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햐~"

내 손 안에서 빛나고 있는 D급 헌터 면허증.

이제야 한 단계 올라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괜히 면허증을 뽀득뽀득 닦고 보물 다루듯이 신중히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트.

"어째서 청룡 길드를 선택하지 않으셨나요?"

바트는 청룡 길드가 한국 1위 길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인지, 진심으로 의문을 느낀 모양이다.

확실히 청룡 길드는 한국 1위인 값을 하는 엄청난 길드였다.

실제로 인재들만 골라서 수집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청룡 길드 소속 헌터들은 뛰어난 성장을 이루었고, 그런 청룡 길드에서 그것도 강룡에게 권유를 받았다는 것은 나의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말이 아닐까?

D급 승격도 단번에 이루고 청룡 길드에게 권유를 받았다는 점은 평생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청룡 길드에 왜 안 들어갔냐고 묻는다면 간단했다.

"바트씨가 길드 만드신다면서요? 거길 들어가야죠."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바트가 길드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난 당연하게도 그 길드에 소속된다는 전제하에 생각했었다.

그만큼 현재 바트가 나의 정신적 지주임을 알아챌 수 있었고, 그의 길드에 가는 편이 청룡 길드보다 훨씬 유익할 거란 것을 느꼈다.

'적어도 내 비밀에 대해 아는 바트가 청룡 길드보단 훨씬 효율적인 방법으로 나를 키워주겠지? 그리고.. 청룡 길드는 이미 사람이 많으니,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다면 지원이 끊길 수도 있으니까, 나한테 집중해줄 수 있는 곳이 최고지.'

굳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바트는 내 생각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하! 그렇죠! 제 길드원 1호는 핸드님으로 정해져 있었죠!"

바트는 뺨을 긁으며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진 탓에 1등 상품으로 받은 상자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뭐가 나올까나."

"1등 상품입니까? 근데 그건.."

"네. 알이네요."

상자에 들어있던 건 수수께끼의 알이었다.

각성자의 기본 스킬인 감정을 사용해도 아무런 정보가 뜨지 않았고, 외관은 평범한 돌덩어리 같았다.

그때, 바트가 포인트 샵에서 고급 감정 돋보기를 사용하는 건 어떠냐는 말을 했다.

"500P네요? 한번 사용해볼게요."

곧바로 구매한 뒤, 알에 가져다 댔고, 나와 바트의 입을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게.

[수수께끼의 알]

등급:???

* 신수가 품고 있던 알이다.

* 평범한 방법으론 부화시킬 수 없다.

무려 신수의 알이었으니까.

10화

"이런 귀한 걸 고작 D급 승격전 1등 상품으로 주다니.."

난 보물을 다루듯이 알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알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신수의 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D급 승격전 상품으로 줄 만한 상품은 절대 아니었다.

"감정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가치를 모른 상태로 넘겼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려 신수의 알인데.."

신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S급 3위에 위치한 제라드의 파트너, 주작을 떠올릴 것이다.

화려한 외관과 강력한 능력, 게다가 충성심까지 뛰어난 탓에 모든 헌터가 갈망하는 존재가 신수였다.

그런 신수의 알이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부화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론 부화시킬 수 없다고 했으니, 부화기를 사용해도 그대로겠네요. 그렇다면.."

조금 미친 짓 같지만 나는 과감한 수를 두자고 마음먹었다.

손에서 실을 뿜어낸 뒤, 알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바트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신수의 알인데, 그런 방법으로 갈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 그런가요?"

바트의 말도 맞았다.

무려 신수의 알인데, 내가 뿜어낸 마력의 실에 금이 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할 것이다.

혹시 특수한 부화 방법이 있나 싶어, 알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때.

[신수의 알이 시선을 눈치챕니다.]

[부화율:0.01%]

알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부화율에 변화가 일어났다.

"뭐.. 뭐야..!"

그저 지긋이 바라봤을 뿐인데, 부화율이 올라갔다니..

신수의 알이라서 그런지, 부화 방식도 상당히 특이했다.

그걸 지켜본 바트는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인 신수들과 다른 녀석인 것 같군요. 관심을 받으며 부화하는 신수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마 지구 특유의 생명체가 아닐지.."

"다른 행성에도 신수가 따로 있나 보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여러 행성이 존재하다 보니, 그 행성을 대표하는 신수들도 다양합니다. 지구도 사방 신수라는 존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관심을 받아서 성장하는 종류의 신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사방 신수가 아니란 말인가?

어쩌면 동양권이 아니라 서양권의 신수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부화만 해준다면 온갖 정성을 들이며 키워주리라 마음먹었으니, 지속적인 관심만 주면 될 것이다.

"그럼 이 알은 평소엔 들고 다녀야겠군요."

"웬만해선 그래야겠죠. 혹시 모르니, 알을 들고 다닐만한 가방을 하나 주문제작 해드릴까요?"

"그건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바트와 이야기를 끝내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알에 관심을 주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부화율이 0.1에 도달했을 때쯤.

[신수의 알이 더한 관심을 원합니다.]

[더 이상 시선으로 부화율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게 뭐야!"

알님께서 더한 애정을 원하셨다.

***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핸하!

-핸드 방송에 이상한 마크가 달려 있는데 뭐임?

-설마 파트너 스트리머 달았냐?

"네, 맞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파트너 스트리머니까, 영상 도네이션 같은 것들 마구마구 부탁드립니다!"

파트너 스트리머가 되고 방송을 처음 켰다.

사람들은 내가 파트너 스트리머가 됐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고, 축하한다는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게다가 영상 도네이션을 보낼 수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여캠의 망령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영상 도네이션"

곧바로 영상 도네이션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상의 제목은 핸드 극딜 모음이었는데, 제목부터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곧바로 재생을 누르자, 고급스러운 왕좌에 앉아 거만하게 웃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핸드? 그 잔챙이 말씀하시는 거면 신경 안 씁니다. 허접한 실력으로 어찌어찌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건 성공한 모양인데.. 솔직히 저렇게 약하면 금방 질려 버리거든요.]

남성은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었고, 말투 하나하나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 욕을 하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오묘해졌다.

심지어 그는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살고 있다는 이유로 지구를 폄하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시청자들은 그 말에 동조했다.

[네? 핸드랑 붙어서 이길 자신 있냐고요?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런 허약한 놈한테 제가 질 리가 없잖아요? 제 검술 한 번이면 그 녀석 모가지는 바닥을 구를걸요?]

더 이상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성좌넷의 스트리머들이 질이 낮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놓고 방송에서 디스를 해가며 사람들에게 망신을 주다니..

나는 곧바로 그 스트리머에 대해 정보를 묻기 시작했다.

"저 사람 이름이 뭔가요? 진짜 무례한 사람이군요."

-오~ 핸드! 찐따 마냥 웃고 넘어가는 거 아니었냐구~

-피스라고 하는 놈인데, 성좌넷 유명 회사 소속임. 그런데 제일 약해서 인기도 제일 없음

-핸드야, 쟤한테 싸움 걸었다가 뒤지면 어쩌려고;

시청자들은 내가 발끈할 줄 몰랐다는 듯이 뜨거운 반응을 보냈으며, 간혹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내 디스를 하는 사람이 피스라는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리자드맨, 오크, 엘프 등등.. 여러 종족들이 나를 향해 여러 험담을 한 영상이 연달아 올라왔으며, 그 영상을 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미운털이 박힌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왜 저를 싫어할까요? 저도 나름 잘 생기고 재밌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속보) 핸드, 성좌넷에서 제일 잘생긴 스트리머라는 발언을 해 큰 충격을..

-잘생긴 건 모르겠고, 방송이 재밌긴 함.

-미움받는 이유는 간단한 듯. 자기들보다 시청자 많으니까 ㅋㅋ

저들이 이토록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고작 내가 본인들보다 인기가 많아서라니..

정말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좌넷의 스트리머들은 또X이가 많다고 들었으니, 타당하기도 했다.

"제가 이토록 미움받고 있는 줄 몰랐네요. 무슨 조치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이대로 계속 타 스트리머들이 내 욕을 하게 놔둬선 안 된다.

저런 식으로 여론몰이가 계속된다면 내 이미지가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며, 내 방송에 대한 선입견도 생기고 말 테니까.

적어도 본보기로 한 명 정도는 참교육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오늘은 적당히 던전을 돌다가 방종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일정을 바꿔야겠네요."

한가하게 던전이나 돌 시간은 없었다.

현재 내 무력으로 피스라는 스트리머를 쓰러트릴 수 없는 건 초등학생도 알 만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노가다보다는 무력증강 쪽으로 일정을 돌리는 편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오늘부터 훈련 빡세게 하겠습니다. 조금 지루해질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핑크공듀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냥 내가 패줄까?"

든든한 누님께서 대리 전투를 제안하셨지만 그래선 모양이 살지 않았다.

차라리 훈련의 멘토로 초빙하는 편이 탁월할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 소환권은 무려 10만 포인트이란 거금이 드는 물건.

매일 훈련 멘토로 부르기엔 부담이 가는 가격이었다.

"일단 새로운 스킬을 구매할 시기가 찾아온 거 같네요."

-드디어 사냐? 맨날 실뜨기만 하니까 약해 보이더라.

-포인트는 얼마나 모였음?

-이번엔 제대로 된 스킬 사라. 사술사의 첫걸음 같은 거 사지 말고!

사람들은 매일 같은 스킬에 염증을 느낀 것인지, 다른 스킬을 구매한다는 말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이번엔 희소성을 생각하며 스킬을 구매하면 안 된다.

적어도 확실하게 활용할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을 구매해야 승리 확률이 올라가니까, 신중하게 고르게 됐다.

"현재 모인 포인트는.. 106만 포인트네요."

-많이도 모았네 ㅋㅋ

-핸드 방엔 흑우들이 많으니까 ㅋㅋ

-그냥 피스한테 시비 걸지 말고, 포인트로 시청자 정모나 시켜주자

시청자들은 내 포인트가 생각보다 많이 모인 탓에 쓸만한 스킬을 추천해준다며 도배를 시작했다.

내가 따로 생각해둔 스킬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중력 마법이었다.

전에 싸웠던 사내의 중력 마법은 상당한 위력을 자랑했고, 범용성 또한 뛰어난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고, 이번에 포인트도 생긴 김에 구매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나의 선택을 만류했다.

-중력 마법은 안 돼!

-그.. 그들이 몰려온다고!

-중사모들한테 맞기 싫으면 배우지 마!

시청자들이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사모는 대체 무엇이길래 저토록 기피 대상이 되는지 궁금했다.

"중사모가 대체 뭐길래 그러시나요?"

-중력을 사랑하는 모임인데, 괴짜들이 가득하기로 유명함

-중력 마법 배운 사람들 방송에 나타나서 도배하며 중사모에 가입하라는 협박한다더라

-가입하면.. 정신이 미쳐버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니, 무슨 중력 마법을 배웠다는 이유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것이 믿겨 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괜히 하는 말은 아닐 것 같기에, 중력 마법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나는 다른 스킬을 찾기 위해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좋은 스킬들은 대부분 100만 포인트를 넘기네요? 오늘은 어쩌면 스킬 하나밖에 못 사고 갈 수도 있겠어요."

-일단 마나에 속성 부여하는 스킬부터 사자.

-저번에 실에 속성 부여 가능하다는 사실 알았으니, 필수이긴 할 듯.

나는 시청자들의 제안대로 30만 포인트를 주고 독 속성 부여 스킬북을 구매했다.

[스킬:독 속성 부여를 획득하셨습니다.]

곧바로 스킬을 익힌 뒤, 실을 뿜어내자, 초록빛이 일렁거리며 실에 맺혀 있었다.

시험삼아 바닥에 실을 늘어뜨리자, 치이익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부식하기 시작했다.

"오, 쓸만하네요. 제 실로 단번에 베어내지 못해도 독으로 천천히 중독시킬 수 있겠어요."

-ㄹㅇ 독거미자너..

-어째 사술이 더 괴랄해진 거 같은데..

시청자들도 독의 위력을 보고 감탄의 채팅을 쳤다.

적당히 마음에 든 나는 다른 스킬을 찾기 위해 스킬 카테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한 스킬.

[용언 마법]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마법이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용언 마법이란 드래곤이 마력을 담아 말하면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는 마법이었다.

예를 들자면 불이 붙어라, 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불이 붙는다는 말이었다.

"이, 이걸로 살까요..?"

용언 마법은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가진 스킬이었고, 강력한 능력을 자랑하기에 구매해도 괜찮은 스킬이었다.

하지만..

-ㅋㅋ 그걸 산다고?

-아니, 왜 자꾸 우리 돈을 함부로 버리려고 하냐;

-상품평 읽으면 그 마음 싹 달아날 거다

시청자들은 용언 마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시청자의 말대로 상품평을 읽기 시작했는데, 별점이 사술사의 첫걸음과 맞먹을 정도로 낮았다.

-아니, 용언 마법이라서 용만 읽을 수 있냐? 왜 해석이 안 되는데!

-냄비 받침대로 딱입니다.

-난 용인데, 이건 나도 못 읽음 ㅋㅋ

-표지부터 해석이 안 된 걸 보고 깨달았어야 했는데..

상품평도 하나같이 부정적인 말이 가득했다.

대부분 해석이 안 돼서 읽을 수 없다는 댓글이 많았고, 환불해 달라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그럴게.

"저.. 이거 읽히는데요?"

내 눈엔 용언 마법의 표지가 확실하게 읽히고 있었으니까.

11화

일반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소문난 용언 마법 스킬북.

하지만 어째서 내 눈에만 제대로 읽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초부터 배우는 생활 용언..? 이라고 적혀 있네요."

마치 자취요리책을 연상시키는 표지는 나에게 있어서 묘한 친근감을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믿을 수 없다며 채팅을 쳤지만, 내 눈엔 제대로 읽힌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진짜 제대로 보여서 저도 놀랐어요! 이거 무슨 운명적인 만남 같은 거 아닐까요?"

-잘못된 만남 아니냐..? 그거 내려둬라;

-아니, 얼마나 갖고 싶으면 읽힌다는 거짓말까지 하냐;

-냄비 받침대로 사용하려면 그냥 다른 스킬북을 사라고!

시청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용언 마법에서 벗어나라는 채팅을 쳤고, 그럴 때마다 내 기분은 더욱 답답해져 갔다.

나는 일단 용언 마법의 가격부터 확인하자고 마음먹었다.

용언 마법의 가격은 100만 포인트.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76만 포인트로는 구매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후회가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용언 마법 사용하면 시청자들 다 자지러질 텐데.. 이걸 포기할 순 없다고..!'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용언 마법을 사용한다면 드래곤 계열 시청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수금을 할 수 있을 데까지 해보자고 마음먹은 뒤, 카메라로 얼굴을 돌렸다.

"자, 형님들! 전 용언 마법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포인트가 살짝 부족하네요?"

-살짝? 24만 포인트가 살짝이냐?

-자낳괴 다 됐네;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핸드는 포인트 상점에서 살아!

시청자들은 한없이 단호했다.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24만 포인트를 받기 위해선 적어도 큰손 3명 정도는 움직여줘야 했다.

내 방송의 큰손, 핑크공듀와 포르테, 라인.

한번 쏠 때마다 1만 포인트는 우습고 많을 땐 10만 포인트도 한 번에 후원해줄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존재들을 구슬려야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핑크공듀를 꼬드기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이상, 어느 정도의 포인트를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서 기둥서방에 빙의한 뒤, 핑크공듀를 호출했다.

"피, 핑크공듀님 계세요..?"

[핑크공듀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있는데? 왜?"

"그.. 포인트 좀.. 지원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기둥서방이 일 나가는 아내에게 용돈을 타낼 때처럼 애절하게.. 또 비굴하게..

그러자 시청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핑크공듀에게서 답변이 왔다.

[핑크공듀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흠.. 조건이 있는데."

"조건이요? 말만 하세요!"

그녀는 조건부로 포인트를 후원해준다고 말했다.

그녀의 조건이 무엇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혹한 일은 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의 조건을 수용한다고 말했고, 핑크공듀의 답변을 기다렸다.

[핑크공듀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앞으로 날 부를 때, 누님이라고 부를 것. 그리고 다음에 한 번 나랑 데이트할 것. 이상이다."

"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핑크공듀 만큼은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누님이라니.. 아니, 그건 수용할 수 있다고 쳐. 하지만 데이트는 좀 아니잖아!'

여긴 팝콘을 튀기는 곳이 아닌데, 돈으로 스트리머를 구매한다는 듯한 뉘앙스는 확실히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현재 내 방송의 회장은 핑크공듀였고, 그녀에게 잘 보여야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포인트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누님.."

[핑크공듀님께서 15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일정은 네가 잡아라. 나한테 확실하게 반하게 만들어 줄 테니."

-핸드 사형선고 ㅗㅜㅑ

-특종)15만 포인트에 삶을 팔아넘긴 남자가 있다!?

-아직 9만 포인트 정도 모자란 데, 어떡하려고?

일단 내 몸을 볼모로 15만 포인트를 채우긴 했는데, 나머지 9만 포인트가 문제였다.

큰손 중, 한 명인 포르테는 주로 미션을 걸며 포인트를 주는 방식을 선호했고, 나머지 한 명인 라인은..

[라인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아! 핸드 엉덩이 때리고 싶다!"

보이다시피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니까.

***

"지금.. 지원을 끊겠다는 말입니까?"

금발의 미청년이 얼굴을 한껏 구기며 화가 난 듯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청년을 설득했다.

"정지수, 자네도 이해해 줄 거라 믿네. 자네가 D급 승격전에서 추태를 보인 탓에 수호 길드의 명예에 금이 간 상태거든. 그 결과 고위직에서 움직이게 된 걸세."

지수는 눈앞의 중년이 그저 둘러대기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D급 승격전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길드의 명예에 금이 갈 일은 전혀 없었고, 고작 F급 신인의 일과를 고위직들이 하나하나 살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지수의 머리엔 점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제 사정 아시잖아요? 수호 길드의 지원이 끊기면 더 이상 제 동생을 돌볼 사람은.."

"그것도 유감이네. 하지만 길드의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이만 나가주게나."

중년은 타협 따윈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고, 그 행위가 불안정한 감정의 기폭제 역할을 해냈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중년을 노려보던 지수는 더 이상 수호 길드에서 무엇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지수는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저, 수호 길드를 나가겠습니다. 당신들이 지원해준 장비, 무기, 돈..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가져가시고, 계약서에 위약금 관련 내용은 없었으니 잡음은 안 나오리라 믿습니다."

"그대로 수호 길드를 나갈 셈인가? 자네의 소문은 이미 타 길드에 쫙 퍼진 상태라 길드 가입이 어려울 텐데?"

"적어도 한 번 실패했다고 매몰차게 차버리는 길드보단 신생 길드가 훨씬 났겠죠."

지수는 중년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탈퇴 선언을 한 이상, 길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다른 길드를 찾아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심신에 안정이 될 터.

지수는 중년에게 예의상 인사를 한 뒤, 길드 건물을 나왔다.

"미치겠네. 진짜로 다른 길드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기세 좋게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사실상 무대책이나 다름없는 상황.

지수는 일단 동생이 입원한 병원을 향해 걸었다.

그때.

"하아.. 벌써 시간이 된 건가?"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세상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 증상은 중력 조절 능력을 개화하면서 덤처럼 붙은 마력 과부화라는 병이었고, 동생을 병원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든 병이었다.

다행히 지수는 능력을 개화하고 쓰러질 정도로 증상이 심하지 않았기에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지만, 병의 여파로 머리가 금발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지수의 동생은 병을 이겨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고, 벌써 1년째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빠, 빨리..!"

지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스틱 형태의 무언가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깊게 한 번 속으로 삼켰다.

그 물건이 정체는 마력 과부화의 부담을 줄여주는 약이었고, 정상적인 루트로는 얻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후우.. 이것도 이제 아껴 피워야 하나?"

괜히 입의 연초를 잘근잘근 씹으며 병원에 다다르는 데 성공한 지수.

지수는 병원에서 풍겨오는 소독약 냄새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찌푸리며 계단을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누워있는 침대에 도착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동생.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 힘들었던 지수는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지아야, 오빠 왔어. 아무 일 없었지?"

지수가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기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지아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준 뒤,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지아야.. 오빠 오늘 길드에서 짤렸다? 그래서 여기 자주 못 올지도 몰라. 그래도 너무 원망하지 마. 오빠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지만, 약 5분 동안 멍하니 앉아 대답을 기다린 지수.

이제 슬슬 가야 할 때가 찾아온 거 같다.

지아의 병을 치료하려면 무려 10억이라는 거금이 들었다.

그 금액을 벌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멈춰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아야, 오빠 이만 가볼게. 3일 뒤에 다시 보자."

그 말을 남기고 병실 밖으로 빠져나온 지수.

그런 지수 앞을 한 남성이 가로막았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은 안경을 쓸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지수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만.."

"제 이름은 바트라고 합니다. 길드를 탈퇴하셨다고 들었는데, 저희 길드에서 일해 볼 생각 없으십니까?"

바트의 인재 영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라인님! 1만 포인트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절 한번 해드리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풀썩 엎드려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봤다면 이상한 눈으로 봤을 것이 뻔했다.

[라인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아! 엎드린 핸드 머리 짓밟고 싶다!"

아주 미X놈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수금을 이어가면 머지않아 100만 포인트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인은 내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라인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핸드야, 포인트 받고 싶냐?"

라인은 갑자기 컨셉을 버리고 협상을 시도해왔다.

한 달간 방송하면서 라인이 저런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지금이 협상하기 제일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원하시나요?"

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핑크공듀처럼 데이트를 원하는 거라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니까.

하지만 라인은 의외로 정상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라인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내가 요즘 고민이 있거든? 언제 한 번 컨텐츠 만들어서 게스트로 초대해줘."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고민 상담 컨텐츠를 원했던 라인.

큰 부담이 가는 조건이 아니었기에 냉큼 수락했다.

"예! 라인님을 위한 컨텐츠, 조만간 한 번 잡도록 하겠습니다."

-아,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용언 마법을 구매하게 되버렷..!

-근데 라인이 진지하니까 좀 이상하네;

-난 솔까 엉덩이 한 번만 때리게 해달라고 할 줄 알았음 ㅋ

나는 라인에게 게스트 초대 약속을 한 뒤, 인증 영상까지 박제해놨다.

핑크공듀와 달리 치밀한 구석이 있었지만, 어차피 지킬 생각이었기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라인님께서 10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아! 핸드 엉덩이 때리고 싶다!"

본래의 컨셉으로 돌아온 라인은 10만 포인트를 후원하고 사라졌다.

이젠 용언 마법만 구매할 일만 남은 상황.

나는 포인트 상점을 열어 용언 마법 스킬북 구매를 눌렀다.

그러자 사술사의 첫걸음을 살 때와 달리 다른 메시지창이 떴다.

[이 물건은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구매하시겠습니까?]

워낙 피를 보는 사람이 많기에 미리 해놓은 조치로 보였다.

나는 거리낌 없이 구매를 눌렀고, 어느새 내 손안엔 용언 마법 스킬북이 쥐어져 있었다.

-이미 샀으니까, 제대로 익혀라

-만약 핸드가 용언 마법을 제대로 습득하면 파급력 엄청날 듯;

-드래곤들 벌써 침 고이는 소리 다 들린다 ㅋㅋ

나는 시청자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용언 마법서를 펼쳤다.

내 예상대로 용언 마법서의 안은 제대로 해독된 상태였고,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상당히 난해했다.

"하지만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지!"

굳어버린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독서를 이어간 결과, 용언 마법 스킬북을 정독해냈다.

그러자 스킬북이 빛의 입자로 쪼개지더니, 내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초급 용언 마법을 획득하셨습니다.]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14 민첩:12 내구:11

정신력:9 마력:21 행운:7

스킬:[성좌넷][사술][근강술][변강술][초급 용언 마법]

내 상태창에 각인된 용언 마법은 그 어떤 스킬보다 늠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내가 용언 마법을 익힌 걸 알아챘는지, 후원으로 어서 보여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일단 오크 던전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적당한 던전을 골라 입장했다.

던전엔 오크가 약 30마리 정도 모여있었으며,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채비를 마친 뒤, 멘트를 이어갔다.

"용언 마법 지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멘트를 뱉은 뒤, 용언 마법의 사용 방법을 복기했다.

용언이란 말에 마력을 담는 행위.

본래 마력 컨트롤은 특기인 탓에 금방 감 잡을 수 있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력을 담아 내뱉었다.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그 순간, 던전의 모든 오크가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12화

피를 흩뿌리며 반으로 갈라지는 오크들.

그 아름다운 광경은 모든 시청자의 눈에 확실히 각인 됐으며, 반으로 갈라진 채 죽어있는 오크들은 내가 용언 마법을 익혔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지, 진짜로 익혔다고?

-야.. 너 정체가 뭐야?

-용이 내가 된다!

시청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채팅으로 도배했으며, 나 또한 현 상황이 꿈만 같았다.

고작 말 한마디로 이 정도의 학살이 가능한 스킬이라는 점에서 놀라웠으며, 더 놀라운 것은..

"어, 어지러워..!"

한 번 사용했을 뿐인데, 심각한 마력 탈진 현상이 찾아왔다.

예전과는 달리 마력 스탯도 늘어난 상태라 어느 정도는 감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비틀거리는 몸을 최대한 제어하며 벽에 기댄 뒤, 미끄러지듯 앉았다.

"용언 마법은 확실히 배운 것 같습니다. 다만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네요."

-아니, 그 정도 성능인데 당연히 마력 오지게 잡아먹지!

-실화냐? 어떻게 인간이 용언 마법을 배우는데!

-핸드야,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용언 마법 좀 알려주면 안 됨?

사람들은 마력 탈진 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듯, 오히려 성능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어느 사람은 직접 용언 마법을 알려달라며 조르기도 했으며, 다른 방송에 좌표를 찍힌 모양인지 처음 보는 시청자들이 급속도로 유입이 됐다.

평소 천명을 유지하던 방송이 어느새 5천 명을 돌파한 상황!

[현자타임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젊은이.. 용언 마법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인가..?"

[용왕시대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야, 나 드래곤인데.. 용언 마법 좀 알려주면 안 되냐? 내가 아는 드래곤들 전부 용언 마법 못 쓰더라."

마법에 관심이 있는 시청자들도 간절하다는 듯이 후원을 보내왔다.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스킬이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심지어..

-청의 마탑에서 강의해 볼 생각 없음? 나 마탑주라 씹가능인데.

-무슨 소리야! 핸드는 황의 마탑에서 데려갈 거다!

나를 둘러싼 마탑주들의 전쟁까지 일어났다.

분쟁으로 인해 채팅창은 순식간에 더러워졌고, 나는 일단 채팅방을 얼린 다음 상황 정리에 나섰다.

"다들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용언 마법을 익혔지만, 현재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용언 마법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은 이해하지만, 현재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더 성장하고 적당한 성취를 이룬다면 여러분에게 용언 마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깔끔한 교통정리였다.

나도 몰랐지만, MC에 소질이 있었던 건 아닐까?

말을 마친 후, 채팅방을 원 상태로 복구하자, 시청자들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 말에 찬동해줬다.

-하긴, 배운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유난 떠는 건 좀 추했지 ㅋㅋ

-마탑주들 채금 먹음? 채팅 좀 쳐봐 ㅋㅋ

-핸드는 성장이 빠르니까, 의외로 금방 될 듯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벽에 손을 짚고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제야 확실하게 보이는 반으로 쪼개진 오크들.

내가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갈라진 오크들은 소량의 마석을 남겨둔 채,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요."

-근데 용언 마법은 어디까지 활용 가능함?

-번개를 치게 만들 수도 있음?

-궁금하긴 하네 ㅋㅋ

"음.. 글쎄요?"

용언 마법의 한계 말인가?

단계가 초급인 만큼 아직까진 엄청난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스킬북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초급 단계는 생명체에게 간섭할 수 있는 정도, 중급부턴 미생물에 의지를 담을 수 있으며, 고급에 다다르면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지 아직까진 대단한 일은 할 수 없네요."

-방금 그게 대단한 거 아니면 뭔데 ㅋㅋ

-지능적으로 맥이네 ㅋㅋ

-핸드야 반으로 갈라지고 싶냐?

시청자들은 용언 마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뜨거운 반응을 보였으며, 용언 마법의 여파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스트리머 피스가 한 달간 휴방 선언을 했다고요!?"

경쟁자가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

"네? 1인용 던전이 다 찼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다른 던전은 자리가 널널한 상태이니,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낭패였다.

방송을 켜기 위해선 1인용 던전이 제격이며, 일반적인 던전은 타인과 환경을 공유하기에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방송을 쉴 수는 없고..'

최근 방송에 물이 오른 상태라 그대로 쉬기엔 무언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뭐, 따지고 보면 첫 방송도 공유형 던전에서 시작했으니 괜찮겠지.

나는 직원에게 적당한 던전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직원은 감사하다며 열정적으로 알맞은 던전을 찾아주기 시작했다.

"이 던전은 어떠신가요?"

"크랩킹 던전..? C급 파티 던전이네요? 왜 하필 여기를..?"

"현재 김수님은 D급 헌터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이 크랩킹 던전은 B급 1명, C급 2명, D급 1명 조합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 정석적인 조합입니다. B급은 후배를 위해, C급는 훈련을 위해, D급은 경험을 위해 진행하는 거죠. 현재 D급인 김수님께선 고랭크 던전의 경험은 전무 하신 것 같으니, 한 번쯤은 경험해보시는 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렇게 던전을 배정해준 줄 알았는데, 내 던전 클리어 기록도 확인해가며 꼼꼼히 계산해준 모양이다.

확실히 나는 C급 이상 던전을 클리어해본 적이 없었고, 경험은 상당히 부족한 편에 속했다.

게다가 파티 던전은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도 없으니, 이번 던전은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을 터.

나는 직원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고 그 파티에 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네, 접수 완료됐습니다. 현재 D급 헌터의 자리가 빈 파티를 찾아놨으니, 여기에 적혀 있는 곳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항상 수고 많으십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남긴 뒤, 종이에 적힌 주소로 이동했다.

***

"안녕하십니까! 핸드입니다!"

-핸드야 늦었구나

-오늘은 뭐하냐?

"오늘도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다만.."

-다만?

-뭐, 또 멘토라도 부르게?

"아뇨. 오늘은 파티 사냥을 해 볼 생각입니다! 총 4명으로 구성된 파티로 던전을 클리어할 예정이며, 이 파티에서 제일 약한 건 아마 저일 겁니다."

-드디어 핸드가 사람들이랑 교류하는구나!

-하도 혼자 다니길래, 본능이 찐따인 줄 ㅋㅋ

-팩폭하지마라! 핸드 울겠다.

지금까지 쭉 혼자서 방송을 하다 보니, 시청자들은 타인의 출연을 기다린 모양이다.

내 방송에 불순물이 섞여, 시청자들이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한 시름 놓았다.

"지금 파티원들을 보러 갈 예정입니다만, 제가 방송을 한다는 것은 최대한 숨기고 싶으니, 여러분들의 채팅과 후원에 반응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나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을 돌렸다.

대기실에 입장하자, 3명의 남녀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내가 들어서는 동시에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같이 파티원으로 활동할 김수라고 합니다."

"아, 김수씨군요. 저는 B급 헌터, 박태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성인 태진이 악수를 청해왔다.

나쁘지 않은 느낌.

적어도 악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D급 주제에 제일 늦다니.."

"뭐, 짐꾼 취급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자."

C급 두 명은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어째서인지 나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벌써 들려오는 불협화음에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눈앞의 박태진만 잘 따라간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후, 다시 한번 박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박태진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저 두 분은 유명 길드에서 키우고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라, 김수씨께서 불쾌하다고 느끼실만한 언동을 자주 하실 겁니다. 그래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박태진씨는 괜찮으십니까?"

"저는 두 분이 속한 길드에서 돈으로 고용한 입장이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최대한 김수씨의 편의를 봐 드릴 테니, 잘해봅시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고랭크의 헌터라면 건방지고 언동이 거칠 줄 알았는데, 나보다 훨씬 신사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

"잠깐, 둘이서 뭘 속삭이는 거야? 빨리 던전 안 들어갈 거야?"

"아, 죄송합니다! 자, 김수씨! 포지션부터 정합시다!"

태진의 안내에 따라 두 여성의 앞에 섰다.

제일 먼저 자신의 스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제일 먼저 태진이 자신의 스킬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박태진, B급 헌터입니다. 저는 주로 방패를 사용하는 탱커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스킬도 방어 위주니, 전위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내 이름은 김지아, 메이지 계열 헌터야. 주로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하고, 위력으로는 B급한테도 비빌 수 있을걸?"

김지아라고 소개한 여성은 호기로운 표정으로 박태진을 쳐다봤다.

그런 시선을 눈치챈 태진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난 주하민, 검사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할 일 할 테니, 참견하지 말도록."

주하민이란 여성은 아무래도 파티의 뜻을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과신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뭐, C급이니까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김수입니다. D급 헌터이며, 적 수색이 가능하며, 공격 쪽에도 자신이 있습니다만.. D급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아무리 잘나도 D급이다.

헌터 랭크는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기에, 저들은 나를 상회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을 터.

내 자기소개를 듣자마자, 김지아가 "누가 D급한테 기대를 해?"라며 작게 속삭였지만, 못 들은 척했다.

"자, 그럼 서로에 대한 소개도 마친 상태니, 슬슬 들어가 볼까요?"

"이제야 들어가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귀찮아."

"열심히 해봅시다!"

각자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후, 던전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파티 던전:크랩킹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의 배경은 바닷가였다.

실제 해운대에서 볼 법한 푸른색 바닷물과 황금빛 모래사장은 전투 대신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만들었지만, 던전은 던전이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어."

검사인 주하민이 무리에서 뛰쳐나갔다.

게다가 그의 동료인 김지아는 익숙하다는 듯이, 내게 모든 짐을 넘기기 시작했다.

-와.. 이건 진짜 오합지졸인데?

-이게 파티냐?

-핸드! 구른다!

아무래도 나와 박태진을 제외하면 정상인이 없는 모양이다.

이번 던전은 꽤 고단할 예정인가보다.

13화

"지아씨!"

"나도 알아! 명령하지 마!"

박태진이 방패로 적의 진입을 막고 김지아가 적을 불태운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딱 맞물리는듯한 느낌을 주는 파티 사냥.

게다가 김지아의 자기소개는 허언이 아니었는지, 꽤 강력한 마법을 연달아 쏘아내고 있었다.

할 일은 모두 앞에서 해버렸기에, 나는 그저 몬스터의 부산물을 줍는 기계가 된 상태였다.

-방관형 스트리머 ㅋㅋ

-핸드야! 하는 것도 없는데, 춤이라도 춰서 응원해야지!

-뭐, 잘 싸우긴 하는데.. 핸드보다 강해 보이진 않는데?

확실히 나도 그렇게 느끼긴 했다.

B급의 박태진의 탱킹 실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단 하나의 몬스터도 흘리지 않고, 박태진 선에서 전부 쳐내고 있었고.

김지아가 너무 앞으로 뛰쳐나오면, 간간이 주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김지아의 실력이 너무 부족해.'

확실히 화력은 좋았으나, 명중률이 크게 떨어졌고, 마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탓인지 벌써부터 지친 티가 드러났다.

저대로라면 금방 퍼지고 말 터.

그런 점을 눈치챈 박태진은 김지아에게 천천히 사냥하라며 주의를 줬다.

하지만..

"뭐? 나를 얕보는 거야? 난 아직 여유롭다고!"

박태진이 자신을 깔본다고 착각한 김지아는 더욱 빠르게 마법을 쐈다.

분명 적은 랍스터 형태의 몬스터일 텐데, 김지아의 마법이 닿고 나면 까만 숯이 된 상태로 발견됐다.

'저대로라면 내가 나설 때가 금방 찾아오겠네.'

현재 주하민이 단독 행동을 나선 이상, 김지아가 지치면 남는 딜러는 나뿐이다.

대충 이 던전의 난이도도 확인했으니, 내가 나서기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김지아가 언제쯤 쓰러질지 예측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채팅창에서 선수를 친 모양이다.

-쟤 쓰러지는데, 5분 남았다.

-아니? 3분이면 쓰러짐 ㅋㅋ

-무슨 소리야? 홧병난 탱커가 법사 두들겨 패서 지금 쓰러질 거임ㅋ

시청자들도 김지아가 오래 못 간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런 시청자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김지아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지쳐버렸다.

"헥.. 조금만 쉬었다 가자!"

"아직 사냥을 시작한 지, 20분도 안 됐는데.."

"뭐!? 내가 쉬자고 하면 쉬는 거야!"

거의 반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된 우리는 시간을 때울 겸,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던전엔 몬스터 웨이브 트리거라는 장치가 존재하는데, 그 트리거를 건드릴 시엔 저희는 모두 죽었다고 보면 됩니다. 약 200마리가 넘는 크랩킹들이 나타나거든요."

"그런 장치가 있다니.. 조심해야겠군요."

"김수씨는 이 던전은 처음이신가요?"

"네, 파티 사냥을 한 것도 처음이네요. 줄곧 혼자서 사냥했으니."

"하긴~ 누가 D급이랑 파티 사냥을 하고 싶겠어?"

김지아는 사사건건 나에게 간섭을 해왔지만, 시청자들이 나를 대신해서 그녀에게 욕을 해줬기에 참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대화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D급 승격전에서 1등을 하셨다고요? 대단하시네요! 저는 10등 안에 드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흐음? 보기보다 비전은 있나 봐? 그래 봤자 D급 수준이겠지만."

"확실히 운이 좋았죠. 저도 제 실력을 과신하진 않아요."

최대한 겸손하게.

괜히 잘난 척을 했다간 김지아가 비꼴 수도 있기에,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서 얻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B급 헌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과 그마저도 해외로 이민 가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박태진 같은 경우는 가정이 있기에, 한국에 남은 모양이다.

"한국은 헌터에 대한 대우가 타국에 비해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흥! 그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 선택은 자유니까요."

"아니, 나는 용납 못 해! 한국 사람이면 한국에서 끝까지 살아야지!"

혼자 불이 붙은 김지아는 이민은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성을 냈고, 나와 태진은 묵묵히 그녀의 히스테리를 받아줬다.

***

"죄송하지만, 김수씨도 사냥에 참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괜찮겠어요? 지아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아뇨. 아까 김수씨께서 D급 승격전 1위를 했다는 말에 흥미가 생기셨는지, 사냥을 허락하셨더라구요."

사냥을 허락하다라..

마치 이 파티를 자기가 주무르는 듯한 뉘앙스로 말해주는구만.

이거.. 서열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사냥에 참여하도록 하죠. 대신.. 태진씨가 조금 고생하실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B급을 찍은 게 아니라, 아직 팔팔합니다."

나는 박태진의 허락을 맡고 사냥에 참가했다.

줄곧 그녀의 사냥을 지켜보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던 참이라 딱 좋은 타이밍이라 느꼈다.

나는 김지아와 가깝게 선 뒤, 손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호오..?"

"희귀한 스킬이군요."

마력의 실을 본 김지아와 박태진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으며, 실에 맺힌 독이 모래를 녹이는 것을 발견하고 식겁한 소리를 냈다.

"데미지는 확실해 보이는군요. 그럼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박태진이 스킬로 크랩킹들의 어그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킬이 너무 잘 들어간 모양인지, 평소에 끌어오던 수를 넘어선 5마리의 어그로를 한 번에 끌어버렸다.

"이런! 다들 조심하세요!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안 해?"

박태진은 최대한 몬스터의 진입을 억누르며 후방을 보호했고, 김지아는 겁을 집어먹은 건지, 뒤로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대로 계세요."

나는 찔끔찔끔하는 사냥에 이골이 난 상태였기에, 오히려 몬스터가 몰리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박태진에게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움직이는 마력의 실.

실은 나풀거리며 크랩킹들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마리의 크랩킹을 사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2초.

그 광경을 지켜본 김지아와 박태진은 입을 떡 벌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 단단한 크랩킹을 한 방에..! 정말 D급 헌터 맞으십니까!?"

"무, 무슨.. 아니, D급 주제에 제법인데? 꽤 쓸만하네!"

박태진은 제대로 된 딜러가 한 명 생겼다는 생각과 내 등급이 D급이라는 것에 의심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김지아는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얼굴을 팍 구겼지만.

이내 표정을 되돌리고 형식상 칭찬을 시작했다.

하지만 난 칭찬 같은 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단 한 가지!

[포르테님께서 20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김지아 자존심 뭉개기 미션 성공! 우리 핸드 꽃길만 걷자!"

포인트가 걸린 포르테의 후원 미션뿐이었다.

'흐흐! 김지아가 효녀네, 효녀!'

마음속으로 김지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

"그나저나 지아씨. 하민씨가 어째서 단독 행동을 하는 건지 알고 계시나요?"

"왜? 넌 하민이 취향 아니니까, 포기하는 편이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명색이 C급 파티 던전인데 홀로 사냥을 해도 괜찮을지 걱정돼서요."

같은 C급인 김지아의 실력을 봐서는 확실히 B급과 근접한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홀로 이 던전을 누빌 만큼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무기는 검.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몬스터에게 접근하는 건 거의 필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김지아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하민이는 C급이지만, C급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아, 자세한 건 귀찮으니까,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봐!"

김지아는 괜히 성을 내며 이야기를 끊어버렸다.

괜히 머쓱해진 탓에 태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지아씨와 하린씨는 어디 길드 소속인가요?"

"길드 말인가요? 김수씨도 흔히 들어봤을 곳입니다."

"제가 흔히 들어봤을 곳이요?"

"예. 청룡 길드라고 아시죠? 한국 최고의 길드. 그곳에 속한 분들입니다."

어쩐지 거만하다 했는데, 청룡 길드 출신이라면 맞아떨어졌다.

자신이 한국 최고의 길드에 속해있다면, 기고만장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만약 그때 강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 두 명이 내 선배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들어가길 잘했다!'

그저 바트의 길드에 들어갈 생각에 청룡 길드를 거절했는데, 이런 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올 줄이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장비를 점검했다.

"슬슬 사냥을 이어가죠."

"벌써? 좀 더 쉬고 싶은데.."

"던전을 클리어하고 쉬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박태진은 벌써 김지아를 다루는 법을 익힌 모양인지, 그녀를 살살 어르고 달랬다.

가까스로 사냥을 시작한 후, 태진의 고생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도 몰이 사냥을 좋아하기에, 태진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몬스터를 모아달라고 부탁했고, 나에게 탄력을 받은 지아는 괜히 경쟁심을 느끼며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오롯이 태진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태진이 몬스터를 흘리는 일은 없었다.

'상당히 유능하네. B급은 전부 저 정도 하는 건가?'

태진의 탱킹에 감탄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건지, 시청자들도 칭찬 일색의 채팅을 쳤다.

-그나마 볼만한 녀석이 탱커네 ㅋㅋ

-딱 부하로 두기 좋은 스타일

-어머! 저 풍근 봐!

주로 여성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는데, 나에겐 볼 수 없는 근육질 몸매라서 그런지,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괜히 태진을 팔아 돈을 버는 것 같아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태진씨, 죄송합니다. 태진씨 아내분도 정말 죄송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성좌넷 시청자들의 성희롱 대상이 된 태진.

나는 애써 채팅을 외면하며 사냥을 이어갔다.

그러던 도중.

"어? 저 뭉텅이는 대체?"

"잠깐! 무언가 이상합니다. 어째서 저 정도로 많은 크랩킹이..?"

지아가 발견한 뭉텅이는 엄청난 수가 모인 크랩킹 무리였으며, 척 보기에도 다가가면 안 될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

'저기에 주하민이 있다는 예감이 드는 거지?'

다른 파티원들도 같은 생각이 든 건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특히 태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한 뉘앙스로 머리를 싸맸다.

"몬스터 웨이브는 진짜 위험한 상황입니다. 단순히 몬스터가 많은 것이 아니라, 엘리트 몬스터도 섞여서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죠."

태진의 표정에선 망설임이 느껴졌다.

이성은 주하민을 버리고 도망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렇게 행동하기 싫은 모양이다.

"저는 하민씨를 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당연히 구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D급, 너는 어떻게 생각해?"

"파티원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당장 구하러 갑시다."

태진은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오합지졸 파티는 사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내가 이런 실수를..!'

혼자서도 충분할 줄 알았다.

길드 마스터가 인정한 잠재력.

끊임없는 노력을 동반한다면 A급 헌터에 오를 수 있을 거란 확언을 받자마자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

게다가 최근 길드 마스터가 한 헌터에게 푹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조급해진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탓에 몬스터 웨이브 트리거를 건들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미 크랩킹을 몇십 마리나 죽인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변에 깔린 시체들과 이가 나가버린 검.

이 모든 것이 내가 곧 죽음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각오해야 하나..?'

이젠 검을 들고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등 뒤의 바위에 기댄 채, 눈앞의 크랩킹을 노려봤으나, 크랩킹은 비정하게 날카로운 앞발을 치켜세우며 나를 향해 찍어 내렸다.

'죽고 싶지 않아!'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크랩킹의 앞발이 나에게 닿기 직전, 귓가에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라."

그러자 모든 크랩킹들이 반으로 갈라져서 죽기 시작했다.

핏물이 시야를 가득 채우던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14화

"안 늦었다!"

바위에 기댄 채, 쓰러져 있는 하민.

안 늦었길 바라며 용언 마법을 사용한 것은 다행인 모양이다.

반으로 갈라진 크랩킹 사이를 지나가 하민의 상태를 살폈다.

'기절한 건가?'

몸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으며, 그녀의 무기인 장검은 이가 나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홀로 싸운 건가?

'미련하네.'

최대한 안전한 사냥을 지양하던 내가 보기엔 매우 비효율적인 사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민의 상태를 살피던 도중, 뒤에서 발걸음이 들려왔다.

"김수씨, 상당히 빠르시네요! 그리고 이 크랩킹들의 사체는.. 헉! 하민씨!?"

뒤늦게 달려온 태진은 크랩킹의 사체로 만들어진 피바다에 놀라고 쓰러진 하민에 두 번 놀란듯했다.

일단 용언 마법으로 크랩킹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비밀로 해두자.

용언 마법은 나의 비장의 수나 마찬가지니,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일단 태진씨, 하민씨 옮기는 것부터 도와주시죠."

"아, 네!"

태진은 하민을 등에 업은 채, 아까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하민을 데려갔다.

둘을 먼저 보낸 나는 주변을 쓱 둘러봤다.

반으로 쪼개진 크랩킹.

용언 스킬북엔 원하는 대상은 용언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지만,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스킬북엔 거짓말이 없던 모양이다.

"나도 슬슬 돌아가 볼까?"

다른 파티원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묘하게 푸른색 빛을 띠는 크랩킹이 죽어있는 곳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다가가 그 물건을 주워들었다.

"이건 뭐지?"

***

"상태는 어떻습니까?"

"몬스터 웨이브를 겪은 것 치고는 상태가 양호합니다. 아마 곧 깨어날 것 같군요."

하민을 치료하기 시작한 지, 30분째.

그녀를 치료하느라, 예비용으로 가져온 포션을 모조리 사용하게 됐다.

주로 청룡 길드의 후원으로 구매한 포션이라 상관은 없었지만, 포션 값이 워낙 금값인지라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나저나 김수씨, 진지하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죠."

태진은 전부터 궁금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D급 헌터 맞습니까? 크랩킹을 단번에 사냥할 정도의 실력과 하민씨를 구하러 갈 때의 속도. 게다가 분명히 살아있었던 크랩킹들이 전부 죽어있었던 일. 모든 정황이 김수씨가 D급 헌터일 리가 없다는 쪽으로 확신하게 되는군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의심이 갈지도 몰랐다.

보통 D급의 헌터는 크랩킹을 사냥하긴커녕, 생채기도 내기 힘들다고 알려져 있으며, 나처럼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형식상 진짜로 D급 헌터인데.

"아까 면허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한 치 거짓 없는 D급 헌터입니다."

"하지만.."

"크랩킹을 단번에 사냥한 일은 제 스킬과 크랩킹의 상성이 좋았을 뿐이고, 하민씨를 구하러 갈 때의 속도는 제 고유 스킬을 사용한 거라 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몬스터 웨이브는.."

솔직히 다른 것들은 얼버무리기 좋았지만, 몬스터 웨이브만큼은 뭐라 변명할 수 없었다.

B급 헌터인 그도 몬스터 웨이브를 만나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재앙 같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D급 헌터가 홀로 마무리했다?

유치원생이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냥 포기하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편이 나으리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보통 D급과는 다릅니다."

"그게 무슨..?"

"강룡이라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강룡이라면.. 청룡 길드의..?"

그 순간, 박태진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전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봤다면, 지금은 마치 상관을 보는 병사의 눈빛이었다.

아마 내가 청룡 길드 소속 길드원이라고 착각했으리라.

"태진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아.. 다 드러났나요?"

태진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나는 그리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D급 승격전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설명해줬다.

강룡에게 러브콜을 받은 일과 그걸 거절한 일까지.

태진은 청룡 길드의 스카웃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면 그럴 거 같다며 웃어줬다.

"그나저나 S급의 자질이라.. 그런 분이 왜 길드도 없이 홀로..?"

"지인의 길드에 들어갈 예정이라서요. 제 목표는 단순히 강해지는 것만이 아니거든요."

성좌넷 탑 스트리머도 찍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시청자들처럼 포인트를 후원할 수 있을 정도로 벌어두고 싶었다.

게다가 성좌넷에서 출세한다는 것은 곧 헌터 능력도 상승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태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강지아가 우릴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 중이야?"

"아, 별 이야기 아닙니다."

"흐음.. 그래?"

강지아는 잠시 멍하니 생각을 하더니, 나와 태진의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그 탓에 태진은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없는데? 그냥 쉬고 싶어졌을 뿐이야."

성격이 강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유들유들한 모습을 보여주는 강지아.

솔직히 적응이 안 됐다.

현재 강지아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은 틈을 타,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주하민씨가 왜 혼자서 사냥을 다니시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본다고?"

내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강지아.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싶더니, 나를 잠깐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하고 하민이는 청룡 길드 입사 동기야."

"입사 동기..?"

"입사 동기라고 해도 나와 하민이의 입장은 전혀 달랐지만."

"그게 무슨..?"

강지아는 뭔가 씁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닷가를 응시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청룡 길드에 입사했고, 하민이는 길드 마스터의 스카웃을 받은 인재였어. 하지만 하민이는 그런 사실을 전혀 신경 안 쓰는 듯이 나와 친하게 지내줬지."

"스카웃이라.."

스카웃 이야기가 나오자 박태진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왠지 부담스럽구만.

"하민이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길드 마스터가 측정한 하민이의 잠재력은 A급이라더라. 그 탓에 하민이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생겼었지. 시간이 갈수록 하민이는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던전에 도전하며 실력을 길렀어. 참 무모하지?"

"무모하긴 하군요. 하지만 제가 아는 B급 헌터 중에서도 그런 식으로 악착같이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하민이 같은 바보가 많은 모양이네. 아무튼 나는 그런 하민이를 내 버려둘 수 없었고, 하민이가 들어가는 던전은 무조건 따라 들어갔어. 우리가 처음에 너희한테 차갑게 군 것도, 지금까지 남성 헌터과 함께 파티를 짜면서 좋게 끝난 적이 없었거든."

확실히 두 명의 외모는 연예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뛰어나니 이해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처음 날카롭게 굴었던 것은 연기였고, 지금 현재 모습이 본 모습이라는 건가?

"내가 던전을 따라 들어가면서 하민이가 다치는 빈도는 확실하게 줄었지. 그때까지는."

"그때요?"

강지아는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며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길드 마스터가 한 헌터에게 푹 빠졌다고 하더라. 이름은 모르겠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상당히 특이한 이름이라고 하던데."

설마 내 이야기인가?

여기서 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다.

"아무튼 그 헌터에게 푹 빠진 길드 마스터는 미친 듯이 스카웃 제의를 했다더라, 하지만 그 콧대 높은 헌터는 단호하게 거절한 모양이더라고? 그 탓에 길드 마스터는 현재 상당히 기가 죽은 상태야. 업무도 제대로 못 보고, 자신이 키우던 헌터들에게 조언도 제대로 못 해주는 상태지."

겨우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그 아저씨는 얼마나 유리멘탈인 거야?

"저번에 길드 마스터의 푸념을 한 번 들었는데, 그 헌터가 세상에 몇 없는 S급 헌터가 될 자질을 가졌다고 하더라. 자신이 본 인재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며 엄청 아쉬워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하민이는 자존심이 상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민이는 안 그래도 무리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더욱 무리하게 됐고, 결국 오늘처럼 일이 벌어지고 만 거야."

"과연.."

다 내 탓이라는 건가?

그저 길드 가입 권유를 거절했을 뿐인데, 이런 나비효과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듣던 박태진은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지, 고개를 저으며 내 탓이 아니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강지아에게 물었다.

"지아씨는..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나요?"

"원망? 글쎄.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잘못한 건 없잖아? 그저 재능을 타고났을 뿐이니까."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그녀의 한 마디.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 이해심이 있는 여자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닷가를 응시했다.

"사실 말이야. 나도 내 재능을 과신했거든? 나라면 하민이를 지켜줄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에야 깨달았어. 내가 가진 재능은 재능이 아닌 평범한 능력일 뿐이라는 걸."

"그게 무슨.."

"S급 재능. 그거 너지?"

뼈를 찌르는 강지아의 한 마디.

그 말이 나오자마자, 박태진과 나는 얼음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알아챈 걸까?

아까 박태진과 나누던 이야기를 들은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던 찰나.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간단해. 길드 마스터가 그 헌터를 발견했다고 한 곳이 D급 승격전이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S급 재능을 가진 헌터의 정체는 D급 승격전 1등 아니겠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니, 처음 네가 그 말을 했을 땐, 반신반의했어. 하지만 너랑 사냥할수록 느낄 수밖에 없더라. 진짜 재능은 한눈에 보면 알 수 있다는 걸."

강지아는 해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나와 태진도 그녀를 따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닷물처럼 푸른 하늘.

그녀의 목소리는 탁 트인 하늘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하민이를 구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하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강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민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을 응시했다.

***

"일이 복잡하게 됐네요."

-ㄹㅇㅋㅋ 무슨 사연이 이렇게 엮이냐?

-마! 남자답게 무릎 꿇고 사과해라!

-아니면 평생을 책임져야지!

방송을 송출하고 있던 탓에, 강지아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들려졌다.

처음엔 그녀의 이야기를 지루해하던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내가 엮인다는 것을 깨닫곤 집중한 모양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땐, 그녀들에게 악감정을 가진 시청자들은 거의 없다시피 사라졌고, 그녀들을 응원하는 시청자들도 생겨났다.

-그나저나 D급 승격전은 어떻게 된 이야기야?

-왜 방송 송출 안 했어? 딱 대!

-중년 아재가 애절하게 매달리는 걸 못 보다니!

"아, 승격전 때는 방송 송출이 안 되더라구요. 저도 킬 수 있었으면 켰겠죠."

방송 한 번 한 번이 모두 포인트인데.

그렇게 시청자들과 소통을 끝내고, 박태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 서 있는 박태진.

그런 박태진 옆엔 주하민이 서 있었다.

"어? 하민씨, 깨어나셨나요?"

"아.."

나를 발견한 하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아마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들었으리라.

강지아가 내 정체에 대해 말한 것 같진 않아, 마음 놓고 말을 걸었다.

"상처는 괜찮으세요?"

"그.. 구해줘서 고맙.. 아니, 감사합니다."

목숨을 구해주니, 돌아오는 건 공손한 존댓말이었다.

하민은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썩 듣고 싶진 않았다.

나는 적당히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한 뒤, 본래 목적이 있었던 박태진에게 다가갔다.

"태진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슨 문제 있으세요?"

"대단한 건 아니고, 아까 몬스터 웨이브 현장에서 발견한 물건인데.."

나는 주섬주섬 아까 주웠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열쇠처럼 생긴 물건.

아니, 겉으로 보기엔 열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감정은 전혀 통하지 않았으며, 어디에 사용할지 감도 안 잡혔다.

'500P를 쓰기엔 아깝고 말이지.'

내가 꺼낸 물건을 본 박태진의 얼굴엔 점차 경악이 일어났다.

"이, 이걸 주우셨다고요!?"

"예. 무슨 아이템인지 아세요?"

"당연하죠! 이 열쇠는 극히 드문 확률로 등장한다는 히든 보스 방 출입권이라고요!"

"엄청나네요! 제가 좋은 걸 주운 모양이에요."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박태진의 얼굴은 묘하게 썩어갔으며, 옆에 있는 주하민도 썩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표정이 왜 그러세요?"

"잘 들으세요. 김수씨. 이 열쇠가 등장한 이상, 이 던전은 히든 보스를 잡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예..? 그렇다면.."

"네. 큰일 난 것 같습니다."

어..

아무래도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모양이다.

15화

"주하민 씨, 거기 한 마리 갑니다!"

"..네!"

몸을 회복한 주하민은 우리와 함께 사냥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한 번 당해야 정신을 차리는 걸까?

한 번 뜨거운 맛을 보아서 그런지, 공격 하나하나가 신중하기도 했다.

"벌써 보스 방이네요."

하민이 파티에 합류한 결과.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냥 속도가 빨라졌으며, 어떤 부분에선 안정감도 느껴졌다.

이것이 A급 잠재력을 가진 헌터라는 건가?

"보스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정비와 계획부터 새로 짜도록 합시다."

파티의 리더인 박태진은 모두를 주변에 앉힌 뒤, 보스 방에 돌입하고 나서의 계획을 상세하게 짜기 시작했다.

"현재 김수 씨가 발견한 열쇠는 히든 보스를 소환할 수 있는 히든 아이템입니다. 본래라면 일반 보스를 잡고 해산하는 것이 맞지만.. 저 아이템을 얻은 경우, 히든 보스를 잡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죄송합니다.."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는 주하민.

확실히 하민이 단독행동을 나서지 않았다면, 히든 보스를 잡는 일도 없었다.

그 탓인지, 하민은 위축된 상태로 파티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 사람도 첫인상과 완전히 다르군.'

나는 계속해서 눈치를 보는 주하민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현재 중요한 건, 히든 보스를 어떻게 해치워야 하는 것이다.

일단 나는 태진에게 히든 보스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히든 보스는 보통 현 던전 난이도보다 격이 한 단계 높은 몬스터가 나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던전은 C등급이니, B등급 보스가 나타나겠죠."

"끔찍하네. B등급 보스면 A급 헌터 몇 명이 붙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 살 수는 있는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태진을 바라본 지아.

확실히 B급 탱커 한 명과 C급 딜러 두 명, 그리고 D급 같지 않은 D급 한 명으로 B급 보스를 사냥한 것엔 무리가 있었다.

이대로 히든 보스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구조를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아뇨. 이 던전은 4인용 던전. 그 이상의 인원이 출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는 건 무리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런가요.."

외부에서 도움을 구할 수 없다면, 우리의 힘만으로 히든 보스를 잡아야 한다는 건데..

"태진 씨가 생각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태진은 표정을 굳히며 한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박태진은 베테랑이다.

B급을 찍는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러 난관도 많이 겪었을 테니,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없는 것 같군요."

"후우.. 어떡하지."

지아는 초조해진 건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진 거겠지.

그런 지아의 손을 잡아주는 하민.

나는 팀원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이길 각오로 싸우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희 파티도 나름 엘리트들만 모였잖아요?"

"하지만.."

"B급 탱커와 B급에 근접한 청룡 길드의 엘리트들. 그리고 제 정체는 잘 아시고요."

지아와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정체를 모르는 하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적어도 이곳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 성좌넷 대기업도 못 찍어봤는데,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편히 눈을 감지 못하리라.

그런 내 모습을 본 시청자들도 용기를 실어줬다.

-맞아! 핸드 죽을 거 같으면 우리가 도와줄게!

-일단 포인트로 포션이랑 도핑 물약 많이 사놓는 게 중요할 듯

-핸드가 아무리 허접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죽는 건 말이 안 되지!

'이런 시청자들을 두고 죽을 수는 없지.'

[핑크공듀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위험하면 나 소환해. 지금 방송 보고 있으니까."

나는 파티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확실히 시청자들을 소환하면 죽음은 확실하게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핑크공듀 누님도 1인용 던전에 소환해본 적이 있으니, 인원수 제한은 걸리지 않으리라.

나는 곧바로 포인트 상점에서 시청자 소환권을 구매한 뒤,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일단 히든 보스를 잡기 전, 일반 보스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이대로 멈춰 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진 않으니까요."

"뭐, 우리라면 히든 보스쯤은 이길 수 있겠지. 무사히 잡으면 헌터 랭크가 올라갈 수도 있겠고."

"게다가 히든 보스를 잡으면 희귀한 아티팩트도 나오니까요."

다행히 암울했던 분위기는 점차 풀렸고, 파티원들의 눈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일단 일반 보스부터 잡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그 전에.

"하민 씨. 잠시만 이 쪽으로.."

나는 주하민을 따로 불러 구석으로 데려갔다.

강지아의 눈빛은 매서웠지만, 순순히 보내준 걸 보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모양이다.

"왜 부르신 건가요?"

"사용하시는 무기.. 완전히 망가졌는데, 제가 마침 검이 하나 있어서요."

보스를 사냥하는데, 이가 나간 검으로 싸웠다간 목숨을 보전하기 힘드리라.

나는 적당히 포인트 상점에서 파는 1000P 가격의 검을 하나 구매한 뒤, 하민에게 넘겼다.

검을 건네받은 하민의 표정은 복잡했다.

"이런 고품질의 물건을.. 받을 수 없어요!"

"그거 싸구려인데."

"거짓말! 제가 평소에 쓰던 검보다 훨씬 질이 좋은 물건인 걸 모를 것 같나요!?"

얼마나 구린 검을 쓰고 다닌 거야?

아무래도 포인트 상점제는 확실히 지구의 물건보다 훨씬 좋긴 했다.

'과도로 고블린을 잡을 정도니까.'

하지만 하민이 저토록 과민반응을 할 정도로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포인트 상점에서 10만 포인트만 써도 훨씬 좋은 검들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

하민에게 나중에 반납하라는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하민의 표정은 풀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검도 빌려주시고.. 게다가 몬스터 웨이브에서 구해주셨잖아요?"

"검을 빌려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게다가 몬스터 웨이브는 팀원들 전부가 함께 해치운 거 아시잖아요?"

미리 말을 맞춰둔 덕에 하민은 내가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괜히 내가 S급 재능을 가진 헌터라는 걸 들키면 상황이 이상해질 테니까.

하지만 하민의 표정은 이상했다.

"또 거짓말. 몬스터 웨이브에서 저를 구해주신 건, 김수 씨잖아요?"

"그걸 어떻게..? 설마 지아 씨가.."

"아뇨. 들었거든요. 그때."

들었다니..?

설마 내 용언 마법을 들은 건가?

분명 정신을 잃은 걸 확인했을 텐데..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죠. 자, 어서 보스를 잡으러 갑시다!"

"김수 씨가 비밀로 하길 원하신다면 비밀로 해야겠죠."

하민은 내 기분을 이해한 건지, 더 이상 용언 마법 관련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

[보스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모두 진형을 갖추세요!"

태진의 지휘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 던전의 보스는 크랩퀸이라고 불리는 크랩킹의 변종이며,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보스 몬스터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크랩킹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가 묶었습니다!"

태진이 크랩퀸의 어그로를 끌은 뒤, 모든 공격을 방패로 흘려버렸다.

빈틈이 생긴 크랩퀸.

그 틈을 놓칠 강지아와 주하민이 아니었다.

"하민아! 가자!"

"응..!"

강지아가 주하민의 검에 화염을 덧씌워 예리함을 더했다.

순식간에 크랩퀸의 앞까지 도달한 주하민.

그녀의 검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환영검!"

이글거리는 검은 아지랑이를 남기며 크랩퀸의 집게발을 잘라냈으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절단해갔다.

이제 밥상이 차려졌으니, 내가 나설 차례다.

"변강술!"

근강술을 이용해 다리에 근력을 증가시킨 뒤, 크랩퀸에게 빠르게 도달한 후, 머리에 변강술을 박아넣었다.

주먹이 크랩퀸의 머리에 닿자, 뇌수가 흩뿌려지며 크랩퀸은 절명해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한 보스 사냥.

C급 던전 정도는 혼자 다닐 만한 것 같았다.

"순조롭네요."

"지금까지 다친 사람 한 명도 없으니, 히든 보스도 똑같이 힘내죠!"

"하민아, 어디 안 다쳤어?"

"네 걱정이나 해!"

화기애애한 분위기.

우리는 애써 히든 보스라는 큰 벽을 외면하며 멘탈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발생]

[죄악의 열쇠가 반응합니다!]

내 주머니에 있던 열쇠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크랩퀸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진짜 시작인가..?

[히든 보스가 등장합니다.]

크랩퀸의 시체가 칠흑 같은 암흑에 휩싸이더니, 무언가로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우리.

제발 상성이 맞는 적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하며 적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다.

[히든 보스:금강퀸이 등장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겉표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다시피, 방어력이 매우 대단해 보이는 몬스터였다.

"꽝인가..!"

"방어력 치중형 보스 몬스터라니..!"

적어도 방어력이 종잇장 같다면 사냥을 노려볼 수 있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엄청난 방어력을 가진 보스였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기엔 아직 이르다고 판단한 우리는 빠르게 위치를 잡았다.

"제가 다시 어그로를 끌겠습니다!"

형태는 크게 바뀌지 않은 탓에 사냥 패턴은 똑같았고, 태진은 익숙하다는 듯이 금강퀸 앞에 서 방패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끄아악!"

금강퀸의 집게가 태진의 방패를 내려치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태진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히든 보스는 히든 보스라는 건가?

방어력도 모자라 공격력도 상당한 모양이다.

"태진 씨! 괜찮으십니까!?"

나는 곧바로 태진에게 다가가 포인트 상점에서 사놓은 포션을 먹였다.

포인트 상점제라서 그런지, 효과는 뛰어났지만 기절한 모양인지,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탱커가 단번에 기절할 정도의 공격이라고!?'

괜히 A급 보스가 아니라는 건가?

공과 수의 완벽한 조화는 우리에게 절망감을 심어주기 부족함이 없었다.

금강퀸은 강지아의 마법도 손쉽게 튕겨냈으며, 주하민의 검도 간단하게 막아냈다.

그 모습을 본 강지아와 주하민은 벌써 전의를 상실한 모양인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렸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포기하면 다 죽습니다!"

"무려 B급 탱커가 쓰러질 정도로 강력한 보스라고! 우리의 공격이 통할 리가.."

"그래서 그냥 죽을 겁니까? 포기하기보다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세요!"

나는 강지아와 주하민에게 소리친 다음,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지아와 주하민의 멘탈이 회복하기 전까진 내가 활약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마력의 실로 금강퀸의 움직임을 억제해보자고 판단한 나는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근강술로 강력해진 각력으로 금강퀸의 위에 올라탄 나는 마력의 실로 금강퀸을 세게 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력의 실의 견고함을 상회하다니.."

애써 감은 마력의 실은 금강퀸이 버둥거릴 때마다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속박도 금방 풀려버리고 말 것이다.

게다가 억지로 금강퀸의 몸체에 붙어 있었는데, 그 발버둥이 강해질수록 내 신체는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큭!"

결국 금강퀸의 몸에서 튕겨 나온 나는 모래사장을 구르며 모래를 토해냈다.

-설마 죽냐?

-성좌넷 스트리머 가오가 있지 ㅋㅋ

-힌트 줄 테니, 받으실?

"힌트..? 주시면 달게 받죠! 좀 주십쇼!"

나는 시청자들의 힌트를 받기 위해서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내가 감아둔 마력의 실은 점점 끊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퀸을 속박하던 마력의 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만렙 광부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금강석이라는 광석이 뭐인지는 알고 있냐?"

"다이아몬드 아닙니까? 그래서 금강불괴라는 말이 있는 거잖아요!"

금강석은 매우 단단하다고 알려진 다이아몬드의 다른 이름.

그렇기에 저 녀석의 신체가 괴물처럼 단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어째서 꺼낸 거지?'

나는 그 의중을 깨닫기 위해서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시청자들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좌절한 채로 멍하니 있는 강지아에게 달려가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작전은 아주 간단했다.

주하민이 가진 검을 금강퀸의 눈에 던지는 것과 동시에 검에 화염 마법을 사용한 뒤.

내가 그 공격으로 인해 생긴 틈을 노려 금강퀸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겨우 그런 공격으로 이길 수 있다고?"

"제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라도.. 불에는 약하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금강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자 뒤에선 강지아의 한숨과 함께 주하민의 검이 금강퀸을 향해 쏘아졌으며.

검과 함께 앞으로 뻗어나간 화염 마법은 검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 검은 화염의 온도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기 시작했으며. 그 녹은 쇳물은 금강퀸의 눈을 가렸다.

"통했다!"

금강퀸은 뜨거운 쇳물에 고통스럽다는 듯이 발버둥을 시작했으며.

주변에 있던 피부도 조금씩 벗겨졌다.

정말로 금강퀸은 열에 약한 몬스터였던 것이다.

다만 마법에 내성이 있기에, 직접적으로 화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기에 주하민의 검을 희생한 것이었다.

"이제 나만 남았다!"

멍석이 깔렸으니, 나는 그 위에서 열심히 놀면 된다.

고통에 버둥거리는 금강퀸의 위에 선 나는 다시금 마력의 실을 감기 시작했다.

아까의 금강퀸은 마력의 실을 끊어내는 데 모든 신경을 썼던 터라 손쉽게 마력의 실을 끊어냈었지만.

지금은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에, 실을 끊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입 벌려! 실 들어간다!"

비명을 지르는 중인 금강퀸의 아가리에 마력의 실을 박아넣었다.

내부는 단단하지만, 속은 분명 아닐 터.

나는 그 실에 독속성을 부여한 뒤, 내부부터 만신창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끼에엑!"

금강퀸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일 터!

우리의 모든 작전이 통한 탓에 금강퀸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로 죽어갔고.

나는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은 채로 마력의 실에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제발 죽어라!"

나는 모든 마력을 짜내 마력의 실을 두껍게 증폭시켰고.

모든 속이 독이 뭍은 마력의 실로 가득 차버린 금강퀸은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보스 몬스터:금강퀸을 토벌하셨습니다.]

[수수께끼의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금강퀸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던전에 울리는 메시지.

게다가 금강퀸의 시체가 빛이 나더니 낡은 상자로 모습이 변해버렸다.

"지, 진짜로 우리가 그 괴물을 쓰러트렸다고..?"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 금강퀸을 쓰러트린 사람은 김수 씨지."

주하민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강지아도 주하민을 따라 감사를 표했으며, 괜히 뻘쭘해진 나는 수수께끼의 상자로 관심을 돌렸다.

"수수께끼의 상자라.."

"던전을 100개 이상 돌아봤지만, 이런 상자는 처음이야!"

"일단 태진 씨를.."

하민은 태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뒤로 돌아갔고, 나와 강지아는 상자의 내용물을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척 보기에도 고풍스러워 보이는 상자.

상자의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안의 내용물이 우리를 향해 인사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16화

"잠깐! 혼자 열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상자를 여는 것을 발견한 건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강지아.

하지만 나는 강지아에게 관심을 줄 여력이 없었다.

그야 그럴게.

[절제의 크라운]

등급:성물

*통상 모드의 왕관은 착용자의 근력, 민첩, 정신력 스탯을 10씩 올려줍니다.

*전투 모드의 왕관은 4조각으로 쪼개진 뒤, 공중에서 착용자를 보조합니다.

*한 달에 한 번, 태양의 빛을 이용해 강력한 레이저를 쏘아냅니다.

*이 아이템은 귀속 아이템입니다.

*전용 아이템과 함께 착용할 시, 보너스 기능이 추가됩니다.

처음 보는 등급의 아티팩트가 눈앞에 놓여 있었으니까.

심지어 성능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우월했다.

'무슨 스탯을 총 30씩이나 올려줘..?'

현재 나의 기본 스탯 중, 30을 넘은 스탯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마력 스탯이 30에 근접했지만, 다른 스탯은 10대에서 놀고 있었기에, 이 아티팩트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인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아이템을 착용하게 된다면 나는 단번에 C급 상위권 헌터의 스탯을 가지게 될 터.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아이템이길래, 그렇게 멍하니.. 헉!?"

강지아도 크라운을 감정한 건지,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봤다.

메이지형 헌터인 그녀에게 근접전이라는 약점은 고질병이나 마찬가지였고, 이 아이템은 그 고질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엄청난 아이템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렇게 굳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뭐야? 성물 등급 아이템은 처음 보는데?

-아니, 무슨 잔챙이 하나 잡았다고 저런 걸 주냐?

-난 성물 등급 아이템 본 적 있는데?

"네? 성물 등급 아이템을 보신 적 있다고요!?"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어?"

"아, 혼잣말이었습니다."

옆에 강지아가 있다는 걸 깜빡했다.

나는 최대한 소곤소곤 시청자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트리머 중, 한 명이 성물 등급 반지 얻었을걸?

-맞아, 걔가 있었지?

"그 스트리머가 누굽니까?"

-임모탈이라는 스트리머임

임모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스트리머다.

최근 성좌넷의 테이스트를 맞추기 위해서 여러 방송을 탐방하며 공부했지만, 임모탈이라는 이름의 방송인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와 같은 신인일 지도?

-걔는 유적 탐방하는 스트리머인데, 유적지에서 순결의 링이라는 아이템 얻었을걸?

-그 반지 성능도 괴랄하더만.

-ㄹㅇㅋㅋ 반지가 무슨 방패로 변하던데?

-아, 그리고 크라운처럼 전용 아이템 표기도 있었으니, 네 아이템이랑 세트일지도 모르지?

왕관에 이어 반지냐..

전용 아이템이라는 표기가 있었다면 분명히 이 아이템과 세트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성물 등급이니, 반지에서 변형되는 방패의 성능도 뛰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언제 한번 연락해봐야겠군요."

나는 머릿속에 임모탈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뒤, 강지아를 바라봤다.

아직도 절제의 크라운에 정신이 팔린 건지, 침까지 흘리며 크라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이 아이템의 처리가 우선인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4명인데, 나 혼자서 꿀꺽할 순 없잖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이 아이템을 가질 수 있을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분명 전투에 대한 기여도는 내가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박태진의 B급이라는 위치와 김지아, 주하민의 청룡 길드 소속 유망주라는 간판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뭘 망설이냐며, 어서 크라운을 착용하라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지금 크라운을 착용해버리면 헌터계에서 영원히 매장당할지도 몰라..!'

다른 등급도 아닌 무려 성물 등급이다.

이 아이템은 분명 정부를 통해 조사가 들어갈 터.

지금 내가 함부로 이 아이템을 착용하게 된다면 일이 복잡하게 흘러갈 것이 뻔했다.

"지아씨, 일단 태진씨와 하민씨에게 이 아이템을 보여주도록 하죠."

"응..? 아, 응!"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침을 쓰윽 닦는 강지아.

솔직히 좀 깼다.

나는 강지아를 데리고 박태진이 쓰러져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곁엔 하민이 앉아있었는데, 홀로 간호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민씨. 태진씨 상태는 어때요?"

"아.. 단순히 기절한 거라 큰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거 같아요. 그나저나 보상은..?"

하민도 보상이 궁금한 건지, 내 손에 들려있는 상자에 시선을 보냈다.

나는 곧바로 크라운을 꺼내 하민에게 보여줬고, 그녀 역시 강지아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성물 등급.."

그녀도 아티팩트의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일단 태진이 일어나기 전,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을 모두 정산해 보기로 결심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얻은 대량의 마석들과 일반 보스 몬스터의 마석, 히든 보스 몬스터의 마석.

이 정도만 해도 당장 몇 달간은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상당한 상태였다.

히든 보스의 마석은 보고를 위해 팔진 못하겠지만, 금액은 제대로 정산되리라.

그때, 기절했던 태진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 여긴..?"

"오! 일어났네!"

"다행이네요.."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서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쓰러져 있는 히든 보스의 사체와 흔적을 보고 상황이 끝났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리더로 불린 제가 제일 먼저 기절해버리다니.. 할 말이 없군요."

"아니, 그건 괜찮으니까, 이 아이템 좀 보세요!"

"네? 무슨 아이템을.. 헉!?"

태진은 1분가량 얼음처럼 굳었다가, 이내 생각이 끝난 건지 입을 열었다.

지아는 기대가 되는 눈빛으로 태진을 바라봤고, 하민은 무언가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다들 잘 들어주세요. 이 아티팩트의 처분은 상당히 애매합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성물 등급은 역사상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희귀한 등급입니다. 심지어 히든 보스를 잡은 보상으로 나왔으니, 더욱 화제가 되겠죠."

태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기에, 이 아이템을 누군가가 갖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협회에 보고한 뒤, 제출하는 방법이 정석이겠죠."

"그건 좀.."

강지아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태진을 바라봤다.

태진은 본인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처럼 표정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템을 협회에 제출할 경우, 저희는 상당히 피곤해질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전례에 없는 첫 유물 등급. 그 유물 등급을 발견한 헌터들은 약 몇 달간, 아니.. 몇 년간 조사에 응하게 되겠죠.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사냥했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 파티는 그동안 던전에 못 들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건 곤란하지!"

"그렇기에 한 가지 제안 드릴 것이 있습니다."

태진은 나에게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템을 비밀로 하는 건 어떨까요? 그냥 한 명에게 몰아주는 거죠."

"엥? 그래도 돼?"

"히든 보스를 잡았다고 해서 무조건 아티팩트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제일 간단하게 일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태진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만약 크라운을 협회에 제출하게 된다면 상실감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조사까지 받게 된다는 점에서 제일 께름칙했다.

그런 점에서 4명 중, 한 명에게 몰아주는 방법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에게 몰아주기엔 상황이 애매하지 않아?"

"지아씨 말도 맞지만, 저는 솔직히 이 아이템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요.. 제가 생각하기엔, 저는 이 아이템의 주인은 아닌 거 같거든요."

태진과 하민은 아티팩트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아마 내가 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걸 눈치채고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강지아가 납득 할까?

'강지아도 크라운이 엄청 마음에 든 눈치인데.'

내가 아는 강지아는 손쉽게 크라운을 포기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 이건 김수가 가져야지."

그녀도 쿨하게 소유권을 포기하고 아티팩트를 나에게 건네줬다.

이걸 내가 받아도 되나?

고작 D급 헌터인데, 유물급 아티팩트라니.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아닐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이 파티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었던 건, 전부 김수씨 덕분이니까요."

"맞아. 게다가 하민이를 구해줬잖아? 난 그걸로 만족해."

"저도 민폐만 끼쳐서.. 이런 보답이라도 해드리고 싶네요."

만장일치로 결국 크라운의 주인은 내가 되었다.

나는 곧바로 상자에서 크라운을 꺼낸 뒤, 머리 위에 얹었다.

[착용자를 스캔합니다.]

크라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내 몸을 쓱 훑기 시작했다.

마치 공항에서 금속 탐지기를 지나는 감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과 유물급 아티팩트를 비교하면 미안한 일이려나?

[착용자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등록이 끝나자, 크라운은 내 머리에 씌워지는 것이 아닌 헤일로처럼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여러 보석이 박혀 찬란하게 빛나는 크라운은 마치 내가 왕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파티원들도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줬다.

"양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남은 마석들은 전부 여러분들끼리 나눠 가지시면 됩니다."

"정말? 이 정도면 값이 꽤 나갈 텐데."

"저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을 얻었으니까요."

우리는 서로를 훈훈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불협화음으로 시작했던 파티는 어느새 완벽한 앙상블을 자아내고 있었고, 내 첫 파티 사냥은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

"기, 길드장님! 특종입니다!"

"무슨 일인가? 자네가 그렇게 호들갑을 다 떨고."

청룡 길드의 마스터인 강룡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적막을 깬 것은 스카웃 담당, 동혁이었다.

동혁은 새빨개진 얼굴로 손에 든 서류를 강룡에게 건넸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강룡은 동혁이 건네준 서류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한국 제8호 히든 보스 출현 보고서였고, 관련자로 청룡 길드의 소속 길드원이 두 명이나 연류되어 있었다.

내용은 C급 던전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맞닥뜨린 파티는 간신히 모든 몬스터의 토벌에 성공, 거기서 히든 보스 전용 열쇠를 획득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 점에서 강룡은 흥미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흐음.. B급 한 명과 C급 두명, 거기에 D급 한 명이라.. 이 조합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견뎌냈다고? B급의 역할이 컸나 보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좀 더 읽어보시죠."

일반 보스를 격퇴한 뒤, 히든 보스의 출현.

히든 보스는 방어 특화형 보스이며, B급 탱커가 단번에 기절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가지기도 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잠깐, B급 탱커..? 그 말은 몬스터 웨이브와 히든 보스를 토벌한 자가 B급이 아니란 말인가?"

강룡은 서둘러 나머지 내용도 읽기 시작했다.

C급 헌터 두 명의 연계 공격도 전혀 통하지 않음.

거기서 D급 헌터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려 토벌을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쓰여있었다.

"D급 헌터는 독을 머금을 실을 이용해, 보스를 토벌하는데 성공..? 잠깐.. D급에 실이라.."

딱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조합이었다.

강룡은 불안한 눈빛으로 동혁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설마 D급 헌터가..?"

"예. 김수입니다!"

"이런, 젠장!"

또 김수다.

강룡이 점찍어 놓은 S급 재능을 가진 사내.

그가 또 히든 보스를 토벌했다는 사고를 쳐버렸다.

그런 김수의 행적은 강룡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에 성공했고, 강룡은 더욱 상기된 얼굴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점찍은 S급 사내야..!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가 더 자라기 전에.. 내 손에 넣어 S급으로.."

관심을 넘어선 집착!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혁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런 동혁을 본 강룡은 근엄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김수를 스카웃 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을 생각하게! 그리고 이 사건에 연류된 우리 길드원 두 명도 빠른 시일 내에 호출하도록!"

"넵!"

그렇게 청룡 길드 안에서 김수의 주가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17화

"그래서.. 결국 성물 아티팩트는 손에 넣으신 겁니까?"

"네. 지금 제 목에 보이는 왕관 모양의 문신 보이시죠? 이게 그 성물입니다."

던전에서 나온 후, 우리는 곧바로 히든 보스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협회로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진술을 하게 됐지만, 크게 거슬리는 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득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

처음 협회는 내가 히든 보스를 단독으로 사냥했다는 진술을 믿지 않았지만, 모두가 일관된 내용으로 진술하자,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고 등급 재조정에 들어간다고 했다.

하긴, B급 보스 몬스터를 홀로 잡는 D급이 있다면 가만히 둘 수 없겠지.

"핸드님께서 생각하시기엔, 등급이 어디까지 올라갈 것 같습니까?"

"높아 봐야 C급이겠죠? B급 보스라곤 하지만 애초에 제 스킬과 상성이 좋았고, 강지아씨의 슬로우가 없었다면 잡아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저 C급이라고 한 단계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D급과 C급의 혜택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좋으니까.

D급은 그저 레이드 참여권과 B급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밖에 없지만.

C급은 무려 달마다 협회에서 품위 유지비로 돈이 나온다.

거기에 세금 감면과 훗날 자녀를 낳게 된다면 학비 지원도 해준다고 한다.

"꽤 혜택이 좋군요. 나름 헌터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C급으로 만족할 수는 없죠."

"핸드님이라면 금방 S급에 오를 수 있겠죠. 그나저나 핸드님."

바트가 내 목을 잠시 응시하더니,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그 성물의 성능..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바트도 그 점에 대해 걸렸나 보다.

성좌넷에서도 겨우 두 개밖에 없다고 알려진 성물 등급 아티팩트.

상당한 희소성 때문인지, 바트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발동을 안 하더라구요."

처음 아티팩트를 얻었을 땐, 화려한 왕관 모양으로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녔지만,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문신으로 변한 뒤, 아무런 명령도 듣지 않았다.

고장이 난 건가?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확인했지만..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28 민첩:26 내구:13

정신력:23 마력:28 행운:7

스킬:[성좌넷][사술][근강술][변강술][초급 용언 마법]

첫 번째 부과 효과인 스탯 증가는 그대로 반영된 상태였다.

심지어 이 정도 스탯이면 C급 상위권은 물론이고 B급 헌터를 넘봐도 좋을 정도로 밸런스가 좋은 스탯이었다.

아마 다른 헌터들이 내 상태창을 보면 놀라지 않을까?

절제의 크라운이 괜히 성물 등급이 아닌 모양이다.

"별도의 발동 조건이 있나 보군요. 성물에 대한 정보는 저희가 조사할 테니, 핸드님은 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오늘 찾아오신 이유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처음 목적은 핸드님이 던전에서 무리를 하셔서 케어 겸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제가 다치면 안 되니까요."

머니 컴퍼니는 1인 스트리머 체제로 운영되는 회사다 보니, 내가 회사의 재산이며 자금줄이다.

심지어 바트가 우스갯소리로 내가 던전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고가의 용병을 고용해 구출한다는 이야기까지 꺼냈으니, 할 말 다 한 거나 마찬가지.

내 뒤에 그들이 있는 한 죽는 일은 없겠지.

"그럼 볼 일은 모두 끝나신 겁니까?"

"아뇨.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바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자 바트의 손에 들려있는 하나의 초콜릿.

"중요한 걸 꺼내는 게 아니었습니까?"

"당이 떨어져서 말이죠."

초콜릿을 마저 까먹은 바트는 책상에 서류를 잔뜩 깔기 시작했다.

서류의 산에서 사진이 붙어 있는 서류를 집어든 바트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입 빌런이라고 아십니까?"

"난입 빌런이요?"

"최근 방송에 난입해서 스트리머를 공격하고 방송을 망치는 시청자가 한 명 생겨났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보통 스트리머는 소속된 회사가 있기 마련이다.

뒤에 회사가 있다는 건, 방송에 지장이 없도록 케어를 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난입 빌런이 나타난다면 회사측 용병이 나타나 난입 빌런을 치워주는 것이 일반적인 대응이 아닐까?

당장 내 담당자만 해도 뱀파이어 로드인데.

"그게.. 난입 빌런은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방송을 방해해서 말이죠."

"그게 무슨..?"

"난입 빌런은 차원을 다루는 스킬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말은 어떤 차원으로든지 갈 수 있다는 이야기고, 차원을 단절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만약 핸드님께서 난입 빌런에게 당하신다면.. 저희는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겁니다."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다 있나?

차원을 단절하고 스트리머만 골라서 팬다니?

난입 빌런은 상당한 변태 같았다.

하지만 성좌넷의 스트리머라면 대부분 강력한 힘을 가졌을 텐데, 난입 빌런에게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당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난입 빌런은 스트리머의 힘을 일시적으로 봉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 탓에 난입 빌런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시청자를 잃는 스트리머도 상당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답이 없군요."

이야기만 들어선 천하무적과 다름없었다.

상대방의 능력을 봉인하는 힘과 차원을 단절하는 능력.

만약 나에게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리라.

'뭐, 내가 당하면 우리 시청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난입 빌런을 찾아다닐 거 같지만.'

내가 무력을 중점으로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가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자신이 당한 것처럼 화내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나처럼 약한 스트리머를 노리진 않겠지.

"난입 빌런이 잠잠해질 때까지 사냥 방송은 줄이시고 새로운 컨텐츠에 투자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난입 빌런은 저 같은 잔챙이를 노리는 것보단 다른 스트리머를 노릴 겁니다."

"하긴.. 맞는 말이군요."

왜 납득 하는데요?

그럴 땐 부정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나도 어느 정도 강해졌다고 느꼈는데, 진정한 강자의 눈엔 차지 않는 모양이다.

바트는 몇 번의 주의를 더 준 뒤, 소량의 초콜릿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라고 해봤자, 옆집이지만.

"난입 빌런이라.."

뭐, 조심하면 되겠지.

***

"이런 일이 있어서 말이죠. 최대한 사리면서 방송을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쫄?

-난입 빌런이 네 친구냐? 걔가 널 보러 왜 오겠어?

-걔한테 처맞던 애들 보면 좀 사릴 필요가 있긴 함

성좌넷 고인물인 시청자들은 당연히 난입 빌런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실시간 중계로 난입 빌런의 횡포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내 방송에 난입 빌런이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다며 사냥이나 하라고 일갈했다.

'섭섭하구만.'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던전에 입장했다.

오늘 선택한 던전은 C급의 리자드맨의 둥지.

저번 파티 사냥 때, C급 던전의 대략적인 난이도를 체감했을 때, 혼자 던전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선택해버렸다.

협회의 안내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차피 C급 헌터로 진급 예정이기에 큰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C급으로 나타나면 놀라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리자드맨에게 다가갔다.

전에 핑크공듀와 들어갔던 던전에서 나온 리자드맨과는 달리 훨씬 근육질 몸매와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괜히 C급이 아니다 싶어 각오를 다졌다.

"땅이 늪지대이다 보니, 움직임이 제한되는군요. 이번 던전은 마력의 실을 주력으로 사용해야겠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음?

-누가 보면 마력의 실 안 쓰려고 노력하는 줄 ㅋㅋ

"에이, 형님들! 저도 전문가인 척 좀 해봅시다!"

그저 늪지대길래, 유명한 생존 전문가 흉내를 내보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마력의 실에 독 속성을 부여한 뒤, 리자드맨을 향해 날렸다.

마력의 실은 리자드맨의 오른팔을 잘라내고 다시 되돌아왔고, 리자드맨은 곧 독에 중독되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으악! 다가오지 마!"

중독되어 쓰러져야 할 리자드맨이 눈에 불을 켜고 좇아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자드맨 한 마리를 건드렸을 뿐인데, 30마리가 넘는 리자드맨이 쫓아왔고, 나는 다리가 푹 꺼지는 늪지대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아니, 왜 중독이 안 되는 거야!? 심지어 근강술로 달려도 느리잖아!"

-ㅋㅋㅋ 늪지대에 사는 리자드맨은 독 내성 있는데-핸드, 아무 조사도 안 했쥬? 그럼 맞아야쥬?

-심지어 리자드맨은 동료 의식이 타 종족보다 강해서 한 마리 건드리면 한 부락이랑 싸운다고 알면 됨

"그걸 왜 지금 알려주시는 겁니까!?"

나는 괜히 시청자들을 원망하며 늪지대 위에서 필사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편이 아닌 모양이다.

"벌써 벽이라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던전의 벽이 내 앞길을 막아섰고.

이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아까 리자드맨을 마력의 실로 베었을 때, 리자드맨이 입고 있던 보호구에 실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 말은 마력의 실로 한 번에 리자드맨을 쓸어버릴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최후의 보루인 용언 마법을 사용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용언 마법은 안 쓰고 싶었는데..'

나는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리자드맨들을 향해 용언 마법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그때.

"앗! 제대로 찾아왔다!"

머리 위에서 천진난만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위로 틀자..

"어딜 보는 거야!?"

소녀가 빠르게 앞으로 쏘아지더니, 나를 향해 화를 냈다.

그와 동시에 이곳저곳에 뭉쳐있는 리자드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잔챙이들부터 해결해볼까?"

그녀가 손을 움켜쥐자, 뭉쳐있던 리자드맨들이 더욱 달라붙기 시작하더니, 점점 무언가에 의해 찌부러지기 시작했다.

그 대단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서, 설마..?"

-난입 빌런 등장이오!

-솔까 핸드 방송이 맛집인데, 안 오는 게 이상하지 ㅋㅋ

-난입 빌런 여자였냐?

말로만 듣던 난입 빌런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30마리가 넘는 리자드맨을 처리한 뒤, 머리에 땀을 닦으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자! 잔챙이들도 모두 정리했으니 본방으로 넘어가 볼까?"

그녀가 손을 모아 기지개를 켜는 자세로 힘을 주더니, 던전 주변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생성됐다.

[차원이 단절됐습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관리자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상태창도 내가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려줬다.

바트에게 들었던 방식과 똑같은 상황.

그 말은 즉슨..

[모든 스킬과 능력이 봉인됐습니다.]

내 보잘 것 없는 무력도 봉인된다는 이야기였다.

"자, 오늘은 약골 방송으로 유명한 핸드 방송에 찾아왔습니다! 핸드 방 시청자 여러분, 재미 있게 즐겨주시길!"

-스물 중반 청년이 소녀에게 강제로.. ㅗㅜㅑ

-핸드 흥행 보증 수표 받았네 ㅋㅋ 난입 빌런이 찾아올 정도면

-핸드야! 안 돼!

"자,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난입 빌런이 살벌한 미소로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18화

"뭘 그리 겁먹은 거야?"

마치 나를 어린아이를 보듯 바라보는 난입 빌런.

리자드맨을 손짓 한 번으로 학살하던 그녀의 무력을 막 목격한 참이라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그녀도 아무런 목적 없이 이런 짓을 하진 않을 터.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바라는 게 뭐지? 요구는 최대한 들어줄 테니, 그냥 순순히 돌아 가주면 안 되나?"

"바라는 건 딱히 없는데? 뭐, 굳이 말하자면.."

그녀가 내 눈앞으로 빠르게 도약한 뒤, 주먹을 내질렀다.

"관심이려나?"

"큿!"

종이 한 장 차이로 주먹을 빗겨 피한 뒤, 옆구리 쪽에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내 공격이 통할 리는 없었고, 그녀는 너무나도 간단히 내 공격을 피해버렸다.

"그래도 아주 잔챙이는 아닌가 보네? 다른 놈들은 스킬을 봉인해버리니까, 자포자기하던데."

"방송을 망치는 쓰레기에게 무릎 꿇을 생각은 없으니까!"

"넌 조금 괴롭히는 맛이 있겠어. 좋아, 너에겐 특별히 스킬을 안 쓰고 맨손으로 싸워주지."

"참 고맙네!"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다.

리자드맨에게 사용했던 스킬을 사용했다면 나는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됐을 테니까.

마력과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내가 믿을 건, 실전에서 쌓은 감각뿐이었다.

"자, 그럼 다시 간다?"

그녀가 재빠르게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고, 주먹이 닿기 전 가드를 올렸다.

하지만..

"커헉!"

"내 주먹의 위력을 너무 만만히 본 거 아니야? 네 팔도 네 몸이잖아? 소중하게 다루라고~"

가드를 올렸던 오른쪽 팔의 뼈가 부서져 버렸다.

무슨 이런 무식한 힘이 다 있어!?

일단 뒤로 물러난 뒤, 등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팔에 뿌렸다.

"포션은 좀 아껴 써야 하지 않을까?"

"네가 할 말이냐?"

완치된 오른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본 뒤,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난입 빌런은 그런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연신 히죽거렸다.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냐?

-핸드가 아무리 강해졌어도, 강아지가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잖아!

-아니, 찐따 괴롭혀서 뭐 한다고..

시청자들은 점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지지해주고 있다는 감각.

그 감각에 기분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핑크공듀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나와 즐겼던 시간을 복기해라! 너는 약하지 않다!"

후원 포인트도 받아버린 이상.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근데 핑크공듀 누님이랑 있었던 시간을 즐겼었나?'

그녀의 기억에선 왜곡된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나에게 명령했던 움직임을 다시 한번 떠올리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선의 결과를.

"오? 이제 각오를 다진 거야?"

"각오보단 널 다져버리는 게 빠를 거다!"

난입 빌런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최소한의 움직임.

그것은 달려갈 때의 보폭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에 당도했다.

놀랍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난입 빌런의 배를 향해 주먹을 꽂았다.

하지만 내 주먹을 손으로 막은 뒤, 다시금 발차기를 해오는 난입 빌런.

"통할 것 같냐!"

아주 미세하게 자세를 틀어 발차기를 피해낸 뒤, 엘보우로 그녀의 어깨를 노려 찍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손으로 막아버린 뒤, 나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것도 막아보시지!"

다시 한번 나에게 도달한 그녀가 빠르게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잔상마저 보일 정도로 빠르게 쏘아진 주먹들은 순식간에 내 상의를 모조리 찢어버렸다.

주먹에 날이라도 있는 건가?

-핸드 몸 좋다?

-예전에 그 멸치 같던 핸드 맞냐?

-더 찢어! 더! 더!

시청자들은 눈 호강을 한다는 듯한 채팅을 치기 시작했으며, 그 탓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이럴 땐, 보통 핑크공듀 누님께서 상황을 정리해주시곤 했으니, 천천히 기다리면 될 터.

하지만 내 기대는 순식간에 배신당했다.

[핑크 공듀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아래쪽도 찢으면 100만 포인트"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 누구도 눈치 못 채게 살짝 눈물을 흘린 후, 전투에 집중했다.

그녀와 점점 주먹을 맞댈수록 나에겐 투쟁심이라는 감정보단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어째서 오른손만 사용하는 거지?"

"어라? 눈치챘어?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그녀는 나와 맞붙고 나서부터 오른손을 이용한 공격 이외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틈이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더 빠르게 쓰러트릴 수 있음에도 말이다.

굴욕.

헌터가 되고 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

압도적인 전력 차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눈앞의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등신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더욱 화가 났다.

"값싼 동정 따윈 필요 없으니까, 제대로 해!"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바라는 대로!"

그녀가 순식간에 내 등 뒤를 잡아냈다.

나는 곧바로 등 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또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본심을 내면 이 정도거든? 그러니까 봐주려고 한 거야."

그녀가 내 목에 다리를 감은 뒤,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오는 감각.

이대로 가다간 수십 초 이내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다리를 풀어야 한다!

나는 양손에 힘을 주어 다리를 풀려고 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정도 힘으로 풀릴 거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조여오는 그녀의 다리.

이젠 한계였다.

"컥..!"

난 마지막 숨을 내뱉은 채,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