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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화

평소처럼 웹서핑을 하던 도중, 이상한 사이트를 발견했다.

[돈이 필요하신가요? 당신의 개성을 찍은 영상으로 벌어보는 건 어떠신가요?]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의 배너에 걸린 광고.

그 사이트는 원래 이런 식으로 광고를 걸어주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광고에 관심이 갔다.

심지어 나는 몇 년 동안 백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도중이라,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에 더욱 구미가 당겼다.

본래 나는 관심을 받는 일을 좋아했기에, 방송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신생 스트리밍 사이트면 경쟁이 치열하진 않을 테니, 한번 해봐도 좋을지도?'

그 사이트에 홀린 듯 들어갔으나, 사이트엔 아무런 아이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백의 창.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누가 장난친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이트를 닫으려던 순간.

[각성이 시작됩니다.]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오르더니, 난데없이 각성이 시작됐다.

"이, 이게 뭐야!? 갑자기 각성!?"

드디어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건가?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고 몸에 주입되는 힘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누운듯한 감각.

각성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이런 느낌을 겪은 건가?

"공격 스킬 가자!"

각성이 끝나고 능력을 확인할 시간이 찾아왔다.

공격 스킬이면 대박이오, 서포트 스킬도 초대박이다!

제발 탱커 스킬만 나오지 말아라!

스킬을 오픈하기 전, 간절하게 기도를 한 다음 천천히 상태창을 열기 시작했다.

"사.. 상태창..!"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5 민첩:7 내구:4

정신력:5 마력:1 행운:7

스킬:[성좌넷]

... 이게 뭐지?

나는 분명 공격 스킬을 바랐는데..?

심지어 성좌넷이라는 이름의 스킬은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그 이름은 나의 머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성좌넷..? 설마?'

다시 눈을 모니터로 옮겼다.

그러자 밝혀지는 각성의 진상.

[성좌넷에서 방송하고 부자가 되어봅시다!]

"하하.."

내가 뜬금없이 각성한 이유가..

성좌넷이라는 광고를 눌러서라고?

***

"각성 확인됐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헌터 관리국에 들러 각성자 등록을 마쳤다.

'진짜로 각성을 하긴 했구나..'

워낙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 꿈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헌터 관리국에선 내가 각성자라는 걸 인정한다는 면허를 발급해줬고,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젠 백수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성좌넷이라는 스킬이 대체 뭔지 알지 못하는 점이 불안했다.

'설마 쓰레기 스킬은 아니겠지?'

각성을 했다고 해서 모두 인생이 펴는 건 아니었다.

농사 관련 스킬과 삽질 강화 같은 스킬이 뜬 사람들은 헌터가 되길 포기하고 일상 생활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나 역시 같은 수순을 밟진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불안감과 생각으로 가득 찬 몸을 이끌고 털레털레 집에 도착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린 걸까?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진 후, 얼굴을 파묻었다.

그 상태로 복잡한 머리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명상을 청했다.

그때.

[성좌넷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활동 아이디를 정해주세요.]

머릿속에 인터넷 창이 떠오르더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이게.. 내 능력인가?'

머릿속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능력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전기세는 들지 않을 테니,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확실한 공격 스킬.

적어도 이런 식의 스킬은 바라지 않았다.

[활동 아이디를 정해주세요.]

강조하듯, 다시 한번 떠오른 메시지 창.

나는 이름부터 정해야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싶어서 아이디를 생각했다.

'내 이름이 김수니까.. 김핸드? 너무 쓰레기 같은데.'

적당히 타협해서 핸드로 정했다.

[아이디 설정이 완료됐습니다.]

[성좌넷에 처음 오신 기념으로 500P를 지급해드립니다.]

[성좌넷엔 방송 송출, 방송 시청, 포인트 상점, 커뮤니티 사용이 가능하니, 열심히 활동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메시지창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장난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난데없이 아이디를 정하라고 하더니, 이번엔 포인트를 지급하고 앉았다.

하지만 각성을 한 이상, 장난이 아닌 현실이라는 건 기정사실이 됐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거지? 나도 방송을 해야 하나?'

일단 방송 송출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의 방에 들어갔다.

제목은 소드 마스터의 대륙 일대기.

알렌 베이스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시청자가 단 2명이었다.

"아, 핸드님. 어서 오세요!"

하꼬 방송의 숙명인 건지, 시청자가 접속하자마자 인사부터 박아줬다.

그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장검을 들고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오러를 다룰 줄 알았는데, 내가 알기론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세계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여성이었고, 알렌 베이스트라는 헌터의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그의 검술은 초보자인 내가 봐도 빠르고 정확하다고 느낄 정도로 대단한 검술이었다.

그런 사람의 방송을 2명밖에 안 본다는 점에서 자신감이 팍 깎이기 시작했다.

'내가 방송하면 아무도 안 보는 거 아니야?'

조용히 알렌의 방송을 보던 도중, 시청자들이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방송 진짜 노잼이네. 실력이 애매하면 개성이라도 있던가, 그냥 묵묵히 몬스터만 잡고 앉았네.

-신입 스트리머라서 그런가? 방송할 줄 모르네. 일단 벗어봐.

채팅은 살벌했다.

나는 그의 검술에 매료되어 집중하고 보고 있었지만, 다른 시청자들은 지루했던 모양이다.

아마 그들은 성좌넷의 고인물 시청자인 걸로 추정됐다.

'그나저나 벗으라는 놈은 뭐하는 놈이야?'

그들의 채팅을 확인한 듯한 알렌의 표정이 팍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검술엔 점점 힘이 빠져갔으며, 눈동자에 미미한 지진이 일어났다.

"재.. 재미가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방송이 처음이라.."

그는 주변 몬스터를 다 처치한 뒤, 자신의 뺨을 있는 힘껏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차례 뺨을 때린 뒤,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나가지만 말아주세요! 그리고 바라시는 대로 벗겠습니다!"

알렌이 갑자기 갑옷을 탈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러나는 알렌의 선명한 근육질 몸매.

그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영정 가는 거냐구~

-더 벗어!

[dsadczs님께서 5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알렌이 벗기 시작하니, 포인트를 쏘고 앉았다.

그래도 알렌은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건지, 히죽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벗겠습니다."

그는 포인트를 어떤 식으로 벌어야 할지, 노선을 정한 모양이다.

그렇게 알렌이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을 때쯤, 나는 가까스로 방송을 탈출했다.

중년 남성의 몸매를 감상하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대체 뭐야?'

그저 평범한 인터넷 방송 사이트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실력자도 잔챙이 취급을 당하고, 남자에게 벗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정신 나간 사이트였다.

내가 우연히 이상한 방송을 들어갔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 뒤, 다른 방송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도중, 내 눈에 들어온 하나의 방송.

시청자가 무려 1만 명이 넘어갔으며, 닉네임도 왕자지르코 라는 이름이었다.

'노린 건가?'

닉네임이야 어쨌든, 그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방송을 눌렀다.

방송 제목은 변장을 하고 동생을 꼬셔봤습니다. 라는 제목이었다.

방송에 입장하자, 스트리머로 보이는 남자가 아름다운 여성을 마주 본 상태로 앉아있었다.

상황은 꽤 진행된 건지, 여성과 남성은 꽤 친밀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아..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략결혼에 묶인 삶은 정말 지긋지긋하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어떻게 해서든 그대에게 혼인을 신청할 테니."

"오라버니가 반대할 거예요. 그는 마왕처럼 포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면전에서 디스 지리네 ㅋㅋㅋ

-지르코 당황한 거봐

"지르코 왕자님의 인성은 좋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나요? 저 역시 지르코 왕자님처럼 신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통한의 쉴드!

-추르코야 지하다.

여성은 눈앞의 남성이 자신의 오빠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더욱 신랄하게 디스를 박아넣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채팅창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고, 결국 클라이맥스까지 지켜보게 됐다.

"페이크.. 나와 함께 도망쳐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외딴곳으로!"

"아리사. 그건.."

"저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진정으로 저를 사랑한다면 모든 걸 버리고 저와 함께 떠나주세요. 제발.."

간절하다 못해, 처절한 그녀의 목소리.

그럴 때마다 지르코의 입꼬리는 하늘로 올라갔다.

"사랑하죠. 사랑하지만.. 당신의 사랑과 저의 사랑은 전혀 다른 모양이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죠? 페이크.."

"무슨 소리냐면.. 저는 당신을 가족으로 사랑한다는 겁니다."

지르코가 머리의 가발을 내던지고 얼굴 분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주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분장이 모두 지워지자, 지르코의 본 모습이 등장했고, 공주는 점점 얼굴이 붉어지더니, 주변 와인 병을 주워들었다.

그런 공주의 기색을 모르던 지르코는 카메라의 앞에 서서 만세 포즈를 지었다.

"동생 몰래 카메라~ 대 성공!"

"이 망할 오빠가!"

공주가 왕자의 머리를 와인 병으로 내려치고 방송이 중지됐다.

그러자 채팅은 불붙은 듯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고, 머리가 아파진 나는 방송에서 탈출했다.

'이게 뭐야..'

상황극이라기엔 너무나도 리얼했다.

한국 사람치곤 서구적인 외형과 고풍스러운 소품은 이질감을 줬으며, 그들이 지구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한 느낌이 있었다.

'설마..'

이 성좌넷이 다른 세계랑 연결된 건 아니겠지?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인터넷 방송 사이트라니,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러 마스터의 방송과 왕자와 공주가 출연하는 방송은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사이트라는 가설에 더욱 신빙성을 실어줬다.

'만약 진짜로 다른 세계와 연결된 사이트라면..'

나는 이 사이트에서 어떤 식으로 해야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방송을 한다는 점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목을 끌어야 할지, 고민됐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검사도 잔챙이 취급을 당하는 곳에서 내 실력을 뽐내봤자, 사람들이 봐줄지 미지수였다.

'그리고 포인트로 뭘 할 수 있는 건가?'

포인트 상점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포인트 상점 아이콘을 누른 뒤,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삼재검법? 마나 볼? 스킬을 판다는 거야?'

포인트 상점은 아이템은 물론이고 여러 스킬과 기술을 팔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포인트만 잘 벌면 강해지는 건 시간 문제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강해진다면 어릴 때부터 염원했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기필코 방송으로 성공한다!'

나는 곧바로 방송을 킨 후, F급 헌터의 생활이라는 방제로 방송을 시작했고, 일주일 동안 시청자 0명을 유지했다.

***

'대체 뭐가 문제지?'

방송이 인기 없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 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0명은 너무하지 않은가?

제목과 내용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냥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평범한 일상을 찍은 방송이 인기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사냥 영상을 찍을까?'

울며 겨자 먹기로 제목을 고블린과 생사결하는 방송으로 바꾼 뒤, 고블린 던전에 입장했다.

그리고 방송 송출을 하는 순간.

-뉴비 왔능가?

-고블린이랑 1:1 하는 새X는 또 처음 보네ㅋ

-역시 고인물들 ㅋㅋ 특이한 방송 찾는 데는 1등이란 말이야ㅋ

고인물 시청자들이 새로운 뉴비에게 신고식을 시작했다.

2화

'실화인가?'

그저 방제와 내용을 바꿨을 뿐인데, 시청자가 순식간에 100명까지 차올랐다.

그 사실에 허탈함은 느낀 나는 지난 일주일의 고생을 떠올렸다.

먹방, 야방, 겜방 등등.. 여러 방송을 했는데도 0명을 유지하던 내 방송.

'별짓을 다 했는데.. 시청자의 니즈가 고작 사냥이었다고?'

뭐, 아무래도 좋다.

포인트만 벌 수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는 일 빼곤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일단 눈앞의 고블린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고블린한테 지는 건 아니지?

-성좌넷에 이런 뉴비가 들어오다니! 우린 고이지 않았어!

-고블린 이기면 1000P

시청자들은 새로 생긴 뉴비가 고블린에게 질 우려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고블린에게 질 생각은 없다.

비록 스킬 하나 없는 비루한 헌터지만, 고블린쯤은 사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커헉!"

고블린의 펀치가 복부에 꽂혔다.

그 여파로 인해 폐의 산소를 모조리 내뱉은 나는 풀썩 주저앉아 구토 증세를 일으켰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비웃듯이 씨익 웃는 고블린.

'뭐, 뭐야..! 고블린은 그냥 초보자용 몬스터 아니었어?'

인터넷에서도 고블린은 잡몹 취급이었기에, 딱히 무장이라고 할 만한 짐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저 장검 하나를 덜렁 들고 왔을 뿐.

그 결과..

-아니, 고블린이랑 싸우면서 검이 부러지는 놈은 처음 보네

-고블린 선수! 핸드 선수의 복부에 스트레이트!

성좌들의 채팅대로 고블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가리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론 상대 몬스터를 손쉽게 잡아내는 쪽의 방송이 인기가 많았다.

소위 사이다 방송이라고 하는 설정이 인기가 많았는데, 이대로 가다간 고구마 방송 확정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힘들게 생긴 시청자들이다.

겨우 잡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생각은 없었다.

이젠 피할 수 없다.

"가드."

"케륵?"

"가드 잡으라고."

그런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가?

고블린은 서서히 가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짐승 대 짐승, 남자 대 남자로 싸움을 시작했다.

시작은 가볍게 고블린의 얼굴에 잽을 날렸다.

가볍게 더킹으로 피한 고블린은 반격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려왔다.

나 역시 가만히 맞아주지 않았고, 가까스로 고블린의 주먹을 빗겨 피했다.

-자강두천..

-스치기만 해도 서로에게 치명타..!

고블린과 나는 치열하게 공방을 나누었고, 그 결과 내 쪽이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몬스터인지, 비실한 육체를 가진 나의 주먹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고블린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진다!'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때, 머리를 스쳐 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포인트 상점!'

나는 분명히 가입 기념으로 500P를 받았을 터.

무기나 스킬을 산다면 적어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곧바로 실행하자고 판단한 나는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500P.. 500P..'

워낙 포인트의 양이 적은 탓인지, 살 수 있는 아이템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도중, 딱 500P 가격의 아이템을 발견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물건을 구매한 뒤, 고블린에게 뛰어갔다.

-저.. 저건..!

-그걸 사용한다고?

시청자들은 당황한 듯이 내가 산 아이템에 경악했다.

그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현재 내가 들고 있는 이 아이템은 다름이 아닌..

"과도 맛 좀 봐라!"

과일을 깎는 데 사용하는 과도였기 때문이다.

장검의 가격은 1500P였고, 내가 가진 포인트로는 턱도 없었다.

결국 과도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고블린을 향해 칼질을 했다.

"크륵!"

갑자기 생겨난 날붙이에 당황한 건지, 뒤로 주춤 물러나는 고블린.

나는 그 빈틈을 노렸다.

고블린의 품으로 파고든 뒤, 명치에 과도를 박아 넣었다.

처음에 가져왔던 롱소드는 고블린의 피부에 닿자 금이 갔는데, 과도는 너무나도 쉽게 고블린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역시 포인트 상점제라서 그런지, 고품질의 아이템이었다.

고블린이 과도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블린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핸드 선수! 굳히기 들어가나요!?

-고블린 선수! 위기입니다!

-고블린 상대로 너무 필사적 아니냐..?

고블린은 처음엔 거센 저항을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절명했다.

나는 겨우 고블린이 죽었다는 걸 깨닫곤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제, 제가 고블린을 이겼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남들이 보기엔 꼴사나울지 몰라도 각성한 이후, 처음 사냥한 몬스터였기에 더욱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고블린 잡고 우는 놈은 처음이네 ㅋㅋㅋ

-맨날 양학 방송 보다가 이런 방송 보니까 꽤 재밌네?

-원래 찐따 싸움이 제일 재밌음ㅋ

시청자의 반응도 꽤 호평이었다.

내심 사냥이 답답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나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옷을 털고 카메라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재밌게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성장하는 방송이 되겠습니다!"

-열심히 해라! 응원할게!

-너도 포인트 주면 벗냐?

-즐찾 눌렀다.

[AASDAX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미션 성공! 그런데 너무 힘들게 이긴 거 아니냐?"

"아이고! 첫 후원 감사합니다!"

처음 터지는 후원.

이제야 내가 진짜로 방송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리액션은 강렬하게 해야 한다고 들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넙죽 절을 했다.

그러자 채팅창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고?

-와~ 다른 방은 리액션도 안 해주던데, 여기 혜자네?

-다른 스트리머들은 자존심 때문에 무릎도 안 꿇던데

[벗방 좋아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이러면 절 10번 해주냐?"

"아이고! 바로 머리 박겠습니다!"

리액션을 절로 결정한 건 신의 한 수인 거 같았다.

아마 성좌넷의 스트리머는 콧대가 높아서 리액션이 시원찮은 모양이다.

무심코 한 지구의 리액션이 이토록 호평을 받을 줄 몰랐다.

그 뒤로 포인트는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으며, 총 6만 포인트를 받았을 때, 나는 비소로 절을 멈출 수 있었다.

***

"현재 지구에서 방송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게 확실하군."

방송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뒤, 다른 지구의 경쟁자가 있나 살폈지만, 지구 출신은 내가 유일했다.

그 말은 즉슨..

'지구의 콘텐츠는 전부 내가 독점할 수 있다는 거야!'

방송은 결국 콘텐츠 싸움이었고, 나는 그런 콘텐츠들이 가득한 행성에 살고 있다.

현재 시청자들은 나의 약함에 주목하며 방송을 즐기고 있지만, 점차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리 만족을 시켜주는 방송으로 끌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강해져야지.'

쌓인 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어쩌면 저번에 봐둔 스킬들과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각종 스탯을 올리는 영약들부터 둘러봤지만, 가격이 너무 높기에 스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삼재검법이 3만 포인트에 마나 볼이 1만 포인트라..'

기본적으로 패시브 스킬과 액티브 스킬의 가격 차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일단 삼재검법을 구매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술을 사용하는 스트리머는 차고 넘칠 텐데.'

주목성을 생각하자면 검을 사용하는 방법은 썩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소한 방법으로 적과 맞서 싸우는 편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 확실할 터.

나는 스킬 목록을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쓸만해 보이는 스킬은 6만 포인트를 넘어섰고, 가격이 적당하다고 느낀 스킬은 한없이 평범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러던 도중, 인기순과 별점순이라는 항목이 적힌 곳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별점과 인기순의 제일 아래에 위치한 스킬을 사용하면 된다는 거 아닌가?

나는 곧바로 스크롤을 미친 듯이 아래로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 도달한 순간,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스킬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술사의 첫걸음]

처음 이 스킬을 봤을 때, 무슨 스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사술사라는 단어는 척 듣기엔 사술을 부리는 악한 사람의 스킬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실상은 달랐다.

실을 이용해서 적을 제압하는 보기 드문 전투방식을 고집하는 스킬이었다.

'심지어 구매한 사람들도 이 스킬을 잘 사용하지 않나 보네.'

상품평을 보면 여론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스킬을 구매하고 조카와 실뜨기를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데 사용하는 걸 추천합니다.

-이 스킬을 배우고 머리에 털이 자라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품평만 본다면 지뢰 스킬이 확실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상품평을 보고 후퇴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스킬에 상품성을 느꼈다.

일단 실을 이용해서 싸운다는 점에서 희소성을 느꼈고, 실을 이용한다면 접근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안정성을 느꼈다.

심지어 삼재검법과 마나 볼보다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아 잠재력은 확인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됐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스킬을 구매했다.

[60000P를 사용하여 사술사의 첫걸음을 구매하셨습니다.]

가격이 꽤 비싸서 다른 물건은 살 수 없지만, 그건 방송을 해서 메꿔가면 되는 문제였다.

구매가 완료된 순간, 스킬북이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는구나."

나는 곧바로 손에 쥐어진 스킬북을 읽기 시작했다.

[사술사의 첫걸음을 정독하셨습니다.]

[스킬:사술을 획득하셨습니다.]

스킬이 생겨나자마자 발동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손끝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푸른색 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마력을 매개체로 생성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허나 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 그건 안 돼!"

실의 제어권을 놓치자, 실이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집안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물론이오, 의자나 책장 등.. 여러 물건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분노보단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부 깔끔하게 베였잖아..?"

마력이 매개체라서 그런가?

잘린 물건들의 절단면은 한없이 깔끔했고, 제법 멀리 있는 물건까지 베어낸 걸 봐선 예상대로 장거리에서 싸울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와 같은 이치인가?'

오러도 검의 겉에 마력을 씌우는 행위이니, 나는 벌써 오러를 깨우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엔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인데, 이젠 두 명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완전 좋은데?'

심지어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니, 범용성 부분에선 오러가 따라올 수 없었다.

잘만 활용한다면 엄청난 기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선 꽤나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아! 그건 팬티라고! 자르지 마!"

집안의 팬티가 전부 걸레가 되기 전에.

****

성좌넷의 스트리머들도 소속된 회사가 있었다.

보통 회사의 역할은 스트리머의 멘탈 케어나 채팅 관리, 홍보 등등..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머니 컴퍼니는 이제 막 운영을 시작한 신생 회사였다.

"대표님! 이 사람 어떻습니까?"

"신중하게 정하자. 적어도 중박은 칠 수 있는 사람과 계약해야 회사 체면이 살지."

그들은 첫 계약을 할 스트리머를 찾고 있었으며, 특히 대표는 까다로운 잣대를 대가며 직원들의 선택을 쳐냈다.

결국 대표가 직접 스트리머를 찾기 위해 성좌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이, 이 녀석이야!"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가 소리를 지르며 한 방송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란 사원들은 곧바로 대표의 곁에 몰려들었다.

대표는 흡족한 미소로 박수를 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대표가 바라보고 있던 화면에 비치는 인물은..

"아악! 거긴 때리지 마!"

고블린에게 얻어맞고 있는 핸드였다.

3화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핸드입니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문제였다.

잠시 후, 시청자들이 물 밀려오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핸하!

-오늘은 뭐할 거냐?

"오늘은 제가 새로 배운 스킬을 사용해볼 겁니다."

-아, 어제 수금 엄청 땡겼지?

-무슨 스킬 배웠는데?

"그건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죠."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종류는 당연히 고블린 던전이며, 초보자들을 위해 안전장치가 된 곳으로만 골라잡았다.

슬그머니 던전에 들어서자,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사냥하고 있었다.

"흐음.. 오늘은 다른 사람들도 있네요."

저번에는 늦은 시간에 방송을 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은 점심쯤에 도착해서 많은 사람이 사냥 중이었다.

괜히 실 컨트롤을 잘못해서 피해를 주면 안 될 텐데..

마음속으로 최대한 컨트롤을 세밀하게 하자고 마음먹은 뒤, 적당한 고블린을 골라잡았다.

"형님들, 제가 새로 배운 스킬! 지금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뻔하게 검술 아니냐? 초보자들은 다 검술부터 배우던데.

-마법일 수도 있음.

-난 저번에 과도 사용하는 거 보고 느꼈음. 핸드는 단검술이 제격이다!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

그들이 실을 사용하는 자신을 보고 얼마나 놀랄지, 벌써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잠시 집중한 뒤,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조금씩 생성되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실.

"이게 제 능력입니다."

-저.. 저거!

-아니 그걸 배웠다고!?

-아이고 핸드야! 우리 돈이 그렇게 가치가 없더냐!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실을 본 시청자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마 사술사의 첫걸음에 대해 알고 있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내가 정신이 나갔다는 채팅을 치기 시작했으며, 어떤 자는 자신과 같은 똥믈리에일 줄은 몰랐다며 감탄했다.

"형님들, 사술사의 첫걸음이 왜 지뢰 스킬인 줄 아십니까?"

-그야 컨트롤 하기 힘드니까 그렇지!

-게다가 가오도 안 살잖냐!

-아이고 핸드야.. 오늘 절 60번 더 하자.

시청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스킬을 산 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 주목성 하나는 끝내줄 것이다.

'게다가 나 이외에 사용하는 사람은 없나 보네.'

게다가 노렸던 부분도 정확히 적중했다.

더 이상 잡담을 나누는 건 방송이 루즈해질 우려가 있기에, 슬슬 사냥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가 사술을 몇 번 사용해본 결과, 잠재력이 엄청난 스킬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범용성으론 오러를 뛰어넘고, 공격 범위도 상당하니, 그야말로 효자 스킬 아니겠습니까?"

-불효자 ON

-네가 자식이 없어서 그래 인마!

-호되게 당해봐야지!

나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블린을 향해 실을 내뿜기 시작했다.

방송을 안 할 때, 몰래 한 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항상 사술을 아주 미세하게 발현시켜 컨트롤을 유지하는 훈련을 이어갔으며, 결국 어느 정도 실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제법 실을 다룰 수 있게 됐을 때, 어째서 이 스킬이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첫 공격 스킬이라서 그런가?'

시청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실은 빠르게 고블린에게 뻗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탓에 고블린은 너무나도 쉽게 도륙이 났고,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됐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지뢰 스킬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어케했누!?

-나 오러 쓸 줄 아는데, 실 다루는 게 훨씬 어려움. 저렇게 사용하는 게 이상한 거임;

-아니, 핸드 이새.. 재능충이었네;

"계속 사냥하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면 고블린들이 반 토막으로 쪼개졌다.

마력의 실은 빠르고 유려하게 고블린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고블린은 깍둑썰기, 어떤 고블린은 채썰기로 화려하게 요리됐으며, 그 순간만큼은 3성급 미슐랭 쉐프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핸드, 마누라한테 이쁨받겠네.

-결혼할 여자가 있는지 먼저 묻는 게 예의 아니냐?

그렇게 한참을 사냥에 몰두했을까?

나는 어느새 보스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풍스러운 문이 이곳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하는 듯싶었다.

"어.. 여긴 혼자 들어가면 위험할 거 같습니다만.."

괜히 겁이 나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실의 성능은 전부 보여줬으니, 슬슬 후퇴해도 좋을 시간일 터.

나는 약한 소리를 내며 시청자들이 찬동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시청자들을 너무 얕본 걸까?

-마!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이 정도 던전은 내 8살 먹은 딸도 혼자서 돌 수 있는데, 핸드야 실망이다.

-보스 잡으면 2만 포인트.

그들은 내가 사냥을 멈추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보스방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끄아악! 살려줘!"

"모두 피해!"

선객이 있던 모양인지, 5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아니, 전투라고 하기엔 처절한 장면인가?

그들은 보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버둥거렸고, 누군가는 벽에 처박힌 채, 기절한 상태였다.

"이게 뭐시여.."

그야말로 지옥도.

나는 그 지옥에 한 발짝 들여놓은 기분이 들었다.

보스는 거대한 고블린이었으며, 정확한 명칭은 고블린 챔피언이었다.

워낙 크기가 거대한 탓에 기색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보스방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젠장!'

나는 재빠르게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부축을 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성.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바, 방심했습니다.. 저희 5명이면 보스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보스에 도전한 모양이다.

아니, 나도 같은 처지인가?

적어도 이 보스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점은 똑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지만, 남성은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청해왔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저 때문에 친구들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분명 내 실력으론 저 보스에게 비빌 수 없을 터.

그런 상황에서 다른 팀원들을 구출해달라니,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보스의 거대한 주먹이 나를 향해 뻗어오기 시작했다.

"안 돼!"

본능적으로 펼친 마력의 실.

실은 여러 번 겹쳐지더니, 보스의 주먹을 간신히 막아냈다.

아니, 오히려 보스의 주먹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유효한 공격이었다.

"토, 통한다고..?"

그저 방어 용도로 펼친 실이 보스의 살가죽을 갈라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분명 쓰러진 각성자들의 공격은 보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내 실이 보스에게 통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승산이 있어..!"

나는 곧바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채팅창의 민심은 더욱 훈훈해져 갔다.

-와.. 다른 사람들 구하려고 하는 거임?

-애가 약해서 그렇지, 착한 녀석이라니까

-그나저나 저 정도 공격으론 쓰러트리긴 힘들 텐데

시청자의 말도 옳았다.

생채기는 생채기일 뿐, 치명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유의미한 공격을 남겼다는 점에서 승산을 느꼈다.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제가 숨겨놓은 기술을 사용할 때가 온 거 같군요."

내가 아무리 컨트롤을 잘한다고 해도, 실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마력의 실을 최대한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만들어낸 기술이 바로..

"실에 속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사실 포인트가 부족해서 실험조차 해본 적 없는 기술이었다,

가끔씩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라며 상상만 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포인트가 쌓인 상태였으니, 충분히 사용할 만했다.

[화염 속성 부여 물약을 구매하셨습니다.]

공격에 속성을 부여해주는 일회용 물약.

이 물건이 실에도 적용된다면, 앞으로의 활용이 기대될 것이다.

물약을 복용하자, 마력의 실 근처에 아지랑이가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저게 된다고?

-마력에 속성이 부여될 줄이야.. 오러에도 적용이 되려나?

-내가 해봤는데, 오러엔 적용 안됨; 실만 되나 봄

시청자들은 실의 새로운 발견에 감탄하는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서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실을 고블린 챔피언을 향해 발사했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마력의 실은 고블린 챔피언의 피부에 찰싹 달라붙더니,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대체!?"

보스가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자, 쓰러진 청년이 놀랐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괜히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뒤, 쓰러진 사람들을 하나둘씩 데려오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살았다! 난 살았다고!"

"도, 도망가야 해!"

그들은 나를 마치 구원자 보듯이 바라봤으며, 괜히 쑥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이젠 보스만 쓰러트리면 되는 상황.

보스는 이미 화염 속성 실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슬슬 마무리 짓자!"

화염 실로 보스를 돌돌 감았다.

그럴수록 보스의 피부는 점점 갈라졌으며, 고통스럽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힘을 줄수록 마력의 실은 보스의 피부를 더욱 파고들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뼈까지 도달했다.

-속박플 ㅗㅜㅑ~

-지엔장~ 믿고 있었다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멋있냐? 뽀뽀 딱 대!

[보스 몬스터:고블린 챔피언을 사냥하셨습니다.]

결국 보스는 아무 저항도 못 한 채, 절명해버렸다.

처음으로 잡은 던전 보스는 나에게 있어서 값진 경험이 되어줬고, 더욱 성장하라는 듯이 질주에 가속도를 더해줬다.

그걸 증명해주듯이..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9 민첩:8 내구:8

정신력:5 마력:13 행운:7

스킬:[성좌넷][사술]

미친 성장률이었다!

고블린을 잡을 땐 요지부동이었던 스탯들이 보스를 잡았다고 큰 폭으로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특히 근력 스탯은 "일주일 밤낮으로 훈련을 해야 1포인트 올라갈까 말까"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올리기 힘든 스탯이었다.

대부분의 스탯들도 눈에 띌 정도로 올라간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르게 성장하는 편이라서 더욱 뿌듯했다.

아마 F급 헌터 중에 나처럼 스탯이 높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 탓에 얼굴을 히죽거렸다.

그리고 내가 웃는 걸 보고 있던 5명의 사람들.

나는 괜히 머쓱해서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틀림 없이 이곳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오랜만에 훈훈한 방송이네

-사례받지 마라! 불쌍하잖냐!

-빈곤층한테 삥 뜯으면 민심 작살 날 듯ㅋㅋ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함을 표현했고, 그 순간이 썩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훈훈하게 채팅을 쳤다.

[숨은 실력자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사례 안 받고 사라지면 5만 포인트 어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솔직히 쓰러진 사람들의 장비를 보면 썩 재력이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제대로 된 사례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차라리 후원의 이야기대로 행동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뜨기 위해서 일어섰다.

그러자..

"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적어도 사례는 받으셔야죠!"

"맞아요! 저희 목숨값이라도 받아주세요!"

그들은 양심에 찔린다는 듯,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례를 받는 것보단 포인트를 후원받는 편이 훨씬 이득이기에 그냥 자리를 떠나자고 마음먹었다.

"만약 당신들이 더 강해진다면, 위험에 처한 초보자들을 도와주세요. 그게 사례입니다."

사람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었기에,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어 얼버무린 다음 던전을 탈출했다.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마음에 든 건지, 연신 칭찬과 후원을 반복했고, 결국 나는 15만 포인트라는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

초보 각성자, 김태수는 현재 글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가 적고 있는 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겪은 일을 널리 알려 그의 대단한 정신을 널리 퍼트리자!'

그런 취지로 글을 적기 시작한 김태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작성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댓글은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직접 그 모습을 봤다면 아무 말도 못 했을 녀석들이..'

김태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언젠간 그들도 이해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김태수의 글엔 점점 신빙성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수의 무용담은 알게 모르게 인터넷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유명 길드 스카우터들은 글의 진위를 파악한 뒤,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4화

"저와 계약을 하고 싶다고요?"

방송을 끄고 훈련을 하던 도중, 양복을 빼입은 남성이 찾아왔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검은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 강렬했다.

그는 자신을 바트라고 소개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 머니 컴퍼니와 계약하신다면, 최고의 대우와 서포트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니, 잠시만요. 설마 성좌넷 관련된 분이세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대길래,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좌넷에 연관된 사람이라니?

지구엔 성좌넷 유저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을 텐데..

"많이 당황하신 모양이군요. 핸드님께서는 스트리머가 회사에 소속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알고 있긴 합니다만.."

"어째서 스트리머들이 회사에 소속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뇨. 그건 잘 모릅니다."

바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 했다.

하기야, 방송을 시작한 지, 1달도 안 된 스트리머가 뭘 알겠는가?

내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바트는 내 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던전에서 녹빛 나무가 가득한 숲으로 변했다.

"이, 이건?"

"핸드님은 다른 사람이 성좌넷에 관한 이야기를 몰랐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아서 자리를 옮겨봤습니다."

"바트씨.. 인간 맞습니까?"

현재 그가 뿜어대는 아우라와 행동은 전혀 인간과 동떨어진 느낌을 줬다.

아니, 어쩌면 너무 완벽하기에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건가?

그런 내 물음에 답변하듯, 바트는 입을 벌려 날카롭게 솟아오른 송곳니를 보여줬다.

"저는 흡혈귀입니다. 아니, 정확한 명칭으론 뱀파이어 로드라고 불리죠. 핸드님의 우려와는 달리 이 행성 출신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배, 뱀파이어 로드요?"

성좌넷은 뱀파이어 로드도 월급쟁이로 만드는 건가?

내가 잘 모르는 것일 뿐인지, 성좌넷엔 더 초월적인 존재들이 득실거릴 수도 있다.

그 괴물들 사이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 일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저희 머니 컴퍼니와 계약을 하실 경우, 여러 지원을 받게 됩니다. 방송 준비 자금이라던 지, 일정 관리와 채팅창 관리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광고도 넣어드릴 수 있으며, 성좌넷 홈페이지에 홍보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핸드님이 버시는 포인트의 9:1는 저희가 가져가게 됩니다. 어떠신가요?"

"자, 잠시만요."

본래 나는 계약 한 번 못해본 백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덜컥 계약하기엔 무언가 불안하지 않은가?

적어도 다른 사람의 자문은 들어봐야 할 텐데..

'맞다. 나 성좌넷에 아는 사람이 없지..?'

이제야 기댈 사람이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그.. 계약서를 한 번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천천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믿을 사람이 없던 나는 바트에게서 계약서를 건네받은 뒤, 조항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는 독소 조항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유리한 조항이 가득했으며, 회사가 손해를 보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편파적인 계약서였다.

그 때문인지, 괜히 미심쩍은 마음이 든 탓에 바트에게 살짝 질문했다.

"그.. 이거 회사가 엄청 손해 보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희는 핸드님의 잠재력에 투자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저희는 어디까지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인지라, 어떻게 해서든 이득을 볼 자신이 있습니다."

괜히 질문한 걸까?

바트가 더욱 무서워진 느낌이 들었다.

일단 당장으로 봐선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였고, 나는 결국 계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핸드님이라면 저희 머니 컴퍼니의 간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예..? 간판이요?"

"네. 저희 머니 컴퍼니는 현재 소속 스트리머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 탓에 대표님은 간판 스트리머를 한번 길러 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죠. 그렇기에 방금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권유 드린 겁니다."

바트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졌다.

간판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엄청나다는 건 알겠지만, 이 정도의 조건이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문제다.

나는 곧바로 계약서에 싸인을 한 뒤, 바트와 악수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핸드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트씨."

***

"그래서.. 왜 안 돌아가시는 겁니까?"

계약을 마친 후, 나는 바트가 곧바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바트는 계약을 마친 후로도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핸드님께서 살고 계시는 행성의 환경을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아무래도 간판 스트리머를 완벽하게 케어하기 위해선, 여러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지구에 대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방송을 키는 날이 아니었다.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나저나 핸드님은 모으신 포인트는 어디에 사용하십니까? 현재 포인트를 많이 모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일단은 안 쓰고 모으는 중입니다. 사술을 완벽하게 익히면 사용할까 고민 중이죠."

"역시 탁월하시네요. 괜히 여러 스킬을 익혔다가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포인트만 날리는 셈이니까요."

괜히 칭찬을 들어 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숨을 돌릴 겸, 근처 아무 카페나 들어선 뒤, 카운터에 줄을 섰다.

"그나저나 바트씨, 뱀파이어는 피 이외에 음식을 먹을 수 있나요?"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요즘 뱀파이어들도 피가 아닌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진화한 상태거든요. 오히려 피를 멀리하고 다른 음식을 선호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나는 적당히 초콜릿 크림칩 프라푸치노 2잔과 초콜릿 케이크 2개를 시킨 뒤, 자리를 잡았다.

혹시나 해서 바트에게 단 음식을 싫어하나 물었지만, 오히려 선호한다며 좋아했다.

이제 슬슬 일에 이야기를 물을 때가 찾아왔다.

"바트씨께 현재 성좌넷의 유행에 대해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언제 물어보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트는 오히려 기꺼워하며 내 질문을 즐겁게 받아줬다.

처음 깐깐해 보였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느새 친숙한 형처럼 느껴졌다.

"현재 성좌넷의 스트리머들의 주요 컨텐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래도 학살이겠죠. 시청자들을 대신해 몬스터를 사냥한다던가, 적대 상태에 있는 나라의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방송은 아무래도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보통은 사냥이나 전투가 주요 컨텐츠라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성좌넷엔 아직 여러 컨텐츠들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예외라고 본다면 왕자지르코의 방송이 지구식으로 진행된다는 건데, 그를 따라 하는 스트리머는 거의 없었다.

그 말을 즉슨 내가 사용할 만한 방송 컨텐츠가 가득하다는 말이었다.

"혹시 따로 생각하신 방송용 아이디어가 따로 있으십니까?"

"바트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지구는 인터넷 방송이라는 문화가 발전한 행성입니다. 그만큼 아이디어도 풍부하고 시청자들의 니즈를 저격하기 딱 좋은 컨텐츠도 가득하죠."

보통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똑같았다.

재미.

오직 그것만 만족시킨다면, 춤을 추면서 전투를 치르든, 음식으로 줄넘기를 하든 아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재미를 채우는 데 자신감이 있었다.

"핸드님께서 아이디어가 많으신 모양인데, 몇 가지만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조만간 쓰려고 했던 컨텐츠, 아바타 사냥입니다."

"아바타 사냥..?"

"예. 시청자 한 분을 모셔서 저를 원격조종하는 것처럼 지시를 내리는 거죠. 그가 몬스터를 유혹하라고 시킨다면 유혹해야 하고, 단숨에 죽이라고 한다면 단숨에 죽여야 합니다."

"단순하지만 좋은 아이디어네요. 시청자들이 같이 참여하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메리트가 대단한 거 같습니다. 게다가 조종할 시청자를 포인트 후원을 많이 한 사람 순으로 정한다면 수금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트는 좋은 생각이라며 핸드를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며칠간 인터넷을 뒤진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컨텐츠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시청자와 바로바로 소통해야 하는데, 방송 특성상 딜레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을 보완해야 할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그건 맞는 말이군요."

바트는 내 말을 듣고 눈을 감은 다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컨텐츠가 있어도 그걸 완벽히 실행하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그런 나의 걱정을 해결할 방법이 생겼다는 듯, 손뼉을 치는 바트.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이죠?"

"성좌넷엔 기본적으로 포인트 상점이 있지만, 물건 품목은 전부 아이템과 스킬로 가득한 상태인 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방송 관련된 아이템은 전혀 없더라구요."

"방송 관련 아이템이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회사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전용 포인트 상점에서만 판매하기 때문이죠."

전용 포인트 상점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아니, 회사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내가 모르는 건 당연한 거겠지.

바트는 자신의 권한으로 방송 전용 포인트 상점 이용권을 지급해준다는 말을 했다.

그 포인트 상점엔 방송 관련 아이템들이 가득 있었는데, 그 중 필요한 물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청자 1회 소환권]

등급:레어

* 시청자 한 명을 소환할 수 있다.

* 가격:100000P

"시청자 1회 소환권.."

가격은 무려 10만 포인트였다.

그렇게 많은 포인트는 아니었지만, 방송 컨텐츠로 사용하기엔 값이 제법 나가는 물건이었다.

괜히 부담스러워진 나는 다른 컨텐츠를 사용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바트가 나의 고민을 알아챈 듯, 미소를 지었다.

"가격 때문에 부담되시겠죠. 아까 말을 들어보니 포인트도 모으는 것 같으시고."

"네. 아무래도 신인 스트리머가 감당하기엔 거액의 물건이네요."

"그 부분에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이요?"

"회사에서 시청자 소환권을 구매해드리겠습니다. 대신, 핸드님은 회사와 계약된 스폰서의 제품을 광고해주시면 됩니다."

바트는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대가를 요청했다.

그저 광고 한 번만 해주면 10만 포인트를 지급해준다니.

나에게 있어선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트는 그런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힘내라며 응원해줬다.

'아마 나를 신경 써서 그런 제안을 해준 거겠지.'

괜히 바트에 감사함을 느낀 나는 애사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며칠 안 가서 사그라들 테지만.

"그러면 다음 방송은 아바타 사냥으로.."

지이이잉!

음식 준비가 끝났다는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트의 말을 잠깐 끊고 음식을 챙기러 다녀왔다.

쟁반에 놓인 음료와 케이크에 시선을 빼앗긴 바트.

"해, 핸드님..! 이 음식들은 대체..?"

"아, 이건 초콜릿 크림칩 프라푸치노라고 하는 음료고 옆에는 초코케이크예요. 둘 다 달콤한 맛이니까, 바트씨의 입맛에 맞을 겁니다."

바트는 곧바로 프라푸치노에 입을 대기 시작했고, 나는 이야기를 마저 들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아까 그 이야기를 계속.."

"이, 이 맛은..!?"

바트가 호들갑을 떨며 프라푸치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무언가 잘못됐나 싶어 식겁한 모습으로 바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바트는 매우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프라푸치노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엄청 맛있습니다! 지구의 음식이 이토록 훌륭할 줄이야! 평생 살고 싶을 정도군요!"

"입에 맞으셔서 다행이네요. 모자라면 더 주문해드릴 테니,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한참 음식을 흡수한 바트는 총 프라푸치노 3잔과 케이크 5조각을 해치우고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기가 막혔지만, 접대해주는 사람이 기뻐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바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왜 그러십니까? 바트씨."

"핸드님.. 저 결심했습니다."

"뭘 결심하셨다는 겁니까?"

"저는 지구에 남아 핸드님의 서포트에 집중하겠습니다. 애초에 저는 핸드님 전용으로 보내진 매니저니까요. 절대 음식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어이가 없었다.

지나가던 누렁이가 봐도 음식 때문에 정착하는 걸 알겠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나를 서포트 해줄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무척 편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단으로 정해도 괜찮습니까?"

"대표님에게 말씀은 드려야겠지만, 아마 허락하시겠죠. 대표님은 핸드님의 팬이니까요."

바트는 그렇게 허락을 맡으러 간다며 회사로 돌아갔고, 나는 카페에 홀로 남아 정리를 시작했다.

고블린 챔피언을 잡았을 때, 마석을 주워 팔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핸드 왔냐.

-핸하!

-오늘은 뭐하냐?

여느 때처럼 방송을 키고 던전에 들어섰다.

오늘은 회사에서 지원해준 시청자 소환권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나는 손에 티켓을 쥔 뒤, 시청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할 컨텐츠는 바로! 아바타 사냥입니다! 시청자분들 중, 한 명을 골라 저의 멘토로 삼을 예정입니다. 저는 그 멘토의 말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룰이 있습니다. "

일단 룰부터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청자들의 채팅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을 뽑아달라는 채팅이 미친 듯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후원까지 터지기 시작했다.

[바스티티님께서 2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나랑 하자 핸드야!"

[칠흑마녀님께서 25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600살 연상 미녀 대기 중."

.

.

.

후원은 점점 쌓이기 시작했고, 내 입꼬리는 점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수금이지!'

5화

"이번 멘토는 총 120000P를 후원해주신 핑크공듀님으로 결정됐습니다!"

길고 긴 후원 전쟁이 끝나고, 끝내 살아남은 시청자는 핑크공듀라는 사람이었다.

이름만 봐도 여성 시청자인 것 같아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내 방송을 보는 사람 중엔 정상인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기대를 접었다.

"그럼 곧바로 소환하겠습니다."

손에 쥔 티켓을 찢으며 핑크공듀라고 외쳤다.

[시청자:핑크공듀가 소환에 응답합니다.]

찢긴 티켓이 빛으로 변하더니, 하나의 형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타난 한 명의 인물.

그자는 2M가 넘는 거대한 장신에 울끈불끈한 근육을 가진 초록 피부의 인물이었다.

"어..?"

내가 순간 잘못 소환했나 싶었다.

눈앞의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인간이 아닌 오크가 아닌가?

일단 사실 확인을 위해 말을 걸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저.. 핑크공듀님이세요..?"

"그래! 내가 핑크공듀다! 크하하하!"

"아니, 공듀라면서요! 남자 아니에요?"

"실례군! 나는 여자가 맞다!"

그.. 아니, 그녀는 내 말이 불쾌했던 것인지, 콧방귀를 뀌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 외모가 여자라고..?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핑크는 아니지 않은가!

"그린공듀로 닉변하시는 게 맞는 거 같은데요."

"죽고 싶나?"

-빠꾸 없네 ㅋㅋ

-인종차별 보소 ㅋㅋ

-핸드야! 도망가!

시청자들도 이 광경이 웃긴 건지, 빠르게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일단 시청자들이 재미를 느꼈다면 다행이다.

10만 포인트가 허무하게 날아간 게 아니니까.

슬슬 방송을 진행할 준비를 해야 하기에, 핑크공듀에게 자세한 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핑크공듀님은 저를 조종하면서 던전을 클리어해주시면 됩니다. 수위를 넘어가는 명령만 아니면 뭐든지 괜찮구요."

"뭐든지라.. 마음에 든다! 크하하하!"

"호쾌해서 좋네요. 바로 진행해봅시다."

이미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1인용 던전에 입장한 상태였기에, 타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핑크공듀의 모습이 들킨다면 여러 각성자들이 모여 레이드를 진행하리라.

나는 마력의 실을 뿜어낸 뒤, 첫 번째 방에 입장했다.

"1인용 던전은 총 5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가 들어간 던전의 등급은 D급이라 질이 낮은 몬스터 밖에 나오지 않으니, 안전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네 걱정을 왜 함ㅋㅋ

-핑크공듀는 자기소개 안 하냐?

-그걸 왜 물어봐 미X놈아!

그러고 보니, 핑크공듀의 자기소개를 듣지 않았다.

아직 초보 스트리머라서 그런지 자잘한 실수가 잦았지만, 시청자들은 너그럽게 넘어 가줬다.

"내 자기소개인가.."

핑크공듀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신랑감을 찾으러 나왔다."

"예? 그게 무슨.."

핑크공듀를 소환한 이유는 멘토로 삼아서 방송을 진행 시키려고 한 건데, 정작 본인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진행해버린 이상, 되감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대화를 이어가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살던 종족은 강한 암컷이 모든 수컷을 지배한다! 하지만 수컷들이 너무 약해서 재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강한 수컷을 찾아 신랑으로 삼기 위해 방송을 출연한 거다!"

"그, 그럼 제 방송에 나온 건.. 저 때문에..?"

"아니, 넌 약해서 관심도 없다."

씁쓸했다.

아니, 결과적으론 기쁜 일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그녀에 대한 소개는 대충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핑크공듀님, 저기 앞에 리자드맨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정해주세요!"

"마력의 실은 봉인이다."

"예..?"

"네 육체는 현재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래선 암컷과 만날 수도 없고,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다! 그러니 널 단련시켜주마!"

"아니, 마력을 안 두르고 어떻게 리자드맨을 이겨요!"

리자드맨은 무려 철로 이루어진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심지어 한 마리도 아닌 다섯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기에, 함부로 다가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시키는 대로 한다며~

-핸드! 구른다!

-근데 이길 수는 있냐?

시청자들도 우려의 채팅을 쳤다.

맨손으로 리자드맨을 제압할 수 있는 확률은 10%도 안 됐다.

심지어 다섯 마리니까,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

괜히 핑크공듀를 소환했다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겁먹지 마라. 오크 특유의 근육 사용법, 근강술을 알려줄 테니까."

"근강술이요..?"

오크들은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인가?

핑크공듀는 팔에 힘을 주더니, 옆에 있는 바위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바위는 쩌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근강술을 익히면 이런 일도 가능하다!"

"핑크공듀님 진짜 남자 아니에요?"

"뭐라고?"

-그때, 핸드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눈빛을 보았다.

-근데 근육 사용법이 따로 있긴 함?

-나도 오크인데, 처음 듣는 소리임 ㅋ

근육 사용법의 설명은 간단했다.

혈관을 팽창시켜 근육을 뜨겁게 달군 뒤, 그 열을 파괴력으로 바꾼다는 이해 안 가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시청자들도 이해를 못 한 건지,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됐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룰은 룰인지라, 그녀가 시키는 대로 혈관을 팽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며, 그걸 지켜보던 핑크공듀는 성에 안 찬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니, 안 되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혈관은 팽창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크 종족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 물어봤지만, 자신이 살던 곳의 인간들도 사용하던 기술이라고 했다.

오크 특유의 기술이지만 다른 종족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 있는 기술이라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못하겠어요!"

"흠.. 그게 안 된다면 실전으로 배울 수밖에 없겠지. 가서 싸워라!"

"예!? 진심이세요?"

"빨리 가라!"

나는 쭈뼛거리는 몸을 이끌고 리자드맨 앞에 섰다.

총 5마리의 리자드맨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으며, 그 눈빛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력의 실만 사용하면 저런 녀석들은 한 방인데..'

괜히 답답함을 느꼈지만, 방송은 방송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때, 그녀가 본격적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녀석의 허리에 발차기를 날려라."

나는 그 말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머리를 숙이라고 한 뒤, 뒤로 몸을 날린 다음 떨어진 검을 주우라고 명령했다.

그녀의 말대로 행동하자, 어느새 내 손엔 철검이 들려 있었다.

-확실히 전투 센스는 인정이네

-멘토할 만한 실력이긴 함

나는 그녀의 말대로 행동하면 이번 방송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검을 뒤쪽으로 찌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검을 뒤로 찌르자, 리자드맨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벌써 1마리를 쓰러트린 상황.

그녀는 침착하고 정확하게 나를 컨트롤했다.

"방심하지 마라! 너는 애송이니까!"

그녀의 말대로 긴장을 늦추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리자드맨의 시체를 집어 들어 방패로 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지시를 받으며 한참을 전투를 치렀을까?

눈앞에 있는 리자드맨 한 마리를 제외하곤 전부 쓰러트린 후였다.

"거의 다 왔다..!"

"흠.. 쓸만하군! 시키는 대로 잘 해줬다! 마지막은 네 녀석 혼자서 쓰러트려 봐라!"

핑크공듀는 나머지는 나에게 맡긴다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현재 내 손엔 부러진 철검밖에 없는 상황.

이 상태로 리자드맨을 이기기엔 힘든 상태였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녀가 마지막을 내게 맡긴 의중이 있을 터.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제일 가능성 있는 선택지는 근강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잘 다루기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되는 기술이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대체 무엇으로 혈관을 팽창시켜야 할지, 어떤 식으로 근육을 달궈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마력을 주입해볼까?'

그녀는 마력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마력뿐이다.

마력의 실을 컨트롤하던 감각을 되살려 전신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육이 마력에 반응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핸드 상태가 좀 이상한데?

-쫄았나봄? 엄청 떨고 있네

-아니, 겁에 질린 건 아닌 거 같아

채팅 볼 시간도 없이 마력을 온몸에 순환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근육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몸이 붉게 달아올랐을 때, 나는 리자드맨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리자드맨은 황급히 검으로 내 손을 막으려고 했지만, 주먹은 너무나도 간단히 검을 분쇄한 뒤, 리자드맨의 얼굴에 꽂혔다.

쾅!

리자드맨의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결국 리자드맨은 절명했다.

"해, 해냈다!"

"이제야 좀 볼만해졌군."

-믿고 있었다구! 어이!

-아니 어케했누!

-진짜 핸드 재능충이냐?

그저 말로만 배웠을 뿐인데, 근강술을 사용할 수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핑크공듀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으며, 시청자들도 환호하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핸드!"

"아, 덕분에 좋은 기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런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선 그녀에게 확실히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소정의 선물이라도 챙겨줄까? 고민하던 순간, 핑크공듀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신랑감 후보에 올랐다! 영광으로 알아라!"

"네..?"

나는 그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

"그 말.. 사실인가?"

"네. 초보자로 보이는 사람이 고블린 챔피언을 홀로 잡았다고 합니다."

동혁은 현재 한국 최고의 길드인 청룡 길드의 마스터인 강룡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청룡 길드의 스카우터였으며, 초보자 던전에서 싹수가 보이는 각성자를 찾아 스카웃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던 도중, 인터넷에 떠도는 글의 작성자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고 강룡에서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후.. 막 각성한 초보자가 고블린을 홀로 학살하며 던전을 누비는 것도 놀라운데, 고블린 챔피언까지 잡아내다니.. 믿기지 않는군."

"게다가 최근엔 여러 꽤 여러 던전을 홀로 격파한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만약 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청년은 얼마를 주고서라도 영입을 해야겠군. 잠재력으로 따지면 S급이니까."

동혁은 놀랐다.

그가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길드장이 저렇게 말할 정도의 인재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동혁의 기색을 눈치챈 길드장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청년의 잠재력도 제대로 못 알아보면서 무슨 스카우터인가? 그는 흔히 볼 수 없는 스킬인 실을 사용해 싸웠고, 심지어 속성까지 부여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점에선 이미 그는 상당한 희소성을 가지게 된 거다."

"과연.. 속성 공격은 마법사들만이 전유물이니까요."

이제야 길드장의 의중을 알아냈다.

홀로 고블린을 학살하며 고블린 챔피언을 토벌할 정도의 무력을 가졌고, 희귀한 속성 공격도 가능한 각성자라는 건, 그야말로 보물과 같은 존재.

한시라도 빨리 청룡 길드로 영입해야 했다.

"이제야 눈치챘나? 그럼 빨리 가서 그 청년을 영입해!"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핸드는 알게 모르게, 헌터계에 이름이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6화

"핸드! 이번엔 난이도를 올리겠다!"

"예!? 여기서 더 올린다고요?"

핑크공듀는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당당히 선언했다.

현재 명령엔 전투 중에 박수를 치라던가, 점프하라는 명령도 간간이 섞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난이도를 더 올린다니..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번엔 몬스터한테 뽀뽀 각이냐?

-몬스터 패다 말고 춤추는 거 아님?ㅋㅋㅋ

-아! 내가 당첨됐으면 오늘 핸드 걸어서 집 못 들어갔는데!

시청자들도 더욱 기대되는 건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런 반응들이 나중에 후원이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애써 웃으며 참았다.

현재 3번째 방에 입장한 상태였고, 상대 몬스터는 플래그맨였다.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몬스터들은 인간과 유사한 외관을 지닌 몬스터였다.

그들과의 대치는 마치 대인전을 하는 듯한 감각을 줬다.

"자, 준비해라 핸드."

"알겠습니다."

나는 별수 없이 근강술을 발동시켰다.

마력이 온몸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고, 넘쳐흐르는 힘은 나를 고양시키기 시작했다.

핑크공듀는 내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총 3마리니까, 한 마리씩 해치운다!"

우선 가장 앞에 있는 녀석에게 근강술이 발동된 주먹을 날렸다.

두 번째 방에서 질리도록 썼던 근강술이기에 실패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내 주먹은 그대로 적의 얼굴에 꽂혔다.

아니, 꽂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 미끄럽다고..!?"

플래그맨은 개구리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던 모양인지, 미끈거리는 피부로 내 주먹을 모조리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핑크공듀는 더 강하게 주먹을 내지르라며 아우성이었다.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

이때, 플래그맨도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구불거리는 혀를 꺼내 내 몸을 감아오는 플래그맨.

"이, 이거 놔!"

-촉수 마스터가 역으로..? ㅗㅜㅑ~

-야 성인인증 걸어!

-핑크공듀 시선은 또 왜 저래?

핑크공듀는 심각한 표정으로 플래그맨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남편을 빼앗긴 아내처럼 처량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분노를 참지 못한 건지, 플래그맨에게 달려가는 핑크공듀.

"내 신랑 후보를 넘보지 마라!""제가 왜 당신 신랑 후보입니까!?"

그녀의 주멱에 마력이 실리기 시작했다.

푸른 마력이 그녀의 주먹을 포근하게 감싸더니, 이내 날카롭게 변형했다.

본래 미끄러져야 정상인 주먹은 날카로운 마력으로 인해 플래그맨의 얼굴을 간단히 찢어버렸다.

속박에서 벗어난 후, 간신히 숨을 고르던 나는 그녀가 사용한 기술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본래 마력을 손에 둘러 파괴력만 높이던 근강술과는 달리, 그녀의 기술은 마력을 변형시켜 상대가 취약한 형태로 변했다.

그 기술만 배운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터.

나는 그 기술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핑크공듀님..?"

"차, 착각하지 마라!"

"예?"

뭘 착각하지 말라는 거지?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네, 네가 걱정돼서 구해준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 예.."

-우효! 기어코 함락해버린 거냐구!

-핸드 이새 ㅋㅋ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인데?

-2M 장신의 근육질 미녀에게 구해지다니.. 부 럽 다 !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전투에 답답함을 느낀 핑크공듀가 하는 수 없이 직접 플래그맨를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시청자들은 내가 이해한 상황과 다른 상상을 하는 모양이다.

상황이 어쨌든, 사냥이 우선이었다.

일단 한 마리는 핑크공듀가 사냥했으니, 두 마리만 남은 상황.

나머지 두 마리는 적어도 내 손으로 사냥해야 모양이 산다.

그렇기 위해선 핑크공듀가 사용했던 마력 변형을 배워야 했다.

"저.. 핑크공듀님?"

"왜, 왜 그러냐!"

핑크공듀는 괜히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아까 마력을 변형시키는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흐음! 과연.. 열정도 합격이다! 방금 내가 사용한 기술은 근강술의 응용 버전인 변강술이다!"

"변강술이요..?"

기술 이름이 노비 이름 같다.

아니, 그녀 행성에선 분명히 근사한 이름이겠지.

이름에 태클을 거는 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변강술을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건 다행이네요."

"근육을 뾰족하게 변형시키면 된다!"

"전혀 다행이 아니었네요."

핑크공듀의 말을 믿은 내가 등신이었다.

그녀는 근강술을 알려줄 때처럼 두루뭉술한 말로 가르침을 대신했고, 그 가르침을 소화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포르테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변강술 완벽히 소화하면 5만 포인트 쏜다! 너무 안전자산인가?"

"아이고~ 포르테님! 미션 수락하겠습니다!"

때마침 알맞은 미션도 나와줬다.

이젠 변강술을 익히기만 하면 될 뿐.

하지만 변강술을 익히는 과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술은 단순히 근육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닌 마력을 변형시키는 것.

그 변형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멍하게 있나! 어서 싸워라!"

"그래야겠죠.."

그녀의 닦달에 하는 수 없이 다른 플래그맨에게 다가갔다.

100번 패면 한 대 정도는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적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미끈거리는 피부에 주먹이 꽂히는 일은 없었다.

플래그맨은 빈틈이 생긴 나에게 혀를 감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당한 기술에 또 당할 내가 아니었다.

간신이 몸을 비틀어 혀를 피한 뒤, 뒤로 물러섰다.

"핸드! 네 기술이 안 통하는 건 전부 근육이 부족해서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이가 없었지만, 핑크공듀는 진심으로 한 말 같았다.

그녀는 내 근육을 키워준다는 명분으로 이상한 명령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주먹을 내지른 뒤, 스쿼트 5회! 바닥으로 구르고 푸쉬업 5회!"

"이게 무슨!"

입은 반발했지만, 몸은 솔직했다.

그녀의 명령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행하기 시작한 몸은 점점 혹독한 명령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왜 다 소화하는 건데 ㅋㅋ

-핸드도 지금 즐기고 있다니까?

-플래그맨도 어이없어하는 거 봐라ㅋ

전투 중에 운동을 하다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발상일 것이다.

핑크공듀는 계속해서 나에게 운동 관련된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그, 그만..! 몸살 나겠어요!"

몸에 과부하가 찾아온 나는 전투를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루틴은 운동->운동->운동인 모양인지, 휴식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다.

어느새 사냥은 뒷전이 됐으며,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핑크공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나 보다.

"어서 일어나라! 누워 있는 시간에도 근손실이 찾아온다!"

"아니, 오크도 근손실 걱정을 해요?"

눈물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은 채, 플래그맨에게 다가갔다.

변강술은 분명 마력을 변형시키는 방법이니, 단순히 생각하자면 마력 컨트롤을 응용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가?

나는 곧바로 마력의 실을 조종하던 감각을 근강술에 덧씌우기 시작했다.

세심하게 마력을 다루던 감각을 활용하자, 손에 모인 마력이 조금씩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지, 진짜로 따라 하냐?

-포르테, 지금 미션 건 거 후회 중 ㅋㅋ

-안전자산? 어림도 없지 ㅋㅋ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주듯, 채팅창에선 뜨거운 반응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변강술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다.

형태는 날카로운 칼날이 가득 박힌 너클 같은 모양으로 변형시켰고, 어느새 내 손엔 변강술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돼, 됐다! 그런데.."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는 근강술과는 달리 마력을 밖으로 돌출시키는 변강술은 효율적인 면에서 매우 떨어졌다.

마치 기름이 새는 자동차처럼 마력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낭비를 막기 위해 플래그맨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 달린 주먹이 플래그맨의 얼굴에 꽂혔다.

근강술과 달리 강력한 변강술의 일격!

주먹은 미끄러지지 않고, 플래그맨의 얼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끄에엑!"

처음으로 유효타를 먹이는 데 성공한 나머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플래그맨의 상태가 이상했다.

주먹은 중간에 멈출 생각을 하지 않더니, 그대로 플래그맨의 얼굴을 뚫어버렸다.

"이게 뭐야!?"

그냥 데미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인데, 단 한 방으로 플래그맨을 죽여버렸다.

본래 플래그맨은 C급 각성자쯤 되야 일격에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몬스터.

그런 플래그맨을 일격에 죽였다는 사실이 믿겨 지지 않았다.

-와 ㅋㅋ 고블린한테 얻어맞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핸드야.. 할애비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이대로 타 스트리머들 하극상 가즈아!

시청자들은 나에게 감정이입을 한 건지, 신난다는 듯 채팅을 쳤다.

확실히 고블린에게 맞던 시절과 비교하면 훨씬 우월한 스펙을 가지게 됐지만, 타 스트리머들에 비하면 잔챙이나 다름없었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하극상을 벌이기 위해선 더욱 강해져야 했다.

"적어도 이런 녀석들에게 쩔쩔매면 안 되겠지!"

나는 홀로 남은 플래그맨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때.

"잠깐!"

핑크공듀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말렸다.

순간적으로 주먹을 멈추는 데 성공한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핑크공듀를 바라봤다.

분명 그녀가 내 기술의 결점을 발견하고 멈췄으리라 확신한 나는 그녀의 말에 경청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스쿼트 10번하고 때려라."

이걸 진짜..

***

"후.. 드디어 마지막 방이네요! 그리고 포르테님께서 주신 5만 포인트는 제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진짜 노골적이네 ㅋㅋ

-포르테 오열 중ㅋ

-마지막 방은 뭐 나오냐?

"마지막 방은 보스가 나올 겁니다. 들어올 때마다 등장하는 보스는 다르지만, 적어도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의 상위종이 나오는 게 정석이죠."

"흠! 벌써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건가.."

핑크공듀는 아쉽다는 말투로 시무룩해졌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13 민첩:11 내구:9

정신력:6 마력:17 행운:7

스킬:[성좌넷][사술][근강술][변강술]

그녀에겐 근강술과 변강술이라는 엄청난 기술을 배웠으며, 스킬으로서 내 상태창에 각인된 상태였다.

게다가 사냥을 하면서 운동을 한 탓인지, 근력 스탯도 올라가 있었으며, 다른 스탯들도 많이 성장한 상태였다.

보통 각성자들이 스탯을 하나 올리려면 피가 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나는 이미 여러 수라장을 겪은 인물들의 훈련을 받은 탓인지 효율적으로 스탯이 빠르게 올랐다.

게다가 상대방의 능력으로 인해 마력의 실을 사용하지 못할 때의 대처법이 생긴 셈이라 무척 든든했다.

"너무 기죽지 마세요. 다음에도 모시겠습니다."

"그, 그런가..? 고맙군!"

핑크공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되찾았고, 힘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보스방에 진입했다.

보스방의 풍경은 다른 곳과 달리, 푸른 초원이었다.

풀 향기가 물씬 풍기는 초원은 그간 고생을 치유해주는 듯한 느낌을 줬다.

그리고 저 멀리 사족 보행을 하는 무언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보스인가?"

1인용 던전이라 엄청 강한 녀석은 나오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춘 뒤, 핑크공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핑크공듀의 표정이 이상했다.

"저.. 핑크공듀님? 명령을 내리셔야.."

"그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핑크공듀는 근엄한 목소리로 내 말을 막았다.

그녀는 흡사 전투를 나가기 전 가장의 표정이었으며, 매우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핸드. 내 남편이 될 생각 없나?"

"예!?"

뜬금없었다.

신랑 후보라고 할 때는 웃음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나는 지금 진지하다! 제대로 대답해라!"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진지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반응을 하면 좋을지 당황한 나의 손을 잡은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처음엔 그저 신랑감을 찾기 위해 적당한 방송을 골라 출연한 곳이 네 방송이었다! 하지만 너의 잠재력을 보면서 마음을 빼앗겼다! 내 가혹한 명령을 아무 말 없이 따라주는 건 물론이고, 근강술에 이어서 변강술까지 익힌 점에서 너는 내 사랑을 받기 충분한 존재다!"

점점 상황이 고조되어갔다.

채팅창은 핑크공듀를 더욱 부추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적어도 이 상황을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텐데..

"피, 핑크공듀님은 강한 남성을 원하신다면서요! 저는 그저 오크족의 기본 소양인 근강술과 변강술을 익혔을 뿐인데요!? 명령은 방송 컨텐츠니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거고요!"

"아니, 근강술은 오크족의 기본 소양이긴 하지만, 변강술은 아니다!"

"그게 무슨..?"

"처음 근강술을 사용하라고 강요했을 때, 나는 네가 근강술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내 예상을 깨고 근강술을 익히는 데 성공했지! 그런 너에게 가능성을 느꼈다!"

그녀는 처음과는 달리 칭찬 일색이었으며, 그녀의 말에 점차 함락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칭찬에 부스터가 걸린 그녀는 더욱 나에게 열정적으로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본래 변강술은 진정한 오크 전사들만 익힐 수 있다고 알려진 기술! 그런데 너는 그 변강술마저 익히고 말았지! 그 점에서 너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나는 그저 오크족이 기본 소양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극소수만 익힐 수 있는 기술이었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구애받고 있는 사실을.

그녀의 구애를 거절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아무리 그래도 오크와 결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 나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결혼은 안 됩니다! 핑크공듀님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

"컥!"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핑크공듀는 부끄럽다는 얼굴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때.

"크허헝!"

저 멀리서 던전 보스인 블러드 울프가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목표는 핑크공듀였으며, 블러드 울프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핑크공듀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꺼져라!"

핑크공듀는 순순히 물려주지 않았고, 역으로 블러드 울프의 얼굴을 깨부쉈다.

순식간에 블러드 울프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됐고, 주변에 피를 흩뿌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블러드 울프를 쓰러트린 핑크공듀는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쭈뼛거렸다.

"핸드.."

"네, 넵!"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군. 아직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지? 다음에 만났을 땐, 내 남편으로 만들어주마!"

얼굴에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활짝 웃는 핑크공듀.

그녀는 귀환용 티켓을 찢은 뒤, 나를 남겨두고 본래 살던 세계로 돌아갔다.

"조, X됐다."

그녀에게 고백을 받은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조롱하기 시작하는 시청자들.

-오크 신랑! 일어나라고!

-어이 어이, 벌써 품절남인 거냐구~

-그런데 왜 안 부럽냐? ㅋㅋ

처음으로 시청자들을 강퇴하고 싶어졌다.

7화

"진짜 옆집으로 이사 오셨네요?"

"네. 이제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곧바로 찾아와주시면 됩니다."

바트가 카페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지, 벌써 일주일째.

기어코 지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옆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길래 찾아갔는데 바트가 이삿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바트가 나를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펼쳐지는 온갖 과자와 초콜릿의 향연.

바트는 자랑스럽다는 듯, 집안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자랑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자, 여기에 앉으시죠."

나는 바트가 안내해준 소파에 몸을 맡겼다.

과연 다른 차원 제품인지, 지구의 소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푹신했다.

바트도 맞은편 소파에 앉은 뒤, 다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제가 핸드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유는 다름이 아닌 방송 관련 문제입니다."

"역시 그렇겠죠."

"저번 아바타 사냥의 반응은 성공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뜨거웠던 건 기억하십니까?"

"네, 실제로도 포인트를 몇 배를 더 벌었고, 동시 시청자 수도 상당히 늘었으니까요."

쪽지로 다음엔 자신을 출연시켜달라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무려 50만 포인트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였고, 콘크리트 팬이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지금은 마냥 시청자가 늘어서 기분이 좋으실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그게 또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쉽게 예로 들자면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 아닙니까? 그게 왜..?"

"현재 핸드님 방송은 한 번에 달아오른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뒷말은 이해가 가시겠죠?"

쉽게 인기가 빠질 수 있다는 말인가?

실제로 한국 스트리머 중에도 단숨에 떴다가 퇴물이 된 사람이 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트는 아마 내 인기가 빠르게 식을 것이 걱정이겠지.

"저도 최대한 컨텐츠들을 활용할 생각입니다만.. 회사 측에서도 따로 생각이 있으시겠죠?"

"예리하시군요. 핸드님은 영상 도네이션이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일단 알고 있긴 합니다만, 성좌넷에도 그런 기능이 있나요? 저는 본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못 보신 것도 무리가 아니죠. 영상 도네이션은 파트너 스트리머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니까요."

바트는 목이 마른 건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파트너 스트리머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산 금액의 비율이 좀 더 올라간다는 점과 방송 노출이 더 잘된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는 칭호였고, 실제로 파트너 스트리머를 달고 있는 방송들은 잘 나가는 방송이었다.

"제가 그 파트너 스트리머를 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파트너 스트리머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래 파트너 스트리머를 달려면 1년 이상 방송을 꾸준히 해야 조건을 달성할 수 있지만, 핸드님은 저희 간판 스트리머 아니겠습니까? 회사 측에서 힘을 써서 파트너 스트리머를 달아드리겠습니다."

"그건 감사한데, 그럼 영상 도네이션 이야기는 왜 꺼내신 건가요?"

파트너 스트리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거라면 굳이 영상 도네이션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바트는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라며, 초콜릿을 하나 까서 먹었다.

"현재 핸드님을 시기하는 스트리머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럴 거 같더라구요. 타 스트리머 팬들이 채팅창을 도배한 적도 있으니까요."

마치 아이돌 팬덤처럼 스트리머들에게도 팬덤이 존재했으며, 타 스트리머를 배척하는 팬덤들도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타 스트리머들도 나를 배척한다고?

그건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방안으로 내놓은 것이 도장 깨기 컨텐츠입니다."

"도장 깨기 컨텐츠요?"

"네. 현재 핸드님의 무력은 암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약한 상태인 건 알고 계시죠?"

"그건 뭐.."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 입으로 인정하자니 모양이 빠졌다.

바트는 그런 점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핸드님의 성장 속도는 성좌넷 탄생 이후, 최고 속도입니다. 아니, 애초에 성좌넷에 핸드님처럼 약한 사람이 들어온 적도 없으니, 최초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런 상황에서 핸드님이 자신을 견제하는 타 스트리머들을 하나씩 제거해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 그 스트리머 시청자들한테 몰매 맞지 않을까요?""아뇨! 정답은 시청자 흡수입니다! 성좌넷의 시청자들은 대부분 스트리머의 무력에 반해 팬이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핸드님이 그 스트리머를 꺾어버린다면 자연스레 시청자들은 핸드님의 방송으로 몰려들게 되겠죠."

땅따먹기 같은 개념인가?

작전 자체는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단순하게 내가 강해져서 타 스트리머들을 때려눕히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등급 몬스터에게 쩔쩔매는 내가 타 스트리머들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처음부터 강한 상대와 붙지 않아도 됩니다. 성좌넷에 어중간한 무력을 가진 스트리머에게 영상 도네이션으로 도발을 하는 거죠.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다 보면 핸드님의 방송은 최정상에 찍혀있을 겁니다. 게다가 핸드님의 컨텐츠는 특이한 것들이 잔뜩 있으니, 팬으로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겠죠."

"나쁘지 않네요. 그렇다면 제가 일단 강해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전부터 미뤄왔던 일이지만, 계기가 생긴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난 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무언가를 느낀 건지, 바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지금부터 저는 헌터 랭크를 올리겠습니다."

F급 헌터를 벗어날 시간이 찾아왔다.

***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시험 시작은 오후 2시이며, 적어도 오후 1시까지는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D급 헌터 승격전을 신청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트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들어가니, 디저트가 잔뜩 있는 테이블에 바트가 앉아있었다.

"다 드실 수 있는 겁니까?"

마치 디저트의 산이라고 비유해도 좋을 정도로 가득 찬 디저트들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바트는 그런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찔러 한입에 욱여넣었다.

케이크를 몇 번 씹던 바트는 티슈로 입가를 닦은 뒤, 입을 열었다.

"굳이 승격전을 치러야 합니까? 허울뿐인 칭호라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바트는 방송할 시간도 모자란 데, 헌터 승격전이라는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승격전은 방송 소재로 사용해도 좋으며, 컨텐츠의 질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였다.

F급 헌터의 인식은 그저 각성을 했을 뿐인 일반인이며, 던전의 출입도 D급까지만 허용이 된다.

하지만 D급를 진입하고서부턴 인식 자체가 달라진다.

진정한 헌터로 인정을 받는 것과 동시에, 던전의 상한선이 B급까지 풀리기 시작하며, 각종 레이드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그렇기에 시간을 내서라도 승격을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승격을 미루신 건지?"

"승격전은 1년에 총 4번 있더라구요. 때마침 승격전이 오늘이라 타이밍이 맞았죠."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면 몇 개월을 더 기다렸을지 모른다.

우연의 일치지만 신이 내려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할 생각으로 신청을 했으며, 바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게다가 D랭크 시험부턴 각종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대기할 테니, 적절한 길드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길드라.. 굳이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바트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바라보기엔 개미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구에선 그 개미들이 모이는 걸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길드에 들어가면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흐음.. 제가 길드라는 걸 만들어봐도 괜찮을까요?"

"예?"

"방법만 안다면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각종 지원이야.. 회사를 통해서 해드리면 되는 거고, 무엇보다 이곳의 인재들이 탐이 나는군요. 잘 구슬리면 핸드님의 방송 소재로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바트는 흥미가 간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속으로 다른 세계 사람이 길드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유능한 그라면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나는 대충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나쁜 손이군요!"

바트가 내 손을 저지하며, 직접 시켜먹으라는 말을 남기곤 디저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이가 없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쭈굴거리는 표정으로 디저트를 시키러 털레털레 걸어갔다.

***

"지금부터 D급 헌터 승격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은 양복의 사회자는 단상 위에 올라 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룰은 간단했다.

필드는 나무가 가득한 숲 필드이며,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환경이라고 했다.

거기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30명만 D급으로 승격한다는 간단한 룰이었고, 참가자들끼리의 전투도 허용된 상태였다.

최대한 몸을 숨겨서 최후까지 살아남든지, 다른 참가자를 30명이 될 때까지 쓰러트리던지, 플레이 방식은 자유자재였다.

게다가 가장 킬스코어가 높은 사람은 소정의 상품을 준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시험이 더욱 치열할 것 같았다.

"자신 있으십니까?"

"어차피 시험에서 겪는 데미지는 현실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VR로 치러지다 보니, 생명의 위협은 전혀 없었고, 상대방을 쓰러트렸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복사한 게임 아바타를 조종하는 방식이기에 몸의 이질감을 느낄 걱정도 없었다.

"자, 이제 시험을 시작할 예정이니, 지정된 위치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곧바로 지정된 캡슐에 들어간 뒤, 눈을 감았다.

[시험의 숲으로 이동합니다.]

몸이 부유하는듯한 느낌이 들더니, 어느새 숲속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관리국의 설명대로 몸에 대한 이질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목표는 30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

내 힘이 다른 사람들에 비교했을 때, 훨씬 강한 건 잘 알고 있지만 여러 명의 사람에게 기습을 당하면 위험하기에 최대한 안전하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다.

적당한 나무를 찾아 은신하려던 찰나.

"주, 죽어어어!"

수풀이 부시럭 소리를 내더니, 바로 뒤에서 검을 든 남성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

남성의 검은 나의 목을 향해 궤적을 그렸으며, 깜짝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변강술을 사용해 남성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꾸엑!"

"어..?"

단지 주먹을 얼굴에 박았을 뿐인데, 남성의 머리는 수박이 쪼개지듯이 간단히 터져버렸고, 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나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엄청 강한 거 아니야..?"

8화

"쉬워!"

금발의 미청년의 호쾌한 검술에 몬스터들이 쓰러져간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강함에 취해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청년의 얼굴은 맞지 않는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한없이 불쾌해 보였다.

"이딴 귀찮은 절차는 왜 만든 거야?!"

그의 정체는 한국 길드 랭킹 5위, 수호 길드의 유망주였다.

각성 때, 굉장한 능력을 각성한 그는 수호 길드의 온갖 케어를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그 때문인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과격한 상태였다.

"사냥한 몬스터 수와 인간 수가 표시되는 건 마음에 드는군."

VR이라서 그런지, 현 상황판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벌써 1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탈락한 상태였다.

상황판을 본 그는 벌써 탈락할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아예 참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우리 길드 체면도 살려줄 겸, 압도적인 1등으로 마무리해볼까?"

적어도 이런 시험에서 1등을 따내지 못한다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에,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목표를 정했다.

그때, 상황판에서 그의 시선을 빼앗은 이름이 하나 있었다.

"김..수..? 이 사람은 뭔데 벌써 몬스터 9킬에 인간 3킬이지?"

시작한 지, 10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성과를 이뤘다는 건, 그가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정도의 강자라는 걸 알려주는 셈이었다.

"미친 살인마든가, 나처럼 길드의 유망주겠군. 이 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탈락시켜야겠어."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이 돋보이는 건 허락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금 목표를 세웠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수풀에서 한 남성이 튀어나왔다.

그는 양손에 단검을 쥔 도적 계열의 각성자였고,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의 기습에 완벽하게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력 100배."

도적이 공중에서 청년에게 칼을 들이민 순간, 도적의 신형이 바닥으로 푹 꺼지더니, 납작하게 눌린 시체가 됐다.

도적을 빈대떡으로 만든 청년은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저런 기본적인 기습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길드 사람들이 보면 한소리 하겠군."

본래 검으로만 승격전을 치루던 그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능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이미 납작해진 시체를 몇 번이고 짓이겼다.

그렇게 시체를 밟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분이 풀린 모양인지, 사냥을 이어가는 청년.

"김수.. 일단 이 녀석부터 해치워볼까?"

청년은 자신보다 활약하고 있는 김수를 향해 칼을 갈기 시작했다.

***

"한 방!"

"커헉!"

즐겁다!

전엔 느껴본 적 없었던 압도적인 강함.

주먹 한 방에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쾌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주먹 한 방에 쓰러트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압도적인 강자를 연상시켰고, 변강술까지 갈 필요 없이, 근강술만 사용해도 사람들은 픽픽 쓰러졌다.

"방송을 못 켠다는 점은 조금 아쉽네."

아무래도 VR 세계라서 그런지, 방송 송출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현 상황을 방송으로 송출했다면 아마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 터.

주로 핸드,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하고 올챙이 학살 중! 이라는 채팅이 도배될 것이 뻔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1등인 건 의외네."

승격전엔 여러 길드의 후원을 받는 유망주들이 가득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성적이 저조한 것으로 봐선 유망주라고 해도 나에겐 아직 닿지 못하는 모양이다.

'뭐, 따지고 보면 나도 유망주나 마찬가지고, 회사에서 지원받는 중이니까.'

너무 오만해지는 것은 방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이곳은 조금만 경계를 늦춰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협적인 공간이기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마침 주변에 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에, 새로 익힌 기술을 사용하자고 마음먹었다.

'마력을 주입해서..'

손을 땅에 맞댄 뒤, 마력의 실을 앞으로 뿜어 퍼트렸다.

앞으로 쭉 나아가는 실은 여러 갈래로 퍼지더니, 마치 뱀처럼 요리조리 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력의 실의 탐지에 걸린 여러 생명체.

"총 다섯인가? 넷은 전투 중이고 한 명은 혼자 있군."

일단 혼자 있는 쪽을 해치우자고 마음먹었다.

다리에 근강술을 발동시켜 빠르게 뛰어간 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나무 위로 점프했다.

홀로 있는 상대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나무 위는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 목에 실을 감은 다음 힘을 주어 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일 필요도 없었는지, 적의 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땅으로 뒹굴었다.

"재미없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목숨의 위협이 없는 이 상황은 아무래도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쉽게 승격전을 끝마쳐도 될까?

적어도 나와 비등하게 싸워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일단 다른 4명 쪽으로 가볼까?"

곧바로 근강술을 이용해 나무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4명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탓에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각 2명씩 팀을 맺고 전투를 치르고 있는 상황.

어느 한쪽이 우세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치열하긴 한데.. 너무 전투의 수준이 낮잖아?'

이제 막 D급 헌터를 지망하는 사람들한테 수준 높은 전투를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공방은 이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공격은 빗나가기 일쑤며, 검이 나무에 박히는 일까지 발생했다.

더 이상 보고만 있으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슬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시작은 사술을 이용해 모든 인원의 무기를 갈라버렸다

그러자, 상대들은 전부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 이건 대체..?"

"네놈들의 짓이냐!?"

"우리 짓이면 우리 무기를 왜 부수겠어?"

서로를 추궁하며 비난을 하는 상황.

나는 곧바로 땅으로 내려간 뒤, 제일 가까이 있는 녀석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그러자 배에 시원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상대들의 표정은 파랗게 질렸다.

"다, 당신 누구야!?"

"저게 가능하다고..?"

"F급 헌터가 어떻게 저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상대들은 자신들이 검을 맞대던 사이인 걸 잊은 모양인지, 서로 몸을 맞대며 나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던 탓에 단숨에 끝내주자는 생각을 한 뒤, 마력의 실을 뿜어냈다.

실은 공중에서 나풀거리더니, 상대의 목에 하나둘씩 감기기 시작했다.

"시, 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당신 F급 맞아!? 여기서 나가면 당신에 대해 항의할 거니까!"

그들은 직감적으로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걸 느낀 건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력의 실을 조이자 나머지 세 명의 목도 손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핏물이 고인 마력의 실을 거둔 다음 현황판을 바라보자, 벌써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 상태였고, 킬 스코어 1위는 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스산한 기운을 느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쿵-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더니,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땅이 푹 꺼져있었다.

그리고..

"찾았다."

금발의 미청년이 나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오싹한 미소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

"드디어 붙는 건가?"

"우리 길드의 유망주와 갑자기 나타난 초신성이라.."

현재 수호 길드의 관계자들은 승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VR 세계가 송출되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객석엔 여러 사람이 줄지어 앉아있었으며, 대부분 각성자의 가족이나 소속 길드 관계자들이 자리를 채운 상태였다.

"정지수가 지진 않겠죠?"

"그건 잘 모르겠다."

정지수는 수호 길드에서 거금을 들여 영입해온 루키였지만, 상대방인 초신성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F급 헌터를 주먹 한 방에 죽여버릴 수 있는 피지컬과 손에서 실을 뿜어 원거리에서 상대를 암살할 수 있는 스킬, 그리고 실전 경험이 많아 보이는 그의 노련함은 아무리 정지수라도 손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중력 조절 스킬이라면 간단히 이기지 않을까요?"

"아니, 중력 스킬의 사거리는 상당히 짧아. 초신성이 작정하고 원거리에서 실을 사용한다면 정지수가 패배할 가능성도 있어."

"에이, 실 같은 건 검으로 막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멍청아! 넌 아까 실로 무기를 부수는 장면 못 봤냐? 적어도 절삭력만큼은 여느 무기보다 예리하다는 말이잖아! 검으로 저항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차라리 실에 중력을 걸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최선일 거다."

그는 수호 길드의 관계자답게 예리한 판단력으로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이길 수 있을지,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 모든 데이터를 모아 경기를 끝낸 루키에게 전해줄 생각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초신성은 어디서 나타난 녀석일까요? 저런 원석을 그냥 방치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내가 알아본 결과, 아직 소속된 길드는 없다더군. 승격전이 끝나면 곧바로 영입 준비부터 해라."

그들은 김수까지 노리고 있는 모양인지, 벌써 영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중압감을 가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 주인이 등장하자, 관객석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여러 길드 스카우터들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수를 영입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는 청룡 길드에서 영입할 예정이니까."

"가, 강룡.."

한국 길드 랭킹 1위, 청룡 길드의 마스터 강룡이 직접 D급 승격전 관객석에 등장했다.

강자의 위엄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한다면 강룡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좌석에 앉은 뒤, 수호 길드 관계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고작 F급 헌터 한 명 때문에 당신이 움직인 겁니까? 김수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강룡님께서 직접 오실 정도의 인재라곤 생각하진 않는데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 능력은 조금 특별해서 말이지. 그는 장차 세상에 몇 없는 S급 헌터가 될 걸세."

본래 강룡은 자신의 무력을 토대로 길드를 1위로 끌어올린 것이 아닌, 길드원들을 성장시켜 한국 최고의 길드로 만들었다.

그의 능력은 그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이며,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런 그가 S급이 된다고 장담한 김수는 대체..'

수호 길드 관계자는 그제야 김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을 돌려 김수를 영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경쟁자가 강룡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그는 그저 마른 침을 삼키며 정지수가 김수를 이길 수 있도록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알기나 하는 건지, 강룡은 미소를 지으며 화면 속 김수를 응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어.'

그는 자신이 김수를 영입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9화

"얼굴 한번 살벌하네!"

다른 참가자들을 사냥하던 도중, 기습해 온 의문의 남성.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보물을 찾은 모험가마냥 살벌한 표정으로 웃었다.

옷에 묻은 피나 나를 공격해왔던 기술로 봐선 상당한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네가 김수냐?"

"날 알고 있나?"

"아니, 이제 알아갈 시간이다! 역중력!"

그는 내가 김수라는 걸 알자마자 검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그의 발걸음은 중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매우 가벼웠으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를 추격해왔다.

그에 맞춰 근강술을 발동한 뒤, 역으로 상대 쪽으로 파고든 뒤, 주먹을 내질렀다.

그때.

"중력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은 어느 순간 흑빛을 머금더니, 마치 빛처럼 빠르게 베어졌다.

그 모습에 위험을 감지하고 빠르게 마력의 실을 일 자로 펼쳤다.

챙-

마치 거대한 쇳덩이가 부딪힌 듯한 충격이 마력의 실에 전해지더니, 내 몸이 5M 정도 밀려났다.

"감은 좋네?"

그가 검을 칼집에 집어넣자, 주변 나무들이 반 토막 나면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베기로 이 정도의 위력을 낼 줄이야..

이제야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대는 아마도 중력을 다루는 것 같네. 하지만 사거리가 그리 길진 않아. 마력의 실로 최대한 멀리서 견제를..'

침착하게 상대방의 공격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한눈팔 시간이 있나?"

그는 또다시 맹렬하게 공격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마력의 실을 뿜어 상대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중력에 의해 마력의 실은 땅에 처박혔고, 접근하게 된다면 그의 중력을 버티지 못해 납작해질 것이다.

'방법을 생각해라..!'

그의 중력 조절도 무한하진 않을 것이다.

아까 중력검을 사용했을 때, 내가 방어하는 사이에 중력으로 찌부러트렸으면 됐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상대방의 중력 조절은 한 번에 한 대상에게만 가능하다는 거지!'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이번 싸움의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신경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력의 실을 사용해 적이 중력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예상대로 그는 중력을 사용해 마력의 실을 막아냈다.

그 틈을 노려 나는 다른 손으로 마력의 실을 뿜어 뒤를 노렸다.

상대방은 당황한 것인지, 뒤쪽에서 오는 마력의 실의 접근을 허용해버렸고, 그 결과..

"아.. 짜증 나는 놈."

뒤쪽으로 파고들었던 마력의 실도 바닥으로 처박혔다.

"중력은 한 번에 한 곳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조금 무리한다면 여러 곳도 가능하다!"

그는 무리한 탓인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이번 시도가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코피를 훔치며 머리를 싸맸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체력을 조금씩 깎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로 끝내주마!"

그는 본격적으로 중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있는 중력을 줄인 뒤, 높은 곳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몸에 중력을 걸어 공중에서 가속도를 붙인 채, 칼을 내리찍어왔다.

"큭!"

마력의 실로 막아냈지만, 전해오는 중력은 전혀 막아낼 수 없었다.

밟고 있던 땅이 푹 파이고, 다리에 금이 간 듯한 저릿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을 꿇게 됐다.

"뭐, F급치곤 잘했다."

그는 자신이 이겼다는 걸 확신하듯, 거만한 목소리로 사형선고를 했다.

머리 위로 올라간 검은 중력을 머금고 나를 향해 베어졌다.

그때.

"이걸 노렸다!"

나는 핑크공듀와 헤어진 뒤, 근강술과 변강술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극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지, 현재 내 스킬과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그 결과, 마력의 실에 변강술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마력의 실의 범용성은 한층 늘어났다.

"크헉!"

검을 막아낸 마력이 실의 형태가 변하더니,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뻗어 나가는 마력의 실은 적의 머릿속을 파고들더니, 그 안에서 또다시 분열을 시작했다.

마력의 실은 청년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이윽고 머리를 관통해냈다.

"너.. 이.. 개새.."

그 말을 남기고 쓰러진 청년은 데이터 입자로 쪼개져 사라졌다.

"쓰러트린 건가..?"

나는 곧장 바닥에 대자로 누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주변에 움푹 파여 있는 땅들을 보고, 그제야 내가 승리했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상대였다.

조금만 실수했다면 이 자리엔 그가 있었겠지.

나는 슬슬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읏..!"

다리에 금이 간 탓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바닥에 몸을 뉘었다.

'뭐, 이대로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도 괜찮겠네.'

현황판을 확인하니, 여전히 1위 자리는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후.. 하하! 내가 1등이다!"

뿌듯한 마음에 홀로 소리를 질렀고, 그렇게 나의 첫 승격전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뼈아프군요."

"머저리 같은 녀석. 끝까지 신중하지 못한 것이 저 녀석의 패인이다."

화면에 대자로 쓰러져있는 김수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수호 길드의 관계자들.

그들은 정지수가 패배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지켜보니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거금을 주고 데려온 루키가 F급 승격전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오명이 뒤따라올 우려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인 정지수의 마음이 꺾일 수도 있는 일이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당분간 혼자 놔둬야 할까요?"

"아니, 그럴 시간 있으면 훈련이나 더 하라고 해라. 쯧!"

그 말을 끝으로 수호 길드 관계자들은 털레털레 관객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주 좋아.. 내가 점 찍어 놓은 녀석답군.'

강룡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격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 루키가 자신의 길드원이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부푼 모양이다.

그때, 옆에서 안경을 쓰고 깐깐해 보이는 남성이 화면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장 약하다고 알려진 F등급의 싸움은 이 정도인가? 생각보다 수준이 높군."

그는 김수를 보고 감탄을 하는 듯한 말을 뱉었다.

그 말을 들은 강룡은 벌써부터 김수를 영입한 것처럼 자신이 기뻐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신생 길드겠군. 안타깝지만, 김수는 내가 데려가마.'

마음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던 사이, 승격전을 치룬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 장혜원씨!"

"장세진씨 맞으시죠? 저희랑.."

스카우터들은 빠져나오는 각성자들을 하나둘씩 잡아 계약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김수씨! 부디 저희와.."

"저희와 계약하시면 파격적인 조건을.."

"오빠~ 우리랑 계약 안 할래?"

승격전의 주인공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한 김수였다.

그가 등장하자 10명이 넘는 스카우터들이 달라붙었으며, 김수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때.

"다들 수고가 많군. 하지만 김수군은 내가 데려가야겠어."

한국 길드 부동의 1위! 청룡 길드의 마스터인 강룡이 나섰다.

모든 각성자들이 들어가길 원한다는 청룡 길드가 움직이기 시작한 걸 눈치챈 스카우터들의 낯빛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길드 마스터인 강룡이 직접 움직였으니, 계약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칫.. 하필 청룡 길드에서.."

"강룡 아재는 언제 봐도 카리스마 넘치네."

강룡의 등장으로 스카우터들은 김수를 놔두고 빠르게 해산했고, 어느새 강룡과 김수를 남긴 채, 주변이 텅 비어버렸다.

김수는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당황했나 보군.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

강룡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김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김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해왔다.

"강룡씨죠..? 청룡 길드의 마스터이신."

"잘 알고 있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청룡 길드에 들어오게나. 자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을 약속하지."

그는 무려 S급이 될 재목을 가진 청년.

강룡은 아직 자신의 손으로 S급 헌터를 키워본 적이 없던 터라 김수를 더욱 탐냈다.

김수는 강룡의 제안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고민하는 건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과 계약하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룡은 청룡 길드가 무명이던 시절, 직접 발품을 팔아 스카우터 일을 해내 왔고, 교섭엔 자신이 있었다.

"자네는 청룡 길드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군. 한국 1위라는 이름은 꽤 무겁네.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멘토, 최고의 동료까지! 무엇하나 떨어지지 않는 최고의 길드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 1위라는 걸세. 자네가 우리 길드에 온다면 자네가 가진 잠재력, 그걸 상한선까지 끌어 올려주지."

강룡은 이젠 슬슬 넘어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직 몸값을 높이기 위해 고민하는 척을 하는 중이지만, 마음은 이미 청룡 길드에 빼앗겼을 것이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한 것인지, 강룡은 김수에게 어서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

그때.

"아, 핸드님. 여기 계셨군요."

저 멀리서 강룡 옆에 앉아있던 사내가 김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룡은 설마 신생 길드 주제에 김수를 탐내는 건가 싶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강룡의 코웃음은 당황으로 바뀌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바트씨! 좀 늦으셨네요."

김수는 반갑다는 듯이 바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강룡은 본능적으로 김수의 손목을 잡았다.

"지, 지금 무슨.."

"아, 강룡씨. 죄송합니다. 저는 청룡 길드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니! 자네는 그 누구보다 청룡 길드에 어울리네!"

김수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낀 강룡은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소속된 길드가 있어서 말이죠. 죄송합니다."

"뭐..?"

김수 같은 실력자가 어째서 신생 길드에 들어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포기한다면, 평생의 버킷리스트인 S급 헌터 양성은 물 건너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회유한다면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한 강룡은 더욱 애절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고려해주게나! 자네의 잠재력이 아까워서 하는 말일세!"

"아니, 안 들어간다니까요? 왜 자꾸 그러세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아, 안 들어간다니까요!"

강룡은 김수가 자신을 거부하자, 더욱 질척이며 매달려오기 시작했다.

김수는 중년 아저씨가 자신에게 매달려온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욱 소름이 끼쳤던 건, 중년 아저씨가 자신에게 매달린다는 것이 잠깐이나마 기뻤다는 것이다.

김수는 강룡을 억지로 떼어낸 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버림받은 듯한 표정을 지은 강룡은 아쉽다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김수가 강룡을 뒤로한 채, 바트에게 돌아가려던 찰나.

강룡이 다급하게 김수의 손목을 잡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버, 번호! 번호라도 받아주게!"

"하아.. 알겠습니다."

번호를 건네받은 김수는 강룡을 향해 인사를 한 뒤, 바트와 함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강룡은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자며 기운을 차렸다.

"반드시 내 길드원으로 만들고 말겠다!"

강룡은 포기하지 않은 모양인지,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탐욕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강룡이 김수에게 까이는 장면은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이 목격했으며, 콧대 높은 강룡을 매몰차게 대한 김수를 향해 감탄하기 시작했다.

"청룡 길드를 차버린 철벽남!"

"어째서 강룡 아재가 저렇게 매달리는 거지? 헤어진 여친이라도 잡는 거 같았는데."

주로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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