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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장이서가 취선루 밖으로 나섰다.

한데 당연히 칠소궁으로 갈 것 같던 그가 몸을 돌려 시장통 골목으로 향한다.

도살방이 쳐들어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부서졌던 건물은 흑룡파의 도움으로 모두 재건하여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왈패치고는 참 왈패 같지 않은 녀석들.

"어, 형님!"

장이서가 어느덧 구석까지 도달하자 밖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던 용태가 화들짝 놀라며 반겼다.

"늦었는데. 안 자고 있었냐?"

"뒤숭숭해서 잠깐 깼습니다. 아니, 근데 형님이야말로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지나가다 들렀다."

"지금 인시(03~05시)인데요?"

"싫냐?"

"아니, 좋지요! 안 그래도 요즘 늘 바쁘셔서 서운했습니다. 들어오시죠."

용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텅텅 비었던 예전과 달리 휴식 공간이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다.

"아, 저희가 뭐 요즘 제갈 선생한테 배워서 다 직접 만든 겁니다."

"손재주가 좋네."

"별말씀을요. 뭐 드시겠습니까?"

"괜찮아. 일단 앉지."

마주 앉은 용태는 괜히 침이 마르고 입술이 들썩였다.

솔직히 장이서가 느닷없이 야중에 찾아와 궁금하면서도 긴장됐기 때문.

한데.

"칠소궁에 처음 왔을 때 기억나나?"

"예? 갑자기요? 그야 기억나죠. 문짝은 삐걱거리고, 아주 귀신이 울고 갈 곳이었죠."

"그래, 그런 곳이었지. 한데 그걸 너희가 바꿨다. 이제는 제법 사람 사는 느낌이 나."

"아니, 뭘 또 저희가 그렇게까지. 아직 솜씨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 그래 보여."

하하, x발. 용태가 난처함에 이마를 박박 긁었다.

하나 사실이었다.

방 안 곳곳에 보이는 것들이라고 해봤자 아직 초짜 수준. 배우려면 한참 멀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기술이 어디 쉽게 느는가.

"그래서 말인데."

"예?"

"기술은 애들한테 맡기고, 넌 수완을 발휘해 보는 게 어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공장(工匠)부터 목장, 야장. 가리지 말고 장인들을 불러 모아서 일 한번 벌여봐."

용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저더러 사업을 하라는 말인가.

"갑자기 말입니까?!"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어, 언제부터요?"

"흠...."

x발, 방금 생각했네. 용태가 황당함에 헛웃음을 뱉었다. 하지만 제안이 혹하면서도 흥미가 동했다.

이에 귀를 세우자 장이서가 이어 말했다.

"월하촌 사람들이 용태 너를 꽤 신뢰하더군. 별다른 대가도 없이 그들을 지켜준 탓이겠지."

"그거야 제 출신이 호룡당이니 양심적으로다가...."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어낸다는 건 사업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내 옆에 둔다는 건 더더욱 그렇고."

"아니, 저기...."

"그 마음 잊지 말고 정진해 봐. 이젠 흑룡파가 아니라 흑룡공방(黑龍工房)으로 거듭나 보란 얘기야. 자본은 얼마든 내가 댈 테니."

"혀, 형님!"

"칠공자님이 소교주 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우려면 부단히 움직여야 할 거다."

용태가 벌떡 일어섰다.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감이 온다. 이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

사내로 태어나 큰일 한번 해보라는데,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칠소궁을 위해서다."

"예, 형님. 칠소궁을 위하여!"

그가 목청껏 외치자 곳곳에 숨어 있던 수하들이 벌떡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칠소궁을 위하여-!

이에 장이서가 픽 웃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홍란에게 말해. 도와줄 거다."

"예, 형님! 감사합니다!"

용태와 수하들은 그가 나갈 때까지 허리를 수직으로 숙인 채 인사했다.

끼이이익, 쿵!

이내 문이 닫히고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드는 용태.

"형님이 사나이 용태의 진가를 알아주셨구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서렸다.

"하하,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리고 수하들도 달려와 모두 같이 기뻐했다. 그야말로 오랜 방황 끝에 빛이 드는 기분.

왈패 짓 그만둔 게 이리도 잘한 일일 수가 없다.

"한데 형님. 큰형님 꼭 어디 가시는 거 같지 말입니다."

"음?"

메기의 말에 모두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문밖을 살폈다.

*

시장통에서 나온 장이서가 다음으로 향한 건 당연히 칠소궁이었다.

한데 뭔가가 묘했다.

방으로 들어가 취침할 시간이거늘, 누군가를 기다리듯 조용히 정원에만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별관의 문이 열리고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장의 용 구유.

이제는 칠소궁의 식구가 된 그였다.

"설마 날 불러낸 건가."

그의 물음에 장이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구유는 황당함을 드러내며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 정도 기척이야 당연히 알아챌 테니까."

"심히 변태적이군."

부를 거면 문이라도 두드리든가. 심지어 제 방이 옆방이다.

한데 따지려던 마음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자세히 살피니 장이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

"...지금 떠나려는 건가?"

딱히 채비랄 것도 없었다. 복장도 평소와 비슷했고, 챙긴 거라곤 물이 든 호리병 하나.

하나 그의 표정이 그래 보였다. 먼 길 떠날 사람처럼 깊었다.

"하루라도 빨리 다녀오는 게 나아. 시간 끌고 소란스레 떠나봤자 괜히 찔러 보는 자객들이나 늘어나겠지."

"음.... 마오가 서운해하겠군. 같이 가고 싶어 했는데."

"서운? 하하. 그러려나."

그렇게 들으니까 또 동생 같고 기분이 나쁘진 않네.

"그래도 안 돼. 곧 조찬도 있고,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그래. 조만간 치러야 할 대결이 있지. 지독한 악연이야. 피붙이지만 누구보다 마오를 원망하고 집착하지. 소교주로 가는 길은 거기부터 시작이야. 그걸 털어내야 해. 그러려면 하루빨리 강해져야 하지."

"수련을 해야 한다는 얘기군."

"맞아. 아직 많이 부족해. 나 없는 동안 네가 도와줘."

"...그러지."

"봐줄 생각은 하지 마. 그냥 죽여도 돼."

"근데 아무거나 가르쳐도 되는 건가? 너희는 외력이 아니라 내력을 다룬다고 알고 있다. 물론 마오의 신체 구조라면 따라올 수야 있겠지만...."

"아니, 가르치는 건 딱 기본기까지. 마오가 익혀야 할 무공은 따로 있어."

"그게 뭐지?"

장이서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창룡도."

"등에 메고 다니는 칼 말인가."

"맞아. 그때 봤지. 불길을 뿜어내던 힘."

장이서의 말에 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한 번 패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지금 모습과 비교하면 상상도 안 되는 수준.

"그때의 그 힘이 칼 속에 담겨 있어. 그걸 끌어내야 해."

"신기한 일이군. 쇠붙이에 힘이 담겨 있다니."

"그래서 우리는 신물이라고 부르지."

"신물...."

구유는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묻진 않았다.

어차피 해보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

장이서도 그런 그를 믿고 더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마오가 잠들었을 본관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구유."

구유가 고개를 돌리자, 장이서도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뜻을 전했다.

"이제부턴 네가 칠공자님의 그림자가 되어다오."

132.

#다시, 준비 (2)

그림자. 마오의 옆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 수신호위가 되어달라는 말.

"너희는 이제부터 철마적이 아닌 칠공자를 지키는 칠무위(七武衛)."

"칠무위...."

"철마적은 잊어. 많은 게 바뀌어야 할 거야. 지금은 모두가 너희를 우습게 볼 거고, 누군가는 의심하며 찔러 보려 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웅크려. 머리를 조아리라는 게 아니야. 때를 기다리라는 거다. 참은 만큼 기회는 확실할 거야. 너희 흉노족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지 보여줄 기회."

구유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백번 이해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장이서를 믿었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으리라.

"무공이든, 검이든, 영약이든. 필요한 게 있다면 홍란을 찾아. 비용은 상관없어. 더 강해질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모든 걸 지원해 줄 테니. 잊지 마. 너희가 칠소궁의 검이자 얼굴이라는 걸."

"...알았다."

장이서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솨아아아-

대나무 숲이 배웅하듯 나부낀다.

마오와 인사라도 나누고 싶지만, 그랬다간 같이 가겠다며 떼쓸 테니.

'금방 갔다 오마.'

속으로만 인사를 건네곤 걸음을 디뎠다.

어느새 대나무 숲을 지나 다시금 홍예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월광이 물 위에 반짝인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주변은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하다.

제 삶엔 이런 적적함이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우하하하! 야, 장이서!'

시끄러운 마오 녀석 때문인지 칠소궁에 온 후부터는 괜히 멋쩍게 느껴진다.

하나 쓸데없는 감정은 임무를 방해한다. 마오와의 거리는 딱 지금이 적당하고, 익숙한 거리는 고요한 거리다.

그런데.

"야, 장이서!"

환청치고는 우렁찬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몸을 돌리자 홍예교 초입에 헐떡이며 서 있는 녀석이 보인다.

붉은 머리의 장신. 얼굴엔 게으름이 가득한 미공자.

"마오?"

"이 자식.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말도 없이 튈 줄 알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주 빠져가지고!"

하. 헛웃음이 새 나온다. 그의 뒤를 살피자 구유가 어깨를 으쓱이며 서 있다. 제가 깨운 게 아니라는 하소연.

이내 마오가 화난 듯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안 주무셨습니까?"

"집 지키던 부하 놈이 밖에 나가서 들어오질 않는데 잠이 오겠냐?"

"앱니까. 이제 구유도 있으니 대충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장이서가 픽 웃고는 몸을 돌렸다.

"야."

그러자 다시 마오가 그를 불러 세운다.

"죽는 건 허락 안 했다."

"뭐 그런 것까지 허락을 맡는 답니까. 쪼잔하게."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죽으래도 안 죽습니다."

"잠깐. 그럼 내가 위험해지면. 너랑 나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하면?"

"당연히 제가 살아야죠."

"야, 이 씨!"

"걱정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장이서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정 없는 새끼. 마오는 심통 맞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한데 가던 장이서가 우뚝 걸음을 멈추곤 다시 입을 열었다.

"칠공자님."

"왜."

"강해지십시오."

"어?"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설 수 있으며, 나머지 모두가 쓰러져야만 끝이 납니다. 패권 전쟁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선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저도 꼭 살아서 돌아올 테니...."

장이서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안색은 파리하다.

하나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깊다. 마오는 큰형 앞에 선 것처럼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여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그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강해지십시오. 칠공자님 손으로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장이서...."

"마가와의 싸움이 있기 전까지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장이서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춘다.

진심이다.

이 새끼는 진짜다.

마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지킬 수 있다.

너무나 쉽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

하지만 이리 크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장이서를 다치게 한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강해져 있을게.... 반드시."

"그거면 됐습니다."

장이서가 다시 몸을 돌려 홍예교를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가 사라져 갈 때쯤.

"장이서어어어! 꼭 살아 돌아와야 해-! 명령이다아아아아!"

마오가 세상 떠나가랴 목청껏 소리쳤다.

그리고 장이서는 슬쩍 고개를 돌리곤 아련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새끼야. 아예 방을 붙여라. 나 죽어간다고. 하하... 염병.'

지끈거리는 머리를 집게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참 대책 없는 녀석.

첩자 자질이라곤 글러 먹은 놈.

근데....

피식.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뭔지.

"다녀오겠습니다-!"

장이서도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응!"

칠공자 보좌 장이서.

독산각으로 출발이다.

* * *

장이서가 떠나가고 며칠 뒤.

해가 저물고 월광호에 달이 차오른다.

취선루가 가장 왕성해질 시간.

늘 그렇듯 인산인해를 이루고, 밝게 빛나는 등롱은 태양 대신 환하게 빛을 밝혔다.

"루주, 오랜만일세."

"오셨습니까, 대인."

홍란은 인사를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과거엔 최대한 모습을 숨긴 채 신비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지금은 보란 듯이 호위를 끌고 다니며 인사를 올렸다.

장이서의 명대로 그녀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

덕분에 날이 갈수록 이곳의 인기는 그칠 줄 모르고 치솟았다.

물론 비단 잘 되는 이유가 그녀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까지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가실 때 목이라도 축이시라 술 좀 담았습니다."

하인이 건네받은 고급스러운 함에는 명주 한 병과 은원보 하나가 예쁘게 담겨 있었다.

"하하, 뭘 이런 걸.... 이러면 내가 취선루를 끊을 수가 있나.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얘기하게."

"별말씀을요. 그럼 살펴 가십시오, 대인."

무공이든, 직급이든, 가문이든. 뭐 하나라도 연을 맺을 이유가 충분하다면.

급에 맞게 돈 쓰러 온 손님에게 도리어 돈을 쥐여주었다.

그렇게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돌아간 인사는 또 다른 인사를 물고 왔고, 그렇게 점점 취선루는 마교에서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이서의 예언대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들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었다.

*

- 일소궁 흑화원(黑火院).

"천무기이이이이이-!"

밖에서 곡조처럼 울려대는 외침에도 대공자 천무기는 방 안에 앉아 고상하게 붓을 들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부르는 것인지 오죽하면 옆에 선 유령마군이 붕대 위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이공자가 화가 많이 난 듯합니다.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놔두어라. 막내의 인장(印)에 욕심부리다 못 쓰게 되었으니 억울할 법도 하지. 속이나 풀게 그냥 두면 된다."

누가 보면 동생 생각하는 형의 모습이지만, 이미 입꼬리는 시원하게 올라갔다.

그리는 난도 다른 날보다 잎이 시원하게 쭉쭉 뻗었다.

그만큼 지금 천무기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뻔했다.

"장이서. 설마 밖에서 한낱 도적 떼를 품어올 줄이야. 하긴, 무공도 안 익힌 평신도들보단 명분은 서겠구나."

칠공자 보좌 장이서.

괘씸하게 제게 은원보 100개를 요구해 왔던 그놈이다.

설마설마했거늘, 이렇게 빠르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능력을 인정해줘야 했다. 해서 은원보도 통 크게 보내주었고.

"한데 아쉽구나. 기껏 보내준 돈이 노잣돈이 될 줄이야."

죽어간다는 소식은 들었다.

언제고 자신이 만마의 주인이 되면 거두어 써줄까도 싶었는데.

"제 팔자가 거기까지인 거겠지."

대공자가 일말의 미련도 없는 얼굴로 붓을 움직였다. 그러자 유령마군이 떨떠름한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하온데 대공자님. 과정이 좀 석연치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도적 떼라 하나 어디까지나 외인. 한데 이에 책임이 있는 비룡당에서 아무런 말이 없지 않습니까. 당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가타부타 말이 나와도 한참을 나왔을 텐데...."

"말을 한들. 믿을 수는 있고? 거짓을 밥 먹듯이 하는 계집이다. 차라리 조용히 해주는 게 진위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나 붕대에 가려진 유령마군의 표정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그사이 삼장로가 맹갑귀마대를 이끌고 교외를 향했다는 소식도 그렇고.

아무튼 정황상 여러모로 불길했다.

그리고 천무기는 이처럼 꺼진 불도 다시 짓밟는 그의 성정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 염려할 것 없다. 이미 넷째에게 뒤를 캐보라고 일러두었으니. 문제가 있다면 독 수저라도 물고 올 것이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유령마군.

사공자 살영도제(殺影刀帝) 한.

여타 후계들과 달리 교주 직속 암살 조직인 살혼대(殺魂隊) 소속으로, 한낱 조장일 때 존자(尊子)로 발탁된 사내.

비록 출신은 미천하나 그의 능력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후, 그러고 보면 장이서와 넷째는 비슷한 면이 많구나. 방첩대와 살혼대에서 활동하던 시기도 겹치고, 남의 뒤만 밟고 살던 팔자도 똑같고. 또 평생을 명만 받들고 사니 제가 금수인 것도 잘 알지 않으냐. 그것도 모르고 제가 인간인 줄 아는 가축도 있거늘."

천무기가 픽 웃음을 지으며 마저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그때 밖에서 천무기이이이이이-! 졸지에 가축이 되어버린 무한성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울렸다.

하나 그는 모를 것이다.

남의 뒤만 밟는 자들이 작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매사 제일 위험한 게 바로 제 등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천무기가 장이서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은 사이. 그와는 반대로 의심에 의심을 무는 이도 있었다.

*

- 마가(麻家) 경천채(敬天寨).

일장로 북명마군 마일성이 머무는 본가.

대부분의 마인은 인사라도 올리겠다며 어떻게든 오려고 안달이지만, 정작 장자인 마이신은 어릴 때부터 이곳을 무척 싫어했다.

공경할 경(敬). 하늘 천(天).

남들은 모두 저를 위해 절을 하는데, 무작정 하늘을 공경하라니.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꿈은 하늘이 되는 것이었다.

천마의 후계가 되어 모두가 공경해야 하는 하늘.

하나 이러한 바람은 그의 타고난 오만함과 열등감을 광기로 비틀어버렸다.

자신이 하찮게 내려다보던 천무기와 마오.

하필 그 두 놈이 작은 하늘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치심과 모멸감. 그리고 절망은 집착을 만들었고, 이러한 집착은 마오에게로 향했다.

밟고 또 밟고. 계속 밟고.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늘을 짓밟아주리라.

그런데.

"형님, 들으셨습니까? 마오 그 자식이 끝내 세를 꾸렸답니다!"

어째서 밟아도 밟아도 자꾸만 올라가려 하는가.

"아무리 도적 떼라고 해도 이건 진짜 있을 수도. 아니,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어떻게 그딴 칠푼이 자식이 세를 꾸린단 말입니까? 형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놈이 세 꾸리면 손을 장에 지져버리겠다고."

협장(목발)도 내던지고 온 마진구가 씩씩대며 들어섰다.

이에 마이신은 이마를 쓸며 나직이 말했다.

"진구야."

"예, 형님."

"가서 화로를 가져오거라."

"정말 지지시게요?"

"내가 두 번 말해야겠느냐?"

"아, 아닙니다!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불타는 화로를 가지고 오너라! 어서!"

"...아주 신나 보이는구나?"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덜컥, 문이 열리고 바닥엔 시종이 가지고 온 화로가 놓였다.

안에는 새빨갛게 나무가 불타고 있다.

"형님, 근데 이제라도 그때 하신 말은 무르심이.... 아무리 사내의 말이 천금과 같다지만... 크아아아악!"

치이이익!

덥석 붙잡힌 마진구의 손이 그대로 화로에 담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