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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제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혹은 시종일관 보이는 불신 가득 까칠한 태도 때문에? 아니었다.

'쯧. 이 아저씨,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네.'

은근슬쩍 황제의 의도가 느껴졌다.

한국에서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던 경험. 그 와중에 별별 사람들을 다 겪으며 쌓은 짬밥. 덕분에 대강 눈치로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짜다. 황제 이 양반, 지금 날 떠보고 있는 거야. 일부러 까칠하게 굴면서 즐기고 있어.'

어째서?

답은 간단했다.

'소설에서도 이런 모습이 종종 나왔지. 라키엘이 죽기 전엔 라키엘에게. 라키엘이 죽고 난 후엔 2황자에게. 계속해서 일부러 태클을 걸었어. 반응을 살펴보며 평가를 했지. 과연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한지를 말이야.'

마치 시험을 내주고 그걸 즐기는 사람처럼. 만점짜리 답안지를 기대하며 희열을 느끼듯이. 일부러 태클을 거는 게 느껴졌다.

'어오, 진짜. 아빠 찬스 써먹기 더럽게 힘드네.'

라키엘은 투덜거렸다. 황태자가 된 건 좋은데. 하필이면 황제라는 양반이 저런 인간 불신 태클 장인(?)이라니.

'자고로 사람은 가진 빽을 잘 써먹어야 인생이 활짝 핀다고 그랬는데. 그 격언대로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렵냐. 인생 난이도 진짜. 후우.'

하지만 마냥 투덜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라키엘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폐하.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말씀드린 환자는 생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것만은 사실이겠지. 하지만, 과연 발진 티푸스라는 네 진단이 정확한 것인가?"

"정확합니다."

"어떻게 그걸 증명하지?"

"으음, 그건...."

"짐은 이해가 아니 되는구나. 생각해보거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지. 하여 성장기의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서 지냈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는 황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기본적인 예법, 교양, 역사, 철학 등의 수업만 간신히 들었지. 그것도 누운 채로. 그보다 깊은 수준의 제왕학, 군사학, 경영 등의 수업은? 시작조차 못하였다. 하물며 의학은 말할 것도 없지."

"...."

쓰읍.

이거, 학력으로 사람 두들겨 패는 건가. 라키엘은 억울함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한의학을 전공했던 나날과 그 이후에 쌓았던 경력을 PPT로 착착 정리해서 일목요연 야물딱지게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그런 이쪽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황제의 신랄한 디스 폭격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너는 의학을 접해본 적도 없다. 당연히 의학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백지상태일 것이야. 한데 그런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한의원이라는 것을 열고, 환자를 받으며, 감히 진료까지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아니 되는구나."

"그건...."

"혹시 너는 지금, 스스로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에 겨워 타인의 몸과 건강을 챙겨보겠다는 허황된 우월감, 혹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

"하여 짐은 의심이 되도다. 네가 과연 제대로 환자를 돌보는 게 맞는지. 네가 내리는 진단을 믿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황제의 청산유수 같은 디스 폭격이 끝났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눈빛을 똑바로 받아냈다. 그러자니 자연히 황제의 의도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하면, 폐하께서는 저를 시험하고 싶으신 것이로군요. 맞습니까?"

"그러하다."

방금 황제가 희미하게 웃은 걸까.

자신의 의도를 단번에 맞춘 것이 흡족해서?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짐이 한 가지 시험을 내리마. 네게 환자를 돌볼 자격이 있는지, 네가 내리는 진단이 정확한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시험입니까."

황제가 손을 들었다. 지금껏 곁에 묵묵히 서 있던 사내를 가리켰다. 황제의 근위대장인 로베르토 경이었다.

"시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여기, 근위대장은 최근 사소한 질환 한 가지를 앓기 시작하였지. 하니 짐이 묻겠도다. 너는 근위대장을 괴롭히는 질환이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진단하여 맞추어보거라."

"이 자리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혹시 자신이 없는가?"

"아닙니다. 다만 약속 한 가지를 받고 싶습니다."

"약속?"

"예, 폐하. 만일 제가 근위대장의 질환을 맞추어 폐하의 시험을 통과하면...."

"황궁 비고의 열람을 허락해달라는 것이겠지. 맞는가?"

"바로 그러합니다, 폐하."

"좋다. 약속하마."

황제, 아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는 확신했다. 근위대장이 최근 앓고 있는 질환. 그걸 라키엘이 맞추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당연하지. 그걸 맞출 방법은 없다. 그 어떤 정교한 진찰로도 단숨에 알아보기 어려운 질환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라면 더더욱.'

황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매일 근위대장과 붙어 다니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조차도 얼마 전, 근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남모를 질환을 알았지 않았던가.

'한데 네가 무슨 수로 그것을 진단하고 맞추겠는가.'

이건 절대로 못 맞춘다. 세상 최고의 명의가 와도 못 맞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제는 확신을 담아 생각했다.

그 사이, 라키엘이 근위대장에게 다가갔다. 근위대장의 손목을 짚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만 있었다. 그걸 보는 황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

라키엘이 눈을 떴다.

황제를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근위대장님, 원형탈모네요?"

"...앗, 아아."

삽시간에 정답으로 명치를 후드려맞은 근위대장의 눈빛이 서글픈 우수에 젖었다.

45화. 비고를 털어라 (3)

"근위대장님, 원형탈모네요?"

"앗, 아아...."

라키엘의 입에서 한 큐에 정답이 나왔다. 근엄하고 묵직하던 황제의 집무실이 삽시간에 숙연해졌다.

황제의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일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과 자제력을 지닌 자가 아니었더라면? 신분과 직위, 모든 범인류적 편견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 즉시 라키엘의 안면부에 거대한 죽빵을 날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은 초인적인 참을성을 발휘했다. 나날이 떠나가는 모발에 안녕을 고하는 서글픔. 그 비애를 묵묵히 곱씹었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었다.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었다.

'내가 왜 이런 걸로 이러는지. 아이유 참. 황태자 전하시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근위대장은 남몰래 사나이의 눈물을 훔쳐냈다. 반면, 황제는 내심 경악했다.

"지금, 근위대장이 원형 탈모를 지니고 있다 하였느냐?"

"예, 폐하."

"하지만 보거라. 근위대장의 머리칼은 여전히 윤이 나고 풍성하다만."

"가발이니까요."

"...."

저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진짜 제대로 진단한 것이 맞구나. 황제는 라키엘의 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 최근, 극심한 탈모에 시달리고 있노라 고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로베르토 경의 나날이 헐벗어 가는 정수리에 대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 오직 로베르토 경의 아내, 그리고 황제인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한데 그걸 어떻게 맞춘 걸까.'

라키엘을 보는 황제의 눈길에 커다란 의문이 떠올랐다. 신기하고 기이했다.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물었다.

"혹시 눈썰미를 발휘한 것이더냐."

"아, 그건 아닙니다."

라키엘이 냉큼 대답했다.

"로베르토 경의 가발은 완벽합니다. 육안으로는 아무리 살펴봐도 가발 같다는 티가 전혀 안 나니까요. 저는 그저 로베르토 경의 맥을 살폈을 뿐입니다."

"맥을 살펴?"

"예, 폐하."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손목 안쪽을 만져보면 동맥을 지나는 혈류의 박동이 느껴질 겁니다. 저는 아스라한 심법으로 그 맥을 감지하고, 느끼고, 분석합니다."

"흐음, 허황된 허풍 같은데 그럴듯하군."

"그렇게라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그 맥으로 로베르토 경의 무엇을 진단하였기에 탈모를 짚어낸 것이더냐."

"간단합니다."

라키엘의 대답이 술술술.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제가 진단하여 보니, 로베르토 경은 신체가 강건하고 내부의 마나가 매우 활발합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심장과 소장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더군요."

"심장과 소장?"

"예. 그곳에서 화기(火氣), 뜨거운 기운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기운이라."

"그런 기운은 대체로 위를 향해 뻗치는 법이지요. 불꽃처럼 말입니다."

"하면, 설마?"

"예, 폐하. 생각하신 그 설마가 맞습니다. 신체의 가장 위에 있는 부위는 정수리지요."

"로베르토 경의 내부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불꽃 같은 기운이 신체의 가장 위쪽인 정수리로 뻗쳤다?"

"그렇습니다, 폐하."

라키엘이 근위대장을 힐끗 돌아보았다.

"정수리에 화기가 몰렸습니다. 하여 머리카락의 뿌리가 되는 모근이 화기에 그대로 노출되었지요. 가뭄을 만나 말라비틀어지는 저 광활한 초원의 잔디처럼 말입니다."

"...크흡."

가만히 듣고 있던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황제가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혀를 찼다.

"쯧."

그럴듯한 진단이다. 황제는 라키엘의 진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저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로베르토 경의 가문은 대대로 근위기사를 배출한 걸출한 기사 가문이지. 물론 로베르토 경도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심법을 익혔고. 한데 그 심법, 심장에 축적하는 마나의 기운이 매우 강맹하여 은근히 뜨거웠단 말이야.'

문득, 로베르토 경과 때때로 대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검신을 통해 몰려오던 근대위장의 마나. 매우 거칠고, 난폭하고, 뜨거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나를 심장에 잔뜩 머금고 있다는 뜻이고, 그 기운이 정수리를 자극했다는 것이로군.'

생각해보니 로베르토 경의 가문에는 유독 머리가 벗겨진 사내들이 많았다. 그저 혈통의 우연한 특성인 것인지. 혹은 심법의 부작용인지.

알 수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비결이야 어찌 되었건, 정말로 짐이 내린 문제를 맞추었구나.'

황제의 눈길이 라키엘을 향했다.

저 아이가 무슨 수로 저런 의술과 식견을 지니게 된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알겠다."

일단은 네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너의 주장이 마냥 거짓만은 아니라는 것도. 네가 하려는 일이 무얼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은 오늘 밤에 한하여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황궁 비고 열람을 허가하는 바이다."

"...감사합니다!"

"단, 하급 구역의 열람과 한 가지 물건의 취득만을 허가하도록 하마."

"예?"

"못 들었느냐?"

"분명 들었습니다?"

"한데 뭐가 또 불만이더냐?"

"딱히 불만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진 않았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리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까딱까딱 기울인다더냐?"

"말귀는 알아들었습니다. 다만-"

"다만?"

"이해가 조금 아니 되어서 말이지요?"

"뭐가 이해가 아니 된다는 것이더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문제를 냈다.

녀석이 문제를 맞추었다.

하여 그걸 인정해주고 황궁 비고 열람을 허락하였다. 한데 뭐가 또 저리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지.

'이 녀석이 원래 이랬던가.'

전에는 이렇게까지 뻔뻔하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자신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어 눈도 못 마주쳤던 녀석일진대. 대관절 최근 무슨 변화의 바람이 불어서 이 녀석이 이토록 뻔뻔해진 것인지.

황제는 그러한 라키엘의 변화가 괘씸하면서도 반가웠다. 녀석이 어떻게 대꾸할지 기대하고, 기다렸다.

라키엘이 말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제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제가 폐하께서 내리신 어려운 문제를 열심히 노력하고 맞추어서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습니까?"

"딱히 열심히 노력한 티는 안 났다만."

"어쨌건 맞추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한데 어째서 황궁 비고의 하급 구역만 열람을 허락해주시는 것이신지...?"

"고작 그 정도 문제를 맞춘 것으로 중급, 상급, 특급 구역까지 넘보았던 것이었더냐?"

"예."

"...."

"딱히 하급만 열람하게 해줄 거란 말씀은 없으셨는데...."

"...."

"시험 낼 때는 분명 그냥 '황궁 비고'라고만 말씀하셨는데...."

"...."

"한데 통과하고 나니까 말씀이 미묘하게 바뀌시니 이거 참...."

"커흠!"

"...."

"하면, 너는 지금 황궁 비고의 모든 구역을 열람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더냐, 감히?"

"요청까지는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떼를 쓰는 정도로만 봐주시면...."

"...."

"죄송합니다."

안 통하는구나.

황제의 완고한 단호박 기운을 느낀 라키엘은 잽싸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턱도 없겠다.

이럴 때 괜히 더 고집부리다간? 하급 구역 열람권마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황제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이쯤에서 만족하자.

'하여간 저 아저씨 깐깐해가지고. 중급, 상급, 특급 구역은 다음에 넘봐야겠구나.'

라키엘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예를 표했다. 황제의 말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라키엘이 떠난 이후. 잠시 왁자지껄했던 집무실이 다시 잠잠해졌다. 돌아온 차분한 공기 속에서 황제는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허허. 참.'

방금까지 라키엘이 있던 자리. 그곳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흐뭇했다.

'병상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이거늘. 참으로 뻔뻔해졌구나. 감히 짐에게 떼를 쓰고 매달릴 정도로 말이로다.'

언제 죽을지 몰라 수많은 주치의마저 포기했던 아들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저렇듯 사람 구실을 하는 모습이 즐거웠다.

자꾸만 뭔가를 해보겠다고 설치는 모습도. 감히 자신을 찾아와 협상을 제안하던 행동거지도. 심지어 후안무치하게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던 행태까지도. 모두가 흐뭇하고 대견했다.

'그래. 더욱 그렇게 해보거라. 짐을 더욱 들이받아보거라. 그럴 때마다 얼마든지 짐은 너를 시험해주도록 하마.'

마음껏 들이받혀 줄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들이받으며 자라는 법이니까.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파악해가고, 넓혀갈 수 있는 법이니까. 훗날 세상을 들이받을 자식의 예행연습을 안전하게 치러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일 터이니까.

'허허. 허허허.'

속으로 연신 웃음을 삼켰다. 겉으로는 여전히 근엄하게 찡그린 얼굴로 수염만 매만졌다. 한데 그러다가 문득, 황제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근위대장의 모습이었다.

"로베르토 경? 그대는 어찌하여 울고 있는가."

"...폐하."

의아하여 물었다.

근위대장이 울먹이며 답하였다.

"아까 황태자 전하가 말입니다. 예상보다 훨씬 정확하게 제 증상...을 맞추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한데 조금 전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전하가 물러나기 전에 제 탈모 치료법을 따로 물어보아 주지 않으셨는지...."

"허?"

"크흑."

"...."

아뿔싸.

"거, 나중에 별궁에 가서 따로 진료라도 받도록 하게. 휴가도 내어줄 터이니."

"크흐흑."

"...."

황제는 말없이 근위대장의 등을 토닥토닥 해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다리 풀린다, 풀려."

"괜찮습니까."

"아니."

"등이라도 토닥여 드릴까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진지한 얼굴로 이쪽의 안위를 물어오는 데미안. 녀석의 태도에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참 신기하다, 신기해.'

오늘 밤 호위로 데려온 데미안도. 방금까지 신경전을 벌였던 황제도. 모두 소설을 읽으며 일러스트와 활자로 접했던 가상의 캐릭터들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들이 말하고, 사건을 겪고, 때로는 죽는 걸 보았다.

한데 지금은?

자신 앞에 이렇게나 생생한 현실이 되어 있다니. 이따금씩, 확 실감이 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황제 그 아저씨, 진짜 포스가 장난이 아니야. 가급적 필요할 때가 아니면 찾아가지 말아야겠다.'

황제와 마주하고 있노라면? 건물주 만날 때만큼이나 기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흔들어 PTSD를 몰아냈다. 그리고 궁내부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곳입니다."

20분쯤 걸었을까.

수없이 많은 복도와 통로, 계단과 모퉁이를 지났다. 연약한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마침내 황궁 깊숙한 곳의 어느 지하에 다다랐다. 그곳에 반투명한 문이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마법의 문으로 보호되는 보물창고. 황궁 비고의 입구였다.

궁내부원이 목걸이 2개를 건네어 왔다.

"전하, 이걸 받으십시오."

"이건?"

"비고의 출입증입니다."

이어지는 궁내부원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만 비고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비고 내부에 설치된 공격마법이 모조리 발동될 것입니다."

"...."

"또한, 이 목걸이는 열람 시간을 그때그때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열람 허가 시간을 넘기면...."

"넘기면?"

"역시 비고 내부에 설치된 공격마법이 모조리 발동될 것입니다."

"...."

"참고로 황태자 전하께서 받으신 목걸이에 입력된 열람 허가 시간은 동이 틀 때까지입니다."

"잠깐. 그럼 몇 시간 안 남았잖아?"

"그러니 서두르셔야겠지요."

궁내부원이 빙긋 웃었다. 라키엘은 얼른 목걸이를 착용하고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들어가자."

"예."

우윳빛으로 일렁이는 반투명한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의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온몸이 출렁. 속이 살짝 메스꺼워졌다.

'우욱.'

아스라한 심법이 마법진의 마나에 반응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입구를 통과하니 안쪽에 널따란 공간이 펼쳐졌다.

"오...."

동네 홈x러스, 혹은 이x트가 떠올랐다. 창고 내부는 어지간한 대형 마트 매장보다도 더 넓었다. 그토록 넓은 공간 전체에 수없이 많은 선반이 놓여 있었다. 선반마다 갖가지 물품이 가득했다.

'바쁜 밤이 되겠네.'

이걸 언제 다 살피나. 눈앞이 살짝 캄캄해졌다. 하지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았다.

"데미안."

"예, 전하."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서 필요한 물건을 찾을 거야."

"어떤 걸 찾으면 됩니까."

"차가운 거."

"예?"

"빙결 계열, 혹은 그에 준하는 성격의 물품, 시약, 마법 구슬 등등이면 전부 체크해. 자, 여기 메모지와 숯펜."

"...."

"구역을 딱 절반씩 나누자고. 넌 여기부터 저쪽까지. 내가 말한 성격의 물품들을 체크하고 위치를 적어둬. 내가 내 구역을 탐색한 뒤에 그쪽 체크한 물건들만 바로 추려서 살펴볼 수 있게."

"알겠습니다."

더 설명할 것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았다. 곧바로 움직였다. 데미안을 비고 오른쪽 구역으로 보냈다. 라키엘은 왼쪽 구역의 모든 물품을 이 잡듯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발 나와라. 적당한 물건아 눈에 띄어라.'

음기를 북돋아 줄 시약이나 아티팩트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발진 티푸스에 시달리는 환자의 기운을 되살릴 수 있다. 다짐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눈동자는 더 열심히 굴렸다. 야식 당기는 한밤중에 냉장고 살피듯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왼쪽 구역 전체를 탐색해도 적당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특별한 기운을 품은 물품이 거의 없었다. 그저 명장이 만든 명검이나 갑옷 등의 명품, 혹은 아름다운 공예품이 대부분이었다.

'하급 비고라서 이런 건가. 설마 오른쪽 구역도 이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초조한 기분을 삼켰다. 데미안이 있을 오른쪽 구역으로 갔다. 마침 탐색을 마친 녀석과 마주쳤다.

"시킨 대로 잘 적었어?"

"예, 여기."

"...이게 뭐냐."

"시키신 대로 냉기와 관련된 물품의 위치를 적었습니다."

"알아볼 수 있게 적어야지?"

"나름 열심히 쓴 겁니다."

"너, 악필이구나?"

"...."

데미안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일로 아웅다웅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사실은....

"위치를 적은 게 하나밖에 없네?"

"예. 냉기와 관련된 물품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내가 살펴본 쪽도 그랬어."

라키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왼쪽엔 냉기와 관련된 물품이 아예 없었다. 데미안이 살펴본 오른쪽에 겨우 하나가 있단다. 그러니까 즉....

'여기 적힌 물품 하나. 이게 최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거네.'

조마조마해졌다. 물품의 위치가 적힌 선반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방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만년설?"

라키엘의 시선이 선반 위를 향했다. '만년설'이라는 이름의 방패가 보였다. 한데 그 모습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방패라고?'

초라했다.

방패라 하기엔 너무나 작았다. 잘 쳐줘야 손바닥 한 뼘 정도. 거의 휴대폰, 혹은 카페 호출벨 정도 크기의 납작한 원형 덩어리에 손잡이만 달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실망하지 않았다.

'아래쪽의 설명을 보자.'

비고의 모든 선반에는 전시된 물품의 기원과 용도가 간략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라키엘의 눈이 바쁘게 안내문을 훑었다.

[이름 : 만년설]

[분류 : 방패]

[입수처 : 불명]

[분류 등급 : 하급]

[용도 : 사용자가 마나를 주입할 시, 중앙부의 코어가 마나를 변환하여 냉기의 방패를 생성, 전개합니다. 냉기의 방패는 일정량 이상의 충격을 받을 시에 깨어집니다.]

[사용 시 주의사항 : 충격을 받을 때 파손되어 떨어져 나오는 냉기의 조각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흩어지니, 함부로 만지거나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대박."

이거다.

안내문의 마지막 부분을 읽은 라키엘. 그의 눈동자가 심봉사 라식 수술하듯 번쩍 뜨였다.

46화. 만년설을 획득하다 (1)

"대박."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읽은 방패의 안내문을 거듭해서 곱씹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이 방패, 겉보기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마나를 주입하면 냉기 실드가 형성되는 방식이었네.'

겉보기엔 그저 초라했다. 납작하고 동그란데 손바닥만 한 크기. 딱 카페에서 쓰는 진동 호출벨에 쓸데없는 손잡이만 달아둔 모습이었다.

한데 저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주입하면? 냉기 실드가 생성된단다.

'...온오프 방식은 못 참지!'

머릿속에 이 방패의 활용 방법이 떠올랐다. 수많은 가능성이 함께 연상되었다. 제법 그럴듯한 계획들도 함께였다.

라키엘은 결심했다.

'이걸로 하자.'

어차피 하급 비고 전체를 둘러본 마당이었다. 한데 냉기와 관련된 물품은 딱 이거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안내문의 내용이 진짜인지 확인은 해봐야겠지.'

라키엘의 눈빛이 깐깐해졌다.

사실 당연한 소리였다. 자고로 득템 전의 확인은 필수이자 국룰이다.

내용물의 특징이 제품 안내서와 일치하는지. 혹시나 고질적인 결함이나 치명적인 단점은 없는지. 내가 사용할 용도에 적합한지. 어딘가 파손된 불량품은 아닌지. 사용 후기가 악담으로 가득하진 않은지. 쓸데없는 돈지랄 플렉스 지름질인 것은 아닌지.

작동 방식이 특이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꼼꼼한 확인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마트에서 3천 원짜리 고무장갑을 사도 사이즈가 맞는지는 보고 사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건 쉽게 얻은 찬스가 아니야. 무려 황제를 설득해서 얻어낸 비고 열람권이라고.'

오늘 밤 이곳을 열람하고 챙겨갈 수 있는 물건은 딱 하나.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라키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선반의 유리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 놓인 방패, 만년설의 손잡이를 잡았다.

"...읏, 츠."

차가웠다. 냉동실에서 갓 꺼낸 싱싱한(?) 각얼음을 맨손으로 잡은 기분이었다.

참았다.

꺼내 들었다.

안내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용자가 마나를 주입하면 여기, 중앙부의 코어가 마나를 냉기로 변환한다고 했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마나써클이 눈을 떴다.

키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고리가 회전했다. 체내의 마나를 증폭하며 순환시켰다. 라키엘은 만년설을 쥔 오른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만년설 손잡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하지만....

...츠즈즛?

냉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만년설의 본체 코어가 심하게 진동했다. 마치 진짜 카페 진동 알림벨처럼.

부우우우웅-!

"...."

이거, 당장 아이스 아메리카노 받으러 가야 할 거 같은 기분인데. 라키엘은 잠시 떠오르는 향수병을 얼른 치웠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냥 무작정 마나를 주입해선 안 되는 거였네.'

손잡이를 잡고 있으니 느껴졌다.

마나를 주입하는 내내 되돌아오는 손잡이의 진동이 불어넣는 마나의 양에 따라 실시간으로 강해졌다가 약해졌다. 그 피드백을 통해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마나를 밀어 넣어선 안 돼. 냉기 실드를 생성하기 위한 적절한 투입량이 있는 거야.'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힘을 조절해서 적절하고 일정한 RPM(분당 엔진회전수)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최적의 엔진 효율을 뽑아내고 연비운전을 실현하는 것처럼. 혹은, 썸을 탈 때 적절한 밀당의 강도를 지켜야 솔로 탈출에 성공하는 것처럼.

지금 상황도 똑같았다.

'손잡이로 돌아오는 진동을 느껴보자.'

강해졌다가.

약해졌다가.

그 사이의 간격을 느꼈다. 가장 적절한 마나 투입량의 감을 잡아갔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국에서 지냈던 전셋집 샤워기가 떠올랐다.

'그 수도꼭지 그거, 참 신비로웠지.'

온수와 냉수. 그 사이의 간격이 참 극단적이었다. 조금만 왼쪽으로 당기면 용암처럼 펄펄 끓는 물이 튀어나왔다. 앗뜨거를 외치며 오른쪽으로 살짝만 레버를 밀면? 빙하기 돌도끼 들고 냉수샤워하던 네안데르탈인의 기상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얼음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기에 샤워를 할 때마다 수도꼭지 컨트롤 장인이 되어야 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냉탕과 온탕 사이.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묘한 적정선. 그 바늘틈 구역에 정확히 수도꼭지 레버를 위치시켜야 화상도, 동상도 입지 않는 쾌적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단련(?)의 나날 덕분이었다. 지금, 그때의 치열했던 경험들이 뜻밖의 도움이 되었다.

'...찾았다.'

손잡이를 통해 돌아오는 진동 피드백으로 감을 잡아가길 5분째. 마침내 적절한 양의 마나를 투입하게 됐다. 진동이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 이 투입량을 그대로.'

유지했다.

기다렸다.

기대했다.

이윽고 기대의 보답이 돌아왔다.

...파츠스스!

납작 동그란 중앙부에서 스산한 소리가 났다. 드라이아이스 연기 같은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름 1.2미터의 원형 냉기 실드를 형성했다.

"...성공."

이건 진짜 대박이다.

라키엘은 사용에 성공하자마자 이 방패의 진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광활한 방어 면적. 한데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드가 전개되었음에도 손에 느껴지는 무게라고는 중앙부의 자그마한 코어와 손잡이의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야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커다란 방패를 쓸 때면 방패의 넓이만큼 이쪽의 시야도 제한되는 법인데, 이 방패엔 그 단점이 아예 없었다. 반투명한 냉기로 형성된 실드 덕분이었다. 실드 건너편이 80% 투과율 틴팅을 한 자동차 앞유리처럼 훤히 내다보였다.

'하. 이거 진짜 쩌는 물건이네. 한데... 이런 물건이 하급으로 분류돼서 여기 처박혀 있던 이유를 알겠어.'

성능이 구려서?

물론 아니었다.

직접 사용해보니 체감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방패, 절대로 사용 못해.'

일단 마나를 적정한 양으로만 주입해야 실드가 발동된다. 심지어 그걸 유지하려면? 적절한 마나 투입량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

사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보통의 검사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보통의 경우, 마나는 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발출하는 데에 사용되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신체능력을 끌어올리거나.'

소설 마검황에서 종종 언급됐던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그래. 보통의 검사들은 마나를 폭발적인 용도로 사용해. 한데 이렇게 섬세한 방법으로 일정량의 마나를 조절하며 지속적으로 발출하는 거? 절대로 못하지. 소드마스터라면 모를까.'

소드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그게 가능해진다. 한데 소드마스터가 이런 방패에 의지할 일이 있을까.

'없겠지, 절대로.'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심법을 지닌 검사는 마나 조절에 서툴러서 이 방패를 사용 못하고. 마나 조절이 가능한 소드마스터에겐 이런 방패가 굳이 필요가 없을 거고. 그러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이 방패, 필요한 사람에겐 진입장벽이 너무 높고, 필요 없는 사람만 사용이 가능한 물건이야. 한마디로 쓰기 까다롭고 성능은 애매한 쓰레기인 거지.'

그게 하급으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리라.

한데 자신에게는?

조금 달랐다.

'내겐 아스라한 심법이 있으니까.'

섬세한 마나 조절이 가능하다. 그게 아스라한 심법의 특징이자 특기니까. 이 방패를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방패, 본체의 크기가 작아서 휴대성까지 엄청났다.

'안 그래도 전에 2황자랑 겨루려고 만들었던 금속 방패, 너무 커서 거추장스러웠지.'

그 방패, 들고 다니기가 참 빡쎘다. 하여 요즘엔? 별궁 한의원에서 약재 다듬을 때 놓는 소쿠리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다.

'어쨌건 만년설 이거, 나한테 딱인 물건이야.'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확인이 끝났다.

확신이 들었다.

'이거면 가능하다. 딘라이어 부인, 치료할 수 있겠어.'

라키엘의 머릿속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가능성의 실타래를 끌어당겼다. 냉기의 방패, 만년설을 활용할 방법. 그리하여 딘라이어 부인의 쇠한 음기를 되살려줄 방법.

궁리하고, 몰두했다.

계산하고, 각을 쟀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비로소 해볼 만하다는 결론이 섰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데미안?"

"예, 전하."

지금껏 묵묵히 곁에 있던 데미안이 보였다. 그를 향해 말했다.

"또다시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도움입니까."

"일단 별궁으로 가서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패, 만년설을 야물딱지게 챙기는 황태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아니, 처음부터 황태자를 볼 때마다 들던 생각이었다.

'극도로 이타적인 사람인 걸까.'

처음 황태자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과 검투사들을 구해주었다. 만성적으로 엄습하던 통증을 치료해주었다. 금단현상 극복을 도와주기도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들을 치료했지. 발작에 시달리던 꼬마도, 열병을 앓으며 실려온 귀족 부인도. 구분하지 않고 성심껏 돌봤고, 지금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그것도 그냥 하는 정도의 노력이 아니었다. 무려 황제와 담판을 벌였다. 담판 끝에 황궁 비고 열람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비고의 보물을 챙기고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아니. 딘라이어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게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한데 저 황태자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걸까.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도 딱히 없을 터인데. 어째서 타인을 보살피려 이토록 애를 쓰는 걸까.

'볼수록 감탄스러워.'

처음엔 좀 의아했는데. 보면 볼수록 알겠다. 이 황태자는 진짜다. 어떠한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있다. 조금의 보상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거다.

과연 저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존경스러웠다. 황태자를 향한 데미안의 눈길이 따스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뭐냐, 뭔데. 왜 느끼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건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 나 보는 눈빛이 게슴츠레하더만."

"...."

"혹시 밤중에 끌려나와서 졸린 건 아니지?"

"물론 아닙니다."

"그럼 됐고. 얼른 움직이자. 보너스 수명 빵빵하게 챙기러... 아니, 환자 보러 가야지."

"보너스 수명이라니요?"

"아, 환자 챙겨줄 거라고."

"뭔가... 다른 뜻인 거 같았는데."

"아니거든? 뭘 꾸물거리냐."

"...."

진짜 아닌가.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키엘을 따라 비고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별궁에 도착했다. 한데 황태자는 환자를 보러 가지 않았다. 대신 어쩐 일인지 별궁 정원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잡더니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예, 전하."

알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환자들을 돕는 당신의 말이라면. 이타적인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명령이라면. 설령 그것이 어떤 명령이라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검을 뽑고 말이야."

파츠스스...!

황태자가 만년설을 들었다. 아까처럼 냉기의 실드를 전개했다. 이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 실드가 박살 날 때까지 날 좀 후려쳐 줄래?"

"...."

그거... 진심?

데미안은 황태자에 대한 존경심이 1그램쯤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저도 모르게, 엉뚱한 의구심 한 자락을 잠깐이나마 품게 되었다.

우리 황태자님.

아니, 이 x끼.

사실은 그냥 어딘가가 살짝 미쳐 있는 놈인 건 아닐까 하고.

47화. 만년설을 획득하다 (2)

"이 실드가 박살 날 때까지 날 좀 후려쳐 줄래?"

"...."

이 황태자.

아니, 이 인간.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혹시 미쳤나?'

데미안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혹시 최근 황태자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은 없었는가. 혹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수면장애에 시달린 기색은 없었는가.

돌이켜 보았지만 없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려쳐 달라니, 전하가 들고 있는 그 방패...를 말입니까?"

"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이쪽을 향해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내가 그랬잖아?"

"예, 그러셨습니다."

"그게 이건데?"

"...."

"네가 이 방패를 후려쳐야 딘라이어 부인이 살아날 거야."

"...."

"그래야 별궁 한의원이 망하지 않을 거고."

"...."

"내 무병장수가 지켜지는 것도 물론이고."

"...."

"황가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제가 그 방패를 후려쳐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

"...."

이 인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다만, 한편으로는 황태자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아까 너도 비고에서 이 만년설의 안내문을 봤겠지?"

"예, 봤습니다."

"그럼 기억하고 있겠네. 안내문의 만년설 사용법과 주의사항."

"예. 한계를 넘는 강한 충격이 가해질 때면 냉기 실드가 깨어진다던 문구 말입니까."

"맞아. 그 아래쪽에 있던 주의사항도 기억나?"

"물론입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주의사항 안내문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충격을 받을 때 파손되어 떨어져 나오는 냉기의 조각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흩어진다고 했지요. 그리고 접촉 시엔 인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함부로 만지거나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문구도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정답. 참 잘했어요, 짝짝짝."

"...."

"뭐. 왜. 뭐."

"어쨌건, 그 주의사항 내용과 전하를 후려치라는 명령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는 겁니까?"

"물론."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냉기 결정체를 약재로 쓸 거야."

"예? 그거, 인체에 큰 영향을 준다는 주의사항이...."

"큰 영향이라고만 했지,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딱히 언급이 없었잖아."

"...."

"그러니까 얻어내서 살펴봐야지. 사람 몸에 이로울지, 해로울지. 그러자면 먼저 냉기 실드가 깨질 만큼 큰 충격을 줘야 하고."

"한데 왜 제가...."

"이걸 깰 만큼 강한 검격을 지닌 사람 중에 네가 제일 믿을 만하니까."

"...."

제가요?

왜요?

데미안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되물음을 꾹 삼켰다. 대신 그는 다른 반문을 했다.

"하면, 그 방패를 꼭 전하께서 들고 계신 채로 제 검격을 받아야 합니까?"

"음?"

"그냥 땅에 내려놓은 방패를 제가 치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입니까."

"이렇게 되니까."

황태자가 보란 듯이 만년설 손잡이를 놓았다. 만년설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전개되어 있던 냉기 실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태자가 쓴웃음을 떠올렸다.

"보다시피, 마나 공급이 끊기면 냉기 실드도 사라지거든. 그러니까 냉기 실드를 유지하려면 무조건 내가 이걸 잡고 있어야 해."

"그럼 정리하자면, 전하께서 다치지 않게, 냉기 실드만 깨지도록 힘을 조절해서 치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바로 그거지."

"...."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솔직히 무섭거든?"

"전하뿐만 아니라 저도 무섭습니다."

"어째서?"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행위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조건?"

"예."

"어떤 조건?"

황태자가 반문해 왔다. 데미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의 방패를 한 대씩 칠 때마다... 특별수당을 주십시오."

"...아?"

고개가 갸웃. 묘하게 찡그려지는 황태자의 표정. 그러거나 말거나, 데미안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검은 사납습니다. 거칠지요. 한데 전하는 고작 방패 하나에 의지해서 그 검격을 버텨내려 하십니다. 심지어 방패가 깨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거, 따지고 보면 제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한테 위험한 일이 아니고?"

"저한테도 위험한 일입니다."

"설마,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반역죄를 덮어쓰게 될 거라서?"

"그렇습니다."

"헐."

"그러니 전하께 검격 한 번을 뿌릴 때마다 저 또한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허얼."

"그래서입니다. 검격 한 번에 특별수당, 아니, 위험수당을 주셔야겠습니다."

"허어얼."

라키엘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러니까, 때리면서 돈을 받겠다고?"

"예."

"내가 황금 고블린이야? 때리면 돈 나오는 몹이니?"

"...황금색 고블린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드린 제안은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위험수당을 주지 않으면 내 방패를 후려칠 수 없겠다?"

"예, 전하."

데미안은 굳은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이건 더 많은 보수를 챙길 적절한 기회라고.

'황태자 전하. 저는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대가 없이 사람들을 보살피는 당신의 행동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돈은 받아야겠습니다.'

돈.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온 모든 원인은 돈이었다.

자신을 혼자 키워준 어머니. 어머니의 비참했던 마지막. 뒷골목에 고아로 남겨졌던 자신. 어린 나이에 홀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온갖 고난. 그 끝에 흘러들어 갔던 지하 검투장. 검투장에 매여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날들.

그 모든 시간의 고통이 돈에서 비롯되었다. 돈이 더 많았더라면. 조금만 더 형편이 넉넉했더라면. 충분히 겪지 않아도 되었을 불행이었다. 그래서였다.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돈은 받아야겠습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지금처럼 건강할지. 언제까지 이렇게 당신을 모실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황태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던 사람이었다. 최근엔 다소 건강해졌다지만. 문제없이 활동할 정도로 기력을 찾았다지만. 이러다가 언제 다시 건강이 악화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10년은 모실 수 있을까요.'

길어봐야 10년.

혹은 5년.

어쩌면 더 짧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그랬다. 황태자가 쓰러져 그의 곁을 떠나게 될 날을 대비하고 싶었다. 강제로 일자리를 잃을 날을 대비하고 싶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보수를 받아두는 것.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넉넉히 저축해두는 것. 오직 그것만이 최고의 대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수를 받아야 해.'

충성심과 돈은 별개다.

충성한다고 해서, 존경한다고 해서 무보수로 일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데미안은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받은 라키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후아. 데미안 이놈, 딱 소설 속 행동 그대로네.'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소설 초중반부까지 보였던 주인공 데미안의 행동들이 떠올랐다.

'중반부까지의 녀석은 의외로 짠돌이에 수전노였지. 돈에 한이 맺혀 있었어. 언제나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서 행동했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거네. 딱 그거네.'

녀석이 뻔뻔하리만치 내미는 요구. 고집을 부리는 듯하는 저 눈빛. 그 모든 것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속 데미안의 모습을 겹쳐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뭐,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정말이십니까?"

"그래. 검격 1회당 하루치 봉급. 어때?"

"좋습니다."

스르릉.

마침내 데미안이 검을 뽑았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만년설을 들었다. 냉기 실드를 전개했다.

...파츠즈즈.

"들어와."

"알겠습니다."

검을 고쳐잡는 데미안.

"안전을 위해서 처음엔 가볍게 가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만년설 손잡이를 꼭 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검격을 기다렸다. 그 순간, 데미안이 쥔 검이 사라졌다.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투컹-!

"...!"

눈앞에 별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확 캄캄해졌다가. 이내 어질어질한 감각과 함께 시각이 돌아왔다. 한데 데미안 녀석이 아까보다 몇 걸음 멀어져 있었다.

아니, 멀어진 것은....

"후억."

이쪽이다.

어지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보니 비로소 알겠다. 두 발 앞으로 땅에 고랑이 파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미친. 검격 한 번 막았다고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난 거야?'

그런데 이게 '안전을 위해서 가볍게' 친 거라고?

'방패는?'

라키엘은 만년설을 살폈다. 제발 한 방에 깨졌기를 바랐다. 한데 아니었다. 냉기 실드는 여전히 쌩쌩했다. 데미안 녀석이 이쪽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깨지는군요. 다시 가겠습니다."

"어?"

"갑니다."

"야, 잠깐...."

투콰앙-!

"...걱."

다시 눈앞에 별똥별이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보다 더 많이 뒤로 밀려나 있었다. 현기증의 여파도 아까보다 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냉기 실드는 깨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꽉 잡으십시오."

"어어?"

투콰학-!

"...긕?"

아예 인중에 운석이 떨어지는 기분. 하지만 데미안은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회에 수당 제대로(?) 뽑아내 보자고 작심한 걸까.

녀석의 검격이 점점 강력해졌다. 그 앞에 간신히 버티고 또 버텼다. 천지창조 순살치킨이 되는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아악, 미친!'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녀석의 검격이 강력할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받아내는 입장이 되고 보니 느낌의 차원이 달랐다. 이러다간 방패가 아니라 이쪽의 어깨나 허리, 혹은 무릎이 박살 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버텼다.

이미 시작한 마당이었다.

이걸 성공해야 냉기 결정을 얻고. 냉기 결정으로 딘라이어 부인의 음기를 살리는 시도를 하고. 그녀를 살리고. 한의원 개업빨 기세를 이어가고. 보너스 수명을 더욱 차곡차곡 챙기고.

'무병장수 부귀영화 황족 라이프! 가즈아아!'

언젠가 맞이할 아름다운 미래를 다짐하며 버티고, 또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쩌엉-!

실드에서 처음으로 색다른 소리가 났다. 마치 거대한 솥뚜껑에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데미안의 폭풍 같던 검격이 거짓말처럼 끝났다.

투둑, 툭....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가는 기척.

무의식중에 눈을 떴다. 그 기척을 뒤쫓듯 눈길을 보냈다. 비로소 보였다.

"아."

부서진 유리 조각? 아니, 그보다는 얼음 파편 같은 덩어리. 반투명한 맑은 빛깔의 덩어리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토록 얻고자 했던 냉기 결정이었다.

'성공이다.'

어질어질한 가운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혹여나 사라질세라, 냉기 결정들을 재빨리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어, 대강은."

그제야 이쪽을 걱정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풀밭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하지만 허투루 흘려보낼 시간이 많지가 않았다.

"끄응, 삭신이야."

몸을 일으켰다.

데미안의 부축을 받으며 별궁으로 들어갔다. 탕약 조제실로 쓰는 주방으로 향했다. 손질된 갈근탕 재료들을 꺼냈다.

말린 칡뿌리인 갈근.

마황과 대추 속씨.

작약과 감초 뿌리.

생강 뿌리와 육계나무 껍질.

분량을 정확히 나누고, 조합했다. 청정수를 끓이고, 정성껏 달였다. 평소에 항상 만들던 갈근탕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한 가지 과정을 추가했다.

'냉기 결정. 이걸 넣어보면 어떻게 될까.'

아까 얻은 냉기 결정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음에도,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제일 작은 조각을 갈근탕에 넣었다.

퐁당.

냉기 조각이 섞이자마자 갈근탕에서 뭉글뭉글 치솟던 김이 확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살얼음이 맺혔다. 이쪽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발. 성공해라. 제대로 좀 나와라.'

이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길. 딘라이어 부인의 음기를 북돋아줄 탕약이 되어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탕약을 마실 준비를 했다.

'마셔서 써클슬롯에 넣어보면 대략적인 성분 시험을 해볼 수 있겠지.'

슬롯을 통해 아주 소량만. 신체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해서 몸에 돌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게 해로울지. 혹은 이로울지. 얼마만큼의 음기를 북돋을 수 있을지.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스스로 진맥하며 분석할 수 있으리라.

한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딩동!

뜻밖의 알림음과 함께, 더욱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기존의 전통적 탕약인 '갈근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였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의 결과물로 '특제 아이스 갈근탕'이 성공적으로 조제되었습니다.]

[이 도전적인 시도가 당신에게 커다란 경험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스킬이 개방됩니다.]

['탕약조제'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탕약조제 Lv.1]

[당신이 조제하는 탕약은 기존의 탕약보다 약효가 10% 증가합니다. 또한,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하여, 탕약 성분이 인체에 미칠 약효, 부작용, 독성 등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

미쳤다, 이건.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삼켰다. 기대하지도 않던 순간에 개방된 새로운 스킬. 그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박.'

48화. 특제 아이스 갈근탕 (1)

'대박.'

미쳤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떡 삼키며 메시지창을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조제하는 탕약의 약효가 10퍼센트나 증가한다고? 10퍼센트?'

누군가는 딸랑 10퍼센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정도면 약효가 살짝 오르는 거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단언컨대 절대로 아니다.

현대의 수많은 제약사들이 약효를 1퍼센트라도 올려보려고 얼마나 많은 투자와 연구를 쏟아붓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10퍼센트의 약효 증가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충분히 절감하리라.

게다가 더 대단한 건 따로 있었다.

'탕약 성분이 어떤 약효를 주는지, 부작용과 독성까지... 전부 알 수 있을 거라니.'

깜짝 선물처럼 얻게 된 탕약조제 스킬. 그 스킬의 가장 핵심 알짜배기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사실 나도 갈근탕에 냉기 결정을 넣은 거... 어떤 약효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였거든.'

그래서 이걸 만든 후에는?

실험하려 했다. 자신이 직접 마셔보려 했다. 써클 슬롯에 아이스 갈근탕을 담아두려 했다. 그런 상태에서 신체에 부담이 없을 정도의 극미량을 조금씩 몸에 풀어보려 했다.

그러면 아이스 갈근탕의 효과와 부작용, 주의점을 셀프 몸빵(?)을 통해 알아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더랬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했더라도 효과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을 거야. 딘라이어 부인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따라서 약효를 시험해볼 시간도 길어봐야 며칠 정도가 다였을 테니까.'

새로운 약 하나를 개발할 때. 연구와 투자에도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간다. 하지만 약 개발 이후의 임상시험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정이다.

'사람이 먹는 약이니까. 혹시나 악영향을 끼치면 절대로 안 되니까.'

탕약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의외로 갖가지 탕약들도 수많은 임상시험과 성분 분석을 거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려 했다. 자신의 몸으로 때워서라도 알아보려 했다. 한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탕약 조제 스킬 덕분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들뜨려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직은 마냥 기쁨에 겨워할 때가 아니다. 쉽사리 안심할 때도 물론 아니다.

'일단 테스트해보자.'

한데 어떻게 해야 성분 테스트가 되는 걸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이스 갈근탕이 담긴 용기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저절로 반응이 왔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답은 예스였다.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분 분석 옵션이 발동되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그 직후, 아이스 갈근탕에 대한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아이스 갈근탕]

[유효 성분 : 수기 농축 마나, 이소플라보노이드, 글리시리진, 이소글리시리진산, 사포닌, 쿠마린, 기타등등... 파이토스테롤, 베투릭산,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등등]

[성상 : 흑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오행 중 수기(水氣)의 회복, 해열, 뇌혈관 혈류 증가, 관상동맥 확장, 면역력 증진]

[용법, 용량 : 1회 200ml, 1일 3회 식후에 복용]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투여하지 말 것 - 신장 및 비뇨기 질환이 있는 환자]

[부작용 : 본 탕약은 신체의 수기를 북돋으므로, 그 영향에 따라 드물게 신장과 방광의 기능이 지나치게 활성화될 수 있음. 복용 중 방광의 통증, 혈뇨 등의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투여를 즉각 중지하여야 함]

[저장 방법 : 1~10℃의 서늘한 환경에서 보관]

[사용 기간 : 제조일로부터 3일]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좋다.

정말로 좋다.

'이 스킬, 진짜야.'

아이스 갈근탕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렇듯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니. 거의 약국에서 파는 타x레놀이나 게x린 등등에 동봉된 설명서의 간략 버전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꼼꼼했다.

그래서 신뢰가 갔다.

특히, '효능과 효과' 항목에 제일 먼저 쓰인 '수기(水氣)'의 회복이라는 언급이 제일 기뻤다. 자신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던 약효였기 때문이었다.

'살릴 수 있겠어, 음기.'

딘라이어 부인. 그녀는 신체의 음기가 특히나 쇠하여 있었다. 한데 만약 수기를 북돋아 준다면?

'수기의 영향을 받는 신장과 방광이 회복되고, 수생목((水生木)의 원리에 따라 목의 기운이 함께 살아나지. 그렇게 목기가 힘을 찾으면? 간과 담이 기력을 얻을 거야.'

모름지기 모든 신체의 기관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 간과 담이 살아나면 심장과 소장도 활력을 얻을 것이다. 뒤이어 비장과 위가 활발해질 것이고. 마침내 폐와 대장도 제 기능을 하리라.

그렇게 면역력이 칼자루를 쥐게 된다. 비로소 병마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해볼 만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럼 가자."

방금 완성한 아이스 갈근탕을 야물딱지게 챙겼다. 데미안이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만들자마자 먹이는 겁니까?"

"어."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어."

"...."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를 따라 아침 햇살이 비치는 복도로 나서면서, 딘라이어 부인이 있을 입원실을 향해 걷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뭘까.'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는 어떻게 된 사람인 걸까. 대관절 어떻게 저렇듯 확신을 보일 수 있는 걸까.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겠지.'

듣기로는 황태자는 의학을 배운 적이 없었노라 했다. 한데 저렇듯 너무나 능숙하게 환자를 진단하고, 약을 만든다. 자신과 검투사들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라키엘은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했다.

"똑똑? 들어갑니다?"

입원실로 들어갔다. 마침 꾸벅꾸벅 졸던 딘라이어 부인의 아들이 황급히 일어났다.

"저, 전하."

"부인은 좀 어떠시지?"

"조금 전에 미음만 드시고는 잠드셨습니다."

"열은, 으음. 여전하군."

딘라이어 부인의 맥을 짚어보았다. 역시나 어젯밤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더 나빠졌어.'

맥이 확연히 약해졌다. 신체가 병마와 싸울 기력을 잃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발 이 약이 효과를 발휘해야 할 텐데.'

부인을 살며시 깨웠다. 부축하며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아이스 갈근탕을 스푼으로 떠서 차근차근,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조금 차가울 겁니다. 천천히. 자, 그렇게."

"으으... 맛이 너무 써요...."

"사탕도 챙겨왔으니 안심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전하...."

다행히 딘라이어 부인은 아이스 갈근탕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다 마셨다. 그렇게 다시 잠든 그녀를 보며 라키엘은 기원했다.

제발 약효가 있기를. 성분 분석에서 나왔던 효과가 100% 발휘되기를. 기원하고, 기다리고, 지켜보았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진득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1회당 200ml씩. 1일 3회 식후마다 복용할 것.'

용법과 용량을 정확히 지켰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아이스 갈근탕을 조제했다. 직접 만든 후엔 반드시 성분 분석을 했다. 검사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딘라이어 부인에게 탕약을 먹였다.

물론 그것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막 개업한 별궁 한의원도 있었다. 낮에는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해야 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대강 살필 순 없었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

아직 초 저질 체력인 몸뚱이였다. 그런 몸뚱이로 일반 환자들을 진료하고, 딘라이어 부인을 따로 살폈다. 온종일 강행군을 반복하니 체력이 금방 방전되었다. 진심 이대로 픽 쓰러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졸릴 때는 꼬슴이 갈색 가시로 허벅지를 찔렀다. 어지러울 때는 사탕으로 당분을 보충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의지를 다졌다.

'언젠가는 내가... 이 빡쎈 노력의 보상이고 뭐고 다 얻을 거야!'

반드시 제대로 즐기며 살아주리라. 플렉스로 점철된 평생을 보내리라. 다짐하고, 분투했다. 그런 덕분이었다. 그의 모습이 별궁 식구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원래 저런 분이셨어?'

모두는 생각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 한창 병상에 누워 있던 때엔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한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검투사들을 데려오셨을 때도 그랬지만... 발작 일으키던 아이를 보살피셨을 때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저렇게까지 헌신하는 그런 분은 절대로 아니셨는데.'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며 땀 흘리는 우리 황태자 전하. 피곤함과 고단함도 무릅쓰고 직접 탕약을 달이는 우리 황태자 전하. 심지어 밤을 지새워가며 환자의 곁을 지켜주시는 우리 황태자 전하.

"...즈어어언하아! 너무 무리하면 아니 되십니다아!"

보다 못한 가르딘 경이 뜯어말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이야."

그 대답이 전부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환자를 돌보았다. 그 모습에 별궁 식구들은 더욱 감탄했다.

이쯤이면 진짜다.

진심이신 거다.

'...존경스러워.'

별궁의 시종장도.

시종과 시녀들도.

근위대원들도.

말 못할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라키엘의 헌신에 갈채를 보냈다. 숭고한 행동에 찬사를 머금었다.

물론 그들은 몰랐다. 실제 라키엘의 마음속에 봉사와 헌신, 자애의 마음이 1그램도 없다는 것을. 오직, '부귀영화! 플렉스 황족 라이프!'라는 다짐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모두의 그런 사소한(?) 오해와 감탄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틀, 사흘, 닷새, 열흘.... 그리고 마침내, 결실이 드러났다.

딩동!

저물어가는 달빛이 창틀에 걸린 어느 새벽. 딘라이어 부인 곁에서 꾸벅꾸벅 졸던 와중이었던가. 비몽사몽하던 의식을 불현듯 일깨우는 알림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으음?'

라키엘은 선잠에서 벗어나며 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아이스 갈근탕의 정확한 활용, 그리고 정성 가득한 간호로 발진 티푸스에 시달리던 환자 : 딘라이어 부인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열병을 이겨냈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시 무난하게 건강을 되찾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보다 환자를 먼저 위하는 성실한 헌신, 봉사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당신을 향해 진심이 깃든 존경과 갈채,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진료 보상에 '찬사 보너스' 효력이 추가됩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의 효과가 1.5배로 적용됩니다.]

마침내, 결실의 꽃망울이 눈앞에서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49화. 특제 아이스 갈근탕 (2)

[진료 보상에 '찬사 보너스' 효력이 추가됩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의 효과가 1.5배로 적용됩니다.]

'...뭐?'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 떠오른 보상 메시지를 거듭 확인했다.

'찬사 보너스? 덕분에 스킬 효과가 1.5배가 된다고?'

그 사이.

추가 메시지가 차곡차곡 떠올랐다.

[환자 : 딘라이어 부인은 당신의 아이스 갈근탕 처방과 정성스러운 간호를 통해 27년 3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27년 3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5.03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지금껏 몇 차례 보아온 보너스 수명 정산 메시지와 같았다. 한데 그 아래로 새로운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보상에 찬사 보너스 효력이 추가됩니다.]

[당신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수명이 1.5배 증가하였습니다.]

[총 7.546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8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46일]

"...."

저도 모르게 들숨날숨. 메시지를 보며 라키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다. 찬사 혜택으로 보너스 수명 보상이 늘어났어.'

원래는 5일의 보너스 수명을 받았어야 했을 터였다. 한데 그게 1.5배로 뻥튀기가 되었다. 덕분에 3일의 추가 보너스 수명을 얻었다!

'허허, 허허허.'

라키엘의 콧구멍이 기쁨으로 벌렁거렸다.

3일.

그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세계 멸망을 앞두고 사과나무를 3일이나 더 심을 수 있다. 끼니마다 1 치킨을 먹으면? 무려 9마리나 먹을 수 있다. 그만큼 3일이란 시간은 삶이 뜻깊어질 수 있는, 소중하고도 값진 의미였다.

'뭐, 어쨌건. 덕분에 하나는 잘 알았다.'

라키엘은 메시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정리했다.

'그냥 보너스 수명을 받는 것보다,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 보상이 뻥튀기가 된다는 거구만.'

분명 메시지에서 그렇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좀 더 주위에 신경을 써야겠어.'

같은 환자를 치료하더라도 조금 더 극진하게.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물샘에 가습기가 풀가동이 될 만큼 정성스럽게. 그렇게 환자를 돌보면 이쪽도 더 많은 보너스 수명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자연스럽게 그런 계산이 섰다.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딘라이어 부인을 치료하느라 제법 애를 썼다. 다음번엔 더 열심히 애를 쓰는 척해보자고 라키엘은 다짐했다. 그리고 메시지창을 치웠다. 시선을 들었다.

곤히 잠든 딘라이어 부인. 그녀의 숨소리가 전보다 확연히 편안해져 있었다. 가만히 이마와 맥을 짚어보았다. 열이 한결 내려가 있었다. 맥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고비를 넘겼구나.'

과연 메시지가 알려준 대로 완치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문득,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이젠 나도 좀 쉴 수 있겠네.'

솔직히 말해서, 이쪽도 정말로 피곤하다. 이 아주머니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좀 더 솔직히는, 기뻤다.

'해냈어.'

보너스 수명은 물론 기쁘다.

한데 지금은 나 덕분에 누군가가 살았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한 가정과 가족이 행복해질 거라는 사실이 더욱 보람차다. 쓸데없는 감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게 더 기쁘다.

그렇게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세상 누구도 모를, 오직 창밖에 휘영청 걸린 달빛만이 엿볼 수 있는 미소였다.

여드레가 지났다. 그동안 딘라이어 부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기력을 회복했다.

"완치되셨습니다."

햇볕 따뜻한 봄날의 아침. 딘라이어 부인을 진맥한 라키엘은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축하합니다. 이제 완전히 나았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그럼요."

고개를 끄덕. 라키엘은 확신했다. 진맥 스킬의 결과가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의 오장육부가 더 또렷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심장 : 딘라이어 부인의 심장과 상담 결과 이상 무! 완치 확정입니다.]

[허파 : 부인 다 나았대. 나 감동 받았어... 허... 프허악....]

[대장 : 완치빵 후원은 못 참지 말입니다ㅋ]

[간장 : 히야. 이게 되네.]

[심장과 허파, 대장과 간장이 당신의 성공적 진료를 축하하며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400]

진맥피셜, 오장육부피셜(?) 모두가 딘라이어 부인의 완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라키엘은 흐뭇한 마음으로 후원 HP를 샤샥 챙기며 말했다.

"완전히 나으셨습니다. 당장 퇴원하셔도 됩니다. 일상생활로 돌아가도 되고요. 하지만 아시죠? 아직은 기력이 다 돌아온 건 아니니까 무리하지는 마시구요. 당분간 음주도 자제하세요."

"그럼, 그 외에는...."

"다 괜찮습니다. 식사 든든히 하고 푹 쉬세요."

"가, 감사... 흐흑... 감사합니다!"

딘라이어 부인이 울먹였다.

열이 펄펄 끓던 그날의 오후. 비몽사몽한 상태로 이곳까지 실려왔던 그녀였다. 당시만 해도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그만큼 괴로웠다. 숨을 쉬는 것마저 힘겨웠다. 이 세상 어떤 의사라도 자신을 살리긴 어려울 거라 여겼다. 괴로움과 고통에 지쳐 자포자기하고 있었더랬다.

한데 이곳에 오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다른 이도 아닌 무려 황태자가 자신을 돌보아주었다. 직접 달인 시원하고 쌉쌀한 약을 먹여주었다. 밤낮으로 보살펴주었다.

덕분에 살았다. 이렇게 건강해졌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스스로도 포기하고 있었던 기적을 기어코 품에 안겨주었다.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감격한 것은 딘라이어 부인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들, 딘라이어 영식도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황태자 전하, 감사...합니다. 정말로 어머니를 이렇게 보살피고 살려주실 줄은... 흐흑...."

딘라이어 영식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 젖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 어머니를 살려주신 은인이십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어, 음, 딱히 안 갚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꼭 갚아드리고 싶습니다. 치료비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얼마면 될는지요."

"치료비?"

"예, 전하."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예?"

"여기 치료비 무료야. 몰랐어?"

"물론, 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전단지에 적혀 있는 거 봤지?"

"예...."

"근데 내가 치료비를 왜 받아. 그럼 전단지 내용이 허위광고가 되잖아. 손님, 아니, 환자 떨어져 그러면."

"하, 하지만, 전하?"

"어, 왜."

"그래도 은혜는 갚고 싶습니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치료비를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한데 딘라이어 영식이 생각보다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래서였다.

'저렇게까지 은혜를 갚겠다는데 뭐 하나쯤 챙겨볼까.'

그런 생각이 은근슬쩍 들었다. 솔직히 퍼주겠다는 놈을 그냥 보내자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뭐 좀 뜯어먹을 건덕지 없으려나.'

라키엘은 머릿속 계산기를 팡팡 두드렸다. 열심히 견적을 뽑아내며 대뇌피질을 풀가동했다. 사람들에게 허위 광고라고 욕을 먹지 않으면서도 딘라이어 영식에게 뭔가를 뜯어먹을 방법. 그걸 고민하다가....

마침내 뭔가가 번쩍,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 이건 어떨까?"

씨이익.

라키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듣자하니 그쪽, 화가 지망생이라며?"

"예?"

"맞지? 그림 좀 그린다던데?"

"아, 예, 맞습니다, 전하. 한데 그걸... 어떻게?"

딘라이어 영식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콧방귀를 풍 뀌었다.

"어떻게는 무슨. 딘라이어 부인이 병상에 누워 있던 내내 아들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

딘라이어 부인과 영식의 얼굴이 동시에 벌게졌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남모를 미소를 삼켰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 부인이 아들 걱정을 많이 했지.'

불현듯, 지난 며칠 동안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비를 넘긴 이후, 딘라이어 부인은 병상에서 하루하루 기력을 찾아갔다. 그 시기에 몇 번인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부인은 세상 여느 어머니와 비슷했다. 입만 열면 아들 걱정이 제일 우선이었다.

'아들이 그림에 재능이 많다고. 화가가 되고 싶어 한다고 그랬지. 그래서 안타까워했어. 차라리 공부를 해서 행정가가 되어주면 좋을 텐데, 라고. 그런 안정적인 직업이 아들의 미래를 위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부인은 넋두리 끝에 항상 미소를 지었던가.

'그럼에도 자신은 아들의 꿈을 응원하노라고, 그랬지.'

그 말이 문득 떠오른 덕분이었다. 그럴듯한 계획이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졌다.

"어쨌건 그쪽, 그렇게나 은혜를 갚고 싶으면 나랑 일 하나만 하자."

"...예? 일이라니요?"

"날 그려봐."

"예에?"

딘라이어 영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를 말입니까?"

"어. 내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면 딱 좋겠군. 가능하면 최대한 숭고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MSG... 아니, 양념 좀 팍팍 쳐서. 할 수 있겠지?"

"가, 가능합니다."

"좋아. 거기에 옆에는 마찬가지로 열심히 헌신하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그리는 거야."

"간호사... 라니요?"

"으음. 깔끔한 백색 옷을 걸친 조수랄까. 숭고하게 환자를 돌보는 황태자의 뜻을 함께 실천하는 멋진 동반자의 느낌을 팍팍 실어서. 할 수 있겠어?"

"무,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당장 그리자."

"지금... 말입니까?"

"어. 문제 있어?"

"아닙니다."

"그럼 화구 챙겨와. 당장."

"...아, 알겠습니다. 그럼,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쪽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걸까. 딘라이어 영식이 허둥거리며 움직였다. 그림 작업이 시작되었다. 장장 사흘에 걸쳐 작업이 이어졌다.

그동안 이쪽은 열심히 갖가지 포즈와 표정을 취해주었다. 솔직히 좀 많이 오글거렸다. 하지만 참았다. 덕분에 멋진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오오."

완성된 그림을 보는 라키엘의 눈이 반짝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는데?"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무슨."

"그런데 전하? 이래도 되는 걸까요?"

"으음? 뭐가?"

"그림 속 전하의 얼굴이... 실제보다...."

"턱을 너무 깎았다고?"

"예...."

"괜찮아. 괜찮아. 포샵... 아니, 원래 다 이렇게 하는 거야."

"하지만 신체 비율도 너무...."

"다리가 길어졌다고?"

"...예."

"아, 괜찮다니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예?"

"이걸로 전시회를 열 거거든."

"예에?"

"그쪽, 지금까지 혼자서 그려온 습작들 있지? 그걸 전부 모으고, 지금 이 그림을 메인으로 내세운 단독 전시회를 열어줄게."

"예에에?"

이쪽을 보는 딘라이어 영식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쪽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눈치다. 덕분에 싱긋,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이쪽이 뚝딱뚝딱 떠올린 계획의 실체를 밝힐 때다.

"관람객이 많이 몰리겠지. 좋은 홍보가 될 거야."

"좋은... 홍보라니요?"

"별궁 한의원 간호사 모집 채용공고."

"...예?"

"그렇잖아도 딘라이어 부인이 입원하기 전부터 전문 간호사 인력이 너무 부족한 걸 절감하던 차였거든."

"...."

"그러니까 이 그림, 위쪽 있지? 여기, 이쪽에다가 빵빵하고 화려한 타이포 좀 때려 박자."

"타이포... 글씨를 말입니까?"

"어 ."

"설마, 간호사 모집 채용공고를 알리는 홍보 문구를 넣으시려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이제 좀 이야기가 통한다. 흐뭇함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하면, 전하께서는 어떤 문구를 넣길 원하십니까?"

딘라이어 영식의 물음.

라키엘은 상큼하게 웃었다.

"쇼 미 더 간호."

"...예에?"

그렇게 바야흐로, 제국의 황태자가 후원하고 주최하는 사상 초유의 전문 간호사 선발 대회, 'Show me the 간호'가 개최되려 하고 있었다.

50화. Show me the 간호 (1)

"자네, 들어봤나?"

"뭘 말입니까?"

"쇼 미 더 간호."

"...."

"이상한 거 아닐세.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나?"

"아니, 그냥 쳐다본 겁니다."

"...험험! 어쨌건, 황태자 전하께서 전문 간호사 선발 대회를 여신다더구만."

"간호사를요?"

"그래, 간호사."

"대관절... 웬 간호사랍니까?"

"그야 뭐, 황태자 전하께서 별궁에 한의원을 여셨으니까, 거기서 일할 조수를 뽑는 게 아닐까?"

"흠, 그렇겠군요. 한데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지?"

"나야 다 자네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저를 생각하다니요?"

"자네, 벌써 5년째 집구석에서 방바닥만 긁고 있지 않나?"

"아니, 제가 취직이 안 되는 걸 왜 집주인 어르신께서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거 오지랖 아닙니까? 선 넘지 마시죠. 제가 언제 집세라도 한 번이나 밀렸습니까?"

"한 번은 아니고 두 번."

"...죄송합니다."

"아무튼, 흠, 간호사 선발 대회 말일세. 자네도 나가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제가요?"

"으음."

"저보고 간호사를 하란 겁니까?"

"으음. 보수가 두둑하더구만."

"얼마나요?"

"한 달 봉급이 자네 2년 치 집세는 되겠던데?"

"...당장 하겠습니다!"

청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집주인 아저씨가 허허 웃었다.

"잘 생각했네. 그럼 프론테라 광장의 공회당으로 가보게나."

"공회당에요?"

"으음. 거기서 미술 전시회를 하는데, 거기 메인으로 걸린 작품에 자세한 모집 요강이 적혀있더구만."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취직 성공하면 제가 옷이라도 한 벌 맞춰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일단 어서 가보게."

봄날의 아침을 맞이한 황도 마젠타. 시가지 곳곳에서 두런두런 소식이 번져갔다. 소식을 들은 이들이 프론테라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한쪽에 세워진 공회당. 그곳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 막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출내기 젊은 화가 딘라이어 영식의 습작들을 내걸어둔, 소소한 전시회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했다. 딱히 주목받을 구석이 없는 일상적인 전시회에 불과했다. 한데, 공회당의 중앙에 걸린 그림 한 점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바로 전시회의 핵심이라는 '치유하는 황태자와 간호사들'이라는 작품이었다.

"저게... 황태자 전하?"

"에이, 아니겠지. 실물보다 너무 훤칠하잖아."

"그렇죠? 다리도 너무 길고."

전시회장의 구조는 교묘했다.

어떤 관람객이라도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조건 '치유하는 황태자와 간호사들' 작품 앞을 한 번은 지나가게 동선이 짜여 있었다. 덕분에 전시회장을 찾는 모든 발길이 그 작품 앞에서 멎었다.

"그런데 그림에 써놓은 저 문구들은... 대체 뭐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림 위아래에 새겨진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타이포가 사람들의 시선을 확 붙잡았다.

<쇼 미 더 간호>

<당신도 될 수 있습니다, 백의의 천사>

<간호사가 되어 찾아내는 인생의 보람과 행복>

<황태자가 선사하는 빵빵한 봉급 돈팔매질 완전 보장!>

"...."

꿀꺽.

무려 황태자가 주는 봉급이란다. 한데 그 액수를 보니 저절로 침이 고였다.

'저거, 어지간한 번듯한 직업들 못지않잖아? 그런데 환자를 간호하기만 하면 저런 돈을 준다고?'

모두는 생각했다.

해볼 만하다고. 저거, 거저 주는 돈 아니겠느냐고. 게다가 고용주가 황태자니까 봉급 떼일 일도 없을 거라고.

"여보, 결심했어."

"네?"

"사실 내 어릴 적부터의 꿈은 간호사였던 게 아닐까."

"...네에?"

관람객 대부분의 마음이 바운스 바운스 흔들렸다. 집단으로 인지왜곡과 셀프 기억조작까지 감행하며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장래희망을 수정했다.

거기에 전시회장의 교묘한 구조가 또 한 번, 관람객들의 흔들리는 마음에 상큼한 막타를 때려 박았다. 전시회장을 떠나는 출구 한쪽에 아예 '쇼 미 더 간호' 접수처를 대놓고 마련해둔 덕분이었다.

[간호사 선발 시험 접수처]

...라고 쓰인 테이블.

그 앞에 줄이 늘어섰다. 끝도 없이 늘어섰다. 새치기 실랑이마저 일어났다. 간호사 그거 어렵지도 않아 보이는데 봉급은 빵빵하고 안정적이니 해볼 만하겠다는 부푼 기대로. 혹은 이 기회에 팔자 좀 고쳐보겠다는 희망으로.

전시회장을 방문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줄을 섰다. 간호사 선발 시험에 이름을 등록했다. 모두가 라키엘이 의도했던 그대로의 결과였다.

"후후, 후후후."

"...."

"후흐흐, 흐흐흐흐."

"...."

"후흐흐흐흣, 흐흐흣."

"...전하."

"어, 왜."

"뭐가 그리 기쁘십니까."

"그럼 기쁘지, 안 기쁘겠어?"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빌딩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간호사 선발 시험 응시자, 이렇게 많이 나왔잖아."

그는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이 중에 쓸 만한 인재들이 있겠지. 그럼 더는 한의원의 간호 인력이 모자라는 일이 없겠지. 한의원이 쌩쌩 돌아가겠지. 더 많은 환자들이 원활하게 진료받고, 병상에서 회복될 수 있을 거야."

그만큼 나는 보너스 수명을 팍팍 땡겨 받겠지. 그 수명으로 천년만년 떵떵거리며 살아줄 테다.

"그런데 안 기쁘겠냐?"

"그렇군요...."

데미안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모시는 이 황태자는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이토록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니. 더 많은 간호사를 뽑는 이유가 더 많은 환자들의 치유와 행복을 위한 숭고한 목적이라니.

'역시 훌륭하신 분.'

작은(?) 오해 속에서 끄덕거려지는 데미안의 고개. 그런 오해를 방치하며 더 흐뭇하게 웃는 라키엘. 둘의 엇갈린 미소 속에 날짜가 흘렀다. 닷새 동안의 전시회가 끝났다.

그리고 엿새째.

황태자가 직접 후원하고 주최하는 전문 간호사 선발 대회, '쇼 미 더 간호'가 별궁에서 진행되었다. 그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 주목! 응시번호 1번부터 50번까지 모여주세요!"

별궁 외부 출입문 광장. 그 앞에 모인 수백이 넘는 응시자들. 그중에 응시번호 1번부터 50번까지가 모였다. 그들을 향해 근위대원이 말했다.

"이제부터 간호사 선발시험의 첫 번째 과제를 시작합니다. 첫 과제는 '돌격, 면접시험장으로'입니다."

"...."

응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또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하지만 근위대원의 이어지는 설명에는 자비가 없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정원의 정해진 코스를 거쳐 면접시험장이 있는 별궁 본채까지 이동하면 됩니다. 단, 여러분이 이동할 코스의 길이는 약 3킬로미터이며, 별궁 본채에 빠르게 도착한 10명의 사람까지만 선착순으로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예에?"

"뭐라고요?"

"잠깐만요, 그럼 나머지 40명은요?"

깜짝 놀란 응시자들이 물었다. 근위대원이 딱 자르듯 말했다.

"선착순 10명에 들지 못하는 나머지는 모두 탈락입니다."

"...."

무슨 이런. 우리는 간호사 시험을 보러 온 건데. 그런데 왜 이런 체력 시험을 치르는 걸까. 모두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출발신호가 다짜고짜 떨어졌다.

"출발!"

"...!"

그때부터였다.

50명이 죽어라 달렸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잠시 후, 10인의 승자가 가려졌다.

"...헉! 후악! 후욱!"

"쿨룩! 쿨럭!"

"게에에엑...."

10인의 승자들이 화려한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비틀비틀 면접시험장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라키엘과 가르딘 경이 맞이했다. 가르딘 경이 응시자들에게 말했다.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곧바로 다음 과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응시자들에겐 숨 돌릴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가르딘 경이 널따란 면접장에 마련된 10개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여섯 가지 종류의 약재가 놓여 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가르딘 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섯 가지 약재 중에 하나는 잘못된 보관방법으로 상태가 변질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각자의 시각과 후각, 촉각을 이용해서 변질된 약재를 골라내십시오. 그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후, 후윽, 아, 알겠습니다...."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응시자들이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더운 땀을 뻘뻘 흘리며 각자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든 변질된 약재를 골라내려고 애를 썼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후, 후욱... 허으... 윽...."

선착순 달리기를 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까닭일까. 응시자 중에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그러더니 누가 붙잡아줄 틈도 없이 혼절했다.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콰당탕!

테이블이 엎어졌다. 약재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 서슬에 나머지 9명의 응시자들이 움찔했다. 모두의 시선이 쓰러진 사내를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응시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저 사람, 쓰러졌는데 괜찮나...?'

'뭐야. 왜 아무도 저 사람 안 챙겨주지?'

'근위대원이나 별궁 사람들이 업고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주최측은 뭐 하는 거지?'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들. 더욱 바쁘게 흔들리는 마음들. 하지만 이내 응시자들은 깨달았다. 가만히 보니, 자신들 외에 쓰러진 사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

모두는 침묵했다. 그 속에서 암묵적인 눈치가 오갔다. 어차피 경쟁인 마당이다. 쓰러진 사람은 안타깝지만 이 또한 경쟁의 일부인 셈이다.

그때부터였다.

9명의 응시자들이 쓰러진 사내에게 신경을 껐다.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약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가르딘 경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됐습니다. 거기까지."

"...예?"

가르딘 경의 말에 움찔하는 응시자들. 아직 상한 약재를 감별하지도 않았는데? 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볼 것은 다 보았으니까.

가르딘 경의 사무적인 선언이 이어졌다.

"여러분이 약재를 감별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을 잘 보았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합격 여부는 추후에 통보하겠으니, 이만 돌아가주시고요.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

9명의 응시자들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합격이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품는 얼굴도 보였다.

그렇게 응시자들이 면접장을 빠져나간 후. 앞서 혼절하여 쓰러졌던 사내가 멀쩡한 기색으로 벌떡 일어났다. 데미안이었다.

"후우, 다행히 다들 잘 속았군요."

"그러게. 쓰러질 때 좀 오버스러워서 걱정했는데."

"...그랬습니까?"

"어. 살짝 어색하더라."

"...."

"연기력 좀 갈고 닦자.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

"어쨌건, 다들 속아 넘어간 덕분에 평가는 확실하게 되는구만."

"그럼 방금 들어왔던 아홉 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부 탈락이야."

라키엘이 선을 긋듯 딱 잘라 말했다.

"일단 기본적인 체력 시험은 통과했어. 환자를 보살피는 데에는 상상 외로 엄청난 체력이 소모되니까.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럿을 돌볼 때는 더더욱.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과제였지."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더군요."

"어. 처음엔 눈치를 보더니 이내 신경을 껐지. 바로 곁에 쓰러진 사람이 생겼는데 말이야. 그래선 안 돼. 약초 감별이나 다른 지식은 교육으로 갖출 수 있지만...."

"이미 지니고 있을 성품이 중요하다는 겁니까."

"어. 정확해."

나보다 남을 우선시하는 성격.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마음가짐. 그것이 간호사의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라키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사람이 그래.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본성이 드러나거든. 이를테면 방금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신체적 한계에 몰렸지. 그 상황에서 간호사 선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과 경쟁심이 걸렸어."

"그러니 다들 본성이 나온 거로군요."

"맞아. 쓰러진 사람을 보살펴야 할 대상이 아닌, 경쟁상대로 치부한 거지. 그래선 안 되는 거거든. 간호사가 될 사람이라면."

사실 면접장에서의 진짜 과제는 인성과 자질 테스트였다. 각자의 테이블 위에 놓인 약재는? 전부 멀쩡한 것들이었다. 보관이 잘못되어 변질된 거? 실은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응시자들을 몰래카메라 찍듯 낚아서 인성을 테스트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특근대원 전원이 돌아가며 체력 훈련도 하고. 어때? 3킬로미터 뛰어보니까?"

"가뿐했습니다."

"그렇겠지. 지금쯤이면 세르지오가 다음 응시자 50명 속에 섞여서 뛰어오고 있겠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다음 그룹에는 또 다른 특근대 검투사가. 또 다음 그룹에는 다음 순서의 검투사가 섞여서 달려올 것이다. 선착순 10인 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방금 데미안이 그랬던 것처럼 쓰러지는 연기로 나머지 9명의 인성을 시험하게 되리라.

"그럼 계속 수고해. 변장 바꾸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물러갔다.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피었다.

'자, 다들 인성, 인성을 보자!'

그 뒤로 시험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뭐야, 이거.'

면접시험이 모두 끝난 후. 시험장에 남은 라키엘은 어처구니가 사라짐을 느꼈다. 쓰러진 특근대원에게 신경을 써준 응시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몇 명은 있지 않을까. 이 시대의 양심이 그 정도일까 생각했는데. 정말로, 진짜로, 믿어지지 않지만 경악스럽게도, 단 한 명도 쓰러진 사람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후우, 이거 실환가.'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그만큼 쓰러진 사람보다 시험이 더 중요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거, 좀 씁쓸한 결과인데?'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성악설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어떡하지. 그냥 응시자 중에 적당했던 사람만 몇 명쯤 추려내야 하나?'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아니다. 그럴 바엔 지금 땜빵으로 간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 별궁 시종과 시녀들을 교육해서 쓰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를 뽑을 거라면 이런 선발대회, 하지도 않았어.'

그러기 위해 시작한 선발대회가 아니다. 기왕 뽑으려면 제대로 된 진짜를. 그게 라키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황도에 살면서 간호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거의 다 왔다고 봐야 할 텐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응시자가 없을까. 정말로 믿고 환자를 맡길 간호사 인재가 없을까. 고민이 뒷골을 두드렸다. 머리가 아팠다. 바람이나 쐬자 싶었다.

'좀 걸을까.'

데미안을 대동하고 정원을 걸었다.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발길이 절로 별궁 외부 관문으로 향했다. '쇼 미 더 간호' 응시자들이 모였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한데 관문에 도착해보니,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네? 우리도 시험에 응시했다고요. 지원서를 냈다니까요?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거죠?"

"거듭 말하지 않았나. 인간만 가능하다고."

"하지만 우리도...!"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소리를 치려는가. 강제로 끌어내어져야 정신을 차릴 건가?"

"...."

어쩐지 관문 바깥쪽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로 보아선 젊은 여자, 그리고 남자다. 여자는 항의하고 있고, 남자는 훈계하고 있다. 내용으로 보아선?

'여자는 응시자. 남자는 관문을 지키는 근위대원인 것 같은데.'

한데 지원서를 냈음에도 입장을 거부당했다니. 인간이 아니라서 시험을 못 치렀다니.

'뭐야. 나 모르는 사이에 시험도 못 치고 입구컷을 당한 응시자가 있었어?'

빠직.

한 사람의 후보도 아쉬운 마당에 감히? 라키엘은 사골육수처럼 깊고 진한 빡침을 느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관문에 도착한 직후, '인간이 아니라서' 커트 당한 응시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응시자를 본 라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51화. Show me the 간호 (2)

"...어?"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문 앞에서 근위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여자. 그 모습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사람인데?'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야. 평범하잖아. 딱 그냥 20대 중반 여잔데?'

그럼 설마 엘프인 걸까. 하지만 귀가 뾰족하지 않았다.

'그럼 엘프도 아니고.'

설마 드워프? 신체 비율상 그건 더 아니고.

'대체 뭐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곁의 데미안이 불쑥 말했다.

"저 여자, 웨어울프로군요."

"웨어울프?"

"예, 전하."

"어째서?"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설 마검황에도 웨어울프 종족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모습일 때도 길고 풍성한 털로 덮인 꼬리가 달려 있다고 했는데?'

저 여자에게선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이 여자의 하의를 가리켰다.

"저런 모양의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

과연 보니까 그랬다.

여자가 입고 있는 바지의 모양이 좀 많이 특이했다. 극단적인 배기핏? 아니, 엉덩이부터 허벅다리까지만 항아리처럼 심하게 펑퍼짐했다. 그런데 무릎부터 종아리, 발목까지는 또 타이트했다. 굉장히 독특한 핏이었다.

그 사이, 데미안의 설명이 들려왔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웨어울프들은 자신의 꼬리를 내보이는 걸 극도로 꺼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꼬리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저런 형태의 바지를 만들어 입는다고 하지요."

"그런... 거였어?"

"예. 언젠가부터 웨어울프들이 저런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웨어울프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저 형식의 바지 착용을 피하게 됐지요."

"해서 자연히 저런 형식의 바지가 웨어울프 특유의 복장으로 굳어진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으음."

...오.

이건 마검황에서도 나온 적 없는 디테일한 정보였다. 소설에서는 웨어울프라면 그저 변신 능력이 있고, 강력한 체력을 지녔고, 후각이 개코라는 정도만 언급되었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잠깐.'

라키엘은 흠칫했다. 방금 자신이 무의식중에 떠올리던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잠깐만. 이거. 체력 빵빵한 개코? 그거 완전 한의원 간호사로 일하기에 딱 좋은 조건인데?'

좌라라락.

머릿속 뇌주름이 풀악셀을 밟았다. 뇌주름 속 뉴런이 급진적인 추론을 시작했다.

'체력이 뛰어나? 그런 간호를 할 때 좀처럼 지치지 않을 거란 뜻이지. 간호는 힘드니까. 정말로 끔찍하게 고된 일이니까. 간호를 한다고 해서 환자 한 사람만 돌보는 게 아니니까.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삼자면... 평균적으로 간호사 한 사람이 담당하는 환자가 적게는 15명, 많게는 20명까지 되니까.'

쉴 틈 없이 돌아다니며 환자를 체크해야 한다. 게다가 환자들이 모두 얌전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거기에 환자 가족까지 신경 써야 한다. 그런 업무를 거의 매일, 3교대로 치러야 한다.

D 타임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E 타임은 오후 2시 30분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N 타임은 오후 9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8시 30분까지.

말로는 8시간 근무지만, 실제로는 앞뒤로 1~2시간의 인수인계 시간이 더 붙는다. 가히 살인적인 업무 내용과 스케줄인 셈이다.

'그러니까 간호사가 없으면 병원이 아예 안 돌아가는 거지. 간호사야말로 병원의 진정한 기둥이자 숨어 있는 1등공신이니까.'

그만큼 고되고 힘든 직업이 간호사다. 강인한 체력이 필요한 이유였다. 한데 웨어울프라면? 어지간한 프로 운동선수마저 찜쪄먹는 체력의 보유자가 아니겠는가.

'그럼 체력으로는 무조건 합격. 게다가 후각까지 뛰어나지.'

말 그대로 개코를 지녔다.

탕약에 들어갈 약재의 상태. 뜸봉으로 쓰이는 쑥의 상태. 그걸 킁킁 한 번으로 간단하게 체크할 수 있다. 게다가 탕약을 달이면서도 후각을 이용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불 조절 타이밍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환자를 간호하면서도 후각으로 느껴지는 환자의 체취를 통해 컨디션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났다. 고려하면 할수록 탐나는 인재였다.

'그럼 인성은 어떨까.'

라키엘은 걸음을 옮겼다. 관문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웨어울프 여인과 근위병의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인간이 아닌 게 왜 그리 큰 문제죠? 똑같이 말할 수 있어요. 똑같이 걷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시험을 치르는 것조차 안 된다는 거죠?"

"여기, 모집 요강에 나와 있잖나. 제국 황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가능하다고."

"저도 사람이에요."

"아니. 웨어울프지."

"제국의 법으로 보호받는 시민이라고요."

"하지만 때때로 짐승 같은 형상으로 변하잖나."

"변하는 건 겉모습뿐입니다."

"이성을 잃어서 양계장에 들어가 닭을 물어 죽이거나 하지는 않고?"

"그건 편견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이성을 잃지 않아?"

"네. 지금과 똑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부릅뜬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걸?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살벌하게 말이야."

"그건 당신이 지금...."

"화나게 만들어서라고? 이성을 잃지 않는다며. 그럼 지금도 참아야지."

"...."

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근위병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못 봐주겠다.

"그만. 거기까지."

이쪽의 말에 움찔하는 여인과 근위병. 둘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여인은 갸웃. 반면, 근위병은 휘둥그레.

"황태자... 전하?"

근위병의 표정이 당혹으로 굳었다. 마치 졸지에 쓰리스타 군단장과 마주친 이등병 같은 얼굴이다. 방금까지 웨어울프 여인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이죽거리던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전형적인 강약약강.

그 모습에 눈살이 더 찌푸려졌다.

"그쪽, 관등성명이 뭐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근무 중 이상 무!"

"이상이 있는 거 같은데. 그리고 난 그쪽 관등성명을 물었어."

"황궁 근위대 12연대 1대대 소속, 상등 보병 블린트입니다, 전하!"

"그래. 블린트 상등 보병, 그쪽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어?"

"...."

근위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친구, 몇 번 본 기억이 났다. 별궁에서 근무하는 식구이긴 한데. 그래도 원칙을 눈앞에서 어기는 건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나는 분명 간호사 선발 대회를 진행하며 모집 요강을 공표했지. 거기엔 제국 황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웨어울프라고 해서 황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건...."

"법적으로 웨어울프의 시민권도 보장이 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이 여자에게 무례했던 걸 죄송해해야지."

"...."

근위병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라키엘은 그에게서 거둔 시선을 웨어울프 여인에게 돌렸다.

"오면서 자초지종은 들었어. 우리 병사가 저지른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하신토의 딸, 아니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스스로를 아니스라고 밝힌 웨어울프 여인이 예를 올렸다. 하지만 아직 분이 덜 풀린 걸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 같아도 빡쳤을 테니까. 그럼 그 분풀이, 시험을 통해 마음껏 풀게 해주지.

"그래. 간호사 시험에 응시하고 싶다고?"

"예, 전하."

"좋아. 그럼 당장 시험을 시작할까."

"...예?"

설마 즉석에서 이럴 줄은 몰랐던 걸까. 아니스의 얼떨떨한 시선이 날아왔다. 그 모습에 싱긋 웃음이 나왔다.

"그쪽은 웨어울프이니 체력은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야. 게다가 다른 응시자들과 시험 내용이 공평해야 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쪽, 이 친구와 달리기 시합을 하도록 할까."

'이 친구'라고 말하며 손을 들었다. 방금까지 아니스와 실랑이를 벌였던 근위병을 가리켰다.

"...전하?"

근위병의 깜짝 놀라는 시선이 날아왔다.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쪽이 웨어울프라서 체력에 자신이 있겠지만, 우리 근위병도 제국에서 정예로 불리는 친구들이거든. 그러니 좋은 승부가 될 거야. 저기, 관문 안쪽 정원의 커다란 분수대가 보이지?"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아니스.

"저기까지 거리가 대략 400미터쯤 되겠네. 저길 찍고 돌아와. 우리 근위병보다 빨리 돌아오면 체력 시험을 통과한 걸로 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니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이 이쪽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뭐해. 출발선에 서지 않고."

이쪽의 채근을 듣고서야 황급히 검을 풀고 투구를 벗어놓는 근위병. 이내 아니스와 근위병이 나란히 관문에 섰다. 아니스는 시선을 옆으로 힐끗 돌렸다.

"...."

아까 모욕감을 주었던 근위병. 찍소리도 못하게 눌러주리라. 다짐했다. 각오했다. 그 순간, 황태자의 신호가 떨어졌다.

"출발!"

투확-!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가속. 들판을 내달리던 조상의 숨결처럼. 언젠가 염화룡 칼리디스를 보좌하였다는 존경스러운 시조의 핏줄을 잇듯이, 질주했다.

주위의 풍경이 가느다랗게 늘어졌다. 스치는 바람이 귓가에서 울부짖었다. 목적지는 오로지 하나.

'저 분수대!'

아니스의 시선이 분수대만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투파파파팟!

분수대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약했다.

타앗-!

온몸을 날렸다. 분수대 높다란 꼭대기를 짚었다. 붙잡았다. 온몸에 관성이 걸렸다.

후우웅-!

분수대 꼭대기를 붙잡은 손을 중심으로 몸이 커다란 원을 그렸다. 원심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손을 놓았다. 온몸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아까 날아왔던 것과 정반대로 바뀐 방향으로.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는 관문을 향해서.

조금의 감속도 없이 180도 방향전환을 마쳤다. 착지했다. 다시 땅을 박찼다.

콰앙-!

전력을 기울인 재가속. 그 순간, 둔한 몸뚱이가 저 앞쪽에서 다가왔다.

"...후! 후욱! 훅!"

아직 분수대를 향해 뛰고 있는, 아까 자신을 비웃었던 근위병이었다. 나름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나마 인간 중에서는 제법 빠른 편이긴 한데.

'한참 느려.'

저런 주제에 잘난 체를 했다니. 가소롭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겼어.'

아니스는 근위병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으엇?"

우연이었던 걸까. 아니면 이쪽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다급해진 탓이었을까.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근위병의 달음박질이 꼬였다. 제 다리에 발끝이 걸렸다.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크으읏!"

쿠당탕!

근위병이 호되게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아니스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으읏...!"

원통하다는 듯 이쪽을 올려다보는 시선. 다시 일어나려고 비척거리는 몸짓. 한데 그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하지만 신경을 껐다. 아니스는 계속 달렸다. 자신을 비웃고 모욕한 인간 따위. 그냥 패배자로 찌그러져 있으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근위병을 뒤로 두고 뛰었다. 관문이 가까워졌다. 한데 그럴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까 얼핏 보았던, 다시 일어나던 근위병의 이상하던 몸짓이 자꾸만 떠올랐다.

'넘어지면서 어깨, 빠진 것 같던데.'

그걸 떠올릴수록 더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찜찜해졌다.

"...이런 x발."

아니스는 욕설을 내뱉었다. 어쩐지 그냥 이대로 달리기에는 찜찜했다. 이렇게 승부를 끝내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것 같았다. 저 근위병이 빠진 어깨를 핑계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싫었다. 그 어떤 핑곗거리조차 없도록, 철저하게 실력으로 짓밟아주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콰가가가각!

질주를 멈추었다.

관문까지 불과 10미터만 남은 지점. 그곳에서 욕설을 잔뜩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근위병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소소한 복수(?)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녀는 근위병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나약한 인간 x끼 주제에 이겨보려고 발악은. 닥치고 가만히 있어봐."

"...어?"

빠진 어깨 관절을 어떻게든 맞춰보려고 애쓰던 근위병.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아니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의 어깨와 팔뚝을 붙잡았다.

뽀그닥?

"끄어아악!"

일부러 우악스럽게 맞춰준 관절. 근위병이 무지막지한 통증에 자지러졌다. 그 모습을 관문에서 바라보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박."

잠시 후, 아니스의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가 반짝, 빛났다.

52화. 꼬리를 마비시키는 법 (1)

반짝.

"...."

아니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팔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황도에서 버틸 여비가 떨어지기 전에 황태자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다들, 조금만 기다려.'

필요하다면 이 목걸이를 팔아서라도 여비를 마련하라고 당부하던 사람들. 그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상기했다. 각오를 다지며 목걸이를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눈길을 들었다.

황태자의 집무실. 생전 처음 보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실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단순하고 새하얀 종이 한 장이었다.

"고용계약서야. 잘 읽어봐."

종이를 내밀며 황태자가 말했다.

"계약서...라니요?"

"일을 하려면 당연히 계약서를 써야지. 안 그래?"

"...."

아니스는 계약서를 집어들었다.

내용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방대했다. 별궁에서 간호사로 근무를 하게 될 것이며. 근무를 위해 소정의 교육 과정을 거칠 것이고. 근무 시간은 몇 시에서 몇 시까지라는 둥.

봉급 액수와 형태, 그 외에 보장받을 권리까지. 여타 중요하고도 잡다한 사항들이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끄응."

"왜? 계약서가 너무 복잡해?"

"조금, 그렇군요, 전하."

"괜찮아. 원래 계약이라는 게 그런 거야. 복잡하고 머리 아프지. 하지만 이렇게 깐깐하게 따지고 짚어놔야 나중에 아, 그때 내가 호구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를 안 하게 되는 법이거든."

"...예?"

"계약서 꼼꼼히 잘 보라고."

라키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지금처럼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이 중요한 법이다. 일단 서명을 하고 나면 끝이다. 나중에 계약서 내용 중에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불합리한 부분이 있다고 백날 따져봐야, 서명한 후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법이니까.

'그래서 특근대 검투사들도 반나절은 끙끙거렸지. 계약서 내용 보면서 고민하느라고.'

가뜩이나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과는 인연이 없던 검투사들. 그들이 계약서 한 장 앞에서 번민에 빠지던 모습이 떠올라 문득, 미소가 흘러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의 아니스를 보며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쉬워. 이런 인재가 몇 명만 더 있어주면 정말 좋겠는데.'

예기치 못하게 나타나 준 웨어울프 여인, 아니스. 잠깐 엿본 그녀의 진가는 실로 엄청났다.

'운동 능력이... 어우야.'

근위병을 압살했다. 늑대로 변신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게다가 어깨를 다친 근위병을 챙기던 태도도 그랬다.

'결승점에 다 와서 멈췄지. 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근위병의 상처를 보살펴주기 위해 돌아갔어. 인성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고. 게다가 더 마음에 드는 건... 호구짓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아까, 분명 얼핏 들었다. 결승점을 앞두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아니스가 짓씹듯 욕을 했었다. 동시에 굉장히 사납고 살벌한 미소를 머금는 걸 보았다.

그건 분명....

'근위병에게 복수할 각을 재는 표정이었거든, 그거.'

확실했다.

그대로 돌아가서 근위병을 챙겨줘도? 이후에 다시 뛰면 또 이길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근위병의 빠진 어깨를 맞춰줄 때 굉장히 아프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흥분. 그러한 모든 계산이 어우러진 표정이었다.

'그래. 나 같아도 착쁜 복수는 못 참지.'

게다가 그걸 서슴없이 행동으로 옮기던 실행력까지. 흐물흐물한 호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환자 중에도 진상이 은근 많거든. 특히 간호사를 만만하게 보고 갑질하는 유형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여자한테 걸리면... 후아, 볼만하겠네.'

체력과 인성 모두 합격.

물렁하지 않은 성격.

게다가 뛰어난 후각까지.

눈앞의 이 여인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이상적인 간호사의 재목이었다. 그렇기에... 아쉬웠다.

'이런 인재가 발굴된 건 참 좋은데. 후우.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더 욕심이 나네.'

최고의 간호사가 한 명인 건 아쉽다. 기왕이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간호사 공개 채용을 시행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고의 간호사를 뽑는 거? 그것도 좋지. 하지만 지금은 우수한 간호사를 최대한 '많이' 뽑는 게 더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래야 별궁 한의원의 일손이 부족하지 않게 된다. 한데 그때였다. 계약서를 보며 고심하던 아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뭔가 비장한 투로 입을 열었다.

"제시하신 계약서, 잘 봤습니다."

"어때?"

"좋습니다. 다만-"

"다만?"

"이대로 계약을 하긴 어렵겠습니다."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니스의 말이 이어졌다.

"계약서의 내용 자체는 마음에 듭니다. 다만,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조건을 추가하고 싶다는 거야?"

"네, 전하."

"어떤 조건?"

"사실 저는 제가 속한 무리의 리더입니다."

"무리? 리더라고?"

"네. 50명쯤 되는 중간 규모의 일족입니다."

"그 사람들도 간호사 시험 보고 싶다고? 당장 데려와 주세요, 제발."

"...."

"아, 그거 아니야?"

"네."

"...."

"만약 제가 제시하는 조건을 계약서에 특약 사항으로 추가해주시면, 저도 계약을 할 것이고, 제 일족도 간호사 시험에 응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특약 사항? 그래서, 제시할 조건이 뭔데?"

라키엘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니스와 비슷한 일족 50명이라니.

'S급 간호사 50명은 못 참지!'

그거면 더 바랄 것도 없다. 저 인원을 전부 영입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그랜절도 뚝딱 박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키엘은 귀를 쫑긋 열었다. 아니스가 자신의 조건을 밝혔다.

"우리 일족을 괴롭히는 태생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

"전하?"

"어, 그래. 태생적인 문제라니. 힘들었겠네. 그런데 그게 뭔지 감이 잘 안 잡혀서. 혹시 식량 문제, 뭐 그런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꼬리입니다."

"...꼬리?"

"네."

꼬리라니.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니스의 말이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 웨어울프 일족은 꼬리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수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왜? 설마 꼬리 모양 때문에 놀림 받거나 뭐, 그런 거야?"

"그건 아닙니다."

"하면?"

"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네."

"혹시, 강아지들 꼬리가 자동으로 팍팍 흔들리거나 하듯이?"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아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분에 따라서 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두려운 것과 마주쳤을 때는 꼬리를 숨기게 되고, 행복하거나 기쁘고 설렐 때는 너무나 티가 나도록 흔들리게 됩니다."

"그게... 나쁜 거야?"

"네."

"어째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니까요."

"...아."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꼬리 때문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단다. 그것만으로도 생겨날 수많은 문제가 좌르륵 떠올랐다.

"그럼 아마도, 인간 사기꾼의 만만한 밥줄 취급을 받아왔겠군. 그 꼬리 때문에."

"맞습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니까, 수많은 인간들에게 속이기 쉽고 만만한 대상이 되곤 하죠."

아니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라키엘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좋거나 설레면 꼬리가 팍팍 흔들린다는 거. 그래서 기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거. 어떻게 보면 솔직하니까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꽃밭이 아니거든.'

문득, 대한민국이 생각났다. 그곳에서의 사회생활이 떠올랐다. 정글에서의 생존과 같은 나날이었다.

사람 좋은 호인? 주위에서 칭찬은 받지만, 언젠가는 이용당하기 십상이었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해서 너무 솔직한 사람은? 호구, 혹은 왕따가 되기 일쑤였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웃기는 소리.'

남과 섣불리 나눈 내 슬픔은 내 약점이 된다. 남과 흔쾌히 나눈 내 기쁨은? 겉으로는 칭찬과 박수를, 실제로는 뱀심과 질시를 불러온다. 잠재적인 적만 잔뜩 늘리게 될 뿐이다.

'게다가 기쁜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후우, 그거 완전 사기꾼들 맛집 인생 당첨이겠네.'

생각해볼수록 보통 괴로운 인생이 아닐 듯했다. 한데 종족 전체가 저런 꼬리를 지니고 있다면?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그래서, 그런 펑퍼짐한 바지로 꼬리를 가리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꼬리의 움직임이 원치 않게 너무 격렬해서, 기쁜 감정만은 숨기지 못하는 처지지만요."

"꼬리를 다리에 묶어도?"

"금방 풀립니다."

"어떻게?"

"꼬리가 스스로 밧줄을 풀어 버립니다."

"...지방자치 근육이야?"

"네, 아마도."

"그럼 꼬리를 자르는 건?"

"해봤는데, 불가능했습니다."

"어째서?"

"꼬리를 잘라 버리니 엉덩이와 다리 힘줄에 영향이 가는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지요. 게다가 그마저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재생이 되더군요."

"꼬리가? 다시 자라났다고?"

"네. 도마뱀 같겠지만요."

"...."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전하. 수많은 환자들을 차별 없이 진료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 점을 기대하고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꼬리를 치료해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저와 제 일족은 전하를 위해 기꺼이 이곳의 간호사가 되겠습니다."

"...."

쩝.

묶어도 안 되고, 잘라도 답이 없는 꼬리를 내가 어떻게 치료해? 라키엘은 처음으로 환자를 마주하며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좀 각이 안 나오는데?'

난감했다. 그래서 나름 떠올린 대안을 제시했다.

"혹시 그럼, 내가 사회적 후견인이 되어주는 건 어떨까?"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황태자의 지위와 권한으로 일족의 사회적 후견인이 되어주겠다고. 한마디로 그쪽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사기를 맞는다거나 여러 불이익을 받을 사태를 미리 방지해주겠다는 거지."

그거면 되리라. 세상 어느 미친 사기꾼이 황태자가 후견인으로 버티는 이들을 건드리겠는가.

라키엘은 자신의 제안이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스가 고개를 젓기 전까지는, 그랬다.

"좋은 말씀이지만, 거절합니다."

"...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쩝."

"아시겠지요? 만일 황태자 전하께 변고가 생기거나, 전하의 마음이 바뀐다면... 우리 일족은 다시 예전과 같은 처지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아니, 전보다 못해지겠지요. 전하의 지원을 받으며 인간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갔던 기억을 지닌 채로, 다시 예전처럼 남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 테니까요. 그건 아마도 더욱 최악일 겁니다."

"...."

"그런 결말은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임시방편을 바라고 전하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바란다는 거지?"

"네, 전하."

"후우. 그래, 알았다."

"설마, 수락해주시는 겁니까?"

"수락해야지 어쩌겠어."

"하면 방법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모르겠고. 이제부터 고민 좀 해보면 안 될까?"

"...알겠습니다."

아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제시한 조건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그 사실은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만일, 황태자가 가슴을 탕탕 치며 '그거 쉽다'라는 식으로 호언장담을 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이 황태자, 솔직하네.'

난감하고 어렵긴 한데, 방법을 찾으러 고민해보겠다는 황태자. 그 솔직한 태도가 믿음이 갔다.

"그럼 저는 전하의 연락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래. 다른 데 가지 말고, 그냥 별궁에 머무르고 있어."

"그래도 되겠습니까?"

"시험 합격자니까 그 정도 자격은 있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니스를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녀가 물러나고 난 후에도 그런 생각은 같았다.

'와. 이거 놓치면 너무 아까운 인잰데.'

최고의 간호사. 거기에 비슷한 능력의 일족 50명까지 세트메뉴. 이건 놓치면 두고두고 땅을 치고 후회할 듯했다. 절대로 놓치기 싫었다.

한데 저들을 잡으려면?

'꼬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냐, 대체.'

묶어도 안 되고, 잘라도 안 되는 꼬리. 저 요상망측 난감한 지방자치 근육 꼬리를 어떻게 멈춰달라는 건지. 솔직히 매우 막막했다.

그래서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그 후의 저녁 시간 내내,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한데 그런 고민 때문에 저녁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탓이었을까.

보다 못한 가르딘 경이 입을 열었다.

"...즈어어어언하아-!"

"어오, 씨. 깜짝이야."

"그러면 아니 되십니다아!"

"경은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닙니다아!"

"그럼 뭔데. 또 뭐가 불만인 건데."

"인상을 너무 찡그리시면 스트레스가 몸에 쌓이고, 이는 각종 질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하."

"매번 그쪽 때문에 깜짝 놀라서 없던 병이 생길 거 같은데."

"아닙니다, 전하."

"아닌 걸 왜 그쪽이 정해?"

"게다가 인상을 계속 찡그리고 계시면 주름살이 생기십니다, 전하."

"아주 내 대답은 듣고 있지도 않지?"

"잘 듣고 있습니다, 전하."

"이럴 때만 대답 따박따박 잘한다, 그치?"

"아닙니다, 전하."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하오나, 전하?"

"어. 왜."

"한 번 주름살이 생기면 지울 수도 없는 법이니, 그래도 인상은 펴고 계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런가."

"예, 전하."

"쯧. 그래도 경 덕분에 기분은 풀리네."

"예?"

"아니, 그냥 그렇다고."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로 저녁 내내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저녁 먹은 게 소화도 잘 안 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색을 눈치챈 까닭이었으리라, 가르딘 경이 저렇듯 나선 것은.

'일부러 내 기분 풀어주려고 그러는 거, 티가 너무 잘 나니까 민망하고 고맙네.'

참 좋은 사람이다, 가르딘 경은. 라키엘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였다.

덕분에 잠시나마 고민을 내려놓은 기분으로. 혹은 동네 젊은 삼촌과 농담 따먹기 하는 기분으로, 가르딘 경에게 말했다.

"괜찮아. 주름 생기면 뭐 어때. 필러 맞거나 보톡스 하면 되지."

"예?"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

"필러... 보톡스... 그게 뭡니까?"

당연히 모를 터다.

한국에 있던 거니까.

"그런 게 있어. 주름 개선과 방지에 탁월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

주름 개선? 방지? 덕분에... 뭔가가, 떠올랐다.

'잠깐.'

머릿속에서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콰직.

전두엽 뇌주름에 뿌리를 내렸다. 잎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었다. 저녁 내내 이쪽을 고민의 늪으로 빠뜨렸던 난제. 웨어울프 일족의 지방자치 근육 꼬리를 멈춰줄 방법. 불현듯, 마침내 꽃을 피운 그 비결은 바로....

'보톡스 침술.'

...바로 이거다.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53화. 꼬리를 마비시키는 법 (2)

'바로 이거다.'

라키엘의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머릿속에서 아이디어의 샘물이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유전 터지듯 쑴펑쑴펑 솟구쳤다.

그 핵심에 보톡스가 있었다.

보톡스(Botox).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단어. 언제까지고 탱글탱글할 줄 알았던 얼굴에서 눈꼬리 주름을 발견한 순간. 촉촉팽팽하던 입가에서 팔자주름이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을 깨달은 순간, 보통 한 번쯤은 고민해보게 된다는 그 주사.

'보톡스 주사. 그걸 응용할 수 있겠어.'

라키엘의 머릿속 생각의 흐름이 더욱 빨라졌다. 일반적으로 보톡스를 근육에 주사하면? 근육이 이완된다. 주름살이 펴진다.

혹은 종아리 알통이 너무 커서 보기 싫을 때? 근육 일부를 주사로 마비시켜 부피를 줄일 수 있다. 마치 다리 깁스를 두세 달 했다가 풀고 나면 근육이 줄어들어 있듯이. 비슷한 원리를 이용해 날씬한 각선미의 완성을 도와주기도 한다. 때로는 사각턱의 근육을 줄여 V라인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데 그 비결은?

강력한 독성에 있었다.

'사실 보톡스는 어마어마한 마비독이지.'

보톡스.

진짜 본명인 풀네임은 보툴리눔 톡신(Botulinum toxin). 그건 그냥저냥한 독성물질이 아니었다. 가히,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하고 개발한 모든 독소 가운데 단연 원탑으로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이었다.

코브라나 블랙맘바의 독? 보툴리눔 톡신 앞에선 핵불닭 앞의 크림스프에 불과하다. 극독으로 유명한 청산가리? 마이크 타이슨에게 덤비는 동네 복싱 체육관 1개월 차 복린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하지. 청산가리라고 해봤자 보툴리눔 톡신에 비하면 최소 1만 배쯤 약하니까.'

보툴리눔 톡신의 반수치사량(LD50)은? 흡입하는 경우엔 킬로그램당 10나노그램 남짓이다. 그러니까 60킬로그램의 성인이 있다면? 겨우 600나노그램. 0.6마이크로그램. 즉, 0.0006그램만 흡입시키면 염라대왕 진로상담교실에 예약을 성공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 그것도 좀 넉넉하게 계산한 거고. 실제 점막으로 흡입하면... 성인 남성 하나 죽이는 데에 필요한 질량이 0.0000005그램 정도니까.'

그건 엄청난 수치였다.

'청산가리는 0.15그램이 있어야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지. 그 유명하고 지독한 방사능 홍차? 그것도 사람 잡으려면 0.01그램은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단순계산상 대략 400그램의 순수하게 농축된 보툴리눔 톡신이 있다면? 전 인류를 몰살할 수 있다. 그만큼 보툴리눔 톡신은 어이가 없을 만큼 강력한 독성 물질이었다.

'한데 사람은 그걸 주름 개선 등등의 미용 목적으로 잘도 쓴단 말이야. 인류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생각해보자니 대략 조금은 멍해졌다. 라키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건, 지금은 그 보톡스 주사의 원리를 이용해볼 때야. 할 수 있어. 보톡스만큼 강력하진 않더라도, 비슷한 기전의 근육 마비 효과를 일으키는 물질을 이용하면? 그걸 약침 시술에 접목시키면?'

가능하리라.

제멋대로 움직여서 문제라는 웨어울프의 지방자치 꼬리. 그 꼬리의 근육에 국소마비의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스의 요구를 100% 만족시키는 셈이다.

'마침 거기에 써먹을 독도 있어.'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가르딘 경을 향해 말했다.

"내가 잠깐 생각난 게 있어서 말인데. 경이 뭘 좀 가져와야겠어."

"예?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쿠스만의 맹독 캡슐."

"...아, 지난번에 지하 검투장을 토벌할 때에 체포했던 그 프로모터, 말씀이십니까?"

"으음. 그때 그자를 체포하면서 확보했던 맹독 캡슐. 비고에 잘 보관해뒀지?"

"예. 물론입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럼 가져와. 당장."

"예? 실례지만 그런 위험한 캡슐을 어디에 쓰시려고...."

"어디에 쓰긴. 좋은 데 쓰려는 거지."

이쪽을 걱정해주는 가르딘 경. 혹시나 이쪽이 맹독 때문에 위험을 겪는 건 아닐까. 심히 우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짓으로 콕콕 눈치를 줬다. 결국, 가르딘 경이 못 이긴 척 걸음을 옮겼다. 총 30알의 맹독 캡슐을 야물딱지게 챙겨서 돌아왔다. 그동안 라키엘은 계획을 정리했다.

'일단 아이디어는 나왔어. 마비성 맹독을 지닌 쿠스만의 캡슐. 그 성분을 약침 시술에 접목시켜서 근육에 국소마비 효과를 일으키는 거. 하지만 그러자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과제는 시술 부위.'

아무 데나 침을 찌를 수는 없다.

어디에 시침을 하여야 마비독이 원하는 효과를 불러올지. 혹여나 있을 부작용을 피할 수 있을지. 충분한 검토를 해야 할 터였다. 하여 라키엘은 아니스를 불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시죠?"

방문자용 숙소에서 쉬다가 불려온 아니스. 그녀가 살짝 긴장한 어조로 물어왔다. 라키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까 그쪽이 요구했던 조건. 해결할 방법을 찾은 듯하거든. 그래서 시술 부위를 조사해야 할 듯해서."

"...네?"

"돌아앉아서 가만히 있어봐."

"...."

그녀를 돌려 앉혔다. 등에 손바닥을 댔다. 순간 그녀의 어깨가 흠칫.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뇌전증 치료를 하던 그때처럼.'

키이이잉-!

심법을 최대로 발동했다. 심장을 둘러싼 마나써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신체의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졌다. 마나를 느끼는 감도가 더욱 정밀해졌다.

그 감각을 손으로 짚고 있는 아니스의 등으로 집중시켰다. 등을 통해 느껴지는 신체의 온기. 옷깃 아래 피부와 근육의 긴장감. 그 사이를 흐르는 혈액의 흐름까지. 그 모든 것이 서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히 MRI에 비견될 수 있을 그만의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시전되었다.

'옳지. 보인다.'

아스라한 심법은 마나를 흡수, 가공하는 데에 특화된 심법이었다. 그만큼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한데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몸속에는? 당연히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피부와 근육.

혈관과 신경.

근막과 뼈대.

가장 깊은 곳의 골수에까지.

어느 곳 하나 마나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아니스의 전신에서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다.

'보인다, 보여.'

눈을 감으니 펼쳐진 새카만 세상. 그 속을 흐르는 빛무리. 마치 남산 꼭대기에서 한밤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도로를 따라 흐르듯 움직이는 수많은 빛의 물결이 보였다. 도로가 혈맥이고, 빛을 뿌리며 달리는 교통의 흐름이 마나였다.

특히, 라키엘은 그중에서도 아니스의 허리와 둔부, 다리, 꼬리 일대의 흐름에 주목했다.

'역시 이쪽의 흐름이 인간과 조금 다르구나.'

꼬리는 인간에게 흔적만 남은 기관이었다. 반면 아니스 같은 웨어울프에게는? 사람의 팔다리처럼 엄연히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그렇기에 꼬리와 그 주위의 혈맥 구성이 인간과 다를 거라 예상했다. 과연 살펴보니 그 예상이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심하게 다르진 않네?'

인간에게도 꼬리가 흔적 기관으로나마 남아 있어서 그런 걸까. 대부분의 혈맥 구성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독맥(督脈)의 위치가 좀 다르긴 하구나. 특히 둔부의 장강혈(長强穴)과 요수혈(腰兪穴)이 인간보다 위아래로 간격이 벌어져 있고. 그 사이에서... 인간에겐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길의 혈맥이 꼬리를 향해 뻗어 있어.'

사람에게는 사라진 꼬리. 뿌리에서부터 끝까지. 처음 보는 혈맥이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구조는 단순하네.'

계속 관찰해보니 어느 자리에 시침을 해야 할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자, 그럼 이제 변신해볼래?"

"네?"

"늑대 모습으로 변신했을 때 혈맥의 위치가 바뀔 거니까. 그것까지 다 검사하고 파악해야지."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의 진지한 태도 덕분이었을까. 아니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쿠드드득!

활짝 열린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 아래. 변신이 순식간에 완료되었다. 평범한 외모의 여인 아니스는 이제 없었다. 그녀가 있던 곳엔 인간의 옷을 걸친 갈색 털의 늑대인간이 두 발로 서 있을 뿐.

"후아. 딱히 덩치가 커지진 않네?"

"...."

"근데 꼭 진돌이 같다."

"끄응?"

"아, 전에 키웠던 멍멍이 이름."

"으르르릉."

"미안."

"...."

"구강 구조가 바뀌어서 말은 못 하는 거구나? 자, 그럼 손."

착.

손바닥을 내밀자 아니스의 손, 아니, 앞발이 반사적으로 턱 올라왔다. 아니스도 그런 자신의 반응을 뒤늦게 깨달은 걸까.

"...크르르릉!"

이쪽을 노려보는 눈길이 사뭇 흉포해졌다. 라키엘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미안. 설마 진짜 될까 싶었거든."

"크르릉!"

"진짜 미안. 그럼 다시 검사하자."

"...."

끄덕.

아니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 형태로 변한 그녀의 신체를 다시 조사했다. 덕분에 변신하며 변화한 혈맥의 구성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후에 그녀를 돌려보냈다. 혼자 남은 침실. 그곳에서 라키엘은 아스라한 정밀 진단의 결과를 검토했다.

'다행이다. 심한 차이는 없어. 신체 구조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것과 비슷한 덕분이겠지.'

그렇게 어느 부위에 보톡스 침술을 시침할지를 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첫 번째 과제인 시술 부위는 해결했고. 그런데 두 번째 과제가 좀 난감해.'

라키엘은 고민에 휩싸였다. 보톡스 침술을 위한 두 번째 과제. 그것은 바로 마비독의 사용량이었다.

'이것도 시술 부위를 정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해. 아니, 사실은 가장 중요하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약이 아닌 독을 쓰는 시술. 심지어 근육에 마비를 일으키는 강한 독을 주입하는 시술이다. 한데 그 용량을 주먹구구로 정한다면? 온갖 위험한 부작용 퍼레이드가 열릴 것이다.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쿠스만이 제조한 이 맹독의 성분이 어떻게 되는지, 부작용을 피하면서 국소마비 효과를 가져올 안전한 적정량이 어떻게 되는지, 그걸 전부 파악해야 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한데 그걸 어떻게 파악할지가 조금 막막했다.

'이걸 제조한 쿠스만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한데.'

검투장의 프로모터 쿠스만. 그는 체포되어 황궁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니 찾아가서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은 못 믿어.'

원래부터 좋은 놈이 아니다. 심지어 이쪽에게 악감정을 잔뜩 품고 있을 터다. 당연히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기엔 어려울 터였다.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고. 그게 제일 위험하지.'

그러니까 쿠스만 질문 찬스는 기각.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면 직접 먹어봐야 하나.'

먹어서 마나써클에 저장할까. 그래서 아주 극미량을 신체에 흘려보내며 성분을 실험해볼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요란한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위험한 발상에 기겁하고 있습니다.]

[심장 : 얘들아, 방금 들었냐? 쟤 독 먹어보겠다는데?]

[허파 : 허... 파하하핰ㅋㅋ]

[대장 : 셀프 실험 실홥니까. 융털돌기가 웅장해지지 말입니다.]

[간장 : 야 그거 먹으면 내가 다 해독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ㅜㅜ 차라리 환상종을 뽑아서 먹여보지 그러냐 이 미친놈아.]

박장대소하고 투덜거리며 일침을 놓는 오장육부. 라키엘은 가자미눈을 떴다. 제일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간장을 향해 대꾸했다.

'환상종한테 독약을 먹이라니. 실험용 모르모트도 아니고. 그거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러자 곧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간장 : 독약 먹는 성분실험이 주특기인 환상종도 있던데?]

'...뭐?'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그때부터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간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54화. 두 번째 환상종 선택 뽑기 (1)

'뭐?'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간장에게서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독약을 먹어서 성분실험을 하는 게 주특기인 환상종이 있다고? 실험용 모르모트처럼?'

[간장 : 엉ㅋ]

뭘 그리 놀라느냐는 듯, 당연하다는 듯한 간장의 말이 이어졌다.

[간장 : 내가 시스템 대기실에 있을 때 봤거든. 진짜야. 독이든 약이든 뭐든지 먹고 성분 분석을 주특기로 삼는 환상종이 있더라고.]

'봤다고? 시스템 대기실에서?'

[간장 : 어.]

'시스템 대기실이라니, 그건 또 뭔데.'

라키엘은 더욱 의아해졌다. 대기실이란 게 있다니.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답은 곧 돌아온 간장의 설명에 있었다.

[간장 : 말 그대로 대기실이지 뭐겠냐. 일종의 라커룸? 선발되기 전에 대기하는 곳? 그 정도로 말하면 되려나. 나도 네가 의식을 일깨워주기 전에는 거기서 자고 있었거든. 여기 심장 형님도, 허파도, 대장도 전부.]

'그럼 아직 안 깨어난 나머지 오장육부도?'

[간장 : 당연하지. 소환을 기다리는 환상종들도 그렇고.]

'....'

라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스템이라는 거, 대체 뭘까. 생각해보면 참 기이한 구석이 많았다.

'나한테만 이런 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도 그렇고. 마치 날 위해 세팅되어서 마련된 듯한 체계도 그렇고. 대체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궁금증을 당장 명쾌하게 풀 길은 없었다.

[간장 : 암튼 더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게다가 안다고 해도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수가 없다니?'

[간장 : 규정이 그래. 금제가 걸려 있어서.]

'그럼 환상종에 대한 건? 아까 네가 봤다는 성분 분석 주특기 환상종.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특징 같은 건 알려줄 수 있나?'

[간장 : 아니. 절대로ㅋ]

'야박하구만.'

[간장 :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오장육부 하든가ㅋ]

"쯧."

정말로 알려줄 수 없나 보다. 라키엘은 더 캐묻는 걸 관뒀다. 그래도 뜻밖의 큰 수확을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러면 역시, 환상종 뽑기가 답인가.'

만약 방금 간장이 알려준 제보가 사실이라면? 환상종을 뽑으면 될 것이다. 그러면 쿠스만의 마비성 맹독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으리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보톡스 침술에 사용할 독의 용량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해보자.'

막막하던 터에 마침 보인 해답의 빛줄기. 라키엘은 그 빛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시스템 창을 열었다.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했다. 일전에 보았던 안내문이 친절하게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소정의 H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선택 뽑기 (2회차) 비용 = 1,5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1,400]

[보유한 HP가 모자랍니다.]

[환상종 선택 뽑기(2회차)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뭐?"

라키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런 태클(?)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더도 덜도 아니고 HP가 딱 100이 모자란단다. 심지어 귓가에는 오장육부의 웃음소리마저 잔뜩 들려왔다.

[오장육부가 지금 상황을 즐거워합니다.]

[심장 : 어엌ㅋㅋㅋㅋㅋ 봤냐 얘들앜ㅋㅋㅋㅋㅋ]

[허파 : 허ㅋㅋㅋ 파하하핳ㅎㅎㅎ]

[대장 : 쟤 방금 괄약근 떨었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그동안 HP도 안 모으고 뭐했습니까 휴먼ㅋㅋ]

"...."

뭘까, 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빡치는 기분은. 마치 의기양양하게 버스에 탔는데 '잔액이 모자랍니다'라는 야물딱진 멘트를 들은 듯한 수치심이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기분을 티 내진 않았다. HP가 모자란 상황이다. 일단은 부족한 HP를 수급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묘하게 빡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잠깐. 이봐들.'

눈 딱 감고 말했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그러는데, 혹시 HP 100 정도만 빌려줄 오장육부?'

....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이 다시 말했다.

'야. 다들 듣고 있는 거 안다고. 100 HP만 좀 빌려주라. 어?'

그러자 비로소 반응이 돌아왔다.

딩동!

[당신의 제안에 오장육부가 황당해합니다.]

[심장 : 이야. 쟤 뭐라는지 들었음?]

[허파 : 허... 파하...ㅋ]

[대장 : HP 빌려달라지 말입니다ㅋㅋㅋ 미친ㅋㅋㅋ]

[간장 : 차라리 가불을 해달라지 그러냐.]

"...."

돌아오는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분이 좀 나빴다.

'감히 오장육부 주제에 사람 요청을 비웃어?'

빠직.

라키엘의 혈압이 고점을 찍었다.

저들에게 누가 주인인지. 어느 쪽이 진짜 갑인지. 확실히 인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다.'

그 순간부터였다.

호흡을 멈추었다.

'그럼 이래도 HP 안 줄 거냐?'

계속 호흡을 참았다. 오장육부의 반응을 기다렸다. 곧, 녀석들의 반응이 돌아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황당해하고 있습니다.]

[심장 : 야ㅋ 뭐하냐?ㅋㅋ]

[허파 : 흡... 프흐...?]

[대장 : 헐. 설마 협박 뭐 그런 겁니까?]

[간장 : 맞는 거 같은데?ㅋ]

녀석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계속 숨을 참았다. 그러자 돌아오는 반응이 점점 바뀌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심장 : 어? 어어? 산소 모자라는데?]

[허파 : ...흐... 프흐흐....]

[대장 : 저놈 미쳤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에이. 그래도 지도 괴롭겠지ㅋ]

물론 슬슬 괴로웠다.

그래도 계속 참았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크나큰 당혹감을 느낍니다.]

[심장 : 야? 야야? 너 왜 그러냐?]

[허파 : ...ㅎㅓ... ㅍㅏㅎ... ㅎ....]

[대장 : 쟤 정색하는 거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와 협박 실화냐ㄷㄷ]

하지만 이미 시작한 치킨 게임이었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계속 숨을 참았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허파 : ...허! 파ᄒᆞㆍ핳하ᄒᆞᄒᆞㅏ핛ㄱ!]

[협박에 굴복한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500]

...협박의 효과는 상당했다.

"퍼학! 하악! 후우!"

라키엘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HP 뜯어내기, 협박, 성공적. 현기증을 가라앉히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머릿속엔 굴복(?)한 오장육부의 야유가 쏟아졌다.

[오장육부가 당신을 힐난합니다.]

[심장 : 야! 허파 죽는다, 인마!]

[허파 : 허... 파하... ㅠㅠ]

[대장 : 와 방금 저 괄약근에 소름 돋았지 말입니다.]

[간장 : 형들 우리 ㄹㅇㅋㅋ만 치자.]

하지만 라키엘은 녀석들의 투덜거림을 무시했다. 어차피 이쪽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또 HP를 후원할 녀석들이다. 게다가 지금은 시급한 일이 따로 있다. 그는 환상종 뽑기 시스템창을 다시 열었다.

딩동.

[선택 뽑기 (2회차) 비용 = 1,5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1,500]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마침내, 뽑기 선택창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합니다.]

익숙한 안내문과 함께 1,500 HP가 쑹텅 사라졌다. 허공에 홀로그램 안내문이 화려하게 떠올랐다.

파앗-!

[선택 뽑기에 앞서,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밝혀주세요.]

[선택 뽑기에서 제시되는 환상종 후보군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에 맞추어 세팅될 것입니다.]

원하는 기능. 그건 명확하다. 라키엘은 아까 간장에게 들었던 제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독이나 약을 먹고 성분을 분석해줄 수 있는, 실험용 모르모트 주특기를 지닌 환상종으로.'

[당신의 요구 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화아악-!

안내문이 광채로 뒤덮였다. 광채가 회전하며 세 갈래 카드로 변했다. 이내 각각의 카드에 간단한 소개 문구가 떠올랐다.

<후보 1 : 난…ㄱㅏ끔…피눈물을 흘린ㄷㅏ…>

<후보 2 : 으앙 또 쥬금 ㅠㅠ>

<후보 3 : 물 먹는 ㅎㅁ>

"...."

이번엔 또 뭘까, 저것들은. 각각의 카드에 적힌 소개 문구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 추가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시스템으로부터 3마리의 후보를 제시받았습니다.]

[세 후보는 당신의 요구사항을 각각 100%, 50%, 0%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한 번 선택한 후보는 환불이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역시나.'

지난번 꼬슴이를 뽑을 때와 같은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명확하다.

'이번에도 세 카드가 각각 대박, 중박, 쪽박인 거구나.'

라키엘은 신중한 눈길로 세 카드를 살펴보았다. 선택은 한 번뿐. 자칫 잘못 선택하면? 공들여 쌓은 HP를 왕창 날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쑴펑쑴펑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머릿속 대뇌피질의 추리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짚어보자. 첫 번째 카드는... 난 가끔 피눈물을 흘린다?'

처음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싶었다. 고도의 은유나 비유인 걸까. 한데 문득, 뇌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지식이 있었다.

'아, 설마 그건가? 뿔도마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났다. 사막에서 사는 작은 도마뱀이었다. 한데 천적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방어 행동이 독특했다.

'눈으로 피를 뿜어냈지. 물총처럼. 그렇게 천적을 놀래거나 당황시키고는 냅다 줄행랑. 그게 그 도마뱀의 생존 전략이었어.'

그렇다면 첫 번째 카드의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가 뜻하는 환상종은? 아마도 그 뿔도마뱀을 기반으로 하는 녀석이 아닐까 싶었다.

'내 추론이 틀릴지도 모르는 거지만. 일단은 그게 맞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결론은 심플하다. 눈으로 피를 뿜는 녀석. 독이냐 약재의 성분 분석과는 동떨어진 녀석이다. 즉, 자신의 요구사항이 0% 반영된 쪽박이라는 뜻이다.

'그럼 첫 번째 카드는 탈락.'

라키엘은 과감하게 첫 번째 카드를 무시했다. 그리고 두 번째 카드를 주시했다.

'으앙 또 쥬금?'

...이건 뭘까.

잠시 생각을 거듭해보았다.

한데 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쓰읍. 너무 애매모호한데. 그럼... 일단 다음 카드부터.'

답을 모를 때는 과감하게 다음 문제부터 풀기. 수능 시험에서 쓰던 전략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카드로 눈길을 옮겼다.

'물 먹는 ㅎㅁ. 다행히 이건 쉽네. 딱 그거잖아. 물 먹는 하마.'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다. 물 먹는 하마의 성능(?)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물을 좋아하겠지. 많이 마실 수도 있겠지. 그만큼 물의 성분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은 끌렸다.

'그럼 이걸로 해볼까? 대부분의 독이나 약이 물을 용매로 삼으니까. 물에 탄 독이나 약 성분을 분석하는 능력도 있지 않을까.'

만일 사실이라면?

대박일 터였다.

물에 탄 모든 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녀석. 생각할수록 유용하고 매력적인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라키엘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진 않았다.

'한데 만약에, 이 녀석이 '물만' 분석하는 녀석이라면?'

오로지 물만 밝히는 물덕후, 물믈리에, 혹은 극한의 컨셉충 편식러라면? 그러면 난감해진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모든 독과 약'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지, 오직 물만 분석하는 물믈리에의 능력이 아니니까.

'만약 그런 거면 뽑기 망하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그래. 분석하고 싶은 성분을 물에 타서 먹인다? 그게 가능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였다.

아직 정체를 짐작해내지 못한 두 번째 카드.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두 카드. 하나는 내 요구 50%를, 하나는 100%를 반영한 카드. 어떤 걸 선택해야 하지?'

중요한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딱 하나 나온 기분. 그 앞에서 인생을 건 찍기를 하는 느낌이 이럴까. 라키엘은 냉철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맹렬히 생각했다.

그러자 답이 나왔다.

'그래. 내가 요구한 건 독이나 약을 분석하는 능력이지, 물에 특화된 능력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확률의 문제다.

그렇게 보니 간단했다.

'물 먹는 하마. 이건 아마도 내 요구사항이 50%만 반영된 녀석일 거야.'

라키엘은 두 번째 카드로 손을 뻗었다. 도박을 하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드를 짚었다.

딩동!

[당신은 후보 2 : <으앙 또 쥬금 ㅠㅠ>을 선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택된 카드가 광채로 물들었다.

화아악-!

이윽고 카드가 뒤집혔다.

뒷면에 새겨진 검은 실루엣. 뭔가 납작 동글거리는 형상이었다. 날개 비슷한 하늘하늘한 게 달려 있었다. 이윽고 실루엣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파지지짓! 파직!

카드에서 솟구치는 스파크. 마법진이 발동하며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그 순간, 뭔가가 카드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파츳!

충격파와 함께 날아오는 야구공 크기의 덩어리.

"뽀복!"

"어어엇?"

얼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 세상에 탄생한 새로운 환상종. 녀석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이건... 불꽃... 개복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55화. 두 번째 환상종 선택 뽑기 (2)

"불꽃... 개복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자신이 선택하여 탄생시킨 환상종. 그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복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뽀복!"

이쪽의 목소리에 즉시 반응하는 녀석. 손바닥 크기였다. 동그랗고 납작했다. 마치 씨앗 호떡을 펼친 것 같은... 개복치였다.

한데 그냥 평범한 개복치가 아니었다. 따끈따끈한 불꽃 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달려 있었다. 심지어 그걸 팔랑거리며 도동실 떠오르기까지 했다! 마치, 불꽃 날개를 펄럭이듯 말이다.

"...."

난 대체 뭘 뽑은 걸까. 원하는 걸 제대로 뽑은 게 맞는 걸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이내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른다. 확인부터 해보자.'

설마 개복치니까 쉽게 꽥 죽는 게 특기인 걸까. 과연 그걸로 어떤 역할을 해주는 걸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저기, 있잖아?"

"뽀?"

"혹시 너도 갖고 있어?"

"뽀복?"

"그거 있잖아. 쪽지. 사용 설명서."

"뽀!"

녀석이 온몸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러더니 게슴츠레한 눈빛을 했다.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뽀오... 뽀오... 오애애액-"

힘찬(?) 구역질과 함께 녀석이 작은 쪽지 하나를 게워냈다.

"...."

아 씨. 드러.

라키엘은 자그마한 비애감을 느끼며 쪽지를 펼쳐 들었다.

[뽀복이 사용설명서]

[뽀복이는 귀엽고 예민한 불사조 개복치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뽀복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뽀복이는 다른 환상종과 달리, 해바라기씨를 사용하는 소형화 / 거대화 변환이 불가능합니다.]

[뽀복이의 거대화는 특수한 조건을 충족할 시에만 가능해집니다.]

<뽀복이 보유 스킬 목록>

[으앙 쥬금 ㅠㅠ (Lv. 1)]

[부활! (Lv. 1)]

[일기 쓰기 (Lv. 1)]

[뽀복이는 <으앙 쥬금 ㅠㅠ (Lv.1)> 스킬과 <부활! (Lv .1)> 스킬을 함께 사용하며 거대화 스택이 충전됩니다. 스택이 10회 쌓일 시, 자동으로 거대화가 발동됩니다.]

"...."

나 진짜, 제대로 뽑은 거 맞나. 스킬 목록을 보자니 이 녀석, 뽀복이의 용도가 더욱 아리송해졌다. 한편으로는 슬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스킬 목록을 봐도.

그 밖의 설명을 읽어도.

어느 곳에서도 약재나 독의 성분 분석을 해준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 꽝을 뽑은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영 아닌 녀석을 뽑아 버린 거라면? 이번 뽑기는 망한 거다. 라키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으음, 뽀복아?"

"뽀보!"

"너 가지고 있는 스킬 있잖아."

"뽀!"

"으앙 쥬금, 이라는 거, 그건 어떤 거야?"

"뽀보복! 뽀복!"

"...응? 일단 먹을 거 아무거나 가져와 보라고?"

"뽀!"

"아무런 편견도, 편식도 없이 다 먹을 수 있다고?"

"뽀보!"

"...."

온몸을 팡팡 끄덕이는 뽀복이. 어쩐지 그 모습이 자신만만해 보였다. 기왕(?) 태어난 거,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포부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먹을 걸 달라니.'

라키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밤의 고요하고도 드넓은 침실. 딱히 먹을 것을 따로 두진 않았다.

'주방에서 뭐라도 가져와야 하나. 그건 좀 귀찮은... 아, 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며칠 전이었던가. 요즘 계속 환자들을 돌보느라 강행군을 한 탓이었는지 유독 목이 칼칼했다. 아침부터 가래가 끼고, 침을 삼킬 때마다 아릿했다.

'그래서 도라지를 좀 가져오게 했었지.'

자고로 가래가 끓을 때는 도라지가 최고인 법. 마침 갖추고 있는 약재 중엔 도라지도 있었다. 그걸 가져오게 했더랬다. 차로 우려내서 마시기 위해서였다.

'한데 정작 마시진 못했지. 바빴거든. 아무튼 그거 이쪽 어딘가에 뒀었는데... 그래. 찾았다.'

뒤적뒤적.

라키엘은 서랍 구석에 짱박아(?)두었던 도라지 뿌리를 찾아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뽀복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을 수 있겠어?"

"뽀!"

녀석이 냉큼 입을 벌렸다. 자그마한 도라지 뿌리 조각을 넣어주었다.

"뽀보복! 뽀보! 우물우물!"

녀석이 도라지 뿌리를 야물딱지게 씹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꿀꺼덕 삼켰다. 그리고 꼴까닥 죽었다.

"...뽀보!"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으앙 쥬금 ㅠㅠ (Lv. 1)>을 시전합니다.]

털푸덕...!

"...."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가슴을 부여잡고 테이블로 추락한 녀석. 진짜로 죽었는지 지느러미의 불꽃이 꺼졌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고 있자니 당혹스러웠다.

"어이? 야?"

콕콕 찔러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눈까지 하얗게 뒤집으며 혀를 봬엙 내밀었다.

"...."

야이 씨.

이거 뽑기 실패인가.

진짜 불량품 뽑은 건가.

오만가지 욕이 나오려는 순간.

"...뽀?"

녀석이 눈을 반짝 떴다.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부활! (Lv. 1)>을 시전합니다.]

[불사복치 뽀복이의 거대화 1 스택이 적립되었습니다.]

힘찬 메시지와 함께 녀석이 발딱 일어났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치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지느러미 한 장을 뚝 떼냈다. 자그마한 송곳니 하나도 쏙 뽑아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떼낸 지느러미를 공책처럼 바닥에 깔았다. 뽑은 송곳니를 연필처럼 야물딱지게 쥐었다.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일기 쓰기 (Lv. 1)>를 시전합니다.]

"...."

일기 쓰기?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걸까. 라키엘은 녀석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 뽀복이가 지느러미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써댔다.

"뽀보보! 뽀복! 뽀!"

뭐가 저리도 불만인 걸까. 괜히 궁금해졌다. 녀석의 어깨너머로 일기 내용을 훔쳐보았다.

그 내용은....

[오늘의 일기]

[새 주인을 만났다. 기분이가 좋았다. 새 주인이 도라지 뿌리 줬다. 기분이가 좋았다. 그런데 도라지 뿌리 맛없어. 플라티코디제닌(platycodigenin)은 너무 짰다. 폴리갈라시드산(polygalacid acid)은 시고 썼다. 플라티코제닉산(platycogenic acid) A랑 사포닌 플라티코딘(saponin platycodin) C42H68O17에다가 이눌린(inulin)이랑 피토스테롤(phytosterol)은 너무 떫게 아주 범벅이었다. 진짜로 맛없었다. 맛없어서 뽀복이 꽥 죽었다. 그래서 뽀복이는... 어쩌고저쩌고... 그랬더니... 이러쿵저러쿵... 블라블라....]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녀석이 쓰고 있는 일기의 내용 때문이었다.

'플라디코제닌? 폴리갈라시드산? 저거... 도라지 성분인데?'

일기를 훔쳐보는 그의 눈길이 바빠졌다. 점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친. 방금 자기가 먹었던 성분을 모조리 쓰고 있어. 그것뿐만이 아니다. 반수치사량 등등의 성분특성까지 전부 고자질을 빙자해서 기록하고 있잖아?'

놀라웠다.

아니, 이건 놀라운 정도가 아니다.

'...대박.'

비로소 라키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불사조와 개복치가 혼합된 이 기묘한 환상종이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지, 직접 보니 알 것 같았다.

'그거네. 이놈 이거, 아무거나 먹으면 무조건 죽어. 일단 죽어. 그건 개복치 특성이고. 그 후에는 불사조 특성으로 부활하지. 그리고 자신을 죽게 했던 물질의 특성을 일기로 기록해서 남기는 거야, 이 녀석은.'

사실 개복치는 쉽게 죽는 연약한 동물이 아니긴 하다. 실제로는 엄청나게 강인한 생물이다. 하지만 뽀복이 녀석은 인터넷 밈으로 떠도는 쉽게 죽는 개복치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 듯했다.

'어쨌건. 이거, 미친. 대박이잖아.'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뭐든지 먹고 성분 분석을 할 수 있는 환상종. 그 실험이 주특기인 모르모트 환상종. 그걸 정말로 손에 넣게 되었다.

그 말은 곧?

'쿠스만에게서 압수한 근육 마비 맹독. 그것도 분석할 수 있겠어.'

설마 가능할까 싶었는데. 제발 되면 좋겠다 싶었는데. 정말로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뽀복이의 일기장 쓰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뽀보복! 뽀보! 뽀!"

아까 먹은 도라지가 그렇게나 억울했(?)던 걸까. 녀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계속해서 새 지느러미를 떼어냈다. 연신 투덜거리며 마치 고자질하듯, 장문의 일기장을 쉼 없이 써내려갔다. 가히 도라지 뿌리 성분에 대한 수십 페이지짜리 논문이라도 쓸 기세였다.

"...."

맹독 분석은 저거 다 쓰면 시키자. 결국, 라키엘은 녀석을 놔두고 잠을 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