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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뭐, 잘생겼네."

사납지만 매력적인 눈매,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 생기 있게 빛나는 피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다시 봐도 꽤 잘생겼다.

이 수준이면 '원래의 나'와 맞먹을 정도.

키도 훤칠하여, 16세의 나이었음에도 쭉 뻗은 다리는 웬만한 성인 이상이었다. 게다가 탄탄한 잔근육까지.

아, 오해하지 마라. 나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다.

그야, 이 몸은 나지만, 내가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도련님, 분부하신 대로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이제 출발하시…."

"안 그래도 가려 했다. 재촉하지 말고 문이나 열어라."

⎯⎯끼이익.

커다란 문이 열린다. 빛이 들어오면서 그 앞에 나열된 하인들이 보인다. 모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질서 있게 예를 표하는 이들은 모두 나의 시종이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사람 수는 여럿이었지만 목소리는 동시에 들렸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잘나가는 공작가 자손의 외출이지.

"오냐."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문을 나섰다.

기세 높은 공작가의 셋째 아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이 소설 속 세계의 악역이자 악당.

그의 몸으로 빙의한 지 일주일째.

"자, 그럼. 히로인을 납치하러 가 보실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다.

1화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예… 예?"

아,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군. 다시 말하겠다.

"따님을 제게 파시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흙이 묻은 천을 머리에 두른 채 나를 맞이하고 있는 이 여성은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내 지위며 지금의 상황을 다 이야기해 줬는데도 이 모양이다. 역시 평민은 이해력이 느리다.

"오십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십…!"

거친 손으로 놀란 입을 막는다. 아마 이 여성이 평생 만져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액수의 돈일 것이다.

정확한 숫자를 듣게 되자, 여성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이내 헛기침을 한 여성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나를 바라본다. 저건 어미가 아니라 협상가의 눈빛이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딸을 데리고 가시려는 연유를 알 수 있을까요."

실례가 안 된다니, 충분히 실례다. 어차피 네년이 원하는 것은 충분한 액수의 돈이 아니던가. 보아하니, 내게 그 이유를 들어서 목적이 중하다 싶으면 가격을 더 올리기 위함이겠지. 저 문장을 알기 쉽게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그…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송구하오나, 명망 높은 슈겐하르츠 공작가에서 제안한 금액으로는 다소 적은 것이 아닌지….

그래, 욕망이란 좋은 것이지. 자고로 초짜가 교환할 때에는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협상가로서의 재능은 없어 보이나 내 친히 이번엔 너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도록 하마.

"100골드를 드리겠습니다."

"…!!"

"자,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통보식으로 전한다. 마치 정말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따님을 제게 파시죠."

그렇게 거래는 성사되었다.

***

덜컹.

마법으로 충분히 장치해 놓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가장 성능 좋은 마차라 해서 기대했건만, 포장된 도로를 매끄럽게 달렸던 시대에서 온 나에게 마차란 불편한 것이었다.

바깥 풍경이 지나친다. 쭉 뻗어 있는 도로가 보인다. 나름 매끄럽게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아스팔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마차의 문제가 아니라 도로의 문제인 것 같다.

"...."

내 앞에 몸을 한껏 움츠러든 채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눈은 내리깐 채로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작게 주먹 쥔 손은 마차의 반동 때문인지 떨리고 있다.

나이가 나와 같은 그녀는 평범한 농부의 딸치고는 지나치게 예뻤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설정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널 구워 먹기라도 할 것 같으냐?"

떨고 있는 그녀에게 묻자, 질문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깜짝 놀란 모습이다. 간이 콩보다 작은 녀석이 틀림없다.

"걱정하지 말아라. 난 인육을 즐기는 변태도 아니고, 그런 취향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래도 긴장되느냐?"

"...."

"대답이 들리지 않는군. 이제부터 너의 주인이 될 자의 말인데 무시할 셈인가. 간이 콩알보다 작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배 밖으로 내버린 것이었구나?"

"아, 아닙니다! …저,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여자는 머리를 숙이며 잘못을 고했다. 몸이 전체적으로 얕게 떨리는 것을 보아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거나 겁을 더욱 먹은 듯하다.

"귀찮은 녀석이군.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라."

나는 가볍게 뱉었다.

"오늘부터 넌 내 전속 시종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너의 어미에게서 100골드라는 거액을 주고 샀다는 것이 그 까닭. 때문에 그에 대한 네 반론은 듣지 않겠다."

"…네."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할 일은 나를 보필하며 내가 주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쉬운 일들은 아닐 테지만. 네가 지금까지 했던 일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어미라 불리는 자에게서 노동을 착취당했으니 말이다.

내 밑에서 일하는 것은 훗날 그녀에게 있어서 보탬이 되는 일이니 더욱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주는 과제는 네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일 것이다. 으음… 그래, 숨길 일도 아니니 바로 말해 주겠다. 너는 마법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지?"

"마, 마법이라 하시…."

"아, 됐다. 그냥 말하지 말아라. 어차피 너에게 있어 마법은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신비의 것이겠지. 하지만 마법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탁!

손가락을 튀기자, 공중에 작은 화염구가 생성되어 그 온기를 전했다. 크기는 작아도 정밀하고 농밀한 불이었다.

"부, 불이…!"

"촌것아, 그만 좀 놀라거라."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진심으로 놀라자, 나는 불을 꺼 버리곤 말을 이었다.

"방금 것은 귀족이라면 두 발로 뛰어다닐 시기에 배우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다. 평민인 너에게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나,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너는 마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

…그것만 하진 않겠지만.

아무튼 정확히 말해, 넌 마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 세계를 위해서, 아카데미아를 위해서. 그따위의 것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나를 위해서.

"저 따위가 어찌…."

"쯧쯧. 누가 평민 아니랄까 봐 자존감도 매우 낮구나. 네 가치를 네가 폄하해서 어쩌자는 거냐? 어미를 닮아 너도 협상가의 자질이 부족하다."

그딴 쓸모없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야 넌….

"넌 미친 천재다."

"미, 미친 천재…!"

"그래, 그냥 천재도 아니고 미친 천재!"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얼이 나간 것으로도 여겨진다.

"미쳤다는 말은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인 천재를 넘어섰다는 강조의 표현이다. 그만큼의 재능이, 너에겐 있다."

지금의 나이는 나와 그녀 모두, 16세.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아 온 나에 비해서 그녀는 마법을 배우는 시기가 느려 터진 것으로도 모자라 폭발해 버렸지만,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녀의 재능은 아카데미아의 모두를 압도할 것이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라. 그저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내가 빙의된 이 소설, '아카데미물 조연으로 빙의했잖아?!'의 최중요 인물이자, 히로인, 알리시아. 우연히 들른 교회의 순례자에 의해 재능을 알게 된 그녀는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말도 안 되는 천재성을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거지, 그녀가 미래에 나의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의 앞길을 막기 전에 내 편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여 즉시 실천에 옮겼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

⎯⎯나는 최중요 인물이자 히로인인 '알리시아'를 '전속 시종'으로 만들었다.

내 행동이 더럽다고? 돈과 지위가 있으면 마땅히 써야지. 쓰지 않는 게 바보 아닌가? 공작가에다 악역인데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 그 재능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절묘한 시기.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쏘냐.

"다른 질문은?"

"...."

"또 대답이 없구나."

"앗, 아. 그… 그, 그것이! 이, 있습니다!"

급하게 몰아붙이자, 그녀는 자신이 계속 숨기려 들었던 마음속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왜 이리도 소중히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 잡다한 물건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널 지금까지 구박한 어미가 자신을 판 돈으로 잘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 좋다. 네가 원한다면 아주 더럽고 치사한 방법으로 모든 그녀의 재산을…."

"그게 아닙니다!"

여자가 다급하게 외친다. 처음으로 들어 보는 제대로 된 힘이 담긴 목소리다. 흥미가 생긴다.

"…그래? 내 말을 중간에 끊은 것은 심기가 불편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네 말을 더 듣고 싶으니, 너그러이 용서하고 묻겠다."

그럼, 뭘 말하는 것이냐.

"저 저희 어머니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물기로 젖어 든다.

"저희 어머니는, 저 이외의 다른 가족이 없는 외로운 분이십니다. …제가 팔린 이상, 어머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글픈 곳에서 남은 삶을… 앗?!"

툭툭.

그녀의 이마에 노크하듯, 몇 차례 쥐어박았다.

이게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의 행동에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아, 내가 오늘 구매한 물건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잠시 확인한 것뿐이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

내가 때린 부위를 두 손으로 감싼 그녀의 주위에 물음표가 가득하다.

미안하지만 그 물음표는 나도 마찬가지다.

이상하네. 이상해.

확인(?)해 봤을 때, 별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이딴 이상한 말이나 씨불이고. …아, 이거 설마.

그렇게 살짝 감을 잡은 나는

⎯⎯하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설마, 진심으로 네 어미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냐."

"…예."

"어처구니가 없구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알리시아의 성격은 대강 알고 있었다. 그야 내가 읽은 소설 속 히로인들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많은 히로인이었으니까. 그만큼 그녀의 심리도 많이 표현되어 있었고.

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얼간이었다니.

직접 대화해 보니 느낌이 새롭다.

"넌, 네 어미에게 팔린 것이다. 그것을 잊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이러는 것을 보면, '미쳤다'라는 표현이 재능이 아니라 머리를 의미하는 게 맞는 것 같구나."

"...."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주 정중하다.

"…이 미천한 여식이, 위대하신 공작가의 자제분에게 감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하면?"

"…그리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의 무례를 보이지 않겠습니다."

오호, 이것 봐라.

"말해 보아라. 내키지는 않지만 너의 무례를 용서하마."

"감사합니다…. 바다와 같이 넓으신 아량…."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본론을 말해라."

"…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하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곧은 심지가 보였다.

"부디, 저희 어머니를… 1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찾아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는 어떤 말씀이라도 따르겠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그녀는 어떤 것이라도 따르겠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너는 지금 분명… 어떠한 것이라도 따르겠다고 하였다? 네 발언에 일말의 거짓도 없는 것이겠지?"

뭐, 여차하면 죽이면 되긴 하지만.

"일말의 거짓도 없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어떤 명령이라도 수행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일이 한층 쉽게 풀릴 것 같다.

"…!"

나는 불쑥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나의 얼굴은 바로 앞에 위치해 옅은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

이어서, 끼고 있던 얇은 장갑을 벗어 그녀의 턱 끝을 잡고 끌었다. 그녀의 목 넘김마저 내 손에 전해진다.

입술이 닿을 듯 더욱 가까워진다.

정말, 농부의 여식이라곤 믿기 힘든 고운 피부다.

그녀의 볼의 열기가 뜨겁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것일까.

나는 그녀의 입술을 지나쳐, 뽀얀 귀에 도착했다.

그러곤 작게 읊조린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덜컹.

마차가 멈췄다.

도착한 곳은 내가 살고 있는 대저택이었다.

마중 나온 하인의 손에 의해 마차의 문이 열렸고, 그 햇살 속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주저앉아 있는 알리시아를 뒤돌아봤다.

"오거라. 이곳이 이제부터 네가 살 곳이다."

자, 알려 다오. 알리시아.

미래의 내가.

너를 죽였는지, 살렸는지를.

2화

"벗어라."

어두컴컴한 방.

몇 개의 불빛이 방 안을 비추는 그 공간에서.

방금 몸을 씻어,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완전히 마르지도 않은 때.

알리시아는 슈겐하르츠가의 셋째 아들, 바르간과 함께 있었다.

"…예."

그의 강압적인 말에 알리시아는 당황했으나, 이곳에 팔린 순간부터 어느 정도 각오는 했던 터라 목에 침을 넘기며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서서히 옷을 벗기 시작한다.

스르륵⎯.

아무리 빨랫방망이로 때려도 지워지지 않는 때가 묻어 있는 옷. 마땅히 둘 곳이 없어 바닥에 두었다. 의자나 침대에 두자니 자신의 입고 있던 옷이 너무나도 더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꺼풀 벗으니 남은 옷은 단 한 벌이게 되었다. 이것마저 풀어 버린다면 자신은 아무런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알리시아가 애써 떨림을 감추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남자를 흘깃 바라본다.

오늘부터 자신의 주인이 된 이 남자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처럼 자세히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자, 숨기려 했던 떨림과 부끄러움이 다시 몰려든다.

남자의 눈은 한 치의 움직일 기미가 없이 고정되어 있다.

"…저, 저어. 바르간 도련님."

결국 알리시아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칼날 같은 눈빛과 마주쳤다.

"그… 속옷마저 벗으면 되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었다. 굳게 다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방어 태세가 멋대로 나와 버린 것이다.

"...."

그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진 채로 자신을 바라본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혼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난다.

그의 커다란 체구가 자신을 위협하는 것 같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사고가 정지하고 빙빙 돌기 시작한다.

"…도, 도련님."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자신과 그는 그만큼의 입장 차이가 있으니까.

"...."

그의 길면서도 어딘가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손목이 펴지며 다가온다. 목적지는 자신. …읏. 그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게 된다.

이윽고 이어지는,

"앗!"

따끔한 손가락.

이마가 아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다 보이는구나. 쯧쯧. 제 주인을 상대로 발정한 모습이라니…. 나는 너 같은 것에게 욕정을 품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예?"

"얼빠진 모습 하고는. 오늘 너의 몸에 맞는 복장을 만들기 위해 신체를 측정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완성되어 갈아입으라는 뜻이었다. 그런 더러운 옷을 언제까지 입고 있을 생각이냐."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얼얼한 이마를 매만지며 그곳을 보자, 의자의 위에는 다른 시종들과 같은 형태의 정갈한 옷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었다.

"…죄송합니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아래로. 어둠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이었지만, 동시에 어둠 덕분에 자신의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길 수 있었….

"…창피하면 빨리 옷이나 입거라. 네가 할 과제들이 한가득이다. 시간이 없단 말이다."

"…예."

없었다.

***

창피함으로 물든 알리시아의 볼이 원상태로 돌아올 때쯤.

자신의 앞에 쌓인 거대한 책의 산에 알리시아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칠칠치 못한 입을 다물고 지금부터 내 말에 집중하거라."

합. 하며 입을 다문 알리시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바라본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단어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좋아, 모양새는 갖추어졌군.

집중하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물었다.

"마법이란 무엇이냐?"

"신의 축복입니다."

"…꽤 고리타분하고 정석적인 대답이로군. 마법을 너의 신체 일부분으로 비유해 보아라. 뭐와 가장 유사한 것 같으냐?"

고민을 이어 가던 알리시아는 내 심기를 살피더니 의문을 오래 끌지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오래 시간을 잡아먹으면 혼낼 것으로 본 모양이다.

"두뇌… 아니겠습니까?"

뇌라.

틀리지는 않았다만 내 의도와는 다르구나.

"마법이란 근육이다."

"근육… 말입니까?"

알리시아가 힘주던 눈의 힘이 다소 풀리며 고개는 갸우뚱한다. 자, 어린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테니 우선 들어 보아라.

"그래, 근섬유다."

나는 내가 빙의한 '바르간'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지식을 이용해서 그녀에게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그중에는 처음 들으면 다소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중요한 히로인이라 그런지 다행히도 머리는 쓸 만하여 어려운 개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평민 중에서는 드물게 글도 읽고 쓸 수 있어 설명하기에도 한결 쉬웠다. 만약 글을 읽지 못했다면 과제를 내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사용법을 모른다면 영원히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 감각을 익힌다면 어지간한 꼴통이 아닐 경우 발달이 가능하다. 이해가 되었느냐?"

"네, 되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용할 때의 감각과 크기, 밀도입니다."

"좋다, 드디어 갓난아이의 수준을 벗어났구나. 지금 네가 배운 것은 마법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이니 마법에 뜻이 있는 자들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눈이 사뭇 진지하다.

"그래, 그럼 되었다. 그날 배운 것은 다음 날에 확인할 테니 그리 알도록 하고…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자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 이제 수업은 마치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앞으로의 나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그녀를 데려왔다. 분명 이것은 훗날에 커다란 나비효과로 되돌아올 것이 확실한 상황. 그렇다면 나는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은 크게 늘려야 한다.

"너에게 닥칠 미래를 이야기해 주겠다."

"미래… 말입니까?"

정확히는 나를 위해 네가 해야 하는 일들이지만.

"그래. 이미 말했지만. 너는 이론과 실기. 두 가지를 동시에 배워 마법을 섭렵할 것이다."

"…예.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잘해야 한다. 네 녀석의 과정 따위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어차피 보이는 것은 결과뿐이다."

"…최고의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보아하니, 아직도 내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구나. 너는 미친 천재라고까지 말하였건만."

중요한 역할의 히로인이라고는 해도, 결국 지금까지 시골구석에 박혀 살면서 구박을 받으며 자란 소녀. 갑자기 자신에게 재능이 넘쳐 난다고 말해도 섣불리 믿기 어려우며, 체감할 수도 없겠지.

"…도련님의 말씀은 깊이 새겨 둔 상태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해 주시는 데에는 그에 합당한 까닭이 있음을 믿습니다."

"누가 시종 아니랄까 봐 말은 예쁘게 잘하는구나. 말은. 아무튼, 그렇게 6개월 동안 마법에 대한 감을 잡고 넌 나와 함께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게 될 것이다."

"아카데미아라 하시면…!"

"용사를 육성하는 데 필요한 관문. 용사사관학교라고도 불리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배움의 장이자 훈련의 장. 이 소설 세계의 주인공들이나 주역들이 대거 등장하는 주요한 무대.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두 주인공 녀석들이 활개 치는 장소.

"넌 슈겐하르츠가의 이름을 달고 출전하게 될 것이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난, 히로인 알리시아로 그 빌어먹을 주인공들을 꺾어 버릴 것이다.

"...."

잠시 정적이 머물고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려움이 한껏 묻어나 있다.

"도련님이 뜻이 그러하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나… 저 때문에 위대한 슈겐하르츠가의 영광에 먹칠하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서니⎯아앗!"

불안해하는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으으."

꽤 세게.

나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면서 똑바로 전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정신교육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기억하거라."

자신의 진가도 알지 못하는 녀석아.

"네 말대로 난 위대한 슈겐하르츠가의 직계 자손이다. 너 같은 천한 농부의 여식과는 그 입장도, 위치도 차원이 다르지."

"...."

"높은 곳에 있는 자는 그 책임도 막중하며 해야 할 일도 많다. 하루에도 하늘과 땅의 간극을 메울 만큼의 배움을 얻어야 하고, 쓸데없는 사교의 장을 열어 마땅히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수면 시간을 아무리 줄여도 부족하지. 뭐, 쉽게 말해 매우 바쁜 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난 널 데리러 갔지.

"그것은 어느 때라도,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

나의 배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알리시아를 우선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난 매우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다. 너의 교육이 쓸모없고 가망 없는, 그런 보잘것없는 것이었다면 이처럼 내가 직접 나서서 마법에 대해 알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야."

이건 명백한 진실이다.

사실을 고하자 알리시아는 놀란 눈을 하고는 정지해 있었다. 아무런 반응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자, 창밖에서 검은 구름에 의해 가려져 있던 푸른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빛줄기를 내려 방 안을 밝힌다.

방 안이 밝아지고 알리시아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너에게는 그만큼의 가치, 재능이 있다. 왜냐고?"

나는 웃었다.

오만방자하고 지극히 권위적인 웃음을.

"그야 내가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다른 구차한 이유는 필요 없다. 그것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녀에게 물었다.

"대답은…?"

알리시아는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울 때도 그랬듯 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물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 알리시아 본인조차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의 떨림을 듣고 놀랐다.

사실, 내가 별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위로하지도, 친절하게 자신감을 심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재능이 있다고, 그녀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그녀를 믿어 주는 듯한 말을 들은 게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여리고 일그러진 여인이다.

"그럼 되었다. 내일부턴 오늘보다 힘든 과업을 수행해야 하니, 빨리 잠을 청하도록 해라. 나도 이제 돌아가도록 하겠다."

"...."

대답이 없는 그녀의 이마에.

"…앗!"

"오늘 딱밤을 몇 번이나 치는지 모르겠구나. 내 손가락이 다 얼얼할 정도다. 마차에서도 말했지만, 주인의 물음에는 항상 대답하도록 해라."

그녀는 살짝 젖은 눈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입가에는 약간이지만 미소도 엿보였다.

"…예.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알리시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밤은 이미 늦고도 늦어 어둠 속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나한테 재능이라니."

함께 살던 어머니께서는 그녀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자신을 도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도 하셨다.

알리시아는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잘하는 것도 없다고 여겨 불만 없이 따랐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되어 버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 하루.

오늘 하루 만에 알리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모조리 바뀌어 버렸다.

웬 이상한 남자가 자신의 집을 박차고 들어올 때는 정말 놀랐으며, 자신을 거금에 산다고 했을 때는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차에서는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등, 재능이 있다는 등의 믿기 힘든 말들을 쏟아 냈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가치를 믿고 자신감을 가지라 했다. 아, 자신감을 가지라고는 하지 않았나. 그 정도로 상냥한 사람은 아니니.

자신의 주인이 된 남자는 자존감이 무척이나 높고, 이를 자랑해도 될 정도의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대담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이 자신을 멀리서부터 데려와선 본래였으면 막대한 돈이 드는 마법 공부를 시켜 주고 있다.

"…나에게 정말로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안 걸까."

시골의 한편에 있었을 뿐인 평민을 어떻게 발견하고 왔다는 것일까. 자신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은 것일까.

그에 대해서도 아직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나로 정의 내리기 모호하다.

"으으…"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머니도 걱정되고, 본인의 앞날도 불안하다.

그와 약속을 했으니 1년에 한 번은 어머니를 뵐 수는 있겠지만, 만약 거짓이라면…? 아니, 그래도 그런 사람 같지는 않…은가…?

…이렇게 고민해 봐야 의미 없겠지.

그래.

우선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렇게 다짐을 하자,

순간의 기억이 지나친다.

오늘 그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옷을 벗고 이상한 말을 해 버린 것과 눈물을 보여 버렸다는 것이.

"...."

옆에 있는 베개를 끌고 온다.

그러곤 얼굴 위로 올려 양팔로 그것을 뒤덮는다. 포근한 베개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지만 쥐고 있는 손가락은 흔적을 강하게 주름잡는다.

"…으으!"

모르는 것으로 가득하지만, 우선 지금 이 감정 하나는 확실하다.

"창피해…!!"

3화

슈겐하르츠 공작가의 저택은 오늘도 평화롭다.

"다시 만들어."

"도련님…?"

"못 들었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종에게 나는 똑바로 다시 전했다.

"이 요리. 맛없으니까 다시 만들어 오라고 했다."

"하지만…."

"음식을 네가 만드나? 어차피 주방장이 만드는 것이지 않느냐. 그게 아니면, '오늘 요리가 쓰레기통에서 막 꺼내 온 것 같으니 바르간 도련님께서 먹을 수 있는 다른 음식을 원하십니다.' 이런 간단한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건가?"

"그, 금방 새로운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시종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간다. 나와 다른 시종들은 새로 들어온 그 시종을 유심히 지켜봤다.

알리시아, 이 소설 속 가장 비중이 큰 히로인.

원래라면 아직 그녀의 집에서, 못된 식모 뺨치며 어미라 불리는 자의 구박을 받은 채 심부름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현재 우리 저택에서 전속 시종으로서 일하고 있다.

너무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이것도 다 그녀를 위한 일이다.

알리시아는 천성부터가 글러 먹었다. 너무 착하고 약해 빠졌지. 그런 어쭙잖은 성격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카데미아에서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나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말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알리시아는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우겠지.

"새로운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다시 만들어."

"도, 도련님? 하다못해 살짝 맛이라도 보시는 게."

"냄새가 별로다."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이건 다 그녀를 위한 일이다.

***

이 소설 속에 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 하고도 2일이 더 지났다.

빙의가 되기 전, 나는 연극영화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연기의 천재로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나에 대한 것은 됐으니 이곳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는 '빙의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종류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아카데미물의 조연으로 빙의했다고?!>라는 웃기지도 않는 것이다. 구더기인 결말을 제외하면 내용은 나름 흥미가 있었으나 제목이 너무 유치했다. 하다못해 뒤에 물음표와 느낌표라도 빼 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소설 속 악역 공작가의 셋째 아들로 빙의했다는 것이다. 빙의물 속에 빙의라 제정신인가 싶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다른 장르에 빙의하는 것보다는 연결 고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본 그 내용을 잠시 설명하자면, 자신이 읽은 소설 속의 평민으로 빙의한 남자 주인공이 범재인 몸뚱이를 극복할 정도의 사기 능력을 얻게 되고. 몇 개월 뒤 용사사관학교, 아카데미아에 입학해서 벌어지는 사건을 주로 다룬다.

다행인 점은 그 주인공이 읽은 소설은 빙의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이 읽은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적국의 셋째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평민이지만 능력으로 아카데미아에 들어온 히로인, 알리시아를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악역들과 싸우는, 그런 일반적인 내용이다.

참고로, 둘의 공통된 악역에 나는 모두 포함된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

내가 읽은 소설 속의 평민 출신 주인공은 '진짜 주인공', 진짜 주인공이 읽은 소설 속 왕자 주인공은 '가짜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복잡한가?

뭐, 중요한 것만 말해 보겠다.

난 빙의물에 빙의했고, 악역 공작가의 셋째 아들이다. 나는 이 악역이라는 역할과, 지위, 외모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고. 오로지 나를 위해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기로 결심했다.

내가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인 '진짜 주인공'은 소설을 탈출하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의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째서, 대체 왜 이 소설 세계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인가.

혹여나,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왜 그 안에서 살려는 거야?'

난 잘나가는 공작가의 자손이다.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 여기라면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 있는데 굳이 그런 각박한 현실로 돌아가? 오히려 내가 반문하고 싶다.

'왜 나가야 돼?'

대체 내가 왜 돌아가야 하는가.

여기서 나는 찬란한 미래를 향해 발을 뻗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보장되어 있는 미래다. 그보다 좋은 것이 있단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아 물론,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이 악역도 그저 잘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악역이기에 당연히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주인공들을 괴롭히지만, 막바지에는 그들에게 밀려 힘이 다 빠진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빙의한 이 바르간의 미래가 그리된다.

그렇다면 나는 주인공들에게 빌붙어서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할까? 그들에게 복종하거나 어울리지도 않는 그룹에 속해 함께 영광을 나누어야 할까?

아니,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로 얻은 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 것이다. 다른 주인공들에게 구차하게 빌붙는 것이 싫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나와 맞물리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을 때에도 나는 악역인 이 바르간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멋지지 않은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이렇게나 당당할 수 있다니. 마치 나의 분신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야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위기도 전부 막을 것이다.

이 오만한 말을 감히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진짜와 가짜. 두 주인공이 모르는 정보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윽. 도련님, 죄송하지만 언제까지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지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닥치고 집중해라. 마나가 흐트러지면 지금까지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다."

"…예. …으윽."

어두운 공간 속, 힘들게 서 있는 알리시아 주변을 보랏빛 마법진이 감싸고 있다. 마나의 운행을 하고 있는 것인데, 알리시아의 안에 잠들어 있던 흐름을 강제로 깨워 장시간 움직이는 중이라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리가 가는 것이다.

반면, 나도 그녀와 같은 것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이는 항상 마나의 흐름을 내부에서 제어하고 있어 요란하게 티를 내지 않아도 이 정도는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파도 참거라. 나와 약조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기억…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1시간이 더 지나고, 나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전했다. 그녀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나의 운행을 멈추곤 힘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알리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하얀 수건을 들고 다가가는 로브의 여인.

"알리시아 양, 수고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호호호,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맙죠. 맨날 버릇없는 도련님만 가르치다가 저처럼 아름다운 미소녀를 가르치게 되어 즐겁답니다."

"…그 버릇없는 도련님이 나를 지칭하는 명사라면 당장 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것이다."

"바르간 도련님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다른 도련님, 제가 맡고 있는 다른 도련님을 말하는 거예요. 호호호."

"...."

이 지랄맞은 웃음소리의 주인은 나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마법, 그중에서도 마법 술식과 원소 계열에 있어 두각을 드러내는 인재다. 또한, 악역 바르간의 성격을 버틴 유일한 가정교사라는 설정이다.

"그나저나, 알리시아 양은 너무나도 아름답네요. 마치 저의 전성기 시절을 보는 것 같아요."

"아, 아뇨. 제가 무슨…."

성격은 촐랑거리고 웃음은 듣기 싫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놓아줄 수 없는 인재다. 마법에 대한 지식과 재능은 그 누구라도 무시할 수 없다.

"혹시 무슨 약이라도 사용하고 있으신 건가요? 으음, 아니면, 운동이라든가 몸매가 좋아지는 그런 운동 있잖아요? 아, 그래그래. 아니면…."

"시끄럽다! 알리시아, 넌 지금 당장 몸을 씻으러 가라. 어서, 이 조잘거리는 년 앞에서 모습을 지워. 내 귀가 멀어 버릴 것 같다."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무시할 수는… 없다.

알리시아는 받은 수건을 지닌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방을 떠나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내 가정교사이면서 약간 이상한 여자, 파울라는 아까의 촐싹거림을 벗은 채, 날카롭게 말했다. 눈매도 그에 준했다.

"도련님, 괴물을 데려오셨군요."

괴물.

그 단어는 알리시아를 말하는 것이다.

"저런 인재를 어디서 찾아오신 거죠? 16세의 늦은 나이에, 마나의 사용법을 익힌 것이 바로 오늘 낮. 처음 도련님께서 부탁하셨을 때는 그냥 도련님의 장난감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어요."

"장난감. 장난감이라…."

"하지만 바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죠. 무려 6시간. …참나,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6시간. 과거에 한 번 마나를 건든 적은 있다지만 본격적으로 운행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이건, 이건…."

"말이 안 된다. 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너의 심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라. …중요한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그녀는 해냈다. 이것 아닌가."

말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하고 있어도, 실은 나도 감정을 숨기고 있는 중이다.

믿을 수 없는 재능을 직접 목격하자.

오싹거리는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엄청난 고양감이 몰려왔다.

일반적인 천재들이 5살에 처음 마나를 깨워 운행할 수 있는 시간, 1시간. 엘리트 공작가의 핏줄에다 그중에서도 천재로 소문난 나만 해도 2시간이었다. 내 2시간이라는 기록은 주변의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그 진실성에 대해 논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봐라. 그녀는 늦은 나이에 마나에 입문하여 6시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내가 빙의한 시점에서 원래 몸의 주인인 바르간의 기억과 사고도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기에 그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몸에 돋은 소름이 사라지질 않는다. 눈앞에서 봤지만 믿기질 않는다. 저것이 정녕 나와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동시에 이야기의 시작부터 그녀를 내 쪽으로 끌고 온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저런 재능충이 나의 앞날을 막을 것을 생각하니, 마왕이 막고 있는 것보다 갑갑하다.

"내년에 그녀도 아카데미아에 입학시키도록 하죠. 마침 나이도 도련님과 같아서, 내년부터 들어갈 수 있는 나이잖아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곳에서 나의 충실한 검이자 방패가 되어 나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칠 것이다.

"이거야 원. 아카데미아에 커다란 파장이 일겠는데요?"

원작에서도 이번 연도에 알리시아와 두 주인공이 입학에 성공한다.

알리시아는 그 두 주인공 중에서도 평민 출신의 얼간이인 '진짜 주인공'의 존재를 인지하고 신경 쓰게 된다. 그녀와 같은 신분이며 같은 반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니 친하게 지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알리시아는 '진짜 주인공' 여자의 무리에 속하게 되지. 주인공은 그녀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해 방치하고. 한심한 새끼. 당연히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했어야 하는 것을….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알리시아는 슈겐하르츠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나서게 된다. 그녀의 신분이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입장이 다르다.

나에게 알리시아가 떨어진 이상, 그 녀석과 같은 평범한 농민이 아니라, 어엿한 소속을 가지고 있는 존재. 그녀는 더 이상 두 주인공의 힘이 되지 못한다.

"판을 뒤엎어야지."

정해져 있는 결말. 정해져 있는 전개.

모든 것을 비틀어 주마. 뒤엉키고 뒤섞여 모두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미련한 것들을 비웃는 사람은.

'나'여야만 한다.

4화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이른 시간.

알리시아는 늦지 않도록 정확히 눈을 떠, 복장을 갈아입으며 미약한 햇살을 맞이했다.

눈을 뜨자마자 행동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또각또각.

이 대저택에 온 지 벌써 4달째.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화려한 복도를, 빠르지만 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걷는다. 그 걸음은 깨끗이 세탁된 수건이 가지런히 보관된 방. 차갑고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특별한 우물 앞을 지나친다.

"좋아."

이곳저곳에서 준비할 물건들을 챙긴 뒤, 알리시아는 다른 공간들에 비해 유난히 넓고 별난 물건이 가득 들어 있는 방문 앞에 섰다.

⎯⎯⎯!

순간, 문 앞에서 들린 소리는.

부드러운 동작을 이어 가는 신발과 바닥의 마찰음, 한 호흡마다 느껴지는 거친 숨소리, 철과 철이 부딪치는 둔탁하지만 커다란 굉음(轟音).

모두 한 사람이 내는 일종의 예술이었다.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걸까. 잠도 늦게 자는 것 같은데, 수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저런 추진력과 지속력을 얻을 수 있는 거지?

문 앞에서 잠시 소리를 감상하던 알리시아는 들키지 않도록 살며시 문을 열어 그 좁은 공간으로 남자를 엿봤다.

윗옷을 벗은 남성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른다. 몸을 이루고 있는 잔근육들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벌써 몸을 씻었는지 착각이 될 정도로의 땀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내렸고.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한 방울은 똑 하며 바닥에 떨어져서는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자기 멋대로 살 것 같은 저 얼굴의 소유자는 실은 엄청난 노력파로, 하루를 수도 없이 쪼개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야말로 피 말릴 정도로.

'첫인상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이어진다.

그때.

"뭐 하고 있는 거지?"

그 날카로운 결정체와 알리시아의 눈이 마주쳤다.

"아, 그… 훈련이 끝나셨을 것으로 사료되어 땀을 닦으실 수건과 차가운 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자기의 성격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거세게 문을 열었다.

"그렇게 숨어서 말이냐?"

단련으로 후끈해진 열기가 전해진다.

"죄, 죄송합니다. 바르간 도련님! 혹여나 수련에 방해가 될까 하여. 살짝 문을 열어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뭐, 그런 것 같았다."

홱.

남자는 알리시아가 들고 있던 수건을 채 갔다.

평소와는 달리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별다른 벌을 내리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는 수건으로 가볍게 머리를 털면서 멀어져 갔다. 어느 정도 걸어가서는 다시 그녀를 돌아본다.

"이쯤 되면, 좀 눈치라는 것을 키워라. 빨리 이쪽으로 그 찬물을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니냐."

"아, 죄송합니다."

"하여간, 가르쳐야 할 것이 이리도 많다니.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구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역시, 그는 입이 너무 험하다. 언제나처럼 또 막말을 듣게 되겠지.

"게다가, 주인이 단련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변태라니. 하아… 답이 없다. 답이 없어."

"예, 예?! 그, 그것은…!!"

오늘은 평소보다 요란하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

"도련님… 이곳은 대체…."

저택의 지하. 어두컴컴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냉기가 감도는 곳.

"아, 별건 아니다. 나도 어렸을 적 다 했던 것이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하, 하지만… 이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건…!"

알리시아는 새파래진 안색을 하고는 그 깊은 구덩이를 바라봤다. 구덩이의 깊이 탓에 안이 검게 보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벌레가 다소 풀어져 있을 뿐이다."

"다소… 말입니까."

물론, 일반적인 벌레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크기이지만. 성충은 30cm가 족히 된다.

알리시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 빽빽이 채워져 있는 하나하나의 외관을 살폈다.

단단하게 번질거리는 갑옷. 어두운색의 그것은 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벌레와 닮았지만, 입이 커다래서 더욱 괴기하다.

"저것들은 잡벌레라고 해서 말이다. 이름 그대로 잡스럽게 별걸 다 처먹는 게걸스러운 놈이지만, 그만큼 분해자 역할을 톡톡히 하여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놈이다."

"분해자라면… 균류 같은 것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살아 있는 생물도 먹는다는 점이 다르지. 마력이면 마력, 살코기면 살코기 못 먹는 것이 없는 이로운 놈들이다. 물론, 일반인들이 야생에서 저놈들을 떼거리로 만난다면 살점을 전부 뜯어 먹히곤 고통스럽게 죽어 버리겠지만."

"...."

뭘 그렇게 보고만 있느냐.

남의 일도 아니건만.

"어서 들어가지 않고 뭐 하느냐."

"…저 안을 말입니까?"

알리시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것도 다 너의 재능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저번에 마법진을 이용해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했으니 오늘은 그 심화편이구나."

"도련님의 깊은 뜻을 이해했습니다…."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런다 한들 얼굴의 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어 속마음이 다 드러난다, 이것아.

"…도련님, 어차피 들어가야 한다면 잠시 마음의 준⎯"

알리시아, 준비시간이 너무 길다.

⎯툭.

그녀의 가벼운 몸을 밀어 버린다.

너무나도 가벼운 몸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저항도 없이 떠밀린다.

떨어지는 알리시아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경악한 표정이 완전하게 보인다. 말을 끝내지 못한 입은 두 눈과 함께 벌어진 채 다물지 못했다.

"꺄아아악⎯⎯⎯⎯!"

비명과 함께 알리시아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윽고.

화악! 눈을 멀게 할 정도의 환한 푸른빛이 돌풍과 함께 터져 나온다. 웬만한 성인 이상의 체격을 가진 나도 주춤할 정도의 위력. 알리시아로부터 방출된 마력이 사방을 압도한다.

응축되어 있던 마나가 순간적으로 발현됨으로써 그 압력이 돌풍을 일으켰다. 알리시아가 급하게 마나를 터트렸기에 장기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소모가 심한 행위이나, 그러한 면을 배제하고 봤을 때 이 정도의 광명은 대단한 것이다.

마나를 제대로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이렇게나 빠른 발산과 높은 순도의 마력을 뽑아내는 그녀에게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겠지.

그렇게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자, 빛의 세기가 줄어든다. 이제야 눈을 찡그리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의 안을 바라보자.

그녀의 푸른 빛 주위로 정신을 차린 벌레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다. 순식간에 알리시아의 주위로 검은 벌레들이 둥그렇게 감싸, 빛이 빠져나오는 틈새가 메꿔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갉작갉작. 벌레들의 주둥이가 바쁘게 움직인다. 빛의 결정을 이보다 맛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듯이 급하게 먹어 치우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시아는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더욱 마력의 순도와 반경을 넓혔다. 겉으로만 보면 풍선에 바람을 넣어 크기가 부푸는 것 같다.

"도련님, 혹시 얼마나 이 안에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자잘한 소음의 뭉텅이 속에서, 평소 작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긴박한 목청이 귓바퀴를 울린다.

"그 벌레들이 배부르다고 느끼면 먹는 것을 그만두지 않겠느냐?"

뭐, 짧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군세를 바라봤다. 이것들을 전부 배부르게 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마력을 뽑아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는 듯 공포에 질려 있다.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갉작갉작.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리시아의 주변은 빛이 새어 나올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또각또각.

또렷한 구두 소리. 한 여성의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왜 왔느냐."

"알리시아 양이 걱정되어 왔죠. 도련님도 너무하시네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저렇게 알리시아 양을 던져 버리시다니."

긴 로브를 입은 여성, 마법 선생 파울라.

"단순히 벌레들이 마력을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벌레들의 몸에 붙어 있는 아주 가느다란 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얇은 것에서 실시간으로 지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알리시아 양을 통해 벌레들이 먹은 마력이 도련님에게로 모이고 있어요. 다시 말해, 아무리 알리시아 양이 마력을 뽑아낸다고 해도 벌레들을 배부르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오호, 역시 입은 시끄러워도 마법 선생이라 이건가. 제법 눈썰미가 좋군.

"그래, 네 말이 맞다. 알리시아는 아무리 마력을 뽑아내도 저 안에서 탈출할 수 없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서 희망을 주는 말로 괴롭히시다니… 어디 보자… 으윽! 정말 징그러운데요? 저 안에 알리시아 양이 있는 거잖아요? 저라면 당장에라도 도망쳤을 거… 잠깐, 벌레들의 상태가…."

눈을 찡그리며 집중하는 파울라. 곧,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뱉는다.

"도련님… 마력을 뺏는 것에서 하나의 시련을 추가로 더하셨군요?"

그녀의 물음을 들은 나는.

"그럼, 당연하지."

빙그레 미소 지었다.

***

이상하다.

아무리 마력을 끌어내 벌레들의 먹이가 될 막을 형성시켜도 저들은 식사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다.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자신을 막아 주는 마력의 소모 속도가 처음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다.

알리시아는 기염을 토하며 마력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녀가 최초로 이상함을 감지한 것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별다른 방도가 없기에 마력을 쥐어짜 내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알리시아는 온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낼 틈도 없이 긴박하게 마나를 운용했다. 머리의 통증과 어지러움으로 곧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으나 깊은 곳에 있는 한 톨의 마나도 전부 쥐어짠다.

4달 전에 지속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주변 공중에 떠다니는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벌레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마나.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끄윽…!"

목구멍이 막혀 버린 듯 숨을 쉬기가 힘들다. 억지로 몸을 부풀어 보지만 공기가 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역감이 든다.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게워 버리고 싶은 괴로움이 속에서 끓는다.

이대로 그만두고 싶다.

이 정도 했으면 못난 자신치고는 오래 버틴 편이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그런 나약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 갔다. 두 손으로 억누르듯 짓눌러 보지만, 저기에 있는 벌레들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알리시아는 마력의 방출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주인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치는 팔린 금액인 100골드를 채울 수 없다.

더욱 세기를 높인다. 어느새 벌레들과의 사이가 가까워졌기에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듯 강렬한 빛이 내뿜어진다.

벌레들은 두꺼워진 층으로 인해 다시 멀어졌다. 좋아, 이대로 한다면 더 버틸 수….

쿵. 그녀의 이마가 바닥과 부딪혔다. 온몸에 힘을 주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극한의 상황에서 마지막 힘을 모두 쏟아 냈기에 모든 마력이 고갈된 것이다.

"안 되는데… 이래선…."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닥에 붙어 버린 자신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데까지가 끝.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도 못하고 그 틈으로 벌레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이대로 죽는 걸까.

순간적으로 든 그 문장은 알리시아에게 절망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도리어, 달콤해 보이는 그 문장을 한 입이라도 먹으면 모든 것이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그리운 사람들도 볼 수 있을 거고.

그녀의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 두 번째 어머니와 만나기 전의,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 동시에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과 끔찍했던 그날.

"...."

그렇게 기억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최근에는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모두 한 사람에 의한 일이었으나 그 가벼운 행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고 좋은 일보단 힘든 일들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녀의 연약한 마음을 쉽사리 놔주지 않는 두 존재가 있다.

홀로 외롭게 지내실 두 번째 어머니.

그녀에게 험한 꼴을 많이 당했을지라도. 고아가 되어, 배고픔에 쓰러져 가던 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주신 분. 이렇게 장성할 때까지 키워 주신 고마우신 어머니.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놀랍게도 최근에 갑자기 들이닥친 그 남자.

그는 비록 거만하고 쌀쌀맞으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믿어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 자신이 이대로 허망하게 죽으면 아마 무척이나 실망하고 말겠지. 그것이 알리시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부들거리는 여린 근육에 힘을 주려 한다. 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아 약간의 떨림에도 최대한의 힘을 내야만 한다.

"도… 도…."

알리시아는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를 불렀다. 그에 따라 목울대가 울렸다.

"도련님…."

"알리시아 양이 아까부터 계속 잠꼬대를 하네요. 하기야, 모든 마력을 소모했으니까 잠들었다 한들 정신이 없을 거예요."

"알리시아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마력 총량을 강제로 늘리는 좋은 기회였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여전히 차가우시네요 도련님은. 아니지… 결국은 벌레한테 뒤덮이기 직전에 구출하셨으니까 사실은 상냥하신 건가."

"쓸데없는 입은 다물고 제대로 옮겨 놓기나 해라. 내일 일정부터는 무척이나 바빠질 테니 그것의 상태도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한다."

파울라는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마법을 사용해 알리시아를 공중에 띄운다. 방으로 옮기면 그녀가 붙어 마력의 회복을 도울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상태를 회복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번 수련으로 인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알리시아라는 말을 게임판에서 움직일 수 있다.

⎯자, 여기까지는 완벽하다.

가히 모든 것이 원하는 전개대로 진행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본격적인 변화의 순간은 지금부터니까.

당장 이어질 다음 고난으로부터 알리시아의 모든 것이 뒤바뀔 것이다. 원래였으면 아직도 멀었을 그 순간을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니까 반동도 상당하겠지.

그러나 상관없다.

어떤 일이든 보상에 맞는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보상이 크면 클수록 위험도 커지는 법. 그러므로 달성했을 때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환한 피부가 유별나다.

이어서 알리시아의 잠든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넘겨 귀에 꽂아 준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철부지의 얼굴이다.

"푹 자거라."

그리고 아침을 맞이해라.

기본적인 준비는 되었으니 한 단계 더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관객인 내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겁쟁이 알리시아여.

5화

틈이 보인다.

어린아이의 작은 눈알 하나조차 들어가지 않는 구멍. 그 조그만 공간을 통해서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온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새까만 어둠. 멋대로 펄떡이는 심장을 잡아 붙들 순 없으니 대신 자신의 몸을 움켜잡는 어린 소녀.

소녀는 주변의 어둠보다 그 틈새의 빛이 두려웠음에도 기어코 작은 틈새에 자신의 눈을 가져다 댄다.

따끔. 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기에 구멍에 돋친 작은 가시가 찔린다. 그러나 그런 자잘한 아픔은 그녀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소녀는 그 빛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밖의 상황은 당장에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처참했으나, 고개에 힘을 주고는 억지로 버틴다.

소녀의 시야에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담긴다. 그녀와 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여자아이였지만 소녀의 시선에서 여자아이는 이미 다 큰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여자아이를 본다. 대충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검에도, 그녀의 낡은 옷에도, 주인을 모를 혈흔이 낭자하다. 그녀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몸을 움직여 틈새로 보이는 시야의 위치를 변동시킨다. 무언가가 보인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한 생명체.

네 발로 서 있는 그것의 몸집은 성인 정도가 안 되었지만, 혈액처럼 붉은 피부와 동공이 보이지 않는 호박색의 눈이 이질적이며 위협적이다.

그때, 그 네 발로 기는 괴물은 여자아이에게 달려든다. 맹렬한 속도로 불같이 빠르게. 여자아이도 검을 휘두르며 달려 나간다. 그러곤 이어지는 장면.

콰학! 모아 둔 것이 한 번에 분출되듯 강렬하게 피가 터지며 여자아이의 심장은 그만….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거친 숨과 온몸을 적신 땀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가쁘게 활동하는 폐는 어둠 속에 있었던 그 시절과 다를 바 없다.

확장된 동공으로 주변을 확인한다. 어렴풋한 기억의 그 낡은 집이 아니다. 곧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나무로 된 건물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감도 오지 않는 삐걱거리던 침대가 아니다.

대충 보기에도 고가로 보이는 가구들과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직 영글지 않은 새파란 빛이 보인다.

주륵. 두 눈에 차 있던 감정이 볼을 타고 내린다. 그녀는 가는 손으로 그 액체를 닦아 냈다.

가쁜 숨은 점차 안정기에 진입한다. 빠르게 돌아다니던 혈액도, 급격히 커진 동공도 점차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

그녀는 상황을 인지했다. 자신은 어제 마력을 전부 소모하고 나서 정신을 잃었었다. 그 직전까지의 기억이 모호하나, 흐릿하게 잔재가 남아 있다.

"빨리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아직 떨림의 잔재가 그녀, 알리시아의 몸에 남아 있었지만, 늦장을 부릴 여유는 없다. 당장 오늘도 바쁜 일정을 해내야 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불을 정리한다. 오른손이 추위에 떠는 것처럼 부들거렸지만 다른 한 손으로 잡아 그 떨림을 붙잡는다.

그러나 떨림의 저항이 거세다. 멈추기 위해 잡은 다른 손으로까지 그 진동이 전염되더니 이윽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된다.

털썩. 결국, 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양손으로는 어깨를 감싸며 어떻게 해서든 멈추려 든다.

"제발… 그만."

오랜만에 꾼 그 악몽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이 단단한 족쇄는 아직도 알리시아를 괴롭히고 있다.

***

"호호호, 이렇게 다 같이 마차를 타고 있으니까 여행 가는 것처럼 신이 나네요! 그렇지 않나요 알리시아 양?"

"…그러네요. …아, 아뇨! 전혀 아니에요! 어딜 가는 건지 말씀해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도련님의 뜻이니 분명 좀 더 실속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왜 내 눈치를 보고 말을 바꾸는 것이냐."

"도련님,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그렇게 사나운 눈매로 노려보시면 그야 당연히 눈치를 보고 말을 바꾸죠. 암요. 그렇죠, 알리시아 양~?"

"그것이…."

자세를 반듯이 하고는 있으나 옆 눈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알리시아. 상당히 불쾌한 눈빛이로군.

"앗!"

"어째서 맞았는지는 묻지 말아라. 가끔은 자신의 힘으로 원인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와, 알리시아 양의 피부가 워낙 하얘서 그런지 엄청나게 빨개지네요."

"파울라 선생, 계속 그런 식으로 주위를 산만하게 한다면 내쫓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도록."

"…왠지 진짜로 추방당할 거 같으니까 가만히 있을게요."

드디어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문 파울라. 저 오두방정인 태도만 고친다면 아카데미아로 복귀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겠건만. 저러니까 능력이 있어도 근신 처리가 되지.

"아! 지금 또 저 아카데미아에서 근신 처리 된 거 놀리려고 하셨죠? 다 느껴진다고요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면!"

"…그런 눈?"

"아,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와, 브람 씨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요즘 도련님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바빠서 얼굴을 영 못 봤잖아요?"

파울라가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사내에게 말했다.

저 녀석, 지금 고개와 함께 말을 돌렸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네,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말수가 적으시네요! 어머나, 이 굵은 팔뚝 좀 봐. 갈수록 몸이 더 좋아지시는 것 같아요!"

"내려라."

"브람 씨? 아니… 이건… 도련님? 혹시 지금 이 달리는 마차에서 내리라고 하신 건가요?"

파울라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뭘 그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가. 나는 분명 말했을 텐데.

"선생은 뛰어난 마법사가 아닌가. 마차에 타지 않는다고 해서 따라오지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마차가 훨씬 편하고…."

"내려라, 파울라."

파울라의 목울대가 넘겨지며 살살 웃기 시작한다. 분명 어물쩍 넘어갈 요량이다.

그녀의 시끄러운 입이 열리기 전에 다시 강조해서 말한다.

"선생, 내가 선생에게 농을 한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죠…."

"머리가 좋은 선생이라면 이미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믿겠네."

"호호호… 알겠어요, 도련님."

저런 힘없는 웃음도 오랜만에 듣는다. 평소의 방정맞은 소리보단 훨씬 귀를 덜 자극한다.

그렇게 달리는 마차의 문이 열리고.

크게 몸을 뛰며 밖으로 나간 파울라는.

"으으! 추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겨울의 날씨를 정통으로 맞으며 마차 옆에 붙어 날아다녔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커다란 지팡이를 타고 말이다.

***

"…큰 도시라 그런지 숙소도 엄청나게 크네요."

"아… 엉덩이 아파. 이래서 지팡이는 타고 싶지 않았던 건데… 아, 알리시아 양, 그건 비싼 곳이라 그래요. 비싼 곳. 원래 마법이 만능이 아니라 돈이 만능이거든요. 돈만 있으면 뭐든 게 해결되는 편리한 세상이죠. 푸에취! …요즘은 도련님 저택에만 붙어 있었으니 통 올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오게 됐네요. 푸에취!"

"선생님… 여러모로 괜찮으신가요? 우선 이거라도 좀 두르세요."

"아, 고마워요 알리시아 양.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네요."

도시에 도착하고 나선 마법으로 이미 충분히 따뜻하게 있으면서도 기어이 알리시아가 준 담요를 두르는 파울라. 아, 저거. 교수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내다 버리는 건데.

그런 눈으로 파울라를 노려보자, 주변에 있던 알리시아의 말똥거리는 눈이 나를 향한다.

"그런데… 도련님? 어째서 제게 목검을 주신 겁니까?"

줄 거면 차라리 마법사인 자신에게 어울리는 지팡이나 줄 것이지, 왜 철심을 박아 더럽게 무거운 목검을 주냐고 묻는 건가.

알리시아, 아무래도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야, 검술을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술을… 세상 물정에 어두워 알지 못하기에 여쭈어보겠습니다. 원래 마법사도 검술을 배우는 것입니까?"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배우지 않지만, 용사라면 경우가 다르지."

"아… 그래서 검술을…."

"하지만, 너는 마법사가 될 것이 아니기에 의미는 없는 질문이구나."

"…예?"

철심이 박힌 목검이 무거웠는지 순간적으로 몸이 기운 알리시아. 숙인 몸에 반동을 주어 검을 감싸 올린다.

"마법사가 아니라니… 그럼 전 어째서 지금까지 마법을… 아얏!"

"한심한 것. 번데기가 되지도 않은 애벌레 주제에 나비가 되려 하는구나."

심지어 알에서 갓 부화한 주제에 말이지.

알라시아가 목검에 의해 봉인된 손으로 평소처럼 이마를 감싸지 못해 괴로워한다. 모습이 상당히 우습다.

"알리시아, 네가 될 것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마법사가 아니다. 넌 마법과 검술을 혼용해서 싸우는 마검사가 될 것이다."

"마, 마검사 말입니까?!"

"그것도 아주 높은 등급의 마검사가 말이다."

일반적으로 마검사라 하면 마법사도 검사도 아닌 어중간한 쓰레기가 되기 십상이지만 그녀는 다르다.

알리시아는 본래 마검사의 체질을 타고났다. 하지만 가짜 주인공. 그 왕자 놈은 뭣도 모른 채 알리시아의 능력에서 마법사만을 개화하게 만든다. 아니, 그 녀석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읽은 소설의 평민 주인공. 즉 진짜 주인공인 '리암'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다.

마법사로 성장해 가던 알리시아에게서 마검사로서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하곤, 도중에 직업을 변경하도록 선동한 것이다. 와우, 정말 박수를 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그 말을 그대로 따른 알리시아도 바보임은 틀림없지만, 원천적인 문제는 리암이다. 마음 같아서는 훗날 대면을 하게 된다면 욕을 한 바가지 박아 주고 싶을 정도다. 아니, 박아 줄 거다. 아주 고풍스럽게.

중요한 스토리의 도중에 직업을 바꾸다니. 알리시아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그 흐름을 쉽게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꾼 것일까. 생각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아무튼, 알리시아가 내 손아귀 안에 있는 이상 그런 얼간이 같은 방법으로 성장시킬 수는 없다. 절대로.

"브람을 데려온 연유도 그 때문이지."

전투 노예이자 충신인 사내, 브람. 원작에서도 항상 바르간의 손발이 되어 주고 묵묵히 높은 성과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과묵하지만 그만큼 누구보다도 한결같으며 믿을 수 있는 자이다.

브람이 알리시아에게 고개를 숙인다. 입장도 비슷하건만, 자신보다 훨씬 어린 자에게 저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정중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 인사를 받은 알리시아도 당황해하며 깊게 허리를 굽힌다. 목검 때문인지 몸이 다소 휘청거린다.

"실력이 좋으신 분이라고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 검이면 검, 활이면 활. 모든 무기에서 높은 성취를 이룬 무인이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알리시아. 근신 중이긴 하지만 능력 있는 아카데미아의 교수인 파울라와, 소설 속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검사, 브람에게 동시에 배움을 받다니. 엘리트 코스도 이런 엘리트 코스가 없다.

"이제 알았으면 어서 준비하거라. 시간은 항상 소모되고 있으니 더욱 소중한 것이다."

"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알리시아가 분주히 움직인다.

6화

"오~! 알리시아 양이 만든 요리라니 놀랍네요! 때깔 좀 봐, 요리 잘하셨군요?"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요리사분의 보조만 했을 뿐인걸요."

"에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어디에요. 전 달걀 껍데기도 제대로 못 깐다고요. 항상 으스러져서 부스러기가 남지 뭐예요. 호호호."

아침부터 파울라의 입이 요란스럽다.

이 고급 여관에선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제때 음식을 차려 주는데 아침 정도라도 도와주고 싶다며 알리시아가 나선 것이 일의 발단.

어지간한 녀석이다.

용사의 재능을 일깨우는 진도가 느리기라도 하면 말렸을 텐데 신통하게도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모습을 계속 보이니 지적하기가 뭐하다.

이 정도면 그냥 알리시아의 천성이라고 봐야겠지. 믿기 힘들지만 남을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 지수가 낮춰지는 걸 수도 있다.

"도련님, 아침부터 단련하셔서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계란이 신선합니다. 한번 맛이라도 보시는 게…."

혹시 제가 만들어서 드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알리시아의 긴장된 얼굴에 전부 드러난다. 이 정도면 그냥 말로 해도 되지 않을까.

"먹을 것이니 보채지 말아라. 내가 잠시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은 네가 별난 녀석이라고 새삼스레 느꼈기 때문이다."

"예… 칭찬 감사합니다…?"

"욕이다. 얼간이 녀석아."

따악⎯!

손가락이 아프다.

"으으…."

"어째 넌 가면 갈수록 돌머리가 되어 가는 것 같구나. 마력에 그런 효능이 있었나."

"도련님이 하도 때려서 단련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기에 그만 좀 때리시지… 우와, 이게 다 뭐야 브람 씨 이것도 좀 먹어 봐요. 되게 맛나네요."

나의 시선을 회피하며 또 브람에게 엉겨 붙는 파울라.

내 언젠가 저년의 피까지 다 빨아먹은 날에는, 천한 주둥이를 잘라 잡벌레의 밥으로 던지리라.

"알리시아 양의 고향에서 만들었던 음식들인가요? 독특한 향이 나네요."

"아… 네. 고향에 자라나던 풀들이 보여서 만들어 봤어요. 맛이 괜찮으신가요?"

"너무 맛있어요. 알리시아 양은 고향에서 유명했겠네요. 예쁜 데다 요리까지 잘하니 남자들이 줄을 섰겠어요."

"아뇨, 그렇지는…."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으며 눈길과 함께 대답을 피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파울라는 그런 낌새를 눈치챌 정도로 예리하지 않다.

"알리시아 양의 고향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과거 이야기라도 좋고요. 우리 앞으로 오래 볼 사인데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 네… 고향 말이죠…."

"제가 뭔가 건드려선 안 될 걸 건드렸나요…?"

이쯤 되자 아무리 파울라라도 알리시아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알리시아는 난처하다는 기색을 표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파울라는 이대로라면 어색한 분위기가 길어질 것 같아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저 도련님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저택에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며칠 함께 있다 보니까 눈치챈 거 있죠?"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 가는 파울라. 무시할 수도 있으나, 이번 한 번은 너그러운 귀족의 태도로 넘어가 주도록 하자.

"뭘 말이냐."

"도련님 잠은 주무세요? 마나 다룰 때 말고는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는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마법에 관한 서적을 읽거나 마나를 단련하시는 건 자주 봤어도."

"아, 저도 궁금합니다."

"알리시아 양도 그래요? 아니, 항상 붙어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니에요?"

저건 걱정돼서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이지.

그나저나, 질문의 수준이 낮다. 나는 뭐 인간이 아닌가. 당연히 숙면을 취하고 휴식도 취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알리시아가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파울라와는 달리 조심스럽고 결이 미묘하게 달랐다.

"…확실히 도련님께서 잠을 제대로 주무시고 계시는지 걱정될 정도로 항상 무언가에 열중하고 계십니다. 노력은 미덕이지만, 혹여나 무리가 되어 몸이 상하시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내가 무리를?"

"그렇습니다. 항상 잠이 부족할 정로도 무언가에 매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자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자신이 이상한 말을 했는지 되새기기 시작한다.

"무슨 헛소리는 하는 것이냐. 나는 그토록 얼간이가 아니다."

"예…? 하, 하지만 가장 일찍 일어나시고 뒤늦게 주무시는 분은 도련님…."

"그건 너희가 너무 많이 쉬는 것이지."

"…그 부분은 저도 도련님을 본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도 전부, 도련님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계신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얘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정도도 안 하면 그게 죽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순간, 정적이 흐른다.

창 밖에 조잘거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다.

경직되어 있던 이들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파울라였다.

"와… 도련님 지금 발언 진심이신 거예요? 방금 그 한마디로 이 자리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을 죽이신 거나 마찬가지이신 거라고요."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고. 이 정도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라 부르기에도 아깝다."

"예…? 그럼 뭔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파울라에게 말한다.

"그건 망상이다, 망상."

절대로 이루어질 일 없는, 아무런 가치도, 희망도 없이 쓸모없는 망상.

자판기에 500원짜리 동전을 하나만을 넣고서는 1,000원짜리 음료가 나오지 않는다고 성을 내며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것.

소설 속이라고 해서, 내 입장이 상당히 유리하다고 해서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경과가 어쨌든 결국 난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 것이고 그렇다는 말은 이곳이 나의 세상이다.

단언해서 말하자면, 세상만사는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한들 언제나 순식간에 재로 변할 수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도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범인과 다를 바 없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내 목표는 이 소설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문장에는 사실 숨어진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보다.

누구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게 내 도착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게 1만 원짜리 음료라고 가정했을 때, 당연히 1만 원의 비용을 투자해야 나오지 않겠는가. 500원을 넣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노력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음료를 사 먹지.

따라서 이건 무리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란 1만 원짜리 음료에 1만 2천 원을 투자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심지어 잔돈도 안 나오는 자판기에 말이다.

난 효율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과한 노력은 나에게 있어 독과 같다.

"뭔가… 도련님이 생각보다 더욱 특이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 같아요… 원래는 이렇게까지 독특하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야 그것은 내가 빙의되기 전의 바르간이니까. 그의 사고가 이어진다 한들, 당연히 차이야 있을 수밖에 없다.

"선생, 제자의 목표가 큰 것은 좋은 일이지 않나."

"그렇죠… 으음. 하긴, 그러네요. 훗날 도련님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면 저의 입지도 높아지는 것이니까요. 호호호."

"그래, 그런 것이다. 자, 잡담은 이쯤 하고 빨리 아침을 마치자. 아직 목적지 마을에 도착하려면 갈 길이 머니 서둘러야 한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

쇄액⎯!

한번 갈라진 파공음은 맥을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물이 흘러가듯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달이 비추는 하늘을 조명 삼아. 바닥에 깔린 돌들을 무대 삼아.

멀리서 보면 춤사위 같기도 한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캉, 캉!

철과 철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서로 갈고닦은 실력을 제대로 뽐내고 있다. 둘 사이에 살의는 없지만,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진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삐끗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가검이 아닌 날이 번쩍거리는 진검승부다. 둘도 그런 위험은 진작에 알고 있다.

그그극⎯!

그럼에도 검을 맞대고 있는 둘의 눈은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맹렬했으며 날카로웠다. 잘못해서 무기에 베일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이윽고.

캐앵⎯⎯!

상대의 손목에 힘이 풀린 틈을 놓치지 않은 브람은 알리시아의 검을 위로 쳐 내, 날려 버렸다. 그녀의 검이 달빛에 반사되며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더니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오, 감탄이로다. 역시 브람, 내 충신답구나.

짝짝.

나는 박수를 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훌륭하다 브람. 너의 검술은 가히 예술이라고 부를 만하구나."

"감사합니다."

"알리시아도 수고했다. 고작 며칠 만에 그 정도의 성취라면 훗날이 기대되는구나."

"감사합니다, 도련님. 아직은 미숙하나 이른 시일 내에 만족하실 만한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알리시아와 브람이 내 앞에 나란하게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문화의 도시 로즈에서 나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알리시아가 검에 입문한 지 나흘째의 밤이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은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다. 내가 검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할 수는 없는 몸이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의 습득력을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그녀의 마검사로서의 재능이 힘찬 태동을 시작했다.

그래, 일반적인 검술은 확인했고. 나머지는.

"알리시아, 오러의 진척 상황은 어떠하냐."

"그것이… 죄송합니다. 검에 마력을 흘려보내어 두르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유지에는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알라시아가 면목이 없다는 듯 안 그래도 깊게 숙여 있던 머리를 더욱 바닥에 가까이한다. 괜찮다 알리시아. 오러를 벌써 온전히 다루었다면 오히려 내가 너를 의심했을 것이다.

"오러란 지금까지 네가 했던 마법과는 완전히 상이한 난도다. 그리 염려할 필요 없다."

"저를 생각해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그딴 게 아니다."

알리시아는 유독 입에 발린 말을 할 때 진실 된 표정을 보인다. 그래서 거북하다. 왜 자꾸 나를 그렇게 선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거야. 속 울렁거리게.

"하지만… 목적지인 루비드 마을에 도착할 적에는 거의 완성된 것이 이상적이다. 좀 더 박차를 가할 필요는 있지."

"반드시 이뤄 내겠습니다."

"그럼 우선, 오늘부터 수면 시간을 줄여야 하겠구나."

체내의 마력을 항상 활성화시켜 둔 채, 불순물을 제거하고 활력을 부여한다면 필요한 수면 시간이 비약적으로 감소한다. 이 이상은 사치다.

"네,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4시간."

"예…?"

처음이라 많이 봐줘서 4시간이다. 이 소설에 들어오기 전에도 난 하루의 4시간에서 5시간을 수면으로 사용했으니까. 이 정도면 무척이나 후하지.

"점차 줄여 나갈 것이나 우선 그 정도면 될 것이다."

"점차 줄여 나간다 하시면 참고로 몇 시간까지 줄어드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2시간."

"아…."

알리시아가 상당히 여러 가지의 감정이 섞인 듯한 감탄사를 뱉었다. 고개는 끄덕이고 있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벌써 시간을 꽤 써 버렸군. 휴식은 끝났다. 어서 마나를 뽑아내라, 알리시아."

알리시아의 수련은 밤이 찾아와도 끝나지 않는다.

7화

"아직 살짝 부족하군."

몸에 들끓던 마나의 기운을 가라앉힌다. 밤공기를 머금어 찬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여전히 가부좌를 튼 자세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내뿜어진 숨은 하얀 연기가 되어 피어난다.

달과 별이 밝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절경의 밤하늘. 하늘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별들이 환히 빛난다. 원래의 세계에서도 원래는 저렇게 많은 별이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겠지. 도시의 불빛이 저토록 밝은 빛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도련님, 아직도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체내의 마력으로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와중, 고된 수련을 마친 알리시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온전히 털어 내지 못한 수분감이 더해져 반짝인다.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얼어 버릴 것이다."

"…아, 맞습니다. 방금 씻었던 물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금방 말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마력을 활성화해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의 사이사이를 지나가게 하였다. 내가 앞에 있다는 것을 신경 써서인지 세기를 약하게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겠지.

"됐습니다. 이제 바짝 말랐습니다."

"아카데미아를 졸업하면 용사가 될 텐데, 그 예비 용사가 감기라도 걸린다면 꼴이 우습게 된다. 주의하여라."

"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도련님? 혹시 얼마나 이곳에 더 계실 예정이십니까?"

대략 1시간 정도 더 있지 않겠느냐.

아직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으니.

그렇게 말하자 알리시아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되돌아온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물기를 닦아 내던 수건이 아닌 다른 것이다.

"날이 춥습니다. 이거라도 두르고 계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언제나처럼 은은한 미소를 보이는 알리시아. 그녀가 건넨 것은 방 안에 있던 담요였다. 열기가 후끈한 것이 아무래도 가져오는 도중 마법으로 데운 것 같다.

"내가 감기에 걸려 우스운 꼴이 될 것은 걱정한 것이로구나?"

"도련님의 일이니 그런 염려는 들지 않으나, 시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항상 당황하며 얼을 타던 알리시아가 어쩐 일인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는다.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는 방증인가. 재미있군.

"그건 그렇고, 왜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냐. 이제 그만 가도 좋다."

"도련님께서 추운 겨울날 밤 밖에서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저만 따뜻한 방에서 수면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혹,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옆에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습니다."

"오, 그러니까 네 말은 당장 침대로 가서 두 발 뻗고 편히 자고 싶으니 지금이라도 그 헛짓거리를 멈추고 가서 잠이나 자라, 이 말이구나?"

"오, 오해이십니다 도련님!"

두 입술이 동시에 벌어지며 허둥거리는 손이 이리저리 배회한다. 조금은 익숙해진 듯했지만 아직 멀었구나.

그녀가 가져다준 담요로 몸을 덮는다. 따뜻한 온기가 어깨와 등에 곧바로 전해진다.

"벌이다 알리시아. 네 주인에게 돌려 유익하지 않은 주장을 피력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도련님… 정말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에 앉아라."

툭툭.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볍게 친다.

"겨울의 추운 밤바람을 맞으며 나와 함께 바닥에 앉아 있어라. 몸을 데울 것은 그 얇은 옷만을 허하겠다."

"예…?"

알리시아는 내 말이 의외였는지 선뜻 움직이지 못한 채 행동을 망설이고 있다.

"잠시 이야기나 하자꾸나."

이 사소한 에피소드도 앞으로 이어질 전개를 위해 필요한 절차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판단 내렸다.

***

"저어… 도련님? 이야기라고 하시면…."

"별건 아니다. 너의 최근 상태에 대한 보고라고 하면 되겠구나. 일의 진행을 위해 마땅히 너의 성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네에… 하지만 마법에 관한 것은 저보다 훨씬 잘 꿰뚫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일도 있는 법이다."

여태까지는 알리시아가 마나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자신의 상태에 무지했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몸의 변화를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감을 잡기 시작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 말이 그리도 의외였느냐. 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좀 의외… 아, 그런 것이 아니라. 갑자기 제 의견을 물어보셔서 당황한 것뿐입니다."

뭔, 헛소리지.

그게 그거 아닌가.

알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곰곰이 분석한다.

방금 수련했을 때는 어땠지. 마나의 흐름이 더욱 원활하게 바뀌었나. 그런 과정이 그녀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민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저렇게 티 나다니. 성격이 바뀌지 않는 이상 거짓말은 평생 못 할 녀석이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시적인 성과야 도련님께서 잘 아실 거고, 몸 안에서부터 뭔가가 변한 그런 느낌은… 아, 그리고 보니. 최근 체력이 좋아졌다고 부쩍 느낍니다."

"원래 마력을 다스리면 자연스레 향상되는 것이다. 다른 건?"

"다른 것 말입니까? 으으음…."

다시 한번 고뇌에 빠지는 알리시아.

"굳이 마법과 관련되지 않아도 된다."

"아, 그런 겁니까? 당연히 그런 쪽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항이 있다.

"최근 우울감이 든다든가, 아침에 몸이 찌뿌둥하다든가 같은 사소한 것도 좋다."

"아침… 아."

그리 눈을 키우는 것을 보면, 뭔가를 떠올린 모양이구나.

"뭔가 있구나."

"아… 그것이… 별건 아닙니다. 정말 사소한 일인지라…."

알리시아의 맑은 눈을 마주한다.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지 못하고 다른 비어 있는 곳으로 한순간 향했다.

"주인에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알고도 간과할 순 없구나."

이어서 말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다면 최면을 걸어서라도 불게 할 테니 곱게 말하라고.

알리시아는 내 강압적인 태도에 모른 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는지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고민이긴 하지만, 최근 악몽을 자주 꿉니다."

"오호, 악몽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지?"

"어린 시절의 기억… 정확히는 제가 살았던 마을이 불타오르던 순간의 파편입니다."

알리시아의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눈가의 총기는 사라져가고 어둠이 그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말해 보아라."

"계속… 말입니까?"

누가 봐도 명확할 정도로 꺼려 하는 기색을 비추는 알리시아. 하지만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저번, 아침 식탁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지. 주인에게조차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냐?"

"…그런 건 아닙니다."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쥐구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져 간다.

"재미없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건 내가 판단하겠다. 네가 멋대로 지레짐작하지 말아라."

그녀의 눈망울이 나를 피해 이리저리 쏘다니다 결국은 포기하고 정지한다.

그리고.

무거운 그 입이 겨우 열린다.

"…사실 도련님께서 저희 집에 오셨던 날 만나셨던 분은 제 친부모가 아닙니다. 고아인 저를 거두어 주신 두 번째 어머니이십니다."

"그렇군."

원래의 스토리대로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다는 데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어머님을 만나기 전의 저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언니와 부모님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무척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알리시아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그것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마나를 처음 건든 것이 아니라고. …맞을 겁니다. 어렸을 적부터 마법에 관해 뛰어난 재능을 보인 언니를 따라 하고자 가족 몰래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워낙 아무것도 몰랐었고 저에겐 재능이 없다고 여겼기에 확신은 없지만, 건드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재능 있는 언니에.

재능 없는 동생이라.

비록 자신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그 엇갈림으로 인해 알리시아는 이후부터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말했습니다. 저희 언니는 용사가 되어 마을의 자랑이 될 거라고.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두의 기대를 받는 언니를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언니를 시샘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신께서 그런 벌을 내리신 겁니다."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손으로 쥐고 있는 옷에는 주름이 더욱 깊어진다. 꽁꽁 싸매 두고 숨겨 두었던 그때의 일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밀었다.

"…어느 날, 붉은 괴물들이 마을을 덮쳤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사라져갔습니다. 언니는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모두가 언니의 보호를 받기 원했습니다."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 알리시아는 억지로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번 뱉기 시작한 감정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언니는 강했습니다. 괴물들이 아무리 쏟아져 나와도 꿋꿋이 버텼습니다. 저는 언니의 곁에서 한심하게 울고만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한 채 언니의 곁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아무리 언니라고 해도 모두를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차례로 피를 토했고, 그건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져 감을 느낀 언니는 저를 주변 창고에 가둔 채 싸움을 이어 나갔습니다. 언니의 몸은 점차 상처로 물들어 갔습니다."

처음엔 자잘했던 상처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뒤덮는다.

"결국 끝까지 버틸 순 없었다. 이거냐."

"네…. 그때의 저는 창고에 나 있는 작은 틈새로 밖을 내다봤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봐 버렸습니다. 언니가 붉은 괴물에게 몸이… 심장이…."

뚫리는 것을.

알리시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괴로운 이야기의 끝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그 이후론 정신을 잃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것은 저 혼자였고 언니의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마 심하게 훼손되어 못 알아본 것 같습니다."

알리시아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그녀는 마을 사람들 전부의 묘를 만든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녀는 모두를 추모했다. 그 믿기 힘든 일을 해낸 알리시아는 당시 10살에 불과했다.

"그렇게 폐허가 된 마을을 떠나 방황하던 저를 거두어 준 것이 도련님께서 만난 그분입니다."

자식을 100골드에 넘긴 어미.

알리시아를 마음대로 부려 먹은 여자.

그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다는 말이다.

알리시아는 말한다.

그녀의 악몽에 등장하는 장면은, 언니의 죽음을 목격하는 그 어두운 창고. 크면서 점차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최근에 다시 도졌다고 했다.

"아… 도련님께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걸 듣기 원하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런 것을 듣기 원했다."

알리시아에게는 다소 잔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스토리를 알던 내가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

주위에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을 느낀다. 시계가 없어도 마력은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증거품이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난 듯하군."

나는 몸을 일으키곤, 앉아 있던 알리시아 위에 담요를 대충 올렸다. 알리시아의 어깨에 담요가 얹혀져 그녀를 감싸게 되었다.

"나는 이만 들어가겠다. 내 시종이 우울한 이야기를 들려줘 흥이 식었구나. 마나의 확인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역시… 기분이 상하신 것이…."

"너도 그러고 있지만 말고, 이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밤이 너무 깊었다.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욱 바쁠 것이니 마땅한 휴식은 필수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다. 알리시아가 주섬주섬 담요를 접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예쁘게 개어진 그것을 팔에 두르곤 말한다.

"도련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꽃이 지는 것처럼 단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알리시아.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 이상 저 고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 무의미하게 괴롭힐 필요는 없다.

"그래."

나는 짧게 답했다.

***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방 안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다. 그 진득한 곳에서 고급진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림자를 마주한다.

알리시아는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했다. 약간의 강제성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살짝 밀었을 뿐 나머지는 그녀의 의지였다.

그녀가 말한 내용은 내가 알던 스토리와 같다. 이것으로 알리시아의 일정에 변화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알리시아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 그녀가 말한 특정한 단어가 떠오른다.

악몽.

매일같이 반복되는 언니의 죽음.

언제부터 다시 그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혹여나 눈치를 채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별다른 이득도 없이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아마,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모를 것이다.

"잘 진행되고 있군. …뭐, 당연한가."

그야 필연적으로.

최근에 다시 악몽을 꾸겠지.

"내가 그리 걸어 두었으니까."

그녀가 잡벌레 구덩이에서 쓰러진 날.

나는 알리시아의 머리칼을 넘기며 저주를 걸었다. 가장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죄악감?

그런 것 따위는 들지 않는다.

그녀의 비약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면 트라우마든 모든 사용한다. 설령 그 탓에 알리시아가 심적으로 위태롭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익을 이끌어 낸다.

그게 악역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8화

상쾌한 아침.

오래된 창문에서 슬그머니 들어오는 어린 햇빛이 반갑다.

"에구구."

삐걱. 한 노인이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날이 가면 갈수록 허리나 관절 등, 성한 곳이 없다. 하나뿐인 귀한 손주 장가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몸이 버텨 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방 안의 냉기가 차다. 오늘은 날이 쌀쌀하니 더 두껍게 입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외부와의 접촉의 거의 없는 곳, 루비드 마을. 이 작은 마을은 다른 대도시처럼 웅장하거나 대단한 것이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평화롭고, 한결같다. 그의 어린 기억을 되짚어 봐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변하는 것은 구성원뿐. 건물이나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

밖에서 새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 감미로운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여유로운 하루를 시작….

"촌장님, 촌장님⎯⎯! 어서 나오세요! 급한 일이에요! 빨리, 빨리."

쿵쿵쿵. 어떤 남자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그를 찾았다.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굽어 있던 허리도 잠시 펴질 정도로 놀란 그는, 주먹으로 허리를 퉁퉁 치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라니?"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문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성이 숨을 헉헉거리고 있다. 그는 거친 숨이 섞인 말을 이어 갔다.

"헉헉. 아니 그게. 지금 어떤 으리으리한 마차가 나타났는데, 마을에서 가장 높은 분을 찾고 있다고 해 가지고. 아침이 이르니까 저희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

"잠깐, 잠깐. 너무 두서가 없어서 이 늙은이의 머리가 따라가질 못하겠네. 그러니까 마을에 누가 온 겐가…?"

젊은 남자는 숨을 길게 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고위 귀족과는 연이 전혀 없는 이 마을에 왜 갑자기 저런 자가 나타나서 들썩이게 하는 건지! 젊은 남자는 지금의 상황에 쫓기고 있다.

젊은 남자는 이럴 시간이 없고 빨리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촌장의 손을 끌었다. 하지만 촌장도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상황은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하다못해 어떤 가문에서 온 것인지 알려 달라는 태도를 일관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 답답하네. 빨리 가야 한다고요! 지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이 사람아. 적어도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는 알아야지 말이라도 할 것 아닌가."

젊은 남자는 울상을 지었다. 한시가 바쁘건만 이런 승강이를 벌일 틈이 없었다.

"슈겐하르츠!"

남자는 촌장을 재촉했다.

"아 글쎄, 슈겐하르츠의 본가 아들내미가 지금 우리 마을에 왔다니까요!"

"뭐…? 잠깐, 어디 자손이 왔다고?"

그 이름을 듣자, 오랫동안 방치해 둬 먼지가 가득 쌓인 그의 뇌에 갑자기 전기가 들어온 것처럼 괴랄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마을 밖의 소식에 깜깜하다 한들 그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가문명 중의 하나로, 트로아 제국의 황가 다음으로 가는 명문가 중 명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명문가의 자제가 이 시골 마을에 왔다고 한다. 어째서? 무슨 연유로 온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이유가 없는데.

온갖 의문이 가득해져 가지만 우선, 해야 하는 행동이 정해져 있다.

"어, 어서 가세나!"

촌장의 바빠진 다리는 다행히도 달린다는 행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얇은 두 다리로 경사진 언덕을 헐레벌떡 뛰어갔다.

***

"볼품없는 마을이로군."

발전이라는 단어는 비료로 묻어 버린 것인지 퇴보해 보이기까지 하는 루비드 마을. 저택이나 대도시에 익숙해진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마을의 촌장이라는 자는 내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며 고개만을 조아리고 있다. 현 황제의 이름도 모르는 이들로 가득 찬 마을인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슈겐하르츠의 위광은 이 시골 마을에까지 뻗어져 있었다.

"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 저, 저희 루비드 마을은 자랑할 것이라곤 자연밖에 없는 허름한 곳입니다."

"그 자연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아…."

거대한 산이 있거나 멋들어진 바위가 있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자가 말하는 자연이랄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수수함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만 나의 시선을 끌지는 못한다.

"…저기… 저."

촌장이라는 자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꼴이 썩 유쾌하지는 않아 고개를 끄덕여 입을 여는 것을 허했다.

"며, 명망 높은 슈겐하르츠의 자손께서 …어, 어찌 이리도 누추한 마을에 방문해 주신 건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안 된다."

"예?"

평민들은 다 이런 것인가. 알리시아랑 반응이 판박이라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어서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촌장.

"네가 알 필요는 없다 한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저 따위의 것이 알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송구⎯."

"며칠 동안 있을 것이니, 이곳에서 가장 좋은 방을 제공해라. 아, 그래. 촌장이라 했으니 자네의 방이 가장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이 천한 놈의 방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곧바로 청소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빌빌거리던 촌장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리 볼썽사나운 표정 짓지 말아라. 내가 설마 깡패도 아니고 아무런 이득을 쥐여 주지 않을 것 같으냐?

철턱. 얇은 전도체가 가득 들어 있는 보따리를 바닥에 던지자, 꽤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촌장도 살짝 고개를 들어 그것을 훔쳐본다.

"안을 열어 확인해 보아라. 섭섭지 않을 정도론 넣어 두었다."

촌장의 거동이 수상쩍은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럽다. 주름이 자글거리는 손이 화려하게 장식된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그러곤 살며시 안을 열어 확인한다.

"이, 이걸… 저, 전부 주시는 겁니까?!"

휘둥그레지는 눈과 입.

은화 보따리 들고 있는 손은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한다.

응, 이 정도면 평민들의 반응은 다 비슷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대도시 로즈에서도 제일가는 고급 여관과 같은 액수를 넣어 두었다. 이거라면 이 작은 마을에서 지내는 비용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싫다면 일부만 줄 수도 있다."

"바로 방을 청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신다면 곧이라도!"

"방 청소는 됐으니 양이나 몇 마리 구해 와라. 생생한 놈들로 말이다."

"가, 가축인 양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아주 팔팔한 놈들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촌장의 바쁜 하루가 신호탄을 날렸다.

***

"작지만 소소한 맛이 있는 좋은 마을이네요. 도련님께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리셨지만 저는 마음에 들어요."

파울라는 대답을 바란다는 눈으로 옆에 서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기만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알리시아 양?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

"알리시아 양?"

"아? 아! 죄송해요 선생님."

"그러고 보니 알리시아 양의 고향도 시골이었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있는 건가요?"

"네…."

이미 베어져 짤막해진 수확의 흔적들. 황금빛의 줄기에 검은 비료 같은 것이 군데군데 묻어져 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각진 돌을 여러 개 올려 만든 작은 돌담이 길게 뻗어져 있다.

꽤 오래되었는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어? 누군가 있네요?"

파울라는 손가락으로 돌담의 부근을 가리켰다. 알리시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한다.

살랑. 갈색 머리칼이 보인다. 몸을 가린다고 가렸지만 긴 머리칼까지 감추는 것은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자박자박. 알리시아는 그 돌담에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설마 접근할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아이들이 고개를 올리며 눈을 깜빡거린다.

낮은 돌담보다도 더욱 작은 여자아이 두 명. 둘의 외관이나 키 차이로 봤을 때 자매인 것 같다.

언니로 추정되는 아이는 동생의 앞을 막으며 알리시아의 접근을 막았다. 경계를 줄이지 않는 눈동자로 그녀를 맞이하며 말한다.

"외, 외부인이 들어 온 건 처음이라서… 그래서…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혹여나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있으나 자신보다 더 작은 생명을 막는 몸은 비키지 않는다.

알리시아는 소녀와 같이 맑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그녀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작을 이었다.

양손으로 치맛자락의 끝을 잡으며 오른발을 살짝 뒤로 민다. 고개는 약간 숙여 예의가 드러나도록 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알리시아라고 해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알리시아가 바르간에게 팔려 와 배운 것은 마법이나 검술뿐만이 아니었다.

앞에 서 있던 소녀는 다시 눈을 깜빡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두 눈꺼풀이 빠르게 움직인다. 이어서는 겁에 질려 있던 얼굴의 근육이 변화한다. 그러곤 높은 톤으로 말한다.

"공주님 같아!"

소녀의 눈이 반짝인다. 하늘에서 내린 눈을 처음 본 아이가 몸을 부들거리며 감탄을 표하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공주님? 공주님이에요? 성에서 온 거예요? 왜? 왜 공주님이 밖으로 나온 거예요?"

소녀는 알리시아의 주변을 빠르게 돌며 물음을 이어 갔다. 소녀는 알리시아의 존재를 그 특정한 것이냐고 물으면서도 동시에 확신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반짝거리고 몸도 엄청나게 하얘! 역시 공주님이라서 하얗구나! 그런데 왜 공주님 옷을 입지 않은 거예요?"

"그건, 제가 공주님이 아니…."

"아! 저 알아요! 변장한 거죠? 왕자님 만나려고 몰래 변장해서 나온 거죠!"

소녀만의 동화가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7년. 오랜(?) 간접 경험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던 소녀의 머릿속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욱 작게 만들었다. 검지만을 펴내어 입을 막기도 한다.

"쉬잇! 조, 조용히 해야 하는 거죠? 비밀이라 들키면 안 되는 거죠?"

긴장된 소녀는 심지어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넘기기 시작했다. 알리시아는 그녀의 예상외 반응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알리시아가 당황하고 있자 파울라가 다가왔다.

알리시아는 파울라가 이 상황을 매끄럽게 끝내 줄 것이라 여기고 한숨 놓았으나.

"맞아~ 이분은 공주님인데 지금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몰래 성을 빠져나온 거야. 그러니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조용히 숨기는 거야, 알겠지?"

"마법사! 마법사죠! 진짜 큰 모자를 쓰고 있어. 동화 속 그대로야!"

"방금 조용히 하라고 했던 거 같은데… 확, 개구리로 변신시켜 버린다!"

파울라가 손을 위로 뻗으며 과장된 동작을 취하자, 소녀는 다시 자신보다 작은 소녀를 감싸며 막아섰다. 입으로는 '착한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나쁜 마법사였어!'와 같은 말을 뱉고 있다.

"이런, 상황이 더욱 악화하였네요. 미안해요 알리시아 양."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똑바로 해야 했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잘못인 걸요."

뒤에 있던 작은 꼬마는 빼꼼 고개를 내민다. 두려움 없는 그 눈에 담긴 것은 호기심이었다.

"곤듀님? 언니, 곤듀님?"

"프리지아, 안 돼. 나쁜 마법사도 있어!"

"나쁜 마버사? 왜 나쁜 마버사랑 곤듀님이랑 이써?"

"그건…."

소녀는 오랜 간접 경험으로 쌓아 올린 지식을 뒤적거렸다. 비슷한 상황을 알고 있다. 어머니께서 이야기해 주신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납치?!"

그런 것도 있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소란스럽구나. 내가 협상을 할 동안 놀고만 있었던 거냐? 한심스럽긴, 한 번이라도 더 오러를 둘러야 하거늘!"

알리시아가 오해를 풀려고 하자 그녀의 말을 끊는 남자의 목소리. 촌장과 이야기를 마친 바르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이들이 보기에 그 장신의 체구와 날이 선 말투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녀는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그 작은 입을 벌리며 말했다. 손가락도 쭉 뻗어 확실히 대상을 지적하면서.

"나, 나쁜 마법사 대장…!"

9화

"그으으…."

멀리서 알리시아를 노려보는 한 작은 소녀의 시선이 멈추지 않고 광을 쏘아 댄다. 저렇게 돌담 옆에 고개를 내밀고 있으면 다리나 허리도 아프겠건만 기세를 죽이지 않는다.

그녀의 일행이 머물고 있는 촌장댁 근처의 소녀는 알리시아를 공주님이라고 확정시하곤 요즘 매일같이 아침마다 찾아와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알리시아는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서 하던 잡일을 잠시 멈추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경계 어린 그녀가 도망가지 않도록 작은 동물을 대하듯 조심스럽다.

"그렇게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좀 앉아 있으면 어떤가요…?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

확. 소녀는 알리시아의 손을 잡으며 끌었다. 순간적으로 있는 힘을 다한 얼굴이 빨개진다. 알리시아의 몸도 그녀의 이끌림에 잠시 주춤하지만, 역으로 힘을 주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저는 공주님이 아니에요. 제가 모시는 분도 나쁜 마법사 대장 같은 게 아니고요."

"끄으응…! 가야 해요 공주님! 공주님은 지금 속고 있는 거예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에델,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잠시 이야기라도 하죠. 맛있는 케이크도 있어요."

"케이크…?"

케이크라는 단어에 소녀의 귀가 쫑긋해진다.

에델이라 불린 소녀의 눈과 입이 벌어지며 손아귀의 힘이 풀린다. 멍한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직면하게 된다.

"네, 케이크예요. 부드러운 빵에다 달콤한 크림을 바른 맛있는 간식이죠!"

"성에서 맨날 먹는 그런 음식이잖아요! 알고 있어요!"

성에서 매일 케이크를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이야기를 들어 줄 기미를 보인다. 알리시아가 모시는 주인은 그런 꼬맹이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하라 했으나 매일같이 찾아오는 어린 소녀를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해를 풀어 자신을 구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면 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음…?'

그렇게까지 생각이 되자 알리시아는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네. 평소였으면 일과에 방해가 되니 무시하라고 말씀하실 게 아니라, 아예 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시거나 강한 제재를 하셨을 텐데….'

"안 돼!"

일순간 들리는 소녀의 외침. 에델의 뜻밖의 행동에 알리시아의 사고는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에델 정신 차려! 공주님을 구해야지. 곧 나쁜 마법사들이 올 거라고."

에델은 작은 손으로 뺨을 팡팡 치며 자신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렸다. 어린아이임에도 유혹에 지지 않는 면이 대견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하나 지금은 좀 넘어가 줬으면 했다.

에델이 다시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의 높은 체온과 살짝 땀에 젖은 것이 느껴진다.

'이걸 어쩐담.'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에델! 얘가 또 그러고 있네. 그만둬, 곤란해하시잖니!"

소녀의 집 쪽에서 기겁하며 달려오는 여인이 있다. 방금까지 밭일을 하고 있었는지 옷의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지만, 딸아이의 만행을 인지하고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것이다.

그녀는 에델을 양손으로 들고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업었다. 에델은 그것을 강하게 거절한다.

"이거 놔 엄마! 공주님을 구해야 해!!"

"엄마가 여기 와서 난리 치지 말랬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하지만 공주님을…."

"공주님은 지금 바쁘시잖아. 너 때문에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나 때문에…?"

아등바등하던 에델의 몸이 멈추며 힘이 다 빠진 생선처럼 축 처진다. 에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리시아를 바라본다. 소녀의 눈동자에는 방금과 같은 굳은 의지가 사라져 있었다.

"공주님, 나 때문에 나쁜 마법사들한테 혼나…? 내가 와서 괴롭힘당하는 거야?"

이런, 물방울 같은 눈이 곧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고, 애가 왜 이럴까."

낌새를 눈치챈 소녀의 어머니는 더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애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이 나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래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여인의 마을에 온 가문의 사람들이 무척이나 높은 신분이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는 연이 없는 일이겠지… 밖에서의 행동거지를 조심하긴 해야겠구나.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동생과 놀다 온 자신의 첫째 딸이 기절초풍할 만한 일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닌가.

에델이 아침마다 그곳을 찾아가 귀찮게 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혔을 때는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서 기절해 버릴 뻔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철이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여인에게 괜찮다며 그렇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손을 젓는 알리시아.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델은 여전히 울상이다. 무척이나 침울해져 기운이 없는 에델.

알리시아는 에델의 시선이 더는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숨이 먹은 풀처럼 몸을 늘어뜨린 채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다 문뜩 깨닫게 된다.

아. 그런 거구나.

구출하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어.

알리시아의 손이 작은 소녀에게 향한다.

잘 익은 벼처럼 고운 색을 띠고 있는 에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위에서 아래로. 빗질하듯이 부드럽게.

그러자, 에델은 고개를 들었다.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 있지만, 아직 흐르지는 않고 고여 있다.

"저는 공주님도 아니고, 나쁜 마법사에게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 건 사실이죠."

에델이 눈을 깜빡인다.

알리시아의 손이 다가올 때마다 한 번씩 눈을 감는다.

"할 일을 다 마치면 제가 에델의 집으로 놀러 갈게요. 그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줄래요?"

쓰다듬는 것을 멈춘 알리시아의 손은 새끼손가락만이 펴져 있었다. 에델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웅…."

그렇게.

알리시아의 약속이 하나 늘었다.

***

"헥… 헥… 도련님… 이쯤 되면 왜 이걸 하는지 정도는 알려 주시죠. 제 마력을 이렇게나 쏟아붓고 있는데…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파울라가 커다란 지팡이에 자신의 체중을 기대며 버텨 서고 있다. 구역감이 올라온다는 듯 길게 늘어진 혀와 크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몸은 그녀의 피로감을 나타내고 있다.

파울라의 평소 행실 때문에 간과되어서 그렇지 그녀도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로 아카데미아의 교수 직책을 맡는 자다.

마나 총량도 상당한 수준인데, 그런 그녀가 마력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죽을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지간해서 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조용히 해라."

파울라의 불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녀에게 지금의 의미를 알려 줄 경우 계획에 방해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알려 줄 수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파울라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팡이에 기대던 몸을 바로 하곤 눈썹에 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자꾸 그렇게 비밀로 하실 거면 더 이상 안 도와드릴 거예요! 제가 아무리 가정교사라고 해도 이건 횡포라고요 횡포!"

"30골드."

"말 돌리지 마세요! 지금 화내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해를 못 하겠나?

그렇다면 조금 더 말해 줄까.

"선생이 매달 슈겐하르츠에서 받아 가는 돈이다."

"확실히 그건…."

폭발적으로 타오르려 했던 파울라의 불꽃이 사그라진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그녀를 마주한다.

"설마 일목요연한 설명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윽."

파울라는 이빨을 갈며 나름 대항하려 했으나 곧 바람이 빠진 풍선 꼴이 되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파울라가 받는 금액은 상당한 수치였다.

그것은 아카데미아의 교수라고 한들 마찬가지다. 초임 교수의 월급이 10골드임을 고려하면 지금 그녀가 받는 액수의 무거움이 체감될 것이다.

게다가 파울라 같은 경우 아카데미아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켜 월급이 상당히 감봉되어 있는 상황. 어쩌면 초임 시절보다 수입이 적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게 맞긴… 하아… 맞아요. 제가 잘못했네요. 월 30골드씩이나 받는 게 뭔 말을 할 자격이 있겠어요. 닥치고 해야지."

잠시 정적을 유지하던 파울라는 웬일로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다는 티를 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물을게요."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다량의 노기(怒氣)와 소량의 장난이 섞인 표정은 사라지고 우려감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알리시아 양을 죽일 생각이신가요?"

파울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 소리를 귓등으로 한번 튕겨 들으며 병에 담긴 마력을 땅에 심어진 대상물에 부었다.

주르륵. 투명한 병에서 액체가 흐른다. 약간의 마력으로 그 푸른 액체가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거… 저번 잡벌레 구덩이에서 얻은 알리시아 양의 마나잖아요."

농도가 매우 높은 액체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밀도를 자랑한다.

알리시아라는 희대의 천재의 마력을 뿌리 끝까지 뽑아 댔으니 압축시킨다 한들 그 양이 적지 않다. 아직 완성된 몸도 아닌데 말이다.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시아 양에게 올 반작용이 상당할 거라는 건 알아요… 게다가 재료가 될 경험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죠."

현재 하고 있는 것과 분야는 다소 달라도 파울라는 마법 술식의 전문가이다. 본인이 확인한 준비물이 이번 술식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맥락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나를 귀찮게 굴고 있지.

파울라는 처음부터 나의 행동을 막고 싶었다. 힘들다며 화를 내는 것은 적당한 방패막이일 뿐.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이기에 언제나처럼 가볍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알리시아 양을 아끼는 게 아니었나요? 그녀는 이런 방법이 아니라도 장래에 충분히…!"

"선생은 미래를 알고 있나?"

"예?"

파울라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조금 전처럼 지금 그런 말이 왜 나오느냐고 쏘아붙일 것만 같다.

"선생은 미래를 알고 있는지 물었다."

"도련님, 저는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예요!"

"파울라."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파울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한 결과와 같을 것이다."

격언이나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고 과정이고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

파울라는 연유를 알지 못했으나 내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입술을 깨물며 우울감에 젖은 눈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말한다.

"알리시아 양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결과'라는 것에 도달할 수조차 없는 거 아닌가요."

파울라의 힘없는 질문은 내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진행할 것을 알고 있고 그녀도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도 저런 물음을 한 까닭은 최후의 양심 같은 것이다. 알리시아와의 관계가 파울라 자신의 입을 열어 말하게 했다.

상당히 괴로운 표정이구나, 파울라. 그새 이 정도로 정이 쌓였단 말이냐.

이래서 감정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 불합리한 것은 언제나 이성을 잡아먹으려 들고 통제하려 든다. 감정에 먹히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어도 사람은 동물이 되어 쾌락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것에 넘어가지 않는다.

알리시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땐 다른 방안을 사용할 뿐이다."

10화

"다시, 농도가 연하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흐름이 불안정하다."

"다, 다시… 네, 알겠습니다!"

"다시."

"…네!"

"다시."

"...."

알리시아가 대답은 하지 않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이런, 고얀 것. 기껏 귀한 시간을 내서 검에 오러를 두르는 것을 봐주고 있건만!

"저… 도련님. 죄송하지만… 더, 더는 마나가 나오질 않습니다."

"헛소리. 여러 번 말했으나, 네 재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이 정도였다면 내가 너를 그런 촌구석에서 꺼내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야."

"그런 칭찬은 감사하…."

"네 기분이 좋아지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지."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알리시아는 천근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몸을 거대한 철검 하나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숨은 턱밑까지 찼고,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질척거렸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그래."

알리시아는 비틀거리는 다리의 힘을 끌어모아 흙바닥을 밀어냈고, 중심을 유지했다. 그륵. 흙바닥에 그녀가 안간힘을 쓰는 흔적이 남는다.

다시 한번, 체내에 있는 모든 마나를 검신에 끌어모은다. 날카로운 검의 예기에 푸른 빛의 마나의 층이 형성된다.

"좋아, 그대로 그것의 농도를 더욱 짙게, 그리고 얇게 만들어라."

"예, 예! 더욱 짙고… 얇게…."

두 눈이 모일 정도로 눈을 찌푸리며 검에 집중하는 알리시아의 노력을 대변하듯 검에 담긴 마나의 형태가 제법 그럴듯하게 변모한다.

"서, 성공했습니다. 도련님!"

알리시아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담긴 마나의 농도도, 얇기도 제법 완성도가 뛰어나다.

"수고했다. 수개월 동안 마나를 다스리며 미리 길을 터놓았다고는 하나, 잘도 며칠 만에 오러를 습득했구나. 역시 내가 인정한 천재다."

"황송합니다, 도련님!"

방금까지 피로에 찌들어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대답에 한층 기운이 살아나 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알리시아를 봤을 때와 비교하면 얼굴색도 한결 좋아 보인다. 영양분 가득한 음식을 잘 챙겨 먹어서 그런가?

"축하합니다."

"감사해요, 브람 선생님, 전부 선생님과 도련님 덕분이에요."

무뚝뚝하게 축하하는 브람과,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알리시아. 자세히 보면 한결같이 무감정한 브람의 굳은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피어 있다. 너무 작아서 유심히 봐야 알 수 있으나 틀림없는 그만의 미소다.

잠시 기쁨을 만끽한 알리시아는 그것을 뒤로하곤 나를 바라본다. 어물쩍한 모습으로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도련님, 한 가지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 곤란한 일이 아니라면 들어줄 테니 말해 보아라."

알리시아가 부탁을 다 한다니. 별일이다. 이토록 빠른 성취를 보이는데 어느 정도의 보상을 챙겨 줘도 괜찮겠지.

"그… 도련님께서 제가 이곳에서 수련하는 동안, 세 분이 어딘가 다녀올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했지."

"그렇다는 것은, 원래의 예정보다 수련이 일찍 끝났으니 저도 합류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자신을 이곳에 두지 말고 함께 데려가 달라. 이 말이구나.

"아, 그건 말이다."

나는 긴장한 듯 입술을 꽉 물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말했다.

***

파울라의 입이 삐쭉 튀어나와 오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저번에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낌새를 눈치채고부터 계속 이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나잇값도 못 하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 주둥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브람의 검으로 잘라 버리겠다고 했다."

루비드 마을에 온 지 5일째. 알리시아만을 마을에 남긴 채 나, 파울라, 브람은 이 더럽게 작은 마을의 주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이곳에 온 세 가지 연유와 관련이 있다. 셋 다 시기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하루라도 지나 버리면 수몰되어 버린다.

다행히도 알리시아의 능력 개화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어 다음 스토리로 넘어가는 데 차질이 발생하지 않았다.

"...."

입을 집어넣은 파울라가 하늘을 바라본다. 꽃잎처럼 살랑거리는 무언가가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눈… 눈이 내려요!"

파울라가 완전히 고개를 위로 꺾었다. 계속 짓누르던 우울감이 한층 덜어져 보인다. 구름은 해를 가리고 두꺼운 층을 형성해 하얀 재를 뿌려 댄다.

입자가 굵고 수가 상당하다. 아마, 목적을 달성하고 나올 적엔 발목 정도까지는 쌓여 있을 것 같다.

손에 닿은 눈의 꽃은 체온을 이기지 못하고 즉시 사그라진다. 파울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굳세게 했다. 무언가 다짐을 한 것 같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정말로 이곳에 비밀 던전이 있는 건가요?"

비밀 던전.

문자 그대로 숨겨져 있는 던전.

"있다. 그것도 아주 먹기 좋은 형태로 말이지."

"먹기 좋은 형태라면… 던전이 약해져 있거나 파훼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어쩐지, 그래서 소수로 도전하시는 거군요."

도전이랄 것도 없다, 파울라. 이미 다 쓰러져 가는 던전에서 간단하게 유물만 가져오면 되는 일이니까. 도전이라는 거창한 문구는 어울리지 않지.

"확실한 건 가 봐야 알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대단한 건데요? 용케도 그런 정보를 얻으셨네요."

"높은 곳에 있으니 모든 것이 훤히 보일 뿐이다."

사실 이번 던전은 본래 바르간과 연이 없는 장소다. 오히려 바르간에게 있어서 유쾌하지 않은 장소라는 말이 더 올바를 것이다.

원래 전개대로라면, 소설 속 주인공인 리암. 그 녀석이 얻어 요긴하게 쓰는 물건이니까. 바르간에 몰입해서 소설을 읽었던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유물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 근방을 지나면… 아, 마침 저기 입구가 보이는군."

"네? 어디… 어? 호수가 있어요! 브람 씨 보이세요? 엄청나게 큰 호수예요!"

"네, 호수입니다."

"싱겁기는. 더 크게 놀라도 된다고요? …하기야, 브람 씨는 과묵한 게 매력이긴 하지만요."

"...."

바다로 착각될 정도의 넓고 청량한 호수가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다. 주변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 이쑤시개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다.

도착했다.

아직 저 안에서 녀석이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이 시기에.

리암이 얻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나 흘러 그 녀석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유물이 온전한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지. 그랬음에도 상당한 출력으로 나를 괴롭혔다. 만약 녀석이 살아 있다면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 어리숙한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리암, 주인공인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 하필이면, 네 이야기 속 악역인 이 바르간이 말이야.

재미있지 않나.

모든 것이 네가 알던 전개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 이것도 그중 하나지.

네가 훗날 키워 무기로 삼으려 했던 애완동물이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두고 너를 물게 된다면.

너는 어떤 얼굴을 보여 줄 거지?

"어서 보고 싶군."

그 얼간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떠오르니 입가의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

"아이고… 고맙네, 어여쁜 아가씨.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

촌장은 오랫동안 숙이고 있어 뻐근하던 척추를 펴며 오만상을 지었다. 오랜만에 바쁘게 움직이니 허리의 통증이 더하다.

촌장댁의 낡은 창고. 먼지가 가득한 이곳에는 온갖 잡다한 물건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릴 도와줘도 되는 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괜히 우리 일을 도운 게 아닌 거 몰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모시는 도련님께서 외출을 다녀오시는 동안 마음대로 하고 있으라고 하셨거든요."

"에구구, 그럼 젊은 아가씨의 쉬는 시간을 뺏어 버린 것이 아닌가. 미안하게 됐네…."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한 일인데요."

알리시아는 마을 촌장의 우려를 환한 미소로 덜어 주었다. 촌장은 잠깐 감격한 것처럼 멈춰 있더니, 곧 주름이 자글거리는 손으로 알리시아의 섬섬옥수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 손주가… 혼기가 차 가는데 말이야… 아가씨 같은 사람이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내 소원이 없겠어."

"네…?"

"참하지, 예쁘지. 어디서 이런 아가씨가 왔을꼬."

"저, 저기…!"

"아가씨의 주인과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알리시아는 촌장의 손을 떼어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발언이 워낙 갑작스러우면서도 당황스러웠고, 내치기에는 그가 상처 입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어때…? 괜찮겠나?"

그렇다고는 하나, 자신의 의사를 표명해야만 하는 상황. 여기서 어물쩍하게 대답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가 될 것이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여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눈동자를 바로잡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우리 손주 놈이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청년이긴 해도, 성실하고 밭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아일세. 성격도 모난 데 없다고 자부하지. …이래도 어떻게 안 되겠는가?"

촌장의 말투가 급해졌다. 그녀가 의외로 칼같이 거절하자 다소 당황한 것이다.

"아, 그래서가 아니라…."

촌장은 그녀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느꼈는지 잡은 힘을 천천히 풀었다. 알리시아는 그의 손에서 부드럽게 벗어났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거든요. 좋은 제안을 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다소곳이 손을 모은 알리시아를 보던 촌장은 앓는 소리를 냈으나 더는 자기 뜻을 밀고 가지 않았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도 걸려 있다.

"보면 볼수록 아까운 아가씨구먼. 그 도련님이라는 자는 복에 겨운 사람이야. 아, 그렇지. 내 더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 잠시 이리로 와 주겠나. 이것도 인연이니 뭐라도 주고 싶어서 말이야."

촌장은 포기하겠다는 허탈하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말을 이으며 창고에서 나가려 든다. 알리시아도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갓 짜낸 우유로 만든 신선한 치즈라네. 꼭 먹이고 싶으니 이쪽으로⎯."

⎯쿠확!

촌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어?"

급격한 상황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알리시아의 입에서 샌 소리가 빠져나간다. 몸이 굳어지고 머리는 해석에 들어간다.

조금 전의 상황. 창고를 나가기 위해 문지방을 넘던 촌장이 사라졌다. …사라졌다? 뭐가? 뭐가 사라졌지.

파육음과 터져 나간 머리.

뚫려 버리듯 몸에서 떨어져 버린 그것은 커다란 가시 같은 것에 박힌 채 나무로 된 창고의 벽에 붙어 있다.

털썩. 머리가 사라진 몸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쓰러진다. 나무의 나이테 같은 그것에서 짙은 액체가 뿜어져 나온다. 콸콸. 주변의 온통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알리시아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변한다. 마나를 전부 고갈한 것도 아니고, 모든 체력을 소모한 것도 아니건만 그녀의 몸은 무거운 것에 짓눌리듯 무거워져만 간다.

머릿속에서 새끼줄로 묶어 둔 그 핏덩이로 이루어진 기억이 다시 살금살금 그녀의 몸을 지배해 간다.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의 이런 상황을 처음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알리시아는 알고 있다.

이 붉은 선혈이 터져 나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크륵?]

문지방 너머,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저기 저 붉은 녀석도 분명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저 호박색의 눈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꿈일까.

너무나도 꾸기 싫은 기억. 저주받은 악몽. 그날의 저주.

자신을 옭아매던 그 괴로움의 연장 선상일까. 그 고통스러운 연속의 뒷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럼에도 간절히 기도한다.

부디, 이것이 평소와 같은 악몽이기를.

11화

[크릭!]

호박 결정처럼 단단해 보이는 괴물의 눈이 기분 나쁘게 얇아지며 거꾸로 뒤집어진 초승달 모양을 했다.

그것은 알리시아가 볼 때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이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 성대가 파열돼도 좋으니 그렇게라도 대항하고 싶다.

"허… 끄으… 거."

그러나 알리시아의 입에 머금어진 단어들은 언어의 기능은커녕 온전히 내뱉어지지도 못하곤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진득하게 엉겨 붙는다.

그날에도 그랬다.

알리시아는 안전한 창고 안에서 언니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의 죽음을 관망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주변에 널브러진 날카로운 농기구를 들고 같이 싸우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겁먹어 바라보는 것밖엔 하지 못했다.

아무런 말도, 소리도 내지 못했어.

왜?

언니가 창고에 자신을 밀어 넣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해서? 혹시 싸우는 언니의 방해가 될까 봐?

깔깔깔.

웃기다 웃겨.

완전히 틀리지는 않아.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하지만 좀 더 원천적이고 사소하며 까슬거리는 뭔가가 있잖아. 목구멍에서 걸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만이 아니잖아.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한다.

익숙한 음성. 익숙한 억양. 하지만 오랜 기억의 저편에 사라졌었던, 이제는 낯선 목소리.

부스럭.

바닥에 깔려 있던 짚이 단단해 보이는 붉은 고깃덩어리에 밟히며 바스러진다. 콰득, 꾸득. 이어서 촌장이었던 자의 육신이 짓밟힌 곳은 사방으로 피육이 튀겨 나간다.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괴이하게 생긴 그것은 알리시아에게 다가왔다. 사마귀가 먹이를 낚아채기 전 살금살금 다가가듯 조심스럽지만, 그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사마귀가 방심한 먹이에 다가가는 것이라면 이건.

[크륵.]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먹잇감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쇄액! 괴물의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 같은 것이 알리시아의 머리에 꽂힌다. 생명체의 약점을 알고 있다. 즐기는 태도와는 달리 한 번에 죽일 생각이다.

"…!"

알리시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내던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얼떨결에 자신에게 날아온 그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두 손은 머리를 보호한 채로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다리는 쓰러진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방금 태어나 세상의 중력에 거스르지 못하는 새끼처럼 알리시아는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머리는 비상이 걸려 도망칠 것을 갈구했으나 몸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켁…!"

괴물의 단단한 꼬리 같은 것이 알리시아의 복부를 강타했고 알리시아는 너무나도 가볍게 날아가 뒤에 있던 나무 상자들과 부딪혔다.

그 충격에 창고에 쌓여 있던 먼지들이 일며 얹어져 있던 각종 도구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몇 개는 알리시아의 머리에도 떨어져 충격을 주었지만 알리시아는 그것이 자신의 머리에 떨어진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감각은 공포와 충격으로 이미 전염되어 약한 통증은 그녀가 신경 쓸 것이 못 되었다.

부스럭부스럭. 그것이 다시 다가온다. 색색거리는 짙은 숨소리를 내는 것이 먹잇감이 반항하려 하자 약간 흥분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알리시아도 그 소리를 들었다. 생존본능에 의해 눈은 탈출구를 향한다. 거기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붉은 피 웅덩이가 되어 머리가 사라져 버린 노인의 몸. 악몽 속에서 주변에 널려 있던 마을 주민들처럼 잔혹하다.

"끄…아…!"

또다시 알리시아는 소리를 내려 했지만, 도저히 단어가 나오질 않았다. 무언가 막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크륵!]

녀석의 단단한 근육질의 다리가 성큼성큼 알리시아에게 다가왔다. 저항해야 한다. 하지 않고서는 죽어 버릴 것이다! 알리시아는 눈에 보이는 아무 물건이나 던지기 시작했다.

툭, 툭. 마구잡이식으로 던진 것들은 괴물의 두꺼운 피부에 스친 상처도 주지 못하고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갔다. 안면에 날아와 부딪히면 불쾌한 기색을 비쳤지만 그게 전부.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한 건 아니다.

[크르르르륵⎯⎯⎯!]

괴물이 분노하기 시작했으니.

쿠궁쿠궁! 녀석은 노는 건 그만두기로 했는지 맹렬하게 돌진한다. 질량이 상당한 녀석이라 땅에 울리는 소리도 엄청나다.

알리시아는 그것을 보고 주변에서 던질 것을 더욱 갈구하였으나 이미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킬 것이 없어진 알리시아는 땅을 긁는다. 파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양손으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녀석에게 멀어져 보려 하지만 창고의 벽 때문에 물러설 곳도 없는 상황. 패닉에 빠진 알리시아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땅을 밀어 댔지만, 몸이 움직일 리 없다.

그러다.

⎯찰그락.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던 어떤 철붙이를 건들게 된다.

쿠궁쿠궁!

콰왕. 붉은 괴물은 커다란 입으로 괴성을 지르며 알라시아와 부딪힌다. 괴물은 알리시아째로 벽을 부수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나아간다. 앉아 있던 알리시아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면서 살가죽에 찢어져 가고 비틀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괴롭다.

그러나, 그 괴물과 부딪혀 날아가는 순간의 도중. 알리시아는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잡았던 칼날을 녀석의 눈에다 찔러 넣었다. 그토록 연습했던 오러도 약간의 마력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찌르기였다.

[크레에에엑!]

강렬하게 돌진하던 녀석이 다리를 멈추고 고통을 호소한다. 녀석의 힘으로 공중을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쿵. 알리시아는 나무와 부딪혀 간신히 정지할 수 있었다.

"…커헉!"

나무와 부딪힌 알리시아의 목구멍에서 토악질이 올라오듯 외마디의 고통이 터져 나왔다. 속력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툭 하고 떨어진다.

"케, 케흑. 커헉."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위액이 올라왔다.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별로 없건만 싹 게워 내려는 것처럼 연신 꿈틀거린다.

얻어맞기 전만 하더라도 그녀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확실한 고통이 몸을 강타하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의식은 있다.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일어서지질 않는다.

귀를 강타하는 울부짖음이 진동하자, 알리시아가 얼굴을 돌려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숨은 여전히 넘어가 버릴 것처럼 얕고 가빴으며 눈에는 초점이 없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줘…!"

"으아아아… 으아아!"

"엄마! 아빠!"

사방에서 비명과 울음소리.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체가 울려 퍼진다.

길게 뻗어 있던 작은 돌담길은 곳곳이 무너져 있다. 나무로 지어진 집들은 타오르거나 무언가 들이받은 것처럼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부서지고 있는 마을. 알리시아의 탁한 눈동자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루비드 마을을 담았다.

깔깔깔.

이게 뭐야, 예전이랑 똑같잖아.

괴물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마을도.

사방에 낭자한 핏자국도.

터져 나가는 사람들의 머리통도.

그때랑 똑같아!

다시 한번, 익숙하지만 낯선 그 음성이 알리시아에게 들렸다. 알리시아의 심장이 그에 반응하듯 거칠게 뛴다. 기존의 몇 배 이상은 빠르게 움직이는 거 같다.

그럴 리가 없다.

이 목소리가 자신에게 들릴 리가 없다. 수없이 꾸었던 악몽에서조차 그녀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작은 숨소리도, 커다란 기합 소리도. 그 창고에서 들리는 음성은 자신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가 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기서 들린다고?

알리시아가 초점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눈으로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생생하게 들리는 그것을 찾아 헤맨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모든 게 그대로야.

너도 마찬가지지.

그 사람은 너를 천재니 뭐니 말했지만, 지금 너의 꼬락서니를 좀 봐.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

"어… 어…."

알리시아는 처음 입을 연 사람처럼 혹은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뻥긋거렸다.

아직 그녀를 찾지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 여기에 있는데. 이 근처에 있는데.

깔깔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네.

몸만 커지면 뭐 해.

마나를 배우면 뭐 해.

결국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데.

무언가가 알리시아를 향해 다가온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소리는 들렸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알리시아가 손을 뻗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러나.

"아…?"

[크르륵.]

알리시아의 뻗은 손에 닿는 것은 부드러운 살갗이 아니라 질척거리고 딱딱한 표피였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흐르고 있다. 그것이 묻은 손을 눈에 가까이하자 붉은 혈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다.

"케, 켁…!"

그 괴물의 꼬리가 알리시아의 목을 조이며 허공에 올렸다. 대롱대롱. 알리시아의 발이 괴로움을 호소하며 물장구치듯 팔딱거린다.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목을 조이는 것을 막으려 한다. 손톱으로 할퀴기도, 있는 힘껏 쥐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힘을 쓰면 쓸수록 자신의 체력만 떨어져 갈 뿐 괴물은 점점 강도를 높여 갔다.

아, 다른 점이 하나 있었네!

가장 중요한 거였는데 말이야.

흐릿해져 가는 알리시아의 시야에는 오른 눈알이 검에 찔려 잔뜩 안면의 근육을 수축시킨 괴물의 얼굴이 보인다. 구렁이 같은 핏줄도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옆.

오랜만이야. 알리시아.

활짝 웃음을 만개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곧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어른거린다.

생각날 때마다 가슴에 창을 찌르는 것 같이 괴롭지만, 그 고통을 감내할지라도 보고 싶은 얼굴.

"…커, 어…!"

각막에 상처가 생긴 것인지, 그게 아니면 괴물이 숨통을 조여 와서인지. 알리시아의 시야가 자꾸만 뿌예진다. 피가 몰린 얼굴에서는 그보다 더 뜨거운 액체가 눈에서 쏟아져 나온다.

알리시아.

그때랑은 다르게 말이야.

너를 지켜 줄.

'내'가 없잖아!

깔깔깔.

당시, 14세의 소녀. 고향의 자랑이자 알리시아의 4살 위 친언니였던 그녀.

샤를로테.

그녀의 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허우적대던 알리시아는 움직임을 정지했다.

***

"아이고… 고맙네, 어여쁜 아가씨.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

촌장은 오랫동안 숙이고 있어 뻐근하던 척추를 피며 오만상을 지었다. 오랜만에 바쁘게 움직이니 허리의 통증이 더하다.

촌장댁의 낡은 창고. 먼지가 가득한 이곳에는 온갖 잡다한 물건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릴 도와줘도 되는 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괜히 우리 일을 도운 게 아닌가 몰라."

"...."

"응…?"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촌장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서로 대화를 원만하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생기 있게 웃어 주며 함께 일하던 젊은 여자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젊은 아가씨? 어디가 아픈 겐가? 악몽이라도 꾼 것마냥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워 보인다. 공기가 부족한 것인지 과한 호흡이 이어진다.

촌장은 급히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얼굴을 잡았다 깜짝 놀랐다. 사람의 기본적인 체온을 무시하듯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의 손에 닿았기 때문이다.

"상태가 심각하군…! 이럴 땐… 그, 그래!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나. 내 금방 따뜻한 물을 받아 올 테니!"

알리시아는 창고를 나서려는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나. 내 퍼뜩 갔다 올 테니."

알리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촌장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곤 움직였다.

그렇게 창고를 나가기 위해 문지방을 넘던 촌장이 사라졌다. …사라졌다? 뭐가? 뭐가 사라졌지.

아니, 아니지.

알리시아, 알고 있잖아.

우리 이런 건 빠르게 넘어가자고.

[크륵?]

문지방 너머,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저기 저 붉은 녀석도 분명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저 호박색의 눈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처음일 수 없다.

그야, 조금 전에 자신을 죽인 괴물의 것이니까.

"이게… 대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하자.

알리시아는 드디어 제대로 된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12화

희대의 천재.

최강의 히로인.

최고의 조력자.

이것은 모두 그녀, 알리시아를 위한 말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별명이 있었지만, 작품 속에서도 사용되는 대표적인 명칭들은 이랬다. 대강 봐서도 알리시아의 용사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잘 느낄 수 있다.

아카데미아에 입학해 평민 출신인 그녀는 모두를 놀라게 한다. 모두가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 교회에서까지 그녀에게 기대했다.

⎯알리시아는 이번 세대의 선두 주자가 될 것이다. 모두를 지키며 인류의 희망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를 펼치듯 누구보다 높이 비행하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커다란 날개로 하늘 높이 치솟아 태양에 닿을 것처럼 말이다.

높이, 높이.

아주 높이.

그러나. 모두는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 펼쳐진 그녀의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날아오르던 그녀의 날개는 태양에 다다르지 못하고 완전히 녹아내린다.

첫 실습.

그녀가 말하는 붉은색 괴물들을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자리. 주인공인 리암과 같은 조였던 그녀는 당시 마법사로 조의 후위를 맡았다. 유일하게 그녀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리암은 최대한 그녀가 괴물들을 조우하는 것을 막으려 들며 열심히 뛰어다닌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알리시아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리암의 수준은 모두 감쌀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결국 알리시아의 선까지 괴물이 들이닥친다. 아무런 사실을 모르는 모두는 그녀에게 몰입하여 기대했다. 천재인 그녀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개는 처참했다.

웃기게도. 예비 용사이자 촉망받는 신세대 천재로 각광받던 알리시아는. 괴물들과 직면한 그 자리에서.

⎯꺄아아아아!

아무것도 못 하고 몸을 숙여 벌벌 떨었다.

그 탓에 그녀의 조원들은 다 같이 최하점의 성적을 받았다. 주인공을 제외하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그녀가 괴물을 무서워할 줄이야. 모두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은 '놀림'으로 변한다.

이후로 그녀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생겼다. 찬란한 영광이 따르기 전의, 그림자 같은 과거다.

겁쟁이.

민폐녀.

빛 좋은 개살구.

칭호라기보다는 놀림거리에 적합한 치욕스러운 단어들.

다행히 이야기가 진행됨으로 인해 그녀의 트라우마는 점차 극복되어 모두를 지키는 수호자 같은 존재가 되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데만 1년이 걸린다.

1년.

1년이라.

준비 시간으로 버리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정도로 기다려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알리시아를 데려와 마법과 검술을 가르쳤다. 모든 조건을 갖추고 루비드 마을이 멸망했던 이날을 기다렸다.

현재 그녀가 몇 차례 죽었을지는 모른다. 그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내가 개입할 것은 없다. 아는 것은 빠져나오는 순간 정도. 내가 미리 준비해 둔 가축들이 전부 죽을 때, 지속되는 반복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지독한 것으로, 최근에 내가 악몽으로 일깨워 주고 있었으니 더욱 확실하게 작용하겠지. 어쩌면 아무것도 못 한 채 정신이 붕괴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때는 아쉽게 된 것이지만 알리시아를 폐기하고 다른 안을 선택해야 한다. 방법은 그녀만이 아니니까.

과연 알리시아가 모든 가축이 죽을 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녀석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힘은 주어졌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준 셈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녀의 몫이다.

***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틈이 없다. 괴물은 다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동을 시작했다.

자신이 미쳐 버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악몽에 갇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까와 같은 고통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감정이었다.

깔깔깔.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네가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내 핑계로 돌릴 생각은 하지 마. 그냥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라고.

너는 그때 아무것도 못 했어. 왜?

무서우니까.

넌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잖아.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창고 속에 숨어 있었던 주제에 뭔 핑곗거리가 그렇게 많은 거야?

겁쟁이 내 동생.

알리시아에게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외형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언제나처럼 다정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담긴 감정은 분노와 조소.

14세의 샤를로테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비웃고 있었다.

괴물은 샤를로테를 지나친다. 그녀의 모습이 일렁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알리시아의 얼굴과 괴물이 가까이 마주한다.

"아, 아아…!"

그것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알리시아는 괴물을 밀쳐 내려 하며 손을 뻗었지만, 자신이 물러서질 뿐이었다. 도망,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그렇게 저번 죽음에서는 도저히 따를 기미를 보이지 않던 그녀의 얇은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듯 드디어 다리가 통제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시나무 떨듯 격하게 떨리고는 있으나 이제 알리시아는 달릴 수 있다.

[크륵?]

괴물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챘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짜 먹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도망칠 수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괴물이 해야 할 행동은 하나.

"…!"

쇄액! 괴물의 촉수가 알리시아의 다리를 향해 쏘아진다. 벌이 독침을 쏘는 것처럼 날카롭고 재빠르다. 알리시아는 낌새를 느끼고 간발의 차로 피한다.

괴물의 공격을 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다리도 움직인다. 그럼 이제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 그러나.

쿠욱. 영문을 모를 통각이 복부에 집중된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어떠한 고통보다도 더욱 지독하다.

분명 촉수는 피했는데 왜?

그런 의문은 바로 해결된다. 고개를 들자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지 괴물은 명백한 웃음을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촉수는 하나가 아니다. 둘. 두 개의 긴 것이 등에 달려 있다.

"커헉…!"

알리시아의 입을 통해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졸지에 괴물은 그녀의 피를 뒤집어쓰게 됐으나 그것은 걸고 있는 미소를 버리지 않았다.

꿈들 꿈들. 알리시아의 배를 통과하고 있는 괴물의 촉수가 다시 움직인다. 먹잇감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인지 단숨에 뽑아 버린다.

괴물의 몸에 의해 막혀 있던 혈이 뚫려 동시에 다량의 피가 터지듯 방출된다. 알리시아의 시야는 다시 어둠 속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겨우 다리가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건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알리시아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그녀는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도망치던 알리시아의 머리가 도자기처럼 깨져 버렸다. 안에 담겨 있는 뇌수액과 피가 터져 나갔지만 알리시아가 그것을 알 일은 없었다.

***

알리시아는 다리가 잘리자 비명을 질렀다. 잔뜩 흥분한 괴물은 크게 도약해 알리시아를 덮친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검으로 눈을 찌르려 했지만 팔이 닿지 못했고. 괴물은 그녀의 안면을 물어뜯어 버린다.

***

잘근잘근. 알리시아의 한쪽 팔이 씹어 먹히고 있다. 괴물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알리시아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지만, 끝까지 그 끈을 검과 함께 잡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시도하려고 들었다. 마력과 검술. 모두 단기간이었지만 잊을 수 없도록 몸에 각인시켰다.

꽈악. 고통과 함께 주먹을 쥐어 본다. 다른 팔은 먹히고 있지만, 나머지 하나라면 충분히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죽을 수는 없다. 죽음에서 되돌아올 때마다 체력과 마력, 정신력 등 아무튼 뭐든 게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느낌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는다. 알리시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격을 개시한다.

마력은 근육과 같다.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한 결과를 입증하듯. 손에 체내의 마나를 모은다. 그렇게 감도는 푸른빛. 이거라면 녀석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몰라!

알리시아는 비명을 지르듯 기염하며 녀석을 향해 마력이 담긴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먹은 딱딱한 녀석의 표피와 부딪힌다.

쿵. 알리시아의 주먹에 전해지는 감촉이 무겁다. 녀석에게도 확실한 타격이…!

[크륵?]

괴물은 이상한 것을 본 것처럼 노려봤다.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질려 버렸다.

콰득.

알리시아의 몸은 반으로 절단됐다.

***

알리시아는 눈이 파인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알리시아는 목이 잘린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알리시아는 숨이 막힌 채 죽음을 맞이했다.

...

....

알리시아는 도망치고 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

괴물들이 마을 곳곳을 파괴한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괴물이 없는 곳은 없다. 모두가 비명을 지른다. 살려 줘요. 누가 좀 살려 줘요!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살리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마력을 담은 주먹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오러를 담은 검은 녀석에게 작은 상처를 낼 수 있었지만, 창고에 들어온 한 녀석을 죽이는 것이 한계. 그녀의 정신 상태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오러는 흔들거리는 촛불과 같았다.

깔깔깔.

결국 도망치는구나.

하긴,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동생이지.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발전했네.

그전에는 도망치는 것도 못 했잖아!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을 움켜쥐는 것처럼 괴롭다. 목이 잘려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가고.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고통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리가 비틀거린다. 공포에 질렸기 때문도 있지만 죽음을 반복하면서 체력에 한계가 온 것이다. 어쩌면 다음번의 죽음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니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 현실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되니까 나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다.

죽음은 너무나도 두렵다.

어렸을 적에도,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저길 봐 알리시아.

꼬마 두 명이 있어.

도망치기 바쁜 와중에도 샤를로테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린다. 소녀의 손짓에 알리시아의 시선도 그쪽을 향하게 된다.

"에델… 프리지아…!"

알리시아는 소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주 작게. 혼잣말 정도로. 근처에 있어도 듣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다.

저기 큰애가 언니인가 봐?

나이는 되게 어려 보이네.

우리 때보다도 더.

소녀들의 앞에 괴물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 괴물은 아이들의 여린 살코기를 원하는 것처럼 긴 혀를 내둘렀다.

에델은 자신의 동생인 프리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식칼을 들고 괴물과 직면하고 있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는지 한 손으로 연신 눈을 닦아 댄다. 그 어린 몸이 푸들거리며 벌려진 입도 마찬가지다.

주방용 칼이 떨린다. 한 손으로는 무거웠는지 두 손으로 잡는 방법을 바꿨다.

다시, 성큼.

괴물이 다가선다. 에델의 몸이 크게 뛴다.

"사… 살려… 공주님…!"

에델의 작은 눈과 마주쳐 버렸다. 알리시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도망갈 수 없어 멈추어 서 있다.

그녀들을 구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저 괴물을 무찌르고 공포 속에서 꺼내 주고 싶다. 그런 사고와는 반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만둬, 알리시아.

네가 누굴 구하겠다는 거야.

가던 길이나 서두르는 게 좋을걸?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배가 뚫리는 고통을 맛봐야 하잖아?

알리시아는 그 목소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몸의 기억. 모든 것들이 알리시아의 다리가 떼지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도 말해 본다.

"도와줘야 해…."

안간힘을 써서 입을 연다. 이를 빠득거리며 몸을 지배하는 감정을 씹으려 든다. 저항은 여전히 강하다. 발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어… 나밖엔…."

그녀의 주인과 일행은 마을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괴물들과 싸울 힘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오직 자신. 자신만이 이들과 대적할 수 있다.

크윽. 발에 못이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다리. 이게 문제다. 이것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에델과 프리지아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그만두라니까.

꼴이 더 우스워만 질 뿐이야.

애초에 네가 뭔가를 하려는 것부터 잘못됐어. 넌 내가 아닌걸? 운 좋게 한 마리라면 모를까. 괴물들을 죽이는 일을 네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야… 아니야…."

마나를 다룰 수 있다. 안정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 훈련했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익혔다.

비록 언니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한 녀석을 죽이는 데 온 힘을 다 써야 할지라도. 그녀가 아니면 저 아이들을 누가 구하지.

그렇게 알리시아의 발끝이 서서히 움직이려는 몇 초의 순간.

꾸드득.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 짧은 망설임에 의해 동화를 동경하던 소녀, 에델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

"언…니?"

에델의 동생, 프리지아는 그 광경에 넋을 놓아 버렸다. 제정신으로 맞닥뜨리기에는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죽었다. 에델이 죽었다. 프리지아의 언니가 죽었다. 이번 죽음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 자신이 죽은 세계에서 몇 번이나 죽음을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약속했는데. 일이 끝나고 놀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마지막에 자신을 불렀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괴물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분명 프리지아다. 죽을 것이다. 그녀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어 버릴 것이다.

"안 돼…."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버티는 게 고작이었던 다리도 오랜만에 굳은 의지가 붙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알리시아는 검을 꺼내 들며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그녀의 얼굴은 익숙하지 않은 분노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오, 뭐야 알리시아.

이건 좀 놀라운데?

느껴진다.

체내의 마력이 채워져 간다. 바보 같게도 대기에 있는 마력으로 몸을 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연습했는데. 공포에 질려 어리석게도…!

날에도 그 기운이 솟아오른다. 푸른 연기가 검신을 타고 올라와 전체를 감싼다. 그것은 응축되어 세기를 높여 간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 그것은 알리시아의 오러였다.

두렵다.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가득 채우는 하나의 감정은.

⎯구하고 싶다.

그것이었다.

13화

순간 돌풍이 불어 괴물이 날아갔다. 어린 소녀, 프리지아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이 그런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프리지아의 앞에 진한 빛을 발산하는 검을 들고 있는 여인의 존재감이 곧바로 공기를 압도했다.

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액체와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 이를 꽉 악물고 있으며 눈은 예기가 돋아 있다.

"곤듀님…?"

프리지아의 언니가 최근 푹 빠져 입에 달고 다니던 여인. 동화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커다란 검을 들고 괴물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프리지아."

프리지아를 위기에서 구한 알리시아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알리시아의 시야에 처참한 주변이 곧바로 들어온다. 넝마처럼 널려 있는 시체들. 하나는 방금 목숨을 잃은 에델의 것이었고, 나머지 둘은 그들의 부모였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구해 주지 못해 미안해요."

알리시아의 사과는 프리지아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검이 되어 버린 수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알리시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방관했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비아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눈에 한가득 힘이 몰려 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동자에 기름이 부어진다.

사그락사그락. 말라 버린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사방이 뻥 뚫려 있는 넓은 장소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붉은 괴물들은 시시각각 빠르게 모여든다.

검을 들고 있는 알리시아는 기세를 더욱 높인다. 그녀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런 사고가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떨쳐 낸다.

지잉⎯!

알리시아는 반경을 정하여 그 선을 넘는 괴물들을 차례로 베어 갔다. 한 합에 한 마리의 머리가 툭 하고 떨어진다. 오러를 두른 알리시아의 검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구역을 침범하는 괴물들의 모가지가 땅으로 꺼진다.

언뜻 보면 선방하고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알리시아의 연이어지는 동작이 거칠다. 평소의 유연함과 부드러움보다는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과하게 실려 몸이 빨려드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크윽…!"

괴물 하나를 쓰러트린 그녀는 동작을 자연스레 연결하지 못해 옆에 있던 다른 괴물의 촉수에 옆구리가 뚫렸다.

알리시아는 아픔을 참는다. 쇄액! 그러곤 그 촉수를 자른 뒤, 그대로 달려들어 적의 목을 베어 버린다.

[크륵.][크라라악!][크르륵.][크릭?][크르르르⎯]

놈들을 죽일수록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늘어 간다. 처음에는 십몇 마리로 보였던 놈들이 이제는 몇십 마리가 포위해 온다.

알리시아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프리지아를 기준으로 모여드는 모든 적을 상대한다. 한 놈에 두 동작 이상을 취하지 않는다. 벌레들이 밀려들 듯 모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 이상 동작을 소모하면 프리지아와 자신의 혈흔이 바로 세상에 튀어나올 것이다.

콰득. 이번엔 알리시아의 갈비뼈가 나갔다. 괴물의 박치기에 당해 버렸다. 그럼에도 동작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쓰러진 괴물의 시체를 짓밟으며 땅을 박차고 뛰어든다.

콰콱. 또다시 괴물을 벤 알리시아의 양쪽 다리에 하나씩 괴물들의 촉수가 박혔다. 곧바로 그것들을 잘라 내어 달려들지만 갈수록 속도나 위력이 줄어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리시아가 지키는 반경은 줄어들고 괴물들이 다가왔다.

"끄, 으읍…!"

그 검은 마수는 이윽고 프리지아까지 도달한다. 프리지아는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꽉 막은 채 비명이 도망치려는 것을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다.

알리시아는 저 동작의 의미를 알고 있다. 어린 날의 자신도 같은 경험이 있다. 좁은 창고에서 헐떡거리는 숨을 죽이려 들며 언니의 최후를 바라봤던 그 순간의 기억이⎯.

타앗! 마력을 발끝에 모아 도약하는 알리시아는 공중을 날아 프리지아에게로 쏘아졌다. 그 행위에 판단이나 의식은 개입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감각 때문에 몸이 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

그러나 알리시아의 간절함은 프리지아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콰륵. 공중을 날아가는 그녀의 몸을 정확히 물어 채는 괴물. 괴물의 커다란 이빨이 알리시아를 잠식한다.

우두둑. 뼈가 부서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각이 전신에 퍼진다. 비명을 질러 고통을 호소하고 싶다.

알리시아는 이를 더욱 강하게 깨물며 악바리로 녀석의 눈에 검을 밀어 넣었다. 자세나 힘이 모자랐으나 어렵지 않게 파고든다. 오러가 담기지 않은 검으로도 찌를 수 있던 유일한 부위다. 오러가 담겼을 때 쉽게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괴물은 비명을 질러 대며 씹고 있던 알리시아를 뱉어 냈다. 철퍼덕. 타액과 피로 범벅이 된 그녀가 맥없이 추락한다.

다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 질질 몸을 이끌며 프리지아에게 다가가려 애쓰던 그녀는 곧 그것마저 멈추고 말았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먹어 치우고 있는 괴물. 입가에 피가 잔뜩 묻어 있다.

우드드득. 연약한 뼈가 이빨에 갈려 나가는 소리.

알리시아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였다.

바르르 근육이 떨리고 뇌의 제한이 풀린 것 같이 알 수 없는 몸의 고양감이 몰려드는 그 순간.

알리시아는 또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