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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325

316화 우리를 막아 내야 할 거다. (2)

지셀의 선언에 모두가 전의를 불태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스코반은 비장한 표정으로 군례를 올렸다.

"무사 귀환을 바라겠습니다!"

힘찬 그의 목소리에 따라 리카르도를 비롯한 마수의 숲 경비대도 군례를 올렸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만 안 가면 돼.'

'왜 자꾸 위험하게 여기를 들쑤시는 걸까.'

'대공자님이니까 뭐 어떻게든 하겠지.'

자신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취미가 없다. 지금까지 겪은 사건들만 해도 대대손손 자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됐다. 이제는 안락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지셀이 스코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 소리야? 너희도 다 따라와야지."

"네? 왜요?"

"일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우리 여기 지켜야 하는데요?"

"내가 앞쪽은 다 쓸어버릴 건데 지키긴 뭘 지켜?"

"...안 가면 안 되나요?"

"안 돼."

스코반은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머리를 굴리던 그는 곧 한 가지 명분을 내밀었다.

"저는 페르디움 소속입니다. 영주님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소속이 다르니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항변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걸 신경 쓰지 않는 남자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후계자인 내가 영주 대리다."

"...총관님이 영주 대리신데요?"

"쓰읍... 나중에 은퇴하기 싫어?"

영지를 물려받으면 페르디움도 지셀의 것이 된다. 스코반 정도야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수 있다.

스코반은 바로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야... 준비해라... 애들 모아...."

"우, 우리 정식 명령 안 받았잖아요?"

"자신 있으면 버텨 보든가. 멀리 있는 총관님보다 가까이 있는 대공자님이 더 무서운 거 몰라?"

"...."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안쪽 구경이나 가자. 좋게 생각하자고."

마수의 숲 경비대는 인원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일손은 하나라도 많은 게 낫다.

지셀은 스코반에게 추가로 명령했다.

"영지에 최소 치안 병력만 남기고 대기 병력은 죄다 끌고 와라. 그리고 인부들도 모집할 테니 원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오라고 해. 보수는 넉넉하게 준다."

스코반은 순순히 움직였다. 어차피 주력은 북방 요새로 다 가 있기에 이 망나니 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지셀은 추가 병력과 인부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베이스 캠프를 만들어야 한다.

"자, 이제 들어가자!"

지셀과 펜리스군이 기존에 만들었던 길을 통해 마수의 숲에 진입했다.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길이 있어도 룬스톤을 캘 때 외에는 쓰지 않으니 숲에 큰 변화가 생길 일도 없었다.

길 주변에는 높은 벽을 쌓아서 제대로 숲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셀은 이제 확실하게 이곳의 영역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전부 허물어라!"

쿵! 쿠웅!

3천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움직이자 높고 단단하게 서서 길을 보호하던 목책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널따란 공터가 만들어지고 바로 지휘 천막이 세워졌다. 이제 이곳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개척이 시작될 것이다.

"초입에는 몬스터가 별로 없다. 최대한 빠르게 밀어 버려라."

숲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디루스 엔트의 영역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길 주변은 이미 예전에 쓸어버렸다.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할 일이 없으니 지셀은 병사들을 과감하게 움직였다.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숲 초입 부분에 마을 두어 개는 들어갈 만한 영역이 확보되었다.

물론 몬스터의 습격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무언가가 벌목을 하는 병사들의 앞으로 뛰쳐나왔다.

병사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괴성을 질렀다.

"우와아악! 뭐야 저거!"

"곰? 저게 곰이라고?"

"무슨 덩치가 저렇게 커?"

병사들 앞에 나타난 것은 보통의 곰보다 덩치는 두 배 가까이 크고, 희끗희끗하고 거친 회색 털로 뒤덮인 그리즐리 베어였다.

이 정도 크기면 이제 맹수가 아니라 그냥 몬스터라 불러도 된다.

이 험한 숲에서 정말 파이팅 넘치게 살아왔는지 눈 한쪽은 길게 파여 있고 온몸에는 상처가 넘쳤다.

비록 더 강한 존재들 때문에 숲 외곽으로 쫓겨난 처지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인간은 한 번에 찢어버릴 만한 힘이 있다.

곰은 나타나자마자 이 주변은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듯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포효 직후 기세 좋게 달려가려던 곰은 살짝 멈칫했다. 먹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정도면 이제 먹이라 할 수도 없었다.

곰은 멈춰 서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리 본능에 이끌려 살아가는 짐승이라도 상황 파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륵, 그륵."

판단이 끝난 곰은 할 일들 마저 하시라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하지만 펜리스군은 곰을 순순히 보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수의 숲에 관한 위험한 소문들에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과한 대응으로 이어졌다.

"쏴라!"

파아아앗!

가장 가까이 있던 보병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수백 개의 화살이 곰에게 날아들었다. 무척이나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쿠워어어어억!"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린 곰은 그대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는 쓰러졌다.

그걸 본 카오르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쳤다.

"야야! 고작 저런 놈한테 그런 공격을 하면 어떡해! 가죽 못 쓰게 생겼잖아!"

저런 거대한 곰의 가죽은 확실히 비싸게 팔린다. 하지만 구멍이 수도 없이 뚫려 걸레짝이 됐으니 이제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보병 지휘관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아니, 그... 그래도 저렇게 무섭게 생긴 몬스터인데...."

"하, 답답하네! 저게 뭔 몬스터야. 그냥 기형 곰이지! 여기 별거 아니니까 쫄지 말라고."

"...."

보병 지휘관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괴물이 나왔는데 별거 아니라고 할 수가 있을까?

카오르는 거만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내가 여기 처음 온 게 아니잖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런 거 나오면 나부터 불러. 알겠어?"

카오르는 온종일 몬스터 가죽 벗겨서 영지로 보내는 일을 하다 왔다. 어느새 가죽에 진심인 남자가 된 그는, 복장에서 가죽이 들어가는 부분은 모두 최고급품으로 바꾼 상태였다.

그는 바로 헌터들을 소집했다.

"가죽 벗길 수 있는 놈들 나오면 먼저 앞장서서 달라붙는다! 알겠냐!"

"넵!"

아이언클리프의 '가죽왕'이 내리는 명령이다. 헌터들은 늠름하게 대답했다.

가죽을 벗길 수 있는 몬스터나 짐승이 나오면 카오르와 헌터들이 상대했다. 그들은 훌륭한 솜씨로 깔끔하게 가죽을 얻어 냈다.

이렇게 중간중간 가죽을 얻는 것도 이득 중 하나였다. 물론 가죽이 있는 몬스터보다는 생김새부터 기괴한 것들이 더 많긴 했지만.

아직 초입 부분이라 듬성듬성 마주치는 몬스터들은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예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그간 마수의 숲에 관해 들어 온 소문도 그렇고, 숲 안의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계속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수의 숲 경비대원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복잡했다.

"역시 숫자가 깡패라니까. 이 숲을 이렇게 밀어 버리는 날이 올 줄이야."

"설마 진짜 위험한 몬스터가 나타나진 않겠지? 계속해도 괜찮겠지?"

"대공자님이 전에 한 번 초입은 쓸어버렸으니 안전할 거야. 안전해야지."

페르디움 사람들에게 마수의 숲은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이 마수의 숲 개척에 한 번 성공했음에도 그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룬스톤을 캐 오는 길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몬스터가 튀어나올 때를 대비해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지셀이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숲을 밀어 버리는 와중에도 경비대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처음 오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에 비하면 나타나는 빈도가 훨씬 낮다고는 하지만, 몬스터들의 크기나 생김새가 꽤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많이 나타났다면 분명히 위험했을 것이다.

신이 난 건 카오르와 헌터들뿐이었다. 그들은 슬슬 긴장을 놓고 마수의 숲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아, 여기 뭐야. 그림자 산맥보다 몬스터가 적잖아. 간에 기별도 안 가네."

"너무 소문만 무성한 거 아닌가? 이런 데가 무서워서 개척도 안 하고 있었다고?"

"아무리 예전에 쓸어버렸어도 이렇게 적게 나오면 재미없지."

그림자 산맥에서는 몬스터를 쓸어버려도 금세 다시 채워진다. 정말 미친 듯이 많았기 때문이다.

각 개체의 힘은 이곳이 위일지 몰라도 수가 너무 적었다. 이러면 계속 사냥하는 맛이 떨어진다.

그들이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드디어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스으윽....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자는 외각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였다.

병사는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을 보더니 기겁하며 외쳤다.

"모, 몬스터다! 몬스터가 또 나타났다!"

아직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병사들은, 경계병의 외침을 듣자마자 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들은 곧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으헉, 뭐야! 왜 저렇게 커?"

"뒤로 물러나! 빨리 제대로 대형을 갖춰라!"

"마법사! 마법사님들을 불러!"

나타난 몬스터는 바로 사마귀를 닮은 자이언트 맨티스였다.

자이언트 맨티스는 인간보다 체구가 크고, 그 앞발은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만큼 강력하다.

한 마리만으로도 수십의 병사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자이언트 맨티스라는 몬스터였다.

그런 몬스터가 무려 50여 마리나 나타난 것이다. 이 정도 숫자면 어지간한 무장 병사들 수백 명도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모여! 빨리 모여라!"

"방패 들고 대열 갖춰!"

"인부들은 어서 대피해라!"

사방이 시끄러워지고 병사들이 밀집했다. 듬성듬성 한두 마리씩 나타나던 몬스터들과 다르다. 드디어 제대로 된 몬스터들이 수십 마리나 나타난 것이다.

인부들도 공사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병사들은 긴장한 채 자이언트 맨티스들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작은놈이 없네, 작은놈이 없어."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주변에 있던 자들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자이언트 맨티스는 인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인데, 이곳에 사는 놈들은 도대체 뭘 먹었는지 원래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평범한 크기인 놈도 앞발을 휘두르면 중보병의 방패 정도는 그냥 잘라 버리는데 저 정도 크기면 얼마나 힘이 강할까?

적의 압도적인 크기에 다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으윽....

자이언트 맨티스들도 상대의 수가 많은 것에 위협을 느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것들은 곰처럼 그냥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이언트 맨티스는 겁이 없기로 유명하다.

상대방 쪽이 수가 많긴 하지만, 크기는 자신들보다 훨씬 작은 걸 확인하고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조금씩 앞발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방패를 들었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다. 기사들과 헌터들, 엘프들과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 숫자에 여기 있는 자들이 당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저 자이언트 맨티스가 얼마나 강한지 겪어 보지 못한 그들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수의 숲에 사는 몬스터들은 숲 밖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아직 초입 부분인 이곳에서 병사를 잃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 근처로 다가온 바네사가 마력을 모으며 말했다.

"다들 준비하세요."

자이언트 맨티스는 그 속도 또한 무척이나 빠르다고 알려진 몬스터다. 얼마나 빠를지 알 수가 없기에 그녀는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병사들이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서 적의 수를 하나라도 줄일 생각이었다.

마법사들이 각자 주문을 외우며 공격하려고 할 때, 지셀이 말했다.

"오, 쟤네 아직 남아 있었네? 이 근처가 그놈들 영역이었지? 그때 다 쓸어버린 줄 알았는데 남아 있던 놈들이 다시 번식을 한 모양이야."

길리언이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다시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어이, 영감. 이번에는 내가 더 많이 잡을 거야. 잘난 척하지 말라고."

카오르도 건들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고든도 근육을 꿈틀거리며 따라나섰다.

"저놈들한테 그때 친구들이 많이 죽었지. 나도 그때 힘들어서 근손실이 많이 났었어."

그들의 뒤를 따라 몇 명의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같이 따라갔다. 기사들은 옛날 생각이 나는지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지금은 다 추억이 됐네."

"그때는 저놈들이 참 무서웠는데."

"다들 그냥 일 보세요.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일행 모두가 저 몬스터를 상대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이곳에는 저놈들을 아주 질리도록 상대해 본 자들이 있었다.

길리언과 카오르를 필두로 나선 기사들.

이들은 모두 마수의 숲을 경험했던, 그리고 처절한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던 50여 명의 용병들이었다.

317화 긴장감을 줘야 해. (1)

앞에 나선 기사들과 몬스터들의 숫자는 서로 비슷했다.

용병 출신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자 다른 기사들도 따라 나가려 했다. 어쨌든 전투에서 가장 선봉에 서야 하는 건 기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광견단 출신 기사 하나가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그냥 거기서 구경해라. 우리가 왜 선배인지 알려 줄게."

그 말에 다른 기사들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복수전이라고 해 두지. 내버려 둬라. 쟤네들이 그때 당한 게 많거든."

일반적인 자이언트 맨티스 하나가 초급 기사 한 명과도 맞먹는다고 한다. 마수의 숲에 사는 놈들은 분명 더 강하다.

예전에도 지셀의 지휘와 벨린다, 길리언, 카오르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꽤 피해를 봤다고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기사들은 조금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아악!

다가오던 자이언트 맨티스들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성큼성큼 달려온 그것들은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바로 앞발을 휘둘렀다.

자이언트 맨티스의 공격 속도를 목도하고 다들 깜짝 놀랐다. 한발 물러서서 구경하던 기사들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빠르기였다.

스걱!

하지만 길리언은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앙!

자이언트 맨티스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그 직후 카오르와 기사들이 각자 자이언트 맨티스들을 하나씩 잡고 달라붙었다.

스걱! 스걱!

분명 자이언트 맨티스의 공격은 평범한 병사들은 막지도 못할 만큼 빠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사들은 가볍게 피하며 자이언트 맨티스들을 공격하고 있다.

뒤에서 구경하던 기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 정도 실력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쉽게 피하는 거지?"

"막거나 굴러야 하는 거 아냐?"

자신들도 마나를 크게 폭발시키지 않는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그런데 자이언트 맨티스를 상대하는 기사들은 너무 쉽게 피하고 있었다.

마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알고 피하는 것만 같았다.

구경하던 지셀이 놀란 기사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저놈들은 분명 위협적인 몬스터지만 공격 패턴이 단순하다. 신체 구조 때문이지. 몸의 뒤쪽이 더 길어서 공격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사각에 들어가면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기가 힘들거든."

과연 자세히 보니 자이언트 맨티스의 공격들은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앞쪽을 내리찍거나 횡으로 베는 게 전부다.

기사들이 공격을 예측하고 바로 옆으로 돌아가면 놈들도 따라서 몸을 돌렸지만, 그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렸다.

콰아앙! 콰앙!

기사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나를 폭발시키며 자이언트 맨티스의 몸을 베었다.

날카로운 앞발과 빠른 전진 속도에 비해 자이언트 맨티스의 방어력은 상당히 약하다. 큰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그것들의 몸은 쉽게 찢어졌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익힌 공략법이지. 익히지 못한 놈들은 다 죽었거든. 블러드 퓌톤을 제외하고는 저놈들한테 입은 피해가 제일 컸다."

"...."

"그때 살아남은 놈들은 이제 저거 한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쉽게 잡을 수 있다. 자이언트 맨티스들은 방어력이 무척 약하니까. 마나를 못 쓰던 시절에도 상처는 낼 수 있었는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

물론 뒤에 남은 기사들도 자이언트 맨티스 하나 정도는 혼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확실히 경험은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이언트 맨티스는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상대의 확실한 약점을 알고 있는데 실력까지 늘어난 기사들을 자이언트 맨티스들이 당해 낼 리가 없었다.

"우와아아아!"

그 놀라운 광경에 병사들과 인부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무섭기로 소문난 몬스터들을 저렇게 쉽게 잡다니!

"대단해! 영주님이 여기를 토벌했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기사님들도 장난 아닌데?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잖아?"

"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어."

마수의 숲 경비대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놀랐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예전 기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엄청 많이 죽고 부상자도 많았었잖아?"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어."

"다들 용병들이었는데....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그 시절의 공포와 위험함만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번 전투는 큰 충격이었다.

마수의 숲이 어떤 곳이었는가. 감히 들어갈 엄두도 못 내던 위험한 곳이었다.

이곳에 사는 몬스터가 상대하기 쉬울 리가 없다. 이건 펜리스의 기사들이 강해진 거다.

"역시 대공자님이야...."

이 모든 게 지셀 덕분에 가능했다. 사람들은 기사들의 실력을 이렇게까지 키운 지셀의 업적에 다시 한번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용병 출신의 기사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그때와 달라진 실력과 위상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리가 강해지긴 했구나."

"그때는 너무 무서웠는데."

"가스톤, 네 복수는 내가 해 줬다."

누군가는 뿌듯해하는 표정을 짓고 누군가는 옛 동료가 생각나는지 살짝 눈물짓기도 했다.

기사들의 활약 덕분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병사들과 인부들은 든든한 마음에 표정이 밝아졌다.

이 정도 병력에 실력자들까지 잔뜩 있으니 겁을 먹을 이유도 없었다.

마법사들은 죄다 자이언트 맨티스의 시체로 달려갔다.

"이거는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마수의 숲에 사는 자이언트 맨티스의 시체라... 이거 정말 귀한 물건이군요."

"이놈들 고기는 비싼 약재로 쓰일 수 있어. 하, 이게 남자한테 참 좋은데."

자이언트 맨티스의 앞다리는 날카로워서 여기저기 쓸 만한 소재였다.

그보다 더 훌륭한 소재가 고기다. 남성들에게 보양식으로 좋다고 알려져 상당히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시시덕거리며 자이언트 맨티스의 시체에 정성스럽게 냉동 마법과 보존 마법을 걸었다.

말로는 연구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어디에 쓸지 뻔히 보였다.

"자, 다시 일을 시작하자!"

지셀의 말에 병사들과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긴장감이 사라지니 작업 속도는 더 빨라졌다. 아예 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겠지?"

"금방 끝날 수도 있겠는데?"

"벌써 꽤 큰 구역을 확보했잖아? 그냥 벌목하러 온 기분이라고."

병사들과 인부들은 그렇게 두런두런 떠들면서 작업에 전념했다.

영역이 확보될 때마다 병사들과 인부들은 새로 목책을 세웠다.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한 감시탑도 빼놓지 않았다.

지셀은 초입이라고 무작정 영토를 늘리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 룬스톤을 얻으러 왔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더 안쪽으로 들어가겠다. 영토는 초입 부분이 안정화되면 더 늘리겠다."

지셀의 명령에 다시 병력과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부들은 숲에 막 들어왔을 때보다 수가 훨씬 늘어난 상태였다. 펜리스의 인부들은 물론이거니와, 페르디움에서도 인부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보급을 맡은 병사들이, 마수의 숲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소문을 낸 덕분이었다.

페르디움의 인부들은 숲에 대해 근원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자이언트 맨티스를 쉽게 처치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마수의 숲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안심했다.

실상은 아직 초입 부분이라 몬스터도 약한 편이고, 기사들이 상대해 본 몬스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물론 인부들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대공자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영지의 병력을 멋대로 움직이시다니! 이 영지는 대공자님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씩씩거리며 나타난 호메른이 소리를 질렀다. 얼굴도 시뻘게진 것이, 무척이나 열이 오른 티가 났다.

펜리스 병력만 끌고 들어간다면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것까지는 막을 명분은 없다. 하지만 멋대로 페르디움의 병력을 끌고 가다니!

아무리 대공자라도 선을 넘은 짓이다. 이놈이 선을 안 넘은 적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놀고 있는 병력이지 않습니까? 위협도 없는데 이럴 때 써야죠."

"어허! 아무리 그래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 엄연히 페르디움 후작님의 병력입니다! 후계자라도 마음대로 데려다 쓸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저랑 상의하고 계획을 잡으셔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시간 오래 걸리잖아요."

"뭐, 뭣?"

"사람들을 얼마나 쓰겠다 회의하고 조율하다 보면 늦어지니까 빠르게 진행한 거죠. 어차피 진행할 거 뭐 하러 시간을 끕니까?"

"어허! 누구 마음대로 진행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쪽에 병력 맡겨 놨어요? 어찌 아버지의 병사를 그리 쉽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까!"

호메른이 꼰대 짓을 하기 시작했다. 꼰대 짓이라고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효율적이라고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어쨌든 잘못이 맞다. 예의와 절차라는 것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 지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호메른을 이겨 먹을 수 있는지도.

"여기 확보한 영토 말입니다. 지력이 참 좋아요. 그냥 씨만 뿌려도 미친 듯이 자랄 정도죠. 룬스톤을 쓰지 않고 개량 밀알만 써도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게 뭐! 우리 것도 아닌데!"

"제가 영지를 물려받을 때까지 페르디움에 양도해 드릴 수도 있는데요."

"지, 진짜요?"

호메른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지셀이 자신의 것을 이렇게 흔쾌히 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현재 페르디움 영지는 지셀이 지원해 주는 식량과 사업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부들은 도로 건설과 각종 시설물 건설에 참여하며 돈을 벌어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셀이 만들어 준 새로운 경작지가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룬스톤 소모량이 많아서 영지 전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매년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순식간에 마을 몇 개 크기에 맞먹는 영토를 확보하고, 앞으로도 더 늘리겠단다. 이 비옥한 토지에 씨만 뿌려도 페르디움의 식량 생산량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게 분명했다.

사실 땅을 다 줘도 지셀에게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우리야 식량은 넘쳐나니까.'

마수의 숲에 온 건 일차적으로는 룬스톤 때문이지만, 숲을 개척하고 영토를 늘리는 건 페르디움의 힘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펜리스는 이곳에서 나는 다른 자원들만 확보해도 충분하다.

만약 페르디움이 자체적으로 많은 식량을 수급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공작가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씨, 괜히 왔다. 가만히 있을걸.'

호메른이 식은땀을 흘리며 지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데스몬드와의 전쟁도 도와줬으니 이제 꿀릴 건 없다 싶어서 성질 좀 부려 봤는데 또 이렇게 됐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부나 더 지원해 주시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제가 그래서 인부들은 더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려고 온 겁니다."

호메른의 장기는 입을 닫아야 할 때 싹 닫는 거다. 이미 예전 마수의 숲 개척 때도 한 번 해 봤다. 두 번째는 더 쉬웠다.

어차피 개척 사업에 참여하면 인부들도 돈을 벌고, 그만큼 페르디움의 경제가 더 활발하게 돌아간다.

자존심을 좀 세워 보자고 왔지만, 자존심 지키자고 버티기에는 보상이 너무나도 컸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셨죠?"

호메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자 지원해 오는 인부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것보다야 영지 차원에서 홍보하는 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호메른은 거기에 노역 부대와 남은 병사들까지 싹싹 긁어 보내 주었다.

저번과는 달리 드워프들과 마법사들까지 작업에 참여했다 보니 개척 사업은 더욱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존에 뚫었던 룬스톤 자원지까지의 길은 곧 상당히 큰 영토로 바뀌었다.

영토 외각에는 단단하고 큰 목책들이 빈틈없이 세워졌고 곳곳에 감시탑이 세워졌다. 재료야 숲 안에 넘치는 게 나무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이야, 이러다가 진짜 영지 하나쯤 되는 땅을 얻을 기세인데?"

"나무들의 품질도 엄청 좋아. 이렇게 공사에 써도 남아돌 정도로 크기도 크고, 많기도 하고."

"생각보다 몬스터는 많지 않은 거 같은데? 자이언트 맨티스 때가 제일 많이 온 거 같아."

저번 개척 이후 시간이 꽤 지나서 새로 자리를 잡은 몬스터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몬스터들을 전멸시켰던 데다, 초입 부분이기도 해서 예전만큼 위험하진 않았다.

새로 생긴 몬스터들은 수도 그다지 많지 않고, 그나마도 대부분 약한 놈들뿐이었다.

병사들과 인부들은 안심하고 웃으며 돌아다녔다. 소문만큼 위험한 거 같지도 않았고 일도 수월했기 때문이다.

몬스터 수십 마리 정도야 금세 처치하는 실력자들이 가득하니 걱정이 될 리가 없었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보고선 지셀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곧 그는 바네사를 불러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곧 저번에 냈던 길을 벗어날 거야.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해 줘. 마법사들한테도 잘 설명하고."

"네, 알겠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 말하지 마. 마법사들끼리만 준비해."

"왜, 왜요? 그러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미리 알고 대비를 해야...."

그러자 지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다들 너무 풀어져서 말이야. 위험하다는 걸 깨달아야 긴장감이 좀 돌아올 거 같거든."

"긴장감이요?"

"그래. 이렇게 즐겁게 가다가는 목적지에서 절반 이상이 죽을 테니까."

그 말에 바네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318화 긴장감을 줘야 해. (2)

바네사가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쯤에서 그 몬스터가 나오나요?"

"그래, 확실하게 나와. 그걸 이용해서 긴장감을 줘야 해. 지금 다잡지 않으면 갈수록 위험해질 테니까."

"그래도, 경고 정도는 해 두는 게...."

"그러면 의미가 없어. 내가 아무리 긴장 풀지 말라고 해 봐야 말만으로는 소용이 없지. 직접 겪어 봐야 해."

무슨 일을 겪든, 미리 알고 대비하면 충격이 덜한 법이다. 그래서 지셀은 오랜만에 아무런 준비 없이 사람들이 몬스터를 맞닥뜨리게 할 생각이었다.

그의 기준에서 그 정도면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딱 좋은 상대였다.

바네사도 지셀의 의도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영주님도 초입 이후에는 처음 가 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지...."

"음, 나중에 얘기해 줄게. 어쨌든 가서 보면 믿을 수 있을 거야."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참 이럴 때는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그냥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출처 모를 신비한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으로 포장되어 있다. 여기서 그런 지식이 하나 더 늘어 봐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과연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수긍했다. 마법사로서 궁금한 점이 많긴 했지만, 지셀이 말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간 지셀은 그녀가 알아야 하는 건 꼭 설명해 주고 알려 줬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조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마법사들에게 돌아가 준비할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길이 끝난 부분부터는 새로 개척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숲은 언제부턴가 다시 빽빽한 나무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부터 조금 천천히 진행한다. 경계 수준을 올리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앞장서도록. 인부들은 후방에서 감시탑을 계속 짓도록 해라."

어떤 지역을 영토로 삼으려면, 그저 그 지역을 확보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확보한 곳을 지킬 수 있어야 진짜 영토가 된다.

확보한 구역이 넓어진 만큼 지셀은 그곳을 지키는 시설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몬스터의 영역에 진입한다. 지셀은 신중하게 접근하며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 영역에는 우리가 잘 아는 몬스터가 살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흔히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몬스터. 강력한 몬스터긴 하지만 그만큼 익숙하기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선발대의 전력으로 충분히 그것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쿠웅! 쿠웅!

길을 내고 영토를 확보하려면 나무를 베어야 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안 시끄러울 수가 없다.

그 소란은 마침내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의 신경을 건드렸다.

크아아아아아!

멀리서 하늘을 울리는 듯한 괴성이 울렸다.

초입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등골까지 저릿해지는 기세에 병사들이 작업을 멈췄다.

"전원 전투 준비. 뒤로 조금 물러난 뒤에 대열을 갖춘다. 기사들은 앞으로 나오도록."

지셀의 명령에 순식간에 인원들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멀리서 무언가가 분노한 듯이 나무들을 박살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쿠웅! 쿠우웅! 쿠웅!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걸음걸이만으로도 땅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콰앙!

"크아아아아!"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오우거?"

오우거는 흔하지는 않지만 유명한 몬스터다. 홀로 수백의 병사와 기사 수십을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진 강력한 몬스터.

그 위용과 힘 때문에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괴물이었다.

병사들은 기겁하며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저것도 덩치가 장난 아니네?"

"여기 사는 놈들은 도대체 뭘 처먹고 살았길래...."

"이 숲에 사는 놈들은 왜 다 저 모양이지?"

오우거긴 오우거인데 이놈도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기존 오우거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거 같았다.

덩치로만 보자면 오우거의 상위 등급이라 불리는 트윈 헤드 오우거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몬스터의 체구는 전투력과 비례한다. 저 정도 크기면 분명 일반적인 오우거보다 훨씬 더 강할 게 분명했다.

그림자 산맥에서 몇 번 오우거를 본 적이 있는 헌터들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 그래도 저 정도 크기면 돈이 좀 되겠는데?"

"크기가 큰 만큼 품질도 더 좋을 거야."

"흐흐, 이거 재미있겠네."

다들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아무리 오우거가 강하다 해도 여기까지 너무 쉽게 왔기 때문이다.

오우거는 혼자 수백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에는 무려 4천이 넘는 병력이 있다. 기사도 400명이나 되고 헌터들도 300명이나 된다.

체급이 깡패긴 하지만 숫자는 더 깡패다. 이 정도 인원으로 오우거 하나 못 잡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오우거와 관련된 특별한 별명으로 불리는 자가 있었다.

"하아, 이번에도 또 이 몸이 처리해야겠네. 다들 구경이나 하라고."

카오르가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트윈 헤드 오우거도 홀로 잡았다. 저 오우거가 그와 비슷한 등급이라 해도 충분히 잡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도 그때 깨달음을 얻고 벽을 한 단계 넘었으니까.

카오르는 검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혼자 잡을 테니까 아무도 끼어들지 마. 알았어? 구경들이나 하라고."

명색이 '오우거 슬레이어'라 불리는 몸이다. 오우거를 상대할 때는 당연히 자신이 나서야 했다.

"와! 오우거 슬레이어 카오르다!"

"이번에도 실력 한번 보여 주세요!"

"고작 한 마리 정도에 당하진 않겠지?"

사람들이 환호하자 카오르가 콧대를 세우고 으쓱거렸다.

다들 가벼운 여흥을 즐기러 나온 것처럼 굴었다.

기사들도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혼자 오우거를 잡을 수 없지만, 이곳에는 오우거를 홀로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카오르뿐만 아니라 벨린다와 길리언, 바네사도 충분히 오우거를 홀로 잡을 수 있는 실력자다.

영주인 지셀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혼자서 여러 마리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긴장이 풀어질 대로 풀어진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카오르와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오직 마법사들만이 표정을 굳힌 채 오우거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앞에 나선 카오르에게 지셀이 물었다.

"정말 혼자 잡겠다고?"

"아, 당연히 '오우거 슬레이어'인 이 몸이 잡아 줘야죠. 내가 오우거 혼자 잡는 거 다들 못 봤을 거 아냐?"

카오르가 어깨를 빙빙 돌리며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우거는 그저 으르렁거리며 사람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흉포하기로 소문난 오우거답지 않은 모습. 원래의 성정대로라면 적이 많건 적건 간에 무조건 돌진하고 봐야 했다.

"봐봐, 저거 쫄았네. 벌써 내 몸에 흐르는 피의 냄새를 맡은 거지. 동족의 피를 말이야."

카오르가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뭔가 이상하다. 동시에 벨린다와 길리언도 살짝 표정을 굳혔다.

쿠웅! 쿠웅!

나무를 박살 내며 오우거가 한 마리 더 튀어나왔다.

"으음... 두 마리라...."

두 마리는 솔직히 조금 힘들다. 카오르의 등에서 살짝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쪽팔리게 못 잡겠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기사들과 헌터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사람들은 더 환호했다.

"와아아아! 두 마리다!"

"두 마리도 잡아 보세요!"

"할 수 있다! 카오르!"

사람들의 응원에 카오르는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내가 오늘 내 숨겨진 힘까지 발휘해 본다!"

두 마리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위험하면 빠질 생각이었다. 정 위험하면 영주든 누구든 도와줄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우거 두 마리야 금방 찜 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카오르가 조금 더 앞으로 나가려 할 때, 또다시 오우거 하나가 뛰쳐나왔다.

쿠웅!

"세 마리?"

이건 무리다. 목숨을 걸어도 이길까 말까다. 실수 한 번만 해도 죽을 수가 있다. 여기서 나서면 그냥 객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쿠웅! 쿠웅!

"다섯?"

카오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벨린다와 길리언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드드드드드드!

마치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광포한 포효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더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오우거는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몬스터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수의 숲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우리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었다.]

"크오오오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오우거들이 곳곳에서 거칠게 포효하며 뛰쳐나왔다.

아홉 마리... 열 마리... 열다섯 마리....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기사들은 무기를 급히 뽑아 들고 자세를 낮췄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드디어 울림이 끝났다. 그렇게 나타난 오우거의 수는 무려 20여 마리였다.

오우거가 이 정도나 모였다면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지도에서 지워 버릴 수 있을 터였다.

역시 마수의 숲은 보통이 아니다. 강력한 몬스터들이 즐비하다 보니 독립성이 짙은 오우거들조차도 무리 생활을 하게 진화한 모양이었다.

병사들과 인부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 자이언트 맨티스보다 수가 적잖아?"

"지금까지 다 쉽게 해치웠잖아? 이번에도 쉽게 잡을 수 있지 않겠어?"

"이, 이번에는 아닌 거 같은데?"

분위기가 무척 이상하다. 그동안 여유만만하던 기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제야 병사들과 인부들은 깨달았다. 지금 나타난 몬스터는 지금까지 마주쳤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오우거가 숲의 제왕이란 별명으로 불린다는 걸 이제 기억한 것이다.

"모... 못 잡나?"

"잡기야 잡겠지.... 사람들 잔뜩 죽은 뒤에...."

"젠장, 정신 차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해서 무기를 움켜쥐었다. 만약 병사들끼리만 저 오우거들과 싸운다면 최소 절반은 죽어 나갈 것이다.

마수의 숲에 사는 몬스터가 바깥에 사는 것들보다 더 강하다는 걸 생각하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인부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다. 그들은 헐레벌떡 뒤로 물러났다. 어찌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서로 어깨가 부딪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마법사들이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엘프들도 굳은 표정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대열을 갖췄다. 이들은 지셀을 따라다니며 전쟁에 참여한 베테랑 병사 출신들이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진형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우거들은 거대한 나무를 들고 있다. 저걸 한 번만 휘둘러도 병사 수십은 그냥 날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지셀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게 마수의 숲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오우거 수십 마리 정도는 우습게 나오는 곳이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기괴하고 지독한 놈들이 즐비한 곳이다."

"...."

"자만하지 마라. 방심하지 마라.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마수의 숲이다."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간 영주를 따라다니며 수많은 위업을 이룬 병사들이다. 그런 그들도 북부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고 내심 자만하고 있었다. 숫자의 힘을 믿고 방심했다.

뛰어난 기사들과 영주들이 뭐든 쉽게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자신들이야 그냥 대충 따라다니면 될 거라 생각했다.

지셀은 지금 그 점을 짚은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이게... 마수의 숲....'

'미쳤지, 오우거를 보고 여유를 부리다니. 이제 초입을 막 지났는데 중심도 아닌 이런 곳에 오우거가 산다니.'

'영주님도 예전에 죽을 뻔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실감하는 법이다. 이곳에 처음 온 병사들과 기사들은 드디어 마수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깨달았다.

헌터들도 이제 여유를 잊고 침만 삼켰다. 오우거는 그림자 산맥에서도 가끔 볼 수 있지만, 그들도 오우거가 무리 지어 사는 건 처음 봤다.

오우거가 이렇게 함께 나타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도 아닌데 오우거가 몰려나온다고?'

'미친... 이 숲은 언제나 몬스터 웨이브 상태인 건가?'

'어쩐지 지금까지 너무 쉽게 왔다 했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서던 카오르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처음에 나타났던 오우거가 오히려 잔인한 눈빛을 띠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가만히 오우거를 노려보던 카오르가 갑자기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셀과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줘."

쪽팔림은 잠깐일 뿐이다. 원래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법이다.

쪽팔려도 살아남아야 한다. 도무지 혼자서 저 많은 오우거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붙는 순간 온몸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얻어맞을 게 분명했다.

카오르의 애원이 제법 강렬하게 들린 모양이다.

"그래, 도와줄게."

지셀이 피식 웃더니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319화 긴장감을 줘야 해. (3)

벨린다와 길리언, 기사들도 지셀을 따라 움직였다.

병사들과 엘프들이 뒤따라오려 하자 지셀이 손을 저었다.

"병사들은 뒤에서 대기해라. 오우거와 맞붙어서 좋을 건 없다. 바네사는 내가 얘기한 대로 준비하고 기사들은 대형을 갖춰라."

오우거 같은 강력한 몬스터는 소수정예로 상대하는 게 낫다. 어설프게 공격했다가는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평범한 지휘관이라면 병사들을 방패 삼아 갈아 넣었을 것이다. 기사들을 잃는 것보다는 병사들을 잃는 게 나으니까.

하지만 병사들을 희생시켜 힘을 빼는 건 지셀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마법사들과 함께 준비하라고 바네사에게 말해 둔 것도 있었다.

벨린다와 길리언에게도 살짝 언질을 주긴 했었다. 카오르만 빼고.

"크르르르...."

오우거들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인간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우거라는 몬스터는 영역을 침범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오우거들은 나무 몽둥이를 강하게 쥐고 자세를 낮췄다.

똑같이 몸을 숙인 지셀이 말을 이었다.

"바네사, 시작해라."

"쿠오오오오!"

동시에 오우거들이 뛰어올랐다. 강력한 힘을 자랑하듯 도약 높이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허공에 떠오르자마자 지셀이 외쳤다.

"눈을 감아라!"

지셀의 말이라면 그 즉시 반응하도록 훈련된 게 펜리스의 기사들이다. 눈을 감은 그들의 뒤에서 바네사의 음성이 울렸다.

"플래시 밤."

번쩍!

오우거들의 눈앞에서 엄청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카아아악!"

뒤를 이어 다른 마법사들도 바네사와 같은 마법을 시전했다.

번쩍! 번쩍! 번쩍!

수십 번의 섬광이 오우거들의 시야를 가린다. 순간적인 빛에 눈이 멀어 버린 오우거들은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직접적으로 시력을 멀게 하는 더 높은 서클의 마법도 있었지만 굳이 플래시 밤을 쓴 이유가 있었다. 오우거가 태생적으로 마법 저항이 강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직접 마법을 걸면 효과는 오래 가겠지만 혹시나 마법에 걸리지 않는 놈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강한 빛을 보게 해 잠깐이나마 확실히 시야를 뺏기로 한 것이다.

"크아아아아!"

운동 신경이 뛰어난 오우거인지라 바닥에 뒹굴다가도 금세 일어났지만, 아직은 주변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가장 선두로 달리던 오우거는 본능이 앞서는 몬스터답게 바로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덩치도 큰 데다 몽둥이 크기도 무지막지하니 공격이 미치는 범위도 그만큼 넓었다. 그 탓에 바로 옆에서 일어나던 오우거가 몽둥이에 얻어맞고 말았다.

콰아앙!

"쿠에에엑?"

얻어맞은 오우거는 깜짝 놀랐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누가 공격했는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우거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공격이 온 방향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몽둥이를 휘두른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자신이 맞은 곳을 향해 휘두르면 된다.

이건 몬스터들의 공통된 습성이기도 했다. 보통 힘이 센 몬스터들일수록 이런 습성이 강하기도 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제대로 안 보이는 상태에서 서로 엉킨 오우거들은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향해 마구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앙!

"쿠아아아악!"

오우거의 공격은 아름드리나무도 한 번에 박살 내곤 한다. 아무리 몸이 단단한 오우거라도 그런 강력한 공격까지 무시하지는 못했다. 놈들은 한 대 맞을 때마다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적의 공격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 오우거들은 서로를 향해 더 강하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날뛰었다.

콰앙! 콰앙! 콰앙!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팔이 부러진 놈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통이 커질수록 그것들의 분노는 더 커져 갔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오우거들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섬광의 효과가 사라지고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눈이 먼 건 잠깐이었지만 그간 쌓인 타격은 적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오우거들은 서로를 향해 마구 울부짖었다.

"카아아악!"

"쿠오오오!"

서로를 탓하는 듯한 희극적인 모양새였다. 한동안 꽥꽥대던 오우거들은 자신들끼리의 다툼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렸다.

"쿠욱?"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한 인간이 대검을 든 채 높이 뛰어올랐다.

3단계의 코어를 활성화해 단숨에 도약한 지셀의 검은 가장 앞에 있던 오우거의 머리에 박혔다.

콰직!

"크아악!"

검이 머리에 박혔는데도 오우거는 바로 죽지 않았다. 마수의 숲에 사는 놈답게 엄청나게 단단했던 것이다.

부우웅!

오우거는 검이 머리에 박히자마자 몽둥이를 휘둘렀다. 지셀은 잽싸게 물러나며 외쳤다.

"쳐라!"

기사들도 단숨에 뛰쳐나갔다. 이들은 대(對)몬스터 방진도 훈련받았다. 뛰어난 헌터이기도 한 지셀은 틈이 날 때마다 기사들에게 몬스터를 상대하는 법을 훈련시켰다.

기사들은 급하게 조를 짜, 대형 방패를 든 자를 선두에 세우고 오우거들에게 달려갔다.

"크아아아아!"

이미 자신들끼리의 난타전으로 여기저기 다친 오우거다. 하지만 가장 앞에 선 기사를 향해 휘두르는 공격은 여전히 강력했다.

"실드."

지잉―!

마법사들이 외치자 선두에 선 기사들에게 마력의 보호막이 덧씌워졌다. 방패를 든 기사들은 바로 오우거의 공격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아아앙!

"우아아악!"

방패를 든 기사는 단 한 번의 공격에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뒤로 날아가 버렸다. 과연 엄청난 힘이었다.

비록 버티진 못했지만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아 낸 것으로 충분했다. 그 덕분에 잠깐의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파이어볼."

파아아악!

수십 개의 파이어볼이 오우거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엉! 퍼엉! 퍼엉!

"크아아아아!"

오우거들은 그걸 맞고도 잠깐 주춤거렸을 뿐이지만 마법사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공격도 다시 한번 시야를 뺏기 위한 공격이었다.

푸욱! 푸욱! 푸욱!

자세가 흐트러진 오우거들의 몸에 수십 개의 검이 박혔다. 아무리 오우거의 몸이 단단해도 마나를 폭발시킨 기사들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는 없었다.

기사들 또한 실패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찌르고 베었다.

"카아아아악!"

오우거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기사들은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빨리 붙어!"

"힘줄을 끊어라!"

"무기를 휘두르지 못하게 해!"

기사들이 오우거의 팔과 다리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오우거의 몸에 어떻게든 매달려 사정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이미 팔이 부러지거나 늑골이 나간 오우거들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비교적 멀쩡한 오우거들은 지셀과 벨린다, 길리언 등의 실력자들이 도맡았다.

파아앗!

벨린다의 몸에서 뻗어 나간 단검들은 오우거의 눈과 귀, 입 등 약한 곳을 꿰뚫었다. 길리언은 기사들이 매달려 있는 오우거의 목을 도끼로 계속 찍었다.

싸우는 것만 보면 누가 오우거인지 모를 정도로 과격한 방식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크아아악!"

오우거들은 버티지 못했다. 시작부터 서로 공격하며 부상을 입어 전투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기사들이 달라붙으니 그들을 떨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 난장판 속에서 '오우거 슬레이어' 카오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지셀은 머리가 아직 덜 깨진 오우거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쳤다.

퍼어억!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곳곳에서 오우거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쿠웅!

수십 마리의 오우거들은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쓰러졌다. 숲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쓰러진 오우거들은 다들 어찌나 심하게 공격을 당했는지 몸이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믿을 수 없는 전과에 병사들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물 흐르는 듯이 진행된 연계 공격이 마치 미리 알고 준비해 뒀던 것만 같았다.

카오르도 그걸 느꼈는지 떠듬거리며 지셀에게 물었다.

"뭐, 뭐야? 이번에도 이만큼 나올 줄 알고 있었습니까?"

생각해 보니 오우거가 나타났는데도 지셀은 예전처럼 급하게 지휘하지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구경만 할 뿐이었다.

벨린다와 길리언도 전과 다르게 제법 침착했다.

지셀이 대검을 땅에 박으며 말했다.

"그래, 오우거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한테는 미리 말해서 어떻게 싸울지 준비를 시켰지."

"왜 나한테는 말 안 해 주고!"

"긴장감 좀 되살리라고. 다들 방심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카오르와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초입부터 너무 쉽게 와서 긴장감이 많이 풀어진 건 사실이었다.

지셀은 그대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구경은 잘들 했나?"

"...."

병사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자신들이 한 건 없었다. 그저 웃고 떠들며 마수의 숲을 우습게 봤었다.

만약 영주가 미리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저 많은 오우거들에게 기습을 당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지셀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하고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이번에는 미리 준비했기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준비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모두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 말에 병사들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폈다. 조금씩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영주의 말이 맞았다. 만약에 오우거가 나올 걸 예상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저 정도 숫자의 오우거가 갑자기 기습을 해서 난전을 유도했으면 끔찍한 상황이 됐을 게 뻔했다.

'그런데... 영주님은 어떻게 아신 거지?'

'전에 왔을 때 우연히 알게 된 건가?'

'역시 우리 영주님은 모르는 게 없구나.'

이런 일이 반복되니 그들은 이제 지셀에게 경외감을 넘어 어떠한 신앙 비슷한 것까지 느끼게 되었다.

신기한 지식이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싸움 실력은 또 어떤가? 어떤 적이 나와도 무찌를 것만 같아 절로 믿음이 생겼다.

그렇다고 이제 지셀만 믿고 편히 지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실수 한 번이면 죽을 수도 있어.'

'영주님이라고 전부 구해 줄 수는 없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움직이자.'

갑자기 나타난 오우거 덕분에 사람들은 비로소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나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엘프들의 긴장감은 더욱더 팽팽해졌다. 자연의 기운에 민감한 이들은 마수의 숲이 이상하다는 걸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숲인데 숲 같지 않아.'

'몬스터들이 전부 비상식적으로 크다. 아무리 기운이 강한 곳이라도 저럴 수는 없어.'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했던가?'

원래 이렇게 조용하고 기운이 넘치는 숲에서 엘프들은 무척이나 편하고 안정적인 기분이 들어야 한다.

몬스터의 유무와 상관없이 숲 자체가 품은 기운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보통 숲과 달리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 이질적인 기운은 강해져 갔다.

마치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그렇기에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엘프들은 너무나도 불편하고 어긋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스콘은 계속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X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여기는 X 같은 곳이야...."

아무도 그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스콘은 영지에서도 자주 저런 욕을 지껄이기 때문이다. 아니, '자주'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달랐다. 지셀은 그녀의 말을 유심히 들어 주었다.

"영주님, 정말 계속 들어가실 생각인가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뭔데?"

"이 숲에 흐르는 기운이 이상해요. 무척이나 불길하고... 꺼림칙한...."

그 말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마수의 숲은 원래 불길한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들어가는 족족 사람이 죽어 나가니 소문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 몬스터들도 괴상한 놈들이 많고 말이야. 하지만 그만큼 얻기 힘든 자원들도 있거든. 그것들을 얻으러 가야 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곳은, 이곳은...."

"이곳은?"

"달라요, 이곳에 있는 생명들은 정상이 아니에요. 뭔가... 뭔가 인위적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루미나는 자신도 설명을 제대로 못 하겠는지 횡설수설했다.

그녀는 교감 능력을 각성하고 난 뒤부터는 자연의 소리를 약간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펜리스 영지의 엘프 중 자연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루미나였다.

"저한테 속삭이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뭐? 누가? 뭘 속삭여?"

"이 숲이요."

"숲이? 말을 건다고?"

"네, 저한테 계속 말을 걸고 있어요."

루미나는 이곳에 들어온 뒤부터 묘한 속삭임을 들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작업하는 소리가 워낙 시끄러웠고, 숲의 기운도 약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고 숲을 없앨 때마다 그 기운은 더 약해져 갔다. 사람들이 짓밟은 곳은 본디 자연의 기운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 기운은 강해지고 속삭임은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이 숲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자신과 하나가 되자고.

320화 아주 위험한 놈들이지. (1)

"흠...."

지셀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마수의 숲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사람은 많지만, 그건 이 숲의 어두운 환경에 기인한 바가 크다.

자신은 루미나가 말하는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전생에 확인했던 기록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물론 전생에는 개척단에 엘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몰랐을 수 있다. 어쨌든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종족은 엘프가 유일했으니까.

'확실히 뭐가 있는 건가?'

루미나가 착각한 걸 수도 있지만, 지셀은 그녀의 말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이곳은 확실히 바깥과 달랐다. 기운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그래서 귀한 자원도 넘쳐나고, 몬스터들도 그 기운의 영향을 받아 더 크고 강력한 것이다.

마수의 숲에 흐르는 기운이 독특하다는 것은 전생에서도 가장 유력한 가설로 꼽혔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숲이 하나가 되자고 한다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숲에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전생에 봤던 지도에도 확인이 안 된 부분이 있긴 했었지.'

공작가는 마수의 숲을 성공적으로 개척했다. 하지만 숲의 대부분 지역이 밝혀진 뒤에도, 숲 중심부만은 지도에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이곳에 관해서는 어떠한 표시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개척지라 생각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마수의 숲 개척이 아니라 공작가를 잡아 없애는 것이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온 뒤에도 그 지역에 관해서는 특별히 고민한 적이 없었다. 후에 자금이 부족해졌을 때 개척해도 될 거라고 넘겼었다.

하지만 루미나의 얘기를 들으니 전생에 본 지도가 떠오르며 조금 찝찝해졌다.

'미개척지가 아니라... 가려 놓은 것이었나.'

예전부터 거슬리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공작가가 마수의 숲에 어마어마하게 집착하는 것.

처음에는 분명 공작가도 이곳에 풍부한 자원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개척을 시작했다.

그건 무언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자원 수집을 위해서는 확실히 아니었다.

전생에도 공작가가 무엇을 노리고 개척을 시작했는지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개척에 참여한 자들도 대부분은 자신들이 왜 이걸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해럴드도 페르디움을 관리하기만 했었지.'

멸망시킬 수 있음에도 남들이 차지하지 못하게 관리만 했었다. 공작가가 반란에 성공한 뒤에야 페르디움을 밀어 버렸다.

그러자마자 공작가는 급하게 마수의 숲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확실해. 이 숲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건 루미나가 말하는 것과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셀은 오랜 시간 용병으로 지내왔다. 그렇기에 수상한 징조는 허투루 넘기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설사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강박적으로 챙겼다.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수상한 징조를 발견하면 알려 주도록 해. 다른 엘프들에게도 편하게 얘기하라고 전달해 주고."

"알겠어요."

마수의 숲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아주 작은 징조라도 우습게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루미나가 말한 것과 공작가가 노리는 것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편이 무시하는 편보다는 낫다.

'뭐가 있든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어차피 지셀의 목표는 마수의 숲을 전부 밀어 버리고 땅을 모조리 차지하는 것이었으니까.

오우거들을 처치한 일행은 다시 영역을 확보하며 움직였다.

다들 전보다 경계심이 높아지고 긴장한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루미나의 말을 들은 엘프들은 자신이 찝찝하거나 수상하게 느낀 점들을 지셀에게 얘기했다.

대부분은 기분 탓인 게 많았지만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저쪽에 몬스터 무리가 있는 거 같아요."

"몬스터들이 나무 사이에 숨어 있어요."

"이쪽에 강한 기운이 뭉쳐 있어요. 아무래도 귀한 약초인 거 같아요."

엘프들의 감각은 숲에서 유독 예민해진다. 마나를 다루는 자들의 기감이 증폭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들은 숲에서 흐르는 기운을 감지하거나 자연의 소리를 듣고 다양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당연히 멀리 숨어 있는 몬스터들도 엘프들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사람들은 엘프들이 보여 주는 능력에 새삼 놀랐다. 지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능력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데리고 온 거지만,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다.

갈바릭은 그런 엘프들을 보며 또다시 투덜거렸다.

"종족 차별 뭐야.... 불공평해.... 외모라도 흉하든가...."

숲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종족이 엘프였다. 원래부터 엘프들과 사이가 안 좋은 드워프들은 괜히 속이 쓰렸다.

드워프들이 우울해하든 말든, 지셀로서는 무척이나 흡족한 상황이었다.

"좋군. 엘프들이 이 정도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가 아무리 전생에서 획득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완벽한 내용은 아니었다. 중요한 자원이 있는 위치와 강력한 몬스터의 영역 정도일 뿐이다.

떠돌이 몬스터처럼 기록되지 않은 자잘한 정보는 알 수가 없다. 개척을 시작한 시기가 다른 만큼, 몬스터의 영역 자체도 정보와는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도와주니 위험을 피해 가는 것도 더 수월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자원들도 얻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아스콘이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X 같아.... X 같은 기운이 느껴져.... 여기는 X 같은 곳이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냐."

"X 같아서 있기가 싫어. 영지로 돌아가게 해 줘.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딴 데서 고생을 해야 해? 느개X, XXXXX, XXXXXX, XXXX!"

말하다가 분을 못 이겨 험한 욕을 내뱉은 아스콘은 바로 벨린다에게 팔다리가 꺾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끌려갔다.

그렇게 아스콘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서 펜리스군의 부상병 명단이 한 줄 늘어났다.

비록 부상병이 하나 늘긴 했지만, 엘프들의 도움 덕분에 개척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지셀은 계속 지도를 보며 위치를 가늠했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개척이 수월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엘프들이 위험을 알려 주면 숙련된 기사들과 병사들이 전투를 준비한다. 지셀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려 주고 지휘를 한다.

누구도 방심하지 않으니 전투 또한 어려울 게 없었다. 어지간한 맹수나 몬스터들도 대군을 보고 피할 정도였다.

'슬슬 다 와 가는군.'

룬스톤 자원지가 가깝다는 뜻은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았다. 지셀이 생각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마수의 숲은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 선발대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정보가 부족해서 그랬을 뿐. 이미 파악한 몬스터들에게 두 번 당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도 우리의 뛰어난 기사들과 정예병들을 당해 낼 리가 없으니까.]

'그랬겠지.'

지셀은 전생에 읽었던 기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당시 공작가에서 보냈던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을 데리고도 숲을 밀고 있다.

그 시절 공작가의 힘을 떠올리면, 병력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준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는 더 강하고 많은 병력을 데리고도 지금 지셀이 하듯 쉽게 밀지 못했다. 중요한 전력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선발대와 탐색조를 계속 운용했기 때문이다.

[요제프 자작은 선발대가 죽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주요 전력을 아끼고 있었다. 간혹가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발자크 백작이 선발대에 참여한 게 전부였다.]

[...그들이 계속 실패하고 죽어 가면서 얻어 온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마수의 숲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러던 중, 우리는 또다시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뭐야?"

가장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가 몬스터 시체를 하나 들고 왔다. 다른 몬스터에게 당했는지 몸의 절반은 찢긴 사체였다.

몬스터는 정말 기괴하게 생겼다. 체고는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는데, 상체는 마치 피부가 붉은 사람과도 같았고 허리 아래쪽은 거미와도 같은 생김새였다.

손에는 단단한 손톱이 두더지처럼 길게 자라있었다. 땅을 파기도 좋아 보였고 무기로 쓰기도 좋아 보였다.

상체가 사람과도 같다는 게 정말 사람처럼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머리와 몸의 구조가 사람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전체적인 구조만 인간과 비슷할 뿐, 그 외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입이라 생각되는 부위에는 마치 촉수 같은 것들이 마구 붙어 있었고 눈은 퇴화했는지 흔적만 보이는 정도였다.

머리뼈는 뒤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머리 앞쪽에는 더듬이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명체인지 알 길이 없었다. 혐오스러운 몬스터의 시체를 보고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우, 징그러워...."

"뭐야, 세상에 이런 몬스터가 있었어?"

"진짜 이 숲에는 별게 다 사는구나."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다 보니 사람들이 몰려와 두런두런 떠들었다.

하지만 딱히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일단 마수의 숲에 사는 다른 개체들에 비해 크기가 상당히 작았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형견 정도라 볼 수 있다.

맹수라면 이 정도도 인간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크기였지만, 숲에 들어온 뒤 거대한 것들만 보아 온 사람들의 눈에는 은근히 약해 보였다.

징그러움은 단연코 순위권에 들지만 말이다.

[그것들은 마수의 숲에 있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하면 현저하게 약했다. 무장 병사 두세 명이면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고 부상을 각오한다면 병사 혼자서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왜 이런 약한 개체가 마수의 숲 안쪽에 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생의 기록을 떠올린 지셀이 몬스터의 시체 앞에 다가와 말했다.

"이놈들은 그렉스라고 불리는 놈이다. 보아하니 무리에서 떨어져서 죽은 모양이군."

[우리는 그것들에 고대어로 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그것들의 서식지 근처에서 며칠을 관찰했다.]

[과연 서식지에는 그놈들이 꽤 많이 사는 편이었다. 그것들도 다른 몬스터들처럼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몬스터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공격해 죽이고, 그 시체를 나눠 먹었다. 때로는 무리 지어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지셀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렉스라고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래. 아주 위험한 놈들이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영주가 별걸 다 알고 있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사냥 성공률은 처참할 정도로 낮았다. 사냥에 성공하는 것보다, 어디선가 몬스터 사체를 끌고 와서 먹는 모습이 더 자주 보였다. 간혹 단단한 손으로 땅을 파고 먹다 남은 사체를 보관할 때도 있었다. 끔찍한 외형과는 다르게 실로 하찮은 몬스터에 불과했다.]

"이놈들은 무리를 짓고 사는 놈들이다. 하나하나가 약하다고 우습게 보면 안 돼."

[다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간혹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 그것들을 죽이고 잡아먹곤 했는데, 그 몬스터들은 그것들의 영역을 차지하지 않았다. 상당히 넓고 환경이 좋았는데도 말이다.]

"따로 대비가 필요합니까?"

길리언의 물음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더 가서 준비하려고 했는데 시체를 발견했으니 이쯤에서 하는 게 낫겠네."

[며칠을 지켜봐도 다를 게 없었다. 마수의 숲에 사는 강력한 몬스터들은 그것들을 죽여 잡아먹고는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단지 마수의 숲에 사는 몬스터들에게 제공되는 식량일 뿐이라고. 마수의 숲에 사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편히 먹고 살기 위해 그것들의 영역을 차지하지 않고 번식하게 내버려 두는 거라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보다 더 확실한 준비가 필요해."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우리는 결론이 나자마자 바로 그것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어려울 리가 없었다. 그렉스는 작고 약한, 하찮은 몬스터일 뿐이었다.]

지셀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요새를 짓는다. 아주 크고 단단하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우리가 마수의 숲에서 저지른 최악의 실수 중 하나였다.]

321화 아주 위험한 놈들이지. (2)

사람들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영역을 확보하면서 목책을 세우고 방어벽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요새를 세운단 말인가?

숲 안에 요새를 세우는 일은 없다. 백 보 양보해서 간혹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방어하는 용도로 세운다 쳐도 여기서는 아니었다.

아직 목표했던 위치에는 가지도 않았다. 요충지도 아니고 진군로도 아닌 이곳에 요새를 짓는 건 너무 과했다.

길리언이 확인차 다시 물었다.

"아직 목적지까지는 거리가 좀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방어벽이 아니라 요새입니까?"

"그래, 임시긴 하지만 그래도 요새 수준으로 지어야 해. 모두 빠짐없이 참여하도록 해."

"요새를 지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빠르게 해야지? 이정도 인원이면 충분할 거야."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지셀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이 숲에서는 무조건 영주의 말을 따르는 게 낫다는 걸 몸으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반대해 봤자 어차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수천의 병력과 인부들이 움직이자 금세 요새는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쿵!

사람들이 벌목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영토 확장을 겸해 움직이다 보니 주변은 순식간에 공터가 되었다.

그래도 목재는 차고 넘쳤다. 지금까지 오면서 엄청난 수량을 벌목했고,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수의 숲에 자라는 나무는 다른 곳에서 자라는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단단하다. 그걸 몇 겹으로 쌓으면 목책이라도 어지간한 돌벽과 내구력이 맞먹을 정도였다.

지셀은 조금씩 형태를 갖추는 요새의 외각 쪽을 보며 드워프들을 불렀다.

"화살 공격을 할 수 있게 망루를 만든다."

갈바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재를 써서 요새를 만들면 방어벽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위에 올라가 싸울 수는 없다.

단을 올려 성벽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할 계획이지만, 아무래도 성벽보다는 효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감시탑 등의 망루를 만들어 외부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당연히 요새에는 그런 게 있어야지. 정석대로 사방에 감시탑들을...."

"아니, 그런 식이 아니야. 벽 뒤에 아예 빽빽하게 붙을 정도로 세워야 해. 지금 크기로 보면 대충... 백 개는 지어야겠군."

"백 개...?"

그 말에 갈바릭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신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영주가 괜히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직접 박살 내는 걸 선호하는 영주다. 그런데도 이렇게 요새를 짓고 방어에 신경을 쓰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랑 싸우려고 이러는 걸까? 벌써 예감이 안 좋았다.

지셀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투석기도 만들어. 그것도 수십 개는 되어야 해. 정교함은 필요 없어. 사거리가 뛰어나지 않아도 돼. 무조건 이 근처를 공격할 수 있기만 하면 돼. 이번만 쓰고 버려도 상관이 없으니까. 알겠어?"

"아, 알겠소."

물러나려던 갈바릭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주... 이번에 싸울 적이 많이 위험하오? 내 지금껏 영주가 이 정도로 준비하는 건 본 적이 없는 거 같소이다."

다른 이들은 이런 준비를 해도 조금 긴장할지언정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영주는 지금까지 뭐든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바릭은 지셀과 함께 가장 많은 일을 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준비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숲에 위험하지 않은 놈은 없다."

지셀은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벌써 말해서 사람들을 동요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목표가 있는 이상 방해하는 것들과는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알면 인부들은 눈치를 보고 빠지려고 할 수도 있다. 요새가 다 지어진 뒤 말해도 늦지 않다.

"준비가 끝나면 얘기해 주도록 하지. 그전까지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이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겠소."

다소 무거운 지셀의 말에 갈바릭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갈바릭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 지셀이 그를 다시 불렀다.

"갈바릭."

"...?"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해. 알지?"

그 말에 갈바릭이 씨익 웃었다.

"나 드워프요. 뭐 만드는 건 대륙 제일이지. 엘프들도 나한테는 안 돼."

자신만만한 갈바릭의 말에 지셀도 마주 웃었다. 아무래도 엘프들의 활약에 드워프들의 자존심이 조금 구겨진 모양이었다.

드워프들의 호언장담대로 요새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마법사들 또한 이제 공사에는 대륙의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실력자들이다. 재료를 다듬고 마법진을 새기는 등 시간이 걸리는 작업은 모두 마법사들이 도맡아 했다.

그들이 힘을 합하자 작업 속도는 무척이나 빠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 건 투석기 제작이었다. 드워프들은 간이 투석기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지금까지 잡은 몬스터 힘줄을 전부 모아야 해."

"최근에 잡은 오우거들이 적당하겠어."

"정교함은 떨어져도 된다고 했어.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게 목표야."

투석기는 인부들을 갈아 넣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보니 대부분은 드워프들이 만들어야 했다.

인부들이나 병사들은 그저 옆에서 잡일을 돕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드워프들은 몬스터의 힘줄과 목재들을 박박 긁어모아 수십 대의 간이 투석기를 완성했다.

갈바릭은 만들어진 투석기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으음... 이정도로 정말 괜찮은가?"

솔직히 전쟁에 쓰기에는 힘들 정도로 조악했다. 사거리나 정확도가 정식 투석기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기본적으로 투석기는 성벽을 공격하기 위한 병기다. 적의 화살 사거리보다 사거리가 훨씬 더 길어야 하고 정확도와 파괴력도 높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급하게 재료를 긁어 만든 탓에 기존 투석기 성능의 절반 정도나 겨우 갖췄다.

그나마 이 정도도 드워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이었지만, 갈바릭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관에게 제대로 된 투석기를 보내 달라고 하는 게 어떻소? 페르디움에 요청해도 되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몇 대 되지도 않잖아? 지금 중요한 건 숫자거든."

"이게 성능이 조금 떨어져서 그러오."

갈바릭의 말에 지셀은 간이 투석기를 시험해보았다. 제대로 된 투석기보다는 성능이 부족하긴 하지만 파괴력이 썩 괜찮았다.

절반 정도의 성능이라 해도 인간이 맞으면 납작해지는 건 똑같다.

지셀은 만족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갈바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정도면 충분해."

"정말 괜찮단 말이오?"

"응, 중요한 건 숫자라니까? 압도적으로 두들겨야 하거든."

주문자가 괜찮다는데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맡은 일에 전력을 다하자 며칠 사이에 대부분의 준비가 끝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웅장한 요새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이렇게 보니 엄청나네."

"진짜 오우거들이 몰려와도 막을 수 있겠는데?"

"숲에 있기는 아까울 정도야."

비록 제대로 된 내부 시설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막기에는 과할 정도로 견고했다.

높이도 지셀이 원한 대로 무척이나 높았고, 벽도 목재를 여러 번 겹쳤기에 어지간한 성벽보다 두꺼웠다.

거기에 감시탑과 투석기가 수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 이 정도면 몇만의 군사도 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불화살에는 꼼짝없이 당하겠지만, 만약 불을 쓰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거라면 영주가 이런 걸 만들 리 없었다.

요새를 몇 번이나 점검한 지셀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요새 앞을 모두 공터로 만들어라. 우리의 시야가 확보되도록 말이야."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주변에 있던 나무는 거의 다 베었다. 하지만 조금만 나아가도 다시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차 있다.

이렇게 나무가 많으면 몬스터들을 공격할 때 효과가 떨어진다. 빽빽한 나무들이 화살과 투석기 공격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길리언도 그것을 알기에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를 가늠하며 물었다.

"얼마나 확보해야 할까요?"

"우리가 불을 써도 숲이 번지지 않을 만큼."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엄청난 공간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바로 병사들과 인부들이 요새 밖으로 나가 나무들을 벌목했다.

쿠웅! 쿵! 쿠웅!

거대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요새 안으로 옮겨졌다. 상당한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비우고 있으니 몬스터를 안 만날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이곳에 오면서 만났던 몬스터도 있고 새로 만난 몬스터들도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쉽게 처치했다.

주변이 휑해질 정도로 나무를 벤 병사들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을 만났다.

"끼에에엑!"

혐오스러운 외형을 가지고 있는 그렉스들이었다. 몇 마리 되지 않는 그것들은 병사들을 발견하자 빠르게 다가왔다.

손톱을 바짝 들고 거미 다리를 마구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의 표정이 썩어 갔다.

"어우씨, 살아 있는 건 더 징그럽잖아?"

"그렇게 세지 않다고 했어."

"빨리 죽이고 일이나 하자고."

피잉!

그렉스들은 병사들에게 접근하지도 못했다. 뒤에서 대기하던 엘프들의 활에 몸이 뚫려 쓰러졌기 때문이다.

"와, 이놈들 진짜 약하네?"

"그냥 사람하고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손톱은 땅을 팔 정도로 단단하고 날카롭다고 하니 조심하자고."

이제 병사들은 적이 약해도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금씩 벌목하며 전진했다.

"끼에에에엑!"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렉스들이 또 나타났다. 나타나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몬스터들을 쉽게 처리한 병사들은 그렉스가 있던 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구멍인데?"

"땅을 판 건가?"

병사들이 바닥에 있는 몇 개의 구멍을 보고 호기심을 품었다. 이 숲에서 구멍이 파인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물러서세요!"

병사들이 구멍 가까이 다가가자 루미나가 엘프들과 급히 달려왔다.

그녀와 엘프들은 바로 구멍 안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파파파팟!

"끼에에에엑!"

땅속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린다. 어찌 된 일인지 구멍 안에는 그렉스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렉스들은 공격을 당하자 구멍 안에서 기어 나왔다. 하지만 나오는 족족 엘프들의 화살을 맞고 죽어 나갔다.

"이제 됐어요. 구멍을 메우고 물러나죠."

루미나의 말에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후다닥 구멍들을 메우고 돌아갔다.

해당 일을 보고 받은 지셀은 길리언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더 전진하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 요새의 문을 없애라."

"문을 말입니까?"

"문으로 만든 곳은 내구도가 떨어질 테니까. 그곳도 아예 두껍게 채워 버려. 보급을 받을 뒤쪽 문만 내버려 둬라."

"그러면 앞으로 나가지는 않을 생각이십니까?"

"이제 모든 인원은 안에서 대기한다. 필요한 사람은 밧줄을 타고 나갔다 올 것이다."

숲 안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놈이 오길래 이렇게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는 걸까?

최근에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를 많이 상대해 본 카오르가 물었다.

"지금 무슨 몬스터 웨이브가 오는 것처럼 대비하는데, 마수의 숲에도 그런 게 있습니까?"

"비슷해.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요새를 지은 거다."

"으음, 그러면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그건 이제 우리가 결정해야지.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몬스터 웨이브를 우리가 결정한다고요?"

카오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이쪽에서 무슨 재주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렉스를 조사하는 동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멸한 정찰조 중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마법사가, 그렉스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우두머리는 영역 안쪽, 가장 안락한 공간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여왕'이라 불렀다.

여왕은 그렉스들이 가지고 온 먹이를 먹으며 알만 낳았고 그렉스들은 그 알을 땅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

지셀은 방법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결정할 수 있어. 강제로 일으키면 되는 문제야."

"아니, 그걸 어떻게 강제로 일으켜요? 몬스터가 우리 말을 들어요?"

[여왕은 언제나 평화롭게 먹이만 먹을 뿐이었다. 그렉스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지만, 전투력도 약한 놈들만으로 이 험한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왕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카오르의 물음에 지셀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안 들으면 듣게 해야지."

"어떻게요?"

"방법이 있거든."

[그래서 우리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마법사들과 뛰어난 기사들이 여왕을 납치해서 캠프로 끌고 왔다.]

지셀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퀸 그렉스를 납치한다."

322화 넌 할 수 있어. (1)

"퀸 그렉스...가 뭐임요?"

"저놈들 우두머리야. 종족을 유지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지."

"그놈이 어디 있는데요?"

"내가 알고 있어. 날 따라오면 돼."

"그러면 그냥 가서 죽이면 안 돼? 요? 왜 납치를 함?"

카오르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왕을 납치해서 그놈들이 구하러 오게 해야 해."

그제야 사람들은 지셀의 계획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꼭 그래야 합니까? 그냥 가서 죽이면 안 돼? 뭐, 요새를 끼고 싸우는 게 안전하긴 하지만 쫄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건방진 카오르의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가서 싸우면 우리가 다 죽을 거다."

"그놈들 엄청나게 약하던데...."

카오르는 입을 삐죽댔다. 아무리 봐도 이번에는 영주가 좀 쫀 거 같았다.

그렉스는 정말 약해서 숙련된 병사 혼자서도 잡을 수 있을 정도다. 만약 자신이라면 수백 수천 마리도 홀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오우거 때 망신을 조금 당한 카오르는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렉스는 딱 좋은 제물이었다.

'만만한 놈들이라 아주 폼 나게 많이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전에 당한 굴욕을 떨쳐 낼 각오로 카오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들 몇 명만 붙여 주쇼. 내가 가서 다 쓸어버리고 올 테니까."

"가면 진짜 죽는다. 여왕이나 같이 잡으러 가."

"하! 진짜! 내가 다 쓸어버릴 수 있는데!"

카오르가 다리 하나를 달달 떨며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또 삐딱해지는 그를 보며 벨린다가 인상을 썼다.

"도련님 말대로 해요. 마수의 숲에서는 방심하면 안 되는 거 몰라요? 뭐가 나올 줄 알고 가서 싸우자고 해요?"

"뭐야? 왜 영주 편을 들어? 원래 뭐 하자고 하면 반대하잖아?"

"제가 언제요? 저 안 그러거든요? 항상 도련님 편이거든요?"

두 사람이 또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카오르가 입술을 실룩이며 벨린다를 노려봤다.

'아오, 진짜 확 패 버릴까? 싸우면 내가 질 거 같기도 하고.... 영 실력을 모르겠단 말이야.'

벨린다도 비슷한 표정으로 카오르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면 다 반대할 거야. 그냥 무조건 반대할 거야.'

두 사람이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다. 영지에서도 꼭 마주치면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길리언이 아무 말 없이 중간에 껴서 둘을 갈라놓자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픽 돌렸다.

지셀이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잡아 와야 하니 몇 명만 추릴 거야.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기사 몇 명, 그리고... 알포이도 데리고 가도록 하지."

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알포이가 나이에 비해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실력에 살짝 손색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험한 작전에 마음 놓고 데려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알포이를 데려간다고요? 바네사가 아니라 알포이 맞아요?"

마법사가 필요하다면 알포이가 아니라 바네사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게 당연한 거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바네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야 해. 할 일이 있거든."

"그러면 꼭 알포이를 데리고 가야 하나요? 이 인원이면 굳이 알포이가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벨린다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지셀이 씨익 웃었다.

"미끼로 써야지."

"미끼요? 그 실력이면 죽을 거 같은데요?"

"아냐, 걔는 안 죽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놈한테는 이상한 운이 있는 거 같아. 난 그런 걸 놓치지 않거든.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적당히 둘러대는 것만 같은 대답에, 벨린다는 답답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알포이는 여신의 힘도 이겨 낸 놈이다. 이상한 운이 있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지셀이 그런 이유로 움직일까? 언제나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나름의 근거로 움직이던 사람이?

그리고 클로드의 꼬임에 빠져 노예로 잡힌 사람이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진심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지만, 지셀이 저리 나오는데 따지기도 어려웠다.

'저렇게까지 데려가고 싶다는데.... 그래도 실력이 너무 떨어져.'

잠시 고민하던 벨린다가 말했다.

"어차피 안전하게 납치해야 한다면 차라리 열기구를 사용하는 건 어때요? 페르디움에 예비로 남겨 둔 게 있으니 금방 가져올 수 있잖아요."

"오,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역시 벨린다는 똑똑해."

"저 왕립 아카데미 나온 여자예요."

"안 믿어. 아무튼 열기구도 안 돼. 마수의 숲에서는 하늘에 뭐가 떠 있으면 위험하거든. 바로 공격당할 거야. 그것도 아주 멀리서. 그래서 이 마수의 숲에 새가 거의 없는 거야."

"네? 뭐에 공격당해요?"

"그런 게 있어. 아직 우리가 상대할 만한 놈은 아니야. 상당히 위험한 놈이거든."

벨린다가 되묻기 전에 지셀이 바로 말을 돌렸다.

"자, 어쨌든 빨리 움직이자고. 오래 대기할수록 병사들도 지치는 법이니까."

그렇게 해서 퀸 그렉스를 잡기 위한 납치조가 결성됐다.

지셀, 벨린다, 카오르 외에 고든, 루카스 등 몇 명의 기사들과 알포이가 포함되었다.

알포이를 제외하면 다들 펜리스군에서 실력이 뛰어나기로 손에 꼽히는 사람들이었다.

길리언은 지셀이 요새의 지휘와 전투 준비를 맡겼기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알포이는 자신이 포함됐다는 걸 통보받고 난리를 쳤다.

"뭔데! 왜 내가 그런 위험한 곳에 가야 하는데! 싫어! 싫다고!"

"넌 신을 이긴 남자잖아? 실력자만 가는 건데 당연히 너도 가야 하지 않겠어?"

자존심 하나만큼은 영지에서 누구 못지않은 알포이다. 실력자들은 가야 한다는 말에 그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고 싶다. 가서 훌륭하게 작전을 성공시켜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싶다.

'그런데 가서 죽기도 싫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지셀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네가 빠진 거 알면 클로드가 엄청나게 놀릴 텐데."

클로드의 이름을 듣자 알포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 새끼 때문에 인생이 다 꼬였다. 그런데 놀림까지 받는 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 간다! 가! 가면 되잖아!"

그렇게 실력자들과 조금 모자란 사람이 포함된 납치조가 출발했다.

요새의 문을 없앴기에 이들은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다시 돌아올 때도 밧줄을 타고 올라갈 것이다.

도로처럼 뻗은 공터를 지나가자 금세 다시 빽빽하게 붙어 선 나무들이 보였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나무로 가득 찬 모습이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셀과 일행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다들 한 실력 하는 사람들이라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끼에엑?"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렉스들이 많이 보였다. 지셀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일행들은 보이는 족족 그것들을 무기로 꿰뚫었다.

푸욱!

"케에엑!"

그렉스들은 갑자기 나타난 지셀 일행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수가 많다고 해도 기껏 수십 마리 정도다. 고작 몇 마리뿐일 때도 있었다. 하나하나의 힘은 일반 병사와 별다를 게 없는 그렉스들이 이 인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벨린다 혼자서 한 번에 십여 마리의 그렉스들을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어렵지 않네요? 이 지역에는 이놈들밖에 없나 봐요."

확실히 그렉스들의 영역인지 다른 몬스터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보기 쉬운 떠돌이 몬스터들도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기껏해야 그렉스들이 옮기는 시체 정도였다.

"끼에에엑!"

그렉스들은 일행이 나타날 때마다 더듬이를 움직이며 덤비려 했다. 하지만 일행에게 작은 상처조차 주지 못했다.

쉬워도 너무 쉽다. 사람들은 슬슬 왜 지셀이 그렇게 요란하게 요새까지 지었나 궁금해졌다.

이 정도로 약하면 그냥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초토화해도 된다. 수가 좀 많긴 했지만, 며칠 시간을 들이면 못 잡을 정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셀은 여전히 신중한 표정으로 움직였다.

"다 왔다. 이제부터 천천히 다가가자."

일행은 의아해하며 지셀을 따랐다. 분명 이곳에 처음 왔을 텐데도 조금 둘러보는 것 외에는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정말 퀸 그렉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물어봐도 제대로 말은 안 할 게 뻔해 아무도 묻진 않았지만.

"오...."

뒤따르던 루카스가 살짝 감탄을 내뱉었다.

지셀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니 확실히 지형이 달라졌다. 빽빽하게 서 있던 나무들이 점점 줄어들고 나무 사이의 공간이 넓어졌다.

그리고 일행은 저 멀리 우글거리는 그렉스들을 발견했다.

"히익... 저게 뭐야...."

"어우... 징그러워...."

"도련님, 저거 정말 납치해도 돼요?"

일단 수백 마리나 우글거리는 그렉스도 징그러웠지만, 그 가운데 있는 놈은 더욱더 징그러웠다.

꽤 멀리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는 자세히 볼 안력이 있다.

보통의 그렉스보다 몇 배나 큰 존재였다.

크기만 큰 게 아니었다. 눈이 퇴화하다시피 한 그렉스들과 달리 여러 개의 눈이 달려 있었고, 배는 알을 품었는지 울퉁불퉁한 주머니처럼 튀어나왔다.

더듬이도 몇 개나 더 붙어 있고 머리는 훨씬 더 길게 뒤로 뻗었다.

그 징그러운 모습에 다들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 지셀이 씨익 웃었다.

"저놈이 퀸 그렉스야. 이제 저걸 데리고 요새로 돌아가자고. 저놈도 전투력은 별거 없거든."

"으윽, 저걸 어떻게 데리고 가죠? 그냥 여기서 처리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벨린다가 인상을 구겼다.

데리고 가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렉스보다 크기가 크다고 해도 평범한(?) 오우거 정도 크기일 뿐이다.

튼튼한 밧줄도 여러 개 준비했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 정도면 충분히 묶어서 데리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저 징그러운 걸 들고 가는 짓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카오르도 몇 번 침을 삼키더니 벨린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냥 죽이고 가면 안 될까? 솔직히 여기 있는 놈들 많아 봤자 몇백 마리인데 다 죽일 수 있잖아?"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건 드문 일이다. 그런 기념비적인 상황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면 우리가 위험해진다. 어떻게든 생포해서 끌고 가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다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포해서 끌고 가면 저 많은 다리로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지를 텐데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든도 조금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납치하죠? 일단 주위에 있는 그렉스들을 다 죽여야 하지 않나요?"

수백 마리나 있긴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실력이면 금방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납치해요?"

"이제 미끼가 활약할 시간이다. 퀸 그렉스를 여기까지 유인해 와야 해. 그러면 우리가 바로 생포해서 자리를 뜬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로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알포이는 사색이 되어서 말했다.

"내, 내가 저, 저 괴물을 어떻게 여기까지 유인해 와?"

"그냥 가서 신기한 마법들 좀 보여 줘. 그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 쫓아올 거야."

알포이가 눈을 끔뻑이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놈들... 사람만 보면 무조건 달려들잖아. 수백 마리나 있다고. 저기를 혼자 가서 마법 좀 보여 주고 데리고 오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줘."

"괜찮아. 천천히 다가가 봐. 절대 퀸 그렉스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기 들어갔다가는 난 바로 죽을 거야. 진짜면 같이 가. 같이 가자고."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같이 갈 순 없어. 너 혼자 가야 가능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떻게 혼자 가라는 거야! 그것도 저렇게 먼 거리를!"

"혼자 가야지 퀸 그렉스가 공격하지 않는다."

알포이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 안 가. 못 가. 안 믿어. 난 사람 믿었다가 뒤통수 많이 맞은 사람이야."

도박에 빠져 노예가 된 건 본인의 책임이지만 어쨌든 발단은 클로드의 혓바닥이다.

알포이는 자신이 그놈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이렇게 됐다고 확신했다.

알포이의 강경한 반응에 지셀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내 말을 믿어."

"안 믿어."

"난 클로드와 달라."

"으...."

알포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가슴을 울렸다.

그러고 보니 지셀은 남들이 안 믿는 많은 일을 성공시켰다.

어쩌면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까?

은근히 마음이 약한 알포이가 조금씩 흔들렸다.

"왜... 왜 나여야 하는데?"

"여기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리고?"

"신을 이긴 남자만이 그런 기적을 보여 줄 수 있으니까."

쿠웅!

그 말은 알포이의 심장을 세차게 때렸다.

남들이 뭐라 하든 정말 여신의 힘을 이겨 낸 건 사실이다. 그건 그에게 남은 자부심의 원천이자, 아들부터 손자까지 대대로 자랑해도 될 만한 업적이었다.

그 위업을 거론한 이상 알포이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난 알포이. 신을 이긴 남자지."

"할 수 있지?"

"해 보고 안 되면 바로 도망갈 거야."

그래도 무섭긴 해서 여지는 남겼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험하면 바로 나가서 도와줄게."

"믿는다. 나 버리지 마."

알포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었다.

그 언젠가 마수의 숲에서 지셀이 용병들에게 한 말이 있었다. 바로 고든이 잡혀갔을 때.

그때 했던 말을 지금 알포이에게 똑같이 해주었다.

"난 나를 따르는 사람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

그 말에 알포이는 살짝 감동한 듯 눈을 빛내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뭔가 진짜 노예가 되는 기분이었다.

"흐, 흥! 갔다 올 테니까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콧김을 한번 내뿜은 알포이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가는 그를 곧 그렉스들이 발견했다.

"끼에에엑!"

"카아아악!"

그렉스들은 괴성을 지르며 알포이에게 달려갔다. 수백의 그렉스들이 몰려오는 건 그 자체로 공포다.

알포이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잽싸게 도망가려던 그때.

퀸 그렉스가 높은 소리로 울었다.

"까아아아아아악!"

그러자 더듬이를 흔들며 다가오던 그렉스들의 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그 모습에 도망가려던 알포이도 놀라고 뒤에 숨어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놀랐다.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킨 알포이가 살짝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아아아악....

그렉스들이 양옆으로 비켜나며 길을 만든 것이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듯했다.

"이, 이게 뭐야...."

알포이가 덜덜 떨면서도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렉스들은 알포이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옆으로 더 물러났다.

그는 지금.

'나, 나는 신을 이긴 남자다. 저놈들도 그걸 알아보는 거야! 으하하하하하!'

정말로 기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323화 넌 할 수 있어. (2)

마치 자신에게 오라는 듯 공간을 내어 준 퀸 그렉스를 보던 알포이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뒤쪽을 향해 속삭였다.

"어, 어떻게 해야 해! 이제 어떻게 하냐고!"

"가까이 다가가."

"다가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유인해 오라니까? 대충 마법 같은 거 몇 개 보여 주면 돼. 신기한 거 보면 홀린 듯이 따라올 거야."

"으... 알겠어."

알포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렉스들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퀸 그렉스를 향해 걸어가는 알포이를 보며 벨린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뭐, 뭐예요? 왜 저래요? 분명 우리만 보면 공격했잖아요? 알포이도 있었잖아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보이는 족족 그렉스들을 처치했다. 그렉스들은 알포이에게 딱히 특별한 대접을 해 주진 않았다.

단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곳에는 퀸 그렉스가 있다는 점이다.

[정찰조가 전멸했을 시, 제법 실력이 있던 마법사 하나가 홀로 살아남아 숲을 헤맸다. 그는 우연히 퀸 그렉스가 있는 곳으로 갔고, 수백의 그렉스들에게 공격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퀸 그렉스가 지금 알포이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까."

그 말에 벨린다가 깜짝 놀랐다.

"호, 혹시... 저 괴물의 취향이 알포이인가요? 남편으로 삼으려고?"

"...그건 아니고."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퀸 그렉스 덕분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퀸 그렉스는 다른 그렉스들보다 조금 더 지능이 높다. 특히 호기심이 많아 처음 본 것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성이 있었다. 이것은 홀로 살아남아 퀸 그렉스를 발견하고 돌아온 마법사가 증명해 주었다.]

지셀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알포이를 보며 말했다.

"저놈이 마법사한테 관심이 많아."

"마법사요?"

"그래,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력을 느끼는 모양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안 되고 알포이를 보낸 거지."

[우리는 퀸 그렉스가 인간에게 우호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살아 돌아온 마법사를 길잡이 삼아 관찰과 조사를 위한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지셀의 말에 벨린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 알포이와 같이 움직여도 되는 거 아니에요? 어쨌든 마법사가 섞여 있잖아요."

"안 돼. 저놈이 허용하는 한계가 있거든. 그것도 아무한테나 허용하지 않아."

[한 명. 퀸 그렉스가 안심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숫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 이상의 인원에게는 무조건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상대가 한 명이라도 오직 마법사일 때만 호기심을 드러냈다. 퀸 그렉스가 마력을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지셀이 말한 대로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린다는 정말 궁금해서 미칠 거 같았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도련님이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숲에는 혼자 들어온 적이 정말 없었는데?'

어릴 때 숲에 들어왔으면 이미 죽어서 시체도 없어졌을 것이다. 애초에 예전 지셀의 권한과 실력으로는 숲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숲에 관해 꿰고 있는 지셀을 보면 마치....

'이미 한 번 와 본 사람 같잖아?'

지셀이 다른 일들을 해냈을 때도 신기하긴 했지만, 마수의 숲을 개척할 때만큼 이상하진 않았다. 지셀은 마수의 숲에 들어올 때마다 무슨 상세한 기록이라도 보는 것처럼 움직였다.

여자의 직감은 때론 무서울 정도의 직관을 발휘한다. 벨린다는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빙의설을 다시 꺼냈다.

'흑마법사가 빙의한 건 아닌 거 같고... 평소에는 우리 귀여운 도련님이 맞으니까....'

그래도 뭔가 다른 존재가 저 몸 안에 있는 거 같다. 그 존재가 지셀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 봐. 아주 그냥 온몸에 구멍을 내 줄 테니까.'

온몸에 구멍을 내면 지셀도 죽는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심이었다.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벨린다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넘겼다. 지셀과 함께 지내며 워낙 기괴한 일들을 많이 겪어서 이젠 일일이 생각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행들이 딴생각하는 와중에도 알포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퀸 그렉스에게 다가갔다.

그렉스들은 멀뚱멀뚱 알포이가 오는 걸 바라만 볼 뿐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으...."

알포이는 퀸 그렉스와 가까워지자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끼르르륵...."

퀸 그렉스는 여러 개의 눈을 빛내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알포이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마치 냄새를 맡는 듯 몇 번 고개를 까닥이기도 했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봐도 알포이는 오금이 저려 왔다.

한참을 그렇게 알포이를 관찰한 퀸 그렉스가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끄르르륵...."

그러자 그렉스들의 몸짓도 조금씩 공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발톱을 들어 올리고 알포이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이, 이 새끼들이?'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놀라운 감각을 발휘하는 법이다.

알포이는 퀸 그렉스가 자신에게 점점 관심이 없어지는 걸 순식간에 깨달았다.

"끼에에에엑!"

퀸 그렉스가 높이 울고 그렉스들이 움직이려고 할 때, 알포이의 손에서 작은 불덩이가 쏙 하고 튀어나왔다.

"이, 이것 봐라! 이거 불이야! 불!"

"끼에에엑?"

퀸 그렉스가 화들짝 놀란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렉스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신기하지? 봐 봐, 막 이렇게 움직일 수 있어."

알포이는 온 힘을 다해 불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력 컨트롤이 어찌나 섬세한지 7서클의 대마법사가 와서 봐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역시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게 없는 법이다.

"끼에에엑!"

퀸 그렉스는 정말 놀랍다는 듯 몸을 한껏 비틀었다.

'토, 통한다. 진짜 통해.'

살짝 자신감이 생긴 알포이는 불덩이를 움직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퀸 그렉스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덩이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알포이를 따라갔다.

알포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돼.'

어떻게든 지셀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된다. 그러면 다 해결이 될 것이다.

바들바들 떨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퀸 그렉스가 자리에 멈췄다.

"끼에에엑!"

알포이는 이번에도 알아들었다. 뭐 다른 거 없냐는 뜻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울음소리만 들어도 다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미친 괴물 새끼, X나 까다롭네.'

결국 알포이는 불을 없애고 자신의 필살기를 선보였다.

"이, 이거 봐라."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4개를 주워 든 알포이는 손을 펼쳐 퀸 그렉스에게 보여 주었다.

"...?"

고개를 갸우뚱하는 퀸 그렉스 앞에서 손을 뒤집은 알포이는 홀짝 마법을 사용했다.

슉.

손등만 보이기에 퀸 그렉스는 돌멩이 하나가 없어진 걸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알포이의 손이 다시 천천히 펴졌을 때.

돌멩이는 3개였다.

"끼에에에엑!"

퀸 그렉스는 자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정말 대단해!'라고 외치는 듯했다.

몬스터 주제에 인간도 속아 넘어가는 고차원적인 사기 수법을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알포이는 그렇게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며 퀸 그렉스를 계속 유인했다.

그가 뒤로 움직일 때마다 퀸 그렉스가 쫓아왔고 다른 그렉스들은 그냥 제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오르가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네."

정말 지셀의 계획대로 되고 있다. 알포이가 미끼 역할을 잘할 거라고 확신한 지셀이 대단한 건지, 정말로 몬스터를 유인해 온 알포이가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저 새끼 뭐 있는 거 아냐?'

신을 이긴 남자라는 별명이 붙은 놈이다. 카오르는 언제나 무시하던 알포이가 활약하는 것을 보고 상당한 긴장감을 느꼈다.

괜히 열기구 추락 사건이 생각나 카오르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다른 사람들도 숨죽이고 알포이를 지켜봤다. 손에 땀이 날 지경이다.

'제발! 제발!'

'넌 할 수 있어! 알포이!'

'신을 이긴 남자잖아!'

만약 퀸 그렉스가 저 손톱을 휘두른다면 돌멩이를 숨기는 데 급급하던 알포이는 그대로 찢길 것이다.

"끼에에엑!"

퀸 그렉스가 한 번씩 소리 지를 때마다 알포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도 그는 천천히 퀸 그렉스를 유인했다. 의외로 정신력이 강한 남자였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결국 퀸 그렉스는 지셀과 일행들이 숨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아직 거리가 조금 있긴 하지만 여기 있는 자들의 실력이라면 단번에 도약할 수 있을 거리였다.

그리고 그쯤에서 알포이의 재주가 끝이 났다.

"끼에에엑!"

"뭐, 뭘 해야 하지?"

알포이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옷 벗는 거 빼고 보여 줄 수 있는 건 다 보여 줬다.

우왕좌왕하는 알포이를 보고 퀸 그렉스가 다시 울었다.

"끼에에엑!"

그리고 동시에 그렉스들이 손톱을 내세우며 알포이를 향해 움직였다.

순간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지금이다."

파앙!

"끼에엑?"

어두운 숲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자 퀸 그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수고했다! 알포이!"

지셀은 크게 외치며 순식간에 퀸 그렉스의 팔과 다리를 잘랐다.

"까아아아아아악!"

고통에 겨운 퀸 그렉스의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일행들도 뛰쳐나왔다. 그렉스들도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묶어!"

카오르가 소리치자 벨린다의 로브가 펄럭이며 수십 개의 단검이 쏟아져 나갔다.

단검에 연결된 얇고 질긴 실들이 퀸 그렉스의 몸을 묶었다. 뒤이어 기사들이 가지고 온 줄을 이용해 더 단단하게 묶었다.

"끼에에에엑!"

퀸 그렉스가 발버둥 쳤지만 단단하게 묶인 줄을 벗겨 낼 수는 없었다.

"튀어!"

지셀이 외치자 기사들은 그대로 퀸 그렉스를 끌고 갔다.

"벨린다! 알포이를!"

"알겠어요!"

벨린다가 알포이의 뒷덜미를 잡아 안고 달렸다.

"카오르! 길을 확보해라!"

콰앙!

지셀이 검을 휘둘러 앞을 가리고 있는 나무들을 박살 냈다. 카오르도 지셀의 옆에서 나무들을 부수며 전진했다.

퀸 그렉스의 크기가 꽤 컸기에 끌고 오는 동안 나무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행들은 일단 달리면서 생각했다.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그냥 가서 다 죽이고 끌고 와도 되는 거 아니었어?'

'뒤에 있는 놈들도 못 따라오는데?'

퀸 그렉스가 잡혀가자 수백의 그렉스들이 쫓아왔지만 이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냥 이대로 요새로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그때 지셀이 다시 외쳤다.

"전력으로 달려라! 어서!"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거 같았다. 일행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곧 사방에서 들려오는 진동을 느꼈다.

드드드드드....

"끼에에에에엑!"

퀸 그렉스는 계속 비명만 지를 뿐이다. 하지만 사방에서 울리는 진동은 퀸 그렉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누구보다 기감이 뛰어난 벨린다가 표정을 굳혔다. 이 진동은 주변에서 다가오는 게 아니다.

빠르게 달리며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땅속?"

진동은 땅속에서 퍼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땅속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하나가 아니야."

거대한 몬스터가 움직이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그런 게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마리의 무언가가 움직이는 흐름이었다.

[우리는 퀸 그렉스가 이 영역을 어떻게 차지하고 있는지 비밀을 알고 싶었다. 이렇게 약한 무리를 이끌고 어떻게 마수의 숲에 살아남았는지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나무를 베며 앞서 달리던 카오르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파아아악!

"카아아아악!"

곳곳에서 땅이 꺼지며 그렉스들이 튀어나왔다.

"이런 싯팔! 이게 뭐야!"

카오르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한두 마리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튀어나온 그렉스들은 얼핏 봐도 수백 마리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그렉스들은 사방에서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끼에에엑!"

드드드드드드!

땅 밑에서 울리는 진동이 더 커져만 간다. 당황하는 일행들에게 지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꽂혀 들었다.

"뚫어라!"

파아아악!

지셀이 가장 선두에서 그렉스들을 무차별로 베었다.

하나하나가 인간 병사와 비슷한 수준이라 약한 몬스터로 취급되는 게 그렉스다. 하지만 이렇게 수백 마리가 모여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마치 인간 병사들이 군대를 이루면 무서워지듯이.

[그 비밀을 파헤친다면 마수의 숲을 한층 더 쉽게 개척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퀸 그렉스를 납치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비밀 따위는 없었다. 마수의 숲은 오직 힘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곳일 뿐이었다.]

"끼에에에에엑!"

땅 밑에서 튀어나온 그렉스들은 사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수가 늘어났다.

카오르는 이를 악물고 그렉스들을 베었다. 벨린다와 기사들도 퀸 그렉스 주변으로 다가오는 그렉스들을 공격하느라 바빴다.

그렉스들이 몰려들수록 일행들의 속도는 점점 느려져 갔다. 땅에는 하도 구멍이 많이 뚫려 이제는 발 디딜 곳도 없을 정도였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퀸 그렉스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긴 했다. 바로 모든 그렉스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렉스들은 그들의 여왕을 구하기 위해 수도 없이 몰려왔다. 그리고 여왕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던 그렉스들의 수는....]

콰아아아앙!

지셀은 3단계의 코어를 개방하며 외쳤다.

"더 빨리 뚫어라! 늦어지면 감당할 수 없다!"

[...약 20만이었다.]

324화 넌 할 수 있어. (3)

[훗날 알아본 바로... 그렉스들은 지하 깊은 곳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퀸 그렉스는 매일 같이 수십, 수백 개의 알을 낳는다. 거기서 태어난 것들은 땅속에 사는 몬스터들과 짐승들을 잡아먹고, 식량이 부족하면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잡아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걸 몰랐다.]

콰아아앙!

그렉스들의 피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정도로 지셀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힘을 내라!"

어느 순간 주변은 그렉스들로 빡빡하게 채워졌다. 그것들은 퀸 그렉스를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지셀과 일행들에게 달라붙었다.

"끼에에에에엑!"

퀸 그렉스는 숲이 떠나가도록 계속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본 카오르가 외쳤다.

"저 새끼 저거 입 닥치게 하면 안 됩니까?"

"소용없다. 소리로 부르는 게 아니야."

전생에 공작가의 기사들도 퀸 그렉스의 입을 막아 봤었다. 하지만 그렉스들은 퀸 그렉스의 울음소리와 상관없이 몰려왔다.

그렉스들을 모으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이지만, 공작가도 그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어차피 몬스터들의 능력이란 기상천외한 게 많았기에 그 구조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었다.

벨린다가 다급하게 다른 의견을 건넸다.

"그냥 죽이면 어때요? 죽여서 저놈들한테 던져 버리고, 지금 나온 놈들은 병력을 이용해서 차근차근 쓸어버리는 거죠."

지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안 돼. 그러면 더 큰 일이 난다."

[몰려오는 그렉스들을 우리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캠프는 순식간에 쓸려나갔고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이 엄청난 수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후퇴하기로 하고, 그렉스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퀸 그렉스를 죽였다.]

콰앙! 콰아아앙!

지셀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마리의 그렉스들이 터져 나갔다.

그럼에도 그렉스들의 수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벨린다는 질린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다시 물었다.

"왜요? 죽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페르디움이 멸망할 거야."

[퀸 그렉스를 죽인 건 최악의 실수였다. 여왕을 잃은 그렉스들은 전부 미쳐 날뛰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여왕을 죽인 인간을 찾아내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마어마한 수였다. 땅속에 숨어 살던 그렉스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렉스의 해일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벨린다는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마수의 숲에서 싸우고 있는데 페르디움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놈들이 바깥으로 나갈 테니까."

[그렉스들은 결국 마수의 숲을 벗어났다. 그것들은 가장 먼저 마수의 숲과 가까운 페르디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시설들이 파괴됐다. 그럼에도 그렉스들은 멈추지 않고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셀은 이를 악물며 다시 외쳤다.

"요새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 퀸 그렉스를 가두고 저놈들을 막아야 해! 그래야 그렉스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요새를 공격할 테니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그것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해럴드 데스몬드 공작이 북부군을 이끌고 움직였고, 북방 요새에서 야만인들과 대치 중이던 카이필러의 사령관, 아렐 하이듄 남작이 요새 병력까지 이끌고 와서야 그렉스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지셀의 외침에 일행은 정신없이 그렉스들을 뚫으며 달렸다. 더 캐묻고 싶어도, 덤벼드는 놈들이 많아져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끼에에에엑!"

다들 마나를 아끼지 않았다. 이미 몰려오는 그렉스들의 수는 수천이 넘어갔다. 지금도 계속 어디선가 튀어나와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자칫 잘못해서 포위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다.

이 영역은 온전히 그렉스들의 것이다. 몬스터들은 그것을 알기에 이곳을 차지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

"으아아아아! 젠장! 또 잡히겠어!"

가장 뒤에서 그렉스들을 끌고 오던 고든이 비명을 질렀다. 그렉스들이 너무 달라붙으니 점점 속도가 늦어져 뒤처지고 있었다.

그는 몬스터에게 잡혔던 트라우마가 있다. 또 끌려가기 싫어서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달려드는 그렉스들이 너무 많았다.

같이 있던 기사들이 분전했지만 이제는 역부족이었다.

촤악!

"크읏!"

그렉스들이 하나둘 기사들의 갑옷에 달라붙었다.

달리면서 떨어내도 다시 다른 놈들이 붙어 버린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렉스들의 해일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상황을 살펴보던 지셀이 외쳤다.

"벨린다! 카오르! 계속 길을 뚫어라! 내가 뒤를 맡겠다!"

"도련님!"

벨린다가 기겁했지만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뒤쪽으로 움직였다.

콰앙!

기사들에게 달라붙던 그렉스들이 지셀의 검격에 날아갔다. 기사들은 그제야 숨을 고르고 앞으로 달려갔다.

벨린다의 옆구리에 덜렁거리며 실려 가던 알포이는 머리를 굴렸다.

'뒤는 영주가 막고 있어. 앞은 카오르가 뚫고 있고. 그러니까 더 빨리 달려야 해.'

마력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퀸 그렉스 앞에서 재롱을 떠느라 상당히 많은 마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벗어난다는 생각에 마음 놓고 벨린다의 품에 안겨 있던 알포이는 다시 위기를 느꼈다.

'잡히면 죽는다.'

그래서 그는 남은 마력을 모두 짜냈다. 공사만 하고 살다 보니 마력의 양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 운용 능력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지잉―!

마력의 울림이 사방으로 퍼진다. 알포이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사람들에게 몸이 가벼워지고 빨라지는 마법을 걸었다.

"엇!"

"뭐야! 이거? 마법?"

"좋아! 더 빨라졌다!"

다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자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벗어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이곳에 마법사는 알포이밖에 없다. 그가 한 일이 분명하다.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이렇게 마법을 거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집중력과 마력의 운용이 필요하다.

알포이 따위가 이런 걸 해내다니! 역시 이 새끼는 급할 때 뭔가 하는 놈이다.

하지만 벨린다는 옆구리에 낀 알포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알포이에게서 퍼져 나간 마력의 흐름을 느낄 정도의 실력자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마법의 적용 대상에는 단 한 사람이 빠져 있었다.

"너... 일부러 도련님은 빼놓은 거야?"

알포이의 마법은 가장 뒤에서 그렉스들을 막고 있던 지셀에게만 걸리지 않았다.

벨린다가 노여워하자 알포이는 탈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 아니야! 마력이 부족해서 저기까지는 안 닿아! 이게 내 한계라고! 지금 있는 사람들도 겨우 한 거야! 내 얼굴 보면 알잖아!"

알포이가 억울하다는 듯 크게 항변했다. 정말 힘이 다 빠졌는지 창백해진 상태로 몸을 덜덜 떨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만 아는 법이다. 벨린다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몸이 가벼워진 만큼 지셀과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카오르도 그 힘 덕분에 더 빠르게 그렉스의 포위를 뚫고 있었다.

지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크게 웃으며 외쳤다.

"잘했다 알포이! 다들 날 신경 쓰지 말고 요새로 달려가라! 금방 쫓아갈 테니까!"

벨린다는 잠깐 고민했지만 지셀을 믿기로 했다.

지셀은 일행 중 최고의 실력자다. 자신이 도우러 가도 오히려 더 방해만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빨리 요새에 도착해서 병력을 끌고 나오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콰앙! 콰앙!

카오르와 함께 앞서 나가던 기사들은 더 바빴다. 그렉스들도 처치하고 퀸 그렉스를 끌고 갈 길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젠장! 싯팔! 망할! 이 미친 숲! 내가 미쳤다고 또 따라와서!"

카오르는 연신 욕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때는 그래도 군대를 이끌고 다 같이 싸웠다. 이렇게 소수로 돌파한 적이 없다.

이런 미친 작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하는 영주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무슨 확신이 있어서 항상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걸까?

살아남고 나서 되돌아보면 정말 짜릿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이러다가는 진짜 제 명에 못 살 거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그렉스들을 베고 나무를 베던 카오르와 기사들은 드디어 눈앞에 탁 트인 공터를 발견했다.

"다 왔다!"

카오르가 기쁘게 외쳤다. 이제 요새 근처까지 온 게 확실하다. 요새의 망루에서는 이곳 상황이 보일 것이다.

확실히 이곳까지는 그렉스의 영역이 아닌지 더 이상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놈들이 없었다.

미친 듯이 달리던 카오르는 자존심을 버렸다. 그는 정말 평생 하지 않을 거라 맹세한 말을 외치고 말았다.

"영감! 도와줘!"

파아아앗!

동시에 요새에서 엄청난 수의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끼에에에엑!"

일행을 쫓아오던 그렉스들이 화살들을 맞고 우수수 쓰러졌다. 비록 뒤에는 여전히 수많은 놈들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옆에 따라붙던 놈들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한숨 돌릴 정도로 큰 도움이 되었다.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길리언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쏴라! 도주로를 확보해야 한다!"

파아아앗!

다시 화살들이 쏘아져 나갔다. 길리언은 지셀의 명으로 이미 전투 준비를 확실히 해 둔 상태였다.

병사들이 넓게 퍼져 다가오는 그렉스들을 공격했다면 엘프들은 정밀한 지원 공격을 시도했다.

"끼에에엑!"

퍼억!

한 기사의 옆으로 뛰어오르던 그렉스가 머리를 뚫려 쓰러진다.

엘프들의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가 도주하던 일행 주변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엑!"

그렉스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린다. 도주하느라 바쁜 일행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높은 곳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길리언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숲이 들썩인다. 그렉스의 색이 불그스름해서 마치 붉은 해일이 몰려오는 듯했다.

드드드드드드드!

살면서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 사냥으로 먹고사는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끔찍하다. 저 그렉스 떼는 순식간에 요새를 갉아먹을 것만 같았다.

병사들은 몰려오는 그렉스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도, 도대체 저 많은 몬스터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저 정도면 이미 숲에서 잔뜩 보여야 했던 거 아니야?"

"영주님이 또...."

누군가의 마지막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전부 영주가 벌인 일이라고 보면 된다.

요새를 지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요새가 없이 저 몬스터들을 맞이했다면?

그냥 이곳에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물론 요새가 있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숫자를 보니 단단하게 지은 이 요새로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줄을 내려라!"

길리언이 명령하자 남아 있던 기사들이 단단한 줄을 내려주었다. 요새 앞까지 도착한 사람들은 줄을 잡고 빠르게 올라갔다.

"끼에에에엑!"

요새로 끌어 올려지는 퀸 그렉스가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퀸 그렉스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저 몬스터가 이번 작전의 핵심 목표라는 건 이제 다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영주님은! 영주님은 어디 계시냐!"

길리언의 외침에 피를 뒤집어써 꼴이 엉망이 된 벨린다가 말했다.

"당장 기사들을 준비시켜요! 도련님을 구하러 가야 해요!"

길리언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더 많은 수의 그렉스들이 몰려오고 있다.

병사들이 열심히 화살을 쏘고 있지만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수가 수만은 훌쩍 넘을 듯 보였다. 그렉스들의 움직임에 따라 땅이 울리고 숲이 들썩였다.

그제야 길리언은 지셀이 떠나기 전 내렸던 명령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오면 안 돼. 요새에서 최선을 다해서 막아. 요새가 뚫리면 적어도 페르디움은 확실하게 멸망할 거야.

빠드득.

길리언은 이가 부서지도록 강하게 깨물었다. 저만한 몬스터들이 마수의 숲을 벗어나면 페르디움 영지 하나 정도는 확실히 멸망한다.

어쩌면 친왕파뿐만이 아니라 공작파의 도움까지 필요할지도 모른다.

영주의 명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저 몬스터 떼들 사이에 영주를 홀로 남겨 둘 수도 없다.

소드마스터라도 저 정도 숫자를 상대하려면 싸우다가 지쳐 죽을 게 분명하다.

망설이는 길리언을 보며 벨린다가 외쳤다.

"길리언! 당장 기사들을 준비하라고요!"

길리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영주가 없다는 사실에 벌써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작전에 참여했던 카오르와 기사들은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숨만 헐떡이고 있다.

'영주님....'

길리언이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고 마법사들과 대기하고 있었다. 다들 지셀이 시킨 모든 준비는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마법을 시전하려면 영주가 와야 한다. 지금 마법을 사용하면 영주까지 휘말릴 게 분명했다.

"끼에에엑!"

드드드드드드!

그렉스들은 이제 요새 앞을 가득 메울 정도로 몰려들었다. 병사들과 엘프들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 댔다.

길리언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모두 자리를 지켜라! 온 힘을 다해 몰려오는 그렉스들을 막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벗어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길리언!"

벨린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외쳤다. 그녀는 길리언을 노려보며 로브를 벗어젖히고 단검을 꺼냈다.

혼자서라도 지셀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때 길리언이 거대한 두 자루의 도끼를 양손에 쥐고 말했다.

"내가 영주님을 반드시 모시고 오겠다. 그때까지만 버텨라."

쿠웅!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그대로 요새에서 뛰어내렸다.

325화 역시 알아도 쉽지가 않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