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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고맙네, 어여쁜 아가씨.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 응? 왜 그런가?"

알리시아는 촌장의 어깨를 잡으며 그가 행동하려는 것을 막았다. 오랜 반복을 통해 학습된 것은 수 마디의 말보다 행동 한 번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제껏 몰려든 충격보다 강한 힘이 전신에 스며든다. 두뇌에서 시작된 그것은 신경을 통해 온몸을 괴롭힌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지금 이 통증을 느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저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다시 기회가 생겼다.

차분히 상황을 살피니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감돌았던 독특한 마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번은 다른 죽음들과 확연히 다르다.

심호흡하듯 마나를 다스리며 몸을 진정시킨다. 그러곤 발걸음을 옮겨 문지방 앞으로 다가간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그 괴기한 녀석을.

[크르⎯?!]

단숨에 베어 버린다.

"세, 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 아가씨… 지금…!"

허둥지둥거리고 있는 촌장에게 알리시아는 침착한 태도로 대응했다. 그녀는 촌장에게 절대로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고 말했다.

촌장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괴물과 그녀가 보인 실력은 확실히 목격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리시아는 괴물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땅이 진동하며 멀리서 괴물들이 구름 떼처럼 달려들고 있지만 마을에 침범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창고에 들이닥친 이 녀석이 가장 선두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러가 둘려 있는 검으로 죽어 있는 그 시체를 난도질한다. 핏줄기가 사방으로 퍼지고 알 수 없는 장기나 살덩어리가 조각되어 떨어져 나간다.

녀석들이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면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하나의 시체로 다른 녀석들을 유인한다. 그리고 유인된 녀석들을 다시 주검으로 만들어 더 많은 유입을 이끈다.

난도질을 끝낸 알리시아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녀석들이 있지만, 신경을 쓰지 않는 무리도 있다. 그렇다면 더욱 강렬한 것을 보여 주면 그만.

무게의 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하고. 단숨에 튀어 나간다.

투웅!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알리시아는 맹렬하게 녀석들과 부딪쳤다. 손에 쥐어진 근육이 과하지 않다. 몸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오르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사삭. 발걸음도 전과 다르다.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듯 가볍지만 파고드는 것이 매섭다. 중심 시야와 외부 시야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얻는다. 청각은 세밀한 작업을 보조하며 알리시아를 돕는다.

스스슥⎯!

커져 가는 파문. 스무 번의 파공음과 스무 개의 목. 괴물을 베는 알리시아의 속도가 점점 높아진다. 자신의 동작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다 한계를 넘어간다.

순식간에 20체가 넘는 괴물들을 죽여서인지 상당히 녀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마을에 달려들고 있는 상당량의 괴물들이 알리시아의 주변에 모여든다.

괴물들에게 순서 같은 것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도 않았다. 상대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어 공격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고회로였다.

알리시아는 사방에서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녀석들을 학살한다. 공격을 당할 위험이 있으면 검격의 범위를 넓혀 두 녀석을 동시에 베어 버리기도 하고, 날아들던 촉수를 피한 운동에너지로 다른 녀석의 목을 자르기도 한다.

그러다 바닥에 널린 시체와 달려드는 녀석들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는 잡벌레의 구덩이에 들어갔을 적에 했던 것처럼 체내의 마력을 터지듯 방출한다.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밀려나거나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그 틈을 이용해서 살해를 이어 가고 자리를 옮긴다.

마력의 소모가 심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훈련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 알리시아는 공기 중에서 꾸준히 마력을 끌어오고 있으니까.

[크에에엑⎯⎯⎯!]

괴물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들에 대한 공포심을 분노로 짓누르자 녀석들 하나하나가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 어디서 이런 수가 몰려든 것인지 끝이 없다.

최대한 주의를 끌어모으고는 있으나 추가로 들어오는 괴물들이 멈추질 않는다. 이미 마을에 들어간 녀석들도 한가득하다.

췌엑! 결국 느껴지는 감각. 날카로운 촉수가 팔을 스쳤다. 공격을 날린 녀석을 몸통째로 단숨에 베었으나 이어서 다른 녀석들이 달려든다.

파앙⎯⎯!

방금 마나를 터트렸건만 또다시 써 버렸다. 상황이 갈수록 긴박해지니 완전히 마력이 회복되는 순간을 기다릴 수 없다.

기계가 된 것처럼 괴물들을 죽여 나간다. 점차 의식보다는 본능으로 움직여지며 자잘한 상처가 늘어난다. 알리시아는 그럴 때마다 의식을 각성시키려고 했으나 그녀의 체력과 정신력은 무한정이지 않다.

들고 있는 검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진다.

잠깐의 틈도 없이 달려드는 괴물. 동시에 네 마리다. 지금 이 자세로 회전하면서 베기에도 무리가 있다. 마나를 방출시켜야 한다…!

또다시 알리시아의 몸에서 푸른빛이 퍼진다. 알리시아의 시야에 담긴 세 마리의 괴물들이 밀려 나가며 움직임이 제한된다.

잠깐, 세 마리…?

나머지 한 마리는?

쿠웅. 알리시아는 의식을 잃을 뻔했다. 그녀의 뒤에서 달려든 녀석이 있는 힘을 다해서 부딪쳤다. 졸지에 허공에 크게 뛰어오른 알리시아는 몸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의 끈을 잡고 몸을 비틀어 검을 휘둘렀다.

[케에에에에에엑!]

녀석의 목이 반만 잘려 고막을 찢길 듯한 소리를 냈다. 자세가 어정쩡하여 죽이지 못했다. 죽지 않은 녀석은 마지막 발버둥으로 꼬리를 채찍 치듯 날렸고.

이는 알리시아에게 명중한다.

"크허…!"

복부를 강타당한 알리시아의 입이 벌려지며 가벼운 몸은 괴물들의 위로 빠르게 날아간다. 괴물들의 호박색 눈이 모인다. 몇몇 녀석들은 그것을 받아먹기 위해 쩍 입을 벌리고 서 있으며 몇몇 녀석들은 입을 벌린 채.

크게 도약한다.

⎯죽는다.

알리시아의 몸은 다시금 그것에 물들기 시작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느리게 움직여진다. 날아가는 자신도 뛰어오르는 괴물들도.

몇 번이나 죽었지만 이런 현상은 처음이다. 어쩌면 정말로 죽음과 직면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아니. 그딴 나약한 생각은 버리자.

"끄으…."

알리시아는 몸을 움직였다. 허공을 날아가고 있는 몸이 떨어지지 않고 있을 정도로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 그녀의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다시피 하건만 터질 듯이 힘을 준다.

조금씩, 미세하게.

검이 움직인다. 다가오는 괴물의 안면을 향해. 천천히. 하지만 괴물이 다가오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녀의 검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진보한다면 괴물은 세 뺨은 가까워진다.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이 순간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살기 위해 투쟁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 한편에 문뜩 들어오는 어떤 것.

새하얗고 동그래 보이는 그것. 닿으면 차갑고 가볍게 녹아내리는 눈송이.

약간 내리는 정도가 아니다. 괴물의 수보다 훨씬 많은 눈발이 하늘에서 내린다. 잘 보니 주변에 온통 눈이 덮여 있다. 그녀가 싸워 온 장소에도, 멀리 보이는 돌담에도. 마을을 감싸고 있다.

언제 이렇게 눈이 내렸는지 모른다. 사선을 넘나들 때는 분명 못 본 거 같은데. 정신이 없어서 몰랐던 것일까.

톡. 작은 눈송이는 알리시아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녀의 눈을 흐리게 만들며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괴물이 다가오는데. 저걸 막아야 하는데. 여기서 죽어 버리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전부…!

그때, 눈에 들어온 이물질 때문인지 알리시아의 시야에 검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헛것을 본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갑자기 나온 그것은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언니… 언니인가…?

반복된 죽음 속에서 보였던 그녀의 언니, 샤를로테.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잦았으니 그녀일지 모른다.

그녀 말고는 없을 터이다.

"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구나. 하지만, 그래… 이번에는 너의 성과를 치하하여 넘어가도록 하겠다. 합격이다, 알리시아."

순간 숨이 넘어갈 뻔했다.

멈춰진 줄로만 알았던 흐름이 가녀린 호흡을 따라 폐로 스며든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검은 그것은 더욱 흐려져 완전히 일그러진다.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게 왜곡된다. 그러나 그것의 모습이 일그러질수록 알리시아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수고했다. 잘도 이 정도까지 해 주었구나. 기대 이상이다."

남을 깔보는 듯한 목소리. 오만함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다.

알리시아는 그 목소리를 듣고 울먹거리는 입을 억지로 벌려 그를 불렀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그 단어는 겨우 빠져나온다.

"바르간… 도련님…."

14화

"잘 들어 알리시아. 절대로 나와선 안 돼. 눈, 코, 입 막을 수 있는 건 다 막아 놓고 있어. 언니 말 알아듣겠어?"

소녀가 강한 어조로 묻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몸집에 비해 커다란 눈망울에서는 덩어리진 눈물이 차례로 흘러내린다.

터져 나오는 아이의 눈물방울을 보며 아이보단 나이가 많은 소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진정하지 못하는 떨림이 전해진다. 소녀는 그것을 느낀다. 그러나 진동을 느끼는 것은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입을 열었다. 소녀가 입을 막으라고 했기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기어이 붙어 있는 두 입술을 뗐다.

"언니… 돌아와?"

"...."

물음을 들은 소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입이 떨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억누른다. 감정의 표출을 근육의 미세한 조정으로 제어한다.

"응, 금방 돌아올게."

소녀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원래라면 이런 과정도 없이 바로 움직여야 하는 게 옳다. 이 좁고 더러운 창고에 아이를 넣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미 그렇게 다짐하고 행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러지 못했다. 이대로 문을 바로 닫을 수 없었다. 소녀의 소중한 가족과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은 모든 다짐을 꺾어 버릴 정도로 소중하여 동생을 끌어안아 버렸다.

아이는 알았다. 숨기려 들지만, 감정이 쉽게 표출되는 사람이다. 그녀의 불규칙한 고동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언니 돌아와?' 가 아니다. '언니 돌아와.' 아이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반드시 돌아와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그게 아니라면 자기 옆에 꼭 붙어 있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책임감 없는 말을 함부로 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사리 분별이 가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떼를 써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도 잘해 왔던 일이다. 할 수 있다. 언니의 방해가 돼선 안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지치지 않고 쏟아졌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숨기려 들면 들수록 더욱 강한 반작용에 감정이 드러난다.

소녀는 아이를 몸에서 떼어 냈다. 몇 시간이라도 이러고 있고 싶다는 열망을 뽑아 버리고 아이가 있는 창고의 문을 닫는다. 닫는 순간까지 보인다. 어두운 공간으로 사라져 가는 소녀의 소중한 동생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소녀도 아이의 표정과 같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꾹 참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그리고.

끼이익⎯.

문은 완전히 닫힌다.

***

⎯탁.

손가락을 튀긴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와 남자를 기준으로 입을 쩍 벌리며 잡아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던 괴물들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입을 다물곤 뒤돌아서 다른 괴물들을 밀고 나간다. 자신들에게는 완전히 흥미를 잃은 것만 같다.

그가 마나를 퍼트렸을 때의 느낌은 그녀가 괴물들과 싸우고 있을 때 사용한 마나의 방출과 비슷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달랐다.

알리시아는 바닥에 착지한 뒤 바르간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여유 있는 표정. 마을이 초토화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마법 같은 일이 아니라, 마법 그 자체다 알리시아."

그가 말한다.

입가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잘 봐라. 그리고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몇 번이라도 되새겨라."

그 악몽인지 뭔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따위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것만을 머릿속에 집어넣어라. 앞으로 이런 하찮은 것 때문에 끙끙 앓고 있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동작을 잇는다.

대충 걸쳐져 있던 푸른 검을 꺼내 들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검이다. 이번에 얻고 온다고 했던 그 유물일까?

"내가 검을 쓰는 장면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네가 죽는 날까지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꺼내 든 시퍼런 검신이 예기를 발산한다. 곧 그 예기는 형태를 갖추며 짙은 빛을 뿜어 댔다. 저건, 오러. 하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농도가 짙다.

"앞으로 2년."

그는 말한다.

"지금부터 펼쳐질 광경을 네가 재현하는 데 주어질 시간이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

"더듬거리긴. 충격에 말하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해져 버린 거냐? 그리고 보니, 눈빛도 그렇고 상태도 그렇고. 고작 몇 시간 동안 못 본 것치고는 많이 달라졌구나."

그러나, 나쁘진 않다.

[크르라아아아⎯⎯⎯⎯!]

지나가기를 방해하던 괴물들을 짓밟으며,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잔뜩 성이 난 놈들이 달려든다. 터질 듯한 근육들이 솟아올라 있다.

"실제로 보니 더욱 추하게 생긴 놈들이로군. 저런 것들의 피가 묻는다면 옷을 빨 게 아니라, 바로 버려야겠어."

바르간은 인상을 구기는 것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언가 기대되는 것처럼 신이 나 보이기도 하다.

스앙 스앙. 오러가 타오르는 검을 공중에 몇 번 휘둘러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러곤 가볍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마지막으로 전한다.

"지금의 나를 뛰어넘어라. 알리시아."

번쩍⎯!

순간, 세상이 암전되어 모든 것이 검게 변했다. 곧바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모습이 안 보인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도 없다. 어디에 있는….

[크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통각의 증표는 도화지에 떨어진 잉크처럼 순식간에 퍼진다. 진한 피가 소용돌이치는 공간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 단 한 번의 검격에 열 마리는 넘는 괴물들이 잘려 나간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고농도의 마나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퍼져 녀석들의 몸에 구멍을 뚫는다.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한 멀리 있던 괴물들은 괴랄한 소리를 내며 더욱 몰려든다.

녀석들에게 수없이 당한 그녀는 지금의 언뜻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 곧 악화될 것을 염려했다.

알리시아는 지금의 상황이 익숙하다. 그녀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된다. 곧 그는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이길 수 없는 소모전을 시작할 것이다.

"도와… 드려야 해…."

그녀의 주변에 있던 괴물들은 이미 주검이 되어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그가 해치우고 간 것이다.

알리시아는 검의 끝을 바닥에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도 확실하게 두 다리는 땅을 밀어내며 그녀를 일으킨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의 여인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잡곤 끌어안았다. 자신의 일부처럼 쓰고 있던 커다란 모자는 어디 가고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이 알리시아의 얼굴에 닿는다.

"고생 많았어요, 알리시아 양…!"

파울라는 알리시아와 마주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정신은 멀쩡한지를 구석구석 확인한다.

"아이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네! 이래서 내가 반대했던 건데! 알리시아 양 정신은 멀쩡하죠?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아니면 설마 누군지 모르는 건가요?!"

"파, 파울라 선생님…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어서 도련님을…!"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예요, 정말! 저기 저 냉혈한은 걱정할 것 없어요. 본인이 만신창이인 주제에 타인을 걱정하다니, 하여간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라니까! …어어?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나서려는 알리시아를 파울라가 온몸으로 막아 세운다. 알리시아의 의지가 파울라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여 마력을 끌어와서야 그녀를 막을 수 있었다.

"막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저라도 가야 해요…!"

"아, 정말 괜찮다니까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끄응… 아니,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팔락거렸는데. 알리시아 양! 알리시아 양! 진정하고 상황을 좀 봐 봐요. 지금 저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여요?"

"네…?"

알리시아는 고개를 들어 바르간을 찾았다. 그가 선방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지만 언젠간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도와드려야 하는… 건…데.

"휴우, 이제 좀 알겠어요?"

다리에 힘을 주는 것을 멈춘 알리시아는 가만히 서서 지금의 광경에 빠져든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은 이러한 것이구나. 파울라는 생각한다.

"알리시아 양, 들어 봐요. 제가 이래 봬도 아카데미아의 교수인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천재를 봐 왔겠어요, 안 그래요?"

파울라는 앞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말을 듣고 있을 것이라 믿고 계속 떠들었다.

"그중 제가 인정한 세 명의 천재가 있어요. 한 명은, 아카데미아의 총장. 그 사람은 정점이에요. 현재로서는 마법 분야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나를 근신 처리한 건 마음에 안 들지만요."

파울라는 살짝 찡그린 표정을 바로 하곤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다른 한 명은, 알리시아 양. 가장 최근에 인정한 천재예요. 제대로 마나를 활성화한 순간의 지속 시간이 6시간이라니… 이 사실이 퍼지면 나중에 교과서에 나올지도 몰라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놀라운 성취를 보이고 있죠. 그리고 마지막으론…."

트로아 제국의 제일가는 명문가.

슈겐하르츠 본가의 셋째 아들.

"바르간 도련님. 그는 두말할 것 없는 보석이에요. 제가 알리시아 양을 만나기 전까지 품고 있는 가능성 면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집안까지 받쳐 줘 실컷 지원받아 왔죠. 살짝 게으른 면이 아쉬웠지만, 최근에는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정말 달라졌더라고요. 그는 앞으로도 엄청나게 성장할 거예요. 그의 실력은, 벌써 웬만한 신입 용사 이상의 급이라고 봐도 돼요."

알리시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눈으론 바르간을 좇았다. 눈을 뗄 수 없다. 마법과 검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지금 이것을 보고 어떻게 눈을 떼어 다른 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괴물들은 미쳐 버린 것처럼 모든 무리가 달려든다. 그녀의 때처럼 일부가 아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모든 떼거리가 눈을 밝히며 달려든다. 그렇다고 순간적으로만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지금의 광경은 마치 개미 떼가 개미지옥으로 몸을 투신하는 것과 같다.

그 일종의 지옥 속에서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화려하지만 고고한 백조와 같이 동작을 이어 나간다. 그와는 대비되게 상대인 괴물들의 상태는 끔찍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은 잘리거나, 태워지거나, 재가 되거나, 뚫려 버린다. 인간 형태로 되어 있는 천재지변이 그들을 통과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거라고 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로? 이미 눈을 의심할 정도로 강한데…?

그만의 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경외심이 밀려든다.

예전의 마법을 몰랐던 시기의 그녀였다면 공포심만이 채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며 피하려 드니까.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마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인외하기에 마땅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치잇.

이게 뭐야.

이건, 사기야 사기!

틱틱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언니 샤를로테가 분한 표정을 지으며 한 사람이 일으키고 있는 기적을 보고 있다.

알리시아, 운이 좋았네.

목숨을 건졌어. 자만심에 취해 있는 줄 알았던 도련님이 설마 저 정도였을 줄이야. 대단하네.

이번엔 기회를 놓쳤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떠나지 않아. 계속 너의 곁에 머물 거야. 너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영원히 함께할 거야. 너도 잘 알고 있지?

너는 날 잊어버릴 수 없어.

더는 이어지지 않는 그녀의 날이 선 목소리. 그것을 마지막으로 샤를로테의 환영은 모습을 감췄다.

알리시아는 그대로 가만히 자세를 유지한 채 괴물들을 쓸어버리는 바르간을 지켜봤다.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15화

모든 적은 토벌되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적의 급이 낮은 개체였던 점도 있고, 바르간이 가지고 있던 기본 스펙이야 워낙 뛰어난 것이었으니까 말할 필요도 없다.

요 5개월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완벽히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실험하기에 적당한 실험체들이었다.

이번에 비밀 던전에서 얻은 이 유물도 쓸 만하다. 저택의 창고에 박혀 있는 찬란한 유물들과 비교해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정도.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유물의 소유권은 온전히 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네 사고의 흐름을 맞혀 볼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끝나 버린 전장에서.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서 있는 알리시아에게 말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워낙 강렬한 경험을 해서인지 기가 죽어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차올랐던 것은 안도감. 겨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해방감이다."

어느 때라도 사람의 가장 원천적인 욕구는 생존이다. 대부분의 생물은 그것을 약간만 건드려도 강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지금의 알리시아는 건들다 못해 파헤쳐진 상황이다. 수만 가지 생각이 들겠지만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다.

나는 순서대로 손가락을 피며 말을 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나에 대한 경외심. 보는 눈이 생긴 지금의 너라면 명확히 느꼈을 것이다. 평생을 시냇물만 보던 사람이 처음으로 바다를 봤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지."

자신의 몸의 안전을 느낀 이후로는 당장 눈앞에 보였던 상황에 대한 감정이다. 특히나 그것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라면 더욱 눈을 돌릴 수 없다.

"마지막으론, 의문점과 해석. 금일 겪었던 일들에 대한 너의 판단과 감정."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앞엣것들은 이미 그녀를 지나갔거나 잔여물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후에는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알리시아의 성격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본능적인 사고의 흐름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겠으나, 대충 큰 줄기만 보자면 이렇다. 이번에 보이는 반응으로 앞으로의 세부 일정이 결정될 것이다.

"…도련님, 하나만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알리시아가 말문을 열었다. 눈빛은 진지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물음을 허하마."

허락이 떨어지자, 알리시아는 고개를 간단히 숙이며 감사의 예를 보였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직시한다.

"괴물들을 이 마을로 부른 건 도련님께서 벌이신 일입니까?"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알리시아는 물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는 말이다.

"아니다."

단칼에 대답한다. 내가 그녀를 루프에 가둔 것은 맞지만 그건 시기를 이용한 것일 뿐 저 추잡한 놈들을 부르진 않았다. 현재로서는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없지만, 그것을 굳이 입으로 전할 필요는 없다.

한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관통할 것처럼 바라보던 알리시아는 내 대답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나름대로 내 말의 진실성을 확인한 것 같다.

"자, 궁금증이 해소되었으면, 이제 너의 대답을 들려주어라 알리시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지금까지 나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흘러가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며,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그녀의 안에서 세심히 검토되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알리시아는 잠잠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 괴물과 조우했을 땐 공포에 질려 사고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한심하게 죽어 나갔습니다."

알고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고, 그래야만 했다.

알리시아는 본인의 상황에 관해 판단이 가능했을 때부터의 기억을 꺼냈다.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공간에 몇 가지 의문점들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의문은 확신으로 변한다.

"그렇게 죽음의 굴레, 끄트머리에 와서야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유사한 일을 마치 빗댄 거 같은 상황을 직면하며, 이게 도련님께서 만드신 환상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과거를 고백한 인물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눈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사고가 가능한 상태라면, 그녀를 위기의 구렁텅이에 넣은 게 나라는 사실은 바보라도 알 정도로 명확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 중요한 것은 이 점이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현실이었고 고통이었다.

풀어 보자면 이런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현실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조금 전의 경험은 환각이었으며 가짜라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이번은? 다시 살아난 이번이 현실이 아니라는 증거는?

굴레 최후의 순간 언저리가 와서야 본인의 상태나 주변의 마나를 감지할 정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그전까지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기운을 감지하기 힘들도록 만들어 놓은 탓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능을 건드린 탓이기도 하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루프의 막바지에서는 지금까지 몇 번 죽었는지를 계산해서 남은 목숨의 개수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마나의 총량 따위는 체감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봐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붕괴한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총 몇 번의 꿈을 꿨는지 셀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없다. 감각이 망가진 상황에서 이전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리시아도 그렇기에 공포에 질렸던 기억은 최소화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이 너무나도 두려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모르기에 말할 수 없다.

"몇 번의 삶에서는, 혹시 도련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실까. 정말로 목숨이 끊기기 직전이라면 와 주시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겁의 고통 속에서 그런 희망은 금세 꺾여 버린다. 오히려 막바지에선 본인의 마나나 체력이 급격하게 깎여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그런 연약한 희망이 아닌, 생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불태운다.

그 전에 겪었던 환상과는 다르게, 마나 총량은 확인이 가능하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에게 가짜의 시간은 없었다. 모두가 진실됐으며 농밀한 시간이었다.

"그래, 그런 고뇌 끝에 결국 넌 괴물들과 싸우는 길을 선택했고, 오러를 두르며 녀석들을 베어 갔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배경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욕구일 테고."

에델과 프리지아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다. 눈이 멀어 버린 그녀를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준 역할을 맡았으니 말이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 너무 에둘러서 표현하여 해석하기가 난해하구나. 짧게 정리해라."

알리시아의 의중은 눈치챘다. 그녀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알기에 부추긴다.

그녀의 푸른 눈은 바다를 연상시키듯 더욱 깊어진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은 멈췄다. 목구멍에서 이어진 목소리는 강단 있고 굳셌다.

"부디, 제가 도련님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었으나 어조나 태도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지금처럼 가르침을 주시고 아둔한 저를 일깨워 주십시오."

그녀는 말한다. 루프의 반복 속에서 깨달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지독한 증오를.

"제가 용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앞으로 제가 얻을 모든 영광과 부를 전부 도련님에게 바치겠습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알리시아는 입을 다문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 가치를 내세웠다. 본인이 지닌 가능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교섭의 재료로 삼았다.

물론, 이건 정당한 교환이 되지 못한다. 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그녀의 미래도 함께 움켜쥐고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알리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지의 표명.

알리시아는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실제로, 나는 합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내 목적에 달성한 이상 쳐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알리시아는 나에게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로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상태, 강인한 정신.

알리시아는 자신이 조건을 충족시켰고, 부가적으로 용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더는 나의 입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갈망이 되었음을 알린 것이다.

"좋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알리시아. 네 생각이 맞다. 나는 너를 내치지 않을 것이고 지금까지 했듯 너를 지원할 것이다."

이래야지.

그래, 이래야지만 내 목표에 가까운 모습이지.

그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트라우마의 극복에 성공했다. 저 눈을 봐라. 저 심지 곧은 눈을! 더는 아카데미아에서 겁쟁이 알리시아라고 불리던 불명예는 찾아볼 수 없다. 완전히 흔적이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적을 썰어 버리는 데 있어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

그게 내가 이번에 얻고자 했던 것이니!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였구나. 이렇게 되기까지 쉽지 않았겠지. …그래, 내 이를 축하하여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마."

몸에 달려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러웠던 그것을 빼내 그녀에게 던진다. 애초에 그녀의 결심을 확인하면 건네주려고 준비한 물건이다.

철컥. 가볍게 던진 그것이 알리시아의 품에 안겨 철 특유의 소리를 냈다. 알리시아의 머리가 검을 따라 길게 움직인다. 그러곤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 동그란 눈을 키운다.

"도련님… 이건…! 이것을 제게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여간 리액션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다. 굳이 온몸을 사용해서 저렇게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건만.

"그래,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 검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너다. 알리시아."

오러를 두르지 않았어도 감도는 맑은 푸른 빛이 검 전신에 환하다. 알리시아가 마을에서 죽어 나가고 있을 때, 나는 파울라와 브람을 데리고 나이아스의 비밀 던전으로 들어가 그 던전의 유일한 유물인 저 검을 꺼내 왔다.

1품(品) 유물, 나이아스.

과거 정령위(位) 공작이었던 물의 정령 나이아스가 깃들어져 있는 검이다.

본래라면 주인공인 리암 녀석이 발견했을 적에는 그 정령이 죽어 버려 2품으로 강등되지만, 지금 저것의 안에는 죽어 가던 녀석이 잃어버렸던 힘을 되찾고 있다.

온전히 힘을 되찾는다면 틀림없이, 사실상 유물의 최고 등급인 1품의 힘을 보여 줄 것이다.

"그 말씀은 즉… 저를 위해서 직접 던전까지 행차하신 겁니까?"

쯧쯧. 생각하는 것 하고는. 아주 그냥 내가 사는 이유도 자신 때문이느냐고 묻지 그러느냐.

"기본적으론 우울한 녀석이면서, 이상하게도 너는 가끔 과하게 긍정적일 때가 있다. 당연히 결론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떨어지기에 움직인 것이다."

그런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알리시아의 굳어져 있는 눈동자가 흔들리며 무언가가 나오려는 것을 열심히 참으려 든다. 그러곤 견디기 힘들었는지 옅은 심호흡을 했고,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으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까막눈이라고 해도 이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쯤은 알겠다며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불경한 마음을 먹기도 했고, 더 이상 나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나 뭐라나.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다.

"앗!"

오랜만에 알리시아에게 딱밤을 날렸다. 정신은 새로워졌어도 저 모습은 변하질 않는구나.

"그냥 조용히 받기나 하면 될 것이지 뭔 그렇게 잡설이 긴 것이냐. 너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 위한 일종의 계약금이니 더 이상 떠들지 말거라."

"계약 말입니까…? 이미 주종 계약은 맺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딴 종이 쪼가리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맺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저주이나 확실한 효력이 담긴 계약의 마법이다."

알리시아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한다. 올곧게,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본다.

"넌 정식적으로 나와 계약을 맺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것이다. 새롭다고는 말해도 체감될 정도로 그전과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어떤…."

"통제성."

이제부터 알리시아 재능은 족쇄가 풀린 미친 말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통제할, 거역할 수 없는 특별한 장치를 해 두어야 한다.

"나는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라서 말이다. 네 칼끝이 나를 향하지 않도록 보험을 드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거절은 없다."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을 입에 담았다, 입장도 입장이며 자신이 뱉은 그 말의….

"계약, 하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대답했다. 이것저것을 말해 주려 했는데 그런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단호하게.

"…이게 저주인 것을 알고도 뱉은 것이느냐."

배반하면 바로 죽어 버릴 수도 있는데도? 불평등의 극치로 빠져나갈 수 없는데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게 처음으로 도련님과 제가 나눈 약조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건 그런데….

알리시아는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각오는 끝마쳤다. 의지는 느껴졌지만, 설마 저주라는 말을 듣고도 이렇게 변함이 없을 줄은 몰랐다.

"어처구니없는 녀석."

그녀가 마차의 순간을 언급하자 그 장면의 기억이 되짚어진다. 분명 그때도 이 녀석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있었지. 별로 많지는 않지만, 내가 이 세계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순간은 전부 알리시아와 관련이 있었다.

"역시 미쳤다는 표현은 머리를 의미하는 게 맞는 듯하구나."

알리시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함을 나타냈다. 계약을 맺는 순간의 최대한의 예를 나에게 보여 준다. 자신은 준비되었으니 언제라도 걸어도 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더는 마차에서 보였던, 공포에 질려 있던 알리시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연약했던 것은 녹아내려 사라졌다.

터벅.

나는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리시아의 턱 끝을 잡고 올렸다. 태양이라기보단 달에 가까운 그 푸른 눈동자의 결정이 도드라진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설정된 것처럼 도저히 평범한 농부의 여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이미 충분히 알았으니 늦출 이유가 없다.

"내, 너를 받아들이마."

나의 시종, 알리시아.

16화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멸망해야 했을 루비드 마을이 살아남았다.

사태가 종결되고 마을의 주민은, 그중 특히 촌장은 땅바닥에 완전히 붙어 버린 채 몇 번이나 절을 해 댔다. 얼마나 해 댔으면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도 했으니 적당히 하도록 막았지만, 그는 연신 고개를 박아 댔다.

그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저희 마을을 구해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는 내가 호의로, 혹은 선의로 이 마을을 구한 줄 알고 있나 보다. 내가 아무런 이득 없이 이 마을을 구했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나는 그에게 똑바로 전했다. 그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인의 귀에도 확실히 닿도록 말이다.

"당연히 도로 받아 낼 것이다. 내가 너희의 목숨을 모두 구한 것이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마을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전했다. 본래였으면 망해, 이야기에서 퇴출당했을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타 버린 재 같은 것들을 쓸모가 있게 재탄생시켜 주는 것이다. 다소 굴리는 것쯤은 이 세계의 신께서도 용서해 주시겠지.

아,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다.

촌장과는 직접적인 계약을 맺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방적인 저주를 하사했다. 내 전문 분야가 저주, 그중에서도 환각계, 그리고 테이밍이니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나의 명령을 어길 시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 저주다. 맹독을 가득 머금고 있어 순식간에 너의 온몸 구석구석에 파고들지. 그 고통은 혀를 잘라 내서라도 바로 죽고 싶을 정도로 강력하다."

앞으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하니 필요한 목줄이다.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발동될 일도 없으며 평소에는 기력을 돋우는 친절한 효능도 있다.

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알리시아에게 건 계약과 뼈대가 같으나 세부 사항은 당연히 다르다.

이 마을은 앞으로 유용하게 재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이끌 인물로 촌장을 선택했다. 이런 작은 시골에서는 나이가 곧 직급이나 마찬가지다. 촌장 역을 맡고 있기도 하니 반발도 적고,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은 확인했으니 그가 적임자다.

수정도 하나 건네주어 원한다면 나와 통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멀리 있는 내가 그에게 지시를 내리기 쉽도록 한 것이다.

아 그리고, 그에게도 떨어지는 보상이 있다. 서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보상인데 그에게 있어 그것은 재산, 사람 이런 것보다 중요하다. 바로, 수명.

그는 내 휘하 전문 의사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게 된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질병이나 통증을 최소화시켜 주고, 마나를 강제로 단련시켜 체력이나 몸의 상태를 호전시키도록 할 것이다.

뭐, 이렇게 한들, 앞으로 20년은 더 살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5년은 더 멀쩡히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쓸모가 있으려면 그 정도는 버텨야지.

자, 그럼 알리시아는 어떤가.

무사히 루프를 마친 알리시아는 벌써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야 있어야 하건만 굳센 정신으로 버텨 내고 있다.

이 루프라는 것이 겉으로 보면 무척 효율적인 것으로 보이나, 알리시아가 같은 특수한 상황 아니면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을 정도로, 실상은 쓰레기 같은 효율을 자랑한다.

게다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상당하고, 며칠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부작용을 지니며 그것의 힘이 꽤 강력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에델이라는 꼬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과 내 방해가 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참 여러 가지로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여길 벗어나 마차에 타면 강제로 재워야겠다.

"무조건, 저택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버틸 겁니다…!"

"…알리시아, 고집 좀 그만 부려라. 눈을 감고 있는 시간과 뜨고 있는 시간이 동일한데도 말이냐."

"공주님, 졸려 보여요. 힘든 거죠? 괴물들이랑 싸워서 쉬어야 하는데 나랑 한 약속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죠?"

"아니에요, 에델…! 자, 자… 보세요! 이렇게나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는걸요?"

"곤듀님… 모미 흔들려…."

프리지아의 악의 없는 말에 알리시아는 당황해하며 팔을 크게 움직여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휘청거린다.

이상한 쪽으로 고집이 세단 말이야.

"그만, 그 촐싹거리는 행위를 그만둬라.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구나. 그런 괴랄한 짓을 하는 건 한 명으로 족하다."

"도련님, 지금 저를 보셨죠…? 왜죠, 왜 저를 본 거죠?! 선생을 공경하는 태도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무시하지는 말아 달라고요!"

파울라의 시끄러운 목청이 이 좁아 터진 집에 가득 찬다. 가구나 기구 들이 알맞게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집. 꼬맹이들의 부모가 정돈해 놓은 것이 눈에 띄지만 동시에 다소 난잡한 곳도 있다.

보아하니, 애들이 어지럽힌 듯하다. 이래서 애들은 질색이다. 말도 안 통하고 쓸데없는 낭비가 너무 심하다.

"나쁜 마법사가 대장 오라버니한테 대들어…! 대장 오라버니, 빨리 혼내요. 지금 혼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버릇없어질 거예요!"

에델은 나의 한쪽 팔을 그 작은 몸뚱이로 붙잡으며 말했다. 한 문장을 완성할 때마다 자기 쪽으로 끄는 것이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으려는 수작이다.

"에델…! 왜 나만 나쁜 마법사고 도련님은 대장 오라버니야? 누가 봐도 그 사람이 더 나쁘게 생겼잖아. 아니지, 그리고 원래 '나쁜 마법사 대장'이었잖아. 어쩌다 그렇게 호칭이 바뀐 거야?!"

내가 기괴한 붉은 생물들은 멸절시킨 이후부터 이 꼬맹이들이 징그럽게 달라붙는다. 더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내 옷자락을 당기어 관심을 끌려든다. 껌딱지마냥 엉긴다.

이렇게 귀찮게 굴 것이라면 차라리 나쁜 마법사 대장일 때가 나았다.

"대장 오라버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공주님이랑 같이 무서운 괴물도 다 무찔러 주고, 마을 사람들도 지켜 줬어. 그렇게 말하지 마!"

"마댜, 나쁘게 말하디 마!"

"프리지아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놈들을 전멸시켰어야 했던 건데…."

오라버니라.

나한테, 그러니까… 바르간한테 여동생이 마침 두 명 있긴 하지만, 둘 다 성격이 평탄하지 않단 말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차라리 이런 꼬맹이들이 동생인 편이 나으려나.

아니지, 걔네는 적어도 귀찮게 굴지는 않잖아. 귀찮게 굴기는커녕 평소에 대화도 잘 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파울라는 온몸으로 화를 표현하고 있는 에델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잠깐, 에델. 손등 좀 보여 줄래? 내가 뭔가 있어선 안 될 것을 본 것 같거든?"

"싫어! 이건 대장 오라버니가 우릴 위해 만들어 준 문양이야, 나쁜 마법사한테는 보여 주지 않을 거야!"

"우리라는 말은 설마 프리지아도…?!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여태까지 본 파울라의 표정 중 가장 놀람을 드러낸 듯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입을 벌리고 있다.

참고로, 내가 강제로 저주를 건 것이 아니다. 이 꼬맹이들이 촌장에게 무언가 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에게 저주를 걸어 달라고 조르기에, 입을 다물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해 준 것이다.

물론, 제 어미가 알면 요절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이 촌장의 문양을 보곤 탐을 내서 말이다. 하나씩 찍어 줬다."

"찍어 줬다니 그렇게 가벼운 게… 이거, 저주잖아요…! 이런 새파랗게 어린아이들한테 저주를 걸다니. 알리시아 양. 알리시아 양은 왜 갑자기 눈을 피해요? 설마… 알고 있었어요?"

"…네."

파울라는 더욱 눈을 키우며 입으로 입을 가렸다. 그 알리시아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묵과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선생님, 하지만 나쁜 저주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선 아무런 까닭 없이 그런 일을 하실 분도 아니고, 아이들의 몸에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요. 오히려 도움이 되는 저주죠…!"

"아… 알리시아 양이 도련님을 옹호하고 있어… 아, 잠시만요. 머리가 지끈거려요.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에 과부하가 걸렸어요."

파울라는 이번에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크게 한숨 쉬었다. 그러곤 알리시아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지적한다.

"알리시아 양. 지금, 명확히 저주라고 말했잖아요. 저주, 저주예요. 저주라고요! 공평한 계약이 아닌 일방적인 관계이기에 저주라고 불리는 거라고요! 지금 이게⎯."

"⎯알리시아. 파울라의 입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알리시아는 순간적으로 뛰쳐나가며 손수건으로 파울라의 입을 막았다. 파울라는 지금의 알리시아의 행동조차도 믿을 수 없다며 저항을 이어 갔다.

하여간 시끄러운 녀석이다.

***

떠날 시간이 왔다.

드디어 이 촌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져온 물건은 별로 없었기에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려 나서기까지 했으니 더욱 빨리 끝났다.

우리의 짐들이 마차로 전부 옮겨지자 에델과 프리지아는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참 정도 많은 녀석들이다. 뭐 얼마나 있었다고 저렇게까지 슬퍼하는지.

그런 생각으로 꼬맹이들을 보고 있자 그들에게 다가가는 알리시아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녀는 꼬맹이들을 안아 주며 달래려 드나 정작 본인도 상당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가 누굴 달래는지. 아무래도 알리시아는 저 녀석들과 정신연령이 딱 맞는 것 같다.

"에델, 프리지아. 건강하게 잘 지내요.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울지 말고요."

"훌쩍, 진짜죠…? 진짜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저희, 공주님을 기억할 거니까요. 공주님도 저희 잊으시면 안 돼요…!"

"곤듀님… 기억할게."

"절대로 안 잊어요. 그 증거로 자."

알리시아는 본인의 눈물을 닦은 뒤, 다른 손으로 새끼손가락을 펴내 보였다.

에델은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끼었다.

프리지아는 쥐방울만 한 손을 언니의 손에 올린다.

"저번 약속도 지켰잖아요. 이번엔 그때보다 시간이 좀 더 길 뿐이에요.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응, 믿을게요. 기다릴게요…!"

'내가 만나러 가는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런 약속을 하는 것이냐.'라는 말을 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효력도 없는 구두계약. 괜히 시간만 더 잡아먹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그쯤 해라, 알리시아. 저택까지 돌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에델, 프리지아."

"응 알겠어요. 그런데 공주님. 마지막으로 잠깐 이쪽으로. 아주 잠깐이면 돼요…."

에델은 알리시아의 귀를 자신의 앞에 놓이게 유도했다. 그러곤 까치발을 들어 무언가를 속삭이는데, 소리가 워낙 작아 뒤 문장만이 들렸다.

"…찾았다는 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에델의 귓속말을 들은 알리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내가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을 확인했는지 그런 게 아니라며 에델에게 강력하게 호소한다.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게 되면, 아무리 나라도 관심이 간다. 마차에서 재우기 전에 강제로 불게 만들어야 하나.

그 모습이 즐거운지 꼬맹이는 검지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헤실헤실 댔다.

"알고 있어요, 비밀이잖아요!"

17화

"그동안 고생 많았다. 지금의 너라면 1차 목표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야."

"전부 도련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알리시아에게 다사다난했던 루비드 마을의 에피소드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

알리시아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다. 기사가 왕에게 예를 표하듯 정중하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멈춘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다.

"마법과 검술 모두 훌륭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고 도련님께선 모든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저도 도련님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결과를 보이겠습니다."

"응당히 그래야지."

당장 일주일 후다.

나와 알리시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학 조건을 충족시켰고 무사히 입학에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며칠 뒤면 아카데미아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릴 입학식이 시작된다.

나는 모든 변화를 이끌고 그 종합체를 그대로 아카데미아에 꽂아 버릴 것이다. 과연,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생각했던 반응을 보여 줄까. 아니면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나를 즐겁게 해 줄까.

"도련님…?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떠올리신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별것 아니다. 그저 너의 놀라운 발전에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부끄럽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몸입니다."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알리시아. 소설에서 봐 왔던 그녀의 전성기와 비교해 보자면 큰 간극이 있긴 하지만, 스타트가 이렇다면 완주를 했을 때의 성적이 기대되는 법이다.

"겸손은 좋은 미덕이나, 너에게는 오히려 독이다."

지나치게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낮으니까 말이지. 최근에야 조금씩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며 무너졌던 자존감이 복원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너는 그동안 열심히 해 왔다. 실제로도 좋은 성적을 보여 주게 되었지. 이것은 단순히 재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알리시아의 귀가 단풍이 물들듯 빨개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지간히 칭찬에 약한 녀석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고생한 너에게 포상을 주려 한다. 이것은 본래 내 계획에는 없었던 것이나 네가 훌륭한 결과를 보였기에 치하하는 것이니, 거절하지 말아라."

"...."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마에 구멍이 날 줄 알아라."

움찔.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도련님의 뜻을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응. 이 정도면 제법 많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비교해 보면 훌륭한 변화다.

"그래, 그럼 긴말할 것 없이 출발하자."

"아,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야, 쇼핑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쇼핑… 말입니까?"

"설명은 귀찮으니 따라오기나 해라."

***

왁자지껄한 사람의 무리와 각종 물건의 향연. 축제라도 벌어진 듯 세상이 시끄럽다. 알리시아는 그 인파에 놀란 감정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도, 도련님…!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도시 로즈에 갔을 때보다도 많은 인파입니다! 이런 건 처음 경험합니다…!"

"…그만 그 촌티나게 동그래진 눈을 원래대로 돌려라. 너는 명문 슈겐하르츠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짝⎯!

알리시아가 자신의 손으로 뽀얀 두 볼을 강하게 때렸다. 소리가 꽤 괴랄하여 통증도 상당하겠건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됐습니다!'라고 말하곤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품위를 지키라는 말이었다만, 괴상한 짓을 하는구나. …하지만 뭐, 그것으로 되었다."

바르간이 알리시아의 손을 잡아끈다.

인상과 평소 행실로 보면 손도 얼음장처럼 차가울 것 같지만, 가끔 이럴 때마다 그녀는 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이끌려 앞으로 나아간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준다. 그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로 높은 계급에 위치해 있는 사람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동시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위해서 신경을 써 주는 것도 처음이다.

응.

그런데….

다 좋은데….

너무 빨라!

이 사람, 걸음 너무 빨라!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아니면 불같이 급한 성격 때문에 그런가? 이 정도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끌려가는 수준이잖아.

알리시아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하고 입 밖으로 자기 생각을 꺼냈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변함이 없지만 긴박했다.

"도, 도련님…!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간은 금이다."

"…제가 좀 더 속력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종종걸음으로 달려 그의 옆에서 걸음을 같이했다. 알리시아는 바르간과 함께 걸었다. 신장 차이로 인해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그와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

손의 통증이 사라지자, 그의 손의 온기나 촉감이 새삼스레 전해진다. 커다랗고 길게 뻗은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꽉 감싸고 있다.

어? 잠깐.

이러면 그냥 손을 잡고 걷는 거 같은데…?

알리시아는 문뜩 이상함을 감지했다.

인식이 바뀌자, 돌연 그녀의 손에서 삐질삐질 땀이 새어 나오며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서 긴장된다거나 하는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생전 처음 잡아 보는 남자의 커다란 손의 감각이 그녀를 잡고 흔들어 댔다.

남자랑 둘이서.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쏠린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미해져 갔다.

뭐야… 뭐야 이거! 잠깐만!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데?!

지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나? 당황스러워하는 거 다 티 나는 건 아니겠지? 얼굴 빨개진 거 아니야?

사고가 복잡해지니까 덩달아 체온도 높아진다. 목 주변이 후끈해진 것을 알 수 있다.

호흡도 가빠지고, 혈액순환도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놓고 싶어도 그가 워낙 강하게 잡고 있어 푸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

슬쩍 남자의 얼굴을 훔쳐본다. 신장 차이가 워낙 나기에 높이 올려다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 참…."

언제부터인지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던 바르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손의 힘을 풀었다.

알리시아는 그에게서 해방된 손을 매만지며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들인다. 바르간은 전혀 피할 생각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눈매를 하고 있다.

"망상이 끝도 없이 이어지니까 더는 끌고 갈 자신이 없다. 제 주인에게 욕정하지 말라고 그리도 일렀건만. 아니지, 이건 주인의 잘못이다. 교육을 다시 하도록 해야겠어."

"도, 도련님?! 전혀 아닙니다! 욕정이라니… 저는 그런 불순한 마음을 일절… 일절…."

'일절 품지 않았습니다!'

알리시아는 속으로 소리쳤다.

그에게 설렜다거나 한 것은 단연코, 절대 아니다. 처음 남자 손을 잡아서 긴장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응? 그러면 그에게 떨렸다는 말이 되는데. 뭔가 아니면서도 부인할 수는 없는 그런… 아아, 어떻게 대답해야!

"죄송합니다…."

애매하면 사과를 하는 게 맞다.

긴장되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뭔가 억울한 느낌도 들지만, 사과하자.

그녀는 그렇게 마음먹고 자신이 평소에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인 사과의 자세를 취했다. 허리를 꼿꼿이 내리며 떨림을 멈춘다. 그녀가 보이는 완벽한 자세였다.

"…툭하면 욕정하고, 심지어는 훈련하는 주인을 몰래 훔쳐보는 변태가 내 전속 시종이라 큰일이구나."

"…그, 그것은… 면목이 없습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너무 억울해…!

***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워낙 아름다우셔서 뭘 입어도 다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으으."

확실히.

히로인이라 그런지 미모는 뛰어나다. 그동안 구질구질한 옷이나 시종들의 옷만 입고 있어서 그렇지 꾸며 놓으니 웬만한 고위 귀족 여식들 뺨에 발길질하는 수준이다.

"좋은 애인을 두셔서 이런 옷도 사 주시고. 좋으시겠어요~"

"그… 애인이 아니라…."

"그 녀석은 내 시종이다. 괜한 헛바람을 불어넣지 말도록."

"아… 그러셨군요? 미남미녀로 잘 어울리셔서 그만… 제가 오해를 했군요."

옷 가게의 주인은 아차 하는 얼굴로 상황을 모면하려 들었다. 서둘러 다른 옷을 가져오며 이것도 요즘 인기가 많은 옷이니 입어 보라고 한다.

"자, 자. 어서 입고 와 보세요. 틀림없이 어울리실 거예요."

"네, 네… 괜찮을까요, 도련님?"

내가 턱 끝으로 갔다 오라고 알리자, 등 떠밀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알리시아. 갈아입을 때마다 이러고 있다.

포상이라고 했으니 눈치 좀 줄이고 즐기면 좋을 것을.

"지금까지 시착한 옷이 총 몇 벌이었지?"

주변에 있던 다른 점원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지 이제 1시간 정도 되었나.

"이번에 입고 오실 옷을 포함하면 총 일곱 벌입니다."

"일곱 벌이라…."

여자들에게 옷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다. 다다익선임은 틀림없겠지만 우선 필요한 옷만 있으면 되니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방금 추천받아 간 옷은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을 수 있는 드레스였지?"

"네 그렇습니다. 요즘에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이너분이 만든 작품입니다. 백작가의 자제분들도 자주 와서 사 가십니다."

"그렇군."

지금까지 입은 옷들이 평상시에 입을 만한 것 위주였으니까 정장을 사야 한다. 사실 정장이 여기 온 주목적이다.

또각또각.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알리시아가 구둣발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이번 옷은 좀 화려한지라 다른 옷들보다도 가장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뽀얗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되었다.

"어떠신가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요? 제가 볼 때는 마치 천사가 하계에 강림한 것 같은 신성함마저 느껴지는데요."

환한 얼굴로 자랑을 하듯 말을 수놓는 가게 주인. 그래, 좀 비싼 옷이라 팔아 보겠다는 마음은 가상하다.

"…부끄럽습니다."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외관이 뛰어나면 뭣하나 알맹이가 이런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본다.

음… 그래도 포장지가 화려하니 내용물도 값져 보인다.

"알리시아, 옷은 마음에 드느냐?"

"가격 걱정이 드…."

"뭐?"

"…는 기미가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듭니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 중에서도 이 드레스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진심입니다."

뭔가 시원치 않은 대답이지만 거짓을 입에 담는 것으로는 안 보인다. 워낙 티가 잘 나는 녀석이니.

"계산하겠다."

"네에, 네에~! 어떤 옷으로 드리면 될까요?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전부 다시 확인해 드릴게요."

"아, 확인은 됐다."

이미 충분히 다 봤다.

"그럼… 어떤 옷으로 드릴까요?"

"전부 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들 전부."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살짝 어벙한 표정을 짓던 여자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마치곤, 오늘 본 모습 중 가장 진솔한 웃음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

어느덧 어두워진 거리.

각종 가게의 조명이 거리를 밝힌다.

옷가게를 나오고, 알리시아는 자신이 들고 있는 짐의 무게를 버티고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나를 한 번 보고, 옷을 한 번 보고, 또 나를 한 번 본다.

"내가 너의 고생을 치하해 준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고작 한 벌을 살 줄 알았다니. 그건 네 주인에 대한 실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하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출발할 때 내가 일러둔 것이 있으니 입을 자유롭게 열지 못하고 있다.

분주하던 눈동자가 멈추자, 이번에는 옷을 들고 있는 알리시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바쁘게 움직인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항상 이렇게 온몸으로 표출되니 내가 모를 수가 있나.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드디어 다음 주다."

"예…? 아… 네, 맞습니다. 다음 주는 아카데미아의 입학식이 있는 날입니다."

이 6달의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앞으로의 일정에 문제가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도록 말이다.

"내가 의미 없이 그 옷들을 사 준 것이 아니다. 너는 비록 시종이지만 슈겐하르츠가의 사람이고 그 입장으로 아카데미아에 가게 된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그에 맞는 복장을 준 것이야. 아무리 아카데미아의 교복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 입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것도 아니고."

그저 너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 모든 행동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니.

"도련님의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을."

오늘은 머지않아 시작될 전장을 위한 잠깐의 휴식. 본격적인 막이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18화

⎯⎯⎯⎯⎯

친애하는 친구 루이사에게.

친애하는 친구라니, 내가 썼지만 오글거리는 표현이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안 돼. 이제 편지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그만두고 싶잖아.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내가 편지를 쓸 일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야. 혹시 오랜만에 받는 절친의 연락에 울고 있는 거 아니야? 정말로 그렇다면 못 보고 있다는 게 한이다. 내가 근신만 아니었어도 아카데미아에서 직관할 수 있었을 텐데. 아, 생각해 보니 근신이 되지 않았다면 편지를 쓸 일도 없었겠다. 호호호.

총장님은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나를 근신 처리했을 때는 스승과 제자든 뭐든 연을 잘라 버리고 싶었는데 그 왜, 스승도 나이가 적지 않잖아? 아무리 여러 가지로 괴물 같은 사람이라도, 결국은 사람이니까. 수명을 이길 수는 없을 거 아니야. 가끔 생각이 나더라. 나도 나이가 들었나 봐. 감수성이 예민해져. 아, 물론 네가 나보다 한 살 더 늙었고, 내가 근신 처리가 된 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았지만!

네가 궁금해할 내 근신 기간 동안의 일들을 적어 보자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고 적어 둘게. 뭐? 아카데미아에서 일할 때보다 놀랄 일들이 뭐가 있느냐고? 그게 또 있단 말이지.

내가 슈겐하르츠 본가에서 일했다는 건 알고 있지? 거기서 엄청난 인물 두 명을 제자로 뒀어. 둘 다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한데 아마 보게 되면 너도 깜짝 놀랄 거야. 물론, 선생이 뛰어나니까 제자들도 재능을 보일 수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야! 입학식 때 한번 잘 찾아봐 내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뭐? 그냥 밝히면 될 것이지 왜 누군지 말해 주지 않는 거냐고? 에이, 그런 건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외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둘 다 상당히 눈에 띄니까 아마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나중에 확인할 테니까 반드시다! 꼭 찾아봐야 해!

아오, 팔 아프다. 이제 편지 줄여야겠어. 나머지 못다 한 이야기들은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잖아? 역시 나는 손보단 입을 움직이는 게 편하다니까. 만나는 날에는 진하게 한잔하자고. 날이 새도록 마셔 보자!

그럼, 그날을 기약하며.

이만 마칠게. 잘 지내고 있어.

네 유일한 친구 파울라가.

ps. 지금 네 앞에 있는 물건들은 쓰레기가 아니라, 내 짐이야. 마땅히 보낼 곳이 없어서 네 방으로 좀 부탁했어. 버리면 안 된다? 곧 가지러 갈게~ 호호호.

⎯⎯⎯⎯⎯

꾸깃.

한 여성이 다 읽은 편지를 주먹으로 구겨 버렸다. 눈썹이 모이고 핏줄기가 올라와 안 그래도 험한 인상이 더욱 짙어졌다.

"이 썩을 파울라⎯⎯⎯!"

여성의 포효는 마나와 함께 방에 가득 차 주변의 물건들을 흔들었다. 달달달. 진동하는 찻잔의 소리가 요란하다.

일을 마치고 편히 쉬어 보려는 마음으로 방 앞에 도착했는데 자신을 반기는 거대한 짐의 무리.

처음, 물건의 주인이 파울라라는 것을 듣자마자 전부 꺼내서 부수거나 아카데미아 밖의 호수로 던져 버릴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겨우 참고, 천천히 그녀의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작은 편지 한 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개념은 있네.'라고 생각하며 펼쳐 봤건만, 글에서 느껴지는 파울라의 안일한 태도가 루이사의 분노를 부추겼다.

쿵⎯.

루이사는 그녀를 위해 제작된 특수한 샌드백에 주먹을 날렸다. 샌드백에는 그녀의 주먹의 흔적이 고스란히 파여 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된다.

쉽게 달아오르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케데미아에서 만들어 준 것인데 처음에는 필요 없다고 거절했으나, 한 번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담배보다 애용하고 있다. 사람을 때릴 수는 없으니 그 대용품으로 치는데 효과가 괜찮다.

쿵⎯.

또다시 엄청난 충격파가 퍼진다. 타격을 받은 샌드백은 물결치듯 퍼졌는데, 당사자의 몸에는 잔물결조차 없다. 한 점의 지방도 없어 보이는 단단하고 날렵한 신체다.

"그 개자식. 오기만 하면 뇌에다 술병을 꽂아 버려야지."

두 번의 타격을 마친 루이사는 진정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봤을 땐 아닌 것으로 보여도 상당히 진정된 모습이다.

"그딴 녀석을 동기로 둬서 이게 무슨 꼴인지."

파울라와 루이사는 학생 시절, 아카데미아에 입학했을 적부터 함께한 친구 사이다. 졸업해서는 용사 시절을 함께 보냈으며, 지금은 둘 다 교수로 활동 중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질긴 인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루이사는 이를 빠드득거리며 생각했다. 파울라의 편지는 읽다가 화가 치솟기도 했고 별 중요한 내용도 없었지만, 인상적인 부분은 있었다.

"제자들이라고?"

파울라가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무시할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그녀는 안다. 파울라는 자신을 전율시키는 정도가 아니면 이 정도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흥미가 없는 것은 거들떠도 안 보는 그녀가. 마법에 대해서는 나름의 권위를 차지한 그녀가. 자신의 제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까지 자랑하기에 바빴다.

'뭐 하는 놈들인데 녀석이 이 정도로 말하는 거지.'

루이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구겼던 편지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

지면에 펼쳐진 초록빛의 향연이 눈부시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릇한 풀들이 자신의 몸을 뽐낸다. 그러다 구름이라도 들어와 햇빛을 가렸는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색을 변화시키며 몸을 숙인다.

비구름이 몰려든 듯 세상이 어두워진다. 파울라는 이 그늘에 그리움을 느꼈다. 태양을 가린 그 거대한 무언가를 보며 감탄한다.

"오랜만에 보는 아카데미아도 멋지네?"

하늘의 도시.

마법의 상징.

그 용맹한 자태 앞에서 풀잎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웅장하면서도 고고하게 상공에 떠 있는 공중도시는. 그녀가 속해 있는 용사사관학교, 아카데미아였다.

전 세계에 용사를 전문으로 키우는 기관은 아카데미아를 포함해도 두 곳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교회를 주관으로 세워져 있는 이곳들은 비현실적인 외관을 자랑한다.

"저기 저 커다란 마석의 1할만 가져가도 엄청난 부자일 텐데."

파울라는 너스레 웃음을 지으며 본인이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음을 인정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아카데미아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가능토록 만든 구심점이자, 끝도 없는 마력의 덩어리.

그 크기는 압도적이라 파울라가 말한 1할이면 웬만한 저택의 크기였다. 가져갈 수도 없을뿐더러 티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카데미아에서 일할 때에는 그 위용이 잘 체감되지 않지만, 이렇게 가끔 밖에서 바라볼 적에는 저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해진다.

다양한 탈것을 타고 왔지만 여기서부터는 아카데미아를 감상하며 천천히 걷고 싶었던 파울라는 타고 온 지팡이를 자신의 곁에 띄운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 져 있는 땅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기분 좋다. 약간 드는 냉기가 오히려 활력을 불어넣는다.

"도련님은 몰라도, 알리시아 양이라면 분명 아카데미아를 보고 나서 넋이 나가겠지?"

파울라는 혼자서 쿡쿡 웃어 대며 알리시아의 놀란 표정을 상상했다. 바르간처럼 직접 놀리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녀도 알리시아의 반응을 볼 때마다 속으로 웃어 댔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귀여워서라는 이유로.

그들과 함께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파울라는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기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아카데미아에서 다시 볼 수 있다.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 놀래켜 주겠지.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헤어짐이 아쉽지 않았다.

'알리시아 양은 무척 우울해 보였지만.'

헤어짐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안쓰러운 과거 때문인지 정신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변모했어도 그런 면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점도 알리시아만의 매력이다.

"브람 씨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바르간이 하도 부려 대느라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브람은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뭘 그렇게 바쁘게 다니는지 피로 칠갑이 되어 있을 적도 많았다.

대충 듣자 하니 루비드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한 내막은 알려 주질 않으니 알 방도가 없다.

바르간은 그녀가 브람의 동향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알 필요 없다.

"선생을 뭐로 아는 건지… 그 잘난 도련님은…! 에잇!"

파울라는 길가에 굴러다니던 돌을 가볍게 찼다. 주변에 보이는 이도 아무도 없겠다. 약간의 마력을 담아서 말이다. 심심한 화풀이로 툭 하고 찬 것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나 동물이 있으면 크게 다칠 정도의 힘이긴 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지금이라면 괜찮….

"어… 어어?!"

아니, 왜 저런 풀숲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는 거야!

고속으로 날아가는 돌 앞에 예상치도 못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파울라는 황급히 손을 뻗어 돌의 속력을 멈추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돌은 청년의 얼굴 바로 앞까지 빠르게 날아가.

"깜짝이야."

츠으으⎯.

청년의 손안에서 멈춰 섰다.

청년도 마나를 제법 다를 줄 아는지 주변에 일렁이는 마나와 돌을 잡은 손에서 치지직 하며 전류가 튀겨져 나간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천만다행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크게 다칠 뻔했다.

"휴우… 아, 이게 아니지. 괜찮아요? 미안해요, 설마 거기서 사람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파울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청년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만행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당연하건만 청년은 오히려 웃어 보이며 파울라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 괜찮아요. 실제로 사람이 나올 만한 곳이 아닌 건 맞으니까요. 다치지도 않았고. 보세요."

청년은 손을 활짝 펴 보이며 자신의 상태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했다. 손에는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굳은살이 알알이 박여 있다.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음? 그런데 진짜 왜 거기서 나오신 거예요? 그쪽은 마땅한 길도 없었을 텐데."

"아, 그게 말이죠…."

사삭사삭. 청년이 빠져나온 풀숲의 가지들이 움직이며 자잘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온 여성이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뱉으며 빠져나왔다.

"이래서 길 찾는 건 나한테 맡기라고 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데미아로 가는 길은커녕 사람이 다니는 길도 아닌데 억지로 들어와선 이렇게… 어?"

'누구….'

청년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은 파울라와 마주치곤 그렇게 말하려 했다가, 멋쩍게 웃고 있는 청년을 발견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가늘어져 대상을 압박하고 있다. 말썽꾸러기인 그가 이런 뜬금없는 상황에 조우할 때라면, 대개 잘못한 사람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뭐야, 또 뭔 잘못을 저지른 거야. 리암."

19화

"굉장한 우연이네요…! 설마 아카데미아의 교수님과 만나 뵙게 될 줄이야."

"호호호, 그러게. 나도 설마 신입생을 벌써 둘이나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아, 내가 교수니까 말 놓아도 되지?"

리암이라는 남학생과 에밀리라는 여학생의 동의가 떨어지기도 전에 편하게 말을 놓은 파울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걸음을 함께했다.

그러던 와중, 에밀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을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선 왜 이곳에 계시는 건가요? 지금 이 시기면 한창 아카데미아의 모두가 바쁠 것 같은데."

에밀리의 순수한 물음에 파울라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자랑하였건만 차마 근신이 풀리고 복귀하는 중이라고는 입에 담기 힘든 것이다.

"아… 그건 말이지."

"다 이유가 있으셨겠지. 다른 지역으로 파견 같은 걸 갔다 오신 거죠?"

"뭐…? 어, 어어. 맞아 맞아. 눈썰미가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파견을 갈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음, 그런 거지. 호, 호호."

에밀리의 의문에 먼저 답을 내보인 것은 파울라가 아닌 상황을 지켜보던 리암이었다.

파울라의 시점에서, 리암이라는 남학생이 자신의 처지를 알 겨를은 없었으나 우연히도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교수님들은 바쁘시구나'와 같은 혼잣말을 했다.

그것을 들은 파울라는 주제를 전환할 겸 둘에 대해서 물었다.

"두 사람 다 오리아 지역에서 왔다고 했지? 오리아 지역이면 트로아 제국의 거의 끝자락인데 용케 잘 도착했네?"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시골 마을에서 왔어요. 오는 데만 1달 정도가 소요됐죠. 교통비도 어마어마했고요."

"리암, 네가 길을 헤매지만 않았더라도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 없다."

여학생이 살짝 놀리듯이 남학생을 공격하면 남학생은 익숙하게 인정하거나 나름대로 받아친다.

조금 전에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파울라는 이 둘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봐?"

친한 남녀 사이를 본다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질문.

"아니요."

"아, 아니에요!"

리암과 에밀리는 제각기로 부정적인 답변을 내밀었다.

오호라.

이건 예상 밖이다.

남학생이 여학생을 잘 받아 주기에 분명 마음이 있다면 그건 남학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연정이 있는 것은 여학생이다.

남학생은 담담하게 답변하는 반면, 여학생은 살짝 놀란 것처럼 발끈하고 나선다.

"그냥 소꿉친구일 뿐이에요. 저희 마을의 촌장님의 딸이 얘라서 말이죠. 서로 남매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마, 맞아요. 남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런, 여학생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남학생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에밀리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있다.

"아, 그그, 입학증! 둘 다 입학증 받았지? 혹시 보여 줄 수 있을까?"

파울라는 서둘러서 다음 화두를 던졌다. 둘은 품속에 고이 간직해 두고 있는 입학증을 꺼내 파울라에게 보였다.

먼저 확인한 것은 여학생인 에밀리의 것. 고급 진 편지 봉투를 열어, 멋들어지게 문장들이 즐비한 곳은 무시한다. 시선을 입학증의 아래로 내리자 진한 붉은색의 인장이 눈에 들어온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문양이다.

그 안에 담긴 미세한 마나를 느낀다.

'여학생은 평범한 수준인가. 아니, 사실 그보단 아래… 재능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든 정도. 시골 마을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인재로 입학 규정은 통과했겠지만 아카데미아의 천재들과 자웅을 겨루기에는 힘들 것 같네. 그래도 마나가 호쾌하고 신속해서 검술과 섞일 때 나름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거야.'

"에밀리는 검사를 직업으로 골랐구나? 적성에 맞는 걸 골랐네."

"그런가요?! 다행이다. 마법에 대한 재능이 부족한 건 알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좋아하고 자신이 있어서요."

"잘 선택했어. 마나가 검사와 어울리는 속성이야."

"그런 것도 알 수 있는군요? 아, 리암은 어때요? 애 원래는 저위 마법 하나도 하지 못했던 애인데 몇 개월 만에 이상할 정도로 부쩍 강해지고 있어요. 혹시 천재성이 늦게 개화한 걸까요?"

"에밀리…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 한번 봐 볼까?"

파울라는 호응을 하며 에밀리의 장단에 맞추었으나 속으로는 그녀가 살짝 과장을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위 마법 하나도 못 하던 애가 단 몇 개월 만에 아카데미아에 입학할 정도로 마나를 발전시켰다? 알리시아 양 같은 특출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없다. 아카데미아는 그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디 보자~."

리암의 입학증서를 펼친 파울라는 에밀리의 것과 마찬가지로 글씨는 무시한 채 아래에 새겨져 있는 인장에 주목했다.

오, 인장의 문양이 잠재력을 나타낸다. 그녀의 말대로 어느 정도의 발전 가능성은 있는 모양이다.

안에 담긴 마나를 끄집어낸다. 그러자 담겨 있던 정보들이 파울라에게 전해진다.

'일반적인 신입생의 평균을 살짝 상회하는 정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자존심이 누구(?)처럼 높지만 않다면 아카데미아에 가서도 기죽지 않고 있을 수 있어. 음? 이 찌릿한 느낌은. 오호, 번개 속성에서 특히나 두각을 드러내네. 그럼 잠재력은… 어라?'

파울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다시 확인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그러시죠?"

리암은 살짝 긴장된 시선으로 파울라를 바라봤다. 파울라는 찌푸린 인상을 펴지 않은 채 리암을 마주한다.

"안 보여."

"네?"

"네 잠재력, 뿌예서 안 보여."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은 알겠다. 이 남학생은 잠재력이 있으며 아직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밤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질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재능이 있으면 있는 거지 숨겨져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저주에 걸려 있다는 말인가? 그거랑은 다른 거 같은데. 뭔가… 다른 차원의 이질적인 그런 느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나 참.

"아니, 이번 신입생들은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예?"

자신의 두 제자를 떠올린 파울라는, 마땅한 반응을 보이기 난처해하는 남학생을 보곤 헛웃음을 뱉었다.

***

"아이고 좋다~!"

"먼지 날려. 침대에서 뛰지 마."

"에밀리, 그러지 말고 너도 누워 봐 엄청 푹신하고 냄새도 좋아."

"됐어. 애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야."

잔잔하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에밀리는 태평한 리암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아라는 거대한 공중도시에 들어온 이후로, 본인은 당장 내일 있을 입학식이 실감이 나 긴장이 되는데 이 남자는 아무런 의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

"네가 왜 바보야?"

"너 때문이잖아 이 바보야."

리암은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일관했다.

에밀리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자신보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리암이 더 똑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바보였어."

"지금 우리 무슨 대화 하는 거야 에밀리? 이거 대화가 되고 있는 거 맞지?"

리암은 침대에 파묻혀 있던 자신의 상체를 일으켜 에밀리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자 에밀리는 긴장하며 살짝 고개를 뒤로 빼고 말았다.

"왜, 왜…! 뭔데?"

"에밀리, 너 많이 긴장했구나?"

"뭐?"

자신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밀리는 그렇지 않다며 강하게 부정했으나 곧 바람에 숙이는 풀잎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맞아. 긴장돼…. 떨려서 미치겠어."

"그렇게 신경 쓰지 말라니까."

"어떻게 그래. 우린 마을의 자랑이고 나는 촌장의 딸인데."

구석에 있는 작은 촌 동네 출신인 두 사람이 아카데미아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동네 주민 모두가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를 정도로 환영할 일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두 마리나 난 것이다. 에밀리는 그들의 환호가 기뻤지만 동시에 천근과도 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재능 없이 마법에 대한 막연한 환상만 가지고 있던 자신의 소꿉친구가 바뀌어 버린 일도 있다.

갑작스레 자신을 추월하더니 이젠 언제 시야에서 사라질지 모를 정도로 질주한다.

그 사실은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우연히 아카데미아의 근처에서 만났던 그 교수님도 그의 잠재력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고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된다고 하셨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한 말이었겠으나 에밀리에게 있어 이는 리암을 인정한 것으로 들렸다. 아카데미아의 무려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소꿉친구를 인정했다.

리암이 한 걸음 또 멀어져 간다. 자신만을 내버려 둔 채로.

"에밀리, 아니 선생님. 괜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지금은 농담하고 싶지 않아. 리암."

"농담이라니.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리암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에밀리의 손을 천천히 잡아주었다.

"마법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배움을 얻지 못했었던 나에게 단지 소꿉친구라는 이유로 마법을 알려 줬던 건 너야, 에밀리."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어려운 일이야."

리암은 말을 잇는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감사하게 생각할 거야."

"...."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용사에 대한 꿈을 꿀 수도 없었을 거고,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오지도 못했을 거야.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리암은 장난기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름 에밀리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장난을 섞은 것이다.

그런 리암과 잠시 시선을 교류하고 있던 에밀리는 그의 마음을 느끼곤 살짝 기운을 차린 것처럼 새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면 뭐 해. 선생님을 쉽게 능가해 버렸는데."

"그럼 서로 도우면 되잖아. 내가 너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네가 힘들 땐 나의 도움을 받으면 돼."

에밀리와 리암의 공간을 밝히던 등불이 흔들린다. 에밀리는 그 등불과 같은 눈동자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런 모습은 에밀리, 너답지 않아."

"나답지 않다…."

에밀리는 그 문장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러곤 살며시 미소 지으며 용기를 보였다.

"확실히 나답지 않았네."

리암은 어느 정도 돌아온 그녀의 미소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소설에서 짧게나마 읽어 왔었던 그녀의 밝은 모습이다.

그는 잠시 생각한다.

이 소설 세계에 빙의가 되고 리암의 기억이나 감정이 이어졌기에 자신이 이 소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으로서 소설을 읽었던 기억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에밀리라는 이 여리지만 굳센 소녀는 굳이 표현하자면 조연이었다. 만약 리암의 기억이 계승되지 않았다면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이다.

그런 소녀가 이 험난한 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자신처럼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도 없는 평범한 소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의문이 끝자락에 박혀 있으나 리암은 애써 모른 척하며 에밀리를 끌어안아 줬다.

물론, 그 전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빠르게 두 번 눈을 깜빡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것'을 띄우는 데 필요한 행위니까.

⎯ 띠링!

대상의 스테이터스를 열람합니다.

에밀리

힘 : 3.5/10 ⦁ 체력 : 3.9/10

마력 : 2.9/10 ⦁ 정신력 : 2.9/10

방어력 : 3.3/10 ⦁ 민첩 : 4.3/11

이젠 익숙해진 투명한 창.

이 작은 것에 담긴 정보가 에밀리의 현 상황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다.

비교 대상이 많지는 않았으나 오늘 만났던 파울라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우연히 지나다니던 지원자들의 정보와는 얼추 비슷한 정도.

처음에는 자신보다 강했던 그녀가 이젠 추월당하여 느린 성장을 보이고 있다.

리암은 눈을 감으며 창을 껐다. 그러곤 마음에 떠다니는 이 불안한 감정을 씻어 낸다.

괜찮다. 할 수 있다.

아카데미아에 오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자신은 이 소설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뒷내용을 훤히 알고 있다.

문제라는 파도가 자신을 덮치기 전에 서핑 보드를 준비해서 그 파도에 타거나, 설령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면 물에서 빠져나와 이번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된다.

"괜찮아 에밀리. 우린 잘해 낼 수 있어."

자신만의 특별한 시스템도 있다.

소설의 내용도 알고 있다.

비록 주연의 몸은 아닐지라도 주연 이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상태창이라는 힘은 마법에 빠삭한 자라고 할지라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힘.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

그래, 우린 반드시 이 소설의 해피엔딩을 볼 수 있어.

***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난 이번 신입생 수석으로 연설하게 된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훤칠하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는 당당하게 입학생들의 앞에서 자신을 밝혔다. 그의 동작은 기품이 깊이 배겨져 있었고 어딘가 우아함을 느낄 정도였다.

단어 하나하나에는 뭔지 모를 힘이 실려 있었고, 발성이나 발음이 스피치 전문가처럼 또박또박했다.

마이크의 역할을 하는 마도구를 잡은 손은 한 마리의 백조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거두절미하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하지.』

품위가 있는 말투에서는 짙은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같은 학생임에도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는 신입생의 대표로 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그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읽은 소설의 주역이었으며 아카데미아의 악역 대장 노릇을 하던 자였으니 모를 리가 없다.

리암은 그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말투가 차가워서가 아니다. 그가 위압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뭐야. 이게 뭐야.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분위기는 소설 속 그 사람 그대로인데.'

심장박동은 빨라지며 온몸의 세포가 경종을 울린다.

바르간이라고?

그 악역 바르간?

왜?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왜 네가 거기에 서 있는 거지?

이상하다.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이번 신입생 수석은 악역인 네가 아니라.

'주인공'이었을 터인데.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대사가 결정타를 먹인다.

『너희는 구더기다.』

"맙소사."

안정적으로 줄거리 위를 달리던 기차가 돌연 탈선했다.

20화

바르간의 앞날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인 알리시아. 나는 그녀가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감과 동시에 사슬을 하나씩 묶어 두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배신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빙의를 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그녀에게 많은 시간과 재산을 투자했다.

아깝지는 않다. 나를 향해서 노려지고 있던 날카로운 명검을, 이젠 내 손아귀에 잡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했다.

하나, 검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주인이 그에 견주지 못하면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다.

바르간의 재능과 초기 스펙은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현 상황에서 뛰어나다 뿐이지 이것만으로도 닥칠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알리시아에게 투자하는 이외의 시간 대부분을 나에게 집중했다. 틈틈이, 세밀하고 정교하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굳이 하나하나 언급하지는 않겠다. 바로 명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결과가 눈앞에 존재하는데 구질구질하게 나의 성장 과정들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난 이번 신입생 수석으로 연설하게 된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라고 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연설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만 약소해서 말하자면, 입학 조건을 충족시킨 자들 중 특출난 몇 명을 선발했고, 그 안에서 따로 치른 시험에서 내가 1위를 차지했다.

그뿐인 이야기다.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거두절미하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하지.』

중요한 단어이니 대상자들을 한 번씩 훑어 줬다. 녀석들은 아직 자신이 당할 치욕이 어떤 것일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구더기다.』

마도구에 담긴 내 목소리가 강당을 꽉 채우며 멀리 퍼져 나간다. 중간중간 불쾌했던 작은 소음들도 모두 홀린 듯 잦아들어 간다. 그들을 차례로 눈에 담는다.

어떤 이는 자신의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눈살을 찌푸린다.

또 어떤 이는 눈을 끔뻑이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눈깔이 튀어나올 듯 부라리며 이를 갈아 댄다.

『작고 연약하며, 부패물 속에서 떼로 살아가고. 더러운 것을 먹고 자라, 성충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더러운 것을 싸고 먹지.』

참으로 같잖은 인생이로다. 이 얼마나 볼품없고 하찮단 말인가.

지잉⎯.

투명한 보랏빛의 무언가가 넓고 빠르게 나아가게 만든다. 나를 중심으로 한순간에 퍼지는 마나의 진동. 짙지는 않다. 농도가 짙었을 경우에는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관계자들이 나설 테니까.

『제대로 된 사고도. 제힘으로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추잡한 입을 벌리곤 들어오는 배설물만을 우적거리는 구더기.』

그나마 유일한 장점은, 주연들의 성장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먹이의 역할을 한다는 점일까.

『그게 너희다.』

당연하게도, 신입생 중에는 콧대 높은 타국의 고위 귀족들도 있다. 도발적인 발언을 참지 못하고 욕을 뱉거나 나를 단상에서 물려내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올 만도 하건만 아무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작게 진동하기만 할 뿐. 전혀.

나는 그 꼬락서니를 보며 조소한다.

『구더기답게 꿈틀거리는 꼴들이 볼만하구나. 마치 며칠은 지난 시체의 가죽을 벗겨 그 속내를 본 듯하다. 불만이 있으면 나와라. 나와서 항의를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모두가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뛰어난 자이거나, 파훼법을 아는 이들, 그리고 덜떨어지는 평민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나를 막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알고 있다. 내가 말하는 구더기라는 명사가 본인들을 지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굳이 내가 말로 언급하지 않아도 체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입에 담는 것은 몽매한 자들을 위한 나의 선의이자 배려다.

『현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너희. 그래, 너희다. 구더기라는 말은 너희를 대상으로 한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이런 수준 낮은 저주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경직된 우매한 것들아.』

진지하게 연설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살짝 담겨 버렸다. 다시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미련한 구더기들을 바라본다.

몸의 움직임을 제한당한 그들의 주위에는 마치 자신이라고 광고를 하듯 머리 위에 환한 보랏빛의 결정체가 반짝인다. 게임으로 치면 NPC라고 알리는 커서와도 같다.

『귀족의 자제. 너무나도 아름다운 울림이지. 하나, 너희들에게 그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이들은 이제야 지금의 상황을 깨달았다. 현재 저주에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소위 나름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들이거나 어렸을 적부터 마법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자들이다.

서로 면식이 있는 자들도 꽤 있다. 얼굴을 마주치는 어리석은 것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계급 말고도 그들을 묶는 또 하나의 공통점.

『너희는 수준이 떨어진다.』

아카데미아는 사람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이른바 영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가장 큰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에서 파생된 기관.

이 말은 즉.

재산, 인맥, 명예.

이 듣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세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아카데미아라는 이야기와 같다.

너무나도 향기롭지 않은가?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단순 경쟁률로만 봐도 1,000 대 1 이상을 자랑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너희는 칭송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스스로 합격했다는 사실을 창피해하고 자신의 나태함과 헛되이 산 인생을 되돌아보며 쓰레기통에 얼굴을 처박아야 한다.』

앞에 나열된 이들 중 몇몇은 나의 가문을 알고 대항할 생각을 일찍이 접었으나, 대부분 이들은 안면의 근육을 달싹거리며 분노를 표현하려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오, 한 녀석의 반응이 유독 거세다. 입을 뻐끔거리며 눈을 부라린다. 녀석의 성의를 봐서라도 제한하고 있는 힘을 줄여 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슈겐하르츠라고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거 아닙니까! 지금 어떤 일을 벌이신 건지 알고 계신 건지요⎯⎯!"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울분을 터트리듯 말하는 남자.

미약하지만 나에 대한 협박이 담긴 말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등급이 나눠진다 이 말인가. 웃기는 일이다. 그래 봤자 억지로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차이이거늘.

『그 장갑에 달린 묘한 문양의 자수를 보아하니, 오셀의 랑피트 백작가 놈이구나. 심지어 직계로 보이는군.』

그의 외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종합하여 신분을 밝혔다. 저렇게 자신의 가문을 표시하길 즐기는 놈이다. 상당히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터.

『랑피트가는 오셀 왕국 내에서 만들어지는 마도구 원료의 상당량을 책임지고 있지. 따라서, 입지가 넓으면 넓었지 좁다고는 할 수 없고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가문에 대한 정보를 뱉었다.

그는 처음에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벙하니 있다가. 곧 깨달은 뒤에는 주체되지 않는 분노를 쏟아 냈다.

"지금 나와 내 가문을 모욕하는 겁니까?!"

그가 열이 끌어올렸다는 것을 표시하듯 붉어진 얼굴로 나를 삿대질한다. 무언가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대충 보면 그냥.

『돼지가 울부짖는군.』

"뭐, 뭐…? 지금… 지금 대체 무슨 망발을…."

가문을 등에 업고 아카데미아에 입학했다. 그나마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합격했다. 아카데미아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합격 기준을 낮춰 두지 않았다면 통과하지 못했다.

재능이 없다는 말은 핑계다.

집안의 뒷받침이 부족했다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너는 그저.

『'랑피트가'라는 고급 천으로 포장된 돼지가 아닌가.』

"…!!"

『어려서부터 받아 왔던 영재교육, 주위에 잘 갖추어진 마력을 단련하기 위한 환경들. 값비싼 지팡이며 심지어는 유물들까지. 수많은 혜택을 받으면서도 이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 아니라, 치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카데미아에 간신히, 정말 어렵사리 통과한 좀 나가는 귀족의 자제들. 애초에 이들의 목적은 용사가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사교의 장으로 쓰기 위해. 혹은 주입된 사상을 바탕으로 아무런 줏대도 없이 입학한 것이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따져야 하는 것은 목적에 대한 갈망. 녀석들에게는 진정성도 종착점도 없다. 단지 주입된 욕망을 따라갈 뿐.

내가 싫어하는 부류 중에서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어리석은 녀석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성향, 재능.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파악하려고도 하지 않는 벌레들.

"슈겐하르츠 네놈이…⎯!! 어, 어어…?"

랑피트가의 애완돼지는 도축당하기 전 발악하는 가축처럼 목청을 나가라 소리를 지르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안정제를 맞은 듯 수그러들었다.

저런 괴음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걸어 둔 것인데 제대로 작동했다.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몸의 상태를 편안하게 하고 기분 좋은 잠을 잘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치유 마법으로 사용되는 저주이니까.

졸지에 뒤에 있던 다른 학생이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는 꼴이 되었다.

이제 저놈한테는 신경 끄고 나머지 대사나 이어 가도록 하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후우⎯⎯.

한숨을 쉬며 주위를 환기한다.

『욕망을 내세울 것이라면 적어도 실력을 갖춰라. 귀족이라면 그에 대한 자격을 보여라. 그토록 사랑하는 계급에 따른 차별의 혜택을 누리려면, 최소한 너희가 무시하는 이들보다 뛰어난 점을 입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단순히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해서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두 발로 밟고 있는 사람의 무리가 떠받들 정도의 무언가를 갖추고 있어야 진정한 계급의 수혜자들이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놈들이 그저 혜택을 누리는 꼴은 너무나도 볼품없다.

『앞으로 짧지 않은 인연이 되겠지. 뭐가 됐든 너희도 아카데미아에 합격한 신입생이 아닌가. 불만이 있으면 방금 전의 그 돼지처럼 언제든 나에게 직접 분노를 표출해라. 등급전이라면 내가 친히 받아 줄 터이니.』

손가락을 튀기며 그들에게 걸었던 제약을 풀어 준다. 묶여 있던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소음이 섞여 강당이 시끄러워진다.

그러나 몸이 자유로워진 이들은 나에게 따지려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겠지만.

뜻이 용사에 없으며 가문의 명예가 제일인 녀석들이다. 비록 내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라도 그들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왜냐?

내가 슈겐하르츠니까.

게다가 이미 랑피트가의 남자가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를 똑똑히 지켜봤다. 나와의 격차가 명확하니 함부로 덤비는 것은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너희가 특별할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현재 너희의 가치는 먹이의 기능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시선을 옮기며 전체적으로 둘러본다. 이 소란의 장에서 유난히 적요한 이가 하나 있다.

수많은 관중이 각자의 생각을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는 강당에서 한 남자가 돌이 된 것처럼 굳어 있다.

보랏빛의 구체는 떠 있지 않았으나 통제당한 사람처럼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학생이 흔들어 보기도 하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 녀석에게만 특별히 강도 높은 저주를 내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눈에 들어온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마력을 담은 어구로 이 소란을 고요로 잠식시켰다.

***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잊지 못할 수석의 연설이 끝나고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리암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했다.

차가워진 안색으로 몸을 진정시키지만, 쉽사리 몸이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

'바르간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본래였으면 주인공이 해야 했을 연설을 녀석이 했다. 원래의 전개와 달라졌어. 어째서?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야.'

잘 생각해 보자.

그는 이번 연설에서 배경에 비해 뛰어난 성취를 보이지 못한 이들을 강하게 비난하며 구더기라고 불렀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말이 안 되는 공격적인 대사였지만 지금 주목할 것은 겉이 아니라 내용이다.

그가 지정한 인물들에게는 저주와 표식을 남겼으며 상황을 파악했을 때, 이것은 평민들을 제외하고 귀족들에게만 행해진 것으로 에밀리 또한 걸리지 않았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일반 평민인 자신에게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저주를 걸었다. 보랏빛의 무언가는 뜨지 않았으나 확언할 수 있다.

실수? 설마하니 실수로 자신에게 저주를 건 것일까. 아니, 확실히 아니다. 그는 순간이지만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봤다. 저주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조소했다.

그래.

이건 마치….

'나의 능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며 가진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비웃은 것처럼.'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스토리가 바뀐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수많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빙의가 되고 나서 별다른 나비효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설마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사실 이 소설 세계의 전개가 애초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설정되어 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진짜 만약의 경우이지만. 바르간도 나처럼 이 소설에 빙의된 빙의자인 것일까?

아직은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다. 순탄하게 흘러가던 철로에서 이렇게 벗어나다니. 이래서야 앞으로 안정적으로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리암, 리암! 듣고 있어 리암?!"

이명처럼 울리던 에밀리의 목소리가 순간 또렷하게 들리며 혼미해져 있던 리암의 감각을 돌려 낸다.

커진 동공으로 에밀리를 보던 리암은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에 잠겼다는 것을 인지하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약간의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지금 다급한 것은 리암이 아니라 에밀리, 그녀였다.

"리암! 어떻게 해! 이것 좀 봐!"

"왜…? 뭐 때문에…."

리암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에밀리는 살짝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한 채 펄럭거리는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다급한 것은 또 처음이다.

"멍 때리면서 뭐 하고 있던 거야, 반이랑 조 편성이 끝났다니까! 진짜, 진짜로 큰일이라고…!"

반과 조의 편성은, 입학 성적 1위부터 10위까지가 한 명씩 조원을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는 성적순이다.

이를 개인이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리암도 에밀리와 다른 조, 크게는 다른 반이 될 가능성을 당연히 고려하고 있다.

그녀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뭐?"

리암의 시선은 에밀리가 쥐고 있는 것으로 향했다. 그 끝에 닿는 것은 리암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에밀리가 자신과 다른 조가 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밀리… 너…."

"리암… 나 어떻게… 나, 나…."

⎯⎯⎯⎯⎯⎯

1반 배정 결과

1조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알리시아

세레나

에밀리

토이렌 트로아 핀

….

⎯⎯⎯⎯⎯⎯

"나… 이번 수석… 바르간이라는 사람이랑 같은 조가 되어 버렸어…."

21화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군."

입학식이 끝나고 맞이한 기숙사의 고요한 밤. 나는 종이에 명시된 조원들을 확인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우선 내가 지정해서 뽑은 알리시아. 그녀가 나와 같은 반, 같은 조가 되는 것은 정해진 절차였다.

내 검이 다른 곳에서 쓰인다면 애써 손질한 의미가 있겠는가. 당연히 이번 수석을 차지했던 이유에 이러한 점도 고려된 것이고. 그래,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 치고.

다른 조원들의 이름을 읽어 본다.

세레나, 핀, 그리고… 에밀리.

핀을 제외하면 내가 알고 있던 구성원들과 아주 다르다. 하기야, 알리시아의 성적과 내 성적에 변동이 생겼는데 그대로인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에밀리와 같은 조가 될 줄은 몰랐군."

리암의 소꿉친구이자 히로인 중 하나였던 에밀리와 같은 조라.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리암 그 녀석은 지금쯤 정신줄을 놓았겠군. 자신의 알던 이야기에서 벗어난 것과 나의 존재에 대한 것만으로도 복잡할 텐데 심지어는 현재 자신의 유일한 아군마저 갈라지게 되다니.

흥미로운 점은 나와 리암이 같은 1반 소속으로, 대부분의 반 학생들이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다만 알리시아와 에밀리를 똑 떼어서 내 쪽에 붙인 꼴이 되었지만.

일이 재미있어졌다. 에밀리는 리암에 대한 애정이 깊은 여자이니 이러한 면을 잘 이용한다면 기존에 준비하고 있던 그림을 보다 풍성하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도련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겁니까?"

생각에 잠겨 있자. 항상 입고 다니던 시종의 옷이 아닌, 아카데미아의 교복을 입은 소녀는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눈은 동그란데 입가에 진 잔잔한 미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 갈수록 기본 탑재(?)된 표정의 깊이가 깊어 간다.

"앞으로의 아카데미아 생활이 기대돼서 말이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련님의 은혜 덕분에 저도 무사히 입학하여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인사는 되었다. 이미 질리도록 받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나 말이라 해도 자주 들으면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너는 이 자리에 서 있을 거였다. 그것도 자유의 몸으로.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숙이려던 알리시아의 행위를 막았다. 그녀는 주춤하며 숙이던 자세를 똑바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어… 그런데 뭣 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알리시아만의 독특한 의문의 표현.

보나 마나 입학식에 대한 건으로 묻는 것이겠지. 그녀에게는 내막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으니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단체 저주를 건 것은 괜찮다. 아카데미아에 미리 허가를 받아 둔 것이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사소한 저주일지라도 끝까지 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갑자기 수석이 학생들에게 저주를 걸어 버린다면 중간에 개입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을 막지 못할 정도로 만만한 곳도 아니고 말이지.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그 찝찝하다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 있구나?"

내 말을 들은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물음을 이어 갔다.

"…맞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귀족분들에게 이렇게까지 하신 연유 또한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굳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단체로 적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궁금한 것도 많은 녀석이구나. 그래, 너에게는 특별히 알려 주도록 하마."

이번에 저주에 걸려 창피를 당한 녀석들은 별로 중하지도 않은 조연들. 그러나 갑질을 하기를 즐기는 놈들로 귀족의 품격과 가치를 떨어뜨리며 아카데미아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 이라는 건 표면상의 이유고.

진짜 이유는 명료하다.

"녀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

"시답잖은 놈들이 우쭐대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이게 진짜 속내지. 아무리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달아 놓아도 핵심은 이것이었다.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그 멍청한 주인공 녀석을 포함해서.

알리시아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멈춰 있더니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한 듯하다.

"뭐, 사실 아카데미아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창피를 주지 않았을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더욱 치밀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원래 음지에 있는 토양이 더욱 질척거리지 않는가.

나름대로 이해를 한 알리시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자기 나름의 해석을 이어 갔지만, 아직 온전히 해결되지 못한 퍼즐 조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별일은 없었다고 한들 아카데미아에서 허락한 것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도련님께서는 명문가의 자제분이시고 수석을 차지하셨으나 그래도 수많은 신입생 중 한 명으로…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을 욕보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앗!"

타악⎯!

오랜만에 들린 청명한 소리가 알리시아의 이마에 울린다. 앞머리로 가려져 있으나 작은 틈새로 금세 붉어진 것이 보인다.

"알리시아, 너는 네 주인의 속이 굉장히 좁다고 여기고 있구나. 내 심기가 불편한 것은 너의 필요 없는 뒷말 때문이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나를 뭐로 보는 건지. 귀족의 모범이 바로 여기에 있건만.

나는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무시한 채 주변 마나의 흐름을 파악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군.

주인과 시종의 관계라고 해도, 너무 늦은 시간까지 남자 기숙사에 이 녀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것이 없다. 이만 돌려보내야겠다.

"그만 가거라. 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끝이 났으니 네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축객령이 떨어지자 알리시아는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것을 챙기곤 깊게 고개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도련님."

"그래."

적당히 손을 저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알리시아는 방을 나가는 순간에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그녀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나는 머릿속에 시간표를 떠올렸다. 아직 수면을 취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다. 남은 자유시간은 무엇을 한다.

"그게 좋겠군."

남은 시간은 마나 총량을 넓히는 데 시간을 쏟도록 하자. 가만히 있어서 뭐 하겠는가.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유익하게 보내지.

***

또각또각.

아침 햇살이 드리우는 아카데미아의 긴 복도. 루이사는 언제나처럼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잘 단련된 육체가 땅에 닿을 때마다 울림이 커져 간다.

'틀림없어, 그 녀석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오랜 악연인 파울라가 제자라며 자랑한 두 명 중 하나. 슈겐하르츠에서 일했으니 당연히 한 명은 그쪽 사람일 거로 추측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괴짜인 녀석이지만.'

어렵지 않게 광범위 마법을 건 녀석이다. 마나의 소비가 심할뿐더러 발현 시간이 오래 걸릴 법도 하건만, 수석이라는 그 녀석은 발을 까딱이는 것. 그 작은 동작 하나로 시전 했다.

루이사의 걸음걸이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를 처음 봤던 순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입학식이 있기 전, 수석은 다짜고짜 회의실에 찾아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귀족이랍시고 말투나 행동에서는 예의를 갖추었으나 미리 연락을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례한 행위였다.

총장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교수와 회의를 하는 중이었지만 그 예의 없는 귀족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총장도 대단한 인물이지.

대담하지만 싸가지 없는 녀석의 의견은 이러했다.

"이번에 있을 수석 연설에서 신입생들에게 저주를 걸 것이니 방해하지 말아라."

이 문장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듣기에는 이렇게 들렸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본인만이 아니었는지 주위에서 듣고 있던 몇몇 교수가 벌떡 일어나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윽박질렀다.

그녀도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를 욕하지는 않았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기죽기는커녕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상한 것처럼 더욱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이번에 들어올 썩은 잎들의 숨을 죽여 주겠다."

덧붙여지는 그의 발언에 루이사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방안을 이야기했다.

아카데미아는 용사를 육성하는 기관이지만 동시에 고위층, 인재들을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엘리트 집단에서 물이 고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욕과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들어온 놈들이 많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루이사는 예전부터 이런 기본 마음가짐이 되지 않은 부류를 싫어했으며 할 수만 있다면 아카데미아에서 내쫓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이미 합격한 녀석들을 억지로 쫓아낼 수는 없어도,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을 억제해 줄 것이며 으스대는 꼬락서니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손을 들어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어떤 결과가 되어도 그녀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수석, 네 녀석도 버릇없는 고위 귀족의 자제인 것은 맞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이렇게까지 나온 것이겠지. 그렇다면 어디 한번 네 그 잘난 힘을 보여 봐라.'라는 사고도 기저에 깔렸었다.

어차피 제대로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면 창피를 당하는 것은 수석일 테니까. 자신은 손 안 쓰고 코를 풀 수 있으니 좋고.

그가 떠나고 나서 모두는 새롭게 발의된 안건에 대해서 논의했고 항상 그렇듯 다수결에 부치기로 했다.

교수들의 의견은 반으로 나뉘었다. 꽤 높은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인데, 그의 발언에 절반이나 찬성을 한 까닭은 본래 수석이 자유롭게 연설할 권리를 가졌다는 점과 그가 사후에 있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슈겐하르츠나 되는 가문의 자제가 그렇게 선언했고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목격했다. 직접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가벼운 입놀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가 총장의 의견에 집중하는 가운데 그는 모두의 이목을 받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해 보도록 하세.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바로 교수들이 개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의 의견이 수락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교수들이 끼어들 틈 없이 수석은 자신의 말한 시나리오를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태연스럽게.

또각.

루이사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녀는 신이 난 것처럼 올라간 입꼬리를 내렸다. 몸에 들뜬 기운을 제거하고 인상을 일부러 험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에게 각인될 첫인상은 중요하다. 심지어 자신이 맡은 반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곤란한 문제아들로 가득한 것 같으니 더욱 주의해야 한다.

끼익. 루이사는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외친다.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그 새파랗게 어린놈들을 반긴다.

"반갑다! 내가 너희의 담당 교수다."

그녀의 등장으로 공중을 떠다니던 자잘한 소음은 사라졌다.

그들의 시야에 루이사가 들어온 것과 함께. 그녀의 눈에도 학생들이 담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독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는 인물. 건방진 표정으로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앞서는 녀석.

'너는 특히 눈여겨보겠다. 슈겐하르츠.'

기껏 내린 그녀의 입꼬리가 도로 올라가 버렸다.

22화

알리시아를 거두었으며 성장을 순조롭게 이끌어 내고 있다. 나는 아카데미아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리암에게 내 존재를 알렸다.

초기의 목적은 전부 달성했으니 이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한다.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빙의한 소설 또한 빙의물로, 내 입장에서 주인공인 리암에게도 주인공이 하나 있다.

액자식 구성이라고 보면 되려나. 진짜와 가짜 주인공을 운운했을 때의 가짜 녀석을 말하는 거다.

원래였으면 우리 고고하고 품위 있는 왕자님께서 당당하게 수석으로 입학하셨어야 했을 테지만 내가 가로채 버렸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아마 상당히 자존심에 금이 갔을 것이다. 지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밀려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놈이라서 특히.

우리 왕자님에게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살 코털을 하나씩 뽑으며 건들면 된다. 너무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 슬금슬금 기어가면 된다.

천천히.

느긋하게.

그러다 보면 정확한 타이밍이 도래한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자.

1학년들 중 주연 인물들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펼쳐 보이며 제대로 충돌하는 시기.

2학기 '기말고사'가 되기까지는 아직 멀었으니까.

그전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음미하며.

점찍어 둔 인재를 포섭하고.

나를 귀찮게 할 단체에 살며시 독을 흘린다.

그러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 융통성 있게 행동하자.

계획이라는 건 딱딱하여 그것만으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계획과 계획의 사이를 부드럽게 움직이게 만드는 우연성이라는 연골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도련님, 도련님."

강의실 앞에 선 루이사는 빔프로젝터를 이용해서 발표하듯 공중에 마법으로 일종의 홀로그램을 투사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홀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어두운 공간이라 대부분의 학생이 그 반짝이는 마법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말을 거는 인물은 루이사가 아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습니다."

옆에서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이는 미성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현상을 신기하다는 듯 약간 입을 벌리며 두 눈을 반짝이는 알리시아였다.

'음?'

주변의 시선이 느껴진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알리시아의 외관에 넋이 나간 몇몇 학생들이 루이사에게 집중하지 않고 알리시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긴, 알리시아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외모가 아니니까⎯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해하고 싶지 않다.

저런 것들이 나와 같은 신입생이라니.

'꼭 저런 것들이 조연을 떠맡아 하지.'

그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자 이를 느낀 녀석들은 원래부터 교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조용히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부끄러운 것을 들킨 사람처럼 놀란다.

특징은커녕 이름도 전혀 기억 안 나는 놈들이다.

그들이 시선을 회피한 것처럼 나도 그들에 관한 관심을 죽이고 있는데. 조연들과는 다른, 익숙한 이의 시선 또한 그 안에 있었다.

'이게 누구야.'

꼴에 주인공이라고 다른 조연들과는 다르게 그는 알리시아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그 까닭은 알리시아보다 내가 눈에 띄는 게 아니라, 아마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겠지.

나와 마주한 리암은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이더니 눈을 피한다. 역시 저럴 줄 알았다.

녀석의 암울한 표정을 보니 두뇌가 팽팽 돌아가며 어떻게 해서든 현 상황을 분석,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리암의 표정이 어두워질수록 시소의 원리같이 나의 기분이 고조됨을 느낀다.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나는 저 녀석을 싫어하나 보다.

심지어 이건 바르간의 감정도 아니라 소설을 읽었던 순수한 나의 감정인데도 말이다.

"도련님, 저도 저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겁니까?"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언제나처럼 어린아이같이 놀라는 알리시아. 무의식이라 그런지 나를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원래였다면 알리시아는 내 옆자리가 아니라 리암의 옆에 앉아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었지.

소설로 보면 나름 인상적인 장면이었는데. 뭐, 지금은 주인공이든 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마법에 헤실대고 있지만.

"…?"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곤 알리시아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려진다. 이어서 시선을 내리더니 자신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손을 뗀다.

어차피 또 죄송하다는 말이나 늘어놓을 테니 괜히 말 걸지 말고 교수에게나 집중하자.

"…그렇게 돼서 1학년 때, 두 번의 기말고사와 클래스전(戰) 등이 너희가 졸업에 필요한 점수인 '카티아(Cattia)'를 가장 많이 벌 기회다. 카티아가, 너희가 용사가 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거고."

홀로그램의 이미지가 바뀌며 이와 함께 어두운 강의실을 채우는 빛도 바뀐다. 루이사는 특유의 어조로 당당하면서 익숙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입학 성적에 따라 나뉜 카티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단 몇 달만 지나도 주변인들과 비교하면 덜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녀가 지금 이 발표를 듣고 있는 누구도 이 대상에서 예외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자, 학생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보였고, 그녀는 이것을 즐기는 듯 길게 웃었다.

짝!

그러고는 손뼉을 치며 꺼져 있던 조명을 도로 돌려놓는다.

"여기까지 대략 설명이 끝났는데 질문이 있는 학생이 있나?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절차상 일단은 묻지."

귀찮으니까 질문은 받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서 한 루이사는 제 뜻을 제대로 이해한 학생들이 손을 들지 않자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기가 찰 정도로 원작 성격 그대로 반영된 녀석이다. 아마 파울라의 친구였지? 어쩐지.

"이후에 조원들끼리 단합 훈련을 하는 일정이 남아 있지만, 아직 우리 반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 우린 뭘 하고 있으면 될까?"

루이사는 주변에 있던 한 남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대상자의 인상이며 말투가 내 기억에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주요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 그게 그러니까… 용사로 활동 중이신, 아카데미아 출신 선배들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건…."

"오오, 옳다 옳아. 나도 정확히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루이사는 대답을 한 학생의 등을 손으로 팡팡 때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지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손에 등을 맞게 된 그는, 상당한 충격이 전신을 감쌌으나 칭찬을 들어서인지 환한 안색을 보인다.

"그런 의미로 무기고에 가서 연습용 무기를 받도록 한다. 조장들은 조원들이 각자 어떤 무기를 골랐는지 보고하도록."

"저… 그럼 선배들에 대한 건…."

"자자, 빨리 조원들끼리 모여서 움직여."

***

널찍하고 밝은 내부의 무기고로 이동한 우리는 각자 직접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고 판단되는 연습용 무기류를 고르고 있었다.

이것은 신입생들이 멋대로 실전용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없도록 한 장치였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놈들이 마음대로 휘두르고 다니다가 사고라도 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무게도 그렇고 강도도 그렇고 아쉬운 점이 많은 검입니다."

알리시아는 나이아스와 가장 유사해 보이는 대검, 클레이모어를 선택했는데 몇 번 휘둘러 보고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뱉었다.

"1품 유물인 나이아스만 들고 다니다가 이런 허접한 철 덩어리를 집으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시골구석에서 자란 여식이라 할지라도 몇 번 귀한 것을 접하다 보면 보는 눈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반 농민들이 한평생 할 수 없을 경험과 물건들을 봐 온 그녀의 평가가 높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

"너희도 어서 고르도록 해라. 시간은 충분히 있다만 낭비할 필요는 없다."

나는 조원이 되고 나서부터 어두운 안색으로 일관하는 에밀리와, 한마디는커녕 입을 벌리는 것조차 목격한 적 없는 세레나. 두 여자에게 말했다.

그들 외의 또 다른 조원인 남자, 핀은 신이 나서 이리 저리를 돌아다니기 바쁜데 이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세레나는 내가 재촉하자 몇 번 흘깃 보더니 조용히 몸을 움직여 근처에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에밀리는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는데 아무래도 리암과 떨어진 충격이 큰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 나랑 같은 조가 돼서 충격을 받은 건가?

"어차피 네 녀석이 연모하는 놈은 같은 반이 아니더냐. 애새끼도 아니고 언제까지 그렇게 궁상떨고 있을 거지?"

"뭐, 뭐야… 당신이 뭘 안다고…요."

말은 저렇게 해도 그 녀석의 이야기를 했다고 죽어 있던 눈동자에 생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감정적인 녀석이다.

"내 눈이 장식으로 보이더냐. 네가 틈만 나면 몰래 다른 조의 남성을 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너는 처음 반에 도착했을 때 그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지. 이 말은 즉, 높은 확률로 아는 사이라는 말일 테고."

"훔쳐보지는 않았어…요! 그냥… 그 아, 아니지. 지금 내가 이걸 왜 설명하고 있는 거야."

에밀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걸어가 진열되어 있던 발키리 소드를 골라 들었다. 길이가 중간은 되어 양손으로 휘두르는 검이다.

"이거면 충분해. 어차피 나는 근접 무기 사용자로 이 조에 편성된 거잖아…요."

"그딴 것 말고. 쇼트 소드나, 커틀러스 같은 리치가 짧으며 파고들기 쉬운 것을 선택해라."

"단검보단 장검이 일반적이고 익숙한데."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는 덜떨어진 것을 조원으로 둘 생각은 없다. 네 특기가 무엇인지, 어떤 게 가장 효율적일지를 고려해라."

어차피 머지않아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검을 깨닫게 될 것이지만 미리 알려 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에밀리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중에 무기를 바꿀 기회가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번 한 번은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시도하려는 건 좋은 자세이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꿀 테니까 알아 둬…요."

경어를 사용할 건지 말 건지 확실하게 해 줬으면 할 정도로 답답한 언어 구사다. 그녀와 나의 계급 차이가 명확한데 이토록 애매한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은.

아카데미아에서 동급생끼리는 계급에 상관없이 반말이나 가벼운 존칭어를 사용하도록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였으면 '요'는커녕 굽신거리며 허리를 펴지 못해야 정상이건만 아카데미아에서는 예외의 상황이다.

별로 마음에 드는 규칙은 아니나 앞으로 수많은 규칙을 어기게 될 예정이므로 이 정도는 귀족의 관용으로 넘어갈 수 있다.

"네가 있던 촌구석에서는 말투를 그따위로 하도록 배웠나?"

"이건 단지 어색해서 그런 거지 우리 마을이 이상한 게 아니야… 요!"

"...."

이 한심한 장면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알리시아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말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럼 자신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시종 관계는 예외다. 감히 나에게 반말을 뱉겠다는 허튼 생각은 버려라."

"그, 그런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했을 뿐입니다!"

"과연 그럴지. 알리시아. 네가 나를 얕잡아 보는 날은 너에게 끔찍한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고 여깁니다만, 조심하겠습니다…. 저어, 하온데 도련님께서는 어떤 무기를 선택하신 겁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품에 감췄던 물건을 보였다.

이 쓰레기의 창고에서 건질 것은 하나도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골라야 한다면 이게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고른 물건이다.

"도련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혹시 잘못 고르신 게 아닌지…."

『선택이 완료된 조의 조장은 와서 보고해. 이제 곧 단합 훈련장에 가야 하니까.』

알리시아의 의문에 대답해 주기도 전. 루이사가 마력을 담은 언어로 모두에게 뜻을 전달하자, 나도 그것에 맞게 움직였다. 알리시아에게는 간단하게만 대답해 줬다.

"우선 갔다 오겠다."

핀 녀석은 무기를 다 골랐으려나. 아직도 고르지 않았다면 어차피 어중이떠중이 조연이니 대충 아무거나 적어 넣어야겠다.

23화

서걱, 서걱!

알리시아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성인 남성 크기가 조금 못 되는 골렘이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진다. 거대한 검을 들면서도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동작이 매끄럽고 신속하다.

하나, 또 하나.

그녀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힘을 보전하며 잔인하고 매섭게 적들을 벴다. 순하던 눈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맹금류와 같은 포식자의 살기만이 득실거린다.

"뭐야… 초보자가 아니라, 굉장한 실력자였잖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밀리는 입을 떡 벌린 채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내뱉었다.

대충 봐도 그녀가 얼마나 알리시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외모가 곱상하고 물러 보이니까 얕봤겠지. 그녀가 겪어 온 일들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저런 대검을 식칼 휘두르듯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줄이야. 심지어 안정적인 오러까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현재의 에밀리는 오러를 두르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정밀도와 형태의 유지에 난항을 겪고 있을 시기이다. 능력치 면으로 보면 민첩이 다소 괜찮은 것 말고는 별 볼 일 없는 게 저 녀석이니까.

순둥순둥하게 생겨 검은커녕 젓가락 하나 들기 힘들 것 같은 알리시아가 자신보다 뛰어나며 전투에 익숙한 것이 놀랍긴 하겠지.

뭐,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순하던 인상은 어디로 가고 한 마리의 맹견처럼 거세게 골렘들을 썰어 버리는 모습은 이질적이긴 하다.

그렇게나 순하던 알리시아를 누가 저렇게까지 변화시킨 건지. 누군지 몰라도 참.

잘했네.

그때 귀를 스치는 바람.

쉐악⎯⎯⎯⎯!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귓바퀴를 강하게 울리는 공기의 진동. 그 소리의 원흉은 빠르게 다음 화살을 장전하며 조준을 하곤 추가 타격을 잇는다.

최전방에서 직접 적들과 맞대고 있는 알리시아의 검에 둘린 오러 정도로 밀집된 농도를 자랑하는 활촉.

세레나는 무표정을 잃지 않으며 차례차례로 골렘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녀가 노리는 대상물을 잘 보고 있으면 알리시아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위협이 될 것 같은 순서로 노리고 있다.

명중률도 상당히 높아 그녀의 손을 떠난 활 대부분이 골렘을 통과하거나 박혀 있다.

정말 단 한마디도. 감탄사나 하품도 하지 않았던 세레나는 본격적으로 골렘들이 몰려오자.

눈매 정도만 살짝 바뀌는가 싶더니 조장인 내가 지시한 어려운 지시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

상당히 까다로운 지시 사항이었음에도, 세레나는 내 의견이 합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고 있다.

역시 이 녀석은 지금 이대로도 쓸 만하다.

'쓸모없는 녀석들이라고 하면.'

"이 녀석이…!"

조금 떨어진 곳에선 다른 남자 조원이 낑낑대는 소리가 들린다.

장검을 들고 싸우는 핀. 오러는 없다. 미약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없다.

몇 차례 골렘의 몸에 그의 날이 스치고는 있으나 피해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약간의 흠집 정도만 생길 뿐 치명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크윽!"

반면, 핀의 몸은 점점 잔상처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체력도 상당히 깎인 것으로 여겨진다.

헐떡거리는 숨이 점점 가빠진다.

'저 녀석이랑.'

"...."

여러 감정이 담긴 눈으로 다른 조원들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 망부석 같은 이 녀석이다.

"뭘 멍하니 구경만 하는 것이냐. 얼른 인질들을 풀어내야 이 연극이 끝나는 것을."

에밀리가 사색에 잠겨 있자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헤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놈팡이 짓 하는 것을 간과할 순 없다.

그러자, 잠시 멀리서 벌어지는 전장에 넋이 나갔던 에밀리의 시야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현 훈련에서 에밀리는 현재 인질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무기고에서 각자의 무기를 고르고 행해지는 단합 훈련으로, 조원들의 팀워크를 끌어올리고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갈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냐? 다들 저렇게 골렘들과 싸우며 주의를 끌고 있는데 인질을 해방하는 일 따위를 하기 귀찮아해서야."

"하, 하고 있었어…! 귀찮은 게 아니야. …그러는 너는 쉬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당당한 건데… 요?"

새까만 의자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역마에 앉아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밀리가 대항한다.

이런 개념 없는 것.

"생각이라는 것이 있느냐? 내가 직접 나서게 된다면 조원들의 실력을 확인하기도 전에 쉽사리 끝나 버릴 것이 아니냐. 어리석기는."

"그러니까. 왜 너만 평가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느냐고…요."

"이거 놀랍군…."

아주 놀라워.

나는 오랜만에 황당한 것을 본 얼굴을 지었다. 품위 유지를 위해 좀처럼 짓지 않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버렸다.

"설마 네 녀석 따위와 나를 동급으로 볼 정도로 무지할 줄이야."

"…크윽"

에밀리는 내 말을 듣곤 이빨을 빠득거렸으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문제는 남이 볼 때는 티가 난다는 것인데, 여기선 너그러운 내가 넘어가자. 이런 것들을 대하는 태도는 따로 있다.

"그렇다면, 좋다. 아무래도 상상 이상으로 아둔한 듯하니. 직접 보여 주는 게 앞으로의 일의 진행에 순하게 따를 테지."

사역마에서 몸을 떼고 일어나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검은 의자가 내 그림자 속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감옥의 문이나 열심히 따고 있어라. 금방 돌아오겠다."

"근데 그럼…!"

"빨리 하는 게 좋을 것이야. 내가 다른 모든 것들을 해결하고 왔는데도 문 하나 따지 못했다면 너의 가치는 그 정도라는 말이니까."

"…까짓 거 하면 되잖아…요."

상당히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에밀리를 뒤로한 채 골렘의 무리로 걸어간다.

에밀리 같은 야생동물은 말로 하면 안 된다. 직접 보여 줘야지.

어쩌면 지금 내가 실수하거나 창피당하는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나에게 기어오를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에도 좋고.

….

하지만, 뭐.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에밀리 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바르간에 의해 단숨에 단합이 종료되고 졸지에 연습을 마친 일행들은 남녀로 나뉜 탈의실에서 교복으로 환복을 하고 있었다.

캐비넷에 몸을 기댄 채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좌절감에 젖어 있는 에밀리에게 다가간 알리시아는 걱정스레 말한다.

"무리하신 거라면 치유 마법을 걸어 드릴까요? 보건실로 모셔다 드려도 되고요."

"아, 괜찮아요. 알리시아 씨. 그냥… 저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뿐이에요."

"예? 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힘들면 말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온 힘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에밀리는 알리시아의 맑은 눈을 들여다봤다.

이물질이라고는 티끌조차 없어 보이는 청정 구역이다. 조금 전에 골렘들을 사정없이 베어 대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에밀리는 비틀거리는 몸을 똑바로 하며 그녀를 마주했다. 알리시아 또한 바로 자세를 잡으며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린다.

"알리시아 씨는 바르간… 바르간 님의 시종이라고 하셨죠? 원래 저렇게 무지막지한 사람인가요?"

"아… 도련님과 관련된 일이었군요. 으음…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건지 아니면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건지…?"

"둘 다요."

에밀리가 즉시 대답하자 알리시아는 살짝 곤란하다는 반응을 이어 갔다.

그러곤 당연히 없을 것으로 생각했음에도 주위를 살피더니, 에밀리만 보이도록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낮춘다.

"…원래부터 그러셨어요."

"역시."

에밀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헛웃음을 뱉는다.

"고생하시네요."

"아니요, 고생은 아니에요."

"어차피 그 사람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안 봐도 고생길인 거 같던데요. 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네…?"

알리시아는 다시 줄였던 음량을 높였고 잔잔한 웃음을 보였다.

에밀리는 알리시아의 발언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봤으나 그녀의 반응이 너무나도 진실되어 보여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떤 말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자세로 말하는지도 중요한 건가.

"어떻게 그런 사람 밑에서 일을 하는데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는 거죠? 제가 그 사람의 시종이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을 거예요."

에밀리가 두 팔로 자신을 감싸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친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언가를 알아차린 알리시아는 잠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비뚤어져 있는 에밀리의 리본을 바로 해 주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건 맞지만 좋으신 분이에요. 워낙 인상이 매섭고, 오해받을 언행을 하셔서 그렇지 속은 무척이나 따뜻한 분이랍니다."

"그 사람이요…?"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듯한 에밀리의 반응에, 알리시아는 상냥하지만 꿋꿋하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함께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해요. 저도 처음에는 도련님을 무서워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거든요."

"지금은 어떤데요?"

"음… 글쎄요.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애매하긴 한데."

리본을 정갈하게 만든 알리시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고 그녀의 대답에 뒷말을 덧붙인다.

"존경, 신뢰, 감사함…이 아닐까요?"

에밀리는 햇볕처럼 따뜻한 알리시아의 미소에 할 말을 잃었다. 길게 대화하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알리시아 씨는 여러 가지로 굉장한 사람이네요."

***

탈의실에서 나온 알리시아 일행은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서는 한창 전투를 진행 중인 조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다른 조원들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 있는 두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띈다.

에밀리는 그중 한 사람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반기려 했으나, 가까이 다가가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반긴 인물은 소꿉친구인 리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볼 수 없었던 낯선 얼굴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마주하고 있는 남자.

"뭐냐, 뭣 때문에 나를 함부로 붙잡는 거지?"

바르간. 그는 리암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행동을 통제한 것이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리암도 항상 달고 있던 장난기를 전부 빼고 진지한 태도로 물러서지 않았다.

살짝 긴장한 것 같은 어투지만 당당하게 말한다.

"바르간. 나와 잠시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자."

리암의 제안을 받은 바르간은 한 치의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하찮은 미물을 보는 것 같은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싫다."

24화

"싫다."

나는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깔끔하게 말했음으로 뜻의 왜곡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잠깐이면 돼… 사실은 너도 나와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고 있잖아. 안 그래?"

"이렇게나 똑바로 말했는데 무시하다니. 이것을 용맹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중요한 이야기야."

강한 척해 보지만 리암의 말투에선 어딘가 간절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불안감이 응어리져 있었다.

이 녀석.

보아하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나는 바깥쪽에 향하던 발끝을 옮겨 기어오르려 드는 평민을 똑바로 직시했다.

"내 아무리 관대하다 할지라도 이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기 힘들구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뻗은 평민의 패기로 여길지니 그만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놓아라."

나도 참 대단하지. 팔목을 잘라 버려도 괜찮았을 것을 이렇게 말로 구슬리고 있으니.

뭐, 사실은 굳이 내 손을 사용해서 리암의 불결한 신체를 건들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내 의사가 변함없자, 그의 눈썹이 작게 떨렸다.

그러나 폐에 들어 있던 공기를 조용히 입 밖으로 밀어내더니 다시 의지를 다잡는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장소도 네가 정하는 곳으로 갈 테니까. 그냥 좀?"

『손을 놓아라.』

"…!"

오호, 이 녀석 봐라.

내가 마력을 담은 문장을 뱉자, 리암은 순간적으로 손을 풀어 버렸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리암의 체내에서 꿈틀거리는 마나의 진동이 느껴진다. 마나를 써서 저항할 생각이다. 세기를 조절한다고 해서 이런 버러지가 버틸 정도로 약하게 해 버렸군.

다시 한번 손을 뻗는 리암.

그렇게 힘을 끌어모은 리암의 손이 나를 향하던 순간.

⎯⎯!

돌풍이 일어난다.

이를 간과할 수 없었던 누군가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가로막았다.

대부분의 이들이 눈을 괴롭히는 바람의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나는 똑똑히 봤다. 그리고 그건 전신에 마나를 공급하고 있던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왜, 네가…!"

리암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지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진국'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바르간!"

리암이 훤히 보일 정도의 적의를 보이자, 알리시아는 골렘을 무찌를 때보다 더 짙은 살기를 띠었다.

검을 들이밀며 언제라도 리암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준비를 끝내곤, 그의 움직임을 막는다.

그녀는 무언으로 리암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 이상 마력을 담은 신체를 내민다면 이 목을 잘라 버리겠다.

그녀의 강렬한 의지는 뒷모습만 보고 있는 나의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전해졌다. 아마 리암이 체감하고 있을 감각은 더할 것이다.

"그만하거라 알리시아. 이만 충분하다."

곧이라도 상대를 효수형에 처할 것 같은 그녀는 내 전언이 떨어지자 칼을 서서히 거두었다. 시선은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모두 잡겠다는 듯 날이 서 있다.

이쯤 되자 리암도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러나 의문과 분노가 기저에 깔린 사람과 같이.

그는 마나를 풀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리암!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힘이 풀린 리암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에밀리가 달려갔다. 눈에 보이는 곳을 빠르게. 그중에서도 알리시아가 노렸던 목을 중심으로 확인한다.

아무런 외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멎어 있던 숨을 뱉어 냈다.

그렇게 몰려온 안도감은 곧 파도와 같이 밀려나고 다른 감정을 드러낸다.

소꿉친구는 다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자신들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위협하고 당당하게 살기를 내뿜고 있는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이 들끓는다.

'보나 마나 그런 사고 과정이 훑고 갔을 테지.'

에밀리는 리암을 감싸며 알리시아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에밀리를 욕할 것은 없다. 알리시아와의 연이라고 해 봤자 같은 조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얄팍한 것. 당연히 연정을 품은 상대를 더욱 소중히 대하겠지.

"서열 싸움은 끝났나?"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담당 교수 루이사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하품까지 하는 느긋함을 보여 준다.

"흐아암⎯. 연인들의 등장으로 몸싸움까지 가나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군."

루이사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일반 남성보다 몸집이 큰 그녀가 일어나자 모두가 그녀를 향해 주목했다.

"치고받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라. 한창 그럴 나이니까 이해하고, 아카데미아에서는 등급전이라는 정규 시합도 있다. 하지만…."

이번은 좀 이야기가 다르네.

"꺄악!"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 것은 에밀리였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며 갑작스러운 변화에 고통스러워했다.

"크으윽. 교수님 이건…."

리암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에 대항하려 했다. 마치 중력이 몇십 배는 된 거 같은 감각. 몸의 무게가. 공기가. 너무나 무겁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고 있는 알리시아가 걱정스러운 톤으로 묻는다.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어하면서 주인을 먼저 생각한 점은 나중에 칭찬해 주겠다.

"역시 수석이라 이건가. 이 정도의 중력장은 간지럽지도 않아 보이는군."

루이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손을 양쪽으로 뻗고 어깨를 으쓱였다.

"과찬이십니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정도죠."

"버르장머리 없기는."

말은 공격적으로 했으나 웃음을 잃지 않는 루이사는 이 이상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쿵.

그녀가 땅을 발로 울리더니, 우리에게 가해지던 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중력장을 펼친 상태로 상대를 때려눕히는 검투사라더니 중력 마법이 숨 쉬듯 자연스럽다.

"언제든지 죽도록 싸워도 좋다.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싸워 봐라. 하지만 그건 아카데미아의 허가가 떨어진 규칙 안에서 행해질 때뿐이다."

루이사는 목청의 몸집을 불리며 자신의 반 모두에게 알렸다. 그것은 루이사의 경고이자 친절이었다.

"모두 잘 들어라. 만약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싸움을 하려 든다면, 너희의 상대는 서로 욕을 주고받던 녀석이 아닌 내가 될 것이다."

여장부를 떠올리게 하는 강단 있고 우렁찬 목소리다. 저 자신감의 원인은 허울만 갖춰진 것이 아니다.

"나랑 살육전을 벌이고 싶은 녀석이라면 멋대로 싸워라. 내가 죽는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선행 학습을 시켜 주마."

꾸준히 단련하고, 실전에서 길러진 강함. 교회에서 일하던 현역 시절, 무려 용사 랭킹 12위까지 올라갔던 루이사니까 할 수 있는 발언이다.

"...."

루이사의 말이 끝나자 리암은 비참한 몰골로 몸을 일으키며 대기실을 떠나려 들었다. 에밀리도 그를 뒤따라간다.

물론, 나가는 것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어딜 가는 거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텐데."

루이사의 물음에 리암과 에밀리는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자신이 속한 조가 끝났으면 돌아가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와 같은 의문을 담고 있는 표정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것을 알면서도 같은 반 동급생들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남은 것이니.

하지만, 리암과 에밀리는 변화수를 잊고 있었다.

루이사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크게 미소 짓는다.

"반성문 써야지. 어딜 토끼려고 드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