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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TO 145

제136화

옆에 있던 에반이 눈썹을 꿈틀했다.

상대가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음을 간파한 거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제 조수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어쨌든 자네도 같이 오지. 함께 고생했을 텐데."

로드니는 둘을 밖으로 이끌어 마차에 태웠다.

"근처가 아닌 겁니까?"

"수많은 환자를 살리신 영웅인데, 간단히 대접할 수는 없지요.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차가 길을 달렸다.

흑사병으로 거리에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어 거침없는 속도로 내달렸고, 곧 치료소가 있던 외곽에서 벗어나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크리스가 천진한 척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멀리 가는군요. 환자들한테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혹시 오래 걸릴까요?"

"환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갑작스레 변한 로드니의 말투.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거다.

"네놈은 곧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테니까."

"!!"

흉흉한 살기에 에반이 반사적으로 마차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콰악!

크리스가 은밀히 에반의 발을 밟아버렸다.

잠자코 있으라는 듯.

'이놈이 다 된 밥에 재를 떨어뜨리려고 해.'

크리스는 까마귀 마스크 너머로 일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당신이 이번 흑사병을?!"

"큭큭, 나는 아니다. 하지만 대신 위대한 분께서 대업을 이루면, 성스러운 열매를 나누어 받기로 하였지. 내가 재능 없다고 멸시하던 의선 명가의 선배들도 다시는 날 업신여기지 못하게 될 거야."

아마 로드니는 의선 명가 내의 경쟁에서 밀려 이번 일에 동참하게 된 것 같았다.

로드니가 득의양양하여 말하였다.

"네놈들은 대업을 이루기 위한 산 제물이 될 것이다. 잔뜩 환자를 살려 숭고함을 품었으니, 제물로서의 가치도 최고이겠지."

"제, 제발 살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잠깐 남은 시간이라도 온전하게 즐기려면 말이야."

"그, 그런…."

크리스는 최대한 두려운 눈빛을 하였고, 옆에 앉은 에반에게도 눈치를 주었다.

'아, 이 자식아. 너도 연기 좀 해! 답답하네.'

에반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두렵다는 눈빛을 하였다.

물론, 표정 연기가 꽝이라 기괴하게만 보일 뿐이었지만.

다행히, 로드니는 크게 의심을 하지는 않았고,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작은 건물이었다.

별달리 특이해 보이지 않는.

"들어가라."

안으로 들어가도 수상한 점은 엿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주 희미한 마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마기 운용력이 극에 달한 크리스가 아니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미세한 기운.

'저주 마가의 흔적이야. 대단하군. 이토록 은밀하게 숨겨 놓았다니.'

직접 안에 들어왔는데도 이 정도로 희박하게 느껴지는데, 만약 생으로 뒤졌으면 절대로 찾지 못했을 거다.

"우,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

크리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로드니가 큭큭 잔혹한 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이곳에 연결된 제단으로 내려가 제물이 될 것이다."

"혹시 이 양탄자 밑으로 나 있는 비밀 통로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맞다. 이 안으로 들어가… 응? 네가 어떻게 그걸?"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로드니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였고.

크리스가 툭 말하였다.

"에반, 죽여."

"…뭐?"

그게 로드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파앗, 빛이 번뜩였고.

로드니의 목이 툭 잘려 떨어졌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죽은 얼굴.

용사다운 깔끔한 솜씨였다.

"이렇게 죽여도 되는 건가? 살려서 고문하는 게 낫지 않았나?"

"괜찮아. 어차피 진실을 말하는 순간, 목숨을 잃게 금제에 걸려 있었을 거야."

저주 마가의 흔한 수법이었다.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제단과 연결된 통로를 알아냈으니 증거는 들어가서 확보하면 돼."

화르륵!

양탄자를 흑마법의 불로 태우자 바닥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정교한 흑마법적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대단한 보안 술식이군. 어지간한 흑마법사는 절대 파훼하지 못할 수준이야.'

물론, 크리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몇 차례 마기를 반응시켜 보안의 패턴을 파악했고, 머지않아 완전히 보안을 해체시켜 버렸다.

쿠우웅.

낮은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바닥.

마치 심연의 아가리 같은 어둠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아니, 우리 둘만으로는 의식을 막을 수 없어."

에반이야 순수 기사이고, 크리스의 능력으로도 저 밑에서 진행되는 의식을 해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도와줄 이가 필요했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올 거야."

에반은 의아한 얼굴을 했고, 곧 크리스가 말한 인물이 등장했다.

"도대체…?"

창백하게 질린 안색의 소녀.

성혈의 각성자 올리비아였다.

* * *

크리스는 로드니가 자신을 마차에 태우자마자 숨어 있던 마리를 은밀히 보냈다.

자신이 향하는 곳으로 올리비아를 부르기 위해.

알로스와 소백작 로이가 시선을 끌어주어 올리비아는 은밀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도 왔어."

쥬피엔도 삐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넌 필요 없었는데?"

"…맞을래?"

크리스는 쿡쿡 웃었다.

"농담이야. 잘 부탁해."

곧 밑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손 하나라도 아쉬운 판이었다.

"어쨌든 저 안쪽에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먼저 들어간다?"

쥬피엔이 훌쩍 통로 밑으로 뛰어들었다.

겁이라고는 전혀 먹지 않는 모습.

에반도 힐끗 크리스티앙을 일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크리스와 올리비아뿐.

그런데 올리비아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녀는 목이 잘린 로드니의 시신을 보고 있었다.

'시체에 충격을 받은 건가? 그렇게 여린 성격은 아닐 텐데?'

저래 보여도 어린 시절부터 법국을 대표하는 성녀로서 온갖 험한 곳을 돌아다닌 그녀다.

"…저자는 의선 명가의 로드니 아니었나요? 도대체 왜 치료 책임자였던 그가 이곳에?"

크리스는 올리비아가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눈치챘다.

성의 고위 인물이 연루되어 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가?

이 뒤에 어떤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는지, 진실의 윤곽을 눈치채고 충격을 받은 거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일부러 더 매정한 말투로 말하였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

"약한 마음 먹지 마십시오. 저 밑에 숨어 있는 진실은 공주께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추악할 테니 말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올리비아는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모른 척 돌아가는 게 나을 겁니다."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크리스는 진심이었다.

어쩌면 크리스는 그녀를 아끼는 오라비로서, 그쪽을 내심 더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 일의 끝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테니.

'하지만 올리비아가 그렇게 할 리는 없겠지.'

과연.

올리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려가겠어요. 제게는 법국의 후계로서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올리비아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남몰래 품속에 숨긴 나뭇조각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오빠가 선물한 조각.

파앗!

올리비아의 등 뒤에서 하얀빛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성혈의 각성자의 상징인 광익(光翼)이었다.

올리비아는 크리스와 함께 훌쩍 밑으로 뛰어내렸고.

곧 끔찍한 지옥을 마주했다.

* * *

커다란 지하 공동이었다.

마치 대형 연무장을 몇 개는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

누구도 성 밑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진정 경악스러운 건 공간의 규모가 아니었다.

중앙의 제단.

섬뜩하고 기괴한 형태의 핏빛 마법진이 수없이 얽혀 있었고, 그 위 허공에 투명한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영혼을 담은 구체였다.

[크아아악.]

[아파. 아파….]

[제발… 제발… 구해줘.]

[엄마, 아빠… 아아악.]

수백이 넘는 영혼이 구체에 담겨 참혹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고, 동요하지 않은 건 크리스뿐이었다.

그는 이런 광경을 과거 숱하게 봐서 면역이 되어 있었으니까.

"흑사병으로 사망한 이들의 영혼입니다. 미리 새겨진 술식에 따라, 이곳 제단으로 끌려와 제물이 된 겁니다."

"도,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올리비아의 음성이 떨렸다.

각오하긴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는 모습.

"글쎄, 과연 누구일까요? 성내, 그것도 중심에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이가?"

"!!"

올리비아의 눈이 굳었다.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빈츠 대공?"

이 성의 주인인 그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분이 이런 일을? 영지민들을 가족같이 아끼기로도 유명했는데?"

올리비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말을 더듬었고, 크리스는 속으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빈츠 대공이 끝이 아니지.'

빈츠 대공은 그저 하수인일 뿐이고, 진정한 배후는 따로 있었다.

"일단 이 의식을 중단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공주의 권능으로 이 영혼들을 해방해 주십시오."

크리스가 올리비아를 데려온 이유.

올리비아는 당대 최고의 제령술사였다.

그녀의 제령은 다른 제령술사와는 완전히 격을 달리했다.

영혼을 위로하는 성좌의 권능을 사용한 것이니까.

그런데 올리비아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부, 불가능해요."

"네? 공주께는 '위혼(慰魂)' 권능이 있지 않습니까?"

"제 '위혼(慰魂)' 권능은 아직 완전히 개화되지 않아 이렇게 많은 영혼을 제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아요."

크리스는 당황했다.

'그럴 리가? 분명 이 시점쯤에 위혼 능력을 완성했을 텐데?'

크리스는 뭐가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지난 1년간, 실의에 빠져 있으면서 권능을 완성하지 못한 거야!'

올리비아는 크리스의 죽음을 자책하며,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영혼이 곪음에 따라 권능의 개화도 그만큼 늦어진 거다.

'이런. 올리비아의 능력이 아니면, 의식을 멈추게 할 수 없는데.'

아무리 크리스라도 이런 수준의 흑마법을 해체할 수는 없었다.

'어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모두 위험에….'

하지만 늦었다.

공동에 연결된 통로 쪽에서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거룩한 성지에 초청하지 않은 쥐새끼들이 들어오다니."

올리비아가 놀란 음성을 토했다.

"빈츠 대공!!"

지적인 인상의 중년 남성.

한 손에 든 마도서.

이곳 성의 주인이자, 5성급 조작계 마법사인 빈츠 대공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빈츠 대공과는 이전 삶 깊은 연이 있었다.

악연이었다.

크리스의 모친을 모함한 증거물을 빈츠 대공이 마련했으니까.

정확히는 법왕의 명령을 받은 빈츠 대공이 증거물을 조작해 내었다.

이전 삶의 원수 중 하나였다.

나타난 건 빈츠 대공뿐이 아니었다.

더욱 끔찍한 존재도 함께였다.

제137화

"흐음, 곤란하군. 더러운 마인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올리비아 공주까지 있다니."

[다 죽이면 되지 않나요? 저 공주는 인형으로 만들고요.]

그때, 허공에서 불쑥 섬뜩한 음성이 들렸다.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한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마치 그림자를 찢고 나타난 듯한 등장.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내의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상대는 커다란 외눈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성별을 알 수 없는 체형, 음성이었다.

크리스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짓눌린 신음을 흘렸다.

"설마, 집행 인형(Executive doll)?"

그 말에 상대, '인형'의 가면이 표정을 띠었다.

쭈욱 가면 밑부분이 갈라지며 어둠이 드러나며 웃는 형상이 되었다.

[절 아시는가 보군요. 맞습니다. 전 사왕성의 장로이신 메르헨 님의 세 번째 인형으로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설마, 메르헨의 인형이 있었다니.'

저주 마가의 인물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너무 거물이었다.

'메르헨이면 사왕성의 장로이자 7성급 마인.'

물론, 본체가 온 건 아니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메르헨의 이명은 인형사.

별명처럼 저주 마가 최고의 인형술사였다.

그녀가 부리는 인형들은 인형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전투 전용 인형은 아니지만, 세 번째 넘버링이면, 6성 이상의 힘을 발휘할 거야.'

빈츠 대공만 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6성급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형마저 함께 있다니. 승산이 없었다.

"장로가 직접 개입하다니. 사왕성은 서로의 영역에 고위 인사의 개입을 피하기로 한 청류의 마왕과 맺은 규약을 잊은 건가?"

[후후. 귀여운 이야기를 하는군요. 당신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면, 규약을 어긴 게 드러날 걱정은 없지 않을까요?]

인형의 가면 입 부분이 쩌억 윗부분까지 갈라지며 마치 먹이를 삼키려는 괴물 같은 형상을 보였다.

[기대되는군요. 크리스티앙 공자, 당신이 어떤 비명을 지를지.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고 싶지만.]

돌연, 인형이 웃음을 멈추었다.

가면의 아랫부분이 닫히며 무표정한 외눈 가면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자중해야겠군요.]

"…무슨 이야기지?"

[애초에 제가 이곳에 있었던 건, 그저 제단의 의식이 원활히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뿐,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거든요. 무엇보다, 주인님께서 당신을 살려두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메르헨, 그년이 왜?'

메르헨은 잔혹성으로 유명한 미친년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이가 아닌데?

[음, 그게. 주인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시험해보고 싶으시다는군요. 과연 소문처럼 대단한지. 마침, 딱 맞는 상대가 있으니, 확인해보기 좋겠네요.]

인형은 피에로처럼 정중한 손짓으로 옆의 빈츠 대공을 가리켰다.

[전력을 다해 여기 빈츠 대공과 싸워보세요. 만약, 주인님이 감탄할 만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살려줄 것이고.]

가면의 입가가 다시 갈라졌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당신을 죽일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빈츠 대공의 손에 살아남기도 힘들겠지만요.]

그 말을 끝으로, 인형은 쭈우욱 뒤로 물러났다.

본인이 말한 것처럼 관전자가 되겠다는 몸짓이었다.

둘에게 합공받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빈츠 대공 때문이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빈츠는 자존심이 상한 눈빛으로 뒤로 물러난 인형을 노려보았다.

졸지에 시험 상대로 전락한 꼴이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

[뭐,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당신의 힘이면 저들을 모조리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요.]

빈츠 대공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어렵지는 않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

물론, 빈츠 대공은 5성 엘더 클래스의 강력한 마법사다.

하지만 크리스 일행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빈츠 대공이 조작계 속성이라 같은 성취에 비해 정면 전투력이 약하다는 걸 감안하면, 크리스 혼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일행 모두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직감하고 있는 거다.

지금 빈츠 대공의 힘은 일반적인 엘더 클래스의 힘이 아니란 것을.

"내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볼 테니, 넌 도망갈 방법을 찾아라."

에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뭐라 하기도 전에, 에반이 빈츠 대공에게 뛰어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5성의 오러 블레이드.

일전 싸웠던 에쉬드나 법국의 미에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찬란함이었다.

크리스가 세운 의지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강렬하게 세워진 굳건한 의지의 기둥.

어떤 방벽조차 가를 파괴의 힘이었지만.

"소용없다."

빈츠 대공이 여유롭게 마도서를 펼쳤다.

파앗!

공기가 촘촘히 모여들더니 성질이 변환하였다.

어떤 날카로운 창조차 막을 강철처럼.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천수만 개의 공기의 층으로 이루어진 실드가 앞을 가로막았고, 에반의 오러 블레이드는 허무하게 뒤로 튕겼다.

'의념급 조작 마법.'

크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단순히 공기를 밀집시킨다고 저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법칙의 한계에 도달했으니 나올 수 있는 강력한 방어력.

즉, 마법에 의념을 실은 거다.

하지만 어떻게?

빈츠 대공이 큭큭 웃으며 답을 말해주었다.

"역시 대단하군. 이 힘은."

"!!"

빈츠 대공의 손에서 강렬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살갗이 저릿하게 에이는.

5성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강렬한 힘의 소용돌이.

동시에 제단의 구체에 갇혀 있던 제물들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만!! 아악!!!]

모두의 안색이 하얘졌다.

갇힌 영혼을 제물 삼아 자신의 힘으로 전환한 거다.

올리비아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인신 공양보다도 더욱 끔찍한 짓이었다.

인신 공양은 산 생명의 '죽음'을 바치는 거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영혼을 바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죽은 영혼은 각자 정해진 사후 세계로 떠나게 된다.

죽은 이가 생전의 선행, 죄과에 따라 대가를 받는 건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이었으니.

반면, 지금 이들이 한 짓은 죽은 영혼들이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게 포획해 고통을 주며 영혼의 마이너스 감정을 힘의 동력원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저 영혼들은 해방되기 전까지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되리라.

빈츠 대공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공주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전혀 귀띔 들은 게 없으셨던 겁니까?"

"…그게 무슨? 미리 듣다니?"

"허, 우습군. 그분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빈츠 대공이 누군가일지 모를 이에게 조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외쳤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을 한 거죠?!"

"간단합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요?"

빈츠 대공은 손에서 몰아치는 자신의 힘을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 대공령은 큰 부를 이루었지만, 군사력이 약해 골드 크로스의 다른 국가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아오고는 했습니다."

골드 크로스는 수십의 소국이 모인 연합체다.

다만, 각 국가는 절대 동등하지 않았다.

소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 골드 크로스의 주역이었고, 나머지 이들은 그들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심지어 군사력이 약한 국가들은 강한 국가들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내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공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법국의 상황도 비슷하니. 말로는 법국을 숭앙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놈들이 많지요. 법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것도 놈들의 견제 때문이니까요. 그러니 법왕께서도…."

거기까지 이야기한 빈츠 대공은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제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법왕께 따로 들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공주는 특별히 고이 돌려 보내드릴 테니까요."

"무, 무슨…?"

혼란에 빠진 올리비아를 놔두고, 빈츠 대공은 다른 일행을 바라보았다.

"물론, 너희는 무사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을 테니. 모두 제단의 제물로 삼아주마."

섬뜩한 선언.

빈츠 대공이 품고 있는 힘을 생각하면, 허언이 아니리라.

'정면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어.'

그때, 쥬피엔이 다가왔다.

"얼마나 시간 주면 돼?"

"…뭐?"

"너, 방법이 있을 것 아니야?"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방법이 있긴 있었다.

다만,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겠지만.'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장담할 수 없지만.

'해내도록 만들어야 해.'

"3분만 버텨줘. 그 안에 어떻게든 해볼 테니."

쥬피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5분 줄게. 그 안에 못 해내면 엉덩이를 후려쳐줄 거야."

휘익, 쥬피엔이 뛰어올라 에반의 곁에 섰다.

쥬피엔이 힐끗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누구야?"

"...."

"뭐, 상관없나. 네가 더 튼튼한 것 같으니, 앞에서 몸으로 때워. 난 뒤에서 보조할 테니. 우리가 5분 동안 저놈을 막는 거야."

에반은 쥬피엔의 특이한 화법이 살짝 거슬린 듯싶었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곧 빈츠 대공의 마법이 몰아쳤고, 에반과 쥬피엔의 분투가 시작되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최대한 빨리 성공해내야 해.'

크리스는 서둘러 올리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까 빈츠 대공에게 들은 말 때문인지, 멍하니 굳어 있었다.

"공주? 올리비아!!"

"!!"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빈츠 대공을 막아야 합니다."

올리비아의 눈동자에 흐릿하게 빛이 돌아왔다.

"공주의 위혼 권능으로 저 제단 위의 영혼들을 제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놈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제 위혼 권능은 부족…."

"지금 여기서 개화해내면 됩니다."

"!!"

그렇다.

이게 크리스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이 자리에서 올리비아의 권능을 개화시키는 것.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고작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권능을 개화하라니?

물론 권능의 개화는 시간의 문제는 아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하니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크리스는 굳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죠?"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권능의 개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올리비아의 가슴의 떨림이 멈추었다.

제138화

"제게 당신의 모든 걸 전적으로 맡겨준다면, 가능합니다. 이 순간, 제게 모든 걸 맡긴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올리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법적인 언약을 뜻한다.

한시적인 맹세이지만, 그녀의 목숨이 저 마인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되는 거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

"당신에게 제 모든 걸 맡긴다고 맹세하겠어요."

언약은 의지의 확정.

그녀의 정신 방벽이 크리스를 향해 활짝 개방되었고, 무방비가 된 그녀의 정신에 흑마법이 펼쳐졌다.

4성 환영 흑마법.

추억의 늪.

과거에 매몰되는 흑마법에 올리비아의 정신이 함몰되었다.

온 시야가 어둠에 잠식되며 의식을 잃기 직전의 순간.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는 손길이 있었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없이 따뜻하며, 굳건한.

그녀가 간절히 바라왔던 손길.

'…오빠?'

* * * '추억의 늪'은 상대를 가장 그리워하는 과거의 환영에 매몰시키는 거다.

올리비아가 가장 그리워하는 과거는 당연히 크리스가 살아 있었을 시절이었다.

올리비아는 환영 속에서 크리스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빠…?"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환영을 보고 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하지만, 단순한 환영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실감났다.

과거를 완벽하게 구연한 듯한.

실제 크리스를 직접 마주한 듯한 느낌.

그래, 마치 '실존'하는 것 같은 환영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가 흑마법을 비틀어 실제로 본인이 환영 속 '크리스'가 된 것이다.

즉, 올리비아가 마주하게 된 '크리스'는 환영이되, 실제 크리스이기도 했다.

크리스는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그리고.

그 과거와 똑같은 음성을 들은 순간.

올리비아의 마음의 둑이 왈칵 무너져 내렸다.

* * *

'이건 환상일 뿐이야.'

올리비아는 가슴을 꾹꾹 눌렀다.

자고 일어나면 깰 꿈에 마음을 주어봤자, 더욱 공허해지기만 할 뿐일 테니.

하지만.

'…정말 환상이라고?'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정교하다, 정교하지 않다, 의 문제가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가짜'가 아니라고.

마치 정말 크리스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말도 안 돼.'

크리스와 함께 있는 이 느낌이 너무나 진짜 같아서, 자신의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려고 해 올리비아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왜, 왜 나타난 거야?"

물어볼 것도 없는 이유였다.

그 마인은 자신이 위혼 권능을 개화하기 바랐으니.

크리스의 모습을 빌려 위혼 권능을 각성하라고 재촉할 생각이리라.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답을 하였다.

"너 조금 쉬라고."

"…어?"

"요즘 계속 힘들었잖아."

올리비아는 다시 왈칵할 뻔했다.

-쉬었다가 가.

과거, 크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게 환영임을 앎에도, 올리비아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정말… 쉬어도 돼?"

"물론."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처럼, 웃으며.

"얼마든지."

이후 시간이 흘렀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올리비아는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크리스와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정말 이상한 건, 분명 환영인데.

올리비아는 자신의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진짜 크리스와 함께 있는 것처럼.

'깨고 싶지 않아.'

올리비아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나 그냥 이대로 있어도 돼?"

"응, 당연히."

다행히, '크리스'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달래듯 가만히 있어 주었을 뿐이다.

하염없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며칠? 몇 주? 아니면, 몇 년?

모른다.

꿈속 시간은 뒤죽박죽인 법이니.

일평생을 꾼 것 같으면서도 돌이켜보면 찰나이기도 한 게 꿈속이었으니까.

올리비아와 보내고 있는 꿈도 그러했다.

이윽고.

"헤헤, 인제 그만해도 돼."

올리비아가 물기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이대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지만.

끝이 날 수밖에 없는 환영이다.

"그래도, 나 좋았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환영 속 보냈던 시간이 정말 크리스와 함께했던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자신의 얼어붙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다시 더욱 그리워지겠지만.'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난 너와 계속 함께 있을 거야."

"!!"

"약속할게."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볼래?"

크리스의 손에서 잎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작하는 휘파람 소리.

"!!"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저 소리를?'

이전, 탑에서 크리스가 종종 들려주던 휘파람 연주와 똑같았다.

무의식 속의 기억을 구현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실제와 같았다.

마치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따뜻한 소리에 올리비아는 더는 눈앞의 환영을 단순한 환영으로 치부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크리스'라고 믿고만 싶었다.

"…이러면 반칙이잖아."

올리비아는 강하게 눈가를 닦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테니, 앞으로도 날 믿고 힘을 내."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함께할 거라는 말, 정말이지?"

"응, 약속. 사실 바빠서 늘 있지는 못할 거고, 가끔 보러 올게."

올리비아는 쿡쿡 웃었다.

크리스의 음성이 그녀의 가슴에 계속해서 잔잔히 스며들었다.

깊게 패 있던 흉터가 살짝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 네가 나한테 늘 하던 이야기 기억나?"

"어…? 응."

올리비아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크리스에게 늘 훌륭한 법왕이 되겠다고 떠들고는 했었다.

성녀로서 힘들었지만, 백성을 위하는 법왕이 되는 건 그녀의 꿈이었으니까.

실의에 빠진 이후로는 어느덧 까마득해진 꿈.

"난 사실 네가 꼭 훌륭한 법왕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 난 널 응원할 거니까."

"...."

"하지만, 네 꿈이 나 때문에 꺾이진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올리비아는 한참이나 지난 침묵 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한결같네."

이전에도.

크리스는 올리비아가 흔들릴 때마다 단단히 잡아주었다.

크리스가 아니었다면, 올리비아는 성녀로서 우뚝 설 수 없었을 거다.

"나 이제 갈게."

그녀의 등 뒤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 오빠한테 부끄럽지 않게 될래."

그와 동시에.

환영이 끝이 났다.

* * *

"!!"

올리비아는 번뜩 눈을 떴다.

눈앞에 재수 없는 마인이 서 있었다.

시간은 거의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제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보신 대로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게 한 겁니다. 권능의 개화에 도움을 주려고요.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군요."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권능을 개화하지 못했던 건, 실의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영혼의 곪은 상처가 권능의 개화를 가로막았다.

저 마인은 그걸 알아보고는 이런 환영을 보여준 것이리라.

'…그런데, 어떻게 그런 환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지?'

사실, 올리비아는 환영 흑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방금 저 마인이 보여준 환영이 일반적인 환영과는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실감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진짜 크리스와 있는 것 같았으니까.

특히 마지막에 휘파람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의식중에 진짜 크리스라고 믿어버리고만 말았다.

어쨌든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해낼 수 있겠습니까?"

권능의 개화를 말한다.

올리비아는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어요."

사실.

그녀의 상처는 여전했다.

당연했다.

고작 꿈 한 번 꿨다고 상처가 나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방금 환영 속 크리스가 진짜든, 가짜든 확실한 건 있었다.

'오빠는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크리스가 바라는 건, 그녀가 법왕으로서 우뚝 서기를 바라는 것.

올리비아는 크리스가 준 선물을 손에 움켜쥐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오빠의 손을 잡는 것처럼.

그 순간, 그녀의 영혼이 한 걸음 위로 나아갔다.

파아앗!

찬란한 빛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광익이 한층 더 숭고한 위용을 뿜어냈다.

'아직 부족해.'

올리비아는 직감했다.

결여된 건, 그녀의 의지.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를 세웠다.

크리스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법왕으로서 백성을 위하는 의지를 가슴에 새겼다.

'해내겠어!'

그렇게 그녀가 강한 의지를 품은 순간, '권능'이 개화하였다.

파아앗!

위혼(慰魂).

숭고한 빛이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와 제단 위의 영혼들을 비추었다.

[아아!]

영혼들이 눈물을 흘렸다.

제령은 단순히 영혼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다.

영혼들이 입은 상처를 회복시키고 완벽하게 정화하는 과정.

성스러운 힘이 영혼들을 붙들고 있던 사악한 흑마법의 기운을 몰아냈다.

"이, 이런…!!"

빈츠 대공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물들이 해방되려고 하면서 빈츠 대공의 힘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다.

"뭐 하는 건가!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빈츠 대공이 다급하게 뒤에 서 있는 인형에게 외쳤다.

인형은 곤란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은 예상 밖이군요. 설마, 권능의 개화를 유도하다니.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인형은 익살스럽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딱, 인형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화르륵.

제단의 밑에서 짙은 암흑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사이하기 그지없는 기운의.

[게헨나의 불길을 소환한 겁니다. 흑마법의 효과를 강화해주죠.]

과연, 해방되던 영혼들이 다시 불길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인형은 마치 흥미로운 관람거리를 보듯 웃음을 지었다.

[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제 갓 개화한 위혼 권능으로는 게헨나의 불길에 사로잡힌 영혼을 구할 수는 없을 텐데?]

올리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파앗.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지만.

화아악!

게헨나의 불길도 마주 더욱더 거세어졌다.

그녀의 권능을 압도하는 힘이었다.

'저 게헨나의 불길은 무려 6성의 의념급 저주 흑마법. 지금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수를 내야 했다.

크리스는 고민 끝에 손을 내밀었다.

"손잡으십시오."

"…네? 네?"

"제가 권능을 운용하는 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어서요!"

올리비아는 당황했다.

성좌의 권능은 오로지 올리비아만의 능력이다. 타인이 돕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탁.

올리비아는 크리스의 손을 잡았다.

"…정말 도울 수 있는 건가요?"

"네, 단, 절 믿어주셔야 합니다. 제 기운에 저항하지 말아 주십시오."

맞잡은 손에서 한 줄기 희미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마기였다.

"!!"

올리비아는 놀라 손을 떼려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크리스의 마기가 그녀의 혈맥으로 스며들었다. 놀랍게도 올리비아의 기운과 어떤 충돌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남들이 보면 눈을 의심할 기사.

'마기와 빛의 기운이 충돌하는 건, 중화반응 같은 거니까. 암흑 마기의 지배의 성질을 이용해 상대 기운의 반응을 정교하게 조작해 중화반응을 일으키는 걸 일시적으로 억누르면 돼.'

그러니까.

크리스니까 가능한 미친 일이었다.

이어서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크리스의 마기가 올리비아의 혈맥 곳곳에 스며들었고, 올리비아의 기운을 교묘하게 건드렸다.

그러자.

파아아아아아앗!!

고고히 흐르던 성스러운 기운이 일순간 다른 흐름의 패턴을 만들어냈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

올리비아가 발현 중인 위혼 권능의 위력이 증폭하기 시작한 거다.

'어, 어떻게?'

올리비아가 경악한 눈을 했다.

크리스가 속으로 답을 생각했다.

'성혈의 권능도 결국 테크닉이니까. 기술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지.'

올리비아는 유일한 성혈의 각성자다.

따라서 권능을 갈고닦게 해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어, 기술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크리스도 성혈의 권능을 써본 적은 없지만.

'이전에 올리비이가 성력을 다루는 건 여러 번 도와준 적이 있으니까.'

그뿐 아니다.

멸망의 시대 때 천족들이 성좌의 권능을 쓰는 걸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걸 토대로 위력을 강화할 방법을 고안해낸 거다.

이것 역시 크리스니까 가능한 미친 짓.

파아아앗!!

강화된 숭고한 권능이 게헨나의 불길을 억눌렀다.

다시금 영혼들이 해방되기 시작했고, 힘에 문제가 생긴 빈츠 대공이 비틀거릴 때.

[아하하하!! 미친! 천족의 방법을 본떠 성좌의 권능을 강화해 내다니! 당신은 과연 인간이 맞긴 한 겁니까?! 아주 흥미로워요! 아하하!]

인형이 기괴한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요. 강림해라, 절망과 악의여!]

게헨나의 불길이 한층 더욱 거세졌다.

크리스가 강화한 권능을 밀어내듯.

올리비아의 안색이 하얘질 때.

크리스가 다음 행동을 했다.

제139화

일단, 올리비아가 흔들리지 않게, 강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제령의 근본. 영혼을 위하는 마음을 잊지 마."

"!!"

워낙 다급한 상황이어서일까?

크리스는 경어를 사용할 생각을 못 했고, 올리비아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저 영혼들을 위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나머지는 내게 맡겨."

올리비아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마치, 저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듯.

크리스도 움직였다.

'암흑 마기의 지배의 성질.'

그의 암흑 마기는 다른 기운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지배력은 어둠의 기운뿐 아니라, 빛의 기운에도 어느 정도 통용되었다.

그의 암흑 마기가 어떤 기운보다도 우월한 순수한 암흑이기 때문이다.

그 지배력을 이용해 올리비아의 기운인 성력(星力) 일부를 자신에게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력을 허공에 퍼트렸다.

퉁. 파앗.

마치 잔잔한 호수의 표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듯.

성력의 파동이 허공을 울렸다.

동시에 소리도 울렸다.

성력의 파동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단발의 소음.

크리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찰나, 수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였다.

규칙적으로.

조금씩 변주를 주면서.

반복된 파동은 규칙이 되고, 규칙의 변주는 리듬이 된다.

단발의 소음일 뿐인 성력의 파동 소리가 흐름을 만들어냈고, 거대한 하나의 악보가 되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레퀴엠.

성력의 파동으로 연출해낸 망자를 위한 연주였다.

크리스의 미친 마력 운용력, 대가의 경지에 이른 음악적 소양을 합쳐 펼쳐낸 경이로운 묘기.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정순한 기운을 담은 연주가 영혼들을 적셨다.

[아아!!]

그렇게.

영혼들을 위하는 올리비아의 마음. 성력으로 연출한 위로의 연주가 합쳐져 기적을 만들어냈다.

파아아앗!

마치 하늘이 열린 듯, 찬란한 빛이 제단 위를 내리쬐었다.

그 결과.

쩌적.

제단 위 영혼들을 가두었던 구가 균열을 일으키더니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해낸 거다!

"커어억!!!"

영혼들이 눈물을 흘리며 해방되었고, 빈츠 대공은 피를 왈칵 토했다.

힘을 잃은 빈츠 대공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아, 안 돼."

에반과 쥬피엔이 저벅 다가왔다.

빈츠 대공은 허겁지겁 인형에게 외쳤다.

"사, 살려주시오!! 당신의 능력이면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테니…!!"

인형이 가면 위로 빙글 미소를 지었고, 크리스는 섬찟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안 돼, 막아!!"

에반이 뛰었지만, 늦었다.

[내가 왜 패배한 개인 네놈을 도와줘야 하지?]

섬뜩한 중얼거림과 함께, 인형이 손가락을 튕겼고.

퍼억.

빈츠 대공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빈츠 대공의 머리 잃은 몸체가 기우뚱 흔들리더니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

장내에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모두 긴장한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너무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 말했듯, 전 그다지 싸울 마음이 없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지? 틈만 나면 피를 흘리고 싶어 하는 게 네놈의 주인 메르헨 아닌가?"

크리스가 싸늘하게 물었다.

변덕스럽고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한 메르헨에게 아까 한 약속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아. 물론 그렇지만, 제 주인께서 크리스티앙 공자, 당신을 많이 탐내고 계셔서요.]

"…뭐?"

인형이 가면 위 외눈 문양으로 똑바로 바라보듯이 크리스를 직시했다.

[크리스티앙 공자, 사왕성으로 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 * *

"...."

잠시 모두 침묵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

"…그게 무슨 미친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농담이면 참 재미없는 농담인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데요? 나쁜 제안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인형은 빙글빙글 미소를 지었다.

[공자도 아시지 않습니까? 암흑 마가에 미래 따위 없다는 것을.]

"...."

[암흑 마가의 마지막 보루인 노르디언 가주에게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무엇보다 우리 사왕성의 내부 분쟁이 끝나는 순간, 암흑 마가 따위야 산산이 짓밟힐 운명이지요.]

크리스는 부정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지.'

비단 암흑 마가뿐이 아니다.

암흑 마가가 있는 남방 마도국의 또 다른 가문들인 극독 마가와 파괴 마가까지도 모조리 사왕성에게 짓밟히게 되니까.

간신히 멸문을 피할 뿐, 사왕성이 부리는 개로 전락한다.

그만큼 사왕성의 힘은 강력했다.

[만약, 사왕성에 오면, 훗날 사왕성이 암흑 마가를 정복 후, 공자께 암흑 마가의 가주 자리를 주겠습니다. 물론, 그때의 암흑 마가는 사왕성의 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있겠지만요.]

크리스가 가타부타 답이 없자, 인형은 턱을 쓰다듬었다.

[만약, 이걸로 부족하다면… 흐음. 어떤 보상이 좋으려나. 아, 이건 어떻습니까? 혈검 마가의 대공녀 이드린느를 드리겠습니다.]

"…뭐?"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혈의 마왕의 이름에 크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아, 이드린느는 우리 사왕성 최고의 미녀이거든요. 어차피 죽여 없앨 생각인데, 그냥 죽이긴 아까우니, 이런 식으로라도 써먹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공자께 특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미쳤군."

크리스는 질린 얼굴을 하였다.

사혈의 마왕을 선물로 주겠다니.

역겨운 걸 떠나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이드린느가 사왕성의 권력 다툼에서 승기를 잡기 전인 건가?'

마도 제국의 어느 곳이든 다 그렇지만, 사왕성도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크루세이드 연합이 내부가 썩어 문제라면, 마도 제국은 서로 끝없이 싸워대는 게 문제였으니까.

'이드린느도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고 사왕성의 패권을 잡았다고 했지.'

어쨌든 들을 것도 없는 이야기다.

"닥쳐."

[큭큭. 역시나 매력적이군요. 아아, 어쩌나. 볼수록 더, 더 탐이 나는데.]

인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냥 여기서 죽여서 인형으로 만들어 버릴까나?]

"!!"

그 순간.

에반이 오러 블레이드를 날렸다.

섬전 같은 기습.

하지만 인형은 당황하지 않고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후훗. 검술 명가인가요? 당신도 인형으로 삼으면 좋겠군요. 각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인형의 몸이 멈칫했다.

찰나, 완전하게 굳은 거다.

마치 실이 끊어진 것처럼.

짧디짧은 순간이었지만, 에반 정도의 기사를 상대로는 억겁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다.

서걱.

인형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뿐이 아니다.

번뜩.

에반의 검이 폭풍을 일으켰다.

손목, 팔, 다리, 등등. 인형의 몸이 수없이 조각났다.

재생을 못 하게 일부러 이렇게 토막 낸 거다.

[무, 무슨?! 어떻게?]

데구르르.

인형의 목이 바닥을 구르며 믿을 수 없다는 외침을 뱉었다.

"봤잖아. 내가 천재인 것."

크리스가 저벅 앞으로 걸어가 구두 굽을 인형의 가면 위에 올렸다.

정확히 외눈 쪽. 인형의 '핵'이 있는 곳에.

"나 같은 천재를 상대로 이렇게나 오랫동안 '끈'을 노출했으면서, 괜찮을 거로 생각했어? 너무 날 무시한 것 아니야?"

[!!]

끈.

인형술의 핵심으로 주인과 인형을 연결하는 흑마법적 연결을 뜻한다.

따라서 그 끈을 자르면 인형도 무력화되니, 크리스는 인형을 처음 본 순간부터 끈을 찾아내려 내내 신경 썼다.

물론, 보통은 철저히 끈의 존재를 감추고, 파훼하지 못하게 손을 써놓지만.

'아무리 메르헨이 7성 흑마법사라도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 인형을 조작하면서 완벽히 끈을 숨기는 건 무리이지. 사왕성과 이곳의 거리는 2,000km도 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다른 이들은 감히 파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실낱같은 빈틈에 불과했지만, 크리스는 그 희미한 빈틈을 노려 일시적으로 인형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거다.

'다음번에는 메르헨도 대비책을 마련할 테니, 같은 수를 쓰는 건 어렵겠지만.'

퍼억!

가면이 부서지자 토막 난 인형의 몸이 죽은 마물의 시체처럼 시커먼 액체로 변해 소멸하였다.

"…끝났군."

에반이 말했고.

크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지."

"!!"

크리스는 온갖 흑마법적 술식과 흔적이 남아 있는 제단을 내려다보았다.

"진실을 밝혀낼 때야."

이 끔찍한 사건의 진정한 배후를 마주할 때가 왔다.

* * *

뒷수습 먼저 하였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진 싸움이었으니, 빈츠 대공이 사라져도 혼란은 없었다.

소백작 로이와 올리비아가 대충 핑계를 대어 빈츠 대공의 부재를 둘러대었고, 그사이 크리스는 증거를 확인했다.

'쉽지는 않군. 역시 저주 마가 놈들의 솜씨야.'

이 사건의 진정한 배후는 빈츠 대공이 아니다.

빈츠 대공은 하수인이었을 뿐이다.

흑마법적 증거물들에 진정한 배후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했지만, 전혀 없었다.

기껏해야 하수인이었던 빈츠 대공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 방법이 있지.'

크리스는 비단 흑마법적 증거물들을 뒤지는 것만이 아니라, 빈츠 대공의 업무 서류까지 모조리 샅샅이 뒤졌다.

원래 외부인이 접근할 수 있는 서류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빈츠 대공이 공식 서류에 증거를 남겨놨을 리는 없지만.

"빙고."

"…알아낸 게 있나요?"

올리비아가 물었다.

어째서인지, 굳어 있는 안색.

"서류를 살피니 확실히 수상쩍은 내용이 있군요."

"...."

"배후가 누구인지 확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리비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푸른 보석빛 눈동자에 긴장이 깃들었다.

크리스는 서류들을 내밀었다.

"이 서류들은 최근 1년간 빈츠 대공령의 물자 반출, 예산 흐름을 기록한 겁니다. 자세히 살피면, 이번 저주에 사용한 물품들을 어떻게 위장해 들여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원체 대규모 저주였으니, 사용한 물품이 많은데, 대부분은 금지 품목이라 온갖 루트를 통해 위장해 들여왔지요. 빈츠 대공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력자가 있는 게 분명한데,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진 골드 크로스의 특성상 이런 일이 가능한 이는 거의 없다.

각국의 군주라도 자신의 영토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이니.

- 자세한 이야기는 법왕께 따로 들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빈츠 대공이 했던 이야기가 스치며 지나가, 올리비아의 안색이 시체처럼 질려갔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그저 짐작일 뿐이지 않나요?"

"그렇지요. 대신, 이것도 보십시오."

루이나가 보낸 서신이었다.

"디어 상단이라고 아십니까?"

"…네, 이번 흑사병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누명을 덮어씌웠을까요?"

"...."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도 골드 크로스 내에 거의 없었다.

크리스가 서신을 펼쳤다.

"다행히도 상단주 루이나는 수완이 좋아, 골드 크로스 내의 여러 핵심 인사들과 안면이 있지요. 그들이 말하길, 디어 상단의 몰락에는 아주 높은 분의 의향이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제140화

올리비아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프더라도.

진실을 마주 보게 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천공 섬의 유리 꽃, 사해에 잠겨 있던 유성 조각, 고룡의 눈. 빈츠 대공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구한 재료들입니다. 이 재료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아십니까?"

"…무엇이죠?"

크리스는 천천히 말을 하였다.

"에메랄드 태블릿."

"!!"

"법국에 잠들어 있는 유물이지요. 방금 말한 재료들이 에메랄드 태블릿에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올리비아의 눈에서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많은 제물과 합칠 시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성좌의 피를 이어받은 혈족이 완성된 에메랄드 태블릿을 소유하면, 성좌와도 같은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지요."

"...."

성좌의 피를 이은 혈족.

법국의 아르헨 왕가를 말한다.

"이 모든 내용들이 가리키는 건 하나."

이윽고.

"이 사건의 배후는 법왕 펜타겔 3세입니다."

크리스는 모든 진실을 말하였다.

"법왕 펜타겔 3세는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 * *

그렇다.

이게 이번 '별의 타락'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숭고하다고 일컬어지는 법왕이 일으킨 끔찍한 사건.

'다 탐욕 때문이지.'

크리스는 조소했다.

펜타겔 3세가 바란 건, 바로 골드 크로스를 지배하는 것.

지금처럼 허울뿐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 되고자 했던 거다.

'실제로 거의 이루었지.'

하지만 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왕성 때문이었다.

사왕성이 이 일에 협력한 건, 법왕을 자신들의 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왕성이 법왕이 저지른 죄악의 비밀을 쥐고 있는 한, 법왕은 사왕성에 거스르지 못하는 신세였으니까.

법왕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감내하기로 한 거다.

사왕성에 휘둘리는 법왕 때문에 골드 크로스는 천천히 망가져갔고, 최후의 순간, 사왕성이 결정적인 일을 터트렸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법왕이 저지른 죄악의 진실을 밝힌 거다.

당연히 골드 크로스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골드 크로스는 싸우기도 전에 내분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 올리비아의 운명도 파멸을 맞는다.

'반드시 막아야 해.'

문제는 올리비아였다.

지금, 그녀는 충격에 빠져 혼자 있는 상태다.

'올리비아에게 법왕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아버지였으니.'

그러니 충격을 받은 게 당연했지만, 시간을 오래 줄 수가 없었다.

'법왕도 곧 변고를 눈치채게 될 거야. 시간을 더 끌면, 일이 어려워져.'

늦어도 오늘.

그 안에 법왕을 치러 가야 했다.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나요?"

"!!"

올리비아였다.

의외로 차분한 음성.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얼굴도 그랬다.

펑펑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히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아요."

"...."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는 않아요. 저… 어쩌면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올리비아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아버지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추악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법국의 썩은 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다.

그러니 법왕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다른 쪽이에요."

"무엇입니까?"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와 '맹약'을 맺고 싶다는 이야기. 아직도 유효한가요?"

처음 올리비아와 만났을 때 꺼낸 이야기다.

"물론입니다.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전 공주와 앞으로도 손을 잡고 싶습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배신하지 않고, 서로의 일에 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겁니다."

굳이 맹약의 형식을 빌리는 건, 신뢰 때문이었다.

'맹약'을 맺으면 서로를 배신할 수 없으니, 훨씬 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죠? '맹약'에 걸고 솔직히 말해주세요."

만약, 맹약에 걸고 말했는데, 거짓이라면, 맹약은 무효화된다.

"마도 제국의 정점에 오르는 것."

"!!"

"그리고 다가올 파멸. 그러니까 마도 제국과 빛의 진영 측에서 일어날 전쟁을 막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연합 쪽에도 이것저것 간섭할 생각인데, 공주가 그때 제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의 답이 뜻밖이었을까?

올리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아니, 믿어요. 당신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것 같으니."

재수 없고, 못되어 보이지만.

크리스가 이번에 빈츠 대공령에서 한 일을 보면, 그는 절대 악인이 아니었다.

성자라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법국의 위선적인 이들보다는 훨씬 선한 이였다.

"그러면, 저도 바라는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단죄하는 데 도움을 주세요."

"!!"

올리비이가 무겁게 침잠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이게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조건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법왕을 단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스스로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의외였다.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올리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빈츠 대공의 연구실을 조사하다가 알게 되었어요. 빈츠 대공이 제 오라버니의 모친을 모함하였다는 것을."

빈츠 대공은 조작계 마법사이자 대단한 수준의 연금술사로 크리스의 모친이 악마와 결탁하였다는 증거를 꾸며내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했다고 해도, 법왕인 아버지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어요. 일부러 그런 판결을 내린 거죠. 즉, 크리스 오라버니를 악마의 씨앗으로 몬 것은 아버지였던 거예요."

"...."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렸다.

"나, 나… 왜 몰랐을까. 아버지가 사실 끔찍한 존재인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만 있었을까."

만약, 올리비아가 자신의 무력함을 이유로 법왕의 끔찍함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크리스를 모함한 게 법왕이었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사이, 크리스는 죽었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 올리비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법국을 책임질 성녀로서도, 그리고 오빠를 위해서도… 반드시 아버지를 단죄할 거예요."

크리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법왕의 단죄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법왕 펜타겔 3세를 몰락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법왕을 단죄한 이후에는, 오라버니에 관한 생각은 그만 떨쳐내십시오."

"...!!"

크리스는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는 건 이해하지만, 더는 당신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딴 거 당신과 상관없잖아요?"

"왜 상관없죠?"

크리스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제 동맹이 될 테니. 그릇된 감정으로 망가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올리비아가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턱.

그의 손이 올리비아의 머리를 덮었다.

올리비아는 다급히 그의 손을 쳐내려 하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마치, 과거, '크리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때처럼.

따뜻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지금은 슬퍼해도 좋습니다. 복수도 도와주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마지막으로 털어 버리십시오."

"나… 난…."

"당신의 오라버니도 당신이 이러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

올리비아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크리스'도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아니, 사실 그런 것보다.

정말 이해할 수 없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크리스'를 떠올리게 해 올리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전 오빠와 함께 있었을 때처럼.

* * *

곧바로 법왕을 향해 출발하기로 하였다.

여유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급보가 들렸다.

"크, 큰일입니다!! 뤽센 왕국에서 백사자 기사단을 출진시켰다고 합니다! 빈츠 대공령의 변고를 확인하겠다고 합니다!"

소백작 로이가 하얀 안색으로 외쳤다.

'법왕의 수작이군.'

크리스는 눈을 지그시 찌푸렸다.

법왕이 빈츠 대공령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채고 손을 쓴 거다.

"어, 어쩌죠? 뤽센 왕국이면 이곳 빈츠 대공령의 바로 옆에 있는 곳인데. 특히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은 무려 6성의 마스터 클래스의 기사이고요."

알로스가 하얀 안색으로 더듬거렸다. 소백작 로이도 마찬가지로 파랗게 질린 얼굴.

크리스는 겁에 질린 둘을 보며 툭 말했다.

"어떻게 하긴? 너희 둘이 알아서 잘 막아야지."

"…네?"

"나와 쥬피엔, 올리비아 공주는 법왕을 잡으러 간다. 뤽센 왕국의 백사자 기사단을 막는 건 알로스, 네게 맡기마. 여기 소백작 로이가 도와줄 거다."

"네? 네? 제가요?"

알로스와 소백작 로이는 다 함께 창백한 얼굴을 하였고,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에 올랐다.

"잘 해봐. 암흑 마가의 위명과 부르센 백국의 배경을 이용하면 하루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

"어? 어? 자, 잠깐요?"

"그러면 믿는다."

타앗!

말 허리춤을 차자, 말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쥬피엔과 올리비아, 에반이 그 뒤를 따랐고, 남겨진 알로스와 소백작 로이는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나쁜 놈."

"…악마 놈."

비슷한 내용을 중얼거린 둘은 흠칫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리는 아련함.

"…힘냅시다, 알로스 경."

"…로이 경도요."

크리스란 공통된 악마 때문에 마인과 빛의 진영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우애가 불타오르는 둘이었다.

* * *

한창 말을 달리던 중 에반이 말했다.

"법국으로 가는 건가? 경계가 심할 거다. 우리만으로는 돌파 불가하다."

아무리 법국의 군사력이 약한 편이라고는 해도 그들 네 명만으로는 맞설 수 없었다.

"차라리 한발 물러난 후 조력을 받는 게 좋지 않겠나?"

"조력? 누구한테? 우릴 도와줄 이는 누구도 없어."

크리스의 말대로다.

이곳은 골드 크로스.

암흑 마가의 도움을 받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골드 크로스의 다른 국가들이 법왕을 치는 데 도움을 주지도 않을 거고.

'법왕이 이번 일의 배후라는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아니,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쉽게 나서지 않을 거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봤자, 법왕이 대비할 기회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아.'

아직 법왕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쳐야 했다.

그들 네 명만으로 법왕을 잡을 기회는 오로지 지금뿐이다.

"다행히 법국으로 갈 필요는 없어. 어차피 법왕은 지금 법국에 없을 테니."

"없다고?"

"그래, 지금 법왕은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제141화

법왕의 목적은 에메랄드 태블릿의 완성.

법국은 의식이 펼쳐졌던 빈츠 대공령과 거리가 멀어 에메랄드 태블릿의 완성 장소로는 적합지 않았다.

빈츠 대공령 근처에서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시키는 근거지를 마련해 놓았을 거다.

'지금쯤 그쪽에 가 있겠지. 의식이 중단되며, 에메랄드 태블릿의 완성에 문제가 생겼을 테니.'

어느 곳인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법왕이 평소 법국을 떠나 자주 가던 장소가 있나? 최근 1년 사이에."

맹약을 맺은 후 올리비아에게 은근슬쩍 말을 놓기 시작한 크리스였다.

"…있어요. 성지인 '달의 정원'에 종종 가고는 했어요."

달의 정원.

성좌의 기운이 달빛처럼 녹아 있다는 성지였다.

성지라 골드 크로스의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땅으로, 오로지 법왕만 걸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성좌들의 계시를 받는다는 이유로 가곤 했는데, 설마 성지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을 줄은."

올리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서 가지. 시간이 없으니."

달의 정원은 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달리니 숲이 나타났고, 숲 안으로 더욱 들어가니 저 멀리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풍경의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달빛의 폭포수가 형상화되어 내려오는 듯한 몽환적인 광경.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달의 기운이 왜?"

올리비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반도 비슷한 점을 느낀 듯했다.

"…성지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운이군. 달의 기운에 끔찍한 탁기가 섞여 있다."

한없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성지란 이름에 걸맞은 숭고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마치 게헨나의 사기와도 비슷한 불길함이 함께 넘실거렸다.

크리스가 이유를 말했다.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시키며 성지의 기운이 오염된 거다."

"이미 완성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의식을 중단시켜 제물이 부족해졌을 테니."

만약, 에메랄드 태블릿이 완벽하게 완성되면, 그들 네 명만으로는 감히 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법왕은 정말 성좌와도 같은 권능을 얻게 되니.

"…불완전한데도 보통 강렬한 기운이 아니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새어 나온 기운이 살갗을 찌르기 시작했다.

성좌의 기운을 담아 성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끔찍한 사기가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이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달의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달의 정원은 말 그대로 정원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정원은 아니었다.

성좌의 기운을 모으기 위한 유적.

외부와 내부가 결계로 차폐되어 있었다.

"딱히 높은 수준의 결계는 아니니 진입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야. 문제는 정원의 밖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인데."

숫자는 많지 않았다.

대략 200명?

대부분 일반 병사였다.

원래라면 에반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는 병력.

하지만 일행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거다.

"저 병사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뭐지?"

병사들 한 명, 한 명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비교하자면, 대략 3성급의 기사와 비슷했다.

믿을 수 없는 일.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이야. 남들에게 성좌의 축복처럼 강력한 힘을 내릴 수 있지."

"불완전한데도 저 정도라고?"

"불완전하니까 저 정도인 거야."

이전 삶 때, 법왕 펜타겔 3세는 무려 3만에 달하는 생명을 흑사병으로 죽여 제물로 바친 후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했는데, 가히 재앙과도 같은 권능을 발현했다.

골드 크로스의 모든 국가가 펜타겔 3세에게 굴복할 정도로.

'뭐, 그것도 한계는 있었지만.'

에메랄드 태블릿의 약점.

발현하는 권능이 무한하지 않다는 거다.

그러니까, 소모적이었다.

권능을 사용한 만큼, 다시 태블릿에 제물을 바쳐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능의 힘이 약해져 펜타겔 3세는 더욱 많은 제물을 찾았고, 온갖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이유로 에메랄드 태블릿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논란이 많았지. '정의'의 성좌가 고안한 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끔찍한 물건이니까.'

악마가 성좌의 권능을 정교하게 본떠서 인간을 끔찍하게 타락시키기 위해 고안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었다.

'사실 성좌가 만든 것도, 악마가 만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정면으로 저들을 모두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니, 에메랄드 태블릿을 탈취해야 해."

"가능한 건가? 어려워 보이는데."

에반이 굳은 눈으로 정원을 살피며 말했다.

안쪽의 모습은 결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밖의 병사들이야 둘째 쳐도, 안에는 분명 기사 병력이 지키고 있을 거다."

기사 전력이 약한 법국답게 5성 이상의 고위 기사는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문제는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이었다.

일반 병사들조차 3성에 준하는 힘을 품게 했는데, 기사들은 얼마나 힘이 증폭되어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가능해. 생각한 게 있으니까."

"어떤?"

"올리비아 성녀의 힘을 이용할 거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나?"

올리비아도 마찬가지로 성좌의 권능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에메랄드 태블릿의 막강한 출력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것이다.

"괜찮아. 그것도 생각한 게 있으니."

크리스는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내게 들은 이야기 잘 기억하지?"

"…네."

올리비아가 꾹 나뭇조각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해낼 테니. 오빠를 위해서."

결전을 앞둔 긴장감 때문일까?

원래 마지막 '오빠를 위해서'는 속으로 하려던 말이었는데, 밖으로 튀어나왔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고, 크리스는 살짝 뻘쭘한 얼굴을 하였다.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리 낯 두꺼운 크리스라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있던 쥬피엔이 뚱하니 말했다.

"귀여운 동생이네."

"…네?"

"내 동생은 재수 없기만 하고 하나도 안 귀여운데."

그러며 쥬피엔은 크리스를 꼬나보았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미운 동생을 쏘아보듯이.

"…자꾸 누가 네 동생이라는 거냐."

크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움직이자."

발을 앞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섬뜩한 음성이 크리스의 발목을 잡았다.

[멈추어라.]

심연에서 흘러나온 듯한 음성.

게헨나의 악마 메피나였다!

'무슨 일이지?'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메피나가 그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지만, 악마를 혐오하는 그는 그녀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경고하러 왔다.]

'경고?'

[그래. 저 안으로 들어가면, 넌 높은 확률로 죽게 될 거다.]

섬뜩한 경고였지만 크리스는 차갑게 답했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대응은 이미 생각해 두었어.'

그런데 메피나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효능은 성좌의 권능을 발현하는 게 끝이 아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게헨나의 인과율에 따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넌 항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크리스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메피나는 악마.

무시할 수 있는 경고가 아니었다.

'권능 발현이 끝이 아니라고? 도대체?'

순간, 크리스의 머릿속에 섬뜩한 가정이 떠올랐다.

'하나 있어. 에메랄드 태블릿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크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내가 예상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대단히 희박한 확률의 일이니까. 하지만 정말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다.

메피나의 말처럼, '항거 불가'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어쩌지?'

물러나는 게 현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법왕을 단죄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아.'

시간을 주면, 법왕은 이번 사태를 완벽히 덮을 거다.

그러고는 다른 수작을 써서 에메랄드 태블릿을 완성하려고 들 거다.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위험한 상황.

그때, 메피나가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만약, 네가 바라면, 너에게 도움을 주마.]

크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굳이 이런 경고를 해주나 했더니, 결국 유혹하려는 목적이었다.

[내 권능이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걸 미연에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크리스의 머릿속에 번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나 있었다.

메피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힘만으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걸 막을 방법이.

게다가 성공한다면, 커다란 이득을 볼 수도 있었다.

'정말 내가 짐작하는 일이 일어나는 게 맞는다면, 안드릴의 봉인을 일부 풀 수 있을 거야.'

안드릴의 봉인 해제 조건은 단순히 9성에 오르는 게 끝이 아니다.

9성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극악한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어쩌면 이번 일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크리스는 메피나에게 말했다.

'닥쳐.'

[…뭐?]

'네놈의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

[후회할 텐데?]

'글쎄.'

크리스는 빙글 미소를 지었다.

'내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어서 말이야.'

무엇보다.

'네놈같이 역겨운 악마 놈과 손을 잡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러니 꺼져!'

저 보이지 않는 너머, 메피나의 존재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건방진 놈.]

거듭된 거절에 자존심이 상한 음성.

쭈뼛 소름이 돋았다.

자신을 향한 위대한 격의 분노에 본능적으로 영혼이 긴장을 느끼는 거다.

하지만.

'화내서 어쩔 건데?'

크리스는 뚱하니 생각했다.

어차피 게헨나 저편의 악마가 분노해봤자, 실질적으로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니 겁먹을 것 없었다.

'삼계(三界)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만. 아직 먼 이야기니까.'

그런, 크리스의 의연함이 뜻밖이어서일까?

메피나가 묘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건방지긴 하지만… 더욱 탐이 나긴 하는군.]

"...."

[지켜보겠다. 과연 압도적인 절망을 앞두고 네놈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만약, 힘에 부치면 언제든지 내게 손을 내밀도록.]

메피나가 시커멓게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기꺼이 도와줄 테니까.]

그걸 끝으로, 메피나의 기척은 사라졌다.

말없이 게헨나 너머에서 크리스가 해내는 일을 지켜볼 생각이리라.

'…기분 나쁘니 보고 있지 말라고.'

크리스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떨치고 싶다고 해서 떨칠 수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

아마, 메피나 말고도 수많은 악마가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시할 수밖에.

"뭐하고 있는 거지? 더 기다려야 하나?"

"아아. 머릿속에서 웬 벌레가 웽웽거려서."

크리스는 고개를 젓고는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노르디언이 챙겨준 마검, 포식자였다.

"나랑 올리비아 공주가 정원 안으로 진입할 거고, 에반은 따라오면서 올리비아 공주를 호위해. 쥬피엔, 너는 뒤에서 병사들을 막고."

마검의 섬뜩한 핏빛이 달빛을 반사했다.

"가자."

결전의 시작이었다.

제142화

일행은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파앗!

피가 튀었다.

"크아악!!"

"뭐냐?! 막아!!"

아무리 3성급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바탕은 일반 병사일 뿐이다.

비교하자면, 휘두르는 힘만 강해진 격.

당연히 일행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문제는 숫자였다.

아무리 힘만 강해진 것이라고 해도 숫자가 200에 달하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에 부치게 될 거다.

"일단, 내가 길을 뚫겠다."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파앗!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뿜었고,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의 진영이 무너져 내렸다.

일행은 틈을 놓치지 않고 안으로 쇄도했고, 곧 정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결계다. 뚫을 수 있겠나?"

"당연히."

크리스가 결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애초에 이 결계의 목적은 외부와 정원 안쪽을 유리해 성좌의 기운을 내부에 모으기 위한 것으로, 보안 술식 자체가 뛰어나지는 않았다.

크리스는 순식간에 결계의 보안을 해체해 길을 열었다.

"막아라!!"

뒤늦게 병사들이 몰려왔다.

크리스가 힐끗 쥬피엔을 바라보았다.

저 병사들은 쥬피엔이 막기로 하였다.

"할 수 있겠어?"

"응."

쥬피엔은 짧게 답했다.

해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음성.

"자, 이거 받아. 4마급 마수인 '껍질 거북이'가 담긴 소환석이야."

껍질 거북이는 이름처럼 움직임이 둔하지만, 무지막지한 물리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쥬피엔을 보조하기 적격이었다.

"마리, 너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 좀 질러주고."

[오호호, 맡겨 주십시오.]

물론 마리는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밴시인 그녀가 이리저리 휘젓고만 다녀도 병사들은 혼이 빠질 거다.

크리스가 건네는 건 또 있었다.

"이것도 받고."

요요한 기운이 담긴 보석이었다.

보석의 정체를 알아본 쥬피엔의 눈이 커졌다.

"환태(幻太)의 마석? 어떻게 이 유물을?"

환술을 보조해주는 유물이었다.

"가문 보물 창고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던데? 몰래 훔쳐 왔어."

"…잘했네. 칭찬해줄게."

쥬피엔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성취의 기사나 마법사들에게 환술은 상대적으로 효용이 떨어진다.

하지만 저 병사들은 힘만 강해진 거니, 환술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방패 역할을 해줄 껍질 거북이, 환태의 마석, 혼을 빼놓을 마리의 귀곡성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으리라.

쥬피엔은 한 손에 마석을, 한 손에 검을 든 채 정면을 보며 말했다.

"얼른 가. 죽지 말고."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인가?"

"쓸데없는 말 닥치고 꺼져. 죽으면 엉덩이를 차줄 테니."

"그래, 너도 조심하고."

크리스는 정원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결계 안쪽으로 들어오니 완전히 풍경이 달라졌다.

마치 낙원을 형상화한 것 같은 화려한 정경의 정원.

그리고 유형화되어 허공에 떠다니는 달빛의 기운.

몽환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기괴한 불길한 기운도 느껴졌다.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작은 저택에서 소름 끼치는 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메랄드 태블릿이 저 안쪽에 있나 보군."

"아마도."

법왕도 저 안에 있을 거다.

'아버지'와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크리스의 가슴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전 삶, 그의 어린 시절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상대이니까.

딱히 복수에 집착하고 살았던 건 아니지만, 가슴이 진동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그런데.

"멈춰라."

"!!"

일단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기사들이었다.

적지 않았다.

20명에 달하는 숫자.

수준도 높았다.

가장 약한 이가 3성의 경지였고, 절반 가까이가 4성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선두에 서 있는 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 했는데, 제 발로 걸어와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갈가리 찢어 죽여주마."

일전, 크리스에게 패했던 5성 엘더 나이츠 미에크였다!

그때, 미에크는 양다리가 잘렸었는데,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으로 치료한 건지, 지금은 멀쩡히 붙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기운.'

기사들 전원, 폭풍과도 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원래의 성취보다 몇 단계는 증폭한 듯한 기운이었다.

더욱 최악은 밖의 병사들처럼 무식하게 힘만 강해진 게 아니란 거다.

이들은 원래도 마나를 손발처럼 다루는 수준 높은 기사였으니, 증폭한 힘을 다루는 것도 훨씬 능숙할 거다.

기사들 한 명, 한 명에게서 강렬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압권은 원래도 5성의 기사였던 미에크였다.

미에크의 손에서 섬뜩한 오러가 번뜩였다.

일전 크리스와 결투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힘의 소용돌이.

단순히 기운의 크기만 따지면 6성 마스터 클래스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법왕 전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이지. 각오해라. 네놈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게 해줄 테니."

미에크의 눈이 잔인하게 일렁였다.

뒤에 있던 올리비아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멈추세요! 당신들은 그 힘이 어떤 끔찍한 힘인지 모르는 건가요?"

미에크가 힐끗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압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

"위대한 대의를 위해, 다른 이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이거늘. 공주님께서는 너무 순진하셔서 탈이군요."

말도 안 되는 멍멍이 소리에 올리비아가 이를 꽉 깨무는 순간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 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다 죽을 놈들이니."

"뭐?"

크리스의 말에 미에크를 비롯한 기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열세인 건 누가 봐도 크리스 쪽이었다.

서로 간의 전력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절망적인 상황.

그런데 크리스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에반, 네가 미에크, 저 멍멍이 놈을 맡아. 해치울 필요는 없고, 손발을 묶어두기만 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할 수는 있지만, 나머지 놈들은?"

에반이 미에크를 맡아도 스물에 가까운 기사들이 남아 있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축복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고 있는.

"나머지는 내가 다 처리하겠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고 있어."

그 미친 이야기에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겠군. 모두 쳐라! 아, 죽이지는 마. 천천히 고문해서 지금껏 날뛴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미에크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기사들 세 명이 천천히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증폭한 힘에 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자신만만한 눈빛이었다.

그때, 크리스가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올리비아 공주, 내가 이야기했던 것을."

"…정말 이렇게 하면 되나요?"

"그래, 날 믿고 어서 해."

올리비아는 잠시 머뭇거린 후 자신의 힘을 개방했다.

올리비아의 등 뒤에서 광익이 뻗어 나왔고, 찬란한 빛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보유한 능력 중 하나인 '성화(聖火)' 권능이었다.

불길은 그대로 크리스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빛의 불길에 휩싸인 크리스의 몸.

다들 그 광경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미친 짓인 거지? 자살하고 싶었던 건가?"

성화는 지금 법왕이 사용한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과 비슷한 버프 권능이지만, 효과가 완전히 달랐다.

대상자의 성스러운 기운을 증폭시켜 준다.

성화 권능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신성 기사, 신성 마법사뿐.

'특히 마인에게는 독과 다름없을 텐데?'

미에크가 헛웃음을 지으며 명령했다.

"죽지는 않았을 테니, 끌고 와라! 주제를 모르고 날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그런데 그때.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크리스에게 다가오던 기사 세 명의 몸이 우뚝 멈췄다.

다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피 분수와 함께 기사들의 몸이 무너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광채.

"아아, 이거 비밀인데."

부러진 성검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 있었다.

미에크가 일전에 보여주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렬한 빛의 기둥.

무려, 5성 중(中).

엘더 미들 클래스의 오러 블레이드였다.

"내가 사실은 빛의 기운도 제법 잘 다루거든."

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 * *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 눈을 부릅뜬 채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인이 어떻게 빛의 기운인 마나를?"

그것도 보통의 마나가 아니었다.

마나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오로지 용사에게만 허락된다는 '광휘의 마나'였다.

신성 기사의 '백색 마나'보다도 숭고하다는.

올리비아와 에반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

'뭐, 저 둘한테는 들켜도 되지.'

에반은 권속. 올리비아는 맹약 관계이니 비밀을 발설하지 못할 거다.

"아아, 내가 천재라서. 마기만 다루려다 보니 지겨워서 익혀봤어. 어렵지 않던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떠들 여유가 있나 봐?"

크리스가 낮게 말했다.

"난 너희를 모두 죽일 생각인데."

"!!"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파앗!

피가 튀어 오르며 기사 한 명이 추가로 쓰러졌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빠르기에 미에크는 깜짝 놀라 외쳤다.

"모, 모두 쳐라!!"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크리스의 성휘 성취는 무려 5성. 그것도 미들 레벨인 중(中).

엘더 클래스부터는 상중하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니, 이들은 크리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은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으로 힘을 증폭했으니 일반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몸에 품고 있지만, 힘을 증폭한 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조, 조금만 버텨라! 성화 권능은 체력 소모가 극심해 오래갈 수 없어! 우리와는 상황이 달라!"

정확한 말이었다.

반영구적인 힘의 증폭을 가져오는 에메랄드 태블릿이 특별한 경우일 뿐, 애초에 이런 버프 권능은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게 보통이었다.

특히 성화 권능은 폭발적인 힘의 증가를 가져오니 그만큼 빨리 방전되기 마련이지만.

"아아. 그거야 준비한 게 있지. 빛의 마나를 다룬다고 내가 마인인 걸 잊은 건 아니지?"

크리스가 이번엔 마검, 포식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검에 베여 바닥에 꿈틀거리고 있던 기사의 목을 찔렀다.

쩌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마검이 기사의 생명력을 흡수했다.

흡수한 생명력은 마기로 전환되어 크리스의 아우터 코어로 흘러갔고, 크리스는 그 마기를 뱀파이어릭 링을 통해 다시 빛의 마나로 전환시켰다.

"힘을 흡수할 에너지 창고가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중간에 지쳐 쓰러질 이유가 없잖아?"

소름 끼치는 모습에 기사들이 주춤하였고, 미에크가 이를 악물었다.

"이익…!"

그나마 이 자리의 기사 중 크리스를 상대할 만한 자는 5성 기사인 미에크 혼자뿐.

크리스를 막으려고 나서는데, 에반이 가로막았다.

"이익, 비켜라!! 어디서 감히!!"

하지만 에반은 미에크 따위가 감히, 라고 표현할 상대가 아니었다.

미래의 용사.

지금 당장도 검술 명가의 차세대 중 최강이라 꼽히던 이였으니까.

같은 5성 하의 경지라도 둘의 검술 조예엔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 때문에 힘에서 미에크가 우세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쉽사리 에반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사이 크리스의 검이 무참히 기사들을 베었다.

파아아앗!!

제143화

일방적인 전투였다.

성화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포식자 덕분이었다.

'정말 대단한 마검이야.'

크리스는 성검 그루나데로 상대를 무력화시킨 후 최종 마무리는 포식자로 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했다.

상대의 생명력을 흡수하니 힘의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크리스는 한순간, 한순간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니, 상대 기사들은 전혀 맥을 추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특히 에메랄드 태블릿과 상성이 아주 잘 맞아.'

원래라면, 아무리 포식자라도 이렇게까지 무한정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포식자로 흡수할 수 있는 생명력은 상대방이 지닌 기운에 비례하니까.

일반 병사들을 베어봤자, 약간의 체력 회복 효과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기사들은 에메랄드 태블릿으로 인해 기운이 증폭되어 있다.

그러니 포식자로 막대한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거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기운이 도리어 크리스에게 힘을 보태주는 역할을 하는 격.

'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눈앞의 기사들은 에메랄드 태블릿의 끔찍한 비밀을 알고도 힘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하등 동정할 가치가 없었다.

"괴, 괴물… 크아악!!"

마지막 기사까지 쓰러진 이후, 크리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에크를 처단하려고 했는데, 예상외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쪽도 끝났다."

미에크가 눈을 부릅뜬 채 목이 베어져 있었다.

에반의 승리였다!

'…에반 놈도 정말 괴물은 괴물이야.'

크리스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에크는 품은 기운만 따지면 6성 이상의 기운을 품고 있었는데, 오로지 검술 기예로만 쓰러뜨린 거다.

'검성 축복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더욱 강해지겠지. 순수한 검술로는 나도 에반 놈한테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겠어.'

뭐, 노예가 강해지는 건 주인으로서 기쁜 일이다.

한편, 상황이 정리되자 에반과 올리비아는 정신을 차리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크리스를 보았다.

"너, 방금 그 마나는?"

"말했잖아. 천재라서 다룰 줄 아는 거라고. 마나는 그냥 겸사겸사 취미 삼아 익힌 거고, 나 마인 맞아. 물론, 비밀이다?"

"…그래."

둘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그래."

이제 최종 결착을 지을 때가 도래했다.

정원 안의 저택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쏴아아.

갑자기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영혼을 스쳐 지나갔다.

'…이건?'

희미한 감각이다.

하지만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재차 비슷한 섬뜩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

올리비아와 에반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 듯했다.

"안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서 빨리 진입해야겠군. 서두르지."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둘 다 물러나."

"뭐?"

"어서 밖으로 달아나라고!!"

"!!"

크리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이 느낌.

기묘한 섬뜩함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과거 크리스는 이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멸망의 시대 때, 무려 십만이 넘어가는 목숨을 뺏어간 끔찍한 사건.

'제길, 설마 정말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다니? 미친.'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뭐해? 어서, 떠나!! 이곳에 남아 있으면 죽어!!"

섬뜩한 느낌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가만히 서 있어도 파르르 살갗이 떨리는 수준이었다.

모두 직감했다.

끔찍한 재앙이 강림하고 있다고.

하지만 에반과 올리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크리스티앙, 너는?"

"…난 법왕을 막을 거야."

"막는다고? 너 혼자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올리비아도 나섰다.

"맞아요. 당신은 이제 제 맹약자 아닌가요? 절대, 혼자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

"아니, 막을 수 있어. 방법이 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에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너 혼자 희생하려는 거냐."

올리비아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뭔가 오해했는지, 격해진 음성이었다.

"맞아요! 혼자 남겠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잘난 척하지 말고, 같이 몸을 피해요! 마인이면 마인답게 굴라고요!"

한편, 크리스는 둘의 반응에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전혀 그런 것 아닌데?'

혼자 남으려는 것.

희생하려는 게 전혀 아니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크리스는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가 남아 있으면 방해되니까 사라지라고 한 거다."

"!!"

"말하지 않았나? 방법이 있다고. 난 반드시 이 사태를 해결해낼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워."

그래.

크리스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단, 그 여파를 계산할 수가 없었다.

재수 없으면, 후폭풍에 휘말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조리 죽음을 맞을 수도 있었다.

'모두 다 앞으로 날 위해 일해야 할 호구들인데. 절대 잘못되게 놔둘 수 없지.'

옛 동료였고, 동생이었고, 그런 사적인 감정을 다 떠나, 공적으로만 생각해도 이들은 그의 소중한 호구들이다.

최대한 오래 부려먹어야 하는.

그러니 지키려는 거지만.

'또 저 마음.'

에반은 이를 악물었다.

에반에게는 심안이 있다.

속생각을 완전히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크리스티앙이, 재수 없는 얼굴과 다르게 그들을 염려하고 위하고 있다는 게 심안을 통해 톡톡히 전달되었다.

'왜 저놈은 늘 이런 식인 거지?'

이게 첫 번째도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크리스티앙은 한결같이 남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놈은 마인 주제에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다는 검술 명가에서도 본 적 없는 진정한 선인이 분명했다.

올리비아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건지, 주먹을 불끈 깨물었다.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주인으로서 '명령'이야. 어서 가."

"!!"

에반의 몸이 덜컥 굳었다.

권속 관계에 기반한 흑마법이 발현된 거다.

'완전히 내 뜻대로 부리는 것까지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크리스의 흑마법 수준이 올라가 간단한 명령을 잠깐 강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 공주, 당신도. 맹약자로서 당신의 안위를 위한 명령이니, 어서 몸을 피해."

"!!"

물론 올리비아와 크리스는 주종 관계가 아니지만, 흑마법은 꼭 주종 관계여야 상대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맹약자로서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흑마법을 걸었다.

두둑.

둘의 몸이 강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익…!!"

"안 돼요!"

둘이 흑마법에 저항하려고 하자, 크리스가 툭 말했다.

"혹시나, 저항할 생각은 마. 내 심령에 연결해 펼친 흑마법이라, 너희가 억지로 저항하면 내가 크게 다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둘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자, 잠깐 기다려 주세요.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올리비아가 다급히 크리스에게 다가오더니 양손을 잡고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왔다.

정확히는 심장 쪽으로.

순간, 올리비아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크리스의 눈이 커졌고.

파아앗!!

올리비아가 움켜쥔 손에서 찬란한 빛이 터지더니 크리스의 몸에 깃들었다.

"[가호] 권능이에요."

크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 그대로 상대를 성력으로 지켜주는 권능이었지만.

"…이건 그냥 가호가 아니지 않나? 어째서 내게 [심장의 가호]를?"

일반적인 [가호] 권능이 단순히 방어력을 올려준다면, [심장의 가호]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다.

일반 가호와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방어력은 물론, 어떤 부상을 당해도 회복하게 해준다.

말 그대로 여벌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는 권능으로 올리비아가 펼칠 수 있는 권능 중 궁극의 가호였다.

다만, 이 가호는 올리비아에게도 페널티가 크다.

가호가 버티는 선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만약 가호의 한계가 넘는 충격을 받아 가호가 깨질 경우, 가호를 펼친 올리비아에게 반작용이 오게 된다.

심장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며, 최악의 경우 올리비아도 함께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권능의 이름이 '심장'의 가호인 이유.

"할 수 있다면서요? 잘난 척 이야기했으니, 죽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어차피, 당신이 죽어 가호가 깨지지만 않으면, 제가 입을 타격은 거의 없어요."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생각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등을 돌려 안으로 발을 옮기려는데, 에반이 묵직하게 말했다.

"죽지 마라."

크리스는 피식 말했다.

"알겠으니, 그만 찡찡대고 어서 사라져. 최대한 멀리. 명령이야."

흑마법적 명령이 다시금 둘의 행동을 강제했고, 이윽고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둘의 기척이 밖에 있던 쥬피엔과 함께 멀어지는 걸 느끼고, 크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이 점차 딱딱해져 갔다.

두려움?

아니다.

이미 대책은 준비해 놨으니까.

그가 굳은 모습을 보이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끼익.

문이 열렸고.

일반적인 저택의 모습과 전혀 다른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구는커녕 방도 일절 없었다.

실내이긴 한데, 어떤 장식도 없이 무색무미 한 드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저 안쪽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크리스의 눈빛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숭고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

법왕 펜타겔 3세.

이전 삶의 아버지와 드디어 조우하게 된 거다.

* * *

"...."

의외로 분노는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한없이 침잠할 뿐이었다.

'역겹군.'

법왕은 환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모습이 과거의 위선적인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 법왕이 무심한 눈빛으로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암흑 마가에서 온 공자인가? 미리 신경을 쓸 걸 그랬어. 벌레 한 마리가 성찬을 망쳐 버리다니."

"...."

"하지만 뭐 상관은 없지.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덕분에 커다란 결단을 할 수 있었으니."

법왕의 눈은 흑빛 광채에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가 흰자 없이 완전한 어둠에 잠식된 끔찍한 모습.

크리스는 '강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눈치챘다.

신비한 수정이 법왕의 앞에 떠올라 찬란한 빛을 뿜었고, 밖에서 느꼈던 기이한 섬뜩함이 다시금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법왕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오늘부로 짐은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이 에메랄드 태블릿에 봉인되어 있던 성좌와 한 몸이 되어."

그렇다.

에메랄드 태블릿은 단순히 성좌의 권능을 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 아니었다.

바로 성좌를 가두어둔 봉인구.

정확히는 성좌임에도 죄악에 물들어 추락한 타천성(陀天星)을 봉인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법왕은 최후의 순간에 에메랄드 태블릿의 봉인을 풀고 자신의 몸에 타천성을 받아들이지.'

끔찍한 사건이었다.

타천성은 사실상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

결국, 법왕의 영혼은 타천성에 먹혔고, 타천성의 폭주로 법국은 지옥으로 변했다.

당시 참사에 휘말려 죽은 숫자가 십만을 훌쩍 넘겼다.

중간계, 게헨나, 천계의 경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이미 영혼이 타천성의 기운에 완전히 물들었어.'

제144화

크리스는 에메랄드 태블릿의 빛을 보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찬란해 보이지만, 지독한 악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전 삶 보았던 게헨나의 존재들의 악기(惡氣)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악기.

에메랄드 태블릿의 봉인을 넘어 저렇게나 진득한 악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건, 이미 법왕의 영혼은 타천성과 뗄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법왕에게 남은 운명은 파멸밖에 없었다.

'어찌 이렇게 한결같이 추악하고 어리석은 건지.'

실소가 새어 나와 입꼬리를 비웃듯 들어 올렸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저질렀군. 숭고하디숭고하다고 추앙받는 법왕이 말이야."

그 이죽거림에 법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찮은 벌레이지만, 짐의 위대한 뜻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모두를 위해서다."

"…모두를 위해서?"

"그래. 골드 크로스는 끔찍하게 썩은 상태다. 짐은 힘을 얻어 골드 크로스의 그릇된 점을 타파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 생각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에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닥쳐. 그냥 욕심 때문이잖아."

"!!"

"머릿속에 탐욕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존재인 주제에 무슨 멍멍이도 믿지 않을 헛소리를."

위선? 법왕은 고작 그런 말로 표현할 존재가 아니다.

법왕의 가슴속에 일렁이는 탐욕은 악마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끔찍했다.

심지어 방금 법왕이 지껄였던 이야기는 이전에도 자신의 잘못을 포장하기 위해 똑같이 했던 이야기다.

"그렇게나 세상을 위해서 전 법왕비를 악마의 주구로 몬 것이냐?"

"…뭐?"

"그때, 네가 뭐라고 했었지? 슬프지만,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 법왕비를 처단하겠다고 했었나? 그래 놓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정부를 새로운 법왕비로 맞아들여?"

아주 어릴 적 일이지만, 크리스는 법왕이 했던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법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리스는 피식 물었다.

"하나만 물으마. 전(前) 법왕비, 시스타냐 황녀에게 미안함을 느낀 적은 있나?"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법왕은 크게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마인인 네놈이 그딴 이야기를 왜 묻는지 모르겠군. 악마의 추종자를 처단하는 건, 법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법왕이 어떤 죄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명백히 느껴지는 음성.

"하하."

크리스는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한결같이 추악한 모습을 보니 도리어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끝이니.'

"그래, 더 이야기할 것 없겠지. 더 이야기하고 있기도 역겨우니 얼른 끝내자."

"…자꾸 무슨 헛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군. 죽는 건 네놈이다."

법왕은 벌레를 짓밟는 듯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죽어라."

화르륵.

에메랄드 태블릿 앞에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소름 끼치는 악기가 풍겨 나오는 안개였는데, 기이하게도 주변에는 빛의 운무가 떠올라 있었다.

숭고함과 끔찍한 악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모습.

타천성의 기운이 현실에 현현한 거다.

'화신과 비슷한 건가? 아직 봉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진짜 화신을 만들지는 못하고 기운만 강림시킨 거군.'

크리스는 기운의 정체를 분석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무려 성좌의 기운이 현실에 나타난 거다.

현재 그의 수준으로는 절대 대적할 수 없는 기운이지만.

크리스는 의아한 행동을 하였다.

천에 싸인 무언가를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이런 말을 한 거다.

"먹어."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마디의 말.

법왕이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순간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저택의 위아래가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굉음과 진동이 일어났고.

검은 안개가 크리스 쪽으로, 정확히는 크리스가 쥔 물건을 향해 빨려 들어가더니,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소멸한 거다.

"무, 무슨…?!"

"아아. 조커를 들고 있는 건 너 혼자만이 아니어서 말이야."

사락.

천이 풀렸고, 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철검이 검신에 방금 흡수했던 성좌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씹어 삼키기라도 하듯, 검 안에 맺힌 성좌의 기운이 이리저리 요동치더니 완전히 소멸하여 버렸다.

소름 끼치는 모습.

"마침, 이놈이 제일 좋아하는 먹이가 성좌의 영혼이거든."

안드릴.

성좌를 죽이는 성살검(星殺劍)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

안드릴은 사혈의 마왕이 쓰던 검이다.

멸망의 시대 때 사혈의 마왕이 휘두르는 안드릴은 그야말로 절망의 강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암흑 마가는 왜 이런 최강의 마검을 알아보지 못한 채 썩히고 있었을까?

봉인을 푸는 개방 조건이 극악하기 때문이다.

'소유자가 9성에 도달해야 하니. 거기에 추가 조건이 더 있어.'

최소한 한 명의 성좌를 안드릴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성좌의 영혼을 집어삼켜야만 안드릴은 성살검으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난다.

사혈의 마왕이었으니 가능했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 좋은 먹이가 있어.'

성좌를 안드릴의 제물로 바치려면, 일단, 성좌의 힘을 약화해 봉인시켜야 했다.

저기 에메랄드 태블릿에 봉인된 타천성처럼 말이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봉인이 완벽한 상태였다면 제물로 삼는 게 어려웠겠지만.'

마침 법왕의 수작으로 지금 에메랄드 태블릿의 봉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렇다고 타천성의 힘이 되돌아온 상태인 것도 아니니, 안드릴의 입장에서는 시식하기 좋게 포장을 열어둔 먹이나 다름없었다.

[고오오오오.]

안드릴이 낮게 울음을 터트렸다. 마치 어서 먹이를 달라고 재촉하는 듯한 울음.

크리스는 영혼이 오소소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쥐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울컥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아직 안드릴은 그가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기다려. 금방 끝낼 테니.'

크리스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어, 어떤 수작을 부린 거냐?!"

법왕이 뒤늦게 경계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법왕은 다시금 성좌의 기운을 현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불완전한 기운의 찌꺼기 따위, 안드릴의 간식이 될 뿐이었다.

[크르르르르.]

안드릴이 흉포하게 울기 시작했다.

이딴 기운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이 에메랄드 태블릿 그리고 타천성이 강림하기 시작한 법왕의 영혼을 향했고, 안드릴의 살기에 노출된 법왕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덜덜.

법왕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골드 크로스의 정신적 지주로 시대를 풍미하던 존재답지 않은 모습.

이건 법왕의 의지가 약해서는 아니었다.

안드릴의 영혼을 압살하는 살기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에메랄드 태블릿의 권능이 아니라면 법왕 개인은 무력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크리스가 가까워질수록 법왕은 뒷걸음질 쳤고, 그러다가 털썩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시커멓게 드리우는 그림자.

크리스티앙의 차가운 눈빛이 법왕을 내려다보았다.

끝낼 때가 되었다.

이 추악한 사건도.

그리고 법왕과 그의 더러운 인연도.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어서일까?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살려줄까?"

"…뭐, 뭐?"

"전 법왕비인 시스타냐 황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해봐. 그러면 살려줄게."

법왕의 눈동자가 파도를 만난 듯 흔들렸다.

"무, 무슨… 갑자기 왜?"

"너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려고."

크리스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싫어? 그냥 죽으려면 그렇게 해도 되고. 참고로, 너 이대로 죽으면 그대로 게헨나행인 것 알지? 그냥 거기서 속죄해도 되겠네. 셋 셀 테니 알아서 해."

둘까지 셀 필요도 없었다.

법왕이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녀에게 사죄하겠다."

"...."

"지, 진심이다. 그러니… 제, 제발…."

크리스는 무표정하게 그런 법왕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이야."

"…뭐, 뭐?"

"나 마인이잖아. 거짓말이야 필수 덕목이지. 뭐, 너도 전 법왕비한테 살려준다고 거짓말했었잖아."

크리스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네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네 법왕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아이랑 같이 살 수 있게 해준다고 했나? 참,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잘해."

법왕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네, 네가 어떻게?"

방금 크리스가 한 이야기는 누구도 모르는 법왕과 전 법왕비만의 비밀 거래였다.

법왕에게 속은 법왕비가 자신의 죄를 자백한 덕에 쉽게 화형대에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데?

"아아, 내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냐고? 글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순간.

법왕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대화를 들었던 건 법왕과 법왕비 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 한 명도 그 대화를 듣긴 했었다.

그제야 법왕은 크리스가 오늘 보인 이해 안 되는 언행들이 떠올랐다.

"서, 설마…? 너, 너는?"

크리스는 물끄러미 물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정말 미안해?"

"…정말 크리스? 미, 미안하다…!! 지, 진심이야! 나, 나는…!!"

"그래, 알았어. 잘 들었으니, 나머지는 게헨나에 가서 속죄해."

크리스는 안드릴을 들었다.

"자, 잠깐…!! 안돼!!"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직접 죽이진 않을게. 어차피 결과는 똑같겠지만."

타천성을 소멸시키면 영혼이 먹힌 상태인 법왕도 무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난 당신의 아들이 아니야."

크리스는 그대로 에메랄드 태블릿을 찔렀다.

철검이 투명한 비석을 관통했고.

동시에.

고오오오오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진동과 함께, 심연에서 울부짖는 듯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안드릴에 먹히기 시작한 타천성의 비명이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반동이 강해.'

성좌를 집어삼키며 오는 반동에 크리스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삼켰다.

'버텨야 해.'

크리스는 이를 악물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해 자신을 방어했다.

성휘의 힘, 마인의 힘도 동시에 발현했다. 원래 혈맥에 무리가 가 한쪽의 힘을 쓰면, 반대쪽 힘은 억제하였는데,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대비를 마친 순간.

빛이 명멸하여 터져 나왔다.

마치 주변 모두를 소멸시키는 듯한 강렬한 빛.

크리스가 있던 저택이 산산이 부서져 먼지로 화하기 시작했고,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휩쓸리는 주변보다는 안드릴을 쥐고 있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거였다.

성좌를 집어삼키고 있는 안드릴이 크리스를 보호하는 기능을 펼친 거다.

봉인된 상태임에도 안드릴이 이런 힘을 펼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죽어 쓰러지면, 안드릴이 성좌를 흡수하는 짓도 중간에 멈추게 될 테니. 일전, 사혈의 마왕이 최초로 성좌를 제물로 바칠 때도 이런 반응이 일어났다고 했지.'

그러니까 자신의 포식을 위한 거지, 딱히 주인인 크리스를 위하려 힘을 발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힘들어.'

속이 진탕하여 왈칵 피를 삼켰다.

안드릴의 보호 기능에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간신히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데, 섬뜩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재미…있군.]

"!!"

[네가… ■■■…인가?]

크리스는 이 음성이 안드릴에게서 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간의 단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분명 들었는데, 인식 속에서 뭉개지듯 없어져 버렸다.

"뭐라고 한 거지?"

하지만 안드릴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말을 하였다.

더욱 의미심장한 이야기.

제145화

[흥미…롭군. 네 운명이 과연 역천(逆天)이 될지, 기대…하고 있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금 빛이 명멸하였다.

이전보다 비교할 수도 없게.

안드릴에게서 암흑의 구가 뻗어 나와 크리스를 보호하듯 감쌌고, 크리스의 의식이 멀어졌다.

* * *

그날 있었던 일은 골드 크로스, 아니,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으니까.

"타천성이 강림할 뻔했다고?"

"그래, 법왕께서 흑사병을 해결하기 위해 성좌들의 계시를 받는 중, 무언가 문제가 생겨 타천성이 강림했다고 하더군. 마도 제국의 크리스티앙 공자와 올리비아 성녀께서 재빨리 개입해 일을 해결했다고 해."

올리비아는 미리 크리스와 이야기했던 대로 진실을 각색해 퍼트렸다.

사실, 올리비아는 죄를 속죄하는 의미로 모든 진실을 솔직히 밝히려고 했으나, 크리스가 반대했다.

법왕이 벌였던 끔찍한 일들이 완전히 밝혀지면, 법국의 위상은 시궁창에 처박힐 테니까.

앞으로 법왕이 되어 골드 크로스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아야 할 올리비아를 생각하면, 그건 현명하지 못했다.

'앞으로 법국은 내 호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건 곤란해.'

그래서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발표했다.

흑사병은 빈츠 대공이 저주 마가와 손을 잡고 벌인 일로.

타천성의 강림은 법왕의 실책으로.

'사실, 법왕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다 밝히는 게 속이 시원하겠지만. 이게 아니어도 충분히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법왕은 에메랄드 태블릿의 힘 덕분이었는지, 후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목숨을 건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뇌사에 빠졌다.

육체의 숨만 붙어 있을 뿐,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타천성이 소멸하며, 계약자였던 법왕의 영혼은 게헨나로 끌려가 버렸으니까.'

이제 법왕은 지금껏 지은 죄에 맞게 게헨나의 억겁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될 거다.

'그나저나 찌뿌둥하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하는 건지.'

이리저리 곡절이 많았지만, 다 잘 해결된 셈이었다.

단, 그는 마도 제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타천성이 소멸하며 생긴 후폭풍을 감당한 덕분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탓이다.

일주일째 병석 신세였다.

'올리비아가 걸어준 가호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지금껏 의식도 차리지 못했을지도.'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누워 있으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주변을 돌아다닐 만했다.

'조금씩이라도 걸어 다녀야 몸도 빨리 낫지.'

그런 마음으로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데, 마주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시종, 기사, 일반 평민 등등 모두 흠칫하더니 크리스티앙을 향해 고개를 숙인 거다.

그것도 깊게 푹.

'뭐야, 왜 그래?'

어느새 나타난 건지, 소백작 로이가 설명을 해주었다.

"크흠, 저건 공자님께서 이번에 해내신 일 때문입니다."

"내가 해낸 일?"

"네, 공자님이 하신 일이 다 소문이 났거든요. 지금 공자님은 골드 크로스의 영웅이십니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마인인 내가 골드 크로스의 영웅이라고? 말이 되나?"

"마인인 게 중요합니까?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골드 크로스는 쑥대밭이 되었을 텐데."

크리스가 없었다면 흑사병도, 타천성의 강림도 막지 못했을 거다.

"무엇보다 올리비아 공주님이 적극적으로 공자님의 공을 알렸습니다. 자신은 한 게 없고, 모두 공자님이 해내신 공이라고."

"...."

"거기에 빈츠 대공령에서 환자들을 모조리 살려낸 신의가 공자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점도 큽니다."

"…그건 어쩌다 퍼진 거지?"

"공자님을 알아본 환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크리스는 얼굴을 가리는 까마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변용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환자들 말고 다른 이들을 만난 일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알아본 이가 생긴 거다.

"환자들을 모조리 살려내다니! 마인만 아니었다면, 성자로 추앙받기 충분한 업적이니까요. 실제로 빈츠 대공령의 백성들은 공자님을 '어둠의 성자님'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

어둠의 성자.

뭔가 유치한 느낌이 가득한 별명이었다.

손등에 흑염룡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별명이군."

"하하. 사실 그것보다는 다른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뭐지?"

"마휘(魔輝)입니다."

크리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마의 빛'이란 뜻이다.

마인이니 대놓고 영웅으로 추앙하지 못하니 저런 별명을 지은 것 같았다.

"어쨌든 공자님은 우리 골드 크로스를 구하셨습니다. 부르센 백국, 그리고 골드 크로스를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소백작 로이가 넙죽 허리를 숙였고, 그 모습에 크리스는 멀뚱히 답했다.

"그리 아부해봤자 안 풀어준다. 넌 영원히 내 노예야."

소백작 로이는 허리를 숙인 채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이 정도 살랑거렸으면 좀 풀어줘라! 네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잖아! 마지막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최후의 순간, 뤽센 왕국의 백사자 기사단이 들이닥칠 때 로이와 알로스가 그들을 막았는데… 진짜 뒤지는 줄 알았다.

'크흑, 이 나쁜 놈! 악마! 다들 눈이 삐었지, 이런 놈한테 어둠의 성자라느니, 마휘라느니!'

욕해봤자 소용없었다.

그때,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크리스티앙과 살짝 닮았지만, 100배는 주눅 들어 보이는 얼굴.

알로스였다.

로이는 반가운 얼굴로 손짓했고, 알로스도 마주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옆의 크리스티앙을 보고 움찔 자라목이 되었다.

같은 악마 밑에서 구른다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국경, 이념을 뛰어넘어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된 둘이었다.

"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알로스 경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크리스는 소백작 로이를 보내주었고, 혼자 조금 더 법국 왕성의 후원을 걸었다.

'그나저나 에반은 모습을 숨긴 건가. 하긴, 모습을 드러낼 사정은 되지 않으니.'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익숙한 광경이 나타났다.

어린 시절 갇혀 있던 탑이었다.

"...."

크리스는 잠시 말없이 탑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털어낸 건가.'

물론, 원래도 과거 때문에 동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상처를 깊은 흉터 속에 덮어두었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정말로 말끔하고 깨끗하게 무덤덤했다.

법왕과 어떤 식으로든 결착을 낸 덕에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다른 일이나 하자.'

크리스는 다른 곳으로 이동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안드릴을 꺼냈다.

확인할 게 있었다.

'변한 게 있나?'

성좌를 제물로 바쳤으니, 봉인 해제의 조건 하나는 달성한 셈이었다.

딱히 육안으로는 변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고물 철검 같은 모습이었지만, 크리스의 눈은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았다.

'봉인이 희미하게 약해졌어. 잘하면, 조금씩 권능을 꺼내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아직은 무리였다.

안드릴의 권능은 소유자의 막대한 힘의 소모를 요구하니까.

현재 크리스의 힘으로는 권능의 일부만 살짝 사용해도 바로 녹다운이 될 거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필살의 한 수가 될지도.'

그렇게 안드릴의 상태를 확인한 크리스는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마지막에 뭐였지? 안드릴이 나한테 뭐라고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크리스는 절대 기억력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들은 이야기를 잊는 법이 없는데.

이상했다.

알아내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야. 너 에고 있지? 그때 나한테 뭐라고 했냐?"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척하는 건지. 용광로나 화산에 집어넣어 고문하면 깨어나려나. 암흑 마가 근처에 제일 뜨거운 곳이 어디지.'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쥬피엔이었다.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있는지, 뜀박질하고 있었다.

쥬피엔은 땀을 닦으며 삐딱하게 물었다.

"뭐 해?"

"아, 그냥."

"몸은 괜찮아?"

"아직 그저 그래."

"그러면 대련 한판?"

"…그냥 그렇다고 한 거 못 들었냐?"

"마인이면 몸 상태가 어떻든 싸움에 나설 수 있어야지. 나도 아직 아파."

쥬피엔은 옷에 가린 팔뚝, 다리 등을 보여 주었는데, 상처가 가득했다.

혼자, 힘이 증폭한 200 병사들을 상대하며 생긴 상처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크리스보다 중상이었지만, 그녀는 며칠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상태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무슨 열혈 바보 마인도 아니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쥬피엔은 자꾸 크리스를 졸랐다.

"한판 하자. 너도 적당히 두들겨 맞으면 몸 회복에도 좋을 거야."

물론, 크리스는 결투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거절하려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뭐 하고 계신 거죠?"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화난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쥬피엔 공녀? 환자를 상대로 검을 들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요?"

"…대련은 몸 회복에 좋아."

"바보도 하지 않을 소리 하지 마세요."

"...."

"크리스티앙 공자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데, 대련을 신청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요? 크리스티앙 공자는 특히 내상이 심해서 제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

쥬피엔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열혈 바보 마인 쥬피엔은 은근히 이런 잔소리 공격에 약했다.

올리비아는 이번엔 크리스를 보았다.

예쁜 이마가 찡그러졌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왜 대련을 거절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거절하려고 했는데, 올리비아가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분명히 누워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요?"

"…많이 나았어."

"낫기는요. 아직도 내상이 심한데. 이러다가 다시 내상이 악화하여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당장 어서 돌아가서 다시 누우세요."

크리스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결전 이후.

올리비아가 이상했다.

'걱정했던 것처럼 실의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티앙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정확히는 크리스티앙이 쓰러지고 병석에 눕고 난 이후… 잔소리가 늘었다.

'이거 예전에 나한테 하던 잔소리랑 비슷하잖아.'

이전 삶, 올리비아와 오빠 동생일 때.

올리비아는 은근히 잔소리가 많았다. 특히 그의 몸이 아프거나 할 때는 굉장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 올리비아의 태도와 지금 모습이 굉장히 비슷했다.

"뭐, 내 몸이 어떻든 너와는 상관없지 않나."

"상관이 왜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