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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반 인근의 중앙 거점.

알리시아를 포함한 전 병력이 이 소란스러운 전장에 합세했다.

알리시아는 도착하자마자 전세를 파악했다. 4반과 5반의 연합군의 머릿수가 크게 줄었다. 1반에서도 탈락자들이 발생했지만 유리한 국면이다.

3반의 레온 일행이 도와주러 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녀의 주인이 말한 대로였다.

그렇다면 알리시아도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이면 된다.

"오오오! 1반에서 온 건가!"

한 남성이 말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분명 저 멀리서 적들과 한바탕 치고받고를 하고 있었는데 폭풍을 일으키며 말이다.

척.

그는 알리시아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음! 잘 단련된 듯하군! 아주 훌륭히 정제된 마나의 흐름이다! 나는 오셀 반테올로 레온. 너희가 없는 동안 저 악인들을 막고 있었다."

"아, 네… 그렇다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나는 악행을 방관할 수 없었을 뿐이니까! 용사로서 마땅한 일을 한 거지! 하하하⎯!!"

알리시아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냥 웃기만 했는데도 이렇게나 위협적인 포효.

전투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도련님에게 들은 바는 없었지만 어쩌면 이를 이용한 기술이 있을지도….

바르간과 함께하면서 전염된 것인지, 알리시아는 그를 세밀하게 뜯어보며 파악하려 들었다. 겉으로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과 태도를 일관했지만, 속은 다소 상황이 다른 것이다.

"수를 보아하니, 더 이상 내가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고개를 쭉 뻗으며 알리시아 뒤에 따라온 이들을 확인한 레온은 주억거리며 말했다.

팔짱을 낀 자세에서는 '약한 이들을 이렇게 보호할 수 있었다! 오늘도 한 걸음 더 진정한 용사에 다가갔다!'는 자신감과 벅찬 감정이 홍수처럼 범람했다.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레온 님들이 아니었으면 저희 1반은 이미 비공정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자네는 선인이군! 마땅히 감사와 예를 표하는 것 또한 용사의 덕목! 덕분에 나도 배우는구나!"

그렇게 또다시 한바탕 호탕하게 웃던 레온은 뒤로 돌며, 양손을 허리춤에 댔다. 가슴을 쭉 펼쳐 안 그래도 넓은 그의 등이 한층 더 확장된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머지않아 다시 전장에서 만난다면 그때는 천지가 요동치도록 멋진 자웅을 겨루도록 하자!"

"기대에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아, 레온 님. 잠시만요, 옷에 먼지가…."

"음, 고맙군!"

⎯빠아아앙!

『3반의 왕 '오셀 반테올로 레온'이 사망했습니다. 3반의 왕이 사망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3반의 모든 인원은 자동으로 아웃 처리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

"…음?"

그 방송이 울리자, 소란으로 가득 찼던 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레온과 알리시아로 향했다.

레온은 이해가 끝나지 않은 알쏭달쏭한 눈썹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본다.

알리시아는 성녀에 버금가는 상냥함과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미소를 보인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면 눈앞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라도 그녀가 벌인 짓이라곤 인지하지 못하리라.

"고맙긴요. 저희가 고맙죠."

***

X 됐다.

3반의 리더.

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깊게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체적인 판국을 살피며 아르텔리온과의 전투로 건물의 일각이 무너져 내린 1반의 거점으로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무슨 개망나니 같은 짓인지.

정찰대로 금방 중간 거점을 확인하고 돌아오겠다고 장담한 레온 일행이 1반을 돕고 있다는 게 아닌가.

통신으로 레온이 '부정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진정한 용사가 아니다!'라며 오히려 호통을 칠 때는, 그걸 듣고 있는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아, 그래.

레온은 원래 이런 인물이었다. 그걸 상정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되지. 당신이 왜 '왕'을 맡게 된 건데!

클래스전이 막 시작된 시점.

누구에게 왕을 맡겨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던 벨을 찾아온 레온.

⎯벨, 내가 왕을 하겠다!

⎯아뇨, 괜찮아요.

⎯나를 믿어라!

⎯아뇨, 진짜로 괜찮다니까요?

레온에게 왕을 맡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벨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벨!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나에겐 방패가 있다. 그리고 강인한 체력과 굳건한 의지가 있다!

⎯…그래서요?

⎯오러로 등을 방어하면 아웃될 걱정도 없지 않은가!

⎯....

바보같이… 아니, 바보에다가 예상하기 힘든 인물이었지만, 레온의 신체 능력이나 오러는 놓치고 싶지 않은 매력적인 보석이었다.

그의 오러를 통과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기습을 당하더라도 짐승 같은 감각과 반사 신경으로 어찌어찌 해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벨!

⎯아, 진짜. 심장에 안 좋아요. 조금만 작게 말해 주세요.

⎯내 주위에 통신이 가능한 사역마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붙여라. 그리고 연락을 통해 나를 움직여라.

⎯지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는 분명히 말했다.

⎯물론, 네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왕을 맡겨라!

당당하게 외치던 그의 고함이 아직도 메아리처럼 귓바퀴에 잔존한다.

그 여운이 가시지도 않는데 뭐?

부정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진정한 용사가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걸 꾹꾹 눌러 가며 겨우겨우 믿어 줬더니만 뭐?

"레온⎯⎯!! 이 X새끼야!!"

벨은 쉰 소리가 나올 정도로 크게 울부짖었다. 본래 평민인 그가 백작가인 그를 욕보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주변의 반 동료들도 그의 감정을 공감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허억허억.

어울리지 않게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더니 숨이 찼다.

"하, 하하. 하하하하!"

벨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대기 시작하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짜 놓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모두가 지켜보는 클래스전. 이 중요한 자리에서.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 가며 준비한 모든 것들을 아무것도 보이지 못한 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극도의 공허함과 무력감이 벨의 눈에 한 방울 맺혔고, 볼을 타고 내려와 흙바닥에 똑 떨어졌다.

46화

공간과 공간의 사이.

허무와 허상의 공간.

워프를 통한 이동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져 그 공간을 채 느낄 순간도 없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에리카는 그 방대하게 넓은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돌리고 있었다.

또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슈겐하르츠!

에리카는 간신히 바르간의 맹공을 피해 워프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본심 같아서는 클래스전이고 뭐고를 떠나 그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싶었다. 공방이라는 표현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겠다. 그저 일방적인 폭행을 가하고 싶었다.

그 뻔지르르한 얼굴을 다신 올리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오만하게 웃을 수 없도록.

하지만 아무리 모욕감이 일고 분노가 차오른다고 해서 현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강하다.

비누칠에 불순물이 씻겨지듯 노력이라는 단어도 씻어 버린 줄 알았던 천재가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어서 그런가.

그의 마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에리카와 바르간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대략 1년 전. 가문과 가문으로 만난 당시에 서로의 성장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여 줬던 모습을 비교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의 마나양이었다.

분명 마물을 통솔하기 위해서 벅찰 정도의 마나를 쏟아부었을 텐데.

철퇴를 든 이후로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마음껏 마나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전까지는 놀고만 있었다는 듯이.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허무의 공간에서 신체는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지만.

에리카는 가상의 지면을 짓밟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서 방대한 마나를 공급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꽤 지쳐 있다는 건 확실했다.

비교적 근처에 있는 5반에 부탁한 원군 중 셋만이라도, 아니. 둘이라도 왔었더라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분명, 다신 없을 기회였을 텐데.

에리카에게 고개를 내미는 현실의 모습은 달랐다.

⎯에리카, 정신 차려라. 아무리 기다려도 원군은 오지 않는다.

묵혀 있던 화도 절로 불러일으키는 비아냥조 말투.

그녀의 생각을 간파한 것처럼 정확히 우려를 짚어 낸 바르간은 전투를 이어 가는 도중 말했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느냐. 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건, 원군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일진대.

분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디피엘리아에게 정확한 위치와 목적에 대해서 전달했다.

원군의 인원이 많아 부담되었던 것만도 아닐 터. 그랬다면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에리카가 속한 4반의 본 거점에 연락을 넣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건,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거나 그 이상의 무언가가 생겼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 때문에 에리카는 현재 4반 거점이 아닌, 5반의 거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야가 확립된, 가까운 곳이라면 빠르게 이동하며 마나의 소모도 적은 워프 마법이지만.

현재 에리카는 바르간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마나를 사용했고, 4반보다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기에 5반을 먼저 들르는 게 효율성이 높다⎯라는 걸 명목으로, 디피엘리아를 걱정하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자.

⎯지잉.

이동이 완료됐다.

허무의 공간을 지나가던 이질감이 사라지고 수십 수백만 개의 작은 입자로 나뉘었던 신체는 올바르게 재구성된다.

마지막으로 디피엘리아의 사역마가 보여 준 시점 그대로다.

공간을 멋대로 이동할 수 있는 워프라고 해도, 시각으로 인지하지 못한 구역을 갈 수 있는 건 아니라 당연한 말이었다.

숨통이 트이는 감각.

공기가 몸을 한 바퀴도 돌지 못했을 때.

에리카는 감각이 활성화됨과 동시에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워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들었다.

바로라도 찌를 것만 같은 날카로운 창끝.

사방에서 이글거리는 눈은 그 창의 주인들이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는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눈동자의 흔들림이 보이는 것만 같다.

"디피엘리아. 이게 뭐 하는 거야 지금."

성녀의 무리는 에리카를 포위하고 있었다.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에리카… 어째서… 어째서 여기로 온 거죠?"

"그야, 가장 확실한 연락 수단이⎯."

"⎯제가 에리카에게 맡긴 사역마가 있잖아요! 4반의 본 거점으로 워프했더라도 연락할 방법은 있었는데 왜… 대체 왜!"

디피엘리아는 그 '왜'라는 단어를 계속 오물거렸다.

주변인들과는 달리 그녀는 에리카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의 감정은 디피엘리아의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왜… 여기로 왔어요…. 에리카."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에리카는 그녀의 말에 내포된 문장을 읽어 냈다.

디피엘리아 주위에 있는 목재 가구의 모습이 변모한다. 물을 먹은 스펀지처럼 부피를 늘린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디피엘리아의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새가 조잘거렸다. 에리카와 접촉한 상태는 아니라 영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에리카의 귀에도 들렸다.

디피엘리아의 통신망은 무사했던 것이다.

⎯디피엘리아 님! 말씀드린 대로, 제2 중간 거점의 방어는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반의 머릿수가 너무 많습니다!

제2 중간 거점?

제1 중간 거점이 아니라?

닿아 있지 않아 잡음이 들렸으나 확실하게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연합군이 공략하고 있던 곳은 1반이 차지한 제1 중간 거점이었다.

제2 중간 거점은 5반이 깃발을 꽂은 지점으로 대부분 5반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을 텐데….

'아.'

고민은 강제로 해결되었다.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순식간에 어떤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시에 지금 그녀의 처지와.

그가 했던 행동들이 오마주 된다.

중간중간 비어 있는 퍼즐 조각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그림이 만들어지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워프를 통해 이동한 그녀는.

'슈겐하르츠…!'

스스로 선택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오도록 '유도'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왔다는 사실로 인해 바르간이 원하는 그림은 완성되었다.

"에리카… 방어에 성공한 1반은 곧바로 제2 중간 거점으로 달려왔어요… 위치를 알고 있던 것처럼요…."

목제품이었던 것들이 꿈틀거리며 줄기를 뻗어 간다.

이내 에리카 주위의 공간을 감싸 가기 시작한다.

"어째서…일까요."

그래도 에리카를 끝까지 믿어 보고 싶었다는 디피엘리아의 애달픈 말투와 대비되게.

구부러졌던 나무줄기가 사방에서 사납게 에리카를 덮쳤다.

***

⎯까악, 까악!

"그리 아양 떨지 않아도 쓰다듬어 줄 텐데 애교도 많은 녀석이구나."

에리카가 떨구고(?) 간 까마귀 사역마의 목을 매만져 주자 검은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얼굴을 비빈다.

세상 행복하게 눈을 감고, 윤기 흐르는 몸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엽다.

에리카에게서 도로 돌려받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역마를 방치해 버릴 주인이라면 버림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데려가도 되지 않을까?

솟구치는 강탈애의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 내며 걷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역마의 마성이란… 대체.

"도련님. 제2 중간 거점의 확보에 성공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이는 알리시아였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와 상황에 대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아웃된 이들이나, 피해 정도를 수치화하여 정확히 알렸다.

"…따라서, 현 1반의 전력은 기존의 8할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충분하군."

만족할 만한 결과다.

지친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사항을 감안하더라도 한창 야단법석일 4반과 5반에 비교하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 혼란을 틈타 돌격하면 되는 일이고.

"...."

알리시아가 빤히 나를 올려다본다.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왜 그러느냐."

"아, 죄송합니다. 뭔가 오랜만에 뵙는 듯하여… 아니 그, 나이아스 님께서 도련님을 흉내 내고 있으신 건 아닌지 확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경하게 행동한 점 사과드립니다."

"녀석이라면 검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마나의 공급을 끊었으니 말이다."

이미 활약을 끝냈는데 녀석만 좋으라고 둘 순 없지.

거리도 좀 돼서 필요한 마나도 더 요구됐으니까.

"도련님. 이후의 계획은 듣지 못하였는데,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것입니까? 저도 이제 약간은… 아주 약간은 도련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오호, 네가 자신감을 보이는 건 또 별일이구나."

환각과 오러의 새로운 단계에 눈 뜬 것이 영향을 준 것일까.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다 높이 평가하게 된 모양이다.

하기야, 그전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으니 올라가야 정상적이지.

"그… 그게…."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지고 있다. 뒷말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도련님께서 인정해 주신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음?

쌍둥이 부엉이 사역마로 통신한 걸 말하는 걸까. 별말을 하진 않았는데. '고생했다.' 말고 뭐 했나.

"인정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않았느냐. 미친 천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정이었다."

"아… 맞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언제나 저를 긍정해 주셨습니다. 그 점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번엔 다소 다른 느낌의 인정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느낌?"

"아, 아닙니다! 그냥 주저리에 가까운 말이니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우왕좌왕하며 급하게 말을 끝내는 알리시아.

저 붉어진 볼을 만지면, 물을 끓인 주전자를 만지듯 뜨거울 것 같다.

뭐, 아무튼.

이후의 전개 말이지.

"그런 건 없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 예? 아, 없는 것이었습니까?"

"그래, 할 건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뿐이다."

"하나라 하시면…."

"총력전."

적의 세력은 깎을 수 있는 최대치로 깎아 두었다.

반면, 우리의 힘은 전력질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남겨 둔 상태. 이미 클래스전을 통해서 관중들에게 보일 쇼는 전부 보여 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나.

이왕이면 마지막까지 잘 장식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우인(愚人)들조차 소름이 돋게 만들어 주자꾸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이번에 준비한 모든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릴 관중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하게 가자.

차마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플럼, 영상 마법을 준비해라."

"아, 아, 아아! 예, 예! 곧 준비하겠습니다!"

크게 부르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던 더벅머리의 남성, 플럼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래스전이 시작할 때 영상 마법을 쓰도록 도운 그 인물이다.

"알리시아, 신학생회 있지 않느냐."

"네, 도련님께서 만드신 연구회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명칭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 하심은…."

신학생회라는 건 관심을 끌기 위한 간판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학생회를 추켜올릴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척을 질 생각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할 필요 없다.

다른 거 하기도 바쁜데 학생회를 뭣 하러.

차라리 그 시간에 한 명이라도 인재를 더 포섭하지.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최후의 결전만을 남기고 있겠다.

모든 이에게 알릴 거라면 지금이 적기다.

이 비옥한 토지에 우리의 깃발을 확실하게 꽂자.

플럼은 신속하게 영상 마법의 준비를 마쳤고 내 앞으로 구체를 띄워 보냈다.

이번엔 알리시아와 대화를 통해서 목도 풀었으니 가다듬을 필요도 없다.

『선전포고다. 에리카, 디피엘리아.』

주변에서 대기하던 1반의 모든 인원들이 각자의 직업에 맞게 꽉 쥔다.

검사는 검을.

마법사는 액세서리를.

궁사는 활을.

각자,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진 무기를 들고.

『이만, 종지부를 찍도록 하자.』

모든 힘을 쥐어짜 낸다.

47화

루이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 좀 풀어 이년아. 이렇게 좋은 날에."

"벨… 벨… 대체 왜 레온에게 왕을 맡긴 거야… 왜… 왜…!!"

날아갈 것 같은 만족감으로 술이 당기는 루이사에 반해, 그녀의 옆에서 좌절하고 있는 파울라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술이 고팠다.

파울라가 시비를 걸어 시작한 내기였으나, 덕분에 루이사는 한 달 치 술 걱정을 덜게 생겼다.

"아, 루이사! 그만 좀 때려! 아파 죽겠네! 그냥!"

"아, 미안미안. 담당 교수로서 우리 반이 우승한 모습이 너무 기특해서 그만."

"으으으…! 레온… 레온…!!"

영상 마법을 통해 선전포고한 대로.

분열한 4반과 5반의 연합군을 1반이 그대로 들이받아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이 순간을 위해서인지 쓰지 않고 아껴 두었던 바르간의 사역마들도 대거 등장해 성을 무너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모든 전말을 깨달은 디피엘리아와 에리카가 다시 힘을 합치려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한번 기울어진 기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사는 우승한 클래스를 띄우고 있는 영상을 바라봤다.

바르간과 그 일행이 걸어가고 있었다.

지쳐 버린 몸을 그대로 침대에 던져 버리고 싶었을 터이나, 눈과 입은 달성감으로 인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짜식. 곧 죽어도 신난 기색을 보이지 않네."

바르간을 향한 말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깨동무하거나, 헹가래를 치면서 기뻐했는데 그는 '천한 녀석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저렇게나 흥분하다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녀석답다면 녀석다운 모습이다.

루이사는 들고 있던 종이를 펴 보였다.

클래스전이 시작되기 전, 바르간이 그녀에게 건넨 양피지였다.

유려한 필체로 길게 적어 놨으나.

군더더기를 제외해서 말하면, 연구회의 이름을 변경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신학생회」에서

「아르볼 프루탈」로 변경 요망.

신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볼 장은 다 본 모양이다. 이 명칭 때문에 루이사가 했던 고생들을 생각하면 바르간의 머리를 술병으로 깨 버리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욕구가 기어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쉽사리 바꿔 주신다니까.

더 이상의 논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에, 루이사에게 있어서도 좋은 이야기였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수석."

루이사는 주위를 잊은 듯 크게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골칫거리였던 수석 녀석의 연구회명도 바뀌었겠다. 클래스전에서 당당하게 우승도 했겠다.

그동안 묵은 체증이 싹 내려앉는 순간이다.

"기분 좀 풀라고, 파울라!"

"아, 쫌! 아프다고 했잖아!! 이 근육 덩어리야!"

루이사의 기분이 고조될수록.

파울라의 등은 시뻘게져 갔다.

***

"돌려줘."

"갑자기 뭐를 말이냐."

"내 사역마. 돌려 달라고."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에리카. 자고로 사역마란 말이다…."

"시끄럽고! 사역마나 돌려 달라고!"

악역영애라 불렸던 위광은 어디로 갔는지 떼쟁이가 된 에리카가 작은 발로 지면을 꾹꾹 누르며 성을 낸다.

밖에서 최대한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것 같더니 결국은 포기한 것일까.

"잘 가거라. 까막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다."

⎯까악….

까만 깃털이 매력적인 까막이는 크게 날개를 펴 보이며 구슬프게 울더니 에리카의 어깨로 옮겨 갔다.

거기서도 씩씩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에리카. 2위도 충분히 훌륭한 성적이다."

"…조용히 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데 성공한 것은 성녀님이 아니라 에리카였다.

디피엘리아는 반 학생들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꼴을 보는 게 힘들었는지 항복을 선언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건 에리카가 이끈 4반이라는 얘기다. 그녀는 모든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날은 또 없을 거야."

에리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두 손은 주먹을 움켜쥔 채 떨리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지금의 에리카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는 게 좋아 보인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흑역사를 잔뜩 생성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은 대귀족으로서, 약혼자로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렇게 에리카에게 추가적으로 말을 걸려는데 불청객이 난입했다.

그녀와 같은 반의 남학생, 밴틀로였다.

인상 좋은 그는 나를 보곤 가볍게 묵례를 했다.

"반 동기들이 에리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만 그녀를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밴틀로, …난."

"걱정하지 마, 에리카. 너는 최선을 다했어.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앞에서 항쟁해 준 너에게 고마워하는 이들도 많아."

"...."

난리가 났네.

서로 꽁냥거리고 아주 난리가 났어.

지금 약혼자 앞에서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며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에리카."

하지만, 그냥 두었다.

내가 건들 사항은 아니었기에.

또한 지금의 에리카에게 밴틀로는 필요한 인물이기에.

다소 버르장머리 없는 건 넘어가자.

"네 시종이 주인을 모시러 왔으니 나도 이만 가 보겠다."

"밴틀로는 시종이 아니야. 모욕하지 마, 슈겐하르츠."

"그래그래. 너도 잘 있거라, 까막아."

⎯까악! 까악!

"그나저나, 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그들을 뒤로하고 멀어졌다.

마침 잘됐다.

나도 보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만날 사람도 있었으니까.

⎯이 사역마 이름이 까막이였어?

⎯아니야… 저 녀석이 멋대로 정한 거야….

뒤에서 작게 들리는 둘의 잡음은 차단하고 상황을 정리한다.

우선, 카티아.

클래스전에서 우승을 했다.

리더를 맡고 있었다.

왕의 문양을 받았다.

클래스전에서 우승을 하면 해당 반의 모든 인원이 20카티아를 받게 된다.

리더는 직책을 맡은 것만으로 5카티아. 또한,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추가로 5카티아.

마지막으로, 우승한 반의 왕은 10카티아를 또다시 받게 된다.

즉, 이번 클래스전을 통해서, 나는 총 40카티아를 획득했다.

입학 수석으로 출발점이었던 20에서.

등급전을 통해 에리카에게 10을 주고.

이번에 40을 얻었으니.

현재 50.

현 1학년 카티아 순위, 2위를 차지한 에리카가 이번 클래스전을 포함해서 46일 터이다.

이로써 잠시 떨어졌던 순위를 다시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지.

신학생회… 아니, '아르볼 프루탈'의 대대적인 이미지 쇄신 광고도 할 수 있었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특별한 '어떤 이'에게 내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부디, 무사히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카티아보다도, 연구회의 이미지보다도 중요한 사안이니까.

"바르간 학생.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어딘가 신비로운 음성이다.

물안개와 같이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지만, 확신할 수 있다.

드디어 그가 접촉했다.

"네, 가능합니다."

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이토록 빨리 다가온 것을 보면 궁금한 게 많은 것 같다.

자, 당신은 어떤 변수이며 어떻게 나를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인가.

"무슨 일이시죠. 헤일리온 님."

***

비공정에 올라탄 나와 헤일리온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별실에 들어갔다.

작은 방이었지만 이야기가 새지 않도록 마법으로 방비가 된 일종의 방음 부스였다.

"바르간 학생은 성자(聖子)인가요?"

헤일리온의 첫 마디는 꽤 직접적이었다.

"아니요. 저는 기적을 행할 수도, 신탁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헤일리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묘한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바르간 학생은 부자연스럽더군요."

"제가요?"

"예, 지금만 해도 그렇죠. 제가 말을 걸 거란 걸 알고 있었죠?"

"그럴 리가요. 제가 예언자도 아니고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지금도 놀란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느라 몹시 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은근히 그를 추켜올리는 말을 섞어 너스레 말했다.

헤일리온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보는 듯했으나 나를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 굉장히 능숙하네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워요."

"칭찬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욕은 아니에요."

칭찬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그저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진실과 거짓에 선악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

헤일리온.

대충은 그에 대한 성격이나 말의 패턴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지만, 예정보다도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남자다.

"클래스전에서 바르간 학생이 활약하는 모습이 돋보이더군요. 저주와 사역마 분야는 신입 용사. 마나 총량은 그 이상. 맞죠?"

영상으로 대충 보고서도 한눈에 파악했다는 건가.

과연, 뛰어난 통찰력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정도 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현 용사랭킹 7위의 남자인데. 당연한 거지.

"그렇습니다."

"이번엔 거짓말을 하지 않네요? 빈말도 하지 않고."

"어차피 알아보실 거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이야기가 매끄럽게 이어 가지지 않고.

단락과 또 다른 단락.

이런 식으로 뚝뚝 끊긴다.

그 특유의 말투 때문인 듯하다.

"저를 부른 이유는 그 때문이었습니까?"

"여러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방금은 그중 하나일 뿐이에요."

잠시 정적이 머물렀으나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초점이 없는 그의 눈은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그가 바로 말을 이어 가지 않는다면 내가 주도권을 잡도록 하겠다.

네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하거든.

나는 미리 준비된 차로 입안을 적시고는 말했다.

"저도 좀 묻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당신은 왜 아카데미아에 온 것이죠?"

"멘토링을 하기 위해서 왔어요."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다. 나 또한 그랬다.

이야기의 흐름이 빠르게 진행된다.

"제가 원하는 답은 아닙니다. 이 또한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역시 부자연스럽네요. 바르간 학생은."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성조에서 미묘하게 흥미롭다는 기색이 새어 나왔다.

원래의 스토리에서 네가 오지 않는 걸 아는데 내가 그런 애매한 대답을 원하겠느냐.

제대로 답하라 헤일리온.

"바르간 학생의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이, 제 질문으로 이어질 것 같네요."

잠시 고민을 하는지 의자에 살짝 등을 기대며 묵언을 행사하던 헤일리온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너무나 뜻밖의 것이라, 계속 유지하던 포커페이스에 살짝 금이 가게 됐다.

"에델과 프리지아라는 아이들을 아시죠?"

…뭐?

지금 걔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알리시아 트라우마 극복하기 위해 들렀던 마을인 루비드 마을.

처음에는 나를 보고 나쁜 마법사 대장이라며 삿대질을 하더니, 나중에는 껌딱지처럼 들러붙어서는 나를 귀찮게 했던 꼬맹이들이 아닌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가면을 복구시키고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역시 그가 아카데미아에 온 건 루비드 마을과 관련이 있었던 것인가.

촌장은 헤일리온은커녕 아무런 소식을 들은 게 없다고 했거늘. 그 무능한 녀석이…!

"그 아이들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다. 바르간 학생."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그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테이블에는 팔꿈치를 댔다.

강압적인 태도이거나, 마력을 뿜어내지는 않았으나 그에게서는 명백한 압력이 느껴졌다.

"멸망해야 했을 루비드 마을의 미래를 바꾼, 당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48화

"언니야… 나, 또 마을 바끄로 나가고 시퍼."

"쉬, 쉬잇⎯! 프리지아, 그건 우리들만의 비밀이라고 했잖아!"

산골짜기에 숨겨져 있는 작은 마을.

루비드 마을의 말괄량이 소녀 에델과 프리지아는 평소와 같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둘은 꽃을 꺾으며 화관과 작은 반지를 만들면서 놀고 있었는데, 동생 프리지아의 발언에 에델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놀란 바람에 크게 외쳐 버렸다.

그런 우려에 에델은 기웃거리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안심감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곤 프리지아의 귀에 조그마한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혹여나 남이 듣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둘러싸며 말이다.

"잘 들어 프리지아. 우리 둘이서 몰래 마을 밖 숲으로 모험을 갔다 온 걸 엄마가 알면 크게 야단치실 거야."

"하디만… 거딧말은 나쁜 거라고…."

"좋은 거짓말도 있는 거야. 세상은 거짓말 없이는 유지되지 않아."

에델의 어른스러운 말이 이해되지 않는 프리지아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언니의 말을 긍정했다.

"프리지아도 혼나는 건 싫지?"

"웅…."

"모험은 또 가고 싶지?"

"응!"

"그럼 모험에 대한 건 비밀로 해야 해."

"왜…?"

병아리같이 말똥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에델을 바라보던 프리지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연결되지 않는 두 개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델은 한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끄으응⎯ 하곤 신음을 내며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면, 언니. 그때 봤던 아저씨도 말하면 안 돼?"

"응? 아, 그 헤일리온인가 하는 아저씨? 응, 안 되지! 그걸 말하면 우리가 밖에 나갔다는 게 들키게 되잖아!"

"그렇구나…."

"그리고 프리지아. 조금만 작게 이야기하자. 진짜 누가 들으면 곤란하다니까."

"촌댱님."

"그래, 촌장님이나 엄마가 들으면 무척 곤란… 어?"

탈그락⎯!

곡괭이가 땅에 떨어진다.

곡괭이는 노인의 어깨에서 낙하한 것이었다.

"에델… 프리지아… 너, 너희 밖으로 나간 적 있었던 게냐?"

"아… 그게요…!"

"거기서 헤일리온이라는 사람과 만났고?"

"촌장님, 잠시만요! 말씀드릴게요. 다 말씀드릴 테니까. 제발 엄마한테만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네?"

루비드 마을의 촌장, 바트의 손이 떨렸다. 그가 최근에 바르간에게 전했던 발언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를 스친다.

⎯네, 바르간 님. 헤일리온은커녕 외부인이 저희 마을에 들른 사례가 없습니다.

설마 그 말이, 그에게 남긴 유언이 된 것일까.

물론, 그 이후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신속하게 보고를 올리겠다는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아닌 에델과 프리지아에게서 얻은 정보. 이 소녀들은 마을에서 자신 다음으로 바르간과 가까운 인물들이 아닌가!

당연히 가장 똑바로, 먼저 확인해 봤어야 했던 것을…!

"사달이야. 사달이야…!!"

촌장의 속에 달린 종이 마구 때려진다.

댕댕댕댕.

잠시도 멈추지 않고.

사달이다 이건…!!

***

"그렇군요. 에델과 프리지아에게."

"귀여운 아이들이더군요."

"...."

우연도 이런 우연이.

교회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도중.

마을 근처 숲에서 놀고 있던 두 꼬맹이에게 물을 나눠 준 헤일리온. 그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마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라….

확률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처음에는 경계하면서 피하더니, 조금 친해지고 나서는 바르간 대장 오라버니와 공주님이 함께 자신들과 마을을 구해 줬다고 자랑하더라고요."

"...."

"공주님은… 알리시아 학생을 말하는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찻잔을 들고 타는 목을 축인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떠올리자면,

과장으로 부풀려졌을지 모르는 나의 행적에 흥미를 느낀 헤일리온은 그대로 조사에 착수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너무나 옅어져 버린 마나의 흔적을 살피며 알티프의 침공이 있었던 그날을 되짚었다.

"알리시아 학생에게 건 저주와, 알티프의 침공. 이 둘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는 마을 내부로 들어가진 않았다.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마을 내부에는 아무런 종적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내가 알리시아의 저주를 걸기 위해 마을 외곽에 심어 두었던 고농도의 마나가, 안 그래도 부스러기 정도만 남은 당시의 사건을 더욱 헤집어 놔 정보를 왜곡시킨 것이다.

그나마 끄트머리라도 감지할 수 있는 건 마을의 외곽이었다.

"신기한 일이죠. 미래라도 보이지 않는 이상, 그런 무대를 만들 수 없었을 텐데요."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헤일리온 님. 결국 당신은, 제가 미래를 볼 수 있다. 이리 생각하고 계신 것이로군요."

"네 그렇죠. 클래스전에서도 일부러 과시하지 않았나요?"

"과시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최적의 수를 뒀을 뿐입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군요."

"실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으니까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소설을 읽어 뒷전개를 알고 있었을 뿐.

성자의 신탁도, 쥐뿔도 아무것도 없다.

추가적으로, 성자의 신탁이라 한들 원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닌 돌연 랜덤 형식으로 깨닫는 경우라 활용하기 힘들다.

"여신교의 의혹이라면 전면 부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닐 거라 짐작했어요."

여신의 축복에 의하였을 가능성도 제외한다.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헤일리온은 잠시 눈을 감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내 말의 진의 여부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상념에 잠겼다.

그러곤 그의 눈이 떠졌다.

나를 파헤칠 듯 관찰하던 눈이 아니라 한층 편해 보인다.

"그녀들에게 건 저주와 관련된 일 등 궁금한 사항이 많이 남았지만, 멘토링을 이어 가면 더 자세히 알게 되겠죠. 모난 돌은 주머니 속에서 튀어나올 테니까요."

"그 말씀은 즉. 어떤 의미인지요."

"바르간 학생은 이상한 성향이 있군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모른 척하며 재확인하려고 하네요."

나는 웃음 지었다.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불렀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저는 바르간 학생을 멘티로 선정할 생각이에요."

⎯됐다.

이것으로 내가 이 소설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한층 넓어지게 되었다.

그뿐이랴, 헤일리온에게서 뽑아 갈 능력이나 기회 등을 생각하면 환호감에 절로 춤을 추고 싶을 정도다!

귀족의 품위를 생각해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헤일리온을 이곳으로 부른 에델과 프리지아에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해도 모자라다. 방정맞게 외부인에게 떠들어 댄 점은 집중해서 관리해야겠으나, 덕분에 생각도 못 한 용의 등에 타게 되었다.

나중에 만나면 선물꾸러미라도 질릴 만큼 안겨 주도록 하자.

물론,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꼬맹이들의 입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촌장은 기존 규정대로 벌을 주어야겠지.

"바르간 학생을 멘티로 선정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가까이 두어 관찰하기 위해. 예지 능력으로 추정되는 힘을 가졌을 나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위함.

둘째, 마법에 대한 천재성도 있지만, 월등하게 눈에 띄는 마나 총량이 흥미로워서. 이 또한 오랜 관찰을 통해 알아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저와 비슷한 사상을 품고 있는 거 같아서요."

헤일리온은 말한다.

나는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으쓱였다. 그의 말은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남은 예비 멘티 자리 하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설마 공석으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안 그래도 그 사안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헤일리온은 가죽 가방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입증하는 증명서였는데 사인란에는 이미 헤일리온의 이름과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예비 멘티가 될 두 명의 인물을 기다리듯.

그 아래 두 사인란은 비어 있었다.

"바르간 학생에게 권한을 양도하고 싶어요."

종이를 훑어보던 나는 눈을 올렸다.

헤일리온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나에게 무언가를 넘기는 제스처를 취했다.

"남은 자리의 선택권은 바르간 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공석으로 남겨도 되고 지인을 초대해도 돼요."

나를 시험하는 말투는 아니다.

다른 감정도, 판단도 들어가지 않은 눈이다. 그의 배경과 지금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나는 알았다.

그는 관심이 없다.

최초의 흥미 사항인 나 이외에는.

설령 아르텔리온 같은 막강한 무력이나, 알리시아 같은 희대의 재능에도 감흥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정식으로 멘티를 선발하게 될 때는 떨어지게 될 낙엽이니.

"의외네요."

내가 시간을 끌고 있자,

헤일리온이 말했다.

"바르간 학생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공석으로 부탁할 줄 알았는데."

"그 역시 매력적인 제안입니다만, 귀족으로서, 아카데미아의 학생으로서. 마땅히 이 천금보다 귀한 기회를 베풀고자 하기에."

"그 말은, 이미 누구를 염려에 두고 말한 것이군요?"

뭐, 그렇지.

아무리 곧 떨어질 낙엽이라도 헤일리온 같은 용사에게 배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몹시 값지니.

애초에 나에게 흥미를 품고 아카데미아까지 온 헤일리온이다.

내가 떨어질 위험은 만무하다고 봐도 괜찮겠으나, 다소 위험성을 지니더라도 이걸 그냥 비워 두기에는 아깝다.

"헤일리온 님, 당신에게 권하겠습니다."

헤일리온은 귀를 기울였다. 몸을 가까이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봤다.

"나머지 한 자리는…."

***

입학 성적 꼴찌.

토이렌 트로아 핀은 온몸을 붕대로 감은 채. 비공정 내부 병실에 침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압도적인 신동.

한천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핀은 어렸을 적에 바르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살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중위 원소 마법을 다룰 수 있다더라.

소수만 쓸 수 있는 저주 마법에 특히 두각을 드러낸다더라.

연이어 들리는 바르간의 행보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샘했을지 몰라도, 핀은 달랐다.

대단하다.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

핀은 진심으로 바르간을 동경했다.

귀족이라 해도 차이가 너무나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의 재능에 감격하여 그가 잘 되기를 바랐다.

그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카데미아에 간신히 들어왔더니 그 우상, 바르간 님이 자신과 같은 조에 들어오신 게 아닌가!

평소에도 노력하기를 아끼지 않는 핀이었지만 그와 함께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매진했다. 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중간에 몇 번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용사가 되기 위해서.

같은 조인 그에게 창피를 주지 않도록 열심히…!

"…아니, 부족해… 너무나."

핀을 괴롭히는 클래스전의 기억.

그 상처가 다시 욱신거린다.

그러다.

드르륵⎯.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핀은 화들짝 놀랐다.

"바, 바르간 님…?!"

그는 우월한 높이에서 핀을 흘깃 내려다보더니 멋대로 걸어와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바르간의 눈동자는 얼음 결정처럼 차가워 보였다.

핀은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보일 낯이 없었다. 그가 명령한 대로 클래스전에서 팔론의 발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나도 치욕적이고 한심스러워 핀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바르간 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려⎯."

"핀, 네 싸움을 지켜봤다."

딸꾹질한 것처럼 핀의 몸이 거세게 뛰었다.

바르간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실로 처절한 발버둥이더군."

화악. 핀의 안면에 불길이 치단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치부를 보이는 것처럼, 수치스러우며. 자신을 믿어 준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기껏 알려 준 검술도 유효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지. 땅을 구르며 팔론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네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팔론에게 수차례 짓밟혀 멍이 든 볼이 지끈거린다.

얼굴만이 아니다.

허벅지, 날개 뼈, 발목 등 멍들고 다친 부위들이 그의 말에 반응하듯 아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핀은 고개를 더욱 숙이며 부들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르간 님께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당차게 알겠다고 대답했으면서 지금의 꼬락서니.

한심하고 부끄럽다.

"정말… 죄송합니다."

핀은 사죄 말고는 어떠한 변명도 입에 담지 않았다. 말꼬리가 길어질수록 자신이 더욱 초라하고 볼품없어질 것만 같았다.

모든 이들이 욕해도 괜찮다.

화면으로 지켜봤을 교수나 학생들의 놀림이나 비난은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핀이 어릴 적부터 우상시했던 천재, 바르간에게 진심 어린 모욕을 듣는다면 다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좌절해 버릴 것만 같다.

"핀."

두렵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차가운 음성에서 이어질 단어가 어떤 것일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어쩌면 내쳐질지 모른다.

그가 만든 연구회에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

"…예, 바르간 님."

핀은 긴장을 하고 있었으나 반 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다.

자신이더라도 그의 상황이라면 끝을 고했을 터이다. 이런 재능도, 비전도 없는 녀석에게는 맞지 않는 기회였으니.

그렇게 이어지는 바르간의 말에 핀은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더욱더 발버둥 쳐라."

"…예?"

바르간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핀의 눈동자는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고, 놀란 숨은 정지하는 듯했다.

"근육이 터져 나가더라도 단련해라. 과열된 마나회로가 망가지더라도 전념해라."

고고한 눈동자는 핀을 꿰뚫는다.

"너에게 휴식이란 사치다. 죽음 이후에나 몸을 편하게 해라. 무리해라. 억지로 움직여라. 그리고…."

잔혹한 현실을 강조하며 철저히 강압적인 어투의 말. 그러나 핀은 그 명령을 들으며 울컥하는 감정을 참아 내는 게 힘겨웠다.

버티지 않으면 눈가에서 그대로 흘러나올 것만 같다.

"네 가치를 증명해라."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알리는 증명서.

멘토의 칸에는 헤일리온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그 아래 멘티란에는 바르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최하단에 비어 있는 하나의 사인란.

바르간이 펜을 건넨다.

"네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다."

붉게 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던 핀의 손등 위로.

참았던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저는 …저는…."

잔뜩 눈물이 올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의 시야로 검은 펜을 조심스레 받았다.

그대로 머리를 낮추는 핀.

목울대가 울렁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방울져 떨어지던 눈물은 줄기가 되어 흘러내렸고, 몸은 달싹거렸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1천 킬로미터 이상의 상공.

아카데미아로 돌아가는 거대한 비공정의 방 하나에서, 핀은 조용히 울었다.

49화

그래 인정하겠다.

핀을 선택한 건 반 정도는 감정에 의거했다.

본래 감정은 최초에 목표를 정할 때 말고는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를 어기고 행동해 버렸다.

⎯끄흑…!

핀의 한심스러운 울음이 들린다.

내가 나오자 더 이상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쏟아 내는 듯하다.

토이렌 트로아 핀.

입학 성적 꼴찌를 제외하면 원작에서 단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 없는 둔재 중에서도 둔재.

하나, 그가 클래스전 준비 기간에 보여 줬던, 팔론과의 전투에서 증명했던 끈기만큼은 소설에 적혀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나는 재능 있는 자를 아낀다.

내 게임 패는 오색찬란한 재능의 광휘를 뿜어내는 자들로만 가득 채울 것이다.

굳이 빛나지 않는 자들로 공간을 채울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이건, 실험.

한계를 시험할 실험용 쥐다.

핀에게 재능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발끝조차 보이지 않는다.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 녀석이 어디까지 기회를 얻는다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테스트이다.

혹시 아는가, 이 모델이 성공하여 다른 이들에게 적용 가능할지. 쓸 만한 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변명이군."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으나, 그 자본으로 다른 이에게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인 건 당연지사.

따라서, 핀을 키우고자 하는 건 취미생활로 치부할 수 있겠다.

RPG 게임에서 캐릭터가 성장한다고 현실의 본인도 함께 성장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게임을 하게 되는 그런 아이러니한 현상.

"알리시아."

"예, 도련님."

"너는 남을 도움으로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였지."

"…그것은… 예? 그렇습니까?"

이거 알리시아보고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네. 얘나 나나 거기서 거긴데.

"넋두리이니 그리 고민에 빠지지 말고 잊어라."

"예… 알겠습니다."

***

아카데미아로 돌아오고 나서 하루 뒤.

연구실로 들어가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아직 핀의 치료가 끝나지 않아 입을 나불거릴 인물이라곤 별로 없을진대 왜?

그런 의문을 품으며 문을 열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바르간 님! 먼저 들어와 실례하고 있었습니다."

맹랑한 목소리로 나를 반기는 인물.

프리다.

비공정에서 매수하여 5반의 거점에서 성녀를 뒤흔드는 데 크게 일조한 여자다.

"그래."

"진짜였나 보네?"

"에밀리, 내가 진짜라고 말했잖아."

신분이 천하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에밀리와 프리다는 벌써 친해 보였다.

자리에 앉자, 알리시아는 자연스럽게 티 세트를 내왔다.

연붉은 차가 찻잔에 쪼르르 담겼고, 하얀 연기가 올라 온기를 전했다.

"와, 진짜 그림이네요."

프리다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어떤 의미로 그림이라고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묻지 않았다.

"입회 신청서다. 여기에 이름을 적으면 너도 아르볼 프루탈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오, 감사합니다."

내가 도로 뺏어 가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종이를 가져가더니, 빠르게 훑어보곤 이름을 적어 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프리다'라 적는다.

지렁이가 기어가도 이것보다는 형태가 아름다울 텐데.

"내용을 면밀히 살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냐."

"아직 어려운 글자는 읽지 못해서요."

"사기라도 당하기 딱 좋겠구나."

"그럴 가능성도 고려해서 이미 신청서의 내용은 다 파악하고 외워 놨죠. 방금 그건 다른 글자가 있는지 확인한 것뿐이에요."

프리다는 생긋 웃으며 알리시아가 미리 내준 차를 홀짝였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면 앞으로 방해될 수 있다. 이른 시일 내에 기본적인 어휘는 갖추도록 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뭘 그렇게 멍하니 서서 보고 있나 에밀리. 프리다가 멤버로 들어오는 게 싫은 것이냐."

"뭐뭣…?!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그게 아니라…!!"

에밀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걸 무시하고 알리시아가 펼쳐 준 책을 읽는다.

정확히 저번에 읽다가 만 곳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활자의 나열을 따라가려던 순간, 에밀리의 손이 책을 가렸다.

"멤버인 우리에게도 제대로 설명해 줘!"

…귀찮게 하는군.

나는 땍땍거리는 소음을 듣고 싶지 않아 빠르고 간결하게 말했다.

클래스전에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프리다를 우리 연구회 소속으로 넣어 주며 간간이 나를 도울 때마다 용돈을 주기로 했다.

이유? 5반을 배반하는 짓을 했는데 그 무리에서 어울릴 수 없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는 프리다가 제안한 사항이었다.

"아무리 돈을 벌 수 있어도 혼자 다니는 건 외롭잖아."

프리다는 생존을 위해 연기를 익히며 써먹어 온 여자다.

용사의 재능은 평균을 살짝 웃도는 정도고 생존력이 강한 녀석이니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가령, 클래스전 때처럼 나 대신 누군가를 속인다든지. 마음 여린 녀석들에게는 못 맡기는 그런 일들이 있지 않은가.

또한 그녀는 기존의 스토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리암과 사상적인 대립이 가장 심한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녀의 교활함을 리암은 인정할 수 없다. 2학기 축제 에피소드에서 크게 부딪히기도 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포섭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 그럼… 그… 리암도…."

"자, 그만 떠들고. 일을 시작하자."

에밀리가 쓸데없는 말을 시작하려 하기에 끊어 버리곤, 눈앞에 쌓인 종이의 산으로 주의를 돌렸다.

거 많긴 하네.

"알리시아, 몇 명이 지원한 거지?"

"총 121명으로. 1학년 72명, 2학년 29명, 3학년 18명, 4학년 2명입니다."

"3학년과 4학년의 지원자 수가 적은 이유는?"

"여러 연유가 있사오나. 아르볼 푸르탈이 1학년으로만 구성된 점, 일부 학생회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3학년과 4학년에 밀집해 있는 점, 이미 연구회에 속해 있다는 점이 주된 요인으로 사료됩니다."

가정한 대로군.

하나를 제외하면.

"내 기분을 맞추기 위해 중요한 사항을 빼먹지 않았느냐. 알리시아, 네가 한 짓은 정보 왜곡이다. 다신 그러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르볼 프루탈의 연구회장이 나이기 때문이 아니냐."

이른바 텃세라는 것이다.

대귀족의 자제라고 해도 1학년.

자신들보다 늦게 아카데미아에 입학한 이의 아래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지.

나이보단 실력이 중시돼야 하거늘.

…하지만, 오히려 좋다.

그런 썩어 빠진 마인드를 가진 이들은 자동으로 걸러졌다는 말이 아닌가.

나로서도 수고를 덜었으니 서로 잘된 일이다.

"이걸 언제 다 검토하지…?"

에밀리가 혀를 내둘렀다.

"금방 한다. 내가 적어 둔 수치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을 제외하곤 나에게 넘겨라. 내가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추려진 인원들로 면접을 보는 거고?"

"그래."

연구회의 주제, 개인 역량 발전.

이에 대한 광고도 제대로 했겠다.

다가오기 꺼려졌던 신학생회라는 명칭도 사라졌겠다.

학생들이 모이는 건 합당했다.

인재들을 포섭해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명백히 반가운 소식.

그러나, 이들을 모두 받아서는 효용성이 떨어지게 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서류를 보며 소설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을 우선하여 뽑고, 비중은 적었지만 재능이 있는 자들, 재능이 엿보이는 자들을 뽑는다.

학생회 소속의 엘리트들을 데려오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들은 차차 이어진 진행에서 어루만지도록 하자.

그러면 지금은 먼저.

"서류를 정리하자."

⎯앗, 잠시만요!

프리다의 개입으로 인해 흐름이 깨졌다.

당혹감이 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저는 글씨를 못 읽는데요?"

"…너에겐 맡기지 않을 터이니 잡일이라도 하거라."

"네에…."

***

에리카가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의 방.

그녀는 책상에 앉아 바르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악랄한 놈…!"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부정적으로.

완전히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클래스전은 수치스럽게 마무리되었다.

평소, 주위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에리카였지만 제대로 반을 이끌지 못했다는 실패감은 그녀를 괴롭혔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에리카는 바르간에게 당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해는 풀었다지만 녀석 때문에 디피엘리아와의 사이는 서먹서먹해졌다. 안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거의 없다시피 하건만, 이렇게 한 명의 예비 친구를 잃게 되었다….

아니, 아니지 아니지.

친구라서가 아니다.

감정에 먹히면 안 된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디피엘리아는 성녀이면서 유능한 사람.

친구가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인재를 잃었다는 게 슬픈 일인 것이다.

"...."

물에 젖은 고양이, 아니 생쥐처럼 풀이 죽은 에리카는 포크를 들어 조각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푹 잘라 냈다.

반듯하게 잘린 케이크은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포크에 의해 꺼진 케이크의 푹신한 시트가 금세 복구된다.

냠.

에리카의 입에 들어간 케이크의 조각이 녹아내리며 혀를 감싼다. 달콤함과 약간의 새콤한 맛의 조화가 훌륭하다.

"...."

원래 같았으면 그 달콤함에 취해 감탄사를 내뱉었을 테지만. 지금의 에리카는 그러지 못했다.

제철의 과일이 올려진, 고급 케이크가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오래된 호밀빵처럼 느껴졌다.

오물오물.

금방 삼킬 작은 한 입의 조각을 오랫동안 씹는다.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입의 근육이 움직일 뿐이었다.

⎯똑, 또독.

노크하듯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햇살처럼 드리우는 창문이었다. 창밖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노란 새가 보인다.

에리카는 창문을 열어 새를 안으로 들였다.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에리카와 주기적으로 연락하기 위한 수단이니까.

방으로 들어온 새는 방 안의 공간을 몇 번 둥글게 배회하더니, 이내 에리카의 어깨에 살포시 앉아 팡⎯하고 반짝임을 남기며 사라졌다.

별무리 같은 노란 빛들은 재조합되어 편지 봉투의 형태가 되었다. 뜯어서 내부를 확인하자 장문의 편지 한 통과 연극 티켓이 두 장 들어 있었다.

"…뭐지?"

편지라면 일상적이지만, 티켓이 들어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에리카는 티켓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곤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은 간단한 문안 인사였다.

언제나처럼, 에리카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긴 애정의 문구들.

"…어, …어어?"

그러나.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에리카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동시에 편지를 읽는 속도도 높아지고, 그녀의 시선도 빠르게 움직였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요즘 녀석 때문에 머리 아픈 지경인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으으…!"

에리카는 순간 차오르는 감정에 쓸려 편지를 찢어 버릴까 하다가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소중한 편지다.

아무리 담긴 내용이 개떡 같다 하여도 손수 적어 주신 글귀다.

"하아...."

에리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주 길게.

무거워진 머리를 짚으며.

에리카는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특정 문장을 다시 눈으로 읽어 본다.

「나의 사랑스러운 요정 에리카야, 오는 약혼 기념일에 바르간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오려무나.」

차라리 작년처럼 가족끼리 만나는 자리였다면 좋았을 것을…!

에리카는 좋지 않은 말이 담기지 않도록 꾹꾹 글씨에 힘을 주며 답신을 적어 내려갔다. 쓰면서 도중에 주기적으로 멈추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이다.

"…이걸 슈겐하르츠에게 어떻게 전하면 좋은 거야."

50화

"무슨 일이지?"

적막만이 감돌던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아카데미아의 학생회장이자 슈겐하르츠 장남인 라인카르벤은 냉소적인 눈동자로 찾아온 이를 바라봤다.

"연구회 신입 회원 선정 건으로 왔습니다."

바르간은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었다.

문이 닫히며 밖의 소음은 차단되었고, 공기의 흐름은 온전히 두 사람만의 것이 되었다.

운을 뗀 이는 바르간이다.

"1차 서류 심사를 끝내서 말이죠. 2차 면접을 볼 장소를 대실해야 합니다."

라인카르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고요를 이어 갔다. 그의 이지적인 눈동자가 바르간을 가볍게 훑는다.

바르간은 그가 원하는 바는 이미 준비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대여실과 시간을 적어 두었습니다. 공실임을 확인하고 작성한 것이니 착오는 없습니다."

고급 원목으로 된 중역 책상 위에 올려진 봉투, 바르간은 기분을 헤치지는 않는 선에서 살며시 미소를 보였다. 분명히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고 있으나, 무언가 보는 이를 찜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날카로운 두 눈동자가 정확히 마주한다.

"연구회 명칭 때의 일도 그렇고. 형님 덕분에 무사히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문의 형제로서, 더 나아가 아카데미아의 일원으로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

라인카르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민을 해서인지 눈이 피곤해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눈꺼풀이 닫힌 것 말고는 바르간이 들어오기 전의 자세와 같다.

여전히 반응이라고는 보여 주지 않는다.

역시 장남인 라인카르벤은 지독하리만큼 딱딱한 사람이다.

그렇게 느낀 바르간은 웃음을 지우며 뒤를 돌았다. 둘의 대화는 이대로 끝이다. 필요한 건 전달했으니 더 이상 이 답답한 공간에 있을 필요 없다.

바르간은 긴 다리를 뻗으며 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바르간."

곧은 음성.

이름을 불렀을 뿐이지만 귀족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낮고 확실하게 울리며 나서려던 바르간을 잡았다.

바르간은 가볍게 뒤로 돌며 입가에 작은 웃음을 걸었다.

우리 둘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기에 나를 붙잡느냐는 의미를 함축한 행동이었다.

라인카르벤은 감았던 눈을 뜨며 다시 바르간의 검은 눈동자를 직시한다. 기 싸움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도 눈을 피하지 않는다. 마치 서로를 가늠하듯 파악하려 든다.

"어린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눈싸움이나 하자고 붙잡은 건 아닐 텐데요. 어떤 용무로 부르신 거죠."

"아르볼 프루탈."

바르간이 설립한 연구회로, 학생회의 위광을 빌려 시선을 끈 그 단체. 라인카르벤은 최근 바르간이 보이는 이상 행동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길드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냐."

아카데미아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가 용사가 되지는 않는다. 귀족들 같은 경우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예도 있고, 평민들은 던전을 공략하며 마물을 퇴치하거나 잡는 헌터의 일을 맡기도 했다.

바르간이 모은 연구회의 인원들은 재능이나 수준, 계급이 천차만별. 엘리트 집단을 형성해서 아카데미아 내부에서의 권력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귀족계의 사교가 목적인 것도 아니다.

한 달 전, 바르간이 말한 '놀라운 발언'과 조합하여 생각했을 때. 연구회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헌터 육성을 통한 길드 사업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라인카르벤의 의도를 읽은 바르간은 내리깐 눈을 빙빙 돌리며 고민하는 체를 했다. 흠.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행위도 잊지 않았다.

이를 짧게 마치곤 대답한다.

"아카데미아의 인재들을 벌써부터 바깥 것들과 섞는다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이들은 아카데미아의 입학 조건을 충족한 새싹들인데 말입니다."

라인카르벤이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자 바르간은 예상했는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야, 형님께서 보시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순물이 다소 섞여 있겠으나,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패총처럼 보이던 그 껍데기 안에 실은 진주를 품고 있을지⎯ 그렇게 말하는 바르간의 표정은 가정이 아니라 확신을 한 듯했다.

라인카르벤은 여전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있었다.

"자신 있어 보이는구나."

"매사에 당당하게 행동하는 게 제 신조입니다. 또한, 형님이라는 아군을 얻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

"제가 했던 말 중에 거짓은 한 스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토록 하지요."

끼익⎯.

그 말을 끝으로 바르간은 학생회실에서 나섰다.

그리고.

잠시나마 깨졌던 고요가 다시 돌아왔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로 인해 공중에서 춤추는 먼지의 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

"...."

홀로 남은 라인카르벤은 중역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깔끔하고 어딘가 기품마저 느껴지는 글씨체.

바르간의 성격을 닮았다면 막 나갈 것 같지만 특이하게도 이런 예는 철저하게 지키는 게 그였다.

팔락.

이 종이를 바르간에게 받은 지 벌써 1개월 정도가 되었으나 볼 적마다 깊이 확인해야 했다. 특수한 마법이 걸린 것은 아닌지. 궤변이 섞인 것은 아닌지.

너무 쏘아봐서 눈이 시릴 정도로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재확인을 이어 갔다. 하지만.

'없다.'

어떠한 꼼수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준비해 두었다면 눈치를 챘어야 정상이다. 마력을 사용하면서까지 확인했는데 별다른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 글은 곧 흐트러짐 없는 바르간의 뜻이었다.

"...."

바르간이 직접 작성했고.

마지막에는 가문의 문양까지 찍은 서약서.

라인카르벤은 그 문서를 읽는다.

「나,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은 슈겐하르츠 가주(家主) 승계 권한을 포기한다.」

적힌 내용은 단출하다면 단출했으나, 결코 쉬이 넘길 수 없는 문장.

길게 나열된 그 어떤 문단보다 강한 파괴력이 있었다.

***

학생회실을 나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표독스러운 눈에 작은 체구를 가진 여인이다.

"요즘 자주 보는 듯하구나. 에리카."

"...."

에리카의 사나운 눈빛이 쏘이기만 한다.

평소였으면 아는 척하지 말라든지, 괜히 말 걸지 말라든지 하면서 입으로도 틱틱댔을 텐데. 눈으로만 말한다.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학생회실에 들어가고 싶었던 건가. 내가 있어서 안 들어갔던 거고.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그녀를 지나치려고 하자 에리카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아직까지도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입이 조금 벌려져 확실하게 나를 잡곤 무언가를 전하려 하는 기색이다.

"뭣 때문에 그리 끙끙 앓는 것이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에리카와 마주했다.

에리카의 작은 입이 오물쪼물하며 꺼내기 싫은 무언가를 간신히 뱉어 내려고 한다.

작은 동물 중에서도 나름 포식자를 차지할 것 같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저번에 봤던 감정과 비슷한 색이 띠었다.

클래스전이 끝나고 보았던 것으로 수치심과 비슷한 경우였다.

음… 얘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면 어지간한 일이라는 건데… 아.

알아챘다.

잘 생각해 보니 곧 있으면 에리카와의 약혼 기념일이다. 아직 일주일이 남았기에 미뤄 두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편지가 도착한 모양이다.

"미안한 말이다만, 용무가 없다면 잡지 말거라.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말이다."

"자, 잠깐만… 슈겐하르츠!"

하지만 모른 척했다.

왜냐고?

거창한 까닭은 없다. 그저 에리카가 어떤 행동 방식으로 지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인물은 강하게 키운다. 알리시아 때도 그랬지만 내 철칙은 바뀌지 않는다.

얼떨결에 나를 손으로 붙잡은 에리카는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떼곤,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냈다.

잠시 풀어졌던 표정도 도로 차갑게 되었다.

예쁘게 세공된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기회를 줄게."

관용을 베풀어 가엾은 이들을 구원하듯, 에리카는 시건방진 모습을 보였다.

팔짱을 낀 채 말이다.

"무슨 기회 말이냐."

"네가 제안했던 점심이나 저녁 식사 약속 말이야."

식사 제안이라 함은 에리카에게 달라붙은 스토커를 유인하기 위해서 던진 미끼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게 어쨌단 거냐."

"그러니까. 다시 기회를 준다고."

"에리카. 확실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게, 그… 아, 잠깐 기다리라니까!"

나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는다면 떠날 것이라 경고하며 마지막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한 에리카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한다.

입은 계속 벌어졌다 오므리기를 반복한다. 언뜻 보면 어미 새가 가져온 먹이를 받아먹기 위한 새끼 새의 부리 같기도 하다.

그러다 혼자서 뭔가를 깨달았는지 중얼거리더니 다시 내 앞으로 좁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래, 잘 생각해 보니 이렇게 머뭇거릴 일도 아니네. 나는 어머니께서 전하신 바를 다시 너에게 전할 뿐이니까."

"그럼 말해 보거라."

"태도하곤… 아무튼,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있는 에리카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붉은 기운을 남긴 채, 애써 당당하려 한다.

"다음 주, 이날. 저녁 시간 비워 놔. 나랑 갈 데가 있으니까."

***

에리카가 어머니의 편지 내용을 무시하지 않았던 까닭은 부모님의 지시에 따르려는 그녀의 성격과 감시 때문이다.

당일 공연장에는 나와 에리카가 왔는지를 확인할 관계자가 배치되어 있을 터이다. 티켓까지 건네준 것을 보면 확실하다. 전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에리카와의 승강이를 벌인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체내의 마나를 다스렸다.

에리카에게 한, 바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몇 달 동안을 인내해야 할 커다란 시련을 위해서.

'우선, 마나 총량을 더욱 넓혀야 한다.'

바르간에 빙의되고부터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수행하는 체내 마나의 확장.

다른 건 빼먹을지라도 이건 빼먹어선 절대 안 된다. 기본적으로 마력 소비가 큰 바르간의 기술들은 본인의 절대적인 마나치가 중요한 사항이다.

저주도, 사역마도 단체로 사용하면 순식간에 마나를 다 빨아먹고 만다. 바르간에게 있어 마나 총량이란 필수 조건이다.

그 이후의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면 안정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을 늘려야 한다.

나는 바닥에 가부좌로 앉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굳이 가부좌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이 자세로 마나를 활성화시키는 게 가장 편했다.

체내의 마나 총량을 확인한다.

예상한 대로의 진척 상황. 이대로라면 목표 시기에 늦지는 않겠으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

이어서,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마나로 돌린다.

마력은 피처럼 전신에 흐른다. 비록 가시적인 실체가 존재하지는 않으나 확실하게 그것은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

따로 심장이 존재하지 않으니 억지로 펌프질을 하여 마력의 움직임을 가속한다. 손끝 세포까지 놓치는 곳 없이 골고루 퍼지도록.

이와 함께 체내에 담긴 핵의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생명의 근원처럼 활력 있고 드넓게.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그렇게 세 시간이 약간 넘도록 마나 총량 확장에 시간을 쏟은 뒤, 나는 눈을 떴다.

전신이 땀으로 끈적거린다.

몸에서는 열기까지 올라왔는데 창문을 미리 열어 두지 않았다면 이 방 안이 찜질방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고 몸 상태를 정돈했다. 마력을 다스린 훈련인지라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니, 준비해 둔 찬물과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차가웠던 수건은 열기에 금방 미지근해졌다.

'졸업 요건으로 만들어야 하는 고유술식. 준비해야 하는 조건들이 만만치 않다.'

아카데미아 마법사 계열 졸업 요건 중에서는 각자 고유술식을 완성하는 사항이 있다. 시기상으로는 앞으로 4년이나 남은 일이니 아직은 깊게 고민하지 않는 이가 태반이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아카데미아에서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악역.

내가 소설에서 퇴장하게 되기까지 앞으로 3년.

기존의 바르간은 고유술식의 완성을 끝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으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반 정도만 완성된 고유술식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악역 바르간의 최후.

그의 인생 마지막 장.

바르간은 미완성된 대규모 고유술식을 발동하고 상당수의 재학생은 물론, 교수들, 심지어는 용사들까지 혼란 속에서 제거했다.

그때 당시의 미쳐 버린 바르간은.

내가 아꼈던 바르간에서 크게 벗어나 버린 그는.

사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광란의 장에서 유린과 유희를 즐기며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일반적으로 그의 광기에 시선을 돌리기에 십상이나, 주목해야 할 점은 고유술식이다.

절반가량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은 고유술식.

바르간은 그 불완전한 마법으로 모두를 압도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만약 그 술식이 완성되었더라면?

바르간이 게으름을 탈피하고 술식에 필요한 모든 준비물을 갖춘 뒤, 인내의 시간을 거쳐 다듬는 데 성공했더라면?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할지 모르나 지금의 나에겐 사정이 다르다.'

어쩌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아니, 끝이 나기에 바르간의 고유술식은 완성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리암 일행의 뒷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위한 관문으로서. 적절한 난이도 조절을 위해 말이다.

'내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성싶으냐.'

바르간의 죽음.

최후의 순간까지 완성되지 못했던 고유술식.

"반드시 완성해 보일 것이다."

장담하지.

고유술식이 완성되고부터, 이 이야기의 끝맺음을 정하는 이는 오롯이.

내가 될 것임을.

51화

"저는 정령술이 특기입니다. 무려 자작급의 정령을 둘이나?."

다음.

"아, 아, 안녕하세요! 저, 저저저, 저는."

다음.

"하하하하! 오랜만에 보는군, 알리시아. 클래스전에서는 방심해서 등을 내주고 말았지만, 다음번에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통해서?."

다음.

아니, 잠깐.

레온 녀석은 진짜로 무슨 생각으로 신청한 건지 모르겠네. 반쯤 장난으로 서류를 통과시켰는데 애초에 저 녀석 학생회잖아. 학생회에서 나가지 않으면 연구회에 속하지 못하는데 나갈 생각으로 한 건가.

아무튼, 무력은 뛰어나도 통제가 안 되니 탈락.

"도련님… 조금은 더 대화해 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태도와 마력의 기운, 간단한 인사말 정도면 알 수 있다. 길게 이야기해 볼 필요도 없지."

"그래도 지원해 준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아? 네가 계속 칼같이 쫓아내느라 나는 미안해 죽겠는데."

"오히려 면접이 빨리 진행되니 좋은 일이 아니더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니 발전이 더딘 것이다, 에밀리."

"…이상하네. 저 사람 개무시하는 말투, 분명히 화는 나는데… 속이 부글부글하는데 뭐라고 할 힘은 안 나. 이게 익숙해진다는 건가. …세레나, 네 의견은 어때? 지금 너무 빠르게 진행하는 거 같지 않아?"

"...적당."

"나는 바르간 님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해."

"프리다… 대체 바르간에게 얼마를 받은 거야?"

그렇게 점차 면접의 흥이 식어 가고 있던 무렵. 다음 지원자의 프로필을 들춰 본 나는 흐려져 가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이번 지원자 중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네 명의 인물 중 하나의 차례이기 때문이다.

"벨리아르 트로아 밴틀로라고 합니다. 궁사의 포지션을 맡고 있습니다."

입학 성적 7위, 현 1학년 최강의 궁사 밴틀로.

에리카의 몇 없는 친우이기도 한 그가 아르볼 프루탈에 가입하기 위해 찾아왔다.

"...."

드물게 세레나가 불쾌함을 드러내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클래스전에서 밴틀로와 궁사 간의 승부를 펼쳤지만 밀려 허덕이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밴틀로는 오히려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인다. 그녀의 경계심에 당황하지 않는다.

녀석의 대략적인 성격은 알고 있다.

"지원 동기에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적었더구나. 내가 가산점이라도 주리라 본 것이냐."

"아니요. 어릴 적부터 천재로 유명했던 바르간 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면,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바르간 님과 친분을 다지고 싶다는 욕망이지 그 외의 불순한 생각은 없습니다."

"과연 입놀림은 알리시아급이로구나."

"…도련님?"

옆에서 알리시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당황스러워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저런 점. 천연덕스럽게 무고한 척하는 점이 딱 닮았다.

밴틀로는 눈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넘어가려 한다.

뭐, 여기까지는 심심풀이였고 본격적인 질문은 이제부터다.

"에리카가 기꺼워하지는 않을 텐데 잘도 지원할 생각을 했구나. 내 약혼녀와 꽤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그녀가 제 선택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정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를 사지 않도록 미리 밝히자면, 저는 에리카에게 연애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내가 시시콜콜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구나."

"사랑스러운 약혼자와 다른 이성이 함께 어울리는 걸 목격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신경이 쓰일 테니까요."

"사랑스러운 약혼자라…."

"아닌가요?"

"흠…."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에 잠긴 척을 하고 있자, 주변에서 나를 향해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진다.

알리시아 같은 경우는 애써 안 보려는데 보게 되는 것처럼 힐끔거린다.

"사역마보다는 못하겠구나."

"사역마요…?"

"그래, 사역마보다 사랑스러운 건 없으니 말이다."

"...."

자, 그럼.

에리카에 대한 건 여기까지로 하고.

콧대 높은 귀족님들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사항이 남아 있다.

"아르볼 프루탈은 철저한 실력주의다. 네가 지금까지 영지 안에서 어떤 호의호식을 누려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집 요강에 친절하게 적어 주셔서 알고 있습니다. 실력에 따라 속하게 될 그룹이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으신 거죠?"

"그래."

아르볼 프루탈은 멤버들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연구회다. 이 또한 결국은 나를 위해서이지만 하여간에.

네 개의 그룹.

뿌리, 목대, 줄기, 가지.

순으로 중요도와 구성원의 전투력에 따라 나눠지게 된다.

뿌리는 아르볼 프루탈의 간부.

목대는 심화 그룹.

줄기는 기본 그룹.

가지는 기초 그룹.

개인의 역량이 천지 차이니 마땅히 속하는 집단을 다르게 배정할 필요가 있다. 배우는 내용도 수행하는 과업에도 차이가 있어야 하니.

현실에서 학원에 들어가면 실력에 맞는 반에 배정되어 함께 공부하지 않는가,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카데미아의 이상과도 합치하는 좋은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분의 차별에 묶여 있다면 훌륭한 용사를 육성할 수 없을 테죠."

"그 말은 설령 기초 그룹인 '가지'에 속하게 되어 남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고 한들 불만은 없단 뜻이냐."

"제 실력이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뒤떨어진다면 합당한 처우라고 생각합니다."

내 성격이 이상한 탓일까. 살살 웃으면서도 은근히 돌려 할 말은 다 하는 게 마음에 든다.

말은 예쁘게 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했을 때 합당하지 못하다면 합당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라는 말이 아닌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뒤따르기에 가능한 응수다.

"합격이다."

갑작스러운 합격 발언에 밴틀로는 다소 놀란 눈치다.

내가 말한 바를 이해하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도 되는지를 우려한다.

"…괜찮은 건가요?"

"길게 끄는 취미는 없다. 확실한 결과는 바로 밝힌다. 너는 '목대'에 속할 것이다. 뿌리에 속하고자 했겠으나 간부는 이번에 선정할 신입들은 들어올 수 없다. 이후, 조건이 충족되면 승급될 테니 그리 알거라."

"확실하시네요."

"알았으면 이만 물러나거라. 네 뒤로도 줄이 밀려 있다."

그렇게 밴틀로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물러났다. 나가기 직전까지 인상 좋은 웃음을 보였다.

?팔락.

다음 지원자의 프로필을 확인한다.

밴틀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은 인재가 기다리고 있다.

"저기… 진짜로 밴틀로를 받아들일 거야?"

"밴틀로는 훌륭한 새싹이다. 어떤 점이 불만인 거냐, 에밀리."

"아니… 불만이랄 건 없는데…."

에밀리는 알리시아와 세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어색하게 웃는다.

"에리카 쪽의 인간이라서 경계하는 건 이해한다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맞긴 해… 맞긴 한데… 으음. 아니야. 다음 사람 부르도록 하자."

똑똑.

다음 지원자가 들어온다.

이후로도 수많은 지원자가 오갔다.

길고 긴 면접은 그 후 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끝나게 되었다.

***

"전부 해서 33명이라니. 갑자기 멤버가 확 늘었네."

"그러네요. 도련님께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어요."

"그런가…? 그건 잘 모르겠던데."

"우측 입꼬리가 1mm 사선으로 올라가셨잖아요. 대놓고 만족을 표현하셨던 거 같은데요…?"

"아니아니. 절대 모르지 그건. 넌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면접이 끝나고, 복도를 걷고 있던 알리시아와 에밀리.

알리시아는 '왜 그걸 모르시는 거죠?'와 같은 눈동자로 오히려 에밀리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에밀리는 그 순수한 호수에 말문이 막혔다.

"관찰력이 좋아서 그런 건가…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 건가… 알리시아는 바르간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알 것만 같네."

"아직 멀었어요. 유용한 시종이 되기까지 갈 길이 멀었는걸요."

"...."

꽉 쥔 양 주먹을 내보이는 알리시아.

에밀리는 그런 알리시아를 보다 문뜩 조금 전 있었던 면접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다. 눈치채기는 훨씬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알리시아의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은 없었기에 확답을 듣고 싶었다.

"알리시아… 있잖아."

"네,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에밀리는 주변을 살폈다. 시간이 어두워져 긴 복도에는 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으려면 지금이 기회다. 평소에는 바르간과 딱 붙어 있으니.

에밀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태평한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물꼬를 텄다. 부담을 느낀 알리시아가 속마음을 숨기지 않도록.

"알리시아는 밴틀로가 들어와도 괜찮아? 그… 밴틀로랑 에리카하고 바르간. 딱 잘라 말하긴 뭐한 그런 관계잖아…?"

"그런 관계라뇨?"

순진무구한 그녀의 반응에 에밀리는 끄으응?대며 참언했다.

"에리카랑 바르간이랑은 약혼 관계잖아? 밴틀로는 그 사이에 껴서 삼각형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예...."

점차 알리시아의 음성이 수그러진다.

에밀리는 그녀가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여겨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으음, 표현이 너무 애매했나. 그러니까 알리시아가 바르간을 좋아?."

?아니에요.

딱 잘라서 대답한다.

에밀리의 물음이 더 이어지지도 못하게.

"어…?"

에밀리는 굳어 버렸다.

여태까지 듣지 못했던 알리시아의 음성. 리암과 바르간이 대척할 때 보였던 살기 어린 모습과는 또 다르다.

단호한 어조와는 상반되게.

알리시아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미소는 평소와 같이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편안케 했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녀의 미소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필사적이라고.

"당황스럽게 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확실히 말씀드려야 할 부분이라 그랬어요."

알리시아는 말한다.

너무나도 확고하게.

"제가 도련님께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에 '그러한 것'은 포함되지 않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알리시아는 바르간의 사소한 행동이나 작은 변화를 귀신같이 눈치챈다.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작은 친절과 칭찬에 얼굴을 붉힌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바르간을 떠올리며 그를 위한 하루를 보낸다.

시종이 갖추어야 자격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다.

이게 연심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녀의 발언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뒷말을 삼켰다.

"그…런가…."

"네, 에밀리 씨."

알리시아의 웃음이.

어둠을 훤히 밝히는 그 푸른빛이.

"그런 거예요."

어딘가 서글퍼 보였기에.

***

불이 전부 꺼진 침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 형체가 달달달 떨린다. 가쁜 숨이 옅게 쉬어지는 소리가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억… 흑…."

뭉텅이인 그림자의 형체.

그 정체인 성녀(聖女) 디피엘리아는 두려웠다.

공포심에 이불로 꽁꽁 싸맨 채 앉아 밤을 지새울 정도로. 그녀의 몸에 미열의 열조차 올라 있다. 눈을 감으면 계속 재생된다. 조금 전, 디피엘리아에게 번뜩인 그 기억이.

여느 때처럼 불현듯 찾아온 신탁.

하지만, 그 광경은 지금까지의 선례들과는 크게 상이했다.

화마에 집어삼켜진 공간.

범람하듯 밀고 들어오는 알티프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용사들은 진을 형성해서 필사적으로 막아 내려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아의 동기들도 몇몇이 보였다. 지금과는 분위기나 모습이 조금씩 달랐지만, 명백히 그들이었다.

전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기억난다. 붉게 피 튀기는 전장에 유독 하얀 머리칼의 여인이 독보적으로 알티프를 사냥하고 있었기에.

알리시아.

틀림없이 그녀다. 지금보다 성숙하긴 했으나 그 아름다운 외모는 그대로였다. 다만, 분위기와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는데, 감정이 없어진, 모든 일에 무감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멈추지 않고 적들에게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강했다. 무서울 정도로 처절하게.

"...."

디피엘리아는 움켜쥔 이불을 더욱 꽉 쥐고 말았다. 이후의 전개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알티프의 대군을 이끄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전장의 모든 이목이 그에게 향한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전장의 모든 이들을 희롱하기를 즐기는 것처럼.

그의 등장에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용사들은 절망했다. 단순한 비유나 묘사가 아니라 그대로 '절망(絶望)' 그 자체였다.

검을 쥐고 있던 이들은 검을 놓고 바닥을 굴렀다.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은 기본이었고 자살 시도를 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활과 액세서리를 쥐고 있는 자들은 동료를 겨누며 활과 마법을 쏘아 댔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입으로는 싫다며 비명을 지른다. 마치 조종당하는 인형같이.

그 끔찍한 지옥에서 한 줄기의 빛처럼 달려 나가는 이가 알리시아였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녀의 마법에 구름이 갈라지고 천지가 요동쳤다. 알리시아는 무감정했다. 살아 있는 기계를 보는 것처럼 차갑게 마법을 쏘아 댔다.

알리시아와 대항하는, 일의 원흉인 남자의 인상이 구겨진다. 욕설 따위를 지껄이고 있는 것으로도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입가에 걸려 있던 비릿한 미소는 잔뜩 일그러졌다.

그것은 원망(怨望), 분노(憤怒), 탄식(歎息)….

더 나아가 한(恨)이었다.

"바르간…."

이를 바라보던 자기 자신, 미래의 디피엘리아는 작게 그를 불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비극을 보는 이처럼 감정의 파도가 크게 일었음을 틀림없었다.

"...."

그 이후로도 차마 제정신으로 보기 힘든 전장이 이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대규모 술식 속에 사람들은 광란의 늪에 빠졌고, 이겨 낸 이들은 바르간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디피엘리아가 보기에 가장 미쳐 있는 인물은 그의 술식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들이 아니었다.

바르간.

혼자서 수많은 용사와 아카데미아의 동료들을 상대하는 그는 무지막지한 마력을 방출하며,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에 먹혀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남을 멋대로 움직이는 술식을 부리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먹혀 파멸되어 가다니.

아무리 바르간이라고 하더라도 굳건한 용사들의 모든 세력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심장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이 꽂힌다. 알리시아의 마법이었다.

바르간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고 있는 헝클어진 고급 양복은 그와 다른 이들의 피가 덧칠해져 짙은 적색이었다.

알리시아의 마법이 사라지고 그의 가슴은 검의 형태대로 뚫리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 폭포수와 같은 핏물이 넘친다. 그리고, 진홍색의 입술이 움직인다.

무언가를 눈치챈 황금의 기사, 아르텔리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검을 들었다. 목을 벨 생각이다. 그 짧은 사이에 바르간은 고개를 들며 웃어 보였다. 살아남은 이들을 저주하는 독기 어린 눈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성녀인 디피엘리아는 그 입에서 뱉어진 문장을 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뱉었는지를.

쿠그그그그그?!

모두가 이변을 눈치챈다.

아르텔리온은 시체가 되어 버린 바르간을 짓밟았다. 분노에 찬 행동이었다. 황금의 기사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르간을 이대로 죽이면 안 됐다. 그가 죽음으로써 기도가 완성된 것이다.

책의 다른 페이지가 포개어지듯.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만나듯.

공간에 커다란 비틀림이 발생했다.

이미 지쳐 버린 용사들은 그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도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가장 확실한 감정은 '공포' 단 하나뿐.

디피엘리아가 이리도 벌벌 떨고 있는 이유도 바르간의 죽음 이후로 보인 검은 군세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 세상의 모든 생물이 미물로 보일 정도로 온전한 생물이 있었다.

격이 다르다.

차원이 다른 죽음이다.

그렇게 지성의 생체가 비루한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신탁은 끝이 난다.

"허, 허억… 꺼헉…!"

물에 잠긴 것처럼. 디피엘리아는 숨 쉬는 게 어려웠다. 억지로 기도를 확장하며 숨을 받아들이고 뱉어 낸다. 그래도 쉽지 않다.

무섭다.

무서워.

너무나도 무섭다.

이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란 말인가.

이게 우리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란 말인가.

디피엘리아의 속은 뿌리째 흔들렸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그녀의 눈에 새겨진 암흑의 길은 확실한 비극이었다.

바르간에 의해 종착점으로 보이는 그 비극과 다르게 전개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디피엘리아가 알 방도는 없었다. 신탁을 받은 성녀는 헤맨다.

"바르간… 바르간…."

그녀는 바르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라면 뭔가 단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뭔가를 알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것인가. 신탁에서의 그는 분명 용사를 적대하고 여신을 추종하고 있었는데….

어둠에 먹힌 깊은 밤.

공포가 꿈을 먹은 밤.

성녀 디피엘리아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자신의 올바른 선택을 찾아 나선다.

"바르간… 바르간…."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52화

보름달이 떴다.

태양의 빛을 가득 담아 세상을 다시금 비추는 대보름달이다.

기숙사 근처에 있는 넓은 정원의 한구석에서.

나는 그 찬란한 세례를 받으며 마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고독한 방 안에서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듯 밖의 정취를 즐기며 단련하는 게 마력의 정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마력의 흐름을 건드리자 변화가 느껴진다.

'마나 총량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저주 마법의 수준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계위로 나뉜다.

가장 낮은 계위인 저위.

다음 단계인 중위.

정상에 가까운 고위.

여기까지는 아카데미아를 졸업할 때가 되면 대부분 이들이 지나가는 관례다.

바르간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던 성취는 대부분의 마법이 고위. 몇몇 전투에 불필요하거나 성향에 맞지 않는 마법은 중위에 머물렀지만 억지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 가성비가 떨어지니까.

마법이 고위에 닿으면 비로소 해당 분야 마법의 대략적인 형체를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계위에서부터 본격적인 개인의 연구와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금이면 저주 마법이 「해득(解得)」의 계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고위의 다음 단계이자, 마법의 새로운 경지.

신세계에 문이 열리고 기존에 체감되던 세상의 모든 인지가 다시금 정리되는 계위.

막 해득 계위에 들어선 이를 초입자. 그 이후의 깨달음에 순서를 매겨 세밀하게 나누는 이도 있지만, 정확히 말해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해득의 계위에 오르고, 개인의 깨달음을 수치상으로 순서를 매겨 표시하는 건 통계를 위한 왜곡을 발생시키게 된다.

그만큼 섬세하고 정교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한낱 수치와 어설픈 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뭐, 정말 격이 다른 수준에 오른 이를 초월(超越)의 계위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건 일반적이긴 하나, 이는 나중의 이야기이며 정말 소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아무튼.

최근 내가 마법에서 목표로 잡는 고유술식을 완성하기 위해선 적어도 하나의 분야에서 해득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본래 바르간의 저주 마법이 해득의 계위에 이르는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8개월 뒤. 빙의하고 난 7개월간의 성과가 무시할 만한 건 아니라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

근처에서 나를 주시하는 한 인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으로 마력을 감추려 들지만, 아직 서툰 감이 있다.

있었다는 건 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방해하지 않기에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집중이 깨지는 게 싫었으니까. 훈련을 일시적으로 멈춘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프리다."

내 음성이 그녀를 부르자, 근처에 있는 풀숲의 잔가지들이 흔들렸다. 풀숲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프리다가 난감하게 웃으며 모습을 보였다.

나오기 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아 내면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하, 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산책 나왔다가 어쩌다 보니…."

달빛 아래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프리다는 평소와 생김새가 달랐다. 주황빛이 도는 연갈색의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있는 건 똑같지만, 머리에 달린 뾰족한 귀와 치마폭 안에 숨긴 폭신한 꼬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이 모습은 말이죠…."

"알고 있다. 너는 아인종이 아니더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에 존재하던 할렘가. 그곳에서 살아온 프리다는 본래 아인종이 가득한 다렉 연합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낯선 할렘가에 버려지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같은 지역 출신인 디피엘리아나 그 외의 인물들과 친구 사이를 맺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 맞아요…."

설마 자기 종족을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별 희귀하지도 않은 걸 숨기려 든다며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카데미아에 널린 게 아인이다. 네가 살아왔던 할렘가에서는 그 꼬리나 귀 때문에 표적이 되었겠으나 여기서는 아니라는 소리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귀찮은 짓을 하더구나."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숨기게 되더라고요."

프리다는 신기하다는 눈동자를 하고 있다.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는 것 같다.

프리다의 치마 아래 툭 하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떨궈졌다.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느라 숨겼던 꼬리가 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거라. 오늘은 대화에 많은 시간을 부었다. 더는 입을 나불거리는 데 아까운 재원을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

"…혹시 저주 마법을 극도로 깨닫게 되면 사람 심리를 훤히 볼 수 있는 건가요… 거기까지 보시니 뭔가 무섭네요."

프리다는 자기 몸을 감싸 안으며 두려움에 떠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다 내가 무시하고 떠날 기미를 보이자 급하게 말을 잇는다.

"바르간 님이 시키신 대로 연구회 서류 정리를 다 했어요. 청소는 당연히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히 했고요."

"그 말을 뱉은 목적이 뭐냐."

"제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게 무슨 의도인지 아시지 않나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노골적인 태도에 다소 어이가 없었으나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확실해서 편하다고 할까.

품 안에 있는 은화 주머니에서 두 닢을 던져 주자, 공중에서 캐치한 프리다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항상 감사합니다!"

밖에서 할 만큼의 단련은 끝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니 프리다가 졸졸 따라붙었다. 원하는 건 이미 줬건만 붙는 걸 보아 아직 부족하다는 신호일까 생각하자, 말을 잇는다.

"바르간 님은 수련에만 매진하시네요."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매일 그렇게 몰두하시는 거예요?"

나는 빤히 프리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둘러서 하는 것만 같다.

"뭐가 궁금한 것이냐."

"아, 역시…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프리다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곤, 곧 그 눈을 지그시 떠 나를 올려다봤다. '이런 걸 묻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여쭤볼게요.'라는 말로 돌다리를 세운다.

"여자에게는 흥미가 없으신 건가요?"

그 뜬금없고 당돌한 물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색이라도 즐기는 것 같으냐."

"그건 아니지만, 항상 단련이나 서적만 읽으시고. 알리시아 같은 아름다운 시종을 두고는 손끝 하나 건들지도 않으셨잖아요?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고 생각해요."

"발로 밀쳐서 잡벌레로 가득한 구덩이 속에 던져 놓기는 했다만."

"…으엑. 그건 좀."

질색하던 프리다는 풉? 하고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의미로 대꾸하지는 않을 텐데 특이하다는 사족을 붙였다. 자신이 바라는 대답과는 다르다고 한다.

"아, 그렇다는 건…."

히히거리며 웃던 프리다는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작은 탄성을 지르더니 분위기를 바꿨다.

선천적으로 지닌 명랑한 기운이 온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차분해지고 농염한 기운이 엿보였다.

간을 보는 행위이기도 했다.

"바르간 님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정보를 얻었으니 이건 희소식이네요."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프리다는 살금살금 다가와 의미심장한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바람을 타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저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치마 아래로 살랑거리는 꼬리 끝이 보인다.

그녀의 당당하면서 어딘가 도발적인 눈매를 보고 있자니 문뜩 소설을 읽고 있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지.

"네가 알게 되었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거야 아직 모르죠. 저는 두 번째 여인이든 세 번째 여인이든 상관하지 않거든요."

"결국 돈이 최고다 이거냐."

"순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까닭인 건 확실하죠?"

원작에서 프리다는 잘 쳐줘 봐야 자주 나오는 조연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이었던 리암에게 있어서 그랬을 뿐. 바르간과 에리카와는 제법 밀접한 연이 있었다.

"돈이 목적이라면 숨겨야 하는 게 기본이거늘 그런 태도로 내가 잘도 퍼 주겠구나."

"숨긴다고 모르실 분도 아니잖아요."

에리카와의 약혼 기념일.

원작에서 에리카의 데이트 제안을 받은 바르간은 당일 해당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에리카를 바람맞힌 이유는 명확하다.

자세한 내막에 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았으나 언급은 있었으니, 독자가 알 수 있었다.

"저의 매력을 아직 모르셔서 그래요.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다음 주에 같이 어딘가에 놀러 가는 거예요. 그럼 분명…."

알리시아와 함께하지 않았던 바르간에게 돈 냄새나 출세 냄새를 맡은 인물들이 몇몇 붙었었는데 그중 유독 눈에 띄었던 인물이 '프리다'였다.

프리다는 당시에도 바르간에게 접근해 데이트를 제안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에리카의 약속 날짜와 겹쳐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바르간의 선택은 에리카가 아닌 프리다였다. 바르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는 없었으나 확언하건대 프리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당시의 바르간은 모종의 사유로 에리카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으며, 그 일이 에리카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용한 것이다.

이후로도 프리다를 통해 바르간은 에리카에게 적지 않은 치욕을 줬다. 오죽하면 에리카가 내연녀에게 밀린 불쌍한 귀족이라고까지 불렸겠는가.

"...."

에리카….

에리카라….

"바르간 님?"

깊은 곳에서 묘한 불쾌감이 꿈틀거렸다.

장난을 치려는, 받아 주려는 마음도 싹 사라진다.

받아들일 수 없는 그것이 니글거리는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하다.

나는 프리다를 옆으로 밀어내곤 앞으로 걸어갔다.

잡념이 많아진다. 산책도 이만하면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밤이 늦었다. 너도 이만 들어가거라."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더는 1분이라도, 1초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건 그저 핑계인가.

"선약이 있다."

프리다를 내버려 둔 채, 방으로 들어섰다.

유독 길었던 오늘의 달밤 아래의 순간도 이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다소 당혹스럽게 홀로 남게 된 프리다는 골똘히 고민하더니 혼잣말을 뱉었다. 그녀의 눈은 빠르게 계산하고 있다.

"…에리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역시 거짓이었나 보네."

프리다 또한 몸을 돌려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오후.

사역마 실습 교육을 마치고 연구실로 향하려던 나는 같은 수업을 들었던 디피엘리아와 마주쳤다. 암울한 표정이던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보아하니 이제 말을 제법 나눴다고 매번 인사를 할 요량인 것 같은데, 저리 귀신 보듯 대하니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줬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내가 봉투를 잡자마자 빠르게 달아난다. 그녀의 사고대로 움직이는 휠체어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편지를 곧바로 읽어 볼까 하다가 집어넣었다. 곧바로 어떤 이와 눈이 마주쳤기에.

"...."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에리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언제나와 같은 차갑고, 새침한 표정이었다.

괜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상하다… 클래스전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아니면, 디피엘리아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상정 이상으로 무른 녀석이다.

터벅?.

걸음을 옮겼다.

연구회에서는 복귀한 핀까지 해서 모두가 모여 있었다. 프리다는 어제의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고, 에밀리에게 장난을 치는 등 평소와 같았다.

소란스러운 현장을 함묵시키고 나는 말을 꺼냈다.

"아르볼 프루탈 신입 회원 선발이 끝났다. 이것으로 총 33명의 대형 연구회가 되었지."

아직 신입들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통과한 이들에 대한 리스트는 게시판을 통해 남겨 두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정확히 말해 연구실을 옮기고 나서부터다.

"따라서, 그것에 맞게 연구실을 바꾸게 되었다. 이미 새로운 곳을 구해 둔 상태다. 대부분의 연구회 물품은 아카데미아의 관계자들이 옮겨 줄 것이나, 개인의 물품은 개인이 옮기도록 해라."

연구회 이동과 관련된 이외의 사항들을 멤버들에게 알린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는 앞으로 아르볼 프루탈의 기본 토대가 되어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할 것이다.

"전에 말한 대로 아르볼 프루탈은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눠지게 될 것이다."

간부들이 포진하는 '뿌리'.

엘리트 그룹인 '목대'.

범인 수준의 '줄기'.

덜 떨어지는 '가지'.

"뿌리에 속하는 멤버들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리다를 제외하곤, 추가로 맡아야 하는 직책이 있다."

본 소속은 뿌리이나, 이들은 각 그룹의 책임자를 맡을 것이다. 해당 그룹의 인원들이 별 탈 없이 성장하고 있는지를 관찰·보고하며, 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도움을 준다. 그 외의 일들도 도맡겠으나 중요 임무는 저것이다.

"목대의 책임자는 나다. 나 이외에 여기서 이들을 이끌 인재가 없어, 안 그래도 바쁜 내가 맡게 되었다."

목대에 속한 엘리트들은 총 넷.

1학년 벨리아르 트로아 밴틀로.

2학년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

4학년 알렉세리아.

4학년 브락키움.

전에 잠깐 언급했던 주요 인물 넷이다.

밴틀로야 더는 설명할 필요 없을 듯하고.

2학년 프란체스카는 1학년 당시 입학 성적 2위로 학생회 출신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학생회를 나가 무소속이 되었는데 이번에 우리 연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2학년은 쓸 만한 놈들이 몇 없는데 프란체스카, 그녀는 제외다.

4학년 알렉세리아도 프란체스카 못지않은 인재이며 학생회와 연이 있는데. 알렉세리아는 무려 재작년 학생회장이다.

3학년에 학생회장이 된 그녀는 1년간의 임기가 끝나고, 휴학을 하여 세상을 여행했다. 그러다 이번에 그의 약혼자 브락키움과 함께 복학했다. 알고 있는 설정으론 브락키움은 그녀가 홀로 여행하는 게 걱정되어 함께했다고 한다.

알렉세리아가 흥미로 아르볼 프루탈에 들어오고 그 뒤를 브락키움이 따른 것인데, 경위가 어찌 되었든 이왕 들어온 거 내 입맛대로, 유용하게 사용해 주도록 하자.

"…이어서 줄기의 책임자는 알리시아와 세레나다."

줄기의 인원들은 전부 열여섯.

가장 인원이 밀집된 그룹이기에 책임자를 두 명 배치했다. 알리시아는 검술, 세레나는 궁술을 주로 다루니 필요하다면 적절하게 분야를 나눠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마지막으로 덜떨어지는 그룹, 가지는 에밀리가 맡는다."

"내가 맡는 그룹만 그렇게 부르는 건 무슨 심보인데…."

가지는 여덟 명으로 구성된다.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아직 싹조차 트이지 않았거나 약간의 여실만 보이는 정도의 인물들을 종합해 놓은 집단.

에밀리에게 맡기자니 다소 불안하기도 하지만 내 도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에밀리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으니 그녀를 임명했다.

그리고 에밀리가 의외로 사람을 분석하는 걸 나름 잘하기도 한다. 정말 의외로.

"잠깐. 왜 여덟이야? 내가 알기론 일곱이었는데. 그리고… 핀은 책임 구역이 없어?"

"...."

에밀리와 눈이 마주친 핀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내 대답을 대신했다. 에밀리의 표정이 점차 얼어붙는다. '설마…'와 같은 말을 입에 머금고 나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본다.

"핀을 연구회에서 퇴출한 거야?"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원하는 에밀리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것 봐라. 사람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중간에 끊어 버리니 오해와 분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존 멤버였던 핀은 뿌리가 아니라 가지에 속한다. 에밀리, 너처럼 책임자를 맡는 게 아니라 그 일원으로 말이다."

"그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에밀리, 괜찮아. 내가 부탁드린 거야."

핀의 말에 멈춰선 에밀리의 떨리는 눈매가 핀을 향했다. 당사자인 핀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클래스전으로 내가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 뼈저리게 느꼈어. 기존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뿌리에 속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끄러울 것 같더라."

"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구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핀은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하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걸 보이며 선언한다.

"반드시 뿌리까지 갈 테니까."

가지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목대로, 목대에서 뿌리로.

아르볼 프루탈의 그룹 멤버는 유동적으로 변한다. 전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중에서도 유독 성장이 빠른 인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조건을 충족한 인물들은 더 높은 그룹으로 재배치된다.

핀은 이야기한다.

현재 가장 아래 등급이라 부를 수 있는 '가지'에서 종점인 '뿌리'까지 가고야 말겠다고.

에밀리는 핀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섭섭한 부정적인 감정을 읽어 내지 못한다. 핀은 그 순간이 너무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늦게 오기만 해 봐."

"금방 쫓아갈게."

클래스전을 준비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두 사람은 나름의 경쟁심 따위를 느끼는 듯했다. 실력 면으로는 에밀리가 우세하나 에밀리는 그 옆에서 핀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직접 지켜봤다.

핀은 에밀리의 경지를.

에밀리는 핀의 열정을.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습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원래라면 라이벌은커녕 인사도 하지 않았던, 서로 남남과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그런데 내가 빙의되고 나서,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 1년이 조금 남지 않은 시간.

아카데미아의 비극이 도래하는 날.

본래라면 퇴장하고 말 이 두 인물은 과연 어떻게 될까.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저…."

나를 몰래 바라보고 있던 알리시아는 기분 좋게 눈웃음을 지었다. 봄바람처럼 따스한 웃음을.

"도련님께서 즐거워 보이시기에. 저도 행복한 기분이 들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로구나."

"네, 도련님 말씀이 옳습니다."

"...."

나의 말을 긍정하는 알리시아.

한데, 짓고 있는 미소가 상당히 거슬린다. 마치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어미의 눈빛.

…무시하도록 하자.

"자, 그럼 오늘의 연구회 활동을 시작하자."

작은 연구실이 다시 분주해진다.

53화

연구회의 활동을 짤막하게 마치고 오후 수업.

담당 교수인 루이사가 공공의 적인 알티프에 대한 교육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알고 있겠지만, 여신교를 따르는 알티프는 교회와 같은 명칭을 사용한다. 위그드라실교 측에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류가 가장 쉬워서 주로 이걸로 부르지. X발, 나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아."

루이사는 마땅치 않다는 듯 혀를 차곤 말을 이었다. 여전히 선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상스러운 용어의 사용이 빈번하다.

"먼저 알티프는 지성체와 무지성체로 나뉜다. 무지성체는 말 그대로 별다른 사고를 하지 않아.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녀석들이 따르는 건 오로지 자신보다 상위 계층에 속한 '지성체'뿐이다."

알리시아가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싸웠던 근육으로 이루어진 붉은 덩어리들. 녀석들은 무지성체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그런 무지성체를 통합해서 여신교는 지들끼리 「사제」라 부른다. 사제급이라고 그냥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원칙상으로는 무지성체라고 부르거나 제4 위험군이라고 불러야 하지."

영상 마법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제'들이 보인다. 등에 촉수 같은 게 두 개 박혀 있는 놈들, 손에 갈퀴가 있으며 수중 호흡이 가능한 형태의 녀석들, 턱이 발달한 녀석들….

공통점은 몸이 붉으며 근육질이라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얼굴만 가면을 쓴 것처럼 하얗다.

그림의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모체를 통한 번식이 가능한 유일한 개체?라 적혀 있다.

탁?!

루이사는 교탁을 쳐 모두를 집중시켰다.

다소 풀어져 있던 학생들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바로 떴다.

루이사 또한 더욱 진중해졌다.

"자, 여기서부터는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루이사는 다음 영상을 틀었다.

영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주교 : 제3 위험군」

"여기서부터는 전부 지성체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기억해라."

루이사의 눈매가 모이며 모두에게 경고하듯 전한다. 그만큼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항이었다.

"주교급부터는 정말로 위험한 놈들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가장 약한 전투력을 가졌던 주교급조차 일반 병사 1천을 가볍게 사살했다. 아니…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일반인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말이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용사로 예를 들어 주지."

주교급은 신입 용사 셋 이상이 있어야 안전하게 사냥할 수 있다. 당연히 포획에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사제 때와 마찬가지로 영상의 아래 작은 글씨로 글이 적혀 있는데, 전도(傳道)를 통한 수 충족이 가능?이라 적혀 있다.

"녀석들은 언어를 통한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들과 말을 나눠 볼 생각은 하지도 마라. 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는 철저히 다른 게 녀석들이야."

루이사는 말한다.

그들은 머리의 회전이 빠른 만큼 교활하고 지능적으로 행동한다. 말이 통한다 해서 방심하고 무기를 내려놓은 순간?.

"너희의 심장은 그대로 뽑혀 바닥에 처박히겠지."

아니면, 사제를 만들기 위한 번식의 모체로 사용될 수도 있고.

루이사의 발언에 모두는 인상을 구겼다.

상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심장이 뽑히면 뽑혔지, 녀석들에게 농락당한 뒤 번식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건 너무나도 끔찍했다.

"녀석들에게 성별은 없다. 따라서 모체로 쓰이는 사람의 성별도 중요하지 않지. 번식하는 방법이 일반적인 생물에서 벗어나니까."

강의실의 분위기가 생각 이상으로 어둡고 긴장감으로 가득 차자, 루이사는 완급 조절을 위해 다소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희는 아직 햇병아리니까, 주교급 이상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거다. 1학기 기말에 있을 실습 때 사제급을 보는 게 전부겠지. 뭐, 그래도 말이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루이사는 말한다.

햇병아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완급 조절을 위해 말을 꺼냈다는 걸 잊었는지 무척 진중하게.

"주교급 이상이 보인다면 곧바로 도망쳐 도움을 청해라. 지금의 너희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

"진짜 징그럽게 생겼네. 알티프는 왜 다 그렇게 흉측하게 생긴 거야?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같은 조인 에밀리가 소름이 돋은 팔을 보이며 말했다. 이에 세레나는 언제나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해 주었다.

"맞아요. 너무 징그럽죠…."

"그치그치?! 1학기 기말고사 때 실습이 벌써 걱정되네… 검도 잘 안 박힐 것처럼 생겼는데…."

"안정적인 오러를 두르면 베여요. 근육이 커서 어디를 베어야 할지 잘 보이기도 하고요.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에밀리 씨의 실력으로 가볍게 잡을 거예요."

"…알리시아는 전문가 같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녀석들과 싸운 적이 있었구나?"

"네, 한 번뿐이지만요."

그런 잡담을 하고 있자 나와 눈이 마주친 루이사가 걸어왔다. 키가 커서 그런지 보폭이 일반 성인 남성보다 넓었다.

"수석아, 네가 올린 외출 신청서가 통과됐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3시에 운행용 비공정을 타고 나가면 된다."

"예, 감사합니다."

"됐다 됐어. 귀찮지만 이것도 담당 교수의 일이니… 그보다, 약혼녀와 데이트라… 괜한 걱정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라. 알지?"

"어떤 불상사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명심토록 하죠."

"하여간, 네 성격은 진짜 변하질 않는구나."

혀를 차듯 헛웃음을 뱉은 루이사는 자신의 염려를 똑바로 전했다. 진심으로 걱정하지는 않아 보였으나 내 반응을 보고 약간의 반발심이 일었겠지.

"섹X 말이다. 섹X. 하는 것까진 말리진 않겠지만, 통금 시간이 지날 때까지 불타오르고 있으면 곤란하다 이거지."

??!!

말을 들은 건 나인데 주변에서 떨어져 있던 알리시아가 화들짝 놀라 입을 뻐끔거린다. 에밀리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둘의 반응이 워낙 호들갑스러워 오히려 가만히 있는 세레나가 더 눈에 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괜히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래서 늦은 놈들이 지금까지 꽤 있어서 하는 말이야."

예비 용사들이라 한들, 아직 젊고 혈기가 넘칠 시기이니 남녀가 서로 눈이 맞아 밤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별로 알고 싶은 설정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런 까닭으로 늦진 않겠죠. 하나… 인생사라는 건 또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지막 비공정을 타지 못하면 어찌 되는 것이죠?"

"…상당히 불안한 발언인데."

루이사는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제대로 시간 맞춰서 돌아오라는 말을 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돌아오지 않은 학생들을 찾기 위해 우리가 나서게 수색하게 되겠지. 아무리 알티프와 싸울 인재들이라고 해도 너희는 아직 애다, 애. 밖에 있던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를 믿고 너희를 맡긴 보호자분들을 볼 낯이 없어."

"오호, 굉장히 어른스러운 모습이군요."

"어른이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수석아."

루이사는 내가 알리시아에게 딱밤을 때리듯 손가락으로 형태를 갖추며 들이밀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풀었다.

"하긴, 나도 말썽깨나 부렸으니 할 말은 없다만."

"...."

그녀의 학창 시절. 파울라와 함께 현 총장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이런저런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다녔다는 설정을 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 루이사가 이런 그리운 표정을 짓는 이유도 분명 그 때문이겠지.

루이사는 몸을 돌리곤 강의실을 나선다.

팔을 대충 흔들며 미리 인사를 한다.

"재밌게 놀다 와라. 기념품은 필요 없고."

"살 생각도 없었지만, 역시 명심하겠습니다."

"싸가지 없는 녀석… 끝까지 그딴 식으로 말하긴."

그렇게 옅은 웃음과 함께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내 주변으론 호기심 가득하다는 표정을 한 에밀리가 흥분을 여실 없이 드러내며 묻는다.

"뭐야 뭐야! 어쩐지 웬일로 그날 연구회 일정이 없다 했더니, 데이트하러 가는 거였어? 와 진짜 대박."

아까부터 이해가 되질 않는 건데.

대체 얘네가 왜 난리인 거지? 지들이 가는 것도 아니면서.

"약혼 기념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어련하시겠습니까."

킥킥거리며 웃어 대는 에밀리.

아무래도 얘가 오랜만에 연구회 활동으로 극기 훈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네년도 리암을 불러 외출하면 될 것이 아니냐. 물론, 내가 연구회 활동을 비워 주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거, 거기서 왜 리암이…!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매일같이 연구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언제 그럴 틈이 있겠어!"

에밀리가 성이 난 것을 표하듯 발끈하려다 아차?하며 기세를 죽인다. 옆에 서 있던 알리시아가 수수한 웃음을 지닌 모습으로 말했다. 항상 보이던 눈매와는 어딘가가 다른 느낌이다.

"도련님이 외출하시는 동안에도 딴 데 새는 일 없이 맡은 업무를 다 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돌아와서 확인할 터이니 준비해 놓고 있거라."

"…예, 도련님."

흠.

이걸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의도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알리시아의 마지막 말에서 아주 소량의 애절함이, 간절함이 담긴 느낌을 받았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그런 기분이었다.

***

방으로 돌아오고 나선 언제나와 같은 단련의 일과를 해야 하지만 오늘은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디피엘리아의 편지다.

그녀가 오늘 보였던 수상할 정도의 공포심.

말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작성하여 전달한 문서.

디피엘리아가 워낙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기에 나도 혼자 있을 때까지 개봉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의 이상 증세다.

어쩌면 이후의 전개에 크게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삭?.

작은 나이프로 인장을 잘라 내어 편지를 꺼낸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본문의 내용은 시였다.

「꿈을 꾸었습니다.

찬란한 제국의 중앙에 뜬 세 번째 별이 빛을 잃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그 죽음이 너무나도 서글퍼 추도문을 읊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추모는 끝내 닿지 못하였고, 이내 망령이 되어 이름 없는 묘비를 배회합니다.」

"…그렇군."

그래.

그래서 네가 그렇게 겁에 질렸던 것이로구나, 디피엘리아.

편지를 다 읽자마자 황금빛 불꽃이 붙더니 금세 타올라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따로 책상에 올려 두었던 봉투도 흔적이 없이 사라진다.

타오르는 봉투에서는 불꽃의 잡음 대신 디피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시로 비유한 게 아닌 평소의 말투였다.

?다음 주 화요일, 저녁달이 뜨는 때. 기숙사 근처에 있는 작은 식물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몸을 뉠 수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디피엘리아가 같잖은 시로 무엇을 전하려는지 똑똑히 알겠다. 알기에 생각이 많아진다.

"신탁의 시기가 빨라졌다. 내용도 달라졌어."

꿈은 신탁.

찬란한 제국의 중앙에 뜬 세 번째 별은 나.

시의 화자인 '저' 또한 나를 의미한다.

시의 화자를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추도문을 읊었다는 부분이다. 바르간의 마지막 대사는 실제로 고인을 추도하는 내용이었다.

앞부분을 해석하자면 이리되겠지.

?신탁을 받았습니다.

트로아 제국 슈겐하르츠가의 삼남이 죽는 미래였습니다. 당신은 그 죽음이 너무나도 서글퍼 추도문을 읊었습니다.

문장만 읽으면 '그 죽음'은 바르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다르다. 바르간은 자신의 죽음을 서글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탁을 받은 디피엘리아는 바르간이 어떤 인물을 추모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죽음' 으로 대신했다. 추모가 닿지 못했으며 망령이 되어 이름 없는 묘비를 배회한다는 것도 대상을 모른다는 비유였다.

"하."

그녀는 나를 협박하고 있다. 너무 연약하여 쉽게 무너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은월도를 내밀며 내 목에 가져다 대려 한다.

신탁은 실제 우리의 앞날 따위가 아니다.

아르텔리온이 주인공인 극이 배경이다.

본래였다면 신탁은 최초의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리암의 공백을 강조했어야 했다. 또한 바르간의 죽음이 아니라 아카데미아의 비극을 다루었어야 했으며, 신탁이 내려온 시기도 4개월 빠르다.

디피엘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받은 신탁은 기존의 바르간이 죽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미쳐 버린 바르간이 여신교의 힘을 빌려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다준 그 사건.

그 사건의 악역이 나인 줄을 알면서도 그녀는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 한다면 미래를 보는 자신이 막을 터이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 통제의 의미이기도 했으며.

나와 직접 접촉하여 알고 있을 정보를 끌어내어, 감당할 수 없는 천지재변 같은 변고에 대항하기 위해 방비책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디피엘리아는 최초의 원작 일부분만을 보여 주는 신의 명령을 따라 나를 잡으려 드는 것이다.

"...."

하지만, 신탁이 달라지리란 건 리암의 사례를 통해서 이미 확인한바. 지금 나를 고심케 하는 건 그녀의 협박 따위가 아니라 부른 요일이었다.

묘하다.

묘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음 주 화요일…."

손잡이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이며 부딪쳤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탁. 탁.

디피엘리아는 정확히 날짜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가 에리카와 약속이 있다는 걸 모를 터이다.

그녀 전에는 프리다가 다음 주에 놀러 나가자고 제안을 했었다. 정확한 날짜는 잡지 않았었으나 원작을 떠올리면 에리카와 겹쳤던 선례가 있었다.

탁. 탁.

마치 나와 에리카가 만나기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이건 우연일까.

단순한 확률의 일치로 봐도 되는 것일까.

탁. 탁.

원작에서 에리카와 바르간은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다. 에리카는 혼자서 어떻게 했지. 그에 관한 서술은 적혀 있지 않아 파악할 수 없지만, 추측하자면 기다린 끝에 홀로 연극을 보고 돌아왔겠지.

탁. 탁.

에리카. 신탁. 다음 주 화요일. 연극.

이 모든 걸 포섭하고 있는, 아니 가능성이라도 있는 사건들이 있었나.

에리카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바르간의 약혼녀. 빙결과 워프 마법의 고위 사용자. 명문 포트레트가의 차녀. 작은 체구. 외강내유. 악역영애. 단 음식을 좋아함, 인형을 좋아함... 그리고.

여신교의 「주교」가 되는 인물.

동시에, 전부터 품어 오던 의문.

그녀는 언제부터 그런 기미가 보인 거지?

탁.

손가락이 멈췄다.

급히 에리카가 건네준 공연 티켓을 확인한다.

소설에서는 딱 한 번 적혀 있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바르간을 나무라며 에리카가 한 번. 그 연극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정말, 단 한 차례.

한 화에 몇천 자.

총 628화의 장편 속에서 고작 한 번 등장했던 연극의 이름을 기억한다. 너무나도 유명해 잊어버릴 수 없는 제목이었으니까.

그리고.

간과했었던, 단순히 작가의 배경지식이라 여겼던 한 줄의 글.

?사랑은 말리면 말릴수록 타오르는 것이다. 흐르는 시냇물 또한 막으면 막을수록 거세게 흐른다.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심했었다.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눈치챘으면서도 대충 넘어갔었다.

그 문장은 최고의 극작가 중 한 명, 셰익스피어의 명언.

「연극 :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셰익스피어에 심취한 등장인물.

사회에 녹아들어 있던 '여신의 추종자'가 무심결에 뱉었던 대사였다.

54화

아침 식사 시간.

어린 에리카에게 있어 아침이란 괴로운 순간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감기는데 감아서는 안 된다.

식탁 앞에서는 기지개를 켜서도 안 된다.

하품해서도 안 된다.

식전기도를 하는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유일신 위그드라실님과 함께하는 시간이니까 예를 갖춰야 한다.

식사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신실한 포트레트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정신을 차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앙증맞은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힘이 풀려 조금씩 미끄러진다.

그때, 천천히 감기던 에리카의 두 눈을 번뜩이게 하는 말이 있었다.

약혼자가 생긴단다.

그것도 그 유명한 슈겐하르츠가의 삼남.

?편지다! 편지가 왔어!

바르간과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직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때.

약혼식을 올리지 않은 시기.

?와아...!

이제 막 8살이 된 에리카는 바르간의 편지를 읽고 감탄했다. 그녀와 동갑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어휘.

자로 잰 것 같은 정갈한 글씨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상한 품격과 배려심.

에리카는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어른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멋진 성인.

아마 이 바르간이라는 사람은 아침 시간이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있잖아, 라일라! 이건 무슨 뜻이야?

어려운 글을 배우는 걸 지독하리만큼 싫어하는 에리카였지만, 바르간이 쓴 편지만큼은 단어 하나씩 뜯으며 되새겼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싫어하고, 뭘 보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었다.

에리카는 그녀의 시종, 라일라와 함께 바르간의 편지를 읽어 보며 답장을 보내는 시간을 종종 보냈다. 그 시간이 에리카에게 있어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바르간 님. 보내 주신 편지 잘 읽어 봤습니다. 문체에서부터 좋은 분이란 걸... 저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을 만나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됐다! 분명, 좋아해 주시겠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

"…하아."

검은 드레스로 곱게 차려입은 에리카는 바닥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약속 장소인 시계탑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꾸며 입은 건 바르간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당연히' 아니다.

저녁 식사 때야 없겠지만, 연극에는 거의 8할의 확률로 그녀의 어머니가 심어 놓은 관계자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보고하는데 꾀죄죄한 옷을 입고 바르간을 만나러 갔다고 적혀 있어 봐라.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따라서 에리카는 움직이기도 불편한, 프릴이 나푼거리는,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외출복으로 개량된 옷이라, 길이가 바닥에 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격하게 돌아가고 싶다.

기숙사로 돌아가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마법서를 읽고 싶다.

서로가 원하지 않는 약혼 기념일을 챙길 필요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찍이 포기한 발걸음은 또각또각 걸어가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왔느냐."

실로 귀족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외관의 남자.

바르간은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어라.

얘가 먼저 올 건 생각지 못했는데.

에리카는 퉁명스러운 눈으로 바르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녀의 입에서 인사말이 나온다.

"그래도 개념은 있어서 다행이네."

바르간은 멋스러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항상 고급스러운 옷만 입고 다니긴 했지만, 오늘은 누가 보더라도 일부러 더욱 격식을 차렸다.

어머니가 알게 되면 좋아하실 거 같다.

"색은 나를 위해 맞춘 것이냐."

"웃겨. 어쩌다 겹친 거지."

옷차림을 맞춘 듯, 둘은 짙은 검은색의 옷을 입었다. 심지어 같은 재봉사가 만든 것처럼 분위기도 비슷하여 누가 보더라도 한 쌍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꾸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리카는 팔짱을 낀 손을 더욱더 조이며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바르간의 끔찍한 돌발 행동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나는 너의 약혼자다."

"그래서?"

"오늘은 약혼 기념일이지."

"…그래서?"

바르간은 내민 손을 살살 흔들었다.

당연한 게 아니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한다.

"손을 잡자는 의미다."

"...."

정지해 있던 에리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더니, 끼고 있던 팔짱은 곧 온몸을 감싸게 된다. 징그러운 걸 본 사람처럼 몸을 바르르 떤다.

그녀는 바르간을 보며 소름 돋는 말로 자신의 반응을 보려는 새로운 괴롭힘이냐고 쏘아 댔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간다.

병아리가 뛰어가듯 멀어지는 종종걸음을 보며 바르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녀 딴에는 바르간과 거리를 두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워낙 보폭 차이가 커 금방 따라 잡혀 버렸다.

그렇게.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비공정에 탄 에리카는 다리를 꼰 채 말했다.

오늘은 무슨 날인지 비공정 안에는 바르간과 그녀 둘밖에 없었다.

"문뜩 옛 추억이 떠올라서 말이다."

"옛 추억?"

"에리카 기억나느냐. 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비공정에 탔던 순?."

"잠깐. 뭔지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에리카는 손을 뻗으며 바르간의 입이 열리는 걸 막았다. 태평한 모습을 보이려 하나, 다소 격양된 어조다.

"그 당시의 너는 순하고 겁이 많았지. 나와 있고 싶어 두려움을 간신히 밀어내고 비공정에 탔건만, 결국 하늘에 올라 지상이 멀어지자 한바탕 눈물을?."

"아, 그만! 그만하라니까…!"

"왜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려 드는 것이냐. 전부 좋은 추억이거늘."

"나를 놀릴 거리이니 너한테는 그럴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라고!"

에리카가 벌떡 일어나 발로 바닥을 탁탁 찼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토록 대놓고 성을 내거나 하는 일이 없는데, 유독 바르간 앞에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올렸다.

"그거 아쉽군."

에리카와 바르간이 공유하는 어렸을 적의 기억은 에리카에게 약점과도 같았다.

그녀는 과거의 자기 모습을 전부 지워 버리고 싶었다. 어리숙하고 연약한 어린 시절의 자신.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간을 순수하게 따르던 과거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땐 내가 미쳤었지."

"어린 시절이란 다 유치하고 철없는, 그런 것 아니겠느냐."

"…너는 어렸을 때가 가장 철들었을 때고."

"처음 만났을 때 말이냐?"

"물론 전부 껍데기일 뿐이었지만."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에리카는 고개를 휙 돌려 밖을 바라봤다. 그녀의 뚱해진 눈으로 하늘이 보인다.

비공정 아래 두꺼운 구름이 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쳐다도 못 볼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아니, 아니. 슈겐하르츠 때문에 이게 무슨 감회야.

"많이 컸구나, 에리카."

"크윽…!"

모든 걸 들킨 사람처럼 에리카의 얼굴을 새빨개졌고, 바르간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의 표정에 더욱 수치심이 올라왔고 그건 한동안 지속되었다.

***

해가 뉘엿뉘엿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는 시간.

디피엘리아는 기숙사 근처의 작은 식물관에서 식물들과 교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우중충했다.

나무의 거칠 거리는 표피를 만져도.

향긋한 꽃내음을 맡아도.

가슴에 쌓인 먹구름은 걷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조잘거리는 작은 새가 폴짝 몸을 돌려 유리의 밖을 바라본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카데미아의 교복을 입곤 있지만 지나가면서도 본 적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이 어렵다. 바지는 입고 있지만, 선택으로 바꿀 수 있으니 남자라 확정할 수 없다.

그가 식물관에 들어왔다.

그냥 식물을 관찰하기 위함이려나?라는 생각이 이어지지 못하고, 그는 디피엘리아의 앞까지 걸어와 말을 걸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디피엘리아는 그를 보고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인간종의 모습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애매한 감각.

"안녕?"

명랑한 목소리였다.

다분한 호기심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인류애를 벗어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네… 반갑습니다. 식물을 보러 오신 건가요?"

아닌 걸 알지만, 디피엘리아는 살짝 말을 돌려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뭐? 아니, 아니. 그런 따분한 짓을 내가 할 리 없잖아!'라면서 웃어 댔다.

그러다 돌연 분위기를 바꾼다.

누군가의 뜻을 전하러 왔다는 말이 전환점이었다.

다른 사람이 빙의된 것 같이, 눈빛부터 말투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마치 오늘 만나기로 한 어떤 오만한 귀족이 떠오르는 그런 아우라다.

"디피엘리아. 허망한 꿈에 먹힌 성녀야. 그다지도 녹슨 검으로 누굴 벨 수 있겠느냐."

그의 음성조차 바뀌자 디피엘리아는 깜짝 놀랐다.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다. 목을 푸는 걸 보지 않았다면 바르간이 직접 말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완전히 같은 목소리였다.

"네가 보는 앞날은 과거의 유산이다. 이젠 지나가 버려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 그 세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너는 모르겠지. 신탁이라는 게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니."

그는 디피엘리아를 비웃는 듯했다.

그녀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그녀의 신념을 무시한다.

나이아스를 통해 뜻을 전하는 바르간은 신탁에 조종당하는 성녀가 우스웠다.

"아. 이건 말해 줘야지."

말을 하던 도중 처음의 낭랑한 목소리로 돌린 나이아스. 부분적으로만 형태를 바꾸는 게 가능하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것도 내가 하는 말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나는 너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거든. 뭐, 좋은 감정도 없지만."

"...."

디피엘리아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불쾌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자신의 편지에 대한 답변이니 끝까지 들어야 한다.

나이아스의 음성은 다시 바르간을 담는다.

"나를 시험하려 하지 마라 성녀."

평가하려 하지 말고.

판단하려 하지 말고.

이해하려 하지 말라.

"너는 몽매하다. 네 줏대 없는 이상으로는 남을 헤아릴 깜냥은 없다."

그저 신이라 불리는 자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빵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있는 너는 그 원형을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고 앞을 밝혀 주어야 할 인물이 어린 양이 되어 바닥이나 쳐 보고 있으니.

…하나, 나는 귀족이며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해서,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나이아스는 품에 있던 오르골 하나를 꺼냈다. 디피엘리아가 가져가기 좋도록 바로 앞에 위치시킨다.

디피엘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감긴 눈과 정령의 질고한 눈이 마주한다.

나이아스는 마지막 뜻을 전한다.

"환상이 담긴 오르골이다. 내 뜻을 담아 두었다. 강요는 하지 않겠다만 우리에서 탈출하고자 한다면 열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

디피엘리아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한참을 오르골을 바라봤다. 나이아스가 떠나고 그녀만이 남아 오르골의 존재가 더욱 돋보인다.

조그마한 유리 탁자 위에 올려진 오르골.

안에 담긴 것은 바르간의 저주 마법.

동시에 그의 이상일지 몰랐다.

열어 보는 게 맞을까. 아닐까.

성녀는 생각한다.

자신의 사고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틀렸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저 바르간의 뒤틀린 관념이 자신을 비하하려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바르간에게 자신의 작은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제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다만, 그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어쩌면 오르골을 확인함으로써 그의 사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를 개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성녀인 자신은 저주에 특히 강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상한 장치를 해 두었다면 풀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여는 게 맞지 않을까.

그를 정화해 나쁜 구렁텅이로 빠지지 못하도록 손을 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

"...."

성녀는 가녀린 손을 오르골 위에 올린다. 결정을 끝냈으나 망설이는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천천히.

조심스레 오르골의 상부를 잡고 지긋하게.

성녀는 작은 그것을 들어 올린다.

***

에리카와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제대로 된 코스 요리였다.

음식이 나오는 텀이 길어 그녀와 대화를 많이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에리카의 입에서 성녀의 이름이 나왔다.

?디피엘리아는 건들지 마.

사나운 고양이처럼 눈매를 세우며 뱉은 말.

저번에 디피엘리아가 나에게 편지를 건넨 장면을 보고 말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에리카는 내가 디피엘리아에게 수작질을 했고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끌려다니고 있다 본 모양이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걸 보면, 최근 디피엘리아와 서먹한 관계인 건 확실한 것 같다.

?관심도 없다. 비즈니스가 아니라면 한마디도 하지 않을 녀석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에리카는 여전히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채였으나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다. 이 역시 그녀다웠다.

나름 즐거운 저녁 식사 이후, 도착한 극장.

나는 현재 그 앞에 서서 전체적인 건물의 구조를 감상하고 있었다.

과거의 극장 구조와 현대의 양식이 혼합된 넓은 건물이었는데, 당장 오케스트라를 연주해야 할 것만 같은 고급스러운 자태였다.

"...."

"안 들어가?"

잠시 과거의 기억에 잠겨 있자, 에리카가 나를 깨웠다.

이곳에서 연극이라.

색다른 기분이다.

"음…?"

에리카가 쭈뼛거리며 작게 손을 내민다.

고개는 돌려 나의 눈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수상하게 여길 거 아니야."

그녀 집안에서 심어 둔 인물이 보고할 것을 염려한 듯하다. 하긴, 틀린 판단은 아니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살짝 차가운, 여린 손이 촉감을 통해 전해진다.

바르간의 기억을 통해 내재되어 있던 예전의 감각도 살아나는데 그때와 크게 차이가 없는 듯했다.

"...."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아니, 전혀."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손에 힘을 더욱 쥐었다.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이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

그런 감상에 점차 젖어 들지만.

온전히 정신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잊지 마라.

이번 외출은 단순한 데이트 따위가 아니다.

?또각.

넓은 무대가 보인다.

수많은 객석이 보인다.

?또각.

이번 분기로 인해 다시금 미래는 크게 바뀌게 된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다.

녀석은 그 대상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짝짝짝.

이윽고 막이 오른다.

어둠이 주변을 둘러싸고 밝게 비치는 이들은 오직.

무대에 오른 배우들뿐이었다.

55화

「언젠가 베로나에 두 경쟁 집안이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오는 합창곡이 울린다.

두 원수 가문, 캐플렛 가문과 몬터규 가문의 자제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리카는 다소 심드렁하게 극을 바라봤다.

이미 내용은 질릴 대로 듣고 보아 알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연출, 노래는 확실히 몰입도를 높여 주었으나 그게 전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도 반복해서 보게 되면, 흥미와 관심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각색이라도 본격적으로 하면 모르겠는데 기본적인 플롯은 대부분 그대로였다.

힐끔? 옆자리를 바라본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몇 년 전에 슈겐하르츠와 함께 가문 사람들끼리 모여 극을 봤을 적에는 저 배우의 연기력이 어떻다느니, 조명의 밝기가 어떻다느니 등. 극과 연이 없는 에리카가 화딱지가 날 정도로 비판을 했었다.

한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감감무소식이다.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조명이 바뀌자 음각 진 날카로운 턱선과 콧날이 드러났다.

그 선을 따라가자 얼음이 담긴 호수가 있었다. 찬찬한 눈동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저 가만히, 무대에 향하고 있다.

오늘따라 슈겐하르츠의 상태가 유독 괴상하다.

자신을 가지고 놀 듯 놀리는 건 여전했으나, 그 정도가 달랐다. 각종 비유나 이상한 격언 같은 말을 붙이며 쏘아 대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다소 침착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얘가 이렇게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는 애가 아닌데….

이미 욕을 해도 수십 마디는 했어야 정상이거늘, 그는 조금의 시선도 밖에 주지 않았다.

이 뻔한 내용의 극을 즐기는 것 같기도, 분석하는 것 같기도, 감상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흥."

에리카는 시선을 돌렸다.

극은 진행되어, 로미오와 줄리엣,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가면무도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줄리엣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로미오가 노래를 부른다. 주변 인물들과의 하모니로 매료된 그의 심정을 녹여 낸다.

"...."

사실 에리카는 이 이야기가 싫었다.

원수 가문인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서로를 그리워하는 게 싫었고.

로미오가 줄리엣의 사촌을 죽이는 전개가 싫었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결국은 비극을 맞이한 결말이 싫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은 로미오가 줄리엣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이 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상대를 좋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기에.

에리카의 뽀얀 손이 작게 주먹 쥐어진다.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지 않느냐."

문뜩, 바르간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대를 보고 있지만, 에리카에게 말을 건 것을 증명하듯 천천히 잇는다.

"그깟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사람을 아둔하게 만드는지."

"...."

에리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바르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린다.

그의 올곧게 차가운 눈을 보고 있지 않으면, 새벽안개 같은 잔잔한 슬픔이 담겨 있다고 오해할 것 같은 목소리다.

"…하지만,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지."

바르간과 에리카의 시선이 교차한다.

온전하게 두 눈동자가 보이자.

그의 눈이 꽁꽁 얼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빙산처럼 굳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표면이 조금 녹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어째서?

바르간의 눈동자를 읽은 에리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눈을 좁혔다.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로 비틀며, 도발이 담긴 말을 건넨다.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갑자기 내가 좋아지고 그런 건가?"

"…걱정하지 말거라."

바르간은 도로 에리카의 눈을 피했다.

오랜만에 그의 진실한 감정이 전달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자신의 연약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린 그.

…분명 착각일 것이다.

착각임이 틀림없다.

그가 진중하게 말한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할 터이니."

"...."

바르간은 그런 말을 뱉으며 한편으로는 다른 문장을 목 뒤로 넘겼다.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차 사그라지겠지.'

약간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극에 집중하며 지금의 분위기를 회피하려 들었다. 껄끄러움, 두려움, 부끄러움. 다양한 감정이 일었으나 가장 짙은 건 다른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바르간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감정이 에리카의 심정 바닥에 깔려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바르간과 약혼을 하고 5년이 조금 지났다.

오늘은 아주아주, 매우매우 중요한 날이다.

"흐, 흐흥~!"

13살의 에리카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부모님이 보시면 예의 없다고 혼나겠지만 그런 걱정은 뒤로 밀어 두었다.

짤막한 두 팔로는 혹시라도 놓치는 일 없도록 깔끔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있다.

선물은 결코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체구가 워낙 작아 상자가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이걸로 바르간 님이 기분 푸셨으면 좋겠다!"

굉장히 밝고 아기자기한 목소리였으나, 에리카는 최근 걱정이 많았다.

걱정…만이 아니다.

상처도 많이 받았다.

며칠 밤을 울음으로 지새우며, 눈이 지나치게 부어 만지면 불룩 튀어나오는 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분명 아무 문제 없었는데.

분쟁은커녕 사소한 말다툼조차 단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는데.

바르간은 어리숙한 에리카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납고 차갑게.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왜??라는 의문에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보며 웃어 주던 따뜻한 미소는 차가운 겨울이 되었다. 부드러운 천과 같이 듣는 이의 귀를 감싸 주던 나긋한 목소리는 시퍼런 칼이 되었다.

그리고.

한겨울의 칼은 에리카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가 자신을 향해 욕을 입에 담았을 때는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것 같았고.

시종을 학대하는 모습을 봤을 땐 팔이 뜯긴 듯하였고.

주고받았던 편지를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 버릴 때는 다리를 자른 것 같은 깊은 통각이 마음에 아렸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걸까…."

그러나, 에리카는 믿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폭언을 일삼아도.

아랫사람을 험하게 다뤄도.

소중한 추억을 찢어 버려도.

이건, 잠시 지나가는 추운 계절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 지나간다면 다시 원래의 그로 돌아와 따스하게 자신을 안아 줄 것이다. 에리카는 진심으로 바르간을 사랑했다. 시작은 동경에 가까운 어린 마음이었지만.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3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가문을 떠나 그 자체를, 바르간만을 바라며 주변 배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고작 열 살을 갓 넘은 뭣 모르는 어린애의 서투른 감정이라고 부를지 몰랐다. 그녀가 봐도 자신은 무척 어렸으니.

하지만, 결코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매일 보고 싶고,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고 명명한단 말인가.

바르간도 자신과 같다. 분명히 그랬다.

서로 감정을 공유하며 달콤한 말을 주고받던 5년이라는 시간이 거짓일 리 없다.

그래서 에리카는 바르간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을 시련이라 받아들이고 꿋꿋이 기다리기로 했다.

도리도리.

에리카는 머리를 흔들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려 들었다. 윤기 있게 빛나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린다. 잠시 갈피를 못 잡는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올라오는 약한 마음이 들었지만, 숨과 함께 삼킨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밝은 모습으로 그의 생일을 축하하자.

그러기 위해서 어렵게 구한 선물이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기뻐할 특별한 물건으로 어렵게 준비했다.

게다가 슈겐하르츠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 저택에 와 있다. 눈물이라면 그들이 떠나고 흘려도 된다.

에리카는 다시금 결심을 마쳤다.

"그런데… 라일라는 어디로 간 거지? 포장 다 하면 바르간 님에게 보여 드리기 전에 봐준다고 했는데."

에리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라일라는 그녀의 시종이었다.

항상 그녀의 옆에 붙어 다니며 고민을 들어 주거나, 대신 일을 해 주는 등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에리카는 넓은 저택을 돌아다니며 라일라를 찾아 헤맸다.

"여기도 없네."

시종들이 모여 쉬는 방에도 없다.

"여기도 없고."

에리카의 방에서 청소하는 것도 아니다.

"…으음.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에리카에게 있어 라일라는 단순한 시종이 아니다. 부모님과 같을 정도로 소중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바르간의 편지를 함께 읽은 것도 라일라였고.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인물도 라일라였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에리카의 곁을 비운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포장을 예쁘게 잘했는지 봐주기로 했는데 말이다.

"여기 있나…?"

에리카는 천천히 라일라의 방문을 열었다.

일하는 시간에 그녀 방으로 돌아간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있을 만한 웬만한 곳은 다 돌아봤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남은 장소는 여기뿐이다.

"라일라… 있어…?"

끼이익?.

문이 열리며 그 틈새로 방 안의 어둠이 에리카를 맞이했다. 어둠과 함께 그녀를 맞이한 건, 원인 모를 금속의 냄새였다.

"바르간 님…?"

에리카는 어둠에 먹혀 있는 자의 모습을 봤다. 그는 포식자와 같이 번뜩이는 안광으로 에리카를 내려 봤다. 한겨울에 내린 눈보다 차갑다.

?에리카가 들고 있던 선물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푸른 광휘의 마석이 모습을 드러내 방 안을 밝힌다.

통증(痛症).

다시금 그 날카로운 칼날이 에리카를 덮치려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 없었다.

"에리카인가."

무신경한 바르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지금의 현장을 목격한 에리카를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담담하게 그리고 싸늘하게.

"이 녀석이 나를 모욕하여 벌을 좀 주었다."

주검이 되어 버린 라일라를 보고.

에리카는 비명을 지른다.

머리가 잘렸는지, 심장이 파였는지. 그 당시의 에리카는 더 이상 바르간에 대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