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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아론!! 딸이 있었어요?! 어쩐지 안 넘어오더라니!"

어쩐지 경악한 얼굴로 소리치는 해나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명할 말을 고르다가, 문득 귀찮아져서 그저 손을 저었다.

"히끅."

"어머, 놀랐니? 미안해. 애가 왜 이렇게 꾀죄죄해요? 일단, 좀 씻어야겠다."

아이가 딸꾹질하자, 해나가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일단, 성공적으로 냉장··· 아니,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앞으로 언제든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머니 가득한 은화가 주는 묵직함, 신상 냉장고, 추가로 들어올 현상금까지. 갑옷에 자국이 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생활 기스 수준이었다.

"운이 좋군."

혼자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고는 습관처럼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이렇게 주사위를 돌릴 때, 감각을 익혀. 익숙해져서, 돌릴 때 주사위의 수가 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작 주사위 놀이 손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를 하다 보면 검술의 정교함도 같이 늘 거야. 내 단검술의 비밀이지.]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운 따위는 없었다.

그저 평소에 흘린 땀과 쌓아온 노력이 찰나의 순간에 승부를 결정 지었고, 그를 모르는 이들만이 운이라 치부할 뿐이었다.

주사위 놀이든, 피가 튀는 칼싸움이든.

운은 어디에도 작용하지 않았다.

미니 냉장고

[살아남아.]

[도망쳐.]

벌떡 일어나서, 황급히 머리맡의 검부터 찾았다. 검 손잡이를 잡아, 그 서늘한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풀었다.

옆에 벗어뒀던 갑옷을 입고 검을 챙겨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가장 어두운 새벽이었다.

뒷마당으로 나오자, 물기 가득한 새벽 공기가 가라앉았던 내 기분을 달랬다.

몸을 풀고, 가볍게 뛰었다. 점점 속도를 높였다.

갑옷이 무겁다 보니, 전보다 훨씬 빨리 숨이 차올랐다. 익숙해져야 했기에, 멈추지 않고 더욱 필사적으로 뛰었다. 뒤에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처럼.

이윽고 심장이 터지기 직전에 멈췄다.

숨을 고르면서, 검을 뽑았다.

검날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횡 베기부터 시작했다. 그다음 수직 베기, 그리고 찌르기. 팔이 후들거릴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이윽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 동작을 멈췄다. 갑옷을 입은 상태라, 전보다 그 횟수가 현저히 적었다.

'하다 보면 결국 익숙해진다.'

단순하게 생각하며, 땀에 전 앞머리를 손으로 밀어 넘겼다. 한계까지 몸을 움직였음에도,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여··· 여기···."

그때,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한결 뽀송뽀송해진 미니 냉장고가 쭈뼛거리며 잔을 내밀고 있었다.

해나가 귀엽다고 데리고 갔었는데, 옷까지 새 옷으로 갈아 입힌 걸 보니, 퍽 마음에 든 듯했다. 씻기고 새 옷까지 입히니, 미니 냉장고는 제법 태가 났다.

'확실히, 눈치가 빨라.'

미니 냉장고가 내민 잔을 받으며 생각했다.

겉모습은 아이였지만, 그 잔혹한 놈들 사이에 있었던 걸 보면, 살아온 세월이 평탄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마, 속은 이런저런 때 범벅일 것이다.

'그래서 어제 나를 따라온 것이겠지.'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를 따라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기에, 눈치가 없는 것보다는 빠른 게 나았다.

"고맙다."

잔에는 살얼음이 띄워진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마셨다.

비명을 지르던 근육이 차가운 맥주에 금세 녹아내렸다. 운동 뒤에 이런 시원한 맥주라니. 이는 엄청난 자극이었다.

단번에 맥주를 비웠고, 내용물이 텅 빈 잔을 아쉽게 흔들었다.

"가···감사··· 합···니다···."

미니 냉장고의 눈동자는 나를 응시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으며,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잔뜩 겁먹은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런데도 어떻게든 내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어제 그 일이 아이에겐 꽤 충격적이었던 듯했다. 그에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저 겁먹은 눈빛으로 올려봤다.

"몇 살이지?"

아이의 보라색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여···열두 살이요."

외견과 다르게 나이가 제법 있었다. 하긴 여기 놈들은 외견으로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굴에 수염 가득하고 주름이 있어도 16살인 놈도 있었다.

"밥 좀 잘 먹어라."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그저 머리를 한 번 두들기고 지나쳤다.

"고···고맙···."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무슨 관계예요? 칸나랑?"

입을 삐쭉 내민 해나가 내 앞에 앉은 미니 냉장고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미니 냉장고의 이름이 칸나였군.'

그에 무슨 관계라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주웠어."

"네에?! 아이를 주웠다고요?!"

대충 뱉은 말에 해나가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가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어."

"여···여기···."

아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시원한 맥주였다. 그에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냉큼 잔을 받아 마시려고 할 때, 해나가 내 손을 잡았다.

"···아론! 길에 아이가 있다고 막 주워오면 안 돼요! 그냥 길을 잃은 걸 수도 있잖아요!"

전혀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당연한 말을 왜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얘한테 들어가는 돈은 나한테 달아두고, 애 밥 좀 잘 챙겨줘. 필요한 거 있다고 하면 사주고."

"···진짜 딸이에요?"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안 닮았는데, 칸나는 이렇게 귀여운걸?"

"에?"

대뜸 해나가 칸나의 볼을 잡아, 쭉 늘어뜨렸고 그에 칸나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근데 왜 칸나가 맥주잔을 건네줘요?"

칸나의 볼을 주무르던 해나가 내가 맥주를 마시고 만족스럽게 웃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맥주를 차갑게 만들 수 있거든."

"어머, 칸나 마법사였어?"

깜짝 놀라, 칸나의 볼을 놓은 해나가 칸나의 보라색 머리를 정리해줬다. 칸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왜 저리 눈치를 보는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떨거지 마법사야."

"응? 이렇게 어린데, 떨거지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떨거지 마법사야."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이 언니에게 안기렴."

칸나를 보는 해나의 눈빛이 더 따뜻해진 것은 착각이었을까. 뻣뻣하게 굳은 칸나를 기어코 품속에 안은 해나가 그 보라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칸나야. 차가운 맥주는 하루에 몇 잔 만들 수 있어? 우리 칸나가, 힘이 들지 않는 선에서 말이야."

"···?"

해나는 '우리 칸나'라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물었다.

해나의 품에 안긴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맥주나 마셨다.

"도시에서는 마법사들이 파는 시원한 맥주가 그렇게 인기가 많다던데···, 조건은 업계 최고로···, 앞으로 함께할 동지로서···."

칸나가 작게 발버둥 쳤지만, 해나는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칸나의 귀에 속삭였다.

둘이 나름 잘 지낼 듯했다.

나는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고, 머리를 울리는 시원함에 다시금 감탄했다.

역시, 출근 전에 마시는 맥주만큼 맛있는 게 없었다.

***

"아, 조장님."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베르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통속에 있던 놈들이 소리쳤던 것처럼 긁힌 정도였는지, 생각보다 빠른 복귀였다.

"어. 베르만, 용병한테 줘 터졌다며."

"그게 무슨···! 그냥 수가 딸려서 그런 겁니다."

베르만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줘 터진 거지. 맞고 다니다니. 하긴, 요즘 훈련을 너무 안 하기는 했지. 애들을 한번 모아서, 특별 훈련을···."

"아로오오오온!!!"

"조장님. 대장님이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에 베르만이 냉큼 내 말을 잘랐다.

"아무튼, 조만간 한번 모아다가 훈련을 시켜야···."

"로오오오온!"

"대장님, 숨넘어갑니다."

그에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양반은 왜 또 난리인지, 조만간 애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2층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평상복 차림의 대장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사람 모양으로 깎인 나무 걸이가 있었는데, 거기에 갑옷이랑 검이 걸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검까지 걸어두는 건···.'

외성 경비대장이라는 작자가 비무장으로 태평히 앉아 있는 꼴에 어이가 없었다.

"예, 아론입니다."

"내성에서 너를 찾던데,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눈 아래 살을 파르르- 떨며 대장이 물었다.

"아, 사고가 아니라, 어제 수배범을 잡아서 내성으로 보냈는데, 그것 때문일 겁니다."

"그으···래? 확실하지? 또 사고 친 거 아니지? 일단, 때려눕히고, 아차 싶어서 대충 누명 씌운 거 아니지?"

"···예."

문득, 이 새끼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외성 경비대에서 가장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모두가 나를 뽑을 텐데.

"역시 우리 아론 조장. 내가 아주 신임하고 있다니까."

대장이 금세 표정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지 않았기에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혔고, 그에 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내성 쪽에서 자네를 찾는다니까 근무 나가기 전에 갔다 오게."

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만을 먼저 보내고, 내성 쪽으로 향했다. 내성 성문 앞에는 사생아 제곱 제이스와 처음 보는 놈이 서 있었다.

"정지. 신분과 용건을 밝혀주십쇼."

어딘지 표정이 굳은 녀석이 내게 창을 겨누며 물었다. 그래도 전처럼 소리를 빽! 지르던 놈보다는 나았다.

"어이- 제이스."

제이스는 나를 무시할 생각인지, 안 보이는 척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입이 간지러웠다.

"창문 밖으로 똥 뿌리던 여인이랑은 잘 돼 가나?"

"···똥 뿌리는 여인이라니! 엠마다!"

반응은 바로 터져 나왔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제이스가 언성을 높였다. 역시, 언제든 반응이 참 맛있는 놈이었다.

"아하, 그래 창문 밖으로 똥 뿌리는 엠마. 아무튼, 잘 돼 가나?"

"엠마가 창문 밖으로 뿌렸던 건, 변소가 너무 멀기도 하고, 대부분 그렇게 하기 때문···. 아니, 내가 왜 평민 놈에게 설명을···."

제이스가 숨도 쉬지 않고 길게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창문 밖으로 똥을 뿌리는 게 미개한 행동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똥을 뿌리는 여인과 제이스가 결혼한다면, 그들의 자식들, 사생아 세제곱들은 창문 밖으로 똥을 뿌리지 않을 테니.

"아무튼, 잘 돼 간다니 다행이군."

"···신경 꺼라."

"음."

제이스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자, 내게 창을 겨눴던 녀석이 슬쩍 창을 치웠다.

"네 놈이 온 것을 보니, 수배범들을 잡았다는 경비대원이 너인가 보군."

"그렇지. 심지어 퇴근 이후에 잡았다고. 내가 이 캐서딕 성을 위해 얼마나···."

"들어가서 별채로 가면 된다. 이번 건도 노바 담당이니."

"왜, 또 그 여자가···."

삐쭉 입꼬리를 올리는 제이스의 모습이 퍽 얄미워 손이 근질거렸지만, 여기는 주먹을 휘두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에 대충 손을 저은 다음 내성으로 들어갔다.

후우···.

저번에도 그랬지만, 노바는 캐서딕 성에서 제일 성질 사나운 여인이라,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두드리는 리듬을 정확하게 맞춰, 내가 얼마나 정중한지 노크 소리로 피력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저번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안심하며 문을 슬쩍 밀어서 열었다. 저번처럼 생생한 오렌지 머리를 질끈 묶은 노바가 누런 종이 가득 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노바는 깃털 펜을 멈추지 않으며 눈만 슬쩍 올려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얼굴을 구겼다.

"또 너야?"

"크흠···."

노바의 반응이 저번과 같은 듯한 느낌이 들어, 슬쩍 헛기침했다.

"하긴, 캐서딕 성의 망나니 아론이 아니라면, 외성 경비대에서 놈들을 잡을 만한 놈이 없지. 근데 그 실력으로 왜 외성 경비대 조장이나 하고 있지? 내성 경비대 쪽으로··· 아니야, 저 망나니 놈이 내성에서 사고라도 치면 감당할 수 없어."

중얼거리던 노바가 깃털 펜으로 제 머리를 슬쩍 긁었다. 그래도 전처럼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진 않았다.

"좋은 아침이군. 오렌지."

"내가 왜 오렌··· 아니, 말을 말자. 너랑 말해봤자 내 머리만 아프니까."

"좋은 아침이군. 아름다운 오렌지."

"···앞에 '아름다운'을 붙인다고 오렌지가 칭찬이 되진 않아. 이걸 내가 왜 설명을··· 아무튼, 용건만 말할게. 네가 잡아서 우리에게 넘긴 놈들은 도시 카르잔의 삼대 조직 중 하나인 '고독한 늑대' 쪽 놈들이야. 원래도 현상금이 붙어 있던 놈들이지만, 귀족의 자제를 살해한 죄로 그 금액이 배가 됐지."

쉬지 않고 쏘아 대듯 말하던 노바가 길게 숨을 고르며,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주름 하나 없는 노바의 목이 꿀렁이며 움직였다.

'물 먹는 오렌지.'

순간, 떠오른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노바의 사나운 눈초리에 애써 참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물을 마시던 노바가 컵을 내려놓고 예의 그 사나운 얼굴로 돌아왔다.

"마침, 영주님이 카르잔 쪽으로 줄을 찾던 상황이라, 네가 잡은 놈들은 꽤 값진 선물이지."

"···크흠."

"웬만하면 내 앞에서는 무표정을 유지해줄래? 나 아직 점심 안 먹었거든."

"응?"

"너처럼 흉악하게 생긴 놈이 칭찬받았다고 입꼬리 씰룩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뚝 떨어진다고."

그 쏘아 대는 말에 나는 더 활짝 웃었고, 그에 나를 노려보던 노바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다 자존심 상했는지, 다시 예의 그 싹수없는 얼굴로 돌아왔지만, 내가 콧구멍을 키우자, 노바는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웃었다.

"풋··· 아무튼, 영주님의 전언을 전해줄게."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됐어.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들어. '고생했노라. 그대 덕분에 캐서딕 성이··· 어쩌고저쩌고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노라.' 끝."

누런 종이 사이에 유독 하얀 종이를 꺼낸 노바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읽어내려가다가, 대충 말끝을 흐렸다.

"응?"

"수고 많았고 고맙대. 앞으로도 이렇게 캐서딕 성을 지키라고 하시네."

"맨입으로? 이거 완전 개새끼···."

"야이! 미친 새끼야! 그런 건 네 방이나, 그 무식한 경비대 놈들이랑 해! 왜 내 사무실에서 지랄이야!"

내가 작게 욕을 내뱉자, 깜짝 놀란 노바가 벌떡 일어나더니, 까치발을 하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면서 중심을 놓쳤는지, 내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쿵. 작게 소리가 났고, 노바가 부딪힌 이마를 손바닥으로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예의 그 짜증이 다시 가득했다.

"뭐,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

"닥쳐. 닥쳐 제발. 닥치라고. 그리고 말 좀 끝까지 들어. 아무튼, 영주님이 네 노고를 치하하셨고, 놈들에게 걸린 현상금은 따로, 네게 빼줄게. 어차피 영주는 돈이 썩어 넘치고, 현상금이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노바, 너는 정말 아름답고 현명한 오렌지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고 오렌지가 칭찬이 되진 않아."

"아름답고 현명하면서 똑똑한 오렌지."

"풋· ·아무튼, 현상금이 나오면 내가 따로 한 번 더 부를게. 그리고 가는 김에 사형 집행인 좀 불러줘. 수는 여섯이라고 전해주고."

"달루스?"

"달루스든, 딜루스든, 캐서딕 성에 사형 집행인은 한 명밖에 없잖아."

다시 예의 그 짜증 내는 오렌지로 돌아온 노바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깃털 펜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방을 나섰다.

***

제국에서 사형 집행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농민들의 노동력이 영주의 재산으로 분류되는 시기였기에, 그 목을 치기 위해서는 제국의 사형 집행인 자격이 있거나, 대대로 사형 집행인 가문이거나, 둘 중 하나가 필요했다.

그리고 캐서딕 성의 사형 집행인 달루스는 후자였다. 중세 놈들은 사형 집행은 하나의 스포츠처럼 축제까지 벌이며 좋아하면서도, 정작 그를 실행하는 사형 집행인은 불행하다며 기피 했다. 그에 달루스는 캐서딕 성의 밖에 있는 외딴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똑똑.

"달루스."

오두막의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쿵쿵. 안쪽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잠시 뒤에 문이 열렸고 붉은 오버코트로 목부터 허벅지까지 가린 퀭한 안색의 남자가 나왔다. 키가 나보다 살짝 더 큰 달루스였다. 달루스 특유의 옅은 약재 냄새가 풍겼다.

"오랜만이군. 아론."

"그래, 달루스. 잘 지냈나?"

나를 발견한 달루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으며 나도 따라 웃었다.

중세 놈들은 사형 집행인이 불운하고, 천하다며 손가락질했지만, 달루스는 내가 본 이들 중 가장 생각이 깊고 신사적이었다.

"일거리가 좀 생겼나 보군."

"이번에는 여섯 명이야. 제법 돈 좀 만지겠구만."

슬쩍 농을 던지니, 달루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겠나?"

"그러지."

쿵쿵거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달루스를 따라갔다. 물먹은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두막 안은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탄 장작이 가득한 벽난로도 있었고, 그 앞에 위에 동물 가죽을 깐 기다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다양한 사형 도구들이 전시하듯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여름 휴가를 보내는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있게. 따뜻한 스튜라도 내오지."

작게 중얼거리듯 말한 달루스가 주방 쪽으로 향했고, 나는 의자에 앉았다. 달루스가 직접 자기 덩치에 맞게 만들었는지, 내가 앉았는데도 제법 자리가 남았다.

"아! 아론!"

그때,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달루스와 똑 닮아 눈이 움푹 들어간 아이 하나가 쪼르르 뛰어 내려왔다.

"오랜만이다. 테드."

"와-아! 아론 갑옷이 엄청 멋있어졌어요!!"

내게 달려온 테드가 갑옷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연신 '오오···' 거리며 감탄했다. 그에 나는 슬쩍 자세를 취해줬고, 테드는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테드. 예의를 지켜야지."

양손에 나무 그릇을 들고 돌아온 달루스가 타박했다. 테드가 찔끔 놀라며, 내 뒤로 숨었다.

"고맙네."

달루스가 내민 그릇을 받았다. 그릇 안에는 건더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달루스는 몇 안 되는 매일 씻는 놈이었으므로, 그의 요리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 손재주가 좋아 요리도 곧잘 했기에, 가끔 얻어먹으러 오두막을 찾았다.

"여섯이라 했나? 이번에는 많군."

"다른 도시에서 온 범죄자 놈들이라서. 수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렇지. 이번에는 테드도 데리고 가야겠군."

"벌써 그럴 나이가 됐나."

"···히익."

테드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달루스는 그를 보지 않고 뜨거운 스튜를 벌컥벌컥 마셨다.

농부의 아들이면, 농부가 되고, 사형 집행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사형 집행인이 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 거센 물결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대부분 그 노력에 힘을 다 쓰고 굶어 죽기 마련이었다.

'대우가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굶진 않으니까.'

사람들에게 배척받는다고 한들, 사형 집행인은 돈도 꽤 만질 수 있고, 수요도 꾸준히 있는 직업이었다.

사형수의 목을 한 번에 자르지 못해서, 덜렁거리며 피가 스프링클러처럼 뿌려지는 끔찍한 사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원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평생직장이기도 했다.

"이건 상대의 목이 두꺼울 때···."

벽에 전시된 살벌한 도구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달루스와 그를 듣는 테드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배를 곯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좋은 직업이었다.

사형 집행인은 사람의 목을 베어 그 피의 값으로 먹고산다는 점에서 용병과 비슷했지만, 자기 몸에는 칼 들어올 일이 없었으니, 명백히 용병보다 좋은 직업이었다.

'이 소식이 들리면 성에서 난리가 나겠네.'

사형 집행이 있을 때면, 광장은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으로 가득 찼다. 거기에 이번에는 그 수가 여섯이었으니, 더 몰릴 게 분명했다.

마치,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성에 있는 모든 이가 가족의 손을 잡고 나와서, 빵과 맥주를 나눠 먹으며 '사람 목 뎅겅 쇼 x6'을 구경할 게 분명했다.

'쯧, 미개한 중세 놈들.'

그를 통제할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형 집행인 달루스

'수가 너무 많으니, 단두대로 하는 게 낫겠군.'

캐서딕 성의 사형 집행인 달루스는 날이 커다란 도끼를 들었다가, 생각을 바꾸고 내려놨다.

단두대보다는, 도끼로 직접 목을 날리는 게 반응이 더 좋았지만, 여섯 명 모두를 도끼로 자르려다가는 중간에 실수가 발생할 수 있었다.

단두대는 저번에 날을 갈아뒀기 때문에, 여섯이라도 별문제 없이 끝마칠 수 있으리라.

달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끼를 등 뒤에 맸다. 쓰지 않을 거지만, 성에 들어갈 때는 도끼를 챙겨야 쓸데없는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나이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

"저도 운동하면 아론처럼 무식하게 커질 수 있어요?"

"무식하다니···. 이게 얼마나 공학적으로 설계된 근육질 몸인데."

오랜만에 만난 아론에 테드가 잔뜩 신나있었다. 그에 달루스는 아들이 걱정됐다.

아직 앳된 그의 아들이 이번에 같이 성에 들어가면 쏟아질 모진 말들을 견딜 수 있을지 염려됐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나도 저 나이 때 시작했으니.'

달루스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가, 거기서 느껴지는 텁텁한 맛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준비 끝났네."

"그래? 좀 더 여유롭게 해도 되는데."

"아아악! 아론! 내려줘요! 어지러워!"

아론은 테드를 위로 들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테드가 싫은 척 소리쳤지만, 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퍽 재밌는 듯했다.

쩝하며 입맛을 다신 아론이 테드를 내려놨고, 그에 테드가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꺄르르- 웃었다.

달루스는 밖으로 나와, 창고 안쪽에 넣어뒀던 수레를 끌고 나왔다. 천이 덮어진 수레에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한, 이런저런 도구들이 있었다.

인간의 몸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사형을 집행하고 나면, 시체의 처리도 달루스가 맡았는데, 피는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고, 피부 같은 경우는 치료 목적으로 찾는 이들이 많았다.

인간은 돼지와 비슷하게 버릴 곳이 별로 없었다.

'여섯이라···.'

수레의 크기가 부족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번 왕복하면 될 것이다. 달루스는 말을 끌고 와 수레에 묶었다.

오래전에 샀던 말이기 때문에, 가죽은 생기가 없고, 눈이 탁했다. 달루스는 어딘지 지쳐 보이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달랬다.

"네가 더는 뛰지 못하게 되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줄 테니, 조금만 부탁하마."

그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말이 기운 없는 투레질을 했다.

"이거 수레에 타기 미안할 정도로 늙은 말이군."

"번개에요! 번개!"

아론의 말에 테드가 손을 번쩍 들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달루스는 사형 집행인이 되고 나서,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아들, 테드도 도망친 아내가 지어준 이름이지, 그가 붙인 것이 아니었다.

"아하하하! 아론은 못 탄다니까요! 걸어와요, 아론!"

"달루스! 돈도 많이 버는데, 기왕이면 좋은 수레로 사지, 이게 뭔가. 골병든 말에다가 사람 하나 못 눕는 수레라니."

아론이 수레에 슬쩍 올라타려다, 자리가 부족하여 다시 내려갔다. 그런 아론을 손가락질하며 방긋 웃는 아들의 모습에, 달루스는 예전 처음으로 아비를 따라나선 날, 아비의 눈썹이 왜 구겨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골골대는 말에게 부드럽게 고삐를 씌우고 천천히 당겼다.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말이 움직였지만, 움직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돈 좀 팍팍 써야지. 달루스 너는 너무 궁상맞게 산다니까."

"···그런가."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달루스는 꽤 많을 이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었기에, 꽤 많은 은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아내였던 이가 숨겨뒀던 주머니를 들고 날랐을 때도 화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는 최대한 돈을 아꼈다.

'테드가 이 일을 하기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아론의 팔뚝을 쿡쿡 찌르며 환하게 웃는 그의 아들을 보며, 말을 삼켰다. 이 은화들은 그의 아들에게 줄 선택권이었다.

이내, 성문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이들이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서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알겠네."

"아론! 이따가 봐요!"

아론이 성문 쪽으로 사라졌고, 달루스는 오버코트의 깃을 고쳐 세우며 모자를 깊게 눌렀다. 그의 아들은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고개를 돌렸다.

"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잠시 뒤, 시끄러운 소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그에 방금까지 방긋 웃고 있던 테드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서 피비린내가 나더니만···."

"그래도 저 천한 놈이 서 있는 것을 보니, 곧 사형이 열리나 보군."

"쯧, 따로 개구멍이라도 만들어서 거기로 다니도록 하지···."

주변에서 이런저런 뾰족한 말들이 날아와 꽂혔다.

달루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테드의 덜덜 떨리는 손을 밀어냈다. 익숙해져야 했다. 이 길을 선택한다면 평생 받아야 할 시선이었다. 갈 곳 잃은 테드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주변의 적나라하고 거친 말들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어떤 이는 다가와서 대놓고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제 아비가 남에게 괄시와 조롱을 받는 건, 아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달루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오버코트의 옷깃을 세웠다.

"감히, 천한 놈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계속된 달루스의 무시에 화가 났는지, 사내가 대뜸 멱살을 잡았다. 그에 테드가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이어질 일을 알고 있었지만, 달루스는 말리지 않았다.

그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달루스는 그저 모자로 제 눈을 가렸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천한 놈이!"

테드가 바닥에 밀려 쓰러졌다.

"쯧, 이 새끼가 더러운 손으로 어디를 만··· 응?"

"더러운 손?"

"아··· 아론?! 히이이익!"

그때, 사내의 입에서 아론이란 이름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그에 달루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론에게 붙잡힌 사내의 안색이 단번에 푸르죽죽해졌다. 아론의 입가에 그어진 긴 자상이 흉하게 구겨졌다.

달루스는 그 모습에 아론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달루스는 아론이 사형 집행인인 줄 알았다. 그에게서는 사형 집행인 특유의 짙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으므로.

"지금 나한테 더러운 손이라고."

"그··· 내 말은 아론한테 한 게 아니라···."

사내는 금방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덜덜 떨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더러운 손이라고?"

"그게 아니라, 아론을 말한 게 아니고···."

"더러운 손이라고?"

"그게···."

"음···, 더러운 손이라고?"

아론은 연신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는데, 그 손바닥이 점점 사내의 목에 가까워졌다.

그에 질겁한 사내가 황급히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서 아론의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자 아론이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깨···깨끗한 손이지! 아론은 우리 캐서딕 성을 지키는 참된 경비 조장인데 말이야! 하···하하."

"그렇지?"

"어··· 어. 물론이지."

아론 딴에는 활짝 웃는 듯했지만, 얼굴에 어지러이 그려진 상처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에 어색한 목소리로 크게 웃은 사내가 급한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사형 집행 때는 좋다고 나올 녀석들이··· 하여튼 미개하고 무식한 놈들. 쯧."

아론이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하며, 투덜거렸다.

캐서딕 성의 망나니, 아론이 누구를 무식하다고 하는 모습에 달루스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조장 또 어디 가십니까."

그때, 검문하던 수염 많은 이가 다가와 툴툴거렸다.

"업무라니까. 노바가 시킨 거라고. 나도 여기 가만히 서서 애들 돈이나 뜯고 싶지."

"진짜 맞습니까? 술 냄새나는 거 같은데."

"아, 이건 아까 아침에 마신 거."

"왜 출근 전에 술을···."

"됐고. 금방 온다니까."

잠시 성문에서 수염이 난 사내와 투덕거리는 아론을 기다렸다가, 같이 성문을 통과했다.

"아, 테드.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고."

"고···마워요. 아론."

아론이 사내에서 받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테드의 손에 쥐여줬다. 그에 테드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아론."

"야, 아들 줬잖아. 그리고 네가 나보다 잘 번다고."

달루스의 부름에 아론이 질색하며 대답했다. 달루스는 아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잘해주지?"

평생 성 밖의 오두막에서 살았던 달루스는 돌려 말할 말재주가 없었다.

돈으로 사 왔던 여인이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어미였던 여인도 참지 못하고 떠난 이가 달루스였다.

"···뭔 개소리를."

아론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이마에 길게 난 흉터가 시선을 끌었다. 깊지만 피곤함이 가득해 보이는 눈이 달루스를 응시했다.

"나중에 부탁 하나 하려고."

"부탁?"

"어. 혹시 나중에 내가 단두대에 오르게 되면, 깔끔하게 끝내 달라고. 단두대 날도 아주 날카롭게 갈아서 말이야."

아론의 뜬금없는 말에, 달루스는 허··· 하고 웃었다.

비록 개차반, 망나니라고 불린다고 해도, 아론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넘쳤다. 달루스는 그런 아론이 단두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대충 둘러댄 말인지, 진심이 섞인 말인지 모르겠지만, 부탁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달루스가 자신 있는 일이었으니.

"그러지. 깔끔하게."

"그래, 그럼 됐어."

"저···저도! 나중에 아론 목을 벨 일이 있다면 깔끔하게 해줄게요!"

"그래··· 그거··· 참··· 고맙다."

금세 다시 신난 테드가 손을 들고 외쳤고, 찜찜한 얼굴이 된 아론이 작게 '호로 새끼'라 중얼거렸다.

그에 달루스는 정말 오랜만에 웃었다.

***

"들었어? 내일은 자그마치 6명의 목을 한 번에 벤다더군! 캐서딕 성이 지어지고 처음 있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게 분명해!"

"광장에 사람이 미어터질 텐데, 미리 자리를 맡아둬야 하는 거 아닌가? 저번 사형 때는 늦어서 목이 뒹구는 걸 못 봤다니까!"

"목이 뒹굴어서, 상자에 쏙 하고 들어가는 게, 최고 볼거리 아닌가! 그걸 못 봤다니, 참 안타깝군."

"염병하네, 진짜."

작은 성이라 사형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졌다.

무슨 축제라도 열리는 것처럼, 거리에는 사람들이 기대감에 가득 차서 활짝 웃으며 뛰어다녔고, 아녀자들은 내일 있을 사형 집행을 구경하며 먹을 음식을 떠들었다.

"내일 비번 없답니다. 모두 당겨서 주변 정리시킨답니다."

잔뜩 심통 난 베르만이 투덜거렸다.

"하필, 비번일 때···."

"조장님은 오늘도 비번 아니었습니까?"

옹졸한 베르만이 대뜸, 내 말을 자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니라니까. 잠깐 혼자 있었다고 삐지다니. 그러니까 용병한테 줘 터지고 다니지. 모름지기 사내의 가슴이 넓어야, 주먹도 강해지는 법이야."

"조금 혼자 있었다니! 조장님은 경비대 본부에서 배 긁으면서, 퍼져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안 깨웠으면 거기서 내일까지 잤을 거면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니까."

"말씀해보십쇼. 그 이유 한 번 들어봅시다."

"그게··· 어휴··· 아니다."

"거, 이제는 지어내는 성의도 없으신 겁니까?"

베르만의 긴 한숨에 못내 억울했다.

아까 오는 길에 잠깐, 숙소에 들렸고, 나를 보자마자 칸나가 내민 살얼음 동동 맥주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아이의 순정이 담긴 선물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그때, 사형 집행 소식을 들은 해나가 내일 광장에서 팔 음식 좀 봐달라고 부탁했고, 그를 먹어보니, 또 짜고 기름져서 어쩔 수 없이 살얼음 동동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음식과 맥주를 한가득 싸서 본부로 돌아갔는데, 때마침 돼지 대장과 마주쳤다.

본디, 상사에게 잘 보여야 아랫것들이 편해지는 법이라, 어쩔 수 없이 돼지 대장과 음식과 술을 나누며 우애를 돈독히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노고도 모르고, 그 잠깐 혼자 검문했다고 삐지다니.

"옹졸한 놈. 내가 다음에 대신 하루 해줄게."

"그럼 됐습니다. 뭐, 오늘 딱히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재빨리 안색이 바뀌는 베르만의 모습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이미 약속했기에 무르지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옹졸하니, 용병에게 줘 터지고 다니지."

"줘 터지지 않았습니다. 쪽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두 명까지는 제가 이겼습니다. 뒤통수친 비열한 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제대로 붙었으면···."

"여, 조장. 소식 들었습니까?"

"조장, 고생하셨습니다."

그때, 투덜거리는 베르만 옆으로 뱀눈 풀과 생선빵 브릭이 나타났다.

"별일 없었냐."

"예, 오늘은 딱히 뭐 없었습니다. 다 내일 준비한다고 바빠서."

뱀눈 풀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긁으며 대답했다. 녀석은 별다른 일이 없어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조장, 내일 여섯 명을 사형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우리 비번도 밀렸다던데."

브릭이 어울리지 않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밀린 게 아니라 사라진 거지."

"조장, 브릭이 아까부터 계속 아쉬워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별말도 안 하던 놈이···."

뱀눈 풀이 슬쩍 곁눈질로 브릭을 가리켰다. 그에 브릭이 헛기침했는데, 그 모습이 못내 어색했다.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설마, 샤롯?"

"뭡니까? 샤롯은 여급 아닙니까? 무슨 일 있었습니까? 뭐야?"

베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물었다. 베르만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이 불안한 듯 대답을 재촉했다.

"그··· 아까 순찰 돌다가···, 샤롯을 만났는데··· 내일 사형 집행 같이 보자고···."

브릭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고 볼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오··· 사형 집행을 같이 보러 가자고?! 샤롯이 네게 완전 푹 빠졌구먼."

"브릭 너까지···. 빌어먹을."

뱀눈 풀이 잔뜩 신나서 저열한 손짓을 했고, 베르만은 배신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형 집행을 같이 보러 가자는 게, 푹 빠졌다는 이야기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개한 데이트 방식이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본디, 하나가 죽으면 하나를 새로 낳아야 균형이란 게 맞지 않겠습니까."

뱀눈 풀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양손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저울질하듯 움직이며 대답했다.

"그··· 그런 겁니까?! 그··· 그··· 그랬다니! 어떻게 합니까! 저 승낙했는데! 으악! 균형이라니!"

브릭이 갑자기 소리를 빽! 하고 지르더니, 양팔을 휘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것을 보니, 벌써 머릿속으로 그 균형이란 걸 맞추고 있는 듯했다.

"젠장, 왜 나한테는 아무도···. 분명히 수염을 기르면 인기가 많아질 거라고···."

베르만이 결투에서 패배한 기사처럼, 브릭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사형 집행을 같이 보러 가자는 게, 데이트 신청이라니···. 미개한 놈들.'

사람 목이 뎅겅 떨어지는 것을 보며 하하 호호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장, 맥주 좀 가져다 두면 짭짤할 거 같은데, 같이 하시겠습니까? 동네 놈 하나 데려다가, 시키면 되니까."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브릭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제안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좋지. 근데 맥주가 아니라, 적포도주로. 그게 색이 비슷하니까."

"오···, 역시 조장입니다. 그럼 제가 인근 술집에서 미리 좀 땡겨 두겠습니다."

내 대답에 뱀눈 풀이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이 묘하게 기분 나빴다.

"적포도주에는 우리 어머니 생선 빵이 제격인데, 몇 개 가져다드립니까? 어머니가 조장이라면 돈 안 받아도···."

"닥쳐, 이 개새끼야!"

"그래, 브릭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희 어머니 요리는 똥이야. 아니, 오히려 똥이 더 맛있을 수도 있겠군."

브릭의 끔찍한 제안에 거친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직설적인 뱀눈 풀은 단순히 닥치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예? 왜 그 맛있는 걸 다들 싫어하는지 모르겠···."

브릭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 샤롯 만날 때는 절대 생선 빵 가져가지 마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브릭에게 말했다.

"그···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브릭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내일 늦지 말고."

"예."

다들 어딘가 힘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적포도주는 광장에서 그··· 맨날 오렌지만 팔던 놈 있지? 그쪽에다가 둬. 거기가 정면이더라."

"적포도주와 정면 자리라··· 조장도 참 대단합니다."

뱀눈 풀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베르만과 브릭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쳐다봐."

그 시선이 묘하게 거슬려서 쏘아붙이니, 다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씻고 나오자, 칸나가 여전히 덜덜 떠는 손으로 살얼음 동동 맥주를 내밀었다.

눈치까지 빠른 미니 냉장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맥주잔을 받아서 홀의 빈자리에 앉았다.

내일 사형 집행 때문인지, 홀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론, 이것 좀 봐줘요!"

그때, 주방 쪽에서 해나가 큼지막한 나무 쟁반을 낑낑대면서 들고 나왔다. 그에 칸나가 달려가서 나무 쟁반을 같이 받쳤다.

'얘는 빵을 무슨···.'

나무 쟁반에는 이것저것 듬뿍 들어간 빵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마, 내일 사형 집행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듯했다.

"간편하게 들고 먹을 수 있는 게 좋다던 아론 말처럼 빵으로 준비했어요. 어때요?"

내 앞에 나무 쟁반을 내려둔 해나가 칸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칸나가 머리를 빼려고 했지만, 해나는 칸나의 어깨를 잡아 못 도망가게 하고는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소풍날, 김밥 단체 주문도 아니고···.'

잔뜩 쌓인 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빵만 잔뜩 쌓여 있어서 그런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 빨간 소스를 뿌리면 좋을 거 같은데."

"빨간··· 소스요?"

내 말에 어쩐지 질겁한 얼굴이 된 해나가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식욕을 자극할 테니까."

"그··· 그렇긴 하겠네요···. 정말 아론은··· 음··· 대단하네요."

해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묘한 감탄을 했다.

"술도 맥주 말고, 적포도주로 하고."

문득, 풀과 이야기했던 게 떠올라, 말을 덧붙였다.

그에 갑자기 칸나가 해나 뒤로 숨었고, 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 그럴게요···. 맥주는 무거우니까! 적포도주는 향도 훨씬 좋고! 맞죠? 아니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알았으니까!"

내가 대답하려고 하자, 해나가 대뜸 고개를 젓고 말을 빨리하며 내 말을 막았다.

"아무튼! 아론은 내일 어디 쪽에서 근무해요? 먹을 거랑 마실 거 챙겨서 거기로 갈게요."

어쩐지 얼굴이 살짝 붉어진 해나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얘랑 같이!"

그러자 해나가 뒤에 숨은 칸나를 끄집어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미니 냉장고를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집행

광고란 연상시키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영화에서 햄버거가 나오면 극장을 나오고 나서 햄버거가 땡긴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사형 집행을 공연처럼 보러 모인 이놈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싶어 할까? 당연히, 적포도주와 붉은 소스가 뿌려진 빵이었다.

"일단, 조장 말이라 가지고 오긴 했는데, 적포도주··· 이거 맞습니까?"

뱀눈 풀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물었다. 풀은 적포도주가 담긴 나무통 하나를 통째로 가져왔다.

"맞다니까. 저쪽에 두고. 어이- 옆으로 좀 가봐."

"예."

매일 광장 같은 자리에서 오렌지를 파는 놈이 가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가판 하나는 더 둘 공간이 생겼다.

정확히 단두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당연히 이쪽에 몰릴 게 분명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단두대가 잘 보이는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가장 잘 보이는 자리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좀 더 높이 들어! 균형 안 맞는다!"

"예! 이쪽 말입니까?"

"어! 그래!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고!"

스카와 빵모자를 쓴 떨거지들이 모여서, 단두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굵은 나무판자를 이어 단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거 진짜 너무 무거운 거 아닙니까?! 나무 맞습니까?"

"잔말 말고, 그냥 들어! 균형 안 맞잖아. 새끼야!"

그중 다른 것보다 색이 유독 짙고 두꺼운 나무판자를 다섯 명이 들고 있었는데, 다들 죽을 것처럼 얼굴을 구기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영주 쪽도 보러올 줄은 몰랐는데.'

마지막으로 치러진 사형 집행이 작년이었는데, 그때 영주는 참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주 쪽도 참여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그 때문에 목공소의 빵모자 놈들이 급하게 높은 단상을 만들고 있었다.

스카 녀석이 자신은 낮에는 앞에 나서지 않는다며 개소리를 했지만, 눈에 그림자를 만들어주니, 누구보다 열심히 망치를 휘둘렀다.

아무리 봐도 스카 녀석은 공구를 다루는 쪽에 특화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녀석이 뺀질나게 목공소를 안 나가는데도, 잘리지 않는 이유인 듯했다.

"조장님, 오시랍니다."

"수염 잘랐냐?"

"크흠···. 대장님이 빨리 오시랍니다."

어제와 달리, 수염을 깔끔하게 민 베르만이 내 시선을 피했다. 수염이 나지 않는 브릭이 샤롯에게 관심을 받았다는 게 베르만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다녀오십쇼. 이쪽은 제가 마무리 해두겠습니다."

뱀눈 풀이 가져온 나무통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퉁퉁. 안이 가득 찬 소리가 들렸다.

"켈이랑 쿼터 오면 이따, 나한테 뒤졌다고 전해줘."

둘은 아직도 출근하지 않았다. 켈은 로사의 품에, 쿼터는 아직 침대의 품에 있을 게 분명했다.

"예. 꼭 전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베르만에게 손을 젓고, 광장의 한쪽에 세워진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은 색이 다 빠진 옅은 초록색이었는데, 그 밑이 진흙에 푹 파묻혀서, 갈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들어가면 물 젖은 천 냄새가 물씬 풍길 거 같은 천막이었다.

살짝 감겨 있는 한쪽을 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 아론 왔구먼."

예의 그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대장이 볼살을 푸들거리며 인사했다. 전보다 살이 더 쪘는지, 갑옷의 이음새로 삐져나온 살이 내 기분을 더럽게 했다.

"예, 대장."

나도 대장을 따라 웃었다. 그러자 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예의 얼굴로 돌아왔다.

대장 옆쪽으로 선 놈들이 내게 고개를 작게 숙였다. 각 조의 조장들이었다. 교대 근무이기 때문에 평소 만날 일이 별로 없었던 얼굴이 한군데 모여 있었다.

성에 있는 다른 놈들에게는 축제였지만, 우리에게는 수당 없는 초과 근무였기에, 다들 얼굴에 짜증이 듬뿍 담겨 있었다.

"다 왔나?"

대장이 어리숙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에 누군가가 작게 '갑옷을 못 입는 거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숫자 6도 못 세는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를 들었는지, 대장의 눈이 미묘하게 부르르- 떨렸지만, 대장은 듣지 못한 척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사형 집행이 있는 날이다. 그 수가 무려 6명인 대행사라, 영주님도 참관하신다고 하셨으니, 다들 긴장해서 실수하지 말고. 이런 날에 잘못 걸리면 끝이야."

"예."

1조 조장, 외눈의 블란트가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그저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외성 경비대는 미개한 중세 놈들 상대로 검문, 순찰, 치안 유지 등 자질구레한 업무들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성에서 제일 성격 더러운 놈들을 모아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은 그런 놈들을 통제하는 조장인지라, 성격이 더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래, 나는 우리 외성 경비대를 믿는다. 다들 내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알아서 잘하자."

조장들이 대답하건 말건, 대장은 표정의 변화 없이 제 할 말만을 이어나갔다. 그에 블란트만 대답했고, 나머지는 고개만 까닥거렸다.

"언제 우리를 믿었다고. 틈만 나면 쪼아대면서."

2조의 조장, 미친개 차트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그에 대장의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가 내려갔지만, 다시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지역을 나누겠다. 아니지, 일단 그 전에 사형 집행인 쪽에서 인원을 요청했는데, 자원할 사람 있나?"

대장의 물음에 다들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블란트도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외면했다. 사형 집행인 관련 일은 여기 모인 개차반들조차 꺼렸다.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손을 슬쩍 들었다.

"역시! 아론! 내 요즘 아론을 가장 신임하고 있는 거 알지?"

어제 나눠 먹은 음식과 맥주 덕분일까, 대장이 과하게 부담스러운 호의를 듬뿍 담아 말했다. 물론, 그 신임은 오줌 누듯 자연스럽게 빠질 게 뻔했다.

"예, ···뭐."

"그럼 아론은 사형 집행인 쪽으로 가봐. 단두대 아래에 있을 거네."

대장이 손을 저으면서 말했고, 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다른 조장들이 고개를 까닥 숙였고, 나는 삐쭉 입꼬리만 올렸다.

단두대는 사람 높이의 세 배 정도 되는 높이로 지어져 있었는데, 단두대 앞은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제일 가까이에는 영주 쪽 병사들이 무장한 상태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그 앞쪽으로는 아이와 손을 잡고 웃는 단란한 가족, 붉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는 풋풋한 커플, 모여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줌마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느 햇빛 좋은 날, 공원을 연상케 했다.

병사들이 나를 슬쩍 보고는, 길을 만들어줬다. 그를 지나쳐 단두대 뒤편으로 향했다.

단두대 뒤쪽에는 사형수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박스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그 앞에 달루스가 있었다. 달루스는 예의 그 붉은 오버코트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목을 날리기 딱 좋은 날씨군."

"···아론."

나를 돌아보는 달루스의 눈이 어딘지 평소보다 퀭했다.

"침대가 불편했나?"

"수레에서 잤거든."

달루스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대답에 습관적으로 수염을 긁었다.

'여관 놈들이 사형 집행인이라고 전부 거절했나 보군.'

내 일이 아닌데도, 괜히 짜증이 났다.

"개새끼들이 자네를 안 받아줬나 보군. 자네가 목을 날리는 걸 보려고, 저렇게 기다리면서 말이야."

"···비가 올 것 같군."

달루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맥락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따라 하늘을 봤는데,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화창했다.

누군가를 죽이기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보기에도, 비가 온다고 말하기에도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맑다가도 뜬금없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제국 동부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야겠군. 비를 맞으면 시체 값이 내려가니까 말이야."

다시 시선을 내린 달루스가 품속에서 태양이 그려진 물건을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신을 믿는 사형 집행관이라니. 역설적이지만, 우습게도 신앙심은 사형 집행관의 필수 덕목이었다.

"들어가서 사형수들을 인도해주겠나? 나는 단두대를 확인하고 있겠네."

"그래."

달루스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두대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하는 달루스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사형수들을 모아둔 곳으로 향했다.

무장한 병사 둘이 서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문을 열어줬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낮인데도 창문이 없어, 깜깜했다. 유일하게 켜진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는데, 곰팡이 핀 습한 냄새와 기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그때 봤던 녀석들이 굴비처럼 묶여 있었다. 다리와 손은 질 낮은 뭉툭한 쇠로 묶여 있었고, 그를 줄이 이어주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아버지가 지금까지 날린 목만 해도 백 개가 넘어가니까, 별문제 없이 한 번에 목을 날려주실 거에요!"

녀석들 앞에 호로 새··· 아니, 테드가 쪼그려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다만, 테드의 해맑은 얼굴과 다르게 입이 재갈로 막힌 사형수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테드를 찢어버릴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테드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붕붕 휘두르며 그대들의 목이 얼마나 멀리 날아갈지 설명하고 있었다.

"아, 아론! 오셨어요?"

"그래,"

들러붙는 테드를 밀어내고, 사형수들 앞에 서서 내려봤다.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전에 봤을 때보다, 몸 상태가 훨씬 엉망이었다.

눈에 가득했던 독기는 티끌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깊은 절망만이 가득했다.

"죽으러 갈 시간이다. 일어나."

읍읍··· 그들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발음이 죄다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다만, 뒤로 엉거주춤 물러나는 것을 보니, 곱게 따라올 것 같지 않았다.

"음··· 그래도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나을 텐데? 나는 좀 서툴러서 한 번에 목이 날아가지 않을 수도 있어. 내 장담하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검을 뽑자,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래도 세 번 안에는 잘라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퉤-, 손바닥에 침을 뱉어,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대로 검을 높게 들었고, 횃불에 비쳐 바닥에 길게 그려진 내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들의 눈이 흔들렸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읍!!"

내려치기 직전, 그들이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는지, 앞으로 엎어졌지만, 악착같이 다시 일어났다.

"그래. 원래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겨야 한다니까. 잘 생각했어."

바닥에서 기면서 펄쩍 뛰어 검을 찌르는 게 특기였던 놈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에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우는 것 같기도,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둘 다 상관없겠지만.

"머리 자르러 가자고. 물론, 무료라네."

나름 재치있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들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머쓱하여 볼을 긁적였다.

줄을 당기니, 녀석들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발이 묶여 폭이 좁은 탓에 꼼지락거리면서 따라오는 꼴이 못내 우스웠다.

"오! 이거 아론 아닌가!"

"블리안 사제···님?"

밖으로 놈들을 끌고 나오니, 흰 사제복을 입은 돼지 사제, 블리안이 앞에 있었다.

뜬금없는 등장에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나는 슬쩍 목을 내밀어, 금태양 목걸이를 보였다. 그러자 블리안의 굵직한 입술이 꼴 보기 싫은 호선을 그렸다.

"오··· 잘하고 다니는구만! 어떤 이들은 그걸 받으면 금이라고 팔기 바쁜데, 역시 아론은 신앙심이 깊군."

내 금목걸이를 발견한 블리안 사제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괜찮은 가격을 제시하는 마차꾼이 없었기에 팔지 않은 것이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따라 웃었다. 가슴에 악마의 손자국을 박아둔 상태로, 사제에게 신앙심이 깊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꽤 짜릿했다.

"에이- 어떤 지옥에 떨어질 놈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합니까! 캐서딕 성의 성자라 불리는 블리안 사제님이 주신 것을!"

"하하하! 자네, 나를 너무 금칠하는 것 아닌가!"

말과는 달리, 블리안은 입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웃었다. 그에 나도 따라 웃었고, 블리안은 더 크게 웃었다. 잠시 웃음벨 시간을 가진 뒤, 블리안 사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중 대부분은 성서에 관한 이야기라, 대충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둘러대며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블리안에게는 충분한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얼마나 떠들었을까, 뒤에 묶여 있던 놈들이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찾아왔다.

"이제, 준비하시랍니다."

병사는 사제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역시 신실한 아론과는 대화가 참 즐겁단 말이야."

"저도, 블리안 사제님과의 대화는 참 좋습니다. 사제의 교본이라 불리는 블리안 사제님 옆에만 있어도 영혼이 깊어지는 기분입니다."

헤벌쭉해진 블리안이 건네준 포션 하나를 품에 챙기며 따라 웃었다. 블리안은 칭찬으로 살살 긁어주면, 아이템을 주는 자판기 같은 사내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본래 사형하기 전에 사형수들에게 참회할 기회를 주고, 축복도 내리고 해준다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지. 흠···."

내 물음에 블리안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사형수들을 둘러보며 말끝을 흐렸다.

"영주님도 오셨습니다. 지금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 병사가 재촉했다.

"야, 너희 잘못했지? 그래, 곧 목이 날아갈 텐데, 반성 안 하면 어쩌겠어. 참회했답니다. 블리안 사제님."

"크흠··· 그렇군. 모쪼록 앞으로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내 말에 블리안이 눈을 잠깐 감더니,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다시 눈을 떴다. 그게 얼마나 짧았는지, 잠시 하품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읍읍···.

그에 사형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라 뭐라 떠들었지만, 입에 물린 재갈에 뭉개져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죽을 놈들의 말은 의미를 지니기 힘들었다.

"그럼 다음에는 회당에서 뵙겠습니다."

"하하, 나야 좋지! 내 특별히 아껴둔 포도주를 열겠네."

블리안과 인사를 나누고, 사형수들을 묶은 줄을 당겼다. 녀석들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멀어지는 블리안을 턱으로 가리키며, '읍읍···' 소리를 냈지만, 뭐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영주님 기다리신다잖아. 빨리 가자. 사람들도 너네 보려고 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니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줄을 당기니, 버티던 놈들이 질질 끌려왔고, 이내 단두대로 오르는 계단에 도착했다.

"고생했네."

계단에 있던, 달루스가 줄을 받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에 손을 저으니, 달루스가 사형수들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읍읍!!

팔짝 뛰어서 검을 찔러 넣던 놈이 나를 돌아보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나 재갈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어, 나도 다시 봐서 좋았다."

내가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읍!! 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달루스에게 끌려 올라갔다.

단두대가 있는 곳이 살짝 더 높았기 때문에, 광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성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모인 게 분명했다. 그들은 마치,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빛나는 눈으로 단두대를 올려보고 있었다.

'쯧, 미개한 놈들.'

작게 혀를 차면서 광장을 살폈다. 스카 놈들이 지은 단상에 영주 내외와 영애, 그리고 영주의 장자가 있었다. 영주는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영주의 아내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영애는 아무래도 영주 아내의 피를 짙게 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장자는 아비의 피를 받았는지, 뚱한 얼굴이었다.

그들 뒤로, 무장한 기사들이 셋 있었다. 그중 둘이 낯익었다.

'기사 벤, 기사 아델라, 나머지 하나는 기사 토익이겠군.'

벤은 영애 뒤에, 스치듯 봤던 여자 기사 아델라와 멋들어진 콧수염으로 유명한 기사 토익은 영주 뒤쪽에 있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단상 아래에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누구 하나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철통 방어였다.

'온 병력을 다 데리고 나왔네.'

그를 보며, 영주가 생각보다 조심성이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무엇이 두려운지, 기사를 전부 끌고 나온 것을 보면, 영주는 스튜도 시녀에게 먼저 먹일 사내였다.

단상이 광장의 제법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장에 있는 이들은 더욱 밀집되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군중을 둘러보니,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저저··· 브릭 새끼.'

구석진 곳에 잔뜩 굳은 브릭이 있었는데, 그 옆에 샤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슴만 내밀어 브릭의 팔에 비비고 있었다.

둘 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당장, 정신을 잃을 것처럼 몽롱한 브릭의 얼굴과 필사적인 듯 입술을 질끈 깨문 샤롯의 얼굴이 대비되어 우스웠다.

그리고 중앙에는 뱀눈 풀이 매대 옆에 있었는데, 매대에는 빵이 잔뜩 쌓여 있고 그 뒤에 해나와 칸나가 있었다.

해나는 뭔가를 찾는 듯 바쁘게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고, 칸나는 해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단두대를 살피고 있었다. 칸나는 단두대에 오른 놈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아이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 나름 잘 어울렸다.

'빵이랑 포도주가 생각보다 안 팔렸네.'

아직 시작되기 전이라 안 팔렸을 것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부채를 들고 화려한 화장을 한 붉은 머리 여인 옆에 선 켈이 베르만에게 혼나고 있었다.

'쿼터는 아직도 안 왔나?'

평소에 늦기는 해도, 적당히 늦는 녀석이었는데, 아직 안 온 것이 조금 이상했다.

뿌우우-.

시작을 알리는 피리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

군중이 박수치며 환호했고, 영주의 몸도 앞으로 슬쩍 기울었다.

그에 고개를 드니, 달루스가 한 놈을 잡아다가 단두대에 눕히고 있었다.

녀석이 발악했지만, 달루스는 가볍게 제압하여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었다.

'그래, 전문가한테 받는 게 낫지.'

고개를 작게 끄덕일 때, 탕!

묵직하지만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와아아아아아!!!

뿌려지는 붉은 피에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군중이 환호했다.

달루스가 익숙하게 떨어진 머리를 번쩍 들어 군중들을 향해 내밀었고, 군중은 전보다 더 크게 환호했다.

그중에는 앳된 아이도 있었고, 청년과 손을 잡아 부끄러워하는 여인도 있었으며, 눈가 주름이 진 노인도 있었다. 심지어 영주조차 눈가에 주름이 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몸을 잃은 머리 앞에 모두가 환호했다.

'미개한 놈들.'

이제는 습관이 된 말을 중얼거렸다.

탕!

다시 하나의 목이 날아갔고.

붉은 폭죽이 터졌으며.

군중이 크게 환호했다.

관중들 몇이 병사들을 밀치고 튀어나와, 땅에 뿌려진 붉은 피에 빵을 찍어 먹었다. 병사들이 뒤늦게 그를 끌어냈다.

그런 기괴함이 더해지면서, 내 어색함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 아빠 정말 멋있지 않아요?"

생글생글 웃는 호로 새끼의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달루스는 예의 그 바닥을 기던 놈을 단두대에 눕히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괜히 왼쪽 가슴이 가려운 듯하여, 슬쩍 긁으며 한 바퀴 둘러봤다.

'응?'

검은 후드를 눌러쓴 사내 하나가 영주가 앉아있는 단상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 차림새가 누가 봐도 수상했는데, 주변에 있는 병사들이 그를 제지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병사들은 사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저 단두대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놈이 관계자일 거라 짐작했다. 그게 아니면 영주가 있는 단상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없을 테니.

사내는 어떤 제지도 없이, 산책하듯 단상 뒤에 도착했고,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들이, 잘 짜인 하나의 연극처럼 보였다.

탕!!

와아아아아!!

다시금 붉은 폭죽이 터지며 사람들이 환호했고, 뛰쳐나오는 몇 명을 병사들이 막았다.

영주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저었고 그에 단두대 주변을 막던 병사들이 길을 내줬다.

그러자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뛰쳐나와, 땅에 흥건한 피에 빵을 찍어서 정신없이 입에 넣었다. 그들은 피가 달콤한 소스라도 되는 것처럼 방긋 웃었다. 우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는 부모도 있었고, 웃으며 서로의 입에 빵을 먹여주는 연인도 있었다.

삐이이-.

이명 음이 들렸다.

그때, 검은 후드가 큼지막한 검은색 물체를 꺼내서 단상 아래에 붙였다.

그를 마친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기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이 익숙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길게 늘어진 볼살. 전보다 더욱 벗겨진 듯한 머리. 아는 놈이었다.

마차에 염소시체를 잔뜩 싣고 있던 놈. 내게 두둑한 주머니를 찔러 줬던 놈. 어깨에 거미와 뱀, 그 사이의 애매한 문신이 있던 놈.

모자크 상단의 캐서딕 지부에 발령 났다던 도르누아였다.

'왜 아우가 저기에?'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저런 가정이 떠올랐지만, 이미 나와 단상 사이는 군중 떼로 막혀 있었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앙!

단상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졌다.

"개 좆 됐네."

나는 불어오는 화끈한 열기를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남작님 날아오르다

캐서딕 성의 영주, 풀푸츠 남작을 처음 봤을 때, 독수리를 떠올렸었다.

부리부리한 눈, 매부리코, 얇은 입술, 거기에 깊은 M자 탈모까지, 풀푸츠 남작은 완벽한 중년 독수리였다.

그리고 지금.

'진짜 독수리인가.'

폭발의 여파로 하늘 높이 떠 있는 풀푸츠 남작을 보며, 상황을 되짚었다.

풀푸츠 남작은 단상의 왼쪽에 앉아 있었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나머지 인물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풀푸츠 남작 아래에는 스카 놈들이 낑낑대며 옮겼던, 예의 그 검은 판자가 깔려 있었는데, 그 검은 판자의 강도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바로 아래서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검은 판자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에 나머지 인물들이 중심을 잃어 옆으로 넘어질 동안, 풀푸츠 남작 혼자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다.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들은 멍하니 공중으로 떠오른 풀푸츠 남작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역시 신이 선택한 핏줄이라며, 박수치며 감탄하는 놈도 있었다.

'의도한 건가?'

황급히 아우를 살폈지만, 살집 있는 눈을 끔벅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보니, 아우도 당황한 듯했다.

삐이이-

폭발음과 섞여 이명 음이 더 커졌다.

후끈한 열기가 천천히 밀려났다.

정신을 잡고, 광장을 살폈다.

으아아아악!

갑작스러운 폭발의 여파로 사람들이 쓰러졌고, 뒤엉키면서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높은 밀집도에 엉킬 뿐이었다.

'단순 테러? 혹은 다른 목적이 있나?'

머리를 쉬지 않고 굴리며, 검을 빼 들었다. 그 서늘한 촉감에 이명 음이 잦아들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4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울타리처럼 막아섰지만, 신경 쓰지 않고 힘으로 밀어버리니 길이 만들어졌다.

"4조!!"

고통이 섞인 비명과 신음, 시끄러운 소리 사이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조장! 이게 무슨···."

창백한 얼굴이 된 샤롯을 품에 안은 브릭이었다.

"급한 상황이니까, 가슴 좀 그만 만지고."

"제···제가 언제 가슴을 만졌다고 그럽니까!"

"됐고! 여기 사람들 천천히 광장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해라!"

당황해서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브릭에게 손으로 광장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그에 브릭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샤롯의 원피스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브릭의 손이 보였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통했네."

"예··· 예?!"

겁에 질려 새하얗게 된 샤롯에게 농을 던지고 다시 움직였다. 뒤엉킨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광장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그에 상황은 더 악화됐다.

물씬 풍기는 땀 냄새와 토 냄새, 피 냄새가 뒤섞여 극심한 악취를 풍겼다.

"4조!!"

"조장님! 여기!"

"비켜! 우리 로사한테 붙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붙을 거면 돈을 내던지!"

"어머, 자상해라."

애써 침착한 얼굴의 베르만, 주변에 화를 내는 켈과 로사가 같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키는 게···."

"서로 먼저 나가려다가, 압사당하니까, 검을 휘둘러서라도 질서 유지 시켜. 베르만, 네가 이쪽, 켈은 저쪽."

"안녕, 아론?"

"어, 오랜만이야 로사."

다른 이들은 얼굴이 다 퍼렇게 질려 있는데,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로사가 느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론, 루나 편지 답장 안 한다며, 루나가···."

"어, 나중에."

쓸데없는 이야기에 손을 젓고, 다시 움직였다.

"질서에 맞춰서 움직여!! 야이 개새끼야! 뛰지 말라고!!"

"진정하시고, 천천히 움직여야 안 다칩니다! 진정하라고!!"

뱀눈 풀은 해나, 칸나와 같이 매대에 올라가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풀은 마치, 양치기 개처럼 사람들의 머리를 검집으로 후려치며 역정을 냈다.

"어이, 풀!!"

"조장! 이게 뭔 개지랄입니까?! 아직, 술도 다 못 팔았는데, 개 좆같은!"

나를 발견한 풀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제 아래에 있는 나무통을 가리켰다.

"일단, 대피시키고. 해나, 칸나 너네도 일단 돌아가."

"···아론은요?! 같이 가요!!"

충격 때문인지, 동공이 한껏 커진 해나가 내 팔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잠깐 멈칫했다가 손을 밀어냈다.

"나는 경비대잖아. 내가 튀면 어떡하냐. 쟤나 잘 챙겨."

아이인데도 칸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히려 칸나가 해나보다 침착했다.

"하···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해나가 다시 매달리며 불길한 대사를 쏟아냈다. 그에 괜히 목이 간지러워 손톱으로 긁었다.

"느낌은 무슨. 빨리 가!!"

소리를 버럭 지르니까, 해나가 그제야 움직였다.

꼭-!!

칸나를 품에 안은 해나가 인파 사이에 뒤섞여 멀어졌다. 그 모습이 꼭 파도에 떠밀려가는 듯했다.

"조장, 어떤 미친놈이··· 귀족을···."

'···그러게 어떤 미친놈이.'

풀의 질문에 괜히, 속이 더부룩해져서 매대에 올려진 잔 하나를 들어 단번에 마셨다. 적포도주의 향이 물씬 풍기며, 후끈함이 올라왔다.

"몰라, 미친놈이겠지."

탕!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니 달루스가 무표정으로 떨어진 머리를 줍고 있었다. 달루스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머리를 들어 보였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 땅을 적셨다.

"···저 놈도 제정신 아닌 것 같습니다."

"놔둬. 장인 정신, 그런 거겠지. 원래 장인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일을 마쳐야 한다며."

대충 손을 젓고, 잔 하나를 풀에게 건넸다. 그에 풀이 찜찜한 표정으로 바닥에 침을 뱉고 잔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튼, 조장도 같이한다고 했던 거니, 나중에 2 실버 주십쇼."

"···쯧."

그때쯤 광장의 사람이 반 이상 빠졌다. 다른 조 녀석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소리를 지르며 같이 인도하고 있었다.

"멈춰! 움직이면 바로 쑤신다!!"

"움직이지 마!!"

영주 쪽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사색이 된 병사들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무기를 들이밀며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 뒤로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단상의 발판이었던 검은 나무판자는 여전히 멀쩡했다. 문제는 그 나무판자만 멀쩡했다.

기사 아델라의 품에 안긴 영주는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고, 의식은 없는지 흰자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는데, 그중 기사 토익의 목이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저거 뒤졌네.'

폭발에 휩쓸려 타죽는 것도 아니고, 넘어지면서 목이 꺾여 죽다니. 기사의 최후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기사들에게서 종종 발생하는 문제였다. 몸에 두른 철이 신분을 대신하는 이곳에서 기사는 늘 무거운 철을 몸에 한가득 둘렀는데, 그 무게에 못 이겨 압사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물론, 오러를 두르면 그를 막을 수 있지만, 24시간 오러를 두를 수 없었고, 늘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이들은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듯했다. 기사 벤은 뒤에서 뭔가를 찾는 듯, 고개를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영애는?'

영애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악착같이 사람들을 붙잡는 이유는 명백했다. 제 주인을 지키지 못했는데, 범인마저 놓친다면 장인 달루스의 일거리가 될 게 분명했으니.

"야, 시발 숙여봐."

"예? 악!!"

뱀눈 풀의 어깨를 밟고 위로 올라섰다. 풀이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댔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물밀 듯이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반대쪽 골목으로 들어가는 검은 후드가 보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똑같은 복장인 검은 후드들이 여럿 있었고, 그 사이에 영애의 뒷모습이 언뜻 보였다.

"저쪽이다!! 영주님을 시해한 놈이자 영애를 납치한 놈이 저쪽으로 튄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꽥꽥 질렀다. 손을 열심히 휘저어 방향을 격렬하게 가리키며 계속해서 반복했다.

눈치 빠른 풀이 나를 따라 소리를 질렀고, 사람들을 잡고 화풀이하던 병사들이 그제야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이어서 기사들도 움직였다. 벨과 아델라 둘이 무거운 갑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뛰어나갔다.

"외성 경비대!! 1조부터 3조까지는 정문, 4조부터 6조까지는 북문을 맡는다!! 빨리 움직여!! 놓치면 우리 다 뒤진 목숨이다!! 좆 빠지게 뛰라고!"

그때, 술이라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진 외성 경비대장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멀리 있는데도 사람들 비명을 뚫고 들렸다.

"아이고···, 조장 내 어깨 다 나갑니다."

"아, 까먹고 있었네."

풀의 앓는 소리에 내려가니, 켈, 브릭, 베르만이 모여 있었다.

"여, 브릭. 아까 보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젖이 그렇게 좋았나?"

"닥쳐, 켈!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진···짜 만졌다고? 브릭, 네가?"

베르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브릭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에 브릭이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베르만이 입을 쩍 벌렸다.

"다 닥쳐. 쿼터는?"

"안 왔습니다. 아직 자고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애 상태가 이상하던데."

풀의 대답에 뭔가 떠오를 듯하여, 관자놀이를 힘껏 꾹꾹 눌렀다. 쿼터와 아우···.

'그러고 보니 아우가 쿼터한테 사탕 같은 걸 줬었는데.'

아우한테 사탕 같은 것을 받고 기뻐하던 쿼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쿼터는 늦잠은 자도, 이렇게 지각할 놈이 아니었기에 의심이 확신으로 기울었다.

"도망친 놈을 쫓는다."

"하지만, 대장이 북문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풀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다른 녀석들도 묻진 않았지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령을 어기면, 후에 크게 처벌받을 게 분명했으니.

상황이 심각해지면, 달루스에게 장난삼아서 했던 부탁이 실제가 될 수도 있었다. 장인 달루스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게 분명했다.

'농담 구분 못 하는 놈한테 괜히 장난쳤나.'

모인 시선에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걸리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말고. 일단, 놈부터 찾아야 해. 아무래도 쿼터가 저놈들과 관련된 것 같다."

"···이 미친 새끼가!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조장, 확실합니까?"

켈이 바로 욕을 내뱉었고, 풀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침음성을 흘렸다.

"뭐합니까. 이러다 놓치겠습니다."

브릭이 선하게 생긴 눈에 힘을 주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일단, 녀석은 혼자가 아니다. 아까 보니까, 마법사인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 물건 같은 걸 사용하여, 폭발을 일으켰고. 복장은 검은 후드다. 기사가 추격을 시작했으니, 멀리 가진 못할 거다. 혹시나, 마주치게 되면 허튼 생각 말고 비명 질러. 내가 갈 테니."

나는 놈들의 굳은 얼굴을 하나씩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특히, 비명을 지르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조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참 안심됩니다."

켈이 이죽거렸고, 나머지가 작게 웃었다.

그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진짜 만졌다고?"

혼자 웃지 못하는 베르만이 브릭을 부러움이 듬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후후···."

브릭이 낮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탕!!

그때, 다시 단두대의 서늘한 소리가 들렸고, 장인 달루스가 마지막 목을 들어 보였다.

주르륵 흐른 피가 단두대를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대장 말처럼 좆 빠지게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달루스를 보며, 켈이 진지하게 말했다.

***

삐이익!! 삐이이익!!!

곳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진행 경로를 예측했다.

'그쪽으로 가면 나가는 길이 없는데, 어디로 가려는 거지?'

다만, 그 도주 방향이 성벽 쪽이라,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게, 추격을 따돌리려는 것 같기도 했다.

'성벽을 부술 생각인가?'

폭발이 크긴 했지만, 성벽을 부술 정도는 아니었다.

"조장, 앞쪽에 뭔가 있습니다."

긴장했는지,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 베르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에 앞쪽을 확인했다. 어두운 골목길 안, 그늘진 곳에 누군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에 베르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내 뒤로 물러섰다.

나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뭐가 튀어나오든 바로 베어낼 수 있게 자세를 잡고 천천히 다가섰다.

가까이 가니, 어스름한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낯익은 인물이었다.

"···벤?"

"아, 아론이군."

기사 벤은 찢긴 갑옷 흉부 부분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크윽··· 조심하게. 병사 중에 배신자가 있네."

벤이 원통한 듯, 중얼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형편없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볼을 긁적였다.

'···이 새끼 개좆밥인 거 아니야?'

저번에도, 이번에도 쓰러져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놈이 정말 기사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냥 어디서 딱지치기로 얻은 갑옷을 입고 폼만 내는 거 아닐까.

'쯧.'

품에서 아까 블리안 사제에게 받은 포션을 꺼내, 녀석의 상처에 부었다. 그에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군."

한결 편한 얼굴이 된 벤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흘린 피가 워낙 많아서인지, 휘청이며 다시 쓰러졌다.

'분명히 기사는 맞는데 말이야.'

흉하게 엎어져서 헐떡거리는 벤을 보면서 수염을 긁었다.

그때,

"꺄아아아악!!"

굵직한 목소리가 지르는 듣기 싫은 비명이 들렸다.

***

악마의 하수인 콜드는 모처럼의 실력 행사에 잔뜩 신난 상태였다.

'개 같은 놈들. 악마를 따르는데 이것도 참아야 하고, 저것도 참아야 하고.'

콜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씬 풍기는 피 냄새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약이 너무 많았다.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피도 수급하지 못하며 근 몇 주를 답답함 속에서 보내야 했다.

덩치 크고 이상하게 생긴 놈이 대놓고 집을 감시하는데도, 참아야 했을 때 콜드는 너무 화가 나서 제 손톱을 뽑아 버렸다.

'멍청한 놈이 실패해서.'

이쪽에서도 나름 큰 투자를 했던 계획인데, 악마를 받은 놈이 실패해버리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엉클어졌다.

진작 떴어야 할 성에서 근 몇 주를 머물러야 했고, 이내 한계에 도달했다.

더는 참지 못할 때, 흑마법사가 행동을 명했다.

변방의 작은 성이었지만, 그래도 인구가 이천은 넘었다. 이 기회에 최대한 많은 피를 마시면, 악마와 직접 계약을 이룰 수도 있었다.

'내가 직접 계약한 상태였다면, 놈처럼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걸림돌은 기사였지만, 그건 흑마법사가 맡는다고 했다.

기사만 없다면, 이런 변방의 조무래기 병사 놈들이 자신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모두 분출해내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상황이었다.

"···이거, 좆된 거 같지?"

"내가 숫총각인 너와 의견이 맞을 줄 몰랐지만, 동의한다."

겁도 없이 떠드는 사내 둘이 콜드의 신경을 긁었다. 수염도 나지 않은 동글동글한 사내와 느끼하게 생긴 놈.

"어이- 거기 이상하게 생긴 놈. 혹시 나른하게 생긴 놈 본 적 있나? 꾸벅꾸벅 조는 놈인데 말이야."

느끼하게 생긴 놈이 건방지게 입을 놀렸다.

그에 콜드는 굳이 입을 열지 않고, 손을 펼쳤다. 벌레와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은 없었다. 그저 짓누를 뿐.

아직, 손자국을 받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흑마법사를 통해 계약의 인은 받아둔 상태였다.

'나는 젊으니까.'

피가 증발하며,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콜드는 몸을 까닥거렸다. 온몸에서 힘이 넘쳤다. 땅을 박차니,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느끼하게 생긴 놈이 검을 비스듬히 들어 주먹을 막았다. 쾅! 주먹과 검이 부딪혔는데, 오히려 검을 든 쪽이 뒤로 밀려났다.

"켈!! 이 개새끼가!!"

동글동글하게 생긴 놈이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지만, 콜드의 발이 뻗어진 이후였다. 쾅! 복부에 직격으로 발차기를 맞은 놈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콜드의 등으로 희열이 타고 올랐다. 상대도 어설픈 놈들이 분명했지만, 생전 싸움이라곤 몰랐던 콜드였다. 단지, 악마와 실처럼 얇은 연을 이었다는 것만으로 이런 압도적인 힘을 부리다니···.

혹여 악마의 손자국을 받게 된다면, 어떤 파괴력을 지닐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짜릿했다.

'꼭 오늘 계약을 이룬다.'

달콤하고 황홀한 무력의 맛에 콜드의 눈이 빙글 돌았다.

"안 되겠군."

그때, 느끼하게 생긴 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콜드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항복하면 자신이 살려주리라 생각하는 건가?

'멍청한 놈.'

콜드는 잠시 고민했다. 어울려주는 척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 작은 희망을 짓밟아서, 짜릿한 달콤함을 맛볼까.

"···역시, 불러야겠지?"

"크흠···. 조장이 훈련을 이야기했다던데, 이번에 부르면 꼼짝없이 끌려갈게···."

자신을 앞에 두고 술집에 있는 것처럼 편히 대화하는 모습에 콜드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큰 공포에 실성한 것인가?

"그래도 살아서 지옥을 겪는 게 낫지. 셋을 셀 테니, 같이 지르자고."

"하아···."

"하나, 둘."

태평한 얼굴로 수를 세는 모습에, 콜드는 순간 긴장했다. 저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뭔가 있나?

"내가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콜드가 뒤늦게 녀석들의 입을 막으려고 할 때.

"셋! 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둘이 합창이라도 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나 크게 질렀는지, 목에 핏줄이 설 정도였다.

생각지 못한 둘의 행동에 콜드는 내지르려던 손을 어중간하게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조장은 귀가 좋으니까."

마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둘은 예의 그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에 콜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시간도 부족한데.'

녀석들의 얕은수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여, 콜드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양손을 교차시켰다. 손톱이 검게 물들며 길어졌고, 이내 맹수의 발톱처럼 변했다.

"잠깐, 기다려주겠나."

"···뭐?"

느끼한 놈의 당돌한 부탁에 콜드는 하마터면 집중을 잃을 뻔했다.

'정신을 놓은 놈들인가?'

어찌 됐건, 그냥 깔끔하게 죽이고 피를 먹은 다음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밤은 짧고 마셔야 할 피는 많았으니, 다른 놈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쿵-.

"아, 됐다."

그때, 멀리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두 놈이 다시 예의 그 평화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정신 나간 놈들."

콜드는 손가락을 까닥거려, 검고 긴 손톱을 연주하듯 움직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젊은 놈들이니 피가 싱싱하리라.

쿵-.

그때, 둔탁한 소리가 전보다 가까이에서 들렸다.

'···뭐지?'

그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기 때문에, 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쿵!

무언가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더욱 가까워져, 이제 벽 너머에서 들렸다.

"조금 뒤로 가는 게 좋겠는데?"

"그러게."

둘이 속닥거리더니, 뒷걸음질 쳤고 그제야 콜드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저놈들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때였다.

콰아아앙!

옆에 있던 벽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뿌려지는 돌 부스러기 속, 먼지가 자욱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덩치가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에 콜드는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챙!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손이 튕겼다.

'···철 덩어리?'

거대한 붉은색이 가까워졌고, 그제야 콜드는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은 붉은색이고, 어깨는 초록색, 하체는 노란색인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사내.

'아니, 사람이 맞나?'

산발 된 머리와 셀 수 없이 많은 흉터. 그리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 깊은 눈동자. 그에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복장, 그 모든 게 어우러져 형용치 못할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콜드는 사내의 형형한 눈빛에 시선을 억지로 돌렸고, 사내의 뒤에 펼쳐진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사내의 뒤쪽으로는 길이 아닌 곳에 억지로 만든 길이 일자로 이어져 있었다. 사내는 앞에 있는 모든 걸 몸으로 부수며 달려온 것이었다.

이윽고, 빠르게 가까워지는 큼지막한 주먹을 보며, 콜드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콜드는 악마를 봤을 때보다, 지금 이 사내가 더 두려웠다.

똥은 싼 놈이 치운다

'꽤 강렬하네.'

벽을 통과해서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멀리서 들리는 비명에 급해져서 일단 들이받았다.

근데 생각보다 벽이 연했다. 중간에는 밀치기만 해도 무너지는 곳도 있었다.

생각보다 부실 공사가 만연한 듯했다. 살짝 박기만 해도, 벽이 두부처럼 부서졌고, 덕분에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거 중독될 거 같은데.'

생각보다 강렬한 맛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끄으윽···."

'근데 이 새끼는 왜 이래?'

목만 붙잡았는데, 놈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게거품을 물었다.

"조장! 괜찮습니까?!"

그에 고개를 돌리니, 그런대로 상태가 괜찮은 켈과 브릭이 보였다.

"에구! 이게 무슨 일이여!!"

그때, 마지막으로 부순 벽 너머로 아줌마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줌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에 생긴 구멍을 매만졌다. 그런 아줌마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황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고, 내 어깨에 잔뜩 묻은 돌 부스러기를 확인한 아줌마가 눈을 잔뜩 구겼다.

"아론! 멀쩡한 벽을 부수고 다니면 어쩌자는 겨!"

맨발로 뛰쳐나온 아줌마가 내 눈을 부라리며,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그냥 살짝 부딪혔는데, 부서졌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밖에 못된 놈들 돌아다니니까. 일단, 들어가서···."

"어디로 들어가라고! 양쪽으로 구멍이 뻥뻥 뚫렸는데! 이게 무슨 집이야! 통로지! 통로! 내 집이 없어졌다니까!"

"아니, 악마 돌아다닌다니까요. 이거 안 보여요?"

"엄머? 이놈은 손이 왜 검은색이여?! 무슨 병 걸렸어? 으휴··· 망측해라!"

흉측한 놈을 아줌마에게 들이밀었지만, 아줌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뿐,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나는 재빨리 멀뚱멀뚱 구경하는 켈과 브릭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아줌마 좀 어떻게 해보라고.

"나중에 다 복구해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소."

켈이 특유의 미소로 아줌마를 슬슬 달래, 다시 들여보냈다.

브릭은 그 옆에서 큼지막한 돌을 하나 줍더니, 구멍 난 곳에 슬쩍 올렸다. 물론, 돌은 금세 굴러 떨어졌고, 브릭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지금 부서진 것들은 외성 경비대 4조 조장 아론 쪽으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예."

구멍 사이로 베르만이 보였다. 녀석은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연신 내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의리 없는 새끼.'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민 사람들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조장, 걱정 마십쇼. 다 같이 분담하겠습니다."

브릭이 제 가슴을 두드리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대충 땜빵만 해도 될 테니까. 뭐···. 조장의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아줌마를 밀어 넣고 온 켈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에 붙잡은 놈을 괜히 흔들었다. 녀석의 목이 꺾일 것처럼 앞뒤로 움직이다가, 이내 눈을 끔뻑 떴다.

"으아아악! 으아아악!!"

나와 마주한 녀석이 눈을 뜨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내가 뭘 했다고 발광이지.'

그에 인상을 쓰자, 녀석이 딸꾹질하더니 제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녀석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아래에서 시큼한 냄새가 슬슬 올라왔다.

'내가 뭐 했다고, 오줌까지 지려?'

녀석의 격렬한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흑마법사가 원흉이자, 계획자입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뚱뚱한 놈이고 눈빛이 사납습니다! 또··· 노리는 것은 영애이고! 영애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람 심장이 필요하다니···, 미친놈이 분명합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것만 한 겁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회에서 연락을 받고, 여기로 모인 것이고, 다들 생판 남입니다! 회는 주로 쥐로 연락하는데, 본거지는 투룸바에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예, 그 무법 도시 투룸바 맞습니다!"

녀석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필사적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걸 떠벌렸다. 얼마나 절박한지, 녀석은 중간에 숨도 쉬지 않았고, 말을 마치고 헐떡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순순하게 모든 걸 불어버려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손가락이라도 꺾고 나서 말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 아닌가.

"좀 나른하게 생긴 놈 못 봤나?"

옆으로 다가온 베르만이 녀석에게 물었다.

"나른한 놈 말입니까?! 못 봤습니다! 저는 배치받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다가, 오늘 처음 나온 겁니다! 못생긴 놈! 이빨 뾰족한 놈! 머리가 세모 모양인 놈! 가슴이 큰 년! 제가 본 것은 저 넷이 다입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꾸며낼 수 없는 절박함이 녀석의 얼굴에 있었다.

"너 같은 놈들이 몇 있지?"

"하수인은 저를 포함하여 총 다섯입니다!"

"하수인?"

"예! 악마와 직접 계약을 하지 못하고, 흑마법사를 통해서 계약한 자를 하수인이라고 합니다! 피를 악마님이 만족하실 정도로 충분히 모은다면, 직접 계약으로 넘어가서 손자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녀석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바로 대답했다.

'흑마법사를 통해 계약이라···, 하수인이라는 놈들은 하청 느낌인가?'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악마 쪽도 복잡한 관계와 급이 있는 듯했다.

'근데 흑마법사라···.'

마법사도 충분히 껄끄러운 상대였는데, 거기에 악마가 토핑처럼 더해진 흑마법사는 생각만으로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예? 아! 흑마법사가 자신이 기사를 처리할 테니, 마음대로 날 뛰라고···. 이곳을 회의 기점으로 삼는다고···."

녀석이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버리는 패였군.'

아무리 흑마법사가 강해도, 더불어 회라는 것의 세력이 엄청나다고 해도, 제국의 성 하나를 점거하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황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 짓을 벌인다면, 당장 수도에서 여기까지 인류의 검으로 이루어진 선이 그어지리라. 제국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태양을 땅으로 떨어뜨린다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쯧."

혀를 차며, 녀석의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그에 의식을 잃은 놈의 사지를 가볍게 꺾은 다음 브릭에게 넘겼다.

"이놈을 광장 쪽으로 가져가서 넘겨라."

"예. 알겠습니다. 다들 조심하십쇼."

놈을 받은 브릭이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영애의 심장이라니···. 도대체 이런 시골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

켈이 검을 고쳐잡으며 툴툴거렸다.

"전 죽을 수 없습니다."

베르만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저런 숙맥 브릭도 했는데, 못하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베르만, 숫총각이었어? 감히, 숫총각 놈이 뻗대고 다녔다니···."

"둘 다 시끄럽다. 일단, 쿼터부터 찾는다."

다시 으르렁대려는 둘을 막았다.

삐이익- 삐이익-

여전히 호루라기는 울고 있었고, 그 소리는 우리 앞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달이 낮게 뜬 밤, 골목은 악마라도 나올 것처럼 어두웠다.

"나중에 로사한테 좀 저렴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줄까?"

뜬금없이 켈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베르만에게 물었다.

서로 투덜거려도, 녀석 딴에는 나름 신경 쓰는 듯했지만, 그 호의를 넘어선 내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필요 없다! 나는 언젠가 나타날 인연, 혹은 필연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에 베르만이 발작하듯 대답했고.

'동정으로 죽겠군.'

나는 그런 베르만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

그르륽-.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괴상한 놈이 병사의 시체에 주둥이를 처박고 있었다. 아그작. 고기를 생으로 뜯어 먹는 살벌한 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그에 나는 오른손을 올렸고, 베르만과 켈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륽?

그때, 녀석이 킁킁대며 얼굴을 들었다. 녀석은 개처럼 킁킁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끔찍하군.'

인간의 형상이 언뜻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점액질이 뚝뚝 떨어지는 회색 괴물에 인피면구를 씌워놓은 정도였다.

아까 녀석이 말한 하수인이란 건지,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전에 만났던 악마 같은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상대를 가늠했다. 덩치는 성인 남자의 두 배였고, 철로 덧댄 병사의 갑옷을 뚫을 만큼 날카로운 이를 지녔다. 나는 녀석의 팔 길이를 대략 계산했다.

'검을 뻗으면 내가 더 길겠군.'

그륽!

녀석이 아무 징조도 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와 침이 뒤섞인 무언가가 공중으로 뿌려졌다.

단번에 거리를 좁히는 녀석을 보며, 다리에 힘을 주고 검을 수직으로 높이 들었다. 이내, 녀석이 인간의 주둥이를 쩍- 벌렸고, 그 안으로 수백 개의 이빨이 보였다.

그에 나는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콰직- 베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효과음이 나며, 녀석의 얼굴이 수직으로 구겨졌다.

면구처럼 씌워진 사람의 얼굴이 울상을 지었다가, 다시 웃었다.

'약해.'

저번 악마 때와 달리, 그저 조금 단단한 철 정도.

그리고 그 정도면 손으로도 부술 수 있었다.

그륽-.

뭉개진 녀석이 오른발을 휘둘렀다. 점액질이 공중으로 흩뿌려지며, 내게 튀었다. 닿은 부분이 연기가 나며 부식했다.

'개새끼가?'

내 붉은 흉갑에 작게 뚫린 구멍에 눈에서 불이 튀었다. 쾅! 녀석의 오른발이 내 가슴 부분을 후려쳤지만, 흉갑에 막혔다. 나는 그대로 검을 다시 힘껏 내려쳤다.

쾅! 시원한 소리가 나며, 녀석의 흉측한 얼굴이 완전히 반으로 구겨져, 양쪽 눈이 딱 붙었다. 검은 눈동자가 뒤룩- 굴렀다.

"조장!"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틀었다.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검 두 개가 괴물의 머리통을 찔렀다. 그에 녀석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지며, 입에서 검은 피를 뱉었다.

"으악! 내 손!"

"엄살은."

제 손을 잡고 펄쩍 뛰는 켈을 옆으로 밀치자, 괴물의 왼발이 방금까지 켈이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쾅! 바닥이 뭉개지며, 진흙이 주변으로 뿌려졌다.

다시 자세를 잡고 검을 내려쳤다. 이번에는 괴물의 얼굴이 반으로 찢어졌다. 괴물의 검은 피가 뿌려지며 흠뻑 젖은 속살이 드러났다.

그에 나는 녀석의 머리에 박힌 검을 놓고, 반으로 갈라진 살점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양쪽으로 쥐어뜯었다.

찌드득-

기분 나쁜 효과음과 동시에 녀석의 살점이 좌우로 떨어져 나갔다. 검은 피가 흘러넘쳐 내 손을 적셨다.

이윽고 힘껏 양쪽으로 뜯어냈고, 녀석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서, 인간의 허연 두개골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질린 듯한 눈빛으로 보는 켈을 무시하며, 두개골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콰직. 두개골이 부서지며, 허연 뇌수가 내 온몸을 적셨다.

'그때 만났던 악마 수준은 아니야. 병사 넷이면 막을 수 있는 정도.'

다만, 그 생김새가 기괴하여, 병사들이 지레 겁을 먹어 피해가 커질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도 한두 번이지만.'

생존이 걸려 있으면, 어떻게든 검을 휘두를 것이고 그렇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조장?"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쿼터가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뭐하다가 이제 나와!!"

얼굴에 묻은 검은 피를 닦던 켈이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질까지 하며 욕을 퍼부었다. 당장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그···게 일어나보니, 이렇더라고."

쿼터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번에는 정도를 넘어섰다. 쿼터."

베르만이 얼굴을 굳히며, 쿼터를 힐난했다.

"아아···, 너무 졸렸다고. 요즘에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평소와 같은 쿼터의 넋두리였지만, 묘하게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저 개새끼를 그냥···."

"진정해라.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까."

주먹을 휘두르려는 켈을 베르만이 막았다. 베르만의 얼굴도 좋지 않았지만, 상황을 봐서 참는 듯했다.

"너네는 북문으로 돌아가라. 일단, 쿼터를 찾았으니까."

"응? 조장은?"

"같이 안 가십니까?"

켈과 베르만이 동시에 반문했다.

그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수염을 긁었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워야지.'

악마의 손자국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해도 검문 때, 들어오는 이의 가슴을 죄다 깔 수 없었다.

누가 검문을 했어도, 상단의 마차까지 준비한 흑마법사가 성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내가 싼 똥이었다.

미개한 중세 놈이 아닌 나는 내가 싼 똥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쩐지 주머니가 두둑하더라니.'

늘 그렇듯 두둑한 주머니는 탈이 났다.

"뭐,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베르만과 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한 번 더 묻지 않냐?"

생각보다 빠른 녀석들의 수긍이 묘하게 거슬렸다.

"에이, 조장이 다치기라도 하겠습니까? 벽을 부수고 괴물의 대가리를 손으로 뜯는 망나니인데. 그리고 저희라도 먼저 가 있어야, 나중에 문제를 수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켈이 왜 당연한 것을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맞는 말이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근데 쿼터는?"

"나는 조장이랑 같이 갈게. 잠을 푹 자서 쌩쌩하거든."

"네가 웬일이냐? 그래, 마음대로 해라."

쿼터가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대답했고, 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 조심하십쇼."

"뭐?"

돌연 베르만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난 녀석들 사이에서 그나마 정상인 베르만은 나를 걱정해주는 듯했다.

"너무 많이 부수면 나중에 감당 안 됩니다."

베르만이 눈에 힘을 주며, 바로 옆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그 구멍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눈총을 보내는 아줌마와 눈이 마주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가라."

그 말을 끝으로 베르만과 켈이 돌아갔고,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말, 잠을 푹 잤는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흥거리는 쿼터를 잠시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콰아아앙!

앞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터져 나오는 푸른 빛이 어두운 골목길을 밝혔다.

뒤쪽에서 들리는 쿼터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때, 우리가 통과시켰던 모자크 상단 놈, 도르누아가 흑마법사더라."

"···도르누아 님이 흑마법사였습니까?"

쿼터가 묘하게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깜짝 놀란 듯했지만, 일부러 끝쪽을 올린 것 같기도 했다. 애매했다.

"어. 너 그때 사탕 같은 거 받지 않았어?"

"아, 그거 먹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해서···, 문제 되는 겁니까?"

"그거야 모르지."

대화가 다시 끊겼다. 조용한 골목길에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조장. 잠을 못 자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습니까?"

조금 가까이 다가온 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반문하며 녀석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직 아니었다.

"예. 잠을 못 자면, 깨어 있어도 깬 것 같지 않습니다. 꿈을 헤매는 것 같고,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모든 게 흐릿하게 보입니다."

나는 잠시 멈춰서, 쿼터를 돌아봤다. 녀석의 눈은 평소의 게슴츠레했던 것과 다르게 활짝 열려 있었다. 늘 맴돌던 피곤이 없었다.

마치, 잠을 푹 잔 사람처럼.

"그래?"

"···제가 왜 잠을 못 자는지 알고 있습니까?"

쿼터는 술을 마신 사람이 억지로 구역질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몰라."

"어릴 적, 우리 마을에 엄청난 기근이 돈 적 있습니다."

콰아아앙!

다시금 굉음이 터지며, 푸른 빛이 주변을 밝혔고, 어딘지 울음을 참는 듯한 쿼터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가, 다시금 어둠에 잠겼다.

"배고팠겠군."

"예, 엄청나게 배고팠습니다. 어느 날 잠이 너무 안 오는 밤이었습니다. 그저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부스럭거리며 아비가 일어났습니다."

작게 중얼거린 쿼터가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옆에서 매우 작게 퍽! 소리가 났습니다. 이어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유난히 힘이 약해서 일을 돕지 못하던 동생 하나가 사라졌고, 저희는 정말 오랜만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래 정말 맛있게···. 쿼터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해하는 것일까. 충격적인 내용과 다르게 쿼터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는 듯 그저 서술했다.

"그랬군."

"그날부터 저는 밤에 잠을 못 잡니다. 내일 가족이 저를 빼고 맛있는 고기를 먹을까 봐."

쿼터가 감정이 담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먹구름 잔뜩 낀 듯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습관적으로 검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좆같은 중세.'

입끝까지 차오른 욕을 삼켰다.

콰아아아앙!

다시금 푸른 불꽃이 주변을 밝혔고, 나는 푸르게 물든, 쿼터의 얼굴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쿼터는 웃고 있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저쪽에서 난리가 난 것 같으니 말이야."

"···예."

아니기를···.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뒤돌았다. 푸른 불꽃이 보이는 곳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눈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신경은 전부 귀에 쏠려 있었다. 발소리로 거리를 가늠했다.

탁탁.

미묘하게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내 바로 뒤까지. 선을 넘었다.

나는 뒤로 돌며 검을 찔러 넣었다. 어느새, 검은 들짐승으로 변모하여 얼굴만 둥그렇게 뜬 쿼터가 나를 향해, 단검만큼 긴 발톱을 찔러넣고 있었다.

다만, 내 검이 녀석의 손톱보다 길었고, 내 망설임이 녀석 것보다 짧았다.

나는 같이 2년을 지낸 놈이라도 완전히 믿지 못했다. 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검부터 찾는 것과 같은 고질적인 직업병이자, 후유증이었다.

결국, 나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는 것, 그 사소한 이유로 2년간 동고동락한 녀석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부끄럽게도, 거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

녀석이 짧게 소리를 내었고, 입에서 검은 피를 주르륵 흘렸다.

무거운 검을 억지로 비틀었다. 녀석의 가슴에 박힌 검이 돌아가며 상처를 헤집었고, 검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그를 온전히 받아냈다.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향해 뻗던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초록색 견갑에 검은색 피가 덧칠됐다.

"미안하다."

'믿지 못해서.'

뒷말은 삼켰다. 위선이었기에.

"···졸려."

아아···, 녀석은 정말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고, 나는 녀석이 눈을 완전히 감을 때까지 녀석을 잡아줬다.

짐승 특유의 누린내와 혈향이 섞여 내 코를 찔렀다.

이내, 녀석의 숨이 끊어졌다.

나는 놈의 머리를 잡고 칼을 목에 박아 넣었다. 검은 피가 터져 나와서 내 몸을 적셨다.

살코기를 써는 듯한 불쾌한 촉감이 검을 타고 넘어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내 녀석의 목이 완전히 뜯겼다. 목을 잃은 몸이 앞으로 엎어지며, 진흙과 섞인 검은 피가 내 흉갑에 튀었다.

"잘 자라."

녀석의 머리를 녀석의 몸 위에 올려주고 진심으로 말했다.

콰아아아앙!!

다시, 푸른 불꽃이 주변을 밝혔고.

쿼터 녀석은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일 앞에서, 슬퍼하는 위선은 떨지 않았다.

"복수는 해줄 테니."

그저 검을 고쳐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