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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 구룡성 상층.

콰앙-!

거뭇한 형체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철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큭!"

신음과 함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장이서!"

그다. 벼락처럼 쏘아졌던 그가 구유에게 밀린 것이다. 빛줄기 그 자체였던 그가 말이다. 하나 뭐라고 대꾸할 틈은 없었다.

괴물처럼 쫓아온 구유의 주먹이 그대로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

쾅!

'이런.'

간신히 고개를 틀어 피해내자 움푹 들어간 철벽이 보인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무조건 치명상.

콰과과과광!

게다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연격까지.

간발의 차로 피해낸 장이서가 옆으로 빠져나와 공간을 확보했다.

'확실히 강해.'

장이서는 다시 한번 느꼈다.

구유의 움직임에 화려한 초식은 없지만, 힘, 속도, 체력. 그리고 괴물에 가까운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주하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

물론 축전공과 백뢰라는 변수가 있으니 생사결에선 누가 이긴다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확실히 그가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다.

특히 뇌속(雷速)이 가장 큰 장기인 장이서에게 모든 움직임을 잡아내는 만안과 그의 반사신경은 천적 그 자체.

「거기인가!」

아니나 다를까. 벼락처럼 몸을 날리던 장이서의 옆구리에 주먹이 시원하게 꽂혔다.

퍽!

"음!"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허리는 새우처럼 꺾이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심지어 팔을 접어 막아냈거늘, 효용이 없었다. 어깨는 마비가 온 것처럼 떨리고, 손끝은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 이런 무식한 괴력이....

"이런."

하지만 진짜는 그다음.

구유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면에서 야차처럼 달려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장이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서린다.

낭패다.

한데 그 순간.

"이봐! 너무 그쪽만 챙기는 거 아니야?"

옆에서 들려온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이내 색안경을 쓴 사내가 불시에 달려와 구유의 옆구리에 일각을 꽂아 넣었다.

빡!

소오다.

"우리도 손님인데 사람 성의가 있지. 장 형, 괜찮나?"

"덕분에."

"고마우면 나중에 한턱내라고. 돈으로 줘도 좋고."

생각하는 게 돈밖에 없냐. 장이서가 픽 웃으며 소오와 나란히 자세를 잡는다.

「....」

구유는 별다른 신음 하나 없이 제 옆구리를 내려 살폈다.

벌겋게 부어오른 걸 보니 제법 충격이 크다.

기질이 가벼워 보여 무시했거늘. 실력은 제법 묵직하다.

하나 단지 그것뿐.

「하나든, 둘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늘 그랬듯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자신일 테니.

구유가 다시금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다소 긴장한 소오가 외쳤다.

"좌?"

"우!"

팟! 동시에 양 갈래로 쏘아지는 장이서와 소오.

빠르다!

구유의 만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원초적인 전략.

한데.

"어억!"

"큭!"

구유가 양쪽으로 뻗은 두 손에 그대로 둘 다 붙잡혀 버렸다.

「끝이다.」

121.

#버티는 겁니다 (3)

팟! 구유가 두 사람을 붙잡곤 벽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대로면 속절없이 벽에 부딪쳐 곤죽이 될 기세.

"그렇게는 안 되지!"

이에 육공자 맹휘가 불쑥 측면에 나타나 단창을 내질렀다.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2식 십광파(十光波)』

파파파팟!

육신을 향해 날아드는 열 개의 섬광.

무시하고 달려들기엔 예기가 예사롭지 않다.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 뛰어난 실력.

결국 구유는 소오와 장이서를 벽에다 내던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괴력이라면 이것으로도 타격은 충분하리라.

쐐애애액!

교차로 선 긋듯 던져버리자 빛살처럼 날아가는 두 사람.

"마오-!"

맹휘가 제 앞으로 스쳐 날아가는 둘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가고 있다고! 으랴아아아아아!"

그러자 거친 기합성과 함께 마오가 날아드는 둘을 향해 방석처럼 옆으로 몸을 날렸다.

퍽!

"억, 씨!"

와당탕 나뒹구는 소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세 사람.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장이서와 소오가 벌떡 일어나 배 잡고 쓰러진 마오를 살폈다. 설마 저들을 몸으로 막아낼 줄이야.

"아주... 주객...도전이라니까.... 씨."

안 죽었네. 소오와 장이서가 피식 웃고는 각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다가온 맹휘까지 옆에 합세했다.

네 사람의 긴장감이 장내에 퍼진다.

확실히 구유, 저자 보통이 아니다.

"이봐, 장 형. 아무래도 우리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저 양반 보통이 아니야. 이건 버티는 게 아니라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몰랐어? 그게 계획이야. 죽을 각오로 싸워서 살아남는 거. 애초에 이긴다는 생각은 버려. 못 이기니까."

"하하, 망할."

소오가 낙천적인 웃음을 흘린다. 이에 맹휘가 인상을 쓰며 말을 얹었다.

"근데 장 보좌. 아무리 그래도 저 뒤까지 감당하는 건 좀 무리 아닐까?"

장이서가 전방을 널리 살폈다.

그러자 씩씩대는 숨소리들이 생생하게 귀에 박힌다. 분노에 찬 기백을 풍겨내는 일련의 무리.

부대장 아신과 철마적이다.

구룡성에 있는 놈들은 죄다 몰려온 것인지 그 수만 일백에 육박해 시야를 꽉꽉 채웠다.

확실히 저들까지 다 상대한다는 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뭐야, 물러가는데?"

마오의 말대로였다.

철마적은 더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썰물처럼 물러서고 있었다.

구유 하나만을 남겨두고서.

"설마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냐?"

마오가 퉁명스레 따졌다. 보통은 좋아해야 할 상황 아닌가. 가만 보면 녀석도 강골이다.

하지만 장이서가 보기에 이건 무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이미 저자도 성치 않은 상태입니다. 걸음이 어색하고, 발목 주변에 피가 흥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죠. 저 몸으로 수하들을 물린다는 건 그로서도 큰 모험일 테니."

나락의 살상력은 마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 그런 그가 얌전히 당해줬을 리 있겠는가.

게다가 이 싸움은 그에게도 흉노족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었다. 누굴 무시하고 여유 부릴 형편은 아니라는 얘기.

"그럼 왜 저러는 건데."

그가 불리(不利)를 감수하는 이유는 하나.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 겁니다."

"최선?"

"예. 아마도 그게 과평을 살려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 장이서가 보기에 그는 흉노족을 위한 싸움도, 개인적인 신의도. 그 어느 것에도 소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멋과 신의가 있는 사내.

'그러니까 더더욱. 마오의 옆에는 저자와 같은 자가 필요하다. 마교에서 모든 결과가 옳을 순 없다. 악행도 저지르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은 다해야 한다.'

장이서의 마음에 구유가 더 깊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건 마오 역시도 마찬가지.

"쳇, 이 와중에도 멋을 부린다 이거지? 좋아.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마오가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호기롭게 나선다.

상대는 전장의 용.

용을 품에 얻으려면 위험을 각오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니까.

「와라.」

팟! 다시 접전이 시작되었다.

네 사람이 차륜전을 펼치자 구유는 만안으로 각자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았다.

구유의 나이 이제 겨우 삼십 대 후반. 하지만 전쟁터를 누빈 햇수도 30년에 가깝다.

경험으로 치자면 노련한 노장이라는 얘기.

해서 딱 보면 안다.

'서로 합을 맞춰본 자들은 아니다.'

본래 합공에 능한 자들은 자신의 수만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 사람, 다다음 사람까지 고려해 공격을 펼쳐야 했다.

가령 내 다음 사람이 우측에 있다면, 공격 후 좌측으로 빠져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또한 내가 이번에 허리를 노린다면, 이전 사람은 막힐 걸 뻔히 알더라도 일부러 머리를 공격해 손을 들추어 허점이 생기게 해줘야 한다.

이렇듯 합공이란 각자의 역할을 배분하여 이길 수 있는 상황 또는 수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 수가 복잡할수록 상대는 곤욕을 겪게 되고, 그게 세 수를 넘어가면 진법(陣法)이 된다.

한데 이들에겐 전혀 그런 게 없었다.

'각자의 수가 각기 따로 놀기 바쁘다.'

뒤는 생각지 않고 정면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맹휘.

구유의 만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우측엔 소오. 맹휘의 뒤엔 마오가 뒤따른다.

제대로 된 합공이었다면, 진형을 이렇게 짜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쐐애애액!

구유가 좌측으로 몸을 날려 피해내자 맹휘는 헛발질하듯 허공을 찔렀다.

"엇!"

이에 길목이 막힌 마오가 무의미하게 멈춰 섰고, 우측에 있던 소오는 시야가 가로막혔다.

그리고 공간을 확보한 구유는 거침없이 파고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퍼퍼퍽!

"칵?!"

"아악!"

일순 마오와 맹휘가 좌우로 날아가 와당탕 자빠진다.

그러자 바로 배후에서 단도를 휘두르며 기습을 가해왔다.

실로 날렵한 몸놀림.

장이서다.

뒤늦게 소오도 전방으로 쏘아져 들어온다.

'분명 이들도 합을 맞춰본 자들은 아니다.'

앞의 두 소년에 비해 능수능란하긴 하나 그래 봤자다. 제대로 된 합공으로 몰아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질 이유는 없다.'

구유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리고 이는 결과로 드러났다.

"억!"

팟! 두 사람의 합공을 방어하던 구유가 한없이 자세를 낮추곤 소오의 발목을 덥석 붙잡은 것. 이내 몸을 뒤로 돌리며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커헉!"

소오의 비명이 울리고, 장이서는 이를 악문 채로 맹공을 퍼부었다.

하나 구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강행했다.

"이런!"

다시 바닥에 쾅!

또다시 쾅!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쾅!

반쯤 부서진 색안경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다음에야 휙 멀리 던져버렸다.

물론 그도 몸이 성치만은 않았다.

뚝, 뚝.

소오를 잡고 찍어대던 그의 팔뚝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그사이 장이서가 단도를 깊숙이 박아 넣은 것.

그뿐 아니라 관자놀이엔 칠각대승의 정수가 담긴 일각까지 꽂았다.

덕분에 한쪽 눈은 새빨개져 시력에 이상까지 생긴 상황.

한데도 그는 여유만만했다. 아니, 오히려 장이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힘들어 보이는군.」

힘들어 보인다고? 장이서가 고개를 숙여 제 팔을 살폈다. 어느새 다시 시퍼런 힘줄이 돋아나 있다. 광의의 불사독이 또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

기호공으로 다스리고 있다지만, 이미 앞서 퍼져나갔던 독 기운까지는 막지 못한 것이다.

「애쓰지 마라. 광의의 독은 움직일수록 더 빨리 퍼질 테니.」

「가만히만 있기엔,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말이야.」

「답은 하나뿐. 너희는 패할 것이고, 나는 이길 것이다.」

「없는 답을 만들어내는 게 또 나의 매력이지.」

「어리석군.」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와라.」

「사양은 안 한다.」

팟! 장이서가 먼저 몸을 날렸다. 이미 구유의 한쪽 시야는 무너진 상태. 속전속결이 답이다.

파직!

장이서가 뇌속(雷速)의 경지로 측면을 파고들었다. 확실히 아까와 달리 느리다. 뇌전법을 펼친 게 맞나 싶을 정도.

『철쇄장(鐵碎掌)』

하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구유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사각지대에서 몰아치듯 쏘아진 일장에 뒤늦게 몸을 돌려 두 팔로 막아냈다.

퍽!

「음....」

신음과 함께 주르륵 뒤로 세 걸음을 밀려났다. 돌덩이에 맞은 것 같은 묵직한 충격. 이내 고개를 든다. 하나 장이서는 시야에 없다.

파직!

바로 그때 그의 어깨 위로 장이서의 일각이 내리꽂혔다.

또다시 사각지대로 파고든 것.

「큭!」

이번엔 효과가 컸다. 구유가 신음을 뱉으며 손을 뻗쳐보지만, 또다시 장이서는 사라진 뒤. 이번엔 후미다.

『철쇄장(鐵碎掌)』

퍽!

등허리에 정통으로 손바닥이 꽂혔다. 오장육부가 뒤흔들리고,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

와당탕!

처음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대장!」

이를 지켜보던 아신과 철마적이 뛰어들 기세로 소리쳤다.

「누구도 나서지 마라!」

하나 구유는 사내 중의 사내.

입가에 피를 닦고 일어서며 다시금 제 뜻을 확고히 했다.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거 없는 오만이 아니었다.

"하아... 하...."

장이서의 호흡은 여느 때보다도 가빠졌고, 어느새 손톱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독이 퍼진 상태로 이를 다스리지 않고, 왕성히 움직여대니. 육신이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던 것이다.

"설마 이번에도 버틸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이번에 등허리에 쑤셔 넣은 철쇄장은 그가 생각한 회심의 일격. 한데 이마저 버티고 일어났으니.... 오히려 난처해진 건 장이서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단숨에 달려든 구유가 장이서의 복부에 일격을 갈겼다.

"컥...."

두 발이 붕 떠오르고, 척추가 휘어질 만큼 엄청난 힘.

「끝이다.」

그 상태에서 두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구유의 연타가 사정없이 꽂혔다.

팔다리를 오므려 최대한 막아낸다고 했으나 의미 없는 일.

콰아앙!

마지막 한 방에 장이서가 먼발치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주르륵, 털썩.

무력하게 쓰러졌다.

"자, 장이서...."

"장 보좌?"

이에 간신히 몸을 추스른 마오와 맹휘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문객잔의 주인장인 소오도.

언제나 저들 앞에 든든히 있어 주던 장이서도.

모두 당했다.

저들에게로 다가오는 저 붉은 눈의 괴물.

전장의 용, 구유에게.

"다른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가 시퍼런 살기를 지닌 채 우뚝 멈춰 선 곳은....

"자, 잠깐...."

잔뜩 겁에 질린 맹휘의 앞이었다.

"네가 마교의 소교주라면 이해하겠지."

"소교주?!"

구유의 충격적인 발언에 마오와 맹휘 둘 다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언제부터!"

마오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하나 구유라고 그걸 알겠는가. 다만 교주의 자식이라 하니 짐작한 것뿐이다.

그리고 중한 건 그게 아니다.

기세에 눌려 얼어붙은 맹휘에게 다가온 구유가 퍽! 목젖을 움켜쥔 채 번쩍 들어 올리고 말했다.

"네 시체를 방패 삼아 밖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122.

#변화의 기회

숨이 쉬어지질 않아! 나 죽어...?

"커억...."

맹휘의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어느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머릿속을 휘젓고, 손에 든 묵흑은 챙! 바닥에 떨어졌다.

"야, 이 씨! 걔가 소교주면 인질로 삼든가 해야지. 시체로 만들면 무슨 소용인데!"

마오가 악에 받친 고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초식이랄 것도 없다.

우우웅!

그냥 내기를 잔뜩 싣고 몸으로 들이받았다.

실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작.

퍽!

그래도 효과는 있다. 원래라면 턱도 없는 공격이지만, 지금 구유의 몸 상태는 서 있는 게 용한 수준. 이런 둔탁한 공격에도 힘없이 날아가 쓰러졌다.

물론 마오의 어깨도 쇳덩이에 부딪힌 것처럼 시린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이 자식, 무슨 몸뚱이가.... 야, 괜찮아?"

쓰러진 맹휘에게 달려가자 연신 기침을 토해내는 게 죽기 직전에 간신히 구했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여기서 죽을 생각이야?"

"마, 마오...."

"왜. 감동했냐? 그럼 잔말 말고 얼른...."

"그게 아니라... 뒤!"

"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마오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집어 던졌다.

구유였다.

"억!"

쾅! 그대로 등이 벽에 부딪히고, 뼈들은 비명을 지른다. 하나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

"야, 이 자식아! 맹휘는 놔두고 나랑... 잠깐만. 오지 말고 일단 거기서 말로... 꺼억!"

퍽! 어느새 다시 달려온 구유가 강렬하게 허리를 비틀며 정확히 간장이 있는 늑골 아래를 가격했다.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사지가 떨리고, 축 늘어졌다.

숨이 멎는 고통. 눈물이 찔끔 흐른다.

살면서 숱하게 맞아봤지만, 단언컨대 그중 제일이다.

"어딜 보는 거야! 나 상대하던 거 아니었어?"

보다 못한 맹휘가 결국 벌떡 일어나 다시 묵흑을 손에 쥐었다. 이에 구유는 붙잡은 마오의 머리칼을 놔주곤, 몸을 돌렸다. 그러곤 서서히 맹휘에게 다가섰다.

이젠 싸움이랄 것도 없어 보였다.

이미 맹휘의 두 다리는 덜덜 떨리고, 눈은 갈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본래 심약했던 그의 성정에 공포심이 불처럼 번진 것.

「교주의 자식이라더니.... 그저 어린 소년일 뿐인 건가.」

구유의 마음 깊은 곳에 진한 주름이 새겨진다. 죄책감이다. 하나 어쩔 수 없다.

「너희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한 것일 뿐. 미안하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1식 풍룡파(風龍波)』

눈을 질끈 감은 맹휘가 비틀어 쥔 단창을 내지른다. 콰과과과과! 그러자 거대한 소용돌이가 전방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아악!"

콱!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구유가 그의 단창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곤 빙하에 갇힌 시체처럼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원망해도 좋다. 아니, 원망해라."

"아, 아니... 나는.... 컥!"

맹휘의 망연자실한 신음과 함께 구유의 손이 덥석 목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도드라지는 힘줄.

목숨이 달린 위기일발의 순간이 들이닥쳤다.

*

한편 그 시각.

'간신히 위기는 넘겼다. 아무리 태워 없애도 끝없이 자생하는 독이라니.... 왜 불사독이라 불리는지 알겠군.'

장이서는 몸속의 독기를 억누르며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이봐, 장 형!"

그리고 소오 역시도 정신을 차렸는지. 팔꿈치로 바닥을 슥슥 기어와 옆에 자리했다.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많이 어려워진 거 같은데? 저기 보여? 도련님들 다 죽게 생겼다고."

"조금만 더 버티면 모래폭풍이 멈추고, 그들이 들어올 거다."

"누구. 삼장로? 들어왔다가 공자님들 다 죽어 있으면.... 구룡성이 통째로 무덤 될 거 같은데?"

정확한 견해다.

맹철용이 아니라 다른 이였어도 제 아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참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다.

한데도 장이서는 침착했다.

긴장해 보이지도 않았고, 난처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설마 장 형...!"

소오는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내가 나서주길 바라는 거냐?!"

만일 그런 것이라면 충격 그 자체. 장이서에 대한 평가를 다시 세워야 한다. 세상 제일 무능한 놈이거나, 아니면... 제일 똑똑한 놈이거나.

당연했다.

소오는 제 실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구유, 저자는 지쳐있어. 내가 성명절기까지 펼치면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가면도 안 쓰고 흔적을 남겼다간 백오문 승계 구도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그건 안 되지! 더구나 무일푼으로는 더더욱. 소오가 장이서를 아래위로 사납게 흘겼다.

"큭!"

하지만 이미 뒤에선 맹휘가 목이 졸린 채 죽어가는 상태.

반면 장이서는 요지부동이다. 흔들림 하나 없이 묵묵부답.

'정말 이러기냐, 장이서?!'

소오만 발을 동동 굴렀다. 하나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날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기다려."

장이서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그러곤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가로막는다.

'뭐야. 나서지 말라고?'

황당함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장이서가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소오는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넋을 잃었다.

하나 그는 본디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게 익숙한 자.

'뭐, 생각이 있겠지. 책임도 그쪽이 질 테고.'

두 손을 들어 올리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장이서는 냉담한 눈으로 구유와 맹휘를 살피며 생각했다.

'지금 구유는 한계에 다다른 상태. 맹휘 정도면 충분히 저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지 못하는 건 오직 심성의 문제.'

상대를 보지도 않고 어설프게 내지른 풍룡파만 봐도 알만한 상황.

지금도 얼마든지 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한순간에 고쳐질 문제도 아니었다. 이미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했을 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이서가 이리 방관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소년.

위기에 처한 맹휘를 바라보며, 절망에 빠진 마오.

바로 너다.

'나의 임무는 마오 너를 소교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힘든 역경들이 펼쳐질 거다. 그때마다 네가 포기해 버린다면 어차피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없다.'

분명히 구유는 마오나 맹휘보다 강하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무공이나 경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이건 싸움에 임하는 각오와 정신의 문제였다.

'무림인은 살면서 숱한 강자를 만나게 된다. 그중엔 무공의 조예가 깊은 자도 있을 것이고, 커다란 권세를 가진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오는 이미 그런 자들을 만나왔다.'

마가의 장자인 마이신. 그리고 살수 단체인 도살방.

이들과의 악연은 크든, 작든.

분명 마오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하였고, 또 이기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간절함.'

마오는 누구보다도 간절했던 자와 맞붙어본 적이 없었다.

하여 그들의 의지에 꺾여본 적도, 그들의 의지를 부숴본 적도 없었다.

해서 매사가 늘 가벼웠고, 진중하지 못했다.

하나 구유는 달랐다. 그에게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사명과 신념이 존재했다.

그리고 장이서는 지금 마오에겐 그런 드높은 벽과의 싸움에서 버티고 일어설 간절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오. 소교주로 가는 길엔 절대로 질 수 없는 굳은 의지와 각오를 가진 자들로 가득하다. 네가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너 역시 이를 짊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교주란 수많은 이의 간절한 의지를 꺾고, 이를 등에 업은 채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어수룩한 마음으로는 한 발자국도 갈 수 없을 테니까.

이를 이겨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마오의 편에 서지 않을 테니까.

해서 지금의 가볍기만 한 마오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선, 자신의 의지를 극한까지 끌어내야만 했다.

또한 구유를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이서가 위기인 걸 알면서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이유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마오에게는 가장 큰 변화의 기회이기에.

'마오....'

그리고.

마침내 그 성장의 변화가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

마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 짙게 낀 안개가 걷히자 잠들어 있던 정신이 고개를 든다.

여긴 어디...? 분명 난 교주가 되었고, 장이서는 내 머리 위에 앉아 만세를 외치고 있었는데...?

꿈과 현실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뿌려지고, 그중 현실만이 남아 자석처럼 서로를 이끈다.

그리고 마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빌어먹을!'

모든 기억이 이어졌다. 철마적. 그리고 전장의 용, 구유!

"끄으으...."

그제야 귓가에 다 죽어가는 꼬맹이의 신음이 생생하게 꽂혔다.

'이런 미친... 끄아아!'

다급함에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전신의 모든 근육과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기는 고통이 찾아들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흐르고, 입 밖으론 소리 없는 비명만이 울렸다.

일어서긴 개뿔, 꿈틀거린 게 전부다.

'뒈질 거 같아.'

그사이 맹휘의 팔다리는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졌고, 두 눈은 이미 흰자위만 남았으며 입에선 타액이 흘렀다.

한마디로 죽기 일보 직전.

'젠장. 제발 누가 저 새끼 좀 살려-!'

마오는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바랐다.

하나 없다.

그 누구도 맹휘를 구해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죽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건가.

과거의 친구들처럼?

아니.... 개소리하지 마!

"크아아아아!"

마오가 비명을 내지르며 쿵!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철벽같은 구유를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대주천을 끝내고 웅! 주먹에 공력을 한껏 실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쓰러트릴 방법도 하나.

마오의 전무후무한 일격기.

"다-다-익-궈어어어언-!"

이것으로 끝장을 보는 거다.

기합처럼 초식을 내지르며 구유의 옆구리로 주먹을 날렸다.

화르륵!

그저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다 태워버릴 듯 엄청난 열기.

그리고 마침내.

퍼억!

그의 허리에 다다익권이 꽂혔다. 이에 잔상을 흩트리며 쏜살처럼 옆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구유!

콰앙!

벽에 부딪힌 것으로도 모자라 움푹 파이기까지 했다.

"됐다!"

이에 마오는 승리를 확신하고 환호를 내질렀다.

다다익권의 위력은 이미 알고 있는바.

제대로 맞았으니 절대 일어설 수 없을 거다. 아니,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데.

"어, 어...?"

마오는 일순 당황에 빠져버렸다.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서서히 일어서는 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

「...이게 너의 의지인가. 제법이구나.」

"어떻게?!"

저벅. 저벅.

구유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제대로 일권이 들어가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비틀거리는 걸음. 옆구리는 이미 불길에 그을린 자국과 함께 시커멓게 피부가 죽어 있다.

제대로 먹혔다.

절대 멀쩡할 수가 없는 일.

"근데 왜...."

「하나 이 정도로는 날 쓰러트릴 수 없다.」

혼란과 낭패감에 완전히 머릿속이 새하얘져 있는 순간.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일순 몸을 비틀며 늑골 아래에 주먹을 꽂았다.

쐐애애액, 퍽!

"칵!"

그게 시작이었다. 퍽! 퍽! 퍽! 구유는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까보다 더 거친 기세로 사정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혼이 이탈하는 것처럼 아득한 고통.

하나 그것보다도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이 새끼 사람 새끼가 아니야.'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대한 존재감이었다.

이길 수 없다.

마오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123.

#내가 이겨줄게

마오는 본래 겁이 없는 편이었다.

마이신도 그의 보복 행위가 두려운 거지, 마이신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마이신이 그를 고깝게 본 것도 사실 그에 기인한 바가 컸다. 맞거나 혼이 나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아야 정상이거늘.

늘 겁도 없이 부라리니 말이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태양과 같은 양기를 갖고 태어난 마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

그걸 어찌 막겠는가.

하나.

'난 못 이겨. 장이서. 어떡해!'

마오는 처음으로 상대한테 뿌리 끝까지 짙은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자는 죽지 않는다. 뭔 짓을 해도 쓰러지지 않는다.

죽는 건... 나다.

구유의 몸이 회오리처럼 돌아가며 그대로 마오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빠악!

아까 맞은 곳과 똑같은 자리.

간장이 출렁이고, 민감한 신경이 대뇌를 두드린다.

"꺽...."

죽을 만큼 아프다는 얘기.

넘어질 힘도 없어 다리를 오므린 채 주저앉았다.

숨이 안 쉬어져 핼쑥해진 얼굴은 꼭 해골 같다.

구유는 그런 마오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몇 살인가."

몇 살이냐고? 아파 죽겠는데 그게 할 말인가. 때리기 전에 묻든가.

하나 구유가 한 걸음을 더 다가오자 고통도 잊은 채 마오의 입에서 빠르게 답이 뱉어졌다.

"여, 열아홉이다...!"

이에 구유는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 그게 오늘 네가 사는 이유다."

뭐야. 이렇게 가버린다고?

마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구유는 맹휘에게로 터벅거리며 다가섰다.

아니, 잠깐만.

"야! 걔는 이제 겨우 열다섯인데?"

"...저 아이는 다르다."

"뭐가 달라!"

"소교주니까. 저 아이의 시체를 내걸어 우리의 힘을 바깥에 있는 마교도들에게 똑똑히 보일 것이다."

"야, 이 씨! 너 머리 나빠? 차라리 인질로 세우든가. 야! 서! 서라고, 이 새끼... 컥!"

마오가 쫓아가려 일어서자 퍽! 구유가 뒷발로 복부를 밀어 찬다. 와당탕! 그러자 한참을 날아가 엎어지는 마오.

"우웩!"

두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울렁이는 속을 게운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다.

어떻게 가볍게 내지른 권각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단 말인가.

이내 제 앞에 서린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괴물이 서 있었다.

파르르. 쉴 새 없이 떨리는 동공.

"두려운가."

그의 무심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빈다.

무섭다. 꼭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픈가."

말이라고. 너무 아파서 다 그만하고 싶다.

"오늘을 두고두고 기억해라."

뭐...? 퍼억!

"칵!"

순식간에 머리칼을 붙잡아 올린 구유가 마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코피가 터지고, 고운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나약하고."

퍼억!

"어리석고."

퍼억!

"주제넘은."

퍼억!

"네 모습을 말이다."

퍼억!

얼굴이 피로 범벅된 마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쿵! 쓰러졌다.

전신의 감각이 무뎌지고,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구유는 한 걸음씩 서서히 멀어져갔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꼬맹이, 맹휘에게로.

다 끝났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x발....'

마오는 대(大)자로 쓰러진 채 낙담했다.

이젠 정말 끝이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니 다소 편안하게 숨이 뱉어진다.

그래. 이거였네.

언제부터 그렇게 겁도 없이 까불었다고. 고작해야 촌 동네 망나니였던 놈이 뭘 해보겠다고.

'버텨? 버티긴 뭘 버텨.'

마오가 코웃음을 뱉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자존감이 모든 걸 염세로 물들인다.

어차피 나서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그냥 못 볼 꼴만 더 많아질 뿐이지.

왜?

저 새끼는 강하고, 나는 약하니까.

틀린 말 하나 없다.

나약하고, 어리석고, 주제넘은 놈.

그러니까 그냥 주제에 맞게 살면 되는 거였다.

괜히 장이서 때문에 이상한 바람만 들어서는.

그냥 이렇게 살았으면 좋잖아.

눈 가리고, 입 닫고, 귀 막고.

누가 죽어 나가든 아무 상관 없이.

그냥 그렇게.

근데....

'그게 맞아?'

일순 마오의 머릿속이 멍해지고, 귀에 이명이 울렸다.

"아니잖아.... 그딴 걸 바라고 사는 새끼가 있을 리 없는 거잖아...."

마오의 눈이 스륵 떠지고, 한 서린 숨이 뱉어졌다.

바꿔야 한다.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누워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끄아아아아아!"

비명과 같은 울분에 찬 기합성이 터진다. 그러자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든다.

숨은 턱 막히고, 관절이 부서지며, 오장육부는 터져나가는 기분.

아프다. 너무나 아프다.

하지만 후회보다는 낫다.

그러니까.

허리가 안 되면 골반. 골반이 안 되면 무릎. 무릎이 안 되면 발목. 발목이 안 되면 발끝이라도. 젖 먹던 힘까지 써서 일어서는 거다.

눈에선 고통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에 맹휘를 다시 주워 든 구유도, 철마적도, 소오와 장이서마저도. 모두가 경악한 채 마오를 살폈다.

우우웅!

그리고 쏟아지는 시선에 울상을 짓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야... 구유. 네 말 다 맞아. 맞는데... 하나가 틀렸어."

틀렸다니.

뭐가.

"소교주는... 걔가 아니고 나야, 이 새끼야아아아아-!"

쩌어어엉-!

귀가 터질 듯이 울리는 고성.

그 순간 막대한 주황빛 양기가 파동이 되어 장내에 퍼져 나간다.

「큭...!」

이에 철마적들이 일시에 귀를 막으며 무릎을 꿇었고, 아신마저도 오만상을 찌푸린 채 각혈했다.

그저 고함 한 번 내질렀을 뿐인데도 음공의 대가가 전력을 쏟아낸 것처럼 강렬했다.

그뿐 아니라 가만히 서 있는 건데도, 마치 흐릿한 불길이 전신을 감싼 것처럼 기이한 형상이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분위기 자체도 달라졌다.

꼭 뭐라도 씐 사람처럼 눈빛은 강렬했고, 표정은 단단했다.

"무슨...."

이에 구유가 서서히 몸을 돌리곤 고개를 갸웃 저었다.

방금까지 무력하게 맞기만 하던 그 소년이 맞는 건가.

완전히 달라진 기분.

심지어 다다익권으로 분명 모든 공력을 다 소모했을 텐데.

의아함을 느끼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간절한 의지가... 혼원일체(混元一體)를 이루었구나!'

주먹을 꽉 움켜쥐고 파르르 떨고 있는 장이서. 오직 그만을 제하고 말이다.

*

마오는 무공에 있어서 천재(天才)인가, 범재(凡才)인가. 누군가 장이서에게 이를 묻는다면 단호히 답할 것이다.

'재능? 그딴 게 어딨어. 없어.'

하지만 타고난 체질을 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다를 것이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의 하늘. 그 누구도 함부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 그 자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는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천양지체(天陽肢體).

양의 기운 중에서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극강의 양기를 지니고 태어나는 존재.

내공이 지나는 길목인 임맥과 독맥에 불순물이 쌓이는 순간 뜨거운 열기에 사라져버리고, 남들은 태양을 쬐면 주름만 느는 반면 걷다가도 내공이 쌓인다는 전설적인 지체.

바로 그 몸의 주인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마가의 적통 마이신이 평생을 시기하고, 무공도 모르는 일자무식인 그가 교주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마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런 재능을 제대로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를 쏟아낼 의지 자체도 없었다.

그저 물이 흐르는 대로. 먼지가 쌓이는 대로.

그렇게 자신의 자질을 방치해 왔다.

쉽게 말하자면, 마오는 제 능력을 십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내기를 다루어야 효율적이고, 또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조화를 이루는지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소동(小童)이 신검을 쥔 격.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달랐다.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

변하고 말겠다는 신념.

이 두 가지가 그의 대뇌를 두드렸다.

이기게 해달라고.

이기고 싶다고.

그리고 그 결과. 일순간에 그가 지닌 잠력이 폭발하여 지닌 내공이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 펼쳐져 버리게 된 것.

비록 일시적 각성 상태에 불과하지만, 이 순간만은 천재를 넘어 완성된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이른바 혼원일체의 단계였다.

'혼원일체는 심해처럼 깊은 공력을 가진 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든 잠력(潛力)을 일시적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내공이 산 정상에 고여 있는 웅덩이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지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지하수를 끌어 올린 것과 같은 격.

그리고 장이서 역시 이러한 현상을 목도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순간에 완전히 달라진 마오라니.

지금 그가 얼마나 강한지조차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소교주가 될 사람은 걔가 아니고 나다. 그러니까 내려놔."

똑같지만 실로 차분해진 목소리.

구유도 그의 기세가 달라졌음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이내 맹휘를 붙잡고 있던 우악스러운 손을 풀었다.

그러곤 마오와 맹휘를 번갈아 살피며 생각했다.

'저 아이가 소교주라고? 그럼 숨을 껄떡이는 이 아이는 무엇인가.'

그때 그의 머릿속에 나락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지킬 자가 있으면서 본교를 건드린 것. 그것도 하필 존자(尊子)들에게 손을 댄 거지.'

'교주님의 후계들이지. 몰랐나 보군.'

존자들. 그리고 후계들.

하나가 아니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구유가 눈을 부릅떴다.

쐐애애액!

이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달려가 마오의 옆구리에 일권을 꽂았다.

퍼억!

제대로 들어간 주먹.

한데.

"...이게 다야?"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마오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자신을 무심히 내려다본다.

어떻게...?

퍽!

다시금 반대편에 휘두른 주먹.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웃기지 마라!」

구유는 이를 꽉 깨물고 마오를 향해 연격을 퍼부었다.

퍼퍼퍼퍼퍽!

이 정도면 눈으로 좇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

마지막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붙잡은 채 얼굴을 향해 빛살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강하다.

그런데.

콱!

구유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잡았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한낱 이 어린 소년이 자신의 주먹을 붙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거였구나."

고스란히 연격을 허용했던 마오가 붙잡은 구유의 주먹을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싸우는 이유."

"무슨...."

"쟤들을 지키겠다는 생각. 그 끝없는 집념이 그 몸으로도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거야."

"네가 뭘 안다고...!"

"근데 나도 마찬가지야."

퍽! 마오가 구유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쳤다.

그러자 터더더덕! 구유가 한순간에 여덟 걸음을 밀려나 벽에 등이 부딪힌다.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에 번쩍 고개를 들고 마오를 살폈다.

"이제 알겠어. 꼬맹이도, 장이서도. 그리고 너희들도. 내가 지키려면 이겨야 한다는 걸."

뭐냐. 도대체 무엇이냐.

어째서 눈빛도, 표정도, 기백도.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냐.

구유는 어느새 손바닥이 흥건해졌다. 등줄기에 흐른 식은땀은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마오의 육신에서 뿜어지는 불꽃 같은 형상은 더욱 짙어졌고, 어느새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뿜어졌기 때문.

일전이 그냥 한사코 가벼운 애송이였다면, 지금은 마치 세상을 짊어진 대종사가 된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길래.

한낱 가볍고, 어리기만 한 이 소년이 대체 뭐길래.

"그러니까."

마오가 시리도록 진중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그러곤 스릉!

천천히 제 등 뒤에 걸린 칼을 뽑아 들었다.

넓적한 회색빛 도면에 용이 인각된 명도(名刀).

그리고 이를 척! 두 손으로 쥔 채 크게 들어 올렸다.

화르륵!

그러자 칼날에 생명이 부여되듯 짙은 화염과 함께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세상을 다 불태울 것만 같은 엄청난 열기!

"내가 이겨줄게."

쐐애애애액!

대각선으로 내리그어지는 일도.

그 순간 구유도, 장이서도, 소오도, 맹휘도, 철마적도.

모두가 보았다.

타오르는 칼날 끝에서 새빨간 불길이 거대한 화룡(火龍)이 되어 세상을 가로지르는 전대미문의 광경을.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구룡성이 폭발해버리는 천재지변의 결말을.

길고 길었던 철마적과의 대결이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124.

#예상에 없던 전개

휘이이이잉!

구룡성의 한 면이 화룡이 파먹은 것처럼 시원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뚫린 벽 너머에선 따스한 햇볕이 바람과 함께 스며들었다.

이내 황사에 가려져 있던 확 트인 사막의 절경이 눈에 담겼다. 종전을 알리듯 모래폭풍도 끝이 난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너무 경이로워서.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더 그랬다.

챙그랑.

"어, 어...?"

그리고 그건 혼원일체를 끝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오도 마찬가지였다.

화들짝 놀라며 창룡도를 떨어트리고, 제 두 손을 살폈다.

"내가 뭘... 한 거야?"

머릿속이 멍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빠짐없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꼭 혼령이 빠져나가 제삼자가 되어 자신을 지켜본 것만 같았다.

분명 제가 벌였음에도 제가 아니었던 것 같은 기이한 경험.

이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이겼다는 후련함이 아니라 몸을 빼앗긴 듯한 두려움이었다.

"칠공자님."

"장이서...."

하나 이런 어두웠던 감정도 제게 다가오는 그를 보자 서서히 먹구름이 걷힌다.

"나... 잘한 거냐?"

흔들리는 동공. 떨리는 목소리.

꼭 인정을 바라는 동생처럼 그가 묻는다.

이에 장이서는 그 누구보다도 대견해하는 형의 마음으로 다정히 답해주었다.

"충분히요."

"진짜로...?"

"예. 칠공자님이 모두를 살리셨습니다."

"내, 내가?"

"아무렴요. 천재인데."

"후후... 우하하하하! 그렇지! 역시 나는 천재였어!"

그제야 두 사람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이야, 공자님. 무서운 분이시네. 이렇게 큰 힘을 숨기고 계실 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깜짝 놀랐지 뭡니까."

"객잔 주인."

"소오입니다. 이제 좀 편히 불러주시죠. 그래도 목숨을 함께 한 사이인데."

"푸하하! 자식. 알았다! 객잔."

"소... 예."

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가락으로 경례 인사를 하곤 피식 웃는다. 이어서 꼬마 하나가 절뚝이며 다가온다.

"제법이네...."

육공자 맹휘였다.

"이 꼬맹이 자식! 기껏 구해줬더니 한다는 말이 그거냐?"

맹휘가 찌푸린 얼굴로 휙 고개를 돌린다.

구해준 걸 몰라서는 아니었다.

다 봤다.

숨이 멎어가는 와중에도 마오가 저를 구하려 목숨까지 내거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더 그랬다.

'하마터면 너도 죽을 뻔했잖아, 멍청아.'

그냥 더없이 고마워서. 그래서 오히려 말이 바로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맹휘가 입술을 질끈 물고 용기 내어 자그맣게 속삭였다.

"...다."

"뭐?"

"...다고."

"뭐 인마."

"고맙다! 고맙다고! 다 들어놓고선. 재수 없는 자식!"

"우하하하하! 알면 됐다."

대소를 터트리는 마오와 팽 토라지는 맹휘. 이를 보며 장이서와 소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싸움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내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곳으로 향했다.

「대, 대장....」

「흑....」

아신과 철마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몰려 있는 곳.

곳곳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쓰러진 전장의 용, 구유.

바로 그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패한 건가?」

구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변에 몰려든 부하들의 통곡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화룡은 그에게서 마지막 남은 기력까지 모두 휩쓸고 지나갔다.

손발엔 일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완전한 패배였다.

전장의 용으로 군림해 왔던 자신이 한참 어린 마교의 애송이에게 패한 것이다.

하나 그것보다도 더 막연한 건.

'흉노족도 여기서 끝인가....'

자신의 패배가 가져오게 될 먼지 같은 결말이었다.

그리고 이를 확정이라도 짓듯이 구룡성 아래층에서 요란한 소음이 빗발쳤다.

콰광-!

샅샅이 뒤져라!

그들이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마교의 세력.

비룡당과 맹갑귀마대.

모래폭풍이 걷힘과 동시에 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대장을 지켜라!」

아신의 외침과 함께 철마적의 병사들은 벌떡 일어나 구유 주변을 에워쌌다. 장이서와 일행은 이를 무심히 바라만 봤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 꼼짝하지 말거라! 오호호호!"

새하얀 도포, 이마에 녹색 보석이 박혀 있는 중년의 여인.

비룡당주 묘채경이 대소를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슥!

삽시간에 실내를 장악하는 황금색 비(飛)자가 새겨진 최정예 당원들을 이끌고서.

하나 자아도취에 빠진 것도 잠시뿐이었다.

"다, 당주님!"

부관이 기함하며 한쪽을 가리키자,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서렸다.

"유, 육공자님?!"

지금쯤이면 당연히 죽어 있을 줄 알았던 맹휘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

심지어 장이서와 마오도 함께다.

'철마적, 이 멍청한 놈들! 대체 지금까지 뭘 한 것이냐? 저런 머저리들 하나 죽이지 않고서. 아니, 근데 왜.... 꼭 상황이 너희가 패한 것처럼 보이는 거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됐다.

그야말로 당황 그 자체.

양쪽 다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아 보였지만, 구유는 만신창이가 된 채 간신히 앉아 있었고, 장이서와 일행은 당당히 서 있었다.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묘채경이 이를 모를 리 없는 일.

'철마적이... 패했다고? 저놈들에게?!'

예상에 없던 전개다.

구유가 누구인가.

자신도 승부를 점지하기 어려운 산왕가의 오군장을 꺾은 자다.

한데 고작 장이서와 객잔 주인. 그리고 꼬마 나부랭이들한테 패했다니.

"비룡당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에 휩싸일 무렵. 뒤에서 과묵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철컥, 철컥!

철갑으로 무장한 맹갑귀마대 사이로 기다란 창 하나를 움켜쥔 채 유유히 걸어오는 자.

존재감만으로도 장내의 공기를 한껏 짓누르는 마교의 절대 고수.

삼장로 맹철용이다.

"그, 그것이...."

묘채경이 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시선은 한 소년에게로 닿았다.

자신의 아들.

육공자 맹휘에게로.

"일단 제 말을 들어보...."

이에 묘채경이 다급히 입을 열려 하자 맹철용은 그녀를 무시한 채 다가서며 불호령을 터트렸다.

"대체 뭘 하고 다닌 겁니까?!"

쿵! 지축이 울릴 만큼 웅장한 기세.

"사, 삼장로님... 흐끅!"

맹휘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뒤섞여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뱉었다. 그러곤 도리어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무, 무서워.'

부자 상봉임에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린다.

맹철용이 사나운 기세로 주변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삼장로님. 일단 저들을 붙잡아 모두 조사 후에 이야기를...."

"비룡당주-!"

"으읏?!"

콰앙! 삼장로 맹철용이 노호를 터트리며 거세게 발을 굴렸다.

이에 지진이 인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고, 제 발 저렸던 묘채경은 화들짝 놀라며 접질린 듯 주저앉았다.

그러자 맹철용이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창끝을 그녀의 목젖에 겨누며 말했다.

"한 마디만 내 말을 끊으면. 그럼 그땐 사해가 얼마나 외로운 곳인지 알게 될 걸세."

이곳은 본교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수틀리면 힘으로 다 죽여 없애겠다는 말. 그리고 그게 거짓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무식한 늙은이!'

해서 속내와 달리 침을 꼴깍 삼키곤,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맹철용의 시선이 맹휘를 향한다.

싸늘한 적막.

맹휘는 말라가는 입 안을 적시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저기... 삼장로님.... 장 보좌와 마오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전부 날 구해주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고작 한다는 말이."

솨아아아.

맹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맹철용의 몸에서 분노를 넘은 광활하고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곤 실망감이 극한에 다다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겼다는 말도. 죽이라는 명도 아니고. 겨우 그겁니까?! 저것들은 죄가 없다...?"

저거라니! 내가 왜 저건데? 마오가 삿대질하며 나서려 하자 장이서가 입가에 검지를 얹고 말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여기부터는 맹휘가 풀어가야 할 일.

그리고 장이서는 맹휘를 믿었다.

"...그러면 안 됩니까?"

아니나 다를까, 맹휘 역시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두려운 내면을 깨트리고 처음으로 눈을 부릅떴다.

"장 보좌와 마오는 제 벗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없는 걸 없다고 하지. 그럼 무어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누구도 저 둘을 탓하지 마세요. 잘못이 있다면... 그건 모두 제 잘못이니."

하. 삼장로의 입에서 헛숨이 뱉어졌다.

감히 지금 제게 대든 것인가. 다른 이도 아니고 막내아들인 육공자 맹휘가?

"장 보좌, 마오. 나 때문에... 미안."

심지어 맹휘가 장이서와 마오에게 고개를 푹 숙인다.

이를 본 삼장로는 기함했다.

지금 제가 뭘 본 것인가. 감히 저를 앞에 두고 칠공자와 그 보좌 따위에게 고개를 숙여?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맹철용이 노성을 내지름에도 아랑곳없다.

맹휘는 허리를 굽힌 채 펴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주기 전까진 일어나지 않겠다는 뜻.

결국 마오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툭 치며 대꾸했다.

"알면 갚아."

"갚긴 뭘 갚습니까? 육공자님. 이리 오해를 풀어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드립니다."

"장 보좌...."

그제야 일어선 맹휘와 장이서. 그리고 마오가 서로를 다정히 웃으며 살핀다.

그리고 맹휘는 돌아서선 언제 그랬냐는 듯 냉기를 풀풀 풍기며 제 부친에게 말했다.

"삼장로께 거듭 말씀드립니다. 마오와 장 보좌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저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허.... 자식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게 이런 것인가.

당장 혼이라도 내고 싶다만, 보는 눈이 많다.

어쨌든 서열상으로는 저보다 높은 육공자.

맹철용은 사납게 노려보기만 하곤, 이를 빠득 갈며 수하들에게 외쳤다.

"경위는... 돌아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단단히 묻겠다. 육공자님을 모셔라!"

예! 그의 매몰찬 명에 뒤따라온 맹갑귀마대가 우르르 몰려든다. 맹휘는 가혹한 처사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늘 이런 식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무력이다.

하나 이제는 아까처럼 두렵지만은 않았다.

장이서. 마오.

저의 벗들이 있기에.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봐."

맹휘는 억지로 씨익 웃고는 인사만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젠장... 잃어버린 개를 찾아도 저렇겐 안 하겠네."

남겨진 마오가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서자로 태어나 온갖 학대와 괄시를 받고 자란 스스로가 떠올랐기 때문.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일차원적인 착각이었는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솨아아아아-

맹휘가 사라지자마자 맹철용에게서 지금까지는 볼 수 없던 막대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동안 보여준 노호는 애들 장난 수준.

'무, 무슨 살기가....'

그야말로 살갗이 찢어질 것 같은 위압감이다.

"육공자님의 체부(體膚-몸과 피부)를 건드린 놈이 누구냐."

누가 삼장로가 자식을 생각지 않는다고 하였는가.

틀렸다. 부정(父情)은 분명 존재했다. 삐뚤어져 있어서 그렇지.

125.

#명분 싸움 (1)

삼장로 맹철용의 포효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맹철용은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되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전부 묻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니."

그야말로 그만이 할 수 있는 청천벽력. 그러곤 싸늘히 마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칠공자님은 나가십시오. 무례는 추후 갚겠습니다."

"어, 나? 가야지. 근데 나만?"

맹철용이 대답도 없이 철마적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장이서와 소오까지만 데리고 꺼지라는 뜻.

이내 손에 쥔 창에선 검은 연기처럼 서슬 퍼런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초절정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전유물. 발기(發氣)다.

아주 작정하고 다 죽이겠다는 뜻.

"너희는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구유의 얼굴에 먹구름이 서렸다. 상대의 실력이 짐작됐기 때문.

'몸이 멀쩡했어도 이기기 힘든 상대다.'

냉정하지만 명확한 평가. 그만큼 삼장로 신창마귀의 위엄은 대단했다. 이대로면 필패. 아니 필사다.

한데 바로 그때.

"잠깐! 지금 뭐 하려고. 쟤들 없애기라도 하려고? 누구 마음대로."

마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와 철마적 앞을 막아섰다.

이에 비룡당주 묘채경과 삼장로 맹철용의 고개가 갸우뚱 비틀어졌다.

"감히 육공자님을 납치하고 옥체에 손을 댄 자들입니다. 죽여 없애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나오십시오.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여지라고는 일절 없는 무자비한 통보.

마오는 당황한 채 다급히 뒤를 살폈다.

겁에 질린 병사들. 눈을 감은 구유. 그리고 낙담하는 아신.

'쟤들을 전부 다 죽인다고?'

아니, 그럼 뭐 하러 이 고생을 하며 지금까지 버틴 건데.

맹갑귀마대와 맹철용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마오가 두 팔을 뻗고는 소리쳤다.

"멈춰! 지금 뭐 하는 거야? 아까 꼬맹이 얘기 못 들었어? 아무도 잘못한 사람 없다니까?"

꼬맹이? 맹철용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인다.

"말씀 가리시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쟤들은 아무 잘못 없다니까?"

"그건 칠공자님이 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맹철용이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수하들에게 고갯짓하며 명했다.

"칠공자님을 모셔라."

예! 그러자 무장한 맹갑귀마대가 철컥거리며 좌우에서 세차게 다가온다.

"야, 이 씨!"

이대로 정말 끝나버리는 거라고?

버티면 다 된다며.

그래서 버텼잖아.

마오가 안달 난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장이서어어어-!"

그러자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와 우뚝 선다.

든든하기 그지없는 등을 내보이며.

"또 뵙는군요."

이에 맹철용이 손을 들어 올리자 맹갑귀마대도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자인가.'

제 수하들을 쓰러트린 칠공자 보좌. 맹철용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빛났다. 제 수하들을 도륙할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상이다.

"자네와는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군. 얌전히 보내줄 때 가게."

가차 없는 통보. 흠. 장이서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양해를 구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기다려달라고?"

"예. 금방이면 됩니다."

장이서는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마오와 마주 섰다. 그러곤 그를 데리고 몇 걸음 물러선 채 말했다.

"여전히 저들을 살리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지. 그러려고 목숨 걸고 버텼는데."

마오와 장이서의 대화에 구유와 철마적의 병사들이 기함했다.

자신들을 살리려고 버텼다니.

그럼 죽기 살기로 싸운 이유가 저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하고, 속가슴이 이상하게 저릿하다.

너희는 대체....

"근데 보시다시피 저분들이 별로 원치 않으시네요."

"그래 보여."

"예. 어쩌면 오늘 일로 마가에 이어 맹가, 천가. 나아가 오룡당까지. 모두 칠소궁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

"사실 그렇죠."

"x같네."

마오의 얼굴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짜증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 사방에 적들이 많은지.

"근데 장이서."

"예."

"살다 보니까 원래 내 편보다 적이 더 많더라."

"오, 그건 또 언제 깨달으셨습니까?"

"방금. 그래서 내 편이 중요해. 왜 희소성이란 게 있잖아. 적을수록 귀한 거."

"칠공자님한테는 특히 더 그렇죠."

이 새끼가. 마오가 도끼눈을 떴다 풀고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 후회할래. 쟤들이 내 편 될 놈들이면...."

마오가 전방의 맹갑귀마대와 비룡당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명했다.

"살려. 어떻게든."

장이서가 픽 웃고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하게 답했다.

"그러죠."

다시 앞으로 나서는 장이서. 그가 맹철용 앞에 섰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철마적은 감격에 젖었다.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주는 자들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저들이 뭐라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 감동은 감동이고 현실적인 의문이 들었다.

'근데 어떻게 살리겠다는 거지?'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불리 그 자체.

장이서가 아무리 재주가 좋다고 한들 판세를 뒤엎을 수는 없다.

이는 철마적 사이에 스며들어 있던 소오 역시도 궁금한 일이었다.

솔직히 지금껏 그를 봐온 게 있으니 군말 없이 따른 거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버티면 뭐가 달라지는데?'

처음엔 맹휘를 방패 삼아 삼장로를 설득하려는 줄 알았다. 한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다.

'또 봐.' 이러고 떠나는데 별말 없이 손만 흔들고 보내주지 않았는가. 소오는 그때 장이서가 순간 치매가 온 줄 알았다.

'설마...! 이번에야말로 백오문의 소문주인 내가 나서주길 바라는 거냐?!'

그럴 리가. 이건 소오가 본원진기까지 끌어다 써도 못 이긴다. 비룡당주와 삼장로를 상대한다? 언어도단이오,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평온해 보이는 거냐.'

장이서는 늘 그렇듯 담담했고, 차분했다.

그렇게 모두가 내심 짙은 의문을 품은 채 장이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자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자는...."

싸움이라는 것은 꼭 무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란 자고로....

"칠공자님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 교주님에 대한 역모로 단정하겠습니다."

명분(名分) 싸움이다.

"허!"

장이서의 폭풍 같은 발언에 대다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는 맹갑귀마대도 마찬가지.

사해의 모래폭풍마저 돌파한 그들이지만, 역모라는 두 글자 앞에선 심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맹철용 역시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에 잠자코 있던 비룡당주가 언성을 높이며 참전했다.

"역모라니.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말 그대로.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칠소궁의 권솔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생살여탈권 또한 오로지 칠공자님의 것. 물을 죄가 있다면 칠소궁에 정식으로 제기하십시오."

곳곳에서 웅성거림과 경악이 빗발쳤다.

철마적이 칠소궁 소속이라니.

심지어 구유는 황당함에 좌객처럼 앉아 있다가 성자의 축복을 받은 것마냥 벌떡 일어섰다.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다는 얘기.

"장이서, 네놈이 드디어 정신 나갔구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1급귀라 하나 아무 권한도 없는 칠공자께서 무슨 수로 이들을...."

묘채경은 조소를 터트리다 말고 흠칫 굳어졌다.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정보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

이내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설마, 백인장의 인을 쓰겠다는 것이냐!"

장내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래. 정답이다.

이들이라면 분명 마오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대공자와도 약조하지 않았는가.

빨리 써먹어 주겠다고.

"역시, 장이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마오가 활짝 갠 얼굴로 품에서 둥그런 신패 하나를 꺼냈다. 이내 화끈하게 소리쳤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 두목이다-!"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두목이라고?!"

"그게 무슨...."

왈패냐. 두목은 무슨. 장이서가 피식 웃는다.

하나 의사만큼은 확실했다.

그가 손에 든 건 백마(百魔)의 글귀가 적혀진 백인장의 인.

분명 천마신교의 교주가 하사한 진품이다.

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

'이걸 이렇게 쓰겠다고...?'

맹철용과 묘채경도 얼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백인장의 인을 삼공녀를 위해 쓰려다가 대공자에게 저지당한 사건.

워낙 유명하지 않았던가. 한데 이걸 교외의 마적들에게 쓰겠다니.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 할 때인 것 같군요."

맹철용이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자, 묘채경이 자신감 가득한 비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로 마오에게 물었다.

"지금 백인장의 인을 여기 마적들에게 쓰시겠다는 겁니까?"

"어. 맞아.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고 가라."

"오호호호! 이들의 죄명이 뭔지는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알든 모르든 당주께서 관여할 일 아니니까 가라고. 난 이미 썼으니까 불만 있으면 정식으로 따져."

말은 맞다. 백인장의 인은 지존의 하사품. 이를 사용하는데 비룡당주든 삼장로든 관여할 일은 아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교주의 뜻에 반하는 것.

하나.

"오호호호호호-!"

비룡당주 묘채경의 당찬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인장의 인을 쓸 수가 있는 상대라면 그랬겠지요. 한데 이를 어쩌죠? 칠공자님께선 저들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뭐?"

"이자들은 모두 비룡당으로 압송될 것이며, 여죄까지 톡톡히 물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뭔 소리야! 이거 안 보여? 패 쓰겠다고."

"예, 쓰세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도들에게만 허용되는 것. 이들은 아쉽게도 아직 교인이 아니라 외인이네요. 오호호호!"

"그게 뭐 어쨌다고! 교인으로 들이는 거야 가서 허락만 해주면 금방...!"

마오가 따지고 들려는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외인을 교인으로 들이는 건 비룡당의 일이잖아. 그리고 저 여자가 비룡당주고.'

바로 이것이었다. 묘채경이 의기양양하게 나설 수 있었던 이유. 문제의 허점을 간파한 소오도 주먹을 꽉 쥐고 중얼거렸다.

"이거 제대로 당했군. 원칙상으로 외인은 교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백인장의 인이든, 천인장의 인이든. 입교하기 전까진 식솔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입교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칠공자 정도가 나서서 보증해 주면 쉬운 일. 하나 문제는 하필 지금 눈앞의 적이 비룡당주라는 것이었다.

당장 그녀가 흉노족을 끌고 가 조사를 먼저 행하고, 죄인으로 단정 지어 버리면 입교는 물론이오, 비룡당에서 살아 나올 수도 없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칠공자님. 그래도 억지를 부리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너...!"

마오가 얼굴이 붉어진 채 입술을 오물거린다. 하나 소오가 달려 나와 그를 만류했다.

"만일 칠공자님께서 이들이 외인임에도 식솔로 인정해 버리게 되면.... 따로 세를 꾸려 반역을 도모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말이 돼!"

아쉽지만 말이 된다.

이쪽에서 명분을 들고나오자, 저쪽도 똑같이 명분으로 응수한 것.

대체 이걸 어찌 풀어야 한단 말인가.

126.

#명분 싸움 (2)

마오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희비가 갈린다. 묘채경은 조소를 잔뜩 머금곤 생각했다.

'발칙한 것들. 감히 백인장의 인 하나만으로 날 상대하려 했단 말이냐? 어림없다. 가서 젖이나 더 먹고 오거라. 오호호호!'

간신히 빼앗은 명분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눈치와 머리로 앉을 자리, 설 자리, 묫자리까지 간파하는 것이 바로 비룡당주라는 직책이다.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다.

"...그럼 문제없는 건가?"

맹철용이 나서며 묻는다.

"예, 아무것도요. 다만 여기서 처벌하긴 그렇고.... 당으로 압송한 후에. 그 후에 처벌하시지요. 마지막 기회는 장로께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삼장로 맹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은 맹가를 건드린 철마적만 깡그리 없애버리면 될 일.

이로써 상황은 다시 완전히 뒤집혔다.

'장이서. 네놈이 이긴 줄 알았지. 천만에.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저놈들을 끌고 가 네놈의 없는 죄까지 만들어 도라옥에 처넣어 주마.'

묘채경이 섬찟한 미소를 드리운 채 장이서를 노려본다. 마오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살핀다.

그러자 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왜. 안 될 건 무엇이냐. 설마 이놈들과 육공자님을 납치하려던 네 진짜 계획이 들통날까 두렵기라도 한 것이냐?"

"우길 걸 우기십시오."

묘채경이 이를 빠득 갈며 대꾸했다.

"우겨? 드러난 것 하나 없는데 우겨? 정확한 건 조사해보면 나올 것이다."

"편파적인 조사는 아니고요."

"그게 뭐 중요하더냐. 억울하면 정식으로 따지든지. 아니면 어차피 네 이름이 나올 것 같은데, 너도 미리 가서 같이 조사받는 건 어떠하냐."

작정하고 엮겠다는 뜻. 역시 대화가 안 통하는 여인이다. 장이서는 얕은 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맹가에서도 같은 입장이십니까?"

장이서의 돌발적인 물음에 맹철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제 될 게 있는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칠공자님의 권솔이라고. 건드리는 순간 역모라고 말입니다."

"억지를 부리는군."

"그렇게 보이십니까."

시건방진 도발에 맹철용의 눈살이 좁혀졌다.

하나 섣불리 일갈을 내지르진 않았다. 대부분 마교 고수가 그러하듯 그 역시 태도에는 힘이 중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약한 놈이 까불면 뭣도 없는 객기이나 센 놈이 까불면 숨겨둔 비수가 있는 호기라는 논리.

그런 의미에서 그가 본 장이서는 호기였다.

첫 만남부터 사막에서 칼을 섞었고, 제 수하들 여럿이 당했다.

알려진 것처럼 입만 산 놈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

'하나 비룡당주 말에 틀린 것은 없다. 권솔이라 아무리 우겨봤자 그건 희망 사항일 뿐. 교리를 바꿀 순 없다.'

맹철용이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저들을 비룡당으로 압송하라!"

예! 맹철용은 장이서의 말을 무시한 채 명을 떨궜다. 그러자 맹갑귀마대가 창끝을 겨눈 채 다시 조여든다.

"오호호호! 뭣 하느냐? 거들지 않고."

여기에 비룡당의 무사들까지 합류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야, 장이서. 어떡해, 이제?"

마오가 발을 동동 구르자 옆에 있던 구유는 예상했다는 듯 묵직한 눈매로 앞에 나서며 말했다.

"애초에 너희가 할 일은 없었다. 우리 모두를 살려주겠다는 네 말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허풍일 뿐."

"야...."

마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나 이를 보는 구유의 표정은 차분했다. 아니, 오히려 더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처음이었다. 우릴 위해 그런 말을 해준 자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

장이서는 직감했다. 그가 지금 하려는 게 무엇인지.

저건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빛이다.

구유는 다가오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성에는 중독된 자들이 가득하다. 분명 이틀 뒤부터 사지가 썩어 사라지겠지.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구유가 주먹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외쳤다.

「끝까지 싸우고, 장렬히 전사할 것이다!」

하! 그러자 그 순간, 철마적 병사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맹갑귀마대와 비룡당 무사들도 첨예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돌이킬 수 없는 사생결단이 벌어질 상황.

"장이서!"

마오의 부름에도 장이서는 침묵한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맹철용과 묘채경은 확신했다.

'역시 허수였구나. 그럼 그렇지. 네놈이 뭘 할 수 있단 말이더냐.'

묘채경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반항하는 자들은 죽여도 상관없다. 아니, 그냥 죽이거라. 오호호호!"

묘채경의 잔인한 명까지 떨어지자, 무사들의 눈빛에 짙은 살광이 더해졌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칼부림뿐.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이에 마오와 소오가 안달이 난 눈으로 발만 동동 구르던 그때.

딱, 딱, 딱, 딱.

장내에 미약하게나마 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장이서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선다.

드디어... 왔구나.

"쯧쯧쯧. 다리도 안 좋은 노인네를 이 멀고도 험한 곳까지 불러내다니. 괘씸한 녀석!"

계단 쪽에서 지팡이 소리와 함께 탁한 노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모두의 행동이 멈추어지고, 마오와 소오는 경악을 뱉었다.

"저자는...!"

반면 장이서는 환하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뱀 머리가 조각된 지팡이를 쥔 채 나타난 작은 거인.

"독산마의!"

마오가 경악한 채 그의 별호를 내질렀다.

그렇다. 육장로 독산마의 사마균. 바로 그의 등장이었다. 도대체 그가 여길 왜....

얼핏 보니 묘채경과 맹철용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했다.

"꼭 와 달라고 서찰을 보내더니. 어찌 된 게 죄다 골골대며 죽어가는 놈들뿐인 게야?"

"서찰?!"

마오는 일순 이곳에 오기 전, 집하촌에 막 들어섰을 때를 떠올렸다.

'뭐야, 여기가 불문객잔이라고? 이건 전서구 보내는 곳이잖아.'

'당연히 아니죠. 제 볼일이 있어 들른 거니 기다리십시오.'

'근데 누구한테 붙이는 건데?'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한테요.'

그럼 그때 보낸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게....

"자네를 부른 게 저자였던가?"

맹철용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그 역시 마의가 찾아온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몰랐기 때문.

무작정 비룡당을 채근해 뒤쫓아 왔다고 했는데....

"끌끌, 정확히는 광의를 찾아온 게지. 한데 이곳을 보니 놈의 흔적이 너무도 많구먼. 아무래도 제대로 온 모양이외다."

"광의...?"

"기억하시오? 공손절이라고."

"과거 천마전에서 비법서를 갖고 달아났던 그자를 말함인가?"

"맞소이다. 그놈이 다시 나타났소. 아주 고약한 놈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분위기가 일순 묘해졌다.

특히 광의라는 말에 맹철용과 비룡당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한데...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런 게야?"

마의는 분위기를 쇄신시키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대치한 국면이 영 이상하다. 얼핏 보면 중간에 놓인 칠공자와 장이서를 핍박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네. 죄지은 자들을 압송하려는 것뿐이니."

맹철용이 선을 긋듯 단언했다. 하나 장이서의 생각은 달랐다.

"마의 어르신.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광의에게 당한 피해자들입니다!"

"음?"

마의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하여 마의께 이들의 치료를 청하는 바입니다."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 상황에 새로운 기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이라는 기적의 흐름이 말이다.

'장이서가 믿는 구석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오기 전에 마의를 부른 거였어!'

소오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장이서가 대단하다는 건 이미 어깨너머로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리 가까이에 함께 서서 마주한 그는 더 난 놈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미리 약을 쳐둔 것이 아닌가.

하나 소오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으니. 그건 바로 장이서는 맹철용이 등장한 순간부터 이미 마의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날 죽이려 했던 삼장로는 이곳에 온 이후부터 나와 마오를 향해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오해가 이미 풀려 있었다는 얘기. 그걸 비룡당주가 해줬을 리는 없고....'

남은 건 자신이 서신을 보내 부른 마의뿐이다.

물론.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상대는 광의와 동문수학한 마의(魔醫). 사람을 살리는 것보단 해하는 쪽에 더 일가견이 있는 자.

마냥 쉽게 넘어가 줄 거라곤 생각 안 했다.

하지만 그는 광의와 달리 내키기만 하면 온전히 되살려주는 자다.

그러니까 그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내걸면 됐다.

그리고 그건 아주 간단했다.

"마지막으로 광의를 만난 자가 바로 접니다."

"뭬야?!"

그가 이곳까지 힘든 다리로 예까지 올 만큼 찾아 헤매는 자.

바로 광의에 대한 정보를 거는 것이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자들을 구해주십시오."

"끙...."

마의의 입에서 실로 난처하다는 듯 침음이 뱉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맹철용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솔직히 불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묘채경만 있었더라면, 곧바로 승낙했을 것이다.

오룡당주가 당대의 실세들이라면 장로들은 이미 그 세월 다 겪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마교 최후의 보루다.

당주 하나쯤이야 뒤가 어떻든 일단 누르고 갈 수 있는 일.

'하지만 맹 가주가 끼면 얘기가 달라지지.'

문제는 바로 삼장로 맹철용이었다.

아무리 장로의 신분은 평행이라 하나 실력으로나, 세력으로나. 교내 다섯 손가락에 드는 최강자가 바로 그다.

게다가 마교의 최고 계층인 장로들의 분쟁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일.

'나도 웬만하면 네놈을 도와주고 싶긴 하다만, 이번엔 상황이 좋지 않구나.'

마의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살펴도 팔짱을 끼고 선 맹철용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자신도 무리해서 나설 수는 없는 일.

장이서가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장로 간의 신의를 깨트릴 정도는 아니다.

하여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려는 순간이었다.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구해달라는 건 뒤에 있는 이자들이 아닙니다."

장이서는 제 뒤로 고갯짓했다. 구유를 비롯한 철마적이 보였다. 그들이 아니라면 누구를 말함인가.

그의 말에 장내에 있는 모두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장이서는 구유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래층에 광의에게 중독된 자들입니다. 그들을 해독해 주십시오."

구유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점점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해독(解毒).

이 두 글자를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달려왔던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에 드디어 빛살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뿐 아니라 철마적 모두가 그러했다.

만일 정말 흉노족에게 드리운 재앙을 걷어내 줄 수만 있다면. 그리만 해준다면.

오늘부터 그는 흉노족의 영웅이다!

127.

#굴종의 맹세

장이서의 거침없는 제안.

그리고 모두의 기대가 서린 대답은 너무도 쉽게. 아주 간결하게 흘러나왔다.

"그게 사실이더냐? 그거라면 어렵지 않지. 낄낄낄!"

아아. 털썩. 아신을 비롯한 다수의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진정한 기적이 벌어졌다.

"이제 죽을 이유는 사라진 건가?"

장이서가 구유를 보며 환히 웃는다. 구유는 여전히 무서운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이내 한참 후에야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이를 본 장이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했다.

"칼을 다오."

"칼?"

무슨 의미인지. 장이서가 등 쪽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건넸다.

그러자.

서걱! 그가 거침없이 제 손바닥을 베어내곤, 무릎을 꿇고 피가 맺힌 손바닥을 떠받들 듯 들어 올렸다.

「이 몸이 죽어 안식의 대지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이제 우리의 주인은... 너다.」

굴종(屈從)의 맹세.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그의 파격적인 선서였다.

이를 알아들은 소오는 입을 떡 벌렸고, 마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장이서는....

"나 말고."

덥석 마오의 손목을 붙잡아 구유의 손바닥 위에 손이 겹치도록 얹어주었다.

그러곤 피가 없는 그의 다른 손을 붙잡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주인은 이쪽. 우리는 벗 정도로 해두지.」

구유의 시선이 복잡하게 변한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고마움. 그것도 평생 잊지 못할 감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마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갑자기?"

"이름을 말해라."

마오는 그의 물음에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나지막이 답했다.

"마오."

구유는 이에 그의 이름을 몇 차례 되뇌곤 말했다.

"이제부터 마오가 곧... 우리의 주인이다!"

구유의 돌발적인 선포가 떨어졌다.

마오오오오오-!

그러자 철마적의 하나 된 함성이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기세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화들짝 놀라 경악했다.

당사자인 마오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피부가 자극받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내 심장이 두근거리고 보다 빠른 속도로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는... 전율이었다.

서서히 마오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그도 답례하듯 큰 소리로 세상 떠나가라 소리쳤다.

"당연하지!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책임진다! 우하하하!"

와아아아아!

마오의 승낙이 이어지자 철마적은 환호와 함께 그의 이름을 구령처럼 쉴 새 없이 외쳤다.

그야말로 지금 사기 최고조. 이 기세라면 천마전까지 뚫고 갈 수준.

마오의 첫 번째 세력이 탄생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흉노족은 본교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괜찮은가?"

장이서가 구유에게 물었다. 이에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과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그럼 됐다."

장이서가 웃는다. 그야말로 화목한 결말.

물론 이를 지켜보던 소오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지금 주인인 걸 인정하면 반역이 되는 거잖아!"

아무리 서로 좋다고 우겨봤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이렇게 되면 마오가 외부에 마교가 아닌 독자적인 사조직을 만든 꼴밖에 더 되겠는가.

이는 상대한테 아예 죄명을 떠다 먹여주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묘채경과 맹철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호호호!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싹 다 잡아들이지 않고! 칠공자와 저 떨거지 둘도 함께 데려가라!"

예! 그녀의 명에 비룡당과 맹갑귀마대가 맹렬한 기세를 피운 채 다시금 움직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모든 말은 끝까지 다 들어봐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아직 장이서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곳에 있는 흉노족은 모두 천마신교의 교인이 되었음을 선포하겠소."

"뭐어? 이런 미친놈이 다 있는가. 네놈이 뭔데. 무슨 자격으로."

이를 들은 묘채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맞다. 장이서는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다.

장이서가 품에서 둥그런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백인장의 인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신패.

앞면과 뒷면이 흑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인 명패.

그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광명우사 흑야의 자격으로. 흉노족을 천마신교의 교인으로 인정한다."

"누...구...?"

묘채경과 맹철용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내 다시 눈을 부릅뜨고 장이서가 든 명패를 살폈다.

그리고 헉!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장이서가 든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아봤기 때문.

광명좌우사자의 직인이 찍힌 패였다.

한 번이지만, 그들의 의사를 대신 발현할 수 있는 존엄하고도 숭고한 신패!

"묻겠습니다. 이것도 억지입니까?"

장이서가 신패를 앞으로 내밀자 어느새 다가온 독산마의가 이를 받아 들곤 활짝 웃는다. 그러곤 얄미운 시누이처럼 호들갑 떨며 말했다.

"으하하! 맞구나, 맞아. 이보시오, 삼장로. 이거 보시오. 광명우사께서 내리신 게 확실하구려. 이렇게 되면 이놈 말이 다 맞지. 암. 우사께서 그리 정하신 건데."

당했구나. 맹철용은 일순 장이서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칠공자님의 권솔이라고. 건드리는 순간 역모라고 말입니다.'

'억지를 부리는군.'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리고 아까까진 몰랐던 것을 떠올려 버렸다.

그가 말을 마치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는 것을.

'허수가 아니라... 노림수....'

애초에 이 상황을 유도한 것.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했다.

이 정도면 장이서는 그냥 무공 실력만 좋은 놈이 아니라... 머리까지 뛰어난 불세출의 천재가 아닌가.

"더는 이 문제에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 아니...."

"만일 오늘의 일로 불필요한 말이 본교에 나돌게 된다면.... 그럼 저 역시 오늘의 일을 정식으로 문제 삼겠습니다."

묘채경의 입에서 허망함과 쓴 내가 우러나는 탄식이 뱉어졌다.

얼굴에 수만 가지 감정이 다 드러난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판세를 뒤바꿔야 한다.

'그래. 저놈들이 당원들을 해하지 않았던가. 그걸 문제 삼아....'

하나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속삭이는 장이서의 서늘한 말에 그냥 굳어져야만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주께서 또 일을 벌이셨다. 그럼 저 또한 어째서 삼장로께서 절 죽이려 하셨는지. 도대체 당주께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끝까지 가볼 참입니다. 그때 누가 더 크게 다치게 될지. 궁금하면 가보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장이서가 씨익 웃는다.

'대체 어디까지 뭘 알고 있는 것이냐.'

모르겠다. 하나 장이서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허섭스레기 같은 가면을 쓰고 모두를 희롱하는 괴물.

섣불리 건드렸다간 도리어 물어버리는 뱀 새끼.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절 더 시험하려 들지 말란 말입니다."

지독한 패배감이 서린다.

처절한 완패였다.

끝내 고개를 숙이는 묘채경.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이것으로 마오는 구유와 철마적이라는 세력을 손에 얻었고,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털썩.

"자, 장이서-!"

자신을 부르는 마오의 외침을 마지막 기억으로....

장이서의 시야가 어둠에 휩싸였다.

* * *

휘이이잉-!

구룡성 뒤로 지네와 전갈만이 까딱거리며 배회하는 음지의 사막.

"끼, 끼낄낄...."

인적이라곤 일절 없을 이곳에 모순적이게도 괴기스러운 웃음이 흩날렸다.

그의 이름은 공손절.

광의라 불리는 존재였다.

지금 그는 회생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손목부터 잘려 나간 두 팔에 완전히 비틀린 두 다리. 가슴을 뚫고 나온 흉골을 타고 흐르는 푸른색 선혈.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심지어 초점이 사라진 두 눈은 어둠만이 가득했고, 육신은 고통의 한계를 넘어 이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히... 킥... 히히히...."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가엔 연신 웃음이 새 나왔다.

"또, 또... 먹고...싶네. 키히히...!"

놀랍게도 이 와중에도 누군가를 향한 욕망만을 분출하고 있던 것.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고, 세상 그 어떤 기운보다도 정순하고 맛있었던 자.

"장이서...."

오직 그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그야말로 광적인 존재의 광적인 집착.

그리고 툭.

점점 꺼져가는 그의 정신에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눈이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설마.

"자, 장이서?! 설마 날... 보러 온 것이냐? 키, 키히히!"

그럼 한 번만. 한 번만 더 맛보게 해다오. 한 번만!

악귀 같은 그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가고, 혓바닥이 꿈틀거린다.

한데 그 순간.

꽈득.

그의 입술 위에 발이 얹어지고 엄청난 무게로 이를 짓이겼다.

"끼, 끼끼끼!"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비명. 이내 무게가 걷히자 그의 얼굴은 처절하게 뭉개졌다.

어떤 미친 새끼가!

광의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그 순간.

"칠흉(七凶)."

상대의 입에서 절대 나와선 안 될 말이 뱉어졌다. 자신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별칭. 그리고 저들 외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것.

"흉노족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이 사달을 만들다니."

주름 가득했던 광의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위에서 기대가 컸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네가 흉신팔주(凶神八主)에 들 자격이 없었던 걸까."

"자, 잠깐만...."

"넌 임무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날 불러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진 잘 알고 있겠지."

"아, 아니야!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게! 한 번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알지 않나. 성공이든 실패든... 뭐든 버릇된다는 거. 잘 가시게."

"잠까아아안! 아, 안 돼! 장이서! 난 이놈을 다시 만나야...! 커헉!"

빠득! 광의의 튀어나온 흉골 위에 발이 얹어졌다. 그러곤 상대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되물었다.

"장이서...?"

"그, 그래! 키히히히! 그, 그놈이 얼마나 마, 맛있는 줄... 꺼어...."

미약하게 꺼져가는 숨소리.

광의의 눈이 서서히 뒤집힌다. 이대로면 열을 세기도 전에 숨이 넘어갈 터. 그럼 그의 심장만 꺼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게 흉신팔주 중 삼흉(三凶)이자 윗분의 명을 받고 온 그의 임무.

하나.

"장이서라...."

사내는 장고 끝에 품에서 붉은색 환약을 꺼냈다. 그러곤 이내 광의의 벌려진 입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연기처럼 녹아내리며 멎어 있던 그의 가슴이 다시 천천히 움직인다.

다 죽어가는 이를 단숨에 살려내다니. 화타가 살아 돌아와 경악할 효능이다.

하나 이는 이들이 속한 곳을 알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죽은 자마저 살려내는 상식을 벗어난 자들이기에.

"네 처분은 윗분께 맡길 것이다."

그는 혼절한 광의를 어깨에 둘러멨다. 그러곤 품에서 붉은색 가면을 꺼내 쓰곤 서서히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모래폭풍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혈존천하(血尊天下) 파멸일원(破滅一原).

희미하게 울리는 교령만을 사막에 남겨둔 채.

#구룡성 그 이후

128.

'윤아. 어른들 말씀 꼭 잘 들어야 해. 알았지?'

'형아는?'

'형은... 잠깐 어디 갔다가 나중에 윤이 찾으러 올 거야.'

'언제?'

'음... 윤이가 강해졌을 때?'

'형아보다 더?'

'앞으로 네가 머물 곳에서 가장 강해졌을 때. 그때 올게.'

'나 그럼 빨리 강해질래. 그래서 형아랑 같이 살래.'

'그래. 그렇게 하자.'

'약속.'

'약속....'

따스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동생과 인사를 마치고, 초라한 집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래서 미련이 발목을 잡아. 한 번만 더 동생을 안아주고 싶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네가 어디에 있든 그 뿌리는 정도에 있음을 절대 잊지 말거라.'

이내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세워야 했다.

'암각 요원 103호.'

퍽!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그리고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땐 이곳에 와 있었다.

머나먼 신강에 드높은 봉우리들이 즐비한 이곳, 천산에.

무림맹이 아닌 마교의 소속이 되어.

그리고 지금은....

"장이서어어어-!"

"헉!"

천둥 같은 고함에 벅찬 숨을 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손바닥에 흥건한 땀이 느껴진다. 그제야 꿈에서 벗어나 현실 감각이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이내 고갤 돌려 옆을 바라보자 웬 잘생긴 멍청한 녀석 하나가 울상을 짓고선 서 있다.

"마...오?"

"어, 나야! 정신이 좀 들어?"

"...그래."

"새끼. 반말하는 거 보니까 살아났구나!"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두통은 좀 있지만.

"응?"

덥석!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던 그 순간. 마오가 갑자기 달려와 저를 껴안았다.

뭐야, 이 자식. 당황함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것도 새카맣게 잊었다.

"지금 뭐 하십니까?"

밀쳐내려 하자 잘게 떨리는 어깨가 보인다.

설마... 우는 건가? 이거야, 원....

아무리 강한 척해도 고작 열아홉 살. 장이서는 얕은 숨과 함께 톡톡. 어깨를 두드려줬다.

"앱니까? 울게."

"닥쳐. 넌 진짜...."

마오가 툭 밀치고 일어나 눈물을 슥슥 닦는다.

그를 보며 픽 웃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낯익은 광경이 눈에 담긴다.

칠소궁.

이제는 집이 되어버린 그곳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마지막 기억은 구룡성.

으레 해야 할 말을 뱉자, 마오는 언제 울었냐는 듯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대꾸했다.

"기억 안 나? 너 진짜 죽다 살았어. 도대체 그 몸으로 어떻게 버틴 거야?"

"제가 얼마나 혼절해 있던 겁니까?"

"열흘. 마의 말로는 오장육부가 녹아내리지 않은 게 기적이라더라."

열흘이라. 많이도 지났구나.

깨어난 순간 대충 예상은 했다.

생각보다 광의의 불사독은 지독했다.

중독되고 조기에 점혈을 짚어 더 퍼지는 걸 막아냈고, 이후엔 조화술을 펼쳐 최대한 독을 다루어냈다.

하지만 처음 퍼져나간 독 기운은 점점 육신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고 더 버티기 힘들겠다고 생각한 순간. 긴장이 풀리며 정신을 잃었다.

"구유는. 흉노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그게 궁금해? 너 진짜 죽을 뻔했다고."

"압니다."

"알아? 그걸 아는 자식이...!"

"그 안에 목숨 안 건 사람은 없으니까요."

"어휴, 말이나 못하면. 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거든? 너 지금 시한부야. 언제 뒈질지 모르는 처지라고."

시한부...?

마오의 말에 문득 제 손을 살폈다.

손톱은 이미 다 부서져 사라졌지만, 피부색은 멀쩡하다. 조금 까슬까슬 탄 것만 빼면.

하나 호흡을 통해 들여다본 내면은 달랐다.

'독이... 다 퍼져버렸구나.'

불사독은 그 이름에 걸맞게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것도 오장육부를 비롯해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중독된 채.

그나마 뭉쳐 있던 독이 자잘하게 흩어져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겠다.

'마의가 응급조치를 취한 건가.'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쨌든 이 정도면 정말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

"혹시 흉노족도 아직 그대로인 겁니까?!"

"지금 남 걱정할 때냐!"

약속이니까. 장이서가 단호하게 쳐다보자 마오가 가슴을 탕탕 치며 답했다.

"걔넨 아니야. 걔들은 독을 소량만 섭취했던 거라 금방 나았어. 근데 넌 완전 제대로 당했다더라."

그랬지. 설마 제 발로 구룡성에서 뛰어내리면서까지 절 벨 줄은 몰랐으니까.

'네 내공은 내 것이야-! 다 내 것이란 말이다! 으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는 자다.

"어쨌든 그럼 흉노족은 안전한 겁니까?"

"어. 전부 다 멀쩡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하긴. 마의가 자신도 없이 고쳐주겠다고 확답했을 리가 없지.

"웃어? 웃음이 나와? 이거 가만 보면 심성이 아주 글러 먹었네. 너 인마. 죽게 생겼다고!"

"보통은 그런 걸 심성이 곱다고 하죠."

"네 입으로 그딴 말 하지 마! 아무튼 마의가 깨어나면 바로 독산각으로 데려오랬어. 그때까지 내공 사용은 절대 금지. 언제 또 독이 발작할지 몰라."

"내공까지 금해야 합니까?"

"어. 죽고 싶으면 안 그래도 되고."

광의.... 그가 주고 간 선물이 꽤 크구나. 그를 너무 쉽게 봤다.

"바로 독산각으로 가자. 지금 가서 치료부터 받아."

마오가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운다.

"저 방금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된 겁니까."

"와, 이런 답답한 여우를 봤나."

"묻는 말에 대답."

슥 눈을 올려 뜨자 마오는 한숨을 길게 뱉고는 기억을 회상했다.

"네가 그때 그렇게 쓰러지고...."

*

*

*

구룡성은 침묵에 잠겼다.

'...돌아간다.'

그리고 삼장로 맹철용은 침중한 얼굴로 돌아섰다. 묘채경이 쓰러진 장이서를 향해 살기를 드러내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자네는 안 가나?'

'이이익...! 가야지요. 갑니다! 안 가고 뭣들 하는 것이냐!'

육장로인 마의가 떡하니 버티고 선 탓에 별수 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그다음은 치료의 연속이었다.

약재가 부족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홀연히 사라졌던 소오가 기적처럼 이를 조달해온 터라 무리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소오는 그 후로 인사만 건네고 사라졌다.

'칠공자님,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네요. 객잔 일을 마치고 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하하, 다음엔 이름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소오입니다.'

'가, 이 객잔 자식아.'

그렇게 사흘에 걸쳐 흉노족의 치료를 마치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나서야 모두가 본산으로 돌아왔다.

'임시방편은 취했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겝니다. 이놈이 살 방도는 오직 독산각에 있으니.... 깨어나면 꼭 찾아오라 하십시오. 꼭.'

그리고 마의는 장이서에 대해 신신당부한 채 떠나갔다.

다시 닷새가 흘렀다.

*

*

*

"...맹휘는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끝내 얘기가 잘 안된 모양이야. 그래도 꼭 돌아오겠다고. 그때까지 잘 지내라더라."

설명을 마친 마오가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장이서도 얕게 침음을 뱉었다.

맹휘를 구해내는 데엔 성공했지만, 정작 맹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던 것.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까? 장 보좌와 마오는 제 벗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저 둘을 탓하지 마세요.'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맹휘는 처음으로 제 부친에게 제 의사를 단호히 밝혔고, 또 그의 부친인 맹철용도.

'육공자님의 체부를 건드린 놈이 누구냐.'

소문처럼 아예 부정이 없는 냉혈한은 아닌 듯했으니.

아마 언젠가는 그 삐뚤어진 부자 사이가 제대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뭐, 어쨌든 결말은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

마오가 활짝 웃었다. 이에 장이서도 마주 웃는다.

그리고 그때 뒤편에서 낯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깨어났는가?"

이에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장이서의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다행이군."

전장의 용, 구유.

"무사해서... 천만...."

익숙지 않은 어눌한 어조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댕기 머리의 여전사 아신.

그리고.

"어, 어이.... 형...님."

고개를 푹 숙여 붉어진 눈을 감추는 녀석, 과평.

그들이 이곳 칠소궁에 함께하게 되었다. 장이서는 픽 웃고는 말했다.

"그 얼굴에 형님이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직 스물일곱이다!"

"세상에. 내가 형 맞네. 와, 이리."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과평. 장이서는 손을 내밀며 인사를 전했다.

"살아줘서 고맙다. 장이서다."

"과평이오.... 살려줘서 고맙소, 형님."

"사내자식이 울기는."

"우, 울긴 누가 울어? 그냥 무사하니 다행이라는 거지."

과평이 새빨개진 얼굴로 발을 굴리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린다. 다음은 아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아직 어색한 게 많은 모양.

「편히 지내도록 해. 잘 지내보자.」

「잘... 부탁드립니다. 아신입니다.」

「장이서다.」

아신이 그제야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였다. 과묵한 성정에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참으로 든든하다.

그리고 마지막은....

"구유다."

전장의 용, 구유.

사해의 잠룡이라고 할 수 있는 그를 품에 얻었다.

이는 이번 행보의 가장 큰 수확이자, 앞으로 마오를 지탱해 줄 든든한 첫 번째 기둥이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칠소궁에 새로운 식구들이 생겼다.

"근데 여기서 흉노족이 다 지내기엔 좀 부족했을 텐데?"

훈훈한 인사가 끝나고 장이서는 문득 든 생각을 꺼냈다. 그러자 마오가 어깨가 잔뜩 올라간 채 대꾸했다.

"내가 용태한테 이미 말해놨지. 구유만 궁에 남고 나머진 전부 마을에 머물 곳을 마련해 뒀다. 언제 또 자객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일종의 방범 차원? 뭐 세간에는 도적 떼를 끌고 왔다느니, 이래저래 난리지만. 어때. 잘했냐?"

웬일로? 나쁘지 않은 묘안이다.

과평과 아신이 철마적과 함께 마을을 지켜준다면, 그보다 더 안심할 것도 없는 일.

"잘하셨습니다."

"우하하! 자, 그럼 이제 독산각으로 가자. 너 얼른 치료해야 해."

"그전에."

"어?"

"구유와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나가주십시오."

"갑자기?!"

"예."

와, 씨. 매정한 새끼. 마오는 느닷없는 축객령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환자의 말을 따라야지. 마오는 과평과 아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구유와 둘만 남겨지자 장이서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아."

순간 세상이 핑 돈다. 하나 땅에 발만 내리고 기다리자 금세 나아진다. 그 모습이 우려스러웠는지 구유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은가?"

"아니."

"솔직하군. 더 눕는 게 어떤가."

"그러기엔 할 게 많네."

"치료가 다 끝난 게 아니라고 들었다."

구유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가득해진다. 이를 본 장이서가 픽 웃고는 그를 스쳐 지나며 말했다.

"나가자. 바람이나 쐴 겸."

"...그러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섰다.

129.

#삼공녀의 분노 (1)

- 월하촌 대나무 숲.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저녁.

두 사람은 높게 뻗은 나무 끝에 올라서서 월하촌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호수 바깥엔 집들이 가득하고, 중심엔 홍예교 너머 취선루가 눈에 들어선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뒤쪽 산 위로 떨어지는 붉은 노을이 따뜻이 감싸주니 그야말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이다.

"어때. 볼만하지?"

장이서가 제 보물을 꺼내 보여주는 사람처럼 환히 웃는다. 이에 구유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괜찮은 곳이다."

"맞아. 모르고 보면 설마 여기가 마교일 거라곤 상상하기 힘든 곳이지."

구유의 표정이 어색하게 비틀린다.

"그렇게 마교라고 막 불러도 괜찮은 건가?"

"둘뿐이잖아. 편하게 하자고."

"역시 이상한 녀석이군."

"괜찮다는 의미로 듣지."

역시 이상한 놈. 구유가 인상을 찌푸리자 장이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참, 혹시 구룡성 인근에선 뭐 본 거 없었나?"

본 것이라.... 구체적 단어가 생략된 물음. 하지만 구유는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동요 없던 두 눈에 분노까지 서렸다.

"광의를 말하는 거군."

광의 공손절.

흉노족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 그 자체.

"맞아."

당연히 구유 역시 그의 시체를 찾았다. 부관참시하려고. 한데.

"폭풍이 쓸고 가면 모든 게 사라지곤 하지. 어떻게든 찾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랬군."

구유에게서 진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 말을 하려고 날 따로 불러낸 건 아닐 테고. 할 말이 무엇인가."

구유가 이젠 용건을 얘기해 보라는 듯 물었다.

장이서도 웃음기를 거두곤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칠소궁이 어떤 상황인지는 들었나?"

"대충."

표정을 보니 어디까지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마오가 지지 세력 하나 없는 망나니 칠공자라는 것. 그래서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은 처지라는 것.

"소교주로 오해했을 텐데. 실망이 컸겠어."

"...너흰 우리를 구했고, 이제 우리는 너희를 구한다. 그 외에 다른 건 필요치 않다."

"든든하네."

어찌 보면 투박한 말. 하지만 그래서 더욱 구유의 진심이 느껴진다. 한 번 주인으로 정한 이상 다른 조건은 아무 필요 없다는 얘기. 설령 가진 거라곤 허명뿐인 칠공자라고 해도 말이다.

"근데 난...."

장이서가 노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연다.

"어떻게든 소교주로 만들어 볼 생각이야."

"...!"

구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몰랐을 때라면 모를까,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사정을 뻔히 봐왔다.

몇몇을 제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궁(宮).

경외라고는 보이지 않는 마교도들의 시선.

한데 그런 칠공자를 소교주로 만들겠다고?

"진심인가?"

구유는 묻고 난 뒤, 장이서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과평을 구하겠다고 뛰어들었을 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진심이군...."

"물론 쉽지는 않아. 날고 기는 자들이 수두룩하고, 온갖 위험이 뒤따르겠지. 반면 칠공자님은 배워야 할 게 아직 많아. 철딱서니도 없고, 성질머리도 고약한데, 고집도 세지. 실력도 엉망이야. 그때 널 상대한 건 우연이고. 그냥 죽기 딱 좋은 팔자지."

그 정도면... 그냥 답이 없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음?"

"누굴 쉽게 해하지는 않아."

"...!"

"그래서 가장 사람답다고 생각해. 사람이 그런 거잖아. 화도 내고, 고집도 부리고. 부족한 부분도 드러내고. 하지만 쉽게 남을 해치지 않는 거.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고마워하는 거. 그게 사람인 거잖아."

"마인이... 아니라는 건가?"

구유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에 장이서는 웃으며 부언했다.

"마인이라고 다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소교주의 자리에 누군가 올라야 한다면. 그럼 난 칠공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거였구나. 부른 이유가. 구유는 장이서의 뜻을 이해했다.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두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지가 되어달라는 뜻이리라.

"...힘든 길이 되겠군."

"도와주겠나?"

이에 구유는 어느덧 거의 다 저물고, 두둥실 떠올라가는 달을 보며 말했다.

"너의 뒤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것이다."

충분한 대답. 장이서의 얼굴이 환히 갠다.

"조만간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어. 없던 일정이라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고."

"광의 때문인가...?"

맞다. 광의에게 당한 불사독. 숨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상태라고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네."

"...괜찮은 것이냐. 아니, 괜찮지 않겠지."

"일리일해(一利一害). 이로움이 있으면 해로움도 감수해야지. 네가 왔으니 이 정도는 괜찮아."

하. 구유는 끝내 고개를 절절 저었다.

정말 별거 아닌 듯 말하는 저 말이 묘하게 자꾸 사람을 긁는다. 미안하면서 고맙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든 이 녀석 장이서를 한번 따라보기로. 그렇게 결심을 굳혔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구유의 진심이 담긴 물음에 장이서는 씨익 웃곤 답했다.

"우선... 좀 쉬자."

*

며칠 뒤.

장이서가 위중하다는 소식은 아무도 관심 없던 예전과 달리, 굵직한 인사들을 향해 빠르게 번져나갔다.

"대체 어쩌다 그런 일이...."

호룡당주 지대호는 분통을 터트리며 죄인들을 더 세게 때려눕혔고.

"오호호호! 사필귀정이니라! 이제야 발 뻗고 자겠구나. 천박한 놈. 그리 까불더니 잘되었다!"

반면 비룡당주 묘채경은 제 집무실에서 환호를 내질렀다.

맹가의 가주 맹철용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이 묘하게 교차했다.

불신하는 이도 있었다.

"거짓말. 장이서는 악귀야. 절대 그렇게 안 죽을걸?"

맹원원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진짜 죽을병이든, 아니든.

이젠 예전과 다르게 확실히 마교의 중추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이도 있었다.

*

- 월광호 취선루.

가장 높은 층에 자리한 홍란의 방.

"제법 손님이 늘었군."

본래라면 잘했다며 좋아했을 장이서가 앉아 있겠지만, 오늘 들려온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매혹적인 여인의 음성이었다.

"과찬이십니다."

홍란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무뚝뚝한 어투에 매서운 눈매. 넙데데한 용모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인피면구를 쓴 지금의 이름은 진산. 바로 삼공녀 사해령이다.

"장 보좌님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위독하다더니. 언제 깨어난 거지?"

"저도 잘...."

장이서가 처음 깨어난 건 며칠이 흘렀지만, 그녀도 제대로 그를 보진 못했다.

깨어나고 얼마 안 가 또다시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도 심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진산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볼수록 묘했다.

주루의 여인이라고 보기엔 몸가짐에 기품이 있었고, 목소리엔 학식이 느껴졌다.

물론 기녀들도 사내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다양한 예와 기를 배운다.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기본적인 기질이란 게 있었다.

반사적으로 윗사람의 말에 반응한다든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저잣거리의 말투라든가.

한데 취홍란은 뭔가가 좀 달랐다.

뒤늦게 누굴 홀리고자 배운 게 아니라 날 때부터 배운 듯한. 그런 태생적인 고귀함이 보였다.

"장이서와는 무슨 관계지?"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홍란이 다소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장이서를 좋아하나."

"그, 그건...."

그야말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비수.

하나 상대가 놀라거나 말거나 진산은 창밖으로 오가는 손님들을 살피며 제 말만을 뱉었다.

"...할 일 없는 놈들이 짝이나 찾던 곳이 이제는 정치판이 다 되었어. 오룡당은 물론이고 대주들까지 드나드는 걸 보면. 이것도 장이서가 노린 건가?"

주저 없는 직언. 홍란은 긴장감에 술잔을 또르르 채워주었다. 진산은 술잔을 받아 들곤 고저 없이 타일렀다.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녀석이 해놓은 짓들이 궁금할 뿐인 거지."

"장 보좌님께서 취선루를 좋게 봐주신 건 맞으나, 주루의 일과는 아무 관계 없으십니다."

"루주와도 아무 관계가 아닌가?"

또다시 찌르는 비수. 따라가기 버겁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라면 다행이고."

탁. 진산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장이서를 높게 보는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홍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남들은 칠공자가 백인장의 인을 받았을 때, 그게 삼소궁을 위해 쓰일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건 시선을 돌리기 위한 허수. 애초에 장이서는 내부에서 식솔을 찾을 마음이 없었어. 누굴 들이든 그게 진짜 칠공자의 사람이 되진 않을 테니."

정답이다. 홍란은 진산의 명확한 추론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래서 교외로 눈을 돌린 거다. 남들은 도적 떼를 들여왔다고 말하지만, 천만에. 나락이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 돌아와 말했다. 이젠 누구든 칠소궁을 얕보면 당할 거라고."

홍란은 모르는 일이지만, 나락은 구유와 직접 싸우고 패한 뒤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삼소궁에 돌아가 보고를 올리는 건 당연한 일.

또르르.

직접 술잔을 채운 진산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마저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게 장이서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판에 끌어들이고, 흔들고, 뒤엎고. 그래서 제가 원하는 값을 반드시 도출해내는 그런 녀석."

"...."

"그리고 그 판에 휘말려 이용당한 건 삼소궁 역시 마찬가지. 보통 그럴 때 내겐 두 가지뿐이다. 더 가까이 두든가. 땅에 묻든가."

쿵! 내려놓은 빈 잔이 아까보다 더 거센 소음을 울린다.

이내 삽시간에 방 안에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휘몰아쳤다.

"...!"

홍란은 갑작스러운 위압감에 일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 사람... 진심이야...!'

당장 자신의 목을 그어도 이상할 게 없는 눈빛.

게다가 이 빙열(氷熱)의 기운은 그녀의 성명절기인 빙화무극심결(氷火無極心訣).

이는 아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겠다는 것과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다시 묻지. 거짓을 고하면 죽는다."

휘몰아치는 빙열풍(氷熱風)에 홍란은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고통에 휩싸였다.

"장이서와는 무슨 관계지?"

솨아아아-!

더 강해지는 빙열풍.

어느새 사방엔 불꽃의 씨가 흩날리다가 이내 서리로 변모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빙화무극심결을 7성 이상 깨우친 자에게만 나타나는 봉화빙설(鳳火氷雪)이다.

보고도 믿기 힘든 기이한 광경.

홍란의 솜털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가 뜨겁게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이건 뭔가가 잘못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불타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거다.

하지만.

'주인님에 대해선 죽어도 말할 수 없어.'

그는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은인.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도 진작 죽었을 터.

홍란은 이를 꽉 문 채로 말했다.

130.

#삼공녀의 분노 (2)

"장 보좌님과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고통이 밀려든다. 아득해지는 정신.

"거짓은 죽음뿐이라고 했을 텐데."

"정말... 입니다.... 하아...."

홍란은 힘겹게 말을 뱉곤 가쁜 숨을 뱉으며 쓰러졌다.

그야말로 생과 사가 오가는 그 순간.

훅! 진산이 손을 펴 휘젓자 빙열풍이 꺼진 촛불처럼 사라진다. 사방천지에 맺힌 물방울만이 연기처럼 잔재가 되어 남았다.

하나 이마저도 잠시뿐.

진산이 가볍게 손을 뻗어내자 한순간에 몰려와 커다란 물방울이 되었다.

그러곤 창밖으로 휙.

"꺄아아악!"

"으헉!"

누군가의 봉변 소리와 함께 장내엔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홍란은 엎드린 채 상기된 얼굴로 숨을 뱉으며 생각했다.

'삼공녀 사해령.... 지닌 무공의 경지가 이미 대공자마저 위협할 정도라더니.... 절대 과언이 아니구나.'

격공섭물에도 격이라는 게 있다.

가깝고, 가볍고, 형체가 단단할수록 다루기 쉽고, 반대로 멀고, 무겁고, 형체가 불분명할수록 어렵다.

이는 곧 공력의 농도, 크기, 경지에 따라 나뉘는데.

물이나 불, 바람과 같이 형체가 무에 가까운 걸 다루려면 최소 초절정에 올라야만 가능했다.

바꿔 말하자면....

'이미 그녀는 초절정을 넘어섰어.'

오싹함이 등골을 스쳤다.

아무리 마공이라 하나 그녀의 나이가 고작 이십 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일.

"루주치고 제법 무공 솜씨도 쓸만해. 그럼 내가 누군지도 짐작하겠지. 아니면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아차 싶었다.

가린다고 가렸으나 표정이 읽힌 것.

이에 홍란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일어섰다. 여기서 모른다고 잡아떼기보단 차라리 제대로 예를 갖추기 위함.

하나.

"소란 떨 거 없어. 인사를 바랄 거였다면 애초에 이러고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

홍란은 고개를 주억인 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러곤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진산과 눈을 맞췄다.

두 여인의 시선이 얽힌다.

"날 알고도 두려움이 없다. 그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 충정(忠情)인가?"

"저는...."

"연정(戀情)이군."

홍란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를 본 진산의 눈빛에도 미약한 떨림이 일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떨림이.

그렇게 두 여인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그 순간.

덜컥!

장지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새를 못 기다리고 일을 벌이면 쓰나."

동시에 두 여인의 눈이 화들짝 커지고, 한 사내의 모습이 담겼다.

서늘해진 마음을 널뛰게 하는 사내.

"너...?"

"자, 장 보좌님!"

장이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쾌활한 모습으로.

홍란은 울먹이며 달려와 장이서의 품에 덥석 안겼다.

"깨어나신 겁니까...."

"하하, 뭐. 보다시피. 루주가 걱정이 많았나 보네."

"정말 잘못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장이서가 홍란의 등을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시선은 진산을 향했다.

'눈빛이 왜 이래.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피식 웃곤 홍란을 떨어트린 뒤, 잠시 나가 있으라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자 드르륵, 탁! 다시 문이 닫힌다.

장이서는 털썩 자리에 앉고는 절 노려보는 진산에게 물었다.

"나 좋아해?"

"미친 것이냐?"

"그럼 그만 봐. 미간 뚫리겠다. 그윽해."

하. 그래. 이런 놈이었지, 장이서는.

진산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술병을 잡았다. 그러자 휙. 장이서가 이를 빼앗아 든다.

이에 다시 노려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잔을 채워준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진산이 술을 훅 털어 넣고 탁! 내려놓자 그가 술잔을 든다.

이에 진산이 고갤 돌리고 무시하자 장이서가 턱을 괴고 물었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몰라서 묻는 거냐?"

"알려주면 경청하지."

"넌 감히 삼소궁을 이용했다. 이름을 팔아 모두의 시선을 홀렸고, 그사이 교외로 나가 득을 취했지."

"그래서?"

부정도 없이 웃으시겠다? 진산의 미간이 좁혀진다.

"백번을 맞아도 씻지 못할 죄를 지어놓고, 대가도 없이 멋대로 죽어간다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와, 그래도 죽일 마음은 없었나 봐. 나였으면 부관참시인데. 너 진짜 나 아끼는구나."

"죽고 싶다고 사정을 하는구나."

"농이야. 봐봐. 나 멀쩡하잖아. 아프다는 거? 그거 다 헛소문이야."

장이서가 픽 웃으며 절 보라며 두 손을 펼친다. 이에 진산은 무심히 쳐다보며 식탁을 탕! 두드렸다.

그러자 술잔이 둥 떠오르곤, 이를 손등으로 쳐 내자 핑그르르 돌며 장이서를 향해 날아간다.

웅웅웅!

공명음이 들릴 만큼 묵직한 내공이 실린 엄청난 일격.

이에 장이서가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해내는 순간.

"큭!"

일순 머리가 핑 돌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툭.

하나 다정히 받쳐주는 고운 손에 다행히 넘어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젖혀진 상체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진산이 화내듯 말했다.

"이러고도 헛소문이라 할 것이냐?"

"하하.... 사실 나 아파. 시한부래."

"미친놈."

툭! 장이서의 등을 밀자 그가 튕기듯이 다시 똑바로 앉는다.

"분칠하면 속을 줄 알았더니. 안 속네."

"속일 걸 속여라."

"좋아. 이제 알았으니 어쩔래. 죽일 건 아니지?"

"대가도 안 받았는데 왜 널 죽이느냐? 그럴 순 없지. 분이 풀릴 때까지 네 뼛속까지 모든 걸 다 털어낼 것이다. 그전까진 반드시 널 살린다."

"와, 나 화내야 해, 감동해야 해?"

"시끄럽다. 오늘부로 넌 보좌에서 해임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라. 독산각부터 갈 것이니."

성질이 이리 거칠어서야. 이러니 여태 혼자지.

하나 어떻게든 살려주려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훤히 보이고, 또 고마워서 장이서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진산파파의 사람이라.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근데 미안. 나 지금 이 일 마음에 들어. 적성에도 잘 맞아. 그러니까 그만둘 순 없어."

"그래...? 그럼 오늘 이 자리가 네 무덤이 되겠지. 대가도 안 치르고 멋대로 죽게 놔두느니, 내 손으로 없애는 수밖에."

"아니 그게 뭔...."

솨아아아!

그녀를 중심으로 빙열풍이 흩날렸다.

빙화무극심결의 성취를 증명하는 봉화빙설(鳳火氷雪)!

심지어 아까 홍란을 대할 때보다 더 잦고, 강하다.

아까는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 것도 아니라는 얘기.

'설마 지금 날 진짜 죽이겠다는 건가?'

장이서는 난색을 삼켰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멋대로 죽는 걸 볼 수 없으니 제 손으로 죽이겠다니.

하나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삼소궁의 체면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

장이서를 아끼고, 또 원하지만 삼소궁을 농락한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마교 삼공녀의 자존심!

"결정해라. 몸으로 대가를 치르든가. 아니면 내 손에 죽든가."

"왈패냐?!"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 하지만 그녀가 진심임을 알기에 장이서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급히 말했다.

"이봐, 진산. 이러지 말자. 나 방금 깨어났어.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헛소리.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네 안엔 수천 마리의 구렁이가 숨어 살고 있다는 것을. 수작 부리지 말고 바로 답하여라."

화르륵! 파스스스!

불꽃이 서리가 되고, 서리가 다시 불꽃이 되는 기현상이 점점 서로 합쳐지며 그 크기를 키워낸다.

이러다 취선루가 통째로 날아갈 기세.

결국 장이서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돈으로 보상하지!"

"뭐?"

고작 돈으로 때우겠다는 건가?

"어림없는 소리. 시답잖은 수작은 그만 부리고 나랑...."

"은원보 50개."

"뭐?!"

훅! 흩날리던 빙화의 씨앗들이 사라진다. 장이서는 제 양팔을 슥슥 털어내며 소름 끼친다는 듯 말했다.

"와, 너 진짜 나 죽이려 그랬냐? 얘 무서운 애네."

"...방금 뭐라고 그랬지?"

"뭐, 무서운 애?"

"그전에."

"뭘 물어. 들은 대로지."

"은원보 50개라고 들었다. 맞아?"

"정확해."

이 자식이.... 진산이 눈매를 좁혔다.

은원보 50개면 대략 은자 2,000냥 어치. 어마어마한 액수다.

"1년에 걸쳐 주겠다는 그런 처맞을 소리는 아니겠지?"

"왜 이래. 장사 하루 이틀이야? 당연히 한 방이지. 우리 사이에 신용이 빠지면 쓰나."

"말은...."

너스레에 혀를 차면서도 진산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뒷배가 없는 그녀에게 가장 부족한 게 바로 돈줄이었으니.

하나 의심이 없는 건 아니다.

"무슨 수로 네가 그 큰돈을 내놓겠다는 거냐. 이곳 주루의 숨은 주인이 너라고 해도 그 큰돈을 단시간에 마련할 수 없다."

장이서가 제법 거금을 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방첩대가 본래 그쪽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제갈귀룡을 통해 은원보를 툭툭 내놓는단 말도 들었다.

하지만 은원보 50개를 덜컥 내놓는다는 말은 쉽게 믿기진 않았다.

한데.

"출처가 걱정이라면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아낸 돈이니까."

장이서는 별거 아니라는 듯 픽 웃고는 술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받아? 누구에게."

"대공자."

장이서는 망설임 없이 사실을 토했다. 어차피 어쭙잖게 숨겨봤자 안 믿을 게 뻔하기 때문.

"대공자가 너에게 은원보를 줬다고?"

"대신 조건이 있었지."

"그게 뭔데."

"백인장의 인을 내부에서 쓰지 않겠다는 것."

진산의 눈이 멍해졌다. 그의 말에 상황이 단박에 이해됐기 때문이다.

백인장의 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주는 대가로 받아낸 것.

'하지만 너는 밖에서 나락마저 쓰러트릴 괴물을 데리고 왔지. 천하의 대공자 천무기가... 이 녀석에게 제대로 놀아났구나.'

하하. 진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 나왔다.

"미친놈...."

그러곤 즉시 웃음기가 사라지고, 절로 욕지기가 뱉어졌다.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모두의 눈을 감쪽같이 속인 것도 모자라, 대공자에게 돈까지 뜯어내다니.

이윽고 두 눈에 짙은 열망이 뿜어졌다.

탐이 난다. 이자를 갖고 싶다. 제 품에 두고 싶다.

"만일 내가 그거로도 부족하다면?"

그녀가 섬찟한 기세로 수를 던졌다.

그러자.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은원보 100개!"

드르륵, 탁!

바로 그때 장지문이 열리고, 취홍란이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화려하게 빛나는 은원보가 100개나 담겨 있는 보물 상자를.

"나는 친구 사이가 더 편한 거 같은데."

"...."

"이 정도면 우리 여전히 친구 맞지?"

진산의 눈이 거침없이 흔들린다. 이 빌어먹을 자식. 영악하고 또 능청맞은 녀석.

마음 같아선 이깟 돈 걷어차고, 손에 넣고 싶다.

하지만....

"다음 술은 내가 사지."

그녀는 끝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콱 닫았다.

누가 그랬나.

돈 앞에는 장사 없다고. 맞다. 특히 그 돈이 대공자 호주머니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돈이라면 더더욱.

또르르. 채워지는 잔.

"언제든 환영이지."

장이서는 환하게 웃으며 시원하게 마셔 넘겼다.

131.

#다시, 준비 (1)

진산은 죽으면 부관참시하겠다는 걱정 어린 인사(?)와 함께 한참을 술잔을 기울이다 떠나갔다.

그리고 취선루의 등불이 모두 꺼진 시각.

어느새 장이서와 홍란 단둘만이 남겨졌다.

"후, 독한 것. 결국 100개를 다 가져가는구나. 술값으로 하나는 내놓고 갈 줄 알았더니."

장이서는 진산이 가져간 은원보 100개를 떠올리며 파르르 떨었다.

하나 돈 귀신인 그가 한 개도 빠짐없이 다 내준 걸 보면 그도 진심으로 미안했던 모양.

이에 홍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몸은 어떠세요."

"아직은. 버틸 만해. 걱정이 많았다며."

"해독이 다 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다 알고 물은 것.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그런 것 같네."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어색한 웃음이 울먹거림으로 변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마의가 해준 응급처치는 불사독을 없앤 게 아니라 뭉쳐 있던 걸 잘게 흩트려 놓은 것.

해서 전처럼 발작하듯 쓰러질 일은 없겠지만, 전신에 퍼져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이젠 조화술로도 감당이 안 되는 수준.

하지만.

"별거 아니야."

그녀에겐 한 마디로 일축했다. 당연히 심각하단 건 홍란도 알겠지만, 더 얘기하면 얘 잠 못 잔다.

"고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하지."

픽 웃고는 화제를 바꿔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겠어."

"그 말씀은...."

"바라던 대로 구유가 함께하게 되었다. 아직은 바꿔야 할 게 많겠지만, 세는 확실히 갖춘 셈이지."

홍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어쨌든 백인장의 인은 제대로 쓰였다.

"아무리 하늘을 가려도 태양을 숨길 순 없어. 오래지 않아 모두가 알게 되겠지. 칠소궁이 더는 예전의 만만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주시하는 자들이 많아질 거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십중팔구는 후자겠지만.

"어차피 우리도 언젠간 터트릴 거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몸을 숨겨야 해."

"생각해둔 시기가 있으신 건가요?"

있긴 했다.

"대략 한 달 후. 마가에서 치러질 마오와 마이신의 대결. 그날을 기점으로 바뀌는 게 가장 좋겠지."

장이서는 머릿속에 이미 앞으로 펼쳐질 날들을 수없이 상상했다.

구유의 등장은 분명 수뇌들을 자극할 거고, 이를 시험하려 드는 자들도 나타날 거였다.

하나 그들이 먼저 날아오르는 것보단, 마오가 함께 새벽녘의 여명처럼 떠올라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마이신과의 대결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독산각으로 떠나기 전에 최대한 해야 할 일들을 전달해 놓고 가야 한다.

장이서는 마음을 굳히곤 용건을 꺼냈다.

"시위는 이미 당겨졌어. 화살은 우릴 향해 날아오고 있고, 남은 건 둘 중 하나야. 죽든가 아니면 흠집도 안 날 만큼 몸집을 키우든가."

"그럼...."

"그래. 오늘부로 취선루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취홍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권력이란 단순히 누군가의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가주를 따르고 받쳐주는 권솔.

그들과 얽히고설킨 수많은 이해관계.

이것이 바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 연쇄적 권력의 구조였다.

지금 장이서는 이를 만들겠다고 한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취선루의 역할 중 하나였다.

"수뇌부들은 어설프게 회유될 자들이 아니야. 힘으로 꺾든, 권세를 보여주든. 실리를 약속하든. 뭐든 직접 겪어야만 깨달을 자들이지. 아래부터 차근차근 들어가. 얼마나 들든 상관없어. 돈이든, 술이든, 뭐든. 원하는 건 전부 쥐여 줘. 딱 하나면 돼. 작든, 크든. 무조건 약점을 잡아. 그럼 어느 순간 남는 건 위태로운 모래성에 올라 서 있는 수뇌부들뿐일 테니."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가 먹는다."

홍란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서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전에 나부터 살아남아야겠지만.'

창밖엔 구름이 걷히고, 커다란 보름달이 자리했다.

*