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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316

306화 하나가 더 필요해. (2)

지셀은 자신만만해했지만 클로드는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물었다.

"전투 식량이요?"

"그래, 전투 식량 제조소부터 만들어. 필요한 건 내가 알려 줄 테니까."

"또 뭐 영주님만이 아는 기술,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아직 세상에 없는 거거든."

"흐음...."

밀을 개량할 때, 화장품을 개발할 때와 같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실컷 반대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반대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은 있었다.

전투 식량을 만들면 군대의 식량 보급이 원활해지고 사기도 높아졌을 터다. 전투력을 높이는 데 큰 효과가 있는데 왜 그걸 이제야 만든다는 걸까?

"전에는 왜 안 만드신 겁니까? 미리 만들었으면 좋았잖아요."

지셀은 훌륭한 질문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 다들 너무 일이 많아서 고생하는 거 같아서."

"피... 거짓말."

"둘째, 지금까지는 우리가 왕국 전역으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없어서."

"흐응...."

"셋째, 데스몬드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만들기가 힘들었거든."

"왜요?"

"재료가 많이 들어가니까. 거래로 재료를 구하려면 수량에 한계도 있고, 상황에 따라 수급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거든."

클로드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시 상단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그전에는 잘 구하던 물품을 못 구할 수도 있었다. 카발디 백작이 철광석을 꽉 쥐고 북부에 도는 수량을 통제했던 것과 같은 얘기였다.

만약 공작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단이라면 지셀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재료가 뭐가 들어가기에 데스몬드를 차지해야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많이 필요하지. 밀과 보리는 물론이고 옥수수, 콩, 기장, 수수, 귀리, 팥, 순무, 양배추... 그 밖에 여러 과일과 약초, 고기들도 필요하고. 생각보다 재료가 많이 든다고."

"...오우."

많이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이 척박한 북부에서 그런 것들을 생산하는 영지는 데스몬드와 레이폴드가 유일했다.

다른 영지는 대부분이 황무지와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농사짓기 좋은 땅이 있어도 밀 경작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데스몬드에는 좋은 땅이 꽤 많기에 여러 작물과 약초, 가축들까지 키우곤 했다.

물론 가장 중점적으로 관리한 건 밀과 가축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른 작물들은 가뭄의 여파 때문에 최근에는 생산량이 대폭 줄긴 했지만, 어쨌든 재배 자체는 충분히 가능한 환경이었다.

"도대체 뭘 만들 건데 그렇게 재료가 많이 들어가요?"

"여기서 말하면 얘기가 길어져.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을 거야."

"흐음...."

클로드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수상하긴 하지만, 영주가 하는 일이 안 그랬던 적이 있던가?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일단 결과가 나오고 나서 보면 된다.

"어쨌든 알겠지? 전투 식량 제조에 필요한 작물들도 룬스톤을 사용해서 생산량을 끌어올릴 거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자고."

"끙... 생각보다 자금이 많이 들 거 같은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전투 식량을 만드는 제조소야 그렇다 쳐도, 관리해야 하는 품목이 너무 많을 거 같은데요."

언제나 돈이 문제다. 돈만 있으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작' 전투 식량을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

보급이 중요한 건 알지만 먹는 것에 너무 과하게 돈을 쓰는 거 같았다. 지금도 보존식은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셀은 단호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항상 말하지만,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돈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전투력이지. 전투력 상승을 위해 영지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으는 게 우선이야."

"네, 그러세요...."

클로드는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하긴, 지금까지 지셀이 한 일들은 다 그랬다. 영지를 발전시키고 부강하게 했지만, 그 모든 건 사실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머릿속에 싸움만 가득한 남자였다.

그래도 새로운 전투 식량이 뭔지 궁금하긴 했다. 이번에도 깜짝 놀랄 만한 게 아닐까?

처음과는 달리 클로드와 가신들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조금 생겨났다.

"자자, 어서 작업에 착수하자고."

지셀은 자신이 구상한 설계도를 갈바릭에게 넘겼다.

언제나처럼 '어떤 기능이 필요하다' 정도만 적혀 있는 대략적인 개념도였다. 갈바릭은 설계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건 좀 쉽군. 금방 만들 수 있겠어."

대부분이 무언가를 넣고 건조하고 갈아서 분쇄하는 용도였다. 이 정도도 금방 못 만들면 드워프 자격이 없었다.

건조하는 데만 마법사들의 도움을 조금 받으면 된다. 마법을 쓰지 않아도 건조 작업은 가능하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마법을 약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좋소, 내 금방 만들어 드리지."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바로 움직였다. 시설 제작 등 하고 있던 일이 많으니 이런 건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

뭔가를 빨리 만드는 것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펜리스 사람들이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 식량 시제품을 만들 제조소가 금세 완성이 되었다.

갈바릭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떻소! 이 정도야 이제 우리한테는 금방이지! 영주가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해 보시오!"

지셀은 제조소 내의 설비를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봐도 모르겠다.'

솔직히 싸움질만 한 자신이 설비의 정교한 구조까지 어떻게 알겠는가? 진짜 말 그대로 개념과 들어가는 재료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이유도 단순했다. 왕국과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니 큰 틀 정도만 익혀 놓은 것이다.

자세히 알 필요는 없었다. 디테일한 부분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니까.

'클로드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의 이상한 사기꾼 클로드가 아닌, 산전수전 다 겪고 손발 하나씩 날아간 전생의 클로드 말이다.

지셀이 개념만 대략 파악했던 것과 달리, 클로드는 상세할 정도로 모든 걸 습득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클로드가 없으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이용해서 구현해야 한다.

그래서 공학적 지식과 기술이 뛰어난 드워프들이 필요했던 거고.

"음, 일단은 결과물을 봐야 알겠네. 내가 생각했던 건 다 들어간 거 같아."

적당히 둘러댄 지셀은 바로 인부들을 구해 시제품 제작을 시작했다.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고, 해럴드가 전쟁 물자로 대부분을 쓸어 갔기 때문에 아직 대량 생산하기엔 재료가 모자라긴 했다.

하지만 이번 시제품을 통해 효과가 입증되면 제조소와 경작지를 대규모로 추가할 생각이었다.

쿠웅. 쿠웅. 쿠웅.

치이이익!

마법사들과 드워프들이 만든 설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부들은 자신들이 뭘 만드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지셀이 시키는 일을 하기에 바빴다.

잔뜩 재료들을 끌고 와 넣고 건조하고 찧고 갈기를 반복했다.

"영주님이 뭘 만드는 걸까?"

"보니까 다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이던데."

"귀족들 먹는 음식을 만드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온 결과물은 아주 곱게 갈린, 누리끼리한 분말이었다.

살짝 맛을 본 인부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맛은 나쁘지 않은데? 뭔가 고소한 거 같기도 하고 달콤한 거 같기도 하고...."

"양념인가? 스튜에 넣고 끓이면 될 거 같은데."

"이런 걸 뭐 하러 만드는 거지? 다른 맛있는 소스들도 많은데 말이야."

인부들은 일하면서도 이런저런 추측을 해 봤지만 누구도 확실한 답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나온 결과물을 보고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비슷한데?"

전생에 봤던 것과 비슷하다. 맛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맛이 아니었다.

물통을 가져온 지셀은 가루를 한두 스푼 정도 넣은 뒤 마구 흔들었다.

곧 물통 안의 물은 가루와 똑같이 누리끼리한 색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찝찝해했을 외양에도 지셀은 거침없이 그걸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

한 번에 쭈욱 마신 지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신체의 미세한 변화도 파악할 수 있는 실력자다.

시제품을 마시자 아주 약간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됐다. 성공이군. 예전에 맛봤던 거랑 비슷해. 이제 실험을 해 봐야겠어."

생각한 대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최소 한 달은 인체 실험을 해 봐야 확실하다.

지셀은 바로 클로드를 호출했다.

"무슨 일입니까? 바빠 죽겠는데."

"드디어 완성됐다."

"새로운 전투 식량이요?"

"그래, 이제 실험에 들어갈 거야. 지원자를 좀 모집하자고."

지셀이 시제품을 보여 주자 클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 가루가 전투 식량이라고요?"

"응."

"가루 먹고 배를 채우라고요?"

"응. 물에 섞어 마시면 돼. 봐 봐."

지셀이 조그만 물통을 하나 가져와 가루를 넣고 흔들었다.

클로드는 그걸 보고 다시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쉑! 쉑! 소리가 날 정도로 섞는 거야."

'진짜 이 쉑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네.'

그래도 클로드는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렸다. 아직 설명이 다 안 끝났으니까.

충분히 섞은 지셀은 다시 가루 물을 마시고 말했다.

"이렇게 물에 충분히 섞은 뒤에 마시면 된다."

"그게 끝이에요?"

"응."

"얼마나 먹어야 해요?"

"하루에 한 번만 먹어도 안 죽어. 물론 힘을 내려면 두세 번은 먹어야 하지. 이것만 적당히 챙겨 가도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걸?"

"흐...."

클로드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미친 소리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영주님?"

"왜."

"사람이 물만 먹고도 며칠은 살 수 있어요."

"그렇지."

"거기에 약간의 비스킷 가루와 육포 가루를 먹으면 더 오래 살 수는 있지요."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먹으면 숨만 붙어 있는 거지, 전투는 못 해요. 한 대만 툭 쳐도 뒤진다고요."

"아냐, 아냐. 이건 괜찮아. 몸에 영양분을 충분히 채워 주거든. 활력이 생긴다는 뜻이지."

지셀은 자신만만했다. 이건 전생에 자신과 수하들도 많이 먹어 본 것이다. 몇 통만 챙겨도 최소 한 달 이상은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 허기가 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이게 전투력 유지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

환란의 시기에는 위험한 작전 지역에 물자 보급을 어떻게 할지도 큰 문제였다.

위험한 놈들로 둘러싸인 곳에 기사들이 고립되면 보급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열기구와 마법을 이용해서 물자를 보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장기 보존 식량에 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다. 기존에 쓰던 보존식들은 그 무게와 부피 때문에 상비할 수 있는 수량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은 쉽지 않았다.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하며, 재료가 고급이어도 안 되고, 보존 기간도 길어야 하며, 체력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그 수많은 전제 조건을 통과하기 위해, 대륙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수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서 만들어 낸 것이 이 가루였다.

어떻게든 물만 구하면 먹을 수 있고 물이 없어도 입에 조금씩 넣어 녹여 먹을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이것만 먹어도 충분한 영양 공급이 되고, 지속적으로 몸에 활력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이 보존식이 개발된 뒤로 인류의 작전 반경은 더 넓어졌다. 전생에서 환란의 시기에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전생에서 충분히 검증되었고 본인도 먹어 봤기에 지셀은 효과를 자신했지만, 이 시대의 상식에 갇혀 사는 클로드에겐 아니었다.

"영주님, 이것저것 넣고 간 건 좋은데요. 그거 몇 스푼 먹었다고 배가 부를 거 같아요? 안 먹은 것보다야 낫긴 하겠죠. 그런데 며칠 못 간다니까요? 다들 그냥 쓰러진다니까요?"

이 시대에는 힘을 내려면 무조건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배고프면 힘을 못 쓰는 게 당연하다. 그저 숨만 붙이고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부분은 클로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내가 노숙 생활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도박 빚으로 거지같이 살았던 클로드다. 쓰레기를 주워 먹은 적도 있고 누가 던져 준 건조 식량을 며칠에 걸쳐 나눠 먹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일어나기도 힘들다. 배도 고프고 힘도 없고 서럽기까지 하다.

그때 먹었던 양은 적어도 저 가루 한두 스푼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클로드는 지셀이 하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사들이야 마나가 있으니 자신보다야 조금 더 오래 버티겠지만, 그래도 저런 것만 먹고 한 달 이상 버티는 건 절대 무리였다. 굶어 죽기 십상이고, 안 죽어도 드러누워 있을 게 뻔했다.

다년간의 노숙 경험이 있는 클로드에게 그건 상식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실험을 한다고? 어쨌든 아직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거네?'

클로드가 반대하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이, 지셀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 하루에 두 번씩만 마셔도 평범하게 움직일 수 있어. 체력이 아주 약간 약해질 수는 있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야."

"아, 안 된다니까요. 영주님 노숙해 본 적 있어요?"

"있지. 살면서 노숙한 날이 더 많을걸?"

"또, 또, 저런다. 하여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귀족가의 자제로 망나니처럼 살았다는 걸 뻔히 아는데 무슨 노숙을 해 봤다는 것인가.

있다고 해 봤자 그냥 며칠 놀러 나갔다가 온 게 전부였을 것이다.

"영주님이 지금까지 이상한 거 많이 만든 건 알아요. 그런데 이건 정말 다릅니다. 제가 굶어 봐서 잘 안다니까요. 그것만 먹고 전투까지 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길어 봤자 일주일이 한계예요. 진짜 그딴 거 만드는 데 그 많은 돈을 쓰겠다고요? 경작지에 룬스톤에 설비에... 어휴, 끔찍합니다. 시간 날리고 돈 날릴 생각 하니."

"그래서 실험을 하자는 거잖아?"

클로드는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 해 보나 마나입니다. 괜히 그런 걸로 시간 날리지 말자니까요? 솔직히! 영주님이 그간 만든 이상한 것들 다 성공해서 다행이지,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 영주님 말 아무도 안 믿을 텐데."

그냥 실험 한번 해 보면 되는 건데 자꾸 도발하고 반대를 한다.

지셀은 클로드가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다. 클로드가 얕은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뻔히 보였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내기 한 번 할까?"

클로드도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셀의 예상과는 달리, 클로드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아주 크게 판을 벌일 생각이었다.

307화 너 믿고 걸어 본다. (1)

"내기라... 그거 재미있겠네요."

갑자기 뜸을 들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다시 물었다.

"할 거야? 말 거야?"

"당연히... 이런 승부를 놓칠 순 없죠. 제 몸에는 승부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근데 걸 건 있어? 네 남은 인생은 이제 안 받을 건데."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사실 클로드에게는 이미 남은 인생이 없었다. 가끔 자잘하게 인생을 건 내기에서 모두 패배해서, 지금은 노예로 살아야 하는 기간이 무려 278년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 빨리 마시기 따위로 10년 정도 뜯긴 적도 있었다. 그냥 기회가 날 때마다 승부를 건 결과였다.

클로드도 자신의 남은 인생이 이제 영지에 굴러다니는 밀가루보다 더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걸 걸려고 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이라면 어떨까요? 후훗."

마법사들은 예전에 계약했던 기간 그대로다. 그들도 이제 도박을 즐기긴 하지만 지셀과 다시 내기를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지금 자신의 인생 대신 마법사들의 인생을 걸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셀도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라면 괜찮지. 분명 마력 덕분에 수명도 길 테니까. 서클이 올라가면 더 늘어날걸?"

"후훗, 그게 끝이 아니지요."

"또 있어?"

"그럼요, 이번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 데리고 올 수 있겠어?"

"제가 그들을 설득해서 내기에 참여하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 친구들도 나름 쓸 만하긴 하지. 좋아, 원하는 게 뭐야? 판을 이렇게까지 키운 걸 보면 보통이 아니겠는데?"

클로드가 갑자기 몸을 배배 꼬더니 말했다.

"아이참, 이거 내 입으로 말해도 되나 몰라."

"뭔데? 뭘 갖고 싶은 건데?"

"일단 자유로 만들어 주는 건 당연한 거죠? 278년 한 번에 다 까시죠."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거면 돼? 자유민으로 고향에 가고 싶어?"

"아니요, 저 영지 하나만 주십쇼. 저도 영주하고 싶습니다."

"푸훕!"

"...."

"흠흠, 적당히 땅 하나 주면 돼?"

웃음을 꾹 참는 지셀을 보며 클로드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영주님한테는 안 받을래요."

"왜?"

"언제 죽을지 알고 그걸 받아요."

공작가와 싸우는 건 예정된 미래다. 지셀에게 영지를 받으면 봉신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참여하지 않더라도 공작가가 이기면 어차피 지셀과 같은 편이라고 죽을 게 뻔했다.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땅을 달라는 거야? 어디서 뭐 뺏어서 줘?"

"튜리안 왕국에서 적당한 거 하나만 사 주세요. 작아도 되니까요. 흐흐흐."

"튜리안 왕국?"

"영주님은 튜리안 왕국이 보증하는 루타니아의 귀족이지 않습니까? 제 후견인으로 작은 땅 정도는 사 줄 수 있잖아요. 아, 그림자 산맥에서는 최대한 먼 곳으로요. 전 안전하게 살고 싶거든요."

기존의 영주와 합의만 한다면, 소속된 국가의 법을 지킨다면 영지를 사고파는 것도 가능했다.

클로드는 돈만 얼마 받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권력의 맛을 봤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권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는 작은 영지의 주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 생각이었다.

어차피 큰 욕심은 없다. 지셀처럼 전쟁광도 아니고 땅을 넓힐 생각도 없다. 그냥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이 편하게 놀고먹으면 된다.

클로드의 야망을 접수한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이기면 튜리안의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구해 줄게.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흐흐흐, 영주님이야말로 나중에 말 바꾸지 마십쇼. 기간은 한 달로 하시죠. 새로 개발한 것만 먹고 한 달 뒤에 전투가 가능한 체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당연하지. 그러면 어서 판돈 걸 사람들 모집해 와."

"좋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금방 설득해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클로드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움직였다. 이제 걸 게 없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자기 것은 안 걸고 남들 인생을 걸었다.

아무것도 안 걸고 야무지게 보상을 챙겨서 이곳을 뜰 생각을 하니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이 나서 떠나는 클로드의 뒤통수를 보며 지셀이 피식 웃었다.

"종신 노예 마법사들이라... 이건 못 참지."

무척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 * *

알포이는 영지의 공사장 구석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상대는 영지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라고 소문난 피오테였다.

사실 피오테는 도박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영지에서 받는 돈도 모두 어려운 영지민들을 위해 썼다.

영지에서 식량을 잔뜩 뿌리니 굶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람은 먹기만 하고 살 수는 없다.

가난해서 생필품을 구하지 못하거나, 아픈데 약초를 제때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피오테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피오테가 받는 돈으로 영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도와주기는 턱도 없다. 그래서 그는 영지의 인사들에게 간혹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대상은 알포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뭐? 나한테 기부를 좀 하라고? 이 불꽃 남자 알포이 님의 돈을 지금 뜯어가겠다는 거야?"

"아니... 뜯는 게 아니고, 영지에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니 조금 도와달라는 뜻에서...."

"내가 제일 어려워! 내가 제일 어렵다고! 마탑의 후계자인 내가 무급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포이는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가 야금야금 돈을 모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영지민들의 일을 도와주고 대가를 조금 받기도 하고, 도박으로 주변 사람들의 돈을 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완고하고 나오면 어쩔 수 없다. 기부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받는 거지, 강요로 받는 게 아니니까.

"아, 알겠어요. 다른 분을 찾아 볼게요."

피오테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려고 하자 알포이가 붙잡았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뭔데요?"

"나도 그냥 주고 싶은데 명분이 없어, 명분이."

피오테가 궁금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무슨 명분이 필요하다는 걸까?

알포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법사는 대가 없이 돈을 주지 않아. 왜냐하면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너에게 내 돈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어떻게요?"

"바로 도박이지. 도박으로 내 돈을 따가면 돼."

피오테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경전에 도박을 금지하는 구절은 없지만, 도박이라는 행위의 근원은 탐욕이기 때문에 죄라고 할 수 있지요."

"...너 아직 멀었구나."

"네?"

"네가 지금 돈에 대한 욕망으로 도박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 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거 아니야?"

"...네."

"그러면 탐욕이 아니라 숭고한 도전이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니까 말이야. 어려운 사람을 도울 방법이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게 더 큰 죄가 아닐까?"

"...."

뭔가 이상하지만 그럴듯하다. 잠시 고민하던 피오테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해 볼게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그 방법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자신이 떳떳하면 되는 문제였다.

알포이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했어. 어려운 건 잘 모를 테니 종목은 홀짝으로 하자. 내 손에 있는 은화가 홀수 개인지, 짝수 개인지만 맞히면 돼. 쉽지?"

"네."

피오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옆에서 구경하던 도박 멤버들은 고개를 저었다.

홀짝은 절대 피오테가 이길 수 없는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도박 멤버인 케인과 마법사들조차 알포이와는 홀짝을 하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알포이가 이 영지 최강이었다.

그걸 모르는 피오테는 순진한 표정으로 알포이와 게임을 시작했다.

알포이는 피오테가 주섬주섬 꺼낸 돈들을 보고 혀를 찼다.

'어휴, 저 돈 없는 거 봐라. 영주가 쟤한테는 꽤 줄 텐데 진짜 어려운 사람들 다 나눠 줬나 봐. 쯧쯧, 저걸 다 잃으면 예쁜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흐르겠어.'

피오테가 꺼낸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은화 몇 개와 동화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알포이는 불꽃의 승부사다. 절대 상대가 불쌍하다고 봐주지 않는다.

소심한 피오테는 한 번에 많이 걸지 않고 딱 동전 하나씩만 걸었다.

"홀!"

"짝!"

"홀!"

"짝!"

피오테는 열심히 도전했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알포이는 마법을 써서 사기도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흐, 내가 만든 이 마법을 파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영지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클로드를 만나 도박을 처음 접하게 된 알포이는 이제 훌륭한 도박사가 되었다.

그는 홀짝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 한 가지 마법을 만들었다.

바로 이동 마법과 경량화 마법, 중력 마법을 응용한 필승 마법이었다. 기존 마법의 짜깁기에 가깝지만, 어쨌든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홀짝 내기를 할 때마다 이 마법을 손에 쥔 작은 물건에 몰래 부여했다.

'이 마법을 만든 뒤로 난 단 한 번도 홀짝에 진 적이 없다. 조만간 영주에게도 다시 도전하겠다!'

상대가 맞췄을 경우, 손목을 돌리기 전에 살짝 손을 펴면 순간적으로 은화가 소매 안으로 들어간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순간이동에 맞먹었다.

이 마법 때문에 알포이는 여름에도 언제나 소매가 긴 로브를 입고 다녔다.

그걸 모르는 피오테는 계속 그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째서 한 번도 못 맞추는 거지?"

계속 같은 것만 찍어 봤지만 단 한 번을 이기지 못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옆에서 혀를 차던 케인이 슬쩍 말해 주었다.

"저 새끼, 저거 마법 써서 사기 치는 거야. 너 절대 못 이겨."

"사, 사기였어요? 내 돈 돌려줘요!"

그러자 알포이가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허! 사기라니 무슨 소리야! 증거 있어? 난 사기 따위 안 쳐! 넌 사제가 그렇게 사람을 못 믿으면 어떡해! 어? 사제가 그렇게 아무한테나 누명 씌워도 되는 거야?"

"아, 아니... 그게 말이 안 되니까요...."

"말이 안 되긴 뭐가 말이 안 돼! 그냥 네가 못하니까 그런 거지! 누가 칼 들고 못 맞추라고 협박했냐!"

씩씩거리는 알포이의 말에 피오테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포이의 속임수를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그, 그만할게요."

얼마 없는 돈을 다 잃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알포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 사나이라 할 수 있나? 어려운 사람들 안 도와줄 거야? 보기보다 근성이 약하네? 그게 여신의 뜻인가?"

그 말에 피오테는 발끈했다. 가뜩이나 여자 같다고 매일 놀림 받는데 돈까지 잃고 저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포기하기도 좀 그랬다.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긴 힘들었다. 어떻게든 따고 싶었다.

"다시 해요!"

'흐흐, 그렇게 도박에 빠지는 거란다.'

알포이가 씨익 웃었다.

'호구 하나 잡았네.'

그는 피오테를 완전히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스트레스 푸는 건 덤이다.

"홀!"

"짝!"

"홀!"

피오테는 연전연패했다.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한 번쯤은 져 줘도 좋으련만 알포이는 그냥 대놓고 사기를 치고 있었다.

"으, 으으...."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거의 다 잃자 피오테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분했다. 사기 같아서 너무 분했고 그걸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차라리 저 적은 돈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썼어야 했는데.

괜히 사람들이 도박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다. 피오테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여신님....'

이제 남은 돈은 은화 하나가 전부였다. 피오테는 눈을 꼭 감고 기도를 올렸다.

'제발 이기게 해 주세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저 사기꾼을 벌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눈을 꼭 감고 기도만 하는 피오테의 처량한 모습을 보며 알포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뭐 해. 빨리 안 걸고."

'여신님... 제발... 저 새끼... 아, 아니 험한 말 죄송합니다.'

피오테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살면서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거 같았다.

자신에 대한 후회, 도박에 손을 댔다는 것에 대한 회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열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그의 마음을 아프게 태웠다.

화악!

무아지경에 빠진 피오테의 몸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그걸 느낀 알포이가 피식 웃었다.

"아이고, 아무리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왜 그런지 알아?"

알포이가 신성력에 맞서며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웅!

신성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강렬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알포이는 곧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바로 홀짝의 신이다. 여신이 와도 나한테는 안 돼."

신을 모시는 사제 앞에서 그 존재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신으로 칭한다.

흑마법사나 할 수 있는 무도한 발언에도 피오테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열망만을 담아 계속 기도할 뿐이었다.

그 열망은 한없이 순수하고 오롯한 신앙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그 뜨거운 믿음은 결국 '무언가'와 통했다.

"아, 빨리 안 거냐고... 오?"

구우우우웅!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며 주위가 어두워진다. 순간 피오테의 정수리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파아아악!

다시 먹구름이 갈라지며 생긴 공간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피오테와 연결되는 것 같았다.

알포이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이런 현상을 묘사한 문헌을 적이 있다.

"채, 채널링?"

오직 여신에게 선택받은 성녀만이 보일 수 있는 권능.

위대한 의지와 연결되어 그 힘의 일부를 사용하고 뜻을 받들게 되는 현상을 채널링이라고 한다. 그리고 채널링을 시도한 성녀는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지셀과 포리스코가 조작했던 소문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계시'를 말이다.

성녀도 특별한 경우에만 겨우 쓸 수 있다는 채널링을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이게 지금 특별한 일인가?

쿠오오오오오!

눈을 감은 피오테의 몸이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그의 몸에서는 강대한 신성력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분홍빛 머리카락은 어느새 아름다운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포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왜, 왜, 왜, 호, 호, 홀짝 따위에 시, 신이 끼어드는 건데?"

역시 이 영지는 정상이 아니었다.

308화 너 믿고 걸어 본다. (2)

번쩍!

감겨 있던 피오테의 눈이 뜨였다. 그의 눈에서는 한없이 신성한 빛이 흘러나왔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은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입술은 더욱더 붉어졌다. 피부마저 아주 깨끗하고 하얗게 변했다.

마치 여신이 피오테의 몸에 강림해 모든 더러움을 벗겨 낸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예쁘게 생긴 정도였다면 지금은 요염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알포이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가, 가능...이 아니고! 젠장! 정신 차려!'

알포이는 이를 꽉 깨물며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신성력의 폭풍에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도 넋이 나간 채 피오테를 바라보며 점차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왜 홀짝 도박 따위를 하다가 이런 상황에 빠져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오오오오!

피오테는 자신과 연결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를 느꼈다. 마치 열락과도 같은 정신적 고양감과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한 힘도 느껴졌다.

오로지 순수한 열망을 담은 기도로만 내려진 힘이었다. 거대한 의지는 피오테의 열망을 느끼고 잠시 멈칫거리는 듯했지만, 어쨌든 '계시'를 내려 주었다.

피오테의 머릿속에 장엄하고 성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었지만 거대한 의지와 연결된 그는 확실히 그 뜻을 알아들었다.

― 짝.

그 인도에 따라 피오테는 성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짝."

"크읏."

알포이는 신음을 내뱉었다. 짝이 맞다. 하지만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마법사가 무엇인가?

신이 세상의 질서와 법칙을 만든다면 마법사는 세상의 질서와 법칙을 희롱하고 비트는 자다.

그는 은화 하나를 소매로 빼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뭐, 뭐야! 마력이 안 움직여!"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마치 마력이 굳은 것처럼 전혀 미동도 없었다.

그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인도 마나를 끌어올릴 수 없었고 마법사들도 마력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오테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 미친! 이게 뭐야!"

"이 정도 힘이라고?"

"이게 말이 되는 현상이야?"

다들 기겁하며 뒤로 더 물러났다. 저 강력한 신성력의 폭풍 안에 있으면 몸도 성치 못할 거 같았다.

"끄으으으으!"

하지만 알포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아무튼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어떻게든 힘을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는 몸마저 그의 뜻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피오테는 심유한 눈빛으로 알포이를 바라보며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손을 펴세요."

영롱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위엄은 세상을 짓누를 정도였다.

동전을 꼭 쥐고 있던 알포이의 손목이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큭, 내가 포기할 줄 아느냐! 신이면 다야? 나는 불꽃 남자 알포이다! 절대 꺾이지 않는 남자가 바로 나란 말이다!"

절대 돈을 잃고 싶지 않았다.

드드드드드.

하지만 알포이의 힘으로 신에 대항하기는 무리였다. 그의 손목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점점 돌아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알포이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꽉 다문 입술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아, 안 돼!"

손목이 거의 다 돌아갔다. 이제는 손가락이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이게 다 펴지면 자신은 돈을 잃고 말 것이다. 사상 최강의 마법을 만들고도 말이다.

인정할 수 없다. 영주라면 모를까, 피오테처럼 멍하고 순진한 놈한테는 질 수 없었다.

"크으으으윽!"

알포이가 어떻게든 버티며 괴로워하던 그때.

주르륵.

피오테의 코에서도 갑자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여신과의 연결은 오직 성녀만이 쓸 수 있는 강력한 권능이다. 그 엄청난 힘을 지금의 피오테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성력이 빠르게 빠져나가며 천상에서 내리던 빛이 줄어들어 갔다.

"아, 안 돼...."

피오테도 당황하며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알포이의 손가락이 점점 펴지고 있었다.

"으으으으으."

"끄아아아앗!"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 버티려 했다.

그리고 알포이의 손이 거의 다 퍼졌을 때.

"아아... 여신이시여...."

털썩.

피오테가 눈을 감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신성력의 폭풍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그 틈을 타 알포이는 마법을 바로 성공시켰다.

슉.

은화 하나가 대놓고 소매로 들어간다. 이미 쓰러진 피오테는 그 사기의 현장을 볼 수가 없었다.

"큭, 크하하하! 홀이다! 홀! 봐라!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알포이는 광기에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 결국 자신이 이겼다. 여신의 힘마저 극복하고 승리한 것이다.

이건 아무나 보일 수 없는 이적이다. 대마법사나 드래곤이 와도 못 할 것이다.

알포이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내가 바로! 신을 이긴 남자 알포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클로드는 입을 쩍 벌렸다.

클로드만 놀란 게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낀 지셀도, 주변에 있던 영지민들도 모두 달려와 구경하고 있었다.

멀쩡한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빛이 쏟아져 내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셀은 미친 듯이 하늘을 보며 웃고 있는 알포이와 피오테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뭐야? 왜 하필 저런 힘이 지금 여기서 발동된 건데?'

여신과의 연결은 성녀라도 쉽게 보일 수 없는 기적이다. 쓰고 싶다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신앙과 열망이 극에 이르러야 겨우 쓸 수 있는 힘이다.

보통은 어마어마한 시련을 받았을 때, 그 고통과 고난 속에서 저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전생에 성녀는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살당했을 때 저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채널링은 그 정도로 위기 상황일 때 써야 하는 것이다.

이딴 하찮은 홀짝 따위에 쓰는 게 아니라!

지셀은 다시 알포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새끼 뭐지? 뭘 어떻게 한 거지?'

도대체 얼마나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여 줬기에 피오테가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느끼고 여신과 연결이 됐을까?

자신은 피오테를 그렇게 굴려 대도 구경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나는―! 신을 이긴―! 남자다―!"

저 미친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쓰러져 있는 피오테를 바라보았다. 피오테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특이하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각성을 할 줄이야.'

성녀는 여신이 선택한다. 선택받은 자가 잠깐이라도 신과의 소통에 성공하면 각성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을 여신의 편애라 부른다. 그리고 편애를 받는 자는 다른 사제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월등한 신성력을 자랑한다.

그것이 바로 성녀의 힘이자 자격이었다. 왜 남자인 피오테가 선택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애초에 편애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긴 하지.'

각성한 성녀는 자신이 모시는 신의 권능을 대행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성녀라면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쥬아나는 미의 여신이기에 피오테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변한 것이다.

지셀이 보기에는 하등 쓸모없는 능력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더 대단해지겠어. 환란의 시기에 큰 도움이 되겠군.'

특별한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다시 여신과 연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각성을 했으니 신성력을 쓰기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었을 게 분명하다.

예전보다 더 빠르게 신성력이 늘어날 것이고, 경지가 더 깊어지면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리라.

설사 믿음을 버리고 그 신앙의 대상이 없어진다 해도 말이다.

'나중에... 필요하면 알포이를 붙여 둬야겠어. 혹시 모르니 클로드도.'

채널링이 필요할 정도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피오테에게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줘서 억지로라도 여신과 연결시켜야 한다.

왠지 알포이와 클로드를 쌍으로 붙이면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 일은 그냥 계기였을 수도.'

사실 피오테의 신성력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늘고 있었다. 각성하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건 그저 작은 계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알포이 따위에게 절망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 새끼도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긴 했다.

성의 사용인들이 달려와 아주 조심스럽게 피오테를 들것에 실어 갔다. 여전히 웃고 있는 알포이는 다들 무시했다.

사람들은 피오테가 실린 들것이 지나가자 모두 길을 비키며 엎드렸다.

"진짜 성녀님이 우리 영지에 나타날 줄이야...."

"이런 기적을 보게 되다니...."

"여신이시여,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주소서."

영지민들은 피오테가 남자라는 걸 모른다. 그냥 외모만 보고 여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피오테는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발 벗고 도와줬기에 인기가 많았다. 그가 성녀로 선택받았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피오테와 알포이가 홀짝을 하던 곳은 공사가 중단되었다. 영지민들이 모두 달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성지가 되어 버린 탓이다.

"에잉.... 별수 없지. 거기 공간은 좀 비워 놔라."

어쩔 수 없이 지셀도 그곳에 작은 신전을 하나 지어 주었다.

영주가 신전까지 지어 주니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더 신실해졌다. 그들은 서로 돈을 모아 아주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을 사 왔다.

신전 옆에 기념비를 세운 그들은 정성스럽게 글을 새겼다.

[성녀 피오테 님이 여신의 계시를 받은 장소. 홀짝으로.]

누가 낙서를 했는지 글귀의 뒷부분이 조금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펜리스 영지민들에게 성지이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기점으로 쥬아나 교단의 신도가 펜리스 영지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그래, 이 신을 이긴 남자에게 무슨 볼일이지?"

알포이가 무척이나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클로드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새끼는 정체가 뭘까?'

처음에 봤을 때는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는데, 이제는 아주 영지에 훌륭하게 적응한 상태였다.

이런 한심한 놈이 그런 기적 앞에서 버티고 결국 이겨 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 새끼, 어쩌면 엄청난 놈일지도....'

괜히 마탑의 후계자가 된 건 아닌 모양이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잘된 일이다. 저 거만함을 더 부추기면 영주와의 내기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네. 여신의 힘을 이겨 내다니. 최고의 마법사라고 소문이 날 거야."

"흐흐,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나도 내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하, 이놈의 재능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이야, 이제 명성도 얻었으니 곧 떠나겠네. 더 큰물에서 놀 거 아냐."

클로드의 말에 알포이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네놈 때문에 영주와의 내기에 말려들어서 몇십 년을 여기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데 떠나긴 뭘 떠나? 놀리냐?"

"어라? 소식 아직 못 들었어?"

"무슨 소식?"

"영주가 이번에 이상한 거 만들어서 새로 실험하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성공할 테니까 언제든지 내기하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난 네가 할 줄 알았지."

그 말에 알포이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지셀이 그동안 이상한 걸 만들고 죄다 성공하는 꼴을 워낙 많이 봤기 때문이다.

"됐어, 어차피 또 내기해 봤자 질 게 뻔하잖아? 영주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건 죄다 성공시켰으니까."

"쯧쯧... '신을 이긴 남자'가 한낱 인간인 영주는 못 이기는 거야?"

"뭐?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아니, 들어 보라고. 당연히 우리가 잘 모르는 건 내기를 해도 질 수밖에 없었지. 영주의 음흉한 연기에 속은 거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걸? 난 그냥 네가 정말 대단해서 내기에서 승리하고 떠날 줄 알았지."

"내가 대단하긴 하지만... 뭔데?"

클로드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사람이 물하고 음식 가루만 먹고 한 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냐?"

"죽을 수도 있겠지만... 사는 사람도 있겠지?"

"그러면 그 사람이 한 달 뒤에 바로 마나도 쓰고 싸움도 할 정도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아?"

"에이, 그건 불가능하지. 산다고 해도 목숨만 겨우 붙어 있을걸? 체력이 완전히 무너졌을 텐데 그런 걸 어떻게 해? 뭐, 나같이 엄청난 실력자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무리야."

"그런데 영주가 그런 걸 만들었대. 병사들도 그걸 먹고 한 달을 버틸 수 있다고 우기던데."

"아주 귀하고 비싼 약재를 갈아서 만들면 가능할 수도 있지."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일반적인 곡물하고 약초만 갈아서 만든 거야. 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한다나?"

"그런 걸 한 달 내내 먹는다고? 풉, 말도 안 돼. 절대 불가능해. 배고픈데 어떻게 싸우냐고."

알포이도 지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인류는 지금껏 허기를 물리치기 위해 끝없이 싸워 왔다.

배가 고프면 기력이 떨어진다. 기력이 떨어지면 모든 생산성이 떨어지고 결국 사회 전체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배고픔이란 무서운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로 한 달을 버티고, 심지어 전투도 가능하다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로드가 비웃음을 띤 알포이에게 슬며시 말했다.

"어때? 이제 명성도 얻었겠다, 이번 내기로 그냥 이 영지와의 관계를 끝내는 게? 하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으음... 그런데 만약에 진짜 그게 되면 어떡하지?"

알포이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걸 수 있는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상태라면 그래도 노후는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또 지면 이제 종신 노예가 된다. 노후고 뭐고 늙어 죽을 때까지 공사만 하다 죽을 가능성이 컸다.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왜 그런 고민을 해? 영주가 하는 일이 정말 항상 성공한다고 생각해? 영주가 신이야? 아니, 신이면 어때? 넌 신을 이긴 남자잖아!"

"으으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게 말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지식인! 언제나 냉철한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저런 무지하고 비상식적인 인간한테 언제까지 휘둘릴 건데!"

"으음...."

알포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진짜 영주가 틀린 것 같았다. 제대로 먹는 것도 없이 활력과 체력을 유지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군대가 보급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는 마법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건조 식량만 계속 먹어도 힘이 빠지는데, 빵과 육포도 아니고 그냥 가루만 먹고 버틴다고? 씹는 맛도 없어서 더 힘이 없어질 것이다.

조금 더 고민하던 그는 곧 굳은 눈빛으로 말했다.

"좋아, 이번에는 진짜 너 믿고 걸어 본다."

"날 믿지 말고 너 자신을 믿어.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믿으란 말이야. 넌 마탑의 후계자고, 이 영지 최고의 마법사이자 신을 이긴 남자지. 넌 언제나 최고야, 브로."

클로드가 주먹으로 알포이의 심장께를 툭 쳤다.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알포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알포이. 신을 이긴 남자지."

알포이가 다시 거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같이 대단한 사람이 계속 노예로 사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내기에서 승리하고 반드시 자유를 되찾으리라.

비장한 표정을 짓는 알포이를 본 웬디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309화 너 믿고 걸어 본다. (3)

"야야, 빨리 가자."

"어휴, 이 지긋지긋한 영지. 다시는 북부 쪽에는 얼씬도 안 할 거야."

"아주 징그러운 영주에 징그러운 영지였어."

투덜거리며 짐을 싸는 이들은 카발디 전쟁 때부터 잡혀 있었던 맥스와 해결사들이었다.

돈값을 하기 위해 영지에서 일했던 이들은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 매일매일 일을 해도 인부들의 일당만큼만 제하니 받은 액수를 까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돈을 뱉어 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로잘린과 메리엘에게 받은 돈이 워낙 커서 뱉기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고 있을 때 데스몬드와의 전쟁이 터졌다.

맥스와 해결사들은 노동돌격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드디어 자유를 얻은 것이다.

"우리는 자유다!"

"와아아아!"

맥스의 외침에 따라 해결사들도 환호를 내질렀다. 이제 정말 이 지긋지긋한 영지와는 끝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맥스와 해결사들이 깨끗하게 씻고 덥수룩한 수염을 깎고 있을 때, 클로드가 찾아왔다.

"이야, 이제 떠나는 거야? 다들 그동안 고생했어."

"어, 음... 총관님 오셨습니까?"

맥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맞이했다. 자신들을 붙잡은 사람은 지셀이지만, 공사장에 보내 무지막지하게 굴린 건 클로드였다.

어찌나 막 굴리던지 진짜 암살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걸리면 평생 붙잡혀 있을 거 같아서 감히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떨떠름한 맥스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클로드는 살갑게 말했다.

"그래, 이제 돌아가서 뭐 할 거야?"

"그간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당분간은 힘든 일보다 적당한 일이나 좀 구해 볼 생각입니다."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클로드는 뻔뻔하게 모르는 척했다.

"아휴, 그 실력에 하찮은 일들을 하기는 아깝지 않아?"

"조금만 더 모아서 은퇴하려고요. 이런 일도 계속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땅이나 사서 편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래, 그런 생각이라니 조금 아깝긴 하네."

실제로 맥스와 해결사들의 실력은 꽤 좋았다. 그렇기에 지셀을 구출하는 임무도 받고 전쟁 때 카오르를 대신해 노동돌격대의 지휘관도 맡지 않았는가.

클로드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며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러면 돈이 좀 많이 필요할 텐데. 단번에 큰돈 벌어 볼 생각 없어?"

"큰돈이요? 어떻게요?"

"이번에 말이야, 영주가 뭘 하나 만들었는데...."

클로드는 알포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제품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맥스와 해결사들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간 영주가 보여 준 실력이 무서웠다. 개량 밀과 화장품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들도 소문은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다.

지셀이 전장에서 싸우는 모습도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들이 감히 도망을 못 간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영주와 내기를 하라고? 맥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이 영지하고 더 엮이고 싶지 않아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클로드는 그 정도야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2만 골드."

"...!"

"이기면 한 사람당 2만 골드씩 받아 갈 수 있을 거야."

어마어마한 금액에 맥스와 해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 금액이면 바로 은퇴할 수도 있다.

손이 떨릴 정도의 금액이었지만 맥스는 바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해결사의 리더다.

"왜... 우리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영주가 만들었다는 이상한 가루 식품은 분명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좋은 기회를 왜 굳이 이방인인 자신들에게 말한단 말인가?

맥스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접한 클로드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간 나 원망 많이 했지?"

"...조금."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영지에 인력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악인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지. 항상 자네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어."

"총관님...."

"자네도 작은 집단이지만 리더로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니까 알지 않나.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이야."

맥스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안 좋긴 하지만 어쨌든 총관은 영지를 위해(?) 사람들을 갈구지 않았는가.

이렇게 떠날 때가 되니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클로드는 맥스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야. 난 그저 자네들이 떠나기 전에 정당하게 큰돈을 챙겨 주고 싶을 뿐이거든. 나도 그렇게 큰돈은 이런 핑계가 없으면 줄 수가 없으니까."

"총관님...."

맥스와 해결사들은 왠지 울컥했다. 코가 시큰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마음 씀씀이가 깊은 사람이었다.

클로드는 논리와 이성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맥스와 해결사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따뜻한 눈빛으로 맥스를 바라보던 클로드가 살짝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영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

"영주님이요?"

"그래, 우리 영주님은 분명 뛰어나신 분이야. 어려움을 딛고 많은 걸 성공시키셨지. 다만... 지금까지 실패가 없었던 게 문제야."

"그게... 왜 문제입니까?"

"갈수록 자만이 심해지니까. 젊은 나이에는 실패와 시련을 겪어 봐야 더 성장하는 법이거든.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지금 큰 손해를 보는 게 좋아."

"왜 지금이 좋다는 겁니까?"

"솔직히 이번 일은 실패해도 영주님이 살짝 망신만 당하고 끝이지. 하지만 큰돈을 잃으면 정신을 바짝 차릴 거야. 자만심도 많이 줄어들 거고."

"으음...."

"생각해 봐. 여전히 자만한 채로 다음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는 게 전쟁이야. 지금 영주님의 심성을 바로잡아야 해. 오히려 돈을 잃는 게 싸게 먹히는 거라고."

"아아...."

맥스와 해결사들은 클로드의 말을 이해했다. 지셀이 공작가에 찍혔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강대한 적이 도사리고 있는데 성공에 취해 자만한다면 분명 큰 곤욕을 치를 게 분명하다.

맥스는 해결사 일을 하며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 자만심은 결국 화를 불러온다. 특히 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랬다.

클로드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충신이었구나!'

'이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아아, 이렇게 큰 사람이니 이런 대영지의 총관을 하고 있는 거겠지.'

맥스와 해결사들은 감격했다. 클로드는 모든 오욕과 비난을 홀로 뒤집어쓰고 오직 영주와 영지만을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그걸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내기는 내기다. 클로드의 논리엔 틀린 점이 없지만, 그래도 맥스는 뭔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뜻이야 좋긴 한데 만약에 지면 큰일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 맥스의 마음을 안다는 듯 클로드가 미소를 지었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모두 참여하기로 했어. 이미 마법사들이 검증을 끝낸 일이야. 걱정할 필요 없지."

"오오!"

해결사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법사들이 검증까지 끝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마법사들은 한때 북부 제일이라 불렸던 적염의 마탑 소속들이다. 거기에 바네사는 6서클에 이른 마법사다.

검증된 마법사들까지 참여한다? 이건 안 끼는 게 바보인 일이었다.

클로드가 일부러 마법사들부터 설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 경험이 많아 쉽게 넘어오지 않는 해결사들이기에 똑똑한 마법사들이 참여했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물론 바네사가 이제 마탑 소속이 아니고, 내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해 보겠습니다!"

맥스가 호기롭게 외치자 해결사들도 모두가 동의했다. 이렇게 클로드는 마법사와 해결사들을 모두 엮어 버렸다.

'휴, 이제 시작이네. 어차피 이길 거니까 다들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도 그는 예전보다 조금 더 발전했다.

사람들을 꾀는 것에 성공했지만 바로 지셀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총관의 권한으로 시제품 가루를 조금 빼돌린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가루를 섞어 마셔 보았다.

"음... 맛은 좀 괜찮네."

먹으니까 속이 약간 더부룩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포만감도 약간 들었다.

그는 그렇게 저녁때까지 업무를 보았다.

"출출한데?"

물에 가루를 타서 마셨으니 허기가 지는 건 당연하다. 그는 한 번 더 먹은 다음에 잠깐 눈을 붙이고 업무를 이어 갔다.

"아, 배고프잖아. 역시 소용없네."

배가 고프다.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씹고 싶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더 배가 고파지는 거 같았다.

그는 가루 먹는 걸 때려치우기로 하고 배부르게 음식을 먹고 난 뒤 말했다.

"딱 굶어 죽지는 않을 수준이네. 이런 거 먹고는 절대 못 싸우지. 으하하하!"

그는 하루만 먹어 보고 포기했다. 배가 고프고 뭔가 자꾸 먹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만큼은 영주가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자만에 넘치는 클로드를 보며 웬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하루 만에 결정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적어도 사흘은 드셔 보시는 게...."

"아우, 됐어. 나 배고파서 이것만 먹고는 못 살겠어. 이건 실패야, 실패."

"...영주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냈습니다."

"이번은 아니야, 그리고 설사 내가 진다 해도 상관없어."

"...?"

웬디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자유를 원하면서 져도 상관이 없다니?

정말 영주의 자만을 경고하려는 의도였던 걸까?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빤히 바라보자 클로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집무실의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건 게 없잖아... 이미 인생 엿 된 상태라서 잃을 것도 없어...."

"...."

클로드는 아무것도 걸 게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인생을 끌어와서 대신 걸어야 했다.

혹시나 사람이 좀 됐나 하고 생각했던 웬디는 그냥 집무실 천장만 바라보았다.

* * *

계약서는 빠르게 체결됐다. 마법사들과 해결사들은 인생을 걸었고, 이겼을 시에는 대가로 자유와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지셀이 흔쾌히 수락한 건 당연한 일이다.

마법사 46명의 계약 연장에 신규 해결사 10명 영입이라니, 이런 건 절대 참을 수가 없다.

클로드는 지셀을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관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몰래 뭘 먹이면 안 되니까요."

"그래라."

"크크큭, 후회하지 마십시오."

"너야말로... 아니, 넌 후회할 게 없구나."

영주와 총관이 또 내기를 했다는 소문은 금세 영지에 퍼져 나갔다.

언제나 지셀을 말리던 벨린다와 길리언 등의 측근들은 이번만큼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동안의 학습 효과로 말려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지셀이 이번에도 성공할까 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이런 내기를 몇 번이나 본 옛 펜리스 지역의 영지민들은 지셀의 승리를 점쳤다.

딱히 어떤 지식의 기반으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그냥 항상 지셀이 이겼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이었다.

"총관님이 또 덤볐다며?"

"쯧쯧, 항상 지면서 왜 그러는지 몰라."

"이번에는 좀 다르다는 소문이 있어. 마법사님들도 다 참가했다는데?"

"에이, 그래 봤자야. 예전에는 마법사님들이 참여 안 했나."

워낙 지셀이 인기가 많으니 오히려 클로드를 비웃는 영지민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래도 클로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승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니면 말고.

클로드는 뻔뻔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이번 테스트에 참가하게 된 자들은 아니었다.

"이게 뭐야!"

"이것만 먹고 한 달을 버티라고?"

"그러고는 모의 전투를 한다고?"

"그걸 어떻게 하냐고!"

차출된 기사들과 병사들은 매일 지급된 가루를 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이 영지의 장점이 무엇인가? 훈련은 힘들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정말 먹을 건 넘쳐났다. 특히 요즘 들어 펜리스 영지민들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만들기 위해 각종 소스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딱히 지셀이 부추긴 변화는 아니었다. 먹는 자원이 풍족해지니 당연하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렇게 먹을 게 풍족해진 상황에서, 가루 섞은 물만 마시면서 훈련은 훈련대로 하며 버텨야 한다. 절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차출된 기사들 중 최고 선임으로 꼽히는 고든과 루카스가 가장 먼저 분노했다.

"이딴 거 먹고 훈련 안 해! 근손실 온다고!"

"내 천재성을 시기한 놈들의 음모다! 가만두지 않겠다!"

엘프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하필이면 차출된 인원 중 아스콘이 껴 있었다.

"야이, 개새끼들아아아!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먹고 버티냐! XXX! XXXXX! XX! XXXX! XXXXX!"

욕이 너무 심해서 못 들어 줄 정도였다.

그들은 들고일어나려 했지만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길리언과 나머지 기사들에게 단번에 제압당했다.

특히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기사들은 자신들이 대신 끌려갈까 봐 더욱더 열심히 참가자들을 막았다.

참가자들은 다들 분노하며 외쳤다.

"총관 새끼가 이렇게 하자고 했다며?"

"아오! 누가 이기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왜 항상 일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하냐고!"

어차피 내기가 아니더라도 실험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건 아니었다.

원래 지셀은 조금씩 몸 상태를 보며 날짜를 나눠서 상태를 보려고 했다. 어쨌든 이건 정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비상 전투 식량이었으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 안전하게 효과를 확인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클로드가 내기의 승리를 위해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지셀이 한 달이라고 말했던 걸 트집 잡아서 말이다.

결국 참가자들의 원망은 클로드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말 한 달 동안 물과 가루만 먹으면서 버텨야 했다.

사람들의 원성과 비난이 빗발쳤지만 클로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나는 배 안 고프니까.'

그는 그 정도로 정신력이 강인한 남자였다.

어쨌든 내기는 시작되었다. 클로드는 더욱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새로운 준비에 착수했다.

내기 겸 실험이 이루어지는 틈을 타 지셀은 예전부터 고민하던 수련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투명 소드마스터]

바로 고든이 쓴 책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한 수련 말이다.

310화 정말 멋진 승부였어. (1)

고든이 쓴 소설 자체는 적당히 읽고 넘겼지만, 그 안에 있던 내용 중 일부는 지셀에게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공격하는 순간에도 기척을 내지 않고 절대 보이지 않는다....'

상대와 실력 차이가 크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고든의 설정에 따르면 그것은 실력 차이와 상관없는 어떠한 권능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힘'보다 위험하다.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 속의 경지에 불과할 뿐이었다.

'성녀도 그런 능력을 쓰지는 못했으니까.'

여신의 권능을 빌려 쓰는 성녀조차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피식 웃고 넘어갔겠지만, 지셀은 거기서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만약 정말 그런 힘을 쓰는 적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 존재라면?'

전생의 경지였다면 주변 영역을 모두 자신의 감각 안에 집어넣는 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면?

설사 그런 권능이 세상에 없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높은 실력자를 만나면 비슷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즉사를 피하고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즉사를 피하려면 어떠한 공격이든 버틸 수 있는 신체가 필요하다.

마나를 익히는 자는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발달한다. 수련을 통해 몸이 자연스럽게 마나를 흡수해 체질이 바뀌기 때문이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감각도 예민해지고, 근력이나 회복 능력도 더욱더 강해진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기사들이 괜히 마나 연공법을 운용하며 마나를 모으고, 싸울 때 몸에 마나를 두르는 게 아니다.

더 강한 힘을 내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마나를 코어에서 뽑아내 신체로 돌려야 한다. 제대로 마나 운용을 하지 않을 때는 대부분 방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마나를 익힌 자도 방심한다면 평범한 사람의 공격에 다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틈을 타서 때때로 암살이 성공할 때가 있었다. 상대도 마나를 사용하는 자라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몸이 알아서 공격을 막아 내고 역으로 상대에게 충격까지 줄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보다 낮거나 동급인 적에게는 불시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수가 싸워야 하는 난전에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약한 자들은 아무리 모여도 자신에게 터럭만큼의 상처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런 몸을 만들기만 한다면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해 보자.'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건 오랜 연구를 통해 이론을 만들고 다시 수많은 실험을 통해 안전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냥 목숨 걸고 무작정 부딪치는 방법이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속도가 빠르다.

지셀은 후자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휘릭.

단검을 하나 꺼낸 그는 바로 자신의 팔을 찔렀다.

푸욱!

검날이 파고든 곳에서 피가 솟구쳤다. 찌르는 순간 마나가 모여 약한 반발력을 냈지만 충분치 않았다.

공격하는 힘이 더 강하고, 속도도 더 빨랐기 때문이다.

'늦어, 그리고 부족해.'

감지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반응해야 한다. 겉가죽이 상처 입는 순간 코어에서 마나가 저절로 뽑혀 나와 신체를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였다. 반격은 그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스으으윽....

얕게 찔러서 그런지 상처는 금세 회복되었다.

지셀은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이제부터 하는 일을 몸이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런 무식한 수련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고 막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몸 자체를 진화시켜야 했다.

'조금만 더 힘을 써 볼까.'

파파파파팍!

그는 단검을 재빠르게 움직여 몸 곳곳에 상처를 냈다. 그러고는 상처 주위로 감각을 집중했다.

상처마다 미묘하게 마나가 몰리는 양이 달랐다. 뒤로 갈수록 상처가 미세하게 커졌다.

몸의 반응 속도가 아직 공격 속도를 제대로 못 따라온다는 증거였다.

'며칠 더 해 봐야겠군.'

수련하러 연무장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지셀은 낮에는 현장 업무를 보거나 수련을 하고 밤에는 서류 업무를 보며 집무실에서 몸을 찔렀다.

옷이 매일같이 뚫리고 찢어진 데다가 피범벅이 되어 있는 상황이 며칠이나 이어지니 벨린다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뭐지? 대련이 없는 날도 이러네?'

지셀이 수련광인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주 옷이 망가져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영 이상했다.

벨린다가 의심하는 동안 지셀의 수련은 점점 과격해져 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머뭇거려서 그런 건가?'

매일 같이 자해를 하니 감각은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달했다. 깊이 찔러도 찌르는 순간 마나가 모여 얕은 상처로 끝난다.

하지만 반응 속도는 꾸준히 늘어나다 어느 순간부터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지셀 자신의 공격이 일정 수준에 머물러서 생기는 문제 같았다.

아직은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초급 기사 수준 정도로 공격하고 있었다. 몸이 그걸 본능적으로 알기에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지셀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단검을 잠시 노려보다가 곧 단검에 마나를 실었다.

진짜로 죽으면 안 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몸과 머리에 박아 넣어야 했다.

'이 정도면....'

지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실수하거나 몸이 늦게 반응하면 죽는다.

인위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려 막을 생각은 없었다. 찌르는 순간, 생존을 위해 몸이 알아서 움직여야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천천히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며칠간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벨린다가 지셀의 집무실을 기습했다.

덜컥!

"도련님! 도대체 밤마다 뭘 하시길래 옷이 이 모양... 꺄아아아악!"

벨린다는 들어오자마자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단검을 자신의 심장에 박아 넣고 있는 지셀의 모습이었다.

* * *

'절반의 성공이다.'

지셀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심장을 찌르는 순간, 단검이 절반쯤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심장이 완전히 파괴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속도로 몰린 마나가 단검을 막아 냈다. 뛰어난 재생력은 상처 난 심장을 바로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나도 겉가죽에 난 상처와 장기에 난 상처는 다르다. 갑자기 큰 상처를 입고 많은 피를 쏟아 냈으니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피오테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죽지는 않았어도 큰 후유증이 남을 뻔했다.

"도련님! 갑자기 또 왜 그러세요! 설마 얼마 전에 아멜리아 아가씨를 다시 만나서 그런 건가요? 다시 아가씨가 그리워진 거냐고요! 대영주까지 됐는데 뭐가 아쉽다고 헤어진 여자한테 미련을 둬요! 이럴 거면 빨리 혼처를 구하고 안정을 찾으시라고요!"

"...아니라고."

"그럼 뭔데요! 또 그놈의 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이번에는 진짜 질까 봐 그래요? 내가 진짜 총관이랑 알포이 새끼 지긋지긋해 죽겠어!"

"...그것도 아니라고."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영지의 가신들이 죄다 몰려와 있다. 이럴 줄 알았다.

클로드가 이번에도 흐느적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또 저 욕 먹이려고 그러시는 거죠? 아니, 못 이길 거 같으면 항복하시라고요. 도대체 그 자존심 뭔데요?"

"...아니라고."

심드렁한 지셀의 대답에도 클로드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저만 욕한다고요! 제가 내기를 걸어서 영주님이 또 이런 소동을 벌였다고! 진짜 사람들한테 사랑받는다고 그걸 그렇게 이용할 거예요? 영주님, 진짜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알포이도 옆에서 툴툴거리며 거들었다.

"그냥 무승부로 해 드릴 테니까 10년만 깎읍시다. 앞으로 고집 좀 그만 부리시고요. 진짜 이럴 때마다 내가 곤란해지는 거 몰라요? '신을 이긴 남자'인 내가! 아휴, 창피해 죽겠네."

클로드와 알포이는 이번에도 가신들의 압박을 받았다. 왜 자꾸 까불어서 영주님을 곤란하게 하냐는 것이었다.

예전에 독을 마셨을 때도 놀랐지만, 나중에는 수련이었다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심장을 단검으로 찌르는 건 누가 봐도 수련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멍청한 수련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들 이번에야말로 저 자존심 강한 영주가 제 성질머리에 분을 못 이겨 자해했다 생각했다.

그냥 전처럼 쫓아낼까 고민하던 지셀은 한숨을 쉬고 약간의 설명을 해 주었다. 자신이 봐도 이번에는 계속 말리는 게 당연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련이야. 위험하긴 하지만 적당히 조절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벨린다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수련인데요? 세상에 그런 수련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뭐가 도움이 되는 건데요?"

"음,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지셀은 대략적으로 자신의 가설을 설명해 주었다. 상세한 이론이라기보다는 가정과 상상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의도는 전달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도 사람들은 한동안 눈만 껌뻑였다. 한참 뒤 벨린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기척도 없는 투명한 놈한테 맞으면 죽을까 봐 그런 수련을 하고 있었다고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거기서 영감을 얻었달까?"

"...도련님, 기척을 느끼는 건 그냥 실력 차이죠. 기척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니, 세상에 그런 생물은 없어요."

바네사도 옆에서 거들었다.

"물리 법칙상 그건 말이 안 돼요. 마법을 써도요.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일정한 속도까지 가속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량이 있는데, 질량이 있는 물체라면 무엇이든 그 현상이 발동...."

설명왕인 그녀가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자 지셀이 허겁지겁 말을 끊었다.

"꼭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언제든 기습당할 때를 대비해서 방어력을 높이는 수련을 하는 거니까 그만 신경들 쓰고 일 봐. 다들 안 바빠?"

사람들은 지금도 충분히 강하니까 그딴 수련은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지셀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봤지? 난 분명 설득했다? 영주님이 거절한 거야."

알포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분명 양보했다? 나 잘못 없다?"

이번에도 여러 사람에게 협박당한 두 사람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영지민들에게도 순식간에 퍼졌다.

영지민들은 깜짝 놀라며 다시 클로드와 알포이의 초상화를 구해 찔렀다.

"총관님은 도대체 왜 우리 영주님을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거야! 어차피 이번에도 영주님이 이길 텐데!"

"성녀님한테 말해서 천벌을 내리게 해야 해!"

"알포이 님도 똑같아! 성녀님한테도 무례하게 대하고 말이야!"

클로드와 알포이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실 본래도 바닥이었기에 지하 밑으로 떨어졌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지셀에 대한 영지민들의 충성심은 무척이나 높다. 당연히 지셀이 승리할 거라 믿으며 클로드와 알포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전과 다르게 강인해졌다. 아무리 영지민들의 저주와 비웃음을 받아도 이제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우리 욕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던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것들의 한계지."

클로드와 알포이는 각자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성의 발코니에 서 있었다.

우아하게 와인을 마신 클로드가 말했다.

"자유가 되면 뭘 할 거지? 알포이?"

"아마 마탑의 후계 수업을 마치고 후에 탑을 물려받겠지. 내 대에서 마탑은 다시 북부 제일의 자리를 차지할 거야."

"역시 야망이 큰 남자군. 신을 이긴 남자다워."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나는... 작은 영지의 주인이라도 되어 볼까 생각 중이야."

"청렴결백한 너다운 선택이군.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래,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잔을 내밀며 말했다.

"넌 훌륭한 탑주가 될 수 있을 거야."

알포이 또한 잔을 내밀었다.

"너 또한 좋은 영주가 될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미소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웬디는 썩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 * *

지셀의 자해 사건 외에는 사람들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지셀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상한 수련을 이어 갔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쏴아아아아.

약속한 날짜의 이틀 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창밖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날씨가 좋구나."

비가 많이 왔으니 땅이 질퍽해질 것이다. 그런 땅에서 움직이면 체력이 더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분명 실험 참가자들은 모의 전투 때 움직이기도 힘들 것이다.

절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틀 뒤인가...."

클로드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본격적인 결전을 이틀 앞둔 오늘.

바람 소리와 스산한 빗소리가 집무실 창을 때렸다.

폭풍전야.

영지에서 자신을 비웃던, 지금도 비웃는 이들에게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영주가 허접한지, 자신이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그것이... '승부사' 클로드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니까.

311화 정말 멋진 승부였어. (2)

"총관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웬디의 말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오늘은 모의 전투가 있는 날이다.

실험 참가자들은 지금쯤 잔뜩 굶고 힘도 못 쓰고 있을 것이다. 끼니마다 물과 그 이상한 가루만 배급했으니까.

클로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데스몬드 영지에 있던 큰 검투장이었다.

검투 노예들이 싸우는 검투장은 데스몬드만 한 대영지가 아니고서는 보기 어려운 시설 중 하나였다.

먼저 와 있던 지셀은 클로드가 도착하자 손을 흔들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주 여유가 넘치는걸?"

"후후, 승리가 확실한 게임에 긴장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번에도 그러다가 당하지 않았어?"

"아님 말고요."

"...."

확실히... 클로드처럼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자는 이렇게 여유가 넘칠 수밖에 없다.

관중석에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클로드가 손을 흔들었다.

쿠웅!

척! 척! 척! 척!

검투장의 한쪽 문이 열리며 200명의 병사가 질서정연하게 걸어 나왔다.

병사들은 모두 나무 방패와 짚단을 엮어 만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사상자가 생기면 안 되기에 살상력이 없는 무기를 준비한 것이다. 짚으로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맞으면 꽤 아프다.

이들은 한 달 동안 클로드가 준비한 병사들이었다.

지셀은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따로 병사 좀 쓴다더니 준비 잘했네?"

"그럼요, 제가 특별히 관리했지요."

병사들 중에서 특히 체격과 힘이 좋은 자들만 선별했다. 최고의 식단만 제공하고, 적절한 훈련과 휴식을 통해 몸을 다듬었다.

거기에 피오테를 닦달해 신성력까지 써서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했다.

클로드는 정신과 근성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짧은 시간 안에 훌륭한 정예를 만들어 냈다.

지셀이 병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능력은 있는 놈이라니까. 이상한 데서 멍청해서 그렇지.'

영지 일도 바쁜데 한 달 만에 병사들을 저렇게 키워 내다니. 병사들에게서 내기에서 이기겠다는 클로드의 의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클로드도 자신이 준비한 병사들을 보며 만족감 어린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번 내기는 예전과는 전혀 다르지.'

예전 내기에서는 그저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키운 병사들로 판을 바꿀 수 있다. 이번 내기 내용은 어느 쪽이 이기냐는 거였으니까.

한 달이나 굶은 놈들이 힘을 제대로 쓸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는 방심하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병사들에게도 상대편 병사들을 뒈지게 패 버리라고 신신당부를 한 상태였다.

클로드가 준비한 병사들이 다 나와 진형을 갖추자 이번에는 지셀이 손짓을 했다.

끼이이익....

반대편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들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봤지만, 짙은 어둠이 문 안쪽을 가리고 있었다.

"으어어...."

또 한참이 지나서야, 물과 가루만을 먹은 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기사 10명, 엘프 20명, 병사 20명이 전부였다. 클로드가 준비한 병사들에 비해 수가 훨씬 적었다. 기사가 끼어 있다는 이유로 수를 줄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기적거리며 짚으로 만든 몽둥이만을 들고 나타났다. 방패도 무겁다며 다 버린 상태였다.

클로드는 승리를 확신하고 미소를 지었다.

'크큭, 완전히 좀비가 다 됐구나? 그럼 그렇지, 한 달이나 굶고 멀쩡할 리가 없지.'

다들 전보다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눈도 퀭하고 걸음걸이에 힘도 없어 보였다.

특히 고든 같은 경우는 징그러울 정도로 컸던 근육이 확 줄어들어 오히려 멋져 보일 정도였다.

미소 짓는 클로드와 달리 벨린다는 살짝 놀라며 눈을 빛냈다.

'근육이 생각보다 줄지 않았네? 눈빛도 아직 살아 있어.'

암살자답게 눈썰미가 누구보다 좋은 그녀는 금세 사람들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분명 피곤하고 힘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군살은 쫙 빠진 상태였다. 일부러 적게 먹고 살을 빼며 운동을 하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눈빛도 정말 살아 있었다. 뭔가 이글거리는 게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지셀이 다시 손짓하자 길리언이 크게 외쳤다.

"시작하라!"

쿠웅!

클로드가 뽑은 병사들이 방패를 앞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실험 참가자들이 뚫지 못하게 방어만 하면 된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병사들을 뚫고 저 뒤에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면 되는 것이다.

"으흐흐흐...."

선두에 선 고든과 루카스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엘프들과 병사들도 어기적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정말 좀비들이 걸어오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터덕, 터덕, 터덕....

천천히 걷던 참가자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들은 어느 순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온다!"

병사들이 방패에 힘을 꽉 주었다. 그냥 지칠 때까지 막고 시간만 끌면 된다고 했다. 비록 기사들도 끼어 있지만, 다들 식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하니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비켜어어어어!"

고든이 크게 외치며 짚단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아앙!

"케엑?"

앞에서 막고 있던 병사가 한 대 맞더니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뒤이어 들어온 루카스와 기사들도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앙! 콰앙! 콰앙!

짚단을 휘둘러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기사들의 짚단 몽둥이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나고 있었다.

클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왜 아직도 저렇게 쌩쌩해? 어떻게 마나를 쓰고 있는 거야?'

똑같이 굶어도 마나를 다루는 사람은 다루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건 맞다. 그 마나가 생명력을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달이나 제대로 못 먹었으니 아무리 기사들이라도 가진 마나가 상당히 줄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야 하는데 전혀 굶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퍼억! 퍼억! 퍼억!

열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쌩쌩하게 날뛰니 아무리 체격이 좋은 병사들이라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들도 나름의 훈련을 받은 정예들이라 똑같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버텼지만, 그들의 상대는 기사들만이 아니었다.

"야이, 시불럼들아!"

아스콘이 분노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눈이 돌아갈 대로 돌아간 상태였다.

"이 XXX, XXXX, 느금X, XXXXX, XXX!"

듣기 고약한 욕들이 쉼 없이 터져 나온다. 괜히 부모 욕까지 들은 병사들도 화가 나서 강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냥 죽어!"

"밥 내놔!"

"으아아악!"

퍼억! 퍼억! 퍼억!

양측은 눈이 돌아가서 난타전을 벌였다.

기사들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긴 하지만 상대하는 병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워낙 힘과 덩치가 좋은 데다가 수도 더 많으니 쉽게 밀리지 않았다.

만약에 검을 들고 싸웠다면 병사들이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들을 막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짚단에 마나를 불어넣어 봤자 조금 단단해진 몽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다 병사들은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 양측은 격렬하게 몸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퍼억! 퍼억! 퍼억!

"으아아아아!"

난장판이 된 검투장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병사들의 수가 많기는 해도 기사들은 차곡차곡 하나씩 쓰러뜨리며 전진했다. 뒤따르는 엘프들과 병사들도 시선을 끌며 나름대로 힘을 보탰다.

클로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아직 진열을 다 뚫지는 못했지만 이미 검증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기사들이 짚단이 아니라 제대로 무장을 갖추고 마나를 썼다면 병사들의 절반은 이미 죽었을 테니까.

지셀이 클로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검증은 된 거 같은데?"

"...."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클로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 막아! 막으라고! 못 가게 해!"

저 정도로 싸울 수 있다면 이제 우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 싸워도 병사들을 뚫지 못한다면 전투력이 떨어졌다는 뜻이 되니까.

어차피 내기 내용은 싸우냐 못 싸우냐가 아니라, 병사들을 다 뚫고 음식을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다.

기사 10명을 포함해 40명이나 되는 병력이라면 당연히 200명의 병사들을 뚫을 수 있어야 했다.

클로드가 준비한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다. 막아 내면 꽤 짭짤한 보상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알포이와 마법사들, 맥스와 해결사들은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그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미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봐도 병사들이 뚫릴 것만 같았다.

결국 '신을 이긴 남자' 알포이는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외쳤다.

"여신님!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퍼억! 퍼억! 퍼억!

"으아아아아압!"

고든과 루카스의 힘은 발군이었다. 그들은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짚단으로 맞아도 버틸 만했다.

"야이! 시발! XXX! 느금X! XXXXXX!"

아스콘은 이미 맞을 대로 맞아 바닥에 쓰러진 지 오래였다. 그는 쓰러져서 머리를 감싸면서도 연신 상대측 부모 욕을 멈추지 않았다.

엘프들과 병사들도 대부분이 쓰러졌다. 배가 부르고 안 부르고를 떠나서, 본래도 이들만으로는 200의 정예병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발목을 잡고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기사들은 상대 병사들의 절반 이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퍼억! 퍼억! 퍼억!

그렇게 기사들은 병사들을 짚단으로 패며 계속 전진했다. 지셀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실전을 겪은 그들에게 이 정도는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나중에는 아예 마나로 몸을 감싸고 우악스럽게 돌파를 시도했다. 어차피 상대도 짚단으로 때리니 약간의 고통만 감수하면 된다.

퍼어어어억!

정신없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얻어맞으며 전진하던 루카스는 어느 순간 앞에 아무도 없는 걸 깨달았다.

"뚫었다."

주변의 병사들은 모두 쓰러졌다. 아직 남은 자들이 있긴 하지만, 진열을 뚫은 순간 모의 전투는 끝이 났다.

루카스를 뒤따라온 기사들이 짚단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이겼다!"

"으하하하하하!"

"저 음식은 우리 거다!"

기사들은 바로 음식을 향해 달려갔다.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듯 다양한 고기와 과일, 거기에 술까지 놓여 있었다.

미친 듯이 음식을 먹는 기사들을 보며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이, 이상하다? 분명 먹어 보니까 배가 고팠는데?"

하루만 먹어도 배가 고팠는데 어떻게 한 달이나 그것만 먹고 버텼을까? 심지어 그 뒤에도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당황하는 클로드를 보며 지셀이 속으로 낄낄댔다.

전생의 학자들과 마법사들은 부피를 줄여 휴대성을 높이고, 먹었을 때 체력이 오래 유지되는 것에만 중점을 뒀으니 약간 허기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씹고 맛보는 작용도 없이 계속 같은 것만 먹으니 물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무척이나 훌륭한 영양식이었다.

사실 전쟁터에서는 포만감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영양분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장에 직접 나선 적이 없어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클로드는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만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설령 알았더라도 어차피 한 달 동안 그것만 먹고살 자신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지셀이 멍해 있는 클로드를 툭 치며 말했다.

"어때? 승부는 끝난 거 같은데?"

클로드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패배 선언을 기다리는 듯 그를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클로드는 이번에도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참, 어쩔 수가 없군요. 영주님이 또 성공할 줄이야. 도대체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워 온 겁니까?"

이유야 어쨌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승부사'니까.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래도 건 게 없으니 이번에는 마음이 참 상쾌했다.

"아, 아으, 어어아...."

반면 알포이와 마법사들, 맥스와 해결사들은 발발 떨면서 이상한 소리만 내었다.

맥스와 해결사들은 30년을 걸었다. 마법사들은 이전 내기까지 포함해 60년 노예가 되었다. 노후고 나발이고 60년 안에 안 죽으면 다행이었다.

그들은 모두 입만 벌린 채 클로드만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클로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주먹을 살짝 알포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졌지만 잘 싸웠어. 그래도 정말 멋진 승부였어. 그렇지, 브로?"

"아, 어으...."

미소 짓는 클로드를 보며 알포이도 손을 들어 올렸다. 예전처럼 마법이라도 쏘고 싶은데 자꾸 손도 떨리고 정신 집중이 안 된다.

"어, 으으으으...."

저 미소 짓는 얼굴에 파이어볼이라도 한 방 먹여 줘야 하는데.

"개, 새...."

털썩.

알포이는 말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새로운 전투 식량은 효과가 좋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보급이 끊기거나 늦어져도 버틸 수단이 생겼다는 건 전쟁 시에 엄청난 강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이 마르도록 지셀을 칭송했다.

"대단합니다!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전쟁에서 작전 반경이 말도 못 하게 늘어날 것입니다."

"위급 상황에서 비상식량으로 쓰기에도 충분합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지 곳곳에 전투 식량 제조소를 설립한다. 충분한 수량이 생산되면 영지민들에게도 조금씩 나눠 주고 비상식으로 가지고 있으라 전하도록. 그리고 품질이 유지되는 보존 기한과 보관 방법을 연구하도록 해라. 아마 몇 년은 거뜬히 버티겠지만, 보존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일이 많긴 하지만 이것도 꼭 필요한 일이기에 가신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클로드도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역시 우리 영주님입니다. 정말 뛰어난 분이시라니까요!"

"...그래."

클로드는 정말 사심 하나 없이 편해 보였다.

지셀은 그를 보며 잠시 고개를 젓고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이제 내 수련을 좀 도와줘야겠다."

뜬금없는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12화 낚시가 잘 되는군. (1)

클로드가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수련이요?"

일도 많은데 또 뭔 수련을 도와 달라는 말인가? 지금까지 영주는 혼자 수련했다. 굳이 다른 사람과 같이했던 걸 따지자면 길리언과의 대련 정도였다.

지셀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던 일들은 그냥 계속하고, 기사들에게 나를 기습하라고 해라. 나는 반격하지 않고, 공격한 책임을 묻지도 않겠다. 단, 마나는 최소한으로 억제하거나 쓰지 말도록. 물론 나도 쓰지 않을 거다."

또 미친 소리를 한다. 눈만 껌뻑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벨린다가 물었다.

"도련님? 지금 무슨 수련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음, 전에 하던 수련의 일환이야. 쉽게 말하면 맞으면서 몸의 방어력을 올려 보려는 거지."

"...보통 그러면 골병이 들거든요? 그 정도는 아실 실력이잖아요."

"괜찮아. 내 회복력 알잖아? 수련 강도를 조금 올리는 수준이라고."

"하지 마세요. 마나도 제대로 쓰지 않고 공격당하면 위험할 거예요."

마나를 쓸 수 있는 수준에 오르면, 의식적으로 마나를 휘감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몸이 단단해진다. 몸 전체가 마나를 조금씩은 머금게 되니까.

그렇기에 굳이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아도 감각이 예민해지고, 운동 능력도 좋아지는 것이다.

지셀 정도의 경지라면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더 많은 마나가 몸 전체에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인간의 피부는 생각보다 약하다. 제대로 마나를 운용하지 않으면 강철 무기를 방어하기는 불가능하다.

벨린다의 만류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한테는 지금 꼭 필요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며칠만 해 보면 돼."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조금만 더 하면 감각이 한 단계 더 올라갈 거 같거든."

지셀의 수련은 현재 절반의 성공에 머물러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초급 기사의 마나 공격은 몸으로도 그냥 막아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찌르며 공격에 자동으로 몸이 반응하게 하는 수련은 어느 순간 성장이 막혀 버렸다.

머릿속에서는 공격하기도 전에 이미 어디를 찌를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찌를 생각만 해도 그 부위에 마나가 몰려 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면 안 돼. 알고 반응하는 건 의미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 기습적인 공격을 허용해도 반사적으로 막아 내고 반격까지 하는 게 최종적인 목표였다.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기구를 만들어 볼까 했지만, 그것도 패턴이 정해질 수밖에 없기에 지셀의 목표엔 부족했다. 역시 최고의 수련은 실전이고,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실전과 비슷하기라도 해야 했다.

지셀이 내놓은 무지막지한 수련 방법에 벨린다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 제발 몸조심 좀 하면 안 돼요? 도대체 어떤 기사가 이곳에서 도련님을 공격할 수 있는데요!"

이 영지의 주인이 지셀이다. 그런 자를 누가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겠는가?

"많을 거 같은데."

지셀의 말에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벨린다는 반대했다.

"안 돼요! 그런 건 내가 허락 안 해요! 도련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예요. 알았어요?"

그녀의 엄포에 지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벨린다도 한번 해 봐. 내가 '샤르넬' 사 줄게. 나한테 상처만 입히면 돼."

"도련님! 그런 위험한 장난 하지 마시라고요!"

펄럭!

파파파파파팍!

벨린다의 몸 곳곳에서 수십 개의 단검이 쏟아져 나갔다.

지셀은 깜짝 놀라며 바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기세가 너무 강해서 마나를 안 쓸 수가 없었다.

타타타탕!

몇 개는 손으로 쳐내고 몇 개는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단검이 모두 떨어지자 지셀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벨린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너무 말을 안 들으니 조금 화가 나서 빨리 끝내려고... 꼭 뭐가 갖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 그걸 막네."

"...."

공교롭게도 벨린다가 먼저 시작해 버렸다. 이러니 반대를 하는 사람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지셀은 헛기침을 한 뒤 길리언에게 말했다.

"마구잡이로 전부 덤비면 수련이 안 될 거 같으니까, 훈련을 진행하면서 따로 습격할 사람을 매일 뽑도록. 제대로 상처 입히면 보상으로 금화를 준다고 해."

"...알겠습니다."

길리언은 자신도 말려 볼까 하다가 한숨만 내쉬고는 말았다. 어차피 말려도 무조건 밀어붙일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영주 습격 훈련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기사들은 곧 지셀을 공격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지셀은 정말 반격하지 않았다. 조금 위험하다 싶은 공격만 피하고, 얕은 공격은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그것도 최대한 마나를 억제하고선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지셀이라도 곧잘 상처를 입었다. 그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바로 보상을 받았다.

때릴 때마다 금화가 떨어진다? 걸어 다니는 보물 상자를 그냥 보고 넘길 사람은 없다.

"왔다! 내 금화!"

"오늘은 내가 먹는다!"

"영주를 팰 기회다!"

보상과 상관없이 다소 개인적인 감정을 섞어서 때리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기사들은 열심히 지셀을 공격했다.

온종일 지셀만 따라다니며 싸울 수는 없기에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하루에 한 번이다.

횟수 제한이 있으니 갈수록 암습을 하는 방법이 교묘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들 암살자와 같은 행동들을 보였다.

지셀이 이동하는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숨어있다가 노린다든가, 업무를 보는 도중 갑자기 습격하는 식이었다.

"아니, 이런 효과가 있었네."

예상치 못한 부가 효과에 지셀도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은폐와 엄폐를 진심으로 하다 보니 실력이 꽤 늘었다.

서로 회의도 하고 조언도 얻으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덕분이었다.

이 상황은 오히려 지셀이 바라던 바였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공격을 막기 위해 수련하는 기술이었으니까.

'내 감각도 더 죽여야겠어.'

문제는 지셀의 감각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이다. 실력 차이 때문에, 숨어 있는 상대도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니 기습의 효용이 조금은 떨어졌다.

어떻게든 최대한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푸슉!

갑작스럽게 나타나 지셀의 팔을 벤 고든이 웃었다.

"흐흐흐, 내 실력 많이 늘었죠?"

"흠, 꽤 쓸 만해졌네."

"상처 났으니까 돈 주셔야 합니다."

"그래, 조금 더 열심히 해 봐."

'히히, 성공했다.'

분명 마나를 최대한 억제하라 했는데, 다들 돈을 받고 싶어서 은근히 마나를 싣고 있었다.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상처가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셀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내버려 두었다. 확실히 상대방이 마나의 양을 점점 높일수록 몸이 다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베이면 마나가 몰려 막아 내기 전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해야 해.'

평소처럼 감각을 활성화하고 의식한 상태에서는 문제가 없다. 공격이 닿기도 전에 피할 수 있고 마나를 뿜어 막아 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감각을 둔화시킨 상태에서는, 공격당하는 걸 알아채고 마나가 몰려도 한계가 있었다. 아직은 일정 수준을 넘는 공격이 들어오면 제대로 막지 못했다.

'흐음... 조금 더 강도를 올려야 하나.'

몸이 생존에 위험을 느끼고 변화해야 한다. 실제로 기사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한 뒤로 어느 정도 수련의 효과가 보이고 있었다.

지셀은 매일 똑같은 고민에 잠겨 성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걷던 지셀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왜?"

앞을 막은 자는 아스콘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공격을 해 봐도 되겠습니까?"

"음? 너 마나 쓸 줄 모르잖아?"

이제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지셀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지셀이 아무리 마나를 의식적으로 억제한다 해도 마나를 싣지 않은 칼에는 겉가죽만 살짝 베이는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로는 몸에 위기감을 줄 수도 없고 반응을 제대로 끌어낼 수도 없다.

하지만 아스콘은 꼭 해 보고 싶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기사들한테만 기회를 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한번 해 보든가."

"허락하신 거죠?"

"그렇다니까?"

"그럼 전 정신 공격으로 해 보겠습니다."

"...?"

지셀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아스콘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야이, 개XXX, 내가 너 때문에 이 나이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가루나 처먹다가 뒈질 뻔했는데 XXXX, XXX, 느금X XXXX XXXX XX, 오늘만 사는 후레XX, XXXX! 이 창의적으로 미친 새끼, XXXXXX...."

"...."

고약한 욕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뭔가 서러움도 느껴지는 듯했다.

황당함에 헛웃음을 짓는 지셀의 뒤에서, 소식을 들은 벨린다가 악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아스콘은 그의 말 '시바리'와 함께 바로 병사들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뒤로도 지셀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속도가 조금 더뎌지는 듯 보이자, 지셀은 습격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과 제한 횟수를 늘렸다. 마나의 제약도 전보다 더 풀어 주었다.

그때부터 기사들은 더욱더 과감하게 지셀을 공격했다.

지셀은 이제 위험한 공격도 그대로 받아 주었다. 때로는 크게 다쳐 실려 간 적도 있고 한쪽 팔이 완전히 잘릴 뻔한 적도 있었다.

"도련님! 그만 좀 하시라고요!"

"영주님,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이건 수련이 아니라 혹사입니다."

벨린다를 비롯한 가신들이 모두 말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고 상처가 많아질수록 회복 속도도 더뎌졌다.

그래도 지셀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야, 이제 감이 더 올라오고 있어."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심장을 찔렀을 때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은 절로 긴장 상태를 유지했고, 공격당할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마나가 그 부위에 몰리는 속도가 빨라져 갔다.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민해졌다. 일부러 더 억누르고 낮췄음에도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진 것이다.

거기에 점점 지셀이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매일같이 상처를 입고 공격을 당하고 있다. 죽음의 위기까지 몇 번 넘기니 몸은 새로운 생존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코어에서부터 마나가 움직이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몸은 자연스럽게 마나를 신체 곳곳에 조금씩 돌리려고 했다.

지셀이 의식하지 않아도 몸 전체에 1단계 코어를 활성화한 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허, 이게 될 줄이야.'

이건 지셀이 오래전에 구상하고, 시도해 본 적도 있었던 기술이었다.

몸 전체에 계속 마나를 활성화하고 있으면 마나가 서서히 소모될 수밖에 없다. 소모된 마나를 제대로 채우려면 연공을 하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지셀 정도의 실력자라면 호흡만으로도 조금씩 회복할 수는 있긴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모든 마나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마나를 의식적으로 계속 운용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반응 속도나 빠르게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마나가 끊임없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소모되는 마나를 조금씩 채우기까지 했다. 온몸의 피부와 호흡기관을 통해서 숨 쉬듯이 말이다.

마나 연공을 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적은 양이지만, 어쨌든 주변의 마나를 알아서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매일같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면 인간의 몸은 놀라운 진화를 이루기도 한다.

'연공법을 조금 더 손봐야겠군.'

몸에서 지금 마나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느낌이 왔다. 이걸 이용한다면 한 번 더 연공법을 개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걸 토대로 코어를 전생보다 더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생에서는 5개의 코어를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코어가 많아질수록 몸에 부담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마나가 급속도로 소모되는 것도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어 5개만으로도 지셀은 대륙 7강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랐다. 대륙에서 그의 적수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금의 깨달음을 이용하고 발전시킨다면 그 이상도 가능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군."

지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잠깐의 영감으로 시작한 수련이 앞으로의 실마리를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단계의 코어가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몸은 점점 그 상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오늘도 왔습니다!"

10명의 기사가 갑자기 나타나 사방에서 지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들의 검은 모두 희미한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딱 초급 기사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공격.

지금까지는 이 정도 공격만으로도 지셀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지셀이 스스로 마나를 억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셀은 마나를 끌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줄 뿐이었다.

카카카카캉!

"...?"

공격을 성공한 기사들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사람 몸을 베었는데 강철을 때리는 소리가 날까?

상황을 확인한 기사들은 경악성을 내뱉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나 쓰신 거죠? 마나 안 쓰신다면서요?"

지셀의 몸은 멀쩡했다. 옷은 찢어졌지만 피부에는 작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기사들의 외침에 지셀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대충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군."

마나를 의식적으로 쓰지 않아도 언제나 1단계의 코어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기사들의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기사들도 제대로 힘을 낸 건 아니다. 진짜 초급 기사 수준의 공격만 가했다. 만약에 제대로 힘을 폭발시켜 베었다면 충분히 큰 상처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부로 영주 습격 훈련은 마무리한다."

이제 기습을 당하는 수련은 더 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새로운 토대를 쌓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해야 하는 건 이걸 더 발전시켜 강화하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2단계, 3단계 코어까지 활성화하고 그 이상의 경지까지 노려 보는 게 목표였다.

습격 종료 선언에 기사들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간 부수입이 좀 짭짤했는데.'

'조금만 더 하면 좋았을 텐데.'

'영주 때리는 손맛도 좋았단 말이지.'

놀거리가 사라진 게 아쉽다는 마음이 제일 컸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기사들은 휘적휘적 자리를 뜨는 지셀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구나.'

미친 수련인 줄 알았는데 진짜 효과가 있을 줄이야. 자신들도 한번 해 볼까 고민하던 기사들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저런 미친 짓이 가능한 사람은 영주밖에 없을 테니까.

* * *

영지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이야 많긴 하지만, 언제 펜리스에 일이 없던 적이 있었던가?

몇 번이나 했던 일들이라 다들 익숙해져서 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낡은 거주지를 부수고 마을을 통합하고 요새를 정비한다. 필요한 공방을 늘리고 데스몬드의 풍부한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을 찾아 가고 있었다.

도로 건설은 이곳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도로가 만들어질수록 자원의 이동도 빠르니 영지 개발 속도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클로드는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보며 골머리를 썩였다.

"으음.... 여전히 행정관이 부족하네."

데스몬드의 가신들을 모두 죽였다.

그나마 철저한 심문과 조사를 통해 하급 관리 중에 쓸 만한 사람을 추리고 있었지만, 영지가 워낙 넓고 할 일이 많으니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 이제 어디서 또 꼬셔 와야 하나."

세이론 아카데미에는 자신에 관한 소문이 다 돌아서 이제 거기서 데려오기는 힘들 거 같았다. 결국 다른 곳에서 다시 사람들을 데려와야 했다.

"당분간은 일을 더 늘리면 안 돼."

지금도 일이 빡빡해서 한 사람이 거의 열 사람분의 일을 하고 있다. 진짜 더는 일이 늘어나면 안 된다.

영주도 요새는 새로운 일이 없는지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대로 병사들을 훈련하고 발전에만 집중하면 될 거 같았다.

클로드가 그렇게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 지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말했다.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

"...."

"펜리스 마법 연구소를 설립하고 마법 병단을 만든다."

클로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313화 낚시가 잘 되는군. (2)

병단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조직이다. 즉 지셀의 말은 마법사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무표정하게 지셀을 바라보던 클로드가 말했다.

"연구소든 병단이든... 우리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공식적으로 우리 영지의 마법사는 한 명입니다."

펜리스 영지에 있는 마법사들은 사실 신분이 애매하다.

공식적으로는 적염의 마탑 지부에 파견된 협력 마법사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지셀의 계약 노예다.

그렇기에 앞에 대놓고 나설 수는 없는 처지였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마탑 소속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탑이 적극적으로 영지전 등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물론 지금도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인 수준이지만 그래도 명분이라는 것이 그렇다. 대놓고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장 소속은 바네사 한 명이다. 나머지는 음... 지금처럼 하면 되겠지. 공사도 하고 싸움도 하고 말이야."

"...."

"그리고 우리 영지에 요새 마법사들이 조금씩 찾아오고 있잖아? 다들 뭐 좀 먹어 보려고 기웃거리는 거 같은데."

"그건 그렇죠. 6서클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요."

데스몬드와의 전쟁 후 펜리스에 6서클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6서클 마법사인 윌로우의 마법이 막힌 걸 여러 사람이 봤기 때문이다.

애초에 왕국군까지 왔는데 소문이 안 나면 이상한 거다.

"6서클 마법사가 흔한 건 아니잖아요? 반쪽짜리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죠."

6서클은 마탑의 탑주에 오를 수도 있는 경지다. 그러니 귀족들은 그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소속이 없는 마법사들도 하나둘 펜리스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세상을 돌며 경험을 쌓으려는 자들도 있었다지만, 대부분이 재능이 없거나 기회가 없어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6서클 마법사를 만나 조그마한 가르침이라도 받으려 펜리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6서클 마법사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지셀도 클로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그들을 우리가 거둬들이자고. 그러면 마법사도 더 많아질 거 아냐? 마법 전력은 어떻게든 더 늘려야 해."

마탑에서 얻어 오는 건 한계가 있다. 마탑도 이제 더 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를 비롯한 대영주들과 싸우려면 마법 전력의 확충이 필수였다. 그들은 데스몬드보다 훨씬 더 뛰어난 마법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을 테니까.

공작가의 마법사 일로이스도 7서클에 이르렀고, 그들과 한패인 진홍의 마탑주도 7서클이다.

어서 빨리 바네사의 경지를 더 올리고 마법사들을 늘려야 했다.

클로드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법이다.

"으음, 그런데 그들이 순순히 영지에 소속되려고 할까요? 재능이 없어서 쫓겨난 사람은 그렇다 쳐도, 소속되는 게 싫어서 자유롭게 다니는 자들은 거절할 텐데요. 마법사들 자존심하고 성질 더러운 거 잘 아시잖아요."

"6서클 마법사가 가르침을 준다는데 안 오고 배길 수 있을 거 같아? 거기에 충분한 보수도 준다고 해."

"확실히 그 정도면 구미가 당기긴 하겠네요. 경지 상승에 목말라 있는 게 마법사니까요. 바네사가 반쪽짜리 마법사인 것만 숨기면 되겠군요."

"그래. 영지 소속 마법사가 되면 전원 마나 집속진도 제공해 준다고 해."

"돈 좀 아껴 쓰시죠? 룬스톤 너무 많이 써서 이제 간당간당한다니까요."

"쓸 때는 확실히 써야지. 그 내용으로 곳곳에 홍보할 준비부터 해."

"끄응... 마탑 마법사들은 어쩌고요?"

"이대로 쭉 살자고 해. 다 같이 행복하게."

"...그럽시다."

클로드는 그냥 설득을 포기했다. 마탑의 사정이야 자신이 알게 뭐람? 계속 이러다가 걸려서 멸망하든지 말든지.

한창 일이 바쁜 드워프들과 마법사들이 끌려와서 다시 추가 공사를 시작했다.

60년 노예가 되어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알포이가 쉼 없이 욕을 내뱉었다.

"아니, 시바! 도대체 왜 일이 안 끝나냐고! 이 거지 같은 영지! 이 망할 놈의 영지! 신을 이긴 남자인 나를 어떻게 보고!"

갈바릭은 그런 알포이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거 마법사들을 위한 건물이라던데? 돈도 엄청나게 많이 들여서 짓잖아."

"흥! 이 몸을 오래 모시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알포이는 자신이 이곳에서 우러름을 받기에 살아 준다고 정신 승리를 했다. 절대 노예로 붙잡혀 있는 게 아니다.

확실히 이번에 짓는 건물은 범상치가 않았다. 수많은 마법사가 머물 수 있는 개인 숙소에 전용 수련장도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마법 서고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편의 시설들까지 도배가 되고 있었다.

당연히 이 모든 시설의 마법 처리는 바네사가 주도했다.

드워프들도 그 어떤 건물보다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지셀이 몇 번이나 이 건물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점점 층수가 올라가는 건물을 보며 알포이가 중얼거렸다.

"멋지긴 한데... 뭔가 마탑 같은데? 우리 숙소 맞아?"

마탑 같은 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마탑이다. 건물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지셀은 모두를 불러 놓고 말했다.

"다들 이 건물이 뭔지 궁금했을 거야. 마법사들 숙소치고는 너무 거창하니까. 일단 우리 영지에 점점 마법사들이 찾아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하는 중에도 6서클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었다.

벨린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찾아오는 이들은 어떻게 하죠? 일단 숙소는 내주고 있는데 계속 6서클 마법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졸라요. 오늘 또 두 명이 찾아왔다니까요?"

떠돌이 마법사들은 바네사를 만나지 못했다.

영지 최고의 비밀 병기를 아무나 만나게 해 줄 순 없었다. 일단 정체가 비밀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영지를 떠나지도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만남 요청만 넣을 뿐이었다.

그들은 펜리스군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저서클 마법사라도 사고를 치면 일반인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셀은 그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짓는 건물은 펜리스 마법 연구소야. 그리고 책임자는 이제 바네사다."

바네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제가요?"

"응, 영지에서 제일 높은 6서클 마법사니까 당연히 연구소 책임자를 해야지."

사실 그대로의 말이었지만 부끄럼을 잘 타는 바네사는 얼굴이 벌게졌다.

"잠깐! 왜 내가 책임자가 아닌 건데! 요!"

알포이가 끼어들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넌 적염의 마탑 지부장이잖아. 이건 펜리스 마법 연구소니까."

"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뭔가 소속이 갈수록 꼬이는 거 같지만 알포이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법사들을 모집한다. 일단은 영지에 찾아온 마법사들부터 회유해 보자고. 그들도 이제 연구소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다."

"잠깐! 우리만의 숙소가 아니었어? 요?"

알포이가 또 끼어들며 묻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도 쓰는 거지. 모든 마법사는 이제 그곳에서 머물면서 다 같이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도 하면서 영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거야. 전투 때는 마법 병단으로 활약한다."

마법 병단이라는 말에 다들 놀랐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법사 전력을 취급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도 같이 낀다고요?"

"그렇지."

"그거... 마탑 아니에요?"

지셀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답했다.

"아니, 펜리스 마법 연구소다."

"그게 마탑이라고!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오오오오!"

이미 소속이 있는 마법사들이 다른 마법사를 필두로 하는 단체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같이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을 한다고?

일을 도와주는 것과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건 다르다. 만약 적염의 마탑에서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 지식을 교류한다는 핑계라도 대면 되니까.

하지만 마법 병단이라니? 지금까지 전쟁에 참여할 때도 항상 몰래 참여했다. 아예 전문 부대에 적을 올리면 결국 이전 전쟁까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건 진짜 다 같이 죽자는 뜻이었다.

그래도 지셀은 꿋꿋하게 말했다.

"마탑이 아니라 마법 연구소니까 상관없다."

"그게 마탑이라고! 그걸 마탑이라고 한다고!"

"마법 연구소다. 전투 또한 방어 차원에서만 진행할 예정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나마 그 정도면 조금 낫다. 방어 차원에서 영지를 도왔다고 하면 넘어갈 여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알포이도 펜리스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다. 저런 말에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건 아니지?"

"...."

"대답해 줘."

지셀은 대답하지 않고 클로드를 보며 물었다.

"노예상 언제 와?"

"...."

클로드가 침묵하고 알포이도 침묵하고 모두가 침묵했다.

조용해지자 지셀은 다시 본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영지 소속이 된 마법사들은 이제 바네사에게 마법을 본격적으로 배운다. 영지 일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빨리 실력도 늘려야 하니까. 필요한 건 영지에서 모두 지원해 주도록 하지."

바네사는 그 말을 듣고 또 깜짝 놀랐다.

"제가요?"

"응, 이제 바네사가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알려줘. 다들 수준을 높여야 하니까."

"제, 제가 어떻게 그런 큰일을...."

"아니야, 할 수 있어. 이 영지에서 가장 서클이 높잖아? 그리고 설명도... 바네사가 최고니까."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에게 뭐 물어보다가 잡히면 최소 한 시간은 설명을 들어야 한다.

바네사는 아예 마법을 해체하는 수준으로 연구하는 걸 즐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이해하기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연구와 수련에 전념한다면 빠르게 실력이 늘 것이다.

결정이 되었으니 이제 진행하는 일만 남았다. 바네사가 연신 부끄러워하며 거부의 뜻을 내비쳤지만 지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펜리스 마법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바네사는 책임자가 되었다.

"아, 그리고 마법 병단의 지휘관은 바네사지만 참모로는 로웰이 붙는다."

로웰도 깜짝 놀랐다.

"제가요? 저 일 많은데요?"

"그냥 전쟁 시 조언하는 역할이야. 부담 갖지 말고."

"끄응...."

바네사가 지휘관이긴 하지만 군사적 안목은 부족하다. 군사학을 배운 자가 옆에서 보조를 해야 했다.

지셀은 조만간 군사 편제도 새로 구성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지셀 혼자 모든 걸 이끌었지만, 이제는 권한을 나눠야 할 정도로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다.

마법 연구소가 발족한 뒤 드디어 떠돌이 마법사들과의 면담 약속이 하나씩 잡히기 시작했다.

지셀은 클로드를 불러 말했다.

"잘 들어, 여기 온 마법사들 하나도 영지 밖으로 보내지 마."

"네? 왜요? 감금이라도 하라고요?"

"아니, 아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다 우리 영지 소속으로 만들어. 할 수 있지?"

"...그걸 왜 제가 합니까? 영주님이 그냥 하시면 안 돼요? 나 바빠 죽겠는데."

"아니야, 이 일에는 네가 제일 적임자야. 난 널 믿어."

"...피."

은근한 칭찬에 클로드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마법사는 중년의 나이에 이른 3서클 마법사였다. 건방지게 다리를 꼰 클로드가 턱을 들고 말했다.

"흠, 그러니까 우리 영지의 6서클 마법사를 만나 보고 싶다, 그겁니까?"

"네, 기회가 된다면 작은 가르침이라도 받고 싶습니다."

마법사는 열망 어린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조금 건방져 보이긴 했지만, 상대는 대영지의 총관이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고작 3서클에 불과한 자신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클로드는 그런 마법사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닌데... 차라리 우리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되는 건 어떻습니까? 6서클 마법사에게 배움도 받을 수 있고 영지에서 전폭적인 지원도 해 드리거든요."

"전속... 마법사요?"

"네, 별거 아닙니다. 우리 영지 돈 많은 건 이미 소문 들어서 알고 계시죠? 이번에 새로 마탑... 아니, 연구소도 짓고 있는데 마법사들에게는 개인 마나 집속진도 제공해 줄 예정입니다."

"허억!"

마법사는 깜짝 놀랐다. 자신 같이 재능 없는 떠돌이 마법사에게 그렇게 지원해 주는 영지는 없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공부를 하며 떠돌아다니는 데 지친 참이라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마법사답게 의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우리 영지에 생각보다 마법사가 부족해서, 먼저 오시는 분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드리는 겁니다. 늦게 결정하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어요. 이런 기회는 있을 때 빨리 잡아야 하는 겁니다."

뭔가 장사치 같은 말이었지만 그럴듯하기도 했다. 마법사가 침만 삼키며 고민하자 클로드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영지에서 숙식 제공부터 시작해서 모든 편의를 봐 드릴 테니 다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수련하고 경지만 올리시면 됩니다."

"저, 정말 그거면 됩니까?"

완전히 꿈의 직장이다. 6서클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드문 일인데 마나 집속진까지 제공해 준다니.

거기에 열심히 수련만 하면 된다? 마법사로서는 최상의 조건이다.

클로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가끔 영지에서 일이 바쁠 때만 조금 도와주시면 됩니다. 우리 영지가 그렇게 바쁜 편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영지를 안정화하느라 '조금' 바빠 보일 뿐이지요."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 마법사가 영지 발전을 위해 힘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클로드는 슬그머니 서류를 하나 내밀며 말을 이었다.

"30년 계약입니다. 별로 안 길죠?"

278년 계약인 그에 비하면 정말 짧은 편이었다.

314화 낚시가 잘 되는군. (3)

클로드의 말에 마법사는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30년이요?"

"네, 영지 전속 마법사가 되는데 그 정도는 있으셔야죠. 정말 긴 거 아니에요. 여기에 200년 넘는 사람도 있는... 아니, 아무튼 다른 영지도 그 정도는 하지 않습니까? 에이, 이 정도도 안 하면 전속 아니지."

"그, 그건 그렇지요."

마법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마법사의 실력과 연구 목적에 따라 그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고작 몇 년만 머물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장기 계약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냥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가 박력 있게 밀어붙이니 마법사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으음...."

마법사는 살짝 고민했다. 자신의 나이가 지금은 중년이다. 30년이면 여기에 뼈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도 많지 않고' 마나 집속진도 쓸 수 있으며 6서클 마법사의 가르침까지 받을 수 있다. 이런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펜리스가 지금은 북부에서 잘 나간다지만 사실은 공작가와 척을 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법사들이 소문에 어두운 편이긴 하지만, 떠돌이 마법사인 만큼 그런 소문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고민하는 듯한 마법사를 보고 클로드가 바네사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총관님?"

"여, 바네사. 여기 이분이 널 좀 보고 싶다고 하시네.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봐."

마법사는 바네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이 여자가 6서클 마법사라고?'

젊어도 너무 젊었다. 왕국에 이렇게 젊은 6서클 마법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거기에 꼴은 또 뭔가? 머리는 헝클어져서 언제 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고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사람 같았다.

순진한 얼굴로 눈만 껌뻑거리는 그녀를 보며 마법사가 물었다.

"저, 정말 6서클의 경지에 오른 게 맞습니까?"

"네, 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부끄러운 얼굴로 몸을 배배 꼬는 바네사를 보며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6서클 마법사다운 품격이 보이지 않는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마법사는 이런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일수록 그 오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헛소문이었나? 나한테 사기를 치는 건가?'

6서클 마법을 한번 써 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엄두는 나지 않는다.

마법사는 높은 확률로 정신병을 달고 산다. 지금은 순진하게 보이지만 어느 순간 돌변할지 몰랐다.

감히 자신을 시험하는 거냐고 갑자기 미쳐 날뛰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제가... 요새 공부를 하다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는데 조금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알려 드릴게요."

상냥한 말에 마법사는 용기를 얻고 책을 하나 꺼냈다.

"전격의 저항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마법사가 책의 한 부분을 짚자 바네사가 슬쩍 보더니 손뼉을 쳤다.

"아, 이 부분이 막히셨구나! 그러니까 이게 어떤 원리냐면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마력끼리의 충돌인데, 그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저항이 생성되거든요. 그래서 마력이 충돌할 때 전격의 흐름을 제지하는데 이 때문에 열에너지의 손실이...."

"오, 오오오!"

바네사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마법사는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설명이 자세한지 막히던 부분이 시원하게 뚫리고 있었다.

'지, 진짜다! 진짜 6서클 마법사야! 6서클이라는 게 거짓말이라도 5서클은 된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설명을 잘하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스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마법을 산산조각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설명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이렇게 쉽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다른 마법사들하고는 전혀 다르다!'

아무리 6서클 마법사가 있다 해도 자신에게 가르침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마법사는 대부분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하는 걸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제자로 들어가 실컷 고생하고 말을 잘 들어야 겨우 하나 던져 줄까 말까다.

거기에 마법사들이 얻는 깨달음은 제각각이다. 지식의 기반 위에 뜬구름 잡는 소리가 섞일 때도 많았다.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꼬아서 말해 주는 놈들도 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쉽게 알려 주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네사의 설명이 한 시간을 넘기자 클로드가 졸기 시작했고 마법사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렇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그게 그런 원리였군요!"

"네, 네. 그다음에는 마력의 움직임이 바뀌어야 하는데...."

마법사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옆에서 졸고 있는 클로드만 제외하면 마치 토론장 같은 분위기였다.

어느 정도 설명이 끝나자 마법사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드디어 이해됐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또 궁금한 거 있으세요?"

바네사의 말에 마법사는 신이 나서 또 품에서 책을 꺼냈다.

그걸 펼쳐서 물어보려고 할 때, 잠에서 깨 침을 닦은 클로드가 마법사의 팔을 붙잡았다.

"쓰읍, 이분이 상도덕도 없이...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클로드의 말에 마법사는 나라가 멸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식에 갈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왜, 왜 그러십니까? 이거, 이거 하나만 더 물어보면...."

"어허, 안 돼요. 지금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우리 마법사님을 붙잡아 두시려고요? 이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계약! 계약하겠습니다!"

"오, 진짜요?"

"계약하면 정말 저분에게 계속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거 맞죠?"

"아휴, 그럼요. 매일 같이 일하는데.... 아니, 같이 연구하는데, 하면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면 되죠. 아마 마법은 질리도록 쓸 수 있을 겁니다."

클로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진짜 남들 평생 쓸 마법을 이 영지에서는 1년이면 다 쓴다.

마법사는 냉큼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어차피 자신의 재능으로는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휴, 그럼요. 자자, 사용인들 따라가시면 연구소에 방을 배정해 줄 겁니다."

마법사가 물러가자 클로드가 의자에 거만하게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해라. 그냥 빨리빨리 계약할 것이지. 왜 자꾸 비싸게 굴어."

"...."

바네사는 그런 클로드의 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영지에 마법사 노예가 늘어난 것만 같았다.

어쨌든 영지에 찾아온 마법사들은 전부 클로드에게 설득당해 계약을 진행했다. 바네사의 지식을 엿본 마법사들이 오히려 더 애원했기에 계약은 어렵지 않았다.

그 수가 무려 20명이나 되었다. 구하기 힘든 마법사를 단번에 영지 소속으로 옭아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물론 마법사들도 만족스러워했다.

"돈이 많은 영지라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건물도 드워프들이 함께 지었다지? 기능도 기능이지만 미적 감각도 아주 뛰어나."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길래 마나 집속진을 이렇게 전부 제공해 주는 걸까?"

평생 마나 집속진은 구경도 못 해 본 마법사들이다. 애초에 그 정도 능력이 되면 소속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매일 밤 바네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개인 수련에 전념했다. 온종일 가르침을 받고 싶은데 바네사가 이상할 정도로 바빴다.

"흠흠, 바네사 님은 6서클이시니 바쁘실 수밖에 없지."

"낮에는 자주 자리를 비우시던데 뭘 하고 계시는 걸까?"

"아마 새로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서 개인 연구에 전념하고 계실 걸세."

그들은 그렇게 바네사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냈다. 그녀에게 배운 게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뒤늦게 합류를 했으니 기존 마법사들과는 아직 사이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자주 모여 담소를 나눴다.

"참 편하고 좋기는 한데 이거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대우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불편해. 영지 일이라도 조금 도와줄 게 없나?"

"그나저나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이 있던데 왜 우리를 볼 때마다 웃는지 모르겠어."

비웃음이면 화가 났겠지만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뭔가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는 미소였다.

그렇게 그들이 즐거움 반, 미안함 반으로 자신들의 수련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클로드가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영지 일을 좀 도와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어험, 그래.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안내하게나."

영지의 고위 인사에게는 겸손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가차 없이 오만한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안내자를 따라 연구소 앞 공터로 이동했다.

잠시 기다리자 여러 대의 마차가 왔고 마부가 소리쳤다.

"화염 마법! 화염 마법 전공이신 분!"

몇몇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화염 학파 출신이다만 무슨 일인가?"

"자자, 여기 타세요!"

"뭐?"

"어서 타세요! 시간 없습니다!"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마차에 올라탔다.

그 뒤에 있는 마차들도 시끌벅적했다.

"바람 마법 잘하시는 분 여기 타세요! 도로 평탄화 작업도 같이 합니다!"

"이쪽은 인부들이 힘 좀 써야 하니까 보조 마법 위주로 타십쇼!"

"큰 돌덩이들 치워야 합니다! 확실하게 파괴하실 수 있으신 분!"

"...."

마법사들은 침묵했다. 이건 마치 인력소에서 급히 노동자를 구하는 모습 같았다.

"이, 이놈들이 감히 마법사에게 지금...."

마법사들이 화를 내기도 전에, 연구소에서 알포이와 기존 마법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야야, 빨리 타자!"

알포이의 말에 마법사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멀뚱히 서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뭐 해요? 빨리 타요. 일하러 가야지."

"늦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요."

"이분들 아직 정신 못 차리셨네.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봐."

새로 합류한 마법사들은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무,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천박하게들 움직인단 말이오?"

알포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긴, 주로 공사가 제일 많지. 돌덩이도 치우고, 정화조도 비워야 하고, 땅도 엎어야 하고, 건물도 지어야 하고, 짐도 옮겨야 하고. 뭐 아무튼 마법으로 할 게 많아."

"마, 마법사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이오?"

"그럼 누가 해? 마법이 제일 빠른데."

"우, 우리는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소. 이, 이런 건 마법사의 신분으로 하는 일이 아니오. 창피해서 도무지 할 수가 없소."

"지금 '신을 이긴 남자'인 나도 하는데 너희가 빠지겠다는 거야? 아, 빨리 타라고! 공사장에서는 내가 조장이니까 그렇게 알고! 너희들 언제 투입되나 내가 기다렸다고!"

알포이의 엄포에 마법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일단은 참았다. 쪽수에서 밀리니 기존 마법사들과 싸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려고 했는데 허겁지겁 바네사가 달려오더니 마차 하나에 올라탔다.

"뭐 하세요? 다들 빨리 타셔야죠. 안 그러면 공사가 늦어져요."

"...."

왜 그녀가 낮에 항상 자리에 없는지 이제 알았다. 이 미친 영지는 6서클 마법사도 공사에 동원하고 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대단하다. 낮에는 공사 일을 하고 밤에는 개인 연구에 수업까지 하고 있었다니.

이런 분이 타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서클이 깡패다. 이들에게 제일 높으신 분은 바네사였다.

덜컹, 덜컹!

마법사들을 태운 마차가 영지 곳곳으로 퍼졌다. 알포이는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마법사 한 명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처음에는 다 그래. 내가 이러려고 마법사 했나 자괴감도 들고 그러지. 그런데 익숙해지면 괜찮아. 내가 나중에 도박도 알려 줄게."

"...알겠소."

"어허, 표정 펴고. 네가 특별한 거 같아? 이 동네에서는 마법사 별거 아니야. 가끔 여신도 오고 그러거든."

"...."

며칠간 앙탈을 부리는 마법사도 있긴 했지만 알포이와 친구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도망가려던 마법사도 알포이의 추격에 잡혀 왔다.

"이, 이게 무슨... 당신들도 3서클이라 하지 않았소?"

제압당한 마법사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알포이가 거만하게 대답했다.

"공사를 하면 실력이 는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우리 실력을 보고 그래? 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늘어난다고. 그리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네사한테 물어보면 되거든. 그러니까 수련한다고 생각해. 한 번만 더 도망가면 다 죽는 거야. 알겠지?"

마법사들이 늘어날수록 일이 편해진다. 알포이는 절대 이들을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계약도 계약이지만 바네사의 가르침과 마나 집속진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경지 상승은 모든 마법사의 꿈이었으니까.

물론 기존 마법사들은 그딴 꿈은 모두 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은 그냥 오늘 하루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다.

클로드는 6서클 마법사의 가르침과 마나 집속진 제공이라는 혜택을 계속 홍보했다.

이제는 북부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많지는 않지만 소문을 들은 떠돌이 마법사들이 하나둘 꾸준히 찾아왔고 그들은 모두 펜리스 영지에 잡혀 버리고 말았다.

"으음, 낚시가 잘 되는군. 마법사들이 늘어나니 공사가 무척 빨라지고 있어."

그냥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걸려든다. 그 정도로 바네사와 마나 집속진은 엄청난 미끼였다.

물론 마법사들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문제도 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룬스톤이 거의 다 떨어져 갑니다. 이제 캐올 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영지의 상황을 파악한 클로드가 지셀을 찾아왔다.

그간 영지 발전을 위해 룬스톤을 어마어마하게 사용했다. 마탑에 파는 양도 있으니 소모되는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아껴 쓰려고 마탑에 파는 것도 줄였지만 결국 바닥을 보인 것이다.

보고를 받은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떨어질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오래 쓰긴 했네. 아주 알차게 썼어."

"어떻게 하죠? 룬스톤이 다 떨어지면 많은 부분이 늦어질 겁니다. 마나 집속진을 유지하는 데도 문제가 생길 거고 마탑과의 관계도 다시 고려해야 하고요."

"뭘 어떻게 해. 답이야 뻔하지."

지셀이 씨익 웃었다. 룬스톤이 모자란다? 그러면 다시 구해 오면 된다.

그곳에 깔린 게 룬스톤이었으니까.

315화 우리를 막아 내야 할 거다. (1)

자신만만한 지셀의 모습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다시 가실 생각이군요."

"그래, 지금 시기면 나쁘지 않겠군."

"공작가가 이를 갈고 있을 텐데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지금은 괜찮아. 친왕파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고 이 북부에서 우리를 위협할 만한 곳은 이제 없으니까. 누가 군대를 일으킨다 해도 이곳에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레이폴드가 있습니다만?"

아멜리아의 얘기가 나오자 지셀이 피식 웃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렇게 멍청한 여자가 아니거든."

만약 아멜리아가 자신을 쓸어버리려 했다면 얼마 전 만났을 때 결판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렇기에 발루아 남작의 반란도 이제는 제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다. 영향을 받을 만한 영주와 귀족들만 모두 잡아 죽이면서 말이다.

그런 선택을 한 그녀가 자신을 함부로 칠 리가 없다.

"그리고 기습당해서 위험하다 해도 돌아올 때까지 버틸 방어 병력은 충분하니까 아직은 걱정할 필요 없어."

"뭐, 그렇게 자신 있으시다면야...."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셀은 바로 가신들을 소집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룬스톤을 구하러 가겠다. 겸사겸사 다른 것도 얻어올 생각이고."

그 말에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가 표정을 굳혔다. 그들은 룬스톤에 안 좋은 추억이 좀 있다.

"도련님 혹시?"

"그렇지, 바로 거기야. 마수의 숲으로 간다."

"끄응...."

벨린다는 반대하려다가 일단 입을 닫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을 때도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하물며 북부 최강의 칭호를 얻은 지금은 말린다고 들을 리가 없었다.

대신 다른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디 있는지 아세요? 예전에야 맞추긴 했지만... 마수의 숲은 넓잖아요?"

"그럼, 잘 알고 있지. 가는 길에 룬스톤 말고도 다른 자원도 얻을 수 있을 거야."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이번에도 그냥 소문이에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참 신기하다. 예전에는 그냥 우연 내지는 운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지셀은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다 알아. 나만의 정보가 있어."

"...."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나중에 꼭 얘기해 줄게."

지셀도 예전처럼 죽었다 살아났다는 농담은 하지 못했다. 그때야 다들 비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분명 장난으로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을 품고 이것저것 물어볼 게 뻔했다.

그래서 지셀은 잽싸게 말을 돌렸다.

"흠흠, 어쨌든 이번에는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가야 해. 준비를 철저히 하자고."

"후, '오우거 슬레이어'인 이 몸이 다시 활약할 수밖에 없겠군."

카오르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전쟁 뒤에도 카오르와 헌터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영지 치안 업무를 맡긴다는 명목이었지만 지금 보니 마수의 숲 때문에 그런 거 같았다.

카오르와 헌터들이야말로 몬스터 사냥에 이골이 난 자들이었으니까.

지셀은 마수의 숲 지도를 펼쳤다. 크기만 대략적으로 표시됐던 마수의 숲 지도에는 예전과 다르게 약간의 지형과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여기다."

펜을 꺼낸 지셀은 전에 만들었던 길의 끝에서부터 연결해 새로운 길을 그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동그라미를 그린 뒤 말했다.

"이곳에 룬스톤이 있다. 그것도 전에 캐던 곳보다 훨씬 더 많이."

"...."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만 삼켰다. 영주가 어떻게 저런 걸 아는지 궁금해 미칠 거 같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영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난 일이다. 모두의 머릿속이 같은 생각으로 물들었다.

'전보다 훨씬 더 많다고?'

이 영지의 발전 근간은 룬스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룬스톤으로 돈을 벌고 모든 걸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얻어올 수만 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

'룬스톤을 사용하는 경작지들을 더 늘릴 수 있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무장도 더 강력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시설들의 동력도 더 강하게 할 수 있어.'

그간 가지고 있던 룬스톤은 돈을 마련하고 아껴 쓰느라 중요한 곳에만 들어갔다. 하지만 이전에 얻었던 것 이상의 수량을 얻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예 영지 전체를 마법 공학으로 채울 수도 있었다.

생각이 같으면 목표도 같아지는 법이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지셀이 말했다.

"다들 이제 알았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전력을 다해 준비하라고. 이번에는 영역 확보도 제대로 하면서 갈 생각이니까."

이미 한 번 해 봤던 일에 반대가 클 리는 없었다. 거기에 믿기는 힘들지만 보상도 어마어마하다.

영주의 헛소리는 언제나 확실한 결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결과를 보면 된다.

지셀의 명령에 따라 모든 인력이 2차 마수의 숲 개척을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척! 척! 척! 척!

3천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대열을 갖춘다.

카발디 전쟁 때부터 이번 데스몬드 전쟁까지 참여했던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영지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좋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거기에 이제는 북부 최강이라는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드높은 사기로 인해 그들의 눈빛은 자부심으로 가득 찼고 걸음걸이마다 힘이 넘쳤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넘치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대부분은 마수의 숲에 들어간 경험이 없었지만, 일부는 그 시절을 경험했던 용병들이었다.

"내가 영주님과 함께 팔로르란 놈들을 없앴는데 말이야.... 그놈들은 어둠에서 공격이 안 통하거든? 그래서 내가 라이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고든이 아련한 눈으로 추억을 더듬었다. 그의 기억은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었다. 잡혀간 뒤에 무서워서 오줌을 쌌던 일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어쨌든 기사들도 마수의 숲에 관한 위험한 소문에 겁을 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셀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너무 많이 해냈다.

각이 잡힌 병사들과 대조적으로 건들거리며 무기를 질질 끌고 오는 무리도 있었다.

"어이, 거기 내가 한번 가 봐서 아는데 별거 아니야. 이 몸이 블러드 퓌톤도 잡아 봤거든. 영주랑 함께 말이야."

바로 건방진 표정으로 웃고 있는 카오르와 헌터들이었다.

이들은 그림자 산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이다. 오히려 소문만 무성한 마수의 숲은 어떨지 호기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뒤이어 활을 장착한 엘프들과 마법사들도 대열을 갖췄다.

엘프들은 200명이 전원 참여했지만 마법사들은 새로 온 자들과 적당히 섞어 50명만 뽑았다.

영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몇 명은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네사와 알포이는 개척대 쪽에 왔기 때문에 영지의 주력 마법사는 모두 참여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필요한 인원이 전부 모이자 길리언이 지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클로드도 옆에서 서류를 보며 말했다.

"필요한 물품도 전부 챙겼습니다. 병사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식량과 의약품을 보급하겠습니다. 개척에 참여할 인부들도 뒤따라갈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개척 방식도 전과 다르다. 기존의 영역을 제대로 확보하고, 몬스터들을 토벌할 때마다 바로 인부들을 투입해 목책을 세우고 방어선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드워프 몇 명과 노동돌격대 500명도 데려온 상태였다.

마수의 숲 지력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 확보한 곳은 훌륭한 영토가 될 것이다.

"인부들이 묵을 곳은 충분하니 다른 준비는 더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지셀이 괜히 예전에 마수의 숲 앞에 주둔지를 세운 것이 아니다.

지금은 비어 있어 페르디움의 경비대가 편히 사용하고 있지만 이제 인부들이 다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지속적으로 마수의 숲을 개척할 준비는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지셀은 눈앞에 있는 병력을 보며 미소 지었다.

"좋군. 드디어 이런 준비를 할 수 있게 됐구나. 참 오래 걸렸어."

3천의 정예병, 400의 기사, 300의 헌터, 200의 엘프, 50의 마법사, 500의 노동돌격대.

어지간한 영지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병력이다.

고작 200도 안 되는 용병들로 마수의 숲에 도전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벨린다와 길리언도 조금은 감격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때는 정말 객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모두가 영주님의 행동을 막으려만 했었지.'

하지만 보라. 다들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일을 성공시켰고 그걸 토대로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두 사람의 감상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벨린다, 다른 준비는 확실히 해 뒀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셀의 말에 벨린다가 웃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따라가지만 암살자들은 아니었다.

개척을 시작하면 영지의 주력이 비게 된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지 모르니 그들은 영지에 남아 있는 주요 인사들을 보호해야 했다.

모든 준비와 점검이 끝나자 지셀이 흑왕에 올라탔다.

"가자."

다들 말들을 타고 있다. 이제 펜리스에서 기마술은 교양이 된 수준이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페르디움을 향해 달렸다.

* * *

페르디움의 총관 호메른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평화롭구나."

간이 떨어질 뻔한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 믿기지 않는 전과였다.

덕분에 페르디움은 축제 분위기가 됐고 영주인 즈발터는 마음 편히 북방 요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진짜 대공자가 그 정도로 해낼 줄이야."

펜리스는 이제 북부 최강이라 불리게 됐다. 북방은 안정이 되었다. 도로 건설 공사 덕분에 일거리도 많아졌고 식량은 넘쳐난다.

이제 그 누구도 페르디움을 예전처럼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지셀 덕분이다. 호메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그렇게 한가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와 말했다.

"대, 대공자님이 왔습니다!"

"오, 그래? 우리 대공자님이 왔어? 무슨 일로 왔대?"

"구, 군대를 잔뜩 이끌고 왔습니다."

"뭐? 얼마나?"

"4천이 넘어 보입니다."

그 말에 호메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지셀이 그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온 적은 없었다. 목재를 털어갈 때도 안 그랬다.

호메른은 찻잔이 떨어질 정도로 벌떡 일어난 뒤에 외쳤다.

"그 패륜아 놈이 드디어 역심을 드러냈구나! 힘으로 이곳을 차지하려고! 이 배은망덕한 놈! 우리가 이번 전쟁도 도와줬는데!"

"그런 게 아니랍니다."

"그럼 왜?"

"마수의 숲을 다시 개척하겠다고 합니다."

민망한 듯 자리에 앉은 호메른이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흠흠, 걔는 왜 항상 선 행동, 후 통보야? 뭐, 그래도 우리 치는 거 아니라니 다행이네."

아무리 영지의 대공자라지만 그냥 군대를 이끌고 마구잡이로 들어올 수는 없다. 다른 영지였다면 진짜 반역이라고 아버지와 전쟁이 났을 것이다.

이쪽이 깨질 게 확실하긴 하지만.

호메른은 입맛을 좀 다시다가 말했다.

"어차피 못 막았지?"

"네...."

"...그래, 그냥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해라. 남의 말 안 듣는 놈이잖아?"

"네...."

호메른도 그간 많은 일을 겪으며 변했다. 어차피 지셀과 관련된 일은 이쪽에서 막아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자신이 제일 앞장서서 막다가 여러 번 곤란해졌었다. 이번에도 막았다가 괜히 민망해지고 싶진 않았다.

펜리스의 깃발을 당당하게 휘날리며 지셀의 군대가 페르디움의 영지를 지나갔다.

"대공자님이다!"

"북부 최강!"

"여기 좀 봐 주세요!"

지셀이 지나가는 곳마다 영지민들이 쏟아져나와 환호를 보냈다.

어차피 이들에게 페르디움과 펜리스는 하나다. 그러니 자신들이 북부 최강의 영지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수없이 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는 모습을 보고 벨린다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전에도 몇 번 보긴 했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이제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북부의 망나니라 불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나 무시만 받던 사람이 영지를 살리고 북부의 대영주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지셀을 돌봐 왔던 벨린다는 눈물을 조금 글썽거렸다.

'이제 제발 사고는 그만 치고 평화롭게 살기를. 그냥 친왕파한테 다 맡기면 안 되나?'

두 손 모아 꼭 기도했지만 당분간 그럴 일이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수의 숲에 도착하자 이미 경비대가 나와 있었다.

지셀은 가장 앞에 있는 자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 스코반. 오랜만이야."

북방 요새에 잡혀 있던 스코반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들어가실 거죠?"

"그렇지, 지금 들어갈 거야."

그때와 같다. 다른 점은 따로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대놓고 간다는 점이었다.

스코반은 그냥 손을 쭉 뻗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기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들어가시죠."

피식 웃은 지셀은 스코반의 뒤에 있는 리카르도에게도 알은체했다.

"너는 여전히 잘생겨서 좋겠네."

"...감사합니다."

리카르도도 말리지 않았다. 대공자가 하는 일은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제일이다.

마수의 숲 입구를 보며 지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다시 보니 참 감회가 새롭다.

'그때는 목숨을 걸고 들어갔는데.'

그렇다고 지금은 쉽다는 건 아니다. 마수의 숲은 여전히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전생의 정보가 있다. 믿음직한 수하들이 있었고, 자신도, 그들도 이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와 같은 건 마음가짐뿐이다.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지셀은 다시 손을 높이 들었다.

"우리가 이곳에 다시 왔다."

기사와 병사들이 가슴을 펴고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들은 마수의 숲에 관한 온갖 소문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주는 이 북부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고 있다. 이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의 말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이번에는 우리가 마수의 숲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눈앞에 있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마수의 숲이 우리를 막아 내야 할 거다."

그의 눈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316화 우리를 막아 내야 할 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