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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힐링 캠프?"

"예."

"힐링 캠프가 왜 여기서 나와?"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눈길로 가르딘 경을 쳐다보았다.

"혹시 가르딘 경, 열혈 공중파 시청자셨어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별건 아니고."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경이 방금 그랬잖아. 왕국군 내에서 우리 부상병 캠프가 특이한 별칭으로 불린다며. 그런데 경이 어쩐지 나한테 익숙한 이름을 꺼내 버려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이곳에 온 지도 2개월째. 그동안 여기 부상병 캠프에 대한 소문이 왕국군 병사들 사이에 쫙 퍼졌단다. 여기로만 실려 오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단다. 심지어 별칭까지 생겼단다.

'그런데 그게 힐링 캠프래. 커허.'

그는 숑숑 떠오르는 옛 기억, 한국에서의 어떤 방송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르딘 경의 뒤에 서 있는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뭐 어쨌건 우릴 부르는 별칭이야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소문을 들은 국왕... 전하께서 저 사람들을 우리 캠프로 보내셨다고?"

"예, 도련님. 정확히는 우리 캠프의 소문이 아니라 성과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합니다."

"흡족해하셨다고?"

"네. 부상병들의 생존율이 70퍼센트가 넘었으니까요."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아닙니다, 결단코."

가르딘 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통 10퍼센트만 넘어가도 훌륭하다는 평가가 나오니까요."

"그런가."

"예. 정말입니다."

"그럼 어쨌건, 우리 성과가 좋아서 국왕 전하께서 매우 기뻐하셨고, 저 사람들을 여기로 교육 파견을 보낸 거라고?"

"그렇습니다, 도련님. 왕국군의 각 부상병 캠프에서 차출된 군의관들입니다."

"오오."

내내 심드렁하던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스무 명이 전부 현역 군의관들이라고? 그럼 생초짜는 아닌 거네? 대박. 안 그래도 일손 모자랐는데!'

실제로 일손 때문에 허덕이던 그였다. 제대로 된 의료 인력이라고는 자신과 가르딘 경밖에 없던 처지였다. 그런데 실려 오는 부상병은 끝이 없었다. 덕분에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편안하게 자본 날이 없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이 날 살려 주는구나!'

라키엘은 눈가의 다크써클 가득 피어나는 광명을 느꼈다. 과로사의 위기를 걷어내고 승천하려는 광대뼈를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군의관들을 향해 빵긋 웃었다.

"흠흠, 다들 반갑습니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군의관 리한이라고 합니다."

"...."

"교육 파견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테지만 우선 다들 절 따라오시죠. 직접 캠프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상병들의 상태와 회복 상황에 따라 천막의 구역을 구분해 두었으니, 우선 그것부터 파악하시는 게 앞으로의 업무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

"다들 뭐 하십니까?"

"...."

이상했다.

스무 명의 군의관 중에 그 누구도 이쪽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멀뚱멀뚱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 눈빛이 좀 이상했다.

그건 마치....

'왜 네가 우리한테 명령을 하느냐는 듯한 눈빛인데?'

묘하게 거슬리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실례지만, 우선 쉴 곳부터 좀 안내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스무 명의 파견 군의관.

그들 중의 하나가 나섰다.

유독 잘생기고 키가 훤칠한 자였다. 목소리도 당당했다. 혹시나 저 군의관들 중에서 나름 목소리 좀 내는 리더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리한 군의관님? 아시다시피 우리는 국왕 전하의 지엄한 명에 따라 숭고한 사명을 지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결코 안락한 여정은 아니었지요. 무려 엿새 동안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한데 그 고생 끝에 도착하자마자 피로를 풀 틈도 주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하다고요?"

"예. 배려가 없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

너무나 당당하게 꺼내는 발언. 그 말을 들으며 라키엘은 가출하려는 어처구니를 꽉 붙들어야 했다.

그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제가 그쪽 분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일을 시키려 하는 게 배려가 없는 행위다, 이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어째서 당연합니까?"

"예?"

"그쪽 군의관님, 이름이 뭐지요?"

"샹드르입니다만."

자신의 이름을 밝힌 군의관. 그는 여전히 당당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시켜놓고 서비스 군만두가 왜 안 나오느냐고 따지는 사람 같았다. 라키엘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샹드르 군의관님?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기다려 줍니까?"

"예?"

"당장 목숨이 까딱까딱 넘어가기 직전인 환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환자가 의사를 얌전히 기다려 줍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당장 죽어가는 부상병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피곤하니까 쉬는 게 권리라는 요구가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착 깔렸다. 그의 마음속에 빡침이 그라데이션으로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 보너스 수명!'

할 일이 태산이었다.

원래라면 부상병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딴 놈과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자니, 그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데 샹드르는 이쪽의 빡침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괴상한 소리를 했다.

"죽어가는 부상병들이라 봤자 그들 중에 귀족 장교는 거의 없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있습니까?"

"...뭐요?"

귀족?

그게 무슨 소리일까.

샹드르의 반문이 이어졌다.

"귀족 말입니다. 혹시 리한 군의관님께서는 귀족을 따로 분류하지 않은 겁니까?"

"그야 당연히...."

"안 하셨군요. 쯧쯧. 그런 기본도 못 지키셨다니. 실망입니다."

"...."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지면 할 말이 그냥 사라지나 보다. 라키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칫 입을 열면 쌍욕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샹드르의 헛소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리한 군의관님? 제가 교육을 받기 위해 파견을 온 입장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모름지기 부상병은 둘로 나뉩니다. 귀족인 자와 아닌 자. 극진히 보살펴서 반드시 살려야 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렇게 둘 말입니다."

"...."

"조금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부상병을 둘로 나누는 걸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의료 인력은 한정되어 있고,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넘쳐나니까 말입니다. 그게 전쟁터의 부상병 캠프니까 말입니다."

"...."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연 누구부터 살려야 할까요? 누구를 살리면 두둑한 사례금을 받게 될까요? 당연히 귀족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어가는 귀족 출신 장교를 살려내면 얼마나 큰 칭찬과 명성을 얻겠습니까. 게다가 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운이 조금만 좋다면 살려낸 귀족 장교 가문의 두둑한 후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럼 반대로 짚어볼까요? 온 힘을 다해서 평민 병사를 살리면,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으로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뿐이지요.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귀족 장교를 살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

"그래서 제가 리한 군의관님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후우, 실로 큰일이 날 뻔했군요. 전하께서 이곳의 이런 안타까운 속사정을 아셨다면 크게 실망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 전에 저희가 와서 그런 점을 지적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말입니다."

"...."

"리한 군의관님?"

"...."

"어째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아, 놀라셨습니까? 하지만 이게 실제 현장의 냉엄한 논리이자 요령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경험이 적으시니 그러시는 것 같...."

"그만. 개소리는 거기까지."

"...예?"

샹드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개소리라니, 갑자기 들은 폭언 때문에 얼떨떨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저 빨간머리 뚱땡이 군의관이 왜 갑자기 욕을 하는 걸까.

하지만 샹드르의 생각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뻐걱!

"...!"

라키엘의 월별 한도 초과의 개빡침을 담은 주먹질이 작렬했다. 샹드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몸뚱이도 트리플 악셀의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홱 돌아갔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옥수수, 아니, 어금니 하나가 허공을 날아가며 반짝, 빛났다.

나머지 군의관들의 눈동자가 칠성장어 승천 댄스를 추며 몹시 흔들렸다.

117화. 등 뒤의 개소리 (2)

폭력은 부당하다.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

라키엘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남에게 폭력을 써본 적이 거의 없었다. 딱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랬다.

한의대생 시절이었던가.

같은 과 녀석과 사소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놈이 패드립을 꺼냈더랬다. 부모님 안 계시냐고. 진짜로 안 계셔서, 가슴 아프게 떠나보낸 지 몇 년도 되지 않았던 터라 울분이 터졌다. 싸웠다. 쌍방폭행이었다. 그게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데 지금.

그때보다 심한 폭력을 저질렀다. 이번엔 울분이 터진 건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 끝에 실행한 주먹질이었다.

뻐억!

"...구윅!"

괴상한 비명과 함께 샹드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옥수수 알처럼 실한 어금니 하나도 반짝반짝 날아갔다. 샹드르가 한 큐에 쓰러졌다.

완벽한 기절이었다. 당연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으니까. 마나를 살짝 실은 주먹질이었으니까. 아마 한두 시간은 푹 잠들지도 모르겠다.

"어엇?"

"어, 그, 어...?"

"저기, 저?"

나머지 파견 군의관들이 입을 뻐끔뻐끔.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가득하던 놀람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그것도 군의관을 때리다니!"

"이러고도 뒤탈이 없을 것 같습니까?"

군의관들의 항의가 쏟아져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대신 비웃음만 피식.

"무슨 짓?"

뻐근해진 주먹을 주물럭거리며 군의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댁들, 뭔가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쪽들은 지금 여기 배우러 온 거야. 놀러 온 거 아니야. 시답잖은 그쪽 이분법이나 설파하러 온 건 더더욱 아니고."

"...."

"그런데 뭐? 부상병을 둘로 나눠야 한다고? 귀족인 자와 아닌 자로 구분해서 치료 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그래야 주머니가 두둑해져? 후원을 받아? 내 참. 듣다 보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

생각만 해도 웃음부터 나왔다. 뭐 이런 쓰레기들이 다 있나 싶었다. 한데 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다니요! 이건 부당합니다!"

"사과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상부에 알릴 겁니다."

군의관들이 더더욱 날뛰었다. 건수라도 잡은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나왔다.

"이 일을 상부에 알리겠다고? 어떤 명목으로?"

"그야 당연히 폭력 행위로 신고를...."

"폭력 행위? 그전에 이자가 저지른 왕명 불복종은?"

"...뭐요?"

항의하던 군의관이 멈칫했다. 라키엘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지적이 이어졌다.

"왕명 불복종. 앙부아즈의 위대한 국왕 전하의 명을 어겼지 않나, 쓰러져 있는 이 작자 말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소리긴. 댁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를 벌써 잊었어?"

"그건...."

"댁들은 국왕 전하의 명에 따라 이 캠프에 왔지. 이곳 캠프가 달성하고 있는 높은 부상병 생존율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 그렇지?"

"...."

"그런데 왜 배울 생각을 하지 않지? 어째서, 내 안내에 따르지 않고 시답잖은 딴죽부터 걸어대는 걸까. 그거, 이미 왕명에 대한 불복종 아닌가?"

"비, 비약이 지나치시오!"

"지나치긴 개뿔."

라키엘이 코웃음 쳤다. 그의 신랄한 말이 이어졌다.

"기껏 배우라고 보내줬더니 배울 생각은 없고. 알려 주겠다고 하니까 그런 거 필요 없노라 하고. 환자를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는 것을 요령이라 말하며. 그걸 모르는 내가 안타깝고. 이런 실태를 알면 국왕 전하께서도 실망하실 거라는 헛소리나 뱉어 대고."

"...."

"그 발언과 행동 어디에 배우겠다는 뜻이 있는 건지 오히려 묻고 싶은데."

"하, 하지만!"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이렇게 주먹질로...."

"그럼 영창에 넣어 줘?"

"...."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집어넣은 대대장이 아직도 거기 있을 텐데. 함께 오순도순 지내게 해 줄까? 여기 전부?"

"...."

"쯧. 할 말 안 남았으면 다들 꺼져.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진심이었다.

저런 마음가짐인 놈들 따위, 백 명이 있어도 도움이 안 될 거다. 아니, 오히려 방해라도 안 하면 다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어째서 저 인간들이 살리는 부상병이 10퍼센트밖에 안 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평소부터 보통 병사들은 그냥 방치하는 거였구만. 그중에 집안이나 배경이 쓸 만한 귀족 출신 장교만 골라서 신경 쓰고 보살피는 거였어.'

생각하자니 욕지기가 나왔다. 저들이 지닌 자그마한 능력. 그 능력이 가져다준 초라한 권력. 자신들이 타인의 삶과 죽음을 선별하고 결정한다는 우월감을 만끽했을 터다.

그런 알량한 오만함에 도취된 저들의 면면이 역겨웠다. 그걸로 고작 한다는 짓거리가 제 주머니나 불리는 짓이라는 사실이 더더욱 역겨웠다.

때린 게 미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까 주먹질을 할 때 조금 더 세게 후려쳤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아쉬웠다.

'모처럼 일손 좀 확보하나 싶었는데. 괜히 쓰레기들한테 기대했다가 귀한 시간만 날렸네.'

어느새 부상병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서둘렀다. 그는 쓰러진 군의관 샹드르와 나머지 놈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바삐 자리를 떠나갔다.

'감히...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근본도 없는 놈 주제에... 나한테 이런 짓을 했어?'

샹드르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자신의 요구대로 여독을 제대로 푼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친절하게 재워(?) 준 라키엘에 대한 분노부터 불태웠다. 당연했다. 라키엘에게 죽통을 맞은 자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날아간 어금니도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통증보다도 굴욕감이 더욱 컸다.

'그까짓 놈이 감히... 내 자리를 빼앗아?'

샹드르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최고다.

자신을 넘어서는 군의관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렇게만 여겨왔다. 실제로도 그랬다. 왕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의과대학을 나온 자신이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교수의 수제자였던 자신이었다. 군의관이 된 후에도 탄탄대로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자신의 부상병 캠프가 최고였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에도 그랬다. 지금껏 참전한 크고 작은 전쟁들을 거치며 왕국군 내에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 무려 부상병 생존율 15퍼센트. 특히, 귀족 장교들의 생존율은 더욱 높았다.

덕분에 항상 주목받았고, 제법 많은 귀족가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나면 자신의 주치의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보낸 대귀족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은 최고였다.

리한, 그 근본도 없는 괴상한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믿을 수조차 없는, 70퍼센트라는, 비정상적인 부상병 생존율을 기록한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2인자로 밀려났다.

그놈 때문이다.

까드득!

샹드르는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파견 온 군의관들이 보였다. 다들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최고였던 자신에게 쏟아지는 염려의 눈빛이라니.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그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 그렇게 볼 필요는 없소. 한데 그놈은?"

"모르겠습니다. 군의관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뒤로 그냥,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자리를 떠났다니요?"

"부상병들을 보러 갔지요. 그 뒤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샹드르는 주먹을 꾹 쥐었다. 리한, 그 뚱땡이 놈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우릴 철저하게 무시하겠다는 거구나.'

감히. 근본도, 출신도 없는 놈 주제에. 그저 운 좋게 왕녀의 후원을 받게 된 주제에.

생각하자니 더욱 분통이 터졌다. 한데 그런 이쪽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 군의관들이 눈치 없는 소리만 해댔다.

"그런데 샹드르 군의관님? 군의관님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말입니다. 여기 병사들에게서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한 소리라니요?"

"그 리한이라는 자 말입니다. 실제로 실력이 상당하다는 모양이던데요?"

"뭐요?"

"그자 덕분에 살아났다는 부상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심지어 절단 수술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절단 수술을 안 했다는 말입니까?"

"예. 직접 캠프를 돌아다니면서도 봤습니다. 다들 사지가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절단 수술을 받은 병사가 거의 없더군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70퍼센트나 되는 생존율을...."

"뭔가 여러 가지 신기한 치료법을 쓴다고는 들었습니다."

"신기한 치료법을요?"

"예. 가시로 온몸을 푹푹 찌른다고 들었습니다."

"가시로 말입니까?"

"아마도 그걸 침술이라고 불렀던 것 같던데. 아, 그거 말고도 또 있습니다. 뜸이라고 부르는 방식이었던 듯한데, 괴상한 풀을 뭉쳐서 말린 덩어리를 피부 위에 올려 두고 불을 붙여 태운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한데 침술과 뜸을 받고 나면 그렇게도 몸이 개운해진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

샹드르는 입을 다물었다.

침술?

뜸?

처음 들어보는 치료법이었다. 가시로 온몸을 찌른다거나, 뭉쳐서 말린 풀 쪼가리를 몸에 올려두고 태우는 치료법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확신했다.

'그놈, 사이비로군!'

확실하다.

리한이라는 자, 사이비 돌팔이다. 어디선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술법을 배워온 것일 터다. 그런 괴악한 사술로 순진하고 멍청한 병사들을 현혹한 것일 터다.

그럼 70퍼센트를 기록한 생존율은?

'운이 좋았던 거겠지. 사실은 절단 수술이 필요하지도 않은 병사들이었던 거야. 그저 어쩌다 보니 크게 다치지도 않은 부상병들만 잔뜩 받은 거겠지. 그러니까 그토록 많은 수를 살릴 수 있었던 거겠지.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어?'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랬다. 자신을 가르친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던가.

'아무리 신과 같은 의술을 지니고 있어도, 전쟁터에서는 20퍼센트 이상의 병사는 살릴 수 없다고 하셨지. 사람인 이상 절대로 그걸 넘을 수는 없다고 하셨어.'

앙부아즈 최고의 의과대학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은 스승이셨다. 그런 스승이 하신 말씀이니 틀렸을 리가 없다.

한데 리한 그놈은? 70퍼센트라는 비정상적인 성과를 기록했다. 당연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다들 속고 있는 거야. 이곳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왕국군의 정보부도, 국왕도, 모두가 그놈의 사술에 현혹된 거지. 어쩌면 그놈, 남들 몰래 흑마술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떡해야 할까. 사명감이 들었다.

'그놈이 사술을 부린다는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해. 그러자면... 내가 실력을 증명해서 놈의 가면을 벗겨야 할 것이고!'

샹드르는 결심했다.

리한, 그놈의 더러운 뒷구석을 낱낱이 까발려 버리리라. 까맣게 속고 있는 모두를 일깨우리라.

다짐하며 일어났다. 자신의 도구를 챙겼다. 천막을 나섰다.

바깥은 캄캄한 밤이었다. 어느새 자정을 알리는 달빛이 머리 위에 휘영청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여겼다. 이 시간쯤이면 리한, 그 사이비 놈도 잠들어 있을 테니까.

'그놈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 실력을 증명할 좋은 기회지.'

그는 어렵지 않게 부상병 천막을 찾을 수 있었다. 거침없이 들어갔다. 잠든 부상병을 살펴보았다. 마침 수술을 받고서 회복 중인 부상병이었다.

'역시.'

부상병의 상태를 살핀 샹드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든 부상병의 상태를 보아하니 리한, 그자가 얼마나 엉망인지 더욱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수술 후에 당연히 해줘야 할 기본적인 처치도 하지 않다니. 역시 그놈은 사이비가 확실해.'

그러니 이제 그 더러운 가면을 낱낱이 벗겨 주마. 샹드르는 활짝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달칵.

갖가지 의료 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피를 뽑아내는 '사혈 도구'를 집어들었다. 잠든 부상병의 팔뚝 정맥을 겨누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운 의학의 상식을 경건하게 되새겼다.

'모름지기 병이나 다친 곳이 생겼을 때는 몸속에 더러운 피가 잔뜩 생겨나니까, 그 더러운 피를 최대한 많이 뽑아 줘야 맑은 피가 빈자리를 채우며 몸이 건강해지는 법이지.'

서컥.

그의 날 선 사혈 도구가 섬뜩하게 빛나며 병사의 멀쩡한 정맥을 잘랐다.

118화. 등 뒤의 개소리 (3)

서컥.

사혈 도구가 섬뜩하게 빛났다. 병사의 멀쩡한 정맥을 잘랐다. 샹드르의 눈빛에 확신 가득한 아집이 서렸다.

'좋았어.'

자고로 나쁜 것은 몸에서 최대한 덜어내어야 한다. 몸에 나쁜 기운이 깃들었다면 빼내야 한다. 그런데 몸에서 제일 뽑기 쉬운 것은?

'바로 혈액이지.'

혈액이야말로 생명의 근원. 모든 생명을 온전하게 해주는 근본.

그렇기에 몸에 병이나 크게 다친 곳이 생기면, 혈액 또한 오염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실은 비단 그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의 스승도, 스승의 스승도 똑같은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치료법이야말로 올바른 진리지.'

몸에 생겨난 오염된 피를 빼주면 된다. 최대한 많은 피를 뽑아내어야 한다. 그러면 오염된 피가 빠져나온 만큼 몸에 빈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무엇인가.

'빈 곳이 있으면 빠르게 채워지는 법. 그게 생명인 법이야.'

오염된 혈액이 빠져나가면 생겨나는 빈자리. 그곳에 새로운 피가 채워질 것이다. 갓 탄생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피가 온몸의 병마를 말끔하게 씻어줄 것이다.

그러면 된다. 어떤 병이라도 낫게 된다. 큰 부상도 빠르게 털어낼 수 있으리라.

샹드르는 그러한 믿음을 철석같이 유지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방금 잘라낸 병사의 정맥 팔뚝 아래에 양동이를 갖다 댔다. 피를 받아낼 양동이였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으, 음?"

잠들어 있던 병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졸지에 칼질(?)을 당한 팔이 따끔했던 걸까.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매가 휘둥그레지는 건 금방이었다.

"어? 어어?"

병사는 깜짝 놀랐다.

그저 잘 자던 자신이었다. 다리의 칼 맞았던 자리가 봉합이 잘되었다고. 다행히 근육도 잘 붙었고, 절단 수술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앞으로 연고 잘 바르고 푹 쉬면 천천히 나을 거라고. '성자'라고 불리는 리한 군의관의 격려와 위로를 받았던 터였다.

그래서 안심했더랬다.

푹 자고 있었더랬다.

한데 팔이 따끔해서 깨어 보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어, 이게 무슨...!"

당황한 병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데 억센 손아귀가 병사의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쉿."

"...!"

"나는 군의관 샹드르라고 하네. 치료 중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게."

군의관이라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병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자신의 팔뚝과 샹드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구, 군의관님...이시라구요?"

"그렇다네. 자네는 내 치료를 받는 중이고."

"하지만, 저기, 군의관님?"

"음?"

"처음 보는 얼굴이신데...."

"아까 낮에 파견을 왔다네. 왜? 뭐가 이상한가?"

"그... 저는 아까 낮에 수술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리한 군의관님께서, 이젠 그냥 쉬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왜 갑자기 오밤중에 찾아오셔서 제 팔뚝에서 피를 빼고 계신 건지...."

"그래서?"

"...."

"감히 일개 병사 주제에, 군의관인 내 치료법에 의심을 품겠다는 건가?"

샹드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병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 그런 말씀이 아니라...."

"아니면?"

"이런 치료를 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듣지를 못해서...."

"여기 캠프에 부상병이 자네밖에 없나?"

"...예?"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이런저런 치료를 할 거라고 꼬박꼬박 알려 줘야 하나? 자네 같은 부상병한테?"

"그건...."

"자네, 귀족인가?"

"아, 아닙니다."

"아니야?"

"예, 군의관님."

"그럼 어떤 치료라도 감사히 받아. 평소 같았다면 자네처럼 내세울 가문도 없는 일개 부상병은 나 같은 사람한테 치료받을 꿈도 못 꿀 테니까. 운이 좋은 줄 알라고. 알았어?"

"...."

"알았어?"

"알겠습니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대단히 찜찜하고 켕겼다. 샹드르라고 이름을 밝힌 군의관의 위압적인 말투도, 안하무인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에 자신을 치료해준 리한 군의관이나 가르딘 경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그분들은 나 같은 일개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친절하셨는데.'

리한 군의관과 가르딘 경은 달랐다. 어떤 부위를 어떻게 다쳤는지 꼼꼼히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 했다. 하여 앞으로 어떤 치료를 할 거고,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다.

한데 눈앞의 이 샹드르라는 군의관은?

'무슨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굴고 있잖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낼 순 없었다. 말 그대로 자신은 그저 일개 병사일 뿐이니까. 군의관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계급이니까. 그저 입을 다물고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런 치료, 괜찮나....'

병사는 자신의 팔뚝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아래쪽에 받친 양동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담긴 피를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손끝이 저려 왔다. 발가락이 찌릿찌릿해졌다. 입술이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순간, 천막 내부를 밝힌 기름 램프 불빛이 두 개로 겹쳐 보였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왜 갑자기 어지러운 거지.

속이 뒤집힐 것 같아.

'토하고 싶어.'

병사는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샹드르에게 말했다.

"저, 저기... 군의관님?"

"그래. 몸이 좀 가뿐해지는 기분이 드나?"

"아, 아뇨. 그게... 좀 어지러워져서...."

"어지러워져?"

"예...."

"쯧. 오염된 피를 빼냈는데 그럴 리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쯧쯧! 조금만 더 참아 보게. 다 자네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어허."

"군의관님... 저... 진짜로...."

이제는 군의관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져 보였다. 혹시 인상을 쓰는 걸까. 아니었다. 그냥 진짜로 온 세상이 다 일렁거렸다. 이쪽을 향해 뭐라고 하는 군의관의 입이 다섯 개로 겹쳐 보였다.

흔들렸다. 촛불도. 천막 내부도. 침상과 바닥에 놓인 양동이도. 그 안에 고여 가는 핏물도. 전부.

"...끄윽."

풀썩.

결국, 더 견디지 못한 병사가 옆으로 스르륵 무너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어? 이봐? 이보게?"

당황한 샹드르의 목소리가 천막을 채웠다.

"...."

당황스럽다. 푹 자다가 깬 라키엘이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다.

'방금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꿈에 아버지가 나오셨다.

당장 일어나라고.

눈을 뜨라고.

아버지가 근엄하게 호통을 치셨던가.

'이건 무슨 야인시대도 아니고.'

라키엘은 황당한 심정으로 웃어 버렸다. 야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잘까 싶었지만, 이미 잠이 죄다 달아나 버린 터였다.

'밤하늘이나 보고 올까.'

의미 없이 뒤척거릴 바엔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곳 세계의 밤하늘은 정말로 아름다우니까. 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와 별빛은 한국에선 볼 수 없던 광경이니까.

그는 천막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셨다. 한편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여기 군의관들, 생각보다 훨씬 쓰레기였어.'

아까 낮에 파견을 왔다는 자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인간들이었다. 부상병을 귀족과 아닌 자로 구분해야 한다니. 그래야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든든한 후원을 받을 거라니.

설령 그런 생각을 한다고 쳐도, 그걸 대놓고 입 밖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점이 쇼킹 그 자체였다.

'쯧.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은 생각하지도 말자.'

그러니 앞으로도 그냥 무시하자. 대강 파견 기간만 때우게 하고 보내 버리자.

'어차피 나야 보너스 수명만 빵빵하게 얻으면 되니까.'

그게 자신의 할 일이다.

이곳에 온 이유다.

보너스 수명을 떠올리는 라키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앙부아즈로 온 지 2개월째. 그동안 얻은 보너스 수명이 제법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283일]

'후후후. 흐흐후후후.'

처음 앙부아즈의 내전 발발 소식을 들었을 땐 170일 남짓 남았던 자신의 예상 기대수명이었다. 한데 이곳에 와서 2개월 남짓한 동안에 저만큼 팍팍 늘었다. 볼수록 흐뭇했다. 또 봐도 더 므흣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이렇게 지낸다면?

'기대수명이 1년은 넘게 쌓이겠지.'

그러면 덜 초조해하며 살 수 있으리라. 시한부 인생이라는 압박도 제법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은... 좀 그랬으니까.'

기대수명이 200일 넘게 쌓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항상 백몇십 일, 때론 100일 이하로 떨어진 채로 지내야 했다.

고작 몇 개월 뒤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압박감. 덕분에 쫓기듯 살아야 하는 초조함. 스트레스와 공포. 더는 겪기 싫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한의원 꾸릴 때 그랬지. 코로나 때문에 엄청 어려워졌을 때. 수입은 뚝 끊겼는데, 가만히 있어도 임대료와 대출 이자는 줄줄 빠져나가고 말이야.'

말 그대로 통장의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앞으로 몇 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남은 돈이 얼마니까. 앞으로 얼마가 들어올 것 같고. 다음 달 임대료와 이자는 얼마가 나갈 테니까. 대강 언제까진 버틸 수 있겠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피 마르는 계산을 하며 지냈던 나날이었다. 달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마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영업자의 엄혹한 일상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그랬다. 매일 가만히 있어도 하루씩 줄어드는 기대수명. 그걸 계산하며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매일매일이 대한민국의 자영업자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후후... 후후후!'

매일처럼 쑥쑥 쌓여가는 보너스 수명. 그걸 이렇게 볼 때마다 얼마나 흐뭇한지. 밤 산책을 즐기는 라키엘의 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보게? 어? 어어?"

적막한 캠프 어디선가 웬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혹감에 물든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라키엘은 탭댄스를 밟던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정신 차리게. 이봐? 응?"

철썩, 철썩!

한결 당황한 목소리.

뺨을 치는 듯한 소리까지.

그 소리들이 부상병들의 회복 전용 천막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갓 수술을 마치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할 병사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1인 전용 회복 천막들이 있는 곳이었다.

"...."

이상한데.

라키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이! 눈 좀 떠보라니깐? 감히, 내 말을 안 들을 건가?"

철썩! 철썩!

"일개 병사 주제에!"

철썩! 철써덕!

"...."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누구?

기억이 났다.

아까 낮에 개소리를 지껄이던 놈. 그러다가 주먹질에 맞고 기절했던 놈. 이름이 샹드르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 그놈 목소리가 이쪽에서 들리지?'

뭔가 쌔한 기분이 들었다. 라키엘의 걸음이 빨라졌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천막을 찾아냈다. 천막 입구를 확 걷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

팔뚝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기절한 병사. 그런 병사의 뺨을 다급하게 후려치고 있던 샹드르.

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어?"

놈의 눈이 커졌다.

라키엘의 눈빛이 살벌하게 식었다.

"...너, 지금 내 보너스 수명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119화. 성자 탄생 (1)

"너, 지금 내 보너스 수명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살벌하게 싹 가라앉은 목소리.

라키엘은 서늘하게 내리깔린 눈길로 천막 안쪽을 훑어보았다. 안쪽의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병사가 팔뚝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아까 낮에 다리 수술을 받았던 병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뭐, 뭐요? 내가 지금 치료 중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샹드르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대꾸해 왔다. 놈의 손에 들린 칼이 보였다. 병사의 팔 아래에 받쳐둔 양동이도 보였다. 양동이에는 이미 받아낸 피가 흥건했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사혈요법?'

문득 떠오르는 이름. 언젠가 근대 의학의 역사 서적을 통해 보았던 내용이 기억났다.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었다.

고작 지금으로부터 2~300년쯤 전인 18세기. 당시만 해도 몸에서 더러워진 피를 뽑으면 사람이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파다했다. 심지어 의사들도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던가.

'특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의사였던 존 브라운이었나. 그 작자는 생명이 지속적인 신체의 자극에 의존한다는 류의 브루노니언 시스템(Brunonian System) 이론을 주장했지. 그래서 질환이 생겼을 때 더러워진 피를 몸에서 강제로 최대한 많이 뽑아낼수록 자극이 커지고, 그만큼 신체가 회복된다고 여겼다던가.'

...미친 이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유행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외과 의무관으로 승진한 프랑소아 빅터 브루세라는 자는 그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아예 거머리를 사혈요법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 의사는 모든 병이 위장관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지. 그래서 어떤 환자가 오더라도 일단 무조건 굶겼어. 금식을 시키면서 거머리를 온몸에 붙였지. 심한 경우에는 한 번에 50마리까지.'

그렇게 굶기면서 피를 쭉쭉, 빨아들이면 사람이 낫는다고 여겼다. 물론 수많은 환자가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당시의 의사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사혈요법 끝에 환자가 죽어도 그 원인을 제대로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시행했지만 환자가 견디지 못해서, 불운해서 죽은 거라고 치부했지.'

그렇게 브루세의 거머리 요법이 최신(?) 의술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 1820년에서 1845년까지의 무렵이었다. 최첨단의 21세기로부터 고작 200년 남짓한 과거였다!

말 그대로 나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한데 그런 꼴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도 오히려 당당한 반응을 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나도 군의관이오. 그러니까 한밤중에 피로를 무릅쓰고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고. 한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내 치료에 간섭을 한단 말이오?"

샹드르의 더욱 커진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라키엘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분노의 감정이 스멀스멀. 뒷골이 절로 뻐근해졌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샹드르를 추궁했다.

"피로를 무릅쓰고 부상병을 치료? 지금? 그 짓거리가?"

"...짓거리?"

"그래. 지금 그쪽, 뭐 하고 있던 거지?

"보면 모르오? 피를 뽑고 있었지 않소."

"피를 왜."

"그래야 건강해지니까!"

"...."

"보시오. 지금 병사가 정신을 잃었지 않소? 더러운 피가 빠지니까 몸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증거요. 그러니 이걸 이겨내기만 하면 이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죽겠지."

"...뭐요?"

샹드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키엘의 서늘한 일침이 이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지혈해. 그 병사 진짜로 죽기 전에."

"지금 무슨 말을...."

"비켜."

더는 못 보겠다.

이따위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병사의 팔뚝에서는 애꿎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진짜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라키엘은 더는 참지 못했다.

'이러다 생사람 잡겠어.'

겨우 20살 남짓한, 앞날이 창창한 병사였다. 마침 적절한 치료를 잘 받고서 멀쩡히 회복기에 들어서던 환자였다. 한데 그런 목숨이 눈앞에서 어이없게 꺼져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성큼 걸음을 내밀었다. 샹드르를 밀쳐냈다. 놈의 의료도구함에 있는 두툼한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병사의 팔뚝을 꽉 눌렀다. 천 조각이 금방 검붉게 물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흥분한 샹드르가 옆에서 소리쳤다.

"한창 순조롭게 치료가 진행되는 중이었소. 그런데 왜 이러는 거요? 이래도 되는 거요? 아무리 성과가 좋은 캠프의 군의관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소!"

"...."

"이런 식으로 경쟁자를 억누르려는 거요? 무례하고 또 무례하오. 비겁하고 불공평하오. 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남의 치료를 마음대로 중단시키는 건지 그 이유를 반드시 들어야겠소!"

"...."

"왜 대답이 없으시오? 이제 와서 항의를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진 거요? 그렇다면 당장 비키시오! 이대로 치료를 애매하게 중단할 수는 없소. 이제 막 환자가 중대한 고비에 접어들려는 순간인데!"

"중대한 고비? 치료?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던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긴. 정곡을 찌르는 소리지. 지금 이 병사의 상태를 봐. 이게 회복이 되고 있는 사람 같나?"

"그야 당연히...."

"죽어가고 있어. 과다출혈로. 그쪽이 제멋대로 멀쩡한 피를 뽑아낸 덕분에."

"...."

그제야 샹드르의 입이 닫혔다. 라키엘의 신랄한 지적이 이어졌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 그쪽, 내가 여기 올 때까지 뭐 하고 있었지? 난 봤는데. 이 병사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지. 안 그래?"

"그건...."

"일어나라고. 눈 좀 떠보라고. 당황해선 허둥거리며. 다 들리던데."

"...."

"말은 아니라고 우겨도 그쪽도 느끼고 있었겠지. 이 병사가 잘못되고 있다는 거. 그런데 그걸 인정 못 해?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 걸, 그 원인이 잘못된 치료법 때문이라는 걸, 끝까지 인정을 못 하겠어?"

라키엘의 말끝에 울분이 서렸다. 말을 하다 보니 진심으로 더 화가 났다. 단지 보너스 수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샹드르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쪽 같은 놈들이 항상 문제야. 환자의 상태를 잘못 진단할 수도 있어. 잘못된 치료법을 선택할 수도 있어. 거기까진 이해해. 사람이니까. 의사도 인간이니까.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지를 못하지? 왜 끝까지 발뺌을 하지?"

"...."

"인정하면 자신이 못난 사람이 될까 봐? 잘난 명성에 흠집이 생기니까? 혹은, 책임을 덮어쓰게 될까 봐? 아니면, 어차피 죽은 환자는 항의를 못 하게 되니까? 정말로 그런 건가?"

"이보시오, 말이 너무...."

"심하다고? 웃기는 소리. 지금 댁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말은 폭언 축에도 끼지 못해. 아니, 폭언보다는 처벌을 받아도 감지덕지할 거야.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자격을 박탈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싶으니까. 그러니 충고 한마디만 하지."

"그...."

"이 자리에서 맞아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있어."

"...."

샹드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쏘아보는 상대의 눈동자에 진심이 실려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게다가 저런 눈빛으로 꺼내는 말마다 틀린 곳이 없었다. 너무나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오고 있었다. 전부 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병사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가슴이 철렁했으니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은 그사이에 이곳에 도착한 다른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

그들 대부분이 사혈요법의 신봉자였다. 환자의 몸에서 피를 최대한 열심히 뽑아내는 것이 최선의 회복법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에게 그 치료법을 실행했고, 그만큼 많은 환자를 과다출혈로 죽였다.

하지만 지금껏 반성해본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환자가 버텨내지 못한 탓이라고. 자신은 잘못이 없노라고. 그렇게만 여겨왔다.

한데 방금 저 뚱땡이 군의관의 말을 들으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자신이 틀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반발심도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이 틀렸을 리가 없다고.

"...."

두 가지 상반된 생각 사이에서 군의관들은 침묵에 잠겼다. 과연 저자는 어떻게 할까. 우리의 사혈요법을 신랄하게 비판해놓고선 어떤 수로 저 병사를 살릴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는 심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낭패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샹드르와 군의관들은 라키엘의 대응을 관찰했다.

"데미안? 가르딘 경? 마침 잘 왔어."

소란을 듣고 달려온 두 사람의 모습에 라키엘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빠르게 지시했다.

"데미안은 담요를 가져와. 최대한 두툼한 걸로. 여기 이 병사 몸을 덮어줘. 그리고 두 다리를 좀 들어주고."

"다리를 말입니까?"

"몸에 남은 피가 최대한 주요 장기와 머리 쪽에 머무를 수 있게."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라키엘의 시선이 가르딘 경을 향했다.

"정맥이 잘렸어. 봉합하자."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이 봉합 도구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라키엘은 병사의 팔뚝에 지혈대를 감았다. 한편으로는 병사의 상태를 면밀히 진단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이내 주르륵 떠오르는 검진 결과. 라키엘의 눈길이 결과표 가장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 병사의 상태를 알려주는 종합소견이 떠올라 있었다.

[종합소견 : 현재 과다출혈(Excessive Bleeding) 상태입니다. 체내 혈액량의 약 30%가 손실되었으며, 대뇌의 산소 공급량 저하로 의식을 잃은 상태입니다. 위험 수준의 혈압저하, 사지냉감, 말초순환부전, 쇼크 증상이 감지됩니다. 최대한 신속한 수혈 조치가 필요합니다.]

'...난리 났네.'

라키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병사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런데도 당장 손을 쓸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 더욱 암담했다.

'수혈이 필요해.'

그런데 수혈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병사의 혈관을 찌를 적절한 주삿바늘도, 혈액을 옮겨줄 튜브도, 수혈을 하는 동안 혈액이 굳는 것을 막아줄 항응고제도. 그 어떤 것도 없으니까.

'이대로 지혈만 하고 치료를 끝내야 하나? 살아나길 그저 빌어야 하나?'

현실적으로는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대로 둔다면?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미 위험한 상황이니까. 결국엔 십중팔구 죽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자신의 보너스 수명을 위해서든. 병사의 생존을 위해서든.

'잘못된 치료법만 신봉하는 개잡놈의 고집 때문에 죽으면 그건 개죽음이 되는 거잖아.'

그게 제일 싫었다.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라키엘은 맹렬히 고민했다.

반드시 수혈이 필요한 상황. 바늘도, 튜브도 없는 상황. 그래서 혈관 대 혈관의 직접 수혈마저도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라. 제발. 생각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과하게 깨문 탓일까.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는 무의식중에 흠칫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있다.'

불현듯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생각. 발상. 혹은 기적의 치료법. 오직 자신만이 실행할 수 있는 방법.

그걸 떠올린 순간.

턱!

라키엘이 수술칼을 집어 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등 정맥을 그었다.

120화. 성자 탄생 (2)

서걱!

수술칼이 움직였다.

손등이 화끈해졌다.

베어낸 손등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핏물. 그 기세(?)가 생각보다 훨씬 맹렬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콸콸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쓰읍. 너무 깊이 베었나.'

아주 잠깐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다. 라키엘은 자신의 손등에서 나오는 핏물의 기세를 감상했다.

물론 주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헉."

제일 먼저 기겁한 반응을 보인 이는 가르딘 경이었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쪽을 향해 던지는 경악에 찬 눈빛이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즈어어어어어언하아-!'

하지만 차마 외치지는 못하고 뻐끔뻐끔. 병사의 팔뚝을 꿰매던 손길마저 덜덜덜. 놀란 반응을 보인 이는 비단 가르딘 경뿐만이 아니었다.

"...."

부상병의 다리를 들어 올려 주고 있던 데미안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샹드르를 비롯한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편, 천막 입구 쪽에서 수군거리며 모여 있던 캠프의 관리병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모두의 눈빛을 종합하자면?

'저 인간이 왜 갑자기 자해를 하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장육부의 반응 또한 비슷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또라이짓에 기겁합니다.]

[심장 : 야! 너 뭐해! 미쳤냐!]

[허파 : 허억... 파핛...?]

[대장 : 형님들 이 인간 드디어 맛탱이가 가려는 것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아니 부상병이 과다출혈인데 얘는 왜 지 피를 빼고 난리임? 설마 병사한테 피를 먹여 주려고? 그런다고 수혈이 돼?]

[위장 : 아 요즘 수혈은 와이파이로 한다고ㅋㅋㅋ 아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물음표 백만 개를 띄우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며 격려의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7,400]

"...."

역시나 다들 난리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누가 뭐라 하건 말건. 미친놈 쳐다보는 눈빛을 보내건 말건.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걱정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다친 손등을 들었다. 입으로 가져왔다. 상처를 입으로 덮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에 확 번졌다. 그대로 빨아먹었다.

"쯥! 쯔읍!"

행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그러고도 놓치는 핏방울이 있을까. 마치 열흘 굶다가 꿀물 마시는 사람처럼 손등을 맹렬히 쭉쭉 빨았다. 꿀꺽꿀꺽, 피를 삼켰다.

"...허억."

이쪽을 보는 모두의 눈빛에 더욱 큰 염려가 깃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으니까.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부상병을 살려낼 유일한 방법. 그 희망의 각을 엿보고서 이러는 거니까.

'써클 슬롯 활성화.'

속으로 되뇌는 순간.

딩동!

맑은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써클 슬롯의 저장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써클 슬롯이 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저장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섭취 중인 물질 : 인간의 혈액(Rh +O) 이 감지되었습니다.]

[감지된 물질을 써클 슬롯에 저장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저장 기능을 활성화했다. 그때부터였다. 꿀꺽꿀꺽 삼키는 혈액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마시는 족족 써클 슬롯에 저장되었다.

[1번 슬롯에 물질 저장 중입니다.]

[1번 슬롯 저장량 : 인간의 혈액(Rh +O) 0.1 리터... 0.2 리터...]

쯥쯥!

계속해서 삼켰다. 써클 슬롯에 담기는 혈액량이 순조롭게 늘어갔다. 0.3리터를 넘겼다. 일반적인 헌혈량인 0.4리터도 금방 채웠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걸론 부족해. 더!'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살려야 한다. 그러한 일념으로 계속 삼켰다. 0.5리터를 넘어. 마침내....

[1번 슬롯 저장량 : 인간의 혈액(Rh +O) 0.6리터]

그제야 라키엘은 자신의 손등에서 입을 떼었다.

"...파하!"

입을 떼자마자 붕대로 손등을 꽉 눌러 지혈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가르딘 경이 창백해진 얼굴로 물어왔다. 그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지금 이쪽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겠지. 부상병이 과다출혈로 죽어 가는데, 난데없이 이쪽이 셀프 자해를 한 것도 모자라 그 피를 한참이나 벌컥벌컥 마시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당장 병사의 상태가 위태로워지는 중이다.

"괜찮아."

그는 부상병의 용천혈(湧泉穴)을 짚었다. 발바닥의 가장 중심에 있는 오목한 자리. 흔히 '족심'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인체의 제2의 심장이기도 하지.'

12경혈 중에서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 몸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혈자리였다. 그렇기에 심장에서 뻗어온 기운이 가장 아래쪽으로 가라앉아 머물고 깃드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나를 담아서 수혈을 한다면... 이곳이 가장 제격이야.'

라키엘은 확신을 담고서 병사의 용천혈을 엄지로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써클 슬롯의 방출 기능을 발동했다.

딩동!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0.01리터.'

과하지 않게.

부드럽게 천천히.

그러나 절대 끊김 없이.

[써클 슬롯에 저장된 <인간의 혈액(Rh +O) : 0.01리터를 방출합니다.]

키이이잉!

슬롯이 활짝 열렸다.

심장을 둘러싼 마나써클이 역회전을 시작했다. 슬롯에 저장되어 있던 혈액을 농축된 마나에 담았다. 혈맥을 따라 이동시켰다. 심장을 출발지로 삼아, 어깨와 팔뚝의 혈맥을 지나, 손길을 따라, 엄지손가락으로.

마침내 병사의 용천혈로 밀어 넣었다.

울컥!

10밀리리터의 혈액이 마나에 담겨 용천혈 주위를 자극했다. 미약하지만 적절한 자극이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 자극에 용천혈을 둘러싼 혈관들이 반응했다. 마나에 담겨서 건너온 혈액 10밀리리터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영양과 산소.

작은 활력이 혈관을 따라 번졌다.

'...된다!'

라키엘은 환호했다.

혹시나 하며 엿본 희망의 각이었다. 나름 떠올린 유일한 수혈 방법이었다. 한데 그게 제대로 통하고 있었다.

'다시, 10밀리리터!'

키이이잉-!

계속해서 조금씩. 끊어지지 않도록 꾸준하게. 차근차근 수혈을 해주는 것처럼. 슬롯에 담긴 혈액을 마나에 실어서 건네주었다. 0.1리터, 0.2리터, 0.3리터... 마침내 0.6리터를 건네주고 슬롯이 텅텅 비어 버릴 때까지.

그동안 건네준 혈액이 병사의 전신을 순조롭게 일깨웠다. 부족했던 산소와 영양을 공급했다. 죽어가던 육신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병사의 족소음신경 또한 반응했다.

건네준 마나가 용천혈을 거쳐 발바닥 안쪽 면의 연곡혈(然谷穴)을 두드렸다. 아킬레스건 주위의 태계혈(太谿穴)과 대종혈(大鐘穴)을 간질였다. 종아리를 타고 올라갔다. 무릎 뒤편 오목한 자리의 음곡혈(陰谷穴)을 때리고, 아랫배의 횡골혈(橫骨穴)과 대혁혈(大赫穴)을 어루만졌다.

그 뒤로도 마나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배꼽 어름의 황수혈(肓兪穴)을 지나, 윗배와 명치의 음도(陰都), 복통곡(腹痛谷), 유문혈(幽門穴)을 상쾌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앞가슴의 신봉혈(神封穴)과 영허혈(靈墟穴)을 통과했다. 앞가슴 위쪽의 신장혈(神藏穴)을 통해 가슴 안쪽 깊은 곳을 두드렸다.

지쳐가던 심장이 그 자극에 호응하였다.

두쿵!

수혈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병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반격의 서막을 알리듯 심방과 심실을 쥐어짰다.

모처럼의 강력한 혈류가 심장을 떠나 대동맥을 일깨웠다. 경동맥을 내달렸다. 새로운 혈액의 흐름이 목줄기를 타고 대뇌에 이르렀다. 전신의 활력을 되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병사의 창백하던 안색에 홍조가 떠올랐다. 숨소리가 안정되었다. 차가워졌던 손발이 따뜻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의 긴급수혈을 받은 환자 : 랭스가 출혈성 쇼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활용한 새로운 개념의 수혈법을 창안하였습니다. 다만, 이는 오직 당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혈법이며, 따라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귓가에 울리는 상큼한 알림음. 덕분에 라키엘은 확신했다.

'됐다!'

살렸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단다.

뒤늦은 안도감이 들었다. 병사의 용천혈에서 손을 떼었다. 한데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안심을 해서일까. 혹은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하느라 마나써클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일까. 그도 아니면 피를 제법 많이 흘려서일까.

"...어."

별안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확 노랗게 물들었다.

다리가 풀렸을까. 세상이 낮아졌다. 궁둥짝에 둔한 충격도 느껴졌다.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데미안. 무어라 다급하게 소리치는 가르딘 경의 모습도 보였다. 비로소 라키엘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하. 또 무리했네.'

아직 약골인 주제에. 병약의 극치를 달리는 시한부 환자 주제에. 그런 주제도 모르고서 설치고 말았다. 덕분에 이렇게 혼절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사람 하나 살렸으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겠다. 라키엘은 흐뭇한 마음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눈을 감았다. 귓가에 흐릿한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당신은 자신의 혈액을 소모하여 타인을 살리는 극한의 이타적 행위를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당신의 치료를 통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려던 사람이 회생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아스라한 심법과 써클 슬롯의 존재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성스러운 기적'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명성이 한없이 드높아집니다....]

'하. 명성....'

그거 좋지.

그 생각을 끝으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완벽한 기절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라. 그것도, 왕국군의 일개 부상병 캠프에서?"

어둑한 실내. 호화로운 내부를 밝히는 촛불 하나.

앙부아즈 반란군의 수장, 쟈빌론은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는 촛불 너머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굽어보았다. 왕국군의 동향을 보고하러 온 정보참모였다.

"그렇습니다, 주군."

참모가 고개를 조아렸다.

"소식에 의하면 군의관 하나가 몸을 어루만지는 행위만으로 죽어가던 병사의 생명을 살렸다고 합니다."

"어루만졌다고? 병사의 몸을?"

"예, 주군."

"도구를 사용하진 않았고?"

"맨손이었노라 들었습니다."

"흐음. 과장된 소문은 아닐까."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근거는?"

"왕국군에 심어둔 첩자가 직접 그 모습을 목격하여 보고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쟈빌론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관심이 배어났다.

'흐음.'

단지 어루만지는 손길만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존재라. 확실히 성자라 불릴 수 있을 듯했다. 그 능력에 흥미가 생겨났다. 그 상징성에는 더더욱 큰 욕심이 배어났다.

'만약, 그런 자가 내 휘하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생각해 보니 더욱 탐이 났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야 그렇다 치고. 그런 성자가 나를 따르게 되면? 공개적으로 내 휘하에 합세하게 된다면? 왕국의 수많은 이들이 나와 내 군대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겠지. 성자가 따르는 군대라고. 성자가 지지하는 군주라고. 그것만으로도 이번 내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임이야.'

그의 계산이 깊어졌다.

부족한 정통성. 그것이 자신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다. 반란군의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한데 만약, 성자라고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의 신하가 된다면? 반군에 합류한다면?

그 상징성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꽈악.

계산을 마친 쟈빌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신이 들었다.

"하면 이렇게 해보도록 할까."

그가 정보참모를 굽어보며 말했다.

"왕국군에 심어둔 첩자를 통하여 그 성자라는 인물과 접촉하도록."

"예? 접촉을... 말입니까?"

"그래. 끌어들여야지. 내 휘하로. 그 어떤 값비싼 조건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명을 내리는 반란군 수장 쟈빌론. 그의 눈동자에 탐나는 인재를 향한 짙은 갈망의 빛이 서렸다.

121화. 세상에 착한 성자는 없다 (1)

"그 어떤 값비싼 조건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반란군 수장, 쟈빌론은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인재를 향한 갈망의 빛이 서렸다. 그것은 기회의 창을 엿본 전략가의 눈빛이기도 했다.

'손길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성자라.'

사실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그 소문이 온전한 진실일 거라는 생각 또한 전혀 들지 않았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의술이 뛰어나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손길만으로 사람을 살렸다는 말은 명백한 과장일 것이다. 그런 동화 같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분명 행운이든 우연이든, 혹은 속임수이든, 뭔가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성자에 대해 생각하는 인식이지.'

과장된 허풍이라도 상관없다. 설령 속임수라 하여도 괜찮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 성자를 지극히 존경하며 우러러본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하니 그자를 내 휘하에 두어야 할 것이야.'

그것만 성공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쟈빌론은 확신을 되새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 번에 뒤엎을 기회였다.

'국왕 메로뱅거. 그자를 이대로 왕위에 앉혀둘 수는 없음이야. 그 늙은 여우의 딸인 아델린 또한 마찬가지. 마젠타노 제국과의 사소한 마찰이 생기자마자 냉큼 고개부터 숙이고는 왕족을 볼모로 보내는 그따위 나약한 핏줄이 이 위대한 왕국과 민족을 이끌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앙부아즈는 결코 나약하지 않다. 우리 앙부안 민족은 훨씬 위대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지닌 저력을 제대로 떨치지 못하고 있음은 모두가 저 나약한 핏줄이 왕권을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것들.

왕국과 민족의 수치.

저것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리하여야 왕국과 민족이 더욱 번영하며 그 역량과 자격에 걸맞은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천세, 만세를 누리며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임을 대대손손 증명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 초석을 놓아야 한다.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한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왕국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훨씬 맹렬했다. 권좌에 기생하는 낡은 귀족 세력의 반발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이쪽의 명분이 빈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까드득!

생각에 잠겨 있던 쟈빌론의 잇새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낱 반란을 꿈꾸는 인간이 아니야. 이 왕국과 민족을 더욱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두기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한데 저 멍청한 인간들은 그 진실을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저 눈앞의 작은 이득과 권리, 안정만을 꾀하고 있지.'

참으로 열등한 것들.

근시안적인 족속들.

낡은 구태의 한심한 것들을 떠올리자니 답답해졌다. 세상이 자신의 이상을, 순수한 열망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더욱 큰 명분이 필요했다. 혹은 민중을 끌어들일 상징이 필요했다. 바로, 저런 성자와도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토록 우러름과 존경을 두루 받는 자가 내 휘하에 들어온다면... 공개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전황은 반드시 바뀔 것이야.'

확신이 들었다.

무식한 민중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될 것이다. 비로소 자신이 품은 원대한 이상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마침내 열광할 것이다. 앞다투어 혁명군에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낡은 귀족들의 태도도 바뀌리라. 그들은 이득에 민감한 족속이니까. 이쪽이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는 것을 보는 순간, 이쪽이 대세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꺼이 깃발을 바꾸어 이쪽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 반드시 뒤엎을 수 있어.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야.'

왕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위대한 민족의 원래 지위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천세 만세.

영원히.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

'설령 내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혹은 그 성자에게 왕위를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굳이 자신이 권력을 쥐지 않아도 좋다.

이 왕국과 민족을 강성하게 키워줄 자라면, 설령 상대가 악마라 한들 기꺼이 권좌를 넘길 수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전에서 승리하고 싶었다. 자격 없는 나약한 것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 왕국과 민족에게 번영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싶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그자를 끌어들이도록 하라."

정보 참모를 바라보는 쟈빌론. 그의 두 눈이 숭고한 애국적 열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래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대우를 몽땅 보장할 테니, 반란군에 가담해 달라는 거지?"

"그렇소."

"허. 참."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 방금 먹은 수프가 트림으로도 나오지 않은 시점. 자신의 단독숙소 천막으로 돌아온 라키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이게 뭔 일이람.'

황당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낸 터였다. 온종일 부상병들을 돌보고, 파견 온 군의관들에게 자운고 제조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드코어한 하루를 보낸 뒤의 피로를 풀어야 할 시간이었다.

한데 이런 난데없는 반란군 첩자의 노골적인 방문이라니. 심지어 첩자의 정체가 파견 온 군의관 중의 하나였다니. 라키엘은 살짝 가늘어진 가자미눈으로 첩자를 샐쭉하게 쳐다보았다.

"이봐?"

"듣고 있소."

"혹시 저녁 식사 메뉴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오."

"그럼, 챙겨 먹어야 할 약을 안 먹었어? 아님 안 먹어야 할 약을 먹었다거나?"

"그것도 물론 아니외다."

"그럼 방금 했던 엄청난 말은 뭐야?"

확인차 물었다.

군의관, 아니, 첩자가 빼지도 않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오. 엄연한 정식 제의외다. 왕국군은 썩었소. 이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소. 그러니 우리에게 동참하시오. 내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시오. 그러면 최고의 명예와 영광이 주어질 것이외다. 물론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놀라고 당혹스럽겠지만, 이건 엄연히 우리 주군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일이오."

"주군? 쟈빌론?"

"그렇소."

"...너무 대놓고 노골적인데. 내가 지금 여기에 반란군의 첩자가 있다고 외치면 어쩌려고?"

"상관없소."

"어째서?"

"당신이 외치면 내겐 두 가지 길이 남을 거요. 하나는 당신을 인질로 삼아 탈출을 시도하는 것. 하지만 그건 선택할 수 없소. 내 주군께서 당신을 최고의 귀빈으로 예우하라 특별히 명하셨으니까. 그러니 내겐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을 것이오."

"그게 뭔데?"

"순순히 체포되는 것이오."

"그럼 잡혀가서 처형당할 텐데?"

"상관없소."

"허."

라키엘은 혀를 내둘렀다. 대꾸하는 투로 보아서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첩자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첩자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처형당하더라도 다른 이가 임무를 이어받을 테고, 다시 당신에게 접근하여 조건을 제시할 것이오. 당신을 휘하에 두고 싶다는 내 주군의 열망이 식을 때까지 말이오."

"너무 질척거리는 거 아닌가."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외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듣고 있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반란군, 아니, 자칭 혁명군에 가담하란다. 혁명군의 수장 쟈빌론의 휘하에 들어오란다. 그럼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단다. 듣자마자 평소에 달팽이관 청소를 덜 해뒀나 싶은 생각이 드는 제안이었다.

'쯧. 내 명성이 너무 높아져 버린 탓이겠지.'

문득 며칠 전, 이쪽에게 반발하던 샹드르 군의관이 일으켰던 사건이 떠올랐다. 수술 후 회복 중인 병사에게 제멋대로 사혈 요법을 썼던 사건이었다.

덕분에 난리가 났더랬다. 간신히 병사를 살렸다. 샹드르는 영창 신세가 되었고, 자신은 성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손만 대면 사람을 살린다는, 다소 부담스럽고 거창한 소문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그 소문 탓이겠지. 그래서 반란군 수장이 이쪽에게 군침을 흘리게 된 것이겠지.

'흐음.'

원인을 추론하니 냉철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 앞의 황당함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덕분에 머릿속 계산기가 촥촥 돌아갔다.

예상되는 이득과 손해. 파생될 상황들. 적절한 출구전략까지. 그 끝에 방긋 웃는 결론은....

'...꼼꼼히 따져 보니까 이거, 나쁜 제안은 아닌데?'

아니, 좋은 제안이었다.

따져 볼수록 더더욱 그랬다.

일단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아니, 활용하기에 따라서 도움이 될 가능성이 느껴졌다. 개이득의 향연이 펼쳐질 각 또한 살포시 보였다.

라키엘은 첩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계산이 끝났다. 그러니 이제는? 확인의 시간이다.

"그럼 말이야. 내가 반란군에 가담하면 뭘 보장할 수 있는데?"

"...뭐요?"

"나한테 실제로 뭘 해줄 수 있느냐고."

"어, 그건...."

"방금 나한테 그랬잖아. 가담하라며. 휘하에 들어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며. 그런데 왜 구체적인 조건을 말하지 않느냔 거지. 영업 몰라? 이 사람 이거, 기본이 안 돼 있네."

"...."

뭘까.

지금 성자 군의관 이 사람, 뭐라는 거지?

첩자는 혼란에 휩싸였다. 솔직히 그는 오늘, 죽을 각오를 한 터였다. 상대는 성자라 불리는 군의관이었다. 그런 명망 높은 인물이 단 한 번의 제의로 깃발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그저 버려지는 패겠지. 자신을 통해 성자 군의관의 반응을 떠보려는 것이 주군의 의도겠지. 그 반응을 살펴보며 성자 군의관을 실제로 끌어들일 진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즉, 이제 곧 성자 군의관이 첩자가 있다며 외칠 거라고, 자신은 왕국군에 체포될 거라고, 처형당하게 되리라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만 여겼더랬다. 한데... 성자 군의관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황스러웠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구체적인 조건 등의 대답은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아니, 아예 전달받은 사항 자체가 없는데. 그냥 최고의 대우와 명예를 보장한다는 말만 하면 된다고, 그 이상은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들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라키엘의 전격적인 급발진 덕분이었다. 첩자는 대혼돈의 뇌정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동안 라키엘의 뻔뻔한 말이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졸졸졸 이어졌다.

"하아. 영업을 하려면 말이야, 어? 이렇게 빈손으로 오는 건 좀 아니지, 이 사람아. 내가 영업 한두 번 받아본 줄 알아? 과일 바구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하다못해 박카ㅅ... 아니, 시원한 음료라도 좀 가지고 오든가. 어?"

"...."

"그리고 말이야. 기왕 말을 꺼냈으면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면 안 되지. 어필하고 싶은 장점 없어?"

"장점, 말이오?"

"어. 말해봐."

"그, 그래도 되오?"

"그쪽이 먼저 제안을 꺼냈잖아?"

"하지만 나는 그저 명령을 받은 첩자일 뿐이라서...."

"아 그러니까 조건 좀 들어보자고.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어?"

"...."

성자 군의관 이 사람, 미쳤나 봐.

첩자는 조금 무서워졌다.

122화. 세상에 착한 성자는 없다 (2)

성자 군의관 이 사람, 미쳤나 봐.

첩자는 조금 무서워졌다. 하지만 라키엘의 급발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봐요. 생각 좀 해보자고. 응? 그쪽이 나한테 제의를 했어. 깃발을 바꾸래. 이거, 그냥 쉽게 꺼낸 말은 아닐 거 아냐. 맞지?"

"그, 그렇긴 하오만...."

"근데 이거, 따지고 보면 나한테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결정인 거다? 안 그렇겠어? 지금까지 한편 먹고 있던 쪽을 배신하고 그쪽에 붙으라는 거잖아. 그럼 나한테도 적지 않은 리스크가 있는 건데. 인생 갈아 넣는 결정일 수도 있는 건데. 안 그래?"

"물론, 어, 맞소."

"그렇지?"

"그렇소."

"그런데 왜 조건이 구체적이지가 못해?"

"...."

"이쪽이 리스크를 짊어지고 결정을 내리려면 어떤 결정이 나한테 유리할지, 뭐가 더 이득이 될지, 행여나 잘못된 결정으로 인생 난이도가 하드코어한 시궁창에 처박히는 건 아닐지, 똑 부러지게 계산할 명확한 근거나 자료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

"그래야 비교를 하지. 안 그래? 그쪽, 시장에서 물건 살 때 비교 안 해?"

"무, 물론 하오."

"그렇지? 하다못해 빵집에서 똑같은 종류의 크림빵 하나를 사더라도 어느 놈이 더 큰지를 열심히 관찰한 뒤에 고르잖아. 왜 그러겠어? 기왕 같은 값이면 한 입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그런데 지금 그쪽, 나한테 동네 시장 빵집보다도 못한 짓을 하면서 깃발을 바꾸라는 제의를 꺼낸 거야? 응?"

"그게...."

"그게 뭐."

"시, 실로 미안하오."

"미안하면 인생 끝나나?"

"아니오."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준비...해 오겠소."

"쓰읍."

"...."

첩자가 목을 움츠렸다.

라키엘이 깐깐한 눈빛을 번득였다.

"또 그런다. 또. 앞뒤 생각 안 하고 그냥 준비해 오겠다고 하면 되겠어?"

"그, 그럼 뭘...."

"뭘 준비해 올지를 구체적으로 말해 봐. 지금."

"지금... 말이오? 아니, 말입니까?"

"당연하지."

털푸덕.

라키엘은 아예 침상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턱을 살포시 치켜들며 첩자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브리핑 한번 해보라는 눈빛이었다.

너무나도 뻔뻔하도록 당당한 기색. 첩자는 그 기세에 휘말렸다. 떠듬떠듬,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듯 브리핑(?)을 시작했다.

"어, 우선... 말씀하신 대로 혁명군에 가담하실 때 제공받게 되실 금전적 보상을 정확하게, 실제적인 금액 단위로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물론 이 금전적 부분은 지급될 저택과 토지, 각종 귀중품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금액이 될 것입니다."

첩자는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며 멘트를 마쳤다. 내심 자화자찬했다. 됐다고. 이 정도면 말 별로 안 더듬었다고. 괜찮았다고.

하지만 그의 자부심(?)은 라키엘의 미간 가득 생겨난 주름에 짜부라지고 말았다.

"쓰읍. 이 사람 이거."

"...."

"이봐. 내가 단순히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 보여? 겨우 그 정도에 유혹을 느끼고 흔들릴 인간으로 보였어?"

"그건 물론...."

"어. 정답."

"...."

"시작부터 숨기거나 빼지 않고 돈부터 얘기하는 태도가 매우 좋아. 계속해 봐."

"그 외에 혁명군 내에서 받게 될 작위와 명예, 실질적인 대우에 대한 부분도 확실하게 조사해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전 대책은?"

"무, 물론 준비하겠습니다. 호위와 보안, 곁에서 모시게 될 시종 등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걸로 끝?"

"...예?"

또, 남았나?

첩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라키엘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말려 올라갔다.

"방금까지 말한 모든 조건이 그쪽네 최고 결정권자의 승인을 받은 사항이라는 인증."

"...아."

"그거 없이 그냥 제시하는 조건이면 보지도 않고 빠꾸시킬 거야.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하자. 응?"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가서 일 보고."

"...."

저 성자 군의관, 이제는 무섭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첩자는 뇌세포가 삐걱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반응은, 이런 전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일단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살았으니까.

안 죽어도 될 거 같으니까.

"그, 그럼 이만...."

첩자는 재빨리 라키엘의 천막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라키엘은 두 사람을 불렀다. 가르딘 경과 데미안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나, 반란군에 가담할까 싶은데."

"...."

가르딘 경과 데미안이 멈칫했다.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아, 전하께서 요즘 많이 피곤하셨구나. 너무 일만 하고 쉬질 못하니까 이러시는 거구나. 괜찮아. 살다가 너무 힘들면 잠깐 정신이 홰까닥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러니까 번아웃이라는 말도 있는 거고.

둘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라키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내 정신이 잠깐 가출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심인데."

"...."

"진짜라니까."

"...."

"좀 믿어 주면 안 돼?"

"예."

먼저 대꾸한 이는 데미안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키엘의 눈을 푹 찔렀다.

"아직도 농담처럼 들리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진담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말리고 싶습니다만."

"어째서?"

"도의상 옳지 못하니까요."

"도의상?"

"예."

데미안의 말이 이어졌다.

"전하께서는 앙부아즈의 내전 소식을 듣고서는 안타까움을 느끼셨습니다. 앙부아즈를 선의로 돕겠다는 일념을 품고서 여기까지 건너와 왕국군의 부상병들을 돌보셨습니다. 한데 이제 와서 갑자기 반란군에 가담하시겠다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응."

"...."

"반란군 병사들은 앙부아즈의 백성 아닌가?"

"하지만...."

"그리고 내가 앙부아즈 왕국에 충성하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야 물론...."

"그렇지. 내가 누군데.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앙부아즈 왕국군에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나? 없지. 나한테는 왕국군이나 반란군이나 똑같이 외국의 세력일 뿐인데."

"그렇지만...."

"저쪽, 반란군에도 수많은 부상병들이 있어. 아마 방치되고 있겠지. 우리가 처음 여기 왔던 때의 이곳에서처럼."

"...."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믿기지가 않았다.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씩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여길 봐. 우리 힐링캠프. 요즘은 잠잠하지? 새 부상병이 거의 실려 오지 않고 있잖아. 최근 왕국군과 반란군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으니까. 발루아 요새 앞에서 대치만 이어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캠프는? 전에 받았던 부상병들만 남았지. 그런데 대부분이 위험한 시기를 넘겼어. 안정적인 회복기에 들어섰어."

"설마 그래서...."

"어. 아무래도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대강 마친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젠 저쪽에서 방치되고 있을 부상병들만 치료해 주고, 돌아가려고."

"마젠타노의 별궁으로 말입니까?"

"응."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즘 들어 마젠타노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방금 데미안에게 했던 말처럼, 새로 실려 오는 부상병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철 장사의 끝물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더 남아있어 봤자 먹을(?) 게 별로 없을 듯한 느낌이 수시로 들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 와서 얻을 건 다 얻었지. 보너스 수명도 왕창 챙겼고. 내손약손 스킬도 생겼고. HP도 쌓았어. 그러니 이젠 슬슬 별궁으로 돌아갈 시기를 잡을 때가 됐고.'

생각해보면 별궁 한의원을 비운 지도 꽤 되었다. 아직까지는 웨어울프 간호사들의 유능함 덕분에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겠지만, 여기서 더 오래 비우면 문제가 생길 터다. 평생 사골육수처럼 든든하게 우려먹어야 할 별궁 한의원이다. 문제가 생기면 곤란했다.

'그런데... 한철 장사가 끝나려나 싶은 순간에 마지막으로 단타를 털어먹을 건수가 보였단 말이지!'

그게 바로 반란군의 영입 제의였다. 제의를 듣자마자 직감했다. 아, 이건 내 앞에 보너스 수명 정찬으로 차려졌던 앙부아즈 내전의 디저트(?) 밥상이구나. 이걸 안 받는 건 예의가 아니지, 라고.

그래서였다.

눈 딱 감고 반란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딱 한 달, 아니, 하다못해 보름 정도만이라도. 그 정도만 반란군에 몸을 담으며 그동안 방치되고 있었을 부상병들을 치료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마지막 디저트 밥상의 국물과 양념까지 싹싹.'

핥아 먹고 별궁으로 돌아가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물론 그런 속내를 밝히진 않았다. 어차피 보너스 수명에 대해서는 모르는 두 사람이니까.

그래서였을까. 곁에서 묵묵히 있던 가르딘 경이 갑자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신의 눈가를 콕콕 야물딱지게 찍더니 코를 흥 풀었다.

"...전하, 저는 감동했습니다."

"가르딘 경은 또 왜."

"치료받을 환자는 아군도, 적군도 아니라는 그 마음가짐... 저도 되새기며 배우겠습니다!"

"...어, 그래."

그런 오해라면 땡큐고. 라키엘은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우린 저쪽으로 간다. 며칠 안 걸릴 거야. 그렇게 알아 둬."

데미안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딘 경은 더욱 열심히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이적(?) 준비를 했다. 매일 밤 첩자와 만났다. 영입 조건을 조율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왕녀 아델린에게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 자신이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난 듯하다고. 이제는 슬슬 황도 마젠타의 별궁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새하얀 편지지 가득 새빨간 거짓말을 술술술 담았다.

그리고 추신으로 덧붙였다.

힐링캠프 창고에 특별히 제작해둔 초거대 사이즈의 오크통이 있다고. 그 안에 술과 베스파로스 여왕벌의 사체가 담겨 있다고. 그걸 황도 마젠타로 배송해 달라고. 그 정도 배려를 해 준다면, 자신이 이곳에 와서 받아갈 보답으로 충분할 거라고. 고마워하겠노라고.

'...이로써 힘들게 담가 둔 여왕벌술도 챙길 수 있을 거고.'

츄릅.

라키엘은 입맛을 다시며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그렇게 힐링캠프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다음 날 새벽, 캠프의 군의관들에게 남기는 당부 편지를 천막 침상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가르딘 경, 데미안과 함께 몰래 캠프를 떠났다. 캠프 외곽지에서 반란군의 첩자와 접선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길 안내를 하겠습니다."

첩자를 따라 이동했다.

자유 상단으로 위장했다. 수레를 타고서 사흘쯤 움직였다. 곳곳에 깔린 왕국군과 반란군의 대치 장소를 빙빙 둘러 이동했다.

산 넘고 물 건너.

평원을 지나.

발루아 요새가 보이는 산자락에 이르렀다. 그곳에 반란군의 주력이 집결해 있었다. 일행은 곧바로 반란군 주둔지의 중심으로 안내받았다.

"이쪽입니다."

사령부에서 나온 고급 장교가 이쪽을 맞이했다. 장교를 따라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마음의 준비는 해 두긴 했는데. 그래도 긴장되네.'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정체가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황궁의 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변장 마법은 강력하니까. 게다가 자신이 이곳에서 해코지를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소설 마검황에서 그랬거든. 쟈빌론. 앙부아즈의 부흥에 미친 열광적 애국주의자. 그만큼 인재에 대한 욕심이 엄청났지.'

능력이 있는 자라면 신분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대우했다.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존중했다. 그야말로 부국강병에 있어서만큼은 편견(?)이 없는 자였다.

그러니 무려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겠지.

"...."

이제부터 그런 어마어마한 인물을 만나러 간다.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마치 면접시험을 보러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사령부의 중심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기다랗게 뻗은 장막의 끄트머리. 그곳에 군림하듯, 도사리듯 앉은 사내가 보였다.

190센티는 가볍게 넘을 커다란 키. 그에 어울리는 장대한 체격. 의외로 정중한 얼굴. 소설의 삽화로 수차례 보았던 모습. 반란군의 수장,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였다.

"...."

역시 사람을 그림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건 엄청나게 다르다. 그 대상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마주하자마자 압도감이 느껴졌다.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듯한 묘한 느낌. 얼굴을 한 꺼풀 벗기면 천사와 악마의 얼굴이 반반씩 드러날 것 같은 기묘한 인상.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쟈빌론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움찔. 절로 어깨가 흠칫했다. 동시에 그가 벌떡 일어섰다.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벅저벅. 거침없이. 서슴없이.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서.

두 손을 뻗어왔다.

이쪽의 어깨를 짚었다.

턱.

"반갑소. 그리고 고맙소, 성자라 불리는 군의관이여."

"...."

어깨를 지그시 붙잡고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길. 그 눈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를 못하겠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마냥 그러한 압박감에 짓눌려 있지만은 않았다. 지나친 압박감에 멘탈이 찌그러지려는 찰나, 그는 자신이 마주했던 일평생 최대치의 압박감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내가 양화대교에 빠지던 날 낮에, 한의원 빌딩 복도에서 마주쳤던 건물주 아저씨.'

그날, 건물주와 마주쳤을 때. 임대료 때문에. 그놈의 돈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

그때에 비하면 쟈빌론이 주는 압박감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압도되던 기분이 날아갔다. 부담감이 사라졌다.

덕분에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여유롭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혁명군의 심장이시여."

...좋아.

자연스럽게 잘 대답했어.

그러니까 이제 딱 한 달만. 그동안만 열심히 부상병들 치료하면서 보너스 수명 팍팍 챙기고 황도 별궁으로 빤쓰런하자. 돌아가자마자 변장 마법부터 풀자. 그러면 성자 군의관이고 뭐고 찾을 수도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일 테니까. 뒤탈도 전혀 안 남겠지.

생각하자니 흐뭇해졌다. 든든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여전히 이쪽을 내려다보며, 쟈빌론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좋소. 다행이오, 그대가 기꺼이 내 뜻에 동참해 주어서. 그러니 이제부터 성자 군의관, 그대는 일개 병사들의 피나 만지는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오."

"...예?"

그게, 무슨 소리?

순간 쌔한 예감이 들었다. 쟈빌론의 미소가 훈훈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대에게 더욱 중요하고 고귀한 일을 맡길 생각이오. 바로, 그대와 같이 고귀한 이가 내 혁명의 정신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만방에 외쳐 주는 것이외다."

"...."

"자, 그렇듯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오."

"...."

"어떻소? 좋지 않소?"

"...."

좋지 않느냐고?

아니, ㅈ된 거 같은데.

123화. 적과의 동고동락 (1)

"이젠 어떡하실 겁니까?"

숙소로 안내받아 들어오자마자 질책하듯 귓가를 푹 찔러오는 데미안의 목소리. 달팽이관이 아플 지경이었다. 안다. 이쪽도 안다. 지금 상황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걸.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ㅈ됐다는 걸.

하지만 라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안내받은 숙소 실내를 죽 둘러보았다. 애초에 약속했던 예우답게 야전 천막치고도 굉장히 넓고 화려했다. 다만, 보안이 철저하다고는 못하겠다.

'쉿.'

입술을 모으며 검지를 갖다 댔다.

그런 이쪽의 모습에 데미안이 움찔.

마침 야전용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와 잉크, 펜이 보였다. 데미안 녀석과 가르딘 경을 번갈아 보며 필기구를 가리켰다.

'누가 우리 이야기를 엿들을지도 모르니까. 필담으로.'

끄덕.

이쪽의 뜻을 알아들은 걸까. 두 사람이 옹기종기 이쪽으로 모였다.

라키엘은 펜을 잡았다.

- 하. 나도 몰랐거든. 내가 성자 군의관으로 소문이 났으니까. 지난번 수혈 때문에 사람한테 손만 대면 아픈 곳을 팍팍 낫게 해준다고 명성이 자자해졌으니까. 그래서 반란군도 내 치료 능력을 탐내는 거라고 생각해서 온 건데. 어오. 씨.

거기까지 쓰고서 펜을 놓았다.

가르딘 경이 펜을 이어받았다.

- 하지만 전하. 보셨다시피 여기서는 전하께 부상병을 맡길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큰일입니다. 여기에도 전하의 보살핌을 기다리고 있을 부상병이 제법 있을 텐데요.

데미안도 재빨리 펜을 잡았다.

-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무리한 시도를 하기보다는 그냥 황도의 별궁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말입니다.

- 쓰읍. 이럴 줄 알았냐, 내가.

라키엘은 혀를 찼다.

그의 펜이 종이 위를 빠르게 누볐다.

- 아니 설마 저 인간이 날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쓸 거란 생각을 내가 했겠냐고. 나도 억울하거든? 여기 부상병들 치료하면서 보너... 보람 좀 느끼려고 한 거거든?

사실이다.

정말로 솔직한 진심이다.

그냥 여기 와서도 왕국군의 힐링 캠프에서와 비슷한 일상을 보낼 줄 알았다. 그저 가득 쌓인 부상병들을 치료하며 보너스 수명이나 싹쓸이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반란군 수장 쟈빌론, 그 인간이 진짜.'

이쪽의 혁명군 지지 선언이 필요하단다. 날짜와 장소를 정해 줄 테니 지시에 따라서 열변을 토해 주면 된단다. 그러니 이제 죽어가는 병사들의 썩은 살점을 헤집거나 핏물을 흠뻑 덮어쓰는 험한 일 따위는 안 해도 될 거란다.

마치 이쪽을 배려하듯.

그게 최상의 예우인 것처럼.

그렇듯 정중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양새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얼얼해서 담이 걸렸나 싶을 지경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황급히 대꾸, 아니, 항의를 했더랬다.

- 그래서 나도 그거 싫다고 했거든. 부상병들 돌보는 일은 하나도 안 힘들다고. 험하지도 않다고. 오히려 나는 그게 보람이 느껴진다고. 그러니까 정치적 선언 같은 거 말고 부상병들을 맡겨달라고. 나는 그걸 하러 온 거라고 말이다.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쟈빌론의 폭탄선언을 듣자마자였다. 찍 눌러진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반사적으로 저런 항의를 했다. 아예 호소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는 부상병들이 너무 좋다고. 하루라도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아날 지경이라고.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못 이룬다고.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부상병들을 몇 수레씩 싣고 오면 진심 행복해질 것 같다고. 맡겨만 달라고.

호소했다.

강력히 어필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쟈빌론은 그저 이쪽을 보며 빙긋,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정중한 거절의 멘트를 톡 발사했다.

'성자라 불리는 군의관, 리한이여. 그대의 뜻은 알겠소. 그 숭고한 마음도 잘 알겠소. 하지만 무릇 사람의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외다.'

'...때라니요?'

'할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 말이오. 예를 들자면....'

'설마.'

'내 뜻을 알아채셨소? 눈치가 빨라서 좋구려.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하여 더욱 좋고 말이오.'

'그러니까, 정치적인 지지 선언은 지금만 할 수 있지만, 부상병을 돌보는 일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인 겁니까?'

'정확하오.'

여전히 정중하게 웃던 쟈빌론. 하지만 웃음과 별개로 그의 태도는 단호박 그 자체였다. 이쪽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단다. 지금은 공개적인 정치적 지지 선언이 최우선이란다.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키엘은 펜을 열심히 움직였다.

- 어쨌건 이젠 인정해야겠네. 여기선 텄다, 텄어.

각이 안 보였다.

부상병을 맡겨달라고 어필하기엔 쟈빌론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다. 여기서 더 어깃장을 부리다간 쓸데없는 의심만 잔뜩 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 손절하자.

"...."

이쪽이 쓴 글귀에 데미안과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은 재빨리 덧붙여 썼다.

- 이미 여기선 뭔가를 좋게 추진해 볼 가능성이 안 보이니까. 최대한 일찍 끊어내고 튀자고. 황도로.

- 동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쪽의 펜을 빼앗듯 낚아챈 데미안이 의문을 써 내려갔다.

- 어떻게 도망칠 생각입니까? 오면서 보니 이곳의 방비는 결코 허술하지 않던데 말입니다. 아니, 가장 어두운 밤의 시간을 빌려도 몰래 탈출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어. 그건 나도 알아.

이곳은 엄연한 반란군의 야전 사령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지휘관들이 즐비하게 머무르는 중심부였다.

숨이 막힐 정도의 철통 보안과 방비는 기본이었다. 단지 초병이 많이 깔린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경계 병력의 동선과 시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거의 길목마다 CCTV가 20개쯤 깔린 듯한 경계 태세였다. 게다가 마법적 감지 장치와 함정도 제법 즐비해 보였다.

이걸 몰래 뚫고 나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데미안이 소드마스터가 되지 않는 한은 꿈도 못 꾼다.

하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 나한테 생각이 있어.

- 방법이 있습니까?

- 어.

이쪽을 골똘히 쳐다보는 데미안.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징징거려 봐야지.

"...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 시점에서 보이는 최선을 수행하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였다. 라키엘의 징징거리기(?)가 실행되었다.

"...크으, 쿨룩! 쿨룩! 컥!"

"왜 그러시오, 리한?"

"죄, 죄송하지만... 콜록! 쿠억, 켈록!"

반란군으로 깃발을 바꾸고 맞이한 첫 아침. 라키엘은 쟈빌론을 만나자마자 죽어가는 사람처럼 격한 기침을 연발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열심히 돌려서 이마와 얼굴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얼굴 곳곳에 열꽃이 피어났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쟈빌론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저, 정말... 콜록! 쿠흡! 죄송... 합니, 쿨러으억!"

힘껏 연기했다.

기침을 하면서는 일부러 입도 크게 확 벌렸다. 덕분에 밤새도록 열심히, 반복적으로 침을 바르며 바싹 말려 둔(?) 입술이 쫙 갈라졌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더욱 적절하게도 피까지 살포시 나와서 흘러주었다.

"케엑, 쿨룩! 콜록!"

"...리한 군의관."

"예, 쿨룩! 컥! 실로 죄송하지만, 제가 당분간 요양을 좀 하여야...."

"꾀병은 안 통하오."

"...."

"혹시 이제 와서 병을 핑계로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려는 것이오?"

"...어, 그것까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그냥 오늘 일을 하기가 좀 싫어서... 어제저녁에 여기 도착한 터라 실제로도 아직 피로감이 상당히 남았기도 하고...."

"그럼 오늘은 쉬시오. 내일 봅시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쟈빌론이 빙긋 웃었다. 마치 이쪽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시킬 일이 없소. 다만 열흘 뒤까지 그런 태도면 곤란해질 것이외다."

"열흘 뒤라 하심은?"

"그날, 발루아 요새가 보이는 평원에서 그대에게 지지 선언을 부탁할 테니까."

"...."

"부디 그날은 몸 상태가 좋기를 바라오."

쟈빌론은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불굴의 한국인이었다. 한 번 튕겼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열렬히 퇴사를 희망하는 소망을 담아, 다음 날에도 새로운 시도를 추진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이 밝자마자 쟈빌론을 찾아갔다. 이번엔 전날처럼 과장된 기침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대신 매우 진지하고도 진중한, 한편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한껏 내걸었다.

"실은 제게 연로한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쟈빌론의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그 뒤로 준비한 대사를 발사했다. 아니, 발사하려는 순간이었다. 쟈빌론이 반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설마 어머니께서 매우 거동이 불편하시고, 불치의 병에 걸리셔서 돌보아 드려야 하는데, 이럴 때 곁을 지켜드리지 못하는 것이 매우 마음에 걸리고,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이제 그만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요?"

"...."

정답.

라키엘은 마네킹처럼 쩌저적 굳어 버렸다. 쟈빌론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거짓인 걸 알고 있소. 물러가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또 실패.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그의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쟈빌론 각하. 사실 제겐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여자친구? 애인 말이오?"

"예."

"없어 보이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 강조하니까 진짜로 더 없어 보이는데."

"...."

"설마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겨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러 다녀오고 싶다... 뭐, 그런 거요?"

"맞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시겠군."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고개를 끄덕인 것 같지?"

"...."

"리한 군의관."

"예, 각하."

"그대의 마음은 알고 있소."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는 쟈빌론의 눈초리. 그 눈길 앞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 뻔했다.

쟈빌론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 밝혔던 대로 부상병을 보살피고 싶겠지. 그렇게 본분을 다하고 싶겠지. 이해하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맡길 수 없음 또한 이해해 주시오."

"...어째서입니까."

"지금은 그대가 노출되면 곤란하니까."

"설마."

"또 이쪽의 뜻을 알아채셨군.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아."

쟈빌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향해 물었다.

"7일 후에 제가 해 드려야 할 정치적 지지 선언. 그 전에 존재가 노출되면 지지 선언의 효력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정확히 맞히셨소."

쟈빌론의 미소가 더욱 만족스러워졌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의 지지 선언은 혁명군에게 있어 반전의 계기가 될 거요. 역전의 발판이 될 거요. 그만큼 충격적이어야 하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던 일이어야 하오. 그렇기에 지지 선언을 하기 전에 그대의 혁명군 가담 사실이 미리 외부에 퍼지면 곤란해지오. 충격이 줄어드니까."

"...."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나름 스포(?)를 방지하겠다는 거겠지.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어째서 지금 당장 지지 선언을 시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때라니요?"

"리한, 그대가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마음을 품는 때 말이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예상 못 했던 대답이었다. 쟈빌론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대의 지지 선언에 아주 조금이라도, 진심이 배어나면 좋겠소. 아니, 꼭 그래야 하오."

"어째서입니까."

"그리하여야 비로소 민중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을 테니까. 모두의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 낼 정도로 감동을 안길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앙부아즈를 위대한 왕국으로 거듭나게 할 혁명의 초석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

"그저 시키니까 하는 지지 선언? 할 수는 있겠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오. 그렇게 해서는 감동을 줄 수가 없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소. 아니, 단순한 표면적 지지 선언만 필요했다면 나는 진즉 다른 수를 썼을 거요."

"어떤... 수단 말입니까?"

"약물이나 마법으로 그대를 세뇌했겠지."

"...."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없소. 단기적으로 민중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지지 선언이 진실되지 않았다는 티가 금방 날 거요. 세뇌란 그런 거니까. 결국엔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뒷말이 나오고, 뒤탈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엔 혁명군의 가치와 정신을 부정당하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소."

"그럼...."

"그래서외다. 나는 열흘의 시간 동안 그대가 혁명군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내 이상과 목표에 조금이라도 공감해주길 바랐소. 지지 선언에 그러한 진심이 조금이라도 들어갔으면 하고 바랐소. 한데 지금 보니 그러했던 내 생각과 바람이 조금은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후회가 드오."

"후회, 말입니까."

"으음."

쟈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불길하다.

쌔하다.

그런데 어째서 쌔한 예감은 항상 그림처럼 딱 들어맞는 걸까.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쟈빌론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특유의 사람을 빤히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하여 좋은 대안이 떠올랐소. 리한 군의관?"

"예."

"내 주치의가 되어 주시오."

"예에?"

"그냥 숙소에만 머물러서는, 이렇듯 아침에 잠깐씩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내 이상과 목표를 제대로 느끼고 공감할 겨를이 없겠지. 그러니 앞으로 내 주치의가 되어, 24시간 내 곁에 머물러 주시오."

"...."

"어떻소?"

...어떻긴 x발놈아.

라키엘은 울고 싶어졌다.

124화. 적과의 동고동락 (2)

"...헉! 허억!"

한 남자가 호화로운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두 손 가득 서류철을 들고서,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다. 그의 표정에는 낭패의 감정만이 가득했다. 지각이다. 평범한 지각도 아니다. 남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존재를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

대륙 최강국의 지배자가 지각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아니, 도사리고 있을 터다. 그 생각에 남자의 다리가 잠시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응원하고 있을 토끼 같은 자식들과 불곰 같은 마누라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더욱 열심히 서둘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황궁 가장 깊은 곳. 황제의 쉼터였다.

"...늦었군."

나름 열심히 옷매무새를 고르며 들어서는데 곧바로 날아오는 한마디. 황제의 묵직한 목소리. 남자는 재차 다리가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아니,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보고를 위해 정시에 움직이려 하였으나, 때마침 추가로 들어온 정보가 있었기에 내용을 취합 및 정리하느라 죽을죄를 저질렀사옵니다."

"추가로 들어온 정보라."

"황태자 전하에 대한 내용이옵니다."

"고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남자, 제국의 정보사령 장관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황태자 라키엘을 살포시 원망해 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라키엘이 앙부아즈로 떠난 뒤부터였다. 그는 거의 매일 황제에게 들들 볶여야 했다. 황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태자의 동향을 물었다.

황태자가 앙부아즈에 잘 도착하였느냐, 도착한 황태자는 누구를 만났느냐, 그 아이가 오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아침은 잘 먹었느냐, 밤에 뒤척이진 않느냐, 환절기에 기침을 하진 않았느냐, 등등.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었다. 이제는 '황'자 소리만 들어도 밤에 자다가 경기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자신은 정보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였고, 상대는 고용주(?)이셨다. 까라면 까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매일,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마다 황제의 면전에서 황태자의 동향 보고를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제107차 정기보고를 드리옵나이다. 우선, 닷새 전에 황태자 전하가 앙부아즈 왕국군의 부상병 캠프, 일명 '힐링캠프'를 떠났사옵니다."

"힐링캠프를 떠났다고? 그 녀석이?"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찌하여?"

"저희도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는 황태자 전하의 목적을 짐작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하여 추가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에 시일이 걸렸던바, 마침내 내린 결론은...."

"결론은?"

"전하가 곧, 황도 마젠타로 귀환할 듯하옵니다."

"그래?"

황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그의 솔직한(?) 상체는 어느새 살짝 앞으로 기울여져 있었다.

정보사령 장관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렇사옵니다. 힐링캠프에 심어 둔 특급 정보원들의 보고에 따르자면, 지금으로부터 이레 전의 시점에 황태자 전하가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고 하였사옵니다. 그것이 전하의 귀환을 추측하는 근거이옵니다."

"전서구가 근거라. 어떠한 경위로?"

"전서구를 입수하였사옵니다. 티가 전혀 나지 않을 방법으로 전서구의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밀봉을 하여 원래의 목적지로 날려 보냈사옵니다."

"그래,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보내는 서신이었는가."

"앙부아즈 왕녀에게 보내는 작별의 서신이었사옵니다."

"작별?"

"그러하옵니다, 폐하."

"보다 자세히."

"예, 폐하. 전하가 앙부아즈 왕녀에게 당부하길, 이제 자신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난 듯하며, 따라서 별궁 한의원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노라 하였사옵니다. 거기에 아울러, 대형 오크통에 담가둔 베스파로스 여왕벌술을 별궁으로 꼭 배송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어 있었사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예, 폐하. 금일의 보고는 여기까지이옵니다."

"그렇군. 물러가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보고를 마친 정보사령 장관이 물러났다. 어느새 홀로 남은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 방금 들은 보고 내용을 떠올리며 근엄하게 턱을 괴었다.

그리고 슬며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웃어도 되겠다.

"...흐흠, 흐흠흠."

무성한 수염 속에서 어느새 하늘로 승천하는 그의 입꼬리!

'이제 매일 걱정에 휩싸여 잠을 뒤척이는 나날도 안녕이로구나.'

황제는 진심으로 기뻤다. 아들이 온단다. 전쟁터로 떠났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단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옷이 주렁주렁한 장식으로 거추장스럽지만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은 그동안 너무나 걱정이 되었던 터였다. 보낼 때는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 그저 첫째가 귀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한데 막상 보내 놓으니 뜻밖의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잠깐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첫째가 사고를 당하는 등등의 흉흉한 꿈이었다.

불안했다.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첫째가 온단다.

가슴이 벅찼다. 입꼬리가 주책스럽게 계속 말려 올라갔다.

"흐흠, 흠흠흠."

하지만 지금은 웃자. 녀석이 돌아오면 지금처럼 기쁜 티를 내진 못할 터이니. 녀석을 위해서라도 엄한 얼굴을 유지하여야 할 터이니. 지금 이렇게라도 미리, 몰래, 많이 기뻐해 두어야겠다.

'그러니 하루바삐 돌아오너라. 이 아비에게 무사한 모습을 보여 주거라. 어서.'

권좌에 도사린 황제의 근엄한 어깨가 두근두근 설렘의 바이브를 싣고서 남몰래 들썩거렸다.

"흐흐, 후흐흐."

아침이 밝아왔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사골육수처럼 짙은 현자 타임을 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 내가 어쩌다가 반란군 수장 놈의 주치의가 되어 버렸나, 라고.

'인생 진짜.'

사람 일 모른다더니.

살다살다 졸지에 적이라 여겼던 자의 주치의가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른 아침부터 방긋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 인간을 깨워야 하는 순간이 올 줄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려면 해야지.

"에휴. 내 팔자야."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이제 일어나셨소?"

바로 옆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언제 다가온 걸까. 기척 같은 것도 없었는데.

"...뜨릡!"

너무나 놀란 까닭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런 후에야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내가 주치의를 놀래켜드렸군."

"...."

반란군 수장, 쟈빌론이었다. 그가 특유의 서늘하고도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어땠소?"

"예에?"

"잠자리 말이오. 불편하진 않았소?"

"...예? 아, 조금."

"조금?"

"괜찮았습니다?"

"다행이군."

피식, 그가 또 웃었다.

"그대는 나와 다르군. 나는 잠자리가 바뀌면 영 뒤척이는 편이라서."

"그, 그렇습니까?"

"으음. 하여 걱정이었소. 모처럼 제공한 새 숙소의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하여서."

"...."

대놓고 이렇게 마음 써주는 걸 고맙다고 여겨야 하나. 그런데 쟈빌론이라는 이 인간, 항상 정중하게 웃는 듯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아니다. 잘 보면 눈빛만은 언제나 시릴 정도로 형형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무런 웃음기도 없이. 그 어떤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는 늑대처럼.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아침 진찰을 하겠습니다."

라키엘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마른침을 얼른 붙잡았다. 잠깐 둘 사이에 깔리려던 어색함을 황급히 걷어내듯, 주치의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데 쟈빌론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그대는 그럴 필요 없소."

"예에?"

"진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오."

"하지만...."

"나는 소드마스터요. 그 사실은 그대도 익히 알고 있겠지."

"예."

"그래서외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오. 가장 미약하고 사소한 마나의 흐름에서부터 근육과 혈관 사이의 순환, 균형, 조화까지. 끝없는 마나의 순환을 이루어낸 자의 특권이랄까."

"그, 그렇습니까."

"그렇지."

"한데 그럼 어째서 저를 주치의로 삼으신 건지."

"궁금하오?"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당번병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상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한데 식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의 앞에는 냉수 한 잔만이 놓였다. 반대로 이쪽의 앞에는 빵 두 덩이와 달걀 프라이 접시가 놓였다.

쟈빌론이 자신의 냉수를 집었다. 마치 건배를 하듯, 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대에게 어제 이르지 않았소. 내 곁에 24시간 머무르라고. 내 이상과 목적,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보고, 느끼라고 말이오."

그러고는 벌컥.

한 모금 냉수로 식사를 마쳤다. 이내 턱짓으로 이쪽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켰다.

"드시오. 기다려 줄 터이니."

"아, 예...."

부담스럽다.

미치도록 부담스럽다.

자신은 정작 냉수 한 컵 원샷으로 아침 식사를 넘겨놓고선. 이쪽이 빵이며 달걀 프라이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니. 노골적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이었다. 체할 것 같았다.

'이거 좀, 비매너 아닌가?'

하지만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의 소굴이고, 그는 소드마스터다. 마검황의 주인공인 데미안조차도 제법 성장하기 전에는 이자와의 정면 대결에서 버티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이자의 비위를 함부로 거슬렀다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생존을 위한 진심(?)을 담아 포크를 들었다. 보란 듯이 일부러 더욱 복스럽게 빵과 달걀 프라이를 뜯어먹었다. 시선도 접시와 음식에만 고정시켰다. 괜히 먹다가 저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간 진짜로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움, 쩝쩝, 쯔접접. 빵이 굉장히, 쩝쩝, 달달하군요."

"...."

"후루룩, 와구와구. 달걀도 제법 든든하고 말입니다."

"...."

"벌컥벌컥, 크야아. 물도 이렇게 상큼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달달하고, 든든하고, 상큼할 수밖에. 바로 어젯밤 인근의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워서 가져온 재료로 만든 음식이니 말이오."

"...푸읍!"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쟈빌론의 상의까지 물이 튀어 버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쟈빌론의 안색은 태연했다. 그가 말했다.

"놀랄 것 없소.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소. 주제도 모르고서 왕국군에 몰래 물자를 대던 농장이오. 응징의 차원에서 모든 가축을 도살하고 곡식을 징발했지. 농가와 창고는 모두 불태웠고."

"그, 그럼 사람은...."

"궁금하시오?"

"...."

내가 마른침을 삼키지 않았기를. 목울대가 출렁이지 않았기를 빈다.

쟈빌론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농장주 말이오? 산 채로 태웠소. 위대해질 왕국과 민족의 미래를 거역하고 낡은 구태의 찌꺼기에 들러붙은 자에게 어울리는 초라한 비명과 함께였지."

"...."

"왜 그러오? 입맛이 달아나셨소?"

물론이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먹고 있던 빵과 달걀에 어제 산 채로 타죽은 농장주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의 것을 게워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쟈빌론은 이쪽에게 역겨워할 틈도 주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여졌다. 탁자를 넘어 이쪽을 지그시,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피할 수가 없다.

그가 말했다.

"리한 군의관?"

"예."

"식사를 이어갈 생각이 없다면,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실 수 있겠소?"

"어떤 질문입니까."

"간단한 질문이오."

"...."

어, 이거.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인데.

이쪽을 향해 한쪽 입꼬리만 슬며시 말아 올리는 쟈빌론.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문득 생각했다. 이거 익숙한 장면이라고. 낯설지가 않다고. 어째서? 어디에서 봤지?

답은 곧 떠올랐다.

'소설 마검황.'

그걸 떠올리는 순간.

쟈빌론의 입이 열렸다.

"내 하나 물으리다. 만약 리한 군의관이 말이오. 조국과 민족을 더욱 위대하게 부흥시키기 위해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

이 질문, 소설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 가지 선택은 군의관 본인이 어떤 형태로든 희생하는 길이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희생이 아닐 거요. 거룩한 희생 또한 아닐 것이오.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요. 본인뿐만이 아닌, 가족마저도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거요. 심지어 대대손손 후세의 모욕과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요. 영원히."

"...."

"다른 선택은 남을 희생시키는 길이오. 대략 수만 명 이상을 생매장하듯 학살하는 길이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추궁이나 죗값은 지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니, 오히려 과감한 결단을 내린 영웅으로 대대손손 존경을 받게 될 거요. 이 또한 영원히."

"...."

"둘 모두, 실행하기만 하면 조국과 민족을 번영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오."

"...."

"하면 리한 군의관? 그대는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소?"

어느새 쟈빌론의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골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를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있었다. 쟈빌론의 물음에 대한 답을 궁리하느라고? 물론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저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으니까.'

문득, 소설 속의 내용이 떠올랐다. 소설에서 몇 번인가, 쟈빌론이 저 질문을 입에 담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질문은, 일종의 사람을 평가하는 쟈빌론만의 은밀한 잣대였다.

'쟈빌론. 그는 의심이 많았어. 측근이라도 쉽게 믿지 않았어.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두어야 할 사람을 발견했을 때, 반드시 저 질문을 던졌지.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하려고.'

하지만 그에게 정답을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 쟈빌론 본인조차도 정답이 무엇인지 몰랐다. 스스로도 평생 정답을 찾아 고민하고 방황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답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을 향한 허탈한 냉소를 머금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나는 저 질문의 대답을 안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아직도 고민 중이시오?"

"...."

귓가에 들려오는 쟈빌론의 목소리.

어느샌가 이쪽을 보는 그의 시선이 가느다랗게 변해 있었다. 위험한 징후다. 저 눈빛의 뜻 또한 나는 안다.

'그는 자신이 한 질문의 정답을 몰랐지만, 적어도 최악의 오답은 알고 있었지.'

그건 바로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는 것이었다. 측근으로 두리라 마음먹었던 상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 그는 지극히 냉혹하게 돌변했다.

즉, 현장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

그 모습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정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찾지 못한 채 갈구하던 정답을 들었을 때 쟈빌론이 보일 반응이 기대되기도 했다.

물론, 정답을 말했을 때 이쪽이 해를 입을 확률이 제로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

"설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오?"

한결, 더욱 가늘어지는 쟈빌론의 눈매. 가느다랗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엇비치는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득이려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라키엘은 망설임을 던졌다.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오욕을 덮어쓰거나, 수많은 타인을 학살하여 명예를 챙기거나,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만 거룩해지는 나라 말입니까?"

"그렇소."

쟈빌론이 입술만으로 웃었다. 그의 눈가에 기대감이 서렸다. 그 눈을 마주 보며, 라키엘은 소설 속에 나왔던 저 질문의 정답을 입에 담았다.

토씨 하나 거르지 않고서.

날것 그대로.

"x랄. 그게 나랍니까?"

125화. 적과의 동고동락 (3)

"x랄. 그게 나랍니까?"

"...."

라키엘의 짓씹는 듯한 말이 콕 튀어나왔다. 토씨 하나 거르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대답이 쟈빌론의 고막을 쿡 찔렀다. 심장도 찔렀다.

쟈빌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동공이 대경악의 팝핀을 추었다.

'...어?'

이상했다.

성자라 불리는 리한 군의관.

그의 대답이 심하게 이상했다. 예상치 못했던 종류의 엉뚱한 답변이었다. 자신이 내민 선택지에 있지도 않은 엇나간 답변이었다. 심지어 굉장히 무례하고 상스러워서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답변이었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대꾸의 반향이 자꾸만 남아 가슴 안쪽을 두드려 왔다. 메아리치듯이. 거듭하여. 호흡을 지배했다.

'왜지?'

화가 나야 하는데 나질 않는다. 자신이 이런 무례한 언사를 면전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던가. 최소한 10년 안에는 없다. 그러니 당장 저 무례를 응징해야 할 터다. 입을 찢어 놓든가, 사지를 수레바퀴에 묶어 꺾어 놓든가,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임이 옳을 터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쿵쿵, 더욱 날뛰었다. 마치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맸던 이상형을 만난 기분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묘한 확신이 다가왔다. 이 무례한 대답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정답이라는 기묘한 확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밀어낼 수 없을 진실.

'그게... 나라냐고....'

곱씹을수록 가슴이 꽉 죄어 왔다. 호흡이 불편해졌다. 자신이 그동안 뭔가를 잘못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라는 기묘한 불쾌감이 뒷골을 간질여 왔다.

혁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낡은 구태의 것들을 쓸어내는 새 역사는.

오직 피로써만 써 내려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유혈을 통한 희생이 있어야만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도 믿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기존의 낡은 체계가 너무나 견고하기에, 깨부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이룩하고 맞이할 새로운 질서의 왕국이... 나라겠냐고?'

굳이, 반드시, 꼭.

피를 흘려야만 하는 걸까? 세상은 그렇게만 바뀔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저 말이 맞는 건지. 자신의 내면에서 피어난 의구심이 맞는 건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마음속의 또 다른 자신이 속삭이는 듯했다. 네가 잘못 생각하며 살아온 거라고. 세상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고. 그걸 굳이 이분법으로만 나누며 그 안에 갇히는 건 멍청이나 벌이는 짓이라고.

"...."

어느새 쟈빌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니, 살벌하게 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라키엘의 목울대도 꿀꺽, 출렁거렸다.

'이거, 분위기 장난 아닌데.'

그는 은근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라 쟈빌론의 기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당장에라도 이쪽을 한 대 칠 것만 같았다. 혹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실은 그럴 법도 했다.

'혼란스럽겠지.'

소설 마검황에서의 쟈빌론이 떠올랐다. 그는 아까 질문의 답을 평생 갈구하며 찾아 헤맸다. 끝끝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스스로 인정할 만한 자기 나름의 정답을 떠올리며 허탈감 속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 정답을 지금, 멀쩡한 상태에서, 남의 입을 통해 들어 버렸다. 그 정신적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아마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과연 쟈빌론의 이쪽을 보는 눈초리는 혼란에 휩싸인 기색이 역력했다.

"...그 대답, 진심이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렇군. 그래."

쟈빌론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피식. 이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물러가시오."

"예?"

"가급적 내 눈에 보이지 말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가능하면 도망치고 싶던 참이었다. 라키엘은 쟈빌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빛의 속도로 물러났다. 온종일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리고 종종 귀를 쫑긋 세웠다. 쟈빌론의 거처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였다.

의외로 쟈빌론은 종일 조용했다.

다만 딱 한 번,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뒤로 나직하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워낙 희미한 소리라서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게 다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였다.

쟈빌론이 이쪽을 부른 것은 다음 날 하고도 무려 정오가 지난 무렵이었다.

"...나는 그대의 대답을 인정하지 못하겠소."

얼굴을 보자마자 쟈빌론이 대뜸 꺼낸 이야기였다. 그의 모습은 하루 만에 엉망이 되어 있...진 않았다. 여전히 말끔했다. 머리칼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옷매무새도 가히 결벽증 환자의 것처럼 주름 하나 찾기 어려웠다.

다만 어제와 달라진 곳이 두 군데가 보였다.

'눈빛이....'

많이 흐려졌다.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원래는 희었을 붕대가 검붉게 물들어 말라붙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젯밤에 얼핏 들었던 소리가 떠올랐다. 뭔가가 깨지던 소리. 그 뒤로 나직하고 희미하게 흘러오던 흐느낌.

"...."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쟈빌론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부터 줄곧 생각을 해보았소. 그대가 내뱉었던 그 무례하고도 오만방자했던 대답을 말이오. 그 끝에 결론을 내렸소."

"인정을 못 하겠다는 결론 말입니까?"

"그렇소."

쟈빌론이 다소 지나치게 격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생에 의해 흐르는 피는 고귀하오. 희생은 그 자체로 고결하오. 그것이 스스로 원한 희생이든, 역사의 흐름이 요구하는 강요에 따라 강제로 치르게 된 희생이든 상관없소. 그 모든 희생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소. 아니, 존중받아야 하오. 숭배되어야 하오."

"그렇습니까."

"당연하오. 그것이 오직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리니까.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더욱 영광된 반석의 길로 올려 둘 정당성의 밑거름이 될 테니까. 그렇게 흘린 피의 무게만큼 우리의 혁명은 더욱 숭고해질 터이니까."

"...."

궤변이다.

지금 쟈빌론은 자신이 일으킨 반란을 정당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더욱 애석한 점은, 이미 스스로도 그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아 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렇듯 더더욱 애써 열변을 토하는 거겠지.

'일종의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네.'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닌, 남의 입을 통해 들어 버린 일생의 정답. 그걸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수긍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거쳐야 할까.

아마도 고난의 행군이 되겠지.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을 주는 놈도 아니었다. 오히려 저렇듯 정신적 혼란에 빠져들어 주면 더욱 좋았다. 빈틈이 생기면 즉시 황도로 도망칠 거니까. 차라리 잘됐다.

"그런데 손은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라키엘은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열변을 토하던 쟈빌론이 오른손을 흠칫 움츠렸다.

"...후, 훈련 중에 사소한 실수가 있었을 뿐이오."

그가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보았다.

실수라니.

소드마스터가? 실수로 손을 다쳤다고? 그걸 누가 믿을까. 쟈빌론 본인도 스스로 얼결에 꺼낸 대답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여겼는지, 어느새 얼굴이 살짝 벌게져 있었다.

라키엘은 빙긋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가까스로 삼켰다.

"그럼 제가 상처를 살펴보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소."

"제가 주치의인데도 말입니까?"

"실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상처니 그냥 두어도 나을 거요. 괜한 수고는 낭비일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이러려면 뭐하자고 주치의로 눌러 앉힌 건지. 물론 그의 목적이야 뻔하다. 이쪽이 자신의 사상에 조금이라도 감화되어 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그래서 며칠 뒤의 지지 선언 연설에 이쪽의 진심이 깃들어 주길 바라는 거겠지.

그때부터였다.

과연 쟈빌론은 치료도 맡기지 않으면서 이쪽을 24시간 곁에 두었다. 그것은 기묘한 동고동락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살벌한 시중들기였다. 얼마나 살벌하냐면, 차라리 3일쯤 굶은 흑표범을 룸메이트로 두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거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시종일관 정중하지만... 사람을 죽일 때도 똑같이 정중한 놈이니까.'

언제 돌변해서 똘끼(?)를 드러낼까 겁났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꿈에도 몰랐다. 지난 사흘 사이, 자신을 보는 쟈빌론의 시선이 어떻게 서서히 바뀌었는지를.

'세상에 이런 자가 존재하였다니....'

아침이었다.

앙부아즈의 반란군 사령관, 쟈빌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키엘을 보았다. 자신과 마주 앉아 눈치를 살피듯 깔짝대며 식사를 하는 라키엘의 모습이 신기했다. 보면 볼수록 더욱 확신이 들었다.

'리한 군의관, 이자는 승냥이가 아니야.'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자신의 곁에 득시글거리는, 권력을 갈망하며 모여든 그 어떤 수하들과도 닮지 않았다. 기묘했다. 편안했다. 대할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풀어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껏 마음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는데. 경계심을 풀어 본 적이 없었는데. 성자라 불리는 이 군의관과 함께 지내면서부터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숙면을 이룰 수 있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저자가 말한 대답이... 정말로 내가 평생 찾고자 갈망하였던 그 대답이었던 걸까.'

거듭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미칠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저자의 연약한 목을 비틀어 부러뜨려 버리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저자와 더욱 친밀해지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갈망 또한 피어났다.

계속해서 곁에 두는 측근?

혹은 오른팔처럼 부리는 심복?

아니었다.

계급과 군신 관계를 떠난 친구로 삼고 싶었다. 술잔을 나누며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에게 시원하게 욕도 하고, 진심으로 응원을 건네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평생 가져 보지 못한 그런 존재로 삼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한 군의관. 나는 말이오, 실은 화가가 되고 싶었소."

"...예?"

수프를 떠먹던 라키엘의 스푼이 멈칫. 쟈빌론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정말이오.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거든."

"그림... 말입니까?"

"으음. 이래 봬도 지금도 제법 그리는 편이오."

"...."

"이상하오?"

"아닙니다. 다만-"

"다만?"

쟈빌론이 물었다.

라키엘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좋아하는 일이 그림이었는데, 어쩌다가 검을 쥐고 소드마스터까지 오는 길을 걷게 되셨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학대당해서였지."

"학대라시면...."

"아버지에게. 매일 밤 채찍질을 당해야 했소.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지. 반드시 화가가 되겠다고 울부짖었지. 하지만 통하지 않았소. 아버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쟈빌론의 눈빛이 깊어졌다. 눈동자는 이쪽을 향해 있되, 실제로 바라보는 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인 거겠지.

"하여 열두 살 때였나. 아버지와 내기를 하였소. 예술학교의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내 뜻을 관철하기로. 탈락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검을 쥐기로."

"...떨어지셨군요."

"아니. 합격했소."

"그런데 왜?"

"아버지가 합격을 취소시켰소. 나 몰래 지위를 남용해서. 예술학교의 학장을 압박했지."

"...."

"그래서 입학이 영원히 취소되었소. 그리고 열흘 뒤엔 아버지가 죽었고."

"설마."

"또 눈치채셨소?"

"...."

이런 눈치, 채기 싫은데. 라키엘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물었다.

"죽인 겁니까?"

"글쎄. 상상에 맡기겠소."

쟈빌론이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서 안타깝게 느껴졌냐고? 전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요즘 이 인간 이거, 왜 이렇게 친한 척을 하냐.'

라키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얼른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데미안, 가르딘 경과 별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빈틈을 만들고자 일부러 쟈빌론의 멘탈을 망가뜨리려 했다. 그가 평생 찾아 헤맨 정답을 핵폭탄 떨어뜨리듯 말해 버렸다.

그런데 그 이후로 쟈빌론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자꾸 친한 척을 한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이쪽과 친구라도 먹고 싶은 건가 싶은 태도를 보였다. 물어보지도 않은 자기 어린 시절 추억 등등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래서... 심히 부담스러웠다!

'쯧. 이러면 나가린데.'

탈주각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각이 보이기는커녕, 관심도 없는 쟈빌론의 과거사만 매일 들어주는 처지가 되었다. 미대 입시 떨어져서 자살했다는 2차대전 콧수염 살인마스러운 불우한 어린 시절을 성심껏 청취해 주는 팔자가 되고 말았다.

'쓰읍. 방법이 없을까.'

라키엘은 내심 초조함을 느꼈다. 한데 그때였다.

"...역시. 그대는 내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나 보군."

"예?"

깜짝이야.

라키엘은 뜨끔했다. 하지만 이쪽의 변명보다 쟈빌론의 반응이 먼저 날아왔다.

"하긴. 이해하오. 누가 남의 불우한 어린 시절 따위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일까."

"아니, 저는...."

"됐소."

"...."

설마, 삐친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쟈빌론이 이쪽으로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흠칫하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상처를 좀 보아 주시오."

"예에?"

"아무래도 덧나려는 듯해서 말이오."

"...."

아침밥 먹던 사람한테 상처를 대쯤 내보이는 저놈이나. 그걸 봐주는 이쪽이나.

라키엘은 수프에 찍어 먹으려던 빵조각을 내려놓았다. 쟈빌론이 내민 오른손을 살폈다. 제법 찢어진 손바닥의 상처가 살짝 곪아 있었다.

'봉와직염 생기려는 삘인데.'

일단 진맥부터 해볼까.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 마검황의 중반까지 절대적 포스를 뿜어냈던 중간보스 캐릭터 쟈빌론. 그의 신체 상태를 살펴볼 기회였다.

"그럼, 진찰을 좀 해보겠습니다."

다행히 쟈빌론은 이제 이쪽의 진맥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맥을 짚었다.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진맥이 완료되었다.

라키엘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종합검진표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떠야 했다.

'...어?'

눈앞에 펼쳐진 쟈빌론의 종합검진표. 그걸 보며 그는 서서히 깨달았다.

소설에도 안 나왔던 쟈빌론의 은밀한, 비밀스러운 체질적 특성을 지금, 자신이 발견한 것 같다고.

바로, 쟈빌론의 작고도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126화. 전문가의 손길 (1)

딩동!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동시에 떠오르는 종합검진표.

'어...?'

그것은 문득 든 호기심에 진맥을 해본 쟈빌론의 종합검진표였다.

동시에, 소설 마검황에선 언급된 적이 없었던 쟈빌론의 사소하고도 비밀스러운 약점을 보여주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7세]

[신장 : 193.4 Cm]

[체중 : 91.9 Kg]

[혈액형 : Rh+ AB]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쟈빌론의 건장하기 짝이 없는 신체 스펙이었다. 심폐기능, 소화기 등등의 오장육부 점수도 만점에 가까웠다.

저런 피지컬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술과 마나 심법까지 갖췄을 테니, 가히 괴물이라 부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겉으로 드러난 쟈빌론의 화려한 스펙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더 아래쪽에 떠오른 '종합 소견'에 꽂히듯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 쟈빌론이 지닌 의외의 약점이 적혀 있는 까닭이었다.

[종합 소견 : 신체의 모든 부분이 지극히 조화롭고 건강합니다. 대사조절 기능, 면역력 등의 모든 항목에서 최적의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정서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적절한 휴식과 안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럼에도 계속하여 나쁜 예후가 이어질 시에는 과감한 퇴사를 권장합니다.]

"...."

그래.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에는 퇴사가 직빵이긴 하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

소설 마검황에서는 한 번도 언급이 없던 부분이었다. 천하의 군국주의자, 광신적 애국주의자 쟈빌론이 만성 편두통 환자였다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쟈빌론의 안색 또한 그랬다. 평온했다. 아니, 무표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진맥 스킬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스킬을 믿었다. 진맥 스킬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게다가 오장육부마저도 똑같은 진단을 내려주고 있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쟈빌론의 오장육부를 부러워...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심장 : 어이 주인? 지금 검진 대상 누구야? 심폐기능 쩌는데?]

[허파 : 허어... 파학....]

[대장 : 허파 형님이 저쪽 허파 폐활량 보다가 현타 왔지 말입니다.]

[간장 : 저쪽 간수치도 장난 아님ㅋ 와 나 보자마자 반할 뻔.]

[위장 : 그래도 저쪽 위장은 좀 불행하네ㅎ 맨날 시달리면서 사는구만.]

[간장 : 위? 튼튼해 보이는데?]

[위장 : 겉보기는 그렇지. 사실은 지금도 갈굼당하고 있거든. 대뇌한테. 신경성 편두통 때문이라나 뭐라나. 내가 저렇게 살았으면 하루 만에 탈주각 세웠을 듯ㅋㅋ]

"...."

라키엘은 오장육부의 진단 소견을 경청(?)했다. 위장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래. 편두통이 신경성 소화불량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지. 특히 위장에 부담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아.'

한국에서도 그런 케이스를 숱하게 보았다. 한의원에 찾아오던 환자들 중에도 무수히 많았다.

특히, 습관적 소화불량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맥해보면 신경성 편두통이 원인인 경우가 제법 되었다.

쟈빌론도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문득 확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저기, 혹시 말입니다. 머리가 아프진 않으십니까?"

"...."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쟈빌론. 눈매가 살짝 커져 있었다. 놀란 걸까, 혹은 빡친 걸까. 헷갈렸다.

그 꿰뚫을 듯한 눈빛을 마주하자니 잠깐 후회가 들었다. 괜히 물어봤나. 그냥 모른 척할 것을 그랬나.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쟈빌론의 한쪽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아프긴 아프지. 항상 아프오. 발루아 요새를 어떻게 깨뜨릴지 고민을 하며 지내느라."

"...."

그런 종류의 두통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말 돌리려고 애쓰는 거 같은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런 기분이 이쪽의 눈빛에도 실렸던 걸까.

이쪽을 보는 쟈빌론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커흠! 흠!"

"얼굴이 좀, 빨개지셨습니다?"

"흠흠! 그럴 리가."

"진짭니다."

"잠깐 기침이 나와서 그렇소. 목이 칼칼해져서."

"역시 환절기란 거겠지요?"

"물론이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셨는데."

"그대의 말처럼 역시 환절기라서. 올해는 환절기가 참 이상하오, 참."

"그렇지요. 환절기가 잘못했군요. 역시나 그런 거겠지요."

"...."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죠."

"...설마, 눈치를 챈 거요?"

"보시다시피 말입니다."

물론이다. 진맥 스킬은 장난이 아니니까. 나름 발뺌을 해 보려던 쟈빌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 참. 그대가 성자라 불리는 이유가 내내 궁금하였는데. 그 궁금증을 이런 방식으로 풀게 될 줄은 몰랐소. 그대가 내 아픈 곳을 단번에 짚어 낼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만성 두통에 시달리시는 게 맞군요."

"그렇소."

쟈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머리가 아프오. 항상 아프지. 편두통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맞춘 거요? 아무에게도 밝힌 적 없는 사실인데."

"그냥, 느껴졌습니다."

"그냥?"

"예."

"허허. 후우. 이건 추궁도 못 하겠군."

쟈빌론은 웃고 말았다.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온종일, 24시간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는 편두통이었다.

이제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진 고통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이걸 밝힌 적이 없었다. 자칫 적에게 약점으로 악용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그런 자신만의 비밀을 단 한 번의 진찰로 맞히다니.

'정말로 그냥 느꼈다는 건가.'

솔직히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넘겨짚은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성자 군의관의 눈을 빤히 마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자가 정말로 자신의 증상을 확인하고서 진단을 내린 것이구나, 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한 군의관, 그대의 진단이 맞소. 머리가 아프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오. 깨질 듯이 아프지. 숨만 쉬어도 송곳으로 머릿속을 쑤시고 휘젓는 것만 같소. 지금도 그러오. 이렇게, 머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대쪽 머리까지 소름이 돋도록 아프지."

톡톡, 그가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라키엘이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아팠던 겁니까?"

"나도 모르오."

쟈빌론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자조적으로 변했다.

"정말이오. 나도 모르오. 처음부터 계속 아팠으니까."

"설마, 아주 어릴 때부터 말입니까?"

"그렇소.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나는 아팠소. 덕분에 언제나 신경질을 부려야 했지. 그러다가 우연히 미술을 접하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 그래서였소.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하지만 그 꿈이 좌절되었다고...."

"맞소. 아버지에 의해서. 그 어떤 예술학교도 나를 받아주지 않게 되었지. 그렇게 강제로 붓을 꺾고 검을 잡아야 했소."

"그래도 두통은 계속 있었습니까."

"물론."

쟈빌론이 재차 피식 웃었다.

"어떤 짓을 해도 결국엔 이 통증을 떨쳐낼 수는 없었소. 그래서였지. 검에 미친 듯이 몰두한 것은. 한 가지를 깨달은 덕분이었달까."

"깨달았다니요?"

"검이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도구라는 걸 깨달았지."

"...설마."

"맞소. 문득 억울해지더군. 왜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지. 그래서였소. 내 고통을 없앨 수 없다면, 남도 똑같이 아프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고 말이오. 그러면 마음속의 억울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습니까?"

"별로."

쟈빌론이 쓰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치기에 그런 생각을 품긴 했었는데, 막상 강해지고 보니 딱히 그렇진 않더이다. 뭐, 어쨌건 그런 비틀린 치기와 독기로나마 남들보다 검에 미친 듯이 몰두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빠르게 지금의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점은 나쁘지 않았노라 말해 볼 수 있겠소."

"...."

중2병(?)을 악과 깡의 원동력으로 삼아 소드마스터가 된 남자라. 라키엘은 뭔가 엄청나다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더욱 궁금해졌다. 쟈빌론이 앓는 두통에 대한 이야기, 이런 자세한 개인사는 소설 마검황에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은 신기했다.

하여 물었다.

"그럼, 그림과 검술 같은 것들 말고 말입니다. 근본적인 두통 치료를 해 본 적은 없으신 겁니까?"

"왜 없었겠소."

쟈빌론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두통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 보았소. 약초부터 시작하여 독극물까지 마셔 보았소. 그 외에도 온갖 수면요법, 명상, 동방 대륙의 기이한 체조까지. 세상에 알려진 수단은 모조리 다 동원해 보았소. 그러나 결과는 보시다시피."

"모두 실패하셨군요."

"그렇소. 덤으로 허접한 약의 복용을 권유한 의사들의 목숨도 여럿 사라졌고."

"...."

꿀꺽,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쟈빌론이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는지 얼른 이쪽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날려 보냈다.

"아,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시오. 그대의 목은 몸통 위에 붙어 있을 때가 내게 훨씬 소중하니까."

"가,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을."

"...."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일까. 라키엘은 무의식중에 목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머릿속에서 뭔가 새로운 생각이 살랑살랑 싹을 틔우는 것을 느꼈다.

'이거, 뭔가....'

각이 보였다.

소설 마검황에서는 나오지도 않았던 쟈빌론의 심각한 만성 두통. 그 속에 얽힌 사연과 그만의 고충. 그걸 다 들은 덕분이었다.

쟈빌론의 두통을 이용해서 이곳을 탈출할 각이 보였다! 잘만 하면 황도의 별궁으로 안전하게 빤쓰런(?)을 감행할 수 있을 듯했다!

'...가능해. 된다. 성공 확률이 충분히 있어.'

라키엘의 대뇌피질이 쌩쌩 돌아갔다. 수많은 시나리오와 가능성을 검토했다. 간을 보고, 각을 가늠했다. 그런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건 된다고.

확실하다고.

해볼 만하다고.

"그럼 말입니다."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움츠러들었던 그의 목은 어느새 시원하게 펴져 있었다.

어깨도 당당하게 펼쳐졌다. 눈매는 확신의 도전적인 번득거림을 품었다.

"그 두통, 제가 없애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뭐요?"

이런 물음을 예상하진 못했던 걸까.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그대가? 내 두통을?"

"예."

"하지만 내가 말하였을 터인데. 어떤 약이나 요법으로도 내 두통을 지울 순 없었노라고."

"예. 분명히 들었습니다."

"한데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자신 있게 했던 의사들은 다 죽었는데."

"그럼 전 자신 없게 말하겠습니다. 일단 시도는 해 보고, 실패해도 절 죽이지는 말아 주시죠."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는 따위의 변명은 아니겠지?"

"죽기는 싫으니까요."

"...좋소."

쟈빌론이 피식 웃었다.

물론 성자 군의관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냥, 저렇게까지 말하니 허락이라도 해 주자 싶었다. 해서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조금도 기대되지 않으니까. 성공할 거란 생각은 들지도 않으니까.

'실패하면 무안하지 않도록 위로나 해 줘야겠군.'

쟈빌론은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앙부아즈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성자 군의관. 그만큼 자신의 의술에 자부심이 대단할 터다.

그러니 모든 의사가 고배를 마신 자신의 두통을 다스리겠노라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겠지.

그만큼 치료에 실패하면 자부심에 상처를 입을 터다. 실패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여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땐 위로를 해주자.

쟈빌론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라키엘이 시키는 대로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라키엘이 하는 치료를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약을 쓰지 않는 거요?"

"예."

"그럼 도구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라키엘이 대답하며 들어 올린 것은... 그냥 맨손이었다.

"...."

그걸 보자 더더욱 기대감이 수직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쟈빌론은 잠자코 있었다. 괜히 실망한 티를 내어서 상처를 줄까 봐서였다.

그사이, 라키엘의 손이 다가왔다. 정수리를 짚어왔다. 그때까진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설마 정수리를 마사지라도 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데 다음 순간.

쓰담쓰담?

그 손이 자신의 정수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무, 슨?'

쟈빌론은 당황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어째서 성자 군의관이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지. 왜 그 손길이 마치 강아지 머리 만지는 듯한 느낌인지. 이 상황 자체가 조금도 이해가 안 됐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쉿.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

대체 뭘까.

이따위로 두통을 치료한다고? 평생 나를 고통의 수레바퀴에 짓이겨 넣은 끔찍한 두통을 없애주겠다고? 겨우, 이따위 장난 같은 짓거리로?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쟈빌론은 저도 모르게 살의를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해진 눈으로 성자 군의관을 쳐다보았다. 벨까. 아니면 목을 부러뜨릴까. 어떻게 죽이지?

그의 머릿속을 살기가 가득 채우기 직전.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야아악소온↗ 에헤이야~"

라키엘이 괴상한(?) 노랫가락을 불러 젖히기 시작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 순간, 쟈빌론을 괴롭히던 극악의 두통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싹 날아갔다.

"...!"

엄마 뱃속을 벗어난 지 어언 37년.

처음으로 겪어보는 상콤함이 쟈빌론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127화. 전문가의 손길 (2)

'...어, 어머니!'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왕가의 방계 혈족으로 태어난 야심가. 평생을 악성 두통에 시달려온 광신적 애국자.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엄마 뱃속을 벗어난 지 어언 37년의 인생, 그동안 처음으로 맛보는 해방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머릿속부터 척추를 거쳐 꼬리뼈 끝자락까지 모든 신경이 활처럼 휘었다.

전신의 세포가 7옥타브 세레나데를 메들리로 불러제꼈다. 혈관 속에서는 적혈구와 백혈구가 손에 손잡고 탭댄스를 추었다.

한마디로... 상쾌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슨. 이게 무슨.'

쟈빌론은 부릅뜬 눈을 치켜들었다. 이쪽으로 손을 뻗고 있는 적발의 통통한 사내가 보였다.

성자 군의관이었다. 그가 괴상한 노래를 찰지게 부르며 이쪽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딱히 성스럽거나 성의 가득한 손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어설픈 손길이었다.

그냥 동네에서 마주친 똥개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은근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프지 않았다.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에서 천상의 상큼한 해방감이 대천사의 날갯짓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대체 이건... 어떻게... 한 거요?"

믿어지지가 않았다.

기쁨 속에서도 의구심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한데 이쪽의 떠듬떠듬거리는 물음을 받은 성자 군의관이 알 수 없을 미소를 지었다.

"쉿."

여유롭게 손가락을 세우는 몸짓. 그리고 다시 불러 젖히는 괴상한 노래. 이쪽의 머리를 쉴 새 없이 쓰다듬는 손길까지.

'아....'

이게 바로 전문가의 손길이구나. 쟈빌론은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러한 실감은 치료(?)가 끝난 후에도 여전했다.

"어떠십니까?"

"...."

"혹시 두통, 느껴지십니까?"

"...."

멍하니 성자 군의관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고개를 내저은 걸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성자 군의관이 보람찬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효과가 있었군요.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다행입니다."

"다행...."

"예. 어떻습니까, 언제나 느끼던 두통이 없어지신 기분은?"

"...모르겠소."

"예?"

"그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상하오.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또...."

"또?"

"...왜 눈물이 나지?"

주르륵.

쟈빌론의 눈가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볼을 가로질렀다. 입가를 지나 턱에 방울 맺혔다.

하지만 쟈빌론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멍하다가, 이내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엉덩이에 뿔이 나건 말건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좋소. 이런 기분은 처음이오. 무슨 이런... 하하, 하하하."

"잘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니, 축하는 됐소. 고맙소. 설마, 설마 그대가 정말로 내 두통을 없애는 데에 성공할 줄이야."

쟈빌론이 손을 뻗었다. 라키엘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솔직히 아직은 얼떨떨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기쁘고 행복했다.

라키엘이 대답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기엔 이릅니다. 아마 제가 해 드린 치료는 효력이 하루밖에 가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그게 지나면 효력이 없어진다고? 그러니까, 내가 다시 아파질 거라고?

"두통이 살아나게 될 거란 말이오? 내일이 되면?"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

"하지만 실망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어째서요?"

쟈빌론이 철렁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재촉하듯 물었다. 반대로 라키엘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내일 다시 치료를 받으면 되니까 말입니다."

"...아."

"그러니까 앞으론 이렇게 해보도록 하죠. 매일 아침마다 제 두통 치료로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전까진 두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거요?"

"물론이지요. 늦잠을 주무셔서 아침 치료를 빼먹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건 자신 있소. 나는 평생 늦잠을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예. 성실한 분이심은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허허. 후후후! 그렇지. 다행. 다행이야. 그렇고말고. 하하하. 하하핫!"

쟈빌론의 입에서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잠깐 철렁했던 가슴이 원위치(?)로 돌아왔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 성자 군의관의 말대로다. 하루에 한 번, 아침마다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면 아플 일이 없다.

"그럼, 내일도 잘 부탁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키엘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잔뜩 맺혔다. 단순히 치료에 성공을 해서? 물론 아니었다. 그가 기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날 신뢰해라. 내 치료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라!'

처음부터 이걸 노린 치료였다. 자신을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것. 더 나아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하는 것. 그렇게만 만들면?

'빤쓰런, 충분히 가능해질 거야.'

하루빨리 별궁 한의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설 마검황의 중반까지를 담당했던 최강 최악의 빌런인 쟈빌론과 졸지에 24시간 합숙 신세라니,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자면 안전하게 도망쳐야 한다.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라키엘은 매일 아침 분투(?)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온!"

"...후우."

"어떻습니까?"

"고맙소. 두통이 싹 가셨소."

약속대로 아침마다 내손 약손 스킬을 사용했다. 쟈빌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두통을 말끔하게 싹 날려 주었다.

그때마다 쟈빌론이 티나게 기뻐하며 순수하게 웃었다. 광적인 애국자, 그래서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자답지 않은, 찐텐 가득한 행복 미소였다.

사실 쟈빌론은 안도하고 있었다.

'과연. 성자 군의관의 말이 맞았구나.'

처음엔 조금 불안했다.

성자 군의관의 두통 치료가 두 번이나 먹힐까. 처음에만 좋았던 게 아닐까.

계속 치료를 받다 보면 몸이 적응하며, 약효가 떨어지듯 효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며 그러한 걱정마저 상큼하게 싹 날아갔다.

'...여전히 아프지 않아. 처음과 똑같다.'

아침 치료를 시작한 지 열흘째.

쟈빌론은 비로소 안도했다. 매일 치료를 받았음에도 치료의 효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과 똑같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효력이었다!

동시에 쟈빌론은 서서히 실감했다.

'나는 이제 성자 군의관의 치료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도 없겠구나.'

계속 아프게 지낼 때는 몰랐다.

태어나던 때부터 줄곧 아팠으니까.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저 참고, 인내하고, 잇몸이 뭉개지도록 이를 꽉 깨물며 참는 것이 다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사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까지 생각했더랬다.

한데 지금은?

달라졌다.

'이젠 예전으로 못 돌아가겠어.'

벌써 열흘째 지옥 같은 두통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 보였다. 한낱 길가에 떨어지는 낙엽의 색깔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이게 살아 있는 느낌이구나 싶었다. 전엔 어떻게 살았나 싶기도 했다. 한편으론 두려워졌다.

만약 성자 군의관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곁에서 떠나간다면? 그래서 다시는 그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

불가능하다.

쟈빌론은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그럴수록 라키엘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꿀이 떨어졌다. 라키엘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럽고 친절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그러한 쟈빌론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준비 완료.'

이제 모든 세팅(?)이 갖추어졌다. 그걸 확신한 라키엘은 탈출 작전의 다음 단계를 실행했다.

아침 치료가 끝난 직후, 입가에 침을 촵촵 발랐다. 그리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꺼냈다.

"저기, 오늘은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히? 어떤 이야기이기에?"

"오늘 밤에 말입니다. 제가 중요한 기도를 올려야 할 듯합니다."

"중요한 기도라니?"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당하다는 기색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좋아. 됐어. 통한다.'

라키엘은 자신감을 얻었다. 기만질의 혓바닥에 힘찬 풀악셀을 넣었다.

"사실은 제가 매일 아침에 해드리는 치료 때문입니다. 그걸 계속 이어가려면, 오늘 밤에 반드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자세히 말해 보시오."

"예.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제가 해드리는 치료는 공짜가 아닙니다. 제 능력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늘이 내려준 축복 덕분입니다."

"축복?"

"그렇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맑고 차가운 물, 정한수를 떠다 놓고 달을 향해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달이 뜨는 때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저물 때까지 말입니다. 만약 그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않으면?"

"저는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

"그 기간이 최소 한 달은 되겠지요. 다음 보름달이 떠서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사실이오?"

"예. 제 명예를 걸고 사실입니다."

라키엘은 신뢰감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또한, 제가 기도를 올리는 동안에는 그 누구의 시선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건, 제가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즉시 기도의 효력이 없어질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겠구려. 맞소?"

"맞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제가 안심하고 어떤 이의 시선도 받지 않으며 밤새도록 기도를 올릴, 달과 가까운 높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마침 그걸 위해 제가 점찍어둔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 기도를 위한 준비를 갖추어 주셨으면 합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절대로 웃지 말고. 라키엘은 명심하며 진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쟈빌론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

저런 기도가 필요한 축복의 능력이라니.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저 말을 어디부터 믿어 줘야 할지 고민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잠깐이었다.

'만약, 성자의 저 말이 진실이라면?'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을 믿지 않아 장소를 준비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성자 군의관이 기도를 제대로 못 올리게 되고, 치료의 능력을 잃게 된다면?

"...."

그건 싫다. 끔찍한 두통의 나날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건 죽는 것보다 싫다.

'어쩔 수 없군.'

쟈빌론은 일말의 찜찜함과 의구심을 접어 두었다. 성자 군의관의 말을 믿어 보는 것이 이득이리란 계산이 섰다.

"좋소. 장소를 알려 주시오. 그럼 준비를 갖춰 두리다."

"정말이십니까?"

"그대가 원하니 내가 도울 수밖에 없지 않겠소?"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고맙지."

그렇게 쟈빌론의 허락(?)이 떨어졌다.

라키엘은 미리 점찍어 두었던 장소를 알려주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곳에 기도를 위한 단출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물론 쟈빌론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도를 하는 동안 감시가 소홀해진 틈에 성자 군의관이 내 곁을 훌쩍 떠나가 버린다면... 그건 안 될 일이야.'

쟈빌론은 군사를 움직였다.

언덕을 무려 다섯 겹으로 둘러쌌다. 철통 같은 포위망이었다. 다만 언덕과의 거리는 200미터 정도로 유지했다.

병사들이 언덕 방향을 절대 돌아보지 못하도록, 등을 지고 서게 하였다.

만약 돌아보는 자가 있다면, 엄격한 군법에 의거하여 본보기로 목을 베겠노라는 엄포도 남겼다.

마침내 밤이 왔다.

"그럼, 기도를 마치면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소."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언덕의 기도 장소로 떠나가기 직전,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쟈빌론을 돌아보았다.

"혹여나 제가 떠나갈 것이라 염려하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작게나마 품었던 의심을 들킨 걸까. 쟈빌론의 어깨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도, 각하의 두통을 치료해 주며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고맙소."

비로소 쟈빌론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배어났다. 저렇게까지 말해 주니 고마웠다.

조금은 감동받은 눈길로, 언덕 위로 멀어지는 라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다.

쟈빌론은 흐뭇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지금쯤 자신의 성자 군의관이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겠지.

앞으로도 나를 더욱 정성껏 치료해 주기 위하여. 밤이슬을 맞아가며 보름달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을 테지.

생각할수록 고마워졌다.

떠올릴수록 따뜻해졌다.

앞으로 더욱 잘해줘야지. 성자 군의관에게 더욱 극진한 대접을 해 주어야지. 그럴 자격이 있는 자니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자니까.

쟈빌론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르고, 서쪽으로 기울었다. 마침내 저물었다. 그

때까지도 쟈빌론은 기다렸다. 성자 군의관이 언덕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노라 생각하며. 이제 슬슬 모습이 보여야 할 텐데, 라고 걱정하며.

진심을 담아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라키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내 아침 햇살이 환하게 떠올랐다. 어느새 싹을 틔운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불려갔다. 결국, 그는 병사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보고드립니다! 성자 군의관이 사라졌습니다!"

가슴 철렁해지는 보고를 듣는 순간, 직접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외침을 귓가에 담아 버린 순간, 그는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배신당했음을. 자신의 보물이 손아귀를 박차고 떠났음을.

"...."

까드득!

훈훈했던 마음의 온기만큼 이글이글 타오르는 극대노의 감정이 이런 걸까. 혹은 서운한 상실감이 이런 것일까.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럭 외치는 쟈빌론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집착이 광기처럼 피어났다.

128화. 미친놈들의 추격전 (1)

"정말 오랜만입니다, 전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오냐. 동감이다."

안개가 잔뜩 낀 새벽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내며, 데미안을 마주 보며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곳곳에 들러붙은 거미줄을 떼어냈다.

"어오, 거미. 어오, 벌레."

머리칼뿐만이 아니었다. 목덜미며 상의 곳곳이 엉망이었다.

거미줄은 기본이고, 전신이 흙먼지며 짓뭉개진 이끼에서 흘러나온 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비좁고 어두운 동굴을 포복으로 기어온 까닭이었다.

"한데, 언덕 중턱에 그런 동굴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데미안이 물어왔다.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우연히, 말입니까?"

"어. 쟈빌론을 따라다니다가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탈영하기 좋은 개구멍을 발견했다나. 지들끼리 쑥덕거리다가 나랑 눈 마주치니까 급하게 입 다물더라고."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병사들의 이야기는 개뿔, 사실은 소설 마검황을 읽은 덕분에 알고 있는 개구멍 동굴이었다.

'쟈빌론이 이끄는 소설 속 앙부아즈가 제국을 상대로 벌인 대전쟁. 그 전쟁의 초기에 이곳 일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거든.'

데미안이 그 전투에 제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의 막바지 무렵, 용병대 전체가 정규군에게 버림받았다.

말 그대로 버리는 패로 쓰였다. 덕분에 데미안과 용병대장이 적진에 고립되어 낙오되었다.

'그때 데미안과 용병대장이 언덕 중턱의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지.'

덕분에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고서 전장에서 탈출할 수도 있었다.

그게 발루아 요새 앞쪽 평원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세 언덕 중의 가장 왼쪽 둔덕이라 하였다.

그 장면이 생각난 덕분이었다.

개구멍 동굴을 써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계획을 짰다. 각을 재고, 쟈빌론에게 거짓말을 살포했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둥, 안 그러면 치료의 효과가 사라질 거라는 둥, 잔뜩 겁을 주었다.

성공적이었다.

쟈빌론은 약간은 의심하는 듯하였지만, 결국엔 이쪽의 꾐에 넘어갔다.

순순히 언덕 꼭대기에 기도 장소를 마련해 주었고, 이쪽은 보름달이 휘영청 뜨자마자 개구멍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덕분에 방금, 데미안과 가르딘 경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가르딘 경?"

"...예, 전하?"

"나 안 반가워?"

"반갑습니다?"

"그런데 날 보는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귀신 마주친 사람 같이."

아닌 게 아니라, 가르딘 경은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음, 저거, 표정 분석기를 돌린다면 공포 10,000%가 뜨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표정은 공포에 질린 사람의 표본 같았다.

"내가 무서워?"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휘휙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면?"

한 걸음 다가갔다. 가르딘 경이 기겁하며 두 걸음 물러났다.

"흐, 흐윽, 거, 거미...!"

"...."

"어깨에 돈벌레도 있습니다!"

"...."

"우, 우으아악!"

"쉿."

"...읍읍."

"그래. 좀 조용히. 우리 지금 몰래 도망치는 중이거든?"

"죄, 죄송합니다."

"벌레가 무서운 거였어?"

"...."

가르딘 경이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나 그런 거였나. 라키엘은 미간을 콕 찡그리며 옷을 툭툭 털어냈다.

"나도 이런 꼬락서니가 좋을까. 워낙 동굴이 습하고 비좁아서 말이지."

"그, 그랬습니까?"

"어. 그래서 지네 안 나오나 싶었는데."

"...헉."

"나오면 잡으려고 그랬거든. 그게 얼마나 좋은 약인데."

"...."

"됐고. 계획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이렇게 딱딱 들어맞게 접선할 수 있어서."

진심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제였던가.

쟈빌론이 잠깐 반란군 간부들과 회의를 가지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잠시 혼자가 되었더랬다. 그 틈을 이용했다.

쪽지를 써서 꼬슴이에게 주었다. 오늘의 탈출과 접선 장소 등의 계획을 담은 쪽지였다. 그걸 가르딘 경에게 보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가르딘 경과 데미안은 이쪽이 원하는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꼼꼼하게도 꾸꾸까지 함께 챙겨왔다.

"꾸꺄!"

"그래, 반가워. 우리 오랜만이지?"

"꾸!"

무사히 만났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이쪽으로."

일행은 안개 자욱한 숲을 걸었다. 하지만 숲은 넓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나무가 드문드문해지는가 싶더니 숲이 끝났다.

일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왕국군의 발루아 요새와 반란군의 주둔지 사이에 있는 평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데미안의 물음에 긴장감이 서렸다. 사실 그는 이번 탈출에 회의적이었다.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위치가 좋지 않아. 탁 트인 개활지라서 낮이 되면 몸을 숨기며 이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질 거야. 강행돌파는 더더욱 불가능할 테고.'

황태자는 어쩔 생각인 걸까. 데미안은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하긴. 타이밍 맞춰서 이동해야지."

"타이밍이라니요?"

"반란군의 수색순찰 부대가 움직이고 교대하는 시간."

"...설마."

"어. 다 꿰고 있어."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쟈빌론의 곁에 꽉 붙들려 있었잖냐. 덕분에 알기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되더라. 각급 부대의 배치 현황, 구역별 경계 시간, 교대 시의 주의사항 등등등. 전부 쟈빌론의 숙소에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심지어 수시로 보고를 받기도 했으니까."

"그걸 다 파악하신 겁니까?"

"어. 통째로 외웠어. 저들의 수색순찰 부대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경계가 허술해질 타이밍도 전부."

사실이었다.

탈출의 성패가 달린 정보였다. 목숨 걸고 노력하며 외웠다. 다행히 암기력이 썩 괜찮은 편이라,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별자리 볼 줄 알지?"

"예."

"비단그물 자리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래?"

"지평선에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가자."

라키엘이 관목 덤불 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몇 걸음을 휘휘 걸어나가더니 둘을 돌아보았다.

"타이밍 놓치면 안 된다니까? 따라와. 빨리."

"...."

아무래도 정말로 외운 듯하다.

가르딘 경과 데미안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안개가 제법 자욱한 편이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평원 중앙의 바위 무더기가 있는 곳에서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커다란 틈새 아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 여기서 쉬어야겠다."

"...."

"얼른. 미적거리다간 들킨다?"

둘은 순순히 황태자의 말을 따랐다.

데미안이 물었다.

"전하. 여긴 안전한 겁니까?"

"어. 확실히."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바위틈 편안한 구석에 궁둥짝을 깔고 앉았다.

"평원 중앙에 있는 곳이라서. 왕국군과 반란군 양쪽 모두가 감시하는 곳이거든."

"그렇다면 더욱...."

"안전하지.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점이잖아. 대놓고 순찰대를 보내기엔 빡쎈 곳이니까. 그러니까 우린 오늘 여기서 쉴 거야."

라키엘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이곳 평원의 동쪽에는 드높은 산맥과 왕국군의 발루아 요새가 있었다. 서쪽에는? 반란군의 군단이 통째로 주둔하고 있었다.

즉, 동쪽의 요새와 서쪽의 반란군 사이에 낀, 햄버거 빵 사이의 패티 신세(?)였다.

"동쪽이나 서쪽으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보아야지. 그래서야. 이대로 평원 중앙을 따라 북쪽으로 살금살금 이동할 거다. 그곳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한 편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라키엘은 아예 대놓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비로소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듣고 보니 황태자의 말이 그럴듯했다.

'하긴. 어차피 서쪽이든 동쪽이든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까. 게다가 여기라면 왕국군도, 반란군의 병력도 대놓고 움직이진 않을 장소 같군. 상대의 견제가 신경 쓰여서 굳이 접근할 일도 없을 듯하고.'

'예. 바위 덕분에 양쪽의 시선으로부터도 안전할 듯합니다.'

낮 동안 여기 짱박히면(?) 된다. 다시 어두워졌을 때 움직이면 된다. 비로소 두 사람은 안심했다.

그때부터였다.

일행은 바위틈에서 탱자탱자 휴식을 취했다. 빵과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뒹굴거렸다.

바위틈으로 엿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감상했다.

양쪽에 왕국군과 반란군의 살벌한 군단이 대치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나름의 피크닉 느낌마저 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도 전에, 서쪽의 반란군 주둔지로부터 엄청난 성량의 외침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리한 군의과아아안-!"

"...!"

꾸벅꾸벅 낮잠이 들려던 무렵 갑작스럽게 고막을 푹 찌른 외침. 엄청난 목소리였다. 평원을 가득 채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량이었다.

마치 코끼리 수백 마리가 합창을 하는 것만 같았다. 혹은 이어폰 음량을 실수로 맥스까지 찍어놓고서 라디오를 틀어 버린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쟈빌론?'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쟈빌론의 압도적인 외침이 재차 날아왔다.

"그대가 근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이쪽의 군마가 한 마리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대의 잘난 종자 둘과 걸어서 도망친다 한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까! 그런 걸음으로는 내 군단의 감시를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까!"

"...."

잘 아네.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한데 정말로 소름 돋게 만드는 외침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 그대는 지금! 평원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내 믿음을 저버리고서! 쥐새끼처럼! 웅크린 채 내 말을 듣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라키엘은 팔뚝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쟈빌론의, 소드마스터 특유의 마나를 가득 담은 성난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니 말하오!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대하였소! 그런 내 마음을 먼저 저버린 것은 그대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싶소! 나오시오! 한 번은 용서해 주겠소! 내 절대 이번 일로 그대를 죽이진 않으리다! 약속하오!"

"...."

약속이라.

용서라.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긴장한 채 이쪽을 돌아보는 가르딘 경과 데미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쟈빌론이 입에 담곤 하던 약속과 용서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떠올랐다.

'그래. 약속을 지키겠지. 날 죽이진 않겠지. 딱 목숨만 붙여두는 형태로 말이야.'

아마 두 다리를 자를 것이다. 자신의 두통 치료를 해줄 이쪽의 손만 남겨둘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두겠지. 그게 바로 쟈빌론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니까.

"...."

다시금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 사이에도 쟈빌론의 악에 받친 외침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오시오! 내가 용서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도와주시오! 기회를 주겠소! 내가 셋을 외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어 주시오!"

"...전하?"

가르딘 경이 불안한 듯 물어왔다.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쟈빌론 저놈, 뻥카를 치고 있는 거다. 이쪽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는 거다. 그러니 저렇듯 엄포만 놓는 거겠지.

"셋!"

쟈빌론의 벼락같은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걱정 마. 말만 저렇지, 실제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라키엘은 자신했다.

저렇듯 평원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외치고 있으니, 요새에 있는 왕국군도 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 잔뜩 경계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겠지.

"...둘!"

"저놈이 군단을 움직이면 왕국군도 곧바로 대응할 거야. 원치 않던 전투를 치러야 할걸. 그러니 쟈빌론 저놈, 말은 저래도 함부로 못 움직여."

라키엘은 확신했다. 그걸 노리고 잡은 위치가 여기였다. 새삼 든든했다.

"하나!"

쟈빌론의 외침에 독기가 서렸다. 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나 싶었다.

'뻥카였구만.'

예상이 맞았다. 라키엘은 빙그레 웃었다. 다음 순간, 평원 전체에 수천 발의 불화살이 떨어질 때까지는, 분명 그랬다.

...화르르륵!

가을철 노랗게 물든 평원의 갈대와 잡초가, 한낮의 햇살에 바싹 마른 풀더미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맹렬한 화마가 되어 평원 전체를 뒤덮어 갔다.

물론, 일행이 몸을 숨긴 이곳 근처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 미친놈이."

그 순간 라키엘은 두 가지를 깨달아야 했다. 하나는 쟈빌론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막 나가는 미친놈이라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쩌면 나는 오늘, 여기서, 저놈과 결판을 내어야 할지도.'

불현듯 떠오른 예감이 가슴을 쿵, 쿵, 선명하도록 뛰게 만들었다.

129화. 미친놈들의 추격전 (2)

쉬쉬쉬쉬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하늘을 갈랐다. 정오를 향해 치솟던 새파란 늦가을 하늘에 수백 줄기의 붉은 선이 그려졌다.

선이 선율이 되고. 불꽃이 되어. 지면에 꽂혔다.

마침내 불꽃으로 피어났다.

화르륵!

불화살의 효과는 만점이었다. 원래부터 건조한 늦가을이었다. 이른 새벽에는 안개가 피었다곤 하지만, 그마저도 오전의 햇살에 완벽히 마른 터였다.

게다가 겨울을 앞둔 계절답게 지면에는 누렇게 메마른 풀과 갈대가 한가득이었다.

불화살이 떨어진 자리마다 불길이 피어났다. 그런 불화살이 수백, 수천 발이었다.

수백, 수천 줄기의 불길이 번지고, 덩치를 불려갔다. 차츰? 아니, 급속도로. 막을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한계를 모르고서. 감당이 불가능할 만큼.

쿠화아아아악-!

"...미친."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평원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있었다.

불길이 메마른 계절의 풀과 바람을 만나 급속도로 커지고, 서로를 잡아먹으며 기하급수로 커졌다. 순식간에 평원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물론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 무더기 인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친! 진심 저거 미친놈이!'

라키엘은 욕지거리를 삼켰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이대로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다간?

'돌솥 불판구이 빼박 당첨이지!'

생각할수록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었다. 실제로 심장과 오장육부가 난리를 치고도 있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당신이 처한 상황에 몹시 놀랐습니다.]

[심장의 근심과 걱정이 깊어집니다.]

[심장이 깊어지는 걱정만큼 더욱 쿵쿵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나머지 오장육부가 층간소음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웃을 배려하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층간소음을 줄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실내에서는 슬리퍼 착용을, 바닥에는 층간소음 방지용 매트를, 마음속엔 혼자가 아닌 다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차곡차곡 새겨 주세요. 반박시 네 말이 다 맞음.]

"...."

뭐지, 방금 내가 본 메시지는.

하지만 저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평원 전체에 불을 싸질러 버린 쟈빌론, 그놈의 의도를 짐작해냈다.

'뻔하지. 그놈, 내가 평원 어디엔가 숨어 있다고 짐작했을 거야. 그런데 왕국군의 견제가 신경 쓰이니까 이런 수를 쓴 거고.'

불을 지르면?

이쪽이 못 견디고 뛰쳐나가게 될 거다. 그걸 노리고 있는 거다.

너구리 등을 잡을 때 굴속으로 연기를 피워서 사냥감이 뛰쳐나오게 만들듯이. 그때 비로소 사냥을 개시하듯이. 그렇게 이쪽을 사냥하려 하는 거다.

그러니 가급적 여기서 버텨야 한다. 움직이면 손해다. 하지만... 버티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전하! 여기서 더 머무르다간 끝장입니다!"

데미안의 다급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르딘 경의 떨리는 외침도 날아왔다.

"흐으으으! 전하아!"

아닌 게 아니라, 이미 불길이 인근까지 번져 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빨랐다.

바람 방향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정말로 돌무더기 속에서 오순도순 돌솥구이가 되는 엔딩을 맞이할 판국이다.

'...젠장.'

까드득!

설마 쟈빌론이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줄은 몰랐는데. 라키엘은 이를 갈며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상대를 덜 미친놈으로 보았던 게 실수였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가자, 북쪽으로."

"북쪽 말입니까, 전하? 동쪽이 아니라요?"

가르딘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길은 서쪽에서 번져 오고 있었다. 발루아 요새가 있는 동쪽 방면은 아직 깨끗했다.

그래서 가르딘 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동쪽으로 도망치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의 생각을 짐작한 라키엘이 고개를 저었다.

"바람 방향 때문에 불길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져 오고 있어. 그런 불길을 계속 등지고서 도망친다는 건 자살행위지. 불이 번지는 속도가 우리 걸음보다 빠를 테니까."

"아...."

"그러니 가능한 한 불이 번지는 방향과 직각으로. 어서 움직이자. 시간 없으니까."

정말로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라키엘이 앞장서서 바위틈을 버리고 뛰쳐나갔다. 뒤이어 데미안이, 마지막으로 꾸꾸를 안은 가르딘 경이 황급히 뛰었다.

그리고 수백 걸음 떨어진 평원의 서쪽 건너편. 그곳에서 쟈빌론이 일행의 모습을 보며 두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