 있던 로이드의 입가에는 사악한 웃음이 보람차게 차곡차곡 맺혔다.

인어 낚시에 성공한 자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