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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넓은 극장 안.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은 고작 셋이었다.

바르간, 에리카.

그리고.

?인생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기회의 바람을 잘 타면 황금빛 미래에 도달하지만, 놓치면 인생의 항로는 여울에 박혀 불행하기 마련이니.

무대에 서 있는 남성은 길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입꼬리가 늘어나 귀까지 찢어진다.

"아아, 참으로 명언이로다. 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이런 진리를 세상에 뿌리었으며 어떤 과거에 존재했는가."

남성은 그가 사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극작가를 그리며 설치된 조명의 빛을 받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크고 익살스러워 그의 모든 행동이 연극처럼 보였다.

천장을 올려보며 생전 보지도 못한 이를 그리워하던 남성은 고개를 떨궜다. 삐딱한 시선으로 객석에 앉아 있는 두 관중을 바라본다.

바르간과 에리카는 두 눈을 감은 채 잠든 것으로 보인다.

"아름답다. 그대, 「성서」에 묘사된 것보다도 더욱 빛나는구나…!"

남성은 에리카를 가리켰다.

팔이 지나칠 정도로 길어 쭉 늘어놓으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운명'이라 이름 짓겠다. 아름다운 그대,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곳에 왔으며 어떤 기구함을 가지고 있는가."

남성의 팔이 서서히 길어진다.

고무줄과 같이 늘어나는 팔은 잠든 에리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다가간다.

그는 에리카의 눈물을 닦아서 핥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악몽을 꾸고 있는지, 어느 정도로 참혹한 과거를 되짚고 있기에 그리도 격한 감정을 담고 있는지 맛보기 위해.

응축된 눈물을 감미하기 위해.

"우리의 만남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구나. 서로 원망하는 가문. 서로 원망하는 종족. 하지만, 우리는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설령 그 끝이 비극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겠다."

남자의 손이 에리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에리카의 얼굴에는 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손가락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움직이며 첫 순간을 만끽하려 든다.

히죽이는 남자.

바로 닿기 직전까지 가까워진 손.

히지만, 이내 그 손은 눈물을 훔치지 못하고 일그러진다.

"끄아아아아아아???!!"

꽈드드드득??.

남자의 검지가 뒤로 접힌다.

중지, 약지, 새끼, 엄지. 모든 손가락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

계속 종이를 접듯, 접혀 들어간다.

손가락에서 시작돼 기다란 팔을 타고 올라간다.

팔목도 접힌다.

뚝? 뚝?

프레스기로 쭉 누른 채 반듯하게 접는 것처럼. 그의 몸은 비틀려 간다.

그 끔찍한 고통을 더는 참을 수 없어 남성은 팔을 잘라 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무에 벌레가 먹듯 몸통까지 이를 것 같았다.

?제법 훌륭한 연극이었다. 비록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으나 깐깐한 평론가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돌연 들리는 음성.

지극히 오만한 말이었다.

말하는 모양새가 자신 말고는 모든 이가 하찮고, 가치 없는 생물처럼 여기는 듯 느껴졌다.

남성은 입가의 비틀림을 더욱 구부렸다.

권능에서 벗어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놀람과 동시에 다른 사고가 함께 피어난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저 악당에 대한 분노심이 타오른다.

"뭐냐 네 녀석은…!! 뭐기에 악몽에서 깨어나 나를 방해하는 것이냐!"

저 남자는 성서에 적혀 있지 않았다.

본래라면 아름다운 그녀 홀로 이곳에 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판을 벌인 일을 뒤집을 순 없어 그대로 진행했다. 문제가 발생할 리 없었으니까.

'권능'이다. 그분의 피를 받은 진득한 권능이란 말이다. 한낱 예비 용사 따위가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을 터인데?!

한쪽 팔이 잘린 남성, 알티프는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상대를 죽일 것만 같은 눈을 하고 있다.

오만한 귀족은 하찮은 미물을 보는 멸시의 눈을 한 채, 남성에게 말한다.

"물음은 내가 한다. 너에게 허한 기억은 없다."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시끄러운 놈이군.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겠다. 그러다 내 약혼녀가 깨기라도 한다면 곤란하지 않으냐."

지성체 알티프는 더욱 험한 인상이 되었다.

저 오만한 녀석이 자신의 인연을 보고 약혼녀라고 말하는 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참… 약혼녀가 이상한 놈들에게 인기가 많으니 걱정이구나. 내가 잠을 잘 시간도 없으니."

스윽. 바르간은 외투에 꽂힌 손수건을 들어 에리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이 녀석???!"

고함과 함께 남성이 달려들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기물을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달려든다.

바르간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작게 읊조린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잘못되었다. 크게 잘못되었어."

바르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국면에서 성을 내야 하는 인물은 네가 아니라 나이거늘."

그의 눈이 한층 진지해진다.

56화

아카데미아의 남자 기숙사.

그중 하나의 방에서는 여신교의 끄나풀, 오셀 랑피트 보르그가 인지부조화 현상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과 감정이 이해되질 않는다. 그토록 증오했는데, 지금도 그러한데. 그 녀석을 보고 생각할 때마다 이와는 반대되는 감정이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네… 이놈… 슈겐하르츠…!!"

쿵!

그가 성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강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이 지끈거릴 때마다, 튀어 오르듯 그 존재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이 자라난다.

그는 자신을 이용하려 든다.

자신이 속한 여신교의 분파. 여신의 미를 현세에 조각하는 형상(形像)파를 조사하고자 한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바르간은 자신을 통해 형상파에 속한 신도들의 정보를 얻어 갔다. 심지어는 '벌레'에 대한 정보까지…!

절대로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그가 물으면 입이 자동으로 열리고 생각하고 있는 바를 훤히 드러내 보였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신실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여신을 배반하는 짓을 하다니!

차라리 놈에게 당하고 있다는 모욕을 여신교에 알려 본인의 평판이 떨어질지라도, 그를 처단할 인물들을 요청하고 싶었다.

"허엇…!! 허, 허억…."

또 숨이 차고 올라와 고통스럽게 한다. 어두운 숲에 홀로 던져진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극한의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젠장, 이래서.

이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놈을 배반하는 그러한 부정한 생각을 할 때마다 뇌가 어떻게 되어 버린 듯 특정한 감정을 발산했다. 대부분은 지금과 같이 공포심이었고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강해진다.

그날 이후다.

녀석이 자신에게 이상한 슬라임 괴물을 먹이고 최면을 건 이후부터, 강탈당한 몸은 그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기 쉽게 만들어진다.

"…!"

갑자기 감기에 걸린 듯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생각하지 않았어. 생각하지 않았다고…!"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긴 보르그는 힘껏 저어 대며 부정한다.

공포를 심어 둔 주제는, 바르간에 대한 배신의 사고만이 아니었다. 하나 더, 보르그가 더는 찝쩍대지 못하도록 바르간이 걸어 둔 안전장치가 있었다.

"에리카는 생각하지 않았어! 전혀 않았다고!! 그만, 제발 그만해 줘…!"

에리카의 상념에 걸어 둔 저주의 농도가 더 진한지, 그의 안색은 완전히 질려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에 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시엔 곧바로 강렬한 저주가 발동되고, 내부에 있는 바르간의 사역마가 마나를 쭉쭉 빨아들여 저항할 기세를 꺾어 버린다.

죽고 싶다.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

가끔 그런 열망이 들기도 했으나, 곧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금세 꺼져 잔향조차 남기지 않는다. 이는 바르간의 저주 때문이 아니다. 그저, 보르그. 그가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책상에 엎드리는 것마저 그만두고 바닥에 웅크려 앉은 보르그는 벌벌 떨기를 계속하다, 미친 사람처럼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띠었다.

힘들다.

죽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히, 히히히… 히."

귀신이 속삭이듯 작게 웃어 댄다.

오늘로 끝이다. 이 지옥에서도 해방이다.

지극히 오만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놈이다.

예비 용사가, 그것도 1학년밖에 되지 않는 놈이 뭘 어쩌겠다고 그곳을 간단 말인가. 자살하러 간 꼴이나 마찬가지다.

보르그는 자신이 알려 준 정보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 바르간을 떠올렸다. 그는 오늘 여신교에서도 형상파, 칼리쿨레아 주교님이 계신 극장으로 갔다.

이유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칼리쿨레아 주교님을 해할 생각이겠지. 어리석다. 너무나 세상을 몰라. 어떻게 주교님이 거기에 계신지를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들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게, 네 운의 끝이다.

죽어라.

죽어라 바르간.

그곳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제사를 위한 제물이 되어라.

"히, 히히히히히. 끼히히… 히윽??!"

웃다가, 공포에 질리다가.

보르그는 작은 방의 한편에서.

더욱더 바르간의 저주에 잠식되어 간다.

***

눈꺼풀이 얼어붙은 듯 떠지지 않는다.

어둠을 몰아내고 앞을 바라보고 싶지만, 끔찍한 악몽이 어린 에리카를 잡아 둔다. 슬퍼. 무서워. 그리워. …그렇게 조잘거리며 끊임없는 반복의 굴레로 끌어당겼다.

에리카는 그 모든 손을 뿌리치려 들며 저항했다.

지금 이 상황은 이상하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든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처음보다는 잡아 두려는 힘이 약해졌다. 마법을 걸었을 시전자가 집중할 수 없거나, 멀어진 것으로….

?!

근육이 끊어져라 힘을 주던 에리카는 간신히 어느 정도 몸의 권한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눈앞은 여전히 캄캄하고 오감은 멀어져 있으나, 체내 마나의 흐름은 조종할 수 있었다.

고오오?.

마나를 운행한다.

얼음의 계곡을 녹여 물길을 튼다.

조금씩. 조금씩. 모든 얼음이 녹아내린다.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가지가 모이듯 하나둘씩 모여든다.

내부의 마나가 정상적으로 움직여지자 몸의 감각이 더욱 빠르게 회복된다. 이젠 눈을 뜰 수 있다.

에리카는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조명. 무대에 켜져 있는 불빛이 간신히 모습을 보이려는 눈동자를 도로 돌려보내려 든다.

에리카의 고운 미간이 모였고, 움직인 동공은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시야에 두 인형(人形)이 보인다. 아니, 한 사람은 팔이 지나치게 길게 뻗어져 있어 괴기한 모습이다.

에리카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집중한다.

『빌어먹을 녀석! 네놈이 방해하여 나의 연인이 축복에서 깨어나지 않았느냐???!! 네놈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의 몸속엔…!』

에리카는 놀란 숨을 마셨다.

똑바로 직시하게 되니 더욱 기괴하다. 사람은 절대 아니다. 마물… 괴물… 아니, 저건… 알티프…? 하지만, 저렇게 인간을 본뜬 형체는… 분명 제3 위험군, 주교급 이상?.

"칼리쿨레아. 내가 입을 다물라 하지 않았더냐."

차가운 대기를 뚫고 선명히 들리는 남자의 음성.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이 소란스러운 극장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마법을 쓴 것처럼 에리카 귀에 곧바로 전해졌다.

어딘가 분노가 깃든 듯한 목소리.

언제나 보이던 남을 괄시하는 미소도 사라진 상태다.

"...."

아주 잠깐이지만. 바르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물건의 상태가 무사한지를 확인하듯, 무심하게 한번 시선을 두고는 거두어, 바로 앞의 괴물을 쏘아본다.

에리카는 그를 부르려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간신히 작동하기 시작한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든다.

바르간은 그런 에리카의 행동을 막았다.

"아카데미아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거라, 에리카. 지금 무리해서 움직였다간 이 전투 이후 한 걸음도 걷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던 에리카는 입을 열어 자신은 아무 문제 없으며 싸울 수 있다고 말하려 들었다.

하나, 입만 뻐끔거려질 뿐 목대가 울리지 않는다.

아직 온전히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다.

"내가 뭐라 했느냐."

그제야 그가 웃어 보인다.

옅은 미소.

"네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에게 업혀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 거기 '앉아 편히 잠'이라도 자거라."

"...!"

저주의 마력을 담은 어구에 에리카의 다리의 힘이 풀리며 눈가의 초점도 사라져 간다. 평소의 그녀라면 벗어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에리카는 자리에 도로 앉게 되었다.

움츠리는 미간은 강제로 펴지고 눈꺼풀이 덮여 온다.

"슈겐… 하르츠...."

고개를 꺼트리기 바로 직전, 간신히 그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바르간의 옆모습이 보인다. 점차 흐려진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리카는 세상 누구보다 편한 얼굴로 곤히 잠이 들었다.

좀 전과 같은 악몽은 꾸지 않을 듯하다.

***

내가 녀석의 권능, '악몽'에 걸려들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두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자동차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에 차 두 대가 들어설 수 없지 않은가. 마법과 결이 다른 여신의 힘이라 한들, 한 번에 두 개의 꿈을 동시에 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말이지.

촤악??!!

잘라 버린 칼리쿨레아 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라나 활처럼 내뻗어진다.

그 속도가 상당하다.

진동하는 파공음에 눈살을 찌푸리게 될 정도로.

과연, 주교급은 다르다.

알리시아가 상대했던 사제 녀석들의 촉수는 이보다 훨씬 느렸다. 상정했던 대로 만만한 놈이 결코 아니다.

녀석은 계속해서 양팔을 내찔렀다.

쾌속으로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그의 신체는 거대한 고무줄같이 탄력적이고 재빠르다.

『아까부터 제대로 된 마법 한 번을 못 쓰고 있지 않으냐! 나불거리는 주둥이치고는 고작 피하는 게 전부라니! 우습도다! 너무나 우스워!』

칼리쿨레아는 밀어붙이는 현 상황이 우세하다고 여겼는지 신나선 더욱 속도를 높여 갔다.

용사처럼 오러를 두르지 않았지만 순수한 신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파괴력이 대단하다.

나는 그 맹공을 유영하듯 피하며 분석을 이어 나갔다.

"네 녀석이 몸이 돌보다 단단하다는 건 잘 알겠다. 연극보다는 광산으로 가는 게 나을 뻔했구나."

칼리쿨레아의 눈빛이 강렬해진다.

이 녀석에게는 웬만한 다른 욕보다는 연극과 관련된 발언을 하는 게 효과적인 듯싶다.

그때.

마주친 칼리쿨레아의 눈동자가 물감처럼 번져 보인다.

녀석이 또다시 권능을 사용했다.

방금처럼 미리 저주를 걸어 놓는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녀석의 저주에 걸리지는 않겠으나 잠들어 버리면 무방비하게 돼 버리는 건 마찬가지이니.

씨익.

녀석이 웃는다.

그 미소마저 흐릿해진다.

눈이 점차 감기며.

내 몸이 서서히 느려짐을 느낀다.

정면으로 쏘이는 놈의 강철 같은 주먹.

?아, 이런. 이건 못 피하겠구나.

콰드득?!

그대로 안면에 꽂힌 주먹.

코뼈와 함께 얼굴 골격을 깨부숴 버린다.

그 충격에 포탄처럼 날아가 버렸다.

칼리쿨레아는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며 징그럽게 웃어 보였다. 소품이 쌓여 있던 뒤편은 먼지로 가득하게 되었다.

칼리쿨레아는 그 미세한 입자들의 향연을 지켜보며.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다시 강한 일격을 가했다.

미처 대항하지 못한 커다란 충격.

녀석의 공격은 끔찍하여 그대로 나의 복부를 뚫어 버렸다?

?라고. 적혀 있어야 네가 원하는 각본일 텐데.

인생이란 역시 정해 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구나.

그렇지 않나, 칼리쿨레아.

『...!!』

허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칼리쿨레아의 눈이 생선 눈깔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사람도 아닌 주제에 얼타는 모습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툭툭.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칼리쿨레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저기 아무도 없는, 소품이었던 잔재들 말고. 나를 바라보라는 신호였다.

"네 녀석의 전투는 아름답지 못하구나. 너는 네 스스로를 극작가라고 칭하는 것 같지만, 네 성향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렇듯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게 네 본성이지."

끄드득, 끄득.

중첩된 저주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한심한 주교.

칼리쿨레아가 전신 근육을 꿈틀거리며 격한 분노로 차오른 얼굴을 돌린다.

빠드득?거리며 녀석의 고개가 돌아간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틀어지는 고통조차 아무렇지 않은지 성난 눈으로 현실을 부정한다.

『이상해… 이상해… 네… 녀석은… 나보다 떨어진다. 분명히 그렇다 …나의, 나의 먹이가 되어야 해… 지금 이 상황은 말이 되지 않아…!!』

흠.

리암처럼 전투력을 수치화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장담은 못 해 주겠지만, 녀석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칼리쿨레아. 이 녀석은 나보다 순수한 전투력에서 더 높다.

강인한 신체는 물론이고 마법 저항력, 성가신 저주의 하모니는 실로 위협적이라 기존의 바르간이었다면 정말로 복부가 관통되었겠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마나… 그 밖에도 더 있다….』

칼리쿨레아는 내가 본인에게 건 저주의 이름을 하나씩 언급했다. 지금의 꼴은 추레할지라도 꼴에 주교급이라고 저주의 파악은 끝난 모양이다.

녀석이 말하는 바가 옳다.

내 저주 하나로는 녀석을 속이기 어렵다. 가느다란 실로 묶는다고 해서 성인 남성이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니듯.

해서, 나는 그 실을 중첩했다.

하나로는 눈을 가리고. 하나로는 귀를 가리고… 그렇게 한 올 한 올 겹쳐 싸여 가다 보면 성인 남성이라도 벗어나지 못한다.

뭐, 그마저도 차이가 너무 나 버리면 무용지물이지만 적어도 이 녀석과 나의 위치에서는 먹혔다.

빠드득.

그의 이빨이 아스러진다. 격한 분노를 견뎌 내지 못한 가엾은 부산물이다.

그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마나 총량이… 그 정도 되는 인간이… 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 없다… 뭐냐, 뭐야. …네놈은, 네놈은 대체 뭐냔 말이다…!』

하나는 아카데미아의 총장이라 이건가.

하기야, 이 녀석이 보기에도 그 사람은 마법의 가장 꼭대기인 초월자(超越者)에 속하니까.

미안한 말이나, 나는 아직 그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 괴물 주제에 과분한 평가를 주는군.

"네 녀석이 궁금해하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 이상하겠지.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니 말이다."

나는 품에 넣어 뒀던 철퇴를 꺼냈다.

착, 착.

가볍게 손에 부딪히며 말을 이어 나간다.

"…말하지 않았는가. 네놈 따위에게 물음을 허한 적 없다고."

『내가 그런 고문 따위에 입을 여리라 보는 건가! 한낱 인간에게?!』

"글쎄… 확언할 순 없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커다란 고통이라면 열지 않겠느냐."

손에 쥔 철퇴를 들어 올리며 말을 잇는다.

으음? 하며, 다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극작가를 자칭하는 녀석을 위한 내 연출이다.

"촉각은 어디에서 오겠느냐."

내 물음에 녀석은 대답하지 않는다. 여전히 꾸득거리며 억지로 내가 건 저주에서 벗어나려 들 뿐이다.

나는 살며시, 애쓰는 녀석의 몸에 손을 대 주었다.

성녀가 어린아이를 감싸 주듯 조심스럽게.

이윽고 칼리쿨레아는 변화를 알아차린다.

"답은 신경(神經)이다."

철퇴를 휘둘렀다. 일반적인 오러를 담았다.

녀석이 비명을 지른다.

특별히 다른 힘을 싣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녀석의 몸 정도지.

콰직?! 콰직?!

아, 그래 그게 좋겠군.

내기를 하도록 하자.

콰직?! 콰직?!

내가 철퇴를 휘두른 횟수의 절반 이하로 비명을 지른다면 네 승리. 초과면 내 승리. 승리한 사람이 원하는 걸 묻고 들을 수 있는 권한을 받는 게지.

오, 이 얼마나 참된 인간군상이란 말인가.

이토록 천한 것에게도 기회를 주려 하다니.

인도(人道)를 추구하고 미물조차 아끼니 그 선량한 마음에 악마조차 속죄의 울음을 터트리는구나.

?끄으아아아아아악!!

어떤가. 칼리쿨레아, 네 의견이 듣고 싶구나.

그리 울지만 말고 대답을 해 다오.

57화

콰직!

일천오백쉰다섯.

콰직!

일천오백쉰여섯.

콰직!

일천오백쉰일곱… 음?

저주 마법으로 칼리쿨레아의 신경 작용을 증폭시키며 철퇴를 휘두르고 있던 도중.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

문뜩 지식이 통과되지 못하게 막고 있던 커다란 문이 개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청아해지며 탁 트이는 감각.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한층 확장되는 신비.

리암이었다면 상태창이 뜨면서 이런 문장이 떠올라왔을지 모르겠다.

?띠링!

저주 마법이 「해득(解得)」 계위에 도달했습니다!

미소가 지어졌다.

가까워졌다고 인식은 하고 있었다. 해서 이번 칼리쿨레아를 상대할 때 사역마를 사용하지 않고 저주 마법만을 활용했다. 끊임없이 마나를 소모해야 하는 녀석을 토벌하는 건 결국 도움이 된 것이다.

『...죽…여.』

비단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칼리쿨레아였던 수수께끼의 생명체가 잔뜩 일그러져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입을 벌리려 든다.

일천 번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정신을 잃고 깨기를 반복하며 악몽 같은 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철퇴를 내리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녀석과의 내기에서 횟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일천 번까지는 전부 비명을 질러 댔으니 너그러운 나는 정확히 이천 번이 될 때까지 녀석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생각이었다.

과연, 귀족의 귀감이지 않은가.

그런 내 깊은 속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칼리쿨레아는 죽여 달라는 등의 연약한 말을 씹어 댄다.

이런,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무승부로 하자꾸나. 나도 참 마음이 여려서 문제로다. 세계를 구할 영웅이라면 보다 강인한 심장을 가져야 하거늘. 이리도 사람이 좋아서야."

칼리쿨레아는 입을 꿈틀거리나 별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리 붕어처럼 뻐끔거리지 않아도 네가 궁금한 건 다 알고 있으니 괜찮은데 말이지.

"내 마나 총량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해득의 계위에 오른 참이겠다. 내 특별히 너에게는 진실을 알려 주마."

네가 이해할지는 둘째 치고.

정제된 진실을.

나는 녀석의 머리채를 집어 들어 눈을 마주하게 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말을 하는데 상대방이 땅바닥만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어야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피범벅이 된 칼리쿨레아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은 지금의 상황에 사뭇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다.

"빙의 특전이다."

그 왜, 리암 녀석이 소설에 빙의하면서 상태창이라는 사기적인 무기를 얻지 않았는가. 아둔한 녀석이 그 하나 가지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주연들의 앞에 섰었지.

그렇다면, 나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이다.

상태창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무언가.

그래, 가령 마나 총량만은 초월(超越)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게지. 아직 계위로서는 도달하지 못하나 이를 이룰 수 있는 무궁무진한 마나의 재능을 받게 되었다면.

지금의 이 광경도 이해되지 않겠는가.

"알겠느냐."

내 물음에 칼리쿨레아의 비틀어진 입에서 샌 소리와 함께 단어가 기어 나온다. 너무 미약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어떻게든 두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죽…여....』

진즉에 생기를 잃은 눈동자는 삶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지금의 순간으로 물꼬를 튼 건지 녀석은 계속해서 죽여 달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아무래도 완전히 망가진 듯하다.

"곤란하군. 이래서야 내 물음에 대한 답을 놓기가…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처음부터 노리고 진행한 고문이었지만, 괜히 한번 말해 봤다. 이곳은 무대 위. 적당한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세에서의 버릇 같은 거지.

나는 칼리쿨레아에게 중복으로 걸었던 대부분의 저주를 해제했다. 지금부터 해야 하는 다른 저주는 높은 집중도와 숙련도를 요한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오롯이 듣기 위해서는 다른 부가적인 요소들에 대한 신경을 꺼 둘 필요가 있다.

칼리쿨레아의 품 안에 있던 작은 병을 흔들어 보였다. 안에는 뾰족한 침을 달고 있는 작은 벌레가 반응을 보인다. 흔들어서 화가 났는지 작은 몸뚱이를 병에 부딪혀 댄다.

나는 칼리쿨레아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형상파에서 에리카를 노리는 이유가 뭐냐."

보르그, 그 스토커 녀석에게 칼리쿨레아가 여신교의 벌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때부터 가설은 확정되었다.

원작의 뒷배경에서. 에리카는 보르그를 통해 관찰되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이나 성향 따위가 보르그의 본위는 아니었으나 분석되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도 바르간과의 기념일 약속에서 바람을 맞은 에리카는 홀로 극장에 들어서고 준비하고 있던 칼리쿨레아에게 당해 무방비하게 되어, 여신교의 벌레를 주입받는다.

여신의 벌레, 신충(神蟲), 알티프의 씨앗.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은 꽁지의 침을 통해 에리카의 몸속으로 이동했다. 그 벌레는 칼리쿨레아의 피를 빨아먹은 녀석이었다.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며 에리카가 저항할 수 없는 틈을 이용해 작업을 끝낸다.

작업은 변모의 과정을 말한다.

지성체 알티프는 번식을 할 수 없지만, 무지성체는 다르다. 그들은 촉수에 달린 침을 이용해서 사람의 몸에서 각종 세포와 DNA 변형을 일으키며 이걸 번식이라고 일컫는다.

번식을 당한 사람의 지성은 파괴되고 또 한 마리의 사제급 알티프가 되어 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종을 이어 나간다.

그런 알티프의 침을 이용해서 개량된 벌레, 그것이 신충.

....

지독한 일이다.

벌레는 언제든 칼리쿨레아가 지시하면 에리카를 '알티프'로 변모시킬 준비를 마쳤다. 그는 이를 협박의 구실로 삼고 에리카를 뒤흔든다.

아니, 뒤흔들었을 것이다.

에리카는 악역영애. 비극적인 죽음이 당연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추측했다.

그녀의 본 성격을 알고 있는 나, 바르간이.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역을 자청하며 아카데미아에서 이상행동을 벌이기 시작한 시기를 짐작하여.

지금의 이야기에 도달했다.

내가 전에 열 번은 에리카에게 점심 식사 제안을 해야 할 거라 추측했던 것이 이런 까닭이었다. 당시엔 뒷배경에 칼리쿨레아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에리카… 그녀…는….』

무의식에 빠진 칼리쿨레아가 말을 잇는다.

형상파가 그녀를 노리는 이유?

그야 짐작은 가며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단지 성서에 적힌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결국은 성서에 명시된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니 어떤 이유를 가졌든지 그녀를 노렸을 것이다. 이유야 부가적인 사항에 불과하다.

왜?

왜냐고?

어째서냐고?

『…여신님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칼리쿨레아.

네 녀석은 틀렸다. 형상파가, 여신의 외관을 표현하려는 그들이, 에리카에게 접근한 본질적인 까닭은 그게 아니다.

형상파가 조각한 여신의 모습만 하더라도 수백 개.

그중 에리카와 닮은 형상은 단 하나.

"내가 말해 주마. 네놈들이 에리카에게 접근했던 연유는…."

?소설의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다.

콰직??!

나는 녀석의 머리를 그대로 으깨 버렸다. 칼리쿨레아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재생도 되지 않는다.

완전한 죽음을, 극에서의 퇴장을 맞이한다.

"...."

머리를 으깰 때 그만 피가 튀어 버렸다.

손수건을 꺼내서 적당히 얼굴을 닦는다.

이럴 때 클린 마법 같은 편리한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쉽게도 이 세계에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그 어떤 멋스러운 이유를 붙여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 소설 속의 모든 인물은 정해진 결말과 전개를 따르기 위해 존재하고 만들어졌다.

보르그가 에리카에게 연심을 품고 스토킹한 것도.

칼리쿨레아가 성서에 적힌 대로 에리카를 맞이한 것도.

우연의 연속으로 에리카가 여신교에 입교한 것도.

그리고, 바르간의 죽음조차도.

모든 요소는 소설의 완결이라는 종착점을 위한 선로이다.

?꽈악.

철퇴를 쥔 손의 악력이 강해졌다.

입으로 소리를 내지도.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전한다.

혹시라도 놓치지 않도록 확실하게 생각한다.

자, 보아라.

여신교에 편입돼야 할 에리카는 그 개연성을 잃었다.

그녀가 이날 이후로 갑자기 여신을 추종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기존의 역사를 따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변혁이 필요하겠지.

틀어진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잃어야만 목표에 다다를 수 있으니, 좋을 대로 휘저어 주겠다.

보아라.

똑똑히 지켜보거라.

내가 바꿀 이후의 전개를!

***

오후 11시 05분.

바르간과 에리카가 있던 극장에 아카데미아의 교수들이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이사를 맞이한 건 바르간이었다.

그는 노란 조명의 빛 아래에서 피범벅이 된 무대에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잔뜩 부서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주교급 1체가 있었다.

교수들은 눈을 회동그래 뜨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었다. 훼손이 심하게 됐지만, 사람의 형상을 한 알티프임이 틀림없다. 최소 주교급이라는 사실.

이럴 수가. 아카데미아 1학년이 주교를 죽였다.

선두에 있던 루이사는 빠르게 바르간과 객석에서 잠들어 있는 에리카의 상태를 눈으로 살폈다. 별다른 피해는 보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쿵쿵! 거리며 분노가 섞인 발걸음으로 나섰다. 바르간을 앞에 두고는 잔뜩 찌푸린 눈매를 보인다.

"내가 어떤 말을 할 것 같나, 수석."

"주교급을 잡았으니 마땅한 찬사를 하리라 봅?."

『개소리 지껄이지 마????!!』

그녀의 노기가 마력과 함께 극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댔다. 함께 온 다른 교수들도 자못 놀라, 얼어 있다.

바르간은 무심한 눈동자를 일관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루이사는 바르간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이렇게 되리란 걸 분명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늦으면 어떻게 조처되는지를 물었던 거고, 찾기 쉽게 마나의 기척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주교급 이상을 보면 도망치라고 했던 게 우스웠나? 그래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거냐??!"

"상처 하나 없이 잡았으니 된 거 아닙니까."

"주교는??! 단순히 무력만을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

바르간은 그녀가 어떤 의미로 지금 이렇게 성을 내고 있는지 알았다.

주교 이상 존재의 죽음은 곧바로 모든 알티프에게 전해진다. 또한 살해자는 그들에게만 보이는 흔적이 남는다.

그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쌓이면 쌓일수록 진한 향수처럼 알티프의 주목을 모은다.

바르간은 그 첫 번째 향기를 묻혔다.

"이 녀석이 속한 집단의 상위 개체가 너를 노리기 시작할 거다. 대주교, 추기경! 그런 놈들이 네 앞에 나타나더라도 지금과 같이 무사할 거 같으냐?!"

루이사는 바르간의 멱살을 잡으며 흔들었다.

그녀는 바르간을 걱정하고 있었다. 용사 중에서도 신입들이 특히나 죽어 나가는 이유가 이 옅은 잔향이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강해지기 전에 죽인다.

성장하기 전에 자른다.

지성체의 알티프는 교활하고 똑똑한 놈들이다. 견고한 방어를 받지 않으면 그 옅은 향을 따라 짐승처럼 달려든다.

"아카데미아라는 방파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용사를 육성하는 기관을 알티프가 기습하지 않는 이유는 방어가 극도로 견고하기 때문이다.

루이사는 멱살을 더욱더 강하게 쥐며 반박한다.

"앞으로 네가 가는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아카데미아에서 평생을 썩을 것도 아니면서, X도 생각지도 않는 말을 씨불이지 마."

"용사가 적을 두려워해서 어쩌겠습니까. 오히려 두 손 벌리고 환영할 일입니다."

"이놈이 그래도…!"

"아, 잠깐잠깐. 루이사. 화가 나는 건 알겠는데. 우선 다친 곳이 없는지 정밀 검사부터 해야 할 거 아니야! 뭐 해요 도려… 아니, 바르간! 이 근육몬은 내가 붙잡아 둘 테니까. 빨리 저기로 가."

중간에 끼어든 파울라가 루이사의 양팔을 붙잡는다. 루이사의 괴력을 감당하기 힘들어 허둥대지만, 마력까지 끌어 내며 막는다.

루이사에게 벗어난 바르간은 그대로 물러서려 한다.

뒤처리는 이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정말 조심하긴 해야 해."

파울라가 바르간에게 우려 섞인 말을 보냈다. 조명을 담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주교 하나는 아카데미아의 어떤 교수가 있어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정말….

"제2 위험군… 대주교부터는 우리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명심하죠."

바르간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잠들어 있는 에리카를 번쩍 들고는 자리에서 벗어난다.

그가 파울라에게 예의를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울라는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불안함을 느꼈다. 바르간이, 그 찬란한 슈겐하르츠의 삼남인 그가.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58화

에리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 잠이었다.

하루에 이 정도의 숙면을 한 건 아주 어릴 적 이후론 처음이다.

여린 밤하늘의 빛을 받고 있는 남자의 형태가 보인다.

그가 말을 걸었다.

"일어났나."

"…여긴."

"보다시피 아카데미아로 돌아가는 비공정이다. 이미 통금 시간은 훨씬 지났지만 말이다."

"...."

교수들은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의 조사를 이어 가고 바르간과 에리카만이 별도의 비공정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옆에는 관계자 한 명이 있었지만, 피곤에 찌들었는지 잠을 자고 있다.

상황을 대강 파악한 에리카의 눈이 커진다. 다급하게 바르간을 부르며 전말에 관해 묻는다.

"알티프는…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너는…."

바르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은 죽었다. 또한, 내 걱정도 할 필요 없다."

"...."

에리카의 눈꺼풀이 나비가 앉듯 가라앉는다. 잠시 정적을 유지하더니, 네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뒷말을 덧붙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무사한 건가. 관객으로 가득했었는데."

바르간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관중도, 다수의 배우도 없었다. 무대에 있는 건 오로지 한 마리의 괴물이었지."

"입구부터가 함정이었다는 건가."

"그렇지."

"그래… 하지만 왜 우리를…."

바르간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며,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아서 휘말린 걸 수 있다고 넘긴다.

"포트레트가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없었다. 하긴, 있었다면 네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만."

"…악운이 겹쳤다는 거네."

에리카는 그의 말의 진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가 전달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매우 정신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내 주신 티켓.

그 극장에 잠복해 있던 주교급 알티프.

오늘따라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가문의 관계자.

이 모든 게 '악운' 하나로 연결되었다.

"하아…."

에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안도감, 자괴감 따위가 담겨 있었다.

바르간은 알티프의 함정을 깨닫고 녀석을 처치했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포트레트가의 영애라는 자가 한심스럽게도 괴물이 설치한 덫에 걸려 허우적댔다. 그럴 뿐만 아니라, 원망스러운 남자 슈겐하르츠에게까지 큰 빚을 지고 말았다.

"...."

"짐이 되어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된다. 앞으로 얼굴 볼 날도 많으니 말이다."

"...."

에리카는 안하무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알티프의 주교를 상대한다는 큰일을 겪고 나서도 이렇게 태평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존경심마저 들어, 더욱 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에리카는 마음에도 없는, 아니 어쩌면 약간은 있을지 모르는 그런 말을 뱉었다.

"…버리고 가지 그랬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함정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냐고."

그녀는 입술을 작게 깨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감은 이미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갔더라면, 이 지독한 관계가 쉽게 정리될 수 있었다. 그도 자신도 바라지 않는 약혼.

마침 티켓은 포트레트가에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바르간이 함정임을 깨닫고 자신을 버리고 갔더라면 무난하게 파혼은 물론,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포트레트가에서 준비한 장소에 알고 보니 알티프가 있었고, 간신히 도망쳐 나왔지만 부득이하게 약혼녀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이렇게만 입장을 발표했다면 말끔하게 끝났을 텐데.

다소 수군거릴지 몰라도 대부분 화살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

"에리카."

바르간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리카는 고개를 올리지 않는다. 복잡한 여러 감정이 그녀가 고개를 드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에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바르간의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물었다."

"...."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바르간은 꼬리를 이었다.

"너를 버리고 가면 내 입맛대로 이야기를 조합할 수 있으니 그 점을 짚는 건가 너는?"

"...응."

에리카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다시금 들리는 그의 기나긴 한숨.

들리는 소리로, 그가 다소 화가 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그런… 아니,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랬다면 이 약혼도 손쉽게 끝낼 수 있었겠지."

"...."

"아니지, 어쩌면 나는 이번 사건을 이용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비참하게 죽어 거름이 되었을 때. 나는 사랑스러운 약혼자를 죽이고 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포트레트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었겠지."

"...."

"악착같이 달려들어 포트레트의 명예는 땅으로 꺼지게 만들고, 배상금까지 두둑이 받아 내려 닦달했을 수 있다. 그 돈을 물 새듯이, 방탕하게 낭비하며 말이다."

"…!"

이어지는 폭언을 참지 못한 에리카는 기세 좋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소량의 눈물이 올라와 있었다.

바르간은 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 짓는다.

"이제야 고개를 드는구나."

"…너는… 너는…!"

에리카는 급하게 눈가에 맺히려는 눈물을 닦아 낸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선수를 치는 건 바르간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럴 수 있었지. 모든 걸 한순간에 끊어 낼 수 있었어."

"그럼?!"

"하나, 그러지 않지 않았느냐."

바르간은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전한다.

"그런 가정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지금 너는 이렇게 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지. 어디 그뿐인가, 오른 눈물을 숨기며 옅게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있다."

에리카, 지금의 너는 이렇게 살아 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굳이 모진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말거라.

바르간의 눈을 바라본 에리카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모르겠다.

슈겐하르츠, 너를 모르겠어.

왜 살려 준 거야. 왜 끊어 내지 않은 거야.

왜… 왜….

왜 다시 다가오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바르간은 그녀를 쏘아붙였다. 에리카가 장막으로 자신을 가리는 꼴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아니면, 정말 그런 말을 뱉고 싶었던 거냐."

"...."

그녀는 숨과 함께 떨리는 동공을 바로잡으려 들며 바르간을 직시했다.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부정적인 가정으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고 싶었던 게 아니다. 이런 순간조차 솔직하지 못한 건 자신의 나쁜 점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방 안에 든 벌레를 밟듯 죽여 버린 이 녀석에게 숙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맞불을 피웠다.

....

에리카는 숨을 고른다.

지금의 자신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조금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이래선 안 된다.

그녀는 다짐을 마친다.

에리카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바르간이 담겼다.

"나는 아직도 너를 원망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마 평생을, 너를 증오하며 살겠지.

"너에게 긍정적인 감정 따윈 느끼지 않아.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뭐, 그렇겠지. 이 정도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

"?하지만!"

그 짧은 단어 하나에 공기의 흐름이 뒤바뀐다.

"하지만… 포트레트가의 차녀로서… 가문의 대표자로서… 너에게 감사를 표할게."

에리카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인다. 다리 한쪽은 뒤로 빼었고, 양손으론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다.

깔끔한 동작. 그녀를 비추는 미세한 불빛.

그 그림 같은 광경은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날 구해 줘서… 홀로 두고 가지 않아 줘서… 고마워."

에리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한다.

바르간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지는 않을 거란 걸.

?달달달.

비공정이 얕게 떨렸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달달달.

그 작은 진동을 체감한다.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일, 날이 밝으면 귀찮은 과정을 거쳐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이럴 때 참 불편하다.

에리카와 함께 걸어가다, 그녀는 자신을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하면서 곧바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의 날이 선 목소리가 아니라, 기세가 약했다.

"음?"

그렇게 내 방문 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며 시선이 교류한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알리시아가 옅은 웃음을 보인다.

단아함을 한껏 감싸 안은 그녀는 나를 반긴다.

"…그래. 계속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던 것이냐."

"도련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략 4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그녀는 방문 앞에 서서 일말의 미동도 없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미련한 녀석."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대충 시간을 보고 너무 늦었다 싶으면 돌아가는 게 정상일 텐데… 아, 하긴 이 녀석에게 상식을 기대하는 건 맞지 않지. 내 실책이다.

"마나 총량을 확대하거나, 내부의 불순물들을 제거하면서 기다렸기에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잘했구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는 듯, 알리시아는 요점을 정확히 짚어 나에게 전했다.

솔직히 말해, 알리시아의 발전을 염려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지만. 그녀는 내 반응을 오해한 모양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나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의 세심한 눈길이 곳곳에 닿는다.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당연한 말을."

그딴 수준 떨어지는 괴물에게 피를 볼 수는 없지. 지금의 나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이렇듯 말끔하게 주교급을 퇴치할 수 있다.

"...."

그대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내 발치를 본다. 단순히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진중하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다소 불안하고 어두운 모습이다.

그녀가 운을 뗀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도련님께서 피곤해 보이시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으고 있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깊게 허리를 접는다.

원래 그녀의 성장을 확인하는 시간대에서 지난 건 맞지만,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전혀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아니, 그건 그렇고 이 녀석 보소. 뭐 하는 거야.

"도, 도련님…?!"

나는 강하게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끌고 왔다.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던져 버린다.

영문도 모른 채 의자에 앉혀져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살핀다. 잡은 얼굴이 붉고 뜨겁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시선은 이리저리 방황한다.

병이나 외상 때문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딱밤을 날렸다.

"앗?!"

오랜만에 손가락이 아리다.

"누가 멋대로 꿍해져서는 검사도 맡지 않고 돌아가도 된다고 했나. 어처구니가 없이!"

"예, 예…? 하, 하지만… 이미 너무 날이 늦었고… 도련님께서도 피로가 누적되신 듯하여…."

"그럼 뭐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냐."

"그거야… 도련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는 걸 확인하기?아앗!"

두 번을 같은 곳을 강타하자, 알리시아의 눈에서 방울진 눈물이 올라왔다. 이런 명연기를 보니 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살피는 눈이 좋아졌다는 건 내 인정하마, 하나, 정작 최근 네 스스로의 상태는 전혀 모르는 듯하니 오늘은 그 교육을 할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힘들게 자존감을 올려 주었더니, 최근부터 도로 내려가고 있지 않으냐! 이 한심한 녀석아!"

?따악!

같은 곳을 세 번째.

이마가 시뻘겋다. 내 손가락도.

"도, 도련님… 너무 아픕니다…."

"그게 지금 네 상태다. 어딘가 정신적으로 아프지. 하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확실히 고쳐, 곤두박질치고 있는 자존감을 강제로 잡아 올려 주마."

"그 말씀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새빨갛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다.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일은 앞머리로 이마를 꼼꼼히 가려야 할 듯하구나.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도, 도, 도련님…!"

그렇게.

남자 기숙사에서 울리는 청명한 소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59화

"우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로 향하는 알리시아.

그녀는 잔뜩 부어오른 이마를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다음 날에는 말짱해졌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하다. 욱신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진통이 올 때마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알리시아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자신을 긍정하는 말을 뱉어 내야 했다. 조금이라도 우울한 기색을 보이거나, 머뭇거리면 가차 없이 딱밤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이 내려졌다.

…이 정도로 연속으로 맞은 건 처음이었다.

그런 그녀를 등을 살며시 건드는 한 사람.

화들짝 놀란 알리시아의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저, 저는 잘났습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우월하고 아름답습니다!!"

"알리시…아?"

"…에, 에밀리 씨?"

자신을 터치한 인물이 에밀리라는 사실을 인지한 알리시아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곧, 퐁? 하고 얼굴을 붉혔다. 정처 없이 열린 입이 꾸물거리기를 반복한다.

바르간에게는 익숙한 알리시아의 면모였으나, 에밀리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에밀리는 알리시아의 이마를 들췄다.

"이, 이게 뭐야…?! 대왕 말벌에게라도 물린 거야?!"

대체 얼마나 큰 벌이 쏘았으면 이렇게 되는 거지? 라는 말을 덧붙이며 에밀리가 알리시아를 걱정한다.

"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밀리 씨."

"괜찮기는, 피멍이 들었는데! …설마 바르간이 이런 거야? 진짜인가 보네?!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읍!"

그녀가 커다랗게 떠들기 시작하자, 알리시아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고, 에밀리의 입을 막았다.

"정말 괜찮아요…! 다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제발 조용히… 연구실 근처잖아요!"

알리시아는 겁에 잔뜩 질린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에밀리는 이런 알리시아의 모습도 처음 봤다.

입이 막힌 에밀리는 숨 쉬는 것이 어려웠고,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알리시아가 다급히 손을 뗀다.

에밀리는 콜록거리며 목을 매만진다.

"미, 미안해요 에밀리 씨…!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아, 이걸 어떻게 해야…."

알리시아가 허둥지둥하며 에밀리에게 치유 마법을 걸었다. 알리시아는 필사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다치거나 한 건 아니라 효과는 없었다.

푸, 프흡? 에밀리의 몸이 떨린다.

알리시아는 더욱 놀라, 치유 마법의 강도를 높인다.

"아하하하?! 그만, 그만해도 돼 알리시아!"

"예? 하, 하지만…!"

"이 정도로 누가 치유 마법을 걸어. 과잉보호에도 정도가 있지."

그제야 알리시아는 치유 마법을 거두었다. 에밀리는 웃음 때문에 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아, 정말… 너도 이렇게 당황하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구나. 와, 진짜 신기한 거 봤네."

"무슨 말씀이신지…."

"항상 빈틈없고 완벽하게 행동하기에 무슨 초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하기야, 바르간이랑 있을 때는 자주 부끄러워했으니까."

"으으…."

터지다 못해 귀까지 새빨개진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창피함을 감추려 들었다. 에밀리는 새로운 알리시아의 반응이 놀라우면서도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깜찍하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숨기고 다녔는지 몰라."

"…놀리지 말아 주세요. 에밀리 씨."

두 손으로 얼굴을 숨기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알리시아를 보던 에밀리는 놀림을 멈추고 감탄을 이어 갔다.

"와… 예쁜 사람이 애교까지 있으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바르간이 왜 그렇게 알리시아를 다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아, 그래도 이번에는 너무했어. 회복 마법 걸어 줄까?"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었고, 침착하려 애썼다.

명문 슈겐하르츠의 시종이 되는 몸이다.

이런 여린 모습을 외부에 보여선 안 된다.

알리시아는 숨을 골랐고 진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런 방식으로 감춰 왔던 거구나."

"...."

"회복 마법은 정말 필요 없어? 오래 갈 거 같은데."

"…괜찮아요. 도련님을 염려하게 한 저 스스로에 대한 벌로서 남긴 거예요."

"가뿐히 갸륵한 수준을 뛰어넘은 것 같은데… 아무튼, 알리시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할 말은 없지. 알겠어, 그럼…."

잠시 고민하며 대화 주제를 변경하려던 에밀리는 적당한 소재거리를 떠올려 냈다.

"맞다, 과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카데미아의 1학기와 2학기에는 한 번씩 산더미 같은 과제 폭탄이 내려지는 시즌이 있다.

이때가 되면 각 과목의 교수들은 개성 넘치는 과제를 내며 이를 평가한다. 물론, 성적에 따라 카티아를 받을 수 있다.

"어떤 과제 말씀이시죠?"

"우리 담당 교수님 것 말이야. 엄청 쉽게 내셨는데, 오히려 너무 쉬워서 고민된단 말이지."

1반의 담당 교수인 루이사가 낸 과제는 이랬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걸 명시하시오.」였죠?"

"그래, 그거! 분량도 알아서, 양식도 알아서, 심지어는 용사와 관련되지 않은 주제라니…. 분명 학생마다 답이 다를 텐데 평가 기준은 어떻게 하려고 내신 건지 모르겠어."

"아직 기간이 있으니까요. 천천히 고민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만, 명확하지 않아서 참… 음?"

연구실로 향하던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전에 있던 좁은 방이 아니라 새롭게 배정받은 넓은 방의 앞이었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엄청난 수의 학생들.

연구회 신입들인가?? 하고 살펴봤지만, 수가 지나치게 많았고, 아는 얼굴도 없었다. 신입 회원들은 아닌 듯하다.

웅성거림이 들린다.

?1학년이 제3 위험군을 잡았다면서?!

?듣자 하니, 약혼녀와 함께 쓰러트렸대!

?아니야. 약혼녀는 당해서 쓰러져 있었고 1학년 수석이 혼자서 죽였다는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무려 지성체야! 지성체를 잡은 1학년은 지금까지 들어 본 적도 없어!

....

"확실히 나도 놀랐고, 이슈가 될 거라곤 생각했는데… 우리 말이야."

"네…."

"여길 어떻게 들어가지?"

***

소문이란 참으로 빠르다.

오늘, 아카데미아는 두 개의 사건으로 뜨거워져 있다.

하나는 내가 중심인 '주교, 칼리쿨레아 토벌'.

아침에 아카데미아에 들어가고부터 끈질기게 달라붙는 인파를 떼어 내는 데 고생깨나 했다.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그녀는 오전 수업 대신 조사를 받았다.

칼리쿨레아는 어떤 녀석이었는지.

녀석이 그곳에 숨어 있는 걸 알았던 건지.

왜 거기에 간 건지 등.

꼬치꼬치 캐물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계획했다는 걸 밝히지 않았고, 이들이 보기에도 알고 움직였다기에는 물증도 없었고, 까닭도 없었다. 조사받는 주원인이 그게 아니기도 했고. 무사히 넘어갔다.

아니, 무사히는 아니네.

온종일 사람들의 잡음으로 귀가 어지러우니.

참고로 나와 에리카는 1학기 동안의 외출 금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리암과 관련된 사건이다.

기특하게도, 리암은 에밀리 없이 기존의 스토리를 따라 움직여 줬다. 클래스전 이후로 녀석은 조원인 정령술사의 부탁으로 연구회에 들어가 그곳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연구회는 글자를 읽고 쓸 줄 모르는 평민들을 위한다는 걸 명목으로, 내부에선 그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계약서를 작성해 마력을 불어 넣고, 쌍방의 동의를 얻은 인장을 찍었다.

당연히 그 계약은 불평등 계약으로 글자를 모르는 멍청한 녀석들이 칠렐레팔렐레 낚여 들어가, 저당잡힌 것이다.

리암은 이를 알게 되고 암수에서 벗어나 공론화에 성공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경험치적으로 한층 성장했겠지.

뭐, 나와 시기가 겹쳐 다소 리암의 공론화가 묻히기는 했어도 해결한 건 맞으니 됐다.

지금은 그보다….

『입을 다물고 비켜라.』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과 학생들은 입을 싹 다물곤 가운데 길을 튼다.

이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소문에 관심이 많고 가볍게 움직이는 녀석들은 이렇듯, 간단한 저주도 파훼하지 못하는 얼간이들로 가득하다는 걸.

나는 뻥 뚫린 길을 걸어가 연구회의 문을 열고는 들어갔다. 문을 닫을 때 방음과 봉쇄가 철저히 되도록 추가로 마력을 부었다.

문을 닫기 전까지 멍청한 놈들의 눈이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쓰레기처럼 쓸어 담아 버리고 싶다.

드르륵?.

문을 닫히고 고요가 찾아온다.

내 뒤에서 예순네 개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진다. 다행히도 선발된 인원인 이들은 인내할 줄을 알았다. 내가 먼저 앞에서 첫마디를 뱉을 때를 기다린다.

나는 그대로 움직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걸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격조 있게 울린다.

그리고.

중앙 탁상에 도착하여.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알다시피 나는 아르볼 프루탈의 장,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다. 우선 축하한다고 말하도록 하지."

눈앞에 앉아 있는 선별된 인재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너희는 선택받았다."

***

간단한 연설과 아르볼 프루탈에 대한 이념 설명을 마치고, 우리는 각자의 그룹에 맞게 따로 앉았다.

본래라면 뿌리인 간부들끼리 모이는 게 맞았으나, 오늘은 첫날이라 설명을 해 줄 겸 책임자들도 각자 맡은 그룹에 속했다.

나는 현재 '목대'의 인원들과 함께 있다.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르볼 프루탈에 들어오신 이상 정기적으로 할당된 시간과 과업을 채우셔야 합니다. 선배라고 해서 눈감아 주는 일 또한 없습니다. 다른 궁금하신 사항은 있으신지요."

"우와… 되게 닮았다. 눈매 같은 건 아예 빼다 박았네?"

저기 가까이에서 봐도 돼??와 같은 맹랑한 말과 함께 얼굴을 들이미는 알렉세리아. 뒤에서는 그의 약혼자인 브락키움이 손을 잡고 도로 앉힌다.

행동을 제지당한 알렉세리아는 볼을 빵빵하게 불리며 불만을 표했다.

"왜 그래. 라인이랑 닮아서 자세히 보고 싶었을 뿐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 지금 건 무례한 행동이다."

"나는 선배인데?"

"그는 연구회장이다."

알렉세리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착석한다. 일부러 삐진 기색을 강조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 알렉세리아라는 여성은 재작년 학생회장이며 휴학까지 하다 온 4학년이다.

참고로, '라인'은 현 학생회장인 라인카르벤을 부르는 명칭인 듯하다. 그나마 라임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원.

알렉세리아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묻는다. 지나치게 환해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반말로 하더니, 여기서는 존칭을 쓰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

내가 꺼리는 타입 중 하나다.

왜 쓸 만한 놈들은 하나 같이 머리에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거지?

"…궁금한 사항이 없다면 이만 간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 무시당했어~!"

"...."

그렇게 목대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2학년 프란체스카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침전된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어린 시절부터 그 이름이 왕국에까지 퍼질 정도로 절세의 천재라 칭송받았지."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프란체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대화가 원활하게 통할 수 있는 상대라 자리에 앉아 마주한다.

"어떤 게 궁금하신지요."

"그런 네 행적은 13세를 마지막으로 더는 퍼지지 않았어. 이따금, 아주 가끔 들리는 말은 칭송에서 멀어진 악평에 가까웠지."

"이 정도의 관심을 받는 줄은 몰랐는데, 영광입니다."

달그락.

그녀가 찻잔을 든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선 묻는다.

"그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뭐지?"

바르간은 13세를 기점으로 완전히 성격이 변해 버린다. 사교계와 세간의 관심을 받던 그는 종적을 감추듯 조용히 살아간다.

여기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건, 소문이 나지 않도록 장치해 두며 못된 짓을 하고 살았다는 걸 의미한다.

그가 포트레트가의 시종을 죽였다는 소문도, 마법에 관한 연구를 멈추다시피 했다는 항설도 외부로는 거의 퍼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카데미아에 출현하여 다시 소문을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가 다르다곤 해도, 귀족계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프란체스카는 바르간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면…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생긴 건가."

차를 마시며, 혼잣말하듯 무심하게 뱉은 그녀의 말은 절반 정도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지그시 돌리며 나를 마주한다.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간소하게 말해 보자면."

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선량한 사람의 눈매임을 자부할 수 있다.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라고 줄이겠습니다."

60화

그날, 오후 4시.

교회의 용사들이 다시 아카데미아를 방문했다.

강당에는 1학년들로 가득하다.

재학생들은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숙덕거린다. 본래라면 이 자리는 단순한 발표의 장으로, 이미 정해진 멘토와 멘티 관계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게 전부라 술렁임은 없어야 했다.

다만, 이번 자리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내가 어두침침한 용사라고 칭하는, 기존의 전개에서 바르간의 멘토였던 용사 크라인이 멘토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헤일리온의 제안 이후로 녀석은 끈질기게 나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와 멘티가 되어 달라고 했는데 거절하자 권한을 승계했다.

용사라는 작자가 이리도 치졸해서야.

…아무튼, 그의 예비 멘티 두 자리는 다른 용사들에게로 넘어갔다. 어떤 두 사람이 받았는지는 아직 불명이지만, 헤일리온은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번 자리는 학생들에게 있어 다시 동아줄을 내려받을지 모르는 기회였다.

"혹시 네가 될 수도 있겠구나."

주변에 있던 에밀리에게 장난스레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자기의 수준을 안다며 그럴 리는 없다고 대답한다.

"나도 바보가 아니라고."

조금 놀라웠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에밀리, 드디어 네가 주제를 파악할 줄 알게 되었구나. 이렇게까지 성장한 배경에는 나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겠군."

"아오! 쫌!"

에밀리는 성을 내며 얼굴을 찌푸렸으나, 어딘가 어색하다. 그녀는 모를지 몰라도,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내가 봤을 때는 확실히 그랬다.

"핀이 헤일리온의 예비 멘티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도 지금과 같이 두 개의 감정이 공존했지."

"…뭐가."

"놀라움과 축하를 밖으로 최대한 선보이며, 속으로는 그와 상반된 어두운 감정을 품지 않았느냐."

"그, 그건…."

에밀리가 눈을 피하며 입을 닫았다.

자신의 추악한 감정이 들었던 그때를 복기하며 자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사람은 하나의 사건에 여러 감정을 느끼고, 사람이 뱉는 한마디조차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네가 당시 시샘을 했다고 하여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뭐야 어울리지 않게. 굳이 포장해 주지 않아도… 아, 그래그래. 알았어. 나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 이거지? 알았으니까 그런 쓰레기 보는 듯한 눈 좀 그만둬."

"알았다니 다행이구나."

그렇게 적당히 에밀리와 담소를 나누고 있자, 장내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모두의 시선은 앞으로 나아가는 아홉의 인물을 보고 있었다.

용사들은 당당하게 나아가며 인사한다. 손은 흔들거나 미소를 짓는 이들도 있다.

?츠으으으!

마이크를 처음 켤 때처럼. 고주파의 소음이 귓구멍을 때렸다. 마도구를 켠 장본인도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한쪽 귀를 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아, 잘 들리시죠?』

대표로 진행을 하는 용사는 말총머리를 한 여자였다. 내가 아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도 나름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사정이 있어서 추가로 예비 멘티를 뽑게 되었어요. 이번 선정 발표에서 세 명의 멘티가 있는 팀이 있을 거예요. 잘못 나온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알겠죠?』

말총머리의 용사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이번에 추가로 뽑힌 학생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싫다면 이후에 아카데미아 측으로 말해 주면 돼요.'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절차상 언급은 해 주어야 했을 터이다.

『아, 참고로. 추가로 예비 멘티를 받게 된 용사 둘 중 하나는 저예요. 친절하고 상냥하게 가르쳐 줄 테니까. 혹시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생각이라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주면 좋겠네요.』

용사는 서론을 줄이고 초읽기를 시작했다.

영상 마법으로 허공에 커다란 숫자까지 떴다.

누가 보면 돈을 많이 투자한 행사장에서 진행자가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줄로 착각할 것 같다.

뭐, 주변을 둘러보면 확실히 긴장하고 있는 재학생들이 많이 있으니 적어도 효과는 확실하지만.

그리고 남은 숫자가 전부 사라졌을 때.

리스트 형식의 영상이 떠오른다.

- 헤일리온

1반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 1반 토이렌 트로아 핀- 샤를로테

1반 알리시아 · 1반 리암 · 1반 에밀리

- 포틀레인

4반 벨리아르 트로아 밴틀로 · 1반 세레나

- 프레하인드

2반 오셀 뷔 아르텔리온 · 2반 오셀 솔루스 라우가

....

최대한으로 기대감을 낮춘 에밀리는 리스트를 훑었다.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서 비롯된….

"어, 어어…?!"

커다랗게 동공을 벌린 에밀리는 몇 번이나 눈을 닦아 내며 재확인했다. 눈앞의 영상을 믿기 힘들어하는 듯하다. 다시 보고, 또다시 봐도 정확히 '1반 에밀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1반에 에밀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다.

에밀리는 입을 틀어막으며 놀람을 감추지 못한다.

나도 조금 놀랐긴 했다. 클래스전에서 에밀리의 활약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눈에 띈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혹시 헤일리온이 귀띔을 해 준 것일까.

그런 의심조차 피어난다.

"에밀리 씨! 잘됐네요! …정말로, 정말로 잘됐어요…!"

"아, 알리시아… 흐, 흐아아앙!"

에밀리는 옆에 서 있던 알리시아를 껴안으며 소란스럽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알리시아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입으로는 작게 축하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있다. 알리시아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맺힌다.

하여간 공감 능력 뛰어난 건 알아줘야 한다.

이 둘을 향한 시선이 집중적으로 모이지만, 터져 나오는 에밀리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그런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실컷 감싸 주었다.

그러면서도 알리시아는, 눈물진 눈매 사이로 틈틈이 진행을 맡은 용사를 바라봤다.

알리시아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러한 점 역시 원작과 동일하다.

『그렇게까지 기뻐해 주니 저도 감사할 따름이네요. 앞으로 잘 지내 봐요!』

말총머리의 용사, 그녀의 이름은 샤를로테.

과거에 묻힌 알리시아의 친언니와 이름이 같았다.

***

발표식이 끝나고, 나와 핀은 헤일리온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거창한 자리는 아니고, 간단히 대화를 나누며 이후의 멘토링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마, 마마마, 만나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저, 저저 저는 토이렌 트로아 핀이라고 합니다!!"

핀은 90도로 완벽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천계에서 지상으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내려온다고 하여도 이 정도로 공손하진 않을 듯하다.

"네, 반가워요. 핀 학생."

헤일리온은 그의 손을 잡아 주곤, 자리에 앉게 시켰다.

핀은 헤일리온을 잡은 손을 금은보화 보듯이 바라보며 이빨을 덜덜 떨기를 반복했다.

보다 못한 내가 핀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앉도록 했다.

호들갑도 유분수다.

"멘토링은 여름방학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예요. 그전까지는 방학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죠."

예비 멘티는 여름방학까지 함께하게 되고, 2학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야 본 멘티 한 명을 선정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 말은 즉, 최소한 여름방학까지는 확정적으로 예비 멘티 모두가 가르침과 현장 실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방학이 되면 제 팀원들과 두 달간 함께하게 될 거예요. 아직 중앙교회로부터 임무가 내려오지는 않아서 어떤 일을 한다고 확언은 못 해 주지만, 아마 주교급의 알티프를 토벌하며 녀석들의 '둥지'를 파괴하는 작업을 맡게 되겠죠."

헤일리온은 말을 하던 도중 나를 슬쩍 바라봤다.

내 반응을 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건 기대가 되는군요."

나는 자연스레 그 기대를 흘렸다.

그는 내가 예언의 힘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어느 쪽으로든 참고로 삼을 생각이었겠지.

미안하지만 헤일리온.

나는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이번 방학에 당신이 마주할 사건은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여 위광을 드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니 말이다.

내가 역사를 바꾸는 과정이라 미래 역시 다소 노선이 달라진다고 하여도,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 현장에 찾아간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잘 흘러갈 물줄기에 바위를 던져서 뭐 하겠는가. 가만히 바라보는 게 제일이거늘.

"둥지가 워낙 위험하니 어디까지나 방관자나 조력자로 팀에 들어오겠지만, 기본적으로 사제급은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어야 해요. 무지성체도 잡지 못하는 실력으로는 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핀은 침을 삼켰다.

자신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깨달은 그다. 클래스전 이후로 뼈 빠지게 단련하고 있어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단련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죠. 바르간 학생이 주교급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1학년인데 대단한 업적이네요."

"그럼에도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둥지는 사정이 다르다. 이 말 아닙니까?"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는 건 바르간 학생의 장점이죠."

헤일리온은 정답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바르간 학생이 죽인 알티프, 칼리쿨레아는 둥지를 만들지 않은 개체였어요. 만약 둥지가 있었더라면 바르간 학생이라고 해도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지성체 알티프가 만드는 둥지.

녀석들은 그 방어 기지를 신전이라고 부르며 그곳에 거주한다. 사람을 제물을 바쳐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부화장을 완비하는 등, 녀석들이 사는 취락의 개념이다.

다만, 괴물들의 거주지인 만큼 그 생김새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둥지는 살아 있는 생물이에요. 둥지에 들어간다는 건 포식자의 입안으로, 혹은 위험한 던전으로 들어간다는 개념과 유사하죠."

둥지 내부는 해당 둥지의 주인인 지성체를 따르는 무지성체로 득실거린다. 또한 둥지 자체가 침입자를 감지하고, 미리 설치해 둔 함정처럼 변모해 제거하려 든다.

그런 와중에 지성체를 상대해야 하니, 둥지의 존재가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칼리쿨레아는 인간 사이에서 살아가느라 둥지를 만들지 않았지만, 헤일리온의 말대로 둥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나조차도 고난을 겪었을 터이다.

헤일리온은 두 권의 책을 내밀었다.

우리 각자에게 주는 준비물이었다.

"둥지 자체에 대한 학습은 물론, 대응 요령, 지켜야 할 철칙 따위가 적힌 책이에요. 본래라면 2학년 때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는 내용이지만, 선행 학습이라 생각하면 되겠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죠."

"반응이 각기 달라서 재밌네요."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전혀 웃고 있지 않고 있다. 방금처럼 연기라도 웃는 척을 했다면, 조금은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건, 단련을 위한 유물이에요."

"유물이라니! 그런 귀한 것까지 받을 순 없습니다!"

"유물이라고 해도 저주가 담긴 유물인걸요."

"예…?"

핀의 얼빵한 소리를 배경음 삼아, 해당 팔찌 형태의 유물 정보를 살폈다. 어떤 저주가 담겨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마력을 제한하는 유물이군요."

나는 이어 말했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하게."

내 말을 들은 헤일리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또한 연기였으나, 하지 않은 것보다 더욱 자연스러웠다.

리암 녀석처럼 편리하게 유물의 이름과 함께 상세 설명이 뜨는 건 아니라도 대충은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유물은 쌍방의 합의에 따라서 효과가 발동되는 계약식 유물이다.

유물을 착용하는 '을'은, 유물의 주인인 '갑'과의 합의에 거쳐 효력의 기간과 그 강도를 결정한다. 강도가 강해지면 을의 최대 출력도 떨어지고 일반적인 마법을 사용하는 데도 그 전보다 훨씬 부담이 발생한다.

물론 유물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라, 계약을 맺었더라도 성능과 상태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최대치가 다르다.

지금 이 녀석은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급. 내 최대 마력 출력의 8할 정도를 통제할 수 있다.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네요."

"...."

"네? 네? 어째서 설명이 필요가 없는 건지… 바르간 님?"

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마침 고유술식을 연구하기 위해 마력을 제한할 재료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헤일리온은 가볍게 건네지만, 이 유물의 등급은 최상위권이다. 나이아스와 같은 1품(品).

고작 계약하에 마력을 통제하는 유물이 주인공 리암의 검 중 하나였던 나이아스 맞먹는 등급을 차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개수가 극히 적으며, 단련을 하고자 하는 용사 지망생들이 눈이 빠지도록 열망하기 때문이다. 수요는 100인데 공급이 0에 수렴될 정도로.

게다가 1달을 사용하고 나면 자동으로 파기된다.

일반적인 귀족들은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보물.

슈겐하르츠가인 나조차 어릴 적, 한 번 사용한 게 전부인 최고급품. 무료로 이런 선물을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좋습니다. 단련을 받도록 하죠."

"기대했던 대로의 대답이네요. 그럼 바르간 학생에게 걸 통제력은…."

"최대치."

"바르간 님?! 마력을 최대치까지 막으시면 어떻게 하시?."

핀의 주접을 한 귀로 흘리며 또렷하게 전한다.

"마력의 제한을 최대치로 하겠습니다."

61화

"저, 저기요 에리카…!"

학생회 회의가 끝나고.

디피엘리아는 오늘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에리카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오늘이 아니라 요새였으나. 어찌 되었든 어색한 건 매한가지였다.

"어?… 어."

디피엘리아의 어색함이 전염된 것처럼, 한겨울의 벌판처럼 냉랭하던 에리카의 표정이 변모했다. 부르니까 멈추기는 했는데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서로 이도 저도 못 하는 모습이다.

우물쭈물하던 디피엘리아가 용기를 냈다.

"…이후, 시간 괜찮나요?"

그녀의 물음에 에리카가 입을 벌릴 틈도 없이, 디피엘리아는 급하게 말을 쏟아붓는다.

"시간이 된다면, 제 방에서 함께 과제를 풀었으면 해서요…!"

디피엘리아의 주먹이 앉아 있는 나무로 된 휠체어를 강하게 쥐어 잡는다. 여기까지 말하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간절한 모습에, 굳어 있던 에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래. 같이 하자."

"에리카…!"

디피엘리아가 환호로 가득한 얼굴을 보인다.

다시금 관계를 복구시킬 기회를 준 에리카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듯하다.

에리카는 그녀의 반응을 보곤 쑥스러운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괜한 죄책감도 들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을 이렇게까지 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은, 감도는 어색함을 온전히 떠밀어 내진 못했지만, 천천히 말을 이어 가며 기숙사로 향했다.

둘의 기숙사는 같은 B동이었다.

디피엘리아의 방은 각종 식물로 가득했다. 창문의 유리도 다른 방들보다 커 빛이 잘 들어온다.

꽃향기와 풀 내음이 방 냄새와 섞여 독특하다.

"차를 내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괜찮은데…."

"별로…인가요?"

"아, 아니… 좋아."

디피엘리아의 목소리가 풀이 죽은 사람처럼 사그라들자, 에리카는 다급하게 부탁한다고 말을 바꿨다. 디피엘리아는 다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고,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티 세트를 준비한다.

에리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거동이 불편한 디피엘리아였기에 도와줄 게 없나 물색하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옆에서 그녀를 보조했다.

에리카가 도울 만한 일은 없었다.

"에리카는 레몬티를 좋아했었죠?"

"응…. 잘 마실게."

티 세트를 들고 온 디피엘리아가 찻잔을 내밀었고, 에리카는 이를 받았다.

"각설탕도 준비해 놓았어요. 여기요."

"아, 고마워."

에리카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에리카는 항상 차를 마실 때마다 설탕을 넣어 먹었다.

휘적휘적.

설탕이 뜨거운 차에 잘 녹도록 티스푼으로 휘저어 준다. 에리카는 조심스레 완성된 차를 입에 가져다 댔고, 무감정해 보이던 그녀의 눈에 별똥별이 스치며 반짝였다.

"맛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아."

에리카는 뒤늦게 자신의 표정이 풀어져 있음을 인식했고, 차의 맛을 칭찬하며 주의를 돌리려 들었다.

이를 지켜본 디피엘리아는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에리카가 이런 또 다른 면모를 숨기려는 때가 가장 귀여웠다.

"...."

그런 생각도 잠시.

디피엘리아는 고민에 잠겼다. 할 말이 있는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

분위기를 읽은 에리카는 찻잔을 내리며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디피엘리아는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우선, 파비안 교수님의 과제부터 하도록 할까요? 그게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좀 더 분위기가 풀어진 뒤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에리카는 그렇게 느끼곤 그녀의 흐름을 따라 주었다.

파비안 교수의 과제는 사역마에 대한 내용이었다.

책을 꺼내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을 찾아보던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갔다.

두 사람 다 꾸준히 공부하는 수재들이라, 과제 하나만으로도 말의 꼬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 각자의 사역마를 소환했다.

디피엘리아는 항상 꺼내 둔 작은 새 말고 하얀 토끼를 불렀고, 에리카는 검은 까마귀를 보였다.

둘이 주목하는 대상은 사역마 자체보다, 그 사역마를 부른 소환진이었다. 그 형태는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내부에는 온갖 수식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에리카가 소환진을 유지시키며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식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거야. 내 워프 마법이랑 비슷하지만, 실체가 존재하는 상태에선 옮길 수 없다는 점이 다르지."

"아, 그렇군요…! 역시 에리카예요. 덕분에 이해가 단번에 됐어요."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에리카의 설명은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이해하기 쉬웠다.

에리카가 살짝 몰려오는 묘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까딱이며 소환진을 바라보던 그녀의 사역마에게 손을 뻗는다.

사역마는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랐다.

"귀여운 사역마예요…! 이름이 뭔가요?"

"...."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생각해서 물은 디피엘리아는 에리카가 말하기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다지 밝히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다.

"이름이 없군요. …그렇죠?"

괜히 찔러봤지만, 아닌 모양이다.

잠자코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까막이."

"와아, 까막이! 좋은 이름이네요! 이 아이는 윤기 있게 빛나는 검은 깃털이 매력인데 딱 짚은 거 같아요."

"…그…래?"

"네!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어딘가 애매한 웃음을 짓는 에리카였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손가락으로 까막이의 목을 만지며 교감한다.

이를 바라보던 디피엘리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듯 말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주제를 언급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에리카의 약혼자분의 사역마도 거의 다 검은색이었죠?"

"그렇지. 슈겐하르츠의 사역마는 대부분 암속성이니까."

에리카는 흘깃 디피엘리아를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디피엘리아가 자신을 부른 가장 큰 이유를 이제부터 밝히려는 듯하다.

그게 슈겐하르츠와 관련이 있는 일인 줄은 몰랐지만, 두 사람의 접점은 거의 없었으니 그렇게 큰일은….

?불현듯 떠오르는 지난번의 기억.

디피엘리아가 슈겐하르츠에게 편지로 보이는 무언가를 건네고 황급히 달아났던 장면이 재생된다.

별다른 접점은… 없었을 텐데….

"그…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결코 이상한 의미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요. …알겠죠, 에리카?"

사전 작업을 거하게 벌여 두는 디피엘리아.

그녀가 붙이는 미사여구가 길면 길어질수록 오히려 그 반대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아래로 감추며 말을 잇는 디피엘리아. 다소 달뜬 숨은 더욱 상황을 묘하게 만들었다.

에리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이 흘러가도록 두었다. 디피엘리아는 침까지 삼켜 가며 힘들게 묻는다.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은.

"바르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이런 사고가 들 틈을 주지 않고 추가 타격을 날리는 성녀.

"아, 바르간에게는 말하면 안 돼요…! 알겠죠?! 절대로 말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흔들림의 결정체를 맞이한 에리카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진다.

'…음?'

***

『20시 17분. D-23 경기장. 승자,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승자,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반복적인 기계음을 뒤로하며, 나는 알리시아와 함께 기숙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아직도 경기장에 남아 있는 남성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더는 나와 연관이 없는 일이다.

"도련님, 경하드리옵니다. 이번에 추가로 10카티아를 획득하게 돼, 60카티아로 부동의 1위를 유지하시는 게?."

"당연한 걸 가지고 일일이 축하하려 들지 말거라."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알리시아의 호들갑을 멈추게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을 끊어 버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알리시아는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못한다.

그럼 확인해 봐야지.

"조금 전의 승부는 잘 관찰했겠지? 채 5분밖에 되지 않는 전투였으나, 배울 점은 있었다."

"네, 확실히 지켜봤습니다. 펠릭스 님의 검술은 검술 명가 하이오드의 검. 저와 다른 점, 보다 효과적이라 판단되는 점을 중점으로 분석했습니다."

"그깟 검술이 명가라니 우습구나. 과대 포장된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냐?"

"분명 제 검술 선생이신 브람 님의 검보다는 못하였지만, 입학 성적 10위로 들어온 건 그런 까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찌르기는 특화되어 있어 주목할 만했습니다."

오, 이젠 이 정도의 함정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구나.

확실히 실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법도 깨달아 가고 있어.

"제법이구나."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고상하게 예를 보이던 알리시아를 내버려 두고 나아가기를 계속하자, 알리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왔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인다.

…뭐, 최근 떨어지고 있던 자존감과 자신감도 이 정도면 확실히 되찾은 거 같다.

"도련님, 궁금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인지라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내가 차고 있는 팔찌로 향했다 돌아갔다. 마치 보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팔찌 말입니다. 혹시 에리카?."

"?가 아니라, 멘토인 헤일리온에게 받았다. 단순한 치장구가 아니며 마나의 출력을 막는 유물이지. 모레부터 사용할 예정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리시아에게 잠깐 눈길을 주곤 거뒀다. 뜸 들이지 말고, 다음 물음을 이으라는 표시였다.

"아, 예…! 그리고… 오늘이 벌써 27일입니다. 머지않아 이번 달이 지나고 마는데 저도 이른 시일 내에 등급전을 치러 카티아를 버는 편이 낫지?."

"?않다. 적어도 30일까지는 기다려라. 곧 '적당한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때까지도 마땅히 반응이 없다면 내가 허락할 터이니 내가 지시할 때까지 등급전은 금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련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내가 어떤 반응이 나타나기를 관망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곤 물어도 이야기하지 않을 걸 알아차린 건지, 내 지시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순백의 표정으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다.

?끼익.

기숙사 방문 앞에 도착하자, 알리시아는 나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러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그러곤 평소와 같이 알리시아의 수준을 파악하고자 검토를 진행했다.

"모든 저항을 해제했으니 걸어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마나 출력으로 나에게 환각을 걸었다.

저번에 아르텔리온과 대결을 할 때는 시각을 이용한 검은 연기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발전해 후각과 청각, 촉각을 건드는 저주도 가능했다.

고오오?.

마나의 진동이 울리고.

새벽안개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냄새가 나며 주변의 형상이 바뀐다.

고요한 숲속에 있는 호수. 나뭇잎에 달린 깨끗한 물 한 방울을 만지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내 똑? 하고 손가락에서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그 소리를 들었다.

확실히 그녀는 저주에도 재능이 있다.

저주란 게 사용자를 많이 타는 마법 중 하나라, 적성이 없다면 기본적인 것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알리시아는 가능하다.

물론, 가능하지 않았더라면 가르치지도 않았겠지만 이렇게 어느 정도 틀이 잡혀 가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주의 특성 중 하나가 또… 혈연관계면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슈겐하르츠 본가에서 차남과 어머니를 빼고는 모두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파고든 건 나와 장남뿐이지만 말이다.

"됐다. 이쯤 하면 충분하다."

지시가 떨어지자, 알리시아는 환각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소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나를 살핀다.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앗!"

"아무런 이상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위협적인 저주를 건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녀석이다. 설령 걸었다고 한들, 내가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다음."

"아, 네…!"

…그렇게 한동안 알리시아의 발전을 확인하고 그녀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허리를 깊게 숙인 알리시아는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는다.

"그럼, 도련님.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내일은 4월 28일.

매년 4월 28일은, 바르간에게 있어 주의를 요하는 날이다. 최대한 충돌을 자제하고, 차라리 일찍 잠들어 살며시 흘려보내는 편이 낫다.

"그래, 가거라."

문이 닫히는 동안.

줄어드는 틈새에서도 알리시아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적어도, 문이 완전히 닫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 모습을 유지하겠지.

겉으로 생각하는 바가 티 나기로 소문난 알리시아의 일이다. 티끌만큼의 우려감이나 걱정이 없는 저 표정을 보면 분명,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잘되었다.

그녀가 이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게 나로서도 귀찮은 일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하니까.

4월 28일에는 마법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헤일리온의 단련을 시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평소에 하던 수련도 해선 안 된다.

특히 밖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끼익.

악역 바르간이 피를 토하는 걸 보여 줄 순 없으니까.

62화

오전 수업을 마친 리암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4월 28일.

1년에 하루, 이날은 바르간과 깊게 관련이 있는 날이다.

?뚜벅뚜벅.

리암의 발소리가 뚜렷이 울린다.

바르간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완벽에 가깝게 무쌍을 찍었던 그가 이 두 약점 때문에 붕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첫 번째는.

'바르간은 남몰래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칭송받던 그는 아이러니하게, 방대한 마나를 품을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독을 품고 있었다.

그 어떤 위대한 의사도. 그 어떤 지체 높은 마법사라도.

심지어는 기적을 행하는 성자라 할지라도.

바르간의 병을 낫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소설의 후반부에 적혀 있는 바르간의 병에 대한 내용은 이랬다.

?이 병은 신의 저주이다. 신체가 아닌 영혼을 좀먹는다. 이 세상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완치할 수 없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성질의 병.

신이 있다면, 바르간을 옥죄기 위한 용도로 생겨난 게 아닌지 의심이 되는 괴이 현상.

아무런 다른 이상이 없다가, 특정한 날을 기점으로 발현되어 년에 정확히 하루씩만 지속·심화되는 기묘한 질병.

바르간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슈겐하르츠의 가주는 진찰을 한 의사를 죽여 세상에 퍼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비밀리에 바르간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온갖 방법으로 물색한다고 소설에 적혀 있었으나,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과는 없었다.

그 선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불치병.

이름조차도 질병을 넘어, 「신의 저주」라고 불려 불길의 징조로 여겨지는 그것은 바르간의 수명을 명시했다. 그는 길게 살아도 20대 중반까지 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치의 병은 1년에 한 번, 바르간의 행동을 제한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설정의 일부일지 모른다.

바르간은 매년, 정확히 4월 28일.

24시간 동안.

마법을 제한당한다.

만약 일정 치 이상의 마력을 사용하게 되면 각혈을 하며 남은 영혼의 수명이 줄어들게 된다.

애초에 바르간이 이런 질병을 앓고 있다고 알게 된 것도, 4월 28일에 무리하게 마법을 쓴 당일이었다. 갑작스레 피를 토한 바르간은 바닥에 쓰러졌고 놀란 그의 시종들이 이 사실을 가주에게 전한 것이다.

가주는 자신과 바르간 이외에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관련 인물들을 죽였다. 이 세상에 그와 바르간만이 이 끔찍한 비극을 알았다.

그는 철저하게 바르간의 병에 대한 사실을 은폐했는데, 추측하기에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천재로 떠받들어지는 바르간의 명성이 순식간에 신에게 버림을 받은 시한부로 추락하는 걸 볼 수 없었을 터이다.

위대한 슈겐하르츠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인 바르간의 짧은 인생을 위해서.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저나, 만약 바르간이 자신과 같은 빙의자라면, 그도 분명히 바르간의 불치병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항상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다가올 명확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원작의 바르간 이상으로 마음대로 전개를 휘젓는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

그의 성격을 떠올리면 후자는 도저히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살기 위해서 억척같은 모습을 보일 거 같은데….

"아."

복도의 모퉁이를 돌다 장신의 남자와 마주쳤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조금 전까지 리암이 떠올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리암은 그를 바라봤다.

걱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정말로… 대책이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소설에 적혀 있지 않았어. 슈겐하르츠가에서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기존 바르간이 죽을 일도 없었을 거야.

바르간.

네가 빙의자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절대 완치할 수 없을 것이다? 명시되었던 구절을 바꿀 수 있을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만약 그게 절대로 수정되지 않는 '소설의 설정'이라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비켜라."

예기를 발산하는 그의 한마디에 리암은 정신을 차렸다. 가벼운 턱짓으로 리암을 물린 바르간은 그대로 나아간다.

순간 보였던 그의 눈동자는 죽음이 다가오는 사람, 혹은 조심해야 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남을 괄시하는 눈빛이었다. …정말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가 멀어지자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별다른 마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비켜 줘야 할 것 같다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고가의 외제 차가 지나가려 하면 가만히 양보하듯.

"...."

리암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곤 생각한다.

아니면, 그것마저 바꿀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소설에 갇힌 우리가?

만약,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면 너는….

'지나치게 거만한 게 아닐까.'

***

다소 난감하게 되었다.

기존 시간표대로라면 오늘 나는 마법을 발동할 일이 없었다.

수업이 있긴 했지만, 마법은 이론을 배우고, 기초 체력을 증진하는 과목이 전부여서, 손만 좀 까딱거리거나 발만 조금 바삐 움직이면 쉽게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흐르다.

파울라가 맡은 「마법술식 심화이론 1」 수업.

역시나 이 트러블메이커가 나를 귀찮게 했다.

?맨날 앉아만 있으면 지루하니까, 오늘은 실습을 할 거예요!

그래. 비록 과목이 '심화이론'이긴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실습으로 마법을 쓸 일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장애물을 모두 파괴하거나 무용지물로 만들고, 결승지점에 도달하면 되는 간단한 규칙이에요~! 그냥 지나치면 안 돼요! 확인할 거니까요!

이젠 '마법술식'도 '심화이론'도 아니게 되었다. 그나마 제대로 남아 있는 건 뒤의 '1' 정도이려나.

아니면 부정이 두 번 들어갔으니 마이너스를 두 번 곱해서 플러스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다른 학생들은 조금 의아해하긴 했으나, 파울라가 다른 깊은 뜻이 있어서 이런 수업을 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볼 때는 정말로, 교육하기 지루해서 마음대로 조정했을 뿐인데.

자, 약한 소리는 이쯤 하면 되었고.

이제 이걸 어떻게 뚫고 지나가 볼까.

"...."

전방의 코스를 바라보고 있자, 나를 향한 지긋한 시선이 느껴진다.

알리시아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알리시아는 현 수업을 듣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배제. 정답은.

"에리카.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갑자기 내가 좋아지고 그런 건가?"

"...."

극장에서 나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줬더니, 고운 미간을 찌푸리는 약혼녀님. 이런 표정을 보이면 여린 나는 상처받는데 말이지.

에리카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녀석의 어디가 좋다고…."

"과거의 자신과 싸우는 중인 거냐?"

에리카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대충 받아쳤다. 시선을 주지도 않는다.

"나는 너를 좋아한 적 없어."

"오호, 그럼 귀여웠던 10대 초반은 모두 거짓이렷다?"

"…마음을 허락한 척 연기했던 거지."

"그것참. 대단한 연기자로구나."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우습게 여기자, 에리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를 향한 것도 잠시. 넓게 뻗어져 있는 코스로 원점이다.

그렇게.

띠이이??!

우리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다들 바쁘게 뛰어가는 와중. 나와 에리카는 공원을 거닐 듯 느긋이 걸어갔다.

시간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어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일찍 끝내서 가산점이라도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그렇지 않으니.

"인기 많더라?"

에리카가 또다시 불쑥 말을 걸었다.

그야, 칼리쿨레아를 잡았으니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겠느냐?라고 대답하려 했다가, 그녀의 반응이 시큰둥한 걸 보아 목적이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그그그그.

거대한 암석이 솟아오르며 각자 라인의 앞길을 막아선다. 높이가 4M는 될 법한 거대한 크기이다.

에리카는 워프 마법을 발동해서 해당 바위의 가운데를 그대로 뚫어 버렸고, 나는 그림자 안에 숨어 있는 사역마를 꺼내 그 바위를 삼켜 버린다.

이어서 대강 낌새를 눈치챈 나는 에리카에게 말했다.

"성녀와 관련된 일이로구나."

"...."

에리카는 남아 있던 바위의 잔재를 추가로 얼려 버렸다. 분명 바위였던 것이 그녀의 손길이 닿자 웅장한 빙산으로 바뀌었다.

그 속도가 가히 살인적이다. 제대로 맞으면 냉동 인간이 될 게 분명하다.

"디피엘리아는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짙어진다.

"네 부탁에 나는, 성녀를 일컬으며 비즈니스가 아니라면 한마디도 하지 않을 녀석이라 대답하였지."

"부탁이 아니라 경고였어."

"내가 그리 받아들였다."

"...."

이쯤 되면 에리카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바퀴를 때릴 때도 되었건만, 그녀는 잠잠했다.

그저, 나와 같은 속도로 코스를 걷는다.

내가 그녀의 속도에 맞추는 걸 거부하지 않는다.

"질투는 추한 감정이다. 에리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한다는 건, 꿍꿍이가 더럽다고 자백하는 거야. 슈겐하르츠."

아, 그래.

지금의 대화로 거의 9할 정도 알았다.

그러니까, 나의 오르골을 연 디피엘리아는 담아 둔 '환상'을 목도했고 더욱 혼란스러워져, 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환상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증할 수는 없을 테니, 조금이라도 나를 파악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재료로 삼으려 했다.

그 정보원은 에리카.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나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겠지.

대사로 하면 대충 이런 느낌이려나.

?바르간에 대해 알려 주세요!

그 까닭을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위그드라실에 대한 신앙을 배반하는 일이기도 하니 대충 지어서 말했거나, 숨겼을 터이다. 그래서 꼬였다. 그 증거로, 에리카는 이렇듯 오해를 하여 나를 쪼고 있는 것이고.

"성녀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커다란 오해다."

오히려 불신과 경계심이지.

"…왜 하필이면 디피엘리아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치이이익??!!

이번 장애물은 양옆에서 고온의 증기를 뿜어 대는 구조였다. 삼켜 두었던 바위를 날려 그대로 부숴 버릴까 하다가 파편이 사방으로 튈 가능성을 고려해 다른 수단을 선택했다.

스스슥.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몸을 부풀리곤, 고온의 증기를 뿜어 대는 구조물의 정면을 막는다. 마구 흔들어 댄 탄산음료의 입구를 판으로 가린 모양새가 되었다.

에리카는 커다란 얼음 기둥 두 개를 세워서 일시적으로 막는 안을 택했다. 고온의 열기가 빠르게 빙산을 녹아내리게 한다.

"…오늘은 그림자 녀석만 사용하네? 원래 같았으면 다양한 애들을 꺼내 보이면서 자랑하기에 바빴을 텐데."

"뭐, 용도의 폭을 넓히는 건 좋은 일 아니겠느냐."

사실은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쓴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지만 구태여 입에 담지 않는다.

다른 사역마들은 소환하는 데 마력을 소모하지만, 우리 '어둑이'는 내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니 아주 소량의 마력만을 먹는다는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몇 차례의 장애물을 극복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대화에서 알아낸 정보는.

디피엘리아는 오르골을 열었고.

진위를 파악하려 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나에게 접근하리라는 예측이다.

추가적으로는… 에리카가 나와 디피엘리아의 비지니스에 관심을 보여 조금 주의해야 한다는 정도?

그 정도가 되겠네.

***

아르볼 프루탈의 연구실.

오늘은 정규 모임이 있지 않은 날이었으나, 지금 이곳에는 '줄기'의 멤버 열여섯과 그 책임자인 알리시아와 세레나가 있었다.

이들은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알리시아를 중심으로 한 그 그룹의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왜 우리가 네년 따위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의자에 푹 기댄 채, 꼰 다리를 책상에 올려 까딱거리는 1학년 귀족 남성, 라반 델 티그레스.

그는 삐딱한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훑었다.

진득하고 특정한 욕구로 가득한 손이 알리시아의 몸을 만지는 듯하다.

알리시아는 그 불쾌함을 떨쳐 내며 말한다.

"저는 줄기의 책임자예요. 아르볼 프루탈에 들어오기 전에 공지했던 사항에, 책임자의 지시가 부당하지 않은 경우 멤버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

?쾅!

티그레스는 한쪽 발로 책상을 내리찍으며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

위에 올려 있던 찻잔들이 엎어져 담긴 액체가 주르륵 흐르거나, 반동으로 나가떨어져 깨져 버렸다.

티그레스는 분노 어린 눈으로 지껄인다.

"그 지시가 부당하다는 말이다?! 천한 년."

처음부터 간신히 외줄을 타고 있던 분위기는 이를 기점으로 완전히 험악해졌다.

티그레스가 발을 까딱이며 알리시아를 가리킨다.

"네년, 알리시아라고 했지. 그래, 제법 실력은 괜찮은 거 같으나 결국은 이름에 성도 없는 미천한 평민이다. 안 그런가?"

그의 말은 물음이었으나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를 씹어 대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아니. 명문 슈겐하르츠의 가랑이 사이를 꼬리 치며 기어가는 개가 되었으니 평민도 아닌, '성노예'라고 일컫는 게 올바르겠지."

"…!!"

"잠시만요, 세레나."

그의 발언에 강한 노기를 띤 건 모욕을 당한 알리시아가 아니라, 언제나 무표정을 일관하던 세레나였다. 그녀는 이제껏 보기 힘들었던 감정을 날것으로 표했고, 알리시아는 이를 막아 세웠다.

티그레스는 피식 웃었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 제법 반반한 외모로 매일 밤 바르간의 총애를 받고 있지 않으냐. 네년이 그 남자를 홀리는 몸을 이끌고 그의 방에 들락날락하는 건 이미 아카데미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는 말한다.

정조라는 걸 모르고, 신분마저 한천한 알리시아의 말을 따르는 건 귀족인 자신에게 있어 치욕에 가까운 '부당한 일'이라고.

"하지만, 네년의 말대로 아르볼 프루탈에 들어온 건 내 선택이었고 명시도 되어 있었지. 따라서…."

티그레스는 분노를 표하면서도 눈으로는 알리시아의 육신을 샅샅이 훑었다. 알리시아는 그가 깊은 곳에서 어떤 추악한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티그레스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진다.

"바르간의 총애를 받은 그 교태를 나에게도 보인다면 군말 없이 따라 주겠다."

능욕적인 발언이다.

알리시아를 그저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악독한 문장이었다. 남들이라면 눈물을 보이거나, 성을 내는 것이 일반적일 터.

그러나, 알리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일순간 피어오르는 서툰 감정이 아닌, 전날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분이었다.

?오늘이 벌써 27일입니다. 머지않아 이번 달이 지나고 마는데 저도 이른 시일 내에 등급전을 치러 카티아를 버는 편이 낫지?

?않다. 적어도 30일까지는 기다려라. 곧 '적당한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때까지도 마땅히 반응이 없다면 내가 허락할 터이니 내가 지시할 때까지 등급전은 금지다.

아.

그렇구나.

이래서 기다리라고 하셨던 거구나.

"...."

침착한 눈을 한 알리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기만 해도 매스꺼워지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직면한 채 대항한다. 그녀의 어조는 또렷했다.

"좋아요. 제가 매일 밤 도련님에게 어떤 교태를 부리는지 보여 드리도록 하죠."

당돌한 대응에 티그레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내 완곡한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건가? 나는 성?."

"?아니요,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충분히 알았어요. 바르간 도련님과 제가 밤마다 나누는 걸 당신도 경험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럼 지금 이건 무슨 뜻이지?"

티그레스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리시아의 연습용 검은 티그리스를 곧바로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첨예한 기운을 뿜어 댔다.

반면, 그녀의 눈은 잔잔하다.

온전하며, 확고하다.

"라반 델 티그레스, 당신에게 등급전을 신청합니다."

알리시아는 바르간의 뜻을 이해했다.

그가 말한 '적당한 자리'가 무엇인지.

왜 등급전을 하지 못하게 했는지.

어째서 이런 자를 연구회의 면접에서 통과시켰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제부터 해야 하는 임무가 무엇인지도 말이다.

63화

하루의 모든 수업을 마치고 검술을 단련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하던 오셀 왕국의 왕자, 아르텔리온.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잔뜩 들떠 복도에서 뛰어가는 두 남학생의 대화가 아르텔리온에게까지 도달했다.

?2반의 티그레스랑 1반의 알리시아랑 제대로 한판 붙는대!

가벼운 잡음이라 여겨,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던 그 소음을.

멈칫.

아르텔리온은 다시 되감았다.

?2반의 티그레스랑 1반의 '알리시아'랑 제대로 한판 붙는대!

알리시아라고 하면 분명, 바르간의 시종인 그녀 이름이다. 클래스전에서 자신과 검을 맞붙으며 무력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표하던 그녀.

"...."

2반의 티그레스는 아르텔리온과 같은 2반의 마검사였다. 입학 성적은 28위. 라반 왕국의 후작가 차남. 자신의 지위를 들먹이며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악질적인 녀석이다.

아르텔리온은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평민 여자를 물건 보듯이 대하고, 그중 외모가 뛰어난 인물들은 탐을 내며 접근한다.

듣기로는 벌써 2차례의 경고를 받아 한 번 더 경고를 받게 될 경우 퇴학 처리된다고 했다.

그런 구제불능한 자에게서 유일하게 눈여겨볼 점이라면, 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잘 '흘려 낸다'는 거다. 타고난 감각을 이용해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 운동에너지를 그대로 비껴가게 만든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이라면 티그레스를 상대하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패배가 예상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아르텔리온은 시간의 흐름을 살폈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기로 해서 들러 보기로 했다.

알리시아라는 여인은 하늘을 호령할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또 어떻게 이번에 마주한 벽을 넘으려 들지 궁금했다.

다른 이의 결투라면 이런 생각은 들지 않을 텐데.

그만큼 자신이 그녀의 재능을 높게 사고 있다는 뜻일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

한 블록에 있는 경기장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아르볼 프루탈의 멤버들은 물론, 소문을 듣고 온 관계없는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경기장에 올라와 있는 라반 델 티그레스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이미 승리의 쾌감에 축 젖어, 후끈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여체(女體)가 보인다.

그가 평가했을 때, 알리시아 그녀는 상등품 중에서도 극상(極上)에 속했다. 아카데미아의 어떤 여성 중에서도, 아니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여성과 비교해도, 알리시아는 유별나게 뛰어났다.

알리시아는 이번 등급전을 통해, 최대치인 10카티아 이외에도, 패배한 이는 승리한 이의 명을 순순히 따르자는 추가 사항을 걸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있으면….

저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을….

티그레스는 끔찍할 정도로 추잡스러운 눈에 알리시아를 담았다.

알리시아는 그가 어떤 종류의 환희를 체감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입학 성적은 28위.

반면, 자신은 47위.

아무리 클래스전을 통해서 주목을 받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인재라는 말을 들어도. 2달이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기간 안에 이 간극을 뛰어넘는 건 가망이 없다 여길 터이다.

당돌하게 대응했으나, 사실은 알리시아 그녀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저 불쾌한 시선이 몸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그녀의 주인인 바르간이 내린 일종의 과제다. 그녀의 주인은 명확히, 일부러 저런 자를 심사에서 통과시켜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사항들이 많이 있었다.

티그레스와 자신의 현 순위 차이가 20위 안에 위치해 등급전을 치를 수 있다는 점. 그 또한 이번 달에 등급전을 치르지 않았다는 점. 도련님께서 미리 언질을 던져 주셨다는 점 등등.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주인은 틀림없이 이번 일을 계획했다. 이젠 알리시아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질 수 없다.

최선을 다해서 임한다.

그것이 도련님의 뜻이니까.

알리시아는 체내의 마나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온 집중을 다한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삐이이익????!

전투가 시작된다.

"…!"

돌격(突擊).

쾌속의 극한으로 치닫는 알리시아의 신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티그레스와의 거리를 '0'로 만들어 버린다.

놀란 티그레스는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직??!

두 청색의 오러가 서로 맞부딪히며 불똥을 튀긴다.

티그레스는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환한 빛 속에서 알리시아의 눈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눈빛은 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크하…!"

티그리스는 동물적인 웃음을 지으며 힘으로 그녀의 검을 밀쳐냈다. 자자작거리는 오러의 반응을 시야에 두지 않고 그대로 몸이 나아가는 방향을 이용.

땅을 디뎌 옆차기를 날린다.

그러나.

취아아악??!

알리시아의 몸은 두꺼운 바람의 장벽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그의 발차기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알리시아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두른다.

그녀의 검은 날 뒤에서 폭탄을 터트린 것처럼 폭발적으로 내리찍는다.

매서운 검격.

티그레스는 말초신경을 자극받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생각보다 더 뛰어난 물건이다!'

티그레스는 검을 비스듬히 하여 알리시아의 공격을 흘려 낸다. 흘려 내는 도중 손에 전해지는 진통.

상당한 출력이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길게 웃는 티그레스는 땅을 밟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렇게.

?알리시아의 턱을 향해 치솟는 돌기둥.

한 주먹에 잡힐 정도로 얇지만, 무시무시한 속도와 웬만한 철 수준의 강도를 지녔다.

그대로 알리시아를 가격하기 직전의 기둥.

돌은 알리시아의 턱을 강하게 뚫어 버렸고.

알리시아는 검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잔재주를…!!"

잔재주는 안개뿐만이 아니다.

언제 준비한 건지, 사방에서 티그레스를 덮치는 물방울.

최대한 압축시킨 액체는 총알과 같았다.

티그레스는 급하게 검으로 몸을 보호하거나 일부분에 오러를 두껍게 둘러 부위를 방어했다.

"하…!"

통증이 없다.

티그레스와 닿은 물방울이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실제가 아니라, 방금 전과 같은 미숙한 환각이었다.

알리시아가 실체를 드러낸다.

카앙! 카앙??!

멈추지 않고 맹공을 이어 가는 알리시아는 환각과 검술을 혼용하며 티그레스를 몰아붙였다.

티그레스 또한 마법과 특기인 검술로 저항했으나, 점차 한 발자국씩 뒤로 밀리게 된다.

조금씩 전세가 밀리고 있다는 걸 느낀 티그레스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비어 버린 감정에 분노를 담았다.

그 분노는 왜곡된 계급관에서 비롯되었다.

"너같이 천한 몸종 년에게 당할 거 같으냐!!"

자자작?!

다시.

티그레스는 알리시아의 검을 흘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몸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치솟는 티그레스의 돌기둥.

돌기둥이 가격한 그녀는 이번에도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이어서 티그레스를 향하는 수십의 물방울.

'좀 전과 같은 패턴이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 여겨 이빨을 갈았고. 마나를 터트린다. 환각 정도는 이 정도의 충격으로도 충분히?

"?큭?!"

철탄이 된 수십의 물방울은 티그레스의 마나를 뚫고 몸을 타격했다. 단련된 용사의 몸이라 버틸 수 있었지, 일반인이었으면 온몸에 구멍이 났을 터이다.

"이 녀석이 계속해서… 나를…!!"

티그레스의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채앙???!

손에 울리는 강렬한 통증.

청명한 진동과 함께 그의 검이 멀리 날아간다.

허공을 돌고 있는 검에서 시선을 내려.

자신을 향하는 여인의 눈이 보였다.

「포식자의 눈」.

분명 물건에 지나지 않을 그녀의 눈은 자신을 그대로 삼켜 버릴 것 같은 포식자. 먹이사슬의 피라미드의 상위 계층에 있는 존재였다.

잔잔해 보이는 바다와 같은 눈동자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해의 공포심을 일깨울 정도로 끝없는 경지가. 티그레스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이것도 환각…인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듯.

무방비하게 된 그를 쏘아지는 수백의 고농도 액체.

?끄아, 끄아아아악!

그는 비명을 질렀다.

하나,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또각.

알리시아가 다가온다.

연습용 검을 집어넣으며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로.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그녀는 말한다.

"원래, 저는 욕을 들어도 괜찮다고 여겼어요. 여기에 계신 많은 귀족분들에 비하면 신분이 천한 것도 맞고, 익숙해서 그런지 그다지 괴롭지도 않았거든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 속에는 독 가루 같은 무언가가 옅게 깔려 있었다.

알리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는… 정말 감사하게도 저는… 바르간 도련님의 시종이니까요."

다가오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가려질 정도로.

티그레스의 주변은 수많은 탄환으로 가득 찼다.

분명 액체였을 그것이 이제는 시커먼 철탄으로 보였다.

"저를 욕하는 건 제가 모시는 도련님을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말았죠. …티그레스 님. 제가 밤중에 도련님과 하는 무언가를 체감해 보고 싶다고 하셨죠?"

알리시아는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티그레스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은 분명 상냥했지만, 주인을 닮아 냉혹했다.

"부디, 무사히 버티시면 좋겠네요."

"흐으윽…!!"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변을 가득 찬 탄환들이 그에게 박혔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19시 20분. C-5 경기장. 승자, 알리시아. 승자, 알리시아.』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티그레스가, 마지막 탄환은 모두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다음 날 아침의 해가 뜨고 나서였다.

***

째깍.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정각을 가리켰다.

두 개의 침이 겹쳐 하나가 되었다.

드디어 4월 28일이 종료.

나는 다시 자유롭게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

다음번의 제약이 오려면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남게 되었다.

1년…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빨리 지나가서 다시 제한에 걸렸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래야 모든 족쇄를 풀어 헤칠 수….

"어디 보자…."

나는 차고 있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활성화를 하려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두뇌 한편을 차지하는 생각을 멀티로 이어 나간다.

알리시아가 활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원하는 스토리 라인대로 그녀는 움직여 줬다.

이름이 뭐더라…?

그래, 라반 델 티그레스. 그 녀석.

악역을 자처하는 그 떨거지 조연을 이용해 '줄기'에서의 알리시아 입지를 재확립시켰다. 평민이 대부분인 '가지'는 문제가 없어도, 귀족이 다수인 '줄기'에서 계급에 의한 문제가 발생할 건 당연지사였다.

굳이 티그레스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몇 개월이 지나면 평민 출신에 따라야 하는 불만이 점차 커져 터지게 되었겠지.

생물이라는 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아서. 자신보다 하나라도 덜떨어지는 자가 자신에게 명령을 하려 들면 불만이 자연스레 쌓이게 된다.

그게 의식에서든, 무의식에서든.

확실하게 누적된다.

클래스전에서 본인의 실력을 증명했다고 하더라도 계급에 찌들어 이를 인정하지 않는 미천한 족속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여, 그 삼류 악당 녀석을 일부러 집어넣어 분란을 발생시켰다. 알리시아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을 알기에, 별다른 참언도 하지 않았다.

쌓이는 불만을 최소한으로 하고, 또한 끝까지 미루는 데 필요한 건. 공포와 능력, 그리고 인정(人情)이다.

흔히 올바른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적은 이유가 이 때문. 그녀의 이후 정황에 따라서 또 달라지겠으나, 이것으로 알리시아가 줄기를 이끌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지.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삼국지의 유비인가 알리시아는.

"오, 되었다."

헤일리온이 건네준 유물을 작동시키자 능력의 최대치까지 발동하는 팔찌가 내 마나를 잠식해 가는 게 느껴진다.

신비로운 감각이다.

극도로 잔인하거나, 무서운 것을 봤을 때 몸에 힘이 빠져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라고 비유하면 좋을까? 이 또한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겠지.

"이 상태로 1개월. 풀리는 건 다음 달 29일인가."

이 유물이 아무리 1품급이라도 착용한 사람의 마나를 억지로 제한하는 건 맞아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할 땐 일정한 텀을 두고 써야 한다. 그 기간도 길어 대략 9년에서 10년은 지나고 쓰는 편이 안전하다.

내 기억상으로, 바르간이 6세의 나이에 이런 유물을 착용했었으니까… 딱 알맞은 시기이다. 당분간은 클래스전을 하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닐 수 없겠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1달 뒤에 마음껏 날아다니면 되는데.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체내의 마력 확장에 들어갔다. 항상 최우선되는 건 마나 총량이다. 나에게 있어 이건 근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마나의 움직임이 극히 둔해지고, 출력도 어린 시절마냥 낮아진 게 단번에 느껴진다. 속이 답답하고, 이물질이 가득 채워져 있는 불쾌함. 효과는 제대로인 듯하다.

그만큼, 풀었을 때의 성취도 상당하겠지.

현재 나의 성취로 따져 봤을 때.

1달 뒤에는 대략….

'목표하는 성능의 고유술식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날 정도.'

기존의 바르간이 보였던 고유술식보다 높은 수준의 술식을 완성할 토대가 갖추어질 수 있다. 비록 중간에 멈춰 그와 같은 어중간한 정도로 끝내더라도 출력이 다름은 분명하다.

"어서 보고 싶군."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한 표현이다.

….

아, 그러고 보니 바르간의 불치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전개를 뒤바꾸려는 내가 설마 그딴 한 줄의 설정 따위 때문에 죽겠는가. 바르간의 약점 중 하나인 불치병은 또 다른 약점을 극복하게 도와주는 치료제이다.

불은 불로.

독은 독으로.

약점에는 약점으로.

뭐, 리암 녀석은 혼자서 심각하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나에게 약점이란, 절망이 아닌또 다른 기회?라는 말이지.

64화

콰지직! ?쿠궁!

콰과가각??!!

해가 정확히 하늘의 중앙에 걸려 있는 때.

드넓은 모의 전투장은 아르볼 프루탈의 인원들이 내는 현상으로 가득하다.

?알리시아! 우측을 부탁해!

?네, 바로 갈게요!

항상 모이는 '뿌리'의 멤버들만이 아니라, 33명의 연구회… 아니, 티그레스가 빠져 이젠 32명이 된 대형 연구회의 인원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공강인 대부분의 학생들이 결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조용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흐음…."

나는 천천히 그들을 관망하며 전장의 흐름을 읽었다.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서로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은 클래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함이 있다.

서로의 기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를 이길 생각으로 전심을 다한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흰 머리칼의 여인. 알리시아는 익숙하게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그녀의 동작은 신속하면서도 정확하여 춤사위와 같이 어색함이 없었다.

세레나는 밴틀로와 서로를 향해 오러를 잔뜩 두른 활을 쏘아 대고 있고… 에밀리는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 핀은… 뭐, 그래도 헤일리온의 유물을 차고 있으면서 저 정도면 나쁘진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의외로 프리다 또한 열심히 임하는 중인데, 본래 여우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차례차례 이길 수 있는 상대만을 골라 사냥하고 있다. 그녀다운 전투 방법이다.

?끄, 끄아아!!

?이건 반칙 아니야?!

하지만, 가장 나의 시선을 끄는 건 뿌리의 멤버들이 아니었다. 소란의 중심에는 목대 소속. 2학년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가 있다.

그녀의 손가락 까딱거림에 전황이 좌지우지된다. 현재, 4학년 선배들이 불참하게 되었고, 나의 마력은 극도로 제한 중. 이 자리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2학년에서도 둘째가는 실력자로 손꼽히는 그녀였다.

달그락. 달그락.

프란체스카의 주위는 뼈마디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로 꽉 차 있다. 그녀의 고고한 눈동자와 찬란한 금발은 미동도 없었고. 귀인을 보호하듯 온갖 해골 병사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대신한다.

카앙??!

알리시아가 그녀의 한 병사와 맞붙기 시작한다.

당연히 몇 번 검을 부딪치고는 알리시아의 검에 머리가 깨져 버렸지만, 그 수가 제법 되어 곤란한 처지다.

"...."

알리시아의 검에 의해서 자기 병사들이 무참히 쓰러져 나가자, 프란체스카는 심기가 불편했는지 땅을 디뎠고, 그들에게 마력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즈앙?!

모든 병사의 무기에 푸른빛의 오러가 둘렸다.

움직임도 조금 전보다 재빨라졌고, 파워도 강해졌다. 병사들의 힘 조절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전황이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마물의 뼈…."

잘 보면 인간 형태의 뼈만이 아니라, 마물들의 것도 있다. 나도 모르게 그쪽에 시선이 가고 만다.

참고로, 저 작고 귀여운 뼈 마물은 동물로 따지면 설치류에 속한다.

…아, 아니지. 그게 아니라.

프란체스카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이 소설 4대 히로인 중 한 명이다. 다르게 표현해, 리암의 여자 무리에 속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령술사 프란체스카」

나와 같은 흑마법 계열이라 마땅히 악역 쪽으로 편입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녀는 명백히 히로인이었고 알리시아에 못지않을 정도로 유의미한 리암의 조력자였다.

음… 스토리의 초반을 지나서야 말이다.

이야기의 초입에서 그녀는 리암과 아무런 연이 없었다. 학년이 같았던 것도 아니고, 연구회가 같았던 것도 아니고, 수업이 겹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쭉쭉. 아무런 접촉 없이 지나다가.

1학년 2학기 축제 에피소드.

프리다와 리암이 대립이 있었던 그 사건에서, 프란체스카는 리암과 만나게 된다.

꽤 구미가 당기는 이유로 말이다.

?흐아아압!

"음?"

?턱.

프란체스카에 대한 정보를 되짚고 있자니, 빈틈을 보였다고 여겼는지 줄기에 속한 멤버 하나가 나에게 달려들어 검을 내찔렀다.

그러나, 유효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고. 녀석의 검은 내 그림자 속에 있던 '어둑이'가 치솟아 막아 주었다.

어제야 어둑이를 다양한 형태로 활용했지만, 본래는 이렇게 물리적인 공격에 몸을 보호하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주인을 보호하니.

"상대에게 가한 공격이 막혔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배우지는 않았을 텐데 대체 뭐 하는 꼬락서니냐. 다른 방법을 찾거나, 거리를 벌리거나. 무엇이든 해야 할 게 아니냐. 머저리 같은 놈."

나를 노린 남자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냥하게 피드백을 해 주었다.

다행히 내가 합격시킨 인물인지라 기죽지 않고, 금세 정신을 차리곤 눈을 치켜세우며 추가 타격을 이어 간다.

근성이 썩어빠진 사람은 아니다. 그런 놈들은 진즉에 걸렀으니까.

그건 그런데….

"인상을 쓰라 하지는 않았다."

"네…?"

농구공 형태로 압축시킨 고밀도의 기체를 녀석의 복부에 힘껏 던졌다. 녀석은 크헉!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더럽게도 입안의 액체를 뱉어 냈다.

제대로 먹힌 듯하다.

오랜만에 마력을 저주가 아닌, 원소 마법으로 형상화했다. 매끄럽지는 못하다. 유물의 효과가 강력하여 본래라면 사고하는 동시에 나와야 했을 바람의 구체가.

무려 2초나 지나서야 형태를 갖췄으니까.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완성도.

확실히 불편하긴 하다. 소모되는 마나도 지나치다. 그래도 단련을 위한 한 달이니까. 유용하게 써먹어야지.

?달그락달그락.

뼈의 군대 행군은 요란하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프란체스카 그녀 혼자서 열은 상대하고 있다. 개중에는 알리시아도 있었는데, 아무리 기존 스토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로는 프란체스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프란체스카는 사령술도 뛰어나지만, 개인의 무력 또한 수준급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들도 있으나, 연구회 활동을 통해 발전시켜 주면 되는 일이고….

조만간 그녀가 더욱 접근하도록 유도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2학기가 되기 전에는 여름방학이 끼어 있지만, 그 전에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산뜻하고 발랄하게 시작되는 2학기 축제.

꿈과 희망이 가득 차야 할 초반부의 에피소드.

주인공인 리암과 히로인인 프란체스카가 처음으로 말을 주고받는 그 장면은.

환호와 희망이 아닌, 비명과 혼란으로 가득한 축제였으며.

그 혼란의 원흉이, 사령술사 프란체스카였으니까.

달그락달그락?.

프란체스카의 군세가 적들을 밟고 나아간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열을 지키며.

***

모의 전투를 마친 바르간은 남은 오후 수업을 듣고, 알리시아와 에밀리와 함께 연구실에 찾았다.

아카데미아는 한창 과제 시즌.

한 실습수업에서, 이마저도 같은 조가 된 세 사람은 협력하여 조별 과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왜… 왜… 자꾸만 꼬이는 거야…."

책상에 축 늘어진 에밀리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해요. 에밀리 씨… 저와 같은 조가 되는 건 이제 질리셨죠…?"

"아, 아니야! 그런 거! 알리시아는 아무런 잘못 없어."

"나와 알리시아의 버스를 타게 될 것이 군말은 더럽게도 많구나."

"버스…? 뭔데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는 아닌 거 같은데."

조원은 무작위로 선출되었다.

따라서, 바르간이 이 일에 개입된 사항은 전혀 없었다.

에밀리 또한 누구의 탓으로 넘기려는 게 아니라 푸념으로 뱉은 말이었다.

"아, 그렇군. 리암 녀석이 다른 여자들과 같은 조가 되어 지금쯤 희희낙락하고 있을 장면을 떠올리니 골치가 아픈 것이었구나."

"그, 그런 거 아니… 그리고! 리암은 그런 애 아니야?!"

"그러고 보니, 최근에 녀석이 정령술사 계집이랑 어울리는 걸 종종 보게 된다만."

"…그건…그래, 맞아! 그거! 뭐야 걔, 같은 조라서 그런 거야?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데??!"

"에밀리 씨, 진정해요!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알리시아는 손걸레로 에밀리가 엎어 버린 차를 닦았다. 알리시아가 자기 실수의 뒤처리를 하고 있자, 고조된 감정이 점차 가라앉아지며 미안해하는 에밀리.

그러든 말든, 바르간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한다.

"녀석은 여난(女難)을 몰고 다니지."

그의 작은 혼잣말에 에밀리는 반응한다.

평소보다 날이 곤두서 있다.

"…리암이 걔랑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설령 뭔가… 뭔가가 있다고 해도 한 명뿐인데 무슨 여난이야."

'그건 네가 기존의 스토리를 모르니까 그렇다. 아둔한 것아.' 바르간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걸 참았다.

물론, 히로인들은 리암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서로 자잘한 마찰이 잦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알리시아야 뭐, 메인이면서도 정작 바보같이 다른 히로인들에게 치이기 바빴지만, 에밀리는 나름 자신의 자리를 꾸준히 지켰었다.

?달칵.

바르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가 되었든, 끝까지 잘해 보거라. 나는 너와 리암이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다."

듣고 있던 알리시아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 또한 두 사람의 연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한다.

이에 에밀리의 표정이 특이하게 변했다.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고, 입은 부정을 하지만 어딘가 기뻐 보인다.

"아이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 둘 다…!"

에밀리는 처음으로, 바르간이 의외로 괜찮은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바르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잡담은 이쯤으로 하고, 과제를 시작하자."

셋은 그렇게 과제에 들어갔다.

알리시아가 바르간의 현 마나 출력 상태를 고려해서 대부분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지만, 기각되었다.

단련하기 위해서 일부러 제한하는 것인데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바르간의 반박이었다.

결국, 바르간이 마나의 출력. 알리시아가 조정. 에밀리가 기타 사항들을 맡아 작업을 이어 나갔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지, 푸른 빛을 띠는 마력의 형상은 순조롭게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바르간은 과제를 하면서도 일부러 마나의 관을 확장하여 사용하며 극한의 비효율을 추구했다. 단련이 아니었다면 학을 떼며 진저리 칠 일이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알리시아. 그래서 결국에 루이사 교수님 과제 했어? 그,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걸 명시하라는 그거. 용사의 일과 관련되면 안 돼서 더 애매하잖아."

"아… 아니요. 아직 하지 못했어요."

"슬슬 기한이 끝나 가는 게 문제란 말이지."

"그러게요… 하지만. 이미 충분히 행복해서 용사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생각나는 게… 아."

"어? 그 반응을 보면 뭔가 떠오른 모양인데? 뭔데? 지금 뭐를 떠올린 거야?"

에밀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알리시아는 누가 보더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아, 아니에요. 아직 아무것도…!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았어요!"

"둘 다, 다물고 집중이나 해라."

그러던 와중.

드르륵?.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들어선다.

"무슨 일이지, 에리카."

"학생회 불시 점검이야. 최근 사건 터진 거 때문에 모든 연구회 활동을 확인하고 있어."

문맹을 악용하여 노동을 착취한 연구회의 일. 기존 전개대로 리암이 해결한 사건이다.

그로 인해, 아카데미아에서는 연구회의 활동을 보다 면밀하고 직접적으로 관찰하기로 했고, 지금처럼 학생회 임원들이나 관계자들을 통해 불시로 점검하게 되었다.

또각또각?.

아무런 거리낌 없는 구둣발 소리가 방 안 이곳저곳에 돌아다닌다. 에리카는 선반이나 서랍, 책이나 자료 등을 살펴보고는 적당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하던 거 마저 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그대로 앉아 있을 생각인 거냐?"

"서 있기는 싫으니까."

그녀는 아르볼 프루탈의 활동을 지켜볼 심산이었다.

에리카의 각진 눈매가 세 사람을 노린다. 자세가 불편했는지 다리를 꼰다.

아.

전구에 불이 켜지듯, 알리시아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주전자를 데우고, 공기와의 접촉과 시간을 정확하게 조정하며 찻잔을 채운다.

알리시아는 에리카에게 차를 내주었다.

막 따른 차에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필요 없으시다면 그대로 두셔도 돼요."

"...."

에리카는 알리시아의 선한 미소를 바라봤다. 그녀와 친분 관계가 없는 에리카도 이 행동은 순수한 친절이 기반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디피엘리아가 떠오를 정도로.

에리카는 고맙다는 말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알리시아는 제자리로 돌아와 작업을 이어 나갔다. 차의 향긋한 향기가 연기와 함께 올라오자, 에리카는 입을 열었다.

"알리시아…였지? 너에게 전해 줄 소식이 있어."

그녀가 말을 건 대상은 바르간이 아닌 알리시아였다.

"네? 어떤…."

"라반 델 티그레스에게 불미스러운 모욕을 들었다면서. 등급전도 그래서 치렀던 거고."

에리카는 설명을 덧붙였다.

때마침 등급전을 보게 되었던 아르텔리온이 정확한 내막을 알기 위해 해당 자리에 있었던 증인들을 조사했고, 티그레스가 어떻게 그녀를 욕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웬일로 심기가 불편해 보이던 그가 티그레스를 직접 찾아가 경위에 대해 실토하게 만들어 재확인했고, 이 사안을 상층부로 올려 세 번째 경고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퇴학 처리된 거지."

에리카는 자업자득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래서 연구회에서 나간 걸로 되었던 거였군요…."

연구회만 나간 게 아니라, 아예 밖으로 추방된 티그레스였다. 알리시아는 괜히 자기 잘못인 것만 같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에리카는 당혹스러웠다.

에리카는 알리시아가 그녀 자신을 탓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치 못한다.

둘만 있는 자리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을 떠벌인 게 좋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스친다.

바르간은 둘의 오해가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알리시아를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지금 이 녀석은 자신이 아닌 티그레스 때문에 우울해진 것이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리석을 정도로 착해 빠졌다는 말이다."

?탁!

"아앗! 이, 이마가…."

그제야, 에리카는 바르간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곤 다시 알리시아로 눈을 돌린다. 그런 게 아니라면서 애써 손사래를 치고 있는 가냘픈 알리시아의 눈.

대충 어떤 인물이라고 들어 짐작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정말로 있다니.

"...."

에리카는 알리시아가 준 찻잔을 들고 안에 담긴 차의 표면을 직시했다. 작게 일렁이는 층에서 에리카의 얼굴이 비친다. 진동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살짝 기울이자 따뜻한 차가 그녀의 입안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차를 마시며, 알리시아를 눈에 담는다.

…향이 좋다.

따뜻한 그것은,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맛있다고 느껴졌다.

자신과는 다르게, 첨가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완성이었다.

그래서 더 썼다.

….

그렇게 공간은 고요로 잠식되었고.

에리카는 한동안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침묵만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가 등장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한 여인이 있다.

'아…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어.'

셋의 어색한 기류 속에서.

에밀리는 고통받고 있었다.

65화

"겨우 끝났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

"고생 많으셨어요, 에밀리 씨. 과제 하느라 힘드셨죠?"

"아니… 과제는 둘째 치고…."

"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나와 에리카를 흘겨보던 에밀리. 다시 알리시아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힘들다는 걸 과시하듯,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왜 저러는 데 저거.

"슈겐하르츠."

불시 점검이 끝나고, 아무런 말도 없이 학생회실로 돌아갈 줄 알았던 에리카는 나를 불렀다. 그녀답지 않게 다소 기세가 빠진 눈이다. 나를 볼 때는 항상 날카롭게 눈매를 세우는데.

"이번 일로, 포트레트가에서 너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자 해."

그녀는 칼리쿨레아를 잡았던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미 그녀의 집안에서 상당한 액수의 위로금을 받았는데, 에리카가 직접 꺼낸 걸 보면 성의가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에리카를 구한 감사함을 표하려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받았다. 포트레트의 가세를 기울일 마음은 없어."

"…의외네."

에리카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이걸 기회로 좋다고 그녀의 집안의 재산을 뜯어내리라 본 듯하다.

"설마 비공정에서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냐?"

포트레트가를 협박해서 보상금을 뜯어낼 거라는 그걸? 심지어 너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렇지는 않지만, 비슷한 정도로는 할 줄 알았어."

"그거참, 약혼자에 대한 신뢰가 두텁구나."

완전히 반대의 의미이지만.

큼. 에리카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여름방학이 되고 포트레트가로 한번 와야 할 거 같아. 부모님께서 너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어 하셔. …그거 때문에 매일 어머니의 편지 세례를 받느라 피곤할 지경이야."

"외출 금지라 더욱 그렇겠지."

아카데미아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제 시즌 이외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전적으로 금지한다.

따라서, 포트레트가의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찾아와 사과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녀와 내가 1학기 동안 외출 금지가 된 이상, 대면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에리카도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여름방학… 그래, 오랜만에 가도록 하마. 당연히 멘토링이 끝난 이후로 날을 잡을 생각이겠지?"

"우리가 교회의 일정을 수정할 순 없으니까."

헤일리온의 팀과 함께 사건을 마치고 돌아오면 포트레트가에 들를 시간이 마련된다. 거의 방학이 끝나 갈 무렵이겠지만, 이렇게 되면 가문의 입장을 고려해서라도 들러야 한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대화를 끝낸 에리카는 작은 몸을 휙 돌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다른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걸을 때마다 긴 머리칼이 살랑거린다.

"...."

음.

포트레트 본가에 방문이라.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고 나서 바르간이 에리카의 저택에 발을 들인 적은 한 차례도 없었는데 말이지.

착착 바뀌고 있구나.

"...."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에밀리."

"아니, 뭐… 생각보다 사랑꾼이구나 싶어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에밀리를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가 반응을 보인다. '아오!'라는 감탄사로 물꼬를 튼다.

"다른 사람한테도 좀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 보지 그래."

"이유가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말이야?"

"정확히 알고 있군."

"아, 이게 진짜…!!"

에밀리는 오늘도 발끈한다.

***

짙은 밤.

올빼미가 구슬프게 울어 대고.

스산한 밤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을 때.

금발의 여인은 눈에 띄는 자기 머리카락을 감춘 채, 걸음을 이어 가고 있다.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

현재 2학년이자, 과거 학생회 임원이었고.

2학년 아카데미아 순위에서 부동의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인. 현 2학년의 순위는 3위부터 급격하게 차이가 벌어져 실질적으로는 1위만의 그녀의 유일한 대적자였다.

사사삭.

그녀는 익숙하게 어둠을 관통했다. 1학년 때부터 해서 벌써 몇 개월 동안 지나 온 길이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고 한들 방해할 요소가 없다.

주변에는 작은 빛도, 조금의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다.

?철컥.

어느 철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안에 담긴 마법식이 서로 교류하며 잠금을 해제한다.

본래라면 재학생인 그녀가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관계자이거나, 교수는 되어야지 출입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조력자'를 통해서 열쇠를 얻었고,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끼이익?.

다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녹슨 철의 소리.

프란체스카는 그 문을 닫으며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생기 있는 금발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영롱한 빛깔의 눈동자는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 눈앞의 거대한 역사(歷史)의 산물에 매료되듯 넋을 잃는다.

「고대 드래곤의 뼈」

지금으로부터 몇천 년 전.

이 땅에 살아 숨 쉬며, 만물의 정상으로 우뚝 군림하여 세상을 아울렀을 역사의 증거이자, 그 자체.

오랜 세월 풍파를 겪고도 그의 기골은 여전히 웅대하고 당당하게 위세를 지니고 있다.

몇 번, 몇십 번을 봤지만, 볼 때마다 경외심이 확신과 함께 등골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감쌌다. 이거다.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가능하다.

프란체스카는 곧바로 준비해 왔던 마력수와 서적들을 꺼낸다. 경외감에 젖어 한참을 관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녀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다.

양피지도 여러 장 꺼내어 마력수를 찍은 깃펜을 그어 댄다. 기초적인 작업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마련되어 있다. 슥슥, 멈춤 없이 작업을 이어 나간다.

그러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야."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깊게 그늘진 그녀의 눈은 완성되지 않은 술식과 드래곤의 뼈를 왕복한다.

프란체스카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키의 몇십 배는 되는 골격을 어루만졌다. 손의 이물질에 의한 손상이 내키지 않았기에 얇은 장갑을 낀 채로.

마나를 투여하며 정보를 살핀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하학적인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중간중간 파괴된 식들도 있었으며, 변형되어 버린 형태들도 존재했다.

뼈를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해체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방대한 마나를 품고 있는 드래곤의 뼈였기에 이렇게 기존의 식을 유지하고 있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현재 그녀가 궁리하는 부분은 뼈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과는 다소 개념이 달랐다.

'…역시 그 남자의 도움이 필요해.'

프란체스카는 탐구를 이어 가며 어떤 이를 떠올렸다.

몇 주 전, 2학년인 그녀는 아카데미아에서 이번 신입생들의 클래스전을 지켜보았다. 크게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한 번 정도는 신입생들의 전반적인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를 발견한다.

단신의 능력으로 반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그.

쉰 마리가 넘는 마물에 단체로 저주를 걸어, 본래 본인의 사역마처럼 자유자재로 통솔했던 그 저주 마법.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마나 총량.

한눈에 보는 순간 알았다. 저 남자는 그녀가 하려는 일에 필요한 존재다.

그녀가 하려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곤란해질 확률이 높아지지만, 프란체스카가 느끼기에 바르간이라는 남자는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인의를 묵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럴지 모른다는 감일 뿐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황.

그렇기에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가 아르볼 프루탈이라는 연구회의 장을 맡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연구회에 들어가 그와 교류를 하다 보면 적절한 거래를 할 기회가 있을 터이다.

'이 저주의 각인으로는 안 된다. 다른 형식, 다른 구조의 마법이 필요해.'

다시금 그가 보였던 흑마법, 그중에서도 저주 마법을 떠올린다. 바르간은 사역마를 다루는 데도 능통하다. 그의 도움을 얻게 된다면, 지금 막히고 있는 술식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직은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단계로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지켜보고 있다.

예정대로의 인물인 건 맞는 듯하지만, 아직 확신은 없다. 조금 더 관찰을 이어 나가고 아니다 싶으면 조용히 빠져나가자.

팔락?.

그녀는 다시 눈앞에 있는 식에 집중한다.

누군가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 내려간 책을 참고하며. 자신의 술식을 개선해 나간다.

***

"…이거 곤란하군. 지고지순해야 할 성녀가. 자꾸 이렇듯, 야심한 밤에. 그것도 외간 남자를 부른다는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난감하게 될 일이로다."

"…오셨군요."

감은 눈꺼풀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디피엘리아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휠체어의 방향을 튼다.

"그래, 네 바람대로 와 주었다. 나를 이리 부른 걸 보면, 에리카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다고 본 모양이구나?"

"...."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지상을 밝히지 않아, 식물들이 다른 방해 없이 곤히 잠을 청하고 있는 식물관.

그 한편에서 바르간과 디피엘리아는 만났다.

"저번에는 다른 분이 이곳에 왔었죠."

"아, 그래. 내가 외출 중이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건네준 물건은 잘 받았나?' 바르간은 너스레 대화의 화두를 던졌다.

그의 짐작대로 디피엘리아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네, 잘 받았어요. 아름다운 오르골이더군요. 안에 담긴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자칫 잘못하면 현혹될 뻔했을 정도로요."

"내 선물이 마음에 든 거 같아 안심이로구나."

바르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가 여유를 부리면 부릴수록 디피엘리아의 인상은 굳어져 갔다.

"비유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진중해진다.

순박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날이 선 목소리다.

"저에게 그런 거짓 환상을 보인 이유가 무엇이죠?"

디피엘리아가 묻는다.

오르골에 담긴 당신의 환상을 전부 살펴보았다. 당신은 지금 시꺼먼 모략으로 자신을 꾀어내려 하고 있다. 그 의중은 무엇인가.

바르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나는 거짓을 담지 않았다. 본인의 눈이 멀었다고 하여 황금을 돌덩이로, 돌덩이를 황금이라 주장하는 꼴이 우습구나. 온전한 눈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경멸하기에 마땅한 일이다."

"위그드라실 님의 신탁을 돌덩이로 치부하는 건가요?"

"실제로 그러하니까."

"…!"

교회를 부정하는 바르간의 언행에 디피엘리아는 일말의 분노를 띠었다.

"교회를 수호하고, 인류를 수호해야 할 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신앙심이 없는 것이로군요! 설마 당신은… 겨우 사심을 채우고자 아카데미아에 온 것인가요?"

"가소롭지도 않은 발언이구나, 성녀."

바르간은 디피엘리아의 기세를 꺾었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를 돌며 말을 잇는다. 그가 걸을 때마다 흙이나 작은 풀잎 따위가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성애, 가족애, 애국심, 인류애. 결국 이런 찬란하고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단어들도 그 기원을 따지자면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그는 디피엘리아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다.

"사심을 채우고자 아카데미아에 온 것이냐고? 당연한 말을! 네가 얼마나 높고 청아한 신념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관념의 조상격인 감정을 '겨우' 사심이라 비하하다니."

탁.

걸음을 멈춘 바르간.

그의 손이 디피엘리아의 어깨 위에 얹어졌고.

동시에 그를 바라보던 작은 새는 사라졌다.

디피엘리아의 시야가 암전된다.

"그렇지만, 뭐 좋다…. 우리의 눈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감각을 느끼는 듯하니. 이런 언쟁은 무의미한 일이지."

아마 서로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터이니.

"...."

"밤이 길다고 한들, 영원하지 않다.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성녀, 나에게 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자, 빨리 오르골에 대한 답변을 내놓아라. 디피엘리아.

"…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성녀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방황하기 쉬운 그곳에서 작은 성냥 한 개비에 불을 지핀다.

"저는 당신이 보여 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믿지 않아요."

66화

"저는 당신이 보여 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믿지 않아요."

그녀의 음성은 확연했으며, 정확하게 바르간이 보인 줄기의 미래를 부정했다.

그러나, 바르간은 가늘게 눈을 뜨며 살핀다.

디피엘리아는 지금 저 대답을 하기까지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며, 어떤 어조, 어떤 높낮이, 어떤 미세한 반응을 보였는가.

그가 느끼기에 적어도 틈새가 아예 없지는 않다.

오르골에 담은 환상은 효과가 있었다.

디피엘리아는 말한다.

"저는 위그드라실님을 따르는 신자예요. 성녀(聖女)라는 이름도 제 적성에 맞았다는 이유만이 아닌, 진심으로 신을 믿고 추앙하기에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거죠."

"잘 알고 있다."

"당신은 저에게 신탁과는 다른 미래를 보여 줬어요. 제 편지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했다는 말이죠."

디피엘리아는 최초의 원작에서 바르간이 죽는 장면을 신탁을 통해 보게 되었고, 이를 바르간에게 비유로 전달해 반응을 살폈다.

바르간은 최초 원작의 전반적인 스토리도, 자신이 본 소설의 내용도 알고 있었기에 디피엘리아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편지를 보냈던 건, 당신이 무언가… 좋지 않은 계략을 꾸미는 중이라면 그걸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어요. 신탁을 받아 당신을 관찰하고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그렇게 전하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신은 예상을 가볍게 부수는 답신을 저에게 주더군요."

디피엘리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당신이 보내 준 답신은 믿기 힘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말이었죠. 현시대에서 성인(聖人)은 제가 유일한데… 어째서 당신이…."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걸까.

또한 어째서 그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을까.

"성인의 능력은 혼자서 깨칠 수 없어요. 반드시 교회의 세례를 받는 정식적인 절차를 거처야 하고, 그 이름은 교회에 남게 되죠. 그렇다면 제가 모를 일도 없고요."

하지만 바르간은 편지의 내용을 전부 해석해 냈다.

심지어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며 자신을 현혹하려고 한다.

"아직도 궁금해요. 어째서 당신이 신탁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온전히 해석할 수 있었는지. 미래를 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어떠한 것인지. 그렇다고 한들, 어떤 목적으로 저에게 밝힌 것인지…."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이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그녀는 하나만을 힘주어 잡고 있었다.

"그 무엇도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성녀. 위그드라실님을 따르는 자. 당신이 저에게 보인 미래는 신탁과 다르고 저를 꼬드기려는 악마의 속삭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확고한 뜻을 전했다.

바르간은 그녀가 보이는 미세한 반응까지 하나씩 읽어 가면서 이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웃음이 지어졌다.

"완전한 존재."

바르간이 짧게 뱉은 말에 디피엘리아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최대한 반응을 숨기려고 하지만, 웬만큼 단련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무의식적인 행동까지 모두 감추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죽고 나서 나타난 그 미지의 존재 말이다."

그 녀석은 언급하지 않는구나.

피하려고 드는 것이냐.

바르간은 이어 말한다.

"똑똑히 보았겠지. 그게 어떤 생물이었는지."

"그건…."

바르간은 그녀의 얼굴과 가까이하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미세한 진동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성녀야. 눈꺼풀이 떨리고 있구나. 그리도 두려우면서, 공포로 좀먹은 미래를 바라보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려 드는 것이냐."

그 길을 따르면 펼쳐질 앞날이 지옥이라고 하여도.

너는 그 가녀린 발을 옮기려고 드는가.

바르간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가벼웠으나, 디피엘리아에게 있어 그의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게 내리 앉았다.

"너는 그 녀석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넘기려 했지. 아이러니한 일이로다. 그리도 좋아하는 신탁이 아니더냐. 아니면… 네가 말하는 신앙심이라는 건 부분적이라, 네 입맛대로 일부분은 수용하고 일부분은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켜 내고 있던 모습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너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있다. 해서 두려운 게지."

그건.

용사의 천적.

인류를 해하는 절대악.

"왜 그런 존재가 신탁에 나왔을까. 위그드라실은 너에게 무엇을 알려 주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 네 말대로 신탁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꾸나. 그럼 네가 봤던 그 이후에 어찌 될 거 같으냐."

"...."

"너는 그 완전한 생물. 여신교의 「교황」을 상대할 수 있느냐."

교황, 제로 위험군.

세상에 넷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진 재앙(災殃), 추기경조차 고개를 조아리는 존재.

작은 손짓에 산이 사라지고.

가벼운 발길질에 땅이 갈라진다는 절대자.

아득히 먼 옛날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존재. 신탁에 나온 그 절대자는 과거에 사라져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알려진다.

다만 아직까지도 살아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모든 위험군의 정상에 위치하며, 그들을 통솔하는 제로 위험군이라 이름 붙였다.

바르간이 죽고, 그 완전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혼비백산에 빠지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용사들이건 학생들이건 모두가 벌레처럼 죽어 나갔고. 알리시아와 아르텔리온을 비롯한 몇몇만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말해 보거라, 성녀야."

"...."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디피엘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미세한 음성이 나온다.

"…상대할 수 있어요. 상대해야 해요."

말을 하면서 본인의 다짐을 굳히듯, 점점 커진다.

"용사잖아요. 세계의 수호자잖아요…! 우리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싸워 이겨야만 해요."

"그 선택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이 날아갈지라도? 네가 사랑하는 동료들과 지인들이 무참히 짓밟혀도 말이냐."

"…그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래야 하겠죠. 저는 그러기 위해서 성녀가 되었고, 용사가 되려는 것이니까요!"

두려움 끝에 용기를 꽃피우는 그녀의 다짐을 들은 바르간은 평가를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래, 그렇다면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겠구나."

디피엘리아는 그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준 오르골에 담긴 건 무엇이었지?"

"미래를 가장한 당신의 허위죠."

"아니. 그런 애매한 대답 말고 확실한 묘사를 해 다오. 넌 무엇을 보았지?"

그녀는 말하기를 꺼리며 입을 열었다.

"…신탁에서 벗어난 당신이 그 존재를 죽이는 모습이죠."

바르간이 빙그레 웃는다.

"그래, 고작 짧게 신탁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너에게 온갖 두려움을 선사한 그 존재의 목을 베어 마물의 먹이로 던지는 장면이었지."

바르간이 오르골에 담은 건.

최초의 원작 스토리도 아닌.

그가 읽었던 소설의 내용도 아닌.

앞으로 그가 이끌어 갈 이후의 새로운 전개였다.

"성녀야. 신탁을 믿는 너는, 신이 네게 내린 미래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해서, 내가 보여 준 달콤한 미래에서 눈을 돌리고 나를 악인이라 여기는 것이고."

결국, 신탁을 따르는 디피엘리아는 바르간이 보여 준 미래는 그의 꿈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다.

모순된 일이다.

사람들을 구원하며 보다 많은 생명이 살기를 바라는 그녀가, 바르간이 보이는 보다 나은 미래의 선로를 괄시한다.

신탁이 인류를 위한 최선책을 보여 준다는 편협한 사고 때문에.

"하나, 잘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더냐. 사람들을 구원해야 할 성녀가. 더욱 많은 생명을 보전할 선택을 무시하다니!"

디피엘리아는 감고 있는 눈을 찌푸린다.

그건 당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 그가 말하는 건, 정체를 모를 계략을 파악한 자신의 추궁을 빠져나가기 위한 궤변이라 말한다.

"그럼 물으마."

바르간은 그림자에 보관해 두었던 그녀의 새를 도로 돌렸다. 빛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본 신탁에서보다 많은 목숨을 구해 냈다면, 혹은 앞으로 그럴 것이라면. 너는 내가 보인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당신의 안을 따라야겠?."

바르간은 성녀의 손에 무언가를 건네준다.

한 손에 감싸 쥘 수 있는 작은 병으로 추정된다. 촉감으로는 그랬다. 디피엘리아는 다시금 선명해지는 사역마의 시야로 그가 건넨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는 말한다.

"그건 「신충(神蟲)」이다."

"네?…이게 왜… 아니, 그보다 이걸 어떻게…."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그녀를 위해서, 바르간은 친절하게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신탁에서 보인 내가 마지막으로 어떤 구절을 입에 담았는지 기억하느냐."

"추도문…이었죠. 누군가를 기리는."

"…맞다."

바르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어딘가 서글픈 듯한 기운이 그의 망막에 맺힌다.

디피엘리아는 그 진동을 보았다.

"그 추도문의 대상은 내 약혼녀, '에리카'였다."

그녀의 눈매가 벌어진다.

비록 뜨인다고 하여도 직접적으로 앞이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놀람으로 인한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잔털이 쭈뼛쭈뼛 섰다. 몸을 꽉 짜고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 그런… 그럴… 수가."

디피엘리아는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사실 여부의 확인보다도 먼저, 최근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떠오른다.

그렇게 도달한다.

"서, 설마… 저번에 당신과 에리카가 갔던 극장에서…!"

"그래."

그는 잔혹했던 진실을 이야기한다.

"신탁이 네게 보인 선로의 가운데에선, 에리카는 홀로 극장에 가 주교급 알티프 칼리쿨레아에게 신충을 주입받는다."

"…!"

디피엘리아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삼켰다. 신충을 주입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기에, 구역감이 올라올 거 같았다.

"에리카는 칼리쿨레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 강제로 여신교의 사상을 주입받는다. 하지만, 에리카는 거세게 저항했지. 설령 알티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여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며 말이다."

바르간도 뒤의 정확한 내막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정보를 얻은 이상,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 기구한 운명으로, 그 전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던 또 다른 추종자에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은 칼리쿨레아는 틈새를 이용하여 조금씩, 확실하게. 그녀의 몸을 지배해 가기 시작한다."

그 틈새가 자신, 바르간과 연관되어 있음은 굳이 밝히지 않는다.

"결국, 에리카의 인격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지."

그렇게, 신실했던 위그드라실의 신자 에리카는 '악역영애'이자 '여신교의 주교'가 되어 작중에서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주연들을 방해하며 아카데미아의 비극을 초래하는 데 앞장선다.

"그러곤 감옥에 갇혀 사형에 처하기 전날까지 여신을 찬양하다 목숨을 잃는다."

바르간은 그녀가 갇혀 있는 옥에 찾아가 마지막을 지켜봤다. 피폐해진 그녀의 몰골과 적의를 눈에 담았다.

이걸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한단 말인가.

"… 허… 끅…!"

아무것도 나오지 못하게 입을 막고 있는 디피엘리아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바르간의 말을 부정하려 한다.

"끅…!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아직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이 남아 있다. 추도문의 대상이 에리카라는 증거는? 칼리쿨레아가 에리카에게 신충을 주입했을 거라는 근거는?

그리고… 그리고….

디피엘리아는 필사적으로 바르간을 부정할 의문들을 들어 올린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심 자체가 흔들릴 것만 같았다.

"원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줄 수도 있다. 가령, 에리카를 따라다닌 또 다른 추종자가 누구인지. 칼리쿨레아의…."

"잠시, 잠시만요! 잠깐 정리할 시간을…! 머릿속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르간은 그녀의 사고 과정이 다시 한쪽으로 쏠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디피엘리아, 나는 벌써 한 명의 목숨을 살렸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려면 멀었으며, 내가 앞으로 에리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변동성이 있겠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겠지."

묘한 일이게도, 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적인 알티프를 완전히 박멸해야 하니까. 최소한 신탁에서 보일 미래보다는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다.

"반면, 너는 어떻지?"

그녀에게 말한다.

신탁을 따르는 건 그녀의 의지, 신념이다. 가장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건.

"무궁무진할 미래를 한정 지어 놓고, 다른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게 아닌가."

"그러… 어… 어."

디피엘리아는 거친 숨을 쉬면서 바르간의 말을 들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금까지의 모든 사고가 부정당하며 구조 자체가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는 성녀의 상태를 훑은 바르간은 이만 물러서기로 했다.

디피엘리아를 한 번에 돌려놓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가 아니다. 그녀는 평생을 위그드라실을 찬양하며 살아왔다. 그런 단단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충격이나 공이 필요하다.

…에리카도 그랬던 것이고.

멀어져 가는 바르간. 디피엘리아는 그를 잡지 않았다. 계속해서 거친 숨을 진정시키려 들며 복잡한 현 상황을 정리하려 든다. 그녀의 손에는 바르간이 쥐여 준 신충의 병이 들려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문장 하나를 툭 던지곤 밖으로 나섰다.

"교회를 너무 맹신하지 말거라, 성녀."

67화

아카데미아에도 주말이 있다.

일주일에 하루는, 안식일이라 하여 아무런 수업도 진행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 황금 같은 휴일을 통해 평소 부족한 잠을 채우거나, 동기들과 놀러 간다거나, 온전히 공부에 전념하거나 한다.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현재 3시간째 방 안에서 나만의 시간을 마음껏 탐닉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시간을 쓸 수 있는 날이다. 이런 날 시간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즈으응?!

아무런 이물질이 존재하지 않도록 순수한 마력을 뽑아내어 그 형체를 구체화한다. 지름 1m의 구체. 손을 가져다 대 내부를 조정한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구체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확산하여 버릴 것이다.

마력과 마력의 입자 사이에 특수한 인력을 발동하도록 설정하고, 현재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거리를 줄여 구체를 축소화시킨다.

식의 변형에 구체의 크기가 점차 줄어든다. 강도와 경도는 높아지고, 표면은 더욱 매끄럽게 변한다.

그렇게 완성된, 조금의 굴곡도 없는 완벽한 구슬. 지름 5cm의 구슬은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책상에 올리자 고유의 소리를 데구르르 굴러간다.

그 구슬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 조심스레 옮긴다.

미리 만든 구슬 네 개가 일렬로 책상 위에 서 있다. 따닥따닥 붙어 각자가 책상 위에 올려 있는 게 아니다. 그래프로 따지면, x축이 아니라, y축을 따라 선을 그리는 모양새이다.

구슬 탑 위에 새롭게 만든 구슬 올리기를 시도한다.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누가 보면 그저 놀면서 시간을 때운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나는 지금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효과적으로 마력을 단련하는 중이었다.

헤일리온이 준 유물로 인해 마력의 출력과 세기를 조절하는 게 상당히 난해하며 소모가 심하다.

그런 몸뚱이로 이토록 순수한 마력의 결정을 만드는 것만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압축시켜 고체화를 통해 형태의 유지. 심지어는 표면에서 빛이 날 정도로 완벽한 형태의 구슬을 만든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자랑이지만.

유물의 통제를 당하는 상태에서,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어지간히 이름난 이들조차 마력 회로가 과열되어 어지럼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불안정한 구슬을 올리거나 하면 곧바로 무너질 이 구슬을 탑을 천천히 쌓아 올리고 있다.

내가 만든 이 마력의 구슬은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이며 다른 어떠한 성향도 섞여 있지 않다.

따라서, 다른 마력의 결정체와 부딪힐 경우, 별도의 조처를 하지 않는 이상 유지되고 있던 식이 충돌하게 되고 혼합되어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거나 튕겨 나간다.

쉽게 말하면 뭉개지거나 무너지거나 한다는 말이다.

비교한다는 거 자체가 웃긴 일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구슬 위에 다른 구슬 올리는 일보다 몇십 배… 아니, 마력을 다루는 점을 고려하면 몇백 배는 어려운 기술이다.

"...!"

지금.

나는 드디어 5번째 구슬을 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처음 이 단련을 시작했을 때는 지름 5cm의 구슬로 4개까지가 최대치였거늘. 지금은 이렇게 발전하여 무려 5개를…!

"아."

데구르르.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공든 탑은 무너지고. 구슬은 각자의 갈 길을 떠나 책상 위를 배회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구슬 탑의 역사를 돌이키며 나는 한탄의 숨을 뱉었다.

"후우…."

짧은 영광의 순간에 대한 애달픔의 표현이다. 결코 빡쳤(?)다거나 하는 치졸한 악감정이 아니라.

"...."

나는 미간을 짚은 채 잠깐의 애도를 마치고 곧바로 새로운 구슬을 만들기 위한 마력을 뽑아냈다.

구슬을 만들어 내는 것도 엄연한 단련의 일부이므로, 한번 만들어 내어 사용한 구슬은 파기한다.

지금은 1m의 구체를 5cm로 압축시키는 선에서 과정을 이어 가고 있으나, 나중에는 좀 더 작은 구체로 더욱 작은 구슬을 만들어야 한다.

밀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안정적인 형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심화 버전인 셈이다.

또다시 완성된 순수 마력의 구슬.

나는 조금 전에 했던 과정을 반복하며 방 안에서 황금 같은 휴일을 보냈다. 현 상태에서 마나 총량을 확대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

데구르르.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

똑똑.

알리시아는 바르간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알리시아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답신이 오질 않는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으음…."

특정하게 지시된 날이 아니고서야, 항상 같은 시각에 방문하여 검사받던 그녀였기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한번 노크를 하며 살며시 손잡이를 돌렸다.

전에 한번,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문이 열렸는지를 확인하고 열려 있다면 들어오고, 닫혀 있다면 돌아가라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잡이가 돌아간다.

들어가도 된다는 의미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어둑한 방의 기운이 틈새에서부터 새어 나온다. 그의 방은 아무런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어둠만이 가득했다.

"어…?"

알리시아는 바닥에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사방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둠만으로 가득한 줄 알았던 그 공간은 빛이 바랜 구슬 천지였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수가 상당하다.

항상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바르간의 방이다.

이상 상황임을 느낀 알리시아는 구슬 사이사이로 지나가며 바르간을 찾았다.

그는 넓은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도련님…!"

바르간을 발견하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보인 알리시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책상에는 바닥에 깔린 구슬들과 같은 형태의 무언가가 하나같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 형태는 실로 완벽하여.

일체의 미동도 없었다.

"도련님… 이게…."

바로 옆까지 그녀가 오고 나서야, 바르간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깊게 파여 있었으며, 평소보다 이지적이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알리시아가 오고 나서야 바르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그와 책상에 올려 있는 어떤 것을 반복해서 보았고 바르간은 설명해 준다.

"내가 쌓아 올린 '구체 5층 마탑'들이다. 겨우 안정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게 가능하게 되었지."

5층으로 된 구슬의 탑이 그의 책상 위에 한가득하다. 모든 구체의 크기며 색이 일관되었으며, 어떻게 저렇게 서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반듯하게 서 있다.

"도련님, 설마 오늘 온종일 이걸…."

"알리시아, 검사받기 전에 말이다."

가볍게 몸을 풀던 바르간은 말한다.

"방 청소부터 하자꾸나."

그가 만든 구슬들은 견고하여 쉽게 승화되지 않았다.

***

알리시아는 신속히 방의 불을 켜며 청소를 시작했고, 그녀의 바쁜 손놀림으로 잔뜩 어질러져 있던 방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알리시아를 바라본다. 오늘은 최대치까지 마력을 쥐어짜 내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전수해 줄 순 없다. 마력 회로가 잔뜩 뜨거워져 더 건드리게 되면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흠… 오늘은 말 그대로 정말 성장을 검사하거나 이론을 전하는 것 정도로 하자.

아, 그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게 있지.

"알리시아, 과제는 전부 했느냐."

"예, 전부 완료하였습니다. 어떤 과목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결과를 냈다고 자부합니다."

"오, 그래. 그럼 되었다."

이 정도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을 터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리시아의 일이니.

이제 과제 시즌도 끝이 나는구나.

1학기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이 완료되어 가고 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줄거리의 감회에 젖어 가고 있자, 돌연 루이사의 과제가 생각났다. 주제가 분명…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것을 명시하시오. 이거였는데.

그녀가 어떤 답을 어떤 방식으로 적었는지 궁금증이 솟았다.

"루이사의 과제에는 뭐라 답을 했지?"

"...."

알리시아가 눈을 끔뻑거리며 그 입술을 벌렸다 오물거리기를 반복한다.

"명시라 하였으니… 활자의 나열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형상화해도 되고, 아니면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써도 괜찮았지."

자유도가 매우 높은 과제였으니.

"아, 맞습니다.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과제…."

알리시아의 반응이 묘하다.

내 눈을 피하려 들고, 모아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저건,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 알리시아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최선의 결과를 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으면서 루이사의 과제는 대충 넘어간 건가?

…그러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알리시아."

"아… 예! 도련님."

"나는 아직 너의 답을 듣지 못했다."

왜 이러는 거야?

주제를 이상한 걸 잡은 건가. 남들에게 말하긴 힘든 그런 거. 나한테까지 말하기 힘든 걸 적었단 말인가?

미간을 좁히기 시작하자, 내 심기가 나빠지고 있는 걸 알아차린 알리시아는 더욱 당황해하며 난색을 표한다.

그러나, 어차피 숨길 수 없다는 걸 인지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그것이?"

"그것이…."

"...."

"아…!"

알리시아가 고개를 내리며 얼굴을 감추려 들기에 손을 확 잡아끌었다. 아무리 끝까지 머리를 내린다고 해도 표정을 숨길 수 없다.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진실을 뱉어 낸다. 갑작스레 그녀를 끄는 데 놀라 터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자,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것. 알리시아, 너는 그 답으로 무얼 명시했지?

"가, '가족'을…!!"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꿈꾸는 가족의 모습을… 환각으로 담아 제출했습니다…."

아, 가족… 가족이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래, 그녀라면 충분히 적을 답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가족에 대한 결핍이 상당하니까. 그래, 그럴 수 있어….

알리시아는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힐끔힐끔 눈을 올리며 나를 살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낮게 말한다.

"알리시아."

"예, 예 도련님…!"

"당분간 검사는 하지 않겠다. 밤중에 찾아올 필요 없다."

"…예?"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마중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 너는 편하게 네 할 일을 하면 되는 게다."

"…도련님? 어찌하여… 아, 아아…! 도, 도련님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 낸다.

"오늘도 이만하면 되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도련님 정말 오해이십니다…! 저는 단지…!!"

"참, 난처하게 되었군. 에리카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그렇게 한동안 알리시아를 놀리며 오늘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최근에 느끼는 건데, 어쩌면 이게 내 일종의 취미 생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머리를 가볍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괜찮다.

만약 알리시아 같은 시종을 두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